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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채로 코어 공학 스킬을 다시 활성화한 나는, 새로 만들어진 코어 안에 마구잡이로 엉켜 있는 정보들을 보고 치를 떨었다.

우웩!

[코어 공학 스킬이 레벨 2가 되었습니다]

휴!

아무래도 내 융합 스킬은 아직 갈 길이 먼 모양이었다.

두 개의 몬스터 코어를 조합해서 새로운 종이 탄생한 게 아니라···

각 코어에 따로따로 들어있던 에너지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 코어로 몬스터를 재구성한다면, 생성된 몬스터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태어나자 마자 죽어버릴 지도 몰랐다.

그리 바람직한 운명은 아니지···

코어 조작 스킬을 성공적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코어 융합 실험까지 마친 나는 다음 단계의 준비에 착수했다.

이미 두 차례 조작을 거친 코어들을 타이니 쪽으로 옮겼다.

내 원숭이 친구는 시끄럽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포르모는 '펫'과 관련된 다양한 스킬이 있다고 암시했다.

펫이란 소포스가, 그리고 아마 이 세계의 다른 존재들도 코어에서 재구성한 몬스터를 지칭하는 단어 같았다.

지난 번 목록을 살필 때 그런 스킬을 본 기억이 없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설사 있었다고 해도 눈 여겨 보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제 스킬 포인트가 좀 남았으니···

나는 다시 한 번 목록을 살피기로 했다.

다가올 웨이브에 맞설 때, 타이니의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말이다.

나는 익숙하게 스킬 메뉴를 연 다음 목록을 넘기며, '펫'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스킬을 찾았다.

과연 일부러 찾으니까 수많은 관련 스킬이 눈에 들어왔다.

···

그 중에는 여러 마리의 펫을 쉽게 다룰 수 있는 스킬부터, 펫을 더 빠르게 키울 수 있는 스킬··· 아마 성체가 될 때까지 필요한 시간과 바이오매스를 줄여준다는 의미겠지··· 펫의 상태창을 확인할 수 있는 스킬, 심지어 펫의 레벨 업 속도를 높이는 스킬까지 있었다.

엄청 다양한데!

이걸 보니 소포스가 허약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공학 스킬을 이용해서 여태까지 생존해온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을 만들어낸 다음 이런 스킬들로 조종할 수 있다면···

소포스는 실로 강대한 존재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막상 내 입장에서 끌리는 스킬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난 몬스터들의 대군을 꾸릴 생각이 없었다.

이미 둥지에 수백 마리 개미가 있는 상황에서는 불필요한 일이니까···

그보다는 차라리 소수의 강력한 펫을 거느리는 편이 나았다.

나와 둥지를 호위할 정예 부대 말이다.

이 '펫' 경로의 스킬들을 배우는 건 내가 원래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코어로 타이니를 재구성한 건 사실상 사고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타이니에게 흠뻑 정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작은 원숭이였던 녀석을 지금처럼 강력한 고릴라로 키워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널 최강의 고릴라로 만들어 주마, 타이니!

그때 내 눈에 스킬 하나가 들어왔다.

[펫 커뮤니케이션: 펫과 주인 사이에 정신적인 연결 고리를 만듭니다. 이 스킬의 레벨이 높아질수록 더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고, 의사 소통이 가능한 거리도 늘어납니다.]

타이니와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녀석이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지금은 그저 내 뒤를 따라다니다가 눈에 보이는 모든 적과 싸우려 들 뿐이지만...

이 스킬이 있으면 좀 더 구체적인 지시를 내릴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펫 커뮤니케이션을 배우겠어!

스킬 구매를 승인하자 이제는 익숙한 감각이 머리를 간지럽혔다.

나는 또 이제 5레벨이 되어 업그레이드가 가능하진 외골격 숙련의 상위 버전을 확인했다.

[외골격 숙련 - 고급 외골격 숙련: 외골격을 이용해서 물리적인 피해를 줄이는 능력을 한층 더 향상시켜 줍니다.]

이것도 구매!

스킬 포인트도 썼으니, 이제 정말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였다.

[일어나, 타이니!]

스톰 콩

나는 새로 얻은 의사소통 스킬로 잠들어 있는 원숭이 친구를 깨우려고 시도했다.

머리 속에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이 녀석 일어나기 싫은가 보군···

[일어나 이 원숭아! 할 일이 많다고!]

다시 한 번 머리 속에 칭얼거리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뭐랄까 마치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올려 덮어쓰는 동작의 정신적인 버전이랄까?

그렇게 나오시겠다?

나는 턱으로 코어 하나를 집어서 잠들어 있는 타이니에게 다가갔다.

딱! 딱! 딱!

일! 어! 나!

일! 어! 나!

한 음절마다 턱에 문 코어로 타이니의 머리를 때렸다.

이래도 안 일어날 테냐?!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니가 내 애정 표현에 반응해서 깨어났다.

그리고 제 머리를 어루만지며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피곤해···]

내 머리 속에 녀석의 뾰루퉁한 목소리가 울렸다.

타이니의 목소리로군!

스킬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

[우린 할 일이 많아, 친구. 특히 너한테는 중요한 날이라고.]

타이니는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잠시 후 녀석의 눈꺼풀이 서서히 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딱!

[아야!]

[코어 받아서 사용해!]

나는 타이니의 앞에 코어를 떨어뜨렸다.

내가 보는 앞에서 도로 잠들려고 하다니···

빠져가지고 말이야!

[이 코어로 네 코어를 강화하라고!]

···

[코어?]

[그래! 코어! 땅 위에 있는 그거!]

[이거?]

[그래!]

[코어?]

[그래!]

···

[어떻게 하는지 몰라···]

아오!

타이니의 멍청함 때문에 분통이 터지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원숭이는 머리가 나빴다.

강한 대신에 멍청하다고나 할까···

지난 번에 코어로 머리를 계속 때렸을 때에는 어쩌다 본능적으로 흡수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 과정을 반복해야 할 것 같군!

나는 겹눈을 사악하게 빛내며 바닥의 코어를 턱으로 집어 들고, 불안한 표정의 원숭이 펫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코어 흡수할래, 타이니?]

[흡수?]

딱!

[흡수하라고 임마!]

딱!

[아야!]

딱!

쏙!

어, 소리가 다른데···

재빨리 턱을 확인하니 내가 두 차례 조작했던 코어가 사라지고 없었다.

됐군!

나는 더듬이로 타이니 머리의 혹을 쓰다듬었다.

[그래! 하면 되잖아!]

[하면··· 되잖아?]

[그래! 네가 코어를 흡수했어! 그래서 없어졌잖아, 그렇지?]

[오오!]

타이니의 멍청한 두 눈이 반짝였다.

마침내 내가 뭘 원하는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다음 코어!

[이제 이걸 흡수해!]

···

[흡수?]

젠장.

[이 돌을 사라지게 하라고! 네 코어를 강화하라고!]

···

타이니는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휴.

딱!

[코어를 흡수하라고!]

딱!

쏙!

아하!

타이니는 이제 고릴라를 닮은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가린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잠깐 불쌍한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건 다 녀석을 위한 일이었다.

지난 번 싸움을 고려하면, 타이니는 아마 진화 직전일 터였다.

그야말로 대활약을 했으니까!

그러니 어서 코어를 최대치까지 성장시켜야 했다.

나는 조작 연습에 썼던 또다른 코어를 집어 들었다.

아직 건드리지 않은 코어들은 놔뒀다가 스킬 연습에 쓸 생각이었다.

[좋아, 하나 더!]

타이니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 사이로 날 쳐다봤다.

눈빛에는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다.

[아니 그럼 코어로 때리기 전에 그냥 흡수하면 되잖아!?]

나는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 원숭이 친구 앞에 코어를 내려놓았다.

[주워!]

내가 타이니에게 명령했다.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게 되니 정말 좋군!

하지만 타이니는 어쩐지 나만큼 즐겁지 않아 보였다.

타이니가 잠시 망설이다가 코어를 집었다.

녀석의 커다란 손 안에 있으니 코어가 정말 작아 보였다.

나는 아무래도 타이니가 어떤 식으로든 손을 변이시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비해 너무 크고 강력해 보였기 때문이다.

타이니는 손바닥 위에 코어를 얹은 채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이내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코어가 순간적으로 빛을 발하며 타이니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그래! 하면 되잖아! 잘했어, 타이니!]

나는 타이니에게 칭찬 세례를 퍼부으며 더듬이로 녀석을 계속 쓰다듬었다.

그러자 녀석의 멍청한 박쥐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귀엽군.

[자, 하나 더!]

···

나는 계속해서 타이니에게 코어를 건넸다.

코어 여덟 개를 흡수하자, 타이니가 고개를 흔들며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꽉찼어.]

드디어 최대치까지 올렸구나!

나는 한쪽에 놓여 있는 거대한 개머리 뱀의 코어를 쳐다봤다.

내 눈에 사악한 빛이 떠오르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디저트 먹어야지, 타이니?

나는 거대한 코어를 집어서 아직 남아 있는 코어들 위에 올렸다.

이 코어는 틀림없이 강력하겠지만, 과연 내 목적을 달성할 만큼 강력할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나는 더듬이 하나를 거대한 코어에 올리고, 다른 하나를 보다 작은 코어들 중 하나에 올렸다.

그런 다음 코어 공학 스킬을 사용해서 두 개를 융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즉시 내 정신을 밀어내려는 엄청난 저항력이 느껴졌다.

두통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으으···

이 멍청한 코어들이···

말 들어!

나는 정신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머리 속으로 두 코어를 서로 합친 뒤 단단히 붙잡았다.

코어들의 에너지가 단 1밀리미터라도 떨어지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거대한 코어는 작은 코어보다 훨씬 더 큰 저항력으로 나를 거부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네가 포기해, 이 돌덩어리야!

흐으으으으응!

결국 두 개의 코어는 서로 합쳐졌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거대한 코어가 작은 코어를 흡수했다.

갑자기 저항이 사라지자 나는 힘이 풀려서 바닥에 쓰러졌다.

이거 정말 힘들구만.

하지만 오래 늘어져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다시 일어서서 신중하게 거대한 코어 쪽으로 다가가 더듬이를 내밀었다.

[호환 가능한 코어를 발견했습니다. 사용해서 코어를 강화하거나 몬스터를 재구성하겠습니까?]

억지로 융합한 코어에서 기형 몬스터를 재구성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특별 코어를 만드는 거였다!

나는 결의에 차서 작은 코어 하나를 더 집어 들고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흐으으으으으으응!

성공이다!

휴우···

너무 힘든데!

[호환 가능한 특별 코어를 발견···]

됐다!

해냈어!

음하하하하하!

나는 기쁘게 새로 만들어진 특별 코어를 턱으로 집어 들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타이니에게 다가갔다.

[타이니, 이것도 흡수해.]

타이니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흔들며 가슴을 두드렸다.

[꽉찼어.]

[나도 알아, 친구. 하지만 이거 하나만 더 흡수해.]

[꽉찼어.]

···

딱!

딱!

쑤욱!

응?

쑤욱이라고?

나는 턱 안에 있던 코어가 사라진 걸 느끼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놀랍게도 특별 코어가 타이니의 머리통에 반쯤 박혀 있었다.

코어의 에너지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타이니의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코어는 점점 더 작아졌고, 불쌍한 타이니는 점점 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타이니의 고통을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코어를 최대치까지 성장시킨 뒤 특별 코어를 흡수할 때 엄청나게 고통스러웠으니까 말이다.

이겨내야 해, 타이니!

이 코어가 너에게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테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타이니의 표정이 점점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녀석의 넓은 어깨가 거칠게 들썩였고 굵은 손가락들이 바닥을 할퀴었다.

할 수 있어, 타이니!

조금만 더 힘내!

그리고 마침내 타이니가 코어를 완전히 흡수했다.

가엾은 타이니는 여전히 신음 소리를 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나는 주저하며 녀석에게 다가가서 더듬이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리 타이니를 위한 일이라지만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타이니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가 코어부터 키운 녀석이니까!

하지만 타이니의 미래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넘어야 하는 관문이었다.

[진화해, 타이니! 진화해서 강해지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야!]

타이니가 내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녀석의 눈에는 고통과 분노가 가득했고, 송곳니가 드러나게 벌린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얼굴 근육은 한껏 경직되어 있었다.

[어서 타이니! 진화해! 그게 유일한 길이야!]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펫을 달래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더듬이로 계속해서 녀석의 머리를 토닥이며, 어서 진화를 하라고 격려했다.

사실 타이니가 최고 레벨에 도달했는지도 100% 확신할 수는 없었다.

타이니의 지능을 고려할 때, 녀석에게 물어봐서 알아내기도 어려울 터였다.

펫의 능력치를 보는 스킬을 구매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겠지만···

단지 그 목적으로 스킬 포인트를 쓰기는 망설여졌다.

타이니가 조금만 더 영리해져도 나한테 자기 능력치를 말해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설사 타이니가 진화할 수 없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나 역시 과도하게 큰 코어를 몸 속에 상당 기간 지니고 있으면서 별 탈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지금 당장 진화하면 가장 좋겠지만···

내가 타이니를 토닥이는 가장 큰 이유는 녀석이 진정하고 새로운 코어에 적응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타이니가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근육이 조금씩 풀리고 호흡도 점점 고르게 변했다.

그러다 마침내 천천히 눈을 감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휴.

불쌍한 녀석, 많이 힘들었나 보군.

타이니가 진화를 하는 건지 아니면 단지 잠든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뻤다.

내 충성스러운 친구가 이런 고통을 겪는 게 마음 아프기는 했지만, 그래도 타이니의 미래를 상상하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이 던전 안에서 코어를 한계 이상으로 성장시킨 다음 특별한 진화를 하는 몬스터가 많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인간 수준의 지성이 없다면 그 이점을 알기도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더 깊은 던전에는 그런 몬스터들, 그러니까 고도의 지능을 가진 존재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 위쪽에 있는 짐승들은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터였다.

설사 특별 진화를 한 경우가 있다고 해도 순전한 우연의 산물이겠지!

잠깐···

뭐지?

타이니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겹눈의 넓은 시야각에 뭔가 변화가 잡혔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타이니를 향해 몸을 돌렸다.

타이니의 온몸에 에너지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털가죽 아래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액체처럼 물결치는 모습은 거의 무시무시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외부에서 보는 건 처음이지만···

저런 현상의 이유는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진화였다!

바로 내 눈 앞에서 빠르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근육의 모양이 마치 찰흙처럼 바뀌고, 온몸의 짧은 털이 불과 몇 초만에 길게 자라났다.

타이니의 전신이 빠른 속도로 변하면서, 어떤 부위는 쑥 들어가고 또 어떤 부위는 불룩 튀어나왔다.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아주··· 많이 커졌다!

원래 어두운 갈색이던 타이니의 두 손은 순식간에 빛나는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갑자기 전기가 일어나는 바람에 그대로 튀겨질 뻔했다.

손에서 일어난 전기는 금세 타이니의 온몸을 뒤덮었다.

타이니의 몸 주위에 그물 모양의 전기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전기가 번쩍일 때마다 엄청난 에너지가 솟구치는 바람에 비밀 통로 안이 뜨거워질 정도였다.

그리고 타이니의 변화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눈을 부릅뜨고 타이니의 모든 변화를 자세히 살폈다.

마침내 진화가 끝났을 때, 나는 경이감에 사로잡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타이니는 덩치가 전보다 두 배 이상 커졌다.

이제 나보다 훨씬 큰 건 물론이고 앉아 있는 통로가 비좁을 정도였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도 어깨가 천장에 닿았다.

온몸을 뒤덮은 털은 이제 길고 곱슬거렸다.

일부 가느다란 솜털은 곤두서서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몸 속에 계속해서 전기가 흐르다 보니 털이 저런 식으로 곤두서는 듯했다.

갑자기, 타이니가 눈을 뜨더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타이니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타이니? 기분이 좀 어때?]

타이니가 천천히 내 쪽을 돌아봤다.

조금씩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고 있었다.

다음 순간, 타이니가 환하게 웃었다.

입이 벌어지면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들어갔다.

타이니는 푸르게 빛나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타이니는 강해진 기분이야!]

폭풍전야

나라와 문화권에 따라 던전에 대해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어디서나 던전으로부터 얻은 자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자원을 얻고 사용하는 방식과 태도는 다양하다.

심연의 군단이 던전에 대해 보이는 방어적인 태도와 신중한 정책은 유명하다.

반면에 길의 교단을 비롯한 몇몇 널리 퍼진 신앙들은 던전을 신성한 장소로 여기고, 몬스터를 상대로 한 전투와 자원의 수확을 종교적인 의무로 받아들인다.

특히 길의 교단에서도 몇몇 광신적인 지부들은 던전 안에서 온갖 종류의 의식을 집행하고, 신도들을 지하에서 각성시킨다는 소문이 떠돈다.

일리레실의 차가운 칼날단이나 코가르 노탄의 현자들, 칼라사르 동부 제국 등도 저마다 던전을 대하는 독자적인 관습과 전통을 수천 년 동안 유지하고 있다.

- 마법학자 타리우스의 저서 판게라 그리고 던전에 대한 문화적 연구, 제1장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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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척 봐도 강해졌네!

크기가 두 배라고!

아무래도 거의 모든 진화 에너지를 힘에 투자한 모양이었다.

조금 안타깝기도 했다.

아주 일부라도 영리함에 썼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뭐,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타이니에게는 대신 생각해 줄 내가 있고, 이제 의사 소통 스킬로 내 지시에 따를 수도 있으니 어쩌면 전투력에 올인하는 쪽이 최선일지도 몰랐다.

특히 곧 닥쳐올 위기를 고려하면 말이다.

이제 남은 건 내 변이를 완성하는 일 뿐이었다.

내게는 지금 열한 개의 바이오매스가 있었다.

다리의 고급 변이를 시키고 나서도 중력 분비선을 두 차례나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양이었다.

나는 신이 나서 메뉴를 열고 선택지를 확인했다.

어디 어떤 다리들이 있는지 볼까!

역시나 탐나는 선택지가 아주 많았다.

어디 보자··· 벽이나 천장에 달라붙는 다리?

그건 지금도 할 수 있는데···

끝에서 가시가 튀어나와 적을 찌를 수 있는 다리?

음···

더 빨리 달릴 수 있도록 추가 속도를 부여하는 다리··· 미끄러지기 좋게 마찰력이 적은 발···

사이에 피막이 있어서 활강할 수 있는 다리?

개미한테 달려 있는 모습이 상상도 안 가는데?

속도를 높이거나 그런 평범한 선택지로 고르려고 하는데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흡수 다리. 코어와 다리를 연결해서, 몬스터가 딛고 있는 표면으로부터 마나를 흡수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니까 던전을 돌아다닐 때, 이 다리가 있으면 벽이나 바닥에서 마나를 흡수할 수 있다는 건가?!

만약 흡수 효율이 괜찮다면 마법 훈련에 큰 도움이 되겠는데!

이 다리로 내 코어나 중력 에너지 분비선도 더 빠르게 충전할 수 있다면··· 훨씬 유용할 테고.

이걸로 해야겠다!

[흡수 다리를 선택하고 중력 에너지 분비선을 +3으로 업그레이드하겠습니까? 11 바이오매스를 소모합니다.]

그래!

으아아아아!

간지럼!

제기랄!

···

이제 여기서 할 일은 다 끝났다.

타이니도 성공적으로 진화했으니, 둥지로 돌아가서 굴파기를 도울 때였다.

나는 타이니에게 남아 있는 코어들을 챙기게 시킨 뒤, 함정망과 연결된 통로를 걸어서 둥지로 향했다.

통로의 벽은 기이할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내가 던전 안에서 환생한 뒤로 이렇게 어두운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어두워지니까 통로가 훨씬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마나 줄기를 따라 흐르는 빛이 계속 깜박이면서, 벽에 비친 타이니와 내 그림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타이니는 덩치가 너무 커진 탓에 거의 기다시피 통로를 지나가야 했다.

한 팔로는 남아 있는 코어들을 소중하게 가슴에 안고 있었다.

우리는 침묵 속에 수직 통로를 내려갔다.

일개미들의 부재와 짙은 어둠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조용한 통로 안에 우리가 내려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몇 시간 내로 이 텅 빈 공간이 몬스터들로 가득한 죽음의 전장으로 변할 거라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침내 둥지의 아래쪽 통로에 도착하자, 일개미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반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물론 개미들은 성대가 없기 때문에, 내게 들리는 건 말소리가 아니라 수천 개의 다리들과 턱들이 부지런히 흙을 파고 나르는 소리였다.

타이니를 데리고 여왕의 방으로 들어가자 수백 마리의 일개미들이 보였다.

평소 여왕의 시중을 들던 몇 마리의 개미들이 아니라, 둥지의 거의 모든 식구들이 여기 모여서 일하는 중이었다.

일개미들은 서로를 타고 넘어가며 벽에 굴을 팠고, 그 중 몇 마리는 던전 아래로 이어지는 길을 막기 위해 파낸 흙을 턱에 가득 물고 아래쪽 통로를 오갔다.

"힘내렴, 아이들아."

여왕의 따뜻한 목소리가 페로몬의 노래처럼 울려 퍼지며 개미들을 격려했다.

하지만 솔직히 개미들이 여기서 더 힘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여왕이 직접 굴을 파러 나섰기 때문인지, 그 주위의 개미들은 그야말로 미친듯이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니, 아래쪽 통로로 내려가 있다가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개미들을 지켜.]

내가 지시하자 타이니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코어를 소중히 끌어안은 채, 개미들 사이를 뚫고 아래쪽 통로로 향했다.

일개미들은 타이니가 자기들 옆을 지나가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타이니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가 등으로 내려오는 등 넘어 다니기도 했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나는 여왕이 굴을 파는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다들 여왕을 돕기 위해 안달이 나 있어서 좀처럼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소 과격한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나는 커다란 덩치를 이용해서 다른 개미들을 밀치거나, 아예 타넘기도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다고 바글거리는 개미들이 거슬리거나 짜증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들은 모두 나와 같은 편에서 재앙에 맞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 아니 개미들이니까 말이다.

간신히 개미들을 뚫고 통로를 파는 현장에 도착한 나는 여태까지 이루어진 진척 상황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여왕이 앞장서서 거대한 턱으로 꾸준히 흙과 바위를 파내고, 무수한 개미들이 그 옆에 달라붙어 잔해를 나른 덕분에···

잠깐 사이 상당한 길이의 통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통로는 이미 대략 2백 미터 길이까지 확장되어 있었지만···

파야 하는 거리는 몇 킬로미터나 되니까!

지금 판 정도로는 둥지의 모든 개미들이 안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타이니까지 생각하면···

훨씬 더 파야 한다!

"여왕님!"

나는 맹렬하게 흙을 파기 시작하면서 여왕에게 인사했다.

말을 할 때 입을 벌릴 필요가 없으니까 편하군···

"어서 오거라, 아이야."

여왕도 나와 비슷하게 턱 한가득 흙을 문 채로 말했다.

나는 여왕과 함께 통로를 파고 들어갔다.

우리가 턱으로 흙덩이를 크게 떼어내서 뒤로 던지면, 더 작은 일개미들이 부지런히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물론 우리 둘만 최전방에서 굴을 파는 건 아니었다.

항상 십여 마리의 개미들이 주위를 오가며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통로를 확장해 나갔다.

나와 여왕을 제외한 대다수 개미들은 흙을 뒤로 던지는 대신 직접 운반했기 때문에, 우리 옆에서 굴을 파는 개미들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나는 여왕과 함께 가장 앞에 남아서, 턱을 마치 피스톤 엔진처럼 움직이며 굴을 팠다.

계속해서 반복 운동을 한 탓에 얼굴 근육이 아파왔다.

하지만 다행이 곧 굴을 팔 때마다 느끼곤 하는 평온한 감각이 나를 다시 찾아왔다.

마치 내가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개미의 원시적인 본능이 충족된다고 할까?

하지만 지금 나는 조금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평온하고 차분한 감각을 떨쳐버렸다.

굴파기에는 생각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시간을 활용해서 마나 스킬을 연습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굴 파는 동작을 본능에 맡기고, 의지로는 코어에 접촉해서 마나 형성 스킬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보조 뇌의 도움을 받으니 마나를 쉽게 끌어낼 수 있었다.

코어로부터 흘러나온 기이한 에너지의 촉수들이 내 생각에 반응해서 신비로운 패턴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 패턴들의 의미나 용도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저 내가 마나 형성 스킬을 배울 때 아무런 설명 없이 내 머리 속에 각인된 형상들일 뿐이었다.

아마 알아내려면 직접 시험해 보는 수밖에 없을 텐데···

어쩐지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킬 레벨이 일정 수준에 오르고 나면 둥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아직은 패턴들 중 상당수를 형성하기 어려웠고, 속도는 물론 성공률 자체가 너무 낮았다.

연습하고 또 연습하다 보면 점점 나아지겠지!

어쨌든 그렇게 여왕과 나, 그리고 둥지의 모든 개미들은 열심히 굴을 팠다.

오직 곤충에게만 가능한 단순한 집중력으로, 그리고 오직 개미들에게만 가능한 속도로 우리는 통로를 만들어 나갔다.

내 육체는 끊임없이 굴을 팠고 내 정신은 계속해서 마나를 형성했다.

육체와 정신이 거의 완전히 따로 돌아가는 상태였다.

그렇게 얼마나 계속했을까, 코어의 마나가 완전히 바닥나는 바람에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빠르게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마나 형성 스킬의 레벨이 두 개나 올라 있었다!

이제 코어의 마나를 다시 보충할 차례였다.

아마 새로 업그레이드한 흡수 다리가 그 속도를 높여줄 터였다.

최근에 파기 시작한 이 통로에는 아직 마나 줄기가 없어서인지, 당장은 다리를 통해 흡수되는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꽤 오래 굴을 팠으니···

원래의 둥지가 얼마나 어두워졌는지 확인해 보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티투스는 우려하고 있었다.

물론 전장에서 보낸 기나긴 시간 만큼 깊은 주름이 패여 있는 사령관의 얼굴에서 근심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평소보다 조금 더 찌푸린 눈썹이나 조금 더 깊어진 눈빛은 티투스를 아주 오래 그리고 가까이 알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거의 알아차리기 불가능한 변화였다.

그래서 아우릴리아 대대장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티투스 휘하에서 오랜 세월 복무한 아우릴리아는 사령관이 경직된 어깨를 풀거나 양손 도끼의 칼날을 엄지로 확인하는 동작에서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낌새를 포착했다.

티투스가 뭔가를 우려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용병 조합과 상인 길드는 길의 교단도 지난 2주 동안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우리 전략가들은 리리아에서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을 경고했습니다."

아우릴리아가 보고를 마쳤다.

···

티투스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은 여전히 숲 쪽에 고정된 채였다.

티투스와 아우릴리아는 야영지에 건설한 벽 위에서 숲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던전 안의 숲은 이제 아주 어두워져 있었다.

심지어 몬스터들조차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조짐을 알아차린 듯했다.

지난 주 내내 숲 속에서 들리던, 몬스터들이 서로 싸우는 소리가 뚝 그쳤기 때문이다.

마치 던전 안의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이 언제라도 격렬한 전투에 뛰어들 준비를 마친 채로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것처럼 긴장된 분위기였다.

"지상에 전달할 지시 사항이 있으십니까, 사령관님?"

아우릴리아가 물었다.

사령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 눈동자로 계속해서 숲을 응시할 뿐이었다.

"대격변 이전에 던전은 어떤 모습이었을 것 같나, 대대장?"

갑자기 티투스가 물었다.

아우릴리아는 보고 내용과 무관한 질문에 잠시 사령관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무도 대격변 이전의 던전이 어떤 상태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령관님. 심지어 그 전에도 던전이 있었는지 여부조차 확실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티투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당연히 나도 알고 있네. 그저 상상력을 발휘해서 어땠을지 생각해보라는 거야, 아우릴리아."

대대장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르겠습니다, 사령관님. 우리가 아는 건 대격변 당시 지상의 마나 수준이 급격히 올랐다는 것뿐이니··· 지하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난 대격변이 웨이브였다고 생각하네."

티투스가 말했다.

"단지 아주 크고, 오래 지속된 웨이브였을 뿐이지."

어둠이 걷히고

대격변이 웨이브였다는 이론은 아우릴리아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어떤 웨이브도, 말그대로 세계를 산산이 부수고 던전의 시대를 연 대격변과 견줄 만큼 규모가 컸던 적은 없었다.

"인근 지역의 레기온 초소들이 보낸 보고서를 읽어 봤나?"

"읽어봤습니다."

티투스가 묻자, 아우릴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기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마나 수준이 상승하고 있네. 어떤 변수도 없이 일정한 속도로 말이야. 반론의 계측 결과도 우리와 일치하더군.

난 이번 웨이브의 범위가 어디까지 미칠지 궁금하네. 어쩌면 페리오르 연방 전체일지도 모르지. 혹은 그 이상일지도···"

"설마 두 번째 대격변이 시작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아우릴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징조가 심상치 않기는 하지만, 대격변이라니?

첫 번째 대격변 당시에는 지상의 문명이, 아니 인류 그 자체가 사라질 뻔했다!

티투스는 자신의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문지르며, 아래쪽의 숲이 발하는 희미한 푸른빛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건 나도 모르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티투스가 말했다.

"하지만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지. 이번 웨이브는 분명 뭔가 달라. 대체 뭐가 다른 건지 내가 알 수 있다면 좋겠군."

두 고참 군단병이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결국 아우릴리아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현재 상황에 대해 지상에 전달할 지시 사항이 있으십니까?"

티투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상에 남아 있는 모든 레기온 병력에게 즉시 준비를 시작해서, 두 시간 안에 여기로 출발하라고 전하게. 단 한 명의 훈련병이나 행정 인력도 남겨두지 말고 전부. 그리고 요새 지하에 있는 로어마스터의 서재에 불을 질러도 상관없으니, 반드시 알버튼도 끌고 와야 하네."

"전부 말씀이십니까?"

아우릴리아가 숨을 삼켰다.

"여왕을 버리실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반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반란은 일어날 걸세. 그리고 여왕은 살해당하겠지."

"그런데 어째서···?"

"난 지상에 존재하는 왕국들의 정치에는 관여할 생각이 없네. 그리고 자네도 그래야 하고, 대대장. 우리가 집중해야 할 대상은 던전일세. 그게 우리의 의무야."

티투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여왕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의 충실한 후원자였습니다. 그리고··· 알버튼 님의 고모라고요!"

아우릴리아는 티투스가 여왕의 운명에 이처럼 냉담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티투스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턱을 꽉 다문 사령관의 두 눈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내 말 잘 듣게, 대대장."

티투스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전례 없는 재앙을 앞두고 있네. 리리아 시와 몬스터들의 해일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보루는 이 임시 요새 뿐일세."

티투스는 흙을 단단히 뭉쳐 만든 벽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자신의 말을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의 지시에 따라 여기로 올 군단병들 뿐이지. 여왕은 위험을 자초했고 거기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네. 다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 사람들은 지킬 걸세."

티투스의 푸른 눈동자에서 천천히 타오르는 분노를 감지한 아우릴리아는 불만을 도로 삼켰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사령관님."

아우릴리아가 대답했다.

티투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서서 야영지 안쪽을 쳐다봤다.

대지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임시 건물들이 줄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에 흩어져 있는 천막들은 야외 대장간이었다.

이번 원정에 참여한 레기온의 모든 병사들이 야영지 안에 머물고 있었다.

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 티투스는 그 누구도 야영지 밖으로 단 1 센티미터도 나가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릭사드에게 메시지를 전하게."

티투스가 갑자기 그렇게 말하자, 아우릴리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 아들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티투스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땅을 내려다봈다.

그리고 다시 아우릴리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릭사드를 시켜서 용병과 상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생각일세."

아우릴리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왜 직접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으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사령관님? 제 아들은 한낱 상인일 뿐입니다. 그 아이를 시켜서 메시지를 전한다고 저들이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티투스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우릴리아."

대대장의 이름을 부르는 사령관의 목소리에 경고의 기색이 묻어났다.

"나와 장난칠 생각은 하지 말게."

이어지는 사령관의 말을 듣고, 이번에는 대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릭사드가 우리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용병들에게 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자네가 유출한 정보 말일세. 그러니 자네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지. 그러면서 우리가 첩자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릴 수 있을 테고."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아우릴리아가 속삭이듯 묻자, 티투스가 코웃음을 쳤다.

"자네는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네, 대대장. 우리가 알아차리기를 바랐겠지.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네."

아우릴리아가 자신을 추스리며 사령관에게 경례를 붙였다.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사령관님."

티투스는 잠시 아우릴리아의 눈을 마주봤다.

하지만 아우릴리아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마 오래 전부터 이 순간을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아우릴리아로서는 놀랍게도, 사령관은 그저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자식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누구를 나무랄 수는 없겠지. 자네 잘못이 아닐세. 릭사드를 시켜서 저들에게 우리가 2주 동안 현재 위치를 사수할 거라고 전하게. 단 2주 뿐일세. 그 뒤에는 저들이 알아서 도시를 보호해야 할 거야."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사령관님?"

"아래로."

아우릴리아의 등을 두드려 준 티투스는 벽에서 내려가 야영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면서 마주치는 병사들에게 농담을 건네거나 격려를 하고, 때로는 나무라기도 했다.

사령관을 바라보는 군단병들의 눈빛은 존경심과 충성심, 그리고 숭배로 가득했다.

티투스 역시 병사들이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영웅 숭배가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군단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굳이 거부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병사들을 살릴 수 있다면 말이다.

물론 티투스는 자기 자신을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허리가 아팠고, 왼쪽 팔꿈치의 연골은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정말로 은퇴할 날이 머지 않았다고 티투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

다시 둥지로 돌아가려면, 어떻게든 통로를 파는 일에 힘을 보태려고 내 뒤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일개미들을 뚫고 지나가야 했다.

내가 천천히 뒤로 돌아서 움직이자, 일을 못해서 안달이 난 개미들이 서둘러 내 몸을 타고 넘어갔다.

이제는 바닥 뿐 아니라 통로의 벽과 천장에도 개미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그야말로 3차원 공사로군!

어찌어찌 개미들로 꽉 막혀 있는 정체 구간을 통과하자 지나가기가 좀 더 수월해졌다.

겨우 두 시간 정도 굴파기를 도왔을 뿐인데 통로는 훨씬 더 길어져 있었다.

거의 내가 거들기 전의 두 배 정도···?

이게 바로 채굴 스킬의 위력이지!

다른 개미들보다 덩치나 힘도 월등하고 말이다.

어쨌든!

통로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여왕의 방으로 나온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랐다.

아니···

안 펼쳐진 광경에 놀랐다고 해야 하나?

방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벽에 퍼져 있는 마나 줄기들은 더 이상 아무런 빛을 발하지 않았다.

아마 둥지 밖의 던전도 똑같이 어둠 속에 잠겨 있을 터였다.

좀 소름 끼치는데.

나는 새로 얻은 흡수 다리를 던전의 벽 여기저기에 대고 빨아들일 마나가 남아 있는지 살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벽의 마나 줄기들은 완전히 말라붙은 상태였다.

포르모가 했던 말을 생각하면, 지금 마나의 수위가 완전히 낮아진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엄청난 기세로 다시 밀려올 거라는 의미였다.

마치 해일처럼 말이다.

···

음···

[타이니? 여기 위쪽 방으로 다시 올라와 볼래?]

타이니의 대답이 언어 형태로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알겠다는 의미가 내 머리 속에 전해졌다.

나는 타이니를 기다리는 동안 마치 우스꽝스러운 개미 댄스를 추는 듯한 동작으로 여기저기 발을 가져다 대면서 마나가 돌아오는 기미가 있는지 살폈다.

당장은 아무런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아이들이 어디 있더라?

알과··· 유충과 번데기들이?

아직 우리의 다음 세대를 옮기지 않았잖아!

나는 열기를 감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더듬이를 흔들며, 여왕의 방 위쪽에 있는 새로 만들어진 육아실로 향했다.

젠장!

예상대로 모두 거기 그대로 있었다.

다섯 마리밖에 안 되는 일개미들이 알과 유충을 씻기거나 먹이를 먹이면서 돌보는 중이었다.

이 아이들을 여기서 데리고 나가야 돼!

당황에 사로잡힌 나는 일개미들 사이로 뛰어들어서 "아이들을 옮겨야 돼, 여기는 위험해!" 라고 외친 다음 가장 가까이 있는 유충을 턱으로 집어 들었다.

보모 개미들은 내가 갑자기 난입하자 잠시 놀라서 동작을 멈췄다가, 곧 어둠 속에서 더듬이를 흔들며 내가 한 말을 '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다들 유충을 한 마리씩 집어 들고 내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꼬물거리는 유충을 물고 여왕의 방으로 돌아가자, 타이니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이제 거대한 고릴라가 된 타이니 녀석은 바닥에 편히 누워서 콧노래를 부르며 쉬는 중이었다.

[여기서 기다려, 타이니! 곧 싸움이 벌어질 거야!]

[싸움!]

싸움이라는 말을 듣자 타이니가 눈에 띄게 흥분했다.

벌떡 일어난 녀석은 온몸에서 전기를 일으키며 때릴 상대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말고 곧 임마!]

나는 그렇게 외친 뒤 보모 개미들과 함께 새로 판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통로를 따라 백 미터쯤 전진하자 잔뜩 모여 있는 개미들과 마주쳤다.

나는 어린 유충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있는 힘껏 외쳤다.

"아이들을 여기로 옮겨야 돼!"

그리고 나서 다시 육아실을 향해 달렸다.

아이들은 둥지의 미래였다!

둥지 안에는 대략 오백 마리의 알과 유충들이 있었다.

녀석들이 모두 성체로 자라나면 둥지의 규모는 두 배로 성장할 터였다.

둥지의 미래 세대가 웨이브에 휘말려 헛되이 죽게 할 수는 없었다!

다시 육아실에 도착한 나는 가장 먼저 보이는 유충을 집어 들었다.

하얀 애벌레는 갑자기 누가 자신을 거칠게 들어올리자 불만스럽게 꼬물거렸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좀 참아, 녀석아!

널 구하려는 거라고!

육아실 밖으로 나오자 내 어설픈 외침을 듣고 수많은 일개미들이 달려오는 중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둥지에는 개미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호하려 드는 두 가지가 있었다.

바로 여왕과 아이들이다.

둘 다 둥지의 미래였고, 그래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대상이었다.

여왕의 방으로 돌아온 나는 뭔가를 느끼고 멈춰 섰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발 밑에 마나가 흐르고 있었다.

아직은 희미했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그리고 내 작은 개미 발이 소량의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을···

안돼!

시작되고 있어!

시간이 얼마 없었다.

서둘러야 해!

나는 최대한 빠르게 통로 안으로 달려가 꼬물거리는 유충을 바닥에 내려 놓았다.

"다들 서둘러! 위험이 다가오고 있어! 어서!"

있는 힘껏 페로몬을 발산한 뒤, 머리 속으로 타이니를 불렀다.

[타이니, 준비해!]

내 경고를 듣자 타이니는 신이 나서 두 발로 일어선 다음, 기대에 찬 얼굴로 팔을 붕붕 휘둘렀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진화 뒤에도 타이니의 호전적인 성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다른 일개미들과 함께 부지런히 아이들을 나르면서, 나는 점점 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발 아래에서 점점 더 많은 마나가 느껴졌고, 둥지의 벽에 푸른 빛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둥지를 집어 삼켰던 새까만 어둠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벽을 따라 퍼져 있는 마나 줄기가 빛을 발하며 맥동하기 시작했다.

미치도록 겁이 났다.

포르모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그랬다면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벽을 바라보며 다시 밝아진다며 좋아하고 있었겠지!

포르모에게 이야기를 듣고 난 지금도, 나는 웨이브가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 몰랐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나는 계속해서 다른 일개미들과 함께 아이들을 운반했다.

아늑한 육아실에서 더럽고 혼잡한 통로 안으로 옮겨진 유충들이 불만스럽게 꼬물거렸다.

가만히 좀 있어, 이 배은망덕한 놈들아!

너희를 살리려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

다섯 번째로 육아실을 왕복할 때에는 이미 빛이 어두워지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고도 계속해서 더 밝아졌다.

그리고 다른 뭔가가 느껴졌다.

처음에는 헷갈렸지만, 곧 그 느낌의 정체를 깨달은 나는 턱에 물고 있던 애벌레를 거의 놓칠 뻔했다.

내 더듬이가 벽에서 열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둥지 전체의 벽에서 말이다.

아직 희미한 열기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마나가 다시 돌아오자 벽 여기저기에 열기의 작은 점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점들은 계속해서 커졌다.

맙소사···

한두 마리가 아니잖아!

나는 더듬이를 맹렬하게 휘두르며 둥지 안에 퍼져 나가는 열기를 감지했다.

곧 몬스터로 변할 열기였다.

[정신 바짝 차려, 타이니!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테니까!]

끝없는 싸움의 시작

타이니도 나와 같은 걸 느낀 듯했다.

어떻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눈에서 번개를 튀기며 벽을 사납게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미쳐 날뛸 기세였다!

나는 새로 판 통로 안에 물고 있던 유충을 내려 놓은 다음, 한층 더 밝아진 여왕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빛은 거의 눈부실 지경이었다.

여섯 개의 다리가 마나를 너무 빠르게 흡수해서 뜨겁게 느껴졌다.

마치 뜨거운 불판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사방에 에너지가 넘쳐 흘렀다!

벽에 얼마나 많은 마나가 흐르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엄청난 힘으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만약 던전 전체, 그러니까 수천 평방 킬로미터의 공간이 모두 이런 식이라면···

맙소사···

이 모든 에너지가 다 어디서 오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디가 됐든 힘의 출처나 원천이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불안과 공포가 심장을 옥죄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 에너지의 아주 작은 파편만 가지고도 나는 모든 걸 집어삼키는 죽음의 구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 터였다.

이 방 하나 안에서 맥동하는 마나의 극히 일부만 가지고도 말이다.

둥지 바깥의 공동은 지금 어떤 광경일지 생각하자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주위에 온통 열기의 점들이 피어나는 바람에, 나는 계속해서 여기저기로 시선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촘촘히 모여 있는 열기들이 모두 일정한 속도로 커지지는 않았다.

갑자기 하나가 밝게 빛나서 돌아보면 이내 잦아들고, 다른 쪽에서 또다른 열기가 폭발적으로 커져서 또다시 돌아보고···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는 바람에 제자리에서 빙빙 도느라 현기증이 났다.

차라리 속 편히 싸울 수 있게 빨리 몬스터들이 나타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른 개미들은 계속해서 육아실을 오가며 아이들을 새로 판 탈출용 통로로 옮겼다.

아직 마나 줄기가 침투하지 못한 탈출용 통로는 다행히 아직 어두운 상태로 남아 있었다.

*까득* *까득* *까득*

이게 무슨 소리지?

방 한쪽에서 희미하게 뭔가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발톱이나··· 혹은 이빨로··· 돌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소리는 분명히··· 벽 안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다음 순간,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모든 벽에서, 위쪽의 수직 통로에서, 육아실에서···

던전의 모든 구석에서 소름 끼치는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더듬이에 느껴지는 벽의 열기가 너무 거세서 마치 온 사방에 불이 타오르는 듯했다.

내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이건···

한 마리의 개미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떨리는 턱을 꽉 다물었다.

···빌어먹을 던전···

···빌어먹을 몬스터···

···해보자는 거냐?

나랑···

싸워보자는 거냐?

그럼 얼른 나와서 이 개미 님에게 덤벼봐!

*쾅*

내 바로 앞쪽의 바닥을 뚫고 팔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바람에 흙먼지가 사방으로 날렸고, 내 눈에도 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물러났고···

다음 순간 타이니가 내 앞에 있었다.

타이니의 거대한 주먹에는 전기 에너지가 번쩍였고, 입술은 사납게 뒤집어져 송곳니가 드러났다.

우람한 어깨 근육이 꿈틀거리더니 주먹이 대포알처럼 바닥을 꿰뚫었다.

흙더미 아래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렸지만, 타이니의 공격은 끝이 아니었다.

타이니가 팔을 들어올리자 그 커다란 손아귀에 몬스터 한 마리가 딸려 나왔다.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까만 놈이었다.

커다란 주둥이처럼 생긴 몸통에는 길고 날카로운 촉수들과 이중 관절로 이루어진 기괴한 사지가 달려 있었다.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한 신체 구조였다.

지구에서는 저 비슷한 생물도 본 적이 없었다.

대체 저게 뭐지!?

태어나자 마자 타이니에게 붙잡힌 몬스터는 고릴라의 우악스러운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날카로운 촉수와 발톱이 타이니의 긴 팔을 할퀴었다.

그러자 타이니의 눈빛이 한층 더 사나워지더니, 손에서 번쩍이던 전기 에너지가 한층 더 강해졌다.

타이니의 손에서 일어난 번개는 곧 몬스터의 온몸을 뱀처럼 휘감았다.

잠시 후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계속해서 지르던 비명을 멈추고 잠잠해졌다.

타이니···

지금···

번개로 튀겨버린 거야?!

쩌는데!

*쾅* *쾅* *쾅* *쾅* *쾅*

점점 더 많은 몬스터들의 다양한 신체 부위가 벽과 바닥을 부수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나르던 몇몇 일개미들이 그렇게 튀어나온 주둥이나 발톱에 붙잡혔다.

빌어먹을!

나는 즉시 달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계속 벽이 무너지고, 몬스터들의 팔이며 머리가 튀어나왔다.

물어 부수기!

우직!

나는 일개미 하나를 붙잡고 있는 또다른 주둥이 촉수 괴물에게 달려들어 턱으로 다리를 물어서 부러뜨렸다.

"통로로 도망쳐!"

이 난리통에서도 다른 개미들이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렇게 외쳤다.

개미들의 더듬이가 흙먼지로 뒤덮인 탓에 잘 들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붙잡혀 있는 일개미들을 모두 구해야 했다.

나는 몬스터에게 붙들린 또다른 개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겹눈으로 살피니, 타이니는 아주 미쳐 날뛰고 있었다.

전기 에너지를 잔뜩 일으킨 탓에 전신의 털이 곤두서서, 마치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악마 같은 모습이었다.

타이니의 길다란 팔이 연신 벽을 뚫고 들어갔다.

그 서슬에 충격파가 사방으로 물결쳤다.

타이니가 벽 속에 박아 넣었던 손을 뽑았다.

그러자 기이한 벌레처럼 생긴 몬스터 한 마리가 타이니의 팔을 휘감은 채 딸려 나왔다.

타이니의 손아귀에 붙잡힌 벌레 몬스터는 거머리 같은 주둥이를 벌린 채 헐떡였다.

거칠게 포효한 타이니는 팔에 전기를 흘려 넣어 놈을 순식간에 튀겨버렸다.

그리고 방을 가로질러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또다른 몬스터를 향해 그 시체를 던졌다.

마침내 벽에서 빠져나온 몬스터들은 우리만 공격하는 게 아니었다.

놈들은 서로를 향해서도 달려들어 죽일 듯이 싸웠다.

심지어 같은 종끼리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아마 던전 전체가 이런 광기에 휩싸여 있을 터였다.

웨이브는···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일개미들의 자취를 따라 달리며,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들의 신체 부위를 닥치는 대로 물었다.

내 주된 목적은 놈들을 죽이는 게 아니라 최대한 많은 일꾼을 무사히 탈출시키는 거였다.

"통로로 들어가! 통로로 들어가!"

나는 형제 자매들에게 계속해서 외치며 벽에서 나오려고 애쓰며 버둥거리는 몬스터들의 팔다리를 턱으로 물어서 끊어버렸다.

이 와중에 육아실은 어떻게 됐지?

아이들은 모두 데리고 나온 건가?

미처 구하지 못한 유충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감이 가슴을 옥죄었다.

가서 남아 있는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

[타이니, 통로를 보호해!]

온통 혼란스러운 와중이라 타이니가 내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걸 확인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육아실을 향해 달리면서 턱에 중력 마법을 주입했다.

그리고 탈출용 통로로 향하다가 붙잡히거나 길이 막힌 개미를 볼 때마다 곧바로 중력의 힘을 이용해 내 쪽으로 끌어당겨 달아날 수 있게 했다.

영문도 모른 채 공중에 떠오른 개미들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지, 아니면 내 실력이 늘었는지 몰라도 다행히 그렇게 끌어당긴 개미들을 다리부터 안전하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

녀석들이 운반하고 있던 유충도 무사했다.

휴!

이제 내가 처음 벽에서 감지했던 몬스터들은 대부분 뛰쳐나온 뒤였다.

놈들은 눈에 보이는 첫 번째 대상에게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싸움을 벌였다.

그 중 많은 수는 내가 여태까지 던전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김새였다.

어둠과 그림자로부터 태어난 듯한 비인간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자연적인 모습의 괴물들이었다.

주둥이는 말도 안 되게 컸고, 팔다리는 불가능한 각도로 휘었으며 필요도 없는 관절이 잔뜩 달려 있었다.

그야말로 악몽 속에서 막 뛰쳐나온 듯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놈들의 외모에 정신을 팔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더 이상 육아실에서 나오는 개미들은 없었다.

나는 앞을 가로막는 놈이 있으면 턱으로 쳐내며, 몬스터들 사이를 뚫고 육아실로 향했다.

아무리 기괴한 놈들이라도 내 턱에 물려서 팔다리가 끊어지는 건 두려운지 슬금슬금 길을 비켰다.

육아실 안으로 들어간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십여 마리의 유충들을 봤기 때문이다.

무력한 애벌레들은 가장 안전해야 할 육아실의 벽에서 뛰쳐나온 악몽 같은 괴물 무리에게 짓밟혀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빌어먹을.

우린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저기 죽어 있는 작은 유충들도 내 가족이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웨이브에 희생되고 말았다.

나는 즉시 후회에 휩싸였다.

내가 좀더 시간을 잘 가늠했다면, 조금 더 빨랐다면, 조금 더 강했다면···

녀석들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잠깐.

방 한복판에 있던 애벌레 한 마리가 운 좋게 살아남아, 나를 향해 꿈틀거리며 기어오고 있었다.

그 주위에서는 사나운 괴물들이 서로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유충이 난폭한 괴물의 발에 짓밟히기 직전에, 나는 턱에 머금고 있던 중력을 활성화했다.

휙!

공중으로 떠오른 작은 유충은 육아실을 가로질러 날아와 내 얼굴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녀석을 턱으로 받으려고 하면 상처를 입힐 가능성이 높았다.

애벌레들은 너무 작고 말랑하니까!

내 얼굴로 충격을 흡수하는 방법이 그리 세련된 해결책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효과는 있었다.

무사히 탈출한 운 좋은 유충이 꿈틀거리며 기쁨을 표시했다.

거의 감각이 없는 유충치고는 희한하게 활기차고 똘똘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괜찮니, 꼬마야?

나는 육아실 안에 더 이상 남아 있는 일개미가 없는 걸 확인하고 돌아섰다.

방금 구해낸 유충을 탈출용 통로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최소한 이 한 마리라도 구하기 위해서.

분노는 그 뒤에 풀어도 늦지 않았다.

슬픔과 죄책감으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 유충을 살려야 했다.

나는 자세를 바짝 낮춘 채로 몬스터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낫처럼 생긴 발톱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내 옆구리를 할퀴었다.

단단한 발톱이 다이아몬드 갑각과 마찰하자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나는 반격하지 않았다.

이 유충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기 전에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없었다.

내 정면에서 끔찍한 몰골의 몬스터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마치 죽음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처럼 추악하게 뒤틀린 생김새였다.

놈이 가까이 다가오자 죽음의 에너지가 내 전신을 찌르기 시작했다.

죽음의 토끼와 싸울 때 느꼈던 기운이었다.

안돼!

HP를 흡수하는 오러를 나는 견딜 수 있을지 몰라도, 유충은 순식간에 죽어버릴 터였다.

젠장!

[타이니!]

내가 머리 속으로 외쳤다.

그러자 여왕의 방 맞은편에서 타이니가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리를 질렀다.

정신을 공격하는 타이니의 초음파 포효에 방 안에 있던 몬스터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고통스러워했다.

심지어 귀가 없는 유충조차 그 진동을 느끼고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내 앞에 버티고 서 있던 악몽처럼 생긴 괴물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눈부신 빛이 내 겹눈을 자극했다.

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온몸이 전기로 휩싸인 타이니가 마치 번개의 신처럼 몬스터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타이니의 손에서는 연신 전기가 번쩍였다.

분노한 표정의 타이니가 내 쪽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녀석이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다음 순간 타이니의 손에서 번개 한 줄기가 날아와 내 앞에 있던 몬스터를 불태웠다!

잘했어, 타이니!

간드아!

나는 최대한 빠르게 다리를 놀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려도 아랑곳 않고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를 내려고 애썼다.

달려달려달려!

탈출용 통로의 입구에 다다르자 일개미들이 이미 방어선을 형성하고, 수적인 우위에 의지해서 몬스터들을 막아내는 중이었다.

방어선의 빈 자리를 발견한 나는 있는 힘껏 도약해서 몸을 그쪽으로 날렸다.

뛰어!

복부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사지 끝에 커다란 가시가 달린 무시무시한 괴물이 내 바로 아래의 땅 밑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놈은 한쪽 팔에 달린 가시가 내 복부를 관통해서 등 쪽으로 나온 상태였다.

이런 제기랄 아프잖아!

내 HP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일단 아이부터 구하자.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바닥에 착지한 나는 여전히 복부를 가시에 관통당한 채로 기어서 통로 쪽을 향했다.

턱에 물고 있는 작은 유충이 작게 꼬물거렸다.

뒤쪽에서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시로 나를 찌른 괴물의 나머지 부분이 지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거의 다 왔어!

몇 미터만 더!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기었다.

지나온 길을 따라 피가 바닥을 적셨다.

마침내 다른 개미들 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서둘러 달려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턱에서 유충을 받아 들더니 통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일개미의 턱으로 옮겨간 유충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꼭 살아야 한다, 꼬마야.

그리고 내 뒤에 있는 놈은···

감히 나를···

그것도 뒤에서 찔러?

넌 나 좀 보자.

반격 준비

내 뒤쪽의 몬스터는 이제 완전히 땅 위로 기어 나온 상태였다.

그리고 이미 자신의 가시에 꿰뚫린 내가 다 잡은 사냥감이라고 생각했는지, 여유롭게 다가왔다.

놈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내 뒤쪽은 결코 안전 지대가 아니었다.

푸슝!

푸슝!

푸슝!

세 발을 연달아 발사하고 뒤를 돌아보니, 몬스터가 온몸에 산성 용액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하!

어떠냐 멍청한 놈아!

피부를 태우는 산성 용액에 놈이 고통스러워하며 뒷걸음질치자, 자연스럽게 내 복부에 박혀 있던 가시도 빠졌다.

그 끔찍한 통증 때문에 순간적으로 머리 속이 하얗게 변했다.

이런 빌어먹을!

아프잖아!

재생 분비선 활성화!

체내에서 분비된 재생 용액이 몸에 난 구멍을 막기를 바라며, 나는 마침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말이지 끔찍하게 생긴 몬스터와 마주했다.

이중 관절이 달린 길다란 두 팔 끝에 날카롭게 빛나는 뾰족한 가시가 달려 있었다.

그 팔 사이의 멋대로 뒤틀리고 말라 비틀어진 몸뚱이 뒤로는 구부러진 꼬리가 땅에 끌렸다.

그 꼬리는 뭐냐?

별 쓸 데도 없어 보이는구만!

복부를 관통당한 직후 절반까지 떨어졌던 HP가 재생 분비선 덕분에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이 부위는 정말 잘 샀단 말이지!

나는 적의 눈앞에서 좌우로 움직이며, 몸을 완전히 회복하기 위한 시간을 벌었다.

몬스터는 잠깐 주저하더니, 대롱처럼 생긴 기괴한 입을 부풀려 끔찍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한 쪽 팔을 들어서 날카로운 가시로 나를 찌르려고 했다.

다행히 구속 산성 용액이 놈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스터의 공격은 꽤나 빨랐다.

무시무시하게 날카로운 가시는 마치 뜨거운 버터를 찌르기라도 한 것처럼 단단한 지면을 쉽게 파고들었다.

나는 간발의 차이로 놈의 공격을 피했다.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린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가시에 찔리지 않을 수 있었다.

뒤틀린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이 괴물은 신체 능력이 매우 높은 모양이었다.

팔을 찌르는 속도와 가시의 관통 능력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실제로 내 갑각도 단번에 꿰뚫었으니까 말이다.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끌다가 가시에 머리를 찔릴지도 몰랐다.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공격해야 했다!

몬스터가 팔을 거두는 순간, 나는 턱에 마나를 주입하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우직!

나는 물어 부수기로 놈의 팔을 공격했다.

다행히 몬스터가 팔을 완전히 거두기 전에 턱으로 붙잡을 수 있었다.

내 턱이 적의 살을 파고드는 만족스러운 느낌이 전해졌지만, 팔을 완전히 끊어낼 수는 없었다.

마나를 주입한 턱으로도 자르지 못하다니!

몬스터가 몸을 뒤로 젖히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하!

맛이 어떠냐!

···놈이 반대쪽 팔을 아래로 휘둘렀다!

이크!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날려 다시 한 번 가까스로 공격을 피했다!

이 자식 어떻게 이렇게 빠른 거지?

팔을 올리는 동시에 피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다음 순간 가시가 지면에 박혀 있었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팔을 아래로 휘두르는 동작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어떤 종류의 스킬이나 변이가 분명했다.

구속 산성 용액을 뒤집어쓴 상태로도 저런 수준의 속도를 내다니···

미리 산성 용액을 발사하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보이지도 않는 공격에 머리를 찔려서 죽어 있을 터였다.

정말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 던전은 정말로 위험한 곳이었다.

우리처럼 초라한 개미 둥지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때 내 겹눈에 이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개미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개미들은 탈출용 통로 안쪽으로 도망치는 대신 입구의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백 마리의 일개미들이 나란히 서서 어떤 몬스터도 자신들을 돌파하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그래, 잘하고 있어!

우린 이겨낼 수 있을 거야!

타이니는 여전히 미쳐 날뛰는 중이었다.

온몸에서 전기를 뿜어내며, 무시무시한 완력으로 적들을 두들겨 팼다.

하지만 언제까지 저렇게 싸울 수는 없을 터였다.

이미 몸 여기저기 상처가 눈에 띄었고, 전기 에너지도 무한은 아니었다.

아까 나를 구하기 위해 번개를 쏘아내느라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 탓인지, 온몸을 둘러싼 전기가 꽤 약해진 상태였다.

반면에 웨이브는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미 몬스터들이 둥지를 가득 채운 상태지만, 벌서부터 벽에서 새로운 열기들이 느껴졌다.

정말로 몬스터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올 모양이었다!

포르마가 했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위험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우선 눈 앞의 강력한 적을 쓰러뜨린 다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개미들이 통로를 계속 파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무너지고 말 터였다.

둥지의 개미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악몽 같은 몬스터들과 싸워서 이길 방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턱에 주입했던 마나를 거두고, 대신 중력 에너지를 끌어냈다.

그리고 마주하고 있는 적이 균형을 되찾기 전에 중력으로 놈을 붙잡았다.

우리 내 거리에서 한 번 싸워보면 어떨까, 친구?

휙!

하하!

나 때문에 계획이 어긋났나?

몬스터는 놀라서 동작을 멈춘 채 나를 향해 날아왔다.

예상치 못한 비행 때문에 빈틈을 드러낸 상태였다.

물어 부수기!

*우직*

나는 몬스터가 날아와서 부딪히는 충격을 버티기 위해 여섯 개의 다리로 지면을 단단히 딛었다.

그리고 턱으로 곧장 적의 얼굴을 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놈의 대롱 모양 주둥이 주위로 십여 개의 작고 붉은 눈들이 마치 루비처럼 박혀 있었다.

내 턱이 살을 파고들어 뼈를 부러뜨리자, 그 눈들에 일제히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한 번 더!

물어 부수기!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살이 찢어지고, 그 아래의 두개골이 내 턱 사이에서 부서졌다.

[레벨 1 녹테 쿠스피데 베르멤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음하하!

어떠냐!

재빨리 주위를 살펴서 당장 내게 달려드는 적이 없는 걸 확인한 뒤, 나는 몬스터의 시체를 몇 입 뜯어먹었다.

빠르게 체력을 회복해야 했다.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녹테 쿠스피데 베르멤.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녹테 쿠스피테 베르멤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녹테 쿠스피데 베르멤. 밤의 창 벌레. 이 어둠에 속한 몬스터는 다리가 없어 이동이 느리지만,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두 팔의 힘과 속도가 그 약점을 보완합니다. 이 가시 창들의 관통력은 아무리 단단한 방어라도 뚫을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 경고해 줘서 고맙군 시스템.

언제나처럼 어차피 나 혼자서도 알아낼 수 있는 내용 같지만···

나는 시체를 몇 입 더 삼켜서 바이오매스 하나를 추가로 얻었다.

하지만 더 많은 몬스터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바람에 식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내게 덤빌 기세는 아니지만, 그래도 느긋하게 식사를 계속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식사를 방해하다니 무례한 놈들.

이 던전 안에는 예의 바른 놈이라곤 없다니까.

바이오매스를 하나만 더 얻으면 중력 분비선을 +4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데!

물론 그런다고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막무가내로 중력 폭탄을 날릴 수는 없었다.

타이니를 맞출 위험은 물론, 천장을 무너뜨리거나 아니면 나까지 폭발에 휘말려 들지도 몰랐다.

내 자신이 만든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다면 너무 어이없는 죽음이겠지···

일단 중력 폭탄은 패스하고.

다른 방법이 뭐가 있을까···

아무래도 중력 에너지와 마나 형성 스킬을 이용한 실험을 해볼 때 같았다.

부디 결과가 좋아야 할 텐데···!

지금 둥지 벽에는 너무 많은 마나가 흐르고 있어서 솔직히 무서울 정도였다.

내 흡수 다리는 흡사 불이 붙은 듯한 느낌이었고, 미친 듯한 속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에너지가 꾸준히 코어를 채웠다.

그래서 이미 코어의 마나와 중력 에너지를 어느 정도 사용했는데도···

두 종류의 에너지 모두 거의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공기 중의 마나를 흡수해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마나 재생 속도도 평소보다 빨랐다.

주위가 온통 기이한 에너지가 충만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마나를 전투에 활용할 수 있는 더 다양한 방법을 찾아낸다면, 이 웨이브는 나처럼 마법 전문 개미에게는 완벽한 환경이 될 수도 있었다.

비록 육체적인 능력이 우수하기는 하지만, 진화 에너지를 투자하고 다양한 변이를 거친 덕분에 현재 내 종족은 두뇌파 개미였다.

그리고 나는 많은 스킬 포인트와 시간 그리고 노력을 들여서 마나의 힘을 사용하는 능력을 계발해 왔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공격 기술 한두 가지는 만들어 냈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이제 웨이브가 닥친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장 뭐라도 시도해 봐야 했다.

다행히 새로운 기술을 시험해 보기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둥지의 개미들은 통로 입구에서 방어선을 유지하는 중이었고, 어떤 몬스터든 가까이 다가오면 벌떼··· 아니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공격했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이 전술이 성공적이라, 겁 없이 방어선에 접근한 몬스터들은 순식간에 개미들로 우글거리는 통로 속에 끌려 들어가서 산성 용액을 뒤집어쓴 뒤 갈기갈기 찢어졌다.

나는 어째서 개미들이 평소처럼 자살 공격에 가까운 맹목적인 돌진을 감행하지 않는지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사실에 무척 감사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이들 때문일까?

둥지의 미래 세대가 위기에 처한 상황이라 일개미들도 신중하게 방어에 전력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날 뻔했다!

물론 개미는 못 울지만···

부탁한다, 일개미 제군들.

우리 가족의 미래를 위해 싸워다오!

그러니까, 방어적으로··· 알았지?

어쨌든 개미들이 적과 난전을 벌이지 않고 있는 덕분에, 내게 운신의 폭이 생겼다!

···물론 타이니가 맞을 수도 있지만, 녀석은 충분히 튼튼하니까.

중력 폭탄이 아닌 이상 내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저 거대한 번개 고릴라를 다치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몬스터들이 서로 사납게 싸워대는 한복판에서, 나는 깊은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리고 보조 뇌까지 동원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무형의 에너지를 느끼려고 애썼다.

마나는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어떤 느낌인지, 내 마음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말로 설명하려면 적당한 표현을 찾기가 어려웠다.

내 몸 속에 저장되어 있을 때의 마나는 밀도가 높아서···

마치 지면 가까이 두껍게 깔려서 투과해 볼 수 없는 짙은 안개처럼 느껴졌다.

아니, 안개가 아니라 힘이라는 번개가 치는 구름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내가 그 힘에··· 접촉하면, 구름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회전하고 꿈틀대며 내 의지에 반응했다.

마나를 움직이려면 그 구름을 고양이의 목덜미를 쥘 때처럼 섬세하게, 하지만 단단히 붙잡고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했다.

마나가 내 의지에 저항하려 들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마나는··· 무거웠다.

내가 정신력만으로 극복해야 하는 관성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보조 뇌의 도움을 받아도 마나를 세심하게 제어하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인 에너지는 장난이 아니었다.

마나를 더 정교하게 움직이려 할수록,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 에너지를 대략적인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정확한 방향으로 움직인 다음 구체적인 모양으로 빚어내는 일은 훨씬 더 어려웠다.

마치 아무리 무거운 공이라도 단순히 굴리기만 하려면 어렵지 않지만, 우측 10도로 스핀을 줘서 정확히 5.5 미터 거리만큼 굴러가게 하려면 어려운 것과 같았다.

그래서 마나 형성 스킬이 필요했다.

마나 형성 스킬은 내가 마나를 원하는 방식으로 다루기 위해 어느 정도의 힘이 필요한지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줬다.

또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식을 부여했고, 뭔가 실수가 발생하면 알려주기도 했다.

마나 형성 스킬을 처음 배웠을 때 저절로 알게 된 패턴들도 있었다.

물론 모든 스킬은 지식을 부여한다.

스킬이란 곧 어떤 기술을 사용하기 위한 지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나 형성 스킬은 다른 스킬들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담고 있었다.

단지 마나를 다루는 기술적인 방법만이 아니라, 그렇게 마나를 다뤄서 만들어야 하는 무수한 형태와 패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유일한 문제는 각각의 형태가 뭘 위한 건지는 알려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뭐, 정확한 형태를 만들기가 말도 안 되게 어렵다는 점도 문제기는 했다.

마나 형성 스킬의 레벨이 오르면서 조금씩 쉬워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시도할 때마다 매번 성공하지는 못했다.

가장 최근에 연습했을 때에도 정확한 형태를 만들어 내는 성공률은 50%에 불과했다.

그리고 성공했을 때에도 여왕과 동료 개미들이 있는 둥지 안이라서, 효과까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과연 어떤 효과가 있는지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제발 뭔가 쓸 만한 결과가 나와야 할 텐데!

중력의 효과

몸 속에서 어두운 보라색의 중력 에너지를 끌어낸 나는 첫 번째로 떠오르는 패턴을 만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원을 겹쳐서 형성하다 보면 결국 구체로 변하는 패턴이었다.

다만 두 개의 원을 동시에 '그려야' 하기 때문에 형성이 상당히 어려웠다.

두 갈래의 에너지를 한꺼번에 제어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조 뇌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지만, 계속해서 주위의 환경을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라 온전히 패턴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는 몬스터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최대한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물론 미쳐 날뛰면서 보이는 모든 대상을 공격하는 몬스터들로 가득한 방 안에서 싸움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몇 차례나 패턴 형성을 중단하고 자리를 옮기거나, 서로 싸우는 몬스터들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몸을 피해야 했다.

그 때문인지 도중에 에너지의 흐름을 놓쳐서 패턴을 완성하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젠장!

대체 누가 마법을 이렇게 어렵게 만든 거야?

그냥 마법 이름을 외치면 알아서 나가게 하면 안 되나?

···

나는 벽에 바짝 붙어 서서 두 번째 시도를 시작했다.

내가 분비선에서 에너지를 끌어내는 동안에도, 땅을 딛고 있는 다리를 통해 계속 마나가 흡수되고 있었다.

코어는 이미 포화 상태라 넘쳐나는 에너지는 곧장 중력 분비선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서서히 중력 에너지로 변환 과정을 거쳤다.

좋아, 집중하자!

나는 다시 한 번 몸 속에서 패턴을 형성하려고 시도했다.

이번에는 다른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거나 몸으로 받아내는 와중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그러자 천천히 패턴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력으로 계속 두 가닥의 중력 에너지를 제어하며, 몸 속에서 원들을 3차원으로 교차시켰다.

패턴의 마지막 부분을 완성할 무렵에는 머리가 엄청나게 아팠다.

여태까지 내가 시도했던 모든 패턴들은 마무리 단계로 갈수록 더욱 복잡했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쾅!

어디선가 날아든 강력한 주먹이 옆구리를 때려서 나를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패턴을 완성하기 위해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도 못했다.

거의 다 됐어···

빌어먹을 거의 다 됐는데···

됐다!

한 순간 내 몸 안에 강렬한 에너지가 차오르더니, 마침내 패턴이 완성됐다!

그리고 패턴을 완성할 때마다 느꼈던 새로운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제 필요한 건 내 정신력으로 이 형상을 견고하게 유지하면서, 효과가 발생할 때까지 더 많은 에너지를 불어넣어 이 패턴을 '가동시키는' 일이었다.

나는 주위의 몬스터들과 충돌하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계속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중력 분비선에서 끌어내 방금 만든 패턴 속으로 불어넣었다.

이걸 가동시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지만···

부디 도움이 되는 효과가 발생하기를!

에너지를 불어넣을수록 패턴은 점점 더 밝게 빛났다.

처음에는 패턴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힘이 반가웠지만, 에너지가 끊임없이 들어가자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마법이 둥지의 개미들에게도 피해를 입히면 어쩌지?!

너무 큰 폭발이나 그런 건 아니면 좋겠는데!

패턴에 에너지를 투입하면서, 나는 개미들이 지키고 있는 탈출용 통로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벽을 따라 이동했다.

도중에 마주치는 몬스터들을 몸통 박치기로 밀어내면서 개미들과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뭔가가 철컥 하고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장난감 블록이 서로 딱 맞아 떨어지거나, 전등 스위치를 올릴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중력장이 강림했다.

패턴이 활성화된 건 내 중력 분비선이 담을 수 있는 용량의 30%나 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갔을 때였다.

구체를 이루는 복잡한 패턴들이 처음에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걱정스럽게도 패턴은 가동을 시작한 뒤로도 계속해서 내 안의 에너지를 빨아들였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구체의 가장 바깥쪽 껍데기가 빠른 속도로 커지더니 내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한 5미터 반경까지 늘어났다!

구체의 중심부는 여전히 내 몸 속에서 회전하며, 무서운 기세로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아무래도 내 주위에 일종의 역장 같은 공간이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역장의 효과가 뭔데?!

패턴을 완성하고 가동까지 시킨 나는 비로소 주위 상황으로 눈을 돌렸다.

주문에 계속해서 에너지를 공급하는 일은 보조 뇌에게 맡긴 상태였다.

이런!

패턴 형성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상당히 두들겨 맞았던 모양이다.

갑각이 여기저기 금이 가거나 움푹 패여 있었다.

다행히 다이아몬드 갑각이 약한 몬스터들의 일반적인 공격을 상대로는 제대로 효과를 발휘해서, HP가 크게 줄지는 않은 상태였다.

근처에서는 여전히 몬스터들이 서로를 공격하며 미친듯이 싸우는 중이었다.

게다가 벽에서는 새로운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체가 확장된 뒤로, 내 가까이 있는 몬스터들의 행동이 뭔가 이상했다.

주문이 효과를 발휘하자···

조금 전까지 맹렬하게 싸우던 몬스터들이 마치 벽돌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갑자기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뭐지?!

내 주위의 환경에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내 몸이 아무렇지 않은 걸 보면, 주문의 효과가 뭐든 나 자신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를 둘러싼 5미터 반경의 구체는 천천히 회전하는 중이었다.

반투명한 구체의 표면에는 어두운 보라색의 중력 에너지로 신비로운 패턴이 그려져 있었다.

구체 안쪽의 몬스터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짓눌린 듯이 버둥거렸다.

나는 당황해서 놈들을 쳐다봤다.

나한테는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데?

적에게만 적용되는 효과인가?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몬스터 한 마리가 구체의 표면을 향해 발톱을 휘둘렀다.

하지만 반투명한 구체를 그대로 통과해 역장 안으로 들어온 놈의 팔은 즉시 무거운 쇳덩어리를 매단 것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그 서슬에 몬스터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건···

설마 그건가?

중력장?

내 주위의 중력이 높아진 건가?

구체 안쪽의 몬스터들을 돌아보니 하나같이 일어서려고 애쓰다가 실패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몇 톤은 되는 돌덩어리에 깔린 듯한 모습이었다.

맞구나!

이 구체 안에 있는 적들은 무거운 중력에 짓눌리는 거야!

끝내주는데!

그제야 왜 계속해서 중력 에너지가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만한 범위에 이렇게 강력한 효과를 유지하려면···

당연히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몇 분 내에 내가 가진 중력 에너지가 바닥날 기세였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건 굉장한 마법이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난폭하게 싸움을 벌이며 서로를 찍어 발기던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이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버둥거리는 광경을 보니 내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중력장이라니!

정말 강력한데!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나는 조금 주저하며 가장 가까이 있는 몬스터에게 다가갔다.

이 새로운 주문의 효과를 좀 더 정확히 알기 전까지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다가가는 걸 본 몬스터는 사납게 으르렁거리면서,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다음 나를 향해 발톱을 휘둘렀다.

하지만 나를 공격하느라 한쪽 팔로만 체중을 지탱하다 보니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다시 바닥에 엎어졌다.

···

대박.

저래서야 반격은 아예 불가능하겠군.

그냥 아무 걱정 없이 가서 물어도 될 것 같은데?

물어 부수기!

물어 부수기!

물어 부수기!

[레벨2 모르수스 요그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 들어올리지 못하는 몬스터를 물어 죽이는 일은···

아주 즐거웠다.

음하하하하하!

축제의 시간이다!

능력의 지속 시간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감한 나는 서둘러 행동에 나섰다.

중력장 안의 모든 몬스터들은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짓눌리고 있었다.

몇몇 놈들은 다른 놈들보다 좀 더 잘 버텼지만, 그 중 가장 강한 몬스터조차 전투력이 절반 아래로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즉, 어떻게 해도 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물고.

물고.

물고.

물고!

나는 쉬지 않고 몬스터들의 두개골을 턱으로 부쉈다.

[···처치했습니다.]

[···처치했습니다.]

[···처치했습니다.]

다 죽여버리겠다!

음하하하하하!

물어 부수기!

물어 부수기!

[물어 부수기 스킬이 레벨 10이 되었습니다.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다.]

중력장에 제압당한 몬스터들을 물어 죽이는 데에 심취한 나머지, 처음에는 시스템 메시지를 인지하지도 못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물어 부수기가 레벨 상한에 도달한 건가?

좋았어!

당장 업그레이드해!

[물어 부수기 -> 물어 깨뜨리기. 이 업그레이드 스킬은 물기 공격의 에너지로 물리적인 육체가 닿는 범위 바깥의 적도 공격할 수 있게 해줍니다. 물론, 물리적인 육체로 공격할 때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입힙니다.]

···

구매!

아마 인간 병사들이 불꽃의 칼날을 만들어서 휘두르던 그런 종류의 스킬 같았다.

그럼 나한테 에너지 턱 같은 게 생기는 건가?

끝내주는데···

당장 시험해봐야지!

나는 중력장 안에 퍼져 있는 몬스터들 중 하나에게 다가갔다.

물어 깨뜨리기 활성화!

그러자 즉시 스태미나가 빠져나가며, 이미 지쳐 있는 몸에 피로가 엄습했다.

맙소사···

비용이 엄청난 스킬이네.

다음 순간, 내 턱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턱 전체를 감싼 빛은 점점 주위로 퍼져 나가, 진짜 턱보다 세 배 정도 더 큰 반투명한 턱 형태를 이루었다.

이 신기루 턱은 내 실제 턱의 모든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했다.

···멋진데!

어디···

물어 깨뜨리기!

나는 신기루 턱을 아래로 내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적을 공격했다.

신기루 턱은 무시무시한 힘으로 몬스터의 머리를 압박해서 멜론처럼 터뜨려 버렸다.

···

우웩.

하지만 쩐다!

이렇게 세다니!

위력이 강할 뿐 아니라 처음으로 조금 떨어진 상태에서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즉 이제는 적을 물어서 죽일 때, 피와 뇌수를 얼굴에 뒤집어쓰지 않을 수도 있게 됐다!

더듬이에 묻은 몬스터 내장을 닦아내는 일은 정말 귀찮으니까.

아주 유용한 스킬이군!

중력 분비선의 에너지가 점점 낮아지고 있어서,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내면의 야수를 풀어서 보이는 모든 몬스터의 숨통을 끊었다.

그러다가 막 몬스터 한 마리의 숨통을 끊고 있던 타이니와 마주쳤다.

타이니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지만, 사납게 빛나는 두 눈과 흉악한 미소로 볼 때 원없이 싸울 수 있어서 상당히 즐거운 듯했다.

전기 에너지는 이미 바닥났는지 여기저기 작은 불꽃이 가끔씩 튈 뿐이었다.

하지만 커다란 두 주먹만으로도 몬스터를 때려잡기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나는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타이니, 몸이 무겁지 않아?]

타이니는 내 중력장의 범위 안에 서 있는데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타이니의 힘이 강하기는 해도···

이렇게 강한 중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틸 만큼은 아닐 텐데 말이다.

타이니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배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어쩐지 상처를 받은 듯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

너보고 뚱뚱하다고 한 말이 아니야, 이 원숭이 자식아!

짧은 유예

아무래도 내 펫은 중력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타이니와 나는 방 안을 돌아다니며 빠르게 몬스터들을 모두 처리한 다음, 탈출용 통로에서 기다리고 있는 개미들에게 돌아갔다.

웨이브가 시작할 때 나타난 몬스터들은 대부분 정리했지만, 지금도 벽 안에서는 새로운 놈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타이니와 나는 계속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내 중력 분비선은 텅 비었고, 물어 깨뜨리기를 계속 사용하느라 스태미나를 소모해서 육체적으로도 지쳐 있었다.

타이니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녀석이 번개를 뿜어내는 원천이 뭔지는 몰라도 이미 바닥나 있었고,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운 덕분에 레벨과 스킬은 상당히 올랐겠지만···

한동안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지금도 타이니의 가슴은 크게 들썩거렸고,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긴 털을 적시고 있었다.

그래도 불쌍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이 싸움에 미친 원숭이 같으니!

아마 내버려 두면 몸 상태는 생각도 않고 곧장 다시 싸우려 들 터였다.

나도 조금 전 싸움으로 레벨이 좀 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이 웨이브를 버티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원을 확보해야 했다.

바로 식량 말이다.

웨이브 덕분에 식량 조달이 더 쉬워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이기도 했다.

사방에서 괴물들이 싸움을 벌였지만, 그건 곧···

사방에서 괴물들이 싸움을 벌인다는 의미였다!

식량이 온 천지에 널렸지만 실제로 그걸 안전하게 보관하고 소비할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나와 타이니는 물론 유충들과 여왕을 포함한 둥지 전체를 먹여 살릴 바이오매스를 확보해야 하는데 말이다!

지금 여왕의 방 안에는 온통 수확을 기다리는 바이오매스가 널려 있었다.

하지만 둥지의 다른 구역에서는 여전히 몬스터들이 싸움을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에게는 다시 몬스터들이 생성될 때까지 잠깐의 유예가 주어졌을 뿐이다.

앞으로 계속될 웨이브를 생각하니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타이니와 나는 벌써 지쳐 있었다.

우리가 활약한 덕분에 둥지가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그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5분?

잠시 뒤면 또다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와 싸움이 벌어질 터였다.

그리고 이제는 나와 타이니도 아까처럼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웨이브가 시작되고 고작 십 분 정도가 흘렀을 뿐이다!

그런데 벌써 이런 상황이라니···

최소한 일주일은 웨이브가 계속될 텐데 말이다.

다시 생각해도 지상으로 굴을 파고 탈출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식량을 모아서 여기로 가져와! 최대한 빨리!"

내가 방어선을 지키고 있는 일개미들을 향해 외쳤다.

일개미들은 지금까지 통로 입구를 훌륭하게 지켰다.

심지어 천장에도 매달려서 적대적인 몬스터들이 뚫고 들어올 틈을 막았다.

아마 통로 안쪽에 있는 유충들을 지키려는 본능 때문인 것 같았다.

사실 개미들은 이미 방어선에 가까이 접근하는 몬스터를 낚아챈 다음 수로 밀어붙여 죽이고, 통로 안쪽으로 옮기는 식으로 제법 많은 식량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다행히 일개미들이 내 말을 듣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미들은 방 안에 쓰러져 있는 몬스터 시체들을 서둘러 통로 안쪽으로 옮겼다.

타이니와 나도 지친 몸을 이끌고 시체를 수확했다.

둥지의 다른 개미들은 언제나처럼 우리가 따로 식량을 모아 놓고 먹을 수 있는 공간을 내줬다.

그 사이 새로 생성된 몇 마리의 몬스터들은 벽이나 바닥에서 완전히 나오기도 전에 일개미들에게 둘러싸여서 바이오매스 덩어리로 전락했다.

우리는 몇 분 동안 바쁘게 움직이며 소중한 식량을 최대한 많이 탈출용 통로로 운반했다.

어느새 둥지의 다른 구역에 있던 몬스터들이 바이오매스 냄새를 맡고 여왕의 방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3분 뒤, 나와 타이니는 통로 입구를 막고 있는 개미들의 방어선 뒤에서 휴식을 취했다.

일개미들 중 일부는 바이오매스를 해체해서 아이들에게 먹이고, 다른 일부는 통로의 안쪽을 부지런히 파고 들어가는 중이었다.

웨이브는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다시 싸울 수 없을 터였다.

탈출용 통로 안에서는 마나를 흡수할 수도 없다 보니 중력 에너지를 회복하는 속도가 크게 떨어졌다.

코어에는 마나가 가득했지만 중력 에너지로 변환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육체적으로도 엄청나게 피곤했다.

스태미나는 완전히 바닥났고, 여섯 개의 다리가 모두 쑤셨다.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배불리 먹고 자야 했다.

내가 억지로 무리하다가 전투 중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둥지에 무슨 일이 생길까?

그리고 만약 내가 죽는다면··· 펫인 타이니는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며 타이니를 흘끗 쳐다보자, 이미 입 안 가득 식량을 우겨 넣는 중이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타이니가 동작을 멈추고 한 손을 자기 배로 가져가서 살집을 확인했다.

···

뚱뚱하다고 한 거 아니라고···

그냥 먹어!

고개를 돌리자 타이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내가 지켜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운 듯 다시 입에 식량을 처넣기 시작했다.

···

겹눈이라서 어차피 보인다 임마···

나는 고개를 흔들고 나서 식사를 시작했다.

타이니가 다 먹어 치우기 전에 배를 채우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덴테스 움브라.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덴테스 움브라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됩니다.]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루미나레 임프.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루미나레 임프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됩니다.]

[덴테스 움브라, 이빨 그림자. 커다란 주둥이에 사지가 달린 형태의 이 생물은 던전의 더 어두운 구역에 서식하는 기초 레벨의 몬스터입니다. 날카로운 이빨과 교활한 본성을 주된 무기로 삼습니다.]

[루미나레 임프, 하급 임프. 악마 종에서는 가장 약한 몬스터지만, 그래도 과소평가할 수 없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놀랄 만큼 공격 범위가 넓고 손톱에는 지독한 저주가 깃들어 있습니다.]

나는 처치한 몬스터들의 시체를 먹으면서 정보를 확인했다.

어쩐지 숲에서 마주쳤던 일반적인 몬스터들과는 궤가 다른 듯했다.

아무래도 웨이브로 인해 늘어난 마나 수위는 단지 몬스터의 수를 늘릴 뿐 아니라, 보다 위험한 종을 만들어내는 듯했다.

아마 평소에는 이렇게 높은 층에서 볼 수 없는 몬스터들 같았다.

젠장.

만약 웨이브 기간 동안 마나 수위가 계속 높아진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위험한 몬스터들이 나타날 터였다.

나는 던전을 완전히 탈출하기로 한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여기 머문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강력한 몬스터들을 상대해야 할지 모르니까 말이다.

새로 얻은 중력장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그걸 믿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육체적으로 충분히 강력한 몬스터라면 중력장 안에서도 싸울 수 있을 터였다.

나 자신을 과대평가하다가 죽음을 당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지금 내 능력치는 다음과 같았다.

=====

레벨: 8 (코어)

힘: 41

강인함: 29

영리함: 32

의지: 22

HP: 50/50

MP: 50/58

스킬: 채굴 레벨 6; 향상된 산성 용액 발사 레벨 5; 잡기 레벨 4; 물어 깨뜨리기 레벨 2; 고급 은신 레벨 5; 깨물어 뚫기 레벨 5; 터널 지도 레벨 1; 마나 형성 레벨 6; 강력한 마나 레벨 3; 외부 마나 조작 레벨 1; 마나 감지 레벨 2; 코어 공학 레벨 2; 고급 외골격 숙련 레벨 2; 펫 커뮤니케이션 레벨 1

변이: 초점 겹눈 +5, 열 감지 더듬이 +5, 구속 산성 용액 +5, 흡수 다리 +5, 주입 턱 +5, 다이아몬드 갑각 +5, 신체 부위 재생 분비선 +5, 페로몬 언어 +5, 중력 마법 분비선 +3

종족: 두뇌파 개미 (포르미카)

스킬 포인트: 4

바이오매스: 11

=====

식사를 마치자 중력 에너지 분비선을 +5까지 성장시킬 수 있는 바이오매스가 생겼다.

그러고 나면 모든 신체 부위를 +5까지 올린다는 계획을 달성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 사실에 마냥 기뻐하기에는 웨이브 때문에 너무 지친 상태였다.

게다가 둥지와 내 새로운 가족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닥친 위협의 압박감이 너무 심해서 좀처럼 다른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통로의 안쪽 끝으로 이동하자 언제나 위풍 당당하던 여왕조차 지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여왕 또한 식사와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일개미들은 파낸 흙을 통로 밖으로 옮기기 어려워지자, 아예 입구 근처에 쌓아서 바리케이트를 만들고 있었다.

덕분에 탈출용 통로의 입구가 아까보다 상당히 좁아졌다.

계속 이렇게 가면 멀지 않아 입구가 완전히 막힐 것 같았다.

물론 여왕의 방으로 통하는 입구를 막는 일에는 장단점이 있었다.

몬스터들이 통로를 침범하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우리는 몬스터들을 잡아서 식량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며칠이나 더 통로를 파야 할지 모르니, 던전으로 통하는 입구를 완전히 막아 버리면 식량 공급에 차질이 생길 터였다.

일개미들이 최대한 빠른 속도로 통로를 파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나는 다시 입구 쪽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어느새 잠들어 있는 타이니의 모습이 보였다.

이 거대한 원숭이 녀석은 자신의 몸뚱이로 통로의 거의 절반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일개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잠든 타이니의 위로 넘어 다니거나 아예 옆쪽 벽에 매달려서 이동했다.

열심히 싸웠으니 좀 쉬게 내버려 둬야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이오매스를 소모해서 나 자신을 강화했다.

다가올 위험에 맞서 싸우려면 조금이라도 더 이점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중력 에너지 분비선을 +5로 업그레이드하겠습니까? 9 바이오매스가 소모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고급 변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메뉴에서 선택하세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많은 선택지가 존재했지만, 이번에는 여느 때처럼 그 사실에 흥분할 여유조차 없었다.

메뉴를 살펴보니 분비선의 변환 속도를 높여서 에너지를 더 빠르게 충전하거나, 분비선이 코어의 마나를 끌어오는 대신 공기 중의 마나를 직접 흡수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마나 밀도를 높일 수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 새롭게 익힐 중력과 관련한 마법들이 모두 대량의 에너지를 소모할 거라고 생각했다.

중력 폭탄과 중력장을 볼 때 중력 에너지를 사용하는 기술들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뭐, 중력이니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앞으로도 그렇게 강력한 기술들을 얻는다면 그걸 사용하기 위한 에너지 소모 역시 클 수밖에 없었다.

[심화 중력 에너지 분비선. 분비선의 용량을 크게 증가시킵니다. 선택 즉시 에너지 용량이 두 배로 늘어나며 이후 변이를 통해 더 늘릴 수 있습니다.]

그래, 중력 마법에 대해 내가 원하는 건···

'더 많이' 였다.

더 다양한 주문들!

더 오랜 지속 시간!

단기적으로는 에너지를 더 빠르게 충전하는 기능이 더 유용할 수도 있지만, 나는 용량을 늘리는 선택 또한 웨이브를 이겨내는데 충분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더 효과적일 테고 말이다.

이걸로 선택하지!

우갸갸갸갸갸!

중력 분비선은 내 복부 깊숙이, 코어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실로 애매한 곳에 미칠 듯한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내가 변이 과정을 견디기 위해 바닥을 구르는 동안에도 일개미들은 작업을 쉬지 않았다.

식량을 안쪽으로 옮기기 위해 내 몸 위를 넘어서 다니다가, 통행에 계속 지장이 생기자 아예 여러 마리가 달라붙어 나를 한쪽 구석으로 옮겼다.

너무하잖아!

사실 변이로 인한 고통이 너무 심해서 별로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다행히 언제나 그런 것처럼 고통은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아까보다 더 지친 상태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만족스러웠다.

드디어 모든 신체 부위를 +5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10을 다음 목표로 해야겠지?

사실 다음 번 고급 변이가 어느 시점에 가능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10일 수도 있지만 +15일지도 몰랐다.

뭐,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우선 순위를 정한 다음 선택지가 나올 때까지 열심히 성장시키는 일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타이니의 옆에 누워서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힘겹게 입구 쪽으로 이동해서 나보다 작은 일개미들을 밀어내고 가장 앞쪽으로 나갔다.

어두컴컴한 통로 안쪽과 달리 여왕의 방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마나 줄기들이 발하는 빛이 서로 뒤섞여서, 마치 벽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광원처럼 보였다.

방 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나서 몇 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여섯 마리의 몬스터들이 생성되어 서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문득 둥지 밖의 숲은 대체 어떤 상황일지 궁금해졌다.

원래는 스폰 지점이 하나도 없었던 둥지 안에서도 이렇게 몬스터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데···

저 위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을 터였다.

나는 그 광경을 상상만 하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당연하지만 직접 올라가서 확인해볼 생각은 없었다···

침입자

둥지의 위쪽 방들에서는 여전히 몬스터들이 싸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아래쪽 통로에서는 새로운 소리··· 뭔가를 먹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몇몇 몬스터들이 다른 놈들을 해치우고 바이오매스를 섭취할 만한 공간을 확보한 모양이었다.

웨이브 초기의 전투에서 살아남아 경험치를 획득한 몬스터들은 새롭게 스폰될 경쟁자들에 비해 상당한 이점을 가질 수 있었다.

운이 좋아서 계속 살아남는다면···

변이를 하거나 코어를 압축하는 경우도 나올 터였다.

웨이브는 몬스터 성장의 일반적인 과정을 엄청나게 가속시키고 있었다.

갓 스폰되는 레벨 1 몬스터는 앞선 싸움에서 살아남은 적들에게 순식간에 당하겠지만··· 운이 좋아서 살아남는 놈들은 몇 배로 빠르게 성장할 터였다.

젠장.

당장이라도 나가서 그런 몬스터들이 너무 강해지기 전에 처치해서 장래의 위협을 제거하고 싶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지치고 약해진 상태에서 위험한 짓을 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결국 둥지에 피해를 입히는 결과가 될 테니까 말이다.

타이니가 깨어날 때까지는 내가 둥지의 방어를 책임져야 했다.

몇 시간만 그렇게 버티다가 타이니와 교대해서 수면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굴파기도 박차를 가해야 하는데···!

나는 아주 천천히 몸의 절반 정도를 탈출용 통로 밖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리들 중 네 개로 여왕의 방 바닥을 딛었다.

그러자 마자 발에 불이 붙은 듯한 느낌이 찾아왔다.

그 느낌은 곧 다리를 타고 올라와 내 코어에 마나를 전달했다.

그리고 코어의 마나가 중력 분비선으로 흘러 들어갔다.

던전 안에는 마나가 정말 충만했다.

그로 인한 내 기분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웠다.

뭐랄까···

내 자신이 하찮아진 기분?

감탄?

혹은 경이감?

그때 어디선가 날카롭게 쉭쉭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내 잡생각을 멈추게 만들었다.

방 안쪽이 아니라 위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대체 뭐지?

내 몸이 바짝 긴장했다.

심지어 이미 방 안에서 싸우고 있던 몬스터들도 움찔하며 물러나서, 서로 거리를 벌린 채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위쪽의 수직 통로에서 처음에는 하나, 그 다음에는 셋, 곧 십여 개에 이르는 검은 촉수들이 천천히 방 안으로 내려왔다.

촉수들은 마치 방 안을 탐색하듯 벽을 문지르고 바위를 휘감았다.

그리고 뒤이어 그 촉수들이 지탱하는, 어떻게 한 데 뭉쳐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꿈틀거리는 살덩이가 나타났다.

금속성의 날카로운 쉭쉭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이런···

맙소사.

끔찍한 괴물이다.

아마 방금 새롭게 스폰되었거나, 아니면 이미 다른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진화한 놈일 터였다.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놈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흉측하고, 또 그만큼 강력할 게 거의 틀림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내게는 놈을 처리할 방법이 있었다.

너무 빨리 공격해 오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방 안의 다른 몬스터들은 새롭게 나타난 기괴한 생물에게 겁을 먹은 듯했다.

놈들은 몬스터답지 않게 소심한 태도로 새로운 경쟁자를 피해 뒷걸음질쳤다.

나는 즉시 코어 내부의 마나를 끌어낸 다음, 그 커다란 흐름을 내 목 안에서 압축하기 시작했다.

저 괴물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난 놈에게 강력한 마나 외침을 선사할 생각이었다.

내 영혼의 포효를 말이다!

아직 중력 폭탄을 사용할 만큼 충분한 에너지가 모이지 않았다.

하지만 코어의 일반적인 마나 역시 몇 차례나 강력한 효과를 보여줬다.

그러니 아마 저 괴물에게도 통할 터였다.

나는 보조 뇌의 도움을 받아 마나를 끌어낸 다음, 이미 지쳐 있는 정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여 최대한 빠르게 힘을 압축했다.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빛 앞에 드러난 괴물의 모습은 정말이지 괴상했다.

놈이 천천히 자세를 낮추자, 촉수 같은 수많은 다리들이 꿈틀거리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자세히 보자 놈의 몸통 역시 촉수들이 서로 얽혀 있는 덩어리에 가까웠다.

나는 이 괴물에게 눈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저 불어 터진 라면 같은 육체의 구조를 파악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짐작해 보자면 놈은 눈이 아니라 수많은 촉수들로 주위 환경을 감지하는 듯했다.

길고 뒤틀린 촉수들은 마치 개가 냄새를 맡는 것처럼 방 안을 탐색하며, 빠르게 다른 몬스터들 쪽으로 미끄러져 나아갔다.

이미 방 안에서 싸우고 있던 몬스터들은 내가 있는 탈출용 통로보다 촉수들에 더 가까웠다.

놈들은 필사적으로 촉수를 피하려 했지만, 결국 그 중 하나가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끔찍한 장면이 펼쳐졌다.

방 안을 탐색하던 촉수 하나가 몬스터의 다리에 닿자 마자, 나머지 촉수들도 채찍처럼 바람을 가르며 그쪽으로 날아갔다.

각각의 촉수마다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나서 불운한 몬스터의 살점을 찢어발겼다.

순식간에 공격의 대상이 된 몬스터, 이빨 그림자는 완전히 촉수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수많은 촉수들은 계속해서 꿈틀거리며 안에 갇힌 사냥감을 유린했다.

촉수들의 무더기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완전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겁에 질린 채 몬스터의 최후를 지켜봤다.

이런 씨···

장난 아니잖아?

나는 괴물의 촉수들이 사냥감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더욱 필사적으로 코어에서 마나를 끌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내 목 안에서 마나를 뭉쳤다.

어서어서어서어서!

끔찍한 공연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괴물의 몸뚱이가 살짝 떨리더니, 촉수들이 방금 사냥한 몬스터의 시체를 들어올려 방 가운데로 옮기기 시작했다.

먹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괴물의 몸뚱이가···

허공에 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이던 촉수 덩어리가 서서히··· 펼쳐지더니··· 말도 안 되게 커다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기괴하게 휘어진 커다란 송곳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촉수들은 몬스터의 시체를 그 입 안으로 곧장 집어넣었다.

몬스터의 시체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놈이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는 커다란 입 안쪽에서 들리는 씹고 부수는 소리 뿐이었다.

···

···

···

겁나라!

대체 저게 뭐야?

저게 뭐냐고, 시스템?

저 입··· 이빨···

말도 안 되는 구조잖아?

나는 두 개의 뇌를 총동원해 마나를 압축하는 속도를 높였다.

촉수 덩어리 괴물이 몬스터를 잡아먹는 장면을 보니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눈꺼풀 없는 눈에 비치는 새로운 선수의 활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마리의 몬스터를 먹어 치운 촉수 괴물은 다시 사냥에 나섰다.

수많은 촉수들이 방 안을 미끄러져 나아가며 새로운 먹이를 찾았다.

촉수들 중 일부가 허공에서 방향을 바꿔 탈출용 통로 쪽으로 접근할 기미를 보이자 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빌어먹을!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내가 필사적으로 불안을 다스리는 사이 촉수들은 조용히 다음 번 사냥감을 탐색했다.

하지만 다른 몬스터들은 나만큼 침착하지 못했다.

방 안에 있던 몬스터들 중 하나가 공포심 때문인지 아니면 피에 굶주린 본성 때문인지 몰라도 사납게 포효하더니 가까이 있는 촉수를 향해 돌진했다.

놈은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서 그 촉수를 갈기갈기 찢었다!

어리석은···

그 몬스터가 촉수 하나를 처리한 작은 승리감을 만끽하기도 전에···

다른 촉수들이 번개 같은 속도로 날아왔다.

다시 한 번 새의 부리처럼 휘어진 가시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십여 개의 촉수들은 순식간에 몬스터를 휘감았다.

그리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침묵 속에 사냥감을 찢어발겼다.

나는 그동안 내내 마나를 압축하고 또 압축했다.

어중간한 위력의 마나 구체를 발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 괴물은 보통 놈이 아니었다···!

한 방에 끝내지 못한다면 두 번째 기회는 없을지도 몰랐다.

[강력한 마나 스킬이 레벨 4가 되었습니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