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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마나 스킬이 레벨 4가 되었습니다.]

좋아!

이제 속도가 좀 더 빨라지겠군!

본체가 새로운 먹이를 씹어 삼키는 동안에도, 촉수들은 계속 방 안 여기저기로 퍼져 나갔다.

적극적으로 사냥감을 찾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꿈틀거리거나 위치를 옮기며 몬스터의 팔이나 다리가 걸리기를 기다렸다.

나는 문득 저 괴물이 뭐와 닮았는지 떠올랐다.

바로 해파리였다.

지옥의 해파리라고나 할까···

해파리와 유사한 사냥 방식을 볼 때, 촉수에 달린 부리 모양의 가시에는 아마 독도 있을 터였다.

나는 이 무시무시한 괴물에게 속으로 핵파리라는 별명을 붙였다.

···

왜, 뭐.

또다른 몬스터를 먹어 치운 핵파리는 다시 한 번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촉수들이 마치 물 속을 떠다니는 것처럼 공중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이제 몇 마리 남지 않은 몬스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벽에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두 마리의 몬스터를 발견했던 구역을 샅샅이 뒤진 촉수들은 수색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촉수들이 향하는 방향을 확인한 내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아무래도 세 번이나 연달아서 위험을 피해가는 행운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았다.

꿈틀거리는 촉수들은 천천히 일개미들이 지키고 서 있는 통로의 입구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맙소사, 만약 촉수들이 나보다 다른 개미들을 먼저 건드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괴물은 마음만 먹으면 열 마리도 넘는 개미들을 한꺼번에 붙잡을 수 있을 터였다.

갓 부화한 일개미는 놈의 촉수 하나도 당해내기 어려웠다.

결국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제기랄···

천천히, 나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개미들의 방어선을 완전히 벗어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목에서는 미친듯이 마나를 압축하고 있었다.

사악한 촉수들이 나를 지나쳐 통로 쪽을 향할 때, 나는 더듬이로 그 중 하나를 가볍게 건드렸다.

젠장, 이럴 때는 눈을 좀 감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다음 순간 촉수들이 번개 같은 속도로 나를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를 완전히 둘러쌌다.

날카로운 부리 모양 가시들이 내 다이아몬드 갑각을 할퀴며 미끄러졌다.

너만 믿는다, 갑각!

나를 위해 버텨줘!

나는 촉수들에게 완전히 붙잡힌 채로 재빨리 HP를 확인했다.

다행히 갑각은 뚫리지 않았지만, 촉수들이 누르는 힘 때문에 생명력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촉수들은 무슨 힘이 이렇게 센 거야!

이대로는 개미.ZIP이 되어버리겠어!

이미 다리는 절반 이상이 부러진 듯했다···

그래도 버텨야 한다!

계속 마나를 압축하자!

나는 촉수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척했다.

마구 몸부림을 치면서 다리를 움직이려고 애썼다.

그러자 촉수들은 더욱 강하게 나를 압박하며 가시로 내 몸을 찢으려 들었다.

제기랄 아프잖아!

그렇게 몇 초를 저항하던 나는 일부러 몸을 축 늘어뜨렸다.

괴물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내 연기력이 통했는지, 촉수가 공격을 멈췄다.

그리고 내 몸을 들어올려 몸뚱이 쪽으로 가져갔다.

핵파리가 입을 벌리고 나를 집어삼킬 준비를 했다.

이때를 기다렸다!

어디 드래곤 브레스를 한 번 받아봐라, 이 자식아!

함성 일발 장전!

농성

해파리와 비슷한 괴물에게 잡아 먹히는 건 내가 두 번째 생에서 계획한 바 없는 일이지만, 사실 삶이란 원래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법이다.

예를 들어···

난 인간이 아닌 개미로 환생했다.

하지만 뭐, 불평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내 눈 앞에서 촉수들이 갈라지며 마치 동굴 같은, 불가능할 정도로 거대한 핵파리의 입이 나타났다.

그럴 리 없는데도 갑각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무서운 광경이었다.

괴물의 입 안쪽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목구멍이고 뭐고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고 휘어진 송곳니들이 튀어나와 입의 경계를 이뤘다.

나보다 먼저 잡아 먹힌 몬스터들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이건···

장관이기는 하지만,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함성 발사!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목 안쪽에서 압축시킨 마나 덩어리를 내보냈다.

마치 좁은 공간에서 폭발을 일으킨 다음 아주 작은 배출구만 만들어 놓은 것처럼, 순수하고 강력한 힘이 내 입을 통해 두꺼운 파괴 광선의 형태로 쏘아졌다.

문득 왜 대포처럼 발사되는 힘이 내 이빨은 부러뜨리지 않는 건지 궁금했지만···

완벽한 조준을 위해 궁금증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

콰과광!

내가 마나 구체를 발사하는 순간, 눈 앞의 세상이 깜빡였다.

그리고 시야에서 핵파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눈 앞에 보이는 건 내 마나 구체가 방 건너편의 벽을 강타하며 일어난 흙먼지와, 우연히 거기 있던 다른 몬스터의 팔다리가 사방으로 날리는 광경 뿐이었다.

[레벨 2 하급 임프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

미안 친구.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마침내 내 다리가 바닥에 닿았다.

다리들 중 세 개는 촉수들이 나를 붙잡을 때 가한 압력 때문에 부러진 상태였다.

다행히 모두 같은 쪽이 아니라서 여전히 걸을 수는 있었다.

갑각에는 촉수에 달린 부리들이 찌르고 할퀸 자국이 가득했다.

재생 분비선이 아직 가득 차지 않은 걸 확인한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았다.

지금도 활성화는 가능했지만, 분비선이 가득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용하는 편이 훨씬 더 효과가 좋을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일단은 부상을 참고 견딜 수밖에···

가능하면 바이오매스를 좀 섭취해서 회복을 도와야 했다.

나는 고통스럽게 몸을 끌고 방 안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부러진 다리들이 바닥에 끌리면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인간일 때에는 가진 다리를 다 합해도 두 개에 불과했는데, 이제 부러진 다리만 세 개라니···

사실 다리가 두 개밖에 없는 감각이 어땠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인간의 두뇌는 2주만 있으면 어떤 새로운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개미가 된 건 2주보다 훨씬 더 전이었고···

사실 이미 인간일 때의 기억들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손?

난 꽤 오래 손 없이 지냈다.

그러니까, 손이 정말 필요한가?

턱이면 충분한데 말이다.

어쩌면 요즘은 문을 열 필요가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군.

핵파리는 이제 방 한 구석에 돌돌 말려서 처박혀 있었다.

무시무시한 몬스터라기보다 엉망으로 뒤엉킨 밧줄 뭉치에 더 가까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놈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직 시스템 메시지가 뜨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실수를 두 번 할 수는 없지.

보라!

인간의 학습 능력을!

핵파리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어떻게 내 함성을 맞고도 죽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놈은 마지막 순간에 모든 촉수를 동원해서 자기 몸을 감쌌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대부분의 촉수들은 끊어지거나 심하게 부상을 당한 채로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놈의 본체 또한 무사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절반 정도는 엉망으로 뭉개진 채 피인지 뭔지 모를 액체를 흘리고 있었다.

문제의 입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놈의 본체를 향해 걸어가다가 바닥에 늘어져 있는 촉수들 중 하나와 닿았을 때, 갑자기 위험이 느껴졌다!

그리고 촉수 몇 가닥이 바람을 가르며 나를 향해 날아왔다!

본체는 다시 한 번 거대한 입을 드러냈다.

송곳니는 절반 이상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시무시한 아가리였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지롱

멍청한 놈!

나를 머리 싸움으로 이기겠다고?

네 꿈 속의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 하!

잔뜩 조심하고 있던 나는 촉수에 닿자 마자 빠르게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물론 다리가 부러진 탓에 그렇게 빠르지는 못했지만···

핵파리는 혼란스러운 듯 몸을 뒤척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걸 볼 때 죽기 직전일 텐데도 촉수들은 여전히 이리저리 꿈틀대며 나를 찾아내려 했다.

이제 그만 편히 쉬렴, 핵파리야.

그리고 내 먹이가 되어라!

물어 깨뜨리기!

나는 남아 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서 에너지의 턱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턱으로 무너진 산처럼 보이는 핵파리의 본체를 공격했다.

내 턱의 무지막지한 악력에 핵파리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레벨 4 크리니스 이나시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아흐···

너무 힘들다!

간신히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멀쩡한 세 다리도 후들거렸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며 그대로 의식을 잃을 뻔했다가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물어 깨뜨리기를 사용하느라 그야말로 한계까지 힘을 쥐어짠 탓이지만,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번 적은 그만큼 위험한 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진맥진한 채 핵파리의 시체 쪽으로 기어가서 놈의 살점을 한 입 물어뜯었다.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크리니스 이나니스.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크리니스 이나니스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됩니다.]

기초 정보고 뭐고 읽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일단 먹기나 하자.

사실 먹기 위해 턱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나는 방 안에 몬스터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고개를 처박고 먹기만 했다.

그렇게 먹는 동안 몇 번이나 시야가 흐려졌고, 몸 여기저기 느껴지던 통증도 둔해졌다.

그때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의지력을 발휘해서 기계적으로 먹는 일에 집중했다.

턱을 움직이고, 삼키고, 다시 반복···

핵파리의 시체를 반쯤 먹어 치우자 포만감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탈출용 통로로 나머지 바이오매스 덩어리를 끌고 갔다.

내 몸은 거의 자동 조종 상태였다.

머리 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다른 개미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개미들은 핵파리의 시체를 탈출용 통로 쪽으로 옮겼다.

녀석들은 또 내 몸도 옮기고 있었다.

여러 마리의 개미들이 다친 다리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나를 안전한 통로 쪽으로 밀었다.

상대적으로 어두운 통로 속으로 들어오자, 나는 다른 개미들을 뿌리치고 입구 근처로 돌아갔다.

그리고 방어선을 사수하고 있는 개미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타이니는 여전히 잠든 상태로 부상을 치유하고 체력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나는 타이니가 깨어나서 내 자리를 대신하기 전까지는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재생 분비선을 활성화하자, 차가운 용액이 내 몸 속에 흐르며 세포를 자극하고 뼈를 다시 제자리에 맞춘 다음 관절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완전히 나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

그렇게 몇 시간 정도 버티고 있으니 타이니가 깨어났다.

부상이 대부분 회복된 상태였고, 눈빛도 생생했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타이니에게 입구를 사수하라는 의사만 겨우 전달한 뒤 통로 안쪽으로 들어가서 엎어졌다.

그러자 무감각한 상태가 나를 따스하게 감쌌다.

마치 두꺼운 이불처럼···

여전히 눈을 뜬 채로, 내 사고가 서서히 느려지다가 마침내 정지했다.

인간으로 치면 수면 상태에 접어든 셈이다.

몇 시간 뒤 깨어났을 때에는 상태가 한결 나아져 있었다.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피로는 대부분 사라졌고, 휴식과 식사 덕분에 상처도 거의 다 아물어서 HP는 만피에 가까웠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두운 보석 모양의 깜짝 선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핵파리의 코어였다.

아마 둥지의 개미들이 핵파리의 시체에서 코어를 찾아낸 다음, 놈을 처치한 내가 알아서 처분하도록 가져다 놓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사려 깊을 수가!

역시 형제 자매가 최고다!

나는 즉시 코어를 흡수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결국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탈출용 통로로 가지고 온 다른 코어들과 함께 벽 안에 잘 묻어 놓았다.

코어를 처리한 나는 빠르게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타이니가 즐거운 얼굴로 방어선 한가운데 서 있었고, 일개미들이 녀석의 몸 위를 기어오르는 중이었다.

불쌍한 원숭이 녀석은 다시 온몸이 상처로 뒤덮인 상태였다.

아쉽게도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 웨이브가 그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돌려서 방 안을 보니 과연 여전히 서로 싸움을 벌이는 몬스터들이 가득했다.

[한 번 더 공격에 나설 에너지가 있어?]

내가 묻자, 타이니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먹는 것만큼 싸우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니까···

나는 다시 한 번 중력장을 사용한 뒤 타이니와 함께 방 안을 청소했다.

그리고 나서 일개미들을 데리고 최대한 많은 바이오매스를 수거해 둥지를 위한 식량을 확보했다.

타이니도 내 지시에 따라 몬스터들의 시체를 통로로 가져가서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뒤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녀석이 쉬는 동안 나는 방어선을 지켰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기나긴 농성을 이어갔다.

나는 몇 시간마다 타이니와 교대해서 휴식을 취하며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두 번째로 교대했을 때 나는 싸움이 잠시라도 그칠 때마다 앞장서서 최대한 많은 흙을 옮겼다.

그리고 내가 싸우는 동안에도 다른 개미들을 시켜서 여왕과 굴파기 팀이 파낸 흙을 입구 쪽으로 가져오게 했다.

우리는 그 흙으로 벽을 쌓아 입구의 일부를 막았다.

이렇게 하면 입구를 막는 동시에 통로 안쪽에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입구를 완전히 막을 생각은 없었다.

던전에서 생성되는 몬스터들은 위협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유일한 식량 공급원이기도 했다.

나는 중력장을 사용할 만큼 중력 에너지가 회복될 때마다 방 안의 거의 모든 몬스터를 사냥했다.

나와 타이니, 그리고 둥지의 개미들이 계속 상처를 회복하며 싸우기 위해서는 식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지만, 적지 않은 수의 개미들이 희생됐다.

나는 물론 타이니도 깨어날 때마다 체력의 한계까지 소모하며 싸웠지만···

방어선의 모든 개미들을 보호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방 안에서 너무 강한 몬스터가 생겨나,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개미들을 죽이기도 했다.

또 때로는 서로 싸우던 몬스터들이 방향 감각을 잃고 개미들 한복판으로 함께 뛰어들기도 했다.

그런 몬스터들은 곧바로 수많은 개미들에게 포위당해 목숨을 잃었지만, 운 나쁜 개미 한두 마리가 싸움에 휘말려 죽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 손실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동료 개미들을 나와 다른 도구나 몬스터로 보지 않았다.

일개미들은 어린아이 수준이긴 해도 지성이 있었고, 나는 녀석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모두 구하고 싶었다.

계속해서 싸움을 거치는 동안 우리의 방어 병력은 상당히 강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개미들이 갓 부화한 상태에서 성체로 진화했다.

마나 감지를 사용해 보니, 성체 개미들 중 상당수가 코어를 형성하고 있기도 했다!

둥지 전체로 보면 실로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끝도 없어 보이는 전투가 둥지의 몇몇 개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 셈이다.

비록 우리의 신경을 갉아먹고 있기는 해도 말이다.

내가 그렇게 휴식과 전투를 네 차례 반복했을 때, 첫 번째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

움직이는 통로

다행히 변화가 발생한 건 내가 깨어 있을 때였다.

타이니와 교대할 시간이 다 되어갈 때였고, 끊임없는 싸움으로 지치고 다친 나머지 하마터면 징조를 알아차리지 못할 뻔했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집중한 나머지, 처음에 그렇게 나를 걱정시켰던 벽 속이나 위쪽 통로의 열기를 감지하는 걸 거의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변이 느껴진 건 아래쪽 통로였다.

대체 뭐와 마주칠지 알 수 없어서 한 번도 탐색해본 적 없는 아래쪽 통로들은 처음 바깥으로 탈출하기 위한 굴을 파기 시작할 때 대부분 막아 놓은 상태였다.

그 뒤로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래서 계속 들리던 싸우는 소리가 갑자기 바뀌었을 때에도 잠시 그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저 다른 소음들 사이에 희미하게 긁는 듯한 소리가 섞여서 들릴 뿐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소리를 의식하지 못했다.

몇 시간 동안 방어선을 지키며 싸운 탓에 내 정신이 보다 즉각적인 위협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래쪽에서 몬스터들이 서로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끔찍한 비명 소리와 불길한 씹는 소리로 바뀌었다.

나는 잠시 뒤에야 그 소리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아래쪽 통로로 몬스터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동시에 두 번째 변화도 알아차렸다.

아래쪽에서 들리는 소리를 걱정하고 있는 내 겹눈에, 통로 안쪽에서 반짝이는 빛이 들어온 것이다.

그걸 보자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이 던전의 에너지 원천인 마나 줄기들이 우리가 만든 탈출용 통로 안쪽까지 침투하고 있었다!

나는 아연한 눈으로 벽에 새로 생겨난 마나 줄기를 응시했다.

단지 마나 줄기가 생겨났을 뿐 아니라, 너무 빠른 속도로 자라나는 나머지 그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느린 속도지만, 그래도 눈에 보일 정도였다.

제기랄···

빌어먹을 웨이브 같으니!

대체 얼마나 더 위험해지려는 거야?

난 벌써 몸과 마음이 모두 너덜너덜하다고!

마나 줄기가 탈출 터널까지 타고 올라왔으니, 조금 있으면 코 앞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올 터였다.

게다가 아래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미지의 몬스터들은 또 어쩌지?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군.

···

후···

진정하자.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돼.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남아서 맞서 싸울까?

···뭘 상대로?

저 아래에서 얼마나 위험한 놈이 올라오고 있을지 전혀 모르는데?

여기 남아서 싸우는 건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내가 이 던전에서 다시 태어난 뒤로 가장 먼저 배운 교훈이, 이길 자신이 없는 싸움은 피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럼 도망칠까?

하지만 어디로?

아직 탈출용 통로는 완성되지 않았다!

위로 도망쳐 봤자 막다른 길이었다.

결국 유일한 선택지는···

숨는 것 뿐이었다.

"빨리! 입구를 막아서 이 통로를 봉쇄해야 돼!"

내가 주변의 일개미들에게 소리쳤다.

일개미들은 늘 그랬듯 내 말에 곧바로 반응했다.

역시 믿을 건 가족밖에 없군!

백 마리 정도 되는 일개미들이 즉시 행동에 나섰다.

개미들은 턱으로 흙을 옮겨 통로의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래쪽에서는 끔찍한 비명소리, 거칠게 이를 가는 소리, 살아 있는 몬스터들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끝없이 메아리 쳤다.

지친 몸을 이끌고 흙을 옮기고 있는 나에게 확실한 동기 부여를 제공하는 소리였다.

대체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아니,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소리로만 추측해 보면, 아래쪽 통로에 있는 몬스터들이 뭔가 무시무시한 놈에게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언제나 던전의 더 아래쪽이 궁금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내려가서 풍경이 어떤지, 어떤 종류의 생물들이 살고 있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메아리 덕분에 그런 생각들이 싹 사라졌다.

얼른 동료 개미들과 함께 (물론 타이니도) 지상으로 올라가서, 이왕이면 산을 찾아 그 꼭대기까지 도망치고 싶었다.

통로 입구를 막는 동에도 마나 혈관은 서서히 안쪽으로 사악한 줄기를 뻗어갔다.

속도는 한 시간에 30 센티미터 정도로 꽤 느린 편이지만, 그래도 점점 면적이 늘어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심란했다.

마나 수위가 아직도 증가 추세인가?

그래서 마나 줄기가 통로 안쪽까지 파고 들어오는 건가?

아직도 알 수 없는 점들이 너무 많았다.

아니, 생각하지 말자.

일단 그냥 파는 거야!

나는 계속해서 일개미들에게 더 빨리 움직이라고 재촉했다.

개미들은 서로의 몸 위를 타고 오르면서까지 최선을 다해 내 지시에 따랐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리가 점점 커져가는 동안, 우리는 탈출용 통로의 입구를 완전히 막았다.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가려지자 완전한 어둠이 우리를 감쌌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막아 놓은 입구 너머로 계속해서 소리와 진동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흙을 입구 쪽으로 퍼다 날랐다.

벽 너머의 방과 최대한 거리를 확보하고 싶었다.

"계속 흙을 쌓아야 돼, 친구들! 안쪽에서 흙을 더 가져와!"

나는 동료 개미들을 닦달해서 계속 입구의 벽을 보강했다.

곧 저 방 안으로 들이닥칠 무시무시한 괴물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벽을 더 두껍게 만들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10분쯤 작업을 계속하니 바깥쪽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흙을 잔뜩 쌓은 탓에 통로 입구의 벽으로 뻗어오던 마나 줄기도 모두 가려졌다.

저 안에서 몬스터가 생겨나 봤자 그대로 생매장당하고 말 터였다.

혹시라도 흙더미를 뚫고 나온다 해도, 지키고 서 있는 개미들이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이제 우리는 길다란 원통 모양의 공간에 완전히 갇힌 꼴이 되었다.

던전의 나머지 부분이 피와 광기에 휩싸인 동안, 나와 개미들은 완전히 분리된 공간에 봉인된 셈이었다.

걱정되는 건 산소와 식량이었다.

물론 지상에서 최대 10,000 킬로미터까지 뻗어 있다는 던전 속에 사는 몬스터 개미들이 얼마나 많은 산소를 필요로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반면 식량의 경우에는 꾸준한 공급이 필요했다.

개미들은 식욕이 왕성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마다 바이오매스를 확보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다 함께 아사할 운명이었다.

타이니는 식량 없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일단은 자게 내버려 둬야지.

안 좋은 소식을 굳이 미리 알릴 필요는 없으니까···

작업을 계속하는 동안 여왕의 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점점 멀어졌다.

소음이 아주 미세한 진동 수준까지 줄어들자, 나는 공사의 진척도를 확인하기 위해 통로 안쪽으로 향했다.

타이니와 내가 방어에 집중하는 동안, 여왕과 여왕이 거느린 일개미들은 굴파기에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덕분에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통로가 꽤 길어졌지만···

레벨 2가 된 터널 지도 스킬로 확인해 보니 아직 지상까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가장 선두에서는 여왕 개미가 여전히 부지런하게 굴을 파는 중이었다.

여왕은 거대한 턱으로 커다란 흙 덩어리를 파내며, 주변의 일개미들이 힘을 내도록 독려했다.

일개미들도 처음과 다를 바 없이 열정을 불태우며, 여왕이 파낸 흙을 부지런히 운반하고 있었다.

설마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혀 쉬지 않고 일한 건가?

입구를 막아버린 탈출용 통로는···

땅 속에서 조금씩 앞으로 이동하는 길다란 원통이 되었다.

앞쪽에서 파낸 흙은 뒤쪽으로 옮겨서 입구의 벽을 더 두껍게 만들었다.

···좀 희한한 상황이군.

나는 여왕 옆에 자리를 잡고 미친듯이 흙을 파기 시작했다.

일개미들이 내가 파낸 흙더미를 모아서 열심히 통로 뒤쪽으로 날랐다.

더 이상 몬스터들과 싸울 필요가 없는데도, 내가 느끼는 웨이브의 압박감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커졌다.

여왕의 방에서 통로 안쪽으로 뻗어오던 마나 줄기와 몬스터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한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우선···

아래쪽의 몬스터들은 대체 왜 올라오고 있는 걸까?

그보다 더 아래쪽에 매우 강력한 몬스터가 나타나서 쫓겨났을 거라는 추측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점점 더 강력한 몬스터가 나타나면···

위쪽을 향한 피난 행렬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을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지상이라고 안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마나 줄기가 뻗어 나가는 속도도 걱정스러웠다.

아무래도 마나 수위가 계속 높아지다 보니 일어나는 현상 같은데···

이런 상황이 웨이브 내내 지속된다면 1주일 후에는 대체 어떻게 될까?

아직 웨이브가 시작되고 나서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남은 기간이 훨씬 더 길었다.

나는 그런 걱정을 잠시 접어두고, 흙을 파는 중간중간 마나 감시 스킬을 사용했다.

우리가 식량을 구하려면, 다른 통로와 가까워졌을 때 그리로 굴을 파고 나가서 거기 있는 몬스터들을 사냥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우리는 내가 예전에 탐험했던 지역을 벗어나 있었다.

탈출용 통로는 이제 내 터널 지도에 전혀 기록된 바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근처의 다른 통로를 찾으려면, 마나 감지 스킬로 몬스터의 코어나 마나 줄기를 찾아낸 다음 그쪽으로 굴을 파야 했다.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아야 할 텐데···

+

도넬란은 완전히 지친 상태였다.

이 젊은 마법사는 지난 24시간 동안 정신력을 바닥까지 쥐어짜서 계속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다 보니 머리는 불타는 것처럼 아팠고 두 눈에서는 피가 흘렀다.

피가!

눈에서 흐르다니!

도넬란은 자신이 배치된 구역을 책임지고 있는 백인대장에게 그런 사정을 호소했지만, 그 결과 되돌아온 건 경멸 섞인 코웃음과 5분 간의 휴식 시간 뿐이었다.

도넬란은 의료 천막으로 들어가서 얼음물을 채운 양동이에 얼굴을 담그고 5분 동안 머리를 식힌 뒤, 성벽 위로 다시 올라가서 교대 시간까지 남아 있는 30분을 채워야 했다.

웨이브 방어는 처음이라 원래도 이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난 밤의 경험은 도넬란이 던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상을 바닥부터 뒤흔들었다.

레기온이 던전 관리에 아주, 아주 엄격하다는 점은 도넬란도 잘 알고 있었다.

용병들은 레기온이 던전에 관해 만들어 놓은 규칙들을 '돌의 법'이라고 불렀다.

마치 바위산처럼 흔들리지도 않고 움직일 수도 없다는 의미였다.

과거에 도넬란은 규칙이 너무 과하다는 용병들의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물론 어리석은 자들이 던전을 탐험하다가 죽어 나가기는 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면도를 하다가도 목숨을 잃곤 했다.

그런데 굳이 던전 탐험을 그렇게 철저히 규제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런 의문이 들지 않았다.

마나의 빛이 돌아왔을 때, 레기온의 전 병력은 임시 요새의 벽 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장교들은 성난 악마처럼 바쁘게 돌아다니며 병사들의 장비를 점검하고 전투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웨이브가 시작됐다.

몬스터들은 바닥에서 솟아났고, 벽을 뚫고 나왔으며 심지어 천장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마치 지옥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놈들은 곧바로 서로 싸우기 시작했고, 진동하는 피비린내와 끊이지 않고 들리는 몬스터들의 비명 소리는 도넬란의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실제로 몇몇 훈련병들은 성벽 가장자리에 매달려서 토하기도 했다.

처음 웨이브를 겪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던 백인대장들은 어린 훈련병들의 추태를 보고도 모르는 척했다.

몬스터들은 폭풍우가 몰아칠 때의 파도처럼 서로 마구 부딪히다가, 점차 요새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요새에 가까이 다가온 몬스터들이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벽에 달려드는 장면은···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곧 요새는 계속해서 밀려드는 파도에 둘러싸인 섬처럼, 몬스터들에게 완전히 포위당하고 말았다.

강철의 육체, 불꽃의 심장

몬스터들이 레기온의 발 밑에서 솟아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야영지 한복판에 몬스터의 스폰을 억제하는 레기온의 고대 유물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유물은 도넬란이 이번 원정 도중에 알게 된 레기온의 비밀들 중 하나였다.

도넬란은 레기온이 얼마나 더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지난 5년 동안 훈련병으로 지내면서 그런 비밀들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기분은 좀 어때, 돈?"

지친 목소리가 도넬란의 귓가에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미린이 흙먼지와 말라붙은 몬스터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 도넬란이 있는 대기 장소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넬란의 옆에 도착한 미린은 온몸에 힘이 빠진 듯 털썩 주저앉아 천막 기둥에 등을 기댔다.

미린도 도넬란과 마찬가지로 쉴 새 없이 싸웠다.

자신의 궁술 스킬을 한계까지 발휘하며, 멀리 있는 몬스터들이나 벽을 타고 올라와 마법사들을 위협하는 놈들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멀리서 몬스터들의 포효 소리와 마법사들이 모든 마나를 짜내 몬스터들의 머리 위로 폭격을 퍼붓는 굉음이 들려왔다.

도넬란은 살면서 이렇게 높은 마나 밀도를 느껴본 적이 처음이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불 마법은 평소보다 더 뜨거웠고, 바람 마법은 훨씬 날카로웠으며, 얼음 마법은 그 어느 때보다 시리도록 차가웠다.

물론 그건 몬스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가 저 요란한 소리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음에 마음이 무너진 훈련병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웨이브가 시작되고 열 네 시간이 지났을 때, 활을 쏠 때의 현란한 손놀림 때문에 '손가락'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궁수 하나가 제발 저 소음을 멈춰 달라는 비명을 지르면서 휴식 장소 한복판에서 쓰러져서 경련을 일으켰다.

위생병 둘이 룬을 그려 '손가락'을 의료 천막 안의 침상으로 옮겼고, 녀석은 아직까지도 거기 누워 있었다.

도넬란은 자신도 바닥에 쓰러져서 비명을 질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 적어도 잠은 좀 잘 수 있지 않을까?

"최고야, 미린."

도넬란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휴가 나온 것 같다니까."

도넬란의 대답에 미린이 킥킥대고 웃더니, 눈을 감고 천막 기둥에 머리를 기댔다.

"눈에서 피가 났다는 얘기는 들었어. 정말 그런데도 5분 휴식이 전부였어?"

"그래."

도넬란이 대답했다.

미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지쳐서 그 이상의 반응은 할 수가 없었다.

잠시 말없이 앉아 있던 미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어."

"그래?"

"다음 교대 근무를 서기 전까지 훈련병들에게 24시간 동안의 휴식이 주어졌어."

도넬란은 깜짝 놀라서 너무 빠르게 몸을 일으키다가, 다리에 쥐가 나고 말았다.

"아야!"

다리를 펴고 고통이 가실 때까지 몇 분이 걸렸다.

미린은 그 모습을 보며 킥킥대고 웃었다.

"어떻게 24시간이나 쉬게 해준다는 거야? 저 위에 우리가 필요하지 않나? 전투가 잦아들 기미가 안 보이는데···"

도넬란이 중얼거리자, 미린이 코웃음을 쳤다.

"잦아들기는, 더 심해지면 몰라도.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윗선에서 대체 무슨 계획인지는 몰라도, 10분 전에 대대장님이 해준 이야기야. 진짜라고!"

도넬란은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모든 훈련병들이 그렇게 오래 휴식을 취하면, 어떻게 방어선을 유지한다는 걸까?

+

야영지 중앙에는 장교들이 모여 있었다.

이 장교들이 던전을 경험한 햇수를 모두 더하면 수백 년은 될 터였다.

야영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청을 때리는 끔찍한 소음에도 불구하고, 장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수염을 쓰다듬거나 턱을 어루만지며 요즘 젊은 훈련병들의 한심한 정신력에 대한 불만을 나눴다.

그렇게 웅성거리던 장교들이 갑자기 대화를 멈추고 일제히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곧 노쇠했지만 여전히 건장한 몸에 어두운 색의 갑주를 두른 티투스가 지휘 천막 밖으로 나왔다.

티투스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들에게 다가가며 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장교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음을 터뜨리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백 미터 밖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사령관은 근래 들어 가장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많은 장교들이 사령관의 그런 변화를 알아차렸다.

"이제는 거의 집 같지 않습니까, 사령관님?"

머리가 희끗한 백인대장 하나가 씩 웃으며 물었다.

티투스는 눈부시게 빛나는 숲 쪽을 바라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자 공기 중의 농후한 마나가 몸 속으로 들어왔다.

"그래··· 거의 그렇군, 마그누스. 10% 정도만 더 높아지면 딱 집일 텐데 말이야."

티투스와 마찬가지로 깊게 숨을 들이 마신 장교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 뿐만 아니라 다른 장교들도 지난 몇 년 동안 보인 적 없는 활기찬 표정으로 훨씬 더 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그누스가 사령부 천막을 흘끗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

"아직 깨어나려면 멀었습니까, 사령관님? 오랜만에 제대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티투스가 고개를 저었다.

"저 늙은 전투 도끼가 깨어나려면 좀 더 집 같아져야 할 거야. 자네도 알잖나."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티투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머지 병사들이 한 나절 정도 편히 쉴 수 있게 우리 늙은이들이 좀 나섰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친구들?"

레기온 리리아 지부의 지상 사령부에서 온 남녀 장교들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각자의 무기를 집어들고 성벽 쪽으로 향했다.

티투스와 아우릴리아만 뒤에 남았다.

"언제쯤 그들이 나타날 거라고 보십니까, 사령관님? 훈련병들이 준비가 되겠습니까?"

대대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티투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 늙은 개들은 몇 시간쯤 전부터 올라오기 시작했을 걸세. 두 번째 스트라타의 압력이 곧 최고조에 달하겠지. 그 몬스터들이 여기까지 밀려들 때가 멀지 않았어. 그 전까지는 병사들을 최대한 쉴 수 있도록 하게. 곧 진짜 시험을 치르게 될 테니까."

대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육체를 강철로."

사령관이 대답했다.

"심장은 불꽃으로."

+

너무 배고프다!

인간일 때는 땅을 파는 게 이렇게 지치는 일인 줄 몰랐다.

···물론 인간일 때에는 이렇게 능숙하게 땅을 파지도 못했지만.

채굴 스킬이 내 본능을 인도하는 데다가 내 턱은 거의 슈퍼 삽과 마찬가지라서, 나는 그야말로 미친 듯한 속도로 땅을 파고 있었다.

계속 일을 하다 보니 텅 빈 배의 허기가 점점 더 심해졌다.

나는 마침내 깨어난 타이니에게 벽에 묻어 놓은 몬스터 코어를 챙기게 한 뒤, 터널 입구 쪽의 벽을 더 단단하게 다지라고 시켰다.

나보다는 상대적으로 최근에 식사를 했지만, 타이니 역시 배가 고픈 상태일 터였다.

여왕은 얼마나 배가 고플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활기차게 땅을 파며 주위의 일개미들을 계속해서 격려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지만···

나는 땅을 파는 작업에 온전히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중간중간 마나 감지 스킬을 사용해서 주변에 식량이 있는지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나 감지 스킬이 2레벨, 그리고 채굴 스킬은 1레벨이 올랐지만···

여전히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터널 지도를 보면 우리의 탈출 통로는 계속해서 미지의 영역을 향해 올라가는 중이었다.

정확히 지상의 어떤 위치에 도착하게 될지 알 수 없어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최소한 내가 인간들과 마주쳤던 던전 입구에서는 수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장소일 터였다.

근처에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해 슬슬 지쳐갈 때쯤, 마침내 뭔가가 느껴졌다.

드디어!

입질이 왔다!

마나 감지 스킬 레벨이 오르면서 탐색 범위가 늘어난 게 천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 멀리 떨어진 곳의 마나를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각의 가장자리에서 아주 미세한 파동이 느껴진 게 전부였다.

이 거리에서는 상대가 강한지 약한지도 판별이 불가능했다.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서는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벌써 둥지에 식량 공급이 끊어진 지 몇 시간이 지났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마나를 감지하게 될지 몰랐다.

자칫하면 지상에 닿기도 전에 모두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통로의 방향을 바꾸더라도 식량부터 확보해야 했다.

나는 여왕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식량을 찾았습니다! 확보하려면 통로의 방향을 조금 변경해야 합니다."

여왕은 작업을 멈추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동작이 일종의 예의라고 짐작했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나를 볼 수 있고 (겹눈), 말할 수도 있으니까 (페로몬) 말이다.

"네가 찾은 게 무엇인지 아느냐, 아이야?"

여왕이 물어서,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사실 정확히 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빨리 식량을 확보하지 않으면 며칠 안에 모두 굶어 죽을 거예요. 지금 근처에서 느껴지는 마나를 쫓지 않으면,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도 알 수 없습니다."

여왕은 잠시 고민하더니 동의의 의미로 더듬이를 흔들었다.

"합리적인 결정이구나. 어느 쪽으로 파야 할지 말해다오."

나는 더듬이로 땅을 쿡쿡 찌르며 터널을 파기 적당한 위치를 찾은 뒤, 마나가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통로의 각도를 조정했다.

새로 조정된 방향으로 굴을 파다 보면, 통로가 방금 발견한 마나의 원천 바로 위를 지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와 타이니가 작은 굴을 뚫고 내려가서 기습 공격을 하면 된다.

굳이 일개미들까지 위험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감지한 마나의 원천은 대략 20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아무리 몬스터 개미로 이루어진 무리라고 해도, 흙과 돌을 사이로 200미터 길이의 땅굴을 파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통로를 마나가 느껴진 위치 근처까지 연장하는 데에는 약 다섯 시간이 걸렸다.

나는 중간중간 코어에 정신을 집중해서 마나의 파동을 감지하며 방향을 바로잡았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마나의 형태가 점점 분명해졌다.

내가 감지한 건 상당히 좁은 통로를 둘러싼 마나 줄기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기쁨이 가슴에 차올랐다.

완벽해!

마나 혈관으로 둘러싸인 통로라면 분명 몬스터로 가득할 터였다.

게다가 통로가 좁은 만큼 생겨난 몬스터들도 충분히 감당할 만한 크기일 테고.

마나 감지 스킬로 문제의 통로를 몇 차례 더 살피자, 작은 코어들이 그 안을 돌아다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최고인데!

잘하면 먹이를 구하면서 코어도 몇 개 건질 수 있겠어!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나는 여왕에게 다시 지상 쪽으로 통로의 방향을 조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는 먹이를 구해오기 위해 아래쪽으로 작은 굴을 따로 파기 시작했다.

[타이니! 이리 와. 밥 먹을 시간이야!]

말을 끝낸 지 10초도 되지 않아서, 통로 반대쪽에 있던 타이니가 침을 질질 흘리며 개미들 사이를 비집고 내 앞에 나타났다.

···

부르지 말 걸 그랬나.

타이니는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로 보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은 우리가 뛰어들 통로 안의 모든 생물을 재로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하기는 제일 좋아하는 싸움과 식사를 하자고 불렀으니.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반응이었다.

아래쪽으로 작은 샛길을 파는 데에는 10분 정도가 걸렸다.

타이니는 내 뒤를 따르며 연거푸 발을 굴렀다.

자기가 지나다니기 편할 만큼 굴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어느 순간, 눈 앞의 흙이 우수수 무너지며 진한 몬스터의 냄새가 더듬이를 찔렀다.

[타이니! 밥 먹자!]

학살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타이니는 신나서 울부짖으며 수직으로 판 굴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러니까, 내 바로 위로 말이다!

원래 내 계획은 천장에 낸 작은 구멍으로 통로 안에 진입한 다음,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주위 상황을 좀 살피는 거였다.

하지만 육중한 원숭이 녀석이 내 위에 올라타는 바람에···

우리는 뚫린 구멍을 통해 그대로 떨어져서 전투 중인 몬스터들 한복판에 추락하고 말았다.

쿵!

···

당장 내려오지 못해, 타이니!

이 멍청한 원숭이 같으니!

잠깐만, 이게 아니지.

[당장 내려와, 타이니!]

하지만 타이니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녀석의 눈은 식량과 전투에 대한 굶주림으로 불타고 있었다.

타이니는 한쪽 발로 내 등을 힘껏 밟고 뛰어올라, 가장 가까운 몬스터에게 덤벼들었다.

마구 휘두르는 두 주먹에서 전기 불꽃이 이리저리 튀었다.

이 자식 날 밟다니···

심지어 데미지도 들어왔어!

무거운 고릴라 밑에 깔리는 경험은 심히 불쾌했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킨 뒤, 정신 상태를 전투 모드로 전환했다.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주위 상황을 살폈다.

우리가 싸울 상대는 뭐지?

좁은 통로는 벽을 온통 뒤덮고 있는 마나 혈관들이 내는 빛 때문에 눈부시게 밝았고, 사방이 전투 중인 몬스터들로 가득했다.

새로운 몬스터들이 이미 싸우고 있는 몬스터들을 밀어내며 생성될 정도였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에···

혼란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모두 저레벨 몬스터들이라는 거!

내가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때 봤던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다 모여 있었다.

민달팽이, 지네, 늑대···

종종 악어 괴물과 가시 도마뱀도 보였다.

모두 약한 몬스터들이었다.

내가 코어를 형성하기 전에도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놈들이니 말이다.

그 이후로 두 번이나 진화한 이상, 놈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여기 있는 몬스터들은 내게 상대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처음 던전에서 환생했을 때보다 내 몸집이 훨씬 커졌기 때문에, 몬스터들이 상대적으로 작아지기도 했다.

늑대 드래곤은 더 이상 나를 내려다보지 못했다.

하!

마음 단단히 먹어라, 꼬맹이들!

음하하하하!

나는 신이 나서 근처의 산호 민달팽이를 향해 턱을 크게 벌리고 달려들었다.

물어 깨뜨리기!

커다란 에너지 턱이 민달팽이의 몸뚱이를 아무런 저항도 없이 파고들었다.

그 끈적끈적한 점액질도 이제 소용없다고!

[레벨 3 산호 민달팽이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다음은 누구지?!

정말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전투였다.

훨씬 높아진 능력치와 변이된 신체, 스킬들 덕분에 진화하지 못한 저레벨 몬스터들은 모두 내게 말그대로 한입거리에 불과했다.

한 때는 네놈들을 두려워했지···

이거나 먹어라!

[···처치했습니다]

나한테 산성 용액을 뱉는다고?

간지럽지도 않군!

음하하하!

[···처치했습니다.]

오, 꼬리를 휘두르는 거야?

내가 한 입 먹어줄까?

[···처치했습니다.]

죽어라 탈출용 통로를 파면서 받았던 모든 스트레스가 여기 있는 약한 몬스터들을 대상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래, 이 끔찍한 괴물들아.

내 스트레스나 해소해 주고 죽어라!

하지만 나와 달리, 타이니는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육중한 주먹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힘없이 쓰러지는 약한 몬스터들은 전투를 향한 타이니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너무 약했다.

눈 앞의 모든 몬스터들을 박살내고 나서도, 녀석은 어쩐지 침울해 보였다.

타이니는 계속해서 통로를 따라 전진하며 적들을 물리쳤지만, 전과 같은 활기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말로 위험한 싸움이 아니면 흥분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너 무슨 마조히스트야, 타이니?

두들겨 맞는 게 즐겁기라도 한 거야?

···아무래도 치료가 필요하겠는데.

한참을 날뛴 끝에 우리는 통로의 일부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새로 스폰되는 몬스터들도 감히 우리에게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스트레스를 실컷 풀고 상쾌해진 기분으로, 통로를 가득 채운 몬스터 시체들 위에 우뚝 섰다.

반면 타이니는 여전히 우울한 표정이었다.

[그러지 말고 힘내, 타이니! 밥 먹을 시간이야!]

내가 말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타이니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녀석은 근처의 몬스터 시체를 하나 집어서 허겁지겁 입으로 가져갔다.

나도 몹시 배가 고팠기 때문에 지체없이 몬스터 시체를 물어 뜯었다.

바이오매스의 맛은 여전히 역겨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어느 정도 적응할 만했다.

아무리 익히지 않은 몬스터 사체라도···

식량은 식량이니까.

몬스터들이 워낙 저레벨이라, 스무 마리를 넘게 죽였는 데도 레벨이 단 하나도 오르지 않았다는 건 좀 실망스러웠다.

여기 있는 시체들을 나 혼자 다 먹는다고 해도 바이오매스를 하나는 얻을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작은 몬스터 코어를 세 개나 발견했다.

이 코어들은 나중에 실험할 용도로 따로 챙겼다.

다음 진화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꽤 있으니, 굳이 코어를 당장 흡수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스킬 레벨을 먼저 올리는 게 우선이었다.

코어 공학 스킬의 잠재력은 여전히 무궁무진해 보였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나와 타이니는 배가 터질 때까지 식사를 했다.

그렇게 실컷 먹고 나서야, 사냥의 원래 목적이 둥지를 위한 식량 확보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

잠깐 정신줄을 놓고 말았군.

뭐, 상관없었다.

웨이브 기간 동안 적어도 몬스터 공급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우리가 시체를 먹는 동안에도 벽에서 계속 몬스터들이 생겨나는 바람에, 입에 음식을 가득 문 채로 놈들을 공격해야 했다.

나는 통로 안쪽까지 내려가서 몬스터들을 죽인 뒤, 시체를 내가 판 샛길 근처로 끌고 오는 노동을 반복했다.

그렇게 10분쯤 지나자 바이오매스의 작은 산이 만들어졌다.

타이니도 반대쪽 통로에서 사냥한 몬스터들로 비슷한 크기의 바이오매스 더미를 완성했다.

나는 식량을 운반할 일개미들을 불러오기 위해 샛길로 올라갔다.

마나 혈관들이 벌써 샛길을 타고 탈출용 통로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젠장.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걱정이 앞섰다.

뭐, 마나 혈관이 뻗어 나가는 것 보다 더 빠른 속도로 굴을 파면 괜찮겠지.

통로를 파는 도중에 벽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는 상황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물론 금방 처리할 수 있는 약한 몬스터이겠지만···

일개미들이 한눈을 팔다가 당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유충들이 있는 근처에서 몬스터가 생성될 수도 있었다.

벌써 웨이브로 인해 둥지의 개미 여러 마리가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운이 좋아서 이 정도였다.

나는 탈출용 통로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일개미들에게 외쳤다.

"여기 내려와서 식량을 가져갈 일꾼이 필요해!"

식량이라는 단어를 듣자 서른 마리 정도의 일개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와서 샛길로 몸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결국 나는 몰려드는 개미들에 깔려 다시 한 번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전투하는 몬스터들 대신 물렁물렁한 몬스터 시체들이 나를 맞이했다.

···

내 위엄이 이렇게 짓밟히다니!

개미들이 내 위를 타고 넘어가서 바이오매스를 자르고 운반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오랜 전투와 노동에 이어서 쉬지 않고 사냥을 했더니, 잠이 미친듯이 몰려왔다.

+

작은 통로에서 얻은 사냥감으로 잔치를 벌이고 나서 꼬박 이틀이 지났다.

굴을 파다가,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굴을 파는 짓을 무려 이틀 동안 반복한 것이다.

당시 터널 침입으로 확보한 바이오매스는 여왕과 일개미, 애벌레들을 배불리 먹이기에 충분했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많으니, 미리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탈출용 통로가 샛길을 완전히 지나가기 전에, 우리는 몇 차례 더 사냥을 나가서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버틸 만한 식량을 충분히 확보했다.

문제는 마나 줄기였다.

샛길을 통해 뻗어 들어온 마나 혈관이 탈출 터널 안에 너무 빨리 퍼지는 바람에,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겨우 몇 시간 만에 탈출용 통로 바닥에 마나 줄기가 흘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몬스터 스폰이 시작되려는 듯, 발 밑에서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일개미들에게 미리 경고를 하고, 지난 번 식사 이후 번데기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유충들 주위에 경호 병력을 더 붙였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갓 부화한 일개미 몇 마리와 애벌레 두 마리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동료를 잃은 건 슬펐지만, 어차피 바이오매스가 부족한 지금 상황에서 그 어린 녀석들이 성체까지 무사히 성장하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결국에는 이것도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생각이지만···

마나 혈관은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자라나고 있었다.

우리가 굴을 파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곧 탈출용 통로 전체가 마나 줄기의 푸른 빛으로 밝아졌다.

마나 줄기는 터널이 조금씩 연장될 때마다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왔다.

다행히 지상에 많이 가까워졌기 때문인지, 약한 몬스터들만 스폰되고 있었다.

통로를 파는 경로에 마나 주입 턱으로 부숴야 하는 커다란 바위들이 자꾸 나타나는 바람에, 지난 이틀 동안은 그렇게 많은 거리를 이동하지 못했다.

그나마 두 번째 바위 지대를 지나고 나니 흙이 훨씬 곱고 부드러워져서 작업이 한결 수월했다.

벌써 레벨 3이 된 터널 지도로 확인해 보니, 이제 지상과 꽤 가까워진 듯했다.

지상이 평평한지 아닌지 모르고, 원래 내가 아는 던전 입구와 우리의 도착 지점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우리가 뚫고 나갈 곳이 강의 바닥이나 해저일 수도 있었다.

음···

내가 채굴의 달인까지는 아니지만···

강이나 바다에 가까워지면 흙이 축축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아직까지 그런 기미는 없으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나는 통로를 파면서도 스킬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채굴 중에도 보조 뇌를 꾸준히 돌려서 연습한 덕분에, 마나 형성 스킬이 무려 레벨 8을 찍을 수 있었다.

마나를 다양한 패턴으로 만들기가 처음에 비해 훨씬 수월해졌다.

물론 여전히 토가 나오게 어렵기는 했다.

그래도 같은 패턴을 반복적으로 연습하다 보니, 익숙한 모양으로 마나를 형성할 때에는 속도가 꽤나 올라갔다.

덕분에 스킬을 연습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같은 패턴을 계속 연습하면, 스킬 레벨이 오르지 않더라도 사용하기 더 편해지니까 말이다.

나는 외부 마나 조작도 조금씩 연습했다.

몸 안의 마나만 다루다가 몸 밖에 있는 마나를 다루려고 하니 상당히 어려웠다.

마치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밖으로 끄집어 낸 다음, 그걸 올가미처럼 사용해서 근처의 에너지를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외부 마나 조작의 레벨을 하나 올린 뒤, 나는 다시 마나 형성 연습으로 되돌아갔다.

지금으로서는 마나 형성의 레벨을 올리는 편이 더 유용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태창을 열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

레벨: 8 (코어)

힘: 41

강인함: 29

영리함: 32

의지: 22

HP: 50/50

MP: 45/58

스킬: 채굴 레벨 8; 향상된 산성 용액 발사 5; 잡기 레벨 4; 물어 깨뜨리기 2; 고급 은신 레벨 5; 깨물어 뚫기 레벨 5; 터널 지도 레벨 3; 마나 형성 레벨 8; 강력한 마나 레벨 4; 외부 마나 조작 레벨 2; 마나 감지 레벨 4; 코어 공학 레벨 2; 외골격 숙련 레벨 3; 펫 커뮤니케이션 레벨 2

변이: 초점 겹눈 +5, 열 감지 더듬이 +5, 구속 산성 용액 +5, 흡수 다리 +5, 마나 주입 턱 +5, 다이아몬드 갑각 +5, 신체 부위 재생 분비선 +5, 페로몬 언어 +5, 향상된 중력 마법 분비선 +5

종족: 두뇌파 개미 (포르미카)

스킬 포인트: 4

바이오매스: 13

=====

열심히 땅을 파고 전투를 한 덕에, 관련 스킬의 레벨들이 꽤 올라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뿌듯한 건 마나 관련 스킬들이 조금씩 성장한 점이었다.

심심할 때마다 타이니에게 궁시렁거린 덕분에 펫 커뮤니케이션 스킬의 레벨도 2가 되어 있었다.

이제 좀 더 먼 거리에서도 타이니와 의사소통이 가능할 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조금만 더 파면 지상에 도달할 것 같았다.

지상으로 나가면 나 자신과 둥지의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울 생각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저 위에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릴지 모르니, 제대로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문명 사회에서 멀리 떨어진 텅 빈 숲 속에 도착하면 가장 좋을 텐데.

그러면 웨이브가 끝날 때까지 안전하게 숨어 지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부디 운이 좋기를 바랄 수밖에!

지상으로!

터널 지도를 보니 아까보다 더 지상에 가까워져 있었다.

조금만 더 파면 언제라도 지상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옆에서 쉴 새 없이 터널을 파고 있는 여왕 개미에게 이 중요한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

"곧 지상에 도달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굴 파기를 멈출 수 있을 거예요."

여왕 개미는 작업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 아이들에게 휴식이 필요할 것 같구나. 더 이상 목숨을 잃는 아이들이 없어야 할 텐데..."

이런 순간에도 여왕 개미는 식구들에 대한 걱정이 우선이었다.

던전에서 태어나는 모든 여왕 개미들이 본능적으로 이런 모성애를 갖게 되는 건지 궁금했다.

"지상에 도착하면 더 이상 공격을 받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가족들도 휴식을 취할 수 있을 테고요."

내가 말했다.

"···그런데 지상이 뭔지 아시나요?"

내가 잠시 후 물었다.

"모른단다."

여왕이 대답했다.

"그런데 어떻게 지상에 올라가기로 결정하신 거에요?"

"내 아이 중 하나가 그래야 한다고 했으니까."

여왕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감돌았다.

마치 자신의 아이가 잘못된 제안을 했거나, 일부러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여왕에게 거짓말을 하는 개미가 어디 있겠어?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뭔가가 턱에 걸렸다.

젠장, 또 바위잖아!

바위 지대를 부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보기만 해도 얼굴이 아파온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돌을 부수는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 턱에 마나를 주입했다.

여왕은 뒤로 물러나 내게 공간을 양보했다.

바위를 부수는 일에 내 턱이 여왕의 턱보다 더 효과적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조금씩 휴식을 취하는 듯했다.

웨이브가 터지고 나서 여왕 개미는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으니까.

와그작 와그작 와그작.

나는 턱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며, 기계적으로 바위를 썰었다.

부서진 바위 조각들이 내 얼굴로 우르르 쏟아져 내려 갑각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뭔가···

좀 쉽게 부서지는 것 같은데?

바위들이 좀 헐겁게 쌓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째서인지 모양도 상당히 일정해···

뭐···

와그작, 와그작, 와그작, 쿠르릉!

몇 분 정도 지났을 때, 갑자기 바위 무더기가 한꺼번에 부서지며 지하가 아닌 열린 공간이 나왔다.

다 온 건가?!

드디어 도착한 거야?!

나는 신이 나서 뚫린 틈새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무너진 바위들을 치웠다.

여기는 어디지?!

···

나를 맞이한 광경은 사뭇 놀라웠다.

겹눈 덕분에 내 주위의 360도가 한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도착한 장소는 아치형의 높은 천장이 있는 석조 건물 내부였다.

내 양 옆으로는 긴 나무 의자들이 한 방향을 보고 나란히 놓여 있었고, 거기 앉은 인간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양 쪽 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 있었다.

이것만 해도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내 앞쪽···

그러니까 의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위치에 연단이 하나 있고, 그 뒤에는 로브를 걸친 남자 하나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가리키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 뒤에는 석상이 하나 있었다.

어··· 혹시···

이건 그건가?

무슨 교회 같은 거야?

뭔가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

갑자기 바닥을 뚫고 나온 거대 개미 - 나 - 를 가리키며 공포에 질려 수군거리는 인간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로브 차림으로 연단 위에 서있던 남자는 침묵을 깨고 분노한 표정으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군중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입에서 침이 분수처럼 튀었다.

충격에 얼어붙어 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남자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편한 기색이 가득하다가, 점점 넋이 나가더니, 나중에는 귀신이라도 본 듯 모두 환희에 찬 표정이었다.

한편 나는 남자 뒤의 석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 어쩐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를 닮았는데.

로브를 입고 긴 수염을 기른 노인의 석상이었다.

주름투성이 얼굴과 눈에는 연륜과 지혜가 담겨 있었다.

석상의 한쪽 팔은 환영하듯 앞으로, 다른 쪽 팔은 넓은 세상을 가리키듯 옆으로 뻗어 있었다.

석상은 연단 뒤의 남자와 비슷한 로브 차림이었고, 허리끈에는 작고 섬세한 글자들이 수없이 새겨져 있었다.

저걸 만드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지금 내가 들어온 장소는 일종의 교회가 분명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무려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보는 햇빛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각각의 창문에 새겨진 그림은 여기서 섬기는 신과 관련 있어 보이는 내용이었다.

그 중 하나의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어쩐지 비참해 보이는 인간들이 일하고 싸우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 바로 옆의 창문에는 석상과 같은 모습의 노인이 하늘에서 내려오며, 환희에 찬 신도들을 향해 로브에서 글자들을 쏟아냈다.

또 그 옆의 창문에서는 몬스터로 보이는 흉악한 생물들이 땅 속에서 기어 나와 첫 번째 창문과 달리 강하고 튼튼해 보이는 인간들과 전투를 벌였다.

각 전투 장면 마다 글자들이 마치 특수 효과처럼 화려하게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사제로 보이는 남자의 로브에도 금색 실로 비슷한 글자들이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빛이 로브를 비추자 글자들이 눈부시게 빛났다.

어쨌든 이 건물은 공들여 세운 교회 같았다.

섬세하게 조각 된 석상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스테인드 글라스, 값비싸 보이는 로브와 높은 아치 천장까지···

있을 건 다 있네!

"무슨 문제가 있느냐?"

뒤쪽에서 여왕의 질문이 들렸다.

내가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지상에 도착하긴 했습니다. 좋은 소식이지요! 그런데 인간들에게 둘러 싸여 있습니다. 아무래도 최선의 상황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여왕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인간이 무엇이냐?"

이런.

"살아있는 생물입니다··· 몬스터는 아니구요."

내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음···"

여왕이 고민 끝에 다시 물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이냐?"

···

···

그러게요.

내가 과연 인간을 사냥해서 먹을 수 있을지의 여부는 둘째 치고 (이 부분은 지금 고민하기도 싫었다), 인간을 잡아먹는다고 해서 바이오매스가 나올까?

몬스터도 아닌데?

경험치는 얻으려나?

얻는다면 얼마나···

···

아니, 아니!

안 돼!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살아 숨쉬는 사람들이라고!

심지어 여자와 아이들도 있어!

경험치 덩어리들이 아니야!

비록 저 사람들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어쨌든 아니야.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나는 고개를 흔들고 주위의 인간들을 쳐다보며, 나의 답변을 침착하게 기다리는 여왕에게 대답했다.

"먹을 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잠시 여기서 식구들과 대기해주세요. 안전한지 먼저 확인하고 싶어서요."

나는 너무 큰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천천히 구멍 밖으로 기어 나갔다.

내가 움직일수록 사제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중년 정도 돼 보이는 남자였는데, 얼굴이 너무 빨개져서 숨 쉬기도 어려워 보였다.

이미 남자의 목소리는 인간이 낼 수 있는 음량을 훨씬 넘어선 것 같았다.

나는 초조하게 더듬이를 흔들며 다리를 하나씩 구멍에서 꺼냈다.

최대한 천천히 나왔는데도, 사제는 내 움직임을 눈치챈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한편 예배당 안의 군중은 사제가 쏟아내는 말에 완전히 현혹된 것처럼 보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나도 알아듣고 싶었다.

땅 속에서 몬스터 개미가 기어 나왔는데, 다들 신의 재림이라도 본 듯 종교적인 황홀경에 빠져 있으니 말이다.

난 아직 그렇게 중요한 직책을 맡을 준비는 안 됐는데!

사제가 나를 가리키자, 군중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나를 향했다.

이번에는 공포 대신, 왠지 불편하게 느껴지는 굶주림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나머지 몸을 구멍에서 천천히 꺼내는데, 근처에 있던 늙은 여자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어···

내가 뭘 잘못 이해하고 있나?

나는 버릇처럼 앞다리로 더듬이를 닦았다.

마치 인간일 때 눈썹 위의 땀을 훔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하지만 신도들은 내 불편한 기색 따위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늙은 여자에 이어, 다른 몇몇도 울음을 터뜨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청중 모두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바닥의 구멍에서 몸을 완전히 꺼낸 나는 이제 교회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벽을 따라 나열된 신도석에서는 군중들이 나를 향해 두 손을 모은 채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음··· 어···.

안녕하세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상황은 아닐 것 같은데요···?

···

조만간 텔레파시 마법을 꼭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금방 필요한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

설교를 마친 사제의 얼굴에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다.

긴장이 풀린 상태로 두 손을 맞잡는 모습이, 곧 승천이라도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신도들과 달리, 사제는 무릎을 꿇는 대신 석상 앞의 제단 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는 그 뒤에서 예식용으로 보이는 화려한 철퇴를 꺼냈다.

사제는 양 손은 철퇴의 자루를 단단히 쥐고 내게 다가왔다.

갑자기 웬 철퇴야?

혹시 무기가 아니라 향이나 뭐 그런 건가?

공격용 무기로 쓰기에는 너무 화려하고 정교해 보이기는 했다.

마나 감지 스킬을 사용해 봤지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마법 아이템 같지는 않은데···

저걸로 나한테 작위 수여라도 해주는 건가?

어깨를 두드려서 축복을 해주는 거야?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싸움을 일으키거나 사람들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내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지만, 잘못해서 훨씬 강력한 외부인을 데리고 오기라도 하면 상황이 복잡해질 게 뻔했다.

전에 터널에서 봤던 병사들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았다.

지금도 그 병사들과 붙으면 속수무책으로 지고 말 텐데...

일단 침착하자.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고.

사제는 예식용 철퇴를 들고 제단에서 내려와 교회 한복판에 있는 나를 향해 걸어왔다.

사제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신도들은 그 순간에 압도되어 손을 높이 들며 뭐라고 소리를 친 후 다시 기도하는 자세로 돌아갔다.

사제가 내게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소리치는 빈도가 더 잦아졌다.

곧 신도들의 아우성이 비처럼 쏟아졌다.

어···

안녕하세요?

내 키는 남자의 몸통까지 왔다.

갓 부화한 개미 때였다면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았을 텐데.

개미가 위아래보다 앞뒤가 더 긴 곤충인 점을 생각하면, 지금 내 크기가 얼마나 어마어마 한지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아마 저 남자가 내 옆에 누우면 내가 더 길 터였다.

그러고 보니 내 몸무게는 얼마나 나갈지 궁금하네.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턱이 없는 사제는 철퇴를 앞세워 들고 황홀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남자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라도 하듯 천천히 철퇴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고, 군중은 더욱 열광했다.

이어서 남자는 철퇴로 내 머리를 그대로 내리쳤다.

나는 남자의 팔을 물었다.

문화 교류

잠시 동안 이상한 기운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어··· 라?

저 남자가 먼저 바보 같은 철퇴로 내 머리를 내려친 거야!

그러니 내가 반격을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던전 안에서 폭력적인 삶을 살다 보면 본능적으로 이러게 된다고!

세상에, 철퇴로 머리를 때려 놓고 반격을 했다고 나한테 뭐라 하면 안되지.

이건 정당방위였어!

사제도 이 상황을 이해하는데 잠깐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절단된 자신의 팔을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에 점점 새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곧 남자는 팔을 부여잡고 뒤로 넘어져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질렀다.

마비된 것처럼 가만히 서 있던 군중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서로를 제치고 문을 향해 달려갔다.

맙소사···

내가 의도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이 사람들은 우리가 왜 교회 바닥을 뚫고 나왔다고 생각하는 걸까?

던전에서 갑자기 무료 경험치 배달이라도 온 줄 알았나?

내가 그냥 여기 서서 철퇴에 맞아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그 예식용 철퇴로 30분을 내리 맞아도, 내 다이아몬드 갑각에는 흠집도 생기지 않을 터였다.

뭐··· 머리는 좀 아프겠지만.

이 지경까지 온 이상, 최대한 피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했다.

둥지를 지상으로 데리고 온 건 웨이브를 피해 비교적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인간 병사들과 싸워야 한다면, 차라리 던전으로 도로 내려가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저 인간들이 나가서 병사들을 데리고 온다면 우리는 끝장이었다.

생각하자!

이 상황을 책임져야 해!

하지만 떠오르는 건 일단 도망가는 사람들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중력 마법을 사용해 중력장을 형성했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도망가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스킬의 레벨과 숙련도가 오른 덕분에, 예전보다 빠르게 패턴을 형성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강력한 에너지가 내게서 뻗어 나가 교회 건물을 통째로 감쌌다.

다행히 중력의 강도를 적당히 낮출 정도의 정신머리는 남아 있었다.

스킬을 발동하자 마자 사람들은 제 자리에 서있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특히 어린 아이들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로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어른들은 그보다 조금 더 잘 견뎠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도망치지는 못했다.

사제는 팔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느라 바빠서, 내 마법 주문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인간이었다.

나는 중력장을 몇 초 동안 유지하다가 다시 거뒀다.

잠깐이지만 사람들을 바닥으로 쓰러뜨린 덕분에 문 밖으로 도망치려는 광란의 질주는 일단 멈췄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개미 얼굴로 사람들에게 '움직이면 다시 중력장을 킬 거야!' 라는 의사를 전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한 것 같았다.

일그러진 얼굴에 가득한 공포를 보니, 이게 종교적인 기적의 순간이 아니라 던전에서 올라온 몬스터가 최악의 시간에 최악의 장소에 침입한 사건이라는 걸 파악한 모양이었다.

어린 아이들의 얼굴에 묻어 있는 공포와 눈물을 보니 좀 충격이었다.

나도 얼마 전까지 인간이었다고!

내가 그렇게 무서워?

하긴···

중력을 조종할 수 있는 거대 개미라니 내가 생각해도 소름 끼치기는 했다.

신도들의 소란을 잠재운 뒤, 나는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 제대로 파악하려 노력했다.

가족을 지상으로 데리고 올라올 건지, 아니면 다른 계획을 세울 건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지금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했다.

나는 예배당 끝에 있는 커다란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는 잠깐 주저한 끝에 턱으로 문을 밀어 이 세상의 지상에 첫 발을 내딛었다.

제일 먼저 내 눈을 사로잡은 건, 하늘을 자줏빛으로 물들인 찬란한 석양이었다.

아름다웠다.

던전 안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에 석양을 볼 때보다 훨씬 감흥이 컸다.

아냐, 집중해!

석양이나 감상하고 있을 시간 없어!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교회는 언덕 위에 있었고, 문 앞까지 자갈길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에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나무 지붕에서 튀어나온 굴뚝마다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좀 더 멀리에는 농장 지대가 카펫처럼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로는 성벽이 보였다.

터널 지도를 다시 확인해보니, 내가 처음에 나오려고 했던 던전 입구는 저 성벽 안 도시의 중심부에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음···

사태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도 있었네.

그런데 다시 집중해서 보니, 아무래도 도시에 불이 난 것 같았다.

성벽 안쪽에서 검은 연기가 어둑어둑 해지는 하늘 위로 피어올랐다.

저기도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부디 안 다쳤으면 좋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들키지 않고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 같기도 했다.

나는 교회 안에 있는 신도들의 상태를 흘끗 확인한 뒤, 건물의 모서리로 가서 뒤쪽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큰 교회는 아닌 것 같았다.

높은 아치형 천장이 있는 튼튼한 석조 건물은 맞았지만, 확실히 대성당은 아니었다.

교회는 마을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언덕 위에서는 마을 전체를 굽어볼 수 있었다.

아마 근처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촌락 같았다.

교회 뒤편으로 작은 목장 몇 군데가 보였고, 그 뒤로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우거진 나뭇잎 덕분에 숲의 바닥은 그림자로 어두컴컴했다.

개미들이 숨기 딱 좋아 보였다.

어쩌면 지상의 숲 속에 숨는다는 계획을 살릴 수도 있겠는데!

나는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많은 신도들이 아까와는 사뭇 다른 바람을 가지고 석상을 향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전에 뭐를 위해 기도를 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구원과 생존을 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제는 온 몸에 힘이 빠진 채로 여전히 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불쌍한 인간 같으니.

죄책감이 조금은 들었다.

결국 저 사람 팔을 물어서 잘라버린 건 나였으니까···

나는 여왕과 대화를 하기 위해 동족들이 기다리는 구멍에 꽁무니를 들이 밀었다.

페로몬 대화는 참 이상했다.

'듣기'는 더듬이로 가능했지만, '말하기'는 엉덩이에 달린 페로몬 분비선을 통해 해야 하니까 말이다.

"여기 올라와서 인간 한 명을 치유해주실 수 있나요? 제가 부상을 입혔는데, 만약 죽는다면 우리의 안위에 안 좋을 것 같아서요."

여왕은 조금 놀란 듯했지만, 곧 나의 제안에 동의한 뒤 바위를 부수고 교회 안으로 올라왔다.

여왕개미의 커다란 덩치가 올라오자, 돌로 만든 바닥이 부서지고 나무 의자도 옆으로 밀려났다.

아마 사람들의 기도는 여왕 개미가 등장하면서 두 배는 강해졌을 터였다.

여왕의 거대한 몸집이 예배당을 가득 채우자, 공포에 질려 바닥에서 울고 있던 사람들이 벽 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여왕 개미는 침착했다.

잠시 더듬이에 마나를 채운 여왕은 커다란 더듬이로 사제의 팔을 건드렸다.

더듬이에서 나온 빛이 사제의 팔을 지나가며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고, 몇 초 만에 출혈이 멈췄다.

이러면 죽지는 않겠지···

적어도 과다 출혈로 사망할 일은 없을 터였다.

말로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가 없으니···

최대한 빨리 개미들을 여기서 데리고 나가야 했다.

나는 여왕개미와 일개미들에게 뭘 해야 하는지 알렸다.

유충과 번데기들을 들고 교회에서 나와 숲으로 향해야 한다고 말이다.

교회 한복판에 난 구멍에서 몬스터 개미가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운반을 돕기 위해 탈출용 통로에 다시 내려간 나는, 통통한 애벌레 한 마리가 신나게 꼬물거리며 나를 향해 꾸물꾸물 기어오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육아실에서 구했던 그 활기찬 유충이잖아?

하긴, 너는 분명 살아남을 것 같았어.

다른 애벌레와는 좀 달랐거든.

아이들을 챙겨서 나온 타이니와 둥지의 식구들은 내 인도를 따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지나쳐 교회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작은 목장들을 지나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내내 사제는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밀밭을 달리는 게 이렇게 스릴 넘치는 일인 줄은 처음 알았다.

나를 선두로, 한 손에 소중한 몬스터 코어를 가득 든 타이니가, 그리고 그 뒤로 둥지의 개미들이 줄지어 따라왔다.

나는 농장을 가로지르는 내내 사람들의 눈에 띄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이제 해는 지평선 아래로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우리를 발견할 만한 상대가 누가 있을지는 나도 몰랐다.

지상은 처음이니까···

혹시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드래곤 편대가 하늘에서 나타나서 브레스를 퍼붓지는 않을까?

이 동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전혀 없었다.

몇 킬로미터 거리의 던전 입구에 있던 마법사들이 우리 전부를 한 방에 날려버릴 만큼 강력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나는 줄 맨 끝의 일개미가 숲 속으로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모든 일개미들, 그리고 충성스러운 경호 병력에 둘러싸인 여왕 개미가 나무 그림자 아래로 들어서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살짝 편안해진 나는 몬스터 개미 군단을 이끌고 미지의 숲 속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왠지 마법의 숲 같은 느낌이 드는 장소였다.

우선 굉장히 오래된 숲인 건 확실했다.

인간 시절에 야외 활동을 많이 해서 식물이나 자연 환경에 대해 박식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가지를 옆으로 넓게 펼친 나무들은 하나같이 주름이 많고 현명해 보였다.

마치 아침 운동을 하며 열심히 스트레칭을 하는 어르신들 같았다.

밤이 깊어지자 축축한 숲 바닥에서 안개가 피어 올라, 우리의 움직임을 좀 더 잘 숨겨줬다.

···잠깐!

열기가 감지된다!

길을 나아가며 계속해서 앞쪽을 살피던 내 더듬이에 갑자기 열기가 느껴졌다.

약간 왼쪽에 뭐가 있는데···

마치 무슨 짐승이 쭈그리고 앉아서 우리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계속 나아가기로 했다.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공격하려나?

도망가려나?

나는 이 숲이나 여기 사는 생물들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뭐라도 알아낼 수 있는 기회라면 놓치지 말아야 했다.

몬스터에게는 지식이 곧 힘이니까!

나는 더듬이를 흔들며 개미들을 이끌고 나아갔다.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데도 열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심지어 행렬이 바로 오른쪽을 지나가도록 경로를 바꿨는데도, 미지의 열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거리가 겨우 몇 미터로 좁혀졌다.

이제 열기의 주인이 어디 숨어 있는지 제대로 보였다.

저기 나뭇가지들이 두껍게 얽혀 있는 빽빽한 관목 뒤로군···

애써 숨어 있는 친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은신이 너무 어설펐다.

만약에 싸움이 벌어지면, 턱에 물고 운반 중인 애벌레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이 활기찬 녀석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마치 주위를 구경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너 눈 없어, 아가야!

대체 뭘 어떻게 보고 싶어서 그러니?

싸움이 벌어지면···

애벌레를 다치게 할 수는 없으니 가급적 턱을 사용하지 않아야 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막 문제의 덤불을 지나가려는 순간, 그 뒤에 숨어 있던 생물이 공격을 시도했다.

깡마르고 뒤틀린 팔다리, 털이 숭숭한 몸뚱이, 사나운 송곳니와 조잡한 단검이 내가 어둠 속에서 알아볼 수 있는 전부였다.

놈은 재빨리 내게 달려들어 들고 있던 단검을 휘둘렀다.

새로운 둥지

대격변이 끝나고 던전이 열린 뒤, 지성을 가진 지상의 종족들이 자원 확보를 위해 지하를 탐험하는 일이 잦아졌다. 던전 몬스터들은 지상 몬스터들에 비해 훨씬 많은 경험치를 제공했고, 그 밖에도 던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자원들도 많았다.

지상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었던 특수한 광석, 놀라운 물성을 지닌 지하의 목재, 마나가 담긴 보석 등 희귀한 채집물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보상을 주는 건 역시 몬스터들이었다.

특정 몬스터 부위를 적절하게 가공하면, 던전으로 분해되어 돌아가는 대신 지상의 재료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놀라운 성능의 장비로 재탄생한다는 사실은 지상에서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지식이다. 비록 값비싸긴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문명화된 도시에서는 이렇게 몬스터의 신체 부위로 제작된 아이템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단순한 형태를 예로 들면 지네의 송곳니로 쟁기 날을 만들거나, 더 커다란 짐승의 뼈를 가지고 쟁기를 통째로 조각하기도 한다.

그보다 더 귀한 보상은 바로 몬스터 코어다. 몬스터가 어떻게, 그리고 왜 코어를 형성하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가장 널리 퍼진 가설은 몬스터들이 지속적으로 마나를 흡수하고 압축해서 신체 내에 강력한 힘의 원천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지상의 몬스터로부터는 발견할 수 없는 특징이기도 하다. 마법사들 또한 주변의 마나를 사용하거나 특수하게 제작된 마나 저장 장치를 휴대하며 주문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몬스터 코어처럼 체내에 마나의 근원을 형성한 사례는 여태까지 없었다.

몬스터 코어는 몬스터가 사망한 이후에도 마나를 흡수하고 저장하는 원래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훌륭한 기술로 적절히 처리한 코어는, 특히 크고 강력할수록, 강대한 무기나 유물이 되곤 한다.

- '판게라와 던전에 대한 문화적 연구' 6장에서 발췌. 마기오 스콜라 타리우스 저.

다 보고 있었다, 멍청아!

나는 놈으로부터 고개를 돌려서 애벌레를 보호했다.

그리고 몸을 살짝 비틀어 무기가 날아오는 방향에 다이아몬드 갑각을 가져다 댔다.

칼날은 그대로 나를 내리쳤다.

팅!

갑각은 아무렇지 않게 단검을 튕겨냈다.

오히려 그 반동으로 낯선 생물의 팔이 끔찍한 각도로 꺾이고 말았다.

내가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만큼이나 적도 놀란 듯했다.

미안하지만 안전이 우선이라···

나는 몸을 비틀었던 방향 그대로 뒤로 돌아, 나를 공격한 털북숭이 적에게 꽁무니를 들이밀고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푸슝!

자기가 날린 공격의 반동 때문에 이미 부상을 당한 상태였던 몬스터는, 산성 용액을 뒤집어쓰자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레벨 9 일레 페람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

너무 약해!

슈퍼 약해!

산성 용액 한 방에 죽는다고?

장난해?

심지어 날 공격하자 마자 자기 팔이 부러졌고···

장난하나?

몬스터가 이토록 약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이걸 먹어도 되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지상의 몬스터는 다 이렇게 약한가?

던전과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아니, 너무 앞서 가지 말자.

이 놈 하나가 모든 지상의 몬스터를 대표하는 건 아니니까.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지.

우리는 털북숭이 몬스터의 시체를 그대로 두고 계속해서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개미 수백 마리가 거의 완벽한 침묵 속에 행진하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난 뒤, 나는 개미들을 멈추게 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는 숲 속의 작은 공터에 도착해 있었다.

사방에 두꺼운 나무들이 빽빽했고, 발 밑의 흙은 부드럽고 비옥했다.

울창한 수풀 안에는 분명 풍부한 생명이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여기가 좋겠어!

이 정도면 인간 사회에서 꽤 멀어졌을 것이다.

적어도 하루 안에 우리를 찾아내지는 못하겠지.

솔직히 더 멀리 가고 싶었지만···

이 숲이 얼마나 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계속 가다 보면 반대쪽 끝으로 나가서, 또 다른 농장과 마주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니 일단 오늘은 여기 자리를 잡고···

더 움직이기 전에 주위를 정찰해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내가 소리치며 지나가자 일개미들이 더듬이로 내 머리를 토닥였다.

개미 무리의 한복판에서, 나는 경호 병력을 거느린 여왕 개미와 만났다.

"둥지를 지을 장소를 찾은 것 같습니다. 여기다 애벌레들을 두고 사냥을 나가면 좋겠어요. 운이 좋다면 근처에서 바이오매스를 풍족히 확보할 수 있을 거예요."

여왕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상당히 지쳐 있는 기색이었다.

하긴 여왕은 웨이브가 시작된 이후로 한 번도 쉬지 않은 유일한 개미였다.

어쩌면 지금 가장 잠이 필요한 건 유충들이 아니라 여왕 개미일지도 몰랐다.

역시 개미는 개미였다.

일개미들은 뚝딱 임시 둥지를 만들어 냈다.

무수한 개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실로 놀라웠다.

수백 마리의 일개미들이 지친 기색도 없이 땅을 파내려 갔다.

몇 시간 만에 공터에는 나무 높이 만한 개미 언덕이 생겼다.

일개미들은 애벌레들을 보살피기 위해 간단한 방만 몇 개 만들었고, 여왕은 새로운 둥지의 중심부에서 호위들의 보호를 받으며 마침내 눈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나와 타이니가 쉴 수 있는 조그만 방을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방 구석에 소중한 몬스터 코어들과···

내가 데리고 온 조그만 애벌레를 가져다 두었다.

아···

너무 피곤하다.

제발 자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그날 밤 둥지는 잠을 자는 거인처럼 푹 쉬었다.

일개미들은 웨이브가 시작되고 나서 지금까지 나 만큼이나 있는 힘을 다해서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교대로 보초를 서는 몇 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피로를 풀기 위해 깊은 잠이 들었다.

오백 마리가 넘는 개미들이 모두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서 쥐 죽은 듯 수면을 취했다.

나는 자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기 전, 둥지 한쪽에 모여 있는 유충과 번데기들을 뿌듯한 마음으로 쳐다봤다.

우리 둥지의 다음 세대들이 깨어날 날도 멀지 않았다.

···

그대로 잠이 들었던 나는, 모처럼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났다.

너무 좋아!

간만에 원하는 만큼 충분히 잤고, 일어나자 마자 몬스터와 죽도록 싸워야 할 필요도 없었다!

나를 그토록 괴롭히던 웨이브는 이제 당분간 안녕이었다.

어깨의 큰 짐을 덜게 되어 마음이 가벼웠다.

물론 여기서도 마냥 안전하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만큼 시달렸으니···

이 정도의 휴식은 괜찮지 않을까?

내가 만든 작은 방의 한쪽에서는 타이니가 몸을 웅크리고 행복하게 코를 고는 중이었다.

몸을 말고 있는데도 녀석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타이니는 지금도 식사를 할 때마다 눈에 보이게 몸이 자랐다.

대체 얼마나 더 커질지 궁금했다.

방 안의 다른 룸메이트 쪽으로 눈길을 돌린 나는 깜짝 놀랐다.

같이 잠들었던 활기찬 애벌레 대신, 번데기 하나가 벽에 기대고 있었다.

번데기라니!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애벌레가 번데기를 짠 모양이었다.

나는 더듬이로 번데기의 흰 표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번데기는 눈조차 없던 애벌레가 제대로 형태를 갖춘 개미로 성장하는 중요한 단계였다.

애벌레였을 때에도 그렇게 활기차던 녀석이···

개미가 되면 과연 어떨까?

왠지 번데기도 다른 번데기들하고는 조금 다르게 생긴 것 같은데···.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네···

나는 속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또 다른 룸메이트, 코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원래 좀 더 많지 않았나?

깜짝 놀란 나는 둥지를 보호하는 어미새처럼 잽싸게 코어들 쪽으로 달려갔다.

맞아, 분명히 이거보다 더 많았어!

코어가 두 개나 사라졌다!

나는 더듬이로 남아있는 코어들을 살폈다.

휴!

다행히 핵파리의 코어는 무사했다.

그 코어에 대해서는 따로 계획이 있었다.

나는 짜증이 나서 더듬이로 타이니를 찰싹 때렸다.

이 원숭이 녀석이 자다가 흡수한 게 분명했다.

처음에는 코어를 줘도 거부하더니, 이제는 몰래 훔쳐 먹어?

찰싹! 찰싹!

내 사나운 더듬이 공격에 타이니가 느릿느릿 잠에서 깨더니 멍한 표정으로 일어나 앉았다.

내가 여태 자신을 때리고 있었다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켠 다음에야 내 쪽을 돌아봤다.

[밥?]

타이니가 물었다.

···

넌 참 한결 같구나.

[그래··· 사냥하러 가자.]

우리는 방에서 나와 둥지의 수직 통로를 타고 개미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다른 개미들도 슬슬 잠에서 깨어나는 중이었다.

나보다 먼저 일어난 일개미 수십 마리가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중 일부는 여왕 개미를 모시러 아래쪽으로 내려갔고, 나머지 일꾼들은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제 대부분 번데기로 변해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둥지의 일개미 수가 천 마리 이상으로 늘겠군!

···하지만 그것도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만한 식량이 필요할 테니까!

지구의 개미들이 다른 곤충이나 작은 생물들을 거침없이 사냥하는 이유는 다음 세대를 기르기 위한 단백질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정작 성체 개미들은 단백질보다 당분을 주된 에너지원으로 삼았다.

하지만 판게라에서는 달랐다!

몬스터 개미들은 움직이고 또 강해지기 위해 유충들 못지않게 많은 바이오매스를 필요로 했다.

즉 몬스터 개미 둥지는 엄청나게 많은 식량을 소비한다는 의미였다.

사냥을 나가야 했다.

벌써 정찰대 역할을 맡은 개미들이 둥지를 위한 식량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수색을 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개미들이 언덕 밖에 삼삼오오 모여서 주위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개미들은 정찰대가 식량을 수집하러 오라는 신호를 보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타이니와 숲 속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출발했던 인간 마을과 반대쪽 방향으로 움직였다.

인간 문명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피하고 싶었고···

이 숲이 얼마나 넓은지도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근처에 꽤 큰 도시가 자리잡고 있는 걸 볼 때, 숲이 그렇게 크지는 않을 터였다.

잘해야 1, 2주일 동안 숨어 지낼 수 있으면 다행일 것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사냥감을 찾아 숲 속을 돌아다녔다.

내 뛰어난 감각 덕분에 다른 개미 정찰대보다는 훨씬 많은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딱히 둥지 주변에 사냥할 만한 몬스터가 많지는 않았다.

조잡한 무기를 들고 있는 빼빼 마른 털북숭이 몬스터 몇 마리와 더 마주친 게 전부였다.

대체 그런 무기를 어디서 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놈들은 심지어 처음 마주쳤던 털북숭이 몬스터보다도 쉽게 쓰러졌다.

타이니가 주먹으로 한 대 때리면 끝이었다.

지상의 몬스터들이 던전 속의 생물들에 비해 약한 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난제에 부딪혔다.

내가 스킬 레벨을 올리려면 레벨업으로 스킬 포인트를 얻어야 했다.

변이를 위한 바이오매스도 필요할 뿐 아니라, 향후 진화를 대비하거나 코어 공학 스킬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코어 공급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상에서는 그 모든 일이 어려워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방금 던전을 탈출해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안을 드나들 방법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가까워졌다.

던전 몬스터를 사냥하지 않는다면 나는 물론 둥지 전체의 성장이 정체 상태에 빠질 테니까.

그럴 수는 없지!

마나 줄기

흠···

굴을 파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만약에 굴을 파더라도 어디로 파야 하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꽤 큰 도시 근처의 숲에는 몬스터들이 얼마 없는 게 당연했다.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지역에 그 정도 규모의 도시를 세우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우리가 먹을만한 식량 정도는 있기를 바랐는데...

예의 털북숭이 몬스터를 제외하면 우리가 여태까지 마주친 사냥감은 평범한 숲 속 동물들이 전부였다.

가끔 덩치가 살짝 더 큰 곰이나 빛나는 뿔을 가진 사슴 따위를 몇 마리 마주치기는 했다.

그런 녀석들을 사냥하면 식량을 좀 얻을 수는 있겠지만···

둥지를 성장시킬 만큼의 경험치나 바이오매스를 얻기는 부족했다.

그런 성장 동력을 얻을 수 있는 장소는 딱 하나, 우리가 도망쳐 나온 던전밖에 없었다.

젠장!

다시 또 땅을 파서 던전까지 가야 하잖아!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어디로 파야 하느냐였다.

새로운 둥지에서 수직으로 내려가는 굴을 파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보다는 몇 백 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에 새로운 굴을 판 다음, 타이니와 내가 사냥을 할 때만 들르는 편이 나았다.

다른 개미들을 함께 사냥에 데려갈 수도 있겠지.

우리가 뚫고 나온···

그러니까 성당에 있는 통로로 다시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다.

어쩌면 벌써 몬스터들이 그 통로로 기어 나와서 마을을 공격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부디 그 사제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몬스터들에게 축복을 내리려 들지 않아야 할 텐데.

폭군 곰의 머리를 철퇴로 때렸다가는 팔 하나를 잃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인간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떠올리니 어쩐지 기분이 우울했다.

여전히 이 세계의 인간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마음이 정하기 어려웠다.

예전보다 인간을 보고도 별 감흥이 없었다는 사실이 특히 심란했다.

아마 둥지의 개미들을 내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인 일로···

몬스터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화된 것 같았다.

처음 던전에서 나가려고 시도했을 때, 앞으로 다시는 인간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경험으로 배웠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으로부터 마음이 점점 멀어지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뚫어 놓은 통로 때문에 수백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결과는 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몰래 마을로 돌아가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한 번 살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일단 지금은 타이니와 함께 숲을 정찰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숲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어서 되도록 둥지 근처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여태까지는 시시한 사냥감들만 마주쳤을 뿐이다.

울창한 녹음이 진 숲 속은 정말 아름다웠다.

오래된 숲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충만하고 다양한 소리들이 귀를 간질였다.

나는 모처럼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한껏 즐겼다.

던전, 특히 웨이브가 시작된 이후의 던전과는 대조적으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환경이었다.

···잠깐.

저 나무 근처에서 뭔가 열기가 느껴지는데?

나는 타이니를 돌아보며 더듬이로 나무를 가리켰다.

요즘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소통 방식이었다.

더듬이로 빠르고 간단한 신호를 보내는 것 말이다.

멍청한 고릴라 녀석도 대충 알아먹을 수 있을 만큼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내 신호를 본 타이니가 눈을 빛내며 내가 가리킨 방향을 빠르게 살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자, 녀석은 곧바로 얼굴을 구기며 처량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날 보면 뭐 어쩌라고, 임마.

나도 별 거 안 보여.

열기의 근원은 척 봐도 아주 오래된 것 같은 나무였다.

두껍고 구불구불한 뿌리가 나무의 둥치에서 뻗어 나와 아래쪽 흙을 파고 들어갔다.

이끼로 얼룩진 나무 줄기에는 혹과 옹이가 가득했고, 이끼 덩어리가 커다란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이상하네···

바로 몇 미터 앞에서 열기가 느껴지는데, 눈에 보이는 건 나무가 전부였다.

흥미로운데?

나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왜 나무에서 생물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지?

아, 물론 나무도 생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열기가 느껴지는 건 이상하잖아?

나는 뜻밖의 수수께끼에 들뜬 마음을 안고 나무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타이니는 그새 지루해졌는지 바닥에 벌렁 누워서 자기 팔에 난 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타이니···

너는 싸움이랑 밥 말고는 도통 관심이 없구나.

나는 나무에 더 가까이 다가가 더듬이로 줄기 위아래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열기가 느껴졌다.

이 숲 속에 다른 나무에서는 느낀 적이 없었는데, 유독 이 나무에서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더듬이로 계속 나무 껍질을 두드리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나무가 웃었다.

···

어···

톡, 톡, 톡.

까르륵.

···

톡톡톡톡톡톡톡.

내가 더듬이로 줄기를 마구 두드리자, 나무의 한 부분이 계속 웃으며 움찔거리기 시작하더니 나무의 몸통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자세히 보니 이상하게 생긴 나무 인간이 흙 속에서 구르고 있었다.

얇은 나뭇가지 모양의 몸통에 이끼로 가득한 팔이 달려 있었고, 그 끝에는 뿌리같이 생긴 얇은 손가락이 있었다.

내가 더 이상 자신을 간지럽히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자, 알 수 없는 그··· 것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울퉁불퉁한 나무껍질 얼굴에 박힌 두개의 진녹색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봤다.

···

톡톡톡톡톡톡톡

내가 다시 더듬이로 몸통을 두드리자, 나무 인간은 다시 웃으며 어린 아이처럼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

뭐야.

이거 대체 뭐야.

타이니는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끔뻑이며 미지의 생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녀석이 하는 생각이야 뻔했다.

먹을 수 있는 거야?

글쎄, 타이니···

나도 잘 모르겠어···

한동안 나와 타이니는 이 기이한 나무 인간을 먹어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자제했다.

몇 분 동안 더듬이로 나무 인간을 간질이던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간지럽히기 시간이 끝났다는 점을 분명히 한 뒤 나무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봤다.

바닥을 구르며 웃다가 잠시 강아지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본 나무 인간은 결국 두 발로 일어섰다.

녀석이 일어서자 생김새를 좀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말랐군!

걸어 다니는 나무라기보다 대벌레에 더 가까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뭇가지 같은 몸에 인간과 닮은 사지가 달려 있지만, 관절은 눈에 띄지 않았다.

머리는 따로 없고 몸통 위쪽에 얼굴이 달린 모양새였다.

주름과 홈으로 이루어진 얼굴 표정은 놀랄 만큼 풍부했다.

타이니는 이 낯선 몬스터를 자세히 보고 나서 실망스러운 티를 냈다.

아마 먹을 게 별로 없어 보여서 그러는 거겠지···

우리가 자기 근수를 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채로, 그··· 나뭇가지?

그래, 나뭇가지는 눈을 반짝이며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한 뒤 발랄하게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지금까지 이 숲에서 타이니와 내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를 만난 적이 없으니, 아마 안전할 것 같았다.

게다가 이 걸어다니는 나뭇가지에 대해서도 가능하면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상대적으로 무해해 보였고, 둥지의 식구들이나 포르모를 제외하면 처음으로 나와 마주쳤을 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생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타이니와 함께 나뭇가지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속도를 높여야 했다.

나뭇가지는 생각보다 빨랐다!

나나 타이니보다 다리가 짧을 뿐 아니라 너무 말라서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모양새에, 심지어 무릎에 관절조차 없는데···

공기 저항이 덜해서 그런가?

이유가 뭐든, 타이니와 나는 거의 뛰다시피 나뭇가지를 쫓아가야 했다.

그렇게 10분쯤 달리자 나뭇가지가 갑자기 멈춰섰다.

우리는 숲 속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크고 나이든 나무들에 둘러싸인 작은 호수의 표면에는 물결 하나 없었다.

마치 지난 백 년 동안 누구도 여기서 숨을 쉰 적이 없는 듯한 고요함이 주위에 가득했다.

나뭇가지가 우리를 돌아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조금 전까지 분명히 저기 있던 나뭇가지가, 걸어가더니, 다음 순간···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내 열 감지 더듬이에는 녀석의 존재가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주위의 나무들에서 몇 개의 열기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호기심에 사로잡힌 나는 호수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더듬이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스무 개도 넘는 열기가 느껴졌다!

나뭇가지가 우리를 자기네 마을로 데려온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나뭇가지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를 환영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수줍음을 많이 타는 몬스터들 같았다.

그 놀라운 의태 능력으로 나무에 숨어서 적들을 피하는 거겠지.

나무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이 장소에는 뭔가 특별한 점이 있을 게 분명했다.

잠시 주위를 살피던 나는 호수를 응시했다.

방금 수면이 뭔가 친숙한 느낌으로 희미하게 빛나지 않았나···?

나는 호기심으로 마나 감지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과연 호수에서 희미한 반응이 느껴졌다.

저 물에는 마나가 들어 있었다!

태어난 직후 첫 번째 공동에서 봤던 웅덩이가 떠오르며 향수가 밀려들었다.

그 물을 마시고 몸에 마나를 흡수해서 코어를 형성할 수 있었지···

아마 이 호수도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나뭇가지들이 호수 주변에 모여 사는 이유도 마나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애초에 여기 있는 나무들로부터 태어난 생물일 수도···?

뿌리로 호수의 마나를 빨아들인 나무들이 저런 가지들을 만들어낸 걸지도 모르겠군.

결국 중요한 건 마나였다.

진화 메뉴에서 봤던 내용을 생각하면 이 신비한 에너지는 어떤 종류의 힘으로든 변할 수 있고, 심지어 생명 그 자체를 창조할 수도 있었다!

내 생각에는 던전의 아주 깊은 어딘가에 이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원천이 자리잡고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근거는 없지만 왠지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출처는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호수의 물도 어디서 나오고 있을 텐데···

그렇지?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호수로부터 30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까지 물러났다.

타이니가 뭘 하려고 그러는 건지 궁금하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따라왔다.

충분히 거리를 벌린 나는 땅을 파기 시작했다.

턱으로 열심히 흙을 퍼내며 빠른 속도로 파고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호수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10미터 깊이의 굴을 만들었다.

갑작스러운 노동으로 가빠진 숨을 고르며, 나는 마나 감지 스킬로 호수 방향을 살폈다.

역시.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가느다란 마나 줄기가 호수의 바닥과 이어져 있었다.

던전이다!

저 가느다란 마나 줄기는 던전에서 나온 게 분명했다.

그러니 여기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던전과 이어진 통로를 만들어서 경험치와 바이오매스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끝내주는 발견이었다!

저 나뭇가지들에게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덕분에 수고를 엄청 덜었으니까!

던전으로 통하는 길을 찾았을 뿐 아니라 호수의 물로 마나를 보충해 가면서 마법 스킬을 연습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일이 술술 풀리는군!

나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바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더 깊이 파고 들어갈수록 마나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뒤, 나는 놀라운 광경과 마주쳤다.

마나의 푸른 빛이 다시 나를 비추고 있었다.

여러 개의 마나 줄기들이 여기까지 영역을 확장해서, 지상을 향해 뻗어 나가는 중이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시도로 나뭇가지들은 물론 인간들까지 구했는지도 모른다.

이 마나 줄기들이 계속 뻗어 나가 호수와 연결되면···

호수 속에서 몬스터들이 생성되기 시작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제 마나 줄기들은 호수 쪽이 아니라, 내가 새로 만든 통로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감상했다.

아마 여태까지는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몬스터가 생성되지 않았을 터였다.

마나 줄기들이 비집고 올라온 좁은 틈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마나 줄기들이 내 통로 안쪽으로 이어지면···

곧 몬스터가 스폰될 것이다!

음하하하하!

성공이다!

나는 의기양양해서 타이니와 함께 방금 만든 통로를 넓혔다.

몬스터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라고나 할까?

몇 시간 뒤 우리는 지하에 제법 커다란 공동 하나를 완성했다.

공동의 유일한 출구는 꽤 높은 천장에 난 구멍 뿐이었다.

이러면 몬스터들이 지상으로 기어 나오지 못하겠지.

뭐, 마나 줄기가 천장을 지나서 자라면 더 이상 그렇지도 않겠지만···

일단은 몬스터들이 지상으로 나오는 걸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커다란 공동을 만들고 나니 꽤 지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둥지로 돌아가서 낮잠을 좀 잔 다음, 다시 돌아와서 어떻게 되어가는지 확인해 보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노력하고 운도 좀 따른다면···

여기다 훌륭한 몬스터 농장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둥지의 규모와 힘을 효과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겠지!

다만 나와 타이니의 성장에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단점이 있었다.

여기서 생성되는 몬스터들은 우리가 경험치나 바이오매스를 얻기에는 너무 레벨이 낮을 테니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문제는 천천히 생각해 보자.

나는 일단 둥지로 돌아가서 마나를 모두 소모해 마나 형성 스킬을 레벨 9까지 올린 다음, 휴식을 취하고 오기로 했다.

불씨

새로운 환경에 도착한 뒤로 이틀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너무 평화로웠다!

40시간 넘게 아무런 위협도 없었다!

너무 평화로워서 녹아버릴 정도였다.

엄청나게 지루해 하는 타이니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녀석은 싸움의 자극에 굶주린 나머지 마치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중독자처럼 굴었다.

뭔가를 먹을 때를 제외하면 계속 자거나 멍하니 벽을 쳐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너무 가만히 있는 바람에 일개미들이 계속 그 위를 타고 넘어다닐 정도였다.

솔직히 조금은 불쌍하기도 했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런 기분을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목숨을 걸고 싸우는 던전 안의 삶은 끔찍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흥분을 선사했다.

그리고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의 보상이 너무 만족스럽다 보니 끊임없이 싸우고자 하는 유혹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위험한 장소에서 계속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살다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지상에 오니 조금···

심심하다고 할까?

마치 다채로운 색상으로 가득한 추상화 속에 있다가 고요하고 평온한 풍경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타이니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좀이 쑤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멍청한 원숭이 녀석과 달리, 나는 꼭 높은 레벨의 몬스터와 싸우지 않더라도 스킬을 연습하면서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는 중이었다.

어제는 하루종일 타이니와 함께 새로 만든 몬스터 농장에 내려가 있었다.

우리가 돌아갔을 때에는 이미 마나 줄기가 빠르게 퍼져 나간 상태였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몬스터들이 스폰되어 있었다.

놈들은 서로 싸움을 벌이며 우리에게 친숙한 아수라장을 연출했다.

나는 타이니가 결코 반기지 않을 지시를 내렸다.

몬스터들을 무력화시키되 죽이지는 말라고 시킨 것이다.

그때 타이니의 얼굴에 떠오른 실망한 표정은 지금 생각해도 웃겼다.

어쨌든 타이니는 내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다.

녀석은 작은 공동 안을 누비며, 몬스터들의 사지를 분질러 놓으면서도 마무리 공격은 가하지 않았다.

사실 어떻게 보면 끔찍한 광경이었다.

사지가 부러져 기지도 못하는 몬스터들이 바닥에 잔뜩 널브러져 있으니···

타이니가 일을 마친 뒤, 나는 식량을 의미하는 페로몬 자취를 둥지까지 연결했다.

그러자 곧 일개미들이 몰려와서 공동 안으로 들어갔다.

일개미들은 몬스터들의 숨통을 끊고 나서 소중한 바이오매스를 둥지로 운반했다.

타이니와 나는 몇 마리의 시체로 허기를 달랜 다음 공동을 더 넓히는 작업에 착수했다.

타이니와 나는 모두 두 차례 진화한 몬스터인 반면, 농장에 스폰되는 몬스터들은 최저 레벨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놈들을 죽이거나 먹는다고 해도 경험치와 바이오매스는 거의 얻을 수 없었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일개미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치와 바이오매스가 필요하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공동 안의 몬스터를 독점해 봤자 의미가 없었다.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몬스터 농장은 둥지를 강화하는 용도에 쓰기로 했다.

나는 더 많은 일개미들이 레벨을 올리고 진화를 거쳐서, 내가 없어도 잘 싸울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정체 상태인 타이니와 내 레벨도 올려야 하지만, 아직은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공동을 넓히고 다시 몬스터들이 쌓이기 전까지 일개미들에게 모두 나가 있으라고 한 뒤, 나는 마법 스킬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한 마리씩 생성되는 저레벨 몬스터를 연습용 과녁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여태까지 내가 유일하게 사용해 본 패턴은 중력장 뿐이었다.

하지만 내 머리 속에는 훨씬 더 많은 패턴들이 들어 있었고, 지금이 그것들을 시험해볼 기회였다.

내가 가장 먼저 시도한 주문은 한쪽 끝에 뾰족한 가시가 달린 복잡한 구체 모양의 패턴이었다.

나는 몇 차례 실패를 거쳤지만 중력 분비선이 가득 찬 상태라 에너지가 떨어질 걱정은 없었다.

마침내 복잡한 패턴을 완성한 뒤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활성화된 패턴을 본능적으로 발사했다.

공 모양의 주문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서 막 생성된 몬스터에게 명중했다.

그리고 점점 커지더니 몬스터를 빠르게 회전하는 복잡한 모양의 구체 안에 가둬버렸다.

몬스터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구체 안에서 쓰러졌다.

뭔가 엄청난 장면을 기대했던 나는 다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체 안에 갇혔던 몬스터는 그저 바닥에 쓰러져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처치했다는 메시지가 뜨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살아 있는데···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몬스터가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비틀거리다가 도로 납작하게 쓰러졌다.

나는 그제야 놈이 무거운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중력장이 내 근처의 몬스터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라면···

이 주문은 멀리 있는 대상에게 무거운 중력을 가하는 거로군!

이건 중력 화살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나는 신이 나서 다음 한 시간 동안 스폰되는 몬스터들에게 중력 화살을 마구 쏘아댔다.

몬스터들은 주문의 효과가 사라지기 전까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복잡한 패턴의 어느 부분에 얼마나 에너지를 불어넣는지에 따라 주문의 강도와 지속 시간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건 중요한 발견이었다!

실험을 통해 패턴의 어느 부분이 어떤 효과를 결정하는지 알았으니···

패턴을 바꿔서 주문의 효과 자체를 변경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중력 에너지를 사용하는 이상 어차피 중력과 관련된 효과가 나오겠지만···

몬스터들을 바닥에 누르는 대신 공중으로 띄울 수 있다면?

그러니까, 중력이기는 해도 우리 발 아래의 행성이 아니라 주문에 의해 만들어진 힘이잖아?

그럼 꼭 아래로 끌어당겨야 한다는 법이 있을까?

주문을 개조하는 일에는 시간이 꽤 걸렸지만···

생각만큼 복잡하지는 않았다.

주문 자체를 완전히 바꾸려는 게 아니라 특정한 부분만 위아래를 바꾸는 거니까 말이다.

그래도 십여 차례의 실패를 거치고 나서야 능숙하게 패턴을 변형할 수 있었다.

나는 흥분해서 패턴에 에너지를 불어넣은 뒤 막 스폰된 지네 몬스터를 향해 발사했다.

구체는 역시나 회전하며 점점 커져서 지네를 안에 가뒀고···

다음 순간 지네가 엄청난 기세로 날아올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천장에 부딪혔다!

···

내가 에너지를 너무 많이 투입했나 보군···

어쨌든, 통했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잠깐 그 자리에서 춤을 췄다.

다리가 여섯 개라 탭댄스를 추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중력장 주문도 이런 식으로 개조할 수 있다면 주위의 모든 몬스터를 공중에 띄워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건가?

빨리 시험해 보고 싶은데!

다음날, 둥지에 다시 식량을 보급하고 농장을 조금 더 넓힌 뒤 나는 두 번째 주문의 연습에 들어갔다.

이번 패턴은 '화살'보다 좀 더 난이도가 높았지만 어찌어찌 형성을 마칠 수 있었다.

완성하고 보니 길다란 창의 중간중간 여러 개의 고리가 돌아가는 형태였다.

창대보다는 고리들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각각의 고리는 더 작은 고리들을 복잡하게 연결해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완성한 창이 쏜살같이 날아가서 몬스터의 몸에 명중했다.

창이 몬스터의 몸에 박히자, 고리들이 일제히 회전하며 점점 커졌다가 다시 줄어들었다.

갑자기 날아든 창에 가슴을 뚫린 몬스터는 놀라서 상처에 발톱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아무런 상처가 없다는 사실에 더 놀라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다소 의아했다.

저 창이 무슨 일을 한 거지?

그때 뭔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창대의 고리가 회전하며 커졌을 때 근처의 가시 도마뱀 한 마리가 그 범위 안에 있었다.

그 도마뱀이 창에 명중당한 몬스터를 향해 끌려오는 중이었었다!

필사적으로 버티던 가시 도마뱀은 결국 공중을 날아와서 처음 창에 맞았던 몬스터와 부딪혔다.

가시부터 말이다.

그러니까 이 주문은 목표로 한 몬스터에게 강한 중력을 부여하는 거로군.

근처의 다른 몬스터들을 끌어당기게 말이야.

음하하하하!

이 주문은···

중력 창이라고 부르자!

···

창처럼 생겼잖아!

물론 이틀 내내 이 두 가지 주문만 익힌 건 아니다.

나는 매일 밤 잠들기 전마다, 코어가 텅 빌 때까지 몇 시간이나 마나 형성 스킬을 연습했다.

그리고 이틀째 밤에 마침내 보상이 돌아왔다!

[마나 형성 스킬이 10레벨이 되었습니다.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다.]

예에에에쓰!

좋았어!

타이니가 근처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두 개의 더듬이를 서로 부딪혀서 혼자 하이파이브를 했다.

[마나 형성 -> 마나 변환. 비용 1 SP. 이 스킬은 아무런 속성도 없는 마나를 다른 속성으로 변환하는 법을 익힐 수 있게 합니다. 스킬 레벨이 오르면 변환 과정에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숙련도를 높여줍니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스킬이었다.

구입!

업그레이드를 확정하자 방대한 지식이 내 머리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

베인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교 도중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났을 때에는, 공포가 베인의 심장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 몬스터가 순순한 자세로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자 공포는 점차 경이로 바뀌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몬스터를 본 베인은 신성한 시스템이 자신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고, 자신이 취할 수 있도록 축복받은 과실을 내렸다고 확신했다.

이런 영광이!

이런 은총이!

그 순간 베인은 자신이 신의 발치에 닿았다고 느꼈다.

제물로 바쳐진 몬스터의 머리를 교회의 성물로 내리쳤을 때 밀려들었던 벅찬 감정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온몸이 떨릴 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베인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그 끔찍한 몬스터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앞으로 달려들어 무시무시한 턱으로 자신의 팔을 물었을 때···

그리고 그 턱에 물린 팔이 종잇장처럼 쉽게 잘려 나갔을 때···

자신이 시스템의 선지자가 되는 위대한 운명을 맞이했다는 베인의 착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베인은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베인의 눈에 떠오른 광기에 겁을 먹은 마을 사람들은 감히 사제의 눈빛을 마주하려 들지 못했다.

사람들은 베인을 치료하기 위해 약제상으로 옮겨서 치료한 다음, 작게 수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사실 치료는 필요하지 않았다.

저주받은 몬스터가 주문으로 상처를 이미 아물게 했기 때문이다.

잘려 나간 팔을 재생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치유 마법의 전문가가 필요했다.

열에 들뜬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베인은 자신의 머리맡에서 오가는 불안한 대화로부터 몇 가지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수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

시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도시를 탈출하는 중이다.

성문에 빗장이 걸렸다.

여왕이 죽었다.

여왕은 살아 있다.

반란이 일어났다.

외부의 침략이다.

두 번째 대격변이 일어나서 던전이 폭주했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서 서로에게 온갖 모순되는 말들을 떠들어댔다.

다음날, 베인은 당면한 위기에 대처할 방안을 논하기 위해 마을 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천히 베인의 혈관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여기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시스템이, 신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베인은 그 부름을 느낄 수 있었다.

코어가 필요해

부상을 입은 사제가 마을을 가로지르자, 마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모자를 벗거나 고개를 숙이며 길을 비켰다.

사제의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빛을 감히 마주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촌장의 저택에 도착한 사제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촌장의 상징인 비단 로브 차림의 뚱뚱한 남자가 책상에 앉아 있었다.

마을의 유지들이 그 책상 주위를 둘러싼 채였다.

베인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자 촌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보시오, 여러분. 우리 신실한 사제님께서 벌써 부상을 털고 일어나셨군! 이는 축하할 만한 일이니, 잠시 회의를 연기하고 축배를 들도록 합시다!"

방 안의 몇몇 사람들은 환호하며 일어섰고, 다른 몇몇 사람들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점 주인인 루터 부인은 회의 연기에 반대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촌장은 답지 않게 빠른 일처리로 이미 하인들을 불러서 술잔을 내오라고 시키는 중이었다.

베인은 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경멸의 빛을 드러냈다가 이내 억눌렀다.

비단 로브를 걸친 눈 앞의 바보는 자신의 의무를 방기하고 술에 취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작자였다.

몇 년만 더 저렇게 흥청망청 지내다 보면 물려받은 재산과 와인이 모두 말라붙을 터였다.

"감사합니다만 에브루이스 촌장님, 회의를 연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병상에서 일어난 이유는 공 그리고 마을 의회와 함께 당면한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서니까요."

베인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심지어 에브루이스조차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편한 기색이 드러났다.

"오··· 오, 좋소. 정말로 좀 더 쉬지 않아도 괜찮겠소, 베인 사제? 보아하니 로브를 갈아 입을 새도 없었던 모양인데."

촌장이 어떻게든 일을 미뤄 보려는 헛된 시도를 했다.

"제 믿음을 상징하는, 제가 시스템의 이름으로 흘린 피로 얼룩진 로브가 촌장님을 불쾌하게 합니까?"

촌장은 뚱뚱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무슨 그런 말을! 그런 뜻이 아니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베인이 빈 의자에 가서 앉더니 루터 부인을 가리켰다.

"루터 부인, 지난 이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몬스터들이 우리를 위협했습니까?"

나이 든 여자는 사제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다소 놀란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뇨, 사제님. 우리는 그 개미들의 다리 한 쪽도 보지 못했어요. 개미들은 곧장 숲 속으로 들어갔어요. 사제님이··· 공격을 당한 뒤에요."

그렇게 말한 루터 부인은 마치 자신을 응시하는 베인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불에 데이기라도 한 듯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지금 몬스터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수도의 소요 사태예요. 오늘 하루 종일 수도에서 소식이 오지 않고 있어요. 거리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병사들이 상업 지구에 불을 지르고, 성의 계단에 피가 흐르고 있는데 말이죠. 온통 끔찍한 소문들 뿐이에요. 사람들이 겁에 질려서 일도 하지 못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도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만 쳐다보고 있다고요!"

베인이 멀쩡한 손의 관절이 하얗게 변할 만큼 세게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수도의 소요 사태가 더 심각하다고 하셨습니까? 던전의 하수인들이 바로 우리의 발 밑에서 솟아난 일보다 더?"

이제 사제의 한 마디 한 마디에서는 단지 열정을 넘어선 증오심이 드러나,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몸을 뒤로 젖히게 만들었다.

루터 부인이 표정을 가다듬고 응수했다.

"마을에서 그 몬스터들에게 목숨을 잃어버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하지만 도시 안에서는 수백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죠. 우리들 중 대부분은 도시에 가족이 있어요, 사제님. 사제님의 부상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지금은 그 개미들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다고요!"

그 말에 베인이 벌떡 일어서서 외쳤다.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던전이 지상까지 길을 뚫고 그 하수인들을 올려 보냈는데, 고작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말입니까?! 정말로 우리 앞에 놓인 장대한 운명이 보이지 않는 겁니까?"

몇몇 사람들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의자에서 몸을 뒤척였다.

에브루이스 촌장은 사제의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시도했다.

"당신은 이틀 전에 교회에서도 그 비슷한 말을 했지만, 베인 사제, 뭐랄까, 결국··· 아니지 않았소?"

베인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촌장 그리고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을 차례로 노려봐서 다들 시선을 피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저는 위대한 시스템께서 우리를 부르신다고, 이 마을의 주민들을 축복하기 위해 가장 큰 축복인 경험치를 내려서 우리를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 담금질하려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건!"

베인이 붕대로 감겨 있는 자신의 잘린 팔을 사람들 앞에서 흔들며 말했다.

"제 오판이었습니다. 전 어리석게도 시스템께서 손만 내밀어 취할 수 있는 과실을 가져다 주셨다고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시스템 안에서 선물 같은 건 없습니다. 오직 보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보상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야 하는 것이고, 전 그 사실을 간과한 죄로 벌을 받은 것입니다!"

에브루이스가 손을 들어 사제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우리는 무기를 들어야 합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베인은 계속해서 열변을 토했다.

"악마가 이끄는 저 잔악한 짐승들은 다시 돌아올 겁니다. 그리고 더 많은 놈들이 나타날 겁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우리의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험에 응해야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베인은 경악한 유지들로부터 등을 돌려 촌장의 집을 나갔다.

그리고 마을 광장으로 걸어가서,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베인은 웅변 스킬을 한계까지 발휘해서 청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사람들이 서서히 마을 광장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을 때, 몇 마리의 몬스터가 교회의 구멍을 통해 나타났다.

베인은 사람들에게 무장하라고 재촉한 뒤, 군중을 이끌고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교회 건물로 들어가서 몬스터들을 무찔렀다.

사람들이 승리의 함성을 지르며 자축할 때에도, 베인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베인은 사람들에게 교대로 교회에서 경비를 서도록 시킨 뒤 숲 쪽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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