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세계수.
70. 세계수.
순간 빡쳐서 말이 헛나왔다.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언제든 떠날 수 있었다고?
그러니까 내가 헛짓거리를 했다는 거야?
욕이 막 튀어나오려는데······.
"뭐? 일부러 갇혀 있었다는 뜻인가?"
시노우엘이 잡혀 온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수림의 거신목을 연구하던 중 프랭크 사령관의 카야킨 사냥팀에게 눈에 띄었고, 사로잡혀 장벽 너머로 끌려왔다고 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을 거치고 거쳐 최종적으로 도착한 것이 바로 이곳 바이마르 대영지.
"용케도 잘 버텼군."
"나는 생명체의 마음을 열어 내 의지를 깃들게 할 수 있습니다."
"정신 조작 같은 건가? 세뇌? 아니면 최면?"
"전부 비슷한 의미일 겁입니다. 다만 강제적으로 내 뜻에 맞춰 조종한다는 것보다는 스스로 마음을 열도록 유도하는 거지요."
"그래서 그 정신 조작으로 방금 저 시녀와 라디프 공작을 세뇌한 건가?"
"낸시는 저를 좋아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크기에 배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라디프 공작과는 협상을 했습니다."
'협상이라고?'
머리가 복잡했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 중에서 가장 안 좋은 것이 뽑혔다.
어쩐지 일이 술술 잘 풀리더라니!
좀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차라리 정신이 망가진 상태로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면, 내가 구해주고 엘프들에게 큰 빚을 남겼을 것이다.
그럼 대수림에서 엘프들의 능력을 앞으로 10년은 더 써먹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 그녀는 너무나 온전한 상태였다.
"대체 무슨 협상을 했다는 거지?"
"라디프 공작은 우리 엘프들에게 넓은 땅과 숲을 내주기로 했습니다. 전 그곳에 세계수를 심고 대수림에 흩어져 있는 엘프를 모아 이 세상에 적응하며 살고자 하는 겁니다."
"그걸 라디프 공작이 순순히 허락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 없이 움직이는 동물이 아니다.
특히 대영지의 영주쯤 되는 인물은 웬만한 조건에 수백의 엘프들을 받아들이고 넓은 땅까지 내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엘프는 줄 게 없을 텐데······?
궁금함에 직접 물었다.
"그럼 라디프 공작이 얻는 것은 뭐지?"
시노우엘이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엘프의 우정과 세계수의 열매입니다."
"세계수의 열매?"
"엘프는 평균적으로 200년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수의 열매를 먹어 하이엘프가 되면 500년을 살 수 있죠."
"아! 그러니까 라디프 공작이 세계수의 열매로 자신의 수명을 더 늘리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당신이 열었다는 것이군."
"맞습니다. 에테나의 말처럼 매우 영리하신 분이시군요."
시노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만큼은 아니겠지만, 인간도 2배의 수명은 확보될 겁니다."
2배의 수명이라니, 솔직히 나도 욕심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오래 산다고 해서 그 인생이 즐거운 것은 아니다.
이미 세상의 멸망을 한번 겪어본 나로선, 어떻게 사는지가 더 중요하지.
"그런데, 그 세계수의 열매가 언제 나는 거지? 내가 알기로 식물은 일단 나무로 성장한 다음에 열매가 열리는 거로 아는데?"
"씨앗을 심고 첫 열매는 20년 후에 열립니다. 그리고 20년마다 50미터씩 자라고, 열매가 하나씩 더 열리지요."
"라디프 공작이 지금 60살이니까. 80살이 되야 먹을 수 있다는 말이군. 그리고, 아직 씨앗이 심어진 것도 아니니까. 어쩌면 몇 년 더 걸릴 수도 있고."
어이없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20년 이상을 기다린다니 라디프 공작의 인내심이 대단하군. 그 전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시노우엘이 내게 미소를 지었다.
"인간의 욕망은 다채롭죠. 당신의 바람은 뭐죠? 건강? 성공? 아니면 재물? 그것도 아니면 사랑인가요?"
"왜 이번엔 내 마음을 열어서 조종하려고? 그런 건 심지 약한 사람한테 통하는 거라고!"
내 반응에 시노우엘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모든 생명체가 다 마음을 여는 건 아니니까요."
에테나가 지금 상황을 지켜보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에테나, 그래도 난 시노우엘을 구하겠다는 계약은 지킨 거야. 그러니까 엘프는 앞으로 4년은 더 날 도와줘야 해. 계약은 계약이니까."
그때 시노우엘이 끼어들었다.
"그건 제가 보증하지요. 세계수를 걸고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에테나, 네가 마르실에게 내 뜻을 전해 줄 수 있겠니?"
"네. 시노우엘님."
"그럼 됐어."
다행히 엘프와 계약은 유효하다.
다만 계약 연장은 틀렸군.
하지만 괜찮다.
4년이면 나도 전진 기지도 자리를 잡았을 테니까.
그 후엔 정찰 임무를 엘프, 대신에 오크를 시켜야 하나?
안당고낙은 오크도 2명은 태울 수 있었으니, 좀 위험하긴 해도 정보는 계속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리고 세계수 씨앗을 구하러 갔다는 엘프 원정팀 말이야. 돌아올 때가 지나지 않았나? 내가 그 이야기를 들은 게 2년 전이라서 말이야."
시노우엘은 아무 말 못 했다.
"그걸 라디프 공작이 알진 모르겠군."
"그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원정팀을 돕기 위해 기간트 사냥팀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뭐? 라디프 공작이 대수림에 기간트를 보낸다고?"
이건 정말 의외였다.
라디프 공작은 돈을 아주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대귀족치고는 상당히 씀씀이가 인색한 영주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수림에 사냥팀이라니······.
차원 균열 너머로 기간트 병력을 보내는 것은 조금만 상상해도 돈이 엄청나게 드는 일이었다.
"허! 엘프 원정대는 실패했을 테니, 그들을 돕기 위해 가는 건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원정팀이로군."
시노우엘은 이번에도 반박하지 않았다.
"우리 세상과 연결된 차원 균열이 대수림 북쪽에 있습니다. 새로운 인간 사냥팀이 그곳을 통과해 세계수의 씨앗을 구해올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녀로서는 최후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세계수 씨앗을 구하러 보낸 원정팀은 2년 전이 아니라 훨씬 더 오래전에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원정팀은 소식이 없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세계의 누군가 힘 있는 사람을 찾았을 것이고, 적당한 사람이 바로 라디프 바이마르 공작이었다.
'이제 보니 일부러 잡힌 거군.'
어쩌다 납치된 엘프가 제국의 권력가들에게 상납 되고 있다는 것은 엘프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엘프의 지도자 격인 시노우엘이 몰랐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인간의 마음을 이용해 기간트 원정팀까지 이계로 보내기로 했으니, 시노우엘의 계획은 성공한 것이다.
나 같으면 황제를 꾀었겠다.
그는 모든 권력의 정점이니, 얼마나 오래 살고 싶을까?
아니지! 라디프 공작이 실패하면 다음엔 황제한테 가려나?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 웃음의 의미를 알았는지, 에테나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시노우엘, 돌아가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묻고 싶군. 대체 세계수가 뭔데, 그렇게 씨앗을 찾아 키우려고 하는 거지? 그런 거 없어도 엘프들의 능력이라면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시노우엘이 처음으로 매우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세계수는 그 자체로 훌륭한 방어 요새입니다. 그리고 거신목을 연구하면서 알아낸 건데, 세계수를 거신목에 접목할 수 있다면, 웬만한 괴수는 범접할 수 없을 겁니다."
"요새라 나쁘진 않군. 그런데 고작 그것뿐이라고?"
그것 때문에 수백이 넘는 엘프 연합 원정대를 보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노우엘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세계수는 정령 차원과 다른 차원을 잇는 통로 같은 겁니다. 그러니 세계수가 있어야 이 세계에 정령이 들어올 수 있고, 그래야 엘프가 정령을 부릴 수도 정령 마법을 쓸 수도 있습니다."
"아! 정령이라면 인정이지. 꼭 찾아서 성공하길 빌지."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알아낼 정도는 다 알아냈다.
시노우엘을 구한 대가는 이미 엘프 정보원으로 받았으니 상관없었고.
그랬기에 눈앞에 하이엘프를 다그치기보단 그냥 이해해주기로 했다.
소수의 엘프가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정령 마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니면 언제 인간들에게 사로잡히거나 괴수에게 잡아 먹힐지 모르는 불안한 삶을 살게 될 테니까.
물론 난 정령 능력 없이도 잘 대우해 줬을 텐데······.
"에테나 그만 가자. 응?"
에테나는 조금 전부터 시노우엘에게 무언가 말을 전하고 있었다.
시노우엘이 날 쳐다봤다.
"이 아이한테 들으니, 이곳 영지의 기간트 생산 공장을 보고 싶으시다고요?"
"그렇긴 한데, 그게 가능한가?"
"제가 이 성에서 가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귀공께서 하인 옷을 입으신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건 그동안 우리 엘프들을 도와주신 은혜를 갚는 것이니 부담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난 에테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모든 엘프가 다 에테나 같았으면 세계수 씨앗을 구하는데, 내가 도움을 줬을 수도 있었다.
나도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침입해서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여유롭게 둘러보는 것도 좋겠지.
***
[바이마르 대영지 기간트 생산 공장]
확실히 몰래 들어온 것보다는 훨씬 낫군.
그런데!
'오! 분업화라니!'
흡사 지구의 자동차 공장을 보는 것 같았다.
나이트급 대형 작업용 기간트들이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손, 팔뚝, 팔꿈치, 어깨 등 단 한 가지 작업만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고, 그런 공정이 모여 팔 하나가 완성되고, 또 공정 마지막에서야 기간트 몸통에 사지와 머리를 연결하는 것 같았다.
시노우엘이 거대한 기간트 조립 공정을 돌아보더니, 살짝 한숨을 쉬었다.
"휴! 이곳 인간들의 기술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저 큰 것을 타고 괴수를 상대하다니요. 우리 엘프도 기간트가 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괴수들에게 패하진 않았을 겁니다."
"이건 인간의 기술이 아니야. 거신의 기술이지. 그리고 엘프의 정령 마법도 꽤 강하지 않나?"
전생에 정령을 다루는 헌터들의 힘은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특히 S등급 헌터들은 집채만 한 정령을 소환해 괴수를 때려잡기도 하고,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괴수를 태우거나 수백 개 물의 정령을 소환해 괴수의 몸을 꿰뚫었다.
시노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은 강하지요. 하지만 엘프는 폐쇄적인 종족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잘 다루는 정령을 중심으로 여러 종족과 여러 부족으로 나뉘었죠."
"그만! 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 서로 협력하지도 않고, 각개 격파당했겠지. 대부분 같은 이유로 망하는 거군."
난 고개를 흔들었고, 시노우엘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엘프가 힘을 모아서 괴수를 상대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건 골백번 회귀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보니 엘프도 인간하고 같네.
'응? 여긴 뭐지?'
대부분 공정은 개방되어 있었지만, 한쪽은 막혀 있어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정지! 여긴 출입통제 구역입니다. 들어가지 못합니다."
중무장한 기사들과 병사들이 입구를 막아섰다.
시노우엘이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녀의 팔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중요한 장소인 것 같은데, 여기까지만 보지."
"당신이 원하신다면 그러지요."
우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난 분신인형 짹을 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잘 뒤져봐! 쓸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 마스터.]
71. 저들이 노리는 것.
71. 저들이 노리는 것.
짹을 침투시키고, 입구를 나오다가 한 사람과 마주쳤다.
"어? 시노우엘님께서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방에 계속 있으려니 답답해서 구경 나왔습니다. 공작께서 어디든 가도 좋다고 하셨거든요."
"아! 잘하셨습니다. 종종 밖으로 나오세요. 그래야 저도 만나고 그러죠."
사내는 말하면서 시노우엘의 가슴과 몸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 눈길이 너무 노골적이고 음흉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밤공기가 매우 차갑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우리가 기간트 생산 공장에서 완전히 나올 때까지 사내의 끈적끈적한 시선은 시노우엘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는 시녀와 하인 복장을 한 에테나와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감히!"
에테나가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만둬라!"
"하지만 저놈은 시노우엘님을······."
"나도 안다."
"저자는 누구지?"
내 물음에 시노우엘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에테나가 알아듣지 못하게 제국어로 대답했다.
"장남인 멜른 바이마르 백작입니다. 소유욕과 탐욕이 지나치게 강한 자로, 이곳 영지에 사는 누구보다 제 몸을 원하지요."
"허! 저런 자들 틈에서 용케도 버텼군."
"어쩔 수 없지요. 이런 짐을 아이들에게 맡길 순 없으니까요."
난 이제야 하이엘프가 왜 엘프들에게 존경받는지 알 것 같았다.
***
우린 시노우엘이 머무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잠시 이 아이와 대화 좀 나누겠습니다."
"난 여기서 기다리지."
난 응접실에서 기다렸고, 에테나는 시노우엘과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잠시가 아니라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길게 하는 걸까?
'차원 균열이라······.'
대체 그건 왜 생긴 걸까?
라디프 공작은 괴수에게 멸망한 세상에 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는 있는 건가?
병력을 얼마나 보낼 생각인 거지?
황제나 다른 대영지에는 뭐라고 변명할 거지?
그냥 사냥팀이라고 하기엔 병력이 너무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태까지 대수림에 진출하지 않은 그들이 새로 진출한다면 믿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설마, 에테나가 길잡이로 갈까?'
엘프 중에서 누군가는 자신들이 들어온 차원 균열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야 한다.
왠지 인간과 의사소통이 가장 잘 되는 에테나가 갈 것 같았다.
그녀가 걱정됐다.
정이란 게 무섭네.
2년을 거의 붙어 다녔기에 꽤 정들었나 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내 마법인형이나 걱정하자.'
짹은 잘하고 있겠지?
여기까지 왔으니 바이마르 대영지의 기간트 생산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가고 싶었다.
그랬기에 짹을 기간트 공장에 남겨 뒀다.
바이마르 대영지는 짹을 납치하고 고문했던 삼황자 라인이었기에 죄책감은 없었다.
그리고 이 세상엔 CCTV 같은 것도 없으니, 누가 침입했는지도 모를 거고, 뭘 훔쳐 가도 범인이 누군지 모를 것이다.
현재 짹은 운명의 실타래 범위 밖에 있었다.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짹의 헌터 등급은 벌써 D등급.
인형의 집에서 매일 훈련하니, 성장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은밀한 발걸음(lv.5)]
[공간 거리 재기(lv.4)]
[맹수의 후각(lv.3)]
[도약(lv.4)]
[양손 내려찍기(lv.3)]
[앞발 후려치기(lv.4)]
그는 이미 내가 가진 6개 스킬을 모두 배웠을 뿐만 아니라, 겨우 한 달 보름 만에 스킬 레벨도 나와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은밀한 발걸음(lv.5)은 표범인형에게 배운 스킬로 먹이를 앞둔 표범이 발걸음을 죽이고 아주 은밀히 걷는 스킬이었고, 맹수의 후각(lv.3)은 표범 괴수가 먹이의 위치를 찾거나 경쟁자를 구별하며, 포식자의 움직임을 냄새로 감지하는 스킬이었다.
특히 맹수의 후각은 유지 시간이 길었기에 패시브 스킬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지금 짹이 가진 스킬은 모두 침입에 특화된 스킬이었기에 그가 걸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젠 병렬사고 스킬을 쓸 수도 있었고.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할까.'
짹이, 뭘 챙겼을지 기대감이 컸다.
[병렬사고(lv.2)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짹(lv.3) 분신인형과 의식을 연결합니다.]
난 이제 20분간 짹의 의식을 공유할 수 있었다.
'짹, 뭔가 좀 나왔어?'
마법진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공유됐다.
'오! 마법진 설계도를 찾은 거야? 그건 무조건 챙겨.'
짹이 지금 들어가 있는 곳은 공장 안에 서류 보관실인 것 같았다.
입구는 경비가 삼엄했지만, 막상 내부는 조용했다.
아니면 기사들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일지도······.
마나를 보는 눈으로 기간트를 분해해 한 땀 한 땀 마법진을 베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작업이었다.
하라면 하겠지만, 기간트 자체에서도 마석이 소량 함유되어 있었기에 빛의 밝기로만 마법진을 구분해야 하는데, 하나라도 잘못 그리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 문제가 된 마법진을 찾아내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릴 거고.
하지만 이제 기간트에 사용된 마법진이 나와 있는 설계도를 얻었으니, 기간트 개발은 시간문제였다.
물론 이런 대규모 생산 라인은 만들지 못하겠지만, 내가 가진 거신 갑옷을 모두 오리지널 기간트로는 만들 수 있었다.
'이제 그만하고 동쪽 끝으로 이동해!'
짹에게 의식을 전달했다.
공장 동쪽 끝과 이곳 저택의 거리는 대략 600미터, 아까 이동하면서 살폈다.
그러니까 짹이 내 운명의 실타래 범위에 들어오면 바로 인형에 집에 넣을 것이다.
그럼 완전 범죄였다.
그런데 짹이 뭔가 수상한 것을 발견했는지, 자리에서 멈춰 섰다.
'응? 이건 뭐지?'
그리고 나도 그 거대한 물체를 봤다.
물체가 너무 컸기에 짹에게 조금 멀리에서 보라고 지시했다.
'배라고?'
공장 한쪽에 비밀스럽게 거대한 배가 지어 지고 있었다.
아직 40% 정도로 완성되려면 한참 있어야 했다.
그런데 모양이 많이 이상했다.
배에 거대한 날개가 4개나 있지 않나, 한쪽 날개에는 거대한 프로펠러도 여러 개 달려 있었다.
뭐지?
이런 게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날개 옆쪽으로 내부가 보였다.
천장까지 높이가 대략 15미터.
이거 딱 기간트가 들어가기 좋은 높이네!
'기간트를 수송하는 배를 만드는 건가?'
하지만 너무 크다!
이게 물에 뜰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프로펠러는 왜 달렸지?
이거 설마, 비행선?
소설이나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하늘을 나는 배가 떠올랐다.
고개를 흔들었다.
이 세계의 기술로는 이렇게 큰 배가 하늘을 날 순 없었다.
마석 배터리를 한 번에 1,000개쯤 태우면 가능할지도.
하지만 전혀 수지타산이 맞질 않는다.
비행 몇 번 하면 대영지도 순식간에 알거지가 될 거니까.
게다가 기간트를 싣고 나는 건 더욱 불가능했다.
그러니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내륙인데, 배를 만들어 어떻게 옮기려고 하지?
'혹시, 하이엘프 시노우엘이 말하지 않은 게 있나?'
하긴 그녀가 내게 정보를 다 말해줄 의무는 없지.
일단 대략적인 모습을 확인했고, 시간이 없었기에 짹을 이동시켰다.
짹이 내 운명의 실타래 범위에 가까스로 들어왔다.
'좋았어! 들어가!'
짹을 인형의 집에 넣었다.
병렬사고 스킬도 딱 맞게 끝났다.
'고생했어.'
[아닙니다! 이런 일은 제가 전문입니다. 또 시키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시노우엘과 에테나가 밖으로 나왔다.
"이야기는 끝났나?"
"그렇습니다."
"이제 다시 보긴 힘들겠군."
시노우엘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앞날에 세계수의 은총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나도 당신에게 기간트의 은총이 가득하길 빌지."
난 에테나와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성벽을 넘었다.
***
북쪽으로 가는 길.
일부러 이곳에 올 때도 갈 때도 기차 같은 교통수단은 쓰지 않았다. 그래야 내가 이곳에 다녀간 것을 모를 테니까.
우린 숲에서 야영했다.
"에테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혹시 무게를 가볍게 하는 정령 마법이 있나?"
"가볍게 하는 마법은 모르겠고, 바람의 정령들이 함께 들어준다면 같은 효과를 낼 순 있죠."
"무게가 얼마나 가능하지? 기간트 같은 거 번쩍 들 수 있어?"
"네?"
에테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상급 정령도 그건 힘들 것 같네요."
"그렇군. 정령으로는 불가능하단 말이지."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아니야."
에테나가 날 빤히 쳐다봤다.
모닥불 너머 불꽃에 일렁이는 에테나의 얼굴은 참 아름답다.
"한 가지 묻지. 에테나는 나와 엘프 중에서 누구 편이야?"
"전 타일러님 편이기도 하고 엘프 편이기도 합니다."
"무슨 대답이 그래?"
"그리고 한 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
"타일러님 편을 들어야 우리 엘프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거 말입니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날 라디프 대영주와 같은 수준으로 본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에테나는 맨 처음 만날 그날부터 날 믿고 있었다.
"좋아 그럼! 진짜 궁금한 걸 묻지. 바이마르 기간트 공장에 초대형 배가 있어, 기간트를 한 50대쯤 실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해 보였는데, 내가 보기엔 도저히 물에도 뜰 수 없을 것 같아. 그런데 왜 그걸 만들고 있을까? 그걸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야. 엘프와 무슨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정령 마법을 이용하는 건 아닌 거 같고."
내 말을 들은 에테나의 눈이 세배로 커졌다.
그녀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다.
"제 생각에는 비공정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비공정?"
"하늘을 나는 배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던 세계에서도 비공정은 흔한 게 아닙니다. 특히 비행석이 있어야 하는데, 얻기가 쉽지 않죠."
"그러니까 하늘을 나는 배가 있단 말이군. 그런데 왜 이곳에는 타고 오지 않았지?"
"타고 왔습니다. 대수림을 비행하다 거대한 괴조를 만나 모두 추락해서 그렇죠."
그건 대수림에 추락한 엘프 비공정이 있다는 말이었다.
새로운 정보를 알아냈다.
그리고 라디프 공작의 진짜 속내도 알 것 같았다.
빨라야 20년 후에 생기는 세계수의 열매?
그런 건 처음부터 협상 조건이 아니었다.
비공정의 비행석만 있다면, 지금 만들고 있는 저 거대한 배를 물에 띄울 수도 있다.
그럼, 진짜 항공모함이네······.
어쩌면 하늘을 날게 할 수도 있고!
"추락한 비공정이 몇 대나 되지?"
"우리 일족이 타고 온 비공정은 10대고, 다른 차원 균열을 통해 들어온 엘프 일족들의 비공정도 있을 겁니다."
"뭐? 차원 균열이 하나가 아니야?"
"네, 이 세계와 연결된 균열은 여러 개가 존재합니다."
이건 처음 들었다.
"하지만 추락한 우리 비공정의 비행석을 다 모아도 그렇게 큰 배는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그럼 물에 띄우는 건?"
"그건······, 가능할 수도 있겠네요."
"만약 엘프 세계로 넘어가 비행석을 더 확보한다면? 그 거대한 배도 하늘을 날 수도 있을까?"
"그럼 가능하겠죠."
그때 에테나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이 빨개졌다.
"설마, 저들이 노리는 것이?"
"그래 비행석이야. 세계수의 씨앗은 그냥 부수적인 거고."
에테나는 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시노우엘은 자신이 라디프 공작을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라디프 공작은 그녀와 엘프를 이용해 훨씬 더 큰 것을 노리고 있었다.
'역시 누군가를 이용하려면, 먼저 자신도 이용당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해.'
그리고 대수림에서 비공정을 날리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하늘을 나는 괴수들의 표적이 될 테니까.
하지만 장벽 너머 이쪽이라면?
특히 하늘을 날지 못해도 바다 쪽에서 엄청난 전력이 될 것이다. 지금 이곳의 조선 수준으로 만든 가장 큰 배도 한 번에 기간트 5대를 옮기는 것이 한계였다.
그런데 단 한 번에 그 10배의 기간트를 옮길 수 있다면!
라디프 공작이 뭘 노리는 걸까?
식민지 지배? 해양 패권?
아니면 정말 비공정을 하늘로 띄워 그 힘을 바탕으로 제국까지 노리나? 어쩌면 대륙 전체를?
그를 직접 만나보진 못했으나, 벌써 배를 짓고 있는 것만 봐도 엄청난 야심이 느껴졌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초대형 배가 물에만 떠도 그의 힘이 아주 강력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엘프 차원 너머로 가지 않고, 대수림에 추락한 이들 엘프 비공정들의 비행석만 찾아도 가능한 일이었다.
'이거 내가 할 일이 또 생겼네!'
지금 제국의 전진 기지가 있는 블랙힐 기지보다 더 북 쪽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엘프도 살아서 수백이 넘어왔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그 비행석을 먼저 찾아 챙긴다면······.
'대비행 시대를 먼저 열 수도 있겠어.'
시대의 변화가 느껴진다.
라디프 공작은 이미 그 변화를 느끼고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한발 늦었지만, 대수림은 내 안방 같은 곳이고, 난 수십 대의 기간트와 내 마법인형들이 있었다.
'이거 좀 쉬엄쉬엄하려고 했지만,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지겠어······.'
일단 당장 기간트를 늘리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단 위험한 곳에 가려면 내가 타는 나이트급 오리지널 마장기와 암 드로운의 거신 갑옷의 성능을 높이는 것이 우선이었다.
'헬다임에 가자마자, 메제트의 탑을 올라가야겠어.'
분신인형 짹이 붉은 모래를 찾아왔으니, 메제트의 탑에서 대지 속성 마석을 만들 수 있었고, 거신이 탑에 남겨 놓은 대지 마법진을 거긴 갑옷이나 기간트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다.
72. 기러기 아빠.
72. 기러기 아빠.
에테나가 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인간이 엘프어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엘프가 제국어를 배우는 것은 가능했다.
그동안 왜 안 배웠냐고 물었더니, 마르실 족장이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간의 사상에 물들 수 있다나 뭐라나······.
헬다임에 도착할 때쯤 되자, 에테나와 난 제국어로 모든 대화가 가능해졌다.
게다가 에테나는 드워프어와 오크어도 가르쳐달라고 졸라댔다.
조금 맛보기로 가르쳐줬는데, 눈치가 빨라서인지 금방 깨우친다.
이젠 내 특별함이 없어지는 건가?
"시노우엘님이나 마르실 족장님이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제 생각은 다르다는 겁니다. 저는 세계수도 좋고 정령이나 정령 마법을 부리는 것을 반대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의지하는 건 반대입니다. 그리고 과거 정령의 힘에 기대기보단 엘프도 최선을 다해 기간트에 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얘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나?'
2년 전 윌리엄 호세스 장벽 사령관과 기차를 함께 탔을 때가 계속 떠올랐다.
그때 고막이 뚫어지는 줄 알았지······.
"엘프가 기간트에 타서 엘프 힘으로 세계수의 씨앗을 찾아와야 진정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고, 엘프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드워프와 오크도 우리와 함께 기간트에······."
"그만!"
"네?"
에테나의 말을 끊었다.
"다 좋은데, 기간트는 어떻게 타려고?"
"그건 타일러님께서 알려주시겠죠."
"내가?"
"전 타일러님을 믿습니다. 타일러님이라면 무슨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방법을 제게 알려주시면 열심히 단련해보겠습니다."
"에테나 하사관, 자네 어째 점점 나를 닮아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입니다."
"뭐?"
살짝 머리가 아팠다.
윌리엄 사령관이 나와 대화하면 이런 기분이 들겠구나.
새삼 윌리엄 사령관을 만나면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가 비행석을 발견하면 기간트의 무게를 줄이는 데 사용하는 건 어떨까요? 그럼 대수림을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동이야 더 빠르겠지. 하지만 위력은 약해질 거야. 기간트의 장점이 거대한 체격과 엄청난 무게에서 나오는 파워야. 기간트가 가벼워지면 괴수에게 그만큼 타격을 많이 줄 수 없을 거고, 그건 이미 기간트가 아니지."
"아! 그럼 수송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좋겠네요."
"그걸 알고 있기에 라디프 공작이 거대한 배를 만들고 있는 거야. 한 번에 기간트를 많이 태워서 보내려고. 만약 비공정이 하늘을 날기 시작하면, 타국도 그렇고 모두 머리가 깨질 거야. 비공정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니까. 그건 완벽한 비대칭 전력이거든."
에테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공정을 잡으려면 비공정밖에 없겠네요."
"그렇지. 그때가 되면 모르긴 몰라도, 가디언 제국이나 대륙의 다른 왕국들도 엘프 차원으로 러쉬를 가지 않을까 싶네. 마석 산업혁명에 이은 비행석 산업혁명이라고 할까?"
"그러니 우리도 하루빨리 대수림으로 가야 합니다. 가서 우리 일족이 타고 왔던 비공정부터 먼저 찾아서 비행석을 확보해야 합니다."
난 활발해진 에테나를 보며 피식 웃어줬다.
"대체 시노우엘이 뭐라고 했길래,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변한 거야? 제국어도 배우고?"
에테나도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전 변한 건 없는 거 같은데요?"
"그래? 그날 시노우엘과 둘이 있을 때, 바이마르 공작가의 기간트 팀을 도와 씨앗을 찾으라고 명령한 거 아냐?"
"아니요! 제겐 자기 생각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응?"
"그리고 제 생각은 무조건 타일러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겁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난 시노우엘이 에테나와 둘이서 길게 이야기하길래 자신의 계획이 잘 돌아갈 수 있게 신신당부를 하거나 에테나를 잘 다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정반대로 말했다고?
혹시나 자신이 틀렸을 때는 대비하는 건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시노우엘 자신이 실패하더라도 에테나가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일지도.
"에테나, 엘프도 마나가 있지?"
"물론입니다. 정령 마나라고, 아주 어렸을 적부터 세계수 주변에 있다 보면 자연스레 얻어지는 보석 같은 선물이죠."
"대수림에 가거든 그 마나를 포기할 수 있겠나?"
"그게 무슨 말씀이죠? 마나를 포기하다니?"
"내 생각인데, 엘프가 이 세계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건, 이미 몸속에 다른 마나가 가득 차서가 아닐까? 그래서 몸속의 마나를 완전히 비우면, 혹여 이쪽 세계의 마나를 느낄 수 있을지도·····."
"무슨 말씀인지 알겠네요. 일단 제 몸속의 정령 마나를 완전히 비우라는 거죠."
"그래, 일단 해보고 안되면, 그때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네! 해보겠습니다."
에테나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일어나시죠. 헬다임에 도착했습니다."
"벌써?"
창밖을 보자,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반대쪽 플랫폼에 많은 병사와 기간트가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야 철수하군.'
가디언 제국과 협상의 주된 내용은 발굴팀과 발굴팀을 보호할 기간트를 제외하고 나머지 병력은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가디언 제국도 병력을 너무 많이 끌고 왔고, 우리 역시 그들과 병력을 맞추기 위해 너무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왔다.
그랬기에 우린 5군단을 제외하고 모두 철수하기로 했고, 가디언 제국도 마장기 100기 정도만 발굴지에 놓고 철수하기로 했다.
'길어야 2년이야······.'
그 전에 어느 쪽이든 이데아 제국의 황궁을 발굴하면 평화는 깨질 수 있었다.
발굴지야 서로 철저히 지킬 테니까 잘 모르겠지만, 거신 갑옷을 발견하고 전진 기지나 장벽 너머로 옮기기 시작하면 티가 안 날 수 없을 테니까.
난 그 전에 최대한 빼먹으면 되고.
"집으로 바로 갈까요?"
"아니, 헬다임 지부로 가자."
***
"대수림 정보대 지부장이 이렇게 오래 대수림을 벗어나도 되는 건가?"
프레디 지부장이 날 도끼눈으로 올려다봤다.
"그래서 저희 지부가 정보를 보내오지 않았나요?"
"물론 계속 보내오지."
"그럼 된 거 아닙니까?"
"아니야! 자네가 있을 때와 정보 질이 달라."
"하긴, 제가 좀 유능하긴 하죠."
프레디 지부장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담배를 찾았다.
"아! 잠시만요."
내가 손을 내밀자, 에테나가 작은 상자를 넘겼다.
그리고 난 그 상자를 프레디 지부장 책상 위에 올려놨다.
"이게 뭔가?"
"싸구려 담배 좀 그만 피우십시오. 할데가르에서 최고급으로 샀습니다."
"뭐?"
프레디 지부장이 상자를 열었다.
"오! 자네가 웬일인가? 이거 아주 비쌀 텐데?"
"한 10상자 더 샀으니까. 당분간 싸구려는 피지 마십시오."
"그래?"
프레디 지부장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난 할 수 없네!"
"눈치가 빠르시군요."
"아무튼, 난 못해."
"이번엔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그래? 뭔데?"
"13살 소녀가 한 명 있는데요, 수도로 유학을 좀 보내고 싶습니다."
프레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유학? 수도로 말인가? 금화가 아주 많이 들 텐데? 아! 그 카야킨 전진 기지에서 데려왔다는 소녀 말인가?"
"네. 금화는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좋은 학교를 좀 알아봐 주십시오."
"흠. 학교라······. 금화가 많이 드는 학교는 대부분 좋은 학교지. 하지만 황립 사관학교 진학을 목표로 한다면, 아주 적당한 곳이 하나 있지. 내 딸도 거기 다니는데, 올해 졸업하지."
"네? 지부장님, 노총각 아니셨습니까?"
"아니, 아주 일찍 사고 쳐서 결혼했지네. 아내는 수도에서 딸 뒷바라지를 하고 있고."
"아! 그렇군요. 거기 학교로 해주십시오."
"귀족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인데 괜찮겠나?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다니는 아이들도 많고."
"네. 괜찮습니다."
"알았네. 호위 기사로 우리 정보국에서 사람을 보내줄까?"
"아닙니다. 마침 적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짹이라면 아주 적당한 호위 기사지.
누구든 우리 앨리슨을 괴롭히면 흔적도 없이 처리할 수도 있고.
"내가 알아보고, 자네 집으로 연락을 주지."
"감사합니다."
프레디 지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타일러 중령, 이제 대수림으로 가야지?"
"며칠 쉬고 갈 겁니다. 그보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까?"
"별다른 움직임이라니?"
"장벽 관문을 넘어 대규모 사냥팀이 나가는 그런 일 말입니다."
"어?"
프레디 지부장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 달 전에 바이마르 공작 가문과 남부 영지의 연합 사냥팀이 대수림으로 들어갔네."
"연합 사냥팀이요?"
"그래, 바이마르 가문의 기간트 50기와 제국 남부 10여 개의 영지에서 모인 기간트 50기가 관문을 넘었네. 그리고 오리지널 기간트가 3대나 포함되어 있네."
벌써 대수림으로 향했구나!
100기라니 생각보다 많은 기간트 숫자에 살짝 놀랐다.
그리고 오리지널 기간트까지 있다니.
그런데 한 가지는 의외였다.
라디프 공작이 다른 영지의 기간트까지 끌어들일 줄 몰랐다.
100기라면 자기 영지의 기간트만으로 충분했으니까.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함인가?
아니면 남부의 영주들이 이미 라디프 공작에게 완전히 넘어간 건가? 그리고 타일러의 출신도 제국 남부의 테레니스 영지였다.
"자네, 무슨 생각을 하나?"
"아닙니다. 다음 관문이 언제 열립니까?"
"사흘 후네."
"그럼 사흘 후에 대수림으로 가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뭐 더 필요한 거 없고?"
"네!"
나와 에테나는 프레디 지부장에게 경례했다.
"아! 타일러 중령."
"네?"
"자네 영지를 알아보러 다닌다면서?"
"네에?"
아니 무슨 내 정보를 모르는 사람이 없네!
"놀랄 필요는 없네. 어디에 떠벌리진 않을 테니, 얼마 전 찰스 국장께서 할데가르로 가시기 전에 우리 지부에 들르셨네."
"네?"
"그리고 은퇴하고 뭘 할 거냐고 묻더군."
"은퇴요?"
"별도 달아 봤으니, 그만 내려와야지."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직 창창하신 분께서?"
"사실 내 아내 건강이 좋지 않네. 나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던 거지. 다행히 내 딸이 내년에 황립 사관학교에 입학하네. 거긴 전원 기숙사에 학비가 전액 무료라 우리도 부담을 덜었네. 그래서 내년에 은퇴해서 아내와 공기 좋은 곳에서 조용히 살겠다고 하니까. 찰스 국장께서 내게 자네 영지 이야기를 하지 뭔가?"
"아!"
"허! 그런데 진짜였군. 영지를 산다는 게."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 찰스 국장이 내게 똑똑하고 능력 있는 영지 관리자를 소개해 준 거군!
오늘따라 프레디 준장의 어깨가 많이 내려가 있었다.
그리고 보니 늘 청승맞게 사무실에서 자고, 싸구려 담배만 피우는 이유가 기러기 아빠라서 그랬구나!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다니, 어쩔 수 없겠군요. 이왕 공기 좋은 곳에 요양 가시려면 발레리온 영지가 어떻습니까?"
"발레리온?"
"아주 아름다운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주변에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가을이면 넓은 들녘에 황금빛 밀이 파도처럼 출렁인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멀지도 않고, 열차 역도 있어 이동하기도 쉽습니다."
"발레리온 영지라······, 한번 생각해 보지."
일단 여기까지만 하자.
어차피 어딜 가든 찰스 정보국장의 눈을 피할 순 없을 거니까.
찰스 국장하고 거래할 만한 정보야 차고 넘쳤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담배 고맙네."
우린 집으로 향했다.
***
"와! 타일러 삼촌이다!"
"오! 타일러여! 왔는가!"
앨리슨이 달려오고, 다음엔 드워프가 다가온다.
그다음엔 케네스 영감이······.
"여! 타일러, 왔나? 나와 드워프들이 기간트와 마장기를 전부 고쳐놨네!"
무슨 데자뷰인가?
전과 레퍼토리가 똑같았다.
원래는 일 이야기는 나중에 꺼내는데, 오늘은 시간이 없었다.
"기간트 부품과 조립 시에 각 부위에 새겨야 할 마법진 설계도입니다."
"어? 이걸 어떻게 구한 건가?"
두꺼운 마법진 설계도를 케네스 영감에게 내밀었다.
"마법진마다 제국어로 설명이 따로 적혀 있으니, 먼저 읽어 보시고 드워프들에게 가르쳐주십시오."
"뭐, 함께 배우면 되겠군."
그때 앨리슨이 말했다.
"내가 드워프 말 할 수 있는데! 내가 가르쳐주면 빠른데!"
"앨리슨은 따로 할 일이 있어."
"어? 내가요?"
앨리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오늘 밤은 타일러 삼촌하고 어디 좀 가자."
"히히! 신난다!"
놀러 가는 거면 좋겠는데, 미안하다.
오늘은 진짜 천재의 솜씨가 필요했다.
우린 다시 메제트의 탑으로 향했다.
[메제트의 탑(대지)]
"우와! 여긴 다 커!"
앨리슨이 그 옛날 거신이 썼던 책장, 책상, 의자를 보며 연신 입을 벌렸다.
"앨리슨, 여긴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알려주면 안 된다."
"네! 우와!"
55기의 기간트와 15기의 마장기가 현재 내 인형의 집에 있었다. 그리고 거신인형과 사마귀인형, 표범인형, 킹콩인형까지 지금 내 전력은 최상이었고, 어쩌면 전생의 S급 헌터일 때보다 더 강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난민 기지에 있는 자동인형까지 모두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래도 불안한 것은 지금 내가 가는 곳은 미지의 영역.
이 세계의 인간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깊고 깊은 대수림이었다.
어떤 괴수가 있을지, 또 얼마나 많은 괴수가 있을지 모르는 곳이었다.
그리고 암 드로운과 혈투를 벌였던 S등급 괴수 드라우켄과 같은 무시무시한 괴수도 존재했다.
어쩌면 그 이상의 거수도 만날 수 있었고.
그랬기에 암 드로운이 착용할 갑옷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짹! 붉은 모래를 첫 번째 방 원형 제단에 올려!"
"네! 마스터!"
"나도! 나도 갈래."
짹이 움직이자, 앨리슨이 신기한 표정으로 따라갔다.
이 붉은 모래를 찾기 위해 짹이 얼마나 힘든 여정을 견뎠는가.
그걸 알기에 마지막 재료는 짹이 올리도록 했다.
[블레이즈 사막의 붉은 모래]
드르르륵! 쿵!
드디어 제단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좋았어!"
73. 오크 해병대.
73. 오크 해병대.
[프란시나 숲의 검은 흙]
[툰다라 호수 밑의 부드러운 흙]
[바티안 바위산의 흰 자갈]
[대수림의 단단한 흙]
다섯 개의 원형 석판이 모두 내려갔고.
이제 남은 것은 마석을 올려야 하는 중앙의 거대 제단이었다.
일전에 얼음 동굴에서 A등급 괴수의 몸에서 꺼낸 주먹만 한 최고급 마석을 올렸다.
드르르륵! 쿵!
하지만 한 뼘을 남기고 멈춰 섰다.
마석의 양이 부족한 것이다.
난 또 하나의 마석을 꺼냈다.
맨 처음 살루스 야영지를 털었을 때, 천막 안에서 발견한 금속 상자가 있었다.
단단히 잠겨 있었기에 인형의 집에 넣어놨었다.
그리고 저번에 드워프들에게 부탁해 열었다.
그 안에서 손가락 한 개만 한 최고급 마석이 나왔다.
'이거면 될까?'
마석을 마저 올렸다.
드르륵! 쿵!
됐다!
마법진이 새겨진 제단이 완전히 내려갔다.
'근데 왜 작동을 안 하는 거지?'
모든 재료를 다 준비했는데?
제단도 다 내려가 있고.
난 다시 다섯 개의 방을 돌아보고 돌아왔다.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지?
그때 앨리슨이 또르르 밖으로 뛰어나갔다.
"으이그! 타일러 삼촌 빨리 나와! 우리가 있어서 그래!"
"뭐?"
"이 방과 이 안에 공간이 전부 마법진이야! 우린 이물질이고."
"아!"
역시 진짜 천재 앨리슨을 데려오길 잘했다.
난 짹과 밖으로 나오다가 딱 한 걸음을 남기고 멈춰 섰다.
"마스터 왜 그러십니까?"
"잠깐만······."
혹시나 이 마법진을 사용하면 무슨 봉인 같은 게 풀려서 장벽이 약해지거나 그런 거 아냐?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 거대 장벽을 만들 때 암 드로운도 있었다.
그가 죽기 전에 그는 내게 기간트의 비밀을 알고 싶으면 메제트의 탑으로 가라고 했다.
그건 내가 이곳에서 기간트 마법진의 비밀을 알아내라는 뜻이었고, 지금 난 대지 속성 마석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랬으니 이건 장벽과는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난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처벅!
위이이이잉!
뒤쪽에서 거친 마찰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다섯 개의 빛이 하나로 모인다.
붉은 모래의 붉은 색이 가장 먼저 중앙 마법진에 도달했고, 나머지가 도달했다.
그 순간 다섯 개의 방과 연결된 통로 전체가 빛을 발하고, 가운데 있던 마법진 제단에서 천장을 향해 빛을 뿜어낸다.
"우와! 멋있다."
슈우우!
순식간에 빛이 사라졌다.
드르륵! 드르르륵!
중앙 마법진과 다른 방의 제단이 원래대로 올라갔다.
"오! 변했다."
푸른 빛이었던 마석이 황금빛 대지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다른 방에 있던 흙들은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지 마석이 흡수한 것 같았다.
"앨리슨! 이제 마법진을 그리자."
"신난다! 마법진을 그리자!"
이번에 이데아 제국의 발굴지에서 구한 롤랑의 갑옷과 장비를 암 드로운이 들고 나왔다.
쿵! 쿵!
다행히 롤랑의 갑옷이 암 드로운과 체격이 비슷했기에 그대로 입힐 생각이었다.
롤랑의 갑옷에도 많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지만, 속성 마법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순수한 무력을 사용한 기사였을 것이다.
"암 드로운 이 마석을 가루로 만들어줘!"
"네! 주군."
성인 주먹만 한 대지 마석을 손바닥 위에 올리더니.
과직!
단 한 번에 가루가 됐다.
가루를 조심히 모아 그릇에 담고 앨리슨에게 건넸다.
이제 앨리슨 차례였다.
"여기 가슴 가운데하고 장갑 안쪽에 반씩 그려서 마법진을 완성해야 해!"
"내가 바본가, 아까 다 알아들었다니까!"
"방향이 정확히 맞아야 해. 잘못 그리면 비싼 마석이······."
앨리슨은 갑옷 안으로 들어가더니 겁도 없이 마석 가루를 손가락에 찍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나를 보는 눈으로 보자, 앨리슨은 손가락 끝에 마나를 집중해 마석을 녹이며 갑옷에 새기고 있었다.
저게 가능한 건가······.
"히히! 여긴 됐다!"
앨리슨이 나오더니, 이번엔 거신의 장갑 안으로 들어가 나머지 절반의 마법진을 손바닥에 새겼다.
"끝났어! 다음엔 어디에 그려?"
"잠깐만."
확인이 필요했다.
난 암 드로운에게 갑옷을 입어보라고 했고, 장갑을 끼고 손을 가슴에 대보라고 했다.
'어? 정말 신기하네. 어떻게 이렇게 딱 맞게 그린 거지?'
손을 올리는 각도와 방향이 가슴에 있는 절반의 마법진과 정확히 맞았다.
이런 건 보통 고도의 계산과 기하학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할 텐데······.
하진 천재 앞에선 다 소용없구나!
"앨리슨 잘했다!"
"또 뭘 그려?"
방금 왼손바닥과 가슴에 새긴 마법진은 어스 웨이브!
[어스 웨이브(대지 마법)]
[땅에 일시적으로 강한 충격을 주어 전방에 너울거림을 만든다.]
[마법진 필요 재료 – 마석(대지)]
일종의 지진 발생기라고 할까?
위력이 얼마나 될지는 대수림에서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다음은 어떤 마법진을 새기지?
왼손에 하나 새겼으니, 오른손에 하나 더 새길 수 있었다.
"이번엔 이 마법진을 왼쪽 가슴과 오른손에 그려줘!"
"네!"
앨리슨은 암 드로운이 벗은 갑옷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처음엔 거신들이 마법진을 왜 번거롭게 절반씩 새겨, 합치는 불편한 방식으로 만든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냥 손바닥이나 가슴에 마법진을 새기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이유는 곧 알았다.
거신이나 그 후손들은 마나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에 마나가 깃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전투 중에 잘못해 특정 신체 부위나 마법진에 마나가 집중됐다가 자신도 모르게 마법이 발동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법진을 둘로 나누면 번거롭긴 해도 내가 원할 때 마법진을 합치고, 양쪽에 마나를 집중해야 발동한다.
이건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앨리슨! 다 그렸다!"
"벌써?"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두 번째 마법진이 완성됐다.
[어스 베리어(대지 마법)]
[전방의 땅을 솟아오르게 하여 장벽을 만든다.]
[마법진 필요 재료 – 마석(대지)]
이곳 메제트의 탑 벽에는 대지 마법진이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난 그중에서 범위 공격이 가능한 마법진과 방어력이 가장 뛰어난 마법진을 먼저 롤랑의 갑옷에 새겼다.
"또 어디에 그려?"
양손은 이미 다 새겼는데.
고민이었다.
관절이나 웬만한 부위는 이미 마법진이 다 새겨 있어서 빈틈이 없었다.
오른쪽 가슴 위엔 빈틈이 남아 있는데, 양손엔 이미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손등에 빈 곳이 있긴 하지만, 가슴에 붙일 자세가 나오질 않았다.
'아! 손등끼리 붙이면 되겠구나!'
"앨리슨, 이번엔 손등끼리 마주쳐 마법진이 하나가 되도록 그려줄래."
"응!"
손등을 비틀어 서로 붙이면 되겠지.
잠시 후 앨리슨이 장갑에 마법진을 그렸다.
그런데.
"앨리슨, 이거 같은 방향인데?"
"아닌데! 맞는데!"
암 드로운이 양손을 비틀어 손등을 대봤다.
반쪽 마법진이 둘 다 위쪽에 그려져 있었다.
"으이그! 왜 힘들게 손등을 비틀어 대는 거야. 그냥 편하게 위아래로 붙이면 되잖아."
"아!"
암 드로운이 왼손등 아래로 하고 오른손등을 위로 겹치자, 마법진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타일러 삼촌 바보! 암 드로운 바보!"
"그래, 우리가 바보다."
아무튼, 세 번째 마법진도 새겼다.
[어스 익스플로전]
[땅이나 바위에 마법진을 심고 폭발시켜 적에게 타격을 입힌다. (딜레이 5초)]
[마법진 필요 재료 – 마석(대지)]
이건 일종의 트랩 마법이었다.
적을 유인하거나 적이 몰려 있는 곳에서 사용하면 꽤 활용도가 많을 것 같아서 새겼다.
"아직 가루 남았는데! 어디에 그려?"
"잠깐만."
하나 정도 더 새겨넣을 수 있었다.
그럼 내 나이트급 오리지널 마장기에 하나 새기자.
하지만 당장 마장기를 분해해 내부에 새겨야 하는데, 그럼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렇다고 마장기 외부에 새겼다가 손상이 되면 아까운 마석만 날리게 된다.
"여기 해치 안쪽에 그려줘!"
"알았어!"
마장기의 배 부분인 해치 안쪽에 마법진 절반을 새기고, 나머진 오른손바닥에 새겼다.
[스톤 엣지]
[땅을 단단히 압축하여 뾰족한 다섯 개의 바위기둥이 솟아오른다.]
[마법진 필요 재료 – 마석(대지)]
"끝났어!"
내 마장기까지 총 4개의 대지 마법진을 새겼다.
아직 손가락 하나 정도의 마석과 가루가 조금 남았다.
이 정도 양으론 마법진을 하나 그리기엔 아슬아슬했다.
아쉽지만 다음에 그리기로 했다.
괜히 그리다가 마석이 부족할 수도 있으니까.
이번에 대수림에 들어가면 괴수를 잡아 최고급 마석도 구해야겠다.
"앨리슨!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이틀간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이젠 대수림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앨리슨, 수도에 가거든 편지 자주 하고."
"나 가기 싫은데!"
"타일러 삼촌 도와준다고 했잖아. 네가 학교에 가야 많이 배우고 삼촌을 더 잘 도와줄 수 있지."
앨리슨의 입이 댓 발 나왔다.
"여기 짹 삼촌이 항상 옆에 있을 거니까. 심심하면 놀아달라고 하고."
"알았어! 내가 많이 배워서 올게. 타일러 삼촌도 조심해야 해!"
앨리슨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다음에 봤을 땐 또 얼마나 커 있을지······.
아니지, 가끔 병렬사고로 들여다보면 된다.
드워프들과 케네스 영감과도 인사를 했다.
가디언 전진 기지에서 얻은 오리지널 거신 갑옷은 모두 놓고 가기로 했다. 갑옷에 마법진은 새겨져 있으니, 내부 제작을 맡긴 것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성공한다면 드워프들의 기간트 기술은 한 단계 더 올라갈 것이다.
대수림에 한번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몰랐기에 기약 없는 이별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떠났다.
***
[헬다임 관문]
기이이잉! 쿵!
관문이 열렸다.
육중한 기간트들이 먼저 들어가고, 우린 뒤쪽에서 기다렸다.
"타일러 중령님!"
그때 글래디스 하사관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에테나, 서두르자!"
우린 도망치듯 관문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중간 입구에서 막혔다.
"타일러 중령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뒤이어 글래디스 하사가 도착했다.
"······왜?"
"헉헉! 윌리엄 사령관께서 꼭 중령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미안하지만 난 지금 매우 급한 일 때문에 대수림에 가는 거야.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그래도 가셔야 합니다. 아니면 제가 곤란합니다."
기간트와 병사들이 앞을 막았다.
"이들로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순간 글래디스가 마른침을 섬겼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사령관께서 중요한 일이라고."
"그럼, 최대한 빨리 일을 보고 와서 장벽 사령부로 가지."
글래디스가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사령관께서 중령님이 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한 마디만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래? 뭐라고 하셨는데?"
"좋은 선물이 있으니, 최대한 빨리 튀어와라."
"선물? 알았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니까. 곧 보지."
"충! 그럼 다녀오십시오."
글래디스가 내게 경례했다.
난 경례를 받고 관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관문 안쪽에 대기 중인 엘프를 만났다.
"마르실님께서 약속대로 엘프 100명을 이곳과 대수림 전진 기지에 배치해 놓으셨다. 병력이동이 발생하면 즉각 카야킨으로 소식을 전할 것이다."
"마르실은 어디 갔지?"
"그건, 나도 모른다."
이미 시노우엘의 연락이 닿은 것 같았다.
그리고 마르실은 바이마르 사냥팀과 북쪽으로 갔을 것이다.
그래도 엘프가 있으니, 큰 위험은 피하면서 가겠군.
"우리도 어서 가지요. 지금쯤이면 카야킨 기지에 도착했을 겁니다."
"아니, 일단 난민 기지로 먼저 가자."
우린 괴수 마법인형을 타고 난민 기지로 달렸다.
***
[이계 난민 기지]
"타냐, 열심히 훈련하고 있나?"
"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으론 안 될 텐데······."
타냐와 트라스의 개 기사들은 내가 알려준 신체 훈련법으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건 롤랑이 만든 마나 훈련법으로 극한의 열과 극한의 냉기 사이를 오가며 마나를 호흡하고 또한 신체를 혹독하게 훈련해 마나가 빨리 몸에 자리 잡게 하는 방법이었다.
대수림의 낮은 그 자체로 뜨거운 곳이었고, 커다란 냉기 마차를 들여와 차례로 그 안에 들어가 훈련하고 있었다.
물론 마석 배터리가 많이 필요했지만.
내가 사람이 없지 돈이 없을까.
"마나량은 확실히 늘었습니다."
"아직 등급은 올리지 못했군."
그건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허허! 기간트는 있는데 실력 있는 기사가 없다니······."
난 일부로 내 오리지널 마장기와 거신인형을 이들 앞에 보였다.
특히 이번에 드워프들이 만들어준 장갑까지 붙인 새로운 거신인형은 완전히 룩급 기간트처럼 보였다.
"지금 추가로 오리지널 기간트를 생산하고 있다. 너희 중에서 가장 먼저 룩급으로 올라간 기사에게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주지."
"이야! 오늘부터 2배로 단련이다!"
"난 잠을 자지 않고 훈련하겠다!"
역시 기사들에게 오리지널 기간트는 당근이었다.
난 이곳 난민 기지에 5대의 기간트를 추가로 배치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자동인형 셋을 인형의 집에 넣었다.
이제 내 마법인형 군단은 한 번에 10대의 기간트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곳 기지는 타냐와 기사들에게 맡겼다.
아리칸 공국의 움직임은 엘프들이 맡고 있으니, 혹시나 그들이 움직이면 바로 카야킨 전진 기지에 도움을 청하면 된다.
그리고 드워프 대장 라스칼과 오크 족장 쿠훌린에게 이번 일에 대해서 말했다.
"쿠오크! 타일러여! 나도 함께 간다!"
"응?"
"쿠오크! 오크 너무 약하다! 오크 마나 없다! 오크 발전 없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오크에게 더 강한 무기를 만들어줬지만, 그건 최하급 괴수나 움직이지 못하는 기간트를 상대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저번에 아리칸 공국 기간트들과 전투에서도 오크의 투지와 죽음을 불사하는 그들의 용맹함을 봤다.
하지만 나이트급 기간트 한 대를 상대하는데 9명이나 죽었다.
힘이 넘치는 오크지만, 눈물 겨운 투쟁이었다.
맨몸으로 맞서기엔 기간트는 너무 강했다.
그러니 오크에게 더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
"쿠오크! 오크 비행석 갑옷 만들어 달라!"
"뭐?"
"쿠오크! 기간트 똑같은 갑옷 만들면, 오크 더 강해진다."
"아! 그러니까 기간트가 아니라 괴수 부산물로 만든 갑옷을 만들어 달라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오크는 기간트에 타지 못한다.
대신 아주 단단하고 두꺼운 괴수 부산물로 갑옷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무게가 너무 무거워, 그 갑옷을 입고 다닐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금 쿠훌린의 말처럼 비행석을 넣어 갑옷을 가볍게 만들면, 오크도 기간트와 비슷한 장갑을 착용할 수 있었다.
기간트는 아니지만, 기간트의 공격을 조금은 막을 수 있는 갑옷과 장갑이 있다면 어쩌면 숫자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다.
오크도 절실하군.
그때 갑자기 오크 전사들이 적 비공정을 향해 과감히 뛰어드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은 먼 미래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오크 강습병이라······.
아니 오크 해병대라고 이름 붙일까?
"좋아! 오크도 함께 간다!"
자신들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지.
74. 파밍 허가권.
74. 파밍 허가권.
탁! 다다다닥! 파앗!
"꾸악구! 꾸악구!"
안당고낙이 달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건 기분 좋을 때 내는 소리다!
녀석들은 대수림을 전속력으로 달릴 때, 항상 이런 소릴 낸다.
새가 날지도 못하면서 달리는 걸 좋아한다니······.
단거리는 표범인형이라면 장거리는 당연 안당고낙이다!
4.5미터의 큰 키와 근육질의 긴 두 다리.
그리고 크고 안정적인 발바닥으로 웬만한 작은 수풀은 아예 밟고 지나간다.
달리다가 가끔 균형을 잃었을 때는 재빨리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중심을 잡는다.
"쿠오오오크!"
쿠훌린은 방금 안당고낙이 휘청거렸다가 날개로 중심을 잡자 기겁했다.
기간트도 안 무서워하는 오크가 안당고낙에 타는 게 조금 무서운가 보다.
자신들이 애써 먹이를 주고 키우긴 했어도 직접 타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오크도 안당고낙 위에서 중심을 잡는 게 쉽진 않아 보였다.
반면에 그 옆에 에테나는 정령을 타는 것처럼 아주 익숙했다.
사실 우리가 안당고낙에 탈 수 있는 것은 다 에테나 덕분이었다.
나와 에테나가 가디언 제국의 전진 기지와 발굴지를 오가며, 적들을 괴롭히고 킹콩 괴수 사냥을 이어갈 때, 안당고낙의 알을 발견했다.
처음엔 타조 알이 생각나서 한번 먹어 볼까 고민했지만, 에테나는 알에서 생명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며, 만류했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 새끼들이 태어났다.
문제는 어미가 다른 괴수에게 잡아먹혔는지 나타나지 않았고, 에테나는 불쌍하다며 아홉 마리의 새끼에게 먹이를 주고 키웠다.
새끼들은 에테나를 어미처럼 따랐고, 난 옆에서 안당고낙의 습성을 연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녀석들은 화산재로 된 흙에서만 새끼를 낳는 습성이 있었고, 난 인형의 집에 이곳 지역의 흙을 잔뜩 넣어서 이동했고, 난민 전진 지기에 한쪽에 사육환경을 만들었다.
지금 내가 타고 다니는 안당고낙은 그때 구해져 이젠 성체가 된 놈들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알을 대량으로 부화해 일곱 번째 무리까지 키웠고, 곧 첫 번째 출하를 앞두고 있었다.
이 일은 30명의 오크 사육사와 20명의 드워프 축사 관리자가 전담하며 사육하고 있었다.
***
[블랙힐 전진 기지]
날 보자 시안 오르도 7황자가 미소를 지었다.
"충!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서 오시게. 타일러 중령. 아니면 이제 가디언 제국의 타일러 남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닙니다. 전 타일러 중령입니다."
"하하! 농담이네. 앉게."
뭐지?
이 여유로움은?
난 시안 황자와 마주 앉았다.
정보국 중령이 출세했다.
후계자 서열 3위와 나란히 앉고.
"발굴 책임자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윌리엄 사령관께서 시키니 별수 있나 열심히 해야지."
"시안 군단장께서도 대수림에 오신지 벌써 1년이 되셨네요. 너무 오랫동안 황궁을 비워 힘드시겠습니다."
"나야 가만히 기지 안에 있는데 뭐가 힘들겠나, 발굴하는 작업자들과 그들을 지키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힘들지."
그리고 보니, 시안 황자의 얼굴이 많이 폈는데?
전엔 항상 고심이 많아 보였다면, 지금은 어딘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저번에 죽을 뻔한 사건으로 사람이 성장한 건가?
정말 마음을 비웠나?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건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래! 타일러 중령, 우리 발굴 현장을 확인하러 왔는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허락하신다면 한번 둘러 봐도 되겠습니까?"
"하하! 자네가 제안한 계획이네. 당연히 발굴상황을 확인해봐야지."
"감사합니다."
"다만 발굴 정보는 정보국에도 비밀이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내가 허가증을 만들어주지."
시안 5군단장은 책상으로 이동해, 앉아서 허가증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대수림을 가로질러 장벽을 넘고, 바이마르 영지에도 다녀오고, 이곳으로 다시 돌아보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안당고낙이 없었다면 아마도 1년은 걸렸을 것이다.
아무튼, 이 짧은 기간에 발굴 작업이 얼마나 진행됐겠나?
이제야 땅을 파고 하수도를 찾아 뚫기 시작했을 것이다.
"가디언 제국 쪽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발굴지 안쪽은 모르지만, 발굴지에서 퍼 올린 흙의 양이 1.5배나 늘었네. 점점 속도를 내는 것이 우리보다 빠를까 걱정이네."
난 살짝 미소를 지어줬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황궁으로 가는 하수도 길만 제대로 찾는다면 우리가 늦을 일은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보다 황궁을 발굴하고 나서가 더 걱정입니다."
"응?"
"가디언 제국도 이쪽을 감시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거신 갑옷을 찾게 되어 제국으로 옮긴다면, 바로 들킬 겁니다."
"그렇겠지. 윌리엄 사령관께서도 그 점을 걱정하셨네."
"팁을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게."
시안 5군단장이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거신 갑옷을 발견하면, 일단 하나씩 바로 옮기지 마시고,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모아 놓으십시오. 그리고······."
"그리고?"
"이동 전에 가디언 제국의 발굴지를 공격하십시오."
"뭐?"
시안 오르도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협정 위반이 아닌가?"
"협정 위반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거신 갑옷을 무사히 장벽 너머 제국으로 옮기는 게 중요합니까?"
"그야 당연히 후자지."
"협정을 지키다가 이동하는 길목이 막히거나 저들이 본격적으로 추격하게 되면, 피곤해집니다. 어차피 발굴이 끝나면 저들과 사이는 틀어지고 전투는 불가피할 겁니다. 그럼 협정 같은 건 그냥 무시하고 최대한 우리 이익을 챙기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시안 오르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거신 갑옷 수송을 대비해 안당고낙 100마리를 준비 중입니다. 그럼 저들보다 2배는 빨리 이동할 겁니다."
"허! 자네의 준비성에는 감탄을 금할 길이 없군.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시안 오르도 7황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계획은 황자님과 측근들만 알고 계십시오. 같은 편에게도 절대 비밀입니다."
"응? 적은 몰라도 이곳 카야킨 전진 기지와 북부군 사령부엔 알려야 하지 않겠나?"
"솔직히 말해서 윌리엄 사령관께서 이 일을 황자님께 맡기신 저의가 뭐겠습니까."
"그야 나더러 이데아 제국의 황궁을 찾고, 거신 갑옷을 발굴해 공을 세우라는 거겠지."
"그겁니다. 저야 시안 황자께서 공을 세우는데 반감이 없지만, 그걸 시기하는 무리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첩자는 어디든 있지요."
시안 오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시안 7황자가 날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윌리엄 사령관께 들으니, 자넨 내 라인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피해 다닌다고 들었네. 그런데 이렇게 도움을 주는 이유는 뭔가?"
나는 씨익 웃어줬다.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고, 일도 같이해본 사람하고 더 잘 맞는 게 아니겠습니까. 시안 저하와 전 이미 죽음의 위기도 함께 이겨냈고, 또 지금도 이렇게 마주 앉아 편히 대화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닙니까. 전 그저 제가 아는 분들이 잘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제게 뭔가 더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하하! 윌리엄 사령관께서 한 가지 실수를 하셨군."
"······?"
"자넨 우리 라인으로 품어서 될 사람이 아니었어. 동업자가 더 어울리지."
"네?"
시안 황자가 미소를 지었다.
시안 7황자가 허가증을 가지고 내 앞에 다시 앉았다.
"저 혹시, 얼마 전에 바이마르 대영지의 병력이 북쪽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그건 또 어떻게 알았나? 한 일주일쯤 됐네. 보급품을 잔뜩 가지고 가는 것이 상당히 오래 사냥할 태세였네. 왜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그건 아닙니다. 대수림에서 병력이 이동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저희 정보대의 역할이 아닙니까. 갑자기 많은 병력이 이동하길래 궁금해서 여쭤본 것입니다."
"내 생각엔 북쪽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러 갈 생각인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웨슬리 슈나이더 경의 사냥팀을 길잡이로 고용했네."
"아!"
라디프 공작의 행동력이 과감하고 빨랐다.
대수림 최고의 사냥팀까지 고용했다면, 단순히 비공정의 비행석만을 노리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역시 가장 확실한 성과를 내려면 차원 균열을 넘어가는 것뿐이지.'
나도 슬슬 서둘러야 했다.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오자마자 가려고?"
"발굴장을 빨리 둘러보고 싶어서요."
"아! 이거 가져가게."
시안 7황자가 내게 허가증을 건넸다.
난 슬쩍 허가증을 쳐다봤다.
오호! 기간이 적혀 있지 않았다.
그건 앞으로 아무 때나 발굴지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
이건 내게 파밍 허가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가는 게 있다면 오는 게 있어야지.
"충! 감사합니다."
경례하고 방을 나섰다.
***
대수림이 넓긴 넓다.
발굴팀이 최대한 블랙힐 전진 기지와 가까운 곳을 찾는다고 다섯 군데나 구멍을 뚫어서 겨우 한곳을 발견했다고 한다.
"타일러님, 여긴 왜 오신 겁니까? 지금 한시라도 빨리 바이마르 사냥팀을 쫓아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괜찮아. 우린 저들보다 훨씬 빠르니까 조금 늦게 가도 돼. 그리고 뒤를 따라가는 게 훨씬 안전하기도 하고."
"하지만 저들이 먼저 비공정을 찾으면······."
"괜찮다니까."
미안하지만 난 비공정에 있는 비행석을 찾기 위해 저들을 따라가는 건 아니었다.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
십중팔구 바이마르 사냥팀은 엘프 차원으로 넘어갈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내 전력 손해는 없어야 했다.
저쪽 차원엔 어떤 괴수가 있을지 모르니까.
[어서 오십시오. 타일러 중령님.]
익숙한 모양의 나이트급 오리지널 기간트가 내게 경례했다.
목소리를 들으니 로제 소령이었다.
끼이잉! 치익!
로제 소령이 해치를 열었다.
"오! 로제 중령! 진급했군."
"네! 덕분에 목숨도 구하고, 진급도 했습니다."
"이제 같은 중령인데 말은 놓지 그래?"
"에이! 그럴 순 없죠. 타일러 중령님은 금방 진급하실 겁니다."
"나도 그러면 좋겠네."
난 그녀의 나이트급 오리지널 기간트를 쳐다봤다.
"내가 찾은 거신 갑옷이 기간트로 다시 태어나다니 신기하군."
"덕분에 제가 그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로제 중령이 내 뒤에 에테나를 쳐다봤다.
"이번엔 엘프와 함께 오셨네요."
"내 부하인데 당연하지. 그런데 경비가 제법 삼엄하군."
"보다시피 오리지널 기간트 한 대와 15대의 기간트가 교대로 근무를 섭니다. 그리고 외곽을 순찰하는 기간트 사냥팀도 따로 있고요."
"고생하는군. 시간이 없으니 그만 안으로 들어가 보겠네."
"저기, 죄송하지만 타일러 중령님도 출입증이 있어야······."
피식 웃으며 시안 5군단장이 발급해준 출입 허가증을 내밀었다.
"아! 이미 다녀오셨군요. 들어가십시오."
"살펴보려면 시간이 좀 걸릴지 모르네. 엘프와 오크는 여기에 있을 테니까. 교대 자에도 잘 좀 말해주게."
"네! 다녀오십시오."
난 홀로 발굴지로 내려갔다.
파밍은 혼자 움직이는 것이 빠르고 편했다.
'한 개라도 건지면 좋겠군.'
아래는 그저 커다란 굴이었다.
입구도 하나밖에 없었고.
그리고 발굴지는 한참 안쪽으로 더 들어가야 했고, 다시 100여 미터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그래도 하수도는 제대로 찾았네.'
하수도 입구를 지키는 기간트와 병력이 있었다.
난 다시 허가증을 보여주고 하수도로 들어갔다.
가끔 발광석이 놓여 있었기에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다 대량의 흙을 옮기는 작업용 기간트를 만났다.
확실히 위로 올라오는 흙의 양이 가디언 제국의 발굴지보다 훨씬 적었다.
그건 그만큼 뚫려 있는 하수도가 더 많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면 격차는 순식간에 따라잡겠어!'
발굴팀은 내 말대로 가장 큰 하수도를 따라 전진하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자, 난 눈으로 마나를 뿜어냈다.
파밍의 시작이었다.
'벌써 엄청나게 안으로 들어갔구나!'
하수도 내부로 네 시간이나 걸어 들어갔다.
가다가 쉬기도 했고, 작업용 기간트가 지나가면 작은 하수도를 살피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 뚫고 들어가는 지역은 귀족이나 기사들이 살만큼 좋은 동네는 아닌 것 같았다.
드드드드드! 드르륵!
앞쪽에서 작업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어딘가 막혀 있는 곳을 뚫고 있겠지.
파밍은 못 했지만, 그래도 발굴 작업이 순탄한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됐다.
어차피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부자들의 집과 귀족들의 저택이 몰려 있을 테니, 다음에 다시 오면 된다.
그때였다.
'어? 뭔가 있다!'
게다가 엄청나게 크다!
뭐지 건물인가?
건물 전체에 마석이 함유된 것 같았다
그렇지.
파밍은 기다림이라고!
푸른 빛을 따라 작은 하수도로 들어갔다.
다행히 건물은 내가 이동하고 있는 큰 하수도에서 400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 위쪽인데······.'
문제는 최대한 조용히 뚫어야 한다는 거다.
지하 통로라 망치질을 하면 엄청나게 울릴 테니까.
그리고 잘못하면 천장이 무너져 매장당한다!
물론 난 또 다른 방법이 있지.
난 암 드로운과 사마귀 마법인형을 꺼냈다.
75. 저건 쓸 수 있겠는데!
75. 저건 쓸 수 있겠는데!
인형술사는 정말 파밍 하기 좋은 클래스였다.
파다다다닥!
사마귀 꼭두각시로 영혼 이동해 하수도 구멍을 통해 계속 위로 올라갔다.
말이 하수도지 거신이 썼던 만큼 그 구멍은 인간이 들어갈 수도 있을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하수도를 통과하자, 거대한 공간이 나왔다.
'오! 여긴 어디지?'
날면서 주변을 살펴보기 힘들었기에 킹콩(lv.7) 마법인형을 불러내 머리 위에 올라탔다.
고개를 돌려보며 자세히 살펴보니 이곳은 거대한 돔형 건물이었다.
그리고 중앙에 십여 개의 거대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그 기둥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손상이 전혀 없었다.
뭐 하는 곳이었을까?
난 사마귀 꼭두각시와 연결을 끊고 밧줄과 킹콩인형의 도움을 받아 직접 구멍을 타고 올라갔다.
장소가 심상치 않았기에 직접 살펴보고 싶었다.
거대 돔으로 들어왔다.
화산재와 용암에도 용케도 무너지지 않은 건 중앙에 거대한 열두 기둥이 돔을 받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기둥에도 마석이 다량 함유되어 있네.
여긴 뭘 하던 건물이었을까?
팟! 파파팟!
기둥 안쪽으로 한발 내디뎠을 뿐인데, 갑자기 주변이 환해졌다.
기둥 전체가 빛을 뿜어내는 것이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때였다!
"헉!"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바로 옆에 있는 기둥에 푸른 로브를 입은 거신이 앉아 있었다.
그것도 멀쩡한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가 살폈다.
검은 머리의 거신은 슬픔과 비통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살아 있는 건 아니겠지?'
암 드로운을 거신 인형으로 만들었던 생각이 나서 손으로 거신의 손을 살짝 만져보았다.
팟! 파스스스스!
거신은 입고 있던 옷과 함께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땡그랑!
'어?'
그런데 바닥에 뭔가 떨어졌다.
저건 거신이 끼고 있던 반지였다.
물론 내겐 팔찌나 마찬가지였지만.
마나를 보는 눈으로 살펴보자, 이 반지에서 엄청난 푸른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오! 그렇지!"
반지 같은 게 하나 나올 때도 됐지!
이곳에서 거신 갑옷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마법 반지를 찾은 것 같았다.
그리고 방금 그 거신은 아마도 마법사였을 것이다.
난 방금 먼지가 되어 사라진 거신 마법사를 향해 묵념했다.
한때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괴수와 싸웠을 거신에 대한 존경이었다.
그는 아마 이곳에 갇혀 쓸쓸한 최후를 보냈을 것이다.
묵념을 끝내고 반지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반지, 아니 팔찌를 왼손에 끼웠다.
"어?"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
몸속에 마나가 휘몰아친다.
원래 내가 느끼고 있는 마나가 갑자기 증폭된 느낌이다.
'와우! 이거 마나 반지였어?'
그렇지 않아도 오리지널 마장기에 타면서 마법까지 쓰기에 마나가 부족해 마법을 몇 번밖에 쓸 수 없었다.
그런데 방금 내 마나가 배로 늘어난 것 같았다.
게다가 기분 탓인가?
마나가 더 잘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나도 더 빨리 모이는 것 같고.
'이거 에테나가 차고 다니면 마나를 느낄 수 있는 거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이트급 오리지널 마장기의 마법을 써야 하니 내가 차기로 했다.
오늘도 크게 한 건 했다.
역시 파밍은 꾸준함과 기다림이었다.
고개를 돌려 혹시나 빠진 물건이 없나 마나를 보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중앙에서 여러 개의 빛이 반짝였다.
백색과 황금색, 초록색, 보라색, 하늘색까지.
가까이 가보니, 모두 주먹만 한 속성 마석이었다.
'대박! 이제 다른 속성 마법진도 기간트에 그릴 수 있겠어!'
문제는 다른 속성 마법진 샘플이 없다는 거지만.
나중에 다른 메제트의 탑도 올라가 봐야겠네.
그곳엔 대지 메제트의 탑처럼 마법진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바닥에 이런 비싼 속성 마석이 떨어져 있는 거야?'
바닥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눈이 번쩍 뜨였다.
'어? 이거? 마법진?'
열두 개의 기둥 가운데 거대한 마법진이 있었다.
그리고 방금 속성 마석이 있던 곳은 마법진의 꼭짓점이었다.
꼭짓점이 여섯 개라.
'각각의 속성 마석을 올려놓는 거 같은데······.'
무슨 마법진인진 모르겠다.
다시 이곳 공간을 살펴보자, 성스러운 회당 같기도 하고. 제단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곳은 신비스러운 기운을 풍기는 장소였다.
그런데!
'아! 불 속성 마석이 없네.'
다섯 개의 속성 마석은 모두 자리에 있었는데, 불 속성만 없었다.
당장 이 마법진을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여섯 개의 속성 마석을 모두 모으면 모를까.
일단 대충 그려가 볼까?
자동인형 자할리를 꺼내 종이에 이 마법진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리게 했다.
화염의 탑이 가디언 제국에 있었나?
지금 부족한 것은 화염 속성 마석뿐이었다.
만약 가디언 제국에 있다면, 난 그곳의 남작이니 입국은 쉽지 않을까?
그러나 대지 메제트의 탑처럼 속성 마석을 만들기 위해선 재료가 필요했기에 화염 마석을 바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섯 개의 속성 마석을 쓸 정도면 왠지 엄청난 마법진일 것 같았기에 꼭 시도해 보고 싶었다.
어쨌든 가디언 제국엔 한 번 가봐야겠군.
자할리가 마법진을 옮겨 그리고, 난 다섯 개의 속성 마석을 챙겼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발견이었다.
이제 난 마법진 샘플만 있다면 다른 속성 마법진도 기간트에 새길 수 있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파밍을 끝내고 다시 입구로 돌아갔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뚫려 있는 모든 하수도를 샅샅이 찾아봤겠지만, 그건 너무 오래 걸린다.
난 지금 바이마르 사냥팀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
며칠, 몇 주, 몇 달이나 흘렀을까?
대수림에선 시간의 흐름은 큰 의미가 없었다.
해가 뜨면 가고, 해가 지면 잔뜩 웅크린다.
가끔 폭포 같은 비가 쏟아지고, 가끔은 괴수와 싸우기도 하고.
그리고 매일 습기와 벌레, 더위를 견디고.
우린 계속해서 바이마르 사냥팀을 멀찌감치 따라가고 있었다.
마르실 역시 에테나처럼 반향정위 스킬이 있었기에 그 범위 밖에서 따라가는 것이다.
"에테나, 길을 알아보겠어?"
"네, 저희가 지나온 길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비공정을 찾는 건 아닌 거 같네요. 아무래도 차원 균열로 곧장 가는 것 같습니다."
에테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인간의 힘을 빌리는 게 싫어서 그래?"
"저들이 과연 세계수 씨앗을 찾아 줄까요? 그냥 비행석만 찾아올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라디프 공작이 정말 오래 살고 싶어서 세계수 씨앗을 구하라고 했을 수도 있지. 그런데 비행석은 어떻게 찾아?"
"광산이 있습니다."
"광산? 그것도 땅에서 캐는 거야?"
"아니요. 그건 하늘에서 캡니다. 하늘에 떠다니는 부유석이나 부유섬이라는 거대한 바위나 땅이 몰려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 부유석이나 부유섬을 먼저 지상으로 끌어 내리거나 그 위에 올라가서 조심히 캐다 보면 안에서 청색의 반투명한 돌이 나옵니다."
"그게 비행석이군."
"고대 엘프의 전설에 따르면 일부 정령은 수명이 다하면 소멸하지 않고 어딘가에서 스며드는데, 한번 스며드는 곳에 또 다른 정령들이 스며들며 점점 그 크기가 커지고 하늘을 나는 힘이 생긴다고 들었습니다."
뭔가 판타지 소설에 나올만한 내용이었다.
하긴 헌터도 차원 균열이 생기기 전까진 그저 소설 속의 흔한 소재였을 뿐이었다.
"부유섬들이 있는 장소가 차원 균열에서 멀어?"
"저희가 들어왔던 차원 균열에선 일주일 정도 걸립니다. 물론 비공정을 타고 왔으니, 걸어서 가려면 그 2, 3배는 잡아야겠죠."
휘이잉!
그때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쿠훌린이 코를 킁킁거렸다.
"쿠오크! 타일러여! 냄새가 난다!"
"뭔데?"
"쿠오크! 괴수다!"
"어디 쪽이야?"
쿠훌린이 위를 향해 손을 가리켰다.
"다들 안당고낙에서 내려! 나무 뒤로 숨어!"
잠시 후 대수림 나무 위를 스치듯 거대한 그림자들이 지나갔다.
날개 길이가 60미터쯤 되고 몸길이가 15미터나 되는 대형 비행 괴수였다.
"저놈들이에요! 우리 비공정을 부순 녀석들이!"
에테나가 몸을 떨었다.
A급 괴수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일족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 괴수들에게 당했기에 두려운 것이다.
비공정 10척에 나눠 타고 4천 명이 넘어왔지만, 겨우 500여 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고 들었다.
역시, 대수림에서 하늘을 나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저놈들이 어디로 가는 걸까요?"
"아마 바이마르 사냥팀이겠지. 그들의 행렬은 수 km 높이에서도 보일걸."
길 안내자들까지 110대나 되는 기간트와 천 명 이상의 병사와 보급품까지, 아마 근처에 있는 괴수들도 그들의 이동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겁이 없는 괴수들은 덤벼들겠지만, 웬만한 괴수들은 위험을 감지하고 피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린 조용히 묻어가는 거고.
에테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들의 행렬엔 마르실과 엘프들도 있을 테니까.
'그래도 이번엔 피해 좀 입겠어!'
A등급 괴수를 하나 상대하려면 기간트 6대의 사냥팀이 전력으로 싸워야 했다.
그런데 방금 여러 마리가 날아갔으니, 등급이 낮은 기간트와 병사들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상처 입은 두 마리의 괴수가 하늘로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괴수를 향해 십여 마리의 다른 괴수들이 날아와 공격했다.
결국, 도망쳤던 두 마리 역시 동료 괴수들의 먹이가 됐다.
상처 입으면 동족도 가차 없구나!
이곳은 저 괴조들의 영역이었다.
"자! 슬슬 우리도 이동하자."
오크의 뛰어난 후각은 가끔 나를 놀라게 했다.
이번에도 에테나보다 먼저 괴수의 접근을 알아차렸으니까.
바이마르 사냥팀이 머물었던 장소에 도착했다.
곳곳에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보였다.
작은 나무는 부러지고, 땅은 파였으며, 곳곳에 피가 튀었다.
괴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바이마르 사냥팀이 괴수 부산물을 챙긴 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다른 괴수들이 몰려와 쓸어갔겠지.
그리고 병사들의 시체도 보이지 않았다.
무덤은 만들 필요가 없었다.
대수림, 이 자체가 거대한 무덤이었으니까.
가끔 부서진 기간트와 마차가 보였다.
암 드로운과 킹콩인형이 인형의 집에서 기간트를 꺼냈다.
그리고 내 자동인형들이 기간트에 올라탔다.
'부서진 기간트만 챙겨!'
이곳엔 여섯 대의 기간트가 부서져 있었다.
모두 나이트급과 폰급 기간트였다.
역시 등급이 낮은 기체의 파손이 심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피해가 적은 것은 두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덕분일 것이다.
웨슬리 슈나이더 백작의 "비브르"와 바이마르 공작가의 기사인 레녹스 백작의 "아메카"가 있었기에 A등급 괴수를 쉽게 물리쳤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부서진 기간트를 챙겨 가지 않았다.
그랬기에 내가 챙겨서 인형의 집에 넣었다.
전투의 흔적을 뒤로하고, 잠시 묵념했다.
이곳에서 죽은 기간트 기사들과 병사들이 편히 잠들길 빌었다.
***
에테나의 말로는 그들이 들어온 차원 균열이 점점 가까워 지고 있다고 했다.
정말 길고 지독한 길이었다.
숲과 친근한 엘프들의 생존율이 낮았던 것은 아마도 대수림이 크게 한몫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S등급 이상의 괴수를 만나지 않았기에 바이마르 사냥팀도 큰 피해를 보진 않았다.
"여기에요!"
에테나가 앞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반으로 갈라져 부서진 배 한 척이 있었다.
"이게 우리가 타고 온 비공정이에요."
진짜 비공정이 있었어!
그런데 이 작은 배에 400명이나 탔다고?
선체 길이가 100미터밖에 안 되는 중형 범선이었다.
얼마나 엘프가 급하게 탈출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에테나가 갈라진 배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비행석은 선체가 부서지며 날아간 것 같습니다."
"비행석 크기가 작은가 봐?"
"보통은 1미터 정도 되는 금속 상자에 넣어서 비공정이 완성되면 선체 여러 곳에 부착합니다. 혹시나 하나가 부서지거나 날아가도 바로 추락하지 않도록 하는 거죠."
"그럼 비공정 이동은 어떻게 하는 거야?"
"배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비행석은 그저 비공정을 위로 띄우는 역할만 하고, 돛을 이용해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겁니다."
"아! 그래서 괴수들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했군."
바람이 강하면 모를까, 바람이 약한 곳에선 느림보 거북이가 될 수도 있었다.
라디프 공작은 그런 것까지 계산했기에 배에 프로펠러를 만들었을 것이다.
나도 나중에 비공정을 만들게 되면 프로펠러는 필수로 달아야겠다.
이동하다가 거꾸로 처박혀 뼈대만 남은 비공정을 발견했다.
이제 보니, 마르실과 에테나가 탄 비공정이 차원 균열에서 가장 멀리 이동한 것이었다.
역시나 시체는 하나도 없었다.
대수림의 괴수들이 가만히 뒀을 리가 없었다.
"여기선 비행석을 두 개나 빼간 거 같아요."
선체 중앙 용골과 선미 쪽에서 방금 뺀 것 같은 1미터 크기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 보세요. 우리가 먼저 와야 했는데······."
에테나는 아까운가 보다.
내가 엘프 차원으로 넘어갈 생각이란 걸 아직 말하지 않아서 저런 반응을 보이나 보다.
반나절을 더 전진했을 때였다.
"타일러님, 비공정이 또 있어요!"
에테나의 레이더에 뭔가 발견된 것 같았다.
우린 거신목 나뭇가지 끝에 걸려 있는 비공정을 발견했다.
그런데 높이가 무려 400미터는 되는 듯했다.
"저건 그냥 두고 갔네요!"
몸무게가 가장 가벼운 자동인형을 비공정으로 올려보냈다.
바이마르 사냥팀이 저기까지 올라가서 배를 끌어 내리거나 비행석을 꺼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저들은 비공정 안에 비행석보다 엘프 차원의 비행석 광산을 노리고 있었기에 그냥 두고 간 것 같았다.
[주군! 배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이는 것을 제외하곤 멀쩡해 보입니다.]
자동인형이 보고했다.
'그래? 그럼 저건 쓸 수 있겠는데!'
76. 황무지와 부유섬.
76. 황무지와 부유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