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황무지와 부유섬.
76. 황무지와 부유섬.
"쿠오크?"
비공정이라고 마냥 공중에 떠 있는 건 아니었다.
"기간트 10대까진 무리네요."
암 드로운과 킹콩인형이 올라타고 기간트 10대를 매달리게 했더니, 비공정이 천천히 땅에 내려왔다.
"휴! 그런데 엘프들은 어떻게 비공정을 착륙시켰지? 공중에서 타고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에테나가 피식 웃었다.
"그건 엘프만의 방식이 있죠."
"뭔데, 그 방법이?"
"물의 정령을 소환해 비행석을 완전히 덮으면 됩니다."
"뭐? 하지만 이곳 세상에선 정령을 소환하지 못한다며? 그럼 어떻게 착륙시키려고 했어?"
"사실은 비행석을 물에 잠기게 하면 부유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어요. 그래서 강철박스 안에 넣은 거고, 거기에 물을 채워서 착륙시키는 거죠."
"에이! 무슨 큰 비밀도 아니네."
"네, 만약 비행석에 그런 성질이 없었다면 저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비행석은 하늘 높이 계속 올라가 우리도 채취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우기 때가 부유섬과 부유석이 아래로 내려와 비행석을 캐기 가장 좋은 시기죠."
에테나의 말을 들으니, 이곳 세상에서 비공정을 편히 쓰기 위해선 정말 프로펠러 같은 별도의 동력 장치가 필요했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착륙시키거나 이륙할 수 있었으니까.
"이거 엘프 차원에 가면 움직일 수 있겠어?"
에테나에게 물었다.
"바람을 타는 걸 말하는 거면 혼자서도 가능합니다."
"그럼 바로 쓸 수 있다는 거네."
문제는 이걸 저쪽 차원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에테나의 말로는 아직 며칠은 더 가야 한다고 했다.
이대로 밧줄에 묶어 계속 끌고 갈 순 있지만, 그건 정말 비효율적이었다.
비공정을 인형의 집에 넣을 수 있을까?
이놈의 헌터 시스템은 다 좋은데, 고지식해서 설명대로 하지 않는다면 전혀 반응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내 마법인형이 인형의 집에 무언가를 들고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마법인형이 소지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들 수 있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법인형들이 힘을 합해서 물건을 들고 넣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문제.
'비행석이 달려 아주 가벼워진 이 비공정을 암 드로운이 혼자 들고 인형의 집에 들어가면 과연 그냥 들어갈 수 있을까?'
또, 비공정에 기간트를 태우고 암 드로운이 인형의 집에 들고 들어가면 비공정과 기간트 모두 함께 그냥 들어갈 수 있을까?
바로 실험해 보기로 했다.
"젠장, 왜 안 되는 거야?"
결과는 바로 나왔다.
그냥 암 드로운만 쏙 인형의 집으로 들어갔다.
난 이해할 수 없었다.
비행석을 이용해서 들지 말라는 법은 없었잖아!
순수한 무게만 인정한다는 거야 뭐야?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냐?
더럽게 까다롭네.
처음으로 인형의 집과 헌터 시스템에 실망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일단 비행석을 모두 떼서 인형의 집에 넣어!"
1미터 크기의 비행석 박스를 비공정에서 하나씩 제거했다.
그리고 암 드로운과 킹콩인형이 인형의 집에 들고 들어갔다.
다행히 이번엔 비행석 박스도 함께 들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이건 가벼워서 인정한다는 건가?
대체 기준이 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인형의 집에 비행석 박스를 놓았더니, 순식간에 수백 미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이건 괜찮다.
인형의 집에 있는 물건은 내가 조작해, 위치를 바꾸거나 마법인형의 손까지 바로 옮길 순 있었으니까.
비공정의 바닥과 갑판에 있는 것까지 총 10개의 비행석을 옮겼다.
생각보다 숫자가 꽤 많았다.
이제 비공정은 그냥 땅 위에 올려진 범선일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짜 배처럼 바닥이 촘촘하고 치밀하진 않았고, 구조가 단순했기에 무게가 훨씬 덜 나갔다.
"자! 모두 모여!"
편법이 안 되면 무식하게 간다!
"하나둘셋 하면 모두 한꺼번에 드는 거야!"
암 드로운이 선미를, 킹콩인형이 선수를 맡았다.
그리고 중앙은 내 대형 토우인형이 잡았다.
그리고 표범인형은 선수 쪽에서 어깨를 댔고, 자동인형들도 모두 선체를 잡았다. 심지어 사마귀인형도 돛대 끝에 매달려 날 준비를 끝냈다.
"자! 하나, 둘, 셋! 들어!"
"으아!"
"쿠아아!"
"힘내라!"
인형의 집으로!
쑤우욱!
"헉! 비공정이 들어갔어요!"
"쿠오오크?"
에테나와 쿠훌린이 경악했다.
성공했다!
시간과 힘은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인형의 집에 비공정을 넣는 것은 같았다.
이거 괴수 마법인형을 더 늘려야겠다.
그래야 수월하게 비공정을 인형의 집에 넣지.
다만 운명의 실이 부족했기에 마냥 늘릴 순 없었다.
"그만 가자!"
우린 다시 바이마르 사냥팀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
드디어 차원 균열에 도착했다.
'허! 생각보다 너무 큰데.'
공간이 일그러진 것 같은 기분 나쁜 꿈틀거림.
그 범위가 수백 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이미 바이마르 사냥팀은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마르실과 엘프 안내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먼저 들어간 것 같고, 지금은 마차와 병사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저기 안쪽은 어디지?"
"전엔 아주 아름다운 숲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폐허지요."
"안쪽엔 어떤 괴수가 있지?"
"종류가 많아요. 강한 괴수도 많고. 무리 지어 사는 놈들도 많죠."
"그런데 왜 이쪽 차원 균열로 넘어오지 않는 거지?"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놈들은 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희가 이곳 차원 균열을 넘어온 겁니다."
난 쿠훌린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쿠오크! 그렇다! 우리를 공격한 괴수들은 우리를 따라 대수림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대답은 에테나와 같았다.
아마도 드워프도 같을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엘프와 오크, 드워프의 차원이 비슷한 시기에 망했고, 그들은 모두 이곳 세계와 연결된 균열로 피신했다. 그리고 저쪽 세계를 폐허로 만든 괴수들은 이쪽 세계로 들어오지 않았다.
왜지?
두 개의 차원 균열은 건널 수 없는 건가?
처음 이계 난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들의 차원이 어떻게, 왜 망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제 곧 이유를 알겠지.
"쿠오크! 인간들이 다 들어갔다."
"나도 봤어. 하지만 좀 더 기다려."
일단 들어간 사냥팀도 마르실 족장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정보가 있었다.
그들도 안에 괴수가 많다면, 다시 균열을 넘어올 것이다.
'다행히 조용한 거 보니, 괜찮은가 보네.'
"자! 이제 우리도 들어갈 준비 하자."
암 드로운과 기간트를 꺼냈다.
그리고 자동인형들을 모두 기간트에 태웠다.
룩급 기간트 3대에 비숍급 기간트 4대, 나이트급 2대, 폰급 1대.
거기에 거신인형과 내 오리지널 나이트급 마장기까지.
"가자!"
"쿠오크!"
내 마법군단과 차원 균열을 넘었다.
***
쿵! 쿵! 쿵!
쏴아아아!
거센 바람이 일었다.
그리고 기간트의 발아래 붉은 흙먼지가 뿌옇게 나부낀다.
'이게 엘프 세상이라고?'
보이는 것은 온통 불모지뿐.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았다.
'이건 지구와 똑같잖아!'
"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십여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에테나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우리의 고향이······."
그녀는 울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에테나에게서 처음으로 슬픔과 분노가 동시에 느껴졌다.
난 그녀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내가 죽기 전에 지구도 곳곳이 이처럼 황무지로 변했다.
특히 초거수 카르마탄은 수십 km에 달하는 거대한 몸집으로 닥치는 대로 산과 강, 숲, 대지까지 마구 집어삼켰다.
놈이 지나는 길마다 불모지가 됐는데, 그 모습이 지금 이곳과 비슷했다.
'설마, 이곳에도 카르마탄 같은 초거수가 있나?'
놈을 떠올리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래선 생존자는 고사하고 생명체 찾기도 쉽지 않겠어.
"쿠오오오크! 오크 세상도 화염에 휩싸였다!"
옆에 있던 쿠훌린도 분노하고 있었다.
그도 폐허가 된 세상을 보자, 자신들이 살던 세상이 떠 올랐나 보다.
그나마 드워프가 살던 세상이 듣기론 제일 나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섬에 가족들을 남겨 놓고 도망쳤기에 걱정이 더 심했다.
'이거 드워프 가족들도 구하러 가야 하나?'
현재 기간트 수리와 생산 모두 드워프들이 하고 있었다.
글러드 왕자와 드워프들은 벌써 2년째 나를 도와주고 있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힘을 키워서 가족들을 구하러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처참한 광경을 보니, 드워프 가족들이 얼마나 버틸지 나도 걱정이 됐다.
어쩌면 벌써 다 죽었을지도······.
이번에 비행석을 잔뜩 모아서 돌아가면 아무래도 드워프가 살았던 세상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장벽이 있어서 다행이야.
새삼 거신들이 고마웠다.
"타일러님, 빨리 가시죠."
에테나가 앞장섰다.
그녀는 벌써 자신을 진정시켰다.
"잠깐! 어차피 사방이 다 불모지라면, 이제부턴 좀 편하게 가자."
난 마법인형을 다시 총동원하여 비공정을 꺼냈고, 다시 비행석 박스를 붙였다.
그리고 암 드로운과 기간트는 다시 인형에 집에 넣었다.
그리고 자동인형들과 괴수 마법 인형들만 갑판에 배치했다.
생각보다 비공정의 속도가 매우 빨랐다.
그건 에테나가 바람의 정령을 소환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람과 물 정령이 주특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능숙하게 비공정의 돛을 조작했다.
내 자동인형들이 돕긴 했지만, 그들은 뱃일에 초보들이었고, 여섯 개의 돛과 방향타까지 에테나 혼자서 조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쿠오크! 타일러여 저기 간다!"
쿠훌린이 까마득한 아래를 가리켰다.
우린 순식간에 바이마르 사냥팀을 따라잡았다.
사냥팀의 긴 기간트 행렬이 미니어처처럼 작게 보였다.
이젠 굳이 뒤를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먼저 가서 부유석을 최대한 챙겨서 빠르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이 불모지에서 빨리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비행 괴수는 안 보이네."
"저도 그게 이상합니다. 지상에 괴수도 거의 안 보이고요."
"먹을 게 없어서 다른 곳으로 갔나 보지."
"휴! 그래도 숲과 산이 없으니, 우리가 살아갈 터전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정령의 힘도 많이 약해졌고요."
"그런데 세계수의 씨앗은 어떻게 구할 생각이었어? 이 정도면 세계수도 살지 못할 것 같은데?"
"여기서 동쪽에 큰 섬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 세이린 일족의 세계수가 있습니다. 그곳엔 차원 균열이 없었기에 괴수의 손이 닿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연합 엘프들이 세이린 일족을 찾아 나선 겁니다."
"그게 얼마나 됐지?"
"5년째입니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 정도면 원정팀이 전멸했거나 최소한 임무는 실패했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지금 바이마르 사냥팀이 향하는 방향은 북쪽이지 동쪽은 아니었다.
역시 라디프 공작은 처음부터 세계수의 씨앗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곧장 비행석을 찾으러 가는 것이었다.
그걸 알았기에 에테나는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엘프는 결국 이용만 당하겠네······.
***
[부유섬 지대]
그나마 다행인가.
계속 황무지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조금씩 작은 산과 들판에 푸른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이 세상도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에테나! 저 거대한 산은 뭐지?"
수직으로 뻗은 산.
그 높이가 수백 미터 이상 뻗어 있었다.
"엘프 선조들의 지혜죠."
"무슨 말이지?"
"옛날 고대 엘프들은 비행석을 확보하기 위해. 이곳 광산 일대에 넝쿨과 뿌리가 굵고 단단한 식물을 심었습니다. 그 결과 식물들이 성장해 부유섬들을 서로 단단히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고, 수천, 수만 년이 지나자 수천 개의 큰 줄기에 묶이게 되었죠."
"아! 이제야 비행석 광산이란 뜻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겠네. 저기에서 비행석을 캐면 되겠군."
에테나는 미소를 지었다.
꼭 거대한 담쟁이 넝쿨이 온 사방에 뻗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될까?"
"큰 섬에 내려서 작업하는 게 좋습니다. 아무래도 큰 섬을 들어 올리려면 비행석이 크고, 아니면 숫자가 많을 테니까요."
"좋았어! 에테나 조심해서 몰고 들어가, 가장 큰 섬부터 찾자."
바이마르 사냥팀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사실 비교적 멀쩡한 비공정을 찾았을 때, 며칠이 걸리더라도 먼저 챙겨야 했다.
그래야 작업이 훨씬 쉽고 빨라지지.
저들의 리더가 멍청한 것을 감사했다.
"저기, 섬 옆으로 붙어!"
우린 인근에서 가장 큰 섬 옆에 붙었다.
77. 힘멜 일족.
77. 힘멜 일족.
이거 운이 너무 좋은데!
암 드로운의 갑옷에 대지 마법진을 새겨 넣었다.
마치 내가 이 상황을 알고 일부러 넣은 것 같았다.
암 드로운이 가슴에 왼쪽 손을 대고 마나를 뿜어내자, 손바닥에서 황금빛 마법진이 번쩍였다.
그리고.
"어스 웨이브!"
주먹을 지면을 향해 강하게 내려찍었다.
콰앙! 쩌엉!
땅이 크게 울리더니.
쿠쿠쿠쿠쿵!
전방으로 땅이 파도처럼 너울거리더니, 부유섬 한쪽이 산산이 부서졌다.
"에테나, 지금이야! 정령을 날려!"
"네!"
에테나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작은 바위와 흙무더기를 가리키자, 바람의 정령들이 재빨리 달려가 낚아챘다.
그리고 곧장 한쪽에 서 있는 다섯 대의 기간트에게 전달했다.
기간트는 바위와 흙무더기를 받아들고, 킹콩 마법인형이 펼친 그물 위에 모았다.
킹콩 마법인형은 그물로 바위와 흙무더기를 감싸곤 그대로 인형의 집으로 들어갔다.
"좋았어!"
이제부턴 내 차례.
난 인형의 집 위에 둥둥 떠 있는 바위 조각과 흙무더기들을 끌어와 아래로 가져왔다.
그럼 인형의 집 안에 있는 자동인형들이 기간트에 타서 망치와 도끼로 바위를 쪼개고 흙무더기를 부쉈다.
그럼 비행석만 공중으로 둥둥 떠올랐고, 흙과 바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탁월한 연계 플레이가 지금 우리의 비행석 채취 방식이었다.
바이마르 사냥팀도 아마도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업을 할 것이다.
대신 그들은 비공정이 없으니, 지상에서 가까운 부유섬이나 부유석을 기간트를 이용해 아래로 끌어내려, 끝에서부터 망치로 부수고 엘프가 있으니 바람의 정령을 이용할 것이다.
그리고 물이 들어간 수조에 비행석만 따로 넣어서 보관할 것이다.
과정이 복잡하고, 부유섬을 끌어 내리는 데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릴 것이라 생산성은 오히려 내가 훨씬 좋을 것이다.
지난 10일간 5개의 큰 부유섬이 사라졌다.
이건 속도가 엄청 빠른 것이었다.
문제는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암 드로운의 마나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더는 작업을 시킬 수 없었다.
대지 마법을 많이 쓰기도 했고 이곳은 다른 세상이라 저쪽 세계의 마나가 없었기에 마나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자동인형 역시 함께 기간트에 타고 부유섬을 부수고 비행석을 채취했지만, 마나를 상당히 많이 소모해 작업을 중단시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와 자동인형은 기간트에 타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석 배터리로부터 마나를 공급받아 조금씩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오면서 마석 배터리 소모만 생각했지, 기사들의 마나 소모는 생각지도 못했다.
'바이마르 사냥팀도 마찬가지겠지.'
지금쯤 채굴을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곧 이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엔 마석 배터리를 더 많이 챙겨와야겠어.'
기간트로 땅과 바위를 깨는 작업은 전투와 같았기에 마석 배터리 소모량이 엄청났다.
많이 챙겼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3분의 2를 소모했다.
나머진 돌아갈 때를 대비해 남겨뒀다.
대수림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에테나! 아쉽지만 그만 돌아가자."
"어쩔 수 없지요."
"쿠오크! 오크를 더 데려왔어야 했는데!"
쿠훌린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비행석이 많아야 오크 해병들에게 더 많은 기간트 갑옷을 만들어 줄 수 있을 테니까!
오크는 타고난 근력과 체력이 있었기에 나름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밥만 잘 먹이고 잘 쉬게 해준다면, 계속 일할 수 있었으니 어쩌면 기간트보다 효율이 높을 수 있었다.
'다음엔 오크들도 좀 데려올까?'
일단 비행석을 상당히 모았으니, 돌아가서 드워프들에게 부탁해 새로운 비공정을 만들거나 지금 있는 비공정을 개조해서 다시 와야 할 것 같았다.
"다들 올라타! 그만 돌아가자!"
***
수백 개의 부유섬 사이로 석양이 진다.
엘프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정말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멸망한, 아니 멸망하고 있는 세상에도 해는 떠오르고, 지금처럼 수평선 너머로 지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아?"
"아니요. 끄떡없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에테나는 정령도 부리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배까지 홀로 조종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 세상에 와서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쿠훌린 역시 자기 무기인 창과 도끼날을 세우며 묵묵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둘 다 속이 말이 아니겠지.
오크가 살던 세상은 불타고 있다고 했고, 엘프의 세상은 점점 불모지가 되어간다.
그래도 우린 돌아갈 집이 있다.
거신들이 만든 장벽 덕분에 우린 괜찮은 거다.
'우린 괜찮겠지?'
왜 지금 시기에 대수림에 차원 균열이 생기고, 다른 차원의 세상이 망해 가고 있는지 불길한 생각이 든다.
만약 장벽이 제 기능을 못 하게 되면 어쩌지?
괴수들이 장벽을 넘으면?
기간트로 막을 수 있을까?
아니야! 거신들도 막지 못했기에 헬다임 장벽을 만든 것이다.
그럼 더 강한 무기를 만들어야 하나?
에이, 설마 앞으로 몇백 년은 끄떡없겠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날려버렸다.
그래도 이번 비행석을 얻는 여정은 매우 순탄했다.
비공정도 생겼고.
이제 돌아가는 길만······.
"크릉!"
쿠훌린이 벌떡 일이서더니, 코를 벌렁거렸다.
순간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왜? 설마, 아니지?"
"쿠오크! 괴수의 냄새가 난다!"
"어디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몸길이 2.5미터 크기의 괴수 하나가 근처 부유섬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엠벌럭이에요."
"엠벌럭?"
괴수를 보는 에테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얼굴은 박쥐처럼 생겼고, 팔다리가 아주 길고 가늘었으며, 갈비뼈가 드러난 빼빼한 모습이 꽤 징그럽게 생겼다.
"하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은데, 항상 무리를 지어 움직이기에 아주 위험한 놈들입니다. 저건 척후병일 거고 근처에 놈들의 무리가 있을 거예요."
"혹시, 점프력이 좋은가?"
"그건 아닙니다. 나무 타기는 잘하는데, 점프력은 보통 수준입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런 놈들이 비공정에 뛰어들면, 골치가 아플 테니까.
"카아악!"
놈이 입을 벌리며 괴이한 소리를 냈다.
"혹시 모르니까 너무 부유섬 옆으론 붙지 마."
"네."
우드드드! 파파팟!
그때 수십 마리의 엠벌럭이 근처 굵은 뿌리와 나무 넝쿨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에테나, 고도를 올리자, 저놈들이 위로 올라가서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네!"
혹시나 몰라 표범인형과 자동인형들을 갑판에 꺼냈다.
기간트는 너무 크기에 갑판에서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위로 올라갈수록 놈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졌다.
"쿠오크! 저쪽에도 올라온다."
쿠훌린이 도끼로 가리켰다.
굵은 넝쿨이나 뿌리마다 수십 마리씩 떼 지어 올라가고 있었다.
이거 어째 불안한데······.
휙! 휙!
괴수가 비공정 옆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에테나, 조심해!"
"네!"
에테나가 급하게 비공정의 방향을 움직였다.
쿵! 쿠쿵!
하지만 괴수 몇 마리가 갑판에 떨어졌다.
"크앙!"
"기사들이여! 놈들을 죽여라!"
자동인형들과 표범인형이 괴수들을 공격하려 했는데······.
"주군. 이미 죽어 있습니다."
"뭐?"
괴수들의 목과 몸통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
비공정이 방향을 틀고, 고도를 더 높였다.
그리고 그들을 발견했다.
"뭐야? 아직 살아 있는 엘프가 있었네!"
하나의 넓이가 100여 미터 정도 되는 큰 부유섬 십여 개가 연결되어 있었고, 그 위에 집과 밭, 열매가 열린 나무들이 보였다.
"힘멜족이에요!"
에테나가 소리쳤다.
"저들은 오랜 옛날부터 부유섬에 사는 엘프들이에요."
"오래 버티진 못하겠는데?"
고개를 흔들었다.
엠벌럭들이 굵은 넝쿨을 타고 올라와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힘멜족 엘프들은 화살을 쏘고, 바람과 땅 정령을 이용해 막고 있었는데, 문제는 괴수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뭐야? 노인과 아이들도 있네!'
맨 위쪽의 부유섬에 제법 큰 물웅덩이가 있었고, 노인과 아이들은 그곳에 모여 있었다.
젊은 엘프들이 잘 막고 있지만, 문제는!
엠벌럭 무리가 다른 쪽 길을 찾아서 오르고 있었다.
이대론 머지않아 위아래로 포위당할 것이다.
아니! 벌써 괴수들이 위쪽 부유섬에 도착했다.
그리고 뿌리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이거 이러다 다 죽겠는데······!'
엘프 노인들이 급하게 바람과 땅의 정령을 소환해 뿌리로 보냈다.
정령들은 아주 잘 싸웠지만 몰려오는 괴수 숫자가 너무 많아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타일러님! 제발 저들을 도와주세요!"
에테나가 달려와 내게 매달렸다.
"힘멜 일족은 매우 폐쇄적이지만 다른 엘프들과 달라요.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샤이닝 일족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도와······."
"하지만 괴수가 너무 많아! 나도 다 막긴 힘들어."
잠깐, 끝까지 막을 필요는 없잖아!
괴수를 다 죽일 필요도 없고.
"좋아! 해보자!"
'암 드로운!'
쿠웅!
나의 거신기사가 괴수들이 넘어오고 있는 부유섬 위에 올라탔다.
그 옆에는 룩급 기간트 2대가 방패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그러자 노인과 아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일스, 다니엘 기간트에 타라!'
아리칸 공국 출신 룩급 기사 둘이 기간트에 올라탔다.
난 바로 명령을 내렸다.
"괴수들을 막아라!"
"주군을 위하여!"
[주군을 위하여!]
암 드로운과 두 자동인형이 괴수들을 향해 달렸다.
11미터의 기간트 셋이 방패로 괴수들을 밀어붙였다.
쾅! 콰콰쾅!
"캬아아!"
"끼아!"
엠벌럭들은 힘에서 밀리며 부유섬 밖으로 우르르 떨어졌다.
"내 칼을 받아라!"
부웅!
서걱! 서걱!
암 드로운이 검을 휘두르자, 괴수들이 우수수 잘려나갔다.
엠벌럭은 거신인형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뒤쪽에서 두 대의 룩급 기간트가 방패로 막고 검을 찌르니, 괴수들은 부유섬으로 넘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잠시 시간을 벌뿐이었다.
'자할리! 가장 큰 도끼를 준비해라!'
[네! 주군!]
토우인형을 이용해 자할리와 룩급 기간트를 부유섬에 내렸다.
지금 룩급 기간트가 들고 있는 것은 롤랑의 저택에서 찾은 거신 장인이 만든 명품 도끼였다.
"뿌리를 잘라버려!"
[네!]
쿵쿵쿵!
자할리의 룩급 기간트가 달려갔다.
그러자 암 드로운이 앞으로 나아가며 거대한 뿌리를 타고 올라가 밀려오는 괴수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다른 두 룩급 기간트도 암 드로운을 따라 전진했다.
[으아아! 자할리가 왔다!]
부우웅! 쩌억!
자할리의 기간트가 도착해 부유섬으로 이어진 뿌리들을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쩍! 쩍!
한번 찍힐 때마다 뿌리가 잘려나갔다.
하지만 뿌리는 많았고, 시간이 걸렸다.
"밀리지 마라! 우린 타일러 주군의 기사들이다!"
[전진하라!]
기간트의 활약을 본 노인 엘프들이 내가 타고 있는 비공정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지금 기간트가 내가 소환한 정령인 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밧줄을 잡아!"
사마귀 마법인형이 밧줄을 들고 엘프들에게 날아갔다.
"밧줄을 나무에 묶어!"
노인 엘프들은 내 말을 따랐고, 아이들은 엘프 말을 하는 인간이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콰직!
[됐다! 뿌리는 잘렸다.]
뿌리가 잘리자, 뿌리에 올라타 싸우던 두 룩급 기간트가 부유섬으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암 드로운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
"에테나! 전진해!"
"네!"
에테나가 바람 정령 마법을 이용해 비공정의 돛에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거대한 부유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가 움직이자, 그 밑에 있는 다른 부유섬들은 뿌리와 넝쿨로 이어져 있었기에 줄줄이 딸려왔다.
이제 문제는 젊은 엘프들이 막고 있는 아래쪽이었다.
그곳을 잘라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부유섬이 괴수들에게서 멀어지자, 암 드로운을 인형의 집으로 불렀다.
"타일러님! 훌륭한 작전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저길 끊어야 해!"
토우인형을 이용해 룩급 기간트 두 대를 인형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도끼를 든 자할리의 기간트는 줄기를 타고 아래쪽 부유섬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이미 입구가 밀려 엘프들은 수십 명이 죽었고, 여러 개의 부유섬을 빼앗긴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도 부유섬 위에서 괴수들과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킹콩! 이번엔 네가 가라!'
쿠웅!
킹콩인형이 비숍급 기간트 두 대를 들고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부유섬 뒤쪽에 내렸다.
'더그, 엘다크!'
그리고 가장 오래된 비숍급 자동인형 둘을 보냈다.
"크어어어!"
쿵쿵쿵!
7미터 킹콩인형이 괴성을 지르며 가슴을 치자, 엠벌럭과 싸우고 있던 엘프들이 기겁했다.
갑자기 뒤쪽에 또다른 괴수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하지만.
다다닥! 쿵! 콰직!
킹콩인형이 괴수들을 주먹으로 때려잡자 자신들을 돕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비숍급 기간트 둘이 검을 휘두르며 괴수를 공격했다.
"엘프들은 뒤로 물러서라!"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노인 엘프들이 내 뜻을 알고, 바람의 정령을 전장으로 보냈다.
그리고 엘프들에게 뒤로 물러서라는 손짓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엘프들이 하나둘 줄기를 타고 다음 부유섬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끼를 든 자할리의 룩급 기간트가 도착했다.
부웅! 쩍! 쩍!
자할리는 이번엔 줄기를 도끼로 자르기 시작했다.
"크아아!"
콰앙!
킹콩인형의 활약이 눈부셨다.
엠벌럭을 한 손에 잡고 던져 다른 놈을 맞추질 않나! 발로 짓밟아 터트리고, 괴수를 양손으로 잡고 찢어버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엘프들이 뒤로 물러서자, 괴수들이 킹콩인형과 두 기간트를 향해 집중적으로 몰려들자,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괴수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기간트의 장갑을 거칠게 물어뜯자, 장갑이 뜯어지고 손상되었다.
그리고 몸통 역시 긁히고 손상되기 시작했다.
역시 이놈들도 괴수는 괴수였다.
"쿠앙!"
콰직!
킹콩인형이 몸을 날려 양손 내려찍기를 시전했다.
괴수 하나가 몸통이 터지며 즉사했다.
하지만 다른 괴수들이 달려들어 다리와 어깨를 물었다.
꼭두각시라 고통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움직임이 둔해졌다.
이건 운명의 실이 끊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야!]
쩌억!
굵은 줄기가 잘리자, 작은 줄기가 뜯어지기 시작했다.
후드드득!
그리고 부유섬이 점점 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됐다!'
난 먼저 킹콩인형을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런데 두 기간트는 운명의 실타래 범위를 조금 넘어갔기에 인형의 집에 넣지 못했다.
[주군의 명령이다! 이쪽으로 달려라!]
자할리가 소리치자.
두 자동인형이 탄 기간트가 자할리가 있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괴수들이 사방에서 달라붙고 앞을 막았지만, 검을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리고 부유섬 끝에 도착해 몸을 날렸다.
"됐다!"
인형의 집으로!
두 자동인형이 인형의 집으로 들어왔다.
아쉽지만 두 기간트는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괜찮다.
자동인형이 중요하지, 기간트는 많으니까.
"휴우!"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동인형과 여기서 헤어졌다면 다시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살아남은 힘멜 일족은 500명이나 됐다.
엘프들은 모두 가장 큰 상부 부유섬에 모였다.
난 자동인형들과 기간트를 모두 인형의 집에 넣고, 쿠훌린에게 키를 맡기고, 에테나와 엘프들이 모인 부유섬으로 건너갔다.
나만 넘어가면 엘프들이 거부반응을 일으킬까 에테나를 동행한 것이다.
그때 한 건장한 노인 엘프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전 힘멜족 족장 테라보라 합니다."
족장 엘프의 태도는 사뭇 공손했다.
"당신께서 저희를 구해주신 분입니까?"
"그렇소."
"저희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이제 저희 목숨은 당신께 있습니다."
테라보가 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목숨을 빚진 자, 목숨으로!"
그러자 뒤쪽에 있던 엘프들도 일제히 내게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목숨을 빚진 자, 목숨으로!"
뭐야? 지금 내게 충성을 맹세한 거야?
에테나가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들은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는 일족이라고 했죠."
그렇게 힘멜 일족 엘프 500여 명이 이제 내 명령을 따르게 됐다.
잠깐, 그럼 세계수의 씨앗이 필요할까?
78. 내가 그랬다고?
78. 내가 그랬다고?
하나의 비공정이 7개의 부유섬을 끌고 있었다.
언뜻 보면 하늘을 나는 기차 같다.
이동 속도는 정말 하품 나게 느렸지만, 비행 괴수가 없는 이상 급할 건 없다.
그보다 정령으로 땅의 울림을 들을 수 있다니!
'이건 생각보다 더 대단한 능력이잖아!'
힘멜 일족의 특수 능력.
그들은 샤이닝 일족만큼 아름답지도 않았고, 바람의 정령도 많이 부릴 수 없었지만, 자신들만의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었다.
[땅의 울림!]
그들은 땅이 연결된 곳이라면 링구르라는 희귀한 대지 정령의 울림을 이용해 신호를 보낼 수 있었고, 그 신호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링구르를 소환할 수 있는 것은 힘멜족뿐이었다.
아베르크 제국은 이미 복잡하게 철도를 깔아 수송력을 극대화했고, 마석이 함유된 전선을 철도와 같은 라인으로 제국 전역에 심었기에 하루면 제국의 모든 곳으로 연락을 보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빌헬름 뢰트켄의 마석 산업혁명 덕분이었다.
하지만 대수림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무 많은 마나의 간섭으로 인해 통신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힘멜 일족의 땅의 울림이라면 전진 기지끼리 연락을 주고받을 수도 있었고, 힘멜 일족이 포함된 사냥팀 역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대수림에서 적의 움직임이나 정보를 거의 실시간으로 보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고, 이런 정보는 엄청난 무기가 된다.
'이걸 구축해 놓으면 대수림의 정보는 내 손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겠지.'
한 가지 큰 문제라면 힘멜 일족이 땅의 정령을 다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세계수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세계수를 심고 성장하기까진 20년이나 걸린다.
20년 후에 일이라······.
'그래 잠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시간이 좀 걸릴 뿐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에테나를 쳐다보았다.
"에테나! 키를 돌려!"
"네? 어디로?"
"세이린 일족의 섬으로 간다"
"저, 정말입니까?"
갑자기 에테나의 눈이 배로 커졌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타일러님, 감사합니다."
"감사는 일이 성공하면 하라고."
"네! 선장님의 명을 받았습니다."
촤르르르르!
에테나가 비공정의 키를 힘차게 돌렸다.
500여 명의 믿음직한 부하가 생긴 것이기도 하지만.
난 500명이 넘는 힘멜 일족의 목숨을 책임지게 되었다.
테라보 족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들이 이 세계에 마지막 남은 힘멜족이었다.
사실 그들도 희망이 없었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다른 엘프들보다 힘멜 일족의 꽤 많이 살아남았지만, 이번에 역대급 우기를 거치면서 부유섬들이 너무 지상 가까이 내려왔고, 괴수들이 쉽게 줄기와 뿌리를 타고 올라와 부족들이 하나씩 사라졌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도 얼마나 버틸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젠 희망이 생겼다.
새로운 세상으로의 초대!
물론 그곳도 괴수가 있고, 끔찍한 날씨의 대수림이었지만, 적어도 불모지에 아무것도 없는 이곳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구해준 나와 강철 소환수도 있었고.
'그냥 장기 투자라고 생각하자.'
당장은 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먼 미래엔 내가 이들의 도움을 더 받을 것이다.
그렇게 느릿느릿한 비공정은 엘프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세이린 일족의 섬으로 향했다.
***
[세이린 일족의 섬]
그냥 조금 큰 섬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보니 우리나라의 강화도 수준은 되는 것 같았다.
사실 강화도는 가본 적이 없지만······.
아무튼, 꽤 큰 섬이라 이곳에 사는 세이린 일족도 6천 명에 달했다고 했다.
우린 항구에 있는 거대한 탑에 정박했다.
이곳 탑은 과거 여러 비공정이 공중에 정박했던 접안 시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비공정 단 한 대밖에 없었다.
"조심히 다녀와!"
"네! 꼭 설득해 보이겠습니다."
에테나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에테나가 세이린 일족의 엘프들과 탑을 내려갔다.
나도 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엘프가 아닌 생명체는 출입금지.
그랬기에 나와 쿠훌린은 비공정에 남아 있어야 했다.
"엘프가 다 아름다운 건 아니었네!"
"쿠오크! 저 엘프는 오크 보다 못생겼다!"
"그건 아닌 거 같지만, 어쨌든 특이하게 생겼네."
키는 2미터에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나 있었고, 피부엔 비늘이 있었다. 게다가 긴 꼬리까지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엘프라 내 기준엔 오크보단 나아 보였다.
괴이해 보이는 건 인간의 기준이겠지.
속도가 너무 느렸기에 이곳으로 오는 길에 부유섬 2개는 부숴서 비행석을 채취했다.
그리고 5개의 부유섬은 여기서 조금 떨어진 바다 위에 그냥 놓고 왔다.
작은 바위나 흙 돌멩이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데, 부유섬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간 항구 전체가 엉망이 될 테니까.
대신 부유섬 하나마다 자동인형과 기간트를 한 대씩을 호위로 남겨 놓았다.
'해무의 능력이라, 그건 좀 부럽네.'
세이린 일족의 섬이 왜 비행 괴수의 공격을 받지 않았는지 알았다. 그건 그들이 바다 정령을 이용해 해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는 괴수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비공정 위에서 바라본 섬은 아름다웠다.
섬 중앙에 200여 미터 높이의 큰 나무가 보였다.
일반 나무에 비하면 200미터도 엄청나게 큰 나무지만, 대수림의 보통 나무도 300, 400미터라 아담해 보였다.
그리고 산과 푸른 들, 아름다운 바닷가와 항구까지.
누구나 한번 살고 싶은 그런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균열이 한번 생기면 그 길로 쑥대밭이 될 것이다.
어제 에테나에게 이곳에 문제가 생기면, 차원 균열을 넘어오라고 말하라곤 했지만,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쿠훌린, 내 기사들과 갑판을 잘 지켜."
"쿠오크! 알았다. 타일러여."
난 선실로 들어갔다.
처음으로 내가 직접 나서지 않고 결과를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에테나가 자신 있어 했으니, 잘하겠지.
그럼 우리 앨리슨이 뭐 하고 있는지 볼까.
[병렬사고(lv.3)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짹(lv.5) 분신인형과 의식을 연결합니다.]
차원 균열 때문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엘프 차원에서도 짹 분신인형과 연결됐다.
'어? 여긴 어디야? 오늘 입학식 아니었나?'
짹의 의식이 흘러들어온다.
'뭐? 입학식은 어제였다고?'
아차! 단 한 번밖에 없는 입학식을 보지 못하다니!
대수림에 들어온 날부터 날짜가 큰 의미가 없었기에 자주 보지 않았다고, 입학식을 놓쳤다.
왠지 아쉬웠다.
그때 짹 앞에 있는 문이 열렸다.
그리고 울고 있는 앨리슨이 보였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누가 앨리슨을 울렸어?'
앨리슨은 안에 있는 선생님께 고개를 숙이더니, 문을 닫았다.
'뭐야? 선생님께 혼난 거야?'
그때 짹의 의식이 공유됐다.
짹이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뭐? 같은 반 친구와 싸웠다고?'
의식엔 앨리슨이 자기보다 큰 남자애랑 싸우는 것 같았다.
짹이 격하게 고개를 흔드는 게 느껴졌다.
'아! 앨리슨이 때렸구나······.'
앨리슨이 남자애의 배에 올라타서 주먹으로······.
이유는 앨리슨의 치마를 들쳤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남자애는 쌍코피가 났다.
'하아 등교 첫날부터 사고라니!'
그래도 맞는 거보단 차라리 때리는 게 낫지.
게다가 나이가 13살이나 먹은 놈이 아이스케키라니!
이건 범죄였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마스터, 죽일까요?]
'뭐?'
내 분노를 느꼈을까?
짹의 살기가 느껴졌다.
'아니야. 앨리슨이 잘하고 있으니까, 놔둬.'
앨리슨이 눈물을 훔치더니, 밝게 웃으며 복도를 뛰어가기 시작했다.
뭐지? 방금 연기한 거야?
짹은 그런 앨리슨의 뒤를 따라 달렸다.
순간 웃음이 흘러나왔다.
씩씩하게 잘 적응하고 있네······.
저런 평화가 계속 지속하길 빌었다.
'분신인형이 좀 많았으면 좋겠네. 궁금할 때 들여다보면 되니까.'
전생엔 나 대신 일을 많이 처리하기도 했다.
새삼 옛날 자동인형들과 분신인형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
'주군! 일어나십시오!'
"응?"
"쿠오오크!"
쿠훌린의 괴성도 들렸다.
"뭐지? 설마, 엘프들이 공격했나?"
서둘러 갑판으로 달려나갔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두운 밤.
횃불들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뭐야?'
"출발해!"
"응? 출발해?"
소리치며 달려오는 사람은 에테나였다.
그리고 그 뒤로 세이린 엘프 수십 명이 쫓아오고 있었다.
"쿠훌린! 밧줄을 끊어!"
"쿠오크!"
쩌억!
선체를 묶었던 밧줄이 끊어졌다.
킹콩인형을 꺼냈다.
"킹콩! 힘껏 밀어라!"
킹콩인형이 있는 힘을 다해 정박지를 발로 밀었다.
그러자 비공정은 정박지와 점점 멀어졌다.
"쿠훌린, 돛을 펴라!"
"쿠오크!"
"이런 너무 빨리 밀었나?"
에테나가 정박지 끝에 도착했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 이젠 뛰지 못할 정도까지 멀어졌다.
그때였다.
에테나가 몸을 날리더니 허공을 두 번 밟고, 선미 갑판 위로 내려앉았다.
"헉헉!"
에테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피슉! 피슉!
갑자기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엎드려!"
팍! 팍!
에테나는 자신이 밟고 뛰어넘었던 바람 정령을 불러오더니 돛을 향해 바람을 강하게 일으켰다.
비공정은 빠르게 항구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세이린 일족의 엘프들은 화살을 쏘며 우리를 향해 뭐라고 욕을 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때 에테나가 씨익 웃더니 품에서 큼지막한 붉은 과일을 하나 꺼냈다.
"그거 뭐야?"
"세계수의 열매에요."
"열매는 왜? 씨앗을 구하러 간 거 아니었어?"
"씨앗은 이 열매 안에 있죠."
"아! 어? 서, 설마 그거 훔쳤어?"
"왜요? 전 타일러님을 따라 한 건데요?"
"뭐? 내가 그랬다고?"
"네! 전에 타일러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허락을 구하기보다 용서를 빌기가 쉽다고. 다음에 만나면 세이린 일족에겐 제가 용서를 빌게요."
순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에테나가 세상 밝게 웃었다.
더는 뭐라고 하지 못했다.
내가 얘를 이렇게 만들었네······.
내 옆에서 좋은 것만 배운 것 같았다.
"처음엔 저도 차분히 설득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수의 열매가 하나밖에 없다고 거절했기에 계획을 바꿨죠. 전 열매는 포기하고 다른 문제를 꺼내며 세이린 족장과 원로들의 방심을 유도하고, 야밤에 경비의 눈을 피해 단 한 번에 성공했죠. 열매를 따는데, 어찌나 심장이 뛰는지. 휴!"
"그래,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만나면 꼭 용서를 빌어."
언제 만날지는 모르지만.
이건 20년에 단 하나의 열매를 맺는다는 귀하신 몸이었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었기에 쉽게 내주진 않았을 거다.
결국, 내가 들어갔어도 에테나와 같은 방법을 썼을 거 같다.
그렇게 우린 성공적으로 세계수의 씨앗을 구했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하죠?"
"뭐?"
에테나가 내게 세계수의 열매를 내밀었다.
"빨리 먹지 않으면 효과가 사라져요. 지금 먹어야 합니다."
시노우엘에게 들었다.
이걸 먹으면 인간의 수명이 2배로 늘고, 엘프가 먹으면 하이엘프로 진화한다고.
"타일러님, 드세요."
에테나는 세계수의 열매를 내게 건넸다.
"타일러님이 오래 사셔야 우리 엘프를 더 잘 보살펴 주시죠."
난 고개를 흔들었다.
"날 200년이나 부려먹을 셈이야? 그냥 딱 내 수명까지만 살련다."
그리고 에테나에게 다시 세계수 열매를 건넸다.
"저도 하이엘프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이엘프가 되면 타일러님과 함께 돌아다니지도 못해요."
에테나가 다시 열매를 내게 내밀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먹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리고 두 번 거절하는 건 또 예의가 아니지.
"쿠오크! 그럼 내가 먹지."
"어?"
쿠훌린이 세계수 열매를 집어 들더니!
아그작!
"쿠오크! 맛있다!"
"헉! 이 돼지 새끼가!"
퍽! 퍽!
나도 모르게 쿠훌린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리고 열매를 뺏었다.
얼마나 입이 큰지 한입에 삼 분의 일을 먹었다.
이런 차라리 내가 먹을걸······.
"젠장! 어쩔 수 없다. 똑같이 삼 분의 일씩 먹자."
난 세계수 열매를 몇 번 베어먹고 에테나에게 넘겼다.
에테나가 나머지 삼 분의 일을 깨끗하게 먹고 씨앗을 곱게 싸서 품에 넣었다.
"맛은 있네! 그래도 수명이 조금은 늘었을까?"
"글쎄요. 저도 세계수 열매를 나눠 먹었단 엘프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쩔 수 없지."
"네!"
"쿠오크!"
쿠훌린이 은근슬쩍 내 옆에 앉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자기도 먹은 게 미안했나 보다.
"으이그! 그래 됐다! 맛있게 먹었으면 된 거지!"
"쿠오오오크!"
"하하하!"
"호호호!"
오랜만에 비공정에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땐 알지 못했다.
우리 몸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79. 공수 기갑부대.
79. 공수 기갑부대.
붕! 쉐에엑!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잠이 깼다.
쿠훌린이 아침부터 단련하나 보다.
창밖을 보자, 온통 바다뿐이었다.
아직 육지는 멀었다.
옷을 입었는데.
"뭐야? 제복이 줄었어."
인형의 집에서 다른 제복을 꺼냈다.
'어? 이것도 줄었네?'
자주 빨기 싫어서 한 30벌을 맞춰서 내 인형의 집에 넣어놨다.
그런데 웬일인지 모두 줄어버렸다.
인형의 집에 습기가 많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단체로 줄어든 제복 대신 평상복을 찾아 입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줄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가장 큰 옷을 찾아 입었다.
밖으로 나가는데.
빡!
"억!"
순간 별이 보이고, 이마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눈물을 찔끔거리고 문틀을 노려봤다.
'어? 문이 작아졌어?'
배라서 문을 작게 만들었지만, 그동안 수백 번을 오갔던 문이었다.
내 키보다 조금 컸기에 단 한 번도 부딪친 적이 없었는데······.
천천히 일어서 문틈에 키를 대봤다.
정확히 이마에 닿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리고 무슨 일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커졌다!'
문에 이마가 닿을 정도면 적어도 15cm 커진 것 같았다.
그럼 내 키가 185란 말인가?
그래서 옷도 맞지 않은 거고.
곧바로 거울 앞으로 향했다.
"오! 나 좀 잘생긴 듯!"
이곳의 날씨 때문에 푸석푸석했던 피부가 백옥처럼 하얘지고 윤기가 흘렀다.
게다가 얼굴선도 미묘하게 변했다.
환골탈태까진 아니겠지만, 영화배우였다면 인생역전 정도는 가능했으리라.
'게다가 이 예민한 감각은 뭐지?'
온몸의 감각이 기민해졌다.
평소보다 소리도 잘 들리고, 마치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 주변 자극에 준비하는 것 같았다.
이건 헌터로 각성했을 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2차 각성인가?
그런 건 들어보지 못했는데.
설마, 이거 꿈인가?
내 허벅지를 꼬집자, 더럽게 아프다.
아! 이미 문틀에 머리를 부딪치며 고통을 느꼈지.
'설마, 어제 먹은 세계수의 열매 때문인가?'
이제야 내 몸의 변화가 모두 이해됐다.
하나를 완전히 먹었다면, 정말 수명이 2배로 늘었을 거야!
그리고 내 키도 2미터가 넘어갔을 거고.
에테나와 쿠훌린도 변화가 생겼나?
서둘러 갑판으로 달려나갔다.
"주군? 키가 자라셨군요."
"오! 체격도 커지셨네요."
"경하드립니다."
자동인형 기사들이 내 변화를 바로 알아봤다.
그때였다.
"쿠아아아!"
거구의 쿠훌린이 선수에서 도끼와 칼을 휘두르며 단련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도끼와 칼이 너무 작아 보였다.
2미터였던 쿠훌린의 키는 3미터에 육박했고, 온몸의 근육은 더욱 도드라졌다.
쿠훌린이 날 보며 소리쳤다.
"쿠오크! 타일러여! 무기가 작아졌다!"
'멍청아! 네가 커진 거야!'
쿠훌린에게 다가갔다.
"쿠오크! 타일러도 작아졌다!"
"아니야! 네가 커진 거야."
"쿠오크! 오크 성장 10살 때 멈춘다. 타일러 작아졌다."
난 고개를 흔들었다.
"쿠훌린, 이 도끼 한번 휘둘러봐."
표범인형이 폰급 기간트용 도끼를 물고 나왔다.
"쿠옥? 표범 괴수도 작아졌다!"
'네가 커진 거라니까!'
3미터의 쿠훌린이 폰급 기간트용 도끼를 허공에 휘둘렀다.
붕! 부우웅!
'헉! 휘두를 수 있잖아!'
폰급이라지만, 기간트용 무기는 엄청나게 무거웠다.
어쩌면 쿠훌린에게 기간트 갑옷을 입힌다면, 폰급 기간트 정도는 맞짱 뜰 수 있을지도······.
쿵!
하지만 몇 번 휘두르고는 힘에 부쳤는지 도끼를 내려놨다.
역시 기간트용 무기는 조금 버거웠다.
조금 작은 무기를 만들어 줘야겠어.
'잠깐! 그럼 에테나도 변화가 있겠네.'
쿠훌린을 뒤로하고 선미 갑판으로 달려갔다.
에테나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자신의 변화를 알고 있었다.
가까이서 바라본 에테나.
에테나의 미모가 더 예뻐진 건 당연했다.
게다가 키도 조금 커졌고.
"키가 많이 커지셨네요."
"쿠훌린에 비하면 조금 자란 거지. 그런데 다른 변화는 없어?"
"정령 마나 친화도가 더 강해졌어요. 정령 마나도 더 늘었고요. 마나를 비워야 하는데······."
그리고 신체 능력도 좋아지고, 시력이나 기타 감각도 좋아졌다고 했다.
이건 나와 쿠훌린, 에테나 모두 공통적인 변화였다.
"세계수의 열매가 대단하네. 하나를 다 먹었으면 환골탈태하겠어."
에테나가 피식 웃었다.
"하이엘프가 되진 못했지만, 전 지금이 좋아요. 타일러님과 함께 할 수도 있고."
에테나가 시선을 피하며 다른 곳을 쳐다봤다.
잘생겨진 내 얼굴에 반했나?
***
정말 기나긴 여정이었다.
그래도 기분 좋은 신체 변화도 생겼고, 세계수 씨앗도 챙겼고, 힘멜족 엘프들도 모두 무사했다.
우린 드디어 차원 균열에 도착했다.
5개의 부유섬을 끌고 온다고 꽤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그래도 걷는 것보단 비공정에 부유섬을 끌고 이동하는 것이 훨씬 빨랐을 것이다.
물론 지치지도 않았고.
하지만 여길 통과하면 대수림이었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바이마르 사냥팀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세계수 씨앗을 챙긴다고 우린 아주 멀리 돌아갔으니, 거리가 상당히 벌어졌을 것이다.
"지금까진 쉽게 왔지만 여기서부턴 이대로 이동할 순 없어."
"어떻게 하죠? 성인 엘프들이야 걸어서 이동할 수 있지만, 아이들과 노인들이 문제입니다."
500명이 넘는 엘프를 무사히 이동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역시 비공정밖에 없겠지."
"하지만 비행 괴수들이 달려들 겁니다."
"느리게 이동하더라도 최대한 대수림 안쪽으로 비행해야지."
"쉽진 않을 건데요. 부유섬도 많고."
에테나의 말이 맞았다.
비공정이야 대수림 안쪽에서 이동하면서 괴수가 덤비면 암 드로운과 마법인형을 동원해 막으면 된다지만, 뒤에 있는 부유섬까지 모두 보호할 순 없었다.
"일단 부유섬을 3개로 줄이자!"
난 힘멜족 엘프들에게 말하고, 기간트를 이용해 후미에 있는 부유섬 2개를 더 부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비행석을 채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은 비행석이 나왔기에 짭짤했다.
그리고 노인과 아이들은 모두 비공정에 태웠다.
나머지 성인 엘프 300명은 3개의 부유섬에 나눠 태울 생각이었다.
그리고 각 부유섬엔 기간트를 2대씩 배치하고.
고도는 100미터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성공할까요?"
"일단 해봐야지. 그리고 들어가기 전에 에테나는 정령 마나를 모두 비워."
"여기서요?"
"그래 정령을 소환하든 정령 마법을 사용하든 모두 쏟아내!"
"네! 해보겠습니다."
에테나는 중급 정령을 소환하고 정령 마법까지 불모지를 향해 마구 발산했다.
사실 저쪽 세계에서 엘프의 마나를 바닥까지 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령을 소환할 수도 없었고, 정령 마법을 쓸 수도 없는데, 어떻게 몸에 정령 마나를 쓸 수 있겠는가.
그러니 기회는 이곳에 있었다.
그런데 세계수의 열매를 먹었기에 마나가 너무 늘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한 시간여 동안 미친 엘프처럼 정령 마법을 쏘아내고, 정령을 계속 유지하자, 드디어 탈진한 사람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고 거친 호흡을 쉬었다.
"헉헉! 이젠 더 남아 있지 않아요."
"완전히 다 빼야 해!"
"정령들이 강제 소환됐어요. 정말 이젠 마나가 없어요."
"좋았어! 이제 이 팔찌를 차!"
"이, 이게 뭡니까? 헉헉!"
"좋은 거야. 저쪽 세계의 마나를 더 잘 느끼게 하는 거지."
에테나는 마나 팔찌를 끼웠다.
그리고 비공정은 부유섬과 함께 차원 균열로 들어갔다.
***
우린 지금 대수림의 거신목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날고 있었다.
세 개의 부유섬 위쪽엔 인형의 집에서 꺼낸 각종 괴수 부산물로 울타리와 엄폐 막을 만들었고, 대수림의 수풀을 덮어서 최대한 위장했다.
그리고 비공정도 수풀을 덕지덕지 붙여서 위장했다.
물론 돛 때문에 알아볼 괴수는 다 알아보겠지만.
"어쩌죠? 십여 마리가 우리 머리 위에서 떠나질 않아요."
에테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며칠 잘 이동했지만, 괴조의 눈을 다 속일 순 없었다.
여긴 놈들의 영역이었고, 지금 놈들은 우리가 조금 넓은 지역으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주군, 제게 맡겨 주십시오."
비공정 바로 뒤에 부유섬을 지키던 암 드로운이 나섰다.
"제가 놈들을 유인하겠습니다. 그 틈에 이동하십시오."
"아니, 그럴 순 없다. 모두 함께 간다!"
"주군!"
나의 제일 기사인 암 드로운을 놓고 갈 순 없었다.
"쿠오크! 그럼 내가 해보겠다!"
쿠훌린이 나섰다.
"넌 미끼가 될 수도 없어."
한 마리가 콕 집어서 날아가면 끝일 테니까.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다. 맨 끝에 부유섬 하나를 포기하자!"
엘프들을 다른 부유섬으로 옮기고, 부산물도 모두 인형의 집에 넣었다. 부유섬이 점점 위로 떠 올랐다.
"도끼로 잘라!"
떵! 떵!
쩍! 쩍!
암 드로운과 기간트들이 협력하자 줄기를 금방 잘라낼 수 있었다.
그리고 부유섬 하나가 거신목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며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괴조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됐다! 에테나, 이동해!"
모든 돛을 펴자, 바람을 타고 비공정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조금만 더 빨리.'
대수림 안쪽이라 바람은 강하지 않았고, 우린 천천히 남쪽으로 이동했다.
"세상에!"
100미터나 되는 부유섬이 10분도 되지 않아 완전히 분해되어버렸다!
역시 A등급 괴수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그리고 괴조 몇 마리가 이쪽을 보더니, 아래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젠장! 조금만 더 가면, 숨을 수 있었는데······!'
울창한 대수림이 코앞이었다.
저 안쪽엔 괴수가 더 많겠지만, 괴조는 날개 때문에 비행이 자유롭지 않았기에 추격을 뿌리칠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미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암 드로운, 후미 부유섬으로 가!"
"네! 주군!"
암 드로운이 후미 부유섬으로 넘어갔다.
'킹콩과 치타는 이곳을 지켜!'
"크릉!"
"쿠아아!"
"쿠훌린도 잘 지키고!"
"쿠오크! 알았다. 타일러여!"
두 괴수 꼭두각시는 비공정에 남겼고, 나도 마장기를 꺼내 중간 부유섬으로 이동했다.
"주군의 명령이다! 모두 이곳을 지켜라!"
[와아아!]
룩급 2대와 비숍급 3대는 후미의 부유섬을 지켰다.
그리고 암 드로운은 방패와 검 대신에 긴 창을 들고 맨 뒤에 섰다.
중간 부유섬은 나와 비숍급 1대 나이트급 3대 폰급 1대가 지켰다.
"놈들이 온다!"
"끼이아아아!"
쏜살같이 날아온 괴조!
쒜에엑!
암 드로운은 괴조를 향해 창을 찔렀다.
푹! 촤악!
괴조는 다리를 찔렸고, 암 드로운은 괴조의 발톱에 어깨 보호 장갑이 떨어져 나갔다.
콰앙!
"끼이악!"
쿵! 쿠쿠쿵!
놀란 괴조가 방향을 틀었다가 거신목에 부딪쳐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일부 괴조들이 다쳐서 기절한 괴조를 향해 달려들었다.
팍! 파파팍!
쓰러진 괴조가 깨어나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놈은 다른 괴조들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괴조들은 하이에나보다 더 지독한 놈들이었다.
그때 괴조 두 마리가 뒤쪽에 바짝 붙었다.
"창을 찔러라!"
[하아!]
파파파팟!
창으로 무장한 기간트들이 접근하는 괴조를 향해 찔렀다.
그러자 두 괴조는 접근하다 말고 위로 솟아올랐다.
이미 한 마리가 당한 것을 봤기에 섣불리 달려들진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속공 대신 지공을 택하기 시작했다.
날개를 파닥거리며 발톱을 세우고 기간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딜!"
쉐에엑!
하지만 암 드로운의 매서운 창 때문에 감히 달려들지 못했다.
그사이 우린 울창한 대수림으로 한 발짝 더 이동했다.
[옆을 조심해라!]
쉐에엑!
괴조 한 마리가 앞쪽 부유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촤악!
폰급 기간트의 머리통이 잘려나갔다.
[조심해 놈들이 다른 곳을 노리고 있다.]
비공정을 향해 괴조 한 마리가 앞에서 날아들었다.
그러자 킹콩인형이 갑판에 배치한 기간트 창을 들더니 던졌다.
쉐에엑! 파악!
"끼이악!"
괴조의 부리에 맡고 튕겼지만, 충격은 있는지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젠장! 조금만 더!'
울창한 대수림에 점점 다가갈수록 괴조들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이번엔 한꺼번에 여러 마리가 여러 곳으로 날아들었다.
쿵! 쿵!
몸길이가 15미터나 되는 괴조가 중간 부유섬에 내려앉았다.
[놈을 공격해!]
내 명령에 자동인형들이 달려들었다.
괴조는 발톱을 들기도 하고 부리로 쪼기도 하면서 기간트를 공격했다.
콰앙!
머리가 날아간 폰급 기간트를 괴조가 발톱으로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인형의 집으로!'
폰급 기간트는 딸려 날아갔지만, 자동인형은 무사히 인형에 집에 넣었다.
그때 괴조 하나가 우리 부유섬을 지나 비공정의 후미를 향해 날아갔다.
에테나가 위험하다!
그때 쿠훌린이 도끼를 들고 에테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괴조가 날개를 펄럭이며 발톱을 세워 접근했다.
[플레임 더스트!]
팟! 파파파팟!
십여 개의 작은 불꽃이 괴조를 향해 날아갔다.
펑! 퍼퍼퍼펑!
"끼아아아!"
괴조의 날개와 몸통에서 화염이 타오르며 연기를 뿜어냈다.
괴조는 고통스러워하며 앞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연기가 삽시간에 주변을 뒤덮었다.
하지만 연기는 곧 사라졌고, 연기를 뿜어내던 괴조도 날개와 몸에 상처를 입었기에 다른 괴조들의 먹잇감이 됐다.
[얼마 남지 않았다! 끝까지 버텨라!]
쾅! 콰쾅!
괴조 하나가 중간 부유섬에 내려앉자 모두가 힘을 합쳐 공격했다.
푹! 푸푹!
괴조의 몸에 창이 박혔지만, 놈은 쉽게 죽지 않았다.
촤악! 촤악!
발버둥 치는 발톱에 기간트의 장갑이 떨어져 나가고, 기체도 손상됐다.
역시 A등급 괴수를 상대하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괴수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후미의 부유섬은 이곳보다 더 많은 괴조가 공격했지만, 암 드로운 덕분에 잘 막고 있었다.
'됐다!'
비공정이 드디어 울창한 대수림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앞선 부유섬이 들어왔고, 이제 마지막 부유섬만 남았다.
그때였다!
괴조를 쓰러트린 암 드로운을 향해 또 다른 괴조가 뒤에서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암 드로운 뒤를 조심해!'
암 드로운이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놈이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어스 베리어!"
쿠쿠쿠쿵!
부유섬 후미가 솟아오르며 20미터 높이의 장벽이 앞을 막아섰다.
콰앙!
하지만 괴조는 마지막에 위로 방향을 틀며 아슬아슬하게 장벽 끝을 부수며 위로 날아올랐다.
아니! 날아오르려고 했다.
촤아악!
"끼이이이아!"
암 드로운의 창끝에 한쪽 날개가 잘렸다.
쾅! 콰콰쾅!
놈은 앞으로 날아가 우리 쪽 부유섬에 떨어졌다.
[모두 공격해!]
내 자동인형들이 득달같이 달려가 창을 찔렀다.
푹! 푸푸푹!
그래도 놈은 쉽게 죽지 않고, 날개를 파닥거렸다.
난 토우인형을 소환해 놈의 날개를 짓눌렀다.
[멈춰!]
그리고 공격을 멈췄다.
재빨리 해치를 열고 괴조를 향해 달려가 날개를 만졌다.
[운명의 실타래(lv.8)를 연결합니다.]
확률은 극악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마장기에 올라타고 죽이란 명령을 내렸다.
푹! 푸푸푸푹!
기간트들이 다시 공격했고, 운명의 실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기사회생(lv.5)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45%나 되는 확률이지만,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괴수는 인간과 달리 페널티가 있는지 기사회생 확률이 현저히 낮았으니까.
킹콩인형도 몇 달 동안 수십 마리를 잡고 나서야 겨우 하나를······.
[허수아비(lv.1) 마법인형을 만들었습니다.]
'어? 단번에 성공했다고!'
난 곧바로 괴조 허수아비를 인형의 집에 넣었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A등급 괴수를 마법인형으로 만들다니!
그것도 하늘을 나는 괴조였다.
만약 내가 괴조를 타고 날아가 적진에 내리면?
공수 기갑부대인가?
80. 칼자루.
80. 칼자루.
괴조(lv.4) 꼭두각시.
좌우 날개를 펴면 60미터가 넘고, 몸체 길이는 15미터에 강인한 두 다리와 발톱은 웬만한 괴수의 머리통을 으스러트린다.
실제로 내 폰급 기간트의 경우 스치는 발톱 공격만으로 머리통이 날아갔으니까.
게다가 괴조들은 시력이 좋아서 수 km 상공에서도 지상의 움직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 괴조인형을 단 한 번 기사회생에 얻다니!
행운의 여신이 이번엔 나를 제대로 도와준 것 같았다.
그동안 많이 야박하긴 했지.
'그런데 슬슬 나는 법도 연습해야 할 텐데······.'
괴조 꼭두각시의 날개까지 이미 300개나 되는 운명의 실을 연결했지만, 비행을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비공정과 2개의 부유섬은 괴조인형와 킹콩인형, 표범인형, 그리고 안당고낙 3마리가 함께 끌고 있었으니까.
이곳은 무풍지대!
지금까진 바람이 강하진 않아도 계속 불어왔기에 비공정의 돛만으로 느리지만, 꾸준히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빽빽하고 울창한 이곳 대수림에 진입하고 난 후에는 바람의 거의 불지 않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한 가지였다.
비공정을 직접 끌어서 이동하는 것.
다행히 비행석의 힘으로 공중에 떠 있었기에, 속도는 느리겠지만 기간트 몇 대만으로도 충분히 끌어서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간트는 마석 배터리를 소모한다.
아직 블랙힐 전진 기지까진 먼 길이었기에 중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랬기에 주전력인 기간트 대신 괴수 마법인형을 총출동했다.
그리고 이참에 괴조 꼭두각시의 레벨도 올리고.
'그래도 마지막에 괴조 마법인형을 얻어서 다행이야.'
괴조가 없었다면 이 정도 속도로 이동할 순 없었을 거다.
우린 지금 기간트가 걷는 수준의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괴조의 힘은 내 괴수 마법인형 중에서 단연 최고였고, 11미터의 암 드로운을 태우고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나중에 비행 훈련이 끝나면, 사람 몇 명 정도는 거뜬히 태우고 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웬만한 괴수는 내 괴조인형을 보고는 기겁하며 덤벼들지 않았다. 내가 타고 온 겁 없는 안당고낙도 이 괴조인형은 두려워했다.
그래서 안당고낙은 괴조와 최대한 멀리 떨어트렸다.
"쿠오크! 아직 멀었나? 타일러여!"
"그래! 멀었다고! 벌써 10번도 더 말했다."
"쿠오크! 빨리 가고 싶은데 너무 느리다!"
그 마음은 나도 안다.
비행석을 생각보다 많이 채취했기에 오크 전사들에게 30개의 기간트 갑옷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다음부터 쿠훌린은 하루에도 10번 이상 장벽이 멀었는지 묻고 있었다.
이건 다 투자였다.
오크 해병대를 만드는 건 괴수 부산물도 들고, 드워프의 노동력도 들어가고, 힘들게 구해온 비행석도 들어가고, 연구까지 해야 했기에 큰 기회비용이 든다.
하지만 지금 준비해놓지 않으면, 정작 필요할 때 오크 해병대를 쓰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일단 적은 숫자라도 만들어 운용해야 부대 경험도 늘어나고 장단점과 고칠 점들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다.
'라디프 공작의 거대 비공정은 이미 완성됐겠지······.'
이제 그들의 사냥팀이 도착해 비행석만 비공정에 장착하면 하늘을 날아오를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라디프 공작의 다음 행보였다.
과연 거대 비공정을 가지고 뭘 하려고 할까?
곧바로 모습을 드러낼까? 아니면 계속 비밀로 숨기고, 진짜 필요할 때 모습을 드러낼까?
생각보다 정보부에서 라디프 공작과 바이마르 가문의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섣불리 예측할 수도 없었다.
'멍청하게 제국을 적으로 돌리려는 짓은 하지 않겠지?'
비공정이 비대칭 전력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적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바이마르 대영지의 기간트 병력은 200에서 250기.
오리지널 기간트는 3대였다.
그들은 기간트 생산 공장이 있었으니, 기간트를 찍어내면 숫자를 빠르게 늘릴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기간트에 탈 기사들은 그렇게 쉽게 구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제국의 황실에 대항하는 짓은 미친 짓이다.
황제가 가진 5개의 기간트 군단 중에서 2개만 움직여도 충분히 토벌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지를 잃으면 비공정이 있어도 아무 소용없었다.
근간이 무너지면 끝이니까.
'그렇다고 황제에게 비공정을 바칠 인물도 아니고.'
아마도 호엘 삼황자를 밀고 있으니, 자신의 힘을 이용해 그를 황제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뒤에서 황제를 조종하겠지.
하지만 비행석을 확보하기도 전에 비공정을 만들었다는 것은 어딘가 급하게 쓰일 곳이 있다는 말인데······.
이건 정말 최고급 정보였고, 내가 입을 열면, 라디프 공작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나만 알고 있을 생각이었다.
아직 라디프 공작이 무슨 짓을 벌인 것도 아니었고, 이 정보의 출처를 추궁하면, 내가 가진 패도 열어야 했다.
어차피 나중엔 알려지겠지만, 아직은 나도 비공정이나 비행석의 정보를 라디프 공작이 독점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모르긴 몰라도 대륙 전체에서 엘프 차원으로 러쉬가 벌어질 것이다.
게다가 지금 엘프 차원은 비행 괴수도 사라졌고, 엠벌럭이란 괴수가 있긴 했지만, 막지 못할 숫자는 아니었다.
마석 배터리만 충분하다면, 해볼 만한 원정이었다.
'그럼 슬슬 마석을 판매할 시점인가?'
내가 출발할 때도 마석과 마석 배터리 가격이 들썩이고 있었다.
그건 제국의 기간트들이 대수림에 집결했다가 돌아오면서 많은 마석 배터리를 소모했고, 마석 채취량이 줄어들고 있었기에 점점 가격이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가장 좋은 건 일단 카야킨 전진 기지를 통해 마석을 파는 것이다.
거의 모든 영지가 기간트가 있고, 일상생활에서 마석 배터리를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직접 팔아도 되겠지만, 그럼 출처가 남는다.
하지만 카야킨 전진 기지는 그저 대수림의 각 전진 기지에서 마석을 구매해 장벽 사령부로 넘기는 것이었기에 최종 출처를 알 수 없었다.
'일단 조금씩만 팔아보고, 양을 늘리자.'
"타일러님! 타일러님!"
갑자기 에테나가 나를 부르며 선실 문을 열고 갑판으로 나왔다.
그리곤 나를 보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왜 그래?"
에테나가 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다다닥! 와락!
"어?"
에테나가 나를 안더니 훌쩍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난 에테나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나쁜 꿈이라도 꿨어?"
"마, 마나가! 마나가 느껴져요."
"뭐?"
그녀의 뺨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건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었다.
"아! 드디어 해냈네."
이건 희소식이었다.
그렇게 기간트에 타고 싶어 하더니, 소원이 이루어 졌다.
물론 마나를 느끼고 기간트에 타려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그리고 에테나가 이 세계의 마나를 느꼈다는 것은 다른 엘프들도 이곳 세상의 마나를 배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 엘프도 기간트에 탈 수 있어요!"
에테나는 감격에 겨워 보였다.
난 말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에테나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만, 내 생각엔 엘프들은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정령 마나를 포기하는 것이니까.
에테나가 세계수 씨앗을 구했기에 수명이 인간보다 긴 엘프는 20년 정도는 충분히 기다릴 것이다.
그럼 세계수를 통해 이곳 세계도 정령 차원이 열릴 것이고, 정령과 정령 마나도 퍼질 것이다.
그럼 자신들이 익숙하게 다루던 정령의 힘을 쓰겠지, 굳이 새로운 마나를 배우고 익혀 기간트를 타려 하진 않을 것 같았다.
100% 마나를 느낀다는 보장도 없었고.
"이제부터 시작이야. 느끼는 것만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러니 부지런히 마나를 움직이고 사용해야 해!"
그래도 난 에테나에게 응원의 말을 전했다.
에테나가 두 눈을 부릅떴다.
"네! 열심히 할 거예요!"
'이거 훈련기를 꺼내야 하나?'
아직은 마나가 더 쌓이게 지켜보자.
오늘 무더운 대수림에서 좋은 소식 하나가 생겼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뭐지?"
"왜 활을 쏘는 기간트는 없죠?"
"응? 글쎄, 나도 그건 모르겠네."
그러고 보니 왜 활을 쏘는 기간트가 없지?
거신 롤랑 백작의 무기고에서도 웬만한 무기 종류는 다 있었는데 활과 화살은 보지 못했다.
활을 만들 수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기간트의 힘을 견디는 활시위가 없어서?
이건 나중에 제대로 알아봐야겠다.
***
바람이 분다!
"끼아아아아!"
괴조(lv.7)의 울음소리.
대수림 위를 낮고 빠르게 날아가는 비공정과 부유섬들.
우린 지금 바람을 탄다.
괴조 마법인형이 하늘을 날며 우리를 끌어주고 있었고, 비공정은 강한 순풍까지 타고, 부유섬들도 거대한 대수림의 나뭇잎으로 곳곳에 돛을 만들었기에 속도가 매우 빨랐다.
우리가 이렇게 하늘로 편하게 갈 수 있는 것은 헬다임 장벽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강한 비행 괴수는 보이지 않았고, 약한 놈들은 감히 괴조에게 덤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와! 이런 속도라면 금방 블랙힐 기지까지 가겠는데요?"
"미안하지만 적어도 보름은 걸어가야 해."
"네? 왜요?"
"우리 비공정을 다른 사냥팀이 볼 수도 있잖아. 부유섬도 미리 정리해야 하고."
"아! 비행석을 비밀로 하실 생각이시군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라디프 공작도 비밀로 할 생각일 거야. 그러니 이렇게 조용히 다녀갔겠지."
내가 비공정이 있는 것도, 비행석이 있는 것도, 엘프 차원에 간 것도, 그리고 바이마르 사냥팀을 몰래 따라간 것도 모두 비밀에 부쳐야 했다.
만약 라디프 공작이 하나라도 안다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은 내 세력이 빈약하니, 바짝 몸을 사릴 때였다.
"와아아!"
"영주님이다!"
"응?"
힘멜족 엘프 아이들이 선미 갑판 아래로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곤 날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 안녕하세요!"
"그, 그래."
아이들에게 살짝 손을 들어줬다.
그러자 이번엔 선수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곳에 있는 쿠훌린에게 인사하러 가는 것이었다.
인사성이 밝은 아이들이네.
난 에테나를 쳐다봤다.
"영주님이라니, 어떻게 된 거야?"
"제가 하라고 시킨 건 아닙니다. 그저 아이들에게 제국어를 가르치다가 영주란 단어에 대해서 알려줬을 뿐입니다."
"그래? 기특한 녀석들이네······."
아이들은 다행히 일찍 적응하는 것 같았다.
엘프는 이제 새로운 세상에 살아야 하기에 에테나에게 제국어를 가르치라고 했다.
그랬더니 몇 달 만에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배우고 있었다. 물론 노인들이나 젊은 엘프들도 배우고 있지만, 학습 속도가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평생 사용한 엘프어 대신 구조도 다르고 생전 처음 듣는 언어를 배우는 일이라 쉽지 않겠지.
'그래도 열심히 따라와 주니 다행이네.'
이들도 내가 자신들을 위해 엠벌럭 무리로부터 구해주고, 대수림의 괴조와 필사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봤으니, 내 진심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 와서 충성심이 더 강해졌다.
어서 영지를 만들어 이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에테나, 그 세계수 씨앗은 어떻게 할 거야?"
"네?"
에테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걸 제게 물으시죠?"
"아! 그건 시노우엘이 결정할 문제인가?"
"아니요. 타일러님께서 결정하셔야죠."
"뭐? 내가? 하지만 그걸 구해온 것은 에테나잖아."
에테나가 피식 웃었다.
"전에도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전 타일러님을 따르기로 했다고. 그리고 씨앗은 제가 아니라 타일러님이 구하신 거죠. 저 혼자선 세이린 일족의 섬에도 가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타일러님의 결정에 맡길 겁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에테나가 내게 씨앗을 내밀었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방금 에테나의 말은 시노우엘보다 나를 더 믿는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일단 씨앗은 내가 안전하게 보관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것은 제 뜻이 아니라 시노우엘님 뜻이에요. 분명 제게 스스로 의지대로 행동하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이렇게 좋잖아요! 엘프들도 구하고, 씨앗도 구하고."
"그렇게 생각한다니, 고민 좀 해봐야겠군."
세계수를 키우기 위해선 하이엘프가 필요하다고 들었다.
이번에 에테나가 하이엘프가 됐다면, 문제가 바로 해결됐겠지만, 이젠 시노우엘이 필요했다.
'그래도 세계수 씨앗이 내게 있으니, 칼자루는 내가 쥔 셈인가.'
81. 토사구팽.
81. 토사구팽.
[블랙힐 전진 기지]
"허! 인근 대수림에서 저 많은 엘프를 찾았다고?"
내 설명을 들은 시안 7황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그마치 500명이 넘는 엘프를 데려왔으니, 놀랄 수밖에.
난 보름 전에 부유석은 모두 분해해 비행석을 챙겼고, 비공정은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리고 기간트로 엘프들을 보호하며 여기까지 왔다.
"일단 저들은 난민 기지로 데려갈 겁니다. 거기서 보호하고 일거리를 줄 생각입니다."
"난민 관리는 자네 소관이니, 자네가 알아서 하겠지. 그런데 그동안 대체 어디에 있었나? 자네를 한참 찾았네."
"저를요? 발굴지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시안 7황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발굴지야 무슨 문제가 있겠나. 곧 큰 전쟁이 일어날 거네."
"네? 전쟁이요? 설마 가디언 제국이?"
"그건 아니네. 서쪽에 아리칸 공국이네."
"네?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아리칸의 공국의 병력으로 제국을 공격한다는 말인가요?"
시안 오르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아리칸 공국이 공격한다고 했나? 우리가 저들의 국경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네."
"네? 우리가요?"
"황제 폐하께선 가디언 제국과 본격적인 힘 싸움 전에 아리칸을 먼저 공격해 피해를 줄 생각이신 것 같네."
"그런데 아리칸 공국과 우리 제국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서로 원수처럼 대하던데요."
"이런 자넨, 역사엔 관심이 없군."
시안 7황자가 피식 웃으며 설명해줬다.
아리칸 공국.
말 그대로 공작이 다스리는 나라를 말했다.
원래 아리칸 공국은 아베르크 제국의 속국이었다.
매년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대신 기간트를 넘겨받는 거래를 했다.
그들은 기간트를 만들만한 기술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리칸 공국은 서쪽의 탈로스 왕국의 팽창을 막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기도 했기에 제국도 그들이 필요했다.
아베르크는 가디언 제국과 대치 중이었기에 서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문제는 20여 년 전에 일어났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자국의 정보와 인재를 빼가는 가디언 제국이 황제는 늘 눈엣가시 같았다.
그랬기에 보급 물자와 전략 자원을 모았고, 가디언 제국을 공격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서로 전력이 비슷했기에 부담감이 컸다.
그때 아리칸 공국의 젊은 대공이 제안을 했다.
자신들이 도와주고 앞으로 조공도 계속 바칠 테니, 기간트 생산 기술을 전수해 주고, 하나의 왕국으로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어쩐 일인지 황제는 흔쾌히 허락했다.
가디언 제국만 사라지면 대륙에서 자신들을 상대할 곳은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대신 아리칸 공국의 기사들이 선봉에 서길 요구했다.
마르틴 대공과 아리칸 기사들은 황제의 요구에 응했다.
13미터의 거대한 퀸급 기간트 우가스.
기간트 가슴에 선명한 십자 표시를 한 크루세이더 기사단.
아리칸 공국의 대공과 기사들은 용맹했고,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가디언 제국의 전선을 돌파해버렸다.
전쟁은 크루세이더의 활약으로 아베르크 제국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가디언 제국의 서부 일대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마르틴 대공과 크루세이더들이 활약할수록 제국의 군단장들과 지휘관들의 처지가 난처해진 것이다.
황제는 이렇게 쉽게 적들을 밀어낼 수 있는 것을 왜 그동안 제국의 지휘관들은 하지 못했는지 그들의 능력을 의심했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제국의 지휘관들은 교묘히 아리칸 공국으로 가는 보급을 지체했다.
이미 승기를 잡았기에 아리칸 공국의 기간트가 없어도 자신들끼리 충분히 전쟁에서 승리할 것으로 봤다.
크루세이더는 마석 배터리와 식량 등 기본적인 물자들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자,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마르틴 대공이 계속해서 물자를 요구했지만, 제국의 지휘관들은 갖은 핑계를 대며 그들이 버틸 수 있는 물자만 제공했고, 그 틈에 자신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동남쪽 전선으로 대대적인 진군을 했다.
문제는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아베르크 제국군이 너무 적진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디언 제국의 명장 안드레아스 대장이 함정을 팠고, 보급로를 끊어 버렸다.
결과는 아베르크 제국군의 대패였다.
큰 전투에서 패하자 아베르크 제국군은 속절없이 밀렸고, 동북부 전선에 있던 마르틴 대공과 크루세이더 기사들 역시 후퇴해야 했다.
보급로가 끊기면 자신들은 고립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전선은 밀리고 밀려 원래 국경까지 되돌아왔다.
이때 제국의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패전 책임을 면하기 위해 마르틴 대공과 크루세이더 기사들이 너무 적진 깊숙이 들어가 병력이 나누어져 패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그러나 황제는 지휘관들의 문제임을 간파했고, 그들을 처벌했다.
"하지만 이미 마르틴 대공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본국으로 돌아갔지. 물론 황제께서는 그들에게 기간트 생산 기술도 넘겨주지 않았고, 독립을 시켜 주지도 않았네."
"어째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제국이 나쁜 것 같나?"
"솔직히 그렇습니다."
"나도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지만, 정치란 때로는 너무 가혹하지. 그렇다고 아무것도 이룬 것도 없고, 크게 손해만 봤는데, 아리칸 공국을 독립시켜줄 수도 없으셨겠지. 아무튼, 과거의 일이라네. 그리고 가디언 제국의 대대적인 반격을 막은 것이 제국의 젊은 장교들이었지. 윌리엄 사령관과 자네 아버지인 개리 백작이 활약한 것도 이때였네."
씁쓸한 이야기였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고,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지금 당장 누가 내게 도움이 되고, 누가 싸워야 할 적인지 구별하는 게 나아 보였다.
"그런데 이젠 우리가 아리칸 공국을 공격하는군요."
"아리칸 공국의 병력이 이미 국경에 집결한 것을 자네도 알지 않나. 아마도 가디언 제국과 모종의 거래를 했을 것이네. 그리고 가디언 제국의 마장기와 탈로스 왕국의 타이탄이 아리칸 공국으로 흘러 들어간 정황도 발견됐지."
"가만히 있다간 좌우에서 협공을 받겠군요."
"그래서 아리칸 공국을 먼저 치려는 것이겠지."
시안 7황자 역시 아리칸 공국의 이야기를 씁쓸한 표정으로 알려줬다.
"아! 그래서 자네의 정보가 더 필요하네. 대수림에 있는 아리칸 전진 기지의 병력 움직임을 최우선으로 파악하라는 지시가 내려와 있네."
"네, 알겠습니다. 서둘러야겠군요."
어차피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내가 막을 순 없다.
그렇다면, 내 터전이 있는 아베르크 제국이 이기도록 도와야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최대한 이익을 취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전쟁은 누군가에겐 큰돈이 되니까.
"아! 혹시 바이마르 사냥팀이 여길 들렸습니까?"
"벌써 4개월은 됐을 거네."
말하고 있는 시안 황자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웨슬리 백작이 안타깝군. 아리칸 공국과의 전쟁에 큰 도움이 됐을 텐데······."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웨슬리 경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거대 괴수의 습격을 받아 케니스 사냥팀이 행방불명 됐다고 들었네."
"행방불명이요?"
'그럴 리가······.'
엘프 차원으로 무사히 도착하고 비행석 광산으로 이동할 때까지도 웨슬리 백작의 사냥팀은 모두 무사했다.
엘프 차원엔 비행 괴수가 사라졌고, 힘멜족 엘프를 공격했던 엠벌럭 괴수 무리가 공격했다고 해도 100기가 넘는 기간트 대군 앞에선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럼 대수림에 돌아와서 당했단 말인가?
대수림 최고의 사냥팀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야."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게."
시안 황자에게 경례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설마, 토사구팽인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심증은 있지만, 증거는 없었다.
비행석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기껏 대수림과 차원을 넘어서까지 안내해줬지만 돌아온 것이 배신과 죽음이라니!
'라디프 공작! 실로 악독한 놈이로구나!'
비행석의 비밀 때문에 대수림 최고의 사냥팀을 공격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시안 황자에게 말한 것처럼 케니스 영지엔 웨슬리 백작의 사냥팀이 괴수와 싸우다가 사라졌다고 말하면 끝이었다.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
내가 이래서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영지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솔직히 내 일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적어도 웨슬리 백작은 이렇게 죽을 사람은 아니었다.
나이도 젊고 오리지널 룩급 기간트에 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웨슬리 사냥팀은 대수림 최고라고 알려졌다.
그랬기에 기간트에 타고 있을 땐 기습할 수 없었을 거다.
다들 자는 밤중에 공격했겠지.
웨슬리 백작은 기간트에 타지도 못하고 당했을 것이다.
바이마르 영지의 비열한 수법에 치를 떨었다.
'이 이야기를 7황자에게 말해줘야 하나?'
아니다!
지금 시안 7황자는 발굴 작업을 해야지 다른 일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가 하는 일도 가디언 제국과 경쟁이기에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럼 정보국장이나 윌리엄 사령관에게 말해야 하나?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도 아니다.
'지금은 모른 척하는 게 좋겠어.'
그랬다간 내가 괜히 호엘 삼황자와 라디프 공작의 타겟이 될 수도 있었다.
역시 힘이 필요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한 힘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많았다.
기간트도 만들고, 오크 해병대도 만들고, 비공정도 만들고. 기사도 늘리고, 마법인형도 더 늘려야 했다.
그리고 돈도 벌어야 했다.
그동안은 내가 돈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대영지를 상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내가 가진 재산은 새 발의 피였다.
그들은 수 대를 이어서 축적한 재력과 재산, 영지, 명성, 인재와 기간트 생산 공장까지 있으니까.
서둘러 난민 기지로 이동했다.
***
[난민 전진 기지]
"타일러여!"
"쿠오오오크!"
드워프 지도자 라스칼이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오크들이 나를 보자,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며 반갑게 인사했다.
"허! 어떻게 된 건가? 전진 기지가 대낮처럼 환하군!"
"거신목 곳곳에 빛을 통과하는 장치를 만들었네. 그리고 거울과 반사판을 이용해 지하 도시 곳곳에 비추도록 했지."
역시 드워프는 드워프였다.
"그런데 저기 뒤에 엘프들은 누군가?"
입구로 마차와 엘프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저 엘프들도 이곳에서 함께 지낼 거야."
"집이 많이 필요하겠군."
"뭐? 남는 집이 많을 텐데?"
라스칼이 미소를 지었다.
"다른 드워프 일족이 합류했네."
"뭐?"
라스칼 옆으로 처음 보는 건장한 붉은 수염 드워프가 다가왔다.
"스켈야스족의 족장 호르갈이다. 그대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반갑다. 난 타일러다."
우린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라스칼이 말했다.
"스켈야스족은 대장장이와 건축일을 잘하는 일족이네. 이곳 지하에 빛을 공급하는 장치를 만든 것도 저들이야."
"오! 손재주가 좋군."
호르갈 족장이 말했다.
"타일러여! 그대가 윈데르 전진 기지에서 우리를 구했다고 들었다. 고맙다! 그래서 일족을 모두 이끌고 이곳으로 왔다."
"잘했다. 우린 언제나 환영이다."
스켈야스족의 드워프 400명이 합류했기에 거주 구역이 부족해진 것이었다.
"타일러여! 너무 걱정은 하지 말게. 엘프들이 살 집은 금방 만들 수 있다."
"고맙군."
스켈야스족은 곧바로 집을 짓겠다며 우르르 도시 외곽으로 몰려갔다.
"저들도 우리처럼 윈데르 왕국의 전진 기지에서 강제로 마석 채굴을 하고 있었지. 이제 자유를 찾았으니, 누구보다 열심히 일할 것이네."
"근데 대장장이들 실력은 어때?"
"우리 토그족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뛰어난 편이지."
"그럼 나와 함께 장벽 너머로 갈 수 있게 몇 명을 추려주게."
"이곳에도 괴수 부산물을 가공하려는 건가?"
"그래, 저쪽 일손이 너무 부족해. 할 일도 많이 생겼고."
"알았다. 내가 호르갈 족장과 이야기하겠다."
이곳에 제2의 기간트 공방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크 해병대의 갑옷과 무기도 스켈야스족에게 맡겨볼 생각이었다.
기이이잉! 쿵! 쿵!
그때 기간트 8대가 다가왔다.
위이잉! 치익!
비숍급 기간트에서 타냐가 내렸다.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주군!"
"축하하네. 한 단계 성장했군."
"다른 기사들도 제법 성장했습니다."
"기간트만 봐도 알겠네."
타냐는 비숍급 기간트에 탈 수 있었고, 대머리 월터와 다른 기사들 역시 나이트급으로 한 단계 성장했다.
그리고 폰급 기간트 3대는 작업용 기간트를 다루던 용병들일 것이다.
그들도 기를 쓰고 롤랑의 수련법을 익혔기에 한 단계 성장해 이제 기간트에 타는 어엿한 기사가 된 것이다.
"이제 제법 기사다운 티가 나는군."
"그동안 열심히 단련했습니다."
"그래서 룩급 기간트에 탈 순 있고?"
"그, 그건 아직······."
피식 웃었다.
불과 1년 만에 이룬 성과였으니, 사실 엄청나게 빠른 것이었다.
"저기."
타냐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은밀히 내게 말했다.
"잠깐 가실 곳이 있습니다."
"응?"
난 타냐와 내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엔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웨슬리 백작이 누워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블랙힐 기지 주변에 쓰러져 있는 걸 엘프 정보원들이 발견해 데려왔습니다."
"왜 이리로 데려왔어? 바로 옆에 블랙힐 기지를 놔두고?"
"웨슬리 백작이 그렇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뭐?"
내 엘프 정보원들은 시노우엘이 허락했기에 이제 간단한 제국어 정도는 말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내 이름까지 말하며 난민 전진 기지로 데려다 달라는 웨슬리 백작의 부탁을 들어줬다고 했다.
"타, 타일러 경······."
때마침 웨슬리 백작이 눈을 떴다.
82. 복수는 나의 것.
82. 복수는 나의 것.
웨슬리 백작이 날 알아보고 힘겹게 손짓했다.
하지만 난 타냐를 쳐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웨슬리 경의 상처는?"
"원래도 중상이었는데, 여기까지 오면서 너무 지체해 치료 시기를 놓쳤습니다. 근처에 있는 전진 기지로 가셨으면 사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타냐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 의미를 알기에 순간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다.
"알았네. 모두 나가 있게."
"네."
웨슬리 백작에게 다가갔다.
"웨슬리 백작님. 오랜만입니다."
"타일러 경. 반갑소."
"몸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꽤 걸린답니다. 좋은 약을 준비하고 있으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세요."
"하아! 내 몸 상태는 내가 잘 알지.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그러니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좀 해야겠소."
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았다.
"그 괴수를 봤소."
"그 괴수요?"
"일전에 내게 말했던 그 하얀 괴수 말이오. 얼음 계곡에서 봤다던······."
"드, 드라우켄 말입니까!"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S등급 괴수가 바이마르 사냥팀을 공격한 것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것도 수십 명의 거신을 죽이고, 암 드로운의 추격대까지 몰살한 괴수였다.
"휴우! 나와 부하들은 목숨을 걸고 그놈과 싸웠소! 대수림의 전투 방식은 다른 곳과 다르니, 우리 사냥팀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소."
"그래서 드라우켄에게 당한 겁니까?"
웨슬리 백작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다행히 놈은 다친 상태였소. 그래서 우리 사냥팀 기간트 절반이 부서지고 기사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놈에게 상처를 입혔고 그놈은 북쪽으로 도망쳤소. 아마도 그 지역이 놈의 은신처였나 보오."
"그럼 이 상처는?"
"그 비열한 바이마르 놈들이······. 크윽!"
웨슬리 백작이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
"아무래도 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타일러 경, 시간이 없소. 끝까지 들어주시오. 그 씹어먹을 놈들이 괴수가 도망치자, 우리에게 다가왔소. 부상자를 치료하고 전사자를 수습하는 척하더니 갑자기 우리를 기습했소. 우린 기간트에 탈 시간도 없이 당했고, 난 부하의 기간트에 겨우 올라타 싸웠소. 하지만 부하들은 이미 모두 죽었고, 나 혼자선 역부족이라 도망칠 수밖에 없었소······."
웨슬리 백작은 눈물을 흘렸고, 고통에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때 상황을 잠시 상상하자, 나도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는 그 심정이 얼마나 처참하고 괴로웠을까.
"크흐흑! 나 혼자 살아남기 위함은 아니었소. 그 빌어먹을 놈들에게 부하들의 복수를 하지 않고선 난 죽을 수 없었소. 그래서 대수림으로 한참을 도망쳤고, 블랙힐 기지로 향했소. 하지만 마석 배터리가 떨어져 기간트도 버려야 했고, 겨우 블랙힐 기지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바이마르 사냥팀이 있었군요."
"크윽! 그렇소."
그들도 장기간 대수림을 횡단한다고 무리했기에 블랙힐 기지에서 오랜 충전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럼 케니스 전진 기지로 가지 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 그곳이 훨씬 가까울 텐데요!"
웨슬리 백작이 힘들게 호흡하며 대답했다.
"하아! 놈들은 내가 도망친 것을 알고 있소. 치밀한 놈들이라 케니스 기지에도 분명 기간트와 사람을 보냈을 거요."
"그럼 다른 가까운 기지도 있었을 텐데요."
"이 대수림에서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소. 그 상대가 바이마르 가문이라면 어느 전진 기지를 가더라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오."
"그래서 이쪽으로 오셨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케니스 기지로 가진 못한 것은 그들의 화살이 케니스 영지로 향할까 걱정돼서였소."
"이해합니다."
"미안하오. 나 때문에 경이 곤란해질 수도 있소."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웨슬리 백작께서 이곳에 계신 것은 저들도 모를 겁니다. 여긴 이계 난민들의 전진 기지니까요."
이곳은 난민들의 전진 기지.
제국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현재는 어떤 세력의 간섭도 첩자도 없는 곳이니까.
"그들이 케니스 전진 기지에는 백작님과 기사들이 괴수에게 당했다고 전달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오리지널 기간트와 주력 기간트 15기가 사라진 케니스 기지에서 확인할 순 없을 테니까요."
"하아! 그렇소. 케니스가 대영지긴 해도 땅만 넓지 기간트 전력은 중급 영지 수준이오. 그래서 무리해서 오리지널 기간트까지 사서 날 영입한 것인데, 이제 비브르도 빼앗겼으니······."
웨슬리 백작의 한숨이 깊었다.
게다가 자신과 함께하던 실력 좋은 기사들이 모두 죽었으니, 사실 복수는 요원한 것이었다.
아니 자신 역시 부하들에게 가고 있었다.
"그들이 우릴 공격한 이유가 있소. 그걸 말해야······, 크윽!"
웨슬리 백작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말을 하시려는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
"하늘을 나는 돌 때문이 아닙니까."
"그, 그걸 어떻게?"
웨슬리 백작은 경악했다.
"말씀하지 마시고 제 말이 맞으면 그냥 고개만 끄덕이십시오."
웨슬리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바이마르 사냥팀을 쫓아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엘프 차원을 넘고, 부유섬에서 비행석을 캐낸 것도 모두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웨슬리 백작은 계속 고개만 끄덕였다.
"저들은 비행석의 비밀이 새나갈까 우려해서 공격했을 겁니다. 사실상 바이마르 사냥팀에 외부인은 웨슬리 백작님과 부하들밖에 없었으니까요."
"내가 너무 어리석었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깊숙이 따라갔소. 실제로 그들은 대수림에서 전투 경험이 없었기에 우리에게 많이 의존하는 상태였고, 다른 차원을 탐험한다는 말에 호기심이 든 것도 사실이오."
웨슬리 백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부하들의 말을 듣고 돌아갔어야 했는데······."
웨슬리 백작은 굵은 눈물을 흘렸다.
이제 와 후회하면 무엇 하는가.
처음부터 바이마르 사냥팀은 웨슬리 백작과 부하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이제 제가 어찌하길 바라십니까? 이 문제를 정보국과 추밀원에 알려서 공론화시킬까요? 아니면 케니스 영주에게 복수를 부탁할까요?"
웨슬리 백작은 가쁜 숨을 쉬면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냥······. 그냥, 나와 부하들을 기억해 주시오."
"······?"
"이 대수림을 질주하며 괴수를 사냥하던, 최고의 사냥팀이 이 시대를 살았다는 것을 그대가 기억해 주시오."
"정말 그거면 되겠습니까?"
웨슬리 백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울컥거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억울하지 않을까?
나 같으면 복수를 해달라거나 최소한 세상에 저들의 악행을 퍼트려 달라고 했겠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기 영주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제 자신이 죽으면 증인도 사라지고, 케니스 영지에서 복수하겠다고 설쳤다간 오히려 역으로 당했을 것이다.
그자들은 그럴 힘이 있었으니까.
주군을 생각하는 기사의 충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힘없는 영지의 서러움도 느껴졌다.
"이런, 부하 녀석들이 날 데리러 왔군."
"네?"
웨슬리 백작은 웃으며 손을 들었다.
"다니엘, 에밀리, 피터, 칸, 가드너······."
난 웨슬리 백작의 손을 잡았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모두가 백작님과 대수림 최고의 사냥팀을 기억할 겁니다."
"고맙소. 타일러 경. 나중에······, 아주 나중에 봅시다."
웨슬리 백작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 순간 운명의 실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졌다.
[기사회생(lv.5) 스킬을 사용합니다.]
'만약 나와 운명의 실이 이어진다면, 당신의 복수는 나의 것이 될 것이고, 끊어진다면 나는 당신과 부하들을 죽기 전까지 기억할 겁니다.'
그 순간 운명의 실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허수아비(lv.1) 마법인형을 만들었습니다.]
"하아!"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졌다.
내게 말은 그렇게 해 놓고 복수를 원하시오?
난 곧바로 운명의 실타래를 웨슬리 허수아비에게 연결했다.
운명의 실이 일제히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꼭두각시(lv.1) 마법인형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나도 힘이 없지만, 언제가 기회가 온다면 당신의 복수를 해주겠습니다. 웨슬리 슈나이더 백작.'
[꼭두각시(lv.1) 마법인형이 자아를 각성했습니다.]
[자동인형(lv.1)이 만들어졌습니다.]
어떻게? 단번에!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고작 1레벨의 꼭두각시가 자동인형이 됐다.
웨슬리 자동인형은 번쩍 눈을 떴고, 날 빤히 쳐다봤다.
꼭 그가 살아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내 마법인형일 뿐이었다.
"네 이름은 앞으로 웨슬리 슈나이더다."
자동인형이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눈을 깜빡였다.
난 웨슬리 자동인형을 인형의 집에 넣었다.
'암 드로운, 부 기사단장이니까. 최선을 다해 가르치게.'
'네! 주군. 맡겨 주십시오.'
이것 또한 인형술사의 운명이지.
***
[헬다임 장벽 관문]
"오늘은 절대 그냥 못 가십니다."
글래디스가 날 보며 굵은 팔뚝에 잔뜩 힘을 줬다.
"자네 설마 매번 관문이 열릴 때마다 날 기다리고 있는 건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허! 자네도 지극 정성이군."
"군인이 명령을 거역할 순 없잖습니까."
"함께 갈 테니, 부탁 하나만 들어주게."
"부탁이요?"
"저 드워프들을 데려가고 싶은데? 모두 내 정보원들이네."
내 뒤에 50명의 드워프를 보자, 글래디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린 글래디스의 도움과 북부군 사령관의 이름을 대고 관문을 쉽게 통과했다.
에테나는 드워프들과 먼저 집으로 갔고, 난 윌리엄 사령관을 만나기 위해 북부군 사령부로 향했다.
[북부군 사령관실]
"충! 타일러 빈슨 중령! 윌리엄 사령관님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윌리엄 호세스 사령관은 경례도 받지 않고, 날 노려봤다.
"자넨 정보국 소속인데 북부군 사령관에게 경례는 왜 하는 건가?"
"······."
삐지셨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뭐? 좋은 소식?"
"시안 7황자께서 확실히 성장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
"네! 이곳에 오는 길에 블랙힐 기지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오랜만에 대화를 나눴는데, 생각이 깊어지신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먼 대수림에서도 현 제국의 정세를 꿰뚫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성장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나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윌리엄 사령관이 내게 손짓했다.
"그만 손 내리고. 이리와 앉게."
"감사합니다."
난 가까이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왠지 가시방석이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네. 뭐부터 듣겠나?"
"나쁜 소식부터 듣겠습니다."
"아니, 좋은 소식부터 알려주겠네."
역시 단단히 삐지셨어.
윌리엄 사령관이 뒤를 슬쩍 보자, 엠버 중령이 서류를 건넸다.
"받게."
"이게 뭡니까?"
"그냥 열어 보면 될 걸 뭐하러 물어보나."
난 서류철을 열었다.
[발레리온 영지 소유권]
"어? 이건!"
"그곳 영주가 아주 문제가 많더군. 도박으로 많은 빚을 졌더군. 그래서 헐값에 샀네. 맨 밑에 자네 서명만 들어가면 거래는 끝이지."
순간 미간을 좁혔다.
이걸 받으면, 7황자에게 라인으로 들어가는 셈이었다.
"받을 수 없습니다."
"뭐라?"
"윌리엄 사령관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누군가의 라인에 들어가기에는······."
"누가 우리 라인으로 들어오라고 했는가?"
"하지만 제가 이걸 받으면······."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네."
"...?"
"자네 똑똑한 대리인이 한 일이니까.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네. 그러니 라인 같은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게."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대리인이라면?"
"프레디 준장 말이네. 자네가 영지 관리인으로 섭외했다면서."
"아! 그건 그랬지만······."
"구매 자금은 카야킨 전진 기지에서 난민 전진 기지에 결재해줄 금화를 미리 당겨서 줬으니까. 그리 알고."
"네······."
순간 정신이 멍했다.
정말 발레리온 영지가 내 것이란 말인가?
이렇게 간단히?
"이게 간단히 된 일이 아니야. 자네가 없는 사이에 프레디 그 친구가 백방으로 알아보고 다녔네. 그리고 찰스 정보국장도 도움을 줬고. 물론 나도 조금은 손을 보탰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영주가 될 수 있죠? 전 귀족도 아닌데요?"
"증명서 맨 하단에 서명란을 보게."
[타일러 빈스 명예 백작]
"명예 백작이요? 이게 뭡니까?"
83. 추밀원.
83. 추밀원.
"명예 백작도 일단은 백작이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백작 작위는 황제 폐하께서만 내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연하네. 그래서 내가 수도에 다녀왔네. 그리고 추밀원장님을 직접 만났지."
나 때문에 수도에 다녀왔다는 건가?
추밀원장도 만나고?
"추밀원장님께서 자네의 공을 높이 평가하셨네. 시안 7황자 저하를 구한 것도 그렇고, 가디언 제국과 협상을 성공시켜 전쟁을 막고, 현재 진행 중인 발굴 계획을 제안한 공도 모두 자네 것으로 하자고 시안 저하와 찰스 국장과 입을 맞췄네. 그리고 내가 자네 능력을 입이 마르게 칭찬했지. 나중엔 고막이 뚫어질 것 같다며, 황제 폐하께 아뢰어 아베르크 제국의 최고 훈장인 엠페러 프라임을 하사하기로 하셨네. 참고로 엠페러 프라임 훈장을 받은 사람은 명예 백작 작위를 받네."
그러니까 내게 제국 최고의 훈장을 준다는 거네.
"그런데 명예 백작은 정확히 뭡니까?"
"원래 초기 제국의 법전에는 엠페러 프라임 훈장을 받은 사람에게 준백작의 작위를 내린다고 적혀 있는데,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제국에서 준백작이란 작위가 사라졌기에 그냥 명예 백작이란 말을 쓰는 거네. 물론 힘이나 권리가 보장된 작위는 아니네. 말 그대로 명예직이지, 그래도 매달 20골드의 품위 유지비도 나오네. 영광인 줄 알게."
"그럼 제가 귀족이 됐다는 것은 확실하네요."
"아니! 먼저 훈장을 받아야지! 그래서 자네에게 수도에서 일정을 상의하기 위해 사령부로 들리라고 한 건데, 그냥 도망쳤다며?"
"아! 그건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서 거의 1년이나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고?"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내게 명예 백작 작위가 포함된 훈장을 준다는 거네.
하긴 황족, 그것도 황자를 구했고, 가디언 제국과 전쟁을 막은 것도 나였다.
그리고 발굴 계획도 모두 내가 세운 것이고.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원래 아랫사람 공은 윗사람들이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왜 내게 다 몰아주는 거지?
"시안 황자께서 그러시더군."
"······?"
"자넨 우리 쪽에서 품어서 될 사람이 아니고, 동업자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아! 저도 들은 기억이 납니다."
"나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굳이 싫다는 사람 끌어들이지 말고, 서로 돕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나을 거 같아서 말이야."
나도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동업자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서로 윈윈하자는 거니까.
"그러니까 빨리 수도로 튀어가! 일단 황제 폐하껜 대수림에 급한 임무가 있어서 늦는다고 했으니까."
"그렇군요. 그럼 그만 가보겠습니다."
"잠깐 기다리게."
윌리엄 사령관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 아직 나쁜 소식을 듣지 못했군요."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흔들었다.
"엠페러 프라임 훈장을 받으면, 발레리온 영지는 자네 것이 되네. 그럼 권리와 동시에 의무도 생겨."
"의무요?"
"지금 아리칸 공국과 전쟁이 임박했네. 제국의 영지들도 병력을 보내거나 금화를 보내야 하네."
"이거 영주가 되자마자 돈 쓸 일이 생기겠네요. 그럼 훈장 받는 것을 미루면?"
"이 미친놈아! 황제 폐하를 얼마나 기다리게 할 거냐! 그랬다간 괘씸죄로 훈장이 취소될 수도 있어!"
"아! 그렇겠군요."
윌리엄 사령관의 얼굴이 벌게졌다.
"자네랑 대화하다간 내 명대로 못살지. 차라리 마누라하고 대화하고 말지."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윌리엄 사령관이 일어서더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자네 키가 커졌군."
눈썰미가 좋은 양반이었다.
지금 내가 입은 것은 블랙힐 기지에서 얻은 북부군 장교 복장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키가 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전에 나보다 작았는데? 그러고 보니 얼굴도 잘생겨진 것 같고? 혼자서 좋은 거 먹고 다니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26살이면 한창 자랄 나이가 아닙니까."
"자네가 벌써 26이라고?"
23살 때 봤으니, 벌써 3년이 흐른 것이다.
"결혼할 나이가 지났군. 내가 중매를······."
"충! 가보겠습니다."
급하게 사령관실을 나섰다.
그리고 서류를 다시 열어봤다.
'내가 영주라니!'
훈장을 받고 여기에 서명만 하면 내 영지가 된다!
제국은 공식적으로 영지를 금화로 사고파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영주가 영지를 양도하는 건 가능했다.
특히 세습 영지의 경우 후계자에게 영지를 물려주는 건 영주의 권리였고, 이 경우 내가 후계자가 된 거다.
이건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고, 도박을 좋아하는 발레리온 영주를 이용해서 작전을 잘 짜야 했다.
특히 발레리온 영지는 기차역도 있고, 경작지도 넓어 가만히 있어도 금화가 쌓이는 곳이었다.
그런데 프레디 지부장이 다 알아서 처리했다니!
'역시 사람이 아주 유능해. 급여를 많이 줘야겠어!'
그럼, 일도 더 많이 하겠지.
난 그 길로 집으로 향했다.
***
"1년 만에 돌아와선 바로 떠나겠다고?"
"짐만 싸서 바로 출발해야 합니다."
케네스 영감과 드워프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발레리온 영지로 이사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 이사라고?"
케네스 영감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멀진 않습니다. 헬다임에서 기차로 이틀 거리입니다. 그곳에 더 좋은 저택을 지어 드리죠."
"이제 겨우 정들었는데······."
글러드 왕자와 드워프들도 아쉬워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난 드워프들을 보며 말했다.
"그곳에선 이렇게 숨어 살지 않아도 돼."
"타일러여! 그게 무슨 말인가?"
"거기 영주가 나거든."
"그럼 우리가 밖에 다녀도 된다는 말인가?"
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밖에 나갈 수 있다니!"
드워프들은 매우 좋아했다.
그동안 그들의 활동 반경은 이 집과 작업장뿐이었다.
내게 불평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답답했는가!
"그런데 이 많은 물건을 어떻게 다 옮기지?"
드워프들이 공방 가득 쌓인 물건들과 기간트를 보며 입을 벌렸다. 엄청난 양이었기에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옮기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마음의 준비만 해."
"아! 타일러의 마법 공간이 있었지!"
"그리고 그동안 호르갈 족장과 드워프들에게 기술을 전수해 주고."
"그건 걱정하지 마라! 타일러여! 스켈야스족도 뛰어난 대장장이들이다. 금방 배울 것이다."
"아! 그리고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어!"
난 글러드 왕자와 자모크 원로, 호르갈 족장을 따로 불렀다.
"그러니까 엘프 차원을 다녀왔단 말인가!"
"그래 그리고 그곳에서 비행석을 발견했지."
내 이야기를 들은 드워프들이 서로를 보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폐허가 된 엘프 세계를 말해주자, 자신들의 세계와 가족, 친지들이 걱정된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그대들이 비공정을 만들어서 줘야겠어."
"그 하늘을 나는 배 말인가!"
"내가 전에 구해준 열차의 마석 엔진 설계도 있지. 그걸 이용해 프로펠러 같은 동력 장치를 만들면, 꼭 배일 필요는 없어."
"아니다. 비행하다가 마석 배터리가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는 돛을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이 좋다."
글러드가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선체 길이는 100미터를 넘지 않게 만들어 주게, 대수림 아래쪽을 통과할 수 있어야 하니까."
"알았다. 타일러여! 비공정은 우리에게 맡겨다오. 그런데 몇 대나 필요한가?"
"최대한 많이."
"많이?"
"드워프 차원으로 가져가야 하니까."
"뭐?"
"뭐라?"
드워프들의 눈이 똥그래졌다.
"못 들었어? 가서 가족과 친지들을 데려와야 할 거 아냐!"
"타, 타일러여!"
"흐흐흑!"
그동안 눈물을 거의 보이지 않았던 드워프들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지난 십여 년간 가족들의 생사도 모르고, 머나먼 다른 차원에서 노예처럼 일만 했다.
이제 그들에게 헛된 희망이 아닌, 진짜 희망을 심어줘야 했다.
***
칙칙! 폭폭!
열차는 쉬지 않고 달린다.
"조금 답답하네요."
"응? 일등석인데?"
"아니요. 그게 아니라 괴조인형을 타고 날아갔다면 지금쯤 수도를 2번은 왕복했을 겁니다."
"아!"
피식 웃어줬다.
그랬다간 괴수가 나타났다며 온 제국에 난리가 났을 거다.
그리고 열차가 안전하지.
편하기도 하고.
가끔 문명의 혜택을 받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금화는 잘 챙겼어?"
"네."
"후드는 계속 쓰고 다녀. 밤중에 나가지 말고."
"제가 무슨 어린애입니까. 그리고 이제 인간 병사 열 명 정도는 무기 없이 혼자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아직 엘프는 너무 눈에 띄니까."
"네네! 알겠습니다."
왠지 건성으로 대답하는 거 같은데······.
내가 수도에서 일을 보는 사이에 에테나는 시노우엘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이제 엘프와 바이마르 공작은 한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에테나를 막진 않을 것이다.
비행석을 쉽게 캐기 위해선 엘프의 정령 마법이 필요했고, 엘프는 그들의 힘과 땅이 필요했으니까.
물론 이젠 내가 깽판을 놓을 거지만.
세계수의 씨앗이 내게 있으니, 칼자루는 내가 가지고 있다.
"타일러님도 조심하세요."
"응? 나?"
"제국의 황제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귀족이나 장군들도 단번에 목을 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아무나 죽이고 그러진 않아."
"그래도 조심하세요."
"알았어."
날 걱정해주는 건가?
왠지 기분이 좋았다.
열차는 다음날 수도에 도착했고, 에테나는 바이마르 영지행 열차를 탔다.
잠시 떨어지는 건데, 왠지 허전하다.
난 그 길로 마차를 타고 추밀원 본부로 향했다.
***
[추밀원 본부]
엄청난 규모에 입이 벌어졌다.
십여 개의 건물과 전용 정원도 있고, 성벽 같은 거대한 담장까지 둘러 있었다.
할데가르의 정보국도 넓었지만, 추밀원은 그보다 몇 배는 더 컸다.
입구 로비에서 기다리던 날 향해 중위가 다가왔다.
"충! 타일러 중령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난 중위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마석 엘리베이터라니!
그 비싼 마석 배터리를 마구 쓰는 것이 역시 추밀원이 제국의 양대 실세라는 것이 느껴졌다.
띵동!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다시 이동했고, 중앙에 있는 로비에 앉아서 다시 기다려야 했다.
많은 사람이 로비를 지나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제국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에 전쟁이 벌어질지도 몰랐기에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진짜 전쟁이 벌어지려나?'
제국의 1군단과 2군단은 아리칸 공국이 있는 서쪽 국경에 있었고, 3군단과 4군단은 휴전 중인 동부 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5군단은 대수림에 있고.
황제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5개의 군단이 모두 외부에 배치된 것은 근 1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원래 가디언 제국군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우리 아베르크의 병력이 아리칸 공국의 국경에 집결하자, 갑자기 동부 전선에 많은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들도 아베르크 황제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에 가만히 있진 않았다.
이제 제국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 대수림이었다.
덜컹!
가장 큰 중앙의 회의실 문이 열렸다.
어깨에 별을 단 사람들과 높으신 분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꼭 건국기념일 행사를 해야 하는가?"
"시기가 좋지 않은 건 다들 압니다. 하지만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익숙한 사람이 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
"오! 타일러 중령!"
"충! 오랜만에 뵙습니다. 찰스 국장님."
"자네가 여긴 무슨 일인가? 아! 훈장 때문에?"
"네!"
"하하! 나도 자네를 백방으로 찾았네만, 도무지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어 고생했네."
"죄송합니다. 다음엔 헬다임 지부에 위치를 알려두겠습니다."
찰스 국장이 별 기대를 안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수림에서 어디에 있는지 안다고 찾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흩어졌지만, 찰스 국장은 내 옆에 계속 서 있었다.
"안 바쁘십니까?"
"바쁘지. 하지만 자네와 함께 들어갈 거네."
"네?"
"추밀원장님이 자넬 잡아먹을 수도 있으니까."
찰스 국장은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겁주지 마십시오. 그런데 건국기념일 행사는 뭡니까?"
"아!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행사지. 올해는 알다시피 주변 상황이 좋지 않고, 금화가 많이 들어가니 취소하자는 의견이 많았는데, 추밀원장께서 꼭 열어야 한다고 하시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금부나 지원국에서 머리 좀 깨지겠지. 이럴 땐 우리 정보국이 좋다니까."
"그렇군요."
"그러니 자네도 정보국에 말뚝을 박게. 내가 확실하게 밀어주지."
"네. 생각해 보겠습니다."
확답은 하지 않았다.
"타일러 중령님, 절 따라오시죠."
나와 찰스 국장은 보로스 추밀원장실로 향했다.
지금 아베르크 제국의 이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 내 앞에 있었다.
"충! 타일러 빈스 중령!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추밀원장이 내 경례를 받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내가 그대를 불렀나?"
추밀원장은 내 옆에 찰스 국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타일러 중령이 혹시나 추밀원장님께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해서 함께 들어왔습니다."
"싱겁군. 내가 자네 부하를 잡아먹기라도 한단 말인가."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튼, 함께 왔으니, 둘 다 앉게."
"감사합니다."
난 푹신한 소파에 허리를 곳곳이 세우고 앉았다.
보로스 추밀원장이 상석에 앉더니 날 쳐다봤다.
"1년 만에 훈장을 받으러 오다니,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이유나 들어볼까?"
"대수림은 늘 전쟁터 같은 곳입니다. 통신이 되지도 않고, 지금은 이데아 수도 발굴지 주변 정보 수집까지 하고 있어 정말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저들이 이데아 황궁을 먼저 발굴하게 되면, 제국은 큰 위기를 겪을 겁니다. 저는 그 위기를 막고자 불철주야 정보를······."
"그만!"
보로스 추밀원장이 손을 들고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곤 찰스 국장을 쳐다봤다.
"정보국 장교들의 입은 언제나 살아있단 말이야."
"하하! 감사합니다."
"이건 칭찬이 아니네."
보로스 추밀원장이 다시 날 보며 말했다.
"그래도 공을 세웠으니 상은 줘야지. 훈장은 한 달 후에 건국기념일 행사 때 황제 폐하께서 직접 수여하실 것이네."
"한 달 후요? 타일러 중령은 대수림 정보 수집에 바쁜 사람입니다. 빨리 줘서 보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보로스 추밀원장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타일러 중령이 시안 황자 저하를 구한 공을 세운 건 맞지만, 엠페러 프라임 훈장을 받을 정도라고 생각하나?"
"이미 황제 폐하께서 주시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훈장은 내가 추천했네. 하지만 그건 곧 있을 아리칸 공국과의 전쟁과 침체한 우리 제국군의 사기를 올려줄 영웅이 필요해서였네."
영웅이라고?
그러니까 시안 황자를 구한 내가 제국의 영웅이 되란 말이야?
84. 재회.
84. 재회.
"이 집 차향이 좋군요. 분위기도 좋고."
"자네 뭘 좀 아는군. 나도 에르가드에 올 때마다 꼭 들리는 곳이네."
넓은 테라스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보고, 차와 커피를 마신다.
바로 앞에 폭 넓은 수로도 있고, 주변에 고급 상가가 많아서 수도의 젊은 남녀가 데이트 장소로 많이 오는 곳이었다.
"이런 찻집은 얼마나 할까요?"
"하하! 영지를 가진 사람이 찻집도 사려고?"
"그냥 궁금해서요."
3년 전만 해도 수도에 이런 찻집 몇 개 사서 편하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영지도 사고, 딸린 식구가 2천 명에 달한다.
앞으로 더 생길 거고.
아! 이제 영지민도 딸린 식구겠구나!
"아까 섭섭했나?"
"네?"
"추밀원장님 집무실에서 말이네. 자네 얼굴에 섭섭함이 그대로 드러나더군."
"제국 최고의 훈장을 준다는데 섭섭할 게 뭐가 있겠습니다. 다만 추밀원장님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서요. 그리고 절 서부 전선으로 보낼까 걱정입니다."
"그래? 난 오히려 자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제가요?"
찰스 국장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 꿈이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은 그런 영지를 가지는 것이 아니었나?"
"그건 맞습니다."
"영지도 생겼겠다. 그럼 이건 기회가 아닌가."
순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저더러 진짜 영웅이 되란 말씀입니까?"
찰스 정보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추밀원장님은 자네 능력을 모르지 않나. 그러니 이 영웅 놀이에 자네를 얼굴마담으로 세울 생각을 하신 거겠지."
"윌리엄 사령관께서 제 능력을 말씀하셨다고 하던데요."
"그거야 자네 기본적인 언어 능력이나 겉으로 드러난 능력을 말하는 거지. 숨겨진 능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윌리엄 사령관님은 그렇게 생각 없으신 분이 아니시네."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정보 국장님도 추밀원장님께 보고하지 않으셨습니까?"
"나?"
찰스 정보국장이 피식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 고급 정보는 쉽게 발설해서는 안 되네. 자네 정보는 내 기준에선 꽤 고급 정보야."
나도 국장을 향해 피식 웃어줬다.
그도 내 능력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윌리엄 사령관 만큼은 아니겠지만.
"자네의 자금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지를 사겠다고 생각했다면 금화는 꽤 있을 거야. 그리고 대수림에서 자네가 한일과 자네 능력을 대입해 보면, 기간트도 있을 거고.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자네가 생각하는 강한 영지를 만들 수 없네. 한 가지가 더 필요하지."
"맞습니다. 인재가 필요하지요."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지. 대수림에서야 자네 인지도가 나보다 높지만, 제국에선 그냥 정보국 중령 수준이네. 영지를 지키고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선 금화와 기간트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기간트에 탈 인재가 많이 필요하네. 대수림 전체의 인재가 5라면 제국은 95지. 그러니 이참에 보란 듯이 진짜 영웅이 되면, 자네 인지도가 엄청나게 올라갈 거야. 그리고 인재들이 자네 영지로 구름처럼 모여들겠지."
찰스 국장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명성을 높이는데 전장만큼 좋은 곳이 없으니까.
"하지만 전장에서 제가 활약할 기회나 있을까요? 다들 라인에 영지에 학연에 지연에 촘촘한 인맥으로 뭉쳐 있을 겁니다. 전 보다시피 아무것도 없으니, 공을 세울 기회조차 잡기 힘들 겁니다."
"하긴 서부군에서 자네 인지도론 뭘 하려고 해도 쉽지 않겠군. 하지만 자네라면 그래도 해내지 않겠나?"
"그리고 전 아리칸 공국의 마르틴 대공처럼 이용당하긴 싫습니다."
"응? 자네가 마르틴 공작 이야길 알아?"
"시안 황자님께 들었습니다."
찰스 국장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오점이자, 지금 황제 폐하의 오점이지. 그때 일이 잘 풀렸다면, 가디언 제국의 서부 일대는 우리가 차지했을 거네. 그리고 아리칸 공국과도 사이가 좋았을 거고."
"글쎄요. 전 그 의견에 동의할 순 없습니다."
"······?"
"제 생각엔 일이 잘 풀리고, 우리가 승리했어도 아리칸 공국은 독립하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기간트 제조 기술 역시 알려주지 않았을 거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건 아리칸 공국의 힘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흠······."
찰스 국장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제국이 아리칸을 계속 부리면 이득인데, 독립시켜 주겠습니까? 그리고 기간트 제조 기술을 알려준다면 그건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볼 땐 기간트를 추가 지급하고, 조공을 깎아주는 선에서 마무리됐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었겠군."
"아니 그랬을 겁니다. 수십 년간 제국군이 뚫지 못한 전선을 마르틴 공작과 크루세이더 기사단이 단 며칠 만에 뚫었습니다. 그 능력이 두렵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황제께서는 처음부터 제국 지휘관들의 행태를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묵인했겠죠."
"그건 너무 비약이 심하군."
"그냥 제 생각일 뿐입니다."
찰스 정보국장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말대로 영웅이 되긴 쉽지 않겠군. 하지만 자네라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네."
"절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
"솔직히 말하면 최대한 과소평가를 하는 중이네. 아니면 자네가 괴물로 보일 테니까."
찰스 정보국장은 생각보다 나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비밀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도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 인형술사의 능력은 단언컨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내가 제국의 영웅이 된다라······?'
그게 내게 이득일까? 아니면 손해일까?
고민 좀 해봐야겠다.
그리고 가뜩이나 황제에 대한 안 좋은 말만 들었는데, 보로스 추밀원장 역시 맘에 들진 않았다.
***
한 달이란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흘렀다.
찰스 정보국장을 따라다니며, 수도 에르가드 정보국 지부대도 방문하고, 추밀원과 다섯 개 하부 조직의 높은 사람들과 인사도 했다. 그리고 내각의 주요 실무자들도 만났다.
찰스 국장은 제국에서 정보도 중요하지만, 인맥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특히 영주가 되면, 영주 회의도 참석해야 하고, 수도의 관리들과 엮일 일이 많아지기에 미리 안면을 익혀 놓으면 나중에 다 도움이 된다고 했다.
에르가드까지 왔는데, 앨리슨을 안 보고 갈 순 없지.
마지막 날은 앨리슨의 학교를 찾았다.
"타일러 삼촌!"
앨리슨이 손을 흔들려 달려온다.
"뛰지 마! 다쳐!"
다다닥! 와락!
"우와! 삼촌이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오고?"
"앨리슨 보고 싶어서 왔지."
"치! 거짓말."
"근데 너 좀 무겁다. 내려와라."
"뭐가 무거워!"
"키도 좀 크고 살도 좀 붙었네."
앨리슨이 내려오자, 나의 분신인형 짹이 다가왔다.
"짹, 넌 왜 이렇게 말랐냐? 밥 안 먹어?"
"휴!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스터."
짹의 한숨이 깊다.
그동안 가끔 병렬사고 스킬을 써서 앨리슨의 상태는 살폈지만, 정작 짹의 상태는 살피지 못했다.
푹 들어간 눈과 다크써클이 그동안의 고생을 말해주고 있었다.
"별일은 없지?"
"앨리슨이 또 사고를 쳤습니다."
"뭐? 또?"
앨리슨이 짹을 노려봤다.
"삼촌, 배신자."
"이번엔 뭔데 그래?"
"선생님을 망신 줘서 일주일간 정학 처분을 받았습니다."
"뭐? 망신?"
앨리슨이 나섰다.
"선생님이 자기가 틀리게 가르쳐 주고, 자꾸 내가 틀렸다고 하잖아. 그래서 그 이유를 차분하고 교양있게 설명해줬더니, 울면서 나갔어. 정말이야."
"하아!"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천재를 교육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나.
왠지 선생님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억울한 표정을 한 앨리슨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줬다.
"알았으니까. 그만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정말?"
"그래."
"야호! 타일러 삼촌 최고!"
우린 최고급 식당에 가서 스테이크도 썰어 보고, 비싼 와인도 마셨다.
박물관도 가서 괴이하게 생긴 그림도 보고, 고급 마차를 타고 번화가에서 쇼핑도 했다.
앨리슨 핑계를 대고 나도 오랜만에 호사를 부려본다.
지금 누리지 않으면, 언제 가져볼지 모르는 일상이었다.
내일 건국기념식이 끝나면 전장에 갈 수도 있고, 아니면 다시 대수림으로 가겠지.
발레리온 영지에도 들려야 하는데······.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냥 놀자.
앨리슨이 묵고 있는 숙소는 학교 근처에 있는 가정집이었다.
프레디의 먼 친척 집으로 딸과 부인도 작년까지 이곳에서 지냈다고 들었다.
동네도 깨끗하고, 음식 솜씨도 좋다고 해서 앨리슨과 짹도 이곳에서 묵고 있었다.
"어서 들어가!"
"타일러 삼촌, 내일도 올 거야?"
"내일은 일이 있어."
"치! 나 내일 노는 날인데!"
"대신 방학 때 발레리온 영지로 오면 계속 놀아줄게."
"알았어! 조심히 가!"
앨리슨은 아쉬워했지만, 이별은 익숙했기에 아이처럼 매달리진 않았다.
난 앨리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아버지도 없고, 혼자서 얼마나 외로울까.
하지만 씩씩한 모습에 조금은 안심했다.
사실 내일 건국기념일 행사에 데려갈까 하다가 퍼레이드 행사에 사람이 너무 몰린다고 하길래 이야기하지 않았다.
훈장 받는 모습을 보면 좋아하겠지만, 괜히 고생이나 하지.
"짹! 고생 좀 해."
"마스터,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 앨리슨을 지키겠습니다."
"아니, 네 몸도 좀 챙겨."
난 짹과 앨리슨과 짧은 인사를 하고, 호텔로 향했다.
[그랜드 호텔]
'내일이면 여기도 안녕이구나!'
한 달이나 이곳에 머물러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늦은 밤 창문 너머로 도시의 야경을 보았다.
에테나도 지금쯤이면 바이마르 영지를 떠나 헬다임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 인형의 집을 열었다.
'주군을 뵈옵니다!'
[주군을 뵈옵니다!]
한참 기간트 대형 훈련 중인 자동인형들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웨슬리, 어때? 그 오리지널 기간트는?'
[아무래도 동작에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보기엔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무기를 쥘 때 오른손 새끼손가락 쪽에 힘이 너무 들어갑니다. 그 때문에 베기 동작이 조금씩 느려집니다.]
'아! 그건 좀 심각하군. 나중에 드워프들에게 꼭 점검해보라고 해야겠어. 웨슬리, 고생했네.'
[아닙니다. 주군!]
웨슬리(lv.7) 자동인형의 성장 속도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난민 기지에서 내 마법인형이 되고, 이곳 수도에서까지 겨우 3개월이 흘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벌써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서 테스트할 실력까지 갖추었다.
룩급 기간트에 타는 다른 자동인형들은 나이트급 오리지널 기간트만 타도 동작이 부드럽지 않았다.
싱크로율이 낮아서 그런 것이었기에 웨슬리의 능력이 압도적인 것이다. 덕분에 암 드로운이 할 수 없었던, 오리지널 기간트 테스트도 할 수 있었고.
'나도 슬슬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야 하는데······.'
지금도 탈 수는 있지만, 아직 마나가 부족했기에 지금 타고 있는 오리지널 마장기처럼 마법을 자주 쓸 순 없었다.
거신의 마나 팔찌를 계속 찼다면, 지금쯤 비숍급에 탔겠지만 에테나에게 빌려줬기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에테나가 벌써 폰급 기간트에 탈 수 있었기에 내 전력은 향상된 셈이었다.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파다다닥!
사마귀 꼭두각시가 신호를 보내왔다.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뭐야? 이 시간에?'
침대에서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난 일부러 가장 높은 층에 복도 끝 방을 잡았다.
그러니 지금 누가 내 방으로 다가온다는 뜻이었다.
'설마, 날 암살하려고?'
암살이라······.
하지만 그럴 사람이 없는데?
설마 백작부인?
타일러 아버지의 정실부인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괴수 마법인형을 꺼내려다가 웨슬리와 자할리를 꺼냈다.
사실 세계수 열매를 먹고 신체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내 전투력과 신체 능력은 상당히 올라갔다.
마치 2차 각성을 한 것처럼 감각은 기민해지고, 동체 시력과 반사신경도 증가했고, 근력 또한 배로 늘었기에 과거의 내가 아니었다.
게다가 레어급 조끼와 검도 있었기에 나 혼자서도 소대 병력 정도는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뭐야? 이 새끼들, 왜 안 들어오지?'
철컹!
앞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응? 누가 늦게 방을 잡았나?'
피식 웃음이 났다.
암살이라니!
대수림에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가?
신경이 너무 예민해졌다.
'잠깐, 이 앞은 옥상으로 올라가는 문인데?'
85. 건국기념일 퍼레이드.
85. 건국기념일 퍼레이드.
자동인형들을 풀어 날 지키게 하고, 난 사마귀 꼭두각시로 영혼 이동을 했다.
'이것들은 뭐야?'
사마귀 꼭두각시의 시야로 본 옥상엔 아홉 명이나 되는 놈들이 가방을 열더니 석궁을 조립하고 있었다.
그리곤 옥상 색과 똑같은 위장막을 덮더니 한쪽 난간에 바짝 엎드렸다.
이 호텔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아! 건국기념일 퍼레이드가 이 앞을 지나지!'
어이가 없군.
석궁으로 무장한 암살자들이라니······.
저걸로 황제를 암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번 행사는 추밀원의 지원국이 준비하는 행사였기에 나도 그들이 이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탄 퍼레이드 단상은 좌우와 후면, 천장까지 투명 유리 보호막이 몇 겹이나 있었다.
한 마디로 방탄 차량과 같았다.
그런데 석궁과 볼트라니!
전면에서 대고 쏘는 것이라면 모를까, 석궁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런 정보도 없이 황제를 암살하려는 놈들이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죽고 싶은가?'
암살자들도 사람이었다.
세상에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지금 이놈들은 자살 특공대였다.
아리칸 공국 놈들인가?
아니면 가디언 제국?
그것도 아니면 살루스 왕국일 수도 있었다.
지금 제국은 적이 너무 많았다.
'암살 시기는 딱 적당하긴 하네.'
5개나 되는 황제 직속 기간트 군단이 모두 수도를 비웠고, 전선은 언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그래도 근위 기사단과 황궁 수비대가 있는데, 어림도 없다.
근위 기사단은 1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모두 기간트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퍼레이드 행사장 주변엔 수도 경비대가 3천이나 배치되어 있었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미 거리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건국기념일 행사는 동이 트는 순간 시작이었다.
'저것들을 지금 싹 쓸어버려?'
괜히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었다.
영혼 이동을 끊고, 내 방에서 전투를 준비했다.
조용히 옥상 계단으로 향했다.
문을 살짝 열자, 놈들의 위장막이 보였다.
무심히 지나쳤다면 난간 그림자 때문에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쳐라!'
팟! 파파팟!
내 마법인형들이 일제히 놈들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푹! 푸푸푹!
"크헉!"
"윽!"
놈들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귀신이 됐다.
"모두 한곳에 눕혀!"
"네! 주군."
아홉 명의 암살자를 나란히 눕히고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난 정보국의 타일러 빈스 중령이오. 호텔 옥상에 암살자들의 시체가 있소."
"네? 암살자요?"
"모두 내가 처리했으니, 경비대를 불러주시오."
"아, 알았습니다."
호텔 직원에게 이야기하고, 곧장 퍼레이드 준비가 한창인 추밀원으로 향했다.
"뭐? 암살자라고?"
"네! 그랜드 호텔 옥상에 아홉 명이나 되는 석궁 저격수가 있었습니다."
안면이 있던 지원국 대령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그가 상관에게 달려갔다.
이제 내 할 일은 끝이었다.
잠시 후.
반가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충! 클린드 부국장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자네 요즘 너무 잘나가는 거 아닌가?"
"네?"
"자네 활약은 잘 들었네. 그리고 요즘 찰스 국장님과 여기저기 인사를 많이 다녔더군."
"일방적으로 끌려다닌 겁니다."
"찰스 국장님은 그럴 분이 아니신데, 그게 더 이상하네."
"그런가요?"
클린드 부국장은 미소를 지었다.
"난 부하가 잘나간다고 시기하는 사람은 아니네. 게다가 자네는 대수림에서 양질의 정보를 보내오는 최고의 정보통이 아닌가."
"대수림에 특이 사항은 없습니까?"
"특이 사항이라고 할 건 없네. 가디언 제국은 여전히 발굴에 힘쓰고 있고, 아리칸 공국은 오히려 전진 기지의 병력을 대거 본국으로 이동시켰네. 곧 있을 전쟁에 대비하는 거지."
"그렇군요."
아리칸 공국은 아베르크 제국보다 병력이 많이 부족했으니, 대수림의 병력까지 긁어모아야 했을 것이다.
"건국기념일 행사는 하는 겁니까?"
클린드 부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자가 있다고 해도 강행할 걸세. 그리고 자네 덕분에 암살자의 존재를 알게 됐으니, 지금쯤 주변 건물을 이 잡듯 뒤지고 있겠지."
"그럼 전 이제 어디로 가면 됩니까?"
클린드 부국장이 피식 웃었다.
"미안하지만 자네도 퍼레이드에 참석하라는 명령이네."
"제가요? 후문으로 오라고만 하던데요?"
"후문이 바로 퍼레이드 시작점이야. 자네뿐만 아니라 이번에 훈장을 받을 기사와 장교들도 퍼레이드에 참석하네."
"쩝. 대수림에 있을 때가 편했습니다."
"하하! 자네도 현장 체질이군."
건국기념일 퍼레이드는 황궁 후문에서 시작해 도심지를 한 바퀴 돌고, 황궁 정문 앞에 있는 에르가드 대광장에서 황제의 연설과 훈장 진수식 등을 하고 마무리된다.
무려 4시간이나 걸리는 퍼레이드에 참가해야 한다니······.
"슬슬 출발하지. 경비가 삼엄할 테니, 내가 데려다주겠네."
"그런데 부국장님께선 여기 왜 오셨습니까?"
"곧 추밀원 예산 심사일이네. 우리 부서도 최대한 금화를 받아와야 하지 않겠나."
"부국장님도 머리 좀 아프시겠습니다."
"뭐, 어쩌겠나? 그게 내 일인걸."
난 클린드 부국장 덕분에 황궁 후문까지 편하게 이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