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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 *

한편 모용소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오행성주는 생각했다.

정호위 백서.

이 새끼를 어떻게 요리해 줄까.

일백에 달하는 살수들이 독살당했다. 이 피해를 금액으로 산출하면 그야말로 천문학적.

손해 보는 걸 죽도록 싫어하는 방주의 성격상 이대로 돌아가면 최소 사망 아니면 불구였다.

한마디로 지금 자신들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얘기.

하여 이 건방진 정파의 3세대 애송이에게 제대로 가르쳐줄 요량이었다.

적도방을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뼈 아프고 끔찍한지를.

일대일에선 어떨지 몰라도 자신들이 합공을 펼치는 순간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니.

촌각. 그 안에 울면서 싹싹 빌 게 만들어 주리라!

그런데.

어째서?!

"아직 더 보여줄 게 남았나?"

저놈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하고, 자신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인가!

"커, 커흑...."

금성주는 엎드린 채 토혈하며 제 도끼를 내려 살폈다.

하나는 완전히 박살이 났고, 다른 하나는 이가 다 나갔다. 명장이 만들었다는 천하의 쌍귀부가 말이다.

분명 합공을 펼쳤고, 평소보다 수 배의 힘을 발휘했다.

하나

"꺄아아악!"

결과는 똑같았다.

맹주도 아니고, 등 총관도 아닌.

정호위 하나를 넘지 못하고 좌절을 맛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누구인가.

그간 숱한 의뢰를 성공시킨 살수계의 전설!

인정할 수 없다. 절대 인정할 수 없다.

"죽어어어어-!"

수아아아악!

하나 남은 쌍귀부를 쥐고 달려드는 그 순간.

휘이이잉!

바람이 스쳤다. 그리고 그때 장이서의 앞머리가 흩날렸다.

찰나였다.

하지만 금성주는 그 순간을 후회했다. 보질 말았어야 했다. 섬찟한 눈동자와 마주하지 말았어야 했다.

왜 그가 나타난 순간,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던 것인지.

왜 그에게 수 배 더 강한 합공을 펼쳐도 똑같이 손 한번 못 써보고 당하는 것인지.

이제야 알아버렸다.

두 눈에서 이토록 살(殺)이 뿜어지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니까.

"천살성(擅殺星)...!"

살수에겐 최고의 축복이라 할 수 있는 귀신(鬼神)의 자질.

미처 몰랐다. 그 존재가 감추어져 있어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가 그토록 두려운 방주와 같은 부류라는 것을.

"정파에 너 같은 천살성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넌 대체...."

금성주가 홀린 듯 중얼거리던 그 순간.

"누가 정파래."

"뭐...?"

장이서가 기막을 치곤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 순간 금성주는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것처럼 넋을 잃었다.

화르르륵!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장이서가 은은히 저에게만 내보내는 이 지독한 마기(魔氣)를!

"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거."

장이서가 입 모양을 천천히 움직인다.

천, 마, 신, 교.

"어으으으으!"

툭!

금성주가 들고 있던 도끼를 떨어트리곤 철퍼덕 주저앉았다.

두 눈은 공포에 잠식됐고, 입술은 부르튼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마교라니. 마교가 여길 왜....

"그건 알고 있나? 너희한테 의뢰를 맡긴 자들이 혈교라는 거."

"...!"

금성주의 초점이 크게 흔들렸다.

"오늘 대화할 게 참 많을 거야."

그리고 사이하게 웃는 장이서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이 새끼는 진짜 마귀구나.

땀이 줄줄 흘렀다.

이대로 붙잡히면 자신들이 적도방인 것까지 모두 실토하게 될 거다.

도망쳐야 한다. 가서 알려야 한다. 이곳 맹호원에 마귀가 산다고!

하지만 어떻게.

아무리 봐도 빠져나갈 방도가 없다.

그렇다면....

지독한 패배감에 얼굴엔 그늘이 서린다. 금성주는 잇새를 질끈 물곤 등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우습게 보지 마라."

"음?"

그리고 그 순간.

치이이익!

심지가 불타는 미약한 소음과 함께.

툭.

그의 등 뒤에 쇠구슬 하나가 떨어졌다. 이내 드러누워 덮어버리는 금성주!

"너, 설마?!"

"너도 곧 따라오게 될 것이다."

콰아아아앙!

이내 그가 거대한 폭발에 휩싸였다.

뒤이어 이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사방 곳곳에서 진천뢰가 비산했다.

간부들이다. 그들이 손을 쓴 것!

"이것들이."

장이서가 단숨에 자릴 박차고 떠올라 흑뢰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불사독마공(不死毒魔功) 흑뢰(黑雷)』

쐐애애액!

뱀처럼 날아간 비도가 진천뢰를 도로 튕겨낸다.

콰과과과과광!

연이어 장원에 폭발음이 빗발쳤다.

그리고 잠시 후.

연기가 서서히 가라앉자 쑥대밭이 된 광경이 눈에 담겼다.

몇 명이었는지, 원래 모습은 어땠는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조각조각 터져버린 시체들.

도주하려던 간부들마저 폭발에 휩싸여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다.

"우, 우웩!"

맹호단 동기들은 이런 광경이 낯선지 견디지 못하고 구역질을 뱉었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태.

단 하나.

"증거를 남기면 안 되니까."

장이서만이 그들의 뜻을 읽고는 이를 갈며 분개했다.

'그냥 보통 살수들은 아니라는 건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나섰다.

"송옥. 다친 녀석들은 네가 의원으로 옮기고, 나머진 상황 정리해."

동기들은 그를 괴인 보듯 바라보며 물었다.

"어, 어디 가는가?!"

"쉬러."

장이서는 짤막하게 답하곤 유유히 사라졌다.

혼란에 빠진 동기들.

"백서. 도대체 자네는 누구인가."

진자량이 사라진 그의 빈자리를 보며 허탈한 듯 묻는다. 모두가 다 같은 마음이었다.

분명 오늘이 끝이라 생각했거늘 그가 홀로 상황을 반전시켰다.

독공으로 적들을 몰살시켰고, 맨몸으로 간부들을 유린했다.

적들보다도 잔혹했고, 전장을 가지고 놀 듯 여유로웠다.

이제 그가 평범한 이가 아니라는 걸 모르는 자는 없었다.

대체 그가 누구기에.

"누군지 아직도 모르겠어?"

모두의 의문 속에 위지경이 당연한 걸 궁금해하냐는 듯 사납게 일언했다.

"정호위. 우리 대장이잖아!"

"...!"

대장. 가볍게 던져진 그 두 글자가 모두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절망적인 상황에 기적처럼 자신들을 구하고, 적들을 물리친 자.

이에 반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을까.

"움직이지. 대장의 지시니까."

남궁신의 묵직한 한마디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맹호단에 진정한 대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적도방이 실패하다니. 백서. 도대체 넌 누구지?'

맹호단 사이에 음침한 안광이 번뜩였다.

347.

#혼종의 수련

홀로 밖으로 나온 장이서는 생각에 잠겼다.

'조금만 늦었어도 줄초상 치를 뻔했어.'

일흉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란 건 예상했지만, 설마 맹호단을 노릴 줄은 생각 못 했다.

심지어 살수들이 금의위로 위장까지 한 주도면밀한 계획.

짐작은 갔다.

'맹주의 분노를 애먼 자에게 향하게 하려는 거겠지.'

그리고 그 대상도 누군지 알 만했다.

맹주가 사찰에서 만났던 바로 그 관군!

분명 그와의 상잔을 노린 것일 거다.

아마 낙향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도 오늘을 위해 계획된 일일 확률이 높았다.

한 가지 더 소름이 돋는 건 혈교가 직접 움직인 게 아니라 살수들을 동원했다는 것.

이게 무슨 문제냐 싶겠지만 장이서는 확신했다.

'이만한 인원이 금의위로 위장까지 한 채 맹주의 거처를 노렸다. 그런 미치광이 집단은 많지 않아. 아니, 하나밖에 없다.'

오행성주는 자신들의 목숨으로 최소한의 비밀을 지켰다고 생각했겠지만 천만에.

장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적도방. 사도련 팔대방파 중 하나.'

그들이 혈교의 의뢰를 물었다는 것을!

문제는 이 사실이 알려지면 자칫 20년 넘게 이어져 온 무림의 평화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거였다.

아니, 아마 일흉은 그것까지 계산하고 적도방을 끌어들인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모두가 놈이 짠 판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는 얘기.

'일흉. 생각보다 훨씬 더 음흉하고 교활한 자다.'

처음이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이토록 긴장감을 느낀 것은.

하지만 여기까지.

놈들의 계획은 여기서 실패했고, 순서는 제 쪽으로 넘어왔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네가 짠 판이었겠지만, 이제부터는 아닐 거다.'

장이서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서렸다.

*

다음 날.

맹호원 습격 사건은 순식간에 소문이 들불처럼 번졌다.

밤 중에 폭음이 그리 크게 일었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

그리고 풍비박산이 났다는 소식에 가장 먼저 장원에 달려온 두 사람이 있었다.

당연히 집주인인 맹주 현청과 등 총관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두 사람은 쑥대밭이 된 장원을 보곤 경악을 토했다.

단원들이 내내 정리를 한다고 했지만, 부서진 건물까지 되돌릴 순 없는 일.

빠르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제야 사태를 알게 된 맹주는 심장이 쿵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나마 사망자가 없다는 말에 간신히 안도의 숨을 삼키곤 물었다.

"대체 적들이 얼마나 쳐들어온 것인가. 다섯? 열?!"

단원들은 이에 서로를 한 번 흘기곤 슬그머니 좌우로 길을 비켰다.

그러자 그들의 뒤에 시신을 덮은 거적들의 끝없는 행렬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건!"

맹주와 등 총관은 기함했다.

어림잡아 최소 일백 구.

그것도 형체가 온전한 것만 이 정도.

심지어 진천뢰까지 터트렸다면서 아무도 죽지 않고 살았다니.

이거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모두 자네들이 한 것인가?"

맹주의 물음에 진자량은 한 발 나선 채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곤 말했다.

"송구스럽지만, 적들은 강했고 저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음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두 사람이 의문을 담아 바라보자 모두가 경외가 담긴 눈빛으로 이렇게 답했다.

"정호위 백서. 그가 단신으로 적들을 쓰러트리고 저희를 구해준 겁니다!"

"...!"

맹주와 등 총관의 입이 동시에 떡 벌어졌다. 그러곤 홀린 듯이 물었다.

"그는 지금 어디 있는가."

*

그 시각 장이서는 숙사에서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겉만 보면 애들만 밤새 일 시키고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천만에.

혈교와의 접전이 격화하는 만큼 그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강해지기 위한 수련!

물론 당장 구규지체를 막을 방도도 없거니와 새로운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강해지기 위한 방법이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등한 경지일수록 숙련과 경험의 차이가 승패를 좌우한다. 그리고 그건 지금 내게 가장 부실한 영역이기도 하다.'

물론 이 말을 또래인 진자량이나 남궁신이 들었다면 기함을 토했을 거다.

대체 어딜 봐서 부실하냐고.

하지만 아쉽게도 장이서의 상대는 3세대들이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입신의 경지에 올라선 괴물들.

앞으로 그들을 상대하기엔 내실은 턱없이 부족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들은 반백 년이 넘는 시간을 쏟아부어 올라선 경지인 반면, 장이서는 고작해야 수년 만에 지금의 경지에 올랐다.

어찌 그 긴 시간의 격차를 단숨에 메꿀 수 있겠는가.

그게 가능한 건 장이서가 알기로 천하에 딱 두 사람뿐이었다.

하나는 상대의 기술을 단숨에 빼앗아버렸던 사부 한무영.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냥 존재 자체가 사기인 사형 진우광.

이들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장이서에겐 역근경이 있지만 그건 일시적인 효과일 뿐.

'사형과 사부는 타고난 괴물들. 애초에 따라 한다는 건 불가능해. 난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바로 의태신기와 회류안을 응용하는 것!

'맹주 현청과 서검 여중악. 의태신기 없이 그들을 흉내 낼 순 없지만, 감각과 동선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만약 이를 회류안으로 그려낸다면...?'

무한한 상상. 그리고 끝없는 대결.

그게 가능하다면 지금의 정체된 시간을 앞당겨 줄 것이 분명했다.

당대 정도 제일이라 불리는 그들의 능력을 의태신기 한 번에 뼛속까지 뽑아먹겠다는 것!

한무영과 진우광이 생태계를 파괴하는 괴종(怪種)이라면, 장이서는 혼종(混種) 그 자체!

핑!

회류안이 펼쳐지고 머릿속에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려졌다.

하나는 신선 같은 용모이나 사나운 주름이 가득한 서검 여중악. 그리고 다른 하나는 중년의 군자처럼 느껴지는 맹주 현청이다!

아무리 상상일지언정 정도의 전설.

본래라면 한 명씩 검을 섞으며 예를 갖추는 것이 도리일 터.

하지만.

'시간 없으니 한꺼번에 간다.'

장이서는 무례한 부교주.

수와아아악!

곧바로 칼부림이 시작됐다.

그리고.

푹푹푹푹! 서걱!

맹주에게 다섯 번을 찔리고, 서검한테 머리가 뎅강 잘렸다.

그야말로 찰나에 벌어진 일.

'헉!'

다시 정신을 차리자 두 사람이 처음 그 자리에 돌아와 서 있다.

'괴물들이 따로 없구나.'

심지어 지금 눈앞의 허상들이 지니는 실력은 진신(眞身)에 비하면 기껏해야 5할 정도에 불과할 거였다.

자신이 의태신기로 가져온 힘이 그 정도 였을 테니.

한데도 이 정도라니. 이건 그냥 내리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

하지만 장이서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 번졌다.

지금 필요한 건 승리가 아니었으니까.

원하는 건 단 하나.

스릉! 장이서의 손아귀에서 새하얀 검이 뽑혀 나왔다.

천매검(天梅劍).

'한 수 배우겠습니다. 대가는 몸으로 치르죠.'

그렇다. 장이서가 이들에게 얻고자 하는 건 다름 아닌 바로 검(劍)이었다!

이유는 하나.

최근에 얻은 두 가지 신기(神技).

극로와 무형검.

기연을 통해 운 좋게 얻어내긴 했으나 두 가지 모두 검(劍)에 기반한 무공.

두 가지를 완벽히 다루기 위해선 최소한 검법이 서검과 맹주의 발끝에라도 닿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적중했다.

서걱!

열두 번째 죽음을 맞이했을 때 깨달았다.

자신의 검과 저들의 검엔 커다란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를 하나씩 부숴나가다 보면 분명 언젠가 답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조급할 필요 없다. 천천히 느끼는 거다.'

서걱!

물론 머리가 잘려 나가는 기분이 썩 좋진 않지만 말이다.

*

'맹주의 검이 웅장한 설산의 자태라면, 서검은 눈사태다.'

삼백 번 정도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들의 검을 처음으로 정의 내렸다.

둘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맹주가 감정을 배제한 완벽을 추구한다면, 서검은 거칠고 난폭한 야수.

물론 둘 다 사람을 위축시킨다는 점에선 똑같지만 말이다.

'저들의 동작을 흉내 낸다고 절대 같은 검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어느새 수천 번에 달하는 죽음을 경험했을 때 깨달았다.

호흡, 속력, 깊이, 무게, 심지어 시선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흡수해 보았지만 결국 그것은 그들의 검.

이들을 뛰어넘으려면 부족할지언정 나만의 검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고 제 손에 담긴 검을 다시 마주했다.

검(劍)이란 무엇인가.

난 이 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두 사람과 수백 번의 합을 맞추면 간혹 천매검이 유리처럼 부서지곤 했다.

실체가 아닌 허상에 강도의 차이가 있을 리는 만무한 일.

어째서일까.

이는 그들은 검을 알고, 난 검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가늘고 긴 검신이 지금 어디로 베고 싶어 하는지. 어디에서 고통을 느끼는지.

이 또한 나의 육신으로 받아들여 함께 해야 했다.

그렇게 장이서는 무아지경에 빠진 채 검신일체(劍身一體)를 이루었다.

한 번, 백 번, 천 번, 만 번.

그리고 수없이 베어내며 자각했다.

내가 곧 검이고, 검이 곧 나이니.

일평생 검과 함께 한 그들의 삶을 녹여 나의 검에 씨를 뿌리리라.

하여 일만 번의 목숨을 양분 삼아 끝내 스스로 들판에 열매를 맺으니.

이것이 바로 나의 검.

자야검(自野劍)이다.

장이서의 검이 어느새 오채 찬란한 빛을 발산하며 두 절대자를 향해 거침없이 그어졌다.

이는 무형검과 극로가 천매검에 담기면서 벌어진 기현상!

그리고 그 결과는.

수와아아아악!

장이서를 수없이 죽음으로 이끌었던 두 지존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장이서의 홀렸던 정신도 서서히 이성을 되찾았다.

스스스스!

손안에 있던 천매검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하지만 검법을 펼치던 순간의 감각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한무영, 진우광과는 또 다른 괴물의 탄생이었다.

장이서는 비록 사제지연을 맺은 건 아니지만, 창안한 검법에 바탕이 되어준 두 사람을 생각하며 정중히 허리 숙여 포권을 취했다.

스스스스.

회류안이 만들어 낸 공간이 서서히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현세로 돌아온 눈앞에는.

"...."

꿀꺽. 잔뜩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동기들이 몰려 와 있었다.

"...뭐냐."

눈매를 찌푸리고 묻자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우왕좌왕 답했다.

"그, 그게...."

"매, 맹주님께서 찾으시네!"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하긴, 이 정도 소란이 일었는데 안 와도 이상한 일.

잘 됐다. 안 그래도 사찰에서 만난 자가 누군지 묻고 싶었거늘.

그나저나 다들 풀 죽어 있을 줄 알았는데 멀쩡해 보여 다행이다.

그런데.

"저기, 정호위. 우린 이제 뭘 하면 될까?"

그걸 왜 나한테 묻나.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잠 안 오면 보초나 서든지."

"충!"

그러자 동기들이 힘차게 답하곤 후다닥 사라졌다.

"밤새 미친 건가?"

장이서는 고개를 젓고는 밖으로 나섰다.

물론 자신이 명상에 빠져 있던 사이, 오채 찬란한 무형의 검들이 장내를 가득 메워 모두를 또다시 경악하게 했다는 건 끝내 모르겠지만 말이다.

맹호단에 정호위 백서의 전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어느 날이었다.

348.

#술래잡기는 없다

한편 안채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주독이 잔뜩 오른 빨간 코에 허리에 찬 호리병.

"이게 어찌 된 일인 게야!"

신주오절 중 하나이자 개방의 태상방주.

북개 취걸륜이다.

"안가에서 보기로 하지 않았던가."

"죄지었어? 친구 놈 집이 무너졌다는데 당연히 와야지!"

그런 뜻 아닌 거 뻔히 알면서 저런다.

"어차피 다 들킨 마당에 뭘 더 숨기겠다고? 더는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

하여 이젠 대놓고 옆에 있겠다는 뜻. 등 총관이 멋쩍은 인사 후 자리를 피해주자, 맹주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와 앉는다.

"아주 장원이 개박살이 났더구먼! 대체 어찌 된 게야?"

"본 그대로일세."

맹주의 짤막한 답변에 북개는 인상을 팍 찌푸리곤 입을 닫았다.

늘어선 시체 더미만 대충 훑어도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훤히 짐작이 갔기 때문.

"금의위.... 이 빌어먹을 놈들이-!"

고오오오!

북개가 격노한 눈으로 진기를 발산했다.

원래 일흉의 계획대로라면 맹주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다.

아마 무림맹 고수들을 비상소집 후 전쟁도 불사했을 터.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끼이이익!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사람.

장이서.

바로 그로 인해 미래가 바뀌었으니.

"부르셨습니까."

"어서 오게!"

맹주가 반가움을 감추며 환대한다. 하나 절친인 북개의 눈까지 속일 순 없는 일.

이놈 봐라? 대체 누구기에 제 자식 바라보듯 저리 따뜻한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눈매를 좁히며 들어오는 장이서를 골똘히 살폈다. 그러다 대뜸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사이하구나. 사이해. 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기에 이리 괴이할 수가 있는 게냐?'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가리는 것만은 천하제일로 꼽히는 게 바로 개코 북개다.

한데 장이서는 몹시 이상했다.

'냄새가 안 나. 아무 냄새가! 하루에 열 번 씻는 놈도 뭐든 냄새가 나기 마련이거늘.'

이런 경우는 딱 하나뿐이었다.

스스로 냄새를 지운 놈.

한마디로 수상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는 얘기.

"앉게."

맹주는 앞에 놓인 방식을 친절히 가리켰고, 북개는 팔짱 낀 채 들개의 눈을 부라렸다.

'뭔데, 이 분위기는.'

장이서는 극명한 온도 차에 어깨를 으쓱이곤 그들 앞에 앉았다.

그러자 맹주가 덤덤한 목소리로 진정성 있게 말했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네. 자네 덕분에 모두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고. 고맙네."

맹주가 고개를 숙인다. 장이서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다소 당황했다.

악두호에 있어야 할 제가 왜 여기 있는지 따지거나, 아니면 어제 있었던 상황에 관해 묻거나.

둘 중 하나일 줄 알았거늘.

확실히 맹주는 맹주다.

입맛을 다시곤 답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할 일 하겠다고."

한데.

"네놈을 어찌 믿고!"

"예?"

뜬금없는 시비조에 고개를 돌리자 북개가 콧김을 뿜는다. 맹주도 황당한지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뭐, 왜. 이놈 믿지 마. 아주 수상한 놈이니까. 내 코는 못 속여!"

"걸륜."

"있어 봐! 너. 밖에 있는 시신들. 다 네가 저리 만든 게냐?"

간부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치고.

"그렇습니다만."

"오냐, 잘 걸렸다. 밖에 일백 명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겉보기엔 다 멀쩡해. 이봐, 맹주. 이게 무슨 뜻인지 자네도 알지 않은가. 독! 이놈이 독공을 쓴 거라고!"

역시 개방인가. 확실히 눈치가 빠르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됩니까?"

"너 성이 뭐야."

"백씨요."

"이것 봐! 신성한 정파에서. 당가도 아닌 놈이 독공을 쓴다?! 이놈 이거 사마외도에서 보낸 세작이 분명해! 당장 잡아다...!"

"무영의 제자일세."

"조카야!"

북개가 달려와 덥석 끌어안았다. 진짜 뭐냐, 이 양반.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귀티가 잘잘 흐르더라니! 이 숙부가 널 한눈에 알아봤구나."

세작이라며.

"어디 보자. 이게 얼굴이 아주 갸름한 것이 무영이랑 똑 닮았네. 아들인 게야?"

"전혀 아닙니다."

"제자면 아들이지. 껄껄껄! 맹주, 애가 됐네, 됐어. 거지가 만지는데도 피하질 않아!"

숨 참고 있는 거 안 보이나.

"나와주시죠."

"근데 넌 내가 누군지 안 묻는 게냐?"

"맹주께서 벗으로 두는 걸인이 한 명밖에 더 있습니까?"

"맞네. 이놈 무영이 제자 맞아! 건방진 게 딱 그놈이야!"

북개가 껄껄 웃으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맹주는 고개를 젓고는 말 나온 김에 궁금했던 걸 물었다.

"악두호로 간 줄 알았는데. 여긴 어떻게 오게 된 것인가."

물어놓고 내심 기대감이 서렸다. 사찰에서 구해준 게 그가 아닐까 싶어서. 한데.

"다녀온 겁니다."

"다녀왔다고?"

척! 대답 대신 옆에 두었던 검을 잘 보이게 앞에 놓았다.

그러자 북개가 다시 엉금엉금 기어와 칼을 살피더니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천매검?!"

맹주의 눈도 번쩍 떠졌다.

"그 옹고집쟁이인 서검이 네게 이걸 주었단 말이냐?"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둘 다 멍하니 입을 연 채 서로를 살폈다. 이윽고 북개가 설명했다.

"넌 이 천매검이 무엇인지 아느냐?"

"서검께서 쓰시던 검 아닙니까."

"그냥 검이 아니다. 평생을 써 온 검이다!"

쉽게 말해 서검을 상징하는 신패(信牌)와도 같다는 것.

"그 말인즉슨 널 최고의 귀인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인 게지."

그런 뜻이었나. 한데 그게 왜. 대수롭지 않게 쳐다보자 북개가 헛숨을 삼키곤 답했다.

"서검이 누구더냐. 화산의 제일 큰 어른 아니더냐. 종정이 널 인정했으니, 명실상부 화산에서 받들어 모셔야 할 어른이 되었다는 얘기인 게다."

"그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얘 봐라. 화산파 장문인도 이제 널 보면 고개를 숙여야 하고, 그 제자들은 엎드려야 하며, 그 제자의 제자는.... 됐다. 아무튼 그 깐깐한 녀석이 아무리 무영의 제자라도 이런 짓을 할 리가 없는데?"

북개의 말대로였다.

서검은 본디 예와 배분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자.

아무리 마음에 든다고 해도, 화산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짓을 할 자는 절대 아니었다.

한데 천매검을 줬다는 건 아예 대놓고 제자들에게 받들어 모시라는 얘기.

물론 장이서가 마교의 부교주이고, 천매검만이 아니라 무형검까지 전수받은 걸 알면 둘 다 기절을 했을 거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장이서조차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

하지만 서검에게는 예와 배분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정도의 어른으로서 무영과 장이서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였다.

그런 자였다, 서검 여중악은.

어쨌든 직접 보고도 믿지 않을 순 없는 노릇. 북개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호탕하게 말했다.

"하긴, 무영의 제자이니 못해낼 것도 없지! 아무튼 만나서 정말로 반갑다. 취걸륜이다. 네 사부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으니 앞으론 날 숙부라 부르거라."

얕은 한숨이 삼켜졌다. 신주오절과의 인연이 설마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지게 될 줄이야.

'사숙이나 사형은 이런 관계를 알고 있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사형은 알고 있었을 것 같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그게 정사마전에서 신주오절이 살아남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고.

나아가 처음부터 멸망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니라 평화와 균형을 위해 일으켰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물론 본인에게 물어봤자 돌아오는 건 성질머리밖에 없겠지만.

어쨌든 사부의 인연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일.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올렸다.

"백서입니다."

북개 취걸륜과도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래. 백서. 가만있자. 서검이 천매검을 주었으면 난 무얼 줘야 하나. 혼인은 했느냐? 내 손녀 같은 비렁뱅이가 하나 있는데. 어때. 만나 볼 테야?"

"비렁뱅이가 된 손녀겠지."

어느 쪽이든 이상하잖아!

북개가 팔불출처럼 치근대자 옆에서 맹주가 눈초리를 주었다.

"인사는 차차 나중에 하도록 하고. 어제 있었던 일부터 들어보지."

안 그래도 바라던 바다. 표정을 갈음한 채 진지하게 본론을 던졌다.

"어제 이곳에 왔던 자들은 금의위가 아닙니다."

음?! 화들짝 놀라는 두 사람.

"그들은 혈교의 의뢰를 받고 온 살수들. 사도련의 적도방입니다."

"...!"

맹주와 북개의 눈이 부릅떠졌다.

*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가 금의위를 치도록 일부러 판을 짠 거다?"

자세한 설명을 마치자 북개가 기함하며 물었다.

"예. 하지만 그냥 금의위는 아닐 거고, 아마 맹주께서 만났던 자일 겁니다."

사찰에서 만난 관군. 이번에 위장한 복장들도 그렇고, 그때 마차에 꽂혀 있던 깃발과 동일한 것도 발견되었다.

맹주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봐선 분명히 의심 가는 것이 있을 터.

"한데...."

음? 순간 맹주가 매섭게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그를 만났다는 건 어찌 아는 것인가? 그건 우리밖에 모르는 일인데."

"그건, 서검께 들었습니다."

"음...."

대충 둘러대자 맹주가 얕게 침음을 뱉었다.

사실 딱히 숨길 이유는 없지만, 당장 굳이 드러낼 필요도 없는 일.

한데 표정이 유독 아쉬워 보이는 건 착각인가.

아무튼.

"그자는 누굽니까?"

다시 본론을 묻자 이번엔 북개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신군(神君) 화무진이라고. 들어보았느냐?"

전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자다.

"황제의 직속 친위대 금의위(錦衣衛). 그중에서도 산하 최강 조직이라 일컬어지는 진무사(鎭撫司)의 수장이지."

쉽게 말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금의위 제일 고수!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오륜회의 배후로 생각했던 자였네."

맹주는 이미 3년 전부터 오륜회를 의심했었다.

구자기의 죽음으로 혈교의 존재를 미리 알게 되었고, 또 자신이 신선폐에 중독되자 혜성처럼 나타난 오륜회가 미심쩍었던 것.

한데.

"오륜회는 실체가 없는 허상 같았네. 오대세가도 그저 속해있는 일원일 뿐. 그들이 주도하진 않았으니까. 하여 의심할 자도 없었네."

말 그대로 상생을 위한 친목 모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규모가 커지더군. 불과 3년이었네. 한데 이젠 오륜회에 속하지 않은 상단이 없고, 오륜회가 아니라면 살아남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지."

그리고 이는 상단과 문파의 공생이라는 불문율을 산산이 부서트렸다.

더는 무림맹이 필요가 없어진 것.

그렇다.

오륜회의 목적은 무림맹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무력화시키는 거였다.

"그때 깨달았네. 오륜회의 뒤에 상단들을 뒷받침해 줄 막대한 권력이 숨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유력한 후보가 바로 금의위 진무사의 수장, 신군 화무진이었다.

"정황도 확실했지."

북개가 말을 이었다.

우선 아무리 뒤를 파도 잡아내기 힘든 감찰 첩보 조직의 수장이라는 점.

평소 무림을 잠재적 반역도로 생각하는 적대적 신념을 가진 존재라는 점.

오륜회에 속한 자들과 지속적인 만남을 가져왔다는 점.

심지어는 맹주가 그와 사찰에서 만난 날 마애석불까지 무너져 내렸다.

어디 그뿐인가.

"이번에 진천뢰를 조사하러 가보니 전부 금의위에서 가져갔다더구먼."

그야말로 모든 증거가 명확히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금의위 진무사의 수장 화무진!

하지만 바꿔 얘기하면 이 모든 것이 다.

'일흉이 짜놓은 함정이다.'

이쯤 되니 장이서는 새로운 의문에 빠졌다.

이 정도로 치밀한 계획을 짜놨다는 건 이미 수년 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맹주와 화무진의 상잔을 노리고 있었다는 얘기.

도대체 왜. 그와 맹주가 부딪쳐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한데 네 말대로 이게 다 혈교의 계획이었다면, 이젠 다 망쳐버렸으니.... 놈은 또 음지로 숨어버리겠구나."

북개와 맹주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서렸다.

다행히 희생은 막았지만, 또다시 길고 긴 술래잡기가 펼쳐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

하나 장이서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아뇨. 이번에 잡을 겁니다."

무슨 수로.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그러니까.

"두 분이 저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장이서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349.

#새로운 판

"대체 혈교 놈들을 어떻게 잡겠다는 게냐?"

북개가 팔짱을 끼고선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다.

"설마 적도방을 칠 생각은 아니겠지?"

적도방. 물론 그들은 사형이 정한 평화협정을 깨트렸으니, 언제고 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적도방을 치면 사도련과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혈교가 좋아할 일을 해줄 순 없죠."

"잘 아는구나. 한데 그럼 방법이 없지 않으냐. 남은 증거라곤 그게 전부인데."

아니. 아직 방법은 있다.

놈들이 숨지 않고 기어 나오게 만들 방법이.

"맹호원을 습격한 건 금의위라고 내부적으로 표명해 주십시오."

"그, 그게 무슨!"

맹주와 북개가 기함을 터트렸다.

이게 뭔 헛소리인가.

방금 전까진 그들이 한 짓이 아니라면서!

"혈교를 계속 움직이게 하겠다는 겁니다."

"...!"

계획은 간단했다.

놈들한테 이번 대계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절반은 성공한 것처럼 믿게 하는 것.

어차피 그들의 최종 목적은 맹호단의 죽음이 아닐 것이다. 그건 단지 과정일 뿐.

진짜는 이를 통한 무림맹과 금의위의 전쟁!

"우리가 금의위를 계속 의심하는 것처럼 꾸미자는 말이더냐?"

정답. 그렇게만 알려줘도 놈들은 다시 움직일 게 분명했다.

물론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놈들이 그걸 믿겠느냐? 이미 실패했는데."

"믿을 겁니다. 두 분도 제가 말하지 않았다면 믿었을 것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

북개와 맹주가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했다. 이번 일은 혈교가 최소 수년을 준비한 것. 단순히 금의위로 위장했다고 다가 아니라,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천천히 쌓아 올린 대업이란 말이다.

심지어 살수들도 진천뢰를 터트려 자멸했으니, 우리 셋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될 거다.

"좋다. 네 말대로 믿는다고 치자. 그럼 그다음엔? 어차피 놈들이 나타나길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신세 아니더냐."

가만히 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다.

"화무진에게 먼저 회동을 제안하십시오. 전쟁이 아니라 화해를 제안하는 겁니다."

"...!"

그건 놈들이 가장 바라지 않는 일. 그러니 어쩌겠는가. 어떻게든 이를 막겠다고 뛰쳐나오는 수밖에.

"역으로 위기를 자초하자는 것이구나!"

북개가 손뼉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나름 그럴싸한 계획. 아니, 확실히 해볼 만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엔 한 가지 필수적인 조건이 있어야만 했다.

"자네 말대로 되려면 혈교도 우리의 움직임을 알아야 할 텐데? 그건 어찌 전할 것인가?"

맞아. 북개도 추켜 뜬 눈으로 묻는다. 이에 장이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건 알아서 알게 될 겁니다."

숨어 있는 쥐새끼가 어련히 물어가 줄 테니.

*

장이서는 계획을 밝히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자리엔.

"음...."

"끄응...."

북개와 맹주가 기 빨린 사람들처럼 진이 빠져 버렸다. 이윽고 한참 후에야 북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무영이 이놈은 제자를 머리만 보고 뽑았나?"

그만큼 기가 막혔다. 북개는 무림맹의 정보 총책. 그 역시 잔꾀로는 어딜 가든 알아주는 편.

하지만 장이서는 뭔가가 달랐다.

계략에 능한 건 기본이고, 치밀하면서도 내내 여유로웠다.

마치 상황을 머리 위에서 가지고 노는 것처럼.

저 나이에 저리 능숙하게 판을 짜는 놈은 난생처음.

"제갈상 그 친구가 봤으면 제자 삼겠다고 난리였겠구만."

북개가 아는 한 가장 영리한 자가 바로 그였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찬사.

하나 맹주 생각은 달랐다.

'제갈상도 이처럼 빠르게 답을 찾진 못했을 걸세.'

지난 3년간 혈교의 꼬리도 잡지 못했거늘.

장이서는 고작 하루아침에 혈교의 흉계를 끊어놓은 것도 모자라 잡아들일 계획까지 세워버렸다.

더구나 머리만 난 놈이 아니라 머리까지 난 놈.

볼수록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는 아이였다.

문득 3년 전, 신승이 제갈상에게 했던 말이 스치듯 떠올랐다.

'그대가 버린 장 대협이라면 분명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외다!'

103호 장이서....

어째서일까. 아닌 걸 알면서도 백서에게서 자꾸 103호가 떠오른다.

왠지 그라면 3년 전에도 다른 답안을 찾아냈을 것만 같은 기분.

만일 백서가 103호라면....

'혹 신승이라면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분명 그는 103호와 인연을 맺었다. 오래된 것도 아니니 만나면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 터.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마음이 술렁였다.

*

한편 밖으로 나온 장이서는 은밀히 객잔으로 향했다.

대낮에 갑자기 술이 고파 온 건 아니고, 사람을 좀 만나러 왔다.

북개가 진천뢰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다는 건, 그녀 또한 지금쯤 도착해 있을 공산이 높다는 뜻.

"아니, 예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습니다만."

아니나 다를까, 객실 안으로 들어서자 절 보며 화들짝 놀라는 여인.

비룡당주 묘채경이 와 있었다.

"화섭자는 만나셨소?"

웃으며 들어가 협탁에 앉았다.

"만났지요."

따라 앉는 그녀가 무섭게 웃는 걸 보니 원하는 걸 얻은 모양.

"놀라지 마십시오. 최근 화섭자가 만든 진천뢰들이...."

"금의위 손에 들어갔겠지."

묘채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걸 어찌 알았냐는 표정.

"아쉽지만 허탕이오. 일흉이 꾸며 놓은 함정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맹주가 비운 사이 맹호원이 급습당했소."

"헉!"

놀란 그녀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묘채경은 경악하면서도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미 오래전에 함정을 판 것이군요. 맹주가 금의위를 치게끔."

역시 척하면 척이다.

"그럼 이제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그녀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할 일은 간단했다.

"쥐새끼 하나만 감시해 주시죠."

"쥐새끼요?"

적도방은 맹주가 자릴 비운 틈을 정확히 노리고 습격을 가해 왔다.

이 말은 곧 혈교가 내부의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얘기.

바꿔 말해 내부에도 첩자가 있다는 말이다.

"하긴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지요. 더구나 낙향했다는 소문부터 놈들의 계획이었다면 더더욱 맹호단에 들어오지 않았을 리도 없고요. 한데, 놈이 누군지 아시는 겁니까?"

알다마다.

분명 놈은 맹주와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당연히 부호위 중 하나일 터.

처음엔 오륜회에 속한 남궁신과 위지경 패거리가 의심스러웠으나 그러기엔 너무 맹탕인 녀석들.

그럼 남는 건 하나였다.

입단 시험을 치르던 날부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던 텁석부리.

'함양의 조진평일세. 미혼이지.'

조진평.

바로 그다!

* * *

화림현 인근의 어느 의원.

"미안하네, 내가 순찰을 나가자고만 하지 않았어도...."

멀쩡히 있어야 할 오른팔이 사라진 단원 앞에 텁석부리의 사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조진평이다.

"아닐세. 이게 어찌 자네 탓이겠는가. 너무 심려치 말게."

팔이 잘린 단원은 애써 웃으며 도리어 그를 달랬다.

그리고 병문안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조진평은 햇살을 마주하자 어둠이 걷히듯 침울했던 표정을 갈음했다.

'미안하지만 내 탓이 맞네. 적도방이 올 걸 난 이미 알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적도방에 의뢰를 한 자가 바로 그였으니까!

'그래도 너무 서운해 말게. 원래라면 팔이 아니라 그 목이 잘렸을 테니.'

조진평이 픽 웃고는 길을 나섰다.

* * *

"이런 쳐 죽일 놈을 보았나!"

한편 객실에선 묘채경이 분개했다.

혈교의 첩자 주제에 지금껏 감히 부교주인 장이서에게 치근댔다는 게 화가 치밀었기 때문.

"한데 그자가 첩자인 건 어찌 아신 겁니까? 신원은 확실했을 텐데요."

확실히 그랬다. 자료만 봤을 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자였다.

함양에서 나고 자랐고, 대인관계도 평이한 데다 노모까지 있었으니.

하나.

"처음부터 수상했습니다."

첩자가 다수의 무리에서 의심을 피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모르는 이들과 친분을 쌓는 것.

'기다리기 적적하니 말동무나 하자는 거지.'

그리고 그는 이를 누구보다도 잘 활용하는 자였다.

사람 좋은 미소에 털털한 성격.

대부분이 허물없이 그를 대하였고, 그만큼 그의 인간관계는 그물처럼 번져 나갔다.

하여 처음부터 그를 의심했었다.

첫날부터 객잔에서 술자리를 함께 가졌던 것도 그에 대해 더 알아내기 위함.

그리고 그 수상함이 극에 달한 건 바로 사찰에 들렀을 때였다.

일주문에 단목살과 황보병.

중문에 송옥과 위지경.

대웅전 앞에는 진자량과 남궁신.

분명 부호위는 일곱인데 단 한 명, 조진평만 보이지 않았던 것.

그래도 그땐 그저 우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습격이 벌어졌던 날.

의심은 완전한 확신이 되었다.

'미, 미안하네.'

하필 적도방이 쳐들어온 날, 부호위였던 그가 정찰조로 나가 놈들의 인질이 되어버린 것.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적도방 살수의 눈이었다.

'그건 알고 있나? 너희한테 의뢰를 맡긴 자가 혈교라는 거.'

자신이 질문을 던진 그 순간.

스르륵.

그의 초점은 자신이 아닌 맹호단 쪽으로 향했었다.

그때 두 눈은 배신감과 충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해명을 요구하듯이.

그리고 그 눈에 비친 인물이 바로.

"조진평. 그놈이었군요."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한마디로 적도방에 의뢰를 맡긴 자가 바로 그였다는 것.

묘채경은 질린다는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혹 제가 부교주님을 배신해야 하는 날이 온다면 그냥 두 눈을 뽑겠습니다."

농담도 참. 피식 웃고는 말했다.

"당분간 제 세상인 것처럼 날뛰게 두세요. 때가 되면 한 번에 정리할 것이니."

"존명!"

"일흉의 계획은 계속될 겁니다. 내가 끝내기 전까지는."

화림현에서 새로운 판이 깔리기 시작했다.

장이서가 만드는 혈교 지옥의 판이!

* * *

- 천산 천마전.

장이서가 중원에서 반격을 준비할 무렵.

그의 소식은 마교까지 날아들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화로가 일렁이는 사이한 공동.

육장로 마의가 서신 하나를 손에 쥔 채 사색이 된 얼굴로 지팡이를 짚으며 헐레벌떡 들어섰다.

그러자 안쪽 태사의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스르륵 떠지는 마성의 눈.

이젠 제법 마교 대공자의 면모가 엿보이는 붉은 머리의 미공자.

칠공자 마오다!

"잠들었다고 생각했겠지만 틀렸어. 잠시 정신을 잃었던 거다."

안 물었다. 그리고 그게 그거 아니냐?!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이서. 아니, 부교주께서...."

"장이서?! 걔가 왜! 설마 왔대? 어디야!"

마오가 후다닥 달려와 마의의 멱살을 쥐고 흔든다. 이 손 놓아라! 이리저리 휘둘리다 간신히 떨쳐내고 말했다.

"그게 아니라 적들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뭐, 뭐야?!"

"그것도 수백 명이 야밤에 기습을!"

감히... 어떤 자식이!

화르륵!

마오에게서 화염이 용솟음친다.

"당장 장로들 불러. 아니, 전군 소집해. 전쟁이다! 장이서 건드린 새끼들은 내가 가만 안 둬!"

"예! 한데 이미 다 죽였답니다!"

"누가?"

"부교주가."

오늘도 태평하기만 한 마교의 하루였다.

350.

#주인님의 뜻대로?

등 총관이 외출에 나섰다.

대외적으로는 휴가라고 했지만, 장원에 있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가 맹주의 밀명을 받아 떠났다는 걸.

"금의위 측에 회동을 제안하신다더군."

"하긴 신중해야지. 자칫하면 역모 아닌가."

"먼저 불문율을 깨트린 건 놈들이라고!"

맹호단 내에서는 이를 두고 옥신각신 소란이 일었다.

어쨌든 동기 중의 둘이나 다치지 않았던가. 당장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그리고 그중 티는 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크게 대로한 자가 있었다.

'맹주란 작자가 이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라니! 수하의 팔이 잘리고, 칼에 찔렸는데. 뭐? 회동?! 제정신인 것인가!'

그건 바로 조진평.

장원에 숨어든 혈교의 첩자였다.

비록 습격에는 실패했으나 계획대로 흘러가는 양상에 내심 큰 기대를 하고 있었거늘.

회동이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모두... 저놈 때문이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지금도 한가로이 명상에 잠겨 있는 놈.

정호위 백서!

그만 아니었어도 적도방은 실패하지 않았을 터. 그랬다면 맹주는 분노에 눈이 멀어 금의위에 전쟁을 선포했을 것이다.

지금은 희생자가 적으니 판단도 흐려진 것!

조진평은 분노를 가다듬으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처음 백서를 봤을 때 자신이 먼저 다가섰던 건, 사실 제일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모나지 않은 모습에 뭣도 없어 보이는 기운.

말 그대로 옆에 두고 써먹기 딱 좋은 호구라고 생각한 것.

한데.

'오늘부터 백서 자네가 정호위이니 그리 알도록.'

그는 예상을 무참히 깨트리며 정호위에 올라섰다.

진룡도, 창궁룡도 아닌 자신이 호구라고 점찍은 애송이가 말이다.

거기다 최근엔 적도방을 홀로 뭉개버렸다.

'도대체 네 정체가 뭐지?'

한낱 도련님이라기엔 독공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물론 청해는 별별 곳들과의 교류가 잦으니 운 좋게 익혔을 순 있겠다만....

'확실한 건 자네가 누구든 그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될 거란 것일세.'

조진평은 애써 서늘한 속내를 감추곤, 장이서에게 다가섰다.

총관이 없는 관계로 외출을 위해선 정호위의 허락이 필요하기 때문.

금세 활짝 웃는 얼굴로 갈음했다.

"이보게, 백 공. 나 잠시 마을에 다녀와도 되겠는가."

뜬금없겠지만 본디 사람 좋은 웃음과 털털함으로 의심을 없애는 게 바로 그의 무기.

"마을? 갑자기 왜."

"거, 지난번에 자네가 내 검을 부러트리지 않았는가. 새로 하나 맞춰둬야지."

"그랬나."

그랬나는 염병. 초식필사 때 파쇄를 해놓고선.

"허락 좀 해주게."

굽신거리자 장이서는 고심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고맙네!"

조진평은 애써 웃으며 시커먼 속내를 감췄다. 아둔하기 짝이 없는 새끼. 지금 날 내보낸 걸 평생 후회하게 될 거다.

그러곤 손을 흔든 뒤 밖으로 나섰다.

물론.

'조진평. 착각하는 건 자유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네 머리 위엔 언제나 위험한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을 테니.'

뛰는 조진평 위에 나는 묘채경.

그리고 판의 주인 장이서가 있겠지만 말이다.

* * *

- 요녕성 심양 모용세가.

챙그랑!

"다시 말해보거라."

깨진 찻잔 조각이 바닥에 널브러지고, 백색증의 종복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며 그 위에 넙죽 엎드렸다.

"맹호단이 저, 전원 생존했다고 합니다."

콰과과과과!

방 안 곳곳에서 붉은 혈기가 용오름처럼 솟아올랐다.

쾌청했던 공기는 장마 때처럼 습해지고, 몸에선 땀이 줄줄 흘렀다.

본래 가주이자 그의 형이 있는 이 방에선 이리 진기를 드러낸 적이 없었거늘.

모용소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만했다.

"감히...."

"끄으으으!"

모용소는 엎드린 종복의 머리를 움켜쥐곤 깨부술 것처럼 손등에 핏줄을 세웠다.

"한낱 후기지수 따위에게 오행성주가 당했다는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것이냐?!"

종복의 동공이 서서히 풀려간다. 하나 안 믿으면 뭐 어쩔 것인가. 사실이 그렇다는데.

퍽! 끝내 모용소는 종복을 벽에다 집어 던지곤 휙 몸을 돌렸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며 숨을 내뱉었다.

그나마 안정이 된 건 침상에 시체처럼 누워 새근새근 잠이 든 제 형을 보고 난 후였다.

"...누구 짓이냐."

모용소가 차분히 묻자 어느새 피투성이가 되어 제자리로 돌아온 종복이 움츠러든 자라목으로 답했다.

"배, 백서라는 자의 짓이라고 합니다."

"백서?!"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이름인가. 진자량도, 남궁신도 아닌 백서라니.

모용소의 눈이 매섭게 떠진다. 종복은 머리가 터지기 전에 곧장 답했다.

"이번에 맹주가 정호위로 선출한 자입니다."

"놈이 진룡과 창궁룡을 꺾고 제일 호위무사가 되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것이냐."

"그게... 어차피 한낱 후기지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사, 살려주십시오!"

쾅! 쾅! 쾅! 종복이 바들바들 떨며 바닥에 피가 터지도록 이마를 박아댔다.

그리고 모용소는 이를 말리지도 않은 채 섬찟한 동공을 좌우로 움직이며 생각에 잠겼다.

'적도방은 중원 제일의 살수들. 그런 자들을 요행으로 꺾을 순 없다. 백서. 분명 무언가가 있는 놈이다.'

마교에 장이서가 있다면, 혈교에는 일흉이 있다. 그는 계략에 능했고, 절대 우연을 믿지 않았다.

"놈에 대해 고하거라."

"청해 백가장이란 곳의 소장주인데 진산이라는 미모의 정혼녀가 있는 것으로... 힉!"

모용소의 눈에 지독한 살기가 번뜩인다.

"내가 그걸 물었느냐?"

"백가장 사람이 화, 확실합니다!"

그래. 확실한 정보인지, 아닌지. 그거만 알면 됐다. 이내 차가운 목소리로 명했다.

"정혼녀는 데려오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라."

"조, 존명."

실로 섬찟한 명령.

백서란 놈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약점을 쥐고 흔들면 안 넘어갈 놈 없을 테니.

"맹주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번 습격을 금의위의 짓으로 결론 내린 듯합니다."

"흥, 당연히 그렇겠지."

이번엔 모용소가 일말의 불신도 없이 쉽게 수긍했다.

이는 맹주를 믿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오래도록 준비한 대계에 대한 믿음이었다.

"하온데.... 화무진과 비밀 회동을 준비 중인 것 같습니다."

"뭐...?!"

모용소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런 여우 같은 늙은이. 금의위가 한 짓이라 생각하면서도 뒤탈이 무서워 발을 빼는 것이로구나.

"늙으면 겁만 많아진다더니...."

"어찌할까요."

"차라리 잘 되었다. 대계는 계속해서 진행한다. 회동이 이루어지는 날. 지옥을 맛 보여주리라!"

"모든 것은 주인님의 뜻대로...."

혈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인님? 아니, 장이서의 뜻대로.

* * *

조진평과 혈교가 장이서에게 속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무렵.

안채에서는 다음 계획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어찌 되었는가?!"

맹주와 북개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에 픽 웃으며 답했다.

"지금쯤이면 혈교에 소식이 잘 전해졌을 겁니다."

음! 두 노부가 주먹을 불끈 쥐며 탄성을 뱉었다.

"흘흘, 화무진 측에서만 응해주면 되겠구만!"

북개가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렸다.

"수고했네."

맹주도 한시름 놓은 듯 대견스레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회동이 열리는 날. 놈들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그날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한데 그전에 나타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아뇨. 놈들은 반드시 그날을 노릴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노리는 건 맹주 하나가 아니니까.

화무진. 그 또한 놈들이 없애려던 자일 거다.

그게 아니라면 맹주가 그를 의심하게 만드는 이런 번거로운 짓을 꾸미지도 않았을 테니.

"맹주는 그렇다 치고. 화무진은 도대체 왜?"

물론 그 이유도 짐작은 갔다.

"놈들이 노리는 건 무림뿐만이 아닐 테니까요."

"...!"

황실. 분명 그곳에도 혈교가 숨어 있는 거다. 단지 금의위가 아니었을 뿐.

"그럼 놈들이 무림과 황실을 동시에 장악하려고 한단 말이더냐?"

아마도. 그리고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게 바로....

"나하고 신군이로군."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한탄하는 두 사람을 두고 마저 부언했다.

"그런 두 사람이 양패구상한다면. 맹주께는 역적이라는 불명예를 안겨줄 수 있고, 거슬리던 화무진은 손 안 대고 치워버릴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거겠지요."

이것이 바로 혈교가 수년을 준비한 대업의 정체.

더구나 맹주가 역적으로 몰리면,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 한 번에 정리할 수도 있다.

신주오절의 무림을 없애고, 완전히 새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

"허...."

맹주와 북개는 상상도 못 한 끔찍한 흉계에 탄식을 내뱉었다. 어찌 그리 악독한 자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치가 떨리는 자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걸 전부 다 꿰뚫고 있는 자네는 대체....'

어쩌면 혈교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가 눈앞의 백서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어쨌든 회동이 열리는 날, 놈들은 총공세를 펼칠 겁니다. 그런 기회를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죠."

"안 있으면?"

"집이 비었으면 뺏어와야죠."

그게 무슨 말인가.

뺏어오다니.

"오륜회."

"...!"

장이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그날 오륜회를 가질 겁니다."

맹주와 북개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오륜회는 명가(名家)와 상단들이 친목을 중심으로 만든 그물과도 같은 곳.

한데 그걸 무슨 수로 가져온단 말인가.

하나 장이서에겐 이 또한 방법이 있었다.

"아직 주인이 없는 곳 아닙니까."

"...!"

"혈교의 첩자가 제 신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비워둔 것이겠죠. 우리가 그 자리를 먼저 먹는 겁니다."

한마디로 놈들이 3년을 공들여 쌓은 탑을 홀라당 집어삼키자는 얘기.

"그게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 오륜회 내부에 누구도 회주가 되는 걸 반대하지 않을 만큼 막대한 힘을 가진 자가 있다면.

"무림맹과 금의위. 두 곳이 배후가 되어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자가 우리 쪽 사람이라면 말이다.

"대체 누구한테?!"

있다, 그런 녀석이.

서역에서 온 대부호.

*

- 중원 안휘성 합비(合肥).

성도 중심에 세워진 거대한 마천루.

안휘의 최고 주루로 평가받는 이곳은 아침부터 실랑이가 한창이었다.

"이봐, 자리가 없다니. 저기 널린 게 자리구먼!"

"죄송합니다. 예약이 꽉 차서요."

"허!"

누가 봐도 텅 비어있거늘 주루에선 오는 손님을 모두 마다하고 문까지 걸어 잠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오늘은 이곳에 아주 중요한 모임이 있기 때문.

오륜회(五輪會).

바로 그들의 모임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새로운 회원이 들어오는 뜻깊은 날.

그것도 기부금이 역대 최대치를 달성해 단숨에 최하 등급인 일륜에서 최고 등급 오륜까지 올라온 막대한 거부!

"하하, 안녕들 하시오. 와, 여기 들어오기 너무 힘들어. 죽겠어, 그냥."

검은 안경을 흘려 쓴 채 활짝 웃는 사내.

까마귀 청소부. 아니, 이젠 서역에서 온 대부호!

"소오라고 하오이다. 잘 부탁드리겠소."

그가 오륜회에 입성했다.

천마신교 부교주, 장이서의 밀명을 받아!

반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351.

#강해지는 법

- 귀주 화림현 맹호원.

맹호단원들은 모두 연무장에 모여 짙은 시름을 뱉고 있었다.

이러기를 벌써 이틀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남궁신의 혼잣말이 모두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지금 저 말보다 저들의 심경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아니, 없다.

진자량도, 송옥도. 하다못해 위지경 패거리와 단원들까지 전부 다.

살면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그것은 생존.

생과 사의 경계에서 살아남는 법이었다.

분명 자신들은 살면서 천재 소리 한 번쯤 들어보고 산 인재였다.

'네가 우리 문파의 기둥이다!'

'자네는 무공의 천재일세!'

각자의 차이는 있어도 분명 그랬다.

자신들은 언제나 승자였다.

하나.

'약속, 지켜야지. 근데 살려준다고는 안 했는데?'

그런 자신들은 너무도 무력하게 죽음 앞에 마주했었다.

이기고 지는 대결은 숱하게 해왔지만,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은 처음이었던 것.

그 결과 너무도 비참하게 농락당해 버렸다. 무력했고, 무능했다.

그런데 그때 구세주처럼 그가 나타났다.

'뭐 해. 복수 안 할 거야?'

그는 자신들을 짓밟고 조롱하던 적들을 유린했고, 가차 없이 없애버렸다.

분명 같은 또래였지만 자신들과는 달랐다.

악귀였고, 괴물이었다.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강했다.

그때 깨달았다.

"강해져야 한다."

생존하기 위해선 더욱 독하고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신아, 어디가?"

남궁신이 거침없이 걸음을 놀렸다.

목적지는 숙사.

이유는 하나다.

"모르면 배워야지."

단원들의 눈이 띠용 커지고, 이내 고개를 끄덕인 채 뒤를 따랐다.

* * *

한편 장이서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등 총관의 복귀만을 기다리던 그 시각.

그는 명상에 잠겨 무공 수련에 한창 빠져 있었다.

특히 최근 맹주와 서검을 상대하며 창안한 자야검법(自野劍法)을 완성해 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왜 다들 검에 미쳐 사는지 조금은 이해가 돼.'

혹자는 만병지왕(萬兵之王)으로 창과 검을 논하곤 했지만, 과거엔 그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익혀보니 알겠다.

이 검이라는 녀석이 얼마나 섬세하고 까탈스러우며 또 매력적인지.

그냥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살면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과거엔 구규지체라는 천형을 견뎌내야 했기에 잡히는 대로 휘둘렀고, 닥치는 대로 취해야 했다.

해서 즐거움은 없었고, 독기만이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 신승에게 무공을 배울 때는 시간이 촉박했고, 천마에게 배울 땐....

'죽거라.'

그냥 생존 그 자체.

하지만 요즘은 뭔가가 달랐다. 마치 매일 연모하는 이를 조금씩 알아가는 기분.

하여 오늘은 별일 없다면 방해 없이 수련에 매진하려고 했다.

그런데.

"자는 게야?"

바로 옆에서 시큼한 냄새와 함께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숨을 삼키곤 눈을 뜨자 역시나 그였다.

코에 주독이 잔뜩 오른 거지 영감.

북개 취걸륜.

"무슨 일이십니까?"

"잉, 정 없는 게 제 사부를 빼다 박았어. 숙부가 조카 보러 오는데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냥 오는 거지."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숙사엔 아무도 없는 모양.

"남들 앞에서는 그냥 저 모른 체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말고. 그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네곤 다시 눈을 감았다.

"흘흘, 왜. 뭐 숨기는 거라도 있는 게냐?"

슬쩍 눈을 뜨고는 말했다.

"궁금하십니까?"

이에 북개가 화들짝 놀랐다.

'이놈 뭐야?'

일순 몹시 위험한 냄새가 등골을 타고 스쳐 지났기 때문.

하나 그도 잠시뿐.

킁킁! 다시 맡으려 해도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알면 알수록 끝이 없는 놈이구나.'

처음엔 무영의 제자래서 궁금했고, 이후엔 하늘을 찌르는 지략에 감탄했으며, 지금은 그냥 이해를 포기했다.

"청해에서 왔다고?"

"이미 다 알아보고 오신 것 아닙니까."

눈치도 수준급이고.

"흘흘, 백가장. 크진 않으나 작은 마을에선 나름 명성이 있더구나. 가주의 인품도 훌륭하고, 집안도 화목하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눈매를 좁히자 북개가 이어갔다.

"근데 거기 아들내미는 맹주를 동경해서 화림현으로 온 거라던데.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요?"

"신분을 그리 덧씌우는 건 결코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 그 말인즉 네게 배후가 따로 있다는 얘기겠지. 그게 아니고선 어찌 오륜회에 네 지인이 있겠느냐?"

확실히. 눈치가 빨라.

장이서는 서늘한 시선으로 다시 물었다.

"그래서요?"

그러자 북개의 입가에 음험한 미소가 서린다.

"그러니 나한텐 솔직히 이실직고하거라."

"뭘 말입니까."

"네 사부 한무영. 그놈이 몰래 의적들을 키워놓은 게지? 그렇지?!"

"예?"

"흘흘, 속일 생각일랑 말거라. 무영이 그놈이 사람을 그렇게 잘 다뤘다. 그런 놈이 혼자 다녔을 리가 없지. 이름이 무엇이더냐. 무영문?"

마교다, 마교.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역시! 흘흘, 앞으로 염려 말거라.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내가 꼭꼭 숨겨줄 테니. 의적 활동을 하려면 신분을 숨기는 건 기본이지! 암!"

의적이 아니라 마교라니까. 그리고 그랬다간 신주오절이 아니라 신주오적 되는 거다.

물론, 도와주면 나야 편하겠지만.

내면에 음험한 미소를 짓는 사이.

"음?"

남궁신과 진자량을 비롯한 동기들이 불쑥 찾아왔다.

너희가 갑자기 왜.

이에 북개와 함께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백서. 부디 우리에게 강해지는 법을 가르쳐다오."

"뭐?"

털썩!

그러곤 다짜고짜 무릎을 꿇는다.

"가르쳐 주시오, 대장!"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옆에선 북개가 얼이 빠진 목소리로 당연하다는 듯 속삭였다.

"무영이 제자 맞네. 맞아."

맞긴 뭘 맞아!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벌어져 버렸다.

"지금 너희 뭐 하냐?"

흘깃 노려보자 남궁신이 재차 의지를 드러냈다.

"배우고 싶다."

"뭘."

"강해지는 법."

"그걸 왜 나한테 배워?"

"너에겐 남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게 뭔데."

"악(惡)."

맞아! 동기들이 웅성거리며 소리쳤다.

근데 이 새끼들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너처럼 악해질 수 있는 것인가?"

"헛소리 그만하고 가라."

"살면서 처음이었다."

"뭐가."

"너처럼 악한 인간."

그냥 죽자. 인상을 와락 찌푸리자.

"부디 우릴 도와주게."

옆에서 진자량이 고개를 푹 떨구곤 말을 거들었다.

"이번에 알게 되었네. 우리는 진검이 아니라 아무것도 벨 수 없는 호화로운 가검(假劍)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검. 의미심장한 말에 턱을 괸 채 심드렁히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이해는 됐다.

이들은 분명 자타가 인정하는 명검(名劍). 하지만 아직 길들지 않은 무딘 검이었다.

검은 상대를 베기 위한 도구.

아무리 현란한 솜씨를 지녔어도 날이 서 있지 못하면 무용지물인 법.

그런 의미에서 이 녀석들은 당장 쓸모가 없는 애송이들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대체 무엇인지. 왠지 자네라면 알 것 같아서. 그래서 찾아온 것일세."

사슴 같은 눈으로 애타게 쳐다보는 동기들. 북개 역시 궁금한지 눈초리를 빛냈다.

이유라면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말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직접 겪고, 느끼며, 깨달아야 하는 것.

"진짜 알고 싶어?"

당연하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에 장이서는 고심 끝에 답했다.

"그럼 버텨내 보든가."

"어?"

"버티라고."

벌떡 일어선 장이서가 성큼성큼 걸어가 남궁신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뭐 하는 거지?"

뭐 하긴.

"허억!"

이내 거침없이 저 멀리 휙 날려버렸다.

와당탕! 그러자 동기들의 눈이 띠용 커졌다. 천하의 창궁룡이 머리 위를 쏜살처럼 날아가 벽에 처박힌 것.

도대체 어디서 저런 괴력이...!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남궁신은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것!

"이 꽉 물어라."

이어 작정하고 내던지기 시작하는 장이서.

으아아악!

숙사에 비명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북개는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흘흘. 좋을 때구먼."

평온한 맹호원의 하루였다.

* * *

새소리가 가득한 대나무로 둘러싸인 어느 사당.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한 사람이 위패 앞에 향을 피우곤 몸을 돌린다.

황색의 비어복(금의위 예복)을 입고 머리에는 관을 올려 쓴 중년인인데, 눈빛이 실로 매섭다.

그나마 죽은 양부를 모신 사당이기에 최대한 억누르고 또 억누른 게 이 정도.

물론 그것도 이곳을 벗어나기 전까지의 얘기.

그가 건물 밖으로 나서자 멋들어진 갑옷을 걸친 관군들이 절도 있게 선 채 고개를 숙였다.

고오오오!

하나하나가 압도적인 기세를 내뿜는 엄청난 자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이들의 기세를 홀로 찍어 누른 채 걸어 나갔다.

눈빛엔 어느새 인정은 사라지고 무자비한 무정만이 남았다.

그의 이름은 신군(神君) 화무진.

황실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절세 고수이자, 금의위 진무사의 수장이다!

"무림맹 측에서 회동을 제안해 왔습니다."

옆에서 뒤따르던 우람한 중년의 부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한 번 만나줬더니. 선을 넘는구나."

"긴밀히 제안할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안?"

"예. 반드시 후회 없는 제안이 될 거라고."

화무진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마차에 올랐다. 그러곤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이번엔 직접 오라 전해라."

"충!"

화무진과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 * *

흑의인 하나가 비틀거리며 숲길을 가로질렀다.

여기저기 베여 혈흔이 보이고, 흑립 아래 갑갑한 면구는 벗어 던진 지 오래.

"하아, 하아...."

헐떡이는 숨을 보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게 기적.

그의 정체는 형에게 죽다 살아난 아우. 선유였다.

하지만 이제 그도 한계인지 혼미해지는 정신에 털썩 쓰러졌다.

몸에서 점점 감각이 사라지고, 머릿속은 새하얘진다.

'죽는 건가....'

온몸이 칼에 베인 채 며칠을 쉬지 않고 돌아왔으니 살아 있는 게 기적.

한데 참으로 신기한 건, 이 와중에 떠오르는 사람이 다른 이도 아닌 절 이리 만든 원흉이라는 거였다.

심지어 얼굴도 두 개.

'금방 다시 오지.'

한 번은 복면으로 가린 채 섬찟한 눈매만을 드러냈었고.

'용감한 건가. 아니면 무모한 건가.'

다른 한 번은 반대로 눈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채 코와 입만 보였다.

분명히 분위기만 보면 전혀 다른 사람이거늘.

'그런데 왜 이렇게 낯이 익은 거지?'

모르겠다. 점점 눈이 감기고 어느새 정신이 서서히 끊겨간다.

그때 두 사람의 모습이 합쳐지기 시작했다.

'다, 당신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 순간!

시야가 아득해지고, 온전히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일각이 지난 뒤.

*

*

*

또 다른 이가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입가에 복면을 쓴 사내.

"여기인가."

놀랍게도 그는 천리미향을 쫓아 온 장이서였다! 그가 주변을 살폈다.

바닥은 수풀이 크게 짓눌려 있고, 핏자국이 생생했다.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서렸다.

"다 죽어가던 놈이 제 발로 걸어간 건 아닐 테고. 누군가 데려갔다는 건 이 숲에 쥐새끼들이 숨어 있다는 거구나."

분명했다. 이곳에 혈교의 본거지가 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불태워 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마음껏 날뛰고 있거라."

때가 되면 모조리 지워줄 테니.

서늘한 다짐을 하며 돌아서는 장이서였다.

352.

#정의대

며칠이 흘렀다.

오늘도 맹호원의 하루는 한결같았다.

맹주는 안채에 두문불출하며 치료에 전념했고, 단원들은....

"배, 백사가 나타났다! 크아악!"

백사 주의보. 아니 백서 주의보에 빠져 있었다. 그가 시도 때도 없이 급습을 가해 온 것.

"정도인답게 당당히 대결을... 칵!"

차라리 정공법으로 싸우면 억울하진 않지. 후방을 노리거나, 돌을 던져 쓰러트리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상대도 안 가렸다.

"하하, 백 공. 나 조진평일세. 난 안 가르쳐줘도 괜...."

"시끄러워."

"크아아아악!"

그냥 작정하고 쓰러트렸다. 그래도 다른 건 견딜 만했다.

문제는 볼일이었다. 장이서는 잔인하게도 그 방심의 순간마저 절대 놓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당할 순 없네."

결국 단원들은 결의했다.

그리고 진자량이 내린 결론은 하나.

"함께 가세."

그들은 늦은 밤 숲으로 향했다. 동기들은 생존을 위해 뭉쳐야 했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등을 맡겼다.

진자량은 수풀 앞에 나란히 선 남궁신에게 말했다.

"이보게, 다음이 내 차례일세."

"내가 그런 걸 왜 알아야 하지?"

"이번엔 꽤 길 것 같아서...."

"여유 부리지 마라. 그 녀석은 사정 따위 봐주지 않으니까."

"알고 있네. 그래도 난 자네를 믿어볼까 하네."

"진자량...."

그간 서로 치열한 경쟁만을 해왔던 진룡과 창궁룡.

그들도 이 순간만은... 하나였다.

"좀 닥쳐, 이 새끼들아! 집중 하나도 안 되잖아!"

힘겹게 고군분투 중인 위지경이 외치는 그 순간.

"오, 온다!"

"이런 x발?!"

스스스슥!

미친 듯이 수풀을 가르며 백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몇 명이 막아서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장이서의 표적이냐, 아니냐가 중할 뿐.

고작 며칠 만에 동기들은 다시 한번 완벽히 깨우쳤다.

'백사 새끼는... 마귀야!'

그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애들을 잡는구나. 잡아."

북개가 찾아와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장이서가 이러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저런 심약한 머리론 답 없다는 거."

"흐흐흐."

물론 북개도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그는 황실이 바뀌고 격변으로 가득했던 혼란의 세대.

지금 후배들에게 필요한 건 딱 세 가지였다.

"의(疑), 살(殺), 결(決). 저 녀석들한텐 이 세 가지가 빠졌습니다. 그러니 쓸모없는 명검인 거죠."

상대에 대한 의심(疑心).

죽이겠다는 살심(殺心).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결심(決心).

장이서의 말대로 이 세 가지가 빠져 있었다.

정당한 대결에선 그게 없어도 이길 수 있었겠지만, 생사가 오가는 전쟁은 달랐다.

장이서는 이를 몸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거였다.

늘 의심하고 경계하며 무슨 수를 써 서든 상대를 죽이겠다는 일념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무차별한 수련의 효과는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동기들의 기세가 갈수록 잘 벼려진 칼처럼 첨예해지고 있던 것.

덕분에 이젠 기습을 당하더라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여유까지 도달했다.

북개는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이런 것까지 알고 있는 게냐?'

자신도 수많은 혼란의 세월을 견디고서야 깨달은 것이거늘.

파면 팔수록 끝을 알 수 없는 장이서의 깊이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단원들의 눈빛에 조금씩 독기가 서려가던 찰나.

"맹주님!"

마침내 그가 복귀했다.

총관 등태보!

맹주의 명을 받아 떠났던 그가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다수의 무리와 함께.

맹주와 맹호단이 서둘러 나가 그들을 마중했다.

각각 검 한 자루를 패용하고, 짙은 푸른색 무복을 입은 수십 명의 중년 무사들.

"맹주님을 뵙습니다!"

그중 선두에 선 자가 대표하여 충정 가득한 인사를 올렸다.

"흘흘, 올 게 왔구먼."

이에 북개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흘깃 살피자 단단한 하관에 강인한 눈매. 정제된 자세만 봐도 보통은 아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함께 온 이들 모두가 그랬다.

마치 하나의 잘 벼려진 칼과 같은 기분.

'누구지?'

이에 대한 답변은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저, 정의대?!"

세 글자면 충분했다.

지금은 낙향하여 맹호단이 맹주를 지키고 있지만, 본래 그 일을 전담하던 자들은 따로 있었다.

무려 정사마전에서부터 지금까지 길고 긴 수라의 장을 함께 견뎌온 맹주 직속 친위대!

그 이름하여 정의대(正意隊).

그들이 온 것이다!

"신 정의대주 연우일. 이제 다시는 옆을 비우지 않을 겁니다!"

그중 연우일은 맹주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서 불같은 성품과 과도한 충심으로도 유명한 자였다.

맹주의 호위를 맡을 정도이니 무공 실력은 말할 것도 없는 일.

"송구합니다. 대주를 말린다고 말렸는데, 소식을 듣더니 죽어도 가야겠다고...."

등 총관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하나 맹주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애초에 낙향할 때도 따라온다는 걸 특단의 명까지 내려가며 간신히 말렸던 것이니.

"정의대가 맹주님을 지키겠습니다."

충! 정의대원들이 일시에 부복하며 가슴 앞에 주먹을 눕힌다.

맹주는 그들의 진심에 끝내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세."

*

"흘흘. 이렇게 모인 것도 오랜만이구먼."

북개의 말에 맹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채에 모인 이들을 살폈다.

평생의 벗 북개. 무림맹의 살림꾼 등 총관. 묵묵히 자신을 지켜준 정의대주.

그리고 자리에는 없지만 과거 군사였던 구자기까지 합하여 혹자는 이들 네 사람을 사통(四通)이라 불렀다.

맹주에게로 통하는 길. 이른바 최측근이라는 것!

"그래, 대주는 잘 지냈는가."

맹주의 안부 인사에 정의대주 연우일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며 답했다.

"잘 지냈습니다. 마누라하고 여행도 다니고, 자식새끼들 혼례도 치러주었고요."

"아니, 근데 이 사람아. 잘 지냈다는 이가 왜 이렇게 죽을상인가?"

"맹주님께서 이런 고초를 겪고 계신 줄 알았다면, 결코 잘 지내지 않았을 겁니다! 여행도 안 갔을 것이고, 자식새끼들 혼사도 망쳤을 거고요!"

"뭐?"

하하하! 맹주를 비롯해 북개와 등 총관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에 연우일은 고개를 휙 돌려 울 것 같은 눈을 감추었다.

"우는 게야?"

"아닙니다!"

"적하고 후배들 앞에선 세상 무서운 녀석이 울기는. 흘흘."

북개가 등을 토닥인다. 훈훈한 회포가 방 안을 따스하게 적신다.

이들이 서로를 얼마나 믿고 의지하는지 알 만했다. 군사 구자기와 정신적 지주였던 노왕야도 함께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진무사 측에서 화답이 왔습니다. 열흘 후 중경의 기루에서 보자고 하더군요."

인사를 마치고 등 총관은 곧장 보고를 올렸다.

본론이다.

화무진이 회동에 응한 것.

맹주와 북개의 얼굴에 화색이 비치었다. 드디어 혈교를 잡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정의대주 연우일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저 둘의 표정만 봐도 그간 얼마나 마음 졸였을지 훤히 보였기 때문.

대략적인 이야기는 모두 들었다.

뒤늦게 얼마나 가슴을 치고 후회했던지.

특히 사찰에서 위기가 있었고, 거처가 습격당했다고 했을 땐 콱 혀 깨물고 죽고 싶었다.

맹호단이 잘 막아줬다곤 하지만 글쎄. 주먹구구식으로 모인 애송이들이 뭘 했겠는가.

그저 운이 좋았던 것뿐.

애초에 자신과 정의대가 있었다면 그런 흉사는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는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마음을 굳게 다졌다.

한데.

"중경이라면 그리 멀지 않으니 맹호단과 다녀오도록 하지."

"...!"

"그래야지. 흘흘."

맹주와 북개가 연달아 귀싸대기 치듯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뱉어버렸다.

"맹호단의 아이들과 다녀오겠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은 들은 그대로지."

북개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안 됩니다. 그 자리가 어느 자리인데 그런 오합지졸 애송이들을 데려간단 말씀이십니까?! 정의대가 모시겠습니다."

"조용히 대화만 하고 오는 것일세."

"혈교에서 눈치채고 또다시 습격을 가해올 수도 있는 일입니다.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합니다!"

연우일은 단호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신중히 내린 최선의 결정이구만, 뭘."

"예?"

되묻고도 어이가 없었다. 맹호단을 그 정도까지 믿는단 말인가? 물론 소식은 들었다.

무당의 진룡. 그리고 남궁가의 창궁룡.

후기십룡 중 최고를 다투는 두 사람이 이곳에 들어와 있다고.

하지만 그래봤자 까마득한 후배들 아닌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도 이런 일엔 경험을 넘어설 순 없었다.

무엇보다도 세대가 다르지 않은가.

정의대는 무려 정사마전을 비롯해 온갖 수라의 장을 견뎌온 최정예들이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녀석들인지 내 눈으로 직접 검열할 것이다.'

마음을 굳게 다잡는 사이, 북개와 맹주는 금세 대화를 이어갔다.

"근데 이거 백서 얘기도 좀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끼리 결정하기는 좀 그렇잖아."

백서? 그건 또 누구인가.

신주오절의 뜻이 곧 정도 무림의 뜻이거늘. 두 사람이 의중을 물어야 할 만큼 대단한 자가 있던가.

"음...."

한데 더 기가 막힌 건 맹주의 반응이었다. 북개의 기괴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것.

"내 따로 의중을 물어보겠네."

"그래야지. 며칠 같이 지내보니까 백서 그놈 아주 요물이야. 속에 이무기가 들었어."

"그런 아이이긴 하지...."

아니, 저.... 연우일은 대화에 끼지도 못한 채 혼비백산했다.

지금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이무기라니. 그런 아이라니.

여태 천하의 맹주와 북개가 저리 높게 평했던 자가 있었던가.

아니, 없다. 전혀 없었다.

'도대체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

회의가 끝이 나고, 연우일은 맹주에게 곧장 청을 올렸다.

"맹주님, 신 연우일. 잠시 장원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이를 들은 맹주와 북개가 서로를 마주 보곤 헛웃음을 뱉었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알아들었기 때문.

예부터 그랬다.

무림맹에 신입 무사들이 들어오면 둘러보고 오겠다며 기강을 잡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대상은 당연히 맹호단이리라.

"맹주님을 호위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 확인은 해봐야지요."

그도 내심 찔리는지 곧장 속내를 털어놨다. 이에 맹주가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짓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설마 제가 한참 어린 후배들을 다치게라도 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제게 맡겨주십시오."

연우일이 위풍당당하게 포권을 취하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남겨진 맹주는 황당하다는 듯 북개에게 말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왜. 뭐 어때서. 애들이 다칠까 봐?"

"그게 아니라...."

연 대주가 놀랄까 봐 그러는 걸세.

정호위 백서.

바로 그 아이 때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 맹주였다.

353.

#불가해의 존재

연우일은 밖으로 나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호위대장으로 지내 온 지도 어언 수십 년.

본래 기강이 해이한 곳일수록 그가 제일 먼저 확인하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숙사!

꼭 몰래 들어와 농땡이 피우는 녀석들이 있었기 때문.

바로 이 녀석처럼 말이다.

"자네는 이 시간에 왜 여기 있는가!"

설마설마했거늘. 일과 시간에 이리 뻔뻔하게 들어와 있는 놈이 있을 줄이야.

자신이 이끄는 정의대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심지어 들은 체도 안 하고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다.

이런 놈은 매가 약!

인상을 팍 찌푸린 채 성큼성큼 다가가 쩌렁쩌렁 호통을 쳤다.

"언제까지 잘 생각인가-!"

쐐애애액!

그러곤 맹수의 발톱처럼 뒷덜미로 손을 뻗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의 절기인 벽라수(劈羅手)의 묘리가 담긴 것!

자는 게 아니라 죽었다 깨어나도 피할 수 없다. 이대로 붙잡아 내던져 주리라.

한데 바로 그때.

척! 연우일의 손목이 정확히 상대의 머리 위에서 덥석 낚아채졌다.

"흡?!"

그러곤 가볍게 돌려 훅! 밀쳐내는 힘에 투두둑 다섯 보를 뒷걸음질 쳤다.

'이게 무슨....'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진 연우일.

반면 상대는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뭐지...?'

뭐긴. 이름은 백서.

맹호단의 정호위다.

그가 원조 정호위 연우일과 마주했다!

*

장이서는 앞에 선 중년의 사내를 흘깃 살피곤 눈매를 좁혔다.

'정의대주?'

그에 대해서라면 장이서도 제법 알고 있었다.

사통의 일인이자 소위 강호에서 이름 석 자면 알아주는 자.

성정은 다소 고지식하나 자신이 믿는 정의에 신념을 바친다고 하여 별호가 정의신검(正意信劍).

"지금 막은 것인가?!"

한데 그런 그가 지금 제 앞에 분기탱천해 있었다.

다소 어이가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맹주와 서검을 상대로 합을 나누느라 잔뜩 몰입해 있었거늘.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 지금 그게 할 말이던가?! 이리도 시건방질 수가. 후기십룡이라 다를 줄 알았거늘. 아직 한참 부족하구나!"

후기십룡? 장이서의 고개가 갸웃해졌다. 하지만 연우일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신의 벽라수를 단숨에 파훼한 자다. 그런 애송이가 후기십룡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창궁룡과 쾌룡은 확실히 아니다. 그럼 진룡이다. 그를 만날 땐 내가 자리에 없었지.'

실망감과 괘씸함에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어디 이번에도 막아 보거라!"

눈에서 안광이 번뜩이고, 그의 일수가 다시 뻗어졌다.

『벽라수(劈羅手) 오지불능(五肢不能)』

연우일은 자신했다. 이번엔 아까와는 차원이 다를 거다. 섬찟한 이름 그대로 팔, 다리, 머리. 모두 꼼짝도 못 하게 만드는 매서운 초식! 지금까지 이를 막아낸 후배는 없었다!

한데!

"아닛?!"

이번에 생겼다.

'어떻게?!'

심지어 아까보다 더 쉽고 간결하게 막아냈다. 우연인가? 그럴 리가. 하지만 어떻게? 풀리지 않는 문답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이어졌다.

"넌... 대체!"

다시 뒤로 밀려난 연우일이 크게 당황한 순간.

장이서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왜 이러는지 이유부터 말씀해 주시죠."

왜? 연우일은 울컥하며 소리쳤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자네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생각지 못한 질문. 직책이 정호위이니 따지자면 숙사가 아닌 맹주의 곁을 지키는 게 정석이겠다만....

"남을 지킨다는 건 나를 지키는 것보다도 힘든 일. 내 몸이 아니니 눈으로 봐야 하는 것이고, 내 손이 아니니 닿아야 할 곳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한데 지금 여기서 자네가 뭘 지킬 수 있는가. 이런 안일한 태도로 대체 무엇을 지켜낼 수 있냔 말이다!"

눈이 크게 깜빡여졌다. 다소 충격적인 말이었다. 내가 너무 안일했나. 만일 이자가 첩자였다면 어땠을까.

"내 말이 틀렸는가?!"

그의 불호령에 감탄과 동시에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혼이 나는 게 대체 얼마 만인가 싶었기 때문.

더구나 그의 말엔 진심과 열정이 느껴졌다.

그게 싫지 않았다.

호위라는 제 일에 자부심을 품고 살아가는 멋진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아닌 거 같습니다."

"아닌 것 같은 게 아니라 아니라고 해야지!"

"예, 아닙니다."

연우일의 미간이 불신으로 일그러졌다. 이놈이 지금 제게 비아냥대는 것인가?

이에 한 소리를 내뱉으려는 찰나.

장이서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음?"

연우일은 다소 놀랐다. 마냥 시건방진 놈인 줄 알았더니, 인정하는 모습이 또 제법 묵직하다.

'그러고 보니 도인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진룡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태생부터 예의 바른 도인이라고.

한데 이놈은 뭐랄까. 사악한 듯하면서도 무게가 있다.

"그럼."

장이서가 포권을 취한 뒤 걸어 나간다.

연우일은 이를 붙잡듯 물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그러자 장이서가 담담히 답했다.

"백서입니다."

"...!"

연우일의 눈이 부릅떠진다.

그럼 아까 들었던 이무기가...!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것처럼 입이 떡 벌어졌다.

*

한편 맹주는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 뒤편 언덕에 올랐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면 속이 좀 덜 갑갑해질까 싶었기 때문.

실은 등 총관에게 맡긴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소림에 내 서신을 전해주게.'

별건 아니었다. 그저 오랜만의 안부 인사이자 103호에 대한 작은 물음 정도.

하나 등 총관은 소림에선 아무런 연통도 오지 않았다고 했다.

'신승.... 아직도 그대의 마음이 풀리지 않은 것인가.'

이해는 됐다.

3년 전.

자신과 제갈상. 그리고 신승이 크게 다투었으니까.

103호와 첩자였던 구자기를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갈리면서였다.

신승은 사실을 그대로 밝히길 바랐다.

'장 대협의 무죄를 밝히고, 군사가 혈교의 첩자였음을 만천하에 공표해야 합니다!'

'그랬다간 혈교가 바라는 대로 된다는 걸 어찌 모르는가!'

'설령 그리된다 할지라도 정도의 책임을 다하여야지요! 이를 외면한다면 그들과 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노왕야의 죽음을 황실이 그냥 넘어갈 것 같은가! 관과 무림의 불가침을 어겼다며 당장 무림맹부터 없애려 들 걸세! 정녕 그걸 바라는가?!'

그야말로 악몽 같던 순간.

결국 맹주였던 그는 끝내 어느 쪽도 아닌 비겁한 중도를 택했다.

103호의 누명은 풀어주되, 군사의 정체는 감추는 쪽으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요. 이것이 무림맹의 길이라면 소승은 이만 떠나겠소이다.'

그 결정에 신승은 절연을 선언하곤 소림으로 돌아가 면벽 수련에 들어선 것이다.

하여 이번에 백서에 대한 서신을 보내면서 내심 그가 돌아와 주기를 고대했거늘.

하나 연통이 없는 걸 보아 헛된 기대였던 모양.

한데 그건 그거고....

"자네는 왜 여기 있는 것인가?"

뒤에서 말없이 서 있는 아이.

정호위 백서.

"그냥. 그게 제 일인 것 같아서요."

그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맹주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이 아이가 정말 103호인지.

하지만 그저 묵묵히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나쁘지만은 않은 듯하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어느 날이었다.

*

며칠이 지났다.

정의대의 합류는 침체해 있던 장원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정의대주인 연우일이 이제 곧 있을 중차대한 여정을 앞두고, 맹호단 교육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

정의대와 맹호단의 대련이 주야장천 이어졌다.

'나쁘지 않다니까.'

덕분에 장이서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알아서 해주니 비교적 널널해졌기 때문.

물론.

"자네는 언제까지 거기 있을 텐가?"

"할 일 하는 겁니다."

이젠 숙사가 아니라 안채의 지붕 위에서 일과를 보내야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잔뜩 독기가 오른 맹호단에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게다가.

"쉽게 당하진 않을 겁니다!"

세대의 격차가 있음에도 맹호단은 제법 선전했다.

정의대주 연우일도 드러내진 않았지만 속으로 크게 감탄했다.

'요즘 애들답지 않게 눈빛이 살아 있다. 꼭 작정이라도 한 놈들처럼. 대체 무슨 일들을 겪은 거지?'

솔직히 날고 기는 인재들이 모인 건 이미 알고 있던 바.

하지만 자신들이 누구인가.

배부르고 등 따시게 자라온 후배들과 달리 전란의 고통을 현장에서 누벼온 자들.

그것도 맹주를 호위하는 정의대였다.

한데 지금의 맹호단은 독기만 놓고 보면 결코 자신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유일하게 부족한 실전 경험도 며칠 새에 자질을 증명하듯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그중 진룡 진자량과 창궁룡 남궁신은 부대주들과 붙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

왜 두 사람을 두고 최고라 평하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이대로라면 언제고 무림맹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강의 부대가 될 거란 기대까지 들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완성 짓는 화룡점정은 바로 저 녀석이었다.

정호위 백서!

며칠이 지났거늘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불가해의 존재.

'날고 기는 맹호단도 저 녀석 앞에서는 고개를 숙인다. 이건 누가 시켜서도 아니다.'

본능적인 경외. 진룡과 창궁룡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더 했다. 아주 죽으라면 나무에 목이라도 달 기세였다.

이들처럼 기가 세고 타고난 인재들이 또래에게 순종하는 경우는 딱 하나였다.

노력으로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만났을 때!

'도대체 정체가 뭐냐.'

심지어 맹주와 북개마저도 그를 규격 외의 존재처럼 달리 대하는 듯했다.

형용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달랐다. 아랫사람이 아닌 마치 귀인을 대하는 분위기.

"흘흘, 눈빛이 아주 의심으로 그득하구먼."

바로 그때 옆에서 탁한 음색이 불쑥 파고들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떨구자 땅바닥에 앉아 술병을 입에 문 노부가 보인다.

북개 취걸륜이다.

"언제 오신 겁니까?"

"그게 중하더냐. 당장 궁금해 죽겠다는 네 얼굴이 중하지. 흘흘. 저놈 때문인 게지?"

북개가 지붕 위를 눈짓했다. 부정은 못 하겠다.

"맞습니다."

"흘흘. 왜. 마음에 안 드는 게냐?"

"안 든다기보다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 또 벽라수를 막아낸 걸 보면 숨겨둔 수가 있는 것도 같고.... 솔직히 가늠이 잘 안 됩니다."

"흘흘, 눈 감고 만져보니 돌이라고 다 같은 자갈일 줄 아느냐? 그중엔 태산도 있는 법이다."

"예?"

"맹주가 그랬던가. 진짜는 세대를 아우르는 법이라고. 으허허!"

북개가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태산? 진짜?'

연우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발언만을 곱씹었다.

"대주. 이것만 명심하게나. 만일 위험에 처한 순간이 온다면 반드시 저놈을 믿고 맡기게. 그럼 기적이 펼쳐질지도 모르니."

북개가 비틀거리며 안채로 향했다.

"대체...."

연우일은 오늘도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다.

354.

#이곳이 마음에 드시오?

"좋은 날씨군."

맹주는 죽립을 쓴 채 고개를 들어 쨍한 하늘을 살폈다.

어쩌면 많은 이가 다칠 수도 있고, 또 강호의 미래가 걸린 기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날보다도 담담했으며, 그 어떤 것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저 알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표정과 말 한 마디에 수많은 이의 사기가 좌우되고, 또한 그것이 곧 성패로 이어진다는 것을.

"가지."

하여 여느 때보다 덤덤하게.

필사의 각오를 묻어둔 채.

그렇게 길을 나섰다.

정의대와 맹호단.

그들의 비호 아래.

화무진과의 비밀 회동.

출발이다.

*

중경에 도착한 건 사흘이 지나서였다. 약속 날짜에 딱 맞게 도착한 것.

한데.

"화 대협께서 모시라 하셨습니다."

루주는 홍등이 걸린 기루가 아닌 건물 뒤쪽 흙밭의 마차로 안내했다.

노란 깃발이 꽂힌 관군의 마차.

맹주와 연우일은 다소 당황했다.

"장소가 바뀐 것인가?"

이런 무례가 다 있나. 약속 당일에 장소를 바꾸다니.

하나.

"처음부터 여기가 아니었던 것이군."

맹주는 대번에 상황을 감지했다. 지난번에는 화무진이 최소한의 수하들만 대동한 채 직접 대웅전에 들어와 맹주를 만났다.

그런데 이번엔 그 반대.

자신더러 혼자 오라는 거다.

그곳이 범굴일지, 근사한 식사 자리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더구나.

"함께 오신 분들은 염려 마셔요. 대화가 끝나실 때까지 저희 주루에서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어여쁜 여인들이 밖으로 나와 다소곳이 인사를 올린다.

맹호단과 정의대는 당황했다. 자신들을 이곳에 잡아 두겠다는 것. 좋게 말하면 대접이고, 나쁘게 말하면 인질이다.

이건 예상에 없던 일.

맹주의 입에서 짙은 탄식이 흘렀다.

그러자 루주가 배시시 웃으며 쐐기를 박는다.

"불편하시면 돌아가셔도 돼요. 다만 다음에 다시 뵐 일은 없을 거라고 하셨어요."

아쉬운 건 저들이 아니라 너희라는 것.

"어찌하시겠어요?"

맹주의 얼굴에 고심이 깊어지고, 연우일은 이건 아니라며 말리려는 찰나.

"그리하시죠."

장이서의 입이 먼저 열렸다.

"자네!"

"단, 우리 둘까지는 동행을 허락해 주시오. 서로 공평해야 맞지 않겠소."

루주의 웃는 얼굴이 살짝 어색해진다. 아마 공평이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화무진이 사찰에 올 때 동행했던 건 마부 하나와 마차에 타고 있던 이 하나.

도합 그를 포함해 셋이다.

장이서가 이를 지적한 것. 그리고 루주의 표정이 굳어졌다는 건 하나를 뜻했다.

그저 권한 없이 내세워진 여인은 아니라는 것. 이내 그녀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다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분이시네요. 그리하시죠."

그녀의 안내에 마차의 문이 열렸다.

"가시죠."

"음...."

맹주는 장이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마차로 향했다.

"멀리서 오신 분들이다. 서운함 없으시도록 각별히 모시렴!"

그리고 루주의 명이 떨어지자 여인들이 총총총 당황한 단원들과 대원들에게로 향했다.

장이서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채 마차에 올랐다.

*

마차가 멈춘 건 어느덧 반나절이 지나 해가 질 무렵이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부는 친절히 문을 열어 주곤 안쪽을 가리켰는데, 대나무숲에 멋들어진 붉은 문주가 자리한 곳이었다.

"여긴...."

맹주는 익히 아는 곳인지 딱딱해진 표정을 지었다.

"아는 곳입니까?"

"무후사일세."

무후사(武侯祠)? 그건 과거 명재상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당 아닌가.

여긴 갑자기 왜.

하나 맹주도 이유까지는 알지 못하는 듯했다.

"한데 계획이 너무 틀어진 것 아닙니까."

연우일이 자그맣게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계획대로라면 오늘 회동엔 혈교의 습격이 이어져야 했다.

하나 장소를 이렇게 먼 곳으로 바꿔버렸으니 사실상 와해된 거나 마찬가지.

"음.... 금의위와 힘을 합하는 것이 먼저일세. 우선 들어가 보도록 하지."

맹주가 마음을 다잡고 안으로 향했다.

좌우에 붉은 담벼락이 놓인 외길이 드러난다.

휘이이잉!

바람이 대나무 사이를 스치며 휘파람처럼 날카로운 소음이 일었다.

본래 예부터 죽림은 회동을 위한 장소로 유명했다.

대나무가 빼곡하면 밖에서 절대 안을 바라볼 수가 없고, 오늘처럼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바람 소리가 피리처럼 들려 엿들을 수도 없기 때문.

한데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장소를 택한 것은 아닐 테고.

어느덧 길 끝에 다다르자 수풀을 등지고 있는 웅장한 사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안엔 황색 장포를 입은 사람이 뒤돌아 서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활화산을 품은 것처럼 터질 듯한 기백.

보자마자 확신했다.

그다.

자신들을 이곳으로 초대한 진무사의 수장.

신군 화무진!

저벅, 저벅.

그가 몸을 돌려 걸어 나온다.

연우일은 그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멎는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존재감.

자신도 모르는 새에 검파로 손이 얹어졌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뒤늦게 이를 깨닫곤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긴장한 것인가...?'

맹주를 호위하며 수많은 자를 만났지만, 이런 적은 몇 없었거늘.

이는 바꿔 말해 손에 꼽힐 만큼 위험한 자라는 얘기.

한데.

'...!'

연우일은 곁눈질로 흘깃 장이서를 살피곤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자신과 달리 전혀 긴장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

'이 위압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느끼고도 태연한 것인가.'

어느 쪽이든 이해가 안 되지 않은가! 이 정도면 세 살배기 어린애도 느낄 수 있을 텐데.

물론 장이서도 긴장한 건 아니지만,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긴 했다.

'사찰에서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강했다. 전력을 다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기척을 읽어낸 게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

'음?'

화무진 역시 장이서를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어 보였기 때문.

하나 금세 관심을 거두곤 딱 열 걸음 앞에 멈춰 섰다.

"오랜만이오, 중리성."

"오랜만에 뵙소이다, 화 대협."

마침내 두 사람이 조우했다.

고오오오오!

그리고 화염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기세.

무림과 관군.

각자의 영역에서 정점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다.

그저 마주한 것뿐인데도 천지의 모든 기운이 다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어떻소. 이곳은 마음에 드시오?"

화무진은 주변을 손짓하며 물었다. 맹주는 천천히 전경을 훑었다.

수풀을 등진 건물. 측면엔 물이 흐르는 정원. 그리고 중앙엔 널따란 광장까지. 우아하고, 근사하다.

하나 회동의 장소로 썩 적합해 보이진 않는다.

"이리 사당으로 초대해 주실 줄은 몰랐구려."

"나도 사찰에서 볼 줄 몰랐으니까."

"그 때문에 장소를 바꾼 것이오?"

"뭐, 겸사겸사."

어딘가 묘하게 긁는 어투. 가벼운 대화인데도 긴장감이 오른다.

"설마 고분고분 따라올 줄은 몰랐는데. 이걸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겁이 없다고 해야 하나."

아니나 다를까, 화무진이 무례한 언사를 툭 뱉었다. 하나 맹주는 사람 좋은 미소로 응수하며 대꾸했다.

"협(俠)과 정의를 위해서라면 못 갈 곳이 어디이고, 못 할 것이 무엇이겠소."

"그런가? 하지만 백성이라면 협과 정의가 아니라 명과 법을 좇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오. 황실이 정하지도 않은 그런 주관적 잣대로 칼부림을 하는 자들을, 우린 부역자라고 하지."

미소가 섞인 칼날 같은 발언. 무림은 잠재적 반역자라는 그의 사상이 대번에 드러나는 말이다.

이 정도면 작정하고 도발하는 수준.

한데 맹주는 도리어 이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이다. 황실이 있어야 협과 정의가 있고, 그래야 백성도 있는 법이오. 하여 무림맹은 황실이 위기에 처한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해낼 것이외다. 협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맹주의 말에 화무진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말은 청산유수.

하나 진짜 할 말은 이제 시작이었다.

"한데 지금 불의로 가득한 도당이 천하를 노리고 있소. 하여 본인은 황실을 지켜달라 간청드리고자 이곳을 찾은 것이외다. 부역자가 아닌 백성의 신분으로!"

화무진의 눈매가 처음으로 크게 일렁였다. 이에 맹주는 결판을 내듯 말했다.

"혈교."

"...!"

"그들이 무림에 이어 황실의 턱 밑까지 숨어들었소이다. 오륜회라는 이름 아래."

그야말로 폭탄 같은 발언.

화무진은 황실의 모든 정보를 다루는 총책. 단연 혈교를 모를 리 없었다.

더구나 오륜회라면, 속한 이들 중 교류했던 자가 적지 않았다.

하나 놀라는 건 이제 시작이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화 대협을 그 배후로 의심했었소."

"나를?"

"그렇소. 그들이 일부러 유도하였으니 말이오. 화 대협과 나의 상잔을 위해."

"하!"

화무진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숨을 뱉자, 연우일은 품에서 범 가면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장원을 습격한 살수들이 쓰고 있던 것이다.

"얼마 전엔 진무사로 위장한 살수들이 거처로 습격을 가해오기도 했소."

"...!"

"분명 황실에는 혈교의 세력이 숨어 있소. 그것도 막대한 권력을 지니고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화 대협뿐이외다. 부디 황실을. 아니 천하를 위해 도와주시오."

맹주는 포권을 취하며 간곡한 마음으로 청을 올렸다.

그리고 침묵.

간절한 바람에 억겁 같은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그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이군."

됐다! 맹주의 두 주먹이 꽉 움켜쥐어졌다. 연우일의 얼굴도 밝게 화색이 피었다.

그런데.

"하마터면 감쪽같이 속을 뻔했어."

화무진의 입꼬리가 불쾌하게 올라선다.

어딘가 맥락에 맞지 않는 말.

맹주와 연우일이 어리둥절해하는 순간.

"내가 그리도 우습게 보였나?"

고오오오오!

화무진의 몸에서 걷잡을 수 없는 살기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반응인가.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땐.

척척척척!

사당 안에서 범 가면을 쓴 무리가 개미 떼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매, 맹주님!"

연우일이 당황하며 앞을 막아서지만 무의미한 일.

챙챙챙챙!

이번엔 측면까지. 일시에 무사들이 뛰쳐나와 칼을 뽑아 든 채 포위해 버렸다.

아예 작정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그 말은 곧...!

"함정?!"

연우일이 크게 당황한 채 숨을 삼켰다.

화무진은 실로 위험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이보시오, 맹주. 연설은 잘 들었소. 하지만 내겐 무림맹이나 혈교나 다를 게 없소. 언제고 치워 없애버려야 할 부역자 나부랭이일 뿐이지. 누가 먼저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야."

"화 대협!"

"한데도 불구하고!"

화무진의 일갈이 쩌렁쩌렁 뱉어졌다.

"나 화무진이 그대에게 지금껏 예를 갖춰준 이유를 아는가?"

"그게 무슨...."

뭔가가 잘못됐다. 맹주는 직감했다. 지금 이건 원망에 가까운 한 맺힌 목소리라는 것을.

대체 왜.

아무런 접점이 없던 자이거늘!

"마지막으로 묻지. 이곳이 마음에 드시오?"

화무진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반면 맹주는 혼란으로 가득해졌다.

이곳이 마음에 드냐고? 아니, 전혀. 들지 않는다. 처음 왔을 때부터 불편했고, 마음이 저렸다.

왜? 당연하지 않겠는가. 오랜 벗이자 정도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이를 잃은 곳이니.

'얼굴을 보여라.... 죽어서 원귀가 되어서라도 네놈을 괴롭힐 것이니....'

3년 전 흑혈의 백면귀에게서 비급을 지켜내고 목숨을 잃었던 무림맹의 귀인.

사천의 번왕, 노왕야 주후만!

이곳 무후사는 바로 노왕야가 죽은 곳이었다.

그리고.

"아쉽군. 기억도 못 해주는 부역자들을 위해 내 양부께서 그리 쓸쓸하게 죽어가셨다니."

"자네, 설마...."

"왜. 이제야 기억이 나나?"

툭.

화무진이 품에서 오래된 서책 하나를 꺼내 던졌다.

그리고 이를 본 맹주는 사색이 되어버렸다.

3년 전, 노왕야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달마의 비급.

[능가경(楞伽經)]

"네 간악한 부탁에 목숨까지 내걸고 구해내신 바로 그 능가경이다. 돌려주지. 값은 목숨으로 받겠다!"

구구구구구!

화무진의 어깨 위로 막대한 진기가 솟아오른다.

이내 거대한 파도의 형상이 사당 위로 자리했다.

성역(聖域)이었다.

입신지경에 오른 황실의 절세 고수!

신군 화무진의 장강대해(長江大海)가 발현했다!

355.

#호위무사의 바람

- 요녕성 심양 모용세가.

"맹주와 화무진이 조우했다고 합니다."

형과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모용소에게 종복이 달려와 말했다.

"드디어 오늘로 대계가 끝을 맺는구나."

일흉 모용소는 승자의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기나긴 세월이었다.

그림자로 살아온 자신이 모용세가를 넘어 무림을 장악하기까지.

누구도 함부로 그릴 수 없으며, 품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위대한 대계.

바로 그 대미를 장식할 결전의 날이 도래한 것이다.

"어리석은 맹주. 화무진을 만나 설득하면 될 줄 알았는가? 그건 날 너무 만만히 본 것이다."

그는 완벽을 추구하는 철두철미한 지략가.

맹주와 화무진이 상잔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끝까지 이를 관철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맹주가 안 되면 화무진을 구슬려서라도!

그리고 그 방법은 너무도 간단했다.

"노왕야에겐 많은 자식이 있었지만, 그중엔 양자도 하나 있었다. 신군 화무진. 비록 황족의 성씨는 갖지 못했으나 그는 노왕야가 가장 아끼던 막냇자식."

그리고 그는 양부의 죽음에 늘 의문을 품고 있었다.

뒤늦게 부고 소식을 접한 뒤 금의위를 총동원해 조사에 나섰지만, 나오는 정보가 영 탐탁지 않았기 때문.

당연했다.

"후후후."

비열한 웃음을 짓는 이 남자.

일흉이 모든 정보를 조작한 뒤였으니!

"맹주. 그대는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 내가 사건을 덮어주지 않았다면, 군사가 오흉인 사실까지 묻어버린 그대의 위선을 만천하에 들켜버렸을 테니."

일흉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맹주의 추잡함을 알리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

하나 고작 군사 하나로 끌어내리기엔 신주오절은 너무도 거대한 성탑.

몰랐다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하여 참고 또 참고 기다렸다.

설익은 과실이 새빨갛게 농익어, 역모라는 이름으로 모조리 다 숙청해 버리는 그날이 오기를!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오륜회에서 오셨다고.'

'모용소라고 합니다.'

비밀회담이 열리기 전, 일흉이 먼저 화무진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친절히 알려주었다.

비틀어진 진실을.

'노왕야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맹주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부탁?'

'예. 바로 이 능가경이라는 비급을 구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능가경. 바로 이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이다.

'일평생 그리도 무림인들을 감싸시더니 기어코....'

화무진은 분개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하려고 했다. 부친이 얼마나 무림맹을 아끼고 위해 왔는지 너무도 잘 알기에.

더구나 달마 조사의 비급이라면 분명 제 부친은 맹주가 시키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되찾아 소림에 돌려주려고 했을 것이다.

하나.

'겉보기엔 달마 조사의 무공 같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혈교. 바로 그들의 무공이지요.'

'뭐...?'

'맹주는 늘 혈교를 지우고 싶어 했습니다. 흔한 야욕이지요. 가만히 있는 자들을 들쑤셔 명분을 얻고, 또 자신의 업적을 쌓기 위한. 뭐 그런 졸렬한 수법 말입니다.'

도저히 믿기 힘든 이야기.

하지만 모용소의 제안으로 수하 하나가 눈앞의 비급을 읽고 연마하는 그 순간.

'크아아아아아!'

살에 취한 혈귀로 변해버리는 걸 보고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달마의 껍데기를 빌린 지독한 마공이라는 것을.

'이제 무림은 구파일방의 것이 아닙니다. 상단과 황실. 그리고 이들을 배출한 가문 모두의 것이지요. 오륜회가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지만 무림맹은 자신들이 도태되어 사라져 가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오륜회를 없애고 싶겠지요. 아마 온갖 이간질을 해대며 화 대협께 도움을 청할 겁니다. 그걸 어떻게 할지. 한번 잘 생각해 보시기를.'

모용소는 그렇게 파르르 떠는 화무진을 남겨둔 채 떠났다.

그리고 확신했다.

화무진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맹주를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바로 오늘 말이다.

"잘 가시오, 맹주. 무림과 황실은 내가 잘 이어가 줄 테니. 하하하하!"

모용소의 광소가 방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이제 자신이 음지에서 벗어나 양지에서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 되리라.

반드시!

* * *

- 사천 무후사.

"처음부터 살려 보낼 마음이 없었구나!"

한편 포위된 연우일은 다급히 전후좌우를 살피며 소리쳤다.

반면 맹주와 장이서의 시선은 위를 향해 있었다.

바로 사당 위에 자리한 거대한 해일의 벽.

화무진의 성역인 장강대해에 말이다.

"결국 일어날 일이었단 말인가...."

맹주는 짙은 패색을 드러내며 한탄을 쏟았다. 오랜 세월 화무진을 의심했고, 자칫하면 제 손으로 그를 죽일 뻔했다.

하나 기적적으로 혈교의 의도를 간파했고, 이제 대화만 나누면 다 되는 줄 알았다.

한데.

"노왕야의 아들이었다니. 혈교가 문제였던 게 아니라 전부 나의 업보였구나."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

만일 자신이 3년 전 신승의 말대로 모든 것을 공표하고, 죄를 인정했다면.

그랬다면 오늘처럼 화무진과 칼을 겨누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건 모두 제 업보였다.

"맹주님,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옆에서 연우일이 외쳐보지만, 맹주는 그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도망?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는 일이다.

모두 제 책임에서 비롯된 걸 어찌 여기까지 와서 도망을 간단 말인가.

"명을 내리겠네."

맹주는 단호히 말했다.

"반드시 살아서 빠져나가게. 하여 꼭 혈교를 막아주게."

"맹주님?"

이내 두 손을 차륜처럼 돌리더니 장이서와 연우일을 향해 양손으로 장풍을 쏘아냈다.

"흡!"

갑자기 날아드는 풍력에 손을 교차해 막아낸 두 사람.

하나 바람에 밀려 걷잡을 수 없이 저 멀리 후방으로 날려 보내졌다.

화무진은 이를 무심히 바라보곤 코웃음을 쳤다.

"제 수하들은 그리 아끼면서 내 아버님은 고작 저딴 마공을 얻고자 이용한 것인가?"

맹주는 침잠한 것처럼 차게 식은 얼굴로 바닥의 비급을 바라보았다.

능가경.

그 이름만 봐도 가슴팍이 쑤신다.

"맞네. 내가 가져와 달라고 청하였었네."

"이제 와서? 하하하! 늦었소, 맹주. 3년 전에 밝혔어야지!"

맞는 말이다. 그때 밝혔어야 했다.

그랬다면 103호도, 노왕야도, 화무진도. 모두가 더 많이 억울하고, 더 많이 분노하진 않았을 것이다.

"미안하네. 모두 내 탓일세. 너무 늦어버렸으나... 정말로 미안하네."

맹주가 고개를 숙였다. 어디에도 거짓이 보이지 않는 진심 어린 행동. 이에 화무진은 격분하며 일갈했다.

"감히...! 아버님을 이용한 것도 모자라 날 기만하려 하는 것인가?"

오해다. 그렇지 않다. 하지만 열린 입이라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왕야의 죽음에 일조한 군사의 죄를 덮어버린 건 분명한 죄악이거늘.

"오냐. 어디까지 그 같잖은 위선을 떠는지 보자. 여봐라! 활을 가져오거라."

화무진이 옆으로 손을 뻗자 수하가 달려와 그에게 단궁을 건넨다.

빠아아악!

그러곤 거침없이 시위를 당겼다.

진무사가 쓰는 화살은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다.

촉이 굵고 십(十)자로 벌어져 맞았을 때 출혈이 크고, 움직일수록 상처가 더 크게 벌어진다. 도움이 없다면 뽑기도 힘들다.

한마디로 지독한 고통에 몸부림치게 된다는 얘기.

"아버지의 고통에 비하겠냐만, 그리 미안하면 어디 겪어 보거라!"

피이이잉!

시위가 떠나고 화살이 출렁이며 독사처럼 쏘아져 나갔다.

맹주는 이를 바라보며 정승처럼 우뚝 선 채 눈을 감았다.

이를 바라보던 화무진은 눈매가 크게 흔들렸다. 정말 가만히 있겠다는 것인가?!

하나 뭐든 상관없다. 화살엔 눈이 없고, 멈출 발이 없으니.

퍽!

끔찍한 소음이 흩날렸다.

한데.

"맹주님...."

불현듯 애써 웃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맹주는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그러자 앞에 낯익은 사내의 뒷모습이 담겼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언제나 묵묵히 제 옆을 지켜주던 사내.

정의대주 연우일.

그의 가슴에 화살이 박혀있던 것.

"자, 자네...!"

"오늘이... 처음입니다. 제가 맹주님을 모시면서... 제대로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연우일은 환히 웃으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맹주를 처음 만나러 가던 날이었다.

하필 산에서 녹림의 습격이 있었고, 간신히 도망쳐 흉한 몰골로 그를 마주했었다.

'자네가 내 호위무사인가.'

그때 대문으로 마중 나온 맹주의 말이 어찌나 부끄럽던지.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곤 고개를 저었다.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저 같은 게 어찌 감히.... 매, 맹주님?'

그런데.

'다치지 말게. 날 지켜줘야 할 자네가 이리 다쳐서 되겠는가.'

맹주는 웃으며 자신의 베인 팔을 천으로 감싸주었다.

그때 자신에게 약속했다.

반드시 이분을 지키겠노라고.

"명색이 첫 번째 호위무사인데.... 수십 년이 지나서야... 그 약속을 지킵니다. 맹주님이 너무 강하셨지 않습니까. 하하...."

"연 대주...!"

"그러니까 마지막만큼은.... 저도 먼저 간 대원들한테 당당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콰직! 연우일이 이를 꽉 깨물곤 화살대를 부서트렸다. 지독한 고통에 정신이 혼미하다.

하나 자신은 무림맹주의 제일 호위무사 연우일!

화무진을 매섭게 노려보며 거침없이 소리쳤다.

"정호위!"

그러자 맹주의 옆으로 다른 한 사람이 마주 선다. 또 다른 호위무사. 정호위 백서다!

연우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맹주님을 모시고 여기서 빠져나가게. 이곳은 어떻게든 내가 막아낼 테니!"

스릉! 이내 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잡는다.

그리고 이를 본 화무진은....

"그러면 그렇지. 이번에도 수하를 내세워 도망치려 하는구나. 가증스럽게도!"

분노가 한계치를 넘어섰다.

"역겨운 부역자들. 한꺼번에 저승으로 보내주마."

고오오오오!

화무진의 눈에서 하늘빛 안광이 쏘아지고, 발검과 동시에 참격을 그었다.

콰과과과과!

그러자 마치 거대한 해일처럼 무자비한 기파가 날아든다.

'이, 이런...!'

연우일은 이를 마주하는 순간 생각했다.

역시 첫인상이 맞았구나.

보기만 해도 안다. 자신이 감히 비빌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망연자실한 마음을 누르곤 간절히 빌었다.

호위무사 치고는 호의호식하고 산 생이었다고. 이 정도면 잘 살았다고.

그러니까 정호위.

내 목숨 여기 두고 갈 테니, 제발 맹주님만 구해달라고.

북개의 말대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믿을 테니!

제발 기적을 보여달라고.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그동안 영광이었습니다. 맹주님.'

그리고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 막대한 검기를 마주하는 그 순간!

살랑.

봄이 마중 오듯 잔잔한 바람이 연우일을 스쳤다.

그리고.

수와아아아악!

오채 찬란한 빛이 해일을 갈랐다.

쩌어어엉!

그리고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빛의 파편.

연우일은 흔들리는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살폈다.

새하얀 검을 든 채 당당히 서 있는 한 남자.

"지키는 건 저보다 대주가 더 잘 어울립니다."

기적이 이루어졌다.

'정호위...?!'

백서. 아니 장이서.

등장이다.

356.

#믿으세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누구 하나 예외는 없었다.

맹주도, 연우일도, 화무진도.

하다못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금의위 무사들까지.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런 존재감도 없었거늘.

지금은 희한하게도 펄럭이는 소매마저 훤히 보일 만큼 모든 신경이 그에게로 향했다.

마치 지금껏 모두를 감쪽같이 속인 것처럼.

누구보다도 가장 놀란 건 화무진이었다.

"너는...."

단순히 자신의 해령천공(海靈天功)이 담긴 일격을 막아내서만이 아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이제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

"또 뵙는군요."

역시. 그자였구나. 건방지게도 사찰에서 은신한 채 제 뒤를 밟았던 자!

"놀랍군."

화무진은 다른 말보다도 진심 어린 감탄을 먼저 뱉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황실 제일 감찰 조직 진무사의 수장 화무진이다.

본래 주 종목은 무공이 아니라 첩보라는 것!

하여 지금껏 누구도 반경 십 장 이내에 자신의 기감을 피해 은신한 자는 없었다.

맹세컨대 단 한 명도!

한데 그 기록을 깨고 제 뒤를 미행한 자가 이토록 어린 녀석이었다니.

하나 감상은 여기까지.

이내 표정을 싸늘히 갈음하곤 말했다.

"저자의 호위무사였는가? 누구든 상관없다. 어차피 죽는 건 매한가지...."

"누가 왔습니까?"

"뭐?"

느닷없는 질문에 화무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누가 왔냐니.

"이곳에 오기 전. 오륜회에서 찾아왔었을 텐데요?"

그걸 어떻게?!

"금의위 지휘첨사(指揮僉事)이신 분이 아무나 만나주지는 않았을 테고.... 누굽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상단은 아닐 테고. 오대세가입니까?"

"하!"

화무진은 장이서의 유도신문에 기가 찼다.

맹주의 호위무사 따위가 감히 제게 문견(問見)을 시도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게 또 상상 이상으로 뛰어나다는 게 황당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이리 나오실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순진하시군요."

"알고 있었다고?!"

그야말로 충격적인 이야기. 장이서는 어깨를 으쓱이곤 담담하게 답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기루에 들렀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어디서 거짓을 늘어놓는 것이냐!"

화무진은 코웃음을 쳤다. 기루라면 이미 이곳으로 오기도 전의 이야기.

만일 그때 알았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함정인 걸 알면서 기어 왔겠는가.

하지만 상대는 장이서다.

"처음부터 다른 마음이 없었다면 가짜 기생들을 놔두진 않았겠죠."

"...!"

화무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대체 그건 또 어떻게.

그러자 장이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홍등(紅燈)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뭐...?"

간혹 기생이라 하여 우습게 보는 사내들도 있지만, 천만에.

지역 별로 차이는 있지만, 중경과 북경에서 기루가 홍등을 걸었다는 건 황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예기(藝妓)들이 머문다는 것.

그녀들은 기개가 높고, 지적이며 함부로 몸을 다루지도 않았다.

물론 금의위 진무사인 화무진도 당연히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근데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그녀들은 자신들의 절개를 비단을 씌운 가죽신에 비유하곤 합니다."

처음 기생 길에 오를 때 받게 되는 어여쁜 가죽신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중히 여기겠다는 것.

"한데 마차가 놓인 흙길 위에 가죽신을 더럽히며 달려 나오는 예기라니.... 당연히 가짜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함정인 걸 알고 있었다? 후후후. 재밌구나."

화무진은 진심으로 흥미가 동했다.

그의 말대로 루주로 위장한 여인은 절 따르는 진무사의 부관 중 하나.

귀신처럼 자신을 감추고 변장에 능해 누구도 알아내지 못할 줄 알았거늘.

고작 그런 사소한 일 하나로 간파하다니.

하지만 진짜 놀란 건 뒤에서 듣고 있던 맹주와 연우일이었다.

'그걸 알면서 도대체 왜....'

'어째서 말을 안 한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일언반구도 없이 따라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

심지어 마차 타고 가자 한 것도 그였지 않은가!

화무진도 같은 마음인지 대변하듯 말했다.

"허세도 적당히 부리거라. 그걸 알았다면 넌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다. 왜? 거기라고 안전하겠느냐."

한마디로 중경의 기루 역시 지금쯤이면 참극이 벌어졌을 거라는 얘기.

하나.

"왜 우리만 왔다고 생각합니까."

"뭐?"

장이서가 스윽 뒤를 돌아본다. 이에 모두가 다 그를 따라 등을 돌렸다.

그러자 잠시 후.

"맹주님을 지켜라!"

"와아아아!"

두두두두!

거친 함성과 함께 일백이 넘는 무사들이 순식간에 사당 안으로 난입해 왔다.

하나는 백색 도포에 푸른 깃의 복식으로 통일한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짙은 푸른색으로 가득한 옷차림이다.

그들이었다.

맹호단과 정의대!

"대장-!"

"우리가 왔네!"

지금쯤 중경의 기루에서 죽었어야 할 그들이 이곳에 나타난 것!

맹주와 연우일은 눈을 크게 깜빡였고, 화무진은 사술에 빠진 것처럼 정신이 혼미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것인가.

답은 간단했다.

"흘흘, 내가 무어라 했느냐? 냄새 맡는 건 날 따를 자가 없다니까."

"수고하셨습니다."

장이서의 옆으로 다가온 늙은 거지.

북개 취걸륜!

이곳에 오기 전, 남들 몰래 그에게 따로 부탁을 해두었던 것.

'일흉은 오늘 회담을 막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을 겁니다. 아니길 바라지만, 이미 화무진이 매수되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그렇다. 장이서는 이미 오기도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일부러 판까지 깔아줬는데 설마 천하의 일흉이 아무 준비도 안 했겠는가? 그거야말로 개가 웃을 일!

'그럼 제 발로 범굴에 기어들어 가는 꼴 아니더냐. 피해가 만만치 않을 텐데?'

'그러지 않게 해야죠.'

'어떻게?'

'숙부의 그 코 좀 빌리겠습니다.'

'잉?!'

장이서는 가루가 든 약낭을 건네곤 씨익 웃으며 말했다.

'천리미향. 이 냄새를 꼭 기억하십시오.'

그러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단원과 맹주. 그리고 자신의 몸에 천리미향을 몰래 뿌려두었다.

하여 이를 미리 숙지한 북개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개입하도록 조처를 해둔 것.

"그래도 네가 애들을 제대로 가르쳐 놨다. 알아서 먼저 루주를 의심하고 제압해 놨더구나."

동기들을 흘깃 바라보자 모두가 씨익 웃는다. 가르쳐준 대로 의심하고, 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채 살아남은 것.

"저놈이 아주 이무기가 따로 없는 놈이라니까. 흘흘!"

"그러니 우리 대장이지요."

화무진은 파르르 떨며 이를 악 깨물곤 통보했다.

"기고만장하지 말아라. 알았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맹주는 오늘 이곳에서 죽는다. 그걸 막아서는 너희 모두 마찬가지!"

기어코 끝장을 보겠다는 것. 이에 북개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일갈했다.

"매앵주우? 네놈은 애비도 없는 것이냐?!"

"노왕야의 양자일세."

"조카야...."

사람 참 한결같다. 장이서는 픽 웃음 짓고는 기막을 펼쳤다.

지금부턴 단둘이 이야기하겠다는 것.

"이쯤이면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뭐?"

"그렇지 않습니까. 애초에 이 사달이 난 것은 맹주께서 지휘첨사인 당신을 속이고 이용하기 위해 왔다는 전제여야 하는 건데. 아직도 그렇게 보이십니까?"

"...!"

화무진의 눈이 마치 한 방 먹은 것처럼 흔들렸다.

화가 나서 잠시 눈이 멀었던 것뿐. 확실히 절 속이려는 상황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번거로운 방법 아닌가.

하나 그게 중한 것이 아니다. 맹주는 자신의 부친을 죽인 원수!

한데.

"뭐, 맹주께 화가 나는 건 저도 이해합니다."

장이서가 또다시 속내를 쑤셨다.

"네가 뭘 안다는 것이냐?"

왜 모르겠는가.

노왕야.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장이서 역시도 모를 수가 없는 일.

따지고 보면 화무진과 마찬가지로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다.

동병상련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분명 맹주께서도 잘못한 게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제대로 변명조차 안 하는 걸 테고요."

흘깃 맹주를 살피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왕야의 죽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혈교의 소행입니다. 또한 당신을 찾아온 자도 혈교이지요."

"헛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구나! 네놈 말을 내가 어떻게 믿...!"

"무엇보다도."

장이서는 그의 말을 툭 자르곤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비급을 주워 들었다.

"노왕야께서 갖고 계셨던 능가경은 마공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뭐...?"

화무진의 표정이 얼얼해졌다.

"그게 마공인 것은 이미 내 눈으로 확인을...."

"왕야께서 갖고 계시던 능가경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세상에 없다니.

"제가 불태웠으니까요."

"...!"

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능가경 진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 이를 일일이 설명하기엔 너무 긴 여정.

그러니까.

"심연 끝의 규룡이 빛을 찾아 오르는구나. 기나긴 여정에 성년이 되고, 새끼를 품으니. 배가 불러 가슴으로 낳았노라."

장이서의 입에서 시의 운율처럼 단정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화무진은 이에 화들짝 놀라며 경악했다.

구결이었다. 능가경에 숨겨진 진짜 구결!

"네가 그걸 보지도 않고 어떻게?"

"능가경을 혈교의 마공이라고 하던가요?"

화무진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해졌다.

대체 이 녀석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인가.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진짜 능가경이 무엇인지."

장이서가 손을 까딱였다.

미친놈. 이놈은 미친놈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궁금했다. 아무리 봐도 장난이나 칠 놈처럼 보이지가 않기에.

"네 말에 책임질 자신이 있는 것이냐?"

"보면 압니다."

화무진은 고개를 내젓고는 장이서의 기막을 날려버린 뒤 수하들에게 명했다.

"백 보 밖으로 물러서라!"

"충!"

우르르르! 그러자 일사불란하게 금의위가 뒤로 빠진다.

"어찌 된 것인가?"

이에 맹주가 다가와 물었다. 그의 눈엔 수많은 감정이 뒤섞였다.

미안함과 기대감, 그리고 떨림과 혼란.

장이서는 이를 보곤 한마디로 일축했다.

"믿으세요."

"...!"

맹주의 두 눈이 거침없이 흔들렸다.

'믿으세요.'

사찰에서 들었던 말이다.

자신을 구하고 마애석불을 부서트린 정체불명의 고수가 했던 말!

"자네 설마...."

이제야 깨달았다. 그게 바로 백서였다는 것을.

도대체 왜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맹주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너무 떨려서 침도 삼켜지지 않을 만큼.

수많은 질문이 목젖을 두들겼다. 하나 지금은 아니었다. 간신히 삼켜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고, 미안하네."

"됐습니다. 나중에 밥이나 사시든지요."

이에 장이서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맹주는 그 미소가 마치 자신의 죄를 보듬어 주는 기분이었다.

아주 오래전 자신에게 맹주냐고 묻던 바로 그 아이가 말이다.

"꼭... 사주겠네."

그러니 나중에 꼭 답해주게.

진짜 자네의 정체가 무엇인지.

맹주는 쓰린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취한 뒤 몸을 돌렸다.

"모두 물러나시게!"

그리고 마침내 장이서와 화무진. 두 사람만이 남겨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게야?"

백 보 밖으로 물러난 북개는 맹주 옆으로 다가와 우려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리 봐도 둘이 한판 붙을 기세.

"보이는 대로일세."

맹주가 쐐기를 박자 북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대꾸했다.

"말렸어야지! 아무리 조카라도 이건 아니지! 화무진이 누군지 잊은 게야?"

왜 모르겠는가. 당연히 알고 있다. 금의위 최고 고수이자 황실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절세 고수.

무엇보다도 입신지경에 오른 절대자!

고작해야 이립에 불과한 애송이가 맞붙어서 버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껏해야 백 합? 아니, 십 합도 버티지 못할 터!

하나.

'믿으세요.'

맹주의 마음엔 미소가 지어졌다.

진정한 천재는 세대를 아우르는 법이니까.

357.

#진짜 능가경

솨아아아아!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에 공기가 터져 나갈 것처럼 달아오른다.

후우, 후우.

미약한 호흡마저도 귀에 생생하게 들릴 만큼 긴장감이 고조된다.

화무진은 대충 상대해 줄 마음 따윈 없었다.

본래 그는 이처럼 휘둘리는 자가 아니다. 휘두르는 자이지. 그러니 아량을 베푸는 것도 여기까지.

그러니까.

"증명하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파아앗!

맹수처럼 날아든 화무진의 검이 단숨에 수직으로 그어졌다.

수와아아악!

옆으로 몸을 피해내자 그대로 초승달처럼 첨예하고 거대한 검기가 자리를 쓸고 지나간다.

수와아아악!

그리고 이어지는 연격.

'베이는 순간 죽는다.'

장이서는 몸을 젖혀 간신히 이를 피해내곤 침을 삼켰다.

그의 검법은 시원할 만큼 동작이 크고, 막대한 위력을 담은 것이 특징인 듯했다.

한데도 불구하고 빈틈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는 오른손은 단조로운 반면, 왼손은 변칙적이고 포악했기 때문.

와락!

이를테면 지금 별안간 멱살이 잡힌 것처럼 말이다.

"고작 이게 다인 것이냐?"

퍽! 괴물 같은 힘으로 그가 밀쳐내자 휘청이며 걸음이 물러졌다.

그리고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참격.

카앙!

천매검으로 막았지만, 왼쪽 어깨에 피가 터져 나가며 팔 한쪽이 새빨갛게 적셔진다.

끝없이 밀려드는 공력이 막아냈음에도 엄청난 무게감으로 내리찍었기 때문.

"호신기?"

역근경이지만 설명해 줄 여유는 없다.

맹주가 설산, 서검이 눈사태라면, 화무진은 눈. 그것도 끝이 안 보이는 폭설이다!

"언제까지 도망 다닐 수 있을 것 같으냐!"

수와아아악!

다시 무섭게 그어지는 그의 일검.

'이대로 당해줄 순 없다. 보여줘야 한다. 능가경의 힘을.'

우우웅!

장이서의 눈에서 황금빛 안광이 뿜어지고, 이내 몸 안에서 정심한 기운이 용솟음쳤다.

단전의 세 번째 층에 자리한 남천능가경이다!

그러자 화무진의 눈이 부릅떠졌다.

'실로 정대한 기운이구나.... 이것이 능가경이라고?'

장이서는 그 힘을 천매검에 담아 자야검으로 응수했다.

카앙!

그러자 검에 서린 오채 찬란한 빛이 그의 괴력에 저항한다.

'확실히 보통은 아니구나.'

합이 이어지자 화무진도 내심 긴장했다.

장이서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정대한 황금빛 기운도 강렬했지만.

방어할 때는 정숙하고 간결하다가도, 공격에 나설 땐 흡사 맹수처럼 예측이 가지 않는 저 검법 또한 대단했기 때문.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 뭘 증명할 수 있단 말이냐!"

이를 달마 조사의 원류심법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한참 이르다!

콰과과과과!

일순 화무진의 검기가 해일처럼 거대해졌다.

해령천공(海靈天功) 10성이다!

"큭!"

그때부터 장이서의 자야검이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공력의 차이만은 아니었다.

몸에 맞는 옷이라는 게 있다.

초식에도 어울리는 심법이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자야검은 맹주와 서검을 본떠 창안한 검법.

무당과 화산에 기초를 두고 있는 만큼 도가의 심법에 적합했다.

능가경이 아무리 정도의 정점이라 할지라도 불가 계통인 만큼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는 일.

"이제라도 말려야 해!"

북개가 사색이 된 채 소리쳤고, 맹주도 두 손에 식은땀이 절로 서렸다.

이대로라면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기세.

물론 이번 싸움은 장이서에겐 너무도 불리했다.

상대는 황실의 범, 신군 화무진.

전력을 다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입신지경의 고수.

한데 그런 그와 제약을 두고 싸워야 했다.

천마신공과 귀천살마공. 그리고 불사독마공은 금해야 한다는 얘기. 당연히 혈마귀도 쓸 수 없다.

이기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하나.

'화무진을 믿게 만들려면 이 방법뿐이다.'

애초에 장이서의 목표는 그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진짜는 이것!

짝!

우뚝 멈춰 선 장이서가 천매검을 납검한 뒤, 두 손바닥을 맞대어 합장했다.

얼핏 보면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살려달라 비는 형국.

파아앗!

이에 화무진은 코웃음을 치며 빛살처럼 달려든다.

"벌써 포기한 것이냐?!"

포기? 천만에. 지금까지 자야검을 펼친 건 상기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태산처럼 무거웠으며, 다 익은 벼처럼 겸손하였던 자.

남천능가경에 그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사람!

장이서는 가까워지는 화무진을 향해 천천히 자세를 바꾸었다.

"저, 저건...!"

그리고 먼발치에서 이를 지켜보던 맹주와 북개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장이서에게서 자신들이 너무도 잘 아는 이의 모습이 설핏 겹쳐 보였기 때문.

3년 전, 역근경을 만들어 주고, 소림 칠십이종 절예를 가르쳐주었던 또 다른 스승!

"시, 신승...?!"

남신승 영오.

바로 그였다!

『역근경(易筋經) 의태신기(擬態身氣) 남신승(南神僧) 영오』

장이서의 몸에 신승이 깃들었다!

수와아아악!

그리고 날아드는 검을 향해 정면에서 일권으로 응수했다.

이건 누가 봐도 자멸 행위!

하지만 지금 장이서의 일권은 달랐다.

비록 의태신기에 깃든 건 힘의 태반을 잃었던 때의 신승이었지만, 도리어 맹주나 서검을 품었을 때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단단했다.

당연했다.

역근경이 깃든 신체에 달마 조사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남천능가경. 그리고 당대 최강의 승려인 신승의 백 년 경험이 합쳐졌으니.

이것이야말로 천년 소림의 결정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모두의 소리 없는 비명 아래.

황실의 검과 소림의 권이 격돌했다.

꽈아아아앙!

암석이 깨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엄청난 풍압이 번져 나간다.

"크윽!"

"흡!"

백 보 밖에 있음에도 그 여파가 강해 태풍에 부닥친 듯한 소란이 일었다.

심지어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끝없이 쏟아지는 무한의 바람!

반면 그 중심에 선 장이서는 실로 평온해 보였다.

마치 벼랑 위에 선 고승처럼.

"대체...."

그리고 화무진은 엄청난 강풍을 고스란히 맞이한 채 장이서와 대치했다.

솔직히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10성 공력이 담긴 검을 권으로 막아내다니.

이건 단순히 권법가들을 무시해서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그가 익힌 해령천공은 마르지 않는 바다처럼 엄청난 내기를 길게 발출하는 것이 특징.

하여 한 번 막아낸다고 끝이 아니었다.

정심한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어지는 여파에 침수당하기 일쑤.

한데 장이서는 지금까지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자신의 공력을 받아내고 있었다.

끝도 없이 강풍이 몰아치는 이유도 이 때문.

"이런다고 믿을 것 같으냐!"

파앗! 결국 먼저 검을 걷어낸 화무진이 거침없이 연검을 휘날렸다.

한데.

쉬쉬쉬쉬쉭!

상대가 한 손을 뒷짐 진 채,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가볍게 피해내고 막아내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

심지어 공력이 더 커졌거나, 기운이 바뀐 것도 아니었다. 한데도 뭔가가 묘하게 달랐다. 이건 마치 엄청난 거목을 상대하는 기분.

'대체 이게 무슨....'

당황으로 물드는 사이.

장이서의 몸에서 불쑥 잔상이 쏘아지듯 옆으로 일권이 뻗쳐졌다.

그리고 등 뒤에 서리기 시작하는 불상의 자태!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

황실의 관료라고 무림의 무공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아니, 다양한 것으로 치자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다.

황실의 숨겨진 서고에는 그간 모아들인 무공의 필사본만 수만 권이 넘기 때문.

그중 아라한신권은 화무진이 직접 목도한 무공 중 하나였다. 그것도 전대 사대금강과의 대련을 통해.

하여 잘 알고 있었다.

아라한신권은 빠르고 타점이 정확하나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이 약점.

반면 자신의 해령천공은 심해처럼 깊고, 천근처럼 무겁다.

전대 사대금강을 생각하면 허용 당해도 끄떡없을 터.

'살을 주고 뼈를 깎겠다.'

하여 마음을 굳게 먹고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장이서의 아라한신권은 여타 소림의 무승들이 펼치는 초식과는 달랐다.

청불상이 아닌 황금불상!

『진 아라한신권(眞 阿羅漢神拳) 불시해탈(不時解脫)』

꽈아아아앙!

"큭?!"

주르르륵!

천둥 같은 굉음과 함께 격타당하는 순간 열댓 걸음을 밀려나 버린 화무진.

주륵!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얕긴 하나 내상까지 입은 것.

'어떻게...?'

혼란으로 사고가 정지했다. 아라한신권의 일격이 이렇게 묵직했던가?!

이건 자신이 본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무공이었다.

내기의 크기는 전대의 사대금강보다도 못했으나 깊이가 달랐다.

마치 같은 껍데기에 속에 전혀 다른 알맹이를 채워놓은 느낌.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비로소 아라한신권이 제 짝을 찾은 기분이었다.

'설마....'

불신으로 가득 채워진 마음에 한 줄기 바람이 스멀스멀 번진다.

하나 아직은 이르다.

팟! 자리를 박차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화무진.

이것마저 막아내면 인정해 주리라.

이내 그의 검에 푸르른 기운이 서리고, 태양을 등진 그 순간.

『해령천공(海靈天功) 파수검(波水劍) 청룡폭포(靑龍瀑布)』

푸화아아아악!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리그음과 동시에 거대한 기(氣)의 폭포가 떨어져 내렸다.

"아니?!"

"헉!"

그야말로 전율이 일지 않을 수 없는 광경.

반면 장이서는 고개를 들어 떨어지는 폭포수와 일검을 무심히 바라봤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손바닥을 쫙 펼친 채 하늘로 뛰어올랐다.

거대한 기의 폭포를 고작 손바닥 하나로 응수하겠다는 것인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행위!

이윽고 공중에서 맞부딪치는 그 순간.

푸화아아아악!

경천동지할 폭포수가 장이서를 무참히 덮쳤다!

"대, 대장...."

부호위들의 눈이 망연자실로 뒤덮인다.

설마 끝난 것인가? 그럴 리가. 승부는 끝까지 봐야 아는 법.

파앗!

갑작스레 안쪽에서 폭포수를 뚫고 황금 빛줄기가 쏘아져 나왔다.

"음?"

이에 바닥에 착지한 화무진이 당황하며 고개를 들쳐 올렸다.

폭포수에 구멍이 생기다니. 그러나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

파파파파팍!

삽시간에 터져 나오는 빛줄기만 무려 열세 개!

『남천능가경(南天楞伽經) 진 관음십삼장(觀音十三掌)』

폭포수가 바닥에 다 떨어지기도 전에 콰아아아앙! 막대한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뿔뿔이 날려버렸다.

솨아아아-

이내 본질인 수(水)의 기운으로 화해 소나기가 되어 떨어지는 청룡폭포.

화무진은 넋이 나간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합장을 취한 채 서서히 하강하는 자.

"너는...!"

정호위 백서.

아니, 소림의 2대 조사 장이서다!

그의 몸에서 연기처럼 수증기가 뿜어지고 흐릿하게나마 부처의 형태를 취했다가 흩어져 사라졌다.

"...."

화무진은 눈매를 좁힌 채 침묵했다.

전력을 다하면 분명 짓누를 수 있다.

아직 성역은 쓰지도 않았고, 12성까진 선보이지도 않았으니.

하나 이건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젠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몸 안에 깃든 공력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불가해의 극이요, 신묘함의 끝이라는 것을.

마치 소림을 위해 태어난 근본 그 자체인 것 같았다.

"그게... 정녕 능가경이란 말이더냐?"

358.

#특별한 분 누구?

어느덧 의태신기를 마친 장이서는 그의 물음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능가경은 혈교의 무공이 아닙니다. 소림의 것이지. 맹주께서도, 그리고 왕야께서도 모두 그걸 알기에 찾으려 했던 것이고요."

화무진의 눈이 크게 흔들린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럼 이 흩날리는 물방울이 설명되질 않는다.

자신의 해령천공을 무(無)로 되돌려 버릴 수 있는 이런 심공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럼 그걸 어떻게 네가...."

익혔느냐고?

"왕야께서는 혈교의 손에 죽음을 맞는 동안에도 능가경만큼은 빼앗기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혈교의 손에 들어가선 절대 안 될 물건이었으니까요."

그의 죽음을 직접 본 건 아니다. 선유와 제갈소미에게 전해 들은 게 전부.

하지만 느껴졌다. 그의 절박한 의지가! 그리고 그것이 돌고 돌아 자신에게 닿았다.

"못 믿겠다면 소림으로 함께 가서 확인하셔도 됩니다."

화무진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을 찾아왔던 모용소보다는 훨씬 더 믿음이 갔다.

솨아아아아!

마침내 화무진의 등 뒤에 서려 있던 해일의 장벽이 사라지고, 검은 칼집에 담겼다.

종전이다!

"이름이 무엇이냐."

"백서입니다."

화무진이 흘깃 장이서의 뒤편을 살피곤 말했다.

"표정들을 보니 너에 대해 모르는 건 모두 마찬가지인 모양이군."

뒤를 돌아보자 먼발치에 맹주와 북개가 넋이 나간 얼굴로 서 있다.

비록 차이는 있으나 엄연히 소림의 무예. 확신은 안 서도 어지간히 놀란 모양.

"뭐, 다 알 필요는 없으니까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 대체 네 정체가 뭐지?"

천마신교 부교주 장이서다. 근데 모르는 게 좋을 거다. 이쪽은 진짜 역적이라.

"목표가 같다는 것만 알아주시죠."

장이서가 진이 다 빠졌다는 듯 힘없이 웃는다. 이에 화무진은 고개를 저으며 숨을 뱉었다. 이상하게 싫진 않은 녀석.

"널 완전히 믿겠다는 건 아니다. 확인이 끝날 때까지 유예하겠다는 것이지."

"그거면 충분합니다."

"날 부지런히 설득해야 할 것이다."

"어렵지 않죠."

"자신만만하구나."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게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혈교는 성정이 집요하며, 자존심이 강한 편입니다. 도발한 자는 짓눌러야 성이 풀리며, 목표로 세운 건 반드시 이루어야 잠을 잘 수 있는 녀석들이죠."

"꼭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모릅니다. 하지만 봐야만 아는 건 아니죠. 지금까지 해온 짓들이 그렇습니다."

혈교와는 참 길고 긴 악연이었다.

사도철부터 시작해 광의, 천악수라, 구자기, 산왕가주에 겸사익까지.

끝없이 그들과 부딪쳐 왔으니.

"그래서?"

"지금 보여드리겠습니다. 혈교가 어떤 녀석들인지."

지금? 그게 가능한 일인가?!

화무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러자 장이서가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린다. 이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조진평-!"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가고, 이내 한 사람에게로 꽂힌다.

"...!"

홀로 살금살금 무리에서 이탈하고 있는 자.

장이서가 말했다.

"쥐새끼처럼 어딜 그리 가시나. 지휘첨사께서 궁금하시다는데. 답은 해주고 가지?"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일순 정적이 흐르고.

조진평은 창공을 보며 짧게 한숨을 뱉었다. 그러곤 선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백서. 저 새끼부터 죽였어야 했는데."

"...!"

이에 주변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천천히 몸을 돌리는 조진평.

사람 좋은 웃음이 특징이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서릿발보다도 차갑게 변해 있었다.

"이번에도 일이 아주 피곤해져 버렸어."

"조, 조진평 자네... 흡!"

수와아아악!

그가 놀라는 동기를 향해 가차 없이 일검을 날렸다.

서걱! 베어지는 옷자락.

다행히 진자량이 뒤에서 잡아당긴 탓에 목숨은 건졌다.

"조심하게. 아무래도 우리가 알던 조진평이 아닌 듯하니."

남궁신과 진자량. 그리고 위지경 패거리까지. 부호위들이 그를 포위하듯이 선다.

이에 조진평은 두 손을 들어 보이는 시늉을 하곤, 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하며 웃었다.

"하하, 왜들 이러나. 장난 한번 친 것 가지고."

"장난? 두 번 치면 살아 있을 자가 없겠군."

"이봐, 자네들이 똑바로 봐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백서, 저자일세. 정말 저자가 청해의 이름도 없는 도련님처럼 보이는가? 정말 그리 생각해? 내 눈엔 음흉한 속내를 품고 들어온 마귀 같은데."

주제를 뒤흔드는 교활한 수법. 하나 상대를 잘못 정했다. 이미 백서는 동기들의 무한한 신뢰를 받는 대장. 이깟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하, 이 병신들. 귀가 있어도 들어 처먹질 않는군. 좋아! 백서 자네가 이겼네. 대단해!"

저벅, 저벅.

그리고 갈라지는 무리 사이로 그가 다가온다. 혈교의 계획을 사정없이 짓밟은 사내.

정호위 백서!

그가 화무진과 맹주. 그리고 북개와 연우일을 대동한 채 앞으로 나섰다.

조진평은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난 아직도 자네가 이해가 되질 않아. 어떻게 번번이 우리 계획을 이렇게 막을 수가 있지?"

"그게 중요한가. 자네가 혈교에서 온 첩자라는 게 더 중한 일이지."

"...!"

곳곳에서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에 조진평은 주변을 쓸 듯이 한번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인정하겠네. 역겨운 위선자 놀이는 여기까지 하지."

웅성웅성!

그의 인정에 장내는 더 큰 소란에 휩싸였다. 하나 조진평은 아랑곳없이 입을 털었다.

"날 지금까지 가지고 논 기분이 어떤가. 재밌었는가?"

"조금?"

"크큭, 백서. 처음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 때부터 자네를 없앴어야 했어."

"다 끝난 마당에 후회하는 것만큼 미련한 일도 없지."

"하하! 맞는 말일세. 하지만 너무 자축하지는 말게. 아직 다 끝난 거 아니니까."

조진평이 품에서 기다란 막대를 꺼내곤 곧장 심지에 삼매진화로 불을 붙였다.

"막아!"

그리고 위기를 느낀 남궁신의 외침을 시작으로 맹호단이 일시에 달려들었다.

하나 그보다 먼저 타들어 가는 음색이 흐르고, 곧이어 하늘 높이 붉은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신호탄이다!

철퍼덕! 부호위들이 무방비 상태인 조진평을 제압한 채 물었다.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바른대로 고하게."

그러자 조진평이 바닥에 다 타버린 막대를 턱짓하며 말했다.

"크큭, 이거? 별거 아닐세. 본래 오늘 계획에 여기서 살아 나갈 자 따위는 없었거든. 맹주든, 지휘첨사든. 뭐 아쉽지만 자네들까지도."

"뭐...?"

"이제 곧 모두를 황천길로 인도해 줄 자들이 올 거란 말일세. 하하하하!"

조진평의 광소에 장내가 분노에 휩싸였다.

그의 입에서 혈교의 흉계가 낱낱이 고해진 것. 특히 화무진은 참기가 어려운지 눈에서 살광을 번뜩였다.

단 하나.

장이서만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왜 놀라지 않는 거지?"

당연했다.

애초에 혈교의 목표는 양패구상. 누구든 살려둘 리가 없지 않은가.

"궁금했거든. 맹주를 잡을 칼이 지휘첨사라면, 지휘첨사를 잡을 칼은 대체 누구인지."

"설마.... 다 알면서 일부러 날 그냥 놔둔 것이냐?!"

조진평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쳤군! 그게 오늘 자네가 죽는 이유인 걸세. 그 오만함 말이야."

"말렸다고 안 올 것도 아니잖아."

"크큭.... 자네는 정말 대단해. 그래, 맞아. 와야지. 명색이 맹주와 지휘첨사를 잡을 절호의 기회인데. 당연히 와야지! 기대해도 좋아. 본교에서 아주 특별한 분들을 모셨으니까."

장이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특별한 분 누구.

서패왕? 혈존?!

"흑혈(黑血)."

그때 조진평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3년 전과 똑같이. 오늘도 이곳을 검은 피로 물들일 것이다! 하하하하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