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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 *

무후사 인근.

붉은 문주가 자리한 입구 쪽으로 한 미인이 걸어온다.

올려 묶은 흑발에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특이점이 있다면 흑색 창을 역수(逆手)로 움켜쥐고 있다는 것.

"멈추어라."

그녀의 등장에 범 가면을 쓴 금의위가 길을 막아섰다.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행색.

"여긴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신원을 밝혀라!"

여인은 방긋 웃으며 답했다.

"후후, 창귀신(槍鬼神)이라고 하면 알려나. 모르면 알아둬. 그래야 누가 보냈는지라도 알지."

"뭐?"

퍽!

눈 깜빡할 사이에 그대로 목을 관통해 꽂혀버리는 흑창!

이에 여인은 창에서 손을 떼곤, 비명도 못 지른 채 파르르 떠는 사내의 옆을 스쳐 지나며 말했다.

"적아린이야."

푸화아아악!

그리고 뒤로 가 창을 뽑아버림과 동시에 정면에 있는 다른 금의위를 향해 내던졌다.

퍼억!

또다시 절명하는 금의위 하나.

"저, 적이 나타... 끅!"

털썩! 이어서 침입을 알리려던 주변의 금의위들이 삽시간에 줄줄이 쓰러졌다.

그리고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흑의인들.

누군가는 백발에 눈썹 대신 둥그런 문신을 한 채 장태도를 패용했고, 또 누군가는 거친 야수 같은 체구에 두 눈동자가 녹색이다. 심지어 얼굴에 기괴한 문신이 가득 그려진 이도 있다.

그야말로 각기 용모가 범상치 않고 사이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들.

혈교의 집행자.

사술과 무공 모두에 통달한 최강의 살수들.

흑혈(黑血)!

그들이 나타났다.

"바깥은 전부 처리했다."

적아린의 옆으로 다가오는 백발의 장태도(長太刀). 동영의 미녀 고수 혈나비다.

"또 무슨 일이길래 신호탄까지 쏘아 댔을까."

적아린이 시체에서 창을 뽑아 들자 혈나비가 바닥에 기괴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인(手印)을 그리는 순간.

슈우우우욱!

바닥에서 새하얀 연기가 솟아오르고, 둥그런 문(門)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안에 사당 앞의 모습이 그려졌다.

무릎이 꿇려진 채 제압당한 조진평.

그리고 통탄하는 맹주와 북개. 격노하는 화무진.

"다 살아있군."

혈나비가 눈썹 문신을 좁히며 중얼거린다.

자신들의 원래 계획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

맹주나 화무진 둘 중 하나는 없어야 정상이거늘.

"일흉이 그러면 그렇지. 또 우리만 뒤치다꺼리하게 생겼네."

뭐 하루 이틀 일은 아니라 놀랍지도 않다. 3년 전 청해에서도 그 고생을 했지 않은가.

'그래서 혹시 몰라 전부 데려왔지.'

상위 서열 다섯만 뭉쳐도 입신의 고수를 잡는다는 게 바로 흑혈이다.

한데 지금 이곳엔 서열 1위인 적아린부터 10위까지 전원이 다 모였다.

여기에 뒷받침해 줄 자들도 50명.

이 정도면 맹주의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승리는 기정사실이다.

한데.

"잠깐."

혈나비가 사술을 거두어들이려는 찰나. 적아린이 이를 제지했다.

"왜 그러지? 빨리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있어 봐."

그러곤 골똘히 사당 안의 광경을 살폈다.

정확히는 조진평 앞에 선 앞머리를 가린 사내. 처음 보는 자다.

'근데 왜 낯이 익은 건데?'

묘했다. 원래 누굴 이렇게 오래 보고 있는 편이 아니거늘. 이상하게 눈이 안 떼어졌다.

뭐지? 심지어 심장이 두근두근 거세게 뛴다. 이건 마치 눈은 알아보지 못해도 몸이 기억하는 느낌.

'잠깐....'

그 순간 적아린의 뇌리가 띵 하고 울렸다.

'일흉의 계획이 언제 실패했었지?'

본래 일흉은 혈교 내에서도 음험하고 영악하기로 정평이 자자한 자다.

무식하고 파괴적인 혈교의 특성상 군사라는 직위는 없으나, 최고의 두뇌를 꼽으라면 단연 그를 앞에 세운다.

워낙 철두철미한 탓에 한번 판을 짜면 결코 실패를 모르던 자.

한데 그런 그가 근래 들어 번번이 실패를 맛보았다.

언제?

'장이서. 너를 만났을 때.'

그리고 지금 일흉의 계획이 다시 무너졌다.

화무진도, 맹주도.

누구도 죽지 않고 나란히 서 있다.

가장 앞에 선 의문의 사내와 함께!

이거... 너무 익숙한 광경 아닌가.

꿀꺽. 적아린의 울대가 꿀렁이고, 전신의 솜털이 바짝 섰다.

그리고 말했다.

"너야...?"

359.

#허망한 최후

적아린은 묻고 제 입으로 답했다.

"너네."

생각하고 보니까 보인다. 한시도 잊은 적 없던 그의 모습이 서린다.

무엇보다도.

"아...."

몸 안에서 타오르듯 터지는 그때의 희열!

과거 혈마귀를 접견했을 때의 감각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그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중원으로!

"돌아간다."

"...!"

그리고 적아린의 입에서 도저히 믿기 어려운 말이 뱉어졌다.

돌아가다니. 어디를. 후문을 노리자는 건가? 흑혈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러자 활짝 웃으며 부언한다.

"오대련지로 돌아가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그야말로 청천벽력!

"적아린. 지금 뭐 하는 거지?"

서열 2위 혈나비가 다가와 정색한 채 묻는다.

"아직도 못 들었어?"

"제정신이야? 이대로 돌아가면 동방왕께서...."

스윽.

적아린의 흑창이 혈나비의 목 앞에 놓인다.

"오늘 책임자가 누구지?"

"...너다."

"그래, 나야. 기린아 적아린."

혈나비의 눈매가 와락 일그러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멸 행위.

하나.

"돌아간다."

혈나비는 품에서 꺼낸 도깨비 가면을 쓰고 몸을 돌렸다.

임무에 나선 이상 흑혈은 반드시 책임자의 명을 우선으로 한다.

서열 1위인 그녀가 가라고 하면 가야 하는 것.

"동방왕께 반드시 네 입으로 낱낱이 해명해야 할 거다."

"염려 마. 누구보다 좋아하실 테니까. 그리고...."

적아린이 흘깃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차피 못 이겨."

"뭐?"

적아린은 방긋 웃으며 걸어 나갔다. 그러곤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또 봐, 장이서.'

점점 장이서의 소용돌이가 커져만 가는 순간이었다.

물론 덕분에 몹시 난감해진 사람도 생겨버렸지만 말이다.

* * *

'뭐...지?!'

조진평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와야 할 자들이 오지 않고 있기 때문.

"뭐야. 특별한 자들이 온다더니. 아무도 안 오는데?"

"혹시 내일 오는 건가."

주변에서 맹호단이 진지하게 수군대자 조진평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닥치게! 조금만 더 기다리면 흑혈이 자네들을 지옥으로 인도...!"

"그러니까 언제 말인가."

"그, 그건...."

조진평은 당황하며 다 타버린 막대만을 살폈다. 분명 지금쯤이면 피의 축제가 벌어지고도 남았을 시간이거늘.

"온다. 반드시 올 것이다!"

무한한 믿음을 담아 발악하듯 소리쳤다. 하나 그래봤자 돌아오는 건 황량한 적막뿐.

"그만하지."

결국은 장이서가 나섰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그도 흑혈이라고 해서 내심 기대했다. 하여 천마안도 펼치지 않고 기다렸거늘.

"그만하긴 뭘 그만하는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너도 알 텐데. 이 정도면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조진평의 눈망울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러곤 이제야 알겠다는 듯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네놈이구나! 백서, 네놈이 또 수작을 부린 것이야! 대체 이번엔 무슨 짓을 벌인 것이냐!"

"모르지. 위에서 널 버린 걸지도."

"뭐?"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팽하는 게 너희 방식 아닌가?"

"어디서 그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천천히 생각해 봐. 앞으로 대화할 시간은 많을 테니."

장이서가 고갯짓하자 부호위들이 강제로 그를 일으켰다.

안 된다. 이대로 끝내선 안 돼!

여기서 벗어나 소식을 전해야 한다!

"잠깐! 자네 지금 나한테 이러면 크게 후회할 텐데?!"

"아직도 허언이 남았나?"

허언? 어디 듣고도 그리 자신만만할 수 있는가 보자.

"청해의 백가장. 바로 자네 집안 이야기인데. 이래도 듣지 않을 것인가?"

"뭐...?"

"설마 번번이 훼방을 놓는 자네를 우리가 그냥 놔둘 줄 알았는가? 이 사람아, 정신 차려! 자네 우릴 너무 우습게 본 거야."

설마.

"지금쯤이면 자네 집에 아주 특별한 손님들이 도착했을 걸세. 하하하하!"

조진평의 광소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어떤가. 이제 좀 실감이 나는가?"

장이서는 살짝 얼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 솔직한 표정. 아주 좋네. 마음에 들어. 자, 그럼 이제 자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겠는가?"

알겠냐. 고개를 내젓곤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준비한 건 그게 다야?"

뭐지, 이 새끼. 너무 태연한 반응에 조진평이 움찔했다. 하지만 이런 일 어디 하루 이틀 해보는가. 저거 허세다.

"이런 얘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자네 정혼녀. 듣자 하니 아주 미인이라던데."

조진평의 음침한 발언에 주변 모두가 크게 당황했다.

정말 이 정도까지 쓰레기일 줄은 몰랐기 때문. 하지만 누구보다도 황당한 건 장이서였다.

"설마 진산을 말하는 거냐? 그녀한테도 자객을 보냈다고?"

"후후, 왜. 겁나나?"

당연하지. 말도 없이 내 신원 만드는 데 자기를 정혼자로 이용했단 걸 알면.... 어찌 나올지 벌써 등골이 서늘하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잘하게. 적어도 시체로 만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하하하!"

장이서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풀어줘."

"...!"

그러자 부호위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린다. 반면 조진평은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하하하! 뭐 하는가? 대장 말 들어야지."

부호위들은 이죽거리는 조진평을 사납게 노려보곤 결국 그를 풀어주었다.

이에 조진평이 어깨를 풀며 일어서는 순간.

서걱!

첨예한 소음과 함께, 툭! 바닥에 기다란 살색 덩어리가 떨어졌다.

"어?"

당황한 조진평이 물끄러미 이를 살폈다. 그리고 사라져 버린 제 우완을 깨닫고서야 뒤늦게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악!"

장이서다. 그의 천매검이 일격에 팔을 잘라 버린 것.

"생각해 보니까 동기의 몫을 아직 못 받은 것 같아서."

장이서가 잔혹한 미소를 짓는다.

"이 새끼야-! 너 미쳤어?!"

조진평이 고통에 눈물을 쏟아내며 소리쳤다.

"네 가족이. 정혼녀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것이냐!"

물론 당연히 어떻게 되면 안 되겠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까.

"해 봐. 열심히."

"이, 이 마귀 같은 새끼-! 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으냐! 크아아아!"

정수리까지 화가 차오른 조진평이 괴성을 터트리며 악귀처럼 맹주에게 달려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동귀어진으로 그라도 데리고 가겠다는 것.

하지만 거기라고 다를까.

"실로 추악한 놈이로구나."

묵직한 음색이 흐르고.

콰과과과과!

바다와도 같은 광활한 내기가 용솟음쳤다.

신군 화무진이다!

수와아아악!

반원으로 커다랗게 검이 그어지고, 툭! 조진평의 왼팔이 어깻죽지부터 시원하게 잘렸다.

"끄아아아아아-!"

세상 떠나갈 듯이 쏟아져 나오는 비명.

"끌고 가라."

"충!"

금의위들이 달려와 단숨에 조진평을 감싼다.

"놔! 놓아라!"

이에 몸부림치며 반항하자 그대로 넘어트리곤, 두 발을 붙잡은 채 질질 끌고 나갔다.

"백서.... 백서어어어어-!"

혈교 첩자의 비참하고도 허망한 최후였다.

아마 내일부터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에서 살아도 산 게 아닌 끔찍한 나날이 이어지게 될 것이다.

"고맙네."

맹주는 대신 나서준 화무진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에 그는 괜스레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레 답했다.

"저놈이 꼴 보기 싫어서 나선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앙금에 금이 서리고 그 사이에 훈훈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장이서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다. 그러자 북개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지금 네 식솔이 다 죽게 생겼는데 웃음이 나와?! 마교 놈들도 그러진 않을 게다!"

아니, 마교니까 그럴 수 있는 거다.

"염려 마십시오. 집에는 미리 연통해 뒀으니. 아마 다들 피해 있을 겁니다."

"어, 언제?!"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벌렸다. 정확히는 피해 있는 게 아니라 기다리고 있겠지만.

"역시 대장...."

부호위들은 장이서에게 엄지를 추켜세웠다. 경외감이 한층 더 상승했다.

"부상자를 챙겨라."

화무진의 외침으로 빠르게 상황은 정리됐다. 부상자라고 해 봤자 연우일 하나. 말은 딱딱해도 내심 미안했던 것.

사실상 화해의 제안이다.

그리고 맹주 역시 이에 호응했다.

"화 대협.... 미안하고 또 고맙네."

"착각 마시오. 모든 의심이 사라진 게 아니니. 혈교를 없앨 때까지만 먼저 협조하는 거요."

서로를 마주 보는 시선에 수많은 말이 담긴다. 하지만 오늘 대화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비로소 관과 무림의 화합이 이루어진 것.

그리고 마침내.

"내게 찾아왔던 자는...."

화무진의 입이 열렸다.

"모용세가의 모용소다."

"...!"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비치었다.

모용소.

드디어 일흉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 * *

백가장 뒤편에 놓인 아담한 호수. 주변엔 잔디가 무성하고, 그 위에는 새하얀 양들이 소리 내며 줄을 잇는다.

회색의 석산(石山)들은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하늘엔 새하얀 구름이 둥실 떠다니니 그야말로 지상 낙원.

하지만 그 어떤 아름다운 풍경도 그녀 앞에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파파파팟!

호수 위를 비상하며 두 개의 쌍검을 우아하게 그어버리는 여인.

백서의 정혼녀 진산.

아니, 삼공녀 사해령이다.

콰아아앙!

불과 얼음의 기운이 가득한 차륜이 쏘아져 견고한 석산 하나를 와르르 가루로 만든다.

퐁!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호수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흩날리는 흑발에 그린 것처럼 완벽한 용모. 물론 예쁘기만 한 게 다라면 완벽이라는 말까진 안 할 것이다.

'아직 부족해.'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끝없는 질책과 무한한 노력. 그리고 사뿐히 물 위를 걸어오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기품!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다.

오죽하면 그녀를 찾아온 손님들도 넋을 잃은 채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적색 의복을 입은 자들.

혈교에서 온 자객들이다!

꿀꺽. 혈인들은 저열한 음심을 마른침으로 감춘다.

"네가 백서의 정혼녀냐?"

음흉한 물음에 호수 밖으로 나온 그녀가 고개를 갸웃 기울었다. 정혼녀? 그러곤 나지막이 말했다.

"나락."

슥. 그러자 그녀 앞에 별안간 은발의 사내가 부복한 채 모습을 드러낸다.

"...!"

분명 아무도 없었거늘! 혈인들은 당황했고, 나락은 담담하게 보고를 올렸다.

"공녀님께선 진산이라는 가명을 쓰고 계시며, 공식적으로는 백서라는 자와 정혼을 하신 것으로 되어 계십니다."

그녀의 눈매에 서늘한 기운이 물씬 풍긴다. 감히 누가 자신을 이용한단 말인가.

"나는 허락한 적이 없다."

고오오오오!

치솟는 살기! 혈인들은 사색이 된 채 얼어붙는다.

한데.

"백서는 부교주님께서 쓰시는 가명입니다. 지금 중원에 나와 계신 듯하고요."

"장이서?"

일순 그녀의 콧등에 예쁘장한 주름이 잡히고,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내 제안을 거절할 땐 언제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다. 장이서에게 전해. 내 이름을 빌린 대가는 치러야 할 것이라고."

"존명."

사해령은 차가운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하나 그녀는 알까.

자신의 입가에 3년간 한 번도 지어지지 않던 미소가 야트막하게 지어졌다는 걸.

"쳐라!"

그리고 혈인들은 알까.

그녀의 기분이 좋든, 말든.

수와아아아악!

"꺼억...."

자비는 없다는 걸.

그녀가 단숨에 혈인 다섯을 저세상으로 보내곤 말했다.

"치워."

그러자 어느새 후방에 일렬로 나타난 검은 피풍의를 걸친 마의 종속들!

"어, 어어어...."

몰려온 혈인들은 당황했다.

자신들을 섬찟한 악의(惡意)로 짓누르는 무리. 이 땅에 이런 자들은 오직 하나뿐이다.

"마...교?!"

"으아아아악!"

벌건 대낮, 혈인들에게 악몽의 시간이 도래했다.

그리고 그녀는 혈겁이 벌어지는 현장을 기품 있게 걸어 나가며 중얼거렸다.

"...인사라도 가야 하나?"

발걸음이 다소 가벼워지는 하루였다.

360.

#지옥 같은 선물

상황을 정리하고 맹주와 북개. 그리고 장이서와 화무진은 무후사 정원에 놓인 협탁에 자리했다.

"모용세가라니...."

맹주는 아직도 속이 진정되질 않는지 탄식을 뱉었다.

그럴 만도 했다.

모용세가가 어디인가. 무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오대세가 중 하나이자, 아랫세대 중에선 검으로 따를 자가 없다던 검성 모용학이 있는 곳이다.

더구나.

"끄응, 검영 모용소. 기억이 나. 과묵하고 든든한 놈이었지. 한데 그놈이 혈교였다니...."

북개의 말대로였다.

검성의 아우로써 공식적인 자리에서 왕왕 마주하기도 했었다.

빼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늘 말없이 제 형의 뒤를 지키는 게 참으로 듬직한 아우라 생각했거늘.

"그냥 혈교는 아닐 겁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장이서가 입을 열었다. 세 사람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젠 그가 말만 해도 촉각이 곤두세워진다. 그만큼 그의 존재감이 커졌단 얘기.

"그냥 혈교가 아니면?"

"일흉. 짐작건대 흉신팔주의 수장일 겁니다."

일흉은 무엇이고 흉신팔주는 또 무엇인가. 세 사람의 눈이 번쩍 커졌다.

장이서는 간단히 설명했다.

가면을 쓰고 활동하는 여덟 명의 배신자들이라고.

"그걸 어찌 아는가?"

이에 화무진이 의문을 드러냈다. 금의위에도 없는 정보이기 때문.

하지만 해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이 녀석 사부가 사냥꾼이외다. 혈교 전문 사냥꾼! 흘흘."

북개가 눈을 찡긋하며 나서줬기 때문. 말하지 않았느냐. 무영문은 내가 지켜준다고.

다소 오해는 있지만 어쨌든 뜻은 통했다.

"한데 그런 자들이 여덟 명이나 된단 말인가?"

"이제 셋입니다."

"음?"

장이서는 침묵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을 자는 이 안에 없었다.

'이 녀석이 없애버렸군.'

'오랫동안 홀로 싸워온 것이구나. 너는 대체....'

'흘흘, 역시 무영문!'

각자 생각은 달랐지만, 장이서를 바라보는 시선에 신뢰가 두터워진 건 동일했다.

"일흉이 모용소라면, 나머지 둘 중 하나는 분명 황실에 있을 겁니다."

정확히는 이흉이 황실. 육흉이 사도련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남은 게 그것뿐이니.

"음...."

맹주와 북개는 황실이라는 말에 침음을 뱉었다.

황실에 접근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

하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황실 쪽은 내게 맡기시오.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화무진이 확언했다. 그의 섬찟한 미소가 이리도 든든할 수가 없다.

이번엔 반대로 화무진이 물었다.

"모용소 쪽은 어찌할 건가?"

모두가 장이서를 살핀다. 어찌하긴. 뻔하지 않은가.

"모용소는 음흉하고, 교활한 자입니다. 오늘 같은 날에도 직접 나서지 않고 몸을 숨길 만큼. 분명 빠져나갈 구실 정도는 마련해 뒀을 겁니다."

뭐, 지금까지 해온 수법들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는 일.

조진평을 붙잡았다곤 하지만 솔직히 큰 소득은 없을 거다.

혈교는 고문 따위에 쉽게 입을 열 녀석들이 아니니.

그러니까.

"다 끊어내야죠. 그래서 결국 직접 걸어 나와 모든 걸 실토하게 할 겁니다. 그게 가장 어울리는 최후일 테니."

장이서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섰다. 북개는 두 팔을 벅벅 비비며 말했다.

"이젠 저놈이 저리 웃으면 무서워. 뭐가 나올지 아주 무서워 죽겠어."

"마찬가지일세."

맹주와 북개가 기분 좋게 웃으며 너스레를 부렸다.

화무진은 그 모습이 다소 신기했다.

천하의 신주오절이 저리 추켜세우는 자라.... 볼수록 끝을 알 수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지만.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반역만 아니라면."

장이서의 말에 화무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말하는 곳에 사람 좀 보내주시면 됩니다."

"그게 다인 것이냐?"

다다. 물론 일흉에겐 가장 지옥 같은 선물이 되겠지만.

* * *

- 중원 안휘성 합비.

성도에 자리한 거대한 마천루.

가장 꼭대기인 팔 층에는 거대한 원탁에 수십의 인사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겉으로 보면 그냥 길가의 아무개 중년처럼 보이겠으나 천만에.

이들이야말로 중원을 움직이는 큰손.

바로 오륜회의 대부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건 이들 세 사람.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사람을 오라 가라야? 서역 물 먹은 놈이라 그런가 예의가 없어!"

후줄근한 차림의 추레한 노부. 고리전장(高利錢莊)의 돈무.

"크흐흐. 중요한 안건이 있다지 않은가. 어디 들어나 보자고."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 금빛 장신구로 가득한 금일상단(金一商團)의 황금만.

"쓸데없는 소리하려고 부른 거면 오늘 그 버릇 단단히 고쳐주지."

기회표국(機會?局)의 용역.

바로 이들이 오륜회의 실세였다.

남들은 모르지만, 비밀리에 모용소에게 충성을 맹세한 잡견들!

그리고 오늘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건, 얼마 전 들어온 서역인 때문이었다.

그가 제안할 안건이 있다고 했기 때문.

물론 그게 무엇이든 승인해 줄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

아주 제대로 개망신을 줄 생각이었다.

본래 처음 온 자에게 위아래도 가르쳐줄 겸 신고식이 필요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여, 형씨들! 잘 지냈어?"

빠직. 세 사람의 이성이 뚝 끊어졌다.

바로 이게 문제였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사사건건 하대라니.

"이보게, 소오 소협.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최소한의 예를 갖추라고!"

"에이, 서역에선 다 이렇게 해. 그리고 알잖아. 나 우리말 서툰 거."

"서툴기는! 지금 잘만 하고...!"

"됐고. 다들 모였지?"

이런 개 잡종 놈이! 소오가 자리에 털썩 앉자 세 잡견이 격분한 채 그를 노려본다.

오냐. 뭐든 말만 꺼내 보거라. 텃세가 뭔지 보여주마.

"부른 용건이나 말하게. 시간 없으니."

"아, 별건 아니고. 내가 회주를 한번 해볼까 해. 응원해 줘."

"뭐, 뭐라...?"

이 미친놈이 지금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인가. 뭘 해?

"언제까지 친목질만 할 거야. 이제 오륜회도 다시 태어나야지.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한번 회주 해볼게. 오륜회는 나한테 맡겨."

"네놈이 정녕 미친 것이냐?!"

결국 고리전장의 주인 돈무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크흐흐. 이런 개잡놈을 보았나. 네가 뭐? 회주를 해?"

금일상단의 황금만도 힘을 보탠다.

"더 들을 것도 없군. 내가 제안하지. 이 서역인 놈을 오륜회에서 내쫓는 안건으로."

기회표국의 용역까지.

실세인 세 잡견이 나서자 나머지 회원들도 '옳소, 옳소.'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와, 이렇게 나온다고? 난 우리가 공존공영하고 동고동락할 막역지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설마 서역인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닥쳐라! 그게 서역인이 쓸 말이더냐!"

그것도 그렇네.

"더 들을 것도 없네! 당장 이놈을 오륜회에서 내보내세."

잡견들을 필두로 상인들이 눈을 부라린다.

그러자 소오는 픽 웃으며 검은 안경을 슬쩍 중지로 올리며 말했다.

"친구로 쉽게 갈 일을 이리 원수로 나오시겠다면.... 뭐, 나도 어쩔 수 없지."

"크하하하! 네놈이 어쩔 수 없으면 뭘 어쩔 것이냐?"

잡견들이 비웃으며 골려대는 순간.

"들어오시죠."

소오의 입에서 대뜸 존대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삽시간에 입구에서 두 무리가 좌우를 포위하듯 우르르 몰려들었다.

한쪽은 가슴에 맹(盟)이라는 글귀가 박힌 무사들!

그리고 다른 한쪽은 황색 갑옷에 범 가면을 쓴 관군들!

"무, 무림맹과 금의위?!"

모두가 아연실색하며 소스라친다.

이에 소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씨들 한번 잘 생각해 보자고. 사이 좋게 다 같이 친구가 되어 관과 무림의 비호를 받을래. 아니면 원수가 돼서 끝까지 가볼래."

"아아아...."

잡견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x됐다.'

완전히 당했다는 것을.

소오가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투표 시작합시다."

오륜회에 첫 번째 주인이 탄생했다.

* * *

- 요녕성 심양 모용세가.

모용소는 오늘 몹시 기분이 좋았다.

삭막하고 차갑기만 한 그에게서 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려질 만큼 좋았다.

제 형을 닦아주는 손길도 그래서 더 다정했다.

당연했다.

오랜 세월 쌓아온 대업이 드디어 그 끝을 이루게 되었으니.

모용세가를 넘어 무림으로. 무림을 넘어 황실로. 아니, 그 이상까지도.

천하를 자신의 그림자로 뒤덮을 수 있으리라.

생각만 해도 짜릿한 자극.

이젠 달라질 것이다.

숨어 있는 그림자가 아니라 진정한 왕으로서 살아가리라.

더욱 대범하고, 더욱 포용성 있게.

그러니까.

"주, 주인님!"

"왔느냐."

모용소가 생전 처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종복을 맞이했다.

반면 종복은 덜덜 떨며 바닥에 넙죽 엎드린 채 소리를 질렀다.

"아, 암야검이 실패했다고 합니다!"

챙그랑! 그 순간 모용소의 머릿속에 그려둔 미래가 얇은 유리병처럼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렸다.

"뭐...?"

"카악!"

그대로 종복의 머리를 붙잡고 대롱대롱 공중에 띄운다.

미소는 사라지고, 대범함과 인자함은 깨진 유리 조각에 갈가리 찢긴 지 오래.

"네놈이 드디어 실성을 한 것이구나. 다시 지껄여보거라."

종복의 동공이 사정없이 굴러가고 이내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끄으으윽.... 사, 살려주...."

"다시!"

"흐으윽.... 암야검이... 실패를...."

"크아아아아아-!"

쾅쾅쾅쾅쾅!

모용소가 눈이 뒤집힌 채 포효하며 종복을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한 번도 아니고 사정없이 십여 차례를!

이건 그냥 미쳐버린 수준.

결국 종복을 완전히 만신창이로 만들고 난 뒤에야 씩씩대며 집어 던졌다.

그러곤 아무 일 없다는 듯 새근새근 잠이 든 제 형을 보며 간신히 분노를 억눌렀다.

이내 뇌리를 스치는 이름 하나.

"백서.... 혹 그놈의 짓이냐?!"

모용소는 혈교의 제일 두뇌.

결코 우연으로 벌어진 일이라 생각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그러했듯 이번에도 마찬가지.

"백가장. 청해로 간 혈인들은 어찌 되었느냐?!"

모용소의 자비 없는 물음에 종복은 탈출하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곤 힘겹게 말했다.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크아아아아아아!"

쾅쾅쾅쾅쾅!

또다시 이어진 모용소의 폭주. 이 정도면 종복이 살아 있는 게 용한 수준.

"백서. 백서. 백서!"

모용소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그의 이름을 뇌까렸다.

마치 손바닥에서 놀아난 원숭이가 된 기분. 도대체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역겨움이던가.

"빌어먹을 부교주가 사라지니, 웬 무명소졸 따위가 내 앞길을 가로막는구나."

피가 끓다 못해 얼굴이 새하얘졌다.

하나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

'난 모용소다. 천하를 가질 모용소!'

그가 결의를 다지곤 엄명했다.

"지금 당장 오륜회로 갈 것이다. 온전한 무림을 가질 수 없다면, 맹주의 상태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끌어내려 주마!"

오륜회에 속한 부호들. 그리고 그들이 고용하고 부리는 자들.

이들을 움직이면 개방이나 하오문보다도 빠르게 판을 뒤흔들 수 있다.

그러니 곧장 오륜회를 소집해 회주에 오른 뒤 천하를 뒤흔드는 거다.

충성을 맹세한 세 명의 잡견이 있으니 어렵지도 않은 일.

"백서. 네놈의 과오가 이 땅에 얼마나 큰 피를 불러오는지 내가 똑똑히 가르쳐주마!"

모용소가 거침없이 나선다.

한데.

"뭣 하는 것이냐? 앞장서지 않고!"

넝마가 된 종복이 무릎을 턱 꿇고는 엉엉 울며 소리쳤다.

"오륜회를 빼앗겼답니다!"

"뭐...?"

휘청거리는 모용소. 동공이 풀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으아아아아아-!"

그날 아주 오래도록 분노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몰래 투명한 눈물을 흘리는 그의 형.

검성 모용학이 있었다.

361.

#끌어낼 방법

회동이 끝이 났다.

"연통하겠소."

화무진은 무심하지만 그다운 인사를 건넸다.

조진평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질질 끌려가 마차에 실렸다.

"진무사의 도움을 잊지 않을 걸세."

맹주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고, 화무진은 고개를 젓고는 답했다.

"고마울 것 없소. 내가 믿은 건 무림맹이 아니니까."

화무진의 시선을 따라 모두의 고개가 장이서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화무진은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널 지켰다. 그게 내가 널 돕는 이유다."

말에 다소 어폐가 있는 거 아닌가. 왕야가 지키려던 건 내가 아니라....

"받아라."

하나 화무진은 네 대답 따윈 필요 없다는 듯 화통하게 패를 건넸다.

"이건...."

황색과 흑색이 어우러진 패.

지휘첨사의 상징이 담긴 신패였다.

이는 장이서를 지지하겠다는 선언과도 마찬가지.

"앞으로 네 뜻이 나의 뜻이다."

"...!"

맹호단원과 정의대원은 경악과 동시에 자랑스러운 시선을 담아 보냈다. 맹주와 북개도 흐뭇하다는 표정.

다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는 건지.

역적인 천마신교의 부교주에게 날개를 달아주겠다는 뜻이다.

물론 거절할 마음은 없다.

"또 뵙겠습니다."

신패를 품에 넣곤 포권으로 답례를 올렸다.

"넌 관인이 더 어울리는 상이다. 원한다면 말해라. 자리를 내어줄 테니."

그러기엔 지나온 길이 너무 멀다. 웃음으로 그를 배웅했다.

화무진은 그렇게 떠나갔다.

분명 그라면 오래되지 않아 황실에 숨은 첩자를 찾아내 줄 것이다. 이흉이 치러야 할 대가는 말할 필요도 없고.

훈훈한 웃음을 지은 것도 잠시.

곧이어 두 번째 작별이 이어졌다.

"맹주님,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우일과 정의대였다.

그는 치료를 위해 복귀를 결정했다. 급소를 피해 위중한 건 아니나, 요양이 필요한 건 기정사실.

물론 본래의 성정대로면 옆에서 뼈를 묻겠다며 버텼겠지만, 지금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었다.

"이젠 자네가 맹주님의 진짜 호위일세. 그리고 고맙네."

백서. 아니, 장이서.

그라면 그 어떤 위협이 닥쳐도 막아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

"충-!"

맹호단은 떠나가는 선배들에게 포권을 취해 인사를 올렸다.

그렇게 모든 일정이 끝이 나고.

"어서 오십시오, 맹주님!"

등 총관의 마중과 함께 마침내 맹호원으로 복귀했다.

"하하, 장원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나?"

고작 며칠이지만, 단원들은 숙사에 도착하자 더없는 기쁨에 잠겼다.

하마터면 중경의 기루에서 죽을 뻔하기도 했고, 또 관과 무림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으며, 동료인 줄 알았던 조진평의 실체까지 알게 되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날이 마치 수년은 흘러간 기분.

확 풀리는 긴장감에 녹초가 되어 쓰러진다.

확실히 연무장에서 수련만 하던 삶과는 천양지차다. 떨리면서 서늘하다.

그래도.

"고생했다."

장이서가 건네는 생존 신고에 피로는 눈 녹듯 사라지고, 심기는 한 층 더 견고해지는 맹호단이었다.

*

시간은 금세 지났다.

씻고, 갈아입고 하다 보니 어느덧 해질 저녁이 되었다.

장이서는 맹주의 호출에 안채로 향했다.

북개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달려와 맞이했다.

"왜 이리 늦은 게야?"

"씻느라고요. 근데 안 씻으셨습니까?"

"천일까진 괜찮아!"

내가 안 괜찮다. 피부로 호흡하며 맹주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설핏 봐도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 하나 금세 이를 갈음하곤 단조롭게 말했다.

"앉게."

부른 용건은 간단했다. 다음을 논의하기 위함.

무림에 숨어든 혈교의 간흉도 찾아냈고, 금의위와 손도 잡았으며, 오륜회마저 빼앗았다.

이제 남은 건 하나.

일흉 모용소를 어떻게 처단하느냐다.

"말해 뭐 해? 당장 척살령부터 내려야지!"

북개가 먼저 의견을 개진했다. 심정만 놓고 본다면 백 번이고 그게 옳다.

정황상 그가 흉신팔주의 수장.

지금까지 무림에 일어난 괴사들은 모두 그가 짜놓은 계략이었을 공산이 컸다.

단연 오흉이었던 구자기도 마찬가지.

원한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하나.

"모용세가는 오대세가 중에서도 손꼽히는 곳입니다. 신중하게 다가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장이서는 한발 물러나 보수적인 의견을 말했다.

"신중은 개뿔! 그놈이 혈교인 걸 이제 우리가 다 아는데. 양심이 있으면 거기 남아 있겠느냐? 벌써 짐 싸 들고 도망갈 준비나 하고 있겠지. 그전에 가서 잡아야 할 거 아니냐!"

글쎄. 과연 그럴까.

"제가 생각하는 일흉이라면 어디도 가지 않을 겁니다."

"으잉?!"

"그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디일 것 같습니까."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을 최고로 꼽는 건 비단 무사들이 강하거나 많기 때문만은 아니죠."

장이서의 이어진 말에 북개와 맹주는 곧장 침음을 삼켰다.

무슨 말인지 대번에 이해가 됐기 때문.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을 최고로 꼽는 이유는 단순히 세력의 크기 때문이 아니었다.

핵심은 바로 권위(權威).

세간에 미치는 영향력이었다.

이를테면 당문은 당가라는 집성촌 위에 세워진 성탑.

그들을 적대한다는 건 수천이 넘는 당가의 혈족들을 베어내야 한다는 것.

소림은 또 어떠한가.

사찰을 찾는 수많은 시주들과 하산한 속가제자들을 합하면 천하에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모용세가도 마찬가지였다.

"끄응.... 모용가는 오랜 왕족의 핏줄. 그리고 요녕성은 그 왕족을 모시는 가신들의 철옹성이나 다름이 없지."

북개가 탄식하며 수긍했다. 요녕성의 군부와 관리들은 기본이오, 백성들마저 모용가를 떠받드는 자들이 태반.

그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곧 제 집이라는 얘기다.

"맞습니다. 그러니 몰아세우려고 하면 더더욱 성벽을 쌓고, 숨으려고 들 겁니다. 그사이 피해는 늘고, 수많은 피를 흘리겠죠. 더구나 정황일 뿐, 직접적인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감정만 앞세워선 도리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이런 염병! 그럼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끌어내야죠."

장이서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청천벽력 같은 말을 이어갔다.

"무림맹 대총회를 열어주십시오."

맙소사.

두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무림맹 대총회(武林盟 大總會).

말 그대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뇌들을 불러 안건을 정하고 논하는 자리!

"그건 갑자기 왜?!"

"우선 맹주님의 병환 소식을 모두에게 알릴 겁니다."

"미친 게야?!"

"어차피 알려져야 할 일입니다. 해야 할 일이고요. 그 몸으로 더는 위험합니다."

말문이 턱 막힌다. 맞는 말이기 때문.

모용소 입장에선 궁지에 몰린 이상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더구나 놈의 정체도 알아냈으니 이제는 위험에서 벗어나야 할 시점.

"좋다. 그다음은?"

"그 자리로 모용소를 끌어내 단죄할 겁니다."

"...!"

맹주와 북개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까는 놈이 숨으려고 들 거라면서? 더구나 대총회면 함정인 걸 뻔히 알 텐데. 거길 기어 나오려고 하겠느냐?"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장이서는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북개는 그 순간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왜일까. 왜 이놈의 말대로 될 것만 같은 것인가.

"모용소는 이번에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내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

그러니까.

"보름 뒤, 대총회에 모용소를 초청하고 백서란 자가 중대 발표를 할 것이라 천명해 주십시오."

"...!"

꼴깍. 두 사람의 목젖에 마른침이 삼켜졌다.

*

"후."

장이서가 떠나가고 남겨진 맹주와 북개는 길게 한숨을 뱉었다.

"더 늙으면 죽음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저놈이 웃을 때마다 십 년씩 늙어!"

맹주는 깊이 와닿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이젠 뭘 꾸밀 작정인지 짐작도 안 간다. 좇아가려다 폭삭 늙는 기분.

"대총회는 그렇다고 치고, 제 이름은 왜 알리라는 게야?"

북개는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건, 의문은 들어도 의심이 안 든다는 거였다.

"흘흘흘, 이상해. 아주 이상해. 말이 안 되는데 왜! 모용소의 앞날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게지? 이봐, 맹주. 나 설마 노망인가?"

그럴 리가. 지극히 정상이다.

장이서의 주변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공통적인 증상.

"근데 자네는 왜 말이 없는가?"

"음...."

북개의 물음에 맹주는 길게 침음을 뱉고는 말했다.

"볼수록 이상해서 말일세."

"저놈 이상한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그게 아니라, 소림의 무공을 알고 있지 않았는가."

그랬다. 무후사부터 돌아올 때까지는 보는 눈이 많아 쉬쉬했으나, 분명히 보았다.

심지어 맹주가 알고 있는 심공의 종류만 무려 네 가지.

뇌공(雷功), 혈마공(血魔功), 독공(毒功), 그리고 소림의 정공(正功).

아무리 무영의 제자라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체질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에 따른 상성이라는 것이 있는 거고.

한데 전혀 연관도 없고, 관계도 없는 네 개의 심공이 그의 몸 안에서 용솟음치고 있던 것.

심지어 어수룩한 게 아니라 하나하나가 천하를 들썩이게 할 수준.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지 않은가."

다른 이들은 몰라도 신주오절인 두 사람이 장이서의 움직임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때 그가 보여준 건 분명.

"신승. 그 친구가 떠오르긴 했었지. 아니, 그냥 떼다 붙여놓은 줄 알았어."

"내 말이 그 말일세."

신승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따라 하고 있었던 것.

"한데 그게 왜. 뭘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나. 사부한테 배웠겠지. 그 아이 사부가 누구인가. 보기만 해도 무리를 꿰뚫고, 숨소리까지 따라 하던 괴물 한무영 아닌가."

"음...."

"더구나 무공도 조금 다르더구먼. 무영이 제 심득을 더한 것이겠지."

안다. 그럴 수도 있다. 맹주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왜. 뭐가 문제인 게야?"

북개의 물음에 맹주는 끝내 털어놓았다.

"백서에게서 자꾸 다른 아이가 보이네."

"다른 아이? 누구."

"103호."

"헉!"

북개가 화들짝 놀라며 탄성을 뱉었다. 그러곤 이내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말했다.

"자네 그거 병일세. 미련이야! 내게 103호 얘기를 몇 번이나 한 줄 아는가? 신강으로 암행 갔을 때 웬 꼬마 하나 보더니 103호라고 노래를 불렀지. 운남에 갔을 때는 어떤가. 시장통에 지나가던 행인 보고 103호라며."

"...이번엔 다르네."

"당연히 다르지! 성립 자체가 안 되는데. 백서는 무영의 제자 아닌가!"

맞다. 분명히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자꾸 그 아이에게로 닿는다.

더구나 103호는 신승과 연을 맺은 사이.

분명 뭔가가 있다.

무엇보다도.

"사찰에서 날 도와줄 때. 그때 보았네. 분명 낯이 익은 얼굴이었어."

"익겠지. 당연히 익겠지! 자네 정호위인데. 봐놓고도 못 알아본 게 더 신기하구먼."

"내 말은!"

"거 쓸데없는 생각 넣어두고, 이번 일 끝나면 진짜 자네 몸만 좀 생각해. 아주 걱정 돼 죽겠어. 나보다 먼저 갈까 봐."

맹주는 답답함에 숨이 차올랐다가 친구의 진심 어린 걱정을 느끼곤 픽 웃음과 함께 날려 보냈다.

"알겠네."

물론 뒤숭숭한 마음까지는 막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362.

#흔들어 보죠

다음 날.

장이서는 북개에게 장원을 부탁하곤 마을로 나섰다.

다들 이번 일로 승기를 잡았다며 좋아했지만, 장이서는 못내 아쉬웠다.

'뿌리까지 뽑아 버렸어야 했는데.'

설마 모용소가 회동이 열리는 날까지 숨어서 안 나올 줄은 몰랐던 것.

더구나 마지막에 조진평을 팽한 것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그건 적아린의 변덕이었지만, 아무리 장이서라도 그것까지 알 수는 없는 일.

여하튼 이번엔 완전히 끝내줄 생각이었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이 철저하게!

객잔을 찾은 이유도 마찬가지.

"오셨습니까."

묘채경이 반갑게 맞이했다.

협탁에 앉자 그녀가 곧장 보고를 올렸다.

"말씀하신 것처럼 백가장엔 미리 연통해 두었고, 아무 피해 없이 습격을 막아냈다고 합니다."

장이서가 전방에서 화무진을 막고 있는 사이, 그녀 역시 후방에서 열일을 하였던 것.

"하온데 삼공녀께서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더군요. 얼굴이 다 빨개지셨다고."

"이런."

그럴 줄 알았다. 당차게 혼사를 거절한 제가 인사도 없이 정혼자로 위장했으니 당연히 뿔이 날 수밖에.

이번 일 마치면 술이라도 사 들고 가야 하나. 고개를 휘젓곤 화제를 바꿔 물었다.

"조진평은 어땠습니까."

그녀에게 맡긴 일은 두 가지.

하나는 백가장에 연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진평을 감시하는 거였다.

이에 묘채경은 씨익 웃으며 협탁 위에 서신을 척! 올려두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놈이 보낸 전서입니다. 원본은 원래 가려던 곳으로 보내고, 제가 필사해 둔 것이지요."

역시.

"근데 이걸 어떻게 구했소? 미리 확인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날아가는 비둘기를 낚아챘지요."

삐이이이! 순간 매 한 마리가 비둘기의 머리를 발톱으로 콱 찍어 누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누가 만리신조 아니랄까 봐.

픽 웃고는 서신을 읽었다.

암어로 숨겨진 글귀였지만, 두 사람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눈동자가 거침없이 빠르게 내려갔다.

맹주가 무후사로 이동하는 날과 장소. 그리고 말미에 적힌 그의 이명(異名).

"조진평이 암야검이었군."

분명 서신에는 암야검(暗野劍)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놀랐습니다. 우리가 알던 암야검은 다른 녀석이었지 않습니까."

낭인을 모아 사찰에 불을 질렀던 흑의인. 분명 그라고 생각했었다. 흥신방에서도 그렇게 말했고.

"한데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장이서는 다시 서신을 내려놓곤,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묘채경이 흥신방을 다녀온 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일을 꾸민 놈이 흥신방에 진천뢰를 구할 방도가 있느냐 물었답니다.'

사실 그때부터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보통 암습을 계획할 때는 반드시 준비되어야 할 것이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목표.

두 번째는 시간.

세 번째는 장소.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가 바로 칼이다.

상대를 없앨 방법!

이게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애초에 계획 자체가 무의미한 것.

그리고 흑의인이 암습에 준비한 칼은 바로 진천뢰였다.

한데 목표에 장소, 시간. 나아가 낭인까지 모아놓고 정작 제일 중요한 칼을 구해놓지 않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더구나 모든 것이 일흉의 계획이었음이 밝혀진 이상, 진천뢰를 구하지 못했다는 건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요. 그럼 대체 그는 누구였을까요. 왜 암야검이란 이명을 쓴 것인지...."

"글쎄요. 하지만 곧 밝혀질 겁니다. 그자가 숨은 곳에 믿을 만한 분을 보내놓았으니."

"보내요? 누구를요."

있다. 누가 있건 걱정이라곤 일절 되지 않는 그런 괴물 같은 존재가.

장이서는 화제를 바꿔 며칠간 무후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끝내 화무진과 손을 잡았으며 조진평은 최후를 맞이했고, 또 일흉의 정체가 모용소였다는 것.

그리고 그를 잡기 위해 무림맹 대총회를 열려고 한다는 것까지 말이다.

"모용소.... 들어본 적 있습니다. 검성 모용학이 태양이었다면, 모용소는 그의 그림자. 하여 검영(劍影)이라 불렸지요."

비룡당주답게 이름을 듣자마자 그에 대한 정보가 술술 나왔다.

"손속이 과하다는 말은 있었으나, 욕심이 없기로 유명한 자라던데. 정파 놈들의 위선은 정말 대단하군요."

그녀의 말대로 모용소에 대해 알려진 소문은 일흉이라는 파격적인 정체와는 몹시 달랐다.

협객은 아니지만, 정도인은 분명했던 것.

특히나 놀라웠던 건 가주의 흉사(凶事)였다.

"모용학이 쓰러지고, 모용소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일반적이라면 가문의 권력을 취하는 걸 생각할 터.

하나 아니었다.

"내려놓은 겁니다. 모용학의 아들인 소가주에게 가문을 맡기고, 본인은 간병을 자처했다더군요."

정체를 알면 그야말로 혀가 내둘러지는 일.

그 덕분에 모용소는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았다고 했다. 잠잠히 듣고는 감회를 밝혔다.

"인내할 줄 알고, 의심할 줄 아는 자입니다. 첩자로 치자면 최고의 자질을 가진 거죠. 대총회가 열리든, 말든 끝까지 혈교가 아니라고 우길 겁니다."

"그렇겠지요."

묘채경도 공감하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첩자들이 제 신분을 밝히는 건 죽어서 남기는 증거뿐이다.

물론 잡아낼 방법이 없다는 건 아니다.

"이런 자들을 움직이려면 모든 걸 의심하고, 또 의심하게 해야 하죠. 그러다 결국 본인이 만족할 만큼 납득이 되었을 때. 그때가 되어야 기어 나오는 것이 첩자의 본능 아니겠습니까."

묘채경이 씨익 웃는다. 그러곤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판을 짜는 데 특출난 인재들이 여기 있군요."

첩자 잡는 귀신.

방첩대 삼조장 미친개 장이서와 비룡당주 묘채경.

마주 보며 씨익 웃는 두 사람.

장이서가 두 개의 패를 협탁에 턱! 올리며 말했다.

"판 한번 흔들어 보죠."

하나는 지휘첨사의 신패이고, 다른 하나는 천마신패다.

"지금부터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두드리세요. 놈이 백서란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때까지."

"존명!"

일흉 모용소.

미안하지만 너의 악몽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 * *

피눈물을 흘리는 불상으로 가득한 방.

모용소는 오랜만에 붉은 악귀의 가면을 쓰곤 상념에 잠겼다.

온통 흑지로 가득해 빛 한 점 없는 곳에 이러고 있으니 설핏 보면 귀신이다.

하나 이는 그만의 오랜 습관이었다.

자신을 가면과 어둠 속에 감추고 있으면, 평소보다도 두뇌가 십분. 아니 백분 발휘되곤 했다.

"화무진과 맹주가 손을 잡았다는 건 내 정체를 알아냈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거기까지다. 아무런 물증도 없이 날 붙잡을 순 없다. 적어도 요녕에 있는 한은!"

장이서의 추측대로였다. 모용소는 도망가긴커녕 느긋해진 자세로 여유를 부렸다.

암야검은 죽어서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고, 혈교인 흑혈은 무후사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

화무진과의 만남도 그저 자신의 소견을 밝힌 것뿐. 덜미를 잡힐 행동은 하지 않았다.

드러난 건 기껏해야 심증뿐. 이것만 갖고는 절대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

"나 모용소가 이대로 끝날 성싶으냐? 천만에! 무림을 온전히 가질 수 없다면 모조리 다 부숴주마. 그리고 그 위에 새로 쌓겠다!"

반성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는 자. 그의 흉계가 다시금 태동을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주, 주인님!"

드르륵! 문이 열리고 그의 종복인 백색증의 사내가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무림맹에서 대총회를 연다고 합니다!"

"대총회?"

모용소가 가면을 벗고는 코웃음을 쳤다.

"한다는 게 고작 증거도 없이 수뇌들을 모아 뒷담을 늘어놓는 것이라니. 맹주란 작자가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맞습니다, 더구나 주인님을 직접 초청까지 하였습니다."

"날? 크큭,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거길 나가겠느냐?"

"예, 하온데...."

"또 무엇이냐."

"한 가지가 좀 이상합니다. 이번 대총회 때 발언할 자의 이름이 백서라고 합니다."

"백서?!"

모용소의 도끼눈이 번쩍 떠졌다.

백서라면 백가장의 아들내미 아닌가. 적도방을 막아내고, 자신의 계획을 망친 주범으로 의심되는 놈!

"그놈이 왜...?"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습니다."

"또 무엇이냐?"

"오륜회의 상인들이 앞으로 모용세가와는 일절 거래하지 않겠다고 통첩해 왔습니다."

"이놈들이...! 그새 회주에게 달라붙었구나!"

뻔했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딸랑이 잡견들이 그새 등을 돌린 것.

"예, 하온데...."

모용소가 매섭게 노려보자 종복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회주가 말하기를 이 모든 것이 백서의 뜻이라고 말했답니다."

"그게 무슨...?"

모용소는 정신이 얼떨떨했다. 대체 그 이름이 왜 오륜회에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그리고 하나가 더 있사온데...."

"또 무엇이냐?!"

"금의위에서 갑자기 요녕성을 감찰하기 시작했는데, 도지휘사가 한사코 물어보니 그것 역시...."

"설마!"

"백서의 뜻이라고 합니다."

"크아아아아아!"

모용소는 분노의 포효를 터트림과 동시에 종복의 멱살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백서, 백서, 백서, 백서! 도대체 뭐 하는 새끼인데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한단 말이냐!"

"끄으으...."

모용소는 종복을 휙 내던지곤, 바닥에 떨어진 가면을 다시 썼다.

그러곤 침착해진 어투로 중얼거렸다.

"무림맹도, 오륜회도, 금의위도. 모두 그놈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인데...."

도대체 어떻게. 이름도 없는 무명소졸이 어찌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

알아내야 한다. 반드시.

"당장 적도방주에게 연통하거라! 맹호원의 백서. 그놈에 대해 샅샅이 알아내라고!"

"하, 하오나 적도방의 의뢰는 오직 살인만이... 히익! 주인님의 뜻대로!"

고오오오오!

죽음의 위기를 느낀 종복이 빠르게 상답하곤 후다닥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남겨진 모용소의 머릿속엔 어느새 두 글자만이 남겨졌다.

백서.

이제부터 끝없이 뇌까리게 될 바로 그 이름만이 말이다.

* * *

귀주의 어느 이름 없는 숲.

백색 장포를 입은 백발의 노부가 산책을 거닐 듯 길을 나섰다.

긴 수염에 장발을 보면 설핏 신선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성난 주름에 부리부리한 이목구비가 포악한 맹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여중악.

정도에는 서검이라 불리는 신주오절 중 일인이자 화산의 종정이며.

"네놈들이로구나. 그 아이가 말한 혈귀들이."

적들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없는 서쪽의 악귀, 서악(西惡)이다!

장이서가 천리미향을 뿌려둔 흑의인의 거점에 바로 그를 보낸 것!

솨아아아아-!

산세를 뒤흔드는 전지적인 기운. 이내 손아귀에는 무형검이 쥐어졌다.

모르는 이가 봐도 그의 주변 공기가 일렁일 만큼 압도적인 광경.

이에 그의 앞에 모인 흑의인들이 침을 삼킨 채 대치했다.

사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일초지적에 불과한 수준.

이내 서검의 엄벌이 시작되려는 순간!

"그만두시게."

흑의인들이 좌우로 길을 벌리며 숲속에서 죽립을 눌러 쓴 노부가 걸어 나왔다.

뭐지?

그리고 그와 마주한 서검은 경악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네...!"

3년 전 불현듯 자취를 감추었던 그의 오랜 벗.

마찬가지로 신주오절 중 일인이자 동쪽의 현자라 불리던 자.

"오랜만이네, 서검."

동현 제갈상!

암각의 주인인 그가 이곳 귀주에 있었다.

서검의 손제자이자 암야검으로 믿고 있던 선유.

바로 그를 데리고서!

363.

#뭐가 더 필요한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제갈상을 따라 안으로 들어선 서검은 콧등을 크게 찡그렸다.

몹시 놀랐다는 그만의 표현이자 습관.

그럴 만도 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공터였거늘, 제갈상이 수인(手印)을 그리자 신기루처럼 마을이 하나 나타났기 때문.

"기억 안 나는가? 무림맹 비밀지부. 그곳이 있던 자리일세."

"누가 그걸 물었는가!"

서검의 입에서 노호가 터졌다.

당연히 안다. 아니, 알기에 물은 것이다.

과거 무영을 만났던 무림맹 비밀지부 암각.

그곳이 그때의 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으니.

"대체 여기서 뭘 꾸미고 있는 것인가?!"

이건 맹주에게도 듣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그도 모를 거다. 알았다면 허락도 하지 않았을 거고, 숨기지도 않았을 테니.

3년 전 암각은 폐쇄하였으니까!

제갈상은 전각을 둘러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그저 선배들이 하였던 일을 과거에도, 지금도 이어가고 있을 뿐이네."

서검은 십 년 먹은 음식이 체한 것처럼 가슴이 콱 막혔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인가?!

"암각은 네가 3년 전 사라질 때 무림맹에서도 지웠다. 그걸 잊은 것인가?"

"애초에 공식적으론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사라진 것도 아니지."

"제갈상!"

"목소리 낮추게. 저 안에서 자네 손제자를 치료 중이니."

고오오오오!

서검의 눈에 짙은 살기가 뿜어진다. 하나 제갈상은 아랑곳없이 말했다.

"걱정은 말게. 다행히 늦지 않았으니. 이곳에 왔을 때 이미 깨어나지 못할 만큼 중상을 입은 상태였지."

서검은 길게 침을 삼켰다.

무슨 상황인지 대번에 짐작이 갔기 때문.

장이서. 그리고 선유.

두 형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해한 채 칼부림을 한 것이다.

자칫했으면 형이 동생을 죽이고 장례를 치러야 할 뻔했다.

"어째서. 어째서 선유가 이곳에 있는 것인가."

"내게 데리고 있어 달라고 한 건 자네일세."

"나는 암각에 보낸 것이 아니다!"

"그럼 방법이 있는가? 사부의 원수를 찾겠다며 천산으로 들어가겠다는데. 화산에서 도망친 아이를 찾아달라고 나한테 온 건 자네였네."

충격적인 비화. 그랬다. 3년 전 선유는 원수를 찾기 위해 화산에서 도망쳤고, 미친 듯이 사방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그때의 그는 그야말로 뵈는 것이 없었고, 그대로 뒀다가는 그릇된 복수심에 미쳐 살귀가 될 것이 자명했다.

하여 서검은 고심 끝에 제갈상을 찾아가 말했다.

'내 손제자를... 찾아주게.'

그리고 제갈상은 묵묵히 이를 받아들였다.

사람을 찾는 데 제일로 꼽히는 그가 움직였으니,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요녕의 객잔에서 선유를 만났고, 술에 절어 있던 그에게 담담히 제안했다.

'날 따르거라. 그럼 수년 내에 네 눈앞에 원수를 데려다줄 테니.'

선유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두 사람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나마 서검에게 종종 안부를 보내온 것이 전부.

잘 있다고. 잘 지낸다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 숨어 있었다니. 그것도 제 형과 똑같은 암각의 요원으로!

"자넨 저들 형제에게 미안하지도 않은 것인가?!"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사무쳤다.

도대체 저들에게 얼마나 더 잘못을 저질러야 이 지독한 악연이 끝을 맺는단 말인가.

하나 제갈상은 그저 공허한 눈으로 이리 답할 뿐이었다.

"...그게 중한가?"

중하지 않다고.

"선유는 천산에 가지 않았고, 지금도 무사히 있지 않은가. 뭐가 더 필요한가."

오직 결과만 이루면 과정은 무엇이든 중요치 않다는 것.

그래, 그게 제갈상이다. 하나 그거 아는가? 이 미련한 사람아. 지금 선유를 그리 만든 게 그의 형이란 말일세.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네. 난 똑같은 일이 벌어진대도 또 똑같은 결정을 할 것이니."

"이 사람아...."

"걱정 말게. 이번 일은 선유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네. 그저 암야검이란 자의 계획을 알게 되어, 이를 알리고자 한 것뿐이니."

단지 마주한 장이서가 호위무사치고는 너무 위험해 보여 쉽게 신분을 드러내지 못해 벌어진 일일 뿐.

"치료만 마치면 처분대로 안가로 보내 대기시키겠네. 지난 3년을 그러했듯. 아무것도 모를 것이고, 아무 일도 없을 것이네."

서검은 수많은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끝내 입을 다문 채 몸을 돌려야 했다.

멀지 않은 날, 맹호원에 한번 들러야겠단 생각을 품고서.

선택은 자신도, 제갈상도 아닌.

이 아이들이 해야 하는 것이니까.

* * *

며칠이 흘렀다.

그사이 모용소의 모든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장이서는 만사태평하게 동기들과 노닐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장이서만 노는 거고, 나머지는 지옥.

"마, 막아!"

수와아아악!

"칵!"

내기가 실린 것도 아니고, 그저 목검을 휘두르는 것뿐인데도 단원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우선 언제 검이 날아드는지 그 틈을 읽어내기가 극히 까다로웠다.

움직임에는 흐름이 있기 마련인데 이건 속도와 힘이 뒤죽박죽인 느낌.

설령 운 좋게 막아낸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콰직!

그대로 박살이 나버리니.

분명 똑같은 목검이거늘 그의 검은 멀쩡했고, 단원들은 부서졌다.

오죽하면 검을 바꿔 달라 청해보기도 했다. 물론 결과는 그대로고 대가는 아팠다.

"크악!"

어느덧 열두 명째 쓰러졌을 때 창궁룡 남궁신이 말했다.

"저건... 검의 숨을 읽는 거다."

검의 숨. 예전에 부친께 물은 적이 있었다.

'어떻게 맹주님께선 나뭇가지로도 명검을 벨 수 있는 겁니까.'

그때 가주인 부친이 이렇게 답했다.

검의 숨.

그걸 읽는 것이라고.

쉽게 말하자면 검이 죽어 있는 도구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태를 이루는 미세한 기운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하여 특정 부위에 강도가 세지기도 하고, 반대로 약해지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바람을 잘 타다가도 갑자기 무거워질 수도 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를 읽는다면 나뭇가지로도 내공 없이 명검을 벨 수 있다는 것.

문제는.

"맹주님 말곤 수취명검을 익힌 자가 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그 꿈같은 일을 저들의 동기가 펼쳐내고 있다는 게 문제겠지만.

놀랄 일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대장의 검이 날이 갈수록 완성되고 있네."

진자량의 말대로 장이서는 매일 강해지고 있었다. 무뚝뚝하고 투박하던 검이 점차 생기를 찾아 독사처럼 날뛰기 시작한 것.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대장은... 진짜로 검을 익힌 적이 없었던 걸세!"

동기들은 동공이 다 흔들릴 만큼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초창기부터 전래동화처럼 전해지던 이야기가 있었다.

'정호위는 검을 쓰는 자가 아니래.'

검이 없어 빌리지를 않나, 검집을 집어 던지지를 않나. 이따금 서툰 모습까지.

하여 다들 설마설마했었다. 그중 검안의 소유자인 진자량은 그 말을 절대 믿지 않았다.

'저런 검로를 그어내는 자가 절대 초심자일 리 없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그는 이곳에서 스스로 검을 완성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큭!"

"으윽!"

남궁신과 진자량을 끝으로 도합 서른여덟 명의 단원들이 연무장에 나자빠졌다.

나머지 열 명은 보초를 서는 중이니 사실상 전멸.

그야말로 규격이 다른 천재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깨닫게 해주는 결과.

"고생했다."

그리고 장이서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들려오는 건 골골대는 신음뿐.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잠시 나갔다 올 테니, 다들 안채에서 대기해."

"윽?!"

장이서는 죽어가는 이들에게 일을 던지고 그렇게 유유히 사라졌다. 미련 없이 떠나가는 구름처럼.

백사는 마귀였다.

*

장원 밖으로 나온 장이서는 화림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마을로 향했다.

물론 가는 과정에도 그의 머릿속은 결코 쉬지 않고 조금 전 대련을 상기했다.

상대가 아닌 자신을.

객관적인 제 삼의 눈으로.

자야검엔 두 사람의 흔적이 담겼는데, 그중 하나가 맹주의 수취명검(手取名劍)이고, 다른 하나가 서검의 무동률(無動律)이다.

수취명검으로 어느 검을 쥐든 호흡을 읽어 최대 효율을 낼 수 있게 되었고, 무동률로는 강약의 규칙 없이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검을 다루는 것만 논하자면 이제 서검이나 맹주의 무릎 정도는 따라갈 수준.

물론 이것만 해도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하지만.

'이제 한계다. 더 나아가려면 막힌 벽을 뚫어야 한다.'

틈날 때마다 회류안을 펼쳐 맹주와 서검을 상대했고, 더 늘 것이 없다고 판단했을 땐 단원들과의 대련으로 실전 감각을 채웠다.

그리고 첫 번째 벽에 도달했다.

물론 나아갈 방법도 알고 있었다.

'검에 어울리는 심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 자신이 익힌 심법들은 자야검에 어울리지 않았다.

새로운 심법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현재 몸 안에 잠들어 있는 맹주의 구극심결!

하지만 금세 고개가 저어졌다.

구극심결은 기의 성질보다도 음양의 폭발을 일으켜 기를 증폭시키는 운용법에 더 큰 의미를 둔 무공.

반면 지금 제게 필요한 건 새로운 유형의 기(氣)다.

'우선은 여기서 만족해야 하는 건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생각이 정리될 무렵. 어느덧 마을에 도착했다.

화림현에 비해 훨씬 더 북적이고, 활기찬 기운이 물씬 풍긴다.

사실 오늘 이곳으로 온 건 지극히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여럿 있기 때문이었다.

그중 하나는 구사방(鳩舍房)에 들러 전서구를 띄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혹 죽엽청(竹葉靑)이 있소?"

바로 술과 안주를 사는 거였다. 그것도 제법 비싼 거로.

당연히 제가 먹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작게나마 보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서검에게 천리미향을 뿌려둔 흑의인을 정리해달라 부탁해 두었기 때문.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암야검은 조진평으로 밝혀진 상황인데 그럼 대체 그는 누구인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혹 낭인들을 불러 불을 지른 이유가 맹주에게 위기를 알리고자 했던 건 아니었을까.

암야검이란 이름을 쓴 것도 일부러 연관된 자들을 알아내기 위함은 아니었을지.

'쓸데없는 생각.'

이내 픽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든 악의가 있는 자들이라면 이미 차디찬 바닥에 묻혀 황천길을 지났을 것이다.

서검은 그런 존재니까.

그런데.

'음?'

볼일을 다 마치고 다시 떠나려는 찰나, 먼발치에서 마주 걸어오는 사내가 눈에 담겼다.

흑색 단발에 검은 장포.

실제 나이는 모르겠지만 겉만 봐선 잘 쳐 줘봐야 불혹.

속눈썹이 짙고, 갸름한 얼굴.

여기에 새하얀 낯빛과 회색빛 흑안은 마치 병색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신비감이 느껴지는 실로 묘한 분위기.

무엇보다 특이한 건.

'색이 느껴지질 않는다.'

사람에겐 응당 본인 고유의 색이란 것이 있다.

몸에 녹아든 기, 내쉬는 숨, 주변에 반응하는 육감.

흔히 용모를 통해 상대를 알아본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방금 본 사람도 눈만 감으면 기억에서 멀어지는 것이 생김새다.

진짜는 색.

몸이 이를 기억하고 상대를 구분하는 것.

장이서는 이를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르고서야 깨달았다.

남천능가경이 강해지면서 외면을 감싸 자신의 색이 희미해진 것.

하여 남들이 보기엔 그저 평범한 범부로 보이는 것이다.

한데 저자는 그런 희미한 색조차도 없었다.

무색무취(無色無臭).

마치 타고나길 그리 태어난 자 같았다.

'이게 가능한 건가.'

자신은 방첩대 삼조장이자 요원 출신인 장이서다.

수많은 첩보 기술을 배웠지만, 그중 가장 자신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간파술이었다.

흘깃 보고도 일대에 은신한 첩자들을 모조리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한데 이자는 보고 있는데도 느껴지질 않는다.'

마치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아예 존재했는지 조차 몰랐을 만큼.

장이서는 의문을 묻어둔 채 마주 걸었다.

그리고 서로 딱 다섯 걸음을 남겨두었을 때.

'...!'

두근. 심장에 그의 기척이 처음으로 박혔다. 딱 이 정도였다. 그를 느낄 수 있는 거리.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서로를 스치고 각자 지나온 길을 교환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만일 적으로 만난다면 가장 까다로운 이가 되겠다고 말이다.

물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겠지만.

364.

#의심의 시작

장이서가 마을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

스쳤던 흑의의 사내는 서늘히 뒤를 돌아 살폈다.

"...."

갸우뚱 기우는 고개. 그 역시도 장이서를 보며 묘한 기분을 가진 것.

하나 금세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길을 나섰다.

본래가 그런 자였다.

자신이 처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면, 바닥에 떨어진 황금도 관심을 주지 않는 무심한 자.

오히려 길 가다 만난 이를 되돌아본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오래 갈 관심은 아니지만.

그는 마을 뒤편에 놓인 외진 숲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멈추어진 건 그늘진 가지 위에 까마귀가 울어대는 을씨년스러운 곳.

돌로 쌓은 이름 없는 묘가 가득한 공동묘지였다.

그는 잠시 주변을 배회하는가 싶더니, 어느 평평한 무덤 앞에 다다라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고른 흙색이 땅에 묻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부지만 봐도 족히 백 명은 더 묻었을 터.

찾았다.

이내 허공을 향해 손을 쭉 뻗어 올리자.

솨아아아아!

땅속에서 영롱한 기운들이 혼령처럼 솟아오른다.

사내는 이를 무심코 흘기다 가장 기운이 거센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곤 콱!

내리꽂은 손이 깊숙이 지저(地底)를 파고들었다.

이내 아무렇지 않게 헤집는가 싶더니, 무언가를 번쩍! 끄집어냈다.

비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흙가루.

놀랍게도 그가 꺼내 올린 건 시신이었다!

그것도 맹호원을 습격한 적도방의 살수. 오행성주의 수장!

하체는 남지도 않았고, 복부엔 큰 구멍이 뚫린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사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도리어 시신을 관찰하듯 더 골똘히 살폈다.

"진천뢰?"

그러곤 금세 사인을 규정.

툭툭툭툭!

검결지로 시체의 혈도를 짚었다.

그러자 그 순간!

화르륵!

놀랍게도 시체가 불길에 휩싸이며 검은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후읍!

이내 숨을 크게 들이켜자 그대로 몸 안으로 흡수되는 기운!

"...!"

사내의 흐릿한 잿빛 눈동자에 안광이 번뜩였다.

망자의 혼은 떠나도 육신엔 기억을 남기는 법.

죽기 전 사투를 벌였다면 분명 몸 안에 상대의 기운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리라.

이것이 그가 여길 찾은 이유!

그리고 잠시 후 사내는 그 기운의 정체를 알아냈다.

이것이 오행성주를 죽게 만든 힘!

그것은 바로....

"마기(魔氣)?!"

사내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뱉어졌다.

그의 이름은 적도방주 구양룡!

천하제일살수(天下第一殺手)의 칼날이 장이서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 * *

- 귀주 악두호(岳頭湖).

안개로 가득한 호숫가로 백발의 노부가 터벅터벅 걸어온다.

흰 수염에 백색 장포만 얼핏 보면 신선이지만, 얼굴에 새겨진 사나운 주름은 영락없는 백전노장.

이곳의 주인 서검 여중악이었다.

장이서의 부탁을 받아 선유의 뒤를 쫓았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갈 때는 금세였거늘, 오는 길은 걸음이 무거워 제법 시간이 걸렸다.

심기가 복잡했다.

동생은 제 형을 원수라 생각하고, 형은 동생을 몰라본 채 칼부림을 벌이다니.

심지어 제갈상은 이곳에서 또 다른 암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잘은 몰라도 이대로 더 놔두었다간 분명 큰 사달이 날 게 분명한 일.

선유가 치료를 마치는 대로 사실을 전해주고, 장이서에게도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이 옳았다.

아니,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

너무 늦었다.

제갈상만 탓할 것도 아니었다. 침묵한 자신 역시 공범이오, 죄인이었다.

"음...."

서글픈 답답함에 오두막을 향해 다가서던 그때.

"음...?"

문 앞에 웬 천에 덮인 바구니와 죽엽청 하나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옆에 놓인 서신과 함께.

[안 계셔서 두고 갑니다. 혼자 지내지만 마시고 가끔 장원에도 들르시죠, 숙부님.]

휘영청 밝은 달.

어느새 손제자만큼 그의 형에게도 마음이 깊어지는 어느 날이었다.

* * *

며칠이 흘렀다.

맹호원에서 쏘아 올린 대총회라는 불씨는 천하를 불태웠다.

'대총회라니. 정사마전 이후론 맹주령(盟主令)을 발동하신 적이 한 번도 없지 않았나.'

'구파일방에 오대세가의 수뇌들이 모두 모일 테니 정말 장관이겠군.'

'말리지 말게. 어디서 열리든 반드시 보러 갈 걸세. 북해든 해남이든 반드시!'

수많은 협객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기대감을 드높였다.

각 지역의 패자라 할 수 있는 거대 문파의 수뇌들이 모두 모이는 행사였다.

하나를 보기도 힘든데 이 얼마나 웅장하고도 역사적인 순간인가.

당연히 천하의 관심이 모두 그리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번 소식을 뜨겁게 달군 데에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이번에 대총회가 열리는 걸 무림맹 내에서 아무도 몰랐다더군.'

'그게 말이 돼? 그럼 맹주께서 독단적으로 여셨단 말인가?'

'듣기로는 백서라는 자가 청했다던데?'

'그게 누군데?'

'맹주님의 호위무사.'

'호, 호위무사?!'

호위무사로 밝혀진 생면부지의 무명소졸 백서.

대총회의 열기를 뒤따라 바로 그의 이름도 스멀스멀 떠올랐다.

대체로 반응은 안 좋았다. 아니, 분통해했다.

뿌리가 깊은 정도 문파일수록 배분과 격식을 더욱 중시해야 하거늘.

어디 하룻강아지 같은 애송이가 천하의 대선배님들을 제멋대로 호출한단 말인가.

'맹주님께서 퇴임을 고려하고 계셨다더니. 심신이 많이 허해지신 모양이야.'

오죽하면 맹주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완전 뒤집어졌다.

'사형,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화산의 무거움을 보여줘야 합니다!'

화산의 장로들인 화산칠진(華山七眞)은 대사형인 장문인에게 당장 불참을 선언하자 건의했다.

'장문인, 자량이 말하기를 자신이 따르는 아이라고 하더이다.'

'음....'

무당파에서는 진자량의 돌발 선언에 크게 당황하며 술렁였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아무에게나 고개를 숙이는 놈은 결코 대 남궁가의 주인이 될 수 없다!'

폐관 수련을 마치고 뒤늦게 창궁룡이 정호위가 되지 못했음을 알게 된 남궁가주는 격노하며 폭발했다.

이외에도 대부분이 다 비슷한 반응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디 족보도 없는 애송이가 까불어?' 딱 이 정도.

하나 어쩌겠는가.

이미 맹주령이 발동해 버린 것을.

결국 들썩이는 분을 다스린 채 대총회가 열리는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정호위 백서. 그놈 낯짝 한번 봐야겠다고. 별거 아닌 놈이라면 아주 호되게 혼쭐을 내주리라. 뭐, 그런 마음으로 말이다.

그렇게 모두가 대총회를 고대했다.

물론 정작 일을 벌인 맹호원에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

- 귀주 화림현 맹호원

"크, 큰일이다! 큰일이야!"

북개가 발을 동동 구르며 언덕으로 달려 올라왔다.

이에 바람을 쐬던 맹주가 뒤를 돌아보자 그가 애타는 목소리로 외쳤다.

"모용소 이놈이 대총회 초청을 거부했네!"

"...!"

맹주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

모용소가 빠지면 대총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수뇌들 불러다 인사만 나누고 끝날 판.

그건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시선이 묵묵히 뒤에 서 있는 이에게로 향했다.

대총회를 소집한 비선 실세!

정호위 백서다.

"이 녀석아, 모용소가 대총회에 불참을 선언했단 말이다! 이래도 문제가 없는 게야?"

한데 장이서의 반응이 오묘했다.

태연하다 못해 뭐 이런 일로 소란이냐는 표정.

"누가 봐도 대총회는 함정 아닙니까? 쉽게 나와줄 리가 없죠."

"그러니까 내 말이!"

"하지만 놈은 나오게 될 겁니다."

북개는 순간 속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방금 모용소가 불참하겠다고 연통을 보내왔는데 나올 거라니.

이 무슨 밑도 끝도 없는 논리인가.

"모용소 돈이라도 훔친 게야?"

"왜 얘기가 그렇게 됩니까."

"그게 아니면 놈이 뻔히 보이는 함정에 나올 이유가 없지 않으냐!"

돈 훔쳤다고 나오는 것도 이상한 거 아닌가? 장이서는 담담하게 답했다.

"함정이 아니라 기회라고 생각한다면요."

"뭐, 뭐라?"

"모용소는 이제 곧 대총회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하?!"

확신에 찬 발언에 북개와 맹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도대체 뭘 믿고?!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소리.

하지만.

'지금쯤 모용소의 머릿속은 모든 것이 의심으로 가득 차 있을 거다. 그리고 그 의심이 극에 달하면 세 살배기 아이도 아는 간단한 사실조차 달리 보이는 법이지.'

아주 간단한 이치였다. 이를테면 가위바위보와 같았다.

상대가 바위를 낼 걸 알고 있음에도, 끝없는 의심에 결국 돌고 돌아 스스로 가위를 내어 져버리는 것.

장이서가 노리는 것도 바로 그거였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제 곧 모용세가에 도착할 그들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믿으세요."

장이서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섰다.

* * *

- 요녕성(遼寧省) 심양(沈陽).

푸른 산림이 울창한 요녕의 성도 심양.

녹색 강이 중앙을 가로지른다.

이름은 심수강.

모용세가는 바로 그 강 귀퉁이에 산을 등지고 자리해 있었다.

길이 비좁아 강 위에 교각을 놓고 일렬로 지어져, 멀리서 보면 그 모습이 실로 기다랗고 장황했다.

"...."

그리고 이를 본 여인은 다리 위 먼발치에서 할 말도 잊은 채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아무리 멱리로 가려도 타고난 미는 숨겨지지 않는 청순한 용모의 미녀.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마침내 고향에 도착했다.

그녀의 이름은 취홍란.

천마신교의 제일 주루인 취선루의 주인이자, 모용세가의 여식이다.

그녀가 무려 십수 년 만에 이곳을 다시 찾았다.

"기억에 남아 있는 모양이구나."

그리고 함께 온 팔자 주름이 사나운 초로의 사내도 있었다.

녹색 장삼을 입은 마교의 전설. 독마 양대헌이다.

천산을 떠난 지는 한참이지만, 독마와 수련을 하며 오느라 시일이 더 걸렸다.

과거였다면 그가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혔겠지만, 다행히 이젠 알아보는 자를 찾는 것도 일이다.

"동생과 함께 저 교량 위를 뛰어놀던 기억이 납니다."

그녀가 눈물을 닦고 수줍게 답하자 독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도 이젠 다 컸겠구나."

"예, 하지만 절 반겨줄지는 모르겠어요."

"너무 염려 말거라."

반가워할 거다. 아니, 반가워해야 할 거다. 무사하고 싶다면.

독마가 다정으로 포장한 섬찟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느새 부녀처럼 사이가 가까워진 그들이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모용세가의 커다란 대문 앞에 당도했다.

당가촌처럼 마을 전체를 이루고 있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오대세가답게 가까이에서 마주하니 그 규모가 실로 웅장하다.

"어디서 오시었소."

입구를 지키는 무사가 다가와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투로 물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홍란은 한참의 고민 끝에 멱리를 위로 넘기며 말했다.

"아버님을 뵈러 왔어요."

"...!"

이에 무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단아한 미녀를 본 적이 없기 때문.

하지만 놀라긴 아직이다.

"낭자의 부친께서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

그녀는 아련한 눈빛으로 당당히 말했다.

"모 용자, 학자. 되십니다."

"허억!"

모용학. 그녀는 몰라도 그 이름을 어찌 모르겠는가.

지금은 몸져누운 채 인사불성이 되었으나 한때 무림오성이라 칭하며 검성으로 추앙받던 자.

그리고 당대의 가주!

"그, 그럼 낭자는...!"

"전해주세요. 모용란이 돌아왔다고."

십수 년 전 사라진 모용세가의 금지옥엽.

모용란이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독마와 함께!

365.

#너였구나

모용소는 오늘도 흑지로 가득한 밀폐된 공간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본래라면 대계를 위한 천하의 정세를 떠올렸겠으나, 요즘은 상사병에 빠진 총각처럼 단 한 사람만을 떠올렸다.

그 이름 백서.

사사건건 제 앞을 막아대는 그 빌어먹을 이름.

며칠간 그에 대해 낱낱이 조사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네놈은 대체 누구냐?!'

원론적 의문점에 도달했다.

먼저 백가장은 평범한 군소방파라고 하기엔 뭔가 비이상적이었다.

[백가장에서 미모의 정혼녀 확인.]

[백가장 잠입.]

[문지기와 접선.]

[백가장 감시 중.]

그냥 읽으면 염탐에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네 장의 서신.

하나 여기엔 아주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 서신을 보내온 자가 한 명이 아닌 네 명이라는 것.

그러니까 각자 저것만 틱 보내고 꼴까닥 죽었다는 거다. 그것도 소리 소문도 없이.

심지어 백가장에선 보란 듯이 시체를 유기했다. 후속 조치도 없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일반적인 곳이라면 경계를 강화하든, 문제를 조사하든 뭐라도 반응이 있어야 했다.

한데 마치 너희 따윈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아주 오만하게. 아무 일 없다는 듯 백가장은 일과를 보내며 좌시했다.

대체 이게 어딜 봐서 정상적인 가문으로 보이겠는가.

음흉하고, 사악했다.

어쩌면 혈교보다도 더.

그래도 청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방의 무역로가 열려 있고, 거친 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니까. 패도적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 전 백서의 뒷조사를 맡긴 적도방주로부터 서신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마(魔).]

딱 한 글자였다.

모용소는 지난날을 상기했다.

적도방은 암습에 실패했고, 자신은 대업을 강행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전의 날. 모든 것을 잃었다.

이건 절대 우연일 수 없었다. 처음부터 절 노린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

한마디로.

'놈은 내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다.'

마치 3년 전에 그놈처럼.

"설마...."

일흉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내 머릿속에 수많은 의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던 그 순간.

"주, 주인님!"

드르륵! 문이 열리고 그의 종복인 백색증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지금 바깥에 누가 가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가주라면 제 형이 아니던가. 정신도 못 차리는 그를 대체 누가.

"그것이... 본인이 가주님의 딸이라고...."

모용소가 흠칫 놀라며 당황했다.

딸이라니. 제 형에게 딸이라곤 단 하나뿐이거늘.

"스스로를 모용란이라고 칭하였습니다."

맙소사. 그 아이다. 자신이 마교에 팔아버린 아이.

"지금 그 아이가 여길 와 있다는 말이더냐?!"

"예. 웬 종복으로 보이는 노부와 함께 왔습니다."

모용소는 잠깐 넋을 잃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뇌리가 번뜩였다.

백서란 무명소졸이 나타나 대계가 무너지고, 뒤이어 마교에 있어야 할 모용란이 살아 돌아왔다.

이것이 우연이겠는가? 천만에.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큭."

모용소의 입에서 순간 웃음이 터졌다.

"주인님?"

종복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끝내 모용소는 참지 못하고 광소를 뿜었다.

"하하하하하!"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 하나 모용소는 이처럼 기쁠 수가 없었다.

조카가 살아 돌아왔기 때문에?

그럴 리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이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럼 그렇지. 자신이 한낱 무능한 정파 따위에게 당할 리가 없지.

이상했다.

갑자기 등장한 백서라는 놈이 사사건건 절 막아낸 것도.

수년을 준비했던 완벽한 대계가 허망하게 무너진 것도.

적도방주가 보내온 마(魔)라는 글귀도.

마교에 팔아넘겨진 모용란이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든 것이 다!

하지만 단 하나의 가설이면 성립이 되었다.

"너였구나."

3년 전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불현듯 나타나 제 모든 대업을 무너뜨렸던 자.

마교의 부교주 장이서!

그놈이었다.

그가 자신을 노리고 있던 것이다.

사흉이었던 산왕가주 파군성이 죽었고, 대공자 천무기는 미쳐버렸다.

이제 더는 마교 내의 소식을 알 방도가 없다는 것. 한마디로 거기서 뭔 짓을 해도 모르고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데 너무 마교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마침내 깨달아 버린 진실. 되었다. 이제 알았으니 되었다.

더는 멍청하게 당하지 않으리라. 지금부터 하나하나 모두 되갚아 줄 것이다.

"모용란,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

한편 접객실에 들어선 모용란은 떨리는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괜찮은 것이냐."

이를 본 독마가 넌지시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요."

실은 거짓말이다.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무려 십수 년 만에 돌아온 집이었다.

떠날 때의 자신은 어렸고, 돌아온 지금은 낯설었다.

무엇보다도 마교에서 살아온 자신을 어떻게 바라봐 줄지. 그게 너무 떨렸다.

물론.

"겁먹지 말거라. 내가 옆에 있을 것이니."

이리도 든든한 존재가 함께 있으니 두렵진 않다. 힘 있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드르륵 문이 열리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꿈에서도 잊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그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

비록 바라던 이는 아니었으나,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숙부님...."

제 부친과 똑같이 생긴 유일한 사람.

숙부 모용소.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반가움에 콧등이 시근거렸다.

방 안으로 들어선 모용소는 천천히 두 남녀를 번갈아 살피곤 말했다.

"네가... 란이라고?"

"예, 숙부님. 란이에요. 제가 왔어요."

모용란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에 모용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까이 다가섰다. 조목조목 살피자 확실히 알겠다.

"남아 있어. 아직 그때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구나. 날... 기억하겠느냐?"

일순 모용소의 동공이 설핏 작아졌다. 하나 그녀는 미처 보지 못한 듯 말했다.

"그럼요. 기억하고 말고요. 어릴 때 제게 무공도 가르쳐주셨잖아요. 잘한다고 칭찬해 주시던 그때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훤합니다."

"그랬지. 그랬었지. 정말 란이로구나."

"숙부님...."

고개를 숙인 그녀의 등을 모용소가 토닥여 준다. 실로 서늘한 눈빛으로 뒤통수를 내려다보면서.

확실히 독한 년이다.

과거에도 될성부른 자질을 보이더니. 결국 천산까지 팔려 가서도 이렇게 살아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대로 모용세가에 남겨뒀다면 무슨 화근이 되었을지.

잠시 후 그녀가 진정이 되자 모용소는 자리에 앉으라 권하곤 눈빛을 갈음한 뒤 말했다.

"대체 어찌 된 것이냐. 왜 이제야 돌아온 것이야. 네 아버지는 끝까지 널 기다리셨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눈물이 크게 고였다.

한 시도 아버지와 동생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늘 아렸고, 그리웠다.

"죄송합니다...."

눈물이 속절없이 떨어져 내렸다. 모용소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듯 답했다.

"아니다. 형님께서 이제라도 네가 살아 돌아온 걸 알면 얼마나 기뻐하실지."

몸져누워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오래전에 들었다.

그저 죄책감에 가슴만 미어질 뿐.

"한이는요...?"

"소가주는 지금 출타 중이다. 한데 이쪽은...."

모용소가 뒤에 서 있는 독마를 흘깃 보며 물었다. 이에 모용란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먼저 독마의 입이 열렸다.

"아가씨를 모시는 종복이다."

그게 무슨! 모용란은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종복이라니. 그의 신분을 생각하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하나 뒤를 돌아보자, 독마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무심히 모용소만을 살폈다.

"종복? 흐음...."

반면 모용소는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뭔 종복의 말투가 저따위인가.

하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골똘히 독마를 마주 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행색을 보니 멀리서 온 모양인데, 우선 오늘은 이곳에서 편히 쉬거라. 형님을 뵙는 건 내일 하자꾸나. 오랜만에 만나는데 울고 지친 모습을 보여 되겠느냐."

"예, 숙부님...."

"밖에 하인을 붙여둘 테니,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하거라. 지금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못다 한 이야기는 추후 다시 하자꾸나."

"감사합니다."

모용소는 차가운 미소로 답을 대신해 주고는 밖으로 나섰다.

모용란은 그가 사라지자 독마를 보곤 입술을 꾹 물었다. 왜 그러셨냐는 뜻. 종복을 자처하면서까지 신분을 숨길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한데.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거라."

"어르신...."

긴말은 필요치 않았다. 고작 한마디에 고개가 숙어졌다. 마교에 대해선 일절 신경 쓰지 말라는 배려다.

모용란은 그의 따뜻한 마음에 가족애를 느꼈다.

그리고.

'모용소라....'

독마의 눈은 더없이 서늘하게 빛났다.

*

한편 건물 밖으로 나선 모용소는 곧바로 다정한 눈매를 걷어내곤, 살벌한 표정으로 가득 채웠다.

"어찌할까요, 주인님."

그러자 뒤따르는 종복이 고개를 조아려 묻는다. 건물 앞엔 무장한 무사들이 즐비했다.

여차하면 바로 들어가 없애버리겠다는 것.

이에 모용소는 나지막이 물었다.

"따라온 놈들은."

"근방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양으로 들어올 때부터 둘이었다고 합니다."

그 짧은 새에 둘의 행적까지 조사를 마쳤다. 요녕이 모용세가의 손바닥 안이라는 게 확실해지는 일례.

"흠...."

모용소는 고민에 잠겼다.

부교주가 걸어온 수작임을 알게 된 이상, 이대로 둘을 불태워 천산에 선물로 보내주는 것이 도리다.

더구나 종복의 눈빛도 마음에 안 들었다.

'건방지게 날 노려보다니.'

보통 눈만 마주쳐 보면 안다. 이놈이 겁만 줘도 벌벌 떨 약골일지, 아니면 끝까지 덤빌 강골일지.

그런 의미에서 모용란이 데려온 종복은 죽음마저 초연한 진성 강골이었다.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놈!

하지만.

"일단은 놔두어라."

모용소는 그들의 처분을 유예하기로 했다.

일단 종놈은 눈빛이 좋았으나 손이 곱고, 내기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언제든 쳐 죽일 수 있는 늙은이라는 얘기.

그나마 모용란이 제법 실력이 있는 듯 보였으나, 그래봤자다.

문제는 장이서의 수가 읽히지 않는다는 것.

'부교주가 의도해서 보낸 것 치고는 너무 허술하지 않으냐. 고작 종놈 하나랑 둘이 들여보내 뭘 어쩌겠다고. 도리어 마교인 게 밝혀지면 제겐 악수가 될 수도 있을 텐데.'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의 위기를 잘만 이용하면 제게 큰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려면 우선 판부터 다시 짜야 한다.

골똘히 고민하던 모용소가 나지막이 명했다.

"너는 당장 요녕에 최근 들어온 수상한 자들이 없는지 알아보고, 맹호원에 전서구를 띄우거라."

"전서구라 하시면...."

"요녕(遼寧). 이곳에서 대총회를 열면 나 모용소가 친히 참석해 주겠다고 말이다."

일흉의 마음에 변화가 일었다!

장이서와 모용소의 이차전이 시작된 것이다.

366.

#뭘 빼앗아?

그날 밤.

맹호원에 소식이 전달됐다.

"됐다! 됐어! 모용소가 대총회에 참석하겠다고 회신을 보내왔다!"

북개는 촐싹대게 방방 뛰며 안채 앞으로 달려들었다. 이에 대화를 나누던 맹주와 등 총관이 화들짝 놀랐다.

"그게 사실인가?"

"그렇대도! 내가 몇 번을 확인했다니까?"

모두의 고개가 위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놀라지도 않고 달밤에 고양이처럼 무심히 앉아 있는 호위무사. 정호위 백서에게로!

반면 세 사람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표정들이 가관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게야?"

뻔히 함정인 걸 알 텐데 느닷없이 대총회에 참석하겠다니.

물론 장이서에겐 내막이 훤히 꿰뚫려 보였다.

'지금쯤이면 눈치를 챘겠지. 내가 누구인지.'

음산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이 정도로 대놓고 알려줬는데도 모른다면 그건 그냥 바보일 거다.

왜?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것도, 적도방 살수들 몸에 마기를 일부러 심어둔 것도, 백가장에 감추지 말고 침입자를 없애버리라고 한 것도.

모두 장이서가 모용소를 끌어내기 위해 파놓은 함정이었으니까.

그래야만 그 의심 많은 모용소가 스스로 실패한 이유를 납득할 것 아닌가.

정파의 무명소졸이 아닌 마교의 부교주에게 당했다는 확실한 이유 말이다.

더구나 취홍란을 봤다면 더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거다.

보나 마나 그녀를 마교에 팔아치운 자도 모용소였을 테니.

"한데 조건을 붙였어."

북개의 이어진 말에 다시금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대총회를 요녕에서 열어달라더구먼."

밝아졌던 맹주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요녕이라니! 거긴 모용세가의 본진이 아닌가. 그럴 순 없네. 잘못되면 백성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울 걸세!"

"그러니까. 그게 문제야."

북개와 맹주. 그리고 등 총관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침음을 삼켰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

이럴 때 답은 하나였다.

스윽. 모두의 고개가 다시 지붕으로 향했다. 해답을 내려줄 밤 고양이. 그리고 답은 곧바로 내려졌다.

"그렇게 하시죠."

"...!"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괜찮은 겐가?! 설령 그가 대총회에 나온다고 해도 난항이 클 것일세. 요녕의 관료들과 만백성이 그를 에워쌀 것이고, 무죄를 주장할 테니."

"그래, 맞다. 요녕에서 놈을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이야. 도리어 거기서 잡지 못하면 애써 잡은 기회만 날리는 꼴인데."

그야말로 적진에서 잔치를 여는 격!

물론 다 맞는 말이다.

모용소 역시 마지막까지 안전을 기하기 위해 판을 짠 것일 테니.

하지만 달라질 건 없다.

"요녕을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바꿔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무슨 수로!"

"모용세가를 빼앗을 겁니다."

"무, 무, 무슨...!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게야? 뭘 빼앗아?"

정확히는 원래 가져야 할 사람에게 돌아가게 될 거다.

세 사람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아느냐? 오륜회엔 운 좋게 네 편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있습니다."

"뭐, 뭐라?!"

그것도 이미 무혈입성해 버린 가장 믿을 수 있는 두 사람이.

그러니까.

"믿으세요."

장이서의 미소에 세 사람은 눈을 크게 깜빡이며 생각했다.

지금 장이서의 머릿속은 자신들이 상상할 수 있는 지붕을 뚫어 저 하늘 높은 곳에 머물고 있다고.

저놈이 저희 편이라서 천만다행이라고 말이다.

* * *

다음 날.

"주, 주인님!"

백색증의 종복이 맹호원의 소식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대총회를 요녕에서 열겠다는 회신이 왔습니다!"

"크하!"

이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모용소의 입에서 폭소가 터졌다.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나 보구나."

"혹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요?"

그렇겠지. 모용소는 싸늘히 표정을 굳히곤 물었다.

"요녕에 들어온 수상한 자들은. 없었느냐?"

모용소의 물음에 종복이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이, 있습니다! 새벽녘에 상인들이 서문과 남문을 통해 들어온 정황이 분명히 있었는데, 이후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크하!"

모용소의 입에서 또다시 참을 수 없는 폭소가 터졌다. 어찌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질 않는가.

"그렇겠지! 이제야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구나."

"소인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멍청하긴. 잘 생각해 보거라. 이 시점에 갑자기 모용란이 돌아온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이유는 뻔했다.

"그 두 연놈을 통해 이곳 모용세가를 장악하려는 것이다."

정확히 짚었다. 이른바 혈통 전쟁. 모용란이 직계라는 신분을 앞세워 왕좌를 차지하려는 것이다.

그럼 어찌 되겠는가.

철옹성인 요녕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되어버리는 거다.

숨을 곳 하나 없는 완벽한 구렁텅이가!

"그, 그럼 상인들은...!"

"위장 전술이다. 종복 하나만 데려온 건 일부러 날 안심시키기 위한 하찮은 전략. 진짜는 바로 그 상인들이다. 그놈들이 대총회 날 내가 자릴 비우면 이곳을 점령하려 들 것이다!"

"히익! 그, 그럼 당장 없애버려야 하는 것 아닐는지요!"

그래, 그게 맞다. 평소라면 분명히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후후, 그리 쉽게 끝내줄 순 없지. 위기가 곧 기회임을 아직도 모르느냐? 생각해 보거라. 대총회를 소집한 게 누구냐."

"그... 백서입니다."

"그래! 그리고 그 백서는 마교 부교주가 맹주에게 보낸 세작이다."

"헉!"

"크크큭. 이제 알겠느냐? 맹주도, 오륜회도, 금의위도! 지금 모두 다 마교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종복은 충격이 큰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난 며칠간 오륜회와 금의위. 그리고 무림맹에서 들려오는 말엔 죄다 백서란 이름이 따라다녔다.

한데 그게 마교의 세작이었다니!

"그리고 그 사실을 대총회에 참석한 수뇌들이 알면 어찌 될 것 같으냐."

"...!"

종복의 눈이 뒤집힐 만큼 커졌다. 안 그래도 백서에 대한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거늘.

"그래. 역공이다. 맹주를 비롯해 화무진. 그리고 오륜회의 소오라는 놈까지! 모조리 마교와 결탁한 죄를 물어 끌어내릴 수 있다."

"아아...."

그야말로 완벽한 부활! 대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날 죽이려고 준비한 자리가 설마 저들의 묏자리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하겠지. 크큭."

"하오면 안에 저 둘은 어찌할까요. 오늘 가주님을 만나기로 하였는데...."

"흥, 봐봤자 제깟 것들이 무얼 알아낼 수 있겠느냐? 생사신의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니 실컷 보게 두거라. 부교주가 방심할 수 있게."

"모든 것은 주인님의 뜻대로...."

종복은 넙죽 엎드리며 경배했다.

모용소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장이서. 지금까진 네놈이 내 머리 위에 있는 줄 알았겠다만, 더 이상은 아니다. 이제부터 판은 내가 지배한다!'

죽어 있던 어깨가 펴지고, 가슴은 자신감으로 가득 채워진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물론.... 세상일이 다 맘처럼 돼야겠지만 말이다.

* * *

요녕의 어느 한 언덕.

종복이 말한 이른 새벽 들어온 상인 무리.

아니, 상인으로 위장한 이들이 한데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한데 난간에 서서 먼발치 모용세가를 바라보는 두 남녀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이보시오, 당주. 내가 웬만하면 장 형 말은 다 믿거든? 근데 이건 좀 말이 안 되잖아. 상식적으로다가."

복면 위에도 놓치지 않고 검은 안경을 쓴 사내. 그의 이름 소오다.

"오호호! 또 무슨 헛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냐."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여인은 웃음만 봐도 비룡당주 묘채경!

장이서의 밀명을 받아 오랜만에 합류한 두 사람이었다.

"아니, 차라리 모용세가를 치라고 하면 내가 이해라도 하지. 며칠간 요녕만 죽어라 횡단하면 모용세가가 우리 손에 똑 떨어질 거라니. 이게 무슨 기우제도 아니고. 말이 돼?"

"네놈이 오륜회주가 된 건 말이 되고?"

"안 되지! 안 되니까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지."

알면 다행이구나. 묘채경이 코웃음을 치곤 답했다.

"세상에 가장 멍청한 짓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부교주님께 대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교주님의 계획을 의심하는 것이지."

"오. 그럴싸해."

"너와 내가 바깥을 도는 역할을 맡았다면, 저 안엔 누가 있겠느냐."

묘채경이 음산하게 씨익 웃고는 모용세가를 눈짓하며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존재가 이미 들어가 계실 거다."

물론 모용소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만.

오호호호!

경박한 웃음과 함께 오늘도 열일 중인 묘채경과 소오였다.

* * *

모용란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세가 내에 빠르게 번졌다.

그녀를 기억하는 이들은 몰래 눈물을 훔치며 기뻐하기도 했고, 모르는 이들은 불신 가득한 눈초리로 의도를 의심했다.

'가주님이 찾을 땐 그리도 안 나타나더니. 이제 와서 뻔뻔하게. 살아 있었으면 소식이라도 전했어야지!'

'뻔하지. 소가주님이 양자이니, 사실상 유일한 직계 아닌가. 가주 자리를 빼앗겠다는 거지.'

'듣자 하니 어디 팔려 갔었단 얘기도 있던데. 그런 여인이 뭔 짓을 하고 살았을지 어떻게 알아?'

심지어 입에 담기도 힘든 말들을 먼발치서 저들끼리 소곤대기도 했다.

다 들려서 문제지.

텅! 독마가 열린 창을 닫았다. 그러자 모용란이 다소곳이 웃으며 말한다.

"전 괜찮아요."

진심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단아하고 여리여리해 보여도, 마교 제일 기루인 취선루의 루주다.

마교 고위직들을 상대하던 것에 비하면 애교만도 못한 수준.

"그럼 되었다."

독마도 더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근데 안 되었으면 어찌 되는 거지? 순간 떠오른 고민에 어색한 웃음과 식은땀이 동시에 맺혔다.

어쨌든 드디어 오늘이었다.

부친인 모용학을 만나기로 한 날이.

마음으로는 어제 당장 찾아가고 싶었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것도 모자라 가문에 불편을 주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한숨도 못 잔 채,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꾹 누른 채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가요."

*

호수와 산 사이에 전각들이 교량처럼 길게 붙어서 지어진 모용세가.

그중 가장 중심에 놓인 드높은 대각이 바로 가주가 머무는 선무각(宣武閣)이었다.

연나라의 시조인 선무황의 시호에서 따온 이름으로 오랜 역사와 혈통을 고수하겠다는 후손의 결의를 담았다.

한데 정작 직계 혈통인 그녀를 향한 시선은 그리 좋지 않은 듯했다.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허락이요?"

모용란의 고운 눈매가 흔들렸다. 오자마자 입장을 거부당한 것. 불편을 주고 싶지 않아 하루를 참고 기다렸거늘.

"모용란입니다. 아버지를 뵈러 왔어요."

"예, 하지만 아가씨라 하셔도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딸이 아버지를 찾아뵙는데 대체 누구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건...."

무사가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제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날카로운 사내의 음색이 스며들었다.

367.

#거미줄

이제 약관쯤 되었을까. 제법 명랑하게 생긴 사내가 무사들을 이끈 채 밖으로 나왔다.

닮은 구석은 없지만, 차림새나 귀티가 나는 용모만 봐도 누군지 짐작은 갔다.

"한아...."

그녀의 동생이자 모용세가의 소가주 모용한이다.

모용란은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봤다.

꺄르르 웃으며 절 따르던 귀여운 남동생.

이젠 다 큰 성인이 되었지만, 그때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날... 기억하겠니?"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모용한은 적개심 가득한 어투로 답했다.

"기억해야 합니까?"

가슴이 도려지는 기분.

"여기는 왜 온 겁니까? 아버지께서 그리 찾을 땐 보이지도 않더니. 이제 와 뭘 뜯어내려고 오셨냔 말입니다."

"누나는...."

"돈입니까? 아니면 설마 내 자리를 노리고 온 겁니까?"

"한아...."

"예를 갖추세요! 난 어린애가 아닙니다. 모용세가의 소가주입니다. 내 자리를 탐하려고 온 게 아니라면 당장 이곳에서 나가세요."

너무 긴 시간이었던 걸까.

제게 누나라 부르며 달려오던 아이는 이제 절 남보다 못하게 바라보며 모질게 쳐냈다.

이해는 됐다.

모용가는 그 무엇보다도 혈통과 직계를 중시하는 곳.

양자의 신분으로 소가주가 된 그로서는 뒤늦게 나타난 자신의 존재가 못 미덥고 불편할 수 있다.

왜 모르겠는가.

마교에 던져지고 수없이 상상했던 모습이었다.

처음엔 납치된 절 찾아줄 거라고 믿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년이 흘렀을 때는 무서워졌다. 자신이 돌아갈 자리가 없을까 봐.

한데 역시였던 모양이다.

모용란은 차오르는 슬픔을 꾹 삼켜내곤 애써 웃으며 말했다.

"...늦게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소가주."

이내 쓸쓸히 몸을 돌렸다. 돌아가야겠다. 여긴 제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런데 그때.

"그래도 모처럼 찾아온 혈육을 이리 박하게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선 안 되지요. 지켜보는 눈도 많은데."

뒤에서 뱀의 혀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뒷짐 진 채 서슬 퍼런 안광을 번뜩이며 다가오는 자.

일흉 모용소다!

"오셨습니까, 숙부님."

모용한이 인사를 건네자,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형님께서도 늘 란이를 그리워하셨지요. 소가주께서 너른 마음으로 이번은 넘어가 주십시오."

"하지만 숙부님...!"

"이 숙부가 부탁합니다."

모용소가 누차 말하자 모용한은 입술을 질끈 물곤 떠나갔다. 찬 바람만을 남겨둔 채.

"괜찮은 것이냐."

다가온 모용소가 다정히 웃으며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숙부님."

"너무 미워 말거라. 그저 널 반가워만 하기엔 이젠 소가주의 자리가 그리 가볍지가 않은 것뿐이니."

"그럼요. 이해합니다."

모용란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되었다. 형님께서 기다리시겠구나. 어서 가보거라."

모용소가 손을 내밀자 입구를 막아선 무사들이 좌우로 길을 연다.

그리고.

모용란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방 안에 홀로 누워 잠이 든 중년의 사내.

마르고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확실했다.

'란아.'

그저 바라만 보는데도 밝게 웃으며 절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모용란은 뚝뚝 눈물방울을 떨어내며 다가섰다.

그리고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저 왔어요, 아버지."

오랜 시간이 지나 드디어 이루어진 부녀의 상봉이었다.

*

독마는 두 사람을 남겨둔 채 밖으로 나섰다.

오랜만의 만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또 찜찜했던 것들이 많았기 때문.

이윽고 흘깃 좌우를 살피곤 생각했다.

'대낮부터 염탐하는 쥐새끼들이라....'

어제도 느꼈지만, 아무리 봐도 모용세가의 상태가 영 좋지가 않다.

복도 모서리 뒤편에 숨어 대기하는 머저리 여섯.

옆방에 모여 도청 중인 얼간이 넷.

아래층에 우글거리는 벌레들 열.

감히 란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버러지들이 무려 스물이나 있다는 얘기.

아무리 초대받지 못한 직계의 등장이라지만, 이건 과해도 너무 과하지 않은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장원 내에는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음습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다른 이들은 불길하다는 정도로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독마가 누구인가.

단언컨대 강호에서 가장 많은 독과 기운을 접해본 이를 꼽으라면 단연 그를 꼽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염이라도 된 것처럼 장원을 가득 메운 이 기운의 정체도 단박에 짐작이 갔다.

'이 안은 사기(死氣)와 원기(怨氣)로 가득하다.'

쉽게 말해 죽음과 원망이 가득한 마(魔)의 기운이 저주처럼 사방에 씌어있다는 것.

심지어 생과 사가 오가는 독산각보다도 더 강했다.

이 정도면 가문에 악귀라도 들러붙은 수준.

이 외에도 수상쩍은 게 한둘이 아니었다. 마치 음모로 가득한 마굴에 들어온 기분.

'대체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

짙은 독무가 번지고, 독마의 신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한편 앞서 자릴 벗어났던 소가주 모용한은 잔뜩 상기된 채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문 앞에 다다르자 따르던 무사들이 고개를 숙인 채 멈춰 서고, 안에선 또 새로운 무사들이 그를 마중했다.

아직 어려서일까, 아니면 가주의 뒤를 이을 후계가 그밖에 없기 때문일까.

자택임에도 경계가 실로 삼엄했다.

호위무사들의 동행은 심지어 그의 방까지 이어졌다.

그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은 단 하나뿐.

"수련에 임할 것이니 찾지 말아라."

그르르륵!

방 안에 따로 마련된 비밀 공간이었다.

비록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고, 사람 다섯이 들어가기도 힘든 협소한 공간이었지만.

그래도.

"흑...."

이곳에서만큼은 솔직해질 수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녀를 향해 진심을 전할 수 있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었다고. 너무도 그리웠다고.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데도 이렇게밖에 맞이해 주지 못하는 절 용서해 달라고.

"흐으윽!"

모용한은 그렇게 한참을 숨죽여 울고 또 울었다.

그래야만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악귀 같은 모용소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벌써 아주 오래된 이야기였다.

모용란이 실종되기도 더 전의 이야기.

처음부터 가주의 양자로 만들기 위해 계획된 아이였으니까.

'난 이 개를 죽이고 싶지 않아요.'

'죽여라. 기르던 개도 쓸모를 다하면 없애야 하는 거다. 아니면 너도 쓸모없는 개가 되고 싶은 것이냐?'

'흐윽....'

정확한 시기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을 때부터 모용소의 거미줄에 갇혀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일거수일투족은 그의 귀로 들어갔고, 뜻에 반하는 행동은 단 한 번을 용납하지 않았다.

가혹한 체벌, 지독한 세뇌.

모용한은 그렇게 길러진 아이였다.

스스로 무릎을 꿇고 제 손으로 고독까지 집어 먹으면서.

'그래. 그래야지. 넌 내 말만 들으면 된다. 그럼 버려질 일은 없을 테니.'

그리고 모용세가로 들어와 가주의 양자가 되었다. 모용란도 그때 처음 만났다.

'안녕, 네가 한이구나.'

해맑게 웃어주며 제 머리를 쓰다듬던 작은 손. 처음이었다. 이처럼 따뜻한 손길을 받아본 것이.

설렜고, 좋았다.

모용소도 그녀와 앞으로 잘 지내라고 말했다. 많이 기뻤다. 진심으로 행복했다. 눈을 감아도 즐거워 매일매일 웃음이 서렸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모용란에게 뒷산으로 놀러 가자 하거라. 단둘이서만.'

아무 의심 없이 명을 따랐다. 그리고 그날.... 그녀가 사라졌다.

'어, 어...?'

처음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이 이렇게나 아프다는 걸.

그 후로 가주가 조금씩 병을 앓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모용한은 생각했다.

자신의 행복도 이제 끝났다고.

그저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녀가 어딘가에 꼭 살아 있기만을 마음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그리고 오늘.

'날... 기억하겠니?'

그녀가 돌아왔다. 이 지옥 같은 거미줄 안으로.

"제발.... 마교라도 좋으니까... 누나를 살려주세요...."

무력한 소가주의 들리지 않는 통곡 소리가 벽 안에 메아리쳐졌다.

부디 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 * *

모용란이 가주와 재회를 마친 그날 밤.

"오랜만에 그리 아끼던 란이를 본 소감이 어땠소."

모용소는 제 형의 몸을 정성스레 닦으며 다정히 물었다.

"어린 여아의 몸으로 마교에서 살아남기가 여간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대견하지 않소?"

겉만 보면 오랜 세월 간병에 지극정성인 최고의 아우.

하지만 조카를 마교에 팔아넘기고, 가주를 인사불성으로 만든 장본인인 걸 생각하면 악귀도 이런 악귀가 없다.

심지어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내 말 다 듣고 있지 않소. 뭐라도 반응해 보시오."

섬찟하게 귀에 걸리는 입꼬리.

그랬다. 가주인 모용학은 의식이 없는 게 아니었다.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 모든 걸 듣고, 보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그리고 당연히 모용소도 이를 알고 있었다. 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니까.

"형님, 난 말이오. 형님은 내 노력을 알아줘야 한다고 생각해. 늘 윗대에서 그리 말하지 않았소.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연의 황족이다. 한데 현실은 어떻소. 고작해야 구파일방 눈치나 보는 신세 아니오. 내가 그걸 되찾아 주겠다는 거요. 그럼 형님은 날 이해해야지. 그게 가주 아니오!"

미친놈. 이건 그냥 미친놈이었다.

하긴 맨정신인 자가 어찌 수많은 시간을 그림자에 숨어 인내하며 이런 간악한 짓을 벌일 수 있었겠는가.

"내 소가주를 황제로 만들어 주리다. 무림도, 황실도 전부 다 내 손에 넣으면 그때 그렇게 해주겠소. 어떻소. 좋으시오? 후후."

그야말로 삐뚤어져도 한참 삐뚤어진 기괴한 괴몽(怪夢)이다. 그리고 이런 괴몽을 품고 있기에 괴물인 거고.

"소가주는 그렇게 하고. 하나를 얻었으면 하나는 포기해야지. 란이는 포기하시오. 그 아이는 추악한 배신자요. 감히 제 가문을 마교에 팔아넘기려고 돌아오다니. 아주 미친년 아니오. 응당 대가를 치러야지."

'으아아아아아아!'

가주인 모용학은 몸 안에서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으며 비명을 질렀다.

인두겁을 쓰고 어찌 그런 말들을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도 다 알고 있었다. 아니, 알게 되었다.

란이를 어떻게, 어디로 팔아넘겼는지.

그날에 흩날리던 풀잎마저 생생하게 전부 알고 있었다.

제 몸을 이리 만들고 모용소가 직접 수십, 수백 번을 말해줬으니까.

그때마다 이 안에서 얼마나 많이 흐느꼈던가. 마음으로 죽일 수 있었다면 모용소를 수천, 수만 번을 찢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시오. 조카를 죽이기야 하겠소. 그냥 형님처럼 몸 안에 가둬두고 적당한 값에 팔아야겠소. 반반한 아이이니 원하는 자들도 있겠지. 움직이지 않는 명문가의 딸. 좋지 않소. 하하하!"

털썩.

태산처럼 보이는 모용소의 사악한 얼굴 앞에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기력하게 주저앉는 것밖에는.

"소가주는 무얼 하고 있느냐?"

모용소가 웃음을 지우곤, 수건을 종복에게 건네며 물었다.

"처소에 근신 중이십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모용소의 눈빛이 살귀처럼 차가워진다.

아까 낮에 있던 두 사람의 재회는 그의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애초에 소가주는 출타 중이지도 않았고, 모용란이 사라질 때까지 처소에 숨겨 두려 했던 것.

한데 제 말을 어기고 기어 나온 것이다.

모용소의 눈빛에 의심이 꿈틀거렸다.

"소가주에게 갈 것이다."

368.

#죽이든가, 빌든가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소가주인 모용한은 밀실에서 나와 제 침소에 힘없이 누웠다.

그는 창밖에 보이는 저 별들이 불쌍했다. 다른 별들에게 감시당하며 늘 같은 자리에만 머물러야 하니까.

지금의 자신처럼.

"왜 그러셨습니까."

"수, 숙부...."

딱딱딱딱. 사정없이 이빨이 부딪치고 어깨는 크게 흔들렸다. 이게 꿈이라면 귀를 틀어막고 혀라도 깨물고 싶을 정도.

하나 현실은 냉혹했다. 몸을 일으키자 모용소가 뒤에서 무섭게 노려보고 서 있던 것.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처소에서 조용히 기다리라고. 모용란 그 아이는 마교에서 보낸 첩자라고. 소가주의 모든 것을 빼앗으러 온 것이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아,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 왜. 막상 왔다고 하니 마음이 약해진 겁니까?"

"생각할수록 너무 화가 나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숙부."

"도망치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아까도 제가 화내는 걸 보셨지 않습니까."

모용한이 손사래를 치며 호소했다. 이에 모용소는 얼굴을 코앞까지 불쑥 내밀곤 감시하듯 동공을 전후좌우로 움직였다.

실로 소름이 끼치는 행태.

으으으으.

이는 모용한에겐 상징적인 행위였다. 늘 벌을 주기 전에 하던 짓이었으니.

두려움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낯빛이 새하얘졌다.

그리고 모용소는 겁에 질린 모습을 보고서야 초점을 바로 한 채 뒤로 물러섰다.

이제야 의심을 지운 것.

"혹여 불쌍하다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가지지 마십시오. 어차피 진짜 남매도 아니니."

"예, 그럼요.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래야지요."

모용소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곤 화제를 바꿔 말했다.

"대총회 소식은 들으셨겠지요."

모용한은 침을 꼴깍 삼키곤 답했다.

"예, 대충은요. 하온데.... 백서란 자가 마교와 결탁한 걸 그 자리에서 밝혀낼 거라고 들었는데, 그게 가능한 겁니까?"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 겁니까."

"아니, 걱정이 되어서요.... 마교인이라고 해도 밝혀낼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혹여 숙부께서 괜히 가셨다가 화라도 입지 않으실까 하여...."

"후후후. 이 숙부가 걱정됩니까?"

"그럼요."

모용한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모용소는 기분이 좋은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알아두세요. 아무리 영민한 자도 군중이 되는 순간 멍청해지는 겁니다. 믿음은 별게 아니에요. 의심이 거듭되면 그건 사실이 되는 거지요."

"그게 무슨...."

"요녕에는 상단으로 위장한 마교의 자객들이 배회하고 있습니다. 내가 왜 그들을 알면서도 그냥 두는지 아십니까?"

모르겠다.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장 모용란까지 없애버릴 수도 있으면서 대체 왜.

"생각해 보세요. 대총회 자리에서 맹주와 마교의 결탁 사실을 알리는 그 순간. 본가가 마교의 자객들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면. 그럼 다들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그랬다. 그는 처음부터 장이서의 계획을 역이용할 생각이었다.

하여 모용란도, 묘채경과 소오도.

그대로 둔 것이다.

마음껏 설칠 수 있게.

"하지만 그것만으로 믿어줄까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의심이 거듭되면 사실이 되는 거라고. 그날 그 자리에 온 백성들 수백 명이 죽을 겁니다."

그게 무슨. 모용한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죽는다니.

"요녕의 백성들은 모두 우리 편 아닙니까?"

"그러니 죽여야지요. 그래야 맹주를 더 의심할 것 아닙니까. 그때 마교의 자객들을 잡아다 모두의 앞에 던져줄 겁니다. 그리고 말하겠지요. 이것이 맹주의 실체라고. 하하하!"

이거였구나. 이게 모용소의 계획이었구나. 모용한은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막아야 한다. 대총회를 막아야 해!

하지만 어떻게?

이 악귀를 어떻게 막아내지...?

절망으로 가득한 모용세가의 밤이었다.

* * *

한편 모용세가에 음험한 기운이 기승을 부릴 무렵.

장이서는 뜻밖의 외출 일정이 잡혔다. 곳곳에서 맹주를 뵙겠다며 난리가 난 것.

"분타주들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것도 각 지역 중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남부의 사대분타(四代分陀). 그곳 분타주들이 인근 안가에서 기다리겠다는 연통을 보내왔다.

"흥! 지금껏 코빼기도 안 비추던 놈들이 이제 와서?"

북개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버럭 성질을 냈다.

"이번 대총회 때문이 아닐는지요. 아무래도 세간에 워낙 말들이 많으니 걱정이 되었을 수도 있고요."

등 총관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장이서를 흘겼다.

대총회를 소집한 게 한낱 호위무사이고, 맹주를 쥐락펴락한다는 둥. 최근 백서와 맹주에 대한 소문이 알게 모르게 흉흉히 퍼져 나가고 있기 때문.

하나 북개는 그럴 리 없다며 코웃음을 쳤다.

"걱정?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 구렁이 같은 놈들이 어디 그럴 위인인가? 좋다고 소문을 더 내면 더 낼 놈들이지. 영원히 낙향할 줄 알았던 맹주가 복귀할 조짐이 보이니 다시 눈도장이나 찍어두려는 게지."

북개가 불신 섞인 말을 뱉었다.

그럴 만도 했다.

예부터 내부 최측근으로 통하는 사통과 남부의 분타주들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본맹과는 거리가 멀기도 했고, 집권이 길어지며 오랜 세월 평화가 이어지자 그들의 입지도 커버린 것.

무엇보다 무림맹 자본의 삼분지일을 강남에서 출자하니, 그곳을 두고 남천무림맹(南天武林盟)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았다.

그렇게 머리가 커지니 행동은 굼떠지고, 고개는 뻣뻣해질 수밖에.

특히 그들이 맹주 말고 잡은 줄이 따로 있다는 얘기까지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다.

마음 같아선 더 볼 것도 없다며 말리고 싶다만.

"정호위와 둘이 다녀오겠네. 자네들은 대총회가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뒤를 부탁하네."

맹주는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속도 좋아요. 그래도 제 식구라고! 잉, 쯧쯧."

어쩌겠는가. 맹주의 뜻이 그렇다는데.

"맹주님을 잘 부탁하네."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등 총관의 인사를 끝으로 맹주와 함께 길을 나섰다.

*

반나절이 걸려 해가 저물 무렵, 도착한 곳은 산 정상에 요새처럼 지어진 근사한 안가였다.

"다들 잘 지냈는가."

맹주의 인사에 드높은 대문 앞까지 마중 나와 일시에 포권을 취하는 사인(四人).

"맹주님, 소인 이제야 일을 마치고 찾아뵙습니다."

표정부터 호소력이 가득한 호북 분타주 양조위.

"이제라도 저희 안휘로 모시겠습니다. 귀주가 웬 말입니까?!"

불같은 성미와 허세가 느껴지는 안휘 분타주 권원.

"한데 예까지 혼자 오신 겁니까? 이것 참...."

교묘하게 비꼬는 어조의 호남 분타주 강호적.

그리고.

"맹주님을 뵙습니다."

아름다운 교소 속에 세월의 내공이 느껴지는 남부의 여왕. 강남 분타주 공설!

남천무림맹이라 불리는 사대 분타주들과 마주했다.

*

사실 장이서가 본 분타주들의 첫인상은 그리 큰 흥미를 끌진 못했다.

굳은살 하나 없는 손. 적당히 오른 살집. 흐트러진 두 발의 무게.

'오랫동안 수련을 하지 않은 자들이군.'

아무리 평화의 시대라지만, 각 지역을 책임지는 분타주들이 이리 나태해서야.

청해지부장인 만세극과 비교하는 것도 미안할 지경.

그나마 눈길이 가는 건 남부의 여왕이라 불리는 강남 분타주 공설.

용모만 보면 한창나이의 미녀인데 눈빛은 불혹의 독거미.

딱 봐도 보통 내공이 아니다. 물론 무공 실력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그녀가 대표로 한 발 나서며 다시 인사를 올렸다. 이에 맹주도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이 있어 편히 머물 수 있었네. 한데 귀주에 이런 안가가 있었던가."

맹주는 다소 놀란 기색을 보이며 주변을 살폈다.

들어서는 담장은 성벽처럼 높고, 안쪽엔 등불들이 숲 사이의 길을 꾸민다.

우뚝 솟은 대각까지의 거리가 꽤 먼 것으로 봐선 규모 자체가 남다르다.

"강남 분타에서 별도로 운영하는 곳입니다. 사해의 귀한 동도들을 편히 모시려고 마련한 곳이지요."

공설은 별거 아니라는 듯 차분히 답하였지만, 속뜻을 생각하면 눈이 동그래졌다.

사해의 동도를 귀주에서만 모실 리도 없고.

바꿔 말하자면 어느 지역이든 공설의 안가 하나 정도는 다 구비되어 있다는 얘기.

다른 건 몰라도 수완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한데 호위도 없이 혼자 오신 겁니까?"

공설이 휑한 뒷길을 살피며 짐짓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있지 않은가. 호위."

그건 바로 장이서. 한 명이지만 백 명. 아니 천 명보다도 낫다는 것이 맹주의 솔직한 평이다.

"일단 모시겠습니다. 들어가시죠."

공설의 말에 다른 세 분타주들이 하하 웃으며 다가섰다. 여기부턴 자신들이 보필하겠다는 뜻.

일상적인 관례인지라 장이서가 자연스레 뒤로 걸음을 무르려는 찰나였다.

"먼저들 가 있게. 난 천천히 둘러보고 뒤따라갈 테니."

맹주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 와중에 구경이라니. 이 무슨 망언인가.

분타주들이 당황하자 맹주는 다시금 허심탄회하게 웃으며 더 큰 충격을 얹었다.

"잠시 정호위와 나눌 말이 있어서 말일세."

"...!"

분타주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호위 하나에 맹주가 좌지우지 흔들린다더니. 하나만 데려온 것도 황당한데 이게 무슨 경우인가.

흘깃 분타주들의 묘한 시선이 이쪽에 닿는다.

조금 전 맹주에게 교태를 부리던 것과는 달리 냉엄하고 위압적인 눈초리.

'대체 그런 말은 왜 합니까?'

눈으로 묻자 맹주가 뭐 문제라도 있냐는 듯 쳐다본다. 말을 말아야지.

"그럼 그리하시지요. 안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남부의 여왕 공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딸린 분타주들도 마지못해 표정을 풀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가지."

맹주는 그제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떤가."

그러곤 두런두런 숲길을 걸으며 이어 물었다. 두서없는 말이지만 느낌 그대로 답했다.

"장원의 규모에 비해 무사들 수가 현저히 적습니다. 수풀도 높아 숨기도 적절하고요. 누가 암습하기 딱 좋아 보이네요."

"하하, 그것 말고. 내가 여기 온 이유 말일세."

호위무사한테 그것보다 중요한 게 뭐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설명을 덧붙였다.

"무사들의 수는 적지만 과묵하고 날카롭습니다. 맹주님을 뵙는 자리에 최정예들로 구성해 안가까지 불렀다는 건 둘 중 하나겠죠."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담담하게 말했다.

"악의를 품었거나. 위협을 받았거나."

맹주가 장난스레 눈매를 좁히곤 너스레를 부렸다.

"자네는 호위무사가 아니라 군사를 해야 했네."

"그럼 맹주님은 누가 지킵니까."

"그것도 그렇군. 그럼 겸직은 어떤가? 총군사의 자리를 내어주지."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시죠."

"농담을 모르는군."

맹주가 픽 웃고는 나름 진중한 눈매로 먼발치 대각을 살폈다.

"오륜회를 조사할 때 의아했던 것이 하나 있네."

다른 지역은 모두 오륜회 출신이 상권을 휘어잡았지만, 강남 분타만은 홍수를 피해 갔다.

당시 서류상으로 봤을 때는 그저 남부의 여왕이라 불리는 공설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모용소와 손을 잡았던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음."

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생각이다. 모용소가 무림맹 자본의 삼 할을 책임지는 강남을 이유 없이 그냥 놔두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

그러니 비밀리에 맹주를 만나자고 한 건 예상한 대로 둘 중 하나였다.

죽이려고 불렀든가, 빌려고 불렀든가.

"아니, 근데 그걸 다 아셨으면 애들 좀 더 데리고 오지 그랬습니까? 습격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

"자네가 있지 않은가. 하하하!"

맹주가 호탕하게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봉급 더 받아야 돼. 괜한 억울함에 고개를 내저으며 뒤를 따랐다.

그리고 대각 이 층에 놓인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신 강남 분타주 공설. 무림맹에 더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하여 맹주께 용서를 구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남부의 여왕, 공설. 그리고 다른 분타주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맹주와 장이서는 서로를 마주 보곤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369.

#무서운 자들

분타주들은 첫 만남의 허세는 내던지고, 곧바로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3년 전. 오륜회가 나타났을 때 저는 누구보다도 먼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공설의 가장 큰 장점은 인맥이 넓고, 계산 속도가 남다른 것.

하여 등장부터 상인들을 끌어모으는 오륜회를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닌 음흉한 속내를 가진 자들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중 두각을 나타내는 상인들이 요녕에 자주 출몰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고리전장(高利錢莊)의 돈무.

금일상단(金一商團)의 황금만.

기회표국(機會?局)의 용역.

이른바 모용소의 잡견들이었다. 물론 당사자들이 직접 간 건 아니었다.

먼 친척의 친구. 또는 수하의 가족. 최소 두 다리 건넌 자들이 요녕에 상주했다.

"그때 느꼈습니다. 이번 일의 배후에는 모용세가가 연루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렇게 그녀는 누구보다도 먼저 모용소의 정체를 간파했다.

맹주도 하지 못한 걸 바로 알아낸 걸 보면 확실히 이쪽으로 도가 튼 여인.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숨겼다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중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직접 찾아뵙고자 나서려고도 하였습니다. 한데 그가 직접 절 찾아온 겁니다."

그녀는 지난날이 떠오르는지 파르르 떨었다.

"그는 남부에서 활동하는 오륜회의 상인들이 보호비에 삼 할을 더 얹어줄 거라고 했습니다."

솔깃했다. 삼 할이면 결코 적지 않은 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그들이 무슨 속셈을 품은 줄 알고!"

맹주의 일갈에 공설은 눈물이 맺혔고, 다른 분타주들은 넙죽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저희도 그때 손을 잡은 걸 땅을 치고 후회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럼 왜 여태 말하지 않은 것인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째서!"

"그건...."

공설이 힘겹게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끄아아아악!

밖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솟구쳤다. 그 순간 공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저, 저희를 잡으러 온 겁니다! 저희를 죽이려고!"

맹주가 눈살을 찌푸리자 공설은 홀린 듯이 말을 이었다.

"혼자 오지 않으셨어야 했습니다. 어찌하여 몸도 편치 않으신 분이 혼자 오신 겁니까!"

"그것까지 알고 있었는가?"

"그게 중요합니까. 저들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맹주님은 모릅니다. 저들이 얼마나 무서운 자들인지!"

도대체 뭘 겪었길래 천하의 강남 분타주가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맹주는 꺾여 버린 그녀의 기세가 못내 아쉬웠다.

무예가 출중한 건 아니었으나 지닌 기세와 능력이 그 어떤 장정들보다도 빼어난 여인이었거늘.

"...자네들이 여기서 죽을 일은 없을 걸세."

"어떻게요?! 맹주께선 지금 몸도 성치 않으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호위무사와 온 것 아니겠는가."

"정의대도 아니고 고작해야 호위무사 한 명 아닙니까?"

"그냥 한 명이 아닐세."

"예?"

아주 강한 한 명이지.

맹주가 뒷짐 진 채 말했다.

"정호위, 부탁하네."

그러자 문가에 기대 서 있던 장이서가 답했다.

"그러죠."

라고.

공설과 분타주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이를 살폈다. 대체 뭘 부탁한다는 것인가.

지금 저들을 죽이러 온 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아니, 몇 명인 줄 알고.

하지만 굳이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콰직!

자객 하나가 문을 부수고 난입하는 그 순간.

수와아아악!

단박에 돌아선 장이서의 검에 그대로 양단되어 버렸으니.

"어, 어어...."

분타주들이 얼어붙은 사이 장이서는 검을 털어내며 말했다.

"천천히 오십시오."

이내 복도로 나서는 장이서.

맹주는 그의 말대로 느긋이 따라나섰고, 공설과 분타주들은.

"끄아아아악!"

"커헉!"

긴 복도에서 사정없이 잘려 나가는 살수들을 바라봐야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이름.

정호위 백서.

그에 대해 아주 잘못 알고 있었다고.

그냥 호위무사가 아니라....

"말도 안 되게 강한 호위무사였구나."

라고 말이다.

*

"커헉!"

장이서는 거침없이 자객들을 베어 넘기며 길을 뚫었다. 망설임도 없고,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콰직! 벽을 부수고 옆에서 튀어나오든.

푹! 계단 발판을 뚫고 칼날이 솟아오르든.

쐐액! 먼 곳에서 비수를 날리든.

"끄아악!"

"컥!"

그냥 범위에 들어선 적들은 무조건 도륙당했다.

이쯤 되니 분타주들도 맹주가 저리 뒷짐 지고 여유 부리는 모습이 이해가 됐다.

공설의 의문도 더 커졌다.

'백서.... 도대체 저자는 누구지?'

인맥으로 치자면 중원에서 손꼽히는 인물이 바로 그녀다.

하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의 흔적이 잡히질 않았다.

그렇다고 구파일방에서 키운 숨은 고수라기엔 검이 너무 매섭고, 표정은 서늘하다.

보통 사문을 벗어나지 못한 애송이들은 이런 사투에 빈틈을 보이기 마련이거늘.

쐐애애액!

"켁!"

이자는 숨어서 비수를 던지려는 자에게 부서진 나뭇조각을 걷어차 즉사시켰다.

그것도 쳐다도 안 보고.

물론 족사공이라는 소림의 기예이지만, 그것까진 알 순 없는 일.

'오히려 자객보다 더 자객 같구나.'

가감 없는 솔직한 평. 모르고 봤다면 마교에서 나온 특급 살수인 줄 알았을 거다. 처리하는 기술이 너무 섬찟해서.

"끄...."

털썩! 어느덧 마지막 자객이 숨을 거뒀다.

옻이 칠해진 다수의 붉은 기둥들이 더 벌게졌다.

장이서는 무심히 손에 들린 백색의 검을 살폈다.

확실히 천매검은 명검이다.

그렇게 베었거늘 날에 핏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닿는 순간 방울이 되어 떨어질 만큼 신기롭다는 얘기.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말 천만다행이로군요."

화색을 보이며 다가오는 공설과 분타주 셋.

스윽.

거침없이 그들의 목젖에 칼을 겨누었다.

"소협, 지금 뭐 하는 짓이오?!"

그러자 공설이 화들짝 놀라며 정색했다.

이에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이 중에 배신자가 있소."

"...!"

도저히 믿기 힘든 말. 공설이 눈을 번쩍 뜨자 분타주들이 질색하며 외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는 것이냐!"

"하, 배신이라니. 어디 호위무사 따위가 겁도 없이...."

그들의 항언에 공설은 안도의 숨을 뱉었다. 그러곤 장이서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가? 목숨을 구해준 건 감사하나 확실한 해명을 들어야겠네."

해명?

"설마 이유도 없이 억단을 한 것인가? 그렇다면 당장 분타주들에게 사과를...."

"이유가 너무 많은데. 그래도 확실한 게 좋을 테니."

"뭐...?"

툭. 칼끝을 올려 쳐 쓰러진 자객의 복면을 날려버렸다. 그러곤 부언했다.

"이자는 당신들과 정문에 함께 나와 있던 자요."

그러자 드러난 얼굴에 공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 역시 아는 얼굴이라는 얘기.

당연했다.

호남 분타주 강호적이 데려온 호위무사였으니!

경악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그 순간.

"이런 제기랄!"

강호적이 자릴 박차고 도주를 택했다. 하나 어리석은 짓.

"컥!"

장이서가 걷어찬 돌멩이에 정강이를 맞아 털썩 쓰러지고, 이내 다른 분타주 둘이 그를 제압했다.

공설은 눈매를 좁혔다.

설마 분타주가 자신을 배신하고 칼을 꽂을 줄 상상도 못 했기 때문.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덤덤하게 서 있는 바로 저 호위무사였다.

도대체 어떻게 자신도 몰랐던 사실을 알고 있던 것인가.

"어떻게 알았는가?"

장이서는 무심히 답했다.

"호위하는 자들 중 일부가 몸이 바깥이 아닌 대각을 향해 있었소. 목표가 다르다는 거지."

"고작 그것만으로...!"

"그리고 자객들이 들이닥쳤을 때 놀라지 않은 것도 저자뿐이었고."

"그럼 문 앞에 기대 서 있던 것도 그걸 확인하려고?"

공설은 소름이 끼쳤다.

'난놈이다. 이자가 맹주를 쥐고 흔든 게 아니었어. 맹주가 끌려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자가 뛰어난 거였다!'

실력이 뛰어난 무사들은 많아도 전장을 지배하는 무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눈앞에 선 백서는 판을 주도하고 뒤집을 능력이 있는 자였다.

그저 단순히 무사로 끝날 팔자가 아니라는 얘기.

아니나 다를까, 장이서는 곧바로 문제의 본질을 꿰뚫었다.

"왜 지금이지?"

"...!"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강호적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중요한 걸 들킨 사람처럼.

"분타주를 노린 거라면 이곳으로 오기 전에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을 텐데?"

자객들을 호위무사로 위장한 채 온 거라면 진작 죽였어도 될 일.

"설마 맹주님을 노린 건가?"

아니, 그럴 리가. 그랬다면 이보다 최소 열 배 이상은 더 준비했어야 했다.

그럼 대체 무엇인가.

뭘 노렸기에 이제 와서 암습을 가한 것인가.

"흐흐흐흐.... 히히히히히!"

그 순간 강호적이 광기에 젖은 사람처럼 눈이 돌아가고, 핏대를 세우며 광소를 터트렸다.

마치 악귀가 씐 것처럼. 그리고 번져 나오는 폭발적인 기세!

'무슨...?!'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사악하고도 역한 기운.

당황한 사이 강호적은 섬찟하게 눈을 추켜 뜬 채 말했다.

"너로구나. 사사건건 날 방해하는 놈이."

솨아아아.

그때 깨달았다. 이자, 분명 몸은 그대로인데 지금은 강호적이 아니다.

섭혼술? 아니 그것보다는 더 심오한 다른 무언가가 있다.

"어차피 곧 보게 되겠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인지."

설마 날 보려고 일부러 기다렸단 말인가?!

"...이걸 어떻게 갚아줘야 할까."

경악에 빠진 사이, 그가 히죽 웃으며 엎드린 채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내 맹주가 선 곳까지 쓱 훑더니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간다.

빠드드득! 그러다 목뼈가 바스러지는 소음과 함께 머리가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목의 근육이 나선을 그리고 입가엔 체액이 질질 흐른다. 보기만 해도 흉측한 모습.

"으, 으이익!"

분타주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켜난다.

반면 강호적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이죽거리며 말했다.

"결정했다. 어떻게 갚아줄지.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아니, 기대하거라.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 순간에 절망을 맛보게 될 것이니. 흐흐흐... 히히히히!"

그리고 그 순간.

'살기?!'

장이서의 기감에 불쑥 없던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확히 다섯 걸음 이내, 기둥 뒤!

"피해!"

외침과 동시에 몸을 날리는 그 순간.

서걱!

끔찍한 소음과 함께 기둥에 횡으로 길게 실선이 그어졌다.

"꺼어어어...."

그러자 동시에 몸이 잘려 나간 채 고꾸라지는 강호적과 분타주들.

"무, 무슨...."

장이서가 몸을 던져 구한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은 공설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정신이 혼미했다.

하나 설명해 줄 겨를 따위는 없다.

"정호위!"

장이서는 옆으로 날아든 맹주와 등을 맞대곤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보통 살수가 아닙니다."

"나도 느꼈네."

솨아아아!

분명 조금 전까지 기척이 느껴졌거늘, 그새 완전히 또 사라졌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느끼고 있었다.

분명 기둥으로 가득한 이 공간 안에 살수가 숨어 있다는 것을.

'맹주가 아닌 분타주들을 노렸다.'

처음부터 목표는 그들이었다는 얘기. 정말 절 보기 위해 기다린 것인가. 일단 생각은 나중에.

두 눈을 감은 채 기감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 순간.

'위!'

콰직! 천장에서 구멍이 뚫리고 검 끝이 뱀처럼 요동치며 날아들었다.

길고 유연한 연검이다!

카앙! 매섭게 날아드는 걸 장이서가 쳐내자 크게 튕겨 나가는가 싶더니, 다시금 반동으로 쏘아져 들어온다.

강하고 빠르다!

단 일격에 자세가 흐트러진 장이서.

카앙! 이를 대신해 맹주가 살수의 검을 격공섭물로 끌어와 어검술로 막아냈다.

캉캉캉캉캉!

끝도 없이 공설을 노리고 파고드는 연검과 이를 막아내는 두 사람.

장이서는 그때 상대의 정체를 직감했다.

이자는... 설마!

370.

#확실해진 것

며칠 전 마을에서 만났던 바로 그 무색무취의 사내.

잿빛의 눈동자를 지녔던 흑의인이다!

분명했다. 그의 기척을 느낄 수 있는 거리, 다섯 보!

대략 머리끝부터 천장까지의 높이다.

그리고 지금 상대를 느끼는 거리도 정확히 일치했다.

딱 한 걸음만 비켜나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하긴, 이런 자질을 가진 자가 뭘 하겠는가. 살수 아니면 첩자지. 그게 아니라면 재능 낭비다.

심지어 실력도 상상 그 이상이다.

본디 연검이란 유연함과 거리감을 중점으로 변칙적인 공격이 장기.

반대로 움직임은 크고 실린 힘이 가볍다는 것이 치명적 단점이다.

한데 이자의 검은 달랐다.

카앙!

그저 한 번 막아냈을 뿐인데도 마혈이 짚인 것처럼 팔이 저릿하고, 천근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했다.

지닌 공력을 오직 연검에 전부 쏟아부어 단점을 상쇄시킨 것.

그만큼 육신은 허점투성이겠지만, 어디 숨었는지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거다.

오직 무색무취인 그이기에 가능한 일.

"막아주게!"

맹주도 이를 느낀 것인지 두 팔을 풍차처럼 돌려 태극 문양을 그렸다.

슈슈슈슈슉!

그러자 바닥에 놓여 있던 자객들의 검이 일시에 천장을 가리키며 떠오른다.

맹주의 장기 중 하나인 다중어검술(多衆馭劍術)!

그의 성역인 만검의 시초가 된 기예이다.

콰콰콰콰콱!

맹주의 도약과 동시에 천장을 뚫고 환상적으로 솟아오르는 십여 개의 검!

장이서가 연검을 쳐내는 사이 위층으로 올라간 검들이 가지런히 눕혀지고, 맹주가 손을 좌우로 펼치는 순간.

팍!

검들이 서로 교차하며 빛줄기가 되어 쏘아졌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공격. 이 정도면 어디에 숨었든 피해내긴 힘들 것이다.

한데.

'뒤?!'

상대는 무색무취만이 아니라 경신술도 극에 달한 듯했다. 상상도 못 한 움직임!

푹!

순식간에 뒤에서 날아든 연검이 그대로 어깨를 관통했다.

공설을 노리고 날아든 걸 장이서가 이형환위를 펼쳐 몸으로 막아낸 것.

물론 그냥 당하고만 있을 마음은 없다.

쐐애애액!

곧장 소림의 대금용조수(大擒龍爪手)를 펼쳐 연검을 척! 붙잡았다.

이에 꿈틀거리며 빠져나가려는 찰나.

파지직!

손끝에서 벼락이 번쩍거렸다. 뇌전법이다. 칼날을 타고 순식간에 전이되는 뇌기(雷氣)!

그러자 촤르륵! 연검이 요동치며 몸에서 빠져나가고, 찰나였지만 상대의 기척이 뇌리에 번뜩였다.

갑작스러운 뇌기에 그가 당황한 것.

장이서는 곧바로 손을 뻗어 검은 벼락을 쏘아냈다.

『진 뇌전법(眞 雷轉法) 흑뢰(黑雷)』

번쩍! 주인에게 돌아가던 연검을 단숨에 쫓아가 쾅! 그대로 기둥을 뚫어버렸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위력!

돌아온 흑뢰의 날 끝엔 핏방울이 맺혔다. 이번엔 상대도 제대로 피해내지 못했다는 얘기.

'놓치지 않는다.'

파직! 장이서의 신형이 빛살처럼 날아가고, 천매검에서 오색찬란한 검기가 솟아오른다.

그리고 느껴지는 기척에 망설임 없이 기둥을 베어내는 그 순간.

촤아아아악!

기둥 좌우에서 연검들이 갈고리처럼 덮쳐들었다.

'하나가 아니라 열 개?!'

이런 미친! 속에서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상대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던 것.

이대로 승부를 볼 것인가. 아니면 빠질 것인가.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벤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벤다.'

수와아아악!

이를 악물곤 찬란한 빛을 흩뿌리며 기둥을 베었다.

'...!'

이에 상대도 당황했는지 칼끝이 흔들렸다. 하나 상대 또한 실패를 모르는 승부사.

파파파파팍!

거침없이 장이서를 향해 열 개의 칼이 쏘아졌다.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빛무리가 흩날린다.

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파스스스! 나무 기둥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그 순간.

장이서는 상대를 마주 볼 수 있었다.

몽환적인 용모에 잿빛 눈동자를 가진 무색무취의 사내.

역시 그다.

연검의 정체는 손에 끼워진 수투(手套). 칼날은 손끝에서 날아들었던 것.

아쉬운 건 잘려 나간 장포 안에 단단한 호갑도 착용하고 있었다는 거다.

'실패구나.'

만일 자야검에 걸맞은 내공이 있었다면 분명 상대를 베었을 텐데.

입안을 질끈 물었다.

물론 상대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

그가 날린 열 개의 연검도 장이서의 몸에 깊숙이 박히진 못했다.

아까는 연검을 붙잡아 역공을 취하려고 일부러 역근경을 풀어두었지만, 이번엔 금강불괴의 힘이 제대로 발현됐기 때문.

덕분에 큰 위기는 면했다.

"정호위!"

맹주가 검을 붙잡고 날아들자, 흑의인은 흩날리는 가루와 함께 스르륵 자취를 감추었다.

이번엔 반드시 기억하겠다는 무언의 눈빛과 함께.

"괜찮은가?"

맹주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곤 주변을 살폈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안가.

오랜만에 만신창이가 된 몸.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돈 더 받아야겠다.

*

혈투가 끝이 나고, 세 사람은 대각 밖으로 나왔다.

콰르르르!

그러자 대각이 보란 듯이 폭삭 무너져 내린다. 그야말로 무덤 그 자체.

한숨이 절로 뱉어졌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야 할 걸세."

맹주는 평소보다도 노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평정심을 유지하기엔 장이서의 몸에 피가 낭자하다. 위급한 건 아니지만, 위험할 뻔했던 건 분명한 사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신(死神)이 다녀간 겁니다."

공설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죽음의 신.

중원에 그와 같은 별호로 불리는 자는 오직 하나뿐이다.

"천하제일살수 구양룡!"

이것이 지금까지 모용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이유.

사신의 칼날이 언제 자신들을 덮칠지 몰라 늘 두려움에 떨고 있었기에.

그래서 더 놀라웠다.

'저 나이에 천하의 사신과 비등한 수준이라니.'

사신 구양룡. 그가 누구인가.

자타공인 천하제일살수로 꼽히는 자다.

사도련 팔대방주라는 명성보다 사신이라는 별호가 원래 더 유명할 정도.

'한데 그런 그의 정체를 알고도 안도하기는커녕 도리어 놓친 걸 분해하는 표정이라니.'

맹주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긴 정호위를 몰아세울 만한 살수라면 그밖엔 없겠지."

사신이기에 이해한다는 표정. 자신이 미친 것인가. 이들이 미친 것인가. 당연히 후자는 아닐 거다.

"한데 그가 왜 자네들을 노린단 말인가."

맹주의 물음에 공설은 잡념은 치우고 곰곰이 생각하며 답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진심이었다. 물론 살수이니 의뢰를 받아 그랬을 것이다. 맹주 역시 그걸 모르고 물은 건 아닐 터.

중요한 건 왜 지금이냐는 거다.

없애려면 진작 없애든가.

이에 공설은 더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위협을 받기 시작한 건, 3년 전부터였습니다."

"...!"

정확히 말하자면 오륜회의 행태가 점점 선을 넘어갈 때쯤. 이를 말리고자 모용소를 찾아갔던 날부터였다.

그날은 참 신기한 날이었다.

하늘은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폭우와 벼락이 쏟아졌고, 가솔들은 범람하는 강물을 막고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와 분타주들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피풍의를 두르고 장원을 거닐었다.

그리고 어느 한 건물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극히 어둡고도, 서늘한 기운.

이미 온몸이 축축하고 하늘이 시커먼데도 불구하고 소름이 끼치도록 확연히 느껴졌다.

"그 안에서 모용소를 본 것인가?"

맹주의 물음에 그녀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론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엔 흑지가 발라져 있고, 피눈물을 흘리는 불상들이 즐비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 안에 붉은 악귀의 가면을 쓴 그가 사술을 읊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떨리는 두 어깨를 교차로 붙잡곤 완전히 얼어버렸다.

맹주와 장이서는 서로를 마주 살폈다.

붉은 악귀의 가면. 흉신팔주다. 모용소가 확실했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저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도 견디기가 힘들 만큼.... 그때 알았습니다. 우리가 알던 모습과는 다르다는 걸."

그날 그녀와 분타주들은 미친 사람처럼 겁에 질려 도망쳤고, 사신의 위협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잊을 만하면 사신이 나타나 자신들을 위협하곤 사라졌다.

차라리 죽이든가, 아니면 붙잡고 화라도 내면 좋겠는데.

가면을 벗고 다시 만난 모용소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으며 자신들을 대했다.

그게 사람을 더 미치게 했다.

"그러다 최근 들어 감시가 사라졌고, 맹주께서 대총회를 여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깨달았다. 맹주가 모용소를 압박하고 있다는 것을. 하여 용기 내어 찾아오게 된 것이다. 설마 배신자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설명을 마치자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 장이서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두 가지는 확실해졌군요."

하나는 구양룡과 모용소가 단순히 금전적 거래 관계만은 아니라는 것.

천하의 사신이 만금을 준다고 분타주들 감시 의뢰를 받진 않았을 것이다.

이건 아무리 봐도 그가 흉신팔주 중 하나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

그리고 두 번째는.

'모용소가 그런 사신까지 부릴 만큼 강하다는 거다.'

구양룡은 사도련에서도 세 손가락에 드는 고수.

경지로 보면 초절정에 불과하지만, 이미 화경의 고수를 죽인 전례가 있는 자다.

그만큼 위험하고 사람 죽이는 데 타고난 자라는 뜻.

한데 그런 그를 수족 부리듯이 다룬다? 그건 구양룡도 어찌하지 못할 만큼 고수라는 얘기.

그저 정도의 배신자 정도로만 생각했거늘. 괜히 흉신팔주의 수장이 아니다. 만만히 생각해선 절대 안 될 자다.

특히 아까 강호적의 몸을 빌려 나타났을 땐, 흡사 혈존을 마주했을 때만큼 위압적인 사기(邪氣)를 느꼈다.

게다가 구양룡과의 대결에서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였으니....

'천마신공은 내가 가진 최후의 수단. 이것만 믿어선 안 된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마음속에 짙은 열의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그리고 공설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맹을 속이고, 기만한 죄. 그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맹주는 긴 침묵 끝에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게 어디 자네만의 문제겠는가. 모용소 그자에게 농락당한 건 나뿐 아니라 모두가 마찬가지인 것을."

"맹주님...."

"그만 일어서게."

"뭐든 맡겨만 주십시오. 분골쇄신하여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녀의 눈빛에 진심이 보인다. 맹주는 이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정호위.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나."

갑자기? 의아함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맹주는 기막을 펼친 뒤 말했다.

"강남을 비롯한 사대 지역을 두고 남천무림맹이라고 부른다지."

"그, 그건 세간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나무라려는 것이 아닐세."

"예?"

"그만큼 모용소만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휘둘릴 일이 없다는 것 아닌가."

공설은 그 순간 맹주가 제게 따로 명하려는 것이 있음을 직감했다.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이에 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색에 잠긴 정호위 백서를 살피며.

371.

#독마의 강림

- 요녕 심양 모용세가.

늦은 밤. 안채를 책임지는 총관 모용식은 가주 앞에 앉아 염소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아가씨께서 다녀가셨더군요."

그는 모용란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니, 그녀와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었다. 죽을 뻔했던 그를 그녀가 살려주었으니.

"기억나십니까. 철없던 시절 저지른 실수 하나로 절 뇌옥에 가두셨을 때. 그때 유일하게 날 사람으로 대해준 분이 바로 아가씨였습니다."

총관은 옛 기억을 회상하듯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쭈뼛거리며 다가와 그 작디작은 손으로 제게 음식을 주셨죠. 그때의 손길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어찌 잊겠는가. 색마였던 그가 고른 다음 대상이 바로 그녀였었는데!

"키키킥. 아주 농익게 잘 컸더군요. 아쉽습니다. 제가 뇌옥에서 조금만 더 일찍 나왔더라면. 아니, 네놈이 날 가두지만 않았다면. 그랬다면 설익었을 때 미리 맛보았을 것을. 하하하!"

그야말로 미친놈 중의 미친놈.

가주 모용학은 속에서 열불이 터지다 못해 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색마였던 과거를 숨기고 모용세가로 숨어 들어왔다가, 덜미가 잡혀 관아로 끌려갔던 자였다.

한데 그런 그를 모용소가 다시 데려와 자신의 감시자로 붙여둔 것.

"뭐 아쉽긴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어차피 곧 아가씨도 가주님과 똑같은 신세가 될 테니. 그때라도 맛보는 수밖에. 비명을 듣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머리는 깨어 있을 테니.... 키키킥.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어 드리지요."

아.... 모용학은 혀라도 깨물 수 있다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깨물어 죽었을 것이다.

십수 년 만에 돌아온 딸을 안아주지도, 반겨주지도 못한 채. 지금이라도 제발 도망가 주길 빌어야 하는 아비의 마음을 아는가.

이건 그냥 생지옥이었다.

이놈이든, 저놈이든. 다 죽일 수만 있다면.... 자신을 이 지옥에서 해방만 시켜줄 수 있다면.

아니, 하다못해 제 딸이라도 무사히 구해줄 수만 있다면.

그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영혼까지 다 갖다 바치리라.

그러니 제발.

마귀라도 좋으니 귀를 기울여 주소서!

그렇게 모용학은 안 될 걸 알면서도 오늘도 간절히 빌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솨아아아아!

시퍼런 독무가 바닥에 은은하게 깔리며 스르륵 그가 나타났다.

"역시 사술에 당한 것이었나."

"네, 네놈은?!"

모용란의 종복.

아니, 모용세가를 집어삼킬 천산의 마귀.

"들어라. 나는 살리는 법 따위는 모른다. 죽이는 법만 알 뿐. 그러니 죽여주마."

네 앞의 총관이든, 네 몸에 깃든 저주든. 그게 무엇이든.

"이것이 란이의 아비인 네게 주는 나의 선물이니."

콱! 독마의 손에 모용식의 얼굴이 움켜쥐어진다. 그리고 발끝을 타고 서서히 독무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끄아아아아악!"

그러자 끔찍한 비명과 함께 모용식의 몸이 독무에 휩싸여 연기처럼 증발하기 시작했다.

"네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멈추라고 말해준다면 멈추어 주마."

"사, 살려줘! 살려줘-! 으아아아악!"

모용식은 몸이 분해되는 극한의 고통을 느끼며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하나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기막이 펼쳐진 이상 이 안에서의 소리는 절대 바깥으로 퍼지지 않았다.

들어줄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

고이 누워 있는 가주 모용학뿐.

"가주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가주님! 가주님 제바아아알-!"

그렇게 모용식은 산 채로 피눈물 흘리는 두 눈을 지나, 독무에 완전히 삼켜질 때까지.

끝없는 고통 속에 가주에게 빌고 또 빌어야만 했다. 제발 깨어나달라고.

물론 현실은 참혹했지만.

"아쉽구나."

다정히 미소 짓는 독마(毒魔)의 강림이었다.

*

모용학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언제는 꿈이 아닌 적이 있던가. 눈도 뜨지 못하는 그에겐 모든 것이 꿈이었다.

그러니 이것도 꿈인 것이다.

그런데....

악몽이 아닌 길몽을 꾼 적은 없었는데?

"신옥(身獄)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육신을 봉하고 그 안에 혼을 가두는 금기된 본교의 사술이지. 이 정도 거리라면 날 보고 들을 수도 있을 터."

모용학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짐승 새끼를 웃으면서 도륙한 것도 모자라, 생사신의도 알아내지 못한 자신의 병명을 정확히 짚어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알아먹었다면 일어나거라.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 셈이더냐."

"아...."

모용학은 그제야 현실을 깨닫고 앙상한 손을 들어 천천히 제 눈가를 더듬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촉촉한 기운.

꿈이 아니었다.

악몽도, 길몽도 아닌 현실이었다.

깨어났다. 지옥 같던 꿈에서 드디어 깨어난 것이다.

제 앞에 우뚝 선 섬찟한 인상의 마귀.

독마 양대헌으로 인해!

"몸이 회복될 때까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쥐 죽은 듯이 지내거라."

독마의 엄포에 모용학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앙상한 몸을 힘겹게 뒤집었다.

그러곤 엉금엉금 기어 철퍼덕! 침상에서 떨어졌다.

뭐 하는 짓이지? 독마는 물끄러미 이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인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것인가? 팔자 주름이 더 짙어진다.

하나 모용학은 아랑곳없이 기어와 독마의 발끝에서 쉰 목소리로 외쳤다.

"죽는 그 순간까지.... 아니 흙 속에 묻혀 앙상한 뼈만 남을지라도.... 섬기고 또 섬기겠나이다! 은인이시여. 흐으윽...."

눈물이 우수수 쏟아졌다.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학.

검성의 부활이었다.

그리고.

"말은 안 듣는 놈이군."

피곤한 독마의 하루였다.

* * *

다음 날.

강남 분타주 공설은 등 총관과 맹호단의 비호 아래 사천으로 떠나기로 했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 사천삼문에 잠시 의탁하기로 한 것.

그녀는 가기 전 장이서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소협께서 구해주신 은혜는 반드시 잊지 않겠습니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으면 그때 꼭 찾아뵙지요."

무슨 심경에 변화가 있었는지, 그녀는 허리까지 숙이며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그 결과 북개와 등 총관을 비롯한 맹호단은 입을 떡 벌려야만 했다.

상대가 누구인가. 지금은 피신하는 신세이지만, 남부의 여왕이라 불리는 강남 분타주다.

인맥이 닿지 않는 곳이 없고, 중원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남부 사대 지역이 그녀의 손바닥 안이었다.

직책으로만 놓고 봐도 분타주는 무림맹의 간부. 반면 장이서는 맹에서 공식적으로 임명도 하지 않은 한낱 호위무사 아닌가.

한데 오만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그녀가 허리를 숙이다니.

실로 이례적일 수밖에 없는 일.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이미 극한에 다다른 장이서의 존재감을 드높이곤 떠나갔다.

덕분에 맹호원도 텅 비어졌다.

장이서는 병가라는 명목 아래 개인 시간을 갖게 되었다.

물론 대총회를 앞둔 지금,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강해져야 한다.'

오직 강해지겠다는 일념.

구양룡과는 동수를 이루었고, 모용소의 진짜 실력은 아직 확인도 하지 못했다.

그뿐인가. 앞으로 혈존을 비롯한 무수한 혈교의 고수들을 상대해야 했다.

입신지경에 오르지 못한 지금의 몸으로는 한계가 분명한 일.

물론 3년간 진우광에게 매일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배운 천마신공이 남아 있긴 하지만....

'대총회에서 함부로 썼다간 도리어 다른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어쨌든 자신과 맹주가 깊이 엮여 있음을 이젠 만천하가 알게 되었으니.

그렇기에 대총회까지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성공해 내고 싶었다.

지난 3년간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여섯 번째 천공!

입신지경으로 향하는 신인지로(神人之路)의 개척을 말이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안개로 가득한 미로에 갇힌 상황이나 다름이 없었다.

구규지체를 막기 위해선 기존의 것들과 겹치지 않는 새로운 기(氣)가 필요한데, 아무리 봐도 여의찮기 때문.

무엇보다도 천마신공이 제일 문제였다.

저와 격이 맞지 않으면 바로 잡아먹으려고 안달이니.

"후... 답이 보이지 않는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된다."

갑갑함을 한숨과 함께 날려버리곤, 언덕으로 올랐다.

시원한 바람이 흩날리고, 이내 소리 없이 꺼내든 천매검을 천천히 휘두르기 시작했다.

핑!

그러곤 상상으로 그려낸 맹주를 상대로 초심으로 돌아가 대결을 시작했다.

*

한편 그 시각.

맹주 역시 안채에서 수련이 한창이었다.

장이서가 자극을 받았듯, 그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

솨아아아아!

청명하고도 현묘한 기운이 겹겹이 막을 이루듯 가득 채워진다.

구극심결(究極心訣)이다.

음과 양의 기운을 번갈아 쌓아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켜 힘을 증폭하는 진신절기.

본래 최대 열두 개의 층까지 쌓았지만, 지금은 여섯 개가 한계.

그래도 이 정도면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그동안 신선폐로 인해 내공을 다루는 것 자체가 독주를 마시는 것과 다를 게 없었거늘.

이젠 어느 정도 진기를 다뤄도 무리 없는 수준까지 돌아오게 된 것.

덕분에 다중어검술도 펼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놀랍게도 생사신의도 아닌 생각지도 못한 이 덕분이었다.

'마을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몇 가지 사다 만든 겁니다. 드세요.'

뜬금없이 제게 약첩에 담긴 환을 건넸던 아이.

정호위 백서.

놀랍게도 그 약을 먹고 나서 급속도로 몸이 나아졌다. 정말 화타가 살아 돌아온 거라고 착각할 정도.

물론 신선폐는 오직 이독제독으로만 치료가 가능하고, 생사신의는 독보다 약초에 더 능했기 때문이지만.

뭐, 그것까지 알 수는 없는 일이고.

어쨌든 맹주가 보는 장이서는 참으로 희한한 존재였다.

어느 순간 제 옆에 다가와,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이가 되어있었으니.

요즘은 정도 무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켜줘야 할 존재란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그가 103호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고개를 내젓곤 내기를 갈무리한 채 밖으로 나섰다. 생각난 김에 얼굴이나 보려고.

보통 자신이 안채에 있을 때 그가 머무는 곳은 둘 중 하나였다.

지붕 위에 앉아 있거나, 아니면.

'역시 여기 있었군.'

뒤편에 놓인 작은 언덕에 오르자 장이서가 검을 뽑아 든 채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워낙 예민한 자라 이 정도 거리라면 분명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

아무 눈길도 주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깊게 몰입해 있다는 뜻이리라.

잠시 후.

"...!"

장이서는 소리 없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맹주는 이를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부드러우면서 거칠고, 절제된 듯 보이면서도 광포하다.'

마치 태양과 달이 공존하듯 도저히 함께하기 어려운 두 가지의 성질이 동시에 느껴진 것.

일전에 화무진과 겨룰 때나, 어제 안가에서도 잠깐 보긴 했지만, 분명 허투루 배운 검이 아니다.

맹주는 오랜만에 후학의 무공에 흠뻑 빠져 홀린 듯이 이를 감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그저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저 아이는 지금 상상 속의 누군가와 대련을 벌이고 있는 거다.'

그것도 정제된 몸가짐을 가진 굉장한 검의 고수!

'누군지는 몰라도 꽤 가까운 이를 떠올리고 있는가 보구나. 대응이 익숙하고, 호흡이 고르다. 하루 이틀 겨뤄본 사이가 아니군.'

심지어 장이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까지 보이자 내심 언짢다.

그러곤 그런 스스로를 자각하고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설마. 내가 부러워하는 것인가?'

맙소사. 이젠 하다 하다 가상의 대련 상대를 부러워하는 날이 올 줄이야.

대체 누구지?!

372.

#특별한 수련

맹주는 한숨이 길게 삼켜졌다. 누군지가 뭐 그리 중하겠는가.

지금의 이 못난 질투심은 순전히 제 업보였다.

오래전 103호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하고 떠나보낸 죄책감의 발로.

하여 백서에게서 103호의 모습이 겹쳐 보이니, 자꾸 뭔가를 가르쳐주고 싶다는 이기적인 심리가 생기는 거다.

씁쓸함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그사이 장이서의 검식(劍式)은 끝이 났다.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남의 수련을 너무 대놓고 보시는 거 아닙니까?"

"아,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그만."

"됐습니다. 뭐, 자격이 없으신 것도 아니니."

"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의문을 드러내자 장이서가 화제를 바꿔 물었다.

"한데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은 더 일정이 없는 거로 아는데요."

"오랜만에 장원이 너무 조용한 듯해 적적하여 들렀네."

"적적해서 절 보러 오셨다고요?"

"그럼 안 되는 건가?"

안 될 건 없지만. 느닷없긴 하네. 장이서가 픽 웃고는 물었다.

"기왕 보신 거 평이나 해주시죠. 어떠셨습니까?"

"훌륭하더군. 누구에게 배웠는진 몰라도 잘 배웠어. 특히 절제된 검의 선율이 마음에 드네."

그렇겠지. 본인을 보고 배운 것이니.

"한데 누구와 대련을 벌인 것인가. 웃는 걸 보니 보통 사이가 아닌 모양이던데. 자네 사부인가?"

이에 장이서는 당황을 숨기곤 답했다.

"뭐, 그런 셈입니다."

어쨌든 정식 사부는 아니지만, 제게 검을 가르쳐준 건 분명한 사실.

적어도 자야검의 사부는 맹주와 서검이 맞으니 그렇다고 답했다.

"역시 그랬군...."

그러자 갑자기 뭐가 그리 서운한지 맹주가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물론 그도 잠시뿐.

금세 표정을 갈음하곤 물었다.

"한데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검과 내기의 흐름이 다소 조화를 이루지 않는 듯하던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역시 자타공인 검신(劍神) 맹주 현청이다. 장이서는 입이 벌어질 만큼 크게 놀랐다.

제대로 기운을 발산한 것도 아닌데 제 부족한 점을 단박에 꿰뚫어 보다니.

"검법은 배웠지만 아쉽게도 심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아."

맹주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뱉어졌다.

흔치는 않지만 강호에서 종종 있는 일이었다.

사부가 말년에 깨달은 무공을 전수해 주기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

"...그래서 그동안 검을 익히지 않은 척했던 것이군."

아니, 그건. 장이서는 순간 훅 찌르고 들어온 말에 속이 뜨끔했다.

이전까지는 정말 검을 몰랐던 게 맞으니까.

"아쉽군. 분명 무영이 심법을 전수해 줬다면, 최고의 검이 되었을 텐데."

오해이긴 하나,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야검에 담기는 공력이 너무도 미약한 수준. 아니, 그뿐 아니라 지금 자신의 경지 자체가 너무도 부실했다.

물론 인간의 한계라 할 수 있는 초절정 후기까지 올랐지만, 몸 안에 담긴 건 모두 신공(神功)이라 할 수 있는 경천동지한 무공들.

이를 온전히 다 펼치기엔 입신의 벽이 너무도 두텁다.

"혹."

잠시 고민에 잠길 무렵. 맹주가 잔잔한 바람을 맞이하며 말했다.

"자네만 괜찮다면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예?"

"기(氣)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아닌가?"

일순 말문이 턱 막혔다. 이에 맹주는 다정히 말을 이어갔다.

"기는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닐세. 시간과 장소. 그 순간의 흐름.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이지. 마침 근처에 수련하기 좋은 곳을 알고 있네. 함께 가보겠는가?"

너무도 갑작스러운 제안. 하지만 지금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다.

얕게 숨을 삼키곤 마주 웃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맹주의 입가에 아주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

다음 날.

"무, 무어라?! 누가 누굴 가르쳐?"

맹호원 안채에서 북개가 닭 대신 아침을 알렸다.

맹주가 오늘 일일 스승으로 백서의 심법 수련을 도와주기로 한 사실을 알게 된 것.

"조용히 좀 하게. 아침부터 웬 소란인가."

"이게 조용할 일이야?!"

북개는 발끈하여 꽥 소리를 질렀다.

물론 백서의 자질이나 능력. 그리고 저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뭘 줘도 아깝지 않은 건 사실.

자신만 하더라도 비렁뱅이 손녀의 짝으로 점지하지 않았던가.

"내가 말이야. 백서 그놈이라면 내 전 재산도 줄 수 있어!"

아무것도 안 주겠다는 말 아닌가.

"근데 자네 무공은 안 되지."

무공을 준다고 한 적은 없다. 찾는 걸 도와주겠다고 한 거지. 근데 그건 그거고.

"왜 안 되는가?"

듣다 보니 괜히 울컥한다.

"몰라서 이래? 일평생 제자 한 번을 안 들인 자네가 무공을 가르쳐주면. 대놓고 후계로 인정하겠다는 거잖아!"

"그게 왜. 설령 내 진신절기를 가르쳐 준다 하더라도. 그 아이가 뭐 어때서 그러는가."

솔직히 백서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찾던 세대를 아우르는 인재였다.

분명 어떤 난관이 봉착해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터.

한데.

"그 아이니까 안 되지! 지금 세간에서 백서를 두고 뭐라는지 아는가? 월야재상이라더라!"

월야재상(月夜宰相).

말 그대로 달밤에 숨어 맹을 좌지우지하는 비선 실세라는 뜻이다.

그리고.

"자네는 암군(暗君)이야! 이용만 당하는 어리석은 임금이라고."

아하하하! 맹주가 박장대소했다. 이렇게 웃어본 것도 실로 오랜만. 맹주는 살짝 맺힌 눈물을 닦아내곤 정색한 척 말했다.

"암군이라는 말은 너무 하는군. 지금은 월야재상의 말을 따르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인데."

"그걸 말이라고!"

북개가 가슴을 탕탕 치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나도 알아. 백서 그놈 말 따라야지. 근데 이런 말들이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북개의 일언에 맹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왜 모르겠는가. 그들 셋이겠지.

무림맹이라고 모두가 현청에게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신주오절의 뒤를 잇는 무림오성.

그중 공직에 매진한 철혈성 등태보와 혼수상태인 검성 모용학을 제외한 나머지 셋.

이른바 천삼성(天三聖)이라 불리는 당대의 무림 실세들.

분명 악의적인 이야기들은 그들의 지지 세력에게서 나왔을 공산이 컸다.

그들에겐 맹주가 든든한 뒷배가 아닌 긴 세월 앞을 가로막은 태산과 다를 게 없을 테니.

존경은 하지만 더는 따를 수 없는 그런 존재 말이다.

"한데 그런 자네가 구파일방도 아닌 월야재상한테 무공을 가르쳐주면 그놈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

천만에. 짐작건대 견제와 질시가 분명 화를 불러일으킬 게 뻔했다.

"백서 그놈 성정상 그냥 넘어가지도 않을걸? 그럼 전쟁이지 뭐. 그래도 가르쳐 줄 테야?"

분명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친구야. 다시 말하지만 잘못 짚었네.

"내가 어찌 무영의 제자에게 무공을 가르치겠는가. 그저 절세 검법에 걸맞은 심법이 없는 게 안타까워 도와주겠다고 한 것일세."

"으잉?! 그런 게야?"

"무영이 남기고 간 검법이라더군. 아쉽게도 심법은 배우지 못한 듯하고."

"뭐야, 난 또...."

속내를 털어놓자 북개가 크게 탄식했다.

그런데 그때.

"무영의 검법이라고?!"

텅!

거칠게 문을 열고 험상궂은 백발 신선이 들이닥쳤다.

충격과 배신감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서검!"

서검 여중악.

그가 맹호원에 방문했다.

죽엽청을 손에 들고서.

*

"아니, 자네가 여기 웬일이야? 그 손에 들린 건. 킁킁! 혹시 술 아닌가? 뭘, 또 이런 귀한 걸 다. 으잉?"

서검은 술을 향해 달려드는 북개를 피해 손을 번쩍 들곤 사납게 물었다.

"무영의 검법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쩝. 북개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곤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다 들어놓고 뭘 물어? 들은 대로지. 백서 그놈이 검법만 익히고, 심법은 익히지 못했대. 해서 맹주가 오늘...."

"난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

과아아앙! 호탕한 일갈에 장내가 들썩였다. 왜 이래, 갑자기?!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서검의 눈에서 짙은 안광이 번뜩인다. 당황한 북개가 취권 자세를 취하는 그 순간.

"내 심법이라도 가르쳐 줄 것이다."

"뭐, 뭐, 뭐라아아?!"

청천벽력이 뱉어졌다. 입까지 떡 벌린 채 넋이 나간 두 사람.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내 것이라니. 네 거 뭐?!"

"뭐든. 필요하다면 전부 줄 것이다."

"설마 자하신공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해서라도 무영의 검을 볼 수 있다면 못 할 것 없지."

"미, 미친 게야?! 자하신공이 네 거냐? 화산 거지! 낚시질만 하더니 자네가 누군지 잊었어?"

어쩌란 거지? 서검이 사납게 코웃음 치며 답했다.

"이미 내가 천매검을 넘긴 아이다. 뭐가 문제지?"

"정식 제자도 아닌데 화산의 무공을 전수하면 어쩌자는 게야?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배분이 문제면 무기명제자로 거두면 그만. 이미 무형검도 그 아이에게 전수해 줬다. 하나 더 준다고 이상할 것도 없는 일."

"이, 미, 미친놈."

북개가 너무 놀라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봐, 현청. 지금 이게 말이 되는 게야? 응? 저놈 좀 말려 봐! 내가 지금... 응?"

"무공을... 전수해 줬다고?"

한데 그 순간 맹주의 목소리가 어딘가 이상하다. 비장하고, 웅장하다. 뭔데. 갑자기 왜 그러는데!

당황한 북개를 스치고 맹주가 서검과 당당히 마주 선다.

"자네가 가르쳤다면 나라고 못 가르칠 이유가 없군."

야, 이 미친놈들아! 북개가 고함을 빽 질렀다.

하나 두 사람은 일평생 선의의 경쟁을 해온 영원한 숙적! 한번 불붙으면 폭우가 쏟아져도 못 끈다.

"흥, 겁쟁이처럼 머뭇거리는 것 같던데."

"그런 적 없네. 자칫 무영의 검에 누가 될까 조심스러웠던 것뿐. 대신할 심법이 자네의 것이라면 내가 나서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고오오오오!

장내가 터질 것처럼 엄청난 기세가 휘몰아쳤다.

"그새 그 아이와 꽤 가까워진 모양이군."

"자네야말로 정호위를 얼마나 봤다고 이렇게까지 나서는지 모르겠군."

"얼마나 봤느냐가 중요한가. 얼마나 가까운지가 더 중요한 것이지."

"내 호위무사일세. 그것도 정호위. 보통은 이를 두고 최측근이라고 부른다네."

"그래봤자 헤어지면 끝날 사이."

"자네는 다른 것처럼 말하는군."

"다르지."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 아이는... 내 핏줄과도 같다."

미친! 북개와 맹주가 또다시 기함을 터트렸다. 이게 뭔 개소리인가. 일평생 여인 한 번 안 만나본 걸 너도 알고 쟤도 아는데.

하지만 서검은 당당했다. 엄밀히 따지면 손제자는 손자와 같고, 백서는 그 손자의 형이니. 자신에겐 장손과 다름이 없다는 기상천외한 논리.

외견과 달리 이쪽으로는 순수한 서검이다.

"더는 못 들어주겠군. 나갔다 올 테니 자넨 여기서 북개와 술이나 마시고 돌아가게."

"그럼 혼자 나가든지. 난 오늘 백서를 보러 온 것이니."

"기어코 끝을 봐야겠다는 것인가?"

"기억이 안 나는가 보군. 마지막에 패한 자가 누구였는지."

"누가 더 많이 이겼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지."

"모르겠는데."

고오오오오!

팽팽한 신경전에 상대를 압살하는 기파가 밀도 높게 장내를 가득 메운다.

급격히 무거워지는 공기. 숨도 쉬기 어렵고, 천근에 짓눌리는 기분!

"사, 사람 살려!"

북개가 호흡 곤란을 호소하며 포복 전진으로 닫힌 문을 쾅쾅 두드리던 그때였다.

"다들 뭐 하시는 겁니까?"

그가 나타났다.

"크흠."

"음."

폭우도 끄지 못할 불길을 단숨에 꺼버리는 남자.

정호위 백서.

주인공 등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