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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화. 황제, 케틀란 테슬라(2)

* * *

루시온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옷가지를 벗느라고 진땀을 빼내야 했다.

―빨리, 빨리!

라타가 루시온 주변으로 빙그르르 돌았다.

"괜찮습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흄은 루시온이 돌아올 때를 대비해 여러 준비를 했기에 그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루시온은 자신의 발밑에 돌아다니는 작은 여우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 테니 이제 누워 계십시오."

흄의 말에 옷을 전부 갈아입은 루시온은 그제야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

포근함이 몰려오자 금세 피곤함이 넘실거렸다.

눈은 누군가 억지로 감기는 것처럼 감겨왔다.

카슨을 상대한 탓도 있지만, 골치 아픈 사실을 알아버린 탓일지도 몰랐다.

테펠로우 셀가가 소유하던 저택에서 이미 베델에게 사라진 그 흑마법사가 말하길, 4황자가 뉴브라 왕국에 제국의 기밀을 여러 개 넘겼고,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들고자 재료를 죽음의 바다에서 가져왔다고 말했다.

4황자가 넘긴 기밀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놈들이 사용하던 타락한 어둠이 죽음의 바다에서 가져왔다는 게 사실로 밝혀졌을 때의 그 충격은 장난 아니었다.

'…미친 새끼들.'

루시온은 다시금 떠올려도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루시온.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누워 있어.]

러쉘이 루시온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맞아. 루시온은 생각이 많아. 엄, 라타도 평소에 어떻게 공을 가지고 놀면 재밌을지를 생각하지만, 라타는 그냥 생각하지 않고 뛰어다니는 게 더 좋아!

라타도 루시온 옆에 붙어서 앞발로 루시온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그냥 생각이 자꾸 떠오르고, 머리가 복잡합니다."

[복잡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지. 봐봐.]

러쉘이 손을 펼쳤다.

1. 죽음의 바다는 타락한 어둠이 모여 만들어진 곳이다.

2. 크라언의 조국인 케오르티아 왕국이 사라진 일 뒤에 네바스트가 있다.

3. 네바스트가 노예상인인 체이톤을 시켜 크라언을 십여 년간 노예 생활을 시켰다.

4. 세 번째 사실을 통해 케오르티아 왕국이 사라진 일이 처음부터 계획됐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헤인트를 통해 네바스트가 널 노리고 있다는 말까지 확정받았잖아?]

벌써 러쉘의 손가락이 다 펴졌다.

[검은 구슬도 있고, 내 기억 일도 있고, 트로에와 어둠이 널 보고 말한 '그릇'과 관련된 일도 있고, 더 말해?]

"됐습니다.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옵니다."

루시온은 단번에 질색했다.

하나를 풀면 두 개가 생겨나고, 두 개를 풀면 네 개가 생겨나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초조해하지 마. 루시온 공이 지금처럼만 한다면 금방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 거다.]

베델은 잔뜩 찌푸린 루시온의 미간을 위로 당겨 주름을 폈다.

'내 이마에 꿀이라도 발렸나?'

러쉘은 설명한다고 잠깐 멈췄지만, 라타는 재미있는지 계속 쿡쿡 찌르고, 베델은 주름을 펴주려 미간을 당기기까지.

옷을 정리하던 흄까지 키득거렸다.

"초조하지 않아. 그냥 짜증이 날 뿐이지."

루시온은 자신을 건들든지 말든지 그냥 가만히 입만 움직였다.

공허의 손 보스만 잡으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그 과정이 길어지고 뭐가 자꾸 생겨나고 있었다.

자신이 살려고 소설 내용을 아주 살짝 비틀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사실 살짝 건드린 것치고 너무 많은 게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살 수 있다면 알게 뭐람.

'그나저나 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날 놓아주지 않는 건데?'

자신은 소설 속, 공허의 손 중간 보스.

특별하다면 특별한 자리일 수도 있지만, 보스처럼 꼭 고정된 자리도 아니었다.

물론, 자신을 이 자리에 앉힌 일이 변경을 무너트리기 위한 수작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았기에 그 자리가 조금 특별할 순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심하잖아.'

―홉! 라타가 장난쳐서 화났어?

루시온은 자신을 빤히 보는 라타와 베델의 시선에 피식 웃어주었다.

행복해지려고 변하고, 달라지려고 했던 자신의 그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저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운명이고 뭐고, 절대로 죽어주지 않을 거다. 절대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루시온은 살짝 굳어진 표정을 풀었다.

[카슨이야.]

러쉘이 바로 고개를 벽 너머로 보았다.

흄은 정리한 옷가지들을 전부 주머니에 넣고서는 문을 열었다.

"루시온은 어떤가?"

카슨이 흄을 보자마자 조곤조곤 물었다.

"지금 막 깨어나셨습니다."

"그럼, 루시온이 좋아할 마실 음료를 챙겨줄 수 있겠나? 밤이니 너무 달지 않게."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천천히 오면 좋겠네."

"예. 물론입니다."

흄은 카슨이 루시온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알고는 바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루시온."

카슨이 루시온을 부르며 침대 옆에 앉았다.

순간 루시온은 흠칫 놀랐다.

평소처럼 카슨이 자신을 불렀지만, 조금 전 한없이 차갑고 살벌했던 카슨이 떠올라 괜히 적응되질 않았다.

―라타는 엄, 이제 얼굴이 두 개라고 하는 게 무슨 말인지 알았어! 바로 카슨이야! 아까는 엄청 무서웠는데 지금은 아니야.

라타는 꼬리를 흔들며 카슨의 무릎에 올라갔다.

―카슨이다. 착한 카슨.

"아직도… 무섭더냐?"

카슨은 자신의 목소리에도 깜짝 놀라는 루시온을 보자 상태가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판단했다.

아직 열도 있었고, 안색도 나빴다.

[어우. 갑자기 카슨이 막 낯선데 나만 그런가?]

러쉘은 양팔을 문질렀다.

[가자, 러쉘. 루시온 공이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잠깐 자리를 비워주자고.]

[아무 말도 안 할 건데....]

[러쉘, 가자고.]

베델은 러쉘을 붙잡고 벽 너머로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루시온은 잠깐 피식거렸다.

"아닙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루시온이 상체를 일으키자 카슨은 이를 말렸다.

"누워 있어도 된다. 바닷물 때문에 상처가 더 벌어졌을 테니."

루시온은 눈동자를 잠깐 굴렸다.

미엘라의 역작 덕에 목숨은 구했지만, 상처 부위가 달라져 버렸다.

기존 상처는 거의 아문 상태였고.

때마침 자신의 주치의는 이번 여정에 따라오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상처를 살핀 건 다른 의사였다.

'좋은 기회가 왔네.'

루시온은 카슨의 만류에도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사실 마법에 끌려가면서 자잘한 상처도 입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보십시오."

여지를 남기며 루시온은 양팔을 살짝 들어 보였다.

카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네가 그날… 이후로 뭐든 무조건 참는다는 걸 아니 내 앞에서는 숨길 필요 없다. 아프더냐?"

"버틸 만합니다."

"너를 노리는 이들이 너무 많구나."

"괜찮습니다. 이제는 익숙합니다."

카슨은 당연하다는 듯한 루시온의 대답에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온이라면 그렇게 대답할 거라 생각했지만, 크로니아라는 이름이 루시온을 너무 짓누르는 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쓰라렸다.

자신도 이런데 아버지는 오죽할까.

"네 상태가 더 나아지면 집으로 가자꾸나. 아버지께서도 무척 기다리고 계시더구나."

카슨이 루시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님."

"그래, 루시온."

"혹시 헤인트 형님께 네바스트가 뉴브라에 흑마법사 일로 항의했다는 사실을 들으셨습니까?"

"그래. 들었다."

"그럼 불확실하지만, 어쨌든 네바스트가 절 부르려고 한다는 사실도 들으셨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형님께서는 제게 그 사실을 말씀해주시려고 하셨습니까?"

이어지는 루시온의 물음에 카슨은 조금 전과 달리 잠깐 망설였다.

"나는 네가… 감당하기 힘들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의 뜻입니까?"

"그래. 내 뜻이기도 했지. 이유를 묻는다면 …네가 휘둘리는 게 싫었다. 애초에 네가 성자가 된 것도 네 뜻이 아니었지 않더냐. 그런데 변경에 나타난 흑마법사를 언급하며 너를 불러내려는 수작질이 보이는데 어떻게 그 사실을 너에게 알릴까."

"형님."

"안다. 네가 얼마나 속상할지를 안다."

말과 달리 지금 가장 속상해 보이는 사람은 카슨이었다.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 내가 밉고, 너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아서 화도 나겠지. 너는 계속 변하고 있는데 이를 우리가 따라잡지 못한 것 같아 답답하기까지 할 테지."

정곡이 찔린 터라 루시온은 말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지 않았다.

"네가 이 여행을 떠났던 이유도, 이렇게 무리해서 여행 일정을 잡은 이유도 이만큼 달라졌다는 걸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더냐?"

"아… 셨습니까?"

루시온은 말을 더듬었다.

6개 지부든 뭐든, 자신이 살기 위해 가져야 할 것들을 제외한다면 방금 카슨이 말했던 이유가 맞았다.

보여주고 싶었다.

이렇게 오래 여행을 다녀도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고, 어떤 순간이 와도 자신은 잘 헤쳐나갈 수 있다고.

입으로만 자신이 크로니아라고 떠들어대는 것 말고, 크로니아로서 당당해진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방구석에 박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아니라고.

"물론이란다."

카슨이 눈웃음을 지었다.

"네가 이토록 애를 썼는데 왜 모르겠더냐?"

부드러운 카슨의 대답에 루시온은 멍하니 카슨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내가 잘못했다, 루시온. 내가 네 노력을 무시했구나."

이어지는 카슨의 사과에 루시온은 조금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불을 꽉 쥐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더냐?"

카슨이 물었다.

"진심… 이십니까?"

"내가 허투루 말을 꺼낸 적이 있더냐?"

"없습니다. 형님께서는 허투루 말을 꺼내실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내게 네 의견을 말해다오. 너도 크로니아가 아니더냐."

루시온의 꽉 다문 입술이 잠깐 파르르 떨렸다.

자신을 보는 카슨이 정말로 달라졌다.

이제 말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목이 멨다.

―루시온…? 울어?

라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약에."

루시온은 일렁거리는 눈동자로 카슨을 바라보았다.

"만약에 네바스트에서 절 노리는 게 확실하다면 언제가 됐든, 제가 가겠습니다."

"가서 무얼 할 셈이더냐?"

"놈들의 진짜 모습을 파헤치겠습니다."

"널 미끼로 삼을 셈이더냐?"

"그렇습니다. 아시잖습니까, 형님. 적이 진짜 모습을 드러낼 때는 바로 먹잇감을 눈앞에 둔 상황이라는 걸요."

루시온은 아직 말을 멈추질 않았다.

"네바스트든, 뉴브라든 결국 제가 사라지길 원할 겁니다. 제가 아버지의 가장 큰 약점이 아닙니까."

"루시온 넌...."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 전 절대 죽어줄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루시온에게서 보이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에 카슨은 어깨에 힘을 빼며 피식 웃었다.

변화라는 게 꼭 긍정적인 효과만 부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카슨은 루시온이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안도하고, 감사했다.

루시온이 자신을 아끼고 있었다.

그걸로 됐다.

"그래, 루시온. 제발 지금처럼 널 아끼렴. 내가 안심할 수 있게 널 소중히 해주거라."

팅!

카슨과 이어진 붉은 실이 팽팽해졌다.

헤인트만큼 질긴 붉은 실이라는 걸 알기에 루시온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자신이 죽음을 벗어나 한 발자국 나아갔다는 의미가 아닌가.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만큼 절 아끼는 사람도 없습니다."

루시온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카슨은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마카롱을 꺼냈다.

곧바로 루시온과 라타의 눈동자가 함께 반짝거렸다.

―우오오오!

"아직 그 일은 멀었으니, 우선 먹거라. 먹고 빨리 나아야 하지 않겠더냐?"

"물론이죠! 마카롱을 보니 이제 다 나은 것 같습니다!"

마카롱을 손에 쥔 루시온은 실실 웃었다.

넘실거리던 피곤함까지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 * *

루시온은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머물던 저택과 황실의 위치가 마차로 4~50분 정도의 위치였기에 저택 밖으로 나가는 기사들의 상황을 감지하고 기다렸다.

급해도 어지간히 급했던지 5황자, 세틸이 헤인트에게 바로 연락했고, 유령이 있음에도 굳이 러쉘이 나서 자신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지금 만날 수 있는데. 원한다면 창문 밖에 흰 천이라도 예쁘게 걸어서 흔들어 봐.

쪽지를 쓴 것까지는 좋지만, 쪽지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생각하다 라타와 눈이 마주쳤다.

―라타가 할 수 있어!

라타가 의욕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들키고 할 수 있겠어?"

―응! 라타 전문이야! 라타가 부엌에서 쿠키를 날름 먹어도 아무도 몰랐....

"라타. 그건 안 돼."

루시온이 라타를 들어 올리며 조금 엄하게 보았다.

라타가 살짝 울먹거렸다.

―아니야. 요리장 아저씨가 라타보고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했어! 라타는 잘못한 거 없어!

"라타. 내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흄을 찾아가서 말하라고 했지?"

―…웅. 루시온이 그랬어. 혹시 라타가 잘못한 거야?

라타가 루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주인이 없는 거라면 몰라도 요리장이 만든 음식에 손을 대는 건 잘못된 행동이야."

라타의 귀가 접혔고, 꼬리가 축 늘어졌다.

오늘따라 입도 삐죽 튀어나와 보였다.

―그럼, 라타가 잘못했어. 라타가 앞으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흄한테 가서 말할게. 라타는 착하니까.

"그래. 착하네."

루시온은 그제야 옆으로 내려놓고는 배를 쓰다듬어주었다.

―이히히.

아까 라타가 슬쩍 나가는 걸 봤지만, 뭘 먹고 왔는지 몰라도 그새 배가 통통해졌다.

털 때문에 몸집이 불어난 건지, 살이 차오른 건지 헷갈렸지만, 귀여우니 됐다.

"자, 라타."

루시온은 라타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우오오오오!

라타가 행복한 얼굴로 침대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너에게 아주 중요한 임무를 남기지. 헤인트 형님에게 들키지 않고 전달할 수 있겠지?"

―응! 라타가 할 수 있어! 라타에게 맡겨!

라타가 제법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꼬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흔들었다.

196화. 황제, 케틀란 테슬라(3)

[내가 따라갈게.]

라타 혼자 보내기가 걱정스럽던 베델이 손을 슬쩍 들었다.

―후후. 베델이 라타를 보면 깜짝 놀랄걸? 세상에나. 라타가 이렇게 똑똑하다니 하면서!

"문 열어줄게, 라타."

―아니야. 라타가 할 수 있어. 봐봐.

라타가 엉덩이를 씰룩거리다 힘차게 뛰어서는 문에 매달렸다.

'달칵'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봤지? 라타는 다 잘해. 이히히.

라타는 문틈 사이에 앞발을 집어넣고는 이어 얼굴로 비집으며 문을 열었다.

―갔다 올게!

라타만 보냈으면 모르겠지만, 베델까지 함께 가니 루시온은 마음이 놓였다.

* * *

저택의 밤은 무척 어두웠다.

라타의 까만 털은 어둠에 묻히기에 아주 최적이었다.

라타가 제일 좋아하는 건 바라만 봐도 좋은 자신의 발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일이었다.

킁킁.

라타는 또 냄새를 잘 맡았다.

헤인트의 방에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지만, 트로에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따뜻한 냄새가 났다.

복도를 달리고, 계단을 내려가고, 사람들이 보이면 구석에 들어가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다 똑같아 보이는 문 앞에 앉아 앞발을 가리켰다.

―여기야! 여기! 라타가 찾았어!

[대단한데, 라타?]

베델은 벽 너머를 살피다 깜짝 놀랐다.

정말 헤인트의 방이었다.

라타가 기척이 거의 없는 편이라는 걸 알지만,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도착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라타. 안에는 헤인트가 있어. 어떻게 들어갈 거야?]

베델이 라타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라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라타 봐봐라.

라타가 문을 향해 돌진했다.

쿵!

쿵!

[…라타?]

베델은 웃음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아이코.

라타는 아픔을 꾹 참고 문이 열리는 곳에 몸을 웅크렸다.

"누구세요?"

헤인트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라타는 문이 열리자마자 우다다 뛰어서 물고 있던 쪽지를 책상에 올리고 창문으로 뛰었다.

'뭐지?'

주변을 살피던 헤인트는 어리둥절한 표정과 함께 눈동자를 굴렸다.

주변에서 어떤 기척도 느껴지질 않았다.

'분명히 소리를 들었는데?'

헤인트는 여전히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문을 닫았다.

곧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조금 전에는 없었던 쪽지 하나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쪽지를 읽고 난 후에 헤인트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황실과 연락이 닿은 건 또 어떻게 알았대?'

* * *

루시온은 하멜로서 마차에서 내렸다.

다시 황궁으로 왔다.

그때 느꼈던 황궁의 위엄이 살갗에 닿기도 전에 황궁 주변을 둘러싼 빛의 불쾌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베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실에 이토록 많은 빛이 깃든 물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저번에 루시온이 저 속을 뚫고 들어갔어. 그때도 제대로 치우지 못했으니 지금이라고 치우겠어? 그때는 골골거렸는데 지금은 빛 내성이 쌓여서 그대로 좀 버티네.]

―맞아. 라타도 그땐 기운이 없었어.

러쉘의 말에 라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이야."

헤인트가 밤을 틈타 황실의 샛길로 루시온을 안내했다.

마차에 내리기 전, 헤인트는 약속이 워낙 급하게 잡힌 터라 황궁에 빛을 치우지 못했고, 대신 황제가 빛이 없는 곳에 먼저 대기하고 알려주었다.

"수작 부리지 마라."

카슨이 루시온의 뒤를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안 한다고. 내가 여기서 뭔 짓을 저지르면 죽기밖에 더해?"

루시온은 살짝 짜증이 났다.

루시온으로서 만난 카슨은 참 좋은 형이었지만, 하멜로서 만난 카슨은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놈이었다.

마차에서 잠 좀 자고 싶은데 카슨이 그조차 하지 못하게 자꾸 자신을 툭툭 건드렸다.

"그런데 하멜."

헤인트가 입을 열었다.

"너 부상은 괜찮아? 카슨이 널 찔렀다며?"

"괜찮을 리가 있어? 오러에 휘둘린 검이었는데."

"제법 마음에 드는 소리네."

카슨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형님 때문에 진짜 고생했습니다!'

루시온은 목까지 올라오는 간지러움을 참느라 목에 핏대까지 섰다.

[카슨. 너 나중에 하멜이 루시온인 거 알면 어쩌려고 그래. 후회하기 전에 정도껏 해.]

처음에는 카슨이 루시온을 놀리는 게 재미있어 구경하는 맛이 있었지만, 슬슬 조마조마했다.

자신이 꺼낸 말처럼 카슨이 하멜의 정체를 알아버리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 됐다.

카슨이 루시온을 얼마나 아끼던가.

[나는 이제 너무 아슬아슬해 보여서 좀 걱정돼.]

베델도 마찬가지인지라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저도 좀 걱정이 되긴 합니다.'

두 사람의 걱정에 루시온은 문득 미루고 있었던 걱정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었다.

헤인트가 걸어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며 루시온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너를 보면 볼수록 내가 아는 사람을 닮았어."

"누구?"

"루시온 크로니아. 뭔가 무리하는 모습이 루시온을 떠올리게 되네."

"헤인트.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그 말에 카슨이 바로 발끈했다.

어디 붙일 게 없어서 자신의 동생을 언급하다니.

"이봐, 카슨."

루시온은 카슨을 불렀다.

"내가 네가 알던 사람이면 어쩌려고 이래?"

"그럴 리가 있겠나."

카슨의 강한 확신에 루시온은 더는 말을 섞지 않았다.

조금 전 러쉘과 베델의 말에 순간 흔들려서 내뱉은 말이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카슨. 루시온이라고. 가면만 썼지, 그냥 루시온인데.

라타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카슨에게 토로했다.

* * *

"저 카슨 크로니아가 제국의 유일한 태양을 뵙습니다."

"소신, 헤인트 트리아가 제국의 유일한 태양을 뵙습니다."

황제, 케틀란을 보자마자 카슨은 허리를 숙였고, 헤인트는 한쪽 무릎을 꿇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루시온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케틀란은 그 모습에도 무례하다 꾸짖지 않았다.

그저 미안한 얼굴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오느라 고생 많았네. 빛이 깃든 물건을 미처 치우지 못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만남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슨 공과 헤인트 경은 잠깐 자리를 비켜주겠나?"

케틀란이 두 사람을 향해 부탁과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은밀한 만남인 만큼 황제도 호위 기사 몇 명을 끌고 왔기에 루시온은 그 부분에서 자신을 헤칠 의도가 없다는 걸 확신했다.

두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혀서야 케틀란은 루시온에게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게나."

"예."

"우선 그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네. 그대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떠나 제국을 위해 일해준 은혜는 사실이지 않은가."

케틀란이 활짝 웃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저 웃음에 속지 않았다.

자신을 헤칠 의도가 없다 한들 속을 훤하게 들여다볼 수 없는 한 케틀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귀족도 낯이 두껍기로 유명한 만큼 황제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을 테지.

"저는 폐하의 의중이 무척 궁금합니다.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짐이 그대를 이용하고 버릴 건지가 궁금한가?"

"그렇습니다."

"세상은 흑마법사를 증오하고, 미워하지. 그건 짐 역시 마찬가지야."

"저도 흑마법사입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그대가 바꿔주었네. 이렇게 도움을 준 흑마법사는 그대가 처음이니."

"제가 폐하를 속이기 위해 했던 행동이라면 어떡하실 겁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케틀란이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하멜."

"예, 폐하."

"그대는 짐이 무엇으로 보이던가?"

"테슬란 제국의 황제이십니다."

"고맙네. 그대가 말한 것처럼 짐은 황제라네.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입만 놀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이지. 그대가 진실을 알려주었다는 건 이미 확인했네. 그대는 오직 진실로서 내게 그대를 알아달라 하소연하지 않았던가?"

[괜히 황제가 황제가 아닌가 봐.]

러쉘이 베델을 보며 속삭였다.

[케틀란 폐하께서는 다시는 없을 훌륭한 황제이시지.]

베델의 눈동자에는 조국을 향한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대가 온 마음과 온 정성으로 짐에게 그리 하소연했는데 이를 몰라주는 건 짐의 성미에도 맞지 않는다네."

케틀란은 여전히 루시온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짐에게 모든 흑마법사를 포용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어렵다고 대답해줄 수밖에 없다네. 흑마법사가 짐의 백성들에게 입에도 담지 못할 일을 저지른 건 사실이니."

"저도 합리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놈들은 흑마법사를 떠나 공정하게 벌을 내려주셨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나도 그 부분을 인지하고 있네. 아니, 오히려 더 일찍 깨달아야 했던 부분이 아닌가 싶었지."

케틀란은 손깍지를 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흑마법사도 제국인이다. 헤인트 경이 그대를 보며 보고했던 그 구절이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다네. 그대는 정말로 제국인인가?"

"그렇습니다. 저는 제국인이자, 폐하의 백성입니다."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케틀란이 본인 입으로 '흑마법사도 제국인이다'라는 구절에 마음을 뺏겼다고 하지 않았던가.

스스로 약점을 꺼냈으니, 당연히 더 자극해야지.

"그리고 폐하께서 버리셔 보호받지 못한 백성이자, 언제 누군가에게 죽을지 몰라 겁에 떨고 있는 가여운 백성이기도 합니다."

"그래."

케틀란은 잠깐 미소를 그렸다.

원래 황제란 무릇 누구한테도 약점을 보여서는 안 되지만, 오늘은 꺼냈다.

그만큼 미안하고, 또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흑마법사로서 세상에 해를 끼친 이들이 많을지, 원치 않은 발현으로 흑마법사가 되어 아무 이유 없이 죽은 자가 많을지를, 헤인트에게 보고를 받았던 그 날부터 떼어낸 적이 없었다.

너무도 답이 뻔한 문제였음에도 고민이 길어졌다.

"무엇도 그대, 아니 그대들의 마음을 달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짐이 잘못했다."

흑마법사는 잘못이 없었다.

잘못이 있는 쪽은 어디까지나 죄를 저지르는 쪽이었다.

흑마법사가 저질렀던 일보다 전쟁 때 더 많은 사람이 죽었고, 평화로운 지금 산적이나 도적들로 목숨을 잃는 자가 많았다.

"짐과 세상이 그대들에게 잘못했다."

흑마법사는 소수였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다수인 마법사들이 잠재된 위험은 더 높았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지금 사람들과 잘 지내지 않는가.

흑마법사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고 왜 선을 그어버렸는지, 너무도 부끄러웠다.

"…폐하."

루시온은 부디 케틀란이 꺼내는 말이 진심이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자신이 흑마법사가 된 지 고작 두어 달 정도였다.

저 사과는 햇병아리인 자신이 아니라 오랫동안 흑마법사로서 자긍심을 가졌던 러쉘에게 향해야만 했다.

더 많은 차별과 죽음의 고비는 러쉘이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을 테니까.

"그래, 뭐든 말해 보거라."

루시온은 케틀란의 말을 들으며 러쉘을 바라보았다.

[…고맙다, 루시온.]

러쉘은 자신의 시선을 느낀 건지 살짝 울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령 케틀란이 진심이든 아니든 황제가 사과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늘 마음에 가지고 있던 응어리가 풀려나가는 게 우습긴 했지만, 러쉘은 기뻤다.

[네가 아니었으면 죽은 후에도 절대로 들을 수 없었던 말이었을 거야.]

러쉘은 루시온을 그를 너무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루시온도 잠깐 러쉘을 바라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4황자 저하를 들먹인 제가 원망스러우십니까?"

"…짐은 그대를 이해한다. 그대가 내게 맞설 수 있는 수단이자 그대를 지킬 수단이 아니던가."

"맞습니다. 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짐이 그대에게 물어봐도 되겠는가?"

"예. 말씀하십시오."

"사실… 인가?"

"4황자 저하께서는 이미 제국의 기밀을 뉴브라 왕국에 넘기셨습니다."

계속 미소를 짓던 케틀란의 입가에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짐이… 부덕했다. 짐이 자식을 잘못 키웠다."

케틀란이 갑자기 약해졌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초췌해져 갔다.

당당하던 그의 눈빛도 바람 앞에 놓인 초와 같았다.

그렇기에 루시온은 몰아붙였다.

"결단을 내리시기가 무척 힘들겠지만, 어찌하실 셈입니까? 귀족들의 중심이 트웰로 스프리카도 후작이라고 한다면 이를 전부 아우르는 구심점이 바로 4황자 저하이십니다."

"...."

케틀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루시온은 말을 멈추질 않았다.

"폐하. 혹 제이엘 켈을 기억하십니까?"

"짐이 어찌 켈 가문을 잊을 수 있겠는가. 충성스러운 가문이었네. 살아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어찌나 기뻤는지 몰라."

헤인트로부터 제이엘 켈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기에 케틀란은 바로 반응했다.

그 반가움이 제 발을 묶어 놓을 줄도 모르고.

"제이엘 켈, 그자가 지금 4황자 저하를 추대하는 무리에게 모함을 받아 내쫓겼다고 말씀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

루시온은 케틀란이 빠져나갈 수 없게 헤인트에게 보고 받지 못했던 과거를 들먹여 현재를 이어버렸다.

지금 25살인 네 아들이 황좌가 탐나서 과거부터 수작질을 부렸다고.

197화. 찔리는 놈이 제 발로 온다

10년 전인, 15살이었던 오웬은 어렸다.

하지만 뉴브라 왕국이 제국의 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어리진 않았다.

제국에서 성인이 되는 나이는 20살, 그것도 생일이 지난 후였다.

"…켈 경에게 들었는가? 켈 경이 그리 말하던가?"

케틀란의 말이 빨라졌다.

"예. 저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여기로 제이엘 켈을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허어...."

현기증을 느꼈는지, 케틀란은 머리를 감싸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폐하. 제가 감히 말씀을 드리건대, 4황자 저하를 조심하십시오."

다시는 없을 제국의 성군이라 불리던 케틀란이 2년 후에 쓰레기가 된 건 4황자 짓이었다.

놈이 황세자가 되어 케틀란이 쥐고 있던 힘과 권력을 뺏어 제 형제와 자매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제국 전체를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크로니아를 위해서라도 최악의 사태는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케틀란은 손을 내리고 눈에 힘을 주었다.

아버지가 아니라 황제로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4황자가 나를 공격할 거라 생각하는가?"

"10년이나 숨죽여 참고, 제국의 기밀을 빼돌린 자가 다음에 폐하의 목을 노리는 일이 왜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멜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하나씩 원하는 걸 손에 넣은 4황자 오웬이 이제 제 머리 위에 놓인 왕관을 노리려 칼을 들이미는 건 빠르냐 늦으냐 차이일 뿐 뻔하게 찾아올 차례였다.

"…고맙네."

케틀란은 황제로서 루시온에게 다시금 고마움을 표했다.

[황제는 진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러쉘은 숨을 길게 토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루시온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러 온다면 자신은 죽어주면 죽어줬지, 결코 루시온을 죽일 수 없을 테지.

[나라면… 절대로 못 할 거야. 애초에 결정을 어떻게 내리겠어?]

베델은 아예 눈살을 찌푸렸다.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이미 케틀란은 대단했다.

"4황자 저하 일을 제외하고 폐하께 알려드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루시온은 케틀란이 흔들릴 때, 더 주저하지 않았다.

사람이 냉정할 때는 밑도 끝도 없이 따지지만,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 냉정함을 잃어 감정에 휩쓸리기 마련이었다.

"내 가슴을 이렇게 섬뜩하게 만든 건 아마 그대가 처음일 테지."

케틀란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입술을 움직였다.

"…후. 말해보게."

숨을 한 번 돌린 뒤에 케틀란은 루시온이 말할 수 있게 허락했다.

"제국의 동부에서 죽지 않는 병사를 만들었고, 이를 주도한 자가 트웰로 스프리카도 후작이라는 사실을 들으셨을 겁니다."

"들었네."

"흑마법을 위해 사용된 재료는 다름 아닌 죽음의 바다입니다."

"뭐, 뭐라 하였는가?"

"동부 축제에서 일어난 죽음의 바다 사건을 덮지 마시고, 오히려 성자를 핑계로 바다로 향하는 모든 이를 기록하고, 죽음의 바다로 가는 길목을 막으셔야 합니다."

죽음의 바다 문제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반드시 제국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

공허의 손이 더는 죽음의 바다를 이용하지 못하게 자신의 사건을 이용해 가장 자연스럽게 막아야만 했다.

"신관이 무어라 떠들든 간에 죽음의 바다는 타락이 맞습니다, 폐하."

케틀란은 계속 이어지는 루시온의 말에 숨을 잠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곧 그는 깍지 낀 손을 풀어 주먹을 쥐며 목소리를 냈다.

"죽음의 바다가 타락이라고 하였나? 그렇다면 왜 신수의 힘으로도 정화가 되지 않는 것인가?"

"빛으로 진행 속도를 늦출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타락을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흑마법사뿐입니다."

루시온은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흑마법사가 가진 힘을 알리는 일이었으니.

"…이렇게 업보를 돌려받을 줄은 몰랐네."

케틀란은 굳은 표정을 하며 주먹 쥔 손을 애써 밑으로 숨겼다.

경계를 넘은 적 없던 죽음의 바다가 얼마 전에 처음으로 경계를 넘어왔다.

이런 일이 또 벌어질 수 있기에 대비를 해야 했지만, 신전에서는 여전히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죽음의 바다가 사실 타락이고 흑마법사만이 그 타락을 막을 수 있다니.

결국, 내몰고 내쫓았던 흑마법사들이 필요했다.

"하멜."

케틀란은 신중해지려 노력했지만, 흔들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대가 한 말을 거꾸로 보자면 그 타락을 일으키는 것 역시 흑마법사가 아닌가."

"저는 쓰레기를 옹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폐하의 논리를 따지자면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도적질하는 것도, 아, 흑마법사도 사람이니 원인이 되는 사람을 다 죽여야 합니까?"

"미안하네. 내 너무 멀리 갔네."

케틀란은 곧 자신이 너무 감정적이었음을 인정했다.

4황자 일 때문에 흔들렸고, 죽음의 바다가 품은 진실 때문에 또 흔들렸다.

케틀란은 호흡하며 중심을 잡고자 애를 썼다.

눈앞에 있는 흑마법사에게 작위든, 보물이든 온갖 공을 주면 줬지 자신이 결코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폐하. 저는 그저 제 가족과 제 사람들을 지키고자 함입니다. 폐하께 진실을 알려드리는 건 폐하께서 제국의 황제이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럼 내가 그대를 지켜줄 수 있게 가면을 벗어줄 수 있겠는가?"

케틀란은 미안한 표정으로 제안했다.

루시온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황제는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자신의 모든 걸 앗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폐하께서 제게 신뢰를 보여주십시오."

"무얼 하면 내 그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루시온은 타협하는 척했다.

자신이 만든 조직이 정말로 자신을 지킬 수 있게 오늘 케틀란 앞에서 조직을 밝히기로 했다.

하지만 케틀란 입장에서는 달리 보일 수도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 말고 다른 정보가 공개된 셈이 아닌가.

"제가 몸담은 조직이 있습니다. 이름은 에일입니다."

"그래. 어쩐지 이상했다. 그대 혼자서 처리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고. 이렇게 알려줘서 고맙네."

케틀란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신뢰라는 게 무엇인지 감이 잡힌 표정이었다.

"제가 몸담은 조직의 독립성을 폐하께서 보증해주셨으면 합니다."

루시온은 그토록 바라던 조직의 독립성을 황제에게 요구했다.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괜히 가슴이 떨려왔다.

독립성을 보증한다.

이 말 자체가 얼마나 무서운 말로 바뀔 수 있을지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케틀란이었다.

팅!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던, 땅과 자기 자신을 이었던 붉은 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팽팽하게 당겨졌다.

'…허.'

이제야 그 붉은 실이 무엇인지 루시온을 알았다.

흑마법사로서 자신과 이어진 붉은 실이었다.

쿵.

쿵.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소설 속 자신을 직접 죽인 게헤인트와 카슨이라면 거기까지 닿게 한 원인은 네바스트의 신관이었으며 이를 키운 건 다름 아닌 제국이었다.

이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었다.

'네바스트가 제국을 노렸기에 나를 이용했다. 제국, 아니, 뉴브라 왕국과 손을 잡은 4황자가 크로니아를 버렸어.'

하지만 이제는 바뀌었다.

4황자가 손을 쓰기 전에 케틀란이 알아버렸다.

네바스트 대신관, 에올이 자신을 흑마법사라 확인했음에도 비켜나갔다.

'끊어져라. 이제는 좀 뭐가 됐든 끊어지라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붉은 실의 모습에 루시온은 허벅지를 세게 쥐었다.

이건 분명히 기회였고, 여기서 끝을 봐야 했다.

케틀란은 잠깐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에 한 가지만 추가할 수 있게 해주게나."

"말씀하십시오."

루시온은 마른 침을 삼켰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긴장이 됐다.

"조직 에일은 제국과 척을 지지 않는다는 조항을 추가해줬으면 하네."

"폐하. 조직 에일은 제국을 적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습니다. 하오나 조직 에일은 제국의 커다란 몸짓에 비하면 너무도 약합니다. 만약 제국이 먼저 조직을 공격하는 일이 생긴다면 저는 바라만 볼 수 없습니다."

루시온은 이 문제가 예민한 만큼 말을 부드럽게 돌렸다.

케틀란이 미소를 지었다.

"내 너무 성급하게 말을 꺼냈다네. 앞에 '서로를 향한 비방과 직간접 공격이 없는' 조건 한해서 '제국과 조직 에일이 척을 지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추가하도록 하겠네. 이러면 되겠는가?"

서걱.

케틀란의 제안과 함께 붉은 실이 잘려나갔다.

루시온은 입술을 꽉 깨물며 가슴 벅찬 감정을 눌러야만 했다.

실이 잘려나갔다.

자신이 했던 일이 절대로 틀리지 않았고, 흑마법사로서 제국에게 내몰릴 일은 이제 없다고, 잘린 실이 말해주었다.

―루시온? 울어?

그림자 속에서 꼬리를 잡으려 빙글빙글 돌던 라타가 꼬리를 잡은 채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베델과 러쉘도 덩달아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면이 루시온의 감정을 가렸다.

"감… 사합니다, 폐하."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케틀란에게 고개를 숙였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자신이 원하던 걸 손에 넣었다.

이제 됐다.

제국이 자신을 공격할 이유는 이제 사라졌다.

자신이 흑마법사로서 제국과 척을 질 이유는 이제 없다.

"혹 더 원하는 게 있는가?"

케틀란이 물었다.

"여기서… 더 말입니까?"

루시온이 얼떨떨해하자 케틀란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는 참 묘한 사람일세. 노련하면서도 서툴다니."

"제가 바라는 건 여기까지였습니다. 더 바래도 되는 겁니까?"

"그대가 제국을 살렸네. 그 도움이 고작 말 한마디로 갚아지는 수준이 아닐세. 짐은 황제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그대에게 아주 큰 은혜를 입었다네. 그대가 요구하는 건 웬만큼 다 들어주고 싶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케틀란의 눈빛 속에 깃든 호의와 따뜻함은 진짜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자신의 어설펐던 부분도 챙겨주려고 하지 않겠지.

자신이 뭘 요구할지 알고.

루시온은 숨을 들이켜며 차분히 생각했다.

아직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이지만, 조직의 독립성은 지켜졌다.

그럼 남은 건 뻔했다.

혹시.

정말 만약에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게 밝혀지고 그 불통이 크로니아에 튀지 말아야만 했다.

황제는 그럴 만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그렇다면 폐하. 혹 제 존재로 누군가 제 주변 사람들을 헐뜯지 않고, 손가락질당하지 않게 지켜주십시오."

크로니아가 부디 자신 때문에 사라지지 않게.

"보석도, 돈도 다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죽지 않게.

"제 바람을 오직 그뿐입니다."

형님이 자신 때문에 '카슨' 그 이름을 버리지 않게.

테슬라 제국의 황제가 부디 그들을 지켜주길 바랐다.

"...."

케틀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건 부탁이라기보다는 마치 유언처럼 들려왔다.

가면에 얼굴을 가려 하멜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얼마나 내몰렸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절벽 끝에 매달려 자신 말고 주변 사람을 지켜달라는 꼴이 아닌가.

자신이 황제로 살면서 감정으로 호소하는 놈들을 정말 많이 보았다.

하지만 하멜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자신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짐은 그대가 필요하네. 그대가 비록 짐의 신하가 아닐지언정 짐은 그대를 내칠 생각이 없네."

케틀란은 자신도 모르게 말에 감정이 섞였다.

만약 하멜이 손에 쥐었던 정보를 귀족들이 가졌다면 자신에게 권력과 작위를 달라 뻔뻔하게 거래를 요청했을 테고.

자식들이 정보를 손에 쥐었다면 황세자 자리를 두고 오만하게 거래를 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하멜은 아니었다.

조직의 독립성을 요구했다.

주변 사람들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이게 대체 무슨 거래인가?'

케틀란은 탄식이 밀려왔다.

그저 자신이 해줘야 할 것들을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저 조직이 귀족들에게 뜯기지 않으려면 독립성은 당연히 인정해야 했다.

흑마법사를 증오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멜은 물론 그 주변도 지켜줘야 했다.

제국을 노리던 적들이 누구인지, 태양을 피해 그림자에 숨어 제국을 갉아먹던 이들이 누구인지 알려줬는데 황제인 자신이 그것도 못 해준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짐은 그대가 원한다면 그대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리고 싶다네. 이는 짐의 이름을 걸고 말하는 진심이네."

"감사… 합니다, 폐하."

루시온은 당황하며 말했다.

케틀란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아니, 조금 화가 난 듯 보였다.

[화가 나지. 암. 화가 날 수밖에 없지.]

러쉘이 뭔가 공감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도 화가 날 만해.]

베델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루시온은 대체 뭘 공감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멜."

"예, 폐하."

"설령 짐이 황제이나, 짐 앞에서도 당당해져야지 그렇게 주눅이 들면 안 된다네."

"예…?"

"요구하고 싶은 게 있으면 더 당당히 요구하게. 그대는 그래도 되는 사람일세. 내게 더 많은 걸 요구해도 된단 말일세."

"그러니까 제가 바라는 건 조금 전 폐하께 드린 말씀이 전부입니다."

루시온은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이미 돈이든 뭐든 필요한 건 충분히 있었다.

더 많은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었다.

"…하. 짐을 이토록 답답하게 했음에도 살아 있는 사람은 그대가 처음이네. 그대는 대체 왜 짐이 먹으라고 떠미는데도 먹질 못하는가?"

"그러니까...."

"알겠네. 짐이 알아서 챙겨주겠네. 걱정하지 말게."

"...?"

198화. 찔리는 놈이 제 발로 온다(2)

루시온은 당황스러웠다.

케틀란 입에서 저 말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대답은 어디로 갔는가?"

케틀란이 서둘러 물었다.

뭔가 강요하는 듯했지만, 악의는 없었기에 루시온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하멜. 그대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참 우습긴 하지만, 만약 내가 그대의 사람이라면 그대가 한 말에 너무도 슬펐을 거라네."

러쉘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역시 황제라서 달라. 이젠 뒤에 후광도 보이는 것 같네.]

―어디? 라타는 안 보이는데?

라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것 봐봐. 이상한 곳에서 둔해 빠져서는.]

[그게 루시온 공이잖은가.]

빈정거리는 러쉘의 말에 베델은 쿡쿡 웃었다.

'아주 신나셨네.'

아무리 앞담화가 익숙해졌다고 해도 루시온은 두 사람의 웃음에 억울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래. 알겠네. 그대의 천성이라는 걸."

케틀란은 이어지는 루시온의 물음에 숨을 짧게 내쉬었다.

"있잖은가. 짐에게 친우가 있네."

루시온은 느닷없는 소리에 목을 매만졌다.

'여기서 아버지 이야기가 왜 나오지?'

케틀란이 친우라 칭하는 사람은 오직 노비오뿐이었다.

"걔한테 막내아들이 있단 말이지."

'…그건 난데?'

루시온은 헤인트에 이어 또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괜히 몸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막내아들을 어찌나 자랑하던지, 이제는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란 말일세. 하지만 또 하는 짓을 보면 짐도 흡족해."

케틀란이 피식 웃었다.

"폐하께서 무슨 의중으로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막내아들과 그대가 닮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네."

"예?"

"다른 쪽에는 그렇게 눈치가 빠르면서 자기 일만 그렇게 둔할 수 없다고 말하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돌아서 한 번 꺼내 보았네. 짐이 생각해도 그대와 참 닮았어."

'내가 눈치가 둔한 편은 아닌데?'

[지금 네가 눈치가 둔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루시온?]

속마음을 읽은 듯한 러쉘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순간 움찔거렸다.

러쉘이 낄낄 웃었다.

케틀란은 루시온의 반응에 제 아들을 바라보듯 하며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실례했네. 어쨌든, 내 그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계약서를 작성하지. 카슨 공과 헤인트 경을 증인으로 세우겠네. 괜찮은가?"

"예. 괜찮습니다, 폐하. 폐하의 은혜로운...."

"아니. 더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네.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건 나라네. 내 머리 위에 올려진 왕관은 입만 떠들라고 있는 게 아니라네. 제국을 위해 일하는, 그대 같은 이들을 지키라고 있는 자리이니."

루시온은 케틀란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성자가 됐던 사실을 축하하는 그 자리에서는 케틀란이 그저 재수 없는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갑자기 마음속에서 존경심이 꿈틀거렸다.

지금 그가 하는 농담, 가벼운 말 등은 다 자신을 배려해서 한 말이 아니던가.

루시온은 당장 가면을 벗고 자신이라 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그대는 참 서투르다네. 그 서투름 때문에 짐이 더 챙겨주고 싶지 않은가."

케틀란은 키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이를 가져오라는 그의 명령에 금방 종이가 배달됐다.

케틀란은 황금이 박인 종이를 내려놓으며 활짝 웃었다.

"자. 이제 같이 적어보세."

* * *

"…계약서가 닳겠네. 닳겠어."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계약서만 뚫어지라 바라보는 루시온을 향해 헤인트가 넌지시 말을 던졌다.

"왜? 배 아파? 이제 황제의 명으로 못 건드리니 말이야?"

루시온이 코웃음을 쳤다.

그의 시선은 카슨에게 향했다.

카슨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다 아예 시선을 피해버렸다.

"아니. 말을 왜 이렇게 삐딱하게 해? 우리가 증인인 거 잊었어?"

헤인트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럼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고?"

루시온이 묻자 헤인트는 멈칫거렸다.

황제가 하멜을 보호하라는 명령까지 했지만, 알 수 없는 찝찝함이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그렇다고 하멜을 믿지 않냐고 묻는다면 또 그런 건 아니었다.

아마도 하멜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나저나 왜 조직에 몸을 담았다고 말 안 했어?"

"나도 죽을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까지 죽게 할 순 없잖아."

"그럼 이제 연락용 아이템을 넘겨줄 수 있겠지?"

"나중에 보내줄게."

루시온은 크라언과 연결할 셈이었다. 그가 중간에서 버겁겠지만, 한 다리를 건너는 게 훨씬 안전했다.

"이제 떠들 입은 없나 보네, 카슨?"

루시온은 카슨을 보며 보란 듯이 계약서를 흔들었다.

카슨의 미간이 구겨졌다.

당장 계약서를 찢어버릴 것처럼 눈빛이 살벌했으나, 그는 화를 참았다.

"폐하께서 널 보호하고자 하셨다. 이제 정체를 공개하는 게 어떤가?"

"싫어."

"내가 너를 건들까 봐 그러는가? 나는 크로니아다. 제국을 지키는 내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폐하의 명을 거부할 생각은 없다."

"아니. 내 주변인들을 위해서니까, 이 가면은 건드리지도 말고, 궁금해하지도 마. 그럼."

루시온은 마차 문을 열어 그대로 밖으로 뛰었다.

분위기가 자꾸만 자신을 추궁하는 쪽으로 흐를 것 같아 그냥 도망쳤다.

꺄르르 웃는 라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무에 가려졌을 때,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괘, 괜찮은 거야?"

헤인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차 속도가 제법 빠르지 않았던가.

"문이나 닫아."

카슨은 그제야 등에 기댔다.

그는 숨을 짧게 내쉬었다.

"폐하께서 허락하셨고, 하멜을 보호하라는 명령도 내려졌지만, 찝찝함이 남아 있다."

"나도 그래."

"저 가면 속에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겠지."

"그럴지도 몰라."

"짐작 가는 사람이 있나?"

카슨이 헤인트를 빤히 보았다.

어쨌든 이 중에서 가장 오래 하멜을 본 사람이 아닌가.

'네 동생… 이 살짝 의심스럽다고 말하면 당장 멱살이 잡히겠지?'

헤인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멜은 웬만한 것들을 알고 있었다.

내부자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한 차례 배신자를 거르지 않았던가.

황실 기사단은 아니었다.

어쩌면 크로니아의 기사단 중에도 있을 수 있지만, 제일 가까이에서 모든 걸 볼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루시온이지 않은가.

'…이런 미친. 의심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또 루시온을 생각한다고?'

헤인트는 뒤늦게 화들짝 놀라며 당장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왜 말을 하지 않지?"

카슨의 미간이 좁혀지며 헤인트를 압박했다.

"그럼 넌 누구 같은데?"

헤인트가 오히려 물었다.

"…글쎄."

카슨은 대충 대답하고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숨을 짧게 내쉬었다.

* * *

"…누가 범인이라고요?"

루시온은 일부러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떨어트렸다.

쨍그랑.

―홉!

자신의 옆에 붙어서 밥을 먹던 라타가 깜짝 놀라 당장 자신의 다리에 매달렸다.

―라, 라타는 안 놀랐어!

러쉘이 키득거리며 라타를 쿡쿡 찔렀다.

―라타는 안 놀랐다고! 그냥, 엄, 그냥 루시온이 좋아서 그랬어.

라타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루시온은 아침에 일어나 크라언에게 현재 상황을 보고해주었다.

황제를 만났다는 사실에 크라언은 기겁했지만, 곧 자신을 보고대단하다며 추켜세우기에 얼른 연락을 끊어버렸다.

"트웰로 스프리카도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카슨이 식사 자리에서 트웰로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새벽에 조사가 들어갔다고 하더구나. 아, 트웰로 그놈의 수족이었던 놈들도 곧 잡힐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진행이 되는 겁니까?"

"누가 도와줬다."

"누가요?"

루시온의 물음에 카슨은 잠깐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재수 없는 자식이 있다."

'하. 여기저기서 재수 없다는 말을 진짜 많이 듣네.'

루시온은 코웃음을 숨기려 일부러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루시온."

"예, 형님."

"오늘 흄한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점심 후에 출발하기로 결정이 났다."

"들었습니다."

"괜찮겠더냐? 네가 아직 불편하다면 더 미룰 수 있으니 부담 갖지 말거라."

"어서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케오르티아 왕국으로 가려면 다시 크로니아로 돌아가야 했다.

카슨은 그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예정대로 진행하마."

"그나저나 헤인트 형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루시온은 카슨에게 물어본 뒤에 고기를 크게 잘라 입에 가득 넣었다.

입속에 사르르 녹는 맛에 그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이 났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먹어보네.'

루시온은 행복한 얼굴로 다음에 먹을 고기를 썰었다.

"보고를 위해 황실로 가서 아마 조금 있다가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출발 당일까지 바쁘네요."

"…하."

카슨은 코웃음을 치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너를 제대로 지키지도 못한 벌이니 아무 생각하지 말거라."

"헤인트 형님께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을 뿐, 형님께서는 최선을 다해주셨습니다."

"루시온. 네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 헤인트가 너를 책임졌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온전하게 다시 크로니아로 데리고 왔어야 했다. 하지만 너는 벌써...."

카슨은 말을 하다 말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겉만 멀쩡하지 속은 너덜너덜해졌다.

아니, 겉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는 괜찮지 않다. 헤인트를 보면 지금도 주먹이 나갈 것만 같구나. 아, 많이 먹거라."

카슨은 루시온의 포크가 멈춰 있자 방긋 웃으며 재촉했다.

[…방금 봤지, 베델? 진짜 헤인트를 죽일 기세였어. 저건 진짜야.]

러쉘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베델을 바라보았다.

[맞다. 저건 진짜였어.]

―라, 라타도 느꼈어.

라타는 몸을 부르르 떨다 다시 제 밥그릇에 고개를 박다시피 했다.

똑똑똑!

다급한 문소리에 카슨이 짜증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고 있거라."

카슨이 문을 열자 이 저택을 관리하던 집사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저, 저하께서 오셨습니다."

"몇 번째?"

"4황자 저하이십니다."

"…콜록, 콜록!"

루시온은 집사의 말에 수프를 먹다 말고 사레가 들렸다.

"무, 물을 먹거라."

카슨이 서둘러 달려와 루시온에게 물을 건넸다.

'이런 미친.'

루시온은 갑자기 치솟아 오르는 짜증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트웰로의 모가지가 곧 잘릴 예정이니, 이제 4황자가 온다 이거지?'

찔리는 놈이 제 발로 자신을 찾아왔다.

[설마, 대놓고 루시온 널 죽이러 온 건 아니겠지?]

러쉘의 눈 사이가 좁혀졌다.

[지금 여기에서…?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베델은 오히려 의문을 느끼며 말했다.

이곳은 크로니아가 소유하고 있던 저택 중 하나였고, 무엇보다 카슨까지 있는 상태였다.

[아니. 이렇게 상황이 명확할 때일수록 신분의 힘이 아주 중요해지곤 하거든. 만약 어떤 상황이 벌어졌고, 범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 중 하나가 황자야. 황자가 자기는 안 했다고 하면 어쩔 건데? 여기서 누가 황자라는 신분을 이길 수 있는데?]

러쉘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콧바람을 세게 내쉬었다.

"…형님."

루시온은 진정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좋은 의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출발 날에 이렇게 불쑥 들이닥치진 않을 게 아닙니까?"

"일단 여기 있거라."

카슨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4황자를 포함해 모든 황자와 황녀는 크로니아와 접점이 없었다.

크로니아는 균형을 위해 다음 황제 자리를 둔 경쟁에 참여는 물론, 접점이 없도록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짓이지?'

카슨은 미간을 찌푸렸다.

황자와 황녀라면 이 암묵적인 규칙을 알 텐데.

"내가 안내하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벌써 몇 번이나 말해야 하느냐!"

거만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카슨은 벌써 4황자가 저택 안으로 멋대로 들어왔을 알아차렸다.

짜증이 났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 어떤 소식도 듣질 못했습니다."

흄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루시온에게 가져다줄 음식을 나르다 만난 모양이었다.

좋지 않았다.

대외적인 착한 이미지와 달리 4황자의 성품은 아주 글러 먹은 편이었다.

카슨이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며 모퉁이를 돌 무렵, 뺨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199화. 찔리는 놈이 제 발로 온다(3)

짜악!

"건방지게!"

"저하."

카슨은 흄이 뺨을 맞는 모습에 순간 울컥했지만, 화를 참았다.

루시온이 이 모습을 봤으면 난리가 났을 테지.

"…카슨 크로니아가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아, 카슨 공. 내 추한 꼴을 보이고 말았네."

오웬이 키득거리며 카슨을 바라보았다.

정작 뺨을 맞은 흄은 자신의 뺨 말고 뒤쪽에 놓아둔 음식이 담긴 카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저하. 그 아이를 놓아주시지요."

"왜 그래야 하는가? 내 저놈의 버릇을 고치고 있는 게 보이질 않은가?"

"제가 아끼는 집사입니다."

"아. 그럼 미안하게 됐네."

오웬은 그제야 슬금슬금 물러나는 기색을 보이다 카슨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크로니아가 시종 하나 똑바르게 가르치지 못하는 곳이라 생각하지 못했거든. 내 어쨌든 무례했네."

오웬은 말과 달리 흄을 때렸던 장갑을 벗고 옆에 데리고 온 시종에게 손을 내밀며 새로운 장갑을 받았다.

그럼에도 카슨은 평온하게 물었다.

"저하.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미리 기별을 주셨다면 제가 마중을 나갔을 겁니다."

"성자를 만나러 왔네."

"오늘 저희가 크로니아로 떠날 예정이라 저하를 성심껏 모실 수 없습니다."

오늘은 바쁘니 이만 물러가라.

카슨은 모든 인내심을 다 끌어모아 최대한 둘러 말했다.

같잖아도 일단 황자였다.

"잠깐이라도 상관없네. 나도 지나가다 들린 것뿐이니."

오웬은 카슨이 왔던 곳으로 걸어갔다.

"그냥 함께 차라도 마시고 싶을 뿐이야. 저번 성자 탄생 기념 축하 자리에서 폐하의 눈칫밥에 만나지도 못해서 아쉽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거든. 마침 잘됐지 않은가."

"저하."

"아. 빈손으로 오질 않았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내 최고급 차와 디저트, 그리고 성자에게 딱 맞을 것 같은 옷가지와 보석들도 준비했지."

카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옷가지와 보석들?

크로니아가 어떤 곳인가.

그걸 알면서도 저런 선물을 준비했다는 건 오웬이 대놓고 루시온을 동물처럼 구경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저하, 저도 이 이상 무례를 참지 않겠습니다."

"지금 무례라고 했나, 카슨 공?"

오웬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뭘 말할지 알고 있다는 듯 무척 오만했다.

"저는 이곳에 저하를 초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지. 그대는 누구도 초대하지 않지."

"옷가지와 보석들? 필요 없습니다. 크로니아에서도 차고 넘칩니다."

"아무래도 그대가 내 말뜻을 오해했나 보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자에게 내 그런 실례를 하겠는가? 이건 그냥 선물이네."

"다음에 오시지요, 저하."

카슨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왜 그대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오웬의 눈꼬리가 휘었다.

"여기가 크로니아의 저택이고, 제가 크로니아이기 때문입니다."

카슨도 미소를 지었다.

"저하."

오웬의 시종이 루시온이 있는 식당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불렀다.

오웬도 그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농담이었네, 카슨 공. 그대가 생각보다 진지할 줄은 몰랐네."

"저는 농담이 아닙니다, 저하. 이만 나가시지요."

카슨이 기세를 살짝 올리며 오웬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오웬은 미간을 찌푸렸다.

"카슨 공…?"

"더는 무례를 눈감아주지 않겠습니다. 저하께서 황자이시나, 크로니아가 이렇게 무시당할 수준의 가문은 아닙니다."

"그럼 어쩔 텐가?"

"어쩌겠습니까? 무례한 손님을 끌어내야 하질 않겠습니까?"

카슨은 물러섬이 없었다.

황자는 4황자 말고도 있었다.

지금 가장 유력한 후보는 5황자인 세틸.

이미 힘에도 밀리고 있는 오웬이 이곳에서 설쳐봤자 그에게 도움 될 일은 전혀 없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곳까지 루시온을 보러왔는지 모르겠지만, 짜증은 물론 묘한 불안함에 가슴이 요동쳤다.

일단 보내야 했다.

"하. 내가 황자라는 걸 잊었는가?"

오웬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곳이 크로니아의 저택이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저하?"

카슨의 매서운 눈빛과 흐트러짐 없는 경고에 오웬은 살짝 주춤거렸다.

크로니아를 왜 모르겠는가.

황제마저도 눈치를 보는 가문이거늘.

"열어."

하지만 오웬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반드시 성자를 만나겠다는 의지가 뒤섞여 있었다.

카슨이 문을 열려는 오웬의 시종을 낚아챘지만, 그 문을 오웬이 열어버렸다.

벌컥.

문이 열리자 루시온은 당연하게도 오웬과 자신을 이은 붉은 실이 나타나는 걸 보았다.

제국과 얽힌 자신의 운명과 황제, 케틀란에게 모든 걸 들킨 오웬은 별개였으니까.

우물우물.

루시온은 오웬과 시선을 마주쳤음에도 입 안에 가득한 고기를 씹기 바빴다.

'저 새끼. 저거 실제로 만나 보니 진짜 거지 같은 놈이네.'

쓰레기 주제에 그 더러운 손으로 감히 흄을 쳤다.

―씨이. 라타는 저 인간 싫어! 라타가 흄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라타가 오웬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꿀꺽.

루시온은 입에 들은 음식을 삼킨 뒤에 우아하게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리고 카슨을 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었다.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까, 형님?"

자신은 4황자 따위는 모른다는 천연덕스러운 미소로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카슨은 그 물음에 혹 웃음이 터질까, 고개를 돌려버렸다.

[캬. 연기가 점점 장난 아닌데, 루시온?]

러쉘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가볍게 손뼉을 마주쳤다.

"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가?"

제일 황당한 건 오웬이었다.

그의 얼굴이 빨개지기까지 했다.

"예. 누구인지 모르니 누구시냐고 물은 게 아니겠습니까?"

방구석에만 틀어박혔던 자신이었다.

누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분은...."

"입 다물게. 너에게 물은 게 아니니."

루시온은 멋대로 입을 여는 오웬의 시종을 향해 매섭게 쏘아붙였다.

"주인에게 대체 무얼 배웠기에 제 주인이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그 입을 놀리는가? 참 무례하구나."

오웬이 흄에게 했던 행동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오웬은 순간 흠칫해서는 인상을 썼다.

"지금 나를 농락하는 것인가!"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체 누구시길래 다짜고짜 제게 하대를 하시는 겁니까? 귀족은 물론 황실의 예법에도 그런 건 없습니다."

루시온은 무지를 방어 삼아 오웬을 꼬집었다.

겁나 몰상식하다고.

"나는 오웬 테슬라다!"

오웬의 목에 핏대가 섰다.

"아. 저하셨습니까?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제가 바깥 경험이 전무하다 보니 황자 저하의 얼굴을 미처 익히지 못했습니다."

루시온은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오웬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도, 동작도 더할 나위 없이 깔끔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지금 어딜 가는 것인가?"

"제 방으로 가려고 합니다."

"지금 나는 그대를 만나러 왔네."

"저를 말입니까? 저하와 저는 초면인데 약속을 잡고 오셨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런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천연덕스러운 루시온의 표정에 카슨은 일부러 오웬을 엿 먹이는 건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루시온을 말리고자 기회를 엿봤다.

"아니. 지나가는 길에 들렀네."

"저하. 참 무례하십니다."

루시온은 바로 오웬의 행태를 비판했다.

오웬의 눈이 커졌다.

그러든 말든 루시온은 신나게 입을 놀렸다.

"이곳은 지나가는 길에 들릴 수 있는 가게가 아닙니다. 하물며 약속도 잡지 않고 오시다뇨. 폐하께서도 약속을 잡고 제 아버지를 만나러 오십니다. 한데 저하께서 저를 그렇게 무시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루시온은 일부러 케틀란은 언급했다.

오웬 같은 놈은 뻔했다.

황자라는 제 신분을 들먹이며 자신을 억누르려고 할 테니까.

"이는 저하께서는 제 명예를 더럽히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가게 주인만큼이나 흔히, 누구라도 만나러 와도 된다고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이만 물러가 주셨으면 합니다."

루시온은 오웬이 입을 열 틈도 주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문을 가리켰다.

"그대가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

오웬은 어느새 붉어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하.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니. 저러니 뉴브라 놈들이 이용하기에 딱 좋지. 적당히 치켜세워주면 헤벌쭉할 놈이니까.'

루시온은 속으로 혀를 찼다.

황자의 자리가 제아무리 높아도 황제보다는 아니지.

"아뇨. 저를 무시하신 건 저하십니다. 그럼, 폐하께서도 하시는 약속을 하지 않은 저하는 지금 폐하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뭐, 뭐라고?"

"더는 안 되겠습니다. 제게 범한 무례를 사과하십시오."

루시온은 배짱을 부렸다.

지금 딱 봐도 카슨이 오웬을 끌고 갈 기세였으니까.

[저놈 대체 뭐 하러 온 거야?]

러쉘은 황당한 표정으로 오웬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시비를 걸러 루시온을 찾아온 것만 같았다.

[황자가 왔다기에 시종은 물론, 호위도 부실하다. 마치 일부러 빠져나가기 좋게끔 노린 게 아닌가 싶어. 아까 러쉘 그대가 말하지 않았던가. 상황이 명확할 때일수록 신분의 힘이 아주 중요하다고.]

[그랬지. 뭘 저지를지 몰라도 일단 범인은 오웬의 시종이 될 거야. 저놈의 세력이 가만두질 않을 테니까.]

러쉘은 팔짱을 꼈다.

너무도 뻔한 상황이 오히려 의심을 피하기 좋은 상황으로 흐르기도 했다.

그는 오웬이 말했던 것 중 '최고급 차와 디저트'를 떠올리며 입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독이겠네.]

[독이라고…?]

베델은 깜짝 놀라다 곧 러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혹시 그냥 독이 아니라 독술사의 독을 말하는 건가?]

독술사는 마법사 중 하나로 제 몸에 도는 마나를 독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자를 일컬었다.

현재 그 악랄함에 독술사가 되는 것도 금지된 상태라 지금은 그런 마법사가 '있었다'라는 정도로 내려오곤 했다.

[그래. 독술사의 독은 마법이라서 은으로도 확인할 수 없다는 거 알지? 그 독을 확인하려면 마나를 이용해 불 마법처럼 부글부글 끓여야 하는데 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

'역시 스승님이셔.'

루시온 자신은 소설 속에서 '독술사'와 관련된 내용이 나왔기에 안다고 치지만, 러쉘은 그게 아니었기에 정말 대단했다.

미론스트의 왕이 '독술사'의 독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지금은 거의 없다시피 한 독술사의 숫자도 한몫했지만, 독 마법을 확인하거나 해제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 무례를 용서해주길 바라네."

오웬은 고민 끝에 정말 이를 악물며 루시온에게 그 뻣뻣한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께서 추리하신 독이 맞네. 그게 아니라면 자존심을 버려가면서 이렇게 나를 보자고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참 우스워 루시온은 웃음을 참으라 힘겨웠다.

뉴브라 왕국에서 오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자신을 죽이라는 지시 같은 부탁을 들었을지도 몰랐다.

제국의 황자가 적국의 개가 되어 놀아나는 꼴이라니.

실제로 보니 참 역겹기 그지없었다.

"예. 저하께서 제게 이리 사과해주시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루시온은 싱긋 웃었다.

어쩔 건가.

여기서 자신을 향해 주먹질을 날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윽박지르기엔 방금 자신이 한 사과를 뒤엎는 셈이니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을 테고.

'놈이 만약에 독을 쓴다고 한다면… 보자.'

루시온은 잠깐 눈동자에 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바로 증상을 보이는 독은 아니겠지. 게다가 일반 독이 아니라 마법이니 조절은 가능할 테고.'

오웬은 분명 카슨에게 '오다가 들렸다'라는 사실부터 말했다.

이미 모든 알리바이를 짜 맞춰 놓았다는 뜻과 같았다.

시종과 호위가 별로 없는 이유도 저 알리바이를 위해서겠지.

사람이 많을수록 입을 막아야 할 자들이 늘어날 테니까.

[뉴브라 왕국이 어지간히도 급한 모양이야. 황자까지 나설 정도라니. 하긴. 루시온 네가 저놈들의 계획을 본의 아니게 다 부서트리긴 했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던 러쉘의 미소에는 금세 뿌듯함이 섞여버렸다.

[러쉘. 그대 말이 맞다. 게다가 지금 중심 노릇을 하던 트웰로 그놈이 잡혔으니, 움직일 수 있는 자는 황자뿐이겠지.]

오웬을 노려보며 베델이 말을 꺼냈다.

무려 후작의 위치에 있는 트웰로가 잡혔다.

괜히 어설프게 귀족이 나서는 것보다 황자가 훨씬 더 안전할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을 했을지도 몰랐다.

"그럼 저하께서 어쩐 일로 이리도 소리 소문 없이 절 찾아오셨습니까?"

루시온은 우위에 있다는 걸 알리듯 주도권을 잡은 흉내를 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오웬이 미소를 짓고 있어도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내 그대를 쭉 만나고 싶었네."

"약속을 잡고 오셨으면 저하가 오셨을 때 마중도 나가고 더 좋았을 텐데요."

루시온은 아쉬움을 담아 오웬에게 뒤통수를 때려주었다.

약속을 잡지 않았던 무례를 또 꼬집자 오웬의 입가도 부르르 떨렸다.

'아. 너무 재밌네.'

루시온은 할 수 있다면 웃음을 터트리고 싶을 정도였다.

200화. 케오르티아 왕국으로

하지만 루시온은 웃음을 참고는 오웬을 향해 더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절 보고자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크로니아이자 성자입니다. 정치적인 부분에 휩쓸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 저하께도 이 부분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고 있네. 그냥 같이 차라도 마시자는 의미이니 너무 크게 볼 필요 없네."

아, 좀.

그 말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오웬은 거듭 반복하는 루시온의 언행에 진저리를 느끼는 듯했다.

루시온은 카슨을 바라보았다.

카슨은 무언가를 바라는 루시온의 눈빛에 주춤거렸지만, 곧 어깨에 힘을 뺐다.

"저하.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오, 그래 주겠나? 고맙네."

오웬은 조금 전과 달리 순순히 물러나는 카슨의 태도에 방긋 웃었다.

갑자기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형님이 나가셔야 내가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거든.'

루시온은 오웬이 생각했던 계획을 고스란히 이용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죄로 칠해질 저놈에게 성자를 독살하려고 했던 죄를 하나 더 얹어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아니. 이참에 줄이 끊어지도록 뉴브라와 사이를 갈라놓아야지.

오웬 주변에 필시 뉴브라와 오웬 사이를 이어주는, 측근 같은 자가 있을 테지.

[루시온.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 몰라도 해. 무조건 해.]

러쉘은 평소와 달리 루시온을 재촉했다.

그게 퍽 우스웠지만, 루시온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오웬에게 물었다.

"어디가 편하십니까, 저하?"

"나는 이곳도 괜찮다네."

오웬은 당장 자리를 뜨고 싶은지 채 치우지 못한 식탁을 가리키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적당한 장소로 안내해주게."

* * *

접객실로 가 오웬이 가지고 온 디저트가 예쁘게 정돈되어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우오오오! 다 라타가 좋아하는 거다!

라타가 침을 꼴딱 삼켰다.

[그거 먹으면 안 돼, 라타.]

―왜? 라타는 먹고 싶은데.

라타가 베델을 바라보았다.

[안에 독이 들었을 수 있으니까.]

―호, 홉! 독이래! 루시온! 먹으면 안 돼!

라타가 루시온을 바라보며 겁에 질린 눈동자를 했다.

'알아. 그리고 안 먹어.'

루시온은 걱정하지 말라고 라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뜨겁습니다."

차를 따르는 건 우습게도 오웬의 시종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는 핑계를 대서 대접한다고 했다.

'진짜 어떤 의미로 대단하네. 독살하려는 상대를 두고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루시온은 시종을 바라보았다.

"내보내시지요. 제가 좀 불편합니다."

"나가 있게."

원하는 걸 이뤘기에 오웬은 루시온이 바라는 대로 시종을 내보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오웬은 방긋 웃었다.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게. 어떤 요구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대화하러 왔을 뿐이니까."

"아, 죄송합니다, 저하. 요새 하도 저에게 무엇이든 요구하는 자들이 많아져서 말입니다."

"내 이해하네. 무릇 힘을 쥐었을 때 달라붙는 하루살이들이 너무도 귀찮고, 짜증 나지 않던가?"

"아뇨. 저는 귀찮고 짜증 나기보다는 그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루시온은 대화가 빨리 끝나길 바랐기에 오웬을 맞춰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저 목은 이제 잘릴 운명인데 뭐 하러 비위를 맞춰줘야 할까.

오웬이 아무리 표정을 감추려 해도 눈동자에 드러나는 분노를 쉽게 숨길 수는 없었다.

감히 내 말에 토를 다냐는 듯한 눈빛에도 루시온은 뜨거운 차를 '후후' 불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푸하하핫! 아, 미치겠다. 너무 재밌네!]

러쉘은 흥미진진한 경기를 보듯 아예 자세를 잡으며 오웬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대는 성자가 되어 어떤가?"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조금 더 크게 놀아볼 생각은 없나?"

"안타깝지만, 없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자신을 떠보는 듯한 오웬의 어떤 물음에도 루시온은 단답형에 가까울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럼, 그대는 원하는 게 없는가?"

오웬의 목소리에 짜증이 살짝 섞여 있었다.

"지금 집에 돌아가 제 침대에 편안하게 누웠으면 합니다."

"정말 그거 말고는 없는가?"

"아, 있습니다."

그제야 오웬이 활짝 웃었다.

"어서 말해보게."

"제가 좋아하는 가게의 마카롱이 먹고 싶습니다."

루시온이 얄밉게 미소를 지었고 오웬의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쟤 화났네, 화났어. 표정 봐라. 아주 널 때려잡을 기세다.]

러쉘은 끅끅거리며 좀처럼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자. 대화가 무르익었으니.'

루시온은 다시 찻잔을 쥐었다.

"그새 딱 먹기 좋을 만큼 식었네요."

오웬에게 '봐라, 이제 나는 차를 마신다'라는 신호를 보냈다.

새빨개진 오웬의 표정이 우습게도 사르르 풀렸다.

"먹어보게. 내 가게에서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었네."

"저하께서 인정하셨다면 그 맛은 환상적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안 되는데.

그거 먹으면 안 돼.

차에 독이 있어. 저 디저트에도 있고.

루시온이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입에 대자마자 어둠이 다급히 그에게 속삭였다.

―루시온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라타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루시온은 오웬의 시선을 의식하며 발밑으로 어둠을 내보냈다.

헤인트가 없기에 흑마법을 쓰기에 아주 자유로웠다.

자신이 보낸 어둠이 바닥을 기고, 오웬의 의자 뒤로 넘어가 등을 타고 그의 머리로 향했다.

뾰족하게 변한 어둠이 단번에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찌릿.

손목이 욱신거릴 정도의 통증일 뿐이었다.

'저런. 정신력이 좋지 않나 보네.'

루시온은 오웬의 눈동자에 깃든 불꽃처럼 타오르는 어둠을 보고는 비웃음을 날렸다.

현혹이 걸리면 당사자는 그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접객실은 1층.

오웬 때문에 근처에 있던 기사들도 이미 물러난 상황이었다.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흄이다! 흄!

라타도 쪼르르 달려와 창문을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흄."

"예, 도련님."

창문 너머로 흄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 가지고 왔어?"

"예. 저놈이 가져왔던 디저트도 막 챙겨온 참입니다."

루시온이 오웬을 접객실로 안내할 무렵, 베델이 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차와 디저트 일부를 챙겨오길 요청했다.

오웬이 뭘 챙겨왔는지 이곳의 요리장은 모른다.

하지만 흄이 자신을 위해, 라타를 위해 자주 디저트를 챙겼기에 디저트를 언제든지 빼 와도 전혀 이상하지도 않았다.

물론, 오웬도 자신이 무슨 디저트를 샀는지 모를 테지.

루시온이 흄이 넘긴 그릇을 받자마자 물었다.

"뺨은?"

흄이 창문을 넘어오며 대답했다.

"모기가 앉은 정도이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지금 한 대 쳐도 될 텐데."

"치면… 죽을 것 같습니다. 아프진 않았지만, 기분이 나빴거든요. 아주 불쾌했습니다."

흄은 다시 루시온이 손에 쥐고 있던 그릇을 얼른 쥐어 차와 비슷하게 생긴 디저트를 맞바꿨다.

"이건 처분하겠습니다."

"아니야. 혹시 모르니 가지고 있어. 아, 서부로 돌아가면 라인트한테 알아보라고 하면 되겠네."

잠깐 샤엘라가 떠올랐지만, 독술사 자체가 금지된 마법이기에 마탑에서 알아보는 건 위험한 행동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먼저 서부로 돌아간 미엘라와 제이엘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조직에 들러야 했기에 한꺼번에 일을 처리하는 편이 좋았다.

[좋은 생각이다. 라인트가 용병이었기에 경험이 많을 테니. 어쩌면 독술사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

베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은 자리에 앉아 저주를 위한 주문을 외우려 입술을 움직이던 차 어둠이 물었다.

저주를 사용하고 싶어, 루시온?

루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주문 대신 저주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줄게. 손가락으로 대상을 가리켜서 옆으로 두 번 휘둘러.

어떻게 휘두르는지 우리가 도와줄게.

루시온의 손가락 주변이 금세 어둠으로 휩싸였다.

[이게… 뭐야? 어둠이 흑마법을 알려준다고?]

러쉘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했다.

저주를 사용하는데 주문은 무조건 필수였다.

그런데 지금 어둠이 다른 걸 알려주고 있질 않은가.

아닌데.

어둠은 러쉘의 말을 바로 부정했다.

굳이 루시온이 우리에게 구구절절 부탁하지 않아도 되니까 주문은 필요 없어.

맞아. 루시온의 말이라면 다 들어줄 거야.

그러니까 얼른, 얼른 강해졌으면 좋겠어.

어둠은 수줍은 말과 함께 8을 옆으로 돌린 모양대로 손가락이 움직였다.

루시온은 대가가 필요 없어.

―왜 루시온은 대가가 필요 없어? 라타가 보기에 필요한데?

라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괜찮아. 우리가 있으니까.

저주는 원래 이런 어설픈 힘이 아니야. 그리고 루시온이니까 괜찮아!

맞아. 원래 이름도 달라. 힘의 속박, 절대적인 복종. 그리고....

쉬잇! 조용히 해! 또 그놈한테 루시온이 아파야겠어? 저번에 그 착한 인간 때문에 살았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

…미안해. 너무 들떴어. 루시온이랑 말해서 기뻐서 그랬어.

어둠이 모습을 드러내며 서로를 향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루시온도 어둠의 왕을 부르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라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저주라는 흑마법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흑마법이라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었다.

[…하. 기록하지 못하는 게 진짜 슬프다. 이건 미친 발견인데. 기록해야 하는데…!]

러쉘은 안타까움에 몸부림을 쳤다.

마나는 인간의 도구로서 마법과 오러로 발전했고, 빛은 신수의 가르침하에 배우고 익혔다면 어둠만 그 정보가 없었다.

그런데 어쩌면 흑마법이라는 게 어둠이 직접 알려줘서 만들어졌다는 가능성이 보이질 않은가.

"…그래서 이다음에는 뭘 하면 됩니까?"

러쉘이 기쁜 건 알겠지만, 루시온은 어서 오웬에게 저주를 심어버리고 싶었다.

저주는 같은 흑마법사라도 알기 어려운 마법이었고, 해제도 어려웠다.

'그나저나 스승님한테 저건 안 보이시는 건가?'

오웬 머리 위에 까만 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루시온은 시선을 돌려 라타를 보았다.

눈동자가 빙그르르 돌아가고 있었다.

'라타 눈에는 보이는데?'

명령하듯이 말해. 루시온한테 아주 쉽잖아?

아. 이 저주는 우리가 지켜줄게. 들키지 않게.

어둠은 기쁜 듯이 키득거렸다.

"감사합니다. 부디 그래 주셨으면 합니다."

어둠이 저주를 지켜주겠다고 하니 벌써 든든했다.

"조심하십시오, 도련님."

루시온은 흄이 창문 너머로 다시 사라진 뒤에 어둠이 알려준 대로 속으로 말했다.

'나한테 먹이려던 독이 든 차는 오웬, 너와 뉴브라 왕국을 이어주는 자에게 직접 먹이게 될 거다.'

까만 링이 움직임을 멈추고 글자가 되어갔다.

남을 죽이려 쓴 독이 든 잔을 친우에게.

까만 별이 오웬의 왼쪽 뺨에 새겨졌다.

동시에 루시온은 속이 찔려오는 듯한 통증에 순간 오만상을 찡그렸다.

'…이거 좀 아픈데?'

됐다! 됐어!

봐봐. 엄청 쉽지? 다르지?

…아니야. 루시온 봐봐. 아파해. 아직 안 되는가 봐.

[루시온한테 대체 뭘 가르친 거야? 제대로 된 거 맞아?]

러쉘이 바로 역정을 냈다.

"괜찮습니다. 잠깐 가슴이 욱신거렸을 뿐입니다."

[진짜 괜찮아?]

"정말로 괜찮습니다."

루시온은 도무지 자신을 믿지 못하는 러쉘을 보다 말고 어둠에게 고개를 숙였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더 많이 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둠은 소소한 바람을 말하다 사라져버렸다.

제 곁에 오래 머무르면 또 그놈이 오는 걸까?

루시온은 의문을 덮고 오웬을 바라보았다.

놈의 눈동자에 어린 어둠의 불꽃이 사라지는 시간에 맞춰 루시온은 차를 마셨다.

꿀꺽.

차가 넘어가는 소리에 오웬의 눈이 순간 커졌다.

[속았네. 저건 무조건이지.]

러쉘은 오웬을 보며 실실 웃었다.

루시온도 그를 따라 웃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디저트까지 손에 쥐었다.

사과 타르트.

겉 부분이 바삭거렸지만, 자신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역시 마카롱이 최고였다.

바삭.

그 소리에 라타의 귀가 쫑긋 섰다.

―맛있겠다. 라타는 가리는 거 없이 뭐든 잘 먹는데. 라타는 다 잘 먹는데.

루시온은 침을 꼴깍 삼키는 라타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곧 오웬을 빤히 쳐다보았다.

보라고.

내가 네가 독술사를 시켜서 듬뿍 넣은 독을 먹고 있다고.

"정말 맛있는데요?"

루시온은 마지막으로 오웬이 만족할 수 있게 도장을 꽉 찍었다.

'어때? 좋아 죽겠지?'

201화. 케오르티아 왕국으로(2)

오웬을 보며 대놓고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었지만, 그는 자신이 독을 먹었다는 사실에 정신까지 팔린 상태였다.

팅!

붉은 실이 팽팽해졌고,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쉽게 나가떨어졌다.

루시온은 흡족하게 웃다 말고 코밑에 흐르는 뜨거움에 깜짝 놀라 테이블을 보았다.

코피였다.

[괘, 괜찮은가!]

베델이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고, 라타는 의자에 매달려 루시온을 구슬프게 바라보았다.

―또 과로야? 루시온 또 '쿵' 해? 그러면 안 되는데. 라타가 너무 슬픈데.

[이것 봐봐! 아까 네가 느낀 통증이 괜한 통증이 아니잖아! 이놈들 어디 갔어?]

러쉘은 이를 갈며 사라진 어둠을 찾아다녔다.

'아까 좀 다른 저주를 사용해서 가슴이 아팠는데, 그것 때문에 코피가 흐르나?'

루시온은 피를 보며 의문을 느꼈다.

―…아니야. 루시온 봐봐. 아파해. 아직 안 되는가 봐.

문득 어둠이 조금 전에 꺼낸 말이 떠올랐다.

'아직 안 된다고 그랬어. 내가 부서진 그릇이라서? 그래서 힘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대 어, 어디 아픈가?"

오웬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독을 넣은 사실을 알고 있으니 지금 자신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무섭겠는가.

루시온은 오웬을 달래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닦았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하."

"그건 상관없네. 어디 아픈가?"

"몸이 요새 좋지 않아서 그럽니다."

"내가 그대의 시간을 너무 빼앗았네. 이만 가겠네."

오웬은 겁에 질린 눈으로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십니까?"

"처음부터 가, 가볍게 말을 나누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대의 몸이 좋지 않으니 이 이상 시간을 뺏지 않겠네."

루시온을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문으로 향하기 바빴다.

"배웅하겠습니다."

"괜찮네. 그대부터 몸을 추스르게."

오웬은 거절하고 또 거절하며 다급히 복도를 거닐었다.

루시온은 다시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저거 완전히 겁쟁이네.'

루시온은 그제야 마음 편하게 차를 홀짝였다.

'맛 좋네.'

* * *

이전에 마법사 집단이었던 루미노스에게 습격당한 사실 때문인지 황실 기사단도, 크로니아 기사들도 준비가 아주 확실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흡사 전쟁을 치르러 갈 정도로 비장하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준비합니까?"

오죽했으면 루시온 자신의 입에서까지 그 말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이다. 적은 이전의 실패로 더 견고해졌을 테니 더 준비해야 하지 않겠더냐."

카슨은 무언가 아쉽다는 표정을 했다.

"신관까지 같이 가면 좋겠지만, 그 부분은 미덥지 못한 헤인트에게 맡기는 수밖에. 일단 마차에 올라타거라. 네가 누울 수 있게 더 큰 마차를 준비했으니."

루시온은 카슨의 재촉에 이기지 못하고 먼저 마차로 향했다.

―우오오오! 그, 엄, 엄, 책에 본 왕의 마차야!

라타는 얼른 문을 열어달라고 벌써 계단 위까지 올라간 상태였다.

―루시온! 루시온! 빨리! 빨리!

흄이 피식 웃으며 마차 문을 열었다.

―우오오오! 완전 넓어! 라타가 막막 뛰어다닐 수 있겠어! 아, 행복해!

라타가 혀를 삐죽 내밀며 앞발을 내민 순간, 흄이 라타를 들어 올렸다.

"라타. 얌전히 있어야죠."

별거 아닌 말이었음에도 쉴 새 없이 흔들리던 라타의 꼬리가 죽어버렸다.

―…웅.

'흄이 무섭긴 하지. 특히, 힘으로는 절대 안 돼.'

루시온은 라타를 보며 키득거렸다.

―라타는 지금, 지금… 슬픈데. 루시온은 기쁜가 봐.

라타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루시온은 흄의 도움을 받아 먼저 마차에 올랐다.

궁둥이에 닿는 감촉이 5점 만점에 4점이었다.

승차감이 좋았다.

흄이 문을 닫자마자 라타가 기회를 노려 우다다 뛰어다녔고, 주변이 어수선해지고, 카슨이 마차에 올라탔다.

라타는 카슨의 눈치를 살피다 얌전히 루시온 옆에 기대 누웠다.

마차가 출발한 뒤에 카슨이 입을 열었다.

"황자와 무슨 말을 나눴더냐?"

"별말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냥, 좀 이상했습니다."

"무엇이?"

"차와 디저트를 먹다 제가 코피를 흘렸는데 갑자기 자리를 피하시듯 나가버렸습니다."

루시온은 태연하게 말을 꺼냈고, 러쉘과 베델은 바로 카슨의 표정을 살폈다.

새파랗게 질려갔다.

"파, 팔을 줘 보거라."

"예…?"

"당장!"

카슨의 재촉에 루시온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팔을 내밀었다.

[루시온 너 일부러 카슨한테 오웬 놈이 독을 사용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한 거야?]

러쉘의 물음에 루시온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황상 그렇게 보이도록 말했다.

"따끔해도 참거라."

뭘 하기도 전에 카슨이 이미 루시온에게 마나를 집어넣었다.

핑그르르.

루시온은 순간 휘청거렸다.

마나가 제 몸으로 와 어둠을 뒤흔들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어둠은 흔들림에 약했다.

'…뭐야? 형님께서도 독술사가 사용한 독을 확인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어?'

루시온은 어둠을 억누르며 울렁거림에 입술을 깨물었다.

―카슨이 가면 쓴 루시온도 아닌데 루시온을 공격했어?

라타가 깜짝 놀라다 당장 카슨을 깨물러 뛰려던 차 러쉘이 라타의 꼬리를 쥐었다.

[아니야. 확인하는 거니까 가만히 있어. 라타 네가 카슨을 흔들면 루시온이 더 힘들어져.]

러쉘은 그새 새하얗게 질린 루시온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언젠가 네 꾀에 네가 당할 날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일 줄은 몰랐네.]

카슨이 가진 마나는 잘 단련되어 보통 사람보다 더 충격이 클 테지.

러쉘은 좋은 경험이라 생각해 키득거렸다.

"…하."

카슨은 안도하며 손을 뗐다.

"갑자기 제게 왜 이러십니까?"

루시온의 언성이 올라갔다.

속이 아직도 울렁거려 살짝 날카로워졌다.

"미안하구나. 혹시나 4황자가 너한테 독을 쓴 게 아닌가 싶어서 확인했단다."

"은으로 확인을 끝냈을 텐데요?"

"독술사의 독은 은으로 확인할 수 없다."

탕탕!

말을 마친 카슨은 갑자기 마차를 두드렸다.

마차가 급하게 멈췄고, 카슨은 루시온이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었다.

"잠깐 확인할 게 있구나."

"확인이라뇨?"

루시온은 카슨이 오웬이 가져왔던 차와 디저트를 확인하려고 한다는 걸 알아챘지만, 모른 척했다.

'남아 있으려나?'

"확인한 뒤에 말해줄 테니 잠깐만 기다리거라."

카슨은 마차에서 내린 뒤 당장 헤인트에게 걸어가 말을 나눴다.

대화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4황자가 자신을 독살하려고 했고, 그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내용이겠지.

"스승님."

루시온은 러쉘을 째려보았다.

[왜?]

"참 매정하십니다."

[누가? 내가?]

"예. 스승님이요."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지. 그렇지 않아?]

러쉘은 뻔뻔하게 입을 놀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