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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루시온은 눈을 깜박거렸다.

"…아버지?"

크로니아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노비오가 헤인트의 멱살을 잡는 모습을 볼 줄이야.

[공의 부친께서…?]

베델이 눈을 크게 떴다.

[노비오가 화가 난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러쉘이 제 눈을 의심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헤인트는 이날이 올 걸 알았는지 이미 각오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 뒤였다.

"무엇이 죄송하던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자신이 경매장에서 빛을 쐬고, 동부에서 타락한 어둠에 끌려 바닷가에 빠진 것도 모두 헤인트 때문이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기에 루시온은 노비오를 말렸다.

"아버지. 그만하십시오."

자신이 자고 있을 때나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습격이 없던 건 아니었다.

하필 굵직한 일에 자신이 다쳐서 이렇게 된 것뿐인데.

"너는 화가 나지 않더냐?"

노비오가 루시온을 보았다.

루시온은 그저 깜짝 놀라 있었다.

대체 왜 화를 내지 않는 건지.

루시온이 화를 냈다면 이다지도 답답하지 않았을 텐데.

"예. 화가 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직도 저를 앞뒤 가리지 않고 성만 내는 아들로서 보고 계신 겁니까?"

말은 이렇게나 잘하면서.

"아버지. 거기까지 하셨으면 합니다. 제가 헤인트 경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카슨까지 말리자 노비오는 손을 놓았다.

하지만 헤인트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경에게 실망했네."

노비오는 그대로 돌아섰고, 루시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노비오를 따라갔다.

자신이 헤인트를 위로하는 게 더 우스울 테니까.

"갑자기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루시온."

노비오가 작은 목소리로 루시온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크로니아로 돌아온 루시온을 반기지도 못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헤인트 경 일이라면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 나중에 다시 말할 테니."

"…혹시 일부러 그러셨습니까?"

"그래. 반쯤은."

[내가 봤을 때 진심이었는데?]

러쉘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적들이 누구인지 또렷해진 와중에 놈들을 위해서 갈등이 하나 생기는 게 좋지 않겠더냐?"

그제야 루시온은 안도했다.

노비오가 아무리 화가 났어도 황실 기사를 건드는 건 황실을 향한 모독이기 때문이었다.

설령 케틀란과 친우라고 해도 그조차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었으니.

"폐하의 뜻입니까?"

"그래. 내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거라."

노비오는 걸음을 멈추고 루시온의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고생했구나, 루시온. 무사히 돌아와 줘서 너무 고맙구나."

노비오는 루시온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 * *

루시온은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눈을 떴다.

어제 집에 도착해 시종들의 환영도 모자라 또 꽃을 받았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방 안이 꽃으로 가득 차버렸다.

내성을 기르기 위해 늘 먹던 라트초를 요 2주간 먹지 못해 너무도 아쉬웠는데 저녁밥을 맛있게 먹은 후, 라트초도 먹고 빛도 쐬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크라언한테 연락해야지 참.'

루시온은 연락할 연락용 아이템을 꺼내러 누운 상태로 손을 뻗다 라타의 보드라운 털이 손에 맞닿았다.

아직 꿈나라에 빠진 라타를 쓰다듬으며 길게 하품했다.

[루시온…?]

막 루시온 방으로 들어오던 러쉘이 그대로 멈춰섰다.

누가 봐도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할 기세가 아닌가.

"좋은 아침입니다, 스승님."

루시온이 채 뜨지 못한 눈으로 활짝 웃었다.

화가 막 끓어오르다가도 그 모습에 러쉘은 아주 힘겹게 화를 참아내며 말했다.

[부지런한 건 좋은데 일어나자마자 바로 크라언에게 연락할 셈이야? 좀 느긋하게 아침 해도 보고 이불에 그냥 파고들던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지. 잠깐 휴식을 즐겨.]

"어둠을 돌리면서 말입니까?"

[그래. …아, 아니, 오늘은 그럴 필요 없어.]

러쉘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추가 자료까지 넘겨주면 트웰로 그놈의 목은 완벽히 떨어지고, 오웬 그놈도 이제 벼랑 끝에 내몰… 아니다, 네가 널 독살하려고 한 증거도 넘길 테니 똑같이 목이 간당간당할 거잖아.]

"스승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쉬려고 했습니다. 제가 형님들도 아니고 어떻게 무리하게 움직이겠습니까?"

러쉘은 그 말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루시온. 네가 계속 무리하고 있다고 말해도 안 들리는 거지? 아니면 듣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닙니다. 잘 들립니다. 하지만 저는 움직여야 합니다."

루시온은 눈을 천천히 떴다.

'또 그 표정이네?'

러쉘은 물어보고 싶었지만, 루시온이 짓는, 거친 파도를 막는 방파제처럼 보이는 그 표정 때문에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러쉘은 숨을 한 번 돌리고 다른 말을 꺼냈다.

[넌 계속 널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잖아?]

"그래서 오늘은 쉬려고 합니다. 조금 힘들긴 하네요."

[오늘만이 아니라 한 달 넘게 푹 쉬어야 해.]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다, 모든 게 다 끝나면 그때 쉬겠습니다."

루시온은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오늘만큼 누가 널 기절시켜줬으면 좋겠다.]

"아쉽게도 그럴 사람이 여기에는 없습니다."

루시온은 키득거리며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크라언."

<예, 하멜 님. 잘 주무셨습니까? 어제 크로니아에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크라언은 바로 대답하며 반갑게 루시온을 맞이했다.

지금 몇 시인지 몰라도 크라언은 참 부지런했다.

"내일 케오르티아로 갈 거야. 체프란의 이름을 써서 크로니아로 초대장이든 뭐든 보내봐."

미엘라와 크라언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버렸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케오르티아 왕국으로 갈 방법을 사용해야 하지 않겠나.

202화. 케오르티아 왕국으로(3)

<내, 내일 바로 말입니까? …하멜 님. 그렇게 움직이시다가 진짜 쓰러지십니다.>

크라언은 기겁했다.

―아닌데. 이미 루시온은 '쿵' 했어! 또 '쿵' 할지도 몰라.

라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힘차게 외쳤다.

곧 루시온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다 그에게 달려들어서는 머리를 비볐다.

―잘 잤어, 루시온? 히히.

"너를 기다리게 할 순 없지."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10년을 기다렸는데 여기서 더 기다린다고 해서 티도 나질 않습니다. 그럼 절 봐서라도 일주일 뒤에 출발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일주일은 너무 늦어."

<그렇게 말씀하실 거면 왜 제 핑계를 대셨습니까?>

"되게 삐딱하다, 크라언? 아침이라서 그런가?"

<아뇨. 자신을 돌보지 않는 하멜 님께 화가 나서 그럽니다. 저는 솔직히 일주일도 굉장히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틀 뒤에."

루시온은 곧 자신만 생각했음을 알고 바로 말을 바꿨다.

피곤한 건 크라언도 마찬가지일 테니.

<쓰시는 김에 더 쓰시죠.>

"이건 흥정이 가능한 물건이 아니야."

<저는 흥정하는 게 아니라 지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미엘라의 마법 아이템으로 나으셨다고 해도 일단 크게 다치셨잖습니까. 휴식이....>

"그래서야 크라언."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왜 다쳤는지 물어보지 않지?"

<…제가 여쭤보면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크라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고맙다."

<감사 인사를 받을 만한 건 아니잖습니까. 솔직히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가… 세게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날 죽이려는 놈이 있어. 그놈이 누구인지 나도 아직 몰라."

<그럼 혹시 그놈 때문에 계속 무리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니야. 라타가 알아.

러쉘과 라타가 동시에 대답했다.

"나는 무리한 적 없어, 크라언."

<알겠습니다. 하멜 님께서 무리하신 건 그놈이랑 상관없었네요.>

[그렇지. 역시 눈치 빨라.]

―맞아. 크라언도 똑똑해!

맞장구치는 러쉘과 라타가 오늘따라 참 얄미웠다.

<…그럼, 이틀 뒤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잠깐만, 크라언. 아직 헤인트 형님하고 통화한 적 없지?"

<예. 아직 없습니다.>

"그래. 이틀 뒤에 보자."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다시 집어넣었다.

'이틀 동안 뭐 하면서 기다리지?'

느긋함과 담을 쌓은 지 오래여서 그런지 몰라도 벌써 몸이 근질거리는 느낌에 루시온은 한숨부터 나왔다.

'…아!'

루시온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

* * *

하루는 집에 얌전히 있었다.

자신도 아버지와 형님의 눈치를 보기에 밥 먹는 것 이외에는 침대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자신이 심심할까, 아버지도 헤인트 형님도 찾아오고, 카슨 형님은 아예 방을 벗어나지 않았다.

흄도 자신의 방에서 온종일 책에 몰두했다. 그러다 흄이 넌지시 '꿈'을 이야기했다.

변경 너머로 가는 꿈이라는 말에 루시온은 자신이 갈 '케오르티아 왕국'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황실 기사단이 크로니아에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인지 새벽에 간단한 배웅을 받은 채 떠나버렸다.

헤인트한테 조심히 가라는 인사도 못 했는데.

"…실망하지 말거라, 루시온. 황실 기사단 전부 네 걱정을 하며 돌아갔으니. 헤인트도 건강하라고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카슨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루시온은 움찔거렸다.

"그것보다 정말 따라가지 않아도 되겠더냐?"

"가벼운 산책이니 형님께서 따라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시온은 정문을 앞에 둔 상태에서 카슨을 바라보았다.

"그럼 갔다 올게요."

루시온은 흄과 함께 카슨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걸어간 후에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 자마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가면을 쓰고 흄은 렌탈로 변신한 뒤에 자마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신입 대장장이 자마드 씨."

망치질하려던 자마드가 그대로 우뚝 멈췄다.

"차라리 처음 만났을 때 기름이 좔좔 발렸던 그 입이 그리워질 정도야."

"에이, 뭘 또 그렇게 그리워하십니까?"

"뻔뻔하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나?"

"적당히 듣습니다."

루시온은 키득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주십시오. 받으러 왔습니다."

"아직 연락도 안 했는데 누구한테 들었지?"

"제가 귀가 밝습니다."

"이건 귀가 밝은 수준이 아닌데?"

"그냥 밝다고 해주십시오. 설명하려면 깁니다. 솔직히 제가 오래 있는 거 싫어하시잖습니까."

"누가 그런 개소리를 지껄였나?"

자마드가 망치를 들며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오래 있는 게 좋습니까?"

루시온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거, 크흠."

자마드는 민망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보고 있으면 손주… 같아서 그래. 그러니 오래 있어도 돼."

"시간 때울 장소가 생겨서 좋습니다."

"거 답답하면 가면을 벗고 있어도 되고. 내가 보기보다 입이 무겁거든."

"그건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준비되질 않아서 말입니다."

루시온의 대답에 자마드는 한쪽 벽에 놓인 대검을 가리켰다.

자마드의 대장간에 도착하자마자 러쉘과 베델이 달라붙어서 유심히 바라보던 그 대검이었다.

"어디 한번 부서트려봐."

자마드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덩달아 흄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정말 제 마음대로 해도 됩니까?"

"그러라고 하고 있잖은가. 부서트려 보게. 부서지지 않을 테지만."

[흄 네가 휘둘러도 부서지지 않을 거야.]

러쉘이 확신했다.

[그래. 저건 진짜 '명검'이니까.]

베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말에 흄은 안심하고 대검을 쥐었다.

묵직했다.

흄은 그 묵직함이 너무도 좋았다.

덩달아 라타의 고개가 대검을 따라 올라갔다.

―라타는 검을 볼 줄 모르지만, 엄청 예뻐!

대검인 만큼 투박한 외형은 다른 대검과 다르지 않았지만, 시퍼런 검날은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과도 같았고, 광택은 별을 뿌려놓은 듯 반짝였다.

흄이 검을 하늘로 올리자 마치 대답을 하는 것처럼 조용히 떨리기까지 했다.

"뭔가… 다릅니다."

[명검에는 영혼이 깃든다는 말이 있어. 물론, 진짜 영혼이 깃드는 건 아니지만.]

러쉘의 시선은 대검에서 떼어지질 않았다.

흄이 밖으로 나가 근처 바위 앞에 섰다.

'일단 가볍게.'

흄이 대검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바위가 갈라진 건 물론, 땅까지 파이며 바람이 일었다.

하지만 대검은 어떤 흠집도 나지 않았다.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루시온을 보았다.

"그럼 이제 세게 해봐. 얼음을 실어서."

"예!"

흄은 힘차게 대답한 뒤에 나무가 울창한 숲으로 걸어갔다.

하.

흄의 입가에 새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대검이 얼어붙었다.

무기에 얼음의 힘을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가슴이 기분 좋게 떨리고 있었다.

흄은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내듯 대검을 찍다시피 앞으로 휘둘렀다.

부우우웅!

바람을 베어버리는 소리가 흄의 귀를 때렸다.

파파파파팟!

옆으로 거센 바람이 일어났고, 흄이 그린 궤적을 따라 얼음이 몸을 일으켰다.

나무를 얼마나 베어냈는지는 몰라도 길게 이어진 얼음 길을 바라보다 자신의 손에 아직도 느껴지는 묵직함에 대검을 들어 올렸다.

가뿐하다.

마치 대검이 그렇게 말하는 듯 처음과 변함없는 모습으로 흄을 맞이했다.

흄은 전율을 느끼듯 몸을 부르르 떨며 크게 외쳤다.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네.'

루시온은 진심으로 깜짝 놀라 가슴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봤지? 그럼 이제 나도 조직에 들어갈 수 있겠나?"

자마드가 우쭐거리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원래 조직원이었잖습니까."

"…허. 뒤통수가 이렇게 얼얼한 적은 처음이야."

"그럼. 병원을 가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 입. 입을 그냥 확!"

루시온은 망치를 들고 일어나는 자마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렌탈의 힘을 견딘 무기는 자마드 씨가 만든 게 처음입니다. 감사합니다. 렌탈이 드디어 제 몸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쥐락펴락하는 솜씨가 아주 환상적이었다.

자마드는 당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분 좋게 웃었다.

자신은 아직 더 좋은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대장장이로서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었다.

* * *

"뭘 좋아하실지 몰라 가장 맛있는 것들만 준비했습니다."

크로니아의 집사장인 안토니가 방긋 웃으며 미엘라에게 말했다.

"고, 고맙네."

미엘라는 루시온이 원하는 대로 친우로서 크로니아를 방문했다.

실제로 경매장에서도 만났으니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분명 어색하지 않아야 했음에도 크로니아라는 이름만으로 바짝 긴장됐다.

하지만 막상 온 크로니아는 뭔가 소문과 달랐다.

루시온의 친우라는 사실만으로 크고 두껍던 크로니아의 정문은 아주 손쉽게 열렸고, 모두가 자신을 반기며 마치 황녀가 된 듯한 대접을 받았다.

그게 적응이 안 될 만큼 부담스러워 당장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을 정도였다.

미엘라는 안토니가 나간 뒤에 숨을 크게 몰아쉬며 집사로서 따라온 크라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긴장 돼서 죽을 것 같아요. 제가 진짜 크로니아에 왔어요. 들어가기 힘들다는 그 크로니아에요!"

미엘라가 쥔 찻잔이 같이 부르르 떨렸다.

"저는...."

크라언이 말을 내뱉기 전에 문이 열렸다.

"긴장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있어도 됩니다."

루시온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늦었습니다. 무슨 날도 아닌데 절 꾸며야 하니, 마는지를 두고 싸움이 나서 말입니다."

루시온은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누가 이긴 겁니까?"

크라언은 키득거리며 물었다.

"내가."

루시온은 딱 봐도 모르겠냐는 듯이 크라언을 바라보았다.

"꾸, 꾸민 게 아니라고요?"

놀란 건 미엘라였다.

"미안합니다. 제 몰골이 아무래도 나쁜가 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꾸미고 올 걸 그랬습니다."

갑자기 미엘라도 크라언도 입을 다물었다.

크라언은 마치 화를 참는 듯해 루시온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베델이 슬쩍 러쉘을 쿡쿡 찔렀다.

자신은 차마 말을 못 하겠으니, 대신 말 좀 해달라고.

러쉘은 한숨을 내쉬다 가볍게 말했다.

[루시온. 너 어디서 그런 말 하고 다니지 마. 그러다 욕만 들어.]

'제가 뭐 실수라고 했습니까?'라고 바라보는 루시온의 시선에도 러쉘은 절대로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질 않았다.

루시온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고자 말을 던졌다.

"일단 출발하죠."

"…이렇게 빨리 말입니까?"

크라언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체프란 저택으로 가서 아버지를 안심시켜드린 뒤에 출발해야 하거든."

루시온은 말과 달리 여유롭게 마카롱을 입에 넣었다.

"아, 일단 먹고 움직일까요?"

미엘라와 크라언이 눈을 깜박거리며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제 나이다워 보였다.

* * *

"몸 상태는 어떤가요?"

미엘라는 마차가 크로니아를 벗어나자 그제야 편안하게 말을 꺼냈다.

"보시다시피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습니다. 억지로 움직이고 계시죠."

옆에 앉아 있던 흄이 루시온의 말을 바로 부정하며 계속 떠들어댔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습니다. 의사는 못해도 2주는 쉬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흄. 너 자꾸 이럴래? 내가 움직일 만하니까 움직이는 거지."

루시온은 흄을 살짝 노려보았다.

자신이 강철도 아니고 어떻게 몸이 움직이질 않는 걸 억지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왜 문제인지 모르시는 게 문제입니다."

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크라언이 당장 미간을 찌푸렸다.

"제게 그 말씀만 하지 않으셨더라도 무조건 일주일 뒤에 움직였을 겁니다."

"하멜 님.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미엘라는 목걸이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순식간에 다들 입을 다물고 그녀만 바라보았다.

"완성됐습니까?"

루시온이 묻자 미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햇님이는 만능이 아니에요. 물론, 루시온 님에게 있어 유일한 치료제라는 건 변함이 없죠."

"그럼 어떤 부작용이 있습니까? 저한테 아직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루시온의 물음에 미엘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작용이라기보다는 몸이 회복되는 데 재생력이 100이 필요하다면 햇님이를 사용해도 70을 절대 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머지 30은 치료가 되지 않은 상태죠."

'생각보다 재생력이 좋은데?'

루시온은 혀를 내둘렀다.

"이건 모든 빛의 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질적인 현상이라, 햇님이한테도 나타나는 것뿐이에요. 물론, 지금도 그 현상을 넘어보려고 작업 중이고요. 어쨌든 받아요."

미엘라는 햇님이를 넘겼다.

햇님이를 받자마자 루시온은 설레기까지 했다.

"그런데 미엘라 씨. 혹시 제가 햇님이를 믿고 이렇게 행동하는 거라고 보셨습니까?"

"…아니었어요?"

미엘라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더니 슬쩍 말을 던졌다.

"그럼 혹시 아픈 거 좋아하세요?"

203화. 두 번째 이야기

루시온이 눈을 깜박거렸고, 러쉘은 참지 못하고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핫! 아픈 거 좋아하냐니! 아, 미치겠네!]

"그,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러쉘의 웃음에 맞춰 루시온이 뒤늦게 언성을 높였다.

"죄송해요...."

미엘라는 슬쩍 루시온의 시선을 피하다 말고 곧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진짜 심각한 거 맞잖아요. 왜 그렇게 다니세요?"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크라언은 그제야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미엘라는 크라언처럼 심각한 표정이 되어 그에게 속닥였다.

하지만 마차였기에 루시온의 귀에 다 들렸다.

"그럼 아예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묶어버리는 게 어때요? 저 잘 만들 자신이 있어요."

"그건 소용없습니다. 하멜 님은 여기저기 잘 이동하시거든요."

[맞아. 아쉽지만, 그건 별로 소용없어.]

러쉘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헴. 라타가 좀 잘해.

그림자 속에 뒹굴 구르던 라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얼굴을 치켜올렸다.

미엘라는 자신의 턱 밑을 툭툭 치며 생각하다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단숨에 기절시키는 아이템은 어때요? 아프지 않게 만들 자신이 있어요."

"오. 그거 괜찮습니다. 오늘 어쨌든 크로니아의 정문을 뚫었잖습니까. 무리하신다 생각하면 찾아와서 쓰죠."

[오! 진짜 좋은 생각이야. 요즘 들어 루시온을 누가 좀 기절시켜줬으면 했는데.]

러쉘은 눈을 반짝이며 엄지를 올렸다.

무려 쌍 엄지였다.

[그런데 아프지 않게 기절시키는 게 가능한가?]

러쉘이라면 몰라도 베델도 뭔가 생각하는 모습에 루시온은 마냥 웃지 못했다.

'에이 설마, 베델까지?'

―라타는 루시온이 '쿵' 하는 거 싫은데.

라타는 한쪽 귀만 올린 채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마 힘들 겁니다. 도련님의 어둠이 반사적으로 나오거든요."

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지금 앞에 있습니다."

루시온은 참다못해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십니까?"

크라언은 조금 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내 집사야."

렌탈은 어디로 갔을까.

"내 집사야."

루시온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예상한 대로 렌탈이기도 하지."

"흄이라고 합니다."

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

물어본 크라언과 가만히 듣고 있던 미엘라 둘 다 입이 벌어질 만큼 놀라고 말았다.

그 모습이 웃긴지 라타가 꺄르르 웃으며 꼬리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설명은 시간이 되면 하겠습니다."

루시온은 햇님이를 품에 넣고서는 물었다.

"그럼 햇님이는 어떻게 사용하면 됩니까?"

* * *

체프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루시온은 흄과 함께 후드로 얼굴을 가린 뒤에 제일 먼저 빠져나와 적당한 곳에서 탈의하고 제이엘을 찾았다.

"하멜 님?"

피터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마침 잘됐다 싶었다.

"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엘라하고 만든 방어 마법이 깃든 마법 아이템 말이야. 잘 썼어."

그 아이템 덕분에 어쨌든 어둠의 왕, 그놈의 공격을 막지 않았던가.

"자, 잠시만요. 그렇다는 말은 최근에 하멜 님께서 그렇게 되신 게...."

"한가해, 피터?"

"한가합니다."

"그럼 저택 밖에 나가면 크라언 님이 있을 거야. 거기로 가봐."

루시온은 피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러쉘을 따라 걸어갔다.

"줄 게 있다며?"

루시온은 바로 손을 내밀었다.

제이엘은 퀭한 눈으로 루시온을 바라보다 힘없이 웃었다.

그의 방은 무수히 많은 서류로 엉망이다시피 했다.

"일단 숨 좀 돌리시고 자리에 앉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좋아."

루시온은 당장 쓰러질 듯한 제이엘의 모습에 마지못해 허락했다.

"바쁜가 보네?"

"예. 새로운 지부 공사 작업이랑 들어갈 자제, 그리고 무역로랑 조직의 재정 관리랑 상인들을 모으느라 머리가 깨질 것만 같습니다."

제이엘이 나열한 것만 들어도 루시온은 진저리가 날 것 같았다.

이래서 인재를 쓰나 싶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좀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요새 행복합니다."

"그래. 일하는 것도 좋은데 쉬엄쉬엄, 적당히 해. 그러다 쓰러지면 큰일이니까."

루시온의 말에 러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누가 누구한테 말해야 할지 모를 말이네.]

"제가 하멜 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흄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요새 좀 쉬었어. 제이엘 봐봐. 당장 쓰러질 것 같잖아?"

"제이엘 씨는 쓰러지지 않고, 상처를 입지 않으셨잖습니까."

"하멜 님."

제이엘이 살짝 심각한 표정으로 루시온을 불렀다.

"말해봐."

"며칠 전, 동부에 있던 임시 아지트에서 하멜 님께서 피를 철철 흘리시면서 렌탈 씨에게 업혀서 오는 걸 봤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제 괜찮으니까, 그 이야기는 됐고. 내게 줄 게 뭔지 줘봐."

루시온은 다시 손을 흔들었다.

"하멜 님께서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조직원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선물이야?"

"예. 저번에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루시온은 괜히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누구한테 물어봤는데?"

"처음에는 이 조직의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헤로안 씨한테 물어봤습니다."

'좋은 선택이라고 봐야 하는가?'

루시온은 미심쩍어했다.

"하멜 님께서는 복종하는 사람을 제일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선물은 그냥 마음이 담긴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셨고요."

[썩 틀린 말은 아니잖아?]

러쉘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런데 옆에서 헤로안 씨를 감시하고 있던 퀘이트 씨가 절대로 헤로안 씨의 말을 들으면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제이엘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부적을 좋아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내가 아니고 퀘이트겠지.'

루시온은 웃음을 꾹 눌렀다.

"그래서 부적을 준비했습니다."

제이엘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서랍에서 선물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막상 샀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어! 트로에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라타가 갑자기 킁킁거렸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루시온은 손가락을 매만졌다.

[에이. 진짜 또 성물인 건 아니겠지?]

러쉘도 미심쩍어했다.

루시온은 제이엘에게 물었다.

"열어봐도 돼?"

"예. 서부로 오기 전에 신전에 들러 확인까지 거쳤습니다.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를 또 듣고 말았다.

루시온이 상자를 열자 이상한 모양을 한 토템이 보였다.

그 토템의 머리 쪽 부분에 붉은 보석이 끼워져 있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보석이라 생각할 무렵 갑자기 허공에 둥둥 떴다.

"...?"

제이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오오오! 라타는 이 장면 경매장에서 본 적 있는데! 팔찌랑 팔찌가 합쳐져서 짠하고 성물이 됐잖아!

루시온은 품에서 불안정한 성물을 꺼내기 전에 라타가 들어가 있는 자신의 그림자를 슬쩍 바라보았다.

[라타. 루시온이 뭘 꺼내면 저택 주변 아무 곳이나 이동해.]

러쉘은 루시온이 무얼 바라는지 눈치챘고, 루시온은 바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알았어! 라타가 눈 크게 뜨고 있을게.

루시온은 침착하게 텔라가 줬던 브로치를 꺼내자마자 당장 그림자 이동으로 자리를 피했다.

저택 멀리서 반짝거리는 걸 본 뒤에 다시 제이엘 앞으로 돌아왔다.

"…어."

제이엘이 더듬거리며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달라는 눈빛에 루시온은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이상하게 빛이 나올 것 같더라고."

여기서 제이엘에게 성물이라고 말해도 그가 이해하기 어려울 테지.

어쩌면 또 제 탓이라 생각해 기껏 빠져나왔던 과거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다.

루시온은 태연하게 브로치를 바라보았다.

마치 제 짝을 찾듯 보석 두 개가 합쳐졌다.

'진짜 트로에 말이 맞았어. 성물이 성물을 부르네. 이것 참. 이대로라면 정말 성물 부자가 되겠네.'

루시온은 어처구니없이 웃으며 브로치를 손에 쥐었다.

"선물 잘 받았어, 제이엘. 혹시 또 나한테 뭐라도 주고 싶으면 언제든지 줘도 돼. 사양하지 않을 테니까."

성물이 주변인의 선물로서 하나씩 오는 걸 발견했다.

가능성 중 하나지만, 자신도 기쁘고 성물도 얻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니까...."

제이엘은 아직도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럴 때는 말을 돌리는 게 최고였다.

"황제가 널 한번 만나자고 하네. 언제가 좋을지 크라언한테 말해 놔."

"예…?"

이미 커진 제이엘의 눈이 눈꺼풀을 뛰쳐나올 정도로 더 벌어져 버렸다.

"네 말대로 황제는 널 도와줬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

"지금까지 잘 버텼어, 제이엘."

루시온은 고개가 힘없이 무너지는 제이엘을 바라보다 저택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흄과 크라언에게 향했다.

* * *

"많이 기다렸습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체프란 저택에 도착하기 전에 베델은 루시온에게 케오르티아가 있다는 그 근처로 가겠다며 먼저 움직였다.

자세한 위치는 그곳에 도착한 뒤에 크라언에게 물어도 늦질 않았다.

"아닙니다.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이렇게 단출하게 가도 되는 겁니까?"

피터가 물었다.

지나가다 라인트를 만났는지 어느새 같이 서 있었다.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라인트가 키득거렸다.

루시온은 잠깐 눈동자를 굴리며 다른 이들을 찾았다.

크라언의 가신이자 전 암살자인 헬론과 결계술사인 슈트라.

그 둘도 따라와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헬론과 슈트라를 찾는 거라면… 아마 같이 못 갈 듯합니다."

크라언은 살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강요할 생각이 없었기에 루시온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루시온은 잠깐 베델의 신호를 기다렸고, 묘한 떨림에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루시온. 혹시 긴장한 거 아니지?]

러쉘이 넌지시 묻자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긴장보다는 불안감이 앞섰다.

'동부에서는 검은 구슬을 찾지 못했는데, 케오르티아 왕국에서는 있는 걸까?'

흄이 꿨던 변경 너머가 어딜 향하는 건지 몰라도 루시온은 이번만큼은 검은 구슬이 있길 바랐다.

어둠의 왕, 그놈에게 당한 뒤로는 더 조급해졌다.

제 몸에 보랏빛 어둠이 나오지 않았다면.

라타가 갑자기 자신이 모르는 라타가 되어버리지 않았다면.

'…죽었겠지. 무조건.'

자신은 놈에 비하면 턱없이 약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자신이 익혔던 흑마법을 아예 사용할 수 없었으니.

무력감.

그 감각에 사로잡혔던 끈적거림이 괜스레 생각이 났다.

'...!'

그때, 베델이 신호를 보냈다.

루시온이 라타를 보았다.

―응. 라타도 찌르르하고 신호가 왔어! 간다!

라타가 신나 하며 앞발을 굴렸다.

* * *

[루시온 공.]

어둠이 걷어지자마자 베델이 다급히 루시온을 불렀다.

[이 앞에 신관들이 있어.]

'...?'

루시온은 다짜고짜 꺼내는 베델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왜?'

[저 앞에? 왜?]

러쉘이 루시온을 대신해 물었다.

[뭔가… 이상해.]

베델은 불안한 듯 손을 만지작거렸다.

[아니. 지금도 되게 이상하거든? 굳이 망한 나라에 신관들이 대기해 있다고? 벌써 10년이나 지났는데?]

[이상한 건 더 있다. …병사에 이어 죽음의 기사가 둘이나 있어.]

[뭐라고? 이게 무슨 조합이야? 진짜로 네바스트가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거야? 아니면 그냥 여기에 있는 거야?]

러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다. 그건 내가 확인해 볼게. 루시온 넌 신경 쓰지 마.]

"…하멜 님?"

크라언은 갑자기 꼼짝도 하지 않는 루시온을 바라보다 불렀다.

"이 앞에 적이 있습니다."

루시온은 크라언과 피터, 그리고 라인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적이라뇨?"

피터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신관들과 기사, 그리고 병사가 있습니다."

루시온은 베델을 바라보았다.

[숫자는?]

자신이 원하는 말을 러쉘이 대신했다.

[신관이 여섯. 기사가 열. 병사가 스물다섯. 적인지 확실하지 않은 죽음의 기사가 둘.]

[신관이 살짝 걸리기는 하는데. 지금의 너라면 상대할 만해.]

러쉘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신관이 여섯. 기사가 열. 병사가 스물다섯입니다."

루시온은 적의 숫자를 말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전투입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204화. 두 번째 이야기(2)

일단 물러났다가 다시 오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림자 이동으로 데리고 올 수 있는 인원수도 한계가 있어 크로니아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루시온은 아직 체프란 가가 아지트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크게 움직일수록 흔적이 남는 법입니다. 만약 놓쳤을 때도 대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움직임으로 적들도 우리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크라언이 이어 목소리를 냈다.

지금까지 은밀하게 행동했다.

이렇게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건 지금까지의 노력을 허물어트리는 것과 똑같았다.

"게다가 질 것 같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크라언은 바로 자신이 애용하던 활을 꺼내 놓았다.

"신관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단숨에 벨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흄이 자마드에게서 받은 대검을 꺼내 들었다.

쿵.

가볍게 땅에 내려놓기만 했음에도 묵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하멜 님은 신관과 멀리 떨어져야 하는 게 맞죠? 아니면 진짜 죽여도 됩니까?"

라인트는 뭐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몰랐다.

피터를 만났고, 그가 한가하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말해 끌려온 게 다였다.

어제 크라언이 말하길, 하멜이 황제와 담판을 지어 조직의 독립성을 약속받았다고 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움직인 자가 하멜이기에 믿을 수 있었다.

"죽여도 됩니다."

루시온이 대답했다.

"저놈들은 제국의 적입니까?"

라인트가 다시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멜이 황제를 만났고, 뭘 했기에 그런 약속을 받았는지 몰라도 제국과 적이 되지 않는 조건을 걸었다는 사실 역시 들었다.

그럼 제국의 적이 곧 조직 에일의 적일 테고, 하멜이 저들을 죽여도 된다고 했으니 제국의 적이 아니겠나?

"아마 네바스트의 신관이거나 네바스트의 끄트머리들일 겁니다."

루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안심입니다. 아무리 용병 나부랭이로 살았어도 제 조국은 제국입니다. 제국인을 죽인 적이 없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또 아니지만, 찝찝하긴 하잖습니까."

라인트는 그제야 미소를 내보였다.

[나는 먼저 가서 일단 대화라도 시도해볼게.]

러쉘이 루시온에게 말한 뒤에 베델이 가리켰던 방향으로 향했다.

"말할 입은 살려두겠습니다."

라인트는 말과 함께 가볍게 마나를 끌어 올렸다.

"후방에서 눈 크게 뜨고 살필 테니 다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피터는 주머니에서 반지 여러 개를 꺼내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루시온의 시선에 피터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엘라 씨가 만들어준 방어 마법 아이템입니다. 이렇게 분산되면 위치가 헷갈려서 정작 절 보호할 수 없을 때도 있거든요."

경험이 묻어난 말이었다.

[그럼, 루시온 공.]

베델이 루시온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루시온은 베델과 빙의를 하자마자 제 머리 위에 어둠을 내보내 가장 높은 나무 위에 찰싹 붙여 놓았다.

자신과 시선을 공유할 수 있는 흑마법 중 하나였다.

어제 자기 전에 러쉘에게 간단한 흑마법 하나를 알려달라고 조르길 잘했다.

―우오오오! 라타도 다 보여!

루시온은 베델의 도움을 받아 시야를 더 끌어올렸다.

"다들 각자 자리 잡으십시오. 제가 놈들의 다리를 묶어버리겠습니다."

신관들이 가장 예민하겠지만, 동시에 덮친다면 문제가 없었다.

여기는 산속.

그림자라면 어디든 있을 테니.

"그게 신호입니까?"

라인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사실 저택에서 이곳으로 올 때 흑마법에 휩싸인 감각이 아직도 잊히질 않았다.

그건 환상적이었다.

마치 따뜻한 난로 앞에 손을 맞대고 있는 기분이었다.

"예. 신호입니다."

루시온은 조직원과 함께 싸워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맞춰야 하는지 몰랐다.

'뭐, 알아서들 잘 싸우겠지.'

루시온은 크라언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나무에 올라 적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있었다.

라인트는 당장 뛰쳐 갈 준비를 했고, 피터는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흄과 시선이 맞았다.

"하멜 님 앞에는 아무것도 없게 할 겁니다."

흄의 사뭇 진지한 눈빛에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그래."

―라타는 준비됐어! 라타는 오늘 맛있는 고기도 많이 먹어서 힘이 넘쳐!

"다행이네."

루시온은 어둠을 내보냄과 동시에 눈을 번뜩 떴다.

자신이 나무 위에 세운 또 다른 눈으로 적들의 위치가 보였다.

하나.

셋.

열.

적들에게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 속 어둠이 자신의 심장 소리와 함께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 잡았다!'

총 마흔하나.

가자, 가!

꺄르르 웃는 제 어둠의 소리를 들으며 루시온은 디버프를 사용했다.

'낙, 다리를 묶어라!'

마흔한 명의 그림자에서 동시에 어둠이 튀어나와 그들의 다리를 휘감고 디버프의 증거인 검은 별을 새겼다.

자신이 소유한 어둠이 한꺼번에 쫙 빠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루시온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스, 습격이다!"

벌써 몇십 초나 뒤늦게 누군가 습격을 알렸다.

화살 하나를 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피슝!

오러가 실린 화살이 정확히 신관의 머리를 명중했다.

크라언은 조금 아쉬운 표정을 했다.

"하나 잡았습니다."

그대로 크라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활을 한 번 더 당겼다.

루시온이 적들의 다리를 묶어 표적을 맞히는 건 너무도 손 쉬었다.

"하나 더 잡았습니다."

만약 저 흑마법이 공격이었으면 어땠을까.

'…무조건 다 죽었을 테지.'

그림자에서 어둠이 튀어나오는 걸 보았다.

마치 악몽과도 같은 모습에 다시금 생각해도 살이 떨릴 지경이었다.

파앙!

신관 두 명이 죽자 신관들이 동시에 빛을 터트렸다.

'아. 시야를 뺏겠다?'

루시온은 퍽 우스웠다.

상대가 다른 이었다면 먹혔을 공격이겠지만, 흄이 이미 달려나갔다.

'이거 어쩌나. 흄한테 그게 통하지 않을 텐데.'

흄은 일정 거리를 두고 중심축을 잡으려 다리를 땅에 박았다.

팍!

다리가 땅에 박히고 온 힘을 다해 얼음의 힘을 가득 머금은 대검이 세차게 휘둘러졌다.

적이 어디 있는지 상관없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건 분명할 테니.

쉬이이이익!

공간을 벨 것처럼 귀를 짓누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하게 만들어진 얼음 덩어리가 자신이 대검을 휘두른 속도보다 더 빨리 날아갔다.

퍼퍼퍼퍽!

마치 벽에 무언가 박혀버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피 냄새가 짙게 흘렀다.

"그대로 이어받겠습니다."

라인트의 눈동자에 노란빛이 어렸다.

촤르르르륵.

하늘을 매운 건 수많은 검이었다.

시야를 뺏긴 건 자신들이 아니라 오히려 적들이었다.

라인트의 손짓에 적들이 있던 그 자리로 검들이 내리꽂혔다.

따악!

동시에 라인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화르르르륵!

검들이 꽂힌 그 자리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가자, 베델.'

루시온은 검을 뽑았다.

검 주변에 어둠이 일렁거렸다.

신관을 상대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한숨을 내쉬는 베델의 소리가 들려와 루시온은 키득거렸다.

루시온은 빛이 사라질 무렵, 그림자 이동으로 적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 하멜 님!"

크라언이 기겁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얌전히 있을 것이지 왜 움직이고 난리인가.

[공이 이런 상태라 마음이 썩 움직이질 않지만, 좋은 기회임은 틀림없지.]

베델은 숨을 가다듬었다.

적들이 조금 전 공격에 반쯤 죽었지만, 아직 신관이 살아 있었다.

기사가 살아 있었다.

자신이 루시온을 만났을 때보다 얼추 5배는 늘어난 그 어둠을 사용할 기회가 왔다.

베델이 아니라 루시온이 빛을 감지했다.

남은 신관은 둘.

딱 좋았다.

루시온은 숨을 돌렸다.

오른손에는 검이.

왼손에는 어둠이 둘려 있었다.

루시온은 빛을 감지했을 때부터 신관들의 위치 파악이 완료된 상태였다.

어둠이 공격성을 띠면 어떻게 되는가.

그간 궁금했지만, 러쉘을 눈치를 살짝 보느라 꽉 눌러놨던 그 공격성을 살짝 풀어버렸다.

루시온이 모았던 손가락을 펼치자 신관들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어둠이 가시가 되어 그들의 두 다리를 꿰뚫었다.

"끄아아아악!"

비명이 동시다발로 울렸다.

―으어어어.

라타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라타는 다시 집중해서는 루시온이 원하는 대로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 신관 앞에 섰다.

자신을 매번 우롱하던 그 빛이 나오지 못하게 가볍게 검으로 그었다.

손목이 뚝 하고 떨어져 버렸다.

비명이 울렸고, 루시온은 이미 다른 신관을 보고 있었다.

놈이 빛을 내뿜기 전에 어둠으로 놈의 어깨를 찍어버렸다.

콰직.

피가 튀어나오며 자신의 가면에 튀었다.

그저 어깨를 꿰뚫으려 했지만, 어둠이 기어코 신관의 팔을 잘라버렸다.

'좀… 사나운데?'

루시온은 그간 억울했다는 듯이 야생의 짐승이 된 어둠을 살살 달랬다.

―안 돼. 루시온 말 들어! 떽! 라타가 화낼 거야!

[공의 어둠이 이리 포악했던가…?]

베델은 사뭇 낯선 루시온의 어둠에 깜짝 놀랐다.

'그러게. 나도 놀랐네.'

루시온은 계속 으르렁거리듯 날뛰는 자신의 어둠을 보며 새삼 무섭기까지 했다.

"…괜찮습니까?"

흄이 달려와 신관의 목을 베며 물었다.

타락하지 않으려 그간 누군가를 죽이는 걸 일부러 피하지 않았던가.

"괜찮아. 죽이지만 않으면."

루시온은 등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검에 어렸던 어둠이 적이 휘두르던 방패를 베어냈다.

'터져라.'

쾅!

적에게 닿지 않게 어둠을 터트렸고, 기사가 비틀거리던 틈을 타 흄이 적의 몸을 베어버렸다.

서걱.

'흠.'

루시온은 어둠을 끌어올렸다.

―아! 라타가 루시온이 뭘 하려는지 알았어. 대롱대롱이지?

"맞았어."

"안 됩니다. 이 이상은 몸에 좋지 않으십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흄이 루시온을 향해 달려오는 기사의 검을 막으며 말을 꺼냈다.

그녀는 짜증을 실어 기사가 끌어올린 오러가 어린 검이고 뭐고 그냥 힘으로 눌러서는 대검의 날이 아니라 등으로 머리를 내리찍어버렸다.

콰드득.

"아니. 스승님도 없으니 한 번만 해보자고."

[…루시온 공?]

"언제 해보겠어, 베델?"

루시온의 간절함에 베델은 넘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이 금세 기울어버렸다.

새삼 러쉘이 얼마나 감시자로서 역할을 잘했는지 알았다.

루시온은 지금 고삐가 풀린 망아지였다.

'러쉘. 언제 오는가?'

베델은 간절히 빌었다.

러쉘이 죽음의 기사 둘의 멱살을 잡고 루시온에게 피해가 없게 끌고 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찾질 못했다.

루시온은 처음 마흔한 명의 다리를 모조리 묶어버렸던 것처럼 그들을 전부 파악했다.

―대롱대롱이다!

라타의 외침과 함께 루시온은 어둠을 꼬챙이로 바꿔 그들의 어깨를 전부 관통한 것도 모자라 하늘로 올려버렸다.

'...!'

정작 흑마법을 쓴 루시온이 움찔거렸다.

피를 질질 흘리며 솟구친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하늘로 십자가형을 받는 듯 보여 기분이 이상했다.

그간 어둠이 가진 공격성을 눌러놨는데 러쉘이 왜 그렇게 시켰는지 알 것만 같았다.

흑마법사는 강했다.

그리고 어둠은 더럽게도 말을 듣지 않았다.

"제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흄은 적들이 혹 죽어버릴까 다급해졌다.

"이렇게 편안한 전투는 처음이네요."

라인트가 자신의 뒤에 만들어놓은 마법 검을 적들의 숫자 맞춰 늘려버렸다.

딱 한 명만 제외하고.

쉬이이익.

팍!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마법 검이 전부 놈들의 머리를 꿰뚫었다.

루시온은 놈들이 죽기 전에 다급히 어둠을 거뒀다.

러쉘이 화가 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시온…!]

딸꾹.

루시온이 너무 놀라 자기도 모르게 딸꾹질이 튀어 나와버렸다.

[너, 설마… 죽인 거 아니지?]

루시온은 살벌한 러쉘의 말에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제야 러쉘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도 러쉘의 눈꼬리가 아직도 하늘을 향해 올라가 있었다.

[그래. 죽인 게 아니면 됐어. 다 이해해, 루시온. 궁금했겠지. 그간 공격성을 억누르며 흑마법을 썼으니까.]

"실토를 받아내는 건 제 전문이니 거기서 기다려 주세요."

라인트는 마지막 살아남은 놈의 목덜미를 붙잡고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흄은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말렸으면 러쉘에게 이렇게 혼나진 않았을 텐데.

[경험해 봤을 테니 알겠지? 공격성을 풀어버리면 흑마법은 더 강해져. 정신력이 강한 너조차 흔들릴 정도로 어둠이 날뛰는 건 덤이고. 내가 왜 공격성을 풀지 못하게 했는지는 조금은 이해했겠지.]

루시온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제가 너무 궁금해서 그랬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스승님. 그러니까 화내지 마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어.]

베델이 대신 루시온의 말을 전달했다.

사과 하나는 기가 막혔기에 러쉘은 숨을 돌리며 화를 억눌렀다.

[공격성을 풀어버렸고, 네 감정까지 격해진 상황이라면 이건 진짜 되돌리기 힘들 거야. 그러니까 최소한의 보호장치라고 생각하고 풀지 마.]

['무조건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이라고 루시온이 말했어.]

러쉘이 루시온을 용서하자 베델도 활짝 웃었다.

동시에 루시온도 바짝 긴장했던 어깨를 내렸다.

[러쉘. 그럼 죽음의 기사는 어떻게 됐는가? 혹시 보내버렸는가?]

베델은 하늘을 가리켜 물었다.

[아니. 대화만 하고 왔어. 보니까, 케오르티아 왕국의 백성이더라. 크라언이 살아남은 걸 알고 있었고,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대.]

러쉘이 손가락으로 놈들이 지키고 있던 곳을 가리켰다.

[이제 결계가 풀릴 거야. 결계가 저놈들의 마나로 움직이고 있었거든.]

205화. 두 번째 이야기(3)

루시온은 러쉘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주변과 별다른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제가 할 일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피터가 뒤에서 걸어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무척 기뻐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크라언은 루시온에게 다급히 뛰어왔다.

갑자기 우뚝 서 있는 게 너무도 걱정스러웠다.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금방 뒷정리를 할 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뒷정리는 제가 해도 됩니다."

"아뇨. 그 뒷정리가 아닙니다."

루시온은 크라언의 말을 부정했다.

자신은 혹시 모를 추적을 방지하고자 유령들을 보내버리려야 했다.

―후후. 라타가 나설 차례야!

라타는 지금을 기다렸다는 듯 그림자 속에서 껑충껑충 뛰었다.

―라타 봐봐라. 잘 보고 있어야 해?

라타가 목을 가다듬더니 눈동자에서 보랏빛 어둠을 피어냈다.

"...!"

루시온은 당장 라타에게 묻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그 무거운 몸에서 벗어나.

라타에게 어울리지 않는 굵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몸집도 갑자기 커진 듯 보였다.

―눈을 뜨거라.

라타의 말에 죽었던 이들에게서 동시에 영혼이 빠져나왔다.

서서히 유령이 되어가던 그들 모두 거의 동시에 눈을 떴다.

[…신수의 힘인가?]

베델의 놀란 감정이 루시온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지.]

러쉘은 팔짱을 끼며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짠! 라타 봐봐. 잘했지? 라타가 최고지?

조금 전 들었던 라타의 목소리가 거짓인 것처럼 라타는 해맑은 소리를 냈다.

"잘했어, 라타. 라타가 최고야."

루시온은 작게 속삭이며 다시 채워진 자신의 어둠을 내뿜어서 유령을 얇은 이불처럼 시체를 덮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크라언이 허공에 뜬 어둠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둠이 마치 눈처럼 스르르 녹아버렸다.

크라언은 알 수 없는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자가 자신을 쓰다듬는 듯했다.

라인트가 숲에서 걸어오며 입을 놀렸다.

"보니까 네바스트 놈들 짓이 맞습니다. 저쪽에 케오르티아라고 하는 왕국이 있고, 음, 그 왕국을 숨기기 위해 결계를 유지하던 중이라고 하는데 케오르티아는 사라졌잖습니까?"

자신이 말했음에도 어이없다는 듯 반응하며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도 일단 결계가 사라지는 걸 지켜본 뒤에 확인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죽였습니까?"

루시온이 묻자 라인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혹시 모르니 데리고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일단 응급조치 후에 저쪽에 묶어뒀습니다."

"좋은 판단입니다."

루시온의 가면이 푸르게 물들었다.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선 증인이 필요한 셈이니.

루시온은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죽음의 기사 둘이 러쉘이 가리켰던 방향을 손가락으로 다시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곧 결계가 걷히고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듣자 하니 크라언을 기다렸다는데 어떤 사이였습니까?]

베델이 묻자 죽음의 기사 중 한 명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기사였습니다. 저하께서 제 눈앞에 끌려갔음에도 이를 구출하지 못하고 무능하게 죽었던, 이름조차 말하기 부끄러운 기사 말입니다.]

같은 기사였기에 베델은 그들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얼마나 참담했을까.

―어! 저기! 저기 봐봐!

라타가 까치발로 그림자 끝에 매달려 앞을 바라보았다.

"…진짜로 결계가 있었잖아?"

피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응했다.

가짜로 만들어진 풍경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크라언의 눈동자에 애달픔이 가득했다.

"제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루시온이 그런 크라언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 * *

한 30분쯤 걸었을까.

덤불을 뚫고 먼저 밖으로 나온 루시온이 그 자리에서 우뚝 섰다.

'…이게 무슨.'

루시온은 제 눈으로 방금 봤던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성이 갑자기 사라졌지?]

러쉘이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나도 보았다. 성이 사라졌다.]

"…마법입니까?"

루시온의 뒤를 따라왔던 흄이 눈앞에서 펼쳐진 상황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넓은 평야에 갑자기 없던 성이 나타나 버렸다.

루시온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가던 흄이 갑자기 오른쪽 눈을 가렸다.

'이런 미친....'

루시온은 눈앞에서 벌어진 이상한 상황과 검은 구슬의 행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라타가 멈춰줄게!

라타가 '후' 하고 소리를 내자 그제야 흄이 손을 내렸다.

"이게 뭡니까…?"

"환상 마법인가?"

뒤따라온 피터와 라인트가 제각기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마법입니까?"

루시온이 피터와 라인트를 보며 물었다.

"전 이런 마법은 본 적 없습니다."

피터가 말했다.

"조금 더 가까이 봐야겠습니다. 일단, 마법… 이라는 생각은 들질 않습니다."

라인트가 남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라인트 말이 맞아. 가까이 가봐야겠는데? 뭔가… 음, 익숙한 기분도 들고.]

러쉘이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현상을 바라보았다.

왠지 꺼려졌다.

"크라언 님. 혹시 따로 움직여봐도 됩니까?"

이어 라인트는 마지막으로 들어온 크라언을 보며 물었다.

"...!"

크라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이, 이게 뭡니까?"

크라언은 말을 더듬으며 루시온에게 해답을 요구했지만, 루시온이 알 방법은 없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흩어져서 살펴보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저는… 여기에서 주변을 살피고 있겠습니다."

크라언은 한 발자국 나아갔고 더는 움직이질 못했다.

그저 입을 다물고 자신이 살았던, 조국 케오르티아의 성을 바라볼 뿐이었다.

"렌탈. 가자."

루시온은 이상한 현상보다 검은 구슬을 찾는데 우선으로 두기로 했다.

"이쪽입니다."

흄은 루시온이 움직였던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루시온은 순간 멈칫하다 흄을 따라갔다.

흄이 향하는 방향은 케오르티아의 성 정문을 향해 있었다.

그 거리는 자신들이 나왔던 덤불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케오르티아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질 않았다.

그저 굳게 닫힌 성문이 루시온을 반겼다 사라질 뿐이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루시온이 죽음의 기사들을 보며 물었다.

[케오르티아가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그 원인을 찾다 습격을 받고 저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죽음의 기사가 된 후에 바라보았을 때 이렇게 보시는 것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크라언과 별다를 게 없는 말에 루시온은 러쉘을 바라보았다.

러쉘은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왕성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뭘까. 이게… 대체 뭘까?'

루시온은 성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흄이 손을 내밀었다.

"검은 구슬은 이 앞에 있습니다."

"여길… 들어가고 되는 건가?"

루시온은 머뭇거렸다.

애초에 이 이상 현상이 일어나는 곳을 만져도 될지 몰랐다.

"구슬이 도련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안내할 수 있습니다."

―어? 라타가 분명 멈췄는데?

흄의 오른쪽 눈동자에 다시 어둠의 불꽃이 화르르 타올랐다.

"…어떻게?"

"저는 인도자니까요."

흄이 싱긋 웃으며 왕성이 나타날 때 손을 가져다 댔다.

끼이익.

듣기 싫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주변 시간이 멈춘 듯 적막감이 깊게 자릴 잡았다.

루시온이 눈을 깜박이고 다시 떴을 때는 이미 자신은 낯선 성안에 들어와 있었다.

'어서 와. 이제 두 개째네!'

검은 형체가 두 팔을 휘두르며 자신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전보다 형체가 조금은 또렷해 보였다.

여기가 케오르티아의 성안이 맞는 걸까.

'…아. 벌써 만났구나.'

검은 형체가 루시온을 빤히 바라보다 곧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 여기는 그놈이 올 수 없어.'

'왜?'

루시온이 물었다.

'그놈의 힘이 닿을 수 없는 곳이거든.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놈이 누구인지 여기서는 말할 수 있나?'

'그럼. 그런데 누구인지까지야. 왜냐고?'

검은 형체가 실실 웃었다.

'네가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되거든. 설명하자면 너무 기니까.'

'왜?'

'여기는 엄청 특별한 곳이야. 네가 오래 있을수록 잡아 먹혀.'

'누구한테?'

'나한테.'

검은 형체는 농담이라기에 살벌한 말을 꺼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루시온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어쨌든, 그놈의 이름은 '베로니아', 거절당한 자라고 보면 돼.'

'자신을 어둠의 왕이라고 하던데?'

푸흡.

검은 형체가 루시온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걔는 왕이 아니야. 아니, 왕이 될 수 없어. 문 속 세계에 갇혀버렸거든.'

'그럼 놈이 나타날 때 시간이 멈춘 건 대체 뭐야?'

'세계가 멈춘 게 아니야. 세계가 그놈을 거부한 거야.'

'나는? 나도 세계에 거절당한 건가?'

'아니. 절대로 아니야!'

검은 형체는 기겁할 정도로 깜짝 놀라며 당장 루시온을 향해 다가왔다.

'넌… 얽매이고, 뒤틀려버렸을 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다음에 만나면. 그때 알려줄게. 지금은 알려줄 게 있으니까. 자.'

검은 형체는 루시온에게 검은 구슬이라고 생각하는 그 힘을 넘겼다.

'이제 두 번째 이야기를 들어야겠지? 엄청 궁금했을 테니까. 이번에는 설명을 덧붙일 시간도 있어.'

루시온이 그 힘을 받자마자 검은 형체는 말을 꺼내기 바빴다.

'어둠의 종은 어둠을 숭배하고 빛을 존경했다.'

어둠의 종은 라비엔이었다.

라비엔이 흑마법사가 가진 어둠 말고 그보다 더 높은 '어둠'을 숭배하고 있다는 건 흄 말고 다른 라비엔인, 아샤를 통해 이미 확인했다.

그런 라비엔이 빛 역시 따르고 있었다니.

'하지만 빛을 따르는 우매한 이들이 어둠을 죽이니, 균형이 깨져 어둠 속에서 타락이 일어나 세상을 덮쳤다.'

마치 책을 읽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루시온은 눈을 크게 떴다.

'타락이… 균형이 깨져서 나타났다고?'

검은 형체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부정했다.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라면 당연하게도 타락을 떼려야 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버리고 균형이 깨져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알려줬다.

'세상은 빛과 마나 어둠의 힘으로 이루어져 있어. 혹시 이건 알고 있어?'

검은 형체가 물었다.

'알고 있어.'

루시온이 대답하자 검은 형체는 실실 웃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 빛은 탄생과 함께, 마나는 삶과 함께 어둠은 죽음과 함께 나타나 이 힘을 가진 사람들은 각각 재생과 변화, 그리고 정화의 힘을 가지게 된 거야.'

루시온이 이미 들었던 내용에서 조금 더 추가한 사실이었다.

'그중 어둠은 특별했어. 아니, 특별할 수밖에 없었지. 죽음을 원하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어둠에게 소통이 필요했어. 죽어버린 자들을 달래고, 탄생으로 순환시켜야 할 의무가 있거든.'

'그래서… 어둠만 자아가 있는 거야?'

'맞아.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빛의 존재들이 어둠의 존재들을 두려워했어. 마치 어둠의 존재들이 죽음을 만들어내는 듯 보였겠지.'

지금과 별다를 게 없었다.

아니, 그때는 유령들이 분명 보였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다니.

'타락은 그렇게 만들어졌어. 깨진 균형, 그러니까빛에게 공격받고 내몰려서 일어난 어둠의 혼란. 불쌍하고 가엾은 이들이지.'

'…빛의 신이 있다며? 왜 막지 않았지?'

'신은 어쩌면 있었겠지. 하지만 빛의 신은 없어, 루시온. 처음부터 빛의 신은 없었어.'

검은 형체는 마치 누군가를 비웃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미안하지만, 여기까지야. 내가 말했지?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다고. 그래도 다음번에는 더 오래 만날 수 있겠네.'

검은 형체가 손을 뻗어 루시온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부서졌던 게 천천히 붙고 있네?'

'부서진 게 고쳐지면 대체 날 어쩔 셈이지?'

루시온이 검은 형체의 손을 치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냥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검은 형체가 하늘을 가리켰다.

'루시온. 조금 전에 네 눈으로 확인했잖아? 비틀어져 버린 세계의 일부분을.'

마치 검은 형제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것 같았다.

'다음에 보자.'

깜박.

루시온이 눈을 깜박거리자 자신은 다시 성문 앞에 서 있었다.

코피가 바로 주르륵 흘렀다.

몸이 뜨겁고, 어둠이 팽창하는 이 반응은 검은 구슬을 얻었을 때와 똑같았다.

무언가가 자신의 의식을 잡아먹는 것만 같았다.

[…루시온 공? 갑자기 왜 그러는가?]

베델이 난데없는 루시온의 증상에 놀라며 물었다.

'다행이네. 너하고 빙의해서 쓰러질 일은 없어서.'

자신이 이렇게 버티는 건 분명 베델 덕이었다.

'그건 자랑이 아니야, 루시온 공!'

베델이 기겁하며 말했다.

"서, 성공하셨습니까?"

흄이 비틀거리던 루시온을 부축하며 물었다.

[그래. 검은 구슬을 얻은 것처럼 보여. 지금 빠르게 어둠이 늘어나고 있잖아?]

러쉘은 살짝 불쾌감을 드러냈다.

루시온은 그저 잠깐 멍하니 있었을 뿐인데.

대체 언제 얻었단 말인가.

―검은 구슬을 루시온이 얻었어! 라타가 알아! 우오오오! 라타한테 힘이 마구마구 솟는 것 같아!

라타가 러쉘의 말에 동의하며 기쁜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

"…흄. 어떻게 한 거야?"

루시온은 가면을 살짝 들어 올려 흄한테 받은 손수건으로 코피를 닦으며 물었다.

"제가 인도자라 검은 구슬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도련님을 안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샤 말이 맞았네."

루시온은 어깨에 힘을 풀며 한숨을 돌렸다.

검은 구슬은 얻었지만, 이 이상한 현상은 사라지질 않았다.

대신 자신의 눈에 다른 게 보였다.

마치 여기에 손을 대라는 듯 손바닥 모양을 한 검은 연기가 아른거렸다.

206화. 빚 받으러 왔다

비틀어진 세계의 일부분.

검은 형체가 케오르티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현상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루시온은 주춤거렸다.

왜 아무도 손바닥 모양을 한 저 검은 연기에 대해 말하지 않는 걸까.

'혹시 여기에 검은 연기 보여, 베델?'

루시온이 자신과 빙의한 베델에게 물었다.

'뭘 말하는 건가?'

베델은 오히려 의문을 가지며 물었다.

분명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을 텐데.

루시온은 살짝 망설이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손을 가져댔다.

화르륵.

자신의 손에서 보랏빛 어둠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루시온? 어둠 색이 왜… 보랏빛을 띠는 거야?]

러쉘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저도… 모릅니다."

루시온도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왜 보랏빛 어둠이냐고.

루시온은 입을 다문 채로 자신의 손바닥에서 일어난 보랏빛 어둠이 도화지를 타고 흐르는 불꽃처럼 왕궁으로 퍼져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왕궁 전체를 감싸는 그 모습에 주변을 탐색하던 피터와 라인트, 그리고 크라언까지 모여들었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왕궁을 덮고 있던 무언가가 부서져 버렸다.

깨진 파편에는 왕궁의 모습이 그려졌고,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평야가 드러났다.

그리고 평야에는 해가 아닌 달이 떠 있었다.

―우오오! 밤이 찾아왔어!

라타의 눈이 별을 따라 반짝거렸다.

[...!]

러쉘은 일부분에만 찾아온 밤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멈췄다.

"해가 뜬 상태에서 달도 뜰 수 있었습니까? 예쁘네요."

흄이 순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 아니야, 흄. 해와 달은 서로 만날 수 없어.]

베델은 흄의 말을 부정하면서 제 눈을 의심했다.

"이거 흑마법… 입니까?"

라인트가 루시온을 보며 물었다.

"마법이 아닙니까?"

오히려 루시온이 물었다.

"마법은 절대 아닙니다. 낮과 밤을 바꿀 수 있는 마법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낮과 밤을 바꿀 수 있는 흑마법은… 저도 모릅니다."

루시온은 러쉘을 의식하며 대답했다.

러쉘이 갑자기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곳은 다시 주변과 똑같이 변했다.

왕궁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뺀다면.

루시온!

어느새 나타난 어둠이 자신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이건 들키지 않게 우리가 숨겨둘게.

루시온이 박살 냈어.

'박살 냈다고? 내가?'

루시온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그저 손을 갖다 댄 게 전부였다.

그놈이 이제 조금, 아주 조금 약해졌으니까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맞아. 맞아!

[이게 그놈이랑 관련 있는 일이라고?]

러쉘이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기억이 분명 떠올랐을 텐데, 러쉘?

아. 이 기억이 아닌 건가?

루시온을 대할 때와는 다른,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어둠이 대답했다.

뭐가 됐든, 우리가 너에게 실망하지 않게 해.

어둠은 마치 경고처럼 말을 내뱉고는 모습을 감춰버렸다.

루시온은 러쉘에게 묻고 싶었지만, 혼란스러운 그를 재촉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 자신도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비틀어진 세계의 일부분이라니.'

분명 베델도 자기 생각을 다 듣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

죽음의 기사가 사라진 왕궁을 보며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 집을 바라보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투구에 가려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루시온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멜 님."

크라언이 울음을 참아내는 듯한 목소리로 루시온을 불렀다.

"잠깐만 이쪽으로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이상 현상을 조사하는 피터와 라인트를 두고 자리를 옮겼다.

"저 현상의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크라언이 물었다.

"이건 나도 모르겠어."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가 됐든, 감사합니다."

크라언은 피터와 라인트를 의식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사라졌던 케오르티아 왕국이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하는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마치 죽은 자를 희롱이라도 하는 모습에 분노마저 차올랐다.

십여 년 전에는 분명 빌었다.

제발, 케오르티아가 다시 나타나길.

제발, 모든 게 꿈이길.

하지만 지금은 사라진 조국을 받아들였기에 차라리 자신이 보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렸으면 했다.

"…케오르티아를 해방해줘서 고맙습니다."

만약 저 반복되는 상황에서 그 속에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의식이 있다면, 아직도 저 이상한 현상 속에 살아 있다면, 매일 사라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게 아닌가.

"따라오길 잘했습니다. 하멜 님께… 제 과거를 말씀드려서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크라언."

루시온은 이런 인사를 받을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손만 가져댔을 뿐이니.

"아뇨, 하멜 님. 다른 이라면 애초에 제 과거를 잡고 협박을 했을 겁니다.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테고, 전 계속 땅만 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크라언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무겁던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

"제 눈으로 사라진 조국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누가 그랬는지도 오늘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헤맸던 문제를 푼 기분입니다. 물론 아직 문제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죄책감이 아주 많이 덜어졌습니다."

"크라언."

"예, 하멜 님."

크라언은 환하게 대답했다.

"…널 계속 기다린 자들이 있어."

루시온은 자신의 뒤를 따르던 죽음의 기사들을 보았다.

러쉘이 살짝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라언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이 뭐지?"

루시온이 허공에 대고 말을 꺼냈다.

"해 봐. 기회는 오늘뿐이니까."

또 누군가에게 대답하듯 목소리를 냈다.

크라언은 만약 하멜이 아니었다면 당장 화를 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장난처럼 보였다.

"폴 가이엔. 그란 세트리온."

루시온의 입에서 아주 그리웠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면 크라언은 뭐 하는 거냐고 물었을지도 몰랐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크라언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의 기사였다.

눈앞에서 죽어갔던, 자신의 친우이자 마지막까지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던 자랑스러운 기사.

"여기에 있어."

루시온이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에는...."

"알아. 보이지 않는다는 건. 하지만 여기에 그들이 있어."

루시온은 처음으로 유령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자신의 인생이 망가져 버린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던 그 사실을 멍청하게도 꺼내버렸다.

단순히 감정에 휩쓸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그러고 싶었다.

크라언만 기다렸던 죽음의 기사들을 외면하고 싶진 않았다.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크라언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미친 새끼라는 말이 올 거라 예상했기에 루시온은 살짝 놀랐다.

루시온은 그 감정 그대로 고개를 돌려 죽음의 기사들을 보았다.

[살아계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그것만으로도 너무도 고마워서, 지금 너무도 행복합니다.]

루시온은 대행자가 되어 죽음의 기사가 꺼내는 말을 제 입으로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어쩐지 그들의 감정까지도 자신의 목소리에 묻어난 기분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무능하고, 무책임했던 자였을 뿐이지."

크라언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억하십니까, 저하? 저하께서 검이 아니라 활을 택하셨던 이유를 말입니다. 저희가 검이기 때문에 저하께서는 활을 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크라언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사실이었다.

그곳에 보이지 않지만, 자신들의 기사가 있었다.

그 말을 어떻게 하멜이 알 수 있을까.

[검이 되어줄 자들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안심하고 갈 수 있겠습니다. 저하. 크라언 저하께서는 마음껏 날아가십시오. 복수는 필요 없습니다. 저하께서는 그저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겠네. 내 그렇게 하겠네."

크라언은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가슴에서 떨려오는 그 감정을 꾹 누르며 내내 가슴에만 담아두었던 그 말을 꺼냈다.

"고마웠네. 내 그대들을 만나 자랑스러웠고, 기뻤고, 행복했네."

[행복하십시오, 저하.]

"…잘 가게, 폴 가이엔 경. 그란 세트리온 경."

크라언은 묵념하듯 고개를 숙였다.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루시온은 별처럼, 모래처럼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신이 돕지 않아도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었다.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낮에 그려지는 빛깔이 햇살에 반사되듯 수많은 빛을 그려냈으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죽음의 기사들이 루시온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어둠에게 소통이 필요했던 검은 형체의 말을 이해했다.

오늘 처음 보았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가슴이 아팠다.

그럼 수많은 죽은 자를 보았던 어둠은 얼마나 슬펐겠는가.

말도 하지 못했다면 그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 * *

루시온은 마차 창문 너머에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베델과 빙의를 한 상태였지만, 이제는 의식을 붙잡기가 너무도 힘겨웠다.

당장 눈이 감겨왔다.

오늘 일은 일단 비밀로 두기로 했다.

모두가 혼란스러웠고, 고민한다고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으니.

마치 세계가 둘로 나누어진 듯한 그 모습이 진짜일까 싶은 생각도 천천히 밀려왔다.

"…제가 정신이 없어 인사가 늦었습니다."

크라언은 체프란의 집사로서 루시온을 크로니아로 배웅하기 위해 같이 마차에 올랐다.

"인사라니?"

크라언은 지쳐 보이는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들의 마지막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번뜩 정신이 깨어지는 말에 루시온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막을 수 없었다.

"내가… 징그럽지 않아?"

마치 겁에 질린 목소리에 크라언이 고개를 들었다.

"징그럽다뇨?"

처음 보는, 아니, 처음 겪는 루시온의 약함이었다.

루시온이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루시온 공…?]

베델이 갑자기 빨라지는 루시온의 심장 소리에 놀라며 물었다.

쿵쿵 뛰는 소리에 이어 루시온은 뻣뻣해지는 자신의 손아귀를 느끼며 숨을 내쉬려 노력했다.

―아빠. 저 사람들은 누구예요? 또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그 말에 시종들이 자신을 괴물처럼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아빠. 헛것이 아니에요. 봐요. 지금도… 나보고 '죽어'라고 말하고 있잖아요. 아빠는 엄청 강해서 저 사람들을 쫓아낼 수 있죠? 그렇죠?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신을 가엾게 바라보았다.

―누나. 나 거짓말 안 했어. 왜 아무도 안 믿어주는 거야? …저기에, 흑, 저기에 분명히 있다니까! 무섭게 노려보면서 날 자꾸 죽이겠다고 윽박지르고, 소리치고!

사랑하는 누님이 집을 떠나버렸다.

―아니야! 형. 난 아픈 게 아니라, 진짜 저기에 있는데. 저기 봐봐. 너무 많아. 너무 시끄러워서 귀가 아파. 으흑, 왜 다 나한테만 그러는 거야? 나 거짓말한 적 없는데. 나쁜 행동도 안 했는데.

사랑하는 형이 자신을 피하기 시작했다.

"…허억. 헉...."

하지만 갑자기 치고 올라오는 기억에 루시온은 숨을 쉬기가 너무 힘겨웠다.

분명 자신이 선택한 일이었다.

자신이 직접 크라언에게 알리길 원했기에 했음에도 그가 언급하자마자 몸이 멋대로 굳어져 버렸다.

무서워서.

너무도 무서워서.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길 바랬는데.

"도, 도련님?"

흄은 빨라진 루시온의 숨소리에 다급히 제 주머니를 뒤졌다.

분명히 안토니가 루시온이 발작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면 먹이라고 준 약이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크라언의 목소리에 루시온의 몸까지 부르르 떨렸다.

베델이 자신을 대신해 숨을 쉬고 있는데, 너무도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루시온은 손톱을 세워 자신의 목을 긁으려 했다.

라타가 다급히 루시온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루시온! 괜찮아! 라타 말 믿어줘.

[그래, 루시온. 제대로 크라언을 봐.]

러쉘까지 루시온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베델이 꼭 감았던 루시온의 눈을 천천히 뜨게 했다.

"…괜찮으십니까? 역시 저택에서 조금 쉰 후에 움직일 걸 그랬습니다."

크라언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을 걱정하고 안타까움과 더불어 후회가 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왜...."

자신이 하멜이 아니라 루시온일 때도 크라언은 변하질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왜… 그렇게 바라보는데?"

"...?"

"내가 징그럽지 않아?"

"왜 하멜 님이 징그럽습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크라언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차분히 루시온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른으로서 아이를 다독이듯 크라언은 부드럽게 목소리를 냈다.

"전 오히려 하멜 님이 걱정됩니다. 불나방처럼 어딜 달려드시지는 않는지, 또 제 몸은 신경 쓰지 않고 구르고 계실지 않을지."

"왜...?"

"왜냐뇨.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 걱정은 당연한 겁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하멜 님께서 먼저 절 걱정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저는 오히려 감사합니다. 아무도 몰랐던 제 기사들의 최후를 바라봐주셨잖습니까? 제게 그들과 작별할 수 있게 도와주셨잖습니까? 하멜 님이 흑마법사가 아니셨다면, 저는 영원토록 그 죄책감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 했을 겁니다. 하멜 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명복을 빌어달라.

성자에게 언젠가 그렇게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성자였던 루시온이 이미 그렇게 해주었다.

"저는 지금 이렇게 행복하다는 기분을 느끼지도 못했을 겁니다."

자신이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지만, 누군가 그 마지막을 봤다는 것만으로 안도가 됐다.

루시온의 떨림도 호흡도 천천히 멎어갔다.

보이지 않는 자가 자신을 믿어주었다.

그 사실 하나에 루시온은 안도하며 더는 억지로 의식을 잡지 않았다.

베델과 빙의를 풀었고, 루시온은 크라언을 보며 싱긋 웃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새근새근.

편안한 루시온의 숨소리에 흄이 미소를 지었다.

207화. 빚 받으러 왔다(2)

"괘… 괜찮은 겁니까?"

크라언이 갑자기 기절하다시피 잠이 든 루시온을 보며 그대로 굳어졌다.

[아마 말은 못 했지만, 엄청 불안했겠지.]

러쉘은 기분 좋게 자는 루시온의 모습에 덩달아 피식 웃었다.

[…유령에게 엄청 시달렸다고 들었다.]

베델은 자신의 손가락을 꼭 잡으며 러쉘을 바라보았다.

본의 아니게 루시온이 떠올리는 기억을 같이 보고 말았다.

다들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

그것도 제일 사랑하던 사람들이.

[그래. 상처받은 야수에 가까웠어.]

러쉘은 루시온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라타도 알아. 라타도 다 봤어.

라타는 잠든 루시온의 무릎에 올라가 몸을 웅크렸다.

―루시온은 엄청 슬퍼했어. 엄청, 엄청, 괴로워서 라타가 싫다고 했어. 라타는 루시온이 왜 그랬는지 알아. 하지만 알아도 슬퍼.

라타의 눈동자가 일렁거렸지만, 라타는 울음을 꾹 참았다.

―루시온이… 라타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감사합니다, 크라언 님."

흄은 라타에게 아니라고 말하려다 일단 가장 고마운 크라언을 향해 말을 꺼냈다.

"원래는 아까 전부터 기절하셨어야 했는데 도련님께서는 억지로 버티고 계셨습니다."

"기절… 했어야 했다고요? 하멜 님의 몸 상태가 그렇게 나쁩니까?"

"아뇨. 그, 음, 이유가 있습니다."

흄은 거짓말을 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나오지 않아 말을 돌렸다.

그가 곤란한 표정을 하자 크라언은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혹시 흄 님도 보이십니까?"

"보입니다."

"외람된 질문이긴 한데, 제가… 처음입니까?"

그 말을 믿은 사람이라는 말이 생략되었어도 흄은 알아들었다.

"아마 제가 알기로 그렇습니다."

크라언은 그제야 루시온에게 퍼졌던, 미쳤다던 그 소문이 왜 생겼는지를 이해했다.

루시온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흑마법사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세계.

아니.

어쩌면 흑마법사도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일지도 몰랐다.

루시온은 크로니아의 막내아들이었으니.

"나중에 일어나시면 제가… 더 잘하겠다고, 건강 챙기시라고 그렇게 전해주십시오."

* * *

자신의 망토가 당겨졌다.

동시에 고개가 돌아갔다.

아.

저번에 꿨던 그 꿈이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뭔가를 빌고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왜 자신의 목소리를 외면하냐고 울부짖고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돌아서 바라본 그의 얼굴에는 우습게도 울고 있는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다.

"타락이… 퍼지고 있습니다!"

자신은 그가 측은했다.

"빛의 축복을 받은 자가 저희를 죽이고 있습니다!"

자신은 그가 안쓰러웠다.

"아니, 세상이 저희를 괴물이라 취급하며… 칼을 들이밀고 있습니다."

자신은 그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왜 저희를 보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가 울면서 물었다.

"아시잖습니까. 알고 계시잖습니까? 저희는… 타락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저희에게 '정화'의 힘이 없습니다."

망토를 잡은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아시… 잖습니까. 저희는 타락에 한없이 약하다는 것을요."

딱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제발…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

안타까웠다.

자신은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에 마치 죽음의 바다가 넘실거리듯 천천히 나라를, 마을을 삼키고 있었다.

세상이 당장이라도 멸망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자신의 마음은 그쪽에 쏠려 있었다.

―루시온?

자신이 입을 열려던 그 순간, 라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온은 눈을 황급히 떴다.

―루시오온…?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라타?"

―어서 꺼야 해. 이러다 들키면 큰일이야!

"뭘?"

―어둠이 사라지질 않아. 라타 말도 듣지 않고.

루시온은 그제야 자신의 몸을 감싼 보랏빛 어둠을 바라보았다.

'물러나.'

루시온은 혹시 몰라 어둠에게 명령하자 '치'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루시온이 주변을 살폈다.

해가 슬슬 올라오려는지 밖이 점점 환해지고 있었다.

러쉘과 베델은 보이질 않았다.

―이제 됐다! 루시온 이제 다시 자야 해. 라타도 깜짝 놀라서 일어났어. 으함.

라타가 하품하다 루시온의 가슴팍 올려둔 앞발을 내렸다.

"라타."

―응?

"혹시 조금 전 일어났던 보랏빛 어둠이 뭔지 알아?"

―응! 라타는 알아!

라타가 배시시 웃었다.

―라타가 루시온한테서 떨어져 나와 라타가 됐을 때 말이야. 그때 봤어.

"네, 네가 신수가 됐을 때 말이야?"

―…엄. 그 어둠이 라타를 라타로 만들어줬어. 이름은 몰라. 하지만 원래 루시온한테 있었어.

'그 어둠이 원래 나한테 있었다고?'

―그 어둠이 라타한테 루시온을 지켜달라고 했어. 그래서 라타는 그러겠다고 말했어. 라타는 루시온이 너무 좋으니까!

라타는 앞발을 루시온의 가슴에 다시 올렸다.

―루시온이 검은 구슬을 얻은 뒤에 보랏빛 어둠은 더 커졌어. 라타는 알아!

"왜 말을 안 해줬어?"

―다 루시온의 어둠인데?

"내… 어둠이라고?"

―라, 라타는 일부러 말을 안 한 게 아니야. 루시온이 가진 어둠이 보랏빛 어둠으로 옷을 갈아입는구나 하고 생각했어.

라타는 금세 울먹거렸다.

라타가 모를 정도로 너무도 자연스러운 탈바꿈이었다니.

"아니야, 라타. 혼내는 거 아니고, 그냥 물어본 것뿐이니까 울지 마."

루시온은 라타가 진정할 수 있게 쓰다듬어주었다.

정말로 그 어둠이 자신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어둠이었다는 걸까?

자신은 뒤늦게 발현했다.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납치 사건 이후로 발현된 것처럼 보였던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라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지도 않을 테고,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라면 누구든 보랏빛 어둠을 가지고 있어야 할 테니까.

자신만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라타."

―응?

라타는 살짝 시무룩해하며 대답했다.

"넌 어떻게 그 어둠을 쓸 수 있는 건데? 내가 가진 보랏빛 어둠이 커져서? 아니면 검은 구슬을 얻어서?"

―엄....

라타가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루시온하고 라타하고만 움직였을 때 말이야.

어둠의 왕.

아니.

거절당한 자, 베로니아.

그놈을 만났을 때를 말하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라타가 가진 어둠이 다 바뀌었어! 라타는 루시온하고 같은 색이 돼서 '와아' 하고 좋아했는데?

'라타가 라타가 아니었을 때, 그때 다 바뀌었다니.'

―그런데 루시온한테 있는 보랏빛 어둠은 라타 말을 안 들어줘. 그래서 조금 슬퍼.

"내가 잘 말해줄게."

―진짜? 이히히. 다행이다. 라타는 루시온도 돕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루시온이....

라타가 황급히 말을 멈췄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루시온은 라타의 꼬리를 붙잡으려다 상체를 일으키며 라타를 붙잡았다.

"라타? 무슨 말을 하려던 건데?"

―아, 아무것도 아니야! 라타는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라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라타."

루시온은 라타가 좋아하는 배를 만져주었다.

라타가 눈을 찔끔 떴다가 다시 감았다.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데?"

속상한 듯한 목소리에 라타의 귀가 쫑긋 섰다.

"날 돕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처럼 아프지도 않고,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는 걸로 충분해.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런 말은 쓰지 말았으면 좋겠어."

라타는 눈을 천천히 뜨고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루시온의 눈동자는 저번에 봤던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것 같아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진짜?

"그래.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루시온이 속상해…?

"맞아."

―라타가 그런 말 하면 루시온이 진짜 속상해?

라타는 신이 난 듯이 다시 물었다.

"그래. 라타 너는, 아니 너만은 그런 말 하지 마."

―응!

라타가 배시시 웃었다.

흄이 이전에 말해준 게 생각이 났다.

속상한 건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거라고.

이히히.

라타는 너무 행복했다.

―라타는 이제 그런 말 안 해! 라타는 루시온이 속상한 거 싫으니까!

"착하네, 라타."

루시온이 부드럽게 라타를 쓰다듬었다.

―루시온. 루시온.

라타는 빨리 일어나 루시온 옆에 꼭 붙어서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라타는 루시온이 너무 좋아.

별님 같은 루시온.

라타는 얼른 더 커서 루시온을 지켜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루시온이 아픈 일도 없을 텐데.

루시온은 눈이 동그랗게 변했고, 곧 입꼬리가 높이 올라갔다.

"나도… 그래, 라타."

루시온이 라타를 살살 긁어주자 라타의 동그랗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금세 길어지는 숨소리를 들으며 루시온은 다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꾸는 이상 꿈.

저번에는 자신이 이하람일 때 러쉘을 만났다.

진짜로 만난 것만 같았는데.

'방금 꿨던 꿈도… 진짜 나이긴 한 걸까?'

루시온은 아직도 생생해 손을 만지작거렸다.

'괴물로 취급했고. 타락에 약하다라.'

다는 몰라도 계속 말을 걸던 그 존재는 흄과 같은 라비엔이지 않을까.

흄이 처음 자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타락에 약했으니.

루시온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다시 떴다.

소설, '어둠의 손아귀'.

생각해보면 너무도 부자연스러웠다.

자신이 어떻게 그 많은 소설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검은 구슬은 자신의 부서진 그릇을 회복했고, 라타가 자신이 원래 가졌다고 말하던, 보랏빛 어둠으로 변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 검은 구슬의 힘은 베로니아, 그놈의 몸에서 나왔고.

그렇다면 검은 구슬은 원래 자신의 힘이라는 결과가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가.

'나는… 대체 뭐지?'

루시온은 복잡해진 머릿속을 비우려 눈을 감았다.

이하람이자 망토를 입은 자, 그리고 루시온 크로니아.

뭐가 진짜 자신일까.

* * *

"…트웰로 그놈의 처형식이 2주 뒤로 잡혔다."

식사 자리에서 꺼내기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노비오는 얼른 루시온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카슨이 바로 루시온의 표정을 살폈다.

루시온은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벌써 잡혔습니까?"

아무리 자신이 추가 증거를 넘겼어도 트웰로는 후작이었다.

그것도 동부를 아우르는 후작.

"폐하께서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셨고, 그 더러운 뿌리가 제국을 농락하기 전에 얼른 뽑아야 한다고 하셨다."

노비오는 모처럼 활짝 웃었다.

트웰로 스프리카도는 뉴브라 왕국과 손을 잡고 루시온을 공격한 자였다.

"혹시 널 노린 이유가 궁금하더냐?"

"아뇨. 궁금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뻔하지 않습니까?"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아무리 트웰로가 동부를 아우르는 귀족이라 할지라도 결코 강대한 힘을 쥘 수 없었다.

위치적인 상황이 컸다.

힘을 쥐려면 필연적으로 서부로 와야만 했다.

설령 적이 없어도 중요한 곳이 바로 여기 서부였다.

이미 크로니아에 제 부하를 보냈던 전적까지 있는 자였다.

그렇다면 트웰로가 무얼 노릴지는 뻔하지 않은가.

'아버지. 하나 더 주셔야 할 텐데요.'

4황자인 오웬에게 걸었던 저주가 분명 발동됐을 텐데.

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도 노비오는 그 사실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아쉽네. 아직은 나하고 관련된 게 없으니 당연하겠지. 일단, 오웬을 잡기 전에 먼저 잡아야 할 놈이 있지.'

미론스트 왕국에 있는 노예상인인 체이톤.

그놈을 잡아서 헤인트에게 넘겨줘야 제국이 본격적으로 네바스트 왕국을 향한 창을 갈 수 있을 테지.

'덤으로 미론스트의 왕도 살려줬으니 바로 세 번째 검은 구슬을 얻으러 가보실까.'

[눈동자 봐봐. 또 나갈 기세네.]

러쉘은 벌써 잔소리를 할 준비를 했다.

'틀렸습니다.'

루시온은 피식 웃고 싶었지만, 웃음을 삼키려 물로 입가심을 했다.

"…루시온. 혹시 오늘 또 어딜 나갈 예정이더냐?"

카슨이 넌지시 말을 던졌다.

몸도 좋지 않은 아이가 자꾸 어딜 돌아다니니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가지 말라고 막으면 또 이전처럼 방에서 나오지 않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아뇨. 당분간 집에 있으려고요. 의사 선생님께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루시온이 보기 좋게 썰린 닭고기를 입 안에 넣으며 대답했다.

208화. 빚 받으러 왔다(3)

밥그릇에 고개를 박다시피 하던 라타가 놀란 눈으로 루시온을 보았다.

[…그, 그렇게 몸이 안 좋은가?]

베델이 바로 루시온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손끝에 열감이 돌긴 했다.

[너, 너 왜 그래? 혹시 검은 구슬을 흡수한 게 잘못되기라고 했어? 진짜 몸이 안 좋았으면 식사 자리에 못 나간다고 말을 했어야지!]

러쉘이 걱정을 담으며 소리쳤다.

―루시온 죽어…? 흄이 그러던데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죽는 거래.

라타가 갑자기 또르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루시온은 한꺼번에 쏟아지는 반응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다들 나보고 쉬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왜 이래?'

"루시온."

노비오가 진지한 목소리로 루시온을 보았다.

"아프면… 식사 자리에 억지로 나오지 않아도 된단다."

"아닙니다. 움직일 만하니...."

"아니다, 루시온. 부축해줄 테니 어서 네 방으로 올라가거라."

카슨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온에게 향했다.

'하.'

루시온은 눈을 크게 뜬 채로 깜박거렸다.

'환장하겠네. 누가 보면 나는 쉬는 거 모르는 사람인 줄 알겠어.'

하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저 아직 배고픕니다."

루시온은 실실 웃으며 육즙이 꽉 잡힌 소고기를 입 안 가득 넣고는 우물거렸다.

"어서들 드세요. 맛있네요."

* * *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루시온은 눈을 스르르 떴다.

얼마 만에 낮잠인지 몰랐다.

개운하다는 느낌과 함께 이불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뒹굴뒹굴해도 되는 걸까.

슬그머니 생각 하나가 머리에 들 때쯤, 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셨습니까? 땀을 흘리시기에 제가 추가로 바람을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혹 추우십니까?"

"아니. 딱 좋아."

루시온은 자신의 옆에 꼭 붙어 있는, 손난로 같은 라타의 체온에 땀이 삐질 나던 참이었다.

도로롱.

라타의 숨소리가 아직도 길었다.

"열심히 뛰어다니다 조금 전에 잠들었습니다."

"베델하고 스승님은?"

"베델 님은 케오르티아로 다시 가서 주변을 살피고 오겠다고 말씀하셨고, 러쉘 님은 위로 가셨습니다."

'베델은 혹여나 내가 또 케오르티아로 갈까 봐 미리 움직인 것 같고, 스승님은… 모르겠네.'

솔직히 케오르티아는 한 번 더 들리려고 했다.

잠깐이었지만, 마치 세계가 분리된 듯 보이지 않았던가.

또 그렇게 보일까.

그게 아니더라도 네바스트에서 어떻게 나올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배가 고프십니까?"

흄이 신나 하며 물었다.

"왜 이렇게 신이 나 있어?"

"도련님께서 휴식을 취하시니 저로서는 이보다 기쁜 일이 없습니다."

때마침 '지잉' 하고 울리는 연락용 아이템 소리에 흄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누군지 몰라도 눈치가 없는 분이십니다."

루시온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글쎄. 눈치가 없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지금 확인하면 되겠네."

루시온이 손을 흔들었다.

흄이 연락용 아이템을 건네며 말했다.

"크라언 님입니다."

'헤인트 형님께 뭔가 연락이라도 왔나?'

지금 크라언한테 연락 올 일은 딱히 없었다.

루시온은 얼른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했다.

"그래, 크라언."

<몸은 어떠십니까?>

"괜찮아."

<설마 또 움직이고 계신 건 아니겠죠?>

"아니. 쉬고 있는데?"

크라언에게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혹시 흄 씨를 바꿔주실 수 있으십니까?>

"…와. 너무 하네, 크라언."

루시온은 진심으로 크라언에게 실망했다.

<저, 정말로 쉬고 계셨습니까?>

"그래."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제가 하멜 님의 몸 상태도 모르고 눈치 없이 연락했습니다. 아프시더라고 끼니 거르지 마시고, 더우시더라도 이불을....>

"용건이 뭔지 말해."

루시온의 목소리는 살짝 삐딱했다.

아니.

자신이 쉰다는 데 주변 반응이 왜 이럴까 싶었다.

왠지 억울했다.

더 돌아다니다가 쉬면 이런 반응이 안 나오겠지?

<하멜 님은 쉬시고, 혹시 흄 씨가 옆에 있다면 바꿔주시겠습니까? 제가 제대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크라언. 나 농담하는 거 아니야."

<저도 무척 진지합니다.>

"용건부터 말해."

크라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헤인트 트리아 님께서 연락이 오셔서 트웰로 그놈의 처형일이 언제가 좋겠냐고 물어봤습니다.>

"나한테 처형일을 맡겼다고?"

<예. 그렇습니다.>

"2주 뒤라고 들었는데?"

<대략적인 날짜일 뿐, 처형일은 하멜 님의 뜻대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황실에서 자신의 의사를 물었다.

아마도 헤인트가 베델이라고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트웰로 놈 손에 죽은, 자신의 기사가 있다는 사실을 케틀란에게 전달한 모양이었다.

케틀란은 이를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이자, 신뢰의 증거로써 이용한 셈이고.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열흘 뒤, 시간은 아침이 좋겠다고 말해줘."

그때쯤, 샤엘라가 초대한 마탑에 갈 생각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하멜 님. 푹 쉬셔야 합니다. 침대에 껌딱지 되어주십시오.>

"조만간 연락할게. 내가 널 노예로 만든 노예상인을 붙잡으러 갈 셈이거든."

<예…?>

"내가 미론스트의 왕을 살렸어. 빚이 있으니 받으러 가야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을 살리다뇨?>

"나중에 말해줄게. 그럼."

루시온은 가볍게 연락을 끊었다.

[…쉬는 거 맞지, 루시온?]

"아, 오셨습니까, 스승님?"

루시온은 러쉘을 반겼다.

[네 목소리가 워낙 잘 들려서 말이지.]

"보시다시피 저 쉬고 있습니다. 아, 낮잠도 잤습니다."

당연한 소리를 마치 자랑처럼 떠들어대는 루시온의 모습에 러쉘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이러고 오늘 저녁에 미론스트 왕국에 갈 거지?]

검은 구슬을 얻어 루시온이 가진 어둠의 양이 이전에 검은 구슬을 흡수했을 때보다 더 늘어났다.

못해도 2배.

저 정도로 어둠이 늘어나려면 빨라도 6개월.

빠른 성장이 기쁘기보다는 혹여나 부작용이 없을지 걱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루시온이 가진 어둠의 색이 바뀌고 있었다.

이질적이라기보다는 마치 전에 알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러쉘은 너무도 찝찝했다.

"아닙니다. 안 갑니다."

[그럼 내일?]

"아뇨. 내일도 쉴 겁니다."

흄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에 이어 러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럼 내일 저녁에 움직이는 거야?]

"오늘을 포함해 4일 정도 쉴 겁니다."

[흄. 혹시 루시온 열이 나는지 좀 확인해 봐. 쟤가 헛소리할 애가 아닌데.]

러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열이 있습니다. 방금 도련님이 깨어나시기 전에 확인했습니다."

[역시 저럴 줄 알았지. 다시 자기나 해.]

"저 방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열은 검은 구슬 때문이라는 걸 아시잖습니까."

[또 북부에 들려서 순례길을 가야 하나.]

"이전처럼 심하진 않습니다. 하나 더 얻고 가도 되겠습니다."

루시온은 자신을 걱정하는 러쉘을 보며 그가 안심할 수 있게 미소를 지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잠이나 자.]

씨알도 안 먹혔지만.

"스승님."

[왜?]

"검은 구슬을 얻으면 꼭 만나는 사람… 이 있습니다."

아니. 애초에 사람이 맞긴 한 걸까.

루시온은 잠깐 망설였다.

[그게 누군데?]

"저도 모릅니다. 검고 형체만 보이는 존재거든요."

[검고… 형체만 보이는 존재라고?]

러쉘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존재였다.

"케오르티아 왕국에서 보았던 그 모습을 '비틀어진 세계의 일부분'이라고 말해줬습니다."

[…비틀어진 세계의 일부분?]

러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루시온이 자신을 잘 볼 수 있게 흄 옆으로 왔다.

[내가.]

러쉘이 말을 꺼냈다.

[아마도 이 상황을 조사했던 것 같아.]

"스승님께서 조사하셨...."

루시온이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러쉘이 그의 이마를 눌렀다.

[누워.]

"기억이… 나셨습니까?"

[그래. 바로 난 건 아니었어.]

루시온이 구슬을 얻고 난 후에 비어버렸던 기억이 바로 채워진 건 아니었다.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시간을 따라 부족했던 기억이 하나씩 퍼즐을 맞춰갔다.

"괜찮으십니까?"

루시온이 걱정을 담아 물었다.

[그래. 나는 괜찮으니까 제발 네 몸부터 생각해, 루시온.]

기억이 난 건 세 개 정도였다.

그중 하나는 방금 루시온에게 말했던 이야기.

"스승님께서 힘드시다면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착한 녀석.

자신이 무슨 기억을 얻었는지 루시온이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루시온은 자신을 위해 참고 있었다.

[그거 말하는 게 뭐라고. 내가 기억을 잃은 건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어제 베델한테도 말했고, 오늘 너한테 말하려고 했으니까.]

베델은 가만히 들어주었고, 고민해주었지만,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이게 이어진 기억이 아니야. 그래서 나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편하실 대로 말씀해주세요."

루시온은 그저 기다렸다.

"…자리를 비킬까요?"

흄이 물었다.

[아니야. 너도 들어야지.]

러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 현상을 내가 조사하고 있었어. 왜 조사를 했는지는 몰라. 그냥 다급했고, 필사적이었어. 그러니까, 반드시 이걸 해야 한다는 그런 기억이야.]

러쉘은 팔짱을 꼈다.

[그리고 다음 기억은 음… 비가 엄청 많이 내렸고, 누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있더라. 좀 많이.]

"...!"

루시온이 움찔거렸다.

아니겠지.

설마.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말을 걸었어. 아니, 애초에 거기는 이곳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 이라고 해야 하나? 좀 낯설더라.]

루시온은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막지 못했다.

[꿈이지 않을까 싶은데, 어쨌든 너무 애처로워서 우산을 씌워줬어. 머리카락은 검은색에 짧았고, 남자였고, 음....]

"혹시 뭐… 라고 말을 걸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루시온은 이상하게 목이 탔다.

[앞에는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이렇게 말했어. 만나서 반가웠다. 나중에 보자. 내가 찾아간다?]

―만나서 반가웠다. 나중에 봐. 내가 널 찾아갈 테니까.

'…세상에.'

루시온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꿈이… 아니었어?'

루시온은 당장 튀어나올 것만 같은 말을 삼켰다.

그게 나라고.

내가 이하람일 때, 스승님을 만났다고.

[내가 말해도 진짜 쓸모없는 기억이긴 하다. 어쨌든, 케오르티아 왕국에서 벌어진 현상이 내 과거와 관련 있다는 건 분명해.]

러쉘은 슬쩍 루시온의 시선을 피했다.

목이 막혀왔다.

[이제 자리를 피해줄 테니까, 얼른 자.]

러쉘은 루시온의 눈을 억지로 감겼고, 마치 도망치듯 그대로 다시 천장으로 올라갔다.

[…하.]

자신은 유령임에도 숨이 막힌 기분에 이어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았다.

괜찮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루시온을 보니 답답함에 미치는 줄 알았다.

러쉘은 저택 지붕에 올라 흔들리는 눈동자로 드넓게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모두에게 딱 한 가지를 숨겼다.

아니, 숨길 수밖에 없었다.

루시온이 죽었다.

자신의 앞에서 루시온이 죽어버렸다.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다른 형태로 루시온이 제 앞에서 죽어버렸다.

자신이 루시온을 대신해 죽는 건 딱 한 번.

'미친....'

―이 세계에 어둠은 죽었어. 어둠이 죽으니 빛 역시 죽고 있지.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균형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네가 알고 있는 그 어둠도 아니야.

자신의 아지트에서 보았던 수첩에 적힌 말.

'그 어둠이. 내가 '까망이'라고 지칭했던 그 어둠이.'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루시온이었어.'

두려움이 온몸을 휩쓸었다.

―타락, 아니야.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어쨌든 놈이 널 쫓을 거야. 놈은 너도, 그 어둠도 노리고 있어. 부디 어느 쪽도 죽지 마라.

'그놈이. 어둠과 트로에가 말했던 그놈이. 루시온이 만났다던 그놈이. 이전에도 루시온을 죽였어.'

러쉘은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대체.'

러쉘의 한쪽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우선 너는 성공했어. 그건 자랑스러워해도 돼.

죽음의 기사였던 브로슨에게도 들었던 말.

무언가가 성공했다.

'나는… 루시온을 살리려 몇 번이나 반복된 거지?'

분명 성공했다고 하는데, 그 성공이 무얼 의미하는지 몰랐다.

이번에는 루시온이 살 수 있는 게 맞는 걸까.

―제… 목에 검이 겨눠져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미엘라가 만든 햇님이로 루시온이 회복된 후 깨어나서 했던 말이었다.

자신은 '그놈'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루시온은 지금 알고 있어. …자신이 죽는다는 걸.'

그런데 네가 수십 번이나 죽었다고.

그 말을 어떻게 루시온에게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 * *

"…하."

미론스트의 첫째 왕자인 브라키온은 제 아버지의 상태가 호전되는 걸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가민가했지만, 그 흑마법사의 말이 맞았다.

하멜.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보십시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자 브라키온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 가면을 쓴 남자는 그때, 제 아버지의 상태를 알려준 그 흑마법사였다.

"…하멜."

"예. 빚 받으러 왔습니다, 저하."

루시온이 씩 웃었다.

209화. 너 잡으러 왔어

브라키온은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을까.

여기는 다른 장소도 아니라 무려 왕실 내부가 아닌가.

빛이 깃든 물건도 있을 텐데?

'…설마 가짜인가?'

브라키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 빛이 깃든 물건 중에 제대로 작동하는 게 몇 개 없더라고요. 보자."

루시온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을 꺼내며 발을 움직였다.

4일을 쉬고, 바로 미론스트 왕국으로 움직였다.

알리바이를 위해 체프란 저택으로 놀러 간다는 핑계를 댔기에 이만큼 편할 수가 없었다.

크라언과 미엘라가 자신을 붙잡으려던 걸 흄 덕분에 겨우 피했다.

굳이 조직을 끌고 갈 만한 일도 아니었고, 검은 구슬을 흡수해 그림자 이동의 거리가 더 넓어져 중간 지점을 거쳐 미론스트의 왕성으로 왔다.

그런데 막상 성에 도착하자 뭔가 이상했다.

루시온은 빛이 깃든 물건이라고 보이는 것 앞에 섰다.

"이거 빛이 깃든 물건이 맞습니까?"

비웃음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루시온은 꾹 삼켰다.

브라키온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은 기꺼이 그 물건을 손에 잡았다.

"보셨습니까? 가짜입니다."

―빛이 깃든 물건이… 거의 없다.

정찰을 갔던 베델이 황당해하며 말했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저번에 미론스트 왕국의 왕이 독술사의 독에 걸렸다는 사실을 말해준 죽음의 기사가 다가와 사실이라고 확정하기까지 했다.

대체 미론스트 왕국이 뉴브라에게 얼마나 많이 넘어가 버린 건지.

"…자리를 옮겨도 되겠는가?"

브라키온이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 분노는 자신을 향한 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침착하네.]

러쉘은 감탄했다. 저걸 어떻게 참을 수 있는지.

"물론입니다, 저하."

루시온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 * *

"앉게."

브라키온은 루시온에게 자리를 권했다.

루시온이 앉자마자 브라키온은 바로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떻게 내 아버지가 독술사의 독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는가."

"제 귀가 좀 특별합니다."

루시온은 굳이 브라키온에게 죽음의 기사가 알려주었다는 말을 꺼내고 싶진 않았다.

"저하. 저는 빚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 정도의 값어치는 했다고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검은 구슬과 함께 아직 잘리지 않은, 브라키온과 이어진 붉은 실을 잘랐으면 했다.

왕이 살아났는데 뭐가 또 부족한 건지.

카슨과 헤인트 다음으로 좀 끈질기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원하는가?"

브라키온의 말에 루시온은 잠깐 흄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브라키온에게 검은 구슬이 있는지, 성에 도착하자마자 흄의 오른쪽 눈에 반응이 있었다.

"큰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긴장하지 마십시오."

루시온은 굳어 있던 브라키온을 보며 가면을 푸르게 만들었다.

"저하께서 가지고 계신, 검은 구슬을 원할 뿐입니다."

"…혹시 이걸 말하는 건가?"

브라키온이 제 주머니에서 검은 구슬을 꺼냈다.

―홉! 진짜 검은 구슬이다!

라타가 그림자 끝에 매달려 꼬리를 흔들었다.

"맞습니다."

"내가 이걸 가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가?"

"제 귀가 특별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루시온은 가볍게 웃었다.

"하면 저하께서는 어찌 그 검은 구슬을 가지고 있습니까?"

검은 구슬이 뭔가 특별하게 생기긴 했으나, 왕자가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도 값어치 없는 물건으로 보였다.

"…아버지께서 독술사의 독에 당하신 후에 내 방에 갑자기 나타났네. 뭔가 증거가 되지 않을까 싶어 내가 가지고 있었네."

[타이밍이 좋지 않은데? 저걸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눈치야.]

러쉘은 브라키온의 눈동자에 깃든 망설임을 보았다.

[루시온 공이 왕을 살려주었다. 뭐가 됐든 도리를 안다면 공에게 반드시 줘야 해.]

브라키온을 보는 베델의 눈매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비록 죽음의 기사가 다 알려준 사실이나, 이를 루시온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모르고 그대로 죽었겠지.

[저하께서는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죽음의 기사가 무겁던 입을 열었지만, 러쉘은 코웃음을 쳤다.

[그건 모르지. 눈이 한 번 뒤집히면 앞뒤를 분간하지 못할 테니까. 지금 브라키온은 범인을 찾고 싶을 텐데, 말이 쉽지. 내 제자의 도움 없이 어떻게 찾을 건데?]

"염치없다는 걸 알고 있네. 하지만 한 번 더… 그 특별한 귀를 사용해 나를 도와주겠나?"

브라키온은 스스로 얼굴을 구기며 루시온에게 구차하게 매달렸다.

"저하."

루시온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지금 저에게 흥정을 시도하시는 겁니까?"

"…내 말이 언짢았다면 사과하겠네. 하지만 지금은 그대밖에 없네. 내부의 적이 언제 아버지의 목숨을 노리러 올지 모르고, 이 넓은 궁에 믿을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네. …제발, 도와주게."

'에이씨. 이상하게 술술 흐른다고 생각했더니.'

저 붉은 실이 잘리지 않는 이상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왕만 살아나면 뉴브라 왕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줄 알았는데....'

루시온은 죽음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투구로 가려져 있어도 곤란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죽음의 기사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봤지? 사람이 간절해지면 저렇게 된다니까.]

러쉘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절 믿으십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솔직히 조금 껄끄러웠다.

검은 구슬을 가져가고 체이톤을 잡으러 왔지, 브라키온이 부탁을 할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저 붉은 실만 아니었어도.'

"아버지를 살려준 자네를 믿네."

"제가 그 독술사와 한패였다면 어쩌실 셈입니까?"

"내 염치없는 말을 했지만, 머리가 빈 건 아니라네. 한패였다면 아버지를 죽였어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였어야 했네."

루시온은 브라키온의 대답이 흡족했다.

일단 뭐든 가장 중요한 건 믿음이었다.

"그래서 배신한 자가 누구인지 궁금하십니까?"

"아, 알려줄 수 있는가?"

[제가 다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죽음의 기사까지 덩달아 목소리가 올라갔다.

루시온은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죽음의 기사가 있기에 당당할 수 있었다.

'공짜로 빚을 지게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하지만 루시온은 일부러 망설이는 척했다.

자신은 흑마법사였고, 브라키온은 왕자였다.

신뢰는 말로서 보여줄 수 있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제게 어떻게 믿음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루시온은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뭔가?"

브라키온은 뭐든 루시온에게 줄 수 있다는 듯 말을 꺼냈다.

하지만 루시온은 그 말에 휩쓸리지 않았다.

브라키온이 간절했기에 그냥 내뱉을 수 있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일단 한 가지 묻겠습니다."

"뭐든 말하게."

"제가 알려드리면 저하께는 이를 해결하실 힘이 있습니까?"

괜히 어설프게 달려들었다가는 오히려 적을 자극하는 꼴밖에 되질 않았다.

루시온 자신과 제국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론스트가 뉴브라 손에 넘어가는 건 곤란했다.

그게 제국을 침략하려던 놈들의 시작인 셈이니.

평소라면 브라키온이 '부탁'이라는 이름으로 뻔뻔하게 자신에게 매달릴 때, 단호하게 내쳤을 테지만, 그 상황을 알기에 아직 자리에 앉아 있던 셈이고.

'…그나저나 오늘은 스승님께서 이상하게 조용하시네?'

루시온은 이맘때쯤, 아니, 이전에 분명히 브라키온을 뻔뻔한 놈이라 언급하며 얼른 자리를 벗어나라고 재촉했을 텐데.

슬쩍 러쉘을 바라보았다.

요 며칠 힘이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루시온은 잠깐 머뭇거리다 다시 시선을 브라키온에게 돌렸다.

일단 이번 일이 먼저였다.

"내, 힘이 없다면 그대에게 묻지도 않았을 테지."

브라키온의 눈빛에 어떤 짜증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적을 죽일 힘은 있네. 다만, 그 적으로 향하는 정보를 얻기에는 시간이 없을 뿐일세.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적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그럼, 사람 한 명만 잡아주십시오."

"…그걸로 대신할 수 없네. 더는 내 염치를 버릴 순 없어."

모든 지배자가 도리를 아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브라키온은 도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다행이네.'

루시온은 자신에게 만족스럽게 깔린 판을 바라보며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수 있었다.

"좋습니다. 일단 계약서부터 쓰시죠."

루시온은 혓바닥을 놀릴 준비를 했다.

미론스트 왕국과 제국의 사이는 무척 좋았다.

지독하게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기어코 미론스트를 차지하려고 손을 뻗친 놈이랑 말도 잘 통하고 이것저것 도와주던 놈 중 누굴 택할지는 뻔했다.

"공증인은 테슬라 제국의 황제이신 케틀란 테슬라 폐하께서 하실 겁니다."

하여 루시온은 황제를 팔았다.

"...!"

브라키온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가만히 옆에 서 있던 흄은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저래도 되는 걸까.

황제의 이름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팔아도 괜찮은 건지.

'자. 좀 더 규모를 키워보자고.'

루시온은 근질거리는 손바닥을 만지작거렸다.

[…너, 그래도 되는 거야? 황제가 아무리 너한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막 팔아도 되는 거냐고.]

러쉘의 제지가 바로 들어왔지만, 루시온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괜찮다고 알렸다.

이는 제국에게도 좋은 방향이었다.

미론스트가 뉴브라 손에 넘어가면 가장 골치가 아픈 건 바로 제국이었다.

뉴브라를 막을 공짜 방패가 사라진 셈이니 얼마나 짜증이 날까.

"지, 지금 테슬라 제국의 황제를 들먹였는가?"

브라키온은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그만큼 충격적인 말이었다.

"들먹인 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 제국과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폐하의 명으로 말입니다."

루시온은 얼추 비슷하게 말을 바꿨다.

케틀란의 명을 받는 건 헤인트였지만, 뭐 그게 그거 아니겠나.

"…제국이 우릴 돕는 건가?"

"저하께서는 누가 우방국인지 알지 않습니까?"

두리뭉실하게.

하지만 브라키온이 원하는 대답을 루시온이 꺼냈다.

목표는 뉴브라 왕국이었다.

이제 크게 흔들릴 때가 왔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에 손을 댄 뉴브라의 왕을 내부에서도 과연 얼마나 옹호할 수 있을까.

뉴브라 왕국의 왕이 되고자 하는 이는 과연 하나일까.

폭탄을 던지되, 제국이 휘둘러야 하는 검은 언제나 '정의'였다.

그 검은 뉴브라 왕국 내부에서 폭풍처럼 일어난, 반 왕정파를 위해 쓰여야 했고.

루시온은 황제가 준 증명서를 꺼내 보였다.

"저는 목숨이 귀한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러쉘의 표정이 급히 굳어졌다.

[러쉘?]

베델은 슬쩍 러쉘을 불렀다.

그만큼 그의 표정이 너무도 심각했다.

[아무… 것도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러쉘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당장 계약서를 쓰겠네."

브라키온은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저건 진짜였다.

정말로 테슬라 황제의 문장이 찍힌 증명서였다.

"내 미론스트의 왕자로서 그대에게 어떤 형태든 은혜를 갚겠다고 쓰겠네. 공증인 역시 황제께 맡기겠네."

브라키온이 다급히 일어나 종이를 가지러 움직이자 루시온은 죽음의 기사를 보았다.

"이제 네 차례야."

[…감사합니다. 제가 저하께 진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음의 기사는 투구를 벗고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브라키온은 자신이 말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종이에 옮겨 적었고, 도장까지 찍었다.

공증인 자리를 비운 채로 루시온에게 넘겼다.

"아. 이것도 받게."

브라키온은 검은 구슬을 루시온에게 넘겼다.

하지만 그는 일단 손에 쥐지 않았다.

'아직 목표가 하나 더 남았어.'

대신 흄을 바라보았다.

흄이 검은 구슬을 제 주머니에 넣은 뒤에야 루시온은 브라키온에게 죽음의 기사가 알려준 자들을 한 명씩 언급했고, 브라키온은 이를 옮겨 적었다.

내부자를 언급을 끝낸 후에야 루시온은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다른 목표를 언급했다.

"제가 찾아야 할 사람은 체이톤입니다. 노예상인 체이톤. 그자가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혹 아십니까?"

팅!

붉은 실이 갑자기 팽팽해졌다.

'…이게 왜?'

루시온은 얼떨떨했다.

체이톤과 브라키온이 관련 있단 말인가.

"그자라면 내가 어디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네. 오늘 놈의 아지트를 습격하려던 참이었으니."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의심했던 귀족 중 하나를 쫓다 체이톤 그놈에게 사람을 파는 현장을 발견했다네."

"또 그놈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었습니까?"

"아닐세."

브라키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네."

210화. 너 잡으러 왔어(2)

[뭐, 뭐라고? 그놈은 노예상인이 아닌가.]

베델이 경악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루시온이 얼른 물었다.

베델이 말한 것처럼 체이톤은 노예상인이었다.

노예상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노예일 텐데.

브라키온은 잠깐 생각하다 목소리를 냈다.

"당시 기사의 보고에 따르자면 흑마법사와 같이 있는 듯했고, 물건을 피에 적시고 있었다고 했네."

[그럴 리가… 저건 신수를 타락시킬 때 쓰는 방법인데, 그걸 물건에다가 한다고?]

러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응했다.

[지금 신수를 타락시키는 방법이라고 했나?]

신수가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베델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러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살해되어 죽은 자의 피는 가장 원념이 가득해서 흑마법사가 신수를 타락할 때 쓰여. 타락한 흑마법사의 어둠도 같이 쓰이긴 하지만. 어쨌든, 방금 체이톤이 흑마법사와 같이 있다고 했잖아? 그럼 저건 뭔가를 타락시키는 게 확실해.]

'그럼 타락시킬 물건이라면.'

루시온은 머릿속을 더듬거리며 생각하다 눈이 번뜩 떠지는 기분을 느꼈다.

'…성물?'

그럴 리가.

루시온은 바로 부정했다.

[지금 상황으로 봤을 때, 그 물건은 신수와 비슷한 힘을 가진 성물뿐인데… 체이톤 그놈, 네바스트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놈이 아니었어?]

러쉘이 오만상을 썼다.

루시온 자신이 부정했던 것도 바로 저 이유 때문이었다.

체이톤은 네바스트의 사람이었다.

신성 국가 네바스트.

빛을 따르는 이들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고 성물을 타락시킬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잘못 짚었나?'

루시온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모든 정황상 체이톤 뒤에 네바스트가 있다는 걸 가리키고 있었다.

크라언을 십여 년간 노예 생활을 하도록 한 자가 바로 체이톤이었다.

크라언의 조국인 케오르티아 왕국을 그렇게 만든 건 네바스트였다.

서로 이어지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관계였다.

"지금 그놈은 어디에 있습니까?"

루시온은 모든 의문을 뒤로 넘겼다.

그 의문은 체이톤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 * *

"…혹 기억하십니까, 스승님?"

루시온은 브라키온이 알려준 곳으로 먼저 움직인 베델을 기다리며 주인 없는 브라키온의 방에서 목소리를 냈다.

베델이 있으면 하기 힘든 이야기이기도 했다.

[트웰로의 부하인 테펠로우 셀가 놈을 말하는 거지?]

"맞습니다."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놈이 왜 그 팔찌에 집착했는지 의문이 듭니다. 정말로 성물임을 몰랐을까요?"

라르비스의 눈물, 그 팔찌의 짝을 가져간 건 가짜 체이톤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경매장에서 그 팔찌를 두고 경쟁했던 건 테펠로우 셀가, 그놈이었다.

유독 그 팔찌에만 반응하지 않았던가.

[루시온. 모든 이유를 떠나 성물을 가져가려고 했던 쪽은 네바스트야. 뉴브라와 손을 잡은 건 아닌 듯 보여. 그랬다면 가짜 체이톤을 보호하던 호위가 그렇게 허술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럼 네바스트와 거래를 하려고 했던 걸까요?"

[그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아?]

"예. 그편이 더 자연스럽네요."

루시온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베델이 신호를 보내기 전에 러쉘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스승님."

[그래. 말해봐.]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러쉘은 순간 움찔거렸다.

"기운이 없어 보이십니다. 제게 미처 말씀하지 못한 사실이라도 있는 겁니까?"

[있어.]

러쉘은 눈치 빠른 제자를 속이고 싶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너무 고민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루시온은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아마 러쉘이 떠올린 기억 중 차마 말하지 못한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입으로도 꺼내기 싫은, 그런 기억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루시온.]

러쉘은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함으로 가득 찬 그의 눈빛을 보며 러쉘을 달랬다.

"괜찮습니다, 스승님."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델이 신호를 보냈다.

"어딘지 알겠지, 라타?"

―응! 라타도 찌르르 하고 왔어!

"도련님."

흄이 루시온을 불렀다.

"정면 돌파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당연하지. 흑마법사로 우글거리는 곳에 굳이 왜 찾아가겠어? 그냥, 슬쩍 놀라게 하고 그놈만 빼 올...."

루시온은 말을 멈추고 흄을 바라보았다.

아지트에 도착했을 때, 성물을 적들에게 투여하면 어떻게 될까.

"왜… 그러십니까?"

흄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생각해보니 아지트에 더 많은 증거가 있을 거 아니야?"

[루시온. 조금 전에 말하다 만 것처럼 그냥 슬쩍 놈만 빼돌려.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일단 가서 확인해보겠습니다."

루시온은 바로 라타에게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응! 라타 마차가 출발한다! 쓩쓩!

* * *

[왔는가.]

베델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녀는 활짝 웃다 곧 마을을 가리켰다.

마을과 붙어 있는 산지에서 내려다보니 집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작은 마을이 보였다.

[저기 마을이 보이는가, 루시온 공?]

베델이 물었다.

"보여."

[저 마을 전체가 놈의 아지트다.]

[몇 채 안 되긴 한데, 저기에 흑마법사가 있다고 한다면 좀 그렇긴 한데.]

러쉘이 턱밑을 매만졌다.

흑마법사든 누구든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은 비밀 장소를 파기 마련이니까.

[브라키온이 보았다던 시체는 이미 공에게 말해주었던 것처럼 마을 중앙으로....]

"체이톤은 저기에 있고, 피 냄새 역시 저쪽에 무척 강하게 납니다."

흄이 손가락으로 루시온의 뒤쪽을 가리켰다.

루시온이 고개를 돌리자 울창한 산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적들이 산속 동굴에 있는 모양이었다.

'개 코가 발동했네.'

흄은 이전에 낡은 저택 밑에서 누군가와 체이톤이 크라언을 두고 나눴던 편지에 베인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저쪽에 있는 마을 중앙에 나와 브라키온의 기사가 봤다던 그 상황은… 혹시 미끼였다는 말인가?]

베델이 당황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루시온은 코웃음을 쳤다.

"저렇게 유령이 돌아다니는데 흑마법사가 브라키온의 기사들을 몰랐다고? 말도 안 되지."

자신의 눈에 보이는 유령만 3명이었다.

아마 더 있을 테지.

[아무래도 일부러 브라키온을 끌어내려고 한 모양이네. 그렇다는 건… 미론스트의 왕이 살았다는 걸 눈치챘다는 말이겠지?]

러쉘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웃을 수 없었다.

'…네바스트가 미론스트 왕국을 먹으려는 건 아닐 텐데.'

루시온은 다시 흄이 가리켰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뉴브라와 거래를 하려고 하는 건가?'

소설 속 시작지점인 2년 후에는 이미 뉴브라 왕국이 미론스트를 장악한 후였다.

미론스트의 왕이 죽고.

제1 계승자인 브라키온이 죽고.

그 동생을 꼭두각시로 세워 나라 하나를 통째로 꿀꺽한 시간이 2년이라면 지금쯤 시작해야 맞는 셈이었다.

'그 시작에 네바스트도 관여되어 있었다는 건가? …그래서 체이톤을 잡는데 붉은 실이 움직였던 거고?'

왜?

왜 네바스트가?

[이거, 누구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조직원 소집이라도 해.]

러쉘은 얼른 크라언에게 연락하라고 루시온을 재촉했다.

"살펴본 뒤에 정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루시온은 흄이 가리켰던 방향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상대는 흑마법사들이었다.

테펠로우 셀가 저택에서 빛으로 무장했음에도 조직원들이 얼마나 죽었던가.

자신 말고도 또 다른 흑마법사들이 있다면 그 피해는 적었을 텐데.

"…그리고 제 품에 뭐가 있는지 잊으셨습니까?"

[루시온 공!]

"도련님!"

베델과 흄이 거의 동시에 소리치며 루시온을 말렸다.

―홉!

그림자 속에 뒹굴뒹굴하던 라타가 깜짝 놀랐다.

'깜짝아....'

루시온은 살짝 뒷걸음질 쳤다.

[루시온! 너는 흑마법사야! 빛의 축복을 받은 자가 아니라고! 왜 그 간단한 사실을 자꾸 잊는 거야?]

러쉘의 목소리도 무척 사나웠다.

저 성물이 루시온을 살렸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아니었다.

"성물의 빛은 트로에의 축복 덕에 괜찮았습니다."

빠르고 쉬운 방법이 있는데 이걸 왜 사용하지 않냐는 말에 러쉘은 제 이마를 치고 말았다.

[만약 이번에 트로에의 축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쩔 셈인데?]

러쉘이 묻자 루시온은 망설였다.

무려 성물의 빛이었다.

베로니아, 그놈에게도 통했던 빛.

"제가 하겠습니다! 저는 빛이 통하지 않습니다!"

흄이 번쩍 손을 올렸다.

어둠의 종이면서도 빛이 통하지 않는 자.

어둠의 종이면서도 빛을 존경했던 자.

라비엔.

"…흄?"

루시온이 깜짝 놀랐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도련님께서 하실 수 없는 건 제가 하겠다고 말입니다."

흄은 손을 내밀었다.

"주십시오. 성물을 들고 제가 기습하겠습니다."

"아직 기다려. 저 안이 어떻게 된 건지는 확인해야지."

[그럼 나하고 러쉘하고 움직일 테니까, 잠깐 여기에 있어.]

베델은 루시온 앞으로 가 손바닥을 내보였다.

'이거 원. 유치원생이라도 된 것 같네.'

루시온은 콧바람을 내쉬었다.

확실히 자신이 직접 보는 것보다 베델과 러쉘이 움직이는 게 훨씬 안전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걱정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타는 저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데.

라타가 살짝 시무룩하며 입을 삐죽거리다 루시온의 그림자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하지만 라타는 기다리는 거 잘해!

"그럼 기다릴 동안 잠깐 앉아계시는 게 어떠십니까?"

흄이 그새 돗자리를 깔았다.

아직 러쉘하고 베델도 가지 않았는데.

"잠깐만요. 저 아직 대답도 안 했습니다."

황당해하는 루시온을 보며 러쉘이 키득거렸다.

[그냥 앉아 있어.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제가 잘 보고 있겠습니다."

흄이 사뭇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럼 너만 믿을게, 흄.]

베델은 흄의 머리를 토닥이다 러쉘하고 움직였다.

뒤에서 허탈한 웃음을 내뱉는 루시온의 목소리에 베델은 쿡쿡 웃었다.

[러쉘. 루시온 공에게 그대가 기억을 되찾았다는 말을 했는가?]

루시온과 조금 떨어지자마자 베델은 슬쩍 러쉘에게 물었다.

[말했어.]

[혹시… 말하기 두려웠는가?]

[두렵다니?]

러쉘이 우뚝 멈춰 섰다.

[그대가 그렇게 보여서. 혹시 아니라면 미안해. 괜한 오지랖을 부렸어.]

베델 역시 멈춰서는 러쉘을 바라보았다.

러쉘의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베델.]

[그래. 뭐든 말해도 돼.]

베델은 며칠 전에 자신이 기억을 되찾았다는 말을 내뱉었을 때처럼 한없이 맑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베델이 같은 유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동료로서 그녀를 믿을 수 있었다.

[루시온에게… 꼭 해야 할 말인데 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러쉘은 답답한 마음을 꺼냈다.

자신은 누군가와 지낸 적이 없었다.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부터 외톨이로 지냈고, 가장 처음 루시온을 어떻게 만났는지 몰라도 과거에도 지금도 루시온을 제자로 뒀다.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인 루시온을 위해 뭐가 옳은 걸까.

러쉘은 처음으로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와 맞닿은 기분을 느꼈다.

[루시온이 슬퍼하더라도 말을… 해줘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루시온을 위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까?]

러쉘의 목소리가 떨렸다.

베델은 일단 러쉘을 달랬다.

괜찮다고.

놀라지 말라고.

루시온처럼 러쉘 역시 짧게 본 사이였지만, 그가 이렇게 흔들리는 건 루시온이 다친 이후로 처음이었다.

지금 체이톤을 찾고, 적의 수는 몇 명인지, 적의 아지트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적들은 어디로 배치되어 있는지.

파악해야 할 것들이 많음에도 러쉘이 자신에게 물었다.

그만큼 러쉘의 절박함이 느껴졌다.

[러쉘.]

[그, 그래.]

[내 생각이 해답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알아. 알고 있으니까, 그냥 말해 줬으면 해.]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상대가 루시온 공이라면 늦더라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

[왜…?]

러쉘은 괴로움을 토로하듯 말을 꺼냈다.

그의 괴로움이 옮기라도 한 건지 베델 역시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루시온 공이… 우릴 믿으니까.]

베델은 루시온과 빙의하며 그의 생각과 기억을 자주 엿보았다.

루시온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강하지 않았다.

[러쉘 그대가 루시온이 처음으로 받아들인 유령이니까.]

베델의 목소리까지 이상하게 떨렸다.

[러쉘 그대도 알지 않은가. 루시온 공이 얼마나 그대에게 의지하는지.]

그 말에 러쉘의 눈동자가 살짝 일렁거렸다.

[우리가 루시온 공을 속여서 받을 상처와 차마 말하기 어려운 진실로 받을 상처 중 어느 쪽에 더 아픈지는 러쉘 그대도 분명 알 테지.]

베델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러쉘을 보고 있었다.

믿음.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자신이 알고 있었다.

아마도 루시온에게 있어 배신이라는 포악함은 다른 사람에 비해 너무도 잔인해질지도 몰랐다.

하여 베델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늦더라도 진실을 고백하고자 했다.

[루시온 공은 그대가 무얼 말해도 믿어 줄 거야.]

[…고맙다, 베델.]

러쉘은 무겁던 가슴이 천천히 풀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마냥 숨기는 게 루시온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루시온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걸어왔던 모든 행동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이야기해야 했다.

[고마워.]

러쉘은 다시금 베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뭘. 당연한 거니까, 그만 말해도 돼.]

베델이 이빨을 내보이며 활짝 웃었다.

그래도 이 기쁨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갈까? 이 이상 늦어지면 루시온 공은 눈치가 빨라서 우리가 뭔가 대화를 나눴다는 걸 알 수도 있다.]

[그래. 일단 체이톤 그놈이 먼저니까.]

러쉘은 먼저 움직이는 베델을 따라갔다.

일단 루시온의 목숨을 위협하는 놈들부터 치워야 했다.

그 뒤에, 기회가 났을 때, 루시온에게.

러쉘은 입술을 아주 세게 깨물었다.

211화. 너 잡으러 왔어(3)

* * *

[…진짜 쓸 거야?]

러쉘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몇 가지만 고치면 괜찮다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혹시 몰라 베델과 빙의도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검은 파동.

이전에 피터를 만나기 전에, 소설 속 헤인트의 동료 중 하나였던 흑마법사가 사용한 흑마법으로 어설프게 따라 했다 자신의 왼쪽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다.

하여 루시온은 오늘 흄에게 부탁해 미리 붕대를 감아뒀다.

검은 파동은 흑마법사를 잡기에 아주 좋은 흑마법이었으니.

[그랬긴 했지만....]

러쉘이 말꼬리를 흐렸다.

"저는 스승님을 믿습니다."

그 흑마법은 애초에 러쉘의 아지트에서 수첩을 발견해 독학으로 익힌 것이라 불안정했지, 직접 만든 러쉘에게 배운다면 말이 달라졌다.

"어차피 한 번은 맞부딪쳐 봐야 하잖습니까?"

루시온은 앞을 바라보았다.

체이톤은 산속 동굴에서 흑마법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있었다.

"저 앞에 타락한 흑마법사가 있고, 그냥 흑마법사도 섞여 있으니까요."

[…그래.]

러쉘은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대답했다.

그 모습에 루시온은 가볍게 웃었다.

"흄이 늑대가 되어 양 떼를 몰아 주고, 도망치는 양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으니 이만큼이나 편할 수도 없습니다. 다 스승님하고 베델 덕입니다."

입구는 총 2개로, 그중 하나가 탈출구로 만들어진 듯 평소 쓰이지 않은 흔적이 보였다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부에 병력은 마을에 비하면 초라했다.

저들은 브라키온을 잡을 함정을 만들었고, 그 함정을 위해 마을로 집중된 상태였다.

'…즉, 내가 습격하기에 아주 좋은 순간이라는 거지.'

자신이 이렇게 놈들의 계획을 역으로 이용할 줄은 몰랐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겠나.

"아 참, 이 정도면 할 만하다고 말씀하신 건 스승님입니다."

루시온이 실실 웃자 러쉘의 표정이 기어코 구겨졌다.

[내 입이 방정이지.]

러쉘은 자신도 모르게 제자의 성장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버렸다.

저번 테펠로우 셀가가 소유한 저택에서는 조직 에일이 같이 움직인 상태에서 흑마법사를 상대한 적이 있었다.

만약에 조직을 이용해 싸울 수 없는 상태에서 흑마법사와 타락한 흑마법사를 맞닥뜨렸다면.

경험을 쌓을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게 자기 생각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는지 궁금했지만, 가져오신 정보가 많아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빙의하고 있던 베델이 움찔거리는지 루시온의 몸이 살짝 떨렸다.

'수상하네, 베델?'

루시온이 묻자 베델은 어색한 웃음을 내보였다.

―라타는 기다리는 게 너무 좋았어! 흄이 마카롱도 주고, 초코 쿠키도 주고, 맛좋은 푸딩도 주고, 또, 엄....

"난 자몽 에이드, 라타 넌 딸기 주스를 마셨잖아."

루시온이 가면을 머리에 살짝 걸치며 말했다.

―맞아! 라타가 좋아하는 딸기 주스!

"라타 넌 뭐든 다 좋으면서."

―응! 라타는 다 좋아!

라타가 꺄르르 웃었다.

[와. 누군 정찰 갔다 왔는데 누구는 완전 난리가 났었네. 누가 보면 소풍 온 줄 알겠어?]

러쉘이 슬쩍 빈정거렸지만, 루시온은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제가 아직 한창 클 나이입니다. 그동안 제대로 못 먹은 게 억울해서 그러니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농담이었어. 먹어. 많이 먹고 많이 커.]

금방이라도 진땀을 흘릴 것만 같이 러쉘은 당황했다.

"저는 진담입니다."

루시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먼저 가 있으마.]

러쉘은 도망가듯 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쨌든, 베델."

루시온은 숨을 내쉬며 입가에 고였던 미소를 싹 지웠다.

그리고 가면을 제대로 고쳐 썼다.

[그래. 검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쥐어패는 것도 좋아해.]

"다행이네. 나는 개인적으로 쥐어패는 쪽이 더 좋거든."

―라타는 발로 걷는 게 제일 좋아!

라타가 꼬리를 흔들며 그림자 속으로 쏙 들어갔다.

"맞아. 직접 다리로 걷는 게 제일 좋지."

루시온은 자신의 어둠을 꺼내 커튼처럼 마을 쪽을 향해 가린 뒤, 앞을 향해 조그마한 어둠을 날렸다.

흄에게 작전을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흑마법사가 취약한 게 무엇이겠는가.

바로 빛이었다.

원래는 성물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그 빛의 효력과 마을에 있는 흑마법사들을 생각해 방향을 틀었다.

브라키온이 저 마을을 치려고 했고, 그렇다는 말은 근처에 그의 병사들이 있다는 게 아니겠나.

브라키온이 자신에게 넘긴 황금패를 당당하게 들고 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빛이 깃든 물건을 싹쓸이했다.

병사들도 데려가면 방패막이로 딱 좋겠지만, 이번 작전은 조용히 움직이는 편이 좋겠다 싶어 그냥 마을에서 저들을 기다리는 적이 계획대로 잘 흘러간다는 생각에 취하게 움직이는 척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번쩍.

동굴 쪽에서 빛이 번뜩이자 루시온은 어둠을 더 끌어 올려 빛을 가리는 범위를 넓혔다.

'흄은 괜찮은 게 맞겠지?'

멀리 떨어졌고, 성물도 아님에도 속이 살짝 울렁거려왔다.

가까이에서 빛을 맞은 흄이 진짜 괜찮을지 걱정이 들었다.

빛이 사라지자 루시온은 어둠을 거둬들였다.

"가자, 라타."

―응! 출발!

* * *

눈앞에 자신을 감싼 어둠이 가라앉자마자 루시온은 팔에 회전하는 어둠인, 검은 파동을 둘러 당장 보이는 놈을 향해 휘둘렀다.

소리도 없이 조용했지만, 곧 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놈의 주변에 일렁거리던 어둠이 끓는 물처럼 뽀글거렸다.

어둠의 약점은 흔들림이었다.

[진짜로… 어둠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지 않아.]

베델이 신기해하며 말했다.

흑마법사를 죽여봤기에 베델은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어둠이 얼마나 짜증 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 바로 나, 비운의 천재인 러쉘이 만들었으니 당연하지.]

러쉘은 자신을 당당히 가리키며 콧대를 살짝 세우다 곧 루시온을 보았다.

그의 팔을 이전과 달리 부서지지 않았다.

[팔도 안 아픈 거 맞지?]

"예. 하나도 안 아픕니다."

루시온은 두 팔을 흔들어 보였다.

부러지지도 않았고, 통증도 없었다.

"벌써 오셨습니까? 조금 더 천천히 오셔도 괜찮았습니다."

흄이 대검을 '쿵' 하고 땅에 내리찍었다.

방금 루시온이 때려눕힌 적의 목이 댕강 잘려나갔지만, 흄은 루시온을 반기는 것만으로 바빴다.

"괜찮아?"

루시온은 흄의 상태를 살폈다.

"저는 언제나 괜찮습니다."

흄이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는 동시에 손을 휘둘렀다.

콰드득.

다가오는 어둠이 얼어버렸다.

[베어내겠다.]

루시온은 손에 두른 어둠을 벗기듯 흐트러트리며 베델의 움직임을 따라 당장 검을 뽑아 얼린 어둠을 베어냈다.

스걱.

그 후에 루시온은 주변을 살폈다.

빛 때문에 피를 토하며 쓰러진 자들이 흑마법사였고, 저기 자기 혼자만 살 거라고 바쁘게 움직이는 놈이 체이톤이겠지.

"빠르게 가자고, 베델. 뒤처리 부탁해, 흄."

"예. 물론입니다."

루시온은 흄의 대답을 들으며 다시 팔에 검은 파동을 둘러 쓰러진 흑마법사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 * *

"…허억, 헉!"

숨이 차올랐지만, 머릿속에는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갑자기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바람 마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매섭게 휘둘러지는 대검에 그 흑마법사들의 목이 바닥을 뒹굴었다.

'멍청한 놈들!'

그렇게 자신 있다며 떠들더니 겨우 한 놈에게 저렇게 맥없이 당하다니.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마을에서 튀어온다던 그놈들은 또 어디로 간 거야?'

짜증 났다.

오라는 미론스트의 멍청한 그 첫째 놈은 안 오고 어디서 개잡놈이 찾아와 계획을 방해하는지.

이걸 다시 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지.

예산이 얼마나 드는지.

윗대가리한테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대단한데?"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섬뜩함이 몰려오자마자 헛발을 내디디고 그대로 앞으로 미끄러졌다.

"도망치는 도중에 다른 생각도 할 수 있고. 엄청 여유롭나 봐?"

루시온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어둠으로 놈의 주둥아리부터 막아버렸다.

"도망가면 살 거라고 생각했나, 체이톤?"

이름을 불리자 체이톤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가면을 쓴 흑마법사라고? 누구지…?'

저런 흑마법사는 어디에도 보고된 적이 없었다.

"아. 아무래도 내가 궁금한가 보네."

루시온이 개구쟁이처럼 목소리를 냈다.

곧 가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너 잡으러 온 사람. 딱 거기까지만 알면 돼. 그 이상은 너한테 너무도 아까우니까."

루시온은 체이톤의 머리카락을 쥐어서는 라타를 불렀다.

"스승님이 있는 곳으로 가자."

조금 전 체이톤이 왔던 그 아지트로.

* * *

콰직.

때마침 흄이 흑마법사의 몸뚱어리를 베던 참이었다.

"금방 잡으셨네요."

흄이 체이톤을 보며 말했다.

밧줄처럼 어둠으로 그를 꽁꽁 묶어 놓은 모습에 흄은 당장 어딘가에 매달아버리고 싶었다.

"다 잡았어?"

루시온이 묻자 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도련님께서 흑마법을 사용해주신 덕분에 어둠이 발동하지 않아 아주 손쉽게 잡았습니다."

[나도 만족했다.]

베델이 루시온의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기뻐했다.

오랜만에 흑마법사를 주먹으로 쥐어팬 탓인지 몰라도 주먹질은 베는 맛 못지않게 무척 짜릿했다.

"그렇지? 주먹질이 나름 괜찮아."

루시온은 적들이 나름 아지트라고 꾸며놓은 동굴 중앙이 아니라 서로 마주해 있는 입구 2개를 제외한, 구멍을 바라보았다.

저쪽이 러쉘과 베델이 말하던 타락이 있는 곳이었다.

―라타가 저 못된 사람들을 유령으로 부를까?

라타가 죽은 흑마법사를 앞발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아직."

루시온은 체이톤을 보았다.

"캐물어야 할 입이 하나 있어서."

체이톤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동공이 살짝 커지긴 했지만, 자신이 만족스러울 만큼 이 상황을 두려워하진 않았다.

루시온은 어둠을 이용해 의자 두 개를 만들었다.

하나는 자신이 앉고.

다른 하나에 흄이 체이톤을 앉혔다.

의자와는 다른 이질적인 감각에 체이톤의 숨소리가 빨라졌다.

루시온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으면 해봐."

"할… 말이라니?"

"없어?"

"뉴브라에서 보냈나? 우리 약점을 쥐라고? 그래도 소용없을 거다. 내 영혼은 빛의 신께서 보호해주시니까!"

푸핫.

루시온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 네바스트의 신관이 그랬어? 대신관이? 아니면 상위 신관이?"

"그분들을 우롱하지 마라, 이 더러운 존재여."

"누가 더러운 존재인지 모르고, 되게 재밌네."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흄이 체이톤을 잡자 루시온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넌 오지 마."

"예…?"

"타락에 약하잖아. 잠깐 여기서 기다려. 망을 보면 더 좋고."

[그래. 위험할 건 없어, 흄. 루시온이 충분히 할 수 있는 범위 내야.]

러쉘도 흄을 말렸다.

"하지만 저기에...."

[알아. 하지만 죽음의 바다에서 가지고 온 타락만큼 위험하지 않아.]

"그때, …그 타락을 정화했기에 그놈이 오지 않았습니까? 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떡합니까?"

흄이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를 내며 러쉘을 바라보았다.

―흄. 저긴 달라. 라타가 알아. 저기에 있는 어둠은 죽음의 바다에 있던 어둠이 아니야. 죽음의 바다에 있던 어둠은 너무너무 슬펐는데, 저기는 라타가 아주 살짝만 슬퍼.

"괜찮아."

라타가 아주 길게 설명했고, 루시온이 평온한 목소리를 내자 흄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지금 여기서 가장 무서울 사람은 루시온과 라타일 텐데.

"기다리고 있어."

그런 루시온이 자신을 안심시키려 하지 않은가.

집사는 이러면 안 된다.

집사가 주인을 안심시켜야지, 그 반대가 되면 안 된다.

"예."

흄은 두려움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집사는 주인을 믿어야 했다.

"그래."

루시온은 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에 돌아섰다.

어둠으로 체이톤의 입을 막은 상태로 질질 끌며 타락이 있는 구멍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워낙 많이 들락날락했는지 어느 정도 길이 보수가 된 상태라 내려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코를 찌르는 악취와 썩어버린 시체들, 그리고 최근에 죽은 것처럼 보이는 시체들이 줄지어 보여 기분이 더러웠다.

피로 된 작은 호수가 자신을 반겼다.

호수에서 검은 액체가 꿈틀거렸다.

저게 타락이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빛이 느껴졌다.

정말로 성물일까.

[…역겹다.]

베델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닳디닳은 그녀의 괴로움이 루시온에게도 전해졌다.

―라타는, 흡, 참을 수 있어.

라타는 아예 얼굴을 앞발로 가리며 몸을 숙였다.

'타락한 흑마법사는… 죽었나?'

루시온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타락한 흑마법사는 죽으면 시체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아까 동굴 중앙이라면 몰라도 여기쯤은 빛의 영향이 덜할 듯한데.

[저기 타락에게 먹혔네.]

러쉘은 손가락으로 피로 된 호수를 가리켰다.

[타락에게 가장 좋은 먹이는 바로 같은 타락이지. 타락은 퍼지고, 증식하니까.]

루시온은 러쉘의 말을 들으며 피로 된 호수 앞에 섰다.

타락은 자신을 타락시키기 위해 꾸물꾸물 기어 올 뿐, 죽음의 바다 때처럼 어떤 말도 걸지 않았다.

그만큼 자아를 가지려면 타락도 짙어야 하는 걸까.

루시온은 일단 의문을 떨쳤다.

"자주 와봤으니 알겠네?"

체이톤을 붙잡은 어둠을 움직여 피로 된 호수에 살짝 발이 닿을 정도로 올렸다.

읍읍!

입이 가려진 체이톤은 발악하며 호수에 발이 닿지 않게 온몸을 움직였다.

그런 그를 비웃으며 루시온이 속삭이듯 말했다.

"저 타락에 먹힌 자의 최후가 어땠는지 말이야."

212화. 열 받았어

읍읍!

체이톤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깊게 드러나고 눈가에 핏발이 섰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처럼 그 눈동자에 어느덧 눈물이 고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반복되는 살인도 시간이 흐르면 무뎌져 마치 평범한 일처럼 느껴졌을 테지.

영원히 자신의 순서가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살려달라고?"

루시온이 물었다.

참 웃겼다.

읍읍읍읍!

체이톤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빛의 신이 널 보호해줄 건데 무슨 상관이야?"

루시온은 체이톤을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깨끗한 네가 하는 일은 똑같이 깨끗한 일일 테고, 나는 지금 널 돕고 있는 거잖아. 깨끗한 상태로 저기에 처박힌, 저들처럼 될 테니 반갑지 않아?"

체이톤은 또 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루시온은 조금 더 체이톤을 내려 발목까지 젖게 했다.

체이톤이 부르르 몸을 떨자 입을 가렸던 어둠을 풀어주었다.

"할 말 있으면 해봐."

루시온은 조금 전처럼 물었다.

잠깐 기다렸다.

한 3초쯤.

"없어?"

루시온은 체이톤을 더 내려 종아리와 발목 사이쯤에 닿게 했다.

타락이 느릿하지만 움직였다.

눈앞에 있는 맛좋은 먹이를 마다할 리가 없을 테니까.

"제,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제야 체이톤이 비명을 지르듯 목소리를 터트렸다.

"아니야."

루시온은 체이톤을 내려 종아리까지 닿게 했다.

금세 핏물을 빨아들이듯 그의 바짓자락이 천천히 붉어졌다.

체이톤은 눈을 질끈 감으며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네… 네바스트에서, 네, 네바스트에서 성물을 타락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미친! 진짜, 진짜로 성물이었다고?]

러쉘이 소리쳤다.

진짜로 네바스트에서 성물을 타락시키고자 했다.

신성 국가 네바스트가.

[무슨 개병신 같은 소리야!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제 성물을 직접 타락시키도록 지시를 했다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실제로 사실이라고 드러나자 러쉘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제 목을 조르는 행위를 네바스트가 미련하게 하고 있다니.

그 사실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브라키온 미론스트."

루시온은 짧게 물었다.

"그, 그러니까, 아아악!"

타락 한 줄기가 체이톤의 다리에 닿았다.

그가 바람에 금방 떨어져 나갈 나뭇잎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러든 말든 루시온은 조용히 재촉했다.

저 정도로는 아직 괜찮으니.

"말해."

"성물, 성물을 타락시키기 위해서는 제,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미론스트 왕국 귀족 중 뉴브라의 뒷돈을 먹은 자들이 엄청 많습니다! 어, 어차피 나라를 배신한 놈들이니 일이 잘못돼도 죄를 덮어씌우려고 그자들과 거, 거래했습니다! 첫째 왕자를 죽여줄 테니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제 백성들을 제물로 바치라고요오…!"

루시온은 체이톤의 얼굴에 타락이 옮았다는, 검은 선이 생기기 전에 올려주었다.

'…뭐야. 네바스트와 뉴브라가 손을 잡은 게 아니라 그냥 제물이 필요해서라고?'

브라키온이 죽는다면 미론스트가 빠르게 뉴브라 손에 넘어갈 걸 알면서도 네바스트는 이를 방관한 것도 모자라 제 탐욕을 위해 한 나라가 망하든 말든, 그 더러운 배신자의 손을 잡아버렸다.

'미친 새끼들!'

그걸 허락한 미론스트의 귀족들도 미쳤고.

죄다 미친 것처럼 보였다.

'더러운 새끼들…!'

루시온은 당장 체이톤을 그대로 담가버리고 싶었다.

저놈 손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겠는가.

[루시온 공. …그 감정에 휩쓸리지 마. 부정이 늘어날 수 있다고 했다.]

베델이 자신을 달랬다.

그녀 역시 지금 이 장소에서 튀어나가고 싶으면서.

루시온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케오르티아 왕국과 네놈이 노예로 부렸던 그 왕자를 기억하지?"

"그, 그, 그걸 어… 어떻게 아십니까!"

체이톤은 경악했다.

두려움 때문에 머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 여기서 케오르티아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거의 다 알고 온 게 아닌가.

"왜 케오르티아였지?"

루시온이 묻자 체이톤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죄송… 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아니. 네가 말해야 하는 건 그게 아니잖아?"

저 사과는 자신이 받아야 할 게 아니었다.

한마디, 한마디를 쥐어짜서라도 크라언과 그의 가신인 슈트라와 헬론에게 꺼내야 할 말이었다.

루시온의 재촉에 체이톤의 떨림이 더 심해졌다.

"시, 시, 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했습니다!"

아니.

신은 없었다.

저놈이 말한 빛의 신은 처음부터 없다고 검은 형체가 그렇게 말해주었다.

[…개소리를 또 지껄이네.]

러쉘이 조용히 분노했다.

"네바스트에서, 그들이 저한테 찾아왔습니다. 신께서 내린 일을 긴밀히 처리해야 할 자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저, 저는 물론 믿지 않았습니다. 신이 어디 있습니까? 신이? 제가 팔아먹은 자들이 몇인데, 만약 신이 있다면 벌써 벼락 맞고 죽어야 할 놈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데...."

체이톤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제… 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 갑자기 병에 걸렸습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치료해주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케오르티아가 사라졌습니다. 제 눈앞에서 한순간에 말입니다…!"

그날을 떠올렸는지 체이톤의 눈동자에는 그때 느꼈던 경외감이 퍼져갔다.

말로도 다 꺼내지 못할 두려움이 온몸으로 흐르는지 체이톤은 잠깐이나마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저는 해야 했습니다. 신의 노여움을 사, 제 딸이 죽지 않으려면… 그냥 해야 했습니다! 압니다! 아무리 부정해도 알고 있습니다!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구더기보다 역겹고, 온갖 오물로 뒤덮인 하수보다 더 더러운 놈이라는 걸 말입니다!"

체이톤은 오열했다.

"부정… 하지 않겠습니다. 전 죄를 지었습니다. 딸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또 죽였습니다!"

루시온은 체이톤의 추잡한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제 딸을 위했다.

자신은 아버지였다.

얼마나 떳떳하게 놀려대는 말인지 몰랐다.

저건 아버지가 아니었다.

"잘 들어, 체이톤."

루시온은 그대로 멈춰버린 체이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진짜 아버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정말 네가 두려웠던 건 과연 병에 걸린 딸이 맞을까?"

체이톤이 그 말에 눈물만 조용히 흘렸다.

"신관이 과연 네바스트에만 있었던 걸까?"

자신이 아는 아버지란 존재는, 설령 세상을 적으로 두더라도 제 자식을 위해 저항하는 사람을 말했다.

"그게 진짜 병이 아니라 흑마법사의 저주라면? 이전에는 몰라도 지금은 너도 분명히 알 텐데?"

체이톤이 이 일에 손을 뗄 시간은 언제든 있었다.

언제든지.

"그래서. 네 딸은 어디에 있는데? 봤어?"

루시온은 천천히 흔들리는 체이톤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도 어렴풋이 눈치챘던 사실인 듯했다.

"살아 있기는 하고?"

"사, 살아...."

"살아 움직이는 시체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봤냐고!"

"...."

체이톤의 말문이 막혔다.

"그래. 두려웠던 건 네 목숨이겠지, 쓰레기 새끼야!"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니. 용서는 내가 아니라 그 왕자에게 가서 빌어야지."

크라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야, 체이톤. 흑마법사가 보는, 네놈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뭔지 알아?"

딱딱.

체이톤의 이가 맞물렸다.

너무도 평온한 그 목소리가 왜 이렇게 무서운지 몰랐다.

흑마법사가 보이지 않는 존재와 이야기를 하는 걸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부정했다.

받아들이면 너무 무서운 사실이니까.

죽은 후에 무언가 있다고 한다면 도망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조차 없어지는 셈이니까.

"죽은 후의 세계."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네놈의 죽음은 내 거다, 체이톤."

죽음조차 해방이 아님을 루시온은 알려주었다.

"증거는 어디 있지?"

* * *

라타 주변에 부드러운 바람이 일어났다.

라타의 몸에서 나온 보랏빛 어둠이 주변을 밝히자 피로 된 호수에서 검은 덩어리들이 다급히 기어 나왔다.

말을 하지 못해도 루시온은 알 수 있었다.

도와달라고.

이 눈물을 멈춰 달라고.

타락은 어둠의 혼란이었다.

자아를 가진 어둠만이 느낄 수 있는 두려움.

'…라타가 왜 그렇게 슬퍼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네.'

루시온은 흄의 감시하에 자료를 찾고 있을 체이톤을 잠깐 생각하다 라타를 바라보았다.

라타와 눈이 맞았다.

―루시온도 느껴지지?

라타가 물었다.

라타의 눈동자에 보랏빛 어둠이 어려 있었다.

묘했다.

라타가 힘을 쓸 때마다 라타와 다른 뭔가 이질적인 감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나쁘다기보다는 자신도 모르는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져, 그 익숙함이 이질적이었다.

"…그래."

―라타는 조금 알겠어.

"뭘?"

―라타가 왜 이런 힘을 가졌는지. 라타는 루시온을 돕고, 어둠을 도와줘야 해.

[…갑자기 떠오른 거야?]

러쉘이 물었다.

루시온의 어둠이 늘어나면 라타는 따라서 성장한다.

신수로서 자각하기 시작한 걸까.

―아니. 라타가 잊어버리고 있었나 봐. 라타는 이제는 잊지 않아! 라타는 똑똑하니까!

라타의 눈에 어렸던 불꽃이 커졌다.

하지만 라타는 루시온을 보았다.

왜 자신을 바라보는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목소리가 멋대로 튀어 나와버렸다.

"돌아… 오거라."

화르륵.

자신의 손가락 끝에서 튀어나온 보랏빛 어둠이 호수 위로 등불처럼 수를 놓았고, 천천히 피로 된 호수로 흘러 들어갔다.

은은하게 비치는 빛깔을 따라 목소리가 들렸다.

우릴 부르고 있어.

아.... 따뜻해.

[...?]

러쉘과 빙의를 푼 베델은 놀란 눈으로 루시온을 보았다.

루시온이 라타를 바라보자 라타는 배시시 웃었다.

―역시 라타는 어둠이 라타보다 루시온을 더 좋아할 거라 생각했어.

"내가 이걸… 어떻게 한 거야?"

정작 목소리를 냈던 루시온 역시 당황해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엄…, 루시온이니까!

너무도 해맑은 대답에 루시온은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이 그릇이기 때문에.

아니면 검은 구슬 때문인가.

놀라는 것도 잠깐, 루시온은 저 호수에서 타락 속에 갇혀 있던 수많은 어둠과 영혼들을 바라보았다.

서로를 얼싸안듯 기뻐하는 모습에 루시온은 의문을 뒤로 미루며 어둠과 영혼들을 바라보았다.

[진짜… 많이도 죽였네. 타락이 다 녹여버렸을 텐데 말이야.]

한때는 자신도 흑마법사였기에 러쉘의 얼굴에 미안함이 어렸다.

타락을 정화하고 튀어나온 영혼들이 저 정도라면 그전에는 얼마나 죽인 걸까.

수백.

수천.

아니, 수만은 되지 않을까.

결코,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으니.

"그럼, 유령도 되지 못하고 타락에 먹힌 자들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같은 유령이나 죽음의 기사에게 죽어 하늘로 가지 못하는 유령은 물고기처럼 생긴 영혼 청소부에게 먹혀 서서히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고 했다.

그때, 라타가 무척 슬퍼하지 않았던가.

[글쎄. 존재가 사라지는데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러쉘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타도 이건 모르겠어.

[이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루시온 공.]

베델의 재촉에 루시온은 성물을 건지러 호수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뜨거운 태양 볕이 내리 쐬는 여름에도 발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웠다.

루시온이 손을 뻗자 어미 새를 향해 달려드는 새끼 새처럼 성물들이 그의 품에 안겼다.

[내 살다 살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네.]

꼭 성물이 흑마법사를 따르는 것 같은 너무도 이질적인 모습에 러쉘은 눈살을 찌푸렸다.

성물을 손에 넣은 루시온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피와 시체들로 가득했지만, 자신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이제 남은 일은 브라키온에게 맡겨야지.

* * *

"…오셨습니까?"

크라언이 루시온과 흄을 반겼다.

벌써 해가 떨어지고 어둑해졌다.

루시온이 가면을 벗자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했다.

그와 흄 주변에 퍼진 피 냄새는 또 뭐고.

"피… 냄새가 납니다."

크라언이 한 발 더 다가오자 루시온은 바로 입을 열었다.

"내 피 아니니까 호들갑 떨 필요 없어."

루시온은 자신이 잡아 온 체이톤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에 잠깐 피식거리다 손가락으로 체이톤을 가리켰다.

"...."

그제야 크라언이 숨을 들이켰다.

루시온이 누굴 잡아 왔겠는가.

―체이톤을 잡아 올 테니까, 화 가라앉히고 기다리고 있어.

가기 전에 루시온이 자신에게 꺼냈던 말이 새삼 떠올랐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잡아버렸다.

'…저놈이.'

저놈이 자신의 지난 십여 년의 시간을 망친 놈이었다.

"씻고 올 테니까, 죽이지는...."

루시온은 말을 잠깐 멈췄다.

크라언의 눈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흄. 아무래도 크라언을 붙잡아야겠다."

213화. 열 받았어(2)

흄이 크라언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냥 잡고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제압하고 있을까요?"

[제압 말고 크라언이 체이톤을 죽이지 않게 막기만 하면 돼.]

흄이 말하는 제압이 어떤 수준인지 알기에 베델은 다급히 알려주었다.

막는 것 정도라면.

흄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언. 참을 수 있겠어?"

루시온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말을 물어보는 것조차.

눈앞에 원수가 있는데 저걸 참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체이톤이 죽으면 곤란했다.

"…저놈이 맞습니까?"

크라언은 숨을 크게 고르며 겨우 말을 토해냈다.

"그래."

"저놈이… 체이톤입니까?"

"맞아."

"저놈이… 저놈이! 저놈이이! 절 십여 년간 노예로서 굴린 놈이 맞습니까!"

크라언은 목에 핏대가 설만큼 체이톤을 증오하며 소리쳤다.

"그래. 저놈이야."

"하...."

크라언의 얼굴이 붉어졌다.

숨을 쉬기도 힘든지 뒤늦게 긴 숨이 튀어나왔다.

"왜… 왜 그랬다고 그럽니까?"

"케오르티아가 조용히 사라져야 했기에 혹시라도 구심점이 될 네가 위험했던 거지."

"그럼! 차라리! 죽이지 왜… 살려뒀다고 합니까? 왜…!"

크라언은 흄의 제지에 더는 다가오지 못하고 옷자락을 꽈악 잡으며 애가 탄 듯이, 갑갑한 듯이 그렇게 목소리를 냈다.

"정말 내가 대답해주길 원해? 그럼 내가 말해줄게."

차분한 루시온의 목소리에 크라언은 고개를 아주 천천히 흔들었다.

지금 머릿속이 뜨거웠다.

당장 밧줄로 묶인 듯, 어둠에 휩싸인 저놈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시체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머리에 수천 개의 화살을 쏘고, 또 쏘다 보면 이 분노가 풀어질까.

크라언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루시온이 자신에게 기회를 주었다.

저놈 입에서 그 이유를 들을 기회를.

"만약… 체이톤을 잡으면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크라언의 목소리는 여전히 뾰족했지만, 루시온은 신경 쓰지 않았다.

"황실에서는 아직 내가 체이톤을 잡은 거 몰라. 그걸 물으러 이제 가야 하거든."

[…지금 저녁이 다 되어가는데?]

루시온을 말리고 싶어도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러쉘은 어설픈 말만 늘어놓았다.

체프란 가를 핑계 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렇게 자주 간다면 의심을 살 게 뻔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

루시온이 물었다.

"어떻… 게라뇨?"

"네 손으로 저놈을 죽이는 게 가장 좋겠지만, 웃기게도 그렇게 된다면 케오르티아가 누구 손에 사라졌고, 왜 사라졌는지는 묻히겠지. 영원히."

말을 꺼내는 자신도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데 크라언은 오죽할까.

"하지만 저놈을 제국에 넘긴다면 비록 네 손으로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많은 것들을 밝혀낼 수 있을 거야."

[더 나아가 네바스트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다, 크라언.]

베델은 크라언이 듣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목소리가 멋대로 나왔다.

그만큼 크라언에게 마음이 쓰였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크라언?"

루시온이 다시 물었다.

그 물음에 크라언은 자신을 향한 루시온의 존중을 느꼈다.

"저는...."

크라언은 목이 멘 소리를 내며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단검으로 놈의 목만 베어도 죽어버릴 텐데.

그렇게 쉽게?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럼 씻고 올 테니까,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들겨 패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네."

루시온은 이미 크라언의 눈빛을 보고 그가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눈치챘기에 다시 가면을 쓰고 밖으로 나갔다.

크라언은 체이톤을 죽이지 않을 거다.

잠깐 보았던 크라언은 일개 복수자가 아니라, 한 나라의 왕자였으니.

* * *

"이거 너무 하네."

베로니아는 웅크려 앉아 아직도 자신의 몸에 들러붙어 꺼지지 않는 보랏빛 어둠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따뜻함은 이제 자신에게 있어 고통일 뿐이었다.

"…너무 아프잖아."

베로니아는 무릎에 얼굴을 살짝 기대 보랏빛 어둠을 꺼트리며 손가락에만 남겼다.

불꽃은 아팠지만, 보면 볼수록 흐릿한 의식이 오랜만에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기분이 나빴다.

후회라는 감정은 이미 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만큼 자신만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었으니.

"늦게 나타나셨습니다. 너무 늦게 말입니다."

그리웠다.

"그래서 내가 이겼어요."

아니, 그리워했었지.

"이제 곧 모든 게 끝납니다. 두고 보시죠."

후.

베로니아는 자신의 손가락을 태우는 보랏빛 어둠을 기어코 꺼트렸다.

만약 이번에도 부족하다면 다음번으로 넘어가면 그뿐이었다.

누가 그릇인지 알았다.

다음번에는 더 빨리, 확실히 죽일 수 있었다.

다만, 왜 이번은 다를까.

몇 번이고 반복했음에도 왜 이번만 다를까.

"그… 같잖은 흑마법사 때문인가?"

이름이 뭐더라.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흑마법사가 있었다.

하지만 알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결국, 세계는 다시 한번 더 시작됐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죽여드리겠습니다. 다시는 그릇이라는 이름으로, 누구에게도 희망이 될 수 없게. 그 이름조차 쓸 수 없게 말입니다."

베로니아는 스르르 뒤로 쓰러져 별도, 달도 없는 하늘을 바라만 보았다.

오늘은 자신을 증오한다며 시끄럽게 떠드는 어둠들조차 없어 너무도 조용해 베로니아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세계라는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에게 버림받을 네가 가엾다.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맴돌자 베로니아는 괴로움을 토하며 귀를 막아버렸다.

또 들려왔다.

망할 그 소리.

"꺼져! 꺼지란 말입니다! 제발, 사라지란 말입니다…!"

아아아악!

베로니아는 그 목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소리쳤다.

* * *

루시온은 잠깐 벽을 잡고 부르르 떨었다.

'…이 짓도 못 해 먹겠네.'

그림자 이동으로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거봐라. 내가 조금 쉬다가 움직이라고 했지?]

러쉘이 루시온을 쪼아대듯 말했다.

―어떡해! 루시온의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졌어!

라타가 그림자 속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면 도중에 중간 지점을 들리던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림자 이동 시, 같이 갈 사람이 늘어나면 당연히 어둠의 소모도 컸다.

스승님과 자신은 계약 때문에 먼 거리를 떨어질 수 없으니 흄 대신 체이톤을.

베델은 자신의 어둠 소비량을 줄이고자 체프란 저택에서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래. 할 수는 있네. 네가 지금처럼 힘들 뿐이지.]

"조금만 기다리면 어둠이 다시 찰 겁니다. 갈 때는 저놈도 없으니 좀 나을 테고요."

루시온은 크라언에게 쥐어 터진 체이톤을 바라보다 신경질이 나 그를 걷어찼다.

퍽!

읍!

어둠을 걷어 입을 풀어줬음에도 체이톤은 부들부들 떨며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기 바빴다.

"…하… 멜?"

루시온이 한 번으로 만족스럽지 못해 한 번 더 발을 놀리려던 차 헤인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홉! 헤인트다!

라타가 그림자 속에서 헤인트를 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퍽!

그러든 말든 루시온은 체이톤을 걷어찬 후에야 헤인트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 내 집까지 알고 있었어?"

"내가 네 집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비번인 것도… 하긴 그렇네."

헤인트는 가볍게 웃었다.

제국도 눈치채지 못한 정보를 다름 아닌 하멜이 주었으니까.

"오늘 용건은 저거야?"

헤인트가 루시온이 밟고 있는 놈을 손가락을 가리켰다.

"맞아. 이게 아니었으면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했겠지."

"…되게 지쳐 보이는데 물 한잔이라도 먹고 갈래?"

헤인트는 당연히 거절할 줄 알고 예의상 물어보았다.

"좋아. 잠깐 들어갈게. 밖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

평소와 달리 좀 덜 삐딱한 하멜의 태도에 헤인트는 소름이 쫙 끼쳤다.

진짜 엄청 지쳤나 보네.

헤인트는 눈동자를 크게 굴리다 문을 열었다.

"들어와."

"들고 가. 무거우니까."

루시온이 체이톤을 가리키자 헤인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다 놈을 둘러업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 * *

탁.

헤인트는 물 한 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그래서 누군데?"

"체이톤."

루시온의 대답에 헤인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밧줄로 꽁꽁 묶은 저놈을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체, 체, 체이톤이라고?"

"그래."

헤인트가 체이톤을 바라보는 틈에 루시온은 허겁지겁 물을 한 번 마시고 내려놓았다.

묘하게 아쉬워하는 눈치에도 루시온은 신경 쓰지 않고, 체이톤이 누구인지를 간략하게 요약해서 말해주었다.

헤인트는 도중에 다급히 물을 찾아 벌컥벌컥 들이키며 놀란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하멜이 또 비어버린 퍼즐 조각을 들고 왔다.

심지어 네바스트가 어떤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고 흑마법을 위해 미론스트 왕국의 백성들을 제물로 바치게 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볼때기를 수백 번 꼬집는다고 해도 마치 꿈에서 펼쳐진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래서 폐하께는 잘 말씀드려줬으면 좋겠어. 별수 없이 폐하의 이름을 팔아버렸거든."

"그 정도는 폐하께서도 이해하실 거야. 미론스트 왕국이 무너지면 곤란한 정도가 아니니까."

"어쨌든, 오늘은 좀 급해서 내가 왔고, 다음에는 조직원들이 너한테 찾아갈 거야."

모았던 자료를 예쁘게 정리해서 넘겨야 제국이 그다음을 위해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겠는가.

"나도 마침 크라언 씨한테 보고하려던 참이었는데 잘됐네. 조금만 더 앉았다가 가."

"타이밍 하나 좋았네."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헤인트의 말에 다시 앉았다.

루시온이 고갯짓을 살짝 하자 헤인트가 4황자, 세틸에게서 보고 받은 내용을 알려주었다.

"아무래도 뉴브라 왕국이 공허의 손을 버린 모양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뉴브라가 공허의 손을 버렸다고?"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인가 본데, 이제 와서 버린다고 뭐가 달라지려나.]

러쉘이 코웃음을 쳤다.

공허의 손을 버린들 묻은 때가 지는 건 아니었다.

"일단 정황상 그래. 뉴브라에서 네바스트에게 자기 나라를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공식적으로 서신을 보내 알렸거든."

뉴브라와 네바스트가 한편이 아니라는 건 조금 전 체이톤을 통해 확인했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일렀다.

체이톤은 어디까지나 하수인에 불과하니.

"둘이서 짜고 칠 수도 있잖아. 어때 보여?"

루시온이 물었다.

"뉴브라가 흑마법사 일로 많이. 아주 많이 곤욕을 치르고 있었거든. 소문이 가라앉던 순간에 네바스트가 공식으로 그 사실을 밝혔으니 손을 잡고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지."

헤인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뜩이나 뉴브라가 과거 전쟁에 패한 이후로 아직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다 제국의 변경을 자극하는 것도 멈추질 않아서 내부에서 반대도 많았는데, 그게 이번에 터져버렸나 봐."

[아니. 절대로 그냥 터졌을 리가 없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루시온?]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누군가 터트린 것이다.

누군지 뻔했다.

"그래서 제국에서 뉴브라에 있던 반 왕정파에게 공허의 손과 뉴브라의 왕이 공작했다는 증거를 넘겼나 보네?"

루시온이 핵심을 찌르자 헤인트는 살짝 헛숨을 들이마셨다.

거기까지 빠르게 도달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맞아. 폐하께서 딱 좋은 시기라며 정보를 흘리셨어. 우리도 지금 뉴브라의 왕 말고 그의 조카가 왕이 되면 좋잖아?"

"말도 잘 듣고."

"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화해라는 이름으로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수도 있으니."

"폐하께서 반 왕정파에 지원이라도 해줄 셈인가?"

"아니. 거기까진 아니야. 그냥 정보가 빠르게 퍼지도록 손을 쓸 뿐이지."

[그래. 거기까지 해야지. 너무 간섭하면 제국의 지원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배짱 놓을 테니까.]

"공허의 손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니다. 이건 내가 해야겠네."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로안한테 충분히 시간을 줬으니 뭐라도 알아냈겠지.

"그럼. 물 잘 마셨어."

"하멜."

"왜? 또 알려줘야 할 게 있어?"

뭐가 또 남은 건지.

어쩌면 4황자, 오웬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줄 셈일지도 몰라 루시온은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노비오는 몰라도 헤인트는 자신에게 알려줘야 했다.

뉴브라 왕국과 관련된 일이니까.

"4황자 오웬 테슬라 저하께서 얼마 전에 체포되셨어."

"황자가 체포됐다고?"

루시온은 오웬에게 사용했던 자신의 저주가 잘 발동됐다는 사실에 웃음꽃이 피어나기 직전이었다.

"보좌관을 독살했거든."

[보좌관이 뉴브라 놈이었나 보네.]

러쉘은 아예 비웃었다.

"저런. 평소 원한이 많았나 봐."

하지만 루시온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시치미를 떼며 웃음을 꾹 눌렀다.

"…혹시 너야? 네가 이런 거야, 하멜?"

214화. 열 받았어(3)

사뭇 진지해진 러쉘의 눈빛과 목소리에 루시온은 일부러 불쾌감을 드러냈다.

"뭘?"

"그 당시 체포현장에 나도 있었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로서는 도무지 지나칠 수 없는 걸 봤거든."

"흑마법을 말하는 건가?"

"그래. 그건 아마 저주였을 거야."

[와…. 헤인트가 진짜 예민하네. 저주가 발동된 후에 금방 사라지는데 그 찰나를 눈치챘다고?]

러쉘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 나인데?"

루시온이 컵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폐하께 4황자 저하의 일을 전한 건 너잖아."

"폐하께서 거기까지 말씀하신 걸 보니 널 아주 신뢰하시는가 보네?"

"말 돌리지 말고 말해."

헤인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루시온은 지금 이 상황이 점점 더 불쾌하게 다가왔다.

가뜩이나 피곤하기도 했지만, 헤인트의 물음이 곱게 들리지 않았다.

"폐하의 명령이야?"

"아니. 폐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황실 기사로서 너를 확인할 의무가 있어."

"그러니까 너는 내가 폐하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이러는 거다?"

여기서?

루시온은 컵을 꽉 쥐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자신을 향한 의심의 꽃이 다른 쪽으로 피어나버렸다.

만약 4황자에게 저주를 걸었다면 황제에게도 가능하지 않겠냐고 그렇게 묻고 있지 않은가.

[루시온. 진정해라. 아직....]

"아니. 당연히 네가 폐하를 공격하지 않겠지. 하지만 폐하께 흑마법을 사용할 가능성이… 없진 않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말해줘. 네가 그런 거야, 하멜?"

헤인트는 살짝 말꼬리를 흐리며 물었다.

[이런 미친 새끼! 지금 뚫린 입이라고 막말하네! 지금 그 말이 그 말이잖아!]

그 태도에 러쉘은 화를 냈고, 루시온은 회오리치는 실망감에 휩싸였다.

그래도 헤인트하고 자신의 관계가 달라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혼자만 착각한 모양이었다.

루시온은 치솟는 분노에 쥐고 있던 컵을 던졌다.

쨍그랑.

-홉!

라타가 깜짝 놀랐고, 헤인트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맞다고 하면 잠재된 위험을 생각해 지금 나를 죽이게?"

"하멜. 그 말이 아니잖...."

"내가 아니라고 하면.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하면 믿을 거야?"

"...."

헤인트는 망설였다.

"잠재된 위험? 그건 나보다 폐하를 지키는 기사들이 더 높겠지. 그런데 너는 지금 엉뚱하게도 나를 의심하고 있네."

"그 말이 아니야, 하멜. 나는...."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붉은 실 때문이라는 걸 알아도 참을 수가 없었다.

"헤인트. 너에게 편지를 보낸 건 바로 나야."

"뭐...?"

"크로니아도 마찬가지고."

루시온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자신은 늘 헤인트를 도왔다.

이렇게 하면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이렇게 하면 바뀌지 않을까 싶어서.

"…그 편지를 보낸 게 너라고?"

헤인트는 굳어지는 자신의 얼굴을 막을 수 없었다.

하멜이 성자 루시온을 도운 게 아닌가.

"…왜. 왜 나한테 보낸 건데? 왜 하필 나인데?"

황실 기사들은 많았다.

자신은 고작 그들 중 하나였다.

"착각하지 마. 내가 도운 건 성자니까."

루시온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성자를… 도왔다고?"

"그래. 그 편지가 누굴 도왔는지 너도 알고 있잖아?"

그 말에 헤인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천천히 흔들렸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히 루시온을 불렀다.

"하멜… 내가."

"그래, 내가 위험하겠지. 흑마법사라서. 아니, 정체를 알 수 없어서. 이 가면 속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까!"

원치 않아도 언성이 자꾸만 올라갔다.

헤인트가 황실 기사로서 본분을 했다고 해도 루시온은 분했다.

너무 애가 타서 눈가가 쓰라렸다.

이만큼 퍼주고도 부족하다니.

그럼 대체 얼마나, 얼마나 더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나라고 이딴 가면을 뒤집어쓰고, 병신 같이 인형극을 하는 게 아니라고! 나도, 나도 살고 싶다는데. 나 좀 죽이지 말라고. 나 때문에 내 사람들 다치지 말라고...."

러쉘의 눈이 커졌다.

루시온이 죽이려던 놈이 '그놈'이 아니라 헤인트였다니.

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루시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흑마법사가 뭐라고.

"얼마나 더 보여줘야 하는데? 얼마나 더 퍼줘야 믿을래?"

간절한 루시온의 목소리에 헤인트는 입이 바짝 말랐다.

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러버린 걸까.

루시온은 잠깐 실소했다.

"…빌어먹을. 진짜 개병신 같네. 퍼줘도 지랄. 해줘도 지랄만 떨고."

"하멜. 내가 실수했어. 내가...."

"왜? 언제 죽일지 각이나 재면서 이제는 편지를 보내서 소름 끼친다고 말해보지 그래?"

루시온이 빈정거림에도 헤인트는 솟구치는 미안함에 어쩌질 못했다.

이건 자신이 잘못했다.

결코, 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렸다.

"…미안해."

"꺼져."

루시온은 문으로 걸어갔다.

"하멜. 내가 말이 심했어."

헤인트가 루시온을 붙잡았다.

"내가 널 죽이는 일은 없어. 절대로…!"

루시온은 잠깐 깜짝 놀랐지만, 붉은 실은 끊어지질 않았다.

"거짓말쟁이 새끼."

루시온은 헤인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퍽!

헤인트가 일부러 맞아주어도 손맛이 그렇게 찰지진 않았다. 베델이 없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였다.

그대로 집 밖으로 나갔다.

-…루시오온?

라타가 조심스레 루시온을 불렀다.

순간 감정에 휩쓸리긴 했지만, 4황자에게 저주를 건 건 자신이 맞았다.

"화 안 났어. 그냥, …그냥 기분이 좀 그래."

망할 붉은 실.

망할 헤인트.

헤인트가 뒤따라오기 전에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 * *

"…그래서 일단 체이톤의 조사부터 시작될 거야. 여기 가져온 서류들을 정리해서 보내면 아마 그 속도가 빨라지겠지."

루시온은 흄이 꺼낸 서류를 가리키며 크라언에게 말했다.

크라언이 쉽게 말을 붙이지 못하고 루시온을 살폈다.

"왜 그래? 이해하지 못할 말이라도 있어?"

루시온은 크라언의 시선을 느끼며 물었다.

자신이 변경 너머에서 마치 뉴브라 왕국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듯 보이게 했다.

그 결과 카슨에게 배가 살짝 뚫렸지만.

어쨌든 그게 잊힐 무렵,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냐는 네바스트의 기습 공격에 뉴브라 왕국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때, 제국이 뉴브라 왕국 내부에 커지던 반 왕정파들에게 현재 뉴브라의 왕이 흑마법사와 결탁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정보를 흘렸고, 뉴브라에서 반 왕정파의 압박에 결국, 공허의 손을 버렸다.

이 사실을 이해 못 할 크라언은 아닐 텐데.

"…혹시 헤인트 님을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크라언의 물음에 흄도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헤인트하고 싸웠어. 라타가 봤어!

라타의 말에 흄이 움찔거렸다.

덩달아 라타도 루시온의 시선에 조용히 웅크렸다.

루시온은 잠깐 망설이다 대답했다.

"없는데?"

"이만 가면을 벗으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제야 흄이 목소리를 냈다.

"…아."

루시온은 잠깐 말을 멈췄다.

베델이 넌지시 러쉘을 보아도 그는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그냥. 헤로안을 만나야 해서."

"제가 불러오겠습니다."

루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흄이 말렸다.

오늘은 어둠을 많이 사용했다.

돌아오자마자 코피도 흘렸고, 이대로 가다가는 또 쓰러질 수도 있었다.

"맞습니다. 헤로안이 와야죠, 하멜 님이 가시면 안 됩니다."

크라언도 루시온을 말렸다.

딸깍.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미 흄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루시온은 잠깐 가면을 벗어서 자몽 에이드를 홀짝였다.

차가운 에이드를 따라 속이 확 풀어지는 듯했다.

"…혹시 우셨습니까?"

크라언은 루시온의 눈가가 붉어진 걸 보았다.

―응!

"아니."

루시온은 크라언에게 똑같이 물었다.

"울었어?"

"예. 제가 티가 잘 나지 않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물어봤어."

"하멜 님도 참 솔직하지 못하십니다."

크라언은 키득거리다 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직… 후련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체이톤은 아직 안 죽었으니까."

"신이… 진짜로 있을까요?"

"아니."

"감사합니다."

"왜 또 그런 말을 하는데? 너 그거 버릇되겠어."

"하멜 님께서 제 백성들의 명복을 빌어줘서,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그냥 바라만 봤으니까 그런 말 할 필요가 없어."

"예. 그게 감사한 겁니다. 제가 얼마나 입이 간지러운지 모르실 겁니다."

"슈트라하고 헬론에게 말 안 했고?"

루시온은 마카롱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아직요. 설명하기에 슈트라도 그렇고 헬론도 너무 바쁩니다."

"아. 새로운 지부 때문이지?"

새로운 지부가 생길 테니,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결계를 두르는 건 당연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설명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준비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크라언이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똑똑.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러쉘이 당장 튀어가 벽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엄, 사람들이 많이 왔어!

[진짜네? 루시온. 너 보러 조직원들이 왔네.]

라타와 키득거리는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마카롱을 하나 더 입에 넣고 가면을 다시 썼다.

"…아 좀, 떨어지라고."

문이 열리자 헤로안의 투덜거리는 목소리부터 들렸다.

이어 웅성거리는 소리에 크라언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헤로안만 오라고 했을 텐데?"

"맞습니다. 분명 저만 오라고 렌탈 씨가 알려줬는데...."

헤로안이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당장 와 루시온의 옆에 앉았다.

"지시하신 대로 헤로안 씨만 모셔오려고 했는데...."

흄이 난감함을 드러내며 루시온을 보았다.

헤로안에 이어 퀘이트와 라인트, 미엘라까지 모였다.

크라언의 인상이 더 구겨지고 말았다.

지금 루시온이 얼마나 피곤한데.

"다들 반갑습니다."

루시온은 마카롱을 다 삼킨 후에야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아무래도 할 일이 없나 보네요."

뒷말은 첫말보다 부드럽지 않았다.

순간 그들은 루시온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조직 내에서 가장 바쁜 사람을 꼽으라면 무조건 하멜이었다.

"…치사해요, 크라언 님."

똑같이 시선을 흘리고 있던 미엘라가 테이블에 차려진 디저트를 보며 크라언을 살짝 노려보았다.

자신도 루시온하고 나누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데.

"사적인...."

크라언은 말을 하다 멈췄다.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이 섞여 있지 않았던가.

"헤로안."

루시온은 그들을 보고 물러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추가로 시킬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온 김에 지시를 내리면 훨씬 더 편하겠지.

"예, 하멜 님!"

자신만 이름이 불리자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렸다.

무척 흡족했다.

"이제 결과를 내놓아야지."

헤로안에게 네바스트의 신관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었다.

비록 제국에서 밝혔지만, 혹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 지시를 거두지 않았다.

"예. 당연하죠. 제가 누굽니까?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헤로안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베델은 조금 더 그에게 다가갔다.

"아주 깜짝 놀랄 만한 정보를 건졌습니다."

그 말에 다시금 시선이 쏠리자 헤로안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시선을 받는 게 너무도 행복한 모양이었다.

루시온은 피식거리며 말했다.

"그 깜짝 놀랄 만한 게 뭔지 말해봐."

"네바스트에서 흑마법사를 발견했습니다."

"...?"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와....'

루시온은 웃음이 흘러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정보였다.

아마 몇 시간 전에.

"뭐야. 누굴 좀 데려와야 한다고 피터도 모자라 나하고 라인트의 부하를 상단과 함께 보내더니, 그 사람들이 흑마법사였어?"

퀘이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헤로안을 추궁했다.

"어, 맞아. 깜짝 놀랐지?"

헤로안은 퀘이트와 라인트를 보며 뿌듯함을 드러냈다.

만약 그들이 먼저 알았더라면 이런 깜짝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을 테지.

"헤로안. 흑마법사를 쉽게 발견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알았지?"

[그러니까. 헤로안이 흑마법사를 어떻게 발견한 거지? 웬만하면 알 수 없을 텐데?]

루시온이 느끼던 의문을 러쉘도 마찬가지로 느꼈다.

헤로안은 잠깐 어색하게 웃었다.

"이걸 말씀드려도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흑마법사가 제 부하에게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음, '어둠이 우리를 인도했다'라고 하던데요? …압니다. 제가 들어도 이상하다는 걸요. 그래서 이걸 보고드려야 할지 말지 망설였습니다."

[어둠이 아무래도 루시온을 돕기 시작한 모양이야.]

어둠이 이상할 정도로 루시온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러쉘은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베델이 물었다.

[죽음의 바다 때문에 루시온 공을 돕는 건가?]

[그렇겠지. 어둠은 어디에나 있으니, 루시온이 황제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누가 가장 필요한지를 알겠지. 입으로만 루시온이 좋다고 떠드는 것보다 훨씬 낫네.]

―응. 어둠은 진짜 루시온을 좋아해! 라타도 좋아하고!

라타 으쓱거리며 자랑스럽게 입을 놀렸다.

'케오르티아에서 내가 깼던 것 때문인가?'

루시온은 자신의 손을 잠깐 바라보았다.

케오르티아 왕국에서 검은 형체가 '부서진 세계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걸 본의 아니게 깨부쉈다.

어둠은 그 때문에 베로니아가 조금, 아주 조금 약해졌다고 알려주었고.

"하멜 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둠이 인도했다뇨?"

라인트가 망설이고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치 어둠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말 그대로입니다. 어둠이 아무래도 그들에게 말을 걸었나 봅니다."

루시온의 대답에도 라인트는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듯했다.

당연했다.

저 말을 이해할 수 있으면 라인트는 마법사가 아니라 흑마법사라고 불려야 할 테니까.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지?"

루시온은 헤로안을 보며 물었다.

"상단과 함께 신중히 데려오고 있습니다. 피터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녀석 진짜 튼튼하니까요. 아마 지금쯤 변경 쪽으로...."

헤로안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루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변경 쪽에 흑마법사를 죽이는 죽음의 기사가 있었다.

브로슨.

그 든든하던 죽음의 기사가 오늘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줄이야.

215화. 세 번째 이야기

"어디 가십니까?"

크라언이 물었다.

"좀… 위험해서요. 변경에 무서운 자가 있거든요."

"그럼, 같이 가겠습니다."

"맞습니다. 같이 가겠습니다."

크라언의 말에 동조하며 퀘이트와 라인트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시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이건 같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흑마법사들을 조직으로 보낼 테니, 그저 따뜻하게 맞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녁 시간까지 돌아가야 하기에 시간이 없었다.

지쳤어도 할 건 해야지.

"아. 만약 숫자가 맞지 않아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헤로안."

모든 사람이 선하지 않듯 흑마법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직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될 것 같은 자는 싹을 잘라버릴 셈이었다.

헤로안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처음 하멜을 만났을 때가 괜스레 떠오르는 탓이었다.

"조심하세요, 하멜 님. 햇님이가 있다고 막 구르면 안 돼요."

미엘라의 당부에 이어 줄줄이 튀어나오는 조심하라는 말에 루시온은 잠깐 멈춰 섰다.

언젠간 하려던 말이었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

"전 절 가장 아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푸흡.

러쉘이 가장 처음 웃었다.

"…이거 웃으면 됩니까?"

크라언이 바로 반색했다.

묘한 분위기에 루시온은 바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하멜 님이 농담했잖아요. 부끄러워서 가신 거 봐봐요. 그냥 웃어주면 되지, 왜 그래요?"

미엘라가 크라언을 타박하자 그는 아직 움직이지 않은 흄을 바라보았다.

"하멜 님이 말씀하신 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흘려들으시면 됩니다. 그럼, 이만."

흄은 고개를 숙인 뒤에 루시온을 따라갔다.

미엘라가 그대로 멈칫거리며 흄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농담이 아니라고?"

* * *

"브로슨."

라타가 단번에 브로슨을 찾았고, 바로 그의 앞으로 이동하자마자 루시온은 그를 불렀다.

[오.]

검을 닦던 브로슨이 루시온을 보며 반겼다.

[엄청 달라졌는데? 이전에는 병아리 같더니 이제는 제법 닭의 향기가 풍겨오네?]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모를 말에 루시온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화르륵.

브로슨이 가진 검은 구슬 때문에 흄의 눈동자가 타오르자 라타가 얼른 꺼주었다.

―후! 됐다. 라타가 껐어!

[보자. 달라졌다는 걸 자랑하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웬일이람? 검은 구슬을 가져가려고 온 것도 아닐 테고.]

브로슨은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다시 검을 닦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브로슨의 검은 구슬은 가장 마지막에 가져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