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좀 (4)
윌리엄은 염원의 탑에서 무언가를 빼돌리려 하고 있었다.
수정구의 존재는 아마도 빼돌린 물건을 넘길 놈이겠지.
그리고 수정구 속 존재는 분명 말했다.
'그 기술'이라고.
여기서 중요한 거는 윌리엄이 아직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는 거였다.
'탑의 고위 관계자도 찾지 못하는 기술이라....'
그건 다시 말해 염원의 탑의 핵심 기술이라는 소리였다.
으득-.
로이스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리며 날카로운 살기가 흘렀다.
그의 살기로 인해 주변 공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이는 조금 전 윌리엄이 느꼈던 영문 모를 한기의 정체였다.
"좀벌레 같은 새끼가...."
그가 느끼기에 윌리엄은 벌레와 다름없었다.
자신의 탑을 갉아먹는 더러운 해충.
딱 그 정도의 존재였다.
"후우...."
살짝 살기를 갈무리한 로이스는 생각에 잠겼다.
'놈을 어쩌지?'
당장이라도 가서 놈을 족치고 모든 걸 알아내고 싶었지만, 그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었다.
'하필 그 새끼도 정신 속성이네.'
로이스가 윌리엄에게서 자백을 받아 내는 것은 간단했다.
그에게 정신 속성 성법 중 하나를 쓰면 된다.
물론 그로 인해 윌리엄은 백치가 되겠지만, 로이스에게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윌리엄이 정신 속성 2티어의 법사라는 것.
'내가 아무리 탑티어라고 해도 그 자식에게 완벽한 자백을 받아 내기는 힘들어.'
자백이란 무의식의 저편까지 모든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윌리엄 정도의 정신 속성 법사라면 제 무의식 또한 조작이 가능해진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자백 성법을 건다면 공연히 꼬리만 자르게 되는 셈이다.
'몸통을 쳐야 한다. 아니, 놈에게 이어진 모든 걸 줄줄이 캐내야 해.'
윌리엄은 분명 그랬다.
우리라고. 내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그리 말할 정도라면 이번 일을 꾸미고 있는 게 그 혼자만이 아니란 뜻이었다.
최소 2명, 혹은 그 이상.
윌리엄 말고도 어떤 존재들이 염원의 탑 내부에서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조력자 내지는 공범이라....'
만약 이들을 쳐 내야 한다면 한꺼번에 모든 것을 뿌리째 뽑아 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괜히 놈들을 놀라게 해 숨을 시간만 벌어 주는 걸 테니까.
염원의 탑에 암약하고 있을 좀벌레들을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이게 다 내 업보로구나."
탑주의 자리가 오랫동안 공석이었고, 자신을 대리해야 하는 나머지 4명의 행방조차 묘연했다.
반면 염원의 탑은 너무도 거대했다.
방향성을 제시하고 채찍질을 해 줄 사람이 없으니 이런 비리가 일어나고 있는 거다.
'어쩌면 윌리엄은 겉으로 드러난 것 중 하나일지 모른다.'
몸집이 거대해진 만큼 어쩌면 염원의 탑은 내부에서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을지 몰랐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아도.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안에서부터 썩은 것들을 도려내야지."
자신이 직접 염원의 탑에 들어가 차근차근 썩은 부위를 찾아낸다.
그리고 단번에, 더는 썩은 살이 퍼지지 않게 완전히 도려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탑을 살필 필요가 있는데....'
탑의 구린내 나는 비리를 찾아내기 위한 잠입 수사.
그리고 그 해결책을 로이스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역시… 그거밖에 없겠지?"
눈을 빛낸 로이스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그가 떠나간 자리.
깨진 통신석 조각만이 남아 을씨년스런 풍경을 자아냈다.
* * *
로이스 없는 로이스 일행이 잡은 숙소.
널찍한 방에 다 같이 모인 일행.
칸과 카니, 켄드릭, 그리고 핀은 방 한가운데에 각종 술과 안주를 늘여 놓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타니아가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선생님은 언제 오실까요...."
오매불망 임을 기다리는 모습에 나비의 턱을 긁어 주고 있던 라비나가 혀를 찼다.
"넌 그분이 그렇게 좋냐?"
"그럼요. 제 첫사랑인 걸요!"
"그게 언제인데?"
"8살 때요."
"…너, 생각보다 조숙했구나."
아니, 이건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8살 때 품은 첫사랑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니.
"우리 선생님이 그때 얼마나 대단했는데요! 정말… 그걸 보고 안 반할 여자가 없을걸요?"
"뭘 했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막 요렇게 하니까, 오우거가 요만해졌어요!"
"…오우거를 주먹만 하게 아작 내는 걸 보고 반한 8살짜리 꼬맹이라는 설정은 좀… 이상하지 않아?"
"아니에요! 이건 제가 설명을 잘 못 하는 거지, 진짜로 라비나 언니가 그걸 봤으면 그런 소리 못 했을 거라니까요!"
"응, 그래."
라비나는 열변을 토하는 타니아에게 대충대충 건성으로 답했다.
그 뒤로도 타니아의 첫사랑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 무렵.
벌컥-.
"나 왔다!"
오늘은 웬일인지 정상적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로이스.
그의 등장에 일행이 시선이 돌아갔다.
"우리 로이 왔다! 어...?"
"선생니이임… 응?"
로이스의 등장에 빠르게 달려간 카니와 타니아의 앞으로 새하얀 종이가 내밀어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로이스는 다른 이들에게도 종이를 나누어 줬다.
라비나만 빼놓고 말이다.
그렇게 종이를 받은 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물었다.
"이게 뭐야?"
그들의 물음에 로이스가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답했다.
"초월학관 입학시험 등록원서!"
"...."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보내는 그의 모습에 일행은 할 말을 잃었고.
"…왜 나는 안 줘요?"
홀로 아무것도 받지 못한 라비나만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물론 뾰로통한 라비나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방바닥에 일렬로 엎드린 로이스 일행.
그들은 로이스가 준 입학 원서를 작성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들 쓰면서 들어."
서두를 뗀 로이스는 자신이 보고 겪은 바를 이야기해 주었다.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를 노니는 소리 위로 로이스의 잔잔한 목소리가 덧씌워졌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고.
"그런데요, 선생님."
타니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왜?"
"그 윌리엄이란 사람이 비리를 저지른 거랑 저희가 지금 이걸 쓰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요?"
"아주 좋은 질문이야."
핵심을 집는 타니아의 질문에 로이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가 초월학관에 들어가야 할 이유로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번 비리의 핵심 인물이 윌리엄이라는 거. 그가 초월학관의 교수로 있는 한, 우리는 그에게 접근해야만 해. 거기서부터 차근차근 감춰진 뿌리를 발굴해 나가야 하는 거지. 그리고 두 번째."
"...?"
"탑 내에 자행되고 있는 비리가 얼마나 많은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점진적으로 경험해 보는 게 좋아. 나는 이번 일로 제대로 결심했다. 내 탑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주 작은 부도덕과 부조리도 절대 좌시하지 않을 거라고!"
"선생님이야말로 부도덕과 부조리의 결정체잖습… 끄웩!"
켄드릭이 로이스에게 옆구리를 걷어차이고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물론 여기서 이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그가 생각 없이 입을 놀리다가 얻어터진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이제 이 정도 일은 그냥 소소한 일상에 불과했다.
옆구리를 부여잡고 끅끅-거리는 켄드릭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라비나가 손을 들었다.
"음… 로이스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 거 같은데요?"
"뭔데?"
"그 로이스 님의 계획이란 것도 결국 저희가 초월학관에 붙어야 가능한 거 아닌가요?"
"맞아."
"그런데 이거 시험… 언제인가요?"
"시간은 널널해."
"아니, 그래서 언제인데요?"
"이틀 뒤."
'시바 말로는… 이 시험 보려고 전 세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시험을 고작 이틀 공부해서 합격하겠다고?
라비나의 어이없다는 시선에도 로이스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걱정 마, 우리 실력으로 떨어지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니까."
초월학관의 시험 분야는 둘로 나뉜다.
조종반과 기술반.
조종반의 경우 조종술에 관한 간략한 이론만 밑받침이 되면 대부분 개개인의 무력으로 입학의 합격 여부가 결정된다.
로이스와 덱스터는 초월기를 무능력자도 움직일 수 있게 설계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개개인의 무력이 조종사 역량의 기준이 되고 만 것이다.
'뭐, 일반인보다는 초인들이 조종사에 적합한 것은 사실이니까.'
때문에 조종반에 지원하게 될 쌍둥이와 불꽃 남매까지.
약간의 이론 지식만 습득하면 그들이 떨어질 일은 절대 없었다.
다만 문제는 기술반에 지원하게 될 라비나였는데....
아무리 로이스라고 해도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라비나를 시험에 통과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런 사실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지 혼자만 입학 원서를 못 받았다고 삐죽 튀어나왔던 입술이 쑥 들어갔다.
대신 라비나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저기요. 로이스 님."
"왜."
"그럼 만약 나머지 분들 전부 다 붙으면… 전 혼자 뭐 해요?"
"걱정 마, 네 문제는 내가 다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
"아, 그리고 거기 전원 기숙사제라고 하니까, 떨어지면… 알아서들 해라."
"자, 잠깐만요! 그걸 왜 이제 얘기해요? 다들 기숙사 들어가면 진짜 전 뭐 하라고요?"
"아아, 걱정 말래두? 내가 다 생각해 둔 게 있다니까?"
"믿어도 되죠?"
"그렇게 못 믿겠으면 지금부터 공부해서 시험을 보든가."
"…그냥 믿어 볼게요."
공부하기는 싫었는지 라비나가 슬그머니 로이스의 시선을 회피했다.
이후 입학원서를 작성하는 소리만이 방 안에 작게 퍼져 나갔다.
사각 사각-.
이번 일이 흥미로워 미치겠다는 쌍둥이와 선생님과 떨어질 수 없으니 반드시 붙겠다며 의지를 보이는 타니아.
여전히 옆구리를 부여잡은 켄드릭과 혼자서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는 라비나까지.
그렇게 그날 로이스 일행의 초월학관입학이 결정되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초월학관 입학시험장 정문.
"와… 엄청나네."
"이게 전부, 시험 보러 온 사람들인가요?"
우글거리는 엄청난 인파에 놀란 불꽃 남매.
타니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저희 정말… 붙을 수 있는 거 맞죠?"
"거참, 별거 아니라니까."
"하지만...."
로이스가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타니아의 등을 팡팡 두들겨 주었다.
"자, 가자! 다들 시험 잘 보고, 나중에 보자!"
"넵!"
"네...."
"다들 힘내세요!"
라비나의 응원을 받으며 로이스를 필두로 일행이 당당히 시험장으로 들어섰다.
* * *
초월학관 입학시험이 시작된 지 8시간여.
면접장으로 향하던 해럴드는 주변을 가득 메운 인파를 보며 피식거렸다.
'올해도 조종반 면접을 맡은 교수들이 곡소리를 내겠군.'
초월학관 신입생의 정원은 조종반 100명, 기술반 100명이었다.
총 200명을 뽑는 시험의 응시자는 총합 4,124명.
성탑에 직접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고작 탑의 하위 교육기관인 학관의 입학시험에 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원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도 속내를 까 보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
총 응시자 4,124명.
그중 조종반 응시자가 3,500명이 넘었고 기술반은 고작 600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조종반에 비해 기술반의 응시자가 적은 이유는 사람들의 인식 때문이었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초월기를 움직이는 조종사들이 더 멋있게 보이는 법.
어린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열 중 아홉은 초월기 조종사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 대중의 인식 차이로 인해 초월기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우고 익히는 기술 법사의 수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리고 해럴드는 그런 대중의 인식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쯧. 그놈의 인식이 뭐라고. 그깟 칼쟁이들보다 기술 법사가 가장 멋있고 훌륭한 직종인 것을!'
다른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눈총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발언자가 해럴드라고 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는 누가 뭐라 해도 '마이스터'라는 영광된 칭호를 손에 거머쥔 이였으니까.
덜컹-.
총총걸음으로 나아간 해럴드가 면접장의 문을 열었다.
먼저 도착해 대기하고 있던 1급 도제 넷이 일어나 해럴드를 반겼다.
"마이스터, 오셨습니까."
"인사는 됐네, 앉지."
"예."
착석한 해럴드는 탁자에 쌓인 수북한 서류를 바라보았다.
"이게 이번 필기 합격자들의 서류인가? 총 몇 명이지?"
"이번 필기 합격자는 321명입니다."
"많기도 하군."
"그만큼 입시 지원자들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뜻이겠죠."
"이쪽으로 빼 둔 건 만점자들의 원서인가?"
"그렇습니다. 이번 시험의 만점자는 총 32명입니다."
"호오?"
해럴드가 흥미로운 얼굴로 만점자들의 서류를 하나하나 넘겨 보았다.
그렇게 넘어가던 서류가 한곳에서 멈췄다.
해럴드의 시선이 한 입시자의 지원 동기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지원 동기: 염원의 탑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다른 지원자들과 확연히 다른 지원 동기였다.
'로이스라… 재밌는 놈이군.'
한 번 피식거린 해럴드가 원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시작하지. 면접자들 들여보내게."
215화. 초월학관 (1)
무난히 필기시험을 통과한 로이스.
"흐아암."
그는 널찍한 의자에 걸터앉아 쩍쩍- 하품을 해 댔다.
"아… 언제 끝나냐."
아침 일찍 시작됐던 시험은 해가 서쪽으로 떨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사실 필기시험 자체는 2시간 만에 끝이 났다.
다만 문제는 채점과 합격자를 발표한 뒤, 다시 2차 면접자를 선별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는 점.
면접관들이 너무 바빠서 오늘밖에 시간이 안 된다나 뭐라나.
로이스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그럴 거였으면 미리 필기시험을 보든가 할 것이지.'
그랬다면 면접자들이 이렇게 기다리는 일도 없었을 거 아닌가.
속으로 투덜거린 로이스가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겉면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수첩.
로이스가 겉장을 펴니 그 안에는 이미 한 줄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윌리엄 조지기.]
로이스는 그 밑에 다른 문장을 추가했다.
[비효율적인 초월학관 입학시험 제도의 개선 필요.]
그렇게 두 번째 줄을 적어 놓은 로이스가 뿌듯한 얼굴로 수첩을 품에 갈무리했다.
'좋아, 좋아.'
앞으로 로이스의 수첩에는 그가 알아낸 탑의 온갖 문제점들이 적힐 예정이었다.
다시 말해 로이스의 수첩은 탑을 청렴하게 만들 미래의 청사진이자, 누군가에게는 살생부가 될 거라는 소리였다.
훗날, 이 수첩이 공개되는 순간 탑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닥치리라.
어떤 이에게는 일거리 폭탄이.
어떤 이에게는 서늘한 칼바람이 말이다.
중요한 수첩을 넣은 로이스가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애들은 잘하고 있으려나.'
일행과 떨어지게 된 지 8시간 가까이 됐다.
'조금 걱정이 되네.'
물론 그가 걱정하는 거는 일행이 아니었다.
일행에게 휘말릴 주변이 걱정될 뿐.
'…적당히들 해야 할 텐데.'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은 최대한 튀지 않게 조용히 처리해야 할 것들.
너무 많은 관심을 끌게 된다면 앞으로 행동에 제약이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콰앙-.
저 멀리, 어딘가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폭음이 들려온 위치는 다름 아닌 조종반 시험장.
로이스의 가슴 한쪽에서 슬금슬금 불안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설마 하는 심정의 그는 작은 통신석을 꺼내 들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저쪽에 핀을 붙여 둔 것이다.
그가 막 통신석을 활성화하려는 찰나.
"면접을 시작합니다. 1번부터 10번 들어오세요."
면접관의 이야기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쾅-.
그리고 또 들려온 폭음.
분명 그의 촉이 말하고 있었다.
이건 쌍둥이 내지는 제자들의 소행이라고.
하지만 차마 확인을 할 시간이 없었다.
그의 면접 번호가 10번이었으니 말이다.
"제발… 적당히 좀 해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로이스는 안내자를 따라 자리를 이동했다.
* * *
널찍한 면접장.
준비된 의자에 앉은 로이스는 면접관들의 면면을 살폈다.
40대로 보이는 남녀 4명과 노인 한 명.
노인에게서는 그 누가 봐도 이번 면접에서 가장 지위 높은 이란 것을 알 수 있을 강렬함이 뿜어져 나왔다.
'오? 제법이네?'
허연 수염을 기른 노인의 눈빛에서 로이스는 짙은 고집을 느낄 수 있었다.
평생을 한 가지에 몰두한 이만 가질 수 있는 장인의 눈빛이었다.
로이스가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바로 면접이 시작됐다.
가벼운 자기소개 이후 기술 분야에 관한 이해도를 알아보기 위한 질문.
'지구나 여기나 면접은 별반 다를 게 없구나.'
그리고 면접을 보는 응시자들의 반응까지.
누가 봐도 외웠다는 게 뻔히 보이는 답변을 달달 털어 놓는 이.
덜덜 떨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
능수능란하게 답변을 하는 이까지.
그렇게 한 차례 면접이 지나가고 로이스의 차례가 왔다.
"10번 지원자.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로이스라고 합니다."
그것을 끝으로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이에 1급 도제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끝입니까?"
"예."
"다른 지원자들이 열심히 준비해 온 것을 보셨을 텐데요? 이렇게 되면 10번 지원자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갈 수도 있습니다만?"
"음…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저는 이 자리에서 제 출신 성분 같은 걸 내세우기 위해 온 게 아니라서요. 초월학관에 들어가는 데 그런 게 필요합니까? 출신 성분보다는 제가 가진 초월기에 관한 지식이 더 중요한 게 아닌가요?"
로이스의 이야기에 가운데 앉은 노인, 해럴드가 흥미를 보였다.
"로이스 군이라고 했나?"
"네."
"그 말은 실력으로 자신을 입증하겠다… 뭐, 그런 말인가?"
"정확히 보셨습니다."
"패기는 좋군. 과연 실력이 그 패기를 뒤받쳐 줄지는 모르겠지만."
싸늘한 질책이었다.
그럼에도 로이스는 이를 미소로 답했다.
"충분할 겁니다."
"호오? 좋군. 그럼 내 물어보지. 간혹 초월기가 조종자의 의지와는 다르게 0.5초 정도 느리게 왼쪽 다리가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이지?"
"딱 0.5초인가요?"
"그렇네."
"그럼 좌골하갑 인근의 신경 전달 회로가 마모된 거네요."
"...?!"
조금의 멈춤이 없는 답변.
거기에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에 해럴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신경 전달 회로가 마모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죠. 외부의 충격 혹은 노후. 하지만 대부분이 회로 내구도 이상의 출력값을 지정해서죠. 무식하게 출력만 높여서 나오는 문제입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칼같은 답이 이어졌다.
해럴드의 눈에 흥미로움이 떠올랐다.
"그럼...."
해럴드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후, 로이스와 해럴드의 질의응답의 시간은 한동안 계속됐다.
이곳이 면접 자리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둘만의 대화가 오간 것이다.
다른 면접자들은 물론 면접관들조차 멍하니 둘을 바라보았다.
한편, 해럴드에게 질문을 받는 로이스의 입꼬리는 살짝 휘어 있었다.
'이거… 재밌네.'
지난 세월 홀로 연구를 해 왔었기에 누군가와 초월기에 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로이스는 지금 이 시간이 제법 흥미롭고 즐거웠다.
그리고.
'저 눈빛....'
고집스럽게 외길을 걸어온 장인의 눈빛.
저 노인과의 대화는 먼 과거, 덱스터와 초월기를 제작하며 나눴던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이후로도 몇 번의 질의응답이 오가고.
해럴드가 감탄하는 눈빛으로 로이스를 바라보았다.
"자네… 누구에게 배웠는가?"
"독학했습니다만."
"…훌륭하군."
그 말로 끝이었다.
마이스터의 입에서 나온 훌륭하다는 표현.
이는 합격의 증거나 다름없었다.
다른 면접관과 면접자 중 이를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자신을 향한 칭찬에 로이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앞으로도 그리 정진해 주길 바라네. 그럼 이걸로 면접을 끝내지. 다들 나가 보게."
그 말을 끝으로 10명의 면접자가 우르르 밖으로 빠져나갔다.
달칵-.
"그, 그럼 다음 면접자들 불러오겠습니다."
"그러게."
대기하고 있던 4급 도제가 황급히 다른 면접자를 부르러 밖으로 나간 사이.
그때까지도 해럴드의 시선은 로이스의 지원 원서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깔끔하게 면접을 마치고 나온 로이스.
다른 면접자들이 불안, 아쉬움 등의 얼굴을 할 때.
그는 너무도 개운한 얼굴이었다.
"으으, 끝났다."
지겨웠던 면접이 끝난 것에 대한 즐거움만이 가득한 로이스.
'다른 애들은 끝났으려나.'
그가 막 다른 일행을 찾아 떠나려는 찰나.
"응?"
로이스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큼지막한 노트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시바가 있었다.
'필기는 붙은 모양이네.'
아마 저 노트에 예상 면접 질문이 가득 쓰여 있겠지.
'힘내 보라고.'
그의 곁을 스치며 로이스는 가볍게 속으로 응원을 해 주었다.
잠시 뒤.
"응?"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시바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뭐였지?"
아무 일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이내 다시 노트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다른 곳에 정신을 팔릴 틈이 없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이 시간, 한 글자라도 더 외워야 했다.
웅얼웅얼-.
그렇게 시바는 다시금 노트로 정신을 집중했다.
한편, 시험장을 떠나 밖으로 빠져나온 로이스는 통신석을 꺼내 들었다.
"나야, 애들은?"
짧은 통신 신호가 가고 곧 답이 들려왔다.
[아, 로이스 님! 여기도 다 끝났어요! 지금 정문 앞에 모여 있어요!]
"그래? 금방 갈게."
로이스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곧 그는 우르르 몰려 있는 일행을 발견하고 물었다.
"어땠어?"
그 물음에 쌍둥이가 입을 모아 답했다.
"별거 아니던데?"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똑같이 답하는 녀석들.
그리고 그 옆에서 연이어 답이 들려왔다.
"한 방에 끝냈어요!"
"저도요!"
심각할 정도로 쾌활한 그들의 반응에 로이스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들의 시험 내용을 물었다.
잠시 설명이 이어지고.
"한 방이...."
로이스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 한 방이었냐?"
조종반의 시험은 기술반보다 더욱더 간단했다.
두꺼운 철판을 가져다 놓고 속성력을 이용해 타격하는 방식.
그렇게 철판에 남은 흔적을 통해 합격 여부가 가려지는 거였다.
기술반과 비교해 몇 배나 많이 몰린 응시자들 사이에서 빠르게 실력자를 골라내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
그리고 그런 시험에서 쌍둥이와 불꽃 남매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바로 한 방에 철판을 아작 내 버린 것.
'아까 그 폭음… 역시 너희 짓이었냐?!'
'혹시나'가 '역시나'라더니.
로이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적당히 하라고 했잖아...."
"저, 적당히 했습니다."
"진짜 살살 쳤어...."
칸과 켄드릭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고.
"아, 나는 칸이랑 켄드릭이 먼저 그래서 따라 한 거야."
"저, 저도요!"
카니와 타니아는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돌렸다.
그들의 반응에 로이스는 혀를 내둘렀다.
'뭐… 그 난리를 쳤으니 떨어질 일은 없겠지.'
시험의 결과는 이틀 뒤 나올 것이지만,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로이스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이틀 뒤, 시험장의 정문에 붙은 합격자 대자보에 로이스 일행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다만.
[기술반 입시생 수석: 로이스]
[조종반 입시생 수석: 칸, 카니, 켄드릭, 타니아.]
가장 상단에 떡하니 박혀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뿐.
로이스의 이름을 본 칸과 카니의 눈이 샐쭉하게 변했다.
"로이… 우리한테는 적당히 하라고 해놓고는...."
"자기도 적당히 안 했으면서."
그들의 눈빛 공세에 당황한 로이스가 외쳤다.
"나, 난 적당히 한 거야! 다만 다른 애들이 너무 수준이 떨어진 거지!"
"응, 그래. 그렇겠지."
"우리도 적당히 한 거야."
몰아붙이는 쌍둥이의 옆에서 불꽃 남매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합동 공격에 로이스는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깊은 한탄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에라이...."
아무래도 조용한 학관 생활은 물 건너간 거 같았다.
그러면.
'노선을 바꿔야겠네.'
'적당히'가 안 된다면 적당히 최선을 다하면 될 뿐.
로이스가 그렇게 고개를 주억거릴 때.
"저기요...."
한쪽에서 작은 손이 올라왔다.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 속에 손의 주인, 라비나가 눈을 동그랗게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다른 일행은 전부 초월학관으로 들어가 버린 상황.
혼자만 밖에 남게 되는 상황이 확정됐으니 라비나로서도 슬슬 불안감이 든 것이다.
우물쭈물 눈치를 보는 그녀에게 로이스가 웃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넌… 이거부터 써."
팔랑팔랑 흔들리는 한 장의 서류.
이를 받아 든 라비나가 첫 줄을 읽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곧 그녀가 와락 인상을 썼다.
"시, 싫어요! 이게 뭐예요!"
라비나의 거부에 로이스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싫으면 어쩌게?"
"그… 이,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나요?"
"네가 알아서 찾아보든가."
"믿으라면서요! 자기만 믿으라면서!"
"그래서 이렇게 해결책을 제시해 줬잖아?"
"너무해!"
라비나의 절망 가득한 목소리가 사이론의 상공에 쩌렁쩌렁 울렸다.
싫다고 떼를 쓰는 라비나를 보며 로이스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저렇게 싫다고 하면서도 결국 라비나가 승낙하리란 것을.
'튕기기는.'
로이스는 라비나를 보며 낄낄-거렸다.
그렇게 최종 합격 통보가 있고 열흘이 흐른 뒤.
로이스 일행 전체가 초월학관에 들어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