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1

215화. 초월학관 (1)

무난히 필기시험을 통과한 로이스.

"흐아암."

그는 널찍한 의자에 걸터앉아 쩍쩍- 하품을 해 댔다.

"아… 언제 끝나냐."

아침 일찍 시작됐던 시험은 해가 서쪽으로 떨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사실 필기시험 자체는 2시간 만에 끝이 났다.

다만 문제는 채점과 합격자를 발표한 뒤, 다시 2차 면접자를 선별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는 점.

면접관들이 너무 바빠서 오늘밖에 시간이 안 된다나 뭐라나.

로이스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그럴 거였으면 미리 필기시험을 보든가 할 것이지.'

그랬다면 면접자들이 이렇게 기다리는 일도 없었을 거 아닌가.

속으로 투덜거린 로이스가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겉면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수첩.

로이스가 겉장을 펴니 그 안에는 이미 한 줄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윌리엄 조지기.]

로이스는 그 밑에 다른 문장을 추가했다.

[비효율적인 초월학관 입학시험 제도의 개선 필요.]

그렇게 두 번째 줄을 적어 놓은 로이스가 뿌듯한 얼굴로 수첩을 품에 갈무리했다.

'좋아, 좋아.'

앞으로 로이스의 수첩에는 그가 알아낸 탑의 온갖 문제점들이 적힐 예정이었다.

다시 말해 로이스의 수첩은 탑을 청렴하게 만들 미래의 청사진이자, 누군가에게는 살생부가 될 거라는 소리였다.

훗날, 이 수첩이 공개되는 순간 탑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닥치리라.

어떤 이에게는 일거리 폭탄이.

어떤 이에게는 서늘한 칼바람이 말이다.

중요한 수첩을 넣은 로이스가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애들은 잘하고 있으려나.'

일행과 떨어지게 된 지 8시간 가까이 됐다.

'조금 걱정이 되네.'

물론 그가 걱정하는 거는 일행이 아니었다.

일행에게 휘말릴 주변이 걱정될 뿐.

'…적당히들 해야 할 텐데.'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은 최대한 튀지 않게 조용히 처리해야 할 것들.

너무 많은 관심을 끌게 된다면 앞으로 행동에 제약이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콰앙-.

저 멀리, 어딘가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폭음이 들려온 위치는 다름 아닌 조종반 시험장.

로이스의 가슴 한쪽에서 슬금슬금 불안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설마 하는 심정의 그는 작은 통신석을 꺼내 들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저쪽에 핀을 붙여 둔 것이다.

그가 막 통신석을 활성화하려는 찰나.

"면접을 시작합니다. 1번부터 10번 들어오세요."

면접관의 이야기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쾅-.

그리고 또 들려온 폭음.

분명 그의 촉이 말하고 있었다.

이건 쌍둥이 내지는 제자들의 소행이라고.

하지만 차마 확인을 할 시간이 없었다.

그의 면접 번호가 10번이었으니 말이다.

"제발… 적당히 좀 해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로이스는 안내자를 따라 자리를 이동했다.

* * *

널찍한 면접장.

준비된 의자에 앉은 로이스는 면접관들의 면면을 살폈다.

40대로 보이는 남녀 4명과 노인 한 명.

노인에게서는 그 누가 봐도 이번 면접에서 가장 지위 높은 이란 것을 알 수 있을 강렬함이 뿜어져 나왔다.

'오? 제법이네?'

허연 수염을 기른 노인의 눈빛에서 로이스는 짙은 고집을 느낄 수 있었다.

평생을 한 가지에 몰두한 이만 가질 수 있는 장인의 눈빛이었다.

로이스가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바로 면접이 시작됐다.

가벼운 자기소개 이후 기술 분야에 관한 이해도를 알아보기 위한 질문.

'지구나 여기나 면접은 별반 다를 게 없구나.'

그리고 면접을 보는 응시자들의 반응까지.

누가 봐도 외웠다는 게 뻔히 보이는 답변을 달달 털어 놓는 이.

덜덜 떨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

능수능란하게 답변을 하는 이까지.

그렇게 한 차례 면접이 지나가고 로이스의 차례가 왔다.

"10번 지원자.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로이스라고 합니다."

그것을 끝으로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이에 1급 도제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끝입니까?"

"예."

"다른 지원자들이 열심히 준비해 온 것을 보셨을 텐데요? 이렇게 되면 10번 지원자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갈 수도 있습니다만?"

"음…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저는 이 자리에서 제 출신 성분 같은 걸 내세우기 위해 온 게 아니라서요. 초월학관에 들어가는 데 그런 게 필요합니까? 출신 성분보다는 제가 가진 초월기에 관한 지식이 더 중요한 게 아닌가요?"

로이스의 이야기에 가운데 앉은 노인, 해럴드가 흥미를 보였다.

"로이스 군이라고 했나?"

"네."

"그 말은 실력으로 자신을 입증하겠다… 뭐, 그런 말인가?"

"정확히 보셨습니다."

"패기는 좋군. 과연 실력이 그 패기를 뒤받쳐 줄지는 모르겠지만."

싸늘한 질책이었다.

그럼에도 로이스는 이를 미소로 답했다.

"충분할 겁니다."

"호오? 좋군. 그럼 내 물어보지. 간혹 초월기가 조종자의 의지와는 다르게 0.5초 정도 느리게 왼쪽 다리가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이지?"

"딱 0.5초인가요?"

"그렇네."

"그럼 좌골하갑 인근의 신경 전달 회로가 마모된 거네요."

"...?!"

조금의 멈춤이 없는 답변.

거기에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에 해럴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신경 전달 회로가 마모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죠. 외부의 충격 혹은 노후. 하지만 대부분이 회로 내구도 이상의 출력값을 지정해서죠. 무식하게 출력만 높여서 나오는 문제입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칼같은 답이 이어졌다.

해럴드의 눈에 흥미로움이 떠올랐다.

"그럼...."

해럴드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후, 로이스와 해럴드의 질의응답의 시간은 한동안 계속됐다.

이곳이 면접 자리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둘만의 대화가 오간 것이다.

다른 면접자들은 물론 면접관들조차 멍하니 둘을 바라보았다.

한편, 해럴드에게 질문을 받는 로이스의 입꼬리는 살짝 휘어 있었다.

'이거… 재밌네.'

지난 세월 홀로 연구를 해 왔었기에 누군가와 초월기에 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로이스는 지금 이 시간이 제법 흥미롭고 즐거웠다.

그리고.

'저 눈빛....'

고집스럽게 외길을 걸어온 장인의 눈빛.

저 노인과의 대화는 먼 과거, 덱스터와 초월기를 제작하며 나눴던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이후로도 몇 번의 질의응답이 오가고.

해럴드가 감탄하는 눈빛으로 로이스를 바라보았다.

"자네… 누구에게 배웠는가?"

"독학했습니다만."

"…훌륭하군."

그 말로 끝이었다.

마이스터의 입에서 나온 훌륭하다는 표현.

이는 합격의 증거나 다름없었다.

다른 면접관과 면접자 중 이를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자신을 향한 칭찬에 로이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앞으로도 그리 정진해 주길 바라네. 그럼 이걸로 면접을 끝내지. 다들 나가 보게."

그 말을 끝으로 10명의 면접자가 우르르 밖으로 빠져나갔다.

달칵-.

"그, 그럼 다음 면접자들 불러오겠습니다."

"그러게."

대기하고 있던 4급 도제가 황급히 다른 면접자를 부르러 밖으로 나간 사이.

그때까지도 해럴드의 시선은 로이스의 지원 원서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깔끔하게 면접을 마치고 나온 로이스.

다른 면접자들이 불안, 아쉬움 등의 얼굴을 할 때.

그는 너무도 개운한 얼굴이었다.

"으으, 끝났다."

지겨웠던 면접이 끝난 것에 대한 즐거움만이 가득한 로이스.

'다른 애들은 끝났으려나.'

그가 막 다른 일행을 찾아 떠나려는 찰나.

"응?"

로이스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큼지막한 노트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시바가 있었다.

'필기는 붙은 모양이네.'

아마 저 노트에 예상 면접 질문이 가득 쓰여 있겠지.

'힘내 보라고.'

그의 곁을 스치며 로이스는 가볍게 속으로 응원을 해 주었다.

잠시 뒤.

"응?"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시바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뭐였지?"

아무 일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이내 다시 노트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다른 곳에 정신을 팔릴 틈이 없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이 시간, 한 글자라도 더 외워야 했다.

웅얼웅얼-.

그렇게 시바는 다시금 노트로 정신을 집중했다.

한편, 시험장을 떠나 밖으로 빠져나온 로이스는 통신석을 꺼내 들었다.

"나야, 애들은?"

짧은 통신 신호가 가고 곧 답이 들려왔다.

[아, 로이스 님! 여기도 다 끝났어요! 지금 정문 앞에 모여 있어요!]

"그래? 금방 갈게."

로이스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곧 그는 우르르 몰려 있는 일행을 발견하고 물었다.

"어땠어?"

그 물음에 쌍둥이가 입을 모아 답했다.

"별거 아니던데?"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똑같이 답하는 녀석들.

그리고 그 옆에서 연이어 답이 들려왔다.

"한 방에 끝냈어요!"

"저도요!"

심각할 정도로 쾌활한 그들의 반응에 로이스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들의 시험 내용을 물었다.

잠시 설명이 이어지고.

"한 방이...."

로이스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 한 방이었냐?"

조종반의 시험은 기술반보다 더욱더 간단했다.

두꺼운 철판을 가져다 놓고 속성력을 이용해 타격하는 방식.

그렇게 철판에 남은 흔적을 통해 합격 여부가 가려지는 거였다.

기술반과 비교해 몇 배나 많이 몰린 응시자들 사이에서 빠르게 실력자를 골라내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

그리고 그런 시험에서 쌍둥이와 불꽃 남매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바로 한 방에 철판을 아작 내 버린 것.

'아까 그 폭음… 역시 너희 짓이었냐?!'

'혹시나'가 '역시나'라더니.

로이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적당히 하라고 했잖아...."

"저, 적당히 했습니다."

"진짜 살살 쳤어...."

칸과 켄드릭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고.

"아, 나는 칸이랑 켄드릭이 먼저 그래서 따라 한 거야."

"저, 저도요!"

카니와 타니아는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돌렸다.

그들의 반응에 로이스는 혀를 내둘렀다.

'뭐… 그 난리를 쳤으니 떨어질 일은 없겠지.'

시험의 결과는 이틀 뒤 나올 것이지만,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로이스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이틀 뒤, 시험장의 정문에 붙은 합격자 대자보에 로이스 일행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다만.

[기술반 입시생 수석: 로이스]

[조종반 입시생 수석: 칸, 카니, 켄드릭, 타니아.]

가장 상단에 떡하니 박혀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뿐.

로이스의 이름을 본 칸과 카니의 눈이 샐쭉하게 변했다.

"로이… 우리한테는 적당히 하라고 해놓고는...."

"자기도 적당히 안 했으면서."

그들의 눈빛 공세에 당황한 로이스가 외쳤다.

"나, 난 적당히 한 거야! 다만 다른 애들이 너무 수준이 떨어진 거지!"

"응, 그래. 그렇겠지."

"우리도 적당히 한 거야."

몰아붙이는 쌍둥이의 옆에서 불꽃 남매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합동 공격에 로이스는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깊은 한탄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에라이...."

아무래도 조용한 학관 생활은 물 건너간 거 같았다.

그러면.

'노선을 바꿔야겠네.'

'적당히'가 안 된다면 적당히 최선을 다하면 될 뿐.

로이스가 그렇게 고개를 주억거릴 때.

"저기요...."

한쪽에서 작은 손이 올라왔다.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 속에 손의 주인, 라비나가 눈을 동그랗게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다른 일행은 전부 초월학관으로 들어가 버린 상황.

혼자만 밖에 남게 되는 상황이 확정됐으니 라비나로서도 슬슬 불안감이 든 것이다.

우물쭈물 눈치를 보는 그녀에게 로이스가 웃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넌… 이거부터 써."

팔랑팔랑 흔들리는 한 장의 서류.

이를 받아 든 라비나가 첫 줄을 읽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곧 그녀가 와락 인상을 썼다.

"시, 싫어요! 이게 뭐예요!"

라비나의 거부에 로이스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싫으면 어쩌게?"

"그… 이,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나요?"

"네가 알아서 찾아보든가."

"믿으라면서요! 자기만 믿으라면서!"

"그래서 이렇게 해결책을 제시해 줬잖아?"

"너무해!"

라비나의 절망 가득한 목소리가 사이론의 상공에 쩌렁쩌렁 울렸다.

싫다고 떼를 쓰는 라비나를 보며 로이스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저렇게 싫다고 하면서도 결국 라비나가 승낙하리란 것을.

'튕기기는.'

로이스는 라비나를 보며 낄낄-거렸다.

그렇게 최종 합격 통보가 있고 열흘이 흐른 뒤.

로이스 일행 전체가 초월학관에 들어섰다.

* * *

입학식이 끝나고.

거대한 강당에서 수많은 사람이 빠져나왔다.

그중 절반은 검은 옷을, 나머지 절반은 흰옷을 입고 있었다.

그 속에는 흰 제복을 입은 로이스도 섞여 있었으니.

'신입생 대표 선서 같은 건 없어서 좋네.'

어쩌다 보니 수석을 차지해서 살짝 걱정했는데 다행히 귀찮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선서가 있었다면 기껏 붙은 초월학관을 퇴학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을지도 몰랐다.

그때 조교로 보이는 이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조종반은 이쪽으로!"

그에 따라 검은 제복을 입은 조종반 신입생들이 우르르 움직였고.

"기술반은 이쪽으로!"

이번에는 흰 제복의 신입생들이 우르르 이동했다.

'분반이라....'

조종반과 기술반의 커리큘럼이 다를 테니 이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만....

"말도 안 돼! 왜 우리랑 로이가 떨어져야 하는데?!"

"이건 음모야!"

"서, 선생니이이임!"

입학식 정문에서 로이스와 떨어지기 싫다며 쌍둥이와 타니아가 칭얼거린 것은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다.

'켄드릭, 저놈은 나랑 떨어진다고 좋아하는 거 같네.'

일단 그건 다음에 만나면 응징해야겠다고 넘긴 그는 잽싸게 다른 흰 제복 신입생들 사이에 숨어들었다.

"선생님이임!"

"로이이이!"

마치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처럼 처절하게 외쳐 대는 일행을 보고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죽했으면 다른 신입생들이 걸음을 멈추고 그들만 빤히 보고 있겠는가.

"빨리빨리 갑시다. 어서!"

로이스가 멈춰 선 기술반 신입들을 재촉했다.

빠르게 멀어지는 조종반과 기술반.

뒤에서 울려 대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자 로이스는 그제야 안도하며 주변을 구경했다.

그렇게 약 5분여를 걸었을까.

"여기가 앞으로 너희가 1년간 사용해야 할 하급동이다. 저쪽으로는 중급반과 상급반 선배들이 있으니 괜히 들어가서 눈치 보이는 짓 하지 말아라."

조교는 간략하게 건물에 관한 설명을 해 주었다.

"하급생들은 25명씩 4개 반으로 운용되니 게시판에 붙은 반 배치를 보고 알아서 이동해라. 아, 반 배치 옆에 있는 숫자는 기숙사 방 배치다. 잘 외워 뒀다가 알아서 기숙사로 들어가도록."

그것을 끝으로 조교가 자리를 떴다.

곧 기술반 신입들이 우르르 게시판으로 몰려들었다.

로이스는 멀찍이서 게시판을 살폈다.

굳이 저렇게 가까이 가지 않아도 그의 눈에는 충분히 게시판의 내용이 보였다.

'역시 1반이네.'

척 보면 척.

이건 분명 입학 성적순으로 반을 배치한 것이리라.

더는 볼 게 없다고 여긴 로이스는 곧장 1반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왔는지 텅텅 비어 있는 강의실.

로이스의 눈이 반짝였다.

'여기가 내 자리지!'

그가 선점한 자리는 창가에 붙은 가장 뒷자리.

여기서 조용히 엎드려 잠이 들면 완벽한 학교생활의 완성이다.

그가 막 책상에 엎드리기 무섭게 다른 신입생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잠시 뒤.

드르륵-.

자신의 옆자리 의자가 끌려 나가는 소리에 로이스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너무도 낯익은 기운에 그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는 로이스와 눈이 마주친 이도 마찬가지였다.

한참 뒤, 그들이 서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로, 로이스 님?"

"…씨바?"

216화. 초월학관 (2)

로이스의 옆자리를 차지한 이는 다름 아닌 시바였다.

시바가 밝게 웃는 얼굴로 외쳤다.

"여, 역시 로이스 님이셨군요! 세상에! 입시생 수석에 이름이 있어서 설마 했더니...!"

수석이란 소리에 좌중의 시선이 우르르 로이스에게로 몰려들었다.

이에 살짝 한숨을 내쉰 로이스.

"…좀 조용히 하지?"

"아… 죄, 죄송합니다."

"그것보다 네가 여기 왜 있냐?"

"네? 그야 당연히 합격했으니 여기 있죠."

"반 배치 성적순으로 자른 거 아냐?"

"아마 맞을걸요?"

"그런데 네가 왜 여기 있어."

"...."

그러니까 다시 말해, 네 실력이 1반에 있을 정도냐 이 말이었다.

로이스의 무시 발언에 시바가 시무룩하게 답했다.

"딱 턱걸이로 25등 했습니다...."

"제법이네."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로이스 님이야말로 여긴 어찌? 분명 여행가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는데 일정이 좀 변경됐어."

"학관은 어떻게 붙으신 겁니까?"

"어떻게 붙긴 뭘 어떻게 붙어? 실력으로 붙었지. 딱히 어려운 것도 없더만. 원래 시험은 평소 실력으로 보는 거야."

"크흠."

로이스의 진심 가득한 말에 시바가 헛기침했다.

자신의 얼굴에 날아드는 '재수 없는 놈'이란 시선에도 로이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책상에 엎드렸다.

"아무튼, 난 잔다."

"아, 넵! 주무십쇼."

하지만 로이스는 잘 수 없었다.

"로이스 님, 로이스 님. 저쪽 친구가 차석이라고 합니다. 저 친구는 그레이엄 공방장의 손녀라고 하고요. 아, 그리고 저 중에 마이스터의 집안사람도 있다고 했는데… 아, 저 친구인가 봅니다!"

엎드린 로이스의 귀에 쉼 없이 재잘거리는 시바.

로이스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넌 대체 그걸 어디서 알아 온 거냐?"

"하하, 동급생이기 이전에 경쟁자가 될 이들 아닙니까? 사전 정보 수집은 필수지요!"

"경쟁자?"

"초월학관을 졸업할 때 1반으로 졸업하면 그만큼 유리하지 않습니까."

"그게 왜...?"

"…설마 아무것도 모르십니까?"

살짝 당황한 시바는 이내 건수를 잡았다는 듯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설명은 길었지만, 핵심은 간단했다.

'랭킹제구만. 그중에서도 1반은 상위권을 상징하는 그룹이고. 성적이 떨어지면 입학 때 1반이었던 이도 2, 3, 4반으로 떨어질 수 있고.'

이른바 경쟁을 위한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비록 같이 입학한 동급생들이지만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쟁심리가 느껴졌다.

"그렇게 1반으로 졸업하면 바로 염원의 탑 4급 도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4급 도제?"

"아, 4급 도제는 말이죠...."

현재 염원의 탑의 구조는 간단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그랜드 마이스터들.

그들의 제자이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실력을 갖춘 15명을 마이스터라 칭했다.

또 그런 마이스터의 제자를 1급 도제.

그런 식으로 4급 도제까지 이어지며 그 밑에는 4급 도제가 되지 못한 문하생들이 있었다.

'보자… 그러니까 문하생은 인턴이고 4급은 사원, 3급은 계장, 2급은 차장이나 과장, 1급은 부장급인가? 마이스터는 임원급이고.'

거기에 현재 학관에 교수로 와 있는 마이스터는 총 5명이고 몇몇 수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급 도제들이 강의한다는 게 시바의 설명이었다.

시바가 떠드는 것을 열심히 듣고 있으니, 로이스에게 '수석이란 놈이 그런 것도 모르냐?'라는 눈빛이 날아와 꽂혔다.

로이스의 얼굴이 좌중의 시선으로 따끔거릴 때쯤, 한 노인이 강의실의 앞문을 통해 들어섰다.

그를 본 로이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어? 저 양반은?'

노인의 정체는 면접장에서 자신과 질의응답을 한 이.

시바가 노인에게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마이스터 해럴드...."

"유명한 사람이냐?"

"당연히 유명하죠! 그랜드 마이스터 더글라스 님의 제자 중 한 분인데요!"

"호오?"

시바의 속삭임에 로이스의 눈이 반짝였다.

'더글라스의 제자라....'

어쩐지 고집스러움이 드워프의 그것 같더라니.

로이스가 그리 시선을 보낼 때, 강단에 선 해럴드가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기술 법사의 길을 걷게 된 그대들을 환영한다. 해럴드라고 한다."

짧은 인사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후 그가 하는 이야기는 크게 별것 없었다.

간단한 격려와 학사 일정.

고작 그 얘기를 하기 위해 왔나 싶을 정도로 정말 별 내용 없는 이야기를 마친 그는 강단에서 내려서려 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질문 있습니다."

잠시 멈춘 해럴드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손을 든 백발의 청년이 있었다.

동시에 해럴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놈이군.'

지원 동기가 독특했던 놈.

그리고 입심만큼이나 나름 실력도 갖춘 놈.

해럴드가 몸을 돌려세웠다.

"로이스라고 했던가?"

"예."

"나는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겠다고 말한 기억이 없는데?"

"에이, 그래도 첫 시간인데 질문 한두 개는 받아 주시죠."

로이스의 가벼운 말투에 주변에서 옅은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해럴드가 누구던가.

그랜드 마이스터 더글라스의 제자이자 염원의 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장인이었다.

여간 깐깐한 성격이 아니라, 들리는 소문으로는 염원의 탑 도제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인물이라 했다.

그런 이를 앞에 두고 저리 경박한 말투라니.

모두가 경악하고 있을 때, 해럴드만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로이스가 선수를 쳤다.

"염원의 탑에 들어가면 그랜드 마이스터님들을 만나 뵐 수 있나요?"

로이스의 질문에 좌중의 분위기가 살짝 달라졌다.

그랜드 마이스터.

기술 법사의 길을 걷는 이라면 누구나 존경하고 선망하는 칭호.

때문에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들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적막 속, 해럴드를 향한 스물다섯 쌍의 시선.

잠시 침묵하던 해럴드가 입을 열었다.

"궁금하거든 탑에 들어와 보거라."

그 말을 끝으로 해럴드는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조금은 기대했던 이들이 허망한 눈빛을 했다.

하지만 로이스는 달랐다.

'이것 봐라?'

조금 전 해럴드는 분명 답을 회피했다.

'없으면 없다, 알려주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되는데 말이지.'

로이스는 해럴드의 말 속에서 그가 그랜드 마이스터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한편, 그렇게 해럴드가 강의실을 빠져나간 뒤, 조교가 들어왔다.

"오늘 일정은 이걸로 끝입니다. 여러분의 적응을 위한 학관 측의 배려이니 오늘은 푹 쉬세요. 내일부터는 정신없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조교마저 나가고 여기저기서 살짝 술렁임이 퍼져 나갔다.

갑자기 붕- 떠 버린 시간에 다들 무얼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싶었다.

그때 강의실의 앞쪽에서 한 남자가 일어나 로이스에게 다가왔다.

갈색 머리의 그는 로이스를 훑어보았다.

"네가 로이스라고?"

"그런데?"

"반갑다. 뷘 레밍턴이라고 한다."

가볍게 손을 내민 그를 보자마자 시바가 로이스의 귀에 속삭였다.

"쟤가 이번 차석이래요, 차석!"

그 말에 로이스가 웃으며 뷘의 손을 잡았다.

"아하, 네가 나 다음이구나."

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맞잡은 뷘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지금은 내가 차석이지만, 다음에는 네가 나의 다음일지도 모르지."

"글쎄...."

로이스가 피식거리며 손을 놓았다.

"뭐, 열심히 해 보라고."

"격려 고맙다."

"별말씀을."

어깨를 으쓱이는 로이스를 보고 뷘의 눈빛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수석과 차석의 신경전에 다른 신입들도 자리를 뜨지 않고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로이스의 뷘이 눈싸움을 하고 있을 때.

드르르륵- 쾅!

거칠게 열리는 문소리.

그리고 들려온 우렁찬 외침.

"로이이이이!"

문을 열고 들이닥친 검은 옷의 여인이 도도도- 달려와 그대로 로이스에게 안겼다.

끈덕지게 달라붙은 은빛 정수리에 로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왜 여깄냐...."

"우리 로이 보고 싶어서 끝나자마자 바로 왔지. 아웅… 우리 로이를 30분이나 못 봤어."

로이스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카니에게 좌중의 이목이 쏠렸다.

"미친… 누구야?"

"…예쁘다."

"쟤, 걔잖아. 이번 조종반 수석. 소문으로 듣기는 했는데… 장난 아니네."

기술반 정원의 성비 중 70% 이상이 남자였다.

그렇다 보니 남다른 미모를 가진 카니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이는 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카니를 보며 살짝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리고 로이스를 찾은 것은 카니뿐만이 아니었다.

"로이스 오빠아아!"

카니에 이어 들이닥친 타니아.

그녀는 로이스를 선점한 카니를 보며 살짝 뾰로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로이스의 옆에 있는 시바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시바네?"

"타, 타니아!"

타니아의 등장에 시바가 너무도 기뻐하며 손을 흔들었지만.

"응, 시바 안녕."

"...."

타니아는 짧게 인사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그녀는 스리슬쩍 로이스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작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다 같은 신입생인데 제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거는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냥 오빠라고 부를게요."

딱 봐도 이번 기회에 사심을 채우겠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그래도 나름의 일리가 있는 소리였기에, 그리고 대꾸하기 귀찮았기에 로이스는 대충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마음대로 해라."

"네, 로이스 오빠!"

타니아가 만개한 꽃처럼 화사하게 미소 지으니 이를 지켜보는 사내들의 눈빛이 또 한 번 변했다.

그 뒤로 찾아온 켄드릭과 칸.

이번에는 기술반 여성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와… 저게 바로 신이 내린 비율이란 거구나."

"기술반 비실이들이랑은 차원이 다르네...."

백색 제복 틈바구니에 낀 흑색의 제복의 네 명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로이스에게 찰싹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카니와 타니아.

은근슬쩍 교실 구경 중인 켄드릭과 칸.

거기에 그들의 중심에 있는 로이스까지.

좌중의 시선이 그들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삽시간에 동물원의 동물 신세가 된 상황에 로이스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여전히 로이스에게 매달려 있던 카니가 주르르 딸려 올라왔다.

로이스의 껌딱지가 된 그녀가 빼꼼히 고개를 들어 물었다.

"어디 가게?"

"기숙사...."

피곤하다는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로이스와 병아리처럼 쪼르르- 그에게 따라붙는 일행.

이를 보고 구경꾼 중 누군가 투덜거렸다.

"세상 불공평하네. 잘생기고 예쁜 것들이… 자기들끼리 뭉쳐 다니냐?"

물론 그렇게 투덜거리는 신입도 로이스 일행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