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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

50화 기사여(5)

"테오르도."

맑고 단아한 목소리.

익숙한 부름.

고개를 들자 지금보다 훨씬 앳된 실비아의 얼굴이 보인다.

"나 정원 구경하고 싶어."

커다란 눈망울로 그리 말하는 실비아.

테오르도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벨로케 전하께서 산책 중이시라 들었습니다."

실비아를 위해서였다.

벨로케를 마주친다면 또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아··· 그렇구나."

실비아는 고개를 숙인다.

"응······ 어쩔 수 없지."

힘없이 돌아서는 작은 아이.

작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실망감. 답답함. 무기력함.

테오르도는 손을 들어 올렸으나 차마 그것을 뻗지 못한다.

위로를 건네지도, 희망찬 말을 할 재주도 없는 고지식한 기사.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말로 도대체 몇 번을 넘어갔던가.

그 작은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해 어찌나 마음이 아팠던가.

얼마나 한이 되었으면 지금도 이리 가슴 한구석이 쑤셔오는 것인가.

이제는 알겠다.

어쩔 수 없는 건 상황이 아니었음을.

그저 스스로의 나약함을 변명하고자 하는 무책임한 말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정원으로 나가는 게 두려웠던 것은 테오르도 본인이었음을.

맞서 싸울 자신이 없었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음을.

그러니······.

"뭐, 뭐야! 살아 있어! 놈이 아직 살아 있다!"

그러니 기사여.

검을 들어라.

눈을 부릅뜨고 검을 힘껏 들어 올려라.

"뭐해! 다 죽어가는 놈이다! 빨리 마무리해!"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는 알지 않느냐.

이까짓 상처보다.

검 따위가 몸에 틀어박히는 것보다 더욱 아픈 것이 무엇인지 알지 않느냐.

그러니 더 움직여라.

쉬지 말고 검을 휘둘러라.

"괴, 괴물···."

"악귀! 악귀다!"

바닥을 굴러라.

입가에 고인 피를 적의 눈에 뱉어라.

검을 적의 목에 틀어박아라.

"끄아악!"

추하게 버텨라.

세상에서 가장 추한 기사가 될지언정 버티고 버텨라.

잊지 마라.

무엇을 위해 검을 들었던가.

무엇을 위해 강해지고자 했던가.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이 순간을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멈추지 말아라.

팔이 잘려나가고 발목이 깊게 베여도 멈추지 마라.

오러를 피워 올려라.

생명을 불태워서라도 더욱 짙은 오러를 피워 올려라.

높이. 더욱 높이.

전장의 모두가 볼 수 있을 만큼 높이.

저 하늘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높게.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려라.

······기사여.

* * *

마치 야차와도 같은 모습.

수십의 기사가 오직 테오르도 한 명을 둘러싼 채 머뭇거리고 있다.

기세에서 압도당한 것이다.

왼쪽 팔은 팔꿈치 아래부터 잘려나갔고 갑옷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했으며 드러난 심각한 상처만 해도 몇 개인가.

다른 이었다면 죽어도 이미 몇 번은 죽었을 터였다.

헌데 어찌 청색의 오러는 더욱더 사납게 타오르고 기세는 어찌 더욱 덩치를 불려간단 말인가.

꼭 스스로의 생명이라도 불태워 오러를 피워내는 것 같지 않은가.

테오르도를 둘러싼 기사들은 마른침을 삼킨다.

허나 기세에서 압도당했을지언정 판단이 흐려진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발악이다. 거리를 벌리고 덤벼들지 마라."

이미 상처가 심각하다.

흘린 피의 양이 정도를 넘어섰다.

가만히 놔두면 결국 머지않아 스러질 목숨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임에도 고고한 청색 오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팔이 잘리고 발목이 반쯤 베여 있는 기사는, 외려 웃고 있었다.

입가에 피를 잔뜩 머금은 채로.

상처가 벌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로 힘껏 외치는 소리.

"히오-! 파블렌코-!"

그것은 또 어찌 저리 쩌렁한 것인가.

저것이 정녕 다 죽어가는 기사가 맞는 것인가.

"나와의 맹세를! 약속을 잊지 말라-!"

피와 함께 토해지는 외침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전장을 울리며 퍼져나간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병사의 곁으로.

악을 쓰며 검을 휘두르는 욘 토르노의 머리 위로.

입술을 짓씹는 히오의 곁을 지나 실비아가 잠든 마차에 닿는다.

한 사람의 외침이 전장을 장악한다.

무뚝뚝했던, 무심했던 기사의 외침.

마지막 절규.

"그러니-!"

그를 상대하는 1황자의 기사들이 다급히 움직인다.

더이상 두고 볼 수만 없게 됐지 않은가.

그 절절한 외침이. 기사의 절규가 아군을 질리게 만들고 적군의 사기를 높인다.

"약속을 지켜라! 히오 파블렌코!"

더이상 놔뒀다가는 전체의 사기가 밀릴 것 같았으니.

모든 전장이 단 한 사람에게 압도될 것만 같았기에.

테오르도를 둘러싼 기사들은 다시 검을 겨눈다.

"죽여! 전부 한꺼번에 달려들어!"

"놈은 죽기 직전이다! 겁먹지 마라!"

"악귀 같은 놈!"

테오르도를 둘러싸고 동시에 달려드는 기사들.

짓쳐드는 십여 개의 검.

그것을 대하는 테오르도의 마지막은 지극히 그 다운 것이었으니.

기사를 닮아 올곧게 뻗은 청색의 오러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정면에서 달려오던 두 명의 몸뚱이가 갑옷 채로 양분된다.

하지만.

"······."

동시에 하나의 검이 테오르도의 심장을 관통한다.

다른 검이 테오르도의 목을 꿰뚫는다.

가슴에, 옆구리에, 어깨에, 허벅지에.

틀어박히는 검.

울컥 솟구치는 피의 양은 가엽게도 얼마 되지 않는다.

천천히 꺾여가는 고개.

꿋꿋하게 버티던 기사의 무릎이 기어이 꿇어진다.

평생을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던 그 몸뚱이가······ 서서히 기울어간다.

황녀의 수호 기사 테오르도 리카르트.

로열 나이츠에 입단하라는 검성의 제의를 여러 번 물리치고 끝끝내 황녀의 곁에 남은 고집스러운 기사.

홀로 막아낸 병사가 백여 명.

그 손에 꺾인 기사의 숫자만 스물에 가까웠으니.

가히 기사 중의 기사라 칭할 만한 자였다.

* * *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999 / 1000)]

히오는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 모든 장면을 눈에 담는다.

나서려던 자신을 막아 세운 기사의 절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사는 기사의 할 일을 다했고.

마법사는 마법사의 할 일을 다 하기 위해.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그 모든 것을 오롯이 눈에 담는다.

부릅뜬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도록.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1000 / 1000)]

기사의 커다란 몸뚱이가 허물어지고서야.

「축하합니다! 히든 특성 '폭력은 안 돼!'의 목표치를 달성하였습니다. 히든 특성의 숨겨진 보상이 주어집니다.」

히오는 눈을 감는다.

「스킬 - '뱀피릭 터치'를 선택하셨습니다.」

「특성과 연계된 스킬 - '뱀피릭 터치'의 이펙트를 분······.」

메세지를 한쪽으로 치워버리고 푹 떨구는 고개.

"아······."

그리고 그 고개가 다시 올라왔을 때 보이는 것은.

「스킬 - '뇌제(雷帝)'가 발동됩니다.」

백색으로 타오르는 눈.

몸을 둘러싸는 벼락의 광휘.

전장을 뒤덮는, 분노를 머금은 뇌운(雷雲).

* * *

먹구름으로 순식간에 어두워진 전장.

허나 그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못한다.

극도의 흥분과 극도의 공포가 난무하는 곳에서 그까짓 먹구름이 대수일까.

하지만.

꽈앙-!

귀가 찢겨나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벼락이 내려친다면 어떤가.

그러한 벼락을 등지고 걸어오는 자가 있다면 어떠한가.

"······비켜라."

돌연 몰아치기 시작한 벼락과 함께 등장한 사내.

기사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너는 뭐···!"

입을 열려던 기사 한 명이.

콰앙-!

재가 되어 흩날린다.

"스킬 사용자!"

"모두 검을 들어라!"

기사들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는 했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콰앙-!

단지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뿐.

어느새 쥐죽은 듯 조용해진 주위.

벼락의 범위에서 아슬하게 벗어나 있던 자들은 입을 틀어막고,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주저앉는다.

그대로 그렇게 굳어버린다.

벼락을 몰고 온 사내는 터벅터벅 걸어가 시체 한 구를 들어 올렸다.

잔인하게 난도질당한 한 구의 시체.

무엇이 그리도 원통한지.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한 기사의 시체를 들고 걸음을 옮긴다.

그의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을 향해서.

천천히.

마차의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는 시체.

팔이 잘리고 발목이 너덜거리며 그 몸에 꽂혀 있는 검의 파편만 십여 개.

가만히 서서 그 흔적을 하나하나 살핀다.

어떻게 베였고 어떻게 찔렸으며 얼마나 아팠을지.

잠시 떠올려 보다가 결국 감아버리는 눈.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89 / 1000)]

새로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인내력을.

"어쩌라고."

한쪽 구석으로 치워버리고 다시금 뜬 눈.

벼락을 담은 새하얀 눈동자가 전장의 저 먼 곳을 향한다.

* * *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정보가 새어나갔을 때?

실비아에게 진화의 서를 건넸을 때?

셋이 함께 욘 토르노의 성을 향해 갈 때부터 문제였을까.

아니, 첫 만남에 그런 터무니 없는 약속을 한 것이 문제였겠다.

이토록 마음 아픈 약속일 줄 알았으면 그따위 것 하지도 않았을 텐데.

어차피 죽을 사람 취급하며 끝까지 외면했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응? 대답해봐. 뭐가 문제였을까."

번뜩이는 백색의 눈동자.

주변에 흩날리는 소름 끼치는 잿가루.

하늘을 장악한 먹구름 사이로 낮게 울리는 우레.

"여, 여기가 어, 어, 어딘 줄 알고······!"

검을 쥔 손이 애처롭게 바들거리지만, 1황자를 지키는 기사는 필사적으로 검을 겨눈다.

그야말로 벼락처럼 나타난 사내.

몇 번의 벼락이 치더니 대뜸 눈앞에 나타난 사내.

그에 1황자의 호위기사들이 빠르게 반응해 검을 휘둘러 갔지만······.

그 결과가 지금 이것이다.

번쩍이며 내려친 몇 번의 벼락.

코끝을 타고 전해지는 매캐한 탄내.

휘날리는 잿가루.

고요해진 주위.

기사가 살아남은 것은, 그저 가장 늦게 반응한 덕택이었다.

손에 든 마정석이 퍼석이며 부서지고 히오는 눈앞의 기사를 지나쳐 걸어간다.

벼락의 여파로 사라져 버린 막사.

그 안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던 1황자와 군단 수뇌부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다.

그중 가장 용감한 한 명이 주저앉았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히오에게 외친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리고 그것은.

콰앙-!

그의 유언이 되었다.

반응할 새도 없이 내려치는 한줄기 벼락.

용감했던 자의 최후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것이었으니.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백색의 눈이 주위를 훑는다.

"정보의 출처는 어디인가."

눈이 마주친 한 명의 귀족이 그 눈을 피하며 가까스로 입을 열어본다.

"무슨 말인지······."

콰앙-!

늘어난 잿가루.

끔찍한 탄내.

히오의 눈이 그 옆을 향한다.

"너희들에게 정보를 알린 자는 누구인가."

이번에 눈이 마주친 자는 제법 눈치가 빠른 자였다.

"정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더 질문을 확실하게 해주시면······."

몸을 바짝 엎드리며 답하는 귀족.

콰앙-!

어김없이 벼락이 떨어져 내린다.

가여운 마음?

들 턱이 있나.

몇천, 몇만이 죽었다.

저들이 이겼더라면 반대의 모두가 이리 죽었을 터.

설마 그 정도 각오도 하지 않고 전장에 나왔겠는가.

"사, 살려주······."

콰앙-!

"질문에 답하라."

그 누구도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땅에 처박은 채 그저 떨고만 있을 뿐.

"그런가."

사실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만한 능력자가 일을 허투루 처리했겠는가.

그러니 히오는 무심하게 손을 까딱인다.

그 손짓에 반응한 것은 귀청을 찢을 듯 울리는 천둥.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새하얀 벼락의 세례.

지옥같은 찰나가 지나가고.

"······."

남은 것은 세 사람뿐이었다.

히오와 1황자. 그리고 이름 모를 기사 한 명.

1황자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죽었다는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

그 하찮은 수급을 들고 너희들이 패배했음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히오는 홀로 남은 기사를 바라본다.

"이름이 뭐지?"

입고 있는 갑옷만큼이나 새하얗게 질린 기사의 얼굴.

"파, 파, 파블로······ 입니······."

"그래. 파블로."

고개를 옆으로 까딱 움직이며 1황자를 가리킨다.

"황자의 목을 베어라."

그 말을 들은 1황자, 알렌베르트가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손을 풀며 발악하듯 외친다.

"어딜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내가 황태자다! 제국의 황태자!"

목에 핏대를 세우고, 침을 튀겨가며 토하는 열변에도 파블로는 홀린 듯 알렌베르트를 향해 다가간다.

"뭐, 뭐하는 짓이냐! 나는 제국의 고귀한······."

황자, 황태자.

그것이 다 무슨 소용있단 말인가.

저항할 의지조차 생기지 않는,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는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는 것이다.

닿는 모든 것이 재가 되어버리는 공포 앞에서는 황태자 따위 너무도 초라한 것이었다.

그러니 파블로는 검을 높이 들어 올린다.

"나, 나는 제국의 황제가 될······!"

푸확- 잘려나가는 목에서 내뿜어지는 피.

기사의 새하얀 갑주위로 후두둑 튀는 그저 새빨갛기만 한 피.

고결한 피가 아닌, 똑같이 새빨간 피.

바닥을 구르는 알렌베르트의 머리와 잘게 떨고 있는 파블로.

그것을 보며 히오는 의미 없는 웃음을 터트린다.

주군의 목을 베는 기사라.

"하하하······."

자신이 아는 기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 * *

바닥을 구르는 1황자, 알렌베르트의 머리.

- 정신 좀 차리게.

그제서야 푸르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일단 황녀부터 살펴봐야 할 게 아닌가. 기껏 인내해놓고 다 날려버릴 셈인가 자네.

지극히 맞는 말이었다.

테오르도가 왜,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가.

"······그랬지."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여 마정석 하나를 꺼내 들고 손에 쥔다.

자연스레 사용할 수 있는 벼락의 힘.

뇌제를 시전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디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마력이 줄줄 새어나간다.

하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최상위 스킬.

꽈앙-!

벼락 그 자체가 되어 순식간에 떨어져 내린 곳은 마차의 바로 옆.

뇌제를 해제하고 진화가 완료되었을 스킬창을 열어본다.

뱀피릭 터치의 이펙트를 실제로 만들어버리는 히든 특성의 힘.

「스킬 : 사신(死神) 소환」

「죽음을 관장하는 귀신을 소환합니다.」

「사신은 일정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기운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소환과 유지에는 별도의 마력이 소모되지 않습니다.」

「사신이 소환되어 있는 동안에는 어떠한 스킬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소환 해제 이후 12시간이 지나면 스킬 사용 제한이 해제됩니다.」

「주의하십시오. 사신의 낫은 소환자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감은 오지 않지만, 무려 스킬 사용 제한이라는 페널티가 걸려 있다.

밸런스를 무너트릴 만한 강력한 힘에 따라오는 강력한 페널티.

"···나중에 확인해보고."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 문장.

일정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기운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말.

실비아의 몸을 잠식해 나가는 죽음의 기운을 드디어 빼어낼 수 있는 것이다.

"사신."

「스킬 - 사신(死神) 소환이 발동됩니다.」

히오를 중심으로 한층 어두워져 가는 시야.

먹구름 낀 하늘에 더욱 어두워진 풍경.

무거워진 공기.

그리고 어느샌가 나타난 사신의 붉은 눈.

그것이 히오를 향한다.

51화 기사여(6)

이전에 테트라디아 마탑에서 스킬을 확인했을 때도 음산한 분위기와 무서운 외형이었지만, 지금과 비교해 보자면 어린아이 장난 같은 것이었다.

단지 등장만으로 한층 어두워진 세상.

가슴이 갑갑해지는 것은 사신으로부터 느껴지는 강한 죽음의 기운 때문이리라.

마치 죽음 그 자체로 이루어진 듯한 귀신.

시뻘건 낫을 들고 검붉은 색의 눈으로 히오를 내려다보는 사신.

- 허허··· 저건 정말로······ 자네 저거 얼른 가지고 마탑으로 가서 함께 연구해보세나! 우리 네크로멘서들이 크게 진보할 수 있을······.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목소리를 흘리는 것도 이젠 제법 익숙했기에 잔뜩 흥분한 푸르넬의 말을 무시한다.

그러면서 똑바로 직시하는 사신의 붉은 눈.

첫 번째로 진화한 최상위 스킬, 뇌제.

두 번째로 진화한 최상위 스킬, 청염.

직접 다뤄야 하는 두 스킬과 달리 이번에는 소환의 개념이었다.

하지만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사신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알 수 있었으니까.

나의 생각이 곧 저 귀신에게 닿는다.

아니나 다를까.

히오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사신이 그 유령 같은 몸을 움직인다.

붉은 낫을 든 채 마차로 향하는 검은 형체.

마차의 두 배는 될법한 크기였음에도 조금의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이 정녕 귀신다운 것이었다.

그렇게 마차 앞에 도착한 사신이 다시 히오를 바라본다.

네가 말한 게 이게 맞느냐는 듯한 느낌에 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 몸에 있는 죽음의 기운 좀 몽땅 빼버려."

히오의 말에 사신은 마차를 잠시 바라보더니 재차 고개를 돌려 히오를 다시 쳐다보는 게 아닌가.

"뭐해? 그거 맞다니까?"

그렇게 말했음에도 그저 가만히 히오를 내려다보는 사신의 붉은 눈.

"······설마."

히오가 다급히 마차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얌전히 누워 있는 은색의 소녀.

고른 숨소리.

평온한 표정.

유령의 눈을 켜고 바라본 실비아의 몸은 죽음의 기운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깨끗했다.

"하······."

반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리도 쉬운 것을."

그저 사신의 눈이 한 번 닿은 것만으로도 이토록 쉽게 해결되는 것을.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지."

조금만 더 버티지 테오르도.

네가 그리 죽고 나면, 뒷감당은 혼자 어찌하라고.

깨어난 실비아에게는 대체 뭐라 말하고. 끔찍하게 난도질당한 그 시신은 또 어찌 보여주라고···.

의자에 기대 멍하니 실비아를 바라본다.

곧 죽을 듯 미약한 호흡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아닌, 평온한 표정.

남부에서 시작된 여정이 동부를 거쳐 수도의 바로 밑까지.

셋이서 함께 왔는데 둘은 남았고 하나는 이제 없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바로 이 마차 안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데.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그리 말했었는데.

그걸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새어나온다.

"할 일을 너무 잘했지 않나."

미련하고 고지식한 기사 아니랄까봐.

누가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라 했나.

마음이······ 헛헛하다.

- ······라니까! 이놈 이거 완전히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있구먼! 세상에 선배님들! 세상이 이렇게나 변했습니다 선배님들! 어느 천지에 제자가 스승을 이렇게나 무시하고 뒷방 유령이나 취급하고! 아이고 나 때는 이런 놈이 있었다면 바로 마법사 선배님들께 소문 쫙 퍼져서 이쪽으로는 발도 못 붙이는 개상놈······.

"개상놈?"

잠시간의 정적 후에.

- ······으로 삼행시 해보겠네.

푸르넬이 멋쩍게 헛기침을 한다.

- 커흠. 안 듣고 있던 거 아니었나?

"제자가 스승의 말을 항상 귀담아들어야지."

- 아무렴. 역시 자네는 자세가 되어 있구먼. 아무튼 이럴 게 아니라 얼른 밖으로 나가봅세. 이건 정말이지 세상에 둘도 없는 기회라니까.

"······기회?"

- 나가보면 알 게야. 얼른 나가보게.

푸르넬의 재촉에 못 이겨 억지로 몸을 일으켜 마차의 문을 열었고.

- 유령의 눈으로 보게.

유령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회색의 영혼과 검은색의 죽음이 난무하는 무채색의 세상.

그 가운데서 압도적인 사신의 존재감.

······그리고.

- 어떤가. 저런 건 처음 보지?

무채색으로 범벅된 세상에서 유일하게 홀로 반짝이는 무언가.

너무도 눈부시게 발하는 빛에 시선이 끌릴 수밖에 없었다.

- 고결한 영혼이라네. 흔치 않은 혼이지.

"고결한··· 영혼."

- 긍지 높은 자의 영혼.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의지를 관철해온 자의 혼. 누구일 것 같은가?

그 빛나는 영혼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누구일 것 같냐니.

너무 뻔한 물음이 아닌가.

긍지 높은 기사.

"테오르도 리카르트."

- 으흐흐흐. 맞네, 맞아. 고고한 긍지와 순결한 마음. 심지어 영혼의 격마저도 꽤 높은 편이지. 자,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겠는가.

마치 유혹이라도 하듯, 속삭이는 푸르넬의 목소리.

- 저 고결한 영혼을 검게 물들이는 걸세.

히오의 인상이 단박에 구겨진다.

- 어허. 자네 지금 또 사악한 네크로멘서니 뭐니 생각하고 있지? 그게 아니야. 이건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것이라네.

히오를 이해시키기 위해 푸르넬은 차근차근 설명해 간다.

- 저 고결한 영혼을 검게 물들인다고 해서 꼭 나쁜 것이 아니야. 그게 정녕 나쁜 일이었다면 네크로멘서는 대륙의 공적으로 찍혀 진작에 몰살당했겠지. 물론······ 좀 과한 몇 놈은 늘 있긴 했다만 이건 넘어가고.

신이 만든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

이 또한 법칙 중의 하나.

수많은 죽음의 종류 중 하나인 것이다.

- 그러니 네크로멘시가 온전한 하나의 학파로서 존중받았지. 게다가 저 영혼, 계속 여기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가.

긍지 높은 자일수록, 격이 높은 영혼일수록 죽음에 크게 미련 갖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이승을 벗어난다.

실제로 지금도 수많은 영혼이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으니.

하지만 테오르도의 고귀한 혼은 떠날 생각이 없다는 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 갓 영혼이 된 상태는 기억이 뒤죽박죽 엉키며 혼란에 빠지지. 그런데도 저리 확고하게 멈춰 있다는 건, 그만큼 엄청난 미련이 남았다는 것이야.

"그러니까 테오르도를 다시 언데드로 되살리자?"

- 보통 언데드가 아니지. 고위 언데드, 데스 나이트라네.

"하지만 내가 아는 네크로멘시는 뱀피릭 터치뿐인데?"

2서클의 네크로멘서로서 기초 문양은 탄탄하게 새겨 넣었다.

그러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언데드 제작은 배우지 못한 상황.

- 그러니 지금이 기회라는 말일세. 정확히는 둘도 없을 만큼 완벽한 기회이지.

푸르넬의 목소리에 흥분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 고결한 혼! 높은 격! 이곳에 사기(死氣)는 넘쳐나고 고귀한 혼은 떠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옆을 보게나.

히오의 고개가 돌아가고 자연스레 눈앞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존재감.

유령의 눈이기에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죽음 그 자체.

- 모든 기운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신(死神). 저건 기적이야. 저런 존재가 자네의 말을 듣는다면 네크로멘서로서 못해낼 게 무엇이 있겠는가.

"사신이 그런 것까지 할 수 있다고?"

- 아니지. 아니야. 저 귀신은 설명에 나와 있는 대로 기운을 통제하는 능력이 전부겠지. 하지만 네크로멘서로 경지를 올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많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기를 다루기 위해, 적은 양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내기 위함이라네.

푸르넬의 말을 들으며 히오는 잿빛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드넓은 지역에 가득 펼쳐져 있는 죽음의 기운.

- 자네는 아직 사기를 다루는 마법을 배우지 못했지. 허나 그것을 대신해 줄 저 인외의 귀신이 존재하지 않나.

이번엔 사신을 쳐다본다.

사신의 붉은 눈 역시 히오를 바라본다.

- 자네는 사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몰라. 그와 관련된 문양 역시 없지. 허나 지금은 그럴 필요조차 없네. 죽음의 기운이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짝이는 혼을 바라본다.

- 자네는 언데드를 제작하는 마법을 몰라. 하지만 훌륭한 스승이 있지. 훌륭한 재료······ 아니, 훌륭한 영혼이 있지. 넘쳐나는 사기와 그것을 다스려줄 존재가 있지.

반짝이는 혼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 모든 상황이 완벽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네.

그럼에도 잘 믿기지 않는다.

"테오르도를 데스 나이트로 만드는 게 그렇게 쉽단 말이야?"

- 상황 자체가 받쳐준 것도 있지만, 사실 자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네. 마법을 이용해 억지로 만들 수가 없으니 자네가 설득해야지. 저 고결한 영혼을.

"설득?"

- 설득이라기보다는 계약이라 해야 할까. 내 차분히 설명해줌세. 일단 적당히 넘어오기만 하면 사기를 있는 대로 때려 박아서 그냥 바로 데스 나이트로······ 크흠. 아무튼 이해했나?

"······뭐, 대충은."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푸르넬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 뭐하나? 어서 사신에게 죽음의 기운을 몽땅 끌어달라 명령을 내리지 않고.

"······바로?"

- 바로 해야지. 명심하게. 자네의 실력으로는 아직 저만한 영혼을 데스 나이트로 만들 수 없어. 사기가 넘쳐나기에, 넘치는 사기를 모두 다룰 수 있기에 시도할 수 있는 것이고 그마저도 혼이 허락을 해야 해.

"알겠어."

히오의 시선이 사신을 향한다.

줄곧 히오만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사신.

굳이 입을 열어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히오의 의지가 곧 사신에게 전달되었으니.

사신은 피처럼 붉은 낫을 천천히 들어 올린다.

그에 짙어지는 어둠.

사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의 모든 죽음의 기운이 몰려든다.

갓 죽은 생명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싱한 죽음의 기운.

범위가 무척이나 넓었기에 몰려드는 기운의 양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히오의 눈에만 보일 장엄하면서도 시커먼 죽음의 행렬이 사신의 인도에 따라 낫에 모여들고.

그 막대한 어둠이 전부 고결한 영혼을 향한다.

- 영력을 다룰 수 있으면 유령의 눈은 단순히 혼을 보기만 하는 눈이 아니라네. 눈에 영력을 담아.

영력을 눈에 집중하니 그 말대로 그저 빛날 뿐이었던 혼에 무언가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 혼에는 많은 정보가 새겨져 있다네. 그걸 들여다보는 거야.

빛을 발하는 테오르도의 영혼.

그것을 향해 끝없이 밀려드는 어둠. 사기(死氣).

그렇게 끝없는 어둠을 받고 있음에도 고결한 영혼은 그 빛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생전에 그가 그랬듯이 말이다.

- 그러다 보면 닿을 수 있을 걸세.

조금 더 끌어올리는 영력.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

- 테오르도 리카르트의 본질에 말이야.

그것은 테오르도의 영혼을 구성하는 기억이었다.

* * *

검을 처음 잡은 건 일곱 살 생일이었다.

목검이 아닌 진검.

그리 화려하지도 않은, 밋밋한 검.

하지만 어찌나 좋았는지 잘 때도 검집 채로 품에 안고 잘 정도였다.

생에 몇 안 되는 강렬한 기억이자 행복한 추억.

견습 기사로서 황궁으로 들어간 것은 열일곱이었다.

기사 아카데미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디 귀족가의 견습 기사로 들어가든가 자유 기사로서 대륙을 떠돌아다니지 않았을까.

열아홉이 되었을 때 영광스럽게도 황궁 제1기사단장, 비탈리아누스 마헬님의 밑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검 한 자루로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대단하신 분.

머지않아 별의 칭호를 얻으실 것이라는 그런 분과 같은 곳에 소속된 것이다.

검을 처음 잡은 그날 이후로 가장 기분 좋았던 때가 아니었을까.

스물여덟이었다.

"오로지 황제 폐하만을 따르는 친위대를 만들 생각이네. 이름은 로열 나이츠. 검을 다루지는 않지만, 깨우친 자들 또한 들어올 게야.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이 되겠지."

단장님. 아니, 8위계에 오르며 별의 칭호를 얻은 위대한 검성, 비탈리아누스 마헬.

"나는 자네가 이 로열 나이츠에 잘 어울린다 생각한다네. 어떤가. 나와 함께 하지 않겠나."

그저 영광뿐인 제안이었다.

어떤 기사가 이런 제안을 마다하겠는가.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다만, 한창 생각이 많았던 시절이라 그런가.

조금만 기다려 달라 청했고 감사하게도 비탈리아누스 님은 흔쾌히 기다려주겠다 말씀하셨다.

"조금 쉬게나. 자네 요즘 생각이 많아 보이더군. 내 폐하께 말씀드려 자네가 좀 쉴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보지."

더이상 비탈리아누스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이것까지 거절하면 내 면이 살지 않는다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단장님."

비탈리아누스님은 웃으시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검에 대한 생각이 많겠지. 그저 검을 휘두르기만 하는 단계는 지났으니 조금 쉬면서 잘 생각해보게나."

그렇게 지나가듯이 하는 한 마디에.

"내가 보기에 자네는 지키는 검이 어울려."

생각은 더욱더 복잡해졌다.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비탈리아누스님의 배려로 빡빡한 황궁 기사단에서 벗어나 다른 임무를 맡게 되었다.

다름아닌 황녀 실비아 베르덴 전하의 호위 기사.

동료 기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기사단을 떠났지만, 그들의 기대처럼 편하게 있을 생각은 없었다.

황녀의 호위 기사라니.

한시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는 막중한 임무가 아니던가.

그렇게 실비아 전하의 호위 기사로서 임무를 시작했건만······.

정말로 할 일이 없었다.

기사단에 있었다면 지금쯤 흙바닥을 뒹굴며 훈련에 여념이 없었을 텐데.

검을 휘둘러 조금이라도 더 강해졌을 텐데 말이다.

그저 온종일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임무의 전부였다.

전하께서 너무 어린 까닭이었다.

하루 종일 서서 하는 일은 그저 황녀 전하를 바라보고 있는 일.

좀 웃으라는 유모의 말에 전하와 눈이 마주칠 때면 어색하게 웃는 일.

그게 전부였다.

어찌 저렇게나 작을까.

손도, 발도, 얼굴도.

저렇게나 작고 여린데 혹 굴러서 떨어지시기라도 한다면······.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바짝 긴장하며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간다.

"자네는 언제쯤 답을 들려줄 생각인가?"

비탈리아누스님의 말에 너무도 죄송하여 고개를 푹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은 로열 나이츠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것이겠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이 무례는 반드시······."

"됐네. 됐으니 그냥 가게나. 이곳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기사가 얼마나 많은데···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기사로 내 똑똑히 기억해놓지."

"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감히 나 따위가 위대한 검성, 비탈리아누스님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그것도 무려 2년을 기다려주셨는데.

하지만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도 작고 꼬물거리는 손.

전하와 눈이 마주치면 나오는 미소는 더이상 어색하지 않았고 하루종일 그저 서 있을 뿐임에도 즐거웠다.

작은 손이 꼬물꼬물 움직여 내 손가락을 감싸 쥘 때면 나도 모르게 입이 헤벌쭉 벌어져 지나가는 시녀들이 쿡쿡 웃은 적이 몇 번이던가.

수치심에 표정을 바로 해보지만, 방긋 웃는 전하의 얼굴을 마주하면 또다시 흐물흐물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비탈리아누스님의 제안을 거절하는 수밖에.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 나서는데.

"지켜야 할 것을 찾았나 보군."

아마도 평소처럼 웃으시고 계실 검성의 말에.

"진심으로 축하하네. 테오르도 리카르트."

그제서야 나는 인정해 버렸다.

아마 평생을 이 작은 황녀님을 위해 살아갈 것 같다고.

방긋 웃는 그 미소를 위해 검을 들고 강해지겠노라고.

다짐하는 순간마저 행복한 것이었으니.

분명 이는 즐겁고, 만족스러운 기억이었다.

분명, 분명 그런 기억일 터였다.

허면 대체 왜······.

마음 한켠이 이리도 무거운가.

떠올리는 것만으로 어찌 이렇게 아픈 것인가.

무엇······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

전하. 전하를 지켜야 하는데 전하는 어디 계시는가.

왜 사방에 어둠만이 자욱한 것인가.

비켜라.

전하를 찾아 뫼셔야 한다.

사특하고 진득한 어둠아.

어서 길을 비켜라.

전하께서 분명 나를 애타게 찾고 계실 것이다.

검을 들고······ 검을······?

검.

나의 검은 어디로 갔는가.

- 테오르도 리카르트.

시끄럽다!

나를 부르지 말아라.

한시라도 빨리 전하의 곁으로 가야만 하니.

- 이미 죽어버린 고결한 기사.

······뭐?

- 실비아를 살리기 위해 마지막까지 검을 들어 올린 기사여.

그 말에 어쩐지 점차 의식이 또렷해진다.

검은 안개가 조금씩······ 걷혀 간다.

- 눈을 떠라.

눈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걷히고 의식이 맑아진다.

과거에 파묻혀 기억에 휩쓸려가던 의식이 건져 올려진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 목소리의 주인을 바로 볼 수 있었다.

잿빛으로 번들거리는 눈.

여전히 우스꽝스럽게 큰 모자와 어쩐지 피가 조금 묻어 있는 로브.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

······그런가.

직전까지의 기억이 모두 나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최후까지 전부.

나는··· 정녕 그렇게 죽은 것이구나.

허면 이 마법사는 어찌 나를 볼 수 있는 것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이 온통 무채색이다.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세상.

거기에 유독 이 주변에만 가득한 어둠.

마법사는 늘 이런 세상을 보고 있었단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던 시선이 다시금 마법사를 향하고··· 문득, 몸이 떨려온다.

아니, 영혼이 떨려온다.

전율이 돋는다.

완전한 영혼의 상태이니 더욱 확실하게 알겠다.

마법사의 뒤에 서 있는 붉은 눈의 귀신.

거대한 낫을 든 죽음의 사신.

격을 벗어난 규격 외의 존재. 거대한 존재감.

그것의 주인은 분명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생각했건만······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는지.

죽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실체를 조금이나마 엿본 기분이었다.

- 테오르도 리카르트.

마법사의 목소리가 혼에 울린다.

- 너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임무가 끝나지 않았다니.

이미 죽은 자에게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마법사여.

나를 위로할 셈인가.

- 네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줄 터이니.

마법사의 말에 압도적인 격을 지닌 사신이 붉은 낫을 치켜든다.

사실은 묻고 싶은 것투성이다.

전하는 어찌 되었는지.

마법사. 너는 너의 할 일을 다 해내었는지.

묻고 싶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는다.

- 저항하지 마라.

사신의 낫으로부터 시작된 진득한 어둠이 다시 짓쳐든다.

- 그 기운을 온전히 받아들여라.

마치 악마가 속삭이는 것만 같다.

네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다시 한번 실비아를 볼 수 있다고 말이다.

- 기사 테오르도 리카르트.

그리고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마법사의 마지막 말이 테오르도의 영혼을 뒤흔든다.

- 죽음으로부터 돌아와 다시 한번 검을 들어라.

짓쳐들어오는 어둠.

끈적하고 농밀한.

마치 죽음과도 같은 기운.

- 황녀를 위하여.

52화 황성으로

어둑한 전장.

하늘에는 뇌기가 사라진 먹구름이 태양을 가린 채 무겁게 떠 있다.

그리고 그 아래.

파스스-

바스러지는 테오르도의 육신.

원통함에 감지 못하고 있던 눈도, 성한 곳 하나 없던 몸뚱어리도.

수십 개의 상처와 그에 틀어박혀 있던 쇠붙이도 전부 부서지고 흩어진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새카만 연기.

내부를 전혀 들여다볼 수 없는 진득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연기.

그 불길한 연기가 점점 더 크기를 키워가더니 이윽고 하늘 높이 치솟는다.

얼마간 그렇게 덩치를 불려가던 검은색 공기가.

하늘 높이 치솟던 연기가 세로로 쩍 갈라진다.

- 흐흐흐흐······.

희열을 가까스로 억누르는 듯한 푸르넬의 웃음.

- 이거 생각보다 훨씬······.

쩍 갈라진 연기 사이로 서서히 드러나는 검은색의 형체.

오로지 사기(死氣)로만 이루어진 육신.

생전에도 큰 덩치였지만,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진 크기.

이미 죽었기에 더이상 죽지 않는 불멸의 기사.

- 걸작이지 않은가!

검은 연기를 가르고 저벅저벅 걸어나오는 죽음의 기사가 히오의 앞에 멈추어 선다.

온통 어둠인 가운데 그보다 한층 더 짙은 흑색으로 빛나는 안광.

아지랑이처럼 흩날리는 검은색의 기운.

히오는 그런 기사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저 멀리 여전하게 들려오고 있는 비명.

강철과 강철이 맞부딪치는 구슬픈 소리.

난잡하게 흩뿌려지는 죽음의 기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이황자 벨로케가 남았다."

그 말에 기사는 히오가 바라보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걷는 걸음 뒤로 일렁이는 칠흑.

아무것도 없던 커다란 손에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대한 검.

검은색 손잡이에 날카로운 흑색의 날.

죽음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대검.

"벨로케의 목을 가져와."

바뀐 것은 없다.

짙은 청색이던 오러가 흑색으로 바뀌고.

무뚝뚝한 눈동자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음에도.

육체는 더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고, 피가 튀지 않으며, 잘려도 다시 재생되어 버리겠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테오르도 리카르트."

여전히 기사는 검을 쥐고 있고.

"전쟁을 끝내자."

여전히 기사는 검을 휘두를 것이다.

"길을 열어라."

황녀를 위해서.

* * *

죽음의 기운이 몸을 잠식한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말이다.

그것도 온갖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갑작스레 죽어버린다.

육체적인 이상은 없기에 치료할 수도 없다.

고위 사제의 신성력 또한 잠시 기운을 억누를 뿐.

효력이 다하면 결국 다시 죽음에 잠식되어가는 것이다.

기운이 머리를 잠식하기 시작하면 스스로 해결할 방법은 이제 없다고 보면 된다.

정신을 잃고 혼절하며 온갖 죽음을 실제처럼 겪다가 그렇게 죽는 수밖에.

불에 타 죽고, 몸이 잘리거나 갈려 죽고.

떨어져 죽고 터져 죽고 얼어 죽고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면서 죽고.

온갖 죽음을 겪으며 그렇게 서서히 죽어간다.

오랜 시간 감겨 있던 눈이 서서히 뜨인다.

다시금 드러나는 은빛 눈동자.

마차의 안.

심한 어지럼증과 함께 실비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여기가 어딘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기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비틀비틀 일어나 마차의 문을 여니 그제서야 상황이 파악되는 것이다.

훅-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느껴지는 혈향.

희미하게 들려오는 고함. 비명. 함성. 절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전장이다.

자신이 기절해있던 사이, 끔찍한 악몽과 싸우고 있던 사이에 벌써 전쟁은 시작된 것이었다.

한데··· 주위에 왜 아무도 없는 것인지.

분명 손쉽게 승리하는 전쟁이었을 터.

계획대로만 된다면 아군의 피를 크게 흘리지 않고 이길 수 있는 것이었을 터인데 어찌······.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걸음을 움직여 마차의 바깥으로 향한다.

하늘에 걸려 있던 먹구름은 꾹 참고 있던 비를 기어이 땅에 뿌린다.

비가 조금씩 떨어져 내린다.

어쩐지 어둡다 했더니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나 보다.

실비아는 그런 비를 맞으며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고 비틀거리던 움직임은 점차 올곧게 변해간다.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할 터.

본인이 선택한 전쟁이 아니던가.

다행히 머지않은 곳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전장에도 한결같은 옷차림.

다른 이들과는 달리 여유가 있어 보이는 뒷모습.

"히오."

실비아의 부름에 히오가 고개를 돌린다.

"실비아."

놀랐다는 듯 조금 커지는 동공. 이내 안심했다는 듯 지어지는 옅은 미소. 그리고······

이유모를 당황스러움 조금.

짧은 순간 파악해낸 히오의 표정이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깨어났지."

히오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며칠 동안 누워 있어서 힘도 없을 텐데 들어가 있어도 돼. 비도 오고······ 전쟁은 곧 끝날 거야."

죽지않는 기사가 출발했으니 곧 2황자의 목을 들고 돌아올 터였다.

하지만 실비아는 당연하게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지."

히오의 옆에 나란히 서서 전장을 바라본다.

음.

역시 한 명이 없으니 허전하다.

"테오르도는? 테오르도까지 참전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던 거야?"

1황자와 2황자. 두 세력이 거의 공멸할 때쯤 나타나 일거에 휩쓸어버리는 것이 계획이었지 않나.

황녀를 지키는 기사까지 나설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실비아가 히오를 보며 물었지만, 히오는 말없이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언가··· 불길한 침묵.

그러다 가까스로 입을 연다.

"······정보가··· 샜어."

그 한마디에 많은 것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 응."

"미안해."

"아니야. 히오의 잘못이 아니잖아. 애초에 히오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건데."

실비아는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며 기다렸다.

아직 테오르도는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으니.

그 입에서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하지만.

"······."

길어지는 침묵.

입술을 달싹이다가 닫아버리고.

말을 할까 멈칫거리다 결국 다시 꾹 닫혀버리는 히오의 입.

계속해서 이어지는 침묵. 커져가는 불안감.

끝끝내 히오에게서 나온 말은.

"······미안해."

잔혹했다.

"응······ 그렇구나."

실비아는 덤덤히 고개를 돌려 다시 전장을 바라본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테오르도 리카르트는.

나의 유일한 기사는.

죽었구나.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잖아 히오. 너는 분명 최선을 다 했을 테지. 나는 알아."

이상하다.

왜 이렇게 무덤덤한 것이지?

어찌 이렇게 태연히 히오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지?

"응. 그래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깨달았다.

어찌 이리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다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는데 텅 빈 공간이 눈에 들어왔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아직, 실감하지 못한 것이구나.

여전히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구나.

언제나 뒤에 묵묵히 서 있던 기사가 죽었다는 것을.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고 있노라면 언제나처럼 조용히 뒤에 서 있을 것만 같은 느낌에.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구나.

뒤를 돌아보고, 눈이 마주칠 때면 고개를 꾸벅 숙여오던 기사가.

왜 예전처럼 웃어주지 않냐고 툴툴거리면 당황하다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던 기사가.

이젠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에.

실비아는 걸음을 옮긴다.

뒤를 돌아보기 싫어서. 황량한 빈자리를 보기 싫어서.

돌아볼 자신이 없었으니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비틀거리던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고 그것을 히오가 잡아준다.

실비아는 웃어 보였다.

"응. 괜찮아. 고마워."

그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저 앞으로. 전장을 향해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긴다.

"있잖아."

빗방울이 점차 굵어진다.

"시신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응. 그렇구나."

재차 옮기는 걸음.

굵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쏴아- 쏟아진다.

그 때문인지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그렇구나.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하게 싸웠구나.

나의 기사는.

눈가를 닦아내며 실비아는 잿빛의 눈으로 전장을 훑는다.

시신마저 찾을 수 없다면.

그 마지막 얼굴마저 볼 수 없다면 혼이라도 찾기 위해서.

무엇보다 반짝이던 혼을 똑똑히 기억하기에.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꾸역꾸역 닦아내며 주위를 살핀다.

기절해 있었던 며칠은 몇 년, 혹은 그 이상의 악몽이었다.

끔찍하고 잔혹한 악몽.

여태 꿨던 모든 악몽을 다 합친 것만큼이나 길고 끝나지 않는 악몽.

몸이 찢기고 갈리고 불에 타는 고통이었는데.

정말로 죽을 만큼 아픈 시간이었는데.

악착같이 버텨서 간신히 악몽에서 벗어났다 생각했는데.

"······이게 뭐야."

여전히 악몽 속이지 않은가.

아무리 버텨도 깰 수 없는 끔찍한 악몽이지 않은가.

비를 맞은 몸이 너무도 무겁다.

얼굴에 열이 펄펄 끓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혼을 찾아야 하기에.

누구보다 고결했던 그 혼을 찾아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반짝이던 숭고한 영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테오르도······."

한번만··· 다시 한번만 만날 수 없을까.

너의 혼이라도 보여줄 수 없을까.

고마웠다고.

미안하다고 전할 수라도 있게.

힘없고 못나기만 한 주인이 꼴도 보기 싫어서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버린 것인가.

너무 비겁하잖아 테오르도.

사과할 시간은 줘야지.

고마웠다고. 곁에 있어줘서 행복했다고.

네가 나의 수호 기사여서 다행이었다고 말할 기회는 줘야지.

많이 밉고 원망스럽겠지만, 인사는 하게 해줬어야지.

"···응? 테오르도."

간신히 버티고 있던 실비아의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힘이 빠져버린 몸이 하릴없이 무너져내린다.

아니, 무너질뻔한 몸을 누군가가 받쳐준다.

어쩐지 익숙한 검은색의 손.

누군가를 닮은 크고 단단한 손.

실비아의 잿빛 눈동자가 그 손의 주인을 찾아 움직이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버린다.

자신이 아는 기사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 너무도 다른 영혼이었으니 금방 시선을 거두어 버린다.

지독히도 어두운 영혼이었기에.

생전, 고결했던 기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알아보지 못한다.

* * *

거세게 쏟아지는 굵은 빗방울.

그 속에서 전쟁의 소음은 들려오지 않는다.

1황자, 알렌베르트의 진영.

나뒹구는 황자의 머리. 그 옆에서 고개 숙인 기사 한 명.

2황자, 벨로케의 진영.

직선으로 길게 이어진 피의 길.

한 명의 불합리한 기사가 만들어낸 넓은 길.

그것은 황성으로 가는 길.

길고 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만들어진 죽음의 길.

그 끝에 머리를 잃은 벨로케의 몸뚱아리가 나뒹군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 * *

왜 황제가 되려 했던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살고 싶어서 그런 것 역시 아니었다.

기사가.

평생 곁을 지켜주던 기사가 영광스러워지기를 바랐다.

힘없는 황녀의 기사가 아니라.

제국의 위대한 수호기사로서 만인의 동경을 받기 원했다.

한데 그 기사는 죽었고 자신은 곧 황제가 될 터였다.

이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젠 모르겠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실비아.

그녀를 받쳐주고 있던 것은 테오르도였다.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열이 펄펄 끓는 얼굴을.

눈물을 꾸역꾸역 참아내는 그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테오르도.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멈칫하고 만다.

내뻗은 손이 너무도 새카맸기에.

실비아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 기운이 자신의 몸에 넘실거렸기에.

반쯤 내뻗은 손은 더 나아가지 못한다.

실비아의 시선은 그를 향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있을, 고결한 영혼을 찾는다.

이미 그 영혼은 검게 물들은 채 자신의 바로 옆에 있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비를 맞으며 서 있을 뿐이었다.

고요한 전장.

쏟아지는 빗소리가 전부인 우중충한 전장.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빗소리를 뚫고 거대한 목소리가 낮게 울린다.

샤우트를 통해 드넓은 전장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고개를 조아려라."

고개를 숙여라.

눈물을 꾹 참고 있는 소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깊게 고개를 숙여라.

기사가 살아 있었다면 목이 터져라 외쳤을 말.

본래 자신의 역할이 아니었을 그 말을 히오는 대신한다.

"새로운 황제에게 예를 갖추어라."

이는 종전의 선언이었고.

"황성으로 갈 것이다."

승자는 없었다.

53화 황제와 기사

시신을 정리하고 병력을 규합하라.

전쟁은 끝났다.

우리는 이제 적이 아닌 동료이니 칼을 내려놓아라.

함께 움직여라.

깃발을 들어 올리고 뿔피리를 힘차게 불어라.

승전보를 울리고 성문을 열어라.

위대한 황녀 전하의 행차시다.

새로운 황제 폐하의 행차시다.

모두 뛰쳐나와 예를 표해라.

축제를 벌여라.

전쟁이 끝났다.

* * *

"흐으으으음······."

갸우뚱 좌우로 계속 움직이는 고개.

그에 따라 함께 움직이는 선홍색의 눈동자.

"애매해. 애매해."

랭킹3위. 아이라이츠.

정확히는 '아이라잌츄'이었으나 모두가 아이라이츠라 불렀고 그녀도 별반 신경 쓰지 않았기에 그리된 것이다.

"지존 천마가 맞겠지?"

'다른 눈'으로 전장의 상황을 보긴 봤다.

벼락과 함께 순식간에 1황자의 진영을 쓸어버리던 그 힘을.

"대단하긴 한데··· 못할 건 없고."

실제로 아이라이츠 역시 1황자 진영을 제 입맛대로 주물렀지 않은가.

"물론 어디 산책 다녀오듯이 그리 쉽게 할 수는 없겠지."

아이라이츠 본인 역시 상당히 공을 들인 작품이었고 다른 랭커들 또한 그 정도로 쉽게 해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더 이상해.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시간을 끌었을까?"

무엇을 위해서?

시르베르트의 계획대로 황녀를 황제로 만드는 것뿐이었다면 그 힘을 이용해 순식간에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을 테다.

한데 지존 천마로 의심되는 인물은 한참이나 시간 끌다가 1황자의 목을 치고 바로 사라져버린 것.

아이라이츠는 이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흐으으음······."

갸웃거리는 고개가 서서히 멈추고.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하는 입꼬리.

"뭐, 보면 알겠지."

그녀의 발아래 부복하고 있는 수십 명의 사내.

방의 벽을 빼곡하게 채운 것은 사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사실적인 그림.

수백 개에 달하는 그림은 모두 한 사람을 그린 것이었다.

많은 랭커들의 동경과 시기를 받던 압도적인 1위.

zl존☆천마★

그런 그림 속 사내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미소 짓는 아이라이츠.

"보고 싶어라."

선홍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난다.

* * *

「업적달성! - 황제의 은인!」

「업적 달성으로 4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벼락을 다루는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가 퍼집니다.」

「명성 증가로 2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2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2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2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죽음을 거부하는 기사'에 대한 이야기가 퍼집니다.」

「명성 증가로 2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2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2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명성 증가로 2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포인트 상점을 이용해 스탯과 스킬 등을 강화해보세요!」

지금 순간에도 명성 포인트가 조금씩이나마 올라간다.

대규모 전쟁에서 활약한 탓이다.

활약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만큼 충격이 강렬했기에 그 힘으로 소문이 퍼지는 것이다.

다만··· 벼락을 다루는 마법사보다 죽음을 거부하는 기사에 대한 말이 더욱 많이 나올 뿐.

"세상에 주인보다 유명해지는 데스 나이트라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테오르도?"

푹신한 소파에서 뒹굴거리는 히오와 그런 히오의 말을 신경도 쓰지 않는 데스 나이트, 테오르도.

황궁 내에서도 귀빈들이 사용하는 너른 방에서 히오는 팔자 좋게 늘어져 있었다.

- 정확히 말해서 주인은 아니지. 공생? 아니야 이것도 이상하고··· 이걸 뭐라 불러야 할까.

데스 나이트가 된 테오르도와의 관계는 상당히 이상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데스 나이트가 됐다면 당연히 주종관계.

히오의 말에 절대복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됐겠지만, 테오르도는 그렇지 않았다.

그 어떤 마법적 작용 없이 만들어진 존재이니 당연한 결과.

그나마 히오의 능력으로 사기를 주입했기에 그 권한이 히오에게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 일단 자네는 빨리 네크로멘서 마법을 좀 배워야 해. 기본적인 소환과 해제는 할 줄 알아야 할 게 아닌가.

"알았어. 그러니까 열심히 배우고 있잖아."

계속 혼잣말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도 테오르도는 별달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히오의 혼에 다른 무엇인가가 끼어있음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 대신 방문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벌써 몇 시간째 저러고만 있는지.

보다 못한 히오가 테오르도에게 한마디 하지만.

"계속 그렇게 있을 거면 내가 말해준다니까 그러네."

테오르도는 그저 고개를 가로젓는다.

실비아가 걱정되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남은 병력을 규합해 황성으로 갈 때까지만 해도 실비아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푸르넬이 혀를 끌끌 차고 욘 토르노가 걱정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었다.

그에 히오 역시 여러 방면으로 걱정이 많았으나···.

황성에 도착하고 입궁한 실비아는 달라졌다.

유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차갑고 냉정한 황녀가 되어 궁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정식 황제로 즉위하지도 않았지만, 내전의 끝을 선포하고 불안한 정세를 안정화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에 매달렸다.

황제로서 어떠할지 조금은 걱정하던 히오도 한시름 놓을 만큼 빠른 속도로 적응한 것이다.

물론 그건 보이는 겉모습일 뿐이고.

실상을 아는 자들이 보기에 실비아의 내면은 여전히 위태로운 것이었으니.

테오르도는 걱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가가지 못한다.

너무도 변해버린 자신이.

불길한 기운을 줄기차게 뿜어대는 스스로가.

실비아의 명성에.

건강에, 앞날에 방해가 될까.

그저 열릴 리 없는 방문을 하루종일 바라보며 걱정만 한다.

"에휴··· 답답하다. 답답해."

- 답답하기는 내가 답답하다네! 얼른 서클 돌리지 않고 뭐하나?

"······응. 미안"

- 할 게 넘쳐 나는데 농땡이나 부리고 말이야. 빨리 2서클 마법 전부 익히고 3서클에 올라야 할 게 아닌가! 평생 2서클에서 썩고 있을 테야?

"알았다니깐···."

지금 배우는 것은 딱히 마법이라 부를 수도 없는 것이다.

푸르넬의 말에 따르면 네크로멘서로서 기본 중의 기본.

가장 먼저 익혀야 하는 언데드의 소환과 해제에 관한 것.

- 문양의 힘으로 사기를 흩트려. 테오르도의 영혼은 사기에 물들었고 그 사기는 모두 자네와 연결되어 있으니 쉬운 게야.

이제는 유령의 눈을 켜지 않아도 제법 또렷하게 사기를 느낄 수 있다.

데스 나이트를 만들어내며 더없이 많은 양의 사기를 느끼고 사신의 힘을 빌려 움직였으니 감각이 크게 발달한 것이다.

그렇게 푸르넬의 가르침 대로 몇 번 연습하다 보니.

- 그렇지. 잘하는구먼.

테오르도의 소환과 해제를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육신을 구성하는 사기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고.

그것을 다시 합쳐서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연습한다고 자꾸 소환과 해제를 반복하니 그제서야 테오르도의 시선이 방문이 아니라 히오를 향한다.

표정은 없지만, 아주 뚱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미안. 이제 안 할게."

그말에 다시 고개를 돌려 방문을 바라보는 테오르도.

유령과 데스 나이트에게 번갈아가며 사과 하고 있는 현실이라니.

한숨만 나온다.

- 자네 저거 어떡할 건가?

"그러게···."

데스 나이트로 되살아난 테오르도.

그 무력이야 말할 것도 없이 강력하다.

생전에도 초인을 눈앞에 둔 기사였는데 그것이 데스 나이트로 돌아오며 더욱 강력해진 것이다.

상처 입지 않는 육체와 사기를 더 많이 불어넣어 주면 그만큼 강해지는 힘.

죽지 않는 몸을 제외하고 순수 무력만 봐도 7위계는 거뜬하리라.

"데리고 가는 건 무리겠지."

- 동감이네.

테오르도에게 걸린 제약은 하나뿐이다.

히오가 죽으면 그도 소멸한다는 것.

하지만··· 저 기사가 그런 것 따위 무서워하겠는가.

그리고 히오 스스로도 저런 상태의 테오르도를 데려가는 건 별로 내키지는 않는다.

본래라면 생전의 기억은 희미하고, 강한 미련에 따른 원망 정도만 남은 채 주인의 말에 절대복종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죽은 직후였고 정상적인 네크로멘시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보니 생전의 기억과 마음이 그대로인 것이다.

그런 테오르도를 어찌 억지로 데려가겠는가.

당장에 무력이 아쉬운 것도 아니니.

미래의 강력한 아군을 하나 얻은 셈 치고 말아야지.

- 제대로 배워서 다음부터는 주종 관계부터 확실하게 박아놓고 시작하게나. 이번은······ 어쩔 수 없지.

"······그래. 테오르도."

히오의 부름에 테오르도가 히오를 바라본다.

"실비아에게 가자."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젓는 테오르도.

"그럼 나랑 같이 갈래?"

더욱 빠르고 강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테오르도.

왠지 기분이 나쁘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됐다 그냥 따라와."

테오르도의 소환을 해제하고 방을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곧 실비아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며칠 동안은 분위기가 어수선하기도 했고.

실비아도 원체 바쁘게 움직이는 터라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었다.

정치적으로는 히오보다 욘 토르노가 옆에 있어주는 것이 훨씬 도움될 테니까.

뭐, 히오 스스로 정리가 좀 필요하기도 했고.

지금은 성내의 분위기도 첫날처럼 개판이지는 않았다.

모든 병력을 규합해서 황자들의 목을 들고 돌아왔을 때는 정말이지······ 혼란의 극치였다고 해야 할까.

1황자와 2황자가 결전을 벌이러 갔는데 돌아온 것은 황녀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노련한 욘 토르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 그리고 황궁 도서관에 관한 말도 빼먹으면 안 된다네.

"알지."

- 그리 말해놓고 또 잊어버리고 헛소리나 줄기차게 해댈 거지 않나?

"내가 언제 헛소리를 그렇게 했다고···."

황성으로 향할 때부터 푸르넬이 노래를 부르던 것이다.

황궁 도서관.

황족과 그에 밀접한 자들이 아니면 이용할 수 없다는 책의 보고이자 유서 깊은 역사의 무덤.

- 아무튼 황궁 도서관은 꼭 가봐야 하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 많아. 기록된 역사를 좀 읽어봐야겠네. 혹시 모르지. 고대 마법서 같은 게 있을 수도 있고.

"알았으니까 그만 좀 말해."

실비아의 방이 머지않았기에 히오는 테오르도를 불러내었다.

마력이 움직이고 그에 맞춰 흩어졌던 사기가 다시 뭉치며 만들어지는 육체.

복도 한가운데 나타난 시커먼 기사.

"자, 이제 실비아한테 갈 거야. 준비됐지?"

테오르도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너한테 있는 죽음의 기운은 실비아에게 영향을 안 준다니까. 괜찮아."

그럼에도 머뭇거리는 테오르도.

그리고 그때였다.

"······마법사."

검성이 나타난 것은.

* * *

검성, 비탈리아누스 마헬.

선황제의 서거 이후 방에 틀어박혀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던 검성이 드디어 상복을 벗었다.

추모의 기간이 끝난 것이다.

"전하를 뵈러 가겠다."

내전의 결과는 그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것이 1황자도, 2황자도 아닌 실종되었던 황녀라니.

다만 그 사실만을 파악하고 그 외의 것은 일절 보고받지 않았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 호기심이 일긴 했으나 본인의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기 위함이었다.

제복으로 갈아입은 비탈리아누스가 책상 서랍을 열고 제법 묵직한 목함 하나를 꺼내 든다.

그것을 들고 방을 나서는 비탈리아누스.

황제의 서거 이후 수개월 만에 방을 나선 그를 향해 마주하는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여온다.

비탈리아누스는 별 감흥 없는 눈으로 인사를 받아넘기며 황녀가 있을 곳을 향한다.

'황녀라.'

어쩌면 조금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다신 없을 명예로운 자리를 거절한,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기사.

멍청한 주제에 고집스럽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사.

그리고······ 이상하게도 자신과 닮았던 기사.

그를 보고 있자면 과거, 황제의 수호 기사로서.

황제의 영광을 위해 검을 들고 강해지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던 자신이 떠올랐으니.

'······무슨 의미가 있었던가.'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다.

그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한데······ 황제는 죽었고 자신은 아직 너무도 멀쩡하지 않은가.

무슨··· 의미가 있었던가.

이제 무엇을 위할 것인가.

비탈리아누스에게 남은 것은 허무뿐이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공허한 눈으로 앞만 보며 걸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복도를 꺾어 돌자 보이는.

"자, 이제 실비아한테 갈 거야. 준비됐지?"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차림의 사내.

여전히 최악인 패션 센스.

"네 그 기운은 실비아에게 영향을 안 준다니까. 괜찮아."

그 사내를 발견한 비탈리아누스의 눈빛이 변한다.

입가에는 즐거운 미소가 걸린다.

"······마법사."

신원미상의 마법사.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속에 막대한 힘을 품고 있는 기이한 자.

히오 파블렌코.

지난번에는 각성도 하지 못한 성녀를 데리고 있더니 이번에는 황궁이다.

"그렇군."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어찌 아무런 힘도 없는 황녀가 그 모든 세력을 물리치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는지.

"마법사. 네가 그리 마음먹었으니. 당연히 그리되었겠지."

저 한 사람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납득되었다.

"무슨 꿍꿍인가."

이전의 만남에는 길거리의 소녀를 성녀로.

이번의 만남에는 힘없는 황녀를 황제로.

어떤 원대한 계획이 그 머릿속에 있는 것인가.

저벅저벅 다가가는 걸음은 이전과 달리 미약한 흥분이 서려 있다. 힘이 실려 있다.

공허하던 눈에 흥미가 일렁인다.

"아니, 무슨 꿍꿍이든 상관없다."

그런 건 차차 알아보면 될 일.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

"못다 한 대련을 마무리 짓지."

속에 가득한 이 울분을.

하소연을 검을 통해 뱉어내고 싶을 뿐이다.

가슴이 답답하여도 어디 풀 곳이 없었다.

평생을 모시던 자를 하루아침에 잃었음에도.

심지어 그 임종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했음에도 그저 무던히 있는 수밖에는 없었다.

자신은 제국의 위대한 별.

검성이었으니까.

조금도 흔들려서는 안 될 황제의 수호 기사.

제국의 수호 기사였으니.

하지만 이 마법사라면.

자신이 인정한 사내라면 속에 들끓는 정체 모를 감정을 오롯이 내뿜어도 받아줄 수 있으리라.

기어이 히오의 앞에 도착한 비탈리아누스.

멈춰서는 두 다리.

히오를 직시하는 두 눈.

그것에 일렁이는 막대한 호승심.

"오, 검성. 오랜만이네."

그리고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는 다른 존재.

아니, 존재야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마법사에 집중하느라 무시하고 있던 존재.

척 보기에도 인간은 아닌, 불길함 그 자체로 일렁이는 자.

마법사의 뒤에 서 있는 그 존재에게 비탈리아누스의 시선이 닿는다.

온통 새카만 그의 전신을 천천히 훑는다.

발끝부터 서 있는 형태. 손끝, 곧게 편 자세까지 살핀 다음··· 얼굴을 바라본다.

"반갑긴 한데 대련은 다음에 하지.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서······."

변함없이 핑계를 대며 대련을 피하려는 히오 파블렌코.

그럼 이제 비탈리아누스가 답할 차례였다.

아직도 몸이 안 좋으냐고.

언제까지 그리 피할 생각이냐고 말이다.

하지만 비탈리아누스는 그저 가만히 있는다.

표정은 굳은 채.

시선은 히오의 뒤를 향한 채.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히오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한다.

"흥이 식었다. 대련은 다음에 하지."

그대로 히오를 지나쳐 걸어간다.

오, 저놈이 웬일이지? 라는 표정의 히오를 지나쳐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그런데 마법사."

뒤는 돌아보지 않은 채 묻는다.

"혹시 기사 한 명을 알지 못하는가."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아주 멍청하고, 고지식 하며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자라네."

히오는 조금의 침묵을 가지다가 답한다.

"······모를 리가."

"역시 그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 제국의 황금 사자.

그 걸음에 맞추어 흔들거리는 금발은 왠지 모르게··· 조금 허무하다.

제국의 검성.

황제의 수호 기사 비탈리아누스 마헬.

"내 일이 바빠서 그런데 대신 말 좀 전해주겠나."

다시 움직이는 그의 걸음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거침없었으며.

전하는 그 말은 무심하기 그지없었으니.

"수고했다고."

이미 죽어버린 기사는 고개를 숙인다.

"그대가 부럽다고 전해주게."

54화 황제와 기사(2)

황궁의 접견실.

황제가 개인적으로 신하나 타국의 사신을 만나는 장소.

"선황제께서 제게 맡기신 물건입니다."

비탈리아누스는 목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실비아를 향해 살짝 밀었다.

실비아는 앞에 놓인 목함의 뚜껑을 열었고.

"이건······."

그 안에 놓인 옥새를 발견한다.

선황제는 옥새를 검성에게 맡겼던 것이다.

옥새상서라는 직책을 폐지하면서까지.

무엇 때문이었을까.

실비아는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즉위식의 날을 조율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차질 없게 준비할 수 있도록 저도 돕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낮추어주십시오."

"아직 재위에 오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즉위식을 거치면 그리하겠습니다."

조용히 오고가는 대화.

이전 두 황자를 대면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원래는 이것저것 이야깃거리가 많았겠으나 오는 길에 궁금증이 모두 풀려버려서 말입니다."

비탈리아누스가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는 움직임을 취했다.

"차라도 좀 더 들고 가지 않으시고요."

"아닙니다. 오늘은 그저 좀······ 쉬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두 사람.

무척이나 짧고 간결했던 만남.

검성은 실비아에게 어떠한 것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다만 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금색의 훈장 하나를 꺼내 목함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는다.

포효하는 사자가 새겨진 팔각형의 훈장.

대륙에 오직 하나뿐인, 한 명에게만 내려지는 영광의 문양.

황제의 수호 기사 훈장이었다.

황제의 수호 기사란 곧 제국의 수호 기사.

제국을 수호하는 방패이자 제국을 상징하는 가장 날카로운 검.

비탈리아누스는 그것을 내려놓은 것이다.

평생을 품에 간직하고 있던 훈장.

그만큼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지만, 마음을 풍족하게 채워주던 상징.

오늘에서야 내려놓은 것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

그만큼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

실비아는 그런 수호 기사의 훈장을 바라본다.

황제를 상징하는 옥새와 수호 기사를 상징하는 훈장.

옥새 옆에 놓은 훈장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시선은 그것에 고정한 채 고저 없는 높낮이로 내뱉는 말.

"이건 그대로 가지고 계셔도 될 것 같군요. 검성 비탈리아누스 마헬. 그대가 아니면 어느 누가 황제의 수호 기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말에 놀란 것은 비탈리아누스였다.

물론 표정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다 이내 알아차렸다는 듯 고개를 작게 주억인다.

"부디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이제 제게는 자격이 없는 훈장입니다."

"검성이 자격이 없다면 누가 자격이 있겠습니까."

"있을 것입니다. 분명."

그 단호한 목소리에 비로소 실비아는 검성을 바라본다.

"······한 명 있긴 합니다만, 그는 이런 명예나 그에 따르는 권력에 관심이 없는 자입니다. 거절하지 않을런지 모르겠군요."

"정녕 아무도 없다면, 그때 다시 권해주시겠습니까."

뭐, 검성이 생각하기에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이 무거운 훈장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 * *

오랜만에 마주한 실비아의 얼굴은 더 수척해져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음에도 그때보다 안색이 더 좋지 않은 것이다.

"무엄하다. 감히 짐을 능멸하는 것이더냐."

냉철하고 단호한, 위엄어린 표정으로 싸늘하게 내뱉는 실비아.

그런 실비아를 보며 히오는 박수와 함께 엄지를 척 추켜세웠다.

"오, 제법 황제 느낌 나는데?"

그제서야 표정을 풀며 배시시 웃는 실비아.

"정말? 몰래 연습 많이 했거든."

히오의 앞에서만큼은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이다.

잠에 들지 못해 짙게 내려온 다크 서클을 화장으로 가리고 괜스레 더 밝게 웃어 보인다.

"그런데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안 좋아 보이네?"

오히려 히오에게 그리 묻는 실비아.

그에 히오는 뚱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다.

"아니, 어떤 덩칫값 못하는 놈 때문에 그래. 신경 쓰지 마."

쓸데없이 덩치만 큰 데스 나이트가 기어이 스스로 역소환을 해내며 숨어버린 것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히오가 실비아를 보며 물었다.

"그보다 너는 좀 어때. 수도의 귀족들은 네 말을 좀 들을 것 같아?"

실비아가 동부 연합 군대를 이끌고, 1황자와 2황자의 수뇌부를 몰살시키고 그 병력까지 모두 흡수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으로 제국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에는 귀족들을 포섭하고 자신의 사람들로 빈자리를 채워나가야 하는데······.

"그럴 리가."

그들이 실비아의 말을 따를 리가.

"당연히 겉으로는 충성을 맹세하지. 유일하게 남은 적통 계승자이고 즉위가 머지않았으니."

하지만 그 속은 전혀 다른 것이다.

수도에 있는 세력이라고는 없는 실비아.

그녀가 가진 유일한 패는 동부 연합의 귀족들인데 수도에서 오래도록 권세를 유지해온 이들에게 동부의 귀족이란 그저 시골뜨기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겉으로는 충성을 맹세하며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이다.

힘없는 황제가 어서 즉위하기만을 기다리며 계획을 세운다.

어떻게 하면 제 뱃속을 더 불릴 수 있을지.

더욱 많은 권력을 틀어쥘 수 있을지.

"이제 누가 진심으로 내게 충성을 맹세할까."

두 황자에게 밀려 숨어지내기만 했던 황녀를 어느 누가 진심을 다해 따를까.

그저 이용해 먹을 생각뿐이겠지.

"그래서 그냥 싹 바꿔버렸어."

그리 말하며 씨익 웃는 실비아의 눈에 짙은 회색이 번들거린다.

올라간 입꼬리가 냉혹하면서도 슬퍼 보인다.

"이용당하고, 눈치 보고, 숨어지내는 건 이제 그만하면 됐으니까."

그래서 모조리 바꿔버렸다.

모두 진심으로 자신에게 충성하기를.

그 더러운 속내를 치워버리고 영혼 깊이 새로운 황제를 따르기를.

실비아는 목함 안에 들어 있는 옥새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황제가 되었다고 해서 믿을 이 하나 없이 평생을 살아가는 건··· 너무 가혹하잖아."

모든 귀족을 모아놓고 그 영혼에게 직접 물었다.

새로운 황제의 아래. 제국을 어찌 이끌어나갈 것이냐고.

대답은 가관이었다.

전쟁으로 비어버린 자리는 생각 이상으로 많았고 그만큼 먹을 건 흘러넘친다.

정치?

제국의 미래?

그딴 게 눈에 들어올 턱이 있나.

어떻게 하면 세력을 더 불릴지.

어떻게 하면 더욱 많은 이득을 취할지.

머릿속에 든 것은 그런 것뿐이었기에.

"그래서 그냥 싹 바꿔버렸어."

씁쓸하게 웃는 실비아.

"어때? 무섭지?"

그에 히오는 한숨을 푹 내쉰다.

유령의 눈을 켜고 실비아를 바라본다.

"그래··· 참 무섭네. 그래서 몸에 또 사기가 제법 쌓였던 거구만."

"헤헤··· 아 그리고 이거 말이야."

옥새 옆에 놓인 훈장을 가리키는 실비아.

"히오 할래?"

그건 그도 잘 아는 것이었다.

황제를 지키는 수호 기사의 훈장.

제국을 지키는 검과 방패의 상징.

신분에 관계없이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경의를 표해야만 하는 훈장.

게임 속에서는 비탈리아누스가 죽는 그 순간까지 품에 간직하고 있던 수호 기사의 훈장이었다.

"누가 수호 기사 훈장을 그런 식으로 권하냐?"

히오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실비아도 멋쩍게 웃는다.

"그것보다 이제 다른 호위 기사는 옆에 안 둘 거야?"

"응.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제 황궁의 모든 이가 진심으로 나를 따를 텐데."

"······그렇게 말하니까 좀 무섭네."

"그런 충성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말이야."

"그럼 내가 괜찮은 기사 하나 아는데 소개시켜줄까?"

"기사? 히오 네가?"

"응. 그런데 부끄럼이 좀 많아."

히오가 데스 나이트를 소환하기 위해 마력을 움직인다.

"너도 몇 번 본 적 있을 걸?"

그대로 훅 솟아나는 검은 오라의 데스 나이트.

커다란 덩치 탓에 위협적인 존재감.

실비아는 갑작스레 나타난 덩치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전장에서부터 몇 번 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히오가 소환하는 개념의 그런 소환수가 아니던가.

당장 호위 기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또 그럴 마음도 없었기에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아, 왜. 니가 맘대로 도망가버리길래 나도 내 맘대로 소환했다. 왜?"

"어디서 주인한테 눈을 그렇게 떠? 아, 눈이 없나? 미안."

히오와 투닥거리는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너무 익숙해서.

"이름은··· 테르? 테디? 음··· 테르가 좋겠다. 이름은 테르야. 뭐, 왜. 이름 예쁘기만 하구만."

온통 검은색으로 범벅된 모습과 어두컴컴한 영혼은 너무 낯선 것이지만, 당황하면 나오는 어색한 손짓.

미세하게 주춤거리는 발동작.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익숙한 것이었기에.

실비아는 그대로 멈춰버리고 만다.

"야야, 좀 저기로 가. 들러붙지 말고. 아니, 네가 시커먼 게 창피해? 너 그거 상당히 위험한 인종차별적인 생각······."

굳이 모든 행동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보면 아는 것이다. 평생을 곁에 있어 주었던 사람이었으니.

오히려 혼을 찾아 헤맸기에 찾지 못했던 사람.

영혼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영혼이 바뀌었어도, 겉모습이 바뀌었어도 그냥 보면 모를 수가 없는 것을.

어찌······ 어찌 나는 이리 마지막까지 나의 기사에게 못할 짓을 저지르는 것인가.

"히오."

여전히 투닥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실비아는 밝게 웃어 보인다.

"나 호위 기사 필요해."

죽음이 닥쳐왔을 때도.

그저 곁에 있었기에 지을 수 있었던 그 미소 그대로.

"나의 기사가 되어 줄 수 있어?"

기사를 향해 밝게 웃으며 손을 뻗는다.

* * *

"이름은··· 테르? 테디? 음··· 테르가 좋겠다. 이름은 테르야."

그 말에 흑색의 기사가 히오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지만, 히오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뿐이었다.

표정은 볼 수 없지만, 기운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감정 정도는 대략적으로 느낄 수 있었으니.

갑작스레 실비아의 앞에 던져진 그 감정은 상당히 복잡한 것이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약간의 걱정.

그리고 부끄러움.

고귀한 황제의 곁에 서기에는 너무도 검게 변해버린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이런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함에 대한 부끄러움.

실비아가 자신을 불쾌해하지는 않을까. 조금의 불안함.

하지만.

"나 호위 기사 필요해."

실비아의 환한 미소.

눈가에 아슬히 매달려 있는 반짝임.

"나의 기사가 되어 줄 수 있어?"

그리고 내뻗어지는 손을 보았을 때.

기사의 그런 번잡스러운 감정은 씻은 듯 사라지는 것이다.

당황스러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가는 것이다.

자신을 향해 내뻗어진 손. 그것을 향해 당연하다는 듯 걸어가는 기사.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새카만 손으로 새하얀 실비아의 손을 받친다. 고개를 숙인다.

그런 기사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오직 하나.

진심 어린 충의.

상대를 위해서라면,

실비아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망설이지 않고 행할 영원한 절의.

죽어도 변하지 않는 충정.

실비아는 그런 기사의 새카만 손을 꼬옥 붙잡는다.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그 손을.

이전과는 달리 냉기가 느껴지는 그 손을 감싸 쥐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정원 구경 가고 싶어."

벌떡 일어난 실비아를 향해 히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저리 좋아할 것을 말이야.

어느 누구의 말처럼 정말 멍청한 기사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접견실 밖을 나와 정원을 향해 나란히 걷는다.

실비아의 손은 기사의 커다란 손가락을 감싸 쥔 채였다.

"있잖아. 테르."

실비아의 부름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말을 할 수 없는 몸인 까닭이었다.

그럼에도 전해져오는 것은 있다.

자신을 향하는 눈.

듣고 있다는 듯 낮춰지는 고개.

자신에게 신경을 쏟고 있는 듯한 움직임.

"하고 싶었던 말이 정말 많았는데 막상 생각나는 말은 하나뿐이네."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원체 무뚝뚝한 기사가 아니던가.

늘 그랬듯 자신이 말하고 기사는 들어주고.

그거면 충분했기에.

"고마웠어. 곁에 있어줘서."

실비아는 더없이 맑게 웃어 보인다.

"앞으로도 계속 고마울 거야."

황제와 그녀의 기사.

영혼을 다루는 소녀와 죽음을 거부하는 기사.

그들이 가는 길에 마주하는 모든 이들이 몸을 바짝 낮추며 길을 터준다.

"고마워. 테오르도."

정원으로 향하는 길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 * *

옥새 옆에 나란히 놓인 수호 기사의 훈장.

그것을 보며 히오는 미소 짓는다.

역시 나란히 있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 내······ 내 이럴 줄 알았지!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고 있는 것을 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푸르넬의 목소리가 방해한다.

"뭐가 또. 왜."

- 왜는 무슨 왜! 자네 황궁 도서관 얘기는 왜 안 꺼내나!

"······아?"

푸르넬이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텅텅 두드리는 소리를 낸다.

물론 두드릴 가슴은 없기에 전부 입으로 내는 소리일 터였다.

- 아이고! 내 이러니 헛소리하지 말고 도서관 얘기부터 꺼내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자네 젊지 않나? 벌써부터 막 어? 정신이 오락가락해?

"알았어. 알았다고. 오늘 안에 하면 되잖아······."

감성이라고는 메말라 터진 유령다운 모습이다.

"일단··· 실비아 몸에 쌓인 사기 좀 빼낼 겸해서."

사신을 소환할 작정이다.

궁을 장악하느라 실비아의 몸에 쌓인 기운도 빼내야 하고 스킬의 연구도 확실하게 해야 하니.

사신을 소환하고 있을 때, 그리고 소환 이후 12시간 동안 나머지 스킬을 쓰지 못하는 무지막지한 페널티.

대체 정확한 효과가 무엇이기에 이런 엄청난 페널티까지 존재하는 것일까.

막강한 페널티에는 그에 준하는 힘이 있기에 히오는 기대가 되는 것이다.

"자··· 그럼. 사신아."

「스킬 - '사신(死神) 소환'이 발동됩니다.」

스킬의 발동과 동시에 급격히 어두워져 가는 실내.

가득 들어차기 시작하는 죽음의 기운.

히오의 등 뒤로 나타나는 사신.

죽음을 관장하는 귀신.

그리고······.

"······."

히오의 목 바로 앞에 멈춘 피처럼 붉은 낫.

금방이라도 목을 꿰뚫을 듯 진하게 퍼져가는 살기.

진득한 어둠 사이에서 번뜩이는 붉은 눈이 히오를 내려다보고.

그제서야 문득 스킬의 설명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 마지막에 있었던 하나의 문장이 이제서야 생각나는 것이다.

「주의하십시오. 사신의 낫은 소환자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55화 사신의 능력

목 앞에 놓인 붉은 낫.

그보다 더 붉게 번뜩이는 사신의 눈이 히오의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왜 이럴까···."

그 눈을 마주 올려보며 히오가 두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진정하라는 듯이.

- 자네에게 불만이 있는 모양인데?

"그러니까 왜···?"

뭘 한 게 있어야 불만이 있지.

지난 전쟁 이후로 처음 사용한 사신 소환이다.

황궁 내 분위기가 어수선했기에 스킬 사용 제한이 걸린 사신 소환을 사용해 보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사신 소환 스킬에 마지막에 적혀있던 문장.

「주의하십시오. 사신의 낫은 소환자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그런데 뭔가······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자비롭지 않나?

진짜 무언가 잘못되었으면 나오자마자 그대로 낫을 휘둘렀으면 될 게 아닌가.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이 벌써 일 분이 넘어간다.

꼭 '나 불만 있어요.'라고 시위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 글쎄··· 자네가 뭘 했는지 잘 생각해보게. 죽음을 관장하는 귀신이 왜 자네에게 불만을 품었을까.

"불만, 불만이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다.

전쟁의 마무리 당시에도 별다른 행동 없이 얌전히 소환해제 되었고.

지금의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기에는 소환과 동시에 목에 낫을 들이밀었으니 지금 이 상황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는··· 그동안 무언가 불만이 있었다는 건데.

······설마.

"너 삐졌냐?"

나타나자마자 주위는 둘러보지도 않고 자신만을 빤히 쳐다보는 눈.

목을 벨 생각이라기보다는 왠지 투정부리는 것 같은 느낌.

"······오랫동안 소환 안 해줘서?"

히오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사신을 올려다보며 물었지만.

움찔.

크게 동요하며 히오의 눈을 피하는 사신.

"진짜라고?"

그대로 침묵하다가 소심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삐진 거 맞구만."

그 말에 조금 더 크게 도리도리치는 사신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에헤이. 뭘 그런 걸로 삐지냐?"

"생긴 건 무섭게 생겨가지고··· 마음이 여리구나?"

계속되는 히오의 놀림에 사신은 그대로 낫을 빼고 몸을 홱 돌려 토라져버린다.

등을 보인 채 방구석으로 가 몸을 웅크리는 그 모습이.

- ······저게 대체 뭐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혀버린다.

* * *

동부 연합과 욘 토르노는 동부로 다시 돌아갔다.

실비아가 수도의 비어버린 관직 중 하나를 제안했지만, 욘 토르노는 고민 없이 거절했다.

"너무 과분합니다."

그에게는 평생을 바쳐온 동부가 있었기에.

매년 쏟아지는 몬스터로부터 그의 성을, 영지민을 지켜내는 그의 삶이 있었기에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이 정도로 못난 오라비를 용서하지는 않을 테니··· 언제든 불러주시면 달려오겠습니다. 전하."

실비아는 동부에 대한 지원을 확대할 것을 약속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영혼에 충심을 강제로 새긴 귀족들 역시 욘 토르노를 따라 함께 돌아갔다.

어차피 그들 역시 실비아를 이용해 먹을 생각뿐이었던 자들.

지금에서야 영혼을 다해 충성을 바치겠지만, 그건 그들이 원래 다스리던 동부에서 해도 충분하리라.

수도에도 인재는 많았으니 말이다.

즉위식의 날짜가 잡혔다.

내전으로 불안해하고 있을 국민들과 기회를 엿보고 있을 타국에게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열릴 것이었다.

새로운 여제의 탄생.

본디 죽었어야 할 소녀는 마법사를 만나 기어이 황제가 되었다.

함께 죽었어야 할 기사는 마법사를 만나 죽지 않는 기사가 되었다.

이는 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그렇게 바쁘게 흘러가는 정국 속에서 히오는.

"음··· 아직 좀 큰 거 같은데?"

사신을 길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히오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신.

"좀 더 작게 해봐."

히오의 말에 좀 더 줄어드는 사신의 몸집.

히오의 머리 위에 위치할 정도로 커다랗던 덩치는 어느새 손바닥만 한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제 좀 봐줄 만 하네."

아기자기한 몸집에 동그랗고 붉은 눈.

장난감 같은 낫까지.

퍽 귀여운 모습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른 사람 눈에 안 보이는 상태라고?"

히오의 물음에 낑낑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신.

"그럼 남들 눈에 보이는 상태로 바꿔봐."

그말이 끝남과 동시에 훅 불어나는 덩치.

다시금 차오르는 어둠. 번뜩이는 눈빛과 날카롭게 벼려진 낫까지.

"어우, 무섭잖아. 다시 원래대로."

낑낑!

다시 작게 돌아온 사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히오가 물었다.

"자주 소환해 달라는 말이지?"

낑!

"그런데 널 소환하면 다른 스킬을 못 쓰는데?"

이는 매우 치명적인 페널티이다.

물론 히오에게는 스킬 외에도 마법이라는 것이 있지만, 아직 그 경지가 낮아 유의미한 공격이 불가하지 않은가.

사신에게 그것을 상쇄할 만큼의 메리트가 있어야 자주 소환할 수 있는 것이다.

낑낑!

사신은 흐물거리는 팔을 휘적이며 의사표현을 한다.

테오르도와 비슷한 느낌이다.

정확하게는 이해할 수 없지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전달되는 느낌.

열심히 양팔을 휘적이며 낑낑거리는 그 말을 종합해보자면.

"아주 쓸모가 많다고?"

뭐, 대충 그런 말이었다.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사신, 아니 그냥 낑낑이.

"낑낑아. 그러니까 너는 내 마력도 채워줄 수 있고."

낑낑!

"체력도 채워줄 수 있고."

낑낑!

"죽음의 기운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낑낑낑!

"음······."

미간을 좁히며 잠시 고민에 빠진 히오.

"이거 완전히···."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말이 안 된다.

"개사긴데?"

낑!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가슴을 쭉 펴 보이는 낑낑이.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기에 히오는 손가락으로 낑낑이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2서클 마법, 뱀피릭 터치.

상대의 생명력을 빼앗아 자신의 마력이나 체력으로 바꿀 수 있는 네크로맨시.

허나 신체가 반드시 닿아야 하며, 효율이 좋지 않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그런 마법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화한 스킬 '사신 소환'은 어떤가.

범위 내의 모든 기운을 통제.

그 넓디넓은 범위는 지난 전쟁에서 이미 확인했다.

그 말인즉 그 안의 모든 기운을 히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의미.

예를 들어 이전 전쟁 같은 상황이면 범위 내의 모든 생명체에게서 마력을 뽑아 히오에게 전달.

혹은 체력을 뽑아내어 히오의 체력을 채울 수도 있고 심지어 죽음의 기운까지 채워줄 수 있다니.

물론 그것으로 생명체를 죽이거나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상대가 소수의 강자라면 그다지 쓸모가 없는 능력.

하지만 대규모 전장에서는 그야말로 무적에 가까운 능력이지 않은가.

적에게는 디버프를, 히오에게는 무한한 마력과 체력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 다른 스킬만 같이 사용할 수 있었어도······."

왼손에는 뇌제.

오른손에는 청염을 두르고 뒤에는 낑낑이를 세워놓은 채 미친 듯이 날뛸 수 있었을 텐데.

페널티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마법이 있지 않은가.

네크로맨서로 경지를 높여서 언데드를 무한히 소환하는 것도 가능할 테고, 그게 아니면 다른 마법을 마구잡이로 난사하는 것도 가능할 터.

상대하는 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빛을 발하는 효과.

전쟁 같은 대규모 전투에서 낑낑이와 함께라면 그야말로 무한의 마법사가 것이다.

게다가 죽음의 기운까지 쌓인다면··· 마법진의 도움 없이 넓은 지역에 다크니스를 펼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게 가장 커다란 메리트다.

"낑낑아······."

히오의 눈이 손바닥 위에 놓인 낑낑이를 향한다.

흥분으로 번들거리는 눈.

"넌 최고야!"

낑낑이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히죽 웃는다.

낑낑!

* * *

그렇게 낑낑거리며 덩실거리는 낑낑이와 히오를 진정시키는 푸르넬의 한심하다는 듯한 말투.

- 뭘 좋아하고 있나? 그래봤자 자네는 마법의 경지가 낮아 활용도 못 할 텐데.

그것은 핵심을 관통하는 지적이었다.

마력과 체력을 무한히 보충받으면 뭐하나.

다른 스킬을 사용할 수 없고 오직 마법으로 승부 봐야 하는데 마법의 경지는 고작2서클.

"그래서 말인데······."

히오가 포인트 상점창을 연다.

「남은 포인트 : 706pt」

"이걸 마력으로 다 바꿔야겠어."

이전까지는 모든 스탯을 고루 분배하려고 노력했다.

근력과 체력, 민첩이 거의 기본 스탯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마력만 집중해서 높였다면 좋았겠지만, 나머지 스탯이 그렇게 낮아서야 말 그대로 스치면 죽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도박에 가깝기는 하지만···."

여전히 모든 스탯은 거의 바닥을 기는 수준이다. 누구든 스치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리라.

그래도 이제는 충분히 여러가지 능력이 생겼지 않은가.

히오가 하기에 따라서 충분히 해볼 만한 도박인 셈이다.

"강함을 미리 당겨오는 느낌이지."

포인트 상점으로 올릴 수 있는 한계는 각 스탯당 500이 한계.

어차피 모든 스탯을 올려야 하는데 마력을 미리 올림으로써 힘을 당겨오고 그걸 활용해서 포인트를 더욱 벌어들이는 것이다.

"그럼 아슬아슬하게 3서클은 될 것 같은데."

서클 하나가 오를 때마다 필요한 마력량이 배 이상으로 든다.

마력 스탯을 500까지 올려도 5서클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만큼이나 필요 마력량이 확 늘어난다는 의미였다.

- 확실히 3서클부터는 다를 게야. 2서클을 견습 마법사라 칭하기는 하지만, 사실 마법사 취급을 하지 않는다네. 정식 마법사는 3서클부터라고 볼 수 있지.

"아무래도 2서클은 좀··· 그렇긴 해?"

2서클에는 제대로 된 공격 마법도 없고 활용성이 좋은 마법도 없다.

하지만 3서클부터는 확연히 달라진다. 제대로 된 한 명의 마법사로서 인정 받는 단계.

- 그리고 정식 마법사부터는 마탑 내에서도 갈 수 있는 곳이 많아질 게야. 마탑의 포탈이 내가 알던 거랑 좀 바뀌기는 했지만······ 아무튼, 마법사는 3서클부터라는 건 변함이 없지.

이름만 들어도 매력적인 마법이 많다.

우선 기본적인 속성 마법.

- 파이어 볼, 아이스 볼, 윈드 커터, 땅에서 돌가시를 솟구치게 하는 스톤 스파이크···.

그 외에도 여러 쓸모 있는 마법이 많다.

낙하 속도를 줄이는 페더 폴. 섬광을 터트리는 플레시 밤. 에어 헤머, 포그 클라우드, 버닝 핸즈, 페인 등등···.

그 갯수부터가 2서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마탑으로 가는 포탈을 찾아야 한다는 건데."

이 못난 스승은 네크로맨서 마법밖에 모르니 다른 마법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마탑으로 가야 한다는 것.

- ······네크로맨시도 좋은 마법이 많은데···.

"효율이 안 좋잖아. 효율이."

네크로맨서 마법에는 필요한 것이 너무 많다.

시체나 혼, 그런 것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팬텀을 제작하든 언데드를 만들든 하는 것이었다.

"황궁 어딘가에도 있을 법한데··· 아는 거 없어?"

- 네크로맨서 지부 말고 다른 마법사의 집은 잘 모른다네.

꼭 황궁이 아니더라도 수도 어딘가에는 마법사의 집이 분명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첫 번째 과제.

이건 사실 짐작 가는 곳이 몇 군데 존재한다.

게임 속에서 수도를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돌아다녔었으니.

그리고 두 번째 과제는 시르베르트를 만나는 것이다.

애초에 수도로 향하고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시르베르트를 만나서 이것저것 묻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그것이 두 번째 과제.

세 번째 과제는 마탑으로 가서 완전한 3서클에 오르는 것.

짧은 목표는 이렇게 세 가지로 잡으면 되겠다.

"일단 그럼 마력부터······."

히오가 포인트를 사용하려는 순간.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히오 파블렌코님. 실비아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 * *

호출을 받고 찾아간 실비아의 방에서 뜻밖의 물건을 건네받았다.

"이걸 진짜 나 줘도 돼?"

팔각의 테두리 안에 금색으로 새겨진, 포효하는 사자의 문양.

제국 수호 기사를 상징하는 훈장.

실비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해봤는데 역시 히오 말고는 줄 사람이 없어."

"왜 비탈리아누스도 있고 네 뒤에 그 시커먼 기사도 있잖아."

"검성은 한사코 거절했고 내 호위 기사는···."

실비아가 뒤에 꼼짝 않고 서 있는 테오르도를 바라본다.

"이런 명예는 중요치 않다고 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데스 나이트를 보며 히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아마 나한테 무슨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네 호위 기사가 역소환 될 일 없을 거야. 그리고 혹시 급한 일 있으면 역소환해서 나한테 보내고."

"응. 그럴게."

"그럼······ 이건 내가 잘 간직하지."

수호 기사의 훈장을 받아 들고 품에 넣자 역시나 예상대로 울리는 알림음.

「업적달성! - 황제의 수호 기사」

「업적 달성으로 4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

이로써 남은 포인트가 무려 1,100포인트.

마력 스탯을 무려 110이나 한번에 올릴 수 있는 수치.

이제 3서클에 오를 마력은 충분해진 셈이었다.

- 황궁 도서관! 황궁 도서관 얘기는 도대체 언제 할 셈인가!

56화 사라진 역사

「스탯 '마력'을 1,100pt로 구매합니다.」

「스탯 '마력'이 +110 상승합니다.」

서클 주변으로 마력이 훅 불어나는 비현실적인 현상.

신의 힘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신비한 느낌.

뭐가 어찌 됐건 기분은 좋다.

1서클과 2서클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마력이 한번에 생겼으니.

3서클은 이제 충분하리라.

- 흐흐흐. 드디어 황궁 도서관에 가보는구먼.

조금 다른 이유이긴 하지만, 푸르넬 역시 기분이 좋아 보인다.

황궁 도서관 출입을 실비아에게 허락받은 것이다.

제국 내에서 가장 명예로운 수호 기사의 직책에 황제의 은인.

뭐, 애초에 황제랑 친구 먹은 사이인데 못 갈 곳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그래도 공적인 절차는 밟아야 했으니 말이다.

"황궁 도서관에 그렇게 가고 싶었어?"

- 물론이지.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기에는 모든 역사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을 걸세. 조금의 과장이나 거짓 없이.

푸르넬이 그렇게나 황궁 도서관 노래를 불렀던 이유.

- 어비스와 전쟁에 대해 알려진 게 기이할 정도로 없지 않은가.

그곳에는 모든 역사가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 보관되어 있을 터였기에.

이유를 확인하러 가는 것이었다.

- 어디 마법사들만 전쟁에 참전했겠는가. 당시에는 마법의 황금기였으니 비중이 크긴 했지만, 모든 인간과 타종족까지 힘을 합쳐 싸웠다네.

그런데 현시대에 그것을 기억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드래곤? 요정? 엘프? 정령?

동화 속에서나 간신히 등장하는 종족이 되어버렸지 않나.

전쟁은 없던 것이 되었고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이 역시 아무도 없다.

- 마법의 상실과는 또 다른 느낌이지. 마법은 그래도 익히지 못한다 뿐이지 기록은 이어져 오고 있지 않은가.

물론 마법을 익힐 수 없는 세상이다 보니 마법사에 대한 인식 자체가 사기꾼이나 광대에 가까워졌지만, 그래도 기억은 하고 기록은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전쟁에 관한 것은 전혀 전해져오지 않는다.

히오 역시 이것이 의문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이런 뒷배경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모니터 속 세상이라는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결국 몰려드는 심연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룩한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까지도 이 현상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많지 않았다.

사실, 알아내려고 크게 노력하지도 않았었다.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내야만 하고 궁금해해야만 한다.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히오는 황궁 도서관으로 향한다.

출입증을 경비병에게 보여주고 넓은 실내로 들어간다.

높은 층고와 그 아래에 놓인 셀 수 없이 많은 서적.

쳔 년의 세월 동안 쌓여온 흔적.

외부의 침입을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역사의 무덤이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겠지."

- 동감이네.

전쟁 이전 시대.

용이 불을 뿜고 화려한 마법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부터 존재해오던 제국이다.

그런 시대에 지어진 황궁 도서관이 고작 이것뿐이겠는가.

딱히 설명해주는 이가 없어도 그 아래층으로 가는 방법쯤이야 찾기 쉬운 것이다.

마치 장식처럼 자연스레 박혀 있는 마정석.

거기서 미약하게 흐르는 마력의 흐름을 따라가면 자연스레 길이 나온다.

그곳에 출입증을 가져다 대니.

비어있던 바닥이 양쪽으로 부드럽게 열리며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드러난다.

-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도 모르면서 관리는 잘해놓았군.

매끄럽게 열리는 비밀 계단.

꾸준히 교체되고 있는 듯한 마정석.

황궁답게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모습이었기에 더욱 의문스럽다.

아예 출입하는 법 자체가 손실되었다면 모를까.

관리가 되어 있고 출입을 하고 있는데도 과거의 전쟁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었으니.

그런 의문을 간직한 채 너른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위의 층보다는 확연히 좁은 공간.

하지만 여기 있는 서적들이야말로 진짜배기인 것이다.

〔피논 식 검술서〕

〔비델루에 가문 비전 검술서〕

〔바베리 식 기(氣) 단련법〕

〔파르매니온 식 권술서〕

〔거버스 가문 비전 창술서〕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무술 서적부터.

〔마도서 - 링 오브 파이어〕

〔마도서 - 레인 오브 아이스〕

〔제르만 바벨 - 중력 마법의 미래와 개선〕

적은 숫자지만, 마도서와 마법에 관련된 논문도 있었다.

- 마도서는 그리 탐내지 않아도 되겠어. 그리 특별한 건 없어 보인다네. 여기로 오기 전, 이미 마탑에서 검수를 끝내고 황궁으로 보내거나 했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

어차피 여기 있는 건 마탑에 전부 있을 것이라는 푸르넬의 말에 마도서에 대한 미련을 깔끔하게 버렸다.

제아무리 천년제국이라 하여도 마법에 관해서는 마탑 아래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국가 상관없이 절대적인 마법적 권위를 지닌 것이 테트라디아 마탑이었으니.

결국 여기서는 찾아야 할 것은 역사서라는 말이었다.

〔구막 상업 왕국 上〕

〔구막 상업 왕국 下〕

〔연리전 동방 연합국 上〕

〔연리전 동방 연합국 中〕

〔연리전 동방 연합국 下〕

···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역사서.

게임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머나먼 과거의 왕국부터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의 이름까지.

고대 왕국의 흥망성쇠가 기록되어 있는 역사서.

- 오오··· 역시나 타국의 정치에 제국이 깊게 관여하고 있었구먼. 아닌 척 뚝 잡아떼더니 말이야.

국가에 관한 역사 외에도 온갖 것들이 있었다.

중요 가문에 대한 상세한 저술.

제국에서 벌어진 각종 비밀스러운 역사.

황가의 비사 등.

그런 것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괴이(怪異)와의 투쟁〕

수많은 역사서 속에 파묻혀 있는 한 권의 책.

제목에 적혀 있는 괴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기에 서둘러 책을 꺼내 들었다.

생각보다 얇은 두께.

정갈한 글씨체로 적혀 있는 내용을 쭉 읽어 내려 간다.

- 1005 : 동부 타울린 백작령, 와다드 백작령, 누이츠 자작령. 괴이에 잠식.

- 1006 : 서부 도시 케일럿, 도시 이데네예, 라벨 백작령. 괴이에 잠식.

- 1007 : 황제 페르디카스 베르덴, 집결의 명. 괴이와의 본격적인 전쟁 선포.

- 1008 : 초인 그라프 마르코프, 초인 펠리페 디오소티, 초인 하르케 루아드, 상급 마도사 파스칼 카돈, 상급 마도사 하밀카 생안드레. 중요 괴이 지역에 파견 결정.

···

쭉 읽어 내려가는데······ 뭔가 이상하다.

시작이 너무 뜬금없지 않나.

괴이가 무엇인지. 언제 어떻게 시작했는지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단 대충 읽어내려가며 뒷장을 몇 번 넘겨 봤지만.

"이게··· 끝이라고?"

너무 짧았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 ······허.

푸르넬의 허망한 헛웃음.

그리고 동시에 히오 역시 이상한 느낌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이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미세한 자국.

- 누가 찢어버린 자국이 아닌가.

어쩐지 뜬금없던 시작.

너무 얇았던 두께. 이상하게 비어 있던 사이사이의 내용.

누군가 의도적으로 책을 찢어버렸다.

내용을 은폐했다.

- 다른, 다른 책도 어서 살펴보게!

책을 내려놓고 다시 다른 책을 찾아 뒤적인다.

〔리퓨에 교단 신탁〕

교단의 신탁이 연도별로 쭉 기록된 서적.

마찬가지다.

어비스와 전쟁할 시기의 신탁만 모조리 찢겨져 있었다.

〔슈르딘 교단 신탁〕

〔베누스 교단 신탁〕

〔메르쿠리우스 교단 신탁〕

······모두 마찬가지다.

정확히 그 시기의 신탁 내용만이 전부 비어있다.

기록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찢어진 것이다.

그것도 자세히 관심 가지고 보지 않으면 티 나지 않을 만큼 자연스레 찢겨있다.

- 조금만 더··· 찾아보게나.

한참을 뒤적였지만··· 모든 것이 똑같았다.

그 시기의 기록은 전부 누군가에 의해 사라졌다.

심지어 다른 종족에 대한 언급은 일절 존재하지 않았고 그와 관련된 서적 역시 없다.

그건 찢어버린 수준을 넘어서 아예 없애버린 게 아닐까··· 하는 추측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 ······돌아가지.

결국 아무런 소득도 얻어내지 못했다.

황궁 도서관에서 얻은 것은 찝찝한 기분뿐이었다.

* * *

- 여기까지 손을 뻗었다면, 관련된 기록은 적어도 제국 내에서는 찾을 수 없겠어.

제국의 최심부라 할 수 있는 곳까지 들어와 굳이 어비스와 이종족에 관련된 기록만 모조리 찢어버렸다.

"이유가 뭘까?"

- 글쎄···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군. 전쟁의 중반부터 유령이 되어버린 까닭에 정보가 너무 없어.

"씁. 어쩔 수 없지."

누가 했는지, 무슨 이유에서 그랬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리고 비어버린 그날의 기록 역시, 황궁 도서관에 없다면 당장에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럼 이제 슬 떠나야겠네."

황궁에서의 볼일은 도서관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실비아의 기운도 낑낑이를 이용해 뽑아주었고 그 옆에 테오르도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어졌으며··· 비상 시 연락은 테오르도를 통해 할 수 있을 터이니.

황궁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 어디로 갈 생각인가?

푸르넬의 물음에 씩 웃음 짓는 히오.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시르베르트를 만나러 가야지."

만나는 과정이 너무 길었지 않나.

지구에서 만났을 때 곧 찾아가겠다 그리 말했었는데.

그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베르가의 죽음. 테트라디아 마탑. 푸르넬과 만나고 제대로 된 마법을 배웠으며······ 실비아를 만나 황제로 만들기까지.

그 과정을 거치고서야 도착한 것이다.

이메니아 아카데미.

그리고 히오의 예상대로라면.

"거기 마법사의 집이 숨겨져 있을 거야."

테트라디아 마탑으로 향할 수 있는 포탈이 이메니아 아카데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시르베르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지하에 숨어 있을 마법사의 집을 찾아 마탑으로 향하는 것이 가까운 계획.

"이번에 마탑으로 가면 좀 오래 머물러야겠어."

내전을 치른다고 마법 수련이 뒷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아카데미에 포탈이 있고 마탑으로 갈 수 있으면 시간을 투자하여 3서클 마법을 제대로 익힐 작정이었다.

- 잘 생각했네. 마탑에 있는 또 다른 나도 오랜만에 만날 수 있겠구먼. 흐흐흐.

* * *

이메니아 공립 아카데미.

하나의 도시라 불릴 정도로 넓은 부지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아카데미.

능력 있는 새싹들은 이메니아에 재학하는 것을 꿈으로 삼고 이미 검증된 능력자들은 이메니아의 교수로 들어가는 것을 명예로 삼는다.

그러니 제국의 거대 기관이자 중요 기관 중 하나로서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킬 사용자나 기사의 양성.

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들 간의 인맥 다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교의 장. 보이지 않는 정치적 다툼. 가문간의 앙금··· 등등.

아무튼, 여러 의미로 복잡하고 그만큼 대단한 곳이 이메니아라는 말이었다.

"비슷한 능력이라고 해서 같은 스킬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진 스킬의 효과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

그런 아카데미의 정교수, 시르베르트.

"정확한 효과를 알아냈으면 그다음으로 자신이 지닌 특성을 찾아야 한다. 스킬과 특성. 이 두 가지를 분리할 줄 알아야 해."

그의 강의는 인기가 많은 편이다.

깔끔한 외모에 성격 또한 비슷해 알아듣기 쉬운 강의.

또 무식하게 실전만을 강요하는 다른 스킬 학부 교수들과는 달리 그만의 이론이 정립되어 있으며 실제로 그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스스로의 강함을 증명하기까지 했다.

적어도 이메니아에 재학 중인 학생이라면 시르베르트의 강함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

서부 루고 지방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오크 부락을 반나절 만에 전멸시킨 믿기 힘든 업적.

그에 황실로부터 염동의 대가라는 칭호까지 받은 강자가 시르베르트 교수였으니.

그의 강의는 늘 학생들로 북적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가진 스킬을 수월하게 강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스킬이 무엇인지. 또 타고난 특성은 무엇인지. 스킬과의 시너지는 어떠한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꽉 들어찬 강의실.

유명 교수 시르베르트에게 집중된 수많은 시선.

그 속에서 평온하게 울려 퍼지는 시르베르트의 목소리.

"자신의 스킬을 명확하게 알아내기 위한 방법으로는······."

그렇게 시르베르트가 강의를 이어가고 있을 때, 돌연 넓은 강의실의 문이 조심스레 열린다.

"저··· 시르베르트 교수님."

조교수 호펜의 등장에 강의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고.

"잠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말에 시르베르트의 미간이 좁혀진다.

호펜이 강의 시간에 이리 불쑥 찾아온 적이 있었던가.

방해받는 걸 싫어하는 시르베르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기에 시르베르트는 의구심을 품고 호펜에게로 향한다.

복도로 나와 강의실 문을 닫고서야 이유를 설명하는 호펜.

"그······ 누가 교수님을 찾아오셔서 강의 끝나면 바로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기어이 시르베르트의 인상이 팍 구겨진다.

"겨우 그 말 하려고 강의까지 끊고 나오라고 한 건가?"

"아니 그게 교수님을 찾아오신 분이 제국 수호 기사 훈장을 가지고 계신 분이세요."

"수호 기사 훈장?"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인물.

"······검성이 나를 찾는다고?"

수호 기사하면 검성.

검성하면 수호 기사.

그건 이미 오래전부터 모두에게 관념처럼 박힌 인식이었으니 시르베르트의 그런 물음은 당연한 것이었고.

호펜은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분명······ 제국을 상징하는 황제 폐하의 수호 기사 훈장인데 검성이 아니라 다른 분이에요."

"다른 사람이 그걸? 누군데?"

"그게······."

말끝을 흐리는 호펜.

자신도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할 말을 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가 간신히 생각해낸 단어에.

"광대······ 같은데요?"

시르베르트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버렸다.

57화 이메니아 아카데미

제국을 수호하는 명예로운 직책.

황제의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는 상징임과 동시에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무력을 지녔다는 방증.

검성, 비탈리아누스 마헬이 아주 오래도록 수호 기사를 도맡아오며 그러한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인물.

든든한 방패이자 최강의 검.

그러니 황제의 수호 기사 문양을 보여주었을 때 작은 소란이 일어난 것이다.

'······생각보다 효과 좋은데?'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제국 수호 기사 문양이다.

그것을 보여주며 시르베르트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르베르트의 방으로 올 수 있었다.

물론 문양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절차가 있긴 했지만.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힐끗힐끗 히오를 쳐다보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계획대로 편하게 들어오긴 했다는 것이다.

- 크으. 옛 기억이 새록새록 하구먼. 새 건물이 몇 개 보이긴 해도 거의 그대로야. 옛날에는 테트라디아에서 왔다고 하면 마법사 새싹들이 그냥 바짝 얼어가지고 잘 보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

옛생각에 또 말이 많아진 푸르넬.

대충 흘려들으며 히오 나름대로 아카데미에 대해 평을 내렸다.

'전체적으로 느낌이 테트라디아와 비슷해.'

건물의 양식이나 생김새가 마탑에서 내다본 고대 도시 테트라디아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한 히오의 생각에 그새를 못 참고 끼어드는 푸르넬.

- 애초에 아카데미란, 체계적인 마법사 양성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비슷하게 느껴질 만도 하지.

그런 푸르넬의 말까지 듣고 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욱 확실해지지 않았나.

'이 안에는 분명 마법사의 집이 숨겨져 있겠네.'

의심가는 장소는 몇 군데 있지만, 워낙에 아카데미 자체가 넓었기에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할 테다.

그전에 시르베르트와의 대화를 먼저 마무리해야 할 테고.

"자식, 성공했네."

아카데미의 교수동.

즉, 본관에서도 상당히 높은 층에 위치한 시르베르트의 방.

넓고 화려하고 깔끔하다.

"곧 휴가 갑니다 같은 닉네임이나 쓰던 놈이 말이야."

닉네임 꼬라지가 왜 그런지.

같은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다.

히오가 그런 생각을 하며 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 벌컥 열리는 문.

거침없이 들어오는 발걸음.

제법 큰 키에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

"시르베르트."

시르베르트의 시선이 히오를 향하고 곧 놀란 듯 휘둥그레진다.

"······지존 천마?"

* * *

"대체 그 복장은······ 아니 그것보다 제국 수호 기사의 훈장이라니. 검성이 아니라 네가 받게 된 거야?"

맞은편에 앉은 시르베르트의 물음에 히오가 고개를 끄덕인다.

"누구 덕분에 정보가 새어나가서 말이야."

시르베르트 측에서 황녀에 대한 정보가 샜고, 그로 인해 히오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말.

그에 시르베르트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건······ 할 말이 없다. 예상치 못했어."

"누구야. 어디서 정보가 샌 거야?"

"내 생각이 맞다면. 아니, 거의 확실해. 아이라이츠야."

"······아이라이츠."

히오가 모자를 벗어 옆에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확실히 아이라이츠가 범인이라면 앞뒤가 맞아떨어지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 벤타이얼 할 때는 딱히 모난 곳 없이 괜찮은 녀석이었지 않아?"

"모난 곳이 없었다라···."

그러고 보니 다른 녀석들한테는 그리 보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히오는 아이라이츠의 숨겨진 이면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으니.

"여기 와서 아이라이츠 직접 본 적은?"

시르베르트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없어."

그리 답하고는 변명하듯 서둘러 뒷말을 이어간다.

"본적은 없지만, 그래도 봐왔던 시간이 있잖아. 녀석은 우리 못지않게 진심으로 그 게임 속 세상을 지키고자 했던 놈이잖아."

"아니지. 아니야."

이번에는 히오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도 그 녀석에 대해 아는 건 많이 없지만, 확실한 건."

랭킹 3위. 아이라이츠.

"그거 다 연기야."

그는 지독한 변태.

스토커.

"나 따라 했던 거야. 지존 천마의 지독한 스토커였거든."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냥 내버려뒀는데···.

지존 천마를 흉내 내며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이 다른 랭커들에게는 제법 믿음직하게 느껴졌나 보다.

물론 히오도 아이라이츠가 이렇게 대놓고 배신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이걸 배신이라 하는 것이 맞는 건가.

애초에 같은 편이기는 했던가. 그만큼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아이라이츠가 네 사생팬···?"

시르베르트의 입장에서는 섣불리 믿기 힘든 말이었다.

아이라이츠가 어떤 이득이 있어서 전쟁을 혼란으로 몰고 간 것이라 추측 했을 뿐.

한데 그런 게 아니고······.

"그럼 전쟁을 난장판으로 만든 이유도 전부··· 너 때문이라는 말이야?"

"정확히는 내가 지존 천마와 동일 인물인가 확인해보고 싶었겠지."

"미친······."

단순 스토킹을 위해서, 지존 천마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만한 희생을, 그만한 일을 벌였다니.

쉽게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믿기 힘든 이유는 또 있었다.

"나는 너에 대한 언급은 조금도 하지 않았어. 그저 황녀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도록 설계를 해놨다. 보험을 들어놨다는 식으로 말했지."

그런 상황에서 아이라이츠는 어찌 히오의 존재를 알고 일을 벌인 것인가.

그에 대한 정답은 얼추 짐작이 간다.

"나를··· 본적이 있었겠지."

어디선가 히오를 목격하고 그를 지존 천마라 의심했다.

그렇다면 그 목격 장소는 어디겠는가.

내전이 발생하기 이전일 것이고.

히오가 힘을 발휘한 순간은 몇 없었으니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도시 사우어.

성녀가 탄생한 도시이자 히오가 검성과 맞선 곳.

그리고······ 마인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 흑아의 흔적이 있었던 곳.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었으니.

히오의 표정이 굳어져 간다.

"아이라이츠는 아무래도 흑아와 손을 잡은 모양이야."

아이라이츠 정도 되는 강자가 하필이면 마인이 나타난 도시에.

그것도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나타날 이유가 무에 있겠는가.

흑아와 손을 잡았다.

그것 외에는 딱히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히오의 표정은 심각했고 시르베르트는 연신 믿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

시르베르트의 심정도 이해는 한다.

히오 역시 자신이 말하고도 적지 않게 놀란 참이었으니.

5위권 안쪽의 최상위 랭커가 흑아와 함께 움직인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불확실한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드는, 불행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각자 나름대로의 생각 정리가 끝나고.

"그래···. 생각해보면 아이라이츠 좀 이상하긴 했어."

시르베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저 좀 유별난 놈이다··· 생각했는데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모습을 몇 번인가 본 적 있었지."

히오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녀석이 이럴 줄은 예상 못 했다."

그냥 게임 속 흔한 미친놈 중 하나인줄로만 알았지.

랭킹 1등이라고 하면 막 따라다니고, 그와 같은 행동을 하고 비슷한 장비를 착용하고. 뭐, 그러는 놈들이 있지 않은가.

실제로 지존 천마 시절에는 제법 자주 있는 일이었고 아이라이츠도 비슷한 놈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랭킹 3위씩이나 되는 놈이 그런다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뭐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놈들이 많음을 알고 있었으니.

······하지만 녀석은 생각보다 더한 놈이었나 보다.

게임이 아닌, 현실이 되어버린 곳에서까지 이런 일을 벌일 정도로 말이다.

"아무튼, 아이라이츠에 관한 건 차차 다시 얘기해 보고······."

히오가 몸을 시르베르트쪽으로 숙인다.

"하나 더 물어보자."

시르베르트의 눈을 직시한다.

그를 찾아온 애초의 목적이 무엇이던가.

어비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지 않나.

"어비스는 왜 클리어하지 않은 거야."

그러니 이제부터가 진짜 본론의 시작이다.

어비스는 왜 클리어하지 않은 건지.

지구의 남태민과 시르베르트가 어찌 공존할 수 있는 것이고 최초의 각성자라 불리며 추앙받고 있는 것인지.

히오의 물음에 시르베르트 역시 표정을 진중히 하며 답한다.

"그러니까······."

준비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내뱉는 그 첫마디는 다소 뜬금없는 것이었다.

"지금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일만의 랭커. 그 대부분은 우리처럼 여기를 현실이라 여기지 않아."

빙의한 랭커의 대부분은 이 세상을 현실이라 여기지 않는다.

현실임이 분명함에도 부정하는 자들이 대부분.

이유는 명확했다.

"포인트 상점에서 로그아웃 이용권을 구매할 수 있잖아. 그것 때문이야."

"······로그아웃···?"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시르베르트.

그에게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로그아웃하는데 포인트가 제법 들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하는 게 더 이득이지. 바깥에서 그것 이상의 포인트를 벌 수 있으니까 말이야."

당연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들이 히오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로그아웃이 포인트 상점에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수십 번도 더 넘게 찾아봤으니 확신할 수 있다.

그런 물건 따위, 히오의 포인트 상점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히오의 충격도 모른 채 시르베르트는 말을 이어간다.

"밖에서 활약해 명성을 떨쳐도 포인트가 쌓이잖아. 물론 질적으로는 그닥이지만, 양으로 압도하지. 이곳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소식이 빠른 세상이니까."

제한 시간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건 랭커들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빙의자들은 이 세계를 현실이라 생각하지 않아."

현실이라 여길 수밖에 없는 환경임에도 그러지 않는다.

왜냐.

그래야만 마음이 편했으니까.

이곳은 어차피 멸망할 세계.

어차피 죽을 자들. 아니, 애초에 npc였던 이들.

그러니 그냥 포인트나 벌고 원래의 세상이나 잘 지켜보자.

이런 생각이 대부분인 것이다.

"어비스를 클리어하지 않는다는 계획도 거기서 발생한 거야."

어비스를 공략하지 않으면 어비스 게이트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어비스 몬스터가 쏟아져 나온다.

그것뿐이었다면 빙의자들은 어비스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으리라.

그들에게는 이 정체모를 세상보다 원래의 세상이 더 소중했으니.

하지만 어비스를 공략하지 않으면 지구에도 어비스 게이트가 똑같이 나타난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가짜세상이 아닌, 자신들의 현실이 위협받는 것이다.

그렇기에 생겨난 계획이 이것이다.

"이 세상 자체를 실험대로 삼자."

어차피 멸망할 세상. 본래의 세상이라도 지키자.

어비스의 초반 부분을 일부러 클리어하지 않으며 실험을 하자.

저주받은 어비스의 기운을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이곳 세상을 희생하면서 말이다.

어차피 이곳은 멸망할 세상이지 않은가.

어차피 전부 npc였던 자들이 아닌가.

어차피 현실이 아니고 자신들의 소중한 인연은 전부 바깥 현실에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변명하면서 말이다.

"하아······."

거기까지 들은 히오가 머리를 쓸어올리고 마른 세수를 한다. 한숨을 내쉰다.

모두가 로그아웃이 가능한 세상에서 홀로 나가지 못하는 현상.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가짜 세상 취급하며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이들은 실험체 취급하는 상황.

이를 대체 어찌 해결할 것인가.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 *

이메니아 아카데미의 중앙 광장 분수대.

그곳을 가로질러가고 있는 붉은 머리칼의 소녀.

"클레어!"

자신을 부르는 명랑한 목소리에 클레어의 고개가 돌아간다.

"같이 가!"

생글생글 웃으며 달려오는 소녀의 이름은 라베나.

클레어의 몇 없는 친구였다.

사실 라베나가 일방적으로 다가온 것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친구라 부를 정도의 사이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다음 강의가 시르베르트 교수님 강의지?"

"응."

"전투 실습이라는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울상짓는 라베나와 그게 뭐 어렵냐는 표정의 클레어.

클레어에게는 실습이든 시험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은 아득히 높은 곳에 있었으니.

고작 또래 아이들끼리 하는 모의 대련 정도야, 긴장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 반응이 익숙한지 라베나는 웃으며 클레어의 팔짱을 끼고 함께 걷는다.

"그래도 시르베르트 교수님 수업이라 좋아! 교수님 너무 멋있으시지 않아? 젠틀하시고 아는 것도 많으시고 엄청 강하기까지 하시잖아."

"음······ 그런가?"

"또 또 그런 반응일 줄 알았어."

이것마저도 예상했다는 듯 클레어를 콕콕 찌르는 라베나.

클레어를 놀릴 생각에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더 짙어진다.

"응? 대체 누굴까? 우리 클레어가 반했다는 사람이?"

"바, 반했다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누가 봐도 어색한 클레어의 반응.

강해지는 것 외에는 관심 없는 클레어가 이 주제에는 늘 이렇게 반응하니.

라베나의 입장에서는 놀리는 걸 참기도 힘든 것이다.

"이제는 알려줄 때도 되지 않았어? 귀띔이라도 해주면 안 돼? 어때? 잘생겼어?"

"으음······."

평소 같으면 새빨개진 얼굴로 그런 거 아니라며 자리를 피했을 클레어가 조금 망설이는 듯하자 이때다 싶었는지 라베나가 더욱 몰아붙인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그래? 시르베르트 교수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야?"

황실으로부터 직접 '대가'의 칭호를 받은 시르베르트에게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클레어가 아닌가.

그런 클레어가 저리 반응할 정도라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

이쯤되니 라베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뭐랄까······."

클레어도 진지하게 자신의 목표를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강대한 힘을 바탕으로 악인을 벌하는 자.

그럼에도 힘을 드러내며 우쭐대기는커녕 동네 아이들을 상대로도 화 한번 내지 않는 사람.

한마디로.

"멋있는 사람이야."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도 어디 보통 힘인가.

눈짓 한 번으로 벼락을 부리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감정을 조절한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특히 아카데미에 들어오고 나서 우쭐한 마음이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남들보다 확연히 앞서나가는 재능.

늦게 시작했음에도 언제나 선두권을 달리는 성적.

교수들의 칭찬. 경쟁자들의 시기, 질투.

그렇게 으스대고픈 마음이 들 때 고개를 가로저을 수 있었던 것은 워낙 대단했던 한 사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강자란 어떠한 것인지.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의 여유란 어떤 것인지 눈앞에서 보아버린 까닭이었다.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은 그 사람 옆에 있어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거야."

어느새 히오는 클레어의 목표 그 자체가 된 것이다.

그의 여유를. 강함을 닮아가는 것.

그러니 다른 이들이 눈에 찰 리가 있겠는가.

시작부터 이미 너무 높은 곳을 보아버렸는데.

"아······ 응. 그렇구나."

클레어의 대답에 당황한 것은 라베나였다.

가볍게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진지했기에.

"클레어는 그 사람을 진짜 좋아하는구나."

"그런 거 아니라니까!"

새빨개진 얼굴로 빽 소리치는 클레어를 웃으면서 바라본다.

확고한 목표가 있는 클레어가 부럽기도 하고 다른 것에는 일절 관심도 없는 클레어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증이 이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전투 실습장으로 향하고 있을 때.

"어디서 천한 냄새가 진동하나 했더니."

같은 학생복을 입고 있는 보라색 머리칼의 소녀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손은 코를 가볍게 틀어막은 채였다.

"신분도 미천하고 가진 것이라고는 그 몸뚱이뿐인 것들이···."

비싼보석이 박힌 액세서리에 우아한 움직임.

거기에 보라색의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는 그 모습이 꼭······.

"주제도 모르고 교수님께 아득바득 기어가고 있구나."

고구마 같이 생겼다.

58화 이메니아 아카데미(2)

바깥의 세상.

즉, 지구에서 벌어들이는 명성 포인트의 양은 이곳 벤타이얼 속 세상 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

난이도부터가 다르다.

바깥 세상에서는 게이트니 몬스터니 난리도 아니지만, 빙의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너무도 쉬운 것이었으니.

그렇게 쉬운 난이도에 비해 얻는 명성은 어떤가.

인터넷에 한 번 올리기만 하면 순식간에 수십만씩 늘어나는 조회수.

각종 매체를 통해 하루아침에 퍼져나가는 소문.

물론 그만큼이나 가벼운 탓에 금방 식는 명성이다.

질이 좋지 않다는 말이었다.

소문이 가볍고 진중하지 않았기에 퍼지는 속도 대비 얻는 명성의 효율은 좋지 않다.

허나 양에서 압도하니 문제될 것은 없다.

오히려 그렇게 질이 낮음에도 훨씬 많은 포인트가 벌리는 것이다.

이곳에서 그리 대단한 명성을 얻지 못했음에도 빙의자들이 강한 이유였다.

바깥세상에서는 최초의 각성자, 영웅, 구원자 등으로 불리우며 명성 포인트를 쌓아나가고 있었으니.

머리가··· 복잡하다.

히오 본인빼고 모두가 로그아웃이 가능한 세상.

물론 첫 로그아웃 이후로 의심이야 하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로그아웃 할 방법이 없는데 시르베르트는 어찌 바깥세상에서 이미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는지.

혹··· 자신만 로그아웃을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기에 몇 번이고 재차 꼼꼼하게 확인해 보았다.

그럼에도 로그아웃 하는 방법 따위는 없었다.

······왜?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왜 라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모르겠다.

그러니, 이건 우선 넘어가고.

"진짜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이 세상을 실험대로 삼는다? 그리고 바깥세상은 멀쩡하게 지키고?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두 번째 문제.

이 세상을 희생해 바깥세상을 지키려는 이들.

겉보기에는 그럴싸한 계획이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이 세상이 멸망하면, 바깥세상 역시 온전할 수가 없다.

어비스 공략을 진행할 수 있는 통로는 바깥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히오의 싸늘한 목소리에 시르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는 히오에게 말했다.

"······그래. 나도 그때 너 만나고 정신차렸다. 그 계획은 틀렸어."

"그걸 꼭 해봐야 안다니."

히오의 질책에 시르베르트도 나름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지만.

"아니 그때는 지존 천마 네가 없어서······."

"히오 파블렌코다. 여기서는 히오라고 불러."

"······그래. 알겠다."

항변을 포기하고 그냥 한숨을 푹 내쉰다.

뭐가 됐든 잘못 판단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최선의 방법은 어비스 공략을 계속해 나가는 거야. 한 번의 실패도 없이."

가장 좋은 방법은 어비스 게이트 자체가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끝이 어딘지 모른다는 것.

말 그대로 심연이기 때문에 게임 속에서도 결국 끝을 보지 못하고 멸망하였지 않았나.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임은 분명했다.

"내 생각도 그래. 공략팀에 신경을 써서 운영하고 있으니 괜찮을 거야."

괜찮긴 괜찮을 것이다.

"당분간은."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다.

"점점 공략을 방해하는 세력이 늘어나고 있어."

여전히 계획을 밀어붙이려는 자들.

이 세상을 실험대로 삼아, 본래의 세상을 위해 희생시켜야 한다는 놈들의 견제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여기에 냄새를 맡은 흑아까지 가세한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아직은 견딜만 하지만, 조만간 한바탕 하긴 해야 할 거야."

그런 의미에서 랭커 중의 랭커.

지존 천마가 나서주면 좋겠지만···.

시르베르트가 히오의 눈치를 힐끗 살핀다.

모르겠다.

표정이 안 좋아보이는데 생각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여태 뭐하고 있었는지도 솔직히 모르겠고.

뭐,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그 강함.

검성을 제치고 제국 수호 기사 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적어도 그에 준하는 무력을 보유했다는 의미였으니.

나름 든든한 것이다.

그래, 든든하긴 든든한데······.

시르베르트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히오에게 조심스레 말한다.

"근데 나······."

일단 할 건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강의하러 갈 시간인데."

시르베르트는 진심을 다해 이 세상을 대하고 있었으니.

교수라는 직업에도 만족하고, 그에 따른 책임감도 있는 것이다.

"할 말 더 남았으면 같이 갈까?"

* * *

"롤랑 번스타인."

클레어의 말에 자색 고구마 소녀가 발끈한다.

"어디 천한 것이 내 이름을 함부로 불러!"

롤랑 번스타인.

번스타인 백작가의 차녀.

바람 속성 스킬을 각성한 스킬 사용자이며 성적 또한 상위권.

가문의 위세까지 높은 편이라 아카데미 내에서도 제법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롤랑 번스타인이었다.

그리고 그런 롤랑 번스타인의 가장 큰 특징은.

"꼴에 보는 눈은 있어서 교수님 강의에 아득바득 기어오는 꼴이란."

시르베르트의 열렬한 추종자라는 것.

그럴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긴 했다.

시르베르트가 결정적으로 유명세를 얻게된 계기.

서부 루고 지방의 오크 부락을 반나절만에 지도에서 지워버린 것이었지 않은가.

그리고 루고 지방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번스타인 가문이었다.

즉, 롤랑 번스타인은 시르베르트가 오크 부락을 어찌 해결하였는지 멀리서나마 목격한 것.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어찌 사람이 저토록 우아한 스킬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인지.

사람이 어찌 저렇게까지 강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일로 승승장구한 시르베르트는 황실로부터 염동의 대가라는 칭호까지 받고 아카데미 교수로 들어왔고.

비슷한 시기에 롤랑 또한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이쯤되면 운명이지 않은가.

교수와 학생이라는 커다란 차이가 있긴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가.

롤랑 번스타인이다.

다만 문제는··· 갑자기 나타난 이 붉은 머리카락.

자신과 시르베르트의 사이에 나타난 시련.

심하게 거슬린다.

뭐, 성적이 뛰어나고 화염 스킬 사용자이니 교수들의 관심을 받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뭐?

시르베르트가 직접 데려온 아이?

그 출처모를 소문은 뭐란 말인가.

게다가······ 유심히 지켜본 바로는 정말로 시르베르트와 제법 친해 보이지 않은가.

다른 건 다 참아도 그것만큼은 용납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돌을 빼내려는 모양새였으니까.

"응. 그래."

무엇보다 열이 받는 건 클레어의 저런 태도.

마치 너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시종일관 무시하는 저 태도.

이번에도 그런 태도로 롤랑을 무시하며 지나쳐갔고.

"익······."

결국 또 혼자만 열을 내버린 꼴이 된 채 클레어의 뒤를 따라 실습장으로 들어간다.

* * *

넓은 실내 실습장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학생들.

제각기 조금씩 긴장한 채 담당 교수 시르베르트를 기다리고 있다.

전투 실습.

격주에 한 번 꼴로 있는 학생들 간의 모의 대련으로서 능력자 양성을 목표로 하는 아카데미 답게 꽤 중요하게 여겨지는 실습.

각자 가진 스킬과 능력이 모두 드러나기에 외부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출입이 가능한 것은 담당 교수와 관련 교수진.

그리고 실습장 내의 안전 아티팩트를 관리하는 이들 정도가 전부.

외부인은 학기말에 있을 종합 평가 때에나 올 수 있는 것이다.

한데······ 오늘은 좀 특별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르베르트 교수.

들어온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 웬··· 광대 한 명과 함께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걸어온다.

큰 고깔모자에 자신의 키보다도 더 큰 지팡이를 손에 쥐고 시르베르트와 나란히 걸어오는 사내.

모두가 의아하게 그것을 바라보며 수근거리는 와중, 혼자 놀란 채 굳어버린 사람이 있었으니.

"······히오?"

클레어였다.

전투 실습따위, 긴장조차 하지 않는 표정으로 무심히 서 있던 클레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놀란 몸이 흠칫 굳는다.

그런 반응을 눈치 챈 것은 두 사람뿐.

클레어의 옆에 있던 라베나와 클레어를 노려보고 있던 롤랑이었다.

"응? 히오? 저 광대 이름이 히오야?"

"······광대 아니야. 아니 그것보다 히오가 왜 여기에······ 아니 왜 하필 오늘."

언젠가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갑작스러워도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라베나에게 배웠던 화장도 안 하고 나왔다.

게다가 하필 실습복 입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클레어 답지 않게 허둥대는 사이, 시르베르트와 히오는 정면에 위치한 단상위에 올랐다.

학생들을 쭉 훑어보며 말하는 시르베르트.

"하던대로 지정된 상대와 전투 실습 진행하면 된다. 규칙은 잘 알고 있을 거라 믿고··· 호펜? 바로 시작하지."

시르베르트 다운 간결하고 깔끔한 진행.

그리고 그대로 마련된 의자에 착석하는 시르베르트와 히오.

히오에 대한 소개 같은 건 없었다.

굳이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궁금한 듯한 눈초리로 히오를 힐끗거렸지만, 관심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자발, 루벨. 아티팩트 착용하고 안으로."

조교수 호펜의 호명 하에 대련이 시작되었으니.

안이 훤히 보이는 대련장으로 들어가 자세를 잡기 시작하는 두 사람.

그럼에도 클레어의 시선은 그곳을 향하지 않는다.

시르베르트와 나란히 앉아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히오.

그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클레어를 바라보는 롤랑.

그녀의 고구마 같은 눈이 빛난다.

척보기에도 뭔가 있지 않나.

조금만 더 파고들어가면 클레어의 약점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다.

* * *

"지존 천··· 아니, 히오. 흑아는 어떻게 할 작정이야."

실습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히오와 시르베르트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랭커들의 근황.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네 덕분에 두 가지 문제는 무사히 해결되었고. 이제 흑아 하나 남았는데···."

어비스가 본격화 되기 전,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세 가지 문제 중 두 가지가 해결되었다.

성국을 하나로 모을 구심점.

이는 우연이기는 했지만, 이리나의 존재를 발견함으로서 해결되었을 터.

신성국은 하나로 뭉칠 것이고 이리나 자체가 어비스의 저주를 어느정도 해소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두 번째 문제인 제국의 내전 또한 해결되었다.

사실 내전이 문제가 아니라 내전 이후의 전쟁이 더욱 큰 문제였는데 황자들이 아닌 실비아가 황위에 곧 오를테니 해결된 셈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흑아뿐이다.

흑아를 무너트려야 한다.

"그건 일단 아카데미에서 볼일 끝내고 다시 얘기해보자고."

그런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는 히오.

어느새 실습이 끝난 것이다.

시르베르트가 히오를 따라 일어나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너 클레어한테 아는 체 안 해도 되냐? 아까부터 너만 보고 있는 것 같던데?"

"······아 맞다."

그제서야 히오의 시선이 클레어를 찾아 움직였다.

* * *

"멍청한 히오. 바보같은 히오."

클레어가 죄없는 땅을 발로 툭툭 차며 중얼거린다.

결국 실습 내도록 눈 한번을 마주치지 못했다.

"너무한 거 아니냐고."

대련도 멋지게 이겼는데.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했는데.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그리 하는지 쳐다도 보지 않고···.

제법 서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돌이켜보면 자신은 히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단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신분도 높을 거라 추측만 할 뿐. 제대로 아는 것은 없었다.

"그 정도의 사이인 거지. 응."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더욱 가라앉는 기분.

그런 기분으로 실습장을 나서려는데 오늘따라 더 짜증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천한 클레어."

자색 고구마 소녀, 롤랑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클레어였지만, 왠지 모르게 오늘은 그러기가 싫은 마음이다.

실제로 지금 기분은 제법 좋지 않은 것이었으니.

"한심한 롤랑. 왜?"

"뭐? 평민 주제에 감히······."

설마 클레어가 받아칠 줄은 몰랐는지 발끈하던 롤랑이 이내 표정을 바로하며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미천한 클레어. 너 아까 그 광대랑 무슨 사이야?"

"······광대 아니야."

평소와는 다른 클레어의 반응에 롤랑은 더욱더 확신한다. 그 광대는 분명 클레어의 약점이다.

한 손으로 우아하게 입을 가리고 얄미운 웃음을 지어 보이는 롤랑.

"그 모습을 보고도 광대가 아니라니? 누가봐도 우리 학생들 웃으라고 교수님께서 데려온 광대잖아?"

"그 입 닫아 롤랑."

저조한 기분탓인가.

이상하게 화가 치밀어오른다.

자신을 욕하고 놀리는 건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적어도 히오만큼은 이유 없이 욕먹게 할 수 없었기에.

클레어의 눈빛이 불꽃처럼 번뜩인다.

"광대를 광대라 칭하는 게 잘못됐다는 거니? 그러다 스킬이라도 날리겠어? 응? 한 번 날려봐. 그날로 넌 퇴학이니까."

이상하다.

롤랑이 저렇게나 얄미웠던가.

마음 같아서는 정말로 저 얄미운 보라 머리카락에 스킬을 퍼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클레어는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그랬다가는 롤랑의 말대로 심한 징계를 받을 터였다.

"그래도······ 주먹으로 몇 대 때리는 건 괜찮겠지."

스킬만 아니면 된다.

주먹다짐 정도로 그리 심한 징계를 주지는 않을 테니.

"뭐, 뭐야. 너 미쳤어?"

그렇게 클레어가 롤랑을 향해 성큼 다가가려는데.

"이봐. 고구마."

그런 클레어의 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지팡이.

익숙한 듯 낯선 뒷모습.

히오 파블렌코였다.

"너, 재능 있어."

갑자기 둘 사이에 나타나 히죽 웃으며 롤랑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히오.

"뭐야 이 광대는?"

롤랑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히오와 클레어를 번갈아 쳐다본다.

"끼리끼리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구나."

그런 롤랑을 향해 손을 내젓는 히오.

"잠시만 아직 기다려봐."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는 허리춤의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그 작은 주머니에서 나오는 한 권의 책.

삐뚤삐뚤한 글씨체로 적혀 있는 책의 제목은 역시나 이상하다.

〔참으면 복이 와요!〕

그런 책을 손에 꼭 쥐고 롤랑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히오.

"준비 됐어. 시작해."

롤랑은 그런 히오를 황당하다는 듯 쳐다본다.

"······역시 미천한 것들은 하는 행동도 이해하기 어렵구나."

그렇게 경멸 섞인 말을 내뱉었지만.

"오오, 좋아. 더, 더 해봐."

오히려 좋아하는 그 이상한 모습에 롤랑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난다.

"이, 이제 봤더니 정신이 나간 사람이구나."

그 말에 히오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씁···. 이건 좀 약한데."

"······그게 무슨···."

"잘 좀 해봐. 머리색도 딱이고 분명 잘할 것 같은데 말이야."

"아, 알아 듣게 말을 해야······."

"부담갖지 말고 하던 대로 하면 돼. 방금 클레어에게 한 것처럼. 응? 할 수 있지?"

주춤 물러나는 롤랑에게 더욱 다가가는 히오.

어딘지 모르게 광기어린 그 눈빛에 물러나는 롤랑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진다.

"오, 오지마···."

그리고 그쯤에서야 롤랑은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녀석은 광대가 아니다.

미친 변태다.

"벼, 변태!"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롤랑.

"음?"

그 뒷모습을 보며 히오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다.

수 년 간의 비폭력주의로 단련된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종종 만나러 가야겠네."

저 고구마 소녀는 분명 자신의 인내력을 올려줄 귀인이라고.

59화 이메니아 아카데미(3)

"여기는 라베나."

"안녕하세요!"

반짝이는 금발만큼이나 명랑한 친구였다.

"그리고 여기는 히오."

고구마 소녀를 아쉽게 보내준 후, 새로이 등장한 라베나를 소개해주는 클레어.

"클레어에게 친구라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잘 부탁해요."

마을에서도 친구 하나 없던 클레어가 아니던가.

그런 클레어에게 친구라니.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히오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라베나가 밝게 말했다.

"클레어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클레어가 제 얘기를 했어요?"

"그럼요! 잘 때도 이야기하고 밥 먹으면서도 이야기하고 아,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리고 또 똥 싸면서도 이야기······ 읍!"

라베나의 입을 틀어막으며 한숨 쉬는 클레어.

이 정도 친화력이니 클레어와 친구 할 수 있는 것이구나···.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이 말 믿는 거 아니지?"

"하하하! 뭐 어때? 욕만 아니면 됐지."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에······ 읍!"

라베나의 입을 틀어막은 채 자연스레 히오에게 묻는 클레어.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물어본다.

"나 대련하는 거 봤어?"

그에 당황한 것은 히오였다.

"···응?"

시르베르트와 대화하느라 클레어를 잊어버리고 있었으니.

"그, 그럼!"

"거짓말. 안 보고 있는 거 다 봤는데."

"······미안."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인다.

"시르베르트랑 이야기 좀 하느라··· 집중을 못 했네."

"무슨 이야기?"

"그냥······ 이것저것. 별거 아니야."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클레어.

괜히 라베나의 입을 막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별거 아니기는.

둘의 표정이 그렇게나 심각했는데.

···그래.

이 정도인 것이다.

자신은 아직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이다.

노력해서 키운 실력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

히오에게는 소꿉장난처럼 보이지 않을까.

더······ 더 강해져야 한다.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

자신의 불꽃을 보고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뜰 만큼.

함께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중요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언젠가는······ 꼭 그의 곁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야 말 것이다.

클레어는 다시 한번 그렇게 다짐한다.

그리고 라베나는 점차 굳어가는 클레어의 표정을 정면에서 보고 있었으니.

클레어의 손을 살짝 떼어내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히오에게 물었다.

클레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함이었다.

"아하하··· 그래도 클레어 보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죠?"

히오에게 적당히 장단 맞추라고 신호를 보내며.

눈을 찡그렸다 폈다 오만 방법을 다 동원했건만······.

"응? 아 뭐, 겸사겸사?"

이 똥멍청이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 채 얼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겸사겸사 보러왔다니?

기분을 풀어주지는 못할망정 더 최악이 되었다.

클레어의 표정이 더 딱딱해질 수 없을 정도로 굳어버린다.

클레어에게 옮은 것인지 라베나의 표정도 비슷해져 간다.

"······겸사겸사······요?"

"응. 사실 찾고 있는 건물이 있는데 너희 혹시 지하로 내려갈 만한 건물······."

거기까지 들은 라베나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이런 똥멍청이!"

히오의 정강이를 후려 차버렸다.

* * *

절도있게 고개를 숙이는 라베나.

"죄송합니다!"

대뜸 정강이를 후드려 까버리더니 곧장 사과해오는 것이 아닌가.

"어어······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얼떨떨하게 사과를 받는 히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베나를 피해 클레어의 귀에 대고 몰래 속삭인다.

"쟤 조심해야겠다. 조울증 같은 건가 본데?"

그말이 워낙 황당했기에 클레어는 저항 없이 웃음이 터져버린다.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헛웃음이었다.

"그래······ 아무튼 그 찾는 건물이 뭔데?"

자신이 노력하면 될 일.

더욱 강해져서 히오가 자신을 필요로 하게 만들면 될 일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아직 자신은 히오에게 쓸모가 없었으니.

그래도 쓸모가 없다면 쓸모가 있게 변하면 된다. 벌써부터 우울해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지하로 내려갈 수 있을만 한 건물. 왠지 느낌이 쎄하다 싶은 건물이나 뭔가 숨겨져 있을 것 같은 건물··· 뭐, 그런 거?"

그렇게 말하고 히오는 혼자 픽 바람 빠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말하고도 이상하지 않나.

뭐 그런 건물이 다 있나 싶을 테다.

사실 별 기대 없이 그냥 물어보는 것이었다.

게임 속 기억을 더듬어 의심 가는 몇몇 곳을 돌아다닐 작정이었으니까.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히오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으니.

"지하로 내려갈 수 있으면서 뭔가 숨겨져 있을 것 같고 왠지 느낌이 쎄한 건물?"

서로 눈을 마주치는 클레어와 라베나.

"그거 여긴데?"

"······응?"

다른 곳도 아니고 실습을 진행했던 바로 이 건물.

"여기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클레어와 라베나.

"몇 달 전, 전투 실습 중에 사고가 나서 한번 엉망이 된 적 있거든."

그러니 몇 달 전, 우연히 이 건물 1층의 바닥이 깨지며 지하로 가는 계단이 나타났다는 것.

"그래서 한동안 떠들썩했었는데 막상 지하에는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리고 문제는······."

호기심에 지하로 내려가 본 학생 중 몇 명이 이상한 게 자꾸 보인다며 헛소리를 해댄 것이다.

한 명만 그랬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을 제법 많은 학생이 같은 증상을 호소했고.

"결국 못 들어가게 막아놨어. 뭐, 어차피 아무것도 없었고 괜히 찝찝해서 이제는 근처에도 안 가지."

"······그래···?"

바닥이 깨지며 드러났다는 지하 계단.

비밀스럽게 숨겨진 것에 비해 아무것도 없었다는 지하 1층의 공간.

'어떻게 생각해?'

히오의 물음에 곧바로 푸르넬의 대답이 들려왔다.

- 볼 것도 없네. 마법사의 집이야. 그런 식으로 통로의 문이 부서지기 힘들 터인데··· 아무래도 오랜 세월 관리되지 않았을 테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겠어.

'입구는 그렇다 치고 헛것이 보인다는데 네크로맨서 지부 아니야?'

- 그건 아닐 게야. 네크로맨서 지부를 내가 모를 리가 없지 않나.

네크로맨서 지부도 아닌데 헛것이 보였다라.

- 짐작 가는 게 있긴 하네만. 일단 가보면 알겠지.

별 기대도 하지 않고 물었던 것인데 마법사의 집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저쪽이야."

라베나는 실습장의 구석 복도를 가리켰고 그쪽으로 향하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법한 곳의 바닥이 나무판자로 막혀 있는 것이 보였다.

- 마법사의 집,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나무판자로 막혀 있다니. 새삼 마법의 몰락이 실감나는구먼.

히오 역시 그 말에 동감했다.

마법이 융성하던 시대에는 살아보지 않았으나······ 이건 너무 허접하지 않은가.

"이 중요한 곳을 이렇게 대충···."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히오를 클레어와 라베나가 빤히 바라본다.

"내려가려고?"

"내려가야지. 이걸 찾아서 온 건데."

히오의 말에 라베나가 나섰다.

"하지만 밑에는 유령이 있다는 소문도 있다구요? 못 보셔서 그렇지 헛소리하는 애들 보면 진짜 이상했어요."

"그래. 내려가 봐야 정말 아무것도 없어. 괜히 음침한 느낌만 들고."

그말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는 히오.

유령이라.

진짜 유령은 제 몸속에 있지 않은가.

무섭긴커녕 쓸데없이 말은 더럽게 많고 옛날이야기에 환장하는 늙은······.

- 크흠! 다 들린다네.

"아무튼, 내려갔다 올 테니까 여기 있어. 혹시나 내가 안 올라오면······ 그냥 돌아가면 돼."

그리 말을하고는 통로를 막고 있는 나무판자 하나를 떼어내 버린다.

그대로 아래를 향해 몸을 집어 넣고는.

"아, 그리고 웬만해서는 내가 여기 들어갔다고 말하지 말아줘."

다시 나무판자로 머리 위를 덮어버리고 계단을 내려가는 히오.

저벅저벅 내려가는 소리가 멀어지더니 이내 곧 조용해진다.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러네."

"응. 곧 올라오겠지."

그렇게 클레어와 라베나는 그 자리에서 기다렸고 곧 히오가 올라올 것이라 생각했다.

저 음습한 지하실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방 돌아올 것이라 생각한 히오는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음. 왜 안 오지?"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내려가 볼까?"

조심스레 나무판자를 들어 올리고 어두컴컴한 지하 계단을 향한다.

"으으. 무서워."

벽에 박힌 마정석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이 전부인 어두운 계단.

이 지하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발견된 이후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데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텅 빈 공실인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내려간 지하실.

그리고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어?"

여전히 아무도 없는 텅 빈 공실이었다.

* * *

- 헛것을 봤다더니. 역시 그거였군.

텅 빈 지하 1층에서 푸르넬의 도움을 받아 내려온 지하 2층.

지하 1층과는 달리 지하 2층에는 진한 마력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 환영 마법사의 집이었어.

지하 2층 중앙에 놓여진 석상하나.

- 환영 마법사의 집에는 보통 저런 게 하나씩 있지. 환영결계를 이루는 축 역할을 했었나 보군.

하지만 오랜 세월 탓인가.

석상은 낡았고 여기저기 홈이 파여 있었다.

때문에 환영결계가 약해졌고 지하의 입구가 드러났으며 내려온 사람들이 헛것을 목격한 것이었다.

- 쯧, 허탕이네 허탕. 환영쟁이들이 이런 집에 뭘 놔뒀을 리가 없지. 어서 4층으로 내려가 마탑으로 가세나.

푸르넬의 말대로 텅 비어있던 지하 1층처럼 2층과 3층에도 이렇다 할 물건은 남아 있지 않았다.

"환영 마법사라는 게 학파의 하나인 거야?"

- 학파라기보다는 환영 마법을 주로 익힌 마법사라고 할 수 있지. 물론, 관련 학파도 존재하고 말이야.

"환영 마법이라······."

지하 3층에 도착해 파블렌코 가문의 상징.

녹빛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목걸이가 안내하는 길이 곧 지하 4층으로 내려가는 길.

- 그러고 보니 자네도 이제 정해야겠구먼.

"정하다니?"

- 3서클부터 정식 마법사라 했지 않은가. 어떤 마법사가 될지 길을 정해야지.

"길을 정한다라···. 그냥 마법 닥치는 대로 익히면 되는 거 아니었어?"

- 어허. 이런 무식한···. 2서클 때와는 마법의 숫자부터 다르다 했지 않은가. 환영쟁이들처럼 특정 마법만 익히는 이들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야.

목걸이를 가져다 대자 쿠궁- 소리를 내며 쩍 갈라지는 벽. 다시금 나타난 계단.

- 일단 효율부터가 비교할 수 없지. 비슷한 계열의 마법을 익힌다면 비슷한 문양이 중복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푸르넬의 말을 들으며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 자네의 재능은 인정하지만, 모든 마법을 익히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말일세. 서클이 높아질수록 새겨야 하는 문양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질 테니까. 일반적으로는 하나에만 집중하는 게 옳지.

지하 4층에 도달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기다란 육면체의 포탈.

- 속성 마법도 마찬가지라네. 화염 마법사, 대지 마법사, 얼음 마법사 등으로 나눠지는 이유가 있어. 차이는 서클이 높아질수록 더 심해지니··· 자네의 재능이라면 그래도 두세 개 정도는 괜찮을 듯싶네만.

포탈 앞에 선 채 푸르넬에게 물었다.

"기왕이면 3서클부터 잘 맞는 마법을 정해서 그것 위주로 익히는 게 좋다는 말이야?"

- 그렇지.

"내 재능이면 세 종류까지는 괜찮을 거고?"

- 그건 순전히 나의 생각이라네.

마법을 세분화해서 집중적으로 익혀야 한다니.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예시 몇 개만 말해줘."

- 예시라···. 자세하게 보자면 엄청나게 많다네. 네크로맨시부터 시작해서 시간을 연구하는 크로노맨시, 그림자 마법, 화염, 물, 바람 등 각종 속성 마법, 중력 마법, 흑마법의 일종인 블러드 마법사, 변환 마법사, 인챈터, 사이크로맨시, 환영 마법사, 소환술을 주로 다루는 마법사······ 당장 생각나는 건 이 정도인데 아무튼, 자네의 재능이면 뭐든 가능하긴 해. 잘 생각해보게나.

생각보다 종류가 많고 이름만 들어도 매력적인 것들이 많다.

"효율을 위해서는 나와 잘 맞는 것을 골라야 한다라······."

그렇게 중얼거리며 포탈 위에 손을 얹는다. 서클을 회전시켜 마력을 불어넣었다.

작동하기 시작하는 포탈.

「포탈과 연결된 지역은 고대 도시 테트라디아 - '마법사의 탑'입니다.」

「포탈에 진입하시겠습니까?」

환하게 뿜어지는 빛.

자연스레 눈을 감으며 생각한다.

무엇이 나와 가장 잘 맞느냐.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다.

나의 능력과 가장 잘 어우러질 마법.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갈고 닦아야 할 마법.

「포탈이 가동됩니다.」

"역시, 그게 좋겠지."

「고대 도시 테트라디아 - '마법사의 탑'으로 이동합니다.」

밝은 빛이 순식간에 훅 꺼지며 히오가 사라지고.

지하 4층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정적에 휩싸인다.

60화 이메니아 아카데미(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