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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

60화 이메니아 아카데미(4)

몸을 휘감는 새하얀 빛이 꺼지고.

천천히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 반갑네!

눈알을 사방팔방으로 돌리고 있는 유령. 푸르넬의 모습.

- 이렇게 마주 보는 게 얼마 만인가!

반갑다며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게 꼭 날파리 같았기에 히오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게. 오랜만이네."

목소리야 뭐 지겹도록 들었지만, 얼굴 마주하고 보니 제법 반갑지 않은가.

- 나의 마탑에 온 것을 환영하네! 자 어서 3서클의 경지를 뚫으러 가보세나!

"···언제부터 여기가 네 전용 마탑이 됐냐."

- 흐흐흐. 나 혼자 사니까 나의 마탑이지. 빨리 서클이나 올리러 가세. 자네가 포탈로 움직이며 걸려 있는 락을 좀 풀어줘야 할 것 같단 말이야. 이제 새로운 방도 구경해보고 싶다네.

"그게 이유였구만."

무슨 이유이든 같은 목적이면 된 것 아니겠는가.

히오가 뒤를 돌아 다시금 포탈을 바라본다.

- 자네 결정은 했나? 마법사의 길 말일세.

정식 마법사의 단계에서 반드시 골라야 한다는 마법사의 길.

원활한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것.

- 그래도 자네는 축복받았어. 보통은 선택이고 뭐고 없다네. 그저 주어진 대로 따라야지. 마법을 누구에게 배웠느냐. 어떤 마법으로 첫 시작을 했느냐로 대게 갈린다네.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지.

포탈에 손을 얹고 마력을 불어넣는다.

"생각해놓은 건 있는데··· 우선 서클을 하나 더 만들고 보자. 3서클에 오르고 나서 이야기해 보자고."

「확인된 마력은 2서클입니다.」

「갈 수 있는 지역은 총 네 곳입니다.」

「마법사의 탑 102층 - 견습 마법사용 훈련장(임시)을 선택하였습니다.」

「포탈이 가동됩니다.」

일단은 먼저 3서클에 오르고 자신의 계획이 실현 가능성 있는지 푸르넬과 이야기 나눠봐야 할 것이었다.

* * *

"우리는 보통 스킬을 등급으로 분류하지. 하위, 중위, 상위, 마지막으로 최상위등급."

오늘도 여전히 학생들로 북적이는 시르베르트의 강의실.

"하지만 이건 너무 광범위한 묶음이라 자신의 스킬이 어느 정도인지 표현하기가 쉽지 않아. 그러니 우리는 더욱 상세한 등급을 알 필요가 있어."

시르베르트의 강의가 인기 많은 이유였다.

대뜸 윽박지르는 다른 실전파 교수들과는 달리 그의 설명은 알기 쉽고 상세했으니.

"스킬의 등급 안에도 또 다른 등급이 세세하게 분류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상위 - 1, 상위 - 2, 상위 - 3 이런 식으로 같은 상위 등급이라도 수준 차이가 나는 이유였다.

"이런 차이는 스킬의 등급이 하위에서 중위, 중위에서 상위로 갈수록 더욱 벌어지지. 그러니까 자신의 스킬이 정확히 어디쯤인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고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지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 말인즉.

"다음 주는 실전이다."

실전만큼 자신의 위치를 알기 좋은 방법은 없었으니.

그에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강의실.

즐거워하는 자도 있었고 벌써부터 긴장하는 사람. 걱정하는 목소리와 자신감을 내비치는 목소리 등, 시끄러워지려는 강의실을 뒤로하고 시르베르트는 복도로 나왔다.

실전이라 해봐야 아카데미 부지 내에서 벌어지는 모의 전투 정도겠지만···.

그 정도만 해도 재능 충만한 이들은 순식간에 실력이 향상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클레어나··· 롤랑도 나쁘지 않지.'

재능 있는 자들은 많다.

아니, 재학 중인 모든 이들이 재능 충만한 학생들이다.

하지만 상위 등급 스킬 안에서도 또다시 등급이 나뉘듯이, 이런 재능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차이가 나는 것이다.

시르베르트는 그중 제일을 클레어라고 보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복도를 걷고 있는데.

"교수님."

조교수 호펜이 시르베르트를 불렀다.

때마침 시르베르트 역시 조교수를 찾고 있었기에 그를 반긴다.

"아, 호펜. 마침 잘 왔네."

복도에 마주 선 채로 대화를 시작하는 두 사람.

"다음 주에 있을 모의 전투 말이야. 내 기사 학부의 알크미온 교수께 말씀드려놨으니 그쪽 조교수랑 이야기 나눠보면 될 걸세."

"아··· 그렇군요."

호펜의 얼빠진 듯한 대답에 시르베르트의 이마에 주름이 진다.

원래는 좀 빠릿하고 똘똘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좀 느슨해진 것 같지 않나.

아무래도 조만간 날을 한 번 잡아야겠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수고하게."

대충 대화를 마무리하고 돌아가려는 시르베르트의 뒤로.

"시르베르트 교수님?"

호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왜. 더 할 말이 남았나?"

시르베르트가 돌아보자 보이는 것은 미소 짓고 있는 호펜의 모습.

"아 그게······ 음."

불러놓고 말을 뜸들이더니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교수님."

짜증이 치민 시르베르트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후······ 자네. 정신 좀 차리지. 요즘 넋이 나간 것 같네."

"예. 죄송합니다."

"이제 진짜 가볼 테니 할 말 생각나면 찾아오게."

"예. 들어가세요."

호펜의 인사를 받으며 방으로 향하는 시르베르트.

정말이지 요즘 들어 일 처리도 그렇고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게 틀림없다.

어디 여자친구라도 생긴 것인지···.

그렇게 걸어가다가 문득.

'그런데··· 호펜이 들어가세요 라고 한 적이 있었던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해보지만, 애매하다.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중요하냐. 안 그래도 할 게 많은데.'

그냥 신경을 꺼버리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생각할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펜은 그런 시르베르트를 바라보다가 등을 돌린다.

"킥······."

입과 눈꼬리는 진한 웃음으로 휘어져 있고.

"하마터면 지존 천마 어디 가버렸냐고 물어볼 뻔했잖아?"

어느새 그 눈동자는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으니.

"아니, 히오 파블렌코랬던가?"

중얼거리던 호펜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내려간다.

쭉 휘어졌던 눈꼬리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분홍색으로 물들었던 눈동자는 원래의 갈색으로 바뀌었으며.

"······."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좌우를 살피다가 다시 일을 하러 가버리는 것이다.

* * *

어설프게 몸 안에 흩어져 있던 마력이 한데 뭉친다.

두 서클을 합친 것보다 많은 세 번째 서클의 마력.

그 많은 양을 단단히 붙잡아 회전시키는 문양의 힘.

- 세 번째 고리까지 완성했구먼.

3서클이었다.

- 심장에 문양이나 때려 박던 어설픈 마법사가 이제 어엿한 정식 마법사가 되었어. 기분이 어떤가?

푸르넬의 말에 호흡을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무슨 기분이기는, 빨리 마법을 배우러 가고 싶은 기분이지."

- 흐흐흐. 마법사의 정석 같은 대답이구먼.

느릿하게 돌고 있는 세 번째 서클.

확실히 묵직하다.

세 번째 고리가 생긴 것만으로도 훨씬 안정감이 생긴 느낌.

- 안정감이 다르지? 괜히 정식 마법사라 불리는 게 아니야.

"확실히 그래."

자신도 즐겁다는 듯 흐흐흐 웃는 푸르넬의 웃음소리.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눈앞에서 입꼬리를 머리끝까지 올리며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 좀 웃지 마라니까."

- 흐흐흐흐. 좋은 날인데 아무렴 어떤가. 아무튼, 이제 말해줘야지. 자네의 마법사로서 향후 방향, 가고자 하는 길.

이 선택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바뀔 터.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 선택에 더욱 확신이 든다.

"일단 첫 번째."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푸르넬을 지나쳐 포탈로 향한다.

"네크로맨시."

첫 번째 선택은 네크로맨서.

- 오오오!

역대 최고로 흥분한 푸르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 역시 자네는 보는 눈이 있구먼! 네크로맨시만큼 훌륭한 마법도 사실 없지! 흐흐흐흐!

"뭐, 그것도 그거고···."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가장 큰 이유.

"낑낑아."

부름과 동시에 실내에 가득 들어차는 어둠.

죽음처럼 아스라이 나타나는 사신.

일명 낑낑이.

"낑낑아, 무섭잖아."

그말에 훅 줄어드는 크기.

아기자기해진 사신을 보며 히오가 미소 짓는다.

"어이구 착하다."

낑낑!

이 낑낑이와 네크로맨시의 시너지가 사기적일 정도로 좋기 때문이다.

죽음의 기운과 마력을 계속해서 보충해주는 낑낑이. 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강대해지는 능력.

그리고 죽음의 기운과 마력, 그리고 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강해지는 특징을 지닌 네크로맨서.

이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할 수 있다면, 일단 숫자에 밀려 불리해지는 경우는 없어지는 것이다.

게임 속 끝도 없이 밀려들어 오던 어비스 몬스터의 재앙을 기억하기에 이는 반드시 필요한 힘이었다.

"이리와 낑낑아."

낑낑이를 손에 올리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좋다고 낑낑거린다.

잠시 그렇게 낑낑이를 쓰다듬어주다가 고개를 돌려 푸르넬을 바라본다.

반짝반짝 기대감이 잔뜩 서린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는 푸르넬.

······진짜 저 앞에서 인정하기 싫은데 두 번째 이유는 저 유령 때문이다.

- 흐흐흐흐! 역시 내 그럴 줄 알았네!

"에휴······."

저 모양 저 꼴이기는 해도 일단 하나 남은 스승이 네크로맨서이지 않은가.

책으로 배우지 못하는 것들도 배울 수 있을 테고 익히는 속도 또한 확연히 다를 테다.

고서클의 다른 마법은 푸르넬이 조언 정도는 할 수 있어도 가르치지는 못할 테니까.

"뭐, 그런 이유로 네크로맨시를 골랐다는 거야."

- 이해했네. 그럼 나머지는 어찌할 겐가? 나는 열려 있는 참 스승이니 다른 학파의 마법을 배우는 것도 말리지 않는다네.

"유령이라 말리지 못하는 건 아니고?"

- ······.

말문이 막혔는지 멍때리던 푸르넬이 재차 말을 이어간다.

- ······아무튼, 자네는 네크로맨시를 포함해서 세 개. 무리한다면 네 개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 하나만 지독하게 파고들어 이름을 남긴 대마법사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두 개 이상의 마법을 다룬 천재들이 이름을 남겼지. 자네에게도 그 정도의 자격은 충분해.

"다른 마법이라···."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나머지 마법은 어떤 걸로 채울 것이냐.

매력적인 마법이 너무 많다.

대표적으로 환영 마법.

낑낑이가 없었다면 네크로맨시고 푸르넬이고 나발이고 환영 마법을 고르지 않았을까.

환영 마법 자체가 적의 눈을 현혹하고 혼란에 빠트리기 위한 마법이다.

한마디로 화려한 마법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특성 '간지 없이는 못 살아'와 '모든 게 두 배'까지 합쳐진다 생각했을 때···.

어찌 본다면 히오의 특성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마법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환영 마법에만 집중하자니 또 아쉬움이 남는다.

4대 원소 속성 마법은?

금속 마법이나 소환 마법.

시간을 다룬다는 고난도의 크로노맨시.

그림자 마법, 사이크로맨시, 변환 마법, 보호 마법, 자연계 마법 등.

이 수많은 매력적인 마법 중에서 왜 두 가지만 골라야 한단 말인가.

그러니 히오의 계획은 이러했다.

"다 익힐래."

모든 종류의 마법을 익힌다는 것은 당연히 마법적으로 봤을 때 극악의 효율이다.

하나를 익힐 때마다 새로운 문양을 배우고 새겨야 하며 그 문양이 다른 마법을 쓸 때 겹칠 확률은 매우 낮았으니.

하지만 그가 가진 히든 특성을 생각해본다면 모든 종류의 마법을 두루 익히는 것이 가장 최선의 효율인 셈이다.

한두 개의 마법을 파고들어 간다면 결국 비슷한 계열이니만큼 진화되는 스킬 역시 비슷한 효과의 스킬이 될 터.

그러므로 두루두루 익히며 많은 종류의 최상위 스킬을 확보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히오의 생각이었고.

-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는 했네만.

푸르넬은 미간을 좁혔다.

좁힐 미간도 없는 유령 주제에 말이다.

- 전부 다 익히는 건 불가능해. 문양은 무한대로 새길 수 있는 게 아니야. 한계가 존재한다는 말일세. 그렇게 전부 익히겠다고 마구잡이로 문양을 새기면 어떻게 되겠나?

뻔한 것이다.

고서클에 올라서 문양을 새길 수 없게 된다.

고위 마법을 익힐 수 없게 된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것도 생각했지.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생각한 절충안.

"쭉 둘러보면서 진짜 필요하겠다 싶은 것들 하나씩만 배우는 거야. 애매한 것들은 전부 빼고."

적당히 문양의 개수를 조절하며 필요하겠다 싶은 마법만 쏙쏙 골라 먹는 것이다. 정말 쓸만하겠다 싶은 것들로만.

문양의 개수까지 전부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는 히오 나름의 절충안이었고 오직 그만이 시도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마탑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기에, 다른 마법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에 가능한 방법.

마법을 상실한 시대에 그 홀로 마법을 익힐 수 있으니. 마력 감응의 천재 특성을 부여받았으니 가능한 방법.

세상에서 오직 히오 파블렌코만이 가능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 그런······.

히오의 당찬 포부에 푸르넬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지만, 안 될 것은 없어 보이는군.

그도 인정해버리는 것이다.

- 허허허허······.

그러고는 허탈한 웃음을 짓는 푸르넬.

-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방식이로군. 그야말로 잡탕 마법사가 아닌가.

이것저것 맛있는 것만 쏙쏙 골라 넣은 잡탕.

그 말에 히오는 히죽 웃으며 포탈 앞으로 간다.

"뭐, 어때."

잡탕이면 어떻고 짬뽕이면 어떻고 꿀꿀이 죽이면 또 어떤가.

"맛있으면 그만이지."

자신은 그 누구보다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었으니.

포탈 위에 손을 얹고 마력을 불어넣는다.

「확인된 마력은 3서클입니다.」

「갈 수 있는 지역은 총 스물하나입니다.」

「마법사의 탑 101층 - 입문 마법사용 훈련장(임시)」

「마법사의 탑 102층 - 견습 마법사용 훈련장(임시)」

「마법사의 탑 103층 - 정식 마법사용 훈련장(임시)」

「베르덴 남부 지역 독립 거점(3) - 마법사의 집」

「베르덴 남부 지역 네크로맨서 지부(2) - 마법사의 집」

「이메니아 마법 대학(1) - 마법사의 집」

「마법사의 탑 110층 - 네크로맨시 교육 실습의 방」

「마법사의 탑 111층 - 원소 마법사(화염) 교육 실습의 방」

「마법사의 탑 112층 - 원소 마법사(대지) 교육 실습의 방」

「마법사의 탑 113층 - 원소 마법사(바람) 교육 실습의 방」

···

「마법사의 탑 126층 - 크로노맨시 교육 실습의 방」

2서클 때와는 갈 수 있는 곳의 숫자부터가 달라졌다.

"일단 하나씩 돌아보면서 뭐 맛있는 게 있나 좀 볼까?"

그만큼 마법사로서 성장했다는 의미고 강해졌다는 의미.

제법 기분 좋은 성취감이 이는 것이다.

「마법사의 탑 110층 - '네크로맨시 교육 실습의 방'을 선택하였습니다.」

「포탈이 가동됩니다.」

61화 이메니아 아카데미(5)

- 정식 네크로맨서가 되기 전에 우선 윤리 교육이 필수라네. 생명을 소중히 할 것. 인간의 육신과 영혼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고 결코 다른 눈으로 보아서는 아니되며 이것은 죽음의 한 방식이니 다르게 받아들여서도 아니 될 것이고······ 뭐, 그런 내용인데 대충 넘어가지 그냥.

빨리 가르치고 싶은지 훨훨 날아다니는 푸르넬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천천히 해. 그러다가 뭐 하나 빼먹을라."

- 걱정말게. 나는 아주 철두철미한 네크로맨서란 말일세.

"······그래."

이동한 네크로맨서의 층은 다른 훈련장 만큼이나 넓었고 방도 여러 개가 존재했다.

"저 방들은 다 뭐야?"

히오가 가리키는 곳을 힐끗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푸르넬.

- 뻔하지. 시체가 보관되어 있을 걸세.

"시체라··· 하긴, 네크로맨서니까."

좀 찝찝하긴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네크로맨서의 길을 택했는데.

- 흐흐흐. 걱정말게. 나중되면 시체가 시체로 안 보여. 아주 예쁜 아이들로 보이지.

"설마···."

왠지 저 말이 진짜일 것 같아서 더 찝찝하다.

- 우선 이리 와보게.

그곳으로 가니, 발밑에 놓인 책을 가리키는 푸르넬.

- 아주 기초 중의 기초부터 시작하지. 에니메니트 데드, 시체를 좀비로 일으키는 마법일세.

"겨우 좀비?"

- 어허. 자네 시작부터 데스 나이트를 만들었다고 눈이 너무 높아진 거 아닌가. 좀비가 은근 가성비가 좋다네. 영혼도 필요 없고 썩어가는 육신이어도 상관 없으니 말이야.

"······알겠어."

책을 집어들자 푸르넬이 웃기 시작한다.

- 네크로맨서라면 무조건 사용해야 하는 필수 문양이 모두 사용되니 익혀 놓으면 좋을 게야. 언데드 소환하는 감도 잡을 겸 해서 말이지.

"이걸 익힌 다음에는?"

- 스켈레톤이지. 그 다음으로는 데스 커터라든가 본 에로우 등이 있긴한데······ 뭐, 익혀는 놓게. 어차피 새겨야 하는 문양이고 제대로된 네크로맨서가 되려면 기초가 탄탄해야지.

고대어와 각종 문양이 적힌 책.

문양은 이미 새긴 것들이었고 고대어는 자동 번역기 푸르넬이 있으니 문제될 건 없었다.

- 그 정도까지가 네크로맨서의 2서클이라 보면 되겠네. 3서클부터는 좀 특별해. 재밌어질 게야.

"뭔데?"

- 흐흐흐. 그건 나중의 재미로 남겨두고, 우선 시체들의 방으로 가보자고.

* * *

「네크로맨시 - '에니메이트 데드'의 시전에 성공하였습니다.」

「네크로맨시 - '에니메이트 스켈레톤'의 시전에 성공하였습니다.」

「네크로맨시 - '에니메이트 데드'를 스킬로 등록하시겠습니까?」

「네크로맨시 - '에니메이트 스켈레톤'을 스킬로 등록하시겠습니까?」

기본 언데드 제작 마법 답게 어려울 건 없었다.

마법의 시전과 동시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시체.

차갑게 보관되고 있던 죽은 자의 눈이 아주 오랜만에 뜨인다.

좀비가 되어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기본 중의 기본인 만큼 내구성도 약하고 단순 명령밖에 이행하지 못하는 저급 언데드.

그리고 그 옆에는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간 스켈레톤이 만들어졌다.

낑낑이를 소환해 놓은 상태라 스킬로서 발동은 시도 못하고 있지만, 그건 천천히 확인해도 될 것이었다.

- 아쉽지만, 저 녀석들은 일회용이라네. 너무 저등급의 네크로맨시로 만들어졌기에 어디 보관할 수도 없어. 사기를 보충해주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얼마지나지 않아 무너질 걸세.

확실히 저등급의 네크로맨시는 들어가는 것에 비해 쓸모가 많이 없다.

- 그래도 저 사신이 있으니 사기 걱정은 없지 않은가.

푸르넬의 말에 작아진 사신을 쳐다보자.

낑낑!

가슴을 쭉 펴보이는 낑낑이.

죽음을 관장하는 귀신 답게 그 주변에는 사기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해 좀비와 스켈레톤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많은 양은 아니고 기본만 간신히 해낼 정도.

- 본래는 그 기본을 해내기 위해 사기 전용 그릇을 만든다네. 마력과는 달리 몸에 가득 저장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니라 항상 극소량만 지녀야 하고 필요할 때마다 죽음을 찾아 헤매야하지. 죽음을 늘 곁에 달고 다녀야 한다는 말일세.

"······극한 직업이네."

그런 네크로맨서의 고충을 낑낑이가 해결해주었다는 말이다.

- 그래도 데스 커터나 본 에로우 같은 마법은 괜찮아. 언데드의 제작, 소환, 강화, 유지 정도에 사기가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된다네.

다음으로 배운 것은 2서클 마법, 데스 커터와 본 에로우.

역시나 그다지 쓸모 있는 마법은 아니었다.

데스 커터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효과는 윈드 커터의 하위 마법 같은 느낌.

본 에로우 역시 살상력이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다.

- 흐흐흐. 너무 실망하지 말고, 3서클부터가 시작이라했지 않은가. 네크로맨시의 3서클은 대개 소환계열이라고 보면 될 거야.

"소환계열?"

고개를 끄덕이는 푸르넬.

- 서먼 팬텀, 서먼 팬텀 스티드, 서먼 고스트, 서먼 레이스, 서먼 스펙터. 유계의 문을 열고 이 유령들을 소환하는 것이라네.

"유령이라······."

히오가 찝찝한 눈으로 푸르넬의 위아래를 훑는다.

"쓸모가 있을까?"

- ······.

"농담이야. 농담. 근데 아까 네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데?

아까는 뭐 세상 특별함은 네크로맨서가 다 가진 것처럼 말하더니. 막상 별거 없지 않은가.

사기꾼 유령 같으니라고.

그렇게 불손한 눈빛을 보내는 히오를 향해 푸르넬이 근엄한 표정으로 말한다.

- 일단 들어보게. 나중에 놀라지나 말고.

서먼 팬텀.

그림자조차 없는 귀신을 소환.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며 적들을 교란하는 유령이다.

서먼 팬텀 스티드.

역시나 그림자조차 없는 유령마. 무지하게 빠르다는 특징이 있다.

서먼 레이스.

검은 그림자의 귀신을 소환한다.

사람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적을 공격. 의외성은 있으나 공격력은 뛰어나지 않다.

서먼 고스트.

그림자조차 어두운 귀신을 소환.

소환된 고스트의 근처는 완전한 어둠으로 물든다.

- 이 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바로 이것. 서먼 팬텀 스티드라네.

"유령마?"

- 그렇지.

푸르넬이 마치 장난감 말처럼 외형을 변경하며 허공에 다그닥거린다.

- 빠르기로 특출난 유령마. 사실, 별로 대단한 녀석은 아니야. 술사가 직접 사용할 일은 거의 없고 나중에 유령계 고위 언데드에게 쥐어주면 요긴하게 쓰일 녀석이지.

"내가 사용할 일은 거의 없고 유령계 고위 언데드가 사용한다라······."

뭔가··· 감이 조금씩 잡히기 시작한다.

푸르넬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기에 기대감으로 눈이 크게 뜨인다.

"······설마?"

다그닥거리며 허공을 부유하던 푸르넬이 움직임을 멈추고 입꼬리를 쭉 찢으며 웃는다.

- 흐흐흐흐. 그래. 눈치 챘는가. 보통 사람은 유령마에 타지 못해. 크게 쓸모가 없는 마법이란 말이야. 하지만 유령이라면 다르지.

그래. 유령이라면 다르다.

정확히는 유령의 몸이라면 유령마에 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히오는 높은 격의 스펙터의 정수를 흡수하며 체질이 바뀌었지 않은가.

두 가지의 특성을 얻었지 않나.

유령의 눈.

그리고 영체(靈體).

본래는 이렇게 활용하려고 한 것이 아니기는 했는데···.

- 생각해보게나. 빠르기로 유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유령마를 타고 허공을 달리는 자네의 모습을!

어디 그뿐인가.

- 게다가 자네의 그 주접 특성까지 합쳐진다면··· 꽤나 볼만하지 않겠는가.

서먼 팬텀 스티드를 익히고 스킬이 된 유령마를 소환.

극적극적으로 화려해진 유령마는 어떤 위용을 뽐낼 것인가.

뭐, 그건 둘째치고 허공을 자유롭게 달리는 훌륭한 이동 수단을 하나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이득이었으니.

"빨리··· 빨리 배우자! 아니, 영력부터 좀 더 올릴까? 영체화 지속 시간을 늘려야 하니까. 응. 그게 좋겠다. 쌓이는 포인트 안 쓰고 있길 잘했네."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악···."

- ······자네 일단 진정을 좀 하고···.

"닥쳐!"

- ······정신이 나갔군. 단단히 미쳤어.

포인트로 마력 스탯을 올린 후에도 꾸준히 명성 포인트는 쌓이고 있었기에 여유가 제법 있었다.

4서클 마력까지는 아직 까마득하기도 했고 충분히 영력을 올릴 가치가 있어보인다.

하늘을 빠르게 달리는 유령마에는 그 정도의 메리트가 있었으니까.

「스탯 '영력'을 190pt로 구매합니다.」

「스탯 '영력'이 +19 상승합니다.」

한층 더 강해진 영혼의 힘.

이제 서먼 팬텀 스티드를 배우기만 하면 매우 훌륭한 이동수단을 얻게되는 것이다.

"스승! 빨리 마법 가르쳐 줘!"

재촉하는 히오를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는 푸르넬.

- 아주 그냥 이럴 때만 스승이지.

그러면서도 마법을 가르치기 위해 히오에게 다가간다.

* * *

확실히 3서클의 마법은 꽤 복잡했다.

푸르넬의 말로는 유계의 문을 여는 것이라 그렇다는데 익숙해지면 꽤 쉬울 것이라고.

대충 이틀 정도가 걸린 것 같다.

유계의 문을 열고 유령마를 소환하는 것에는.

「네크로맨시 - '서먼 팬텀 스티드'의 시전에 성공하였습니다.」

「네크로맨시 - '서먼 팬텀 스티드'를 스킬로 등록하시겠습니까?」

유령의 눈을 켠 히오의 눈에 보이는 광경.

쩍 갈라지는 허공과 그 속에서 뛰쳐나오는 팬텀 스티드. 유령마.

평범한 말보다 조금 더 커다란 크기.

- 어서, 영체화를 한 다음에 타보게나. 고작 3서클의 네크로맨서가 유령마를 타다니··· 어쩌면 역사적인 순간에 있는 거라고!

푸르넬의 재촉과 함께 몸의 특성을 변환한다.

변환한다기 보다는 숨어 있는 특성을 끄집어 올린다가 맞는 표현이리라.

「특성 - '영체(靈體)'가 발동됩니다.」

조금이지만 희끄무레해진 듯한 몸.

하지만 크게 티가 나는 것은 아니고 겉보기에는 평소와 다름이 없다.

일반적인 물리 공격은 그대로 흘려버리는 기이한 몸.

그것을 노리고 얻은 특성이었으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게 되었지 않나.

그렇게 걸어간 히오가 얌전히 서 있는 유령마의 위에 올랐고.

"오오···!"

아무런 이질감 없이 탑승할 수 있었다.

"가자! 령마야!"

히오의 말을 알아들은 유령마가 앞발을 번쩍 들고 말의 울음소리를 내며 질주하는데.

"어, 어어?"

그 속도가 너무 빨랐기에.

"머, 멈춰!"

콰아앙-!

마탑의 벽에 그대로 머리를 처박고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 쯧쯧······ 아무리 유령의 몸이라도 마탑의 외벽은 못뚫는다네.

아무래도 좀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 * *

흑아(黑兒).

본래의 뜻은 검은 아이.

한때는 대륙을 피로 물들였던 악의 집단.

두려움으로 쌓아올린 악명.

검성과 한번 크게 맞붙은 이후 잠잠해졌다고는 하지만, 그 이름은 이미 공포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하아아······."

사내가 내쉬는 숨에 뿜어져 나오는 검은 안개.

"그래. 실패. 실패. 실패. 실패. 실패."

마치 지옥에서 올라오고 있는 듯한 쇳소리.

사내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내전으로 제국을 양분하는 것도 실패. 기껏 궁에 심어놓은 아이들도 걸러지고··· 그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나오는 날숨.

그것에 섞여 나오는 검은 연기로 방안이 자욱하다.

"그래. 성공한 게 없어. 죄다 실패뿐이야."

후우- 마지막 숨을 내뱉고 고개를 돌린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수십 명의 흑의인.

전부가 흑아의 간부였다.

"황궁에 들어간 아이들의 소식이 한 번에 끊어졌다고."

"예."

가장 앞에 있는 간부의 대답에는 어떤 망설임도, 감정도 섞여있지 않다.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유는."

"파악되지 않습니다."

"파악되지 않는다. 그래···. 놓친 것이 있었나?"

"새로운 인물이 하나 등장했습니다. 전쟁에서 황녀의 편에 선 자. 히오 파블렌코입니다."

"히오 파블렌코. 처음 듣는 이름이야."

부복한 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답하는 흑의인.

"본인을 마법사라 칭하고 다니는 괴짜입니다. 제법 그럴싸한 스킬을 사용하는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경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번 전쟁의 변수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사내의 시선이 엎드린 간부의 뒤통수에 고정된다.

"변수. 변수. 그래. 변수. 변수였구나. 그래. 네 말은 그 변수가 전쟁에서 우리 아이들을 모조리 골라내고 황궁에 잠입한 아이들까지 골라냈다는 말이지."

"그 외의 변수는 보이지 않았기에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가장 유력합니다."

"그래. 이해했다."

사내가 손을 뻗는다.

"그러니 너도 이해해라."

한층 짙어지는 실내의 검은 안개.

부복한 채 보고를 올리던 흑의인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뽑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예."

사내의 손짓에 따라 끊임없이 뽑아져 나오는 검은 안개.

그에 간부의 얼굴은 눈에 띄게 헬쓱해져 가고 가죽이 뼈에 달라붙을 정도가 되어감에도 그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으니.

"그리하겠습니다. 아타올프님."

눈앞의 사내가 자신들의 주인이자 흑아의 수장.

검은 안개의 아타올프인 까닭이었다.

그러니 그가 자신의 몸에서 모든 검은 안개를 뽑아가더라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자신의 생명줄이 되었음에도.

이 모든 게 뽑힌다면 죽을 것이 분명함에도 덤덤히 고개를 숙인 채 다가올 죽음을 기다린다.

거듭 말하지만, 그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 수고했다."

이윽고 흑의인의 몸에서 모든 안개가 뽑혀져 나가고 그 흑의가 땅에 풀썩 떨어진다.

뼈와 가죽만 남긴채 그대로 죽은 것이다.

그럼에도 장내의 누구 하나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남은 것은 오직 기괴함뿐인 현장.

아타올프는 태연히 그 옆의 흑의인을 지목한다.

"히오 파블렌코의 행적은."

지목받은 간부의 입에서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답이 나왔다.

"이메니아 아카데미입니다."

목소리는 다르지만, 철저히 배제된 감정만큼은 똑같은 대답.

아타올프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럼 그곳의 아이들도 위험하겠구나."

"그럴 가능성이 높다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수라고는 미미했을 전쟁.

자신들은 혼란을 주는 입장이니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을 임무.

허나, 전쟁이 가까워져 오자 관련된 모든 인물들에게서 연락이 뚝 끊겼고.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유일한 변수는 히오 파블렌코 하나뿐이었다.

황실에서 또한 마찬가지.

황위가 교체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적극 이용해보려 했으나··· 황궁에 잠입해 있던 모든 이들의 연락이 동시에 끊긴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숨어 들어가 있던 흑아의 인물들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말이다.

그것 역시 히오 파블렌코가 황궁에 머물 때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

그런 히오 파블렌코가 이번에는 이메니아에 가 있다.

내전에서도 실패. 황궁에서도 실패.

그 다음 중요 기관, 이메니아.

어렵사리 뿌려놓은 씨앗을 수확도 하지 못하고 또 잃을 수는 없었으니.

아타올프는 손짓한다.

"기껏 키운 아이들이 날뛸 환경은 만들어 줘야겠지··· 그래."

그에 모든 간부들이 동시에 몸을 일으킨다.

"이메니아로 가라."

문이 열린다.

간부들이 쏟아져 나간다.

"죽이고 불태우고 빼앗아라. 파괴하고 무너트려라. 그리고···."

검은 안개가 그 뒤를 따라 나오기 시작했으니.

"히오 파블렌코를 찾아서."

공포의 재림이었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라."

62화 이메니아 아카데미(6)

제이슨 클라록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황위 쟁탈전에서 줄을 잘 선 덕분에 제법 많은 이권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이젠 양지에서도 당당히 활동할 수 있을 정도.

물론, 딱히 그럴 생각은 없었다.

"이번 기회로 황궁 깊은 곳까지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전쟁이 황녀의 승리로 끝났다고 해서 실비아가 황제가 되고 끝.

이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 제이슨이 잘 안다.

그렇기에 이것을 계기로 황궁 깊은 곳까지 발을 넓히려는 계획이었고 자신도 있었다.

제이슨에게는 그만한 경험과 실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하루아침에 돌변한 귀족들의 태도.

충심으로 똘똘 뭉친 그들에게는 조금의 틈도 없었고 틈이 없는 곳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다가는 탈이 나기 마련이었으니.

오히려 궁 내의 정보력은 이전만도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된 연유인지 짐작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황녀의 숨겨진 능력이겠지."

제이슨 역시 내전이 일어나는 동안 계속 황녀의 곁에 있었지 않은가.

황녀에게 끔찍한 지병이 있고 그것이 숨겨진 능력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히오 파블렌코가 괜히 황녀를 밀어준 게 아니었어. 이런 능력이 있는 줄 알고 있으니 확신을 가지고 도와준 것이겠지."

알면 알수록 더욱 알 수 없어지는 인물이다.

히오 파블렌코라는 작자는.

"아무튼 황궁은 넘어가고···."

그 외에도 신경 써야 할 것은 널리고 널렸다.

영역이 확대되었고 그만큼 제이슨에게 전달되는 정보의 양 역시 많았으니.

그렇게 각종 정보가 담긴 서류를 뒤적이던 와중.

〔특급〕

유달리 눈에 띄는 붉은색 글씨.

특급의 가치를 지닌 정보.

그만큼 중요하거나 긴급한 정보라는 의미였다.

제이슨은 고민할 것도 없이 봉해진 입구를 뜯어 내용을 살폈고.

- 바알 숲 인근.

미간에 패인 골이 깊어진다.

- 흑아 출현.

최초로 목격된 검은 안개의 보고였다.

* * *

복도를 힘차게 걸어가는 붉은 머리칼.

클레어는 시르베르트의 방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물어봐야겠어."

텅 비어버린 지하실에서 히오가 사라진 지도 벌써 며칠.

혹시 시르베르트라면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가는 것이었다.

히오가 웬만하면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시르베르트에게는 상관없을 것 같았고 그라면 히오가 어디 갔는지, 문제는 없는 것인지도 알고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시르베르트의 개인 교무실로 향해 가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익숙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호펜 조교수님."

조금 피곤한지 초췌한 얼굴의 사내.

호펜이었다.

"시르베르트 교수님 찾아뵈러 왔는데 안에 계실까요?"

클레어는 마주 걸어오는 호펜에게 물었고 호펜의 시선이 클레어를 향한다.

그리고 곧 급격하게 휘어지는 눈꼬리.

"안녕?"

호펜답지 않은 살가운 인사.

"아, 네······ 안녕하세요."

클레어가 얼떨떨하게 인사를 받았지만, 호펜의 기행은 계속되었다.

"네가 클레어구나?"

마치 클레어를 처음 보는 듯한 태도.

"흐응··· 예쁘게 생기긴 했는데······ 너무 애 같지 않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클레어의 위아래를 훑는 시선과 여성스러운 말투.

괜스레 소름이 오소소 돋는 걸 느끼며 클레어가 호펜을 피해 옆걸음질 친다.

"음······ 저는 이만······."

그렇게 슬금슬금 물러나려고 하는데.

"너 혹시 히오 파블렌코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아니?"

그 물음에 걸음을 우뚝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웃음을 치고 있는 호펜.

난생처음보는 호펜의 그런 모습에 클레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요. 몰라요···."

"으응? 마지막에 너랑 같이 있는 걸 내가 봤는데?"

"아 그게··· 잠깐 인사만 나눈 거고 그 뒤로는 잘······."

그 대답에 잠시 정색하더니 클레어를 향해 고개를 바짝 들이미는 호펜.

"나는 거짓말하는 애들을 정말 싫어해."

"저, 정말이에요···. 저도 히오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몰라요."

"흐으응···. 그렇구나."

숙였던 몸을 다시 일으키고 다시 호호 웃음 짓기 시작하는 호펜.

너무도 여성스러운 그 몸짓에 재차 소름이 돋는다.

"그래. 클레어. 다음에 또 보자꾸나?"

그대로 몸을 돌려 가버리는 호펜.

클레어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시르베르트의 방으로 뛰쳐 간다.

* * *

"히오가 갑자기 지하실에서 사라졌다?"

시르베르트 역시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호펜이 히오 파블렌코의 행적을 물었다고."

이는 충분히 이상하게 여길만한 것이었다.

호펜이 히오를 찾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자신에게 말도 하지 않고 말이다.

"혹시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나?"

히오가 지하실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이야 뭐, 원체 희한한 놈이니 그럴 수 있다 치자.

시르베르트는 오히려 호펜의 행동이 더욱 의아한 것이다.

가뜩이나 요즘 이상해졌다 느끼던 호펜이 아니던가.

"이상한 점은······."

시르베르트의 질문에 고민하는 클레어.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이야기할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말투나 몸짓이 여성스러웠다고 해야 하나? 마치 제가 알던 호펜 조교수님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호펜이 호펜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 가정.

"설마··· 아이라이츠?"

지존 천마의 지독한 스토커 아이라이츠.

아이라이츠의 정확한 능력은 모르나 타인을 조종할 수 있다고 얼핏 들었다.

스킬과 특성이 정신계열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었다.

설마 그 아이라이츠가.

이미 흑아 쪽에 붙었을 거라 예상하고 있던 그가 호펜에게 무슨 수작을 부려놓은 것이라면?

아니, 그걸 떠나서 일단···.

'아이라이츠가······ 여자?'

자신의 바로 곁에 있는 인물에게까지 아이라이츠가 손을 썼었다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격이다.

한데 아이라이츠가 사실 여자였다니?

그건 이전의 내용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이다.

"아이라이츠라······."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가능성을 열어놓고 생각해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호펜이 곧 아이라이츠라고 가정하고.

이유가 무엇일까.

여태 잘 숨어서 감시하고 있었으면서 갑자기 클레어에게 알은 채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머리를 굴려보지만, 생각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어차피 곧 정체가 드러날 테니?"

정체를 드러내도 상관없다는 의미가 아니겠나.

그것 외에는 떠오르는 이유가 딱히 없었다.

"교수님···? 아이라이츠가 누구······?"

혼자 중얼거리며 상념에 빠진 시르베르트를 향해 클레어가 조심스레 물었다.

방해하지 않으려 했건만, 너무 궁금하지 않은가.

하지만 시르베르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내일 있을 합동 시험에 집중하렴."

네가 끼어들 만한 레벨이 아니다.

시르베르트는 그리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말문이 막혔다.

결국 답을 얻은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히오가 갑자기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괜찮은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이것만큼은 시르베르트도 모르는 눈치였기에.

얻은 것이라고는 아이라이츠라는 이름과 늘어난 의문뿐.

"네······."

클레어는 그렇게 대답하고 방을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뭔가···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알 수 있는 게 없다.

알 수 있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무력함.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후 승승장구하는 실력에 자신감이 붙었건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여전히 자신은 무력하지 않은가.

마치 눈앞에 흑아의 간부가 나타났던 그날처럼 말이다.

절로 주먹이 꽉 쥐어지고 힘이 들어간다.

그 무력함을 또다시 느낄 수는 없었으니.

역시 더 강해지는 수밖에.

"클레어!"

시르베르트의 방을 나와 터덜터덜 걸어가는 클레어의 앞에 라베나가 나타났다.

"교수님이 뭐라셔? 그 사람이 갑자기 어떻게 사라졌는지······ 못 알아냈나 보구나."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힘없는 걸음걸이와 표정만으로도 짐작이 가능했기에 라베나는 클레어에게 위로를 건넨다.

"괜찮아! 그래도 별말 없으셨으면 큰일은 아닌 거겠지! 우선 가서 점심 먹고 기운 내는 거야! 내일 중요한 시험도 있는데 이렇게 풀이 죽으면 안 돼!"

으쌰으쌰하며 클레어를 이끄는 라베나.

두 사람은 학생 식당으로 향해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 강의를 듣기 위해 이동한다.

특별한 건 없었다.

뭐, 롤랑이 어디선가 또 튀어나와 시비를 걸긴 했지만, 이제는 뭐라는지 귀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게 오후 강의를 듣고 나면 체력 단련 시간이 따로 존재한다.

스킬 사용자들도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체력과 근력, 민첩 등을 단련해야 하는 시대였기에.

기사 학부생만큼은 아니더라도 기본 이상의 육체 스팩은 갖춰야 하는 것이다.

거기까지도 별문제 없는 하루였다.

이미 우울했던 오전의 일은 어느 정도 잊혀진 상태였다. 목표가 높고 도달하기 어려울수록 클레어의 의지는 높게 피어오르는 불이었으니.

더욱더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단련에 힘을 쏟고 나면 이제 저녁 식사시간이 다가온다.

기숙사에 돌아가 씻고 나오면 언제나처럼 라베나가 반겨주는 것이다.

"배고파! 얼른 가자!"

"응."

저녁 식사를 하고 어느새 어둑해진 아카데미의 길거리를 걷는다.

곳곳에 들어온 가로등의 불빛 아래를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내일 있을 시험 이야기.

다른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 오늘 있었던 일에 관한 이야기 등을 나누다 보면 어김없이 롤랑이 두 사람의 앞을 턱 가로막는다.

"어디서 천한 냄새가······."

어찌 이리 둘이 있는 곳을 알고 귀신같이 나타나는지.

이쯤 되면 사실 몰래 따라다니던 것은 아닌지 의심마저 드는 것이다.

"너 사실 우리 몰래 따라왔지?"

"무, 무슨 말이냐. 내가 천한 너희 뒤를 왜······."

"너 친구 없구나?"

"······나는 롤랑 번스타인······."

머리 위를 비추는 가로등.

양옆의 화단 속에도 마정석이 빛을 내고 있어 운치가 제법인 길.

클레어와 라베나, 그리고 롤랑은 그런 길을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길을 따라가면 제법 둘러가야 하기에 어둡지만, 빠른 지름길을 향해가는 것이다.

언제나 이용했던 길이었고 항상 별일은 없었다.

다만, 오늘은 그런 어두운 길 한가운데 누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제오니?"

왠지 소름 끼치는 목소리.

남자가 여자의 말투와 목소리를 흉내 내는, 자연스럽지 못한 소리.

"조교수님?"

호펜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라베나와 롤랑은 의아하게 그를 바라봤고 클레어는 긴장하며 걸음을 멈춘다.

호펜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아는 이는 이곳에서 클레어 자신뿐이었으니.

예의 그 웃음을 지으며 걸어오고 있는 호펜을 경계심 가득 담아 쳐다보는 것이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해서 말이야."

저 말투와 행동.

저자는 지금 클레어가 알던 조교수 호펜이 아니다.

시르베르트가 중얼거리던 그 이름.

"응? 얘들아. 히오 파블렌코가 여기 온 날, 너희 셋을 만났잖아?"

아이라이츠.

"그래서 말인데 하나만 물어보자."

천천히 다가오는 호펜.

여우처럼 휘어진 눈.

의미심장한 미소.

"지존 천마라는 이름을 아니?"

영문모르겠다는 표정의 롤랑, 라베나.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 반응해버린 클레어.

"아······?"

호펜의 고개가 천천히 클레어를 향하고.

"너 알고 있구나?"

섬뜩한 선홍빛이 번뜩인다.

* * *

"음······ 이게 전부인가?"

히오의 앞에 놓인 여섯 권의 마법서.

3서클 기본 마법.

문이나 상자 등을 잠그는 락(lock).

잠겨 있는 것을 열게 해주는 언 락(unlock).

3서클 바람 속성 마법.

물건이나 대상을 날려버리는 레비테이션.

낙하하는 물체나 대상의 속도를 깃털처럼 만드는 패더 폴.

3서클 환영 마법의 일루젼.

전부 마탑을 돌며 얻은 3서클의 마법서이다.

공격 스킬은 충분하니 가능하면 히든 특성 페널티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유용한 것들로만 추렸고 나온 결과가 이것들이었고.

거기에 푸르넬의 추천으로 가져온 마지막 한 권의 마법서.

- 캔슬레이션. 마법을 취소하거나 마법으로 인한 상태이상을 취소하지.

"이게 쓸모가 있다고?"

마법이 사라진 시대에 마법을 취소하는 마법을 배우라니.

낭비처럼 느껴졌기에 그리 물었지만, 푸르넬은 단호했다.

- 조금 더 생각의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네. 익힌 마법의 정해진 효과만 생각하지 말고 그 원리를 파악하라는 말이야.

요는 마법의 원리, 즉 상대의 마력을 끊어버리는 캔슬레이션의 그 원리를 파악하고 응용하라는 말이었다.

꼭 마법이 아니더라도 스킬은 마력으로 발동되는 것이었으니.

- 대놓고 즉발형인 스킬이나 많은 마력이 들어가는 스킬 같은 건 취소시킬 수 없겠으나 가늘게 이어진 연결, 길게 이어지는 지속형 스킬은 충분히 끊어낼 수 있을 거라네.

설명만으로는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익혀봐야 알 수 있을 듯했다.

그래도 푸르넬이 저리 단호하게 말하는 것에는 항상 이유가 있었지 않은가. 믿을만한 것이다.

"그럼 캔슬레이션까지 총 여섯 개네."

불필요한 문양 낭비를 최소화 하고자 거르고 걸러서 찾은 여섯 권의 마법서.

나머지는 공격 마법이거나 고작 3서클의 경지로는 익힐 수 없는 마법들이 대부분.

정식 마법사가 되었다고는 하나, 이제 겨우 시작의 단계라는 말이었다.

개중 가장 기대가 되는 것은 역시 환영 마법, 일루젼.

환영 마법이야말로 히든 특성의 페널티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히든 특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꼼수를 얼마나 많이 생각했던가.

그 중 하나가 바로 정신계 스킬을 얻는 것이었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지성을 가진 모든 생명체에게 폭력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인 상처를 입히거나 피해를 가할 경우,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페널티 - 모든 스킬의 삭제」

히든 특성은 육체적인 피해만을 폭력으로 간주했으니.

만약 정신적 피해까지 폭력으로 간주했으면 말도 함부로 하지 못했으리라. 언어폭력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여튼, 그런 이유로 일루젼은 히오와 가장 잘 어울리는 마법이 될 터였다.

"팬텀 스티드에 고스트랑 레이스 소환법도 익혔고··· 이것만 익히면 3서클 마법도 얼추 완성인가."

- 전무후무한 잡탕 마법사의 탄생이지. 흐흐흐.

그런 대화를 나누며 첫 번째 책을 펼치는 히오.

시작은 환영 마법, 일루젼이었다.

63화 이메니아 아카데미(7)

"오지 마."

클레어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화염.

아카데미로 오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피어오르는 속도와 크기.

그 불꽃이 주변을 환히 밝힌다.

당황해 하는 라베나와 롤랑의 얼굴을 비추고 흥미가 가득 서린 호펜의 표정까지 비추는 불빛.

"클레어···? 왜 그래. 호펜 조교수님이잖아."

"멍청한 클레어. 퇴학당할 결심이라도 한 거야?"

라베나와 롤랑의 만류에도 클레어는 더욱 거세게 화염을 뽑아낸다.

호펜에게 고정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아니야. 호펜 조교수님이 아니야."

호펜의 가죽을 뒤집어쓴 전혀 다른 존재.

이름을 짐작컨데.

"아이라이츠."

클레어의 말에 호펜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동그랗게 떠진다.

"나를 아니?"

역시 예상대로.

아니, 시르베르트의 예상대로 저자는 아이라이츠라는 사람이다.

물론 클레어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아이라이츠 역시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내었다.

"시르베르트가 말해줬겠구나. 뭐, 어차피 곧 들킬 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눈치챘다 해서 뭘 할 수 있겠냐만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아이라이츠.

그녀는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호펜의 몸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시르베르트에게 들켰다.

그렇다 한들 그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본체의 위치를 모르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이나 마찬 가지일 테니.

"그래서 그 무서운 불꽃으로 나를 겁주는 거니? 뜨거워 보이기는 한다만, 아픈 건 내가 아닌걸?"

어차피 다치는 건 호펜의 몸뚱이지 아이라이츠가 아니지 않은가.

그녀가 가진 능력의 무서움이었다.

"그러니 마음대로 하렴?"

호펜의 양팔을 쫙 펼쳐 보이는 아이라이츠.

클레어는 그런 아이라이츠를 노려보다가 결국 화염을 꺼트려 버린다.

저 말대로 호펜의 몸을 장악한 아이라이츠를 공격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클레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클레어의 화염이 꺼짐과 동시에 물어오는 라베나.

그리고···.

"너, 너 또 시르베르트 교수님이랑 단둘이 만났어? 굴러 들어온 돌 주제에······!"

여전히 멍청한 소리나 늘어놓는 롤랑.

"조용히 해. 멍청한 롤랑."

롤랑이 재차 발끈하려 했으나 그런 헛소리나 듣고 있을 아이라이츠가 아니었다.

"보아하니 뒤의 그 두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고······ 어때 클레어. 궁금하지 않니?"

마치 유혹이라도 하듯 선홍색 눈동자를 빛내며 다가오는 아이라이츠.

"지존 천마··· 아니, 히오 파블렌코가 어떤 사람인지. 왜 다들 그를 그렇게 찾아다니는지 말이야."

낮게 속삭이는 그 말에 급격히 마음이 흔들린다.

"히오의 목적은 무엇인지. 그가 무엇을 상대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니?"

왜 궁금하지 않겠는가.

히오를 목표로 삼겠다 다짐했으면서 정작 그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다.

무언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 이상은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다.

마음이 답답했기에 그저 강해지고자 했다.

강해지면 자연스레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하지만······.

정말 강해지는 것만으로 이룰 수 있을까. 히오의 곁에 나란히 설 수 있는 게 맞는 것일까.

정작 그는 자신을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한 클레어가 눈을 질끈 감는다.

"······헛짓거리 하지 마."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아이라이츠가 분홍빛 시선을 거두며 입을 가린 채 웃었다.

자연스레 클레어의 정신에 간섭하려다 실패한 것이다.

"정신력이 제법이구나. 아쉬워라."

역시 같은 여성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

거기다 본체가 아닌 다른 이의 몸을 빌려 했으니 위력이 현저하게 감소하는 것.

그걸 감안하더라도 제법 뛰어난 정신력이지 않은가.

정신계 방어 능력도 별달리 없어 보이는데 순수한 본인의 의지로 막아냈으니 말이다.

"우리를 찾아온 이유나 말해."

다시 눈을 뜬 클레어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호펜의 눈을 직시하고 그 속에 든 아이라이츠를 바라본다.

그에 아이라이츠는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답하는 것이다.

"우선은 확인이 목적이었는데 네 반응 덕분에 확신은 섰고······."

히오 파블렌코가 지존 천마라는 확신.

그것이 필요했는데 클레어의 반응으로 확신을 얻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목적은 무엇인가.

"너희를 도와주러 왔지?"

클레어와 라베나, 뭐 겸사겸사 롤랑까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클레어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도와줘? 왜?"

"왜라고 물으면······ 음···."

진지하게 고민하던 아이라이츠가 답이 생각났는지 밝은 표정으로 클레어에게 말한다.

"히오 파블렌코에게 미움받기 싫어서? 아니 미리 점수를 좀 따려고?"

그렇게 말하고는 후후 웃는 아이라이츠.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러니 클레어는 손을 뻗어 아이라이츠의 뒤쪽을 가리킨다.

"우리는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기분 나쁘게 웃지 말고 빨리 가버려."

"음. 괜찮겠어?""

그에 아이라이츠 역시 손을 뻗어 클레어의 뒤쪽을 가리키는 것이다.

"너희 곧 죽을 텐데."

순간.

딸랑-

들려오는 맑은 종소리.

딸랑- 딸랑-

클레어의 고개가 뒤쪽을 향해 천천히 돌아간다. 그에 라베나와 롤랑 역시 같은 곳을 바라봤고.

그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늘 높이 치솟는 검은 안개.

"이메니아는 곧 무너질 거야."

아카데미를 모두 감싸버리겠다는 듯 광활하게 펼쳐지는 검은 안개의 막.

그리고 들려오는 달콤한 속삭임.

"어때. 살려줄까?"

* * *

파울론은 기사 학부에 다니는 기사 지망생이다.

가장 존경하는 기사는 검성.

희망하는 곳은 황실 기사단.

정석적이고 평범한 기사 지망생.

물론 이메니아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라는 사실만으로 이미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지만, 범위를 아카데미 안으로만 놓고 봤을 때는 평범함 그 자체인 사람이다.

그러니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식사를 하고 평범하게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반가운 얼굴 하나를 마주한다.

"라올렛!"

같은 기사 학부의 동기 라올렛.

작위는 없으나 집안에 돈이 많아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하며 보기와는 다르게 성실하고 무뚝뚝한 자신의 동기였다.

밝게 손을 흔들며 라올렛을 향해 잔걸음으로 뛰어갔지만······.

"······라올렛?"

어딘지 모르게 상태가 이상한 라올렛.

동공은 풀려 있고 입은 헤 벌어진 상태였으며 걷는 걸음걸이는 목적 없이 비틀거린다.

"라울렛! 왜 그래!"

파울론이 곁으로 가 어깨를 잡고 흔들자 그제서야 라울렛의 시선이 파울론을 향한다.

눈은 풀린 채.

입은 헤벌쭉 벌어진 채.

파울론을 보며 하는 말.

"통로를 열어라."

동시에 라울렛의 입이 쩍 벌어진다.

눈동자는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고 눈과 코. 입과 귀 할 것 없이 모든 곳에서 검은색의 안개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하늘 높은 곳까지 순식간에 치솟는 검은 안개.

그러한 현상은 비단 파울론의 앞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아카데미 곳곳에서 치솟아오르는 검은 연기.

삽시간에 하늘을 장악하고 넓게 퍼져가는 것은 그 너머를 볼 수 없는 검은색의 안개.

그것이 드넓은 아카데미 전체를 감싸기 시작하고.

딸랑-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종소리.

딸랑- 딸랑-

아카데미 전체에 울려 퍼지는 맑은 종소리.

그 종소리에 검은 안개가 한층 더 짙어진다.

외부를 감싸듯 둘러지던 안개가 내부까지 스며들어 오는 것이다.

파울론은 넋을 놓고 그것을 올려다본다.

양손으로 받치고 있던 라올렛은 이미 옷가지만 남겨둔 채 모조리 검은 안개 그 자체가 되어버린 후였다.

"이게 대체······."

그리고 그런 안개 사이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형체.

마치 유령과 같은 걸음으로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하는 검은 복장의 사람들.

그제서야 파울론은 제법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떠올리는 것이다.

검은색의 안개.

뒤이어 들려오는 종소리.

그것이 들려오면 반드시 나타나는 최악의 집단. 대륙을 피로 물들였던 공포의 상징.

"······흑아."

긴 시간 숨죽이고 있던 검은 안개의 재림이었다.

* * *

"교수님께 가야 해!"

처음으로 클레어와 라베나, 롤랑 세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기사 학부를 제외하고 현재 아카데미에서 가장 강한 인물이라 평가받는 교수.

시르베르트 반 에른헴. 그에게 가야 한다.

"흐응···. 나는 그거 추천하지 않는데?"

뒤에서 들리는 아이라이츠의 말은 무시한 채였다.

수상쩍기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인 저 녀석의 무엇을 믿고 함께 한단 말인가.

지금은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 시르베르트와 합류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교수님은······."

"교수동에 있겠지! 가자!"

검은 안개는 이미 사방에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클레어에게는 조금이나마 익숙한 것이었다.

델피르 마을에서 겪었던 느낌.

아니, 그것이 수십 수백 배로 늘어난 느낌.

단지 흑아의 간부 한 명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절대 이길 수 없을 벽처럼 느껴졌었는데 그것들이 떼로 몰려온 듯한 느낌이었다.

어두침침한 안갯속에서 방향을 잡고 교수동을 향해 뛰쳐 간다.

"생각해보렴. 흑아가 바보도 아니고 시르베르트를 모를까? 이미 그에게는 그 힘에 걸맞은 존재들이 잔뜩 가고 있을 거라고? 그 곁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지."

여전히 뒤에서 들려오는 아이라이츠의 목소리.

그 말을 무시하며 달려가고는 있지만···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달리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이런 혼란 속에서 믿을 수 있고 이끌어줄 수 있는 강력한 아군은 필수였기에.

시르베르트라면 충분히 그 역할을 다 해낼 수 있을 거라 믿고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걸음은 얼마 가지 않아 가로막혔으니.

다름아닌 한 명의 아이 때문이었다.

지나가는 길목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한 명의 아이.

검은 안개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자그마한 체구의 아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파······."

게다가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스러워 하고 있지 않은가.

"아파. 아파. 아파. 아파. 너무 아파."

클레어와 라베나는 다급히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고 했다.

"마인이야."

멈춰선 것은 아이라이츠의 덤덤한 말 때문도 아니었다.

"괜히 가까이 가지 말고 빨리 죽이는 걸 추천한단다?"

이미 그 말이 들리기 전부터 아이처럼 보이던 것이 점차 부풀어 오르며 괴상한 형체를 갖춰나가기 시작했으니.

"뭐, 뭐야!"

눈 깜짝할 새에 수 미터가 넘게 불어난 덩치.

그와 동시에.

"꺄아악!"

"으악! 도, 도망쳐!"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검은 안개 사이사이로 보이는 눈앞의 괴물과 비슷한 형체들.

콰앙-!

휘둘러지는 주먹과 깨지는 바닥.

비산하는 돌.

마치 수박이 깨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와 후두둑 튀는 새빨간 액체.

"크, 클레어······."

주춤 물러나는 라베나와 그 앞에 선 검은색의 커다란 괴물.

그것의 시선이 클레어 일행을 향한다.

"물러나!"

클레어의 머리 위로 불쑥 생겨나는 시뻘건 화염구.

"킥킥킥······. 고작 마인 하나도 간신히 상대하는 너희가 수라장을 뚫고 시르베르트에게까지 갈 수 있을까?"

뒤에서 들려오는 아이라이츠의 말을 흘려들으며 머리통만 한 화염구 일곱 개를 동시에 날린다.

콰아앙-!

워낙 거대한 덩치 탓에 하나의 빗나감 없이 모조리 틀어박히며 폭발하는 화염.

그에 조금은 안심했으나.

- 그어어어

커다란 주먹이 폭발의 연기를 뚫고 나와 클레어의 바로 앞에 내려꽂힌다.

아카데미 내에서도 뛰어난 위력으로 손꼽히던 클레어의 스킬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통하긴 했으나 저 괴물을 쓰러트리기에는 조금 모자란 것이다.

"저런······ 포기하렴. 이대로 가다가 흑아의 간부라도 하나 만나면 전멸이야. 주제를 파악하고 생각을 해."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클레어를 타이르는 듯한 아이라이츠의 목소리.

발악하듯 괴물을 향해 스킬을 쏟아붓고 있는 롤랑과 라베나의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

어두운 밤하늘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검은 안개. 때문에 좁아지는 시야.

"응? 잘 생각하렴 클레어. 저 괴물은 잡는다 치고 그다음은? 또 그다음은?"

그런 상황 속에서 아이라이츠의 나긋한 목소리가 사뿐히 귓가에 내려앉는다.

"이미 흑아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통로를 열었어. 너는 어찌 버텨내더라도 네 친구들이 버텨낼 수 있을까?"

클레어의 곁에 바짝 다가온 아이라이츠가 클레어의 턱을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재차 일렁이는 선홍빛 눈동자.

"이 절망적인 상황을 단박에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지 않니?"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말에.

"히오 파블렌코."

클레어의 눈빛이 점차 흐릿해져 간다.

"그의 위치를 말해."

64화 이메니아 아카데미(8)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르베르트의 방은 평화롭다.

고요한 실내.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소리가 조용하게 들려온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시르베르트의 손.

잠시 멈췄다가 인상을 조금 찌푸리더니 다시 손을 움직여 글자를 써내려간다.

내일 있을 시험 때문이었다.

조교수 호펜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의심하고 있으니 혹시 몰라 그가 할 일까지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었다.

시르베르트 반 에른헴. 남태민은 그런 사람이었다.

계획하고 미리 대비하는 것을 당연시했으며 연구와 탐구를 즐기는 사람.

내일 있을 시험만 끝내고 나면 호펜을 이용하든 다른 계획을 세우든 해서 아이라이츠 문제를 해결해야 할 테다.

'아이라이츠······.'

열심히 움직이던 펜촉이 다시금 뚝 멈춘다.

아이라이츠에 생각이 닿자 집중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녀석이 왜 흑아에···.'

추측에 따르면 흑아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거의 확실하지 않은가.

대체 무엇을 위해 그러는지.

아이라이츠 정도의 최상위 랭커에게 악명은 분명 독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그를, 아니 그녀를 믿었던 것이었고.

한데 그런 아이라이츠가 흑아에 붙어버렸다니 도대체가 영문을 알 수 없지 않나.

"······일단 이것부터."

시르베르트가 다시 몸을 당기고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펜 끝을 움직여 서류를 채워나간다.

그 집중에 다시금 조용해진 방.

종이와 펜촉이 만나는 사각사각 소리만이 조용히 퍼져나가는 와중.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움직임이 다시금 뚝 멎는다.

시선은 서류를 들여다보는 채였고 손은 펜을 쥔 그 자세 그대로 굳어가는 표정.

다른 생각이 나서도, 아이라이츠를 떠올린 것도 아니었다.

단지.

"······."

그의 눈 옆으로 한 줄기의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지나간 까닭이었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현상.

일어나서도 안 될 현상.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시르베르트가 뒤를 돌아보았고.

"······허."

커다란 창문을 통해 훤히 들여다보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아카데미 곳곳에서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검은 연기.

거대한 돔의 형태로 아카데미 전체를 감싸기 시작하는 검은색의 연기 아래로 눈과 코, 귀와 입을 통해 끊임없이 연기를 뿜어내는 사람.

그 곁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사람.

정신없이 도망치는 이.

점차 짙어져 가는 흑색의 안개.

삽시간에 벌어진 혼란.

그리고 이 괴이한 현상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시르베르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흑아."

흑아의, 아타올프의 상징인 검은 안개의 출현.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인데."

중얼거리는 시르베르트의 등 뒤로 검은 안개가 조금씩 짙어진다.

방문 틈으로 계속해서 들어오는 그것들은 조금씩 형체를 갖춰나가기 시작하고.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시르베르트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린다.

"왜 이렇게 갑자기?"

일만 랭커들의 변수로 미래 예측이 무의미해졌다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뜬금없는 습격이 아닌가.

흑아의 발호는 본디 몇 년 뒤에나 일어날 사건이었다.

방 안의 검은 안개는 어느새 완전한 사람의 형태를 갖춰갔고 그 숫자만 열을 넘어가고 있었으니.

그럼에도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나지 않는 것이 제법 기괴스러운 것이다.

"이 정도 규모라면 작정하고 벌인 것인데."

고개를 가로젓는 시르베르트.

"이해가 가질 않는단 말이야."

왜 이런 타이밍에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무엇을 노리고 이메니아를 습격하는 것인지.

그것도 이해가 가질 않지만, 정말로 의문인 점은 따로 있는 것이다.

"고작 너희 정도로 나를 잡겠다고."

천천히 뒤로 돌아서는 시르베르트의 눈에 보이는 십여 명의 흑의인.

한 명 한 명이 전부 흑아의 간부급 전력.

허나.

"이해가 안 돼. 이해가."

자신에게 닿기에는 고작인 전력.

시르베르트는 그것들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리고.

「스킬 - '상급 염동'이 발동됩니다.」

콰아앙-!

동시에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 십여 명의 간부들.

"다시는 기어나오지 못하도록 처박아주마."

흩날리는 먼지 사이에서 시르베르트의 안광이 번뜩인다.

* * *

염동의 대가, 시르베르트 반 에른헴.

제국에 이름을 떨치며 명성을 쌓아 올린 아카데미의 정교수.

바깥세상에서는 구원자, 영웅 등으로 불리우며 최초의 각성자로서 막대한 명성을 쌓아 올린 강자.

콰앙-!

그러한 명성을 바탕으로 주력 스킬인 염동을 상급의 끝자락까지 진화시켰고 그와 어울릴 만한 여러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 자.

콰앙-!

그가 작정하고 염동을 펼치고 있으면 웬만한 존재는 감히 그의 근처로 다가오지도 못하고 찌부러지는 것이다.

콰아앙-!

하지만 흑아의 간부들과 마주하고 벌써 수십 분.

그런 시르베르트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으니.

언제나 정갈하게 넘어가 있던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작은 것이긴 하지만, 상처 또한 존재했다.

작정하고 전투에 돌입한 시르베르트에게는 흔치 않은 일.

"이 썩을 것들이······."

처음의 여유로웠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잔뜩 찌푸려진 얼굴만이 남았다.

문제는 녀석들의 조합이었다.

오로지 시르베르트의 염동만을 염두에 둔 조합 구성.

염동을 방어할 수 있는 스킬 보유자가 있는 것이다.

염동력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었다.

육체의 스펙을 한계까지 올린 자들은 쉬이 막을 수 없고 그 외에도 한 점을 돌파하는 강력한 공격. 들어 올리지 못할 만큼의 거대한 무게 등 여러 파훼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대비한 여러 스킬을 시르베르트는 보유하고 있지만······ 상대는 그마저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롭게 대처해 오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콰아앙-!

발밑을 부숴 오는 길을 막았음에도 곧장 천장을 부수며 솟구치는 놈들.

시르베르트는 스스로에게 염동을 걸고 본인의 방을 벗어나 공중으로 뛰어들었다.

기존의 방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고 허공으로 거리를 벌리려는 생각이었지만.

"······제대로 작정을 했군."

그마저도 우습다는 듯 똑같이 허공을 부유하며 날아오는 모습에 혀를 차는 시르베르트.

흑아의 힘.

아니, 아타올프의 힘이라 해야 할까.

아타올프에게 개조당해 그의 힘인 검은 안개 그 자체가 되어버린 자들.

혼란과 두려움, 공포의 감정을 먹어치우며 더욱 강력해지는 힘.

흑아의 모든 이들은 아타올프의 검은 안개를 다룬다.

스스로를 희생해 통로를 연다거나.

안개가 되어 움직인다거나 한계 이상의 데미지를 다른 이가 대신 받게 한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그런 검은 안개의 특성에 생전의 능력까지 가진 이들.

그것이 흑아의 간부라는 것들이었다.

"그만 쫒아와라. 거머리들아."

흑의를 펄럭이며 허공을 자유로이 날아오는 놈들에게 손을 뻗는다.

다시 한 번 염동을 조작해 녀석들에게 압력을 가해보지만.

"······망할."

그 중 한 명이 손을 휘젓자 허무하게 흩어지는 염동.

거기에 일행 전원을 하늘로 날려보내는 능력자.

그에 시르베르트는 바닥의 돌이나 장애물 따위를 끌어와 그들에게 날리지만, 이번에는 거대한 막이 생겨나 그것들을 전부 막아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 안에서 작고 뾰족한 바늘침 수백 개가 광범위하게 쏘아져 오는 것이다.

전부를 염동으로 막자니 마력 소모가 극심했기에.

「스킬 - '중급 철의 벽'이 발동됩니다.」

「스킬 - '중급 철의 벽'이 발동됩니다.」

다른 중위 등급의 스킬을 여러 번 사용해 막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 개자식들. 마력 탈진을 노리고 있어."

넓게 펼쳐 공격할 수 있는 스킬 사용자가 섞여 있다.

그야말로 시르베르트를 상대하기 최적화된 자들이 모인 것이다.

"······허공으로 뛰어든 게 실수였나."

「스킬 - '중급 철의 벽'이 발동됩니다.」

「스킬 - '중급 철의 벽'이 발동됩니다.」

또다시 빽빽하게 쏘아져 오는 바늘침을 막아내며 후회해보지만, 의미는 없다.

지상에 있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으리라.

어떻게 행동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생각해라······. 생각."

다른 이들로부터의 지원?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본다.

흐릿한 안개 사이로 들려오는 비명과 각종 스킬들이 쏟아지는 소리.

각양각색의 오러가 휘둘러지고 또 꺼져버리는 광경.

그야말로 아수라장.

「스킬 - '중급 철의 벽'이 발동됩니다.」

「스킬 - '중급 철의 벽'이 발동됩니다.」

아카데미를 지키는 경비 병력에게 기대를 걸 수도 없을 테다.

애초에 그리 강한 자들이 아닌 까닭이다.

외부에서의 지원?

아카데미를 둘러싼 저 검은 안개가 그것을 차단한다. 외부는 물론, 내부에서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는 감옥.

적어도 저 장막을 뚫을 정도의 실력자는 되어야 유의미한 지원인 것인데 그것을 기대하기는 힘들 터.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무엇을 바랄 수도 없으리라.

실전이라고는 겪어보지 않은 우물 안 개구리들.

이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며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스킬 - '중급 철의 벽'이 발동됩니다.」

"뒤로···! 내 뒤로 전부 모이거라!"

그런 가운데 눈에 띄는 한 사람.

쩌렁한 목소리로 학생들을 불러모으는 이.

기사 학부의 교수, 알크미온이었다.

일반인에 비해 두 배는 더 커진 키와 덩치.

인간의 것이 아닌, 호랑이를 닮은 상반신.

특유의 그 스킬로 과거에는 수인 기사라 불리며 유명세를 얻었지만······.

"으아아악!"

그는 이런 전투를 오래 지속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사방에서 귀신처럼 덮쳐드는 흑아.

그들에게 공포심 따위는 없었고 오로지 상대를 죽인다는 목표뿐이었으니.

게다가 덩치가 커진 알크미온보다 더욱 커다란 괴물, 마인들까지 곳곳에서 덮쳐들고 있지 않나.

그것들을 전부 상대하며 겁에 질린 학생들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거의 한계라는 말이었다.

아카데미의 교수는 대부분 그런 자들이었다.

이미 전성기가 지난 이들.

다른 시대에, 다른 공간에서 강함을 떨치고 남은 건 연륜뿐인 자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일단 합류를 해야겠어."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며 알크미온이 분전하고 있지만.

그를 비롯한 기사출신 교수들과 정신 차린 몇몇 학생들이 힘을 내고 있지만, 검은 연기 속에서 얼핏 드러나는 괴물의 숫자는 그것을 압도하는 것이었기에.

"알크미온!"

쿵쿵 땅을 울리며 그들에게 짓쳐들어가고 있었기에.

"물러나라!"

시르베르트는 빠른 속도로 하강하며 남은 염동의 힘으로 일대를 장악한다.

마력이 쑤욱 빠져나가지만, 그 대가로 알크미온 일행을 둘러싼 모든 괴물을 모조리 허공에 띄워 올렸으니.

"시르베르트 교수!"

그제서야 알크미온이 그 호랑이 같을 얼굴에 한줄기 미소를 피워올리는 것이다.

입꼬리에 한줄기 선혈이 걸려 있음에도.

든든한 아군이 등장했다 여기는 것이다.

과연 그의 기대대로 바닥에 착지한 시르베르트가 망설임 없이 주먹을 꽉 쥐어버렸고.

「스킬 - '상급 염동 : 압(壓)'이 발동됩니다.」

그대로 허공에서 터져나가는 괴물과 흑아의 존재들.

그에 뒤에 모인 수많은 학생들은 물론이고 간신히 버텨내던 교수들까지 시르베르트를 바라본다.

마치 영웅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으하하하! 시르베르트 교수! 내 자네가 이렇게까지 흐트러진 건 처음 본다네! 그래도 자네가 왔으니 마음이 놓이는구먼!"

군데군데 상처를 입고 입가에는 피가 고인 주제에 호탕하게 웃는 알크미온.

허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자네 저것들은 대체 무엇인가. 뭘 달고 온 게야."

흑의를 펄럭이며 시르베르트의 뒤를 쫓아온 간부들을 보아버린 것이다.

그에 시르베르트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간략하게 말했다.

"흑아의 간부들입니다. 한 명 한 명의 능력이 전부 저를 상대하기 위해 짜여졌어요. 그러니······."

그 답지 않게 흐려지는 말꼬리.

이것이 정답이라고 한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저것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신은 이곳과 학생들을 지킬 테니 알크미온을 비롯한 기사 출신의 교수들이 나서서 저들을 상대해달라는 의미.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판단이었고 정답에 가까운 것이라 여겼다.

시르베르트의 능력은 자신보다 약한 다수를 상대할 때 효과적이었고 저들에게는 통하지 않았기에 하는 부탁.

듣기에 따라서는 대신 죽어달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크······."

알크미온은 목청 높여 웃는다.

"크하하하하! 뭐 그런 부탁을 그리 뜸들이는 겐가! 자네답지 않아!"

시르베르트의 얼굴 만한 주먹을 꽉 쥐고 커다란 덩치를 움직여 걸어나가는 알크미온.

"내 비록 늙었지만, 명색이 호랑이 아닌가."

그런 그의 뒤로 당연하다는 듯 다른 교수들이 따른다.

그들은 애초에 교수이기 이전에 반평생 등을 맡겼던 동료였으니.

"저런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망령에게 질 수는 없지!"

땅을 박차고 힘껏 뛰쳐나가는 알크미온.

그를 향해 예의 그 바늘침이 빽빽하게 쏘아져 온다.

"어딜!"

몸에 오러를 두르고 수백 개의 바늘침을 기합으로 뚫고 지나가는 알크미온과 익숙하게 그를 방패 삼아 바짝 따라붙는 교수들. 아니, 전 기사단원들.

시르베르트는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은근슬쩍 염동을 발동해보지만, 간부진에 닿기 전에 어김없이 흩어져 버린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시르베르트.

여기저기서 도망쳐온 학생들로 그 뒤는 어느새 가득 차버린 것이다.

대부분의 눈빛에 서린 두려움과 절망, 공포.

그것을 읽어냈기에 시르베르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바로 한다.

덤덤하게 학생들을 바라보며 말한다.

"저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먹고 더욱 강해진다. 그러니."

그대로 몸을 돌리며 재차 발동하는 염동.

「스킬 - '상급 염동'이 발동됩니다.」

주변에 짓쳐들던 흑아와 괴물이된 마인들이 한꺼번에 허공으로 떠오른다.

"겁먹지 마라."

「스킬 - '상급 염동 : 압(壓)'이 발동됩니다.」

그대로 일거에 찌부러지는 괴물들.

아무리 베고 찌르고 스킬을 날려도 쓰러지지 않던 것들이 너무도 손쉽게 압축되어 버리는 경이로운 광경.

"침착하게 자리를 지켜라."

학생들의 눈에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물론 그들에게는 시르베르트의 뒷모습만 보일 테니 가능한 희망이었다.

내뱉는 말과 달리 잔뜩 일그러진 시르베르트의 표정.

끝을 알 수 없는 적의 숫자와 달리 자신의 마력은 벌써 절반 아래로 떨어져 버렸으니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금방 끝날 것이다."

장담할 수는 없었다.

* * *

"으아아악!"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린다.

"이 되먹다 만 잡것들이 감히! 감히!"

알크미온의 절규와도 같은 외침.

그 주변에는 그의 동료이자 전우였던 교수 몇몇의 시체가 보인다.

'······얼마나······ 지났지.'

한 시간? 두 시간?

시간 따위 헤아리고 있을 틈이 없었기에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다.

마력을 아끼고 아끼고 아껴가며 분전했음에도 아직도 상대해야 할 적은 널리고 널렸다.

어느순간부터는 막아내는 범위도 줄어들어 반대편은 학생들이 뭉쳐서 간신히 막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어설펐기에, 겁에 질렸기에 사상자가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끝인가.'

이제는 정말 남은 마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

조금 전에도 자칫 잘못했으면 정신을 놓아버릴 뻔하지 않았는가.

마력 탈진 증상이 시작되려는 것이었다.

'애초에 아카데미의 인원으로 작정하고 달려든 흑아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제국에서도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최악의 집단이자 거대 세력이다.

십여 년 전에 검성과 크게 한 번 맞붙은 뒤로 세력이 위축되어 몸을 사리고 있었을 뿐.

그 힘은 이다지도 막강한 것이다.

아니, 십여 년간 몸을 사렸다는 것은 그만큼 힘을 비축했다는 말이었으니.

그런 흑아의 전력을 고작 아카데미 교수들과 경비병, 학생들 정도로 막아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이만하면 정말이지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끄아아아악!"

"제, 제발 살려주세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비명.

공포에 잠긴 울음.

허나 어쩔 수가 없다.

'진짜······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이 여기서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바닥난 마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무의미하게 죽을 뿐이다.

"나는! 울페르트 알크미온!"

한때는 영광스러웠던 기사의 마지막 발악.

시르베르트를 척살하기 위해 꾸려진 십여 명의 간부를 상대로 알크미온과 그의 기사단은 몇 시간을 버텨낸 것이다.

"내 이름을 걸고 너희 중 하나는 반드시 길동무로 데려가리!"

허나 그것도 이제 끝에 가까워졌으니.

그의 영광을 함께 했던 동료들은 이미 눈을 부릅뜬 채 바닥에 나뒹굴고 서 있는 것은 오직 알크미온 하나뿐.

그러니 정말로 어쩔 수 없다.

'로그아웃을······.'

달리 방법이 없지 않나.

훗날을······ 후일을 도모하자.

"덤벼라! 덤벼라 이 귀신들아! 비겁하게 숨지 말고 하나씩 덤비란 말이다!"

알크미온의 몸에 빽빽하게 꽂힌 바늘침.

짓뭉개진 왼 주먹.

"으, 으아아아!"

"막아! 막아!"

"교, 교수님······!"

등 뒤에서 울부짖는 학생들의 목소리.

「로그아웃 이용권(72시간)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정말이지 어쩔 수 없다.

「예」 「아니오」

로그아웃하고 회복한 후에 한국의 길드원들을 모으자. 랭커들을 모조리 불러 오늘의 복수를 반드시 하리라.

"사,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시르베르트의 손가락이 '예'를 향해 천천히 움직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치 무언가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이 천천히.

그런 손가락이 돌연 우뚝 멈춰 선 것은 학생들의 비명 때문도, 알크미온의 피를 토하는 외침 때문도 아니었다.

"······."

문득 머리 위에서 빛이 보인 까닭이었다.

검은 안개로 둘러싸였을 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빛.

시르베르트의 시선이 자연스레 하늘을 향하고 이내 곧 경악으로 눈이 부릅떠진다.

"······저게 뭐야."

오롯이 선 채 지상을 굽어다 보는 금빛의 거인.

목숨을 건 인간의 전쟁 따위, 그저 하찮은 투닥임으로 만드는 경이로운 존재. 인외의 무엇.

그 거대한 입이 천천히 열리고.

- 나는 위대한 마법사.

낮은 목소리가 검은 안갯속을 크게 울렸으니.

- 히오 파블렌코.

지상의 모든 시선이 하늘을 향한다.

65화 이메니아 아카데미(9)

두터운 통나무를 연상케 하는 팔뚝과 주먹.

금방이라도 클레어 일행을 덮칠 듯 괴물의 두 주먹이 위협적으로 떨어져 내리지만.

"이 몸으로는 그리 길게 잡아두지 못하니 빨리 뛰렴?"

한줄기 선홍빛이 스쳐 지나가고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는 괴물.

"······가자."

그 틈에 클레어와 라베나, 롤랑이 재빨리 지나가고 아이라이츠가 뒤를 따른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상황은 처참했다.

달려가는 와중에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무언가 깨지고 찢기는 끔찍한 소리.

검은 안갯속 언제 어떻게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적들.

발끝에 무언가 툭 걸리는 느낌에 지나치며 힐끗 돌아보니 뜯겨져 나간 팔 한쪽이 보이는 것이다.

이름모를 사람의 뜯겨진 팔 한쪽. 피로 범벅된 고깃덩어리.

그런 것들이 주변에 끝도 없이 널브러져 있다.

"······."

구역질이 치밀어 오름에도 꾸역꾸역 참으며 달려나간다.

당장 멘탈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상황에서도 클레어는 입술을 짓씹으며 달려나간다.

아이라이츠에게 홀려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도움이 없으면 이 지옥 속에서 살 수 없다 판단 내렸을 뿐.

상대가 어떤 꿍꿍이인지. 언제 뒤통수를 칠지 도 모르지만, 라베나와 롤랑마저 저런 꼴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

상대가 설사 악마라고 한들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 멀었니?"

길을 재촉하는 아이라이츠.

클레어가 향하는 곳은 히오와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전투 실습장의 숨겨진 지하실.

어차피 그곳으로 가봐야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는 말은 거대한 괴물과 귀신처럼 달려드는 흑아 또한 없을 확률이 높을 테고 아이라이츠는 허탕을 칠 것이라는 말.

그리고 정말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히오가 거기 있다면······.

나타나 줄 수 있다면, 아이라이츠의 말대로 이 지옥을 바로 끝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

'······아니야. 이제 그만 기대.'

언제까지 히오가 해주기만을 기다리다가는 결국 나약해지고 말 테다.

중요한 순간에, 나아갈 수 있는 순간에 정체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우선 몸을 피하고 그다음 어찌 행동할지를 생각해야 하리라.

"저기로 들어가면 돼!"

방향감을 상실케 하는 안갯속에서도 길을 찾아 실습장의 근처까지 기어이 도달하였다.

입구에 서성이던 세 마리의 괴물을 아이라이츠의 스킬로 세뇌시키고는 재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

클레어와 라베나는 복도를 가로질러 지하실 입구에 섰다.

나무판자로 어설프게 막혀 있는 지하계단의 입구.

"저 이상한 여자가 찾는 곳이 여기야?"

두 사람보다 조금 늦게 들어온 롤랑이 지하실을 바라본다.

"이거 거기네. 유령 나오는 지하실."

망설임없이 나무판자를 들어 올리고 아래로 향하는 롤랑.

"여기 대체 뭐가 있길래···."

라베나와 클레어도 그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간다.

기대하지 않으려 했건만,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한줄기 희망을 품고.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가 도착한 지하실은.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역시나 썰렁했다.

싸늘한 공기만이 감도는 텅 빈 지하실.

"히오 파블렌코와 헤어진 장소가 여기라고."

마지막으로 계단을 내려온 아이라이츠가 주변을 둘러본다.

"흐응 제법 그럴싸하게 비밀스러운 곳이긴 한데······."

중얼거리며 지하실의 벽을 짚어나가는 아이라이츠.

꼼꼼하게 벽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더니 다시 클레어에게로 향한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이제 와서 내가 거짓말을 왜 해."

"히오 파블렌코가 정말로 여기를 내려왔다는 말이니?"

"그렇다니까."

선홍색 눈동자를 들이밀며 자신을 압박하는 아이라이츠.

그 뒤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롤랑의 모습이 클레어의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갑자기 사라졌고?"

"그래···. 뭐 아는 거 있어?"

"흐음······."

턱을 쓸어내리며 고민하는 아이라이츠.

점차 가까워져 오는 롤랑의 보라색 머리칼.

클레어는 그런 롤랑을 애써 외면하며 계속 아이라이츠에게 말을 걸었다.

"히오를 만나면 뭘 하려고 그러는 건데. "

"꼬맹이는 몰라도 된단다."

"나 어린애 아니야. 그러니까 말해."

귀찮다는 듯 찌푸려지는 아이라이츠의 표정.

그리고 번쩍 들어 올려진 롤랑의 손과 그 손에 쥐어진 주먹만 한 짱돌.

"후······ 꼬맹아 잘 들어. 지존 천마는 내 하낡!"

뻐어억-!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허물어지는 아이라이츠 아니, 호펜의 몸.

그 자리를 대신 하는 것은 씨익씨익 대는 롤랑의 모습이었다.

"나 롤랑 번스타인이야!"

언제 몰래 챙겨왔는지 주먹만 한 짱돌을 옆으로 던져버리고는 머리를 쓸어올리는 롤랑.

그녀가 쓰러진 아이라이츠에게 다가가며 클레어와 라베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뭐해? 빨리 밟아!"

"응? 아, 응!"

* * *

- ······환영쟁이들이 이걸 봤으면 전부 눈을 까뒤집으면서 달려들었겠구먼.

스킬로 등록된 환영 마법, 일루젼은 조금 특별했다.

"생각해보면 내 특성 자체가 일종의 환영 마법이잖아?"

- 눈을 현혹하는 데 있어서 자네의 특성보다 더한 건 없겠지.

초고위 환영 마법은 상대를 환영 속에 가두어 결국 그것이 실제가 되게 만든다는데······.

히오의 특성과 너무도 유사하지 않은가.

그러니 환영 마법 일루젼은 히오의 특성과 맞물려 그 효과를 몇 배 이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아무튼 목표로 했던 마법은 모두 익혔고 스킬 효과도 전부 확인했으니······ 이제 다시 나갈 차례야."

푸르넬이 뻔뻔하게 히죽 웃는다.

- 즐거운 여행 다녀오시게.

"같이 가면서 뭘 새삼스레."

어차피 그 혼의 반쪽은 함께 하는 여행이지 않은가.

- 흐흐흐. 나는 이번에 새로 열린 방들을 하나하나 탐독해봐야겠네. 그래야 나중에 자네의 서클이 높아졌을 때 스승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겠지.

이번에 새로 열린 여러 층에는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문양을 새겨가며 익히기에는 애매한 마법.

아니면 히오가 익히기에는 아직 너무 어렵고 필요한 것도 많은 그런 마법이 많이 있었고.

마탑에 남아 있을 푸르넬의 본체는 그런 마법을 연구하고 있겠다는 말이었다.

"그래. 잘 부탁할게."

-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뭘 새삼스레. 흐흐흐.

히오의 말투를 따라 하며 능청떠는 푸르넬.

히오는 피식 웃으며 모자를 집어들었다.

이전의 입문자용 마법 모자가 아닌, 정식 마법사의 마법 모자.

3서클에 오르며 마법사 세트를 모두 정식 마법사용으로 갈아치운 것이다.

그렇다고 크게 좋아진 건 아니었다.

원체 효과가 좋았던 모자와 로브, 지팡이였던지라 기존의 효과에서 조금씩 더 상향된 정도.

그리고 모자와 지팡이가 전체적으로 더 화려해진 정도가 전부였으나.

"기분이 다르잖아. 새 장비를 차려입으니까."

이제는 정말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마법사가 되었지 않나. 기분이 다른 것이다.

주먹만 한 불꽃을 간신히 피워내던 마법사에서 제법 그럴듯한 마법을 구사하는 정식 마법사로.

새롭게 더욱 화려해진 모자를 머리에 얹고 여전히 커다란 스태프를 손에 쥔 채 포탈 앞으로 향한다.

"다녀올게."

「확인된 마력은 3서클입니다.」

「갈 수 있는 지역은 총 스물하나입니다.」

푸르넬이 손을 대신해 눈알을 키우고 양옆으로 데룩데룩 굴린다.

오직 푸르넬만이 할 수 있는 작별 인사.

- 다음에 직접 마주할 때는 더욱 성장해 있겠구먼.

「이메니아 마법 대학(1) - '마법사의 집'을 선택하였습니다.」

「포탈이 가동됩니다.」

예의 그 환한 빛이 몸을 감싸고 눈을 감싼다.

히죽 웃는 푸르넬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 간다.

아주 찰나 간의 시간이 흐른 후, 빛이 사라진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빛이 사라진 익숙한 포탈.

황량한 지하 4층의 공간.

그리고 미약하게 느껴지는.

"······."

사기(死氣).

지하 4층의 공간임에도 이 정도로 죽음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희미하게 걸려 있던 미소가 빠르게 식는다.

"······마법 결계는?"

말 뜻을 알아차린 푸르넬의 재빠른 답변.

- 올 때 보았지 않은가. 환영 결계는 무너졌어. 영체화를 해도 될 게야.

그 말인즉, 영체가 되어도 볼썽사납게 부딪칠 일은 없다는 의미였기에.

「스킬 - '서먼 팬텀 스티드'를 발동합니다.」

즉시 팬텀 스티드를 소환한다.

허공이 쩍 갈라지며 새하얀 빛과 함께 등장하는 팬텀 스티드의 모습은 유령마라기 보다는 차라리 신수에 가까운 것.

스킬로 발동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특성 - '영체(靈體)'가 발동됩니다.」

익숙하게 팬텀 스티드의 위에 올라타고 의지를 전달한다.

빠르게 위로, 지상으로 향하자는 의지.

그에 앞발을 번쩍 치켜들고 허공을 달리기 시작하는 팬텀 스티드.

그 양옆으로 새하얀 날개가 쫙 펼쳐지고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지하 4층의 천장을 뚫고 지하 3층.

지하 3층을 지나쳐 지하 2층으로 올랐고 순식간에 그것마저도 지나쳐 지하 1층에 도달했으며 이제 곧바로 지상으로······.

"응?"

나가기 직전 끼익 멈춰 선다.

지하 1층에 익숙한 붉은 머리가 보인 탓이었다.

"클레어?"

무언가를 둘러싼 채 자근자근 짓밟고 있는 클레어를 비롯한 몇 명.

히오의 목소리에 그들의 고개가 동시에 위를 향하고.

"······히오?"

천천히 내려오는 히오를 바라본다.

날개 달린 새하얀 말을 탄 채 서서히 내려오는 히오.

「특성 - '영체(靈體)'가 해제됩니다.」

팬텀 스티드에서 내려 바닥에 착지하자 비로소 면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클레어와 라베나, 그리고 롤랑과······ 얼굴이 퉁퉁 부은 웬 남성 한 명.

히오와 눈을 마주치더니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짓는 이상한 사내.

"히오······ 파블렌코!"

히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아나? 아니, 그보다 일단."

왠지 모르게 희열에 찬 사내의 눈빛을 무시하며 클레어를 바라본다.

"무슨 일이야. 바깥의 저 기운들은 대체······."

그에 팬텀 스티드와 히오를 혼란스러운 눈으로 번갈아 보던 클레어가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흑아, 흑아가 습격해왔어."

"······흑아."

깊게 가라앉는 히오의 눈빛.

습격의 이유라든가. 규모 따위가 의문으로 떠오르기는 했으나 그건 나중에.

지금은 당장 저 사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죽음의 기운이 어찌나 진한지 전장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일단 알겠어."

그렇게 말하고 다시 팬텀 스티드에 올라타려는데.

"지존 천마."

들려온 사내의 말에 걸음이 멈춘다.

낯선 목소리에 익숙한 이름.

"너······ 뭐야."

고개를 돌리자 히죽 웃고 있는 낯선 남성.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넌 모를 거야. 지존 천마."

의문에 대한 답은 클레어에게서 나왔다.

"시르베르트 교수님께 들었는데······ 아이라이츠래."

아이라이츠.

히오가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시르베르트의 조교수로 본 적 있지 않나.

"······그렇군. 몸을 빌려 숨어있는 건가. 아이라이츠."

그의 머리를 장악한 낯선 마력.

가늘고 길게 이어진 마력의 끈이 느껴지는 이유가 이것이었나.

그리고 무엇보다 어울리지 않는 선홍색의 눈빛.

"킥킥킥··· 역시 한눈에 알아볼 줄 알았다니까. 지존 천마."

태평한 그 웃음에 문득, 분노가 치솟는다.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이마를 맞대며 선홍색 눈을 깊게 들여다본다.

갑작스러운 흑아의 습격과 때맞춰 모습을 드러낸 아이라이츠.

"네가 벌인 짓이냐. 아이라이츠."

"아냐 아냐!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나는 네게 미움받기 싫은걸? 단지······."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

"정보를 조금 넘겨줬지. 시르베르트의 스킬이라든가? 뭐, 이것저것."

"······더 이야기할 가치도 없군."

아이라이츠는 완전히 맛이 갔다.

그리 판단한 히오가 오른손에 쥔 지팡이를 휘두르려는 순간.

"그런데 흑아가 갑자기 왜 습격해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내뱉어진 물음에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이라이츠의 말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만다.

"나도 응. 아주 자세한 건 모르지만, 너를 죽이려고 온 거야. 흑아는."

"······뭐?"

"그러니까 황궁에서 왜 그랬어? 아타올프가 심어놓은 녀석들 하루아침에 싹을 뽑아버린 거. 네가 한 일이지? 지존 천마."

황궁이라면······ 손을 쓴 게 전혀 없다.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실비아의 능력으로 행한 일.

영혼을 조작하고 그 과정에서 흑아의 세력까지 걸러내버린 것.

"지난번 전쟁은 또 어떻고. 물론 그건 오해가 좀 있겠지만······ 킥."

"······역시 너였구나 아이라이츠. 정보를 빼내 알렌베르트 군단을 조종한 녀석이."

"응! 맞아! 하지만 나는 네가 지존 천마가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다니까? 응? 내 말 이해하지? 응? 너는 나 이해하잖아?"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든다.

그러니까 어떤 오해가 쌓여서 아타올프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일을 벌였다는 건데······.

"응? 미안해. 하지만 이해하지? 물론 아타올프에게 최우선 제거 대상이 되었지만, 너라면 상관없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나를······."

"시끄럽다."

뭐가 그리 다급한지 와다다 쏟아내는 아이라이츠의 말을 막고 다시 그 눈을 들여다본다.

"언제까지 그리 숨어 있을 수 있을 것 같나. 아이라이츠."

오른손에 쥔 지팡이를 살짝 들어 올리고 서클을 회전시킨다.

"조만간 찾아가지."

그대로 지팡이를 땅에 가볍게 쿵- 찍자.

"응! 난 좋아! 사랑······."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픽 쓰러져버리는 아이라이츠. 아니, 조교수 호펜.

캔슬레이션을 이용해 마력의 연결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 팬텀 스티드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이것저것 다양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지만, 우선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이 난장판을 종결시키는 것.

그러니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을 꾹 눌러담는다.

「특성 - '영체(靈體)'가 발동됩니다.」

팬텀 스티드에 다시 오르니 그제서야 클레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 행색이 보이는 것이다.

잔뜩 헝클어진 붉은 머리칼과 옷 여기저기 튄 피.

얼마나 다급했을지. 무서웠을지.

그럼에도 아이라이츠임을 밝혀내고 여기서 자신을 기다려준 클레어.

고마웠다.

"······고맙다. 클레어."

그리 말하자 클레어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푹 숙인다.

얼핏 보이는 귀가 새빨갰다.

그리고 미안했다.

신경을 많이 써주지 못한 것 같아서.

시르베르트의 말대로 아카데미에 홀로 던져놓고 오랜만의 만남에도 인사 한 번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이 문득 미안했다.

그렇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이 또 있었기에.

"이제 괜찮을 거야. 걱정 마."

그런 말을 남기는 수밖에 없었고.

그대로 팬텀 스티드를 타고 곧장 지하실 천장을 뚫고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히오 파블렌코는, 갑작스레 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지하실에 내려앉은 정적.

고개를 숙인 클레어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고 있는 라베나.

롤랑은 히오가 뚫고 사라진 지하실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본다.

뭐가 뭔지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휙휙 하더니 쇽 하고 사라졌지 않은가.

이건 정말······ 뭔가 이상하다.

전에 봤을 때는 그냥 욕먹는 걸 좋아하는 미친 변태였지 않았나.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기 그지없다.

이상한 점을 꼽아보자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그걸 지적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이상하다.

모자랑 지팡이는 뭘 어쨌길래 더 괴상해진 건지. 대체 벽은 어떻게 뚫고 다니는지. 날개 달린 말은 또 어떻고.

황궁 어쩌고 하며 나눴던 대화는 또 무엇이고 지팡이가 슥 움직이니 그대로 쓰러진 아이라이츠라는 사람. 그 마법 같은 일은 또 무어란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많고 많은 이상한 점 중에 가장 이상한 점은.

"분명······."

분명 병신 같은데.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참 애매하다.

어쨌든 확실한 건.

"가자!"

이 위에서는 다시 한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

지하실 입구를 향해 뛰어가는 롤랑.

뒤에 있는 클레어와 라베나를 향해 외친다.

"뭐해? 빨리 올라가자!"

* * *

팬텀 스티드를 타고 순식간에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간다.

아래의 광경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굳이 유령의 눈을 켜지 않아도 느껴진다.

주위에 가득 들어찬 혼. 죽음의 기운.

원통해, 여전히 무서워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가여운 영혼.

빠득- 자신도 모르게 이가 갈린다.

왜 조금 더 생각해내지 못했나.

왜 조금 더 신중하지 못했는가.

"···정신 차려라."

고개를 가로젓고 두 눈 부릅뜬 채 아래를 내려다본다.

어두컴컴한 검은 안개 속.

괴물에 몸이 짓이겨진 시체.

악을 쓰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학생들.

다리를 질질 끌며 울고 있는 자.

멍하니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

······이 모든 것이 스스로가 조금 더 잘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참극.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245 / 1000)]

참상을 두 눈에 똑바로 담는다.

후회와 한탄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녀석들이 바라는 것은 히오 파블렌코, 자신의 목숨.

다른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자신을 최우선적으로 제거하려 들 테다.

아니,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분노를 여과 없이 표출하며 의지를 불어넣는다.

「스킬 - '샤우트'가 발동됩니다.」

화악- 뿜어져 나오는 금빛의 광휘.

팬텀 스티드의 밑으로 형체를 갖춰나가는 금빛의 거인.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곳에 깔린 모든 검은 안개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연다.

- 나는 위대한 마법사.

아카데미 전역을 압도하는 육중한 울림.

- 히오 파블렌코.

전투의 소음이 일순간이지만, 뚝 멎는다.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향한다.

울려퍼지는 이름에 모든 검은 안개가 움직임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본다.

그래.

그렇게 계속 올려다보아라.

무의미한 살생을 멈추고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아라.

「스킬 - '일루젼'이 발동됩니다.」

나는 너희의 눈을, 마음을 현혹할 테니.

너희는 오직 나를 향해서만 달려들어라.

- 아타올프의 하잘 것 없는 망령들아.

「선택하십시오.」

「스킬 - '일루젼 - 신의 심판자.'」

「스킬 - '일루젼 - 죽음의 지배자.'」

울려퍼지는 목소리. 약동하는 긴장감. 모여드는 수천, 수만 개의 시선.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드넓은 공간 속에서.

「스킬 - '일루젼 - 신의 심판자.'가 발동됩니다.」

하늘이 갈라진다.

- 내가 여기 있다.

동시에 모든 검은 안개가 한 사람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한다.

66화 이메니아 아카데미(10)

일루젼 - 신의 심판자.

상대의 눈을 현혹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법이 히오의 특성과 맞물려 그 효과가 극대화된 스킬.

하늘이 열린다.

「일루젼 - '신의 심판자'가 발동됩니다.」

그리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어둑한 공기를 가르며 새하얀 빛의 무리가 하늘에서 쏟아졌으니.

검은 안개가 장악한 공간 속.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무엇인가가 그런 어둠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낸다.

날카로운 빛이 안개를 가르고 하늘을 연다.

- 아타올프의 하잘 것 없는 망령들아.

서서히 내려오는 것은 빛을 내뿜는 거대한 검.

그 하나만으로도 이미 지상의 모든 이들을 압도하는 것일 진데 심판의 검은 하나가 아니었으니.

- 내가 여기 있다.

하늘을 뚫고 구름과 어둠을 꿰뚫으며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신성한 빛의 검.

그 개수만 수십에 달했으니.

가히 신의 심판자. 거창한 이름에 걸맞은 성스러운 검이다.

진노한 신의 형벌인 것이다.

위용을 드러내는 수십 개의 거대한 검과 그 아래 자리잡은 금빛의 거인.

그리고 그 사이에 오롯이 떠 있는 새하얀 신수.

그것에 올라탄 사람은.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

지상의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피를 토하며 주먹을 휘두르던 알크미온도.

절망하며 훗날을 도모하던 시르베르트도.

겁에 질려 머리를 땅에 박고 있던 사람도.

지하실에서 이제 막 올라온 세 명의 소녀도.

어둠 곳곳을 꿰뚫으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수십의 빛의 검에 압도당한다.

그러니 그저 올려다보는 것이다.

"최우선 제거 대상이다."

허나 흑아의 간부들.

감정이 제거된 검은 안개의 망령들은 달랐다.

고저 없는 높낮이로 오직 제거 대상만을 바라본다.

빛의 검에 압도당했을지언정 물러나지 않는다.

그런 명령은 그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지 않았으니.

"제거하라."

작열하는 빛의 검에 몸이 타들어 갈 것임을 알면서도 움직인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그 위용에 본능적으로 몸이 떨려옴에도 능력을 발동하는 것이다.

날 수 있는 자는 허공에 몸을 띄워서.

그러지 못하는 자들은 검은 안개가 되어 일거에 솟구친다.

"어, 어딜!"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알크미온이 몸을 날리지만, 노쇠한 몸뚱이는 원하는 곳에 닿지 못하고 고꾸라진다.

체력이 다했고 상처가 심한 탓이었다.

"······막아!"

시르베르트가 서둘러 남은 마력을 끌어모아 보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다.

고작해야 한두 명을 바닥에 추락시켰을 뿐.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것들은 이미 수백.

아니, 전장의 모든 검은 안개가 짓쳐드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그것들의 최종 목표는 단 하나.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

-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가여운 망령들.

자신에게 몰려드는 검은색 물결을 보며 히오는 지팡이를 번쩍 들어 올린다.

마력이 모여들고 의지가 움직인다.

「스킬 - '청염(靑炎)'이 발동됩니다.」

어둠을 꿰뚫고 내려오는 수십 개의 거검(巨劍).

청염의 푸른 불꽃이 그 검 끝에 자리한다.

- 타올라라.

번쩍들어올린 지팡이의 끝으로 지상을 겨눈다.

솟구쳐오는 검은 안개를 가리키고.

동시에 검 끝에서 쏘아지는 푸른 화염.

몰려드는 안개를, 어둠을 모조리 태워 없애는 최상위 불꽃.

위에서 아래로 쏘아지는 푸른빛.

아래서 위로 짓쳐드는 검은 안개.

순식간에 맞닥트린 푸른 불꽃과 검은 안개.

막대한 두 개의 기운이 부딪침에도 예상했던 커다란 충격이나 소음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일방적인 까닭이었다.

압도하는 것은 푸른 화염. 청염(靑炎).

그와 마주하는 검은 안개는 이렇다 할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녹아내린다. 바스라진다.

치고 올라오는 검은 안개를 삽시간에 잡아먹으며 거침없이 내려가는 푸른 불꽃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듯 더욱 멀리 퍼져 나간다.

검은 안개를 몰아내고 푸른 바다가 되어 멀리 나아가는 것이다.

지상에 남은 괴물들.

그들의 육신마저 모조리 불사지르기 위해.

아주 조용히.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태워 없애버리기 위해.

그것이 청염을 다루는 자의 의지.

푸른 불꽃은 그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 모든 어둠을 불태우고 검은 안개를 몰아내었으니.

전장이 정적에 휩싸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미친놈인 건 알았지만."

거기까지 확인한 시르베르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허탈인가.

결국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인가.

"진짜 신이라도 되려는 건지."

주저 앉은 채 올려다보는 하늘.

어둠을 정화하는 푸른 불꽃과 그것을 굽어살피는 금빛 거인.

불꽃을 쏘아 보낸 신성한 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행한 이는 백색의 신수 위에 앉아, 오연하게 지상을 내려다본다.

"으하하하!"

바닥에 드러누운 알크미온은 하늘을 바라보며 광소를 터트린다.

"하하하하!"

그때마다 입가에 고인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보고 있는가."

다만 말을 건넬 뿐이었다.

"호킨."

눈을 부릅뜬 채 목이 잘려나간 시체를 향해.

"베누이트."

심장에 수십 개의 바늘침이 꽂힌.

"올리버."

머리부터 짓뭉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이미 죽어버린 옛 동료들을 향해 말을 건넬 뿐이었다.

돌아올 대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입을 연다. 웃음을 터트린다.

"하하하하! 살아 있으니 좋지 않은가. 이런 기적도 보고 말이야!"

계속해서 웃는 입과 달리 두 눈은 무척이나 서글퍼 보였으니.

"그러니까 뭐하러 그리 서둘러 가버렸냐는 말이다."

한쪽 팔을 들어 두 눈을 가려버린다.

"······미안하다."

웃음은 곧 흐느낌으로 바뀌어간다.

"······너. 말해."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리듯 말하는 롤랑 번스타인.

"저거······ 대체 뭐야."

시선은 하늘을 향한 채 넋 놓고 중얼거리는 말은 분명 클레어를 향한 물음.

허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클레어도, 그 옆의 라베나도 롤랑과 비슷한 표정을 한 채.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빛의 검에게 장악당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떤 말로 이것을, 이 느낌을 표현할 수 있을까.

경외라는 말이 어울릴까.

그것조차 넘어선 두려움이라는 표현이 적절할까.

"정체가 뭐냐고···."

첫 등장에는 그저 단순히 시르베르트의 지인 정도로만 생각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전투 실습에 참관한다는 게 의아하긴 했으나 크게 신경 쓰일 정도는 분명 아니었다.

그런데 저건 대체······.

저런 것이 가능하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그야말로 저 하늘 위의 신이나 가능할 법한 일이 아닌가.

신의 심판을 대행하는 심판자의 모습이 아니냔 말이다.

"내가······."

클레어가 저 하늘 높은 곳에 있는 히오를 보며 중얼거린다.

"내가 저기에······."

손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히오.

강한 건 알고 있었다.

허나 이제는 더욱 명확하게 알겠다.

저 전율스러운 강함을. 자신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힘을.

그런 히오의 곁에 과연 자신이 설 자리가 있을까.

이 경이로운 장면에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반드시···!"

아니, 하고야 말 것이다.

반드시 저 옆에서, 같은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일이자 두근거리는 목표였기에.

클레어는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꽉 쥔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리하겠다 다짐하며 오롯이 떠 있는 히오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렇기에 클레어는 볼 수 있었다.

모두가 하늘을 장악한 빛의 검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

땅을 지배하는 푸른 불꽃에 넋이 나갔을 때 클레어는 오로지 히오만을 올려다보고 있었기에 알아차린 것이다.

꿈쩍도 하지 않고 한 곳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히오의 시선을.

왠지 모르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이 지옥이 끝났다 안심하고 있는 모든 이들과 달리, 그는 아직 긴장하고 있음을.

주변의 안개는 모조리 걷혔지만, 아카데미 전역을 두른 거대한 검은색 장막은 여전히 멀쩡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챈 순간.

- 모두.

거인의 입이 재차 열린다.

- 도망쳐라.

* * *

이곳 세상에 빙의 되기 전, 남태민은 제법 평범한 사람이었다.

완벽주의자도 아니었고 과하게 깔끔 떨지도 않는, 게임 하다가 혼자 화를 내는 그런 평범한 사람.

탁탁-

"이놈 이거 진짜 잡으라고 만든 놈 맞아?"

남태민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마우스로 책상을 탁탁 내려친다.

그가 들여다보는 모니터에 떠 있는 한 줄의 메세지.

「사망하였습니다.」

"에라이."

뭔 게임이 이렇게 똥망인지.

무슨 npc 한 명이 저런 사기적인 특성과 스킬을 보유하고 있단 말인가.

"씁······ 이 게임 조만간 망하겠는데?"

그러니 그 말은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벤타이얼 온라인.

나름 재밌게 3년 가까이 플레이하고 있는데······ 어찌 가면 갈수록 이상하지 않나.

적대 세력의 수장 격 npc에게 너무 사기적인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름이 아타올프였나?"

그가 다스리는 흑아 자체가 문제다.

흑아라는 집단은 사실 전부 아타올프 한 명의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부터가 벌써 말이 안 되지 않나.

간부라는 놈들, 그리고 그 밑에 있는 흑아 소속 개개인들 모두가 실은 아타올프의 검은 안개라는 설정.

본래는 멀쩡한 사람이었으나 흑아에 들어오고 아타올프의 능력에 의해 그리 되어버렸다는 건데······.

"적당히 해야지. 말이 되냐고."

그런 녀석들이 온갖 곳에서 튀어나와 혼란을 주고 악명을 떨친다.

그것으로 끝이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그렇게 퍼진 악명을 먹이 삼아 아타올프의 능력은 끝도 없이 강해지는 것이었으니.

그 최악의 범죄자는 가히 대륙 최강이라 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아타올프가 검은 안개를 거느리고 직접 나타났다 하면 유저고 npc고 할 것 없이 그냥 모조리 몰살이다.

남태민이 플레이하는 '곧휴가 갑니다'도 재수 없게 아타올프를 만나 죽어버린 것이었고.

"npc한테 죽고나 있고··· 서러워서 빨리 강해지든가 해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다시 마우스를 움직여 부활버튼을 누른다.

그 메세지 뒤로 보이는 배경은 짙디짙은 흑색.

사망해서 나온 효과가 아닌, 아타올프의 검은 안개가 가득 들어찬 효과.

감히 대항할 엄두도 나지 않는 그 능력이 머물렀던 흔적이었다.

* * *

과거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닐 테다.

- 모두 도망쳐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금빛의 거인은 모습을 감춘다.

하늘을 가득 메우던 수십 개의 빛의 검 역시 삽시간에 소멸하여 버린다.

다시금 어둠에 잠기는 주위.

"······도망쳐···."

시르베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이것은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게 만드는 익숙한 어둠이었기에.

끝난 줄 알았던 습격은 사실 끝나지 않았다.

아니, 실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도망쳐라!"

어디로? 라는 생각 따위는 의미가 없다.

최대한 멀리. 무조건 멀리.

검은 안개가 이미 지척에 왔으니.

온다.

살아 움직이는 지옥이 온다.

대륙 최강이자 최악의 안개가 몰려온다.

"꾸물거리지 말고 도망치라고!"

시르베르트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온 사방에 소리쳐 보지만.

"도망······!"

이미 늦었음인가.

한 치 앞만 간신히 보일 정도가 되어버린 공간.

어느새 바로 옆을 장악하고 있는 검은 안개.

공기가 떨려오고 검은 안개가 진동한다.

그러자 울리는 것은 공간 그 자체.

- 그래. 그래.

고막을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

근원을 알 수 없는, 검은 안개에서 들려오는 쇳소리.

- 네가 히오 파블렌코로구나.

바로 곁에서 안개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에 솜털이 곤두선다. 저항할 의지가 생겨나지 않는다.

염동을 아무리 갈고 닦는다 한들 이 검은 안개를 자신이 막을 수 있을까.

밀어닥치는 것은 무기력함.

그리고 절망감.

대륙 최강자 반열에 거의 다가섰다 생각했다.

최상위 스킬로 진화에만 성공하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얼마나 멍청한 착각이었나.

직접 피부에 와 닿은 그것은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감. 언제든 손만 까닥하면 자신의 목숨 따위 바로 취해버릴 수 있는 압도적인 힘.

몸이 달달 떨려오는 것은 비단 마력 탈진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러니 시르베르트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지만, 그것을 꿰뚫던 빛을 알기에.

기적과도 같은 경이를 조금 전에 목격했기에 어떠한 희망을 쫓아 본능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봤고.

꽈아앙-!

전율한다.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낙뢰. 그 배경을 채우는 천근 같은 우레. 번뜩이는 벼락.

그리고.

- 가엾은.

새하얗게 타오르는 두 눈.

- 아타올프.

검은 안개마저 오시하는 벼락을 닮은 눈.

67화 이메니아 아카데미(11)

대륙 최강자 중 일인, 아타올프.

검성이 괴물 같은 육체와 8위계, 초인 위의 초인으로서 최강자 반열에 올랐다면 아타올프는 그와 정반대.

자신의 특성과 스킬을 극한으로 활용해 강함을 축적하였다. 혼란을 주고, 공포와 두려움을 퍼트리면 퍼트릴수록 강해지는 그의 특성을 이용해서 말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닐 테다.

단순하게 좋은 스킬과 특성을 가졌다고 해서 정점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어떠한 깨달음 또한 필요했을 것이고 아타올프는 그것을 해낸 것이다.

- ······괴물이로군.

푸르넬의 말마따나 괴물 같은 기운.

입가에 쓴웃음이 걸리고.

"······예정에 없던 일인데."

등에는 한줄기 식은땀이 흐른다.

이변을 느낀 것은 검은 안개와 청염이 맞부딪쳤을 때였다.

얼핏 보면 청염이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것이 당연하다 히오도 여겼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청염이 태우기 전에 검은 안개가 먼저 사라졌다.

압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난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절로 긴장감이 일었으니.

뜻하는 바가 너무도 명확하지 않나.

검은 안개의 주인이 그것들을 모두 불러들인 것.

아타올프가 등장했다는 말이었다.

그 직후 지상에 있는 이들에게 도망가라 경고하기는 했지만, 소용이 있을런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스킬 - '샤우트'를 해제합니다.」

「스킬 - '일루젼 - 신의 심판자'를 해제합니다.」

스킬을 해제하고 청염을 곁으로 불러들인다.

그와 동시라고 해도 좋을 순간에 어둠이, 검은 안개가 들이닥친다.

삽시간에 몰려드는 어둠.

조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농도 짙은 안개.

이것이 공간을 장악하는 순간, 일대는 이미 아타올프의 영역인 셈이다.

그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다.

그 위험성을 너무도 잘 알기에 즉시 스킬을 발동한다.

「스킬 - '뇌제(雷帝)'가 발동됩니다.」

전신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벼락의 힘.

동시에 들려오는 아타올프의 기괴한 목소리.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쇳소리.

- 그래. 그래.

검은 안개는 일대를 모두 장악했고 그러한 목소리는 검은 안개를 통해 들려오고 있다.

그러니 공간 전체가 울리는 것이다.

- 네가 히오파블렌코로구나.

사방천지에서 들려오는 거북한 소리에도 히오는 그가 있는 곳을 정확히 바라본다.

타오르는 백색의 눈이 막대한 존재감을 직시한다.

청염의 불꽃 너머, 검은 안갯속 압도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곳.

저기 흑아의 수장, 아타올프가 있다.

스스로의 강함을 위해 대륙을 피로 물들인 자.

대륙 최강이자 최악의 범죄자.

허나···.

그의 몰락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입장에서는 그저.

"가엾은 아타올프."

가여운 인간.

* * *

- 가엾다.

클클 웃기 시작하는 아타올프.

그에 안개가 출렁이고 공간이 진동한다.

- 재밌구나.

허세가 먹힐 상대는 아니다.

그럼에도 히오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이다.

- 그래. 배짱도 두둑하고.

그러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검은 안개가 짓쳐들지 모른다.

- 나와 함께 해볼 생각은 있느냐. 히오 파블렌코.

작열하는 눈으로 아타올프가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손은 주머니 속을 뒤진다.

손에 잡히는 마정석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함께하기에는 네 죄가 너무 깊군. 아타올프."

- 그래······.

일순, 안개의 흐름이 변한다.

- 안타깝구나.

퍼어엉-!

공간을 장악한 검은 안개가 청염과 맞부딪치는 소리.

모든 것을 불사르는 최상위 불꽃이 처음으로 가로막힌 것이다.

아니, 청염이 안개를 간신히 막아내고 있다는 표현이 적당할까.

- 거슬리는 불이야.

까드득-

사방에서 밀려오는 검은 안개에 청염이 조금씩 밀려난다.

애초에 보호를 위한 불꽃이 아닌 까닭이다.

압도하며 태우는 푸른 화염.

허나 아타올프가 직접 움직이는 검은 안개는 그런 청염을 외려 압박하는 것이다.

점차 밀려나는 푸른 불꽃.

좁아져 오는 공간.

빠르게 결정을 내린다.

「스킬 - '서먼 팬텀 스티드'를 해제합니다.」

해야할 건 강대한 힘을 한 점에 집중시키는 것.

「스킬 - '청염(靑炎)'을 해제합니다.」

푸른 불꽃이 사라짐과 동시에 밀려들어 오는 검은 안개의 중앙을.

꽈아앙-!

뇌제의 힘으로 돌파한다.

동시에 아타올프가 있는 곳에 수십, 수백의 벼락이 내려꽂히지만.

꽈아앙-!

역시나 가로막히고 만다.

- 그래. 이번에는 벼락이구나.

힘이 집중된 안개를 뚫어냈다고 해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사방천지에 안개가 깔려 있으니 그 정도는 아타올프가 인지하는 순간 곧장 다시 옥죄어 올 것이기에.

안개의 구역을 완전히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재차 벼락의 힘을 집중한다.

목적지는 저 하늘 높은 곳.

검은 장막의 완전한 바깥.

안개가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지만, 이미 전진하고자 마음먹은 뇌제를 막을 정도로 그 힘이 모이지는 않았으니.

꽈앙-!

새하얀 빛을 내뿜으며 검은 장막을 꿰뚫고 기어이 아타올프의 영역을 벗어난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조금 더 버틸 수 있는 상황 정도로 바뀐 것이다.

청염은 태우지 못하고 벼락은 닿지 않는다.

"이거 진짜······."

마정석 두 개를 꺼내 들며 마력을 보충하자 금세 빛을 잃고 바스라지는 마정석.

이제 마정석도 몇 개 남지 않았다.

최대한 마력을 아껴가며 싸워야 하는데 어디 그럴만한 상대인가.

"······위험한데."

꽈아앙-!

공기가 찢어지는 천둥소리와 함께 자리를 벗어난다.

벗어난 자리를 채우는 것은 아타올프의 안개.

어느새 지척까지 따라와 다시 주위를 감싸오는 검은 안개에 담긴 힘은 막대하다.

「스킬 - '뇌제(雷帝)'가 해제됩니다.」

「스킬 - '패더 폴'이 발동됩니다.」

등 뒤에서 솟아나는 거대한 두 쌍의 날개.

떨어지는 낙하 속도를 급격히 줄여주는 스킬, 패더 폴.

- 잡아라.

어둑한 하늘에 울리는 아타올프의 명령.

아타올프의 영역에서는 벗어났지만, 검은 안개는 끊임없이 영역을 재구성하기 위해 사방으로 압박해 들어온다.

「스킬 - '패더 폴'이 해제됩니다.」

「스킬 - '뇌제(雷帝)'가 발동됩니다.」

꽈앙-!

그 진득한 손길을 피해냄과 동시에.

「스킬 - '뇌제(雷帝)'가 해제됩니다.」

「스킬 - '청염(靑炎)'이 발동됩니다.」

얼기설기 뒤엉킨 안개의 틈으로 푸른 불꽃을 쏘아 보낸다.

「스킬 - '서먼 팬텀 스티드'가 발동됩니다.」

떨어지는 몸을 팬텀 스티드가 받아내고 검은 안개를 피해 빠르게 자리를 벗어난다.

그와 동시에 청염은.

히오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긴 채 쏘아져 나간 청염은 덤벼오는 안개와 맞서지 않고 요리조리 피하며 전진하는 것이다.

그렇게 쏘아져 나간 불꽃이 아타올프가 있을 거라 예상되는 곳에서.

콰아앙-!

가진 바 최대의 화력을, 불을 뿜어낸다.

어두운 밤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푸른 화염.

「스킬 - '청염(靑炎)'이 해제됩니다.」

하지만 청염이 사라진 자리.

- 그래. 과연 마법사라 이것이구나.

아타올프를 둘러싼 검은색의 막.

무저갱과도 같은 칠흑의 안개막은 어찌나 단단한지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저것이 문제였다.

뇌제, 청염의 힘으로도 뚫리지 않는 아타올프의 방어막.

수백 발의 벼락에도.

최대로 불사른 청염에도 아타올프의 육체는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페널티의 메세지가 뜨지 않았으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무언가 있다.

아무리 그 특성으로 강함을 누적해왔다지만, 무언가 다르다.

느낌이 다른 것이다. 담겨 있는 힘이 다른 것이다.

자신이 펼치는 뇌제, 청염과 분명 같은 최상위 스킬일 터. 헌데 느껴지는 힘은 그 이상.

단순히 등급으로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임과는······ 역시 다르다 이건가.'

진정으로 본인의 스킬을 깨달은 자.

등급을 넘어선 무엇인가를 얻은 자의 힘.

마정석을 꺼내 마력을 빠르게 보충해보지만, 그것마저도 몇 개 남지 않았다.

최대한 마력을 아끼기 위해 필요할 때만 뇌제와 청염을 사용했음에도 소모 속도가 엄청난 것이다.

- 다음은 무엇이냐. 히오 파블렌코.

그럼에도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

재차 밀려들어 오는 검은 안개에 한 번이라도 붙잡히는 순간 그대로 끝이었으니.

빈약한 스탯과 모자란 방어기술로는 허무하리만치 쉽게 죽어버릴 터였기에.

팬텀 스티드에 올라탄 채.

때로는 벼락을.

때로는 화염을 피워올리며.

그렇게 계속 싸워야 할 테다.

필요한 것은 한 번의 기회.

뚫리지 않는 어둠을 베어버릴.

단 한 번의 날카로운 기회.

* * *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어서 움직여!"

지상에는 때아닌 대피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부상자를 업은 채 남아 있는 교수들의 지휘 하에 이 전쟁터를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언제 안개가 다시 내려올지 모르니 서둘러!"

다행인 것은 지독한 검은 안개가 하늘 위로 가버렸다는 것.

저 하늘 높은 곳 크게 감싼 채로 있었기에 그 틈에 최대한 멀리 가려는 것이다.

하늘을 쩌렁하게 울리는 우레와 그것을 감싼 검은 안개는 그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지독한 불안감을 안겨주었으니.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존재 앞에서 그들은 무기력하기만 한 것이다.

"클레어······."

그런 피난 행렬의 끝자락에는 세 명의 소녀가 있었다.

클레어와 라베나, 그리고 롤랑까지.

"···응."

마지막까지 남아 다른 생존자가 없는지 확인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클레어가 마지못해 발걸음을 돌린다.

꽈아앙-!

공기를 찢는 소음과 함께 때마침 번뜩이는 하늘.

하늘을 감싼 짙은 안갯속을 일순간이나마 비춰주는 벼락의 세례.

저런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벌써 몇 시간 째 벌어지고 있는 전투인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내려치는 벼락과 솟구치는 화염 속에서 거대한 날개와 익숙한 신수의 모습이 한번씩 비쳐 보일 뿐.

누가 승기를 잡았고 상태는 어떠한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클레어는 움직이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긴다.

자신이 있어봐야 할 수 있는 것은 없기에.

저 검은 안갯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기에 대피 행렬의 가장 마지막에서 억지로 몸을 돌린다.

그리고 그때 돌연 그 옆에 불쑥 나타나는 한 사람.

분명 아무도 없던 공간에 갑작스레 느껴지는 인기척.

그에 클레어의 고개가 돌아가고.

"······!"

그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진다.

"말 좀 묻지."

마치 갈기를 떠올리게 하는 금발.

사자를 닮은 맹수의 눈.

"혹, 저곳에 마법사가 있는가."

위대한 검성, 비탈리아누스 마헬.

* * *

- 그래. 히오 파블렌코.

웅웅 진동하는 아타올프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머니를 뒤적인다.

- 지쳤구나.

허나 원하는 건 잡히지 않았다. 마정석이 모두 떨어진 것이다.

최대한 아끼려고 패더 폴이나 레비테이션, 서먼 팬텀 스티드 등을 사용하였음에도 결국 끝은 찾아왔다.

상대가 상대인 까닭이다.

대륙의 최강자.

최악의 범죄자임과 동시에 진정으로 깨우친 자.

그런 자를 상대하며 이것 이상으로 마력을 아낀다는 것이 곧 오만이고 방심인 것이다.

- 그래.

아타올프는 너무도 멀쩡했다. 상처 하나 없었다.

물론 그건 히오도 마찬가지였지만, 남은 마력이 얼마 없는 것에 비해 검은 안개는 여전히 처음과 같았으니.

- 히오 파블렌코. 선택해라.

그제서야 히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아타올프. 얼핏 보면 평범한 중년인의 인상.

얼굴에 새겨진 기다란 검상이 아니었다면 평범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 여기서 죽을 텐가. 나와 함께 할 것인가.

여전히 듣기 거북한 목소리에 히오는 인상을 찌푸린다.

"정말로 듣기 싫은 목소리야."

그런 도발에도 아타올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물을 뿐이었다.

- 죽을 텐가.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여전한 안개.

아타올프를 근접에서 보호하는 흑색의 막을 결국 뚫지 못했다.

저것을 뚫으려면 뇌제 보다도 조금 더 집중된 힘이 필요하다.

근본적으로 무언가를 부수기 위한 힘이 필요하다.

그러니 히오는 여태 기다린 것이다.

마정석을 모조리 쏟아붓고 검은 안갯속을 끊임없이 배회하며 기다려온 것이었다.

"죽는다라······."

상대가 방심하는 순간만을.

마력이 닳고 닳고 닳을 때까지 확인시켜주었다.

수십 번을 넘게 보여주었다.

나의 벼락은, 불꽃은 결코 네게 닿지 못한다고.

너의 곁에 있는 짙은 안개를 결국에는 뚫어내지 못한다고.

너는······ 안전하다고 말이다.

그렇게 결국 해내지 않았나.

아타올프는 그를 감싼 안개의 막을 믿었고 주위의 안개를 물렸으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으니.

히오는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못하는 것이다.

"글쎄··· 죽는 건 어떤 건지 내 잘 모르니 한번 물어보지."

방심의 결과는 참혹할지니.

"어떻게 생각하나?"

기꺼운 마음으로 친구를 향해 묻는 것이다.

"테오르도."

아타올프의 등 뒤로 흑빛의 안광이 번뜩인다.

68화 이메니아 아카데미(12)

그랜드 홀.

성내에서 가장 큰 홀.

황성 내의 모든 공식행사 및 연회가 행해지던 장소. 평상시는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할 때 사용하는 공간.

이 넓은 홀에는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아니, 한 명은 사람. 다른 하나는 데스 나이트.

왕좌에 앉은 실비아와 당연하다는 듯 그 옆에 서 있는 흑색의 기사 테오르도.

그 중 실비아는 앞에 놓인 보고서를 심각한 표정으로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정말 괜찮을까?"

보고서를 내려놓고는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히오가 간다고 했지만······ 오래 머무르지는 않을 거라 했잖아."

보고서에 적힌 것은 흑아의 움직임에 관한 내용과 바로 다음, 아카데미가 습격당한 것에 관한 내용.

그에 테오르도는 괜찮을 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실비아를 안심시키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정말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보고를 받은 것은 조금 전.

그리고 그런 정보를 얻기 이전에 이미 제국 최강의 기사단이 아카데미를 향해 출발한 참이었다.

그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들이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습격에 관한 보고를 받았으니.

우연이기는 했으나 빠르게 지원 병력이 파견된 것이었다.

그러니 히오 파블렌코가 없더라도 괜찮지 않겠는가.

흑아라면 대륙 어디든 몸소 나서는 검성이 가고 있으니 말이다.

"······알겠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불안하긴 하지만, 황제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중심을 굳건히 하고 다음 일을 계획해야 하리라.

그리 생각한 실비아가 귀족들을 불러모으려고 마음먹은 순간.

문득 느껴지는 허전함에 뒤를 돌아봤고.

"······테오르도?"

자신의 기사가 사라졌음을 눈치채고야 만다.

그리고 불현듯 떠오르는 히오가 남긴 말.

-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네 기사가 역소환 될 일은 없을 거야.

"히오······ 테오르도···."

불안한 마음은 커져만 간다.

* * *

번뜩이는 흑빛 안광.

사방에 만연한 검은 안개보다도 더욱 시커먼, 죽음으로 이루어진 기사.

별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테오르도."

스쳐지나가는 한 번의 눈빛 교환이면 충분했다. 이미 의지는 전달되었으니.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단박에 파악한 죽음의 기사는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든다.

그에 높게 솟구치는 사기(死氣).

죽음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칠흑의 강기.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실비아의 곁에 있을 테오르도를 역소환하고 아타올프의 등 뒤에 재소환했으며.

등장과 동시에 의지가 전달되고 새카만 강기를 내뿜으며 검을 들어 올린 것까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그 아타올프마저도 예견치 못한 상황인 것이었다.

그러니 기대한다.

"베어버려."

사기를 한껏 머금은 저 칼날이 아타올프의 안개를 갈라버리기를.

7위계에 버금가는 기사의 강기가 저 안개를 산산이 부숴버리기를 기대하며 남은 모든 마력을 끌어올린다.

안개의 막이 부서지는 순간 그 머리 위로 수백 수천 발의 벼락이 떨어지리라.

······하지만.

카아앙-!

기대했던 소리가 아니었다.

소환과 거의 동시에 휘두른 검이었음에도 아타올프는 반응한 것이다.

아니, 반응을 넘어서 막아낸 것이다.

안개의 막에 가로막힌 테오르도의 검은색 강기.

확실히 코앞에서 휘둘러진 강기인 만큼 효과는 있었다.

굳건하던 막이 제법 크게 흔들리고 있긴 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고작이었다.

결국 갈라버리지는 못하지 않았나. 꿰뚫어내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시 원점인 것이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 아타올프가 죽음의 기사와 눈을 마주한다.

- 그래.

까드득- 검은색의 안개막과 사기로 이루어진 강기가 계속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에도 변함없는 아타올프의 목소리.

- 히오 파블렌코. 이게 네 마지막 한 수였구나.

테오르도의 주변으로 삽시간에 몰려드는 검은 안개.

그것에 가려져 점차 자취를 감춰가는 테오르도의 육체.

- 죽음의 기사라··· 옛 마법사들이 다뤘다는 전설적인 기사.

그런 말을 태연히 내뱉으며 테오르도의 육신을 감싸는 검은 안개.

이윽고.

빠득- 빠드득- 부서지는 소리가 그 속에서 들려온다.

- 허나 그저 부풀려진 과거의 잔재일 뿐.

테오르도의 육체가 검은 안개에 의해 바스러지는 끔찍한 소리.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곧 다시 조용해진 안갯속.

서서히 흩어지는 검은 안개,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검은 안개와 힘겨루기를 하던 기사가 사라진 것이다.

죽음의 기사는 검은 안개에 짓이겨져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 것이었다.

- 도태되어 버린 것은 이유가 있는 법이지.

다시 천천히 뒤를 도는 아타올프.

이제 히오 파블렌코의 마지막 수까지 제거했다.

긴 세월을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죽음을 목도했던가. 집행했었나.

저만한 실력자가 마지막 한 수를 숨기고 있을 거란 건 쉽게 예측 가능한 것이었으니.

그의 표정을 바라본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체념인가 절망인가.

아니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며 전의를 불태울 텐가.

여태 수많은 이들이 죽기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 ······그래.

몸을 돌려 히오를 바라본 아타올프가 뒤늦게 입을 연다.

그의 눈에 비친 히오 파블렌코는.

- 너는 웃는구나.

웃고 있었다.

조금의 가식이나 허세가 아닌, 진실된 웃음.

- 무엇이 그리 우습더냐.

그에 히오는 손에 들린 지팡이를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입을 연다.

"과거의 잔재다. 도태되었다."

그 말에 웃은 것이었다.

우습지 않은가.

사라진 역사.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잊혀진 전쟁.

더없이 많았을 영웅들의 업적, 숭고한 희생.

그러한 희생의 끝은 결국 마법의 상실.

"너희가 무엇을 대가로 살아 숨 쉬는지 모른 채 그것을 비웃는 꼴이란."

어찌나 우스운지.

그에 아타올프가 재차 입을 연다.

검은 안개가 일렁이며 그 기괴한 목소리를 넓게 퍼트린다.

- 그래. 히오 파블렌코. 네가 그렇게 예찬하는 마법의 결과가 이것이냐.

척 보기에도 느껴지는 기운이 이전과 같지 않다. 마력 또한 얼마 남지 않았을 터.

마지막 한 수까지 철저하게 막아내었다.

이제 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도태된 건 도태된 것이다. 히오 파블렌코.

본디 그런 것이다.

죽음 앞에서 그런 것 따위 무의미한 것이다.

약자가 부르짖는 신념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검은 안개가 움직인다.

동시에 히오의 지팡이도 움직인다.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나."

어두운 밤하늘.

검은 안개가 드리운 공간.

거기에 한층 더 어두워지는 시야.

- 무슨······.

무언가 심상치 않은 존재감을 느낀 아타올프가 모든 검은 안개를 불러들인다.

"도태된 것은 마법이 아니라."

그럼에도 밝아지지 않는 공간.

묵직하게 다가오는 거대한 존재감.

"마법을 상실한 인간이지."

「스킬 - '사신(死神) 소환'이 발동됩니다.」

아타올프의 바로 앞에 등장하는 거대한 사신.

어둠 속 붉은 눈을 번뜩이며 아타올프를 내려다 보는 귀기어린 시선.

그리고 아타올프의 목 바로 앞에 멈춰 있는 사신의 붉은 낫.

- ······.

아타올프는 굳어버린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분명 모든 검은 안개를 불러와 빈틈없이 방어했음에도 귀신처럼 자신의 목 앞에 드리운 사신의 낫.

"하나 더 알려주지. 아타올프."

그런 아타올프에게 재차 말을 건네는 히오.

"죽음의 기사는 말이야."

아타올프의 등 뒤로 재차 넘실거리는 잿빛의 기운. 사기(死氣).

그것이 뭉쳐 익숙한 형체를 만들어 간다.

이전보다 더 크게.

이전보다 더욱 강렬하게.

"죽지 않기에 죽음의 기사라네."

다시금 등장하는 흑빛의 안광.

콰아앙-!

하늘 높이 치솟은 칠흑의 검강이 검은 안개와 부딪친다.

* * *

콰아앙-!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한 굉음.

"쯧쯧······."

그에 비탈리아누스는 혀를 짧게 찬다.

"그게 아닌데 말이야."

아카데미의 내부까지 순식간에 들어와 올려다보는 하늘.

검은 안개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위대한 검성에게 그까짓 안갯속쯤이야. 훤히 보이는 것이다.

콰아앙-!

재차 울리는 소리.

죽음으로 벼린 강기와 아타올프의 검은 안개가 부딪치는 소리.

비탈리아누스는 더욱 집중해 안갯속을 들여다본다.

그의 눈에 금빛 오라가 일렁인다.

"저건······ 마법사의 짓이겠군."

높은 건물의 옥상.

괴기스러운 기운을 줄기차게 내뿜고 있는 인외의 존재. 처음 느껴보는 낯설고 거대한 존재감.

희한하다. 이상한 것이다 하면 전부 마법사의 짓일 것이기에 그리 단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건물의 옥상을 넘나들며 흑색 검강을 줄기줄기 내뿜는 죽음의 기사 또한 보인다.

콰아앙-!

그쯤에서 비탈리아누스는 혀를 한 번 더 차고는 천천히 검을 뽑아든다.

"더는 못 봐주겠어."

숨겨놨던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점차 커져가는 황금 사자의 존재감.

그제서야 저 하늘 위를 넘나들며 싸워대던 세 사람의 시선이 지상을 향한다.

"그게 아니라네."

가볍게 휘둘러지는 비탈리아누스의 검.

허나 그 결과는 전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장난처럼 휘두른 그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색의 거대한 오러.

"그리 무식하게 떼를 쓴다고 해서 벨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것이 검은 안개를 가른다.

황금빛 물결이 되어 하늘을 뒤덮은 안개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버린다.

"의념을 실어야지. 저 안개는 보통의 강기로는 뚫리지 않아."

밤하늘을, 검은 안갯속을 환히 비추는 금빛 오러.

세 사람은 아래를 바라보고 비탈리아누스는 위를 바라본다.

그 면면들을 훑는다.

"이제야 잘 보이지 않는가. 이거 반가운 얼굴들이 많군."

가장 먼저 흑색 오라를 넘실거리는 죽음의 기사에게로 향하는 시선.

"융통성 없는 기사. 방금 내가 한 말 잘 새겨듣게나."

다음으로 여전히 우스꽝스런 모자를 쓴 마법사를 향한다.

"그래. 마법사도 역시 있었군. 이제 좀 적응되나 싶었는데 그새 옷차림이 더 화려해졌어."

마지막으로 반대편을 향하는 시선.

"그리고······."

비탈리아누스의 표정이 깊게 가라앉는다.

"미운 옛친구."

그 전신에 일렁이는 살기.

황금빛 오러가 폭발하듯 뿜어나온다.

* * *

클레어는 검성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본다.

클레어뿐만이 아니었다.

롤랑도 라베나도 마찬가지였다.

넋을 놓고 중얼거리는 라베나.

"······나 비탈리아누스님 실물로 처음 봐."

라베나 옆에서 같이 중얼거리는 롤랑.

"나도···."

어느새 제법 죽이 잘 맞는 두 사람.

"클레어는 좋겠다···. 비탈리아누스님이랑 말도 섞어보고."

"그러니까. 미천한 클레어주제에······."

그런 두 사람에게 반응할 법도 하건만, 클레어 역시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제국의 수호 기사이자 황제의 수호 기사 비탈리아누스 마헬.

위대한 별의 칭호를 얻은 기사 중의 기사. 검성.

제국을 지키는 방패이자 가장 날카로운 검.

그런 존재를 만난다는 건 웬만한 귀족일지라도 영광으로 생각하는 그런 것이었으니.

"근데··· 검성께서 말씀하신 마법사가 누구지?"

"마법사라니. 그런 건 죄다 사기꾼이잖아. 이야기책에나 나오는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비탈리아누스님께서 헛소리를 할 리는 없잖아."

"그것도 그러네."

라베나와 롤랑의 대화를 들으며 클레어는 걸음을 옮긴다.

"클레어? 너 다시 돌아가려고?"

검성이 걸어간. 아니, 거의 날다시피 하며 사라진 아카데미의 안쪽을 향해.

"응. 가볼래."

"정신 나간 클레어.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롤랑이 인상을 찌푸리지만.

"그럼 나도 가볼래!"

라베나가 클레어의 곁에 붙어버렸다.

"비탈리아누스님께서 가셨잖아. 금방 해결되지 않을까?"

그에 롤랑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린다.

"그, 그런가···?"

사실 그녀도 궁금한 것이다.

아니, 어느 누가 궁금하지 않겠는가.

위대한 검성이, 제국의 수호 기사가 직접 검을 쓰는 모습을 본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저 멀리서나마 보고 싶은 것이다.

결국 설득당한 롤랑마저 합류해 세 명의 소녀가 아카데미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으악!"

또다시 불쑥 나타나는 인기척.

"저런, 놀랐구나. 미안."

히죽 웃는 갈색 머리의 사내와 그 주위에 있는 열 명에 가까운 인원.

그 중 갈색 머리의 사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클레어에게 물었다.

"지나가다가 익숙한 이름이 들려서 말이야. 혹시 단장······ 아니, 비탈리아누스님이 여길 지나갔니?"

"검성 님이라면··· 네. 지나가셨어요. 엄청 빨리."

그 대답에 갈색 머리 사내는 한숨을 푹 내쉰다.

"같이 좀 가자니까. 하여튼······."

개성 강해 보이는 열 명의 남녀.

그런 화려한 외모와 달리 복장은 모두 같은 것이었다.

새하얀 제복에 수놓아진 금색의 수실.

왼쪽 가슴에 놓여진 공통된 문양.

"······설마?"

금색의 검이 하늘을 꿰뚫고 있는 화려한 문양.

그것을 알아차린 롤랑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로열 나이츠!"

오직 황제의 명만을 따른다는 제국 최강의 무력집단.

답지않게 잔뜩 흥분한 롤랑이 갈색 머리 사내를 향해 물었고.

"저희 구하러 오신 거예요?"

로열 나이츠라 추정되는 사내는 멋쩍게 웃으며 답한다.

"아니··· 그게 다른 임무를 받고 출발한 거긴 한데······."

"데이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래."

차가운 인상을 한 여인의 말에 숙였던 몸을 일으키는 사내, 로열 나이츠의 일원 데이먼.

아카데미 안쪽을 향하는 다른 로열 나이츠의 눈치를 힐끗 살피다가 조용히 클레어 일행을 향해 속삭인다.

"사실 저 안에 엄청 대단하신 분이 있어서 모시러 가는 임무였거든."

"엄청 대단하신 분이면······ 비탈리아누스님이요?"

"아니, 그분은 우리 단장님이지."

"그럼······?"

앞서가던 로열 나이츠가 그런 데이먼을 재촉한다.

"빨리 가자고!"

그에 그들을 향해 후다닥 뛰어가며 외치는 데이먼.

"뭐, 좀 있으면 알게 될 거야."

69화 이메니아 아카데미(13)

검은 안개를 가르는 황홀한 금빛 오러.

단단한 껍질이 깨지고 비로소 그 속에서 치열한 전투를 이어가던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융통성 없는 기사와 이상한 마법사.

그리고....

"미운 옛 친구."

비탈리아누스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다.

그것은 지독한 살기.

그로 인해 사자의 금색 갈기가 사정없이 휘날리고 눈동자 또한 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 비탈리아누스.

그에 아타올프의 시선 역시 비탈리아누스를 향한다.

- 그래. 여전하구나. 그 역겨운 금빛은.

비탈리아누스를 넘어, 그 뒤쪽을 향하는 시선.

- 여전해. 비탈리아누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저 멀리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기사단, 로열 나이츠라 불리는 것들.

그리고 그 뒤를 조심스레 따르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 여전히 너는 영웅이고 여전히 많은 존경을 받고 있겠지. 그래.

아타올프의 눈가에도 짙은 살기가 일렁인다.

히오를 상대하면서 보여 주었던 무던한 태도가 아닌, 강한 흥분과 증오 따위가 넘쳐흐르는 것이다.

"헛짓거리할 생각 마라. 아타올프."

그 시선을, 증오를 황금빛 오러가 가로막는다.

- 헛짓거리. 그래. 내가 하면 헛짓거리. 네가 하면 영웅적 행보.

꽈아앙-!

검은 안개와 맞부딪치는 황금의 오러.

이전과는 소리의 크기부터가 달랐다.

그만큼 팽팽한 힘, 거대한 힘과 힘의 부딪침이었으니.

아타올프 역시 전력을 다해 비탈리아누스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안개의 범위가 줄어들고 그만큼 집중되는 힘이 비탈리아누스의 검을 맞받아친다.

꽈아앙-!

물론 그가 상대해야 할 기사는 한 명이 더 있었다.

- …귀찮은...!

데스 오러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검을 휘두르는 테오르도.

자욱한 사기를 말미암아 더욱 강해져 돌아온 죽음의 기사.

콰아앙-!

아타올프를 직접 지키는 그 절대적인 막은 뚫지 못하였으나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테오르도를 계속 의식하며 안개의 막을 펼쳐 놔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테오르도를 죽일 수도 없다.

그는 이미 죽어 버린 기사였으니.

아무리 죽여도 저 빌어먹을 히오 파블렌코가 다시 되살려 내는 것이었다.

"질긴 인연도 오늘이 마지막인 듯하지 않나. 아타올프."

안개를 무던히 받아넘기며 말하는 비탈리아누스의 말에.

- 크크큭....

아타올프는 웃음을 흘린다.

- 그래. 너는 여전히 오만해. 네 마음대로 그런 것까지 정하는 것이냐.

콰아앙-!

"내가 정해야지. 나로 인해 비롯되었으니 내가 끝내야 함이 옳지 않겠나."

콰아앙-!

- 그러니까 그것이 오만이고 그것이 짜증 난다는 말이다. 비탈리아누스.

콰아앙-!

끊임없이 일어나는 막대한 힘의 폭발.

그 사이에서 틈을 노리고 달려드는 테오르도의 흑빛 오러.

콰아앙-!

정신없이 이어지는 참격의 연속.

안개를 부수는 금빛 오러. 그것을 진득하게 감싸고 빈틈을 파고드는 끈적한 안개.

콰아앙-!

힘과 힘의 충돌.

그에 땅이 울리고 하늘이 진동한다.

* * *

"데이먼,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하는 맬리사의 말에 데이먼은 예의 그 웃음을 짓는다.

"하하하. 자라나는 새싹들이 궁금해하잖아. 이 정도는 알려 줘도 문제없을 테고."

"없던 문제도 너는 만들어 버리니까 하는 말이야. 데이먼."

그 인상처럼 차가운 맬리사의 말에도 데이먼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뿐이었다.

"근데 뭐, 딱히 말할 것도 없었어.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아는 게 없기는. 홀로 전쟁을 끝낸 위인이라고 들었잖아."

데이먼 리에프테를 포함한 열 명의 로열 나이츠. 그들에게 주어진 최초의 임무는 그것이었다.

새로이 자리에 오른 위대한 방패이자 가장 날카로운 검.

제국의 수호 기사를 모셔 와라.

황위에 오를 실비아가 처음으로 내린 대외적 명령인 만큼 그런 간단한 임무에도 로열 나이츠와 검성이 직접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들이 실비아를 새로운 황제로 인정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아울러 여전히 강력한 황권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새로운 수호 기사라는 분 말이야. 본 적 없어?"

데이먼이 맬리사에게 물었지만, 맬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귀찮아진 것이다.

그녀치고 이 정도면 상당히 많이 대화를 받아 준 편임을 알기에 데이먼은 바로 옆의 기사를 툭툭 건드린다.

"응? 마티스. 얼핏 들리는 말로는 좀 괴짜 같던데… 너도 몰라?"

데이먼보다 족히 머리 두 개는 더 큰 키와 덩치의 기사.

마티스라 불린 기사는 데이먼의 질문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럼에도 데이먼은 얌전히 기다렸고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몰라."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마티스.

데이먼은 한숨을 푹 내쉰다.

"그래도 오늘은 대답이 평소보다 빠르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

그에 다시 고민에 잠기려는 마티스를 보고 데이먼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니, 이건 질문 아니니까 대답 안 해도 돼!"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기는 마티스.

"어휴. 하나같이 괴상한 놈들만 모여서는."

검성이 이끄는 제국 제일의 무력 집단.

작위를 얻을 수 없음에도 오직 황제를 위해, 황제의 명만을 따르는 가장 명예로운 기사단.

그리 알고 있는 이들이 본다면 뭐라 생각할까.

데이먼이 보기에는 그냥 괴짜 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장 단장인 검성 비탈리아누스만 하더라도 검에 미친 괴물....

"빨리 좀 와!"

"응!"

부디 이번에 만날 새로운 수호 기사만큼은 좀 평범한, 자신의 말을 잘 받아 주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데이먼은 뛰쳐 간다.

* * *

열 명의 로열 나이츠.

가진바 키와 덩치, 성별과 성격, 능력까지 모두 각양각색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 강함.

콰아앙-!

"…그러니까 저게 지금 우리 단장이 싸우는 소리라는 거지?"

그런 그들도 들려오는 굉음에는 몸이 떨려 오는 것이다.

그 안에 담긴 막대한 힘이 느껴졌기에.

"갑자기 혼자 뛰쳐나간 이유가 있었구만."

점차 가까이 갈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광경은 무지막지한 것이었으니.

하늘을 감싼 검은 안개와 그 속에서 번쩍이는 황금빛 오러.

콰아앙-!

힘과 힘의 충돌로 인한 강한 충격파.

"저 검은 안개는… 혹시나 했는데."

피난하는 아카데미 생도들에게 듣긴 했다.

흑아가 습격했다고.

그리고 비탈리아누스가 갑작스레 뛰쳐 갔을 때도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그가 그리 급하게 갈 이유는 몇 없었으니까.

한데 정말로 하늘을 뒤덮은 검은 안개가 보이지 않는가.

대륙의 최강자이자 최악의 범죄자.

검은 안개의 아타올프가 나타난 것이다.

"저게…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힘."

그리고 맬리사의 그런 중얼거림마저 들어 버렸을 때. 데이먼은 결국 참지 못한다.

말로만 듣던 최악의 범죄자가 눈앞에 있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저런 위대한 전투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후우...."

허리춤에 달린 검 손잡이를 쥔 채 자세를 낮춘다.

눈은 지그시 감은 채 집중하는 정신.

"…데이먼, 내가 분명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수상한 낌새를 느낀 맬리사가 뒤늦게 데이먼을 돌아보지만.

"하."

이미 사라지고 없는 데이먼.

그 갈색 머리에 호승심으로 일렁이는 얼굴은 어느새 하늘 위, 전장의 한복판.

정확하게는 검은 안개의 아타올프 바로 옆에 불쑥 나타나는 것이었다.

"하하하하! 네가 아타올프구나!"

동시에 이뤄지는 발검.

그것은 어찌나 빠른지 순간 빛이 번쩍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데이먼 리에프테.

극쾌의 발검술과 상대의 뒤를 점거하는 스킬을 깨우친 기사.

그 까다로운 능력과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발검술로 일대일의 전투라면 져본 기억이 거의 없는 강자.

그렇기에 그의 검이 막히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였는데....

카앙-!

너무도 쉽게 검은 안개에 붙들리고 만다.

"엥?"

심지어 아타올프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귀찮은 벌레라도 꼬인 것처럼 검은 안개가 그의 다리를 붙잡더니.

"으악!"

그대로 아득한 지상을 향해 패대기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빠르게 가까워져 오는 땅을 보며 데이먼은 몸을 웅크리고 오러를 잔뜩 둘렀다.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며 근육을 잔뜩 굳힌다.

그리고 그때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

"페더 폴."

엄청난 속도로 내려 꽂히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더니 바닥에 도착할 때쯤에는 사뿐히 내려앉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닥에 엉덩이부터 톡 떨어지는 데이먼.

"뭐지?"

그 자세 그대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저 높은 건물의 옥상에서 자신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한 사람.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전장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서 있는 모습.

이상한 모자와 화려한 지팡이.

저건....

"괴짜네."

딱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 * *

"로열 나이츠가 왔나."

아무래도 검성 혼자 온 것이 아니었던 모양.

무슨 연유로 이 늦은 밤에 그들이 아카데미를 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확실한 기회였다.

로열 나이츠 정도의 전력이라면 분명 전투에 도움이 될 터이니.

아타올프라는 거물을 이번 기회에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타올프 또한 느끼고 있었다.

- 버러지 같은 것들이 자꾸 기어 오는구나.

눈앞의 검성. 그리고 자꾸 주변을 맴돌며 무시 못 할 강기를 쏟아 내는 테오르도.

그리고 새로 나타난 열 명의 로열 나이츠까지.

모든 게 거슬리지만, 직접 위협을 느낄 만한 것을 꼽자면 단 둘뿐이다.

황금빛 오러를 넘실거리는 비탈리아누스.

의념이 실린 그의 금색 오러는 자신의 안개마저도 가르고 육신에 직접 타격을 가할 수 있으니.

조금의 방심도 허용치 않는 상대인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 히오 파블렌코.

언제부터인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히오 파블렌코.

그리고 그 곁에 존재하는 붉은 눈의 사신. 귀기가 넘실거리는 그 존재감이 자꾸만 거슬리는 것이다.

- 무엇을 꾸미고 있느냐.

사신의 낫은 분명 검은 안개를 아무렇지 않게 뚫고 들어와 자신의 목을 겨누었다.

모든 힘을 실은 안개였음에도 장난처럼 뚫고 들어온 것이다.

다만 그 뒤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뿐.

허나 그렇기에 확신한다.

히오 파블렌코는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다고.

저 인외의 사신을 통해 커다란 무엇인가를 준비 중이라고 말이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서 저걸 방해해야 하는데.

막아야 하는데 눈앞의 검성 또한 그것을 눈치챘는지 자꾸만 끈덕지게 들러붙는 것이 아닌가.

"어딜 가려고 그러나. 마법사는 내버려두고 나와 이야기나 나누지. 아타올프."

- …비탈리아누스.

검성의 그러한 태도에 더욱 확신이 차오른다.

당장 저 히오 파블렌코부터 막아야 하리라.

아래의 저 버러지 같은 것들이 문제가 아니다.

흑색 강기를 휘두르는 죽음의 기사 역시 크게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는 이 두 사람.

검성의 능력은 잘 알고 있지만, 히오 파블렌코는 대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찌 저리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곳을 응시하고 있는 것인지.

그 곁에 선 붉은 낫의 귀신으로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마법이라는 이름하에 어떤 짓을 저지르려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기에.

순간 모든 힘을 집중해 비탈리아누스를 크게 한번 압박하고는.

콰아아앙-!

그 힘을 이용해 거리를 벌린다.

조금 아니, 상당히 무리하는 것이지만, 이러는 방법뿐이리라.

직감이 말해 주고 있다.

자신의 길었던 생에 몇 없는 위기 상황이라고.

- 히오 파블렌코.

일순간, 훅- 짙어지는 안개. 더욱 넓어진 범위.

아타올프의 몸에서 끓어오르는 안개.

허공에 떠오른 그의 등 뒤로 넓게 퍼진 검은 안개가 하늘을 모조리 뒤덮는다.

- 네놈의 꿍꿍이를 내 모를성싶더냐.

공간을 날카롭게 찢으며 퍼져 나가는 낮은 울림.

지옥에서 올라오는 듯한 기괴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검은 안개를 통해 공간을 뒤흔든다.

더불어 더욱 힘을 키워 가는 안개의 존재감까지.

"미친...."

이전에도 거대했지만, 더욱 불어나는 그 힘의 존재감에 데이먼은 경악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로열 나이츠가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리며 전투 태세를 갖추었고.

"로열 나이츠는 물러나라!"

그들의 정신을 일깨우는 비탈리아누스의 쩌렁한 외침.

격해지는 전투의 흐름 속에서 너희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일종의 선고.

"단장님 하지만...!"

"두 번은 말하지 않는다. 너희는 물러나서 여파를 수습해라. 제국민을 보호하라. 이곳은 나와 마법사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비탈리아누스 역시 그 존재감을 더욱 불려 나간다.

등 뒤로 솟구치는 기세가 어찌나 강렬한지 내뿜어지는 오러에 금빛의 사자 형상이 맺힌다.

그것이 곧 비탈리아누스의 의념이었으니.

그가 관철해 왔고 거쳐 왔으며 나아가야 할 길.

그것까지 확인한 이상에야 로열 나이츠는 물러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존심이 상해 이가 빠득 갈리지만, 생전 처음이라고 해도 될 만한 그런 경험이지만.

자신들은 이곳에서 엄연한 약자이기에.

그런 가운데 재차 들려오는 고막을 갉아 먹는 듯한 음울한 음성.

- 히오 파블렌코. 당장 멈추지 않으면 남는 건 파멸뿐이다.

그런 울림을 가로막는 단단한 금빛.

"마법사. 개의치 말고 계속하시게. 내 비록 늙었다고 하나, 자네 하나 지키지 못하겠는가."

- 마법사의 힘에 의지하는 꼴이라니. 대단하신 검성의 명예는 어디로 갔나.

"자네를 죽일 수만 있다면 무언들 못 하리. 마법사에게는 그만한 힘과 가치가 있다네."

모든 힘을 쥐어짜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끝없이 힘을 키워가는 검은 안개. 밤하늘을 아득하게 뒤덮어 가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에 맞서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황금 사자의 오러.

어둑해지는 공간을 조금의 거침도 없이 단박에 꿰뚫어 버릴 날카로운 금빛의 검.

그리고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하...."

이마를 짚으며 조용히 중얼거리는 히오.

"왜 저래… x발."

가만히 있었는데 지들끼리 갑자기 난리다.

70화 이메니아 아카데미(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