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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70

#260화

"...."

이안은 창밖을 응시하며 손에 든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뱃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싸구려 럼주였다. 목이 얼얼할 정도로 독했지만, 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은 선선한 바람이 창문을 타고 안으로 흘러들었다. 아직 서부를 벗어난 건 아니었으니, 계절이 변하고 있는 것이리라.

'거, 시간 더럽게 빠르네.'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금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말발굽 소리만이 백색 소음처럼 귓가를 울렸다. 늘 떠들어 대던 동료들이 전부 사라진 데다, 필립도 그와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동안은 그리워했던 고요함이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고 나니 생각처럼 즐겁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목소리와 정신없는 일상에 묻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이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회의감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이래서, 친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니까.'

기분 좋게 헤어져 놓고도 이 모양이라니.

새삼스러운 쓴웃음과 함께, 이안은 일행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름대로 신경을 쓰긴 했지만. 그들 모두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란 확신은 전혀 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랬다.

아무리 애써도, 이 세계는 점점 더 망해가고 있었다. 심지어 이미 혼돈의 시대가 열리지 않았던가.

아직은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이 소수에 불과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모두가 그렇게 부르게 될 터였다.

그러니 누군가 치명적인, 혹은 불운한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하진 않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싸늘해지는 느낌에, 이안은 다시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정신력 수치가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위기 상황일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는 정신력은, 평소에도 감정의 기복을 그리 크지 않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가 늘 어느 정도는 냉담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높은 정신력 수치의 영향도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국, 감정을 아예 없애 주지는 못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능력치도 아니었다. 그저 현실이 되면서 더해진 부가 효과 중 하나일 뿐.

'…배가 부르긴 했네. 내 코가 석 자인데.'

이런 말랑한 감상에나 젖어 있다니.

술을 삼키는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짙어졌다.

아마 한동안 평화로운 여정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터였다.

중앙 지역에 접어들 테니까.

황실과 교단의 영향력이 가장 직접적으로 닿는 중앙은, 가장 부유하며 치안도 좋았다.

물론 시한부에 불과한. 그리고 그 이면에 수많은 끔찍한 비밀을 품은 표면적인 평화일 뿐이지만.

어쨌건 길가에서 도적이나 마물을 마주칠 일은 거의 없을 터였다.

'그래도 이딴 생각은 오늘까지만….'

"이안 님."

엘리야의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다시 술병을 입에 가져가려다 멈칫한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풀어헤친 짐가방. 그리고 그 안에 종류별로 나뉘어 정돈된 물건들과 그 앞에 앉은 엘리야가 동시에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하던 그녀는, 시키지 않았는데도 짐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존 식량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되는대로 쑤셔 박아둔 게 보기 거슬렸던 것이리라. 보아하니, 이제 정리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그 상자도 꺼내 주시면 안 될까요? 어제 보니, 안이 엉망이었거든요."

"엉망일 것까지야…"

중얼대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왼손을 뻗어 아공간에 넣었다.

곧 표면에 주문 회로가 음각된 봉인함이 빈 좌석 위로 떨어졌다.

다시 봐도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내던 엘리야가 벌떡 일어나 봉인함을 열었다.

마차 안에서도 마음껏 일어설 수 있다는 것도, 난쟁이의 태생적 장점 중 하나였다.

자연스럽게 보급품 담당이 됐네.

내심 뇌까리며, 이안은 상자 안을 뒤적이는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마법적인 재능이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 그녀가 비전 주문을 사용하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긴, 비전은 대부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이었다. 마력 탐지가 그렇듯이.

상자에 담긴 마석과 정수, 기타 잡다한 소지품과 향신료 통들을 뒤적이던 엘리야가, 이내 뭔가를 집어 들었다.

"이건, 무슨 반지죠? 마도구나 유물 같지는 않은데요."

이안의 시선이 엘리야가 내민 손바닥 위로 향했다. 쇠로 만든 굵은 반지가 그 위에 얹어져 있었다. 넓적한 마디 부분에 원형 미로 같은 복잡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그건 강철 금고의 열쇠야."

"강철 금고라면… 제국 최대의 은행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모르는 게 없네. 그것도 책에서 읽었냐?"

"네. 작은 조직으로 시작해 전쟁의 시대를 거치며 막대하게 세를 불린 곳이죠. 혹자들은 교단을 매수한 고리대금 업자들이라 부르기도 한다더군요. 하지만 어쨌든 제국의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곳이기도 하다고 읽었어요."

설명해 달란 뜻은 아니었다만….

속으로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반지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아직 필립에게 말해두지 않았지만, 강철 금고는 이번 여정에 들러야 할 곳 중 하나였다.

주머니가 홀쭉해지다 못해 텅 빌 지경이지 않던가. 금고에 있다는 금화의 절반만 건질 수 있어도, 다시 한동안은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게 될 터였다.

"혹시, 강철 금고의 지부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

이어진 물음에, 엘리야가 잠시 생각을 곱씹고는 입을 열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중앙 곳곳에 다섯 개의 지부가 있을 거예요. 그 위치는 아마도…."

"그건 밤에 필립에게 알려 줘. 경로를 맞춰 보게."

"네. …의외네요."

고개를 끄덕인 엘리야가 이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안 님도 강철 금고를 좋아하지 않으실 줄 알았거든요. 그분의 대행자시니까."

"그분이, 강철 금고를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돈을 위해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혔다고 하셨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해 주지 않으셨지만, 그렇게 말씀하실 만 한 일들이 있었던 거겠죠."

난 또 뭐라고.

이안이 짧게 웃음 지었다.

"돈이란 게 다 그런 거지. 애초에 네 손에 있는 그 열쇠도, 원래부터 내 건 아니었어. 남의 것을 빼앗은 거지."

"빼앗으신 거라고요…?"

멍하니 되물으며, 엘리야가 손바닥의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더 묻지 않을게요."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 게 좋으리라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리라.

이미 이안을 비롯한 일행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끔찍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몇 번이나 보지 않았던가. 반지를 봉인함에 집어넣는 엘리야를 바라보며 피식 웃은 이안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 그게 없으면, 여정의 절반은 거지꼴로 다니거나 손에 피가 마르지 않게 될 테니까."

"…네."

침을 꿀꺽 삼킨 엘리야가, 한층 더 진지한 얼굴로 봉인함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산기슭을 따라 이어진 관도를 오르던 마차가, 이윽고 길을 벗어나 으슥한 숲속으로 들어갔다.

"이쯤에 자리를 잡겠습니다."

마차가 멈추고, 간이 창문을 연 필립이 말했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문을 열었다.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땔감부터 구해 오겠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마부석에서 훌쩍 뛰어내린 필립이 어둠에 잠긴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 새끼. 기운 없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콧방귀를 뀐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산 중턱. 나무와 풀숲 사이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작은 공터였다.

야영지로 삼기에 흠잡을 데 없는 위치였다.

"…역시, 바깥세상의 숲은 다르네요. 음산해요."

마석 등을 손에 든 채 뒤따라 내린 엘리야가, 주위를 두리번대며 속삭였다. 말과 달리 눈빛을 반짝이는 채였다. 공터로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여긴 꽤 안전한 산이야."

"그런 건,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새 소리도 나고 산짐승도 울잖아. 저주받거나 마물이 득시글대는 산은 조용하지. 죽은 것처럼."

"아하…."

"책에 이런 건 쓰여있지 않나 보군."

"네. 덕분에 배웠어요. 감사합니다."

"감사까지야…."

낮게 웃은 이안이 아공간에서 마법서를 한 권 꺼내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그는 그 옆에 봉인함까지 꺼내 놓고는 몸을 돌렸다.

이내 마차에서 짐가방을 꺼내는 엘리야의 곁을 지나치며, 그가 덧붙였다.

"저기 모닥불을 피울 거니까, 근처에 자리를 잡아 둬."

"네. 식사를 준비하면 되죠?"

"그래 주면 고맙지."

이안은 말들을 마차에서 분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잡일을 직접 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뭔가 하기도 전에, 일행들이 알아서 척척 처리해 주지 않았던가.

'이래서, 없어져야 소중함을 안다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이안은 말들을 근처의 나무로 끌고 갔다. 나무 둥치에 줄을 묶고 있자니, 백마가 가볍게 고개를 털며 투레질을 해댔다.

뭐, 줄이 너무 짧다고?

피식한 이안이 줄을 더 길게 고쳐 묶었다. 녀석이 그제야 고분고분 땅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안은 백마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똑똑한 녀석이었다. 하긴. 정화자들이 타고 다니던 녀석이니 당연하겠지.

…이왕이면 안 죽고 계속 데리고 다닐 수 있으면 좋겠는데.

"...?"

생각하며 몸을 돌린 이안의 눈매가, 이내 설핏 가늘어졌다.

엘리야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바닥에 마석 등을 내려놓은 채, 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사락, 종이 넘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네가 주문쟁이라는 걸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

그녀의 곁으로 다가선 이안이 내뱉었다. 그가 오는 줄도 모르고 책에 빠져 있던 엘리야가 고개를 들었다. 이안의 눈을 올려다보며, 그녀가 곧바로 내뱉었다.

"이런 금서를,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 건 마석 등의 불빛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미간을 슬쩍 찌푸린 이안이 내뱉었다.

"흑마법사의 연구실에서."

"역시…!"

엘리야가 탄성을 흘렸다. 이안의 미간에 더 깊은 골이 패일 찰나, 그녀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깜짝 놀랐어요. 이안 님께서 흑마법에 관심이 있으시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 없었거든요!"

"관심 없어. 그건 땔감으로 쓰려고 챙겨온 거다."

"아하! 땔감으로 쓰…."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야가 멈칫했다. 이안의 눈을 다시 올려다본 그녀가, 방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색으로 눈을 치켜 떴다.

"땔감이요? 이걸, 땔감으로 쓰신다고요?"

"그래. 이런 건 불에 특히 잘 타거든. 왜, 문제 있냐?"

"다, 당연하죠!"

엘리야의 목소리가 순간 커졌다.

"이건 오염된 마력을 이용해 이미 죽은 신체를 다시 움직이거나, 사체에 남은 잔존 의식을 영혼 없이 일깨우는 방법 등이 기록된 아주 귀중한 자료 같거든요. 아직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공허의 파장으로 오염된 마력이 육체와 정신에 끼치는 영향도 기록되어 있는 것-"

"우리 그걸 보통 사령술이라고 부르지. 알다시피 흑마법이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자른 이안이, 엘리야의 눈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흑마법사가 되고 싶은 거냐?"

"네…? 아뇨. 그럴리가요. 어디까지나, 이게 학술적인 가치가 아주 높은 책이라는 의미였어요."

"이 책에 가치를 두는 건, 내가 알기로는 흑마법사들뿐이거든."

"보편적으로 그렇죠. 하지만 저는 검은 벽에 대해 공부해야 하잖아요. 아시겠지만, 검은 벽은 공허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도 알려져 있고요."

"...."

한쪽 눈썹을 찌푸린 이안을 올려다 본 엘리야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검은 벽을 연구하려면 공허와 흑마법에 대한 이해가 필수 불가결한 셈이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흑마법사들은 제정신이 아닌 데다 위험하기까지 하고, 이런 금서들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타락자로 몰릴 수도 있으니까요. 거기다 대부분은 어딘가에 감춰져 있거나, 이 순간에도 사라지고 있죠."

양손으로 마법서를 가리킨 엘리야가 덧붙였다.

"이런 높은 수준의 금서를 손에 넣는 건, 제국의 암시장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요."

"…그런 것도, 책에서 읽은 거냐?"

이윽고 이안이 양쪽 눈썹을 다 찌푸린 채 물었다. 엘리야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검은 벽에 대한 연구가 더딘 건, 학자와 마법사들이 금서를 손에 넣기 어려워서거든요. 얼마나 많은 학자가 자료에 목말라 있는지 아신다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보고서에 참고 문헌의 부족을 매번 토로하는 건 물론, 정기적으로 마탑과 교단에도 자료를 요구하고 있다고요. 물론, 소득은 거의 없지만요."

"하…."

이안의 얼굴에 비로소 헛웃음이 번졌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그를 올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킨 엘리야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태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은데… 그건 어렵겠죠?"

"당연하지."

언제 웃었냐는 듯 정색한 이안이 대답했다.

아무리 학문으로 접한다고 해도, 이런 어둠의 지식을 가까이하다 보면 익혀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인지상정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 엘리야는 호기심도 많았다.

그녀를 정말 대자로 여기는 건 아니었지만, 눈앞에서 타락하도록 방치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이래서 굳이 나한테 부탁한 건가?'

아르케아스를 떠올린 이안의 미간이 다시금 좁아졌다.

빙 돌아간다고 했을 때 오히려 반겼던 걸 보면,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그와 오래 함께하다 보면 타락자 한 둘쯤은 마주치게 될 테니까. 어둠의 지식과 가까이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 순진한 막내 딸이 직접 보고 경험하길 바란 것이리라.

저벅- 저벅-

저만치에서 되돌아오는 필립의 발소리를 귀에 담으며, 이안이 오른손을 펼쳤다. 그의 손아귀에 불꽃이 피어올라 주위를 밝혔다.

"그러니까 물러나라."

"자, 잠깐만요, 대부님…!"

숨을 들이켠 엘리야가 손을 내뻗었다.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죄송해요…! 하, 하지만, 이론적인 부분만이라도 잠깐만이라도 읽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주문을 완성시키는 방법 같은 건 훑어보지도 않을게요…!"

"...."

물론, 이안은 그녀의 설득에 전혀 넘어가지 않았다.

마법서를 읽으면서 주문은 안 보겠다니.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진 건,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라서였다.

막내 딸의 연구 자료.

연계 퀘스트가 분명했다. 엘리야의 연구에 도움이 될 서적을 몇 개 구해다 주면 완료되는, 게임이었다면 비교적 간단했을 퀘스트였다. 보상도 약간의 경험치와 능력치 포인트 하나가 전부였다.

'…그리고 보통은, 이런 퀘스트가 분기점이었지.'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실 찰나.

"뭘 보게 해 달란 말씀이십니까…? 엘리는 또 왜 저런 표정이고요."

뒤에서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품에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아 든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크랄렌이 가지고 있던 마법서를 읽게 해달라는군."

이안이 오른손의 주먹을 쥐며 내뱉었다.

"예…? 뭘 읽는다고요…?"

필립이 되물었다.

불덩이가 번쩍이는 불티를 흩뿌리며 손아귀에서 사그라드는 가운데. 이안이 인상을 구긴 필립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엘리가 어둠의 주문쟁이 꿈나무였다고."

#261화

"꿈나무라는 게 대체…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네요. 맙소사, 루 솔라여…."

탄식한 필립의 시선이 절로 엘리야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엘리. 흑마법은 단순한 마법이 아닙니다. 영혼을 더럽히고 육체를 망가뜨려요."

오히려 멍하니 이안을 바라보고 있던 엘리야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저는 흑마법을 익히려는 게 아니라, 그저 공허의 지식을 공부하고 싶을 뿐이라니까요…."

"흑마법사의 절반쯤은 아마, 그렇게들 시작했을 거다. 엘리."

딱 잘라 말한 이안이, 천천히 몸을 숙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걸 읽지 못하게 한다고 해도, 네가 제도에서 암시장을 들락거리는 것까진 막을 수 없겠지. 금서를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하진 않으니까. 그렇지?"

"…아마도요."

속내를 들킨 듯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었던 엘리야가, 이윽고 대답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혀를 찬 이안이 손을 뻗어 마법서를 집어 들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보는 앞에서 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

엘리야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다른 의미로 충격받은 표정이 된 필립이 안고 있던 장작을 와르르 떨어뜨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래서, 위대한 분의 막내 따님이 그 저주받은 책을 읽게 두시겠다고요…?"

탄식하듯 내뱉는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안이 말을 이었다.

"대신, 주문과 관련된 부분은 전부 찢어 버리거나 덧칠할 거다. 정말 네가 흑마법을 익히지 않을 생각이라면, 불만 없겠지?"

"물론이죠…!"

눈을 빛내며 대답한 엘리야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목구비가 워낙 커서, 표정 변화가 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그게 교단과 마탑이 금서를 검열하는 방식이기도 해요! 아주 엄격한 검열을 통과한 소수의 금서만이 연구 자료로 제공되죠. 이안 님께서 직접 검열한 책이라면, 어쩌면 교단에서도 그걸 인정해 줄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교단에 그 책을 들고 가는 짓은 절대 하지 마라. 정 원하면, 나나 여기 필립 경에게 부탁해. 대신해 줄 테니까."

이안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엘리야가 걱정 말라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마법서를 아공간에 휙 던져 넣으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이 녀석과 함께하는 동안 흑마법사를 한 명쯤은 꼭 마주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이왕이면 아주 끔찍한 몰골로 변이된 놈으로.

"맙소사…. 백금룡께서 알게 되신다면 분명 진노하실 겁니다. 어쩌면 슬퍼하실 수도 있겠군요. 이쪽이 더 두렵고요…."

필립이 중얼댔다. 현기증이 나는 듯한 얼굴이었다. 비로소 녀석을 돌아본 이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양반도, 이미 알고 계셔."

"엘리가 흑마법사라는 것을요?"

"전 흑마법사가 아니에요."

덧붙이는 엘리야를 턱짓으로 가리킨 이안이 말을 이었다.

"이 녀석이 흑마법에 관심이 많다는 걸. 들었겠지만, 말린다고 될 게 아니야. 난쟁이들이 집요한 성격이라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저도… 들은 적은 있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제대로 된 난쟁이니까. 그냥 장작이나 다시 주워서 모아."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울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필립이 엉거주춤 떨어뜨린 나뭇가지들을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식사를 준비할게요. 죄송해요, 제가 정신이 팔려서 그만."

퍼뜩 정신을 차린 엘리야가, 허둥지둥 봉인함쪽으로 몸을 돌렸다.

"천천히 해. 어차피 그 전에 할 일도 있거든."

내뱉은 이안이 가볍게 손을 떨쳤다. 그의 손아귀에서 번진 불꽃이 장작 위에 떨어졌다.

주위가 밝아지면서 온기가 번졌다. 서늘해지기 시작한 밤공기를 데우기에는 충분한 열기였다.

"그래서, 경이랑은 무슨 얘길 나눈 거냐?"

모닥불 옆에 대충 걸터앉으며 이안이 덧붙였다.

정말 이래도 되나 하는 얼굴로 엘리야를 바라보고 있던 필립의 안색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이런저런… 여러 이야길 했습니다. 그동안의 추억이라던가. 앞으로의 진로라던가."

"너한테 잘 생각해보라고 한 건, 진로에 대해서였겠고."

"뭐, 그런 셈이죠…."

씁쓸하게 읊조린 필립이, 이내 고개를 털고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다른 얘길 하시죠. 당장 중요한 건 따로 있지 않습니까?"

말하며 강철 장갑을 벗은 그가, 벌어진 흉갑 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곧, 잘 접힌 종이가 들려 나왔다.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따로 있지. 과제를 끝내긴 했나 보네."

어깨를 으쓱이며 이안의 옆에 걸터앉은 필립이, 그와 자신 사이의 땅에 지도를 내려놓았다.

이안도 비로소 지도를 눈에 담았다.

변방 일부와 서부. 중앙. 그 아래 내해까지 그려진 제국 지도였다.

북부와 남부, 남서부는 일부만 그려져 있었지만, 이것만 해도 꽤 비싼 값을 치렀을 물건이었다.

물론, 이안이 보기엔 여전히 지도라기보단 꽤 자세하게 그려진 그림 정도에 불과했다.

"사실, 우리가 제도까지 돌아가는 길은 결국 두 갈래입니다."

필립이 검지로 지도 한복판을 가리켰다.

서부와 중앙의 경계선. 산 그림이 있는 걸 보니, 일행의 현재 위치인 모양이었다.

"중앙에 접어들어 북쪽으로 빙 돌거나…."

필립의 손가락이 반 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곧 그의 손가락이 중앙 깊은 곳에 그려진 제도에서 멈췄다. 제도는 지도에서도 유독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이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듯이.

필립의 손가락이 다시 처음 위치로 돌아왔다.

"이대로 쭉 내륙으로 들어간 뒤에, 내해를 마주치면 위로 올라가거나요."

이번에는 직선으로 중앙을 가로지른 그의 손가락이 제도에서 머지않은 내해의 앞에서 멈춰, 이어진 강줄기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핀 필립이 덧붙였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자가 더 마음에 들긴 합니다만…."

"그러시겠지."

넌 변방 근처로 움직이고 싶을 테니까.

속으로 덧붙이며 콧방귀를 뀐 이안의 시선은, 중앙으로 접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치게 될 도시에 멈춰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돌든 필립의 손가락이 거쳐 간 지점이자, 가 본 적 없음에도 낯설지 않은 이름을 가진 도시였다.

"어쨌든, 보르타는 들를 거란 얘기군."

"예. 물자를 보충하는 편이 좋으니까요."

고개를 주억거린 이안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죽을 자리만 잘도 찾아다니던 상인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서였다.

"잘됐네. 운이 좀 따라준다면 손님 대접도 받으면서, 겸사겸사 보급도 싼값에 끝낼 수 있겠어."

그가 변방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왔는지. 또 다른 상행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속으로 덧붙인 이안이, 뭔가 열심히 준비 중인 엘리야를 돌아보았다.

"엘리. 강철 금고의 지부가 어디 어디에 있다고?"

움직임을 멈춘 엘리야가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니오세. 미드퍼트. 헤이버리. 오스폴. 에글라론. 제 기억이 맞다면, 이렇게 다섯 개 도시에요."

두 개는 이안도 게임에서 가 본 적 있는 도시였다. 그중 한 곳은 마법사의 악몽이란 이름의 마경이 열리는, 본래 루시아가 가게 되었을 라르무트 가문이 지배하는 도시이기도 했다.

"다시 한번 불러 주십시오. 엘리."

"니오세. 미드퍼트. 헤이버리. 오스폴. 에글라론."

엘리야가 다시 식사 준비를 이어가며 말을 이었다. 필립의 시선이 지도에 표시된 도시들을 훑었다. 이내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북쪽으로 돌면 오스폴이. 내륙으로 들어가면 미드퍼트가 있군요. 어느 방향으로 가도 중간에 한 번은 거쳐 갈 수 있겠어요. 그런데, 강철 금고는 왜 들르시려는 겁니까?"

"찾아야 할 금화가 있어서. 어쨌든…."

대충 대답한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대충 결론은 나온 것 같군. 일단은 보르타까지 간 뒤에 생각해도 되겠어. 그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말을 이으며 허리춤의 진은 강철 장검을 풀어 바닥에 놓은 이안이, 뒤이어 아공간에서 강철 장검을 한 자루 꺼냈다.

그걸 지팡이 삼아 짚고 일어선 그가 덧붙였다.

"지도 집어넣고, 방패 들고 와라."

"…갑자기요? 식전에요?"

필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식후에 하면 속이 안 좋다고 할 거잖아. 땀 좀 빼고 나면 입맛도 돌고, 잠도 잘 올 거다."

우울한 생각들도 사라지고.

이안이 왼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잉, 낮은 울림과 함께 손등에서 황금빛 방패가 피어올랐다.

입맛을 다신 필립이 일어섰다.

"…바로 들고 가겠습니다."

몇 번 본 덕분인지, 처음처럼 신기해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엘리야는 달랐다. 입을 헤 벌린 채 백금 방벽을 바라보는 그녀를 돌아본 이안이, 모닥불 너머로 걸음을 옮기며 내뱉었다.

"삼십 분쯤 걸릴 거다. 딱 맞게 준비해 줘."

"네…! 미리 준비를 끝내 놓고, 구경해도 되나요?"

엘리야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안이 풀썩 웃음 지었다.

"마음대로 해."

***

다각- 다각-

마차가 완만한 내리막길을 나아갔다. 오르막이 내리막으로 변한 지도 벌써 한 참이 지났건만.

"...."

마부석에 앉은 이안은, 경치 감상 대신 미간을 찌푸린 채 아래만 바라보고 있었다.

'…별짓을 다 하네, 정말.'

마법서를 다시 읽으면서, 주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부분을 잉크로 덧칠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힘들거나 어렵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많이 들고, 무엇보다 더럽게 귀찮은 작업이었다.

하지만 별수 없는 부분이었다.

퀘스트도 완료하고, 엘리야가 타락하지 않게도 만들고 싶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의 엘리야는 끝내 흑마법의 길에 발을 들였을 게 분명했다.

검은 벽을 안전하게 없애는 데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인재를 그런 식으로 잃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는 언젠가 직접 검은 벽을 넘어야 할 운명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건 결국, 그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인 셈이었다.

물론, 이 책이 정말 연구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뭔 개소리를 이렇게 길고 정성스럽게도 써 놓은 건지. 시발….'

손을 뻗은 이안이, 옆에 놓은 술병을 들어 벌컥 들이켰다.

아무리 봐도 그의 눈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아직도 마력이나 혼돈력. 그리고 이게 심상에 파장으로 중첩되어 쌓이는 원리나, 그게 의지에 따라 입자화되는 원리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가능하기에 그렇게 할 뿐.

부욱-

아예 주문 공식과 배합이 빼곡한 페이지를 통째로 찢어 버리며, 이안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흑마법사를 하나라도 마주친다면, 반드시 엘리야가 보는 앞에서 싸우리라고.

"하…."

마침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이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다지 홀가분하지는 않았다. 아공간에는 크랄렌의 연구실에서 가져온 금서가 두 권 더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당장 작업을 몰아서 끝낼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엘리야가 똑똑해도, 이 두꺼운 책을 하루 만에 뚝딱 다 읽고 소화할 리는 없었으니까.

다시 왼손을 뻗은 이안이 술병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비로소 내리막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뭇가지들이 드문드문 시야를 가리긴 했지만, 그래도 눈이 탁 트이는 듯한 광경이었다.

숲과 농작지. 들판이 뒤섞인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었으니까.

하늘의 먹구름은 멀어질수록 점점 옅어져서, 저 멀리서는 푸른 하늘도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다.

덕분에 그 아래의 숲과 들판, 농작지는 유독 더 선명하고 쨍하게 보였다. 저 멀리 장난감처럼 솟은 성벽과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칙칙한 풍경에 오래 길들여진 탓인지, 동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중앙은 중앙이란 거지….'

제국 중앙은 게임에서도 산이나 계곡이 많지 않은, 적당한 높이의 완만한 언덕과 평야가 주를 이루는 지역이었다.

숲. 경작지. 넓고 깨끗한 대로와 내해로 이어지는 크고 작은 물길.

게다가 아직 먹구름에 뒤덮여 있지도 않았다. 이안이 기억하는 3챕터 후반부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리라는 의미였다.

적어도 반년. 어쩌면 1년 이상의 여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서부에서 일어난 일의 여파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겠고, 이면에는 수많은 음습한 비밀과 음모들이 뿌리를 뻗어가고 있겠지만.

적어도 겉보기엔 대륙 그 어느 곳보다도 밝고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경치를 안주 삼아 술을 홀짝이던 이안의 평화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

문득 미간을 좁힌 이안이, 마부석에서 일어서 마차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지나쳐 온 산기슭 쪽에서 일련의 말발굽 소리가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행인이라 여기지 않은 건, 적당한 속도로 달리고 있어서였다.

내리막에서 말을 달리는 건 보통 둘 중 하나였다. 쫓기거나, 쫓거나.

"저것들은…."

자주 그렇듯, 이번에도 후자가 분명했다.

기수들의 모습을 확인한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짧게 입맛을 다신 그가, 이윽고 다시 몸을 숙였다.

드르륵-

이안이 마부석 뒤편의 간이 창문을 열었다. 졸고 있었던 듯 입가를 훔치며, 필립이 고개를 돌렸다.

"…뭔가 문제가 생겼습니까?"

이안의 표정을 확인한 그가 당황한 기색도 없이 물었다. 그저 눈빛이 단숨에 선명해졌을 뿐이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문제까진 아니지만, 어쨌든. 나오지 말고 안에 있어라. 엘리 곁을 지켜."

"어떤 놈들인데요?"

창문 너머로 검열을 끝낸 마법서를 밀어 넣으며, 이안이 대답했다.

"귀쟁이들."

#262화

마법서를 받아드는 필립의 눈매가 꿈틀댔다.

건너편에 앉은 엘리야가 마법서와 이안을 번갈아 바라보는 가운데, 필립이 덧붙였다.

"아이나스일지도 모르겠군요. 나세르가 보낸 전서를 받고 곧바로 움직였다면, 따라올 시간은 충분했을 테니까요."

"확인해 보면 알겠지. 일단 안에 있어라. 싸우지 않고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안 싸우신다고요…? 어떻게요?"

"귀쟁이 들의 방식을 쓸 거야. 일단은."

"...?"

어리둥절한 필립과 그가 늘어뜨린 책으로 손을 뻗는 엘리야를 마지막으로, 이안이 창문을 닫았다.

술병의 남은 술을 전부 단숨에 마셔 버린 그가, 한 손으로 쥐고 있던 고삐를 놓으며 읊조렸다.

"지금처럼 그냥 가라."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속으로 덧붙인 이안이 훌쩍 마차 지붕으로 올라섰다.

추격전이라도 벌어진다면 모를까. 그냥 나아가는 거라면 한동안은 마부석을 비워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닐라인지 셀림인지 모를 백마는, 굳이 이끌지 않아도 알아서 길을 따라 나아갔으니까.

"...."

지붕 위에 선 이안은 달려 내려오는 요정 무리를 바라보았다.

어쨌건, 당장 칼부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싸우는 게 목적이라면 더 빨리 말을 몰았을 테고, 무기도 이미 뽑아 들고 있었을 테니까.

지금은 둘 다 아니었다.

다섯으로 구성된 인원 모두가 미늘 갑옷과 각종 무기로 중무장한 상태였음에도 그랬다.

곧 요정 전사들의 시선이 집중됐지만, 이안은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다.

'도대체, 추적자란 놈들은 매번 어떻게 이렇게 내 위치를 잘 알고 따라오는 거야?'

위치 추적기가 달린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이번엔 일행들과 뿔뿔이 흩어지기까지 했는데. 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의문을 떠올리며 허리춤의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을 뿐이었다.

진은 강철 장검을 늘어뜨린 이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이상 달려온다면, 싸우자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마력을 조금 담아서, 그리 크지 않음에도 선명하게 번져 나가는 목소리였다. 요정들은 귀가 밝으니 굳이 마력까지 담을 필요는 없었지만. 이쪽의 뜻을 더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시선을 받은 선두의 요정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이어 한 팔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

잿빛에 가까운 은발을 목덜미까지 기르고, 요정 특유의 오만하고 냉막한 인상을 가진 여전사였다.

다그닥- 다그닥-

뒤따르던 요정들이 그녀의 손짓에 발맞춰 속도를 줄였다.

이안은 그들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그들은 성별에 상관없이 차가운 인상에 늪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른 머리 색도 백금발이나 은발 정도의 차이였다.

'귀쟁이들은 죄다 비슷비슷하게 생겨 먹었다니까…'

이안은 내심 혀를 찼다.

그가 단숨에 구별할 수 있는 요정은 아마도 테사이아뿐일 터였다. 이목구비가 더 개성 있는 건 둘째 치더라도, 그녀에겐 저들에겐 없는 장난기와 기품이 있었으니까.

"신분과 용무를 밝혀라."

요정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차를 뒤따르는 형상이 되자, 비로소 이안이 덧붙였다.

선두의 요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굳이 먼저 존대를 해 줄 생각은 없었다. 이안은 주문쟁이 다음으로 요정을 싫어했다.

예외는 단 한 명뿐이었다. 아직까지는.

미간을 더 찌푸렸던 선두의 요정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아이나스가의 요정들이다. 이안 호프 경을 만나 뵈러 왔다. 이 마차에 타고 계신 것 같은데."

역시. 내심 읊조리면서도, 이안이 태연하게 어깨를 까딱였다.

"글쎄. 어쩌면."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다. 마부. 그저 그분께 몇 가지를 여쭙고 확인받을 이야기가 있을 뿐이야. 그러니 잠시 마차를 멈춰라."

자존심이 상한 듯 더 싸늘해지긴 했지만, 어쨌건 여전히 최소한의 정중함은 잃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그 여쭙고 확인받을 이야기가 뭔지 이미 알고 있는 이안은 입꼬리를 말아 올릴 뿐이었다.

"그냥 이대로 대화하도록 하지. 정말 싸우러 온 게 아니라면."

"…그럼 이안 호프 경이라도 뵐 수 있게 해라. 나는 그분과 대화를 나누러 온 거니까. 네가 아니라."

"그것도 이대로 하면 돼. 내가 이안 호프니까."

"...!"

요정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녀의 뒤에서 저마다 이안을 노려보던 다른 요정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차례 눈을 깜빡인 요정이, 이안을 빤히 바라보며 덧붙였다.

"귀하가 이안 호프 경이시라면… 왜 마부석에 앉아 계셨습니까?"

"계속 안에만 있으면 답답해서. 요정과 달리 인간은, 아무나 마부석에 앉아도 죽지 않거든."

말을 멈춘 이안이 짧게 실소했다.

"어쨌든, 재미있네. 대뜸 찾아와서 날 불러 달라고 해 놓고. 정작 나타나니 의심부터 하다니."

"...!"

화들짝 눈을 깜빡인 요정이, 비로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이안 경…. 이렇게 곧바로 뵐 수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쪽이 책임자이신가?"

"예. 아이나스의 일원이며, 수색대의 지휘를 맡은 앨리스 아이나스입니다."

"말했듯, 이안 호프요. 용병이지."

"…용병 출신이시란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아, 그래. 나에 대해 사전 조사를 좀 했나 보군.

이안은 옅게 웃음 지었다. 이 오만하고 잔인한 거짓말쟁이들이 이렇게 조심스러운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아서였다.

물론, 그저 그의 명성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터였다.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먼저 내 질문에 답부터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이안이 운을 뗐다.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앨리스가 곧바로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내 뒤는 어떻게 알고 따라온 거지? 추적이야, 전서를 받고부터 시작하셨겠고."

순간 멈칫했던 엘리스가, 아직도 이안의 손에 들린 새하얀 칼날을 곁눈질하고는 대답했다.

"…마차의 흔적을 추적했습니다."

"바퀴 자국을?"

"예."

"어디서부터?"

"드네로브에서 테센으로 접어들면서부터였습니다."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눈이 정말 밝으시군. 꽤 오래전 흔적이었을 텐데."

"…칭찬 감사합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이거지.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핀드렐 아이나스, 그가 죽인 귀쟁이가 주절대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가문의 요정들은 포기를 모르는 최고의 추적자들이라던. 적어도 그 말은 허언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동시에 이 귀쟁이들이 이렇게까지 공손한 가장 큰 이유도 확실히 알게 됐다.

테센이 어떤 몰골이 되었는지도 직접 본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그 꼴이 된 데에는 이안이 영향이 지대했으리라 판단한 게 분명했다.

'하긴. 도시에서도 한 푸닥거리 하긴 했었으니까.'

그가 싸운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었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건 잘된 일이었다. 덕분에 상황이 더 편해졌으니까.

"라클리프에서도?"

"예. 약간의 돈을 쓰긴 했습니다만."

이안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금화라도 하나 찔러 줬다면, 그의 행방을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터였다. 성문을 나선 뒤론, 하던 대로 마차의 흔적을 따라왔겠고.

마차를 바꿔 타지 않길 잘했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이 미소 지었다.

"덕분에 의문이 풀렸군. 좋아. 이제 귀하가 원하는 대화를 시작해 봅시다."

그가 진은 강철 장검을 검집으로 되돌렸다.

앨리스의 눈빛에 옅은 안도가 스쳤다. 표정은 그대로였으니, 꾸며낸 감정은 아닐 터였다.

이 귀쟁이는 확실히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이 이들에 대한 호감이나 방심을 불러일으키진 않았다.

어쨌건 이들은 귀쟁이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악명 높은 아이나스.

"경의 일행 중에, 아이나스의 이름을 사칭한 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텐시아 아이나스라는 이름의 원로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앨리스가 입을 열었다. 슬쩍 이안의 얼굴을 한차례 올려다본 그녀가, 재빨리 다시 마차로 시선을 내리며 덧붙였다.

"가문의 이름을 사칭하는 행위는 가장 큰 범죄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본래라면, 그 요정을 따라가 극형에 처하는 것이 당연한 절차였습니다."

"…그래서?"

이안이 덤덤하게 되물었다. 다시 한번 이안을 일별한 앨리스가 마른 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추적하며 알게 된바. 우리는 이안 경께 먼저 자초지종을 듣는 게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요정은 이안 경의 동료이며, 경의 명령으로 그런 역할을 수행한 것 같았으니까요. 해서, 집행에 앞서 경께 이야기를 듣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요정답지 않게 담백한 말투였다. 하지만 이안은 앨리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티 나지 않게 조금씩 마차와 간격을 벌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튀겠다는 생각이 틀림없었다. 그야말로 요정다운 선택이었다.

아마 작정하고 튄다면 이안도 전부 잡아 죽이기는 어려울 터였다.

물론 다 죽인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 이것들은 꾸준히 가문에 연락을 넣고 있었을 테니까.

소식이 끊긴다면 이안이 범인이란 걸 곧바로 눈치채겠지. 그럼 아이나스 전체와 싸우게 될 터였다. 어쩌면 중앙의 다른 요정 가문들과도.

하지만 이안은 그 사실에 새삼스럽게 당황하거나 긴장하지 않았다.

"훌륭한 선택을 하셨군."

핀드렐을 죽인 순간부터. 그리고 테사이아에게 신분을 사칭하게 한 순간부터 언젠가 예정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을 대비한 몇 가지 계획들도, 당연히 진작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중에서도 최선의 계획이 현실이 됐다. 사실, 이안도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다고 생각했던 계획이었다.

이 귀쟁이들과 칼부림이 아니라 대화부터 나누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만약 내 친구에게 먼저 갔다면, 귀하의 가문과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을 테니까."

"…경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게 맞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요정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가운데, 앨리스가 한층 더 서늘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안을 올려다보는 눈빛에 두려움과 적의가 동시에 묻어났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뒷짐을 지듯 왼팔을 슬쩍 뒤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 친구는 그저 내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이지. 정확히 말하면 가명을 쓴 것일 뿐, 사칭은 아니었소."

엘리스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그게 무슨…."

"이건 내 정당한 소유물이니까."

이안이 아공간에서 꺼낸 은 브로치를 요정들이 보이게 내밀었다.

크랄렌과 만나기도 전에 테사이아에게 진즉 돌려받아 아공간에 처박아 뒀던 물건이었다.

"...!"

앨리스의 눈이 커졌다. 눈이 좋은 요정이니, 이안의 손에 들린 브로치가 진품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본 것이리라.

"…그건 가문의 인장입니다.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해 주지 않으신다면, 결코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이안 경이라 할지라도."

확연히 딱딱해진 얼굴로 앨리스가 씹어 뱉었다. 말과 달리, 그녀와 마차의 거리는 조금 더 벌어지고 있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해명이랄 것도 없소. 핀드렐에게 받은 거니까."

여기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앨리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핀드렐? 핀드렐을 아십니까?"

"잘 알지. 내가 그자의 전 재산을 판돈으로 탈탈 털어먹었으니까."

이안이 싱긋 미소 지었다. 용병의 미소였다. 앨리스가 멍청한 표정을 지은 건 거의 동시였다. 눈을 멍하니 깜빡인 그녀가, 이윽고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판돈…? 설마 지금, 가문의 인장을 도박으로 따내셨단 말씀이십니까?"

"이걸 가지고 있으면 아이나스가의 일원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이며, 그에 따른 권리도 행사할 수 있는 거라 주장하더군. 금화로 치면, 그래… 한 백 개쯤 된다던가."

"...."

엘리스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다른 요정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앨리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자식이… 그랬다고요?"

"애석하게도."

"…그걸, 순순히 넘겨줬습니까?"

"아니었지. 곧바로 날 죽이겠다고 덤벼들던데. 거꾸로 두들겨 패 줬더니 잠잠해졌지만."

"그게… 어디였습니까?"

미간을 더는 좁아질 수 없을 때까지 찌푸리던 앨리스가, 이윽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안이 즉답했다.

"변방."

"조금만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차피 거기로 가도 못 찾을 것이오. 새벽에 부하들을 끌고 도망쳤으니까. 더 깊은 변방으로 갔겠지. 전쟁통에 껴서 한몫 챙길 계획이었으니."

"이런… 빌어먹을… 놈이…."

엘리스가 이를 갈며 중얼댔다. 방금까지 튀려던 건 잊은 듯, 그녀의 말이 다시 조금씩 마차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숨을 고른 앨리스의 얼굴이 다시 냉막하게 되돌아왔다. 하지만 뾰족한 귀만큼은 여전히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그놈은 제 혈육으로, 가문에서도 퇴출당한 문제아입니다. 가문의 수치라고 할 수 있죠. 놈이 경께 어떤 무례를 저질렀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만…."

분노를 꾹꾹 억누른 목소리로 내뱉은 그녀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 녀석이 가문의 인장에 대해 한 말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그러니, 가문의 인장을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건, 도박의 판돈 따위로 거래될 물건이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그럴 순 없소. 이건 내 소유물이니까."

이안이 딱 잘라 말했다.

사실 주려면 줄 수도 있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물건에 깃든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주문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다시 낯이 굳어지는 앨리스를 내려다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하지만 더는 이걸 사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기회가 된다면 녹여서, 돈으로 바꾸겠소."

"녹여…."

더듬댄 앨리스가, 자존심이 상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덧붙였다.

"그럼, 맹세라도 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찬란한 여신의 이름을 걸고."

"어렵지 않지. 맹세하겠소."

"경께서 해 주신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는 것도요?"

"...."

이게 본론이었네.

앨리스의 눈을 잠시 빤히 내려다본 이안이, 이윽고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그것도 맹세하지."

"…알겠습니다. 빌어먹을… 그 말하는 짐승 같은 놈이…."

시선을 돌린 앨리스가 중얼댔다. 눈빛에 수치심과 분노가 아른거렸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가문이 망신당했다 여기는 게 분명했다.

"물을 말은, 그게 끝인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이안이 내뱉었다. 앨리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예.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군요."

말투가 까슬해진 걸 보니, 정말 볼일을 다 본 모양이었다.

다신 안 볼 사이다, 이거지?

낮게 코웃음 친 이안이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 하나 남았소."

"...?"

엘리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안을 향한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짜증을 숨기지 않은 채였다.

용무가 끝났으니 여차하면 그냥 튀어 버리면 그만이라 여기는 게 분명했다.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핀드렐에게 받아야 할 빚이 남아있거든."

"빚이… 남으셨다고요?"

"궐련 스무 개쯤."

"궐…."

"하루면 만들 수 있다더니. 그게 도망칠 시간을 버는 거였더군."

이야기가 이어질 수록 앨리스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이안이 내민 손의 손가락을 까딱이며 덧붙였다.

"그놈을 다시 만나긴 어려울 것 같으니, 같은 아이나스인 당신이 갚으시오."

"...."

#263화

이제 더는 화도 나지 않는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던 앨리스가, 이윽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요정들이 슬슬 눈짓을 피하며 품을 뒤적였다.

곧 그들이 저마다 꺼내 든 작은 상자를 앨리스에게 던졌다.

앨리스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낚아채고는, 상자 하나를 골라 열었다. 그 안에 다른 보관함에서 꺼낸 궐련이 차곡차곡 채워졌다.

"...."

백금발인 요정 전사 하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앨리스가 궐련을 채우고 있는 저 보관함의 주인일 터였다. 하지만 앨리스는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나머지 보관함을 휙휙 던져 되돌려 줄 뿐이었다.

'자기 것도 있을 텐데. 이걸 또 삥을 뜯네.'

하여간, 귀쟁이들이란.

이안이 실소를 삼킬 찰나, 그에게도 보관함이 날아들었다.

얼굴을 노린 듯한 직선 궤적.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낸 이안이, 보란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호오…."

보관함의 재질이 은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안이 흡족한 얼굴로 뚜껑을 여는 사이.

"그간의 이자로 몇 개 더 넣었습니다. 이제 경과 가문 사이에는, 아무런 빚도 없는 겁니다."

앨리스가 강조하듯 덧붙였다.

개수 확인을 끝낸 이안이 다시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것도 맹세해 주면 되겠소?"

"…그럼 이만."

짜증스럽게 손짓한 앨리스가 말 머리를 돌렸다. 질렸다는 듯 이안을 바라보던 다른 요정들도 곧바로 그녀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다그닥- 다그닥-

요정 무리가 멀어졌다. 산길을 내려올 때보다 오히려 더 빠른 속도였다.

실소를 흘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이, 이내 다시 궐련함을 내려다보았다. 입가에 맺힌 미소가 절로 짙어졌다.

"이 귀한 걸 더 얻을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많이.

그가 궐련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요정들을 털어먹은 기념이었다. 심지어 핀드렐의 보관함에도 아직 궐련이 몇 대 남아 있었으니, 한 대 정도는 허비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새로 얻은 궐련은 핀드렐의 것보다 더 굵고 길었다. 물론 입에 문 순간 느껴진 향이나, 정보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효과는 다르지 않았다. 그저 더 오래 피울 수 있는 것일 뿐이리라.

"----!"

그때 앨리스의 고함이 메아리쳤다. 요정어였지만, 이안도 반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핀드렐을 향한 원초적인 쌍욕.

"저렇게 심한 말을…."

기분 좋게 중얼대며 은 브로치와 궐련함을 아공간에 던져 넣은 이안이, 비로소 마부석으로 몸을 돌렸다.

화륵-

궐련에 불이 붙었다. 이안은 약초 냄새 가득한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산길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드르륵-

등받이 아래쪽의 간이 창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이안이 연기를 토해내며 고개를 돌렸다.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필립의 얼굴과, 반대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엘리야의 얼굴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필립이 뭔가 말하기도 전에, 엘리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정과 도박을 해서 이기셨다고요? 심지어 그 아이나스와요? 정말 대단하세요. 요정은 감각이 예민하고 눈치가 빨라서, 도박을 아주 잘한다고 알고 있거든요."

연기를 한 모금 더 들이마시며 필립과 눈빛을 교환한 이안이, 이윽고 덤덤하게 내뱉었다.

"놀라워할 거 없어. 거짓말이니까."

"…네? 그럼, 지셨던 건가요?"

"아니. 전부 거짓말이란 얘기야."

"...?"

엘리야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필립이 헛웃음을 흘리는 가운데, 이안이 엘리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핀드렐 아이나스는 죽었거든. 오래 전에."

"…설마."

눈을 깜빡인 엘리야가, 제발 아니길 바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이나스 가문의 요정을 해치고, 인장을 빼앗아 도용한 데다 거짓 해명까지 하신 거란 말씀은… 아니시겠죠?"

"정확하네. 전부."

"맙소사… 아이나스가 어떤 가문인지는 알고 계세요?"

"잘 알지."

낮게 실소한 이안이 덧붙였다.

"그놈은 아무 이유도 없이 샬롯을 모욕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우릴 죽이려고 따라왔었으니까. 그야말로 아이나스 다운 짓거리였지."

여전히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던 엘리야가, 이윽고 탄식하듯 읊조렸다.

"그래서, 그냥 다 덮어씌워 버리신 거군요."

"뭐,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

엘리야가 입술만 달싹였다. 충격이 꽤 큰 모양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대부에 대한 환상 하나가 깨진 것인지도 몰랐다.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덕분에 평화롭게 해결됐잖아. 내가 사실대로 털어놨다면, 일단 수긍한 척 돌아간 뒤에 수십 명은 더 이끌고 돌아왔을 거다."

연기를 한 모금 더 깊이 마신 그가, 슬쩍 엘리야를 일별했다.

"그럼 저쪽을 다 죽여야 했겠지. 죽어줄 순 없잖아. 그럼 그 다음에는 아이나스 전체랑 싸워야 할 테고. 다른 가문과 그들과 연관된 인간들도 끼어들겠지. 우리는 그 과정에서 당연히, 범죄자로도 낙인찍히겠고. 안 그래?"

"…이른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거군요."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댔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이안이 풀썩 웃음 지었다.

"그렇게 포장할 수도 있겠네."

나 편하려고 한 일이지만. 어쨌든 여러 목숨도 살린 거니까.

이안은 허공에 연기를 기다랗게 뿜어냈다.

가능 불가능을 떠나, 운 나쁘게 엮인 이들까지 모조리 죽이게 되는 상황은 피하는 게 좋았다. 여긴 이미 제국 한복판이지 않은가.

"저야 나리께서 그러시는 게 새삼스럽진 않습니다만."

입맛만 다시고 있던 필립이 끼어든 건 그때였다.

"그래도 찬란한 여신의 이름까지 거신 건 과하셨습니다. 여신께선 부정과 거짓을 아주 싫어하셔요."

"그래…?"

이젠 성기사다운 말까지 다 하네.

코웃음을 친 이안이 궐련을 입가로 꼬나물었다.

"그럼 당사자랑 합의해 보도록 하지."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눈을 감은 그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하신다는군."

"하…."

헛웃음을 지은 필립이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용서하셨을 것 같아서, 할 말이 없군요."

"그럼 그건 왜 얻어내신 건가요?"

엘리야가 툭 덧붙였다. 이안이 다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입에 문 궐련을 응시하며, 엘리야가 말을 이었다.

"굳이 그러실 필요까진 없었잖아요. 잘못하면 거짓말이 들통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 반대야. 덕분에 내 이야기에 대한 의심이 싹 사라졌잖아. 거짓말을 거짓말로 덮은 거지."

엘리야를 돌아본 이안이 연기를 뿜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귀쟁이들이 자주 쓰는 방식이지. 이런 건 책에 적혀 있지 않을 테니, 알아 둬라."

"…나중에라도 들키게 되면요?"

엘리야가 되물었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그때 다시 고민하지 뭐."

아마도 안 들키겠지만.

속으로 덧붙이며, 이안은 당장 핀드렐을 찾아 변방으로 떠날 기세이던 앨리스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몰랐지만, 딱히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핀드렐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데다, 설사 놈의 시신을 찾아내더라도 이안의 소행으로 여기긴 어려울 테니까.

심지어 지금 변방은 온갖 마경으로 뒤덮여 난장판이지 않은가.

거기 발을 들인다면, 핀드렐의 행방이 아니라 본인의 생존을 더 걱정하게 될 터였다.

게다가 이안은, 핀드렐이 가문의 골칫덩이였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만에 하나 이안과의 연관성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여파가 크지는 않을 것이다. 귀쟁이들은 셈이 아주 빠르지 않던가.

체면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미 묻고 넘어간 일을 굳이 다시 들춰내 이안을 적으로 삼으려 하진 않을 터였다.

"정말이지, 대단하십니다. 나리."

필립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요정들을 속여 먹은 걸로도 모자라 물건까지 갈취한 인간은, 아마 나리가 유일할 겁니다."

이안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피식댔다.

"내 업적이 늘었군."

귀쟁이도 속인 거짓말쟁이 정도가 되려나.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칭호라고 내심 덧붙이며, 이안은 궐련의 연기를 폐부 깊숙이 음미했다.

"…바깥 세상에 대해 또 하나 배운 느낌이에요. 세상은 정말, 방심할 수 없는 곳이군요."

"이런 건 굳이 배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리. 도움이 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요."

비로소 이어진 엘리야의 감탄에, 필립이 차분하게 덧붙였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배우던 놈이.

코로 연기를 뿜은 이안이, 슬쩍 간이 창문 쪽으로 손을 내리뻗었다.

"술이나 한 병 더 줘 봐. 좋은 안주가 하나 더 생겼는데, 안 마실 수는 없으니까."

"예. 나리. 독한 걸로 드리겠습니다."

"저, 이안 님."

필립이 부스럭대는 사이 엘리야가 말했다. 이안이 돌아보자, 그녀가 서로 다른 색의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저도, 그 궐련을 한번 피워 보면 안 될까요? 요정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던-"

"안 돼."

이안이 정색하며 엘리야의 말을 잘랐다. 이어 필립이 내민 술병을 받아들며, 그가 덧붙였다.

"넌 절대 이런 거 배우지 마라. 네가 성인이라 해도 안 돼."

요정의 궐련은 오히려 몸에 좋았지만, 그런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이안은 엘리야가 품에 안듯이 든 두꺼운 마법서를 내려다보았다.

"그 책이나 읽어라. 쓸데없는 호기심 느끼지 말고."

"…네. 사실, 지금도 이 책의 내용이 제일 궁금하긴 해요."

엘리야가 선선히 대답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감사해요. 덕분에, 적어도 이틀은 즐겁겠어요."

이어진 말에 이안이 멈칫했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다시 엘리야를 돌아보았다.

"이틀이라고?"

"네. 사실, 읽을 게 필요했거든요. 책이 없으면 마음이 불안해져서요."

"아무리 그래도, 겨우 이틀?"

"…혹시, 그게 뭔가 문제가 되나요?"

엘리야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눈을 감으며 궐련의 연기를 들이마신 이안이,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간이 창문을 닫은 그가 술병의 마개를 열었다. 연기 섞인 한숨이 뒤를 이었다.

"며칠은 안 해도 될 줄 알았더니…."

입맛을 다신 이안이 술병을 들었다.

어쨌건 오늘은 이제 내내 마실 생각이었다. 중앙의 경치와, 이 약초 향 나는 궐련을 안주 삼아서.

***

페이든 경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제국의 푸른 하늘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지만 공기가 적당히 서늘했다. 어느새 완연한 가을이었다.

태양의 위치를 가늠한 페이든의 굵은 눈썹이 미미하게 좁아졌다.

"늦으시는군…."

뭔가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내심 읊조리는 그의 시선이 골목의 담벼락과 건물 너머, 높다랗게 이어진 지붕들을 훑으며 지나갔다.

이내, 저 멀리 그 모든 것보다 높이 솟은 첨탑들이 그의 검은 눈동자에 담겼다.

잠시 제도의 중심을 응시하던 그가, 걱정을 떨치듯 시선을 내렸다. 그가 선 음침한 골목의 전경이 비로소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

제도 곳곳에는 수많은 건물과 길이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일종의 도시의 맹점 같은 공간들이 여럿 존재했다.

범죄자들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때때로 은밀한 만남을 위해 찾는 장소. 이곳도 그중 하나였다.

여긴 폭이 적당히 좁고 한쪽 끝이 막혀 있어서, 마차를 한 대 거꾸로 밀어 넣기만 해도 길을 완전히 막을 수 있었다.

"…흠."

지금처럼.

페이든 경은 정차 중인 마차의 후면을 돌아보았다. 마차 앞에는 그의 종자인 쉘비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지금 이 골목으로 들어올 방법은 담벼락 사이로 드러난 건물들의 쪽문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혹은 하수구로 기어 나오거나.

하지만 하수구는 물론, 그 어떤 문도 열리지 않았다.

구석진 쓰레기 더미 사이의 쥐나 벌레를 제외하면, 두 발로 선 건 페이든 뿐이었다.

그가 초조함을 감추려 갑옷 이곳저곳을 휘휘 움직이는 사이.

끼이이-

마침내 저 건너편의 쪽문 하나가 열렸다. 뒤이어 무채색의 두건 망토를 눌러쓴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체구로 봐선 둘 다 여인이었다. 페이든의 눈에 비로소 안도와 걱정이 뒤섞이는 사이, 두 두건 여인이 쪽문의 좌우에 마주 보고 섰다.

곧 회색 두건을 눌러쓴 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선 두 여인보다 키가 컸지만, 체구는 마찬가지로 호리호리했다.

그녀는 다른 둘과 달리 곧바로 페이든을 향해 다가왔다.

"늦었군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경."

눌러쓴 두건 아래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번졌다.

자세를 바로 한 페이든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그저 조금 걱정했을 뿐입니다, 황…."

그의 입이 닫혔다. 여인이 검지를 펼친 손을 자신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댔기 때문이었다.

두건 아래로 드러난 얇고 긴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밖에선, 그렇게 부르지 않기로 했잖아요?"

"…죄송합니다. 공녀님."

"그래요. 그게 훨씬 듣기 좋군요."

두건 아래의 푸른 눈동자가 페이든을 마주 보았다. 페이든이 조금 놀란 듯 미간을 꿈틀대는 사이.

"준비는 다 됐겠죠?"

그녀가 페이든의 앞에 멈춰 서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페이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명하신 대로 준비를 끝마치긴 했습니다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제도를 떠나시는 건-"

"아버님을 만나 뵙고 온 길이에요. 그래서 늦었죠."

"...!"

이어진 말은 페이든의 숨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눈을 부릅뜬 그의 시선에, 공녀가 덧붙였다.

"아버님께서도 허락해 주셨고요. 미리 말하지 않아 미안해요. 경.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어요."

"윤허를… 받으셨습니까?"

"그럼요."

짧게 웃음 지은 공녀가, 페이든의 눈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근래 여러 번 제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을 직접 데려오겠다는데, 허락하지 않으실 리가요."

#264화

"장본인… 이라니요?"

되묻고는 멈칫한 페이든이, 이윽고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설마, 정말 그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요. 북부에서 두각을 드러낸 후로도, 수많은 업적과 혼란을 낳은 자."

두건 아래의 푸른 눈이 묘한 열망을 머금고 일렁였다.

"교단이 그 이름을 알리지 않으려 노력 중이지만, 어느새 제법 많은 이들이 이름을 알게 된. 새로운 성자로 임명될지도 모르는데도, 어째서인지 아직도 교단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은 자…."

혼잣말을 읊조리듯 내뱉은 공녀가 두건을 벗었다. 한데 곱게 묶은,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페이든이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바라보는 가운데.

"우리는 그를 만나러 갈 겁니다."

공녀가 확신하듯 말을 맺었다.

"하지만… 본래는, 서부로 가시겠다 하지 않으셨었습니까?"

화들짝 머리칼에서 시선을 뗀 페이든이 덧붙였다.

공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하지만 변방과 서부에 관심을 두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잖아요. 문득 이런 의문이 들더군요. 내가 직접 움직인다 해서 오라버니와 동생을 이길 수 있을까. 과연 아버님이 정말 바라시는 게, 우리끼리 서부나 변방을 두고 힘겨루기를 하는 걸까."

공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주 기품 있는. 하지만 동시에 어떤 묘한 권위를 가진 미소였다.

"그래서 관점을 조금 바꿔 봤죠. 그랬더니 이런 결론이 나오더군요. 이게 정답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허락을 받은 걸 보면, 가능성이 조금은 있지 않겠어요?"

"...."

페이든이 낮게 침음했다. 공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불안이 묻어났다.

"소문대로라면, 지금 그의 행적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분명, 아주 위험해지실 겁니다."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도, 페이든이 말을 이었다.

"머잖아 공녀께서 자리를 비우셨다는 걸 많은 이들이 알게 될 테니까요. 몇몇 분들은 경쟁자를 제거할 아주 좋은 기회라 여기실 겁니다. 가장 손쉬운 선택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건,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이를-."

"경의 생각처럼 오래 걸리지도, 멀리까지 가게 되지도 않을 겁니다."

말을 자르며 그에게로 고개를 기울인 공녀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그는 지금, 중앙에 있거든요."

"...!"

"바로 어제 들어온 보고서로 알게 된 사실이죠. 아직은 나를 포함해 교단의 극소수만이 알고 있어요."

"중앙의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까진 아직 몰라요. 하지만 그자라면 머지않아 어딘가에서 또 자신을 드러내겠죠. 그 소식은, 곧바로 나도 알게 될 거고요. 그리고 어차피…."

페이든을 응시하는 공녀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경이 날 지켜 줄 거잖아요?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물론입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경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우진 않을 거예요. 아스메도 함께 갈 거니까. 그러니, 염려는 거기까지만 해요."

슬며시 쪽문 앞의 여인들을 돌아보았던 페이든이, 이윽고 고개를 숙였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좋아요. 설레네요. 제도를 떠나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거든요."

상쾌하게 미소 지은 공녀가 두건 여인들을 돌아보았다.

한 명이 깊이 허리를 숙이는 가운데, 다른 한 명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걸었다.

비로소 공녀가 다시 페이든을 마주 보았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나눌까요?"

그제야 그녀를 이 냄새나고 음침한 골목에 너무 오래 세워 뒀다는 것을 깨달은 페이든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모시겠습니다."

***

"슬슬 마차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리."

마부석에 앉은 필립이 말했다.

마차 지붕 위에 반쯤 눕듯이 기대앉아 있던 이안이, 옆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한 모금만 더 마시고."

그가 고개를 젖히며 술병을 입에 댔다.

푸른 하늘이 그의 시야에 가득 찼다. 높게 흐르는 흰 구름보다 푸른색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더 많았다.

어제부터 볼 수 있게 된 광경.

적당히 선선하기까지 해서, 이렇게 지붕에 기대 누워 술을 축내기에도 딱 좋았다.

물론, 그저 시간만 죽인 건 아니었다. 야습조차 없이 보낸 지난 며칠은, 늘 머릿속을 오가던 생각들을 정리하기에도 좋은 환경이었다.

'중간중간 귀찮은 소일거리들이 있긴 했지만….'

이안은 비로소 상반신을 일으켰다. 곧게 뻗은 관도 너머, 낮게 이어진 장벽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 일대를 전부 감싸고 있을 터였다. 중앙에선 그리 드물지 않은 광경이기도 하리라.

문득 루 사드의 글루미르가 뇌리를 스쳤다. 이런 걸 따라 하려 한 것이었겠지.

이 세계가 게임이었다는 걸 다시금 떠올리게 하기에도 충분한 광경이었다.

어쨌든, 관도 끝의 활짝 열린 관문 너머가 보르타였다.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할 순간이 머지않은 것이다.

끼익-

몸을 숙여 마차 문을 연 이안이, 날렵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엘리야도, 지금은 허벅지에 펼쳐 놓은 책이 아니라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나타날 관문과 도시를 눈에 담고 싶은 것이리라.

그녀의 옆에 앉은 이안이 말했다.

"그 책, 잠깐 넣어두는 게 좋겠다."

"아. 그러네요. 이걸 보일 순 없겠어요."

엘리야가 냉큼 책을 덮어 내밀었다.

그녀가 벌써 반 이상을 읽었다는 걸 확인한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시며 마법서를 아공간에 던져 넣었다.

이걸 다 읽으면, 이제 이안의 수중에 남은 건 한 권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건 퀘스트의 카운트도 올라가고 있고, 엘리야 역시 이안이 지워 버린 부분들은 알아내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만.

'…읽을 게 다 떨어지면, 또 얘기가 달라질 것 같단 말이지.'

그 전에 관심을 돌리거나, 경각심을 무의식에 각인시킬 만한 예시가 필요했다.

정말, 마법사의 악몽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이안은 소리 없이 입맛을 다셨다.

이 빌어먹을 세상은, 정말이지 타락의 유혹이 너무 많았다.

물론, 그 모든 것을 대신 막아 줄 수 있으리란 오만한 생각까진 하지 않았다.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까지였다. 그러고도 끝내 엘리야가 흑마법에 빠져든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리라. 애초에 검은 벽을 연구하겠다는 그녀의 목표는, 그런 위험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다각- 다각-

창밖으로 관문이 가까워졌다.

경비병들의 표정도 느슨하고 문도 열려 있는 걸 보면, 사실상 검문을 하지 않는 지역인 모양이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여긴 중앙이고, 변방이나 북부, 심지어 내해와도 거리가 멀었으니까.

애초에 이 장벽은 내전의 시대나 전쟁의 시대에 지어졌을 터였다.

지금은 그저 영지를 구분하는 경계선에 불과하리라.

역시나, 마차는 정차조차 하지 않고 관문을 지나쳤다.

시선도 주지 않는 경비병이 보일 때쯤, 이안은 몸을 앞으로 뻗어 간이 창문을 두드렸다.

마차가 곧바로 멈췄다.

다시 의자에 걸터앉은 이안이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말 좀 묻겠소."

"음…?"

쩍 하고 하품을 하던 경비병이 느릿느릿 마차 옆으로 다가왔다.

이안이 창문 밖으로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순간 졸음이 가신 표정이 된 경비병이 그의 주먹 아래로 손을 내밀었다.

…사람 사는 동네는 다 똑같구만.

내심 읊조리며, 경비병의 손바닥 위에 쥐고 있던 은화 하나를 떨어뜨린 이안이 말했다.

"이 도시에 방주 상단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로 찾아가야 하오?"

"아, 도시로 가시려던 것이었. …이셨습니까?"

대답하며 이안을 눈에 담은 경비병이 뒤늦게 말을 올렸다.

그가 귀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지금 이안은 상당히 깔끔한 모습이었으니까.

물이 보일 때마다 씻은 건 물론이고, 엘리야가 그의 의복과 식사까지 도맡아준 덕분이었다.

"그렇소."

"찾는 건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얼마 전, 도시에 몇 없는 장원으로 이사했으니까요. 대로를 따라 내성 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간판을 발견할 수 있으실 겁니다."

살아 돌아온 정도가 아니라, 한몫도 단단히 챙긴 모양인데.

내심 웃음 지은 이안이 덧붙였다.

"상단주는 도시에 있소?"

"그럴 겁니다. …외부인이 도시에 들어가면 통행료를 내야 합니다만. 알렉에게 이미 지불했다고 말씀하시면, 그냥 통과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럼 덕 좀 보겠소. 알렉."

싱긋 미소 지은 경비병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평화로운 동네라 그런지 인심도 후했다.

슬쩍 마주 웃은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마차가 유유히 관문을 통과했다.

곧 보르타의 전경이 펼쳐졌다.

수확을 끝낸 포도밭. 저 멀리 밀밭과 풍차가 보였다. 심지어 드문드문 여러 개였다. 근처에 강이 흐르는 것이리라.

드르륵-

얼마 지나지 않아 간이 창문이 열렸다.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시가 보입니다, 나리. 생각보다 크네요."

이안을 돌아보는 눈빛이 반짝였다.

이제 제국의 도시에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변방 출신인 그에겐 매번 새로운 놀라움을 선사하는 모양이었다.

어쨌건 그의 말대로, 보르타는 제국의 대도시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어 보였다.

높다랗고 고풍스러운 성. 그 주위로 꽤 높다란 성벽이 한 겹 더 도시 안쪽을 두르고 있고, 그 밖으로도 크고 작은 지붕들이 이어졌다. 도시 외곽을 감싼 성벽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것이리라.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것 같은 동네들이 나오네.'

이안의 입매가 설핏 올라갔다. 변방은 물론이고 북부나 서부보다도 깨끗하고 화려한 도시였다.

모든 도시가 이런 식인 세상에 떨어졌다면, 조금은 삶이 덜 고달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관문과 이어진 성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저 옆의 성벽으로 다가가는 마차와 행인들이 모습이 보였다. 성문이 하나가 전부가 아닌 것이리라. 보르타는 여행객들이 한 번쯤은 거쳐 가는, 일종의 자유 도시인 모양이었다.

"통행료는 알렉에게 지불했소."

성문을 지키는 병사는 그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마차가 도시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이는 것만큼 번성한 도시였다. 수도 시설까지 존재하는 듯, 그다지 고약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거리를 오가는 다양한 인종의 행인들도 복장이 제법 깔끔했다. 절반쯤은 외부인 같았다.

"역시, 바깥세상은 넓네요."

창문 밖을 구경하던 엘리야가 중얼댔다. 하긴. 제대로 된 도시를 보는 건 처음일 터였다.

라클리프는 거대한 도시이긴 했지만, 반파되어 재건 중이지 않았던가.

이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도는 훨씬 더 클 거다."

"그렇겠죠. 거긴, 난쟁이를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여긴 인간과 요정뿐인 것 같거든요."

요정…? 생각하기가 무섭게, 이안은 인파 사이에서 요정을 발견했다. 생김새도 복장도 요정치고는 평범했다. 다소 거만해 보이는 표정은 여전했지만.

하긴. 여긴 중앙이지.

이안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내해나 숲과 이어진 도시가 아니라도, 정착한 요정 가문이 존재할 수도 있으리라.

"내가 알기로 난쟁이들은 죄 북부에 있지만…. 그래. 중앙에선 그래도 찾아볼 수 있을지도."

"난쟁이 남자들은 그렇게 온몸에 털이 덥수룩하다면서요. 궁금하네요. 정말 그런지."

"너랑은 여러모로 다를 거다. 너무 놀라지 마."

잡담을 나누는 사이, 대로를 나아가던 마차가 방향을 틀었다.

이유를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높다란 담벼락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저택을 열 개 정도는 지을 수 있을 법한 범위였다.

'매달 세금을 엄청나게 뜯기겠군.'

아까 알렉이라는 이름의 경비병이 말했듯, 두 번째 성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이런 장소에 이만한 부지 하나를 통째로 쓰다니. 변방에선 상상도 못할 광경이었다. 북부나 서부에서도, 물론.

'…어쨌든, 동네 장사는 아예 안 하는 모양인데.'

굳게 닫힌 대문 앞은 무장한 경호병 둘이 지키고 있었다.

마차가 대문 앞에 멈췄다. 필립이 경호병들을 향해 말했다.

"파엘 단주에게 전하시오. 고객이자 은인인, 이안 호프 경께서 방문하셨다고."

이젠 시키지 않아도 잘 한다니까.

이안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문을 열면서, 그가 엘리야를 돌아보았다.

"넌 여기 앉아 있다가, 필립이 문을 열어 주면 그때 내려라. 예법 정도는,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저를 어떻게 소개하실 건가요?"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잠시 멈칫한 이안이, 이윽고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의뢰인."

문을 닫은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굳게 닫힌 대문이 보였다. 그 앞, 홀로 남은 경호병도.

기다란 창과 가죽을 덧댄 방패. 그리고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반투르인이었다.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 근육이 우람했다.

'여기서 저렇게까지 중무장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안은 대문 양옆에 튀어나와 있는 간판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뿔처럼 곡선을 그리며 솟은 철제 골자 사이를 은으로 장식하고, 끝에 각기 커다란 배와 저울을 조각한 금속 장식물이 달려 있었다.

한쪽은 은으로, 한쪽은 금을 덧씌워 고급스러웠다.

이안은 중앙이라 해도 문맹률이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글자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끼이이-

커다란 대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제국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본 것중 가장 단출한 차림인 그가, 이안을 발견하고는 눈을 치켜떴다.

"루 솔라여…! 오면서도 반신반의했건만! 정말 경이셨군!"

다행이네. 북부의 초인 어쩌고 하면서 무릎부터 꿇을까 걱정했는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오랜만이오. 보르타의 파엘."

#265화

"오랜만이오! 하하, 이렇게 반가울 데가!"

소리치며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파엘이, 경호병에게 문을 활짝 열라 손짓하며 걸음을 옮겼다.

필립에게도 눈인사를 건네며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경과 나 사이에는 어떤 운명이라도 엮여 있는 모양이오. 며칠만 늦으셨어도 만나지 못할뻔했는데 말이오."

"또 상행이라도 준비하고 계셨나 보군."

"그보다 더 대단한 게 있소. 이렇게 사지 멀쩡하신 모습으로 다시 보니 좋소. 전에는 중요한 일이 있어 보이셨었는데. 무사히 잘 끝내신 모양이오."

"그렇다고 할 수 있소. 환대해 주시니 고맙군."

이안이 앞에 멈춰 선 파엘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파엘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상단 최고의 고객이자 은인이 방문하셨는데, 당연한 일 아니겠소? 안 그래도 꼭 다시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 주셔서 고맙소. 덕분에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겠군."

말투로 보아하니, 그저 전에 이안 일행이 그의 물건을 잔뜩 사준 것만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던 터라, 이안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기대되는군. 사양하지 않겠소."

파엘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어느새 대문이 활짝 열렸다. 슬쩍 몸을 옆으로 돌린 파엘이 그 너머를 향해 한 팔을 들었다.

"방주 상단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하오. 이안 경. 자, 이야기는 들어가면서 마저 나누도록 합시다."

싱긋 미소 지은 그가 몸을 돌렸다. 이안이 느긋하게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가운데, 재빨리 앞서 나간 파엘이 말과 나란히 걸으며 필립을 돌아보았다.

"오랜만이오, 필립 경."

"오랜만입니다. 파엘."

"곧 하인이 올 것이오. 말과 마차를 맡겨 주시오. 원하신다면, 머무실 곳까지 마차에 타고 계셔도 괜찮소."

"아닙니다. 그땐 내려서 함께 걷도록 하죠."

"그나저나, 아주 훌륭한 말이오. 마차나 끌기엔 아까운 혈통 같은데. 혹시-"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이안은 대문과 담벼락 너머로 드러난 전경을 눈에 담았다.

겉보기만큼이나 넓은 장원이었다. 판석을 깔아둔 길이 저 안까지 이어지고, 널찍한 정원과 마당이 펼쳐졌다.

저장고로 보이는 커다란 목조 건물들과 여러 채의 석조 저택들이 곳곳에 솟아 있었다. 처마 지붕까지 갖춘 제국식 건물이었다.

상단의 고용인과 하인으로 보이는 이들도 곳곳을 바쁘게 오갔다. 앞선 위험한 상행들의 성공이, 상단에 꽤 큰 부를 안겨준 게 분명했다.

"훌륭하군요. 저건, 포도주를 보관하는 건물들인가요?"

주위를 구경하던 필립이 말했다.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뿐만 아니라 치즈를 만드는 발효장도 여럿이오. 도시의 기술자들을 고용해서, 이제 전부 직접 만들고 있소. 귀하들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지. 아니었다면 애초에, 살아서 돌아올 수도 없었을지도 모르오."

"…변방의 상황이, 많이 좋지 않나 봅니다."

"말도 마시오. 아, 최근 변방이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시는 모양이군. 잠시 후에 자세히 알려 드리겠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네. 부디."

필립이 대답하는 가운데, 걸음을 늦춘 파엘이 다시 이안과 가까워졌다. 이안을 돌아본 그가 미소 지었다.

"조금 어수선해도 이해해 주시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지만, 움직일 준비를 시작한 참이어서 말이오."

"뭐, 활기 차서 좋군."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던 파엘이 덧붙였다.

"필립 경도, 그리고 이안 경도. 전에 우리에게서 사간 물건은 거의 착용하고 계시지 않으시군. 나름대로 엄선한 물건들이었는데. 험한 일을 많이 겪으신 모양이오."

"그만한 시간이 지나긴 했잖소?"

"…하긴. 이쪽도 많은 일이 있었으니, 경께서도 마찬가지이시겠지. 차근히 이야기 나눠 봅시다. 이렇게 방문까지 해 주셨는데, 설마 하루 묵지도 않고 떠나실 생각은 아니시리라 믿겠소."

파엘이 넌지시 덧붙였다. 눈빛을 보아하니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은 모양이었다.

피식한 이안이 되물었다.

"바쁘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소?"

"괜찮다마다. 덕분에, 이제 내가 직접 뛰어다닐 일은 줄어서 말이오. 그게 아니라도, 경은 내가 직접 대접해야 하지 않겠소?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신데."

파엘이 넉살 좋게 웃음 지으며 덧붙였다.

"혹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시오. 나름대로 이곳에선 자리를 잡고 있으니,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이오."

"그럼 보급품을 구매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직접 팔아 주신다면 더 좋고."

"어렵지 않지. 필요한 물품의 목록만 적어 주시오. 내 전부 구해드리리다. 물론, 원가로."

"그것도 사양하지 않겠소. 고객 관리가 철저하시군."

파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귀하께는 더한 것도 얼마든지- 아. 오는군. 빨리 여기 기사 나리께 고삐를 받으시게!"

시선을 돌린 파엘이 달려오는 하인에게 손짓하며 소리쳤다.

필립이 마차를 멈추는 가운데, 파엘이 자연스럽게 그 옆에 섰다.

이안도 앞서 가지 않고 기다렸다.

이렇게나 환대해 주는데, 이쪽도 예의를 차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곧 마부석에서 내린 필립이 마차 문을 열었다. 엘리야가 기다렸다는 듯 마차에서 내렸다. 안에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던 듯 한결 단정해진 모습이었다.

그녀를 눈에 담은 파엘이 놀란 표정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일행이자 의뢰인이시오. 실례를 무릅쓰고 동행했소."

"실례라니. 당연히 전에 뵌 분들이 나오실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놀랐을 뿐이오."

파엘의 대답을 들으며, 이안이 엘리야를 돌아보았다. 엘리야가 정중하게 무릎을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리야 마이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작은 상단을 운영 중인 파엘입니다. 이안 경의 일행이시라면 내게도 귀빈이시니, 지내시는 동안 불편함 없도록 모시겠습니다."

파엘이 정중하게 마주 인사했다. 엘리야가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사려 깊고 친절하시네요. 들은 대로."

"이안 경이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것 같지는 않고. 필립 경께서 저에 대해 좋은 말씀을 해주셨나 봅니다. 하하."

파엘의 너스레에, 어느새 엘리야의 뒤에 선 필립이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파엘이 엘리야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무례를 저지르려는 의도는 아닙니다만, 영애께선 제가 본 난쟁이 중에 가장 예의 바른 분이십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단주님."

"가정 교육을 잘 받은 덕분이지."

엘리야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가운데, 이안이 저도 모르게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덧붙였다.

파엘이 조금 놀란 듯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혹, 귀족 가의 영애이십니까? 제가 견문이 좁아, 난쟁이 가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많지 않아서요."

"예. 비록 몰락한 가문이긴 합니다만. 조부께서 한때, 북부의 명인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엘리야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도 모르게 그녀를 슬쩍 돌아보았던 이안이 이내 웃음을 삼켰다.

'그런 설정이었구만….'

아르케아스가 준비해 준 가짜 신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그녀의 표정이나 말투에선 평소의 조금은 얼빠진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에 나올 준비를 착실하게 해 왔던 게 분명했다. 아마 다른 용의 아이들도 이런 식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리라.

파엘이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러셨군요. 해서, 이안 경과 함께 북부로 돌아가는 길이셨습니까?"

"아뇨. 제도로 가고 있어요. 이안 경은 거기까지 저를 호위해 주고 계시고요."

"호오… 그렇습니까…?"

이안을 돌아보는 파엘의 입가에 더 진한 미소가 맺혔다.

"본래도 반가웠는데 더 반가워지는군요. 정말 여신의 인도라도 받는 듯한 느낌입니다."

또 뭔가 있나.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파엘이 덧붙였다.

"경, 식사는 하셨소?"

"아직 식전이오."

"잘 됐군. 곧바로 식사를 준비하라 이르겠소."

이안은 식재료만 준비해달라는 말을 꾹 삼켰다.

물론 엘리야가 이곳의 요리사들보다 음식 솜씨가 좋으리란 건 분명했지만. 귀족 가문의 영애라고 자신을 밝힌 이상 부엌에 들일 수는 없었다.

파엘이 덧붙인 건 그때였다.

"훌륭한 술도. 경과는 그래야 오래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잖소?"

역시, 뭔가 있긴 하네.

내심 읊조린 이안이 미소 지었다.

"이래서 구면이 좋은 모양이오."

웃음 지은 파엘이 몸을 돌렸다.

하인이 탄 마차가 옆으로 빠지는 가운데, 그들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파엘의 걸음은 조금 느려진 상태였다. 엘리야를 배려하는 것이리라. 곧 자연스럽게 이안과 나란히 걸으며, 파엘이 문득 목소리를 낮췄다.

"한데,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신 것이오? …아, 이런. 혹시-"

"조심스러워 하실 필요 없소."

순간 굳어진 파엘의 안색에, 짧게 웃음 지은 이안이 덧붙였다.

"다들 각자의 길로 흩어진 것뿐이오. 무사히."

"다행이오. 말을 하고 나서도 내심 아차 싶던 참이었는데. 보르가 있었다면 분명 한 소리 들었을 것이오."

파엘이 웃으면서도 손바닥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게. 귀하야 말로 늘 붙어 다니던 이가 안 보이는군. 상행 중에만 늘 붙어 다니시는 거였소?"

"아, 보르는…."

파엘의 낯이 살짝 굳어졌다. 눈빛이 가라앉은 건 아주 잠깐이었다. 다시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그가 덧붙였다.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다시 나눕시다. 모든 이야기에는 순서라는 게 있는 법 아니겠소. 지금은 누가 뭐래도 경이 우선이오. 자, 이곳이 여러분들이 머무실 집이오."

말을 돌리듯 덧붙인 파엘이 필립과 엘리야를 돌아보며 양팔을 들었다. 이안도 그가 가리키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2층 높이의 주택이었다. 저 안에 더 큰 저택이 있는 걸 보면, 여긴 일종의 별채인 모양이었다. 위에서 보면 마당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아까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병이 이 별채의 문 앞에 서 있었다. 파엘의 시선을 받은 그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귀빈들을 모실 때 쓰려고 지은 집이오. 첫 손님이 이안 경이시라니 더 뜻깊군. 그럼 식사는…."

"여기서 하겠소."

이안이 현관으로 들어가며 대답했다. 파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러겠소. 침실은 위층이니, 짐을 풀고 쉬고 계시오. 잠깐이면 될 것이오. 못다 한 이야기는, 식사 중에 다시 나눕시다."

경호병에게 손짓한 파엘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보아하니 식사 준비를 직접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문을 닫으며 필립이 읊조렸다.

"손님 대접이 정말 훌륭하군요. 재산을 꽤 불린 것 같은데도 저러는 걸 보면, 정말 대상이라도 될 재목인가 봅니다."

"그냥 손님이라서만은 아닐 걸."

이안이 걸음을 옮기며 읊조렸다. 필립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럼, 뭔가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겸사겸사겠지. 아마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이안은 계단에 발을 들였다. 저 상인이 또 어떤 죽을 자리를 찾은 건지는, 어차피 곧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될 터였다.

***

식사는 1층의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이안 일행과 파엘, 넷이서만 함께하는 자리였다. 하인들조차 음식과 술을 대절한 뒤에는 전부 자리를 비웠다.

이안은 파엘의 속내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내밀한 이야기들을 마음 편하게 나누고 싶은 것이리라.

"음식이 입에 맞으시는 것 같아 다행이오."

일행이 어느 정도 접시를 비우자, 파엘이 안도한 듯 말했다. 이안은 고기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맛이오."

물론 엘리야의 음식을 처음 맛봤을 때만큼의 감동은 없었지만. 어쨌건 꽤 훌륭한 음식이었다.

게다가 한동안은 또 보존 식량만 먹지 않았던가. 엘리야의 손맛이 더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태생적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포도주가 특히 훌륭하군요. 저번에 선물해 주신 것도 대단했지만. 이건 그보다도 더 맛이 깊습니다."

필립이 술을 홀짝이며 덧붙였다. 이안도 술잔을 드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슬며시 엘리야를 일별한 채였다.

그녀 역시 술을 홀짝홀짝 마셔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꽤 독할 텐데도 안색조차 변하지 않은 채였다.

하긴. 어쨌건 그녀는 난쟁이였다. 이안은 지금까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난쟁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올해 나온 것 중 가장 좋은 술이오. 마음껏 드시오. 아직 잔뜩 남아 있으니."

너털웃음을 지은 파엘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덧붙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지역의 포도주는 특히 맛이 좋기로 유명한 편이오. 테센이나 그나마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할 수 있소. 물론, 우리가 한 수 위지만."

"그럼 이젠, 독보적인 위치가 됐군요."

묘한 표정으로 말한 필립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파엘이 눈을 끔뻑였다.

"설마, 서부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오?"

"소문이 어떻게 퍼졌소?"

그의 시선을 받은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파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부의 지배자였던 크랄렌 공작이 마족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소."

"그리고?"

"교단의 정화대가 북부의 초인에게 도움을 청했고, 힘을 합쳐 물리쳤다던데. 그 과정에서 어쨌든 서부가 쑥대밭이 되었고 말이오. 일단 내가 들은 건 이 정도요.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아마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오."

"호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르타는 비교적 서부와 멀지 않은 곳이지만, 소문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라클리프를 떠난 이들은 죄다 배를 타지 않았던가.

내해와 강을 낀 도시들부터 알음알음 자세한 이야기가 번지고 있으리라. 물론, 제도는 지금쯤 발칵 뒤집혀 있겠지만.

필립과 엘리야가 슬며시 이안의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일행들의 표정을 본 파엘이 물었다.

"뭔가 아시는 게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여러분들은 어디서 오시는 길이시오?"

#266화

"그 근처에 있었지."

"...!"

파엘이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덧붙였다.

"용병에게 의뢰와 관련된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거요."

뭔가 더 물으려던 파엘이, 그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움찔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곧 다시 술잔을 쥐며 말했다.

"어쨌든, 소문은 거의 다 사실일 것이오. 올해부터 귀하는 포도주를 더 비싸게 파실 수 있겠지."

"…그렇군."

굳어 있던 파엘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술잔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던 그가 읊조렸다.

"북부의 변화를 보면서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긴 했소만. 생각보다 더 빠르게 현실이 되고 있는 모양이오. 하긴… 변방이 그리되었다는데. 제국이라고 영원히 안전할 순 없겠지."

필립의 시선이 곧바로 파엘에게로 돌아갔다. 쥐고 있던 포크를 놓은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변방은 어떤 상태입니까?"

그의 눈빛이 진지해진 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메브가 다시 변방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지 않던가.

이안은 게임에서의 기억으로 짐작하고 있지만, 필립은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파엘이 입맛을 다시고는 입을 열었다.

"최악이라고 들었소. 마경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있다더군. 흉지가 아닌 곳을 찾는 게 더 어렵고, 본 적도 없는 마물들이 뒤틀린 숲과 계곡을 활보하며 사람들을 산 채로 씹어 먹는다고 말이오."

"...."

"왕국들도 전쟁을 멈췄다더군. 사실, 전쟁을 계속할 상황도 아닐 것이오. 그런데도 변경 지역에는 매일 같이 밀입국한 자들이 붙잡히고 있다고 들었소. 많은 이들이 목숨 걸고 국경을 넘어, 스스로 노역 형을 택하고 있는 것이오."

"…차라리 용기 있는 이들일지도 모르죠.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리느니, 도전을 택한 거니까요."

필립이 읊조렸다. 여러 생각이 오가는 듯, 술잔을 응시하는 눈빛이 음울하게 일렁였다.

쓴웃음을 흘린 파엘이 덧붙였다.

"두 분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나도 그 한복판에 휩쓸리고 말았을 것이오. 나뿐만 아니라 함께하던 수많은 이들도."

다시 말없이 음식을 우물대고 있던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결국, 오른델까지 가지는 않으셨었나 보군."

"그렇소. 벨 론데 국경 인근까지만 들어갔었지. 그리고 그때쯤엔 이미 많은 이들이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소. 주민들조차 검은 벽의 광기가 변방을 물들이고 있다고 수군댔으니 말이오."

술잔을 턱 아래로 든 파엘의 눈빛이 깊어졌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때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한 모양이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날 밤. 하늘에서 심상치 않은 벼락이 여러 번 쳤소. 비도 오지 않았는데, 하늘이 쪼개지는 것 같았지.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소."

흡혈 여제를 죽였을 때인가. 어쩌면 균열 사이로 뭔가 넘어왔을 때일지도.

이안은 내심 생각하며 식사를 이어 나갔다.

아직도 음식을 먹고 있는 건 그뿐이었다. 필립은 진작 입맛이 떨어진 듯 술잔만 들고 있었고. 엘리야는 흥미로워하는 눈빛으로 파엘의 입만 바라보았다.

포도주로 입술을 축인 파엘이 덧붙였다.

"보르가 이제는 결정을 내릴 때라고 재촉하더군. 그래서 그렇게 했소. 행렬을 돌려 다시 되돌아 나가기로 했지. 하지만 모든 상단이 동의하진 않았소. 몇몇은 오히려 아겔 란까지 반드시 가야겠다고 주장했지."

"돌아가는 상단이 더 많을 테니, 그만큼 물건을 비싼 값에 팔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군요."

엘리야가 덧붙였다.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다못해 벨 론데에도 아직 남은 도시가 여럿 있었습니다. 그 인근의 상황은 아주 어지러워서, 평소보다 더 큰 이문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유혹을 이기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무리가 둘로 쪼개졌습니까?"

필립이 물었다. 파엘이 씁쓸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됐소. 나와 함께 돌아가기로 한 이들이 훨씬 더 많긴 했소만. 어쨌든, 그래서 내 뜻에 동의해준 상인들에게 돌아가는 길의 거래를 전부 양보했소. 내 결정 때문에 모두에게 손해를 끼칠 수는 없잖소."

"…상단의 규모를 이렇게까지 키운 이야기라기엔, 계속 손해만 보고 계신 것 같은데."

옅은 실소를 흘린 이안이 고기를 한 점 더 입에 넣으며 말했다.

파엘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대신 우리 상단은 북부로 향하기로 했소. 변방에서의 거래를 양보한 대신, 다른 상단들의 보급 물자를 싸게 잔뜩 양도받았지. 그들 중에는 북부의 출입이 금지된 이들도 있었으니, 좋은 거래였던 셈이오."

"아하…."

이안이 다시 한번 웃음 지었다.

기어코 북부를 다시 갔군.

하긴. 달리 뾰족한 수가 있진 않았을 터였다. 그대로 돌아간다면 손해만 보고 끝났을 테니까.

이안이 알기로 그건, 파엘이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일이었다.

"사실 거의 울며 겨자 먹기나 다름없었소만. 북부에 들어서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소. 검은 벽이 심상치 않은 상태라지 않겠소."

"검은 벽이요…?"

엘리야가 눈을 치켜떴다. 재빨리 자세를 고쳐 앉은 그녀가 덧붙였다.

"정확히 어떻게 심상치 않다던가요?"

"불안정하다고 하더군요. 직접 본 건 아닙니다. 카링기온을 비롯한 최전선의 요새들은, 이미 민간의 접근이 금지된 상태였습니다."

파엘은 엘리야의 반응에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북부 군단은 거의 다 검은 벽 인근에 주둔 중인 것 같았습니다. 아마 동부 전선도 비슷한 상태일 거고. 아래쪽 사막 요새들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겠지요."

"…침식을 대비하는 거군요. 검은 벽이 그 너머의 괴물들을 불러들이고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엘리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평소의 조금은 어리숙해 보이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지하게 현상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학자의 얼굴. 그녀가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며 읊조렸다.

"어쩌면 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도 검은 벽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그 반대이거나요. 변방에 뿌리내린 광기가 검은 벽을 자극하고 있는 거예요."

똑똑하네. 그런 얘긴 해 준 적도 없는데.

이안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했다.

검은 벽은 그가 북부를 떠날 때 이미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흡혈 여제가 죽으며 만들어 낸 균열이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이리라.

어쩌면 서부의 의식이 타락자들이 원치 않은 순간에 시작된 것도 그 영향을 받은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다시 검은 벽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겠지. 모든 게 연결된, 일종의 악순환의 고리인 셈이었다.

'난 그걸 알면서도 굴리고 있고.'

이안의 입가에 옅은 쓴웃음이 스쳤다. 물론 그 사실이 새삼스럽거나 공교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퀘스트들을 해결해 나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어차피,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터였다.

그저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리라.

거기 무력하게 휩쓸리느니, 지금처럼 발버둥이라도 쳐야 했다.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걸 아는 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술잔을 다시 입에 가져가던 이안은, 필립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필립이 짧게 헛기침하며 술잔을 들었다.

보아하니 저 녀석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해 온 모든 일이 오히려 검은 벽을 자극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이런, 제가 말이 너무 많았군요. 죄송해요."

혼잣말처럼 중얼대던 엘리야가, 뒤늦게 주위가 조용해진 것을 깨달은 듯 말했다. 파엘이 아니라는 듯 술잔을 드는 가운데, 그녀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래서요? 그 뒤엔 어떻게 됐나요?"

"덕분에 물건들을 비싸게 팔 수 있었습니다. 영애께선 모르시겠지만, 그때 제가 가지고 있던 물건은 대부분 제국제 병장기였으니까요. 거기다 술과 치즈도 잔뜩 있었죠. 전부, 전선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파엘이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물건을 다 정리하고 보니, 평소의 배가 넘는 이득을 봤더군요. 추가적인 일정으로 생긴 손해를 전부 메꾸고 나서도요. 이것도 어떤 의미에선…."

파엘의 시선이 다시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경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소. 이미 그 전에 자치령 수비군에 물자를 납품한 이력이 있어서, 거래가 더 원활해졌었으니."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편하게 쉬다 가도 될 것 같소. 술과 고기도 마음껏 축내면서 말이오."

접시를 깨끗이 비운 이안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파엘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당연한 말씀을. 말씀드리지 않았소. 한 가지 아쉬운 건…."

문득 짧게 입맛을 다신 파엘이 덧붙였다.

"나름대로 노력해 봤지만, 끝내 용살자의 이름을 알아내지는 못했다는 부분이오."

필립과 엘리야가 또 한 번 동시에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들과 달리 태연하게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내뱉었다.

"아쉬우시겠군. 궁금해하셨는데."

"당연한 말씀을. 다들 그 얘기만 하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어 버리더군. 사실… 음. 민망한 이야기지만, 이실직고하겠소."

짧게 헛기침한 파엘이 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피고는 덧붙였다.

"우리는 경이 북부의 초인과 연이 닿아 있으리라 추측했소. 해서, 경의 이름도 언급했었지."

"내 이름을…?"

이안이 슬며시 한쪽 눈썹을 말아 올리며 되물었다. 그의 표정을 오해한 듯, 파엘이 고개를 숙였다.

"사과드리겠소. 그저, 내가 경과 친분이 있는 사이라 했을 뿐이오."

"…아니오. 어쨌든, 결과가 좋지는 않으셨나 보군."

"북부인들은 경을 안다고 하면 화색이 되었소만. 해서 북부의 초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표정이 요상해지더군. 그리고는 곧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소. 다들 더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더군."

"...."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던 필립이 황급히 술잔으로 입을 가렸다. 이안의 입가에도 헛웃음이 스쳤다.

북부인들이 기분이 상한 건, 파엘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 여겨서일 터였다. 어쩌면 모욕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몰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용살자의 이름을 대면서 용살자가 누구냐고 물었으니.

다시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듯 입맛을 다신 파엘이 덧붙였다.

"그리고 그날 밤에, 웬 무뢰배들이 숙소로 들이닥쳤소. 용살자의 전사들이라는 이름의 용병단이었지. 혹시 아시오?"

"뭐, 이름 정도는."

"말이 용병단이지, 사실상 자경단이나 다름없는 작자들이오. 거의 북부 전체에 세력을 뻗치고 있다더군. 혹 북부에 갈 일이 있다면, 경도 조심하시오."

이안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 새끼들이, 골목대장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이지.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파엘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자들의 우두머리가 말하길, 앞으로 북부에서 계속 거래를 하고 싶거든 입을 조심하라더군. 금방 들통날 거짓말 같은 건 하지 말고, 북부의 초인에 대해서 캐내려 하지도 말라고 말이오."

"그래서,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소?"

"날붙이를 들고 와서 윽박지르는 데 별수 있겠소. 거짓말 같은 건 한 적 없다고 했더니, 코웃음을 치며 돌아가더군. 그래서 뭐, 그 뒤론 어디서 말도 꺼낼 수가 없었소. 대체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건지는 아직도 의문이오."

쩝 입맛을 다신 파엘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혹시, 짐작 가는 부분이라도 있으시오?"

"글쎄…."

그냥 사실대로 알려 줄까, 순간 고민한 이안은 이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자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알게 될 사실이긴 했지만, 지금 말했다가 따라오게 될 온갖 요란스러운 반응과 질문들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조용히, 떠돌이 용병 이안 호프로 지내고 싶었다.

술잔을 마저 비운 이안이 술병을 집어 들며 내뱉었다.

"어쨌든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상관없잖소."

"그건 그렇소. 거래가 끊긴 것도 아니고. 남아도는 모피를 잔뜩 헐값에 사서 이중으로 이문까지 남길 수 있게 됐지. 그러니 돌아오는 길에 변방의 상황을 전해 들었을 땐, 얼마나 등골이 서늘했겠소."

"제게 알려 주신 변방의 소식을, 그때 들으신 거군요."

필립이 덧붙였다. 변방의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은 것이리라.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변방 깊이 들어갔던 상단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소. 단 하나도. 생사조차 알려지지 않았지. 설사 누군가 살아 있다 해도, 변방 깊은 곳에 고립되어 있을 것이오."

잠시 말을 멈춘 파엘이 이안과 필립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이안 경과 필립 경, 두 분께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겠소. 두 분은 수백 명을 살린 것이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고."

"감사는 기꺼이 받겠소만. 결국은 귀하의 공이 가장 클 것이오. 결정은 귀하가 내린 거잖소."

이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필립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엘이 쓴웃음처럼 느껴지는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하지만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랄 것이오.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돈을 번 것뿐 아니라, 숙원까지 이루게 되었으니까."

"숙원이라니요?"

필립이 되물었다. 파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상행에서 살아남은 상단들끼리 뭉치게 됐소. 아직 이름도 정해지지 않았소만. 일종의 동맹이 만들어진 것이오."

#267화

필립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상인들은 이미 서로 긴밀한 관계로 이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요."

"외부인이 보기엔 그럴 것이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소. 타지에 나왔으니 일시적으로 적대하지 않는 것일 뿐. 제국의 거대 상단들 부터가 틈만 나면 서로를 견제하고 거래를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 아래가 어떻게 뭉칠 수 있었겠소."

이안에게 술병을 받아 든 파엘이 말을 이었다.

"본래도 저번 상행이 끝나면 논의해 보기로 했던 문제였소. 물론, 확신하진 못했었지. 다들 거대 상단의 눈치를 보기 바빠서 말이오. 하지만 변방의 일을 겪으며 다들 생각을 달리 먹었더군."

잔에 술을 따르며, 그가 필립을 돌아보았다.

"상인은 그 누구보다 변화에 민감한 족속들이오. 다들 뭉치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 오리라 예감한 것이겠지."

"…하긴.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인다면 장점이 많겠군요. 거대 상단에 휘둘리게 될 일도 줄어들 테고요."

"바로 그렇소. 각자의 이름은 유지하되,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서로를 지키는 관계가 될 것이오. 말 그대로의 동맹이지."

파엘이 미소 지으며 술병을 내려놓았다. 분명 기쁜 일일 텐데, 묘하게 꾸며낸 듯한 미소였다.

술잔을 든 채 그를 바라보던 이안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상단 동맹 같은 건, 게임에서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파엘이 진작 죽어버렸을 테니 당연한 걸지도 몰랐지만. 그와 비슷한 단체도 본 기억이 없었다.

중반부 이후로 그가 만난 제국 상인들은 죄다 소위 거대 상단의 깃발을 건 자들뿐이었다.

상단 마다 주력으로 취급하는 물품은 달랐지만, 더럽게 비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며칠 뒤에 도시를 떠나신다는 게, 그 동맹 때문이시군."

"그렇소. 첫 회담이 예정되어 있지. 단체의 이름과 규칙을 정하고, 대표자도 선출하게 될 것이오. 그 밖에도 조율할 부분들이 잔뜩 남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시작은 할 수 있게 되겠지. 오래 염원해 온 순간이오… 그런데…."

읊조리듯 말을 맺으며, 파엘의 시선이 잔에 담긴 포도주의 표면을 훑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그걸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르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오?"

"...!"

파엘이 홱 고개를 들어 이안을 바라보았다. 필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히는 가운데, 잠시 이안과 눈빛을 교환한 파엘이 탄식하듯 읊조렸다.

"어떻게 아셨소?"

"눈치껏."

"이런… 내색하지 않았다고 여겼건만. 이안 경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나 보오."

티가 줄줄 나던데.

이안은 속으로만 읊조리며 어깨를 까딱였다.

굳이 이런 걸 물은 건, 퀘스트의 냄새가 나서였다. 정보를 많이 얻었고 손님 대접까지 융숭하게 받고 있으니, 먼저 화두를 던지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그것이…. 다 나 때문이오."

한숨을 내쉰 파엘이,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상단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그 친구를 비롯한 여럿을 전령으로 잔뜩 부려 먹었소. 마지막으로 회담을 잡을 서신을 보내려는데, 보르가 느낌이 좋지 않다고 하더군. 최근에 너무 눈에 띄게 나대고 다녔다고 말이오. 며칠 기다렸다가 은밀하게 움직이고 싶댔소."

거, 서론 좀 생략하지.

내심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핀잔 대신 술만 한 모금 더 마셨다.

자신의 술잔을 내려다보는 파엘의 얼굴에 자책과 근심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더는 감출 수 없다는 듯이.

"나는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말라고 했소. 자네는 북부인답지 않게 겁이 너무 많다고. 사실, 내 욕심 때문이었소. 조급하고 시야가 좁아졌던 것이오. 물론, 안일했고. 보르는 내 명령에 따랐소. 늘 그렇듯이 투덜대면서도. 그리고 돌아와야 할 때에 돌아오지 않았지."

자책하듯 이를 악물었던 그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그제야 느낌이 좋지 않아지더군. 그리고 보르는, 다음날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소. 혼자, 말도 없이 맨몸으로.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말이오."

"습격이라도 당한 겁니까? 중앙에서요…?"

필립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파엘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도를 위장한 용병이었을 것이오. 싸우기 직전에 그랬다더군. 네 목은 분수를 모르는 네 주인에게 보내질 거라고."

"…대형 상단에서 손을 쓴 거겠군요."

"아마도. 천칭. 고리. 모루. 어디든, 눈치를 채고 막으려 한 것이겠지. 중소 상단들이 뭉친다면 그들에게도 문제가 될 테니까. 내가 주동자라는 것도 알고 있는 게 틀림없소."

이안이 술잔을 집어 들며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 친구가 일개 용병들에게 당하는 건 별로 상상이 되지 않는데."

"평범한 자들이 아니었댔소. 눈이 마물처럼 불길하게 번들대고, 이상할 정도로 강하고 빨랐다더군."

"눈이 번들거리고, 강하고 빨랐다고요…?"

되묻는 필립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이안이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결국 살아 돌아오긴 했는데도 여전히 걱정하시는 걸 보면.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군."

"며칠이면 털고 일어날 줄 알았소만. 아니었소. 오히려 더 좋지 않아지고 있지. 상처가 썩어들어가듯이 검게 변하더군."

"일반적인 상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주가 깃든 게 분명해요."

필립이 굳은 얼굴로 내뱉었다. 아마 떠오르는 기억이 있는 것이리라. 파엘이 취기가 오르는 듯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해서 도시의 사제님께 기도를 부탁드리기도 했었지. 효과가 없었소. 성물이라도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소만. 이 도시에 그런 귀한 물건은 없어서 말이오. 신의 사도나 뛰어난 마법사를 아는 것도 아니고."

"...."

필립의 시선이 다시 한번 이안에게로 돌아오는 가운데,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마침내 퀘스트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상단의 동반자. 완료 조건을 확인한 이안의 눈매가 조금 더 가늘어졌다.

'…또 분기점인가?'

보르가 죽어도 완료되는 퀘스트였기 때문이다. 죽건 살건 보상은 경험치와 물음표 하나로 똑같았다.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연계 퀘스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었다. 아마도 보르의 생사여부에 따라 다른 퀘스트가 이어지리라.

술잔에 다시 술을 따르며, 그제야 일행의 표정을 다시 확인한 파엘이 입을 열었다.

"이런, 내가 분위기를 다 망쳤군. 사과드리겠소. 아무래도 좀 취한 모양이오. 염려하지 마시오. 보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될 테니까."

억지로 지은 게 분명한 미소를 입가에 그린 그가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그래서 이미 옆 도시인 프렌신에 사람을 보내 두었소. 거긴 성물을 소유한 주교님이 있으시다고 들어서 말이오. 늦어도 다음 주면 그 분이 오실 테고, 내가 회담을 끝내고 돌아올 때쯤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이미 알고 계시잖소?"

이안이 툭 내뱉었다. 파엘이 정곡을 찔린 듯 굳어지는 가운데, 그가 말을 이었다.

"벌써 제법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보르가 아무리 북부의 강인한 전사라도, 그때까지 버티는 건 쉽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까… 한시라도 빨리 해결하는 게 낫겠지."

"...!?"

파엘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술잔에 가득 찬 포도주가 넘쳐 흐르고 있었지만, 술병을 치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였다. 이안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설마…?"

"공교롭게도 이 자리에는, 기초적인 의료 지식을 갖춘 사람은 물론이고 성물의 소유자와 찬란한 여신의 사도도 함께하고 있어서 말이오."

파엘의 입이 벌어지는 가운데, 필립은 물론 엘리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의료 지식을 갖춘 사람이 본인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이 세계의 의술이란 건, 믿을 만한 게 못 되던데.'

이안이 내심 실소를 삼킬 찰나, 석상처럼 굳어져 있던 파엘이 이윽고 입술을 달싹였다.

"이안 경, 찬란한 여신의 사도셨습니까…?"

경악한 동시에, 어느 정도는 납득하는 듯한 묘한 말투였다.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아니오."

"그럼…?"

이안의 시선을 따라 고개만 돌린 파엘이 더 크게 눈을 치켜 떴다.

"필립 경이?! 필립 경, 성기사셨습니까?"

"아직 대교회에서 서임 의식을 치르지는 않았습니다만. 계시를 받은 사도인 것은 사실입니다."

"허, 허어…."

필립의 대답에 파엘이 헐떡이듯 탄식했다.

저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콧김을 뿜은 것도 잠시, 이안은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가 특별한 경우일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락자와 마찬가지로 신의 사도도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애초에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기도 하지만, 대부분 어딘가에 소속되어 각자의 전선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주친다 해도 스스로 밝히지 않는 이상 알아볼 수도 없을 터였다.

술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덧붙였다.

"말 나온 김에, 바로 보러 갑시다."

"이, 이렇게 바로 말씀이시오…?"

파엘이 여전히 놀람을 추스르지 못한 얼굴로 되물었다. 상대적으로 평온하게 필립과 엘리야를 일별한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만취하기 전에 환자를 보러 가야 하지 않겠소. 보르와 안면이 없는 것도 아닌데. 치료부터 끝내고 마음 편하게 마시고 싶군."

말과 달리 술잔에 남아 있던 술을 전부 들이켠 이안이 일어섰다.

"안내하시오. 술상도 새로 준비해 두라 이르시고."

"아, 알겠소…!"

술이 확 깬 얼굴이 된 파엘이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

보르의 거처는 파엘의 저택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었다. 북부식으로 지은 단층집. 제국식 건물들이 즐비한 장원 한복판에 야인 정착지에서나 볼법한 목조 저택이 놓여있는 광경은 꽤 전위적이었다.

아마 보르가 요구했을 터였다. 파엘은 전체적인 조화를 해칠 것을 알면서도 들어주었겠고.

"확실히… 저주 같군."

보르의 침실에 들어선 이안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읊조렸다. 뒤따라 들어온 엘리야도 동글동글한 코를 슬쩍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느껴져요."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에도 은은한 광택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쳐서 더 어두운 방 안은, 냄새뿐만 아니라 오염된 마력이 풍기는 특유의 음산함이 감돌았다.

"창문은 왜 닫아 놨소?"

침음을 흘리는 파엘을 돌아보며 이안이 물었다. 파엘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불길한 저주가 더는 침범하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소. 창문을 열어 두면 어떤 불온한 것들이 저주에 이끌려 들어올지 알 수 없잖소."

또 그놈의 개 같은 미신이군.

"갈아입을 옷과 붕대로 쓸 천. 깨끗한 물을 준비해 오시오. 천과 옷은 끓는 물에 삶고, 물도 한번 끓이시오. 돌아오면, 문 앞에서 기다리시고."

내심 혀를 차면서도, 이안은 핀잔 대신 해야 할 일들을 말했다.

환자에게 더 악영향만 끼칠 미신이었지만. 이 빌어먹을 세계는 이런 게 그저 단순한 미신으로만 끝나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겠소."

더 덧붙이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파엘이 곧바로 방을 나섰다. 탁, 문을 닫은 이안이 필립과 엘리야를 돌아보았다.

"커튼을 전부 거두고 창문부터 열어. 여기선 없던 저주도 생기겠군."

"동감이에요. 이안 님."

엘리야가 기다렸다는 듯 걸음을 옮기는 사이, 이안은 필립에게 턱짓하며 침대로 다가섰다.

보르는 그들이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의식조차 차리지 못했다.

키도 크고 덩치가 좋았건만. 지금은 몰라보게 야윈 상태였다.

'쇠약의 저주인가?'

이안은 누렇게 변색된 이불을 거두며 단검을 뽑아 들었다. 손아귀에 불꽃을 피워 날을 달군 그가, 보르의 상반신을 칭칭 감싼 붕대를 잘라냈다.

"끔찍하군요…."

필립이 탄식하듯 중얼댔다. 보르의 상반신은 어깨와 옆구리의 상처를 중심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사방으로 뿌리를 뻗듯 검게 물든 혈관이 번졌다. 환부 한복판에는 고름이 가득 차 부풀어 있었다.

오염된 마력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육체를 약화시킴과 동시에 상대의 생명력을 원천으로 번져 나가는, 복합적인 효과를 가진 저주 같았다. 이 정도면 적어도 중위 이상의 저주이리라. 게임에서는 상태 이상과 도트 대미지를 함께 입히는 방식으로 구현되었었겠지.

'꽤 실력 있는 흑마법사 같은데. 용병들은 그놈의 하수인이었던 건가…? 아니면, 뒷세계의 동업자?'

어쨌든 이안은 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도착한 셈이었다. 며칠만 더 늦었더라도 보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그나저나…."

고개를 주억거린 이안이 이내 필립을 돌아보았다.

"너, 정화 의식을 할 줄은 아냐?"

"그게… 아까는 분위기가 그래서 입 다물고 있었습니다만."

필립이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신성을 제대로 다뤄 본 건 거의 싸울 때뿐이라서요."

"그냥 최선을 다해서 기도라도 올려 봐. 정 안 되면 요 녀석한테도 한 번 물어볼 테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이안이 오른손을 까딱였다. 필립이 짧은 탄성을 흘렸다.

"나리의 사역마도 있었죠.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네요. 알겠습니다."

"사역마…? 사역마가 있으시다고요?"

창문을 전부 열던 엘리야가 홱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눈빛이 또렷하게 반짝였다.

이안이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나중에. 엘리. 나중에."

"아.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죄송해요."

저 녀석과 함께하는 동안엔 절대 공허의 표식은 꺼내지 말아야겠네.

다시 한번 생각하며, 이안이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숨을 고르며 앞으로 나선 필립이 침대 옆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보르의 크고 야윈 손을 양손으로 움켜쥔 그가 고개를 숙였다.

#268화

"만물을 평등하게 비추는 자애로운 빛이여-"

기도문이 나지막하게 이어졌다.

뒤에 선 채 보르를 눈에 담던 이안은, 문득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하나의 루트 빼고는 전부 죽음으로 끝나는 퀘스트 라인인 건가….'

이안의 뇌리로 이들과 관련된 분기점들이 스쳐 지나갔다.

북부에서 이들을 트라벨가로 향하게 두었다면, 타후므리트가 침공했을 때 다른 상인들과 함께 도시를 떠나게 되었을 터였다.

물건을 다 팔 수 있었을지는 둘째 치고, 다시는 북부에서 거래할 수 없게 되었으리라.

당연히 변방의 상행에서 북부로 방향을 튼다는 차선책도 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변방에서 실종된 다른 상인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겠지.

애초에 이안 일행을 마주치지 않았다면, 북부 설원 지대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이안이 며칠만 더 늦었다면 보르는 결국 죽게 되었을 터였다.

지금까지 본바, 파엘과 보르는 단순한 고용인과 호위 이상의 유대가 있었다. 분노와 슬픔에 잠긴 파엘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애초에 동맹이 결성되기도 전에 죽었을지도.'

보르가 죽고 나서도 멈추지 않는다면, 다음 차례는 파엘이 되었을 테니까.

하긴. 기본적인 결말이 비극인 건,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세계부터가 착실하게 멸망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던가.

게다가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큰 흐름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서브 퀘스트일수록 더 그런 경향이 있었다. 테사이아나 북부 야인. 하다못해 드네로브가 그랬듯이.

하지만 어쨌건, 그들을 살린 건 어떤 식으로든 이안에게는 도움이 되었었다. 큰 흐름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작은 부분에서는 이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리라.

'그럼 이자들을 살리면, 대형 상단들이 그때처럼 폭리를 취하지는 못하게 되는 건가…?'

너무 소소한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퀘스트 보상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솨아아….

중얼대듯 이어지던 기도가 끝난 건 그때였다. 필립과 보르를 중심으로 방안을 밝게 비추던 빛이, 모래 알갱이 같은 빛무리로 화해 흩어졌다.

가슴 앞에 양손을 모으고 있던 엘리야가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는 가운데.

"…최선은 다해 봤습니다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일어선 필립이, 황금빛의 잔재가 아른거리는 눈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젠 정말 성기사 태가 좀 나는데.

"수고했다."

침대맡으로 다가선 이안은 보르의 상태를 다시 살폈다. 필립의 엄살과 달리,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피부를 뒤덮고 있던 저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오염된 마력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냄새는 여전했지만.

'확실히, 루 솔라의 신성력이 좋긴 하네.'

게임이었다면 고작해야 1레벨 정도의 정화 기도였을 텐데.

하지만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이제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환부는 여전히 고름을 잔뜩 머금고 부어 있었으니까.

물론, 이안에게는 이걸 손대지 않고 처리할 방법이 있었다.

'다 먹을 수 있겠냐? 저주의 잔재가 남아 있다면 그것까지.'

보르의 옆구리 위로 오른손을 뻗은 이안이 생각했다.

대답하듯, 손가락의 검은 반지가 스르륵 풀리며 흘러내렸다.

보르의 몸 위를 기어간 늪지의 원한이 환부 한복판을 콱 깨물었다.

'어쩌다 보니 이런 식으로 더 많이 써먹게 됐단 말이지….'

이안은 고름을 빨아먹은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건 게임일 때는 없던 활용 방식이었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이럴 때마다 장비로서의 능력치도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성장이라도 하는 것처럼.

"와…."

어느새 침대 옆으로 다가온 엘리야가 탄성을 흘렸다. 늪지의 원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였다.

흑마법과 관련만 있으면 종류 불문하고 정신을 못 차리는 건가.

낮게 코웃음 친 이안이 말했다.

"나중에 실컷 구경할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지금은 가서 물과 붕대를 받아 와. 벌써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정말요…? 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소 지은 엘리야가 곧바로 몸을 돌렸다. 곧이어 멈칫한 그녀가 다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 님. 남은 부분은 제가 해도 될까요?"

"그렇게 해."

나야 고맙지.

이안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의 의료 지식이란 걸 믿을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남은 일이라 봐야 상처 부위를 닦아내고 붕대를 감는 것뿐이었다.

빙긋 미소 지은 엘리야가 걸음을 옮겼다. 초조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던 파엘이, 물이 가득 담긴 대야와 천을 그녀에게 건넸다.

부리나케 준비해서 온 걸 보면, 어지간히 걱정된 모양이었다.

"엘리야를 보조해."

필립에게 덧붙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엘리야에게 물통과 천을 받아 드는 사이, 이안은 파엘에게로 다가갔다.

마른 침을 삼킨 파엘이 물었다.

"어떻게 됐소…? 문틈으로 찬란한 빛이 번져 나오는 것은 보았소만."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은, 잘 된 것 같소."

"정말이오? 루 솔라여…. 고맙소, 이안 경. 정말 고맙소…!"

눈을 치켜뜬 파엘이 거의 껴안을 듯한 기세로 소리쳤다. 그를 밀쳐내듯 손사래 친 이안이 덧붙였다.

"아직 마음을 놓을 때는 아니오. 보르의 회복력에 달렸지. 일단 창문은 늘 열어 두고, 침대보와 이불도 전부 바꾸시오. 방안을 항상 깨끗하게 유지하란 말이오. 붕대도 끓는 물로 삶아서 매일 교체해 주시고."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다시 바짝 긴장한 얼굴이 된 파엘이 대답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 주의를 준 건, 아직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아서였다.

뒤에서 엘리야의 목소리가 번진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 됐어요."

벌써…?

파엘의 시선이 홱 돌아가는 가운데, 슬쩍 미간을 좁힌 이안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미간은, 보르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 바로 다시 평평해졌다.

"…훌륭하군."

몸을 꼼꼼하게 닦은 건 물론이고 붕대도 흠잡을 곳이 없이 감아 둔 것이다.

'게임으로 치면, 정말 비전과 공통 스킬만 잔뜩 익힌 건가…?'

하긴. 보조 역할만 하는 용병도 드물지만 존재하긴 했었다. 방랑 사제라던가 하는.

"고맙습니다. 필립 경. 그리고 영애."

보르의 상태를 확인한 파엘이 둘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필립과 엘리야가 뿌듯한 미소를 짓는 가운데.

"아직 하나가 남았소."

내뱉으며 엘리야를 안아 침대 아래로 내려준 이안이,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벗었다.

끝에 단단한 가죽 주머니가 달린 수수해 보이는 목걸이였다. 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엇이오?"

"성물이오. 델라 루의 은총이 담긴."

"...! 루 솔라여, 아니, 델라 루여…!"

눈을 치켜뜬 파엘이 더없이 양손을 앞으로 모아 쥐며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요란 떨긴. 내심 코웃음 친 이안이 보르에게 목걸이를 걸어줬다. 성물이 담긴 주머니를 그의 가슴 한복판에 놓으며, 이안이 말했다.

"떠나기 전에 반납하시오. 빌려주는 거니까."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창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죽지 않았는데도 완료된 걸 보면, 이제 살아나는 것이 확실해진 모양이었다.

"고맙소, 이안 경. 몇 번이나 도움을 받는지 모르겠군. 일생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소."

파엘이 무릎까지 굽히며 인사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이며 미소 지었다.

"감사는 술과 음식, 그리고 도움으로 받겠소."

"물론이오. 이미 별채에 새로 술상을 준비해 두라 일러뒀소."

"잘 됐군. 아직 한참 부족했는데."

필립과 엘리야에게 턱짓한 이안이 몸을 돌렸다.

"뒷정리는 귀하가 하시오. 난 다시 가서 마셔야겠으니까."

***

식탁에는 치즈와 햄. 구운 닭. 그리고 포도주가 말 그대로 통째로 놓여 있었다.

받침대에 옆으로 놓인 상태였는데, 마개를 열면 통 안에 담긴 포도주가 흘러나오는 방식이었다.

이제야 마음이 편해진 듯 필립과 엘리야가 연신 음식을 집어 먹는 가운데, 이안은 느긋하게 포도주만 홀짝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리."

기름으로 번들대는 손가락을 날름대며 필립이 입을 열었다.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보르를 구했다고 해도, 흑마법사는 여전히 건재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이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홀짝였다. 엘리야가 고개를 갸웃하며 필립을 바라보았다.

"상단주에게 경고를 보내는 게 목적이었으니, 목적은 이룬 것 아닌가요? 용병으로 고용된 마법사일 것 같다면서요."

"일반적인 용병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상대는 마법사입니다. 일반적으로 주문 쟁이는…."

필립이 이안과 엘리를 번갈아 보며 잠시 주저했다. 주문 쟁이를 둘이나 앞에 두고 주문 쟁이의 험담을 하려니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낮게 코웃음 친 이안이 대신 말했다.

"아주 자존심이 세지.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잊지 않고. 이상한 부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파엘에게 경고가 통하지 않았다는 걸 알면 다른 수를 쓸 거다. 지금쯤 이미 알았을지도 모르지. 저주가 깨졌으니까."

"어쩌면 애초에, 동맹이 결성되지 못하게 하는 게 의뢰 내용이었을지도 모르고요."

필립의 첨언에, 눈을 깜빡인 엘리야가 읊조렸다.

"그럼… 상단은 여전히 위험한 거네요."

필립이 어깨를 으쓱였다.

"용병으로 활동하는 흑마법사라면 도시 안에서까지 분란을 일으키려 하진 않겠습니다만…. 확신할 수는 없죠. 게다가 어차피, 상단은 도시를 떠날 테고요."

"그래. 아마 파엘도 그걸-"

고개를 끄덕이던 이안이, 문득 낮게 웃음 지었다.

"양반은 못 되는군."

저만치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물론, 파엘이었다.

"새로 준비한 음식은 입에 맞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장내로 들어섰다. 이안이 술잔을 들며 고개를 까딱이는 가운데 필립이 미소 지었다.

"아주 맛이 좋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오셨습니까? 그분 곁을 지키실 줄 알았는데요."

"코까지 골면서 자는 걸 보니, 아주 멀쩡해진 것 같아서 말이오. 살아났으면 됐지, 고용주가 경호병 간호까지 할 필요는 없잖소? 그보단 은인들을 대접하는 게 우선이지."

파엘의 너스레에, 이안은 코로 웃음 지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걱정하더니. 막상 고비를 넘고 나니 다른 생각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랴부랴 다시 찾아온 건, 이안 일행이 내일 바로 떠나 버리지 않을까 싶어서였으리라.

자신의 술잔을 채운 파엘이 자리에 앉으며 웃음 지었다.

"해서, 무슨 말씀들을 나누고 계셨습니까?"

"흑마법사에 대해서."

이안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반대로 술을 입에 가져가던 파엘이 움찔 굳어졌다. 이윽고 다시 잔을 내려놓은 그가 말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도, 보르를 저렇게 만든 게 타락한 주문 쟁이란 말씀이시군."

"꽤 높은 수준의 저주였소."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파엘의 낯이 굳어지는 가운데, 필립이 차분하게 덧붙였다.

"경호병을 더 고용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가능하다면 많이요. 만약 상대가 포기하지 않았다면, 이동하는 동안 또 습격이 있을 겁니다."

"그게…."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쩝 입맛을 다신 파엘이 말했다.

"제국법상, 상단이 고용할 수 있는 경호병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소. 사실, 그리 많이 고용할 수도 없고. 게다가 요즘, 실력 있는 용병들은 죄다 변방으로 가버려서 인재를 찾기도 어려운 실정이오."

"영주님께 병사를 빌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필립이 덧붙였다. 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도시 안에서는 가능하지. 영주님과 나는 꽤 좋은 관계이니 말이오. 하지만 황실이나 교단의 명령이나 적법한 이유 없이는, 다른 도시로 병사를 보내는 건 금지되어 있소. 상대 도시에서 요청이라도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상단의 호위로 병사들을 부리는 건 안 될 일이오.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지."

술을 한 모금 마신 파엘이 갈등이 오가는 눈빛으로 읊조렸다.

"억지를 부려볼 수도 있긴 하겠소만…. 그런 선을 넘는 행동은 더 큰 문제만 불러올 것이오."

"제국법은 확실히 엄격하군요. 변방 왕국들과는 다르네요."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숨을 내쉰 파엘이 술잔을 들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한 상태요. 모레 낮. 늦어도 글피 새벽에는 도시를 떠나야 하니까. 보르는 함께 갈 수 없을 테고, 교단에 도움을 청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오. 마법사를 고용할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대안이 떠오르질 않았소."

술로 입술을 축인 그가, 주저하며 이안과 필립을 돌아보았다.

"…두 분 말고는 말이오. 이미 큰 도움을 받은 주제에, 정말이지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소만…. 한 번만 더, 우리를 도와주실 수는 없으시겠소?"

#269화

이안의 눈앞으로 기다렸다는 듯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상단의 수호자. 완료 조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완료 보상이었다. 꽤 많은 양의 경험치와 스킬 포인트 하나에, 물음표까지 두 개나 붙어 있었던 것이다.

'보상이 많은 걸 보니, 이게 마지막 퀘스트인 건가?'

이안의 시선이 다시 완료 조건으로 향하는 사이.

"그저 부탁만 드리려는 것은 아니오. 최대한의 보답도 약속드리겠소. 혹시 달리 원하시는 게 있다면, 그것도 맞춰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오."

그의 침묵을 오해한 듯, 파엘이 절박한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곧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볼을 붉히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거절하신다 해도 티끌만큼의 원망도 하지 않을 것이오.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지. 은인 분들께 또다시, 이런 위험할지도 모르는 부탁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오."

알긴 아나 보네. 이안은 내심 실소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나는 용병이오. 조건만 맞는다면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지."

"저, 정말이시오?"

파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보는 가운데, 이안이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의뢰를 수행 중이오. 지금은 필립 경과 영애를 제도까지 안전하게 모시는 게 내 역할이지."

"…아. 그렇지. 내가 이렇게 생각이 짧소. 두 분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순서이거늘."

파엘의 시선이 필립과 엘리야 쪽으로 돌아갔다. 별 말 없이 어깨를 으쓱이는 필립과 달리, 눈을 빛내며 상황을 지켜보던 엘리야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곧 그녀가 물었다.

"회담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건가요?"

정중하고 진지한 얼굴이 된 파엘이 곧바로 대답했다.

"바스무트에서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영애."

"바스무트라면… 하엔 강을 끼고 있는 도시군요. 미드퍼트 북쪽에 위치한."

"예. 넉넉잡아 열흘이면 일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일정을 조금 서두른다면 그보다 하루는 더 단축할 수 있겠군요. 두 분께서 제도에 도착하시는 날이 그만큼 늦어지는 것이겠습니다만…."

혀로 입술을 축인 파엘이 가슴에 한 손을 얹으며 말했다.

"도와주신다면 남은 여정 동안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모든 부분에서 돕겠습니다. 영애께선 이곳에서 안전하게 쉬고 계셔도 됩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네요. 마침 일정에도 여유가 있고요. 하지만, 가게 된다면 저도 함께 갈 겁니다. 물론 여긴 안전하겠지만, 이 두 분과 함께하는 것만큼 안전하진 않을 것 같거든요. 물론…."

엘리야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 경께서도 수락하신다면요."

말을 마친 그녀가 다시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냥 수락할 줄 알고 꺼낸 말이었는데. 하고 싶은 말도 다 해버리는구만.'

이안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색의 눈이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모험가나 용병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옅은 웃음을 흘린 이안이, 비로소 다시 파엘을 마주 보았다.

"그럼 우선, 정확한 의뢰 내용부터 들어봅시다. 회담을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상단을 지켜주면 되겠소?"

비로소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쉰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두 분은 내 개인 경호 신분으로 동행하시게 될 것이오. 영애는 상단의 귀빈으로 모시겠소. 다만… 두 분이 흑마법사 때문에 동행한다는 사실은 비밀로 할 생각이오."

"다른 상인들이 겁을 집어먹을 걸 걱정하시는 거군."

"다들 이미 충분히 겁을 내고 있어서 말이오. 흑마법사에게 습격당한 사실까지 알게 되면, 회담 내내 본래 목적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만 나오게 될 것이오."

이번 일에 사활을 걸었을 테니, 어떻게든 제대로 일을 마무리 짓고 싶은 것이리라.

어쨌건, 이안에게도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건 그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어렵지 않지. 귀하도 티를 내지 않으신다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 이안이 슬며시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럼, 보수는 어떻게 주시겠소?"

"선수금으로 금화를 오십 개 드리겠소. 의뢰를 끝마치고 돌아오면 그만큼을 더 드리도록 하고. 앞서 말씀드렸듯, 남은 여정에 필요한 모든 물자도 지원해 드리겠소. 회담이 무사히 끝나면, 동맹의 이름으로 선물도 드리도록 하겠소. 이건 개인적인 감사도 포함된 선물이 될 것이오."

"불확실한 보상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확실해지고 나면 말씀드리고 싶어서 말이오. 만약 잘 안 된다면, 금화 백 개를 더 드리는 것으로 하겠소."

부수익이 최소 제국 금화 이백 개라. 내심 기분 좋게 곱씹으면서도, 이안이 덧붙였다.

"한 사람당? 흑마법사의 습격이 없더라도?"

순간 움찔한 것도 잠시. 파엘이 재빨리 자연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당연한 말씀을. 세 분 모두에게 똑같이 드리도록 하겠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도 말이오."

"현명하고 공정하시군요…."

필립이 용병의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저도 모르게 나온 웃음이 분명했다.

정작 엘리야는 그다지 좋아하는 기색이 없었다. 제국 금화 이백 개가 얼마나 큰 돈인지 와닿지 않는 것이리라.

이안이 잔을 들며 말했다.

"추가 조항을 하나 더 붙인다면, 받아들이겠소."

파엘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말씀하시오."

"만약 우리가 흑마법사를 찾아내 죽인다면, 그 순간 의뢰가 완료되는 것으로 합시다. 놈의 목을 들고 오면, 그대로 잔금을 치르고 의뢰는 끝나는 것이오. 당연히, 각자 갈 길도 가는 거고."

"왕복하는 시간을 아끼실 수도 있겠군…. 알겠소. 다만, 일찍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회담이 끝날 때까지는 동행해 주시면 안 되겠소?"

파엘이 덧붙였다. 필립과 엘리야를 돌아본 이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괜찮겠군. 어차피, 미드퍼트에 볼 일이 있어서 말이오."

"그럼… 그 조건으로, 받아 주시는 것이오?"

파엘이 슬쩍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입술 끝만 말아 올린 이안이, 술잔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의뢰는 성립되었소."

"고맙소…!"

소리친 파엘이 냉큼 잔을 들어 내밀었다. 필립도 기다렸다는 듯 잔을 들었고, 이안의 시선을 받은 엘리야도 한 박자 늦게 다른 이들을 따라 했다.

그녀의 얼굴에 맺힌 미소가 더 짙어지는 가운데, 이안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이는군…! 오늘은 드디어 발을 뻗고 잘 수 있겠소."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전부 비운 파엘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미 의뢰를 받으시긴 했습니다만,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걱정과는 달리요."

잔을 내려놓은 필립이 말했다.

막상 의뢰가 성립되고 나니, 그냥 돈만 받게 될 수도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보르를 습격한 뒤에 그냥 보수를 받으러 떠나 버렸을지도 모르니까요. 마법사들이란 종잡을 수 없는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흑마법사는 더 할 테고요."

파엘이 미소 지었다.

"상관없소. 상인이란 무릇, 일어나지 않은 최악의 상황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법이니까."

전혀 그래 보이지 않던데.

내심 읊조리는 이안을 돌아보며, 파엘이 덧붙였다.

"게다가 이건 마음의 문제요. 두 분이 동행하시는 것만으로도 모든 근심이 다 사라졌으니."

"…그러시기엔 너무 이른 것 같소만."

이안이 풀썩 웃음 지으며 말했다. 파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저었다.

"사라지다마다. 경과 만날 때마다 결국은 일이 다 잘 풀렸잖소. 매번 말이오."

"행운의 부적 취급이셨군…."

"근거 있는 믿음이지. 나는 이미 경의 실력을 본 적이 있잖소. 보르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지. 게다가 이번엔, 찬란한 여신의 사도이신 필립 경까지 함께 하고 계시고. 그리고 사실…."

술통의 마개를 열어 다시 잔을 채우면서, 파엘이 넌지시 덧붙였다.

"본래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소만. 오늘 일을 겪으며 더 확실하게 알게 됐소. 이안 경이 평범한 용병은 아니시리라는 것을 말이오."

"그래서, 궁금하시오?"

이안이 다시 잔을 들며 물었다.

그가 굳이 칭호들을 떠들고 다니지 않는 건, 물론 낯 간지러워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서브 퀘스트에 지장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그 휘황찬란한 이름들을 듣고 나면, 웬만한 이들은 그에게 뭔가를 부탁할 엄두도 내지 못할 테니까. 실제로도 그렇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미 퀘스트를 받은 지금은, 굳이 묻는다면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파엘은 뜻밖에도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경이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알고 있소. 앞으로도 그 부분은 궁금해하지 않을 생각이오. 그저 상단의 은인이자, 행운을 가져다주는 징표로 모시겠소."

"뭐, 그러시다면야."

코로 웃음 지은 이안이 잔을 들었다.

"편할 대로 하시오."

"자, 그럼, 마음껏 드시오. 부족하시다면 얼마든지, 무제한으로 내어 드릴 테니."

"그 말씀은 후회하실 텐데…."

필립, 엘리야와 눈을 마주친 이안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신의 사도에 난쟁이. 거기다 체력과 재생력, 저항력이 모두 초인적인 수준인 주문 쟁이 까지.

지금 이 셋이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 이곳의 모든 술을 거덜 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

그저 시간이 문제일 뿐.

"후회라니, 서운한 말씀을. 자! 드십시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파엘은, 어느새 다시 불콰해진 얼굴로 술잔을 치켜들었다.

***

"뭘 멍 때리고 있어? 앞으로 가! 짐 다 실었으니까!"

"상자 빨리빨리 옮겨 와! 몇 개 안 남았다고 눈치들 보지 말고!"

아침부터 밖이 소란스러웠다.

대조적으로 조용한 방 안. 소파에 기대앉은 이안은 느긋하게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틀간 푹 쉰 덕분인지 컨디션이 좋았다. 물론 종일 술을 끼고 살긴 했지만, 그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술은 그를 취하게 만들지도 못하지 않던가.

벌컥-

방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필립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투구까지 뒤집어쓴 채였는데, 목부터 이어진 안면 가리개가 눈 아래를 전부 가리고 있었다. 파엘이 사다 준, 제국 강철로 만든 투구였다.

"준비가 거의 다 끝나 갑니다. 나리."

안면 가리개를 내린 필립이 말했다.

"슬슬 나오실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시간을 잘 맞췄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옆에 놓인 투구를 집어 들며 말했다.

필립의 것보다 얇고 가볍긴 했지만, 어쨌든 이것도 양 볼과 코를 완전히 가리는 물건이었다.

이걸 산 건, 혹시 모를 귀찮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쨌건 회담 자리까지는 동행하게 될 텐데, 그의 얼굴이나 이름을 아는 상인이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

이안의 시선이 건너편으로 돌아갔다. 간이 탁상 앞. 회색 로브를 걸친 엘리야가 의자 아래로 다리를 달랑대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필립이 들어온 것도 깨닫지 못한 듯 활짝 펼친 왼 손바닥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펜을 쥔 오른손은 탁상 위에 펼쳐둔 책에 뭔가를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었다.

"엘리야."

이안이 불렀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왼 손바닥 위에 꿈틀대는 얇고 긴 검은 뱀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물론, 늪지의 원한이었다. 잠깐 빌려줬더니 틈만 나면 저러고 있었다.

입맛을 다신 이안이 오른손을 뻗었다. 슈확, 늪지의 원한이 검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

그제야 화들짝 눈을 깜빡인 엘리야가 고개를 들었다. 다소 황망해 보이는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며,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떠날 때가 됐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정신을 빼고 있었네요. 금방 채비할게요."

엘리야가 허둥지둥 일어섰다. 피식 웃은 필립이 안면가리개를 다시 올리며 몸을 돌렸다.

"그럼, 마차를 앞에 대기시켜 두겠습니다."

"그래."

오른손 중지에 다시 서늘한 반지의 감촉이 되돌아온 것을 느끼며, 이안은 허둥대는 엘리야를 눈에 담았다.

그녀에게 방어구를 사주고 싶었건만. 보르타에는 난쟁이에게 맞게 만들어진 물건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주문 제작은 가능하다고 했지만, 도시를 떠나기 전까지 일정을 맞추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그녀가 새로 산 물건은 저 회색 망토와 일지, 잉크, 깃털 펜과 한쪽 어깨에 둘러멘 가죽 가방 따위가 전부였다.

그나마 망토도 구매한 뒤에 엘리야가 직접 수선을 해야 했다.

'여기서 사면 다 공짜였는데….'

짧게 입맛을 다시면서도, 이안은 한쪽 어깨를 까딱였다.

어차피 일이 끝나고 나면 곧 주머니가 두둑해질 테니, 그녀의 보호 장비는 미드퍼트에서 제작해도 충분할 터였다.

"다 됐어요. 가실까요?"

엘리야가 두건을 눌러쓰며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몸을 돌릴 찰나,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설레네요. 의뢰를 받아서 상단과 동행하게 되다니. 정말 모험을 떠나는 느낌이에요."

"들뜰 거 없어. 아마 끔찍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타락한 주문 쟁이는, 꼭 네가 보는 앞에서 목을 날려 버릴 거고. 방을 나서며, 이안이 속으로만 덧붙였다. 엘리야가 대답했다.

"방심하지 않을게요. 제 몫도 다할 거고요."

"넌 안전하기만 해도 네 몫을 다 하는 거다."

"그런 상태에서도 도움이 될 부분이 있을 거예요. 저도 나름대로, 고민을 좀 해 봤거든요."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들어서며, 이안이 낮게 콧방귀를 뀌었다.

"또 어떤 골치 아픈 결론을 내렸는지는, 가면서 듣도록 하지."

"만족스러우실 거예요. 그리고 대부님. 혹시라도 정말 흑마법사와 마주치게 될 일이 있다면-"

"안 돼."

이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잘랐다. 뒤따라 계단으로 들어서며, 엘리야가 우물댔다.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는데요."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거나 물어볼 게 있다고 하려던 거잖아. 아니야?"

뒤에서 멈칫대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 다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맞아요. 그럼 적어도-"

"안 돼. 흑마법사의 소지품은 전부 태워 버릴 거다."

쓸만한 건 아공간에 처박을 거고.

이안이 내심 덧붙이는 사이, 엘리야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제 생각을 다 아시는 거예요…? 주문이라도 쓰셨나요?"

"드디어 들켰네."

"...?!"

홱, 두건이 벗겨지는 소리가 번졌다. 위를 올려다본 것이리라. 곧 낮은 침음이 뒤를 이었다.

"농담하신 거였군요."

대답 대신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대문을 열었다. 짐을 실은 마차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가운데, 저만치에서 그가 탈 마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는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안 경."

대문 옆에 선 나무 기둥처럼 비쩍 마른 북부인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인 것이다. 보르였다.

#27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