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그래… 잠시, 이리 줘 보겠니?"
아르케아스가 짧은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검날을 쥔 이안이 자루를 그의 손 앞으로 내밀었다.
아무리 저 몸이라 해도, 아르케아스가 마검에 홀릴 걱정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아르케아스가 자루를 쥐자, 검날에서 옅은 울림이 일었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양손으로 검을 받쳐 든 아르케아스가, 거뭇한 윤기가 흐르는 검날을 눈으로 훑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와 말하자면, 나도 몹시 놀랐단다. 그가 아직도 야망을 버리지 못했음은 알고 있었지만… 기어코 결계에 균열까지 만들어 냈을 줄이야. 그건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란다."
아르케아스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하지만 그래….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 그리고 그는, 그 시간을 견딜 인내심과 의지를 지닌 존재이고."
다시 이안을 마주 본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늘을 거슬러 천상에 오르려던 존재잖니. 그건 용에게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란다."
일행들은 어느새 술잔을 내려놓고 아르케아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이야기를 그 당사자에게 직접 들을 기회이기 때문이리라.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인 나세르조차,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끔뻑였다.
물론, 이안은 역천룡의 비화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역천룡을 섬기는 자들이 더 있을 것이오. 지금은 내 행적을 놓쳤겠지만, 곧 다시 알게 되겠지. 그럼 또 나를 따라올 것이오. 어쩌면… 의회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겠지."
씁쓸하게 대답한 아르케아스가 흑검을 다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황금빛이 아른거리는 눈동자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다시 한번 사과하마. 내 불찰이다. 네가 나의 대행자가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을 위협이야."
"사과는 됐소. 중요한 건 대응이니까."
"옳은 말이지. 하지만…."
아르케아스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댔다.
이안은 대답을 종용하는 대신, 일어서 술병을 들었다. 그는 아르케아스의 빈 술잔을 채워 주기 시작했다.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역천룡이라니… 대체…. 가만. 그럼, 그 시체가…?"
다들 말없이 술만 홀짝이는 가운데, 뒤늦게 충격에 빠진 듯한 표정이 되어 있던 나세르가 중얼댔다.
다시 자리에 앉은 이안이 그를 돌아보며 피식댔다.
"아, 그래. 너도 그놈의 시체를 봤나 보군."
"…예. 아마 지금쯤 대교회로 옮겨졌을 겁니다. 역천룡이라니… 그 전설 속의 악룡이 아직도 살아 있단 말입니까?"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야. 여전히 신의 흉내를 내고 있지. 자신을 섬기는 신도 몇몇을 사도라 칭하며, 힘까지 내려 주면서."
"...!"
이안이 술잔을 들며 내뱉은 말에 나세르가 경악한 듯 입을 벌렸다.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더 말려 올라갔다.
'저놈은 여명단이었던 주제에 아는 게 없네.'
하긴. 설사 역천룡에 대해 아는 고위 인사가 있더라도, 그 사실을 아래로 발설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래. 그는 살아 있고,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단다. 신들께서 직접 내리신 벌이지."
아르케아스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렇기에,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에게 그 어떤 추가적인 위해도 가할 수가 없단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에게 따져 묻고 만류하는 것뿐이지. 물론,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을 거란다. 오히려 역효과만 낳겠지. 본래 그런 존재이니까. 내가 아직 어리던 시절부터, 이미."
아르케아스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막아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이안.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널 돕는 거란다."
씁쓸하게 미소지은 그가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나세르가 더는 뭔가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뭐, 귀하는 그러시겠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이안이 태연하게 침묵을 깼다. 그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아니잖소?"
"...!"
아르케아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손에 든 잔에서 술이 찰랑대며 튀어 올랐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귀하께서 직접 문제를 해결해 주리란 기대는 처음부터 한 적도 없소. 그래서 알려 주실 수 있는 부분만 알려 달라고 한 거고. 그런 의미에서 여쭤볼 게 있는데…."
옅은 파장이 번지는 아르케아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이안이 미소 지었다.
"용의 마력이 깃든 무기는 용에게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이오?"
나세르는 물론 일행 모두가 홱 고개를 돌려 이안을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용에게 직접 이런 걸 물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들을 더 놀라게 한 건 이어진 아르케아스의 목소리였다.
"더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 우리의 뼈와 가죽은 아주 단단하잖니. 동시에 마력으로 지켜지고 있기까지 하지. 너도 알다시피 용의 마력은 그 밀도가 아주 높단다. 그러니 같은 용의 마력이 그나마 더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거란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안의 물음에 대답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아르케아스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이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힘을 누가 휘두르느냐가 더 중요하단다. 처음 그 말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알고 있니? 맞춰 보렴. 너도 아는 이름이란다."
"…카르하를 말씀하시는 거요?"
"바로 알아차리는구나. 그래. 그의 도끼에는 진언이 새겨져 있었지. 필멸자의 몸으로 태어나 불가능한 운명에 맞서는 그의 의지에 감복한 어떤 용이, 그에게 도움을 준 거란다. 그리고 그는 그 도끼로 절대적인 존재에게 큰 상처를 입혔지. 그 용이 누구인지는, 알려 줄 필요도 없겠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용살자로 만들어 준 용도 바로 그놈이니까.
술로 입술을 축인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그가 용의 마력이 깃든 무기의 도움을 받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란다. 하지만 그때 그는 이미 스스로 신성을 갖출 만큼 위대한 전사였지. 그 사실은 잊힌 채, 절반의 진실만이 이어져 온 거야. 물론, 나는 그 오해를 굳이 바로잡지 않았단다."
아르케아스의 안광이 의미심장하게 일렁였다.
"언젠가 나를 죽이려는 이들이 있잖니. 교활한 함정을 파 둔 셈이지. 그들을 내가 만들어 낸 무구로 나를 겨누고 나서야, 자신들이 헛된 꿈을 꾸고 있었음을 알게 될 테니까."
솔직하시긴. 이안이 슬쩍 나세르를 돌아보며 웃음 지었다.
녀석은 또다시 숨 쉬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물론, 이안은 순수 교도들이 정말 백금룡을 죽일 수 있으리라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그는 이미 아르케아스가 싸우는 걸 직접 본 적이 있지 않던가.
신이 직접 천벌을 내려 아르케아스를 떨어뜨리지 않는 이상, 놈들은 그에게 닿을 수조차 없으리라.
"하지만 이 이야기의 진짜 중요한 부분은, 내가 판 함정 따위가 아니야."
아르케아스가 이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스스로 신성을 손에 넣을 만큼 위대한 전사조차, 끝내 홀로 용을 죽이지는 못했다는 사실이지. 사실 상처 입은 타후므리트가 스스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먼저 목숨을 잃는 건 카르하가 되었을 거란다."
아, 이 얘기를 하려고 그렇게 밑밥을 까신 거군.
코로 웃음 지은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가운데,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용의 힘은 살아온 시간에 비례한단다. 그리고 그는, 나보다도 오래 산 용이지. 비록 그 힘을 봉인당한 채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와 맞선다면, 너는 죽게 될 것이다. 이안."
오늘 만난 이래 가장 단호하고 완고한 말투였다.
이안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게임에서 역천룡과 싸워 보지 않았던가. 수많은 게임 오버 화면을 보여 주었던, 말 그대로 끔찍하게 강하던 괴물. 심지어 놈을 죽일 수 있었던 건 공격 패턴을 전부 외운 것으로도 모자라, 운까지 따라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도 아슬아슬했다. 마지막 한 방이 약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는 다시 게임 오버 화면을 보게 되었을 테니까.
현실이 된 지금은 당연히 그때보다 더 강해졌으리라. 물론 그건 이안도 마찬가지였지만, 용에 비할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패턴도 아예 똑같지는 않을 테고, 재도전할 기회도 없었다.
"그러니 그를 찾아가려는 생각은 하지 말렴. 그는 네가 결코 찾을 수 없는 곳에 있단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주지 않을 거야. 그걸 알려 주는 건, 내 손으로 널 죽이는 것과 다름없으니."
잠시 말을 멈춘 아르케아스가 차분히 숨을 고르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맺힌 황금빛이 일렁였다.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단다, 이안. 적어도 그자에게는. 그자의 하수인들에게도, 물론."
애석한 말이지만, 난 이미 그놈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속으로만 읊조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적어도, 놈의 하수인들과 싸우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오. 죽어 줄 순 없잖소."
"물론이지. 그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말렴. 방심도 하지 말고. 아마 네가 사도를 몇쯤 죽이고 나면, 그도 생각을 달리하게 될 거란다. 나를 괴롭히기 위해, 자신이 겨우 손에 넣은 모든 것을 걸 리는 없잖니."
"글쎄…."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이안이 내뱉었다.
"들은 만큼 집요하다면, 그럴지도 모르겠소만."
"그러길 바라는 듯한 말투로구나."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이윽고 아르케아스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 또한 진귀한 광경일 터였다.
"그래… 마음대로 하렴. 네가 그자들을 거꾸로 추적해 심문한다고 해도 말리지 않으마. 하지만, 그런다 해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을 거란다. 그들도 모를 테니까."
"만약 내가 끝끝내 그놈이 유폐된 감옥을 알아낸다면, 어떻게 하실 거요?"
"그건 불가능…."
내뱉던 아르케아스가 순간 멈칫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이안이라면, 정말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 것이리라.
"그때는…."
이윽고 아르케아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가 직접 너를 말리러 갈 수밖에. 오해는 하지 말거라. 너와 같이 싸우겠다는 뜻이 아니야. 그때는 내가 직접 너를 붙잡아 끌고 나올 거란다. 그곳에 발을 들인다면, 내게도 그럴 권리가 있어."
볼기짝이라도 때리겠다는 듯한 말투시군.
이안의 입꼬리가 설핏 말려 올라갔다.
"다행이군…."
아르케아스의 의아한 시선을 마주 보며, 그가 덧붙였다.
"어쨌든 바로 죽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오."
"뭐라…?"
되묻던 아르케아스의 얼굴에 헛웃음이 번졌다. 너는 정말이지, 하고 중얼대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가 덧붙였다.
"너처럼 고집이 센 대행자를 둔 용은, 아마 내가 처음일 것 같구나.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어쩌겠소. 귀하께서 선택하신 대행자인데."
이안이 풀썩 웃음 지으며 말했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는 말에, 아르케아스도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라크마흐와 대적하고 싶지 않은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 용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이안도, 그리고 다시 지상으로 기어 올라올 날도.
어쩌면 끝내 자신을 옭아맨 봉인을 깨뜨리고 다시 세상으로 나올지도 몰랐다. 놈은 그럴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분명 다시 아르케아스와 함께 놈과 싸우게 되겠지만.
그게 용의 무덤에서 놈과 싸우는 것보다 더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는 놈도 자신의 힘을 전부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타후므리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악몽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러니 놈이 아직 지하에 있을때 죽여야 했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진 후에나 가능할 일이었다. 적어도 놈의 사도를 죄다 쳐 죽인 이후가 되리라. 용의 마력이 깃든 무구를 더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쉽진 않겠지만….'
죽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든 해 내야겠지.
쓴웃음은 지은 이안은 잔에 남은 술을 남김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어쨌건, 최후의 보루가 하나는 생긴 셈이었다. 아르케아스가 빈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물론, 말리는 게 아니라 도와준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만하면 충분한 답이 되었니?"
이어진 아르케아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이 빈 잔을 내려놓았다. 옆에 앉은 샬롯이 자연스럽게 잔을 다시 채워 주는 사이, 그의 시선이 앞에 놓인 정화자의 두건 망토로 향했다.
"작은 부탁을 하나 더 드려도 되겠소?"
"안 된다고 해도 할 거잖니."
이제 날 너무 잘 아시는데.
설핏 웃음 지으며, 이안이 말했다.
"이 망토에 새겨진 교단의 문양을 지워 주실 수 없겠소? 너무 눈에 띄어서 말이오. 귀하께서 선물하신 방패처럼."
"뭐…?"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던 아르케아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교단의 성자에게 교단의 문양을 지워 달라고 부탁하다니…! 이런 신성 모독이 또 있을까."
테사이아를 제외한 일행들이 가슴 철렁한 얼굴로 아르케아스를 바라보았다.
이미 이안이 아르케아스에게 강짜를 놓기 시작한 순간부터,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물론 이안은 태연했다. 아르케아스가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을 향한 그의 관점은, 이안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에 대한 답을 주는 건 어렵지 않지."
이윽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운을 뗀 아르케아스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엔 내 질문에 먼저 답을 주지 않겠니? 언질을 주었듯, 나 역시 네게 부탁할 게 있단다."
그래. 언제 말씀하시나 했지.
이안이 입맛을 다시며 읊조렸다.
"벌써 겁이 나는데…."
"안심하렴. 이번에는 아마,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닐 테니까."
"말씀해 보시오."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갈지, 결정된 바가 있니?"
"자세한 건 상의를 해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슬며시 필립을 일별한 이안이 덧붙였다.
"중앙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싶소. 아마도."
"그래…? 잘 됐구나. 역시, 아무래도 우리는 운명의 끈으로 엮여있는 모양이야."
반색하며 술잔을 내려놓은 아르케아스가, 의자를 밟고 일어섰다. 작달막한 전신이 무릎까지 드러났다. 이안을 똑바로 마주 본 그가 미소지었다.
"그럼 이 아이도 함께 데려가 주렴, 이안. 제도까지만."
"...?"
#251화
고개를 갸웃한 이안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중앙으로 간다는 게, 꼭 제도를 들른다는 뜻은 아니었소만…."
"아, 그랬니? 그렇다면 이참에 제도에도 들르면 되겠구나."
아직 거기 발을 들일 생각은 없었는데.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이안은 게임의 제도를 떠올렸다.
제국과 대륙의 중심. 황제궁과 본교단이 위치한, 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
게임에서도 제도는 맵을 따로 사용할 정도로 크고 번성한 도시였다. 물론, 그만큼 도시에 드리운 그림자도 짙었다.
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 육체는, 귀하의 막내딸이라 하지 않으셨소?"
"그래. 엘리야 마이어. 예쁜 이름이지? 나는 엘리라고 부른단다. 너도 그렇게 불러 주면 좋아할 거야."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덧붙였다.
"이름을 물은 게 아니오. 용의 아이는 평생을 둥지에서 보낸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서 말이오. 그런데 맞이도 아니고 막내를, 왜."
"간단하단다. 전설이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지."
아르케아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필립이 그를 돌아보았다.
"전설이, 잘못된 이야기라고요…?"
"앞날이 창창한 아이들을 어찌, 평생 내 시중만 들며 살게 할까."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은 아르케아스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 아이들은 모두,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준비가 되면 세상으로 떠난단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살게 되지. 내 아이라는 사실은 평생 밝히지 않은 채로. 사실, 아주 오랜 시간 반복되어 온 일이란다. 기록되거나, 밝혀지지 않았을 뿐."
그가 필립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알려진 전설은 그런 진실을 감추기 위해 각색된 것이지. 나의 아이라는 게 알려지면, 자신의 삶을 살기 어렵지 않겠니?"
"그건… 그렇겠군요."
필립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나 역시 독립한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는단다. 설사 그 아이가 그릇된 선택을 할지라도. 나는 그저 가끔 멀리서 지켜보거나, 소식을 전해 들을 뿐이지. 때로는 기뻐하며, 때로는 슬퍼하면서…."
아르케아스의 눈에 맺힌 황금빛 안광이 일렁였다. 수많은 기억을 헤집듯 아련한 눈.
그가 자신의 팔을 쓰다듬었다.
"이 아이는 조금 더 내 곁에 두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렇게 모든 조건이 부합하는 순간이, 다시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니."
아르케아스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니 이안. 이 아이를 제도까지 무사히 데려가 주렴."
동시에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백금의 막내딸. 선택 퀘스트였다. 완료 조건은 간단했다. 엘리야 마이어를 제도까지 무사히 데려가는 것. 시간제한도 없었다. 보상은 경험치와 스킬 포인트 하나. 그리고 하나의 물음표.
이안은 일단 창을 닫으면서,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소."
"말하렴. 너는 의문점이 많은 의뢰는 좋아하지 않잖니."
"나랑 같이 다니는 건 위험할 거요. 이미 앞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니, 이유를 또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그런데도 굳이 왜 지금 이런 의뢰를 하시는 거요?"
"내 곁에 남아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일 거란다. 내가 무얼 준비하려는지 너는 알잖니. 게다가 너는 어떤 상황이라도 이 아이를 끝까지 지켜 줄 거잖니. 그게 의뢰니까. 그렇지?"
아르케아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게다가, 그런 순간들을 조금은 경험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단다. 그저 책이나 이야기로만 접했을 뿐, 세상이 정말 얼마나 위험한지는 전혀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물론 그렇다 해서…."
그가 슬며시 이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 아이가 마냥 짐이 되지는 않을 거란다. 아마도 네 시종을 자처할 거야. 나를 섬기던 아이이니, 그 능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 물론 그건, 이 아이가 가진 역량의 일부에 불과하단다."
"무슨 능력이 더 있소?"
"여러 재능을 타고났지. 기본적으로 아주 똑똑하고 박식하단다. 책을 읽는 걸 특히 좋아하거든. 알잖니. 난쟁이들은 기본적으로 외골수 기질을 타고난다는 걸. 심지어, 마법적인 재주도 부릴 줄 알지."
이안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주문쟁이란 말씀이시오?"
"특정한 색의 마법을 익히지는 않았단다. 내가 하지 못하게 했거든. 대신, 여러 비전들을 익혔지."
"...."
비전 스킬들을 떠올린 이안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공격 마법 하나 쓸 줄 모르는 난쟁이 주문쟁이라.
대충 생각해도, 그다지 쓸모 있을 것 같은 조합은 아니었다. 아르케아스의 확언과는 달리.
"그래서, 제도로 보내 마탑에 들여보내시려는 생각이시오?"
"딸 아이가 원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내가 만류했단다. 지금의 마탑들은, 과거와는 다르잖니."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는 거의 모든 마탑은, 저마다의 방식대로 변질되었으니까.
아르케아스의 말이 이어졌다.
"다행히 마음을 돌려주더구나. 이 아이는 제도의 대학에 입학하게 될 거란다. 거기서 고등 교육을 받고, 본인이 연구하고자 하는 학문을 연구하게 되겠지. 이 아이가 가장 몰두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알겠니? 오늘 우리가 나눈 대화의 주제 중에 답이 있단다."
"…혹시, 검은 벽이오?"
"그래. 이 아이는 검은 벽을 연구하게 될 거야. 그 기원과 구성. 그것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과 사라진 후의 여파. 이미 대륙 곳곳에 남은 광기의 흔적들을 피해 없이 지우는 방법까지…."
아르케아스가 의도한 걸까, 아니면 정말 이 막내딸이 원한 것일까.
내심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짧게 웃음 지었다.
"뭐, 어쨌든 마법을 배우는 것보다는 나아 보이는군."
"그래. 걱정되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탐구심과 학구열이란 건 막고 싶다고 다 막을 수는 없는 거잖니."
"아무리 그래도, 하필 이 시기에 그런 결정을 내리시다니. 대륙과 제국의 앞날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계시잖소."
"그러니 더더욱 제국으로 보내는 거란다.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제도는 오히려 점점 더 밝아질 테니까. 제국의 중심부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될 거야."
거참 생각도 깊으시군.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물론, 퀘스트를 거절할 생각은 아니었다.
지금 이건 원하는 정보들을 손에 넣고, 원하는 조건을 제시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덕분에 적어도 아르케아스의 속내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회복을 끝내면, 홀로 곧바로 검은 벽을 무너뜨릴 준비에 들어가려는 것이리라.
그게 뭐건, 안전한 방식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 자신의 딸을 미리 가장 안전한 곳으로 떠나보내려는 것이겠지. 자신이 가장 믿는 대행자의 경호 아래에서.
어쩌면 이안 역시 제도에 남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윽고 다시 술잔을 든 이안이, 술로 목을 축이고는 입을 열었다.
"곧바로 제도로 직행하지는 않을 거요. 또 어떤 꼬리가 붙을지 모른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이곳에서의 일로 한동안 시끄러울 테니까. 그 개판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갈 생각은 없소."
"그러렴. 오히려 잘됐구나. 이 아이에게 넓은 세상과 다양한 경험을 선사할 수 있겠어. 어쩌면, 덕분에 다시는 제도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지."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이안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덧붙였다.
"혹시 제도에 발을 들였다가 귀찮은 상황이 벌어지면, 귀하가 나서서 수습해 주시오. 직접."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만. 그 또한 약속하마."
"그리고 이번 의뢰의 보수는, 내 마법에 도움이 될 만한 것으로 받겠소."
아르케아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꼼꼼하기도 하지…. 역시 내 대행자로구나. 하지만 이번만큼 큰 상을 내릴 수는 없을 거란다. 그건 감안해 주렴."
"그건 알고 있소. 이미, 꽤 무리하셨잖소."
"이해해 주어 고맙구나. 더 묻고 싶은 게 있니?"
"없소."
"그렇다면… 잡아 주겠니?"
아르케아스가 손을 내밀었다. 짧게 한숨 쉰 이안이 일어섰다. 이어 퀘스트를 수락한 그가, 몸을 기울여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의뢰는 성립되었소."
"참으로 기분 좋은 말이로군."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든 아르케아스가, 이내 손을 놓으며 덧붙였다.
"잠깐만 기다리렴."
그의 양손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사이로 진언이 피어올랐다.
그 한복판에 팔을 깊이 집어넣은 아르케아스가, 뒤이어 그 안에서 잘 말린 채 밀봉된 양피지와 작은 부적을 꺼냈다.
진언이 빛무리와 함께 흩어지는 가운데, 아르케아스가 손에 든 것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 편지는 대학의 총장에게 보내는 추천서란다. 제도에 도착하면 엘리에게 주렴. 나머지는 아이가 알아서 할 거란다. 이걸 전해 주는 순간이, 네 의뢰가 완료되는 시점일 거야. 그리고 이 부적은, 뭔지 알려 줄 필요 없겠지?"
"다음번엔 어떻게 오실 거요? 휴식 중이시잖소."
"다시 깊이 잠드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괜찮단다. 제도에서 귀찮은 일이 생기면 즉시 태우렴. 그게 아니라면, 제도가 아닌 곳에서 태우고. 사실 나도, 제도에 발을 들이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거긴 너무 부산스럽거든."
실소를 흘리며 양피지와 부적을 아공간에 던져 넣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는데…."
아르케아스의 옆에 앉은 메브를 일별한 그가, 그녀의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너도 같이 가야지? 필립."
"물론이죠. 나리."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주섬주섬 자리에 앉은 아르케아스가 필립을 돌아보았다.
"내 대행자만으로도 든든한데. 이토록 훌륭한 성기사까지 동행해 주다니. 덕분에 마음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겠구나. 고맙다."
"이안 나리만으로도 걱정 없으시겠지만, 저 역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영애께선, 무사히 제도에 발을 들이시게 될 겁니다."
필립이 맹세라도 하듯 말했다.
술잔을 드는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너와 나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을 테니, 사이좋게 지내 주렴. 벗이라는 걸 가져 본 적 없는 아이란다."
"그렇습니까…? 제 동생이다 생각하고 보살피겠습니다."
"그 반대란다."
"…아, 그렇군요. 그럼, 누님이요."
필립이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이종족의 나이를 겉모습만으로 유추하는 건, 아직 이안도 잘하지는 못하는 부분이었다.
자리에 앉은 이안이 덧붙였다.
"그래서, 망토는 어떻게 해 주실 거요?"
"아, 그렇지. 답을 주자면, 그 표식은 지울 수 없단다."
만족스럽게 술을 꼴깍대던 아르케아스가 곧바로 대답했다. 이안의 시선에 그가 미소 지었다.
"당연하잖니? 그건 대교회에서 축성을 받은 천이란다. 그래서 더 튼튼한 거야. 거기 새겨진 문양을 지우는 건 정말 신성모독이지."
"이런…."
"그러니, 그냥 뒤집어 입으렴."
"...?!"
이안은 물론 다른 일행들도 순간 멍한 표정이 되어 아르케아스를 바라보았다. 아르케아스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진언 회로는 평소에는 거의 티가 나지 않잖니. 차라리 그편이 덜 눈에 띌 거야."
"…하."
그런 간단한 방법이.
실소를 흘린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말 그대로 사고의 빈틈을 찔린 것이다. 하긴. 갑옷도 아니고. 겉과 속을 뒤집어 입는다 해서 그리 티가 나지도 않을 터였다. 어떻게 만든 건지, 이 두건 망토에는 재봉선조차 없었다.
"어차피 이안, 네 전투 방식으로는 그리 오래 쓰지도 못할 거란다. 보기보다 잘 찢어지고, 수선도 불가능하거든."
아르케아스가 덧붙인 말에,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자가 수복 주문 같은 건 없소?"
"비슷한 건 알고 있지. 하지만 교단에서 거부했단다. 그건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라고. 덕분에 나는 매년 두 벌씩 새로운 걸 만들어 주고 있단다.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지."
하여간 교단 놈들이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내심 고위층의 의중을 이해했다. 백금룡이 신과 같거나 더 위대해 보이는 건 원치 않는 것이리라. 게다가 교단의 성기사들이 파괴되지 않는 장비로 무장하는 것도 원치 않을 터였다. 어쨌건 내부적으로도 파가 나뉘어 있지 않던가.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는 그때, 술잔을 내려놓은 아르케아스가 샬롯을 돌아보았다.
불현듯 용의 시선을 받은 샬롯이 순간 굳어졌다가, 이내 진중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용의 조언이 다시 시작됐다는 걸 깨달은 것이리라.
"고뇌하는 전사야. 그 고뇌를 멈추지 말렴. 그리고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지기를 바라겠다. 너는 야성에 몸을 맡기지 않아도, 이미 위대한 전사란다. 투쟁의 신이 인정할 만큼."
"...!"
샬롯의 주황색 눈에 파장이 번졌다. 백금룡이 계시라도 내리는 것처럼 느껴질 터였다.
물론 이안이 보기에 저건 그저 오래 산 존재의 통찰력에 가까웠다.
그의 기억에서 본 것과 직접 샬롯을 마주하며 느낀 것들을 조합해 건네는 조언이리라.
아르케아스의 부드럽고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고뇌와 이성, 그리고 섬세함이 네 동족에게도 필요할 거란다. 끝내 다시 야성에 몸을 맡기고 싶은 순간이 오거든, 여기 이 벗들을 떠올리렴. 본래 위대한 전사가 가는 길은, 가시밭이 펼쳐질 수밖에 없는 법이니."
"명심… 하겠습니다. 위대한 백금룡이여."
샬롯이 고개를 숙였다. 이안 이외의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진심에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한 건 사실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마 아르케아스가 한 말들이 와닿은 것이리라.
이안이 소리 없이 웃음 지으며 술만 홀짝이는 가운데, 아르케아스의 시선이 나세르에게로 향했다.
미소 지은 채로 굳어진 나세르가 조용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럴 필요 없단다.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으니."
"...!"
나세르의 눈매가 움찔 떨렸다. 그의 시선에 아르케아스가 말을 이었다.
"여신께 감사하렴. 네가 완전히 눈멀기 전에 먼저 너를 내치셨으니. 오히려 너에게는 한 번의 기회가 더 생긴 셈이란다. 네게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없었을 기회지. 그러니 속죄의 길을 겸허히 걷길 바라마. 곁에 훌륭한 길잡이가 있으니, 그 뒤를 잘 따른다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거란다."
아르케아스의 시선을 받은 메브가 받아들이듯 고개를 숙였다. 잠시 굳어져 있던 나세르도 이윽고 명심하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
다시 이안을 마주 본 아르케아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이만하면 만족스럽지 않냐고 묻는듯한 시선에, 풀썩 웃음 지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고맙소. 다들, 큰 도움이 되었을 거요."
"그래… 네게 그 한마디를 듣는 게 쉽지는 않구나. 아주 표현에 인색한 대행자를 두었어."
말과 달리, 아르케아스의 얼굴에 맺힌 미소는 한층 짙어져 있었다.
그가 빈 잔을 내려놓았다.
"덕분에, 아주 알찬 시간을 보냈구나. 이안."
가시려고? 생각하며 이안은 슬쩍 술병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술이 조금 남아 있건만. 아무래도 일행들을 위해 양보하려는 모양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요. 고생하셨소."
이아진 대답에 더 짙게 미소 지은 아르케아스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가 테이블 옆으로 걸음을 옮기며 덧붙였다.
"그리 오래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으니, 작별 인사는 길게 하지 않으마.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 주리라, 그리고 무사히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겠다. 이안."
"노력해 보겠소. 또 봅시다."
고개를 끄덕이며 멈춰 선 아르케아스가 일행을 돌아보았다.
"어쩌면 너희들 중 몇몇은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렇더라도, 그렇지 않더라도. 모두 늘 무사하고 건강하길 바라마. 그리고 만약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조금 더 편하게 대해 주렴. 여기 이, 내 대행자처럼."
벌떡 일어난 메브를 시작으로, 이안을 제외한 모두가 일어나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르케아스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떠나며 작은 선물을 하나 더 주마. 내가 떠나고 나면, 이 아이를 잘 붙잡아 안아 주렴."
"...? 그러겠소."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안이 대답했다.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그럼, 다들 손을 들어 눈을 가리렴."
왜 그래야 하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아르케아스의 눈동자에 새하얀 빛이 맺히더니, 삽시에 그의 전신으로 번지기 시작했으니까.
이안은 재빨리 손으로 눈을 가렸다. 뇌리를 지끈 울리는 듯한 두통이 번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252화
눈을 감은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던 눈부신 빛이 이내 잦아들었다. 장내를 휩쓸고 지나간 신성력이 사방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
눈을 뜬 이안이 몸을 날렸다.
아르케아스, 아니 엘리야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촤악-
이안은 그녀의 몸이 땅에 닿기 직전에, 낚아채듯 붙잡아 안아 들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아르케아스가 부탁했으니까.
'…정말 그래서일 뿐인가?'
엘리야를 어깨 위까지 치켜들며,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방금 그가 느낀 두통은, 일종의 사념에 가까웠다. 그리고 거기엔 묘한 애틋함도 섞여 있었다. 엘리야를 본 순간 더 짙게 느껴진 감정이었다. 아마 몸이 먼저 움직인 것도 그 때문이리라.
"끝난… 겁니까? 떠나셨나요?"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행들은 아직도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안이 대답했다.
"그래. 가셨다."
"하…."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일행들이 풀썩풀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르케아스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건 이안이건만.
다들 전투라도 끝낸 것처럼 기진맥진해 보였다.
"평생 오늘을 잊지 못할 겁니다. 백금룡을 만난 것으로도 모자라… 그분께 이런… 영광스러운…."
필립이 피로와 감격이 뒤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테사이아조차도 마찬가지였다.
"듣던 것보다 훨씬 고결한 분이셨다…."
"…왜 위대하다고 불리는지도 알겠군."
"심지어… 자비로우시기까지 하셨고요."
혼잣말 같은 감상을 늘어놓는 일행을 눈에 담던 이안이, 툭 덧붙였다.
"방금, 뭔가 다른 게 느껴지진 않았고?"
"찬란하고 따스한 신성… 말고 도요?"
필립이 나른하게 되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고개를 저은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두통을 느낀 건 그 뿐인 모양이었으니까.
'백금룡의 사념 같은데. 그게 어떻게 나한테도 전해진 거지.'
어쩌면 서로의 기억을 오갔던 여파인지도 몰랐다. 잠깐이지만 하나로 이어졌던 의식이 공명한 것이다. 물론, 정확한 이유나 원리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추측만 할 뿐.
분명한 건, 신성력이 아르케아스에게 고통을 준 것 같다는 사실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무슨 긴고아라도 차고 있나.'
아르케아스의 기억에서 본 조여 들어오는 빛의 고리를 떠올린 이안이,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당장은 알 수도, 중요하지도 않은 부분이었다.
지금은 그보다, 그의 어깨에 기댄 채로 축 늘어져 있는 이 난쟁이가 차라리 더 중요했다.
"...."
엘리야는 전혀 의식이 없었다. 잠든 게 분명했다. 쌔근쌔근한 숨소리가 전해졌다. 이안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가가 반짝였다.
'…이거, 침인가?'
분명 이목구비는 그대로이건만.
인상이 전혀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르케아스가 깃들어 있을 때는 신비로워 보였는데, 지금은 평범하다 못해 어리숙해 보였다.
'영… 믿음직 스럽진 않은데.'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의뢰라 해도, 이 녀석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상황은 사절이었다.
하던 대로, 강하게 키워야겠군.
내심 중얼대며 식탁으로 돌아간 이안이, 한 손으로 술잔을 들었다.
"루 솔라여…."
의자에 축 늘어진 일행들은 저마다 백금룡과의 대화를 곱씹는 얼굴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소리 없이 웃은 이안이 잔에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켰다. 역시 훌륭한 맛이었다. 잔을 내려놓은 그가 식탁 한복판의 술병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셨는데도, 아직 일행이 한 잔 정도씩은 충분히 더 나눠 마실 만큼이 남아 있었다.
"나머지는, 내일 밤에 마시는 게 어떻겠소?"
이안이 말했다. 일행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돌아왔다.
"…좋은 생각 같은데."
이윽고 메브가 대답했다. 냉큼 일어난 필립이, 마개와 술병을 잡았다.
"술은 제가 챙겨 나가겠습니다."
그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일행들이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다들 가장 먼저 아르케아스에게 받은 영약부터 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웅웅 대는 흑검을 아공간에 던져 넣은 이안은, 정화자의 망토로 엘리야를 감쌌다. 체구가 워낙 작은 덕분에, 그녀는 망토에 완전히 가려져 발끝도 드러나지 않았다.
조금 수상해 보이긴 하지만, 설마하니 난쟁이를 품에 안고 있으리란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하리라.
"술이 생각보다 독한 모양입니다. 일어나니 취기가 느껴지는데요."
일어선 나세르가 중얼댔다. 이안이 몸을 돌리며 대꾸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숙취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다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오히려 몸이 가뿐해질 터였다. 신의 물방울은 술의 형태를 한 회복 약이나 다름없으니까.
"필립, 돌아가면 방패만 들고 마당으로 내려와라."
계단을 내려가 예배당으로 들어서면서, 이안이 문득 내뱉었다.
술병을 신줏단지처럼 품에 안은 필립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패를요? 왜요?"
이 녀석도 술기운이 도는 모양이었다. 조금의 취기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안은, 내심 부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기본적인 방패술을 알려 줘. 나도 이젠 쓸 줄 알아야 하니까."
"아…! 그렇지요!"
술이 확 깬 얼굴이 된 필립이 덧붙였다.
"이따, 그 방패를 다시 한번 자세히 보여주시면 안 됩니까?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방패인데, 제대로 보고 싶어서요."
"어차피 싫어도 자주 보게 될 거다. 이번 여정 내내, 나한테 방패 쓰는 법을 전수해 줘야 하니까."
"저야 영광이죠. 나리께서 제게 배울 게 있으시다니. 나세르에게 배운 기술들까지 전부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듬직하네, 새끼.
피식 웃으며 교회의 대문을 연 이안이, 곧이어 멈칫했다.
"...?"
다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오, 오오… 나오신다…."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빛이여…."
계단 아래에서 입구와 마차를 지키던 스펠로와 병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기도를 올리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거리 곳곳에 모여든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쥔 채였다.
"이게 무슨…."
메브가 중얼대는 가운데, 계단을 내려가는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작은 선물이라더니…."
백금룡이 마지막 순간 신성을 뿜어낸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행이 아니라, 도시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었으리라.
"…찬란한 여신께, 계시라도 받으신 것입니까?"
이안이 다가서자, 일어선 스펠로가 물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더 공손해진 말투였다.
일행이 안에서 만난 게 백금룡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왜 다들 모여 있소?"
이안이 대답 대신 되물었다. 고개를 숙인 병사들이 서로를 돌아보는 가운데, 스펠로가 대답했다.
"교회 안에서 터져 나온 빛을 보고 모인 것이지요. 빛의 고리가 도시 상공을 훑고 흩어졌습니다. 경께서 올린 기도에, 여신께서 응답을 주신 것 아니었습니까?"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어쨌든 루 솔라의 신성력인 건 사실이지 않던가.
"역시…. 여신께서 서부를 버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감사합니다, 경. 내일 이 사실이 알려지면, 많은 이들이 안심하게 될 겁니다."
"감사는 정화자들에게 하시오. 그들의 공이니까."
이안이 옆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이왕 써먹기로 한 김에, 확실히 시선을 돌릴 생각이었다.
"그, 그렇습니까…?"
스펠로가 놀란 듯 바라보는 사이, 말없이 그를 지나친 일행들이 차례로 마차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마차에 탄 이안이, 엘리야를 옆자리의 샬롯에게 건네며 스펠로를 돌아보았다.
"부탁할 게 있소만."
"말씀하십시오."
"말 한 마리와 지붕 달린 마차를 구해 주시겠소? 눈에 안 띄는 걸로. 이 마차는, 너무 눈에 띄어서 말이오."
"내일 오전까지 구해 마당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스펠로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리고 범죄자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가 어딘지도 알고 싶은데. 도시 구석이든, 성벽 밖이든."
"예…?"
이어진 말에, 스펠로가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인적이 드물고 외진 곳 말이오. 다소간의 소란이 일더라도 아무도 오지 않을 만큼 으슥한."
"그런 곳은 왜…."
"그래서, 모르시오?"
"…몇 군데 알긴 합니다만."
"잘 됐군. 그중에서 가장 으슥하고 외진 곳으로 알려 주시오. 나 말고, 마부에게. 돌아가는 동안."
"예. 알겠습니다."
스펠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대답했다. 이안의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이안은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다.
"고생하셨소. 돌아가면 푹 쉬시오."
싱긋 미소 지은 이안이 창문을 닫았다. 마차가 기다렸다는 듯 출발했다.
오늘 밤, 교회에서 일어난 빛의 축복을 널리 알릴 시민들을 뒤에 남긴 채로.
***
"...!"
엘리야는 눈을 뜸과 동시에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푹신한 침대. 다소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이불이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방에 가득한 술 냄새와 곰팡내, 짠 내가 느껴졌다.
"...."
동그랗게 뜬 그녀의 두 눈은, 좌우의 색이 달랐다. 한쪽 눈은 선명한 파란색이었고, 반대쪽 눈동자는 연한 갈색이었다.
서로 다른 색의 두 눈에, 널찍한 방의 전경이 담겼다. 옷과 이불, 각종 병장기가 어지럽고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딱 적당하게 일어났군, 엘리."
"...!"
고저 없는 목소리가 번졌다. 화들짝 고개를 돌린 엘리야가, 비로소 창가에 놓인 쇼파를 눈에 담았다.
정확히는 그 위에 앉아, 느긋하게 팔목 보호대의 고리를 채우고 있는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를.
잠시 멍하니 입을 벌렸던 그녀가, 이윽고 내뱉었다.
"그분이시군요. 북부의 초인, 용살자…."
"내 소개를 할 필요는 없겠군."
남자,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엘리야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고, 말투도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심지어 하던 일을 멈춘 것도 아니었다. 팔뚝을 만지작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엘리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제가, 독립할 때가 된 건가요?"
이안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의 검은 눈이 비로소 엘리야를 마주 보았다.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고 윤기 없는 눈동자.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설마, 백금룡께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 건 아니겠지."
"그게…."
대답하려다 멈칫한 엘리야가, 이윽고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제가 둥지 밖으로 나온 이상… 저는 더 이상… 그분과의 일을 이야기할 수 없는데요…."
"그건 네가 용의 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지켜야 하는 규칙 아닌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내뱉은 이안이, 턱을 까딱이고는 덧붙였다.
"그게 아니라도 나는 예외로 해야지. 직접 그분의 부탁을 받았고, 그분의 대행자이기까지 하니까."
"어… 그런가요…?"
엘리야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기울어졌다. 생각해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예외를 둬도 되는 건가…?
엘리야가 내심 중얼대는 사이, 이안이 말을 이었다.
"넌 이제 내 책임이야. 이건 중요한 부분이고. 그러니 대답해 주면 좋겠군. 지금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전달받은 게 맞나?"
"…독립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이윽고 이안의 논리가 옳다고 결론 내린 엘리야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게 언제인지 확답을 주시지는 않았죠. 대행자를 다시 만날 날이 언제일지,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하셨거든요. 대행자께선, 자신의 부탁이라도 무작정 들어주는 분이 아니시라고요."
"…별 말씀을 다 하셨군."
이안이 공기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여전히 표정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엘리야는 그가 웃었다는 걸 눈치챘다.
"어쨌든,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라는 거네."
"네. 일단은요."
"그럼 대화가 편해지겠군."
시선을 돌린 이안이, 다시 하던 일을 이어가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제도까지 데려갈 거다. 미리 말하지만, 평화로운 여정이 되지는 않을 거야. 위험한 일도 많을 테고, 제도까지 직행하지도 않을 거니까. 먼 길을 빙 돌아서 가게 될 거야."
"빙 돌아가신다고요…?"
"그래. 문제 있나?"
"그럴 리가요…!"
엘리야의 목소리가 순간 커졌다. 이안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돌아보는 가운데, 그녀가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저는 제가 기억하는 이래 단 한 번도 둥지 밖으로 나간 적이 없거든요. 세상은 오로지 책과 이야기로만 접했죠. 그 한복판을 거닐게 됐는데 불만이 있을 리가요."
"하…."
서로 다른 색의 눈을 똑같이 반짝이며 말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 이안이, 짧은 탄식을 흘렸다. 입맛을 다신 그가 말을 이었다.
"성년이 지났다고 들었는데. 맞냐?"
"네. 맞아요."
"네가 뭘 기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은 네 기대와는 여러모로 다를 거다. 그러니까, 들뜨지 마."
고저가 없어 건조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널 보모처럼 돌봐줄 생각은 없다. 너도 네 몫을 해야 할 거야. 물론, 사고도 치지 마라. 난 귀찮아지는 건 딱 질색이야."
하지만 엘리야는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정말… 들은 그대로시네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안도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일어섰다.
"내 얘기를 많이 들었나 보군."
그가 자신의 왼팔을 휘휘 돌렸다. 시선은 자신의 팔에 둔 채였다.
"물론이죠. 그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대답하며 침대 밖으로 나간 엘리야가, 이안을 바라보며 멈춰 섰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엘리야 마이어입니다. 여정 동안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최선을 다해 모실게요. 대부님."
"...."
엘리야가 깍듯하게 무릎을 굽혔다. 이안의 팔이 우뚝 멈췄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고개만 돌려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정식으로 인사-"
"아니, 마지막만."
서로 다른 색의 눈을 깜빡이며 이안을 올려다 본 엘리야가, 이윽고 내뱉었다.
"…대부님?"
"...."
#253화
한차례 입술을 달싹인 이안이, 이윽고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가, 왜 네 대부지?"
"그분의 대행자이시니까요. 저는 그분의 딸이니, 대행자이신 이안 호프 경께선 당연히 제 대부님이 되시죠."
엘리야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이안이 입을 꾹 다물며 눈을 감았다. 그가 한숨을 삼키고 있음을 알 리 없는 엘리야가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도 당부하셨어요. 용은 당대에 단 한 명의 대행자만을 두니, 대부님을 만나게 된다면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예를 다하라고요."
"…그리고?"
눈도 뜨지 않은 채, 이안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또 무슨 얘기를 들었지?"
"말씀드렸다시피, 대부님에 대해서 들었죠. 휴식에 들어가신 후로도, 자주 제 머릿속에 속삭이셨거든요.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완벽한 조건의 대행자를 찾으셨다고요. 그 조건이 무엇인지까지는 말씀해 주지 않으셨지만…."
다시 눈을 뜬 이안이 엘리야를 내려다보았다. 놀란 눈빛이 아닌 걸 보니, 그 조건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궁금했지만, 엘리야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걸 알려 주셨죠. 덕분에 대부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거예요."
"또 뭐라고 했는데?"
"...!?"
소파 아래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온 건 그때였다. 화들짝 놀란 엘리야는, 그제야 이안의 소파 아래에 빼꼼 튀어나온 하얀 얼굴을 발견하고는 눈을 치켜떴다.
'왜 저기 누워 있지…?'
그리고 난 왜 저걸 못 봤지?
생각할 찰나, 요정이 덧붙였다.
"묻잖니. 백금룡께서, 이안에 대해 또 뭐라고 하셨냐구."
"어… 무뚝뚝하고, 무모하고, 철저하시다고요. 고약한 농담도… 즐기시고요."
"역시. 위대한 분은 안목도 남다르시네. 그리고?"
"그리고…."
요정이 씩 미소 짓는 가운데, 엘리야가 다시 이안에게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언행에 상처받지 말라고요. 마음은 따듯하고 선한 분이시니까."
"환장하겠군…."
비로소 이안의 입에서 장탄식이 번졌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가, 이번에는 오른팔의 갑주를 조율하기 시작하며 입을 열었다.
"나와 같이 다니는 동안에는, 내 규칙에 따라야 할 거다."
"네. 대부님."
"첫 번째는 날 그렇게 부르지 않는 거야."
"…그럼, 어떻게 부르나요? 이안 경? 이안 님…?"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
이건 너무 버릇없는 것 같은데.
엘리야는 내심 생각했지만, 이안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만 까딱였다.
"부럽네, 이안. 대자가 생긴 거잖아."
"...."
이어진 요정의 말에 이안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 그는 코로 긴 한숨을 내쉴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곧이어 요정이 미끄러지듯 빠르게 소파 밖으로 기어 나왔다. 일어선 그녀가 옷을 탁탁 털며 엘리야를 마주 보았다. 늪 같은 눈동자가 장난기를 가득 머금고 반짝였다.
"아쉽네. 너희 둘이 같이 다니는 걸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을 것 같은데. 내가 아는 난쟁이들은 죄다 괴팍하고 이상했거든. 그런데 넌, 예의 바르게 이상한 편이네. 반 토막."
이상한 요정한테 이상하단 말을 듣다니.
생각하며, 엘리야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누구세요?"
"테사이아 에레노스라고 해. 아마도."
어깨를 으쓱인 요정, 테사이아가 다소 건방져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요정 일족의 최연소 원로지."
"원로… 요정이시라고요?!"
이어진 말은 엘리야의 큰 눈을 더 커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테사이아가 턱을 슬쩍 치켜들었다.
"그래. 따끈따끈하지. 다시 태어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았거든."
"하지만… 어떻게요? 마력의 황혼기가 찾아온 이래 모든 생명수가 생장을 멈춰서, 더는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들었는데요."
"어머. 박식하다더니, 정말 아는 게 많구나?"
눈을 동그랗게 뜬 테사이아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라 이안에게 물어야 돼. 난 그냥 죽다 살아난 것밖에는 한 게 없거든."
엘리야의 반짝이는 눈이 이안에게로 돌아갔다. 시선을 느낀 듯 입맛을 다신 이안이, 손짓을 멈추지 않은 채 내뱉었다.
"변방에 이미 다 자란 채로 죽어 있던 생명수가 있었다. 끔찍한 의식으로 타락한 채로 되살아났지. 하지만 본래 품고 있던 씨앗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
"…변방의 밀림에 다 자란 생명수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론이 사실이었던 거군요. 요정들에게 알려진다면-"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변방은 지금 검은 벽의 광기에 뒤덮여 있을 테니까."
이안이 말을 잘랐다. 다소 귀찮은 듯한 말투였다. 잠시 눈을 깜빡인 엘리야가, 이윽고 덧붙였다.
"검은 벽의 광기가, 변방 지역 전역을 물들이고 있다고요? 어쩌다가요?"
이안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번졌다.
"…대자가 생긴 것도 기가 막힌 데, 물음표 살인마이기까지 했군."
"그게 무슨 뜻인가요?"
"두 번째 규칙이 생겼다는 뜻이지."
내뱉으며 엘리야를 바라본 이안이, 이번에는 오른팔을 휘휘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질문은, 하기 전에 허락을 구하고 해라. 백금룡께선 네 질문에 전부 대답해 주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네…? 아니, 어… 네."
입술을 달싹이던 엘리야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입술 끝만 당긴, 건조한 미소였다.
"똑똑하다더니. 역시 배움이 빠르네."
이게 그 고약한 농담인가…?
엘리야가 멍하니 생각하는 그때, 이안이 옆의 식탁에 얹어져 있던 검을 집어 들며 덧붙였다.
"조금 더 쉬고 있어라, 엘리. 우리는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아래층에 간단한 식재료와 부엌도 있으니까, 출출하면 뭐라도 찾아 먹고."
"어딜 가시는…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물으려던 엘리야가 고개를 숙였다. 깔깔 웃은 테사이아가 입을 열었다.
"아주 못된 야옹이가 있거든. 그 녀석을 끌고 와서,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를 할 때까지 괴롭힐 거야. 그 뒤엔, 아마도 죽일 거고."
"...."
놀러 가는 듯한 말투였지만, 내용은 무시무시했다.
말문이 막힌 엘리야가 입만 벌리는 사이, 검을 허리에 찬 이안이 문으로 걸음을 옮기며 덧붙였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와도 놀라지 마. 적어도 보자마자 네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내 동료들이니까, 안심해도 돼. 필립이란 녀석이 있는데, 뭔가 필요하면 그 녀석에게 부탁하고.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 거야."
"예. 그런데… 이안 님,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되나요?"
엘리야가 재빨리 덧붙였다. 문을 열던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엘리야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만약, 제 이름을 모르는 분들이 들어오면요?"
"그땐…."
이안의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또 다른 검으로 향했다.
"저걸 들고 휘둘러. 그리고 도움을 요청해. 밖에 경비병들이 달려올 테니까."
"...."
이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염려 마라. 그럴 일은 없어. 여긴 안전한 곳이니까. 못다 한 대화는 나중에 다시 하자. 대화를 나눌 시간은, 앞으로 차고 넘치게 있을 거야."
이안이 밖으로 나갔다. 이따 봐, 반 토막. 하고 속삭인 테사이아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이게… 바깥세상?"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엘리야가, 이윽고 중얼댔다.
색이 다른 눈을 몇차례 깜빡인 것도 잠시.
"일단은…."
그녀의 시선이 장내로 돌아갔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워지는 광경에 작게 한숨 쉰 엘리야가, 옷 소매를 걷어 올렸다.
"…청소부터 시작하자."
***
'대부라니….'
규칙적으로 번지는 말발굽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이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 심지어 논리도 그럴듯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아르케아스가 그렇게 알려준 걸지도 몰랐다. 그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고개를 턴 이안은, 건너편에 앉은 테사이아의 장난스러운 눈빛을 마주하고는 다시 한번 헛웃음을 삼켰다.
그녀는 의자가 불편한 듯 연신 몸을 꼼지락 대면서도, 눈썹을 들썩이며 실실 웃음 짓고 있었다.
이안을 놀리는 건 물론이고, 좀전에 보고 들은 이야기를 일행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것이리라.
'마음대로 해라. 마음대로….'
입맛을 다시며, 이안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평소에 타던 것보다 훨씬 작고, 의자도 불편한 마차였다.
마차를 끄는 말도 한 마리였다.
스펠로가 따로 준비해 준 물건이었다. 본래 타던 마차는 나머지 일행들이 내성으로 타고 갔다.
마차가 멈춘 건 그때였다.
끝이 뾰족한 귀를 쫑긋대던 테사이아가 입을 열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군요. 제대로 도착한 것 같습니다, 이안 경."
텐시아 아이나스의 말투였다. 그녀가 이 말투를 쓰는 건, 마부를 의식하고 있어서였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을 아낀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드륵-
때마침, 마부석 쪽으로 난 조악한 간이 창문이 열렸다.
두건을 깊이 눌러쓴 스펠로의 얼굴이 드러났다.
"시간을 잘 맞춘 것 같습니다. 바로 오는군요."
속삭이듯 내뱉는 그는, 그는 검은 망토와 두건으로 온몸을 가린 채였다. 라클리프를 구한 영웅들을 은밀하게 돕는 조력자가 된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이는 차림이었지만, 이안은 굳이 그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어쨌건 그의 은밀한 부탁을 전부 충실하게 수행해 주고 있지 않은가.
"계획대로 수행하시오."
이안의 나지막한 대답에, 굳게 고개를 끄덕인 스펠로가 다시 창문을 닫았다.
다각- 다각-
스펠로의 말대로, 정면에서 또다른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행이 탄 마차일 터였다.
이안이 턱짓하자, 테사이아가 마차 한쪽 문을 끝까지 활짝 열어젖혔다.
다각- 다각-
열린 문 앞으로, 다가온 두 마리 백마의 머리가 드러났다. 녀석들의 은빛 마갑이 눈에 들어올 때쯤, 마부석 쪽이 부산스러워졌다.
마부들이 마차를 옮겨 타는 소리일 터였다. 곧 두건을 눌러쓴 채 고삐를 집어 드는 스펠로가, 문 앞을 지나치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
은밀한 사명감과 뿌듯함이 뒤섞인 눈빛.
내심 실소하면서도, 이안은 고개를 끄덕여 줬다.
두건을 더 깊이 눌러쓰는 스펠로가 지나가고, 단단해 보이는 마차의 몸체가 이어졌다.
이쪽과 마찬가지로 한쪽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였다.
그 너머. 나란히 앉아 이쪽을 돌아보는 메브와 필립을 눈에 담은 이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엘리가 깨어났다. 가서 잘 보살피고 있어. 굶고 있으면, 뭐라도 찾아서 먹이고."
"예. 나리. 염려 놓으십시오."
필립이 대답할 찰나, 이안의 마차 안으로 커다란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쿠웅-
얼굴에 검은 복면이 덮이고 팔다리가 줄로 결박된 팔메르였다.
놈은 마차 바닥에 떨어지고도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놈을 집어 던진 샬롯이 뒤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일행의 마차가 그대로 멈추지 않고 지나쳤다. 저대로 저택으로 돌아가서, 안에 이안이 있는 것처럼 대기하게 될 터였다.
귀찮은 짓거리였지만, 이목을 끌지 않고 움직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팔메르의 등에 발을 얹으며, 테사이아가 마차 문을 닫았다.
드륵-
거의 동시에 마부석 쪽의 간이 창문이 다시 열렸다. 나세르의 갈색 얼굴이 드러났다.
"출발하겠습니다."
"길은 확실히 알고 있겠지?"
"예. 걱정 마십시오."
싱긋 미소지은 나세르가 창문을 닫았다.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꽤 느린 속도였다. 승객을 다섯이나 태우고 있기 때문이리라.
…중간에 퍼지면 귀찮아 지는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옆에 앉은 샬롯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러 생각이 오가는 눈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팔메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놈의 꼬리는 꼬리 갑주가 씌워진 그대로 샬롯의 한쪽 팔에 칭칭 감겨 있었다.
아주 자연스러워서, 특이한 형태의 팔뚝 보호대나 장신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야옹아. 아까 반 토막이 이안을-"
테사이아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눈빛으로 그녀의 입을 다시 다물게 한 이안이, 재빨리 내뱉었다.
"문제는 없었나?"
테사이아를 돌아보던 샬롯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문제 없었다. 다들 어젯밤의 일만 얘기하더군. 찬란한 여신께서 교회에 축복을 내리신 게 맞냐고 말이야. 그렇다면 자기네들의 무고가 증명된 것과 다름없다 여기는 모양이더군. 다들 메브와 필립에게 확인을 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필립은 뭐라고 했지?"
"신께서 무슨 의도로 신성을 내리신 건지는 알 수 없다고 했지. 일개 종이 주인의 뜻을 예단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고. 매번 같은 대답만 반복했다."
"아주 모범적으로 둘러댔네."
역시, 다 컸다니까. 새끼.
이안이 코로 웃음 짓는 사이, 샬롯이 덧붙였다.
"자꾸 달라붙는 작자들 때문에 조금 오래 걸렸을 뿐. 일 자체는 아주 쉽게 끝났다. 다들 이제 이놈에게는 관심도 없더군. 제대로 인도받았고, 온전히 우리 차지다."
분명 다 듣고 있을 텐데도, 팔메르는 으르렁대거나 꿈틀대지조차 않았다. 억눌린 숨소리만 흘릴 뿐이었다. 입에 재갈을 물린 게 분명했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 됐군."
#254화
귀족과 관리들의 관심이 전부 옮겨 갔다니.
백금룡의 마지막 선물이 기대 이상의 효과를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하긴. 오늘은 찾아오는 놈들도 없었지.'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아마 다들 어젯밤의 일을 멋대로 해석하며, 교단의 인맥에게 보낼 서신들을 작성하느라 바쁠 터였다.
그게 어떤 여파를 불러올지, 이안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분명 그의 이름도 언급이 되긴 하겠지만. 어쨌건 어제 교회에서 일어난 기적의 주역도 공식적으로는 고티어와 나세르였으니까.
아마 한동안은 대교회에서도 그들의 행적을 찾느라 바쁠 터였다.
그들을 도저히 찾을 수 없게 될 때쯤에나 이안을 찾겠지. 혹시 모를 그 순간을 위한 변명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여차하면 여명단을 팔 거니까.'
라클리프의 소식이 전해지면, 아마 여명단도 발칵 뒤집어질 터였다.
이안을 죽이기 위해 보낸 자들이 변절했을 뿐만 아니라, 의회의 의원까지 죽였으니까.
놈들의 수장은 특히나 골머리를 앓게 되리라.
그렇다고 이안에게 새로운 자객을 보낼 수도 없을 터였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도 일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더는 그를 신경 쓸 여력조차 없어질 가능성도 충분했다.
의회 전체가 삐걱댈 테니까.
백금룡 뿐 아니라 크랄렌 조차, 자신의 입으로 균형이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다고 떠들어 대지 않았던가.
아마 이번 사건을 명분으로, 내부적인 갈등에 불이 붙으리라.
'아예 자멸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안이 보기엔, 끝내 누군가가 의회의 패권을 쥐게 될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게임에선 그게 여명단이었던 게 분명했다.
순수 교도가 교단의 주류로 떠오르고, 온갖 극단적인 정책들이 펼쳐지지 않았던가.
이번 일로 그들은 낭패를 겪게 될 테니, 아마도 실권을 쥐는 건 전혀 다른 세력이 되리라.
어떤 놈이건 똑같이 개판을 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차피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아니던가.
게임일 때보다 의회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으리란 것만으로도, 이미 의의는 충분했다.
게다가 놈들의 꼬리를 밟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게임일 때와 가장 극적으로 달라진 부분들에 주목하다 보면, 충분히 냄새를 맡을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당분간은 나도, 굳이 먼저 건드릴 생각은 없지만.'
이안은 슬쩍 어깨를 까딱였다.
괜히 벌집을 쑤셔서, 놈들을 다시 뭉치게 만드는 공통의 적이 되어줄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저들끼리의 암투에 몰두하도록 놓아두는 편이 나았다. 이번 일로 말미암은 혼란이 가라앉을 시간도 필요했고.
그러니 라클리프를 떠나면, 한동안은 본업인 떠돌이 용병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다.
서브 퀘스트 들이나 해결하면서.
'본업이라니.'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나도 현지인이 다 됐네. 시발….'
마차의 속도가 줄어든 건 그때였다. 상념에서 깨어난 이안이 테사이아와 샬롯을 돌아보았다.
왜 이렇게 조용한가 했더니. 테사이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느새 마차 안으로 구린내와 비린내가 섞인 악취가 스며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방 도시의 골목에서나 날 법한 냄새였다.
이안이 입을 열었다.
"어때?"
"조용하다. 적어도 사람은 없어."
"그러게. 누가 죽어도 모르겠네."
샬롯에 이어 테사이아도 들으라는 듯이 덧붙였다. 팔메르는 여전히 별 반응이 없었다.
…이 새끼, 삶의 의욕을 아예 잃은 건가.
이안은 그제야 다시 팔메르를 내려다보았다. 놈의 상태 따위는 알 바 아니었지만, 그로 인해 입을 열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테니까.
하긴. 샬롯이라면 어떻게든 놈의 입을 열 터였다. 그녀의 심문 기술은 이안에게도 배울 점이 있었다.
게다가 사실, 이안이 궁금한 건 팔메르가 털어놓는 정보가 전부가 아니었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샬롯과 테사이아가 어떤 생각을 할지가 더 궁금했다.
'무슨 계획을 내놓건, 어설플 거란 말이지….'
모든 이야기를 들어둔 후에 계획을 종합적으로 보강하는 게, 이안이 이 자리에 동행한 이유였다.
몇 차례 힘겹게 앞뒤로 움직이던 마차가 이윽고 완전히 열렸다.
간이 창문이 열리고 나세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측 문을 여십시오."
"우측?"
"테사 쪽에서는 좌측이요."
"말을 참 어렵게 하네, 짝귀."
"…이게요?"
핀잔을 준 테사이아가 문을 열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린 이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높다랗게 솟은 성벽을 앞에 둔, 도시 구석이었다. 쓰레기와 썩어 빠진 생선 대가리가 굴러다니는, 굽이진 골목 끝의 작은 공터.
'정말 범죄자들이 좋아할 만한 곳이긴 하네.'
마차는 골목을 가로막듯 정차한 채였다. 만약 누군가 근처까지 온다 해도, 마차 너머를 제대로 볼 수는 없을 터였다.
헐떡대는 갈색 말을 눈에 담은 이안이, 허리춤의 검을 풀며 입을 열었다.
"아무도 얼씬대지 못하게 잘 지키고 말이 아무거나 주워 먹지 못하게도 신경 써. 괜히 배탈이라도 나서 죽어버리면 말값을 물어 줘야 하니까."
"그 전에 지쳐서 죽을 걸 적정해야 할 것 같군요. 저쪽으로 끌고 가서 좀 쉬게 하겠습니다. 물도 먹이고요. 누가 오건, 잘 타일러 돌려보낼 테니 염려 마십쇼."
이안이 통째로 던진 검을 받아든 나세르가, 말을 묶은 끈을 풀며 마차 반대쪽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이제 정말 마부가 다 됐네.
코웃음을 삼키며, 이안은 샬롯을 돌아보았다.
팔메르를 마차 밖으로 집어 던진 그녀는, 놈의 발목을 집어 들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샬롯이 물었다.
"심문은 나에게 맡겨둘 거냐?"
"그래. 난 여기 앉아서 구경만 할 거야. 묻고 싶은 게 있긴 한데 중요한 건 아니니까. 네가 볼 일을 다 본 뒤에 묻도록 하지."
"…그 전에 죽일 수도 있다만."
"그럼 뭐, 어쩔 수 없고."
마차의 문턱에 걸터앉은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가라앉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 샬롯이, 팔메르의 다리를 끌고 공터 한복판으로 걸음을 옮겼다.
팔메르의 온몸이 오물로 범벅이 됐지만, 그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곧 멈춰선 그녀가 팔메르의 목을 붙잡고 강제로 무릎 꿇렸다. 놈이 뒤집어쓴 복면이 벗겨졌다.
입에 재갈을 문, 그새 조금 야윈 팔메르의 얼굴이 드러났다. 야성과 자신감으로 가득하던 노란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었다.
"안녕. 또 만나네."
샬롯의 옆에 선 테사이아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인사하는 가운데, 샬롯이 놈의 입에 묶인 재갈을 풀었다.
테사이아를 응시하던 노란 눈이, 이윽고 샬롯에게로 돌아왔다.
"...."
샬롯은 놈을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팔메르의 시선이 이윽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짓눌리는 것처럼 아래로 내려갔다.
이안도 익히 경험한 적 있는 현상이었다.
'그때는 샬롯이 저 입장이었지만.'
지금에 와선,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기억이었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해라."
샬롯이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잠시 이를 악물었던 팔메르가, 샬롯의 무릎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씹어 뱉었다.
"구역질 나는 뒷골목에서 죽게 될 줄이야…. 하지만 이미 각오는 되었다. 죽여라."
"소원대로 해주지. 하지만 그 전에 내가 할 질문에 대한 답부터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조금이라도 덜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면."
"...."
팔메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문 채 슬쩍 위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샬롯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언제부터 태초의 야성을 섬겼지? 마로 텔에 있을 때부터인가?"
수인족의 도시 이름인가.
이안이 내심 읊조리는 사이, 팔메르가 읊조리듯 대답했다.
"그렇다. 새로운 고향을 떠나기 전부터였지…."
"역시 그랬군…. 내가 중앙으로 떠나기 전에도, 이미 너처럼 이기적이고 나약한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지."
"언제부터 후손이 조상을 섬기는 게 나약하고 이기적인 일이 된 건지 모르겠군…. 내가 일족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왔는지 안다면, 그렇게 내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을 거다."
"일족을 타락시키기 위한 희생이었겠지…!"
샬롯의 목소리에 섬뜩한 저주파가 섞였다. 그러쥔 주먹에서 뼈 소리가 번졌다. 풍성한 갈기가 너울대는 가운데, 그녀가 덧붙였다.
"말해라. 지금 마로 텔은 어떤 상태지? 야성의 의식을 치르는 어린 전사들이 정말 그렇게나 많아졌나?"
팔메르가 이를 악문 채 다시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본능에 새겨진 공포를 이겨내려는 듯 온몸을 부들대며, 놈이 내뱉었다.
"일족을 팔아넘기라는 거냐…? 넌 나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내게 그 어떤 치욕과 고통을 주더라도…!"
"그런 게 아니야!"
샬롯이 일갈했다. 그 외침이 어떤 힘이라도 지닌 듯, 팔메르의 몸에 힘이 탁 풀렸다.
"너 같은 놈들은 지금, 일족 전체를 위험해 빠뜨리고 있다. 나는 일족을 구하려는 거야!"
"무슨 소릴…. 머지않아 제국은 더이상 내해 건너까지는 신경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혼돈과 어둠의 시대가 열렸으니까…!"
고개를 숙인 채, 팔메르가 으르렁댔다. 그가 저항하듯 온몸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조상들이 빼앗긴 땅을 전부 되찾을 것이다…. 예전처럼 그림자 속의 포식자가 되어서…! 저 더러운 귀쟁이들을 모조리 찢어 죽인 후에!"
"그래서 공작을 도왔나? 하지만 그 헛된 꿈은 이뤄지지 않을 거다. 어둠이 제국을 뒤덮는 것보다, 일족을 노리는 칼날이 더 빠를 테니까."
짐승이 으르렁대는 듯한 소리로 내뱉은 샬롯이 팔을 뻗었다. 팔메르의 양 볼을 피가 날 정도로 움켜쥔 그녀가, 놈의 고개를 억지로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이미 교단과 귀쟁이들은 너희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뿐 아니라, 너희가 일족의 주류가 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지. 그러면 적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테니까."
"...!?"
팔메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놈의 흔들리는 눈을 노려보며 샬롯이 소리쳤다.
"교단의 정화대와 사병을 앞세운 귀쟁이들이 남부에 발을 들일 거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우리가 과거에 겪었던 살육이 다시 펼쳐질 거란 말이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눈을 치켜뜨며 굳어있던 팔메르가, 이윽고 간신히 되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공작이 이런 얘긴 해준 적이 없나 보지? 그자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래! 전부 사실이다. 내가 직접 들었지. 그것도 귀쟁이에게서."
양 볼을 움켜쥔 손아귀에 더 힘을 주면서, 샬롯이 노란 눈을 뚫을 듯 응시하며 덧붙였다.
"그러니 당장 말해. 지금 마로 텔의 상황은 어떻지?"
"...."
경악과 불신으로 흔들리던 팔메르의 눈빛이 이윽고 조금씩 가라앉았다. 한동안 숨 쉬는 것도 잊은 듯 샬롯을 올려다보던 그가, 이윽고 뭔가 결심한 듯한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지금 마로 텔은…."
***
이안이 저택으로 돌아온 건 하늘이 어둑어둑해진 무렵이었다.
"...?"
마차에서 내린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코를 킁킁대며 뒤따라 내린 테사이아가, 샬롯을 돌아보며 내뱉었다.
"설마 했는데. 역시, 여기가 이 맛있는 냄새의 근원지였어."
이안은 자신의 코가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군침이 절로 도는 냄새가 마당을 뒤덮고 있었다. 근원지는 당연히도 저택 안이었다.
녹초가 된 말을 추스르는 나세르를 슬쩍 돌아보며, 이안이 이내 문을 열었다.
"허…."
다시 앞을 돌아본 이안이 멈칫했다. 그가 짧은 탄식을 흘리는 사이, 뒤따라 현관으로 들어선 테사이아와 샬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대로 보는 거… 맞지?"
"…믿기 힘들지만. 그래."
저택 내부가 그들이 나갔던 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는 먼지가 풀풀 날리고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는데.
지금은 아주 깨끗했고, 심지어 밝았다.
있는 줄도 몰랐던 벽면의 등잔과 촛대에 전부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암흑시대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힘든 아늑함마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생각보다 늦으셨군요."
이안이 다시 걸음을 옮길 찰나, 복도 옆에서 필립이 불쑥 튀어나왔다. 걸음을 멈춘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저긴 식당인데.
"다행이네요. 뭔가 문제라도 생기신 건 아닌가 했는데. 그래서, 일은 잘 마무리 하셨습니까?"
"이게 다 뭐지? 대청소라도 했나?"
이안이 대답 대신 되물었다. 눈을 깜빡인 필립이, 이윽고 풀썩 웃음 지었다.
"아, 이거요? 믿기 힘드시겠지만-"
"…엘리야의 작품이다. 이안."
메브의 목소리가 말을 잘랐다. 가벼운 차림이 된 그녀가 식당에서 걸어 나와 필립의 옆에 섰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찻잔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걸 보니 정말 차를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들어왔을 땐, 이미 청소를 반 이상 끝내 놨더군."
"그 녀석이…?"
"그래. 지금은 식사를 준비하고 있어. 사과하지. 우리는 조금 전에 먼저 식사를 마쳤다."
"오전부터 굶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필립이 덧붙였다. 메브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안이 물었다.
"그 차도, 엘리가 우려준 거요?"
"그래. 부엌에 찻잎이 있었나 보더군. 몰랐는데, 쓸 수 있는 향신료도 꽤 남아있었고."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메브가 말을 이었다.
"미리 말하지만 엘리야는 요리에 아주 조예가 깊다, 이안. 기대해도 좋아."
뭐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안이 헛웃음을 지을 찰나, 필립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덧붙였다.
"축하드립니다, 나리. 아주 훌륭한 대자가 생기셨어요."
"...."
#255화
이어진 말에 이안의 표정이 다시 한번 떨떠름해졌다.
이미 다 말했다니.
하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말하지도 말라고 하진 않았다.
주문쟁이 난쟁이라면 충분히 할 만한 사고의 흐름이었다.
이안이 속으로 세 번째 규칙을 만들어내는 사이.
"복장을 정리하고 내려 와라. 식사를 준비해 두라 이를 테니."
느긋하게 말한 메브가 다시 식당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필립이 의미심장하게 일행을 돌아보았다.
"올라가시면 또 놀라실 겁니다."
"...."
서로를 돌아본 이안과 샬롯, 테사이아가 곧바로 계단으로 발을 들였다.
"…그 짧은 팔다리로,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람."
2층의 복도로 들어선 테사이아가 중얼댔다.
그러게.
속으로만 읊조린 이안이 헛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2층 복도 역시 아주 깨끗하고 밝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곳곳에 저주와 죽음의 흔적이 가득했건만. 이제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전혀 몰랐는데, 이제보니 꽤 그럴듯한 제국 양식의 저택이었다.
그건 일행들이 묵던 방도 마찬가지였다 장내의 모든 가구와 물품들이 깨끗해진 건 물론이고, 침구류도 각이 딱딱 잡힌 채 있어야 할 위치에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 술 냄새는 물론 곰팡내도 나지 않았다.
장비들을 풀어헤치며,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능숙하다더니…."
이건 그런 말로 끝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엘리야는 청소와 정리정돈의 달인, 아니 명인이 분명했다.
어느 순간부터 위생을 거의 포기한 채 살아온 현대인 출신에게는 감동적이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어지르기 미안해지네."
말과 달리 걸치고 있던 장비들을 허물 벗듯 떨어뜨리며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이안과 샬롯은 그녀에게 눈총을 주면서, 벗어 놓은 장비를 한 곳에 고이 모셔 두었다.
"백금룡께선 둥지가 깔끔한 걸 좋아하셨나 보군."
"마법이야. 분명히 뭔가 주문을 쓴 거야."
방을 나서는 이안의 뒤를 따르며, 샬롯과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이안도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비전 스킬 트리에 청소와 관련된 마법 같은 건 없었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 세계에는 그의 스킬 창에는 없는 주문이 수없이 많지 않던가.
'문을 닫았다가 열면 알아서 정리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1층으로 내려오던 이안은, 좀 전의 자신과 같은 얼굴로 들어오고 있는 나세르를 발견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셋을 올려다본 나세르가, 쌍꺼풀이 짙은 눈을 잔뜩 치켜뜬 채 내뱉었다.
"저택에, 찬란한 여신의 기적이라도 내렸던 겁니까?"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그가 나세르의 앞을 지나치며 대꾸했다.
"그 비슷한 일이 생기긴 했지."
"대체… 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는 또 뭐고요?"
"우리도 지금 확인하러 가는 길이야. 짝귀."
녀석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셋의 뒤를 따랐다. 무장을 전혀 하지 않은 터라, 다른 셋과 달리 위층을 들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안은 곧바로 식당으로 들어섰다. 부엌과 이어진, 본래는 시종이나 하인들이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음식 냄새가 한층 더 짙어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거의 다 준비됐으니까."
부엌 쪽에서 엘리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문 너머로 고개만 내민 채 서로 다른 색의 눈을 빛내며 말한 그녀가, 대답도 듣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안은 군말 없이 원형 식탁의 빈 자리에 앉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맛도 모른 채 허기를 채우기 위한 식사를 했던, 바로 그 식탁이었다.
맨 마지막으로 식당에 들어온 나세르의 눈이 다시 한번 커졌다.
"그거… 혹시 차를 드신 겁니까?"
지금 식탁 위에는 백금룡과 먹다 남긴 술병과, 두 개의 찻잔만이 놓인 상태였다. 놀랍게도 필립 역시 술 대신 차를 마신 모양이었다.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세르가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었다.
"루 솔라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문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시는군요. 드디어 문명인으로 되돌아온 느낌이에요."
요란 떨긴. 이안은 짧게 콧방귀만 뀌었다.
하긴. 저 녀석은 중앙의 대교회에 소속된 정화자였다. 심지어 제국의 귀족 출신이기도 하지 않던가. 본래는 제국 중앙의 문화에 더 익숙할 터였다.
필립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저는 출신이 변변치 않아서 그런지, 차는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제 입엔 값싼 맥주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메브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향으로 마시는 것이다, 필립. 차는 머리를 맑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지. 거기다 비싸기까지 하니, 기회가 있을 때 마셔 두는 게 좋아."
"차 맛을 아실 줄은 몰랐군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차는 마실수록 몸에 좋죠."
빈자리에 앉으며 대답한 나세르가, 옆의 필립을 돌아보았다.
"필립 경도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대교회에 들게 되실 테니까요. 거기선 음주가 금지되어 있어서, 모든 사제와 기사들이 차만 마십니다."
"뭐라고요…?"
필립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나세르가 특유의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물론 서임을 받으신 후엔 밖에 나가서 술을 드실 수 있지만요. 그래도 차에는 맛을 들여 두시는 게 좋을 걸요. 드시다 보면 분명 눈을 뜨실 겁니다. 차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끝이 없죠. 잎을 어디서 재배했는지, 어떻게 말렸는지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거든요. 제가 특히 좋아하는 건-"
"…여기가 제국이라는 걸, 이런 식으로도 체감하게 될 줄이야."
이안이 몇 번째인지 모를 헛웃음을 흘리며 읊조렸다.
커피도 없는 세상에서 차라니. 하긴. 게임에서도 있던 아이템이었고, 여긴 그의 고향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차 예찬론을 늘어놓는 나세르에게 조금 질린 듯한 표정이 된 필립이, 이내 이안의 좌우에 앉은 샬롯과 테사이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일은 잘 끝내신 겁니까? 원하던 정보는 얻으셨고, 그 타락한 수인도 처리하셨고요?"
샬롯이 슬며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네가 말하라는 뜻으로 턱만 까딱였다. 출출하고 귀찮았다. 비슷한 심정이었던지 혀를 날름대며 입맛을 다신 샬롯이 내뱉었다.
"팔메르는 죽이지 않았다."
"예…?"
"그놈은 지금, 우리가 내일 타고 갈 상선의 짐칸에 처박혀 있지."
"뭐라고요…? 그자를 혼자 두셨다는. 아니, 애초에 왜 살려둔 겁니까?"
필립이 미간을 찌푸리는 그때, 부엌에서 쟁반 하나가 둥둥 뜬 것처럼 다가왔다.
온갖 음식 그릇을 담은 쟁반을 머리 위로 치켜든 엘리야였다.
오래 전, 어딘가의 난쟁이 여급이 선보인 것과 거의 흡사한 묘기였다.
…난쟁이들은 전부 저걸 할 수 있는 건가.
이안이 생각할 찰나, 엘리야가 쟁반 위의 접시들을 식탁 위로 옮기기 시작했다.
"입에 맞으시면 좋겠네요."
그녀가 일행 사이사이로 접시를 배분하며 말했다. 그녀의 능숙한 움직임을 눈에 담던 이안이 물었다.
"이게 다, 그분을 모시면서 습득한 기술들이야?"
잠시 푸른색과 갈색의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린 엘리야가, 이윽고 되물었다.
"네, 아니오로 대답해야 하는 건가요?"
"그래."
"그렇다면, 네. …어느 정도는요."
뭔가 뒷 사연이 더 있는 거겠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못했다. 앞에 놓인 접시들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선 대가리나 육포가 아니라 이름 모를 야채들과 깍둑썰기한 고기가 떠다니는 우윳빛 스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 후추와 소금으로 밑간을 한 게 분명한 구운 고기까지.
전부, 현대인 출신이 그의 눈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나이프와 포크를 들며, 이안이 내뱉었다.
"기술을 제대로 익힌 모양이군."
눈을 끔뻑인 엘리야의 얼굴에, 조금은 안도한 듯한 미소가 번졌다.
이안이 고기를 써는 사이, 포크로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찍어 든 테사이아가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음침하고 커다란 동굴에서 혼자 외롭게 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그녀의 행동이 당황스러운 듯 눈을 깜빡인 엘리야가, 이윽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둥지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어요. 아이들이 사는 곳은 따듯하고, 안락하죠. 심지어 해를 볼 수 있는 지하 숲도 있어요. 우리는 거길 정원이라고 불렀고요."
"처음부터 혼자였던 건 아니란 거네."
"확실한 건."
이안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잘랐다. 그는 고기를 한 조각 씹어 삼키고, 스튜까지 한 입 맛본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은 빵을 찢어 스튜에 찍고 있었다.
"네 요리 실력이 청소 실력만큼 뛰어나다는 거다. 그게 가능한 일일 줄은 몰랐는데."
물론, 빈말이 아니었다. 엘리야가 만든 음식들은 이 개 같은 세계에서 먹은 그 어떤 음식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건 이 요리들에 대한 모욕이었다.
현대인이던 시절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맛이었으니까.
맛 좋은 술에 이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라니.
연달아 이어진 호사가, 이제는 오히려 비일상적으로 느껴졌다.
"그래. 정말 대단한 실력이지."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엘리야의 얼굴에 한 박자 늦게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앞으로도 노력할게요."
그녀가 처음으로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식탁의 빈 자리를 턱짓했다.
"술잔만 모아서 가져다주고, 너도 앉아라. 바빴을 텐데."
"네. 그런데 술이 조금 모자란데… 물을 조금 탈까요?"
"많이 타도 괜찮아. 그래도 먹을 만할 테니까."
"네. 저, 필립 경. 죄송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뻗은 필립이 술병을 내밀었다. 깍듯하게 인사한 엘리야가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이제 보니 예의도 바르군.
이안은 내심 읊조렸다. 깨끗한 실내와 맛있는 음식 덕분이겠지만, 마음이 한결 너그러워진 느낌이었다. 물론, 그래도 세 번째 규칙에 대해선 알려줄 생각이었다.
필립의 나지막한 웃음이 이어졌다.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은 답을 듣기에 적당한 때가 아닌 것 같군요.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드십시오."
식사 중인 네 사람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사이 돌아온 엘리야가, 식탁에 술병과 술잔들을 올려놓았다. 어느새 고기 한 덩어리를 다 먹어치운 테사이아가, 스튜 접시를 들며 읊조렸다.
"정말 대단하네. 반 토막을 진작 만났어야 했는데."
"식재료를 좀 사다 달라고 했을 때는, 이런 결과가 나오리란 상상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술잔을 식탁 중앙에 가지런히 정렬하며 필립이 말을 이었다.
"반성하게 되더군요. 사실 엘리가 식재료 목록을 적은 종이를 내밀었을 때, 역시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나 했거든요."
"맛대가리 없는 육포나 곰팡이 핀 빵은 다신 못 먹을 것 같아. 물론, 비린내 나는 생선도. 나한텐 그게 최악이었어."
테사이아가 스튜를 그릇째로 들어 홀짝대며 말했다. 그 모습도 놀랍다는 듯 바라본 엘리야가 덧붙였다.
"적은 재료들로도 맛을 낼 방법을 고민해 볼게요. 남은 향신료도 전부 챙겨갈 생각이거든요."
쿵, 그 순간 손을 뻗은 이안이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엘리야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이안이 고기를 우물대며 덧붙였다.
"챙긴 재료들은 전부 이 안에 넣어 둬라. 내가 안전하게 보관해줄 테니까."
그 쓰레기 같은 보존 식량을 맛있게 만들어 준다는데, 이보다 더한 도움도 줄 수 있었다.
눈을 깜빡인 엘리야가 말했다.
"어떻게 하신 거죠? 마력을 전혀 느낄 수 없었는 데요. 이건 어디서 나온 거예요? 마도구인가요?"
"…글쎄."
한 번에 질문 네 개라니. 빵 조각을 스튜에 깊이 적시며 이안이 낮게 웃음 지었다. 엘리야가 화들짝 덧붙였다.
"죄송해요. 두 번째 규칙을 잠시 깜빡 했어요. 너무 놀라서 그만."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대답해 주시는 건가요?"
"아니. 이건 일종의 영업 비밀 같은 거거든."
사실은 나도 원리를 전혀 모르는 거지만.
속으로 덧붙인 이안이 축축해진 빵을 입에 넣었다.
아직 음식이 남은 건 그와 나세르 뿐이었다. 샬롯과 테사이아의 그릇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맛에 그렇게 감탄하면서도, 허겁지겁 먹어 치우던 습관을 버리지는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자는 왜 살려둔 겁니까?"
이윽고 필립이 물었다. 혀를 날름대며 입가를 핥던 샬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살려 달라더군."
"그래서, 살려 주신 거라고요?"
"그래."
"그럼 배에는 왜 태우신 겁니까? 설마…."
"내 일을 돕겠다고 했다. 나를 대전사로 섬기면서."
"…그걸 또, 믿어 주셨고요?"
"그냥 믿진 않았지."
"...."
필립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설명을 들을수록 더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물로 입을 헹군 테사이아가 웃음 지었다.
"너무 많이 생략했잖아. 이 멍청한 야옹아. 설명을 꼭 이안 처럼 하네."
지금 날, 욕으로 써먹은 건가?
마지막 고기를 입에 넣으며 이안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필립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그럼 현명한 테사이아 에레노스 공께서 첨언해 주시겠습니까?"
"야옹이네 일족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전혀 몰랐더라고. 싹싹 빌던데. 일족을 위해 싸우다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전에, 야옹이가 그런 얘길 한 적이 있거든."
샬롯을 묘한 눈으로 돌아본 테사이아가 말을 이었다.
"수인은 마족의 편에 선 이들조차, 이념이 다른 일족이라 여겼다고. 요정과 달리. 보니까, 반대의 경우에도 통하는 말이더라. 정말 다른 야옹이들을 구하고 싶어 했어."
"결국, 그 자의 말을 믿어주셨다는 거군요. 타락자의 말을."
"전 마족의 앞에서 할 말은 아닌걸?"
이어진 테사이아의 말에 필립이 허를 찔린 듯 헛기침했다.
엘리야의 눈이 반짝이는 가운데, 나세르도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전해듯긴 했지만, 일행들의 자세한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테, 테사는 경우가 좀 다르죠."
"물론 그렇지. 결정적으로, 이안도 그 야옹이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했어. 그래서 결정을 내린 거지."
"…그 말씀을 먼저 해 주셨더라면 더 간단했을 텐데요."
"그거야 내 마음이지. 그런 의미에서,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말야."
말을 멈춘 테사이아가 은근한 눈빛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부두로 가는 동안, 그 녀석한테 군도에 대해서는 왜 물어본 거야?"
#256화
"너도 이미 들었잖아."
이안이 남은 빵을 스튜 그릇에 문지르며 말했다. 이제 그의 접시도 거의 다 비어 있었다.
"그래. 군도 놈들이 공작과 한패인지 궁금한 거랬지. 그거 말고, 진짜 이유 말야."
"없어. 그게 전부야."
"흐응… 그래? 알았어. 그렇다면야. 믿어 줄게."
묘한 미소를 입가에 건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난 또, 이안이 군도로 가려고 하는 건가 했지."
눈치 빠르긴.
이안은 빵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테사이아의 예상대로, 그가 말한 건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검은 군도는 남부와 마찬가지로 가 본 적 없는 지역이었으니, 미리 정보를 얻기 위해 물어본 것이다.
궁금한 눈빛이 된 필립이 물었다.
"그래서… 소문대로, 놈들도 한 패였습니까?"
"긴밀한 사이이긴 했지만. 의회의 하수인은 아니었다더군."
"아, 그렇습니까? 불행 중 다행이군요…."
대신, 놈들은 다른 괴물을 섬기는 것 같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필립을 바라보며, 이안이 속으로만 덧붙였다.
팔메르의 말에 의하면, 군도의 군주 몇은 바다 아래에 잠들어 있는 존재를 섬긴다고 했다.
군도의 배들이 흑해의 괴물들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드문 건 그 덕분이라는 것이다.
군도 놈들도 뒤가 구린 부분이 있으리란 의미였다.
샬롯과 테사이아도 함께 들었지만, 둘 다 그 부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거기선 뭐, 크라켄 같은 거랑 싸워야 하는 걸지도.'
어쨌든, 당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가 볼 생각이었지만, 적어도 당장은 아니었으니까.
군도의 잔당들이 부리나케 도망가지 않았던가. 지금 그가 군도로 향한다면 그게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흑해 한복판에서 배와 함께 침몰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아무리 그라도 망망대해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을 터였다. 군도의 해적들 전체를 상대로도.
한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은 이안이, 가볍게 입맛을 다시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돌아간 다음엔 정확히 어쩔 셈이지?"
그의 시선이 좌측에 앉은 샬롯에게로 향했다.
"그 제사장이란 놈과 심복들을 전부 죽일 거냐? 아까 네가 말했던 것처럼?"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사장과 그의 측근들은 죽일 수밖에 없다. 크룩시카께선 슬퍼하시겠지만, 어쩔 수 없어. 그리고 놈들의 가죽은 박제해서 성벽에 걸어둘 거다."
또다시 끔찍한 이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되자, 흥미진진하게 듣던 엘리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안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야의 반응은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어차피 도시를 떠나고 나면, 언제든 끔찍한 상황들을 경험하게 될 터였다. 게다가 그녀는 성인이었고, 거기다 난쟁이였다.
이안이 본 난쟁이들은 죄다 괴짜 기질이 있었지만, 어쨌건 다들 심지가 단단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이리라.
샬롯의 말이 이어졌다.
"일족이 타락자를 처단했다는 걸 보이기엔 그보다 확실한 방법이 없겠지. 그릇된 길로 접어든 어린 전사들도 와해 될 거다. 구심점이 사라졌으니까. 물론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덤벼드는 놈들도 있겠지만…."
그녀가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편한 차림이었지만, 여전히 팔에는 팔메르의 꼬리를 감고 있었다.
"그놈들은, 전부 꼬리를 잘라 버릴 거야."
"철혈의 대족장이 탄생하겠군…."
온몸에 꼬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그 모습을 떠올린 이안이 낮게 웃음 지었다. 그가 아는 샬롯이라면, 일족을 위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곧 입가의 미소를 지운 이안이 덧붙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거다."
"…내부 정리를 끝낸다 해도 말이냐?"
샬롯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의 말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 눈빛이었다.
"그래. 상대는 중앙에서 닳고 닳은 귀쟁이들이야. 일단 병력과 정화자들을 대동하고 남부로 발을 들이면, 네가 뭘 준비하건 소용없게 만들 거다. 네 권위를 의심하고, 꼬투리를 잡으려 들겠지. 거짓이 하나라도 드러난 순간, 하려던 일을 해버릴 거야."
"...."
"실제로 너도, 광전사들을 전부 죽이려는 건 아니잖아? 꼬리가 잘렸다고 크룩시카에게 버림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샬롯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길… 역시 그런가…."
읊조리는 그녀를, 이안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수인들이 요정들에게 패배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의 동족 의식 자체가 약점이나 다름없어 보였으니까.
만약 인간이나 요정이라면, 그냥 타락자들을 전부 죽여 없앴을 터였다. 그편이 훨씬 쉽고 깔끔했다. 그게 아닌 이상,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물론, 대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판을 엎어 버려야지."
덧붙인 말에, 샬롯이 그를 홱 돌아보았다. 귀가 뾰족하게 위로 솟구친 채였다. 한쪽 얼굴을 가르는 네 가닥의 흉터가 전부 이안 쪽으로 드러났다.
"나랑 다니면서 많이 봤잖아. 저쪽의 패를 알면서도 이길 수 없으면, 무효로 만들어 버려야지."
"그러니까… 어떻게?"
"내부 정화를 끝내. 그리고 곧바로, 네가 직접 대교회에 사절을 보내 조사단의 파견을 요구해라."
"...!"
샬롯의 눈이 커졌다.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일족을 타락시키려던 제사장과 관련된 이들을 전부 처단했다고 말이야. 확실한 물증도 동봉하고, 내 이름도 팔아. 그러면 아마 교단도 즉각적으로 움직일 거다."
"네… 이름까지?"
"북부의 초인이자 백금룡의 대행자인 이안을 오랜 시간 보필하다 귀환했다고 하면 되겠군. 그게 사실이니까."
메브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이런 부분만큼은 늘 그녀가 가장 이해가 빨랐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내 명령으로 돌아왔다고 해. 내가 남부의 어둠을 뿌리 뽑아 달라 부탁했다고. 그럼 네 말의 신뢰도가 훨씬 올라갈 거다."
눈을 깜빡인 샬롯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멍하니 읊조렸다.
"그렇게 파견된 조사단이 모든 조사를 끝내고 돌아가, 일족이 깨끗하다는 걸 기록한다면…."
"아이나스나 다른 요정들도 정화자들을 불러들일 수 없게 되겠지. 이미 교단 내부에서 결론이 난 사안이니까. 그러면 그놈들이 사병을 끌고 수인들의 영역을 침범할 명분도 사라질 거야."
이안이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이안을 빤히 바라보는 샬롯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안… 너는 정말이지…."
"물론 그사이에도 귀쟁이들이 훼방을 놓을 수도 있어. 어쩌면 조사단에 아예 자신들의 사람을 섞어 넣을지도 모르지. 그 부분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덧붙인 이안이, 나세르를 돌아보았다.
"저 녀석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대교회라도, 믿음직한 주교가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 여명단이나 순수 교도, 요정과도 관계없는."
"음… 떠오르는 이름이 많지는 않군요. 사실, 대교회의 사제나 주교님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해가 관계가 얽혀 있는 경우가 많아서요."
나세르가 손가락으로 입술 아래를 문지르며 읊조렸다. 곧 입가에 예의 그 여유로운 미소를 띄운 그가 샬롯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수인들에 대한 편견이 없는 분들은 몇 분 떠오르는군요. 대신 헌금이 좀 필요해지겠지만요. 이안 나리의 이름도 효과가 좋겠지만, 금화가 더해지면 더 일 처리가 빨라질 겁니다."
"그 정도 자금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샬롯이 즉답했다. 이안과 함께 다니면서 사제라는 족속들을 다루는 법도 꽤나 익숙해진 그녀였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군. 방법이 없으면 광전사들을 따로 어디로 빼 두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렇게 해 둬라. 마을이 없으면 하나 새로 만들어서라도."
"그래… 영지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탁자 산이라 불리는 깎아지른 산들이 있다. 그 근처를 임시 유배지로 만들어 가겠어."
"거기에 요정 가문의 보증까지 곁들이면 완벽해지겠네."
이안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네가 정말 에레노스이길 바래라, 테사. 그럼 네가 판을 뒤엎고 수인족을 구할 마지막 단추가 될 테니까."
일행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눈을 깜빡인 테사이아가 말했다.
"내가 가주이자 원로니까. 야옹이들을 구할 사절을 보내란 거야?"
"네가 직접 하면 더 좋고. 교단의 조사단이 방문하는 시기에 맞춰서. 중앙의 귀쟁이들에겐 결정타가 될 거다."
"최연소긴 해도, 어쨌든 나는 원로니까. 그렇겠네. 듣자 하니 우리 가문은 거의 망했다던데. 수인과 교류하는 최초의 가문으로 만들면 되겠어. 그러면 남부에서의 영향력도 더 커지지 않을까?"
"…이 와중에도 이득 볼 생각을 먼저 하다니. 역시 귀쟁이답군."
웃음을 흘린 샬롯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겠다, 이안.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렇게 길까지 제시해 주다니."
"그냥 입으로만 떠든 거야. 막상 그대로 전부 이루어 내는 건 쉽지 않을 거다. 변수가 많을 거야. 위험하다는 건, 당연한 거고."
"그래… 그걸 전부 해내려면, 우선 내가 일족을 확실히 장악해야 되겠지."
샬롯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보란 듯 고개를 끄덕인 테사이아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내가 도와주기도 전에 죽어 버리지 말고."
"걱정 마라. 나는 죽지 않아. 전부 해낼 거다."
"할 수 있으실 겁니다. 찬란한 여신이 가호하실 테니까요. 투쟁의 신께서도, 물론 비호하실 테고요."
필립이 덧붙였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안이 설핏 굳어졌다.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 뇌리를 스쳐서였다. 그가 곁에 없으니, 샬롯이 투쟁의 축복을 받을 방법도 사라지는 것이지 않겠는가.
'…맨몸으로 보내면 안 되겠네.'
내심 생각을 정리한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결론은 이만하면 나온 것 같으니까."
그가 식탁 중앙의 술병을 손에 들었다.
"이제, 마실 일만 남았군."
엘리야를 제외한 일행 모두가 순간 멈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술병의 마개를 연 이안이, 앞에 놓인 잔을 하나씩 채우기 시작했다.
물을 타서 색이 연해졌지만, 상쾌하고 달콤한 향은 그대로였다.
"물론입니다. 마셔야죠."
필립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쾌활하게 내뱉으며 일어섰다. 그가 일행들의 앞으로 술이 채워진 잔을 배달하는 사이, 샬롯이 머쓱하게 중얼댔다.
"오늘 같은 날에, 너무 내 얘기만 했군."
"그거야 네가 칠칠 맞으니까 그렇지."
테사이아가 잔을 들며 미소 지었다.
"그래서 어디, 일족을 구할 수나 있겠어?"
"네 가문 걱정이나 해라, 귀쟁아."
샬롯이 덤덤하게 맞받아쳤다.
"네가 원로이자 가주라는 것도, 미래가 어두운 건 마찬가지니까."
"웃기네. 오늘만 해도 봐. 나한테는 이안도 별 말이 없잖아. 그만큼 믿음직스러웠다는 거야."
"말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 말을 아낀 거겠지. 넌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으니까."
곧, 둘이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향한 험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안도 오늘은 둘의 말다툼을 굳이 막지 않았다. 그저 기가 막히다는 듯 옅은 헛웃음만 흘릴 따름이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 둘은, 아주 친합니다. 서로 목숨도 걸 만큼."
자신의 잔을 들고 실실 웃으며 구경하던 필립이, 나세르의 옆에 앉은 엘리야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엘리야가 눈을 깜빡였다.
"신기하네요. 제가 읽은 책에선, 수인과 요정은 원수나 다름없다고 했거든요."
"그랬었지. 처음에는."
이안이 술을 홀짝이며 대답했다. 물을 탔어도 여전히 맛이 좋았다. 이안을 돌아본 필립의 눈매가 슬며시 휘어졌다.
"이 두 분이 어쩌다 친구가 된 건지, 제가 알려 줘도 되겠습니까?"
"저도 궁금하군요. 사실, 내내 의문이었거든요. 그 마족과 관련된 부분이 특히요."
나세르가 잽싸게 덧붙였다.
좌우에서 이어지는 샬롯과 테사이아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는, 변방의 왕국인 아겔 란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됩니다. 테사이아를 처음 만난 곳이 그곳이거든요. 아. 저와 우리 나리는 아겔 란 출신입니다. 이안 나리와도 거기서 처음 만났죠. 이 이야기는 뒤로 미뤄두고, 테사와의 첫 만남부터 이야기하자면…."
눈을 반짝이는 엘리야와 나세르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필립이 주절주절 말을 이어갔다.
왁자지껄한 한복판.
"...."
눈이 마주친 이안과 메브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소 지으며 술잔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훌륭한 밤이었다. 지나가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
고오오....
온몸을 울리는 듯한 낮은 소리가 번졌다.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속삭임 같기도 한 소리였다.
이안은 자신이 어둠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르처럼 끈적한 질감을 가진 어둠. 어둠 표면이 그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꿈틀대며, 비명을 지르는 얼굴 같은 일그러진 파문을 연달아 만들어냈다.
게임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광경이었지만.
"...."
이안은 이게 검은 벽이라는 사실을 단숨에 깨달았다.
아르케아스의 기억에서 스치듯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터였다.
'무의식에 남았거나. 혹은 영혼이 이어졌던 여파이거나….'
이안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끝도 없이 솟은 끈적한 어둠은, 중간쯤부터는 검은 연기처럼 변해 일렁였다. 불길한 오로라가 펼쳐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걸 인식의 장막이라 부르던가.
이렇게 보고 있자니, 왜 마법사들이 그렇게 검은 벽에 매료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고체도 액체도 기체도 아닌.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강대한 힘까지 품은 무언가.
게다가 바라보고 있으면 시선을 빨아들이듯이 끌어당겼다. 귓가로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네 본능에 몸을 맡기라고. 이 너머,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이라고.
"네 세상이 아니라니. 좀 아쉽군."
옆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257화
남자. 딱 그 정도의 정보만을 가진 특징 없는 목소리였다.
"...."
이안은 옆을 돌아보았다.
황량하게 펼쳐진 광야와 그 너머까지 끝없이 이어진 검은 벽.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배경으로, 목소리만큼이나 특징 없는 얼굴을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색의 제국 정복 차림이었다.
처음 보는 놈인데. 하는 생각은 곧바로 바뀌었다.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자를 본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과거, 타락한 용인 타후므리트와 싸운 이후에 꾸었던 꿈. 거기서 그의 앞에 마주 앉았던 놈이었다.
"그래도 아름답지 않나? 이건 하나의 예술 작품이나 다름없지."
기억을 떠올림과 동시에, 더는 남자의 이목구비를 제대로 구별할 수 없었다. 물감으로 그린 얼굴을 손으로 문지른 것 같았다.
또 깨어나면 어렴풋한 기억만 남게 되겠지 생각하면서도, 이안이 입을 열었다.
"너, 혹시 혼돈의 파편이냐?"
검은 벽을 응시하던 남자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목구비가 흐릿했지만, 이안은 그가 미소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재미있는 추론이군. 하지만 애석하게도 틀렸어. 그건 네 것이고, 또한 네 분신이지. 어쩌면 네가 될지도 모르고."
"…그럼 뭐지? 고대 신?"
남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글쎄. 그 부분은 의문으로 남겨두고 싶군. 너무 다 아는 건, 재미가 없잖아."
재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 씹새가.
이안이 이를 악물 찰나.
"넌 잘 하고 있어."
남자가 툭 내뱉었다. 어느새 주위가 어두워져서, 그의 정복이 어둠 속에 녹아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처럼 계속 운명에 저항해라. 그래서 살아남아."
어둠이 이안의 시야를 물들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붉은 상형 문자들이 노이즈처럼 스쳤다.
"네가 끝내 어떤 존재로 거듭날지는, 나도 아주 궁금하니까."
"대답해! 나를 여기로 끌고 온 게 너냐? 아니면 너희 공허 놈들?"
이안은 애써 소리치며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개 같은 말장난이나 선문답 따윈 관심도 없었다.
그저 답을 듣고 싶을 뿐이었다. 저놈이 사라지기 전에.
철퍽-
하지만 그의 손은 진흙 같은 어둠에 박힐 뿐이었다.
남자의 얼굴이 먹물에 가라앉듯 사라졌다. 이안은 놈을 집어삼킨 어둠 속으로 팔을 휘저었다. 어떻게든 놈의 멱살이라도 쥐기 위해서.
하지만 어둠이 이안을 집어삼키는 게 훨씬 더 빨랐다. 어둠과 붉은 노이즈가 시야를 가득 뒤덮었다.
-네가 진짜 궁금한 건, 그게 아니잖아?
속삭임과 함께, 누군가 그의 몸을 흔들었다. 의식이 빨려 들어가듯 치솟았다.
"이안. 일어나. 이안?"
이안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의 어깨를 흔드는 손길과 그를 내려다보는 하얀 얼굴이 선명해졌다.
테사이아였다.
그녀가 이안의 눈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별일이네. 네가 우리보다 늦게 일어나다니. 악몽이라도 꾼 거야?"
"...."
이안은 그제야 방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다들 일어나 기지개를 켜거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매일 아침 그랬듯이.
테사이아의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티는 전혀 안 내더니. 내심 아쉽고 속상했던 거네. 이안."
"…그래. 그럴지도."
선선히 내뱉으며, 이안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꿈의 기억은 벌써 흩어지고 있었지만, 몇 가지 장면은 뇌리에 박힌 것처럼 선명했다.
꼭 다시 보자 씹새야. 어차피 내가 뭘 묻건 대답도 안 해 줄 것 같던데. 다음번엔 면상에 주먹부터 박아 줄 테니까.
그가 내심 중얼대는 사이, 씩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턱짓했다.
"이안 거는 아래에 뒀으니까, 써."
이안은 소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팔꿈치 아래까지 오는 길이의 판금 팔목 보호대와 강철 장갑.
정화자의 흉내를 내게 하기 위해, 필립에게 빌려줬던 물건이었다.
본래 녀석의 것이었던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각자의 주인에게로 되돌려 준 모양이었다.
"...."
이안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창문을 돌아보았다. 먹구름 낀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예정대로 막 해가 뜬 시간에 일어난 것이다.
철컥, 철그럭- 철걱-
곧 일행이 저마다의 장비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새벽까지 술판을 벌인 탓에 실제로 잔 시간은 두세 시간에 불과했지만. 다들 피곤한 기색은커녕 오히려 상쾌해 보였다.
며칠 전 있었던 전투의 여파는 이미 찾아볼 수도 없었다.
다들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안만은 그게 신의 물방울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틀간 연달아 마신 술이, 오히려 일행들의 체력을 말끔하게 회복시켜 준 것이다.
"빠뜨린 물건이 없게 잘 챙기십시오."
"걱정 마, 주근깨."
"두 분이 드실 건조 식량이나 자질구레한 물품들은 따로 짐가방에 챙겨서 마차에 넣어 두었으니, 챙겨 가시고요."
"정말? 언제 그런 걸 또 다 준비해 뒀대."
"어제 밖에서 볼일 보고 계실 때요. 엘리가 집을 치우는 동안 할 것도 없고 해서, 겸사겸사 준비해 뒀습니다."
"역시, 찬란한 여신의 사도는 다르네. 고마워."
평소와 다름없는 여상한 대화들이 오고 갔다. 덩달아 함께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던 엘리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제, 두 분을 배웅하러 가는 건가요?"
"우리가 시작이지. 어머. 아직 몰랐구나. 하긴. 다들 굳이 말을 안 꺼냈으니까."
판금 장화를 신으며 대답한 테사이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빨강머리랑 짝귀는 북부로 갈 거야. 너랑 주근깨는 이안을 따라 중앙으로 가고. 그러니까, 각자 갈 길 가는 날인 거지."
"아하… 두 분만 떠나시는 게 아니었군요. 그래서…."
엘리야가 멍하니 방 곳곳의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테사이아의 말을 들었음에도, 다들 별다른 반응 없이 하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니."
필립이 싱긋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그는 정화자의 판금 흉갑을 걸치고,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다소 초라한 견갑을 어깨에 대고 있었다.
"네. 그렇겠죠."
묘한 눈빛이 된 엘리야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백금룡이라도 떠올리는 건가.
그녀를 흘깃 바라보며 생각한 이안이, 곧 입을 열었다.
"나세르."
"예?"
부리나케 장비를 착용하던 나세르가 고개를 돌렸다.
"다 끝나면 내려가서 마차를 준비해. 두 대 다 끌고 나갈 거니까, 경비병들에게도 말해 두고."
"예. 경호하겠다고 하면, 따라오라고 할까요?"
"그래. 어차피 어제 다 얘기해 뒀어. 알아서들 할 거다."
"예. 천천히들 내려오십시오."
남은 장비를 대충 몸에 걸친 나세르가 방을 나섰다. 내려가서 마차를 준비한 후에 마저 착용하려는 모양이었다.
이안이 다시 느긋하게 장비를 걸치기 시작한 사이.
"우리랑 같은 마차를 타. 이안."
그를 돌아본 테사이아가 불쑥 내뱉었다. 샬롯도 슬쩍 눈만 굴려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평소보다 우람해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필립이 착용하던 정화자의 판금 견갑은 그녀의 것이었으니까. 다른 장비들과 조화롭게 어우러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훌륭한 떠돌이였다.
피식한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어차피 할 얘기도 있었으니까. 엘리야, 필립과 같은 마차를 타라."
"네. 이안 님."
엘리야가 대답하는 사이, 필립이 뒤편의 메브를 돌아보았다.
"나리는, 저랑 같이 타실 거죠?"
"그래. 그러자꾸나."
메브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묘한 눈빛이 되었던 필립이, 티내지 않으려는 듯 미소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하긴, 저 둘도 할 말이 많겠지.
내심 피식한 이안이 팔목 보호대의 고리를 꽉 조였다.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일어난 그가, 간이 식탁에 놓인 진은 강철 장검을 집어 들며 몸을 돌렸다.
"그럼, 먼저 내려가 있겠소."
***
다각- 다각-
메브와 필립, 엘리야가 탄 커다란 마차의 뒤를 따라, 나세르가 모는 작은 마차도 출발했다.
이른 아침부터 나와 있던 스펠로와 경비병들이 자연스럽게 마차를 호위하며 따라붙었다.
"...."
마차 내부는 묘하게 고요했다.
작고 불편한 마차에 타고 있었지만, 오늘은 테사이아조차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다.
막상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자, 뭐라 선뜻 입을 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한 시민들의 목소리만이 희미하게 마차 내부로 파고들었다.
…안 어울리는 짓들을 하네.
내심 읊조린 이안이, 아공간에서 정화자의 두건 망토를 꺼냈다.
본래는 필립이 쓰던, 그리고 엘리야를 감싸는 포대기로 쓰기로 했떤 물건이었다.
"...?"
이안이 망토를 샬롯의 허벅지에 툭 얹어 줬다. 눈을 깜빡인 샬롯이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이 말했다.
"네가 써라."
"뭐라고…? 이 귀한 걸, 내가?"
샬롯의 주황색 눈이 커졌다. 진심으로 놀란 듯, 동공이 뾰족하게 좁아진 채였다.
"하지만… 무장은 지금 가진 것들만으로도 충분하다만…."
샬롯이 더듬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고대인의 전투 도끼와 팔메르의 것이었던 송곳니 검. 진은 강철 단검에 정화자의 견갑까지 착용한 상태였으니까.
이안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죄다 공격 용이지. 넌 늘 방어에 약점이 있었으니까, 이거면 꽤 보완이 될 거다. 거기다 넌 거기선 카르하의 축복을 받을 수도 없어. 신성의 매개체인 내가 없으니까."
슬쩍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가 샬롯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러니까 그냥 받아라. 게다가, 상징적이기도 하잖아?"
"...."
샬롯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이안이 한쪽 어깨를 까딱였다.
"교단의 조사단이 물으면, 하던 대로 내 이름을 팔아. 교단의 정화자가 내게 기증했고, 내가 너에게 손수 하사했다고 말이야."
말을 마친 이안이,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곧 잘 말린 양피지를 꺼낸 그가 망토 위에 그것을 얹어 놓았다.
화로의 사원에서 받은, 화로의 성녀 체르윈 아스트레이아의 직인이 찍힌 증명서였다.
"이건 여러모로 네 말의 신뢰도를 더해 줄 거다. 화로의 성녀의 이름까지 있으니,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전까진 널 건드릴 수 없을 거야."
"…언제 또, 이런 것까지 생각했지?"
샬롯이 이윽고 물었다. 이안이 짧게 웃음 지었다.
"어젯밤에."
샬롯과 테사이아는, 언젠가 그에게 다시 도움이 될 녀석들이었다.
다른 DLC 지역이 그렇듯, 남부는 완전한 미지의 영역이 아니던가.
거기서 도움을 줄 단 둘뿐인 동아줄을 잃을 수는 없었다.
물론 그런 걸 떠나서도, 이안은 그녀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비록 형벌처럼 시작된 관계였지만. 어쨌거나 끝내,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가 되었으니까.
오랜 시간 그다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던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감정에 휘둘려서 일 그르치지 마라."
이안이 덧붙였다. 여러 감정이 오가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던 샬롯이, 이윽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그래. 명심하도록 하지."
"나는?"
건너편에 앉은 테사이아가 불쑥 끼어든 건 그때였다.
이미 이안이 샬롯에게 망토를 건넨 순간부터 눈을 잔뜩 부릅뜨고 있던 그녀였다.
이안의 시선에 그녀가 곧바로 덧붙였다.
"설마 야옹이만 주고, 또 난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지? 안 준다고 원망하진 않겠지만, 이안은 전부터 나보다 이 녀석을 더 챙겼다구."
거, 누가 귀쟁이 아니랄까 봐.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허리띠에서 요정의 비수를 뽑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네 거다. 넌 어차피 호신용 무기만 있으면 되잖아."
"흐음…. 비교가 되긴 하지만, 내 것도 있긴 했다면 뭐-"
조금은 누그러진 표정으로 비수의 자루를 쥐던 테사이아가, 이내 눈을 깜빡였다. 앞으로 내민 자신의 손목에, 이안이 팔찌를 채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에 작은 마석이 박히고, 주문 회로가 정교하게 음각된 마도구였다. 이안이 사용하던 역장의 근원이기도 했다.
테사이아의 시선에, 이안이 툭 덧붙였다.
"넌 반짝거리는 걸 좋아하니까."
"역시… 이안은 생각이 깊네."
테사이아의 입꼬리가 헤벌쭉 올라갔다. 샬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사이, 이안이 말을 이었다.
"역장은 물리적인 충격에는 강하지만 마법적인 공격에는 그보다 취약해. 방어력이 없진 않다만. 알고는 있어라. 마석에 남은 마력, 잘 확인하고."
이안이 아공간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두 개 정도 더 들었다. 이 이상은 알아서 구해."
"고마워, 이안. 한 번 안아 주고 싶은데, 그래도 돼?"
"아니."
"응.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냉큼 대답한 테사이아가, 반짝이는 눈으로 팔찌와 비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제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 이런 녀석이 원로여도 괜찮은 건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다시 샬롯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공간 구석을 헤집고 있던 손을 밖으로 꺼냈다.
갑주가 덧씌워진, 길고 새카만 무언가를 움켜쥔 채였다.
"...!"
샬롯이 돌처럼 굳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이안의 손에 들린 건 그녀의 꼬리였으니까.
#258화
오랜 시간 아공간에 보관되어 있던 꼬리는, 썩지도 말라비틀어지지도 않았다. 털에서 여전히 윤기가 흘렀다.
이안이 입을 열었다.
"진작 돌려주려고 했는데. 그냥 편의상 내가 보관하고 있었던 거다. 이제, 가지고 돌아가."
이안이 꼬리를 내밀었다. 귀를 뾰족하게 세운 채 떨리는 손을 홀린 듯 내뻗던 샬롯이, 곧이어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허공에서 손을 말아쥔 그녀가, 다시 손을 허벅지 위로 내렸다.
"지금은 받지 않겠다."
"...?"
이안의 고개가 설핏 기울어졌다.
긴 숨을 내쉰 샬롯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마로 텔은, 본래 수인 이외에는 그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다. 예외는 황실과 교단. 그리고 그들의 명을 받은 자들뿐이지. 그 이외의 이종족이 발을 들이면, 죽음을 각오해야 해. 그러니까…"
그녀의 시선이 이안의 손에 들린 자신의 꼬리로 되돌아갔다.
"그걸 징표로 만들겠다. 일족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모두에게 알릴 거야. 내 꼬리를 들고 나를 찾는 이는, 일족 전체가 빚을 진 은인이라고."
"...."
이채가 서리는 이안의 눈을 다시 마주 본 샬롯이, 설핏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럼 네가 누구를 마주쳐도, 아무런 문제 없이 나를 만나러 올 수 있을 거다."
"…내가 남부에 들르지 않으면, 어쩌려고?"
"어…? 아니…."
샬롯이 언제 웃었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럴 거냐? 전에는 분명히…."
"농담이야."
이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렇게 하지. 그런 규칙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고맙다. 네가 이런 생각을 다 할 줄이야."
"…네게 배운 거다. 이안."
대답하는 샬롯의 얼굴에도 미소가 되돌아왔다. 피식한 이안이 샬롯의 꼬리를 다시 아공간으로 넣었다. 낮게 가르릉대며,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선택을 했다는 듯이.
"야옹이가 똑똑한 짓을 다 하네."
테사이아의 콧소리가 이어졌다. 어느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둘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곧이어 덧붙였다.
"요정들의 지역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안. 나도 가문에 정착하면, 네 이름부터 알려 둘 테니까."
"그래.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방법도 잘 고민해 봐라. 분명 골치 아픈 과정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마. 알아서 잘해 볼게. 어차피 야옹이랑 나는, 운명 공동체잖아?"
그 말도 오랜만에 듣네.
이안이 웃음 짓는 그때, 마차가 멈췄다.
어느새 바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차 문을 열고 냉큼 내린 테사이아가, 한차례 주위를 돌아보고는 다소 거만한 표정이 되어 걸음을 옮겼다.
샬롯에게 턱짓한 이안도 마차에서 내렸다. 몇 걸음을 옮기자, 마차에 가려져 있던 부둣가의 전경이 펼쳐졌다.
"...."
군도와 상단의 배들이 여럿 떠났지만, 아직 정박해 둔 배가 여러 척 남아 있었다. 아직 아침인데도 주위를 오가는 뱃사람들이 많았다.
스펠로와 병사들은 일렬로 멈춰 선 마차의 앞뒤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이리라.
어쨌든 눈에 띌 수밖에는 없는 광경이었다. 주위를 오가는 이들이 연신 마차 쪽을 힐끔댔다.
테사이아가 텐시아 아이나스의 얼굴이 된 건, 저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일 터였다.
'가까이에도 세웠군.'
샬롯과 테사이아가 타고 갈 배는, 바로 앞에 정박해 있었다. 무슨 잎사귀인지 모를 나뭇잎을 깃발에 새긴 상선이었다.
"빨리 옮겨! 시간 없으니까."
"아침은 가면서 먹을 것이오, 다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움직이시오."
선원들이 바쁘게 배 안으로 나무 상자들을 옮겨 대고 있었다. 선장과 상단주가 연신 소리치며 그들을 재촉했다. 짐을 거의 다 실은 걸 보니, 시간을 잘 맞춰 도착한 것 같았다.
이안이 넘실대는 검은 바다와 그 너머로 솟은 해상 성벽, 그리고 활짝 열린 수문들을 차례로 눈에 담는 사이.
"함께 해서 영광이었다, 메브. 필립."
"나야말로. 넌 내가 본 전사 중에 가장 용맹했다. 샬롯. 앞으로도 무운을 빌지."
"찬란한 광명이 함께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샬롯. 그리고 공. 언젠가 꼭 다시 뵐 날이 오면 좋겠군요."
"살 만해지면 남부로 오세요, 필립 경. 메브 경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내가 중앙으로 진출하는 게 빠를지도 모르죠. 그리된다면, 어떻게든 소식을 전하도록 할게요."
일행들이 작별 인사를 나눴다. 꽤 밝은 분위기였다. 나세르와 엘리야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옆에 서 있었지만, 샬롯과 테사이아는 그들에게도 한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엘리야는 갑자기 기품 있게 말을 건네는 테사이아의 모습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깍듯하게 무릎을 구부려 인사했다.
곧 샬롯과 테사이아가 다시 이안 쪽으로 다가왔다.
이안은 그들을 눈에 담았다. 둘 다,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샬롯의 얼굴과 드러난 몸 곳곳에는 함께한 시간 만큼의 흉터가 새롭게 새겨졌고. 테사이아에겐 전에는 상상도 한 적 없던 기품이 흘렀다.
"...."
샬롯이 이안을 바라보며 멈춰 섰다. 이안은 그녀의 주황색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씩 미소 지은 샬롯이 안팎을 뒤집은 정화자의 두건 망토를 보란 듯 뒤집어썼다.
두건을 깊이 눌러 쓴 그녀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또 보자. 이안."
"그래. 또 보자."
이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작별 인사는 그게 전부였다. 홱 몸을 돌린 샬롯이, 필립이 준비해준 짐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빈 자리를 테사이아가 채웠다.
이안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드물게도 쓴웃음이 맺혀 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이런 식으로 드려야 하다니. 아쉽기 그지없군요. 이안 경."
귀족 흉내를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안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앞으로는 지금 이 모습에 더 익숙해져야 할 것이오. 공."
"그래… 그렇겠죠. 조언 고마워요. 명심하죠."
고개를 옆으로 까딱인 테사이아가, 이윽고 무릎을 굽히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진심으로. 그러니까 꼭 다시 만나요. 내가 중앙에 진출하기 전에."
…그거 진심이었냐.
이안이 내심 읊조리는 사이. 일행들을 한 차례 더 눈으로 훑은 테사이아가, 마지막으로 이안에게 한쪽 눈을 찡긋대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가 벌써 저만치에 걸어가는 샬롯의 뒤를 따라 멀어졌다.
두건을 눌러 쓴 수인 전사와 원로 요정이 배에 올랐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정말이지… 작별은 늘 적응이 안 되는군요. 몇 번을 겪어도, 매번 똑같이 아쉬워요."
옆에 선 필립이 읊조렸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고 배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오래 함께한 전우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삶을 살기 위해 돌아가는 것이었으니까.
곧 짐을 모두 실은 상선이 고정끈을 풀고 닻을 올렸다. 배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후면의 갑판 위로 테사이아와 샬롯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때였다. 둘 다 가만히 선 채 일행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부두를 떠난 배가 너울대는 물살을 가르고, 이윽고 활짝 열린 수문을 통과해 멀어졌다.
이안의 시선이 메브와 필립 쪽으로 돌아온 건, 배가 해상 성벽에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눈빛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도 떠납시다."
***
라클리프를 떠나는 과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이미 메브와 필립, 아니 고티어와 나세르가 대교회로 돌아갈 것이라 이야기를 끝내 놓은 덕분이었다.
도시의 관리들은 오히려 책이라도 잡힐까, 일행이 나눠 탄 두 대의 마차를 검문조차 하지 않았다.
다각- 다각-
스펠로와 그가 지휘하는 병사들이 마차를 호위해 도시의 동쪽 성문을 지났다.
열린 창문으로 멀어지는 라클리프의 성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마주 보고 앉은 엘리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엘리야는 눈만 깜빡일 뿐,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다른 색의 두 눈이 차분했다. 부두까지 가는 동안 메브와 필립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을 텐데도, 그 이야기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려 깊은 난쟁이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하긴. 주문쟁이 난쟁이도 어울리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그녀에게 내뱉은 이안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이안 경…?"
마차 밖으로 몸을 내미는 그를 바라보며, 스펠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부석에 앉은 병사의 곁으로 올라서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배웅은 여기까지면 충분할 것 같소. 스펠로 경."
"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경."
마부석의 병사에게 내려오라 손짓한 스펠로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고삐를 받아든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별말씀을. 덕분에 내가 편했지. 수고 많으셨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안은 스펠로를 슬며시 돌아보았다. 잘난 것도 부족한 것도 없는, 전형적인 제국의 기사.
명성에 압도당한 것일 뿐이겠지만, 어쨌건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자이기도 했다.
"경은 지금 엄밀히 말해, 자유 기사나 다름없지 않소?"
이안이 툭 덧붙인 말에, 스펠로가 어리둥절해하며 입을 열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렇습니다만. 사실상 여전히 라클리프에 소속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작지만 봉토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차기 성주께서도 그 권리를 인정해 주실지는 의문입니다만…."
"그럼, 원한다면 도시를 떠나실 수도 있겠군."
스펠로의 낯이 순간 굳어졌다.
"라클리프를 떠나란 말씀이십니까?"
"여기 남으면 피곤한 일을 많이 겪게 되실 거요. 감수하시겠다면 상관없으나, 그게 아니라면 드네로브로 가시오."
"...?"
"웨스트우드 백작께 내 소개로 왔다고 하면, 아마 받아 주실 거요. 알다시피 거긴 경작지가 넓은데, 일손도 관리자도 부족하지. 이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스펠로의 입이 벌어졌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관도 앞으로 이어진 오르막길로 시선을 돌렸다.
"선택은 경의 몫이오."
"가, 감사합니다, 이안 경…! 명심하겠습니다…!"
스펠로가 감격한 듯 소리치며 머리를 조아렸다. 물론, 이안은 더 이상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호의일 뿐이었다.
그에게 의리를 지킨 백작과, 여러 귀찮은 일들을 처리해 준 별 볼 일 없는 기사에게 딱 적당한.
"드네로브로 가면, 대교회로 보낼 보고서를 하나 더 작성하겠습니다. 귀 공과 정화자들께서 이곳에서 이룩한 위업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역사에 기록될 겁니다…!"
점점 멀어지며 이어진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안 그래도 된다고 말할 틈은 없었다. 멈춰 선 스펠로는 안장 위에서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버린 것이다.
이안이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긴. 하지 말래도 하겠지.'
본인의 이름이 역사에 남을 기회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정식 보고서가 있다면, 행방불명된 고티어와 나세르를 찾다 지친 대교회의 시선도 돌릴 수 있을 터였다.
어디 있는지도 모를 이안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것 보다, 이미 수중에 들어온 보고서를 참고하는 게 더 빠르고 편하지 않겠는가.
그것도 나쁘지 않은 마무리였다.
사실, 이안은 자신이 귀찮아지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되돌아가는 스펠로와 병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언덕길 측면. 저 멀리까지 이어진 완만한 내리막과 절벽 아래로, 내해의 검푸른 물결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지평선은 아마도, 남서부 내륙일 터였다.
…정말 더럽게도 넓네.
다시 앞으로 돌아가려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검푸른 물결 한복판에서 멈췄다.
배 한척이 마차와 같은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돗대 위에 펄럭이는, 잎사귀 문양이 새겨진 깃발.
샬롯과 테사이아가 탄 상선이었다. 이대로 내해를 거슬러 나아가리라. 남부의 항구 도시에 닿을 때까지.
"...."
이안의 가슴 한편에서 묘한 감흥이 번졌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몇 번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 감정을 곱씹기엔 아직 조금 이른 시점이었다.
다그닥….
저들이 오늘의 마지막 작별은 아니었으니까.
오르막이 내리막으로 바뀌고서도 한동안 말없이 나아가던 이안이, 이윽고 고삐를 당겼다.
일어선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몇 미터 뒤, 한 마리의 갈색 말이 끄는 작은 마차가 따라서 멈추고 있었다.
마부석에 앉은 나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릴 찰나.
"나리, 왜 벌써 멈추십니까…?"
먼저 마차 문을 연 필립이, 문 밖으로 상반신을 내민채 물었다.
녀석의 치켜뜬 눈을 마주보며, 이안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때가 돼서 멈춘 거다. 갈림길이야."
#259화
"...."
필립의 시선이 그제야 마차 앞으로 향했다.
이안의 말대로 갈림길이었다. 한 가닥 관도는 북쪽으로, 또 하나는 비스듬하게 북동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인 필립이, 이윽고 억지로 지은 듯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럼 그냥,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갈까요? 어차피 급할 것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아니면 그냥 이 근처에 야영지를 꾸릴까요? 적당한 곳에서 하루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출발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이안은 평소처럼 이제 정오가 막 지났는데 무슨 야영지를 꾸리냐 거나, 다음 갈림길이라고 속 편히 헤어질 수 있겠냐는 식의 핀잔을 하지 않았다.
"...."
그저 가만히 필립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필립의 미소가 울상으로 바뀌는 데는 몇 초면 충분했다. 입술을 떨던 그가 읊조렸다.
"그럼 그냥 조금만이라도 더…."
"그만하거라, 필립."
메브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두꺼운 판금 장갑을 착용한 손이 필립의 한쪽 어깨를 쥐었다.
"때를 늦춘다 해서 아쉬움이 줄어드는 건 아니잖니."
"나리…."
필립이 울상을 지으며 마차 안을 돌아보았다.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기서 헤어지자꾸나."
"...."
"오늘 나눈 대화를 잊지 말렴. 너라면 잘 해 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그건…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답하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필립이, 마차 밖으로 휙 뛰어내렸다. 그가 마부석의 나세르를 올려다보았다.
"따라오십쇼. 마차의 말을 교체할 겁니다. 나리를 모시며 주의해야 할 부분들도 알려 드릴 테니,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 두십쇼."
그대로 걸음을 옮긴 그가, 갈색 말의 앞을 지나쳐 마차 반대편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눈가의 습기를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알겠습니다."
선선히 대답한 나세르도 마부석에서 내렸다. 그가 갈색 말에 묶인 고정을 푸는 사이, 메브가 마차 밖으로 내렸다. 정화자의 망토는 마차 안에 벗어둔 듯, 전신 판금 갑옷을 고스란이 드러낸 채였다.
"와서 어떤 녀석을 데려갈 건지 고르십시오."
두마리 백마 옆으로 온 필립이 나세르에게 내뱉는 가운데. 여전히 마부석에 선 이안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메브가 미소 지었다.
"결국 이 순간이 왔구나, 이안. 사실, 너를 다시 만났을 때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죽기라도 할 줄 아셨소?"
"그랬지. 사실, 그러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눈치 채고 있는 줄 알았는데."
"뭐, 어느 정도는."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흉갑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내게 그랬듯, 필립도 잘 부탁해. 이안. 무모한 짓 하지 않고, 무사히 제도에 도착할 수 있도록."
옆에서 필립이 숨죽여 코를 훌쩍댔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는 그를 슬쩍 돌아본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건 의뢰요, 부탁이오?"
"의뢰라고 하고 싶지만, 이제 줄 수 있는 게 없구나. 모두 네게 받은 것이나, 네게 줄 것이니. 그러니, 이번엔 부탁이라고 할 밖에."
"그럼 그 부탁은 받아들이겠소."
메브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안을 잠시 가만히 응시하던 그녀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방식은 알고 있지만… 계속 거기에 서있기만 할 거야? 작별이니, 잠깐이라도 내려와 주면 좋겠는데."
"그것도 어려운 부탁은 아니군."
소리 없이 웃음 지은 이안이 훌쩍 마차 옆으로 뛰어내렸다. 비로소 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메브가 물었다.
"그래서, 다음 행선지는 어디지? 곧바로 제도로 가진 않을 거라며."
"글쎄. 중앙은 넓으니까. 외곽부터 천천히 돌아볼 생각이오. 아마도."
그녀에게 마주 다가가며 이안이 대답했다.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정해진 건 없는 거구나. 하긴 그래… 너는 떠돌이 용병 출신이지."
"출신이라니. 지금도 그렇소."
"뭐…?"
눈을 동그랗게 떴던 메브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 지었다. 복수가 끝난 뒤로 종종 볼 수 있게 된 표정이었다. 한쪽 턱을 가르는 흉터조차 잘 어울리는, 시원해 보이는 미소.
"그래. 지금도 그렇겠지. 넌 어디에도 묶이고 싶지 않아 하니까."
"역시. 이제 날 지나치게 잘 아시는군."
이안이 멈춰 서며 대답했다.
메브는 멈추지 않았다. 걸음이 조금 더 느려졌을 뿐, 여전히 이안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그를 올려다보는 녹색 눈에 담긴 여러 감정들도 선명해졌다.
이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메브가 팔을 뻗어 그를 껴안았다.
체온이 전해지지는 않았다. 철그럭, 강철이 서로 맞닿는 소리만 번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메브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이안의 팔을 힘껏 감싸 안았다.
"...?"
분리한 백마 한 마리를 옮겨 오던 나세르가, 그들 쪽을 돌아보고는 눈을 깜빡였다. 뒤따라온 필립이 이안과 메브를 일별하고는 이내 다시 나세르를 돌아보았다.
"어딜 보십니까? 말 묶으시고, 집중해서 들으십쇼."
"어…. 아니. 예. 그러죠."
나세르의 당황한 듯한 대답에 이어, 필립이 주절대기 시작했다. 대부분 메브를 모시기 위해 주의해야 할 아주 사소한 부분들이었다.
이안이 풀썩 웃음 지었다.
"전에도 이러셨던 것 같은데."
"그래. 그랬지."
그때와 달리, 메브는 감싸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이안의 쇄골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생각해 보니, 이번에도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지 않았더군요. 고마워요, 이안 경. 불가능할 줄 알았던 나의 복수를, 끝내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줘서."
"마침 내 과업이기도 했지만, 그 감사는 기꺼이 받겠소. 그런데…."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슬쩍 내려다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왜 갑자기 존댓말이오?"
"하고 싶으니까."
"지금 껴안으신 것처럼?"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하자고 한 건, 너였잖아?"
…이걸 이렇게 써먹네.
이안이 풀썩 웃음 짓는 사이, 메브가 덧붙였다.
"결국, 이번에도 남은 보수를 요구하진 않았구나. 끝까지."
"아직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언제 요구할 거야?"
"아시잖소? 내 목숨을 거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 그때 경을 찾아가 요구할 것이오."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그날이 언제든, 죽지 않고. 그러니, 너도 그러길 바라. 이안."
오늘 여러 번 선수를 치시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그러겠소. 그때 또 봅시다. 내 칼도, 잘 맡겨 주시고."
"물론이지…."
이안의 등을 토닥인 그녀가, 안고 있던 팔을 풀며 반걸음 물러났다.
대신 이안의 양팔에 자신의 손을 얹은 채였고, 그의 눈에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여전히,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네 안부도 잘 전해 주도록 할게. 이안."
"며칠 전에 필립이 한 말도, 잘 생각해 보시오. 사원에서 루시와 함께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요. 내가 경을 다시 찾기에도, 그편이 더 쉬울 테고."
이안이 고개를 슬쩍 까딱였다.
"변방은 넓잖소?"
메브는 대단 대신 그저 빙긋 미소만 지었다. 그녀의 시선을 가만히 마주하던 이안이, 이윽고 낮게 웃음 지었다.
"안 그러시겠단 거군."
"아니. 이건 그냥 아쉬워서 보는 거야. 다시 만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이어진 대답에, 오히려 이안이 잠시 멈칫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메브가 말을 이었다.
"이상하지? 그토록 길고 긴 여정을 끝낸 뒤에 남은 감정이, 헤어짐의 아쉬움이라니."
"…너무 늦지 않게, 보수를 받으러 가겠소."
이윽고 이안이 말했다. 메브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그가 슬며시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과연 그게 좋은 일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몰랐나 보네. 나는 너와 함께 사선을 넘는 걸 아주 좋아해. 솔직히 말해서, 그걸 즐기는 편이지. 그러니까…."
메브가 이안의 팔을 쥔 손아귀에 슬며시 힘을 주고는 속삭였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릴게. 이안."
미소 지은 메브가 휙 몸을 돌렸다. 붉은 머리칼이 찰랑대면서, 불그스름해진 귀가 설핏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멀어진 그녀가, 마차의 발받침대에 한쪽 발을 올리고서야 이안을 다시 돌아보았다. 평소와 다름 없는 얼굴. 빙긋,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그녀가 그대로 마차에 올랐다. 탁. 마차 문이 닫혔다.
"...."
그 모습을 끝까지 가만히 바라보던 이안은, 이윽고 참고 있던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떠날 채비를 하던 나세르의 시선이 그와 마주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가 어정쩡한 미소를 지을 찰나, 이안이 말했다.
"잘 모셔라. 네 속죄와 참회를 끝내기도 전에 죽지 말고."
"…예. 나리의 앞날에도 찬란한 빛과 무운이 함께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빛과 무운은 무슨.
코웃음을 흘린 이안이 마저 몸을 돌렸다. 그가 자신의 마차로 다가갔다. 백마 한 마리를 내어 주고 대신 갈색 말을 마차에 묶은 필립이, 백마의 마갑을 벗기고 있었다.
"뭐 하냐?"
이어진 이안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한 마리만 마갑을 씌우고 다니면 너무 눈에 띌 것 같아서요. 도로 입힐까요?"
눈이 불그스름한 걸 보니,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할 상태 같았다.
슬쩍 입맛을 다신 이안이, 닐라인지 셀림인지 모를 백마를 눈에 담았다. 그는 아직도 두 녀석을 구별하지 못했다.
"머리랑 목 부분은 이 녀석한테 그대로 두고, 몸통만 옆 놈한테 입혀. 그렇게 하면, 조금 덜 눈에 띄겠지."
사실 눈에 띄지 않으려면 그냥 마갑을 벗기는 게 가장 좋았지만.
저 성능 좋은 마갑을 그냥 썩히고 싶지는 않았다.
"예. 그러겠…."
필립이 대답할 찰나,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멈칫했던 필립이, 입술을 꾹 앙다물고는 다시 하던 일에 몰두했다.
"…천천히 해라. 서두를 필요 없으니까."
핀잔대신 덧붙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아무리 그라도, 지금 필립의 심정을 다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메브는 스승이자 은인이며, 동시에 가족이지 않던가.
"...."
마차 문을 열자, 안에 타고 있던 엘리야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은 별다른 말 없이 그녀의 건너편에 앉았다.
열린 창문 너머로, 북쪽으로 이어진 관도로 접어드는 마차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안의 시선이 가만히 그 마차의 뒤를 좇았다.
"…괜찮으세요?"
문득 엘리야가 물었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주제넘은 말이었다면 죄송해요. 제 어릴 적 생각이 나서 그만."
"어릴 적?"
이안이 물었다. 말해도 되나, 하는 눈빛으로 잠시 그의 눈치를 살핀 엘리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어릴 때, 둥지에는 아직 형제가 몇 남아 있었어요. 전 검은 벽이 솟은 이후에 입양된 마지막 아이라, 다들 저랑은 나이 차이가 조금 있었죠.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차례로 둥지를 떠났어요. 그때마다 전, 매번 울었고요. 한밤중까지."
왜 내내 그런 표정인 건가 했더니. 지난 기억 때문이었나.
짧게 웃음 지은 이안이, 이윽고 덧붙였다.
"그 형제 중에, 혹시 요리를 잘하는 녀석도 있었냐?"
"어떻게 아셨어요…?"
엘리야의 눈이 커졌다. 푸른색과 갈색의 눈동자에 놀람이 서렸다.
"벨라가 그랬죠. 둥지의 서고에는 온갖 시대의 요리사들이 비법을 기록한 책들도 있었거든요. 늘 그걸 보며 연습했고, 저와 형제들에게 먹였어요. 언젠가 황실의 요리사가 되겠다고요. 저는 열심히 잡일을 도우면서 구경했죠. 벨라의 요리를 아주 좋아했거든요."
…정말이었다니. 그냥 한 말인데.
이안의 실소가 짙어질 찰나.
다각- 다각-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마부석 쪽의 간이 창문이 열리더니, 필립의 목소리가 번졌다.
"그래서… 어디로 갈까요, 나리?"
"그게 네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야."
창문 너머를 슬쩍 돌아본 이안은, 필립의 손에 못 보던 깨끗한 지도가 펼쳐져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제도까지 한 반년쯤 걸렸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가는 게 좋을지, 경로를 몇 개 짜 봐. 오늘 밤까지."
뭔가 몰두할 게 필요할 테니, 필립에게도 마냥 귀찮은 작업은 아닐 터였다. 역시나, 필립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야영할 때 보고 드리겠습니다."
간이 창문이 닫혔다. 반년이라는 말에 다시 반짝이기 시작한 엘리야의 눈빛을 슬쩍 마주 본 이안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메브와 나세르가 탄 마차는, 이미 저만치까지 멀어지고 있었다.
#26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