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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00

#190화

텐시아 아이나스는, 물론 테사이아의 가명이었다.

그녀는 갑옷을 전부 벗고 천 겉옷만 걸친 채였다. 수수한 차림새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녀의 이질적인 외모와 분위기가 더 오롯이 드러났다.

"...!"

멍하니 테사이아를 바라보던 오벨리가 불현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의 늪처럼 짙은 녹색의 눈과 시선이 마주친 까닭이었다.

그가 다급하게 곁에 선 조라를 팔꿈치로 찔렀다. 잠시 넋이 나간 것처럼 테사이아를 바라보던 조라가, 반사적으로 한 걸음 성큼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 정식으로 소개하겠소! 루 솔라의 종이자 델라 루의 충실한 신도, 드네로브의 정당한 지배자인 흙투성이 귀족, 모르간 웨스트우드 백작의 장남이자 적자… 어, 또… 빵과 맥주의 수호자, 오벨리 웨스트우드 공자이시오!"

아주 중요한 걸 수호하시는군.

이안은 내심 웃음 지었다. 슬쩍 보니 수인과 요정의 연이은 등장에 놀란 표정이던 병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입가를 씰룩대고 있었다. 그건 비웃음보다는 오벨리에 대한 친밀함의 증거 같아 보였다.

물론 오벨리는 조라를 흘깃 노려보며 코로 긴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지만.

테사이아의 눈매가 옅은 호선을 그린 건 그때였다.

"웨스트우드가의 대공자셨군요. 반갑습니다."

음의 높낮이가 크지 않은, 아주 귀족적인 말투. 볼을 붉히며 헛기침한 오벨리가 재빨리 무릎을 굽혔다.

"반갑습니다, 아이나스 공. 선의에 감사드립니다. 귀공의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우리 모두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대공자의 감사는 기쁜 마음으로 받도록 하죠."

"아주 훌륭한 기사들을 거느리고 계시군요."

"물론이죠."

그녀의 시선이 이안과 메브를 훑었다. 그들에 대한 애정보다는 자신의 안목에 대한 자부심이 먼저 묻어나오는 눈빛이었다.

"이반 경과 메버릭 경은 부귀영화와 명성에 관심이 없을 뿐, 원한다면 언제라도 중앙에 이름을 떨칠 대단한 실력자입니다. 심지어…."

테사이아의 시선이 여전히 마차 문을 쥔 샬롯을 느긋하게 훑었다.

"시종인 샤론조차도요. 모두가 일당백의 용사들이죠."

"오오…."

슬쩍 미간을 찌푸리던 샬롯이, 오벨리와 조라의 시선에 재빨리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수인 전사를 여럿 본 것은 아닙니다만. 확실히 남다른 강건함이 느껴집니다. 흐음… 공께서 서부를 찾으신 이유가 궁금해지는군요. 물론, 무례를 저지르려는 건 아닙니다."

이제야 놀람과 긴장이 가라앉은 듯, 오벨리가 한결 푸근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덧붙였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협조하기 위해 여쭙는 겁니다."

"뜻은 감사하군요. 아쉽게도 개인적인, 그리고 가문 내부의 사정과 관계된 일이라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요. 물론…."

담담하게 대답한 테사이아가, 왼손을 자신의 가슴 앞에 얹었다.

"그로 인해 영지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으리라는 것만은, 가문의 이름을 걸고 보증합니다. 대공자."

"그러시군요. 이해했습니다."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오벨리가 덧붙였다.

"하면, 달리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큰 도움을 받은 분들을 이대로 떠나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기도 하지만, 이반 경과 메브릭 경이 토벌한 마물의 처분도 논의해야 합니다만."

잠시 고민하듯 눈을 내리깔았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요. 차라리 잘됐군요. 긴 여정을 이어온 터라 모두가 지쳐 있으니. 대공자께 도시까지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연기를 본업으로 삼아도 되겠는데.

이안은 내심 헛웃음을 흘렸다. 예의범절 따위에 관심이 없는 그가 보기에도, 지금 테사이아가 보여 주는 언행은 모든 게 자연스럽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부탁이 아니라 기회를 준다는 식의, 특권에 익숙한 자들 특유의 태도 역시 그랬다.

사실상 그것이 그녀의 신분을 증명하는 가장 큰 증거이기도 했다.

요정은 모두 타고난 거짓말쟁이라는 샬롯의 지론이 옳았다는 게 다시 한번 증명된 셈이었다.

물론, 오벨리와 그의 심복들 역시 이 모든 게 거짓말임을. 그걸 떠나 애초에 요정의 보증이란 건 길가의 돌멩이보다 무의미하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도 내심 바라던 대답이니 신경 쓰지 않는 것이겠지만.

"물론입니다. 오히려 이쪽에서 부탁드리고 싶군요. 부디, 제대로 감사를 표할 기회를 주시라고 말입니다."

"감사 인사는, 우리를 안내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설마요. 턱없이 부족하죠."

"그럼, 대공자를 믿고 다시 마차에 타도록 할게요.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아 있어서요."

"아, 제가 공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군요. 그저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던 게,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아니라는 말 대신, 그저 괜찮다는 듯 옅게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이반 경은 나를 대신해 대소사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 필요한 사안이 있다면 경과 상의하도록 하세요."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사실상 아랫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주 자연스러워서, 아무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이안조차도.

'사실, 저게 저 녀석의 본래 모습인 건 아닌가.'

그가 내심 생각하는 사이, 그럼 이만, 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테사이아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인사 대신 오벨리 일당을 오만한 눈빛으로 한차례 훑어본 샬롯이 마차에 올랐다.

탁, 문이 닫히자 비로소 주위의 분위기가 풀어졌다.

"요정 원로이시라니….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 뵌 건 처음이오. 이제야 경들의 실력이 이해가 가는군."

오벨리가 이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느새 한결 편해진 말투. 조라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저마다 눈빛을 교환했다. 다들 뭔가 입이 근질근질한 표정들이었다.

이 녀석들, 정말 제국 촌놈들인가.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해서, 도시까지는 얼마나 가야 하오?"

"반나절이면 충분하고도 남소."

"흐음…. 알겠소."

신분을 알고서도 여전히 별다른 예의를 갖추지 않은 말투였지만, 오벨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중앙에서 온 원로 요정의 정예이니, 다소 오만한 게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리라.

"우선 갑시다. 경들이 처리한 바실리스크는 사람을 보내 운반하도록 할 테니. 그전까진, 여기 이 친구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오."

오벨리의 시선을 받은 기수들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메브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이윽고 덧붙였다.

"그럼 저들의 말을 좀 빌릴 수 있겠소? 그 도마뱀에게 한 마리를 잃은 터라."

"물론이지. 두 마리를 내어 드리겠소."

시원하게 말한 오벨리가 기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졸지에 보초도 서게 된 데다 도보로 돌아오게 생긴 기수들이, 한숨을 내쉬며 이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

오벨리의 인도 아래, 일행은 관도를 나아갔다.

오벨리의 무리는 그와 조라, 그리고 운 좋게 따라오게 된 기수 하나가 전부였다.

그렇다고 이동이 어색하거나 조용하지는 않았다.

"서부는 처음이신 것 같으니 말씀드리는 것이오만. 땅이 검다 해서 불길하게 여기지 마시오. 물론 얼마 전부턴 계절답지 않게 하늘도 흐리고 마물도 부쩍 늘긴 했소만. 이 검은 흙은 서부가 델라 루의 축복을 받았다는 증거요."

오벨리가 넉살 좋게 떠들어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병사를 여럿 잃었다더니, 원수를 갚은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는 모양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귀족은 귀족이란 거지.'

이안은 짧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부석의 필립이 제발 뭔가 더 물어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물론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오벨리는 이안과 메브가 과묵한 것을 무례하다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그것이 기사의 미덕이라 여기는 것일 터였다.

"여기선 작물이 아주 잘 자라고, 이렇게 한 해씩 쉬어주기만 해도 금방 다시 비옥해지지. 모든 게 델라 루의 은총 덕분이오."

"…우리 같은 사람들과는 인연이 없는 이름이시군."

이안이 짧게 대답했다.

오벨리가 여기선 많은 이들이 섬긴다고 대답하며 웃음 지었다.

물론 이안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찬란한 여신의 장녀이자 번영의 여신. 빛은 풍요를 가장 먼저 낳는다던가.

"여러분들의 모습으로 봐선, 중앙에서 곧장 오신 것 같진 않은데. 서부에 들르기 전에 어디를 거치셨소?"

이어진 물음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러 곳을 거쳤소."

"혹, 북부나 변방도?"

"일부는."

"호오… 보고 들은 것이 많으시겠군. 아무래도, 도착하면 연회를 준비해야겠소. 여기선 외부의 일을 직접 전해 들을 일이 그리 많지 않으니, 이런 기회를 놓치면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거든."

"주군께서 허락하실지 모르겠군. 시끄러운 자리를 좋아하는 분이 아니셔서 말이오."

이안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물론, 그런 자리가 생기면 여러 거짓말이 탄로 날 수도 있으니 피하려는 것일 뿐이었다.

"그럼 식사라도. 엄연히 내 손님들이신데, 대접을 하지 않을 수는 없잖소. 드네로브의 전통이기도 하고."

하루만 묵고 떠나야겠네.

이안은 내심 결론지으며 묵묵히 말을 몰았다.

어색한 적막이 내려앉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곧 작은 마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목조 담벼락과 집들. 그 너머로, 수없이 일렁이는 밀밭이 보였다.

"저곳이 드네로브요?"

생각보다 너무 작은데. 이안이 속으로만 덧붙이며 묻자, 오벨리는 물론 조라도 웃음 지었다.

"그럴 리가! 저긴 일종의 농막 촌이오. 경작지가 넓으니 곳곳에 이런 식으로 마을을 만들어 둔 거지. 드네로브라니…. 하긴. 여기도 드네로브의 일부이긴 하지. 하하."

재미있는 농담이라는 듯 웃음 지은 오벨리가 기수에게 손짓했다. 넋을 놓고 있던 그가 화들짝 오벨리를 돌아보더니, 이윽고 한숨과 함께 말을 몰아 달려갔다.

"저기서 말과 마차를 몰고 그 괴물의 사체를 가져올 것이오. 날이 이러니, 부패하기 전에 해체해야 하지 않겠소."

"훌륭한 판단이시군."

"처분에 대해서는 도시에 도착한 후에 다시 논의하도록 합시다. 뿔과 가죽, 피까지 모두 쓸모가 있을 테니까."

"이런 일에 익숙하신 모양이오. 마물이 그리 많은 동네 같지는 않은데."

오벨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별 관심이 없지. 하지만 가문이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을 때만 해도, 마물이 아주 많았다고 들었소. 놈들에게서 나온 부산물을 마법사들에게 파셨다더군. 곳간을 채우기 위해선 뭐든 해야 했던 시기였다더군. 아시겠지만, 마법사들은 눈 뜨고 코를 베어 가는 못 믿을 족속들이잖소?"

"…그렇지."

"해서, 아버지 까지만 해도 연금술이나 마도구와 관련된 지식들을 열심히 공부하셨다더군. 덕분에 나도 어려서부터 잡다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소. 그 덕은, 요즘에야 비로소 보고 있지."

그가 조라를 힐긋 돌아보고는 덧붙였다.

"마물이 늘면서, 손에 넣은 것들이 많아졌으니까. 올해는 라클리프에 팔 물건들이 풍성해질 것이오. 중앙의 음험한 마법사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 말이오."

거참 생산적인 가문이군.

생각하며 웃음 짓던 이안은, 곧 끝없이 펼쳐진 밀밭을 마주했다. 심지어 벌써 조금씩 익어가고 있기까지 했다.

"와… 이렇게 넓은 밀밭은 처음 봅니다."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던 필립이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반응이 촌놈 같다 여긴 것이리라.

의외로 이 녀석이 연기 구멍이네.

이안이 필립을 슬쩍 돌아보는 사이.

"중앙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지. 서부에 필적하는 농지를 가진 곳은, 그나마 남부 일부일 뿐일 거요. 남서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지."

오벨리는 오히려 기분 좋다는 듯 웃음 지었다. 그가 밀밭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 근방은 밀이 가득하지만, 도시 뒤편으로는 옥수수밭과 목축지도 넓게 있소. 남서쪽으로 며칠 더 내려가면 포도밭도 많고. 테센의 포도주는 중앙에서도 유명할 테니 아시겠군. 보르타 정도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지."

테센은 일행의 목적지이기도 했다.

특산품 따위엔 관심도 없었기에, 이안은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밀밭을 바라보는 그의 뇌리로는 게임의 기억이 설핏 스쳤을 뿐이었다. 그때의 제국은, 이런 중요한 곡창 지대를 잃었던 것이다.

'이딴 식이면… 내가 뭘 어떻게 해도, 그놈의 결말이란 건 멸망으로 정해져 있는 거 아닌가?'

"정말이지 대단하군요. 아, 물론 이야기로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실제로 보니 경건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필립이 횡설수설 덧붙이며 감탄했다.

이안은 짧게 코웃음을 흘렸다.

연습은 제일 열심히 하더니, 제일 불안하군.

하긴. 필립은 거짓말을 일삼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을 터였다. 사실을 부풀리거나 축소하는 건 익숙하지만, 아예 가짜 신분을 내세운 적은 없었으니까.

다행히 그런 모습들이, 이 농지의 대공자에게는 진솔한 반응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할아버님과 아버님, 백성들이 피땀 흘려 일궈낸 결과물이지. 아까도 말했지만, 본래 이 일대는 마물과 놈들이 사는 숲이 많았다더군. 그걸 다 개간해 이런 아름다운 농지를 일궈낸 것이오. 그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오는 길에 보셨겠지만."

자부심과 존경심이 묻어나오는 말투. 이안은 드물게도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같이 망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 이 암흑 시대에, 보기 드문 광경이자 방식인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흙투성이 귀족이라 부르시는 겁니까?"

"본래는 멸칭이었다고 들었소. 귀족이 농민들과 함께 비천한 일이나 한다고 말이오. 하지만 할아버님은 자랑스럽게 여기셨고, 아버님도 그 뜻을 고스란히 이어받으셨지. 우리 가문의 가주는, 고된 일에 앞장서는 자만이 앉을 수 있소. 그러지 않는 자는 언제든 풍요로운 여신의 품에 안겨 벗어나지 않게 될 수도 있으니까."

"벗어나지 않게 되다니?"

이안이 툭 덧붙인 말에, 오벨리가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바라보았다. 눈을 치켜떴던 필립이 재빨리 덧붙였다.

"이반 경은 북부 출신이라, 여신들께는 그리 관심이 많지 않으십니다. 물론 찬란한 여신과 엄정한 여신을 섬기시긴 합니다만…."

"북부… 출신이셨소? 아, 오해하지 마시오. 북부 출신들은 죄다 덩치가 산처럼 크다고 알고 있어서 말이오. 내가 본 바로도 그랬고."

"그게 북부인에 대한 대표적인 편견 중 하나지."

언젠가 외팔이가 된 용병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며, 이안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알려진 대로 덩치 큰 전사들도 많지만, 나처럼 날렵한 부류도 적지 않소."

"호오… 또 하나 배웠군. 하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은 흔치 않지. 어쨌든, 풍요로운 여신의 이명은 나태요. 게으름은 번영의 증거이니, 델라 루께선 기꺼이 품어 주시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미 안긴 걸지도 모르오."

오벨리가 자신의 두툼한 턱을 쓸어내리며 미소 지었다.

"난 먹는 것에도 앞장서는 편이라서 말이오."

"…차라리 그러기만 하셨으면 좋겠군요. 위험한 일에도 부득불 앞장 서시니, 덕분에 제 속이 까맣게 탑니다."

뒤에서 듣고 있던 조라가 불쑥 내뱉었다. 오벨리의 시선을 받은 그가 덧붙였다.

"겉도 까맣다고 하지 마십쇼. 그건 저만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뭐래?"

오벨리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짓는 사이, 이안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래서 마물 사냥에도 동참하셨던 거군."

"그렇소. 본래 아버님께서 하셔야 할 일이오만, 요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말이오. 여러 부분을 내가 대행하고 있지. 보다시피, 다 차기 가주를 놀려 먹기 바쁜 고얀 놈들만 심복으로 둔 터라, 쉽지는 않소만."

"잘 해내고 있으신 것 같은데."

"멀었소. 오늘만 해도 경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고. 요즘 들어 부쩍 마물도 늘었소. 저 먹구름은 갤 생각도 하지 않고. 외곽에선 병도 돌고 있지. 덕분에, 아버님께 매번 혼쭐만 나고 있지."

이안의 눈매가 꿈틀댄 건 그때였다.

"병이라면, 어떤?"

#191화

이안의 눈빛을 오해한 듯, 오벨리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염려하지 마시오. 도시는 깨끗하니. 몇몇에게 열병이 생기고는 있소만, 그때마다 격리하고 사제님이 밤낮으로 신경 써 주고 계시오."

"…흐음."

더 물을까 잠시 고민하던 이안은, 이내 그러지 않기로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라클리프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이 근방이 시발점이었나…?'

정말 게임에서와 비슷한 상황이 시작되고 있는 거라면, 얘기를 듣는 건 의미가 없을 테니까.

이안의 눈치를 슬쩍 살핀 오벨리가 덧붙였다.

"여기선 종양병이나 열병이 도는 건 아예 드문 일도 아니오. 그래서 성 뒤편에 병자들이 머무는 집들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지. 올해는 시기가 좀 이르긴 하지만, 이런 때도 있는 법 아니겠소."

"…병이 도는 게, 드문 일이 아니라고요?"

이번에는 필립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경계심이 잔뜩 묻어나는 눈빛.

오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에도 온갖 병을 앓는 환자들이 넘쳐나지 않소? 여긴 여름에 해가 뜨겁고 풀과 벌레도 많아서, 수확기가 지나고 나면 앓아눕는 자들이 적지 않소. 물론, 대부분은 몇 주면 완치되지."

"아닌 자들도 있단 거군요."

"뭐, 나병이나 종양병이면 달리 손쓸 수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

"나병이라니…."

필립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오벨리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걱정이 많은 편이시군. 염려 마시오. 그런 경우에는 테센으로 보내지게 되니까."

"테센이요?"

이안을 곁눈질한 필립이 덧붙였다.

"테센에,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산단 말씀이십니까?"

"모르셨소? 제국 각지에서 때때로 보내지는데."

짧게 헛기침한 필립이 말했다.

"알 수 있을 리가요. 나병 환자들은 신께 버림받은 자들이 아닙니까. 신실한 사제나 성전사, 성기사들은 결코 걸리지 않는 병이니."

그건 신성력 덕분일 것 같다만.

이안은 속으로만 읊조렸다. 그에게 질병을 신앙과 연결하는 건 정말 당치도 않은 논리였지만.

어이없게도 이 세계에선, 마냥 비웃을 수만은 없기도 했다.

사제나 성기사 같은 자들이 병을 앓는 일이 드문 건, 어떤 방식으로든 신성에 자주 노출되는 덕분일 테니까. 필립이 가진 성 다미엘의 반지만 해도, 회복력을 높여 주고 각종 추가적인 저항력을 부여하지 않던가.

오벨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곳 사제님들의 생각은 다르오.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것은 맞으나, 여신께서 속죄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 여기지. 해서, 그들은 영혼이라도 구원받기 위해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한다오."

"속죄라…. 아무리 그래도, 나병 환자들이 있으면 테센의 주민들이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테센에는 교단의 수도원이 있잖소. 제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제국 각지에서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수학하지. 그만큼 엄숙하고 신실하며 자애로운 사제님과 수도사들이 여럿 계시고 말이오. 나병 환자들은 그 인근에 머물고 있으며, 수도사들이 그들을 보살피고 있소."

엄숙과 자애라. 이안은 또 한 번 실소를 삼켰다.

사제들과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으니까. 심지어 그들 사이엔 주르도라는 타락자도 섞여 있지 않은가. 아마도 그가 전부인 것도 아닐 터였다.

놈들이 나병 환자들에게 남몰래 무슨 끔찍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럼 역시, 여기가 아니라 테센이 시발점인 건가?'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늦지 않게 제대로 길을 찾는다면, 이번엔 서부가 그 지경이 되는 일은 없을 지도 몰랐다.

이안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오벨리가 덧붙였다.

"거기다 밤마다 궂은일까지 도맡아 하는 이들을 주민들이 싫어할 리가. 서부는 아마도 그들에 대한 편견이 가장 없는 지역일 것이오. 수많은 나병 환자들이 평온하게 눈감는 것을 보기도 했고. 그렇지 않나, 조라?"

"옳은 말씀이십니다. 제 부모님처럼 말이죠."

조라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의 고개가 홱 그에게로 돌아갔다.

"부모님이, 나병 환자셨습니까?"

"그렇습니다만."

"...."

필립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이마에 식은땀이 돋은 그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 죄송합니다. 제가 한 말은 그저… 어리석은…."

"괜찮습니다. 익숙한 편견이니. 부모님이 그렇게 되셨을 땐,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부모님께서 뭔가 큰 죄를 지으신 거라고."

조라의 태연한 대답에, 필립이 더 울상을 지었다. 제발 도와달라는 눈빛에, 이안은 콧방귀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게 입 조심 좀 하라니까.

메브도 낮게 헛기침하는 가운데, 오벨리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식견을 넓힐 기회가 된 것 같으니 다행이군. 이런 촌구석에서도 배울 게 있다니, 좋은 일 아니겠소?"

"그… 예… 정말 그렇군요…. 제가 어리석고… 편협했습니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대답한 필립이 고개를 푹 떨궜다.

그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조라조차도 두툼한 입술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오벨리가 넌지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보아하니 두 분의 종자인 것 같은데. 재미있는 친구 같소."

"어쩌다 한 번씩만 보면 그런 편이지."

이안의 대답에 웃음을 터뜨린 오벨리가 앞을 바라보았다.

"아름답지 않소?"

"…그렇소. 확실히."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완만한 언덕을 따라 이어진 밀밭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먹구름이 낀 것이 문득 아쉬워졌다. 날이 맑았다면 노을이 졌을 테고, 그럼 그야말로 장관이었을 테니까.

"진심이신 것 같아 기쁘군. 보통은 다들 지루하고 따분하다 여기는 편이라서 말이오. 중앙으로 도망친 내 동생 녀석처럼."

"유학을 떠나신 모양이군요. 학자를 꿈꾸시는 모양이죠?"

필립이 덧붙였다. 방금의 경험 덕분인지 한층 조심스러워진 말투였다. 오벨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은 그렇소만. 모를 일이지. 놈팡이들과 어울리면서 못된 짓이나 잔뜩 하고 다닐지도. 아니, 그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요. 대책 없는 놈이지. 평생 나와 아버님의 속이나 썩이는."

자신도 모르게 메브 쪽을 슬쩍 돌아보았던 이안이, 이내 덤덤하게 내뱉었다.

"혈육이라는 게 다 그런 거지."

"하하. 이반 경도 형제가 있으신가 봅니다. 그래. 다 그런 거 겠지. 달리 천형이라 부르겠소?"

웃음 지은 오벨리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벌써 다 왔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소. 저곳이 바로 델라 루의 사랑을 받는 황금빛 성, 드네로브요."

야트막하고 완만한 언덕길 저 너머, 어느새 성의 전경이 드러나 있었다.

황금빛 성이라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일 터였다. 드네로브는 제국의 여느 대도시처럼 성벽에 둘러싸인 평범한 도시였다. 물론 이안의 예상보다는 훨씬 컸다. 성벽 밖으로도 벽돌로 지은 집들이 잔뜩 펼쳐져 있을 정도였다.

아마 주변에 펼쳐진 밀밭이 모두 익으면, 이름처럼 황금빛에 둘러싸인 도시처럼 보이리라.

'게임에선 이름도 못 들어 본 도시가 이 정도면, 라클리프는 더 어마어마하겠네.'

제국 서부 내륙 지역이 얼마나 평화로웠는지를 알려주는 듯한 광경이기도 했다.

하긴, 여긴 지리적으로 검은 벽과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 중 하나였다.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졌지만.

"갑시다. 이따 바실리스크의 시체가 도착하면, 도시 사람들이 아주 놀라 뒤집어지겠군."

오벨리가 앞장서 속도를 높였다. 메브를 슬쩍 돌아본 이안도,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삐를 고쳐 쥐었다.

***

드네로브에는 따로 내성이 없었다. 대신 꽤 오래된 듯한, 높은 돌담을 두른 장원과 몇 개의 건물로 나뉜 대저택이 영주 성의 역할을 대신했다.

오벨리의 말에 의하면, 처음 이 일대에 정착할 때 지은 건물을 보수하고 확장하면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이라 했다.

어쨌건, 덕분에 일행은 별관이라 불리는 손님용 저택에 묵게 됐다.

저택의 시종들은 범상치 않은 무리, 특히 요정과 수인의 등장에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편히 쉬십시오, 공."

저택 복도까지 일행을 안내한 오벨리가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깍듯하게 말했다.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대공자."

"별말씀을. 그런데, 정말 하인들을 다 물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내 사람들의 시중을 받는 게 더 편하고 익숙하거든요."

"달리 필요하신 게 있다면, 밖의 아무에게나 필요한 것을 요청하십시오. 누구건 도와드릴 겁니다."

"도시를 둘러보고 싶은데. 괜찮겠소?"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옆의 방문 앞에 선 이안이 덧붙였다.

오벨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이오. 어디든 편하게 다니시오. 아, 물론 아버님이 계시는 본관은 제외하고."

"당연한 말씀을."

"머잖아 바실리스크 사체가 도착할 거요. 그때 다시 봅시다, 이반 경."

"그럽시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대공자."

이안의 대답에 이어, 테사이아가 가볍게 다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마주 인사한 오벨리가 조라를 이끌고 몸을 돌렸다. 조라가 옆에서 뭐라 속삭이고,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하며 귀를 붉히는 오벨리의 뒷모습이 복도 너머로 멀어졌다.

그 모습을 각자의 방 앞에 서서 지켜보던 일행이, 이윽고 테사이아가 선 안방으로 한데 모여들었다.

탁.

문이 닫히고 장내가 조용하다는 것까지 확인한 순간, 비로소 테사이아의 입꼬리가 광대뼈 아래까지 말려 올라갔다.

"와,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어때 이안, 감쪽 같았지?"

평소의 말투로 돌아온 그녀가 이안을 돌아보며 내뱉었다. 피식댄 이안이 의자에 걸터앉는 사이, 샬롯이 인상을 구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 신나 하지 마라, 귀쟁아. 그러다 말실수라도 해서 다 들통나면, 그 뒤엔 어떻게 될지 몰라."

"너나 잘해, 불량 시종아. 표정도 못 숨기면서."

코웃음을 친 테사이아가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래 봬도 오는 내내 만반의 준비를 해 뒀다고. 게다가 나 같은 요정은 처음 본 눈치였고."

"요정은 봤을 거다. 보아하니 수인도 본 적 있는 눈치였고. 원로를 처음 본 거겠지."

메브가 덤덤하게 정정했다. 투구를 벗은 그녀가 붉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이안의 건너편에 앉았다.

이안이 다시 일어선 건 그때였다.

"나가는 길에 목욕물을 부탁할 테니, 다들 씻고 쉬고 계시오."

그가 아공간에서 꺼낸 은 브로치를 테사이아에게 던지며 덧붙였다.

"여기 있는 동안엔, 옷깃이나 소매에 항상 차고 다녀라. 혹시 누가 알아보면, 네 신분이 더 확실해질 테니까."

"알았어, 그럴게. 그런데, 어디 가게?"

"도시로."

이안이 견갑과 목 보호대를 풀어 탁자 위에 놓았다. 테사이아의 눈이 반짝였다.

"나도 따라갈. 아, 안 되겠구나."

"당연하지. 넌 여기 있어. 혹시 내가 없는 사이에 도마뱀이 도착하면, 시간도 좀 끌고."

메브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보급은 식량으로 충분할 텐데. 너까지 움직일 필요가 있겠느냐?"

"보급 때문에 나가는 게 아니오."

내뱉으며 문으로 걸음을 옮긴 그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벽에 기대 선 필립을 돌아보았다.

"넌 따라와라."

"...?"

***

저택을 나선 이안은 도심지로 발을 들였다. 도시는 겉보기만큼이나 번성했다.

성밖에 사는 이들과 안에 사는 이들의 구분은 전혀 없어 보였다. 아예 성문을 활짝 열어둔 데다, 출입을 통제하는 병사조차 없었다.

밖에 집을 지은 건, 그저 도시 안에 새로운 집을 지을 공간이 부족해서였을 뿐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미 밤중인데도 돌아다니는 주민이 아주 많았고, 다들 별 걱정이 없어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스쳐 지나간 주점에선 벌써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목소리가 창문을 뚫고 번지고 있었다.

"역시, 제국은 제국이군요. 하긴. 밀밭에 옥수수밭에 가축까지 잔뜩 키우는 것 같은데, 일손이 많이 필요하겠죠. 대단합니다."

양손을 머리 뒤에 깍지 껴 얹은 채로, 필립이 내뱉었다.

입가에 즐거운 듯하면서도 씁쓸해 보이는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난장판이나 다름없던 변방과 너무 다른 모습이라 그럴 터였다.

도시로 들어온 순간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누린내보다도 먼저 느껴지지 않았던가.

심지어 길가에 오물을 버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마 거름으로 쓰기 위해 따로 모아 두는 것이리라.

"얼마 남지 않은 평화겠지만."

이안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필립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또 냅다 초를 치시는군요."

"사실이니까. 현실을 외면해 봐야 남는 건 없어."

"…하긴. 서부에도 어둠이 깃들고 있다는 건, 하늘만 봐도 명확한 부분이긴 하죠. 이 평화도… 순식간에 깨질 테고요. 그러니까-"

입맛을 다시며 읊조린 필립이, 속내를 알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떠나기 전에, 백작께 미리 경고를 남길 생각이신 거죠?"

"아닌데."

"역시 그러실… 엥. 또 아닙니까?"

"냅다 찾아와서 불길한 소릴 하면, 귀담아 듣겠냐? 우리 한테 득 될 게 전혀 없어."

입을 뻐끔댄 필립이 이내 덧붙였다.

"그럼 적어도 대공자에게 귀띔 정도는 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귀족치곤 꽤 소탈한 데다, 인망도 두터워 보이던데요.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했으니, 조금은 갚아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거, 새끼. 오지랖은.

이안은 콧방귀로 대답을 대신했다. 애초에 경고나 조언만으로 해결될 문제였다면, 지금 대륙이 이 모양이 되진 않았을 터였다.

필립이 다시 그를 돌아본 건, 성문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성밖."

"성밖, 어디요?"

"뒤."

"뒤…?"

고개를 갸웃하던 필립이, 이윽고 똥을 밟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설마, 열병 환자들을 보러 가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192화

"맞는데."

이어진 대답에, 필립이 눈을 질끈 감았다.

"루 솔라여…. 아니, 거길 대체 왜 가시려는 겁니까? 그러다 병이 옮기라도 하면-"

"난 안 옮아. 너도 성물이 있으니 걱정 없고."

"아니… 저를 콕 집어서 데려오신 게, 그래서였습니까?"

"어느 정도는."

"그러다 저랑 나리 둘 다 병에 걸리면요?"

마물 마족 할 것 없이 몸을 던져 썰어 대는 주제에, 풍토병이 무서워서 벌벌 떨다니.

본성이란 건 아무리 무뎌져도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이안은 필립을 돌아보았다.

"그럼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겠지."

"증거라뇨…? 무슨 증거요?"

"뭐긴."

돌고 있는 병이 단순한 돌림병이 아니라는 증거지.

속으로만 덧붙인 이안이 앞서 걸어갔다.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필립이 이내 미간을 좁혔다.

"나리, 왜 말씀을 하다 말-"

"따라오기나 해. 뭐든, 가서 보면 확실해질 테니까."

"...."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한 이안이 멀어졌다. 한숨을 푹 내쉰 필립이, 이윽고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코 아래를 덮어 묶으며 그 뒤를 따랐다.

***

오벨리의 말대로, 성벽 뒤쪽에는 농노들의 거처와 조금 거리를 두고 지어진 판잣집들이 여러 채 지어져 있었다.

밖에 횃불을 밝혀 두긴 했지만, 근처를 오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이안은 차례로 집을 방문해, 내부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오는 일을 반복했다.

처음 몇 채는 빈집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한두 명씩의 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대충 지어진 침상과 바닥에 널브러져 앓고 있었다. 시설이 전혀 위생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강도처럼 얼굴 절반을 가린 필립은,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끝내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연 순간 병이 옮으리라 여기는 게 분명했다.

이안은 그깟 천을 얼굴에 두르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덕분에 필립이 조용해졌으니까.

"...?"

이안의 미간이 좁아진 건, 제법 깊은 곳에 위치한 집의 문을 열었을 때였다.

뒤에 선 필립이 순간 헐떡일 정도의 악취. 하지만 이안이 미간을 좁힌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장내를 돌아보는 그의 눈동자에 흐릿한 광채가 서렸다. 마력 탐지. 동시에 신경이 곤두서면서, 육감이 한층 더 날카롭게 벼려졌다.

"역시…."

이윽고 그가 나지막이 중얼댔다.

어지간해선 느끼기 힘들 만큼 미세한 오염된 마력이 제법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흑마법이나 저주의 흔적.

아직도 문밖에 선 필립에게 들어오라 손짓한 이안이, 나란히 누운 두 명의 병자에게로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소리.

이안은 등을 지고 누운 병자 하나를 끌어당겨 바로 누였다.

"으으…."

본능적인 반응일 뿐, 병자는 이미 의식이 없어 보였다.

그의 상태를 훑는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피부가 나무껍질처럼 벗겨지고, 그 끝이 검게 변색 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종기들이 부풀어 오르고, 반개한 눈은 하얗게 먼 채였다.

'…역시, 똑같네.'

그의 뇌리로 게임 속 라클리프의 전경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라클리프는 이미 부패와 역병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부패와 역병을 흩뿌리는 권속들이 배회하는 죽음의 도시.

비단 라클리프만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서부 전체에 되살아난 망자와 마물이 배회했고, 대지 자체가 썩어 버렸다.

인근의 바다도 마찬가지였다. 이지를 가진 존재는 그들의 목숨을 대가로 강대한 힘과 영생을 얻은 타락자들 뿐이었다. 물론, 그들 역시 아주 끔찍한 몰골로 변이되어 있었지만.

이안이 라클리프의 보스만 간신히 클리어하고 서부를 떠난 건, 지역 전체가 그저 걸어 다니기만 해도 체력이 깎이는 죽음의 땅이 되어서였다.

'그걸 견디기엔, 독과 질병 내성이 꽤 부족했지.'

보아하니 그 모든 사태의 원흉이, 그때 죽인 보스가 아닌 모양이었다.

"루 솔라여…."

필립이 속삭이듯 탄식했다. 그는 병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안이 턱짓을 하고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그가 문을 닫았다.

이안이 덧붙였다.

"와서 신성력 좀 부어 봐."

필립은 왜 그래야 하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가라앉은 눈으로 다가와, 병자의 몸 위에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아귀에서 은은한 빛이 번져, 이윽고 병자의 몸으로 내려앉았다.

"…컥. 커어어…."

병자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번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벗겨진 피부 사이로 핏줄이 울룩불룩 돋아나고, 크고 작은 종기들이 터질 것처럼 꿈틀댔다.

"...!"

필립의 눈이 커졌다.

신성력이 질병의 회복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눈에 보이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건 질병이 치료되는 것보다, 저주가 정화되는 현상에 더 가까웠다. 혹은, 신성력에 죽어가거나.

"이게 대체…."

나지막이 탄식한 필립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보이는 그대로다."

"그럼 이건… 정말…."

필립의 멍한 시선이 신음하는 병자의 전신을 훑었다. 그 와중, 신성력이 집중적으로 닿은 부분은 조금씩 지글대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는 뜻이리라.

"...!"

이안의 시선이 문 쪽으로 돌아간 건 그때였다.

필립이 주먹을 움켜쥐자 손아귀의 빛이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시선을 교환한 이안과 필립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가에서 떨어진 어둠에 몸을 숨겼다.

"으… 으으…."

남겨진 병자가 흘리는 신음만이 번지고, 발소리가 근처까지 가까워졌다. 필립이 소리 없이 단검을 뽑아 들고, 이안도 운철 단검의 자루에 손을 얹는 가운데.

"오… 오오오…!"

"뭐 저런 엄청난 괴물이…?!"

"대공자 만세!"

성벽 너머에서 왁자지껄한 탄성과 함성, 휘파람 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집으로 다가오던 발걸음이 멈추더니, 곧이어 왔던 길을 되돌아 빠른 속도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거참 타이밍도 좋군.

이안은 단검 자루에서 손을 뗐다.

발소리를 쫓아갈 필요는 없었다.

타락자와 관련된 인물이라 해도, 원흉이라 할만한 핵심 인물이 아닌 이상 당장 처리하는 건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이쪽은 아직 아는 게 별로 없지 않은가. 필요한 정보를 다 얻기 전까진, 저들이 꼬리를 밟혔다는 사실을 모르게 두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목적을 이루기 전까진 어디로 떠나지도 않을 테고.'

병자들을 내려다보던 이안은, 이내 몸을 돌려 다음 집으로 향했다. 병자들을 향해 짧게 기도한 필립이 숨죽여 그의 뒤를 따랐다.

이안은 다음 몇 채의 집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내부만 확인했다. 전부 좀전의 병자들과 비슷한 상태였다.

"...."

이안이 다시 장내로 들어선 건, 고작 네 채의 집만을 남겨뒀을 때였다. 죽음의 냄새가 났다. 그가 장내에 누운 병자에게로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가 병자의 상태를 눈에 담았다. 머리카락 한 올 남지 않은 병자는, 새카맣게 물든 앙상한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였다. 몸 곳곳에 툭툭 튀어나온 손바닥만 한 종기가 살아있는 것처럼 맥동했다.

종기 내부에서 오염된 마력이 한층 또렷하게 느껴졌다.

병자의 생명을 빨아먹고 자라난 덕분이리라.

그때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역병의 원흉.

그가 퀘스트의 내용을 눈에 담으며 오른손의 장갑을 벗는 그때.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이들도 가족이 있을 텐데요. 가족이 이런 상태인 걸 안다면… 저렇게 평화로울 리가…."

필립이 나지막이 중얼댔다. 이안이 장갑을 벗은 손을 병자 위로 내밀며 대꾸했다.

"테센에 보내진 줄 알겠지. 초기 증상이 나병과 비슷하니까."

"그런…."

필립이 탄식하는 가운데, 이안의 중지에 끼워져 있던 검은 반지가 스르르 움직여 뱀의 형태가 됐다.

늪지의 원한. 어느 순간부터 이안에게 반항조차 하지 않게 된 녀석은, 지금에 와선 자의식조차 거의 남지 않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생사를 오가는 전투와 온갖 종류의 신성력에 장시간 노출된 탓이리라. 지금은 그저 이안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인형에 더 가까웠다.

삼킬 수 있다면 조금 삼켜 봐라.

이안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녀석이 스르르 손가락 사이로 기어 내려가 병자의 몸 위에 떨어졌다.

늪지의 원한이 종기를 콱 깨물고 꿈틀대는 사이.

"…나리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필립이 문득 물었다. 이안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내뱉었다.

"뭐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란 것을요."

그래, 궁금해 할 줄 알았지.

건조하게 코웃음 친 이안이 대답했다.

"잘."

"…조금만 더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혹시나 했을 뿐이야. 아까 대공자가 그랬잖아. 평소보다 이른 시기에 병이 돌았다고. 알다시피 테센에는 타락자가 있고, 서부에는 어둠이 깃들고 있으니까. 한 번 확인차 들러 본 거다."

"혹시가 역시가 되셨겠군요."

"그렇지."

"맙소사… 이제야 왜 대공자나 백작에게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으시겠단 건지 알겠군요. 그자들도 믿지 않으셨던 거예요. 이 풍요로운 모습을 보고서도 방심하지 않으시다니, 역시 나리십니다…."

"그건 정말 귀찮아지기 싫어서였어. 의미 부여하지 마라."

코웃음 친 이안이 손을 뻗었다. 종기에서 입을 뗀 늪지의 원한이 용수철처럼 그의 손으로 튀어 올랐다. 놈의 몸통 한복판은 어느새 메추리 알을 삼킨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녀석이 낑낑대며 손가락에 감기는 사이, 일어선 이안이 다시 몸을 돌렸다.

"또 어딜 가시는…."

"이들에게 기도라도 해 줘라. 여기서 루 솔라의 신도는 너 뿐이니까."

내뱉은 이안이 밖으로 나갔다. 필립이 선선히 무릎을 꿇었다. 얼굴의 반을 덮었던 천을 벗어버린 그가, 눈을 감고 기도문을 읊었다. 이윽고 기도를 끝낸 필립이 병자를 내려다보며 일어섰다.

"…당신들의 복수는, 반드시 해드리겠습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린 그가 비로소 집을 나섰다.

우두커니 선 채 어둠 너머를 응시하는 이안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필립도 그가 바라보는 것과 같은 방향을 돌아보았다.

어둠에 휩싸인 성벽.

"뭘 보시는 겁니까?"

"…끝냈으면 돌아가자."

시선을 거둔 이안이 몸을 돌렸다.

"도마뱀이 도착한 것 같은데, 너무 늦으면 이상하게 여길 테니."

***

도시의 밤거리는 주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주민들은 도시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 하나 같이 흥이 돋은 얼굴들이었다. 다들 다리 여섯 달린 거대 도마뱀에 대한 온갖 종류의 헛소리들을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화제의 주인공인 바실리스크는, 백작 가의 장원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병사들과 시종, 하인들도 그 거대한 괴물의 시체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 이반 경! 드디어 오셨군! 어디에 계셨었소?"

그 앞에서 병사들과 껄껄대고 있던 오벨리가 이안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이안의 건조한 시선을 받은 그가 얼굴 가득 웃음 지으며 덧붙였다.

"별관에 올라갔더니 부재중이셔서,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었소. 저 놈을 안주 삼아 한 잔 마시면서 말이오. 경도 한잔 하시겠소?"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이안이, 비로소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바실리스크를 돌아보았다.

"이 큰걸, 정말 빨리도 옮기셨군."

"다들 무거운 걸 옮기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어서 말이오. 그보다, 처분은 어떻게 하시겠소?"

오벨리가 나무 술잔을 들어 바실리스크를 가리켰다. 안에 찰랑거리는 액체는 볼 것도 없이 맥주였다.

"어떤 걸 원하시오?"

"통째로 팔아 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지. 그래 주신다면 이대로 몇 시간쯤 놓아두고 구경하다가, 곧바로 해체 작업에 들어갈 생각이오. 아버님도 확인하고 들어가셨고."

"가격만 맞는다면야. 못 그럴 것도 없지."

"그럼 금화 다섯 개는 어떠시오? 물론 제국 금화로."

곧바로 이어진 말에 이안이 짧게 웃음 지었다.

"아무리 운반비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너무 후려치시는군."

"이런, 들켰군. 하하. 흥정이 몸에 배어 있어서 말이오."

넉살 좋게 웃음 지은 오벨리가 덧붙였다.

"그럼 여덟 개는 어떻겠소?"

아마도 금화 열 개까지 올라갈 것을 염두에 둔 가격이리라. 이안은 그 기대에 부응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한 가지 조건만 받아들이신다면, 그렇게 하겠소."

"한 가지라면, 어떤?"

"놈을 해체하다 보면 정수가 나올 수도 있소. 그건 이쪽에 넘겨주시오. 주군께서 요긴하게 쓰실 테니."

"흠…. 저 정도 되는 마물의 정수는, 나오기만 하면 꽤 비싼 값에 거래되는 물건이라고 들었는데…."

두툼한 턱을 긁적이던 오벨리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저건 경의 전리품인데, 내가 고민하는 것도 우습군. 알겠소. 가죽과 피, 뿔에 이빨만 해도 금화 여덟 개 가치는 충분하니까."

그가 이안에게 손을 내밀며 덧붙였다.

"찬란한 여신께 맹세코, 정수가 나온다면 경께 가져다드리리다. 이렇게 거래를 끝내시겠소?"

"그럽시다."

그 맹세가 정말 의미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속으로 덧붙이며, 이안이 손을 맞잡았다.

#193화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이는군. 고맙소, 경."

이안의 가라앉은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듯, 오벨리가 기분 좋게 웃으며 내뱉었다. 이안이 손을 놓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별말씀을."

"돈은 곧 시종을 통해 올려 보내겠소."

"그리 알고 있겠소. 그럼 이만 올라가 보겠소."

"편히 쉬시오. 아마 지금쯤 다들 저녁 식사 중일 것이오. 그럼, 내일 아침에 봅시다."

몸을 돌리다 멈칫한 이안이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내일 아침에, 뭔가 있소?"

"아. 올라가면 아시게 되겠지만, 아버님께서 내일 오전에 귀하들과 대면을 요청하셨소. 자주 있는 일은 아닌데. 이런 마물을 손쉽게 처치한 용사들과 고귀한 원로 요정을 직접 뵙고 싶으신 모양이오."

"…밤이 아니라 오전에?"

오벨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본래는 저녁을 원하셨소만, 저녁엔 내가 만찬을 준비할 예정이라서 말이오. 내 손님이니 아버님이 양보하실 수밖에. 정작 공께선 아버님의 요청은 수락하시고, 내 요청은 고민해 보겠다 하셨소만."

아, 그런 식이었던 거군.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을 바라보며 오벨리가 목소리를 낮췄다.

"경이 설득 좀 해 주시오. 감사를 표하려 마련하는 자리에, 주인공들이 빠지셔야 되겠소?"

"말씀드려 보겠소."

만찬이 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속으로만 덧붙이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벨리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혹여 술을 마시고 싶다면 언제든 내려오시오. 계속 술판을 벌일 예정이니까."

대답을 기대한 말이 아닌 듯, 장난스럽게 잔을 들어 보인 오벨리가 몸을 돌렸다. 그가 그대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멀어졌다.

빵과 맥주의 수호자라더니. 술을 마시면 성격이 호탕해지는 권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접견이라니…."

내내 전혀 웃지 않고 있던 필립이 중얼댔다. 그를 돌아보며 건조하게 웃은 이안이, 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오벨리의 말대로, 일행은 테사이아의 방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이안. 벌써 대공자가 왔다가 갔다구."

테사이아가 입가에 고기 양념을 묻힌 채 말했다.

이안이 허리춤의 검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밑에서 만났다."

"아, 그래? 그럼 얘기도 다 들었겠네?"

"그래. 백작의 요청을 받아들였다지?"

되물으며 자리에 앉은 이안이, 메브가 건넨 술잔을 받아들었다.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요청을 그 자리에서 딱 잘라 거절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말인데."

고기 조각을 입에 날름 넣으면서, 그녀가 미소 지었다.

"내일 오전에 떠나자. 괜히 백작이랑 한자리에 엮여서 좋을 거 없잖아. 방금까지 그 얘기 중이었어. 무슨 핑계를 대는 게 좋을지. 마땅한 게 나오진 않았지만."

그녀의 건너편에 앉은 샬롯이 맥주잔을 들며 덧붙였다.

"그래서 널 기다렸다, 이안. 너라면 분명 뭔가 묘수가 있을 테니."

"글쎄…."

필립과 슬쩍 눈빛을 교환한 이안이 내뱉었다.

"백작을 만나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엥…?"

테사이아가 고개를 기울이고, 샬롯이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필립의 표정을 보고 있던 메브가 입을 열었다.

"가짜 신분이 들통날 위험성은 이미 알고 있을 테고…. 그래야 할 이유가 있겠구나."

"그렇소."

"밖에서 뭔가 일이 있었구나. 어딜 다녀온 건데, 이안?"

테사이아가 뒤이어 물었다. 이안이 술잔을 들며 대답했다.

"성 밖. 판자촌."

"판자촌…?"

"병자들을 격리한 곳 말입니다."

필립이 덧붙였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가, 밖에서 본 것들을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이안은 입만 축이려던 맥주를 한잔 전부 마셨다. 최근에 마신 맥주 중에 가장 맛이 좋았다. 물론 미지근하긴 했지만, 아직도 코끝에 감도는 악취를 날려 버리기엔 충분했다.

"그러니까 역병이, 그것도 저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역병이 돌고 있단 말이로군. 그것도 주민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에."

설명을 듣고 난 메브가 심각해진 얼굴로 읊조렸다. 다시 잔을 채우면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직은 돌고 있다고 말할 만큼 번지진 않은 것 같소만."

필립에게 다시 한번 눈짓을 보내며, 이안이 오른손 장갑을 벗었다. 배가 부푼 채로 손가락에 감겨 있던 늪지의 원한이 식탁 위로 툭 떨어졌다.

곧 녀석이 웩, 삼키고 있던 것을 일부 게워냈다. 아주 적은 양이었지만 일행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타르처럼 새카맣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점액질이었으니까.

푸스스-

점액은 곧바로 녹아내리듯 검은 연기로 변해 피어올랐다.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오른손을 내뻗었다. 손아귀에서 뻗어 나온 흐릿한 빛이 연기와 점액질을 그대로 태워 버렸다.

저주의 부산물이라는 걸 보여 주기엔 충분한 증거였다.

"드네로브에도 타락자가 암약하고 있었던 거군…. 이미 희생자들까지 만들어 내면서."

메브가 탄식했다. 다시 늪지의 원한을 반지로 되돌린 이안이 포크를 들었다. 그가 접시에 놓인 고기를 입에 넣는 사이.

"내가 본 그 괴상한 그림자의 영향일 수도 있지 않을까? 변방의 어둠이 내려오고 있다며."

고기를 우물대던 테사이아가 물었다. 아직도 음식을 먹고 있는 건 그녀와 이안뿐이었다. 샬롯과 메브는 포크를 내려놓고 술잔만 손에 들고 있었고, 필립은 아예 처음부터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이안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게 이곳의 타락자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계기가 되었을 거다. 그 전부터 시작된 거라면, 이미 도시가 쑥대밭이 됐을 테니까."

"…어쩌면, 우리가 쫓는 자와도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메브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안이 고기를 씹으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그건 확인해 보면 알게 되겠지. 물론, 경이 그냥 테센으로 떠나시겠다 해도 그리하겠소. 난 지금, 경의 복수를 돕고 있으니까."

형식적인 말이었다. 역시나, 메브는 고민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확인해 보도록 하자. 내 복수를 떠나, 타락자들의 음모를 알게 되고도 외면할 수는 없는 법이니."

"그러시다면야."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다시 식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남은 얘기는 식사를 끝내고 해도 충분할 터였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일행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백작과 대공자도 한 패일까?"

테사이아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술잔을 들며 필립이 내뱉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들은 이번 일과는 무관하지 않을까 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들이 한패라면 병자들을 격리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역병을 퍼뜨려서 얻는 게 무엇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냥 병이 퍼지게 뒀겠죠. 우리에게 굳이 열병에 대해 떠들지도 않았겠고요. 아마 백작과 대공자는 상황을 모르고 있을 겁니다. 아무리 백성을 아낀다 해도, 병자들을 직접 보러 갈 일은 없을 테니까요."

"호오. 제법 그럴듯한 소리를 하네, 주근깨."

싱긋 미소지으며 고기를 씹던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틀렸어."

"…틀렸다고요?"

"그래. 그게 백작과 대공자의 결백을 증명하진 않아."

"이유를 설명해 주시죠."

"저주로 만들어진 역병이라며. 흑마법은 나도 좀 아는데. 보통 치명적일수록 큰 대가를 필요로 해. 아마 도시에 환자를 던져 놔도, 네 생각처럼 크게 번지지는 않을 거야. 고작 몇 정도를 죽이고 사라지겠지. 물론, 다른 부작용을 일으키는 부산물을 만들어 내겠지만."

그녀가 메브와 샬롯을 차례로 돌아보고는 미소 지었다.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가 되려면, 저주의 힘을 축적할 시간과 준비가 필요할 거야. 아니면 이 일대를 마경으로 만들거나. 아무리 이 일대가 어둠에 덮이고 있다고 해도, 꼭 필요한 과정이지. 그래서 격리한 걸수도 있어. 때가 무르익기 전까지, 주민들이 모르게 하려고."

술잔을 든 테사이아가 느긋하게 덧붙였다.

"어쩌면 애초에, 그 병자들 자체가 제물일지도 모르지. 저주의 힘을 키우기 위한. 내가 보기엔 거의 확실해."

"…마족 출신 귀쟁이다운 말이군. 설득력이 있어."

샬롯이 코웃음 치며 술잔을 들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던 필립이 덧붙였다.

"백작과 대공자의 결백은, 결국 알 수 없는 거군요."

"그렇지. 하지만 확실한 게 없진 않아."

포크를 들어 고기 조각을 푹 찌른 테사이아가 자신만만하게 덧붙였다.

"사제들. 그자들은 분명히 타락했어. 앞뒤가 딱 맞잖아. 테센의 수도원에는 너희가 찾는 타락한 사제가 있고. 여기도 병자들을 돌보는 건 사제들이니까. 내가 볼땐 죄다 한통속이 분명해. 그러니까…."

샬롯을 돌아본 그녀가 눈썹을 들썩였다.

"말 나온김에 확인해 보자. 기척 없이 다니는 건 너랑 내 전문이니까. 조용히 교회에 잠입해서 하나씩 족쳐 보자고. 그럼 뭐라도 나오겠지."

"마음에 드는 소릴 하는군."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은 샬롯이 덧붙였다.

"한 놈만 살려두면 충분해. 스무 번의 기회를 주면, 아는 걸 전부 굴게 될 거다."

미간을 찌푸린 필립이 물었다.

"왜 스무 번입니까?"

"손가락과 발가락을 합치면 스무 개니까."

"아, 아하… 그렇군요…."

"원한다면 스물세 번도 가능해. 코와 귀도 있으니까. 물론, 기회를 다 쓰기 전엔 절대 죽지 않을 거다. 내가 보증하지."

"…아쉬우시겠지만, 그 기회를 주는 건 다음을 기약하시는 게 좋겠군요. 아까 보니, 교회가 도시 한복판에 있었거든요."

"그래. 테사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저주의 힘을 축적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적지 않은 희생을 야기할 수도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인 메브가, 입맛을 다시는 샬롯과 테사이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순 없다. 민간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신중하게 접근하고, 단숨에 끝장을 내야 해. 적어도 밤에 충돌하는 건 피해야겠지. 밤은, 놈들의 시간이니까."

"깐깐하긴. 그럼 어쩔 수 없이…."

혀를 차며 말하던 테사이아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곧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금화를 들고 온 시중이었다. 금화 주머니를 받아드는 샬롯에게, 그가 덧붙였다.

"내일 백작님과 대면할 때는 무장을 모두 해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의상이 필요하시다면, 저희가 따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소."

묘한 눈빛으로 일행을 돌아보았던 샬롯이 대답했다. 공손하게 인사한 시종이 밖으로 나가고, 돈 주머니를 든 샬롯이 자리로 돌아오며 미소 지었다.

"백작이 꽤 철저하군."

"많이들 하는 조치입니다만. 상황이 이러니 맘 편히 받아들일 수 없군요."

"무슨 상관이야, 우리에겐 이안의 마법이 있는데."

덧붙인 테사이아가, 이윽고 돈 주머니를 받아드는 이안을 돌아보며 내뱉었다.

"우리 무기들을 따로 보관해 줄 거지, 이안?"

"당연하지."

"차라리 잘됐네. 백작이 타락자인지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수틀리면 바로 목에 칼을 들이밀면 되잖아."

이안이 접시에 남은 마지막 고기 조각을 입에 넣으며 피식댔다.

"당연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먼길을 돌아왔군."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거야?"

고기를 삼킨 이안이, 맥주로 입을 헹구고는 말을 이었다.

"내일 백작을 대면하는 자리에는 분명히 타락자가 있을 거다. 그게 백작이나 대공자가 아닐지라도, 최소한 놈들과 직접 연결된 끄나풀이라도 있겠지."

"확신하네."

"당연하지. 원로 요정씩이나 되는 존재가 별다른 연고도 없는 서부에, 하필이면 이 시기에 나타났으니까. 왜 온 건지, 혹시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지 알아내려 하겠지. 그러기에 내일만큼 손쉽고 확실한 자리는 없겠고."

"…반대로 우리에게도 손쉽고 확실한 순간이 되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겠구나. 우리가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은 모를 테니까."

메브가 서늘한 눈으로 읊조렸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가볍게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렇소. 증거도 있겠다. 마침 저쪽에서 먼저 판을 깔아 줬으니, 우리도 이용해 봅시다."

"만약 웨스트우드 백작과 오벨리 대공자가 전부 타락자와 한패라는 게 확실해지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필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술잔을 입에 가져간 이안이,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내뱉었다.

"글쎄. 너라면 어떻게 하겠냐?"

"…처단하겠죠. 당장은 오명을 뒤집어쓰고 쫓기게 될지라도."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잔에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켜는 사이, 테사이아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쫓기는 건 정말이지 지긋지긋한데."

"그게 싫으면 내일 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할 거다, 귀쟁아."

"뭐? 그게 무슨 헛소리…."

샬롯의 핀잔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릴 찰나, 필립이 눈을 번뜩이며 내뱉었다.

"그렇군요. 테사가 잘만 한다면, 가짜 신분이 들통나는 일 없이 백작을 심문하고 타락자를 처단할 수도 있겠어요."

"아니, 왜 결론이 그렇게 나…?"

"염려 마십시오. 테사는, 그저 외우시기만 하면 됩니다. 말을 지어내는 건 저희가 할 테니까요. 도와주실 거죠?"

필립의 시선을 받은 샬롯과 메브가 당연하다는 듯 술잔을 들었다.

"...."

마지막으로 술잔을 드는 이안까지 눈에 담은 테사이아의 입이, 결국 멍하니 벌어졌다.

#194화

일행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느긋하게 채비를 끝냈음에도, 가장 먼저 방을 나선 건 이안이었다.

주연인 테사이아와 그녀를 챙겨야 하는 역할인 일행들과 달리, 일종의 행동 대장인 그는 평소와 크게 다를 게 없었던 덕분이었다.

물론 갑옷과 검을 비롯한 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덕분도 있었다.

그는 시종들이 가져다 준 제국식 회색 정복에, 가벼운 가죽 부츠와 얇은 천 장갑만을 걸친 채였다. 갑옷의 무게에 익숙해져서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차림으로 있으니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도련님! 도련님! 일어나십시오!"

계단을 내려온 그를 반긴 건 조라의 목소리였다.

별관 앞 장원에는 어느새 바실리스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기어코 어젯밤에 해체 작업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대신 술에 취해 잠든 병사와 시종들이 구석구석에서 코를 골아대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오벨리도 있었다. 조라가 거의 멱살을 쥐다시피 한 채 그를 깨우고 있었다.

…이런 게 서부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란 건가.

내심 중얼거리며, 이안이 출입구 옆의 벽에 기대 설 찰나.

"벌써 늦었습니다! 늦었다고요!"

"...!"

마침내 오벨리가 번쩍 눈을 떴다. 저만치의 이안과 눈이 마주친 것도 잠시. 그의 복장을 확인한 오벨리가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더 빨리 깨워줬어야지!"

"이미 그랬습니다! 준비를 다 끝내고 다시 오라고 하신 건 도련님이셨다고요!"

"내가 그랬다고…?"

"어서 가서 옷부터 갈아입으십시오. 술 냄새도 좀 날리시고요."

"이, 이반 경! 공께서 나오시면 잠시만 기다려 주시라 전해주시오! 부탁드리겠소!"

달려가려던 오벨리가 멈칫했다.

품에서 뭔가를 꺼내 조라에게 건네며 몇 마디를 속삭인 그가 비로소 허둥지둥 멀어졌다.

조라가 장원을 가로질러 이안 쪽으로 다가왔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시군."

"일상입니다. 백작님이 편찮으시기 전엔 저러지 못하셨는데. 지금은 아주 고삐 풀린 망아지가 따로 없습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내뱉은 조라가, 이안에게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만한 주머니가 그 위에 놓여 있었다.

"대공자께서 전해 주시라는군요. 신의를 지킬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말씀과 함께요."

주머니를 받아든 이안이 곧바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녹색 빛이 아른거리는, 보석의 원석처럼 생긴 돌덩이.

자신에게만 보이는 정보창을 눈에 담으며, 이안이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훌륭하군."

바실리스크의 정수였기 때문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정수가 아닌 만큼 모양도 투박하고 증폭력도 떨어졌지만. 대신 속성 보정치가 추가된 데다 담긴 마력의 밀도도 높았다.

제대로 가공한다면 최상급 정수로 거듭나리라.

"만족스러우시다니 다행입니다."

조라가 고개를 숙이는 그때, 계단에서 발소리가 이어졌다. 필립과 메브였다. 이안이 그렇듯, 그들도 평소와 다른 가볍고 깔끔한 차림새였다. 둘의 모습을 눈에 담은 조라의 눈이 커졌다.

"여기사… 셨습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전신 판금 갑옷을 벗어버린 메브는 흰 피부와 녹색 눈동자, 목 아래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칼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였으니까.

바지와 튜닉으로 이루어진 남성용 정복이, 한쪽 턱을 가로지르는 흉터와 어우러져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오?"

이안이 넌지시 물었다. 황급히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문 조라가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조라에게 눈인사를 건넨 필립과 메브가 이안의 곁에 서는 가운데. 뒤이어 샬롯과 테사이아가 계단을 내려왔다.

"...."

닫혔던 조라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갈기를 늘어뜨린 채 정복을 걸친 수인과 은발 요정의 조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것이리라.

옅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몇 가닥 땋아서 늘어뜨린 테사이아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기품있고 고고해 보였다. 드레스는 치맛단이 조금 땅에 끌리는 데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수수했지만, 조금도 그녀의 분위기를 해치지 못했다.

드레스 옷깃에 은으로 만든 꽃 모양 브로치가 반짝였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조라가 허리를 굽히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반가워요, 조라."

"조, 좋은 아침입니다. 공. 잠자리는 편안하셨는지요."

이안이 전쟁 같던 어젯밤을 떠올리는 사이, 테사이아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요. 그런데 대공자께선…."

"곧 오실 겁니다. 일정상의 작은… 착오가 생겼어서요."

조라가 이안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실소를 삼킨 이안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라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래…? 어렵지 않지. 조라?"

조라를 돌아보며 슬쩍 턱 끝을 치켜 든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기다리는 동안, 뭔가 이야기를 해 주지 않겠어요?"

"이야기라면 어떤…."

"뭐든지요. 곧 만나 뵙게 될 백작님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잠시 머뭇거린 조라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백작님은 궂은일도 솔선수범하는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성격이 불같고 괴팍한 면이 있으시지만, 다들 그런 부분조차 존경했지요. 마님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신 이후로는 그런 부분이 조금 더 심해지시긴 하셨었습니다만…."

짧게 헛기침한 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최근에는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거의 모든 시간을 저택에서만 보내고 계십니다. 그러시면서 다소 강박적이고 잡념이 많아지시긴 했습니다만… 곧 좋아지시겠죠."

최대한 온화한 단어들을 사용한 것일 터였다. 필립이 메브와 이안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사이,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지병을 앓으시는 건가요? 아니면…."

"아, 염려하지 마십시오. 전염병은 아닙니다. 젊은 시절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신 후유증이죠.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다소 괴팍하고 무례하시더라도 천성이 악한분은 아니시니, 부디 오해는… 아."

주저하며 말을 잇던 조라가 자세를 바로 했다.

"저기 오시는군요."

일행의 시선이 돌아갔다. 오벨리가 말끔한 정복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곧 숨을 헐떡이며 멈춰선 그가 엉거주춤 다리를 굽혔다.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공."

"괜찮습니다. 덕분에 여기 조라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테사이아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했다.

조라와 시선을 교환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메브와 샬롯을 잠시 놀란 듯 바라본 오벨리가,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가시죠. 조라?"

"예,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하고 덧붙인 조라가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테사이아와 샬롯이 그 뒤를 따르는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확실하군요."

나란히 걷는 이안과 메브의 등 뒤에서, 필립이 속삭였다.

"저 둘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분명합니다."

이안은 물론, 메브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

백작의 저택은 담벼락을 하나 더 통과해, 장원의 가장 깊은 곳에 솟아 있었다. 옆으로 넓은 2층 높이의 대저택이었지만, 제국의 대귀족치고는 검소하다 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눈에 띄는 건, 창과 방패를 들고 정원 곳곳에 선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저들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선 늘 이러십니다."

오벨리가 난처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안 일행은 무장을 해제시킨 주제에, 정작 이쪽에선 무장한 병사들을 대기 시킨 게 민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일행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저들의 무기를 빼앗아 역으로 살육을 펼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필립이라 할지라도 그럴 수 있을 터였다.

건물 앞에 도착하자 시종장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마중 나왔다. 반백에 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하지만 낯빛이 좋지 않은 자였다.

"아버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십시오."

오벨리와 테사이아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그가, 2층의 연회장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저택 내부에도 무장한 병사들이 곳곳에 대기하고 있었지만. 이안은 전혀 다른 부분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택의 퀴퀴한 공기 사이로, 아주 희미한 오염된 마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감각으로 거의 느끼기 힘들만큼 희미했지만, 분명 흑마법이나 저주의 흔적이었다.

곧 연회장의 대문 앞에 선 판금 갑옷 차림의 중년 기사가, 오벨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 멈춰 선 오벨리가 말했다.

"내 손님인데, 준비가 과하셨소. 아우렐 경."

"제 역할을 다할 뿐입니다. 대공자."

"그럼 지금부터라도 다들 물러나 주시오. 아버님의 성격상 높은 언성이 오갈 수도 있는데, 듣는 귀가 있으면 귀빈들이 민망하지 않으시겠소?"

"하지만…."

"내 손님들이니, 내가 책임지겠소."

"…그리하겠습니다."

아우렐 경이 병사들에게 물러나라 턱짓하는 사이, 시종장이 대문을 열었다.

제법 널찍한 장내가 드러났다.

단순히 연회만을 위해 마련한 장소는 아닌 게 분명했다.

중앙을 비워둔 채 몇 개의 의자가 같은 방향으로 놓여 있고, 그 끝에는 작은 단상이 솟아 있었다.

그 위. 옆으로 길게 만들어진 의자에 걸터앉은 노인이 바로, 이 저택의 주인인 웨스트우드 백작이었다.

테사이아의 뒤를 따라 장내로 들어서면서, 이안은 백작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하얗게 센 백발. 비쩍 마른 얼굴과 흐릿한 갈색 눈. 얼굴에 검버섯도 잔뜩 펴서, 한눈에 봐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이 공간 전체에서 죽음의 냄새가 났다. 흐릿한 저주의 흔적도 여전했다.

"...."

장내에 백작만 있다는 걸 확인한 이안의 눈빛이 칙칙하게 가라앉는 가운데.

"아이나스 공이시라고?"

백작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눈빛이나 겉모습과 달리 다소 칼칼한, 힘 있는 목소리였다. 시종장이 단상 옆으로 걸음을 옮기고, 오벨리와 조라는 그 반대편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테사이아가 정중앙에 섰다. 왼쪽 뒤에 선 이안을 기준으로 나머지 일행들도 일렬로 멈춰 섰다. 테사이아의 옆으로 한 걸음을 나서면서, 샬롯이 입을 열었다.

"끝없는 지식의 탐구자이자 생명수의 막내딸. 죽음의 세례를 받고 다시 눈뜬 자이며 일족의 최연소 원로이신, 텐시아 아이나스 공이십니다."

꼿꼿하게 선 테사이아가 살짝 턱을 치켜들며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시종장이 기다렸다는 듯 반걸음 앞으로 나섰다.

"루 솔라의 신도이자 델라 루의 축복을 받은 자. 선황 폐하께서 임명하신 서부의 수호자이자 검은 흙의 개척자. 드네로브 전역의 정당한 지배자이신 흙투성이 귀족, 모르간 웨스트우드 백작이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한 테사이아가, 비로소 가볍게 다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백작 각하. 덕분에 배불리 식사하고 따듯하고 안락한 잠자리에서 잠들 수 있었습니다."

"아이나스 가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소."

이어진 백작의 말은 감사 인사에 대한 화답이 아니었다.

"요정 가문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전사들이라고. 해서 전쟁의 시대에는 타락한 족속들과의 전투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지. 또한, 그 실력만큼이나 오만하여 인간조차 하찮게 여긴다던데."

오벨리가 홱 고개를 돌려 백작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더 악명 높은 가문이었군.'

핀드렐 아이나스를 떠올리며, 이안은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가 살아온 방식은 늘 이런 식이었을 터였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선 상대를 무례하게 뒤흔드는 방식도 서슴지 않는.

동시에 이건 자신의 불안함을 감추기 위한 무기이기도 할 터였다.

그것이 병 때문인지, 하늘을 뒤덮는 어둠 때문인지, 이 시기에 자신의 땅을 방문한 요정 패거리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의 은밀한 본모습이 들통날 것을 염려해서 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건, 예상을 벗어나지는 않는 수준의 무례함이었다.

테사이아가 태연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소문은 와전되기 마련이죠. 물론, 전부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귀공의 일행 중에 요정이 보이지 않아 꺼낸 말이오. 가문의 방침이 달라지기라도 한 것인가?"

"혼란한 시대니까요. 가문의 손은 언제나 부족할 수밖에 없기에, 원로들은 저마다의 방식을 추구하고 있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보다시피 다양성을 추구하는 편이죠."

"다양성이라…."

백작이 나지막이 웃음 지었다. 다시 의자에 앉은 그가 테사이아를 내려다보았다.

"하면, 이런 혼란한 시기에 다양한 실력자들을 이끌고 서부를 찾은 이유는 무엇이오?"

"아버님…!"

오벨리가 탄식하듯 속삭였다.

"이분들은 제 은인이자 손님들이십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는 취조가 아니라-"

"서부는 과거부터 인간의 땅이었으며, 요정과는 아무런 접점도 없을 텐데. 고귀하신 원로께서 직접 발을 들이셨으니, 궁금할 수밖에 없잖소. 혹, 말씀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으시오?"

백작이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말을 맺었다.

테사이아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리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하지만 이미 먼저 여러 질문에 답을 해 드렸으니, 그전에 제 질문에도 몇 번의 답을 해 주시는 게 순서일 것 같군요."

"순서라…."

또 한 번 곱씹으며 짧게 웃음 지은 백작이,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 말씀해 보시오."

"도시에 역병이 번지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까?"

#195화

"...!"

이어진 말에 백작의 눈이 커졌다. 오벨리와 조라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슬쩍 테사이아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대화를 길게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지만, 중간 과정을 지나치게 많이 건너뛴 것이다. 분명 서부를 방문한 이유에 대해서도 그럴듯한 대답을 준비해 놓았었건만.

'주입식 교육이 과했나. 아니면.'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건가.

테사이아의 표정만으로는 유추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띤 채였다.

이안이 다시 시선을 돌릴 찰나.

"역병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다시 주름진 미간을 찌푸린 백작이 물었다. 테사이아가 그의 눈을 헤집듯 응시하며 내뱉었다.

"전혀 모르셨다는 말씀이시군요. 이 도시는 백작님의 것일 텐데요."

"내 도시에 그런 일이 있을 리도 없지만. 일어나고 있다 해도 귀공이 상관할 바는 아니오. 귀공의 목적과는 관련 없는 말은 언급하지 마시오."

"관련이 있답니다."

"뭐라?"

"지금 번지고 있는 역병은, 흑마법으로 탄생한 저주의 결과물이니 말이지요."

"...!"

"그리고 말씀하셨다시피, 나는 타락한 족속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아이나스 가의 원로죠. 그러니 답변을 신중하게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백작의 인상이 더 구겨지는 가운데, 굳어져 있던 오벨리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오, 오늘은 이만 물러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공.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지금 귀공은 드네로브 뿐 아니라 아버님의 명예에도-"

"증거는 있소?"

벌떡 일어선 백작이 말을 잘랐다. 흐릿한 눈으로 테사이아를 노려보면서, 그가 씹어 뱉듯 말을 이었다.

"귀공의 주장을 뒷받침할 합당한 증거 말이오. 이 자리에서 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내 통치력뿐 아니라 영지의 명예를 더럽히려 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당장 성 밖의 판자촌으로만 가 보더라도 알게 되실 테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보시겠다면 그리 해드리지요. 그러나 그 후엔…."

테사이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백작께서도 결백을 증명하셔야 할 겁니다."

백작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홱 고개를 돌렸다.

"이반 경? 이리 나와 증거를 보이도록 하세요."

이런 게 메소드 연기란 건가.

테사이아의 싸늘한 눈빛에 헛웃음을 삼킨 이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 오른손의 장갑을 벗었다.

중지에 끼워진 늪지의 원한이 뱀의 형태로 돌아가, 그 아래에 펼친 왼손 손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녀석은 뒤이어, 소화 시키고 있던 저주의 잔재를 전부 토해냈다.

"...!"

백작이 해괴한 광경을 본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악취가 번진 것도 잠시. 이안의 손에 고인 새카만 점액질이 검은 연기로 화하기 시작했다.

다시 백작을 돌아본 테사이아가 보란 듯 말을 이었다.

"역병의 증거이자 저주의 잔재입니다. 역병 환자들에게서 직접 빨아낸."

"그런 괴상한 술수를 증거랍시고 들이댄단 말이오?"

"말장난 하지 마십시오, 백작."

뻔뻔하게 내뱉은 테사이아의 눈가로 실핏줄들이 꿈틀대며 돋아나기 시작했다.

백작의 낯이 굳어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것이 원로 요정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기예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증거를 원하기에 증거를 보였을 뿐. 이로 인해 내가 얻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음을 백작께서도 아실 텐데요. 그러니-"

테사이아가 문득 말을 멈췄다. 흐릿한 마력이 아른거리는 그녀의 시선이 백작을 지나쳤다.

그녀는 물론, 이안조차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새카만 연기가, 바람도 불지 않는데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느리지만 선명하게, 마치 허공에 길을 내듯이.

테사이아를 비롯한 일행 모두의 시선이, 연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

뒤늦게 그 현상을 깨달은 백작의 시선도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아니…."

"...."

모두의 시선을 받은 오벨리와 조라의 얼굴에 당혹이 번졌다. 입술을 파르르 떨던 백작이, 곧이어 일갈했다.

"네 이놈! 지저분한 반투르 놈들을 거둬 주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그제야 이안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오벨리의 등 뒤에 선 조라에게로 향했다.

당혹스러워하던 조라의 검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곧 결연한 눈빛이 된 그가 삽시에 소매에서 단도를 뽑아 들어, 앞에 선 오벨리의 목 앞에 가져다 댔다.

"다들 물러나시오!"

"...!"

일반적인 단검보다 날이 짧은 단도였지만, 목줄을 베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터였다. 눈을 치켜뜬 오벨리가 숨을 들이켜는 사이, 반대쪽 팔로 그의 가슴팍을 감싸 안은 조라가 백작과 이안 일행을 돌아보며 씹어 뱉었다.

"이렇게 들키다니…. 제기랄…. 다들 물러나! 당장!"

"반투르에서 굴러 들어온 천것들을 먹이고 씻겨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더니. 기어코 짐승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군. 내 도시에서 무슨 역겨운 짓을 벌인 것이냐?"

백작이 개의치 않고 내뱉었다. 조라가 그를 노려 보았다.

"닥치시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으니. 그 핑계로 나와 내 부모를 일평생 부려먹었지. 여기 이 대공자란 놈도!"

"네 부모가 그리 가르치더냐? 나병에 걸렸을 때 알아보았어야 했거늘. 그때부터 이미 사악한 짓거리를-"

"닥치라고 했을 텐데? 눈앞에서 아들이 죽는 걸 보고 싶나?"

조라의 단도가 오벨리의 목덜미를 살짝 긁었다. 두툼한 오벨리의 목에 불그스름한 핏기가 번졌다.

그제야 백작이 굳어졌다. 조라가 일행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안 들리나? 다들 물러나. 길을 터라. 당장."

"...."

하지만 이안 일행은 아무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저 한차례 서로를 돌아보고 이안의 표정까지 살피고는 다시 조라를 바라보았다.

조라의 이마에 설핏 식은땀이 돋아났다.

"이, 이대로 대공자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냐? 이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

직후, 어느새 가까워진 검은 연기가 조라와 오벨리의 코앞까지 다가들었다. 조라가 단도 날을 앞으로 휙 내뻗었다. 그 순간 검은 연기가 그의 손아귀로 빨려들듯 밀려들었다. 조라의 연갈색 눈동자가 거무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뭐, 뭣들 하시오? 당장 물러나지 않고! 진정 내 아들을 죽게 내버려 둘 참인가!"

비로소 백작도 일행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무표정하게 서 있던 이안이 내뱉은 건 그때였다.

"연기력이 형편 없군. 여기 와서 좀 배워야겠어."

"뭐, 뭐라고…?"

조라가 눈을 부라리며 되물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당신들 둘 다."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오벨리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오벨리의 낯이 굳어지는 가운데, 조라가 일갈했다.

"미친 소리 그만해라!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그어 봐."

말을 자른 이안이, 비로소 부릅뜬 조라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어 보라고. 할 수 있으면."

"...."

조라가 순간 숨을 멈췄다. 그의 눈동자에 거무스름한 빛이 아른거리는 가운데.

"…저들은 물러나지 않아, 조라."

오벨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안을 노려보던 백작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가고, 오벨리가 한 손을 들어 뒤에 선 조라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날 위해 나서 줘서."

"…도련님."

조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벨리의 손에 볼을 비비던 그가, 단도를 쥔 손을 툭 떨어뜨렸다.

"이게 무슨…?"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작이 어리둥절하게 뇌까렸다.

"둘이… 한패 였다고…?"

필립이 멍하니 중얼대는 가운데.

조라가 양손을 오벨리의 어깨 옆으로 치켜들며 일행들을 노려보았다.

"다가오지 마시오. 조금이라도 다가오는 순간…."

푸스스, 조라의 눈동자에 맺힌 검은 빛이 아른거렸다.

테사이아를 비롯한 일행 모두가 또다시 이안 쪽을 곁눈질했다. 이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 지금 이건, 일종의 이벤트 컷씬 같았다. 이게 끝나고 나면 새로운 퀘스트가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적어도 새로운 정보라도.

게다가 조라는 오벨리를 인도해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었지만, 어차피 뒤로 가 봐야 벽만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조라에게서 느껴지는 영문 모를 혼돈력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필립이 준비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저, 저 말이 사실이냐…? 저 빌어먹을 반투르 놈이 너까지 끌어들인 게야…?"

믿기 힘들다는 듯 되묻는 백작의 얼굴을 마주 보며, 오벨리가 내뱉었다.

"그 반대입니다. 아버님. 조라는 그저 저를 위해 동참했을 뿐이죠."

이상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백작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왜. 네가 왜…?"

"정말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시군요. 하긴. 그러니 어머니께서 그토록 고통스러워하시는 동안에도 저 빌어먹을 땅만 보살피셨겠죠. 끝내 눈을 감으시던 그 날에조차 말입니다."

"뭐, 뭐라…?"

"제가 어리석었지요. 이 가슴속의 슬픔이 분노로 변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기도나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여신들은 끝내 제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번도. 오히려 제게 손을 내민 건…."

오벨리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과거였다면 불경하다 여겼을 이들이었죠. 그들은 제 증오를 이해하더군요. 그리고 저 역시 알았습니다. 제가 마땅히 동참해야 할 일임을."

"대, 대체 무슨 짓에 가담한 것이냐…? 고작 그런 이유로… 도시에 역병의 저주를 풀었다고?"

"고작? 고작이라니요."

오벨리가 신경질적인 웃음을 흘렸다.

"아버님은 늘 그러셨죠. 흙투성이 귀족이라는 위명에 취해, 저 땅과 거기서 나오는 작물 외에는 모든 걸 하찮다 여기셨어요. 어머니를 잃고 울던 제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매질을 하셨지요! 여신께 돌아감은 자연의 섭리라고요? 그렇다고 아내의 시신을 밭에서 화장해 그대로 흩어지게 두십니까?"

"그래서 백성들에게 그 화풀이를 했단 말이냐? 아무런 관련도 없는 자들에게?"

오벨리가 멈칫했다. 슬며시 시선을 피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들의 희생은… 원치 않은 결과였습니다. 하늘이 어둠에 뒤덮이기 시작하며 일어난, 예상치 못한 비극이죠. 아니. 끝내는 겪었어야 할, 불가피한 비극이라 해야겠군요. 저는 이미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의 죽음으로, 이 땅이 더 빠르게 더럽혀지게 되었으니까."

"델라 루여…. 그게 네 목적이었느냐? 대를 이어 일궈온 이 땅을, 네 손으로 다시 더럽히는 것?"

"물론이죠. 그것이 아버님의 전부니까요."

거참 개판이군.

이안은 한숨을 삼켰다.

전혀 궁금하지도, 새삼스럽게 놀랍지도 않은 비극이었다. 타락자는 대부분,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궤변 따위가 아니라 원초적인 감정에 이끌려 타락의 길로 빠져드는 법이었다.

메브의 동생인 버논도 열등감이 단초가 되어 타락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무덤덤한 건 그뿐이었다.

일행들은 저마다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달리, 저 넉살 좋고 친절하던 대공자가 타락자 중 하나라는 사실이 꽤나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하긴, 이안조차도 오벨리와 조라에게선 타락의 징후를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그게 뜻하는 건….'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사이, 몸을 부들부들 떨던 백작이 내뱉었다.

"당장 어리석은 짓을 멈추거라. 저주를 거둬라. 네가 나는 물론이고 신까지 저버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복수로는 충분하니."

오벨리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미 늦었습니다…. 고작 저 하나가 멈추고 싶다 해서 끝낼 수 있는 선은, 이미 넘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저는 그저, 전체의 작은 한 조각일 뿐이죠."

"뭐라…?"

"그러니 지켜보십시오. 평생을 일궈낸 모든 것들이 썩어 문드러지고, 끝내 부패와 죽음이 가득한 죽음의 땅으로 변하는 것을요. 그럼 그때는 제 심정을 조금은 알게 되시겠지요. …그걸 제 눈으로 볼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군요."

애틋한 눈으로 옆의 조라를 돌아본 오벨리가, 곧이어 덧붙였다.

"저는 오늘, 조라와 함께 이 자리에서 죽게 될 테니까요."

"네, 네가 진정…!"

백작이 기침을 토하며 비틀댔다. 오벨리를 마주 본 조라의 눈이 결연하게 가라앉았다.

"도련님은… 그날을 볼 수 있으실 겁니다."

그는 동시에 오벨리를 와락 끌어안고는, 그대로 휙 몸을 돌려 자신의 뒤로 내팽개쳤다.

곧바로 다시 일행 쪽을 돌아본 조라의 눈은, 어느새 흰자위가 하나도 없이 새카맣게 물들고 있었다. 꿈틀대는 어둠이 그의 주위를 감싸며 넘실댔다.

"필립!"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턱짓한 이안이 소리쳤다. 양팔을 활짝 펼친 조라의 전신에서 새카만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조라-!"

오벨리가 울부짖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단상으로 몸을 날렸다. 넋을 놓은 백작의 멱살을 쥔 그녀가 쏜살같이 되돌아오는 사이.

솨아아아-

손을 내밀며 튀어나온 필립의 앞으로, 신성력의 장막이 눈부시게 피어올랐다.

조라의 전신에서 토해져 나온 연기가 삽시에 자욱하게 번지며 밀려들었다.

"아윽… 컥… 크흑…."

연기에 휩쓸린 시종장이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그의 전신이 순식간에 새카맣게 물들고 말라 갔다.

"장막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지독한 저주입니다…!"

빛의 장막을 두른 필립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연기는 신성력의 벽을 넘지 못하고 타들어 갔다. 일행은 백작을 움켜쥔 테사이아를 필두로, 이미 그의 뒤에 모여 있었다.

"대낮에 이만한 흑마법을 펼치다니…?"

샬롯이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이건 흑마법이 아니야."

내뱉은 건 이안이었다. 이안의 시선에, 그가 덧붙였다.

"이건 저것들이 모시는 신이 내려준 힘이지."

아마도 대가로 목숨을 바쳤겠지만. 그의 말을 들은 것처럼, 주위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장내를 뒤덮은 검은 연기 때문은 아니었다. 날 자체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필립이 창밖을 돌아보며 멈추지 않고 물러나던 그때.

"주, 주군-! 무사하십니까?!"

연회장의 대문이 벌컥 열렸다.

"아니, 이게 무슨…?!"

필립의 고개가 득달같이 돌아간 건 거의 동시였다.

"안돼! 오지마!"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고여있던 안개가 기다렸다는 듯 흐르기 시작했고, 문을 열고 달려 들어온 아우렐 경과 병사들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끔찍한 비명. 연기가 복도와 창문 밖으로 끝도 없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비명과 신음이 멀리까지 번져나갔다.

"이렇게까지 막 나가다니…."

필립이 탄식하는 가운데, 비로소 넘실대던 안개가 조금씩 옅어졌다.

"컥… 쿨럭…."

그 너머, 피를 토하며 주저앉는 조라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느새 그의 전신은, 병자들의 그것처럼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안돼… 조라… 이럴 수는…."

주저앉아 있던 오벨리가 조라를 내려다보며 탄식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저주의 흔적 없이 멀쩡했다. 곧 왈칵 눈물을 쏟은 그가, 다급하게 기어가 조라를 안아 들었다.

조라의 입술이 달싹였다.

"길은… 길은 열렸습니까…?"

"그래. 열렸어. 고맙구나, 나의…."

오벨리가 조라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조라의 검게 물든 피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아니, 더는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듯 비통과 슬픔에 잠긴 모습이었다.

"조라…? 안돼… 또 이렇게… 조라…."

오벨리가 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조라를 쓰다듬던 그때.

"소, 손…! 그 손 떼거라! 당장!"

넋이 나간 채 테사이아의 손에 잡혀 있던 백작이 내뱉었다. 그가 아른거리는 황금빛 장막 너머로 오벨리를 노려보았다.

"너까지 죽고 싶은 것이냐? 당장 그 손-"

"이게 당신을 저버린 대가입니까, 델라 루여? 이렇게 또다시…. 아아… 위대한 부패와 질병의 아버지시여… 차라리… 나도 함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중얼대던 오벨리의 어깨가 문득 굳어졌다.

"컥… 커억…?"

목을 움켜쥔 채 신음한 것도 잠시. 입으로 거무스름한 연기를 토해내기 시작한 오벨리가 조라의 위로 포개지듯 쓰러졌다. 새카만 안개가 삽시에 그의 전신을 뒤덮으며 끌어 올랐다.

백작이 숨이 넘어갈 듯 헐떡였다.

"아, 안돼…! 안…."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아, 그래. 드디어 시작이군.

심드렁하게 눈을 깜빡인 이안이, 그대로 아공간에 손을 쑤셔 넣었다.

#196화

철컹, 철그렁-

아공간에 보관 중이던 무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장검, 원형 방패, 전투 도끼를 비롯한 일행들의 무기가 차례로 바닥에 떨어졌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철컹- 철그럭-

쇠 장갑이나 강철 장화 같은 방어구들이 뒤를 이어 쏟아졌다. 비교적 부피가 작고 착용이 간편한 장비들이었다.

그가 허공에서 물건을 꺼내는 이적을 선보이고 있음에도, 테사이아에게 붙잡힌 백작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애초에 눈치조차 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오벨리를 집어삼킨 검은 안개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테사이아가 움켜쥔 손을 놓았다. 그대로 주저앉은 백작이 비로소 탄식했다.

"안 돼… 오벨리… 안 돼…."

일행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흐릿한 연기를 신성의 장막으로 밀어내는 필립을 제외하고는, 각자의 장비를 분류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윽… 그르륵…."

연기 속에서 진흙을 토하는 듯한 소리가 번졌다. 그 사이로 새카만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오벨리가 변이를 일으키는 것이리라.

뿌득, 뿌드득-

섬뜩한 뼛소리가 이어졌다. 오벨리를 삼킨 검은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번져나갔다.

동시에 단상 옆에 끔찍한 몰골로 죽은 시종장과, 문 앞에 쓰러져 있던 기사와 병사들의 시체도 꿈틀대며 변이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장화 착용을 끝낸 이안이, 팔목 보호대를 집어 들며 고개를 돌렸다.

치맛단 한쪽을 북 찢은 테사이아가 발을 가죽 장화에 쑤셔 넣으며 그를 바라보는 사이.

"백작."

이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백작은 대답은 물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테사이아가 홱 고개를 돌려 백작의 뺨을 날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가벼운 손놀림이었지만, 백작의 정신을 일깨우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이, 이게 무슨…?"

그제야 테사이아를 돌아본 백작이 피 맺힌 입술을 달싹였다. 테사이아가 싸늘한 눈빛으로 내뱉었다.

"정신 차리세요, 백작. 저 밖의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

어리둥절해 하던 백작의 눈이 뒤이어 커졌다.

어둑어둑해진 창밖 저 너머에서 희미한 비명이 번지고 있었다. 백작의 늙고 노쇠한 얼굴에 또 다른 충격과 두려움이 번졌다. 가뜩이나 작고 마른 그의 몸이 더 쪼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반 경의 말을 들으세요."

"무슨… 말을?"

"두 번 말할 시간 없으니, 잘 들으시오."

백작의 눈을 마주 본 이안이 기다렸다는 듯 내뱉었다.

"당신의 아들은 이미 늦었소. 그리고 여기서 꾸물대면 당신의 땅과 도시도 그렇게 되겠지. 막고 싶다면 대답하시오. 도시에 병력이 얼마나 있소?"

"백인대 둘이 조금 안 되오. …아니."

눈을 깜빡이며 대답한 백작이, 이내 고개를 털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적겠군. 하지만 주민들 중 남자 절반은, 언제라도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소."

"예비군은 필요 없소. 주군이 귀하를 모시고 밖으로 나갈 것이오. 남은 병력을 모으고 주민들을 통솔해 도시 밖으로 대피하시오. 그리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건 절대 건드리지 않게 통제하시고. 할 수 있겠소?"

이안의 눈을 창백하게 응시하던 백작이,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 아들은, 정말 늦었소?"

"대공자는 이미 죽었소."

내뱉은 이안이, 새카만 연기 너머로 꿈틀대며 부풀어 오르는 실루엣을 눈에 담았다.

"저건 전혀 다른 괴물이오. 그의 목숨을 대가로 태어난. 그리고…."

이안이 이제는 가면처럼 보일 정도로 굳어진 백작의 얼굴을 다시 마주 보았다.

"저게 끝이 아니오. 대공자와 뜻을 함께하는 타락자들이 상황을 눈치챈 게 분명하니까. 아직 미완성일지라도, 준비하던 의식을 시작한 것이오."

"의식…? 의식이라고…?"

"창밖의 저 어둠이 그 증거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소. 대답이나 하시오. 대공자가 가까이 지낸 자들이, 교회의 사제들이 맞소?"

"그, 그렇소. 하지만 교회에는 루 솔라의 상징은 물론이고… 델라 루의 신상도 있는데…."

"믿으시오. 타락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그딴 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비로소 정신을 차린 것이리라 여겼건만…. 제기랄… 아들아… 가문의 전통이 그리도 야속했더냐…?"

백작이 망연자실하게 탄식했다.

이안은 이미 샬롯과 메브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둘은 주군과 백작을 호위하고 길을 열어. 병사들을 통솔해 주민들을 대피시켜. 끝낸 후엔 교회로 오고."

말을 멈춘 그가, 바닥에 놓인 부러진 단죄의 검을 들어 샬롯에게 던져 줬다.

"네가 지녀라. 검의 신성력이 저주를 조금은 막아 줄 거야. 대공자는 땅을 더럽힌댔지. 아마 부패의 저주일 거다. 조심하는 게 좋아. 꺼림칙한 건 가능하면 몸에 닿지 않게 해라."

"알았다. 그러지."

샬롯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메브는 손을 뻗어 백작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노인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기며, 그녀가 내뱉었다.

"내 눈을 보시오. 백작."

"...!"

"당신의 아들을 저리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소?"

잠시 숨을 멈췄던 백작의 눈빛이, 비로소 가라앉았다.

"…하고 싶소."

그가 메브의 눈을 마주 보며 씹어 뱉었다.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그럼, 당신의 복수는 내가 대행하겠소."

"...?"

메브의 대답에 미간을 좁혔던 백작의 눈이 뒤이어 커졌다. 자신을 마주 보는 메브의 녹색 눈동자에, 피처럼 붉은빛이 진득하게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귀하는, 귀하의 백성들을 구하시오. 우리가 도울 테니."

내뱉은 메브가 멱살을 쥔 손을 놓고는, 곧바로 판금 장갑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철벅-

변이를 끝낸 망자들이 일어서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비쩍 말라붙었던 그들의 몸은, 이제 타르처럼 검고 끈적한 점액으로 뒤덮여 있었다. 녹아내려 뻥 뚫린 눈코입에서는 암녹색 진액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생전에 착용한 방어구는 그대로였고, 무기 역시 고스란히 집어 든 채였다.

장비를 전부 착용한 이안이 흑검을 집어 들며 일어선 건 거의 동시였다.

"탈출은 창문으로 하시오. 필립, 창문 앞까지 안전하게 호송해. 장비를 착용하고 나선 내 뒤를 보조해라. 여긴 우리 둘이 맡을 거니까."

"예…! 뒤에 두 분, 다 끝나시면 제 장비 좀 챙겨 주십쇼! 창가까지만요!"

소리친 필립이, 신성의 장막을 유지한 채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작이 그제야 비로소 일행들의 면면을 훑기 시작했다.

드레스의 허리춤에 검을 묶고 있는 테사이아. 간단한 무장을 끝내고 몸통만 한 전투 도끼를 한 손으로 쥐어 든 샬롯. 전신에 피처럼 붉고 끈적한 신성력을 머금은 메브. 한 손을 내뻗어 흐릿한 신성력의 장막을 피워내고 있는 필립과, 새카만 검을 움켜쥔 채 그를 등지고 선 이안까지.

"당신들은… 도대체…?"

"아까 못다 한 질문의 답을 드리죠. 백작 각하."

그런 그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우며, 테사이아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서부에 암약한 타락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것은 또한 누군가의 복수이며. 저 위대한 백금의 뜻이기도 합니다."

"백금…? 설마, 당신들은-"

"그딴 생각은 나중에 하시오."

말을 자른 이안이, 다가오기 시작한 망자들을 눈에 담으며 덧붙였다.

"지금은 각자의 역할에 집중해야 할 때니까."

"…진정 저것들을 단 둘이서 상대할 참이오?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도, 이건 자살 행위나-"

"교회에서 다시 보자. 가라."

이안이 백작의 말을 무시한 채 내뱉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도끼를 등에 멘 샬롯이 한 팔로 백작을 안아 들고, 필립의 장비를 품에 안은 테사이아와 샬롯이 걸음을 옮겼다.

솨아아아-

빛의 장막이 이안의 몸을 훑고 지나쳤다. 눈을 감은 이안이 흑검의 자루를 고쳐 쥐었다.

지잉, 자루가 손아귀에 착 감기며 가볍게 떨렸다.

그래, 말만 잘 들으면, 오늘 더러운 피를 잔뜩 마실 수 있을 거다.

피부가 따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이안이 내심 중얼댔다.

변이 중인 오벨리가 뿜어내는 저주의 여파. 하지만 영향력은 그게 전부였다. 혼돈의 파편이 그를 지켜내려는 듯 혼돈력을 토해냈고, 그것만으로도 통증이 가라앉았다.

비로소 이안이 눈을 떴다.

비척대며 다가오는 망자들.

그의 시선이 그 너머, 변이를 거의 끝마쳐 가는 실루엣을 훑었다.

'다 끝내기 전에 처리하는 건, 무리겠지?'

"그… 르륵…!"

그 생각에 응답하듯, 가까워진 망자 하나가 역겨운 소리를 흘렸다. 이안이 기억하는 게임 속 부패의 망자와 여러모로 흡사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진흙 같은 점액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까지도.

"교회에서 봐!"

소리친 테사이아가 훌쩍 몸을 날리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이안이 달려 나갔다.

기다란 창을 움켜쥔, 한때 병사였던 망자가 가까워졌다.

서걱-!

적당히 얇고 기다란 검날이 병사의 몸을 사슬 갑옷째로 사선으로 갈랐다. 평소처럼 진공 폭발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저주가 깃든 저 살덩이가 사방으로 튈 터였다.

철퍽-

잘려 나간 상반신이 찰흙 덩어리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도 여전히 꿈틀대는 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이안은 바로 옆의 또 다른 망자에게 검을 휘둘렀다.

스걱-! 콰지직-!

흑검이 연달아 호선을 만들어냈다. 삽시에 셋을 베어낸 이안의 시선이 창틀의 필립 쪽으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비로소 장비를 줍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는, 아우렐 경이었던 망자에게로.

타탓-

확인과 동시에 그가 달려 나갔다. 예리하게 뻗어 나간 흑검이 판금 갑옷 위로 훤히 드러난 뒤통수를 갈랐다. 아우렐 경이었던 망자의 머리가 반으로 잘렸다. 놈을 지나친 이안이 몸을 돌리며 멈춰 섰다.

"그… 으으…."

코 아래만 남은 입에서 끈적한 신음이 번졌다. 망자가 검을 들었다. 그보다 이안이 놈의 흉갑을 발로 걷어차 밀어내는 게 더 빨랐다.

콰장창, 잘린 머리 단면에서 체액을 흩뿌리며 넘어지는 놈을 향해, 이안이 왼손을 내뻗었다.

콰르르르-

그의 손아귀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갔다. 아무런 증폭도 더하지 않은 화염 방사. 하지만 아우렐 경과 그 근처에 토막 나 꿈틀대는 놈들을 함께 태우기엔 충분한 화력이었다.

화르르르-

불길에 휩쓸린 망자들이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타들어 갔다. 꿈틀대던 움직임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역시, 상성은 게임이랑 똑같군.

"조, 조금만 시간을 벌어 주십시오, 나리. 금방 합류하겠습니다!"

뒤에서 필립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좀 걸린단 소리지? 속으로만 뇌까리며 정문으로 들어서는 망자들을 눈에 담은 이안이, 곧바로 불길에 휩싸인 놈들을 뛰어넘으며 몸을 날렸다.

단상 옆, 변이한 오벨리가 솟아오르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놈에게 도달할 수는 없었다.

"그웨에에엑-"

역겨운 소리와 함께, 새카만 점액질의 궤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촤아악-

이안이 다급하게 옆으로 몸을 굴렸다. 벽과 바닥에 흥건하게 뒤덮인 점액이 증발하기 시작했다.

시발, 왜 안 나오나 했다.

썩은 토사물. 게임에서는 상당한 대미지와 추가적인 도트 대미지. 그리고 이동 속도 저하를 유발하는, 권속들의 스킬 중 하나였다.

토사물을 뱉은 건 시종장이었던 권속이었다. 곧바로 일어선 이안이 악취를 풍기며 증발하는 토사물을 건너뛰면서 팔을 내리쳤다.

콰직-!

시종장 권속의 목이 한쪽 어깻죽지와 함께 잘려 나갔다. 허물어진 놈의 상반신이 땅에 닿기도 전에, 그 위로 화염구가 떨어졌다.

퍼엉-! 화르르-

작은 폭발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살덩이들이 비산했다. 이안이 그 사이를 뚫고 다시 솟구쳤다.

비로소 변이한 오벨리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웅크린 것처럼 보인 건 착각이었다. 부풀어 오른 머리와 목만이 살점 사이에 파묻힌 채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그저 거대한 검은 살덩이에 가까웠다.

몸 곳곳에 앞니만 겨우 난 크고 작은 아가리들이 옹이구멍처럼 벌어져 주위의 검은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 사이로는 자줏빛이 핏줄처럼 번져 일렁였다.

역시는 역시네.

이안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화르륵, 주위로 춤추는 불꽃이 연달아 피어오를 찰나.

콰아아아-

놈의 전신에 돋은 아가리들이 삼키고 있던 안개를 도로 토해냈다. 포자처럼 분출된 안개가 그대로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

이안의 전신에 푸른 역장이 피어올랐다. 거의 동시에 밀려든 안개의 물결이 그를 밀어냈다.

이글대던 불꽃들이 그대로 터져 나가고.

"으악?!"

장비를 착용하던 필립이 반사적으로 신성의 장막을 몸에 두르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튕겨 나간 이안이 미끄러지듯 착지하는 사이.

"그… 오오오-"

살점 사이에 파묻혀 있던 오벨리의 머리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비대하게 변이된 비대칭의 눈구멍이 암녹색의 안광만이 일렁였다. 진흙 덩어리를 뭉친 듯한 몸 곳곳에서 고름 같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놈을 올려다 보는 이안의 뇌리로, 게임에서 본 적 있는 정예 마물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부패의 뿌리.

철퍽- 철푸덕-

놈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니라 비정형의 마물처럼 미끄러지듯 천천히 움직였다.

심지어 이안 쪽이 아니라 정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택 밖으로 나가 땅에 뿌리를 내리려는 것이리라. 게임에서 그랬듯이.

'그게 네 염원이기도 하겠다만….'

미안하지만, 그렇게 둘 순 없을 것 같다. 오벨리.

속으로 읊조린 이안의 눈동자가, 불길을 머금은 것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197화

오벨리, 아니 부패의 뿌리가 움직임을 멈춘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동시에 몸 곳곳에 뚫린 아가리 중 이안 쪽으로 향한 것들이 쩍 벌어졌다.

거대한 몸체가 일순간 출렁이고.

"구- 에에엑-!"

여러 가닥의 새카만 토사물이 일제히 뿜어져 나왔다.

'기어 다녀도 할 건 다 한다 이거지.'

인상을 구긴 이안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사실, 저놈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도 이제야 알게 된 그였다.

게임에서 마주친 부패의 뿌리들은 땅에서 돋아난 종양처럼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니까.

촤아아악-

바닥과 벽면에 걸쭉하게 뒤덮인 토사물이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증발했다.

'냄새 한 번 죽이네.'

어쩌면 지금은 저걸 뒤집어쓰고도 별문제가 없을지도 몰랐지만, 굳이 확인해 보고 싶진 않았다.

이안이 휙 몸을 젖혔다.

"크… 어억-!"

붉게 부식되어 가는 창날이 그의 얼굴 앞을 스치고 지나쳤다. 어느새 다가온 망자가 등 뒤에서 냅다 창을 내지른 것이다.

파상풍 걸릴 뻔했네, 시발. 그대로 몸을 돌려 망자를 썰어 버린 그가, 잘린 상반신이 떨어지기도 전에 화염구를 내던졌다.

안개 돌풍에 함께 밀려났던 망자들이 어느새 자세를 다잡고 몰려들고 있었다. 부패의 뿌리는 다시 문을 향해 기어갔다. 저 덩치로 문을 통과하는 건 어려워 보였지만, 그런 건 별문제도 되지 않으리라.

'이미 개지랄이 시작돼서, 저게 땅에 닿게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날아드는 창날을 보지도 않고 피하면서도, 이안은 부패의 뿌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놈을 죽이는 건 게임에서도 꽤 귀찮은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생명력이 높았고, 물리 공격에도 내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가가면 부패의 안개를 뿜어 대고, 원거리에선 방금처럼 토사물을 뱉어 댔다. 스킬을 시전하는 중에는 특히 그랬다. 이제 보니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특히 뛰어난 모양이었다.

거기다 놈의 주위에는 항상 호위하는 부패의 망자들이 득시글댔다.

지금 몰려드는 것들도 그런 목적으로 되살아난 것이리라.

그나마 저놈이 창문이나 벽이 아니라 문으로 향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곧바로 벽을 무너뜨리면서 정원으로 떨어졌을 테고, 영주의 저택에 정화되지 않는 부패의 흔적이 남았을 테니까.

아마도 인간일 적의 본성이 조금은 남아 있는 거겠지.

어쨌든, 게임에선 저놈을 죽이려면 꽤 많은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했다.

시전 시간이 긴 마법은 사용하기 어려우니, 놈과 망자들의 공격을 피해 도망 다니며 하위 마법을 퍼부어야 했으니까. 약점이 되는 근원이 드러날 때까지.

화르르- 퍼엉-!

내뻗은 손아귀에서 날아간 화염구가 뿌리의 등판에 작은 파문을 만들어내며 폭발했다. 푹 파인 등판이 잠시 부글대다 이내 가라앉았다. 게임에서와 같은 반응.

'개같네. 진짜.'

망자 하나의 머리를 날리며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오벨리가 변이하기 시작한 순간 떠오른 퀘스트의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실패의 결과물.

빤히 보이는 함정이었다. 그 결과물이란 게 저놈만을 뜻하는 게 아닐 테니까. 냅다 마법을 퍼부어댔다간 후회하게 될 게 분명했다.

게다가 게임에서 저놈을 상대할 때와 지금 그의 마력량은, 애석하게도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심지어 회복 속도는 현실이 된 지금이 훨씬 더 느렸다.

그러니 적당한 양의 마력만을 소모해 약점이 드러나게 만들고, 물리적으로 끝을 내는 편이 효율적일 터였다.

"그… 르륵…!"

그게 쉽지 않은 건, 달려드는 망자들 때문이었다. 문에서 망자들이 끝도 없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병사뿐 아니라 시종과 하인으로 보이는 남녀노소가 뒤섞여 있었다.

저택의 거의 모든 이들이 저런 몰골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이안은 밀려드는 원초적인 공세와 토사물을 이리저리 피하며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물론 성과가 크지 않았다. 토막난 것들은 토막난 채로 꾸물대며 다시 달려들었다. 이것들은 물리 공격으로는 쉽게 죽일 수 없었다.

아마도 움직일 수 없게 완전히 토막을 치는 정도가 최선이리라.

그마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회복하거나, 저들끼리 이어 붙을 공산이 컸다.

'이렇게 시간을 끌 바엔, 차라리 혼돈력이라도 써서-'

칼춤을 추던 이안의 미간이 이윽고 슬쩍 구겨진 순간이었다.

솨아아아-

"...!"

그의 앞으로 흐릿한 신성력의 장막이 피어올랐다. 날아드는 녹슨 창까지 막아 주진 못했지만, 장막에 닿은 망자들의 몸을 지글지글 불태우며 밀어냈다.

콰지직-!

뒤이어 제국제 원형 방패를 앞세운 필립이 망자들과 충돌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나리!"

"알면 됐다."

이안의 핀잔에도 필립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의 말이 농담이란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실제로도 이안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합류였다. 이안이 문으로 다가가는 뿌리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놈들이 토하는 건 막지 말고 피해."

"예…!"

"길 좀 터줄 수 있겠냐?"

"물론… 입니다-!"

이를 악물며 대답한 필립이 방패를 밀고 있던 팔을 힘껏 떨쳤다. 동시에 신성의 장막이 폭발하듯 바스러지면서, 그 잔재들이 망자들에게로 쏟아졌다. 비틀대며 타들어 가는 놈들을 향해, 다시 옅은 신성을 두른 필립이 힘껏 몸을 던졌다.

콰장창-!

볼링핀처럼 쓰러지는 망자들 사이로 필립이 나뒹굴었다.

저거, 뒷감당은 되는 건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곧바로 몸을 내달렸다.

어쨌건 도약할 거리는 충분했다.

쓰러진 망자 몇을 짓밟은 이안이 힘껏 솟구쳤다. 그가 머리 위로 흑검을 치켜드는 가운데, 뿌리의 등에 돋은 아가리들이 일제히 벌어졌다.

이안이 예상했다는 듯 마력 역장을 피워올렸다.

푸화악-!

한발 앞서 터져 나온 휘몰아치는 방벽이 토사물을 사방의 벽면으로 튕겨냈다. 물론 전부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뒤이어 쏟아진 토사물이 역장 위를 후려치며 눈부신 푸른 빛을 만들어 냈다.

이안의 속도가 단숨에 줄었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서걱-!

흑검의 검날이 뿌리의 등 어름 깊숙이 틀어박혔으니까. 쩍 벌어진 아가리 하나를 반으로 갈라 버린 채였다. 토사물을 전부 토해낸 아가리들이 일제히 다음을 준비하듯 오그라들었다.

콰아아-!

하지만 검신을 타고 번진 마력이 불기둥이 되어 폭발하는 것보다 더 빠를 수는 없었다. 일점 폭발.

살점을 태우며 치솟은 불길이 천장에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 내며 사방으로 넘실댔다.

하지만 이안의 눈동자에 맺힌 불그스름한 마력은 아직도 전혀 빛을 잃지 않았다.

자루를 쥐고 있던 왼손을 뿌리를 향해 내민 이안이, 천천히 주먹을 쥐기 시작했다.

콰르르르-

사방으로 넘실대던 불길이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모여들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그가 완전히 주먹을 움켜 쥐자, 불길이 폭포처럼 뿌리를 뒤덮으며 쏟아져 내렸다.

새로 익힌 상위 마법 중 하나인, 화염 역류의 효과였다.

선행되는 마법이 있어야만 사용 가능한 스킬이었지만, 훨씬 적은 양의 마력으로 또 한 번의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스킬 레벨이 낮은 만큼 추가적인 파괴력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마력 양이 턱없이 부족한 이안에겐 특히나 유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는 더더욱.

화르르르르-

벌어진 아가리들은 토사물을 토해내지 못했다. 그러기도 전에 벽화가 녹아내리듯 지글대며 허물어졌다.

'이 좋은 걸 이제야 배우다니.'

괜히 적색 필수 스킬이 아니네.

생각하며 허물어지는 등판을 박찬 이안이, 공중제비를 돌며 착지했다. 흘러내린 불의 폭포가 그의 발목까지 넘실댔다. 정복에 붙은 불을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것만으로 꺼버린 그가, 달아오른 흑검을 고쳐 쥐었다.

그나마 벽돌로 만든 저택이라 다행이었다. 목조 저택이었다면 지금쯤 사방이 불바다가 되었으리라.

우르릉-

'…아닌가?'

바닥이 흔들린 순간, 이안은 더 볼 것도 없이 허물어지는 부패의 뿌리를 향해 다시 몸을 날렸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은 녹아내리고 있지만, 불길이 꺼지면 금방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테니까.

놈을 노려보는 이안의 감각이 예리하게 돋아났다. 여섯 번째 감각까지 더해진 이안의 눈은, 흐물대는 살덩이 사이로 설핏 드러난 덩어리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아마도 땅을 오염시킬 저주를 가득 품고 있을 부패의 근원.

한 줌의 혼돈력과 바람을 머금은 칼날이, 일부만 드러난 근원을 정확하게 갈랐다.

콰직-

뼈가 부서지는 듯한 감촉과 함께 근원이 산산조각 났다. 내부에 가득하던 새카만 덩어리가 유령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르륵…."

불길에 저항하던 살덩이들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지글대는 끈적한 점액질.

"...."

미끄러지듯 착지한 이안이 매캐한 연기와 함께 녹아내리는 놈을 내려다보았다.

별다른 감흥이 일지는 않았다. 그러게, 아무리 빡쳐도 타락자랑은 손잡는 게 아니라니까. 하고 속으로 뇌까린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런 작은 감상조차 곧 사라졌다.

"나, 나리…! 나리!"

필립의 외침이 이어졌으니까.

내 저럴 줄 알았지.

곧 꺼질 듯한 빛의 장막을 두른 채 망자들 한복판에서 허우적대는 필립을 눈에 담은 이안이 곧바로 몸을 날렸다.

부패의 뿌리가 죽었다 해서 망자들까지 죽음으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날이 어두워지게 만든 근원이 사라진 뒤에야 다시 죽음으로 돌아가리라.

'아니어도 뭐, 별 수 없고.'

이 정돈 백작이 알아서 수습하겠지.

망자 몇을 연달아 썰어 낸 이안이 공간을 만들었다. 거의 바닥을 구르고 있던 필립이 방패를 후려치며 간신히 일어섰다. 방패 표면과 하반신에 망자가 토해낸 토사물이 흥건하게 뒤덮여 있었다.

아마도 허우적댄 건 이것 때문이었으리라. 그나마 빛의 장막이 저주를 상당 부분 중화시켜 준 모양이긴 했지만.

"조심하라니까."

내뱉은 이안이 그대로 필립을 잡아끌며 길을 텄다.

그는 아까 일행이 뛰어나간 창문의 옆, 또 다른 창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문 쪽으론 아직도 부패의 망자들이 쉬지 않고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굳이 경험치도 주지 않는 놈들을 정면 돌파로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뛰어."

"예? 여기서요?"

"여기 겨우 2층이거든?"

"그러니까요."

진짜 알다가도 모를 새끼라니까.

이안이 인상을 찌푸리자, 입맛을 다신 필립이 엉거주춤 뛰어내렸다.

그사이 다가온 망자를 발로 차 밀어낸 이안도 그대로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콰장창창-

방패를 앞세운 채 떨어진 필립이 요란하게 바닥을 구르고, 뒤따라 착지한 이안이 날렵하게 자세를 다잡으며 일어섰다.

저택 밖 정원은 상대적으로 고요했다. 역시나, 모든 망자가 저택 내부로 몰려들었던 게 분명했다.

시체도 없는 걸 보니, 나머지 일행들은 옆에 솟은 작은 별관의 지붕으로 뛰어내렸던 모양이었다.

물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보단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처럼 넘실대는 먹구름과, 눈에 보일 정도로 시들고 있는 정원의 식물들이 훨씬 더 유의미했다.

이안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라온 필립이 주위를 두리번대며 속삭였다.

"정말 의식이든 뭐든 해서 마경을 열어 버린 걸까요? 그것도 이렇게 대낮에? 아무리 어둠이 밀려오고 있다지만…."

"준비는 일찍부터 시작했겠지. 아까 얘기 못 들었냐?"

"반 정도만 겨우 들었습니다. 워낙 놀란 상태였어서요."

필립의 눈빛에 이안이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아마 대공자는 부패의 저주만 이 땅에 심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고대신과 계약하는 게 그렇게 원하는 것만 빼먹을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건 몰랐겠지. 아니면,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했거나."

"…다른 타락자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을지도요."

"뭐건, 어둠이 밀려들 건 예상하지 못했겠지. 그때부터 원치 않던 역병이 퍼지기 시작한 모양이니까. 그리고 아주 타락자 다운 결론을 낸 거지. 역병 환자들을 제물로 이용하자는. 그러니 동정심 따위 느끼지 마라. 속아 넘어갔건 뭐건, 결국 똑같은 놈이야."

"제, 제가 무슨. 그럴리가요."

필립이 머쓱하게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니긴.

코웃음 친 이안이 덧붙였다.

"어쨌든 내 예상도 조금 빗나갔군. 난 놈들이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역병을 퍼뜨린 건 줄 알았거든. 제물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그들이 의식의 제물이란 걸, 이미 짐작하고 계셨다고요?"

"성벽 주위로 땅을 팠던 흔적이 규칙적으로 있었어. 그것도 아주 어설프게."

"그, 그럼 그때 성벽에서 보고 계시던 게…? 아니, 그런 걸 왜 미리 전부 알려 주지 않으신 겁니까?"

"테사가 말했으니까. 나까지 거들었다가 틀리면, 쪽팔리잖아."

"...?!"

당황해 하는 필립의 시선을 무시한 채, 이안은 대공자의 저택과 별장이 위치한 바깥 장원에 발을 들였다.

토막 난 망자의 시체가 몇 구 널브러져 있었다. 단면이 타들어 간 것만 봐도, 누구의 솜씨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곳곳에 핏자국이 흥건했다. 높다란 담벼락 너머로 도시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이안에게, 필립이 덧붙였다.

"어쨌든 그럼, 이게 정말 사악한 의식의 결과물은 맞단 거군요. 대공자와 조라의 정체가 들통난 걸 깨닫자마자, 곧바로 의식을 거행해 버린 거예요."

"아마도. 원하는 결과가 나왔을지는 모르겠다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안은 대답 대신, 다시 한번 실패의 결과물 퀘스트를 떠올렸다.

역시나 퀘스트는 오벨리를 죽이고도 완료되지 않았다. 실패와 결과물 모두, 오벨리의 계획을 의미하던 게 아니라는 게 확실해진 것이다.

'역시. 보상에 비해 상대가 약한 건 일단 의심하고 봐야 한다니까.'

내심 코웃음 치며, 이안은 반쯤 열린 대문을 활짝 밀어젖혔다.

#198화

거리는 어제 본 활기가 거짓말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온갖 가재도구가 굴러다니고, 길과 벽 곳곳에 핏자국이 흥건했다. 반쯤 허물어진 건물들. 여기저기서 연기가 치솟고, 저 멀리 흐릿한 비명과 고함이 메아리쳤다.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과정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쨌건 여럿 구출하긴 했나 보네.'

그렇다고 망자들이 전부 몰려간 건 아닌 모양이었다.

굽이진 대로와 곳곳에 마구잡이로 이어진 골목. 반파된 건물 사이 사이에서 명백하게 인간은 아닌 것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개중에는 아주 선명하게 오염된 마력을 뿜어내는 것들도 있었다.

'역병으로 죽은 자들도 되살아난 거군.'

성벽 안쪽에도 그들을 파묻었던 것이리라. 애초에 이 난장판의 시작이 그것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저 멀리 보이는 교회의 첨탑을 이정표 삼아 골목으로 들어선 이안의 눈빛이, 이내 서늘해졌다.

"그… 으으…."

"그륵…."

비척대는 발소리와 가래 섞인 숨소리가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골목으로 드리운 그림자들을 눈에 담은 필립이 방패를 눈 아래까지 치켜들며 속삭였다.

"저, 나리. 저것들을 마주치기 전에 기도라도 한 번 올리지 않으시겠습니까? 투쟁의 신께서 축복을 내리신다면… 아주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흘린 이안이 내뱉었다.

"기도를 한다고 들어줄 작자가 아니야."

겁쟁이라고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안이 흑검을 고쳐 쥐며 앞장섰다.

"그러니까 그냥 싸울 준비나 해라. 교회까지 멈추지 않고 갈 거니까."

그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골목 너머에서 부패의 망자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전신에 새카만 종양이 뒤덮인 놈 하나가 눈에 띄었다. 종양 한복판마다 기다란 촉수가 혓바닥처럼 꿈틀대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저놈 역시, 게임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역병에 걸려 죽은 자가 되살아나면 저렇게 되는 거였나.'

이름이 부패의 숙주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타타탓-

속으로 뇌까린 이안이 돌진했다.

"제기랄… 루 솔라여… 저 몰골로 되살아나느니 차라리 죽게 해 주소서…."

한숨을 내쉬며 읊조린 필립도, 그의 뒤를 따라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

콰직! 서걱-

이안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나아갔다.

부패의 망자들은 골목 어딘가에서 계속 기어 나와 앞을 가로막았지만, 단 한 번도 멈춰서지 않았다. 굳이 놈들을 죽이려 애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상반신과 하반신을 분리해서 걷어차 버리기만 해도 충분했다. 때때로 촉수를 꿈틀대며 다가오는 부패의 숙주는 가까워지기 전에 화염구와 화염 방사로 태워 버렸다.

빠각! 콰득!

뒤따르는 필립도 이안의 방식에 금새 적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턴, 토사물을 막을 때 외엔 성물의 신성력을 아예 사용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검으로는 이안처럼 단칼에 망자들을 반 토막 내지 못했지만. 대신 팔이나 머리, 다리를 사정없이 날리고는 방패로 후려쳐 떨쳐 냈다.

새끼, 진짜 많이 크긴 했네.

때때로 뒤를 확인하던 이안의 입가에도 흐릿한 헛웃음이 스쳤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카드득-! 뻐억!

"...!"

베어낸 망자의 몸을 발로 걷어찬 이안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길이 열렸다. 대로로 이어지는 골목 끝. 한쪽에 높다란 첨탑이 솟은 교회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필립!"

"예, 나리!"

다리가 잘린 채 기어오는 망자의 머리를 날려 버리던 필립이, 잽싸게 그의 뒤를 따라 내달렸다.

둘은 골목을 완전히 빠져나오고 나서야 다시 속도를 줄였다.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필립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지나온 골목에는 토막 나거나 몸 일부가 잘려나간 망자들로 가득했다. 골목 전체가 꿈틀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숫자가 유독 많아 보이는 건, 하나가 둘이나 셋으로 토막 난 덕분이리라.

악몽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을 응시하는 필립의 눈빛이 절로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어 대는 이들로 가득하던 길이건만.

"어딜 보냐?"

이어진 이안의 핀잔에, 필립이 재빨리 그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말한 이안도 교회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좌우로 이어진 대로 너머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여기서는 정문 쪽은 안 보일 텐데요…?"

되물으며 시선을 돌린 필립의 미간이 이내 구겨졌다. 곳곳에서 망자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보이는 것만 해도 열이 넘었다. 되살아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입에서 선지 같은 피를 뚝뚝 토해내는 여자도 있었다.

"대피하는 과정에서도 희생자가 꽤 생기는 모양이군."

이어진 이안의 말에, 필립도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는 아까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고함이 번지고 있었다. 그르렁대는 숨소리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도 희미하게 들릴 정도였다.

"꽤 고전하는 모양입니다. 의외군요. 세 분이 함께 가셨는데요. …하긴, 주민들을 대피시키려면 우리처럼 무력화만 시키는 걸로는 부족할 수도 있겠군요. 대열도 지켜야 하겠구요."

"그냥 고전할 만한 상황인 건지도 모르지."

"...!?"

이어진 짧은 말에 필립이 홱 고개를 돌려 이안을 바라보았다.

필립과 달리, 그는 이미 숨도 헐떡이지 않고 있었다.

"저쪽으로 합류해야 할까요?"

"아니."

이안이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우린 그냥 우리가 하려던 일을 하면 돼."

그제야 높다랗게 솟은 교회 건물을 눈에 담은 필립이, 이윽고 결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재빨리 이안을 지나쳐 앞서가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우리가 이 빌어먹을 의식을 끝내 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죠. 이런 미친 짓을 벌이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는 동의한다만…."

정말 그놈들도 이런 상황이 벌어지리란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

이안은 다시 한번 의문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물론 지금 이건 여러 예상치 못한 변수가 더해져 만들어진 돌발 상황에 가깝겠지만.

게임을 떠올려 보면, 준비가 철저했더라도 상황이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굳게 닫힌 교회의 대문을 밀던 필립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돌아본 건 바로 그때였다.

"나리. 안 열리는데요?"

"안에서 잠궜나?"

"글쎄요. 미동도 안 합니다."

"비켜 봐."

이 지랄을 펴 놓고, 지들은 문을 잠그고 숨은 건가.

필립이 비켜서기가 무섭게, 이안이 흑검을 내리쳤다. 문과 문 사이의 틈을 정확하게 노린 일격이었다.

카가각-

하지만 흑검은 문틈을 전혀 베어내지 못했다. 그저 표면에 할퀸듯한 흔적만 조금 남겼을 뿐이었다.

이거로도 안 베어진다고…?

미간을 좁힌 이안이 흑검을 아공간에 던져 넣고는 양팔을 힘껏 내뻗었다. 정말 필립의 말대로 미동도 하지 않는지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

그의 눈이 순간 커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손바닥에 대문이 닿은 순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더니, 뒤이어 눈앞으로 환영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자줏빛이 아른거리는 공허의 변방 어딘가. 사방으로 수많은 촉수를 뻗은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댔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러나 묘하게 다정한 속삭임이 뇌리를 긁었다.

물론, 실제로는 찰나에 불과한 환영이었다.

문에서 손을 뗀 이안이 자신의 손아귀를 내려다보는 사이.

"왜 힘을 주려다 마십니까…?"

필립이 주위를 힐끔대며 물었다. 이 와중에도 망자들은 꾸준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선두의 망자들과는 고작해야 십여 미터 정도밖에는 떨어져 있지 않았다. 곧 토사물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지리라.

"이건 못 열어. 의식 때문에 잠긴 거다."

내뱉은 이안이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교회 외벽을 올려다보며 나아가던 그가 이내 멈춰 섰다. 교회 측면에 높다랗게 솟은 첨탑 아래였다. 훌쩍 뛰어오른 그가 튀어나온 벽돌을 움켜쥐며 매달렸다.

투쟁의 축복을 받은 상태였더라도 한 번에 뛰어오르지는 못했을 높이였다. 마법으로 몇 번에 나눠 뛰어 올라간다면, 필립이 따라오지 못할 터였다.

그러니 기어 올라갈 수밖에.

게다가 교회에는 창문이라 부를 만한 게 없었다. 벽면 윗부분에 중간중간 벽돌을 빼서, 내부에 빛이 원을 그리며 쏟아지도록 만들어 둔 게 전부였다.

'하여간, 가지가지 하네.'

이안이 거미처럼 벽을 타고 오르는 사이.

"아니… 그렇게 가시면…."

그를 올려다보며 멍하니 중얼대던 필립이, 이윽고 가까워지는 망자들을 다시 눈에 담았다.

한숨을 내쉰 그가 방패를 등에 걸고는 벽면에 달라붙었다.

"루 솔라여… 죽는다면 제발 그냥 떨어져서 죽게 하소서…."

필립의 중얼대는 목소리에 소리 없이 피식대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외벽을 타고 올랐다.

건물 내부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느낌이 한층 더 선명하게 와닿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기분 나쁜 불길함 정도로 그치겠지만, 이안은 심상치 않게 일렁이는 혼돈력을 느낄 수 있었다. 혼돈의 파편도 감응하듯 낮게 공명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게 튀어나오긴 했단 거지.'

아마도 그것이, 진짜 실패의 결과물이리라.

이윽고 이안은 첨탑 위의 난간에 팔을 얹었다. 중간에 교회 지붕으로 올라설까 하는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문이 저 꼴인 이상 지붕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교회 내부는, 일종의 간이 던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후우…."

저릿한 손을 가볍게 털면서, 이안은 난간 너머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개판이 된 도시. 그리고 저 너머, 성의 정문에 모여 있는 자들의 모습이 비로소 선명해졌다.

문 앞에 살아남은 백성들이 겁먹은 초식 동물처럼 모여 있고, 그 주위로 대열을 갖춘 병사들이 몰려드는 망자들을 저지하는 중이었다.

샬롯과 테사이아의 모습도 보였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선두에서 이리저리 날뛰며 뛰어다니고 있었으니까. 전열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건 저들 덕분인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구출한 주민보다 변이되거나 되살아난 자들이 훨씬 더 많아 보였다.

하긴 저주가 퍼지는 속도가 더 빠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부패의 숙주에게 감염된 망자들도 전파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메브는 보이지 않았다. 주민들이 나가지 않고 모여 선 걸 보면….

'…역시, 성 밖에도 잔뜩인 거네.'

활짝 열린 성문 너머에서 때마침 번쩍이는 붉은 빛을 눈에 담은 이안이 입맛을 다셨다.

애초에 그가 본 건 성벽 아래에 제물들을 파묻은 흔적이었다. 그것들도 죄다 되살아난 게 당연했다. 게다가 대로를 중심으로 성벽 밖에도 집이 잔뜩이었으니, 부패의 숙주들에게 아주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으리라.

교회로 합류하는 건 글렀고. 오히려 이쪽에서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도우러 가야 할지도.

이안이 내심 중얼 대던 그때였다.

"나, 나리… 저 좀 잡아 주십시오… 저 이러다 정말… 루 솔라의 곁으로 가게 생겼습니다…!"

발아래에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필립이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매달려 있었다.

새끼 거의 다 와 놓고 엄살은.

재빨리 몸을 숙인 이안이 그를 힘껏 끌어당겼다.

철푸덕 바닥에 주저앉은 필립이 숨을 헐떡였다.

"루 솔라여…."

"그놈의 신 좀 그만 찾고, 일어나라."

그의 어깨를 움켜쥐고 일으켜 세운 이안이, 아공간에서 흑검을 꺼내 들며 몸을 돌렸다. 식은땀 가득한 얼굴로 헐떡이던 필립이 다급하게 되물었다.

"아니, 쉴 틈도 안 주십니까?"

대답 대신 칼을 들어 저 너머를 가리킨 이안이, 교회 내부로 이어진 계단으로 발을 들였다.

"...?!"

멍하니 고개를 돌렸던 필립이 그제야 정문의 상황을 확인하고는 눈을 치켜떴다.

숨을 멈췄던 것도 잠시.

곧 다급하게 다시 방패를 꺼내든 그가, 군말 없이 이안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199화

계단을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이 캄캄해졌다. 비좁은 공간까지 더해져, 필립은 목이 졸리는 듯한 갑갑함을 느꼈다.

앞서 걸어가는 이안의 규칙적인 발소리만이 귓가를 울렸다. 필립은 애써 숨을 고르며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었다.

솨아아-

장갑 사이로 흐릿하게 빛이 번졌다. 어둠을 밀어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빛이었다. 그저 어둠의 농도를 조금 옅게 만들어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필립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천장. 좁고 긴 벽면. 그리고 앞서 걸어 내려가는 이안의 뒤통수.

필립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때때로 직각으로 꺾이는 계단이 심연 속으로 끝없이 이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묘한 이질감과 불쾌감.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혹시 우리가 지금 마경이나 결계 안으로 들어온 겁니까?"

"아마도."

덤덤한 대답에, 필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위로 돌아가더라도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안에서의 용무가 끝나기 전엔 나갈 생각이 없었지만.

나가지 않는 것과 나갈 수 없는 건, 언제나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제 이 안으로는 신의 손길도 닿지 않을 터였다.

그건 곧, 그가 이 안에서 죽게 된다면 영혼이 천상에 닿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게 된다면 그의 영혼은 공허의 먹잇감이 되거나, 세상의 틈새를 영원히 떠돌게 되리라.

필립이 이런 곳에 발을 들일 때마다, 매번 처음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서 필립은 더더욱 이안의 뒤통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신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이런 어둠 속에선, 이 검은 머리의 성자가 그의 신이나 다름없었다.

평소와 다름 없는 덤덤한 정수리를 주시하며 얼마나 내려갔을까.

"...."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계단이 끝나고, 기다란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좌우로 드문드문 문이 보이는 복도는 계단과 마찬가지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신성을 아껴라."

내뱉은 이안이 검을 늘어뜨린 채 앞서 나아갔다.

필립은 재빨리 모아쥔 손을 풀고는, 검과 방패를 꺼내 들며 그 뒤를 따랐다.

빛이 흩어지자 주위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귀가 높은 산에 오른 것처럼 먹먹했다. 지금이라면 멀지 않은 곳에서 번지는 소리라도 제대로 들을 수 없을 터였다. 물론 그런 사실이 새삼스럽거나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온다."

그의 앞에는 이안이 있었으니까.

그가 내뱉은 순간, 필립은 곧바로 검과 방패를 코앞까지 치켜 들었다. 고양이의 그것처럼 반짝이는 이안의 눈이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도."

"...!"

"넌 후방을 주시해. 길은 내가 뚫을 테니까."

필립은 대답 대신 뒤로 몸을 돌렸다. 귀가 먹먹한 와중에도, 그르렁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발소리도 밖의 망자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들려왔다.

타탓-

다음 순간, 이안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뒷걸음질을 이어가면서, 필립은 꿈틀거리는 복도 너머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으로는 이 어둠을 꿰뚫고 저 망자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서걱- 화르르-

다음 순간 시야가 밝아졌다.

필립의 앞으로 자신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광원의 정체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안이 불덩이로 망자를 불태운 것이리라.

복도의 형태가 선명해졌다. 무채색의 벽돌. 좌우로 드문드문 낡은 문이 이어지는 가운데, 필립은 소리로만 듣던 망자의 실체를 비로소 눈에 담았다.

쩍 갈라진 복부 사이로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는 내장을 늘어뜨린 자였다. 얼굴을 비롯한 몸 곳곳이 불그스름해 보이는 건 불빛 때문이 아니었다.

망자의 머리와 어깨, 팔이 수많은 붉은 지렁이에 뒤덮인 것처럼 굼실댔다.

'촉수…? 아니, 버섯?'

그게 수많은 촉수가 몸에 돋아났기 때문임을. 그리고 그 촉수 끝에 저마다 괴상한 형태의 갓이 달려있다는 것까지 알게 된 필립의 미간이 이내 일그러졌다.

불빛이 이내 사그라들었다.

필립이 더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턱-

곧 매캐한 탄내를 풍기는 망자의 시체가 그의 발뒤꿈치에 걸렸다.

방패는 여전히 뒤에 둔 채, 몸만 옆으로 돌린 필립이 저 앞의 이안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위치를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콰직-! 서걱-

이안이 휘두르는 검에서, 어느새 흐릿한 보랏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 밝은 빛은 아니었지만, 이 어둠 속에서는 더없이 선명하게 일렁이며 이리저리 호선을 그려대고 있었다.

그 궤적에 썰려 나간 망자들은, 놀랍게도 흐릿하게 타들어가며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신성력에 닿은 것처럼.

'저건 대체…?'

어둠을 수놓는 보랏빛 궤적에, 필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안이 사용하는 저 검이 마검이라는 사실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이 마검이 가진 힘을 제 것처럼 휘두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타락자나 검의 마성에 잡아먹힌 자들이나 가능한 일일 터였으니까.

"너무 뒤쳐지지 마라."

하지만 그를 향해 내뱉는 목소리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이 냉랭했다.

"…예."

순순히 대답하면서, 필립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긴. 이안이라면 반대로 마검을 완전히 지배해 버리는 것도 가능한 건지도 몰랐다.

그가 보편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준 게 한두 번이 아니지 않던가.

애초에 그는 신의 사랑을 받는, 검을 쓰는 마법사였다.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아졌을 뿐. 사실 선한 타락자나 빛을 섬기는 마족만큼이나 모순된 말이었다.

어쩌면 그렇기에 불가능에 가까운 위업을 그토록 여러 번이나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걸지도.

그 와중에도 이안은 홀로 다가오는 망자들을 쉴 새 없이 베어 넘기며 처음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속도로 나아갔다.

필립의 걸음도 점점 빨라졌다.

그가 아예 앞을 바라보며 이안의 뒤를 따라가는 것에만 집중한 것도 잠시.

"...!"

좌우로 이어지던 문 중 하나가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

팔을 내뻗으며 튀어나온 망자를 바라보는 필립의 눈이 커졌다.

"끄… 륵…!"

눈구멍과 입, 머리에 불그스름한 버섯이 잔뜩 돋아나 일렁였다. 필립을 향해 내뻗은 팔에도 꿈틀대는 괴상한 버섯이 뒤덮여 있었다.

솨아아-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놀란 와중에도, 검에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그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콰직-! 푸욱-

내뻗은 팔을 단칼에 잘라버린 필립이 망자의 가슴팍에 검을 찔러 넣었다. 신성력이 망자의 몸을 태우는 가운데, 그가 방패 옆면으로 망자의 안면을 연달아 후려쳤다.

목이 뒤로 덜렁 넘어간 망자가 균형을 잃고 비틀댔다. 그대로 놈의 가슴을 걷어차 다시 방 안에 밀어 넣은 필립이, 더 멀어진 이안을 쫓아 내달렸다.

이내 이안의 걸음이 멈췄다.

갈림길이었다. 그의 뒤에 멈춰 선 필립이 두 갈래 어둠을 번갈아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하군요."

"동감이다."

혀를 찬 이안이 이내 방향을 정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필립도 뒤처지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어느새 복도 곳곳에서 푸르스름한 이끼와 붉은 버섯이 돋아나 있었다. 물가라면 모를까. 교회에서는 부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안은 멈추지 않고 길을 텄다.

필립은 더는 방심하는 일 없이 때때로 측면에서 튀어나오는 망자를 상대하면서, 그가 멈춰 설 일이 없도록 보조했다.

"더럽게 기네, 시발…."

이안의 낮은 중얼거림에, 필립은 무언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가 볼 때, 여긴 숙소였다. 사제들은 물론이고 타지에서 온 신도나 수도사들이 생활하는.

이렇게 길어진 건 공간이 뒤틀리고 늘어난 영향이리라. 물론 필립은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건지는, 아직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

이안이 문득 멈춰 선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지금까지는 그냥 지나치기만 하던 방을 돌아본 채였다.

곧 흑검을 치켜든 그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콰직, 망자의 머리가 으깨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필립은 재빨리 뒤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안이 목이 날아간 망자를 벽면으로 툭툭 걷어차 밀어내는 사이.

"...!"

침대와 작은 책상, 벽장이 두 개씩 마주 보고 놓인 방을 돌아보던 필립의 눈이 비로소 커졌다.

특별할 것 없는 전경이었지만, 어딘가에서 희미하지만 익숙한 느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신성력…?"

그가 중얼대는 사이 이안이 장내를 가로질렀다. 곧 그가 가장 구석에 위치한 벽장을 벌컥 열어 젖혔다.

"히, 히익…. 차, 찬란한 빛이여, 부디 그 자비로운 온기로 이 비천한 종의 영혼을-"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가오는 필립을 돌아본 이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생존자라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기대도 안 했는데요."

"말이 통할 상태 같진 않다만."

"잠시만 제게 맡겨 주십쇼."

"짧게 끝내라. 저 밖에 구해야 할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내뱉은 이안이 한 걸음 물러났다.

고개만 끄덕이면서, 필립은 벽장 안을 바라보았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중얼대는 건, 눈을 질끈 감은 금발의 사제였다.

필립과 비슷한 또래 같았다. 어쩌면 아직 수도사에 불과한지도 몰랐지만.

"눈을 뜨셔도 됩니다, 사제님. 우린 사람입니다."

필립은 공손하게 내뱉었다. 사제의 입술이 멈췄다. 굳어있던 것도 잠시, 그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내뱉었다.

"말도 안 돼…. 날 현혹해 영혼을 빼앗을 심산이라면-"

헛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검을 허리춤에 되돌린 필립이, 심드렁한 표정의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번엔 정말 확실합니다. 이 분은 타락자가 아니에요."

이안이 빨리 할 일이나 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다시 앞을 돌아본 필립이 사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그의 손아귀를 타고 번진 신성력에, 사제가 비로소 번쩍 눈을 치켜떴다.

그가 감격에 가득 찬 얼굴로 필립을 돌아보았다.

"성기사셨군요…! 루 솔라여, 감사합니다…."

필립은 아니라고 사실대로 말하는 대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루, 루스입니다. 기사님."

"반갑습니다, 사제님. 저는 필립입니다. 우선, 밖으로 나오시죠."

"예, 예, 필립 경…."

사제, 루스가 엉거주춤 밖으로 나왔다. 그에게서 지린내가 느껴졌지만, 필립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소변만 지린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루스는 곧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고개만 들어 필립과 이안을 번갈아 돌아보는 그를 향해, 필립이 덧붙였다.

"찬란한 여신의 손길이 느껴지더군요. 그 덕분에 무사하실 수 있으셨던 겁니까?"

"예, 예. 그렇습니다…."

루스가 목덜미를 더듬어, 사제복 안으로 걸고 있던 끈을 들었다.

은 가죽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 안에서 꺼질 것처럼 희미한 신성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중앙에서 수학하던 시절, 절 가르쳐 주신 주교님께 하사받은 물건입니다. 최초의 성상에서 나온 파편이라더군요. 저도 이것이 정말 신성을 뿜어낼 줄은-"

"절대 몸에서 떼어 놓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신다고요…?"

루스가 눈을 치켜뜨며 필립을 바라보았다. 그가 재차 입을 달싹였다.

"그, 그 불쌍한 괴물들을 전부 퇴치하고 여기까지 오신 게 아니셨습니까?"

"괴물들과 싸운 건 맞지만, 우리는 첨탑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교회에 도사린 어둠을 퇴치하기 위해서요."

"아… 아아…."

루스의 눈동자에 공포와 절망이 서렸다. 양팔로 머리를 감싸쥔 그가 몸을 웅크리며 내뱉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 나가셔야 합니다. 그, 그건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에요. 분명 저 저주받을 공허 어딘가에서-"

"이미 도시도 이 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이 어둠의 근원을 없애기 전에는 여기서 나갈 수도 없어요. 우린 지금 이 안에 갇힌 겁니다."

필립이 말을 잘랐다. 루스의 얼굴에 공포가 뒤덮였다. 필립이 그의 흔들리는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우린 여길 이 지경으로 만든 원흉을 제거할 겁니다. 사제님이 도와주신다면 조금이라도 더 쉬워지겠죠.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사제님. 저희와 함께 가면서, 여기서 보고 겪은 걸 전부 알려 주세요."

"가, 같이라니…. 저는 못 갑니다. 죽을, 죽을 거예요. 저는 예배당 쪽으로는 절대… 다시는…."

"그럼 그렇게 하시오."

이안이 툭 내뱉은 건 그때였다. 필립의 시선을 받은 그가 심드렁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우린 가던 길 가자."

"한 번만 더 설득해 보면 안 될까요…?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증언할 목격자가 한 명은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다른 생존자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

이안이 코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벌 떨고 있는 루스를 내려다본 그가, 곧 예고 없이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쥐어 들었다.

맥없이 딸려 올라온 루스가 눈을 치켜뜨는 사이. 이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기 있어 봐야 네가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사제. 그 목걸이의 신성력은 곧 꺼질 테고, 밖에 어슬렁거리는 놈들이 네 냄새를 맡을 테니까. 그럼 곧 똑같은 괴물로 되살아 날 테고, 우리 뒤를 노리겠지. 그러니 차라리 지금 내 손에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히, 히익…!"

"하지만 이 녀석 말대로 따라온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도움 될 말을 뭐라도 하겠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기겠지."

검날을 루스의 목덜미에 얹으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그러니 당장 결정해라. 갈래, 죽을래?"

"...."

설마하니 이렇게 노골적으로 협박할 줄은 몰랐던 필립이 멍하니 입을 벌리는 가운데.

"가, 가겠습니다…."

하얗게 질린 채 목에 드리운 검날을 내려다보던 루스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20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