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미친…?!"
욕지거리를 토해내는 와중에도, 흑기사가 반사적으로 흑검을 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전신에 검붉은 마력이 솟구칠 찰나, 대검이 그 위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아- 콰앙-!
대검에 짓눌린 채 추락한 흑기사가, 엉망이 된 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검과 검이 맞부딪쳐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굉음. 흑기사를 중심으로 바닥의 깨진 판석과 흙더미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거미줄 같은 균열이 연회장 바닥 전체로 번졌다. 흑검의 검면과 자루를 쥔 양팔이 다 구부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완력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단지 버텨 낸 것뿐이었다. 전신을 뒤덮은 충격을 전부 떨쳐내는 건 불가능했다.
"흡…!"
대검을 내리친 자세로 착지한 이안이, 땅에 발이 닿기가 무섭게 대검을 다시 치켜들었다. 태산처럼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진 흑기사가 간신히 참았던 숨을 토할 찰나.
쒸아아악-!
대검이 커다란 호선을 그리며 다시금 떨어져 내렸다. 흑기사가 황급히 다시 양팔에 힘을 불어넣었다.
또 한 번의 폭음. 그리고 방금보다 더 강한 힘이 실린 대검이 흑검 위를 후려쳤다.
흑기사의 몸이 바닥에 더 깊이 박혀 들고, 내뻗은 팔의 팔꿈치가 절로 굽어졌다.
솨아아- 대검 날을 따라 새겨진 고대어에 푸른 빛이 새겨지는 가운데, 이안이 다시 대검을 치켜들었다.
"…아니-"
또?!
흑기사가 뒷말을 내뱉기도 전에, 뒤로 젖혀졌던 대검이 다시 한번 거대한 호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새하얀 냉기의 궤적까지 더해진 채였다.
천장의 벽돌들이 줄지어 떨어져 내리고 있었지만, 대검을 내리치는 이안은 피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미 그가 미로 저택의 지하에서 이보다 더한 붕괴를 경험했음을 알 리 없는 흑기사의 눈에, 처음으로 놀람과 당황을 넘어선 생경한 감정이 서렸다.
공포.
콰아아아-
그 와중에도 대검이 만들어 낸 거대한 궤적은 어느새 흑기사의 코앞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흑기사가 품고 있던 용의 마력을 일제히 뿜어내면서 팔을 들었다.
비명을 지르듯 징징 울리던 흑검에 마력이 폭포수처럼 치솟았다.
대검이 그 위를 후려친 건 거의 동시였다.
쩌어엉-!
전신을 울리는 충격파와 함께, 용의 마력과 신성력이 뒤엉켜 만들어 낸 빛의 폭발이 일었다. 그 위로 한 박자 늦게 수많은 냉기의 칼날이 쏟아졌다.
콰과과과과-
연회장의 바닥이 흑기사와 이안을 중심으로 움푹 꺼졌다. 동시에 팔에 가해지는 압력을 더는 견디지 못한 흑기사의 장갑과 팔목 보호대가 터져 나갔다. 빛의 폭발을 뚫고 들어온 냉기의 칼날들이 흑기사의 전신에 난도질한 듯한 선과 흠집을 그려 댔다.
하지만 흑기사는 끝내 버텨 냈다.
충격파와 압력, 그리고 쏟아지는 냉기 칼날의 포격이 잦아들었다.
흑기사가 거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온 대검 날을 간신히 응시한 다음 순간.
"...."
이를 악문 이안이 다시 휙, 대검을 치켜들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그게 다시 대검을 내리찍기 위해서라는 걸 깨달은 흑기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정말 이놈은 자신이 쪼개질 때까지 대검을 내리치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성이 무너지게 되더라도.
퍽.
떨어진 돌덩이가 이안의 머리를 후려치고 튕겨 나갔지만, 그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어쩌면 용도 이렇게 죽였을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흑기사의 내면에, 문득 불같은 분노가 치밀었다.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에 대한 수치심까지 더해진,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분노였다.
밀도 높은 마력이 만들어 낸 전신의 아지랑이가, 그에 감응하듯 끓어 올랐다.
"꺼져라-! 이 미친 자식아!"
콰아아아아-!
포효와 동시에 끓어오르던 마력이 폭발했다. 대검을 치켜든 이안이 눈을 치켜뜬 채로 휩쓸려 튕겨 나가고, 흑기사가 박혀 있던 바닥의 돌과 흙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쉬아아악-!
하지만 이안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지는 못한 게 분명했다.
생성과 동시에 갈기갈기 찢겨나간 푸른 역장이 사그라드는 가운데.
부릅뜬 흑기사의 눈에, 대검을 무게추 삼아 자세를 다잡는 이안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대검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카가가가각-
대검 날이 기다란 호선을 만들어 내며 속도를 줄였다.
이안의 발이 땅에 닿았다.
다시 대검을 뽑아드는 그의 모습은 어느덧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흔적도 남지 않은 흉갑. 한 쪽만 남은 견갑과 팔목 보호대. 너덜거리는 각반. 받쳐 입은 사슬 갑옷은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떨어져 나가서 누더기가 따로 없었다.
그 아래의 누비옷은 터진 사슬 조각들이 박혀 붉게 물들었고, 먼지에 뒤덮인 얼굴 한쪽에는 머리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끈적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무표정하기 그지 없는 얼굴. 전신에 맺힌 붉은 신성력은 고요하게 타오르고 있었고, 광택 없이 우묵한 눈에는 오로지 하나의 의지만이 담겨 있었다.
너를 죽이겠다는.
"미친 자식…. 이제 보니 누더기의 사도였구나…. 네놈이야말로 저 신들이 얼마나 모순적이며 얄팍한 것들인지를 증명하는 산증인이군."
비틀대며 일어선 흑기사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양팔에 힘을 주며 씹어 뱉었다.
"자신들이 그토록 불경하게 여기는 마법사에게 앞다퉈 힘을 내리다니 말이야….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그만큼이나 싫다는 것이겠지. 교단도 알고 있느냐? 자신들이 섬기는 신과 성자가 음흉한 주문쟁이를 대행자로 삼았음을? 북부인들은 아느냐? 자신들의 대전사가-"
"시도는 좋았어."
이안이 말을 잘랐다. 다음 순간 쿠확,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대검을 늘어뜨린 그의 신형이 삽시에 커졌다. 일직선으로 흑기사를 향해 달려들며, 이안이 툭 덧붙였다.
"하지만 난 주절대면서 시간 끄는 취미는 없거든."
"이런 명예도 모르는-!"
말과 동시에 이어진 파공음에, 흑기사가 다급하게 움켜쥔 흑검을 옆으로 치켜들었다.
반격이 아니라 철저하게 방어를 위한 자세. 그의 전투 의지가 이전과 같지 않음을 무의식중에 증명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카가가가가각-
횡으로 긴 호선을 그리며 뿜어져 나온 대검이 흑검의 날 위를 미끄러졌다. 흑기사의 몸이 옆으로 죽 밀려나는 가운데, 맞부딪친 검날에서 불티가 폭죽처럼 튀어 올랐다.
이를 악물던 흑기사의 눈에, 이안의 눈동자가 보였다. 잿빛.
설마, 또?
퍼엉-!
추측을 현실로 만들듯, 기다란 대검 날에서 소리 없는 폭발이 터졌다. 일순간 빨아들였다가 밀어내는 엄청난 압력이 흑기사의 몸을 연회장 벽면으로 날려 버렸다.
끝내 놓치고만 흑검이 핑그르르 돌며 날아오르는 가운데, 벽면에 처박힌 흑기사를 놓치지 않고 노려보던 이안이 재차 몸을 날렸다.
어느새 내뻗었던 대검을 머리 위까지 치켜들면서.
키히이이이-!
유령마가 귀곡성 같은 울부짖음과 마력의 폭발을 토해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주인이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것을 깨달은 듯 모든 마력을 토해내고는, 폭주하듯이 이안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그렇다 해도, 뒤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궤적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푸확-!
뒤에서 기다란 선을 그리며 날아든 붉은 궤적이, 마갑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간 유령마의 몸을 그대로 썰고 지나쳤다.
잘려나간 유령마의 몸이 안개 덩어리처럼 터져 나갔다. 그러면서도 밀려드는 속도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신성력을 떨쳐낸 뒤에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듯, 타들어 가는 안개 사이로 말 머리의 형상이 아른거리며 피어올랐다.
바닥에 그림자처럼 깔린 채 질주하던 샬롯이 솟구친 건 바로 그때였다. 그녀가 올려 친 도끼날 끝에, 말의 두개골로 보이는 새카만 뼈가 걸렸다.
푸확-! 말의 흉상을 만들어내던 검은 안개가 증발하듯 흩어졌다.
"멈추지 마라! 이안!"
두개골을 도끼날에 건 채 솟구친 샬롯이 소리쳤다.
물론 이안은 이미 그러고 있었다.
그는 애초부터 멈출 생각이 없었다.
쒸아아아악-!
벽면에 처박힌 와중에도 도끼날에 걸린 검은 두개골을 뚫어질 듯 노려보던 흑기사가, 귀를 파고드는 파공음에 뒤늦게 팔을 치켜들었다.
카가가가가각-
천장과 벽면을 모조리 찢어발기며 밀려든 사선이, 그 한복판에 내밀어진 흑기사의 검붉은 팔뚝까지 갈라 버렸다.
대검이 만들어 낸 궤적은 흑기사의 팔을 지나쳐 가슴 한복판에서야 비로소 잠시 멈췄다.
대검을 양손으로 쥔 이안을 응시하는 흑기사의 눈빛에, 일순간 묘한 평온함이 내려앉았다.
"내 영혼은… 참된 주의 곁으로…."
콰지지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의 팔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대검 날이 흑기사의 상반신을 전부 잘라냈다.
잘려나간 흑기사의 상반신이 비스듬하게 떨어져 내렸다. 검은 피를 왈칵 왈칵 토해내던 하반신도 털썩,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하아- 하아-"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완료창을 응시하며, 비로소 이안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흥건하게 번진 핏물과 흑기사의 육신에서 검붉은 빛이 끓듯이 피어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푸화아아악-
흑기사의 육체가 번쩍이며 검붉은 아지랑이를 사방으로 토해냈다.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젖힌 이안이, 그 아지랑이가 만들어 내는 검붉은 장막을 올려다보았다.
장막 너머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인지한 것만으로도 심장을 옭죄는 듯한 존재감. 어렵지 않게 그 정체를 깨달은 이안이, 치미는 공포를 내색하지 않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서, 이 놈의 영혼은 네 곁으로 갔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뇌리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번졌을 뿐이었다. 놀랍게도 적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 순간, 마력의 아지랑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머릿속을 긁던 웃음소리와 존재감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치이이이….
숯덩어리처럼 새카맣게 변한 흑기사의 시신이 흐릿한 불티와 매캐한 연기를 토해냈다.
동시에 이안의 전신에서 아른거리던 붉은 신성력도 증발하듯 사라졌다.
남은 건 더 짙게 느껴지는 어둠과 귀가 먹먹한 적막 뿐.
철그렁-
군단장의 대검이 땅에 떨어졌다.
축복이 끝남과 동시에 새삼 느껴지기 시작한 무게감에, 이안이 그냥 나루를 놔버린 것이다.
비틀댄 이안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이러다 괴물들한테 죽기 전에 골병으로 먼저 죽겠는데….
흐릿하게 이어진 뭔가를 부수는 소리에, 이안의 입가에 맺힌 쓴웃음이 더 짙어졌다.
보지 않아도 샬롯이 유령마의 두개골을 박살내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 확인 사살 한번 철저하네.'
대충 하지. 혹시 모르는데.
속으로 덧붙이며, 이안은 엉망이 된 연회장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마력과 신성력이 만들어내던 빛이 사라져, 연회장은 흐릿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나마 아직 멀쩡한 벽면의 등잔 몇에 꺼질듯한 불이 맺혀 있긴 했지만, 을씨년스러움을 더할 뿐이었다.
폭탄이 터진 것처럼 뒤집히고 가라앉은 바닥에는 천장의 잔해들이 나뒹굴었다. 곳곳이 무너지고 균열이 간 벽면은 위태로웠고, 한쪽에 구멍이 뻥 뚫린 천장은 그 너머의 먹구름을 훤히 드러낸 채 쉬지 않고 흙먼지를 떨어뜨렸다.
이렇게 보니 성 전체가 무너지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아마도 위보다 옆으로 넓게 지어진 구조물인 덕분이리라.
"이안…!"
그리고 그 한복판, 잔해를 헤치며 달려오는 메브와 도낏자루를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는 샬롯의 모습이 보였다. 이안 못지않게 만신창이가 된 샬롯의 상반신이 부풀었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번뜩이는 주황색 안광에는 묘한 만족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괜찮은 것이냐…? 움직일 수 있겠어?"
그의 앞에 멈춰 선 메브의 목소리에도 짙은 피로가 묻어나왔다. 안면 가리개를 올리자,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드러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유령마와의 전투도 쉽지는 않았을 테니까.
북부 혈통의 전마만큼이나 덩치가 큰 데다, 미친 듯이 마력을 토해내며 날뛰어대지 않았던가.
이들 둘이 그놈을 상대해 주지 않았다면, 전투가 훨씬 더 힘들어졌을 터였다.
"…괜찮진 않소만. 움직일 순 있소. 경도 앉으시오. 좀 쉽시다."
이안의 대답에, 메브가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숨을 헐떡이는 소리만 번지는 가운데, 이안은 이제 연기도 토해내지 않는 흑기사의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놈의 전신 판금 갑옷은 이제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장화 정도가 멀쩡해 보였지만, 이안이 착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컸다.
너무 열심히 깨부쉈나.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신 찰나였다.
"끄, 끝인가…?"
"다들 무사하신… 맙소사…."
반쯤 무너진 통로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던 병사들 몇이, 이윽고 탄식을 흘리며 걸어 나왔다. 아까는 죄다 정신이 나가 있더니, 전투가 이어지는 사이에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굉음과 폭발이 이어졌으니 없던 정신도 돌아왔으리라.
"루 솔라여…."
"이런 처참한 꼴이라니…."
그들이 본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연회장의 전경을 눈에 담으며 연신 탄식을 흘리는 사이.
"...?"
이안의 시선이 문득 옆으로 돌아갔다. 피부가 따끔해지는 마력의 파장이 문득 느껴진 것이다.
주위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하지만 은밀한 악의가 깔린 마력의 파장.
그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린 이안의 입꼬리가, 이내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난장판이 된 연회장 한구석.
잔해 사이에 덩그러니 박혀 있는 흑검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도, 건질 게 없진 않군."
짧게 침음한 이안이 일어섰다.
#181화
"이안…?"
"쉬고 계시오."
고개를 갸웃하는 메브에게 덧붙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거꾸로 세운 도낏자루에 양팔을 얹은 샬롯과 멍하니 선 병사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가운데. 이안은 절뚝대면서도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잔해 사이에 박힌 흑검을 차근히 훑었다. 끝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무게추. 중앙이 살짝 튀어나온 기다란 자루. 용의 날개를 형상화한 듯한 십자 막이와 거뭇하고 매끈하게 이어진 검신.
그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검날에 서린 광택이 일렁였다.
어서 쥐란 거지?
내심 피식한 이안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루를 움켜쥐었다.
푸확-!
기다렸다는 듯 자루를 타고 검의 마력이 밀려들었다. 검을 쥔 이안의 주위로 검붉은 마력의 아지랑이가 휘몰아쳤다.
이안의 눈동자가 흰자까지 모두 검붉게 물들었다. 온갖 잔인한 환영과 비명, 그리고 살의와 증오를 머금은 감정들이 함께 쏟아졌다.
-죽여…. 모조리 죽여라… 저들에게 끝없는 공포를…
속삭임이 이안의 뇌리를 울렸다. 커졌다가 작아지고, 윽박지르듯 하다 다시 부드러워지는 사념이 메아리치듯 어지럽게 오갔다.
잘 단련된 기사라도 단숨에 타락시키고, 평범한 농노조차 피에 미친 살인귀로 만들어 버릴 강력한 사념.
"…그래, 확실히 마검이군."
하지만 이안은 조금 짜증스럽게 읊조릴 따름이었다.
사념은 그의 영혼을 조금도 물들이지 못했다. 그저 시끄럽고 거슬리는 환청과 환영일 뿐.
혼돈력을 살짝 끌어올린 것만으로도 이안의 눈동자가 본모습을 되찾았다.
솨아아-
반지에서 멋대로 번진 신성력도 이안의 전신을 감쌌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검을 향해 혼돈력을 밀어 넣었다.
-전부 죽여라. 죽….
뇌리를 시끄럽게 울리던 사념이 문득 잦아들었다. 키이잉, 검신이 밀려드는 혼돈력에 저항하듯 날카로운 울음을 토해냈다.
소용없는 저항이었다. 이안을 감싼 마력이 맥없이 흩어졌다. 그 사이로 검을 뽑아 든 이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놀란 듯 일어서는 메브와, 언제라도 달려올 자세를 잡던 샬롯이 동시에 멈칫대는 가운데.
치이잉-
이안이 혼돈력을 거둬들이자, 검신에서 짧고 섬뜩한 울림이 번졌다.
더는 환청과 환영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검의 내부 어딘가에 존재하는 의지를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기세가 다소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그를 향한 악의를 가득 머금은 채였다.
"…아무래도, 교육이 좀 필요하겠네."
읊조린 이안이, 허리춤의 빈 검집에 마검을 밀어 넣었다.
정보창도 확인하지 않은 채였다. 이미 손에 넣은 물건이니, 그딴 건 나중에 확인해도 충분했다.
검집이 상대적으로 짧은 탓에 검날 일부가 여전히 훤히 드러나 있었지만, 이안은 상관하지 않고 검집을 허리춤에서 떼어냈다.
뒤이어 검을 쥔 그의 손이 아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웅- 우웅-
마검이 울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대로 검을 놔버리고는 아공간 밖으로 손을 뺐다.
마검에서 번지던 불길한 존재감이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저 내부가 어떤 식인 건지는 나도 전혀 모르는데.'
딱히 답을 알고 싶지는 않은 의문을 떠올리며, 그가 저릿한 오른손을 툭툭 털 찰나.
"용살자께서… 마검을… 봉인하셨다…."
"루 솔라여…."
병사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탄성이 번져 나왔다. 이안은 그제야, 아직 자신을 감싼 신성력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신성력은 빛무리로 변해 천천히 흩어지면서, 그의 주위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병사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루 사드의 구원자시여… 감사합니다…."
"찬란한 여신과 위대한 백금룡께 영광 있으라…."
"루 솔라께 영광 있으라…."
진심이 가득 담긴 기도가 이어졌다. 슬쩍 보니, 어느새 메브와 샬롯까지 한쪽 무릎을 꿇고는 저마다의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너희들은 또 왜 그래?
환장하겠네, 진짜…. 속으로 읊조리며 헛웃음을 짓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난장판이 된 계단 위쪽으로 향했다.
경쾌하고 빠른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반파된 복도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예상대로 백발의 요정이었다.
"잠잠하다 싶더라니, 역시나네…. 다 끝난 거 맞지, 이안?"
난장판이 된 장내를 돌아보며 중얼댄 테사이아가, 이윽고 이안을 향해 소리쳤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내뱉었다.
"생존자들은?"
"저 위에 다 모여있어. 아까 갑자기 귀 따가운 고함이 울리면서 죄다 나자빠졌었는데, 어쨌든 이젠 괜찮아. 내가 뺨을 치니까 다들 깨어나더라."
"…잘 됐군. 전부 성 밖으로 데리고 나와라. 성이 중간에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안전한 길로 안내하라고 하고."
"알았어! 그런데, 왜 다들 무릎을 꿇고 있는 거야?"
그건 나도 묻고 싶은 말이야.
대답 대신 입맛을 다신 이안이, 연회장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
문을 걸어 잠근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샌 글루미르의 주민들은, 다음 날 아침이 되고서야 성에서 일어난 소란의 전말을 알게 됐다.
흡혈 일족의 잔당으로 추정되는 마족이 쳐들어왔고, 루 사드의 구원자인 용살자가 그 마족의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
주민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끔찍한 잔해만 남은 미로 저택에서의 사건과 달리, 이번에는 목격자도 여럿이었다.
"뎁의 말로는 불길 같은 신성을 온몸에 두르시고, 사람만큼 거대한 빛의 검을 휘두르며 날아다니셨다더군. 손길 한 번에 돌풍이 불고, 검을 휘두르면 천둥이 쳤대."
"찬란한 여신의 화신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기적이지."
"아무렴. 동행한 붉은 기사와 수인 종자에게도 병사들부터 구하라 명하시고 홀로 마족과 맞서셨다는데. 그토록 숭고한 분이 찬란한 여신의 일부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사람이 둘만 모여도, 저마다 들은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바빴다.
온갖 종류의 살이 붙어 대는 데에는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듣자 하니 엄정한 여신과 더 각별한 사이시라던데. 붉은 기사도 그분의 사도라지, 아마?"
"예끼, 이 사람아. 루 솔라께서 들으시네. 엄정한 여신은 찬란한 여신의 따님이시잖나! 그러니 붉은 기사가 그분을 섬기시는 거겠지."
"허어. 그렇겠군. 그럼 역시, 그분은 찬란한 여신의…."
"하, 한스가 부럽군. 그분께서 후광을 두른 채 저주받은 마검을 봉인하시는 모습을 직접 보다니 말이야. 진짜 기적이었다더군. 마법 따위가 아니라."
"부러울 게 뭐 있나. 그 자리에 있다 죽은 사람이 몇인데."
"하긴. 그나마도 그분들이 아니셨다면 살아남지 못했겠고."
평소라면 눈살을 찌푸리며 불경하다 호통쳤을 성의 관리들과 병사들도, 그들의 입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병사들은 더 열성적으로 용살자의 업적을 칭송했다.
대부분 용살자 일행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자들이었다.
성의 관리들과 영주 대리인은 용살자 일행을 도시에서 가장 좋은 저택에 모시고, 병사들과 시종들까지 붙여 보필했다.
내성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조사도, 그들이 저택을 방문해 진행했다.
용살자와 붉은 기사가 휴식을 취해야 했기 때문에, 조사는 붉은 기사의 종자와 용살자의 시종인 백발 요정이 대리했다.
물론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모든 과정이 신속하게, 그리고 막힘없이 진행됐다.
"용살자께서 떠나지 않으시면 좋겠군. 그럼 그 누구도 감히 우리를 건드리지 못할 것 아닌가."
"위대하신 백금룡의 뜻을 대행하기 위해 떠나셔야 한다잖나."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지. 성심을 다하면, 성스러운 임무를 다하신 후에 돌아와 주실지도."
"말 나온 김에, 기도를 올리러 가지 않겠나?"
"또…? 그래. 좋지, 뭐. 가세."
***
"…환장하겠군."
창밖을 슬쩍 내려다본 이안이, 한숨을 삼키며 다시 몸을 돌렸다.
아직도 주민들이 저택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전에도 저러더니. 꼬박 하루를 자고 난 지금도 이 모양이었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느긋하게 식사를 이어가던 샬롯이 말했다. 그 건너편에 앉은 메브도 빵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은 이안이 식사를 끝내갈 때쯤에야 깨어났다. 주민들을 대피시키기가 무섭게 기절했던 이안과 달리, 둘은 귀족들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걸 확신한 뒤에야 잠에든 까닭이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이지. 교단이 너를 새로운 성인으로 추대한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이안."
그건 죽어야 되는 거 아닌가.
빈자리에 걸터 앉은 이안이 실소를 흘렸다.
"성인은 무슨…. 난 루 솔라를 섬기지도 않는다니까."
그가 앞에 놓인 술잔을 쥐는 사이, 메브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신앙은 그저 구실일 뿐이다. 언행이 고결하다면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지. 괜히 신들이 앞다퉈 네게 힘을 빌려주시겠느냐?"
"그건…."
내가 게임 캐릭터라 가능한 걸 텐데.
이안은 뒷말을 포도주와 함께 삼켰다. 그가 보기에 메브의 말은 반만 진실이었다.
적어도 루 솔라는 신도들의 믿음과 신앙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신이니까. 그녀가 그런 족속이라는 건, 게임의 맹신자들만 떠올려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금도 보지 않았느냐? 네 덕분에 백성들의 신앙심이 한층 더 깊어진 것을. 찬란한 여신께서 흡족해하실 일이지."
"저들은 그저 이 현실을 잠시 잊을 구실이 필요할 뿐이오."
"그게 신의 사도가 하는 일이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말을 말아야지.
샬롯이 메브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입맛을 다신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게 맞긴 하지.'
내 경우엔 즐기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거지만.
이안이 포도주를 마시는 사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한쪽 팔에 여전히 붕대를 감은 필립, 그리고 망토를 근사하게 두른 테사이아였다.
진중한 얼굴로 장내에 들어선 둘의 표정이, 문을 닫음과 동시에 확 달라졌다.
몸을 앞으로 축 기울인 필립이 중얼댔다.
"피곤해서 쓰러질 뻔했습니다…."
"내 말이. 용살자는 이안인데, 왜 우리한테 자꾸 손을 잡아 달라고 하는 거야?"
바닥에 벌렁 드러누우면서 투덜대던 테사이아가, 메브의 시선을 받고는 혀를 차며 일어섰다.
방구석의 의자를 끌고 온 필립이 식탁을 바라보며 앉았다.
"어쨌든, 다 끝났습니다. 더는 귀찮은 절차도 남아있지 않고, 전투 중에 파손된 세 분… 아니, 두 분 나리와 샬롯의 장비는 전부 새로 받기로 했습니다. 물론 공짜로요. 글루미르를 또다시 구해주신 보답이라더군요."
"잘 됐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브가 건넨 술잔을 곧바로 입에 가져간 필립이, 잔에 담긴 술을 전부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도시의 장인들이 전부 달려들어 수선 중입니다. 심지어 주민들도 돕고 있고요. 아시다시피 제가 여러분들의 치수를 전부 알고 있어서, 일이 더 편했습니다. 끝나는 족족 마차에 실어 주기로 했고요."
"언제쯤 끝나는데?"
"오늘 밤이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나리."
메브가 내민 술병 앞에 잔을 가져다 대면서, 필립이 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성이 반쯤 무너졌는데, 오히려 백성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까는 마구간지기가 와서 고해성사하더군요. 사실 우리에게 내준 말이 가장 좋은 말이 아니었다고요. 용서하겠다고 했더니, 이미 가장 좋은 말로 바꿔 놨답니다."
"별의별 얘길 다 들었어. 북부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긴, 그때는 다들 이안이 죽을까 봐 걱정하느라 바쁘긴 했지. 나도 목말라, 야옹아."
"넌 손이 없냐?"
샬롯이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자신의 술잔을 내밀었다.
씩 웃으며 받아든 테사이아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이제 다 끝났어. 쉬기만 하면 돼."
"잘 됐군. 그럼 내일 해 뜨기 전에 출발하면 되겠어."
"그래. 해 뜨기 전까지 쭉-. 뭐라고? 내일?"
테사이아가 술잔을 입에 가져가다 말고 되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눈을 치켜떴다.
"말도 안 돼! 난 하나도 못 쉬었다고. 너희 셋이 코 골고 잘 동안, 여기 이 주근깨랑 밤낮 가릴 거 없이 돌아다니고 떠들어 댔단 말야."
"맞습니, 아니. 그것보다, 이번 전투로 몸이 다시 축나셨습니다. 세 분 모두요. 적어도 며칠은 더 쉬셔야-"
"그러다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이어진 필립의 말을, 이안이 잘랐다.
일행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덧붙였다.
"우릴 습격한 놈은, 흡혈 일족의 잔당이 아니었으니까."
"예…?"
필립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눈빛을 교환한 메브와 샬롯이 역시, 하고 중얼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설마, 나리는 알고 계셨습니까?"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제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거고요? 제가 받은 조사는 교단으로 보내질 겁니다. 그럼 저는 신 앞에 거짓을 고한 셈이-"
"무슨 상관이야, 넌 몰랐는데."
이안이 툭 끼어들었다.
필립이 입을 뻐끔댔다.
"그게 무슨…."
"넌 믿고 있는 대로 말 한 거니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
이안은 필립의 시선을 무시한 채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물론 사실은 너무 귀찮고 피곤해서 설명하지 않았던 거긴 하지만.
어차피 이런 말장난은 사제들도 곧잘 하는 짓거리였다.
"염려 말거라, 필립. 여신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것이야."
메브가 덤덤하게 타일렀다.
이윽고 체념하듯 눈을 질끈 감은 필립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그놈은 대체 뭐였던 겁니까?"
"그놈은 용의 대행자였다."
필립의 눈이 번쩍 뜨였다.
"용…? 용이라고요…?!"
#182화
"그래."
"…용의 대행자가 왜, 아니,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용이 나리를 노린답니까? 나리는 저 위대한 백금룡의 대행자인데요? 용을 죽인 것 때문에 원한이라도 사신 겁니까? 그럼 왜 그동안 아무런 말씀도-"
순간 입을 뻐끔댄 필립이, 이내 쏟아내듯 질문을 토해냈다.
숨 넘어가겠네, 새끼.
"나도 몰랐다. 날 쫓아오는 놈이 있다는 것도, 그놈이 용의 대행자라는 것도. 전부 마주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들이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알려줄 수 있겠느냐?"
한 손을 들어 필립의 말을 막은 메브가, 녹색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며 덧붙였다.
"네 말을 의심해서 묻는 건 아니야. 사실 나도 의문을 품고 있었다. 놈이 다루는 힘에서 신성력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해서, 나는 공허의 힘이리라 여겼지."
"그게 바로 용의 마력이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이안이 말을 이었다.
"나는 신성력과 혼돈력, 용의 마력을 모두 경험해 봐서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소. 게다가 그놈을 죽인 뒤에 나타난 기척도 분명 용이었지. 아마 경도 느끼셨을 텐데."
"그랬지. 공허의 존재이리라 여겼을 뿐…. 그래… 비단 공허의 괴물들만이 그런 존재감을 지닌 건 아니지. 용이라 해도 충분히…."
메브가 비로소 탄식을 흘렸다. 뭔가 말하려는 필립에게 다시 기다리라는 눈빛을 보낸 샬롯이 덧붙였다.
"하지만 타락용은 이미 죽었을 텐데. 네가 죽인 용의 잔해를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만."
"타후므리트는 죽은 게 맞아. 대행자를 보낸 건 다른 놈이다."
"어떤 놈인지, 짐작은 가?"
테사이아가 뒤이어 물었다.
그녀는 다른 일행들과 달리, 그저 흥미로울 뿐이라는 듯이 눈을 빛내며 술을 홀짝대고 있었다.
사실 이미 이름까지 알고 있었지만, 이안은 태연하게 어깨를 까딱였다.
"글쎄. 백금룡은 모든 용은 언젠가 필연적으로 광기에 물들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했었지. 타후므리트가 사랑에 눈이 멀었듯이."
술잔을 든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그 흑기사 놈은 본인을 사도라 칭하고, 자신이 섬기는 용을 참된 신이라 여겼다. 그러니까 이놈은, 자신이 신이라는 과대망상에 빠진 놈이겠지."
"그렇게 정신 나간 용이 있다면, 어째서 아직까지…."
"…역천룡."
읊조리던 샬롯의 말을, 필립의 얼빠진 목소리가 잘랐다.
일행들의 시선을 받은 그가 미간을 좁히며 덧붙였다.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니시겠죠? 다른 것도 아니고, 역천룡의 전설인데요. 신을 참칭하며 천상에 오르려 한, 희대의 악룡."
샬롯과 테사이아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빡였다.
물론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게임에서 라크마흐와 싸우기까지 했지만, 놈의 사연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사제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말해 주곤 하는 이야기다."
입을 연 건 메브였다.
"먼 과거, 대륙을 피로 물들이며 공포로 군림하던 악룡이 있었다. 그 힘이 어찌나 강대한지, 같은 용조차 그를 막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정도였다지. 그의 오만은 극에 달했고, 끝내 자신을 신이라 칭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종족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용들조차 그의 뜻을 따랐다더군."
포도주로 입술을 축인 그녀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놈은 끝내 천상에 오를 준비까지 했지. 교단의 용사들이 떨쳐 일어선 건 그때였다. 그들은 황금의 용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는 그 청을 받아들여 함께할 용들을 모았지. 그리고 악룡이 의식을 거행하는 그날, 결사대와 악룡을 숭배하는 이들 간의 전투가 펼쳐졌다. 수많은 용과 교단의 용사들이 목숨을 잃었지."
메브의 목소리가 아련해졌다. 먼 과거, 이 이야기를 듣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듯.
"그리고 그들의 희생과 염원이 천상에 닿아, 악룡에게 신벌이 내렸다. 그리고 황금의 용이 그의 날개를 꺾어 추락시켰지. 그리고 교단의 용사들이 목숨 걸고 용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신을 참칭한 악룡은 죽었고, 그 이름은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졌지. 그리고…."
어깨를 으쓱인 그녀가, 묘한 눈빛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인간의 편에 선 용들은 교단의 성자가 되었다. 악룡의 날개를 꺾은 용이 바로, 그 위대한 백금룡이지. 교단은 신과 용의 가호를 모두 받게 되었으며, 모든 인간이 한마음으로 빛을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시대가 열렸다더군. 그러니 항상 찬란한 여신과 교단의 성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라는 게, 내게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사제님의 말씀이셨다."
"재미있는 이야기네."
재미는 개뿔. 뻔하기만 하구만.
테사이아의 말에 이안이 소리 없이 코웃음을 치는 사이.
"이제 보니, 그게 단순한 전설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메브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맺었다.
이안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양이오."
"…제가 꺼낸 말이긴 합니다만."
필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생각할수록 믿기 어렵군요. 전설에 의하면 역천룡은 죽었습니다. 말 그대로 까마득한 과거의 존재이기도 하고요. 전쟁의 시대와 내전의 시대보다도 더 먼 옛날이요."
"글쎄. 내가 느낀 바로는 멀쩡히 살아 있던데."
"다른 용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백금룡은 용이 일으킨 문제에는 전력으로 개입할 권한이 있어 보였다. 다른 놈이 있다면 진작 처리했을 거야. 그의 시선을 피해 이런 짓을 꾸밀만한 용이 여럿일 것 같진 않다만."
"…그럼, 이안 나리께선 정말 그 고대의 악룡이 아직도 대륙 어딘가에 멀쩡하게 살아 있으리라 보신다는 거군요."
"일단은. 난 그딴 전설보다, 내가 직접 경험한 걸 더 믿어."
사실 이미 답을 알아서 죄다 끼워 맞춘 거긴 하지만.
"루 솔라여…."
비로소 탄식을 흘린 필립이, 술을 벌컥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런 엄청난 죄를 저지른 존재를, 왜 죽이지 않고 살려 뒀답니까?"
"죽음은 지나치게 자비로운 형벌이니까."
잔을 든 샬롯이 툭 내뱉었다. 필립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교단은 그 악룡이 산채로 고통받게 만든 거다. 가능한한 오래. 어쩌면, 영원히."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과거 우리 수인들이 섬기돈 신도,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처지가 되었으니까."
"아하…."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댄 필립이, 애꿎은 술잔만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럼 그리 확신하실만 하지요. 제가 무지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라. 나 역시 찬란한 여신을 섬기니까."
샬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메브가 탄식하듯 읊조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토록 오랜 형벌을 받으면서도 야욕을 버리지 않았단 말인가…. 놀랍고도 두려운 일이군. 지금에 와선 어떤 괴물이 되어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버리지 않은 수준이 아니지. 그 와중에도 자신의 신도를 만들고, 힘을 내릴 수도 있는 상황까지 만들어 낸 거니까."
이안이 덧붙인 말에 순간 굳어졌던 필립과 메브가, 이내 탄식했다.
"그렇겠군요. 왜 나리를 노린 건지도 알겠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백금룡에게 원한이 깊을 테니, 대행자를 죽이는 방식으로 복수하려는 거겠죠."
"이유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
잔에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켠 이안이, 빈 잔을 툭 앞에 내려놓았다.
"그보단, 그놈의 대행자가 하나가 아니리란 사실이 더 중요하지."
"...!"
테사이아를 제외한 일행 모두의 눈이 커졌다. 샬롯이 그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런 놈들이 더 있단 거냐?"
"날 죽이고 유일한 대전사가 될 거라고 지껄였으니까. 비슷한 처지인 놈이 여럿인 거야. 그 도마뱀이 내 목에 보상이라도 건 모양이지."
"훌륭하군… 또 그런 엄청난 것들과 싸울 수 있다니."
미소 짓는 샬롯을 제정신이냐는 듯 바라본 필립이, 이내 탄식했다.
"그래서 여기 계속 머물면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하신 거군요."
"그래. 놈들은 내 위치를 아니까. 아마, 제국을 경유했을 때 알려졌겠지. 내 신분을 정확히 밝힌 건 그때가 처음이니까. 어쩌면, 이미 다른 놈이 오고 있을지도 몰라."
"시간상으로도 이상하지 않군요. 어쩐지, 우연이라기엔 너무 공교롭다 여기긴 했습니다만. …잠깐만요. 맙소사, 루 솔라여."
문득 깨달은 듯 탄식한 필립이, 이안과 메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럼 제국에는 타락자뿐만 아니라, 역천룡을 섬기는 이교도들까지 암약하고 있단 거군요!"
당연한 얘길 굉장히 놀랍다는 듯이 하네.
이안이 헛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어쩌면 다 한통속일지도 모르지."
"그러진 않을 것이다. 백금룡께서 엄연히 존재 하신데, 어찌…."
"그거야 모를 일이지. 남몰래 공허의 고대신을 섬기는 사제도 있는 판국에, 역천룡이 대수겠소?"
툭 내뱉은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물론, 백금룡을 다시 만나면 물어볼 생각이었다. 정말 몰랐는지, 아니면 늘 그렇듯 알면서도 방조 중인 것인지.
만약 후자라면 그걸 빌미로 주머니를 왕창 털어주리라.
"하지만…. 으음, 그래.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중얼거리는 메브의 눈빛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분노나 결의보다는 암담함에 가까웠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시련을 앞둔 것처럼.
"그러니까, 요약하면 웬 미친 늙은 용이 이안을 노리고 있으니까, 더 개판이 되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거지?"
술만 홀짝이던 테사이아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알았어. 납득할 만한 이유였으니까, 받아들일게. 이야기도 꽤 재미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당분간은, 신분을 밝히는 것도 조심하는 게 좋겠군."
덧붙인 이안이 메브와 필립을 돌아보았다.
"우리 위치가 알려지면 그놈의 또 다른 하수인이 따라붙게 될 테니까. 평소라면 별 상관없지만, 이제 우리는 타락자들을 색출해야 하잖소."
"근처에서 소란이 일면 놈들의 귀에도 들어갈 테고, 늘 그랬듯 쥐새끼처럼 숨어 버리겠죠.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필립의 대답에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메브를 바라보았다.
"경도 마찬가지요. 경이 나를 돕고 있다는 것도, 이미 공공연히 알려지고 있을 테니까. 어쩌면 이미 타락자들의 귀에 들어갔을 수도 있소."
"…그래. 당분간은, 이름 없는 방랑 기사가 되어야겠구나."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샬롯이 묘하게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테사이아도 혀를 차고는 읊조렸다.
"아쉽게 됐네. 너희가 하는 걸 보면서, 다음번엔 나도 내 소개를 할 생각이었거든."
"…테사가요? 왜요?"
필립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종자가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해야지."
"주제를 모르는군. 네가 이안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샬롯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테사이아가 느긋하게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당연하지. 난 무려 원로 요정이라고. 요정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슬쩍 턱 끝을 치켜든 그녀가, 샬롯을 내려다보듯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존재가 함께한다는 걸 알리는 것만으로도, 이안에게 도움이 될 거야. 내 말이 틀려?"
"…제기랄."
그녀를 노려보던 샬롯이 나지막이 읊조리고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어이없다는 듯 웃음 지은 필립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신분을 감춰도 눈에 띄지 않는 건 어렵겠군요. 이 두 분이 계시니 말입니다. 뭔가 가짜 신분을…."
이안의 표정을 보고 잠시 말을 멈춘 필립이, 눈을 끔뻑이고는 덧붙였다.
"왜 테사를 그렇게 보십니까?"
"저 녀석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
"...?!"
샬롯이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테사이아도 설마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테사."
"응, 응…?"
아공간에서 꺼낸 은 브로치를 테이블 위에 놓으며, 이안이 덧붙였다.
"넌 이제부터 아이나스다."
"...?"
테사이아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안이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나와 경이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동안엔, 네가 일행의 얼굴이 돼라. 너는 아이나스 가문의 원로고, 우리는 네 호위가 되는 거야."
"그래도 괜찮을까…? 꽤 이름난 가문 같다며."
"이미 원한을 샀는데, 하나 더 얹어진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웬만해선, 놈들의 귀에 들어갈 일도 없겠고."
"그렇다면…."
멍하니 입을 벌리는 샬롯을 힐끔댄 테사이아의 얼굴에, 비로소 악동 같은 미소가 번졌다.
"할게. 되게 재미있을 것 같아."
"다른 사람들 앞에선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넌 원로니까. 아주 오만한 귀쟁이처럼 굴어야 돼."
"염려 말거라."
테사이아의 말투가 돌변했다.
말투만 변한 게 아니었다. 눈매는 서늘하게 가라앉고, 입꼬리는 끝만 살짝 올라갔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던 것보다도 훨씬 더 고고하고 오만해 보이는 미소.
비록 눈가에 멍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긴 했지만, 특유의 분위기를 헤치지는 못했다.
소리 없이 일어선 그녀가 천천히 몸을 기울여 손을 뻗었다. 테이블에 놓인 브로치를 집어 들며, 그녀가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기꺼이 그리해 줄 테니."
"훌륭하군."
이안의 대답에, 그녀의 미소가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렇지? 지금까지 본 것들을 좀 따라해 봤어."
"그건 절대 잃어버리지 마라. 만약 아이나스를 아는 누군가가 증명을 요구하면, 그걸 보여줘야 하니까."
"안 잃어버릴 자신은 없는데."
중얼댄 그녀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턱을 살짝 치켜들며 이안을 내려다본 그녀가, 브로치를 내밀며 느릿느릿 덧붙였다.
"그러니 이건 네가 잘 보관하거라, 이안."
"미치겠군…."
샬롯이 눈을 질끈 감는 가운데, 피식 웃은 이안이 브로치를 받아들었다.
곧 브로치를 아공간에 대충 던져 넣은 그가 덧붙였다.
#183화
"저 녀석을 중심으로 적당한 사연을 더해 봐라, 필립. 말을 지어내는 건 네가 잘하는 거니까."
"물론이죠. 염려 마십시오. 가장 어려운 부분이 해결되었으니, 나머지는 일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묘책이로군요. 검문을 피해 다닐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입니다."
싱글대며 대답한 필립이, 이윽고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이 되어서 한 번 더 여쭙는 겁니다. 두 분 나리와 샬롯 모두, 그 몸으로는 아주 힘든 여정이 되실 테니까요."
"나는 괜찮다, 필립."
"나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는 아주 가벼운 부상이야."
메브에 이어, 입맛을 다시던 샬롯도 대답했다. 이안은 대답 대신 자신의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상태는 전혀 좋지 않았다. 지금은 거동만 간신히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눈을 감으면 바로 곯아떨어지리라. 본래라면 적어도 며칠은 더 요양이 필요했다.
"나리…?"
"…이동하면서 쉬면 돼."
***
시선을 거둔 이안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전에 보니 마차 지붕이 아주 넓고 쾌적해 보이더군."
"당분간 호위는 내가 전담하겠다. 말에도 내가 탈 테니, 이안 너는 휴식만 취하도록 해."
메브가 결연하게 덧붙였다.
샬롯이 잔을 들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교대로 타지. 마차에만 앉아 있으면 좀이 쑤시니까."
그녀의 눈을 마주 본 메브가 흐릿하게 미소 짓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불쑥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나는?"
"감히 말에 탈 생각은 하지도 마라, 귀쟁아. 싸움도 못 하게 된 주제에."
단호하게 내뱉은 샬롯이 필립 쪽을 턱짓했다.
"네 자리는 마부석이니까, 이 녀석과 상의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샬롯."
테사이아의 말투가 귀부인처럼 나긋나긋해졌다. 미간을 찌푸리는 샬롯의 시선을 느긋하게 마주하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아이나스 가의 원로인 내가, 어찌 마부석에 앉는단 말이냐?"
"…제기랄."
탄식한 샬롯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테사이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부석은 네 자리다. 나는 마차와 말에만 탈 예정이니 그리 알거라. 하면, 나는 이만 잠자리에 들겠다. 때가 되면 깨우거라."
이안을 향해 다리를 살짝 굽히며 인사한 테사이아가 그대로 침대로 걸어가 누웠다.
신이 잔뜩 났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잔을 내려 놓은 샬롯이 뒤따라 일어섰다. 테사이아를 침대에서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이어진 둘의 소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안이 손에 낀 반지를 빼서 앞으로 내밀었다.
"미리 떠날 준비를 끝내 둬라, 필립. 이동 중에 마실 술도 잔뜩 실어두고. 상하지 않을 녀석들로."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반지를 받아들며 일어선 필립이 덧붙였다.
"글루미르의 주민들에게 남기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자고 일어나니 우리가 모두 떠나고 없으면, 다들 상심이 클 텐데요. 제가 마구간지기에게라도 따로 나리의 전언을 남겨 두겠습니다."
"별걸 다…."
코웃음 치다 잠시 말을 멈춘 이안이, 이윽고 앞에 놓인 잔을 쥐며 내뱉었다.
"루 사드는 구원 받은 게 아니라고 해. 그저 한고비를 넘겼을 뿐, 더 큰 어둠이 몰려오고 있다고."
?샬롯과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필립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이안과 메브의 건조한 눈빛을 번갈아 바라본 그가, 이윽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전하겠습니다."
다음 날, 일행은 예정대로 도시를 떠났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발을 들일 때만큼이나 조용하게.
일행이 탄 마차는 관도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했다.
국경을 넘을 때까지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제국제 마차는 길이 없는 곳에서도 나쁘지 않은 승차감을 자랑했다. 과거 천칭 상단의 마차는 물론이고, 북부인들이 최선을 다해 만들어 줬던 마차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물론 승차감이 나빴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을 터였다.
이안은 도시를 벗어난 순간부터 잠들었으니까. 정말 지붕에서 자려는 걸 일행 모두가 만류한 덕분에, 그나마 마차 내부는 그의 차지가 되었다.
지붕에는 대신 테사이아와 필립, 샬롯이 번갈아 올라갔다.
꼬박 하루가 지나도록 이안은 깨어나지 않았다. 식사를 한 끼 할 때만 잠깐 눈을 떴고, 그나마도 식사를 끝내자마자 바로 다시 마차에 올라 모포를 덮어썼다.
그는 밤중에 일행이 고블린 무리와 전투를 치르는 동안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겨울잠에 든 곰처럼.
그 와중에도, 일행은 아무렇지도 않게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루 반나절쯤 지났을 때부터는 대화도 스스럼없이 나누기 시작했다. 다소 시끄럽더라도 이안이 깨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다들 확실히 알게 된 덕분이었다.
"전부터 궁금하던 게 있습니다."
"말 해. 뭔데?"
"뱀파이어로 사는 건 어떤 느낌입니까? 지금과는 많이 다른가요?"
"많이 다르지.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이 훨씬 좋다는 거야. 배고프지 않다는 부분에선 특히."
물론, 떠들어 대는 건 대부분 필립과 테사이아였다.
"피에 대한 굶주림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 난 항상 배고프고 목마른 상태였으니까. 피를 마셔도 단지 굶주리지 않게 됐을 뿐이지, 결코 포만감을 느끼지는 못했지. 지금은 그게 더 확실해졌어. 내가 포만감인 줄 알았던 건, 그저 목마르고 배고프지 않은 상태였을 뿐이야."
"항상 배고프고 목마르다라…. 그야말로 참기 힘든 충동이었겠군요. 그걸 견디셨다니, 대단하십니다."
"너도 여차하면 죽게 될 상황이라면 참게 될 거야, 주근깨. 어쨌든, 여한은 없어. 마지막엔 이안의 피를 실컷 맛봤으니까."
"이안 나리의 피를… 드셨다고요?"
"그래. 내 인생 최고의 맛이었지. 물론 고기도 맛있고 술도 맛있지만, 그것들이랑은 비교도 안 돼.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그런데, 왜 그렇게 봐?"
"…설마, 아직도 피를 마시고 싶은 충동이 남은 건 아니시겠죠."
"들켰네. 보기보단 눈치가 빠르구나, 필립."
"...."
"농담이니까, 그 반지 내 쪽으로 내밀지 마."
테사이아는 새로운 일행과도 아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필립은 기본이고, 심지어 메브와도 그랬다.
그녀에게 틈틈이 글자와 예법을 배우는 데다가, 밤에는 얻어터지기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고 봐…! 내가 언젠가 한 번은 꼭 받은 걸 전부 몰아서 갚아 줄 거니까."
메브가 휘두른 세검에 손목을 얻어맞고 검을 떨어뜨린 테사이아가, 얼얼한 손목을 어루만지며 씹어 뱉었다.
그나마 얼굴을 얻어맞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약이 바짝 오른 듯 눈가에 핏줄까지 돋아난 채였다.
세검을 검집에 미끄러뜨리듯 돌려놓으면서, 메브가 미소 지었다.
"배움이 빠르군. 한 5년쯤 지나면 정말 내게 한 방 먹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 칭찬이 아니라 놀리는 거지?"
"그럴 리가. 진심이다."
"그치만, 우린 그 전에 헤어지게 되잖아."
"그렇지."
"...."
"애석하게 됐네, 귀쟁아. 하지만 내가 돕는다면 시간이 더 단축될지도 몰라."
모닥불을 뒤집던 샬롯이 툭 끼어들었다. 슬쩍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은 그녀가 덧붙였다.
"그러니 언제든 말만 해라. 최선을 다해 도와줄 테니까."
테사이아가 코웃음을 흘렸다.
"꿈 깨, 야옹아. 그 핑계로 날 두들겨 팰 생각인 걸 모를 줄 알아? 네가 덤비면 도망만 다닐 거야. 너도 알겠지만, 난 그걸 가장 잘해."
"...."
샬롯이 입맛을 다시는 가운데, 필립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럼 저는 어떻습니까? 제 팔이 다 나은 다음에요."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주근깨. 내가 너한테까지 질 것 같진 않은데."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자신만만하네. 좋아. 부상이 완벽하게 나으면 덤비도록 해. 그 도전, 받아 줄 테니까."
"제가 도전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필립은 검술만큼이나 방패술도 뛰어나지."
고개를 끄덕이며 내뱉은 메브가, 테사이아를 마주 보았다.
"분명 배울 게 있을 거다. 테사."
"하지만 난 방패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걸."
"…왜요?"
필립이 미간을 찌푸렸다.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안 쓰잖아. 너만 빼고."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이분들이 하나같이 특출나신 겁니다. 방패는 공격과 방어 양면에서 아주 훌륭한-"
"약해 보여."
"-어찌 보면 최고의, 뭐라고요?"
"하지만, 뭐. 네가 날 이기면, 가르쳐 주는 걸 허락할게."
"...."
멍하니 입을 벌렸던 필립의 시선이, 이윽고 샬롯 쪽으로 돌아갔다.
"왜 샬롯이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이제야 알겠군요. 이분은 정말,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재주를 타고 나셨어요."
"그게 귀쟁이의 본성이니까."
샬롯이 심드렁하게 덧붙인 말에,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맞아. 심지어 난, 귀쟁이 중의 귀쟁이지."
"전 마족이기도 하고."
"그렇지. 이안의 표현에 따르면…."
문득 말을 멈춘 테사이아의 시선이 홱, 어둠 너머로 돌아갔다.
그녀의 눈가에 핏줄이 돋아나고 동공이 확장된 것도 잠시.
"마물이다."
"…또요?"
이어진 속삭임에, 필립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래. 어제랑 비슷하네. 작고 귀여운 것들."
"그것들을 귀엽다고 생각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혀를 찬 샬롯과 메브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섰다.
테사이아와 함께 마차에 오르며 필립이 중얼댔다.
"이틀 연속 습격이군요. 아무리 관도를 벗어났다지만… 확실히 비정상적인 수준입니다. 이안 나리 말씀대로 흡혈 여제의 저주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아니라면 뱀파이어들의 영향력이 사라지면서 마물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이거나요."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빨강 머리랑 야옹이가 알아서 다 처리할 텐데."
마차 지붕에 가볍게 올라선 테사이아가 가장자리에 걸터 앉았다.
"우린 마차만 잘 지키면 돼. 이안이 깨어날 일 없게."
곧 어둠 너머에서 크고 작은 숨소리가 번졌다.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마물 특유의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마부석에 앉은 필립이, 이윽고 심드렁하게 읊조렸다.
"보아하니, 그럴 일은 없겠군요."
그의 말대로, 단 한 마리의 마물도 마차 근처에 도달하지 못했다.
***
"그런데 말야, 샬롯."
어느덧 사흘째였다.
마차 지붕에 축 널브러져 있던 테사이아가 문득 입을 열었다.
샬롯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내뱉었다.
"징그러우니까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네 옆에 있는 녀석이나 데리고 놀아."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필립을 슬쩍 일별한 테사이아가 고개를 저었다.
"슬슬, 주근깨한테 듣고 싶은 얘긴 다 들었어."
"그래서, 놀아달라고?"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네 덩치가 전보다 더 커진 것 같아서."
"…그게 또 무슨 헛소리인지."
"확실해. 물론 넌 전에도 좀 멍청해 보일 정도로 근육질이긴 했지만."
"흠…."
그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샬롯이 가르릉댔다.
"글쎄.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
"나는 확실히 알겠군."
"...!"
마차 안에서 번진 목소리에, 눈을 치켜뜬 샬롯이 득달같이 고개를 돌렸다. 지붕 옆으로 상반신을 늘어뜨린 테사이아도 마차 문에 달린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언제 깼어, 이안?"
"방금."
짧게 대답한 이안이, 여전히 누운 채로 마부석의 샬롯을 마주보았다.
"요 몇 달 사이에 근육이 훨씬 더 많이 붙었군. 육체가 극한까지 단련된 걸지도 모르겠어."
"도끼가 전보다 가벼워진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긴 했다만…."
샬롯이 자신의 커다란 손아귀를 내려다보며 중얼댔다.
이안이 피식 웃음 지었다.
"잘 됐지. 고향에 돌아가면 부족을 손에 넣어야 할 테니까."
"...!"
"너희는 기본적으로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동족끼리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냐?"
"그럴 리가. 강자가 모든 권리를 가지는 건 당연한 순리다. 그래… 어쩌면 내가, 정말 일족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을지도…."
샬롯이 생각에 잠긴 사이.
"몸은 좀 괜찮은 것이냐, 이안?"
말을 마차에 나란히 붙이며 메브가 물었다. 상반신을 일으켜 등받이에 기대앉은 이안이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현기증도 두통도 없었고, 몸도 쑤시지 않았다. 이제야 몸이 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테사이아의 반대편 창문으로 고개를 떨군 필립이, 거꾸로 이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다행입니다. 편히 쉬십시오. 여정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계속 없고 싶으면, 문제없단 얘긴 하지 마라. 네가 그딴 소릴 할 때마다 뭔가 일어났으니까."
"넵."
"그런 의미에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한차례 돌아본 이안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이제, 마저 쉬고 싶은데."
메브와 샬롯이 시선을 돌리고, 테사이아와 필립도 마차 지붕으로 휙하니 사라졌다.
비로소 마차 밖의 풍경이 드러났다.
바닥의 짐가방에서 육포와 술병을 꺼내면서, 이안은 전경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꽤 남쪽으로 내려온 모양인데도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생기 없이 이파리를 드리운 나무들. 따듯하지만 텁텁한 공기.
'슬슬, 2챕터의 끝이 머지않았네.'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게임에서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그가 만들어 낸 변화가 적지 않았지만, 큰 흐름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터였다.
여제가 세상에 새로운 균열을 새기기까지 했으니, 시기상으로는 오히려 더 빨라졌겠지.
글루미르와 루 사드의 귀족들이 그의 전언을 귀담아들으리란 기대는 전혀 들지 않았다. 설사 그런다 해도 루 사드에 국한된 변화일 터였다.
전쟁은 계속되리라. 검은 벽의 광기가 변방 전체를 물들일 때까지.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거지.'
생각하며 술병을 입에 가져간 이안이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댔다.
눈은 여전히 창밖으로 향한 채였지만, 그의 시선은 오로지 그에게만 보이는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태창.
마법사라고는 볼 수 없는 능력치들을 체념하듯 훑던 그의 시선이, 비로소 스킬 창으로 향했다.
이게 본론이었다.
'…이만하면 오래 버티긴 했다만.'
포인트를 사용할 생각이었으니까.
방대하게 펼쳐진 스킬 트리를 응시하는 이안의 눈에, 미뤄 왔던 여러 갈등이 오갔다.
갈수록 명확해지는 각 속성의 장단점. 한정적인 포인트와 이미 만성이 된 마력 부족.
"...."
답이 없는 고민을 이어나간 끝에, 이안은 몇 개의 새로운 마법을 익혔다.
공통 스킬이나 비전은 단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건만, 그동안 모은 포인트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졌다.
?"후…."
이윽고 상태창을 닫는 그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번졌다.
더 망캐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예 틀린 생각은 아닐 터였다. 이번에도 결국, 여러 가지 속성을 골고루 올렸으니까.
물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애초부터 마법사로서는 차고 넘칠만큼 망한 상태였으니, 이 길을 끝까지 밀어 붙일 수밖에.
'하다가 멈추면 아니 함 만 못한 법이지….'
술을 몇 모금 마신 그는, 잡념을 떨치며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곧 맞지 않는 검집에 담긴, 불길하게 생긴 검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집 한복판을 쥔 손아귀를 타고, 흑검의 사념이 전해졌다.
증오와 분노.
하지만 저번처럼 그를 향해 곧바로 이빨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배운 게 있는 모양이지.
슬쩍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비로소 정보창을 열었다.
세 번째 사도의 흑검. 간만의 유일 등급 무기였다.
#184화
이안은 그 아래로 이어진 글자와 숫자들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단죄의 검에 필적하는 공격력. 심지어 내구도는 더 높았고, 피를 먹으면 일정 비율로 내구도가 회복되는 부가 능력까지 있었다. 몇 가지 추가적인 능력치 보정. 당연하게도 스킬 역시 하나 내장되어 있었다.
마력 탐지나 빙하 방벽처럼 활성화할 수 있는 액티브 스킬, 역천의 송곳니.
십자 막이를 타고 피어오르던 검붉은 아지랑이를 떠올린 이안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보는 눈이 많을 때 썼다간, 타락자로 몰리기 딱 좋겠는데.'
물론, 옵션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마검다운 페널티도 붙어 있었다.
공격 시마다 낮은 확률로 2레벨의 광란 상태와 착란 상태를 유발했고, 전투가 지속될수록 그 확률이 올라갔다. 정신력도 조금 떨어졌고, 결정적으로 역천의 송곳니를 활성화하려면 혼돈력이 필요했다.
본래는 캐릭터를 타락시켜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였으리라.
물론 혼돈의 파편을 품은 이안에게는 문제 될 것 없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그의 정신력은 조금 떨어지는 정도로는 티도 나지 않을 만큼 높았고, 상태 이상에 걸리더라도 큰 문제 없이 견뎌 낼 수 있을 터였다.
애초에 그의 저항력을 뚫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건 저주 받은 검이다, 이안."
메브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어느새 마차가 조용해졌고, 그녀 뿐만 아니라 샬롯도 꺼림칙한 눈으로 흑검을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네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거야. 불필요한 오해도 받게 되겠고."
"알고 있소. 이 녀석에게 잡아 먹힐 일은 없으니 걱정 마시오. 그리고 이걸 뽑는 건, 목격자를 남길 일이 없을 때 뿐일 거요."
메브를 돌아본 이안이 덧붙였다.
"불필요한 오해는,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지긋지긋 하니까."
"네가 그리 말한다면야…."
읊조린 메브가 시선을 돌리는 사이, 이안은 흑검을 다시 아공간에 밀어 넣었다. 우웅, 손아귀에서 울림이 번졌다.
싫으면 어쩔 건데.
코웃음 친 이안이 손을 놓았다. 흑검의 울림이 씻은 듯 사라졌다.
가볍게 손을 턴 그가, 이윽고 마차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국경을 넘기 전에, 산이나 계곡을 지날 일이 있냐?"
"예. 있을 겁니다."
필립이 곧바로 대답했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지도를 꺼내는 모양. 이안이 덧붙였다.
"지하로 통하는 땅굴이나 동굴을 찾아보자. 마물 둥지여도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좋겠군. 그만큼 깊을 테니까."
"다행히 한동안은 산과 계곡을 여럿 지나게 될 겁니다. 일단은 밀입국이니까요. 그런데…."
한쪽 창문 위로 고개를 빼꼼 늘어뜨린 필립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동굴이나 땅굴은 왜요?"
"너희들과 신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해서."
"...?"
필립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반대쪽 창가로 테사이아도 슬며시 얼굴을 드리웠다. 그녀의 짙은 녹색 눈동자를 일별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암흑 성물을 봉인할 거다."
"...!"
정확히는 봉인이 아니라 각인이지만. 필립이 놀란 듯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탄성을 흘린 테사이아가 말했다.
"그때 그거? 나도 구경해도 돼?"
"안 돼. 나 혼자서 할 거다."
"단호하네…."
"위험해서 그러시는 걸 겁니다. 근처에 있기만 해도 혼을 빼앗길 수도 있는 데다, 어떤 괴현상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으니까요."
필립이 떨리는 목소리로 첨언했다. 과거, 어둠에 잡아먹힐 뻔한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메브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런 위험한 의식을, 혼자 치뤄도 괜찮겠느냐?"
"괜찮소. 오히려 그러는 게 마음이 편하지."
메브가 걱정스럽다는 듯 침음하는 가운데,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길로 접어들면 계속 주위를 수색해 보겠다. 하나 정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거야. 마물들이 모여들고 있으니까."
"그럼 부탁하지."
내뱉은 이안이 술병과 육포를 들고 일어섰다. 창문 밖으로 몸을 빼 지붕 위로 올라선 그가, 테사이아와 필립을 돌아보았다.
"내려가라. 아이나스 가의 원로께서, 마차 지붕에 타고 계시면 안 되지."
"그럼, 사양하지 않으마."
씩 웃은 테사이아가 묘기 부리듯 마차 창문으로 쏙 들어갔다.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넌 저 녀석의 시종 아니냐?"
"아, 주무시는 사이에 역할이 바뀌었습니다. 그건 샬롯이고, 전 말단 경호병이죠."
"그래서, 안 타겠다?"
"아, 타란 말씀이셨군요. 알겠습니다."
필립이 꾸물대며 몸을 돌려 마차의 문을 열었다.
샬롯의 혀 차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마차 지붕에 벌러덩 드러 누웠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하늘이 그의 눈동자에 가득 맺혔다.
먹구름은 마차와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 흐릿한 어둠을 더 멀리까지 퍼뜨리려는 듯이.
***
루 사드, 글루미르.
다각- 다각-
마차에 앉은 글루미르의 영주 대리, 벨란 자작 부인의 얼굴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내내 얼씬도 않던 미로 저택으로 향하는 중임에도, 그녀는 작은 불만조차 토로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철걱- 철그럭-
금실로 원을 수놓은 흰 로브를 걸친 백마 탄 기수들이, 마차를 감싼 채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얼굴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이 두건을 눌러쓴 그들은,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음에도 덩치가 거대했다.
걸음을 옮기거나 움직일 때마다 쇳소리가 나는 걸 보면, 로브 아래에 갑옷을 걸친 게 분명했다. 고삐를 쥔 손도 하나같이 두툼한 쇠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글루미르에 발을 들인 이래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작 부인은 감히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거나 이름을 물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교단의 정화자였으니까.
모든 어둠을 멸하며, 그에 있어 일말의 자비와 타협도 없다고 알려진, 찬란한 여신의 칼날들.
온갖 공포스러운 소문을 몰고 다니는 이들이, 글루미르를 찾은 것이다.
자작 부인이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지금 그녀와 마주 앉은 사제 덕분이었다.
마찬가지로 교단의 로브를 걸친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린 듯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 갑옷을 걸치지 않은 듯 다소 왜소한 체구.
하지만 자작 부인은 그의 눈 역시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 사제가, 말로만 듣던 이단 심판관이라 내심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 악명 높은 정화자들을 수족처럼 부릴 리 없었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인."
사제가 부드럽게 말한 건 그때였다. 어깨를 크게 들썩인 자작 부인이, 곧바로 억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사, 사제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저 저주받은 저택에 발을 들이는 게 두려워서요."
"그러셨군요."
사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자작 부인은 땀이 베여나오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이들이 교단의 정화자라는 걸 안 순간, 그녀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고해 성사하듯 털어놓았다.
글루미르에 일어난 일을 알고 찾아온 게 분명했으니, 그러지 않으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
그녀는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려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지금 이렇게 이들과 동행하는 처지가 됐다.
"이런…."
마차 밖을 응시하던 사제의 미소가 슬며시 흐려졌다. 미로 저택 인근, 새카맣게 변한 땅과 악취를 뿜으며 썩어들어가는 시체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구역질을 간신히 참으면서, 자작 부인이 내뱉었다.
"위대한 백금룡의 대행자와 붉은 기사가 만들어낸 광경이라더군요. 말씀드렸다시피, 그분들이 글루미르의 모든 어둠을 뿌리 뽑으셨답니다."
"과연. 들은 그대로로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밖을 응시하던 사제가, 곧이어 덧붙였다.
"그분들이 떠나신 지 얼마나 됐다고 하셨었죠?"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전혀 듣지 못하셨고요?"
"무, 물론이죠. 전언만을 남기신 채 홀연히 사라지셨습니다."
"더 큰 어둠이 몰려오고 있다…."
"예, 바로 그 말씀이요."
자작 부인이 손을 꼼지락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복 검증. 역시, 이 자는 이단 심판관이 분명했다.
곧 마차가 멈췄다. 정화자들이 말에서 내리는 가운데, 자작 부인도 주춤대며 마차에서 내렸다.
저택은 과거의 아름다움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검게 물든 땅. 곳곳이 허물어진 담장. 앙상하게 바짝 물러 붙은 정원의 식물들과, 흔적조차 남지 않은 저택.
이것이 본모습이라고 말하듯, 불길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보다시피…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저주 받을 마족들의 압제에서 벗어난 증거니까요. 또한 백금룡의 대행자께서 이룩하신-"
"저 마차에는, 제가 부탁드린 것이 실려 있습니까?"
마차에서 내리며 뒤를 돌아본 사제가 말을 잘랐다.
다가오는 짐마차를 눈에 담은 자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드린 흑기사의 시체일 겁니다. 마찬가지로 위대하신 백금룡의…."
내뱉던 자작 부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문득 그녀를 돌아본 정화자의 두건 아래로, 황금빛 안광이 번뜩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자작 부인이 금방이라도 주저 앉을 듯 다리를 떠는 가운데.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사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작 부인의 시선을 받은 그가 싱긋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저 짐마차 까지만, 저희들에게 넘겨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사제님…."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떠나셔도 좋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들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숙인 자작 부인이 도망치듯 마차에 올랐다. 로브를 걸친 채 우두커니 선 정화자들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못한 채였다.
다각- 다각-
곧 짐마차가 사제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차에서 내린 마부가 엉거주춤 인사하고는, 자작 부인이 탄 마차의 마부석에 올라탔다.
자작 부인의 마차가 멀어졌다.
정화자들이 짐마차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느긋하게 그들의 뒤를 따른 사제도, 마차에 실린 흑기사의 잔해를 눈에 담았다.
찢겨지고 부서져 원형을 알아 보기 힘든 판금 갑옷. 토막난 데다 새카맣게 타버린 시신.
그 사이로 얼핏 드러난 비늘의 흔적을 눈에 담던 사제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보십니까?"
"…적어도 뱀파이어는 아닙니다."
정화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비늘이 돋은 흔적이 있습니다. 아마, 전혀 다른 존재였던 것 같군요."
여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또 다른 정화자가 그 말을 받았다.
"이안 호프는 이 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도시를 서둘러 떠난 것이겠군요. 알려진 바와 달리 뱀파이어의 잔당이 아니었으니까. 이 놈은 그를 노린 겁니다."
"그렇군요…."
사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이들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질문을 던진 건, 그저 이들이 어디까지 알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려는 과정일 뿐이었다.
몸을 돌린 사제가 저택으로 발을 들였다. 여섯 명의 정화자들이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말라 비틀어진 정원. 저택이 있던 자리는 전체가 땅 속으로 움푹 꺼져서, 폐허 동굴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파편으로 난장판이 된 일대를 훑는 사제의 눈동자에 황금색 빛이 아른거렸다.
"적어도, 알려진 만큼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이는군요. 게다가…."
읊조리던 사제가, 이윽고 늘어선 정화자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우상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용살자가 그 물건을 손에 넣은 것 같군요."
"역시…."
정화자들 사이에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희미한 탄식이 번졌다.
이들은 교단의 정화자들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루 솔라를 섬기는 자들이었다. 사제의 가름치에 깊이 감화되어, 그와 뜻을 함께하고 있기까지 했다.
빛이 더 찬란하게 빛나기 위해서는 그만큼 짙은 어둠이 필요하다는. 신앙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진정한 꽃을 피우리라는.
거기다 흡혈 일족이 교단에 복속된 존재였음을 알고 있는 소수의 인원에 포함된 자들이기도 했다.
"백금룡, 그 위선자가 그동안 감춰온 야욕을 드러낸 게 분명해졌습니다."
누군가가 내뱉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덧붙였다.
"대행자를 앞세워 교단의 뜻에 간접적으로 반기를 든 겁니다."
정화자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요 동의를 표했다. 그들은 백금룡을 믿지 않았으며, 동시에 혐오했다. 루 솔라를 섬기는 건 인간으로 충분하며, 그녀의 뜻과 기적을 행하는 것 역시 인간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기 때문이었다.
한때 신의 자리를 대신했던 고대의 망령은,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마검을 정화했다는 증언 역시, 눈속임이 분명합니다. 그는 야만인들의 신과 엄정한 여신의 편애를 받고 있으나, 백금룡의 뜻을 대행할 뿐 찬란한 여신의 가호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 또한 백금룡의 뜻일지도 모릅니다. 거짓된 구원자를 만들어 내려는."
사제는 그들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가 입을 열 필요는 없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충분했다.
백금룡은 그들로서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지만. 그의 대행자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곧, 누군가가 내뱉었다.
"백금룡의 대행자는, 제거해야 합니다."
#185화
"동의합니다. 그는 결국 교단의 걸림돌이 될 겁니다."
"찬란한 여신의 종에게 이름 따위는 필요치 않습니다. 모든 영광은 오롯이 주의 것. 거짓된 선지자나 구원자는 사라져야 마땅합니다."
이어진 목소리에, 사제의 입꼬리가 설핏 말려 올라갔다.
이런 이유들이 저들의 모든 본심은 아닐 터였다.
사제가 볼 때, 이들은 이안 호프를 질투하고 있었다.
출신조차 불분명한 일개 용병이, 자신들보다 훨씬 더 신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그런 결정을 내릴 시기는 아닌 것 같군요."
그럼에도, 사제는 그들의 편을 들지 않았다.
"결론은 모든 게 확실해진 후에 내려도 늦지 않습니다. 어쩌면 정말 세간의 평가대로 대륙을 구원할 위대한 영웅일지도 모르니."
"...."
"그보다는 그를 찾을 방법을 모색하는 게 순서입니다. 그는 매번 홀연히 사라져 버리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으니."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제의 말이 핵심을 찔렀기 때문이다. 이대로면 그들은 이안 호프의 흔적만을 따라다니게 되리라.
"북쪽으로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는 전쟁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
"서쪽 국경을 지나 아겔 란으로 향했을지도 모릅니다. 붉은 기사가 그곳 출신이니, 반란으로 멸망하기 직전인 고향을 외면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아직 백금룡이 그에게 어떤 사명을 내렸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것이 변방과 관련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가 제국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고민하는 척 턱을 어루만진 사제가 내뱉었다.
"아겔 란. 혹은 제국이라…. 여기서 남하했다면, 제국 서부에 발을 들이게 되겠군요."
"목적지가 그곳이 아니라도, 한 번은 라클리프에 들르게 될 겁니다. 제국 서부의 중심이며, 길이 교차하는 요지이기도 하니."
"그럼 세 무리로 나누도록 하죠. 둘은 서쪽으로. 둘은 남쪽으로. 그리고 둘은 나와 함께 움직입니다. 나는 본국으로 돌아가, 저 흑기사의 정체를 밝혀낼 생각입니다."
상황을 정리한 사제가 손짓했다.
서쪽으로 가게 된 둘이 짧게 혀를 차며 물러나고, 사제와 동행하게 된 둘도 마찬가지였다.
남쪽으로 향하게 된 둘의 반응은 판이했다. 하나는 만족스럽게 뒤로 물러났으나, 또 하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머뭇거린 이는, 다른 정화자들이 떠드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자였다.
모른 척 두 무리를 돌아 본 사제가 덧붙였다.
"우상과 마검을 회수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와 적대하지 마세요. 그는 백금룡의 대행자이자 북부의 초인이며, 교단의 다수가 주목하는 용사입니다."
"...."
정화자들의 숨결이 가라앉았다. 두건 아래로 드러난 눈빛들이 서늘했다. 사제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사사로운 감정은 버리길 바랍니다. 신분도 감추도록 하세요. 혹여라도 외부에 교단 내부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이는 건 곤란합니다."
"...."
"그럼, 이만 물러들 나세요."
정화자들이 몸을 돌렸다.
사제는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는 저들이 자신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이안 호프를 찾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를 죽이려 들 터였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오히려 그래주길 바라며 덧붙인 말이었으니까.
물론, 저들이 이안 호프를 죽일 수 있으리란 기대는 없었다. 오히려 이안 호프가 저들을 죽이겠지.
교단과 이안 호프의 관계에 균열을 만들기엔 충분한 계기였다.
당장은 여러 신과 교단의 관심을 받는 존재이지만.
크고 작은 마찰과 그로 인한 희생이 반복되다 보면, 그는 신의 축복을 받은 초인이 아니라 교단의 위험인물로 분류되게 될 터였다.
사제가 본격적으로 나서는 건 그때부터이리라.
"이별은 아쉽지만…. 당신은 끝까지 도움이 되는군요. 여제."
폐허를 돌아보던 사제가 눈을 감으며 읊조렸다. 곧 그의 닫힌 눈꺼풀 위로 은은한 황금빛이 감돌았다. 곧 그의 감은 눈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사제가 먹구름 자욱한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감은 눈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제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당신이 남긴 균열조차도 말입니다."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잘 접힌 매끄러운 손수건이었다. 표면에 금실로 수놓은 진언이 빽빽했다. 사제가 손수건을 펼쳤다.
천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무언가의 잔해로 보이는 새카만 조각이었다.
모습이 드러난 순간 조각 내부에서 희미한 보랏빛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조각이 재가 되어 바스라 지면서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솨아아-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본 사제가, 이윽고 다시 눈을 뜨며 몸을 돌렸다. 빛이 가라앉는 그의 눈동자에 만족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수많은 변수들이 있었지만, 끝내 의회가 원하던 결과가 만들어졌다.
이제 대륙은 또다른 고난과 어둠을 마주하게 되리라.
"그러면 결국… 더 절실하게…."
문득 번쩍인 먹구름이 사제의 앞에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우르릉, 뒤이어 마른천둥이 울려 퍼졌다.
멀어지는 사제는, 끝내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어둠 사이로, 걸어 나오는 샬롯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절벽을 찢은 것처럼 뚫린 동굴.
입구를 나서는 그녀의 얼굴과 한 손의 도끼에서 짙은 푸른색의 체액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의 왼손에 질질 끌려 나오는 동굴 트롤의 체액이었다. 덩치가 다소 작은 걸 보니 새끼인 모양이었다.
"이제 저 안에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 이안."
샬롯이 동굴 옆 공터에 대충 겹쳐둔 트롤 시체 사이에 놈을 던져 넣으며 말했다. 무려 여섯 마리. 이 정도면 동굴 트롤 중에서도 대가족이라 할 수 있었다.
건너편 나무에 기대 있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별 말씀을. 꽤 깊은 동굴이니, 충분할 거다."
"잘 됐군."
미소 지은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예상과 달리 일주일 만에 간신히 찾아낸 적합한 동굴이었다.
이번에도 허탕이었다면 제국 땅에서 각인 의식을 치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으리라.
"고생하셨습니다, 샬롯."
이안을 앞서 달려간 필립이 천을 내밀며 말했다. 왼팔의 붕대를 푼 덕분에 움직임이 한결 자연스러웠다. 샬롯이 그가 건넨 천으로 도끼 날을 닦는 사이.
"꿈도 꾸지 마라."
은근슬쩍 옆으로 따라붙은 테사이아를 돌아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아윽-"
휙 달려 온 샬롯이 팔뚝으로 테사이아의 목을 감싸 들어올렸다. 팔딱대는 그녀를 무시한 채, 샬롯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염려 마라. 동굴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할 테니까."
"야영지는 마차 옆에 꾸리겠습니다."
샬롯이 팽개친 도끼를 들며 필립이 덧붙였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메브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등진채 걸음을 옮겼다. 붓으로 그린 듯한 동굴 입구가 가까워졌다.
화륵-
손에 든 횃불에 불이 붙었다.
다소 좁아 보이는 입구와 달리,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동굴 내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천장이 높은 걸 보니, 본래는 자연 발생한 동굴이었던 게 분명했다. 이곳에 둥지를 튼 트롤들이 가꿨을 뿐.
"훌륭하군…."
이안은 이윽고 나타난 공동에서 걸음을 멈췄다. 입구는 보이지 않았고, 공간도 적당히 넓었다. 울퉁불퉁한 벽면 곳곳에, 트롤들이 판 것으로 보이는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샬롯의 말처럼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굴 밖의 기척 역시도.
이 정도면 일행이 공허의 속삭임에 홀릴 걱정은 없으리라.
턱.
횃불을 바위 사이에 꽂은 이안이, 음영이 아른거리는 바닥에 걸터앉았다.
아공간에 들어갔던 그의 손에, 마력을 머금은 보관함이 들려 나왔다.
상자 표면에 정교하게 새겨진 주문 회로가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이안이 곧바로 상자를 열었다.
"...."
아래로 몇 개의 뼈가 이어 붙은, 눈구멍이 네 개나 뚫린 작은 두개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횃불의 불빛이 잦아들고, 주위의 어둠이 한층 짙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안을 응시하는 눈구멍 속의 심연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댔다.
이해할 수 없는 속삭임이 사방에 메아리쳤다. 기하학적인 문양. 다른 세계의 끔찍한 광경이 할퀴듯 눈앞을 스쳤다.
'역시, 지랄 맞긴 하네.'
이안은 두개골을 움켜쥐었다.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정보창이 선명해졌다. 틈새를 걷는 자의 두개골. 유물 등급의 부적이었다.
능력치를 더 자세히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 시야가 일그러지고, 눈구멍 속의 심연이 그를 빨아들일 것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니까.
이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혼돈력을 끌어올렸다.
푸확-
하지만 그보다 두개골에서 끈적한 어둠이 터져 나오는 게 더 빨랐다.
흔들리던 횃불이 단숨에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사방이 컴컴했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개골 속으로 혼돈력을 밀어 넣었다. 엄청난 저항감. 두개골 내부에서 익숙한 마력이 느껴졌다. 각인된 여제의 마력이었다. 환청과 환각이 어지럽게 오가는 와중에도, 이안은 혼돈력을 밀어 넣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쩌적-
뭔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귓가를 스친 건 바로 그때였다. 이건 환청이 아니었다. 정말 어둠 한복판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었으니까.
쩌저저적-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진 균열이 와르르 무너져 흩어졌다. 시야가 확 트였다.
그는 여전히 동굴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하지만 온통 흑백이었고, 광원이 전혀 없음에도 주위를 식별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이안의 뇌리로 전에 본 비슷한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흡혈 여제의 환영.
뒤이어 이안은 자신이 전혀 움직일 수 없음을, 그리고 어느새 손아귀의 두개골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또 이딴 식이군.'
쩌억-
또 다른 파열음이 귓가를 스친 건 그때였다. 이안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소리의 근원지를 볼 수 있었다. 동굴 입구로 나가는 길목 한복판에, 기다란 공간의 균열이 새겨져 있었다.
균열 너머로 자줏빛이 아른거렸다.
'공허…?'
그럼 여긴 어디야.
생각할 찰나, 반질반질한 무언가가 균열을 비집고 튀어 나왔다. 커다란 머리통의 정수리였다. 쿠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고개를 들었다.
서양배처럼 생긴 회색 머리통 곳곳에, 흩뿌린 것처럼 멋대로 박힌 새빨간 눈알들이 번쩍였다. 면상 한복판이 세로로 길게 갈라지면서 아가리가 좌우로 쩍 벌어졌다. 선홍색 속살과 제멋대로 몇 겹으로 돋은 이빨들이 드러났다.
"키… 르르르-"
놈이 마력이 뒤섞인 울음을 토해내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벌레 껍질처럼 반들거리는 목덜미. 그 아래로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린 작은 머리들이 드러났다. 맨 위의 머리에 비하면 작지만, 그래도 웬만한 인간의 머리보다는 커 보였다.
머리 사이로 벌레의 그것과 비슷한 길고 뾰족한 다리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꿈틀댔다.
'거참 징그럽네.'
이안이 할 수 있는 건 생각뿐이었다. 몸은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고, 마력도 마찬가지였다.
상태창은 열 수 있었지만, 포인트를 투자할 수는 없었다. 스킬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스킬이 비활성화되어 있었다.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세상의 틈새.
퀘스트 창을 닫으며, 이안은 내심 안도했다. 역시, 이건 일종의 이벤트 컷씬이리라.
'타락자 전용 이벤트는 다 이딴 식인 건가.'
빠드득, 빠득-
고막을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이어졌다. 공허의 괴물이 내는 소리였다. 놈은 더 이상 균열을 뚫고 나오지 못하고 고개만 들이민 채 멈춰 있었다. 지금 들리는 소리는, 놈이 안간힘을 쓰면서 이를 가는 소리였다.
곧 놈의 머리가 축 처졌다. 포기한 것처럼 보인 것도 잠시. 놈의 머리가 일제히 이안을 돌아보았다.
동공이 가로로 누운, 수많은 붉은 눈알들. 시야에 담긴 공허의 마력이 삽시에 이안의 의식을 옭아맸다.
"...!"
정작 이안을 놀라게 한 건, 그 순간 번지기 시작한 내면의 울림이었다. 이제는 꽤 익숙한 감각이었다. 혼돈의 파편이 공명하고 있었다. 주문에 저항하듯이.
'갈수록 멋대로 구는 것 같은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에도 파편의 울림이 점점 커졌다. 시야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다. 그를 옭아맨 주문이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파편의 울림이 잦아든 것도 잠시.
푸확-!
파편이 품고 있던 혼돈력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핏줄을 타고 번지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의 의식을 가득 채우듯이 번져나갔다.
시야가 삽시에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타르처럼 끈적한 감촉이 전신을 뒤덮고, 이안의 의식을 익사시킬 것처럼 집어삼켰다.
"...!"
이안을 주시하던 눈알들이 번쩍인 건 바로 그때였다.
곧 머리 사이 사이에 제멋대로 솟아 있던 다리 하나가 휙 움직였다. 날카로운 다리의 단면이 주렁주렁 달린 머리 중 하나를 깔끔하게 잘라냈다.
철퍽-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뒤이어 주렁주렁 달린 머리들이 아가리를 벌리더니, 보랏빛 점액질을 토해냈다. 쏟아진 점액질이 잘린 머리를 향해 꿈틀대며 기어갔다.
쩍, 쩌적-
새겨져 있던 균열이 좁아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균열을 비집고 나와 있던 머리가 조금씩 그 너머로 되돌아갔다.
"하아…."
이안이 의식을 되찾은 건 바로 그때였다. 시야가 밝아지고, 감각이 되돌아왔다.
되돌아온 정도가 아니었다. 껍질을 한 겹 벗은 것처럼 모든 감각이 더 선명했다.
심지어 몸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타르를 뒤집어 쓴 듯한 느낌도 여전했다. 힘이 느껴지는, 기분 좋은 끈적함.
착각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인 이안은, 보랏빛 외피가 덮인 듯한 기다란 손을 눈에 담았다. 물질화한 혼돈력이, 섬유처럼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혼돈력이 육체 자체를 구성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의 의식을 담은 채로.
몸속에 가득한, 그리고 대기에도 흐르는 혼돈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헛웃음을 짓던 이안은, 자신의 입술이 말 그대로 귀 아래까지 찢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본래보다 훨씬 굵고 길어진 혀가, 칼날처럼 촘촘하게 돋은 이빨 사이를 훑었다.
'이 비슷한 걸 히어로 영화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상태창을 열었다.
능력치들이 멋대로 늘어나 있었다. 스킬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이 전부 사라지고, 대신 처음 보는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피의 칼날. 사냥의 시간. 혼의 결박 등등.
'설마 이거, 그동안 파편에 먹힌 것들의…?'
"키… 르르르-"
귀를 찌르는 소리가 이안의 상념을 깨뜨렸다. 어느새 거의 다 닫힌 균열이 흐릿한 자줏빛 흔적만을 남긴 채 반짝이는 가운데.
푸스스스-
거무튀튀한 괴물이 일어섰다.
사마귀와 지네를 합친 듯한 역겨운 형태. 그 한복판에 박힌 건, 아까 잘려 나왔던 그 머리였다.
점액질이 육체로 재구성된 모양.
자신을 응시하는 여러 개의 눈알을 마주 보며, 이안이 다시 한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쿠득, 쿠드득-
늘어뜨린 그의 양손 끝에,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났다.
#186화
"키- 에에엑-!"
육성과 사념이 뒤섞인 비명을 토해낸 괴물이 달려들었다. 덩치가 제법 큰데도 엄청난 속도였다.
이안은 그 와중에도 놈이 치켜든 길고 끝이 날카로운 네 개의 앞다리와, 지네처럼 마디진 몸통에 돋은 수많은 다리가 물결치듯 움직이는 것을 전부 인식할 수 있었다.
적어도 특성까지 전부 비활성화된 건 아닌 모양.
심지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균열에서 흘러나온 혼돈력과 괴물이 뿜어내는 사념과 공허의 마력이 만들어내는 파장까지 전부 또렷하게 눈에 보였다.
저마다의 색을 가진 파장이 뒤엉키며 흑백의 동굴에 색을 불어넣었다.
내가 이걸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게 맞긴 한가.
생각하며, 이안은 놈을 향해 마주 몸을 날렸다.
쒸아아악-
괴물이 기다렸다는 듯 기다란 앞발 하나를 내뻗었다. 집중력이 최고조인 상황에서도 빠르게 느껴지는 속도.
이안의 자세가 바닥에 깔리듯 낮아졌다. 샬롯을 따라 해 본 것인데, 평소엔 불가능하던 자세가 아주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콰드득-!
그의 머리 위를 사선으로 스친 앞발이 옆의 땅에 박혔다. 폭발이나 흙먼지가 튀어 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저 바닥이 깊이 파였을 뿐.
이안이 땅을 박찬 건 거의 동시였다.
콰과과과-
그의 오른손이 색색의 파장을 가르며 뻗어나갔다. 손톱보다는 발톱이라 불러야 할 손끝의 칼날이 허공에 보랏빛 궤적을 아로새겼다.
육체를 구성하는 혼돈력이 아주 조금씩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시간 제한이 있다 이거지.'
깊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괴물의 상반신에는 아직 끝이 낫처럼 날카로운 다리가 세 개나 더 남아 있었다. 게다가 상체와 몸통이 이어진 부분 좌우로는 사슴벌레의 뿔 같은 길고 굽어진 다리 한 쌍이 튀어나와 있기까지 했다.
쒸아악-
세 개의 앞다리가 저마다 다른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방어보다 공격을 택한 모양이었다.
이안의 전신에서 보랏빛 아지랑이가 번진 건 거의 동시였다. 사냥의 시간.
시야가 일그러지는 가운데, 모든 감각이 곤두섰다. 이안은 재차 허공을 박차며 몸을 휘돌렸다.
쒸에에에엑-
그의 몸이 좌우에서 밀려드는 두 개의 다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그대로 손을 뻗은 그가 사선으로 떨어져 내리는 또 다른 앞다리의 옆면을 내리쳤다. 손끝의 칼날이 갑옷처럼 딱딱한 외골격을 단숨에 잘라냈다. 그리고는 어느새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 멈춰선 다리의 뒷면을 힘껏 발로 걷어찼다.
괴물의 상체가 순간 흔들리고, 반발력에 몸을 맡긴 이안이 땅으로 튕겨 나가듯 떨어졌다.
콰과과과-
그 와중에 자세를 다잡은 그가 손가락을 땅에 박으며 속도를 줄였다. 그의 앞으로 열 가닥 흑백의 고랑이 깊이 파였다.
'이게 되네.'
이안은 내심 감탄을 흘렸다. 모든 게 거의 본능적으로 이루어진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투쟁의 축복을 받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 모든 근육과 신경계가 새롭게 구성된 것 같았다.
푸확-!
그때, 이안이 팔다리를 동시에 박차며 솟구쳤다. 콰과과곽, 방금까지 그가 있던 자리로 거무튀튀한 가시들이 틀어박혔다. 괴물의 머리 주위로 삐죽삐죽 돋아 있던 가시들이 연달아 발사된 것이다.
몸을 돌려 가까워진 천장에 착지하듯 부딪힌 이안이, 그대로 괴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보라색 아지랑이가 기다란 직선을 아로새겼다.
괴물이 발작하듯 앞다리들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안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콰지직-
놈을 지나친 이안이 바닥을 구르듯 착지했다. 그의 손아귀에는 괴물의 몸통 일부가 걸려 있었다. 사마귀의 앞발 같은 기다란 다리 하나가 고스란히 붙은 채였다.
"키… 이이악-!"
다리 하나를 잃은 괴물이 비명을 토해냈다. 그 와중에도 다리째로 뜯겨 나간 몸통이 엄청난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이 새끼, 보기보다 별거 아닌데.
'아니면 지금 내가 센 건가…?'
후자 쪽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상태창만 봐도 능력치가 멋대로 잔뜩 늘어나지 않았던가.
심지어 저놈은 공허의 괴물이었다.
아무리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졸개 하나라 해도, 본래는 이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지는 상대였을 터였다.
그가 사방에 일렁이는 파장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덕분도 있으리라. 손아귀에서 부글대며 녹아내리고 있는 몸통도, 본래라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쥐고 있을 수는 없었을 터였다.
지금은 나도 일종의 공허의 존재인 건가.
"키… 아아앗-!"
괴물이 고막을 찢을 듯한 포효를 터뜨린 건 거의 동시였다. 다시 달려들려던 이안은 팔로 얼굴을 가리며, 뒤따라 터져 나온 혼돈력의 파장을 막아냈다.
몸이 뒤로 밀려나는 압력.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무게 중심을 낮춰 견디면서, 이안은 진짜 문제는 저 괴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육체를 구성한 혼돈력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렇게 저놈의 공격을 막아내는 순간에는 더더욱.
'저놈을 죽이기 전에 힘이 먼저 다 떨어지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이안은 압력이 사라짐과 동시에 고무줄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포효하며 육체의 재생을 끝낸 괴물이 기다란 앞다리를 연달아 내리찍었다.
콰과과과곽-
쏟아지는 칼날 사이를 이리저리 피한 이안이 그대로 몸을 날렸다. 쒸아악, 괴물의 좌우에서 동시에 파공음이 이어졌다. 좌우로 벌어져 있던 기다란 다리가 그의 궤도를 노리고 밀려들고 있었다.
저기 휩쓸려 토막 난다 해도, 지금의 육체라면 충분히 본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정말 그런지 시험해 볼 생각은 없었다.
이안이 왼손을 내뻗었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간 혼돈력이 괴물을 옭아맸다. 다리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고, 이안을 노려보는 붉은 눈알들에 흐릿한 당황이 스쳤다.
쒸아아악-
쇄도한 이안이 그 한복판으로 오른손을 내뻗었다. 놈의 머리가 몸속으로 쑥 파고 들어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콰직-!
이안의 오른손이 흔적만 남은 몸통 한복판에 틀어박혔다. 콰직, 왼손까지 몸통에 박아넣은 이안이 오른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끈적하고 엿 같은 감촉이 번질 뿐, 놈의 머리는 느껴지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이안의 전신에서 혼돈력의 잔재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우지지지직-!
괴물의 단단한 갑피에 균열이 일더니 쩍 벌어지며 갈라졌다.
괴물의 몸을 좌우로 찢어발긴 이안이 검은 체액을 흩뿌리는 속살을 노려보았다. 놈의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잘린 단면을 움켜쥔 이안의 양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콰지지직- 퍼억-!
괴물의 상반신이 완전히 좌우로 찢겨 나갔다. 동시에 이안이 놈의 단면을 박차며 물러났다. 축 늘어지는 와중에도 놈의 앞다리들이 등판을 노리며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키… 에에에에엑-!"
명백한 고통을 담은 비명이 뒤를 이었다. 축 늘어지는 상체가 아니라, 바닥에 깔린 넓적한 몸통 아래에서 번진 비명이었다.
이안이 공중제비를 돌며 착지하는 사이, 괴물이 지네 같이 기다란 몸통을 치켜들었다. 반으로 쩍 갈라진 상체는 그대로 늘어뜨린 채였다.
잘린 단면에서 체액이 멈추지 않고 뚝뚝 흘러내리며 증발했다.
그리고 놈의 머리는, 마디마디로 이루어진 복부 한복판에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키- 이이이익-!"
놈이 수많은 다리를 꿈틀대며 울부짖었다.
이제 너도 공평하게 타임어택이네.
증발하는 양팔의 체액을 털어낸 이안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올리고는 질주했다.
정신파와 혼돈력의 파장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듯, 괴물이 비명을 멈췄다.
이안은 이미 놈의 몸통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좌우로 늘어진 앞발들이 반사적으로 날아들었다.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에서 몸을 젖혀 피해내고, 그 와중에도 손을 털어 만들어낸 기다란 궤적으로 다리 하나를 잘라내기까지 했다.
그는 새로운 힘을 사용하는 것에 벌써 익숙해지고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힘을 다루게 된 게 처음이 아닌 덕분이리라.
그런 와중에도 이안은 문득, 자신이 타락한 상태였다면 본래의 스킬들도 사용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어쨌건 특성까지 비활성화된 건 아닌 것 같은 데다가, 새로 얻은 스킬들은 하나하나가 일종의 권능에 가까운 성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혼돈력을 소모하는 속도도 엄청났다.
흑마법 같은 걸 다룰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여유로운 전투가 되었으리라.
'나는 그럼 이 상태에서도 반쪽짜리라는 건데….'
물론, 확인할 방법은 없는 가정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반쯤 본능적으로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쉴새 없이 날아들던 앞다리들은 전부 잘리거나 뜯겨 나가 축 늘어져 있었다.
징그러운 눈알들에 서린 감정도완전히 달라졌다. 위기감.
변이하듯 길어지던 몸통의 다리들이 파도치듯 좌우로 밀려들었다.
이안이 왼팔을 가볍게 떨친 건 거의 동시였다. 터져 나온 혼돈력의 파장이 괴물을 얼어붙게 했다.
'다음번엔 똥구멍으로 튈 거냐?'
이안은 가까워지는 놈의 머리를 노려보며 내뱉으려 했다. 그저 그러려고 했을 뿐이었다.
정작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그르렁대는 울음소리였다. 아무래도 말을 하기에 적합한 구강 구조는 아닌 모양이었다.
상관없는 일이었다.
콰직-!
놈의 머리가 더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게 분명해졌으니까.
이안의 손아귀가 괴물의 머리통을 파고들었다. 마른 두부를 손으로 으깨는 듯한 감촉. 동시에 놈의 아가리가 좌우로 쩍 벌어졌다.
여러 겹의 이빨이 돋은 주둥이가 촉수처럼 앞으로 쭉 뻗어 나왔다.
깜짝이야, 시발. 몸을 옆으로 휙 젖혀 피한 이안이, 시계추처럼 되돌아오며 놈의 몸통에 양발을 디뎠다.
턱, 동시에 그의 왼손이 놈의 머리통 한쪽을 움켜쥐었다. 그러면서 뽑아 든 오른손으로는 반대쪽 얼굴을 힘차게 후려쳤다. 까드드득, 벌어진 아가리가 강제로 닫히기 시작했다. 미처 다 되돌리지 못한 촉수가 사이에 걸렸지만,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우지지직-
이안의 양팔과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손끝이 괴물의 점점 더 깊이 괴물의 머리통을 파고들고, 이윽고 놈의 머리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몸에서 뜯겨져 나왔다.
그대로 발을 박차 떨어져 내리면서, 이안은 손아귀 사이의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반쯤 으깨지기까지 한 와중에도, 놈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멀쩡하게 남은 몇 개의 눈알에서 실지렁이들이 꿈틀대는 듯한 파장이 번졌다. 놈의 정신파가 전해졌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사념.
'뭐, 살려라도 달라고?'
이안의 양팔에 힘이 들어갔다. 으스러지던 괴물의 머리통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수박처럼 터졌다.
그리고 그 감촉이 묘하게 기분 좋았다.
'기분이 좋다고…?'
이안이 괴물의 체액과 파편으로 범벅인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는 사이.
쿠웅-
머리를 잃은 몸통이 한 박자 늦게 바닥에 쓰러졌다. 다리들이 한차례 꿈틀댄 것도 잠시. 곧 형태를 잃고 점액질이 되어 녹아내리면서, 동시에 증발하기 시작했다.
이안이 비로소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장내에 자주색 공허의 마력이 자욱하게 피어나는 것으로 보였다.
'끝인가…? 그럼 이제 뭘 어떻게.'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두근, 이안의 전신이 울렸다. 혼돈의 파편이 다시 공명하고 있었다. 동시에 전신을 구성한 혼돈력이 타오르듯 뿜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안은 체념한 채, 그저 그 변화에 몸을 맡겼다.
보라색과 자주색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곧 함께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쩌적-
그 한복판으로 새카만 균열이 번졌다. 균열 너머의 어둠이 삽시에 커지더니, 시야 전체를 물들였다.
"...!"
이안은 숨을 들이켰다. 동굴의 퀴퀴한 냄새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칠흑 같은 어둠. 어느새 다시 동굴 한복판이었다.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 창이 이어졌다.
이안은 상반신을 일으켰다.
손아귀에서 두개골의 감촉이 느껴졌다. 안에 담긴 힘도.
이제 이 암흑 성물의 소유권은 그에게 있었다. 어둠 사이로 드러나는 두개골의 눈구멍을 내려다보며, 이안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의 틈새라니. 이것의 전 주인인 흡혈 여제가 뇌리를 스쳤다.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한 환영.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 낸 균열과 방금 그가 겪은 현상이 아예 무관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럼 설마, 앞으로 암흑 성물을 손에 넣을 때마다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가. 거기선 그런 공허의 괴물 같은 모습으로 싸워야 하고?'
이게 대체 뭔 의미가 있는 건데.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너무 많았다. 늘 그랬지만, 타락 DLC와 관련된 부분들은 특히 더 그랬다.
공략 글에서도 해당 카테고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 않았던가.
그가 아는 건, 그저 게임을 진행하며 어쩌다 알게 된 몇몇 단편적인 정보가 전부였다.
공허나 틈새는 물론이고 내면에 품은 혼돈의 파편에 대해서조차, 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았다.
'그렇다고 타락자들 한테 직접 물어볼 수도 없… 잠깐만.'
물어 볼 수도 있지 않나?
멈칫한 이안이, 이윽고 턱을 긁적였다.
#187화
생각해 보니 아예 불가능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죽여 없애 버릴 놈들이니, 정보를 얻는 데 실패한다 해서 잃을 것도 없었다.
물론 원탁 의회에 타락자만 모여 있는 건 아니겠지만. 메브의 근본적인 복수를 돕는 동안에는 타락자를 여럿 마주치게 될 터였다.
그게 몇이나 될진 몰라도, 계속 시도하다 보면 의문을 조금은 풀어 줄 놈이 하나쯤은 있으리라.
'죄다 실패하더라도 뭐, 타락하는 놈들은 끝도 없이 나올 테니까.'
결론을 내린 이안이 손을 털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간 불덩이가 횃불을 밝히고는 동굴 벽면에 부딪혀 흩어졌다.
공동의 전경이 드러났다. 분명 공허의 괴물과 싸웠건만, 그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증거는 손아귀의 두개골, 그리고 텅 비어 버린 혼돈의 파편뿐이었다.
그래, 정말 별개의 공간이었단 거지.
생각하며, 이안은 비로소 두개골의 정보창을 열었다. 내용을 확인하던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진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모든 공허 주문 레벨 증가…?'
공허 주문이라니. 혼돈력 회복이나 하나 더 올려 줄 것이지.
하긴, 암흑 성물은 애초에 타락자 전용 아이템이었다. 언제 이런 옵션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쨌건, 이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옵션들은 그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들이었다.
체력과 정신력은 물론 상대적으로 부족한 지능까지 하나 올려 주는 데다가, 각종 저항력 옵션들도 깨알같이 붙어 있었으니까.
그는 바닥에 떨어진 보관함까지 주워들며 비로소 일어섰다.
틈새를 걷는 자의 두개골을 다시 이 안에 넣을 필요는 없었다. 저주받은 물건을 안전하게 봉인하는 용도인 것 같으니, 가지고 다니다 보면 쓸 일이 있으리라.
'하다못해 제국의 상인에게 팔아 치우기라도 할 수 있겠지.'
보관함과 두개골을 아공간에 던져 넣은 그는, 횃불도 들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고작 몇 분이 지났어도, 몇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
이안의 미간이 좁아진 건, 저 멀리 동굴 입구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희미한 기합성과 고함.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마물의 것이 분명한 악취가 코끝을 스쳤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군.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몸을 날렸다.
"우- 워억-!"
"자꾸 앞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테사! 간격 유지하세요!"
마물들의 비명. 일행이 저마다 내지르는 고함이 삽시에 선명해졌다.
동굴 입구를 향해 달려가는 이안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귀를 파고드는 마물들의 비명과 고함이 한두 종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굴 트롤의 둥지 근처에 다른 마물이 많을 리가 없는데.'
보통은 있을 리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건, 당연히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힘껏 땅을 박차 동굴 밖으로 나서며, 이안은 세 번째 사도의 흑검을 꺼내 들었다.
서늘한 자루의 감촉. 미끈한 검날이 소리도 없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가운데.
'…역시는 역시군.'
이안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단숨에 눈에 담았다.
안에서 들은 그대로였다.
고블린과 코볼트는 물론이고 식인 늑대와 거대 박쥐 같은 광기에 물든 짐승들. 거기다 구울과 해골 같은 되살아난 망자까지.
평소에는 저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들이 한데 뒤섞여 밀려들고 있었다.
심지어 마차와 동굴 입구를 등진 채 늘어선 일행의 주위로, 이미 죽어 널브러진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평소라면 진작 겁을 집어먹고 흩어져도 이상하지 않건만. 어둠을 뚫고 달려오는 것들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멈추지 않고 달려들고 있었다.
…뭐, 흑마법에라도 홀린 건가.
"나리! 드디어…!"
뒤를 돌아본 필립이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던 일행들도 시선을 돌리는 가운데.
"고생들 했다."
내뱉으며 그들 사이를 지나친 이안이, 곧바로 흑검을 휘둘렀다.
콰직-!
달려들던 고블린 한 마리가 종잇장처럼 썰려 나갔다. 날이 어찌나 예리한지 손에 걸리는 감촉조차 거의 없었다. 철퍽 허물어진 고블린이 그제야 크엑, 하는 단말마의 신음을 흘렸다.
"넌 마차를 지켜라, 귀쟁아!"
"필립! 부탁한다!"
거의 동시에 소리친 샬롯과 메브도 각자의 자리에서 돌격하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마차 앞을 지키던 필립이 방패를 고쳐 들고, 테사이아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옆에 섰다. 마물을 제법 찔러 죽인 듯, 걸친 가죽 갑옷과 검에 마물의 체액이 범벅이었다.
그야말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지금까지 자리를 지킨 건 그저, 한 마리의 마물도 동굴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는 듯이.
콰직-! 서걱-!
앞서간 이안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때때로 돌풍이나 냉기 파장을 토해내며 마물들을 휩쓸었다.
말 그대로 일방적인 도륙이었다.
본래도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들이라, 숫자가 많다 해도 그리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게다가 샬롯과 메브도 멈추지 않고 전진하면서 그가 포위당하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스걱-
"키… 엑…."
전투는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대부분의 마물들이 토막나고 짖이겨진 시체가 되어 널브러졌다.
뒤늦게 본능이 되돌아온 것처럼 주춤대던 남은 놈들은, 어느 순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끼엑- 끼에에에-
도망치는 놈들의 비명이 산을 울리는 메아리가 되어 멀어졌다.
"정말 그냥 모여든 거라고…?"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린 이안이,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흑검을 휙 아공간에 던져 넣었다.
놈은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 낮게 울었지만, 이안의 손길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의식은 잘 끝낸 것이냐, 이안?"
숨을 고르며 다가온 메브가 물었다. 꽤 격렬한 전투였음을 증명하듯, 그녀의 갑옷은 온갖 마물들의 체액으로 범벅이었다.
"작은 사건이 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대답하며 몸을 돌린 이안이, 어둠 저 너머의 마차를 눈에 담았다. 마차는 다행히 멀쩡했고, 말도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
테사이아가 그중 한 마리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뭐라 속삭이고 있었다.
말은 투레질조차 하지 않고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녀석들이 차분한 건 그녀가 뭔가 한 덕분인 모양이었다.
이제 최면은 못 쓸텐데, 뭐지.
생각하며 마물 시체들을 칼로 뒤적대는 필립까지 눈에 담은 이안이, 비로소 덧붙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요?"
"네가 동굴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답한 건 전투 도끼를 늘어뜨린 샬롯이었다. 그녀가 숲의 어둠을 꿰뚫듯 돌아보며 덧붙였다.
"온 사방에서 모여들더군. 이것들, 동굴이 목표였다."
"동굴이…?"
아 그래, 뭐에 홀렸나 했더니.
이안의 입가에 옅은 헛웃음이 번졌다.
두개골이 뿜어낸 공허의 마력이 마물들을 불러 모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빛으로 날아드는 나방처럼,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으리라.
아무래도 동굴은, 타락자들의 밀실처럼 완벽하게 공허의 마력을 차단해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온 산의 마물이란 마물은 죄다 모여든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산 밖에서까지 왔을지도 모르죠."
건질 게 없었던지 빈손으로 마차로 들어갔던 필립이, 가죽 수통을 여러 개 들고나오며 말했다.
마차로 다가오는 셋에게 차례로 수통을 건넨 그가 덧붙였다.
"요즘 거의 매일 마물을 보긴 했습니다만. 오늘은 특히 남달랐습니다. 이런 산속에서 이딴 것들에게 죽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니까요."
"하여간 엄살은."
"반쯤은 진심이었습니다. 보십쇼. 마물이 아무리 늘었다 해도, 이건 정말 너무 많잖아요."
물을 마시며 피식댄 이안이, 대꾸도 없이 테사이아에게 수통을 건넸다. 하지만 필립은 아랑곳 않고 땅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 숫자면, 조만간 무리 지어 민가를 습격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입니다. 게다가 이것들, 뭘 먹고 자란 건지 하나같이 체구도 보통이 아니라고요."
거 새끼. 하여간 적당히를 몰라.
혀를 차며 고개를 숙였던 이안은, 이내 슬쩍 미간을 좁히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그렇긴 하네."
"그렇죠? 전에 마경에서 본 놈들만큼 크고 끔찍하게 생기지는 않았습니다만. 고블린조차도 여간 몸이 좋은 게 아닙니다. 제국 근처라 더 강한 놈들만 남은 건지…."
"그보단, 놈들이 살기에 더 좋은 환경이 된 거겠지."
장작 주위의 시체들을 발로 툭툭 차 밀어내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더 좋은 환경이라뇨?"
"변방 전체가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들고 있다고 했잖아."
불꽃을 던져 다시 모닥불을 밝힌 이안이 덧붙였다.
"마경이 아닌 곳의 마물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거다."
게임에서도 변방이 마경 천지가 되었을 무렵엔, 일반 마물들도 더 크고 강해졌었다.
본래 있던 몹을 색만 바꾸거나 덩치만 키워서 재탕하는 건 게임에선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현실이 된 지금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굳이 이런 것까지 현실성이 더해질 필요는 없지 않나…?'
필립이 이안의 건너편에 걸터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륙에 마물들이 이렇게 창궐한 건, 전부 검은 벽 때문이었군요."
"이젠 제국 땅도 안전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군. 마물들은 숫자가 많아지면 무리를 나눠 이동하는 습성이 있으니. 국경을 가리지 않고 번지고 있겠어."
모닥불 옆에 앉은 메브가 투구를 벗어 옆에 놓으며 덧붙였다. 테사이아가 짐가방을 필립의 옆에 툭 내려놓은 건 그 직후였다.
"무슨 상관이야. 어딜 가도 있는 놈들이고, 보이는 족족 죽이면 그만인데. 언제는 안 그랬어? 쓸데 없는 소리들 그만하고, 나 배고파 죽겠으니까 얼른-"
그 순간 먼 하늘이 번쩍이며 테사이아의 얼굴에 순간 짙은 음영을 새겼다. 쿠르릉, 한 박자 늦게 천둥이 뒤를 이었다.
말들이 놀란 듯 투레질하고, 미간을 찌푸린 테사이아가 다시 일어나 녀석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 또 한 번 먼 하늘이 번쩍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천둥.
"…동굴로 들어갈까요? 비가 올 것 같은데."
가방에서 술병을 꺼내던 필립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앉으려다 말고 멈춰 선 샬롯이, 저 먼 하늘을 응시하며 내뱉었다.
"아니. 비는 안 와."
"…이렇게 천둥이 치는데요?"
"난 수인이다. 오늘 날씨가 어떨지 정도는 바로 알 수 있다는 뜻이지. 비는 안 와. 이건 비를 몰고 오는 천둥 같은 게 아니야."
샬롯의 말에 대답하듯 밤하늘이 요란하게 번쩍였다.
이어진 천둥도 하나가 아니었다.
멀리서부터 비교적 가까운 곳까지, 굉음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연달아 이어졌다.
"화, 확실히. 평범한 벼락 같진 않아 보이긴 합니다만-"
애써 가벼운 목소리로 내뱉던 필립이 얼어붙었다. 이번에는 일행의 머리 위를 덮은 먹구름까지 눈부시게 번쩍였기 때문이다. 온몸이 울리는 듯한 굉음에 멍하니 입을 벌렸던 필립이, 이윽고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제가 잘못… 본 겁니까? 아니면, 정말 구름이 보라색으로 번쩍인 게 맞는 건가요…?"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필립."
메브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샬롯도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말에 긍정할 찰나.
"아무래도, 뭔가 일어난 것 같아."
테사이아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말들을 진정시키던 그녀는, 어느새 저 먼 북쪽 하늘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상한 게 보였어. 저 멀리, 구름 너머에서."
"정확히 어떤… 이상한 거요?"
"정확히는 모르겠어. 이제는 사라졌거든. 하지만 분명히 봤어."
내뱉으며, 테사이아가 모닥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녀의 눈가를 따라 돋아난 핏줄이 꿈틀대고 있었다. 늪처럼 짙은 녹색의 눈동자에 흐릿한 마력이 아른거렸다.
이안의 눈을 마주 보며, 그녀가 덧붙였다.
"아주 커다란 그림자였어. 손가락처럼 꿈틀대는."
#188화
이안의 눈매가 꿈틀댔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산 능선 사이로 드러난 저 먼 밤하늘을 눈에 담으며 내뱉었다.
"꿈틀대는 그림자였다고?"
"응. 확실히. 엄청 먼데도 커다랬어. 마치-"
그때 다시 한번 구름이 번뜩였다.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빛이었지만, 이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하지만 테사이아가 말한 아른거리는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불길한 보랏빛과 천둥뿐.
하늘을 돌아보았던 테사이아가 황급히 덧붙였다.
"말했다시피, 이젠 사라졌어. 하지만 잘못 본 게 아니야. 정말-"
"알아."
말을 자른 이안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저 혹시 싶어 한 번 더 확인해 봤을 뿐이었다.
테사이아가 아, 그래? 하고 중얼거리는 사이. 이안은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떠올렸던 기억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흡혈 여제의 주마등 속, 흑백의 하늘을 가르던 균열. 그리고 그 사이로 드리우던 기다란 무언가.
그것의 아른거리던 그림자를 떠올린 이안이, 문득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일행 모두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닥불 타들어가는 소리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짧게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내뱉었다.
"왜 항상 다들, 내가 모든 문제의 답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야… 나리는 수많은 괴물을 상대한 전문가이자… 금단의 지식을 탐구하는 마법사이시니까요…? 거기다 지금은…."
잠시 말을 멈춘 필립이, 이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짐작 가는 부분이 있다는 눈빛이시기도 하고요. 나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다 같은 무표정이라 여기겠지만, 전 나리의 표정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됐거든요. 아마, 다른 분들도 그러실 테고요."
일행들이 저마다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 없게 하네, 새끼.
입맛을 다신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여제가 생긴 균열이 확실히 확실히 치명적인 틈을 만들어 낸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저 너머에서 뭔가가 넘어올 만큼."
"...! 저 너머라면, 공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글쎄, 그거야 모르지."
내뱉은 이안이 손을 뻗었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필립이 쥐고 있던 술병을 그에게 내밀었다.
술병의 마개를 열면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이 세계의 이면에 공허만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
"…틈새를 말하는 것이구나. 이 세상의 이면."
메브가 가라앉은 눈으로 대꾸했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디서건 뭔가 넘어오긴 한 모양이오.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술병을 입에 가져가며, 그가 툭 덧붙였다.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일어났군."
"...."
"...."
술을 마시는 이안을, 메브와 필립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너머의 존재가 어떤 괴물들인지, 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이미 경험한 그들이었다.
변방에 얼마나 끔찍한 변화가 일어날지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진짜 엄청 커 보였는데. 그런 괴물이라면 어디 숨을 수도 없을 거야."
테사이아가 덧붙인 건 그때였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필립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공허의 존재들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냅니다. 모습을 바꾸거나, 어쩌면 일부만 이 세계에 넘어왔을지도 모르죠. 그도 아니면 저 너머에 남은 채로도 이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됐을지도 모르고요. 적당한 마경을 찾아 거기 뿌리를 내렸을 수도 있겠죠."
"아하…."
"확실한 건 하나 뿐입니다."
테사이아와 샬롯을 번갈아 바라본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세상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이요."
"그런 괴물들이 그렇게 많다면… 이 세상은 진작 멸망하고도 남았어야 하지 않을까?"
"놈들은 대가 없이 이 세계에 머물 수 없다더군. 마경을 거닐 때를 제외하고는."
샬롯이 새 술병을 꺼내 마개를 열며 대답했다. 테사이아가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필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 변방 곳곳에는 마경이 열리고 있죠. 분명 더 가속화되었을 테고, 완성된 후엔 그 범위도 넓혀 갈 겁니다."
이안가 메브를 돌아본 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다시 변방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글쎄…."
읊조리며, 이안은 알아서 하라는 듯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물론 그는 변방에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이건,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었으니까. 심지어 당장은 아는 게 전혀 없지 않은가.
단서를 찾는답시고 돌아다녀 봐야, 소득 없이 시간만 보내게 될 터였다. 경험치조차 없는 무의미한 살육으로 귀결될 귀찮은 상황들이나 잔뜩 기다리고 있겠지.
그보단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나았다. 백금룡의 의뢰 같은.
하지만 물론, 메브와 필립이 돌아간다고 한다면 그 결정도 존중할 생각이었다.
이들이 쫓는 주르도라는 사제는, 그가 대신 찾게 되겠지만.
"…아니."
메브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샬롯에게 술병을 건네받은 그녀가, 이안처럼 병째로 한 모금 마시고는 덧붙였다.
"우리는 돌아가지 않을 거다, 필립."
"...."
"내 이 선택에 대한 대가와 착임은… 모든 일이 끝난 후에 치를 거야. 피하거나 외면하는 일 없이."
여러 의미를 함축한 말이었다. 정확히 어떤 생각으로 내뱉은 말인지는, 아마도 그녀 본인만이 알고 있으리라.
메브를 가만히 바라보던 필립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만 그런 짐을 짊어지시게 할 순 없죠. 저도 같이 지겠습니다."
"...."
묘한 눈빛이 된 메브가, 대답 대신 다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필립이 애써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생각해 보면, 무작정 최악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어쩌면 이게 계기가 되어서 전쟁이 끝날지도 모르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나리?"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할 순간이 온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이안이 대충 대답했다. 말 그대로 생존의 문제가 되기 전까진 전쟁이 계속될 것이라거나. 그 전까진 영지민들의 목숨 따위엔 관심도 없는 용병과 타락자들이 더 활개를 치게 되리란 식의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이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세상은 이미 충분히 개판이야."
테사이아가 툭 끼어들었다. 가방에서 햄 덩이와 치즈, 육포를 주섬주섬 꺼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하나하나 신경을 쓰다간 끝도 없을 거란 얘기지. 게다가 세상에 어둠과 싸우는 게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단검을 뽑아 햄을 썰기 시작한 그녀를 보며, 이안이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젠 꽤 그럴듯한 말도 하는군.
술을 한 모금 들이켠 필립이,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옳은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겠죠. 이럴 시간에, 각자 제국에서 맡은 역할에 대해서나 한 번 더 복습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그것도 식사 중에?"
"꿈에서도 나올 정도로 해 둬야,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법입니다. 테사. 제가 구울 테니, 테사부터 다시 시작해 보세요."
필립이 잡념을 떨치려는 듯 움직이고, 테사이아가 떨떠름하게 자신의 위조 신분에 대해서 읊어 대기 시작했다.
다음 차례임을 직감한 듯 내키지 않는 눈빛이 된 샬롯과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술을 들이켜는 메브를 차례로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제는 조용해진 밤하늘을 잠시 응시한 그가 눈을 감았다.
지옥처럼 변한 변방의 전경이, 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필립의 인도 아래 멈추지 않고 남동쪽으로 나아간 일행은, 이윽고 산길을 벗어났다.
완만하게 이어진 평야와 숲.
제국이었다.
적당히 따듯한 날씨와 건조한 공기. 하지만 날이 맑지는 않았다. 변방에서 번진 먹구름이 어느새 제국의 하늘까지 조금씩 잿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안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어쩌면 자신이 어둠을 몰고 다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는 그 반대겠지만. 어쨌건, 가는 곳마다 하늘이 우중충해 지는 게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지도가 틀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제국 서부와 중부의 경계선 어디쯤 있을 겁니다. 이 숲이 끝나면 관도를 타도록 하죠."
필립의 예고대로, 그들은 곧 관도에 접어들었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꽤 잘 다듬어진 도로였다.
관도 오른쪽으로는 숲이, 왼쪽으로는 드넓은 평야가 이어졌다.
하지만 마냥 목가적인 여정은 아니었다. 메브가 예지한 것처럼, 밤에는 숲의 어둠 너머에서 마물들이 기어 나와 어슬렁댔다.
물론, 마물 퇴치도 일상의 일부가 된 일행에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역시, 이제 제국도 그리 치안이 좋지 않군요."
"여기가 변경이라 그런지도 모르지. 변방으로 통하는 길이 인접한 것도 아니고, 중부로 이어지는 길은 이곳 말고도 많으니까."
"잘 아시는군요, 샬롯. 제국에 살 때 서부에도 와 본 적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없다. 하지만 서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들어오는 건 몇 번 봤지."
"아하…. 아, 남쪽으로 가면 내해가 있었죠. 전 변방 촌놈이라 그런지, 내해가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상상이 되질 않습니다."
"상상할 필요도 없다. 최악이니까. 배는 끔찍해. 타는 동안에도 멀미가 나는데, 하선하고 나서도 한동안 이어지지."
"그래도 그걸 타면 내륙 깊은 곳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던데요."
"시간을 아낄 수 있을 뿐이야. 언젠간 너도 타게 될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
시답지 않은 대화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이안은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귀에 담았다. 제국 서부에 대해서는 그도 거의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그가 이곳에 발을 들인 건 서부의 중심인 라클리프가 전부였고, 그 시기의 서부는 이미 사람 살 동네가 아니었다. 심지어 라클리프 조차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 일행의 앞에 펼쳐진 서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제 막 구름에 덮이기 시작한 하늘.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와 숲. 아직은 별 볼 일 없는 마물들. 개간 중인 듯 나무 밑동만 남은 들판과 그마저도 다 뽑아낸 빈 땅.
"…이안."
지루한 여정에 변화가 생긴 건, 며칠이 지난 오후였다.
마차에 탄 샬롯이 마부석으로 이어진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마부석 구석에 기대 술을 홀짝대던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샬롯은 테사이아의 시종 역할을 하게 된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마차에 함께 타고 있었다.
마부석은 필립과 이안의 차지였다. 제국에 들어선 이후로 일행은, 보는 사람이 없어도 자신의 가짜 신분에 맞게 행동하고 있었다.
언제 제국인을 마주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샬롯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 더 울창해진, 그리고 저 너머로 산기슭이 보이는 숲을 돌아보았다.
"비명이 들렸다."
"비명…?"
"그래. 마물 같은데. 사람 고함과 발굽 소리도 들리는군."
"...."
필립의 시선을 받으며, 이안이 자세를 바로 했다. 곧 그의 눈매도 가늘어졌다.
"그래. 들리는군."
"마차를 세울까요, 나리?"
"아니. 계속 가라."
숨소리와 말발굽 소리, 나무에 뭔가 부딪치는 소리 등등에 귀를 기울이며, 이안은 숲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곧 어둑한 숲 너머로 소리의 정체가 드러났다.
일련의 기수들이 관도를 향해 부리나케 도망치고 있었다. 꽤 중무장을 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집채만 한 크기에 머리에 뿔이 달린 암녹색 도마뱀이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다리가 여섯 개나 달린 놈이었다.
이안이 들은 뭔가 부딪히는 소리는, 놈이 기수들을 추격하며 나무에 몸을 들이받는 소리였다.
"저거… 용입니까?"
필립이 자세히 보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댔다.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넌 뭐 죄다 용이냐? 애초에 저건 날개도 없는데."
"바실리스크로군."
메브가 내뱉었다. 그녀는 어느새 투구를 머리에 쓰고 있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만."
"내가 보기에도 그렇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이 일어섰다. 저건 게임에서도 정예 마물로 분류되던 놈이었다. 경험치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전리품 역시.
그의 시선을 받은 메브가 말을 마차 옆으로 바짝 붙이는 가운데, 샬롯이 다시 마부석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도 같이 가겠다, 이안. 바실리스크라니, 나도 싸워 본 적 없어."
다급하게 내뱉은 그녀가, 숲 너머를 눈에 담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메브의 뒤에 올라탄 이안이 피식댔다.
"넌 자리를 지켜라."
도망자 무리 맨 뒤, 서코트를 걸친 퉁퉁한 체구의 사내를 눈에 담은 이안이 덧붙였다.
"저기 쫓기는 놈, 귀족이니까."
"...."
"천천히 따라와라, 필립."
탄식하는 샬롯을 외면하며 덧붙인 이안이, 메브의 어깨를 두드렸다. 메브가 기다렸다는 듯 고삐를 후려쳤다.
말은 중무장한 둘을 태우고서도 힘차게 내달려, 거침 없이 숲으로 접어들었다.
"아니…?!"
이윽고 도망치던 기수들 몇이 이안과 메브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악성을 흘리는 사이.
"오, 오지 마시오!"
서코트를 걸친 퉁퉁한 사내가 소리쳤다.
"도, 도움은 감사하나, 날붙이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오! 숲 밖까지 따라오진 않을 테니, 말 머리를 돌리시오!"
저 살기도 바쁜 와중에, 착한 놈이군.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내뱉었다.
"그렇다는데. 어쩌시겠소?"
"어쩌긴."
짧게 웃음 지은 메브가 보란 듯 고삐를 한 번 더 후려쳤다.
뒤이어 고삐를 한 손으로 고쳐 쥔 그녀가 허리춤에서 늘씬한 양손 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내릴까?"
"마상 전투는 경 전문이잖소. 적당한 순간에 뛰어오를 테니, 갈라집시다."
"그러지."
옆으로 손을 뻗은 이안도 아공간에서 흑검을 꺼내 들었다. 목격자가 여럿이니 내장된 스킬을 쓸 수는 없겠지만, 예리한 칼날만으로도 충분하리라.
"키에엑-!"
곧 속도를 늦춘 바실리스크가 이 세계의 파충류 마물들 특유의 괴성을 토해냈다. 측면에서 달려오는 이안과 메브를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콰르르르- 우지끈-
놈이 바닥을 굴러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를 쓰러뜨리며 멈춰 서는 사이.
"눈을 똑바로 마주 보지 마시오. 경은 몰라도, 말은 바로 숨이 끊어질 수도 있소."
속삭인 이안이 말 엉덩이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휘몰아친 바람이 그의 몸을 힘껏 떠밀었다.
#189화
"아니, 저런 무모한…?"
퉁퉁한 기수, 오벨리가 도망치던 것도 잊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투구 아래 그의 시선은, 울부짖는 바실리스크와 놈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검은 머리 기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볼 때 저건, 그야말로 자살 행위였다.
산기슭에서 튀어나온 저 다리 여섯 달린 괴물은, 이미 그와 동행한 병사들을 여섯이나 찢어발긴 후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중 둘은 그 전에 이미 저주에 휘말려 죽어 버린 상태이기까지 했다.
말에 탄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를 포함한 나머지 기수들도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을 터였다.
저런 괴물을 죽이려면 만반의 준비를 한 토벌대를 최소 스물은 대동해야 하리라.
역시나. 샛노란 눈을 번쩍이며 예의 그 저주의 파동을 뿜어낸 바실리스크가, 달려드는 검은 머리 기사를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리며 솟구쳤다.
위아래로 더 날카롭게 돋은 송곳니 사이에서 독 연기가 이글이글 피어올랐다.
말고삐를 당기며 탄식한 오벨리가, 그런 바실리스크의 옆으로 선회하는 또 다른 기사를 돌아보았다.
최소한 저자라도 살려야 했다.
"부디 목숨을 허투루 낭비하지 마시오! 덕분에 도망칠 여유가 생겼으니, 이제 그만-"
"키에에에엑-!"
그의 외침을 집어삼키며 바실리스크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오벨리의 시선이 휙, 다시 옆으로 돌아갔다.
분명 괴물의 아가리에 씹혔어야 할 검은 머리 기사가 놈을 지나치고 있었다. 바실리스크의 마력에 홀리지 않은 건 둘째 치고, 허공에서 궤적을 틀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움직임이었다.
물론, 그가 알기로 허공에서 궤적을 바꾸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키아아악-!"
나뒹구는 바실리스크는 그 일이 일어났음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심지어 커다란 목덜미 한쪽에서 푸른 빛의 체액이 솟구치고 있기까지 했다. 궤적을 바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저 두꺼운 비늘을 뚫고 상처까지 낸 것이다.
동행한 병사들이 내뻗은 창은, 고작 비늘 몇 개를 털어내고 죄다 부러져 나갔었건만.
"델라 루여…."
그가 탄식을 흘리며 고삐를 잡아 채는 사이. 말에 탄 채 선회하던 전신 판금 갑옷의 기사가 돌진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엉망으로 만드는 바실리스크의 곁을 깔리지 않고 비스듬하게 지나치면서, 그가 안장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키야아악-!"
바실리스크가 발작하듯 나뒹굴었다. 놈이 휘두른 굵고 기다란 꼬리를 말과 함께 펄쩍 뛰어넘은 기사가 멀어졌다.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그 빈 자리로 검은 머리 기사가 다시 솟구쳤다. 같은 인간이라고 믿기 힘든 놀라운 도약력.
"마법 무구라도 쓰는 것인가…?"
아예 멈춰선 오벨리가 멍하니 중얼댔다.
"도련님! 거기 서서 뭐 하십니까!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뒤에서 외침이 터져 나온 건 그 직후였다. 그와 함께 도망치던 기수들도 어느새 저만치에 멈춰 서 있었다. 소리친 건 검은 피부를 가진 반투르인 청년이었다.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 보인 오벨리가, 이내 뭔가 깨달은 듯 그들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그러면서 오른 손은 허리 춤의 검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구경만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비로소 뇌리를 스친 것이다.
갑작스러운 구원자들이 상상 이상의 실력자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저들을 도와 토벌에 합류 하는 게 옳았다.
"설마, 저길 다시 가자고요?"
"미치겠네, 정말…."
기수들이 떨떠름하게 탄식하면서도 고삐를 고쳐 쥐던 그때였다.
"거,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저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벨리를 비롯한 기수들이 멈칫하는 가운데, 목소리가 이어졌다.
"뭘 하시려는 생각이건, 멈춰 주십시오."
오벨리가 목소리가 돌아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숲 가장자리의 관도 위, 어느새 가까워진 마차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중무장을 한 채로 마부석에 앉은 갈색 머리의 청년이 그와 기수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조금 더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이왕이면 이 근처까지요."
"하, 하지만 어찌 그냥 보고만 있겠소? 게다가 저 괴물은 보통 마물이 아니오. 본래 산속의 깊은 계곡에서-"
"저쪽을 다시 보십시오."
오벨리의 말을 자른 마부가 턱짓과 함께 덧붙였다.
"지금 저분들이 위험해 보이십니까?"
"...."
다시 바실리스크 쪽을 돌아본 오벨리가 저도 모르게 입을 뻐끔댔다.
두 기사가 좌우를 오가며 바실리스크를 몰아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물은 여전히 흉포하게 날뛰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놈의 전신에 못 보던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상처에서 푸른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물러들 나십시오. 여러분들이 합류해 봐야, 오히려 방해만 될 겁니다."
"...."
신랄하게 이어진 말에, 오벨리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사이.
"옳은 말씀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도련님!"
이미 물러서기 시작한 기수들 사이에서, 반투르인 청년이 소리쳤다. 오벨리의 시선을 받은 그가 보란 듯 손에 든 부러진 창대를 던져버렸다.
"저 사이에서 뭘 돕는단 말입니까? 이리 오십시오. 도련님께 생채기가 생기면, 저희는 뼈가 부러질 겁니다."
"…끙."
이윽고 침음한 오벨리가 말 머리를 돌렸다.
숲의 전투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느긋하게 다가오는 마차의 고급스러운 외형을 눈에 담던 그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 싸움이 끝나면 바로 달려가 봐도 되겠소?"
마부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굳이 꼭 그러셔야 할 이유가 있다면요."
***
"키-에에에엑-!"
자신이 흘린 푸른 피로 목욕이라도 한 듯한 몰골이 된 바실리스크가,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마력을 토해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낸 듯, 저주의 파장은 눈이 아니라 전신에서 터져 나왔다.
"...!"
꼬리 쪽을 지나치던 메브의 말이 앞으로 넘어지는 가운데, 이안도 우뚝 멈춰 섰다.
메브가 낙마 직전 안장을 박차며 몸을 날리고.
"캬아아아아!"
아가리를 쩍 벌린 바실리스크가, 멈춰 선 이안에게로 달려들었다. 그가 저주에 걸렸으리라 확신한 듯 저돌적인 움직임이었다.
삐죽삐죽하게 돋은 이빨 사이, 네 개의 송곳니가 낫처럼 날카롭게 번쩍이며 밀려들었다.
하지만 좀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연기를 토해내지는 않았다.
이안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간 건 그때였다.
드디어 독이 다 떨어졌군.
그는 처음부터 저주에 걸리지 않은 상태였다. 메브의 말이 자빠지는 걸 보고 미끼가 되기 위해 멈춰 섰을 뿐.
바실리스크의 아가리를 노려보던 이안이, 곧 손을 뻗었다.
뻗어 나가는 흑검의 검신을 타고 바람이 예리하게 솟구쳤다.
스걱-
보이지 않는 칼날이 바실리스크의 여린 입천장을 갈랐다. 머릿속까지 헤집은 게 분명했다. 놈의 노란 눈이 순간 탁 풀리는 가운데, 이안이 비로소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돌진을 피한 그가 바닥을 구르는 사이.
콰지지지직-
바실리스크가 풀숲과 나무를 쓰러뜨리며 옆으로 허물어졌다.
일어선 이안이 저만치의 메브를 눈에 담았다. 낙법을 끝낸 그녀도 무사히 일어서고 있었다.
어디 부러지진 않았나 보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몸을 돌렸다. 쓰러진 바실리스크가 옅게 꿈틀댔다.
흑검을 양손을 고쳐쥐며,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비늘이 얇은 목덜미를 깊이 내리쳐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다.
그가 머리 위로 검을 치켜 들 찰나.
"은고오오옹!"
뒤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
멈칫한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의 관도까지 물러나 있던 통통한 체구의 기사가 말을 몰아 달려오고 있었다.
"바실리스크의 피는 귀한 재료입니다! 심장! 차라리 놈의 심장을 찌르십시오!"
이안의 시선을 느낀 듯,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좋은 정보 고맙군.
피식한 이안이 몸을 돌렸다.
몇 걸음을 옮긴 그가 비스듬하게 쓰러진 바실리스크의 몸통을 힘껏 걷어찼다. 곧 여섯개의 다리 사이, 잿빛 비늘이 달린 복부가 드러났다.
그 사이를 훑어 보던 이안이, 이윽고 힘껏 흑검을 내뻗었다.
쿠드드득-
검날이 바실리스크의 가슴뼈를 가볍게 가르고 깊이 박혔다. 곧 손끝에 뭔가 다른 근육을 가르는 느낌이 전해졌다. 바실리스크의 꼬리와 다리가 한차례 크게 꿈틀대더니, 뒤이어 완전히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경험치가 오른 것을 확인한 이안이, 비로소 흑검을 아공간에 던져 넣으며 시선을 돌렸다. 흑검은 더는 반항하지 않았다.
"경, 괜찮소?"
메브가 대답 대신 한쪽 팔을 들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말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걸음걸이만 봐도, 말이 죽어서 낙담했다는 게 전해졌다.
다각- 다각-
그사이 근처까지 다가온 통통한 기사가 말을 멈췄다.
허겁지겁 내린 그가, 턱 위까지 간신히 덮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 괴물에게 죽은 이들도, 무사히 찬란한 여신의 곁으로 갔을 겁니다."
금발에 갈색 눈. 기사라기엔 지나치게 좋은 풍채도 그렇지만, 귀족이라기보단 시골 청년 같아 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걸친 서코트에는 밀과 곡괭이가 새겨진 문장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미소 지은 청년이 덧붙였다.
"오벨리 웨스트우드 입니다."
"이반이오."
이안이 짧게 대답했다. 이반은 한동안 쓰게 될 그의 가명이었다.
"이반 경이시군요. 저분은…?"
"메버릭 경. 대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니, 굳이 말을 걸려 하지 마시오."
이안이 대신 덧붙였다. 메버릭은 물론 메브의 가명이었다.
오벨리가 너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또 다른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검은 피부의 청년이었다. 재빨리 말에서 내린 그가 이안 쪽을 일별하고는 내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달려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도련님. 정말-"
"괜찮아, 괜찮아. 물러나 있겠어, 조라? 아직 대화 중인데."
"…예. 죄송합니다."
이안에게도 슬쩍 고개를 숙인 조라가 뒤로 물러났다.
정말 귀족가 자제셨군. 그런데 왜 어울리지도 않는 마물 사냥 같은 걸 하고 있었던 거지.
심드렁하게 생각하는 이안을 다시 바라본 오벨리가 미소 지었다.
"다시 한번 정식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반 경. 그리고 메버릭 경. 두 분이 아니었다면, 이 괴물을 토벌하는 데에 적지 않은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겁니다."
"바실리스크는 이런 곳에 사는 마물이 아닌데. 어쩌다 쫓기게 되셨소? 둥지에라도 발을 들이셨나?"
다가오는 메브를 돌아보며, 이안이 물었다. 오벨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근래 영지 인근의 마물이 부쩍 늘었습니다. 해서 이렇게 토벌대를 구성해 숲을 순찰하고 있지요."
이안이 몸을 돌렸다. 조라에게 말 고삐를 건넨 오벨리가 그의 곁으로 따라붙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는 저 산기슭 근처까지 갔을 뿐입니다. 본래는 계곡 깊은 곳에서나 살고 있었어야 할 놈이 바위 위에 있더군요. 심지어 잔뜩 화가 난 채로요."
"아하…."
이안이 짧게 웃음 지었다. 대충 상황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마물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바실리스크가 둥지에서 쫓겨난 모양이었다.
본래라면 동굴 트롤까지도 한 끼 식사로 삼을 수 있는 괴물이지만, 숫자 앞에서는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겠지.
"운이 없으셨군."
"어찌 보면 좋은 편이지요. 덕분에 여러분들을 마주쳤고, 이렇게 최소한의 희생만으로 토벌하지 않았습니까."
"이쪽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오. 저 괴물은 우리 소유니까."
오벨리를 돌아본 이안이 덧붙였다.
"피 한 방울부터 비늘 하나까지 전부. 이의 있으시오?"
뒤를 따르는 조라의 눈빛에 긴장이 서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둘이서 바실리스크를 때려 잡은 외지인들이 나쁜 마음이라도 먹는다면, 그들 모두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을 테니까. 게다가 오벨리가 귀족이란 걸 알고서도 전혀 위축된 느낌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오벨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을 터뜨렸다. 둥그스름한 턱이 흔들렸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구매하는 건, 괜찮으시겠죠?"
"그거야 물론. 운반을 도와주신다면 값을 조금 깎아드리도록 하지."
"거래를 할 줄 아시는군요. 그렇게 하죠. 이보게, 다들 이리 와서 감사를 표하시게!"
오벨리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마차 근처에서 필립과 떠들고 있던 기수들이 화들짝 말에서 뛰어 내렸다.
"감사 인사는 됐소. 이미 충분히 받았으니."
손을 들어 저지한 이안이 마차로 다가갔다. 마부석의 필립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안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겸손한 분이시군요. 보아하니 서부는 처음이신 것 같고요. 혹, 중앙에서 오셨습니까?"
오벨리가 물었다. 마차 옆에 멈춰 선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아셨소?"
"제 성을 들으시고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신 것 같았으니까요."
아, 이 일대에서 방귀깨나 뀌는 집안이라 이거지.
이안이 내심 피식하는 사이, 이안과 메브, 필립을 차례로 돌아본 오벨리가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제 소개를 정식으로 다시 해도 되겠습니까?"
"나한테 물을 말은 아니오."
내뱉은 이안이 슬쩍 필립을 일별하고는 덧붙였다.
"우리도 모시는 분이 있는 몸이라서."
"아, 그렇겠군요. 이런, 제가 예의가 없었습니다. 안에 타신 분께, 만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뒤로 한걸음 물러난 오벨리가 물었다. 어느새 달려온 조라가 그의 옆에 섰다.
이안이 시선을 보내자,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마차를 툭툭 두드렸다.
한 박자 늦게 마차 문이 열렸다.
샬롯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오벨리와 조라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
그들은 수인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놀란 듯 눈을 치켜뜨고 있었으니까.
"소개… 하겠소."
아랑곳 않고 마차에서 내린 샬롯이, 한 손으로 문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끝없는 지식의… 탐구자이자 생명수의 막내 딸…. 죽음의 세례를 받고 다시 눈뜬 자…."
스륵, 마차 안에서 흰 팔이 소리 없이 밖으로 나왔다. 찰랑대는 은발을 늘어뜨린 테사이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난간에 서는 가운데.
잠시 한숨 같은 숨소리를 토해낸 샬롯이 덧붙였다.
"…일족의 최연소 원로이신, 텐시아 아이나스 공이시오."
#19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