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도둑 동아리 부실.
당규영은 서류의 산을 보며 한탄을 금치 못했다.
"이거 언제 다 끝내냐."
최근 한 달간 그녀는 정신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3학년으로서 수업, 공략전, 대인전을 치르고,
멘토로서 1학년들 따라 던전에 들어가서 지켜보고 케어해 주고,
도둑 동아리 부장으로서 동아리 운영까지.
그러다 보니 블랙 마켓과 관련해서 처리해야 하는 서류들이 뒷전이 되었다.
본래는 미리미리 해 둬야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개최 직전인 지금 몰아서 하는 것이다.
2학년 쌍둥이가 음흉하게 웃으며 한마디씩 했다.
"빨리 끝내고 그 1학년이랑 놀러 가고 싶은 거요?"
"누님이 요즘 얼굴이 폈어. 맨날 인상 팍팍 쓰고 다니더니."
당규영은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아래에서 그림자 팔들이 솟아올라 쌍둥이에게 관절기를 걸었다.
- 드드드득,
"저건 맞아도 싸다."
서류 작업을 돕던 채다빈이 시선을 슬쩍 들어 올리더니, 별로 안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리고 말했다.
"그래도 한 주만 더 고생하시면 좀 널널해지겠네요. 이번 주면 멘토링도 끝이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그러나 멘토링은 끝나도 고생은 끝나지 않는다.
동아리 부장이란 그런 것이다.
어째서 작년도 부장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여 이 자리에 앉았는지, 당규영은 아직도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깨달은 뒤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리고 내년에 채다빈이 부장 자리를 넘겨받고 후회할 때에도 이미 너무 늦었을 것이다.
그때, 부실 밖에서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십중팔구 의뢰를 하러 찾아온 손님일 터라, 2학년 부원이 응대하러 나갔다.
"어서 오십셔. 무슨 일로 찾아오셨—"
늘상 하던 대로 영업용 멘트를 늘어놓으려던 그가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고 멈칫했다.
거기에 의아함을 느껴 기웃거리던 다른 부원들도, 동아리실을 방문한 손님의 정체를 확인하자 그 자리에 굳어졌다.
그녀는 단정한 차림새에 이지적인 미모를 가진 여학생이었다.
넥타이에 꼽힌 금빛 핀이 그녀가 3학년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한 손에는 접이식 부채를 반쯤 펼쳐서 입을 슬쩍 가리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이지적인 동시에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용살학원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유명인사였다.
'제갈소소.'
검술 동아리의 지낭(智囊)이라 불리며, 총군사이자 차장 자리에 앉아있는 핵심 중의 핵심 인물.
그녀가 이곳을 찾아왔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한다.
바로 검술 동아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갈소소가 부채를 탁 접었다.
그리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주위를 물려 주시겠어요?"
"...."
당규영이 주위에 눈짓을 보내자, 부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우르르 자리를 빠져나갔다.
채다빈이 뜻 모를 눈으로 둘을 보고 나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도둑 동아리 부실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윽고 당규영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제갈소소와 눈높이를 맞췄다.
158화 검술 동아리 (1)
제갈소소와 당규영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점점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윽고 서로에게 다가가 두 손을 덥석 맞잡더니,
"쑈!"
"뀨!"
"쑈쑈!"
"뀨뀨!"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기 시작했다.
제갈소소와 당규영.
둘은 무려 다섯 살부터 우정을 이어 온 소꿉친구 사이였다.
소꿉친구라는 사실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지만, 반가워서 방방 뛸 정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덧붙여 두 사람 모두 3학년인 데다 나름의 리더십을 보여야 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
따라서 이미지 관리를 위해 주위를 물리고 단둘이 남은 것이다.
겸사겸사 사적인 얘기를 나누려는 목적도 있었고.
먼저 방방 뛰기를 멈춘 것은 당규영이었다.
계속 손을 맞잡은 채 투정을 부린다.
"쑈, 요새 왜 이렇게 연락이 없어?"
"미안, 너무 바빴어. 자주 메시지 할게."
제갈소소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당규영 역시 부장으로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둑 동아리 같은 중견급 동아리도 운영하려니 바빠 죽겠는데, 검술 동아리 같은 초거대 세력의 차장이라면 어떻겠는가.
해서 그녀는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더 투정을 부리기에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이런저런 근황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제갈소소가 얼굴을 진지하게 하고 본론을 꺼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응, 뭔데?"
"우리가 몇 주 전에 우선 입찰한 던전이 있었는데...."
검술 동아리가 우선 입찰권을 써서 선점한 던전.
바로 흑사방이다.
제갈소소가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흑사방 인근의 풍경을 담은 사진.
전각들이 온통 무너지고 불타서 아수라장도 그런 아수라장이 없었다.
당규영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진짜 엄청 어질러 놓고 나왔네.'
김호에게 미리 전해 들은 대로,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남아버렸다.
"누가 먼저 들어갔나 봐. 혹시 아는 거 있나 해서."
흑사방은 B랭크, 즉 심층부 던전이다.
심층부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입장하려면 매우 높은 수준의 은신 능력이 요구되니, 십중팔구 도둑 동아리가 관여했을 터.
검술 동아리는 그런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갖고 움직이는 중이다.
당규영이 작게 한숨을 쉬며 인정했다.
"우리가 손 쓴 거 맞아, 거기."
"우선 입찰이 걸렸는데도?"
"응, 그거 때문에 우리도 말렸는데, 의뢰주가 하도 고집을 부려서."
"그럴 거 같더라. 근데 의뢰주가 누구야?"
질문을 하는 어조는 자연스러웠지만, 제갈소소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보통 의뢰주의 정체를 캐묻는 이 시점에서 트러블이 생기곤 한다.
도둑 동아리 측에서는 가급적 고객의 정보를 비밀로 부치고 싶어 하고, 검술 동아리는 자신들의 이권을 침범한 쥐새끼를 잡아내야만 하는 입장.
그리고 도둑 동아리가 계속 숨기려 든다면 실력 행사로 나갈 수밖에 없다.
제갈소소로서는 당규영과 친분이 있는 만큼 거기까지는 가지 않기를 바랐다.
따라서 잘 중재하고 달래기 위해 직접 발걸음을 한 거였는데.
예상과는 달리, 당규영은 곧바로 의뢰주의 정체를 털어놓았다.
"1학년이야. 3반 김호."
"그렇게 바로 말해도 돼?"
"전~부 자기한테 토스하라신다. 피해 주기 싫다고. 좀 도와달라고 하면 어디 덧나나."
입술을 삐죽거리는 당규영.
그 모습을 보고 제갈소소의 눈이 또다시 반짝 빛났다.
'이거.... 뭔가 있는데?'
촉이 온다.
평소 의뢰주를 대하는 태도라기에는 감정이 담긴 말투.
'피해를 주기 싫어한다'는 대목에서도 둘 사이에 보통 이상의 친분이 있음이 짐작된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조금 더 나한테 의지해 줬으면 좋겠는데....' 하는 아쉬움까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에, 제갈소소가 슬쩍 떠보듯이 물음을 던졌다.
"1학년이면 걔야? 요즘 같이 다닌다는."
"누가 그래? 같이 다닌다고."
"너도 알잖아. 소문 다 났어."
제갈소소는 여전히 떠보는 중이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검술 동아리 차장쯤 되니 소문이 일찍 흘러들어 왔을 뿐, 3학년 전체에 퍼지는 건 시간문제다.
그리고 이 소문의 유력한 출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두꺼비 자식을 그냥...."
최근 실의에 빠져 산다는 김갑두일 터.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오는지 당규영이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소꿉친구인 제갈소소가 판단하기에, 실상 당규영은 그다지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크든 작든 그 김호라는 1학년에게 호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도 될 것이다.
'너무 흥미진진한데?'
동아리 관련 일로 찾아왔다가 이런 러브코미디를 발견할 줄이야.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려고 해서, 제갈소소는 자연스럽게 부채를 펼쳐 입을 가렸다.
그리고 잠시 탈선했던 대화를 원래대로 끌어왔다.
"자기한테 토스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면, 나름대로 대책도 마련해 뒀겠네?"
많고 많은 던전 중에서 검술 동아리의 우선 입찰 던전을 골라 들어갔다는 것은, 검술 동아리와의 갈등을 각오하면서까지 얻을 것이 있었다는 뜻.
덧붙여 그 갈등을 해소할 무언가까지 미리 상정해 두었다는 의미다.
그 짐작이 맞다며 당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걸. 아마."
"아마? 뭔지 얘기 안 해 줬어?"
"우리 후배님은 신비주의야. 비밀이 많아."
다만 김호가 정확히 무엇을 준비했는지는 당규영도 잘 모르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걱정이 안 되나 보네.'
그 김호라는 1학년이 아무리 날고 기는 실력자라 한들, 아직은 1학년에 불과하다.
준비할 만한 거래 소재에는 엄연한 한계가 존재한다.
딴에는 자신 있게 준비했는데 별 볼 일 없는 것일 가능성도 꽤 높고.
당규영으로서는 궁금하거나 걱정될 만한 상황인데,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발 물러난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김호가 걱정이 안 생길 정도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거나,
벌써 당규영과 김호 사이에 그만큼의 신뢰가 쌓였거나.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점점 더 흥미가 동한다.
제갈소소가 부채를 탁 접었다.
이런저런 질문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김호의 이름이 나온 시점에 정해진 셈이었다.
"한번 만나서 얘기해 볼게."
제갈소소는 궁금해졌다.
과연 김호가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해결책을 준비해 두었을지.
"그런데 걔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쑈, 너까지 이러기야?"
* * *
검술 동아리.
제갈소소는 사촌동생이자 측근인 제갈영영과 함께, 집무실에서 각종 서류들을 결재하고 처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한창 서류에 집중하던 도중,
- 쿵쿵,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들겼다.
분명 노크 소리지만 울림이 묵직하다.
제갈소소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문이 벌컥 열리며 2학년 남학생이 집무실에 들어섰다.
듬직한 덩치에 온몸이 근육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충 깎은 수염, 험상궂은 인상까지.
지나가던 녹림도를 데려다가 교복을 입혀 놓은 것 같다.
2학년 녹림도, 막대웅이 물었다.
"부르셨소? 선배님."
"네, 부탁할 일이 있어서 불렀어요."
물론 말이 부탁이지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검술 동아리에 소속된 자로서 어떻게 차장의 부탁을 거절하겠는가.
막대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씀하쇼."
"1학년 3반 김호. 만나서 얘기를 나눠 보고 싶어요."
"여기로 데려오면 되오?"
"네, 대신 강압적인 수단을 써선 안 돼요."
"뭐, 알겠수다."
막대웅이 고개를 까딱하곤 집무실 문을 닫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제갈영영이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또 저쪽에 쪼르르 달려가서 다 불겠네요."
"그렇겠지."
"하여간 흑도는 믿을 수가 없다니까."
검술 동아리는 용살학원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세력인 만큼, 내부에도 여러 파벌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출신에 따라 갈리는 '흑도'와 '백도'였고, 지금 2학년이 언급한 것처럼 두 파벌은 썩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막대웅은 그 흑도 파벌의 일원이었고.
그렇다면 굳이 상대 파벌의 일원을 불러 일을 맡길 필요가 있었을까?
제갈영영의 눈빛에는 그런 의문이 담겨 있었다.
제갈소소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니?"
"보나 마나 '강압적인 수단'을 쓰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분명 막대웅은 제갈소소가 부탁한 대로 김호를 데려오겠지만,
'강압적인 수단을 쓰지 말라'는 당부는 한 귀로 흘릴 것이다.
흑도답게 성정이 거칠기도 하고, 저쪽에서 지시하는 방식대로 일처리를 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무력을 써 놓고 '강압적인 건 아니었다' 발뺌할 수도 있는 일이고.
하지만 명색이 총군사인데, 제갈소소가 그걸 예상하지 못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제갈영영이 물었다.
"언니는 막대웅이 실패할 거라 보시나요?"
"확신해."
제갈소소는 오히려 막대웅이 지시를 어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강압적인 수단'을 썼다가 실패하리라 확신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백도 쪽에는 흑도를 물어뜯을 빌미가 하나 생긴다.
막대웅이 그녀의 지시를 어기고 멋대로 행동해서 실패하기까지 했다고.
그리고 흑도 파벌에서 그것을 사주했다고.
여기까지는 제갈영영도 전부 이해했으나, 여전히 그녀는 다소 미심쩍어 보였다.
"그런데.... 그 1학년이 잘 버틸 수 있을까요?"
만약 김호의 실력이 기대 이하라서, 강압적인 방식이 성공한다면?
역으로 흑도 쪽에서 '봐라, 우리 방식이 더 잘 통하지? 하고 큰소리칠 수도 있다.
이번에도 제갈소소는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 안 해도 돼."
그녀의 확신에는 매우 뚜렷한 근거가 있었다.
불타 버린 흑사방의 모습을 보고, 학기 초에 벌어졌던 사건이 하나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로 도둑 동아리의 임시 보관소 침입 사건.
거기에 손을 보탰던 복면인의 정체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 복면인은 인페르노 피스트를 익히고, 2학년 선도부 곽승재를 정면승부로 쓰러뜨린 후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참으로 공교롭게도, 김호가 들어갔다는 흑사방이 온통 불타 있다.
도둑 동아리와의 관계도 제법 밀접해 보이고.
이것들을 전부 연결하면 나오는 결론은.
'얘가 인페르노 피스트구나.'
그럼 막대웅이 한 트럭 덤벼도 상대가 안 될걸.
159화 검술 동아리 (2)
제갈소소의 집무실을 나선 막대웅.
그는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듯하더니, 이내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트레이닝 센터는 한창 수련 및 대련 중인 학생들로 시끄러웠다.
막대웅은 그저 앞만 보며 걸었고, 점점 인적이 뜸해지며 시끄러운 소음은 저절로 잦아들었다.
곧 특수연공실 구역으로 들어선 그가 굳게 닫힌 문 앞에 멈춰 섰다.
"...."
본래 성질대로라면 솥뚜껑만 한 주먹을 들어 문이 부서지라 쿵쿵 두들겨 댔을 테지만, 그것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 한다.
문 너머의 상대는 자신의 집중이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막대웅은 그의 심기를 조금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또한 열심히 노크를 하지 않아도 상대는 자신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아챘을 터.
따라서 막대웅은 문 앞에 얌전히 서서 기다렸다.
얼마 뒤, 문이 저절로 스르르 열릴 때까지.
방 안은 어두컴컴하여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막대웅은 아무렇지도 않게 방 한구석으로 다가갔다.
이곳에 하루 이틀 찾아오는 게 아니라서 그렇다.
과연 그곳에는 한 사내가 등을 보이고 앉은 채였는데, 자세를 보니 방금 전까지 명상을 하다가 막 눈을 뜬 듯했다.
사내가 등을 보인 채 질문을 던졌다.
"제갈이 왜 부르던가."
"사람 하나를 데려오라더군."
"흑사방?"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검술 동아리 차장씩이나 되는 거물이 몸소 도둑 동아리를 방문했다.
최근 두 동아리 사이에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으니, 차장이 움직일 정도의 사건이라면 동아리의 이권 문제, 십중팔구 우선입찰권 침해 문제다.
그리고 그 뒤에 제갈소소가 누군가를 불러 독대를 하고자 한다면.
흑사방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누구."
"김호라는 놈이오. 1학년."
"...1학년?"
"나도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소."
흑사방은 명색이 B랭크 던전.
막대웅이 들어갔다간 뼈도 못 추릴 테고, 사내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 흉험하기 짝이 없는 던전에 들어간 것이 고작 1학년이라고?
쉽사리 납득할 수 없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의 생각은 자연스레,
"총알받이를 세운 건가."
"내가 보기에도 그렇소."
김호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쪽으로 흘러간다.
우선입찰 던전에 침입한 다음, 1학년을 총알받이로 세워 놓고 제갈소소와 몰래 거래를 주고받는다.
충분히 있음 직한 이야기다.
김호가 무소속이라는 점 역시 총알받이 가설에 무게를 더했다.
"헌데 따로 알아보니, 그 1학년 놈도 지하층에 자주 들락거리기는 하는 모양이오."
이제 입학한 지 겨우 두 달 돼가는 1학년이 보이기엔 과감한 행보다.
그렇다면 흑사방 건에 관해서도 단순한 총알받이가 아니라, 공범에 가까운 건 아닐까.
사내가 물었다.
"불러서 어떻게 한다던가."
"내가 받은 지시는 녀석을 데려오라는 것까지요.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려나 본데."
강압적인 수단은 쓰지 말라더군, 하고 한마디 덧붙이는 막대웅이었다.
"...."
특수연공실 내의 공기가 급격히 무거워졌다.
사내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 시작한 탓이다.
"여전히 머릿속이 꽃밭이군, 제갈."
우선입찰 던전에 침입을 허용한 것은 곧 검술 동아리의 영토를 침범당한 것이나 마찬가지.
그런데 불러서 이야기부터 들어 본다?
몹시 마음에 안 드는 방식이었다.
아직 이 일은 검술 동아리 내부의 일이지만, 언제 밖으로 새어 나갈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는 분명 제갈소소의 유하기 짝이 없는 대처도 함께 새어 나갈 터.
"백도 놈들이 저들끼리 어떻게 지내든 알 바는 아니다만, 우리까지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지."
"옳은 말이오."
"데려와라, 내 앞으로. 그리고 그 전에...."
남의 것을 넘본 대가는 치러야지.
공범이든 총알받이든 간에 말이다.
불러서 이야기를 들어 본다?
아니, 이야기는 일단 뜨거운 맛을 보여 준 다음에 들어도 늦지 않다.
오히려 그편이 이야기가 더 술술 잘 나올 것이다.
막대웅 역시 이 지극히 흑도다운 사상에 십분 동의하는 바였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알겠소. 누구를 데려가면 되오?"
다만 막대웅이 직접 손을 쓸 수는 없다.
극히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면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손을 대는 건 중대한 교칙 위반 사항.
따라서 김호를 제압하는 건 같은 1학년의 몫인데, 누구한테 그 일을 시킬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사내가 대답하기에 앞서 단어 하나를 입에 담았다.
"리플레이."
막대웅이 수정구 두 개를 휙휙 던지고, 사내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그것들을 받아 확인했다.
최근 김호의 리플레이 두 편.
하나는 이번 주, 오우거를 상대로 치른 크리스탈 공략전.
다른 하나는 선도부 조벽과의 크리스탈 대인전이다.
사내는 한동안 말없이 리플레이 수정구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눈에 이채를 머금었다.
"...나름 피하는 재주는 있군. 스킬 구성도 성가신 편이고."
오우거와 조벽의 공격을 모두 회피하고, 공략전과 대인전 모두 퍼펙트 게임으로 마무리하는 김호의 모습.
특히 경기 막바지에 조벽의 절초를 해소하는 모습에는 제법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적을 밀치고 당기는 스킬 구성도 상대하기가 적잖이 까다로워 보인다.
"허나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벽은 선도부 소속으로 모든 능력치가 균형 잡힌 실력자지만, 스피드만 놓고 보면 학년 최상위권이라기엔 손색이 있다.
그런 조벽의 추격을 허용했다는 것은 김호의 스피드가 더욱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나오는 결론은,
"속도로 압도하면 되겠군."
조벽을 훨씬 상회하는 스피드로 승부를 본다면, 아무리 미꾸라지처럼 잘 피하는 그라도 공격을 허용하고 말리라는 것.
사내의 지시가 떨어졌다.
"철수와 민수를 데려가라."
* * *
오우거가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왔다.
"꾸우우우—!"
쿵쿵거리며 곽지철과의 거리를 좁힌 놈이 곤봉을 내리찍었다.
곽지철이 납작한 부침개가 되려는 찰나, 그와 곤봉 사이에 모래처럼 고운 흙이 모여들더니 비스듬한 벽을 형성했다.
흙벽을 후려친 곤봉이 마치 미끄럼틀에 미끄러지듯 옆으로 빗겨 지나갔다.
헛스윙 탓에 자세가 조금 흐트러졌지만 오우거는 공격을 멈추지 않고, 손을 뻗어 눈앞의 인간을 잡아채려 들었다.
뻗어 오는 속도부터가 심상치 않아, 스치기만 해도 피해가 클 것 같다.
"...!"
그러나 곽지철은 이마저도 예상한 듯, 미리 시전해 둔 마법을 사용했다.
바닥에서 커다란 흙 손바닥이 솟아오르며 오우거의 손을 옆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 팍!
"꾸우우!"
아랑곳하지 않고 온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오우거.
곽지철은 급하게 발을 놀려 놈의 돌진 경로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모래벽을 미끄럼틀처럼 세워 곤봉을 흘려 내고, 곧바로 흙 손바닥 마법을 준비하는데.
오우거가 의외의 행동을 보였다.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발을 들어 걷어찬 것이다.
미처 대응하지 못한 곽지철이 거대한 발에 차이려는 찰나,
- 퍼억,
"크엑."
내가 먼저 곽지철을 뻥 차 버렸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몸을 일으키는 곽지철.
하도 걷어차여서 이제는 익숙한지 곧바로 전투를 이어 간다.
다시 모래벽과 흙 주먹을 번갈아 시전하다 보니,
- 파앗—!
[크리스탈 100%]
크리스탈 충전이 끝나며 오우거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후우...."
겨우 한숨을 돌리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곽지철.
매우 낭패한 몰골이었으나 실제로는 꽤 많은 발전이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곤봉에 뚝딱뚝딱 얻어맞고 눕기 바빴는데,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공격들을 흘리게 된 것이다.
'역시 처맞으면서 배우는 게 제일 빠르다니까.'
오늘도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는 구타 수련법이었다.
그때, 당규영이 한쪽 그림자에서 불쑥 솟아오르며 멘토링의 끝을 알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수고 많았어."
"감사합니다."
곽지철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나에게도 슬쩍 고마움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조금만 더 연습하고 점수 내라고 하면 되겠네.
곽지철이 순간이동 포탈을 넘어 사라지고, 우리도 뒤따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면서 당규영이 말문을 열었다.
"야, 어제 검술 동아리에서 왔었다?"
"뭐랍니까?"
"흑사방 들어간 거 누구냐고 묻더라."
"저라고 말씀하셨죠?"
"응, 네가 다 토스하라며."
당규영은 조금 더 도움을 주고 싶었는지 작게 입술을 삐죽거렸으나,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내가 고집을 부려 강행한 일이니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는 게 맞다.
도둑 동아리를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협상할 준비도 다 됐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았어. 그리고 증거 자료는 다 비공개로 돌려 달라고 말해 놨다."
이 부분만은 별개로 합의가 된 상태.
선도부에서도 아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기에, 우리가 그날 밤 심층부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은 최대한 숨겨야 한다.
들키면 다 같이 중징계니까.
따라서 유력한 단서가 될 흑사방 공략 리플레이 및 사진 등은 모두 비공개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검술 동아리의 초점은 '누가 우선입찰권을 무시하고 던전에 입장했는가'에 맞춰져 있어서, 당규영이 내 정체를 공개하자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 달래."
"무슨 부탁이요?"
"너한테 2학년 한 명 보낸다는데."
만나자는 얘기는 지금처럼 당규영이 직접 전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메시지를 통해서 해도 상관없다.
그럼에도 굳이 2학년을 보낸다는 건,
"사이가 안 좋나 보네요. 그 2학년 분이랑."
"그런가 봐."
내 손을 빌려서 엿을 먹이겠다는 의도다.
아마 정치적인 이해관계도 상당 부분 얽혀 있겠지.
물론 그런 복잡한 일에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고, 내가 할 일은 매우 간단하다.
누구든 찾아오는 상대를 박살 내 버리면 되는 거다.
당규영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모르니까 우리 애들 좀 붙여 줄까?"
"아니요. 혼자 해결할게요."
"칫, 그러든가."
내가 계속 거절만 해서인지 조금 토라진 당규영이었다.
어쨌든 당규영은 동아리 관련 업무를 봐야 하고, 나는 마나 연공을 해야 하기에 목적지가 다르다.
해서 이쯤에서 갈라질 때가 됐다.
"들어가세요, 선배님."
"응, 내일 봐."
당규영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다음, 트레이닝 센터를 향해 쭉 걸었다.
그러다가 나는 전방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길목에 남학생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니 예상대로 앞을 가로막는다.
조벽과 비슷하게 덩치가 크지만, 이쪽은 어딘지 모르게 산적 놈 같은 아우라가 풍겨온다.
넥타이 핀을 확인해 보니 은색, 2학년.
덧붙여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노골적인 적의가 느껴진다.
"김호."
"예, 선배님."
"내가 온 이유는 아나?"
"압니다."
"따라와라."
2학년이 등을 돌리고 앞장섰다.
160화 검술 동아리 (3)
2학년 선배는 앞장서면서 자신을 막대웅이라 소개했다.
이미 당규영에게 언질을 받았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막대웅은 나를 동아리 부실로 데려가는 것 말고도 다른 용건이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도착한 곳이 외진 골목인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짐짓 어리숙한 척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는 검술 동아리가 아닌데요?"
"물론 아니지. 널 차장님에게 데려가는 건 나중 일이야."
"그럼 지금은요?"
그러자 막대웅이 입가에 스산한 미소를 머금으며 기세를 흘리기 시작했다.
"함부로 남의 것을 넘본 대가를 치러야지. 검술 동아리가 만만해 보였나?"
"만만하진 않은데.... 대가는 일단 대화부터 나눠 본 다음에 치르는 게 맞지 않을까요. 저쪽에서도 그걸 원하는 거 같고."
"우리 모두의 뜻이 같지는 않다."
"그래도 기왕이면 차장님의 뜻이 우선 아닐까 싶거든요."
"나한테는 아니다."
이 동네 기강이 상당히 해이하구만.
차장이 내렸다는 지시를 저렇게 가벼이 어길 수가.
어쩐지 저쪽에서 이렇게 판을 짠 것도 납득이 되는 것 같다.
이번 기회에 막대웅 파의 콧대를 꺾어 놓으려는 거겠지.
나로서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싸움 한 번에 흑사방 리플레이를 비공개로 돌려준다면 남는 장사니까.
"그래서, 직접 손을 쓰시려고요?"
다만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손을 대는 건 교칙 위반 사항.
막대웅도 그 사실을 아는지 입가에 걸린 웃음이 짙어졌다.
"물론 다른 녀석들이 상대할 거다."
그리고 턱짓으로 내 뒤편을 가리킨다.
언제 나타났는지 1학년 두 명이 앞뒤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번갈아 보았으나 기억에 남아 있는 얼굴들은 아니었다.
해서 물었다.
"친구들, 우리 통성명부터 할까?"
"철수."
"민수다."
철수와 민수가 짤막하게 한마디씩 했다.
아예 대꾸조차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가명 냄새가 풀풀 풍기니 거기서 거기다.
내가 또 뭐라 물으려는 찰나, 막대웅의 지시가 대화를 끊었다.
"이만 시작하지."
"...."
"...."
철수와 민수의 검집에서 칼날이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깔끔한 발검.
나는 철수를 바라보다가 칭찬을 보냈다.
"자세가 좋네."
"고맙군."
철수가 칭찬을 담담히 받고, 검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걸어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철수의 손이 순간 흐릿해지더니, 한 줄기 섬광이 내 시야를 반으로 가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지간해서는 반응조차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쾌검이었다.
물론 나는 그가 출수하기 전부터 예측하고 움직이기 시작했기에, 옆으로 반걸음 이동해서 회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틀었는데, 뒤에서도 민수의 공격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첫 공격이 실패하는 즉시 검을 회수하고 찔러 넣는 두 사람.
앞에서는 심장, 뒤에서는 척추를 갈라 버리려 든다.
'이렇게까지 살벌하게 나올 필요가 있나?'
공격 하나하나가 인체의 치명적인 급소를 노리고 있다.
적중되면 매운 맛을 보는 게 아니라 승천하게 생겼다.
그러기엔 아직 세계 평화를 위해 할 일이 많아서, 나는 도둑걸음을 시전하며 스텝을 밟았다.
검격들이 아슬아슬하게 나를 스쳐 지나간다.
앞뒤를 점하고 몇 번이나 찌르고 베었는데 계속 실패하자, 지켜보던 막대웅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확실히 잘 피하는군.... 속도를 올려라."
"...."
그의 지시에 철수와 민수가 잠시 물러나 시선을 교환했다.
이윽고 둘의 기세가 조금 변한 느낌이 들더니 재차 공격해 들어온다.
- 쐐쐐쐐쐐!
나를 앞뒤로 포위하고 공격을 연계하는 것은 같지만,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이들의 배후에 있는 자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 것도 같다.
'스피드로 압도하겠다, 이 말이군.'
실제로 피하기가 슬슬 버거워지고 있으니 그 노림수가 틀린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스피드는 오버히트를 안 썼을 때 기준이라, 마음만 먹으면 더욱 압도적인 속도로 찍어 누를 수도 있다.
하지만,
'벌써 다 보여 줄 필요는 없지.'
이들과의 인연이 오늘만으로 끝날 리가 없으니까.
따라서 나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 뿅!
허공에서 먹구름이 솟아올랐다.
나는 뿌리에 먹구름을 휘감은 뒤, 짓쳐오는 철수의 칼끝에 슬쩍 가져다 댔다.
먹구름에 닿자 칼날이 튕겨나가며 검격의 궤도가 옆으로 휘어진다.
"...!"
즉시 검을 회수하는 철수.
내가 이럴 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재빠른 반응이었으나, 잠시 공격이 끊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틈에 나는 등 뒤에서 검을 찔러 오는 민수에게 이목을 돌렸다.
- 펑, 펑!
압축된 마나가 두 번 폭발했다.
뿌리에 부여된 메모라이즈로 일점폭발을 두 번 저장해 둔 다음 순식간에 해방시킨 것이다.
뜻밖의 반격을 얻어맞고 잠시 몸이 경직된 민수.
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 펑!
압축된 공기가 터져나오며 그를 멀리 날려 버렸다.
'일단 저건 치워 놨고.'
다시 정면으로 몸을 돌리다가 급히 고개를 꺾자,
- 쐐액!
한 줄기 빛이 내 뺨을 스쳐 지나간다.
일대일이 되었음에도 철수의 기세는 한풀 꺾이기는 커녕 오히려 더 매서워진 듯하다.
'제법인데.'
나는 철수의 공격들을 피하는 것보다 먹구름으로 슬쩍슬쩍 밀어내는 쪽으로 전법을 바꾸었다.
그러면서 한 번씩 일점폭발을 섞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펑, 펑!
철수의 반응은 이번에도 훌륭했다.
마나 뭉텅이가 모여드는 낌새만 보여도 몸을 피하고, 동시에 끊임없이 공격을 이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녀석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점폭발이 터져나왔기에 아주 조금씩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성가시군."
"고맙군."
짧은 시간에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갔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암만 생각해도 어디서 본 거 같단 말이야.'
처음 만났을 때도 기시감을 느꼈지만 긴가민가했었다.
하지만 계속 상대하다 보니 기시감의 정체가 점점 뚜렷해져 간다.
평범한 가명, 평범한 외견, 평범한 무기,
그러나 살기 짙은 검술....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나 뭐 좀 물어봐도 돼?"
"뭔가."
"그 혹시, 성이 장씨인가? 장철수?"
"...!?"
철수가 검을 찔러 대다 말고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더욱 확신이 섰다.
"장삼이니??"
"...아니다."
"장삼이 맞지??"
"아니라고."
"그럼 저기 민수는 왕필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평정심이 눈에 띄게 흐트러진 것으로 보아 정답을 제대로 맞춘 모양이다.
2대2 대인전에서 상대팀으로 잡혔던 장삼과 왕필.
그때는 점소이와 문지기 컨셉이었는데, 오늘은 철수와 민수 컨셉으로 돌아온 것이다.
"야, 반갑다. 이걸 이렇게 또 보네."
"...."
맥이 빠져 버렸는지 공격을 중단한 장삼.
뒤쪽에서 다가오던 왕필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그러자 막대웅이 얹짢은 얼굴로 다시 지시를 내렸다.
"뭘 멀뚱멀뚱 서 있나. 싸워라."
"...."
철수와 민수, 아니 장삼과 왕필에게 막대웅은 상급생이자 동아리 선배일 터.
감히 거역할 수가 없는 입장이다.
따라서 다시 자리를 잡고 전투를 재개하려는데,
- 쿠구구구,
갑자기 나무 문이 불쑥 솟아올랐다.
이 용살학원에서 나무 문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바로 곽승재의 고유마법이다.
해서 막대웅이 인상을 팍 쓰곤, 걸어 나오는 곽승재에게 퉁명스레 내뱉었다.
"너는 어딜가나 빠지질 않는구나."
"본인이 떳떳하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 뭐가 문제인가."
"...."
떳떳하지 못한 막대웅이 잠시 입을 다물고.
곽승재는 장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검술 동아리 셋에 무소속 1학년 하나.... 대강 짐작은 간다만 네 입으로 설명할 기회를 주마."
막대웅은 나무 문이 갑자기 솟았을 때는 잠깐 당황했지만, 다시 느긋한 태도로 돌아와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우리 후배님들이 실력을 겨뤄 보고 싶다길래, 선배로서 참관하던 참이었지."
"실력을 겨뤄 본다.... 2대1로 말인가?"
"2대1이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안 될 이유는 없지. 다만 장소는 구분하는 게 맞지 않겠나."
"여기가 뭐가 어때서?"
곽승재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알 만한 놈이 자꾸 발뺌을 하는군. 1학년들에게 교칙을 숙지시킬 겸 말해 주마. 트레이닝 센터와 아레나 밖에서 벌이는 결투는 모두 교칙위반 사항이다."
"그런 게 있었지, 깜박했구만."
막대웅이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현장을 잡아내기는 했지만 그가 직접 어긴 교칙은 없다.
1학년들이 아레나 밖에서 싸우는데 선배로서 말리지 않았다는 도의적인 책임만이 있을 뿐.
곽승재가 1학년들을 한 명씩 눈에 담으며 말했다.
"해산해라. 다음에는 벌점이다."
"예, 선배님."
장삼과 왕필이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물러나고, 막대웅 역시 잠깐 나를 노려보다가 등을 돌렸다.
그렇게 검술 동아리 삼인조가 자리를 뜨자, 곽승재의 눈길은 자연스레 남아 있는 나에게 돌아갔다.
'넌 왜 안 가냐?'하고 눈빛으로 묻길래, 나도 주섬주섬 먹구름과 뿌리를 집어넣으며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신고를 받았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우연이라기엔 너무나도 시기적절하게 등장한 곽승재.
아무리 탐지 능력이 3학년들도 인정할 수준이라곤 하나, 이런 외진 곳까지 능력이 닿지는 않을 거다.
이것은 즉, 상황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신고를 넣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분명 검술 동아리 차장 쪽 사람일 터.
'타이밍도 적절했고.'
곽승재가 전투가 벌어진 직후 출동했다면 막대웅 측의 의심도 컸겠지만, 내가 어느 정도 버틴 다음에,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신고를 넣었다.
결과적으로 싸움을 벌인 1학년 중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막대웅과 배후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거기에 차장 측은 막대웅에게 왜 지시를 어겼는가 추궁할 빌미까지 만들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역시 차장은 아무나 해 먹는 게 아니라니까.'
내가 깔끔한 일 처리에 감탄하며 자리를 뜨려는데, 곽승재가 잠시 나를 불러세웠다.
"김호."
"예, 선배님."
"지철이는 어떻게 하고 있지."
또 동생 얘기네.
어쩌면 곽승재의 관심사는 선도부와 제 동생밖에 없는 건 아닐까?
아무튼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라, 나는 이 며칠간 멘토링에서 벌어진 일들을 간략하게 추려서 전달했다.
오우거의 공격을 제대로 흘릴 때까지 뻥뻥 걷어찼다는 부분만 조금 미화해서.
"—그래서 지금은 꽤 늘었네요."
"그렇군."
"내일쯤 점수 낼 텐데,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나와 연습한 대로만 하면 초고득점은 아니라도 나름 준수한 점수를 내지 않을까 예상한다.
곽승재가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거의 불가능할 거라 여기고 있었는데, 그 녀석도 하면 되는군. 도움을 줘서 고맙다."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이전에 말한 대로, 많은 것을 약속하지는 못한다. 허나 이 빚은 언제고 잊지 않고 갚지."
"그걸로 충분합니다."
"가겠다."
거기까지 말하고 곽승재는 나무 문 너머로 사라졌다.
- 쿠구구구....
나무문이 땅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나도 원래 목적지인 트레이닝 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따라 트레이닝 센터가 멀구만.'
또 걸음을 멈출 일이 생겼다.
저 앞에서 장삼과 왕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피할 이유가 없었기에, 똑바로 다가가며 물었다.
"왜 또. 교칙위반이라니까."
선도부가 왔다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시비냐.
그러나 장삼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럼?"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161화 검술 동아리 (4)
주위에 막대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이 둘만 왔다면 싸울 생각이 없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에 답해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바쁜 몸이라, 가면서 얘기합시다."
"그러지."
우리는 트레이닝 센터로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장삼과 왕필은 먼저 사과부터 했다.
"부득이하게 손을 쓰게 됐다. 이런 방식은 바라지 않았지만.... 동아리 일이라는 게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더군."
"그렇겠지. 이해한다."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면 좋든 싫든 그 집단이 목표하는 방향으로 함께 움직여야만 한다.
용살학원에서 동아리에 묶인다는 건 그런 의미다.
내가 무소속을 유지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로서는 잠깐 시간을 낭비한 것 말고는 피해 본 게 없고, 막대웅 측의 손해가 더 크기도 해서 장삼 왕필에게는 이렇다 할 악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뭔데?"
장삼은 입을 열려다가 머뭇거리고 왕필과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부끄러운 질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티가 많이 났나?"
처음 2대2 대인전에서 만났을 때, 나는 한눈에 이들이 살수 계열 클래스라는 것을 간파했었다.
그러자 경기가 끝난 후 장삼이 어떻게 알아챘는지 물었고, 나는 지나치게 평범해 보인다는 점을 이유로 꼽았었다.
그런데 또 철수와 민수로 위장했다가 들켰으니 은근히 신경이 쓰이나 보다.
나는 솔직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좀 낫더라."
"그런가?"
장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사실 이번에는 저 둘이 장삼과 왕필이라는 것을 눈치챈 거지, 평범해서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아니다.
초면이었다면 '평범하게 생겼는데 칼 잘 쓰네' 정도의 평가를 내리지 않았을까.
두 사람은 내가 해 줬던 피드백을 십분 반영해서, 변장을 조금 더 개성 있게 바꾸고, 무기도 싸구려 철검에서 D급 표두의 장검으로 바꿔 들었다.
이제는 반에 한두 명쯤은 있을 법한 평범함이니, 정체를 숨기기에는 나쁘지 않다.
다만....
"이거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
"철수 민수, 누구 아이디어냐. 딱 말해."
잘 가다가 작명 센스가 다 망쳐 놨어.
왜 많고 많은 이름 중에 하필 철수 민수란 말인가.
"...."
장삼이 말없이 왕필을 바라보았고, 왕필은 시선을 피해 먼 산을 바라보았다.
이 행동으로 누가 범인인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계속 시선이 집중되자 왕필이 참다못해 장삼에게 삿대질을 했다.
"'장삼 왕필'은 이놈이 지었다!"
전세가 역전되어, 이번에는 장삼이 우리의 시선을 피해 먼 산을 바라보았다.
뻘쭘한 침묵이 이어지다가, 두 사람이 동시에 헛기침을 해 댔다.
"크음, 다른 가명을 알아보지."
"그게 좋겠다. 아니야, 너네는 안 되겠어. 그냥 다른 사람한테 맡겨."
"...그러지."
심각해진 얼굴로 고민을 시작한 장삼과 왕필.
보나 마나 새 가명에 대한 고민일 터라, 나는 기다리지 않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근데 그거 물어보려고 찾아온 건 아니잖아."
"...음."
"유령무영(幽靈無影). 맞지?"
"그렇다."
두 사람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2대2 대인전에서 그들은 정체를 숨긴 채, 삼재검법으로만 우리를 상대했다.
반면 나는 고현우를 성장시키는 게 목표라, 그들이 본 실력을 발휘해 싸우길 원했다.
그래서 미끼로 내건 것이 '이기면 유령무영에 대해 알려 주겠다'였는데,
왕필은 내가 대수인과 윈드포스를 섞은 장법으로 날려 버리고,
장삼과 고현우의 승부는 양패구상, 즉 무승부로 끝났었다.
이들은 그것을 기억하고 찾아온 것이다.
"사실 막대웅 선배의 지시대로 행동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했다."
- 유령무영은....
- 이기고 물어보랬는데.
- 다음에 다시 도전하겠다.
마지막에 저렇게 말하고 헤어졌으니까.
이 기회에 나를 제압하고 물어보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허나 쉽지 않더군."
둘이서 협공을 했는데도 내 몸에 생채기 하나 못 냈다.
저쪽도 어느 정도는 실력을 숨겼겠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이대로라면 언제 나를 쓰러뜨리고 유령무영에 관해 듣게 될지 요원하다는 판단이 섰고, 이렇게 찾아왔다는 거다.
장삼과 왕필이 한마디씩 했다.
"억지스럽다는 것은 안다. 그래도 다시 고려했으면 좋겠군."
"원하는 것이 있다면 최대한 맞춰 주겠다."
나는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 못 알려 줄 것도 없지."
"그게 정말인가?"
'어차피 조만간 가지러 가야 되거든.'
유령무영은 이 둘뿐만 아니라, 도둑 동아리가 심층부를 뚫어 주는 조건으로 약속하기도 했었다.
언제까지고 빚으로 달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가지러 가는 것은 예정된 일이다.
그때 겸사겸사 이 녀석들과도 거래를 주고받으면 되겠지.
"공짜가 아니란 것 정도는 알겠지."
"물론이다. 원하는 걸 말해라."
그러나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너무 급하다. 거래는 내 손에 들어온 다음에 천천히 생각해도 안 늦어."
"으음...."
"우선 부탁 하나만 들어줘라. 앞으로 또 충돌할 일이 생기면 미리 언질을 줘."
오늘은 갑자기 튀어나온 선도부에 방해를 받아서 물러났지만, 막대웅 파가 이대로 포기할 리 없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계속 시비를 걸어올 테니, 그럴 때마다 미리 알려 달라는 거다.
장삼이 얼굴을 굳혔다.
"미안하지만 동아리를 배신할 수는 없다."
"누가 배신하래? 싸우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대충 싸우라는 것도 아니야. 메시지만 하나 남겨 달라고. 마음의 준비 좀 하게."
"으음, 그 정도라면."
반쯤 넘어온 장삼에게 내가 추가타를 넣었다.
"그리고 지금이야 우리 사이가 험악하지만, 앞으로 쭉 그렇지는 않을걸?"
흑도쪽과도 거래를 할 테니 결국에는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가 될 거다.
장삼은 현재 공식적으로 실력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나름 유망주급.
검술 동아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입장이다.
4대 세력 간의 경쟁, 그리고 유망주들끼리 벌이는 경쟁에 비하면 나와의 다툼은 그저 소소한 해프닝에 불과하다.
그러니 내가 추후 거래를 제안하면 반드시 받아들이리라 확신한다.
장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다면 알겠다."
"종종 연락하자고."
"그러지."
볼일은 그걸로 끝이었는지 장삼과 왕필은 더 따라오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나 역시 가던 대로 트레이닝 센터로 걷다가,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근데, 너 본명이 뭐냐?"
"무극(武極). 장무극이다."
"멋지네."
"무의 끝을 보라는 뜻으로 사부님께서 지어 주셨다."
낭만이 있는 사부님이시군.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다음으로 왕필에게 물었다.
"너는?"
"왕춘삼이다."
"...."
나는 몇 초간 침묵한 뒤, 왕필, 아니 왕춘삼에게 다시 물었다.
"너는 가명 안 써도 되는 거 아니야?"
* * *
막대웅은 다음 날 다시 나를 찾아왔다.
어제에 비해 기분이 상당히 저조해 보인다.
'쪼인트 좀 까이셨나 본데.'
일차적으로 검술 동아리 차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데다 나를 데려오지도 못했으니 거기서 한 번 까였을 테고,
배후의 목표였던 '나에게 매운맛을 보여 주는 것' 역시 실패했으니 또 까였을 테고.
덧붙여 선도부한테 찍혀서 당분간 몸을 사려야 하는 처지가 됐다.
'다 자업자득이지.'
나는 세상 해맑은 얼굴을 한 채 막대웅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대가를 치르러 가나요?"
막대웅의 안면이 분노로 씰룩거렸다.
안 그래도 험악해서 산적 놈 같은 인상이 더욱 험악하게 변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노를 표출하면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을 알기에 꾹 눌러 참는 기색이다.
"...따라와라."
조금이라도 나와 가까이 있는 시간을 줄이고자 하는지, 막대웅의 걷는 속도가 빨랐다.
이번에는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검술 동아리 부실로 이동한다.
'근데 이걸 부실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한 층을 다 쓰고 있다면 그건 동아리실일까, 동아리층일까?
부실은 동아리의 규모, 그리고 그 동아리가 참여하는 여러 행사에서의 성과 등을 종합해서 결정된다.
가령 도둑 동아리는 규모만 놓고 보면 중견급이지만, 하도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는 탓에 페널티를 잔뜩 받았다.
당장 학기 초만 해도 임시 보관소에 침입했다가 검거됐었고.
따라서 규모에 걸맞지 않게, 한적한 구석에 조그마한 부실을 배정받았다.
반면 검술 동아리는 명실상부 용살학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동아리이며, 학사 및 학생 단체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를 주고받는 편이다.
그 결과로 이렇게 한 층 전체를 쓰는 것.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최신식이며 최고급이다.
나는 막대웅을 따라 걸으며 이곳저곳에 눈길을 주었다.
둥글게 모여 앉아 담론을 나누는 이들.
검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무언가 비교하는 이들.
회의실 같은 방에서는 다음에 들어갈 던전에 대한 브리핑이 진행 중이다.
계속 구경하며 걷다 보니, 막대웅이 고급진 나무 문 앞에 멈춰 섰다.
차장의 집무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문을 두드리지 않고, 나를 똑바로 마주 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차장을 어떻게 구워삶을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적어도 우리의 눈 밖에 났다. 앞으로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기대되네요. 요즘 삶에 활력소가 부족하던 참이었는데."
내가 빙긋 웃으며 답하자 막대웅의 안면이 또 한 차례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나에게서 시선을 떼더니, 주먹을 들어 문을 쿵쿵 두드렸다.
안쪽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집무실에 들어서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지적인 미모를 가진 3학년 여학생이었다.
책상 위에 세워진 명패가 그녀의 이름이 제갈소소이며, 검술 동아리의 차장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제갈소소는 서류 작업을 마무리하던 참이었는지, 책상에 늘어선 서류들을 가지런히 모아 정리했다.
그런 뒤에야 시선을 들어 올려 막대웅을 바라보았고, 막대웅은 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데려왔소."
"수고했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축객령이 떨어지자 막대웅은 곧장 등을 돌리더니, 문을 쿵 닫고 나가 버렸다.
제갈소소는 닫힌 문을 뜻 모를 미소를 띤 채 바라보다가, 이내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일이 생겨서 늦었습니다."
"아니에요,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원래는 어제 만났어야 했는데, 막대웅 파가 수작을 부려 하루 늦어졌다는 뜻.
그리고 제갈소소가 말하는 '고생'이란 장무극과 왕춘삼과 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덕분에 나도 제갈소소도 이득을 봤으니 윈윈이었다.
"당규영 부장 말로는 준비해 온 게 있다고 하던데, 한번 들어 볼게요."
검술 동아리와의 협상은 제법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162화 검술 동아리 (5)
제갈소소가 자신 몫의 차를 따르며 이쪽으로 물음을 던졌다.
"한 잔 드릴까요?"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찻잔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잔에서 깊고 부드러운 향이 올라온다.
나는 차를 한 모금 홀짝거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차군요."
"가문에서 재배하고 배합한 용정(龍井)이에요."
"확실히 풍미가 깊습니다. 그런데.... 저기 계시는 분은 안 드셔도 됩니까?"
"...!"
내가 벽면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묻자, 제갈소소가 흠칫 놀라며 부드러운 미소가 아주 잠깐 흐트러졌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가듯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평정심이 여태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언제부터 눈치챘나요?"
"방에 들어섰을 때부터 묘하게 위화감이 느껴지더군요."
제갈소소의 진법은 3학년 수준인데다 제갈세가의 비전이 가미되어 있을 거다.
하지만 고인물 센스로 졸업생이 설치한 진법도 간파한 나다.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는 몰라도, 아주 작은 위화감을 보고 진법이 설치됐다는 사실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또한 이 시점에서 그녀가 나에게 숨길 것이라면 사람밖에 없기에, 벽 너머에 누군가가 있으리라 추측한 것이다.
나를 보는 제갈소소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대단하네요. 당규영 부장에게 미리 듣기는 했지만 역시 만만치 않아."
이내 제갈소소가 벽 쪽으로 다가가더니, 근처에 배치한 기물 몇 개의 위치를 바꿨다.
그러자 진법이 해제되며 비밀 문이 드러났고, 그 문을 통해 여학생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 여학생은 첫인상부터가 드세 보였고, 그 드센 성정을 반영하듯 등에 커다란 도를 메고 있었다.
"...."
문제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못마땅함을 넘어 적개심까지 엿보인다는 점인데, 이래서 격리된 비밀 공간에서 대화를 듣게 했구나 싶다.
하지만 이렇게 삼자대면을 하게 된 이상 이미 엎질러진 물.
제갈소소가 그녀를 소개했고,
"이쪽은 팽미령이에요. 저랑 같이 3학년이고,"
"이번에 흑사방을 공략했지. 파티장이었다."
팽미령이 말을 받았다.
'파티장'이라는 대목을 특히 강조하면서.
그녀가 바로 흑사방 침투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것이다.
팽미령이 나를 쏘아보며 비꼬듯 말했다.
"팀원들이랑 몇 주 열심히 준비해서 들어갔더니 내부는 개판을 쳐 놨고, 흑사방주는 미쳐 날뛰고 있더라. 덕분에 고생 좀 했어."
검술 동아리의 입장에서는 세력의 이권인 우선 입찰권이 침범당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집단으로서의 입장.
냉정하게 따지면 제삼자에 가깝다.
아무리 화가 난다 한들, 던전에 직접 발을 들인 당사자의 분노에 비하겠는가.
기실 내 잘못은 맞았기에 나는 꾸벅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화내시는 것도 다 이해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다 엎어 버리고 싶은데, 소소랑 당규영 얼굴 봐서 일단 참는다. 거창한 걸 준비해 왔다던데, 아니면 각오해."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팽미령이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물었다.
"근데 흑사방에는 뭐 가지러 들어간 거냐?"
"재료가 필요했습니다."
"재료?"
나는 대답 대신 뿌리를 꺼내 보였다.
검은 광택을 띤 금속이 짧은 봉을 구성하고 있다.
만년한철과 블랙 미스릴의 합금이다.
팽미령이 그것을 유심히 살피더니 눈에 이채를 머금었다.
"한철.... 아니야, 만년한철?"
"맞습니다."
팽미령과 제갈소소가 시선을 교환했다.
"흑사방에서 주괴가 드랍돼?"
"나는 지금 처음 듣는데."
"비고 구석을 잘 보시면 주괴 상자가 있어요."
"...?"
팽미령이 조금 인상을 썼다.
듣고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눈치라, 나는 흑사방 공략본을 꺼냈다.
제법 두툼했기에, 방주의 비고에 들어갔을 때의 공략법만 짚어서.
그것을 보고 팽미령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여기 이런 게 있었나."
"몰랐어?"
"이걸 어떻게 알아?"
[방주의 검은 궤짝]은 비고에서도 깊은 한구석에 처박혀 있고, 온통 검은 칠이 돼 있기에 정말 세세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제갈소소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어차피 주괴 상자는 안 갖고 나왔겠네."
"...아마 그렇겠지."
그렇다면 나에게 보상을 도둑맞았다고 하기에는 다소 애매해지는 셈이다.
보상은 이번 문제의 일부분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때문에 팽미령은 화가 아주 조금은 누그러진 듯했다.
또 그녀는 나에게 계속 화를 내기보다, 흑사방 공략본을 확인하는 데에 온통 신경이 쏠린 상태였다.
공략했던 던전 곳곳에 숨겨진 요소들이 있었다니 궁금할 만도 하지.
빠르게 넘겨 가며 이곳저곳을 살피고, 혼잣말처럼 감탄사를 흘렸다.
"이렇게 자세하게.... 이거 누가 썼어?"
"접니다."
"너, 솔직하게 말해."
"저 맞아요."
입학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1학년이 심층부 던전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파악하고 있으니, 안 믿기는 게 정상이다.
아마 내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반면 제갈소소의 관점은 조금 다른 듯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냈는가, 혹은 내 배후에 누가 있는가 없는가는 나중에 생각할 문제.
당장 중요한 것은.
"다른 던전 공략본도 있나요?"
"네, 여기 있습니다."
나는 다음으로 [깃털뱀 제단] 공략본을 넘겨주었고, 둘은 그것 역시 흥미로운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가 제갈소소와 팽미령이 서로의 의향을 확인하듯 시선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공략을 준비하는 던전이 몇몇 개 있어요. 거기에 관한 공략본을 이것처럼 써 줄 수만 있다면, 우선 입찰권 문제는 이대로 덮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공략이 가능한' 지하층 던전에 대한 공략법은 모두 머릿속에 들어 있다.
그중 한두 개 가르쳐 주는 것쯤이야.
그러나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것도 괜찮지만 제가 준비한 게 더 구미가 당기실 겁니다."
이미 강력한 카드를 준비해 왔는데 굳이 다른 걸로 협상을 진행할 이유가 없다.
내 말에 또다시 슬쩍 눈빛을 교환하는 두 사람.
"한번 들어보죠."
"제가 가져온 건 장보도입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장보도 조각A와 C를 꺼냈다.
그것을 받아 들여다보던 제갈소소가 말했다.
"장보도 조각이 맞기는 하네요. 하지만 이것만 봐서는 가치를 판단할 수가 없어요."
어느 던전의 장보도인가에 따라 최종적으로 얻는 보상의 수준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가령 어중간한 D급, E급 던전이라면 숨겨진 것이라 해 봐야 대단치 않을 테니까.
물론 이것 역시 예상된 질문이었다.
하나만 있어도 충분할 조각을 둘 모아온 것은 이 상황을 대비해서였다.
"겹쳐서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일으켜 보십시오."
제갈소소가 내 말대로 장보도 조각 둘을 알맞게 겹치더니, 손에서 금빛 화염이 치솟았다.
- 화르르륵,
불길에 휩싸였음에도 장보도 조각들은 전혀 타지 않고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 후 제갈소소가 삼매진화를 거두자 두 조각은 하나로 겹쳐진 상태였으며, 그 위에 옅은 지도가 떠올라 있었다.
"이건...."
"알아보시겠습니까?"
이건 어느 던전의 지도인가.
팽미령은 떠오르는 것이 없었는지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 장보도를 노려보았다.
반면 제갈소소는 무언가 깨달은 듯 눈빛이 조금 변했다.
"악인집결. 맞나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88번, B랭크 던전.
악인집결.
키워드는 [보스 러쉬]로, 일대에 출몰하는 악인들, 즉 마두들을 모두 처치하는 것이 목표다.
다만 그들 하나하나가 이름난 마두들인데다 일부는 서로 협력하기까지 하니, 상대하기가 이만저만 까다로운 게 아니다.
따라서 B랭크 던전 중에서도 높은 난이도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자들이 한 곳에 모이는 원인이,"
"이 장보도 때문이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마두라는 단어에는 자연스레 무림공적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종적이 드러나는 즉시 고수들의 추격을 받을 텐데, '집결'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한 곳에 모여드는 데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존재할 터.
그리고 제갈소소의 손에 들린 미완성 장보도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
"...."
잠시 생각에 잠긴 제갈소소와 팽미령.
표정이 거의 처음 그대로인 제갈소소와는 달리, 팽미령의 얼굴은 상당히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나에 대한 짜증이나 분노는 거의 사라지고, 그 자리를 매우 큰 흥미와 갈망이 대신하고 있다.
B랭크 던전의 장보도와 그것이 가리키는 히든 피스라면 정말 보통 물건이 아닐 테니까.
또한 이 [악인집결] 내부의 히든 피스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그것을 가장 먼저 선점할 수 있다면.
우선 입찰권을 침범당한 것이나 던전 공략을 방해받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는, 그야말로 엄청난 명예가 주어지는 것이다.
다만, 이 장보도는 미완성이다.
어렴풋이 지도의 윤곽만 떠올랐을 뿐, 정확히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제갈소소가 물었다.
"A와 C를 가져왔다는 건, 마지막 한 조각도 구할 방법이 있다는 거겠지요?"
"물론입니다."
한 주 동안 던전 세 개를 공략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었기에 대응표국-대응표행 연계 던전만 빠르게 해치웠다.
장보도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에는 두 장이면 충분하기도 해서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나머지는 언제 가지러 가실 생각인가요?"
"다음 공략전 주간 내로 해결하겠습니다."
그러자 제갈소소가 팽미령에게 물었다.
"어때? 기다릴 수 있어?"
다음 주는 중간고사 주간,
그다음 주는 대인전 주간,
그리고 그 다음이 공략전 주간이다.
거의 3주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니,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팽미령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기다리지."
조금만 인내심을 발휘하면 엄청난 기회가 손에 들어올 테니까.
제갈소소도 뒤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역량을 시험해 보죠."
마지막 장보도 조각을 확보하기까지 3주의 시간이 주어졌다.
* * *
['랭크 업(D)'을 사용합니다.]
['증폭'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D->C)]
대응표행 랜덤박스에서 나온 [랭크 업]은 [증폭]에 쓰였다.
가장 랭크를 올리기 어렵고 가장 유용하니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셈이다.
다음으로 나는 인벤토리에서 [봉마함]을 꺼내 놓고, 복덩이 서예인이 뽑아준 [정화부]를 척 붙였다.
그러자 새하얀 정화부가 테두리부터 까맣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마기를 정화하는 만큼 정화부 역시 점점 소모되는 것이다.
나는 더 지켜보지 않고 봉마함을 도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한동안 이대로 놔두면 될 거다.
물론 정화부 1개로 봉마함 내부의 응축된 마기를 전부 정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애초에 내 목표는 '정화'가 아니라 '중화'였다.
조금만 중화해도 내가 큰 무리없이 사용할 수준은 될 터.
그리고 그렇게 중화된 마기는,
'마공(魔功)의 연성에 쓰이지.'
블랙 마켓 사전 답사 때, 나는 구하고자 하는 금지 아이템 리스트를 만들어서 당규영에게 넘겼었고, 당규영은 이런 말을 돌려주었다.
- ...무슨 마공이 이렇게 많아. 김호야, 넌 어떻게 맨날 살벌한 것만 찾아다니냐.
163화 1차 멘토링 종료
한 주 동안 곽지철을 뻥뻥 걷어차고, 오우거를 일점폭발로 괴롭혀 댄 결과.
['일점폭발'의 랭크가 상승합니다. (D->C)]
랭크를 C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나선폭발의 세 가지 선행 스킬들 중 둘이 준비된 셈이다.
거기에 더해 다른 바람 계열 스킬들도 제법 랭크작을 해 두었다.
[스킬]
▷윈드포스(C+)
▷인페르노 피스트(B)
▷증폭(C)
▷트위스터(C+)
▷일점폭발(C)
▷복사-스킬[2/2]
1. 도둑걸음(B+)
2. 오버히트(D)
대부분 정체 구간인 C랭크에 머무른 상태로, 당장 눈에 띄는 수치 변화는 없다.
그래도 꾸준히 숙련도를 쌓아 나가다 보면 언젠간 하나둘 B랭크에 도달할 거다.
이렇듯 멘토링 이벤트를 마지막까지 알차게 활용하자,
한 달에 걸쳐 진행된 1차 멘토링에도 끝이 보였다.
미리 짐작했던 대로, 홍연화-송천혜 듀오는 오우거에게서 체력 100%를 유지하며 퍼펙트 게임.
곽지철 역시 조금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무난한 점수로 클리어했단다.
해서 당규영은 흡족한 기색으로 우리 넷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한 달 동안 고생들 많았어. 낙오하는 사람 없이 잘 따라와 줬다."
사실 당규영은 다른 멘토들에 비해 임의 규칙 등의 난이도를 높게 설정한 편이었다.
가령 스티커 대인전은 당규영이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탓에 홍연화만 겨우 한 개 뗐었고, 이번 크리스탈 공략전도 [쇠약] 말고는 오우거에게 제약을 걸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모두 포기하지 않고 완주한 것은 물론, 준수한 성적까지 낸 것이다.
"그래도 이제 시작이니까 계속 정진해야 된다. 작별 인사는 여기까지만 짧게 하자. 주말에 푹 쉬고, 다음 주 중간고사도 잘들 봐."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조원들이 꾸벅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하고 하나 둘 자리를 나섰다.
당규영은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냥, 제자를 두면 이런 느낌일까 싶어서. 홀가분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그러네."
"의외로 적성에 맞으셨나 봅니다."
"응, 의외로."
원래는 멘토링 근처에도 갈 생각이 없었던 당규영이다.
그러나 임시 보관소 침입으로 인해 각종 징계가 몇 주씩이나 쌓인 상태였고, 선도부 측에서 그 징계를 탕감해 준다고 해서 반 강제로 떠맡았던 것이다.
해서 대충대충 하는 시늉만 할 법도 한데, 당규영은 끝까지 책임감을 갖고 멘토링에 임했다.
그리고 성장하는 멘티들을 보면서 여러모로 느끼는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키우는 맛이지.'
그 뿌듯함에 내가 S급 영웅을 1,000명이나 키웠던 거고.
이윽고 조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당규영이 시선을 떼고 쭉 기지개를 켰다.
"아고고— 근데 넌 안 가?"
"가야죠. 내일 어떻게 하실지만 듣고요."
"맞다, 너도 좀 도와준다 했었지."
내일, 즉 주말부터 블랙 마켓이 열린다.
그리고 금지 아이템을 미리 확보해 주는 대가로 나도 조금 손을 보태기로 약속이 된 상태다.
당규영이 장난스레 씩 웃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네. 이거 완전 부원 다 된 거 아니야? 이참에 그냥 신청서 쓰자."
"사양할게요."
"칫."
내가 단호하게 컷하자 당규영이 짧게 혀를 차더니, 앞선 질문에 답했다.
"오픈은 정오에 할 건데, 그땐 안 와도 돼. 초반에는 간만 볼 거거든."
도둑 동아리에서 블랙 마켓 거래소로 사용할 건물은 A부터 F까지.
하지만 처음에는 A, B거래소 둘만 먼저 개방한 다음 추이를 지켜볼 예정이란다.
손님이 얼마나 들어오나, 선도부가 어떻게 반응하나.
거래소 두 개라면 관리하는데 일손이 달릴 일도 없으니, 동아리 부원도 아닌 내 손을 빌릴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럼 몇 시쯤 가면 돼요?"
"한 저녁 대여섯 시쯤? 그때 밥이나 같이 먹자."
"알겠습니다."
"낮에는 장터도 쭉 돌아다녀 봐."
"그러려고요."
* * *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게 마련.
블랙 마켓에서 금지 아이템을 취급한다면,
당연히 일반 아이템들이 거래되는 장터도 존재한다.
'사실은 이게 주류지.'
멘토링이 종료되고, 졸업생들은 며칠 내로 던전섬을 떠나야 하는 입장이다.
그 전에 인벤토리의 불필요한 물건들을 최대한 정리하고 싶어 하기에, 번화가 장터가 성대하게 열리며 대량의 아이템이 매물로 풀린다.
"그러므로, 내일은 다 같이 번화가를 돌아볼 겁니다."
나는 고현우와 서예인을 앞에 앉혀 놓고 그렇게 선언했다.
고현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이 기회에 한번 가 보는 것도 괜찮겠구려."
잠자고 먹는 시간 외의 모든 시간을 수련에 바치는, 살아있는 수련 기계 고현우.
그러나 그도 사람이고 학생이라, 내심 번화가는 어떤 곳인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때마침 장터가 열린다는 좋은 구실이 생겼으니, 반드시 참여하겠노라 의지를 불태운다.
"헌데 번화가에는 어떤 아이템이 풀리는 거요?"
"그건 가 봐야 알겠지."
뭘 노리면 된다고 콕 찝어서 말하기는 어렵다.
졸업생들뿐만 아니라 2, 3학년 재학생들도 안 쓰는 아이템을 잔뜩 꺼내서 판매하기 때문에, 풀리는 물량이 엄청난 데다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물론 '안 쓰는 아이템'이 항상 '안 좋은 아이템'이라는 법은 없지."
"옳은 말이오. 운이 좋으면 진흙 속의 진주를 발견할 수도 있겠구려."
"그렇지, 운이 좋으면."
고현우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한 곳을 쳐다보았다.
용살학원에서 가장 운이 좋은 복덩이가 그곳에 엎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서예인에게 물었다.
"아가씨, 일정은 좀 어떠십니까?"
"갈래."
서예인은 내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은 상태였는데, '번화가'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잠이 확 달아나선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지난 번화가행이 꽤 재미있었나 보다.
"게임 센터 또 가?"
"일단 내일 일정에는 없는데."
"건슬링어 어드벤쳐."
회색빛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이거 완전히 사뿐 폴짝에 재미 들렸네.
나는 서예인을 마주보며 실소를 흘리다가, 시선을 돌려 고현우에게 물었다.
"조금 일찍 갈까? 내일."
"본인은 언제든 좋소. 그 게임 센터란 곳에도 관심이 가던 참이니 더욱 잘 됐군."
"그래, 그럼 오전에 출발합시다."
일찍 가서 쭉 살펴보고, 남는 시간에 게임 센터에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경품 목록에 괜찮은 아이템이 올라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자 서예인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려고?"
"응, 가서 잘래...."
아직 저녁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굳이 그 점을 꼬집지 않고 서예인을 보냈다.
고현우가 추측한 바를 말했다.
"미리 체력을 비축해 두겠다는 심산이로군."
"아마?"
"좋은 생각 같소. 본인도 미리 운공을 해야겠구려. 내일은 저녁이 다 돼서야 돌아올 터이니."
"그러든가."
그렇게 고현우까지 자리를 정리하고 떠나자,
멀리서 지켜보던 안정미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다.
"김호님 덕분에 멘토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다시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앞선 3주 동안 서예인이 안정미의 말을 잘 듣고 수련을 따라가도록 유도했고, 의욕을 끌어올리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번 주 크리스탈 공략전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점수를 낸 다음에,
- 근데 오우거는 끝내 못 잡았네. 아쉽다.
- 이것도 중간고사 범위인 거 알지? 오우거도 다시 나온다.
- 미리 많이 연습해 봐.
슬쩍 떡밥을 뿌리는 걸로 서예인이 의욕을 불태우게 만들었다.
덕분에 점수를 냈는데도 오늘까지 열심히 연습 모드를 반복했다고.
내가 아니었다면 안정미는 멘토로서 준비해 온 것의 반도 채 못 가르쳤을 테니, 이렇게 나를 볼 때마다 거듭 감사 인사를 하는 거다.
이어서 안정미가 명함을 한 장 건넸다.
"김호 님이라면 아가씨를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군요. 괜찮으시다면 앞으로도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았으면 합니다."
안정미는 졸업생 멘토로 잠시 들어온 입장이라, 여느 졸업생들과 마찬가지로 던전섬을 떠나야 한다.
미래전략실 팀장 자리를 언제까지고 비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때문에 명함, 즉 자신의 직통 연락처를 건네두는 것이다.
가장 서예인과 가까운 나에게서 계속 근황을 전해 들을 수 있도록.
"아가씨에게 힘이 되어 주신다면 혜성그룹 역시 김호 님에게 최고의 지원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정미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내 나는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 많이 이르기는 하지만, 팀장님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내 표정이 진지한 데다 '집사님'대신 '팀장님'이라는 단어를 쓰자, 안정미도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듯했다.
"말씀하세요."
"내일 이곳을 주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안정미에게 시간과 장소가 적힌 종이쪽지를 건넸다.
블랙 마켓 사전 답사 때, 번화가 벽면에서 발견한 암호문.
바로 그것이 가리키던 시간과 장소다.
나는 암호문을 교묘하게 고쳐서 양측이 엇갈리게 만들어 놓았다.
물론 놈들이 그것을 알아채고 약속을 변경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한쪽은 그곳에 나타나겠군요."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안정미가 심각한 얼굴로 생각하다가 물었다.
"학사 측에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기엔 저도 숨기는 게 많은 입장이라서요."
안정미의 관점에서 보면, 그녀는 단지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곳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나타나리란 사실만 나에게 전해 들었을 뿐.
나는 놈들이 악인이라 주장하지만, 아니라면 애먼 사람을 잡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학사 측에 알린다 한들 그들도 이 정보만 갖고서는 움직이기 어렵다.
그 정체불명의 인물이 용살학원에 위협이 되리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나 역시 숨겨 둔 비밀들을 꺼내야 하고, 이후 학사 측의 이목이 집중되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운신의 폭이 크게 좁아지니 악수인 셈이다.
그러니 도움을 구하려면 이렇게 안정미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상황을 지켜보시다가 유사시에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요컨대 이것은 일종의 보험이었다.
안정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내 부탁을 수락했다.
"김호 님의 말씀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부탁하지 않으셔도 나서야 할 일입니다. 지켜보죠."
164화 번화가 장터 (1)
다음 날 오전.
번화가행 셔틀버스 정류장 앞.
예상외로 가장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는 사람은 서예인이었다.
가만히 서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데, 워낙 미모가 빛나서인지 그것만으로도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은다.
"...."
서예인은 내가 다가가자 곧바로 알아채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네가 제일 빨리 왔냐."
"일찍 일어났어."
"어제 일찍 들어가긴 하더라. 얼마나 잤는데?"
"많이 잤어."
"배터리 몇 퍼센트?"
"...80?"
서예인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답했다.
그렇게 자고 80%면 연비가 많이 나쁜 거 아닌가 싶지만, 지금 안 졸린 게 중요하니 넘어가기로 했다.
"김 형, 서 소저."
"어, 왔냐."
뒤이어 고현우도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다가, 우리를 번갈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오늘은 본인이 제일 늦었구려."
"우리 중에는. 근데 늦은 건 아니지."
아직도 약속 시간까지 5분이나 남았거든.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셔틀버스 두 대가 연이어 정차했다.
우리는 대기하던 다른 학생들과 함께 우르르 버스에 올랐다.
- 웅성웅성....
몇 주 전에는 버스에 탄 학생의 수가 겨우 열 명 안팎으로 휑했고, 그나마도 나와 서예인 말고는 전부 2, 3학년이었다.
반면 지금은 앉을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바글바글한데다, 1학년의 숫자도 제법 많다.
아마 이들 대부분은 고현우처럼 오늘 처음 번화가에 가 보는 것이리라.
옆자리 대화가 넘어온다.
- 제과점 딱 대. 빵 다 죽었다 오늘.
- 돼지 같은 놈. 빵 먹으러 가냐?
- 그럼 먹으러 가지, 뭐 하러 가?
- 중간고사 준비 안 해?
- 뭔 줄 알고 준비를 해.
- 몰라도 스펙업은 해 둬야지.
이렇듯 학생들 절반은 놀고먹고 휴식을 취하는 게 목표, 나머지 반은 스펙업이 목표다.
우리 목표는 후자에 더 가깝지만, 고현우는 대화를 엿들으면서 조금 솔깃해진 모양이었다.
"과연, 모처럼 식도락을 즐길 기회이기도 하군."
서예인도 내 소매를 슬슬 잡아당긴다.
"게임 센터."
"일단 두 분 다 진정하시고."
뭘 할지는 가서 천천히 생각합시다.
잠시 후 번화가에 도착하니, 셔틀버스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인산인해였다.
고현우가 쓴웃음을 흘렸다.
"기왕이면 느긋하게 구경하면서 걷고 싶었건만, 그럴 틈도 없어 보이는구려."
"어쩔 수 없지.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일단 장터부터 돌자."
"알겠소. 갑시다."
고현우가 선두에 서고 내가 바로 뒤에서 방향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서예인은 내 팔뚝 부근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졸졸 따라왔다.
"어디부터 가는 거요?"
"일단 가까운 데부터."
학사 측에서 장터를 열도록 허용해 준 장소는 두 곳.
하나는 2, 3학년과 동아리들이 매대를 세우는 상급생 판매 구역,
다른 하나는 졸업생들이 모이는 졸업생 판매 구역이다.
그리고 그중 가까운 곳은,
"상급생 쪽이지."
우리는 인파를 뚫고 2, 3학년 판매 구역까지 이동했다.
상가 같은 넓고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거의 그 건물 앞까지 다다랐을 무렵, 앞장서던 고현우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으음."
"줄이 길지?"
지렁이처럼 길고 구불구불하게 늘어선 줄.
물건을 살 장소는 두 곳뿐이고 학생들은 수백 명이니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지렁이 꼬리에 붙으며 고현우가 말했다.
"조금 더 일찍 올 걸 그랬나 보오."
"일찍 와도 똑같았을걸."
아침 일찍, 개장시간 전부터 대기했어도 줄은 섰을 거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그리고 일찍 온다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야."
"그건 어째서 그렇소?"
"파는 사람이 물건을 안 내놓으면 어차피 못 사거든."
"으음, 그것도 일리가 있군."
파는 입장에서 보면 장터가 하루 내내 열리는데, 꼭 시간대를 아침으로 설정할 필요가 없다.
느긋하게 오후쯤 올라오는 매물도 부지기수.
따라서 빨리 오든 늦게 오든 좋은 아이템을 찾아내는 건 오로지 운에 달렸다.
"어쨌든 별 수 없이 차례를 기다려야 하겠구려."
"그렇겠지."
어디 거대 동아리에 연줄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은.
그런데 그때,
"또 보네요."
뒤쪽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검술 동아리 차장, 제갈소소가 서 있었다.
부채를 든 손을 가볍게 흔들며 인사하길래 나도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장터 구경하러 왔나요?"
"그렇습니다."
제갈소소가 빙그레 미소짓더니 등을 돌렸다.
"따라오세요."
나는 즉시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 어리둥절한 고현우와 서예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내 우리 셋은 줄을 벗어나 제갈소소를 뒤따랐다.
"같이 온 친구 두 명도 소개해 줄래요?"
"얘는 고현우, 얘는 서예인이에요."
제갈소소가 흥미롭게 둘을 번갈아 보다가 시선이 고현우에게 머물렀다.
나에게 소개해 달라고 말은 했지만, 검술 동아리 차장의 정보력으로 고현우쯤 되는 실력자를 모를 리가 없다.
"소문 많이 들었어요. 놀라운 검기를 가지고 있다더군요."
"과찬이십니다."
"언제든 시간이 날때 검술 동아리를 한번 방문해 줬으면 좋겠어요."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곧 제갈소소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상급생 판매 구역으로 통하는 다른 출입구였다.
그러곤 문을 열어 주면서 짧게 설명한다.
"동아리 권한이에요. 쉽게 말하면 초대장 같은 거죠."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한테 쓰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줄을 무시하고 판매 구역에 사람을 들이는 것은 제작 VIP 티켓이나 던전 우선 입찰권과 같은 동아리의 권한.
아무리 검술 동아리 차장이라도 함부로 남발할 수는 없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같은 동아리나 평소에 친분이 있는 후배들한테 돌아가야 맞는데, 그걸 선뜻 우리 셋에게 쓴다?
의구심을 가져 볼 만한 부분이었다.
제갈소소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까, 미리 점수를 따 두고 싶어서요."
앞으로 자주 보게 되리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당장 장보도 조각 B가 걸려 있기도 하고, 검술 동아리와 거래할 것도 꽤 많으니까.
"그런데 점수를 따 두신다는 말씀은...?"
"...."
제갈소소는 뜻모를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흔든 후 등을 돌린다.
"그럼 둘러들 봐요."
"감사합니다."
멀어져 가는 제갈소소에게 거듭 감사 인사를 하고, 고현우가 나를 보며 감탄했다.
"거대 동아리에 연줄이 있었구려."
"그러게."
어쩌다 보니 연줄이 생겨 버렸다.
무슨 속내를 숨기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장터를 둘러보기로 했다.
상급생 판매 구역은 상가 크기의 건물을 전부 사용하는 만큼 매우 넓었다.
2, 3학년들이 세운 매대들이 시야 끝까지 펼쳐져 있다.
이걸 언제 다 돌아보나 싶지만, 머리 위로 시선을 들어올려 보면 팻말들이 둥둥 떠다니며 각기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다.
<전사>
<마법사>
<궁수>
<도적>
....
판매 구역 내부도 카테고리 별로 구획이 나뉘어져 있다.
안 그래도 아이템들이 잔뜩 풀려 정신이 없으니, 이렇게 최소한의 정리라도 안 하면 구매하는 입장에서는 한참 헤메고 다녀야 한다.
그러니 이렇게 편의성을 봐주려는 거다.
전사 계열인 고현우, 마법사 계열인 나, 원거리 계열인 서예인이 살펴 볼 곳은 각기 다르다.
해서 고현우가 물었다.
"흩어져서 찾는 게 어떻소?"
"그냥 같이 다니자. 시간 많잖아."
제갈소소 덕분에 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을 건너 뛰었으니까.
꽤 여유가 생긴 만큼 같이 다니는 편이 낫다.
서로 아이템을 고르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테고.
해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궁수 구획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선배 여럿이 둘러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인기척이 느껴지자 잠시 대화를 끊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남학생 하나, 여학생 하나가 다가와서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와. 찾는 거 있니?"
"클래스가 뭐야?"
나는 서예인을 가리켰다.
"얘가 총사에요."
"...쩝, 그렇구만."
남학생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더니 무리로 돌아갔다.
여학생이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쟤는 활잡이 아이템만 팔거든."
총사인 서예인과는 아예 안 맞을 테니 일찌감치 손을 떼는 것.
이어서 여학생이 물었다.
"특별히 찾는 거 있니?"
"일단은 둘러보려고요."
"그래,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고."
여학생 역시 우리가 부담 갖지 않도록 조금 물러나 주었다.
나는 서예인에게 물었다.
"뭐부터 볼래?"
"...."
서예인의 쇼핑 스타일은 2주 전 번화가에 왔을 때,
<귀쟁이 마도구점>에서 대강 파악했다.
'복잡하게 따지지 않는 스타일.'
이 아이템 저 아이템 손에 들려 줘도 마음에 안 차면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마음에 들면 고민하지 않고 집는다.
"...."
예상대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던 서예인의 시선이 한 곳에 꽂히더니, 곧장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다양한 원거리 계열 스킬북이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서예인은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기라도 하는 듯 그곳을 거침없이 뒤적거리더니, 한참 구석에 처박혀 있던 스킬북 한 권을 끄집어냈다.
[랜덤 스킬북 - 원거리]
'저건 또 어떻게 봤대.'
잠시 물러나서 지켜보던 여학생이 서예인이 뭘 집어 든 걸 보고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이 랜덤 스킬북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표정이 묘해졌다.
"이거 사려고?"
"네."
여학생은 조금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나야 팔면 좋기는 한데, 그래도 선배니까 솔직하게 말해 줄게. 랜덤 스킬북은 추천 안 해."
랜덤 스킬북.
사용 시 무작위 스킬 하나를 습득하게 해 준다.
이 경우 '원거리 계열'로 범위가 좁혀지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무수히 많은 원거리 스킬 중 하나를 습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수히 많은 스킬들 중에는 서예인의 성향과 안 맞는, 쓸모없는 것의 숫자가 월등히 많다.
매우 높은 확률로 엉뚱한 스킬을 배우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시세보다 낮게 넘길 수도 없어. 우리도 본전치기는 해야 하거든."
아무리 랜덤이라도 스킬북인 만큼 그 가치가 높다.
또 지하층 던전에서 드랍된 아이템이라, 공략에 투자한 자원을 메꾸려면 제값을 받아야 한단다.
서예인이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물었다.
"얼마에요?"
"8천 포인트."
고현우가 흠칫 놀랐다.
리플레이를 많이 판매해 나름 포인트가 넉넉한데도 우습게 볼 수 없는 금액이다.
1학년 대부분은 아예 엄두도 못 내겠지.
그런데 랜덤 스킬북에서 엉뚱한 것을 익힌다면?
그 8천 포인트가 공중분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학생이 말릴 만도 했다.
"차라리 다른 거 사는 게 나아. 진짜 확실해?"
"살게요."
"나는 진짜 말렸다. 네가 산 거야."
서예인은 주저없이 학생증을 꺼내 8천 포인트를 지불했다.
그리고 곧바로 랜덤 스킬북을 펼쳐 들었다.
여학생이 여전히 뒷맛이 찜찜한 표정을 짓다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로 익히려고?"
"네."
- 파앗—
말릴 새도 없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하는 스킬북.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여학생은 안타까움 반, 체념 반이 되어 한숨을 푹 쉬었다.
곧 이 빛이 서예인에게 흡수되고 본인만 볼 수 있는 알림 메시지가 떠오를 거다.
새 스킬을 익혔다고.
- 파앗—
그런데, 스킬북이 발하는 빛은 서예인에게 흡수되는 대신 계속해서 더욱 강렬하고 환해져만 갔다.
은은하던 빛이 이제는 눈이 부셔서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야, 저거 뭐야?"
"쟤 뭐해?"
갑작스런 이상 현상에 주위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럼에도 스킬북의 광채는 계속해서 밝아지고 또 밝아지더니, 결국에는 장내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 파아아앗—!
165화 번화가 장터 (2)
섬광탄처럼 사방을 가득 메우던 광채가 사그라들자, 정신을 차린 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 뭐야, 뭐야?
- 방금 무슨 이펙트였어?
- 1학년이 랜덤 스킬북 쓰는 거 같던데.
- 랜덤 스킬북 이펙트가 그렇게 나온다고?
그러나 이 난리를 일으킨 서예인은 진작에 자리를 벗어난 뒤였다.
정확히는 트러블을 예상한 내가 얼른 데리고 나왔다.
나는 서예인에게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스킬북을 거기서 쓰면 어떡해. 저기 아직도 난리 났네."
"쓰고 싶었어."
"왜?"
"그냥."
그냥 쓰고 싶어서, 직감이 시키는 대로 썼다니 할 말이 없어졌다.
결과까지 좋아서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뭐 나왔는데."
"본인도 무척이나 궁금하구려."
고현우와 내가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자, 서예인은 스킬북을 사용했을 때 출력되었던 알림 메시지를 띄워서 보여 주었다.
['랜덤 스킬북 - 원거리'를 사용합니다.]
['불릿 타임(F)'을 습득합니다.]
"어이가 없네."
아무리 운이 좋아도 그렇지, 이건 사기인데.
반면 스킬에 대한 지식이 적은 고현우로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스킬이기에 김 형이 그렇게나 놀라는 거요?"
"인식가속 스킬 중에 제일 좋은 거야."
"인식가속이라 하면?"
"느려져. 네가 보는 모든 게."
"...!"
불릿 타임.
지속시간 동안 시전자의 인식을 급격히 가속하여, 모든 것을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볼 수 있다.
날아오는 총알이 회전하는 모습마저 보이는 정도.
F랭크 기준 지속 시간 1초,
재사용 대기 시간 5분.
쿨타임이 아주 길지는 않지만 남발할 수 없는 수준이고, 지속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니 매우 신중히 사용해야 하는 스킬이다.
그러나 불릿 타임이 발동되는 찰나만큼은 전투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가령 같은 원거리 클래스와 포격전이 벌어졌을 때, 상대방의 공격을 모조리 피하면서 사격을 꽂아 넣는 것도 가능하고,
근접해 온 암살자 계열 등의 일격에 대응하고 반격하기도 훨씬 쉬워진다.
고현우가 감탄사를 흘렸다.
"허어, 그런 스킬이라면 본인이 써도 무척 유용하겠소. 8천 포인트가 아깝지 않구려."
"누가 쓰든 엄청 좋지. 익힐 수만 있으면 8천이 아니라 8만도 안 아까워."
불릿 타임은 그 엄청난 성능만큼이나 습득 난이도가 악랄하기 짝이 없다.
안정미는 당연히 못 익혔을 테고, S급으로 육성했던 총사들 중에서도 보유한 녀석이 한 손에 꼽혔었지.
그런 악랄한 스킬을 서예인은 궁수 판매구역에 발을 들이자마자 한번 슥 둘러보고, 랜덤 스킬북을 집더니 그대로 익혀 버린 것이다.
세상은 불합리함으로 가득 찬 곳임이 틀림없다.
서예인이 우리 둘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운이 좋군?"
"...."
"...."
저건 또 어디서 배워 왔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듯 갑작스럽고 어이가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서예인의 전력이 대폭 증가했다는 것은 달가운 일이다.
"집사님 가시고 뭐 배워 볼까 했는데, 이거 익히면 되겠네."
"응."
불릿 타임을 실전에 써먹으려면 매우 높은 숙련도가 요구된다.
스킬 효과는 어디까지나 시전자의 인식을 가속하는 것일 뿐, 실질적인 속도에는 변화가 없다.
느리게 보이는 만큼 본인의 움직임도 똑같이 느려지기에 거기에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최적의 타이밍을 잡아내는 연습까지 해야 하니, 익히기만 한 지금으로서는 갈 길이 한참 먼 셈이다.
"랭크작도 해야 되고."
"그러고 보니 지금은 F급이군. 랭크가 더 오르면 어떻게 되는 거요?"
"지속 시간이 늘어나지. 쿨은 줄고."
"허어, 여기서 더 강해진다니."
고현우는 부러운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나는 다시 서예인을 쳐다보았다.
"연습은 아무래도 상대가 있는 게 좋기는 할 거야."
"같이 해."
"같이 해야지. 근데 금방 중간고사니까, 그거 끝나고 본격적으로 시동 겁시다."
"응."
서예인이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가벼운 약속을 잡아 놓고,
다음으로 돌아볼 판매 구획은 근거리, 전사 클래스.
"본인 차례로군."
고현우가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면서 슬쩍 나에게 물었으나,
"본인도 랜덤 스킬북을 구한다면.... 혹여 서 소저처럼 강력한 스킬을 익힐 수 있는 거요?"
"깃털뱀 부족의 나무잔."
"안 되겠군."
현실을 자각하고 빠르게 미련을 내려놓았다.
"크흠, 하면 장비 위주로 돌아보려 하오."
"슬슬 구할 때도 됐지, 장비."
서예인의 경우 장비를 새로 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미 대부분의 장비 수준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1학년이 쓰기에는 과하게 좋고, 뭉게구름 팔찌 등 몇몇 장비는 졸업을 한 뒤에도 통용된다.
해서 스킬북 위주로 살펴본 거고,
고현우는 그 정반대.
'스킬은 놔둬도 알아서 잘하지.'
사문에서 가르친 독문 무공을 사용하고, 하나둘 초식을 다듬어 나가는 중이다.
[불릿 타임]같이 사기적인 성능이라면 몰라도, 구태여 다른 스킬을 배우고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
반면 장비는 이제 겨우겨우 무기가 파괴되는 것만 막은 상태.
슬슬 다른 옵션으로 눈을 돌릴 때도 됐다.
궁수 코너와 마찬가지로, 전사 코너에 들어서니 선배 몇 명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만 이들은 한눈에 누가 근접 클래스고, 누가 아닌지 알아본 듯했다.
나와 서예인에게는 별반 관심이 없는 걸 보면 말이다.
3학년 선배가 고현우 앞에 척 멈춰 서더니 위아래로 슥 훑어보았다.
허리춤의 [깃털뱀 주술검], 셔츠 앞주머니에 꽂아 둔 [튼튼이 볼펜].
"장비는 검과 볼펜이라, 무인으로 보이는데, 맞나?"
"그렇습니다."
"방어구는?"
"이 교복이 다입니다."
선배가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는 듯 인상을 썼다.
"부실하군, 부실해. 아무리 무인이라도 그렇지, 최소한의 안전장치조차 없어서야."
"저 역시 부족함을 느끼던 참입니다."
"그렇겠지. 따라오게."
그는 고현우를 한쪽으로 안내해서 앉혀 둔 뒤, 다른 선배들과 무언가 상의하는 듯했다.
이윽고 방어구 셋을 가져와 고현우 앞에 내려놓는다.
"무인임을 감안해서 가볍고 활동성이 편한 것 위주로 가져왔네.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보게."
첫 번째는 옅은 광택을 머금은 새하얀 티셔츠 한 벌.
[성전사의 셔츠(C)]
▷지속적으로 '힐(E)'발동.
▷물리 방어(E)
약간의 방어력을 지니고 있는데다 가만히 있어도 회복 마법이 발동된다.
착용만 해도 유지력이 올라간다.
두 번째는 앙상한 갈비뼈 모형.
약간의 흑마술이 가미되었는지 검은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갈비뼈 튜닉(C)]
▷1일 1회 '본 아머(D)' 시전 가능.
▷흑마법 저항(E)
▷저주 저항(E)
옵션만 봐도 마법 방어에 치중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직 고현우는 마법사한테 대차게 얻어맞아 본 적이 없지만, 미리 대비해 둬서 나쁠 건 없다.
하루 한 번이라도 [본 아머]를 시전할 수 있다는 점 역시 매력적이다.
세 번째는 기하학적인 마법 문양이 각인된 가죽 갑옷.
[창술사의 관통 가죽 갑옷(C)]
▷일정 확률로 '방어 관통(D)'발동
▷관통 저항(E)
[방어 관통]은 살가죽이 두꺼운, 오우거 같은 적의 방어를 뚫을 때 유용한 스킬이다.
중갑옷 전사를 상대로도 예상외의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
[관통 저항]은 쉽게 말하면 찌르기 계열 공격을 덜 아프게 맞는 특성이다.
총탄이나 화살 등 대부분의 원거리 공격이 찌르기 판정으로 들어오니 원거리 저항이라 봐도 무방하다.
"으음...."
고현우는 고민에 빠졌다.
무엇을 고르든 유용하리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니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회복을 통한 유지력 증가냐, 마법 방어를 보강하느냐, 방어 관통 옵션을 챙기고 원거리 방어를 보강하느냐.
"김 형의 생각은 어떻소?"
"이건 순전히 취향이야. 분야가 다 다르잖아."
"고민이 되는구려. 본인 눈에는 다 쓸만해 보이니...."
시선이 세 방어구를 오가며 쉽사리 선택을 내리지 못하는 고현우.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서예인에게 묻는다.
"서 소저의 생각은 어떻소?"
이른바 복덩이 찬스.
운에 맡기기로 한 모양이다.
"...."
서예인은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방어구 셋 중 하나가 아닌, 전혀 엉뚱한 곳을.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저기는 뭐가 있습니까?"
"글쎄, 잠깐 기다려 보게나."
선배가 서예인이 지목한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매대를 뒤지더니, 갑옷 한 벌을 들고 돌아왔다.
청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갑각류 껍데기 같은 형태를 띤 갑옷이다.
[청동 갑각(D)]
▷물리 방어(E)
▷업그레이드 가능
"이걸 찾은 건가?"
3학년 선배가 물었다.
고현우도 일단 서예인에게 판단을 맡기기는 했지만, 이게 맞나 싶은지 미심쩍은 눈치다.
앞선 세 방어구에 비해 그다지 좋은 점이 보이지 않는다.
업그레이드 슬롯이 남아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말이다.
혹시 서예인의 오늘치 운이 다한 건 아닐까?
그래서 아무 데나 손가락질을 한 건 아닐까?
그때, 내가 고현우를 툭 건드리며 한마디 던졌다.
"사."
"...!"
고현우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여태까지 취향 차이라고 한발 뒤로 물러나 있던 내가 이 볼품없어 보이는 갑옷은 바로 사라고 하니,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리고 고현우는 내 조언은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곤 했다.
"이걸로 구매하겠습니다."
"확실한가? 무인이 쓰기엔 무거울 텐데."
"적응해 보겠습니다."
3학년 선배도 마찬가지로 영 미심쩍은 기색이었으나, 고현우가 고집을 부리자 그러려니 했다.
그 입장에서는 이러나저러나 팔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자네 선택을 존중하지. 4천 포인트만 내게."
고현우가 곧바로 학생증을 꺼내 계산을 마치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마법사 판매 구역으로 이동했다.
청동 갑각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고현우가 말문을 열었다.
"김 형을 믿기에 망설임 없이 구매하기는 했소만, 본인은 아직도 잘 모르겠소."
"잘 산 거 맞아."
서예인의 행운이 조금 남아 있던 덕분에 고현우 역시 진흙 속에서 진주를 건져 낼 수 있었다.
"그거, 사실 업그레이드 슬롯 두 개다."
"하면 '청동' 수식어가 업그레이드로 붙은 거란 말이오?"
"그렇지."
매우 희귀한 갑각류 몬스터를 잡아서 제작하는 방어구.
제작 직후의 명칭은 [투명 갑각]이다.
투명 갑각의 특징은 업그레이드에 들어가는 재료의 성능을 고스란히 반영한다는 점.
금속을 쓰든, 몬스터의 일부분을 쓰든 말이다.
"어쩌다가 청동을 업그레이드 재료로 썼는지는 몰라도, 그건 빼 버리면 돼."
"그다음에는...."
"다른 걸로 바꿔 넣어야지."
최고의 재료 두 가지를 구해서.
166화 번화가 장터 (3)
마법사 코너에 들어서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길드연합, 대자연 동아리 유망주 박나리.
어깨 위에는 미니 호랑이 범이가 올라타 있다.
시선이 마주쳐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더니 저쪽에서도 인사를 돌려준다.
"아, 안녕."
"애옹."
범이 역시 앞발을 흔들고, 박나리의 어깨에서 훌쩍 내려와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무릎에 연신 뺨이며 이마를 부벼 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고현우가 손을 뻗어 쓰다듬으려 했으나,
"귀여운 고양이로군."
"하악—!"
즉시 털을 곤두세우며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는 범이.
고현우는 머쓱해져서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쟤네 2대2 대인전에서 붙었었지.
청류를 그렇게 사정없이 갈겨 댔는데 사이가 좋을 리가.
"버, 범아. 돌아와."
박나리가 허둥지둥 [생명의 큐브]를 꺼내서 열자, 범이가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둥글게 몸을 말았다.
어쩐지 거래할 때부터 범이 전용 별장이 될 것 같더라니, 정말 그렇게 됐다.
스크래치도 한가득이고.
"그래도 잘 쓰고 있는 거 보니 좋네."
"어, 응. 고, 고마워.... 너도 잘 쓰고 있어? 공백 스킬북으로 배운 거...."
"그럼, 완전 잘 쓰고 있지."
과하게 잘 써서 많은 사람들의 혐오 스킬 1순위에 올랐다.
당규영은 윈드포스 하면 치를 떨고, 홍연화는 바람만 불어도 안색이 창백해진다.
"아, 하, 하하, 그렇구나...."
박나리가 그렇게 소심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또다른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나리야, 누구 왔.... 어머,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대자연 동아리 부장, 하수연.
소심쟁이 박나리가 누구랑 이렇게 대화를 하나 싶어서 따라 나온 것이다.
"특별히 찾는 게 있나요? 있으면 도와 줄게요."
호의로 가득 찬 태도와 말투.
그럴 만도 한 것이, 생명의 큐브 덕분에 박나리는 유망주들 간의 레이스에서 제법 앞서 나가는 중이다.
'수납하는 모든 생명 아이템의 효과 1.3배'는 격차를 벌리기 충분한 성능이니까.
또 나와 에메랄드 마탑의 결투를 참관하고 난 뒤부터 최대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아주 훌륭한 마음가짐이야.'
앞으로도 좋게좋게 거래하면 서로 편하지.
따라서 나는 사양하지 않고 하수연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혹시 스킬북이 있으면 하나 구하고 싶습니다."
"어떤 스킬북이죠?"
"[에어버스트] 입니다."
하수연의 얼굴이 조금 아리송하게 변했다.
"혹시 직접 익힐 생각인가요?"
"네."
"...그렇군요. 스킬은 많을수록 좋죠."
하수연은 내가 따로 생각하는 바가 있겠거니 싶었는지 더 캐묻지 않고, 근처에서 매대들을 관리하던 2학년 선배 두 명을 불렀다.
"[에어버스트] 스킬북 올라왔나요?"
"...."
두 사람은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보는 듯했다.
그러다가 2학년 하나가 장부를 뒤적거리며 답했다.
"우리 쪽에는 없어요. 아직 오전이니 판매자 분이 안 나타난 걸 수도...."
혹시 나중에 다시 오면 스킬북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다소 불확실한 말을 덧붙인다.
한편, 다른 2학년 선배 하나는 아직까지도 미간을 찌푸린 채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떠오른 듯 안색이 확 밝아지며 박수를 짝! 친다.
"아! 명훈 오빠가 갖고 계실 걸요?"
"졸업생 분이에요."
하수연이 설명을 보충했다.
졸업생이 스킬북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은,
"졸업생 판매 구역에 가 봐야 겠군요."
"네, 메시지 보내 놓을게요."
"감사합니다. 바로 갈게요."
"아, 잠깐만요."
곧바로 등을 돌리는 나를 하수연이 잠시 멈춰 세웠다.
그리고 조그만 종이쪽지를 꺼내 무언가를 슥슥 적고 사인을 하더니, 고이 접어 나에게 건넸다.
"저쪽도 줄을 한참 서야 될 거에요. 가서 이거 보여 주세요."
졸업생 판매 구역의 대기열은 상급생 구역보다 길면 길었지 짧지는 않을 거다.
졸업생들이 판매하는 아이템의 수준이 더 높다는 인식이 있고, 실제로도 그러니까.
그러니 제갈소소가 우리를 쪽문으로 들여보내 준 것처럼, 하수연도 동아리의 이권을 사용해서 줄을 서지 않고 통과하게 해 주는 거다.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대자연 동아리는 그쪽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을요."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나와 하수연은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 * *
우리 셋은 번화가의 인파를 뚫고 졸업생 판매 구역으로 넘어갔다.
마찬가지로 상가 비슷한 커다란 건물에, 앞에는 줄이 지렁이처럼 구불구불하고 길게 늘어서 있다.
건물을 빙 둘러 후문으로 향하자, 그 앞에서 대기하던 3학년 선배가 우리를 막아섰다.
"여기 입구 아니다. 앞에 가서 줄 서."
"압니다. 이거 한 번만 봐주세요."
선배가 하수연의 쪽지를 받아 빠르게 읽고, 우리 셋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후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라."
"감사합니다."
우리는 들어가자마자 곧장 '명훈 오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미리 언질을 주고 출발했기에 그 역시 한눈에 나를 알아보았다.
"[에어버스트] 산다고?"
"예, 구매하고 싶습니다."
"4천 포인트야."
빠르게 '명훈 오빠'와의 거래를 끝마쳤다.
내 포인트 사정은 고현우나 서예인처럼 여유롭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지출이었다.
'그리고 스킬북이 4천이면 거저지.'
무난하게 좋은 스킬들이 만 포인트 단위로 거래되는 것을 감안하면, [에어버스트] 스킬북의 가격대는 상당히 낮게 책정된 편이다.
가격이 낮다는 건 수요가 적다는 뜻이며, 수요가 적다는 건 스킬의 성능이 애매하다는 뜻.
그래서 내가 이 스킬북을 찾는다고 했을 때 하수연의 표정이 묘해졌던 거다.
에어버스트.
압축된 공기 덩어리를 날려 폭발시키는 바람 계열 마법이다.
위력은 그럭저럭이고 폭발 범위도 꽤 넓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맞추기가 어렵지.'
투사체가 날아가는 속도가 몹시 애매해서, 사실상 눈 달리고 다리 달렸으면 다 피하는 수준이다.
그렇게 허공을 빵빵 터뜨리는 모습을 보고 플레이어들이 지어 준 별명이,
'공기팡.'
즉, 배우는 것만으로도 비웃음을 사기 딱 좋은 스킬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비웃음은 에어버스트의 진면목이 발휘되자 금세 쏙 들어가 버렸다.
정확히는 에어버스트와 연계되는 강력한 스킬의 위력이 알려지고부터.
'나선폭발.'
에어버스트가 바로 나선폭발의 마지막 세 번째 조각이었던 것이다.
완성 조건은 선행 스킬 셋의 C랭크 달성.
[트위스터]와 [일점폭발]은 멘토링을 통해 준비를 마쳤고,
[에어버스트] 랭크작은 앞선 둘에 비해 아주 쉬운 편이다.
이벤트 보너스 없이 해도 금세 쭉쭉 오르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미뤄 둔 것.
'중간고사 시작 전까지 완성한다.'
얼마 안 남았지만, 충분히 가능할 거다.
이후 졸업생 판매 구역을 한 바퀴 돌며 가볍게 훑어보았으나, 특별히 눈에 띄는 아이템은 없었다.
확인차 히든 피스 레이더, 서예인에게도 물었다.
"뭐 없냐. 느낌 오는 거."
- 도리도리,
정말 괜찮은 아이템이 없는지, 오늘치 운이 다했는지는 몰라도,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다.
각자 원하던 것 하나씩은 집었고.
"이제 가도 되겠다."
"게임 센터?"
서예인의 눈빛은 조금씩 지루함을 띠던 중이었는데, 끝났다는 말에 곧바로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그러나 나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밥부터 먹고. 시간 많아."
원래는 한참 줄 서는 시간을 계산에 넣었기에 오후 서너 시는 돼야 다 끝나겠다 싶었는데, 제갈소소와 하수연 덕분에 이제 막 점심시간이 된 참이었다.
게임 센터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 배부터 채운 다음에 느긋하게 가도 상관없다.
해서 우리는 번화가를 거닐며, 곳곳에 늘어선 노점상들을 살펴보았다.
"뭐 먹을래."
"본인은 전부터 '추로수'라는 것을 먹어 보고 싶었다오."
"츄러스 말하는 거지?"
"구슬 아이스크림."
"그래, 너네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 * *
같은 시각.
번화가와 조금 떨어진 곳의 3층짜리 건물.
외견은 버려진 폐건물처럼 꾸며 놓았으나, 실상은 이곳이 도둑 동아리의 컨트롤 타워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서 계단을 오르면 제법 커다란 방이 나오고, 그 방은 온 벽면이 수많은 모니터로 가득하다.
그리고 모니터마다 번화가 곳곳의 모습이 비치는데, 번화가에 설치된 방범용 수정구의 시야를 훔친 것이다.
그 모니터들을 도둑 동아리 부원 몇몇이 차례대로 지켜보고 있었고, 방의 중심에는 이 컨트롤 타워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쥐고 있는 채다빈, 그리고 그 곁에 당규영이 서 있었다.
채다빈은 연신 태블릿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직까지는 순조롭네요."
"응."
장터가 개장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블랙 마켓도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들킬 것을 우려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나, 하나둘 접선소를 통해 A, B 거래소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조금씩 금지 아이템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도부는 우리 쪽에 관심이 없어 보이고요."
모니터 몇몇은 선도부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접선소나 거래소 근처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았다.
아직 올해 블랙 마켓이 어떤 식으로 개최되는지 잡아내지 못했거나,
초반에는 번화가의 치안 유지에 집중하고자 하는 것이거나.
물론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활성화된 거래소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상황은 어려워지기만 할 테니,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태블릿을 두드리며 이 화면 저 화면 넘기던 도중, 채다빈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거 김호 아니에요?"
"어, 맞네."
화면에는 인파를 가로지르는 김호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늘 함께 다니는 잘생긴 무사, 그리고 회색 머리 예쁜 애랑 함께.
셋은 각자 손에 구슬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든 채였다.
"귀엽네."
당규영이 피식 웃곤 모니터에서 시선을 뗐다.
'그래도 대범하게 넘어가시네.'
당규영과 김호의 거리감은 일반적인 선후배 관계라 하기에는 많이 가까운 편이다.
적어도 채다빈과 부원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렇다면 당규영으로서는 김호와 저 회색 머리 여학생이 같이 다니는 것이 탐탁지 않게 느껴질 만도 했다.
같은 여자가 봐도 감탄이 나오는 미모인데다, 당장 둘의 거리감 역시 단순한 동급생이라기엔 많이 가까워 보였으니.
해서 이들을 보고 당규영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걱정했는데, 연상다운 포용력으로 너그럽게 넘어가는 모양이다.
채다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건 채다빈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 힐끔,
자연스레 다른 화면들을 훑어보던 당규영이 곁눈질을 했다.
또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화면들로 넘어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 힐끔, 힐끔,
연신 곁눈질로 한쪽 모니터를 힐끔거린다.
정확히 김호가 비치는 곳만 골라서.
"...."
그럴수록 당규영의 미간이 미약하게 꿈틀거리고, 언짢음 게이지가 조금씩 상승하는 것이 느껴졌다.
채다빈이 몰래 다른 부원들과 시선을 교환하니, 그들 역시 지금 벌어지는 이상 현상을 감지한 듯했다.
컨트롤 타워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167화 웨폰 마스터 (1)
노점상을 돌며 군것질로 배를 채우고.
다음 목적지는 서예인이 바라던 게임 센터였다.
게임 센터 역시 다른 장소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붐벼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굴하지 않고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가, 안쪽 구석에 마련된 학생 전용 코너로 향했다.
미니 게임에 포인트가 제법 들어가는 탓에 확연히 인파가 줄어들었지만, 2주 전에 비하면 이곳 역시 훨씬 북적거리는 편이었다.
그런데 서예인의 발걸음이 돌연 우뚝 멈추더니, 가만히 한 곳을 응시했다.
"건슬링어 어드벤쳐...."
"없어졌네."
오락기들의 배치가 바뀌었고, 미니 게임들 대부분이 다른 것으로 교체되었다.
주기적으로 갱신되는 건 경품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건슬링어 어드벤쳐>는 우리가 사실상 최고 기록에 가까운 점수로 경품을 타갔기에 매우 유력한 교체 후보였다.
조금씩 시무룩해지는 서예인을 긍정 보스 고현우가 달래고, 나도 한마디 보탰다.
"하하, 서 소저. 너무 상심 마시오. 다른 즐길 거리도 많지 않겠소?"
"딴 거도 막상 해 보면 재밌을걸."
"응...."
"일단 경품 목록부터 보자."
목표를 새로 설정하면 흥미도 다시 생길 테니까.
<금주의 경품 목록>
- 투명화 스크롤 - 장신구
- 장비 강화석
- 랭크 업(E)
- 험상궂은 곰돌이 인형
....
2주 전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라진 목록.
그때는 [랜덤 랭크업]이 있어서 바로 집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썩 자주 등장하는 보상은 아니기는 하다.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랭크 업을 집어야겠네.'
방금 졸업생 장터에서 구매한 [에어버스트]는 랭크 올리기가 꽤 쉬운 편이지만, 랭크 업까지 곁들인다면 소모되는 시간을 더욱 단축할 수 있을 터.
나는 둘에게 물었다.
"너네는 뭐 끌리는 거 있냐."
"랭크 업."
고현우는 아직 고민하는 중이고, 서예인은 나와 같은 랭크 업을 골랐다.
[불릿 타임]을 E로 올린 다음에 쓰려는 듯한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럼 이건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가.
[랭크 업(E)]
▷획득 조건1: <웨폰 마스터>에서 20킬, 또는 15어시스트 이상 달성
▷획득 조건2: 사망 횟수 3회 미만
옆에서 기웃거리던 고현우가 물었다.
"웨폰 마스터는 어떤 게임이오?"
"저거."
새로 배치된 오락기 중, 한 가지 종목이 학생 코너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대전 서바이벌 게임, <웨폰 마스터>.
게임에 참여하는 인원들이 지정된 시간 동안 지정된 공간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적을 마주치면 싸우는 단순한 규칙이다.
죽으면 토큰을 다시 넣어서 이어 하기가 가능하지만, 토큰은 당연히 개당 300포인트로 사야 하고, 우리가 목표로 하는 [랭크 업]은 세 번 죽으면 포기해야 한다.
"2데스로 20킬이나 15어시면 쉽지 않겠네."
한 번 죽을 때마다 10번 죽여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나마 희소식이라면 이것 역시 2인 1팀으로 진행이 가능하다는 거다.
한 명이 20킬을 노리고, 다른 한 명이 15어시스트를 노리면 딱 맞는다.
"본인은 함께할 수 없는 거요?"
"안 되겠다. 2인 1조라."
"그렇군. 하면 개인으로 진행하리다. 몹시 흥미가 동해서 말이오."
"경품은 뭘로 하게?"
고현우가 경품 목록을 다시 쓱 훑어보고 답했다.
"본인은 마음에 차는 것이 없으니, 이번에는 경험이라 생각하고 즐기려 하오."
"그것도 괜찮지."
때마침 한 경기가 끝나고 빈자리가 잔뜩 생겨났다.
주변에서 대기하던 다음 경기 참가자들이 그 빈자리를 메꾼다.
우리 셋도 나란히 세 자리를 차지했다.
먼저 서예인이 토큰을 집어넣자,
화면에 커다란 '?'가 떠오르더니, 이 사람 저 사람 다양한 실루엣으로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제목이 이렇게 붙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거든.'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캐릭터의 직업군과 무기는 무작위로 정해진다.
단, 플레이어 본인의 클래스만 쏙 빼놓고.
예를 들어 서예인의 클래스는 총사라, 원거리 계열 캐릭터는 절대로 안 걸린다.
대신 성기사가 걸릴 수도 있고, 마법사가 걸릴 수도 있고, 사제가 걸릴 수도 있고.
어떤 무기든 능숙하게 다뤄서 승리를 따내야 하기에 <웨폰 마스터>인 것이다.
이내 빠르게 변화하던 실루엣의 형태가 고정되며 서예인의 캐릭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부가 까무잡잡하며, 대머리에 근육이 우락부락한 사내.
옷은 반쯤 걸치다 말았고, 온몸에는 문신인지 물감인지 모를 붉은 것을 덕지덕지 처발랐다.
그리고 손에는 투박한 한 자루 검, 허리에는 손도끼.
서예인은 야만족 전사, '바바리안'이 된 것이다.
화면 속 바바리안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듯 목청껏 함성을 내질렀다.
- 크아아아아—!
"...!"
서예인의 회색빛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꽤 마음에 들었나 보군.
다시 흥미가 돌아온 것 같으니 잘 됐다.
이어서 내 캐릭터도 정해졌다.
깡마른 체구에 등이 새우처럼 굽은 사내.
입은 의복은 서예인의 바바리안과 비슷하며, 입에는 길쭉한 대롱을 물고 있다.
깃털뱀 제단에서 본 홀쭉이와 비슷하게 생겼다.
'야만족 독침쟁이.'
저 독침에 맞으면 화면이 흐려지거나, 좌우가 반전되거나, 움직임이 느려지는 등, 다양한 상태 이상에 걸린다.
적을 쓰러뜨리기보다 제어하는 것이 중점인 캐릭터다.
물론 독침을 맞춰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내가 누구인가.
'미니 게임 대마왕이시다.'
그리고 이걸로 각자의 역할도 정해진 셈이었다.
"네가 킬하고 내가 어시하면 되겠다."
"응."
서예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편 고현우의 화면에는 귀품 있고 단정한 의상을 입은, 아리따운 마법사 여성이 떠올라 있었다.
스태프를 휘두르자 그녀 주위로 눈보라가 몰아친다.
고현우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본인은 마법사로군. 항상 궁금했는데 이렇게 체험해 볼 기회가 생겼구려."
"조심해라. 그거 몸 되게 약해."
"하하, 주의하리다."
이내 모든 참가자의 캐릭터가 정해졌는지 화면이 휙 바뀌고, 다음 순간 나와 서예인은 커다란 유적지 안에 서 있었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가운데, 곳곳에 타오르는 횃불이 어슴푸레하게 주위를 밝힌다.
그리고 화면 가장 아래 스코어보드에는 킬/데스/어시스트 횟수가 떠올라 있다.
[서바리안 0K/0D/0A]
[김독침 0K/0D/0A]
곧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며 경기가 막을 열었다.
[3]
[2]
[1]
[Start!]
"자, 출발해 봅시다."
"출발."
근접 캐릭터인 서예인이 앞장섰다.
발 닿는 대로 커다란 통로를 나아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꺾고 또 나아간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던 도중, 횃불이 발하는 빛에 육중한 그림자가 일렁거리더니 점점 가까워져 왔다.
- 철컹, 철컹,
두꺼운 갑옷을 걸친 기사와 뒤따르는 사제 듀오.
저쪽도 근접 클래스가 익숙지 않은 건 마찬가지인지 행동거지가 심히 부자연스럽다.
- 크아아아—!
서예인의 바바리안이 포효를 내지르며 돌진했다.
그리고 상대방 가까이 붙어서....
휘적휘적 검을 내젓는다.
아직 컨트롤이 익숙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런 상황은 상대방도 마찬가지인지, 기사 역시 방패를 어설프게 앞으로 쑥 내밀어 막는다.
'음, 부자연스러워.'
두 팔을 삐걱삐걱 움직이며 공방을 주고받는 바바리안과 기사.
경험해 보지 않은 클래스를 조작하면 이런 참사가 벌어지곤 한다.
그렇게 소꿉장난 같은 전투가 벌어지던 도중,
- 위잉—
기사의 몸이 밝은 빛을 머금었다.
후방의 사제가 회복 마법을 시전하는 것이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체력을 회복하니, 이대로는 서예인이 먼저 쓰러지고 말 거다.
물론 지켜만 볼 내가 아니었다.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독침을 준비하기 시작해서 지금 장전이 끝났다.
상대방을 겨냥하고,
- 훅!
투구 가리개 틈새로 독침이 쏙 들어갔다.
그러자 기사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는데, 둔화 상태 이상에 걸린 모양이다.
한창 공방을 주고받던 도중인데 움직임이 느릿느릿해지면 당연히 크게 빈틈을 노출할 수밖에 없다.
서예인이 힘껏 기사의 방패를 후려쳐 자세를 무너뜨리더니, 또 있는 힘껏 검을 내려찍었다.
- 깡!
야만인다운 괴력에 철로 된 투구가 움푹 팼다.
그럼에도 서예인은 검을 내려찍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쾅, 쾅, 쾅!
[서바리안 1K/0D/0A]
[김독침 0K/0D/1A]
"어, 저거 도망간다."
즉시 등을 돌리고 달리는 사제.
그러나 뒷덜미에 독침이 꽂히고, 서예인이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를 덥석 붙잡더니 그대로 목을 따 버렸다.
[서바리안 2K/0D/0A]
[김독침 0K/0D/2A]
"처음인데도 곧잘 하네."
"나, 힘 쎄."
"그러네. 아주 무지막지해."
바바리안이란 이렇듯 오로지 피지컬로만 승부를 보는 상남자의 클래스다.
"계속 가 봅시다."
"응."
계속 유적지 통로를 따라 걷다 보니, 또 횃불에 일렁거리는 사람 그림자 둘이 보였다.
뒤이어 나타난 전사 둘.
같은 가죽 갑옷을 갖춰 입었으며 무기도 같은 검과 방패를 들었다.
무작위로 클래스가 결정되기에 저렇게 중복이 걸리기도 한다.
쌍둥이 전사도 우리를 발견하곤 빠르게 돌진해 왔다.
나는 독침을 장전하며 서예인에게도 지시했다.
"도끼."
"도끼."
서예인이 허리춤에 찬 손도끼를 꺼내 들더니 곧장 앞으로 내던졌다.
휘리리릭 회전하며 날아간 손도끼가 쌍둥이 전사 A의 어깨에 콱 틀어박힌다.
처음 던져보는 손도끼라 빗나갈 가능성이 높다 생각했는데, 역시 원판이 원거리 클래스라 그런지 뭐 던지는 건 잘한다.
"도끼 맞은 친구부터 치우자."
"응."
바바리안이 성큼성큼 나아가 두 전사와 격돌하려는 찰나,
- 훅—!
내가 독침을 쏘아 보냈다.
쌍둥이 전사 B의 목에 가느다란 침이 꽂히고,
"아! 이거 뭐야?!"
어디선가 혼란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아마 쌍둥이 B를 조작하는 플레이어일 거다.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는 걸 보면 '반전' 상태 이상에 걸린 모양이다.
안 그래도 익숙지 않은 클래스인데 조작이 거꾸로 되니 헷갈리겠지.
그사이에 서예인은 저돌적으로 쌍둥이A를 몰아붙였다.
어깨에 손도끼가 틀어박힌 탓에 이미 전력이 대폭 감소한 상태.
A가 방패를 앞세웠지만 그대로 걷어차 버린 다음, 성큼 내디디며 검을 사선으로 긋는다.
- 콰드득!
쌍둥이 A가 두 토막이 나 버리고, 즉시 B에게 돌진하는 서예인.
막 반전 상태이상이 풀렸는지, B는 자세를 바로잡고 맞대응에 나섰다.
- 훅!
다음 독침이 꽂힐 때까지만.
"아니! 진짜 이거 뭐냐고!"
또 혼란스러운 외침이 학생 코너를 울린다.
B의 상태를 살피니 움직임이 굼벵이처럼 느릿느릿해졌다.
이번에는 둔화에 걸렸군.
그리고 둔화에 걸린 상대는 상남자 바바리안, 서예인의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 콰드드득!
[서바리안 4K/0D/0A]
[김독침 0K/0D/4A]
"힘 쎄."
"힘 쎄."
우리는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짝.
168화 웨폰 마스터 (2)
쌍둥이 전사를 처치한 후 계속 전진하다 보니, 시야 저편에 밝은 빛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유적지 밖으로 나가는 출구.
내부를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라 해 봐야 우리 둘과 방금 만난 두 팀이 다일 거다.
제대로 20킬을 쌓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앞장서는 서예인에게 주의를 주었다.
"나가면서 조심해."
"응."
유적지 출구야말로 적들이 자리 잡고 기다리기 딱 좋은 장소라서 그렇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는 법.
서예인이 출구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 쐐애애액!
회색 빛줄기가 매서운 파공성을 흘리며 짓쳐 들었다.
서예인이 재빨리 팔을 들어 올려 막았으나,
- 푹.
빛줄기는 팔을 꿰뚫고 서예인의 가슴팍에 틀어 박혔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쇠뇌가 들려 있었다.
그제서야 가슴팍에 박힌 것을 확인해 보니, 그것은 강철로 이루어진 화살이었다.
그리고 서예인의 화면에는 작은 문구가 떠올랐다.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상대방.
[Continue?]
[10, 9, 8....]
그리고 서예인의 화면에는 작은 문구가 떠올랐다.
[Continue?]
"죽었네. 이어 합시다."
"응...."
서바이벌 대전이라 그런지 근접 캐릭터도 맷집이 그리 튼튼하지는 않다.
이어 하기를 많이 해야 포인트 수금이 편해서 그런 건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가져 본다.
300포인트로 토큰을 구매한 후 오락기에 집어넣는 서예인.
[서바리안 4K/1D/0A]
[김독침 0K/0D/4A]
바바리안이 다시 나타난 곳은 유적지 안, 첫 시작 지점이었다.
반면 내 위치는 출구 근처.
"일단 다시 합류하자. 그쪽으로 갈게."
"알았어."
미로처럼 얽혀 있는 유적지 내부지만, 고인물답게 오는 길을 다 외워 둔 상태다.
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쟤네 아직도 있네."
방금 쓰러뜨렸던 기사와 사제 듀오를 마주쳐 버렸다.
첫 조우에서 우리한테 크게 패했기에 또 싸워야 하나 주춤거리다가, 내가 혼자라는 것을 알아채자 곧바로 싸움을 걸어온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나는 보통 떡이 아니라, 독침이 달린 떡이었다.
- 쵹!
독침을 맞은 기사의 움직임이 한없이 느려졌고, 그 사이에 나는 잽싸게 그를 지나쳐 빠져나왔다.
"지나갑니다~"
열이 뻗쳤는지 죽일 듯이 추격해 오는 둘.
나는 달리다가 이따금씩 등을 돌려 독침을 한 발씩 꽂아 주고, 다시 달리기를 반복했다.
추격은 길지 않았다.
맞은편에서 서예인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도끼!"
"도끼."
- 휘리리릭!
손도끼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내 어깨 너머로 날아가, 사제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점점 명중률이 올라가는군.
[서바리안 5K/1D/0A]
[김독침 0K/0D/5A]
전세가 역전되어 2대1이 1대2로 바뀌었다.
그러나 기사는 이판사판이다 싶었는지 도망치지 않고 맞섰다.
사선을 그리는 검을 서예인이 몸을 기울여 피했다.
그리고 마주 검을 휘두르자 기사가 방패를 들어 튕겨 낸다.
반대쪽 손의 손도끼를 내려찍는 서예인과, 마주 검을 휘둘러 쳐내는 기사.
- 챙! 챙!
'슬슬 적응들 하는구만.'
어설픈 인형극 같았던 첫 전투와는 달리, 두 근접 캐릭터의 움직임이 훨씬 더 정교해졌다.
모두들 조금씩 웨폰 마스터에 가까워져 가는 것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이건 팀 게임이기도 하거든.'
- 훅!
"...!"
독침을 맞고 또 상태 이상에 빠진 기사.
그의 정수리에 서예인의 장검이 떨어져 내렸다.
- 콰직!
[서바리안 6K/1D/0A]
[김독침 0K/0D/6A]
가볍게 2킬을 챙긴 뒤, 서예인과 아까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서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적지 출구가 나타났다.
"자, 나가 봅시다. 화살 조심하고."
"응."
- 쐐애애액!
아니나 다를까, 유적지 밖으로 한발을 내딛기 무섭게 쏘아져 오는 화살.
그런데 회피하리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서예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화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다음 찰나 정면으로 검을 휘둘러,
- 쩌어엉—!
날아오는 화살을 반으로 쪼개 버렸다.
"말도 안 돼!"
경악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아마 막 화살을 날린 플레이어겠지.
그러나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석궁을 쏘며 위치가 드러났기에, 그는 숨어 있던 장소에서 벌떡 일어나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예인이 무서운 속도로 그를 쫓아가 상반신과 하반신을 분리해 버렸다.
[서바리안 7K/1D/0A]
[김독침 0K/0D/6A]
이번엔 어시스트가 안 들어왔군.
쟤 혼자 다 했으니 어쩔 수 없다.
<웨폰 마스터>는 기본적으로 2인 1팀 게임이라, 석궁수의 페어도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거다.
해서 전투가 종료되고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나, 뭐가 튀어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에 매복했거나, 우리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중이거나.
어느 쪽이든 당장 볼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근데 그건 어떻게 쳐냈냐."
방금 전 상황은 내가 보기에도 의외였다.
서예인의 천재적인 재능은 인정하지만, 바바리안은 생소한 직업군이다.
해서 이제야 조금씩 감을 잡아 가는 와중인데, 날아오는 화살을 정확히 맞춰 쪼개 버리는 건 지나치게 난이도가 높다.
서예인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답했다.
"느려졌어."
"불릿 타임?"
"...? 응."
대답이 한 박자 늦게 나왔는데, 알림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그런 듯했다.
화살이 쏘아져 오는 찰나 자기도 모르게 [불릿 타임]을 시전했고, 전투가 종료되고 쿨타임이 도는 걸 보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천재적이군.'
막 배운 스킬을 본능적으로 최적의 타이밍에 써먹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제안했다.
"그럼 이참에 몇 번 더 써 볼래?"
"응."
서예인이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자, 나는 증폭을 시전했다.
['증폭'을 사용합니다.]
['불릿 타임'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F->D)]
[지속 시간 00:04:58]
[재사용 대기 시간 00:29:58]
C랭크로 오른 증폭.
대상의 랭크를 5분 동안 두 단계 올려 주고, 재사용 대기 시간은 30분이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D급이 된 불릿 타임의 능력치는,
'지속시간 2초, 쿨타임 3분.'
재사용 대기 시간이 줄어들었으니 더 자주 사용할 수 있다.
아마 남은 경기 동안 두세 번 정도는 더 써 볼 수 있을 거다.
유적지 밖은 암석 지대와 숲이 적절하게 섞인 지형.
군데군데 몸을 숨기기 알맞은 장소들이 마련되어 있다.
석궁수도 그래서 잘 안 들켰었고.
"천천히 가자. 어쩐지 저놈들 또 올 거 같은데."
"또 와?"
"내 생각에는."
서로 한 번씩 죽였으니, 둘 사이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셈.
마지막은 만전을 기하기 위해 파트너와 함께 싸움을 걸어오지 않을까?
- 쐐애애액!
"저거 봐라. 왔지."
날아오는 화살을 서예인이 훌쩍 옆으로 뛰어서 피했다.
그 다음 석궁수를 쫓아가려는데, 근처에서 불쑥 검은 그림자가 솟아오르더니 그대로 덮쳐들었다.
온통 시커먼 옷을 입은 암살자.
손에는 의상과 마찬가지로 시커먼 단검 한 자루가 들려 있다.
저놈이 석궁수와 페어인가 보다.
나는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저놈도 독하네."
우리가 지나쳐 온 곳에서 튀어나왔다는 건, 여태 그곳에 숨어 있었다는 뜻.
석궁수가 서예인에게 잡힐 때는 등장할 타이밍을 놓친 것 같고, 그가 이어 하기를 하고 이곳으로 돌아온 지금에야 모습을 드러낸 거다.
서예인이 암습에 반응하는 사이, 석궁수는 다시 거리를 벌린 뒤 화살을 재장전해 발사했다.
- 쐐애액!
그리고 서예인이 화살을 피하는 사이 암살자는 잠시 뒤로 빠졌다가, 또다시 석궁수의 시간을 벌기 위해 공격해 들어온다.
두 상대가 번갈아 바바리안을 괴롭히는 상황.
그러나 나는 내심 기대를 품고 있었다.
'이제 보여 주나?'
슬슬 불릿 타임 쿨타임이 다 돌았을 테니까.
- 쐐애액!
화살이 날아오고 암살자가 단검을 찔러 오는 그 찰나, 서예인의 눈이 번뜩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바바리안의 몸이 두 공격 사이의 아주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절묘하게 스쳐 지나가는 공격들.
이어지는 반격에 암살자의 팔이 떨어졌다.
"너무 훌륭하고."
나는 기립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한창 전투가 진행 중이었기에 나도 손을 보탰다.
- 쵹!
한쪽 팔을 잃고 황급히 물러나려는 암살자.
그러나 뒷덜미에 독침이 꽂혔기에 그는 더 이상 물러나지 못했다.
암살자의 목을 뎅겅 썰어버린 다음 곧장 석궁수를 추격하는 서예인.
나는 그런 서예인에게 한마디 했다.
"죽이지는 말아 봐. 나 어시스트 좀 먹을게."
"응."
어시스트는 내 도움을 받으면서 적을 처치해야만 횟수가 올라가기 때문에, 내가 독침으로 살짝이라도 찔러야 한다.
서예인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놈에게 바짝 따라붙더니, 주먹으로 안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미니 게임이라 티가 안 나는 거지, 실제로 저랬으면 이빨이 몽땅 부러졌을 거 같은데.
나는 뒤따라가서 붙잡힌 석궁수에게 독침을 발사했고,
- 쵹!
서예인이 놈을 마무리 지었다.
저거 기분 좀 더럽겠네.
[서바리안 9K/1D/0A]
[김독침 0K/0D/8A]
한 번 제대로 승패가 갈리자 석궁수-암살자 듀오는 더 이상 우리를 노리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시비를 걸고 멀리서 괴롭히고 싶겠지만, 죽으면 600포인트씩 손해인 탓이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해서 숲과 암석지대를 나아가며 적들을 파죽지세로 쓰러뜨렸다.
[서바리안 13K/1D/0A]
[김독침 0K/0D/12A]
그러던 도중, 암석 지대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아리따운 여성 마법사.
"오, 서 소저—"
고현우가 조작하는 캐릭터였다.
서바이벌 게임에서 이렇게 마주치는 게 신기한지 스태프를 흔들며 인사한다.
"...."
반면, 서예인의 빈 손은 허리춤으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휘리리릭—콰직!
맹렬하게 회전하며 날아간 손도끼가 고현우의 골통을 쪼개 버렸다.
[서바리안 14K/1D/0A]
[김독침 0K/0D/13A]
"...."
고현우가 서예인을 보고, 다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얘한테 한마디 좀 하라는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서예인의 편이었기에, 적당히 볼륨을 조정한 뒤 작게 호통쳤다.
"나약한 놈. 사사로운 감정을 갖고 전투에 임하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으음...!"
고현우는 강호의 비정함을 깨닫고 말았다.
169화 웨폰 마스터 (3)
고현우의 얼음 마법사는 합해서 세 번의 죽음을 겪었는데, 그중 둘은 서예인이 날린 손도끼가 원흉이었다.
- 휘리리릭—콰직!
물론 고현우는 이런 일을 마음에 담아 두는 성격은 아니었다.
처음 손도끼에 골통이 쪼개졌을 때는 어이가 없어 했지만, 본격적으로 맞붙어 패하자 결과에 승복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본인의 패배요. 김 형의 말대로 몸이 약하구려."
"그 캐릭터는 특히 더 약하지. 완전 유리 대포거든."
"그런 듯하오. 마법사들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음을 알게 되었소."
그리고 고현우는 더 이상 이어 하기를 하지 않았다.
벌써 900포인트를 날린 셈이라, 아무리 즐겜 모드라도 포인트를 펑펑 쓰기는 부담되기 때문이다.
또 경기가 거의 끝나가기도 해서, 미련 없이 내려놓고 우리가 하는 것을 구경했다.
그리고 경기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 서예인은,
- 콰가가가각!
[서바리안 25K/1D/0A]
[김독침 0K/0D/22A]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든 무서운 속도로 배우고 숙달하는 천재적인 재능과, 이따금씩 쿨타임이 돌아오는 불릿 타임, 그리고 옆에서 얍삽하게 보조하는 내 독침 덕분이었다.
거의 파괴 전차로 돌변한 상태였다.
이곳저곳을 거침없이 질주하며 마주치는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
다른 참가자들도 용살학원 학생으로 나름 재능이 넘치는 이들이었으나, 서예인만큼은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었다.
미니 게임을 하면서 저들끼리 한두 마디씩 주고받던 것이, 나중에는 거의 바바리안 얘기만 하게 되었다.
- 아니, 저거 뭔데?
- 컨트롤 뭐 저렇게 좋냐?
- 버그인가? 쟤만 원래 클래스 하는 거 아니야?
- 야, 온다, 온다, 튀어!
다들 몇 번씩 서예인에게 죽음을 경험했음에도,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감탄하는 분위기다.
반면 그 옆의 나, 독침쟁이에게는 그저 원성만이 자자했다.
- 아, 독침 너무 열 받아, 아.
- 자꾸 옆에서 깔짝거려.
- 진짜로, 거의 잡을 수 있었는데.
- 아악! 또 안 보여!
나는 그 모든 극찬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게임은 상대방 열받게 하려고 하는 겁니다.
- 쵹!
곧 제한 시간이 모두 지나고 경기가 종료되었을 때,
[서바리안 31K/1D/0A]
[김독침 0K/0D/27A]
서예인과 나는 기존 목표였던 20킬, 15어시스트를 한참 넘어선 상태였다.
초과 달성 보상이 없는 게 아쉽군.
경품으로 주어진 [랭크 업(E)]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게임 센터를 나서려는데,
"얘들아, 잠깐만."
2학년 선배들이 우리를 불러세웠다.
보나 마나 조금 전 경기에 참가했던 이들일 거다.
"...."
서예인은 2학년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슬그머니 내 등 뒤로 숨었다.
일명 김호 방패다.
그걸 보고 몰려오던 선배들이 멈칫하더니, 서로 핀잔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 야, 너 때문에 애 숨었잖아.
- 왜 1학년한테 겁을 주고 그러냐?
- 네가 못생겨서 그런 거 같은데.
- 솔직히 너보단 내가 낫다.
잠시 누가 제일 못생겼나 월드컵이 열리려다가, 호남형 얼굴을 가진 선배 하나가 대표로 나섰다.
"미안하다. 다른 건 아니고, 뭐 좀 물어보고 싶어서."
"네, 선배님."
"혹시 그, 바바리안 듀오가 너희였니?"
"네, 얘가 바바리안이고 제가 독침이었어요."
서예인과 나를 차례대로 가리키며 답하자 선배들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수군거렸다.
- 여자애가.... 바바리안이라고?
- 그리고 남자애가 독침?
- 반대 아니었어?
- 바바리안 너무 화끈하던데.
예쁘장하고 조용하게 생긴 서예인의 모습과, 전장을 종횡무진 질주하며 적들을 썰어 재끼는 바바리안의 모습이 도무지 매치가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인걸.
호남 선배 역시 조금 충격을 받은 듯했으나,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렇구나, 혹시 원래 클래스가...?"
"총사랑 마법사입니다."
또다시 선배들이 뒤집어졌다.
- 총사였는데 바바리안을 그렇게 잘해?
- 손도끼는 확실히 잘 던지긴 하더라. 나 두 번 찍혔어.
- 그건 네가 허수아비여서 그런 거 아닐까?
- 아니, 이거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시비 거네? 다시 붙어?
- 드루와.
혼란의 도가니탕에 빠진 선배들을 뒤로하고, 호남형 선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도 안 믿어져서 물어봤어. 말해 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선배님."
"독침은 나도 조금 열 받던데, 그만큼 캐릭터 특성을 잘 살렸다는 뜻이겠지. 둘 다 멋진 플레이였어."
"감사합니다."
뭘 좀 아시는 선배님이군.
호남형 선배에 대한 평가가 한층 긍정적으로 변했다.
나중에라도 접점이 생긴다면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질문은 그게 다였는지 선배들이 손을 흔들고 자리를 뜨려다가, 그중 하나가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근데 둘이 무슨 사이야? 매니저 같이 보이는데."
"비슷합니다."
지금으로서는 매니저라는 표현이 그럭저럭 들어맞는 것 같다.
그런데 내내 등 뒤에 숨어있던 서예인이 어깨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집사?"
"집사 아니다."
나는 정색을 하고 부정했다.
어딜 은근슬쩍 사람을 집사로 삼으려고.
서예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집사 안 해?"
"절대 안 하지."
하면 안정미랑 비슷한 신세가 되는 건데.
나는 매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서예인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인벤토리에서 [랭크 업(E)]을 꺼내 내밀었다.
"...?"
"안 한다고."
* * *
게임 센터에서 한바탕 스트레스를 풀고,
우리는 번화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한참이나 그렇게 돌아다니자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기 시작했고, 아침에는 무려 80%에 달했던 서예인의 충전도가 거의 방전 상태에 이르렀다.
"...."
"야, 가서 자."
"응...."
걸어 다니며 졸기 시작하는 서예인을 기숙사로 돌려보내고, 고현우도 들어가기 전에 조금 더 장터를 구경하고 싶대서 그러라고 보내고.
나는 시간에 맞춰 당규영과의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마주하게 된 것은,
"...."
벤치에 삐딱하게 기대고 앉아 있는 당규영.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뚱해 보인다.
입술도 조금 삐져나온 것 같고.
짐작 가는 것이라곤 하나밖에 없었기에,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잘 안 풀려요? 블랙 마켓."
"아니?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평소보다 다소 쌀쌀맞은 말투.
어제만 해도 살갑게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왜 갑자기 뿔이 났는가.
또 하나 의문인 것은, 당규영이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는 점.
나름 털털하고 솔직한 성격이라 불만이 있으면 바로바로 말하는 편인데, 그렇게 못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게 없어서, 나는 문제 해결을 조금 뒤로 미루었다.
"일단 밥부터 먹읍시다."
배부터 채우고, 포만감에 기분이 한결 나아지면 그때 다시 물어보는 걸로.
지난 사전 답사와 마찬가지로 노점상을 돌면 되겠다 싶어서, 근처 핫도그 집을 가리켰다.
"저거 어때요, 핫도그."
"...."
당규영도 이래선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삐죽거리던 입술로 푸—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탁탁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앞장서서 걸으며 말했다.
"무슨 핫도그야. 가자, 예약해 놨어."
"예약이요?"
내가 뒤따라 걸으며 묻자, 당규영이 어깨 너머로 시선을 보내며 답했다.
"어. 얄미운 후배님 밥 한 끼 사 주려고 그런다."
"감동했습니다, 선배님. 제가 정말 좋은 선배님을 뒀네요."
"흥, 그리고 너 오늘 점심도 군것질로 때웠잖아."
"그건 그렇죠."
"한 끼는 제대로 된 거 먹어야지. 츄러스나 구슬 아이스크림 같은 걸로 배가 차?"
"지당하신 말씀이기는 한데.... 그거 먹은 건 어떻게 아셨어요?"
번화가에 군것질거리가 한두 종류도 아닌데, 어떻게 그걸 정확히 맞췄는가.
당규영이 순간 움찔거리더니,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 댔다.
"그... 으냥? 지나가다 봤지?"
"츄러스랑 구슬 아이스크림 사이에 시간 차가 꽤 있었는데.... 두 번 보셨어요?"
"...."
"선배님?"
"야야, 다 왔다!"
당규영이 나를 잡아끌고 빠른 걸음으로 눈앞의 레스토랑을 향했다.
레스토랑의 정체를 확인하자 나는 조금 놀랐다.
"여기 예약을 잡으셨다구요?"
이 레스토랑은 양식 전문점으로, 제과점과 함께 번화가에서도 손꼽히는 맛집 중 하나다.
당연히 예약하려면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어야 하고.
그걸 일 년 중 번화가가 가장 붐비는 시기 중 하나인 오늘 저녁에 예약을 잡은 것이다.
당규영은 우쭐해졌다.
"자꾸 까먹는 거 같은데, 나 동아리 부장이야."
"역시 부장님이십니다."
"감사히 먹도록."
심지어는 예약한 자리마저 바깥 야경이 한 눈에 보이는 2층 테라스였다.
자리에 앉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음식이 나왔고, 우리는 찹스테이크와 샐러드, 파스타 등을 접시에 조금씩 덜어 먹었다.
그러면서 사소한 대화를 나누고,
"쑈— 제갈소소가 내 얘기 안 해?"
"한두 번 짧게만요."
"희한하네. 잘 부탁한다고 말해 놨는데."
"잘해 주시긴 했죠."
"그럼 다행이네."
이따금씩 대화가 끊기면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야경을 구경했다.
하늘이 어둑해져서 가로등들이 켜지는 저녁임에도, 번화가는 여전히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수많은 인파가 흐르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또 시선을 돌려 서로 마주 본다.
"...."
당규영이 냅킨으로 입가를 훔치고 물었다.
"왜 그렇게 봐?"
"테이블 매너가 완벽하시네요."
포크와 나이프, 냅킨을 다루는 사소한 손짓 하나하나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배워서 몸에 익은 것에 가깝다.
평소 도둑 동아리 부원들을 대할 때는 거칠고 자유분방한 이미지인데, 지금은 명문가 아가씨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당규영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이 정돈 기본이지. 예전에 세가에서 배웠거든."
"당가에서요?"
"응, 내가 얘기 안 했나? 나 직계야. 지금이야 반쯤 내놓은 자식이기는 한데."
"얘기 안 하셨죠. 그런데 반쯤 내놓았다는 말씀은...?"
"출가했거든."
당규영은 당씨 성임에도 독도, 무공도 안 쓰고, 그림자 마법이 주력이다.
소속된 세력도 당가가 소속된 무림연맹이 아닌, 길드연합의 도둑 길드 및 도둑 동아리.
이전부터 의문을 가졌던 부분이었는데, 출가해서 그림자 술사가 되었단다.
"출가는 어쩌다 하시게 됐어요."
"그냥, 갑갑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
가문에 얽매이지 않고, 손수 개척하는 자유로운 삶을.
내가 또 물었다.
"지금은 그런 삶을 살고 계십니까."
"그럭저럭?"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하며 씩 웃는 당규영이었다.
그리곤 내가 식기를 내려놓은 걸 보고 묻는다.
"난 다 먹었어. 너는?"
"저도 끝났습니다."
"그래, 일어나자 그럼."
"감사합니다, 선배님. 잘 먹었어요."
내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당규영은 기분 좋게 웃었다.
약속 장소에서 보였던 토라진 기색은 온데간데없다.
"잘 먹은 만큼 열심히 도와주기?"
"당연하죠. 어디로 가면 됩니까?"
이번 블랙 마켓에서 도둑 동아리는 내가 원하는 금지 아이템을 확보하고, 나는 임시 용병으로서 손을 보태기로 약속한 상태다.
- 한 다리 걸칠래?
- 제가 뭘 하면 됩니까?
- 그 재수 없게 생긴 선배님 있지? 거기 붙어.
그리고 내가 붙기로 한 졸업생 뺀질이 아저씨는 예비 전력으로, 대기하다가 유사시에 도움을 주는 역할이다.
해서 그 아저씨 위치가 어디냐고 물어본 건데.
당규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했다.
"음.... 그거. 생각이 바뀌었어."
"그럼,"
당규영이 나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나랑 같이 다녀."
170화 현음옥마지
당규영은 곧바로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함께 번화가 인파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다가, 내가 물음을 던졌다.
"선배님, 그런데 우리 어디 가요?"
"너, 금지 아이템 리스트 만들어서 줬잖아."
"그랬죠."
"방금 막 하나 올라왔대. E거래소에서 기다린대서 그리로 가는 거고."
"오."
도둑 동아리 측에서 나에게 확보해 주기로 한 물건이 매물로 올라왔단다.
수많은 금지 스킬 중 내 기준에 맞는 극소수의 스킬들만 추려 냈기 때문에, 이번 블랙 마켓에 아예 안 보일 가능성도 고려했었다.
그래도 이렇게 올라온 걸 보면 운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거래소에 거의 다 왔을 즈음 우리는 슬쩍 방향을 틀어 근처 접선소를 향했다.
소프트 아이스크림 카트.
낯익은 도둑 동아리 부원이, 낯익은 음흉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한다.
"어서 옵쇼."
"무슨 맛? 또 반반?"
당규영과 내가 초코 반, 바닐라 반을 고르자 부원이 콘에 반반 아이스크림을 능숙하게 퍼 담았다.
"반반 가야죠."
사전 답사 때는 모양이 못 봐줄 정도로 엉망이라 당규영이 한마디 했었는데, 그동안 제법 연습을 했는지 지금은 완벽에 가깝다.
"그럼 나도."
"여기 있습니다. 맛있게들 드십쇼."
부원이 아이스크림 콘 두 개를 냅킨에 싸서 건넸다.
냅킨이 본체로, 블랙 마켓 티켓이자 이정표다.
냅킨의 화살표 무늬가 우리의 다음 행선지, E거래소를 가리킨다.
당규영이 아이스크림을 작게 몇 번 낼름거린 다음 물었다.
"근데 넌 그거 없어도 되는 거 아니야?"
"쉽게 쉽게 가면 좋죠."
고인물 센스를 발휘하면 이정표 없이도 진법이나 통과걸음 미로를 뚫고 들어가기야 할 거다.
하지만 지금은 내기가 걸린 것도 아닌데, 괜한 수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
이정표 보면서 편하게 가는 게 상책이다.
당규영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느긋하게 걷다 보니 E거래소에 도착했다.
E거래소의 외견은 다양한 생필품을 판매하는 마트였으며, 한창 영업 중이라 내부에 학생들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우리도 안에 들어가 태연하게 둘러보는 척하면서, 냅킨이 가리키는 대로 더욱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관계자 외 출입 금지> 팻말이 붙은 문을 주저 없이 밀고 들어갔는데, 근처를 지나다니던 학생들은 우리의 이런 행동에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진법이 있거든.'
졸업생 선배가 마트 곳곳에 설치해 둔 진법이 아주 교묘하게 시야를 왜곡하는 중이다.
때문에 냅킨이 없는 이들의 시선에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만 보일 거다.
아마 우리가 사라진 것도 알아채지 못했겠지.
냅킨의 화살표는 청소 도구를 쌓아놓는 반 칸짜리 방을 가리키고 있었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니 아무것도 없는 벽면을 가리켜서 또 거기로 발을 집어넣자, 저절로 [통과걸음]이 발동되며 다음 방으로 넘어간다.
사무실처럼 꾸며 놓은 방.
계속 다음 벽을 넘고, 복도로 나와 계단을 오르고, 또 벽을 넘는다.
그렇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사무실처럼 꾸며 놓은 방에 들어섰는데, 이곳에는 선객이 있었다.
웬 사내가 의자에 점잖게 앉아 있다가 인사를 건넸다.
"왔는가? 웬일로 당 부장이 직접 왔군."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리고 당규영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졸업생 멘토 선배.
곁에 세워 둔 검이나 무복 등으로 미루어 보아 무림인 분위기가 강하게 풍긴다.
이내 그는 품에서 낡고 색이 바랜 무공서 한 권을 꺼내 들었는데, 거기에는 거친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현음옥마지玄陰玉魔指>
"이걸 찾는다고 들었는데."
"그 스킬북이 맞습니다."
"...."
사내의 눈길이 잠시 당규영을 떠나 나에게 머물렀다.
그리고 금세 눈에 이채를 머금었는데, 무언가 깨달은 기색이었다.
내가 1학년이라는 것, 그리고 스킬북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사람이 당규영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그게 아니라면 여기까지 나를 달고 올 리가 없을 테니까.
1학년이 이런 마공서를 구해서 익힌다니 상당히 호기심이 동하는 듯 보였으나,
금지 아이템을 거래함에 있어 불문율이란 서로 질문이 적을수록 좋다는 것.
그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이내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대금을 지불하게."
"네, 선배님."
사전 답사 때 이정표 없이 졸업생들의 시험을 통과한 덕분에, 저 대금은 그들이 처리할 거다.
매우 쿨하고 신속하게 거래를 마치고, 사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리 둘을 동시에 눈에 담으며 뜻모를 미소를 지었다.
"잘 쓰게나. 블랙 마켓의 성공을 기원하겠네."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사내가 벽을 넘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후, 당규영이 나에게 무공서를 넘겼다.
[스킬북 - 현음옥마지]
"옛다. 근데 이건 무슨 스킬이야? 그냥 이름부터 마공인 건 알겠는데."
"말로 하는 것보다 보여 드리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나는 주저 없이 스킬북을 사용했다.
낡은 책자가 빛무리로 화하며 내 몸에 스며들고, 시야 한 켠에 알림 메시지가 출력된다.
['스킬북 - 현음옥마지'를 사용합니다.]
['현음옥마지(C)'를 습득합니다.]
인페르노 피스트와 마찬가지로 배우자마자 C랭크.
성능 역시 전혀 밀리지 않는 막강한 스킬이다.
나는 주먹을 쥔 채, 삿대질을 하듯 검지만 곧게 폈다.
그리고 마나를 끌어올려 집중시키자,
- 스으으으—
검지가 끄트머리부터 꽁꽁 얼어붙었다.
마치 옥(玉)으로 만든 조각상처럼 영롱한 푸른 빛을 머금었으며, 냉기가 얼마나 강한지 드라이아이스처럼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당규영이 그것을 신기한 눈으로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와, 예쁘다. 만져 봐도 돼?"
"살짝 건드리기만 하세요. 아주 살짝만."
당규영이 내 검지에 조심스럽게 손끝을 가져다 대다가, 불에 데이기라도 한 듯 황급히 손을 뗐다.
- 드드드득,
바로 손을 뗐는데도 끄트머리부터 성애가 끼며 냉기가 확장되어 간다.
당규영이 즉시 마나를 끌어올려 냉기를 밀어낸 다음 손을 털었다.
"엄청 차갑네."
"그래서 이름에 현음(玄陰)이 붙은 거죠."
현음옥마지.
손가락으로 찔러 피해를 주는 지법(指法) 계통 무공이다.
그렇다면 이름에 마(魔)는 왜 붙었는가.
바로 이 지법의 살벌한 효과 때문이다.
현음옥마지는 상대방의 혈도, 즉 마나 회로를 집중적으로 노려서, 마나의 흐름을 동결하고 끊어 놓는다.
한 번 당하면 반쯤 스킬이 봉인되거나 위력이 대폭 감소하는 셈.
게다가 회로를 통해 강력한 냉기가 침투하기에 움직임에도 큰 지장이 생기며,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설명을 듣자 당규영이 으슬으슬해진 듯 작게 몸을 떨었다.
"마공이 맞기는 맞네. 그럼 페널티는 뭔데?"
그리고 이 스킬이 금지 스킬로 지정된 데에는 살벌한 효과뿐만 아니라, 사용했을 때의 페널티 또한 크게 한몫을 했을 터.
"냉기 제어에 신경을 써야 하고, 마공답게 마기가 없지는 않고요."
말은 이렇게 했어도 냉기는 큰 문제가 아니다.
S랭크 [원소 저항]이 있으니까.
인페르노 피스트와 마찬가지로, B랭크까지는 원소 페널티를 거의 받지 않고 시전할 수 있을 거다.
정작 문제가 되는 건 마기.
원하는 금지 아이템 리스트를 만들 때 일부러 마기의 비중이 적은 마공들로 추리기는 했으나, 마공은 마공이다.
자주 쓰면 쓸수록 마기가 누적되며 나에게 악영향을 끼칠 테니, 남발하지 않고 중요한 순간에만 써먹어야 한다.
물론 이런 강력한 스킬을 남발할 일이 있을까 싶지만 말이다.
"하여간 맨날 살벌한 거만 배운다니까. 또 누구를 담가 버리려고."
"세계 평화에 걸림돌이 된다면 치워야죠."
거슬리는 놈들을 모조리 담가 버리면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당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에, 그러시겠지요. 이제 나가자."
"넵."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냅킨의 이정표가 우리를 출구로 안내했다.
벽 몇 개를 넘고 계단을 내려가고, 또 벽 몇 개를 더 넘은 다음 눈앞에 보이는 문을 열었더니 E거래소 건물 뒤편이다.
냅킨을 내려다보자 각인되어 있던 복잡한 술식이 점점 더 희미해지더니, 이내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제 역할을 다했기도 하고,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미리 설치해 놓은 장치다.
냅킨으로 돌아가 버린 이정표를 쓰레기통에 투척하고, 건물을 빙 돌아 다시 번화가에 접어들었다.
인파를 따라 거닐며 당규영에게 물었다.
"블랙 마켓은 지금 어디까지 진행됐어요?"
"사실상 이제 시작이야."
오전에는 A, B거래소만 개방하고 조금씩 간을 보며 손님을 받았고, 하나둘 개방하는 거래소를 늘려 갔다.
그리고 저녁이 된 지금 마지막 F거래소까지 활성화하며, 본격적으로 블랙 마켓이 막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 역할은 뭐에요?"
"지금은 딱히 없어. 거래소 근처 돌아다니면서 시간 때우고, 다빈이가 연락 보내면 바로 가고."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채다빈.
거래소 인근에 설치된 수정구들을 통해 끊임없이 번화가를 주시하고 있다.
그러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곧바로 근처 부원들에게 알려 대응하게 하는 거다.
그리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문제는 발생하지 않은 상태.
"결국 우리도 예비 전력이네요."
"그런 셈이지."
"그럼 제가 뺀질이 아저씨 쪽에 붙으나, 선배님 쪽에 붙으나, 그게 그거 아니었을까요?"
"아닌데? 아주 많이 다른데?"
내가 눈빛으로 뭐가 그렇게 다른가 묻자, 당규영이 매우 당당한 태도로 답했다.
"너 가면 내가 심심해져."
"...."
"아, 솔직히 너도 그렇잖아! 저기 가고 싶어?"
"솔직히 저도 선배님이랑 다니는 게 편하긴 합니다."
"그치? 흐흫흫."
당규영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해서, 채다빈을 비롯한 도둑 동아리 부원들이 열심히 블랙 마켓을 관리하는 동안, 우리는 번화가를 거닐며 열심히 시간을 때웠다.
"구슬 아이스크림?"
"방금 먹었잖아요, 아이스크림."
"또 먹어. 양 많으면 나눠 먹으면 되지."
"그럽시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당규영이 구슬 아이스크림에 집착을 보이길래 나눠 먹고,
"게임 센터는 가 봤냐?"
"갔죠, 오늘도."
"야, 나랑도 가."
"다음에요."
당규영의 관심을 게임 센터에서 떼어 내고.
미니 게임을 한다면 채다빈이 연락을 취했을 때 바로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부지런히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당규영과 내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곽승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해맑게 손을 붕붕 흔드는 한소미와, 흥미로운 눈으로 우리를 번갈아 보는 송천혜가 있었다.
셋이서 번화가를 순찰하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잠시 멈춰 선 듯했다.
당규영도 금세 그 사실을 파악하곤,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받았다.
"승재, 안녕?"
171화 블랙 마켓 (1)
얼마 전에 곽승재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 당규영 선배와 교제 중이라고 들었다.
- 가깝기는 한데, 연애하는 사이는 아닙니다.
-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고도 들었는데.
- 멘토랑 멘티니까요.
그리고 지금 곽승재가 나에게 보내는 시선에는 '이래도 부정할 셈인가?' 하는 물음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오해가 커져 가는 것은 송천혜도 비슷해 보이는데,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떠오른 것으로 보아 머릿속으로 로맨스 소설을 한 편 쓰는 것 같다.
한소미는 그냥 뭐든 좋은지 방긋방긋 웃는 중이고.
'진짜 안 사귀는데.'
해명한다고 오해가 풀리지도 않을 것 같아서 나는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계속 말없이 시선을 받아넘기자 곽승재가 다시 당규영에게 타겟을 돌렸다.
"두 분 사이가 제법 친밀하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번화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실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가 좀 친하긴 해."
"뭘 하던 중이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얘랑 뭐 나쁜 짓 할 거 없나~ 돌아다니고 있었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송천혜가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한소미와 빠르게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당규영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장난스레 씩 웃었다.
'나쁜 짓'이 뭔데?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당규영이 되물었다.
"너네는?"
"아직 미숙한 면이 많은 녀석들이라, 데리고 다니며 가르치는 중입니다. 번화가 순찰도 겸하고 말입니다."
"응, 그래 보이네. 열심히들 해."
곽승재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도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승재가 웬일이야, 좋은 말을 다 해 주고."
"저는 두 분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냐? 고맙다."
곽승재가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웬일로 송천혜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빛나는 수정구가 박힌 단말기가 들려 있었다.
밴 웨이브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아이템으로, 대상이 금지 아이템을 소지하거나 인벤토리에 보관한 것을 감지하면 붉은빛 경고등이 켜진다.
불심 검문을 하겠다는 뜻.
당규영도 나도 평소에 의심 가는 짓을 많이 하고 다니는 터라, 지금도 만에 하나 금지 아이템을 보유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당규영이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든가."
송천혜가 긴장한 기색으로 단말기를 우리 둘에게 차례차례 가져다 댔다.
- 우웅—
그러나 수정구는 조금 밝아지기만 했을 뿐, 색깔 변화는 전혀 없다.
'우리가 그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지.'
아무렴 불심 검문을 예상 못 했을까.
당규영은 금지 아이템을 죄다 두고 왔고, 나는 [현음옥마지] 스킬북을 얻자마자 익혀 버렸다.
그러니 뭐가 나올 리가 없었다.
송천혜는 조금 머쓱해져서 물러나더니, 곧바로 표정 관리를 하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수고들 하고."
지켜보던 곽승재가 말없이 걸음을 옮겨 나아가고, 송천혜가 이쪽을 힐끔거리며 뒤따랐다.
한소미도 손을 해맑게 붕붕 저어 인사하곤 그들과 합류했다.
선도부 셋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당규영이 말문을 열었다.
"승재가 오늘은 빨리 물러났네. 평소엔 좀 더 귀찮게 구는 편인데."
"방해하고 싶지 않으신가 보죠. 그리고...."
"너도 눈치챘냐?"
곽승재가 접근해 오기 조금 전부터 시선이 느껴지던 참이다.
보나 마나 선도부 측에서 당규영을 감시하려는 거겠지.
도둑 동아리 부장으로, 블랙 마켓을 주관하는 핵심 중의 핵심 인물이니 말이다.
곽승재가 몇 마디 나누고 빠진 것은 우리의 경계심을 늦추려는 의도일 테고.
선도부로 짐작되는 그들은 어지간한 도둑 못지않은 은신술로 기척을 감추고 있었으나,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번화가 곳곳에 도둑 동아리의 눈이 심어져 있다는 것.
당규영이 컨트롤 타워에 연락을 넣었다.
"다빈아, 우리 보여?"
- 네, 보여요.
"우리 미행당하는 거 같은데. 4시 방향 좀 확인해 줘."
- 잠시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채다빈의 보고가 돌아왔다.
- 있어요, 선도부. 3학년 하나, 2학년 하나.
"역시 있구만."
- 다른 분들한테 연락 넣을까요?
"아니. 우리끼리 해결할게. 땡큐."
연락을 끊은 후 당규영과 내가 잠시 마주 보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튀자."
"튀죠."
그리고 즉시 달리기 시작했다.
선도부 측은 적잖이 당황했는지, 흠칫 놀라는 기색이 여기까지 전해져 왔다.
한참 멀리 떨어져서 감시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그러나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듯, 마찬가지로 속도를 내 추격해 온다.
우리는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인파를 빠르게 거슬러 달리다가, 건물과 건물 사이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골목을 계속 달리면서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려 건물 높이를 확인한다.
"위로 뛰죠."
"위로? 저건 좀 높은데."
"저를 믿어 보십쇼."
"그래, 한번 해 봐."
"바로 뜁니다."
우리는 즉시 손을 잡고 땅을 박찼다.
- 펑!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윈드포스를 시전해 한층 높이 붕 떠올라 건물 옥상에 착지했다.
다음 순간 골목에 들어선 선도부 둘.
"...."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기감을 넓게 퍼뜨려도 보지만, 우리가 옥상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뛰어오르기엔 다소 높은 건물이라 거기까지 생각이 안 닿고, 당규영이 그림자 마법으로 기척을 숨겨 주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조금 더 수색을 이어 가던 선도부 하나가 낮게 혀를 찼다.
"쳇."
그리고 추적을 포기한 듯 골목을 떠나 버렸다.
"이럴 땐 쓸만하네, 바람 마법."
"마냥 나쁘기만 한 건 아니죠."
"응, 나쁜 건 너잖아."
당규영이 내 볼을 쿡 찔렀다.
나는 한쪽 볼이 찌그러진 채로 말했다.
"슬슬 저쪽도 시동 거나 봅니다."
"응."
선도부가 노골적으로 우리를 감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들의 주요 목표가 번화가 치안 유지에서 블랙 마켓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강수를 두기에 앞서 주요 인물들을 마킹해 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들이 둘 강수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
당규영이 다시 컨트롤 타워에 연락을 보내자, 채다빈이 물었다.
- 따돌리셨어요?
"응, 또 뭐 특별한 거 있어?"
-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어요. B 거래소가 발각된 것 같아요. C 근처도 분위기가 안 좋고요.
이어서 화면 몇 개를 공유하는 채다빈.
화면마다 선도부들이 비추고 있었는데, 모두 B거래소를 목표로 점점 포위망을 좁혀 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걸 보고도 당규영은 크게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올 게 왔다는 태도에 더 가까웠다.
"슬슬 하나쯤 걸릴 때도 됐지."
오전부터 내내 거래소들을 하나씩 늘려 갔는데, 선도부가 바보가 아니라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어야 맞다.
하물며 선도부는 엘리트들만 잔뜩 모아 놓은 집단 아닌가.
- 어떻게 할까요?
"줄 건 줘야지. 괜히 나서지 말고, 다 빠지라 그래."
언젠가는 선도부에게 발각되리라 예상했기에 거래소를 여섯이나 마련한 것이기도 하다.
두셋 정도는 내줘도 큰 지장이 없도록 말이다.
또한 괜히 지키겠다고 나서 봤자 손해만 더 키울 테니, B거래소에서 모든 부원을 철수시키라는 당규영의 지시였다.
"B거래소 거래들도 다른 데로 분배하고. C 분위기도 안 좋다고?"
- 네, 그쪽은 아직 의심 단계인 것 같아요.
"들키기 전까진 최대한 써먹어야지. 그대로 운영하고, 미리 손님들한테 주의만 줘."
- 알겠습니다.
컨트롤 타워와의 연결을 끊고, 당규영이 나에게 폭죽 비슷한 것 몇 개를 건넸다.
마력을 주입해서 쓰는 신호탄이다.
"이거 갖고 있어."
"선도부가 쓰는 거네요."
"슬쩍해 왔지."
당규영이 씩 웃었다.
선도부 신호탄을 슬쩍해서 준다는 건 당연히 교란용으로 쓰라는 뜻이다.
우리는 건물 옥상에서 B거래소 방향을 응시했다.
"저기 다 모여 있다곤 하는데...."
"금방 뿔뿔이 흩어지겠죠."
B거래소 점거가 끝나는 즉시 사방으로 분산되어 다음 거래소를 수색해 나갈 터.
그리고 예비 전력으로서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그 수색에 훼방을 놓는 거다.
"미리 하나 쏠까요?"
"맘대로."
당규영이 어깨를 으쓱하자, 나는 신호탄에 마력을 주입했다.
밝은 빛줄기가 하늘로 쏘아져 올라갔다.
- 슈우우우——팡!
그 즉시 빠르게 가까워져 오는 기척들.
안 봐도 선도부일 게 뻔하다.
"튑시다."
"튀자."
우리는 다음 건물로 몸을 날렸다.
* * *
- 종적을 놓쳤다.
"그렇습니까."
소식을 전해 들은 곽승재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규영을 감시하기 위해 은밀히 선도부 둘을 붙여 놓았는데, 귀신같이 눈치채곤 따돌려 버렸단다.
찔리는 것이 없었다면 도망칠 필요도 없었을 터.
김호와 당규영이 한다는 '나쁜 짓'이란 역시나 블랙 마켓과 관련된 일인가 보다.
다만 그들을 뒤쫓는 것은 현재 우선 순위가 아니다.
곽승재가 고개를 돌려 한소미와 송천혜를 바라보았다.
"안뇽하세요! 잠시 검문 있겠습니당!"
"협조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지나가는 학생들을 멈춰 세우고, 수정구를 들이밀며 금지 아이템 보유 여부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곽승재가 손짓하자 즉시 불심 검문을 중단하고 그에게 다가왔다.
"넹?"
"부실로 돌아간다."
- 쿠구구구....
주문을 해방하자 불쑥 솟아오르는 나무 문.
송천혜와 한소미가 곽승재를 따라 문을 넘자, 다음 순간 그들은 선도부실에 서 있었다.
"어서 오렴."
선도부장, 오세훈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오세훈을 비롯해 선도부원 다수는 벽면 근처에 서서, 그곳에 붙여 놓은 커다란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도 군데군데에는 붉은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바로 선도부원들이 불심 검문으로 금지 아이템을 검거한 장소들이다.
그 붉은 표시들을 취합해 붉은 원을 그렸고, 그 원의 중심 부근에는 건물 하나가 자리했다.
2학년 선도부원이 곽승재에게 경과를 보고했다.
"블랙 마켓에 사용되는 거래소 한 곳을 특정했다. 허나 진입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왜지."
"강력한 진법이 설치되어 있다. 더 나아갈 수가 없어."
"해체는 시도해 봤나?"
이 질문에는 3학년 선도부원이 답했다.
나름 진법에 조예가 있는 자였으나, 얼굴을 찌푸린 것으로 보아 잘 풀리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실력으로는 역부족이더군."
"그렇습니까."
3학년 선도부가 나섰는데도 해체하지 못했다면 그 윗줄의 실력자가 관여했다는 뜻.
오세훈의 실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당규영이 준비를 많이 했나 보네."
졸업생 분을 모시려면 출혈이 꽤 컸을 텐데.
금년도 블랙 마켓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다만 당규영의 의지가 어떻든, 교칙 위반은 교칙 위반이다.
금지 아이템을 대놓고 거래하는 현장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졸업생은 도둑 동아리 측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오세훈이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여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께서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172화 블랙 마켓 (2)
졸업생은 오세훈의 부탁을 받고 선선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 역시 한때는 선도부원이었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시간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긴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으며 물었다.
"진법에 막혔다고?"
"그렇습니다."
"가 보자. 승재야, 문 열어 줘."
"예, 선배님."
곽승재는 진작에 주문을 영창한 상태였다.
어차피 다음 행선지는 정해져 있었으니까.
닫아 놓았던 나무 문을 다시 열자 그 너머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포니테일 여성이 칭찬을 연발했다.
"이거 너무 편해. 승재야, 졸업하면 우리랑 일 안 할래?"
"고민해 보겠습니다."
고유 마법의 존재만으로도 벌써 러브콜이 산처럼 쌓인 곽승재였다.
이윽고 그들이 문을 넘어 도착한 곳은 번화가 한 켠의 빈 건물 앞.
주위를 선도부 여럿이 빙 둘러 포위하고 있었는데, 일반 학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건물 내에 있는 학생들의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함이다.
포니테일 졸업생이 건물을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 맞아? 확실해?"
"확실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진법에 대해 파악한 것은—"
"아, 그건 됐어."
현장에 있던 선도부원이 설명하려는 것을 손을 내저어 끊고, 그녀는 건물 입구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말로 듣기보다 몸소 한번 겪어 보려는 심산이다.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녀가 거의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갑자기 몸을 180도로 빙글 돌리더니, 터벅터벅 걸어 선도부원에게 돌아왔다.
자신도 모르게 진법이 유도하는 대로 움직인 것이다.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졸업생.
"교란 진법이네. 이러면 너네가 못 뚫을 만도 하겠다."
"송구합니다."
진법 해체를 시도했던 3학년이 고개를 숙였다.
포니테일 여성이 물었다.
"내부에 민간인은 없지?"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
"뒤로 더 물러나."
"...?"
선도부원들은 왜 물러나라고 하는 건지 의뭉스러운 표정이 되었으나, 졸업까지 한 대선배의 지시라 군말 없이 따랐다.
이어서 포니테일 여성이 다가간 곳은 건물 입구가 아닌 외벽이었다.
벽에 가느다란 손을 살짝 얹는다.
"도둑놈들 장단에 맞춰 줄 필요는 없지."
그녀의 손이 푸른 빛을 머금더니, 그곳을 중심으로 커다란 파문이 일며 벽이 강하게 물결쳤다.
뒤이어 벽에 쩍쩍 빗금이 가며 빠르게 건물 전체로 퍼져 나갔고,
- 쿠르르르....
일대가 지진이라도 난 듯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B거래소 내부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이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이거 왜 무너져?"
"빨리 나가, 빨리!"
학생 십수 명이 거래소 창문을 깨고 튀어 나왔다.
곧바로 선도부의 포위망에 걸려 제압되었으나, 그들은 옳은 선택을 한 것이다.
선도부에 잡히는 게 건물 잔해에 깔리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 쿠르르르릉—!
곧 건물이 완전히 붕괴해 폭삭 주저앉고, 일대가 자욱한 흙먼지로 뒤덮였다.
"...!"
"...!"
지켜보던 선도부원들은 아연실색해졌다.
진법을 파해하지 못해서 도움을 요청한 건데, 아예 진법이 설치된 건물 자체를 무너뜨려 버렸으니.
그들이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하는 의문이 담긴 눈빛을 오세훈에게 보냈으나,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였다.
졸업생의 돌발 행동도 예상 범위 안이라는 뜻.
사실 반쯤은 이것을 의도하고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선도부장의 권한으로는 이렇게 과감하게 손을 쓸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 쾅!
"크억!"
선도부원이 저항하는 학생을 바닥에 메다꽂았다.
그리고 단말기를 들이대자 수정구가 붉은빛으로 물든다.
금지 아이템을 보유했다는 의미다.
제압당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포니테일 여성이 그들을 일별하며 지시했다.
"데려가서 심문 시작해. 혹시 안에서 버티다 깔린 놈들 있으면 꺼내 주고. 명색이 용살학원인데 죽지는 않았겠지."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선도부실로 돌아가려던 그녀가 무언가 떠오른 듯 등을 돌리더니, 폭삭 주저앉은 건물 잔해를 가리켰다.
"저건 내 앞으로 달아 놔."
* * *
- 쿠르르릉—
B 거래소 쪽에서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광경을 보며 당규영이 혀를 내둘렀다.
"와.... 저 무식한 놈들. 완전 밥상을 엎어 버렸네."
거래소의 위치를 특정했으니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진법을 뚫고 통과걸음 미로를 뚫으리라 예상했는데, 그 예상을 비웃듯 단숨에 건물을 철거해 버렸다.
"졸업생 분이 손을 쓰셨나 보네요."
"그럴걸? 오세훈이나 곽승재는 저런 거 못 해."
2, 3학년 선도부가 낼 수 없는 화력인데다, 선도부 입장에서는 번화가 건물에 손을 대기 전에 고려할 요소가 많다.
그러니 졸업생이 나섰다는 추측에 무게가 실린다.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 아닐까요."
"아마?"
아무리 저 졸업생이 막무가내라도 건물들을 마구 부수고 다니지는 못할 테니까.
또 B거래소는 빈 건물이었지만, 나머지 거래소들 대부분은 우리가 스킬북을 거래했던 E거래소처럼, 영업 중인 곳을 빌렸다.
민간인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면 건드리지 못한다.
따라서 나머지는 당규영의 의도대로 진법부터 차근차근 뚫고 들어와야 할 거다.
한 방 먹기는 했어도 여전히 도둑 동아리 측이 우세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열심히 방해해야지.'
- 슈우우우—팡!
선도부용 신호탄을 또 하나 터뜨렸다.
주로 위급한 상황에 쓰는 신호탄이라 무조건 확인하러 올 수밖에 없다.
감히 선도부의 물건을 훔친 놈들을 잡아 족치기 위해서라도 더욱.
역시나 기척 여럿이 빠르게 포위망을 좁혀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 뜁니다. 잡으세요."
"응."
당규영과 손을 잡은 채 맞은편 건물을 향해 도약했다.
단순히 뛰어서 넘기에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 펑!
[레비테이트 존]과 [윈드포스]를 조합해 허공에서 한 번 더 도약한다.
그렇게 다음 건물에 내려앉은 다음 또 다음 건물로 넘어간다.
당규영의 눈이 흥미로 반짝거렸다.
"이거 하면 할수록 재밌네."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요."
서예인도 크리스탈 공략전에서 몇 번이나 던져 줬었고, 차현주도 대인전에서 멀리 날려 줬더니 좋아 죽더라.
이렇듯 윈드포스는 누군가에게는 혐오 스킬 1순위지만, 누군가에게는 재미가 가득한 스킬이기도 하다.
몇 번 더 옥상 점프를 하자 선도부의 추격을 가뿐히 따돌릴 수 있었다.
짧은 휴식을 취하는데, 아래쪽을 살피던 당규영이 내 손을 잡아끌더니 손가락질로 한 곳을 가리켰다.
"야, 저거 봐 봐."
건물 사이 골목을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는 학생 하나.
연신 뒤를 돌아보는 것으로 짐작컨대 무언가 켕기는 게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 켕기는 것이란 십중팔구 금지 아이템일 터.
"우리 고객님이셔."
"근데 걸린 거 같네요."
다음 순간 선도부 둘이 나타나 고객님의 앞뒤를 가로막았다.
3학년 하나, 1학년 하나.
둘 다 얼굴이 낯익은데, 3학년은 임시 보관소를 지키고 있던 지옥부 선배, 1학년은 황금련 대공자 금조한이다.
금조한이 고객님에게 다가가며 단말기를 들어 보였다.
"잠시 불심 검문이 있겠습니다."
"구, 굳이 검문까지 해야 하나?"
고객님이 불안하게 눈알을 굴렸으나, 그의 등 뒤에서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순순히 협조하는 것이 이로울 거다."
지옥부 선배가 팔짱을 낀 채 위협적으로 기세를 쏘아 보내고 있었다.
그 기세에 눌려 고객님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금조한이 그에게 단말기를 가져다 대려는 찰나,
- 펑!
"어엌?!"
압축된 공기가 폭발하며 금조한의 신형이 옆으로 휙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리고 지옥부 선배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은밀하게 날아든 나비 몇 마리가 그의 몸을 구속했다.
"당규영이냐!"
용살학원 내의 그림자 술사는 매우 한정되어 있고, [영접비행]을 주요 스킬로 쓰는 술사는 사실상 당규영뿐.
물론 당규영으로서는 그 질문에 답할 이유가 없었다.
"흡!"
곧바로 그림자를 풀어낸 지옥부 선배가 등에 메고 있던 도끼를 꺼내 들었다.
금조한 역시 벽에 얼굴을 박아 코피가 주륵 흐르기는 했으나, 곧바로 자세를 다잡고 검을 뽑는다.
"...."
그러나 우리는 진작에 그곳에서 자리를 뜬 뒤였다.
고객님이 안전하게 빠져나오는 것까지만 보고.
당규영이 지옥부 선배의 방향으로 혀를 쏙 내밀었다.
"내가 미쳤다고 너랑 싸우냐. 어차피 지는데."
당규영과 도둑 동아리가 이번 블랙 마켓에서 이루고자 하는 가장 큰 목표는 금지 아이템 검거율을 최대한 낮추는 것.
작년도 블랙 마켓의 실패로 바닥까지 떨어진 신용을 되찾기 위함이다.
그리고 예비 전력인 우리의 역할은, 선도부의 불심 검문이나 수색 등을 방해하는 것.
방해는 조금 전처럼 갑작스레 허를 찌르고 도망치는 걸로도 충분하다.
당규영이 또다시 선도부용 신호탄을 꺼내 들었다.
"슬슬 또 쏠까?"
그러나 나는 곧바로 답하지 않고 침음했다.
"...어쩐지 느낌이 쎄하네요."
"뭐가?"
"슬슬 나무 문이 솟을 거 같은데."
신호탄을 여러 번 쐈는데도 계속 우리를 놓쳤으니, 선도부원들 대신 곽승재가 움직일 때도 됐다.
당규영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듯 잠시 고민하다가,
"일리가 있네. 그럼 딱 이번까지만 쓰자."
"그럽시다."
신호탄에 마나를 주입했다.
선명한 빛줄기가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 슈우우우—팡!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우리가 윈드포스를 써서 다음 건물로 넘어가는 순간,
- 쿠구구구구,
마치 우리가 그곳으로 갈 줄 예상이라도 한 듯, 나무 문이 불쑥 솟아올라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당규영과 나는 서로 마주 보았다.
"진짜 오네."
"느낌이 쎄했다니까요."
곧바로 문을 열고 나온 곽승재.
그리고 3학년 선도부 둘이 더 따라 나와 그의 양옆에 자리를 잡았다.
"선배님, 그런 나쁜 짓은 곤란합니다. 그 신호탄은 선도부원에게만 사용이 허락된 물건입니다."
"응? 웬 신호탄?"
당규영은 시치미를 뚝 떼곤 아무것도 모르는 양 되물었다.
사실 우리는 근처에 있었을 뿐이지, 신호탄을 쐈다는 증거는 없다.
아직까지는.
곽승재가 이번에는 나를 응시했다.
"김호, 뭘 하든 교칙으로 정해진 선 안에서만 하라 하지 않았나."
"그러셨죠. 전 그냥 선배님 따라 마실 나온 겁니다."
저 교칙 위반 안 했어요.
나 역시 시치미를 뚝 뗐다.
물론 당규영도 나도,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하는 것이기는 했다.
"일단 선도부실로 동행해 주시지요."
조사하면 다 나온다.
가령 내 인벤토리에는 아직 신호탄이 남아 있다.
그리고 동행을 거부할 시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3학년 선도부 둘이 무기를 뽑아 든 채, 언제든 출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당규영과 내가 눈빛을 교환했다.
'잘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리고 전투가 막을 올리려는 순간,
- 휘리리릭—!
갑자기 어디선가 낚싯줄 같은 실이 날아들더니, 곽승재와 3학년 선도부 둘의 몸을 칭칭 휘감아 버렸다.
173화 블랙 마켓 (3)
"이건 대체?"
"무슨...?"
선도부 삼인조가 자신들을 옭아매는 실을 풀어내려 했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마나까지 끌어 올렸음에도 끊어지기는커녕 더욱 강하게 조여든다.
나는 잠시 그들이 버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오른 사람처럼 과장되게 놀란 시늉을 했다.
"헉! 선배님, 우리 그거요!"
"어? 아아, 그거! 그걸 깜박했네!"
'그거'가 뭔지는 몰라도 눈치 빠르게 장단을 맞추는 당규영.
급한 티를 팍팍 내며 내 손을 잡아끌고, 곽승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야, 우리 빨리 가 봐야겠다. 선도부실은 다음에 갈게! 수고들 해!"
"선—"
그리고 곽승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잽싸게 땅을 박차 다음 건물로 넘어갔다.
한참 달리고 나서 뒤쪽을 확인하니 선도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도 낚싯줄을 못 끊어 낸 모양이다.
"비싼 값은 하지?"
잠시 멈춰서 숨을 돌리는 시간을 갖다가, 당규영이 어디론가 말을 건넸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졸업생 뺀질이 사내.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의 근처에서 가느다란 무언가가 반짝 빛나며 손으로 빨려들어 갔다.
아마 방금 사용한 낚싯줄일 거다.
'졸업생일 줄 알았지.'
선도부 셋이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순식간에 제압당했으며, 우리가 자리를 떠날 때까지도 낚싯줄을 끊어 내지 못했다.
심지어 두 명은 3학년이라 더 확실했다.
당규영이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지나가는 길에 다빈이가 알려 줘서 왔지."
뺀질이가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당규영이 곧바로 컨트롤 타워에 통신을 연결했다.
채다빈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 잘 빠져나오셨어요?
"어. 대응 너무 잘했다. 승재 한 방 먹였네."
- 요주의 인물이니까요. 계속 보고 있었죠.
곽승재는 작년도 블랙 마켓의 검거율을 높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요주 인물.
도둑 동아리 입장에서 최우선으로 신경 써야 하는 대상이다.
때문에 컨트롤 타워의 인원 몇이 곽승재의 동향만을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었고, 그가 나무 문을 소환하는 즉시 다음 위치를 추적했다.
그리고 3학년까지 둘 가세하자,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뺀질이 사내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상황은 좀 어때?"
- 좀 있으면 C거래소도 들킬 것 같아요. A쪽도 수색 중이구요.
"빠르네."
원래는 B거래소에서 시간을 한참 허비했어야 하는데, 선도부 측 졸업생이 단숨에 건물을 철거해 버렸다.
따라서 곧바로 다음 거래소 수색에 인원들을 투입할 수 있게 된 것.
"우리도 당하기만 할 수는 없지. 부지런히 방해하자. 다빈아."
- 네, 부장님.
"지금부터는 네가 지휘권 잡아."
- ...!
"아마 선도부 애들 경계심도 꽤 올라갔을 거야. 이제는 무턱대고 들이대면 안 돼."
가령, 당규영과 나는 고객님의 탈출을 돕기 위해 금조한과 지옥부 선배를 기습했었다.
그러나 같은 수법이 두 번 세 번 통하지는 않을 터.
금조한은 몰라도 지옥부 선배는 더욱 주위를 경계하며 행동할 테니, 기습하기가 훨씬 어려워졌을 거다.
'어설프게 들어갔다가 역으로 당할 수도 있고.'
그러니 이쪽도 더욱 신중해야 하며, 채다빈이 미리 시야를 확보한 다음에 들어가는 게 좋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일일이 당규영의 허락을 받지 않도록, 아예 지휘권을 넘겨 버리는 것이다.
- 그치만 제가 잘할 수 있을지....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돼. 내년엔 네가 부장이잖아. 믿어도 되지?"
- ...해 보겠습니다.
결의에 찬 채다빈의 대답을 듣고 당규영이 빙긋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