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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No.640 대응표국 (3)

"...."

"...."

북이 울렸음에도 한동안 연무장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모두 바쁘게 눈을 좌우로 돌리며 서로를 경계할 뿐.

그러나 대치 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야아아—!"

참다 못한 낭인 하나가 옆사람에게 목검을 휘둘렀다.

옆 낭인이 마주 목검을 세워 막고 반격한다.

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딱, 딱!

선공을 가한 쪽에서는 나름대로 만만해 보이는 상대를 고른 거겠지만, 막상 붙어 보니 실력차가 확연했다.

해서 그는 몇 합 교환하지도 못하고 바닥에 털썩 몸을 눕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이 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 우와아아아—!

낭인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검을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연무장이 삽시간에 고함, 비명, 딱딱 목검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

한편, 우리 삼인조는 커다란 원의 가장자리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자칫 장외로 밀려나기 쉽다는 위험성이 있지만, 전후좌우로 포위될 일은 없으니 일장일단이 있는 셈이다.

특히 내 좌우는 쥐돌이와 억울이가 맡아 주고 있었기에,

'든든하구만.'

"이야압!"

덩치가 커서 때릴 데가 많다고 여겼는지, 낭인 몇이 억울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억울이의 두꺼운 팔에 힘이 들어가고 핏줄이 울긋불긋 튀어나오더니, 목도가 무서운 속도로 휘둘러졌다.

분명 먼저 목검을 휘두른 건 상대방인데 닿는 건 억울이의 목도가 더 빨랐다.

그만큼 가공할 속도와 파괴력을 가졌다는 뜻이었고,

- 빠각! 빠각!

낭인들이 한 칼에 하나씩 나가 떨어졌다.

어디 한 군데 부러지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쥐돌이 역시 다가오는 적들에 능숙하게 대처했다.

한쪽에 쥔 목검으로 적의 공격을 흘리고, 반대 손에 쥔 목검을 명치에 쑤셔 넣는다.

덤벼든 놈들이 순식간에 당하자 낭인들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가운데에 멀뚱멀뚱 서 있는 내가 만만해 보인 듯 한 명이 목검을 베어 왔다.

"어이쿠."

나는 짐짓 당황한 척 그것을 흘려 낸 뒤, 스쳐 지나가는 낭인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압축된 바람이 폭발하고,

- 펑,

그는 바람이 미는 대로 몇 걸음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다시 나를 공격하려 했으나,

- 장외!

표두의 외침에 시선을 내려보니, 그는 어느새 원 바깥에 서 있었다.

분함에 얼굴이 일그러진 그를 표두가 제지하고 끌고 나갔다.

방금 내 모습이 영 허약해 보였는지 집중적으로 나를 노리기 시작하는 낭인들.

그들을 막아서며 억울이와 쥐돌이가 한마디씩 했다.

"김 아우, 조심하게. 우리가 다 못 도와줄 수도 있어."

"딱 붙어 있으라고."

"예, 형님들. 딱 붙어 있겠습니다, 형님들."

나는 매우 긴장한 얼굴로 낭인들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 어깨 너머의 고현우를 보았다.

- 서걱!

고현우가 목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낭인이 마주 목검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다음 찰나 그것은 깔끔하게 반으로 잘려 버렸다.

예리한 절단면을 보고 낭인이 눈을 부릅떴다.

"부, 분명히 목검과 목검이 부딪혔는데...."

"더 하시려오?"

"아닙니다 소협, 아니 대협."

그리고 그는 시선을 내리깐 채, 도망치듯 원 밖으로 나가 버렸다.

- 장외!

고현우가 다음 희생자를 향해 목검을 휘둘렀고, 이번에도 목검을 반토막으로 잘라 버렸다.

'잘 하고 있군.'

공략본을 통해 고현우에게 지시한 사항은 총 세 가지.

첫 번째는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낭인들에게 그의 강함을 각인시키고, 대응표국 인물들의 주목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다.

이 지시는 벌써부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해서, 낭인들은 감히 고현우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들었다.

그래야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또한 국주를 비롯한 수뇌부가 진중한 눈으로 고현우를 주시하는 것으로 보아, 후자 역시 성공적인 듯하다.

두 번째 지시는 실력자만 '남기기.'

이 대응표국의 임시 표사 모집과 난장판 비무는 연계 던전의 전반부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임시 표사를 뽑고 나면 연계되는 다음 던전에서는,

'표행을 떠나지.'

즉, 이 자리에서 내 입맛에 맞게 구성원을 고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당연히 실력자를 많이 남길수록 연계 던전의, 표행의 난이도도 쉬워지게 마련.

처음부터 쥐돌이와 억울이를 아군으로 영입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이외에도 낭인들 중에 실력이 뛰어난 이들의 인상착의를 미리 언급해 두었다.

따라서 고현우가 해야 할 일은,

'걔들만 피해 다니는 거지.'

어차피 실력자들은 가만 놔둬도 알아서 잘 할 테니, 충돌하지만 않으면 된다.

물론 저쪽에서 공격해 오는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반응해야 하지만 말이다.

바로 지금처럼.

사마귀 같은 인상을 가진 사내가 고현우에게 목검을 연신 찔러 댔다.

내가 언급한 실력자들 중 하나라 가급적 쓰러뜨리지 않는 편이 좋다.

따라서 고현우는 슬쩍슬쩍 피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기세를 끌어올렸다.

[순류]

- 휘잉—

부드러운 바람에 사마귀 사내의 목검이 빗겨 지나가고, 고현우 역시 흐름을 타고 그를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

사마귀 사내가 한발 늦게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실전이었다면 적에게 등을 내준 시점에서 목이 떨어진 셈이다.

때문에 그는 즉시 실력 차이를 깨닫곤 다른 이에게 이목을 돌렸다.

의도대로였기에 고현우 역시 그를 그냥 보내 주었다.

한편, 우리 쪽은 거북이처럼 수비적인 태세를 유지하는 중이다.

낭인들은 앞선 몇 번의 충돌을 통해 쥐돌이와 억울이의 실력을 확인해서 어지간해서는 공격하지 않는 상황.

둘 사이에서 보호받는 나에게 쥐돌이가 말했다.

"계속 이렇게만 가자."

"예, 형님들."

장 국주가 언급한 바, 난전 비무는 적당한 인원이 남을 때까지 진행된다.

그렇다면 굳이 누굴 쓰러뜨리려 돌아다니기보다, 계속 버티고 살아남는 편이 안정적이다.

대기하면서 힘을 비축할 수도 있고.

다만 낭인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상당수가 원 가장자리에서 시간을 때우는 중이었다.

'떨거지들은 이만 퇴장해 주시고.'

- 휘잉—!

그리고 그곳에 갑작스레 강풍이 불어닥쳤다.

"어, 어?"

"무슨 바람이...!"

나름 실력이 있는 이들은 어떻게든 버티려 들었으나, 떨거지 낭인들은 속절없이 원 밖으로 밀려 나갔다.

지켜보던 표두는 그들을 우르르 탈락시켰다.

- 장외! 장외!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부네요."

"김 아우도 조심하게."

나는 억울이와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며 다시 고현우를 바라보았다.

두 번째 지시가 실력자를 남기는 것이었다면,

마지막 세 번째 지시는 그 정반대.

'골라서 쓰러뜨린다.'

그 대상은 바로 임시 표사 모집의 원흉, 습격자들이다.

놈들은 연이은 습격으로 표사들의 숫자를 줄이고, 대응표국이 낭인들을 모집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일부가 낭인으로 위장한 채 숨어든 상태.

이어질 표행에서 이들이 안팎으로 난리를 피우면 성공 확률이 대폭 하락할 테니, 지금 미리 처리해 두는 편이 이롭다.

- 쐐애액!

고현우의 목검이 날카로운 파공성을 흘리더니, 턱수염을 짙게 기른 낭인의 어깨에 내리꽂혔다.

"끄아악!"

어깨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턱수염을 일별하고, 곧장 다음 목표로 향하는 고현우.

이번에는 목검이 구레나룻 낭인의 팔을 부러뜨렸다.

"크악!"

이미 전후 사정을 다 파악했기에 그의 손속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놔두면 우리가 위험해지므로 인정사정없이 팔다리를 부러뜨려 놓았다.

"놈!"

고현우가 노골적으로 가짜 낭인들만 골라서 노리자, 몇몇은 정체가 들통 났다는 사실을 직감한 듯했다.

해서 숨겨 둔 실력을 드러내며 반격을 가해 보았지만, 그럼에도 고현우가 한수 위.

그가 반격을 슬쩍 흘리며 놈의 팔도 부러뜨려 버렸다.

다만 그 혼자서 돌아다니기엔 원의 크기가 너무 크니, 나도 손을 보태는 것이 맞다.

마침 이 상황에 아주 안성맞춤인 스킬을 배워 왔지.

['증폭'을 사용합니다.]

['일점폭발'의 등급이 상승합니다.(E->C)]

슬쩍 시야를 돌리자, 송충이 눈썹 낭인이 연신 상대방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찰나, 그의 복부 어림에 마나가 모여들더니,

- 펑,

그대로 폭발했다.

송충이 눈썹이 배를 움켜쥔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문득 그 모습을 발견한 쥐돌이가 물었다.

"저자는 왜 저러는 건가?"

"뭘 잘못 먹고 왔나 봐요."

- 펑,

다음 목표도 배때지에 일점폭발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그가 무릎을 꿇은 채, 방금 전까지 접전을 벌이던 상대에게 물었다.

"크으윽.... 대체 이게 무슨 사술이냐?"

"나, 나도 모른다."

두 낭인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했다.

나는 쥐돌이와 억울이 사이에 숨어서 일점폭발을 계속 시전했다.

야비하다는 것은 나도 알지만,

'이 또한 세계 평화를 위해서다.'

고현우와 내가 가짜 낭인들을 처리하자, 본래 그들과 충돌했을 실력자들은 더욱 자유롭게 원 안을 활개 치고 돌아다녔다.

결과적으로 어중이떠중이들의 숫자가 더욱 빠르게 줄어들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발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리던 원 안이 점점 한산해져서, 겨우 열댓 명만을 남겨두었다.

남은 이들끼리는 어느 정도 실력을 확인했기에, 누구 하나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상황.

- 둥—!

그때, 북이 울리며 비무의 끝을 알렸다.

지금까지 원 안에 남아있는 자들은 모두 임시 표사로써 채용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

대응표국 국주가 단상에서 내려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윽고 그는 고현우를 앞에 두고 멈춰 서더니, 나지막한 감탄사를 흘렸다.

"많아 봐야 약관(20세)도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젊은 친구가 실력이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문을 물어도 괜찮겠는가?"

"천풍문이라 합니다."

"으음.... 견문이 좁아 들어 본 바가 없군."

역시 무인은 실력이 좋고 볼 일이었다.

실력이 부족한 이가 생소한 문파명을 댔다면 '천풍문? 그런 문파도 있나?' 하고 되물었을 터.

그러나 상대가 고현우다 보니 국주가 제 견문이 좁음을 탓하는 것이다.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언제 다가왔는지 표두급으로 보이는 고수 하나가 국주 곁에 자리를 잡고 섰다.

국주가 그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조금만 더 실력 발휘를 해 볼 텐가? 이번 표행에서 표두급의 권한과 대우를 약속하겠네."

표두를 제압한다면 표두급으로 대우해 주겠단다.

고현우가 실력을 마음껏 드러내고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바로 이것을 노린 것이다.

일개 임시 표사가 아니라 표두급의 권한을 갖는다면 연계 던전을 운영하기가 훨씬 더 수월해질 테니까.

고현우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148화 No.640 대응표국 (4)

고현우가 일말의 고민조차 없이 제안을 수락하자, 장 국주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이내 그가 자신 곁의 고수를 소개했다.

"여기 강 표두는 나름 표두들 중에 한 손에 꼽는 실력자일세. 자네와는 좋은 승부가 될 걸세."

이내 국주가 자리를 비켜 주고, 강 표두가 고현우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목검으로 할 텐가?"

"저는 손에 익은 무기가 편합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군. 나 또한 마찬가지일세."

강 표두가 등에 멘 두꺼운 도를 꺼내 들고, 고현우 역시 철검을 손에 쥐었다.

주무기는 주술검이기는 하지만 그건 황금빛으로 부담스럽게 번쩍거려서 너무 눈에 띈다.

낭인이 그런 귀한 물건을 소지한 것도 이상하고.

해서 철검으로 때우려는 모양이다.

'깨지진 않겠지.'

내가 [튼튼이 볼펜]을 만들어 준 이후로 무기 내구도 문제는 상당 부분 개선됐다.

기존에 붙어 있던 옵션, [무기 손상 방지]가 F에서 C랭크까지 올라갔기에 철검으로도 꽤 오래 버티는 편이다.

또 이런 비무에서 청류 같은 큰 초식을 남발할 일도 없다.

두 사람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강 표두가 입을 열었다.

"본래대로라면 선수를 양보했을 테지만, 자네 같은 고수를 상대로 그랬다간 아예 기회가 없을 것 같군. 가겠네."

"한 수 부탁드립니다."

강 표두가 도를 앞세운 채로 신중하게 전진했다.

반면 고현우는 철검을 중단으로 세우고 그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야금야금 좁혀지다가,

"흡!"

강 표두가 성큼 내디디며 도를 사선으로 베었다.

고현우 역시 반걸음 앞으로 나서며 도의 궤적에 철검을 가져다 대었다.

검과 도가 충돌하리라는 중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도는 미끄러지듯 철검을 지나쳐 엉뚱한 허공을 베었다.

"...!"

강 표두의 얼굴이 조금 굳어지더니, 반쯤 휘둘러지던 도를 회수하여 다시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고현우가 슬쩍 철검을 갖다 대자 궤적이 틀어져 버렸다.

또 도중에 도를 회수하여 다시 휘두르는 강 표두.

철검을 슬쩍 밀어넣는 고현우.

엇갈리는 검과 도.

이것이 몇 번 반복되자 중인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왜 자꾸 베다, 말다, 베다, 말다 하는 건가?"

"이게 비무인지 애들 장난인지 모르겠군."

—라고 말하는 이들은 하수였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강 표두가 도를 반쯤 휘두르다 말고, 고현우가 철검을 느릿하게 가져다 대는 모습뿐일 거다.

서로 허공에 병장기를 휘적거리는 것밖에 안 보이니 애들 장난 같을 만도 했다.

"...."

반면 장 국주와 대표두급 이상의 고수들은 시종일관 진중한 눈으로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쥐돌이와 억울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 대단하군."

"젊은 친구의 실력이 한수에서 한수 반 정도 앞서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도 그렇네. 아니라면 저 강맹한 도격을 저리도 손쉽게 흘려 낼 리가 없지."

방어 또는 회피보다 적절하게 흘려 내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다.

적의 공격을 정확히 읽은 후 극히 짧은 찰나를 잡아내야 하기 때문.

그런데 고현우는 강 표두의 맹공을 하나하나 어렵지 않게 흘려 내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실력의 우위가 증명된 셈이다.

'[순류(順流)].'

청류와 급류에 이은 고현우의 세 번째 초식이다.

흑사방 공략 당시에는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아, 사물의 신물까지 써서 백사의 초식을 버텨 냈다.

그러나 고현우는 멘토링을 들으며 이 순류를 계속 갈고 닦았고, 깃털뱀 사원 공략에서 중간 보스들을 쓰러뜨릴 때 결정적인 한 수로 써먹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다도 한층 능숙해진 듯하다.

"으음...."

강 표두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가진 역량을 모두 발휘해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아직까지 유효타가 없다.

반면 고현우는 처음 시작했을 때의 평온함을 유지하며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실력차가 너무나도 극명하니 비무를 이어 가 봐야 무의미하다.

그러나 강 표두는 이대로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내 그가 비무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더니, 기세를 잔뜩 끌어올렸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도를 연속으로 내질렀다.

- 파파파팟!

여러 개의 도기(刀氣)가 마치 그물 같은 형상을 하고 덮쳐 왔다.

이것의 강 표두의 회심의 한 수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고현우의 평온한 눈빛 역시 조금 더 진지하게 변했다.

온몸이 짓쳐오는 도기에 갈기갈기 찢기려는 찰나, 그가 검을 중단으로 세우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급류(急流)]

- 휘잉—

뒤이어 불어가는 강풍이 거기에 급격한 속도를 더했다.

고현우가 앞으로 쏘아져 나가며 검을 긋자, 도기의 그물이 단숨에 가닥가닥 잘려 나갔다.

초식을 와해하고도 계속 쏘아져 나간 고현우가 멈춘 것은 강 표두의 바로 앞이었다.

철검 역시 그의 목젖 한 치 앞에 멈춰 있었다.

강 표두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칼끝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졌네."

고현우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 * *

"아이고, 고객님들. 잘들 하고 나오셨습니까?"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오는 우리를 신병철이 반갑게 맞이했다.

우리는 대답 대신 씩 웃으며 받아 온 보상을 내보였다.

[대응표국 랜덤박스(E)] *4

고현우는 표두 자리를 얻어 던전 목표를 최대치로 달성했기에 랜덤박스 3개.

나는 겨우겨우 임시 표사 자리만 얻어서 1개다.

물론 E급 랜덤박스라 보상이 적어도 크게 상관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 던전에서 깔아 둔 포석으로 다음 연계 던전을 공략하는 것.

고현우가 물었다.

"하면 그 연계 던전이라는 곳에서 본인은 표두로 시작하는 거요?"

"그렇지. 네 역할이 중요하다."

고현우에게는 표행에 참여하는 이들을 통솔하는 역할이 주어질 예정이고, 특히 낭인들로 이루어진 임시표사 무리가 그의 몫이다.

이것 역시 예측했기에 고현우더러 압도적인 무위를 보이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래야 낭인들이 군소리 않고 따를 테니까.

실제로 쥐돌이와 억울이, 그리고 사마귀를 닮은 낭인 등은 그의 실력에 깊이 감화된 기색이었다.

국주가 의도적으로 언급을 피했으나, 모두들 표행이 그저 목적지까지 물건만 옮겨 주고 끝날 리가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반드시 무슨 일이 벌어질 텐데, 표두가 고현우 같은 실력자라면 생환 가능성이 높아지니 달가울 수밖에.

여기까지 전부 성공적이었으나, 고현우의 얼굴은 썩 밝지 않았다.

조금은 걱정되는 기색이다.

"본인이 잘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소. 검 쓰는 일이야 자신 있지만, 사람 다루는 건 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오."

"별 거 없어. 공략본에 써 놓은 대로만 해라."

"알겠소. 숙지하리다."

고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며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만 밟아 댔다.

그러다가 앞장서던 신병철이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

"근데 너네 검술 동아리 때문에 뭐 가지러 간 거 아니었냐?"

"가져왔지."

내가 장원에서 슬쩍해 온 장보도 조각A를 내보이자, 고현우와 신병철이 그것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겨우 한 조각에 불과하기에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다.

"검술 동아리가 이런 데 관심을 가진다고?"

"저쪽을 잘 달래려면 우선 화내는 포인트부터 잘 짚어야지."

들어가서 랜덤박스 몇 개 빼먹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선입찰이 된 던전에 들어갔다는 것이 저들이 분노하는 주된 이유다.

동아리의 영향력을 침해당했다는 건 달리 말하면 우습게 보였다는 뜻.

신병철은 이제 조금 감을 잡은 듯했다.

"명예랑 자존심 문제구만."

"그렇지."

"근데 그거랑 장보도가 무슨 상관인데?"

"이 장보도도, 장보도가 가리키는 장소도 여태까지 공개된 적이 없는 곳이야."

"진짜?"

과거 수많은 영웅들이 던전섬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고, 지금에 이르러 미개척 지대는 거의 남지 않았다.

이 장보도를 손에 넣는다는 것은, 그 미개척 지대를 가장 먼저 선점할 기회를 얻는다는 뜻.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명예가 약속된 셈이다.

"그럼 솔깃할 만도 하구만. 근데 그게 뭔 장보도인데?"

"그건 나중에."

"아니, 말하다가 끊기 있냐? 악질이네 이거."

벌써부터 장보도의 정체가 흘러나가면 조각 쟁탈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해서 고현우와 신병철이 궁금해 죽을 것 같은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음에도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힌트라도 좀."

"힌트. 세 글자야."

"세 글자? 뭔데?"

"나중에."

* * *

랜덤박스 개봉식은 복덩이 서예인과 함께 하는 게 최선이다.

그러나 대응표국 공략의 최고 공로자, 고현우를 빼놓고 우리끼리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셋의 일정이 모두 들어맞을 때까지 개봉식은 보류하기로 했다.

다음 날에도 공략전과 멘토링은 어김없이 이어졌다.

"으아악!"

- 콰직,

[곽지철 - %]

곽지철은 어김없이 오우거한테 얻어맞고 뻗었고.

나는 혼자서 스킬 랭크작을 했다.

- 펑! 펑!

한동안 일점폭발로 오우거를 괴롭히다가,

'슬슬 깼겠네.'

곽지철이 정신을 차릴 때가 됐다 싶어서 던전 밖으로 나갔다.

멘토링 중이니 가급적이면 둘이서 해야 하거든.

예상대로 곽지철은 눈을 뜬 상태였다.

"끄으윽...."

눈만 뜨고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대고 있기는 했지만.

나는 뿌리로 곽지철을 툭툭 건드렸다.

"아저씨, 일어나요. 이런 데서 자면 감기 걸려요."

"끄윽.... 닥쳐라."

"가정으로 돌아가셔야죠. 일어나라니까?"

"닥치라고 했다...!"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면서도 끝내 널브러진 자세를 고수하던 곽지철.

그런데 그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치켜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뭘 보고 저리 놀랐나 시선을 돌리자,

"혀, 형."

"...."

그곳에는 곽지철의 형, 곽승재가 무뚝뚝한 얼굴로 서 있었다.

다른 2학년들과 함께인 것으로 보아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우리를 발견한 듯했다.

이내 곽승재가 일행에게 말했다.

"볼일이 생겼다. 먼저 가서 기다려라."

"그러지 뭐."

그의 일행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떠났다.

"...."

곽지철이 시선을 내리깐 채 이어질 질책을 기다렸다.

그러나 곽승재는 제 동생한테는 처음에 눈길 한 번 준 게 끝이었다.

오히려 볼일이 있는 건 내 쪽인가 보다.

"묻고 싶은 게 있다. 괜찮나?"

"예, 선배님."

곽승재는 선도부의 실세 중 하나.

그런 자가 먼저 일대일 대화를 청한 이상 그냥 넘어가기는 아깝다.

나한테 뭘 묻고 싶은 건지 호기심이 동하기도 하고.

따라서 나는 곽승재와 함께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송천혜나 당규영 등에게 전해 들은 대로라면, 곽승재는 매우 직설적인 성격을 가졌단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빙빙 돌리지 않고 면전에 스트레이트로 던지는 스타일.

그래서 어느 정도 직설적인 대화가 되리라 예상은 했는데.

곽승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을 초월했다.

"당규영 선배와 교제 중이라고 들었다."

"예?"

149화 위기의 곽지철

누가 그런 말을 했을까 짐작하기엔 이미 출처가 너무 많았다.

같은 선도부인 송천혜가 귀뜸했을 수도 있고.

동생 곽지철이 대화중에 흘렸을 수도 있고.

혹은 그외, 멘토링 4대4 대인전에 참여했던 손형택이나 북궁한설 등일 수도 있고.

그래도 가장 유력한 후보라면 역시,

"김갑두 선배님이 말씀하셨나 보네요."

"그렇다."

곽승재는 부인하지 않았다.

4대4 당시 곽지철이 이런 말을 했었는데,

- 예전에 형한테 들은 적이 있어요. 김갑두 선배님에 관해서.

- 무투가답지 않게, 지나칠 정도로 신중한 성격이라고 했습니다.

얼핏 들으면 단순한 평가 같지만, 한편으로는 김갑두와 곽승재 사이에 어느 정도 친분이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연애담 같은 개인적인 대화를 할 정도라면 그보다 더 가깝다고 봐야 한다.

"넋두리를 한참 하시더군."

물론 이 경우는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신세 한탄에 가까웠을 테지만 말이다.

곽승재를 불러내 무알콜 술주정을 시작한 김갑두.

- 둘이 엄청 가까워 보이더라....

- 막 스킨십도 하더라....

- 알콩달콩해서 부러워 죽겠더라....

- 난 또 차단했더라....

- 귀찮게 할 생각도 없었는데....

그리고 곽승재는 무념무상으로 그것들을 다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후폭풍이 오셨나 보군.'

김갑두는 마지막으로 당규영에게 거절당하자 미련 없이 돌아섰었고, 심지어는 잘 챙겨 주라면서 나한테 보급형 엘릭서를 건네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떠나는 뒷모습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내심 실연의 아픔을 다 이겨 내지는 못한 모양이다.

하기야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되면 애초에 누가 고생을 하겠는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물론 그건 그거고, 정정할 건 정정하고 넘어가야겠지.

"당규영 선배와 가깝기는 한데, 연애하는 사이는 아닙니다."

"'아직은'이라고 들었다. 서로 호감이 있는 것도 사실 아닌가?"

"선후배로서 존경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고도 들었는데." 

"멘토랑 멘티니까요."

"...그런가."

내가 물 흐르듯 자연스레 답하자, 곽승재가 무덤덤한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김갑두한테 한참 듣고 온 것이 있어서인지 완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내가 부끄러워서 숨기거나, 관계가 진전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보는 것 같다.

거기까지 정정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고, 세상 앞일은 모르는 것이기도 해서 굳이 사족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곽승재가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의 개인사에 이 이상 관여하는 것도 무례한 일이겠지. 허나, 뭘 하든 교칙으로 정해진 선 안에서만 하도록. 지하층에서처럼 내가 잡으러 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하고 안 걸리면 그만 아닐까?

곽승재는 그런 내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잠시 나를 응시했으나, 이내 눈길을 거두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지철이는 어떻게 하고 있나."

'걔는 그냥 짐짝이에요.'

전투력으로 따지면 0.3인분 정도죠.

—라고 본인 형 앞에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두루뭉술한 답변을 돌려주었다.

"그럭저럭 남들 하는 만큼은 합니다."

"내가 보기엔 따라가는 것조차 벅찬 것 같던데, 아닌가?"

"그거야 어쩔 수 없죠, 보통 남들이 아니니."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곽지철이 모자라다기 보다는, 조원들이 너무 뛰어난 것이다.

나는 예외로 치더라도, 송천혜는 선도부에 홍연화는 유망주급.

그들과 보조를 맞추려다 보면 가랑이가 찢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나도, 당규영도, 곽승재도, 그런 점을 감안해서 너그럽게 평가를 내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못난 동생 놈이다. 언제쯤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날런지...."

"차차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계속 지켜보시죠."

"그래야겠지."

곽승재의 태도는 내내 그랬듯 무뚝뚝하기 짝이 없었으나, 지금은 은근히 동생을 위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퇴부에 대해서는 들었나?"

"저는 번복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에메랄드 마탑과의 결투.

당시 부장 목종화는 곽지철에게 '지면 넌 퇴부다'하고 선언했었는데, 내가 퍼펙트 게임으로 두들겨 팬 뒤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다.

해서 퇴부는 그냥 해 본 소리였구나 싶었는데, 곽승재가 이렇게 언급하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유예됐을 뿐이다. 두 달 뒤로."

"결투하고 두 달 뒤라면.... 중간고사 다음 한두 주 정도겠네요."

"그래, 그때까지 랭킹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이었구만.'

그간 곽지철이 묘하게 성과에 집착하는 모습이 눈에 띄곤 했었다.

가령 지난 주 4대4 대인전을 돌아보면, 여러 이유를 들어 자신과 일공이 붙도록 당규영을 설득했었다.

기본적으로는 팀의 승리를 위해서였을 테지만, 어떻게든 일공을 쓰러뜨리고 싶은 강한 승부욕도 엿보였다.

당시에는 저 녀석이 저런 캐릭터였나 싶었는데, 퇴부가 연관되어 있다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랭킹을 올리려면 승패 하나하나가 중요할 테니까.

다만 곽지철은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상태.

예시로 든 일공과의 승부에서는 처참하게 패했고, 랭킹도 겨우겨우 현상 유지가 고작이다.

그 말은 즉,

"이대로 가면 쫓겨나겠지요."

"후.... 그렇겠지."

곽승재가 드물게도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제 동생이 동아리에서 쫓겨난다는데 심란하지 않은 형이 어디 있으랴.

그리고 곽승재가 여기까지 얘기를 꺼냈다는 것은,

"제게 부탁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그렇다. 허나 많은 것을 약속할 수는 없다."

선도부는 언제나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해야 하기에, 부원들의 개인적인 거래는 가급적 지양하는 것이 방침이다.

따라서 내가 곽승재의 부탁을 들어주더라도 지불할 수 있는 대가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러나 나는 평소와 달리 까다롭게 따지지 않았다.

'물질적인 대가가 전부가 아니니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더욱.

"말씀하십시오."

"퇴부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건 부차적인 문제다. 지철이 본인의 실력이 느는 것이 더 중요하지."

"동감입니다."

"지금 녀석이 처한 난관을 스스로 헤쳐 나가도록, 네가 유도해 줬으면 좋겠다."

다시 말해, 오우거한테 뚝딱뚝딱 두들겨 맞고 뻗는 현 상황을 곽지철이 자신의 힘만으로 극복하게 만들어 달라는 말이다.

"쉽지는 않겠네요."

"불가능한 요구라면 손 닿는 데까지만 해 주면 된다."

"아닙니다. 방법을 찾아보죠."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곽승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고인물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없기 때문이다.

* * *

곽지철은 초조한 기색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물었다.

"형이랑 무슨 얘기 했냐."

"네 얘기. 형 걱정 좀 그만 시켜 자식아. 이 우물 안 개구리 자식아."

"...."

평소대로라면 버럭 역정을 냈을 곽지철이지만, 내가 제 형을 들먹여서인지 계속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그러다가 조금 억눌린 어조로 말문을 연다.

"...부탁이 있다."

"싫은데?"

"다 들어보고 거절해라."

"아, 싫다고."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안 봐도 뻔했기에 빠르게 선수를 쳤다.

다양한 몸값 올리기 수법 중 하나다.

예상대로, 다급해진 곽지철이 인벤토리에서 에메랄드를 꺼냈다.

"공략전 좀 도와다오. 대가는 치르겠다."

"...."

나는 심드렁한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인벤토리에서 루비를 꺼내 옆에 갖다 댔다.

스티커 대인전 때, 홍연화와 루비 마탑 측의 부탁을 들어주며 받은 루비.

곽지철의 에메랄드와 크기를 비교하면 정확히 두 배다.

D급과 B급의 차이다.

"보이니? 이게 너랑 홍연화의 성의 차이야."

"...!"

게다가 홍연화는 만년한철 녹이는 데 도움도 줬다.

곽지철은 설마하니 나와 루비 마탑 사이에 그런 거래가 오갔을 줄은 몰랐는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대가를 치를 거면 비슷하게라도 맞춰 주든가."

"지, 지금은 이게 제일 큰 거다."

현재로서는 에메랄드 마탑에 추가 지원을 받기는커녕 퇴부가 걸린 상황이고, 가문에 연락을 넣기에도 눈치가 보인다.

곽승재한테 부탁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될 테고.

그럼에도 곽지철은 어떻게든 내 도움을 받고 싶은 듯했다.

"나, 나중에 반드시 사례하겠다."

"이거보다 큰 걸로?"

"무조건이다."

내가 루비를 가리키며 묻자 곽지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곽승재에게 구체적인 보상을 요구하지 않은 건 이런 이유도 있었다.

곽지철 본인한테도 뭘 받을 테니까.

추후 지불할 에메랄드가 홍연화에게 받은 루비 만하다면 충분히 일을 맡을 만하다.

나중에 에메랄드를 받아도 되고, 비슷한 가치의 아이템을 요구해도 되고.

물론 곽지철이 정말 퇴부를 당해 버린다면 에메랄드 마탑의 지원이 완전히 끊기는 셈이니 보수를 덜 받거나, 아예 붕 떠 버릴 위험성도 조금은 존재한다.

'그러니 일단 받은 만큼만 가르쳐 보면 되지.'

잘 따라오나 보고, 영 싹수가 노랗다 싶으면 발을 빼면 그만이다.

내가 말없이 손을 펴자 곽지철이 그 위에 에메랄드를 올려놓았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알겠다." 

우리는 우선 던전에 입장했다.

초반부는 어려울 게 없으니 진행하면서 얘기해도 상관없다.

각자 크리스탈을 회수하고 동굴 안으로 발을 들였다.

몰려드는 고블린을 처리하고 나아가면서 내가 말문을 열었다.

"여태까지 네 방어 수단이 뭐였냐. 방어 아니면 피하기였는데, 방어는 오우거한테 그냥 뚫려 버리고 피하는 데는 별로 소질이 없지."

"...그렇다."

"원래는 네가 알아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정답부터 줄게. 공격을 흘려 봐."

"그게 더 어려운 것 아닌가?"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근데 넌 목토술사잖아."

모든 마법사 중 방어 수단이 가장 많은 것이 바로 목토술사.

당연히 상대의 공격을 흘리는 수단도 부지기수다.

그리고 곽지철이 에메랄드 마탑에서 배워 온 수십 가지 마법 중에는 분명 이 상황에 걸맞은 것이 한두 개는 존재할 거다.

"...."

고민에 빠진 곽지철.

구체적인 방법을 떠올리는 건 이 녀석의 몫이다.

내가 남들 상태창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마탑에서 뭘 배워 왔는지 꿰뚫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도 마음 편히 생각할 수 있게 고블린들 정리는 내가 맡았다.

계속 나아가다 보니 시야가 밝아지며 성소가 나타났다.

커다란 종유석에서 빛기둥이 뿜어져 나와 곽지철을 가리켰다.

이번엔 얘부터 충전이네.

[크리스탈 1%]

"꾸우우?"

그리고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오우거가 몸을 일으켜 곽지철을 바라보았다.

곽지철은 그때까지도 고민을 거듭하다가, 번뜩 무슨 생각이 스친 듯했다.

"생각났냐?"

"될지는 모르지만.... 한번 해 보겠다."

에메랄드가 강렬한 녹빛을 발했다.

곽지철이 그 상태에서 스태프를 지면에 푹 꽂아 넣자, 그를 중심으로 일대가 고운 모래로 화해갔다.

[퀵샌드(Quicksand)]

150화 고민하는 홍연화

퀵샌드.

유사(流沙) 소환 마법으로, 용도는 크게 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주변 환경을 사막화하고, 단단한 암석 등을 모래처럼 잘게 분해하여 토속성 마법을 연계하는 것.

"꾸우우—!"

오우거가 곽지철을 노리고 짓쳐 드는 도중, 둘 사이에 커다란 모래벽이 솟아올랐다.

곤봉이 그것을 후려치자 가볍게 부서지며 모래가 흩날린다.

그러나 뒤이어 흩날리던 모래가 다시 모여들며 새로운 벽을 세운다.

아랑곳하지 않고 모래벽을 퍽퍽 부수며 전진하는 오우거.

"꾸우?"

그러던 놈이 문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일대가 모래 웅덩이로 화한 탓에 다리가 푹푹 빠져든다.

'시작은 좋네.'

모래 마법을 통한 유연한 방어 및 발 묶기.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랭크가 너무 낮아.'

에메랄드 마탑에서 여러 마법을 연마한 덕분에 상황에 알맞은 것을 떠올리기는 했으나, 배워 두기만 했을 뿐 숙련도는 한참 떨어진다.

사막화가 진행된 범위가 좁으며, 오우거의 발이 빠져드는 깊이가 얕다.

'그래도 모래는 여전히 유용하지.'

유사를 벗어난 오우거 앞에 또다시 모래가 모여들고 벽을 세웠다.

놈이 파리 쫓듯 팔을 저어 치워 버리고 곤봉을 휘두른다.

- 부웅!

"크윽...."

가까스로 몸을 날려 피한 후 다시 모래를 조작하는 곽지철.

그런 녀석에게 조언을 던졌다.

"지금도 막으려고만 하고 있잖아. 그럼 여유가 안 생기지. 막지 말고 흘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크엑!"

- 퍼억!

내가 곽지철을 뻥 걷어차 버렸고, 다음 찰나 그 자리에 곤봉이 내리꽂혔다.

데굴데굴 구르다 일어나서 자세를 다잡는 곽지철.

오우거가 계속 공격해 들어가려 했으나, 내가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렇게 흘려 보라고."

"꾸우우—!"

놈이 귀찮다는 듯 휘젓는 팔에 윈드포스와 트위스터를 연계하자,

- 텅—!

팔의 궤적이 옆으로 틀어졌다.

목종화의 나무 골렘을 상대로도 선보였던 한 수였다.

여기까지 하고, 나는 다시 둘만의 시간을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이제 따라해 보십쇼."

"아니. 그걸 어떻게."

그러나 곽지철의 눈에 이것이 가능해 보이건 말건, 오우거는 공격을 멈추지 않을 터였다.

바닥을 휩쓰는 곤봉을 점프로 피한 다음, 곽지철이 스태프로 오우거를 가리켰다.

모래가 허공에서 뭉쳐 들며 놈의 공격을 흘려내려 했지만, 역시나 너무 어설펐다.

얻어맞기 직전인 곽지철을 내가 또다시 뻥 걷어찼다.

"크엑."

"다시."

"그만 좀 걷어차면 안 되나?"

"오우거한테 맞을래, 나한테 맞을래."

곽지철의 눈동자가 오우거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대로 계속하지."

곤봉 맞고 뻗는 것보다는 차라리 걷어차이는 게 낫다는 결론.

사실 살살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살살해서 어느 세월에 배워.'

서예인이었다면 한 번 슥 보고 따라 했을 테지만, 곽지철은 몇 번이나 시행착오를 거치고도 감을 못 잡은 상황.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여기서 얼마나 더 시간이 소요될지 모른다.

아무리 부탁을 받았고 보수가 걸렸다고는 하나, 곽지철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은 없었다.

따라서 내가 내린 결론.

'속성으로 때려 넣는다.'

그리고 속성으로 때려 넣기에 전통적으로 효과적인 방법은, 고통을 주입하여 온몸을 비틀게 만드는 것.

- 퍼억,

"크엑."

곽지철이 또다시 걷어차이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일어나. 계속 간다."

그러나 이내 벌떡 일어나 오우거를 마주했다.

녀석의 두 눈에 독기가 가득 차올랐다.

* * *

곽씨 형제의 부탁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

멘토링 마지막 주간인 만큼, 최우선 목표는 내 스킬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해서 나는 곽지철을 뻥뻥 걷어차면서도 바람 마법과 일점폭발로 오우거를 계속 괴롭혀 댔고,

['트위스터'의 랭크가 상승합니다. D+->C+]

['일점폭발'의 랭크가 상승합니다. E->D]

신규 스킬들의 랭크를 한 단계씩 올릴 수 있었다.

윈드포스와 트위스터는 C랭크로 정체 구간에 접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랭크작을 게을리하지 않고 계속해야 빠르게 B랭크에 닿을 거다.

그러니 랭크작은 이번 주 내내 이어질 예정이다.

다만 당규영이 우리를 지켜봐 줄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3학년인데다 동아리 부장이라 개인 일정을 소화하기도 바쁘다.

블랙 마켓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당일 멘토링 일정이 끝났다는 건 이벤트 보너스도 못 받는다는 뜻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다음 수련으로 넘어갔다.

끊겼던 마나연공을 마저 해서 영약의 기운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해서 트레이닝 센터로 털레털레 걸어가는데,

'누가 따라오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처음에는 검술 동아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미행이라면 아무리 조심성이 없어도 바로 뒤까지 따라붙지는 않을 테니까.

발걸음이 나를 졸졸졸 따라오다가, 너무 가까워졌다 싶으면 머뭇머뭇거리면서 속도를 늦춘다.

그리고 거리가 멀어지면 또 졸졸거리면서 따라온다.

나는 뒤를 돌아 확인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몇 사람을 떠올려 보았다.

서예인은 내가 보이면 곧장 다가와서 소매를 슬슬 잡아끄는 스타일.

당규영 역시 가까이 붙어서 어깨에 손을 척 올리고 '야, 어디 가냐?' 묻는 스타일.

송천혜는 속도를 한껏 높여 내 옆에서 걷다가, 내가 계속 무시하면 '저기요!'하고 부르는 스타일이다.

등 뒤의 발걸음은 이중 누구에도 해당되지 않으니, 소거법을 통해서 나오는 결론은.

'홍연화겠네.'

그렇다면 저 머뭇거리는 태도도 설명이 된다.

말을 걸고는 싶은데 어딘지 모르게 겁나고 주저되는 거겠지.

'하는 수 없군.'

내가 먼저 나서는 수밖에.

나는 일부러 모른척하면서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몸을 홱 돌리며 소리쳤다.

"와악—!!"

"!!!"

예상대로 등 뒤에는 홍연화가 서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토끼 눈을 뜬 채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진 상태.

이내 홍연화는 앞으로 걷는 방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허둥지둥 뒷걸음질로 도망치다가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그러나 넘어가기 직전에 내가 윈드포스를 써서 막았다.

"괜찮냐."

"개, 갠차나...."

"그러니까 왜 뒤에서 그러고 따라와. 수상하게."

"미안...."

"미안할 것까진 없고, 뭔 일 있냐."

홍연화가 머뭇거리면서 답했다.

"그, 그게에.... 언니가 고맙다고, 시간 날 때 동아리실에 꼭 한번 들려 달라는데...."

홍예화가 무엇을 고마워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간다.

4대4 대인전에서, 홍연화가 북궁한설을 꺾은 것 때문이겠지.

홍연화는 용살학원에 입학하고 아직까지 눈에 띄는 활약상이 없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배치고사에서 1패를 하고 600점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900점대 강자들을 파죽지세로 쓰러뜨리고 다니는 다른 유망주들과는 비교가 될 수밖에 없고, 모르긴 몰라도 홍연화가 유망주 중 가장 아래 아니냐는 말도 나왔으리라 짐작한다.

루비 마탑 부장 홍예화로서는 비슷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텐데,

이번 대련에서 홍연화가 북궁한설에게서 가볍게 승리를 따낸 것이다.

그것도 900점대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

가뭄에 단비, 아니 사이다를 들이붓는 격이었다.

함박웃음을 짓는 홍예화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거기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나지.'

만년한철 합금을 녹이기 위해 상부상조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홍연화의 아쿠아플레임 랭크가 오른 것도 사실.

C랭크가 아니었다면 북궁한설을 상대로 압도적인 상성 우위를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홍연화는 지난주 내내 나와 대련을 하며 개량 파이어 필라의 숙련도를 높였고, 마법진 운영도 매우 능숙해졌다.

경기 내내 북궁한설을 갖고 놀다시피 한 것은 이 덕이 컸다.

위와 같은 이유로, 홍예화로서는 나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상의하고 싶은 것도 있대."

뭘 상의하고 싶은지 역시 매우 뻔했다.

다시 C랭크에 정체된 홍연화의 아쿠아플레임.

이후의 성장을 위해서는 '빙 속성 몬스터가 많은 던전'에 들어가야 한다는 힌트를 흘려 놓았고, 그건 당연히 지하층 던전이 될 터.

그러니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을 거다.

하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한데 당분간은 시간이 안 나겠다. 조만간 꼭 들린다고 말씀드려."

"응, 알았어."

지하층에 관련해서는 검술 동아리에 대처하는데 비중을 두어야 한다.

그러니 아쿠아플레임과 관련해서 상의를 한다 한들, 어차피 지하층 던전을 찾아 들어가는 건 나중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

또 아쿠아플레임은 C랭크라 지금도 충분히 강하고, 홍연화에게는 그것 말고도 성장시킬 스킬과 특성이 잔뜩이다.

나나 저쪽이나 급할 게 없다는 말이다.

"이제 더 할 말 없지? 간다."

"저, 저기!"

등을 돌리려는 나를 홍연화가 다시 불러세웠다.

"어, 왜."

"그게.... 커!!"

"커?"

저건 뭐가 크다는 소린가 싶었는데, 급하게 말을 하다가 목이 메인 듯했다.

홍연화가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커, 커피! 좋아해?"

"그냥 있으면 먹는데, 사 주게?"

홍연화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또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나, 나도 고마워서...."

북궁한설을 쓰러뜨린 것에 관한 고마움은 다른 누구보다 홍연화 본인이 가장 클 것이다.

그러니 그 답례로 커피라도 사겠다는 말이다.

이런 건 거절하는 게 아니라,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잘 먹을게."

"...!"

홍연화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게 매점으로 간 우리들.

나는 늘상 마시는 아이스 커피를 골랐고,

홍연화는 아메리카노에 에스프레소 샷을 몇 개나 추가했는지는 몰라도 매우 검고 걸쭉한....

'석유?'

저런 것에 입을 댔다간 혀가 남아나질 않을 것 같은데, 홍연화의 태도는 물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평소에도 저 조합을 즐긴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본인 취향이니 그러려니 하고,

우리는 매점 근처 벤치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커피를 홀짝거렸다.

"...."

그러는 도중에도 힐끔힐끔, 곁눈질로 내 눈치를 살피는 홍연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커피에 집중한다.

그런데 표정에 일말의 근심이 엿보이길래, 이번에도 내가 먼저 물었다.

"무슨 고민 있냐."

"아, 아니? 아무것도 없는데?"

"있는 것 같은데."

추궁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홍연화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쪼끔?"

"공략전이 잘 안 풀려?"

"아니야, 공략전은 할 만해."

첫날에는 송천혜와 누가 더 대미지를 잘 넣나 경쟁하려 했지만, 정작 오우거가 쓰러지지 않아서 의미가 없어졌다.

이후 내가 기본기부터 잘 다지라는 조언을 주었고, 두 사람은 그 조언을 순순히 받아들여 크리스탈 충전 위주로 공략전을 풀어 나가는 중이란다.

그리고 홍연화와 송천혜 모두 파트너 도움 없이 오우거의 공격들을 피할 실력은 되니, 공략전 최고점은 확정된 셈이다.

"그럼 뭐가 문젠데?"

"그게...."

홍연화는 잠시간 커피잔을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151화 No.471 대응표행 (1)

"나, 계속 올라운더로 가는 게 맞을까?"

"진로 고민이구만."

"응."

"올라운더로 갈지, 포대형으로 갈지?"

"응...."

앞으로의 진로 고민.

홍연화는 한 주 한 주 멘토링을 진행할수록 조금씩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올라운더로서 전투에 임했을 때보다 포대를 섰을 때 더 활약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디펜스 공략전에서는 화염 마법만 연이어 시전해 정문을 불길로 뒤덮어 버렸고,

크리스탈 대인전에서 북궁한설을 상대할 때도 한번 자리를 잡은 뒤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올라운더 쪽으로 투자를 분산하기보다, 아예 포대형 스킬과 특성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그럼에도 올라운더로 밀고 나가는 게 좋을까?

이것이 홍연화의 고민이었다.

"일단 하나 물어보고 싶은데, 멘토링은 왜 올라운더로 신청했냐. 원래 포대형에 더 가깝지 않았나?"

배치 고사만 해도 전투 내내 움직이지 않았고,

2대2 대인전에서도 백준석을 앞세우고 포대를 섰었다.

소탕 공략전에서는 내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쌍둥이 트롤과 근접전을 벌이기는 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파이어 필라로 마무리했고.

"그, 그거는...."

그런데 내 질문에 홍연화의 눈이 잠시 허공을 헤매고 다녔다.

마치 난처한 질문이라도 받은 것처럼.

"내가 왜 올라운더로 신청을... 했냐면...?"

나는 재촉하지 않고 말없이 기다렸다.

이내 홍연화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채,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나는... 뭘 해도 잘하니까? 올라운더도?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 데?"

그리고 그럴수록 홍연화의 얼굴이 점점 빨개지더니 거의 머리카락 색과 비슷해졌다.

'한마디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는 말이군.'

다만 그 말을 대놓고 던지면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대화를 계속 이어 가려면 이 부분은 모른 척 건너뛰는 게 낫겠지.

"아무튼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 올라운더를 선택한 건 아니란 소리네."

"응."

홍연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먼저 나는 교과서적인 대답을 돌려 주었다.

"가급적이면 강점을 살리는 방향이 낫지 않겠냐. 네가 제일 자신 있는 게 뭐야?"

"...캐스팅 속도?"

아닌 게 아니라 홍연화의 캐스팅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보통 마법사들이 파이어 필라를 시전하려면 수십 초는 족히 잡아먹는 반면, 홍연화는 길어야 10초 이내.

게다가 최근에는 파이어 필라를 소형으로 개량한 덕분에, 불과 몇 초마다 마법진을 하나씩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그 캐스팅 속도가 올라운더일 때 더 유용할지, 포대형일 때 더 유용할지 비교해 보면 될 거 같다."

"응.... 네 생각은 어때?"

홍연화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건 볼 것도 없이 포대형이지.'

이미 포대형으로 S급까지 육성한, 루비 마탑주라는 전례가 존재한다.

심지어 홍연화에게서는 그 이상의 잠재력이 엿보인다.

그러나 거기까지 얘기할 정도로 신뢰가 쌓이지는 않았기에, 나는 말을 아꼈다.

"글쎄, 그건 나보다는 다른 분들한테 묻는 게 낫지 않을까."

당장 언니인 홍예화도 있고, 마탑의 다른 마법사 선배들도 있고, 멘토인 당규영도 있고.

1학년인 나보다는 선배들의 말에 더 신빙성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홍연화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그래도.... 듣고 싶은데...."

"왜? 선배님들 놔두고."

"저번에 해 줬던 피드백도 그렇고.... 도움이 많이 돼서...."

그간 내 조언이 가장 큰 도움이 됐으니 이번에도 먼저 들어보고 싶단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한마디 해 줘도 괜찮겠지.

나는 할 말을 조금 고른 후 입을 열었다.

"캐스팅 속도는 어느 쪽을 선택하든 큰 강점이지. 그래도 그걸 더 잘 살릴 수 있는 건 포대형 쪽이라고 봐."

"그건 왜...?"

"올라운더는 캐스팅 말고도 신경 쓸 게 많잖아."

올라운더는 근, 중거리에서 적의 공격을 회피하고 거리를 유지하며 틈을 봐야 하기에 자연스레 신경이 분산된다.

따라서 아무리 캐스팅 속도가 빠르더라도 쉴 새 없이 마법을 연사하지는 못한다.

반면 포대형 마법사는,

"파티원들이 다른 역할을 다 맡아 주지."

굳이 다른 데에 신경을 기울일 필요가 없으니, 안전하게 후방에 자리를 잡은 뒤 펑펑 화력을 쏟아붓기만 하면 된다.

"...!"

홍연화는 무언가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아마 포대형 쪽으로 제법 마음이 기울었을 테지만, 나는 이쯤에서 브레이크를 한 번 밟기로 했다.

"그런데 너무 서두르진 마라."

궁극적으로는 포대형 마법사의 길을 걷더라도, 벌써부터 성급하게 진로를 정할 필요는 없다.

뉴비에게는 뉴비 나름의 페이스가 있는 법이니까.

"이제 1학년이니까. 시간 많아. 이것저것 해 보고, 물어보고, 충분히 생각해 보고 정해."

"...응, 그럴게."

홍연화의 안색이 한결 편해 보였다.

* * *

수요일.

멘토링이 끝나자마자 고현우, 신병철과 던전동 앞에 모였다.

당연히 지하층에 내려가기 위함이었다.

곧 들어갈 연계 던전의 목표는 표행, 즉 호위이며, 일반 던전들보다 클리어에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던전 내외부의 시간 흐름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다.

때문에 계산을 잘못하면,

'수업을 놓칠 수도 있지.'

그리고 그것은 학사 측에서 우리를 조사할 아주 좋은 빌미가 되어 줄 터.

이수독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다.

- 수업은 왜 결석했지?

- 결석하고 뭘 했지?

- 헌데 그 시간에 비인가 공략이 하나 있었다더군....

위와 같은 불상사를 피하려면 수업은 무조건 놓치지 않고 들어야 한다.

해서 평소에는 가능한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는 한밤중을 노렸지만, 오늘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지금, 저녁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모인 것이다.

신병철이 준비물을 나누어 주었다.

"자, 자, 받으시고, 이것도 받으시고."

2학년 넥타이 핀, 그리고 아무개 뱃지.

도둑 동아리 선배들에게 사정사정해서, 보다 강한 인식 저해 마법이 걸린 것들로 받아 왔단다.

신병철이 조금 긴장된 투로 말했다.

"근데 해 떴을 때 지하층 내려가는 건 또 처음이네. 이거 안 걸리나?"

"하하, 우리는 그저 신 형의 실력을 믿을 따름이오."

"그러다 걸리면?"

"벌점밖에 더 받겠소?"

오늘도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찬 고현우였다.

신병철과 고현우가 동시에 내 쪽을 보자, 나 역시 슬쩍 턱을 까딱여 동의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잘 안내해 주면 혹시 아냐. 랜덤 박스 하나 넘겨 줄지."

"...맡겨만 주십쇼 고객님들."

신병철이 기운찬 발걸음으로 앞장섰다.

지하층의 풍경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바깥이 오후건 자정이건, 어차피 이곳에는 햇빛이 안 드는 탓이다.

다만 한 가지 매우 큰 차이점이라면, 원형 계단을 오르내리는 학생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

동굴에서 메아리가 울리듯, 위아래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선후배들,

- 안녕하세요, 선배님!

- 그래, 너희는 어디 들어가니?

- 오늘은 D랭크 가 보려고요.

- 그래, 수고들 하고.

공략에 실패했는지 상태가 영 안 좋은 2학년 파티와, 그들을 보고 흠칫 놀라는 다른 파티.

- 뭐야, 너네 조금 전에 내려가지 않았냐? 왜 벌써 올라와?

- 아씨, 완전 말아먹었어.

- 아니, 어쩌다가?

- 보스 패턴을 잘못 읽었다.

- 야, 말아먹은 김에 리플레이 공유 좀. 우리도 조만간 거기 갈 거거든.

- 포인트 내놔.

막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와 희희낙락한 파티.

- 이야, 오늘 대박이다.

- 보상 뭐 이리 잘 나왔냐.

- 내 말이!

한편 우리는 바꿔 단 넥타이 핀 색에 맞춰 철저하게 2학년인 척 행동했다.

때마침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3학년들과 시선이 마주쳤기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어, 그래."

3학년들은 후배들이 인사를 하니 일단 받기는 했으나, 모르는 얼굴인 것을 확인하고 대강 지나가 버렸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중간중간 만나는 2학년 파티들.

그들은 우리 셋의 얼굴을 수상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마치 '우리 학년에 저런 녀석들이 있었나?' 떠올리려는 기색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신병철을 따라 그들을 무시하고 빠르게 지나쳐 버리거나, 맞은편 파티가 2학년임을 파악하는 즉시 방향을 꺾곤 했다.

2학년 파티들도 굳이 우리를 뒤쫓아 오지는 않았는데, 강화 아무개 뱃지가 제 역할을 해 주고 있는지, 아니면 저들의 오지랖이 그리 넓지 않은 덕분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No.471] [대응표행]

이윽고 던전 앞에 서서 신병철이 물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 다시오면 되냐?"

클리어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던전이라 하루 종일, 밤새 앞에서 대기하라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요구다.

"아침까진 끝날 거다. 그때 와."

"좋았으, 그럼 아침에 봅시다들."

우리는 신병철의 배웅을 뒤로하며 순간이동 포탈을 넘었다.

시야가 까맣게 어두워지더니 서서히 밝아진다.

귓가에 어렴풋이 들리던 소리도 점점 크고 또렷해진다.

- ...우

- 김....

"김 아우, 김 아우!"

쥐돌이와 억울이가 바로 옆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즉시 상황 파악을 마치고 답했다.

"예, 형님들."

"뭘 그리 멍하게 있나?"

"잠시 딴생각을 좀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들."

"쯧쯧, 정신 차리게."

핀잔을 주면서도 내가 맛탱이가 간 건 아님을 확인했기에, 조금 안도한 기색으로 시선을 돌리는 두 낭인들이었다.

이들을 포함해서, 사람들은 나와 고현우가 갑자기 나타났음에도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니까.'

던전이란 무한히 반복되는 인형극과도 같고, 우리는 그 인형극의 몇몇 인형을 대체했을 뿐이다.

연계 던전이라 대응표국에서의 공략도를 기준으로 어떤 인형을 대체할지가 결정된 것이고.

가령 내가 던전에 입장함으로써 '낭인 표사 을(乙)'은 없는 인물이 된 셈이다.

고현우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이 '고 표두'가 되었음을 자각하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조금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공략본을 통해 미리 언질을 주었기에 빠르게 적응해 가는 모습이었다.

현재 상황을 빠르게 요약하면, 표행은 이미 출발하여 한창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규모는 기껏해야 마차 몇 대 분량으로 그리 크지 않다.

반면 호위는 그에 비해 과하게 많다.

대응표국에서 엄선한 표두들과 표사들에 더해, 낭인들로 이루어진 임시 표사들까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무조건 습격이 있을 거라는 말이지.'

전투가 벌어지리라 십 할 확신한 게 아니고서야, 대응표국 측에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표행을 구성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머리가 안 돌아가는 이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기에, 분위기는 시종일관 무겁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내가 멍하니 있으니 쥐돌이와 억울이가 핀잔을 준 거고.

나는 느긋하게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표행이 넘어야 하는 산은 총 셋.

그리고 지금 넘는 것이 첫 번째였다.

'슬슬 나오겠네.'

곧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마차들이 향하는 저 앞쪽에 사람 하나가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표두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정지."

152화 No.471 대응표행 (2)

길목을 가로막고 서 있던 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녹림도. 즉, 산적놈이었다.

그리고 그 짐작이 맞다고 말하듯 풀숲에서 다른 녹림도들이 하나둘 튀어나와 그의 곁에 합세했다.

또한 사방에서 인기척과 시선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진작부터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

일행의 긴장된 시선이 표두들에게 집중되었다.

이번 표행에는 고현우를 포함해 표두급이 총 셋이나 붙었는데, 그중 강 표두가 책임자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비무에서는 고현우에게 패했지만, 표국 밥을 가장 오래 먹었기에 경험 면에서는 비교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따라오게."

강 표두가 표사 몇을 데리고 앞으로 나섰다.

상대 진영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일견 조심성이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상대 측에서도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중년인이 나서서 그들을 맞이했다.

다른 녹림도들에 비해 한층 기세가 매서운데, 그가 바로 이 고개에 자리 잡은 녹림채의 채주였다.

"강 표두, 오랜만일세."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우리야 늘 똑같지. 별일 없는 게 좋은 것 아니겠나."

녹림도에게 별일이란 죽거나 다치는 일 아니겠냐며 너스레를 떠는 채주였다.

낭인 표사 무리는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몰라 한층 긴장하고 있었는데, 오랜 지인을 대하듯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자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쥐돌이가 물었다.

"저게 그건가? 통행세 받고 보내 주는 거."

"그런가 봅니다."

"말로는 들어 봤는데,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

표사와 녹림도의 관계.

표행이 같은 길목을 한두 번 드나드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녹림채 또는 수로채를 마주치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처음 마주쳤을 때야 칼부림을 했을지 모르지만, 계속 피를 흘리는 건 양측 모두에게 손해.

따라서 적당한 통행세를 내고 지나가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지금 강 표두가 넘겨주는 전낭처럼 말이다.

전낭을 받아 들며 채주가 물었다.

"헌데 오늘은 평소보다 표물이 적어 보이는군. 표사는 또 너무 많고...."

"그만큼 중요한 물건을 옮기는 중입니다."

"중요한 물건이라.... 한탕 해먹을 때인가?"

채주가 장난스레 물었다. 

꾸준히 통행세를 받는 녹림채의 입장이지만, 마차들 안에 평생 산적질을 안 해도 먹고 살 만한 재물이 들어 있다면.

여태까지 잘 유지해 오던 균형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 표두의 반응은 태연하기만 했다.

"중요한 물건이 항상 값나가는 물건이라는 법은 없지요."

"하하, 그것도 맞는 말이지. 우리도 저만한 숫자를 상대로 도박을 할 생각은 없네."

채주 입장에서 보면 이번 표행은 마차를 호위하는 표사의 수가 평소보다 배는 많으며, 그들 하나하나의 실력도 만만치 않아 보여 위협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이긴다 하더라도 피해가 매우 클 거다.

그럼에도 표물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면 목숨을 걸어보겠지만, 강 표두의 말처럼 금전적인 면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통행세를 받아먹는 게 낫다는 판단이다.

평소보다 조금 더 묵직한 전낭 역시 그런 판단에 한몫을 더했으리라.

채주가 자기 어깨너머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도 저 고개를 넘을 셈인가?"

"기왕이면 익숙한 길로 다니는 편이 좋겠지요."

"...나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네."

시종일관 친근하던 그의 어조가 갑작스레 진지해졌기에, 강 표두가 물었다.

"그건 어째서 그렇습니까?"

"얼마 전부터 거웅채와 소식이 끊겼네. 심부름 삼아 보낸 놈들도 안 돌아오고."

거웅채란 표행이 넘을 다음 고개에 자리를 잡은 산채를 말한다.

서로 이웃사촌 같은 사이라 두 산채 사이에 종종 왕래가 있었는데, 일방적으로 소식이 끊겼다는 건 저쪽에 '별일'이 생겼음을 의미했다.

강 표두가 진지한 태도로 예를 갖췄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중하게 고려해 보고 다음 행보를 결정하겠습니다."

"그러시게나. 이놈들아, 이만 가자!"

채주가 녹림도들을 이끌고 썰물처럼 자리를 빠져나갔다.

강 표두는 곧바로 표행을 출발시키지 않고 다른 표두들을 불러 모았다.

강 표두보다는 다소 경력이 짧은 조 표두, 그리고 우리의 고현우. 고 표두다.

강 씨는 상황을 간략하게 추려서 설명했다.

"—이와 같이 거웅채에 무슨 변고가 생겼다면, 다음 고개를 넘는 동안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네."

"허나 우리에게는 이렇다 할 선택권이 없지 않습니까?"

이 말을 한 것은 조 표두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표물을 전달해야 하는데, 우회해서 가기에는 시간 여유가 없습니다."

"으음.... 그래도 안전이 우선 아니겠나."

위험을 무릅쓰고 뚫고 가는가, 아니면 기한에 맞추지 못하더라도 안전을 도모하는가.

강 표두와 조 표두의 의견이 대립하는 상황.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고현우가 입을 열었다.

"제가 의견을 내도 괜찮겠습니까?"

"말해 보게."

"만약 거웅채를 점거한 자들의 목표가 이 표행이라면, 멀리 돌아서 간다고 한들 그대로 보내 줄 리가 없습니다."

"이러나저러나 한바탕 전투는 피할 수 없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물론 고현우는 공략본에 나와 있는 대로만 말하는 것이었다.

괜히 돌아서 가 봤자 결과는 같고, 던전 클리어에 시간만 한참 걸린다.

따라서 조 표두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도록 지시해 놓았다.

그러나 이런 말 못할 사정을 제외하고라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다.

침음하는 강 표두에게 조 표두가 한마디 보탰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모집한 낭인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가진 전력도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으음."

"또한 채주의 반응을 보셨듯이, 어지간해서는 시비를 걸어오지 않을 겁니다. 걸어오더라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을 테지요."

"...알겠네. 정면 돌파로 하지."

강 표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멈춰 있던 표행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마차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물론 그건 반만 맞는 소리지.'

적들이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표물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는 전제 조건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만약 마차들 안에 금은보화가 가득 들었고 채주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녹림도들도 목숨을 걸고 공격해 왔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놈들은 저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 * *

표행이 계속해서 나아가고, 두 번째 고개를 넘는 동안에도 얼마간은 아무 일 없이 평화로웠다.

그러나 고개를 반쯤 넘었을 무렵, 고현우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느낌이 안 좋군. 여기서부터는 긴장하는 게 좋을 거요."

"...!"

고현우는 이 표행에서 한 손에 꼽히는 실력자.

그가 경고하니 다른 이들도 분분히 병장기를 꺼내 들며 전투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과연 잠시 후, 전방에 흑의인 몇이 길목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지난 고개에서 만난 자들이 척 봐도 녹림도 같았다면, 이자들은 척 봐도 수상했다.

하나같이 붉은 기가 감도는 흑의 무복을 입고 있어서 더 수상했다.

또한 사방에서 인기척과 시선이 느껴지는 것 역시 지나온 고개와 거의 비슷한 구도.

차이점이라면 인기척과 시선에 더해,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살기까지 묻어 나온다는 점이다.

강 표두가 흑의인들의 면면을 살펴보곤 얼굴을 굳혔다.

"...모르는 자들이군."

이 길목을 숱하게 지나다니던 강 표두에게 초면이라면 상황이 단숨에 안 좋은 쪽으로 기운 셈이다.

협상을 처음부터 해야 하고, 이런 경우 대부분의 협상은 결렬되곤 하니까.

그래도 사람 일이란 대화를 나눠 보기 전엔 모르는 법.

강 표두가 주변에 눈짓하자 고현우와 임시 표사 몇몇이 그를 호위하듯 함께 따라왔다.

강 표두는 상대 진영에 다가가다가, 제법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물음을 던졌다.

"안녕하시오. 이 인근은 거웅채의 영역인 걸로 알고 있소만."

"내가 새 채주다."

대장격으로 보이는 흑의인이 무감정한 어조로 그리 답했다.

역시나 거웅채에는 매우 '별일'이 생긴 것이다.

강 표두는 돌아올 대답을 이미 알면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전낭을 건넸다.

"그렇구려. 이건 우리 표국이 새 채주에게 보내는 작은 성의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고, 지금은 부디 길을 비켜 주시길 바라오."

흑의인이 전낭을 받아 들더니,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받았다. 이제 마차를 놓고 꺼져라."

"...."

"그럼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강 표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예상했던 데다, 표국 밥을 먹으며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태연한 어조로 답했다.

"마차를 놓고 물러가도 살려 줄 생각은 없어 보이오만."

단지 표물만이 목표라면 이렇게 대놓고 살기를 드러낼 이유가 없다.

처음부터 전부 죽여 입막음할 생각으로 표행을 가로막은 것이다.

"...."

흑의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혀 왔다.

그리고 희끗한 한 줄기 섬광이 날아드는가 싶더니,

- 쩌엉—!

강 표두의 얼굴 한 치 앞에서 가로막혔다.

그의 손에는 언제부터인가 두꺼운 장도가 들린 채였다.

나름 표두급이라 한 실력은 한다.

다음 찰나 고현우가 앞으로 성큼 내디디며 검을 긋자, 흑의인이 잽싸게 그것을 피해 물러나더니 원래 자리에 내려앉았다.

완벽히 피한 것 같았으나 그 옆의 흑의인 몇 명의 몸이 대신 허물어졌다.

애초에 고현우가 그들을 노리고 검기를 날렸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쓰러지면서 작은 비명 소리 하나 내지 않는 걸 보면, 이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훈련되었는지 익히 짐작되었다.

흑의인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쳐라."

- 스스스스슥....

사방에서 매복하고 있던 흑의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포위망을 좁혀 왔다.

특유의 보법 탓인지, 뱀이 바닥을 미끄러지는 듯한 소리가 장내를 울려 왔다.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쥐돌이와 억울이가 한마디씩 했다.

"김 아우, 정신 바짝 차리게."

"아까처럼 멍하니 있으면 목 날아간다."

"예, 형님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를 보호하듯 양옆에 자리를 잡는 형님들이었다.

- 스스스슥....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흑의인들과 표사들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크아악!"

"놈!"

"죽엇!"

- 채채챙!

장내가 비명과 고성,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

153화 No.471 대응표행 (3)

대응표행의 핵심 규칙은 [호위].

표물을 적에게 탈취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운반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가 성공 여부를 좌우한다.

물론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이고, 고인물은 항상 그 이상을 노려야 하는 법.

추가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요소들에도 신경을 써 줘야 한다.

던전에서 표물 다음으로 중요하게 판단하는 것은,

'사람이지.'

바로 표행에 함께하는 표두, 표사, 쟁자수 등.

이들을 얼마나 살려서 목적지까지 데려가는지가 추가 보상을 결정한다.

그리고 개개인의 무력이 강할수록 생존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당연지사.

대응표국에서 실력자들만 추려 내겠다고 난리를 피운 것은 그 때문이었고, 그 결과가 지금 드러나고 있었다.

- 서걱!

억울이의 거대한 도가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졌다.

그에게 짓쳐 들던 흑의인은 예측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에 반응하지 못하고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쥐돌이 역시 흑의인에게 쌍검을 쉴 새 없이 휘둘러 밀어붙이다가, 결국은 가슴팍에 쌍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지금 상대하는 적들은 대응표국에서의 어중이떠중이 낭인들이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정예들.

마음가짐 역시 비무처럼 가볍지 않다.

흑의인이 가슴팍이 꿰뚫린 채로 쥐돌이의 팔을 덥석 움켜쥐었다.

놈의 눈에서 어떻게든 길동무를 만들겠다는 독기가 엿보인다.

"이런...!"

쥐돌이가 붙잡힌 팔을 빼내려는 도중, 다른 흑의인이 그의 목을 노리고 검을 찔러 들었으나,

- 펑!

다음 순간, 내가 뻗은 손바닥에 얻어맞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장법을 쓰는 척 은근슬쩍 윈드포스를 섞어 후려친 거다.

그 틈에 팔을 빼낸 쥐돌이가 단검을 교차시켜 흑의인의 목을 그어 버렸다.

"고맙네, 김 아우. 장법에 조예가 있었는가?"

"가전 무공 몇 수 얻어 배운 게 다입니다. 보신 것처럼 위력도 변변치 못하고요."

"아닐세, 덕분에 살았어."

- 서걱!

감사를 표하며 다음 흑의인을 베어 넘기는 쥐돌이였다.

이번에는 팔이 잡히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이쪽은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됐네.'

우리 삼인방은 나름 견고하게 방어가 굳어졌으니, 지금부터는 다른 곳에 신경을 써 줘야겠지.

나는 대응표국에서 난장판 비무를 할 때처럼 몰래몰래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전장을 둘러보니 사마귀 낭인이 수세에 몰려 목숨이 위태롭다.

그쪽으로 일점폭발을 시전하자,

- 펑!

공격하던 흑의인의 복부에서 압축된 마나가 폭발했다.

놈은 아픈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으나, 폭발에 잠시나마 자세가 무너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

사마귀 낭인의 눈이 그 작은 틈새를 포착하고 번뜩 빛나더니, 흑의인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나는 곧바로 다음 목표를 포착하고 윈드포스를 시전했다.

- 휘잉—

물리력이 담긴 바람에 흑의인의 몸이 순간 휘청거렸고, 그 역시 다른 낭인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런 식으로 윈드포스와 트위스터, 일점폭발을 몰래몰래 시전하면서 이곳저곳을 살폈다.

'고현우는 어쩌고 있나 볼까.'

- 카가가가각!

고현우의 근처가 흑의인들의 갈기갈기 찢긴 시신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오죽하면 저 겁도 없는 흑의인들이 그에게만은 쉽사리 다가가지 못할 정도.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고현우는 대장격 흑의인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이내 철검이 회색빛 섬광을 흘리고, 제자리에 우뚝 정지한 대장의 몸에서 머리가 스르르 굴러떨어졌다.

- 삐익—!

그러자 어디선가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흑의인들이 공격해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일사불란하게 물러나더니, 순식간에 시신들을 수습하여 자리를 떴다.

마치 처음부터 습격이 없었던 것처럼 휑해진 장내.

바닥에 흩뿌려진 혈흔만이 방금 일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는 이들의 정신을 조 표두의 호통이 일깨웠다.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빠르게 수습하고 바로 이동한다!"

그러자 분분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표사들과 쟁자수들.

한편, 강 표두는 고현우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자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고수였군."

"과찬이십니다."

"아닐세. 표국에서 붙을 때는 손속에 사정을 두었던 모양이야."

본 실력을 발휘했다면 불과 몇 합 만에 승부가 갈렸을 거라며, 한껏 고현우를 추켜세우는 강 표두였다.

고현우는 난처한 웃음을 흘리다가 슬쩍 화제를 전환했다.

"다행히도 피해가 적은 것 같습니다."

"그렇군. 전투가 흉험했던 것치고는 부상자도 적어."

강 표두 또한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사상자는 전무, 부상자도 고작 몇 명밖에 안 된다.

반면 흑의인들은 시신을 모두 수습해 갔기에 정확한 숫자는 파악이 안 되지만, 언뜻 보기에도 사상자의 숫자가 제법 되었다.

대승이라고 봐도 좋은 수준이었다.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니까.'

일반적으로 낭인들의 실력은 문파에서 체계적인 수련을 받은 무인들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기백이 훨씬 넘는 낭인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이들만 추려 냈다면, 다들 제 앞가림은 할 실력은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흑의인들을 상대로 힘이 부치는 자들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그건 내가 슬쩍 마법을 시전해서 메꿨다.

물론 고현우 말고는 이런 내막을 알아차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가령 조 표두는 자신의 예측이 맞았다며 기세등등해졌다.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우리의 전력은 충분히 강합니다."

"으음.... 확실히 그렇군."

"이만큼 본때를 보여 주었다면 놈들도 당분간은 엄두를 못 낼 겁니다. 계속 뚫고 나가시지요."

* * *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흑의인들은 금세 전력을 수습하여 추격해 왔다.

또다시 벌어진 전투.

모두 적들의 조직력과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으나, 이내 투지를 불태우며 맞서 싸웠다.

방금 전 습격을 이겨 낸 저력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라,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놈들을 무찌를 수 있었다.

새로이 등장한 대장 격 흑의인 또한 고현우의 청류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 삐익—!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호각이 울리며, 적들이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퇴각했다.

표사들과 장내를 수습하던 도중, 억울이가 억울한 인상을 더욱 억울하게 찌푸렸다.

"이상하군...."

"뭐가 말인가?"

쥐돌이의 물음에 억울이가 고현우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저 젊은 친구의 실력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네만, 명색이 대장이라는 자가 너무 쉽게 쓰러지지 않았는가?"

"듣고 보니 그도 그렇군. 지나치게 소모품처럼 쓴다는 느낌도 들고 말이야."

앞선 두 흑의인이 정말로 그 집단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두 번씩이나 대충 던져주듯 내보낼 리가 없었다.

그 말은 즉,

"구심점으로는 쓰되, 실질적인 대장 격은 아니라는 뜻이로군."

"내 생각도 비슷하네. 하면...."

"그보다 훨씬 아래, 조장 같은 것 아니겠는가?"

"아마 그렇겠지."

어느새 곁에 있던 낭인들도 얼굴을 굳힌 채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조금 전 쓰러진 흑의인이 '대장'이 아니라 '조장'이라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그들이 상대하는 집단의 크기가 드러난 것보다 몇 배는 더 커진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리고 그때,

"이건!"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중인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자 낭인 하나가 바닥에 널브러진 팔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현우의 검기에 조각조각 난 잔해 중 하나였는데, 흑의인들이 미처 수습해 가지 못한 듯했다.

물론 사람 팔뚝이 잘린 것쯤이야, 칼밥 먹고 사는 무인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낭인이 놀란 목소리를 내뱉은 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모두들 팔뚝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

그리고 이내 모두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팔뚝 한 켠에 낙인처럼 찍힌, '염왕(閻王)'이라는 글자를 보고.

"염왕대(閻王隊)...!"

과거 정마대전에서 패해 사분오열된 천마신교.

그 마교의 무력 집단 중 하나였던 염왕대가 이 외진 산중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흑의인들이 그토록 지독하게 훈련된 상태였는지, 나름 낭인 중에서도 고수 소리를 듣는 이들을 밀어붙일 수 있었는지도 전부 설명이 되었다.

"...!"

"...!"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다가 쥐돌이가 문득 잘린 팔뚝에서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한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표물들이 실린 마차들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낭인들 역시 곧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뒤따랐다.

그들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대체 저 표물의 정체가 뭐길래 마교에서 이토록 집요하게 노린단 말인가?

그러나 마차로 다가가는 그들의 앞을 강 표두를 비롯한 표사들이 가로막았다.

"멈추시오."

"표물을 확인하게 해 주시오."

"확인할 수 없소."

"우리 또한 목숨 걸고 표물을 지키는 처지요. 이 정도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오만."

강 표두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들의 의견은 타당하오. 그럼에도 말씀드릴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소."

"그럼 왜 안 되는지 이유라도 속 시원하게 말해 보시오."

"...."

강 표두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얼굴을 굳혔다.

그는 그 상태로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과 함께 답했다.

"...저 안에 들어있는 것이 공개된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죽여 입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오. 물론 우리도 포함해서 말이오."

"...이런 젠장맞을."

"된통 잘못 걸렸구만."

낭인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제야 왜 다른 문파의 고수가 아닌 낭인들을 잔뜩 모집해 임시 표사로 고용했는지, 표행 성공 시 약속된 보수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컸는지 깨달은 그들이었다.

강 표두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중요한 것은 표물이 무엇인가가 아니오. 중요한 것은 저 안을 확인하건 말건, 마교에서는 우리를 모두 죽이려 들리라는 것이지."

"...!"

"그러니 지금은 궁금증을 잠시 미뤄 두고 힘을 합칠 때요."

"...알겠소."

"일부러 언급을 피한 점은 사과하리다. 허나 보수에 대해서는 한 치의 거짓말도 없소."

강 표두가 호언장담했다.

표행이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기만 한다면 약속된 보수를 동전 일문도 빠짐없이 지불할 것이며, 대응표국의 장 국주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조했다고.

그때, 후방을 주시하던 낭인 하나가 외쳤다.

"또 온다!"

멀리서부터 그림자가 드리우듯 가까워져 오는 흑의인들.

염왕대가 그새 또다시 전력을 수습하여 공격해 오는 것이다.

모두 분분히 자신의 병장기를 꼬나 쥐며 전투에 대비했다.

그러나 그들의 안색은 이전에 비해 한층 어둡고 무거웠다.

154화 No.471 대응표행 (4)

- 삐익—!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즉시 흑의인들이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더니, 이내 썰물처럼 장내를 빠져나가 버렸다.

"후...."

"빌어먹을...."

그러자 모두들 아무렇게나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휴식 시간이 주어졌음에 안도하는 한숨이었으며, 그 휴식 시간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에 한탄하는 한숨이기도 했다.

쥐돌이가 쌍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말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

목숨을 건 격전이 한참이나 이어지다가, 고현우가 조장급 흑의인을 쓰러뜨리면 금세 전투가 종료된다.

그리고 겨우 숨을 돌렸다 싶을 때쯤 재개된다.

이것이 여태까지 셀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시작된 습격이 해질녘, 한밤중, 그리고 하늘에 파랗게 동이 터 오는 지금까지 이어졌다.

모두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계속 싸웠기에, 하나같이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이 틈에 뭐라도 먹어 두어야겠다 싶었는지 억울이가 육포를 입안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전투적으로 씹으며 물었다.

"아니, 저놈들은 잠도 안 자나?"

"자겠지. 허나 마교 아닌가."

염왕대는 명색이 마교의 전투 집단.

처음부터 온갖 악조건을 이겨 낼 수 있도록 철저하게 훈련되었을 텐데, 며칠 못 자고 못 먹는 게 대수겠는가.

반면 낭인들은 여태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 없이 자유롭게, 내키는 대로 살아왔다.

그러니 같은 악조건이라도 이쪽의 타격이 더 클 수밖에.

또한 괜히 사기만 떨어뜨릴 터라 굳이 언급은 안 하고 있지만,

'차륜전을 당하는 중이지.'

아군 측의 방어는 생각 이상으로 견고하다.

염왕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고수인 고현우가 있고, 낭인들 하나하나의 실력도 녹록지 않다.

내가 대응표국에서 강자들만 골라서 데려온 덕분이다.

염왕대 측에서도 몇 번 부딪혀보곤 물량 공세로는 승산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듯하다.

따라서 여러 조가 번갈아서 표행을 괴롭히는, 이른바 차륜전을 벌이는 것이고.

그렇게 작은 피해가 가랑비에 옷 젖듯 누적되어 가는 것이 현 상황이었다.

후방을 주시하던 낭인이 한숨과 함께 한마디 내뱉었다.

"또 온다...."

목소리가 작은 걸 보니 이젠 소리칠 힘도 없는 모양이다.

다들 비슷한 심정일 테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

비척거리면서도 각자의 무기를 그러쥐었다.

그리고 또다시 염왕대가 덮쳐 왔다.

* * *

"끄아악!"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 소리의 진원지로 시선을 돌리자 낭인 하나가 제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팔뚝은 염왕대원의 검에 깊이 관통당한 채였다.

'슬슬 부상자가 나오는군.'

연이은 차륜전으로 모두 조금씩 상처가 누적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살가죽이 긁혀서 조금씩 피가 흐르는 정도였다.

거의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로 다친 것은 이 낭인이 처음이었다.

"아악!"

다음 습격에서는 또다른 낭인의 허벅지에 긴 검상이 새겨졌다.

검을 휘두르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절뚝거리며 걸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습격이 이어질수록 부상당하는 낭인이 셋, 다섯, 일곱....

눈덩이가 불어나듯 늘어갔다.

안 그래도 다들 체력이 바닥을 치는데, 전투에 참여할 인원마저 줄어드니 피해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부상자는 계속해서 늘어날 터였다.

게다가 또다른 큰 문제라면,

'발목이 잡혔지.'

부상자들을 챙기느라 표행의 이동속도가 덩달아 느려졌다는 것.

모두들 그것을 깨닫고 있었고, 본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윽고 부상자들이 저들끼리 한구석에 모이더니, 얼굴을 맞대고 무언가 상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은 갈수록 침통하게 변해갔으나, 결국에는 어떤 합의점에 이른 듯했다.

개중 한 명이 대표로 강 표두에게 말을 걸었다.

"강 표두."

"무슨 일이오?"

"우리는 여기까지인 것 같소. 먼저 가시오."

강 표두가 얼굴을 굳혔다.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가 남아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보리다. 우리가 빠지면 표행도 속도를 낼 수 있을 거요."

"그럴 순 없소. 어찌 다친 사람을 이대로 두고 간다는 말이오?"

강 표두가 만류했으나 부상자 낭인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

"우리라고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 아니오. 허나 이대로 가면 어차피 다 죽을 뿐이오.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소?"

"...."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은 걸로 아오. 표행을 위해 현명한 선택을 내리길 바라겠소."

그의 말대로, 목적지가 지척이었다.

표행이 넘어야 하는 고개 셋 중에 둘은 이미 넘었고, 세 번째 고개도 반 이상 지나왔다.

부상자들을 포기하고 조금만 더 속도를 내면 된다.

한편 나는 생각했다.

'이쯤에서 끼어들면 되겠구만.'

이만하면 분위기가 충분히 무르익은 것 같았다.

해서 나는 불쑥 손을 들어올렸다.

"저도 남겠습니다."

"!?"

"...?"

모두가 놀라서 나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나는 이 표행에서 내내 병풍이나 다름없었는데, 뜬금없이 부상자들과 함께 남겠다니 의외일 만도 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부상당한 낭인들이 나를 만류하려 들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무엇하러 공연히 목숨을 버리려 드나?"

그러나 내가 손을 들어올린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했다.

내가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표행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취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몇 명이서 시간을 벌어 봐야 얼마나 벌 수 있겠습니까."

이미 전투에서 일인분도 채 하기 어려워진 부상자들이다.

이들이 목숨 바쳐 싸운다고 한들 물 한 잔 마실 시간이나 벌 수 있을까.

단순히 개죽음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시간을 벌고자 한다면 더 많은 인원이 남아야 한다.

"...."

"...."

그 사실을 깨닫자 장내의 모두가 서로의 눈치만 살피기 바빴다.

남으면 거의 반드시 죽는 셈인데, 선뜻 나서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주저 없이 손을 들어 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좋네, 우리도 남지."

"김 아우가 남는데 우리만 살겠다고 떠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바로 든든한 쥐돌이와 억울이 형님들이었다.

이어서 사마귀 낭인을 비롯해 몇몇 낭인들이 더 손을 들었으나 그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뒤이어 의외의 인물이 손을 들어 올렸다.

"저도 남지요."

조 표두.

그러자 안 그래도 상황을 따라가기 힘들어하던 강 표두가 더욱 눈에 띄게 당황했다.

"자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조 표두가 어두워진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잘못이 큽니다. 채주가 경고했을 때 진작에 멀리 돌아서 가야 했는데.... 고집을 부려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건 자네 잘못이 아닐세."

"아닙니다. 책임을 지게 해 주십시오."

조 표두가 계속 강하게 주장하니 강 표두도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결국 남은 것은 부상자들과 나, 쥐돌이와 억울이를 비롯한 몇몇 낭인들, 그리고 조 표두와 그를 뒤따르는 표사들.

합해서 스무 명이 조금 넘는 조촐한 숫자였다.

"...."

모두 멀어져 가는 마차들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표행이 작은 점이 되었을 즈음, 등을 돌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우리를 습격해 올 때와 달리, 군대가 진군하듯 전진하는 흑의인들.

또한 여태까지의 전투가 차륜전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들의 숫자는 습격마다 나타났던 것의 몇 배는 되었다.

척척 다가오던 그들이 우리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서더니, 흑의 중년인 하나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여태까지 버림패로 내보냈던 조장급들과는 사뭇 다르다.

'염왕대 부대주.'

그가 이쪽을 잠시 응시하더니, 눈빛에 이채를 머금었다.

"부상자는 고작 몇 명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이만큼이나 더 남았나? 용기가 가상하군."

"...."

"그 용기를 높이 사서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하마."

부대주가 지시를 내렸다.

"전부 참(斬)하라."

- 스스스슥....

뱀이 바닥을 미끄러지는 듯한 소리가 장내를 가득 울렸다.

흑의인들이 점점 속도를 붙이며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극도로 긴장하며 격돌에 대비하는 가운데.

갑자기 내가 뒤로 등을 홱 돌리며 외쳤다.

"뒤!!"

"!?"

모두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후방에 자리했던 조 표두와 표사들이 검을 휘둘러 오는 모습이었다.

- 카가가각,

조 표두의 검을 쥐돌이가 다급히 쌍검을 교차시켜 막았다.

"이게 무슨 짓...."

그러나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상황이 너무나 명명백백했다.

등 뒤에서 암습을 가하려다가 들켰다면 결론은 하나니까.

"배신인가!"

"배신? 아니지."

조 표두가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내 그의 온몸에서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나는 원래부터 마인이었다. 그저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을 따름이지."

"...!"

"흐흐, 애석하게 되었구나. 저놈만 아니었어도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갔을 것을."

"크윽...."

쥐돌이는 이어지는 조 표두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다 같이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조 표두와 표사들이 마교의 간자였다.

또한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와중에도 염왕대는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 오는 상황.

우연의 일치일까, 그런 급박한 전투 가운데 쥐돌이와 억울이의 눈빛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그리고 동시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내가 상황에 걸맞지 않게 너무나도 태연해 보였기 때문이리라.

나는 두 사람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믿고 따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들."

"김 아우?"

"지금부터는 이 아우한테 맡기시죠."

나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다가오는 염왕대를 향해 느긋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뿌리로 전방을 척 가리켰다.

['증폭'을 사용합니다.]

['트위스터'의 등급이 상승합니다.(C+->A+)]

- 휘오오오오—!

물리력이 담긴 바람이 한 곳으로 모여들며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형성했다.

"...!"

"...!"

흑의인들은 필사적으로 몸을 날려 회오리바람을 벗어나려 들었으나, 끊임없이 불어 대는 강풍에 속절없이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점점 한곳으로 뭉쳐 가는 흑의인들.

그들을 마주하며 반대쪽 손을 꽉 움켜쥐자 검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곧 나는 불타는 주먹을 활시위를 당기듯 잡아당긴 후, 힘껏 앞으로 내뻗었다.

- 콰콰콰콰콰—!

불어가는 화염폭풍이 소용돌이에 갇혀있던 흑의인들을 뒤덮어 버렸다.

잠시 후, 화염폭풍이 걷히고 드러난 것은 경로를 따라 깊게 팬 구덩이, 그리고 그 구덩이에 여전히 남아 타오르는 불꽃뿐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고 눈앞의 참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놀란 사람을 꼽자면 아마 염왕대 부대주가 아닐까 싶다.

그는 겨우 회오리를 벗어나 목숨을 부지했는데, 내 무위를 보고 누군가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염패(炎覇)!"

나는 손끝에 남은 불씨를 훅 불어서 껐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155화 No.471 대응표행 (5)

염왕대 부대주는 인페르노 피스트가 남긴 흔적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불길이 남아 이글거리며 열기를 뿜어내는 중이다.

"이런 열양공(熱陽功)을 익혀놓고 염패가 아니라고?"

"믿든 말든 알아서 하시고, 일단 난 말했수다."

"...."

내 대답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부대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로서는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인페르노 피스트로 인해 진형이 완전히 와해되었기에, 휘말리지 않은 대원들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그 뒤에도, 염패로 짐작되는 나를 상대하기에는 몹시 위험부담이 크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부대주를 내버려 두고, 나는 등을 돌려 우리 진영으로 걸었다.

다가오는 나를 마주하며 조 표두의 안면이 쉴 새 없이 경련했다.

거의 계획대로 다 돼 가던 것이 불주먹 한 방에 어그러졌으니, 그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언제부터 간파했나?"

"모르면 바보죠. 하루이틀 일도 아닌데."

"그게 무슨 뜻이지?"

"안알려줌."

이 던전을 한두 번 공략한 것도 아닌데, 핵심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정도는 줄줄이 꿰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놔두면 거하게 뒤통수를 때리는 조 표두 같은 놈은 더욱.

물론 나는 고인물이 되기 전, 파릇파릇했던 첫 도전 당시에도 뒤통수를 맞지 않았다.

조 표두가 수상하다는 단서가 군데군데 깔려 있었고, 그것들을 토대로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덕분이다.

가령 첫 고개에서 녹림도들이 경고를 주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강행을 제안했다는 점.

단순히 생각이 없는 유형이거나 자신감이 지나친 것일 수도 있지만, 의심을 갖기 시작하기에는 충분한 단서다.

다음 단서는 이어지는 습격을 계속 관찰하다 보면 눈에 띈다.

흑의인들은 대개 정규 표사들보다 낭인들로 이루어진 임시 표사 무리에 공격을 집중하는 편이고, 표사들 역시 대체로 몸을 사리며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한다.

결과적으로 낭인들에게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피해가 누적되는 반면, 정규 표사들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다.

심지어 조 표두가 이끄는 자들은 온몸이 별 상처도 없이 깨끗한 수준이다.

낭인들에 비해 표사들의 수준이 크게 높지도 않은데, 한쪽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는다는 것 역시 의심해 볼 만한 요소다.

마지막으로 조 표두가 부상자들과 남겠다고 말하는 것.

이전까지 낭인들에게 별 신경도 안 쓰다가, 갑작스레 부상자들을 챙긴다.

자신이 뱉은 말에 책임을 진다고는 하지만, 사지에 남기까지 하는 것은 과하게 느껴진다.

이런 단서들은 따로따로 놓고 보면 단지 기분 탓이라 느껴질지 몰라도, 한곳에 모아 두고 보면 급격히 수상해진다.

물론 이런 내막을 조 표두한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언제부터' 눈치챘는지 정도는 가르쳐 줄 수도 있지.

나는 품 속에서 종이 쪽지 하나를 꺼내 들며 답했다.

"이때부터요."

"...!"

조 표두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내가 꺼내 든 종이 쪽지.

그것의 정체가 장원에서 슬쩍한 장보도 조각이었기 때문이다.

장원은 마교의 안가(安家)였고, 놈들이 대응표국에 수작을 부리러 자리를 비운 틈에 잠입해서 수묵화를 훔쳐 왔었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군...."

"그렇죠."

"하, 하하."

조 표두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입가에는 자기 자신을 비웃는 듯한 조소가 떠올라 있었다.

한참이나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조 표두의 움직임이 돌연 우뚝 멎었다.

고개를 들어올린 그의 두 눈은 진득한 살기로 번뜩거리고 있었다.

"죽어랏!"

다음 찰나 조 표두가 자기 앞의 쥐돌이에게 검을 휘둘렀다.

이렇게 된 이상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가겠다는 심산 같다.

뒤따라 다른 표사들도 낭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전투가 재개되었으나,

나는 느긋하게 앞으로 나서며 일점폭발을 두 번 연이어 시전했다.

- 펑, 펑!

두 번의 작은 폭발.

큰 피해는 주지 못했으나 조 표두의 동작을 절묘하게 끊어 놓았고, 그로 인해 제법 큰 빈틈이 생겨났다.

그리고 칼을 맞대던 쥐돌이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 푸욱,

쌍검이 조 표두의 가슴팍 깊이 틀어박혔다.

그러나 제 심장을 꿰뚫렸음에도 그는 쥐돌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충격받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는데, 그제야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네놈이었구나!"

낭인으로 위장하고 잠입한 염왕대를 대응표국 난장판 비무에서 죄다 탈락시킨 것도.

습격마다 몰래몰래 낭인들에게 도움을 줬던 것도.

"예, 전부 접니다."

"하, 하, 완전히....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

조 표두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털썩 몸을 눕혔다.

다음 순간 그의 가슴팍에 조그만 상자 하나가 떠올랐다.

[대응표행 랜덤 박스(D)] *1

'드랍템 챙겨 주시고.'

- 서걱!

랜덤 박스를 회수하는 사이, 조 표두를 따르던 마지막 표사가 억울이의 장도에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이걸로 이쪽은 일단락 되었기에, 나는 염왕대 부대주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어쩌실래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나?"

부대주가 되물었다.

그는 살아남은 염왕대를 수습하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교의 전투 집단답게 승산이 없음에도 끝까지 싸울 생각이겠지만, 다른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이대로 물러난다면 쫓지 않겠습니다."

"...진심인가?"

"이런 거 갖고 장난은 안 칩니다."

"왜지?"

'아저씨는 드랍템이 없거든요.'

조 표두는 잡으면 랜덤 박스를 주지만, 부대주는 의외로 아무것도 안 내놓는다.

확률이 낮은가 싶어서 수십 번 잡아 봤지만 아예 드랍 자체가 없었다.

즉, 계속 싸워 봤자 득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도 좀 쉬고 싶거든요."

게다가 인페르노 피스트에 한 무더기 증발하기는 했지만, 아직 염왕대 다수가 생존한 상태.

이대로 맞붙는다면 현재 목숨줄이 아슬아슬한 부상자 낭인들이 쓰러질 위험성도 존재한다.

생존자가 줄어들면 보상도 같이 줄어드니 오히려 손해.

따라서 지금은 전투를 피하는 게 이롭다.

"물론 맨입으로 보내 드리기는 좀 그렇고."

드랍템이 없다고 했지, 받을 게 없다고는 안 했다.

나는 부대주를 마주 보며 안주머니를 툭툭 쳤다.

"품 안에 그건 두고 가십쇼."

"...!"

부대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어떻게 알았지."

"제 눈치가 좀 귀신같거든요."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온 거니까.'

고현우를 보내고 부상자들과 남은 데에는 조 표두를 때려잡는 것 말고도 이런 이유가 있었다.

"...."

부대주의 고민은 짧았다.

저울 한 쪽에는 꽤 중요한 물건 하나, 반대쪽에는 자신을 포함한 염왕대의 목숨이 올라가 있다.

그 물건의 가치가 목숨을 바칠 정도라면 끝까지 싸우겠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좋다. 넘겨 주지."

부대주가 품 안에 손을 집어넣더니, 보관하던 것을 꺼내 휙 날렸다.

나는 빠르게 날아오는 희끗한 그것을 바로 앞에서 잡아챘다.

[장보도 조각 C]

마교의 안가에서 회수한 장보도 조각에 이어 두 번째.

장보도를 완성하려면 마지막 세 번째 조각이 남았지만, 이것만으로도 검술 동아리와의 협상 테이블에 앉을 준비는 끝난 셈이다.

나는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

"잘 받았습니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

"또 보게 될 거다."

"예, 또 봅시다. 기왕이면 다음에는 영약도 좀 챙기고 다니시고, 무공비급도 있으면 더 좋고."

좀 푸짐해야 때려잡는 맛도 날 거 아니야.

부대주는 몇 초 더 나를 노려보다가 등을 돌렸다.

그를 따라 염왕대가 빠르게 장내를 빠져나갔다.

"김 아우, 이제 보니 대단한 고수였군...."

상황이 종료되었음에도 여전히 놀란 기색인 쥐돌이와 억울이.

나는 그들에게 다시금 꾸벅 허리를 숙였다.

"속여서 죄송합니다, 형님들."

"아닐세, 김 아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오히려 감사를 표해야 맞지."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던 와중 쥐돌이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얼굴을 조금 굳혔다.

그리고 조 표두(였던 것)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헌데 저 조가 놈이 우리를 속인 거라면, 표행 쪽에도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았겠는가?"

"바로 보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자들과 낭인들이 이곳에 남은 취지는 표행이 나아갈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으나, 그것은 사실 전제 조건부터 틀렸다.

'꼭 뒤에서 추격하리라는 법은 없지.'

첫 조우와 마찬가지로, 염왕대의 본대는 표행의 앞길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장 강한 고수인 염왕대주도 거기 있을 테고.

여기까지 깨닫자 낭인들이 눈에 띄게 당황해서 술렁거렸다.

자신들이 헛수고를 한 것은 물론 표행이 더한 위험에 처했다니.

쥐돌이가 다급하게 물었다.

"얼른 도우러 가야 하지 않겠는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내가 다음으로 덧붙이는 말에 낭인들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고 표두는 강하거든요."

"...!"

쥐돌이가 무릎을 탁 쳤다.

"자네들, 처음부터 한패였구만!"

"하하, 그렇습니다."

"어쩐지 나이대가 비슷해 보인다 싶었네."

고현우와 나는 두 연계 던전이 진행되는 내내 서로 모르는 척했는데, 조 표두를 비롯한 마인들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내가 고현우와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면, 내가 아무리 힘을 숨긴다 한들 놈들도 내 일거수 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울 터.

그렇다면 부상자들과 함께 남을 때에도 조 표두가 다르게 대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까지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고, 나는 조 표두 및 부대주가 이끄는 추격대, 고현우는 염왕대주를 각기 상대하게 된 것이다.

"가시죠, 아마 저쪽도 정리됐을 겁니다."

나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앞장섰다.

* * *

부상자들을 이끌고 천천히 걷다 보니 과연 먼 저편에 마차들이 멈춰 있었다.

쥐돌이와 억울이는 그때까지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으나, 표행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모두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점점 표정이 풀어졌다.

이내 저쪽에서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고현우가 마중을 나왔다.

그의 한 손에는 금빛 주술검이 들린 채였는데, 철검을 집어넣고 나름 본 실력을 발휘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렇다 할 상처가 없는 걸 보면 예상대로 염왕대주는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나 보다.

"오셨소, 김 형."

"어, 잘 끝냈냐."

그러자 고현우가 빙그레 웃으며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위에는 조그만 상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대응표행 랜덤 박스(D)] *2

"두 개나 나왔다오."

156화 No.471 대응표행 (6) 

표행은 짧은 휴식을 취한 후, 세 번째 고개를 마저 넘어 목적지에 도달했다.

"수고 많았소. 약속한 보수요."

강 표두가 줄지어 선 낭인들에게 묵직한 전낭을 하나씩 건넸다.

반신반의하며 전낭을 슬쩍 열어본 자들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는데, 안이 전부 은자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줄이 점점 줄어들어 나와 고현우의 차례가 되었다.

"여기 있네. 정말 고생했네."

다만 그가 우리에게 건넨 물건은 전낭이 아니라, 옅게 빛나는 조그마한 상자 네 개였다.

[대응표행 랜덤 박스(D)] *4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음 낭인으로 넘어가는 고 표두.

장내의 누구도 이 점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고현우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이럴 때마다 실감하게 되오. 현실과 다름 없어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던전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는 것을 말이오."

"섬찟한 일이지."

무한히 반복되는 인형극의 인형이 된다는 건 과연 어떤 느낌일까.

고현우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섬찟하기도 하고, 조금은 아쉽기도 하구려. 그래도 함께 동고동락한 전우들이나 마찬가지인데, 던전이 초기화되고 나면 기억에서 잊혀 버린다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

"...?"

대응표국-대응표행과 같이 직접적인 연계 던전이 아니더라도, 하나의 큰 스토리로 묶여 있는 던전들의 경우, 내 행동들이 이후 던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김 아우."

쥐돌이와 억울이 같은 등장인물들과 쌓아 둔 인연이 계속 이어지기도 하고.

내가 그들에게 물었다.

"예, 형님들. 떠나시렵니까?"

"당분간은 수련에 전념하려 하네. 어딜 가도 크게 부족하지 않은 실력이라 생각했는데, 이번에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어."

"두 분의 무공에 큰 성취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고맙네. 또 보세, 김 아우."

가벼운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쥐돌이와 억울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고현우는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참 묘하군...."

"뭐가?"

"저 두 분 말이오. 기도(氣道)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릇이 커 보인다고 해야 할지.... 뭐라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구려."

나는 씩 웃었다.

"안목이 쓸 만하구만. 나중에 전설이 될 분들이시다."

"그게 정말이오?"

"그래." 

쥐돌이와 억울이는 주연급은 아니지만, 관련 던전들에서 제법 자주 모습을 비추곤 한다.

이른바 슈퍼 조연급인 셈이다.

게다가 지금도 나름 쓸 만한 실력이,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더욱 급격히 강해진다.

"나중에는 별호까지 붙지. 낭인무적(浪人無敵)이라고."

"오오...!"

"종종 뵙게 될 테니까 잘 기억해 둬."

"잊을 리가 있겠소?"

고현우의 눈이 흥미로 반짝거렸다.

- 쿠르릉....

그때,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공략이 완료되었기에 던전이 서서히 붕괴 및 재구성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늦기 전에 나가야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남았다.

"궁금하지는 않았냐, 마차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물론 궁금했소. 헌데 김 형도 짓궂은 데가 있더군. 왜 공략본에 그 내용만 쏙 빼놓은 거요?"

"이런 건 마지막까지 남겨 둬야지. 이제 얘기해 줄게."

표물의 정체.

대응표국은 우리가 처음 임시 모집에 참가한 시점에서 이미 기반이 상당히 흔들린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더한 지출을 감수하면서까지 낭인들을 불러 모으고, 어떻게든 표물을 운반하려 들었다.

또 마교는 어땠는가.

간자들을 투입해 표국에 수작을 부리는 것은 물론, 염왕대라는 강력한 무력 집단을 동원해서 표물을 빼앗으려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낭인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세자, 계속 피해를 보면서 차륜전을 벌이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대체 표물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그렇게까지 한다는 말인가?

"...!"

다음 대답이 몹시 궁금한 듯, 고현우가 온 신경을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랜덤 박스를 차례대로 꺼내, 총 네 개를 한곳에 모았다.

"[대응표행]에서 획득할 수 있는 랜덤 박스는 총 7개야." 

클리어 보상으로 강 표두가 지급하는 것이 최대 4개.

마차가 파손되거나 사상자가 나오면 그에 맞춰 개수가 줄어든다.

덧붙여 염왕대주를 처치할 시 2개, 조 표두에게서 1개가 보너스로 드랍된다.

부대주는 드랍 아이템이 없는 대신, 멱살 잡고 협박하면 장보도 조각을 주고.

"그리고 4개를 모아서 던전 안에서 열면,"

- 달칵,

랜덤 박스 하나의 덮개를 열자, 그 안에서 새까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나머지 랜덤 박스들까지 온통 뒤덮어 버리더니, 반죽하듯 모양이 이리저리 변했다.

잠시 뒤 연기가 걷히자, 랜덤 박스 4개가 있던 자리에 다른 것이 놓여 있었다.

곳곳에 금이 간 매우 낡은 도자기 하나.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데다 금줄로 칭칭 동여매 놓기까지 했다.

[봉마함(B)]

고현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것이 바로 표물의 정체란 말이오?"

"그래."

"으음,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군. 어디에 쓰이는 물건이오?"

"단어 그대로야."

봉마함(封魔函).

마기(魔氣)를 한계까지 응축해서 눌러 담고 봉인해 놓은 도자기다.

일반 무인에게는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은 물론 해롭기까지 하지만, 마공을 연성한 마인들에게는 천고의 영약이나 마찬가지.

"그리고 이런 게 마차 안에 잔뜩 들었었지."

"과연. 하나만 해도 엄청난데 잔뜩이라면 마교에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던 것도 이해가 가는구려. 앞으로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테고 말이오."

"절대로."

이 표행에서는 나와 고현우가 표물을 지키고 있었기에 염왕대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놈들이지만, 전력 차이가 너무 극심하면 그저 개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잠시 물러난 것일 뿐, 마교의 습격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또한 다음 습격에는 나와 고현우를 능히 상대할 정도로 강한 고수와 함께 찾아올 테지.

고현우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하면 봉마함은 끝내 마교의 손에 들어가겠구려."

"스토리상 그렇게 되지. 우리가 항상 개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봉마함이 다수라면 무력 집단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닐 터....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겠소?"

마교는 이미 정마대전에서 패해 수많은 집단으로 찢어지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태다.

봉마함을 빼앗긴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런데 한참 약세인 상태에서 무력 집단 하나 새로 만든다고 전세가 뒤집히겠냐는 물음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안 되지."

"하면 저들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거요?"

"네가 하나 잘못 짚은 게 있는데, 쟤네는 무력 집단이 필요한 게 아니야. 구심점이 필요한 거지."

"...!"

고현우가 무엇인가 깨달은 듯 눈썹을 치켜떴다.

봉마함의 갯수가 많다는 점에 집중한 나머지, 그걸 '무력 집단'을 만드는 데 쓴다는 쪽으로만 생각이 기울었던 것이다.

"저 수많은 봉마함의 마기를 단 한 사람에게 집중한다면 어떨까."

"...어마어마한 고수가 탄생하겠구려."

"그렇지. 흑사방도 비슷해."

우리는 몰래 꼼수를 부려 비고만 털어먹고 나왔지만, 본래 흑사방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흑사와 백사는 흑사방을 장악하고, 일대의 청년들을 잡아들여 마교의 대법을 연성하고 있었다.

그렇게 반쯤 완성된 대법만으로도 불사에 가까운 육체를 얻었고, 실제로 인페르노 피스트를 몇 번이나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꿈쩍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자신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완성할 고수한테 대법을 시전하는 거지."

"과연. 이제 슬슬 그림이 그려지는군."

중원 각지에 흩어져 암약하는 마교.

그들이 염원하는 것 역시 모두 같다. 

분열된 마교를 다시 하나로 뭉칠, 단 한 명의 절대 고수의 재림.

"그리고 이와 관련된 던전들을 하나로 묶어서—"

깃털뱀 제단과 사원 등은 '인신공양 의식을 통한 깃털뱀 강림'이라는 하나의 큰 스토리로 묶여 있다.

따라서 관련 던전들을 한데 묶어 [깃털뱀 강림] 시리즈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흑사방과 대응표국 등을 포함한 던전들을 한데 묶어—

"—[천마재림] 시리즈라고 부른다."

* * *

순간이동 포탈을 타고 밖으로 나오자, 신병철이 은신을 풀고 우리를 맞이했다.

입을 쩍 벌려 하품하면서.

"으어엄— 나왔고만."

"지금 몇 시야?"

"여섯 시 반."

일반 던전들보다 클리어 시간이 긴 던전이었기에, 어제 오후에 들어갔는데도 아침이 돼서야 마무리가 됐다.

그래도 예상했던 시간보다는 조금 일찍 나온 셈이었다.

나는 고현우와 시선을 교환하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운기조식 조금 하다가 아침 먹고 수업 들어가면 딱이겠네."

"소주천(小周天) 한 번이면 적당할 듯하오."

"진짜 미친놈들인가...."

신병철은 수련광들의 도 넘는 행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던전에 들어가서 내내 격전을 치렀을 텐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운기조식이라니.

거기다 이어서 수업에 멘토링까지 하지 않는가.

고현우가 근엄한 태도로 답했다.

"고수가 되기 위한 길은 멀고도 멀다오. 이 또한 긴 여정의 일부에 불과하지. 그렇지 않소, 김 형?"

"고 표두의 말이 옳도다."

내가 맞장구를 치자 신병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시구만. 아주 둘이 죽이 척척 맞으시네. 좋으시겠어요."

"하하, 너무 그러지 마시오. 신 형이 기뻐할 만한 소식도 가져왔다오."

"...뭔데? 아니지, 뭡니까 고객님들~?"

신병철이 기뻐할 만한 소식은 거의 정해져 있었기에, 즉시 말투가 사근사근해졌다.

예상대로 고현우의 인벤토리에서 나온 것은, 지난 대응표국 공략에서 얻은 E랭크 랜덤 박스 하나.

"이른 새벽부터 고생해 줘서 고맙소, 신 형."

"아이고, 고객님들 뭐 이런 걸 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신병철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손을 싹싹 비비댔다.

그리고 잽싸게 랜덤 박스를 받아 들더니, 뚜껑을 움켜쥔 채로 묻는다.

"...바로 연다?"

"언제 여는가는 신 형의 자유지만.... 괜찮겠소?"

저번에도 받자마자 바로 열어서 F급 나무잔이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신병철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아이, 그때 한 거는 액땜이고, 이번이 진짜지. 잘 봐라. 딱 보여 줄 테니까.... 무지개빛 황금빛 떴냐!"

신병철이 힘차게 랜덤 박스를 열어젖혔다.

- 달칵,

[대응표국 찻잔(F)]

"...."

신병철이 찻잔을 내려다보며 두 눈을 껌벅거렸다.

나는 가만히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콜렉션이 늘었네."

"인생."

157화 복덩이 서예인

나는 쌀과자를 서예인의 입으로 가져갔다.

"복덩이님, 이것도 한번 드셔 보세요."

"응."

쌀과자를 작게 한 입 베어 물고 우물거리는 서예인.

마음에 들었는지 나머지도 야금야금 베어 문다.

대응표국 근처 저잣거리에서 사 온 건데, 단맛이 과하지 않고 담백해서 취향에 맞을 줄 알았다.

"복덩이님, 이건 좀 어떠세요."

"좋아."

그 외에도 각종 특산품 간식거리들을 죽 늘어놓고, 골고루 하나씩 바치는 중이다.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곧 있을 랜덤박스 개봉식을 대비하기 위함.

미리 서예인의 컨디션을 최대한 끌어 올릴 필요가 있다.

물론 서예인의 기분이나 컨디션은 정작 행운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렇게 공물을 바치는 이유는, 굳이 비유하자면 분수대에 동전을 던지는 행위과도 같다.

"쌀과자가 맛있으시군요, 복덩이님?"

"맛있어."

"그럼 또 드려야지요. 여기 있습니다."

"너도 먹어."

서예인은 쌀과자를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다가, 자기도 하나를 집어 내 입에 쏙 넣어 주었다.

"...."

그리고 안정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우리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 표정이 흐뭇함을 넘어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보인다.

안정미가 그렇게 선 채로 승천하려는 찰나,

"김 형."

고현우가 약속 시각에 맞춰 자리에 나타났다.

멘토링 일정을 전부 소화하고 한소미와 틈틈이 대련까지 하는 터라 우리 셋 중에는 하루가 가장 길다.

살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다가, 서로의 입에 쌀과자를 넣어 주는 우리를 보고 멈칫한다.

그러더니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급한 볼일이 떠올랐소."

"없는 거 안다. 돌아와."

"허나 두 분이 이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는데, 본인이 방해하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오."

안정미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생각이 어떻든, 오늘 랜덤박스를 여는 것은 정해진 일이다.

"됐고요, 앉으십쇼."

"다음에 해도 괜찮지 않겠소?"

"굳이 미룰 거 있나. 이렇게 셋이 모였을 때 해치워 버려야지."

"으음, 김 형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고현우가 맞은편에 앉아 특산품 간식거리를 쭉 훑더니, 상대적으로 덜 줄어든 것을 몇 개 집어먹었다.

쌀과자에는 감히 손도 안 대겠다는 마음가짐.

아무튼 세 명이 다 모였기에,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상자깡의 시간이 돌아왔답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랜덤박스를 하나씩 꺼냈다.

[대응표국 랜덤박스(E)] *3

E랭크 랜덤박스를 총 4개 얻었으나, 신병철에게 하나 넘겨서 찻잔이 나왔다.

따라서 남은 것은 셋.

[대응표행 랜덤박스(D)] *3

D랭크는 총 7개가 드랍되었으나, 그중 넷을 봉마함으로 바꿔서 마찬가지로 세 개가 남았다.

"...."

한편, 안정미는 내가 인벤토리에서 랜덤박스를 꺼내는 즉시 뒤쪽으로 스르르 물러나더니 투명하게 변했다.

지난 깃털뱀 사원 상자깡에서 갑자기 서예인이 그녀에게 화살을 돌렸고, 어쩔 수 없이 대신 연 상자에서 F급 나무잔이 나왔었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벌어질까 봐 일찌감치 발을 뺀 것이다.

실로 미래전략실 팀장다운 처세술이며, 베테랑 총사다운 은신술이었다.

'유감.'

아쉬운 대로, 먼저 D랭크 랜덤박스를 서예인에게 넘겨주었다.

"복덩이님,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지난 몇 번의 실험을 통해 서예인의 행운이 충전식에 가까운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한두 번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주고, 그 뒤로는 점점 평범한 사람의 운과 비슷해지는 거다.

따라서 등급이 높은 D랭크를 먼저 열도록 하는 게 최선이다.

"...."

랜덤박스를 받아 든 서예인이 항상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덮개를 열려다가, 손을 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나중에 열래."

그리고 살살 고개를 젓는 서예인.

지금 열면 기대 이하의 결과물이 나오기라도 하는 걸까.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서, 일단 그러려니 했다.

'대박이 강요한다고 터지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 상황에서는 서예인이 슈퍼 갑 오브 갑이다.

본인이 내킬 때 열도록 놔두는 것이 아예 안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나는 고현우를 마주 보며 E랭크 랜덤박스를 집어 들었다.

"고현우, 승부다."

"...!"

고현우가 내 의도를 알아채곤 마찬가지로 랜덤박스를 집었다.

누가 더 높은 등급을 뽑는가 승부.

"김 형과의 첫 승부가 이런 식이 될 줄은.... 허나 좋소. 피하지 않으리다."

"셋 세면 여는 거다. 셋, 둘—"

"—하나."

우리는 동시에 랜덤박스를 개봉했다.

- 달칵,

- 달칵,

[십년하수오(E)]

[십년하수오(E)]

"무승부네."

"무승부군."

우리는 서로를 보며 씩 웃곤 하수오를 각자 인벤토리에 챙겨 넣었다.

슬쩍 서예인에게 눈짓으로 묻자 여전히 고개를 살살 가로젓는다.

아직도 때가 아니라는 뜻.

해서 다시 고현우와 D랭크 랜덤박스를 하나씩 집었다.

"먼저 열겠소."

"그러십쇼."

고현우가 눈을 감은 채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상자 덮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 번쩍!

안에 든 것은 작은 목갑 둘.

첫 번째 목갑은 잘게 빻은 가루, 두 번째는 콩알만 한 알갱이로 가득 차 있었다.

[금창약(D)]

[내상약(D)]

금창약은 외상, 즉 피육의 상처를 다스리는 가루약.

내상약은 말 그대로 내상을 다스리는 단환이다.

"본인에게 꼭 필요한 게 나왔구려."

"그러게."

나야 고인물다운 회피 능력으로 어지간해서는 맞을 일이 없지만, 고현우는 그렇지 않다.

흑사방만 해도 히든보스 백사를 만나 내상을 잔뜩 입었었고, 깃털뱀 사원에서는 비교적 피해가 적었으나 여기저기 긁혀서 왔었다.

앞으로 지하층을 드나들며 어떤 강적을 만날지 모르는데, 그렇다고 비싸디비싼 포션을 구비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런 와중에 내외상약이 하나씩 나왔으니 어지간한 상처는 저걸로 치료할 수 있을 거다.

다음은 내 차례.

나 역시 마음가짐을 경건하게 하고, 곧바로 D랭크 랜덤박스를 개봉했다.

- 번쩍—!

[랭크 업(D)]

"나도 선방했네."

랭크 업은 영구적으로 사용자의 능력치를 올려 주기에, 동급의 다른 아이템보다 가치가 높다.

이제 남은 것은 D 하나, E 하나.

다시 서예인에게 물었다.

"지금은 어때?"

"열어 볼래."

드디어 준비가 되었는지 D랭크 랜덤박스를 자기 앞으로 슬슬 끌어오는 서예인.

그리고 우리와는 달리,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태도로 랜덤박스를 활짝 열어젖혔다.

- 콰아아아아—!

그리고 예상대로, 오색빛 창연한 광채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며 장내를 뒤덮었다.

'이건 B랭크 확정이네.'

이펙트가 장난이 아닌 걸로 보아 고등급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다.

어떤 B랭크 아이템일지는 봐야 알 테니까.

눈을 보호하며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시야를 가득 메운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새하얀 부적 한 장.

[정화부(B)]

▷마기를 정화합니다.

"대박이네."

"어디에 쓰이는 물건이오?"

"봉마함 얻어 온 거 있잖아. 그거랑 한 짝이야."

"...과연."

봉마함은 지나치게 짙은 마기를 띠고 있어, 일반 무인은 물론 마인조차 실력이 어중간하면 건드릴 수 없다.

정화부는 그 마기를 상당 부분 정화, 혹은 중화하는 역할을 해 준다.

원래는 따로 정화부를 얻거나 그 외의 방식으로 마기를 정화해야 하는데, 서예인이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랜덤박스에서 덜컥 뽑아 버린 것이다.

"역시 복덩이님이십니다."

"응."

나는 쌀과자를 하나 더 조공으로 바쳤다.

이제 마지막 E등급이 하나 남은 상황.

"하는 김에 이것도 열어 볼래?"

"...."

서예인이 랜덤박스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몸을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인데도 계속 빤히 바라본다.

그러다가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이동하더니 또 그곳을 빤히 바라본다.

그것이 두어 번 반복되고, 결국 안정미가 은신을 풀고 나타났다.

계속 투명화를 유지하고 모른 척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 봐야 나중에 자기만 고달파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안정미는 사약을 받아드는 대역죄인처럼 E랭크 랜덤박스를 넘겨받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격려를 보냈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E랭크니까 시원하게 F급 뽑으셔도 괜찮아요."

"네, 김호님. ...그럼 열어 보겠습니다."

- 달칵,

[대응표국 찻잔(F)]

안정미의 안색이 찻잔과 같아졌다.

"죄송합니다."

"괜찮다니까요."

집사님만 그런 게 아니거든요.

뜻밖의 콜렉터 동지가 생겨 버린 신병철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