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자요석 채굴 (2)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접근이 꽤 어려운 5층짜리 구조물에 헌터 하나가 있었다.
짓다가 만 빌딩으로 보이는 건물의 난간에서 총구만 살짝 내밀고 반대편을 노리는 것이다.
던전 콘셉트 자체가 '버려진 광산 도시'이다 보니, 버려진 빌딩이 있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야! 쫄지 말고 채굴하라고!"
"그렇게 입만 털지 말고 네가 직접 올라가 봐라! 채굴이 되나! 저격을 바로 하는데!"
"답답한 새끼! 내가 간다, 가! 간...."
타앙!
"...!"
나선형으로 만들어진 이동로를 따라, 작은 돌산을 오르던 헌터 하나가 비명횡사했다.
정확히 관자놀이를 관통한 마탄은 헌터를 저승으로 보내 버렸다.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격의 정확도는 놀라울 정도로 높았다.
[정조준]
강후가 반대편의 헌터들을 저격하고 있는 헌터의 모습을 정조준으로 확대했다.
그러자 한 여자가 보였다.
확대된 시야에서는 어느새 그녀가 총구를 자신에게 돌리고는 방아쇠를 당기려 하고 있었다.
"...?"
[신속 회피]
강후가 바로 스킬을 썼다.
동시에 그녀는 강후가 있는 방향으로 세 발을 쐈다.
그녀가 조준한 곳은 강후가 있던 위치가 아니었다.
앞으로 5m 정도 떨어진 지점으로 쐈다.
똑같은 위치에 세 발을 맞춘 것이다.
'경고 사격.'
의미는 확실하게 이해했다.
그녀는 강후의 본능적인 회피에 놀랐는지, 입꼬리가 살짝 씰룩이고 있었다.
좀 더 겁을 줄 요량으로 강후의 발 근처를 노렸는데, 순식간에 강후가 회피 기동을 한 것이다.
그녀는 눈에 특수한 고글을 착용하고 있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것이 아이템이 틀림없어 보였다.
"음."
강후가 때마침 옆에 있던 작은 바위를 타깃으로 삼아, 횡 이동을 하며 모습을 숨겼다.
가까이 보이는 돌산으로 갔다가는 그녀의 집요한 저격에 당할 판이었다.
아마도 돌산을 선점한 헌터들과 교전 중인 듯한데, 애매한 교착 상태인 것으로 보였다.
헌터들도 괜히 그녀에게 접근했다가 머리에 구멍이 뚫릴까 봐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고.
그녀 역시 자리를 잡았는데, 빠져나갈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일종의 눈치 싸움을 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교착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된다.
'균형을 깨는 건, 역시 지원군의 등장이지.'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진 강후의 모습을 부지런히 찾는 것이 보였지만, 위치를 특정하지는 못했다.
[무영]
무영 스킬까지 활용하면서 기척을 아예 없애다시피 했다.
이쯤 되자, 모든 감각을 최대한으로 열어 강후의 위치를 쫓으려던 그녀의 계획도 수포가 됐다.
그 사이.
강후는 조용히 빌딩 입구로 진입하여, 단숨에 그녀가 있는 5층의 난간 옆으로 붙었다.
그리고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녀의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필요한 게 뭐지?"
"아...!"
갑자기 들려온 강후의 목소리에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방금 사라진 것을 본 것 같은데, 어느새 건물에 올라와 옆까지 접근했다.
강후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미 죽었을 상황이었다.
"자요석이 필요한 건지, 아니면 저놈들이랑 싸우고 싶은 건지 궁금한데."
"누구야, 당신은?"
"나? 자요석 캐러 온 사람."
강후가 돌산을 가리켰다.
여기서 자요석을 캘 수 있으면, 굳이 라테우스 던전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필요가 없다.
어차피 그곳도 미리 자리를 선점한 헌터들은 있을 터.
피차 똑같이 고생할 거라면, 차라리 지원군을 하나 둘 수 있는 여기가 훨씬 낫다.
그녀가 답했다.
"자요석이 필요해."
"좋아. 그럼 목적은 일치하네. 얼마나 필요하지?"
"500g."
"적당한 양이군. 그럼 내가 네 자요석까지 채굴을 해 올 테니, 힘을 합치는 건 어때?"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그건 내 사정이니까 네가 힘을 보탤 수 있는지만 말하면 돼. 오지랖 넓게 걱정하지 말고."
강후가 웃었다.
헌터가 자요석을 채굴하려면 다량의 마나를 필요로 한다.
청명 수용소에서 마석을 채굴할 때도 그랬었다.
강후가 수시로 광산에 끌려갔던 건, 마나 활용량이 많아 채굴 효율이 좋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선천성 마나 과민증 때문에 강후가 마나 수급이 용이하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다.
어쨌든 마나 사용은 걱정거리가 아니므로, 강후 입장에서는 돌산 꼭대기만 갈 수 있으면 됐다.
"가능해."
"그럼, 잠깐 팀이 되자. 콜?"
"콜."
전략적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녀가 되물었다.
"그쪽은 이름이 뭐야? 난 반세영이라고 해. 나이는 스물 넷."
"정선규. 스물 아홉."
강후가 천연덕스럽게 가명을 말했다. 반세영도 마찬가지다. 본명은 아닐 것이다.
"그럼 선규 오빠라고 부를게."
"부를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어쨌든 이동로를 잡아줘. 엄호 아닌 직접 사격에 포커스를 맞추자고."
"알겠어."
파앗!
강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반세영은 다시금 감각을 확장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강후의 위치와 이동 경로를 특정할 수 없었다.
단순하게 은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기척을 지우는 스킬까지 더한 느낌이었다.
세상은 넓고 실력 좋은 헌터는 많다고 하지만, 이런 암살자면 결코 만만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모르고 경고 사격이랍시고 발 앞에다가 세 발이나 마탄을 쏴댔으니....
강후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지금쯤 저승에 있었겠다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 * *
얼마 후.
"이, 이 새끼 뭐야?"
"너, 뭔데?"
강후가 돌산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헌터들이 화들짝 놀라 공격 태세를 취했다.
인원은 일단 눈에 보이는 것만 해서 열 명.
성좌 정보가 보이는 녀석은 없었다.
아마도 레벨 100 언저리 녀석들일 것이다.
앞서 살짝 스캔했었던 반세영의 성좌 정보가 총 셋이었다.
어림짐작으로 반세영의 레벨이 200 이상일 것이라 유추해 볼 수 있는 상황.
그런 그녀가 레벨이 낮은 헌터를 상대로 우세를 점하지 못한 것은 치명적인 약점 때문일 것이다.
'모든 거너의 가장 큰 딜레마는 근접전에서 맥을 못 춘다는 거지. 한 우물만 파면 망하니까.'
고화력을 위해서는 점점 더 긴 총을 들고 다녀야 하는 거너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그녀는 총열이 꽤 긴 녀석을 들고 있었다. 이러면 작정하고 달라붙는 헌터에게는 쥐약이다.
강후가 혈루를 역수로 쥔 상태에서 양팔을 들고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얘들아. 딱 자요석 두 덩어리만 캐고 갈게. 잠깐만 어디서 쉬다 오면 안 될까?"
"뭐래, 이 X신은?"
"우리 칼바람이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이 뜨내기 새끼야?"
"아, 너희 패거리 이름이 칼바람이구나. 이름 잘 지었네. 나락으로 보내고 싶어질 만큼."
"어디서 되도 않는 개그를 처하고 있어, 지금."
칼바람 패거리들이 으르렁댔다.
그 와중에 반세영의 저격은 신경이 쓰였는지, 저마다 철제 장벽 뒤에서 열심히 입을 털어대고 있었다.
'맛대가리는 없는 놈들이네.'
성좌와 계약한 헌터가 한 명도 없어 뒷맛이 아쉬웠지만, 지금은 목적에 충실할 때다.
강후는 사실 여기를 지키고 있는 헌터들보다, 돌산 곳곳에 설치된 트랩이 걱정됐다.
실력 있는 기술자가 트랩을 깔아놨다면, 헌터를 다 정리해도 접근이 어려울 수 있다.
"안 그래도 저년 때문에 짜증이 나던 차에 잘 됐다. 야, 이 새끼부터 족쳐!"
대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한데 뒤섞여서 싸우면 반세영도 쉽게 엄호 사격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본 전략적 판단이었다.
분명 그것은 대장의 입장에서는 아주 합리적이고도 옳은 생각이었다. 그림은 좋았다.
다만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상대가 초근접전을 선호하는 강후라는 것, 그뿐이었다.
"나야 환영이지."
강후가 행복한 표정으로 협상의 결렬을 반겼다.
* * *
전투 시작과 동시에.
"음...."
방아쇠에 검지를 갖다 대고 있던 반세영이 손가락을 펴고는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굳이 자신이 이동로를 뚫어주기 위한 지원 사격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분명 강후는 열 명의 칼바람 패거리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전혀 열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정적이었다.
가까이 접근하는 놈부터 차례대로 몸에 상처를 냈고, 전투에 필요한 부위만 해체하듯 찔러냈다.
그래, 농락이었다.
그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강후는 칼바람 패거리에게 단 한 차례의 유효타도 허용하지 않았다.
돌산에 배치된 패거리들은 나름 날쌘 녀석들이었다.
움직임이 날래다 보니, 꽤 오랜 기간 이어진 반세영의 저격에도 희생자가 적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강후도 고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강후의 위치는 계속 극적으로 바뀌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라는 수식어를 자신 있게 쓰라면 지금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특히 환영술과 그림자 걸음을 동시에 펼쳤을 때는 반세영도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도대체 어떤 실루엣을 쫓아가야 진짜 강후를 찾아낼 수 있을지 막막했던 것이다.
다시금 간담이 서늘했다.
이런 사람을 적으로 인식하고서 경고 사격을 했던 상황이 아닌가?
그러고도 목숨이 무사했기에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아아악! 아악!"
"다리! 내 다리...!"
돌산 입구에서 강후와 뒤엉켜 싸운 칼바람 패거리 전원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멀쩡한 놈은 한 명도 없었다.
이미 정리되다시피 한 전장.
마탄 한 발을 보탤 여지조차 없는 완벽한 클리어였다.
바로 그때.
탁!
강후가 손가락을 튕기며, 상황을 매듭짓는 피니쉬를 선보였다.
혈화.
그 폭발의 영역에 칼바람 패거리 전원이 사이좋게 자리하고 있었다.
퍼퍼퍼펑! 퍼펑! 펑!
"미쳤다."
반세영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상처 입은 칼바람 패거리의 몸에서 피의 꽃이 아름답게 공중을 수놓으며 피어오르는 것을.
혈화는 지금껏 그녀가 봤던 스킬 중에서 가장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이펙트를 갖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희생양이 된 대상에게는 지옥으로 향하는 급행열차가 될 것이다.
"뭐 하는 헌터지?"
반세영이 강후를 다시 살폈다.
상황은 이미 정리됐고, 그가 누구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제법 헌터에 대한 소식에 밝다고 생각해 왔지만, 강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깔끔하고 완벽한 은신부터 시작해서, 혈화 같은 스타일리쉬한 스킬도 갖고 있는 '암살자'.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암살자라면, 어딘가에서 이름을 한 번쯤은 날려도 봤을 법한데.
정선규라는 이름과 얼굴이 그녀에게는 너무 생소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나타난 신예라고 하기에는 가진 실력의 깊이와 완성도가 높았다.
'만들어진' 실력자인 것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운 좋은' 실력자가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꿀꺽-.
그를 지켜보는 그녀는 쉴 새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61화 임밸런스 포인트 (1)
* * *
라테우스 자요석을 넉넉하게 캐는 작업은 입구의 패거리들을 정리하자 손쉽게 끝났다.
침입자를 견제하기 위한 트랩이 정교하게 설치되어 있는 것을 걱정했던 강후지만.
그것은 놈들에 대한 과대평가였던 듯했다.
티가 확실히 나는 트랩은 피하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물론 강후에게 쉽게 보였을 뿐, 다른 헌터가 왔다면 얘기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일이 잘 풀렸다.
다만 몇몇 패거리들이 이쪽으로 오다가 전투가 펼쳐진 것을 보고 입구로 간 것을 본 상황.
그래서 이쪽은 별일이 없더라도, 나중에 던전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문제가 좀 생길 듯했다.
오픈형 던전은 공략을 마친 다음 출구가 열리는 폐쇄형 던전과 달리 입구와 출구가 같아서다.
'일단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강후가 걱정을 미뤘다.
지금 입구에 뭐가 있을지, 어떤 식으로 상황이 꼬일지 생각해 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다.
그건 나갈 때 생각하고, 확인하고, 판단하면 된다. 탈출 전략도 그때 세우면 된다.
강후가 반세영을 불러 자요석을 나눴다.
그녀에게 약속한 물량을 줬고, 자신도 의뢰받은 수량에서 좀 더 넉넉하게 챙겼다.
생각보다 입구의 전투가 손쉽게 풀려 반세영이 한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매정하게 굴진 않았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분명 일부 헌터는 위축되거나, 적극적인 전투를 펼치지 못했을 테니까.
강후에게 자요석을 넘겨받은 반세영이 감사히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일이 어렵게 흘러가나 싶었는데."
"뭐, 나도 덕분에 멀리 안 가고 자요석을 캤으니 서로 이득이지."
"선규 오빠."
"응?"
"어디 소속이야? 딱 봐도 꽤 유명한 길드에 들어가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헌터들은 실력이 좀 있다 싶으면 먼저 소속부터 묻는다.
선입견이랄까? 이렇게 실력 좋은 헌터를 세상이 절대 가만히 둘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실력이 있음에도 용병 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당장 강후의 눈앞에 있는 사람, 반세영이 그런 케이스다.
실력이 있다고 판단하는 강후의 생각과 다르게, 그녀 본인은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길드 활동을 안 하는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강후의 눈에 그녀는 서포트 거너로서는 완벽히 최적화가 된 실력자였다.
특히 마탄 적중률이 대단했다.
일반적인 총과 달리 마탄을 쏘는 총은 마나의 흐름과 출력, 공기 저항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심지어 타깃의 맷집이나 항마력도 같이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여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
괜히 거너가 희소가치가 높은 직업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효율이 크게 떨어지는 직업으로 취급받기도 하고. 하지만 그녀는 결이 좀 달랐다.
"소속 없어."
"정말? 이런 실력을 갖고 있는데 그냥 둔다고?"
"선택은 내 몫이니까."
"말도 안 돼. 아까 전투하는 걸 보니, 그 단기간에도 스킬을 엄청 많이 쓰던데?"
반세영은 당연히 강후가 길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헌터라고 생각했다.
심심찮게 스킬북 지원도 받았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만큼 강후의 공격 레퍼토리가 다양했다.
하지만 독고다이라고 하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해서 그녀가 가늘게 눈을 떴다.
강후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소속에 대해서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자. 우리 볼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 혹시 괜찮으면 번호를 좀 받을 수 있을까?"
어지간해서는 먼저 번호를 요청하지 않는 강후지만, 이번에는 번호를 달라고 했다.
그녀에게 좋은 일을 해 주려는 게 아니다.
그녀가 서포트 개념으로 붙어서 팀플레이를 할 수 있다면, 효율이 극대화될 것 같아서다.
"나야 좋지! 근데 오빠에게 내가 어울리는 사람일까?"
반세영은 이미 강후에게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아마 강후의 레벨 정보를 봤다면, 쥐구멍이라도 찾아가서 숨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강후는 레벨 250, 아니, 그 이상은 충분히 되는 실력파 헌터로 그려져 있었다.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는 다시 만나서 맞춰 봐야 알겠지."
"하긴."
담백한 강후의 대답에 반세영이 바로 자신의 번호를 적어줬다.
상당히 절제된 듯하면서, 할 말은 하는 강후의 스타일이 꽤 마음에 들었다.
"또 보자고."
번호를 받은 강후가 바로 자리를 떴다.
자요석 채굴도 끝난 마당에 굳이 무덤이 된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제 임밸런스 포인트를 찾아갈 시간.
시공간과 차원이 만들어낸 오류의 이득을 볼 때가 왔다.
* * *
같은 시각.
장시환은 공태수의 왼팔을 가져간 의문의 인물에 대한 자료를 계속 검토하고 있었다.
채관형이 왜 그리 관심을 갖냐고 핀잔을 줄 만큼, 평소보다 많은 시간을 쓰는 중이었다.
본능이자 직감이었다.
지금껏 장시환은 쓸만한 동료나 부하를 늘려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많이 믿어왔다.
뭔가 인연의 끈이 닿기만 하면, 자신에게 큰 힘이 되어줄 사람일 것 같다는 그런 생각.
그렇게 맺어진 대표적인 인연이 채관형이었고, 정화 길드의 간부들 역시 모두 그랬다.
공태수가 기습을 당했던 현장의 CCTV로는 도무지 누구인지 판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일 주변에서 운행했던 모든 버스의 내부 CCTV 정보와 길거리, 심지어 건물 옥상의 영상까지 모두 확보했다.
그리고 정보팀 인력을 동원해서 1차 필터링을 마쳤다.
이를테면 확실하게 일반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후보군에서 빼고.
더 나아가 마법계, 치유계 등으로 보이는 헌터들도 관심 선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착용한 무기나 차림을 보면 알아볼 수 있는 바가 있어, 분류 작업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영상에서 파악된 얼굴 중에 소속된 길드가 있는 헌터도 모두 제외시켰다.
미치지 않은 이상, 길드에 소속된 상태에서 공태수의 팔을 노렸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비 목록에 파악된 용병의 이름을 채워가고 있었다.
공태수의 팔을 자른 헌터는 용병일 것이 틀림없기에.
그런데.
"응?"
대외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장시환에게는 초면이 아닌 얼굴 하나가 보였다.
얼굴은 익숙한데, 기억이 바로 나지 않는다. 왜 그런 걸까.
다시 생각의 방향을 과거로 돌려봤다.
"아. 전망대?"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전망대에서 자신의 옆자리에 있었던 헌터.
자신을 보고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그 헌터였다.
첫인상이 다른 헌터와 달라서 기억에 두고 있었는데, 그 헌터의 얼굴이 영상에 잡힌 것이다.
"허허.... 혼자 움직였고. 무장은 단검인가? 심지어 편한 버스를 두고 건물 옥상으로 움직였어?"
장시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느슨한 이음새 때문에 다른 쪽으로 방향이 돌아가 있던 CCTV 덕분에 강후를 잡아낸 것이다.
화질도 좋다 보니, 강후가 화면에 잡힌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얼굴을 알아보기는 너무 쉬웠다.
물론 종종 도약 능력이 좋은 헌터들이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는 이동을 할 때가 있다.
다급하게 누군가를 추격하거나, 반대로 도망칠 일이 있을 때 말이다.
하지만 재미 삼아서 그러는 일은 거의 없을뿐더러, 한 가지 더 의심되는 부분이 있었다.
이 시각, 공태수는 버스를 타고 도로 위를 이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영상 속의 주인공인 강후는 분명히 버스의 동선과 비슷한 루트를 이동하고 있었다.
"야, 이거 재밌게 흘러가는데."
공태수의 왼팔을 잘라간 남자가 이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호기심이 끓어올랐다.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가 않다고 생각했던 전망대의 남자.
바로 그가 공태수를 노린 헌터였을 가능성이 장시환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높아져 가고 있었다.
* * *
그 무렵.
"던전은 넓고, 미친놈은 많고."
강후는 자신을 미행하다가 기습을 시도했던 두 헌터를 처치하고, 강탈한 성좌 목록을 보고 있었다.
[위대한 독재자]
[솔로 플레이 시, 경험치 10%를 추가로 보조합니다. 체력 회복 속도가 2배 상승합니다.]
[사막의 여우]
[사막 지형의 던전에서 경험치 25%를 추가로 보조합니다. 체력 회복 속도가 2배 상승합니다.]
처음에 두 헌터가 무슨 커플이나 쌍둥이 개념인가 싶었을 정도로 성좌 구성이 유사했다.
어쨌든.
위대한 독재자 성좌는 솔로 플레이 비율이 거의 100%에 가까운 강후에게는 시너지가 좋았고.
사막의 여우 역시, 사막형 던전을 골라서 다닐 수 있으면 효율이 너무 좋은 성좌였다.
이런 성좌를 가지고도 비겁하게 기습을 시도하려다가 죽은 두 놈이 한심할 따름.
"아이템까지 주고 죽었으니, 이건 뭐 아낌없이 주는 나무네."
두 헌터에게서 10억 원어치의 아이템도 챙겼다.
마나 관련 아이템이라 강후에게는 필요가 없었고, 이후 이예린에게 팔기로 생각을 정리했다.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다시 본래의 이동 경로에 진입한 강후가 기억을 되짚으며 빠르게 목적지를 찾아갔다.
또렷이 원작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 평생 찾아내지 못할 곳에 임밸런스 포인트가 있었다.
"보인다."
특징이 드러난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는 풍경이지만, 오류점을 알고 있으면 찾아낼 수 있는 광경.
울창한 나무숲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중, 바람 반대 방향으로 계속 흔들리는 녀석이 있다.
던전도 결국 시스템과 데이터의 산물이다 보니, 구현 과정에서 발생한 일종의 오류인 셈이다.
수백 그루의 나무 중에 유일하게 그 나뭇가지만이 자연의 순리와 다르게 움직이고.
그 나무 뒤편에 임밸런스 포인트를 활성화할 수 있는 숨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공간이 투명하기 때문에 임밸런스 포인트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위치였다.
'무협 소설로 따지면 영약이고, 판타지 소설로 보면 만드라고라. 소설 속 주인공의 전유물.'
임밸런스 포인트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주인공의 급성장을 도와주는 확실한 터닝 포인트.
원작에서는 장시환이 꼬박꼬박, 우걱우걱 모든 임밸런스 포인트의 특혜를 누렸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곧바로 코앞까지 접근한 강후가 허공에 손을 뻗은 채, 마나를 천천히 흘려내기 시작했다.
부담이 심해질 상황을 대비해서 솔라키움을 먹을 준비도 마쳤다.
적당한 두통 정도는 참고 넘기겠지만, 그 이상으로 압박이 심해지면 먹을 생각이었다.
우웅. 우웅. 우웅.
강후가 불어넣는 마나만큼 투명했던 허공이 점점 불투명한 하늘색으로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순식간에 무려 100의 마나를 임밸런스 포인트가 잡아먹었다.
강후가 무한에 가까운 마나 수급이 가능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시도하다가 끝났을 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완연한 하늘색으로 변한 공간의 기운이 강후를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샤아아아!
이내 자석에 이끌리듯이 강후의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레벨이 올랐습니다!]
[신강후 Lv. 55]
[레벨이 올랐습니다!]
[신강후 Lv. 56]
[레벨이 올랐습니다!]
[신강후 Lv. 57]
상태창의 레벨 정보가 연속으로 숫자를 갈아치워 가며, 상승 갱신되기 시작했다.
경험치 풍년의 시작이었다!
62화 임밸런스 포인트 (2)
* * *
"경험치 버프 때문인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올랐다."
강후가 훌쩍 수십 단계를 뛰어넘어버린 자신의 레벨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현재 강후의 레벨은 85였다.
처음에는 70에서 75 사이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경험치가 더 많이 들어온 것이다.
물론 레벨이 낮으므로 경험치에 따른 상승폭이 높은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엄청난 급성장이었다.
아득해 보이던 레벨 100의 구간이 순식간에 가시권 안에 확 들어와 버렸다.
[황야의 전략가가 특이한 성장 루트를 알고 있는 당신의 지식에 특별함을 느낍니다.]
[정의의 사도가 이런 성장 방식은 비록 정석은 아니지만, 대단히 기쁜 일이라고 말합니다.]
성장을 지켜본 성좌들이 관심을 보인다. 신기할 것이다. 남들과 다른 성장 방식을 알고 있으니.
[네가 이런 것을 알고 있다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상당히 흥미롭구나.]
차원 강탈자도 말을 보탰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지식을 강후가 갖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사실 강후와 처음 계약을 했을 때부터 그에게서 특별함을 느껴 왔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태생의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많은 것을 꿰뚫어 보는 그녀지만, 강후의 빙의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몇 군데 더 찾아갈 거야."
기억 속에 아직 네 군데의 임밸런스 포인트가 더 있다.
그중 두 군데는 위치를 어렴풋이 알고, 나머지 두 군데는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
후자의 경우는 머릿속에서 구상만 해 뒀던 상태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에 남아 있었다는 얘기다.
기억이 있는 두 군데는 각각 제주도와 일본에 자리를 잡고 있는 포인트였다.
일본에 있는 임밸런스 포인트는 안영호를 만나러 가게 될 때, 한 묶음으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든든하네."
강후가 폭발적인 레벨업을 통해 얻은 보너스 포인트를 전부 체력에 투자했다.
매번 한 번씩 클릭해서 올리던 스탯을 수십 번을 연달아 클릭하니, 그 나름의 쾌감이 있었다.
"후우."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듯, 마나가 쭉 빨려 나간 느낌에 강후가 대충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나무숲만 울창할 뿐, 몬스터나 채굴의 거리가 될 만한 것이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 시야를 확장해 봐도, 헌터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대전역을 한 번 가기는 해야겠네. 베니한테 얘기도 들은 마당에 하데스를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이후의 계획을 떠올렸다.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클럽 하데스를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웠다.
입장보다 퇴장을 걱정해야 하는 던전이기는 하지만, 리스크를 감수할 만큼의 가치는 충분했다.
"마스터 케이(K)도 한 번 보러 가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전에도 몇 번 염두에 두었던 적이 있는 사람을 떠올렸다.
마스터 케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솔라키움을 직접 키울 줄 알며, 많은 것을 연구한 헌터이다.
백발의 노인이고, 동시에 학자의 느낌도 가진 사람이다. 일종의 현자 포지션이랄까?
깨달은 바가 많은 인물이나, 자기 세력은 없다.
원작에서는 어떤 거대한 세력의 뒷배경인 것처럼 냄새만 풍겨뒀을 뿐, 그 이상의 내용은 없었다.
강후가 마스터 케이를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명확했다.
바로 선천성 마나 과민증 때문이다.
솔라키움에 대해 연구해온 그라면, 마나 과민증에 대한 해결법도 알지 않을까 싶어서다.
매드 솔라키움은 수급하기가 어렵고, 일반 솔라키움은 고통을 완벽하게 억제하지는 못한다.
결국은 근본적인 해결이 필요한데, 마스터 케이에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신강후의 아이덴티티와도 같았던 이 병을 과연 해결할 수 있을까? 이게 없으면 신강후가 아니라는 표현까지 원작에 적었었지.'
떠오르는 원작의 내용에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독자들도 신강후를 보면, 항상 창백한 얼굴로 힘겹게 싸우는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었으니까.
하나의 상징과 같은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쉽게 해결될까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한다.
설령 결론을 불가능이라는 단어로 얻더라도, 해 보는 게 맞다.
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아예 확률이 0%니까.
일단 시도해 보면 확률은 다양하게 바뀐다.
"이제 슬슬 나가는 걱정을 해야겠네."
라테우스 던전에서의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
자요석도 반세영 덕분에 안정적으로 잘 캤고, 임밸런스 포인트에서 '꿀'도 잘 빨았다.
남은 것은 입구에 진을 치고 있을 것이 분명한 칼바람 패거리를 어떻게 따돌리냐의 문제.
"뭐, 재껴야지."
결론은 항상 간단하다.
막히면 뚫으면 되고, 방해가 되면 치우면 된다. 죽이려 하면 죽이면 되고.
* * *
돌아오는 길.
강후는 생각지도 않았던 루트에서 중간 보스의 흔적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이동로처럼 보이는 길이었는데, 특이한 발자국 하나가 있어서였다.
"데레일라가 여기에 있었네."
발자국의 주인을 직접 보지 않고도, 강후는 그 이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데레일라.
암살자 계열의 인간형 몬스터로 '기교의 장막'이라는 특수 스킬을 가지고 있다.
보스 스킬이다.
기교의 장막을 펼치면, 그 안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은신 감지가 절대 안 되는 특징이 있다.
은신을 감지하는 능력보다 무조건 '상위' 판정을 받기 때문에, 알아차릴 수 없다.
절대 은신 감지 능력 판정이 있어도, 이를 무시하고 감지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데레일라는 특정한 던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하게 이곳저곳에 퍼져 있는 형태로 있다.
그래서 데레일라를 만난 헌터들에게는 정말 재수가 없다는 수식어가 꼭 붙고는 했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을 낮은 확률로 마주친 것이니까. 이득을 볼 부분이 전혀 없어서다.
하지만 강후에게는 스킬 강탈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오히려 넝쿨째 굴러들어 온 복이었다.
물론 이 복은 데레일라를 죽여야만 복이 된다. 반대로 당해버리면 독이 되는 셈이다.
"못 참지, 이건."
데레일라는 무조건 잡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쉽지는 않다.
하지만 라테우스 던전의 데레일라는 조심성이 떨어지는 듯, 발자국이라는 흔적을 남겼다.
영민하고 똑똑한 녀석이었으면 애초에 발자국이 남을 지형을 통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으윽.
횡 이동을 활용해 은신 상태에 돌입한 강후가 은밀하게 발자국을 쫓기 시작했다.
기척을 숨기기 위해 추가로 시전한 무영은 덤이었다.
보이지 않는 적을 쫓는, 보이지 않는 자의 발걸음이 시작됐다.
* * *
그로부터 2시간 후.
라테우스 던전의 출입구 근처의 언덕가에 자리를 잡은 두 남녀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의 정체는 전세혁과 반세영.
강후가 앞서 만났던 두 인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서로 사촌지간인 관계였다.
각자 볼 일을 마친 두 사람은 앞서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고 있던 중이었다.
"세영아. 그 정도만 하고, 어지간해서는 내가 필요하면 날 찾아. 혼자 고생하지 말고."
"오빠, 그렇게 도움받아 버릇하면 성장을 못 해. 난 반쪽짜리 헌터가 되는 건 싫어."
"지금도 충분히 반쪽짜리 아니냐?"
"에잇, 오빠! 그러니까 반쪽짜리 헌터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한다는 얘기잖아!"
"하하하. 근데 예전부터 권했지만, 서브 무기 하나는 다룰 줄 아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래도 고민 중이야."
"서브 무기를 조금만 다룰 줄 알았어도, 아까 네가 말한 상황에서 도움받을 이유가 없었겠지."
"오랜만에 실력 좋은 헌터를 만난 것 같아. 정선규...."
"정선규라."
전세혁이 웃었다.
반세영에게 들은 설명과 강후를 만난 지점을 교차 체크해서, 이미 앞뒤 상황은 파악한 후였다.
사촌 동생 반세영이 만난 사람은 강후였다. 정선규라고 소개한 이름은 가명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클립스 내부 정보를 가진 전세혁이기에 강후의 본명을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굳이 반세영에게 강후의 본명을 알려주고 싶진 않았다. 가명을 쓰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에.
"오빠도 만났다 그랬나?"
"응. 오는 길에 만났지."
서로 이름은 다르게 알고 있지만, 똑같은 사람을 얘기하고 있는 상황.
전세혁이 강후가 보여주었던 퍼포먼스를 떠올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반세영이 강후에게 준 후한 평가는 절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였다.
신강후.
전세혁도 오랜만에 직접적인 관심을 갖게 된 헌터였다.
좀 더 알고 싶기에 던전에서 볼 일을 마친 이후에 한 번 더 보자고 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죽여! 저 자식이다!"
"우리 동료들을 죽인 놈이다!"
"족쳐!"
아까 전부터 던전 출입구 주변을 지키고 있던 헌터들이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바람' 무리였다.
라테우스 던전에 거점을 둔 조직으로 패거리라고 하기에는 제법 규모가 되는 조직이기도 했다.
"어? 선규 오빠인데?"
"볼거리가 생겼구만?"
둘이 동시에 강후를 알아봤다.
잘 됐지 싶었다.
칼바람 무리의 수는 보이는 것만 파악해도 최소 스무 명. 반면에 강후는 혼자다.
수적 열세의 전투일수록 수세에 있는 헌터는 더 많은 변수 창출과 다양한 레퍼토리가 강제된다.
강후의 입장에서야 힘들겠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아주 재밌는 볼거리가 생긴 셈이다.
"말은 바로 하자. 먼저 시비를 건 것은 너희 동료들이었어. 내가 먼저 나선 게 아니고."
"좆 까고, 그냥 뒈져!"
강후의 절제된 대화가 무색하게 칼바람 무리는 저마다 무기를 꼬나쥔 채, 강후에게 달려들었다.
애초에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을 예상한 듯, 강후의 대응도 즉각적이면서 빨랐다.
전세혁이 눈에 힘을 잔뜩 줬다.
강후라면 눈을 깜박이는 순간에도 다른 스킬을 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으어?"
그때, 최전방에서 강후에게 달려들던 헌터 하나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정신 교란 스킬이 있네."
전세혁이 곧바로 본질을 파악했다.
강후의 얕은 혼돈 스킬에 당한 헌터가 방향 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스킬 이름을 파악할 순 없었지만, 발현 기전을 알아차리는 것은 전세혁에게 어렵지 않았다.
"암살자가 정신 교란 스킬을?"
"클래스를 전제 조건으로 놓고, 정선규를 판단하려고 하면 복잡할 거야. 있는 그대로를 봐봐."
전세혁은 그가 한 말대로 강후를 어떤 직업군으로 단정 짓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재다능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에, 어떤 스킬을 봐도 놀랄 이유가 없었다.
그때.
"하아앗!"
방향을 잃고 헤매던 헌터가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동료를 향해서 훌쩍 몸을 날렸다.
도약에 진심인 자세와 잔뜩 힘이 들어간 무기 상태를 보니, 착각이 아닌 확신이 분명했다.
"환각이군."
환각 증세다.
아마 환각에 걸린 헌터는 지금의 공격 대상이 동료가 아닌 강후로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자신 있게 몸을 날리는 거겠지.
그리고 결국.
푸화아악!
"커억! 이, 이 새끼...."
팀킬이 일어났다.
전투 시작과 동시에 상황이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거...."
"환각 스킬이 있는 건가?"
절대다수인 칼바람 무리의 얼굴에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압도적인 수적 우위가 분명한 상황이지만, 뭔가 상황이 잘못 흘러가는 것 같았다.
너무 평온해 보이는 강후의 표정에서 극도의 이질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63화 김천 해방구 (1)
* * *
[철퇴의 무신]
[어떤 디버프 스킬에 노출되더라도 맷집 수치는 무조건 100 이상을 유지합니다.]
[광기의 수학자]
[확률에 영향을 받는 스킬의 경우에는 정확하게 확률을 계산하여 표시합니다.]
[강자지존]
[슬픈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단, 필요에 따라서 활성화도 가능합니다.]
상황을 정리하고, 그 안에서 강탈한 성좌의 계약을 확인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전 5분 만에 스물이 넘는 헌터 중에 다섯이 죽었다.
그중 셋은 성좌와 계약을 한 헌터였고, 강후는 그들의 계약을 알차게 챙길 수 있었다.
나머지는 '맛없는' 성좌를 갖고 있거나, 계약 자체가 없는 잔챙이들이었다.
강후의 입장에서는 굳이 이 녀석들과 계속 교전을 벌이며, 힘을 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기교의 장막]
앞서 데레일라를 제압하고, 녀석에게서 강탈한 기교의 장막 스킬을 썼다.
불투명한 회색빛으로 만들어진 장막 안에서 움직이니, 적들도 함부로 다가서지 못했다.
몇몇 헌터가 은신 감지를 하려는 듯이 정신을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감지가 안 돼...."
"물러서. 어딨는지 몰라!"
"빠지라고, 새끼들아!"
강후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어, 모두 겁을 집어먹고 물러날 뿐이었다.
1대 20으로 싸웠어도 진 상황이다. 여기에 은신까지 더해졌으니 싸울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후."
던전 밖으로 나온 강후가 호흡을 고르며, 만약을 생각하고 뒤를 돌아봤다.
혹시 칼바람 패거리의 헌터 일부가 뒤를 쫓아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과대평가였던 모양인지, 놈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던전 안에서는 점점 출입구로부터 칼바람 패거리들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강후의 뒤를 이어 전세혁과 반세영이 따라 나왔다.
강후는 서로 친분이 있어 보이는 두 사람을 보고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인맥이라는 요소는 종종 의외의 관계로 엮이기도 하는 만큼, 이상하지는 않았다.
미리 전세혁에게 언질을 받았는지, 반세영은 강후에게 다음에 꼭 연락할게요, 하는 멘트만 남기고는 멀찍이 자리를 벌렸다.
반세영이 충분히 먼 곳까지 떨어진 것을 확인한 전세혁이 운을 뗐다.
"인상적인 전투였어요. 스킬 종류가 엄청 많으시던데."
"잔재주를 좀 부릴 줄 압니다."
"이 던전에는 느낌상 의뢰 수행을 위해서 온 것 같은데. 솔로잉이 처음은 아닌 듯합니다만?"
"사실 지금까지 솔로 플레이 외로 움직여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혼자가 편하기도 하고요."
되짚어보면 누군가와 호흡을 맞춰서 던전을 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전략적으로 필요에 따라 바깥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윤상미 같은?
"원래는 느긋하게 술이나 한잔하면서 친분을 쌓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요."
"어떻게 바뀌었죠?"
전세혁의 관심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그는 앞으로도 활용가치가 큰 인물이다.
그를 통해 이클립스 내부의 정보까지 얻을 수 있다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강동현도 강후의 입장에서는 언젠가 다시 부딪힐 것이 '확정'적인 적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략적으로 서로 휴전을 하고 있을 뿐, 충돌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의뢰 하나 맡아보겠습니까?"
"의뢰 말입니까?"
"지인에게 부탁을 받은 게 있는데, 왠지 강후 씨도 솜씨가 꽤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테스트입니까?"
"이 정도 의뢰까지 성공시킬 수 있는 헌터라면 정말 깊게 친해지고 싶을 것 같거든요."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강후의 생각대로 테스트가 맞았다.
강후가 전세혁에게 테스트를 받을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부하가 될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와 친해지고 싶은 과정에 필요한 통과 의례가 있다면, 꼭 통과하고 싶었다.
전세혁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기 전에 꼭 이런 식으로 나름의 시험을 하는 모양이었다.
유별나다고 하고 싶진 않았다.
실력자가 실력자와만 친분을 트고 싶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마음에 안 들면 무시하고 인연을 안 만들면 그만이다.
"용병단 운영을 하시는 것 같진 않았는데."
"맞아요. 용병단 의뢰 같은 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으로 받은 의뢰의 나눔입니다."
"의뢰자에게는 동의가 된 사안이고요?"
"그럼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니까, 그 점은 걱정 안 하셔도."
전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 강후의 귀에 속삭인 내용은 예상과는 결이 다른 내용이었다.
강후가 놀라 되물었다.
"군벌 '심연'의 대장 이현석 씨의 조카를 구출해 달라는 겁니까?"
"맞아요. 조카 수현이.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자면 민수현이죠."
"민수현."
"현석이에게는 유일한 핏줄이기도 하고."
사라진 이현석의 조카를 구해 달라는 의뢰였다.
대외적으로 의뢰를 맡길 순 없어서, 지인들에게만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현석도 적이 많은 사람이다 보니, 공개 의뢰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어서다.
사라진 민수현을 찾아서 인질로 삼고, 이현석의 약점을 잡으려고 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저는 지인이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입이 무거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저는 강후 씨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니까."
전세혁의 말은 듣기에 따라 칭찬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위협으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즉, 이 비밀이 새어나가면 무조건 네 소행이다, 라는 확신을 한다는 얘기였다.
"직접 하실 생각은?"
"화력전은 자신 있지만, 기동전은 자신이 없거든요. 저는 불가능한 의뢰입니다."
"음."
전세혁이 깔끔하게 자신의 약점을 인정했다.
기동전을 운운하는 것을 보니, 빠른 움직임과 은신이 필요한 장소인 모양.
"민수현 씨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장소는?"
"예상이 아니라 확실한 장소입니다. 지역이 넓기는 하지만 분명 그 안에 있습니다."
"어디죠?"
"김천 해방구역."
"지옥을 찾아가셨군."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김천 해방구역.
보통 한 글자를 줄여서 김천 해방구로 불린다.
이름만 들어서는 그럴듯해 보이는 어감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완벽한 무법도시다.
연고 없는 용병, 길드에서 추방되거나 징계를 받은 헌터들, 온갖 범죄자들이 한곳에 모인 곳이다.
그야말로 범죄도시인데,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이 많은 구역이기도 했다.
오히려 어지간한 도시보다 번성한 곳으로 온갖 금지 약물과 마약이 판매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살인과 폭행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구역이기도 했다.
해방구에서 통용되는 몇 가지의 룰만 지키면 어떤 짓을 해도, 이곳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실 어지간한 헌터는 굳이 찾아갈 이유가 없는 장소다.
하지만 사람을 구해야 한다면, 그 안을 누비고 다녀야 하는 만큼 리스크가 큰 장소였다.
'괜찮은 아이템을 싸게 구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이 매력적이기는 한데.'
워낙에 죽는 헌터가 많다 보니, 아이템의 거래가 활발한 편이다.
출처 대부분은 죽이고 강탈했거나, 어딘가를 약탈해서 얻은 것이기는 하다.
"보상은 최소 50억 원. 그 외에 협의를 통해 심연에서 제공할 수 있는 편의를 꽤 제공할 겁니다."
"예를 들면?"
"심연이 꽉 잡고 있는 경기도 북동부 일대의 던전에 대한 여러 차례의 공략 기회겠죠."
구미가 당기는 보상이다.
던전 공략으로 미들 보스, 메인 보스를 잡아 스킬을 늘려가야 하는 강후에게는 매력적인 제안.
전세혁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제가 뒤를 보증할 거니까, 구출만 성공한다면 현석이로부터 많은 감사를 받을 겁니다."
"보증까지."
"그렇죠. 동네에서 길 잃은 어린아이 찾는 것도 아니고,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의뢰니까."
"좋습니다. 수락하죠."
강후가 의뢰를 받았다.
해방구에서 무쌍을 찍을 자신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적어도 죽지 않고,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서서였다.
그 근거에는 차원 강탈자로부터 얻은 네 번째 특전.
바로 지정 위치로의 이동이 있었다.
하루에 한 번밖에 쓸 수 없지만, 그래도 모자랄 것이 없는 옵션이기도 했다.
"술은 그다음에 하죠, 어때요?"
"그렇게 하죠. 바로 출발해도 될 것 같네요."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게다가 포항에서 김천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기도 했다.
물론 채굴한 자요석을 제공하고 의뢰 수당을 받아야 하는 만큼.
이예린에게 연락해서 직접 포항까지 내려오라고 할 생각이었다.
매번 그녀를 찾아가서 편의를 맞춰줬으니, 한 번 부르는 것쯤은 문제 될 것도 없다.
"잘 부탁합니다. 현석이가 이미 심연에서 몇몇 헌터를 보냈는데, 전부 죽은 모양입니다."
"그런 장소에 절 보내려고 하신다는 게 조금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믿는다고 생각해 주시면 더 좋지 않을까요? 하하."
강후는 민수현이 안에서 죽었다기보다는 탈출할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실력이 있는 마법계 헌터라고 했으니, 자기 자신을 지킬 힘 정도는 있을 터다.
그런데 들어가기만 했을 뿐,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어딘가에 숨어있기에 그럴듯했다.
* * *
연락을 받은 이예린이 바로 포항으로 내려오면서, 정산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자요석 채굴에 대한 의뢰 정산과 필요 없는 아이템 판매까지 전부 마치고 나니.
70억 원의 수익이 더해져, 총 176억 원의 실탄이 확보됐다.
해방구 내의 마켓을 휘젓고 다니기는 부족함 없는 금액이다.
2등급 이상을 사려는 것이 아니면.
이예린과의 짧은 만남.
하지만 중요한 얘기가 오갔다.
"일단 박민성 씨에 대해서는 찾아보는 중이에요. 실종자 의뢰에 들어가 있었던 건 맞네요."
"그 이후에 추가 소식 있으면 알려주시고."
"네. 그리고 한 가지 더. 장시환 씨에게서 선규 씨에 대한 정보 요청이 있었어요."
"음?"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규 씨의 CCTV 영상을 보내주고, 이 인물에 대해 알고 있냐는 거였죠."
"공태수 쪽 사건을 조사하고 있나 보네요. 자기와는 관련도 없는 일에 뭐 이리 관심을 갖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신경이 쓰이는 내용이었다.
공태수와 정화 길드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장시환과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장시환이 직접 알아보고 있다는 것은 공태수를 공격한 자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건데.
그 사람이 강후 본인이다 보니, 관심이 반갑게 느껴질 수 없었다.
강후가 물었다.
"대답은?"
"당연히 모른다고 알아서 커트했죠. 전 독립된 주체지, 장시환의 부하는 아니니까요."
"현명하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슬쩍 눈치를 줬다.
말하라고 요청해도 그녀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용병대의 단장에게 신뢰는 곧 전부이기 때문이다.
활발히 거래 중인 의뢰꾼의 정보를 쉽게 팔아버리면, 아무도 용병대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 세계도 은근히 소문이 빠르다.
그래서 한 번 그렇게 찍히면 감당할 수 없었다.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은 기본이고.
'그럼, 이쯤에 찍어둘까.'
강후가 적당히 인적이 드문 주변의 흐름을 확인하고, 위치를 세이브할 준비를 마쳤다.
[이 장소는 안전한 지역입니다. 해당 위치에 즉시 복귀 지점을 지정하겠습니까?]
만약 민수현을 구한다면, 곧바로 해방구를 탈출해서 나올 지점이 여기가 될 것이다.
김천 해방구에서는 단숨에 멀어지게 되는 만큼, 누군가의 추격으로부터 확실히 안전한 장소였다.
탈출을 대비한 준비는 끝났다.
실탄 확보도 끝났으니, 이제 김천 해방구로 가는 일만 남았다.
64화 김천 해방구 (2)
* * *
포항역 인근에 즉시 복귀 지점을 지정해 둔 강후는 차를 렌트해 김천 해방구로 향했다.
해방구 방면은 KTX는 물론이고, 안전 버스로도 갈 수가 없어서다.
대부분 우회해서 가거나, 가더라도 무정차로 통과하기에 절대로 내릴 수 없었다.
강후가 렌트 업체에서 빌린 차는 싸구려 중에서도 한참 싸구려인 차였다.
여차하면 버리거나 박살 날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의 일이 벌어지는 곳이 해방구인 만큼,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운이 좋으면 아이템을 정말 저렴하게 구입할 수도 있고.'
강후가 해방구로 가는 것에 관심을 가진 이유 중에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마켓에서 형성되어 있는 가격의 논리가 해방구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빨리 팔기 위한 경쟁이 붙기 시작하면 말도 안 되는 금액까지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 빼앗은 아이템을 빨리 현금화하기 위해 가격을 싸게 내놓는 경우도 많았다.
출처를 생각하면 께름칙한 아이템들이지만, 굳이 그런 점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강후가 끼고 있는 아이템 일부도 누군가에게 가져온 것들이었으니까.
'민수현을 찾기만 하면, 이현석과는 엄청 가까워질 접점을 만들 수 있어.'
민수현 구출 의뢰는 의미하는 바가 컸다.
이현석이 대외적으로는 외골수 이미지에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다른 것은 차치하고 그는 은원(恩怨) 관계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감사를 표해야 할 사람에게는 어떻게든 신뢰와 감사의 표시를 하고.
복수해야 할 대상에게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더라도, 반드시 복수의 끝을 본다.
그것 하나만은 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후로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분위기 봐라. 진짜 최악이네."
강후가 지평선의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김천 해방구의 모습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원작에서 해방구에 빌어먹을 세기말 분위기를 깊게 깔아놓은 덕분에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다.
국내, 국외의 어떤 해방구를 봐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마치 지옥문을 보는 것처럼 붉고 검은 무언가가 이글거리고 있는 광경.
가까이 갈수록 아찔하고도 걱정스런 느낌만 잔뜩 드는 그런 광경만이 있을 뿐이다.
해방구로 향하기 위한 좁은 길목으로 막 접어들기 시작할 무렵.
부우우웅! 우우웅!
갑자기 어딘가에 숨어있던 트럭 두 대가 나타나서는 강후가 운전하는 차의 앞과 뒤를 막았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 지대가 되어버린 옛 거리의 길목을 막은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해방구 인근인 이곳에는 도움을 요청할 어떤 요소도 없었다.
112에 전화를 해도, 해방구 근처는 출동 불가 지역이다.
그나마 112에 전화라도 걸어볼 수 있으면 다행이고, 전화 자체가 강제로 우회되어서 엉뚱한 곳에 연락이 닿기도 한다.
이를테면 도움을 요청하려고 전화를 걸었더니, 되려 해방구 안에서 그 소식을 들은 범죄자들이 몰려오는 식이다. 기지국이 범죄자들의 손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
운전대를 잡고 있던 강후는 트럭에서 내리기 시작한 헌터의 무리를 보고 곧장 모습을 숨겼다.
차 문을 열면서 바로 기교의 장막을 썼고, 장막의 안에서 강후의 모습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너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강후를 노렸던 헌터들은 문을 열면서 사라진 강후의 행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이거?"
"이 새끼 어디 갔어?"
"은신인 거 같은데? 감지해 봐!"
다섯 헌터 중에 두 명이 부랴부랴 고글을 꼈다. 은신 탐지를 위한 아이템일 것이다.
준비성이 철저한 것은 강후도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황을 방관할 때의 일이고.
강후는 이미 그 시점에 고글을 끼고 있는 두 헌터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기교의 장막]
[스킬 숙련도 : Lv Max]
[반경 11m 안에 투명한 장막을 구현합니다.]
[그 안에서 사용자는 절대 은신 상태를 얻으며, 어떤 감지 능력에도 발각되지 않습니다.]
[단, 장막 밖으로 나가면 그 즉시 은신 효과가 사라지면서 장막이 없어지고, 2배 향상된 이동 속도를 2초 얻습니다.]
데레일라에게 얻은 기교의 장막은 강후와 시너지가 딱 좋은 스킬이었다.
모습을 감추며 적을 노리거나, 그들로부터 빠져나갈 기회를 노려야 할 일이 많잖은가?
기교의 장막은 껄끄러운 부분을 해결하기에 특화된 스킬이었다.
순간적으로 마나의 소모가 많은 것이 흠이지만, 마나 과민증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다.
고글을 끼려던 두 헌터의 실수가 있다면, 강후와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
기교의 장막 범위 안에 있던 둘은 강후의 접근을 예상도 하지 못했다.
고글을 착용한 상태에서도 강후를 볼 수 없었고, 무영으로 기척까지 숨겼기에 눈치도 못 챘다.
결과는 간단했다.
푸욱! 푸우욱!
"으컥!"
"커컥!"
죽음이었다.
가볍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강후는 손쉽게 두 헌터의 목숨을 취했다.
애초에 성좌 계약도 안 된 헌터라서, 처음부터 승리 정도는 당연히 확신하고 있었다.
빨리 죽일 수 있느냐의 문제였는데, 눈 먼 장님이나 다름없어서 곧바로 목을 땄다.
"씨, X발, 뭐야! 뭔데?"
남은 셋이 크게 당황했다.
강후의 위치를 특정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유린을 당하니, 공포감이 극대화됐다.
그 사이.
이번에는 도약으로 힘껏 달려든 헌터의 목숨을 강후가 추가로 노렸다.
나름 공방전이 한 차례라도 생기지 않을까 싶었지만, 결과는 일격에 즉사.
물론 상황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시작부터 대참수 스킬을 쓰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들은 너무 약했다.
자기들 딴에는 그럴듯하게 앞뒤를 막고, 머릿수와 분위기로 찍어누르려고 했을 터.
하지만 강후는 이런 느슨한 포위와 위협에 위축될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경험은 너무 흔하다.
"도망치자! 도망치자고!"
"얘, 얘네들은?"
"뒈졌잖아! 그냥 버려, 새끼야!"
살아남은 나머지 두 명은 그나마 셈이 빨랐다.
목숨값으로 지불하고 싶었는지, 들고 있던 아이템 몇 개를 던지고는 36계 줄행랑을 쳤다.
강후가 아이템을 챙기는 동안, 도망칠 시간을 벌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뭐 하자는 놈들인지...."
도망치는 두 헌터의 뒷모습을 보며 강후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추격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내버려 두었다.
쓸만한 아이템은 이미 알아서(?) 앞에 던져두고 간 듯했기에 더욱 추격할 필요를 못 느꼈다.
"그냥 여기다 세울까."
죽은 헌터들로부터 자잘한 아이템을 수습하고.
다시 차를 탈까 하던 강후가 구석진 곳에 대충 차를 세우고는 시동을 끄고 문을 잠갔다.
해방구가 멀지 않은 데다가, 그 안으로는 어차피 차를 끌고 들어갈 수도 없는 탓이다.
수습한 아이템들의 감정가는 도합 약 3억 원.
3명의 헌터에게서 얻은 아이템의 감정가라고 하기엔 민망한 금액이었다.
해방구와 그 주변이 무법지대인 것은 맞지만, 구성원이 모두 무법지대에 어울리는 존재는 아니다.
이런 녀석들처럼 일격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실력 없는 녀석들도 즐비하다.
다만 법의 구속이 없는 공간에서 어설프게 광기만을 드러내며, 미친 짓을 벌일 뿐이다.
어차피 힘의 논리만이 유일하게 통하는 곳이다. 강후는 차라리 이런 곳이 편했다.
실력 행사가 필요하면, 앞뒤 잴 것 없이 하면 되니까. 그러면 상황은 알아서 정리된다.
* * *
"망할."
해방구 초입에 들어선 강후가 코를 틀어막았다.
갖가지 마약초를 태우는 냄새가 질펀하게 난 탓이다.
혹시나 해서 챙겨온 마스크를 바로 착용했다.
이 냄새를 정직하게 맡았다가는 걷다가 취해서 쓰러질 판이었다.
태우는 마약초의 종류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각양각색의 풀을 태우고 있었다.
이 냄새를 계속 맡으면서 여기서 지내고 있으면.
아마 24시간 내내 물 위를 걷는 기분이고, 세상이 파스텔 톤으로 녹아내리는 느낌일 것이며.
더 나아가 숨을 쉴 때마다 말초신경이 자극을 받으면서 흥분이 고조될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 병신 만들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으흐흐흐."
"헤헤...."
이미 환각, 환청 상태에 빠진 헌터들이 비틀거리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제대로 무기도 갖춰 들고 있지 않고, 입고 있는 것도 없는 것으로 봐서는 일찌감치 털린 모양.
돈이 될 것이 없으니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모양이다. 죽일 가치도 없으니까.
몇 블록을 더 들어가니, 생각한 것보다 거리가 한산했다.
해방구의 헌터들이 다른 곳으로 갔을 리는 없고, 이럴 경우는 십중팔구 이벤트가 있을 때다.
아니나 다를까.
전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간차로 날아든 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데스매치인가?"
특설 경기장이 보인다.
클럽 하데스에서도 보았던 형태의 싸움이 김천 해방구 안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경기장 안에서 마주친 헌터 둘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우는 것.
그것이 데스 매치다.
각각의 실력에 따라서 배당 값이 매겨지고, 판돈이 걸린다.
그리고 판돈 일부는 싸우는 두 헌터에게 배분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기는 헌터가 양쪽에 걸린 판돈 중 자신의 배분을 모두 차지할 수 있게 되고.
상대방이 착용했던 모든 아이템은 온전히 자신의 소유로 빼앗을 수 있게 된다. 전리품인 셈이다.
강후는 경기에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고만고만한 헌터들이 서로 실력을 겨루다가 의미 없이 개죽음을 당할 뿐이니까.
전투에서도 배울 점이 많기보다는 온갖 문제점을 발견하고 실망하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굳이 눈 썩는 관람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대신 특설 경기장 한편에 마련된 마켓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상대 헌터를 죽이고 전리품으로 얻은 아이템들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광경이 하나 있다면.
마치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팔고 있는 아이템 뒤에 죽은 헌터의 시체를 놓는다는 것이랄까?
누구 '유품'인지 확실하게 공개를 하는 형태다. 좋게 말하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고인 능욕.
해방구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뭐가 해방이 된다는 걸까? 이승에서 해방되어 저승으로 간다는 뜻인 걸까?
물론... 셀프 디스다. 남들에게는 말 못 할 비밀.
어쨌든 강후는 불쾌한 기분을 잠깐 접어두고, 본래 목적인 아이템 살피기에 들어갔다.
가판대를 따라 움직이면서 살폈지만, 어지간히 좋아 보이는 것들은 다 팔렸다.
결제 대기 상태에 있거나, 혹은 팔리고 나서 비치해 놓은 모조품만이 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날이 안 좋네.'
생각보다 많은 아이템을 봤는데 쓸만한 것이 없다.
애초에 죽은 헌터의 아이템으로 판매 목록이 구성되다 보니, 날마다 내용물이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날은 이런 물건이 나오나 싶기도 하지만. 또 어떤 날은 이렇게 물건이 없나 싶기도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후자였다.
한데 바로 그때.
"음?"
시야에 들어오는 스킬북 하나가 있었다. 이미 많은 헌터의 손때가 묻은 스킬북이었다.
보통 스킬북은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중에서 구하기가 정말 어렵다.
한데 보란 듯이 가판대 위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이 구매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메리트가 더럽게 없음을 뜻할 터.
아마 배울 가치조차 못 느끼거나, 희귀한 직업군에 귀속된 스킬북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강후에게는 의미가 달랐다.
어떤 직업군에 해당되는 스킬이어도 배우는 것은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발트만을 이용해 대참수 스킬을 꼼수로 학습했던 것처럼.
65화 김천 해방구 (3)
스킬북을 집어 들었다.
[스킬북 – 야만의 시대]
[특이 사항 : 광전사 전용]
[학습자의 마나 스탯이 50 미만인 경우, 모든 스킬의 마나 사용 값이 50% 감소합니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왜 이 녀석이 헌터들의 외면을 받았는지 바로 알게 됐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광전사 계열의 헌터가 국내외를 통틀어도 그 비율이 매우 적다는 것.
둘째, 어느 정도 초심자 수준을 탈피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마나 스탯은 50을 넘어간다는 것.
광전사이면서, 낮은 수준의 마나 스탯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유지력에 문제가 생긴다. 마나 총량이 적어 스킬 사용에 애를 먹을 테니.
애초에 조건을 만족시키기 힘든 전제를 두는 형태로 스킬북이 짜였으니 외면을 받을 수밖에.
'나한테는 너무 좋은데?'
하지만 강후에게는 달랐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의 힘을 믿고, 지금까지는 마나 스탯에 전혀 투자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과거에도, 지금도, 강후의 마나 스탯은 20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언젠가 마나 스탯이 올라갈 일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고, 그렇다면 야만의 시대는 강후에게 정말 효율적인 스킬북이었다.
모든 스킬의 마나 사용량이 절반으로 깎이는데,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스킬북을 판매하는 것으로 보이는 판매자에게 물었다.
귀에만 피어싱을 10개 이상으로 한 것이 심상찮아 보였지만, 보고 말 사람이니 신경 쓰진 않았다.
"이건 얼마입니까?"
"어서 오세요! 어떤 녀석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 이 스킬북 사시려고요?"
험상궂어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판매자는 친절한 목소리로 안내를 이어갔다.
역시 외모는 선입견인 모양.
세상 이렇게 호의적인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나 이런 구역에서 말이다.
"네. 관심이 있어서."
"내용은 확인하신 거죠?"
"물론입니다."
"20억 원으로 정가를 잡았습니다. 사실 30억 원 정도가 적정가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시작부터 약을 파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약을 먹고 지껄이는 수준의 내용이다.
이런 녀석들은 흥정의 대응에도 능하다. 애초에 그걸 고려해서 가격도 터무니없이 잡아놨다.
강후가 대답할 가치도 못 느끼겠다는 듯, 바로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떠났다.
당장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걷고 또 걸었다.
여차해서 노림수가 안 먹힌다고 해도, 아쉬울 것 같지 않다는 나름의 자신감도 있었다.
그때.
투닥, 다다다닥!
다급히 뒤를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급했는지, 중간에 발소리가 꼬이기까지 했다.
"저기, 저기 손님!"
"...?"
강후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판매자를 쳐다보자, 그의 낯빛도 자연스럽게 어두워졌다.
그의 가판대에 있는 아이템들이 유독 인기가 없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처치 곤란한 물품만 골라서 모아놓은 것처럼, 구성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오랜만에 관심을 보이는 구매자를 만나 들뜬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바가지를 써 줄 이유는 없었다. 동정이나 연민으로 호구가 될 이유는 없으니까.
"제가 다른 물품이랑 착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거 정가가 15억...."
또다시 외면.
아까보다 더 미련 없이 자리를 뜨자, 판매자가 체념한 듯 조정된 금액을 불렀다.
"10억입니다, 10억!"
많이 깎았다.
생각했던 적정가보다 살짝 높은 수준이기도 했다.
아무리 효율이 떨어지는 스킬북이라고 해도, 결국 스킬북은 스킬북이다.
그 이상으로 후려치면 이번에는 판매자가 단념할 가능성이 컸다. 손해 보는 느낌일 수 있다.
하지만 강후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무표정한 얼굴과 함께, 정말 입꼬리 한 번 떨리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입술을 뗐다.
"5억."
* * *
얼마 후.
"역시 해방구는 이래서 오는 맛이 있지."
스킬북을 백팩에 잘 챙겨 넣은 강후가 흡족한 표정으로 길을 따라 걸었다.
뒤통수를 노려보는 시선이 왠지 느껴지는 듯도 했지만, 이미 거래가 끝난 마당이라 신경을 껐다.
생각보다 훨씬 더 싸게 샀다.
해방구는 일반적인 가격대가 아니라, 이 구역에서의 필요에 따라 가격이 요동치는 만큼.
지금처럼 기존 가격보다도 훨씬 싸게 살 가능성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반대인 경우도 있다.
아마 이 스킬북이 서울역에 있는 마켓에서 판매됐다면, 정가 10억 원이었을 것이다.
적당한 배짱과 입을 놀린 대가로 5억 원이나 아낀 셈이다. 수지맞은 거래가 됐다.
이렇게 된 이상.
발트만을 이용해서 꼼수로 학습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대참수 스킬을 학습했던 방법 그대로.
온누리 길드와는 일전에 안면을 터 뒀으니, 다시 찾아가면 협상할 여지는 충분할 듯했다.
어차피 돈만 준다면야, 잠깐 던전의 공략 라이센스를 대여해 주는 것이 문제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여차하면 다음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편하게 협상할 여지는 있었다.
"음."
강후가 어느덧 깊숙하게 들어온 해방구 주변의 면면을 살폈다.
시끌벅적하면서도, 그래도 밝은 느낌이 물씬 풍겼던 입구의 풍경과는 다르게.
지금 이곳은 해가 질 무렵의 석양에 물든 황색 배경과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뒤섞여 있었다.
마치 세상이 황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어둠이 자리한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림.
전세혁에게 전달받은 정보에 따르면 민수현이 해방구에 온 것은 납치가 아닌 자의적 판단이었다.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이해해보려고 한다면, 호기심이라는 이유로 설명이 가능하기는 하다.
해방구는 분명 일반적인 세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비에 녹슬고, 피에 찌든 건물이 풍기는 묘한 악취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호기심을 함께 자극한다.
시야를 가리는 그림자는 언제든 그 안에 잉태한 죽음, 시체를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다.
어쩌면 그 두근거림이 궁금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일상이 된 세상, 바로 해방구.
아마 민수현은 모종의 이유로 깊숙하게 들어왔다가, 일이 꼬여 나오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클 듯했다.
이를테면 중요한 물건을 훔쳤다거나, 해방구 중심의 비밀 시설에 접근했을 수도 있다.
해방구에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조직된 '관리체'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통 해방구 중심에 위치한 마석 광산이나 핵심 던전의 이득을 독식하며 번영을 이룬다.
하필 그곳에서 건드려선 안 될 관리체의 역린을 건드려버리게 된 것일 수도.
짚이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원작에서 다수의 해방구가 에피소드의 배경으로 쓰인 적이 꽤 많은 만큼.
핫 플레이스가 될 만한 위치는 강후의 머릿속에 이미 있다.
하지만 그것만 믿고 무작정 들어가 보기에는 해방구라는 공간이 주는 불확실성이 너무 컸다.
일이 꼬이면 민수현을 구하기는커녕, 탈출을 긴급하게 고민해야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바로 그때.
"한 푼.... 도움을 주십쇼."
방금까지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던 을씨년스러운 골목길에서 구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어딘가 자리를 꿰차고 있던 거지가 누군가의 접근을 알아차리고는 구걸을 시작한 것일 터.
'헌터네.'
거지인 척하고 있지만, 마나를 숨기지는 못했다. 거지 행세를 하고 있는 헌터인 것이다.
왜 위장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보기 좋게 꾸며놓은 그의 주변 자리를 보니, 여기에 자리를 튼 지는 오래된 듯했다.
거지의 앞에 접근해서는 속주머니에서 꺼낸 5만 원권 10장과 함께 말을 꺼냈다.
"혹시 길을 잃어서 방황하거나, 혹은 누군가의 추격을 받는 여자 헌터를 본 적이 있습니까?"
강후가 전세혁에게서 받은 민수현의 사진을 거지에게 보여 줬다.
눈코입은 모자이크 처리가 됐지만, 그녀의 특색인 분홍색 머리카락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흔하지 않은 색깔의 머리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바로 알아보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거지가 뜸을 들였다.
강후가 5만 원 권 10장을 한 번 더 내밀었다.
"이러면 좀 떠오르시나?"
"어딘가로 비틀대면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어. 위치가 어디였더라...."
이번에는 20장을 내밀었다.
거지가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모텔이 하나 있기는 해. 그래도 좀 밝은 곳에 있어서 안전한 곳이지."
"안내 좀 받읍시다."
모텔이라고 뭉뚱그려 말한다면, 후보가 될만한 건물이 너무 많아 특정하기가 어렵다.
해방구 안에는 버려진 모텔 건물도 너무 많기에 거지의 말은 너무 포괄적이었다.
거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후가 지폐를 좀 더 내밀었다.
이왕 안내하는 거, 확실하게 안내를 하라는 나름의 성의 표시였지만....
"내 기억이 확실하면 저쪽이 맞수다."
거지가 안내한 방향은 안타깝게도 좋지 못했다.
정조준 스킬로 확대해 둔 시야에 길목의 끝이 들어왔고, 그 끝에서 핏자국이 일부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너무 쉽게 가려고 했네. 이건 내 잘못이다. 직접 찾는 게 속이 편한 건데.'
조용히 쓴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받아들였다.
함정이다. 이 녀석들은 행인을 등쳐먹는 놈들이다. 아니, 등쳐먹으면 다행이고 죽이겠지.
강후가 자연스럽게 자신을 사지로 안내하고 있는 거지의 뒷모습을 보며, 차분히 답했다.
"그래. 장소만 정확히 안내하면 보상을 크게 해 드리지. 정말 크게 말이야."
* * *
그로부터 5분 후.
"자기 명줄대로 살지 못하는 놈은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까."
강후는 백팩에 착실하게 챙겨 넣은 3억 원어치의 아이템을 확인하고는 현장을 떠났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이템의 주인은 강후를 노리려고 했던 거지와 그 무리들이었다.
아마 이런 식으로 행인을 몰래 노리거나, 기습하는 방식으로 해 먹어왔던 듯했다.
성좌 계약도 없고, 실력도 미진한 헌터들이라 전부 일격에 목숨을 잃었다.
헌터 목숨이 이렇게 파리목숨이어도 될까 싶지만.
힘의 논리가 가장 냉정하고 정확하게 펼쳐지는 곳이 헌터의 세계인 만큼 이상할 것은 없었다.
죽이기 전, 거지가 주절거린 바에 따르면 민수현을 본 적이 있는 것은 맞았다.
다만 방향이 강후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었다. 정말 중심지로 향했던 것이다.
해방구의 중심지는 가장 위험한 지역이기도 하다.
게다가 해방구 전체는 의도적으로 스마트폰을 활용할 수 없도록 기지국이 마비되어 있는 상태.
그래서 민수현이 중심지 어딘가에서 몸을 숨긴 채, 사실상 자의로 갇혀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르륵.
강후의 모습이 사라졌다.
횡 이동을 활용해 연계하는 자연스러운 은신은 몸에 완벽히 익은 터라, 거침이 없었다.
중심지는 허락받은 존재가 아니면, 접근 자체만으로도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다.
그런 만큼, 강후도 최대한 기척과 모습을 숨기고 이동할 생각이었다.
일찌감치 준비해 온 복면의 착용도 마쳤다.
눈을 제외한 나머지를 착실하게 가려두면, 나중에 얼굴을 특정 당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
아주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해방구의 중심지역 깊숙한 위치까지 들어왔을 무렵.
"저년! 저년 잡아!"
"드디어 찾았다!"
하늘의 도우심일까. 아니면 일이 제대로 꼬이려는 조짐일까?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한 오래된 빌딩 사이를 가르며 전력으로 도망치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핑크색 머리.
구출 대상, 민수현이었다.
66화 김천 해방구 (4)
* * *
해골 마스크를 쓴 헌터들이 집요하게 민수현을 쫓기 시작했다.
흑골단이었다.
김천 해방구의 중심지를 꽉 잡고 있는 조직으로 온갖 이익을 독식하고 있는 조직이었다.
그래서 해방구에 모여드는 각양각색의 헌터들도 쉽사리 중심지에는 가 보지 못했다.
잘못했다가는 흑골단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혹은 영원히 햇빛을 못 보는 곳으로 끌려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지하 감옥 같은 곳.
우우우웅!
지상에서는 오토바이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골단 헌터들이 부리는 오토바이로 언뜻 보기에도 출력이 꽤 좋아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파팟! 팟!
건물 위쪽으로는 날랜 암살자들이 움직였다.
예전에 강후가 공태수를 쫓아갈 때 그랬던 것처럼, 옥상의 사이사이를 지름길로 활용하는 모습.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마법계로 보이는 헌터들은 공중에 몸을 띄운 채로 움직이고 있었다.
민수현이 가속 이동 스킬로 보이는 구성을 활용하며 도망치고는 있었지만....
이런 흐름이라면 1분도 되지 않아서 잡힐 판이었다. 흑골단의 추격은 조직적이면서도 깔끔했다.
'교전도 무의미해.'
강후가 판단을 빠르게 했다.
필요에 따라 교전을 벌이며, 탈출 루트를 모색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민수현의 뒤를 추격하고 있는 흑골단 구성원의 전력이 좋았다.
성좌 계약을 모두 기본으로 깔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사용하는 스킬의 격도 훨씬 높아 보였다.
게다가.
'도대체 뭘 훔친 거야?'
민수현이 양손에 끼고 있는 장갑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색 영롱한 이펙트가 보이는 것이다.
2등급 아이템부터는 아이템에서 고유한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
아이템 특성마다 밝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민수현이 착용한 장갑은 유독 그 정도가 심했다.
아무리 봐도 그녀가 원래 갖고 있던 장갑이라기보다는 여기서 훔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민수현에게 도벽이라도 있는 걸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들어온 곳이 너무 호랑이 굴이다.
'그냥 데리고 확실하게 튀는 게 좋겠다.'
강후가 괜한 호승심이 올라오려던 것을 차분하게 찍어 눌렀다.
신경 쓸 사람이 없다면야 시원하게 한바탕 붙는 것이 꽤 멋진 그림일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구해야 할 사람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나도 지키면서, 남도 지키는 일이다.
오죽하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가 같이 죽는 경우가 있겠는가?
지금은 구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딱 머리채만 붙잡고 물가 밖으로 빨리 나가는 것이 우선이다.
파팟! 팟! 팟!
강후가 가속과 도약을 반복 활용하며, 빠르게 민수현에게로 거리를 좁혔다.
예전에 비해 훨씬 체력적으로도 든든해진 몸이라, 스킬의 반복 사용에도 몸이 멀쩡했다.
과거 같았으면 메스꺼웠을 속이지만, 지금은 마른침 한 번 삼키는 것으로 진정됐다.
바로 그때.
골목길에서 트인 방향으로 이동하던 강후의 경로를 가로막는 존재가 나타났다.
흑골단원이었다.
주변에서 마나의 흐름이 느껴져 멀리 있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계속하고는 있었는데.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흑골단원이 물었다.
"누구냐, 넌?"
구출이 1순위인 상황이 아니었다면, 적어도 한마디의 대꾸 정도는 해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민수현이 아무리 발재간이 좋고 스킬 활용이 된다고 해도, 다수의 추격은 뿌리치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그게 될 거였으면, 자신이 구하러 올 일도 없었겠지.
파앗!
강후가 대답 대신, 혈루를 앞으로 선명히 내어 보이며 흑골단원에게 달려들었다.
무기로 대화를 하겠다는 확실한 의지였다.
"치고 빠지기가 주특기인 이 정철후 님의... 끄윽!"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둔 자신감이었을까.
헛소리를 지껄이며, 너무 여유롭게 회피 동작을 취하던 정철후라는 흑골단원이 죽었다.
자기 딴에는 꽤 쓸만한 회피 스킬을 갖고 있어,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다고 여겼던 모양.
하지만 이미 그가 움직이기 전에, 강후는 마나의 흐름을 따라 그의 회피 경로를 읽고 있었다.
그가 이동할 방향으로 유독 마나의 흐름이 집중적으로 응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스킬 시전 직전에 마나가 '길을 닦는다'고 표현한다.
찰나의 순간에 먼저 사전 작업이 이뤄지는데, 99.9%의 헌터는 이 흐름을 읽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마나에 누구보다도 진심이고, 또 예민한 강후에게는 너무 선명히 보이는 흐름이었다.
"인생을 너무 쉽게 사네."
강후가 정철후의 목을 그어버리고 묻은 피를 바지에 쓱쓱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금 민수현의 위치를 파악했다.
직선거리로는 멀지 않았다.
물론 지상, 공중 할 것 없이 그녀를 쫓는 헌터가 한가득인 상황이라 시간이 촉박하다.
"죽여버려! 죽여버리라고!"
흑골단 헌터들은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민수현이 흑골단의 간부급 이상의 헌터가 쓰던 아이템을 훔친 게 틀림없다.
그녀가 이현석의 조카라고는 해도, 시가 천억 원이 넘는 아이템을 쉽게 가지고 다닐 순 없을 터.
'알 게 뭐야.'
어쨌든 그녀의 사정이다.
구하기만 하면, 이현석이 전세혁에게 부탁했던 의뢰의 대리 수행은 가능해진다.
강후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구출에 실패하더라도 딱히 아쉬울 것 없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렇게 도약과 가속, 그림자 걸음을 섞어가며 민수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아앗!"
순식간에 강후가 지척에서 나타나자, 당황한 민수현이 바로 양팔에 푸른 기운을 만들어냈다.
빙결 능력인 듯했다.
"구하러 왔으니 힘 빼지 마."
"뭐...?"
"전세혁 씨의 의뢰를 대리 수행하러 왔다고."
"당신은 누군데?"
"귀찮군."
"꺄악!"
누구니 뭐니, 밝히는 것도 귀찮아서 강후가 바로 민수현의 어깨 자락을 움켜쥐었다.
강후에게 극적으로 해방구를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딱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는데, 바로 성공 여부였다.
차원 강탈자에게서 얻은 네 번째 특전인 초장거리 공간 이동은 홀로 사용하면 100% 성공한다.
하지만 2인 이상일 경우에는 확률이 정확히 50%였다. 되거나, 혹은 안 되거나다.
[순간 이동하겠습니까?]
[2인 이상의 순간 이동은 성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확률은 정확히 50%입니다.]
능력을 활성화하자, 바로 시스템의 안내 문구가 떴다.
일단은 써 봐야 안다. 써 보지 않고 지레짐작할 수는 없는 노릇.
만약 실패할 경우는 최대한 그녀를 보호하면서 탈출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실패하면.... 아쉽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셈 치고 그녀를 포기하면 될 일이다.
그녀가 앞으로 미래를 꾸려나감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까지는 또 아니니까.
"내 손, 꽉 잡아."
"뭐, 뭔데요?"
"안 그러면 나중에 토할 수도 있어."
"정말 날 구하러 온 거예요?"
"지금 목이 멀쩡한 걸 보면 감이 안 오나?"
어리긴 어리다.
아니면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일지도.
어쨌든 강후가 민수현의 뒷목을 꽉 잡았고, 그녀 역시 강후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말대로 곁에 있음에도 아직까지 목숨이 멀쩡한 건, 최소한 적은 아니라는 얘기다.
"X발, 저 새끼는 뭐야!"
"같이 죽여버리면 돼!"
"멈췄다! 두 년놈이 멈췄어!"
"무조건 잡아! 대장님의 명령이다!"
흑골단원들의 날 선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그녀가 훔친 아이템의 주인도 명확해졌다.
간도 크지.
흑골단 대장이 가지고 있던 아이템 장갑을 훔친 모양이다. 자초지종은 나중에 들을 수 있을 터.
파아아앗!
이윽고 순간 이동이 시작됐다.
주변 모든 광경이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됐군.'
강후가 안도했다.
실패할 경우도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이왕이면 구출에 성공하는 것이 그림은 더 좋기 때문이다.
쿠과과과!
몸 전체가 떨리는 느낌과 함께 강후와 민수현의 몸이 해방구 안에서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된...."
"환영일 수도 있어! 찾아! 당황하지 말고 주변을 뒤지라고!"
"뭐라도 쏴! 쏴봐, 새끼야!"
험악한 말이 뒤섞여 들리는 가운데, 흑골단원의 실루엣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그 무렵, 이미 희미해진 시야 속에서 강후와 민수현의 위치는 완벽하게 달라져 있었다.
강후가 해방구에 오기 전에 미리 저장해 두었던 세이브 포인트로의 이동이었다.
[순간 이동이 완료되었습니다.]
성공이었다.
민수현은 그렇게 강후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구출됐다.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던 완벽한 탈출이었다.
* * *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감사는 그쯤이면 됐고. 일단은 연락부터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보호자가 와 줘야지."
"그, 그래야겠어요. 일단."
민수현이 강후에게 건네받은 스마트폰으로 이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동안.
민수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엄청 먼 거리를 이동한 느낌은 드는데,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거리가 가깝지는 않지만, 탁 트인 시야 안으로 저 멀리 포항역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미쳤네...."
김천 해방구에서 포항역으로 이동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몇 초.
민수현은 강후가 펼친 공간 이동 능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공간 이동 스킬을 가진 헌터는 많다. 공간을 이동했다는 자체가 신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먼 거리를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얘기가 전혀 다르다.
기껏해야 10m, 20m 따위를 이동하는 단거리 공간 이동 능력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정도면 판타지 소설로 따졌을 때 텔레포트 능력을 가진 것이나 진배없는 상황.
민수현은 이런 공간 능력을 얻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공간 이동에 특화된 능력을 가진 마법계 헌터도 레벨 600 정도는 거뜬히 넘겨야 할 터다.
당장 자신도 마법계지만, 공간 이동 능력은 전무했다. 그만큼 얻기 힘든 능력이기도 했다.
"여보세요? 삼촌?"
그때, 이현석과 연락이 닿았다.
가까운 사람만 아는 번호이기에 처음 걸려온 전화번호여도 이현석이 받을 거라 생각했다.
"저, 지금 일단은 안전한 곳에 있어요. 어디에 있었냐고요? 그게... 김천 해방구에...."
"...."
강후가 조용히 듣고 있자니, 수화기 너머에서 고성이 속사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를 혼낸다기보다, 걱정하는 마음이 잔뜩 담긴 삼촌의 애정 어린 외침에 가까웠다.
민수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감은 지가 오래됐는지, 떡진 핑크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을 따라 철사처럼 딱딱하게 움직였다.
"알았어요. 그럼 아예 이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을게요. 포항역 근처예요. 네."
통화가 끝났다.
이현석은 민수현에게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말고, 현재의 위치를 유지하라고 했다.
괜히 다른 곳에 보는 눈이 생길지 모르니, 안전이 확보된 위치를 지켰으면 하는 모양.
강후 역시 괜히 이동할 생각은 없었기에 민수현과 함께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그녀에게 건넸다. 좀처럼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었다.
"도대체 흑골단에서 뭘 훔친 거야?"
강후의 질문에 민수현이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흑골단 대장 신준호. 녀석의 2등급 아이템 장갑을 훔쳤어요."
"왜지?"
"저는 성좌 혜택이 꽤 특이하거든요."
조금 특이한 것도 아닌, 꽤 특이하다고 본인 스스로 말하는 혜택은 과연 무엇일까.
강후도 짐작 가는 바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밌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 듯했다.
67화 김천 해방구 (5)
* * *
민수현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쭉 듣고 난 강후는 그녀가 왜 무리해서 해방구에 갔는지 이해했다.
물론 뒤를 생각 안 하고 들어간 무모함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가기는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수현은 특정 아이템에 대해서만 히든 효과를 활성화 해 주는 성좌와 계약을 맺고 있었다.
동시에 특정 아이템의 구성 정보와 소유자 정보까지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김천 해방구까지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신준호가 벗어두었던 장갑을 훔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탈출 계획이 그녀의 머릿속에는 없었고, 결국 안에서 갇혀 버렸던 것이었다.
가뜩이나 손발이 잘 맞기로 유명한 흑골단의 영역 안에 있었으니, 나올 엄두도 못 냈을 터.
강후가 도착했을 때, 그녀가 도망치고 있었던 이유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껴 먹었던 비상식량도 바닥을 드러냈고, 탈수 증상도 점점 심해져 답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멍청한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하고, 죽을 생각으로 나왔던 때였어요. 그때, 오빠가 온 거죠."
"멍청한 건 잘 아는 것 같네."
"보통 멍청한 게 아니죠."
강후의 때아닌 일침에 민수현이 씨익 웃었다.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라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그녀로서는 이렇게 인연이 닿아 자신을 구하러 와준 강후에게 고마운 마음만 가득할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강후가 선보인 공간 이동 능력이 계속 기억에 남아서,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겉으로 본 복장이나 무장 상태는 분명 암살자의 모습이 맞는데, 능력 구성이 이상한 것이다.
"어쨌든 안전하게 삼촌에게 인계하고 나면, 내 일은 끝이네."
"개인적인 감사 표시를 꼭 하고 싶은데요. 당장에는 돈이 없지만, 삼촌에게 부탁하면...."
"됐어. 그 협의는 내가 알아서 네 삼촌이랑 할 테니까, 괜히 임의로 보상하지 마."
"겸손하시네요."
"겸손한 게 아니라, 좀 더 유리한 위치에서 협의를 하려는 내 생각에 네 호의가 방해될 뿐이야."
"엄청 까칠하시네."
"비즈니스는 원래 까칠하게 해야 뒤끝이 안 남는 법이거든."
"삼촌에게 많이 뜯어내세요. 제가 그만큼 삼촌에게 빚을 갚으면 되니까."
"다음부터는 신중하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에요."
"꼰대 같은 충고는 이 정도까지만 하도록 하지."
강후가 백팩에서 꺼낸 생수 한 병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미 두 병이나 비운 그녀지만, 여전히 목이 마른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방금 강후가 했던 말은 절대로 빈말은 아니었다.
이현석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만들고, 그를 확실하게 이용할 생각이었기에.
순수한 선의와 마음만으로 세상이 멋지게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안타깝게도 이 빌어먹을 세계는 그렇게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지는 않다.
더군다나 많은 감정이 메마를 대로 메마른 강후에게 있어, 순수한 선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철저히 이익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어내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착한 사람의 연기를 할 수도 있고, 희대의 인간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
열세 개의 별이 딱 그렇다.
그들은 수많은 가면을 바꿔 써가면서, 세상을 교묘하게 자신들의 입맛대로 통제할 준비를 한다.
아니, 이미 현재 진행형이다.
당장에 채관형만 해도 정유리에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에서는 여성의 인권과 아픔을 적극 변호하며, 성범죄자들 처벌에 함께 앞장서겠다지 않는가?
하나의 얼굴로만 살아갈 생각을 한다는 건,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멍청한 생각이 분명하다.
한편,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현석을 기다리는 게 따분했는지 민수현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제 장갑에는 관심이 없나 보네요?"
"내 장갑이 아니니까."
"그래도 궁금할 수는 있잖아요? 2등급이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등급도 아니고."
"널 죽일 생각이면 관심이 있었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상황이라서 말이야."
"어... 그럼 관심 갖지 마요."
민수현이 몸을 움츠렸다.
레벨만 놓고 따지면, 그녀가 세 배 이상은 되는 상황이지만.
강후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시피 한 그녀는 강후에게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뭐랄까.
처음부터 뇌리에 강렬하게 박힌 인상 때문인지, 강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바로 그때.
"왔군."
그녀보다 먼저 이현석을 알아본 강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과는 정반대인 구릿빛 피부와 덥수룩한 수염, 빳빳하게 다려입은 군복은 원작에서 조형해 두었던 이현석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의 조직인 '심연'을 상징하는, 눕힌 S 모양의 문양이 그려진 견장이 어깨에서 반짝였다.
"삼촌! 삼촌...!"
민수현이 이현석에게 한달음에 뛰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삼촌을 반기는 어린 조카 같았다.
"너, 내가 어디를 가도 통신 라인은 확보하라고 얘기를 했냐, 안 했냐?"
"그게... 삼촌. 해방구 안쪽은 아예 모든 신호가 방해를 받아서 스마트폰이 먹통이 된 상태였어요."
"그럼 연락이 가능한 지점까지 나오기라도 하던가!"
"나중에는 스마트폰을 잃어버렸어요...."
"됐고. 일단 넌 저기로 가서 얌전히 있어라."
이현석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 둘이 민수현에게 인사했다.
아마 이현석을 호위하고, 더 나아가 민수현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경호원들일 것이다.
"감사해요! 감사해요, 오빠!"
민수현이 강후를 향해 연신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그녀를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지금 같아서는 없을 것 같지마는, 혹시 몰라 강후도 어색한 표정으로 손인사를 건넸다.
이현석의 조카니까, 어쩌면 볼 일이 잦아질 수도 있다. 아예 실력이 없는 헌터도 아니고.
그때.
단둘이 남은 자리에서 이현석이 강후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제 조카를 해방구에서 구해주셨다고요."
"전세혁 님으로부터 부탁을 받았습니다. 사적으로 받아도 되는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세혁이의 눈썰미를 저는 믿으니까, 어떤 분이든 녀석이 맡겼다면 저는 믿습니다."
"그나저나 오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강후가 온통 피투성이인 이현석의 군복을 보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군복 자체에 아예 붉게 물을 들여놓은 건가 싶어 그냥 지나쳤지만.
가까이서 보니 염색이 아닌, 신선한 피에 물든 흔적이었다. 가시지 않은 피비린내가 났다.
"아, 이거 말입니까? 내부에 있던 배신자 하나를 막 처리하고 오는 참이라."
강후의 눈빛이 반짝였다.
문유석이 처리된 걸까?
그의 보안 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던 적이 있으니, 인과 관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놓고 그에게 문유석을 죽였냐고 물어보기에는 그림이 썩 좋지 않을 듯했다.
메일을 보낸 사람이 자신이라고 밝히면서 생색을 낼 그림도 딱히 아닌 듯했다.
어차피 민수현을 구출한 것만으로도 이미 생색을 낼 여지는 충분히 만들어 두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이현석이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익명의 제보가 하나 들어왔었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 배신자가 하나 있었더군요. 등잔 밑이 어두웠던 거죠."
"원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법입니다."
능청스럽게 답하며 강후가 속으로 웃었다. 계획은 성공한 것 같다. 문유석이 죽었다.
아마 별다른 이슈가 없다면, 이현석이 한 달 안팎으로 허망하게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원작에서 탄탄대로를 걸었던 장시환의 행보도 지금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현석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장시환과 정화 길드의 앞길을 막아설 테니까.
그가 다방면으로 '어그로'를 끌어준다면 강후로서는 운신할 폭이 훨씬 더 넓어진다.
아울러 자신에게 집중될 수 있는 이목도 일부 분산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현석은 전략적으로 가치가 큰 인물이다. 실제로 대단한 실력을 가지기도 했고.
"우선 수현이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갖고 계신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강후가 덤덤하게 말했다.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이현석의 모습은 분명 진심이 담겨있었다.
"뒤늦게 파악한 상황을 들어 보니, 해방구에서 바로 여기로 움직이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수현이를 구하러 가기 전부터 계획하셨던 루트인 겁니까?"
"네."
"실로 믿기 힘든 공간 이동 능력입니다. 일본에서 공간 이동으로 유명한 호사카 켄지도 이 정도 거리는 어려울 겁니다."
이현석의 말대로였다.
호사카 켄지.
일본의 마법계 헌터로, 공간 이동에 특화되어 있다.
그는 다양한 공간 이동과 위치 전환 스킬을 갖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장거리로 이동하는 스킬이 반경 10km 안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호사카 켄지는 공간 이동 계열의 능력자이자 권위자로 여겨졌다.
한데 강후는 그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의 거리를 단숨에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물론 하루에 한 번이라는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뭐, 각자 특화된 분야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무장하신 상태를 보니, 암살계통이신 것 같은데. 참 흥미롭군요. 흥미로워...."
산전수전 다 겪은 이현석이기에 강후가 어떤 스타일의 헌터인지는 첫 만남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암살자다.
그것도 아주 날카롭게 다듬어져서, 스쳐 가기만 해도 목숨을 거둘 수 있는 실력자다.
이현석은 강후에게 느껴지는 아주 차갑지만, 한편으로는 정제된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언제든 공수 전환을 할 수 있는 자세를 잡고 있다.
이현석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항상 전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강후의 준비성이.
이현석이 말을 이었다.
"가장 중요한 얘기를 계속 놓치고 있었군요. 자, 감사를 어떻게 표현할지 말씀 나눠봅시다."
강후는 처음부터 이현석에게 말할 내용을 생각해 두고 있었다.
현상금 즉, 민수현의 구출에 대한 대가로 책정된 금액은 50억 원이었다. 적지 않은 돈이다.
하지만 강후는 이번만큼은 돈에 관심이 없었다. 이현석이라는 사람 자체를 얻고 싶었다.
이현석의 성격을 안다.
그는 은혜를 몇 곱절 이상으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고, 또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이를 활용해서 한몫 단단히 챙길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일회성이다. 한 번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그 돈만큼의 가치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치환한다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저는 좀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습니다만."
"단순하다고 함은 역시 금액적인 부분이겠지요?"
이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돈이 걸려 있던 의뢰가 아니던가. 강후의 반응은 예상 범주 안이었다.
하나뿐인 조카이자, 유일한 혈육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다. 돈은 얼마라도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현석의 예상과 달리, 강후가 고개를 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중에 차 한 잔 마실 시간만 내어주시죠. 티타임 한 번이면 만족합니다."
"예?"
"돈은 필요 없단 얘깁니다."
목숨값을 돈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받겠다는 강후의 대답.
읽을 수 없는 그의 속내에 이현석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68화 강동현과의 조우 (1)
* * *
생각은 처음부터 확실했다.
친분을 만든다.
조카의 목숨을 빚진 마당에 은원 관계를 확실히 하는 이현석은 절대 제안을 외면할 수 없을 터.
제안은 티타임 한 번이라는 작은 이슈로 시작하지만, 강후는 거기서 관계를 쌓을 생각이었다.
"그걸로 되겠습니까?"
"이현석 님 같은 분을 사적으로 볼 수 있다면, 수십억 원이 아니라 수백억 원의 가치를 하지요."
"허허. 이런 제안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요. 조카를 구해 준 대가치고는 너무 적지 않습니까?"
이현석의 말이 강후가 노린 점이었다. 그로 하여금 미안하면서도 빚진 듯한 마음을 들게 한다.
그것이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유지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생각하기 나름이지 않을까요?"
"좋습니다. 그러면 조속한 시일 내에 차 한 잔 마시면서, 조금 더 건설적인 얘기를 해 보죠."
"감사합니다."
"구두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이걸 드리겠습니다."
이현석이 품속에서 꺼내어 강후에게 건넨 것은 '피의 증표'라고 불리는 작은 명패였다.
붉은색의 바탕에 심연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이현석의 서명이 음각으로 새겨진 증표.
이것이 있으면 언제든 그와 만날 약속을 잡을 수 있고, 독대가 가능하다.
보통 친분이 깊은 사람들에게만 피의 증표를 건네곤 하는데, 이것을 받은 것이다.
아마 전세혁도 피의 증표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이현석과는 막역한 사이니까.
"조만간 연락드리죠."
"자, 번호도 여기."
이현석이 명함을 내밀었다.
자신의 개인 번호였다.
금테까지 두른 명함으로 건네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일대일 연락처인 모양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정말 전화번호를 줘야 할 사람에게만 개별적으로 주는 번호라는 얘기다.
만약 강후에게 명함과 함께 건넨 전화번호 끝자리가 0001이라면.
다음에 명함을 받는 사람에게 주는 번호는 0002인 셈이다.
이럴 경우, 0001의 번호가 외부에 유출되면 무조건 강후의 소행이 된다.
한마디로 이현석은 강후에게 신뢰를 보이면서, 동시에 신뢰에 대한 테스트도 같이한 셈이다.
이 명함의 번호로 다른 누군가의 전화가 걸려오면, 그 즉시 강후에 대한 신뢰는 끊어질 터다.
"곧 연락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수현이는 다음에 직접, 정식으로 감사 인사와 사과의 말씀을 드리도록 단단히 교육시키겠습니다."
"꼭 그러실 필요는 없지만, 사양은 않죠."
강후가 웃으며 답했다.
어쨌든 이렇게 이현석과의 확실한 인연의 고리를 만들었다.
어지간한 헌터라면 만날 기회는커녕, 가까이서 얼굴 보기도 힘든 남자와의 독대라니.
전략적 가치가 큰 인물과 교류하게 된 만큼, 앞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맛이 더 클 듯했다.
'이제 대전역으로 가야겠군.'
강후의 시선이 KTX 포항역으로 향했다.
이제 기차를 타고서 대전역으로 갈 시간이다.
클럽 하데스. 지하 7층의 비밀을 찾으러.
* * *
그 시각.
흑골단 대장 신준호는 급히 소환한 남자를 만나,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장갑이야 어찌 됐든 상관없어. 훔쳐 간 년이야 조사하면 알게 될 테니 그것도 괜찮아. 다만 이 새끼는 꼭 잡아서 죽이고 싶군."
"일단 영상으로만 봐서는 누군지 알 수 없겠군요...."
신준호의 말을 들은 남자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골 가면으로 얼굴 반 이상을 가린 신준호와 달리, 남자는 딱히 그런 위장은 없었다.
대신 얼굴이 좀 이상했다.
표정이나 초점이 없는 느낌이랄까? 마치 감정이 없는 기계의 가짜 얼굴을 보는 느낌이었다.
신준호를 비롯해 이 남자를 아는 사람은 그를 이름이 아닌 '해결사'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의뢰 성공률 99%.
보수는 비싸지만, 일단 맡기면 어지간한 의뢰는 반드시 답을 얻어내는 실력자였다.
신준호가 말을 이었다.
"이년을 도와준 이 새끼를 반드시 잡고 싶어.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능력이 너무 궁금해."
"이 위치에서 해방구 밖으로 한 번에 사라졌다, 이 말이죠."
"그렇지. 티끌만큼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그 뒤로 해방구 내에서 CCTV에 잡힌 게 없고."
신준호는 의문의 복면 남자에 대한 분노와 관심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전후 상황을 파악한 결과,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는 스킬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여서다.
신준호가 계약한 성좌는 헌터의 인육을 먹으면, 일부 능력이나 스킬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 말인즉, 강후를 찾아내 그를 '먹으면', 저 공간 이동 능력을 얻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까짓거 2등급의 장갑 아이템은 잃은 셈 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강후가 민수현을 구하는 과정에서 쓴 능력은 가치가 상당한 것이었다.
시간, 공간을 다루는 능력은 파급력이 클수록, 부르는 게 값이기 때문이다.
얼추 앞서 있었던 상황의 흐름과 맥락을 모두 파악한 해결사가 입을 열었다.
최소한으로만 입을 움직여 목소리를 내는 것이 확실히 사람답지 않은 이질감을 풍겼다.
"일단 기존 보수로는 힘들겠습니다."
"하여간 빌어먹을 돈 귀신 같은 새끼...."
"의뢰를 받을지 말지는 제가 정합니다. 좋은 대답은 아닌 것 같은데요."
"기존 보수로는 힘든 이유나 들어보자. 왜?"
"남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잖습니까. 공간 이동 능력을 빼고는 파악된 능력도 없고."
"어차피 우리 흑골단에서 지원을 붙여줄 텐데, 그걸로는 도움이 안 된다는 거냐?"
"쓸모없습니다."
다른 헌터가 이런 말을 신준호에게 지껄였다면, 진즉에 머리와 땅이 딥키스를 나눴겠지만.
실력 좋기로 유명하고, 동시에 흑골단에 제법 많은 도움을 준 해결사이기에 그렇지 못했다.
신준호가 체념한 듯 말했다.
"그래. 어떻게 해 줄까?"
"보수는 선금입니다. 견적을 내드릴 테니, 먼저 입금하십쇼."
"그래. 그러지."
"잠시."
해결사가 강후가 머물렀던 자리를 따라서 천천히 걸으며 두 눈을 감은 채, 뭔가를 느꼈다.
해결사에게는 마나의 흔적을 쫓고 교감하는 능력이 있었다. 일종의 영적(靈的) 능력이기도 하다.
성좌에게서 비롯된 능력이지만, 타고난 천성도 있어 시너지가 정말 좋았다.
"허허."
해결사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보였다. 강후가 이 자리에 남기고 간 흔적과 그 강렬함이.
"뭐가 보여?"
"아주 듬직한 성좌가 뒤를 지켜주고 있군요. 무서운 건, 이놈은 그 성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미친놈이냐?"
"미친 것과 대단한 것은 한 끗 차이. 제 느낌에는 후자인 것 같군요. 재밌겠어. 재밌겠는데...."
썩은 미소를 지으면서 호기심을 표출하는 해결사의 모습은 불쾌한 골짜기를 보는 듯했다.
신준호도 여자를 구출한 그 남자의 능력이 보통이 아님은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됐다.
이것을 기회로 삼아서 해결사가 녀석을 잡아 오면, 그 능력을 착실하게 취하면 된다.
지금껏 늘 그래왔고, 그것이 신준호를 흑골단의 대장이 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동시에 김천 해방구가 흑골단의 손에 들어온 이유이기도 하고.
"강한 이끌림이 느껴진다."
시종일관 무표정했던 해결사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흥미가 가는, 강자의 냄새가 풍기는 그런 존재가 아니면 절대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그간 해결사가 관심을 보인 헌터가 얼마나 상당한 실력자였는지를 잘 아는 신준호이기에.
갑자기 달라진 해결사의 표정에 그 역시 흥미가 동했다.
도대체 어떤 놈인 걸까?
"입금해 주십쇼. 바로 쫓게."
이미 해결사는 잔뜩 몸이 달아 있었다.
* * *
"해방구를 다녀와서 그런지, 대전역 정도는 두 발 뻗고 자도 되는 안전지역으로 보일 정도네."
대전역에 도착한 강후는 해방구에 비해서 확실히 안전(?)해 보이는 풍경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랬다.
해방구는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헌터의 시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지만.
적어도 대전역 앞에는 시체가 없었다. 물론 으르렁대는 헌터는 꽤 있었다.
특히 이클립스 소속의 헌터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데스는 이제 이클립스의 통제 아래 있으니까, 확실히 접근이 좀 껄끄럽기는 한데....'
그래도 가 보고 싶었다.
초대량의 마나가 출입의 열쇠가 되는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
발견해 놓고도 아무도 못 들어간 던전이라면, 안에서 획득할 수 있는 이득이 꽤 많을 것이다.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나오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강후에게는 공간 이동이 가능한 성좌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차원 강탈자를 다른 성좌가 대체할 수 없는 이유라고 생각할 정도로 성능이 좋은 능력이다.
바로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대전역에 온다고 말한 적은 없었는데, 여자의 직감인 걸까?
"응, 서연아."
한서연의 연락이었다.
* * *
그녀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연애하던 시절, 수시로 드나들었던 그녀의 집이라 강후의 입장에서 어색할 것은 없었다.
왜 뜬금없이 전화가 왔나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정화 길드에 정식 영입된 것이다.
즉, 위성 길드인 '해어화' 길드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일종의 스카우트가 된 셈이다.
프로 스포츠로 따지면 2군에서 1군으로 콜업된 것이니, 감개무량한 것은 당연한 일.
그녀의 기쁜 마음은 백번 이해했지만, 강후의 입장에서는 운명의 장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최대의 적이 될 조직에 소속된 전 여자친구라니.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있는 걸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무조건 서연이와 싸우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때의 일은 그때 가서 걱정하기로 했다.
한서연의 집에 들어온 강후가 외투를 벗고는 그녀가 건넨 탄산수 한 잔을 마셨다.
마침 갈증이 났던 차라 시원하게 마시고 있으니, 그녀가 웃으며 대화의 운을 뗐다.
"오빠가 못 본 사이에 많이 달라진 느낌이 드네. 여기서도 강인한 마나의 힘이 느껴져."
"립 서비스가 좋아졌네."
"아냐! 정말로 그렇게 느낀 거야. 오빠도 알잖아. 내가 제법 마나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
"그렇긴 하지."
"청명 수용소에서 탈출한 그때 만났던 오빠의 느낌과 전혀 달라. 강해진 것 같아. 그것도 엄청."
"많은 일이 있었지."
강후가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경험한 변화가 가까운 사람에게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연애할 때도 자신의 눈빛 하나하나, 미세한 감정의 흐름까지 읽었던 한서연이다.
그만큼 감각적인 그녀이기에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오빠가 안 올 줄 알았어."
"왜?"
"오빠는 항상 거리를 두려고 하니까. 그러면 이 집이 오빠에게는 가장 불편한 장소잖아?"
"바꿔 생각하면 어떨까. 거리에 대한 부담이 없으면, 딱히 불편할 것도 없는 장소야."
"크큭, 가까이 오지 말란 얘기야?"
"우리는 좋은 친구라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된다는 얘기지."
강후의 말을 들은 한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체념한 듯 냉수를 들이켰다.
물론 강후의 말에 상처를 받았다거나,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과 강후는 연인 관계가 아니다. 과거에 연인이었던 친구 사이일 뿐이다.
"좋은 친구. 그래. 오빠의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아."
이내 그녀가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고 있던 윗옷을 힘껏 벗었다.
의도한 건지.
아니면 정말 성별을 뛰어넘은 '친구'라고 생각해서, 편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속에 덧대어 입은 티셔츠 하나 없이, 바로 속옷과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노출이었다.
나름 추파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그녀의 신호였지만.
"못 본 사이에 배가 많이 나왔네."
강후가 가차 없이 분위기를 깨 버렸다.
69화 강동현과의 조우 (2)
* * *
한서연은 보기 좋게 깨진 분위기 덕분에 안전(?)히 파자마로 갈아입고 방으로 향했다.
뭔가 가져오려는 것이 있는 모양. 강후는 거실에서 풍기는 은은한 커피 향을 느끼며 앉아 있었다.
사실 본능에 충실하려면 얼마든지 충실할 수 있었다.
감정은 메마르고 무디어졌을지 몰라도, 욕구는 선명하고 충만하기 때문이다.
성욕? 당연히 있다.
미친 세상을 그럴듯하게, 정상적으로 살면서 헤쳐나가려면 성욕 역시도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단순하게 욕구를 채우자고 그녀의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과 달리, 한서연에게는 비즈니스적으로 가볍게 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것은 원작의 신강후에게 빙의하면서 자연스럽게 덧씌워진, 순수한 마음일 것이다.
몇 번이고 지워보려고 해도, 너무 깊이 박혀 있어 절대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도장과도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았다, 라는 말과 함께 한서연이 제법 두꺼운 종이 묶음을 가지고 다가왔다.
"오빠, 이거 봐봐."
"뭔데?"
"나는 알잖아. 오빠가 어떤 병으로 고생하는지."
"그렇지."
한서연은 강후의 선천성 마나 과민증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강후가 헌터로서의 능력을 각성한 순간부터 지독하게 시달렸었던 병이기 때문이다.
서로 열렬히 사랑했던 때가 있었기에, 그녀가 그의 병을 알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부터 꾸준히 알아봤었고, 요즘은 더 다방면으로 병을 치료해 줄 사람이 있나 찾아봤었어."
"없을 거야. 불치병이야."
그녀에게 단언하듯 말했지만, 아예 기대가 없지는 않았다.
단,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만큼, 의식적으로 긍정적인 가능성을 낮게 보는 쪽에 가까웠다.
"루마니아에 각성한 후, 희귀병이 발병한 헌터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해 온 사람이 있어."
"루마니아?"
"미하이 반쿠(Mihai Bancu)라는 연구자가 있어. 그 사람도 헌터고, 동시에 포션 과반응증으로 고생했던 사람이야."
"포션 과반응증이라...."
흔한 불치병은 아니다.
하지만 강후에게는 어감이 생소하지 않았는데,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는 병이었기 때문이다.
강후가 짚이는 바가 있어, 그녀에게 바로 되물었다.
"포션을 마시면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건가?"
"응, 맞아. 그래서 체력, 마력 포션을 절대 마실 수가 없는 사람이야. 냄새만 맡아도 거부 반응이 있다고 해."
"흥미롭네."
무미건조하게 말한 흥미로움과 달리, 강후는 자신이 과거에 구상했던 증세와 똑같아 내심 놀랐다.
이 역시도 무의식의 구현인 것이다. 요즘 자주 만나게 되는 현실의 형태다.
"외피 증식증이나 선천성 무감각증에 대해서는 연구뿐만이 아니라 해결한 사례도 있어."
"치료를 했다는 건가?"
"맞아. 그게 한 달 전의 일이야. 얼마 안 된 일이지. 이게 인터뷰 번역본이야."
한서연에게 넘겨받은 자료를 보자, 과연 불치병이 치료된 사례가 있었다.
3류 언론의 찌라시 기사가 아니라, 공인된 헌터 언론에서 꼼꼼하게 작성한 양질의 기사였다.
"진짜 치료가 됐군. 후속 기사에 재발병이나 남은 흔적이 없다고도 적혀 있고."
"맞아! 이 사람을 오빠가 꼭 한 번 찾아가 봤으면 좋겠어. 많이 힘들어했잖아. 현재 진행형이고."
"음...."
마스터 케이만이 유일한 해결책인가 싶었는데, 국외로도 시선을 돌릴 필요는 있어 보였다.
하지만 신중할 필요도 있었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사라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통증만 핀셋처럼 걷어낼 수 있어야 한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 자체가 사라지면, 자신의 가장 큰 장점까지 같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고마워, 서연아. 굳이 날 위해서 이렇게 신경 써 줄 필요가 없는데, 고생이 많았네."
"고생은 무슨. 그냥 운 좋게 알게 된 거야."
"그렇다고 하기엔 쌓아놓은 자료가 너무 많은데."
강후는 한서연이 철저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잘 알았다.
그녀의 성격상, 꾸준히 알아봤을 것이다. 직접 발품까지 팔면서 찾아다녔을 수도 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헌신적이고, 자신보다 남을 더 위하는 사람.
강후가 말을 덧붙였다.
"어떤 식으로든 이 자료의 대가를 지불하고 싶어.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흥. 됐어. 돈은 나도 많아."
한서연이 웃으며 답했다.
빈말은 아니다.
그녀도 헌터로서 재주가 좋은 사람이고, 정화 길드에 영입되면서 거액의 계약금도 받았을 터다.
"그래도 공짜는 싫은데."
"그럼 내가 원하는 것 하나만 들어줘. 그러면 난 받아서 좋고, 오빠는 공짜가 아니니 마음 편하고."
"뭐지?"
"그냥 오늘 하루. 딱 하루만 같이 시간을 보내줘. 예전처럼. 딱 한 번만."
"...."
말을 채 마무리 짓기도 전에 붉어진 그녀의 눈시울을 보며, 강후도 생각이 많아졌다.
과거의 감정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되새길 수는 있다.
한서연이 원하는 보답이 그것이라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연기가 아닌 진심을 담아서 말이다. 뜨거웠던 그 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
강후가 짧게 말을 받았다.
길게, 말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다. 서로를 너무 잘 아니까. 그래서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느덧 서쪽 하늘로 해가 지고 있었다.
곧 찾아오게 될 밤.
이 세상에서 눈을 뜬 이후, 가장 길지만, 한편으로는 외롭지 않은 밤이 될 듯했다.
아주 잠깐만큼은.
과도하게 통제하는 이성의 끈을 벗어 던지고, 감정과 본능에만 충실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감정을 절제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조용히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간은 깊게, 뜨겁게, 그리고 밀물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 * *
다음 날 저녁.
강후는 클럽 하데스를 500m 정도 앞에 둔 지점까지 도착해 있었다.
일전에 대규모 유혈 사태와 납치 사건이 있었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번창하는 중이었다.
해가 지기도 전에 몰려들기 시작한 손님들이 그 증거였다.
금요일 밤의 쾌락과 유흥을 마음껏 즐기기 위해, 젊은 영혼들이 삼삼오오 입장하고 있었다.
물론 손님의 대다수가 이클립스 소속이거나, 일반인 위주일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이클립스가 범죄 조직이기는 해도, 일반인은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품성이 없어서 무시하는 쪽에 더 가깝기는 했다.
그들은 마나를 다룰 줄 아는 헌터를 주로 납치한다. 그리고 수용소로 보내, 마석을 캐게 한다.
즉, 마나를 쓸 줄 아는 일꾼이 필요한 거지 밥만 축내는 일반인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딱 한 가지 걸리는 점은 내부 구조가 바뀌었을 수 있다는 것.'
지난번에 한 차례 전투가 있었기에 내부 구조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층계의 위치가 바뀌진 않았겠지만, 가는 길이 예전과 다를 수는 있는 것이다.
은신 상태에서 무영으로 기척을 숨기고 들어가는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적절하다.
다만 은신을 마냥 오래 유지할 수도 없기에 강후의 셈이 살짝 복잡해지려는 찰나.
"여기서 뭐해요?"
"...?"
갑자기 누군가가 옆에서 툭, 강후의 어깨를 쳤다.
대전역에 있을 지인이라고는 한서연밖에 없는데, 도대체 누가 자신을 알아본 걸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파격적인 하데스의 분위기에 맞춰 몸에 쫙 달라붙는 원피스를 챙겨입은 여자가 보였다.
메이크업의 방식부터 모든 것이 평소와 달라 바로는 못 알아봤는데, 자세히 보니 윤상미였다.
"너는 왜 여기에 있는데?"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오빠는 여기 왜 있는데요? 그리고 옷이 그것밖에 없어요?"
"놀러 온 건가?"
"당연히 놀러 온 거죠! 오빠 같은 사람이 클럽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고. 싸우러 왔어요?"
윤상미다운 질문이었다.
맞는 말이다.
클럽에서 몸이나 흔들려고 강후가 올 일은 없으니까. 실제로 강후는 심한 몸치이기도 했다.
암살자로서의 움직임은 유려하고 화려하지만, 춤꾼으로서는 뻣뻣한 각목 그 자체다.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차피 전부 다 알아도 그녀는 들어갈 수 없는 던전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클립스보다 자신에게 백만 배는 더 호의적인 윤상미의 마음을 알아서이기도 했다.
얘기를 듣고 난 윤상미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처음 듣는 소식인 모양이다.
"내가 도와줘요?"
"도움이 필요해서 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어쨌든 외부에 비공개된 지하 7층을 가야 하는 거잖아요. 혼자는 어려울 텐데?"
"혼자 가나 둘이 가나 똑같아.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거면, 차라리 혼자인 게 속은 편하지."
"당연히 힘으로 뚫으려고 하면 그렇죠. 하지만 그건 저를 너무 단순하게 본 거 같은데요."
"그럼 단순하지 않은 방법이 있나?"
"오늘 찐하게 눈 맞은 연인 콘셉트는 어때요?"
"쉽게 설명해 봐."
"여긴 클럽이잖아요. 지하 6층을 벗어나, 은밀한 공간으로 남녀가 이동하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는 얘기에요."
클럽을 즐기지는 않아도, 그 안에서 어떻게 청춘남녀의 감정이 고조되는지는 잘 아는 강후였다.
윤상미의 말이 그럴듯했다.
"굳이 왜? 들어가도 나밖에 못 들어갈 텐데. 네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이 없어."
"그냥 오빠가 저한테 빚이나 좀 지게 하려는 거예요. 그런 채무감을 싫어하는 오빠잖아."
"일부러 빚을 만든다. 크큭."
웃음이 나왔다.
하루 전, 강후가 이현석을 대했던 것과 비슷한 의도로 윤상미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사람의 마음이란, 다 돌고 도는 모양이다.
인연의 끈을 만들기 위해, 상대로 하여금 마음의 빚을 지게 만드는 방법은 분명 효과가 있다.
"도와줘요, 말아요?"
윤상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가 손발을 맞춰주면 접근이 좀 더 수월하기는 하다.
지하 6층까지 쭉 들어갈 수 있으면, 은신과 기척 숨기기에 투자해야 할 시간도 그만큼 줄어든다.
게다가 아직은 이클립스 전체에 강후의 얼굴이 팔린 것이 아니었다.
차소희의 죽음을 강동현이 내부 비밀로 묻은 만큼, 극소수의 관계자만 강후의 인적사항을 안다.
오늘이 기회라면 기회다.
"도와줘. 기꺼이 빚을 지겠어."
강후가 윤상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참, 그녀와의 인연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사이인 듯했다.
다시 만난 그녀와 또 한 번 하데스에서 호흡을 맞출 일이 생겼다.
과거와는 달리 좀 더 진한 콘셉트로 말이다.
* * *
클럽 하데스에 입장한 후.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강후와 윤상미가 지하 7층으로 갈 기회를 잡기 위해, 서로 호감을 느낀 남녀의 연기를 할 즈음.
강후는 곁눈질로 살피던 주변의 시야에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강동현이었다.
"다들 고생 많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지만, 다행히 강동현과 시선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묘한 시점에 나타난 그.
후우우욱.
강동현이 연초의 희뿌연 연기를 힘껏 뿜어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 순간.
"실례하지."
강후가 자신과 마주 본 윤상미를 방패로 삼아, 그대로 그녀에게 입술을 포갰다.
간발의 차이로 강동현의 시선이 윤상미의 뒤통수를 훑으며 지나갔다.
남녀의 진한 스킨십과 유혹이 오가는 광경이야 클럽에서는 흔하다 못해 당연한 일이기에.
강동현은 대수롭지 않게 쓱 훑어보고는 어디론가 향했다.
아슬아슬했던 순간이었다.
70화 강동현과의 조우 (3)
* * *
"제대로 해요."
"뭘?"
"눈 맞은 여자에게 스킨십을 이렇게밖에 못 해요?"
"...."
"연기를 연기처럼 하면 다 들켜요. 진심을 담아서 연기를 해야 안 들키지."
한 몸으로 뒤섞여 입을 맞추고 있는 강후와 윤상미는 자연스럽게 지하 7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지하 7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구석에 만들어져 있었다.
실제로 그 주변에 이미 '먼저' 자리를 잡고 재미를 보고 있는 남녀도 꽤 됐다.
다만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별도의 감시용 시스템이 구축되어있다는 것이랄까?
'마나에 반응하는 구조네.'
강후가 바로 알아봤다.
지하 7층으로 들어서는 초입을 꼼꼼하게 덮고 있는 무형의 결계는 마나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여기를 통과하기 위해 은신을 하든, 도약을 하든 무조건 감지가 된다는 얘기다.
감지를 피하기 위해서는 불규칙하게 얽혀 있는 결계를 피해 가야 한다.
다행인 것은 강후에게는 마나의 흐름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결국 결계도 마석의 마나를 기반으로 삼아 돌아가는 형태의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형태를 보니 제법 실력이 있는 헌터의 손길로 구축된 결계는 틀림없어 보였다.
나름 비싼 돈을 주고 만든 티가 났다.
이클립스 내부에 그만한 장인이 있는 걸까.
"오빠, 생각보다 입술이 꽤 두껍네요."
"불편해?"
"아뇨. 원래 입술 두툼한 사람이 매력이 넘치는 법이에요. 입술이 가는 남자는 싫더라."
"나 때문에 고생하는군."
"고생은 무슨? 나름 사심을 채우는 거죠. 크큭. 잘생긴 남자와 키스를 할 기회가 흔하겠어요?"
"잘생겼다라...."
"오빠 정도면 잘생겼죠. 이상하게 겸손 떨 생각하지 말아요. 잘생긴 건 잘생긴 거니까."
윤상미가 괜시리 어색해질 수도 있는 분위기를 농담과 장난으로 유쾌하게 메웠다.
어쨌든 오늘의 일로 윤상미에게 신세를 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도와준 덕분에 강동현의 시선도 피했고, 지하 7층 앞까지 무난하게 왔다.
확실히 눈 맞은 남녀의 연기를 하며 움직이니,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딘가를 찾듯이 움직였으면 진즉에 누가 붙어도 붙었을 터다.
윤상미가 속삭이듯 말했다.
"빠져나올 자신은요?"
"그건 확실한 방법이 있어."
"어떻게요?"
"아예 클럽 밖으로 안전하게 나갈 방법이 있어. 그러니까 들어가기만 하면 돼."
"진짜예요?"
"여기서 농담을 할까?"
강후의 대답에 윤상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후가 몰래 들어가려는 던전의 입장을 도와주는 것까진 좋은데, 나올 때가 걱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후에게 확실한 방법이 있다고 하니,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럼 이제 가 볼게요. 오늘 하데스가 물이 좋아서, 노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아요."
"고마워. 이쯤이면 된 것 같네. 빚은 나중에 꼭 갚도록 하지."
"나중까지 갈 것도 없어요. 그냥 오빠 번호 하나만 줘요. 그게 내 요구예요."
"내 번호 값이 그렇게 비싼가?"
"비싸게 구니까 비싸지죠. 얼른 내놔요. 이제 와서 다른 소리 하기 없기에요."
"좋아."
강후가 윤상미의 스마트폰에 자신의 번호를 찍어 주었다.
전화를 건 그녀가 강후의 스마트폰이 울린 것을 확인하고는 웃으며 화면을 껐다.
"우리 던전 한 번 꼭 같이 가요. 얼마 전에 괜찮은 던전 하나를 제가 발견했거든요."
"소유자가 없는 던전?"
"네, 맞아요. 이미 헌터 치안청의 허가를 받아서 소유권도 인정받았어요."
"부럽군."
진심이었다.
개인 소유의 던전이 있다는 것은 언제든 레벨업에 도전할 수 있는 훈련장이 있는 것과 같으니까.
어지간한 던전은 주인이 다 있다 보니 갖기가 쉽지 않은데, 윤상미가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조만간 연락할게요. 번호 차단하거나 그러지 말구."
"알았어."
"그럼, 갈게요!"
"신세 많이 졌네."
강후가 손인사를 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윤상미가 쿨하게 계단을 따라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얼굴에 잔뜩 홍조가 띠어져 있었지만, 워낙 조명이 어두운 탓에 강후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럼. 이제 들어가 보실까.'
결계 앞으로 움직였다.
제법 촘촘하긴 하지만, 몸 하나를 딱 옆으로 돌려서 지나갈 만한 틈이 하나 보인다.
마나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없는 헌터라면, 절대로 통과하지 못할 틈이지만.
강후에게는 보였다.
어디서, 어떻게 몸을 틀어야 이 결계와 접촉하지 않을 수 있을지.
스르륵....
어둠 속으로 강후가 자연스럽게 몸을 숨겼다. 늘 그랬듯이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사라진 그였다.
* * *
흐름은 좋았다.
결계를 안전하게 통과했고.
온갖 잡동사니가 먼지에 뒤섞여 쌓여 있는 공간을 지나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창고도 지났다.
애초에 비공개 지역이라 그런지 CCTV도 없었지만, 강후는 용의주도하게 은신 상태로 움직였다.
안전해 보여도, 절대 방심하지 않고 변수에 대비하는 것. 그것은 강후의 변하지 않는 신조였다.
그렇게 도착한 지하 7층의 어딘가에는 분명 베니가 말했던 던전의 입구가 있었다.
아직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지만, 그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마나를 갈구하고 탐닉하려는 듯한 던전의 기운은 먼 곳까지 뻗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참 많았는데 말이야. 이왕이면 인사는 좀 하는 게 좋지 않을까?"
"...?"
"불청객 씨. 이미 네가 어딨는지 나는 알고 있다는 얘기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차소희를 죽인 후에 통화하면서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은 중저음의 목소리. 강동현이었다.
강후가 주변을 둘러보자, 내부 엘리베이터 하나가 여기로 연결되어 있었다.
밖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면 비밀 엘리베이터인 모양. 충분히 있을 만한 구조물이었다.
"위에서 보드카나 마실 것이지, 언제 여기로 와 있었던 거지? 몰랐군."
강후가 은신을 풀었다.
어차피 강동현과 싸우든 무엇을 하든, 은신은 풀어야 한다. 얼굴을 숨길 수는 없다.
게다가 강동현과는 이미 구면이었다. 서로 얼굴을 알게 된 경로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허허. 신강후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의외인걸?"
강동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찌감치 혈루를 꽉 움켜쥔 강후는 언제든 전투에 돌입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전략적으로 상황에 맞춰서 공간 이동을 쓸 계획도 있었다. 선택지는 하나가 아니었다.
"아주 좋은 구경거리가 지하 7층에 있다기에 왔지."
"누구에게 들은 거지?"
"믿을 만한 정보원에게서."
베니가 믿을 만한 정보원인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 그럴듯하게 포장을 했다.
강동현이 내부자 소행으로 누군가를 의심하게 만들고 싶은, 소소한 노림수였다.
물론 딱히 타격이 될 만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신강후. 억지로 자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볼 것 같았는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나도 마찬가지야."
"하데스는 우리 이클립스가 운영하는 클럽이다. 던전 역시 우리의 소유지."
"어차피 있어도 아무도 못 들어간다며. 그럼 내가 좀 들어가 봐도 되지 않나?"
"누구 마음대로."
"아무도 못 먹을 음식이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먹어서 소화하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어서."
"개소리를 논리적으로 하니, 그럴듯하게 들리는군."
"하긴 사냥개를 부리려면, 개소리를 열심히 하긴 해야 했겠지. 알아듣는 게 이상하진 않네."
"멘트가 제법 살아있네."
"입만 살아있는 건 아니라고."
살짝 자세를 낮췄다.
강동현은 육체파 헌터다.
복싱이 주특기다.
그래서 애초에 클래스의 분류도 격투가로 구분됐다. 광전사만큼이나 희귀한 클래스다.
강동현은 정면 승부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다.
레벨 250대의 차소희는 약점을 노리고, 변수를 창출해서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해도.
레벨 500을 훌쩍 넘기는 강동현은 지금의 강후에게 무리였다.
'대신 버티면서 들어갈 기회를 노려볼 수는 있지.'
어차피 여기서 강동현과 생사전을 벌일 필요는 없다. 그럴 생각도 없고.
다만 시간을 벌면서 던전에 빠르게 마나를 불어넣을 수 있다면, 입구가 금방 열릴 것이다.
카득!
바로 매드 솔라키움을 씹었다.
무한대로 던전에 마나를 쏟아부으려면, 지금은 무조건 매드 솔라키움을 먹어야 한다.
"공짜는 없다, 신강후!"
쿠과과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강동현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당장에라도 터져나갈 듯한 양쪽 팔뚝은 그의 일격이 얼마나 위협적일지 미리 암시하는 듯했다.
스파앗!
강후는 바로 기교의 장막을 깔았다.
장막의 반경 안에서는 절대 은신이 유지되기 때문에 시간을 벌기에는 제격이었다.
동시에 강후는 전력을 다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대부분을 던전에 조준했다.
이왕이면 가까운 곳에서 마나를 불어넣고 싶었지만, 중요 위치는 이미 강동현이 선점하고 있었다.
"오? 소희를 죽일 때 쓴 적 없는 스킬이 생겼군? 최근에 얻은 스킬인 건가?"
강후가 사라지자 강동현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품에서 꺼낸 은신 탐지용 고글을 썼지만, 역시나 강후는 보이지 않았다.
"절대 은신 스킬이라. 암살자와는 너무 잘 어울리는 스킬이군. 멋있어. 아주 잘 어울려!"
강동현이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그는 충분히 여유를 부릴 만한 실력이 있었다.
강후는 대꾸하지 않고, 계속 마나를 불어넣었다.
몸이 주변의 마나를 폭발적으로 빨아들이자, 순식간에 몸 전체에 과부하가 걸렸다.
하지만 매드 솔라키움을 먹어둔 덕분에 과부하에 대한 정산은 30분 뒤로 미뤄둘 수 있었다.
[불굴의 투신]
[전투 시간이 길어질수록, 근력이 비례해서 상승하고, 체력이 회복됩니다.]
'지랄 맞은 성좌랑 계약했군.'
스캔으로 확인된 강동현의 성좌 정보 중에 인상적인 성좌 하나가 있었다.
기억이 맞다면.
불굴의 투신도 성좌 서열 100위 안에 거뜬하게 들어가는 수준급의 성좌다.
차원 강탈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성좌 혜택이 아닌가.
싸울수록 강해지고 회복된다니? 미친 혜택이다.
"흠. 흥미롭군. 던전에 제법 많은 양의 마나가 들어갔어. 이 정도 마나는 거뜬하다는 거지?"
강동현이 꾸준히 던전에 공급되고 있는 마나의 흐름에 감탄했다.
그는 강후를 못 찾는 게 아니었다.
강후가 이 던전을 당당하게 찾아올 만큼, 얼마나 마나를 잘 다루는지 보고 싶었다.
결론만 놓고 말하자면 상상 이상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마나를, 그것도 단시간에 폭발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성적인 마나 부족에 시달리는 클래스 Top 3를 거뜬히 차지하는 암살자에게 맞지 않는 사치였다.
"이거 안 되겠군."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너무 여유를 부렸다가는 강후에게 눈 뜨고 대문을 열어주는 꼴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더 잴 것도 없이, 바로 움켜쥔 오른손 주먹에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굳이 강후가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강력한 충격파로 던전 앞 공간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강동현의 무식한 대응법을 간파한 순간 강후의 표정이 굳었다.
애초부터 강동현은 절대 은신을 간파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냥 날려버리면 되니까.
센 놈은 역시 대응이 달랐다.
71화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 (1)
스파앙!
그리 넉넉하지도 않은, 지하 7층의 통로 안에서 강동현이 날린 '권풍'이 모든 공간을 잠식했다.
[호신 - 2단계]
재빨리 호신 2단계를 전개한 덕분에 가장 강력한 권풍의 첫 번째 단계는 버텨냈다.
하지만 다섯 차례에 걸쳐, 힘이 조금씩 줄어들며 전방으로 방출이 되는 형태였기에.
이후로도 네 번의 공격을 추가로 막아내야 했다.
보호 결계는 물론, 신속 회피와 도약까지 곁들여가면서 전력을 다해 공격을 피했다.
과연 강동현이었다.
권풍 다섯 번 중에 한 번만 제대로 맞았어도 뼈도 못 추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옆에 놓여 있던 작은 책상의 철제 다리가 기역 자로 구부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뼈였다면 저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기 딱 좋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강동현의 공격을 모두 피했고, 마나를 좀 더 넣었다.
[전광비도]
강후가 품에서 꺼낸 연습용 단검 하나에 전광비도 스킬을 시전하며, 강동현에게 날렸다.
보통의 헌터라면 맹렬하게 날아드는 단검을 보고 피하거나, 막아낼 방법을 찾을 터.
하지만 강동현은 단검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망설임 없이 정권을 질렀다.
"하압!"
순식간에 부딪힌 주먹과 단검.
연습용 단검이기는 해도, 상당한 운동량을 실은 공격이었다.
하지만 강동현의 손끝에서 약간의 불꽃이 튄 것을 제외하면, 변화가 없었다.
내심 그의 몸이 조금이라도 뒤로 밀려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움찔하는 선에서 끝났다.
'무식하게 힘이 센 놈이군.'
이렇게 평가절하할 수 있는 실력은 아니지만, 강후는 강동현의 이미지를 단순하게 생각했다.
물론 무식하게 힘만 센 것은 아니다. 나름의 전략 전술도 가졌다.
다만 일반적인 동레벨의 헌터와 비교했을 때,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
"으럇! 으랴앗!"
강동현은 계속 은신 상태에 있는 강후를 타격하기 위해, 여기저기로 주먹을 내뻗었다.
그때마다 강한 충격파가 뻗어져 나오며, 내벽이 무너지고 흔들렸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풍뢰진]
강후가 강동현의 판단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풍뢰진을 깔아가며 신경을 긁었다.
그가 풍뢰진에 상처를 입을 것 같지는 않지만, 유발되는 공격 효과에 신경이 쓰일 듯해서였다.
"잔재주가 많구만,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은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 보자!"
강동현의 말엔 이유가 있었다.
은신 상태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무한정 은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강후의 공격만 적절하게 차단하면서, 좁은 공간에서 사방으로 공격을 퍼붓는다면.
결국 강후의 마나가 고갈되든, 은신 유지가 힘들어지든 해서 상황의 끝을 본다는 계산이었다.
안타깝게도 강동현은 강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자기 나름대로는 강후의 실력을 높게 평가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능력에 비하면 한없이 낮았다.
매드 솔라키움을 씹은 강후에게 마나의 소모는 조금의 걱정거리도 아니었다.
은신 유지?
직접적인 충격을 입는 것만 아니면, 유지는 30분 동안 문제없이 가능했다.
강동현은 강후가 특수한 조건 안에서는 무한대로 마나를 활용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강후는 끊임없이 모여드는 마나를 던전에 아낌없이 퍼부었고, 서서히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좋아. 감이 온다.'
마나를 게걸스럽게 탐하던 지하 7층 던전. 녀석이 빨아들이는 마나의 양이 현저히 줄었다.
그 양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정해진 양 이외에 과도하게 마나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기에, 알아서 조절하는 것이다.
[그림자 걸음]
[환영술]
[시야 강탈]
이어 강후가 아껴뒀던 스킬 몇 개를 강동현을 향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공격 의사? 처음부터 없었다.
철저하게 강동현의 시야를 교란시키고, 시간을 벌기 위한 강후의 노림수였다.
애초에 레벨 100도 안 되는 헌터가 500이 넘는 헌터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사람으로 따지면, 7살 어린 아이가 25살의 운동선수를 상대하는 격이다.
그림이 그려지는가?
어지간한 핸디캡을 주지 않는 이상, 절대 성사될 수도 없고, 성사되어서도 안 되는 매치업이다.
한쪽의 승률이 99.9%도 아니고 100%이기 때문이다. 지금 두 헌터의 전투가 딱 그랬다.
'됐다.'
그 사이.
마나를 넉넉하게 흡수한 던전의 입구 색깔이 바뀌기 시작했다.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어?"
강동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던전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열린 걸까?
그저 탐색전의 시작이라고나 할 법한, 아주 짧은 교전을 치렀을 뿐이었다.
강동현의 입장에서는 아직 몸도 풀리기 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쪽은 상황이 끝났다.
그리고.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동현을 향해, 강후가 보란 듯이 손가락 욕을 날리고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깔끔한 입장.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강동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입구에 몸을 들이밀어 봤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튕김이 전부였다.
"하하하. 이거 완전 의외인데. 내가 신강후의 능력을 너무 얕잡아본 건가?"
강동현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스킬들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은 앞서 차소희와의 전투 영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상 속에서 스킬을 많이, 아낌없이 쓴다는 점도 확인은 했었다.
즉, 마나 스탯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풍요로움이 있는 헌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견제하며 동시에 공격을 피하고, 여기에 던전에 마나까지 불어 넣는....
쓰리 트랙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나가 '정말'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강후는 그것을 해냈다.
즉, 강후가 마나를 다루는 능력에 대해서만큼은 강동현이 완전히 오판한 것이다.
"진심으로 갖고 싶군. 이 녀석만 얻으면, 소희가 죽은 건 싸게 먹힐 것 같은 느낌인데...."
강동현이 입맛을 다셨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데, 강후의 잠재력은 황금 떡잎 수준으로 보인다.
"일단은 다시 던전 밖으로 나올 때, 어떻게든 붙잡아야겠군. 젠장. 오랜만에 배가 아픈걸."
강동현이 배를 어루만졌다.
자기도 못 들어가 본 던전을 유유히 공략하게 될 강후를 생각하니 배알이 꼴리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강동현도 지금은 여기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도저히 계산이 서지 않기에.
보기 좋게 강후에게 한 방 먹었고, 입장료 한 푼 받지 못하고 무료 입장을 시켜준 셈이 됐다.
* * *
던전 안으로 들어온 강후는 그 즉시, 속도를 내서 공략을 시작했다.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이라고 지칭하기는 했지만, 사실 던전 하나를 지칭하는 고유 명사는 아니다.
이런 식으로 다량의 마나가 입장권이 되는 던전은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나가 아닌 살아 있는 헌터의 '피'라던가, 다른 형태로 입장료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최악의 경우가 살아 있는 헌터의 '목숨'을 요구하는 곳이다. 즉, 누군가 죽어야 문이 열린다.
이런 던전은 사실 도덕적인 이유로 대다수의 헌터는 들어가기를 꺼렸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도덕적이고 바르게 흘러가지 않는 법. 당연히 제물을 갖다 바치는 헌터도 많았다.
어쨌든 까다로운 던전 입장 조건에 심지어는 강동현까지 나타난 변수가 있었지만.
사고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강동현의 방심도 한몫했고, 아낌없이 매드 솔라키움을 씹은 선택도 옳았다.
"던전의 전반적인 레벨 수준은 200 정도네. 경험치도 확실히 예상보다 2배는 더 되는 것 같고."
그간 한 번도 공략되지 않고 내부 에너지가 누적된 형태이다 보니, 전반적으로 보상이 좋았다.
특별한 아이템이나 마석을 드롭하는 것이 아니어도, 경험치 자체가 풍족했던 것이다.
"이 기회는 딱 한 번뿐이니까."
한 번 공략이 끝나고 나면, 다시 리셋된 이 던전에서 똑같은 혜택을 누릴 수는 없다.
그때는 원래대로 돌아간 기본값의 경험치를 제공한다. 지금의 절반 수준이 되는 셈이다.
그때.
쿠웅! 쿠웅!
3m 정도의 거구에 근육질의 몸을 가진 미들 보스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 대숲 지대로 접근하던 상황이라 경계 수준을 높인 상태였는데, 바로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아드]
[특수한 던전의 환경에 따라 적요석 1개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습니다.]
미들 보스의 이름과 함께, 아래의 내용으로 표시된 것은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내용을 해석하자면, 던전 내부의 에너지가 누적된 상태라 특수한 보상이 추가됐다는 얘기였다.
그 보상이 다른 것도 아닌 적요석이었다.
적요석은 스킬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필수 재료다. 적요석이 없으면 스킬 업그레이드를 시작조차 할 수 없다.
현재 강후가 갖고 있는 적요석은 총 1개.
적요석이 있으면 호신 스킬을 3단계까지 올리는 것도 가능하고.
더 나아가 2개 이상의 적요석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스킬들의 업그레이드도 가능해진다.
미들 보스가 1개를 준다는 것은 메인 보스 같은 경우는 최소 2개를 기대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여차하면 여기서 든든하게 적요석 농사를 하고 갈 수도 있다.
"문제는 저놈이군."
콰직! 콰드득!
크르르르.
강후가 신경질적으로 대나무를 부러뜨리며 나타난 미들 보스 아드를 응시했다.
이족 보행을 하는 악어형 몬스터로 한쪽 팔은 아예 날카로운 날처럼 다듬어져 있었다.
신체 부위가 하나의 무기인 것이다.
"적요석 하나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못 먹어도 고지."
강후가 전투태세를 갖췄다. 아직 매드 솔라키움의 약발도 남아 있는 만큼, 두려울 것은 없다.
* * *
그 시각.
'별일 없는 것 같네.'
쾌락으로 가득한 하데스의 분위기에 흠뻑 취해 즐기고 있던 윤상미가 시선을 돌렸다.
강후가 들어간 지 꽤 되었는데도 별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안전하게 입장한 모양이다.
'내가 누구 걱정을 하는 건지.'
윤상미가 아주 잠깐이나마 강후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강후를 보고 있자면, 막연한 느낌이어도 그가 위험에 빠지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강후가 걸어온 행보를 제법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강후에게는 늘 세컨드, 써드 플랜이 있는 느낌이었고. 그래서 실패해도 당황하지 않는 듯했다.
솔직히 부러웠다.
전략적 안배는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확신과 그만한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윤상미는 자신이 강후처럼 능숙하고 태연하게 위기에 맞설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강후에 대해서 경외의 감정과 동시에, 실력에 대한 호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더 나아가 이성으로서의 호감도 마찬가지다. 분명 그에게는 차가운 도시 남자의 매력도 있었다.
그때.
쿠구구구! 쿠구구구!
문이 닫혀 있는 지하 6층의 비상구 쪽 철문 밖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방향이 전부 아래로 향하는 것을 보니, 지하 7층으로 움직이는 것이 틀림없었다.
"...."
살짝 걱정이 됐다.
들어간 강후는 어쩔 수 없고.
던전 밖으로 나올 강후를 잡으려는 걸까.
분명히 강후가 빠져나올 계획이 있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걱정이 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언뜻 들은 발소리의 총합만 합쳐도 최소 스물은 넘는 상황.
과연 이렇게 많은 헌터의 포위망을 어떻게 탈출할 수 있다는 걸까.
심지어 강동현도 클럽에 와 있는 마당에 과연... 살아서 나올 수는 있는 걸까?
72화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 (2)
* * *
"나, 참. 어이가 없군."
"대장, 어떻게 된 겁니까?"
"이 안으로 들어간 헌터가 있다. 내가 여유를 부린 사이에 마나를 비싸게 지불하고 들어갔네."
"어떻게... 들어간 겁니까?"
"어떻게 들어가긴. 마나를 죄다 쏟아 넣고 들어간 거지."
"그게 가능합니까?"
"나랑 말장난하고 싶은 거냐?"
"...죄송합니다!"
하데스 안팎에서 쓸만한 전투 인력을 소집한 강동현이 던전 입구에 헌터를 배치했다.
폐쇄형 던전은 내부 공략이 완료될 경우 두 가지 형태로 출구가 열린다.
새로운 출구가 열리거나, 아니면 기존의 입구가 출구가 되어 같은 장소로 나오게 되거나.
확률은 반반이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서 전력을 배치한 것이다.
그리고 공략에 실패할 경우에는 무조건 들어간 입구로 되돌아 나와야 하는 만큼....
어떤 식으로는 의미가 있는 전력 안배였다.
각양각색의 헌터가 배치됐다.
각종 무기를 다룰 수 있는 근접 계열이나 다양한 견제 공격 옵션을 가진 원거리 계열은 물론이고.
공간 이동과 가속 활용에 능한 헌터도 배치했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조합이었다.
"들어간 녀석이 누군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다들 불청객의 존재를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지금껏 이클립스 내부에서도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에 들어간 헌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강동현도 들어가지 못한 이 던전을 당당히 들어갔다면,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일까?
"너희들은 말해도 몰라. 나중에 나오면 직접 붙잡고 이름을 캐봐라. 알아내면 포상을 주지."
강동현이 피식 웃으면서 연초를 입에 물었다.
이제부터는 기다림의 싸움이다.
누군가를 진득하게 기다려본 지가 오래됐는데,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테스트를 겸해서 강동현이 던전 입구에 쉴 새 없이 마나를 밀어 넣어 보았다.
하지만 포션까지 먹어가며 보조를 해도, 도무지 던전이 요구하는 '입장권'을 끊을 수가 없었다.
끼이이익.
강동현은 입구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일단 강후가 나오는 대로 생포하기 위한 포위망은 확실하게 짰다.
갑자기 순간 이동이라도 하는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님에야, 하데스를 빠져나갈 수는 없을 터다.
그렇다면 강후의 생포는 확정적이라고 두고.
그를 잡으면 어떻게 후속 처리를 하는 것이 좋을까?
'제정신으로 컨트롤하기는 놈이 너무 잘난 맛에 사는 게 맞아. 이런 놈은 길들이기가 쉽지 않지.'
마음으로 이끌려 자신의 수족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당장에 사냥개라고 불리던 심복들 중에도 마음을 달리 먹고 배신하려고 했던 놈이 한둘이던가?
하물며 처음 단추부터 어긋나게 끼워진 강후가 자신의 밑에서 순순히 따를 리 만무하다.
'추적자.'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이클립스의 자랑(?)이자 두려움의 요소 중에 하나이기도 한 추적자가 좋은 사례일 것이다.
약물을 통해 통제하고 활약하는 인간 병기인 추적자의 메커니즘이라면 강후를 다스릴 수 있다.
꼭 전투 인력으로 활용할 필요도 없다.
저 정도의 마나 활용 능력이면, 마석 광산에만 던져 놓아도 수많은 수용자의 가치를 대신할 터다.
"참나. 여자도 이렇게 기다려본 적이 없는데, 팔자에도 없는 대기를 하게 생겼군."
강동현이 씁쓸한 속이 쉽게 달래지지 않는지, 연초 한 개비를 더 꺼내서는 입에 물었다.
툭 뱉은 농담에 여기저기서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가장 먼저 웃은 놈 앞으로. 너는 내가 특별히 기다림이 끝날 때까지 기마 자세로 대기시킨다."
괜히 짓궂은 장난까지 치는 강동현이었다.
* * *
그로부터 약 10분 후.
꾸에에엑!
아드가 혀를 빼물고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강후의 앞에서 쓰러졌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이놈 하나 상대하는 데에도 체력을 이렇게 갖다 쓸 줄이야. 던전 수준이 높긴 높군."
강후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굵은 땀방울을 신경질적으로 쓸어내렸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앞서 강동현과의 전투가 도움이 됐는지, 고생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 쉽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만큼 성장에 대한 갈망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아마 이런 갈망은 더 이상 오를 것이 없는 경지까지 올라야 비로소 사라질 듯했다.
레벨로 따지면 999랄까? 먼 미래의 일이다. 물론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기도 하고.
레벨은 이제 88이 됐다.
착실하게 쌓아온 경험치 버프는 이 던전처럼 경험치가 짭짤한 곳에서는 체감 상승 폭이 더 크게 느껴졌다.
"적요석도 2개. 이러면 이제 업그레이드 조건으로 적요석 2개를 요구하는 스킬도 변환 가능하고."
아드에게서 얻은 적요석이 든든했다.
현금적인 가치는 계산하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적요석의 활용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거기에 스킬이군."
강후를 가장 흡족하게 만들어준 것은 아드에게서 강탈한 스킬이었다.
후보군은 여러 개가 있었지만, 그중에 효율이 좋을 스킬을 골랐다.
[광란적 치유]
[스킬 숙련도 : Lv Max]
[정지된 상태에서 마나 1을 체력 1로 치환하여 회복합니다. 초고속의 회복이 가능합니다.]
매드 솔라키움을 먹은 상태면, 사실상 무한대에 가깝게 체력 회복이 가능한 스킬이었다.
정지된 상태라는 전제가 붙기는 하지만, 그거야 잠시 동안 멈추면 될 일이다.
혹은 은신 상태에서 조용히 서서 체력을 회복할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이제 적어도 내 사전에 힐러는 없겠네. 자체 회복이 가능하니."
혼자 다 해 먹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굳이 멀리서 예시를 찾으려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로 강후 자신이 그 말을 증명하는 자체니까.
낮은 방어력이 약점인 암살자에게 자체 회복 스킬이 탑재된다는 건, 사기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 속도를 좀 더 내볼까."
꽤 까다로웠던 미들 보스의 언덕을 넘었으니, 이제 또 샌드백이 될 몬스터를 찾아 나설 차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언제라도 뒤에서 강동현이나 그 패거리들이 모습을 나타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으니까.
하나라도 놈들에게 퍼주지 않으려면, 부지런하게 몬스터의 씨를 말리면서 전진해야 한다.
탄탄대로였다.
발걸음은 빠르게.
마음은 느긋하게.
순차적으로 몬스터를 상대해 나갔다. 일대일 구도를 유도하면서, 하나씩 처리한 것이다.
단 한 마리의 작은 몬스터도 놓치지 않고 척살한 덕분에 레벨은 91까지 쭉 상승했다.
보통 던전 한 곳을 '독식'해도 레벨 2를 올리기 힘들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강후가 리미트리스 던전에 들어와서 본 이득은 꿀을 빤 정도가 아니라, 꿀통에 몸을 담근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중간에 매드 솔라키움의 효과가 끝나면서, 앞서 강동현과의 전투에서 계산을 미뤄뒀던 것에 대한 후폭풍을 온몸으로 실감하기도 했다.
그래서 꼼짝 않고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30분 정도는 반쯤 탈진한 상태로 앉아 있어야 했고, 이후 30분은 안정을 되찾기 위해 호흡을 신경 써야 했다. 그렇게 충분히 체력을 회복한 다음에야 강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레벨에서만 희소식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중간에 우연히 발견한 솔라키움 서식지에서 다수의 솔라키움을 채취하고 보유량을 30개까지 늘렸던 것이다.
일반 솔라키움도 언제든 용도가 다양한 만큼, 여분을 충분히 확보한 셈이었다.
아울러 미들 보스 하나를 더 처치했다.
이름은 킹 슬라임.
말이 좋아서 미들 보스지, 보너스 몬스터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애초에 공격 능력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끼잉끼잉 거리며 일방적으로 맞아준 것으로도 모자라, 녀석은 아낌없이 보상을 주고 갔다.
그렇게 적요석은 3개가 됐고.
아이템 드롭까지 이루어져 부적 아이템이 하나 더 늘었다.
[말랑말랑한 부적]
[등급 : 없음]
[긴급 사용 : 마나를 전혀 소모하지 않고 스킬을 1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재사용 대기 1시간.]
효용 가치가 있는 부적이었다.
마나 회복이 더딘 상황에서 대량의 마나를 소모하는 스킬을 써야 한다면?
말랑말랑한 부적의 '긴급 사용' 옵션을 활용하면 되는 것이다. 보험용으로는 제격인 셈이다.
다만 딱 한 가지.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익숙해지기 힘든, 킹 슬라임에게서 강탈한 스킬의 이름이 자꾸 눈에 밟혔다.
자기만 확인하면 되기에 망정이지, 스킬명이라도 외쳐야 하는 이슈가 있으면 쪽팔렸을 것이다.
[귀요미!]
[스킬 숙련도 : Lv Max]
[너비 3m, 높이 2m가량의 중형 크기의 슬라임 1기를 소환합니다. 공격 능력은 없습니다.]
"음...."
누구에게도 스킬명을 직접 입으로 언급하면서 말하고 싶지 않은 스킬이었다.
다만 이름과 달리, 스킬 자체는 유사시에 쓸모가 있었다.
슬라임의 부피가 제법 되는 데다가, 색깔이 불투명해 장애물 역할로 활용이 가능했다.
한편으로는 원거리에서 날아오는 껄끄러운 공격을 방어할 방패의 용도로도 확장성이 있었다.
"내가 가로채지 않았으면, 정말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 같네."
무리해서라도 들어온 보람이 있었다.
강탈 스킬, 경험치, 적요석, 아이템, 어느 것 하나 모자라는 보상이 없는 것이다.
이것들이 고스란히 강동현이나 그 관계자에게 들어갔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
확실히 배가 아팠다.
자체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좋지만, '빌런'의 이득을 성장 동력으로 빼앗는 것은 쾌감이 더 컸다.
오늘 이 자리에서 얻지 못한 적요석과 아이템 차이가 훗날 비수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기에.
보스 몬스터까지 공략에 성공한 시점은 강후가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에 입장한 지, 한나절이 지났을 때였다.
최종적으로 달성한 레벨은 94.
이것만으로도 헌터 인생에 있어서 제2의 전성기라고 불리는 레벨 100이 코앞이 됐다.
거기에 보스 몬스터는 적요석을 무려 2개나 드롭했고, 덕분에 적요석 여유는 5개로 늘었다.
평생 적요석 자체를 구경하지도 못하는 헌터가 9할 이상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대박 그 자체.
여기에 보스 몬스터로부터 강탈한 패시브 스킬은 강후의 체력을 영구적으로 늘려 주었다.
[깨달음 - 피]
[스킬 숙련도 : Lv Max]
[영구적으로 '체력'이 100 상승합니다.]
패시브 스킬인 '깨달음'은 선택에 따라, 마나를 올려주는 형태도 가능했다.
하지만 앞서 야만의 시대 스킬북을 얻은 바가 있는 강후로서는 마나를 높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스킬북 – 야만의 시대]
[특이 사항 : 광전사 전용]
[학습자의 마나 스탯이 50 미만인 경우, 모든 스킬의 마나 사용 값이 50% 감소합니다.]
그렇게 되면.
마나 스탯이 50을 넘어가면서 스킬북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워낙 많은 스킬과 다양성을 가진 강후이기에, 스탯 안배도 심도 있는 계산이 필요했다.
남들은 절대 할 일 없는, 강후만의 특별한 고민인 셈이다.
"적요석 5개를 어떻게 업그레이드에 쓸지는 차근차근 고민을 하도록 하고."
어떤 스킬을 어떻게 업그레이드 하느냐에 따라, 전투에서의 응용 요소가 전혀 달라지게 된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선택지는 많은데, 너무 많은 것이 문제. 충동적으로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그럼... 심호흡 한 번 하고."
강후가 호흡을 다듬었다.
출구로 들어가면 의외의 장소가 나올 수도 있고, 들어갔던 입구로 그대로 나올 수도 있다.
후자일 경우에는 보나 마나 강동현이 있을 터다.
당연히 혼자 있을 리 없고, 부하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겠지.
단 0.5초만 망설여도 그 안에서 벌집이 되어 죽거나, 옴짝달싹 못 하게 포박될 수도 있다.
[호신 - 2단계]
[보호 결계]
강후는 예비 세팅을 마친 뒤.
스으윽.
출구로 발을 내디뎠다.
다음 순간.
"나왔다! 잡아!"
"묶어!"
"활동 영역 차단해!"
혹시나는 역시나가 됐다.
73화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 (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