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 (3)
* * *
강후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입구이자 동시에 출구인 곳으로 강후가 나오는 순간, 강동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들어간 강후가 이득을 혼자 본 것은 아쉽지만, 결국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한 줌의 연기로 사라지고 말았다.
"...?"
강동현은 입에 물고 있던 엽궐련을 자신도 모르게 뱉어낼 만큼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공간 이동 능력을 모조리 통제당한 헌터들이었다.
원래 강후가 모습을 보이면, 곧장 그에게 달라붙어 포박 스킬을 쓸 예정이었던 것이다.
"스킬이 왜 안 먹히는 건데?"
"공간 이동이 거부됐어!"
하지만 내로라하는 실력을 가진 헌터들은 자신의 주특기인 스킬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리고 쏜살같이 날아간 몇 개의 스킬은 강후의 보호 결계와 호신 2단계에 모조리 막혔다.
그다음.
"불철주야 고생들 해."
강후는 가운뎃손가락 인사를 끝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은신도, 도약도, 위장도 아닌 완벽한 공간 이동이었다.
강후에게서만 느낄 수 있었던 마나의 흐름이 완전히 없어졌기 때문이다.
영역 안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면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완벽한 탈출이었다.
"허허. 이놈 봐라?"
강동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예상도 못 한 흐름이었다.
마나를 다루는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앞서 던전 출입으로 확인은 했다.
하지만 그 재능으로도 모자라, 현장을 아득히 벗어나는 탈출까지 가능할 줄이야?
의심할 여지 없는 순간 이동의 능력이었다.
이는 강동현에게도 없는 능력이고, 더 나아가 어지간한 공간 이동 능력자도 힘든 기술이었다.
"진짜 닭 쫓던 개 신세 됐네."
강동현이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강후에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제대로 물을 먹었다. 예상하지도 못한 능력을 본 것이다.
"이래서야... 정말 포기할 수가 없잖아. 질척댈 수밖에 없게 만드는구만?"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한편으로는 강후에게 일방적으로 농락당하고, 좋은 일만 시켜준 것 같아 배가 아팠다.
그렇잖은가.
그 실력 좋은 강동현이 강후에게 상처 하나 내지도 못하고, 던전까지 눈 뜨고 내줘버렸다.
이 자리에 와서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냉정하게 진단해서 입 털고 똥폼 잡은 것이 전부였다.
"대장! 어떻게 합니까?"
"놈이 도망친 것 같은데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부하들이 앞다투어 되물었다.
그러자 강동현이 손을 휘휘 저으며, 허탈함이 잔뜩 담긴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모두 해산해라. 새 됐다."
* * *
"완벽한 탈출이었어."
아무도 없는 텅 빈 공터에 자리를 잡은 강후가 씩 웃으며 방금까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잠깐이지만 또렷이 봤다.
실력 좋은 부하들을 대거 배치해 놓고, 이때다 싶어 자신을 잡으려 했던 강동현의 모습을.
수 싸움이라는 게 그렇다.
패가 많은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또한, 상대의 패를 예측하지 못할수록, 허를 찔릴 확률도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강동현은 자신에게 공간 이동의 묘수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덕분에 잘 차려진 던전을 상차림 그대로 갖다 바친 셈이 됐다.
이제 손때가 묻은 던전이 된 만큼, 클럽 하데스 지하 7층의 던전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다시 간다고 해서 적요석의 획득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새로운 스킬을 강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김천 해방구에서 너무 빨리 나왔어. 쇼핑을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통장에 있는 166억 원의 돈이 계속 신경이 쓰인다. 지금은 현금이 많은 것이 능사는 아니다.
헌터에게 있어, 돈은 스탯 또는 능력으로 치환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돈 자체는 스탯이 되지 않지만, 그 돈으로 아이템을 사면 스탯을 추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계속 돈을 모으기만 하기보다는 적당한 금액만 남기고, 아이템을 사는 것이 나았다.
아직 강후에게는 착용하지 않은 부위의 아이템도 많고, 올려야 할 스탯도 많았다.
"김천으로 다시 가고 싶진 않은데.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차분한 홍천 해방구도 나쁘진 않겠군."
괜찮은 대안이 떠올랐다.
강원도 홍천의 해방구역.
김천 해방구보다 훨씬 크고, 더 다양한 아이템이 판매되는 곳이다.
북한 쪽이 가깝다 보니, 북쪽에서 어둠의 경로를 통해 유입되는 장물도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헌터의 몸에 특수한 시술을 하는 '기술자'들도 홍천 해방구에는 제법 있었다.
포항 시외 버스터미널 앞에 도착한 강후가 홍천행 안전 버스의 시간을 확인하려던 즈음.
전화가 걸려 왔다.
이예린일까 싶었는데, 예상이 그대로 맞았다.
"네."
- 통화 괜찮아요?
"괜찮으니 받았죠."
늘 그렇듯이 툴툴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대화가 시작됐다.
이예린도 이런 화법에 익숙해진 덕분인지, 피식 웃으며 신경 쓰지 않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 지정 의뢰가 들어왔어요.
"내용은?"
- 의뢰가 들어온 용병단과 협력해서 그들의 적대 용병단의 대장을 처리하시면 돼요.
"불꽃놀이는 아닌 것 같고."
- 정치적 개념도 아니에요. 나름 정의구현이라는 코드도 들어가 있는 의뢰죠.
"정의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상대적인 것 아닙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일침이 제법 심장 깊숙한 곳을 찔렀는지, 이예린이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맞는 말이다.
작금의 시대는 철저하게 이미지에 따라 진실이 가려지고 왜곡되는 시대다.
당장에 정화 길드만 해도 그렇잖은가?
이예린이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장시환과 친목을 유지하면서 지내고는 있지만....
군벌 심연의 대장 이현석이 주장하는 대로, 뒤가 구린 일에 정화 길드의 손이 꽤 닿아있음은 그녀도 잘 알았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정화 길드가 정의의 수호자인 줄 안다.
헌터 치안청보다 더욱 신뢰하는 것이다.
장시환이 누군가를 범죄자로 지목하면, 그는 어떤 해명을 해도 무조건 그날 이후로 상종 못 할 쓰레기가 된다.
- 실언을 했네요. 단순하게 말하자면 뭐, 견제 의뢰죠. 좀 과격한 게 문제이긴 하지만?
"타깃은?"
- 수락하셔야만 알려드릴 수 있어요. 비밀 유지 의무도 들어가고요.
"수락하죠."
강후가 의뢰를 받기로 했다.
수십 년을 종교에 파묻혀 살아온 신앙인을 죽이는 의뢰만 아니라면, 딱히 거리낄 것은 없었다.
애초에 털어서 먼지가 안 날 헌터는 없고, 그런 헌터가 제거 의뢰의 타깃이 되니까.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온 헌터를 비싼 돈 주고 죽여달라는 의뢰는 거의 없다.
아니,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 의뢰면 용병단 자체에서 거른다.
- 전종두. 이번 타깃이에요.
"전종두?"
- 네. 오쇼 용병단의 대장이죠.
전종두라는 이름은 생소하지만, 오쇼 용병단이라는 이름은 생소하지 않았다.
원작에서 러시아 범죄 조직이자 길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용병단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국내의 용병 정보를 러시아 쪽에 대거 팔아넘긴 것은 물론, 헌터를 납치해 '매매'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국내의 인재 유출이 문제가 될 만큼 커졌고.
실제로 원작에서 장시환이 문제를 크게 느끼고, 대대적으로 뿌리 뽑기에 나섰던 단체이기도 하다.
그 시기는 지금보다 뒤지만, 밑바탕은 일찌감치 깔린 것이다.
전종두는 머리가 아니다.
삐져나온 꼬리일 뿐.
오쇼 용병단의 납치로 장시환에게 대적할 만했던 유망주나 기대주들이 사라졌던 것을 생각하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도 전종두와 그 윗선은 없어지는 게 훨씬 이득인, 악질적인 조직이었다.
이예린이 말을 이었다.
- 전종두의 레벨은 우선 최소 350 이상인 것으로 추정돼요. 상세 정보는 별도의 보안 메일을 통해서 자료를 보낼게요.
"보상은?"
- 머리 100억. 생포 300억.
"캐낼 정보가 많은 놈인가 보네요. 편차가 심한 걸 보면."
- 아무래도 내부자 정보가 값이 비쌀 수밖에 없긴 하잖아요?
"근데 한 가지만 짚고 가죠."
- 네. 말씀하세요.
"고평가는 감사한데, 이게 과연 저한테 맞는 의뢰이기는 한 겁니까? 상대가 레벨 350인데?"
강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급성장을 거듭하긴 했어도, 아직 강후는 레벨 100을 넘기지 않은 헌터였다.
이예린도 강후의 레벨이 100이 안 된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 선규 씨니까 그런 제안을 하는 거죠.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면 꺼내지도 않았을 제안이에요.
"우리 솔직하게 말해 보죠. 커미션 얼마 받았습니까?"
- 푸핫! 그런 것 아니에요. 저는 사적으로 소개비를 더 받지는 않아요. 공식적으로 기본 수수료를 높이면 모를까?
"순수한 선의다... 이거군요."
- 전폭적인 지지와 믿음이라고 바꿔서 불러주시면 감사하겠네요. 호호.
이예린을 딱히 의심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실 강후가 이 의뢰에 마음이 끌린 이유는 단독 의뢰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활용할 수 있는 아군이 있으면, 갑작스런 변수나 위험에 빠질 확률이 현저히 낮아진다.
강후가 아직 채우지 않은 남은 정보의 퍼즐을 물었다.
"그러면 합을 맞출 용병단은 어디입니까?"
- 김수경 용병단이에요.
"김수경 용병단?"
그때.
생각지도 않았던 거물의 이름이 이예린의 입에서 나왔다.
* * *
"온답니까?"
"응. 방금 이예린에게 연락받았어. 수락했다는군. 이름은 정선규라고 하고."
"가명이겠죠?"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아니, 왜, 형님처럼 대놓고 본명 쓰는 헌터도 많잖습니까. 그래서 그냥 궁금했던 거죠."
강후와 이예린의 통화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김수경은 바로 이예린에게 연락을 받았다.
강후가 김수경이 원한 날짜까지 그들의 집결지로 합류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김수경이 부른 '손님'이 강후 한 명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양양 일대에 거점을 두고 있는 김수경은 이쪽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네임드 헌터였다.
좋게 보면, 지역 인근에서 벌어지는 온갖 범죄 행위의 근절에 앞장서는 인물이었다.
물론 이면에 '이권'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명분은 확실했던 것이다.
그런 김수경에게 최근 들어 자꾸 눈엣가시가 되기 시작한 것이 전종두의 오쇼 용병단이었다.
분명히 윗선에 북한이나 러시아 쪽에 줄을 댄 세력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지역 내에서 분쟁이 공공연히 유발되고 있는 마당에 먼저 선수를 칠 생각이었다.
저런 조직들이 하나둘 영역 내에서 또아리를 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근절이 힘들어진다.
"공태수의 왼팔을 날려버린 그 화제의 인물을 직접 볼 수 있게 될 줄이야."
그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검지로 들어 올린 안경테를 따라, 달빛이 하얗게 반사되어 예리한 선을 만들어냈다.
내심 전부터 보고 싶었던 인물이었다.
'공태수 사건'의 주인공은 김수경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과 귀가 밝은 헌터라면 누구나 궁금해했다.
74화 에밀리아 로즈 (1)
"믿을 만하답디까?"
"피차 얼굴 한 번 안 본 사이에 믿을 건덕지가 뭐가 있어? 실력이 곧 신뢰지."
"하기야 이예린이 칭찬만 열심히 쏟아낸 용병이 정선규 말고는 없었다죠, 아마?"
"그 깐깐한 여자가 필터링을 했는 데도 이 정도 칭찬이라면 믿어도 될 거다."
김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예린과 안면을 터고 지낸 지는 오래됐다. 그녀는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말만 붙여줬다. 미사여구 없이.
그렇다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듯이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김수경은 딱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암살계열의 헌터면 초근접전을 해야 하는데, 과연 전방에서 버텨내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좋든 싫든, 결국 전종두의 앞에 가장 가까이 몸뚱이를 들이대야 하는 것은 강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암살계 헌터의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았다. 멀리서 상대의 목숨을 날로 먹을 수는 없다.
"빨리 시간이 흘렀음 좋겠군."
벌써 두근거렸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강후지만 기대가 됐다.
그것은 울산의 도살자 공태수의 왼팔을 깨끗하게 날려버린 실력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 * *
"여긴 그래도 좀 낫네."
홍천 해방구로 들어설 입구 근처에 도착한 강후가 여유롭게 주변을 살폈다.
초입에서부터 마약초를 태우는 매캐한 냄새가 났던 김천 해방구와는 달리.
홍천 해방구는 가로수로 심어둔 아카시아의 꽃향기가 물씬 풍겨오고 있었다.
게다가 늦은 밤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가로등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주변이 전부 밝았다.
이상한 것은 보통 입구에서는 작은 다툼이든 시비든 왁자지껄한 분위기여야 하는데.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사람이 없었다기보다, 뭔가에 이끌려서 사람이 어디론가 쭉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다만 피비린내라던가 격렬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봐선, '전투'는 아닌 듯했다.
흔적을 쫓는 것은 쉬웠다.
아직 남아 있는 열기와 마나의 흐름은 결국 하나의 지점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강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수많은 헌터에게 둘러싸여 열렬한 사인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여성 헌터 한 명이 보였다.
'에밀리아 로즈?'
강후가 그녀를 바로 알아봤다.
호박색의 눈동자.
은회색의 긴 머리에 C컬이 잔뜩 들어간 머리카락 끝자락의 웨이브.
여기에 올 블랙의 드레스 코드에 맞춰 입은 셔츠와 일자형의 바지까지.
원작에서 에밀리아 로즈라는 이름으로 설계된 네임드 헌터였다.
옆에서 보는 콧날이 무엇이든지 베어버릴 것처럼 날카롭기 때문에 더 잊을 수 없는 이미지였다.
'성좌 정보에서부터 답 없네.'
강후가 스캔된 성좌 정보의 목록을 보고는 혀를 찼다.
단순 비교하면 장시환이 보유하고 있는 성좌의 수와 같았다. 30개의 성좌가 함께하는 것이다.
물론 그녀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있는 이유는 단지 성좌가 많아서는 아니었다.
'열세 개의 별이니까.'
그녀의 미래 때문이다.
현재 강후가 직접 마주하거나 혹은 소식을 통해 접한 적이 있는 열세 개의 별은 총 네 명.
장시환. 채관형. 유청화. 케이시 렉스. 여기에 이제 다섯 번째 인물이 추가되는 셈이다.
물론 지금 이 시점에 에밀리아 로즈가 열세 개의 별에 소속되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원작에서 본격적으로 직접 등장하는 시점은 지금보다는 한참 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잠재적인 적수를 눈앞에서 마주하게 된다는 건,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맛이 있었다.
'정신계. 마법계. 여기에다가 성좌 능력 덕분에 인간은 물론 동식물과도 언어적 교감이 가능하지.'
에밀리아의 특징이다.
그녀에게는 소통의 장벽이라는 게 없다. 메인 성좌가 모든 감정과 언어의 교류를 가능하게 한다.
그녀가 무서운 이유는 사실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상대방도 모르게 생각과 신념을 심는다는 것이다. 아주 은밀하고 교묘하게.
원작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열세 개의 별이 직접 나서지 않고도 많은 적을 처리했었다. 비겁하게.
그래서일까.
지금 이 장소에도 그녀의 매력과 유혹에 취한 헌터 무리가 꽤 보였다.
자살을 지시하면, 미련 없이 목숨을 끊을 것 같은 헌터도 상당수 보이고 말이다.
카득.
강후가 주머니에서 꺼낸 솔라키움 하나를 씹었다.
혹시라도 에밀리아에게 정신을 제압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녀의 정신 제어를 피하는 방법 자체는 어렵지 않다.
우선 정신 제어를 당하기 전에 전조 현상처럼 드는 기분 나쁜 느낌이 있다.
그때, 그 느낌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는 방향성만 잡으면 눈 뜨고 당하지는 않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에밀리아가 보이지 않게 매혹 스킬을 쓴다는 점이다.
사방으로 흩뿌리듯이 흩어진 매혹의 기운은 특히 이성에게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암컷과 짝짓기를 하는 수컷 사마귀처럼, 이성을 상실하게 되는 셈.
"에밀리아.... 대단해...."
"이 아이템이라도 주면 사인 한 장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손 한 번만 잡아도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죽어도 좋을 것 같은데, 흐...."
이미 정신 나간 말들을 지껄여대는 헌터가 상당수였다.
에밀리아도 그런 반응을 즐기는 듯, 도도한 눈빛을 흘리며 갈망을 고조시켰다.
그러던 와중 강후와 에밀리아의 시선이 한 점에서 교차했다.
워낙에 많은 인파가 있다 보니, 스치듯 시선이 마주쳤다가 흘러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에밀리아는 한참을 자신을 바라본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기분 나쁜 느낌이 머릿속을 엄습했지만, 강후는 어렵지 않게 정신 제어를 튕겨냈다.
회피하는 방법을 잘 아는 강후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몰라서 당하는 게 문제지.
에밀리아가 시선을 고정한 채로 강후를 향해 걸어왔다.
따각. 따각.
옷에 컬러를 맞추어 신은 검은색 플랫 슈즈가 특유의 발소리를 내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아주 독한 성좌들만 잔뜩 달라붙은 녀석이구나.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악마들만 붙었다.]
그때, 차원 강탈자가 에밀리아가 계약한 성좌의 면면을 알아보고는 차갑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살피니.
과연 장시환이나 채관형이 계약한 성좌들보다 훨씬 더 악독한 성좌들과 계약되어 있었다.
성좌와의 계약은 보통 계약자인 헌터의 성향이나 본능을 따라가게 되기 마련이다.
에밀리아쯤 되는 네임드 헌터라면, 원하는 성향의 성좌와 계약하는 것은 쉬운 일.
악마에게 끌려가는 순수한 어린 양이 아니라, 직접 악마가 되어가기 위한 조형을 하고 있는 셈.
"저기? 실례지만 대화 가능할까요?"
"와, 저 헌터는 뭔데 갑자기 에밀리아가 가서 직접 말을 거냐?"
"뭔데, 쟤는?"
"역시 얼굴부터 생기고 봐야 되는 건가. 하기야 에밀리아도 우리 같은 오징어에게는 말 걸기 싫겠지."
"새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반반하게 생겼네."
에밀리아가 강후에게 직접 말을 걸자, 부러운 눈빛이 칼날처럼 꽂혀 들었다.
애초에 남의 시선 따위야 관심도 없는 강후이니, 에밀리아 말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강후가 되물었다.
"무슨 볼일인지?"
"괜찮으면 술 한 잔 어때요? 제가 머무는 방에 꽤 괜찮은 술들이 있거든요."
"와... 미친."
단순 대화 신청이나 데이트 제안도 아니고, 자신의 방에 버젓이 남자를 초대하는 꼴이라니!
강후에게 원망에 가까운 눈빛이 쏟아졌다.
'수작질은 아닌 듯한데.'
어차피 정신 제어가 안 통한다는 것은 조금 전 보이지 않는 탐색전으로 파악이 끝났을 터.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질을 하려는 것은 아닌 듯했다.
설령 다른 계획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현장을 빠져나올 방법은 많다.
당장에 순간 이동만 활용해도, 세이브 포인트로 즉시 빠져나오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얼굴도장. 괜찮겠군.'
강후가 에밀리아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콜.
그녀와의 독대가 자신에게 손해가 될 것은 전혀 없어 보였다. 왜 술자리를 원하는진 모르겠지만.
* * *
해방구가 전반적으로 위험한 곳으로 불리긴 해도, 프라이빗하면서 안전한 곳은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에밀리아가 머물고 있는 피닉스 호텔은 해방구 안에 있지만, 어느 곳보다도 안전했다.
해방구 전체를 관리하고 있는 관리 조직인 케낙스(Kenax)의 직영 호텔이라 보안은 최고였다.
여길 잘못 건드렸다가는 해방구에서 척살 대상이 되기에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강후는 에밀리아를 따라가는 동안, 딱 한 가지만 신경을 써서 움직였다.
모든 스킬과 능력이 억제되는 구역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감지였다.
마석을 많이 쓰면, 억제 구역을 만드는 것 자체는 언제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나의 흐름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강후에게 그 정도의 흐름을 살피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다행히 오는 내내 함정의 조짐은 없었다. 애초에 에밀리아는 그럴 생각도 없었던 듯했다.
그렇게 들어온 그녀의 공간.
예상은 했지만 피닉스 호텔 최상층 펜트하우스였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미리 잘 닦아두었던 고풍스러워 보이는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섀클턴 위스키에요."
"기념용 말입니까?"
"그럴 리가요. 1907년에 남극 탐험을 떠났던 어니스트 섀클턴이 베이스 캠프에 묻어뒀다던 그 위스키죠."
"맥킨레이의 그 위스키를 말하는 겁니까?"
"맞아요. 그 위스키죠."
애초에 에밀리아가 운을 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현실이 되니 손끝이 제법 떨렸다.
기념용이 아닌 실제 위스키라면 1896년 또는 1897년산, 둘 중에 하나다.
후자로 생각해도 125년이 훌쩍 지난, 역사가 깊은 위스키를 마시게 되는 셈이다.
이 한 잔은 돈으로 비교할 것이 아니라, 흘러온 시간 자체로 의미가 깊은 위스키였다.
넉넉히 잔에 위스키를 채운 에밀리아가 강후에게 쓱 내밀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셔츠 끝으로 구릿빛 손목을 따라서, 기분 좋은 머스크 향이 났다.
에밀리아가 말을 이어갔다.
"그쪽."
"정선규입니다."
"좋아요. 선규 씨. 혹시 제가 누군지 모르나요?"
"잘 알죠. 헌터 생활을 시작하면 무조건 듣게 되는 이름인데."
"근데 제가 신기하지 않아요?"
"꼭 신기해해야 하나요?"
강후가 되물었다.
네임드라고 불리는 헌터들은 이상한 '자존심' 같은 것이 있다.
자신을 보고 놀라거나, 감격하거나, 존경스런 눈빛을 보내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일전에 장시환이 무미건조한 강후의 반응에 흥미를 느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내가 유명인인데 모르는 척해? 정말 날 모른다고? 하는 그런 이상한 자존심 자극 말이다.
"뭐, 그런 건 아니죠."
"결국, 둘 다 같은 헌터일 뿐인데. 당신이라고 특별할 것이 있다 생각하진 않아서."
"큭."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날카롭다 못해 뼈가 시릴 만큼 차가운 일침에 에밀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랄까.
날 이렇게 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같은 느낌이랄까? 강후의 말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75화 에밀리아 로즈(2)
* * *
에밀리아와의 대화는 오늘 처음 봤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꽤 깊어졌다.
강후의 입장에서는 왜 에밀리아가 자신을 앞에 두고 이런 얘기를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자신이 두렵지 않으니, 아무 얘기나 꺼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위협이 되지 않는 상대에게 몇 마디를 더 한다고 해서, 딱히 약점이 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악을 더 이해하기 위해 악성향의 성좌와 손을 잡는다. 그럴듯하지 않아요?"
"연쇄살인마가 이 세상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 주장하는 것만큼 허황된 소리로 들리네요."
"난 그래요. 순수한 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살인마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여봐야 한다는 것과 똑같이 들려요."
"호호. 예상한 반응이에요."
강후가 에밀리아의 말에 반박을 하긴 했지만, 말투 자체는 평온했다.
그녀가 하는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원작대로라면 에밀리아의 열세 개의 별 합류는 확정적이야. 하지만 변수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
강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방금 에밀리아가 했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괜한 희망을 가질 이유도 없다.
하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악에 대한 호기심으로 열세 개의 별에 들어갔다면?
처음부터 부역자가 되기를 꿈꿔왔던 장시환이나 채관형과는 결이 다른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그녀는 자신의 명예와 부귀영화를 위해서 열세 개의 별이 되었을 수는 있지만.
마왕의 부역자가 되겠다는 신념 하나로 열세 개의 별이 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어떤 것도 속단할 수 없다.
다만 다른 가능성이 존재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미래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흥미로운 게 뭔지 알아요?"
"뭐죠?"
"난 내가 두 눈으로 보는 모든 헌터의 잠재력을 정리된 하나의 수치로 확인할 수 있어요."
"오호."
솔깃한 말이었다.
에밀리아에 대한 원작의 설정이 아주 디테일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이렇게 모르는 부분도 있다.
잠재력을 간파할 수 있는 성좌가 있다니. 강후도 군침을 저절로 흘리게 되는 성좌였다.
"왜 제가 많은 인파 속에서 유독 당신, 정선규 씨에게 관심을 가졌을까요?"
"잠재력이 높아서?"
"높은 정도가 아니에요. 성좌가 제게 알려준 당신의 잠재력은 무한대예요. 한계가 없다는 거죠."
"...."
자화자찬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성좌는 제대로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 맞다.
미래를 예측하고 예견할 수 있고 스스로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자신 아니던가?
성장 가능성과 그 루트가 무궁무진하기에 잠재력을 무한대로 보는 게,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거예요. 단순히 그냥 잠재력만 높은 사람인가? 아니면 자신의 그런 높은 잠재력을 스스로도 깨닫고 있는 사람인가?"
에밀리아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녀는 중간중간 몇 번이고 강후에게 정신 제어를 시도했지만, 당연히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밀리아는 미련이 남았는지 이따금씩 시도를 했다.
그리고 막힐 때마다 쓴웃음을 지었다.
강후가 자신의 노림수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힘으로 찍어누른다면, 얼마든지 강후를 억누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힘의 차이는 명확하니까.
그렇지만 에밀리아는 헌터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한대의 잠재력이 궁금했다.
자신을 그토록 아낀다는 성좌도 자신을 수치화된 잠재력으로 표시하는 판국에.
유일하게 강후에게만 무한대의 판정을 내린 것이다. 쉽게 말하면 측정 불가라는 뜻이다.
에밀리아가 말을 이었다.
"결론은 후자예요. 당신은 나를 보고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모두 들여다보듯 행동하고 있잖아요?"
"좋아해야 되는 겁니까?"
"호호. 그건 자유죠. 어쨌든 스스로의 가치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떤 방향을 추구해야 하는지, 그리고 제 분수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확실히 알죠."
"맞아요. 그걸 느꼈던 거예요. 오만하지는 않지만, 자신감은 충만한. 딱 그 경계의 사람."
"칭찬을 조금 더 들으면 손가락이 닳아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인데."
"정선규 씨. 시간이 되면 나중에 파리에 있는 에밀리아 타워로 와요. 우리 한 번 더 만나죠."
"스카우트 제안입니까?"
"헌터 대 헌터로의 호기심 정도로 해 두죠. 당신 같은 사람은 백날 영입하려고 해도 안 온다는 것을 난 알거든요."
에밀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많은 경험이 말해 준다.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헌터들은 절대 누군가에게 함부로 소속되지도 않고, 쉽게 자신의 옆을 내어주지도 않는다.
스스로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속되려고 하지도 않고, 그럴 여지를 주지도 않는다. 가까이 두려고 하면 멀리 날아간다.
에밀리아는 강후에게도 똑같은 분위기를 느꼈고, 이는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었다.
"얼굴 정보만 한 번 등록할 수 있게 해 줘요. 그러면 언제든 제지 없이 출입 가능하니까."
졸지에 이뤄지게 된 얼굴 촬영.
강후는 거절하지 않았다.
이름이 팔리는 것도 아니고, 뻔한 얼굴이 팔리는 것 정도야 신경 쓸 것도 아니기에.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좀처럼 접점을 만들기 힘든 열세 개의 별과의 인연이 이런 식으로 생길 줄이야.
우연은 소리소문없이 찾아온다더니, 오늘 에밀리아와의 만남이 딱 그랬다.
즉흥적으로 홍천 해방구에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다.
* * *
다시 해방구의 시가지로 돌아온 강후는 바로 쇼핑에 나섰다.
이미 혈루라는 좋은 녀석을 갖고 있기에 무기는 관심 대상에서 제외했다.
착용하고 있는 아수라의 흉갑 역시 효율이 좋아서, 4등급 이상이 아니면 볼 일이 없을 듯했다.
그렇게 딱히 교체가 필요 없는 부분을 제외하다 보니, 관심 부위가 추려졌다.
옵션이 괜찮다는 가정하에 목걸이와 팔찌가 바꿀만하다는 계산이 섰고.
특히 여유가 남아 있는 반지 쪽이 가장 부담 없는 부위일 듯했다.
스탯의 방향성은 명확했다.
체력, 항마, 맷집.
강후는 딱 세 가지 분야에만 관심을 뒀다.
'항마 95, 맷집 320.'
스탯을 재차 확인했다.
그래도 아이템을 착실히 잘 착용한 덕분에 두 스탯의 수치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방어 쪽 스탯을 챙기기가 대단히 어려운 암살자 직업군의 특성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비슷한 레벨대의 암살자를 생각하면 높은 게 사실이지만, 내 기준으로는 낮다.'
강후는 만족하지 않았다.
왜냐면 점점 실력 좋은 헌터들과 꼬일 만한 일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에 오늘도 에밀리아를 만나지 않았던가? 직전에는 강동현과 교전도 치렀고 말이다.
이런 헌터를 상대로는 100% 회피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피한다고 한들, 일부는 공격에 노출될 계산을 반드시 해야 했다.
결국, 한두 방은 맞을 수밖에 없다. 상대도 바보는 아니니까. 매번 수 싸움을 이길 순 없다.
그렇기에 타격을 당하더라도 몸이 버틸 수 있게 하는 스탯인 항마와 맷집은 정말 중요했다.
'스킬을 써서 막는다는 것 자체가 방어자 입장에서는 턴을 한 번 빼는 거니까.'
방어자 입장에서 최고의 그림은 잘 막는 것이 아니라, 맞아도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강동현이 무서운 존재인 이유가 바로 맷집 때문이었다.
어지간한 공격은 맞아도 끄떡없기에 공격자 입장에서 방어로 인한 공백이 계산되지 않는다.
자신의 공격이 성공해도, 그것이 상대의 공세를 늦출 수 있는지 확신이 안 서는 것이다.
강후가 시장을 꼼꼼하게 돌아보면서 고르고 또 골랐던 아이템 중 하나를 선택했다.
애초에 팻말에 붉은 글씨로 '흥정 불가'라고 되어있는 곳이라 달리 가격 협상도 하지 않았다.
"이걸로 합시다."
"100억이요. 딱 정가지."
"그렇긴 하군요."
강후가 판매자로부터 산 것은 3등급 아이템이었다. 무광택 검은 반지로 특색은 딱히 없었다.
[욕망의 그늘 - 반지]
[등급 : 3등급]
[맷집 + 75]
[항마 + 75]
꽤 괜찮은 반지였다.
양쪽 스탯을 두루 챙기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새 반지의 착용으로 강후의 맷집은 무려 395가 됐다. 400이 코앞이 됐다.
이 정도면, 필살기 성의 공격을 정통으로 얻어맞는 정도만 아니면 '즉사'는 면할 수 있었다.
죽는 것과 사는 것은 큰 차이인 만큼, 매우 유의미한 스탯 라인에 올라온 셈이었다.
일반적인 암살자의 성장 곡선을 따른다면, 레벨 300을 찍어도 못 만들 맷집 스탯이기도 하다.
'버는 건 어려운 데, 쓰는 건 1초면 끝이군.'
강후가 66억 원까지 쭉 내려간 통장 잔고를 보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빙의 직후와 비교하면 경제 단위가 달라진 것이 맞기는 하지만.
장시환이나 채관형 같은 헌터들의 경제 단위를 생각하면, 여전히 어린 아이 수준이나 다름없다.
돈이라는 게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펑펑 쓸 곳을 찾는 것은 쉽다.
마음 같아선 로또 복권 번호라도 기억하면 좋을 텐데, 원작에서 복권 얘기가 나온 적이 없다.
바로 그때.
해방구 전체로 송출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무 때나 방송되는 것은 아니고, 해방구의 메인 이벤트가 있을 때만 나오는 전체 방송이다.
그 말은 즉, 곧 데스 매치가 있을 예정이라는 뜻이다.
해방구의 핵심 수입원 중 하나이기도 했다.
참여하는 헌터의 목숨을 걸고서 이뤄지는 데스 매치는 엄청난 금액의 판돈이 몰리기 때문이다.
판을 깔아주는 해방구 운영 당국이 배팅 수수료로만 무려 5%를 갖기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도박이 패가망신하기는 딱 좋지."
강후가 다른 시장으로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배당에 따라서 2배, 3배로 돈을 불리는 것도 가능한 것이 데스 매치의 배팅이지만.
반대로 순식간에 몇십, 몇백억 원을 잃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서다.
뒤늦게 본전 생각이 난다고 한들, 돌려받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몇몇 헌터가 잃은 돈이 아까워서 행패를 부리다가 목 잃은 귀신이 됐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도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장 데스 매치가 벌어지는 특설 경기장 외곽에 있는 수많은 가묘(假墓)가 그 증거였다.
가묘는 돈 달라고 행패를 부리다가, 해방구 관리 조직인 케낙스에게 죽은 헌터의 무덤이다.
바로 그때.
"음...?"
무심결에 대형 전광판에 표시된 데스 매치 참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강후의 시선이 멈췄다.
앞부분에 스쳐 간 얼굴은 일면식도 없는 헌터의 얼굴이었지만.
맨 마지막에 나타난 얼굴은 강후의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강후는 그 남자의 이름이 전광판에 표시되기 전, 이미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박상오?"
원작처럼 흘러간다면 절대 지금은 죽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이 데스 매치 참여자 목록 마지막에 버젓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확률 100%의 도박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76화 위기는 곧 기회 (1)
박상오.
아웃복서 스타일의 검사로 원작에서 떠돌이 용병 출신으로 네임드가 된 헌터다.
강후가 박상오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원작을 연재할 때, 직접 삽화까지 넣어가며 막판에 그에게 공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삽화 속의 얼굴 그대로이니, 다른 사람을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박상오는 국내파가 아니라, 일본에서 주로 활동했던 헌터이기도 했다.
그 역시 정화 길드를 좋아하지 않아, 영입 제안을 뿌리치고 일본으로 갔던 것이다.
'어쨌든 원작처럼 흘러간다면 지금은 죽을 일이 없지. 무조건 당첨될 복권이라는 얘기고.'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돈을 불릴 요소를 찾게 됐다.
에밀리아와의 만남도 그렇고, 홍천 해방구에 온 것이 여러모로 터닝 포인트가 된 느낌.
원래는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지만, 이래서야 데스 매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데스 매치에서 공식적으로 배팅 참여자에게 공개되는 정보는 딱 하나뿐이다.
매치에 참여할 헌터의 레벨 정보.
레벨 스캔을 통해 인증되기 때문에 정보는 왜곡되지 않는다.
그 외에는 이런 데스 매치만 주로 찾아다니는 헌터들이 사적으로 정보를 판매한다.
신뢰도는 저마다 천차만별이라 가짜 정보를 파는 경우도 있고, 진실인 경우도 있었다.
결국은 정보를 구매하는 헌터가 얼마나 분별력 있게 정보를 사들이느냐가 관건이 되는데.
당연히 정보 판매자 중에도 네임드가 있는 터라, 그 사람의 정보가 비싸게 팔리곤 했다.
처음 보는 판매자라던가, 과거 구매 내역이 없는 판매자의 정보는 보통 사지 않는다.
'박상오가 가장 레벨이 낮네.'
전광판에 표시된 정보를 보니, 박상오가 다른 참여자에 비해 레벨이 50 이상 낮았다.
이런 매치는 레벨의 높고 낮음이 절대적이다.
고스란히 스탯과 스킬의 차이가 되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박상오가 본격적으로 이 바닥 생활을 하기 전인 듯했다.
박상오가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데스 매치를 찾아다니며, 제법 많은 돈을 벌기 때문이다.
한데 정보 판매자들이 언급하는 정보 얘기를 들어도, 박상오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그 말은 판매자들에게도 생소한 참여자라는 얘기다. 없는 정보를 갖다 팔 수는 없는 셈이다.
장내 방송이 시작됐다.
- 곧 특설 경기장에서 금일 메인 이벤트인 데스 매치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케낙스의 관리 아래, 데스 매치는 지금까지 사고율 0%를 자랑하는 스포츠로 자리 잡았습니다.
모든 판돈의 수수료와 배당, 배분에 대한 관리는 헌터 치안청의 공식 승인을 받습니다.
안심하시고 배팅하세요. 일확천금의 꿈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자, 지금부터 각 매치업과 배당률이 공개됩니다. 주목해 주세요!
방송이 끝나자마자 전광판에 각각의 매치업과 실시간 배당이 바로 표시됐다.
[전국선 1.2 vs 박상오 3.0]
"와! 개꿀 매치업 떴다! 저 매치는 닥치고 전국선 아니냐? 최근에 기세가 엄청 좋은데?"
"전국선, 쟤 말야! 지난 매치에서는 레벨이 35나 높은 녀석도 재끼지 않았냐?"
"재낀 정도가 아니라, 쟤 완전 미친놈이야. 데스 매치만 찾아다니는 새끼라고!"
헌터의 관심이 일제히 쏠린 것은 박상오와 다른 헌터의 매치업이었다.
기대 승률을 반영하듯, 배당이 확 갈렸다. 당연히 모두의 관심은 전국선의 배당 값이었다.
"무조건 먹고 가는 20%인데 이걸 포기할 수가 있나?"
"30분 안으로 이자 20%가 무조건 들어오는 매치업을 포기하면, 그게 병신이지."
"야, 배당 더 떨어지기 전에 묻자. 이건 못 먹을 수가 없는 매치업이잖아."
"근데 박상오가 누구냐?"
"알 게 뭐야. 죽지 못해 안달 난 머저리 새끼인가 보지."
"레벨도 전국선보다 50이나 낮네. 그냥 죽으려고 온 거구만?"
"이거 케낙스 놈들, 판 짜려다가 돈 세게 잃을 각인데? 배당 빨리 후려쳐야겠는데?"
헌터들이 앞을 다투어 특설 경기장 앞에 마련된 배팅 전용 테이블로 향했다.
장내 방송대로, 헌터 치안청의 승인 과정이 있기에 약간의 대기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그만큼 배팅한 돈에 대한 안전성이 보장되므로, 모두 부담 없이 큰돈을 걸 수 있었다.
'미래를 알고서 돈을 건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강후가 속으로 웃었다.
물론 아주 낮은 확률로 자신이 계산한 미래가 바뀌어서 박상오가 죽을 수도 있다.
원작의 내용이 틀어지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만한 깨달음의 수업료로 60억 원을 지불해야 한다면 크게 아까울 것 같진 않았다.
이후 같은 실수만 반복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돈이야 열심히 벌면 그만이다.
베팅 테이블로 간 강후가 주변 헌터들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박상오에 60억 걸겠습니다. 전용 계좌 알려주세요."
"에? 저, 저기 돈 버리는 친구 하나 나왔네."
강후가 박상오에게 돈을 걸자, 헌터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강후를 쳐다보았다.
최근 기세가 좋다 못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전국선을 무시하고 반대에 돈을 걸다니.
일확천금을 노리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무모해도 이렇게 무모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강후는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의 9할 이상을 박상오에게 걸었다.
"전국선! 빨리! 야, 돈 모았다가 어디에다가 쓰게! 그냥 묻으라니까! 묻으면 무조건 20% 먹는다고!"
"박상오에 걸긴 왜 걸어? 돈이 남아도냐? 빨리, 그냥 묻지 마로 가! 얼른!"
배팅금이 과도하게 몰리는 탓에 전국선의 배당이 계속 떨어지자, 헌터들이 더 급해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박상오에게 거꾸로 찔러보는 헌터가 몇몇 나오기도 했지만.
그래봤자 몇백만 원, 진짜 많아야 천만 원 정도를 거는 것이 그들의 최대 배포였다.
그런 와중에 강후가 60억 원을 떡하니 박상오에게 걸었으니.... 다들 아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훗."
하지만 딱히 다른 생각이 없는 강후는 팔짱을 낀 채, 데스 매치가 시작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 * *
그로부터 1시간 후.
"와.... 저 친구, 그럼 60억에서 180억. 거기에 360억까지 쭉 불린 거야?"
"박상오에 두 번 연속으로 걸었어?"
"어.... 그것도 몇억도 아니고, 60억, 180억을 그대로 갖다 박았다고."
"올인 두 번인가?"
"그렇지. 돈이 썩어 넘치는 건지 아니면 미래시라도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진짜 미쳤네."
"어이, 도대체 뭘 믿고 박상오에게 다 건 거야? 박상오 친척이야? 어떻게 된 거야?"
"영업 비밀. 다들 수고하쇼."
강후가 통장에 정산되어 들어온 금액을 확인하고는 현장을 떴다.
잔고는 366억 원이 됐다.
오늘의 데스 매치는 이렇게 끝났고, 박상오는 2연승으로 주가를 대폭 높였다.
아마 박상오에게 오늘처럼 3배당, 2배당이 잡힐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전국선이 그랬던 것처럼, 짜디짠 낮은 배당을 갖고 갈 가능성이 높다.
떠돌이 용병 생활을 하면서, 데스 매치에서 전승 가도를 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회성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단숨에 큰돈을 벌어들였다. 지금까지 번 돈 중에서 가장 쉽게 얻은 불로소득이었다.
공돈은 가끔 벌 때 가장 재미있는 법이다.
100억 원을 쓰고.
순식간에 300억 원을 벌어 떠나는 현장. 어느 때보다도 강후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홍천 해방구의 명물인 먹자골목에 접어들자, 각양각색의 음식이 강후를 반겼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조합 중 하나인 떡볶이와 순대를 잔뜩 시킨 강후가 젓가락을 막 들려는 찰나.
전화가 걸려왔다.
이예린이었다.
"네, 예린 씨."
- 통화 괜찮아요?
"괜찮으니 받았죠."
- 박민성이라는 헌터에 대한 정보를 찾아달라고 했죠? 국내에서 실종된 박민성 헌터.
"맞아요."
- 가족을 찾은 것 같아요. 근데 좀 인적 사항이 특이해요. 예상과는 다른 정보거든요.
"어떻습니까?"
- 어렸을 때, 영국으로 입양이 됐어요. 그래서 현재 부모 두 분이 모두 영국인이에요.
"입양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는 이슈 아닙니까?"
- 그런데 부모가 둘 다 영국에서 잘나가는 네임드 헌터예요. 영국에서는 실종신고가 됐더라고요.
"그럼 국내에 부모 몰래 왔다가 실종이 됐다, 이 말입니까?"
- 정황상으로는 그래요.
"부모에 대한 정보를 보내주고, 그 부모님과 접촉을 해 주면 좋겠는데요. 시신이라도 빨리 찾아갈 수 있도록 말이죠."
- 알겠어요. 바로 연락을 넣어볼게요.
"수수료는 두둑이 챙겨드리겠습니다."
- 전에도 얘기했잖아요. 이번에는 완전한 제 호의로 진행하는 일이라고요. 됐어요. 아무튼 끊어요!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처음에는 그라운드 제로까지 와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헌터의 가족이나 찾아줄 생각이었는데.
거기서 파생된 그림이 영국, 그것도 네임드 헌터까지 흘러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조건 없이 품었던 선의가 좋은 보답으로 돌아오는 걸까?
다행인 것은 그라운드 제로의 특수 환경 덕분에 시체의 부패는 생각보다 늦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부모가 최대한으로 빨리 와줬으면 했다.
그때.
쿠궁! 쿠궁! 쿠궁!
강후가 앉아 있던 플라스틱 의자는 물론, 주변의 모든 구조물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느껴졌다.
작은 충돌 따위에서 비롯된 진동이 아니라, 제법 큰 폭발이 있을 때 느껴질 법한 세기였다.
"뭐야?"
"어디 뭐 터졌어?"
강후만 진동을 느낀 것이 아니기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헌터라면, 이런 상황과 연결될 법한 몇 가지 사건 사고를 알기 때문이다.
그 순간.
콰과과과!
연쇄 폭발이 일어나면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충격파가 주변의 모든 것을 거칠게 덮쳤다.
강후가 본능적으로 보호 결계를 펼치지 않았으면, 속절없이 휘말렸을 정도로 강한 충격파였다.
'던전 폭발이군.'
강후는 현장을 직접 본 것이 아니었지만, 충격파의 세기와 패턴을 깨닫고 상황을 바로 파악했다.
던전 폭발.
원인은 다양하지만, 보통 오랜 시간 던전이 공략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일컫는다.
쉽게 비유하자면.
냄비를 센 불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꽉 닫아놓았다가, 찌개가 흘러넘치는 상황을 예로 들 수 있다.
던전도 주기적으로 공략을 해서 내부 에너지를 해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부에 꽉 찬 에너지가 외부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현상이 바로 던전 폭발이었다.
보통 던전은 쌍방향이 아닌 일방통행이라 내부에 있는 몬스터가 절대 밖으로 나올 수 없다.
하지만 폭발이 일어나면, 쌍방향으로 구조가 바뀌기에 몬스터들이 출몰하게 된다.
헌터 치안청의 관리하에 있는 던전은 체계적으로 모니터링이 되므로 이런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영향권 밖에 있는 던전은 결국 해당 던전을 소유한 세력의 관할이 된다.
안타깝게도 홍천 해방구의 관리 조직인 케낙스의 던전 관리에 허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수습 입장에서는 지옥이지.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기회잖아?'
한 차례의 충격파를 잘 버텨낸 강후가 혈루를 쥐고, 폭발의 진원지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수습할 의무가 있는 케낙스에게는 전력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가 큰 상황이 맞지만.
홍천 해방구의 손님인 강후에게는 날뛰게 될 모든 몬스터가 경험치였다.
던전 에너지를 잔뜩 머금고 세상에 나온 몬스터는 일반 몬스터보다 보상이 훨씬 더 좋을 수밖에 없다.
일전에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에서 상대했던 몬스터처럼 말이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
77화 위기는 곧 기회 (2)
* * *
'속도형 몬스터가 많은 던전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 같군.'
진원지로 이동하면서.
날뛰는 몬스터들의 특성을 바로 파악했다.
보통 던전 폭발이 일어나면, 해당 몬스터의 특성이 극대화된 형태로 출몰한다.
만약 맷집이 좋은 녀석들이 던전 안에 있었다면 외피가 잔뜩 두꺼워진 형태가 되고.
움직임이 날쌘 녀석들은 2배속, 3배속 빨리 감기를 하듯이 날뛰는 식이다.
마법을 쓸 줄 아는 몬스터라면,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마나를 탑재하게 된다.
이번 폭발은 움직임이 날쌘 녀석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기동전에 능하지 않으면 피해를 보기 딱 좋은 스타일의 몬스터들이 날뛰고 있는 상황.
"크헉."
"허억."
그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몬스터에게 달려들던 헌터 둘이 순식간에 머리를 잃었다.
사마귀처럼 생긴 몬스터 두 녀석이 집게로 싹둑 머리를 자르자, 그대로 잘려나간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공격이었지만, 속도가 워낙 빨라 눈 뜨고 당해버렸다.
"좋은 훈련이 되겠네."
강후는 가볍게 생각했다.
전투는 무겁게 임해야겠지만. 굳이 시작부터 겁을 집어먹지는 않았다.
"히이익!"
"도망가자! 애들이 너무 쎄!"
"야! 우리가 도망가면 이놈들이 이쪽 거리를 미친 듯이 활보하고 다닐 텐데!"
"알 게 뭐야! 케낙스에서 알아서 하겠지. 영웅 놀이하지 말고 얼른 도망치자고, 병신아!"
본능에 충실한 반응이 헌터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현실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어차피 이런 상황이라면 던전 라이센스도 무의미할 테고. 역으로 들어가 봐?'
강후는 좀 더 먼 그림을 보고 있었다.
어떤 던전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폭발이 일어났다면 내부에 미들 보스, 메인 보스가 있을 터.
이들을 잡으면 평소보다 더 강화된 보상은 물론, 스킬도 당연히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로 이득을 볼 여지가 많은 상황이라 욕심이 났다.
폭발이 일어난 마당에 공략 라이센스가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파팟! 팟!
목표가 더해지니, 전보다 훨씬 더 의욕이 샘솟았다.
하지만 던전 밖에서 날뛰는 몬스터의 관심은 강후도 예외는 아니라서, 몇 놈이 꼬여 들었다.
후웅! 후웅!
콰작! 콰작콰작!
"어우. 빠르네."
앞서 머리를 잃은 헌터들이 손도 못 쓰고 당한 이유를 알 것 같을 만큼 속도가 빨랐다.
심지어 강후가 쉽게 피할 수 없도록 위, 아래, 옆을 동시에 노리는 식이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후방 회피로 쭉 빠지지 않았으면, 어디든 잘려 나갔을 공격이었다.
[풍뢰진]
광역 공격을 위한 풍뢰진을 깔았다.
이렇게 속도감이 있는 몬스터들은 일대 다수의 전투가 매우 까다롭다.
그래서 동시에 녀석들의 전력을 약화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면 전투가 어렵게 흘러간다.
퍼석! 퍼서석! 파삭!
끼엑! 키에에엣!
풍뢰진의 효과는 만점이었다.
순식간에 공격 영역 안에 들어온 사마귀 다섯의 몸에 셀 수 없이 많은 상처가 났다.
날카로운 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이따금 풍뢰진의 '전류'가 터지면.
아예 몸이 경직되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감전과 동일한 형태의 증상이었다.
당연히 강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전광비도]
한 번의 단검 투척에 모든 힘을 싣는 전광비도는 지금 같은 상황에 최적화된 필살기였다.
손끝을 떠났는지 알 새도 없이 사라진 단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마귀의 양미간을 뚫었고.
꾸엑.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몰리스 마니체로 간단히 혈루를 회수하면 상황 종료.
일방적인 대미지 교환의 성공이었다.
[납치]
끼에에엣!
이번에는 한 녀석을 직접 앞으로 소환했다.
방금에는 찾아가는 서비스를 했지만, 이제는 찾아오게 만드는 서비스를 한 셈.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다가 강후에게 강제로 소환된 사마귀는 피할 겨를조차 없었고.
푸욱!
복부 한가운데에 시원하게 혈루가 꽂힌 사마귀가 집게를 움직이며 강후를 노리려는 찰나.
쫘아아아악!
강후가 사마귀의 복부 한가운데에서부터 왼쪽 어깨까지, 거대한 붉은 선을 그어버렸다.
어떤 스킬도 쓰지 않고 단순히 완력(腕力)으로 임한 것이지만,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후두두둑!
상처를 따라 체액, 피, 오장육부 할 것 없이 쏟아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쏟아졌다.
사마귀는 그 자리에서 몸 한 번 까딱이지 못하고, 선 채로 목숨을 잃었다. 쇼크사였다.
"와, X발. 저 새끼 뭐냐."
"뭔데 몬스터를 앞까지 강제로 끌고 와서 배를 쑤시냐? 방금 깔았던 전기장판 같은 건 뭐고?"
"누구야, 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지켜본 헌터들이 앞다퉈 혀를 내둘렀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더불어 헌터가 죽어 나가는 현장을 생각하면 더욱 이질적인 광경이라서다.
"차라리 우리도 숟가락 얹을까? 쟤 뒤로 따라가면 몬스터들도 제법 잡을 수 있을 듯한데?"
약삭빠른 헌터가 강후의 남다름을 알아보고는 자기 나름대로 그럴듯한 계획을 세웠다.
강후가 몬스터를 상대하는 재주가 있는 듯하니, 뒤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으려는 것이다.
어쨌든 대미지 측면에서 양념이 된 몬스터를 죽이거나 하면, 경험치와 보상을 얻을 수 있으니까.
강후는 혼자고 자신들은 여럿이니, 대놓고 들러붙어도 싫은 소리를 못 할 것이라고 여겼다.
아무리 헌터에게 실력이 제일이라고 한들, 쪽수 앞에서는 장사가 없기 때문이다.
"빨대 꽂기를 하자는 거냐?"
"그렇지. 몬스터 신경 쓰느라 정신없는데, 뒤까지 신경 쓸 겨를이 어딨겠어?"
"하긴. 보니까 독고다이네. 작정하고 붙으면, 생각보다 또 빨아먹을 구석이 있겠어."
"클클. 가자고. 그리고 원래 말이야. 실력이 있으면, 동업자 정신으로 다른 헌터도 챙기고 하는 게 맞아. 그렇지 않냐?"
어찌나 자기 합리화에 능한지.
혹자는 들어도 콧방귀도 안 낄 개소리를 진지하게 늘어놓는 패거리들이었다.
문제는 그 개소리를 모두 격하게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는 점이랄까.
어쨌든 강후에게 기분 나쁜 똥파리들이 꼬이고 있었다.
* * *
그 시각.
장시환은 자신의 집안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화장실에서 계속 손을 씻고 있었다.
여기는 어지간해서는 볼일을 보러도 잘 안 오는 위치였다.
서재나 거실 같은 핵심 활동 반경에서 한참 떨어진, 집의 '외곽'에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화장실을 써야 할 이유가 있어, 굳이 여기까지 와 있던 상태였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수돗물을 따라, 장시환의 손에서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씻겨져 나갔다.
그리고 우측 하단 쪽으로 보이는 배수구에는 출처가 다른 사람의 피가 계속 흘러들고 있었다.
이런 살인이 한두 번 있었던 일은 아닌 듯, 장시환은 시체에 관심도 없었다.
그저 거울을 본 채로 계속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젠 그냥 안에서 푹 쉬지 그러냐. 내가 만든 꿈속에서 영원히 쉬란 말이다."
차갑게 깔린 목소리는 분명 평소의 장시환과는 거리감이 꽤 있는 목소리였다.
애초에 눈빛도 달랐다.
우수에 잠긴 슬픈 눈빛이 아니라 광기로 가득 찬 살인마의 눈빛이랄까?
평소의 장시환과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이건 내가 꿈꾸던 세계가 아니야. 자꾸 나를 무너뜨리려고 하지 마. 이건 아니라고!"
"하지만 넌 내가 만든 이 꿈을 꽤 좋아하는 것 같아. 점점 그 꿈에 취한 시간이 늘어가잖아?"
"아냐! 아니라고!"
"마음 편히 꿈에 취해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부역자로서의 복잡하고 어려운 생각은 전부 내게 맡기라고."
"안 돼. 절대 안 돼...!"
한 입에서 전혀 다른 두 자아의 격론이 오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승리한 것은 '항상' 그랬듯, 장시환의 변질된 자아였다.
아직 강후는 알지 못했지만, 이렇게 원작의 장시환은 이미 부역자 엔딩의 밑바탕이 깔려 있었다.
원작 내용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망상이었던 것이다.
그가 대의와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은 완벽하게 망상이었다.
자기 자신이 만들었기에 완전히 속을 수밖에 없었던 망상.
실제의 장시환은 누구보다 잔인하고 잔혹하며, 더 나아가 정의에는 관심도 없는 빌런이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장시환의 집에 외부인 자격으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둘도 없는 죽마고우인 채관형이다.
장시환이 남은 피를 마저 씻어내며 말했다.
"들어와."
"아우, 피 냄새! 작작 좀 죽여, 인마! 티 안 나게 시체 처리하는 것도 나한테는 일이라고."
"처리해 달라고 한 적 없어. 귀찮으면 여기에 냅둬. 알아서 썩든 뭐든 되겠지."
"그럼 시체가 썩는 냄새가 나겠지. 퍽이나 생활 환경이 좋아지겠다. 어?"
"잔소리하러 온 거면 가라. 지금도 충분히 머리가 많이 아프니까."
"아직도 그 미친놈이 말을 걸어오는 거냐?"
"뭐.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고. 신경 쓸 것 없어."
신경질적으로 양손을 닦아낸 흰 수건은 여전히 피가 잔뜩이었다.
결벽증이 있는 채관형은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흰 수건에 붉은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다.
그가 화제를 꺼냈다.
"엘리자베스가 합류하겠다고 한다."
"본인 입으로?"
"어. 우리의 대의에 적극 공감한다고 하더군."
"구원의 성녀가 드디어 세상을 구할 결심을 하게 됐군. 진즉에 그랬어야지."
장시환이 웃었다.
구원의 성녀, 엘리자베스.
아프리카나 분쟁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치료하고 돕는 힐러 계열의 헌터다.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가난한 자를 도우며,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낫게 해 주는.
그야말로 성녀의 아이콘이었다. 그렇기에 구원의 성녀라는 별칭에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그런 헌터가 열세 개의 별에 합류할 의사를 밝힌 것이다. 충실한 부역자가 한 명 더 늘었다.
* * *
한편 그 시각.
'인간의 이기와 시기는 어쩔 수 없는 건가. 부스러기만 주워 먹을 줄 알았는데, 선을 슬슬 넘네.'
강후는 점점 자신의 경로를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은근슬쩍 위협까지도 하는 헌터들의 움직임에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자신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양념된 몬스터 일부만 공격한다고 생각했다.
동선에 방해가 되었기에 쳐내고 지나간 몬스터라, 딱히 욕심을 내진 않았다.
오히려 뒤에서 쫓아오는 헌터들이 마무리를 해 주니, 귀찮은 수고를 더는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슬쩍, 마치 실수인 듯 아닌듯하게 자신을 향해 스킬을 날리는 녀석이 나왔다.
화들짝 놀라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기도 하고, 멋쩍은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단지 사과만 받고 넘어가기에는 섬뜩할, 예리하게 빈틈을 노린 공격이 몇 차례 있었던 것이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를 생각했던 것이라면 나쁘지 않았던 시작.
하지만 본분을 잊은 악어새들은, 어느새 악어의 살점을 뜯어먹을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강후는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놈들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다.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해 있었지만, 모든 살기는 후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슈아아아!
확실하게 선을 넘는, 누군가의 마법 스킬 공격이 강후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78화 위기는 곧 기회 (3)
본보기가 필요하겠지 싶었다.
기교의 장막을 깔면서 바로 모습을 숨긴 강후는 신속 회피 스킬을 이용해 마법 공격을 피했다.
애초에 자신의 뒤통수를 노렸던 것을 뻔히 알았기에 보지 않고도 피하는 것이 가능했다.
동시에 장막이 만든 은신 속에서 목숨을 노린 마법사 헌터의 이마를 정확히 조준했다.
샤아아!
전광비도 스킬 덕에 엄청난 추진력을 탑재한 혈루가 순식간에 마법사 헌터에게로 날아갔다.
강후가 은신한 상태에서 혈루를 던졌기 때문에 상대의 인지는 더욱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푸욱!
"커헉!"
혈루의 날카로운 검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헌터의 이마에 깊숙이 박혔다.
얼마나 세게 박혔는지, 두개골이 함께 으스러지는 소리까지 났을 정도였다.
"헐...."
"단검이 도대체 언제 날아온 거야?"
남은 일동이 모두 얼어붙은 것처럼 제자리에 멈춰 섰다.
조금이라도 강후를 향해 움직였다가는 옆에서 명을 달리한 동료의 신세가 될 것 같아서였다.
"분수에 맞게 부스러기만 주워 먹으면 됐지. 왜 내 요리에 관심들을 갖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포기는 빨랐고, 체면 따위는 곧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동료의 죽음으로 확실한 공포를 학습한 '악어새'들은 자신들의 분수를 바로 알아차렸다.
아주 잠깐, 악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자신들의 그릇된 생각을 크게 반성하면서.
이제부터는 강후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였다.
남은 놈들을 다 죽여버릴 수도 있고, 괜한 곳에 힘 빼기 싫으니 살려줄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맛있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성좌 계약 하나 붙잡고 있는 녀석이 없었다. 한마디로 잔챙이라는 얘기다.
바로 그때.
"...?"
갑자기 느껴지는 찌릿한 느낌에 강후가 몸을 움츠렸다.
폭발을 일으킨 던전이 곧 앞이었다. 거리를 계산하면, 300m 남짓한 지점까지 왔을 정도.
그래서 진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심상찮은 기운이 감지된 것이다.
'왜 해소 흐름이 아니지?'
강후는 앞서 던전 쪽에서 느꼈던 마나의 기운보다 훨씬 어지러워진 파형을 느꼈다.
보통 폭발을 한 번 일으켰으면, 마나의 파형이 안정화되는 흐름으로 가야 하는데.
갑자기 뒤엉킬 대로 뒤엉킨 마나의 흐름과 복잡한 파형이 느껴진 것이다.
오직 강후만 이것을 느꼈는지, 주변의 다른 헌터들은 열심히 던전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저 멀리 반대편에는 케낙스 소속으로 보이는 헌터도 제법 몰려오는 중이었다.
폭발의 뒷수습을 해야 하니, 현장으로 앞다퉈 달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순간.
'이게 진짜다.'
강후가 잴 것도 없이 바로 호신 2단계를 펼쳤다. 짚이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아압! 콰아아앙!
주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전조가 일더니, 곧바로 대폭발이 일어났다.
앞서 던전에서 일어났던 폭발은 일종의 예고였고.
이번 폭발이 진짜였다.
쿠우웅!
"크윽!"
아슬아슬했다.
정말 간발의 차이로 호신 2단계가 만든 방어막이 충격파를 받아냈다.
단순하게 보호 결계만 펼쳤으면 부상을 면치 못했을 정도로 위력적인 폭발이었다.
재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콰앙!
2차 폭발이 일어났다.
강후가 호신 2단계의 연속 사용 옵션을 활용하고, 또 한 번 몸을 보호했다.
정말 호신 2단계였기에 다행이지, 1단계였다면 속절없이 당했을 것이다.
"...."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강후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연속 폭발이었다.
호신 2단계가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만큼, 아슬아슬했던 순간이었다.
휘이이이이.
적막 속에 공허한 바람이 불었다.
강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서 불규칙한 폭발에 휘말린 헌터들은 모두 죽어있었다.
얕은 신음 하나 들을 수 없는 완벽한 전멸이었다.
던전에 가까이 접근했던 케낙스의 헌터들은 풍선처럼 터져 죽거나, 몸이 여러 갈래로 찢겼다.
애초에 인체로 버텨낼 수 있는 수준의 충격파가 아니라, 뻥튀기처럼 터져버린 셈이다.
"지랄 맞은 폭발이군."
강후는 어느새 닫혀버린 던전 입구를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2차 폭발이 일어나면서, 쌍방향으로 열렸던 던전의 통로가 다시 일방통행으로 바뀐 것이다.
던전 폭발이 99%의 확률로 한 차례의 폭발만 일으킨다는 기존의 통계를 생각해 보면.
1%의 희귀한 확률이 걸린 셈이었다. 애초부터 먹지 못하는 떡이었다.
여기에 불나방처럼 휘말린 헌터들은 전부 개죽음을 당했고, 강후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대재앙 – 어둠'이 죽음도 거스른 당신의 통찰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음?"
갑자기 나타난, 그런데 심상찮은 성좌의 메시지에 강후가 몸을 움찔했다.
메시지 속에 언급된 성좌의 이름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차원 강탈자도 받지 못하는 특혜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녀보다 훨씬 윗선이라는 얘기다.
성좌들의 모든 질서를 조율하는 주체인 대성전.
대성전에서 전체 서열 50위 안에 드는 성좌의 이름은 황금빛으로 빛난다.
강후는 차원 강탈자를 현재 기준 60위권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다.
한데 그것보다 훨씬 위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죽음만 열심히 구경하러 다니는 변태 같은 놈인데, 이 녀석이 여기서 이렇게 나오나?]
어지간한 성좌의 등장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차원 강탈자가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반응을 보이는 성좌라면 무게감을 굳이 가늠할 필요가 없다.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니까.
그때.
후원을 한 번이라도 한 성좌가 아니라면, 열리지 않는 대화 채널이 열렸다.
채널을 연 주체는 당연히 대재앙 – 어둠이었다. 의외의 상황이 연속되고 있었다.
[신기하군. 보통 이런 식의 폭발이 일어나면 대부분 죽던데. 아니,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려나?]
목소리가 차갑게 깔렸다.
차원 강탈자도 뺨 때릴 만큼의 한기였다.
"결과는 보다시피."
강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흥미로운 녀석이군. 실로 오랜만이야. 너는 충분히 주시(注視)할만한 자격이 있겠어.]
'주시까지 한다고?'
강후가 놀랐다.
주시란, 성좌가 헌터 셋을 지정해서 상시 살피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인터넷 쇼핑으로 따지면 일종의 장바구니, 찜 같은 개념인데 강제성이 좀 더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성좌가 헌터 셋을 '주시'하기로 했으면 반드시 셋 중의 하나와는 계약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대재앙 – 어둠이 계약자 신강후를 '주시'했습니다. 남은 주시 계약자는 한 명입니다.]
[또 보자, 계약자 신강후.]
'대재앙 – 어둠'은 홀연히 나타나 일방적으로 주시하고 할 말을 전한 뒤 사라졌다.
선물도 하나 있었다.
['대재앙 – 어둠'이 다량의 성력을 소모하여, 당신에게 엄청난 양의 버프를 후원합니다.]
[경험치 증가 +100%]
앞서 다른 성좌들이 열심히 후원해 온 것이 무색할 정도의 엄청난 후원이었다.
[미친 것.]
차원 강탈자의 반응은 즉각적이면서도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가뜩이나 '황야의 전략가'도 잠재적인 메인 성좌의 경쟁자로 자리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런데 거기에 자신보다 서열이 훨씬 높은 성좌가 나타났으니,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훗. 몸값이 오르겠군."
강후가 씨익 웃었다.
그저 매사에 열심히 임하고 있을 뿐인데, 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예전만 해도 갑을이 명확했던 차원 강탈자와 강후의 관계는 이제 역전되려 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역전됐다. 차원 강탈자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 * *
강후는 그 길로 홍천 해방구를 나왔다.
던전 폭발로 일어난 뒷수습 때문에 해방구 내의 모든 이벤트가 올스톱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데스 매치는 이미 재미를 봤고, 마켓은 임시 폐점 상태가 되어 더 볼 것도 없었다.
이미 챙길 건 다 챙겼다.
에밀리아와 인연을 만든 것은 물론, 쓸만한 반지 아이템도 손에 넣었다.
거기에다가 박상오에 대한 기억을 이용해서, 손쉽게 300억 원을 벌어들였고.
던전 폭발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덕분에 상당히 서열이 높은 성좌의 주시까지 받게 되었다.
뭘 해도 잘 풀린다는 말이 딱 어울릴 수밖에 없는 탄탄대로였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홍천 해방구를 나온 강후는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박민성의 부모가 이미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에서 어떻게 이리 빨리 왔나 싶었는데, 앞서서 일본에 먼저 와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짚이는 것이 있어 일본으로 갔었던 모양.
하지만 본래 국적이 대한민국이었던 아들의 출신을 생각하면, 살짝 아쉬운 행보였다.
한편 김수경 용병단에서도 연락이 왔다.
서울까지 들렀다가 움직이면 일정이 빠듯해지겠다 싶었는데, 변동이 생긴 것이다.
"네, 정선규입니다."
- 김수경입니다. 이예린님을 통해 정보는 확인했습니다만, 통화는 처음이군요.
"혹시 변동사항이 있습니까?"
예정대로면 내일 봐야 한다.
보통 일정에 변동이 없으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 타깃이 예상했던 것보다 던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네요. 일정을 미뤄야겠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후의 가일정은?"
- 3일 후로 하죠.
"알겠습니다. 그때 뵙죠."
그렇게 짧은 통화는 끝났다.
빠듯해질 듯했던 일정에 자연스럽게 숨통이 트였다.
어차피 전종두를 처리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는 아닌 만큼, 꼭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차라리 그럼 여기서 야만의 시대까지 배우는 그림으로 가?"
박민성의 부모와 관련된 만남에 시간이 오래 소요될 것 같지는 않았다.
김수경이 사흘의 여유를 줬으니, 오늘 서울에서의 일정을 소화한다고 해도 이틀이 남는다.
딱히 처리해야 할 의뢰도 없고, 그렇다고 꼭 다녀와야 할 장소도 없는 만큼.
이참에 지난번처럼 스킬북 꼼수를 이용해서 빨리 야만의 시대를 학습하는 것도 좋겠지 싶었다.
가깝게는 수원역의 온누리 길드에서 다시 한번, 발트만 던전을 대여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어도 세컨드, 써드 플랜은 있으니 문제 될 부분은 없을 듯했다.
휴게소에 막 들른 강후가 스마트폰을 열어, 이예린에게 온 보안 메일을 확인했다.
아침이 되면 만나게 될 박민성의 부모에 대한 정보였다.
과연 누구이기에 영국의 네임드 헌터라고 불릴 만큼 위상이 높은 걸까?
네임드라는 조건 하나만으로는 짚이는 인물이 너무 많기에 강후도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메일을 확인한 순간.
"스핏파이어(Spitfire) 길드. 여기 마스터와 부 마스터가 박민성의 부모였다고?"
생각한 것 이상으로 거물인 헌터 둘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의 모험 전문 길드 스핏파이어. 그 길드의 주인이 바로 박민성의 양부모였다.
강후의 입장에선 일본에 이어, 영국으로도 활로를 뚫어볼 기회가 생긴 순간이었다.
79화 여수행 (1)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강후는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아침에 보겠다는 말을 거절하고.
바로 그들을 만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외롭게 방치되고 있을 자식이 눈에 밟힐 부모의 마음이 느껴져서였다.
강후가 감정적으로 마모된 구석이 많다 해서, 타인의 감정을 유추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딱히 수면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터라, 잠을 자고 싶지도 않았다.
박민성의 부모이자, 영국의 스핏파이어 길드의 마스터, 부 마스터이기도 한 두 사람.
둘의 이름은 가니에르와 멜리사였다. 이름을 알고 나서야 강후도 기억이 났다.
아주 두각을 드러낸 네임드까지는 아니었지만, 원작에서 지나가듯 몇 번 언급된 적이 있는 이름임을.
어쨌든 가니에르와 멜리사를 박민성이 있는 곳까지 안내했다.
그들이 직접 마련한 보안 차량을 타고 이동하니, 그라운드 제로로 가면서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박민성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라운드 제로의 특수한 지역적 환경 덕에 박민성의 시신은 거의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
몇 시간 전쯤에 죽은 시신을 보는 느낌이랄까. 약간의 고름이 생긴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멀쩡했다.
가니에르와 멜리사는 눈물을 훔치며, 보안 차량의 냉동 공간에 아들을 실었다.
펑펑 눈물을 흘리는 두 사람을 보면서, 강후는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자(養子)에게 저만큼 마음을 줄 수 있나 싶기도 했다.
실리적이면서 대단히 이성적인 자신의 감정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지 싶기도 했다.
그렇게 수습이 끝나고.
그라운드 제로에서만 나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제법 가신 도로까지 나왔을 무렵.
가니에르가 운전하던 차를 잠시 세우고, 강후에게 대화를 요청했다.
차 안에서 흘러가듯 대화를 나누기에는 예의와 격식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고.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대화를 나누기에는 제법 중요한 내용들이 오고 갈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강후도 장소를 가리는 타입은 아닌지라, 차에서 내려서 길가로 나왔다.
그라운드 제로 방면으로 향하는 도로는 통행량이 거의 없어, 고요했다.
먼저 말을 시작한 것은 가니에르였다.
"정말 어떻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아이를 데려올 수 있게 되었네요."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 슬픔을 제가 감히 재단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프네요."
"입양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 가슴으로 열심히 키운 아이입니다. 슬프지만 이겨내야겠지요."
가니에르가 눈물을 훔쳤다.
멜리사는 아까부터 계속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지라, 제대로 말도 잇지 못했다.
강후가 물었다.
"아드님이 한국에 오신 건 모르셨던 겁니까?"
"저희가 마지막으로 민성이에게서 얘기를 들은 것은 일본의 헌터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화통화였죠."
"음...."
"실제로 도쿄에 들른 것도 확인이 됐습니다. 하지만 만났다는 친구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짚이는 바는 없으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한국에 관해 이야기한 것은 정화 길드뿐이었는데...."
듣고 싶지 않았던 길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설마 이 일에도 정화 길드가 개입되어 있을까? 박민성이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었을까?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니 할 수 있는 것은 추측밖에 없다.
하지만 정화 길드에서 공을 들여서 박민성을 도모할 만큼, 그의 가치가 큰 것은 아니다.
다만 박민성의 부모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 쪽은 원작에서도 장시환과 무척이나 대립각을 세웠던 국가이기도 했다.
당연히 '악당' 포지션으로 그려졌었다.
하지만 지금, 달라진 시점에서 보면 끝까지 부역자들에게 저항했던 정의의 세력인 셈이다.
어쨌든 단서가 너무 부족하다.
억지로 연결고리를 만든다고 한들, 이유를 찾을 수 없으니 무의미한 연결이 되는 셈이다.
"괜찮으시다면 영국으로 오시게 될 경우, 저희 스핏파이어 길드의 옵저버(Observer)로 참여해 주시겠습니까?"
가니에르도 소모적인 얘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어디까지나 박민성의 죽음은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 자신들이 알아보고 조사해야 할 문제다.
아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게 도와준 강후에게 또 다른 짐을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옵저버.
각 나라마다 다른 단어로 쓰이기는 하는데, 국내에서는 보통 '초청 용병'이라는 표현을 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길드 차원에서 정식으로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다.
단, 길드 소속은 아니면서 길드원과 동등한 대우와 지원을 받는다.
조직에 대해 구속은 되지 않으면서, 필요한 특혜나 권리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길드에서 외부의 헌터를 초청하거나 전력에 보탬을 얻고 싶을 때 많이 쓰는 방식이었다.
초청 용병을 두고 영미권에서는 옵저버라는 표현을 썼다.
강후가 대답했다.
"저야 그렇게 배려해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죠. 스핏파이어 길드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립서비스다.
사실 오늘 처음 기억에서 막 떠올렸지만, 원래 말이라는 것이 하기 나름 아닌가.
강후로서는 참 반가운 제안이었다.
국내에서 최고가 된다고 해서, 세계에서 최고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원작의 장시환도 그랬다.
국내를 다 평정하고 해외로 진출했다가, 시작부터 미친 듯이 털리고 시작했었다.
물론 그것을 계기로 해서 더욱 각성했고, 세계를 제패할 실력자로 거듭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해외로의 진출은 필수적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밑밥을 쳐둘 필요가 있었다.
일본에는 안영호라는 믿을 만한 카드를 만들어뒀고.
생각을 신중하게 하기는 해야겠지만, 유청화를 통해서 중국의 신투 길드 쪽에도 선을 댈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영국이다.
가니에르와 멜리사를 통해서 스핏파이어 길드에 줄을 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스핏파이어 길드는 영국에서 Top 15에 드는 것은 물론, 모험이나 오지 탐사, 개척에 특화된 길드다.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던전도 제법 보유하고 있는 만큼, 기대되는 요소가 많았다.
"이건 옵저버 전용 라이센스입니다. 제 명의의 전자 서명이 있으니, 인증은 바로 됩니다."
"이렇게 주셔도 되는 겁니까?"
"제 아들을 무사히 품으로 돌려보내 주신 은인이시니까요. 개인적으로 쓰셔도 되고, 외부에 파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경우까지 전부 고려한 감사 표시입니다."
전자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금으로 처리된 옵저버 라이센스.
보고만 있어도 소유욕을 강하게 자극받을 만큼, 무척 예쁘게 만들어진 라이센스였다.
"기한은 어떻게 됩니까?"
"무기한입니다. 평생 저희 스핏파이어 길드의 옵저버로 언제든지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최고의 보상이었다.
옵저버 라이센스는 짧은 기간으로 발급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외부인에게 일방적으로 특혜만 제공하는 형태이기에 길드 입장에서 길게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무기한이라는 말은 즉, 스핏파이어 길드로부터는 앞으로 언제든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에 대한 별도의 의무나 책임 없이 말이다.
막 눈물을 훔친 멜리사가 말을 보탰다.
"정말 감사해요. 금전적인 보상도 얼마든지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저희 보안 연락처를 따로 드리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길드 명의의 골드 카드를 발급해 드리겠습니다."
골드 카드.
매달 사용 한도가 리셋되는 결제용 신용카드를 말한다.
정해진 금액 안에서 언제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카드이기도 하다.
한도는 서로 협의하기 나름이지만, 보통 최소가 10억 원으로 시작한다.
즉, 매달 10억 원은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펑펑 쓸 수 있다는 얘기다. 최소가 그 정도다.
이미 옵저버 라이센스로도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누릴 수 있는 것을 외면하고 싶진 않았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을 하기도 했고.
강후가 웃으며 되물었다.
"월 한도가 얼마입니까?"
* * *
그 후.
아들 박민성의 시신을 수습한 가니에르와 멜리사는 바로 영국으로 향했다.
예전부터 미래를 대비해 준비해 뒀던 가족 전용의 묘소에 박민성을 묻는다고 했다.
한국에 급히 왔을 때와 다르게 영국으로 돌아가는 항공편은 그들의 전세기를 이용했다.
이제 박민성도 양부모와 함께했던 제2의 고향으로 돌아가, 영면(永眠)할 수 있을 것이다.
"선의는 보답받는다, 이건가."
강후가 자신의 양손에 들려 있는 옵저버 라이센스와 골드 카드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언제든 스핏파이어 길드의 던전이나 내부의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 월 한도 20억 원의 신용카드도 쓸 수 있게 됐다.
골드 카드는 몇 년 정도의 제한을 둘 것이라 생각했지만, 가니에르는 처음부터 확실하게 못 박았다.
강후가 사용하는 한 무기한이라고 말이다. 외부인에게 양도만 하지 않으면 평생이라고 했다.
한바탕 폭풍 같은 보상의 향연을 누리고 나서인지,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다.
수원역 인근의 호텔에 체크인을 한 강후는 여기서 한숨 푹 자고 난 뒤, 온누리 길드를 찾아가 지난번처럼 던전 공략 라이센스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발트만 던전을 다시 들어갈 수 있다면, 지난번처럼 꼼수 학습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난 강후는 바로 온누리 길드를 찾아갔다.
이번에도 던전 관리팀의 총괄팀장인 한승혁이 나왔다.
그래서 생각보다 대화가 잘 풀릴까 싶었는데, 변수가 생겼다.
이미 공략 일정이 앞으로 한 달가량은 꽉 차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승혁은 외부인인 강후가 자꾸 발트만 던전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자신들은 알지 못하는 꿀포인트나 숨겨진 보상이 있는지 집요하게 캐려고 했다.
게다가 라이센스를 대여하는 단가도 배 째라 식인지 100억 원으로 올려버렸다. 애초에 대여할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덕분에 협상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결렬됐다.
강후도 꼭 발트만 던전 하나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서, 굳이 한승혁에게 목을 매지는 않았다.
그래서 강후가 새로 잡은 목적지는 바로 여수였다.
여수의 군벌, 자강(自强).
그들 소유의 던전 중에 발트만 던전처럼 스킬북 꼼수가 가능한 던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만 다르지, 사실 내부 구조나 형태는 발트만 던전과 95% 이상 같은 던전이기도 했다.
군벌 '자강'의 대장인 김자호는 화교 출신으로 소속 헌터들도 화교 출신이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거점 영역으로 접어들자, 차이나타운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니나 다를까.
"어이! 외부인은 여기서부터 두 발로 걸어서 들어가라! 편하게 차 몰고 다닐 생각 하지 말고."
그들의 관리 구역 초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강제로 차에서 하차하게 됐다.
외부인이 편하게 차를 몰고 다니는 꼴은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80화 여수행 (2)
* * *
짓궂은 검문이 여러 번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골목길을 지나려는 데도 불구하고 통행료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고.
테러범을 방지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걸고, 전신에 금속 탐지기를 돌리기도 했다.
애초에 단검 하나만 들고 있어도 금속 탐지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
자강의 헌터는 그것을 트집 잡아, 왜 금속이 탐지되냐며 역정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웃긴 것은 그렇게 한참 진을 빼놓고는 별것 아니니 통과! 하는 처분을 내린다는 점이다.
그제야 강후는 이곳의 돌아가는 구조가 진심으로 안전, 보안을 위해 검문검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들 용돈 벌이나 할 생각으로 꼬장을 피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대응을 바꿨다.
가까운 ATM 기기에서 넉넉하게 5만 원권을 뽑은 다음.
각각 100만 원, 200만 원의 뭉텅이로 만들어, 앞을 가로막는 헌터들에게 내밀었다.
대신, 조건을 걸었다.
"날 가장 깍듯하게 모시는 녀석에게만 주지. 한 명이야. 여러 명 안 골라."
그때부터 공기가 달라졌다.
검문검색 같은 것은 저세상으로 사라져버렸고.
앞을 다퉈 길을 열고, 장애물을 치우고, 갑자기 얼음물을 구해와서 강후에게 대접하고는 했다.
역시 자본주의의 맛이 이런 걸까?
강후는 돈 쓰는 재미를 느끼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확실히 여수 일대를 꽉 잡고 있는 군벌이라 그런지, 어디를 가도 자강의 깃발이 나부꼈다.
이현석이 이끄는 심연에 비하면 규모가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역 군벌이라는 타이틀을 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아마 이 정도 세력이면 지역 상권이나 경찰, 헌터 치안청과도 제법 유착이 이뤄져 있을 터다.
그러니 무서울 것 없이 아랫것들도 날뛰는 것이겠지. 이상할 것 없는 그림이었다.
대장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을까 했던 예상과 달리, 김자호와의 만남은 빠르게 이뤄졌다.
강후가 관계자에게 문의할 때, 던전 대여 건과 더불어 최소 금액 10억 원을 보장해서 그런 듯했다.
여수까지 내려와서 외부의 헌터가 던전 라이센스를 대여할 일이 흔치는 않을 테니....
궁금해서 만난 부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곧바로 김자호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집무실은 온통 박제된 야생동물의 머리로 가득했는데.
죄다 눈을 부릅뜬 채 죽음을 맞이하고 박제되어 있어 섬뜩했다.
정갈하고 깔끔한 형태로 집무실을 구성하는 서울권의 헌터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제 막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이었지만, 김자호가 잔에 채운 보드카를 들이켜며 말을 걸었다.
"외부인이 오는 일도 흔치 않은데, 뜬금없이 와서는 우리 자강의 던전을 공략하고 싶다고?"
"전부터 관심이 있는 던전이 좀 있어서."
"어떤 던전인지 얘기는 미리 들었는데. 그 던전에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데?"
"뭐랄까. 감이랄까? 이번에 가면 왠지 좋은 아이템이 나올 것 같은 느낌?"
"이봐."
"음?"
"혹시 너, 약 빠는 놈이냐?"
갑자기 이야기가 확 튀긴 했지만, 충분히 예상 범주 안에 있는 반응이 나왔다.
예전에 한승혁도 그랬다.
이미 자신들이 수십, 수백 번을 공략한 던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강후가 이상한 것이다.
차라리 공략 횟수가 적거나, 정말 뭐가 있는 곳이라면 흠칫 놀라기라도 하겠지만.
그런 것이 없는 평범한 던전이다 보니, 갑작스레 관심을 보이는 게 이해가 갈 리 없었다.
게다가 라이센스 대여 비용으로 주겠다는 10억 원이 결코 적은 돈도 아니고 말이다.
"그냥 모험을 좋아하는 헌터 정도라고 해 두면 안 되려나?"
"우리 던전에 와서, 우리 조직에게 돈을 쓴다는 거야 말리진 않겠는데. 너무 이상하잖아?"
"세상이 원래 그렇지."
"이 새끼, 이거. 진짜 약 빠는 새끼네, 이거."
김자호가 혀를 끌끌 찼다.
특히 여수 일대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각성제가 많았다.
굳이 마약이 아니더라도, 마약에 준하는 효과를 지닌 각성제는 차고 넘쳤다.
김자호는 강후의 말도 안 되는 호기심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러면 이해가 갈 듯했다.
어차피 자강 입장에서는 라이센스 장사를 해서 돈을 버니, 손해 볼 것이 전혀 없었다.
강후가 물었다.
"콜?"
"좋아. 라이센스 대여는 문제가 없어. 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외부인에게 단독으로 던전을 열어준 적이 없어."
"동행?"
"정확히는 감시자에 가깝지. 도와주진 않을 거니까."
"남이 좋은 거 먹는 꼴은 못 보겠다 이건가?"
"후후. 끝까지 들어보라고."
강후가 팔짱을 낀 채,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즉흥적인지, 아니면 원래 가지고 있는 매뉴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의 대여 방식이 있는 모양.
강후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자, 김자호가 보드카를 한잔 더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던전 라이센스 비용은 1억 원만 받지. 대신 중간에 나온 전리품은 모두 우리가 갖는다."
"그리고?"
"미들 보스, 메인 보스의 드롭템은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아. 대신 나머지는 다 우리가 갖는다."
"그걸로 충분히 10억 원을 퉁칠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네."
"솔직하게 말해 줄까?"
"거짓말할 건 또 없잖아."
"여차해서 공략하다가 네가 죽으면 네가 가진 아이템이 전부 우리 거지."
"...기가 막히군."
강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김자호의 생각이 꽤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강후가 공략 도중에 목숨을 잃는다면, 착용하고 있던 아이템은 자연스럽게 자강의 소유가 된다.
누가 찾아와서 소유권을 주장할 것도 없고, 그렇게 찾을 수 있는 게재도 아니다.
"어때?"
"뭐, 나는 볼 일이 보스 몬스터 쪽에 있는 것도 맞으니까. 그렇게 하자고."
손해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스킬을 추가할 목적으로 이 던전을 찾아왔으니까.
게다가 가장 중요한 미들 보스, 메인 보스의 보상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하기도 했고.
"던전 관련 정보는 친절하게 넘겨주지. 대신 레벨 스캔은 꼭 해야 해."
"얼마든지."
강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자호가 직접 꺼낸 스캔 장치를 활용해 강후의 몸을 스캔했다.
레벨 스캔 작업은 보통 1분 정도가 걸리기에, 잠시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후.
스캔 장치에 뜬 강후의 레벨을 확인한 김자호가 화들짝 놀랐다.
"이봐. 이 레벨로 던전에 들어가겠다고? 그럼 입구 컷이야. 죽고 싶지 않으면 참지?"
"목숨까지 걱정해 주시고. 너무 친절하신데? 그럼 없던 일로 할까?"
"여기 몬스터 레벨 대가 전부 200대야. 100도 안 되는 레벨로는 정말 힘들 텐데?"
"힘들지 안 힘들지는 들어가고 나서 보자고. 어차피 죽어도 내가 죽지 당신이 죽진 않잖아?"
"하기야 내 오지랖이군. 그래. 그럼 안내해 줄 녀석을 붙여주지. 명심해. 걔는 네가 죽을 위기에 빠져도 도와주지 않을 거야."
"다 된 밥에 재나 뿌리지 말라고 해."
강후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김자호의 말투나 리액션이 조금 거슬리는 구석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꽤 협조적이었다.
지역 군벌이다 보니, 꽉 막힌 구석이 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대화가 잘 풀렸다.
마침 던전도 공략 대기 상태이다 보니, 별도의 기다림 없이 바로 입장을 준비할 수 있었다.
시작이 좋다.
* * *
강후가 '감시자'와 함께 던전에 입장한 것은 그로부터 15분이 지나서였다.
나이가 꽤 어려 보이는 헌터였는데, 아무리 높게 잡아도 스무 살이 되지 않을 듯했다.
바로 통성명이 이뤄졌고, 감시자의 이름이 백선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가명일 터다.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백선태는 팔짱을 낀 채로 강후가 공략해 나가는 과정을 살폈다.
힘을 보탤 이유가 전혀 없다 보니, 무기를 꺼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백선태는 강후의 움직임을 흥미롭게 살피고 있었는데, 자신과 똑같은 직업군이어서였다.
얼마나 강후를 관찰했을까?
강후가 초입부터 부드럽게 몬스터를 제압해 나가면서, 확실하게 몸풀기를 끝냈을 무렵.
백선태가 강후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마침 몬스터의 등장이 끊기는 구간이라,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느낌 좋은 암살자는 꽤 오랜만에 보네요. 자세도 좋고, 빈틈도 없어 보이고. 신기한데요?"
"암살자 보기가 힘들죠."
"정확히는 실력 좋은 암살자를 보기가 힘들죠. 다들 멋만 부리다가 뒈지는 놈들 천지라."
백선태의 말에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수준에 못 미치는 다른 암살자에 대한 경멸이 함께 묻어났다.
사실 강후의 생각도 비슷했다.
암살자 직업군이 되면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열심히 똥폼이나 잡는 녀석들이 허다한데.
그런 녀석들은 평균 수명이 짧다.
암살자는 수많은 헌터의 직업군 중에서도 가장 예민한 직업군에 속한다.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기 좋은 직업군 순위에서 늘 최상위권에 랭크되는 것이 암살자이기 때문이다.
노림수가 실패하면.
타깃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상태일 수밖에 없는 암살자는 가장 맛 좋은 먹잇감이 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위험 부담이 정말 크다.
백선태가 말을 이었다.
"꼭 던전 하나를 이렇게 지정해서 와야 할 이유가 있나요? 보상도 대부분 포기하면서."
"모험심이랄까.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불규칙함을 찾아 떠나는 느낌이랄까. 뭐, 그런 거죠."
강후가 생각나는 대로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살짝 돌리고 웃었다.
이유야 명확하다.
스킬북 꼼수로 스킬을 배울 수 있으니 온 것이다.
하지만 굳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천기누설을 하고 싶지 않으니, 시쳇말로 개소리가 나오는 거다.
"어쨌든 좋은 구경하고 있습니다. 지금 선규 님의 레벨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요."
백선태는 자신의 진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레벨은 250.
강후의 레벨을 기준으로 비교하면 2.5배는 높은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는 전투 내내, 강후의 움직임에서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를 느꼈다.
깔끔하고 간결하며.
무리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모든 동작이 날카로웠다.
그러면서 허술하지도 않았다.
이런 수식어들의 나열이 얼마나 공존하기 힘든 것인지는 헌터라면 다들 알 것이다.
저 말을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 만들면 딱 한 단어가 나온다.
완벽.
지금 강후가 보인 움직임의 완성도가 딱 그러했다.
한편 백선태의 칭찬과는 별개로.
강후는 지금의 전투를 훈련처럼 활용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어야 해. 내가 원하는 타이밍을 만들려면.'
초보적 시각으로 본다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피하는 것이 상책이기는 하다.
위험에 빠질 확률을 시작과 동시에 크게 낮출 수 있어서다.
하지만 실전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미리 회피하는 대응을 보면, 노련한 헌터는 회피 과정을 보면서 다음의 대응을 맞춘다.
상대가 미리 패를 까는 형국이 되기에 노림수를 가져가기가 수월해지는 것이다.
노련한 헌터가 한 수, 두 수 앞을 대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최대한 늦게 피할수록, 시간과 공격권을 모두 낭비하게 만들 수 있다.'
피하는 시기를 최대한 뒤로 미룸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다음 수를 꺼내기 어렵게 만드는 것.
그것이 강후가 생각하는 성장의 다음 스텝이었다.
81화 여수행 (3)
* * *
그 시각, 서울역.
"...떨려."
한 여자가 서울역 로비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가만히 선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발이 땅에 붙기라도 한 것 같은 무거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보게 되고, 막연한 두려움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기억난 사람에게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봤지만, 연결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긴. 던전 안에 있을 때는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했었으니까. 그때가 지금인 거겠지."
그녀의 정체는 정유리였다. 전화를 걸려고 했던 사람은 바로 강후였고.
감회가 새로웠다.
자기 스스로 선택해서 그라운드 제로에서의 은둔을 택한 삶을 이렇게 끝내게 될 줄이야.
계기는 분명했다. 강후가 자신에게 알게 모르게 기운을 불어넣어 준 덕분이었다.
뭐랄까. 세상에 잔뜩 상처를 받고 움츠러들었던 자신에게 희망의 빛줄기를 보여준 느낌이었달까.
정유리는 강후와 함께했던 짧지만 강렬한 추억 속에서 미래를 다시 만들어나갈 의지를 얻었다.
채관형과의 참혹한 기억에 사로잡혀서 트라우마에 허우적거릴 수도 있었던 삶.
하지만 강후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채관형처럼 타락한 것이 아니라, 충분한 선의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알려 주었다.
무작정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게 해 줬다.
"같이 서울 구경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어쩔 수 없으려나. 쳇."
당사자는 전혀 모를 원망(?)을 퍼붓고 나니, 바닥에 딱 붙어 있던 발도 제법 가벼워졌다.
강후와 이런저런 말장난을 하면서 서울역을 거니는 상상을 해 보니, 더 마음이 가벼워졌다.
"일단 바람이나 쐬자!"
정유리가 힘차게 역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우선 항상 목에다가 즐겨 착용하는 예쁜 스카프를 하나 살 생각이었다.
그리고 서울 나들이를 실컷 즐겨보기로 했다. 실로 오랜만에 오는 서울이니까.
이따금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 시선이 유독 적대적으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무던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모든 감정은 지나치게 비약적인 것이고, 채관형이 남겨 놓은 트라우마의 산물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강하게 다독였다. 별 것 아니라고. 어느 누구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 않다고.
"이제 내 삶을 살 거야."
정유리가 떨리는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세상에 나온 이상.
이제는 잡아먹히지 않고 헤쳐나갈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줄 사람이 자신의 곁에는 꽤 많이 있다.
이를테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같은 사람 말이다.
* * *
한편, 그 무렵.
야만의 시대 스킬북을 학습하기 위한 강후의 여정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위기라는 이슈가 전혀 없는 던전 공략을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건가 싶은데.'
백선태는 평온하다 못해, 한가롭기까지 한 강후의 던전 공략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중간에 나름 위기의 포인트라고 생각했던 미들 보스 공략 구간도 정말 무난하게 넘어갔다.
백선태는 알지 못했지만.
강후는 미들 보스에게 '출혈 강화'라는 패시브 스킬을 얻어낼 수 있었다.
미들 보스의 공격에 상처를 입었을 때, 지혈이 잘 안 된다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출혈 강화]
[스킬 숙련도 : Lv Max]
[기존에 출혈 효과가 있는 스킬의 효율을 임의의 확률로 2배에서 3배까지 늘립니다.]
출혈 스킬이 전혀 없는 헌터라면 무의미한 스킬이지만, 출혈 찌르기와 같은 스킬이 있는 강후에게는 시너지가 너무 좋은 스킬이었다.
어쨌든 백선태는 강후를 보면서 '깔끔하다'라는 생각을 몇 번이고 거듭해서 했다.
암살자 직업군의 헌터들은 모두 절제되어 있으면서 군더더기 없는 한 방을 가진 스타일을 원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바라고 지향하는 영역의 얘기일 뿐, 실전에서의 흐름은 매우 난잡하다.
타깃이 될 헌터나 몬스터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주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변수와 예측할 수 없는 대응 속에서 혼선이 빚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똑똑하다고 한들 수천, 수만 개의 상황에 대한 대응을 머릿속에 두고 있을 수는 없다.
한데 강후는 매번 모든 공격과 방어에서 당황하거나, 굼뜬 모습을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마치 상대가 이렇게 반응을 하면, 저렇게 대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명확한 것처럼.
물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확실히 보였다. 공격 레퍼토리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백선태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스킬만 해도 15종이 훌쩍 넘어갔다. 자신이 가진 스킬의 보유 개수를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이다.
'도저히 못 참겠군.'
백선태가 강후에게 호기심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감시자'의 역할에 집중하려던 다짐을 깼다.
김자호는 괜히 외부인에게 마음을 주거나, 인연의 연결고리를 만들지 말라고 주의를 줬지만.
그러기에는 강후가 자신이 닮고 싶은 롤모델의 모습을 너무 많이 갖고 있었다.
레벨은 자신보다 한참 낮지만, 실력으로는 몇 수 위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백선태에게 레벨은 그리 중요한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레벨이 다가 아니다.
한편, 같은 시각.
'메인 보스 앞두고 레벨 94.'
강후는 메인 보스와의 최종전을 앞두고 94까지 올린 자신의 레벨을 흡족하게 살피고 있었다.
레벨 100이 코앞이다.
레벨 100은 기본 스킬이 추가되는 구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성전에 있는 모든 성좌에게 '자격 알림'이 일괄적으로 통보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성좌들에게 많은 위기를 딛고, 마의 영역으로 불리는 레벨 100에 도달한 헌터가 있습니다, 하고 공식적인 알림이 뜨는 것이다.
이때는 모든 성좌가 해당 헌터의 존재를 인지하기에 많은 계약이 이뤄지곤 했다.
그래서 레벨 100 이상의 헌터는 99% 이상이 성좌와 계약이 이루어진 상태다.
어떤 성좌든지 일단 달라붙기는 하기 때문이다. 격이 떨어지거나 부족함이 있더라도 말이다.
물론 청명 수용소에서 탈출하기 전에 이미 차원 강탈자와 계약한 강후에게 새 이슈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자격 알림이 현재 강후를 후원하고 있거나, 지켜보고 있는 성좌들에게 자극이 될 가능성은 컸다.
황야의 전략가가 더 많은 후원 보따리를 준비하거나.
강후를 주시하는 '대재앙 – 어둠'이 생각보다 일찍 계약을 제안할 수도 있는 상황인 셈.
그래서 강후에게도 레벨 100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그것은 강후를 이미 메인 계약자로 두고 있는 차원 강탈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후에게 직접 드러낸 적은 없지만, 그녀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경쟁자가 될 성좌가 언제 어떻게 튀어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최대 위기인 셈이다.
보너스 포인트 투자와 스탯, 스킬의 확인까지 마친 강후가 잠시 휴식을 위해 바위에 걸터앉았다.
"저기, 정선규 님."
그러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백선태가 말을 걸었다.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나 싶었더니, 궁금한 점이 생긴 모양이다.
"네."
"혹시 스승 되시는 분이 누군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스승이라."
"네. 좋은 스승님을 두셨을 것 같은데. 물론 가르침을 담을 그릇이 큰 것도 있겠지만요."
강후가 스승이라는 말을 곱씹은 것은 그런 존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백선태가 스승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체계적으로 지름길을 밟게 해 줄 스승이 없었다면, 지금의 실력이 될 수 없었을 거라고 본 거겠지.
실제로 네임드라고 불리는 헌터를 보면 절반 이상은 좋은 스승을 둔 경우가 많다.
가까운 예시로 장시환의 경우도 평생의 은인이라고 부르는 스승이 존재한다. 지금은 죽었지만.
이예린 역시 실력 좋은 스승이 가르침을 주고 있다. 한국인은 아니지만.
어쨌든 강후는 백선태의 질문을 무시하기보다는 나름의 답을 주고 싶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계십니다. 뵌 지가 좀 오래되긴 했지만, 항상 제 곁에 계시는 느낌이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후의 스승은 바로 자신, 본인이었다. 모든 깨달음과 배움의 원천이다.
신강후라는 캐릭터가 그렇게 짜여 있다.
원작에서 괜히 장시환의 최고의 숙적이라고도 불린 '아치 에너미'였던 것이 아니다. 주인공을 넘볼 수 있었던 캐릭터였다.
유심히 계속 자신을 살피는 백선태의 눈빛에 강후가 농담을 툭 던졌다.
"뒤를 캘 준비를 하는 거죠?"
"예?"
"표정이 딱, 누군가를 더 알고 싶을 때의 표정이라. 호기심이 차다 못해 넘치고 있달까?"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캔다는 표현은 좀! 정말 진심으로 궁금할 뿐입니다."
"하하. 농담이에요."
좀처럼 농담을 안 하는 강후지만, 백선태에게는 그런 장난을 치는 게 제법 재미있었다.
아직 헌터로서 때가 덜 묻은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군벌 '자강'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사실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의 헌터이기도 했다.
"선규 님. 혹시 괜찮다면 보스 몬스터 공략을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경험치는 보존하겠습니다."
그때, 백선태가 의외의 제안을 꺼냈다.
감시자 역할에만 충실할 줄 알았는데, 굳이 보스 몬스터 공략에 같이 참여하겠다고 할 줄이야.
경험치를 보존한다는 얘기는 보스 몬스터가 죽기 1분 전에 전장을 이탈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대미지 기여도에 관련한 모든 부분이 리셋된다.
최종적으로는 기여한 바가 없게 되니, 당연히 경험치도 나누지 않게 된다.
한 마디로 같이 합을 맞추기만 하고 과실은 전부 강후에게 양보하겠다는 뜻.
강후의 입장에서는 굳이 거절할 필요가 전혀 없는, 오히려 고마운 제안이었다.
그의 속내가 짐작이 가지만, 강후가 이유를 물었다.
"이유를 들어볼까요?"
"한 번 호흡을 맞춰보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지켜보면서 감명을 받은 바가 많아서요."
"딱히 감명을 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은 아닙니다만."
"다른 헌터는 몰라도, 저에게는 충분히 롤모델이 되는 실력을 가지셨습니다."
강후의 입가가 씰룩였다.
백선태가 작정하고 비행기를 띄워주는, 기분 좋은 느낌을 털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냉정하고 보수적으로 판단하는 강후다.
모자란 부분을 어떻게든 찾아내고, 넘치는 부분은 자만을 멀리하도록 만족하지 않게 채찍질한다.
그런데 백선태가 존경과 경외의 눈빛을 계속 보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백선태의 실력을 보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어쨌든 같은 직업군의 헌터라면 귀감이 될 만한 요소가 있을지도 모른다. 레벨도 높은 편이고.
"그럼 기존의 룰만 잘 지켜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제게 권리가 있는 보스 몬스터니까요."
"물론입니다!"
강후에게 허락을 받은 백선태가 마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좋긴 좋은 모양이다.
바로 그때.
"짐이 만들어 낸 죽음의 불길이 어리석은 피조물에게 지옥으로 갈 지름길을 선사하리라."
계속 강후를 기웃기웃 쳐다보던 보스 몬스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멘트를 소화했다.
무게감과 위압감이 있는 몬스터라면 듣는 그 순간, 소름이 쫙 돋을 멘트였다.
하지만.
"그래봤자 불닭이지."
강후는 보스 몬스터 '카나비스'의 위엄과 권위를 한 마디 표현으로 짓밟아버렸다.
불닭.
활활 타오르는 불의 화신, 불사조를 꿈꿨었던 카나비스는 그렇게 한 마리의 하찮은 닭이 됐다.
82화 여수행 (4)
* * *
'실력 좋네.'
'역시 바로 옆에서 보니까 확실히 보인다. 전부 계산하고 피하는 거야. 운이 좋은 게 아니라.'
불닭(?) 카나비스를 쓰러뜨리기 위한 전투가 심화 될수록, 강후와 백선태는 서로에게 매력을 느꼈다.
물론 실력에 대한 호감을 느낀 것이었다. 혹자가 생각할 법한 감정적인 호감이 아니라.
어쨌든 백선태는 강후의 스킬과 회피 대응이 의도적이면서 계산된 것임을 확인했고.
강후는 백선태의 실력이 지방의 중소규모 군벌에서 썩기에는 아쉽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자호가 얼마만큼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백선태의 실력이라면 정화 길드도 쉽게 들어갈 정도였다. 당연히 권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두 암살자의 치고빠지기식 공략에 카나비스는 죽을 맛이었다.
카나비스의 특징은 강력한 화력을 가진 불을 뿜어내면서 적의 접근을 저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을 뿜어내는 것이 무한대로 가능한 것은 아니어서, 약간의 대기 시간이 꼭 필요했다.
문제는 이 빈틈을 강후와 백선태가 절대 그대로 두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특히 강후는 굳이 카나비스에게 접근하지 않고서도 전광비도 같은 스킬로 원거리 타격이 가능했다.
게다가 접근하면 접근한 대로, 대참수 스킬을 이용해서 파괴적인 일격이 가능했다.
그렇다 보니 카나비스는 강후가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어도 계속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뿜어내는 불의 경로도 읽혔는지, 뿜어내기도 전에 먼저 위치를 바꾸곤 했다.
그림자 걸음이나 환영술까지 탑재한 강후인지라, 더욱 타격하는 것이 어려웠다.
"흐억. 허억. 흐억."
가쁜 숨을 토해내고 있는 것은 강후와 백선태가 아닌 카나비스였다.
인간처럼 목소리도 낼 수 있는 터라, 등장부터 무게를 잔뜩 잡으면서 나섰는데.
결과적으로는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부끄러움을 잘 안다면 얼굴이 화끈거릴 상황이었다.
그러는 사이.
강후가 다시 카나비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녀석의 목숨을 위협해야 꼼수 상황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나비스는 인간형 마법사였던 발트만과 생김새나 공격 방식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 보면 결국 꼼수에 활용되는 패턴은 똑같았다.
카나비스에게도 까다로운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태워 먹기'라는 스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강후가 전광비도를 활용해 혈루를 던질 자세를 취하자, 카나비스가 몸을 흠칫했다.
앞서 저 공격으로 날개에 중상을 입은 경험이 학습됐기에, 먼저 긴장한 몸이 반응한 것이었다.
이어서 강후가 힘껏 던지는 자세를 취하자, 카나비스가 빠르게 대응에 나섰다.
"캬아아악!"
카나비스가 입을 힘껏 벌려 토해낸 것은 앞선 것과는 비교도 안 될 화력의 불길이었다.
아예 날아오는 혈루를 녹여 없애버리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대응이었다.
태워 먹기 스킬의 전개.
'역시 닭대가리인가?'
예상대로의 흐름에 강후가 미소를 지었다.
발트만도 그랬고, 지금의 카나비스도 그렇고. 고통이 학습된 몬스터는 은근히 기만에 잘 당한다.
강후의 손끝을 떠난 것은 혈루가 아니라, 품속에서 꺼낸 야만의 시대 스킬북이었다.
하지만 짐작조차 할 리 없는 카나비스는 태워 먹기를 활용하여, 순식간에 스킬북을 없애버렸다.
동시에 푸른빛 정수의 형태로 치환된 내용물이 카나비스의 입안으로 쏙 들어갔다.
본래 태워 먹기 스킬은 상대의 공격을 태워 없애면서, 마나 보충을 유도하는 형태다.
하지만 카나비스는 애꿎은 스킬북을 태웠고, 정수를 먹어서 얻은 것은 뜬금없는 스킬이었다.
세팅은 그렇게 끝났다.
다만.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영문을 알 리 없는 백선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후가 던진 것은 단검이 아니라 책이었기 때문이다.
강후의 스킬 강탈 능력에 대해서 전혀 알 리 없는 백선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이제 때가 된 것 같네요."
물러나라는 신호를 줬다.
카나비스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백선태가 대미지를 보조해 준 덕분에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단축됐다.
이제 남은 것은 스킬북을 먹인 불닭에게서 다시 스킬을 회수하는 일뿐이다.
밥상은 차려졌다.
숟가락만 들면 됐다.
* * *
그로부터 5분 후.
[야만의 시대]
[스킬 숙련도 : Lv Max]
[학습자의 마나 스탯이 50 미만인 경우, 모든 스킬의 마나 사용 값이 50% 감소합니다.]
강후는 카나비스를 죽이고 강탈에 성공한 야만의 시대 스킬을 확인하고 있었다.
본래 광전사 전용이었던 스킬이지만, 꼼수 덕분에 직업이 일치하지 않는 패널티는 사라졌다.
만약 그대로 학습했더라면 보통 기존 효율의 1할로 떨어지는 페널티가 적용되는 만큼.
마나 사용값이 50%가 아닌 5%가 감소하는 극히 미미한 효과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꼼수로 완전한 스킬 체득이 가능해진 덕분에 원래의 효율 그대로 계승할 수 있었다.
'레벨 95 달성에 야만의 시대도 챙겼고. 여기에 주황색 마석까지 먹은 거면 완전 이득인데.'
강후를 더 기분 좋게 만든 것은 죽은 카나비스에게서 전리품으로 얻은 마석이었다.
주황색 마석은 시장에서의 거래가가 최소 100억 원에 육박하는 녀석이다.
중, 대형 길드에서 수요가 많은 편이라 판매도 잘 되는 축에 속해 현금화가 쉬웠다.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마석을 던전에서 전리품으로 얻기는 쉽지 않다. 확률이 매우 낮아서다.
하지만 그 낮은 확률을 뚫고 보상이 나와줬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좋은 소식은 더 있었다.
[불의 영혼]
[화염 '절대' 내성이 7.5% 상승합니다.]
카나비스가 죽는 순간, 영구 버프의 형태로 화염에 관련된 내성이 체득됐다.
절대 내성이란.
어떤 경우에서도 무시되지 않는 내성이다.
예를 들어 화염에 대한 절대 내성이 100%가 된다면, 어떤 화염 공격에도 끄떡없게 되는 것이다.
다만 절대 내성은 최상위 헌터들도 쌓아 올리기 힘들 만큼, 획득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카나비스로부터 화염 절대 내성을 얻었다.
7.5% 절대 내성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한다면, 최소 750억 원은 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보통 100%의 절대 내성을 가진 헌터의 능력 가치를 1조 원으로 보기 때문이다.
특정 속성 공격에 있어 완전히 무적이 되기에 그 정도의 가치 평가가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었다.
"정말... 의미가 깊은 감시였습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하루네요."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백선태의 손 위에는 뭔가를 빼곡하게 적어 넣은 노트가 들려 있었다.
"뭐. 도움이 됐다면야."
강후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까지 자신을 보고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다시 여수에 올 일이 있으실까요? 아무래도 없으시겠지요? 굳이 오실 이유가 없는 곳이니."
백선태가 어느덧 열려버린 출구를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왠지 지금이 아니면 다시 강후를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여기서 인연의 끈을 만들어두지 않으면, 연결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 것이다.
존경심은 알량한 자존심을 가볍게 무시했다. 마음이 강하게 원한다면 그깟 체면이 무슨 의미일까?
백선태가 강후의 앞으로 후다닥 달려가서는 고개를 숙였다.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연락처라도 교환할 수 있을까요? SNS를 알려주셔도 됩니다."
"연락처를 제가 받죠. 의미 없이 교환하고 싶지는 않아서."
"아, 예. 예. 알겠습니다."
강후가 선을 확실히 그었다.
백선태가 처음부터 쭉 호의적이었고, 지금도 나쁜 마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리 쉽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관심은 어디까지나 백선태 개인의 욕심이다.
강후는 백선태에게 흥미를 느낀 것은 맞지만, 그가 누구인지 진지하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먼저 다가갈 필요는 없다. 강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백선태가 다급하게 노트에 자신의 이름과 핸드폰 번호, 몇 개의 SNS 주소를 적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뜯어서는 잘 접어서 강후에게 건넸다. 부디 잃어버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백선태가 말을 덧붙였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생각나시면 꼭 한 번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나가는 대로 수습을 진행하겠습니다. 나머지 보상들은 저희 군벌의 몫이니까요."
"얼마든지."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된 부분에 대한 얘기고, 강후도 이미 얻은 것이 많아서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야만의 시대를 학습하러 온 던전이지만, 생각보다 정말 많은 보상을 얻었다.
주황색 마석만 시장에 잘 팔아도, 잔고를 466억 원까지 쭉 불릴 수 있다.
* * *
백선태와 헤어진 뒤.
강후는 전투로 쌓인 피로를 달랠 겸, 인근의 호텔로 향했다.
피로를 먼저 풀고 싶어서다.
확실히 던전 수준이 높았기 때문인지 몸에 알게 모르게 쌓인 피로감이 상당했다.
객실 안으로 들어온 강후는 바로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는 반신욕부터 했다.
몸 전체를 타고 올라오는 노곤한 느낌이 좋았다. 이 맛에 반신욕을 하는 거겠지.
"이렇게 된 김에 1,000억 원을 목표로 모아볼까. 2등급 아이템이면 훨씬 수월해질 듯한데."
욕심이 났다.
지금 3등급 아이템인 혈루를 갖고 있는 것으로도 던전 공략에 얻는 동력이 꽤 컸다.
레벨을 한참 상회하는 던전 공략이 가능한 배경에는 혈루가 주는 무게감이 상당했다.
특수 효과인 '피의 맛' 덕에 중복 부위 타격에서 상당한 대미지 이득을 보는 데다가.
혈루 자체가 항마, 맷집을 올려주는 정도가 높아 방어적인 측면에서도 효율이 좋았기 때문이다.
3등급 아이템 혈루가 이럴진대, 한 단계 더 위의 아이템이라면 사는 세계가 달라질 듯싶었다.
당장에 스탯 측면만 해도 혈루보다 최소 2배에서 3배 이상의 상승폭을 경험할 것이고.
특수 효과도 한두 개가 아니라, 예닐곱 개를 줄줄이 달고 나타나는 형태가 될 테니까.
괜히 네임드 헌터들이 2등급, 1등급 아이템 장착에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다.
새로 태어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헌터로서의 능력과 방향성에 격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물론 돈을 갖고 있어도, 자신과 궁합을 잘 맞는 아이템을 찾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
강후는 만약 2등급 아이템 구매에 필요한 돈을 모으게 되면 국내가 아닌 국외로 눈길을 돌릴 생각이었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아이템은 미국이나 중국에 비해, 물량이나 다양성이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
"주황색 마석을 팔고. 여기에다가 전종두에 관련된 건수만 잘 마무리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700억 원대까지 자산을 불리는 것도 가능해진다.
전종두가 죽으면 의뢰비가 100억 원이지만, 생포할 경우는 300억 원이니까.
스마트폰에 잔뜩 쌓여 있는 스팸 문자와 재난 알림 문자를 귀찮은 표정으로 지워내고 나니, 몇 건의 부재중 전화 알림과 톡 알람이 보였다.
"훗. 생각보다 일찍 그라운드 제로에서 나왔네."
강후가 처음으로 번호를 교환한 사람. 언젠가 그라운드 제로에서 나오길 바랐던 사람.
- 어디야? 나 서울 왔어!
- 전화 안 받는 것 보니 던전에 간 거구나? 나중에 확인하면 연락해 줘! 기다릴게!
- [사진]
- [사진]
정유리의 연락이 와 있었다.
83화 여수행 (5)
* * *
정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은 강후가 그녀를 만난 곳은 서울대공원이었다.
아직 김수경 용병단과 합류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했다.
다만 정유리의 제안 덕분에 강후는 팔자에도 없던 동물원 데이트를 하게 됐다.
원작의 신강후라는 캐릭터는 이런 자잘한 데이트 자체와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동물원에 가서 동물을 보면, 언제 어떻게 잡아먹힐까를 생각하는 캐릭터였으니까.
어쨌든 정유리가 동물원에 가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강후는 그녀와 함께 서울대공원 초입에서부터 코끼리 열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재밌지? 재밌지?"
"...."
"막 설레지 않아? 아직 동물들도 못 봤는데, 난 벌써 기대되는데? 엄청 떨려!"
"날이 진짜 좋기는 하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정유리의 마음을 따라가기에는 강후의 마음이 너무 닳아 있었다.
그래도 날씨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좋은 것 같아, 자연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게 됐다.
소풍 가기 딱 좋은 날.
소설에서 그런 표현을 썼을 때, 딱 그때 떠올렸던 푸른 하늘이 오늘의 하늘이었다.
"뭐 하고 지냈어?"
"던전. 휴식. 의뢰. 휴식."
"일, 집, 일, 집이란 얘기잖아?"
"헌터는 원래 그렇게 살 수밖에 없잖아. 도태되지 않으려면 채찍질을 계속할 수밖에."
성장에 욕심이 없는 헌터였다면 적당히 레벨을 올린 뒤에 만만한 던전이나 돌아다녔겠지만.
강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더 높은 세상, 순위, 서열을 꿈꾸는 헌터에게 휴식은 사치다. 많은 헌터의 공통된 생각이다.
"오늘 하루는 어깨에 힘 좀 빼봐! 너무 긴장하고 있잖아!"
강후의 어깨를 툭툭 치는 정유리의 손길에는 들뜬 감정이 잔뜩 담겨 있었다.
그런 정유리가 부러웠다.
이 빌어먹을 신강후라는 캐릭터는 그런 순수한 감정이 아예 삭제되어 있다.
원작에서 혹시나 다른 방향으로 새어나가는 빌런이 될까 싶어 걱정했던 탓에.
어지간한 긍정적인 감정은 전부 말살을 시켜놨기 때문이다.
그나마 웃을 수 있는 입과 근육이라도 살려둔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서 헛웃음이든 쓴웃음이든, 아니면 기뻐서 짓는 웃음이든 미소를 지을 수는 있다.
이것까지 없앴으면, 그냥 인간을 쏙 빼닮은 로봇 신세를 면할 수 없었을 터다.
"아이스크림이나 먹을까?"
"오! 아이스크림도 먹을 줄 알아? 얼굴만 봐서는 아이스크림만 먹어도 감기 걸릴 것 같은데?"
"얼굴이 어떤데?"
"내일 죽을 날을 받아놓은 사람처럼 창백하잖아.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따뜻한 카페 라떼를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야."
"그래서 안 먹는다는 건가?"
"아니, 아니! 먹어야지! 사 준다면 무조건 먹는 거지!"
"바닐라? 초코? 딸기?"
"바닐라!"
"바닐라 아이스크림 두 개 주세요."
주문하면서도 참 어색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고 편한 상황이 강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끊임없이 순수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을 뿜어내는 정유리의 존재가 좋았다.
아이스크림값을 지불하고, 아이스크림을 받아든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동물원이라는 공간이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는 곳이다 보니, 느긋한 여유를 갖는 것이 가능했다.
강후가 슬쩍 운을 뗐다.
"생각보다 일찍 그라운드 제로에서 나왔네."
"응. 그때, 선규 씨...."
"스물아홉 살이야."
"아! 그럼 오빠라고 부르는 게 편하겠네. 선규 오빠와 헤어지고 나서 던전을 여기저기 많이 다녔거든."
"그라운드 제로 안에 개인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 던전이 있나?"
"뭐, 정확히는 내 소유는 아니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가진 던전은 좀 있지?"
예상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온다.
정유리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강후도 모른다.
다만 소유한 던전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재력이나 실력이 있음을 뜻한다.
원작의 정유리에 대해서 조형된 부분은 그녀 자체밖에 없는데, 가족은 누구일까?
정유리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오빠에게 자극을 많이 받아서 열심히 던전을 공략했어. 그리고 생각했어."
"세상에 나가고 싶다고?"
"응. 한 번 부딪혀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 생각보다 괜찮은 헌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모자라지 않는!"
"깨달음을 얻었군."
"맞아. 부정적인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난 거지!"
잘 됐지 싶었다.
정유리는 충분히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강후가 은근하게 그녀가 세상에 나올 것을 종용한 것도 그 가치를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장기적으로는 정화 길드에 맞설 대항마를 만들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아마 정유리는 달리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성장할 것이다.
레벨도 강후보다 훨씬 높은 만큼, 한참 앞쪽의 출발선에서 달려 나가고 있는 셈이다.
"레벨은 얼마나 올랐지?"
"10 정도? 많은 건지 적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던전에서 살았나 보네."
"응, 맞아! 호호호!"
레벨 250의 헌터가 레벨 10을 이렇게 단기간에 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저 정도의 성장이라면 할아버지라는 존재가 판을 깔아준 던전이 꽤 괜찮은 곳일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할아버지가 다양하게 도움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조력자를 붙여줬거나.
할아버지가 누굴까.
질문을 참고 싶은 마음보다 호기심이 훨씬 더 앞섰다.
다만 질문을 하기 전에 정유리가 먼저 말을 덧붙였다.
"이제 다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어. 물론 채관형에게 가진 복수의 마음은 그대로지만."
"세상에 맞서보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고 보면 되겠지."
"맞아. 아무 생각 없이 복수하지는 않을 거야. 생각을 많이 정리했어. 조용히 칼을 갈 거야."
시종일관 밝았던 정유리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그것은 지켜보던 강후도 순간적으로 흠칫하게 만들 만큼 강력한 살기였다.
"먹어. 녹겠다."
"에휴! 순진한 동물들이 가득한 동물원에서 내가 뭔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미안해, 오빠."
"동물원이 성역(聖域)도 아니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는 거지. 근데 할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지?"
강후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할아버지? 아, 우선 정확하게 말하자면 친할아버지는 아냐. 나를 입양해 주신 할아버지야!"
"양부의 개념이 아니라 양조부라는 뜻인가?"
"응, 맞아. 친엄마, 친아빠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 그대로 두고 싶다고 하셨거든."
"그렇군. 내가 괜한 질문을 한 건가?"
"아냐, 전혀! 친부모를 원망하거나 그렇진 않아. 어쨌든 할아버지는 그라운드 제로에 계셔."
"그라운드 제로?"
"응. 오빠도 들어본 적은 있을 텐데? 솔라키움 재배를 하고 계시거든!"
"아, 그분이?"
"응! 내 할아버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정유리의 할아버지가 마스터 케이(K)인 것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솔라키움을 재배할 수 있고.
자신의 선천성 마나 과민증에 대해서 조언을 구해볼 수 있겠다 싶었던 사람.
그 사람이 정유리의 양할아버지라니. 인연이란 이렇게 의외의 형태로 연결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원작자로서 원작의 내용을 모두 꿰뚫고 있어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 혹은 원작에서 다뤄지지 않은 영역이 이런 식으로 알아서 끈을 만들어내곤 한다.
내가 쓴 원작의 세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있다니.
물론 굵직한 뼈대와 기둥이 될 메인 스토리는 알고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흥미로웠다.
적당한 긴장감이 들었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정말, 말 그대로 적당한 긴장감 말이다.
어쨌든 마스터 K가 할아버지라면, 정유리의 가치는 강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아진다.
강후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자, 정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할아버지랑 안 좋게 엮인 일이 있는 거야?"
"아냐. 오히려 반대지. 종종 필요한 것을 마스터 K에게서 사곤 했었으니까."
"내게 도움을 준 사람이라고 하면 할아버지도 반기실 거야! 가고 싶을 때, 언제든 말해줘!"
"좋아. 잘됐네."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유리를 중간 다리로 삼아 마스터 K를 만난다면, 좀 더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만남이 가능할 터.
그의 존재는 강후에게 꽤 중요했다.
솔라키움의 공급은 부차적인 문제고, 그가 가진 지식들과 경험의 폭이 넓기 때문이다.
한서연이 알아본 루마니아의 미하이 반쿠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가 선의를 가진 헌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노릇.
그래서 일부 사전 검증(?)이 된 마스터 K가 좀 더 믿을 만했다. 상대평가이기는 하지만.
그 이후.
서울대공원의 메인 관람 루트를 따라 걸으면서, 강후는 정유리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정유리의 양할머니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유리가 자세히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양할머니 역시 헌터라는 것이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하지만 길드에는 꽤 영향력을 미치는 막후 실력자인 듯했다.
정유리에게 뜻하지 않게 많은 정보를 얻었다.
그녀가 자신에게만큼은 경계심 없이 속 깊은 얘기까지 해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믿음이라는 것.
누군가가 자신을 신뢰하고 믿어준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반면에 강후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게 됐다.
과연 자신이 100% 믿는 사람은 존재하는가? 단언컨대 없었다. 항상 의심의 눈으로 상대를 본다.
뜨거운 우정을 나눌 친구.
서로 재고 따지지 않을 사랑.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 두 가지가 자신에게는 없었다. 오로지 비즈니스적인 관계만 있을 뿐.
'고독하네.'
결론은 간단하다.
고독하고 외롭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을 우정과 사랑이 나타났으면 했다.
그러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세상이 밝고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 강후의 생각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강후는 복잡한 생각들에 빠지지 않고 정유리와의 동물원 데이트를 즐겼다.
귀여운 동물을 보며 웃었고, 맛있는 간식이 주는 달콤함의 기쁨을 오롯이 느꼈다.
빙의 이후.
정말 쉴 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에게 처음, 제대로 찍어주는 쉼표였다.
그리고 쉼표를 찍는 시간에, 자신을 외롭지 않게 해 주는 한 사람이 있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한나절의 데이트가 강후에게는 의미 있는 재충전의 시간이 됐다.
이제 김수경 용병단과의 만나게 되면, 그때부터는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전장이 무대가 된다.
데이트가 끝나고.
서로 다른 길로 향하게 될 4호선 대공원역 앞에서 둘은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오빠. 언제든지 내가 필요하면 연락 줘. 물론 나도 던전에 있으면 연락은 못 받지만 말이야!"
"즐거웠어."
"오빠! 좀 웃고 다녀! 아까 보니까 웃는 모습이 훨씬 더 잘생겼더라! 진짜로!"
"내가 웃은 적이 있었나?"
"몰랐구나? 아까 오빠 엄청 활짝 웃던데?"
웃지 않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웃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억지웃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유리와 보내는 시간에 오롯이 집중했기 때문일 테지.
"아무튼 또 연락할게! 고마워, 오빠!"
강후가 손을 흔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녀가 충분히 멀어졌을 때, 중얼거리듯 속내를 토해냈다.
"나도 고마웠어."
84화 베주미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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