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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클럽 하데스 (1)

* * *

강후는 윤상미와 계약한 성좌에 대한 정보를 보고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질풍 검제]

[중립 성향의 성좌. 검을 이용한 모든 공격에 바람의 힘을 활용할 수 있게 지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검풍을 일으키는 검사다.

판타지 소설 속, 오러 블레이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검을 활용한 공격 외에도 바람을 일으키면서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강후가 호기심을 가진 건, 질풍 검제 성좌가 생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작자로 살았던 시절에 스치듯 떠올렸던 아이디어 중 하나였다. 이런 성좌가 있었으면 하고.

그렇다면 자신의 무의식이 세계의 어딘가에 자연스럽게 반영이 된 것이 분명했다.

강후가 말없이 전장을 다시 살피고 있자, 윤상미가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스타드가 밀리겠네요."

"아냐. 저건 일부러 바스타드가 평정에게 공간을 내준 거야. 유인이야."

서로의 형세 판단이 엇갈렸다.

사실 누가 이겨도 나쁜 놈이 승리자가 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정도 전세가 결정된 것 같은 느낌에 확 불타올랐던 관심도 식었다.

윤상미도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강후에게 물었다.

"꼭 무슨 영화 속에 나오는 미남 뱀파이어 같아요. 엄청 얼굴이 창백해. 어디 아파요?"

미남까지는 모르겠지만, 창백하다는 생각은 늘 했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의 영향이 클 것이다.

"항상 아프다고 봐야지."

부정은 하지 않았다.

원작에서도 선천성 마나 과민증을 해결할 치료 방법은 엔딩이 나는 시점까지 찾지 못했다.

물론 다른 의미로 해결되기는 했다.

신강후가 죽었으니까. 해결이라기보다는 해방이랄까.

"이제 어디로 가요?"

"대전역."

"······오! 정말요? 저도 가려던 참이었는데."

"반응이 한 박자 늦는 것을 보니, 처음부터 목적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에요. 가깝잖아. 갈 생각이었어요. 우연히 이렇게 동행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특이한 캐릭터다.

헌터들끼리는 오랜 시간 신뢰가 형성된 것이 아니면, 보통 친근하게 굴지 않는다.

흉흉한 세상이다 보니 동행이나 동승도 당연히 꺼리는 편. 하지만 윤상미는 아니었다.

'자기 실력에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자기 몸 확실하게 간수 할 자신이 있으면, 사실 좀 열린 마음으로 다녀도 문제는 없다.

보통 상대를 믿었다가 뒤통수 맞고 죽거나 납치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하지만 힘이 있으면 상관없다.

"그럼 안전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걸로. 역 쪽은 마음에 걸리네."

강후가 바스타드의 유인책에 말려 오산역으로 패퇴하기 시작하는 평정의 헌터들을 가리켰다.

꼬락서니가 지하철의 구조물을 엄폐물로 삼아 전투를 장기전으로 질질 끌고 갈 모양새인 듯하다.

안전 버스는 다수의 무장 헌터, 그것도 마탄을 다루는 헌터가 직접 가드(Guard)를 서는 버스다.

비싼 운임만큼 이동 중의 안전은 보장할 수 있다.

강후는 편한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 * *

달리는 버스 안.

옆에 앉은 윤상미는 대검을 곰 인형처럼 꼭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

종종 꺾인 목이 강후의 어깨에 닿곤 했지만, 강후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물론 밀쳐내지도 않았다.

한정적으로 주어진 여유.

강후는 김목현을 죽이고 얻었던 아이템을 살폈다.

착용은 했지만, 구성을 확인하진 못했던 것들.

[몰리스 마니체 - 장갑]

[등급 : 5등급]

[한 손 면장갑 아이템으로 5m 내에 위치한 '인식 무기' 하나를 바로 회수할 수 있습니다.]

[착용 즉시 손의 색깔, 모양과 동화되어 외부에서는 쉽게 장갑의 형태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단검에 연동하는 게 가장 최상일 것 같은데.'

단검 투척에 대한 부담감을 낮춰주는 아이템이다.

투척으로 적을 견제하고 떨어지거나 박힌 단검을 직접 손으로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손짓으로 회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기 회수에서의 동선 낭비를 극적으로 줄여준다.

[아수라의 혜안 - 흉갑]

[등급 : 5등급]

[마나 +50]

[단, 변환 옵션을 활용해 체력 +50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스위칭 대기 시간은 24시간.]

'믿는 구석이 있었군.'

김목현이 전투에 자신감이 충만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나 스탯 보조를 50이나 받았으니.

만약 변환 옵션이 없었다면 강후에게는 큰 감흥이 없었을 거다. 마나에 대한 갈증은 적으니까.

하지만 변환 옵션이 있는 것으로 아수라의 혜안에 대한 가치는 달라졌다.

최고의 구성품이다.

내친김에 바로 변환을 마쳤다.

자세히 안 살폈으면 체력을 손해 볼 뻔했다.

이제 남은 하나.

[무신의 유희 - 반지]

[등급 : 5등급]

[맷집 +50]

[특수 재료인 적요석을 활용해서 한 등급 위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다.]

물리적인 공격에 대한 방어력을 대폭 높이는 맷집.

무조건 다다익선이기에 가치는 높았다.

게다가 열 손가락에 끼는 반지라서 착용에 대한 부담도 덜한 편이다.

그 외에 마력을 올려주는 두 개의 아이템은 중복 부위에 필요 없는 스탯인 만큼 팔기로 했다.

"······."

확인을 마친 강후가 주변을 보니, 버스에 탄 몇몇 헌터들도 잠들어 있었다.

가드들은 계속 창문 밖을 살피고 있었는데, 바스타드 인장을 단 오토바이 몇 대가 쓱 왔다 갔다.

하지만 가드를 잘못 건드렸다가 이마에 구멍이 뚫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도로에서 멀어졌다.

'서울을 가야 하나.'

문득 서울이 떠올랐다.

던전이나 레벨업에 대한 욕심을 모두 배제하고 보면, 사실 서울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

거기서는 가다가 지갑을 떨어뜨려도, 누구도 건드리지 않을 정도다.

건드린다면 주인을 찾아주려는 손길이 전부다. 혹은 헌터 치안청의 사람들이거나.

하지만 얇은 콜라 캔 하나에 2만 원이 넘어가는 살인적인 물가가 문제다.

안전에 대한 대가다.

'그래도 야생의 맹수 새끼가 동물원의 맹수보다는 나은 법이지.'

강후가 생각을 정리했다.

피 냄새도 맡아본 놈이 더 잘 맡고, 싸움도 해 본 놈이 한 번을 더 찌르는 법이다.

열세 개의 별.

간교한 마왕의 부역자들을 모두 뛰어넘을 실력을 갖추려면, 일분일초의 무의미한 평화는 아깝다.

쿠쿵!

"헛! 츄릅!"

방지턱에 버스가 한 번 들썩이자,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윤상미가 황급히 입 아래를 훔쳤다.

잠깐이라도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만 있으면 마음 놓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마는······.

이 세계를 사는 헌터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생명의 가치가 떨어진 세상.

* * *

대전역에 도착한 강후는 윤상미와 함께 이예린을 만날 생각이었지만.

밤이 너무 늦었고, 이예린도 외부 업무를 보는 중이었기에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으로 약속이 밀렸고, 자연스럽게 밤 시간이 비었다.

대전역 인근에 제법 이름이 알려진 바에 들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오늘은 휴점이었다.

"괜히 방황하지들 마시고, 저희 파이트 클럽에서 칵테일 한잔하면서 기분 전환이나 하시지요?"

덕분에 그 근처에서 호객 행위를 하던 삐끼가 강후와 윤상미를 낚았다.

마침 술 한 잔이 마시고 싶었던 참이고, 유사시에 자기 몸 정도는 간수할 자신도 있었기에.

강후는 윤상미와 함께, 인근의 지하 파이트 클럽으로 향했다.

클럽의 이름은 하데스(Hades)였다.

지하 3층부터 입구가 시작되는 클럽 하데스에는 생각한 것보다 사람이 많았다.

이미 중앙에 만들어진 특설 무대에서는 헌터들의 '파이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 돈의 단위가 갱신되는 것을 보니 데스 매치인 모양이었다.

죽은 헌터에게 걸린 판돈을 이긴 헌터와 그 배팅자들이 가져가는 구조인 것이다.

"춤 좀 춰도 돼요?"

"뭘 하든."

강후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그녀와 동행만 한 것일 뿐, 완벽한 일행은 아니니까.

그녀가 스테이지로 이동해 댄스 삼매경에 빠질 즈음.

강후는 특설 칵테일 바에서,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마시고 싶었던 칵테일을 시켰다.

"솔라키움 버스트."

"오호? 이걸 마신다구요?"

"마시라고 만든 거 아닌가?"

"사실 구색용에 가까워서요. 솔라키움이 워낙 맛이 좀······. 그렇잖아요? 큭큭."

스모키 메이크업이 인상적인 붉은 머리의 바텐더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솔라키움의 맛은 분명히 대놓고 비유하기에 난감한 구석이 있기는 했다. 어른만 아는 맛이랄까.

"괜찮아. 좋아하니까."

강후가 원래 가격보다 10만 원을 더 얹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팁이다.

이런 음성적인 파이트 클럽에서는 바텐더들이 꽤 쓸만한 정보를 파는 경우가 많다.

물론 로또성이 짙다.

바텐더가 아는 것이 적으면, 그저 신변잡기 정도 수준의 쓸모없는 정보가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복권을 긁는다는 생각으로 부담 없이 팁을 주고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가 묻는다.

"우리 초면이죠?"

끄덕. 무언의 대답.

"저는 베니라고 해요."

베니. 흔하게 쓰이는 가명이라, 며칠 지나면 까먹을 것 같은 이름이다.

베니가 열심히 레시피에 따라서 칵테일을 만들며, 강후에게 좀 더 고개를 숙였다.

워낙에 노출이 많은 복장이라서 몸을 숙이는 것만으로도 꽤 아찔한 광경이 연출됐지만.

강후는 놀라우리만치 베니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눈길을 돌릴 이유를 못 느낀 것처럼.

베니가 살짝 어이없는 듯한 헛웃음을 지었지만, 뭐, 무성욕자도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쨌든 팁값은 할 시간이다.

"파이트 클럽의 지하, 그러니까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지하 7층에 던전 입구가 있다는 얘기가 있어요. 들어간 사람은 있는데 나온 적은 없다나?"

건물은 분명 지하 6층까지 있었다. 로비에서의 이정표나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봐도 그랬고.

던전은 곧 이권이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던전이 누구나 수시로 출입 가능한 '오픈형 던전'이라 비밀에 붙였을 수도 있다.

항상 열려 있으니, 유입을 차단할 수 있어야 필요할 때 던전 내부를 컨트롤 할 수 있어서다.

강후는 왜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느냐고 물으려다가 말을 삼켰다.

바텐더의 말은 십중팔구는 허풍이나 뜬소문인 경우가 많다. 적당히 걸러 들으면 된다.

"그리고 블루문이 곧 이클립스에 합병된다는 얘기가 있어요. 근데 그렇게 되면······."

바로 그때.

와장창창! 쨍그랑!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잔과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클러버로 가득한 인파 사이에서 제법 규모가 되는 남자 무리가 옷소매를 드러냈다.

세 자루의 칼이 사선으로 늘어서 있는 모양을 인장으로 만든 조직. 바로 이클립스(Eclipse)였다.

"음."

어떤 상황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여긴 상대적으로 온건 세력으로 불리는 블루문 조직이 운영하는 파이트 클럽이다.

그런데 이런 패악질을 부린다는 것은 베니의 말대로 블루문이 이클립스에 팔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이놈들은 누굴까?

바로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납치'하려는 놈들이다.

납치한 헌터를 마석 광산에 팔아넘기거나, 인신매매로 '처분'하면 제법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새 베니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와중에도 직업정신은 투철하게 발휘했는지, 강후의 앞에 솔라키움 버스트까진 따라 놓고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우웅! 쨍그랑!

어디선가 날아든 재떨이 하나가 강후가 막 마실 예정이던 유리잔을 산산조각 냈다.

"썩 유쾌하진 않은 시작이군."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13화 클럽 하데스 (2)

블루문의 업장이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클립스는 인수와 함께 자신의 업장을 거대한 인신매매의 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마 오랜 기간 사전 조사를 했을 것이다.

여기를 방문하는 헌터들이 꽤 '돈'이 된다는 것을.

"흐아앗!"

그사이, 강후의 뒤에서 헌터 하나가 달려들었다. 옷소매의 이클립스 인장이 보인다.

무턱대고 도끼를 들고 달려드는 꼴이 실력을 갖춘 놈 같지는 않았다.

휘이익! 푹!

"으억!"

상황은 바로 종료됐다.

헌터의 정면에서 횡이동으로 모습을 감춘 강후가 뒤에서 나타나 그의 뒷덜미에 단검을 꽂았다.

"너희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 윗대가리 놈들이 일부러 아랫것들 수를 줄여서 이득을 더 보려는가 하고."

강후가 손 쓸 틈도 없이 숨통이 끊어진 헌터의 몸을 발로 찼다.

이미 요단강을 건넌 헌터는 그대로 볏짚처럼 앞으로 픽, 고꾸라지고 말았다.

새삼 느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으로 가득한지.

칵테일 한 잔 넉넉하게 마실 틈이 없다.

그 사이.

강후의 위치를 확인한 윤상미가 어느새 대검을 챙겨서는 옆쪽으로 따라붙었다.

당황하기보다는 재밌게 놀고 있었는데 아쉽다는, 딱 그런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서울에서 마시는 술이 가장 맛있는 술인 거 같아요."

"그 말은 공감해."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 걸고 마시는 술은 술이 아니라 독주일 뿐이다.

헌터가 많은 이 클럽이 안전한 곳이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낚시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가죠."

"비상구 쪽으로 뚫고 가는 것이 좋겠는데."

"동의해요. 메인 루트는 어차피 삼중, 사중으로 막아놓고 있을 거예요."

"응."

"어쩌면 바로 잡아다가 수갑을 채워 수용소로 보낼 차까지 대기시켰을 지도요."

바로 그때.

클럽 안에서의 장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 고객 여러분. 흑사자에서 본 클럽의 교란을 일으키기 위해, 내부자를 심어놓은 듯합니다.

- 저희 이클립스에서는 신속하게 내부 분란 세력을 진압, 정상화를 목표······.

"지랄하고 있네!"

빠각!

헌터 중 누군가가 날린 의자가 대형 스피커를 강타하며 한 방에 먹통으로 만들어버렸다.

코앞에서 이클립스 헌터들이 다른 헌터들을 잡아가고 있는데, 그걸 누가 믿겠는가?

"뒤를 맡아줘."

"선규 씨는요?"

"좁은 계단 루트 구조상 대검은 어려워. 내가 앞을 맡는 게 맞아."

"알겠어요! 우리 혼성팀을 결성하는 건가요?"

"단기 비즈니스라고 생각해."

바로 그때.

쾅!

지하 2층 비상구 쪽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를 살펴보기 전에 강후가 먼저 들고 있던 단검부터 날렸다.

단검 회수는 몰리스 마니체 장갑 덕에 5m 안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부담은 없었다.

퍽!

"억······!"

정확히 문이 열리고, 상대가 고개를 내미는 시점에 날아간 단검이 그대로 복부를 꿰뚫었다.

시선을 돌려 팔 쪽을 보니, 이클립스의 인장이 그려진 옷소매가 선명하게 보였다.

뒤에서 그 상황을 지켜본 윤상미가 물었다.

"알고 던진 거예요?"

"아니."

"······."

생각해보면 갑자기 이때 여기로 나올 만한 헌터가 이클립스 놈들밖에 없긴 했다.

강후가 손을 뻗자.

"크악!"

복부에 박혀있는 단검이 자연스럽게 손안으로 착 감기듯이 들어왔다.

"와, 염동력? 암살자 클래스가 이런 능력까지 부리는 것은 또 처음 보네."

윤상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이런 염동력 스킬은 마법사 계열 헌터가 사용하기 때문이다. 암살계는 흔치 않다.

그사이.

"아래다!"

지하 1층 비상구 문을 열고 나온 이클립스의 헌터 둘이 강후를 가리켰다.

그 시점에 이미 강후는 시야에 들어온 한 녀석을 향해, 일찌감치 납치를 사용하고 있었다.

중간에 난간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은 장애물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으아앗!"

납치 스킬에 걸려 순식간에 몸이 쭉 당겨온 헌터의 머리가.

빠각!

난간에 부딪혀 그대로 뒤로 꺾였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난 것을 보면 최소 경추 골절이다.

"으히익!"

함께 진입한 동료의 결정은 빛보다 빨랐다. 그는 곧바로 방향을 틀어 왔던 문으로 돌아 나갔다.

"이거 이레귤러(Irregular)의 냄새가 풍기는데······."

모든 과정을 본 윤상미의 표정이 굳었다. 암살자가 쉽게 쓸 수 없는 스킬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검을 회수한 염동력이야 종종 아이템 옵션에 추가되는 일이 있으니 그렇다고 쳐도.

헌터를 저항할 새도 없이 잡아당긴 납치는 애초에 헌터들이 쓸 수 있는 스킬이 아니었다.

던전의 특정 몬스터, 그것도 마족 계열의 몬스터만이 쓸 수 있는 일종의 전유물이었던 것이다.

"뒤는?"

"클린. 아무것도 없어요. 여기까지는 생각이 안 닿은 건가 봐요."

"클럽 안에 먹잇감이 많아서 그런 거겠지. 얼른 나가자."

강후가 속력을 냈다.

이후로도 비상문에 자리를 잡기 위해 몇 명의 헌터들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지만.

그때마다 도약과 납치, 횡 이동과 시야 강탈을 활용해가며 적절하게 놈들을 제압했다.

강후의 뒤에서 본의 아니게 개점휴업이 되어버린 윤상미는 그의 실력을 온전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감했다.

그는 전장에서 경험을 굵직하게 쌓은 노련한 용병이라고.

아울러 다수의 특수한 스킬까지 보유한, 예사롭지 않은 남자라고 말이다. 추측이 아닌 확신이었다.

[성좌 '정의의 사도'가 권선징악을 몸소 실천하는 당신의 행보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성력을 소량 소모하여 당신에게 약간의 버프를 후원합니다.]

[경험치 증가 +0.1%]

'딱히.'

강후의 입이 냉소를 띠었다.

그의 생각을 차원 강탈자가 먼저 읽었다.

[걸리적거리는 쓰레기를 치우다 보니까 질이 나쁜 쓰레기였을 뿐인데. 저 호구 같은 놈은 네 속을 꿰뚫어 보지는 못하는군.]

권선징악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

이 세계에는 절대선, 절대악이라는 것이 없다.

그 균형을 모호하게 만들고 종국에는 뒤집어버리는 놈들이 바로 열세 개의 별이다.

세상이 영웅이라고 믿었던 구원자들은 하나 같이 인류를 배신할 마왕의 부역자가 되니 말이다.

이 세계에서 어떤 것이 선이고 악인지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

보통 그래서 편하게 생각할 기준을 만든다.

그것은 바로 힘 있는 존재가 선(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작금의 세계는 죽는 놈이 악(惡)이다.

* * *

현장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

딸깍. 치이이익.

편의점에서 산 맥주 두 캔을 서로 나눠 든 둘은 그제야 마른 목에 수분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건 뭐예요?"

"마지막에 도망치던 놈. 단검을 휘둘렀는데 손가락이 잘려서 생각지도 않게 얻었지."

윤상미가 가리킨 것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반지였다. 강후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바닥에는 강후가 아닌 다른 주인의 것인 손가락이 먹다 만 소시지처럼 버려져 있다.

"오늘 좋은 구경 했네요. 보니까 솔직히 혼자 용병으로 다닐만한 이유가 있겠다 싶던데요?"

윤상미가 강후에게 엄지를 치켜 들어 보였다.

클래스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강후를 상대한 헌터들은 하나같이 초기 대응부터 박살이 났다.

선수필승이라는 단어를 가장 실감 나게 실천한 것이 바로 강후였다.

"레벨 몇이에요? 아까 본 걸로는 최소 100은 넘었겠다 싶던데. 성좌도 달고 있죠?"

강후는 침묵했다.

이럴 때는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보다 알아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두는 것이 좋다.

굳이 그게 아니라며, 정보를 바로잡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좋은 착각은 방치가 답이다.

"잠이나 자고 싶군."

지끈거리는 이마에서 스멀스멀 마나 과민증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클립스 놈들의 등장으로 끝내 마시지 못한 솔라키움 버스트가 눈에 밟혔다.

한 잔 값으로 수십만 원을 썼는데 결국 입에 한 모금도 넣지 못하고 쓰레기가 됐다.

"같이 방에서 한잔할래요?"

"싫어. 아침 9시에 이예린을 만나기로 했어. 만날 생각 있으면 8시 30분까지 대전역 앞으로."

"지금은 어디로 가게요?"

"적당히 눈 붙일 곳 찾으러. 피차 서로 어딨는지 모르는 게 나을 듯하니, 각자 쉬자고."

강후가 몸을 돌린 채, 건성으로 오른손을 흔들며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아침에 이예린을 만나면, 처분을 미뤄뒀던 아이템을 모두 팔아 현금화를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솔라키움을 사는 데 써야 할 듯했다.

그날 새벽.

강후는 클럽 하데스에서의 전투로 무리했던 몸을 냉수 샤워로 대신 달랬다.

꽤 비싼 모텔을 잡은 덕분에 물발도 좋았고, 무엇보다 욕조가 커서 좋았다.

어쨌든 솔라키움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낮추기 위해, 일부러 다른 수단을 찾아보려고 한 것이지만.

"X발······."

전투 끝자락에 마력을 무리해서 끌어올려 쓴 탓인지, 기어이 몸이 말썽을 일으키고 말았다.

한달음에 욕실로 달려간 강후가 샤워기를 틀고, 그 안에 이마부터 들이밀었다.

애초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던 터라, 걸리적거릴 것은 없었다.

"크윽. 계속 문제가 될 텐데."

찌푸린 인상이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탁월한 재능과 바꾼 약점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 약점이 공략당할 소지가 높다는 점이다.

[장시환이 예리한 관찰력으로 신강후의 몸에 담긴 비밀을 알아낸 이후로는.

그는 절대 신강후와의 전투에서 속전속결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시간은 '무조건' 자신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원작의 내용이 눈앞에서 아른거리자, 강후는 거칠게 물을 뿌리며 외면했다.

"분명히 구상을 했었는데······."

무의식 속에 마련된 이 거지 같은 질병의 돌파구가 있을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윤상미의 질풍 검제 성좌가 그랬던 것처럼, 선천성 마나 과민증의 해결 방법도 분명히 존재한다.

장시환에게 위기를 만들려고 할 때, 쓸 용도로 떠올렸던 치료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나."

강후가 냉장고에 보관해둔 솔라키움 두 줄기를 떠올렸다.

생명수가 사라져 곧 바닥을 드러낼 것만 같은 느낌. 두 줄기 밖에 남지 않은 지금이 딱 그랬다.

* * *

다음 날, 아침.

강후와 윤상미가 이예린을 만났다.

윤상미는 별도로 마련된 대기실에서 이예린과 대화를 나눌 사전 준비를 마쳤고.

강후는 이제 그녀와 정산을 할 참이었다. 받을 보상이 기대가 됐다.

"바르타로스의 신발을 이리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고마워요, 선규 씨."

의뢰품을 돌려받은 이예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에게 의미가 있는 신발이다 보니 더더욱 감회가 남다른 모습이었다.

"손상 없이 잘 가져왔습니다."

"솔직하게 먹튀를 생각 안 했던 건 아니거든요. 가져가면 가져가는 대로 상관없다고도 생각했고."

"뒤통수 걱정을 24시간 내내 하고 싶은 악취미는 없어서. 일감을 더 원하기도 하고요."

강후가 고개를 저었다.

말이 쉬워 먹튀지, 그 순간부터 김목현이랑 같은 신세가 되는 셈인데······ 쓸데없는 짓이다.

"우선 보상으로 원했던 미들 보스가 많은 던전 위주의 리스트업이에요. 던전 레벨은 100 미만으로 분류했어요. 맞죠?"

"한 번 보죠."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서류철을 넘겨받았다. 확실히 핵심 정보만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중에 눈에 띈 것은.

[가평역 1번 출구 앞 던전]

[정식 명칭 : 폭풍의 언덕]

[보스 관련 정보 : 미들 보스 다섯, 메인 보스 하나.]

폭풍의 언덕 던전에 대한 건이었다.

미들 보스를 포함한 총 보스 몬스터의 수가 무려 여섯.

'강탈용 스킬 여섯 개가 이곳에 다 묻혀 있단 말이지.'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14화 폭풍의 언덕 (1)

폭풍의 언덕 던전에 관련된 공략권을 받기로 했다.

사전 공략 신청도 빠를수록 좋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이예린을 통해 신청을 마쳤다.

승인은 12시간 후로 났다.

밤 9시에 입장하게 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시간을 입맛대로 맞출 수는 없기에 받아들였다.

"우리 용병단 소유의 던전이고 입구에 가드를 항상 세워두는 던전이에요."

"최소한 침입자의 유무는 알 수 있겠군요."

"그렇죠. 작정하고 외부 세력이 개입하는 것을 막지는 못해도, 적어도 뒤치기는 알 수 있죠."

"그쯤이면 충분합니다."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피 남이 공략하고 있는 던전에 들어와서 뒤를 노리다가, 역으로 죽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다음 의뢰 얘기를 할까요?"

"얼마든지."

"사실 첫 의뢰는 테스트 성격이 강했어요. 보통 여기서 입구컷으로 절반은 걸러지는데······."

생존율 50%짜리 의뢰를 통과했다는 뉘앙스의 말이 왠지 묘하게 들렸다.

물론 용병 의뢰라는 것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뤄지긴 하지만.

죽을 가능성이 있는 의뢰를 주고, 그걸 테스트 정도의 성격으로 가볍게 본다는 게 특이했다.

어쩌면 저런 냉정하고도 계산적인 마인드가 '고급 의뢰' 성공률이 높은 이예린의 용병단을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잘 통과했다는 말인 것 같은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현상금이 제법 걸린 수배자 의뢰를 받고 싶다고 했었죠?"

"네."

"괜찮은 후보군을 리스트로 뺐어요. 버거운 상대는 아닐 거예요. 찾는 건 문제이긴 하겠지만."

"보죠."

리스트를 쭉 훑었다.

수배자 의뢰가 들어온 헌터 중에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허정태.'

원작 말미에 나온 인물이다.

배드 엔딩을 내는 과정에서 사실 장시환이 은밀히 활용하던 킬러라는 사실이 언급된 인물이다.

뒤늦게 엔딩에서 연결 고리가 밝혀진 셈인데······.

그전까지 허정태는 '정의롭다'고 여겨지던 헌터 다수를 죽인 경력이 있었다.

살인마였다.

엔딩 직전까지 주인공 장시환은 허정태의 존재만 인지했고.

실질적인 살인 지시는 장시환의 죽마고우이자 부역자인 채관형이 도맡아 했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지금의 허정태는 현상금이 걸린 이유가 살인은 아니었다.

가평 헌터 치안청에 있던 '던전 안정도 감지 장치'를 절도한 건에 대한 수배였다.

중범죄자라고 하기는 부족하고, 잡범 취급을 하기는 국가 기물 절도죄가 적용이 되다 보니.

이렇게 용병단마다 개별적인 수배 의뢰가 들어간 듯싶었다.

그래서 보상금을 지급하는 주체가 헌터 치안청이었다.

사실상 국가 보증의 현상금인 셈이다.

[끝내 거점을 찾지 못했던 허정태의 본거지는 황당하게도 양평역 인근이었다.

양평역의 헌터 치안청에서 불과 500m밖에 되지 않는 곳, 문성 빌라에 그가 살고 있었다.

한데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이다. 무능한 치안청의 헌터들은 끝까지 그를 잡지 못했다.]

원작 스토리 막바지에 쓴 내용이라 그런지, 허정태에 대한 서술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났다.

거주지 주변의 건물이나 경관에 대한 내용도 기억나는 만큼, 위치 특정은 금방 될 듯했다.

"허정태에 관심이 가세요?"

"네. 창을 즐겨 쓴다는 내용도 좀 흥미롭고. 공격선을 넓고 길게 따야 하는 놈이 노리기 좋아서."

강후가 적당한 이유를 붙였다.

사실 어디에 있는지 곧바로 알 것 같아서 고른 것이 선택 지분의 90% 이상을 차지했지만 말이다.

"보상은 현상금 3억 원과 레벨 100 미만 던전에 대한 1개월 임대권이에요. 단, 조건이 있어요."

"생포?"

"맞아요."

"하기야 치안청에서 공식적으로 수배를 내렸으니, 사적인 처벌은 불가능하겠죠."

"애초에 살인죄가 아니기도 하고요."

보상 자체는 꽤 구미가 당겼다.

물론 생포하려면 찾아가기에 앞서, 여차하면 쓸 수갑 하나를 사둬야 할 것 같기는 했다.

어설픈 동네 양아치를 잡아끌고 가는 것은 아니니까.

상대는 언제든지 역공할 수 있는 헌터다.

"얘로 의뢰를 받죠."

"괜찮겠어요? 사실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는 게 가장 어려운 녀석이기도 해서······."

"그건 제 몫입니다."

강후가 단호히 말했다.

다만 허정태를 찾아가는 순서는 폭풍의 언덕 던전을 공략하고 난 후에 하기로 했다.

공략 루트를 잘 짜면 던전 안에서 레벨 30까지 넘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암살자 레벨 30의 기본 스킬인 '가속'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단순한 속도 향상의 매커니즘이지만, 그래서 꼭 필요한 스킬이기도 했다.

'허정태도 처리해 두면, 좋은 나비효과가 될 것 같고.'

이래저래 겸사겸사다.

레벨 추정 정보를 보니 100 안팎이라고 한다.

그쯤이면 충분히 노림수로 덤벼볼 만했다. 그럴만한 힘이 있다.

그렇게 의뢰 수락까지 마친 뒤, 강후는 자신에게 쓸모없는 9등급 아이템을 이예린에게 싹 팔았다.

서로 흥정 없는 정가에 신속하게 거래를 마쳤고, 바로 2억 5천만 원을 정산받았다.

그리고 국내의 유일한 솔라키움 판매자인 마스터 케이(Master K)에게 연락했다.

직접 찾아가기에는 먼 '그라운드 제로'에 있는 만큼, 퀵 배송으로 가평역에서 수령하기로 했다.

구매량은 총 10개, 가격은 5천만 원. 정신 나간 가격이지만, 없어서는 안 될 물품이기에 샀다.

이것도 그나마 케이의 하우스에서 재배가 얼마 전에 끝나, 가격이 낮게 풀린 것이라고 했다.

확보된 재고가 절반 이상 소진되면, 가격이 50% 이상은 뛴다는 것이다.

그렇게 잔고가 2억이 남았다.

강후는 가평역 쪽으로 가기 전에 암시장에 들러서 남은 돈으로 단검 아이템을 살 계획을 세웠다.

지금 보유한 연습용 단검은 근력도 형편없이 낮고, 사냥에도 적합하지 않아서다.

무엇보다 5등급 수준의 단검을 충분히 살 여유가 있는데, 주 무기를 사지 않는 것은 손해였다.

거래를 마친 뒤.

강후는 대전역을 떠나기에 앞서, 윤상미와 짧은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사실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선규 씨 같은 실력을 가진 용병이면 앞으로 찾는 곳이 많을 듯해요. 또 봐요. 곧 볼 것 같아요."

"적으로만 안 보면 좋겠는데."

"호호. 그럴 리가요. 어쨌든 쓸만한 정보 있으면 공유하고 싶은데, 전화번호 알려줄 수 있어요?"

"네 번호를 알려줘. 내가 필요하면 연락하지."

"······재수 없는 멘트인데 은근히 멋있게 들리는 거 알아요?"

"재수 없게 들으라고 한 거야."

강후의 말에 윤상미가 명함 한 장을 건넸다.

그러면서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강후를 쳐다봤지만, 정말 그녀에게 연락처를 주지 않았다.

"꼭 연락해요! 그냥 일상 대화도 좋으니까 언제든지!"

새벽에도 그랬듯.

강후는 윤상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뒤돌아 손을 흔드는 것으로 모든 인사를 대신했다.

* * *

대전역에 도착한 강후는 용산역으로 가는 표를 먼저 끊었다. 거기서 ITX로 갈아타야 했다.

간밤에 이클립스의 일로 역까지도 상황이 심각하게 흘러갈 줄 알았는데, 수습이 금방 끝난 모양.

물론 수습이 끝났다는 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났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상황이 빠르게 종료되고, 클럽 하데스 안에 있던 다수의 헌터가 어디론가 끌려갔음을 뜻한다.

가깝게는 청명 수용소고 멀게는 해외로 향하는 인신매매 화물선에 실렸을 가능성이 컸다.

어떤 결과든지 최악이지만, 그나마 나은 것은 전자다. 말이라도 통해야 살 만은 하니까.

그리고 최소 영양 권장은 채우도록 먹이는 청명 수용소와 달리, 해외는 아예 얘기가 다르다.

그때.

강후의 옆에서 용산행 열차를 기다리던 꼬마 아이가 제자리에서 통통 튀며 소리쳤다.

"신난다! 신난다아······!"

아이의 옆에는 올해 스물아홉 살의 강후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부부가 있었다.

"시윤아. 그렇게 신나?"

"응, 엄마! 서울 가면 이제 밤에도 치킨 먹으러 가고 그럴 수 있는 거지?"

"그럼! 물론이지! 서울에서는 시윤이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을 거야!"

"와아아! 진짜 신난다!"

아이의 환호가 이해가 갔다.

헌터 치안청의 모든 인력이 모여있는 서울은 감히 '범죄율 제로'에 도전한다고 할 정도로 치안이 좋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가로 수도권 외의 지역을 사실상 포기해 버렸지만 말이다.

"······."

단란한 3인 가족을 보며, 강후는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저 셋은 과연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감흥도, 기억도 없는 강후로서는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어쨌든 서울에 가는 저 가족은 더 이상 마음을 졸이며, 밤거리를 거닐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이를 위해 부모가 큰 결정을 한 것 같아 안쓰러워 보이는 구석도 있었다.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헌터 치안청은 물론, 장시환 헌터님께서 지켜주실 거야."

그리고 영 듣고 싶지 않았던 이름이 아이 아버지의 입을 통해 들려왔다.

단순한 믿음을 지나서 맹신(盲信)에 가까운 민간인들의 믿음.

그것이 장시환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다.

이후 그의 대척점에 서면, 180도 뒤집힌 시선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쏠리게 되겠지.

- 곧 용산으로 떠나는 열차가 들어올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청명 수용소에서 눈을 뜬 후 처음으로, 서울권을 경유해 다른 곳으로 갈 기회가 생겼다.

* * *

그 시각.

청명 수용소를 찾아온 한 여자가 수용소장 이택근과 일대일 면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택근은 청명 수용소 전체를 총괄하는 책임자였지만, 여자 앞에서 완벽한 저자세를 유지했다.

"이 소장님, 이번 일. 대단히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검은 머리, C컬 단발이 인상적인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이택근을 멸시하듯 쳐다봤다.

차소희.

이클립스의 서열 3위이자 강동현이 보낸 심복으로 강후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일임한 담당자였다.

레벨은 250으로 어느 조직으로 가도 상위 서열은 거뜬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많이 이상합니다."

"그렇잖아요? 레벨 스캔까지 해서 입소 전에 레벨 10인 것을 확인했던 헌터잖아요. 신강후."

"네, 맞습니다."

"마석 채굴 외에는 던전의 근처도 가본 적이 없는 헌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요?"

"······."

"2급 간수 하나, 3급 간수 둘. 거기에 성좌까지 달고 있는 '추적자'도 죽였단 말이죠."

"네, 사후 조사 결과 제대로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당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보의 앞뒤가 안 맞아요. 신강후에 대한 정보, 누락 된 것 아닙니까?"

차소희가 쏘아 보낸 의심의 화살은 강후가 아닌 이택근에게 쏠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희생자들의 면면을 살펴봤을 때, 강후의 레벨이 10일 리가 없었다.

그간 이런 일은 항상 존재했고, 그때마다 차소희는 현장을 조사하면서 데이터를 채워왔다.

하지만 이번 일은 기본 전제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레벨 10은 이런 힘을 낼 수 없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말이다.

상황상 침묵할 수밖에 없던 이택근에게 차소희가 확신하듯 말했다.

"신강후. 레벨은 최소 70. 그리고 100% 확률로 성좌와 계약했어요. 그것도 꽤 쓸만한 성좌."

"하지만 그런 실력을 가졌다면, 도대체 저희 수용소에서 왜······."

차소희의 '황당한' 추측에 이택근이 처음으로 반론을 제기하려는 찰나.

화르르륵!

이택근의 정수리에 왼손을 올린 차소희가 그의 얼굴을 시뻘건 화염으로 태워버렸다.

비명 한번 지를 새도 없이 맞이한 최후였다.

차소희가 힘없이 떨어져 버린, 재가 된 이택근의 머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마스터를 노릴 킬러를 몰래 육성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그게 누구든지 말이에요."

당사자인 강후가 알았다면 경악을 했을 법한······.

기가 막힌 헛발질이었다.

15화 폭풍의 언덕 (2)

* * *

용산역에서 내린 강후에게 여유 시간이 생겼다.

이전과 달리 사람의 발길이 뜸해진 탓에 가평 방면으로 향하는 기차가 줄었기 때문이다.

강후가 먼저 들른 곳은 용산역 내에 위치한 헌터 마켓이었다.

헌터 치안청에서 직접 운영하는 마켓이라 그런지 규모도 크고, 내부에서 다루는 품목도 많았다.

가진 돈은 총 2억 원.

금액을 최대한으로 쓰는 범위에서 가장 좋은 아이템을 찾으러 돌아다녔고, 성과는 있었다.

[창공의 환희 - 무기]

[등급 : 5등급]

[근력 +50]

[30분 이상의 비전투 상태 지속 시, 체력 회복 속도가 5배 증가합니다.]

자거나 푹 쉴 때, 체력 회복에 도움이 꽤 될 수 있을 아이템이었다.

물론 조건부로 만능은 아니다. 비전투 상태는 마나를 조금도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니까.

항상 주변을 경계하면서 조심해야 하는 수도권 밖 영역에서는 이럴 일이 흔하지 않다.

그래도 근력이 대폭 올랐다.

근력을 겨우 1 올려주던 연습용 단검을 버리고 무기를 갈아치우니, 극적으로 느낌이 달라졌다.

강후가 역 앞의 화단에서 주워들은 돌멩이 하나를 꽉 움켜쥐고는 힘을 주었다.

우드드드득. 우드득.

평소 같았으면 으스러뜨릴 엄두도 나지 않았을 돌멩이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 근력은 이런 거지.'

스킬의 가공할 만한 위력 덕분에 그간 뒤로 미뤄둔 부분이 없지 않기는 했지만.

사실 모든 힘의 근간이 되는 근력은 한 번도 중요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암살자 클래스라고 해서 무조건 빠르게 움직이는 민첩함만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순간적으로 육신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적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원초적인 힘도 중요하다.

'마나 과민증이 전투를 치를 때마다 신경을 잔뜩 쓰이게 만드는 것은 맞지만······.'

강후가 습관적으로 이마를 손끝으로 훑으면서 스스로 평가했다.

마나 과민증에는 분명 일장일단이 있지만, 단점보다는 장점이 압도적으로 많다.

클럽 하데스에서 벌어졌던 전투만 해도 그랬다.

부작용은 차치하고 마나에 대한 걱정이 없으니, 강후는 아낌없이 스킬을 퍼부을 수 있었다.

마나 고갈을 걱정해야 하는 다른 헌터와는 결이 아예 달랐던 것이다.

오죽하면 윤상미가 몇 번이고 '마나 안 부족해요?'하고 물어봤을까.

이해가 안 돼서였을 터다.

그때.

꽈르르르륵!

참고 참았던 배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났다. 생각해 보니 새벽부터 먹은 것이 없었다.

"간만에 서울 물가 체험이나 좀 해 봐야겠군."

비싼 것은 알지만, 아무것도 안 먹고 던전 공략을 준비할 수는 없는 법.

음식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갈비탕. 한 그릇에 15만 원."

서울의 물가와 마주쳤다.

음식값에 평화와 목숨의 숭고한 가치가 담겨 있는 서울의 물가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자신에게도 예외를 줄 수밖에 없었다.

15만 원짜리 갈비탕 한 그릇을 국물 하나, 후춧가루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워 먹은 뒤, 역 근처의 거리를 따라 걸었다.

분명 대전역과 똑같이 하늘은 흐린데, 이상하게 따스하고 온화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일 것이다.

여기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 세상이 달라 보이는 거겠지.

"꺄악! 저기야! 저쪽으로 왔대! 오다가 차를 돌렸나 봐! 얼른 가 보자!"

"아, 진짜? 왜 이리 오빠들 얼굴 보기 힘든 거냐고!"

"빨리 뛰어! 늦으면 사진도 못 찍는단 말이야!"

그때, 서른은 족히 넘어 보이는 여성들이 앞을 다퉈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연예인이 왔나 싶을 정도의 열광과 환호였다.

강후가 본 사람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다른 쪽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설마.'

짚이는 바가 있었다.

강후도 빠르게 그 인파에 섞여 뛰었다. 인파 사이에 남자들도 제법 있기는 했다.

사람들이 몰려든 자리에 도착하자, 이 폭발적인 반응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이동 경로를 확보한 한 무리의 헌터들이 대오를 맞춰, 용산역 남부의 던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정화 길드의 헌터들이다.

장시환을 마스터로 둔 국내 명실상부한 1위 길드이자, 서울 내의 '유일한' 길드이기도 하다.

서울의 헌터 구성에서 치안청을 빼고, 정화 길드를 빼면 0명이 될 것이라는 말은······.

농담이 아닌 진짜였다.

정화 길드가 서울 내 길드를 모두 흡수하거나, 교묘하게 죄를 뒤집어씌워 해체시켰기 때문이다.

[장시환이 절대 악이라고 믿었던 헌터와 조직에 대한 생각은 놀라우리만치 왜곡이 많았다.

그의 망상 속에서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모호해졌고, 때로는 거짓이 진실이 되기도 했다.

그는 정화 길드만이 절대 선이라는 명제에 사로잡혀, 모든 생각을 자신의 망상에 맞춰버렸다.

그래서 마왕이 강림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다시 곱씹어봐도 이야기의 최후반부에 왜 저런 내용으로 '급발진'을 했나 싶을 정도의 내용 전개.

명색이 주인공이라는 놈이 사실은 망상과 꿈속에서 살았다는 것이 에필로그 내용의 일부였다.

이러니 연재한 플랫폼에서 욕을 바가지로 먹고, 별점 테러를 당할 수밖에.

어쨌든 정화 길드가 서울 내의 유일한 길드고,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다 보니, 핵심 구성원에 대한 팬덤이 생기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꺄아악! 관형 오빠!"

"관형 오빠! 이쪽 한 번만 봐주세요! 제발요! 사진 한 번만!"

특히 여성 팬들이 열광한 사람은 채관형이었다.

바이올렛 색깔의 머리카락이 유독 잘 어울리는 그는 환한 미소와 함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세상의 모든 어둠과 슬픔을 담은 것처럼 무표정하고 깊은 강후의 눈빛과는 완벽히 반대다.

'어지간히 저 녀석한테도 퍼줬군. 성좌가 도대체 몇이 붙어있는 거지.'

강후가 채관형의 머리 위쪽에서 쉴 새 없이 점멸을 반복하는 붉은 점의 성좌 정보를 훑었다.

최소 열 이상이었다.

그나마 정보창에 전부 출력되지도 않아 [...] 표시까지 달고, 내용이 접히기까지 했다.

물론.

수용소 탈출 이후 급성장을 거듭하는 훗날의 신강후를 생각하면 '적당히' 퍼준 수준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 후의 신강후는 세상의 온갖 기연과 행운이 모여드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3년을 아무 생각 없이 보낼 생각은 없다.

청명 수용소를 탈출하고, 원작에 없던 일이 생겨난 시점에서 이미 내용은 조금씩 비틀리고 있다.

'그래, 내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어. 내게 주어진 것만 생각하다 보니 지나쳐 버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 이후로도 장시환과 채관형은 여러 갈래의 기연과 독식을 거듭해가며 성장한다.

주인공과 그 동료에게 자연스럽게 허락되는 소설 속 장치다.

강후는 그 요소에 개입해, 방향을 자신에게로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보는 충분하니까.

아이템부터 시작해서 다른 성좌와의 인연, 그리고 훗날 꼭 필요한 사람과의 인연까지.

중요한 게 많다.

아직 저들은 모르는 미래의 혜택을 가로챌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다.

다만.

'레벨이 문제군.'

모든 요소를 고려했을 때.

적어도 레벨 50은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줄이고 줄여서 겨우 맞춰본 수치고, 느슨하게 생각을 하면 100까지도 봐야 한다.

'일단, 오십.'

강후가 단기 목표를 잡았다.

다음 생각은 전부 다 집어치우고, 우직하게 레벨 50까지 달리는 것이다.

이후에 다음을 고민한다.

정신없이 현실 적응에 뛰어드느라 간과했던 부분 하나를 깨달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가장 맛있는 것이 남이 먹던 것을 빼앗아 먹는 것이기도 하고.

지금 하는 생각이 딱 그렇다.

촤악.

강후가 쌀쌀한 날씨에 챙겨 입은 코트를 여미며, 용산역사 안으로 다시 방향을 돌렸다.

그때.

"저 오빠······도 왠지 잘생긴 것 같지 않아?"

"어, 진짜. 나인 보이즈의 민호 닮았어! 아니, 민호보다 훨씬 예쁜데?"

"누구지?"

인파 속에 조용히 묻혀 있던 강후의 외모를 알아본 여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이긴 해도, 그 안에 숨겨진 미모를 감출 수는 없었다.

오히려 묘하게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구석까지 있었다.

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초면의 남자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강후는 유유히 용산역을 떠났다.

단기 목표를 확실히 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용산역에서 먹은 15만 원의 갈비탕은 의미가 있었다.

* * *

저녁 무렵.

약속한 시간에 가평역에 도착한 강후는 마스터 케이가 보낸 퀵 배송을 바로 수령했다.

마치 현금을 금고에 채우는 것처럼, 솔라키움 열 개를 속주머니에 넣으니까 세상을 가진 것처럼 기뻤다.

"너무 조용한데."

평일 밤, 그것도 서울 안이 아닌 밖의 영역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래도 용산에서 막차를 탄 사람이 많았을 것 같은데, 내려 보니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착용한 아이템과 비상식량, 약품, 솔라키움까지 다시 확인을 마쳤다.

이로써 던전에 들어갈 준비는 끝났다.

사전에 공유받은 던전 내 정보에 대한 숙지도 됐고, 남은 것은 입장 시간을 기다리는 것뿐.

그런데.

- 제발요! 가진 건 다 드릴 테니까 보내주세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제발!

근원지가 가깝지는 않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거리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질 나쁜 범죄와 연관되었을 내용이 들리고 있었다.

- 가진 건 다 필요 없어. 그냥 네 몸만 잠깐 주면 돼. 빌려주면 된다니까?

- 이제 막차도 지나갔고, 주변에는 치안청도 없어. 소리 질러 봤자니까 그냥 포기해.

- 백마 탄 왕자라도 나타날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런 새끼들은 우리가 그간 목을 다 따버렸거든.

- 킬킬킬!

최소 네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말을 안 한 녀석이 있을 수도 있으니, 최소값이 4다.

애초에 이동 경로이기도 했기에 강후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가평역 1번 출구에서 쭉 북쪽으로 가는 루트라서 그런지, 유독 사람이 더 없었다.

그나마 하나 있는 편의점은 해가 지기도 전에 폐점한 상태였다.

"······."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길 안에서 네 남자에게 희롱당하는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양옆으로 3층까지 건물이 있긴 했지만, 오래전에 사람이 떠난 텅 빈 건물이었다.

"도와주세요! 제발!"

강후와 눈이 마주친 여자가 애절하게 소리쳤다. 동시에 패거리의 시선도 강후에게 향했다.

"야. 무슨 소설도 아니고 주인공처럼 나서서 구해줄 것 같냐? 어이, 갈 길 그냥 가지?"

"심장에 칼빵 맞기 싫으면 가던 길 가라. 어?"

앞의 두 놈이 빙빙 돌리는 단검을 따라 마나의 흔적이 느껴졌다.

헌터다.

그러니 기세등등할 수밖에.

강후가 별말 없이 고개를 돌려서는 현장을 벗어났다. 일말의 미련도 없어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봐라! 클클! 세상이 그렇게 소설 같지 않다니까? 얌전히 벗자. 그럼 부드럽게 다뤄줄게."

"으히히히!"

강후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네 놈들이 앞을 다퉈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재미를 보려고 할 즈음.

프슷!

제법 소리를 잘 듣는 헌터 하나가 어디선가 들려온 바람 소리에 내리던 바지를 멈췄다.

바로 그때.

푸욱!

"커헉!"

홀연히 강후가 나타나 한 놈의 '그곳'을 짧게 찌르고 지나갔다.

스치듯이 지나간 공격이었지만, 그 공격 한 번에 사타구니 사이가 온통 피투성이가 됐다.

강후가 사라진 남쪽 길목이 아닌, 무인 지대였던 북쪽 길목에서 나타난 것이다.

잠깐 사이에 50m는 족히 우회해야 하는 경로를 돌아서 기습을 한 셈이었다.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억!"

강후의 납치를 피할 겨를도 없이 또 다른 한 녀석이 그대로 강후를 향해 날아갔고.

"으아아아!"

푸우우욱!

힘껏 앞으로 쭉 내밀고 있던 강후의 단검과 녀석의 몸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말이 좋아서 충돌이지 사타구니 사이를 그대로 단검에 꿰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세상이 소설 같진 않지."

이어 들린 강후의 말 한마디에 패거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지옥이 눈앞에 있었다.

16화 폭풍의 언덕 (3)

"어흐흐흐······! 어흐흐!"

여자를 희롱하려던 네 명의 헌터가 험한 꼴을 당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몇 초.

강후는 가볍게 급소를 찌르는 것으로 전투를 끝냈다.

사실 전투랄 것도 없었다.

당장 어떻게든 치료하면 죽지는 않을 부위를 노렸던 것이니까.

물론 지혈을 빨리할 경우의 이야기고 그렇지 않으면 과다출혈로 죽을 수도 있다.

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최대한 현장에서 멀리 나왔다.

안전 버스가 오는 곳으로 향하는 동안, 그녀는 꽉 잡은 강후의 손을 놓지 않았다.

"감사해요. 집으로 일찍 가려고 평소에 가지도 않던 길을 가려다가 그만······."

왜 저런 길로 갔는가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길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우범지대가 있어도 나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갔다가 이런 사달이 난 듯했다.

"조금 돌아가도 빛을 따라서 가면 비교적 안전할 겁니다. 어둠을 가까이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차분한 목소리로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 주자, 그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감사해요. 호신용 물품이랑 신고 전화를 할 겨를도 없이 당황하는 바람에······."

"마침 오네요."

강후가 막 이쪽으로 오기 시작하는 안전 버스를 가리켰다.

"이선희라고 해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꼭 사례하고 싶어요. 꼭이요."

"됐어요. 사례받을 생각으로 한 것 아니에요."

강후가 손사래를 쳤다.

다만 이름이 뭔가 익숙했다.

이선희.

원작에서 나오는 이름이다.

지금으로부터 1년 후쯤 각성하고, 신강후에게 적당히 조력자 포지션이 되는 인물.

특이한 에메랄드색 머리와 눈가에 길게 새겨놓은 십자가 타투 때문에 기억이 바로 떠올랐다.

'뭐, 상관없겠지.'

미래를 예견한 한 마디라도 던져줄까 하다가 참았다.

원작에서 아주 중요했던 인물도 아니고, 이 정도 인물은 순리대로 흘러가게 두는 것도 좋다.

"하지만······."

"갑니다. 다음부턴 조심하시고."

뒤돌아선 강후가 대충 손인사를 건네며, 자연스럽게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길로 사라져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선희에게 어둠을 가까이해서 좋을 건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

누구보다 어둠을 반기며 빠르게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 * *

던전 입장까지 남은 시간 5분.

정확히는 내부 초기화가 끝나고 다시 공략 가능한 준비가 되기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서둘러 들어가고 싶다 해서 열리는 것이 아니기에, 강후는 느긋하게 입장을 기다렸다.

던전 앞에는 이예린에게 보수를 받는 가드들이 일찌감치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곧 들어갈 강후의 안전을 미리 점검했다.

강후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경우를 산정하고 시뮬레이션 전투를 했다.

혹자는 이게 되겠냐 싶겠지만, 다른 헌터가 아닌 '신강후'는 가능했다.

그럴 수 있게 원작자인 자신이 인물을 조형해놨고, 타고난 감각과 능력을 만들어줬다. 불가능할 수 없었다.

[성장이 눈부시군. 며칠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할 줄은.]

'필요한 건 시간뿐.'

강후가 덤덤하게 말했다.

재능을 펼칠 시간, 던전을 공략할 시간.

바로 그 시간만 있으면 된다는 얘기다.

[처음 헌터가 되었을 때부터 온갖 비극과 시련의 결정체와 같았던 네가 흥미로웠다.]

어지간해선 입을 잘 안 여는 성좌가 바로 그였다.

그만큼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 즐거웠다.

꼭 입에 발린 칭찬이나 후원을 하지 않아도, 그의 대화는 곧 '가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원래는 더 지켜보려고 했었지만, 네 녀석의 당돌함에 이끌려서 손을 내밀었지.

지금 생각해보니 더 지켜봤으면 훗날 반드시 후회했을 듯하군. 앞으로도 계속 가치를 증명해라.]

'맨입으로?'

[조만간 네 녀석을 호되게 검증할 일이 있을 것이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차원 강탈자의 기척이 사라졌다.

의미 있는 답을 들었다.

바로 검증이라는 단어.

헌터와 계약을 한 성좌는 자신의 성력의 상당량을 담보로 하여 특수한 퀘스트를 발동시킬 수 있다.

헌터에게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퀘스트 개념이 유일하게 활성화되는 때이기도 하다.

이 퀘스트는 성좌가 계약자에게 자신의 더 큰 힘을 주어도 되는지 테스트하는 자리다.

그래서 계약자가 수행 도중에 죽을 경우에는 실제 던전 공략처럼 정말 죽었다.

게다가 계약자가 죽으면 자동으로 성좌와 맺은 계약이 해지되는 만큼.

종종 계약자를 '손절'하고 싶은 성좌의 낚시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랬다가 퀘스트를 성공해버리면 그때부터는 영원히 일심동체가 되지만 말이다.

그 사이, 5분이 훌쩍 흘렀는지 던전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가드 하나가 강후에게 고개를 숙였다.

"준비됐습니다. 들어가시죠."

어림짐작으로 봐도 레벨 150은 넘어갈 듯한 헌터들이었다.

가드는 총 네 명.

적지 않은 돈이 던전 호위에 쓰이고 있는 중인 셈이다.

다만 그들은 강후에 대해 뭔가를 궁금해하지도, 판단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려는 듯이 계속 던전 주변을 따라 움직이기만 했다.

강후가 바로 던전에 들어섰다.

미들 보스 다섯.

메인 보스 하나.

실수 없이 성공만 한다면, 최소 여섯 개의 스킬 강탈이 예정되어있는 노다지 공략의 시작이다.

* * *

서걱!

"꾸웩!"

"한 방이군."

던전에 들어온 강후는 착실하게 몬스터를 잡아가며, 자신의 전투력을 점검하고 있었다.

일단 레벨 20 미만의 몬스터는 무조건 한 방이었다.

강후의 도약 스킬에 대응할 능력도 없었다.

보통 20레벨 헌터는 20레벨 몬스터를 상대로 '약우세' 정도의 포지션이 되는 게 일반적이다.

동 레벨의 몬스터보다 조금 나은 수준. 일대일로 승부 할 때, 이길 수는 있는 수준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가진 능력과 레벨 사이의 괴리가 말도 안 되게 심한 강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상식이었다.

"벌써 레벨 22인가?"

던전에 들어온 지 약 1시간.

암살자 클래스 특성에 맞게 몬스터를 소규모로 유인해 내서 처치하는 방식은 잘 맞았다.

무리하지 않고 충분하게 쉬다가 마음먹었을 때 일격으로 몬스터를 처치하니, 과민증 발동도 안 됐다.

확실히 경험치를 혼자 몰아 먹는 구조이다 보니, 레벨업이 눈에 띌 정도로 빨랐다.

"슬슬."

강후가 비탈길 아래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뭔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들 보스 몬스터다.

일단 레벨업으로 획득한 보너스 포인트를 습관처럼 체력에 넣고는 바로 공격 자세를 취했다.

아이스맨.

평범한 이름이나, 그래서 더 확실한 정체성을 갖는 이름이다.

특성이자 동시에 스킬이기도 한 능력은 '빙결 속성 부여'로 접촉과 동시에 얼리는 특성이 있었다.

탐색전 차원에서 서로를 향해 막 돌진을 시작할 때.

강후가 미리 전술적 이점을 가져가기 위해서 아이스맨에게 시야 강탈과 얕은 혼돈을 연계했다.

보통 지능형 몬스터라면 저항하거나 혹은 피하는 시늉이라도 했을 터.

하지만 무력형 몬스터에 가까운 아이스맨은 스킬을 몸뚱이로 때울 요량으로 받아내며 돌진해 왔다.

덕분에 두 스킬을 정직하게 뒤집어쓴 아이스맨은 순간 달라진 세상을 경험하게 됐다.

"우루룩?"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라져버린 방향 감각!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아래고 위인지 짐작할 수 없게 됐다.

강후가 적당히 거리를 확인하면서 때가 되면 횡 이동으로 응수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우롸악!"

갑자기 비탈길 방향으로 돌진한 아이스맨이 오른발을 헛디디더니, 그대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

강후가 한심하게 뒷모습을 보는 동안, 쭉 미끄러져 내려간 아이스맨의 머리가 돌부리에 부딪혔다.

빠각!

누가 들어도 뼈가 부서질 때 나는 소리가 아이스맨의 머리에서 났다.

[강탈이 활성화된 대상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스킬은 다음과 같습니다.]

[빙결 속성 부여]

그리고 강탈이 활성화됐다.

"뭔데, 이건······."

생각지 않은 지름길이 열렸다.

이후.

손쉽게 아이스맨을 처리한 강후는 이어서 만난 아이스맨의 형제 격 미들 보스인 파이어맨도 쉽게 처리했다.

직전에 얻은 빙결 부여 능력을 적절하게 쓴 것도 있지만, 이 녀석 역시 멍청했기 때문이다.

사실 미들 보스라고 해서 다 똑똑한 지능형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빙결 속성 부여]

[화염 속성 부여]

스킬 두 개가 추가로 생겼다.

강탈과 함께 숙련도 최대를 찍은 두 스킬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이 가능한 스킬이 됐다.

우선은 무기에 속성의 힘을 부여해서, 상대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거나 회복을 늦출 수 있었고.

마나를 넉넉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접촉한 대상을 얼리고 태울 수 있었다.

물론 즉각적 발화, 빙결 개념은 아니라서 머리를 쓴 연계가 필요하다. 살짝.

"슬슬 원 클래스 색깔에서 벗어나는 느낌이 있긴 하군."

강후가 검에 연관된 스킬 외의 것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헌터의 능력 확장은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필요하며 좋다.

특히 원작의 신강후처럼 단체전에 선명한 취약점, 시쳇말로 고자 판정을 받는다면 더욱 그렇다.

보완할 필요는 분명 있다.

훗날 주인공 장시환이, 강후가 다수의 적을 상대할 스킬이 부족한 부분을 집요하게 노려서다.

뚜렷한 단점을 알고 있는 이상, 강후는 방치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부분에서 속성 부여 및 활용 능력은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제 좀 몸이 풀리는 듯하네."

강후가 뻣뻣했던 몸이 제법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좀 더 이동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아직 잡아야 할 미들 보스가 셋이 더 있다. 그리고 중간 과정에서 마주칠 '잡몹'들도 있고.

그때.

휘이이이.

한동안 잠잠했던 던전의 모래바람이 다시 불었다.

지평선 시야 안으로 보이진 않지만, 사전 자료에서 본 대로 가까운 곳에 사막지대가 있었다.

"음."

강후가 시선을 돌렸다.

모래바람의 영향이 닿으려는 곳에 협곡 지대와 맞물려진 낭떠러지가 보였다.

평소 같았다면 몬스터도 없는 낭떠러지는 신경 쓰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 지금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던전 환경을 이용해서 써먹을 수 있는 전략적 판단이었다.

확실히 모래바람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자, 단 몇 m 앞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이 안에서 길을 정확히 찾아가고 싶으면, 마나의 흔적을 이정표처럼 남겨놓아야 할 듯했다.

그럴듯한 생각이 떠오른다.

마침 이쪽에 다수 분포하는 몬스터인 '갈퀴 도마뱀'을 처치할 방법이었다.

그것도 기존 방식대로 한두 마리만 꾀어내 처치하는 것이 아닌 대규모 학살을 성공시킬 방법!

'폭렙'에 대한 꼼수였다.

17화 스킬 강탈 (1)

* * *

푹!

"쿠루루룩!"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봐."

이후, 강후가 열심히 던전을 누비고 다니면서 한 일은 갈퀴 도마뱀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었다.

굳이 급소를 노리려고 무리하지 않았다.

녀석들을 마주치는 즉시, 신속하게 접근해서 몸에 적당한 상처만 내고 도망쳤다.

워낙에 호전성이 많은 몬스터라 그렇게 자극을 한 것만으로도 죽일 듯이 눈을 부라리며 쫓아왔다.

던전 몬스터에 대한 경험치 정산은 두 가지를 중요시해서 이뤄진다.

첫째는 기여도다.

몬스터를 죽이기 위해 대미지를 넣은 헌터가 각각 어느 비율로 대미지 기여를 했는지 본다.

물론 힐러, 버퍼 같은 경우에는 별도의 보정치를 적용했다.

이를테면 몬스터를 죽인 헌터에게 넣은 버프의 양과 증가된 대미지를 보고 계산하는 식이다.

둘째는 대미지의 유무 자체다.

힐러와 버퍼를 제외하면, 다른 클래스는 무조건 몬스터에게 대미지를 넣은 기록이 있어야 했다.

그것이 없으면 설령 함께 보스 몬스터를 잡았다 해도, 경험치 정산에서 배제됐다.

지금 강후가 하고 있는 밑 작업이 바로 둘째의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일단은 대미지를 넣어둔 기록이 있어야, 이후에 경험치 정산을 누락 없이 받을 수 있어서다.

"미친 듯이 쫓아오는군."

강후가 일부러 손바닥을 그어서 더욱 상처를 냈다.

그러자 뚝뚝 흘러내리는 핏물을 따라서, 갈퀴 도마뱀들이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쫓아왔다.

어느덧 그 수가 쉰 마리에 육박할 만큼 불어나 있었다.

보통 많은 수가 아니었다.

너무 많기에.

조금만 강후가 움직임을 멈춰도 바로 포위당해 찢겨 죽을 수도 있었다.

그 상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강후가 미리 만든 '마나 이정표'를 따라, 착실히 움직이고 있어서다.

갈퀴 도마뱀들을 유인하기 전에 만들어 둔 이정표였다.

마나 흔적을 남겨놓는 것.

보이지 않아도, 마나 추적 능력으로 그 위치를 쫓아가는 것.

바로 이 작업을 미리 해둔 덕에 잠깐의 멈춤도 없이, 원하는 장소까지 계속 유인할 수 있었다.

휘이이이!

모래바람은 더 거세졌다.

강후는 눈으로 보고 움직이고 있다기보다, 마나 이정표에 100% 의존하는 중이었다.

갈퀴 도마뱀.

워낙 치고 빠지는 전투에 능해, 정직한 전투로 죽이기가 까다로운 녀석들이다. 물론 보상은 좋다.

그래서 이렇게 기회가 왔을 때, 일망타진할 수만 있으면. 경험치에선 확실히 재미를 볼 터였다.

타다다닷!

강후가 본격적으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럴 때가 됐다. 몬스터와 숨바꼭질 놀음이나 해 보겠다고 여기에 온 것은 아니니까.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빨라진 강후의 속도만큼, 피 냄새에 이성이 마비된 도마뱀들 역시 앞을 다퉈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강후가 더 이상 추적되는 것이 없는 마나 이정표의 부재를 느끼고 멈춰서는 순간!

도르르륵!

강후의 발끝에 걸린 뭔가가 굴러떨어졌다.

동시에 몸의 방향을 돌리자, 발뒤꿈치 끝의 아래쪽에서 이전과는 다른 공허함이 느껴졌다.

낭떠러지다.

아까부터 계속 눈여겨봤던 협곡의 위, 더 이상 전진할 곳이 없는 길의 끝이었다.

두다다다!

모래바람에 가려진 시야는 낭떠러지의 존재를 누구도 인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갈퀴 도마뱀은 더욱 기세등등했고, 멈춰 있는 강후를 향해 앞을 다퉈 몸을 날렸다.

어떻게든 강후를 할퀴고 상처를 내서, 그 피와 살점을 발라먹겠다는 잔혹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강후는 최대한 버텼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있던 도마뱀의 앞발이 몸에 닿기 약 50cm, 그 정도 직전까지 왔을 즈음.

파앗!

몸을 바짝 낮추면서, 도약 스킬을 썼다.

그러자 강후의 몸이 마치 스케이트를 타듯이 마른 지면 위를 긁으며 현장을 벗어났다.

프슷!

동시에 실루엣으로 보인 도마뱀을 타깃으로 삼아 횡 이동까지 연계했다.

이어서 도약, 또 횡 이동.

반복 스킬 사용으로, 강후는 빠르게 낭떠러지를 벗어났다.

아슬아슬했지만, 그래서 더 완벽하게 이루어진 회피였다.

모래바람 속에서 사라진 강후를 녀석들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우와악! 와악!"

"쿠와악!"

낭떠러지를 인지하고 아슬아슬하게 멈춰 선 갈퀴 도마뱀을 뒤에서 오던 녀석들이 그대로 덮쳤다.

그것은 흡사 안개가 잔뜩 낀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연쇄 추돌 사고와도 같았다.

"쿠아아아······!"

대참사가 벌어졌다.

물론 갈퀴 도마뱀의 입장에서야 그렇고, 강후의 입장에선 겹경사였다.

일일이 스킬을 쓸 필요도 없이 갈퀴 도마뱀들을 모조리 처리하면서 경험치도 얻어냈으니 말이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갈퀴 도마뱀들이 낭떠러지 위에서 속절없이 지면으로 낙하했다.

워낙 높이가 되는 곳이다 보니, 어떤 식으로든 기사회생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이.

푸욱! 푸우욱!

가까스로 휘말려 추락하는 참사를 면한 몇 마리의 도마뱀들을 강후가 착실하게 처리했다.

앞에서 들린 동족의 비명에 정신이 팔려있던 녀석들은 제대로 소리 한 번 못 내고 죽었다.

[레벨이 대폭 올라 27이 되었습니다.]

아이스맨을 잡기 전까지만 해도 22였던 레벨이 몇 차례의 상승을 거듭하며, 무려 27까지 올랐다.

[성좌 '기동전의 대가'가 당신의 유인 전략에 감탄하여 박수갈채를 멈추지 못합니다.]

[성력을 소량 소모하여 당신에게 약간의 버프를 후원합니다.]

[경험치 증가 +0.2%]

레벨 업 만큼이나 기분 좋은 성좌의 후원이 이어졌다. 경험치 증가 버프는 무조건 다다익선이다.

[제법이군. 아주 좋았다.]

아울러 차원 강탈자의 칭찬까지 그 기쁨을 더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낭떠러지에 떨어지기 직전에 강후에게 죽은 도마뱀 중, 한 마리가 마석을 드롭했다.

보통 일반 몬스터에게서는 얻기 힘든 전리품인데, 낮은 확률을 뚫고 나온 모양.

"파란색 마석. 천만 원. 그러면 솔라키움 두 줄기네."

강후가 도마뱀의 시체에서 파란색 마석을 주워들었다.

무지개색으로 분류되는 마석의 등급 체계에서 다섯 번째의 마석이다. 그럼에도 가격이 상당했다.

왜 이클립스가 헌터들을 착취해서 마석을 채굴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던전은 확률이지만, 광산은 확정이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다.

휘이잉······.

이내 기다렸다는 듯이 모래바람이 잦아들었다.

강후에게 타이밍을 맞췄다기보다는 순리대로 흘러간 것이었으리라.

거꾸로 생각하면.

강후가 막판에 조금만 더 머뭇거렸었다면 유인 전략이 실패하고 위험에 빠졌을 수도 있었다.

"자주 쓸 수 없는 전략이라 아쉽네."

강후가 입맛을 다셨다.

몬스터의 호전성과 던전 환경, 그리고 타이밍까지.

삼위일체로 딱 맞아떨어져야 할 문제이기에 이 던전에서 다시 재미 보긴 힘들 듯했다.

어쨌든 성과는 컸다.

다른 헌터가 몇 날 며칠, 아니 몇 주를 고생해도 못 얻을 경험치를 한 번에 얻어냈으니까.

경험치가 만약에 음식이었다면, 진즉에 배가 터져 죽었을 만큼 차고 넘치게 먹었다.

* * *

한편 차소희는 계속 강후에 대한 흔적과 기록을 조사 중이었다.

재가 되어버린 이택근의 시체를 보고 아주 잠깐 인상을 찌푸리긴 했다. 너무 감정적이었나 해서.

하지만 이미 '죽여버린' 마당에 미련 둘 게 뭐가 있을까 싶어, 쿨하게 넘겨버렸다.

이어서 좀 더 추가 조사를 해 보니 강후가 레벨 10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했다.

차소희가 강동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들리자마자 바로 용건부터 날렸다.

"소장을 새로 보내주세요."

- 거, 그놈의 성격 좀 죽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나. 조심 좀 하지, 그래.

강동현도 딱히 놀란 반응은 아니었다.

자주 있었던 일이니까.

그리고 이렇게 뒷수습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애초에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이라 더 머리 아파하지도 않았다.

"죄송해요. 하지만 상황이 너무 앞뒤가 안 맞다 보니, 열받아 손이 먼저 나간 듯해요."

- 후임은 바로 보낼 테니, 잘 격려해주고 수습시켜. 알겠나?

"네, 죄송해요. 어쨌든 신강후에 대한 조사는 더욱 면밀하게 진행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차소희가 강후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희생당한 헌터, '추적자'가 있던 곳을 훑었다.

추적자는 이클립스 내에서 육성하고 있는 일종의 인간 병기였다.

철저히 약물 의존적인 몸과 정신을 만들어 놓기에 평소에는 백치나 다름없다.

어쨌든 전투에는 일가견이 있는 헌터만 레벨 90 이상으로 선별해서 만든 것이 추적자.

그런 추적자가 강후에게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마나로 낚시를 한 것까지는 좋아. 멋진 전술적 판단이고 잘 먹혀 들어갔어. 그런데······."

차소희는 일반적인 통념에 맞지 않게 흘러간 현장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암살자 클래스가 평범한 도약, 횡 이동으로 추적자의 눈을 속였을 리 없다.

조직 차원에서 직접 육성한 인간 병기다. 다른 건 몰라도 어설픈 눈속임에 당하진 않는다.

"유일한 가능성은 하나뿐이야."

차소희가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확정지은 경우의 수는 딱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강후가 숙련도 최대치를 찍은 '도약'과 '횡 이동'을 사용했을 경우다.

그러면 추적자의 시야에서 벗어났다가 기습적으로 턱 아래를 찍어 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문제는.

"레벨 10짜리 헌터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적'을 행사했다는 것을 믿으란 말이야?"

바로 이것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생각해도.

도저히 인과관계를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후의 공개된 정보와 실력에는 간극이 있었다.

지금껏 조사에서 한 번도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한 적 없는, 성공률 100%의 조사관 차소희.

이클립스에서 그녀가 쌓아 올린 명성이 강후 때문에 오점이 생기려 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강후의 뒤꽁무니만 쫓는 게 아니라, 아예 본인을 직접 찾아야 할 듯했다.

* * *

"일단 솔라키움 두세 개는 확정이군. 예상은 했는데 이런 식으로 찰떡같이 붙어 나올 줄은."

그 무렵, 강후는 메인 보스가 있는 위치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미들 보스를 만났다.

하나가 아닌 셋이었다.

앞서 상대했던 아이스맨과 파이어맨 시리즈처럼, 일종의 형제 콘셉트의 미들 보스였다.

이름은 디펜더(Defender).

생긴 것은 셋 모두가 똑같으며, 인간형이다.

비유하자면 2m 정도 신장의 럭비 선수를 보는 느낌?

이 셋은 각각 자신에게 특화된 스킬을 갖고 있었다.

바로 방어술.

실드라는 표현도 알맞을 것이다.

다만 셋이 특화된 분야가 조금씩 달랐다.

[전면 방어술]

[측면 방어술]

[후면 방어술]

각각 이렇게 전용 스킬을 따로 갖고 있었다.

그래서 홀로 움직여선 한 방향의 방어만 가능하고, 함께 움직이면 모든 방향의 방어가 가능했다.

언뜻 보면 인원수가 많다 보니 까다로워 보일 수 있다. 수적 우세를 무시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결국은 한 녀석을 얼마나 빨리 따느냐의 싸움이지. 빈틈은 한 방향만 만들어도 되니까.'

강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오히려 분업화된 셋이기에 하나만 무력화해도, 1인분도 하기 힘든 오합지졸이 될 거라고 봤다.

삼발이 다리 하나를 날리면, 그것은 곧 엎어지고 무너질 것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18화 스킬 강탈 (2)

'셋이 뭉쳐 다니는 것으로도 모자라 미들 보스 타이틀을 달고 나온 것으로 얘기는 끝난 거지.'

강후는 상황을 담백하게 봤다.

정말 세 명의 디펜더들이 까다로웠다면 이 던전에서 메인 보스 타이틀을 가져갔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치명적 약점 또는 태생 자체의 문제나 변수가 있음을 뜻한다.

환영술로 포문을 열었다.

강후와 함께 출발한 다섯의 환영이 가장 가까운 디펜더를 특정하고 달려들었다.

지이잉! 지잉!

저마다 특화된 스킬을 활용하며 방어에 나섰다. 가장 대응이 빠른 것은 전방 디펜더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시선을 기준으로 앞에 방어막을 형성할 수 있다 보니 대응이 기민한 듯했다.

'예상대로.'

가장 반응이 늦은 것은 후방 디펜더였다.

등 뒤에 방어막이 생기니, 곧바로 정면 대응이 안 되는 것이다.

터업!

강후가 속주머니에서 꺼낸 솔라키움을 입술에 꽉 문 채로 돌진할 준비를 마쳤다.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결과까지 보려면, 중간에 마나 과사용이 필수일 것 같아서다.

퍼펑! 펑!

여기저기서 환영이 터져가며 연막을 만들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작업도 머리 아픈데, 그나마 가짜를 맞춰도 연막으로 뒤끝이 남는다.

3초의 연막 효과는 강후가 디펜더와의 거리를 좁히고, 한 녀석을 노리기에는 충분했다.

강후는 계속해서 환영을 만들어내며, 집요하리만치 '측면 디펜더'만 노렸다.

전방, 후방 디펜더는 무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철저하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강후의 맹공격을 측면 디펜더가 전력으로 막아내며 버티고 또 버텨내자.

전방, 후방 디펜더가 어느 정도 전투 흐름이 하나의 결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공격적으로 임했다.

덩치 좋은 녀석들의 협공이었기에 강후는 절대 정면으로 공격이 맞부딪히는 그림은 주지 않았다.

그 대신, 측면 디펜더의 몸을 중심으로 꾸준히 횡 이동을 전개하며 위치를 바꿨다.

일단 뒤로 넘어가서 은신을 해 버리면, 협공하려던 둘도 목표를 재설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심'의 개념이 없는 몬스터의 경우에는 이럴 때, 동족이 피해를 입어도 공격을 거칠게 퍼붓는다.

이를테면 동료의 얼굴에 붙어있는 벌레를 잡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뺨을 때리는 식이다.

동료의 아픔보다 벌레의 제거라는 명제에 충실하려고 하기에 조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디펜더 삼인조는 달랐다. 서로 조심했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기회를 몇 번 놓쳤다.

강후가 피하고 또 피하며, 계속 측면 디펜더의 빈틈을 공략했다.

확실히 내실이 탄탄함과 동시에 두 동료의 지원을 받아서인지, 쉽사리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전투 도중에도 꾸준하게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후방 디펜더의 빈틈이 포착됐다.

착용하고 있었던 건틀릿이 살짝 틀어졌는지, 손목 부분을 만지면서 재조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별것 아닐 수 있는, 아주 잠깐의 조정 과정이지만 강후에게는 선명한 구멍으로 보였다.

순간적으로 정면이 아닌 옆으로 팍 튀어버린 강후의 몸이 순식간에 후방 디펜더에게 닿았다.

너무 가까운 거리였기에 도약과 동시에 순간이동을 하다시피 강후가 그에게 붙었다.

[출혈 찌르기]

푸슛! 푸슛! 푸욱!

강후가 출혈 찌르기를 신속하게 어깨에 꽂아 넣었다.

좀 더 강화된 형태의 찌르기 스킬이라 그런지, 단검이 깊게 파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억! 어억! 억!"

신음을 토해내는 와중에도 후방 디펜더의 양팔이 강후의 몸을 노리고 접근해왔다.

애초에 강후가 그의 상체에 매달린 것처럼 붙은 형태라, 손쉽게 잡힐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 강후는 횡 이동을 이용해, 그의 등 뒤로 이동해 있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시야 강탈]

[얕은 혼돈]

감각 체계를 교란하는 성좌 스킬을 연달아 퍼부었다.

카득!

강후는 미련 없이 솔라키움 줄기를 씹었다.

마나가 폭발적으로 빠져나가는 지금부터 슬슬 느낌이 올라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허엇······!"

시각과 공간 감각을 모두 잃은 후방 디펜더가 제대로 갈피도 잡지 못하고 양팔을 바둥거렸다.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는 독이 됐다.

다른 두 동료가 쉽게 접근할 수 없게, 경로를 방해하는 역할을 해버려서다.

강후에게는 기회였다.

터억!

과감하게 디펜더의 목 뒷덜미로 올라탄 강후가 양어깨를 발판 삼아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크아아아악!"

양 손가락을 그의 왼쪽, 오른쪽 눈에 가져간 뒤. 그대로 눈을 찔러버렸다. 후벼 파버린 것이다.

"눈은 강철이 아니거든."

강후가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제아무리 강력한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가장 취약한 부위 중에 하나는 역시 눈이다.

물론 높은 레벨로 올라가면 눈 자체에도 강화된 '막'을 가진 경우가 종종 나타나긴 하지만.

레벨 100 미만 던전이면, 그렇게 '고급스러운' 몬스터가 나올 수준은 아니었다.

푹푹푹! 푹푹!

강후가 연달아서 출혈 찌르기를 더 쑤셔 넣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10개의 중첩이 쌓이면서, 특유의 출혈 효과를 볼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샤아아!

'역시.'

때를 맞춰 디펜더의 상태 회복을 도와주는 '대회복'이 활성화됐다. 초고속의 회복 기제였다.

하지만 여기서 출혈이 빛을 발했다. 대회복이 무력화된 것이다.

이곳보다 상위 몬스터라면 이를 무시하고 일정량의 회복을 이뤄냈겠지만······.

애석하게도 디펜더들은 그 정도까지의 하이 스펙은 아니었다. 한계가 명확했다.

"흐어!"

후방 디펜더가 탄식을 터뜨렸다. 믿었던 대회복이 무위로 돌아가자 대단히 좌절한 모습이었다.

그사이.

강후는 이미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디펜더의 눈으로 단검을 돌려, 온 힘을 다해 쭉 잡아당겼다.

"······!"

그것으로 끝이었다.

[강탈이 활성화된 대상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스킬은 다음과 같습니다.]

[후면 방어술]

[전면 방어술과 측면 방어술을 획득하면, 본 스킬과 합쳐져 '보호 방벽' 스킬이 재생성됩니다.]

'이거였군.'

조금 특별한 메시지가 떴다.

보통 독립된 스킬 하나를 얻으면 거기서 끝이지만.

이 스킬의 경우는 다른 스킬과의 연관성을 인정받아 세트 효과를 볼 수 있는 듯했다.

마치 조각을 모으듯.

각 방향의 방어를 담당한 스킬 조각을 완성하면 하나의 완전체 스킬이 되는 것이다.

한 놈이 죽었다.

이제 남은 것은 두 놈.

강후가 더욱 공격의 템포를 높였다. 지금만큼 휘몰아치기 좋은 때는 없다.

바로 납치를 이용해, 전방 디펜더를 소환했다. 동시에 강탈한 후면 방어술 스킬을 썼다.

여기까지는 강후가 왜 후면 방어술 스킬을 썼는지 의도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전방에 있는 적을 끌고 왔는데, 뒤를 방어한다는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 부자연스러움에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진즉에 인지했어야 했지만.

애석하게도 전방 디펜더는 강후의 노림수를 전혀 읽지 못했다.

그리고 횡 이동과 함께 강후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제야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다.

이미 그때는 상황이 벌어지고 난 후였다. 강후가 전력으로 디펜더를 밀치고 있었던 것이다.

치이이이익!

"끄으아아아!"

이윽고 사고가 터졌다.

후면 방어술로 만들어낸 방어벽에 전방 디펜더의 몸이 닿으면서, 하얀 연기가 타올랐다.

설치형으로 만들어진 방어벽에 디펜더의 신체가 닿으면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물론 강후의 노림수였다.

방어막은 일종의 결계라서 스킬 등에 대해선 저항하고 튕겨내는 효과를 갖는다.

하지만 생체에 대해선 마치 달아오른 철판에 닿은 것처럼, 급격한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전방 디펜더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실 반쯤 넋이 나갔다.

허를 찔린 것은 물론, 몸 뒤쪽이 통째로 불타오르는 느낌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는 녀석을 두고 강후가 등지며 섰다.

적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 그것은 전장에서 최우선으로 지양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치이이익······!

"끄어어어!"

강후가 등진 상태에서 만들어낸 후면 방어술 스킬의 방어막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몸 앞에 방어벽을 만들기 위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몸을 돌렸던 것이다.

그 바람에 전방 디펜더는 마치 위아래가 막힌 석쇠 안에서 통째로 구워지는 고기 신세가 됐다.

창의적인 공격의 연계!

쿠웅!

처음부터 강후의 손바닥 안에서 놀 수밖에 없었던 디펜더 3인조 중 두 번째가 죽었다.

전면 방어술 스킬의 강탈.

이제 하나만이 남았다.

"다음은 너다."

그리고 강후가 마지막 희생양이 될 미들 보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 *

순식간에 동족 둘을 잃고, 전의를 상실한 측면 디펜더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레벨은 30을 코앞에 둔 위치까지 쭉 올랐다. 수치로 보면, 29.7은 족히 될 법한 레벨이었다.

['보호 방벽' 스킬이 생성됩니다. 기존의 방어술 스킬 3종은 폐기되었습니다.]

동시에 스킬 세트 효과에 따른 통합이 이루어졌다.

보호 방벽.

앞선 3종 스킬과 달리 모든 방향을 방어할 수 있는 구조였다.

스킬 시전자를 따라다니는 '이동형'이 아닌 '설치형'이기에 전략적인 활용도가 더 높았다.

아울러 스킬 숙련도 최대 효과로 보호 방벽의 중복 사용이 가능해졌다.

껄끄러운 공격이 쏟아지는 루트에 전술적으로 여러 개를 설치하는 그림이 가능해진 셈이다.

[성좌 '기동전의 대가'가 성좌도 울고 갈 당신의 전략에 눈물을 흘립니다.]

[성력을 다수 소모하여 당신에게 쓸만한 버프를 후원합니다.]

[경험치 증가 +1%]

"······?"

강후가 눈을 부릅떴다.

'기동전의 대가'가 점점 자신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지만, 후원 수준이 확 높아질 줄이야?

보통은 소량의 성력을 소모하는 약간의 버프를 후원하지만 지금은 그 규모가 달라졌다.

[이 계약자는 나의 것이다. 너 같은 하찮은 성좌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의도한 건지, 실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차원 강탈자의 날이 잔뜩 선 메시지가 보였다.

성좌 간의 경쟁은 강후의 입장에서는 천번 만번이라도 반길 일이었다.

결국은 후원 '랭킹' 싸움이기 때문이다.

많은 후원을 받을수록, 계약자의 마음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기에.

차원 강탈자도 그것을 아는 만큼, 미리 반응을 보이는 셈이다.

이미 경쟁은 시작됐다.

실제로 장시환이 가장 영악하게 잘했던 것이 성좌의 자존심을 교묘히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성좌의 경쟁적 후원을 유도했고, 받아낸 모든 것이 고스란히 자신의 능력이 됐다.

"이제 한 놈 남았나?"

강후가 북쪽을 살폈다.

일찌감치 먹구름이 잔뜩 껴 있는 것이 상대해야 할 적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앞서 얻은 속성 부여나 보호 방벽 스킬도 활용 가치는 무궁무진하지만.

강후는 메인 보스에게서 강탈할 수 있을 스킬에 대해 입장하기 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그것은 바로 깊은 상처, 그리고 상처를 따라 흘러나온 피를 단숨에 태워버리는 잔혹무도한 스킬.

피의 꽃, 혈화(血花)였다.

19화 스킬 강탈 (3)

* * *

얼마 후.

황야에서 메인 보스와 마주친 강후는 곧바로 한바탕 교전을 벌였다.

말이 좋아 교전이지, 미친 듯이 쏟아지는 상대의 공격을 대응하며 피하기 바빴다.

"그냥 미쳤군."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림자 흑마법사, 알리샤.

여성형이지만 목소리만 놓고 보면 중성에 가까운, 묘한 보이스를 가진 보스 몬스터였다.

물론 특징은 그게 아니다.

김목현의 실력도 하찮게 느껴질 정도로 전투에 특화된 실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시작부터 퍼붓기 시작한 흑마법의 맹공 때문에 강후는 한 번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한 상태였다.

더 까다로운 것은.

알리샤가 전면의 방어는 강후를 노리는 공격으로 커버하고.

나머지 방향으로의 방어는 몸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원형의 스킬로 대응한다는 점이었다.

보통 수호 마법이라 부른다. 몸을 중심으로 계속 회전하며 접근하는 적을 노리기 때문이다.

'저것 때문에 도약이랑 횡 이동은 사실상 봉인이나 다름없는 상태고.'

횡 이동을 하면 알리샤의 후방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위치가 딱 수호 마법의 테두리였다.

무슨 말이냐면, 횡 이동을 성공시켜도 수호 마법에 당하면서 곧바로 은신이 풀린다는 얘기다.

당연히 수호 마법 자체의 대미지에 노출,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 난타전을 하자니, 알리샤의 보스 스킬인 혈화가 마음에 걸렸다.

상처가 어느 정도 누적되면, 그녀는 혈화를 사용할 것이다.

그러면 강후가 입은 상처와 흐르는 피가 하나의 기폭제가 되어, 폭발을 일으킬 터.

가뜩이나 낮은 체력으로 고생하는 비루한 이 몸뚱이라면, 혈화에 즉사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물론 강후만 알리샤를 까다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알리샤 역시, 전투 시작 이래로 단 한 번도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한 상황이 불만족스러웠다.

공략으로 던전이 리셋되어 다시 등장해도 과거의 데이터를 공유하는 것이 메인 보스의 특징.

그래서 알리샤도 다양한 전투에 대한 데이터를 갖고 있었다.

한데 강후처럼 초반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한 케이스는 없었다.

강후의 접근을 막기는 했지만, 사실 그뿐이었던 것이다.

방어의 측면에서는 성공일지 몰라도, 공격의 측면에서는 성과 없이 마나만 소모한 셈이 됐다.

게다가 강후가 도약 스킬만 활용해서 손쉽게 피했기에 그의 스킬 구성에 대한 판단도 부족했다.

알리샤가 강후를 매섭게 노려보며 다른 빈틈을 찾고 있는 사이.

강후 역시 그녀를 끊임없이 응시하며, 지금의 전투에 의미를 더해 주고 있었다.

'까다롭지만, 그래서 더 좋다.'

전투의 모든 과정이 아슬아슬하고, 또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이쯤은 되어야 승리했을 때, 극복하고 성장하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솔직히 레벨 수준에 맞게 다니면 편하긴 편할 것이다. 한두 방이면 다 죽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성장도 정체되고, 특히 쓸만한 강탈 스킬을 얻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 강후가 다른 헌터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쭉쭉 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한참 상위 수준의 던전을 도전하면서 경험치를 독식하니, 성장을 못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반적인 헌터라면 길드 차원에서 전력을 다해 밀어줘도 최소 보름 이상은 잡아야 했다.

그것도 최소로 잡았을 때고, 적당히 쉬고 대기하는 시간까지 더하면 한 달에 가까워진다.

"흠······."

좀처럼 소리를 잘 내지 않는 강후가 오랜만에 침음성을 냈다.

벌써 씹어 넘긴 솔라키움의 개수만 2개였다.

제대로 된 전면전도 없이, 서로 탐색전만 한 수준인데 말이다.

'일단 공격 레퍼토리는 다 파악한 것 같군. 내 쪽에서 공개한 스킬은 도약이 전부고.'

강후는 상황은 열세지만, 전략적 판세로는 우세에 있다고 판단했다. 근거는 충분히 있었다.

승부수를 던질 때가 된 듯했다.

'수비의 달인, 이런 건 개 짖는 소리지. 무승부는 절대 승리가 아냐. 실력 없는 자의 변명일 뿐.'

파앗!

강후의 몸이 앞으로 쭉 쏠리며, 지금까지 내디딘 적 없는 전방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알리샤의 공격을 좌우, 혹은 후방 도약을 활용해 멋지게 피해냈지만.

이제는 돌진하는 가운데 앞으로 피해야 한다. 상당한 고난도 작업이지만, 해내야 할 것이기도 했다.

나중에 알리샤보다 더 강한 보스 혹은 헌터를 상대하면, 밥 먹듯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누가 보아도 뻔한 루트인 좌우, 후방 회피를 선택하면 그때는 노림수 한 번에 바로 죽는다.

'보여. 잘 보인다.'

강후의 고유 재능인 제법 우수한 주력과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이 빛을 발했다.

알리샤가 자신에게 퍼붓는 흑마법의 경로가 빠르긴 해도, 분명히 예측할 수 있을 만큼은 보였다.

파앗!

첫 번째로 날아온 진보라 불꽃은 바로 고개를 숙여 피했다.

진보라 불꽃의 구체가 초저공의 비행은 불가능하다 보니, 몸을 바짝 낮추는 것으로 회피가 됐다.

알리샤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그 시점에 두 번째 마법인 바람 화살이 이번에는 지면에 낮게 깔린 채로 날아오고 있었다.

방금까지의 노림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공격이다. 바람 화살은 초저공 비행이 가능했다.

"후!"

강후가 숨을 토해내며, 몸을 훌쩍 날렸다. 이럴 때는 공중 도약이 가장 적절하다.

'역시.'

이미 타이밍을 맞춰서 허공에 몸을 띄운 알리샤가 강후에게 다음 공격을 연계하고 있었다.

과연 메인 보스다웠다.

중간에 공격 흐름이 비는 구간이 없다. 일전의 디펜더 3인조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다.

강후도 알리샤의 빈틈없는 노림수만큼 다음 대응 수단을 미리 생각해 둔 후였다.

[환영술]

스파앙!

강후의 몸이 흩어졌다.

환영술 자체가 추진력을 부여해주는 효과가 있다 보니, 공중에서 강후의 방향이 살짝 꺾였다.

굳이 다른 방향으로 기동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동선이 비틀어진 것이다.

후웅!

아슬아슬하게 알리샤의 다음 마법이 옆으로 지나가고, 이번에는 강후의 턴이 왔다.

볼 것도 없이 강후가 바로 납치 스킬을 썼다.

마법사는 어떻게든 끌고 와 가까이서 패야 한다!

이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대명제이기도 했다.

다음 순간.

"꺄악!"

시종일관 강후처럼 묵묵히 전투에 임하던 알리샤에게서 하이 톤의 비명이 들려왔다.

강후의 뜻대로 상황이 꼬여버렸음을 깨달은 메인 보스의 확실한 자각이었다.

'미친.'

끌려오는 와중에도 알리샤는 악으로 깡으로 양손에 마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대책 없이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발악이었다.

메인 보스로서 박수를 보낼 만한 근성인 셈이다.

이대로 붙으면 강후도 그녀에게 일격을 먹이겠지만, 반대로도 호되게 한 방 먹을 상황이었다.

오드득!

강후가 아껴 씹으려던 솔라키움을 아예 입 안에 넣은 채로 우적우적 씹었다.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나 과민증이 폭발적으로 일어날 것 같아서였다.

알리샤와 충돌하기 직전.

강후가 횡 이동을 전개하며, 그녀의 뒤로 돌아갔다.

원래는 끌려온 그녀를 바로 단검으로 손볼 요량이었지만, 전략적으로 포기했다.

동시에 보호 방벽을 펼쳤다.

지금까지 전략적으로 노출을 아껴왔던 스킬을 한 번에 대방출한 것이다.

카드드득!

보호 방벽이 알리샤의 수호 방패와 맞물리면서,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치 뜨거운 불판 두 개를 서로 겹쳐놓고, 누가 더 뜨거운가를 시험하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수호 방패를 보호 방벽이 받아내 주면서, 강후에게는 완벽한 프리딜 타임이 생겼다.

안타깝게도 이쯤에 몸을 조금이라도 돌리고 있었어야 할 알리샤의 반응은 반 박자 늦었다.

아마 수호 방패의 힘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암살자가 이런 방어 스킬이 있을까 싶었겠지.

덕분에 '반 박자'의 이점을 얻었다.

본능적으로 우위를 읽어낸 몸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고, 손은 이미 앞으로 쭉 뻗어져 있었다.

푸욱!

"꺄아아······!"

왼쪽 등을 뚫고 들어간 단검이 깊숙한 곳까지 쭉 파고들며, 그녀에게 고통을 선사했다.

[화염 속성 부여]

이어 강후가 바로 들고 있던 단검에 화염 속성을 부여했다.

상처를 더 깊게 만들고,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을 열기에 화염보다 더 좋은 속성은 없다.

마나를 있는 힘껏 불어넣자, 단검이 급격하게 달아오르며 용광로에서 막 꺼낸 듯한 느낌이 됐다.

"X미."

참았던 욕이 터져 나왔다.

뒤가 없다는 생각만으로 마나를 전부 쏟아 넣었더니, 마나만큼 뇌도 같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몸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이지만, 또렷한 정신은 그 몸을 기어이 알리샤의 앞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너만 악바리인 건 아냐!"

강후가 양손으로 힘껏 단검을 움켜쥔 채로 전력을 다해 그녀의 가슴 위쪽에서 날 끝을 내리찍었다.

그것은 마치 녹아내리기 직전의 뜨거운 금속이 뼈와 살을 태우며, 뚫고 내려가는 것과 같았다.

"······!"

제법 강인한 육신을 가진, 명색이 메인 보스인 그녀도 이 단검은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평범하게 날붙이로 찔러대는 것이 아니라, 용광로에서 녹인 쇳물을 붓는 느낌이었으니까.

피부가 녹고, 살이 녹고.

이어서 뼈가 녹아내리자, 그 안에 숨어있던 나약한 심장은 당연히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지금까지 상대한 수많은 적 – 헌터 – 들이 알리샤의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느꼈다.

메인 보스의 목숨이 때로는 이렇게 하찮게, 형편없이 죽을 때도 있구나······하고.

적이 아닌 아군이었다면 감탄을 마지않았을 만큼.

시작부터 끝까지 강후의 대응과 노림수는 깔끔했다.

전략적으로 스킬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까지, 모두 말이다.

쿠웅!

그렇게 쓰러진 알리샤는 부릅뜬 눈과는 달리, 끊어진 숨을 다시 되살리지는 못했다.

[레벨이 대폭 올라 32가 되었습니다.]

레벨이 단번에 세 계단이 뛰었다.

동시에 암살자의 30레벨 기본 스킬인 '가속'이 자동으로 추가됐다.

공격 가속, 움직임 가속과 같이 다양한 가속이 필요해질 강후에게 가장 유용한 스킬이었다.

게다가 최대 숙련도가 바로 적용되는 만큼, 가속의 범위와 확장성도 상상을 초월할 터였다.

[강탈이 활성화된 대상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스킬은 다음과 같습니다.]

[혈화]

그리고 처음부터 기대하고 있었던 보스 스킬 '혈화'도 얻었다.

다른 헌터에게서는 유사한 형태를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스킬이다.

활용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전투 초반에 확실한 상처 하나를 만드는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고.

상처를 꽤 많이 내어놓은 적을 '마무리'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었다.

피를 태운다는 건, 중상을 입은 사람에게는 즉사로 이어질 수 있는 치명타이기 때문이다.

"정말······."

강후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지면에 천천히 몸을 안착시켰다.

이 짧은 순간에 뱃속으로 사라진 솔라키움 줄기의 수가 4개.

여기에 2천만 원을 태웠다.

물론 혈화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한없이 적은 돈이지만, 어쨌든 값싼 전투는 아니었다.

바로 그때.

딸그랑.

죽은 알리샤에게서 초록색 마석 하나와 특이하게 생긴 아이템 두 개가 툭, 하고 떨어졌다.

괜한 기대 없이 덤덤하게 전투를 치른 강후지만, 이래서야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보상이었다.

20화 스킬 강탈 (4)

* * *

글라스에 채워진 와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채워지기를 몇 차례.

주변 안전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집 안에서, 두 여자가 마음 편히 와인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따금 삐, 하고 경보음이 울리기도 했지만 지나가던 길고양이가 남긴 흔적이라 개의치 않았다.

"언니, 요즘 정말 보기 힘들어!"

"남이사. 너도 바쁜 건 마찬가지 아니야? 그런데 어쩐 일로 대전에 왔어?"

"뭐, 용병이 다 그렇잖아? 일감이 어딨나 싶어서 돌아다니다 보면 대전도 가고, 부산도 가고."

"끝까지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얘기는 안 하네?"

"언니야 항상 보고 싶지! 근데 나를 만나줘야 말이지? 이렇게 만난 것도 신기할 정도인데?"

"내가 한 전화의 10%만 잘 받았어도 진즉에 만났을걸? 남자 만나는 중인지 받지도 않더만?"

"이렇게 서로 폭로전으로 가는 거야? 호호호."

"어쨌든 만나니까 좋다, 상미야. 요즘 좀 외롭기도 했거든."

와인 삼매경에 푹 빠진 윤상미와 한서연.

둘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언니 동생 사이이자, 둘도 없는 친구 사이기도 했다.

다만 헌터가 된 이후로는 서로가 추구하는 바가 달라서 성장의 방향성이 달라지게 되었다.

윤상미는 떠돌이 용병이 됐고.

한서연은 해어화 길드에 간 것이다. 해어화 길드는 정화 길드의 위성 길드로 대전 지부격이었다.

"언니."

"응?"

"나 신기한 헌터 한 명을 만났어. 오산역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동행을 하게 됐는데."

"얘! 초면인 헌터랑 그렇게 쉽게 동행을 해? 어디 소속일지 알고 그렇게 물렁하게 굴어?"

"에헤이. 내가 이런 일 한두 번 하나? 다 스스로 지킬 자신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흠······. 좋아. 어쨌든, 그래서?"

"이름은 정선규. 물론 가명이겠지만 동행으로 대전역에 오게 됐거든. 그리고 알다시피."

"알아. 클럽 하데스에서 벌어진 그 사건. 네가 거기서 탈출했다 했잖아?"

"어! 그때 그 사람이 나 대신 앞길을 뚫어줬는데 말이야. 정말 공격이 간결하고 파괴적이더라."

"짜게 평가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할 윤'소금' 씨가 이런 극찬을 한다고?"

"언니. 난 칭찬할 만하면 무조건 해. 그간 그럴 만한 헌터들이 없었을 뿐이지!"

"클래스가 뭐였는데?"

"암살자 클래스. 어지간한 헌터는 일격에 제압하거나, 바로 빈틈을 찾아내 공략하더라고."

"특이점은?"

"각 스킬마다 완성도가 정말 높아. 숙련도가 엄청 높은 거겠지. 레벨이 꽤 높은 것 같았어."

"정선규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가명으로도 생소한 이름인걸?"

"그러니까 말이야. 활동한 지는 얼마 안 된 듯했어. 이예린이랑도 두 번째 거래였다고 하더라고."

"두 번째?"

"응!"

이 시기에 공교롭게 두 번째 거래를 할 만한 사람이 문득 한서연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물론 이예린을 찾아와서 의뢰를 받는 용병이 한두 명은 아닐 것이다. 하루에도 몇십 명은 온다.

하지만 최근에 자신이 직접 이예린을 소개시켜줬던 강후가 떠올라 흠칫했다.

첫 의뢰를 잘 수행했다면, 지금쯤 딱 두 번째 의뢰를 요청할 때가 됐을 테니까.

하지만 청명 수용소에서 막 탈출한 강후가 윤상미의 극찬을 들을 실력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면 진즉에 수용소를 탈출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언니 예전 남친. 그분은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언니에게 연락했었다며?"

"맞아. 강후 씨."

"어떻게 된 거래?"

"이클립스 놈들에게 납치를 당해서 청명 수용소로 끌려갔었던 것 같아. 마석 광산으로."

"그럼······ 거기서 탈출을 한 거야?"

"응. 그것만 들었어. 어떻게 탈출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얘기해주지 않더라."

"전 남친 분도 언니랑 연락 두절되기 전에 막 헌터가 됐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렇지. 그 상태에서 수용소에 갇혀 지냈으니, 성장을 제대로 하진 못했을 텐데······."

한서연도 이제 와 생각하니 의문스러운 부분은 있었다.

강후에게 있어서 레벨이나 스탯 같은 요소가 달라진 것은 없을 텐데.

그래도 나름 실력 있는 간수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수용소를 어떻게 탈출한 걸까?

"언니, 전 남친 분에게 미련 많았잖아. 좀 더 세게 붙잡지 그랬어? 헤어지고 힘들어했잖아."

"알잖아. 강후 씨, 성격. 한 번 아니면 끝까지 아닌 사람이야. 나 몰래 걱정은 해 주더라도······."

"언니는 너무 과거에 살아서 탈이야."

"헤어지기 전에 네가 했던 말을 강후 씨가 똑같이 내게 해 주더라. 사람 생각은 다 똑같은 거겠지?"

"에이, 모르겠다! 와인이나 더 마시자, 짠!"

둘이 한 사람을 두고 한 얘기지만, 그들은 공통 키워드에 강후가 있다는 사실은 짐작도 못 했다.

가명이 수시로 바뀌는 세상에서 누군가를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은 정말 의미 없는 일이었다.

* * *

"수지맞았네."

강후가 초록색 마석을 집어 들었다. 개당 1억 원쯤 하는 마석이다.

파란색 마석이 천만 원 정도 하니, 색상이 한 등급만 올라도 가격이 확 뛰는 셈이다.

보통 보스 몬스터에게서 초록색 마석을 획득할 확률은 10%로 본다. 알리샤 정도의 수준을 전제로.

얻기 쉬운 마석은 분명 아닌 셈이다.

미신이기는 하지만 보스 몬스터를 빨리 처치하면, 보상이 좋다는 얘기도 있긴 했었다.

원작에서도 소위 '카더라'였기에 검증된 데이터는 없지만, 어쨌든 확실히 빨리 잡기는 했다.

'마나 과민증에 대한 적당한 긴장이 내게는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강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부담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심리를 만드는 역할도 같이 한다고 보는 것이다.

깔끔하게 계산된 공격을 시도하지 않으면, 과민증의 영향으로 수세에 몰릴 가능성이 있어서다.

물론 이건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때의 얘기고, 뒤집어 생각하면 항상 부담을 갖는다는 뜻도 된다.

알리샤의 죽음과 함께 전리품으로 남은 것은 두 개.

하나는 4등급의 아이템 반지고, 다른 하나는 스킬북이었다.

강후가 반지부터 먼저 확인했다.

[핏빛 탐식 - 반지]

[등급 : 4등급]

[모든 스탯 +15]

[출혈 상태가 대상에게 적용되고 있을 때, 출혈 상태를 50% 더 악화시킵니다.]

"출혈 찌르기의 짝을 이렇게 찾네. 하긴, 혈화와 잘 어울리는 특성이기도 하니까."

알리샤의 스킬에 궁합을 맞추기 위해 만들어졌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강후를 위한 아이템이 됐다.

바로 착용 등록을 마쳤다.

아이템 등급도 등급이고.

구성에서 무엇 하나 빠질 것이 없는 완벽한 반지였다. 모든 스탯 15는 무조건 이득일 수밖에 없다.

[체력 : 146]

체력 스탯을 보았다.

다른 스탯은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딱히 봐둘 게 없지만, 체력은 정말 중요했다.

처음 수용소에서 눈을 떴을 때의 체력이 10이었다.

지금 정도의 체력 스탯이면, 운동선수와 비교될 수준은 한참을 뛰어넘는다. 지구력이 상당히 늘었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은 평상시 경우고, 마나를 집중적으로 활용하는 '전투' 시기가 되면 계산이 달라진다.

일단 선천성 마나 과민증의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발동되면.

그때부터는 극심한 두통, 구역감과 함께 초당 1의 체력이 빠지게 된다.

과거와 비교하면 마나 과민증이 발동되더라도, 참고 얼마간은 버틸 맷집이 만들어진 셈이다.

게다가 전신에 과부하가 걸리는 시점도 예전에는 스킬 두세 개를 연타로 사용했을 때라면.

지금은 네다섯 번까지는 충분히 버틸 정도가 됐다.

전투에서 스킬 한두 번을 더 쓰고 안 쓰고의 차이는 매우 크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기에.

'조금 사람다워지기는 했군. 적어도 평상시에는 말이야.'

강후가 어색한, 하지만 그래도 충분한 만족감이 담긴 미소와 함께 다른 전리품을 확인했다.

스킬북이다.

[스킬북 – 대참수]

[특이 사항 : 검사 전용]

[체력과 마나를 일정량 소모하여 대상을 일격에 거세게 내려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대로 학습해서는 클래스의 페널티로 효과를 10%밖에 볼 수 없었다.

암살자 클래스인 강후에게는 약간 내리친 정도의 수준으로만 스킬이 발현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페널티를 걷어내는 것만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일격필살의 용도로도 사용이 가능했다.

'이건 좀 고단수의 꼼수가 필요하니까, 일단 킵 해 두기로.'

당장 스킬을 체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에, 며칠간 보류해 두기로 결정했다.

다른 방식을 써서 페널티 없이 학습할 수 있는 만큼, 굳이 팔 이유는 없었다.

자정을 막 넘긴 시간.

가평역 인근의 번화가로 들어온 강후가 바에 들러, 전투로 달아올랐던 머리를 식혔다.

이곳은 나름 안전지역이었다.

길목 중간에 가드(Guard)들도 있고, 가평 헌터 치안청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았다.

모던 바인 이 바에 다행히 솔라키움 버스트가 있었고, 강후는 취향대로 한 잔을 시킬 수 있었다.

'하데스에서부터 못내 아쉬웠던 한 잔을 이제 마시네.'

강후가 무뚝뚝한 남성 바텐더에게서 받은 솔라키움 버스트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먼 길을 돌아온 한 잔이다.

보상심리일까?

"솔라키움 버스트, 두 잔 더."

더 주문했다.

베니가 말했던 솔라키움 버스트 특유의 맛에 대한 이야기도 새록새록 떠오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법인데, 나한테만 맛있으면 그만 아닌가.

두 번째 잔을 들이키던 강후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봤다.

확실히 근육이 좀 붙었다.

체력도 늘었고.

알코올이 좀 들어가도 몸이 대책 없이 늘어지는 느낌보다, 적당하게 이완만 되는 느낌이 난다.

일단 하루 정도는 푹 쉰 다음에 허정태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설정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닌 이상, 허정태가 어디에 살고 있을지는 계산이 됐다.

다만 허정태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나서, 그다음에 무엇을 할지가 고민이 됐다.

휴식은 중간중간에 쉼표로만 끝날 일이고, 이 몸뚱이는 꾸준하게 성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상위의 모든 특권을 독식하고 있을 장시환을 생각하면, 몇 걸음은 더 앞서 뛰어야 했다.

'그라운드 제로에 다녀오는 일을 조금 더 일찍······.'

강후의 생각이 좀 더 깊어지려던 그때.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다.

한서연, 그리고 이예린.

[한서연]

[해어화 길드의 한서연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발신자 이름을 보니 무미건조하게 표시된 세 글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울러 발신자의 설정으로 추가된 인사말도 보였다.

"······."

한서연이 정화 길드의 위성 길드에 들어가 있을 줄이야. 유쾌한 일은 분명 아니다.

뭐, 이것은 지금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그녀와 충돌할 일이 없을 수도 있고.

강후가 전화를 받았다.

"응."

- 오빠, 미안해. 잠깐 통화 괜찮아? 보안 전화야. 도청은 안 되니까 안심해.

"괜찮아. 무슨 일이지?"

- 대전역에 차소희가 왔어. 방금 아는 동생과 와인을 좀 더 사려고 나왔다가 차소희를 봤는데.

"차소희?"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이클립스의 3인자이며, 강동현의 둘도 없는 심복이니까.

강동현의 '사냥개'로도 불린다.

- 용병들이 모인 핫스팟만 돌아다니면서 오빠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었어. 오빠 본명과 함께.

"핵심은 차소희가 날 쫓고 있다, 그거지."

- 응, 맞아. 오빠, 조심해.

"고마워. 끊을게."

- 언제든 힘들면 연락해, 오빠. 내가 어떻게 해서든 도울게. 알았지? 내가 어떻게든!

"지금 연락으로도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 그럼."

강후가 전화를 끊었다.

이타적인 그녀의 마지막 멘트가 떠올랐지만, 가슴이 뭉클해지기보다는 더 싸늘해짐을 느꼈다.

신강후라는 캐릭터가 원작에 등장한 시점부터 끝까지 온갖 고생과 비극을 다 겪는다고 하지만······.

"벌써 이렇게 꼬이나."

생각보다 이른 시점에, 훗날 거물급이 될 눈 하나가 자신의 뒤에 따라붙었다.

사냥개 차소희.

벌컥벌컥!

머릿속이 갑자기 헝클어진 느낌에 솔라키움 버스트를 들이켰다.

맛도 잊은 원샷이었다.

21화 진실의 눈, 안영호 (1)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