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진실의 눈, 안영호 (1)
* * *
"정말 본 적 없는 거죠?"
"없어. 그리고 있다고 해도 내가 왜 네게 말해줘야 하지? 그럴 의무 같은 건 없잖아?"
"우리 이클립스에게 협조해서 나쁠 건 없을 텐데요. 뒤통수에 눈 몇 개 단 걸로는 부족했나 보죠?"
"눈만 붙여놓고 방아쇠 하나 당기는 놈이 없던데. 왜? 우리 용병단이랑 한 판 붙을까 봐 쫄려?"
"쫄리긴요. 동현 님만 나오셔도 그쪽은 바로 정리되는 데 그럴 리가?"
"그럼 나오라고 하던가. 매번 방구석 파이터처럼 의자에만 앉아있는 주제에 허세는...."
"어쨌든 못 본 겁니다? 나중에 본 적이 있는 걸로 밝혀지면 그냥은 안 넘어가요."
"꺼져, 좀. 그냥."
차소희가 대전역 인근에서 용병 스팟만 찾아다니며 강후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있는 탓에.
그녀의 조사가 데스크를 열고서 용병단 지원자를 받고 있던 이예린에게까지 닿았다.
이예린의 용병단인 청안(靑眼)과 이클립스는 오래전부터 앙숙 같은 사이였다.
둘 다 대전 권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데다가, 이권 문제로 이미 충돌 중인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클립스가 청안을 진즉에 쓸어버리지 못한 것은 이예린이 주변 인맥을 착실하게 잘 쌓아둬서였다.
특히 청안처럼 이클립스와 반목하고 있는 범죄 조직 흑사자와 이예린이 손을 잡았다.
마치 삼국지연의의 위, 촉, 오를 보듯이 서로 견제하는 동맹이 결성된 것이다.
어쨌든 아슬아슬하게 힘의 균형이 맞고 있는 상황이다보니, 어느 곳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불철주야 고생하세요."
"꺼지라 했다."
"흥."
차소희가 끝까지 이예린의 속을 긁고는 유유히 현장을 떠났다.
"미친년."
이예린이 그녀의 뒤에 들으라고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박아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클립스에서 사냥개를 보내서 선규 씨에 대해 조사할 정도면, 무척 관심이 크다는 얘기인데.'
강후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생포가 목적인 듯했다.
죽일 거였으면 이렇게 묻고 다니지 않는다. 소리소문없이 추적을 하다가 목을 날려버리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사냥개를 보낸 사람 즉, 강동현이 강후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소리였다.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실력을 가졌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예린 역시 강후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었기에, 그 관심이 이해가 안 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과 같은 생각을 다른 누구도 같이 하고 있고, 그게 이클립스라는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적당히 꼬장 정도는 피워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훗.'
차소희가 강후를 찾기 어렵도록 방해하기는 쉽다.
그녀의 뒤에 적당히 눈을 붙이면 되니까. 동선만 파악해 둬도, 강후와 만날 일을 줄일 수 있다.
물론 강후에게 위치를 통보해주면서 말이다.
강후에게 깊은 인연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강후가 이클립스에 연줄이 생기는 것도 원하지 않는 만큼.
이예린은 자신의 의뢰꾼 – 용병단에서 의뢰만 받는 헌터 – 인 강후의 안전을 조금 더 신경 써주기로 했다.
장기적으로는 의뢰꾼이 아닌 용병단원으로 강후를 영입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그녀의 욕심이었다.
"창현아."
"네, 단장님."
"교선이 불러. 간만에 일 좀 시켜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이예린이 자신의 '눈'을 불렀다.
* * *
강후는 한 잔 더 채운 솔라키움 버스트와 함께, 차소희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쥐 죽은 듯이 지내는 것이 아니면, 이런 일이 생길 것은 기정사실과도 같았으니까.
혹시 싶어 이클립스가 인수, 운영하고 있는 헌터 커뮤니티나 공식 홈페이지를 살펴봤지만.
그들 차원에서의 공개적인 수배는 없었다. 그 말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 목적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문제는 차소희를 만나게 되면, 그때 가서 고민을 해도 될 듯했다. 의중을 떠봐야 할 문제다.
"한잔 더."
"마지막입니다, 손님. 저희가 솔라키움 재고가 다 떨어져서...."
"괜찮아요. 마지막 잔으로 할 거니까."
다음 잔을 기다리며, 강후는 생각에 잠겼다.
허정태에 대한 건까지 처리하고 나면, 그다음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계획이었다.
이예린에게 새 의뢰를 받아 수행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다른 루트는 없을까 싶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라운드 제로였다.
과거 비무장지대로 불리던 DMZ부터 시작해서 '옛' 북한의 땅으로 쭉 이어지는 구역.
사는 사람 없이, 몬스터만 가득한 이 영역을 헌터들은 그라운드 제로라고 불렀다.
서쪽으로는 사리원, 동쪽으로는 원산까지의 광활한 땅이 전부 그라운드 제로였다.
이곳은 별도의 허가 없이 출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출입자의 안전은 스스로가 챙겨야 한다.
'레벨업 측면에서도 괜찮고, 무엇보다 매드 솔라키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니까.'
매드 솔라키움.
솔라키움의 농축 버전이다.
좀 더 강력한 진정 효과를 가진 녀석으로 섭취 시에는 약 30분 동안 마나 과민증에서 '해방'된다.
물론 이후에 큰 후폭풍이 오긴 하지만, 어쨌든 전투에 확실한 도움은 되는 셈이다.
매드 솔라키움은 자라나는 곳도 대중이 없고, 애초에 얻기가 힘들어 시장에서 팔지도 않았다.
얻으려면 직접 그라운드 제로를 뒤지면서 발품을 팔 수밖에 없다.
'애초에 내가 짠 공간이지.'
그라운드 제로는 원작에서 '신강후'가 열세 개의 별 중에 둘을 끌어들여 처치했던 곳이다.
원작자로서 지형도까지 세세하게 그리며 짰던 공간이라, 쓸만한 포인트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전부 다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필드 보스 몇 마리와 매드 솔라키움 몇 줄기는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솔라키움 버스트입니다."
안경을 쓴 무뚝뚝한 남성 바텐더가 강후에게 마지막 솔라키움 버스트를 건넸다.
옆에 쭉 쌓인 다섯 개의 칵테일 잔이 강후의 뚝심 있는 취향을 짐작게 했다.
바로 그때.
3층에 위치한 모던 바의 유일한 출입문이 흔들리더니,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막 잔을 입에 대기 시작한 강후를 보고는.
"형! 너무 내가 오래 기다리게 했지? 삼촌이 보낸 사람들이 아직 안 와서 말이야!"
능청스럽게 손을 흔들면서 말을 걸었다.
다만 행동과 달리,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강후가 별 대꾸 없이 그를 쳐다보며 슬쩍 어깨 뒤를 살폈다.
그러자 사복을 갖춰 입은 – 그래서 사복 같지 않은 – 남자 둘이 문밖에서 안을 살폈다.
그들의 시선은 번갈아서 남자와 강후를 훑었고, 이내 강후와 시선이 마주치자 사라졌다.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남자는 강후가 홀로 앉아있던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서는 말을 이었다.
이제 눈빛은 안정을 찾았는데, 반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둔 두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형, 잘 지냈지?"
"붙은 눈은 일단 떨어졌어."
"아...."
덤덤하게 미행자 둘이 일단 시야에서 사라졌음을 말하는 강후를 보며 남자가 흠칫했다.
"상황은 알겠는데, 애꿎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건 질색이야."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강후의 냉랭한 지적에 그가 풀이 죽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강후는 남자에게서 확인되는 성좌 정보를 보고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실의 천리안]
[중립 성향의 성좌. 원하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게 하지만, 자신 역시 항상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진실의 눈, 안영호.'
바로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원작에서 신강후와 더불어 정화 길드의 대척점에 서게 되는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죽기 전까지 정화 길드를 혐오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최후는 정화 길드의 서열 3위였던 신태석을 끌어안고 함께 죽은 폭사였다. 그만큼 뿌리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어쨌든 작중 안영호의 등장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3년 후.
게다가 국내가 아닌 일본이 주 무대다.
이유는 간단한데, 그의 외삼촌이 일본 굴지의 길드 중 하나인 리코우 길드의 부 마스터라서다.
굳이 좋은 빽을 둘 수 있는 일본을 두고, 국내에서 위험하게 활동할 필요가 없었던 셈.
그런데 왜 국내에 있는 걸까?
'그럼 정화 길드를 혐오하게 된 계기가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꼬인 탓인 건가?'
원작에는 없던 부분이지만, 배드 엔딩과 맞물려 재구성된 과거에는 어울리겠단 생각이 들었다.
예상이긴 하지만, 미행자 둘이 정화 길드의 사람일 수도 있다.
안영호는 중요한 인물이다.
일본의 리코우 길드가 든든하게 뒷배가 되어주는 인물이다 보니, 이용할 가치도 많다.
지금 시점이면 한없이 약한 때일 터.
더군다나 힐러라서 전투는 더욱 젬병일 때겠지.
그러니 미행자들과 싸우거나 따돌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여기까지 떠밀려 온 것일 터다.
처량하게 뒷모습을 남기고 떠난 안영호의 빈자리에 찬바람이 머물렀다 지나갔다.
탁!
강후가 남은 솔라키움 버스트를 한 번에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이제 막 반층 정도를 내려간 안영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예?"
"상황을 요약해 봐. 짧게."
"정화 길드에 있다가 탈퇴했는데, 그 뒤로 미행이 붙었어요. 그런데 누군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상이 맞았다.
원래의 흐름대로면 안영호는 여기서 정화 길드에 '납치'를 당하게 되는 거겠지.
이후 그의 삶도 원작의 신강후처럼 완전히 꼬이고, 그들에 대한 혐오를 키워가는 것일 터다.
"대기."
강후가 안영호를 멈춰 세우고는 그를 타깃으로 삼아, 횡 이동으로 은신에 성공했다.
그리고 한 층을 더 내려와 유리 창문 밖으로 아래를 살피니, 이질적인 광경이 보였다.
일단 입구에는 아까 봤던 미행자 둘이 연초를 태우며 서 있다.
주변에 사람은 없고, 미행자 둘의 바로 옆에는 정체불명의 검은 밴 하나가 있다.
'이건 너무 허술하지.'
입구만 막았을 리 없다.
건물의 출구는 엄밀하게 따지면 아래도 있지만, 위도 있다.
오히려 보란 듯이 입구를 막고 있는 것을 보면, 대놓고 옥상으로 가도록 그림을 짠 듯하다.
'하여간 나쁜 짓에서는 더 체계적인 놈들이야. 이게 다 채관형의 입김이겠지.'
일단은 안영호를 구하는 것으로 계획이 섰다.
어설픈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안영호의 이용 가치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일과 감정에 진심인 안영호의 목숨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 되어준다면?
그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보답하고 은혜를 갚으려 할 것이다.
성격이 애초에 그렇다.
원작에서도 정화 길드의 입장에서야 빌런이었지, 리코우 길드에게는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기다려. 내가 옥상으로 길을 뚫지."
"예?"
"위에 있는 놈들을 처리하겠다는 뜻이야. 당신은 그다음에 올라오면 되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 인사는 상황이 다 정리되면 듣자고. 일단 4층 계단에서 기다려. 5층 다음이 옥상이니."
"네. 알겠습니다."
팟.
강후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횡 이동으로 은신 상태에 돌입하며 사라졌다.
안영호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지만, 강후의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그사이.
강후는 열려 있던 창문 밖으로 몸을 걸친 뒤, 도약을 이용해 한 층씩 위로 올라갔다.
모든 체중을 고스란히 두 팔로 감당해야 했지만, 늘어난 근력과 체력이 이를 충분히 가능하게 해줬다.
게다가 아직 주변에 헌터도 없고, 공격 스킬을 활용 중이지 않았기에 은신도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3층에서 4층, 4층에서 5층, 그리고 난간까지 강후가 도착하는 동안.
1층의 두 미행자도, 옥상에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던 두 헌터도 강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순간.
난간에서 몸을 훌쩍 날린 강후가 옥상으로 들어오는 철문 앞을 지키고 있던 두 헌터를 향해.
파아앗...!
벼락같이 도약을 전개하며,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푸욱! 푸욱!
5등급 단검 아이템, 창공의 환희가 경쾌하게 둘의 목젖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 어떤 방어구나 장비로도 가장 방어하기 힘든, 목을 갈라내며 목숨을 끊은 순간이었다.
흔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목에 난 상처로 인해 쌔액쌔액,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어쨌든, 클리어.
안영호를 구할 구원의 도주로가 열렸다.
22화 진실의 눈, 안영호 (2)
* * *
"와...."
강후를 따라, 옥상에 도착한 안영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은신한 상태에서 창틀을 따라, 은밀히 올라간 것부터가 신기했다.
게다가 미행이랍시고 보냈으면, 최소한 레벨 7, 80은 족히 넘을 헌터 둘을 단번에 제압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한 번에 처리하지 못했다면,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든 동료를 부르든 했을 터.
하지만 일격에 목숨을 잃은 탓인지, 1층 입구의 미행자들은 여전히 주변만 살피고 있었다.
"일단 빠져나가자고."
강후가 손을 뻗었다.
남자 손을 잡는 취미는 없지만, 일단 이 건물에서 벗어나야 했다.
다행히 건물들마다 높낮이 차이가 크게 없고, 직선거리가 짧다.
그래서 강후가 절반 수준의 효율로 떨어지는 2인 도약으로도 충분히 뛰어넘는 것이 가능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도약으로 위치를 옮길 건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충분히 모던 바가 있던 건물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쉴 새 없던 도약도 끝이 났다.
중간중간 쉬는 타이밍을 잡아가며 도약을 쓴 덕분에 강후도 딱히 과민증을 자극받지는 않았다.
"후아. 후아. 후아."
고생을 한 것은 강후인데, 벌러덩 뒤로 누운 것은 안영호였다.
아직 실력 있는 헌터로 성장하기 전의 모습이라 그런지, 안영호에게는 어설픈 구석이 참 많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꼼짝없이 납치당할 판이었는데, 이렇게 목숨 걸고 저를 구해주셔서...."
안영호가 눈물을 글썽였다.
사실 목숨까지 걸고 구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을 해 준다면 바로잡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맨입으로 도운 건 아냐."
"물론 저도! 저도 아무 대가 없이 이 은혜를 갚으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안영호가 바짝 몸을 숙이면서까지 강후에게 최대한 예를 갖췄다.
진실밖에 말할 수 없는 헌터, 안영호.
그의 말에는 허풍이나 겉치레가 전혀 없다. 모든 것이 진심이다.
"저는 안영호입니다! 올해 스물셋입니다. 가명이라도 좋으니 은인의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정선규. 올해 스물아홉. 본명은 아니지."
"선규 형님! 너무 감사합니다!"
안영호의 성좌 특성에 맞게 진실을 말해 주었다. 아니, 진실을 말하게 됐다.
말을 하지 않으면 진실을 숨길 수 있지만.
일단 입을 열게 되면 진실을 말해야 한다.
안영호가 가명에 형님이라는 호칭까지 얹어 부르니 참 어색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이도 알게 된 만큼, 강후가 편하게 말을 놓았다.
"왜 정화 길드가 널 쫓지?"
"모르겠어요. 자력으로 국내에서 성장해 보고 싶었고, 그래서 외삼촌의 후원도 뿌리치고 온 건데."
"외삼촌이라면?"
"아, 저희 외삼촌이 일본 관서권에서 1위 길드 자리를 공고히 유지하고 있는...."
"리코우 길드."
"네, 맞아요! 아세요?"
"리코우 길드가 우리나라로 따지면 정화 길드 같은 곳인데 모를 리가."
"네! 그 리코우 길드의 부 길드 마스터를 하고 계세요. 길드 마스터는 외삼촌의 둘도 없는 친구죠."
"든든한 지원군을 두고도 굳이 국내로 온 모양이군."
"네. 삼촌 덕 본다는 얘기는 듣기 싫었거든요. 그리고 전 한국이 더 익숙하기도 하고요."
"음."
"스즈키 후미야. 제 외삼촌이에요."
익숙한 이름이다.
강후가 기억하는 원작의 내용과 안영호의 말에 아주 작은 불일치도 없었다. 거짓이 없다는 얘기다.
"어쨌든 제가 생각한 것과 길드의 운영이 맞지 않아 탈퇴를 했어요. 기간 계약이었던 것도 아니라서 문제 될 게 없었는데...."
"어떤 부분이 맞지 않았지?"
"길드 소속이 아닌 소속 불명의 헌터를 치료하는 일이 꽤 많이 있었어요. 분명 국내 헌터는 아닌."
"그리고?"
"지하 훈련장에서 패턴 분석을 이유로 같은 스킬을 계속 반복해서 사용하게 했습니다. 이미 숙련도 최대라서 굳이 더 올릴 것도 없는 스킬을 말이죠."
"패턴 분석이라고 했다고?"
"네. 분명히 그랬어요. 채관형 님이 그리 말하더군요. 헌터에게 가장 중요한 분석이라고."
"...."
짚이는 점이 있어, 강후의 양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유청화.
열세 개의 별 중.
다른 헌터에 대한 스킬 분석, 패턴 숙지를 바탕으로 흉내 낼 줄 아는 중국인 헌터가 존재한다.
강후의 스킬 강탈처럼 완벽하게 사용법을 인지하고, 최대 숙련도로 활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 효율의 1, 2할 정도는 볼 수 있을 만큼의 하위 버전으로 카피가 가능한 것이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라 '희생양'으로 하여금 계속 반복하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한데.
안영호가 말한 흐름이 유청화의 전형적인 스킬 카피 루트랑 거의 비슷했다.
부역자 엔딩 때문에 이미 지금 열세 개의 별은 거대한 흑막이 되어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그들 사이에 이런 커넥션이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국적을 초월하는 연대감을 가진 열세 개의 별이니, 쓸만한 스킬을 학습하게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이게 이렇게 흘러가나.'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화 길드는 그 자체가 거대한 위선의 길드다.
심지어 자기 의지로 길드를 탈퇴한 사람의 뒤를 쫓아 납치를 시도하다니.
물론 대외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헌터를 썼을 것이다. 꼬리가 밟혀도 언제든 자를 수 있는 헌터.
"일단 제 잔고에 있는 3억 원. 바로 드릴 수 있어요. 이건 아주 작은 사례일 뿐이고요."
"사양 않고 받겠어. 사실 목숨값치고는 싼 것일 수도 있고."
"맞습니다. 그리고 외삼촌에게 부탁해서 길드 차원에서도 꼭 보상을 해 드리겠습니다."
"이를테면?"
"일본에 오시면 제 소유와 명의로 된 던전에 대해서는 언제든 공략 가능하시게 해드릴 게요."
"금수저군."
"하하.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오늘 형편없이 신세를 지긴 했지만요...."
"데리러 올 사람은?"
"10분 내로 올 듯해요. 오는 길에 도로에서 조직 간의 전투가 있었나 봅니다. 막혔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정화 길드의 미행에 방치된 시간이 있었던 거군."
"일이 꼬일려니까 한도 끝도 없이 꼬여버린 거죠. 어쨌든 계좌부터 알려주시면 바로."
강후가 바로 계좌번호를 알려 주었다.
안영호의 말대로 그는 금수저가 맞다. 그래서 빨대를 좀 꽂아도 티는 전혀 안 날 것이다.
이후.
상황 정리는 빠르게 이뤄졌다.
안영호에게서 먼저 3억 원의 '성의 표시'를 받았고.
그다음, 강후는 안영호를 통해서 그의 외삼촌인 스즈키 후미야와도 통화를 마쳤다.
신강후에게는 없지만, 원작자로서는 가졌었던 5개 국어 능력을 활용한 막힘 없는 대화였다.
통화 내용은 간단했다.
길드 차원에서 조카를 구출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며, 원한다면 대외 공고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강후는 허례허식은 전부 생략하고, 향후 일본에서의 활동에서 도움을 받고 싶다고 했다.
물론 이 모든 대화 내용을 전부 문서화해서 보증하고 말이다.
전자 계약이 활성화된 지금, 거리에 상관없이 보증을 받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스즈키 후미야로부터 공식 약속을 받아낸 것은 리코우 길드 소유의 던전 공략 라이센스를 10차례 발급받기로 한 것이었다.
일본도 국내만큼이나 쓸만한 던전이 많은 만큼, 알차게 쓸 수 있는 카드 열 장을 갖게 된 셈이다.
"형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알려주신 연락처는 꼭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그쯤 했으면 가. 아까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을 하는 건지. 공짜로 도운 것도 아니고."
"그래도요. 정말 감사합니다!"
끝까지 감사하다는 인사를 입에 달고 있던 안영호.
그렇게 그와의 짧은 만남은 끝이 났다.
강후로서는 생각지도 않게, 일본 쪽에 인연의 끈이 닿은 셈이었다.
일이 잘 풀리려는 모양이다.
* * *
적당한 모텔을 잡아 푹 잠이 들었던 강후가 눈을 뜬 것은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이후로 경춘선과 경의중앙선을 번갈아 타며 양평역으로 향하자, 오후 4시 30분 즈음 도착했다.
적당히 초저녁을 앞둔 시간.
일에 착수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그때, 이예린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 아니, 어제 뭔 던전을 혼자서 그렇게 빨리 돌았어요? 애초에 솔플도 쉬운 던전이 아닌데!
"딱히 시간 계산은 안 했는데."
- 제가 생각한 것보다 선규 씨가 훨씬 빨리 나와서, 가드 계약 시간이 한참 남았다고요!
"하긴, 시간 계약일 테니."
- 어쨌든 뭐, 깜짝 놀랐단 얘기예요. 던전이야 일분일초라도 빨리 돌려주면 좋긴 하지만요.
이예린은 칭찬을 마치 혼내듯이 쏟아부은 뒤, 멋쩍은 듯 목소리 톤을 낮췄다.
곱씹어보면 빨리 공략해 줘서 고맙고 대단하다는 뜻으로, 이예린식 버럭 버전이었다.
강후가 별말 없자, 이예린이 바로 빈 오디오를 채웠다.
- 허정태 건에 대한 보상은 알고 있죠? 다시 확인차.
"물론."
- 다음 의뢰도 세팅되어 있어요. 이번은 잠입 의뢰인데... 보수는 세지만 정말 어려울 거예요.
"어디 의뢰입니까?"
- 정화 길드예요.
"...."
운명은 계속 이렇게 장난을 치는 모양이다. 물론 정화 길드의 의뢰라고 못할 것은 없지만.
- 어때요? 구미가 당겨요?
"보상만 확실하다면."
- 최우선으로 봐 달라고 한, 던전 공략 라이센스 대여 위주로 알아보고 있어요. 더 알아볼게요.
"허정태를 처리하면 연락하죠."
- 알겠어요. 파이팅!
"...."
응원 멘트가 뜬금없기는 했지만, 별생각 없이 전화를 끊었다.
당분간은 어떤 의뢰를 하든 간에 최우선 순위는 '던전'이다. 즉, 레벨업을 무조건 우선시한다.
허정태 생포 의뢰도 던전 임대권이 없었으면 시작도 안 했을 것이다.
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강후가 시계를 봤다.
너무 밝은 시간도 별로고, 그렇다고 완전히 해가 진 이후도 별로다.
허정태가 레벨이 높은 만큼, 강후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짜서 굴릴 생각이었다.
어설프게 밝은 시간.
그 시간이 허정태 같은 돌격형 캐릭터의 시야를 교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
천천히.
강후가 허정태의 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평역 인근에는 사람이 붐볐지만, 어느 누구도 강후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 * *
오후 6시.
서쪽 하늘로 충분히 넘어간 해가 붉은 노을을 만들어내며, 은근한 땅거미를 드리우기 전.
허정태가 집을 나섰다.
분명 그는 남자지만, 겉으로 봤을 때는 영락없는 여자였다. 여장을 한 것이다.
긴 머리에 대격변에 가까운 수준급의 메이크업, 여기에 보정 속옷의 힘까지 더해지자....
천생 여자였다.
다리도 적당히 가늘어, 더 남자임을 짐작할 수 없게 했다.
허정태는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부터 한 남자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정화 길드의 채관형이다.
- 약속대로 이영민의 삼촌을 죽이면 남은 2억을 주지. 어때?
"저야 뭐, 챙겨주시면 다 합니다."
목소리만큼은 숨길 수 없는 남자지만, 밖에선 입을 다물면 끝이다.
- 그래, 수고해.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이영민의 삼촌이 죽으면, 이영민은 정화에 충성하게 되는 겁니까?"
- 그렇지. 우리가 길드 차원에서 삼촌을 죽인 범인이 '붉은 눈'이라고 할 거거든.
"역시...."
- 그러면 갈 곳 없는 이영민은 우리 길드에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게 되겠지.
"치밀하십니다."
- 어쨌든 끝나는 대로 연락해. 보수는 바로 지급할 테니까.
"옛."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1층이었다.
위장은 완벽했고, 항상 그랬듯이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터였다.
양평 헌터 치안청의 치안관들도 코앞에서 몰라보는 판에 누가 알아보겠는가?
한데 바로 그때.
"허정태."
빌라 앞, 화단에 삐딱하게 앉아있던 한 남자가 정확히 자신을 응시하고는 이름을 불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켜본 적 없는, 심지어 방금 통화한 채관형조차도 알지 못하는 거처.
그 앞에 보란 듯이 강후가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너, 누구야."
공들여 화장한 허정태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23화 허정태 (1)
"악취미가 있네. 어지간한 취향은 존중하는데, 여장하는 재주는 좀 그렇지 않나."
"어디서 왔냐고 묻잖아.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내가 사는 곳까지 알고 있냐고."
"대답하면?"
"뭐가 대답하면이야. 새끼야. 내가 묻는 거 안 들려?"
"됐고. 덤벼라. 콩밥 쳐 먹이러 온 거니까, 둘 중 하나가 뻗어야 상황이 끝날 거다."
강후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살살 약을 올리자, 허정태가 쓰고 있던 긴 머리의 가발을 벗었다.
그러자 밤톨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릴 정도로 반삭으로 밀어버린 머리가 드러났다.
머리 한쪽에는 '땜빵'까지 있는 것이 영락없는 까까머리 모습, 그 자체였다.
[어둠의 사제]
[악성향의 성좌. 중립, 선 성향의 성좌를 모시는 헌터를 상대로 전투 능력이 25% 상승합니다.]
'뜻하지 않은 버프를 줬네.'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차원 강탈자는 풍기는 느낌에서 악성향 같다는 느낌을 받지만, 실상은 중립 성향이다.
어찌 보면 '신강후'와 구원자의 운명을 함께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선 성향에 더 가까워진다.
선이든 중립이든, 악성향인 어둠의 사제와는 결이 다르니 허정태는 버프를 얻는 셈이다.
원작에선 허정태에 대해 이렇게 디테일한 설정을 잡아주진 않았다. 외모 묘사나 사는 곳에 대한 정보 정도가 고작이었다.
한데 붙은 성좌를 보니 빌런에 알맞게 조형이 된 모양이다.
또한 이런 성좌의 능력 덕분에 원작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늘 실력이 좋게 느껴졌던 것일지도.
"지금이라도 갈 길 가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야. 난 헌터 죽이는 거, 신경 안 쓰거든."
"난 아닐 거 같냐?"
강후가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여기 움켜쥐었던 단검으로 많은 헌터의 목숨을 끊었다.
물론 다 죽을 만한 놈들이었고, 그것에 대해서 동정이나 연민 같은 감정은 없었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하는 험악한 세상. 그곳이 바로 원작이 만들어낸 삭막한 지금의 세계다.
"그래. 그럼 이젠 죽는 느낌도 한번 경험해 보라고!"
촤악!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옷소매 속에서 손가락 한 뼘 크기의 뭔가를 꺼낸 허정태가 그것을 꽉 쥐었다.
그리고 마나를 불어넣자, 순식간에 길이가 쭉 늘어나며 장창의 모습으로 변했다.
'강격의 장창.'
어떤 아이템인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일종의 여의봉이랄까. 물론 대책 없이 늘릴 수는 없지만, 휴대하기 좋게 줄이는 건 수월하다.
타탓!
이윽고 허정태가 장창을 깊숙하게 내지르며, 강후의 동선을 제한하기 위한 흐름으로 들어왔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꺾이는 사선의 형태로 공격을 했기에, 어설프게는 정면 돌진이 되지 않았다.
깡!
강후가 파고든 장창을 단검인 창공의 환희로 쳐냈다.
길이는 장창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짧지만, 어차피 쳐낼 면이 넓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일단 납치 스킬은 아꼈다.
이런 눈치 빠른 놈은 한 번 스킬을 꺼냈다가 실패하면, 다신 노림수를 갖기가 어렵다.
일종의 필살기 개념으로 준비해 둘 생각이었다.
승부는 결국 한 방 싸움에서 끝나니까.
스읏, 쾅!
허정태가 장창을 그대로 지면에 내리쳤다. 강후의 위치와 관계없이, 의도된 내리침이었다.
우우웅!
그러자 지면 위로, 발생한 충격파가 저공비행으로 날아오며 순식간에 강후를 덮쳤다.
"...!"
한 방 먹었다.
단순 충격파가 아니라, 상대를 위로 쳐올리는 탄성을 가진 파장이었다.
상승 탄력에 휘말린 강후의 몸이 붕 떠올랐고, 이에 연계해 허정태가 다음 공격을 이어 나갔다.
쿠아앙!
그것은 장창을 허공에 반달 모양으로 휘저으며 날리는, 일종의 바람 공격이었다.
정확히는 날카로움을 담고 있는 바람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칼과 같은 바람이랄까?
어쨌거나 무방비로 허공에 떠버린 상태.
도약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즉시 활용하기 어렵기에, 다른 수를 썼다.
위이이잉!
바로 보호 방벽이었다.
쿠웅!
칼바람이 보호 방벽을 때렸지만, 듬직한 내구성으로 어렵지 않게 방어를 해냈다.
쿠아앙! 쿠앙!
허정태가 두 차례 더 칼바람을 날렸지만, 강후는 보호 방벽의 뒤로 이동하며 쉽게 회피했다.
"어디 소속이냐?"
"없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런 스킬은 길드에서 밀어주지 않으면 안 나올 텐데?"
"칭찬은 고맙게 듣지."
때아닌 허정태의 인정에 강후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전문적으로 육성 과정을 밟은 것 같단 말이겠지. 길드 차원에서 컨설팅도 해 주고 말이다.
그것은 애초에 암살자 클래스가 방어에 관련된 스킬과 거리가 멀다는 '선입견' 때문이기도 했다.
강후는 이런 스킬을 억지로 학습한 것이 아니라, 강탈하여 페널티가 없는 자신의 스킬로 만들었다.
완성도가 높다 보니,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 전문적으로 훈련한 스킬처럼 느껴질 수밖에.
강후가 단검을 고쳐 쥐었다.
보호 방벽은 이제 노출이 됐으니, 녀석의 계산에 이 스킬은 무조건 들어갈 것이다.
임기응변으로 한 차례의 위기는 넘겼지만, 다음 카드가 넉넉하게 있는 건 아니다.
'한 번 볼까.'
파상공세로 몰아붙이려던 강후가 즉석에서 전략을 수정했다.
전략적으로 소모전을 하기로.
무의미한 소모전이 아니다.
강후의 고유 재능 중에 하나인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은 상대의 습관을 캐치하기 매우 좋다.
만약 어떤 특정한 공격이나 노림수 전에 습관처럼 보여주는 사전 동작이 있다면?
예리하고도 정확한 눈썰미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때부터 강후가 몸을 낮추고, 방어를 우선시 할 수 있도록 단검을 역수(逆手)로 쥐었다.
공격보다 더 어려운, 하지만 그래서 적의 수를 꼼꼼하게 살필 수 있는 방어전이 시작됐다.
* * *
근 5분에 가까운 시간을 강후는 방어로만 일관했다.
단 1초에도 한두 차례의 공격이 연이어 들어올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5분은 정말 길었다.
'항마 능력은 뛰어나군.'
그 과정에서 강후는 얕은 혼돈이 아예 걸리지 않는 허정태의 능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울러 시야 강탈은 유사한 스킬에 당한 사례가 많은지, 장창으로 시야를 가려 영리하게 피했다.
도약은 장창을 쭉 뻗는 거리 견제에 쉽게 각이 보이지 않았고.
횡 이동은 강후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허정태가 등 뒤편으로 먼저 창을 뻗기에 껄끄러웠다.
강후는 허정태의 기세가 제법 높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실상 허정태의 속내는 정반대였다.
모든 공격 수단을 다 써봤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강후가 뚫리지 않았다.
보호 방벽이 너무 껄끄러웠다.
거기에 강후가 후방으로 도약하거나, 지형지물을 바탕으로 횡 이동을 하며 은신을 해대는 바람에 나름 노림수랍시고 펼친 공격들이 죄다 실패로 돌아갔다.
강후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지금껏 이렇게 상대를 '깨끗하게' 두어 본 적이 없는 허정태로서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일까.
허정태는 강후의 레벨을 110인 자신보다 훨씬 높은 160, 170 정도로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완벽한 착각이었지만, 그만큼의 완성도를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암살자 계열 외 스킬을 사용할 줄 안다는 점에서, 전문 육성된 '킬러'의 냄새도 맡았다.
한편.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해. 힘이 실린 공격을 할 때는 무조건 허리를 왼쪽으로 살짝 비튼다.'
강후는 방어 일변도로 일관했던 시간 속에서 유의미한 단서 하나를 얻었다.
허정태의 일격에 관련된 사전 동작.
바로 허리 비틀기였다.
본인이 아는 습관이라고 하기에는 비트는 폭이 매우 적었다. 작정하고 보니 겨우 보이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습관을 역이용해서 상대를 끌어들이는 케이스도 있지만, 그 수준은 아니라고 봤다.
사실 간 보기 차원에서 한 번 역공을 취하려는 모션도 보여줬었기 때문이다.
낚시성으로 보여준 습관이었다면, 그런 모션을 취했을 때 다른 반응이 나왔을 거다.
'그렇다면.'
계산이 끝난 강후가 전속력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예 보란 듯이 허정태를 향해 시야 강탈 스킬을 썼다.
막힐 것을 계산하고 사용한 스킬이기에 명중에 대한 욕심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
입술을 굳게 다문 허정태가 장창을 수평으로 들어 시야 강탈 스킬의 영향을 막아냈다.
그 시간만큼, 강후는 허정태에게 더 가까이 접근했다.
바로 그때.
'지금이다.'
허정태가 허리를 왼쪽으로 살짝 비트는 동작이 보였다. 힘을 실어 공격하기 전의 사전 동작이다.
그것은 즉, 지금 스킬을 회피하는 동작에서 바로 공세로 전환할 것임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신속한 공수 전환의 예고편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강후가 우직하게 돌진했다.
그리고 단검을 앞으로 쭉 겨누며, 허정태의 복부를 노릴 것임을 대놓고 암시했다.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드는 거라면, 이대로 반격을 제대로 맞고서 쓰러지는 그림이 되겠지만.
사전 동작을 확인했을 때 맞춘 다음의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파앗!
공중 도약이었다.
"아?"
강후의 노림수를 읽은 뒤, 나름 멋진 회피에 이은 역공을 펼치려고 했던 계산이 어그러졌다.
장창이 앞으로 쭉 뻗어져 나간 시점에 강후는 정확히 허정태의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허를 찔려도 제대로 찔렸다.
허정태의 양쪽 어깨도 순식간에 여러 군데를 찔렸다.
푹푹푹, 하는 소리와 함께 양쪽 어깨 위에서 불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전신으로 뻗어져 나갔다.
단검이 정확히 세 번을 어깨 위를 찍고 지나간 것이다. 그것도 제법 깊숙하게 말이다.
'아직 부족해.'
혈화를 쓰기는 조금 이르고, 또 상처가 부족하다. 강후가 한 타이밍을 더 가기로 했다.
허정태를 죽일 생각이었으면 방금 정수리를 찔렀을 것이다. 그럼 이미 상황은 종료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목적은 '생포'였던 만큼, 전투 능력의 무력화가 중요했다.
강후가 다시 쇄도했다.
방어자가 된 허정태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게도, 아까와 공격 방식이 또 같았다.
먼저 시야 강탈을 던지고, 이를 막으려는 허정태의 복부를 또 한 번 노리는 '척'하는 식이었다.
양자택일의 선택지에 걸렸다.
강후는 실감했다.
지금의 허정태는 풋내기라고.
왜냐면 양자택일 선택지를 강요받는다는 것은 무조건 방어자에게 불리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씨...."
허정태의 찌푸린 미간 사이로 짙게 발라뒀던 파우더가 땀에 섞여 흘러내렸다.
허정태는 배를 막았다.
앞서 쓴 레퍼토리를 또 쓸 리는 없다는, 누가 그런 뻔한 수작질을 하겠냐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그 뻔한 수작질이 한 번 더 나왔다. 이번에도 강후의 몸은 공중을 날고 있었다.
푹푹푹!
"...발."
허정태가 찔린 곳을 또 찔렸다.
한 번 찢어진 살점을 다시 한번 난도질하자, 이제는 상처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쏟아져 나오는 피의 양이 방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혈화]
탁!
혈화 스킬의 사용과 함께 강후가 손가락을 튕겼다.
다음 순간.
퍼퍼퍼펑!
허정태의 머리 위로 붉은 피의 꽃이 만개했다.
24화 허정태 (2)
* * *
지옥을 보았다.
그 말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이 지금의 상황에 있을까.
허정태는 강후가 손가락을 튕긴 순간부터 시작된 어깨에서의 폭발에 경악했다.
폭탄을 설치한 것도, 폭발할 만한 무언가를 던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강후가 신호하듯 손가락을 튕겼을 뿐인데, 양쪽 어깨에서 그야말로 피 분수가 일어난 것이다.
차캉!
강격의 장창이 떨어졌다.
놓치고 싶어서 놓친 게 아니라, 쥐고 있을 힘을 손가락에 전달할 수가 없었다.
너덜너덜해진 어깨는 흐물거리는 관절 인형처럼 제멋대로 움직였고, 팔은 축 처져 있었다.
아무리 인상을 쓰면서 안간힘을 써도, 도무지 양쪽 어깨 아래로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 대만 더 맞자."
"이 개새끼야...!"
허정태의 외침이 무색하게 강후가 도약과 함께 달려들어서는 팔꿈치로 그의 얼굴을 강타해 버렸다.
목이 완전히 뒤로 꺾여버릴 정도의 힘 앞에서 제아무리 허정태라고 한들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공중에서 반원을 그리며 나자빠진 허정태는 그대로 기절했다.
완전한 블랙 아웃이었다.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강후는 방심하지 않고 쓰러진 허정태의 양쪽 손바닥에.
푸우욱! 푹!
예비용으로 들고 다니던 연습용 단검을 꽂아 넣었다. 이걸로 매듭은 완벽하게 지어졌다.
그리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 네, 양평 헌터 치안청의 담당 치안관 윤경휘입니다. 무슨 도움을 드릴까요?
"여기 문성 빌라 앞입니다. 수배자인 허정태를 잡았습니다만."
- 예?
"출혈이 좀 있어서 시간이 늦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빨리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아! 알겠습니다! 바로 출동하겠습니다!
서울 밖의 치안청 대부분이 '식물' 치안청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여긴 그래도 좀 돌아가는 모양.
전화를 끊기 무섭게 신고가 접수됐다는 문자와 함께, 다섯의 치안관이 출발했다는 연락이 왔다.
이쯤이면 허정태를 안정적으로 이송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듯했다.
강후는 허정태가 떨어뜨린 강격의 장창부터 들었다.
어차피 헌터 치안청에 인계하면 되는 것은 허정태의 신병(身柄)일 뿐, 아이템은 관할 외다.
별도로 도난당한 아이템 신고가 있던 것도 아니고, 일종의 불문율 같은 것도 있고 말이다.
[강격의 장창 - 무기]
[등급 : 4등급]
[근력 +100]
[원하는 만큼 장창의 길이를 자유자재로 줄일 수 있습니다. 단, 최대 길이는 정해져 있습니다.]
주 무기로 써먹을 일은 없겠지만, 유사시에 예비 무기로는 써먹기 좋을 듯했다.
단검이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타깃에게서 잘 뽑히지 않거나, 멀리 날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 예비로 쓰면서 시간을 벌 수 있는 무기가 있으면 좋을 터.
장창은 그런 예비품이 될 듯했다.
이어서.
강후가 허정태의 피 묻은 손가락에서 반지도 하나 빼냈다.
보통 반지는 부담 없이 여러 개를 차고 다닐 법도 한데, 지금은 하나만 착용하고 있었다.
[사냥꾼의 피 - 반지]
[등급 : 5등급]
[체력 +50]
[체력이 50% 미만으로 떨어질 경우에 회복 능력이 기존의 2.5배로 상승합니다.]
"볼 것도 없네."
강후가 바로 반지를 꼈다.
체력이 50 올라간 것만으로도 몸의 컨디션 변화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체력 197.
이 정도면 수준급 운동선수급의 체력은 되고, 레벨 80대의 체력형 검사와 스탯이 비슷하다.
물론 착실히 쌓아 올린 베이스를 마나 과민증으로 깎아 먹겠지만, 어쨌든 꽤 높다는 얘기다.
체력은 강후가 처음부터 욕심냈던 스탯인 만큼, 이렇게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선 안 됐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잡템'을 얻었지만, 강후에게 쓸만한 아이템은 아니었다.
이 녀석들은 이예린이나 암시장을 찾아 팔 생각이었다.
어림짐작의 예상 판매가는 2억 정도다.
"후우."
그제야 강후가 밀린 한숨을 토하며, 인사불성이 된 허정태를 깔고 앉았다.
딱히 앉을 공간도 마땅치 않았던 차에 나름 푹신푹신한 의자 같아서 편했다.
선명한 까까머리.
코를 찌를 듯한 향수 냄새.
여기에 역설적으로 발랄하게 챙겨입은 A라인 스커트에 스타킹까지....
"정말 환장할 모양새군."
허정태의 배 위에 앉은 강후가, 성별의 느낌이 완전히 갈리는 위아래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추한 꼴이다.
* * *
현장에 출동한 치안관들은 가장 먼저 허정태가 이렇게 치안청과 가까운 곳에 살았단 사실에 경악했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강후에게 쏠렸다.
강후와의 통화를 맡았던 윤경휘가 먼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번 일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일은 치안청에서 공시한 대로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추가적인 감사패 전달도 있을 수가 있겠고요."
뻔한 얘기라서 딱히 감흥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마침 허정태의 속주머니에 알사탕 하나가 있었기에, 그거나 꺼내서 열심히 오물거리는 중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서 공시를 원하시는지요? 아니면 원치 않으시는지요?"
"묻으시죠. 큰일도 아니고."
공시해 봤자 이름뿐인 명성밖에 남는 게 없는데 의미가 없다.
제대로 이름을 남겨야 할 때는 나중에 따로 있을 것이다. 하찮은 녀석을 처리했을 때가 아니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은 하나만."
"네. 혹시 어떻게 허정태의 소재지를 파악하신 겁니까? 지금까지 소재 불명이었는데요."
"결과가 중요하지 않나요?"
"...그렇긴 합니다만. 너무 신기해서요. 저희가 수배를 여러 군데에 했던지라."
"저 녀석, 더 피를 쏟으면 상태가 완전히 나빠질 수도 있으니 그것부터 신경 쓰시고. 보상 건으로 넘어갑시다."
강후가 이야기 방향을 돌렸다.
그럴듯하게 거짓말로 설명하기도 그렇고, 무엇보다 설명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후 윤경휘의 지시 아래, 치안관 다섯이 각자 흩어졌다.
둘은 허정태의 병원 후송 및 치료를 맡았고, 둘은 현장에서 허정태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윤경휘가 강후를 맡아서는 치안청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현금 보상을 지급했다.
통장 잔고에 딱 3억 원이 찍혀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굳어 있던 강후의 얼굴도 살짝 펴졌다.
이 세계에서는 아무리 달콤하게 말하고 포장해도, 실체가 전달되기 전까진 아무 의미가 없어서다.
하지만 이제 보상이 확인됐으니 마음이 어느 정도 놓이는 것이다.
물론 보상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이건 사전에도 공시된 목록에 있던 던전 목록입니다. 레벨 100 미만이고, 세부 정보가 있습니다."
"잠시 살펴도?"
"물론입니다. 이리 큰일을 해주신 분에게 저희가 감히 재촉할 수 있나요. 편히 보십시오."
윤경휘는 처음부터 철저히 저자세였다. 애초에 헌터 치안청의 포지션이 그랬다.
과거, 헌터의 시대 초창기처럼 떵떵거리는 위세가 이제는 발톱의 때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뒷골목 고양이보다도 못한 신세라고 볼 수 있다.
강후가 목록을 쭉 훑었다.
1개월 임대권이면, 적어도 십수 차례는 공략할 수 있는 던전이다.
관심 있게 보는 내용은 미들 보스, 메인 보스가 많은 던전이다.
어쨌든 스킬 강탈을 빼놓을 수가 없는 만큼, 이 부분에서 확실한 이득을 취하고 싶었다.
그때.
강후의 시선이 한 던전 목록에서 멈췄다.
'이 던전. 특성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다.'
원작에서 언급된 적이 있는 던전이었다.
바로 특성 변화.
던전 내부 생태계와 구성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완전히 뒤바뀌는 변화다.
그 경우 미들 보스, 메인 보스 할 것 없이 전부 바뀌는 것은 물론, 지형 구조도 전부 바뀐다.
'미들 보스, 메인 보스가 각 하나지만, 특성 변화가 일어나면 총합 넷. 각기 다른 스킬 네 개야.'
마침 변화 시기도 이 시기의 4월 말일로, 4월 초인 지금과 1개월 임대 타이밍도 맞았다.
다른 던전은 메인 보스 하나에 미들 보스 둘인 곳이 최대 수치였으므로.
더 둘러볼 것도 없었다.
스킬을 최대 4개까지 강탈할 수 있는 이 던전을 이길 수 있는 라인업은 없을 듯했다.
"광주송정역. 3번 출구 근방에 있는 이 던전으로."
"임대 시점은 언제부터로 하실까요? 원하는 시기로부터 정확히 1개월을 확보해드립니다."
"일주일 후로."
강후가 시기를 정했다.
그라운드 제로에 대한 계획, 이예린이 제안하려고 하는 잠입 의뢰, 대참수 스킬의 재학습에 대한 건도 있는 만큼.
이것들을 먼저 해결하고, 던전에 도전해 볼 참이었다.
게다가 광주송정역 인근은 광주 광산구에 위치한 곳으로 세력 판도의 파악도 필요했다.
현재 대전 뺨칠 정도로 격렬하게 이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그쪽이기 때문이다.
이클립스와 흑사자, 이예린의 용병대 청안처럼 반목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애교 수준이다.
"그럼 일주일 후, 자정부터 던전 임대 라이센스를 발급하겠습니다. 31일 후에 종료됩니다."
"확인."
강후가 헌터 등록증 번호를 넣고, 라이센스를 검색하는 어플을 통해 대기 상태임을 확인했다.
모든 보상 수령은 끝났다.
윤경휘는 보상 지급 과정에서 자신의 본명을 알게 됐겠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나랏돈과 보상을 타 먹으려면, 정체는 숨길 순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양평 헌터 치안청을 떠나는 길.
입구까지 강후를 배웅나온 윤경휘가 물었다.
"어느 쪽 의뢰였습니까?"
"청안."
"아하, 그러셨군요. 그쪽 용병이시라면 믿을 만하죠."
"고생하셨습니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뵐 일이 있으면 좋겠네요."
강후는 절대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며 치안청을 떠났다.
괜한 꼬리가 밟히기 전에 양평은 조금 일찍 떠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정화 길드의 움직임은 늘, 생각하는 것보다 몇 박자는 빠르게 앞서나가기 때문이다.
15분 후.
허정태가 치안관들의 입회 아래 응급 치료를 받을 시점에 채관형은 부하로부터 올라온 보고를 받고 있었다.
바로 허정태에 대한 건이었다.
꼼꼼한 채관형의 성격에 맞춰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보고서.
내용을 본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허정태가 나와 통화한 직후에 당했다고? 제대로 손도 못 쓰고 양팔이 병신이 됐어?"
"...그렇다고 합니다."
"치안관 놈들 짓이야?"
"아닙니다. 저 정도로 허정태를 압도할 실력자가 양평 헌터 치안청에는 없습니다."
"그럼 누군데?"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누군가가 허정태를 완전히 제압했고 치안청에 넘겼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니까? 도구 하나쯤 사라진 것은 상관없어. 그런데 내 도구를 함부로 건드린 새끼가 누구냐고!"
"죄송합니다. 허정태를 찾아가 볼까요?"
"신병 인도가 끝난 범죄자 놈에게 찾아가서 뭐 하려고? 됐고. 주변 CCTV라도 뒤져서 알아봐."
"예, 알겠습니다."
"어제 안영호 일도 그렇고, 대체 어떤 새끼가 계속 어깃장을 놓는 거지...?"
콰드드득.
심기가 불편해진 채관형이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그대로 찌그러뜨렸다.
어제부터 자신이 지시한 일들이 마치 누군가 약을 올리기라도 하듯, 전부 꼬이고 있었다.
세간의 사람들에게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그지만, 본래의 실체는 지금 같은 모습이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
그것은 귀신같이 채관형의 일을 방해하는 의문의 인물, '강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25화 허정태 (3)
* * *
경의중앙선을 탈 요량으로 양평역에 도착했을 즈음.
한 무리의 헌터들이 역에서 나와, 정확히 허정태의 집이 있는 문성 빌라 쪽으로 뛰었다.
"문성 빌라라고! 뛰어!"
"현장 CCTV는 제가 확보하겠습니다!"
"비용이 얼마든 상관없으니, 무조건 달라고 해!"
"예!"
옷깃을 흩날리며 열심히 달리는 그들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정화 길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CCTV를 운운할 만큼, 현장에서 자료를 확보해야 할 이슈는 강후와 허정태의 일밖에 없어서다.
'정말 빠르군.'
허정태와의 전투가 조금만 길어졌어도, 신고가 조금만 늦어졌어도 저 얼굴들을 볼 뻔했다.
언젠가는 정화 길드와 공식적으로 접점이 생길 일이 있기는 있겠지만....
굳이 지금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강후의 생각이었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강후는 원작과 다르게 허정태가 헌터 치안청에 체포된 이후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분명히 허정태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일단 채관형이 그를 다시 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채관형의 충실한 도구로서 활약하던 헌터 살인마, 허정태도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전혀 다른 형태로 살인마의 길을 걷게 될 수 있지만, 정화 길드와 손발을 맞출 일은 없겠지.
'이렇게 싹을 자르는 거다.'
강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이 변화는 아주 큰 변화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거대한 나비효과가 되어 미래를 뒤집을 것이다.
장시환과 그 일당들이 당연하게 취해야 할 기연을 빼앗고, 하수인을 하나씩 잘라내 버린다면?
그만큼 미래의 그들에게는 있어야 할 힘이 사라질 터.
반대로 그 힘만큼 강후는 그들을 따라잡게 될 거다.
'재밌어.'
강후가 웃었다.
지금 경의중앙선을 타고 향하려는 곳은 방금 즉흥적으로 떠올린 목적지인 '양수역'이었다.
원작에서 장시환이 기연으로 재미를 본 던전이 바로 양수역에 있기 때문이다.
장시환의 '마나 부족'을 해결해 주기 위해, 원작자로서 마련한 터닝 포인트였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 덕분에 강후는 마나 부족에 대한 갈증은 전혀 없었다.
부작용이 심한 증세이기는 하지만, 순기능만 생각하면 사실 마나 무한이나 다름없어서다.
강후가 양수역의 던전에 주목한 이유는 마나가 아니었다.
미들 보스와 메인 보스가 누구냐였다.
던전과 몬스터 레벨은 75 수준이기에 강후에게 딱히 부담은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가운데 두 보스에게 강탈할 수 있는 스킬이 바로.
[그림자 걸음]
[스킬 강화(1회)]
이렇게 두 가지였다.
특히 메인 보스에게 얻을 수 있는 스킬 강화는 '궁극기'라고 불리는 스킬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숙련도가 최대인 스킬만 궁극기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기에 정말 귀한 기회이기도 하다.
-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멀어지는 기차의 창밖을 따라서 더 멀어져가는 정화 길드 헌터들의 뒤통수가 보였다.
현장의 CCTV를 확인해도 아마 자신의 뒷모습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허정태와 싸울 때, 그것까지 고려하고 짜놨던 판이고 동선이기 때문이다.
물론 머리 스타일이나 옷이 드러났을 수는 있지만, 그거야 적당히 바꾸면 그만이다.
'어쨌든 장시환이 오기 전에.'
이득을 볼 것들은 남김없이 선점한다.
강후는 대전제를 항상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시환의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모든 요소들은 자신이 반드시 차지한다.
그것이 기연이든, 사람 사이의 인연이든, 혹은 숨겨진 히든 피스든 말이다.
다 빼앗아야 한다.
* * *
양수역에서 내려서 쭉 이동하다 보면 멀지 않은 곳에 부용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나온다.
해발은 썩 높지 않지만, 인적이 무척 드물다 보니 사실상 무인 지대나 다름없는 산이기도 했다.
헌터의 시대가 열리기 이전에도 양수역 인근은 수도권에 비해서는 매우 조용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치안까지 불안정해진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곳에 터를 잡고 거의 평생을 살아온 노인들만이 작은 텃밭 정도만 일구며 살아갈 뿐이었다.
범죄 조직의 헌터들도 노인들은 이래저래 가치가 떨어져, 굳이 그들을 해코지하려 하진 않았다.
'부용 황주 농원으로부터 반경 100m 안. 늑대의 옆모습을 빼닮은 바위가 표지판처럼 있는 곳.'
기억을 되짚으며 이동했다.
던전에서 흘러나오는 마나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마나 추적으로는 찾을 수 없는 던전이었다.
애초에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던전인 것이다. 찾아 들어가면 첫 방문자가 되는 셈이다.
제초는 당연히 되지 않은, 온갖 수풀과 잡초가 무성한 공간을 한참 들어가야 했다.
그래도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탓에 오래 헤매지는 않았다.
게다가 부용 황주 농원은 저녁에도 부지런히 사람 손길이 닿는 곳이라 주변 조명도 제법 있었다.
'찾았다.'
30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한 끝에 던전 입구를 찾아냈다.
던전 입구는 바위와 바위틈새에 있어서 정말 작정하고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면 찾을 수 없을 장소였다.
"좋아."
강후가 단검을 다시 움켜쥐었고, 언제든 예비로 꺼낼 수 있도록 장창도 준비했다.
허정태에게 빼앗은 '강격의 장창'은 앞으로 쓰임새가 많을 것이다. 임기응변용으로도 좋다.
스르륵.
이윽고 들어간 던전.
처음 '방문자'를 맞이하는 던전의 하늘이 회백색 구름의 음침함으로 시작을 열었다.
그리고 암살계열로 구성된 미들 보스 특성에 맞게 던전 내의 기본 몬스터들도 특징을 드러냈다.
바로 검은 복면인.
무협 소설이나 영화에서 볼법한 무인들이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린 채,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재밌겠군."
강후가 자세를 낮췄다.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놈들이 알아서 다가올 듯했다.
파팟. 팟. 파팟.
열 명에 달하는 복면인들이 저마다 주변 바위와 나무 따위를 디딤대로 삼아 접근했다.
이리저리 현란하게 움직이면서 좌우로 몸을 비트는 것이 꽤 잔재주처럼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강후의 뛰어난 동체 시력은 한 명의 누락도 없이 완벽하게 복면인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리고 복면인 몇이 선두의 복면인을 방패 삼아, 허공으로 훌쩍 몸을 날렸을 때.
퍼억!
"크헉!"
강후가 기습적으로 허리에서 꺼낸 강격의 장창을 쭉 늘려서는 복면인을 후려쳤다.
무한정으로 늘어나지는 않지만, 원래 길이까지는 순식간에 쭉 늘릴 수 있는 장창인 만큼.
복면인이 단검을 든 팔을 뻗으며 접근하기 전에 우선적인 경로 차단이 가능했던 것이다.
단지 후려쳤다, 라고만 생각했는데 공격을 당한 복면인은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있었다.
일격에 골로 간 것이다.
"암살계가 다 그렇지. 깃털처럼 가벼워서 부서지기도 좋아."
강후가 자신의 몸을 슬쩍 훑었다.
동병상련이다. 제법 근육이 붙긴 했어도 암살자 특유의 부족한 내구성은 어쩔 수 없다.
"극단적인 거리두기를 가장 싫어하기도 하고."
후웅! 후웅!
장창을 휘둘렀다.
퍼억!
그 와중에 몸을 낮춰 접근을 시도하던 복면인 하나가 장창에 정수리를 내리 찍혀 고꾸라졌다.
움직임을 쫓지 못한다면 장창을 통한 견제가 의미 없지만, 지금은 경우가 전혀 다른 것이다.
눈을 통해 움직임이 보이니, 길이가 긴 장창을 이용해서 미리 경로를 차단하는 것이 쉽다.
단검과 장창, 그 절대적인 길이의 차이만큼 복면인들은 고스란히 손해를 보고 있었다.
파앗!
단숨에 둘을 제압한 강후가 이번에는 기습적으로 도약을 활용하며 그들에게로 붙었다.
무리 사이로 강후가 들어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복면인들이 당황하는 사이.
푸슉! 푹! 푸욱!
강후의 단검이 아주 약간의 힘만 들여서는 세 복면인의 목젖을 가볍게 찌르고 갔다.
'가볍게' 찔렀지만, 그들에게는 '무겁게' 죽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한 방이었다.
그렇게 거리를 좁히자마자, 또 장창을 활용해 후려치기 시작하니 손을 쓸 길이 없었다.
열 명의 복면인은 그렇게 강후의 옷깃 한 번 제대로 그어보지 못하고 모조리 죽어버렸다.
"시시하군."
강후가 코웃음을 쳤다.
레벨 75 수준의 일반 몬스터는 이제 상대하기가 전혀 어렵지 않다.
이 정도면 던전에 대한 눈높이를 100으로 상향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듯싶었다.
승승장구.
강후가 앞길을 가로막는 복면인을 계속 제압하며, 던전 중반 지점까지 빠르게 나아갔다.
애초에 초소형 던전이다 보니까 진행이 빨랐다. 그만큼 몬스터가 많지도 않고.
장시환의 기연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설계된 던전이라는 티가 팍팍 나는 장소인 셈이다.
그렇게 입장한 지, 20분 정도가 지났을까?
미들 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은 잔영.
평범한 모델링을 복사 붙여넣기를 한 듯했던 복면인들과 달리.
길게 늘어뜨린 흑발에 붉게 빛나는 눈, 우수에 잠긴 눈빛까지 담긴... 나름 멋진 녀석이었다.
"그림자 걸음."
강후가 잔영에게 강탈할 수 있는 스킬에 대해 다시 주의를 환기했다.
잔영이 가진 그림자 걸음 스킬은 미들 보스의 스킬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사기적이다.
그게 문제 될 것도 없었던 것이 아무리 사기적이어도, 결국은 잔영만 쓸 수 있는 스킬이기 때문.
하지만 강후의 강탈로 인해, 언제든지 빼앗아 갈 수 있는 최고의 스킬이 됐다.
'그게 나, 신강후의 밥줄이지.'
강후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강해질 가장 빠른 방법은 잔영처럼, 존재 그 자체만으로 사기적인 스킬을 빼앗는 것이다.
특히 남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스킬 구성을 늘려가면, 모든 것이 무기가 된다.
전투의 수 싸움에서 써먹을 패가 쉴 새 없이 늘어나는 셈이다.
"...."
강후가 잔영이 먼저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녀석과 공방전을 치르며 제압하는 그림도 괜찮지만, 오래 힘 빼고 싶진 않았다.
사실 잔영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메인 보스라서다. 쉽게 계산이 서지 않기도 하고.
"후후."
강후가 자신을 보고도 적극적인 모션을 보이지 않자, 잔영이 이유 모를 웃음과 함께 몸을 움직였다.
다음 순간.
쿠아아!
거대화한 잔영의 그림자가 하늘 높이 솟구치더니, 이내 세 갈래로 흩어졌다.
그림자 걸음이었다.
세 개의 그림자를 원하는 방향으로 흩어지게 하되, 그림자의 위치로 이동할 수도 있는 스킬이다.
그림자의 속도가 워낙 빠르고, 어둠 속에서는 그림자 자체도 숨길 수 있기 때문에.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까다로운 스킬 중 하나였다.
파앙!
강후 역시 즉각 대응했다.
환영술!
세 그림자보다 개수로는 2개가 더 많은 환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스킬이다.
그렇게 잔영에게 혼선을 준 사이, 잔영도 그림자 하나를 선택했다. 이동하기 위해서다.
찰나의 순간.
잔영이 미리 이동하려고 결정했던 그림자에게서 보인 약간의 일렁임을 강후가 잡아냈다.
깔끔한 환영술의 대응으로 말미암아 생긴 시각적 교란이, 짧지만 분명한 흔들림을 만든 것이다.
파아앗!
강후가 망설임 없이 잔영의 그림자 하나를 정해서는 덮쳤다.
만약 잘못 선택한 것이라면 후방을 고스란히 빈틈으로 내어 주게 되는 최악의 선택이지만.
'내 눈에는 보인다니까.'
강후에게는 아니었다.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그리고 잔영 같은 몬스터를 원작자로 '직접' 설계하면서, 자연스레 숙지하게 된 공략법은.
깔끔하게 머릿속에서 조합되어, 100%의 전략적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니 틀릴 일은 없었다.
푸우우욱!
강후가 뒤도 안 돌아보고 지른 단검이 잔영의 이마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갔다.
손잡이를 뺀 모든 부위가 파고 들어가, 굳이 결과를 따져볼 필요도 없는 완벽한 치명타였다.
[강탈이 활성화된 대상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스킬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자 걸음]
"잘 쓸게."
강후는 마치 격려해 주듯이 피를 철철 쏟아내고 있는 잔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쿠웅!
그렇게 죽음의 격려를 받은 잔영의 심장은 더 뛰지 않았다. 즉사였다.
바로 그때.
"음?"
스킬 강탈만 생각했던 강후에게 또 하나의 전리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작에서 장시환은 얻은 적 없는 전리품인 스킬북이었다!
그것도 암살자 전용의 스킬북이었다. 효율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맞춤형 스킬북이 나온 것이다.
이어 스킬북에 손을 얹는 순간.
"오. 이게 여기서 나온다고?"
꼭 필요했던 스킬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과 시너지가 좋을 수밖에 없는 스킬이었다.
26화 울산행 (1)
[스킬북 - 후방 공격]
[특이 사항 : 암살자 전용]
[타깃을 뒤에서 공격할 경우, 기존 공격보다 대미지가 33% 증폭된 상태로 적용됩니다.]
패시브 스킬이다.
생각하면서 쓸 필요도 없고, 별도로 마나를 소진하지도 않아 마나 과민증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횡 이동 덕분에 후방 공격을 할 일이 잦은 강후였다.
그런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시너지를 가져다줄 수 있는 스킬북이 나타났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바로 학습했다.
당장 다음 전투부터 효과를 볼 수 있고, 효율 측면에서는 자신을 배신할 일 없는 스킬이기에.
[그림자 걸음]
[스킬 숙련도 : Lv. Max]
[다섯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 움직인 후, 하나의 그림자를 지정해 순간적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는 반경 100m 밖으로 나가거나, 물리적인 피해를 입으면 그 즉시 사라집니다.]
[무의식이 반영된 그림자는 주인의 움직임을 모방,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움직입니다.]
그림자 걸음에 대한 확인도 마쳤다.
숙련도 최대로 넘어온 덕분인지 잔영이 사용하던 그림자 걸음보다 훨씬 더 업그레이드됐다.
"레벨도 올랐고."
한편 레벨도 33이 됐다.
늘 그랬듯, 보너스 포인트는 체력에 투자. 그리고 한동안 무심했던 전체 스탯 확인도 했다.
[신강후 Lv.33]
[클래스 : 암살자]
[고유 재능 : 제법 우수한 주력 /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근력 70][민첩 60]
[체력 198][마나 20]
[항마 45][맷집 70]
청명 수용소를 탈출하기 전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환골탈태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달라져 있었다.
레벨 10, 체력 10이었던 약골의 몸은 이제 운동선수가 부럽지 않을 체력이 됐다.
물론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발동되면, 3분의 카운트다운이 걸리는 빌어먹을 몸이 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기반이 생긴 것이다.
예전에 바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때와는 그림이 달랐다.
마나는 저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마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다른 헌터에 비해 월등히 높으므로, 수급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사람 구실은 하게 됐다뿐이지, 아직 갈 길은 멀지."
마냥 기뻐하진 않았다. 그런 생각도 사실 안 들고.
강후는 전보다는 확실하게 버틸 만 해졌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초소형 던전인 이곳에서 곧 메인 보스를 만날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보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이름을 알아내는 것은 너무 쉬웠다.
왜냐하면....
"신강후."
또 다른 내가 이 던전의 메인 보스이기 때문이다.
* * *
같은 시각.
대뜸 자신의 집무실에 찾아와 연신 독한 위스키를 들이키고 있는 채관형을 바라보는 남자.
바로 채관형마저도 상관으로 모시는 사람.
정화 길드의 주인이자 설립자인 장시환이었다.
두 사람은 상하 관계를 초월한 막역한 친구 사이였기에.
자신을 찾아와 아무 말도 안 하고 술만 연신 들이키는 무례함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장시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긴 머리가 흩날렸다.
어깨까지 쭉 내려오는 그의 긴 흑발은 너무 고와서, 윤기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장시환이 채관형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내가 즐겨 쓰던 괜찮은 도구 하나가 부서졌어. 그리고 안영호에 대한 연구 건도 무산됐고."
"그런 일, 흔하지 않았어?"
씩씩거리는 채관형과 달리 장시환은 오히려 씨익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채관형은 그렇게 사람이 태평할 수 있냐는 듯이 장시환을 흘겨보고는 말을 덧붙였다.
"일이 잘 안 풀리는 것만큼 엿 같은 기분이 없단 말이다."
"관형아. 사소한 실패나 뒷걸음 정도는 우리에게 별것 아니야. 밝은 미래가 이미 펼쳐져 있다고."
"뭐가 밝은데! X발."
"우리의 꿈은 무조건 실현될 거야. 그 꿈을 막는 놈은 당연히 적이 되고, 한 줌의 재가 되겠지."
"장시환. 너무 낙관만 하지 마. 무조건이 무조건이 아니게 될 수 있단 말이다."
"저런 잔챙이 한둘 사라졌다고 해서, 우리의 미래가 바뀌진 않는다고. 알겠어?"
순간 표정이 확 변해버린 장시환에게서는 죽은 허정태와 사라진 안영호에 대한 멸시가 묻어났다.
그까짓 '하찮은' 놈 한둘 사라지고 놓쳤다고 해서, 뭐 그리 의미를 부여하냐는 눈빛이었다.
장시환이 말을 이어갔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잖아. 내가 정의고, 내가 선이고, 내가 길이야. 어떤 것도 우릴 막을 순 없으니, 혼자 심각해지지 마."
"...네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도 된다는 거냐."
채관형은 친구이자 라이벌이기도 한 장시환에게 날 선 한 마디를 뱉어냈다.
그러자 장시환은 평소처럼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주인공이야."
* * *
전투의 최고조에 다다른 강후는 '또 다른 나'와의 전투에서 더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난이도 자체는 오히려 앞서 상대했던 잔영보다 낮았다.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생각도 같고, 노림수도 같은 또 다른 신강후는 그런 의미에서 예측이 너무 쉬운 적이었다.
과거의 나이지 않은가?
지금보다 발전한 미래의 자신이 아닌 발전하기 전의 과거와 싸우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방금, 막 즉흥적으로 떠올린 연계 공격에는 또 다른 내가 오히려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강후야. 난 단검만 쓰진 않거든. 세컨드, 써드 플랜이 늘 있어. 근데 너에게는 없는 듯하다."
강후가 비틀거리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격려라기보다는 곧 녀석에게 찾아올 최후를 암시하는 일종의 세리머니 성격이 강했다.
아니나 다를까.
"쿨럭!"
강후가 막 고안해 낸 연계 공격을 한 차례도 막지 못한 녀석은 검은 피를 토하고 숨이 끊어졌다.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자기 자신을 보스로 상대했기에 강탈할 수 있는 새로운 스킬이 없었다.
그래서 시스템 메시지는 예상했던 대로, 다른 형태의 변화구를 던져주었다.
원작에서 장시환도 얻었던 보상이다.
[스킬 강화(1회)]
숙련도 최대의 스킬에 한정해서만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기회.
스킬 강화다.
강후의 경우, 성좌 효과 덕분에 모든 스킬이 숙련도 최대인 만큼 제한이 될 스킬은 없었다.
'궁극기'의 용도로 활용이 가능해지는 만큼, 어떤 스킬을 업그레이드해도 파괴적이다.
이런 스킬 강화 보상은 던전에서도 정말 희귀하게 얻는 보상이었다.
확률이라는 숫자놀음으로 말하자면, 0.001% 미만이라는 통계를 쉽게 붙일 수 있을 정도.
그뿐만 아니라, 이 효과를 보려면 무조건 숙련도 최대의 스킬이 필요하다.
그런 스킬을 미리 가지고 있는 것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요조건이 까다로운 셈이다.
"일단 보류."
강후가 우선은 기회를 소진하지 않고 남겨두기로 했다.
후보로 떠오르는 스킬이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아직 확신이 들지는 않아서다.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그 순간에 즉시 강화가 가능하므로 급할 것도 없었다.
바로 그때.
[적요석 – 특수 재료]
"이거, 횡재했네."
죽은 '자신'에게서 전리품 하나가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잔영에게 스킬북을 얻었을 때도 횡재했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잘 풀리는 모양이다.
적요석은 정말 귀하다.
아이템 등급을 업그레이드하거나 숨겨진 옵션을 풀기 위해, 꼭 필요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설령 살 수 있다고 해도 가격에 제한이 없었다. 부르는 게 값이다.
그 부름은 몇억, 몇십억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갈 수도 있다.
물론 이걸 판다고 한다면 정직한 구매자보다, 눈이 뒤집힌 범죄자들이 몰릴 확률이 99.9%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판매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장시환의 손에 들어갔다면 배가 아플 뻔했네."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즉흥적인 면이 있었지만, 어쨌든 기억을 떠올린 덕분에 잘 왔고 이득을 많이 봤다.
그림자 걸음.
스킬 강화.
적요석.
어느 것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스킬이자, 누군가에게는 평생이 걸려도 얻지 못할 기회다.
볼일은 끝났다.
일단은 이예린에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라운드 제로에 갔다 와 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직까지는 조금 실력이 부족한 느낌이다.
그곳은 적정 수준, 권장 레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온갖 변수의 결정체나 다름없는 곳이다.
한 마디로 헌터들의 야생.
그렇기에 어설픈 도전 정신만으로 달려들기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대신 이예린에게 좀 더 비싼 의뢰를 뜯어내고, 이것으로 더 괜찮은 아이템을 구할 계획을 세웠다.
레벨업만큼, 기본 아이템 세팅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레벨이어도 어떤 아이템을 세팅했느냐에 따라, 체감되는 힘이 십수 배 차이도 날 수 있기에 구성은 정말 중요했다.
* * *
다음 날, 아침.
강후는 전날 이예린과 미리 조율한 장소에 도착해서 그녀를 만났다.
늘 그랬던 대로라면 접선 장소는 대전역이겠지만, 오늘 만남은 평택역에서 이뤄졌다.
그래서 강후를 보자마자 이예린이 운을 띄운 내용도, 바뀐 장소에 대한 화제였다.
"장소가 좀 의외죠?"
"매번 대전역이면 그게 더 이상하죠."
"하긴. 맞는 말이네요."
"허정태는 잘 인계했습니다."
"안 그래도 연락받았어요. 저희 쪽 의뢰라고 말씀해 주셨다면서요? 호호, 그건 부탁 안 드렸는데."
강후가 고개만 끄덕였다.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사실 이런 게 비즈니스다.
자신이 의뢰꾼으로 있는 용병단의 이름을 살짝 언급해주면서, 그 격을 높여주면....
당연히 용병단에서도 의뢰꾼에게 더 좋은, 더 쓸만한 의뢰를 물어다 주는 것이다.
"다음 의뢰 얘기를 하기 이전에 꼭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어요. 차소희, 알아요?"
"알고 있습니다. 뒤를 밟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서연이가 알려주던가요?"
"네."
"맞아요. 이클립스에서 쫓는 것 같은데, 제가 선규 씨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눈을 붙여뒀어요."
"음."
"차소희의 위치 보고가 들어오면, 계속 선규 씨에게 제가 보안 문자를 보낼게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뭐, 비싼 인력 쓰는 것도 아닌걸요. 이런 미행을 좋아하는 녀석이 제 밑에 있다 보니. 호호."
강후가 적당한 감사만 전했다.
자신이 요청한 것도 아니고, 이예린이 먼저 호의를 베풀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감사는 하지만 저자세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신경을 쓸 만큼, 이예린이 자신을 매력적으로 생각한다는 해석이 됐다.
충분한 대화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이예린이 바로 화제를 돌렸다.
"원래 선규 씨에게 의뢰하려고 했던 것은 '잠입'이었어요. 하지만 '암살'로 바꿔야 할 듯해요."
"암살이라."
돈이 된다면 못 할 것은 없다.
그리고 보통 암살 의뢰는 죽어 마땅한 이유를 가진 녀석을 타깃으로 들어온다.
이예린이 회색 영역에 있는 사람인 것은 맞지만, 아무나 죽이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다.
그녀 차원에서 한 번 필터링해서 의뢰를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러니 이번 타깃도 죽일 만한 놈일 터다.
"한 번 보세요."
이예린이 서류를 쓱 내밀었다.
그리고 첫 페이지를 보는 순간, 강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울산의 도살자?"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27화 울산행 (2)
본명 공태수.
그가 울산의 도살자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그의 손에 워낙 많은 헌터가 죽어서다.
범죄 조직, 군벌, 용병 가릴 것 없이 납치하고 죽이는 놈이다 보니 완전히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같잖은 원망이긴 하지만, 검은 세계의 '상도덕'을 지키지 않는다는 비난이 가장 큰 이유였다.
돈만 된다면, 같이 일을 하기로 했던 파트너도 목을 날리는 식이라 원성도 자자했다.
어쨌든 그가 운영하는 범죄 조직인 '붉은 피'는 울산을 거점으로 둔 조직 중 하나였다.
규모가 꽤 컸기에 공태수를 싫어하는 조직도 그를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했다.
워낙 공태수가 '또라이'다 보니, 잘못 건드리면 붉은 피와 전면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용병단 쪽으로 은밀하게 암살 의뢰를 맡기는 식이 됐다.
용병에게 들어간 살인 의뢰들은 꼬리를 자르기 쉬워서다. 배후를 들킬 염려도 적다.
'얘, 원작에선 안 죽잖아.'
강후의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였다.
원작에서도 이와 유사한 이슈가 있었다.
공태수를 죽이기 위해 많은 용병이 집결했다.
하지만 결과는 용병들의 몰살.
공태수는 이후 더 기세등등해졌고 승승장구했다.
물론 원작과 지금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자신, '신강후'가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어쨌든 공태수가 원작에서 어떤 전략과 전술로 본인을 죽이려던 용병들을 유인했는지는 잘 알고 있다.
판을 좀 더 확실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 또한 갖췄다.
강후는 확인 차, 이예린에게 물었다.
"이거, 불꽃놀이입니까?"
"맞아요. 동시에 여러 용병단에서 의뢰가 뿌려졌고, 다들 인지하고 움직이는 것 같아요."
"비운의 주인공이 나는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 이건가."
쓴웃음이 지어졌다.
불꽃놀이란, 다수의 용병이 고용되어 하나의 '강한' 타깃을 노리는 경우를 말한다.
이 경우, 분명히 다수 용병 중에 누군가는 목숨을 잃는다. 피할 수 없는 결과물이다.
하지만 그 목숨을 제물로 삼아, 살아남은 용병들은 타깃을 더 확실하게 노릴 수 있게 된다.
즉, 자신이 죽지 않으면 기회가 되고, 타깃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적 우위 덕분에 분명 목적은 달성될 터.
그렇다면? 끝까지 살아남는 헌터가 과실을 모조리 취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불꽃놀이다.
"예상 인원은?"
"정확하진 않지만 최소 추정은 가능해요. 백 명."
"미쳤군. 이런 식이면 불꽃놀이에 더 뛰어들 텐데."
"과열은 이미 되고 있어요."
이예린이 웃었다.
강후가 시선을 내려, 의뢰 보상과 관련된 내용을 훑었다.
그러자 그녀가 곧바로 능숙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공태수를 죽일 필요도 없어요. 왼팔만 잘라와도 25억을 받을 수 있어요."
"마법을 99% 이상 왼손으로 쓰는 마법사니까,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겠고."
"맞아요. 오히려 죽이면 보상금이 5억 깎여요. 웃기죠?"
보상이 확실히 세긴 세다.
그만큼 공태수에게 이를 가는 조직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기억이 맞다면, 현재 공태수의 레벨은 200대 초반이다.
사실 이예린만 나서도 일대일로는 정리되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다. 이론상으로는.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공태수가 쓸만한 아이템으로 무장하여, 소위 '템빨'을 보고 있어서다.
불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재수가 없으면 일격에 목숨을 잃는 그림도 나올 수 있다.
"어렵겠으면 거절해도 돼요. 의뢰가 강제는 아니니까. 하지만 솔깃할 것 같아 가져온 거예요."
"받죠. 실패한다 해서 돈을 무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죠. 그냥 울산 공기 한 번 쐬고 온다고 생각하세요."
"수락하죠."
강후가 의뢰서를 받았다.
바로 내용을 훑었고, 태웠다.
정보라고 제공된 내용이 다 강후가 알고 있는 원작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암살 – 정확히는 신체 절단 의뢰이지만 – 이라는 것이 레벨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딱 한 번의 기회, 그것을 얼마나 잘 포착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지가 중요하다.
의뢰서에 적혀 있는 '불꽃놀이' 결행 시점은 내일 저녁.
하루 여유가 있기는 하지만 미리 이동하는 그림이 좋을 것 같았다.
* * *
강후는 이예린과 평택역 앞에서 헤어지고, 안전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이동했다.
그때 구면인 얼굴과 마주하게 되어 걸음을 멈췄다.
"오빠, 또 보네요?"
윤상미였다.
어느새 호칭이 자연스럽게 오빠로 바뀌어 있었다.
복장은 지난번과 같았다.
아마 옷을 안 갈아입는 편이거나, 저게 일종의 전투 복장인 모양이다.
"여기는 왜 왔지?"
"울산에 바닷바람 쐬러 가려고요."
"나랑 생각이 같은 것 같네."
"훗, 오빠도요?"
"단골집 물어볼 생각은 하지 마. 나만 먹을 거니까."
"에헤이. 사람이 참 삭막하네."
의도한 것으로 보이진 않지만, 이래서야 잠재적인 경쟁자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기는 했다.
물론 싸우는 스타일도, 의뢰에 접근하는 방식도 다를 테니 부딪힐 일이야 없겠지만.
윤상미가 의외의 제안을 했다.
"우리 한 팀으로 가고, 반띵할래요?"
"거기선 너도 내 앞을 막으면 적이야."
"헉...."
강후의 냉랭한 반응에 윤상미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싸울 생각이야 없는 건 알았지만, 강후에게서 확실하고도 선명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치근덕댈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강후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니, 힘을 합치면 더 좋은 시너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협상은 결렬됐다.
이쯤 되면 미련을 갖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거절 의사는 없다.
"그럼 동행이나 해요. 마음 편하게 울산으로 가려면 안전 버스가 낫잖아요?"
"뭐, 그건 편할 대로. 옆에 앉는 것까지는 뭐라 하진 않을 테니까."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15분 후.
강후와 윤상미가 터미널에 도착한 울산행 안전 버스를 탔다.
대전역이었으면 울산행 버스를 타는 헌터들이 꽤 많았을 텐데.
지금은 두 사람을 포함해 총 세 명의 승객이 탔고.
이미 안에는 버스 기사를 제외한 9명의 승객이 탑승해 있었다.
입석이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적어 의외였다.
그렇게 문이 막 닫혔을 때.
"...."
강후와 윤상미의 시선이 교차했다.
곁눈질에 가까웠지만, 눈빛만으로 확실한 내용 전달은 끝났다.
문이 닫히고 나서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이 버스가 하나의 거대한 '범죄 버스'라는 확신이 들었다.
일단 가드로 보이는 헌터 둘이 승객과 너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보통 가드는 승객과 전혀 말을 섞지 않는다.
주변 경계를 해야 하고, 그 경계에는 당연히 승객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버스 밖을 주로 살피지만, 그렇다고 내부 경계를 느슨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탑승해 있던 몇몇 승객의 몸에는 아직 마르지도 않은 피가 몇 방울 묻어 있었다.
이 정도면 몇 분 전에 이미 피를 본 적이 있다는 뜻이다. 버스가 도착하기 전에 말이다.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버스에서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강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과 윤상미, 기사를 제외하고 이 안에 있는 헌터 열 명 중.
성좌를 보유한 헌터가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잔챙이'라는 얘기다.
'모두가 착각하지. 인원이 많으면 상황이 쉽게 정리될 거라고.'
강후가 아무렇지 않은 척, 윤상미와 함께 맨 앞자리에 앉았다.
버스라는 특수한 공간은 전투를 벌이기에는 매우 좁지만, 기습적으로 공격하기에는 너무 좋다.
특히 뒤에서 끈을 넘겨와서 목을 졸라버린다거나, 좌석을 뚫고 검을 내지른다거나.
예상치 못한 공격을 만들어내기가 너무 좋은 것이다.
강후가 창공의 환희를 들어, 옆면을 찬찬히 살폈다.
칼집에 단검을 넣기 전에 할 법한 무기 상태 확인으로 보이는 움직임이었지만.
사실 강후는 검면에 비친 뒷좌석을 보고 있었다.
탈 때는 볼 수 없었지만, 뒷좌석 아래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있다.
그리고.
후욱.
마치 호흡을 맞추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뒷좌석에 앉아 있던 두 승객의 콧바람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파앗! 솨아악!
강후가 몸을 전력으로 회전시키며, 그 힘을 그대로 실어 단검으로 뒤를 내리찍었다.
순간적으로 가속 스킬까지 쓰면서 움직임을 극대화한 덕분인지.
"크억!"
상대는 손도 쓰지 못했다.
이마 한가운데에 단검이 그대로 꽂혀서는 눈이 까뒤집어진 채 숨이 끊어졌다.
푸욱!
동시에 윤상미가 역수(逆手)로 잡고 좌석을 뚫으며 찌른 대검에 상대는 가슴이 꿰뚫려 즉사했다.
맨 앞자리였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대검을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나왔던 것이다.
"X발! 눈치챘잖아!"
"죽여! 죽여버리라고!"
"기사 뭐해! 밟아! 그냥 밟으라고!"
역시 본색을 드러냈다.
둘을 눈 깜짝할 사이에 잃은 나머지 승객 여덟이 저마다 무기를 꼬나쥐고는 강후와 윤상미를 노렸다.
평택역에서 같이 탄 또 한 명의 승객 역시 한패였다.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사는 창백해진 얼굴로 열심히 액셀만 밟고 있었는데, 아마도 몇 차례 위협이 있었던 듯했다.
슬쩍 기사를 살피자, 오른쪽 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위협성으로 베인 흔적이다.
강후가 말했다.
"기사 양반. 개문 버튼 한 번만 눌러봐."
"그럼 제가 죽습니다...!"
"안 누르면 나한테 죽을 텐데?"
치이익!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달리는 버스이기에 문이 열린 것만으로도 강풍이 밀려왔다.
윤상미는 아무 말 없이 옆을 지켰다. 강후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내리는 놈은 특별히 살려 보내준다. 기회는 한 번이야. 셋을 세 주지. 셋."
"병신아! 지금 수를 봐라! 네가 깝칠 때냐?"
가장 가까이 있는 헌터가 소리쳤다. 성좌는 없는 헌터다.
강후가 처음부터 관심을 둔, 성좌를 가진 헌터는 버스의 가장 뒷좌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것도 다리를 쩍 벌린 채, 세상의 온갖 오만함을 표현하는 듯한 꼴사나운 자세였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여유롭게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둘."
강후가 앞서 들린 말에 대꾸하는 대신, 카운트를 마저 셌다.
다들 미동조차 없는 것을 보면, 수적 우위에서 확실한 승리를 자신하는 듯했다.
"하나. 끝."
마저 숫자를 센 강후가 앞서 기회를 아껴뒀던 스킬 강화를 바로 사용했다.
대상은 혈화였다.
[혈화]
[스킬 숙련도 : Ultimate]
[대상에게 입힌 상처와 흐르는 피를 매개로 하여, 강력한 폭발을 일으킵니다.]
[단일 타깃이 아닌, 반경 10m 안에 있는 모든 타깃을 혈화의 대상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타깃에게 혈화를 다시 발동시키려면, 대상에게는 1일의 시간이 흘러야 합니다.]
'좋아.'
강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킬 숙련도 표시가 궁극기를 상징하는 의미인 'Ultimate'로 바뀌었다.
이제 혈화는 일대 다수 전투에서 마무리를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스킬이 됐다.
피와 상처를 매개로 하는 폭발력도 기존의 혈화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졌을 터.
즉, 별것 아닌 상처도 이제는 혈화 한 번에 중상, 혹은 치명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일까.
탁!
강후가 납치 패거리들에게 확실한 경고를 하고자, 앞서 죽은 둘을 제물 삼아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퍼서서석!
폭음과 더불어 강후에게 이마가 꿰뚫렸던 헌터의 머리통이 모두의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씨, X발...."
"저, 저게 뭐야. 저게 뭔데?"
"사람이 터진다고...?"
무난한 압살과 일방적인 유린을 자신했었던 패거리 전체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일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은 잘못되었다는 눈빛이었다.
28화 울산행 (3)
* * *
당황한 것은 맨 뒷좌석에 앉아 있던 패거리의 대장뿐만 아니라, 윤상미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는 스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음 보는 것은 둘째치고, 사람의 머리를 터뜨릴 수 있는 스킬이라니....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스킬인지 짐작도 가지 않아서다.
'피를 폭발시키는 건가? 흑마법계 헌터의 마나 태우기처럼? 피를 태우는 걸 수도 있겠어.'
그나마 귀동냥과 경험으로 체험한 것이 많은 윤상미가 강후의 스킬 구성을 예상했다.
'피를 태우는 스킬은 들어본 적도 없는데. 게다가 파괴력이 마나 태우기와는 차원이 달라.'
구조만 유사해 보일 뿐, 순수한 화력만 놓고 보면 마나 태우기는 아예 비교할 가치도 없었다.
마나 태우기는 기껏해야 화상을 살짝 입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 오빠는 어떻게 된 게 볼 때마다 사람이 업그레이드가 되어서 나오는 거지? 그것도 며칠 사이에?'
윤상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동료 둘이 시체까지 능욕을 당하며 죽은 탓인지 남은 패거리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여차하면 자신도 그 꼴을 똑같이 당할 수 있겠다는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릴 놈은 내려."
강후가 단검으로 여전히 열려 있는 버스 중간 문을 가리켰다.
하지만 패거리들은 뒤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대장의 존재를 인지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엇보다 쪽팔렸다.
상대는 겨우 둘인데, 아직 여덟이나 남은 자신들이 도망칠 생각을 한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일까.
"뒈져, 새끼야!"
생각이 더 깊어지고 싶지 않았던 패거리 둘이 강후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방해하지 말고 거기 있어."
강후가 등 뒤에 있는 윤상미에게 손을 뻗었다.
괜히 앞으로 나서지 말라는 경고였다.
대검을 든 그녀와 엉켜서 싸우기 시작하면, 원하는 동선을 뽑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윤상미도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지만, 강후의 앞길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뒤에서 팔짱이나 끼고서 상황을 관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을 듯했다.
파앗!
도약과 함께 강후가 사라지고.
윤상미가 어련히 알아서 싸워나갈 강후의 센스를 믿고, 시선을 돌려 기사를 바라봤다.
겁에 잔뜩 질려 전방만 응시하고 있던 기사는 윤상미가 가까이 다가오자 몸을 움찔했다.
"괜찮으세요?"
"네, 네, 네! 괘, 괜찮습니다!"
"믿어달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걱정 마세요. 우린 아저씨 해치려는 사람은 아니니까."
"아, 알겠습니다!"
"원래 가는 경로대로 쭉 밟아주세요. 그리고 이따가 제가 신호를 보내면 그때 브레이크 한 번만 밟아주세요. 오케이?"
"알겠습니다!"
짓궂은 생각 하나가 떠오른 윤상미가 적절하게 강후를 돕기 위해, 미리 안배를 해 뒀다.
그사이.
푸욱! 푸욱! 푸욱!
"억!"
"크아악!"
강후는 이미 패거리 사이로 파고들어 그들의 어깨와 겨드랑이, 팔꿈치에 단검을 꽂고 있었다.
즉사로 연결되진 않지만, 즉각적으로 전투 능력을 상실하기에는 딱 좋은 부위였다.
좁은 공간에서 강후가 환영술을 펼치며, 가뜩이나 예측도 안 되는 움직임에 혼란을 유발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헌터는 강후의 환영을 공격하려다가 동료를 공격하기도 했다. 큰 실책이었다.
게다가 강후의 밥줄과 같은 횡 이동 스킬은 은신 효과도 갖고 있어, 그들을 더 혼란스럽게 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헌터 한 명이 소리쳤다.
넓지도 않은 버스 안에서 강후의 뒤꽁무니도 쫓지 못하는 상황이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푸욱!
"억."
녀석은 목 뒤쪽을 정확히 뚫고 들어온 강후의 단검에 입을 벌린 채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
강후가 주변을 둘러보자, 대장을 제외하고 목숨이 붙어 있는 헌터들이 상처를 움켜쥐고 있었다.
넓은 평지에서 전투를 치렀다면 이렇게 단기간에 여러 명을 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좁은 무대는 회피 능력이 탁월한 강후에게 최적의 전장터였다.
도약 스킬을 활용한 것도 처음의 한 번이 전부였고, 덕분에 마나 과민증도 발동되지 않았다.
"후."
강후가 짧게 숨을 토해내며, 혈화를 발동시켰다.
출혈 찌르기까지 열심히 쑤셔 넣은 만큼, 각각의 상처는 꽤 깊이 만들어져 있는 상태였다.
퍼퍼퍼펑!
그 순간, 강후도, 대장도, 그리고 윤상미도 모두 함께 보았다.
헌터들의 깊은 상처가 피보라를 만들어내면서, 신체 부위가 제멋대로 흩날리는 것을.
팔꿈치에 상처를 입었던 헌터는 혈화의 발동과 동시에 팔꿈치 아래를 잃었다.
겨드랑이를 찔렸던 헌터는 어깨가 반쯤 잘려 나가, 썰다 만 고깃덩어리처럼 너덜너덜해졌다.
"크아아악!"
"팔! 내 팔...!"
"아아아악! 살려줘!"
사방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바로 앞에 강후가 있지만, 어느 누구도 무기를 움켜쥐고 싸울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충격과 공포의 현장을 믿을 수가 없었는지, 뒤에서 지켜보던 대장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때.
"아저씨, 지금!"
윤상미가 기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끼이이익!
그러자 기사가 온 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았다.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힘껏.
"...크헉!"
관성에 끌린 대장이 몸을 어찌 가눌 틈도 없이, 그대로 앞으로 튕겨 나왔다.
반면에 전투 내내 후방에도 흘깃 시선을 돌렸었던 강후는 상황을 미리 예측했던 상태였다.
덕분에 기둥을 잡고 버텼다.
그때, 마치 선물 상자처럼 날아온 대장이 강후의 품에 안겼다.
"X발."
대장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강후와 붙게 된 것은 둘째치고.
이미 강후의 단검이 손가락 반 마디만큼 목을 뚫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조금만 힘을 줘도 목 옆을 지나가는 혈관들이 우수수 세상의 빛을 볼 판이었다.
[음악의 아버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체력 회복 속도가 5배 상승합니다.]
'원작에서 이런 성좌가 나온 적도 있었나? 별 성좌가 다 있군.'
강후가 대장과 계약되어있는 성좌의 정보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원작자로서 가졌던 수많은 무의식이 전부 이 세계에 구현이 되어있을 테니 이상할 것은 없다.
윤상미의 센스 있는 보조 덕분에 확실한 승기를 잡은 상황.
바로 대장의 목숨을 취할까 싶었던 강후가 생각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
여기서 대장을 죽여 성좌와 아이템만 강탈하기에는 뭔가 아쉬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후가 대장을 불렀다.
"어이."
"...."
"뭘 그렇게 노려봐? 애먼 사람을 잡은 게 아니잖아. 너희가 우리를 담그려고 했던 거지."
강후의 날 선 말에 대장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숙이려 했다.
하지만 단검 일부가 목을 찌르고 들어와 있는지라, 흠칫 놀란 뒤 자세를 원위치시켰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스스로 상처를 더 깊게 만들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장이 답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다른 놈들과 달리, 너는 눈빛에 후회가 가득해 보여서. 협상을 해 줄 수도 있을 듯한데."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장의 눈빛에 흔들림이 있었다.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있는 법. 그것은 강후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물며 이런 풋내기들을 이끌고 다니던 헌터라면, 더욱 자기 목숨 귀한 줄은 잘 알 것이다.
제대로 똥 밟았다고 생각하겠지.
"뭘 원하지?"
"이거지."
강후가 엄지와 검지를 말아 보였다.
캐쉬. 돈이라는 얘기다.
이 버스에 자신과 윤상미를 태울 때, 저들도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없다. 가진 건."
"그렇군."
쫘으으윽!
"크아아악!"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후가 단검을 살짝 사선으로 비틀었다.
그러자 살점이 후벼 파지는 소리와 함께 대장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럼 딱히 지금 죽어도 상관은 없다는 거지?"
"니미...."
"아프겠지. 욕 한 부분은 봐줄게. 하지만 또 내가 같은 말을 하게 되면, 그땐 끝이야."
"자, 자, 잠깐!"
강후가 움켜쥔 단검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지자, 대장이 다급히 양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이번은 경고가 아니라, 진짜 목숨이 끝장날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와서였다.
결국.
"7억! 통장에 7억이 있어!"
그가 자신의 목숨값을 외쳤다.
그러자 시종일관 어두웠던 강후의 표정도 자연스럽게 풀렸다.
"그래야지. 협상은 서로가 욕심을 내려놓으면,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지는 거라고."
* * *
5분 후.
계좌에 7억 원이 입금된 것을 확인한 강후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녀석에게 남은 돈은 약 3만 원 정도. 저승길의 노잣돈으로는 충분한 금액이었다.
대장의 이용 가치가 없어지자, 강후가 몸을 일으키며 그대로 단검을 위로 잡아당겨 올렸다.
쫘아악!
"끅...?"
원망이 잔뜩 섞인 눈빛으로 노려보는 대장을 향해, 강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협상할 수 있다고는 했지. 그게 목숨이라고는 얘기 안 했잖아."
푸슈슈슈!
쿠웅!
분수처럼 쏟아져 나온 핏물과 함께 대장의 숨이 끊어졌다.
'앞으로 쉴 때는 어떻게든 클래식을 꼭 들어야겠군.'
강탈에 성공한 '음악의 아버지' 성좌가 강후의 성좌 정보에 새로이 추가됐다.
이름으로는 무게감이 있지만, 능력으로는 대단할 것이 없어서인지 차원 강탈자는 조용했다.
이어서 강후는 고통에 신음하던 나머지 헌터들도 차례차례 처치했다.
전투에 가장 중요한 팔과 어깨에 문제가 생긴 그들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그나마 둘은 도망치기 위해 버스 문밖으로 몸을 날렸지만, 뒤끝이 더 좋지 못했다.
재수가 없게도 버스의 뒷바퀴에 깔려 죽은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자살이 되어버린 셈.
그렇게 버스 내부는 정리됐다.
강후와 윤상미를 상대로 한탕을 하려던 헌터 열 명은 그렇게 전부 저승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탔다.
"버스 기사 아저씨. 문 닫아요. 다 끝났으니까."
그리고 강후가 아직도 열려 있는 중간 문을 보며, 기사를 향해 말했다.
상황 종료.
이 버스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은 자신과 윤상미, 그리고 기사밖에는 없었다.
윤상미가 이제서야 겨우 땀 한 방울을 흘리고 있는 강후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 엄청난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도 생각보다 힘을 덜 썼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빠는 참...."
"각자의 전리품은 각자가."
"그래요."
강후가 백팩 지퍼를 열었다.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을 차곡차곡 안에 담아 넣을 시간이었다.
몬스터는 죽어서 경험치를 남기고, 헌터는 죽어서 아이템을 남긴다지 않는가?
이제 승리의 보상을 챙길 때가 됐다.
그리고.
[소울 메이트 - 장갑]
[등급 : 5등급]
[한 손 장갑 아이템으로 레벨만큼 체력 수치가 오릅니다.]
[체력을 최대 200까지 올릴 수 있습니다.]
"오?"
처음부터 심상찮은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의 손에서 벗긴 장갑 아이템이었다.
29화 맹수의 시간 (1)
레벨이 오를 때마다 공짜 스탯을 얻는 셈이다. 그것도 강후에게 가장 중요한 체력 스탯을 말이다.
이런 아이템을 스탯 비례형 아이템이라고 하는데, 효율을 매우 높게 평가받는 아이템이다.
물론 더 이상 비례 효과를 보지 않는 시점부터는 매력이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 그쯤 되면, 훨씬 더 좋은 아이템을 착용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즉, 성장하는 과정의 보조로 착용하기에는 그 어떤 아이템보다도 성능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미련 없이 광기의 전주곡 장갑을 탈착하고, 소울 메이트로 장갑을 바꿔 착용했다.
[바람이 이끄는 대로 - 신발]
[등급 : 5등급]
[민첩 +50]
[상시 이동 속도가 33% 증가한 상태로 유지됩니다.]
'이건 고민할 것도 없이 신발을 갈아신어야겠네.'
강후가 신발을 벗기 전, 자신이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을 다시 확인했다. 꼼꼼해서 나쁠 건 없다.
[추적의 신발 - 신발]
[등급 : 6등급]
[민첩 +25]
[지정한 대상을 추격할 때, 이동 속도가 25% 상승합니다.]
'역시.'
어떤 관점으로 봐도 새로 얻은 신발의 성능이 무조건 좋다.
강후가 신발을 곧바로 바꿔 신었다. 기존에 신던 신발이야 어떻게든 팔면 그만이다.
이후.
죽은 헌터들에게서 회수한 아이템은 전부 부위가 중복되거나, 효율이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전부 판매할 품목으로 분류해 두었다. 짐작이지만 다 팔면, 5억은 거뜬히 챙길 듯싶었다.
강후는 윤상미가 챙긴 전리품이 얼마의 가치를 할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보상의 완벽한 분리는 강후의 기본 신념 중 하나이기도 했다.
부우우웅!
안전 버스는 계속 남쪽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출혈이 있었던 버스 기사도 지혈이 되고, 내부 상황이 해결되자 평정심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강후가 운전 및 치료비를 겸해, 두둑하게 200만 원의 돈을 쥐어 준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없는 힘도 끌어내 열심히 액셀을 밟아야 했다. 덕분에 승차감 좋은 탑승이 계속됐다.
버스 안에서 피비린내가 나기는 했지만, 강후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표정은 차분했다.
윤상미가 가끔 코를 쓱 닦아내곤 했지만, 그녀 역시 익숙한 냄새라서 금방 적응했다.
한동안 적막이 감돌던 버스 안에 소리가 채워지기 시작한 것은 휴게소에 들른 후였다.
강후가 캔커피를 사고, 윤상미가 캔맥주를 사면서 그때부터 살짝 이야기꽃이 피었던 것이다.
물론 늘 그랬듯이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윤상미였다. 강후는 보통 듣는 입장이었고.
"오빠."
"싫어."
"...엥? 오빠라고 부르기만 했는데 뭐가 싫어요? 아직 말도 안 했는데?"
"개인 플레이하자."
"뭐야, 이 오빠. 무서워! 독심술 같은 것도 배웠어요?"
"아니. 네가 진지하게 오빠라고 부를 때면, 꼭 같이 팀을 하자고 얘기를 하니까."
"쳇. 진짜 비싸게 구네."
속내를 말하기도 전에 들켜버린 윤상미가 입술을 삐죽였다.
윤상미의 입장에서 강후는 정말 혼자 두기 너무 아까운 인재였다. 물론 자기 입장에서의 얘기다.
그의 실력이 너무 좋다.
아무 곳에나 혼자 던져놔도, 어떤 일이든 해결해낼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겁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생각이 많은 것은 자신이었다.
아까 버스 안 전투에서도 충분히 실력을 갖고 있음에도 수적 열세에 기가 눌렸었다.
강후가 공격적으로 판을 깔아주지 않았다면, 솔직히 버스에서 내릴 생각도 했었다.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를 가늠할 수 없어서다.
정말로 강한 놈이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후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어쩌면 지금 이만큼 가까워져 있는 관계도 희소성이 높은 걸지도 몰라. 차라리 만족하자.'
윤상미가 마음을 다스렸다.
강후를 보니 주변 대인 관계가 두루 원만할 것 같지는 않다. 많이 아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지금 이 정도의 거리감도 매우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했다.
윤상미가 화제를 돌렸다.
"울산에 도착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상황을 보고 생각해야지. 하지만 불꽃놀이에 희생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강후가 덤덤하게 답했다.
말이 딱딱하게 끝맺음 된 것이 살짝 신경 쓰였는지, 강후가 넌지시 되물었다.
"넌?"
"저는 쓸만한 '불꽃'을 좀 찾아보려고요. 이런 자리는 허황된 꿈만 꾸는 불꽃이 꽤 많거든요."
"총알받이를 찾겠다는 거군."
"좀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그럴듯하게 좀 받아줘요. 그렇게 정곡을 찌르면 어떡해요?"
윤상미가 웃었다.
속내를 들켰기 때문이다.
그녀는 최대한 주변 자원을 동원해 목표를 달성하는 케이스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따로 움직이면서 별도로 기회를 노려보고자 하는 강후와는 노선이 완전히 다른 셈이다.
"적당히 마시라고. 알코올에 찌든 검만큼 가장 물러터진 검도 없으니까 말이야."
"적어도 누구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떠서 다니진 않으니까, 걱정 꺼요. 흥."
그녀가 강후의 얼굴을 흘깃 살폈다.
확실히 하얗다. 아까 그렇게 뜨거운 전투를 치렀음에도, 이리 핏기가 없을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비극과 슬픔, 아픔을 다 가진 것처럼 벽을 세워놓고 사는 이 남자.
윤상미는 강후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절대로 보여주려고 하지 않기에 더 궁금해지는 청개구리 같은 마음인 것이겠지.
하지만 아직 강후의 마음을 열기에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공을 많이 들여야 할 듯했다.
* * *
울산 시외버스터미널 도착 후.
"기회가 되면, 또 봐요."
"이예린 쪽으로 줄을 댄 것 같은데. 그러면 종종 볼 날이 있겠지."
"이 정도 인연이면 연락처 교환 정도는 어때요? 뭐, 내가 귀찮게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 정도의 인연이니까 안 하는 거야."
"와! 자존심 상해. 나, 이래 봬도 번호 달라는 남자들 많거든요?"
"그럼 번호 알려줘. 내 번호 알려줄 생각은 없고."
"하여간 캐릭터 확실하다니까. 됐어요. 나, 갈 거예요!"
"나중에 내 앞길은 막지 마."
"남이사! 오빠나 내 앞길 막지마요. 걔는 내가 잡을 거니까."
화난 듯한 표정으로 뒤돌아서기는 했지만, 금세 윤상미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강후가 저렇게 자신을 대할수록 뭔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만 커진다.
애초에 이성적으로도 호감이 있다 보니, 무슨 말을 해도 콩깍지가 쓰이는 모양이다.
순식간에 윤상미가 사라졌다.
강후 역시 용병들이 많이 붐빌 버스터미널은 바로 빠져나왔다.
공태수를 노리기 위해서 모여들 용병들은 동료가 아니다. 전부 잠재적인 경쟁자일 뿐.
재수 없으면, 공태수를 함께 노리려다가 적으로 싸울 수도 있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공태수의 공식 일정은 공유되고 있다. 그는 곧 인근에 있는 던전 공략을 시작하게 될 예정이다.
울산역과 버스터미널에 용병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도 던전과 가깝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던전 근처로 움직이고 있는 다른 용병들과 달리.
강후는 경로를 전혀 다른 곳으로 잡았다. 던전이 잘 내려다보이는 빌딩 옥상으로 이동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여기서 공태수를 노릴 생각이 없어서다.
다른 용병들의 계획은 뻔했다.
공태수와 그의 공략팀이 던전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외부의 정보가 단절되어있는 동안 던전 주변을 완벽하게 정리한다.
'청소'해 두는 것이다.
그다음, 공태수 무리가 던전 공략을 마치고 나오면 기다리고 있다가 바로 급습하는 것이 계획.
공태수를 가장 확실히 노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던전에 들어간 출구와 입구가 여기는 같으니까.
다른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때.
"모두 비켜라! 공태수 대장님께서 가시는 앞길을 막는 놈들은 뼈마디도 못 추릴 줄 알아라!"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붉은 피 조직원들이 대거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중 목소리가 큰 부하 하나가 외치는 듯했다.
일행의 중심에는 공태수가 있었다. 양손에 낀 황금색 장갑이 무척 인상적인 마법사 헌터다.
공태수를 본 용병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광경이 보였다.
사복 차림의 완벽한 위장이었지만, 강후의 눈에는 그들의 출신과 태생이 훤히 보이고 느껴졌다.
물론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역시.'
강후의 예상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공태수에게 시선을 뒀지만, 그에게는 일체의 성좌 정보가 표시되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공태수의 주변을 호위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계약한 성좌가 있었다.
'아예 가면을 만든 건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감쪽같군.'
강후가 고개를 까닥였다.
지금 보이는 공태수는 공태수가 아니다. 공태수의 얼굴을 하고 있는 가짜다.
진짜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사실은 모두의 눈에 보이는 저 남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서 멈춰선 안 된다.
가짜 공태수가 나오기 전까지 용병들은 주변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태수는 이 용병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도록, 더 크게 포위망을 짤 가능성이 컸다.
자기를 죽이러 온 놈들을 곱게 살려 보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울산의 도살자라고 불리는 헌터가 편히 살려 보내주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다.
'찾자.'
강후가 옥상에서 진득하게 주변을 내려다보았다.
이 상황을 모두 살피고 있다면, 공태수도 얼마나 손이 근질거릴까 싶었다.
위장으로 판은 잘 짜뒀고, 생각대로 흘러가면 월척을 낚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 분명히 가까운 어디에선가 상황을 지켜보며, 최적의 역공 타이밍을 노릴 게 분명하다.
'저 호텔도 나쁘진 않네.'
강후가 던전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호텔 하나를 특정해서 살폈다.
저기 어딘가에 진짜 공태수가 머물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저 호텔에는 용병도 많을 테지.
'일단 쇼핑을 좀 할까.'
강후가 주의를 환기했다.
순간 마음이 동해서 급하게 주변을 살피긴 했지만, 당장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터였다.
애초에 공태수가 공략하기로 예정했던 던전의 공략 기간이 최소 하루는 걸렸다.
즉, 잠깐 시간을 내서 다른 곳을 다녀온다 해도 전략적으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근처에 마켓이 있는 만큼, 그곳에 들러 버스에서의 전투로 확보한 전리품까지 싹 팔고.
그 잔고를 바탕으로 쓸만한 아이템을 하나 살 생각이었다.
얼추 다 팔면, 잔고가 20억 원은 맞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쯤이면 4등급 아이템 하나는 무조건 산다. 이왕이면 여유 착용 부위가 많은 반지가 좋을 것이다.
그로부터 1시간 후.
울산 제3 마켓 전체를 샅샅이 훑은 강후가 가장 마음에 드는 아이템 하나를 선택했다.
마나 과민증과 고통에 노출되어있는 자신에게 유의미한 아이템이 될 것 같은 반지였다.
사실 전부터 꼭 갖고 싶었지만, 도통 마켓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구성이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30화 맹수의 시간 (2)
[끈질긴 인내 - 반지]
[등급 : 4등급]
[체력 +100]
[평상시에도 항상 고통 경감 효과가 25% 적용됩니다.]
체력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고통 경감 효과를 가진 아주 쓸모 있는 반지였다.
강후는 예전부터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수단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까지 치료법을 찾지 못한 선천성 마나 과민증에 대한 차선책이었다.
과민 상태에 빠지더라도 고통을 줄일 수 있으면, 그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서다.
하지만 지금은 과민 상태에 빠지면 극심한 두통이 몰려오고, 이내 온몸이 망치로 맞은 것처럼 고통에 젖어들기 시작한다.
강후는 여기서도 버틸 힘을 얻고 싶었다.
고통 속에서 버티는 그 시간이 강후에게는 이득이었다.
고통 경감도 아주 유의미한 효과지만, 체력도 무려 100이나 올랐으니 체감은 더 컸다.
몸이 과민증으로 고통받게 되더라도, 착실하게 높여둔 체력은 카운트를 뒤로 늦춰줄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100초의 여유를 더 번 셈이다.
전투에서의 100초는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지고 있던 잡템을 모두 처분하고, 필요한 아이템 구매까지 마친 다음.
마켓 밖으로 나온 강후가 다시 원래의 포인트로 돌아가기에 앞서서, 잠시 카페에 들렀다.
값비싼 아메리카노에는 별 취미가 없지만, 잠시 머릿속을 식힐 시간을 갖고 싶었다.
꿀꺽- 꿀꺽-.
"역시 캔커피가 진리인가."
단숨에 절반을 들이킨 강후가 씁쓸한 혀끝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달달한 캔커피나 첫맛이 강렬한 솔라키움 버스트가 입에 익숙해서 그런지 쓴맛이 영 어색하다.
자주 입에 물게 되는 솔라키움의 진액도 맛이 살짝 달달한 편이기에 더 그랬다.
'대참수 스킬북을 원래대로 학습해서는 효율이 한없이 낮아지니, 결국 꼼수가 필요한데....'
강후의 눈빛이 깊어졌다.
자신의 클래스 특성과 일치하지 않는 스킬을 학습하면, 효율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15%가 나온다.
즉, 강후가 대참수 스킬을 그냥 학습하면 명칭만 대참수지, 파괴력은 형편없는 스킬이 생긴다.
하지만 보스 스킬 강탈이 가능한 '신강후'의 특성상, 의외의 발상이 가능한 방법이 있었다.
보스에게 스킬을 강제 학습시킨 후, 그 보스를 죽여 스킬을 강탈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보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그랬으면 진즉에 했을 것이다.
'국내에서 가능한 곳은 다섯 군데. 그중에 네 곳은 군벌의 손아귀에 있으니 제외하고.'
한 곳이 남는다.
수원역에 있는 던전으로 그 일대에 거점을 두고 있는 온누리 길드가 이 던전을 소유하고 있다.
'공태수를 처리해 의뢰 수당을 받고 나면, 바로 수원역으로 뛰는 게 좋을 것 같다.'
다음 계획을 정리했다.
늦기 전에 대참수 스킬을 배워, 훨씬 위력적인 공격 스킬을 하나 더 추가할 생각이었다.
헌터의 꽃은 스킬이다. 그리고 다다익선이다. 스킬이 많아서 나쁠 것은 단 하나도 없다.
"...?"
바로 그때.
카페 안에서 유리창 밖을 살피던 강후의 몸이 살짝 들썩였다.
전혀 예상 못 한 장소에서 타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공태수였다.
물론 애초부터 그가 던전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밖에 있는 게 놀랍진 않았다.
다만 볼 일이 따로 있던 건지, 아니면 여유가 있었던 건지. 마켓 근처에 와 있었던 모양이다.
[신궁]
[신궁의 투혼이 깃든 당신은 마법, 화살 공격의 명중률이 기존에 비해 5배 상승합니다.]
[탐식의 요람]
[끊임없이 마나를 탐하는 성좌는 마나를 활용한 기이한 체계를 완성시켰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마나 20% 소모해서, 체력을 20% 회복합니다.]
'확실히 공태수야.'
강후가 그에게서 표시되는 성좌 정보를 확인하고서는 확신을 가졌다.
공태수의 성좌가 맞다.
자체 회복에 자체 명중 보정이라니.
이러니까 헌터의 목숨을 쉽게 빼앗는 것이다.
잘 버텨내고, 잘 죽이니, 실력이 안 되는 적수는 죽어 나갈 수밖에.
당연한 이치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레벨 100에서 200 사이의 헌터에게는 성좌들이 간을 보며 잘 붙지 않지만.
200 이상이 되고, 안정적이면서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진입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죽을 일 없는 '안전 자산'처럼 여겨지면서, 계약자의 지속적인 성장과 함께 자신의 격도 더불어 높이려는 성좌가 몰리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앞다투어 성좌의 계약 신청이 늘어난다.
'허정태도 그렇고 볼 때마다 좀 역겹네.'
강후가 팔짱을 낀 채로 도도한 눈빛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공태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완벽한 여장이다.
앞서 자신의 '대역'으로 던전에 들여보낸 가짜도 공태수와 영락없이 똑같이 생겼었는데.
여장을 한 공태수를 보니, 원래 공태수의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뭔가 역겹지만, 꽤 예쁘게 여장이 됐다.
물론 원판 덕분이기도 할 터다.
강후가 성좌를 스캔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 좋은 눈썰미로도 절대 알아보지 못했을 위장이었다.
"...."
거리를 두고 호위가 있다.
일행이 아닌 척,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최소 열 명의 헌터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위장을 한 와중에도 호위를 두는 용의주도함이라니.
섣불리 덤벼서는 안 될 듯했다.
바로 그때.
부우우웅.
마을버스가 도착하고.
공태수와 그 호위들이 시간차를 두고 버스에 탑승했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일반인의 모습이다.
같은 버스에 속 편하게 타고 뒤를 밟고 싶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다.
잠깐의 동행이야 문제 될 게 없겠지만, 공태수와 가는 루트가 전부 비슷하면 의심받을 것이다.
"햇빛은 영 질색인데...."
강후가 정면에 보이는 건물 옥상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유달리 햇볕이 강하게 내리쏟아지고 있는 시간.
직사광선은 피하고 싶지만....
눈에 덜 띄게 공태수를 쫓으려면 건물 사이를 뛰어넘으며 버스를 추적하는 게 좋을 듯했다.
도심 안이기에 징검다리 삼아서 넘어갈 건물 옥상은 충분히 있었다.
중요한 건 집중력이다.
벌컥벌컥! 탁!
남은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킨 강후가 컵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르르르.
컵 안에서 굴러다니던 얼음이 움직임을 멈추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파팟- 팟- 팟-!
이미 강후는 계단을 따라 빠르게 옥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부우우웅.
이윽고 버스도 출발했다.
추적의 시작이었다.
* * *
'버틸 만하네.'
그간 착실히 체력을 높여온 탓인지, 연속적인 스킬 사용에도 몸이 제법 버텨줬다.
버스가 속도를 바짝 높이는 구간에서는 덩달아 도약 스킬 활용의 빈도도 늘어났지만.
마나 과민증이 발동되어도 버틸 체력이 있다 보니, 고통 경감 효과와 맞물려 지구력이 생겼다.
게다가 버스가 정지 신호에 걸리면, 강후에게도 쉴 시간이 주어지는 만큼 회복의 여유도 있었다.
얼마 후.
공태수의 무리가 버스에서 내린 것은 던전으로부터 약 1k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였다.
처음에는 현장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기 위해서 내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살짝 시간이 흐르고 나니, 다른 목적이 드러났다.
'여기가 집결 포인트였군.'
강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여러 개의 빌딩과 건물에 각기 흩어져 있던 헌터들의 등장이었다.
전부 사복 차림이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살기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공태수의 부하들이었다.
가짜가 던전에서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을 용병들을 뒤에서 덮치기 위한 큰 그림이었다.
가짜 – 용병 – 진짜.
이런 구조로 전선이 짜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후방에서 기습을 당할 용병들은 속수무책이 된다.
어림짐작으로도 100명은 됐다.
비단 여기에만 공태수가 자신의 부하들을 배치하진 않았을 터.
다른 곳에도 비슷한 규모가 있을 듯했다.
팔뚝을 따라 소름이 돋았다.
공태수는 어떤 기분일까.
자신을 죽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용병을 한 번에 일망타진할 생각에 희열을 느낄까?
그럴 것이다.
아마 곱게 살려두지도 않겠지.
놈이라면 차라리 죽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낄 만큼, 용병들에게 지옥을 선물할 가능성이 크다.
'인내심 싸움이군, 이제.'
아직 가짜 공태수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다.
그때까지 진짜 공태수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는 가장 최적의 타이밍을 노릴 것이다.
강후 역시, 그늘과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기고 끝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무리 전투에 자신이 있다 해도, 저 거대한 무리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미친 짓이다.
'마법계니까 조심하겠지.'
강후는 공태수가 마법사 클래스 특성상, 주요 전장에서는 거리를 둘 것으로 확신했다.
마법사들은 무리가 한 번 작정하고 달라붙기 시작하면, 떼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히 부하들을 보내놓고, 전선과 전황을 조율하는 거리 두기를 할 가능성이 컸다.
강후는 스스로 공태수가 홀로 남거나, 소수의 호위 인원만 남길 시점을 노릴 생각이었다.
그때.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공태수의 시선이 강후가 방금까지 있었던 위치로 향했다.
"...."
하지만 이미 횡 이동으로 은신 상태에 돌입한 강후를 볼 수는 없었다.
공태수도 자신이 많이 예민해져 있었던 거라 생각하고는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가 다시 모습을 숨길 시간이었다.
* * *
다음 날 새벽.
달조차 구름에 가려져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이 찾아왔을 때.
"공태수가 나왔다! 죽여! 죽여버리자고!"
숨죽여 때를 기다리던 용병들이 던전 공략을 마치고 나온 가짜 공태수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간간이 지나가는 차 소리만 들리던 던전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편의점, 호텔, 식당, 그리고 골목.
장소를 가릴 것 없이 숨어 있던 용병들이 나타난 것이다.
"대장을 지켜라!"
"뒤로! 뒤로 후퇴해!"
미리 공태수가 뿌려둔 '미끼'들이 적절하게 역할을 수행했다.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가짜 공태수는 부하들과 함께 빠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강후는 주요 전장이 될 방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을 뿐이다.
공태수가 판을 짜놓은 이상, 어지간한 용병들은 여기서 다 죽어 나갈 것이다.
그나마 실력 좀 있는 용병들만이 살길을 찾거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겠지.
강후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딱 한 번, 시선을 돌렸다.
윤상미도 용병 무리에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무리에 껴 있다고 해서 구하러 갈 생각은 없었다.
바로 그때.
스스스슷!
진짜 공태수의 손짓과 함께.
적당히 거리를 두고,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던 붉은 피 조직원들이 도로를 따라 움직였다.
본격적인 포위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용병들에게는 최악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상황이다.
강후는 공태수에게만 시선을 집중했다.
어차피 의뢰 대상은 그 하나뿐이다. 다른 놈에게 목숨값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고.
팔 하나만 잘라가도 25억 원이다.
그 순간을 위해 모든 생각과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강후에게 너무 쉬운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고.
역으로 포위망에 갇힌 용병들이 절규하며 죽음을 향해서 질주하기 시작했을 때.
강후는 공태수의 주변을 지키던 호위들이 하나둘씩 전장으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완벽한 섬멸을 위해서 공태수가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충분히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먹잇감이 홀로 되는 순간을 위해, 숨소리도 참아가며 수 시간을 기다려왔던 강후에게는.
"...."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사냥을 시작할 맹수의 시간이었다.
31화 맹수의 시간 (3)
* * *
공태수의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 가까이 접근한 강후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타이밍을 노렸다.
스킬 캐스팅, 시전, 약간의 후속 동작, 그리고 다시 스킬 캐스팅 준비.
공태수는 분명 정해진 루틴으로 원거리에서 부하들의 공격에 화력을 보태주고 있었다.
신궁 성좌가 같이 있기 때문인지, 꽤 먼 거리에서도 스킬이 유효타로 딱딱 박혔다.
푸슉!
"어억!"
날카로운 창 모양을 쏙 빼닮은 바람이 순식간에 날아가서는 용병 하나의 가슴팍을 뚫었다.
200m를 족히 넘기는 거리에서 그만큼의 화력이 나올까 싶었는데 공태수에게는 어렵지 않았다.
'시전하는 그 순간에 치고 들어가는 게 베스트겠군.'
강후가 타이밍을 잡았다.
아무리 실력 좋은 헌터라고 한들, 시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각성' 효과가 있으면 스킬 캐스팅 시간을 극적으로 단축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 공태수의 스킬 활용 시간을 보고 판단하자면, 각성에 관련된 아이템은 없는 듯했다.
"큭큭큭."
공태수가 전황을 보며 웃었다.
재밌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판이 흘러가고 있고, 용병들이 줄줄이 몰살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던전 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의 9할이 용병의 것이었다. 그만큼 상황이 나빴다.
'2초. 일대일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
강후가 계산을 끝냈다.
주변 호위와 반응을 생각하면, 2초 안팎으로 공태수와 단둘인 상태를 만들 수 있다.
숨을 더욱 죽였다.
엇박자가 나지 않도록, 공태수의 공격 흐름이 일정한지 보는 중이었다.
주변에 적이 없어서인지, 공태수의 원거리 공격이 규칙적인 패턴에 따라 진행됐다.
시간을 완벽하게 동기화시킨 강후가 공태수의 스킬이 시전된 직후를 캐치했다.
그리고.
파앗!
짙은 어둠 속에서 도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공태수를 향해 납치 스킬을 시전했다.
"...억!"
성공이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난 강후를 뒤늦게 인지한 공태수가 바로 납치에 끌려왔다.
저항할 틈도 없었다.
전방으로 스킬 지원을 하다 보니 기습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어엇!"
그 순간, 대장이 뭔가에 끌려갔음을 인지한 부하들이 시선을 돌렸다.
이제부터다.
그들이 접근하기 전까지의 시간이 강후가 일대일을 진행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파앙!
강후가 환영술을 활용해 자신을 닮은 환상 다섯 개를 주변으로 흩어지게 했다.
시간 벌기용이다.
[야시(夜視)]
능숙한 교감자 성좌 덕분에 상시 유지되고 있는 야시 능력이 어둠을 밝게 치환시킨다.
이제 강후에게 시각적으로 문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또렷해서 문제지.
"X발!"
끌려온 공태수가 욕설을 내뱉으며, 바로 단거리 이동 스킬을 쓰려고 했다.
마법계 헌터의 전형적인 회피법이기도 하다. 현장을 벗어나기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끌려옴과 동시에 현장을 벗어날 정신력이 있다는 부분이 대단한 것이기도 했다.
문제는.
"너, 읽혔어."
강후가 일찌감치 공태수의 회피를 예측했다는 점이다.
애초에 납치가 깔끔하게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공태수는 바보가 아니니까.
회피 방향이 반격에 수월한 후방 이동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예측이 맞았다.
강후에게 수를 간파당한 공태수가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역습이다.
스파앗!
푸욱! 푹푹! 푹!
단숨에 도약으로 거리를 좁혀버린 강후가 공태수의 왼쪽 겨드랑이와 어깨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공태수는 꽤 괜찮은 흉갑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어깨와 겨드랑이는 보호가 가능한 부위가 아니었다.
"크아아악!"
공태수가 비명을 질렀다.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한참 전부터 자신의 빈틈을 진득하게 노리고 있었던 걸까?
강후가 나타난 지점은 공태수가 적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 범위가 전혀 아니었다.
마나의 기척이나 스치는 모습이라도 인지했다면, 진즉에 싹을 잘랐을 텐데!
완벽하게 흔적을 감추고 있었던 강후를 공태수는 단 한 번도 감지하지 못했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 새끼가...!"
화르르륵!
살기로 채워진 붉은 눈빛과 함께 공태수의 오른손 위에서 거센 불길이 타올랐다.
'가깝다.'
이런 미친 불길에 노출되면 강후라고 한들 몸이 버텨낼 재간이 없을 듯했다.
최소 화상이고, 노출 시간이 길어지면 뼈와 살이 녹는 것은 금방이다.
강후가 후방으로 도약을 전개하며 뒤로 물러섰다.
어차피 일방적인 공격의 성립은 끝났다.
혈화가 있기 때문이다.
퍼퍼퍼펑!
"으아악!"
혈화 스킬을 사용하자마자 공태수의 왼쪽 어깨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상처를 깊이 낸 상태였기에 공태수의 뼈와 근육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크으으으...!"
공태수가 신음하며 오른손을 왼쪽 어깨로 뻗었다.
있어야 할 팔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처업!
그 순간 강후는 공태수의 왼팔을 집어 든 뒤, 빠르게 현장을 벗어났다.
호위들이 막 도착하고 있는 데다가, 일부는 강후를 향해 화살까지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까앙! 까강!
강후가 혹시나 적의 공격이 이어질 수 있는 방향에 보호 방벽으로 길을 막아두고는.
파팟. 팟. 팟!
전속력으로 현장을 벗어났다.
딱 마나 과민증이 발동되기 직전에 깔끔하게 끝을 냈다.
만약을 위해 다시금 살핀 공태수의 왼팔은 분명 그의 것이 맞았다.
지저분하게 새겨져 있는 타투와 그 문구는 공태수가 좋아하는 문구와도 일치했다.
'호화스러운 짓은 다 했군.'
심지어 팔뚝에 마석도 박혀 있었다.
마법계 헌터가 자주 하는 인체 개조 중에 하나다.
일종의 휴대용 '마나 배터리'를 들고 다니는 셈.
워낙 부작용이 많아서 전문가의 수술이 필요한데, 구성을 보니 꽤 세심한 손길이 닿은 듯했다.
물론 이젠 쓸모없는 수술이 됐다. 주인 없는 팔이 되었으니, 그저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굳은 다섯 손가락 사이로 반지 세 개가 보인다.
볼 것도 없이 마나에 관련된 아이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는 딱히 필요 없는 만큼 이예린을 만나는 대로 처분할 생각이었다.
반지의 등급을 확인해 보니 4등급 하나에 5등급 둘이었다. 최소 14억 원을 확보할 수 있다.
"으아아아!"
"크아! 살려줘! 살려줘, 제발!"
저 멀리.
던전 주변 전역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용병들의 비명이 들렸다.
공태수가 강후에게 왼팔을 잃은 것과 별개로 저들의 운명은 결코 해피 엔딩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더 최악으로 갈 가능성이 컸다.
가장 중요한 왼팔까지 잃었으니, 울산의 도살자는 지금 눈에 뵈는 것이 없을 거다.
"캔 커피 한 모금이 간절하네."
강후가 우유 맛이 짙게 풍기는 캔 커피를 떠올리며, 유유히 현장을 벗어났다.
재주는 용병들이 실컷 넘고, 과실은 강후가 취한 상황.
하지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용병들은 계속 공태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그를 찾을 뿐이었다.
공태수의 울화만 열심히 돋구는 악화일로였다.
같은 시각.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냔 말이다...! 크아아악!"
"대장! 우선은 뒤로 물러나십시오! 치유 능력을 가진 헌터를 금방 데려오겠습니다!"
"내 팔이 없어졌는데 데려와서 도대체 뭘 하겠다고!"
"지혈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는 쓰러지십니다!"
"어떤 놈인지 반드시 찾아! 사진! 사진 찍은 게 있으면 반드시 내게 가져오란 말이다!"
공태수가 버럭 소리쳤다.
그는 지금껏 몸에 이렇게 깊은 상처가 나본 적이 없었다.
나름 로열 로드를 밟아온 그가 좌절이나 실패를 경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백전 무패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던 자신이 다른 것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왼팔을 잃었다.
이래서는 마법사 헌터로서 제대로 된 전투조차 소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자존심에 상처 입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짓밟히고 구겨져서 쓰레기통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고통 속에서도 강후와의 전투를 복기해 봤지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스킬이기에 어깨와 겨드랑이에 낸 상처를 매개로 삼아 폭발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솜씨로 보면 암살자 계열의 헌터가 틀림없는데, 구현한 스킬의 양상은 마법계의 특성도 있었다.
"내가.... 이 공태수가...!"
분노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전리품으로 자신의 팔까지 잃은 마당이라 도저히 이 굴욕감을 씻어낼 수가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렇게 만든 놈을 찾아내서, 어떻게든 끝을 보는 것.
그뿐이었다.
그것만이 완벽한 복수다.
* * *
3시간 후.
"이걸... 이렇게 얻네요?"
"편하게 울산 여행이나 다녀올까 했는데 마침 공태수가 보여서. 잘 잘라서 가져왔습니다."
"잠깐만요. 이거 꿈 아니죠? 선규 씨가 잘라 온 팔 맞죠? 현실이죠, 이거?"
"꿈인 거 같으면 가져가죠."
"아, 아니! 아니에요! 정신이 확 들었어요! 현실이네, 현실!"
동이 틀 무렵에 강후를 만나 공태수의 '왼팔'을 확인한 이예린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사전에 입수해둔 왼팔의 정보와 일치했다.
명언을 라틴어로 새겨 넣은 타투도 그렇고, 마석 역시 수술을 위해 별도로 세공한 것이 보였다.
강후가 실패하길 바라고 의뢰를 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성공을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울산의 도살자라는 명성이 괜히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강하고, 또 용의주도했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공태수가 강후에게 속절없이 왼팔을 잃은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울산의 현장에서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대다수의 용병이 죽거나 잡혔다고 했다.
죽은 용병은 차라리 운이 좋은 케이스고, 살아서 잡힌 용병이 누가 봐도 최악이었다.
공태수의 분풀이용 먹잇감이 되는 것은 물론, 인신매매에 넘겨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즉.
현장 상황만 놓고 보면, 공태수가 짜놓은 판에 용병이 대거 희생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강후는 유유히 공태수의 왼팔을 잘라서 가지고 왔다.
현장 소식은 지옥인데, 강후에게는 해당 사항이 전혀 없는 듯했다.
"정산하죠. 왼팔 값도 받고, 이 아이템도 즉시 매입을 좀 해 주면 좋겠군요."
"잠시만요. 선규 씨. 정산은 금방 하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우리 잠깐 다른 얘기 좀 할까요?"
"정산을 하면서 해도 될 것 같은데. 굳이 얘기부터 하려는 이유가?"
"좋아요. 그럼 반지 세 개 감정부터 하면서 말할게요. 셋 다 처분하고 싶은 거죠?"
"네."
강후의 대답에 이예린이 반지를 하나하나 살피며 앞서 언급한 '다른 얘기'를 이어갔다.
"의뢰꾼 생활 청산하고 우리 청안에 들어올 생각 없어요? 제대로 밀어줄 자신 있는데."
"작은 놀이터라서 별로 재미없습니다."
"하긴. 그 대답을 들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너무 빨리 나와서 좀 상처받긴 했네요."
"악의는 없습니다."
강후는 이예린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의 규모가 작다고 생각할 뿐이다.
정화 길드와 대적할 생각이 있는 강후로서는 청안보다 훨씬 큰 조직이 필요했다.
"선규 씨. 앞으로도 꼭 저희 용병단과 거래를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저, 솔직히...."
"솔직히?"
"선규 씨의 실력에 반해버릴 것 같거든요. 지금까지 수천 명의 의뢰꾼을 관리해왔지만, 선규 씨 같은 '미친놈'은 처음이에요."
"미친놈이라. 틀린 말은 아니네요. 확실히."
좀처럼 잘 웃지 않는 강후가 이예린이 던진 뜻밖의 비유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분명 자신은 미친놈이 맞았다.
내일 따위는 집어치우고 오늘만 사는 것 같은 미친놈. 딱 그랬다.
32화 대참수 (1)
* * *
정산은 순식간에 끝났다.
이예린이 굴릴 수 있는 돈의 규모는 강후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컸다.
그래서 의뢰 수당에 아이템 판매 가격을 정산받기까지 불과 5분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잔고 49억 원.
언뜻 보면 꽤 많은 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4등급 아이템은 4개를 사면 없어질 돈이고, 3등급 아이템은 살 수도 없는 돈이라서다.
괜히 헌터의 세계가 '그들이 사는 세상'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중위, 상위, 최상위로 올라갈수록 이를 구성하는 경제 관념이 대격변에 가까울 만큼 달라진다.
장시환 같은 최상위의 헌터는 4등급 이하 아이템은 던전에서 얻어도 아예 관심도 갖지 않는다.
'잡템'이라고 부른다. 쓸모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 이건 정말...."
앞서 몇 번이고 감탄을 했지만, 이예린은 아직도 자신에게 공태수의 왼팔이 있는 게 신기했다.
그녀도 공태수를 상대로 호각세로 싸우면 싸웠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신체를 훼손할 수는 없었다.
예측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레벨 200대 헌터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 강후의 레벨을 스캔한 적이 있는 이예린이다.
그렇기에 강후의 레벨이 아무리 높게 잡아도 70을 넘기기 힘들다는 것이 그녀의 예상이었다.
레벨 70의 헌터가 그 세 배를 훌쩍 넘기는 헌터를 상대로 부상을 입힌다?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지금껏 강후가 해 온 일들이 불가능하다 여겼던 일들의 연속이라 새삼스럽진 않았다.
'조금씩 원작의 결이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
한편 강후는 자신을 향해 아낌없이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는 이예린을 보며 생각했다.
사실 원작에서 이예린과 신강후와의 관계는 딱히 이렇게 가깝거나 돈독하지 않았다.
그녀가 훗날 열세 개의 별에 대적할 실력자로 성장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신강후와의 교류가 많진 않았다. 그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보이지 않게 응원하는 정도.
그런데 지금은 적극적으로 영입 제안을 할 정도로 이예린의 관심을 듬뿍 받고 있다.
'원작의 메인스트림은 장시환에 대한 이야기야. 곁가지는 적당히 건드려도 문제없겠지.'
강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철저하게 주인공인 장시환 위주로 쓰인 원작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구성했다.
공태수에 관련된 이야기도 얼핏 지나가는 소식처럼 듣게 된 내용이 원작 언급의 전부다.
[뉴스를 본 장시환이 웃었다.
"울산은 원래부터 저랬지. 그러게 공태수 같은 미친놈은 왜 건드려 가지고 사서 고생을 해?"
어차피 서울에서 벌어진 사고가 아닌 만큼, 뉴스 기사는 마치 휘발성 있는 알코올처럼 머릿속에서 금방 사라졌다.]
바로 이 내용이다.
아마 이번에도 장시환은 뉴스를 통해 울산에서 벌어진 일련의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다만 조금 다른 내용을 읊고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진 않을 듯했다.
'메인스트림만 조심해서 건드리자. 정화 길드의 관심은 늦게 받을수록 좋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했을 때.
이예린이 새로이 가져온 의뢰 제안서를 내밀었다.
테두리에 금테 처리까지 되어있는 것이 의뢰의 격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먼저 운을 뗐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는 걸 좋아하시죠?"
"물론입니다."
"암살 의뢰예요. 타깃의 이름은 조구빈. 살인마예요. 그것도 아동 유괴 살인범이죠."
"...."
정의 구현에 대한 거창한 신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간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에 대한 생각은 있는 강후였다. 최소한의 도리 말이다.
하지만 아동 유괴로도 모자라서 살인이라니. 단어의 조합이 끔찍하게 느껴져, 인상이 찌푸려졌다.
"의뢰를 주신 분은 희생자의 아버지예요. 원하는 건 딸과 자신의 복수죠. 조구빈의 죽음."
"위치 파악은?"
"최종적으로 확인된 것이 그라운드 제로에요. 이후 나온 기록은 없다고 해요."
"비겁한 놈."
강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그라운드 제로에는 범죄자들이 많이 산다.
워낙에 위험한 곳이다 보니, 헌터 치안청에서도 수색하러 가기를 꺼린다. 변수가 너무 많아서다.
"성공 보수는 10억 원. 딸의 유품이나 혹은 시신이라도 회수하면, 추가 협의 보상금이 있어요."
"금액대는?"
"최소 10억 원 이상은 될 거예요. 여기에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더 담기게 되겠죠."
"추가 사항은 없습니까?"
"보상 지급 전에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있어요. 조구빈이 죽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는 겁니다."
"영상 통화 같은?"
"그렇죠. 녹화된 영상이 아니라 실시간 영상을 원하는 거죠."
"이를 악물고 딸의 복수를 위해 하루하루를 참고 있을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네요."
"그 아픔을 얼마나 가늠할 수 있겠어요. 단지 가슴이 아플 뿐."
이예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강후 역시 생각이 많아졌다.
단순히 악인 단죄의 느낌이 아닌, 악마를 처단하기 위한 의로운 여정처럼 느껴졌다.
'조구빈을 쫓으면, 자연스럽게 매드 솔라키움을 얻을 수 있는 그림도 나올 것 같네.'
어차피 매드 솔라키움도 필요했던 차였다.
그라운드 제로에 한 번은 다녀올 생각이었으니, 이참에 볼 일을 다 보고 와도 될 듯했다.
게다가 조구빈이 어디 숨어 있을지, 얼추 예상되는 장소도 있었다.
그라운드 제로라는 공간을 설계한 것이 바로 원작자인 자신이 아니던가. 역추적은 어렵지 않다.
* * *
그 무렵.
"꿈 한 번 기분 나쁘네."
악몽을 꾸는 바람에 잠에서 깬 장시환이 대충 큰 컵에 담은 레드 와인을 쭉 들이켰다.
거칠게 들이킨 레드 와인이 피처럼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요 근래 자꾸 악몽을 꾸고 있는 장시환이었다.
누군지 얼굴을 볼 수는 없는데, 자꾸 자신을 찾아와 다짜고짜 공격을 하는 것이다.
무서운 것은 그 녀석이 워낙에 신출귀몰해서 움직임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앞인 줄 알고 보면 뒤에 있고, 아래인가 싶으면 위에 있는 그런 식이었다. 귀신 같은 느낌이랄까?
TV를 켰다.
일반 채널은 다 지우고 헌터에 관련된 채널만 따로 추려 띄워놓는 것이 장시환의 오래된 습관.
오늘도 항상 그랬듯이 국내와 세계의 헌터 소식을 훑었다. 정보 업데이트는 필수다.
그때, 국내 소식 중 관심이 가는 이야기가 있어 시선을 집중했다.
울산에서 붉은 피 조직과 그 대장인 공태수를 노린 일전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언제 한 번 날 잡고 사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했는데. 공태수 놈이 그걸 또 노렸네?"
흐름은 예상대로였다.
공태수가 설계한 큰 판에 꼬인 용병들이 대거 몰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공태수가 왼팔을 잃었어?"
정작 판을 짠 공태수도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마법사에게 있어 정교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양팔, 양손의 유무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공태수가 주로 쓰는 것으로 알려진 왼팔을 잃었다는 것이다. 대형 사고다.
게다가 공태수의 왼팔을 잘라간 헌터의 정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뒷모습을, 그것도 꽤 낮은 프레임의 오래된 CCTV 영상으로 확보한 것이 전부였다.
이래서는 뒤통수만 겨우 확인하는 꼴인데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위에 다 지켜보는 놈이 있었네."
장시환이 피식 웃었다.
어떤 녀석인지는 몰라도 참 대단한 일을 해냈다.
불과 2초 만에 공태수의 왼팔을 잘라내고 유유히 전리품으로 챙겨갈 수 있었던 헌터는 누구일까.
워낙 이슈가 많은 세계이다 보니, 어지간한 소식은 금방 잊어버리기 마련이지만.
이 소식만큼은 후속 내용을 주의 깊게 살피고 싶어졌다. 범상치 않은 놈 같았기 때문이다.
장시환이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정화 길드의 정보 전략팀.
헌터 치안청의 내부 데이터 베이스까지 활용하는, 수집력이 뛰어난 정보 팀이었다.
그들이라면 아주 작은 가십거리라도 꼼꼼하게 찾아내 보고를 올릴 것이다.
- 네, 말씀하십시오.
"울산 공태수 사건. 녀석의 왼팔을 잘라갔다는 헌터에 대한 모든 소식을 내게 수합 해서 올려."
- 알겠습니다.
바로 지시가 내려졌다.
이제 저 헌터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장시환의 책상에는 그에 관련된 서류가 쌓여갈 것이다.
* * *
조구빈을 찾기에 앞서, 강후는 먼저 수원역부터 들렀다.
대참수 스킬을 학습하기 위해 필요한 던전이 온누리 길드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거점은 바로 수원역. 그래서 이예린을 평택역에서 만나고 올라오는 길에 수원역에 들른 상태였다.
'분위기가 다르네.'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수원역 일대는 치안이 꽤 안정되어 있었다.
역 앞에서는 축제 같은 것도 하고 있고, 온누리 길드 소속의 헌터들이 캠페인도 하고 있었다.
수원 - 클린 헌터 캠페인.
이름이 좀 거창하긴 한데, 헌터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수원역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수원역 일대를 꽉 잡고 있는 온누리 길드의 영향력 덕분인지, 확실히 역의 분위기는 좋았다.
게다가 다수의 중소 규모 길드들이 자유롭게 길드원을 모집하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다른 지역이었으면 진즉에 칼부림이 났을 현장이다. 평화적인 경쟁이 허용되지 않아서다.
강후가 바로 온누리 길드의 전용 빌딩을 찾았다.
역 앞에 보란 듯이 세워져 있는 15층 빌딩이 바로 '온누리 빌딩'이었다.
빌딩 안으로 이동한 뒤.
"던전 라이센스 대여 관련해서 담당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로비에서 담당자를 찾았다.
여기에 내용을 좀 더 덧붙였다.
"돈은 이 정도 있으니까, 간 보기는 안 해도 될 겁니다."
피차 소모적인 대화를 막기 위해, 가진 돈을 인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후는 필요에 따라서 10억 원 정도는 충분히 쓸 생각으로 왔다.
대참수를 페널티 없이 학습할 수 있다는 특혜를 생각하면....
돈 아까운 장사는 절대 아니다.
페널티가 없는 대참수는 완벽한 '한 방' 스킬이다.
일종의 필살기 개념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안내해 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세요."
여성 안내원이 정중하게 강후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담당자의 지시가 있었을 터다.
'역시.'
미리 가진 돈부터 인증한 덕분인지, 당신이 뭔데 대여를 하느니 마느니 같은 소리는 안 나왔다.
이게 돈의 힘이다.
겉모습만 보고 상대를 속단하거나, 괜한 문전박대로 얼굴을 붉히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13층.
최상층에서 2층 아래인 곳에서 담당자를 만났다.
붉게 염색한 스포츠 머리가 인상적인 담당자.
그는 바지 주머니에 왼손을 밀어 넣은 채, 무척 껄렁껄렁한 자세로 강후를 맞이했다.
"온누리 길드 던전 관리팀의 총괄팀장 한승혁입니다."
한승혁이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기가 무섭게.
"온누리 길드 소유의 발트만 던전. 1회 공략 라이센스 대여를 받고 싶습니다. 제시 가격은 10억. 두 번 협상은 안 합니다."
강후가 바로 생각한 조건을 가지고 들이받았다. 협상의 여지를 차단하는 일방적인 제안이었다.
33화 대참수 (2)
한승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시한 금액은 매력적이었다.
사실 어지간해서는 길드에서 초면의 외부인에게는 던전 라이센스 대여를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조금 높은 가격을 부른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대여해 주는 입장에서야 수틀리면 안 빌려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승혁은 왜 강후가 발트만 던전에 관심을 갖는지,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던전의 경험치적인 부분에서 꿀을 빤다거나, 고급 마석을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발트만 던전은 그런 확정 특혜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보스 '발트만'이 특색 있는 몬스터인 것은 맞지만, 보상이 특별하지는 않다.
한승혁이 물었다.
"이유를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예전부터 공략해 보고 싶었던 던전이기도 하고, 간밤에 꿈자리가 너무 좋았어서."
"좋은 아이템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뭐, 그런 거죠."
좋은 꿈 한 번 꿨다고, 그 꿈에다가 10억 원을 태우겠다니.
한승혁은 어이가 없었다.
무슨 던전이 복권도 아니고 말이다. 10억 원의 가치를 하려면 4등급 아이템 하나는 얻어야 한다.
어쨌든 던전 라이센스를 대여하는 것에 꽤 몸이 달아올라 있는 듯했기에, 한승혁이 말을 바꿨다.
"흠. 워낙 찾는 사람이 많아서, 12억 원은 주셔야겠는데."
드르륵.
강후가 의자를 밀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꾸도 하지 않았고, 한승혁을 보지도 않았다.
여기서 더 줄 거면, 차라리 군벌을 찾아가서 밑바닥부터 협상을 하는 게 나을 듯했다.
군벌들은 항상 군자금을 넉넉하게 마련하고 싶어 하기에, 라이센스 장사를 자주 하는 편이다.
"...저, 저기?"
한승혁이 당황했다.
라이센스 대여는 관리자 수당이 10%다. 기존 제안으로도 1억 원은 확정인데, 일이 꼬이려 한다.
"10억! 10억으로 합시다! 순간 욕심이 좀 나서 그랬는데, 깔끔하게 10억으로 끊읍시다!"
강후가 멈췄다.
아마 한승혁은 수지맞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라이센스가 잘 팔리지도 않는 던전을 팔아넘겼으니.
하지만 강후에게는 의미가 달랐다.
암살자 클래스에게 대참수 같은 스킬은 얻기 어려운 스킬이다.
설령 스킬북으로 얻는다 하더라도 부르는 게 값이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100억 원은 될 터다.
그런 스킬을 꼼수를 이용해 10억 원에 학습할 수 있다면, 무조건 남는 장사 일수밖에.
물론 내막을 모를 한승혁의 입장에서야 강후가 호구처럼 보일 터.
그렇게 생각해주면 더 좋다.
거래는 성립됐다.
"언제 갈 수 있습니까?"
고개를 돌린 강후가 한승혁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 * *
타이밍이 잘 맞았다.
발트만 던전에 입장할 수 있는 시간은 6시간 후.
마침 그때 초기화가 끝난다고 한다.
그래서 강후는 발트만 던전 인근에 있는 모텔을 대실로 빌려서는 들어와 있었다.
몸이 살짝 나른하던 차라, 찬물로 시원하게 씻으며 눅눅해져 가던 정신을 깨웠다.
씻고 나온 강후가 냉장고에 보관 중인 솔라키움의 잔량을 체크했다.
7개로 넉넉하진 않다.
발트만은 화력이 꽤 필요한 녀석이라, 한 번 꼬이면 솔라키움이 미친 듯이 소진될 수도 있다.
'이래저래 그라운드 제로로 갈 수밖에 없는 그림이네.'
조구빈에 관련된 의뢰가 아니었어도 그라운드 제로는 한 번 다녀왔어야 할 상황이다.
막상 가기로 마음을 먹으니,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것이 많았다.
그라운드 제로는 진정한 의미로의 야생이다.
온갖 돌연변이 몬스터와 범죄자 헌터들이 득실대는 곳이다.
게다가 북한 쪽의 헌터도 종종 내려오기에 그들을 만날 가능성도 존재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북한의 헌터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재수 없을라치면, 적으로 싸울 수도 있다.
삑.
혹시나 하는 생각에 틀어본 헌터 관련 TV 뉴스에서는.
- 울산 태화강역 일대에 거점을 두고 있는 조직 '태화강'이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타깃은 대장의 치명적인 부상으로 혼란에 빠진 조직, 붉은 피입니다.
태화강은 주변의 모든 조직 세력을 규합하여, 이 기회에 그들을 몰아내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졸지에 춘추전국시대가 됐네."
강후가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흘러가도 상관은 없다.
공태수가 설령 죽어도, 또 다른 공태수가 나오겠지.
나쁜 놈이 죽으면, 보통 더 나쁜 놈이 빈자리를 채우기 마련이다.
악당을 몰아내고 좋은 세상, 좋은 시대가 열리는 일은 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일이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자신의 번호를 아는 사람 중에 먼저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뻔했다.
"응, 서연아."
- 오빠, 잘 지내?
"갑자기 안부 전화를 하려고 전화한 것 같진 않은데. 용건만 말해줘."
- 차소희가 전주 쪽으로 내려가 있어. 간 이유는 모르겠지만, 관련 정보를 얻은 모양이야.
"눈을 붙인 거야?"
- 응. 오빠가 걱정돼서 개인적으로 고용한 눈이 있어. 문제는 없을 거야.
"고마워. 하지만 무리할 필요는 없어."
- 무리하는 거 아냐. 내가 신경 써 줄 수 있는 부분만 신경 쓰고 있을 뿐이야.
"그래."
- 오빠.
"응."
- 오빠가 원하면 서울 쪽으로도 길을 터줄 수 있어. 그쪽은 정말 안전하잖아.
서울이라는 간접적인 비유를 쓰긴 했지만, 정화 길드에 연을 만들어주겠다는 뜻이다.
강후에게 있어 정화 길드는 앞으로 최대의 적이 될 곳이라 반감만 가득한 곳이었다.
물론 한서연이 악의로 자신에게 꺼낸 얘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배려일 것이다.
"괜찮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
-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꼭 얘기해 줘. 오빠, 알았지? 혼자서 힘들어하지 마.
"알았어. 서연이 너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던전 갈 때마다 항상 조심해."
- 응, 그럴게!
"끊는다. 고생하고."
강후가 전화를 끊었다.
한서연은 원작에서도 오로지 신강후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순애의 대명사랄까.
이야기 후반부에서는 신강후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기도 한다.
그 희생이 결과적으로는 신강후를 폭주하게 만들면서 그를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시종일관 냉정함을 유지하며 장시환에게 대적해 왔던 그가 처음으로 감정적인 사람이 되게 만들고.
그것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서 장시환에게 죽는다.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할 빌런으로서의 멋진 최후라면 최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서연...."
사랑했던 시간 속에서 원작 속의 신강후도 한서연을 위해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않았다. 후회 없이 사랑했다.
그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슴에 간직한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마음의 빚을 갚는 중일 터다.
* * *
평소 6시간의 여유가 있었으면, 기다릴 것 없이 침대에 누워 잠부터 청했을 텐데.
오늘은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아서인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헌터그램'을 켰다.
헌터 전용의 SNS로 홍보 및 커버 영상의 용도로 많이 쓰이는 수단이다.
대외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공개하는 경우가 많기에 보통 실력 있는 헌터들의 영상이 많았다.
당연히 여기에는 장시환과 채관형의 영상도 있었다.
중복 없는 순수 조회 수도 업로드 하루 만에 100만을 돌파한 상태.
둘의 인기는 '미친' 수준이다.
"흠."
홍보 영상을 보는 강후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장시환과 채관형은 둘 다 레벨도 높고, 계약한 성좌도 많아 까다로운 것이 당연하지만.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가진 능력의 조합이 사기성이 짙다는 것이었다.
장시환은 마법-공간계 헌터고, 채관형은 검술-공간계 헌터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자유자재로 공간을 바꿔가면서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것이 능력으로 보장된다. 달리 몸에 과부하를 유발하지도 않는다.
헌터로서의 태생이 공간 이동에 특화되어있는 것이다. 단거리 이동 스킬을 원 없이 쓰는 셈이다.
딱히 누굴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 원작에서 그렇게 조형해 둔 것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장을 잘하고 손톱, 발톱을 다 숨긴다고 해도 정화 길드 안에서는 위험해."
좀 더 빠른 성장을 위해 정화 길드에 들어가는 선택지도 고려해 봤지만 생각할수록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예로 안영호만 해도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납치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열세 개의 별 중의 한 명인 유청화가 이미 정화 길드 안에 있다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여차하면 강후의 스킬도 그녀에게 카피 당할 수 있다. 좋은 그림이 아니다.
"아예 어느 세력에 둥지를 틀고 싶으면, 강원도 쪽의 군벌도 나쁘진 않은데."
강후는 비단 수도권에만 관심을 두고 있진 않았다.
강원도 쪽에는 그래도 좀 '사람 냄새'가 나는 군벌들이 있다.
평화 유지라던가, 범죄 근절과 같은 나름의 정의로운 뜻으로 신념을 가지고 모여든 헌터 말이다.
그곳도 갈만하다고 생각했다.
야생의 수많은 동물을 보면 태어났을 때 포식자들로부터 살아남는 것이 어렵고.
성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기 좋은 먹잇감으로 컸을 때 살아남기 어렵다.
강후는 지금의 자신이 딱 그렇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레벨 200 정도를 찍을 때까지는 항상 긴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위험은 항상 어디를 가든 존재하니까. 단 일분일초도 안심할 수 없다.
* * *
기다림의 시간이 끝난 후.
강후가 발트만 던전 앞에 도착하자, 온누리 길드에서 파견된 헌터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서비스는 좋네.'
공식적으로 라이센스 대여를 한 곳인 만큼, 후속 관리에도 꼼꼼하게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헌터 몇 명이 강후를 신기하게 쳐다봤고, 팀장 격으로 보이는 헌터가 강후에게 말을 걸었다.
"레벨 33이신데, 레벨 100 던전인 발트만 던전에 들어가도 괜찮겠어요? 그것도 솔플로?"
대여 과정에서 레벨 스캔은 필수였기에, 레벨에 대한 정보가 알려진 것은 딱히 상관없었다.
그렇지만.
'저놈의 숫자놀음이 늘 문제지.'
숫자로 자신의 가능성을 재단하는 팀장의 말이 거슬렸다.
다들 숫자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차이가 크면 벌벌 떨고 죽는 줄 안다. 지레 포기하는 것이다.
"...."
강후는 그들을 무시하고 던전에 입장했다.
일대 다수의 전투만 안 하면 된다는 것이 강후의 생각이었다.
강후는 신중하게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무리하지 않고 발트만 던전을 초입부터 공략해 나갔다.
분초를 다투는 의뢰도 아니고.
비싼 돈을 주고 들어온 던전인 만큼, 조금의 경험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착실하게 레벨을 올렸다.
패시브 스킬은 약자 멸시 덕분인지 후방 공격이 대미지가 잘 박혀서 공략이 더욱 수월했다.
다만 공략 내내,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클래스는 역시 무기 빨을 무시할 수가 없는데."
바로 강후의 주 무기이자 단검인 창공의 환희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보통 네임드라고 불리는 헌터들은 진짜 비싸고, 귀하고, 기능이 좋은 주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무기들은 최소 3등급 이상이며, 다양한 활용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창공의 환희는 5등급에 비전투 시 회복 관련 옵션을 제외하고는 다른 구성이 없었다.
이것이 못내 아쉬웠다.
물론 무기 빨 없이 지금 이 정도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늘 높은 곳을 지향하다 보니 항상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는 지금의 매 순간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34화 대참수 (3)
그래서 계획을 세웠다.
이후 아이템을 구매할 일이 생긴다면, 무조건 모든 초점을 무기에 집중하기로 말이다.
창공의 환희도 충분히 좋은 무기지만, 돈만 있으면 이것보다 훨씬 더 좋은 단검을 얻을 수 있다.
강후는 전투에서 더 확실히 화력을 뽑아내기 위해서라도 무기를 1순위로 두기로 했다.
3등급 수준으로만 무기가 올라가도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 * *
무리하지 않고 착실하게 공략을 한 덕분에 강후의 레벨은 쭉쭉 올라갔다.
어느덧 37이었다.
레벨업으로 얻은 보너스 스탯은 전부 체력으로 들어갔고.
소울 메이트 장갑의 특별한 효과인 '비례 체력' 역시 차곡차곡 잘 올라갔다.
"살짝 피곤하군."
강후는 뻐근해진 어깨를 어루만지며, 정면에 있는 보스를 바라보았다.
흑마법사 발트만.
좀 더 세부적으로 구성을 뜯어보면 발트만은 '체력형 마법사'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맷집도 좋으면서 마법까지 부릴 줄 아는 마법사라는 얘기다.
버티는 능력이 좋기에 근접전도 거부감이 없고, 경우에 따라선 적극적인 공격이 가능했다.
보통 마법사들은 자신이 피해를 입는 것이 두려워, 근거리 교전을 꺼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체력형 마법사는 회복과 맷집에 자신이 있으니, 뒤를 생각하지 않고 퍼붓는 것이다.
발트만의 주특기는 '작열(灼熱)'이다.
발화 능력이 주특기이고, 그래서인지 전장도 불에 관련된 형태로 설계되어 있다.
3m의 간격을 두고 전장 전역에 횃불이 피워지고 있고, 멀지 않은 곳에서는 용암이 흐르고 있다.
여차하면 발트만에게 죽는 것이 아니라, 용암에 녹아서 죽을 수도 있지 않겠나 싶을 정도다.
"후우."
심호흡을 했다.
발트만을 제거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가 아니다.
녀석의 특수 방어 스킬을 유도하는 것이 먼저다.
발트만은 상대의 스킬을 막아내기 위해, 종종 '태워 먹기'라는 스킬을 쓴다.
투박한 이름처럼 실제의 구현도 그랬는데, 날아드는 스킬을 불로 태워서 입으로 삼켰다.
그렇게 되면 상대가 스킬에 투자한 마나의 50%를 흡수할 수 있었다. 괴상한 스킬이다.
강후는 발트만이 태워 먹기 스킬을 대참수 스킬북에 쓰도록 판을 짤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스킬북을 태워 삼키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대참수 스킬이 학습되기 때문이다.
보스 몬스터는 헌터와 달리 성향이 다른 스킬북을 학습해도 페널티 처분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에.
강후가 발트만을 죽이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그에게서 대참수 스킬을 강탈할 수 있었다.
그것도 말끔하게 페널티가 지워진, 순도 100% 위력 그대로의 스킬로 말이다.
터업.
솔라키움 줄기 하나를 입에 물었다.
아무리 호흡을 조절하면서 싸워도 발트만쯤 되는 녀석을 과민증 발동 없이 죽일 수는 없다.
그러니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하찮은 피조물이여! 괜한 고생 하지 말고, 냉큼 이곳에서 돌아가는 것은 어떠냐?"
멀리서 발트만이 무어라 지껄여댔지만, 강후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끔 저런 말에 욱해서 달려드는 헌터들이 있는데, 가장 멍청한 케이스다. 아무 도움이 안 된다.
파앗!
강후는 대답 대신 도약과 가속 스킬을 동시에 연계하면서 전투의 포문을 열었다.
도약은 스킬 자체로, 원하는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힘이 어마어마한 스킬이다.
한데 여기에 가속 스킬까지 추가하면, 전광석화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활용할 수 있는 스킬의 개수가 늘어나면서, 강후는 두 스킬을 묶어 연계하는 구성을 짜고 있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각성 – 스킬 캐스팅 시간을 상당히 줄여주는 – 효과를 발동할 수 있어서다.
"타올라라."
발트만이 즉각 대응했다.
강후의 미친 속도의 접근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발트만은 오히려 잘 됐다는 표정이었다.
화르르륵!
발트만이 손끝으로 가리킨 지점을 중심으로 거대한 화염 장벽이 솟구쳐 올랐다.
새빨갛게 이글거리는 장벽은 마치 작은 태양을 이곳에 갖다 놓은 것처럼 열기를 뿜어냈다.
이는 강후도 무시하면서 통과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불을 코앞에 두면 발트만의 몸에도 어떤 변화가 생길 법도 하련만.
정작 당사자는 코앞에서 불길을 일으키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뜨거워하지도 않았다.
'시야를 가리는 구역을 만들어주면 나야 좋지.'
강후도 발트만의 즉각적인 대응에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좋은 이용수단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보호 방벽에 화염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똑같이 시야를 가릴 수 있는 불의 벽을 만들었다.
보호 방벽은 설치형이기 때문에 원하는 곳에 얼마든지 자리를 잡는 것이 가능했다.
그 상태로 강후가 미리 봐둔 발트만의 자리를 향해 손을 살짝 뻗었다.
연계한 스킬은 바로 납치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불길 너머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끌어당길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는지.
"흐억!"
발트만이 모양이 빠지는 비명과 함께 허공에서 파닥거리며, 순식간에 강후의 앞으로 끌려왔다.
콰악!
발트만이 쉽게 빠져나갈 수 없도록 옷깃을 비틀어 잡아챈 뒤.
푹! 푸푹! 푹! 푹!
출혈 찌르기 스킬을 활용해 쉴 새 없이 발트만의 어깨와 가슴팍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크아아악...!"
발트만이 신음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오른손을 활용해 다른 스킬을 펼쳤다.
즉사나 중상(重傷)과 같은 최악의 상황으로 가기 전에 공격적으로 던진 대응의 수였다.
화르르륵!
"제길."
강후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일단 뒤로 쭉 물러섰다.
발트만은 불의 가호라는 스킬을 활용해 스스로를 지켰다.
몸 전체를 거대한 불길로 바꾸는 스킬로 화염에 절대 면역이 있는 그이기에 가능한 대응이었다.
확실히 까다롭다.
그간 손쉽게 목숨을 끊었던 보스 몬스터와 달리, 발트만의 대응에는 짜임새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후가 손 놓고 아무것도 못 한 것은 아니다. 방금도 상처를 입혔고.
이제 값을 매길 차례다.
[혈화]
퍼퍼퍼펑!
"크어어아악!"
혈화를 사용하기 무섭게 발트만의 양어깨와 승모근, 흉부 상단에서 동시다발의 폭발이 일었다.
이것이 혈화의 힘이었다.
앞서 만들어둔 상처를 매개체로 삼아, 상대에게 생각지도 못한 추가 피해를 입히는 것!
강후가 다시 몰아쳤다.
후우웅! 후우웅!
이번에는 그림자 걸음이었다.
다섯 개 그림자가 전방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가기 시작하고.
각성 효과로 재차 사용이 가능해진 그림자 걸음을 강후가 또 한 번 썼다.
카득!
그리고 미련 없이 솔라키움 줄기를 꽉 깨물어, 안에서 흘러나오는 진액을 게걸스럽게 삼켰다.
곧 마나 과민증의 발동이 확정적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발트만의 빈틈을 만들어냈을 때, 확실하게 휘몰아쳐야 한다. 정신없이.
"다 태워버려 주마!"
발트만이 사방으로 흩어진 강후의 그림자를 보고는 신경질적으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어느새인가 만들어진 불의 비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강후를 특정하고 공격할 수 없으니, 모든 대상을 동시에 타격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자기가 자기 속성을 활용한 공격에 당하지는 않으니, 이런 공격적인 대응이 가능하군.'
내심 발트만이 부러워졌다.
단검을 누구보다 잘 다룰 줄 아는 만큼, 단검 공격에 무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파팟.
강후가 아직 형태가 남아 있는 그림자 중 하나를 선택해서 순식간에 위치를 바꿨다.
발트만은 그림자에는 관심이 없었다. 계속 본체 쪽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강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동공이 흔들리며 당황했다.
이윽고.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발트만에게 다시 접근한 강후가 이를 악물고 단검을 꽂아 넣었다.
푸욱!
"크억! 이, 이놈...!"
불의 가호 스킬은 한 번 경험한 적이 있기에, 같은 대응을 할 때 살짝 물러섰다가 다시 접근했다.
발트만의 대응 패턴이 하나둘씩 분석되자, 움직임도 더 이상 복잡해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 걸음에 호되게 당했으니, 또 당하고 싶진 않겠지.'
강후가 미끼를 던졌다.
재차 그림자 걸음 스킬을 전개하며, 이번에는 대놓고 그의 앞으로 그림자를 하나 보냈다.
앞서서 그림자와 본체의 위치가 바뀐 경험을 했으니, 같은 레퍼토리에 또 당하고 싶진 않을 터.
바로 그때.
품속에서 대참수 스킬북을 꺼낸 강후가 전력을 다해서 발트만에게 책을 던졌다.
그림자의 속도를 살짝 조절하면서, 그것보다 스킬북이 먼저 닿도록 타이밍을 맞췄다.
강후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 있었던 탓일까?
"으아압!"
얼굴이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오른 발트만이 마치 드래곤 브레스처럼, 화염을 전방으로 뿜어냈다.
태워 먹기 스킬이었다.
'됐어.'
화르르르륵!
이내 태워 먹기에 휘말린 대참수 스킬북이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푸른빛 정수의 형태로 치환된 내용물이 발트만의 입안으로 쏙 들어갔다.
스킬을 태워 먹었으면 발트만에게 마나를 보충시켜줬겠지만.
애석하게도 발트만이 얻은 것은 필요한 마나가 아니라, 활용 방법도 모르는 이상한 스킬이었다.
어쨌든 먹였다!
이제 발트만을 죽여도 된다.
그에게서 대참수 스킬을 강탈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스스로 헛짓거리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열이 바짝 오른 발트만이 강후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죽여버리겠다!"
이번에는 그의 손 위로 길쭉한 채찍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불의 채찍이라고 불리는 스킬이다.
제멋대로 줄었다가 늘어나길 반복하는 것은 물론, 타격 즉시 불이 붙기에 매우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강후는 당황하지 않고 도약을 활용해 극단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발트만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 거센 채찍질이 몸에 닿기 전, 횡 이동을 활용해서 발트만의 뒤로 돌아갔다.
"윽."
강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쉬지 않고 스킬을 휘몰아치듯이 쓴 탓인지 몸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솔라키움과 끈질긴 인내 반지의 고통 경감 효과가 적용되고 있는데도 이만큼의 고통이 느껴졌다.
아마 두 가지 보조 수단이 없었으면, 지금 전투가 아니라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새삼 보조 수단의 존재에 감사하게 됐다.
마나 과민증이 계속 체력을 갉아먹고 고통을 유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틸 정도는 됐다.
푸욱!
"끄아악!"
뒤에서 발트만의 허리와 옆구리 사이의 움푹 파인 공간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마법사 직업군의 보스 몬스터라서 그런지, 안에 덧대 입은 갑주의 강도가 썩 높지 않았다.
강후는 그 상태로 찔러 넣은 단검을 꽉 잡고는, 잔혹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비틀었다.
마치 꽉 잠긴 통의 뚜껑을 여는 것처럼 전력으로 돌리고, 또 돌렸던 것이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지옥일 수밖에 없었다.
피부와 근육, 살점은 물론이고 내장까지 뒤틀리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다면 그게 비정상일 정도다.
"크아아아!"
발트만이 절규했다.
강후는 멈추지 않고, 연이어 시야 강탈과 얕은 혼돈 스킬을 발트만에게 쑤셔 넣었다.
녀석에게 시야를 빼앗고, 공간에 대한 혼란을 줘야 최후의 일격을 확실히 먹일 수 있다.
피날레(Finale) 말이다.
강후는 전투를 길게 끌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기회에 두 번은 없다. 다음이라는 것도 없다. 운이나 요행 같은 것도 없다.
처음 잡은 기회가 반드시 마지막 기회여야 하는 것이다!
강후는 여기서 끝을 볼 생각이었다.
35화 대참수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