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전부 꽝이었다. 돈만 날렸다.
'쯧, 행운 Lv.1로는 효과가 부족한가.'
물론 실망스럽진 않다. 이미 1천만원에 당첨됐으니까.
나는 은행에 들러 복권 당첨금을 받은 뒤, 용산의 상가로 향했다.
용산 상가.
각종 헌터 관련 상점들이 즐비한 성지. 다른 곳과 비교하면 수수료가 다른 곳에 비해 싸다는 장점이 있다.
이곳에서 내가 가진 아이템을 판매하고, 필요한 아이템을 구매할 거다.
'일단 성장의 마족을 잡고 얻었던 마정석부터 팔아치워야겠다.'
이번에는 마정석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에 방문했다.
딸랑~
"어서오십쇼. 무슨 일로 오셨나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푸근한 인상의 남성이 나를 반겼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마정석을 꺼내들었다.
『 경이로운 순도의 마정석(D++) 』
"이걸 팔고 싶습니다."
"오오!"
마정석을 받아드는 주인의 눈이 빛났다. 돋보기를 사용해 이곳저곳을 살피던 가게 주인이 감탄하며 말했다.
"D등급 게이트에서 보기 힘든 좋은 품질이네요. 마침 저희 가게에서도 딱 이만한 등급의 마정석이 필요했었거든요."
그는 이것저것 따지더니, 내게 계산기를 내밀었다.
"이 정도면 될까요?"
650만원이다. 내가 예상했던 가격보다 150만원이나 더 쳐줬다. 내가 그래도 시세만큼은 나름 정확히 안다.
과거에 못 먹는 떡 보기라도 하자면서 열심히 조사했었으니까.
'남는 돈으로 비빔면이랑 한우를 배터지게 먹어도 되겠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표정을 살피던 가게 주인이 침음을 흘렸다. 고민하는 모습이 판매를 망설이는 걸로 보였나 보다.
"으으, 알겠습니다. 50만원 더 쳐드릴게요.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급해서요."
이내 가게 주인이 스스로 가격을 높였다. 진짜로 물건이 급한 모양이었다. 뭔가 행운 스킬 덕분인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기분 좋은 거래였다. 은빛 늑대를 잡고 나왔던 작은 마정석 두 개도 팔았다.
마정석과 늑대의 부산물을 판 것만 약 900만원이 나왔다.
여기에 복권으로 당첨된 천만 원을 더하면 1900만 원.
그게 내 전재산이다.
'후.'
헌터가 벌이가 좋다고 이야기는 참 많이 들었다. 하지만 회귀 전의 나랑은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밑바닥 중의 밑바닥에는 볕이 들지 않으니까.
지금부터는 다르다.
내가 벌어들이게 될 돈의 액수도 점차 차원이 달라질 것이다.
'고등급 헌터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인단 건지.'
그만큼 헌터 산업이 이 세계에서 끼치는 영향이 크다는 거겠지.
뿌듯한 마음이 든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비빔면 살 돈이 없었으니까.
'아쉽지만 이 돈은 다시 재투자해야 된다.'
이번 던전을 공략하는데 필수적인 아이템들이 있다.
그것들을 사면 수중에 남은 돈은 얼마 안되겠지.
나는 눈물을 머금고 마법 부여 아이템을 파는 가게로 향했다.
거기서 가방 하나를 집어 들었다.
수납 Lv.3이 부여된 가방이었다. 거기에 무게 감소 Lv.1까지.
"아, 그건 5400만원입니다."
"······."
직원이 웃는 얼굴로 그리 말한다. 나는 슬그머니 손에 든 마법 가방을 내려놨다.
과연 마법 부여가 된 아이템. 내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다.
'수납 인챈트가 걸려 있는 가방을 구매하려고 했는데 가격이 워낙 비싸야지.'
던전의 마정석을 캐내고 옮기려면 가방이 필수다.
'인벤토리로는 모자라.'
기본적으로 헌터는 모두 인벤토리라는 저장 공간을 얻는데 이곳에 아이템을 자유롭게 보관할 수 있다.
'내 등급이 B급만 됐어도 그냥 가는건데.'
또 등급이 높을 수록 그 크기가 커진다. D등급 헌터의 인벤토리는 넓지 않다. 크게 잡아도 0.5평 정도다.
사냥 한 번 정도는 상관 없지만, 대량의 마정석을 캐내고 옮기려면 훨씬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나는 고심 끝에 더 낮은 등급의 가방을 골라 들었다. Lv.1의 수납 스킬이 인챈트 된 가방이다.
"이건 얼마······."
"그건 1400만원입니다. 고객님."
잠깐 눈의 초점이 흔들렸지만 결국 구매했다.
필요한 지출이었다.
던전은 한 번 닫히면 다시 열리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가능하면 한 번에 최대한 많이 옮기는 게 좋다.
'내 돈······.'
피눈물 나는 구매였다.
이후에 헌터용 곡괭이와 삽도 하나씩 샀다.
헌터용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별 거 아닌 물품도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로프나 랜턴 등 탐사에 필요한 아이템도 미리 구매했다.
- 계좌 잔액 : 78,530 원
"······."
참 이상하다. 분명 천만 원 넘게 찍혀 있었는데.
그 충격에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메꾸려면 빨리 던전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다.
* * *
인천에 위치한 어느 산 속.
나는 지도에 표시된 위치와 주변을 비교하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이 근처가 맞는 것 같은데.'
비탈길을 쉬지 않고 올라왔지만, 체력 스킬과 능력치 덕분에 조금도 지치지 않는다. 길만 알고 있었다면 뛰어서라도 올라갔을 거다.
약 30분 간 이 산 저 산을 헤메고 다닌 결과.
『 스킬 '인지 Lv.10'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해당 스킬의 경험치가 25% 상승합니다. 』
나는 보고서에 표시된 던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짜 잘도 숨겨 놨네.'
던전 입구는 흙과 나무, 식물들로 절묘하게 가려져 있었다. 보아하니 위장 같은 스킬로 숨겨둔 것 같았다. 그것도 고레벨.
이 경우엔 인식 저해가 일어나 더욱 찾기 힘들다.
'인지 스킬이 쓸모가 많구만.'
인지 스킬이 없었으면 한나절이 걸렸을 거다.
'근데 경험치가 25%정도만 올랐네.'
사실상 스킬 레벨을 11레벨까지 직접 올리는 헌터는 없을 거다. 스킬의 최대레벨'만' 올려주는 아이템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레벨을 한 칸 올려주는 건 몰라도.
그렇기에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경험치를 필요로 하는 걸거다.
'아니지, 25%면 말도 안되는 속도지.'
애초에 스킬 10레벨을 달성하는 것도 범인의 재능으론 쉽사리 해낼 수 없다.
'들어가려면 이 풀때기랑 흙을 치워야겠는데.'
인벤토리에서 헌터용 삽을 꺼내들었다.
삽으로 주변을 정리하자, 그제서야 숨겨져 있던 입구가 모습을 훤히 드러냈다. 나는 한 방울 흐른 땀을 닦아내며 허리를 폈다.
'그래, 이제야 잘 보인다.'
주변과 확실히 비교되는 검은 석재가 입구를 이루고 있었다. 그 크기는 대략 3m 정도. 이만한 크기를 숨겨 놓은게 누군진 몰라도 참 능력자다.
그곳으로 발걸음을 들이기 전.
나는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부턴 정신계 방벽이 존재한다. 무턱대고 들어갔다간 위험할 수 있어.'
이곳은 정신계 마법으로 접근 자체를 원천 차단하고 있었다.
억지로 들어가려고 했다가 정말로 미쳐버리거나, 몇 달을 앓아누운 헌터를 본 적이 있었다.
'조금씩 들어가면서 버텨야 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 D등급 헌터는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정신 저항 같은 관련 스킬이 있는 C++등급의 헌터가 필요하다고도 했고.
'그래도 난 괜찮다.'
내게는 정신력 스킬이 있다. 우두머리 늑대의 포효를 참아내며 얻은 정신력 스킬.
즉,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다.
『 스킬 '정신력 Lv.3'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 정신계 마법에 저항합니다. 』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안으로 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마자 부정적인 사념이 내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심장이 옥죄어지고 온몸이 떨린다. 당장이라도 주저 앉고 싶어진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이건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정신계 마법에 불과하니까.
'천천히.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버티기만 한다면.
제대로 견디기만 한다면 분명 이겨낼 수 있다.
한걸음, 한걸음.
느릿하게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크윽.'
심지어는 과거의 기억들이 환청처럼 들려 왔다.
- 이 쓰레기 헌터 새끼가! 괜히 나대지말고 마정석이나 찾아.
- 그 따위로 할 거면 꺼져. 너 같은 새낀 필요 없으니까.
- 남의 짐은 되지 맙시다. F급이면 F급답게 뒤에 짜져 있으란 말이야.
극심한 무력감과 탈력감이 밀려왔다.
재능이 없단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F급 헌터.
그 시절의 내가 느낀 부정적인 감정이 파도처럼 나를 휩쓴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그 결과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 자체를 박살낸다.
'젠장.'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리며 앞으로 넘어졌다. 나는 바득바득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부림 쳤다.
정신계 마법.
이는 헌터들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신체 능력은 일반인보다 월등하지만, 그들의 정신 또한 그런가?
'그럴 리가.'
헌터도 고뇌하고, 좌절하고, 쓰러진다. 여느 평범한 사람처럼. 그러나 사람의 내면은 잘 드러나지 않기에 헌터들은 종종 잘못된 우월감에 휩싸이곤 한다.
자신은 강하다고.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신체의 강함이 전부가 아닌데도. 그런 이들은 이런 정신 공격 앞에서 쉽사리 무너진다. 보기 추할 정도로.
그런 점에 있어서 나는 한결 나았다.
'이런 더러운 기분은······. 진작에 뒤지도록 맛 봤어.'
재능 없는 F급 헌터라고 멸시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멸망한 세계를 바라보며 절망도 했었다.
'그래, 지금의 나는 달라졌어.'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그 결과가 지금 아닌가.
나는 무릎을 잡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내 시야로 다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스킬 [ 정신력 Lv.4 ]를 획득합니다. 』
『 스킬 [ 정신력 Lv.5 ]를 획득합니다. 』
거세게 쏟아지던 부정적인 생각과 잡념들을 몰아내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허억······. 허억······."
그것들은 전부 허상이었다.
단단하게 자리 잡은 '나'라는 존재를 다시금 느낀다.
'정신 공격이란 거 쉽지 않네.'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옷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래도 이젠 괜찮다. 오히려 정신력 스킬을 키워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다시금 긍정적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흐뭇해진다.
'공짜로 스킬 레벨업을 시켜주고, 완전 수련이 따로 없군.'
나는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기이한 문자가 새겨진 돌벽이 쭉이어지고 있었다. 보통 던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이미 꽤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몬스터가 없다.'
이것만해도 큰 차이였다. 잠깐, 그렇다는 건······.
'설마 정말로?'
정신계 방벽이 둘러져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의심하기는 했다.
'크윽.'
몇 발자국 더 나아가자, 다시 거센 정신적 반발이 느껴진다. 나는 다시 뒤로 돌아왔다.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여기는 그냥 던전이 아니야. 입구부터 비정상적인 수준의 정신방벽도 그렇고, 몬스터가 없는 것도 그렇고.'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여긴 D급이 클리어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던전을 발견한 윤정수에게 새삼 감탄한다.
'윤정수, 이 대단한 새끼.'
아니지, 재물 획득의 물약이 대단한 건가? 어쨌든 윤정수 본인은 몰랐겠지만 이곳은 나중에 꽤 유명한 던전이 된다.
'여긴 보통 헌터는 공략할 수 없는 던전이니까.'
보고서에는 C급 최상위 이상의 헌터가 접근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는데 그건 입구의 첫번째 구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앞으로 몇 개의 더 강력한 정신 방벽과 함정이 존재한다. 심지어 순차적으로 강해진다. 그 앞에서 대부분의 헌터가 발을 돌리게 된다.
'그건 S급 헌터도 쉽게 돌파할 수 없을 정도.'
그리하여 이 던전을 차지하는 자는 헌터가 아니다.
바로 마족이다.
이 던전의 끝에는, 마족 군단장 중 하나가 사용하던 아이템이 잠들어 있다.
18화 솔로 플레이(2)
마족들 중에서도 극히 빼어나거나거나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
군단장(軍團長).
마계왕의 인정을 받은 그들은 마족을 이끌고 최전선에서 인류를 침략했다. 그들이 보여주는 능력은 차원이 달랐다.
SSS급 헌터를 가뿐히 뛰어넘는 절대적인 힘 앞에서 인류는 절망했다.
마계왕이 세계를 침공하는 동안 인류는 고작 두 명의 군단장을 살해했을 뿐이었다.
'지난번에 쓰러뜨렸던 성장의 마족. 그 놈도 군단장이 될 운명이었지.'
나는 그걸 사전에 차단했다. 달리말하면 놈이 죽일 수백만의 사람들을 살렸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미래의 군단장이 사용할 장비가 존재할 수도 있었다.
'무패(無敗)의 마족.'
놈은 진작에 이 세계에 넘어와 헌터인양 행세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길드를 만들고 게이트를 공략하며 아이템을 모은다.
그러나 그 실체는 이 세계를 노리는 마족.
'그 정체가 밝혀졌을 때는 충격이었지.'
놈이 인간들 사이에선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군단장인 이유였다. 그가 들렀던 던전이나 획득한 아이템은 연구되고 조사되었으니까.
영웅들은 그런 정보를 서로서로 공유했었다.
나는 그렇게 흘러나온 정보를 소문으로 들었고.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이 던전은 유명했었다.
'D급 던전인데 아무도 못 들어가는 걸로 유명해졌지.'
윤정수는 결국 이곳을 공략하지 못하고 팔아 치우게 될 거다. 그렇게 여러 길드의 손을 거친 이 던전을 무패의 마족이 공략하게 된거고.
그래서 나는 이 안에 잠든 아이템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무래도 주워들은 이야기다보니까.'
소문에 의하면 끝까지 사용하던 아이템이라던데. 그 아이템의 정체에 대해선 말이 많았다. 무기라느니, 소환수라느니, 장비라느니.
무패의 마족과의 전투에서 살아 돌아 온 영웅이 얼마 안 있어 죽었기에 진실은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겨우 D급 던전인데 그 정도로 좋은 아이템이 있으려나?'
그래도 보상을 기대해 볼만한 근거는 된다.
다만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여기엔 일반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기껏 성장의 마족을 잡고 레벨 제한이 풀렸는데 아쉬운 일이었다.
'뭐, 레벨은 보스를 잡아도 오르니까.'
스킬 레벨이 높기 때문에 충분히 도전해볼 만했다.
'그럼 다시 움직여볼까.'
1차 관문을 통과하고 나서 잠시 휴식을 취했었다.
가져온 이온 음료를 마저 들이켠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멸망한 세계엔 없어진 음료인지라 꿀맛이었다.
휴식을 취하고 나니 몸 상태가 확실히 가볍다.
나는 팔과 다리를 움직여 준비 운동을 했다.
'여기서부터는 정신계 공격 뿐만 아니라 함정도 같이 나온다.'
유명한 던전이기에 나는 그 구조를 알고 있다.
'월간 헌터를 틈틈히 읽어뒀던 게 이런 도움이 될 줄이야.'
월간 헌터는 내가 좋아하던 헌터 관련 잡지책이다. 인터넷에서도 얻기 힘든 귀한 정보를 기사로 만들어 실어주는 훌륭한 책이었다.
비록 F급 헌터였지만, 언젠가 날아오를 그 날을 위해 나는 헌터 정보만큼은 열심히 수집했었다.
'뭐, 끝까지 날아 오르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결국엔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된다. 헛된 일이 아니었다.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나는 준비 운동을 완벽히 끝마쳤다.
'몸은 다 풀었다. 남은 건 관문을 돌파하는 것 뿐.'
이 던전은 총 4개의 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금 첫번째 관문을 돌파했고, 이제 두번째다.
아쉽지만 함정의 세세한 위치까지는 모른다.
'두번째 관문의 핵심은 화살이다.'
나는 다음 관문으로 발을 내딛었다. 왠지 모를 저항감이 느껴진다. 공기의 무게가 한층 무거워진 기분.
이 정신계 공격을 받아내면서 함정을 피해야 한다.
쉬이익!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들렸다.
『 스킬 '인지 Lv.10'을 발휘합니다. 』
『 스킬 '민첩 Lv.10'을 발휘합니다. 』
촤악!
보자마자 반응했지만 화살은 내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한다고 피했는데 몸이 마음 같지 않다.
『 정신계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일부 감소합니다. 』
『 스킬 '정신력 Lv.5'를 발휘해 정신계 공격을 일부 방어합니다. 』
두 개의 상반된 메시지가 떠오른다.
정신력 스킬이 없었다면 화살은 그대로 내 심장을 꿰뚫었을 거다.
'이대로 돌파한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나갔다. 특정 구간을 지날 때마다 여러 방향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나는 침착하게 귀를 기울였다.
높아진 인지 능력은 오감에 전부 작용한다. 그간 나는 너무 시각에만 의존해왔다.
'보고 피하려면 늦어진다.'
『 스킬 '인지 Lv.10'을 발휘합니다. 』
'듣고 피해야 해.'
소리의 속도는 화살보다 빠르다. 그것으로 먼저 방향을 파악해야 했다. 보는 건 그 다음이었다.
어디선가 화살 쏘아지는 소리가 났다.
'좌측이다.'
그대로 몸을 반대로 틀자 화살이 나를 피해서 지나갔다.
'이번엔 우측.'
화살을 피하는 건 더 이상 어렵지 않았다.
『 스킬 [ 정신력 Lv.6 ]를 획득합니다. 』
『 스킬 [ 정신력 Lv.7 ]을 획득합니다. 』
정신력 스킬도 다량의 경험치를 얻고 있었다. 레벨이 오르자 주변 공기의 무게가 덜어졌다. 몸을 움직이기 한결 편하다.
수십 개의 화살이 나를 노리고 쏟아졌지만 전부 어렵지 않게 피해낼 수 있었다.
터억.
그렇게 2관문을 통과했다.
* * *
회색이었던 바닥의 색깔이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다음 관문으로 넘어왔다는 의미였다.
나는 통로의 너머를 내다봤다.
'세번째 관문에서 필요한 건 속도.'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좌우의 벽이 줄어들고 서 있을 바닥이 차례차례 꺼진다. 공략자는 압사 당하기 전에 빠르게 달려서 길을 통과해야 했다.
간단한 함정이었지만, 3관문부터는 정신계 간섭이 더욱 강력해진다.
유명한 헌터들도 여길 공략하다 심각한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굳이 도박을 할 필요는 없지.'
나는 다시 2관문 쪽으로 돌아섰다. 그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미 함정이 사라진 2관문에도 여전히 정신 방벽만큼은 남아있다.
다시금 공기가 살짝 가라앉는다.
거기에 똑바로 서서 팔짱을 끼었다. 그리곤 요지부동으로 서 있는다.
『 스킬 '정신력 Lv.7'의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
입가에 미소를 돌았다.
이곳의 공략법은 간단하다.
적어도 나한테는 말이지.
'좋아.'
이대로 레벨이 충분히 오를 때까지 쭈욱 기다리면 되는 거다.
* * *
쿠구구구······.
서서히 줄어드는 벽 사이를 나는 거침없이 뛰어나갔다. 도중에 발판이 무너지거나, 사라진 부분이 보였지만 가뿐하게 뛰어 넘었다.
『 스킬 '정신력 Lv.9'를 발휘합니다. 』
정신력 스킬이 9 레벨에 이르자 정신계 방벽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방해 없이 장애물을 뛰어넘고, 발판을 찾아 밟는 건 내겐 너무 간단하다.
타악.
3관문을 순식간에 통과했다.
내가 완전히 관문을 통과하자 한껏 줄어들었던 벽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
'다음이 마지막 관문인가.'
이번에는 아예 보랏빛 안개가 던전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더 이상 이곳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모양새다.
여길 공략하는 법은 아까 전과 마찬가지다.
'쉽다, 쉬워.'
나는 뒤로 돌아가 정신에 걸리는 부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느긋하게 경험치를 쌓아간다. 10만배가 된 경험치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벽이 나를 향해 줄어들지만 언제든지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이윽고, 메시지가 떠오른다.
『 스킬 '정신력 Lv.10'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정신력 Lv.11'을 획득합니다. 』
『 '정신력' 스킬이 최대 레벨이 도달했습니다. 』
'오.'
정신력 스킬의 경험치는 순식간에 차올랐다.
어쩌다보니 11레벨까지 달성했다. 최초의 11레벨 스킬이었다. 그 효과가 바로 체감 된다.
'몸이 오히려 가벼워졌어.'
관문에 서 있는데도 정신 간섭이 아예 느껴지지 않는다. 한줄기 상쾌함마저 느껴진다.
나는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정신력' 스킬이 11레벨을 달성하여 추가 효과를 획득합니다. 』
『 이제 정신계 '마법'에 한해 부정적인 효과를 받지 않습니다. 』
'정신계 마법 완전 면역?'
믿겨지지 않는 효과였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11레벨에 도달한 스킬은 대부분 추가 효과를 부여 받는다. 이때 부여되는 효과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내가 받은 추가 효과는 사기 그 자체.
꿀꺽.
나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보랏빛 안개가 던전 내부를 꽉 채우고 있다. 저 내부에는 이전보다 지독한 정신계 마법이 펼쳐져 있을 거다.
S급 헌터조차 버티지 못하는 기형적인 난이도.
근데 이제 괜찮다. 나는 정신계 마법에 면역이니까. 방벽과 같은 던전의 저주는 일종의 마법으로 취급되기도 하고.
'가보자.'
나는 망설임 없이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푸쉬이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개 속을 무던히 걸어 나간다.
'여긴 1관문과 마찬가지로 함정은 없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아른거리던 무언가가 형체를 이룬다. 바닥에 엎드린 채 덜덜 떨고 있는 어떤 난쟁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 제, 제발······. 꺼내줘, 살려줘. 나를······. 죽여줘······.
판타지에서나 볼법한 갑옷을 걸치고 있는 난쟁이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 환영 뒤로 끔찍한 참상이 비춰진다.
- 죽어! 죽어버려! 니 새끼만 아니었더라면 내가······!
- 이 빌어먹을 새끼가!
서로에게 미친듯이 칼을 휘두르며 피를 흩뿌리는 두 사람. 그들은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서로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어떤 이는 쉴 새 없이 후회의 말을 되뇌이면서 바닥에 쓰러진 동료를 찌른다.
그러한 환영이 점차 늘어간다. 수십에 달하는 환영이 미쳐 날뛴다.
보고 있자니 미간이 찌푸려졌다. 흡사 지옥도다.
'이 던전의 마법에 집어 삼켜졌던 사람들의 기억인가.'
마법과는 별개로 던전이 만들어내는 기억의 형상일까?
나는 그 환영들을 무감하게 지켜봤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이 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이 던전은 아직 아무도 공략을 시도하지 않았으니까.'
다른 세계가 있는 거겠지. 그것은 마족의 존재로도, 게이트의 존재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거기서도 일어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던전에 잠든 마정석과 아이템이라는 막대한 보상.
거기에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헌터 혹은 모험가들.
그 최후의 기억이 여기에 생생히 새겨져 있다.
이 던전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집어 삼켜 온 거겠지.
『 스킬 '정신력 Lv.11'을 발휘합니다. 』
『 부정적인 영향을 무시합니다. 』
던전의 마법에 가로막힌 자들의 좌절과 공포가 생생히 느껴진다. 이러한 일들이 여전히 다른 세계에서도 반복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씁쓸하다.
푸쉬이······.
나는 환영들을 지나쳐 안개 속을 빠져나왔다. 보랏빛 안개가 아쉬운 듯 연기를 뿜어냈다. 그런다한들 나에게 해를 끼칠 순 없었다.
* * *
'이제 남은 건 보스인가.'
4관문을 통과하자 원형으로 된 넓은 장소가 나왔다.
일렁이는 횃불과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안개. 그 너머로 반짝이는 마정석의 덩어리들.
그 한 가운데.
보라색 안개를 흘리는 갑옷이 있다.
전신에 검은 갑옷을 두른 검사. 그 투구 속의 어둠이 나를 응시했다.
철컥.
녀석이 검을 들어 올렸다.
'이 던전의 난이도는 비정상적이다.'
외부에서 관측되는 마력의 양과 그 힘이 비례하지 않는다. 아마도 마기의 영향을 받은 거겠지.
마계에 존재하는 마족들의 활동으로 인해, 던전이나 게이트에 마기가 스며든다는 게 정설이었다.
'모든 변칙 게이트나 던전이 그런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그렇다고 봐야겠지.'
크게 걱정할 건 아니었다.
아무리 마기에 오염되어 봤자 그 토대는 D급 던전이다. 그 중심이 되는 보스의 힘은 잘해봐야 C급을 넘지 않을 거다. 잘 쳐서 D급 상위 정도.
나는 심호흡을 하고 인벤토리에서 도검 영혼 포식자를 꺼내 들어 올렸다.
그런데 영혼 포식자의 상태가 이상했다.
'응?'
영혼 포식자의 칼날에서 흘러나오는 한기가 한층 강해져 있었다. 그것뿐이었으면 몰랐겠지만 그 한기에 검은 기운이 묻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직 갑옷 검사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나는 슬쩍 영혼 포식자의 정보를 확인 했다.
『 아이템 정보 』
- 이름 : 마기가 깃든 영혼 포식자
- 등급 : 특수 레어
- 능력치 : 공격력 30(+3)
- 특수 기능 : 영혼 개방, 마기 포식
공격력이 3 늘어 있고, 웬 기능 하나가 더 생겨나 있다.
『 영혼포식자 : 마기 포식 』
- 설명 : 마(魔)를 흡수할 때마다 공격력이 영구적으로 3 증가합니다. ( 1 / 5 )
오호라.
마족을 처치할 때마다 공격력이 늘어난단 거였다. 성장의 마족을 처치하고 나서 처음 꺼내서 미처 몰랐다.
'이런 기능이 붙었을 줄이야.'
잘 됐다. 이번 보스를 잡고도 공격력을 올릴 기회가 있었다. 마족은 아니지만, 마기가 묻어 있는 것 같으니까.
갑옷 검사는 여전히 가만히 서서 나를 주시하고 있다.
'내가 먼저 오는 걸 지켜보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먼저 가주마.
나는 바닥에 닿은 발에 힘을 주었다. 그 즉시 땅을 박차고 쏘아지듯 뛰어나갔다. 순식간에 보스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뒤로 뻗었던 검을 그대로 내지른다.
카아앙!
그러나 다음 순간, 보스의 검은 나의 검과 맞닿아 있었다. 저릿한 충격이 도검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그래도 검대검이라면 물러설 이유가 없다.'
『 스킬 '검술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나는 몰아치듯 수차례의 연격을 퍼부었다. 검에 의한 풍압이 보스가 흘리는 안개를 떨쳐냈다.
한걸음, 한걸음씩 보스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결정타를 날리려던 그때였다.
보스의 검에 보랏빛 안개가 회오리처럼 모여들었다. 더없이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안개 덩어리.
"!"
콰아아앙!
보스의 검에서 나온 반월형 마력이 나를 덮쳤다. 형언하기 힘든 기운이 몰아치며 나를 밀어냈다. 나는 그 충격파에 휩쓸려 바닥을 굴렀다.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크으윽······. 뭐, 저리 세냐.'
영혼포식자를 쥔 손에 피가 스며들었다. 온 몸이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이 아프다. 지금 내겐 마력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있다면 영혼 포식자의 영혼 개방 정도인데, 스택이 모자르다.
『 스킬 '맷집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 치명적인 데미지를 받아도 행동할 수 있습니다. 』
『 맷집 Lv.10 [ 34% ] 』
맷집 스킬 덕분에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아쉬움에 이를 악물었다.
'젠장, 조금만 더 빨랐으면 됐는데.'
일자베기를 먼저 사용했으면 내가 녀석을 집어 삼킬 수 있었다. 그걸 알고 녀석도 내게 빈틈이 생기는 틈을 노린 거겠지.
'위압 스킬도 안통하고.'
방금 전 공격 속에 욱여 넣어 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놈이 가진 능력치가 나보다 더 높다는 의미다.
나는 이미 모든 스킬을 발휘하고 있는 상태다.
'하다 못해 레벨이라도 높았으면······.'
지금 내 레벨은 20.
이제 막 D급이 된 레벨이었다.
'이런.'
여기가 내가 아는 던전인 줄 알았으면, 몬스터 한 마리라도 미리 잡아왔을텐데.
스으윽.
내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자, 이번에는 보스가 검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검 주변으로 보랏빛 안개가 모여든다.
다시 한 번 반월형의 마력이 내 쪽으로 쇄도했다.
콰아아앙!
나는 가까스로 몸을 굴려 피했다. 이미 부상을 입은 마당에 싸움이 길어지면 불리하다.
'무슨 쿨타임도 없냐, 저건.'
잠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놈의 마력은 계속해서 날아왔다. 그 동작이 눈에 뻔히 보였기에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난번 성장의 마족이 쏘던 미사일에 비하면 피하는 건 간단하다.
'내가 공격할 틈이 없어서 그렇지.'
더 이상의 정면 승부는 위험하다. 놈은 내가 결정타를 날리기 전에 분명 카운터를 노릴테니.
철컥.
연달아 마력이 담긴 참격을 날려대던 놈의 움직임이 멈췄다. 내게 공격이 먹히지 않고 있단 걸 학습했나보다.
그러나 나를 향해 다가오진 않았다.
'보스 녀석, 그 자리에서 못 움직이는 건가?'
비정상적으로 강한 힘에는 제약이 따르는 법이었다.
내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보스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손을 들어 올렸다.
스윽.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안개가 모여든다.
스스스······.
곧이어 보스의 앞에 작은 기사가 생겨났다. 보스보다는 더 작은 크기의 기사들.
철컥, 철컥.
그 수는 총 두 마리였다.
부하 두 녀석이 곧장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망치지 못하게 확실히 붙잡겠다는 위압감을 풍기면서.
'그냥 도망가야하나. 그러기엔 너무 아쉬운데······.'
다시 레벨업을 하고 돌아온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뭔가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뭔가 어떻게 안되나.'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턱.
어느새 나타난 벽이 등과 부딪혔다.
그때였다.
잊고 있던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 잠깐만.'
보스가 소환한 몹도 경험치를 주던가?
내가 아는 지식들을 종합해 본 결과 답은 금방 나왔다.
'그래, 분명히······.'
하수인 몬스터는 경험치를 준다.
『 레벨 정보 』
- Lv.20 (0%)
그리고 난 아직 레벨업을 하지 않은 상태.
'이건 기회다.'
하수인 병사 두 마리를 바라보는 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19화 솔로 플레이(3)
'병사 놈들은 당연히 보스보다 약하겠지.'
D급 던전에서 등장하는 마수의 평균적인 레벨은 30.
'내 레벨은 20이지만 스킬이 뒷받침되어 있으니 괜찮아.'
두 마리의 잔몹을 상대로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 스킬 '위압 Lv.7'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일순 나를 향해 다가오던 병사 둘이 멈칫했다. 그들의 능력치가 일부 낮아졌다.
나는 뒤쪽의 벽을 박차고 뛰어올라 도검을 들어 올렸다
- 신태양류 일자베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푸른 직선을 단번에 그어낸다. 직선이 이어진 부근에서 강렬한 충격이 이어졌다.
콰아앙!
병사 둘은 살아 있었다.
'막았나.'
잔몹치곤 상당한 검술 실력이었다. 놈들은 그 짧은 순간에 검을 들어서 일자베기를 막았다.
그러나 뒤이은 충격까지 무효로 할 순 없었다. 두 명의 병사가 중심을 잃고 기울어졌다.
'지금이다.'
나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재빠르게 병사 하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놈이 자세를 되찾기 전에 다시 한번 일자베기를 사용했다.
서걱—!
푸른 선이 놈의 몸을 갈랐다. 이번에는 완벽하게 적중했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놈의 갑옷에 새겨졌다.
병사의 고개가 억울하다는 듯이 나를 향해 드드득 돌아간다. 그러나 놈의 몸은 이미 양단되었다.
철컥, 철컥!
미처 처리하지 못한 병사가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시야의 한 켠에서 마력이 담긴 참격을 쏘아내려는 보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첫 번째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그 순간 승패는 결정 되었다.
『 특성 '무재조정(EX)'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획득 경험치가 10만 배가 됩니다. 』
『 특성 무재조정:한계돌파의 효과로 능력치 상승폭이 1.2배가 됩니다. 』
새하얀 빛무리가 내 몸을 미친 듯이 휘감기 시작했다. 그 찬란한 빛의 세례 속에서 나는 가볍게 뛰어올랐다.
『 레벨업! Lv.21이 되었습니다. 』
『 레벨업! Lv.22가 되었습니다. 』
『 레벨업! Lv.23이 되었습니다. 』
『 레벨업! Lv.24가 되었습니다. 』
···
..
.
"!"
살짝 뛰었는데 어느새 천장이 가까워져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레벨 업을 하며 상승된 능력치의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물론 놀란 건 잠깐이었다. 적응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 스킬 '인지 Lv.10'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스킬 '체술 Lv.10'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두 개의 스킬이 급변한 신체 능력을 보조합니다. 』
인지와 체술, 두 개의 스킬 덕에 금방 내 몸에 적응할 수 있었다. 원래부터 내 능력치였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나는 순식간에 병사의 머리 위까지 도달했다. 병사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뒤늦게 쏘아진 보스의 마력이 애꿎은 던전의 벽을 강타했다.
콰과광!
흩어져 나오는 파편과 먼지의 부스러기.
서걱.
나는 가볍게 도검을 휘둘러 병사를 베어냈다. 스킬을 쓸 필요도 없었다. 영혼포식자의 칼날에 허무하게 잘려나간 병사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
..
···
『 레벨업! Lv.37이 되었습니다. 』
『 레벨업! Lv.38가 되었습니다. 』
『 레벨업! Lv.39이 되었습니다. 』
『 레벨업! Lv.40가 되었습니다. 』
'이게 레벨에서 오는 힘의 차이구나.'
레벨업 이전의 내 힘이 D급 초입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서 한 단계 상승한 C급과 동일한 능력치다.
속도와 힘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능력치의 향상이 있었다.
다시금 보스의 칼날에 보랏빛 안개가 휘몰아친다. 그러나 아까 전 같은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부드럽게 움직여서 그 검격을 피했다. 몇 번 더 검격이 날아왔지만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다.
고개를 들어 보스를 바라봤다. 놈의 주변을 두른 안개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런 대치가 상태가 잠시 이어졌다.
보스도 지능이 있는지라, 병사를 더 소환해주진 않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나름대로 마력을 소모할테니.
아쉽지만 괜찮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타악.
땅을 박차고 나가자, 단숨에 보스의 지척에 도달한다. 마치 상위 헌터가 된 듯한 느낌.
나는 몰아치듯이 검을 휘둘렀다.
카앙! 카앙! 카앙!
검날이 서로 부딪히며 푸른 불꽃이 튀어 올랐다. 휘두르는 검은 더 없이 가볍고 자유롭다.
20레벨 때와는 확연히 다른 차이였다.
20레벨이 한 번에 올랐기에 그 체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카앙!
내 공격 한 번 한 번에 갑옷 기사가 크게 밀려난다. 검을 잡은 녀석의 손이 비틀리더니 급기야 검이 흔들린다.
나는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내 안쪽에서 무언가가 끓어 오르고 있었다.
센스와 검술?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뒷받침 되어야하는 건 단연 레벨이다.
레벨로 쌓아 올린 능력치 차이가 모든 걸 압도하고 있었다.
카아앙!
푸른 불꽃이 튀어오르며 갑옷 기사의 검이 크게 뒤로 밀려났다.
도검을 뒤로 뻗어 일자베기를 준비했다.
동시에 투구 안쪽의 어둠 또한 나를 응시했다. 놈은 휘청이면서도 검에 안개를 불어넣고 있었다. 마력이 담긴 검이 폭발적으로 휘둘러지려 한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더 빠르다.'
간결면서도 명확하게.
『 스킬 '일자베기 Lv.10'을 발휘합니다. 』
서걱—.
좌우 일자로 뻗어진 고요한 청광(靑光).
레벨이 올라서일까 일자베기에 실린 힘이 한 차원 달랐다. 공간에 새겨진 푸른 선이 전에 없는 풍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보스의 검은 휘둘러지지 못했다.
갑옷을 채우고 있던 안개마저 양단되어 형태를 잃고 퍼져나갔다.
그 내부를 채우던 정체불명의 영혼 또한 사라졌다. 깔끔하게 사선으로 나뉘어진 갑옷이 허무하게 바닥을 굴렀다.
『 도검 영혼포식자가 마기를 포식합니다. 공격력 + 3 』
『 인과역전 상점의 효과! 』
『 레벨이 최대치에 도달하여 경험치 대신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 213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총 보유량 : 242p ) 』
메시지가 연달아 떠오른다. 보스가 완전히 죽었음을 알리는 메시지기도 했다.
나는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후.'
D급 던전치고는 굉장한 난이도였다. 어디선가 마기의 영향을 받아서겠지.
그래도 정신력 스킬도 올리고, 위압 스킬도 올렸다. 레벨업까지 알뜰하게 챙겼고. 완벽한 공략이었다.
뿌듯한 미소를 짓는 내 앞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 던전의 보스가 처치되었습니다. 』
『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
게이트와 달리 던전은 클리어 보상이 존재한다.
'드디어.'
군단장이 사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아이템의 정체를 확인할 시간이었다.
붉은 빛무리가 내 앞으로 살포시 내려왔다. 눈부시던 빛은 점차 잠잠해져 어떤 물건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정체는 반지였다.
투박한 철로 조각된 철반지.
나는 그걸 집어 들었다.
겉보기엔 정말 평범한 반지였다. 하지만 아이템을 겉보기로 판단하는 건 금물이다.
곧바로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다.
『 아이템 정보 』
- 이름 : 방어의 반지(???)
- 등급 : 유니크
- 능력치 : 방어력 + 10
- 효과 : 현재 핵심 기능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으음.'
나는 침음을 흘렸다.
'대단하기는하다만. 군단장이 사용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겨우 반지 하나끼고 방어력 10을 챙길 수 있단 건 굉장한 이점이다.
내가 지난번에 빌려 썼던 메탈 방어구는 풀장착을 하고도 25의 방어력이었으니까.
근데, 군단장이 썼다기엔 너무 허전하다.
소문이 거짓말이었나?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의심스런 눈으로 정보를 살피던 내 눈에 메시지창의 물음표 세 개가 보였다. 이어서 아래 설명까지 확인했다.
'핵심 기능이 봉인 되어 있다고?'
종종 능력이 봉인된 아이템이 발견되곤 한다. 봉인을 풀면 특수한 능력이 생기는데 그 종류와 성능은 여러가지다.
그런데 나는 그 종류를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모르지만, 멸망한 세계에선 대부분 알던 상식이지.'
나같이 허접한 헌터도 알 정도로 널리 퍼진 아이템 구별법이었다.
나는 횃불에 다가가서 반지의 안쪽 부분을 자세히 살폈다. 미세하게 마법의 술식이 새겨져 있었다.
내용을 정확히 읽어내는 건 불가능하지만, 이게 무엇인지는 알 수 있다.
그 술식의 끝에는 정말 미세한 별표가 새겨져있다.
'이건······. 대박이다.'
표식을 확인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거 어쩌면 정말로 군단장이 사용하던 아이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건 성장형 아이템이었으니까.
'성장형이라니.'
아직은 '???'로 되어 있지만 그 봉인만 풀어낸다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 거다.
물론 그게 전부였다면 내가 이렇게 기뻐하지는 않았을 거다.
가장 중요한 건 이거였다.
내 특성은 경험치를 10만배로 받고.
성장형 아이템은······.
'미쳤다. 진짜로.'
경험치를 통해 성장한다.
* * *
까앙! 까앙!
보스는 잡았지만 마무리가 남아 있었다. 보스방 뒤편의 벽에 다닥다닥 돋아난 마정석들.
전부 다 돈덩어리다.
나는 미리 구입해 온 헌터용 곡괭이를 들고 그 사랑스런 놈들을 캐냈다.
처음에는 그냥저냥 캐는데, 캐다보니까 점점 속도가 붙는다.
『 스킬 [ 채굴 Lv.1 ]을 획득합니다. 』
『 스킬 [ 채굴 Lv.2 ]를 획득합니다. 』
···
『 스킬 [ 채굴 Lv.10 ]을 획득합니다. 』
'오우······.'
꼭 이런 스킬은 레벨이 뒤지게 잘 오른다. 해체 스킬도 그렇고 채굴 스킬도 그렇고.
다시 채굴에 집중하던 때였다.
두두두두두!
갑자기 내 손이 미친듯이 던전의 벽을 두드리며 마정석을 캐내기 시작했다. 때리는 족족 마정석이 튀어나오는데 지치지도 않는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메시지를 확인했다.
『 스킬 [ 채굴 Lv.11 ]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굴삭력이 35%증가하고, 채굴시 체력 소모가 50% 감소합니다. 』
'편하군.'
비전투 스킬이라 그런지 몰라도 효과가 장난 아니었다. 나는 말그대로 굴삭기가 되어서 마정석을 채취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전부 수납 스킬이 붙은 가방에 담았다. 1400만원짜리 가방이 드디어 제 쓸모를 한다.
'가방은 계속 쓸 수 있고, 이번에 얻을 이득은 훨씬 크니까.'
결과적으로 좋은 투자를 한 셈이었다.
마정석을 전부 채취한 뒤, 나는 아이템들을 전부 챙겨 던전 바깥으로 나왔다.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하자 신선한 산의 밤공기가 폐 곳곳으로 퍼진다. 상쾌한 기분이였다.
'쾌쾌한 던전 공기보단 역시 산공기지.'
어느새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그도 그럴게 꽤 오래 있었다. 혼자 채굴 하기엔 많은 양의 마정석이었다. 스킬이 11레벨을 찍은 건 막판에 와서였고.
나는 가방에 담긴 마정석을 슬쩍 확인했다.
'이걸 전부 팔면······.'
어림잡아 1억은 나오지 않을까.
'재물 획득의 물약 효과가 확실하구나.'
액수를 생각하니 입꼬리가 올라간다. 좋은 일이 많아서 입이 아플 지경이다.
그래, 이게 헌터 생활이다.
던전과 게이트를 돌며 돈을 쓸어 모으는 삶.
내 능력에 따라 재화와 명성이 치솟는 그런 삶.
회귀 전에는 손가락 빨며 다른 헌터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그런 내가 혼자서 던전을 토벌하고, 마수들을 도륙내다니. 감회가 새롭다.
'마냥 기뻐하고 싶지만.'
이대로 세상이 평화로울 리 없다는 게 문제다.
'빌어먹을 마족 놈들.'
하산하는 길에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봤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별은 잘 안보였다. 빛공해 때문에 그냥 까만 밤하늘이다. 근데 그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회귀 전 밤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멸망한 세계에 인류의 불빛은 없었으니까.
'마족의 침공을 막지 못하면 돈이고 나발이고 결국엔 무의미해 진다.'
아직 이 세계에 다가올 절망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정보상 백묵 조차도 아직은 모른다.
'마족과 교류하고 있는 사람은 있겠지만······.'
그들조차 세계가 멸망할 거라곤 생각치 못한다.
대중들이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기 시작할 무렵, 마족들은 이미 이 세계를 집어 삼킬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늦는다.
'놈들의 계획을 사전에 최대한 차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지식과 능력 그리고 조금의 돈이 내 손에 있다.
나는 고개를 내리고 다시 산을 내려가는 데 집중했다.
밤공기는 차갑지만, 불록 솟은 가방의 무게만큼 마음은 든든했다.
* * *
터억.
집에 도착한 나는 가방을 방 한구석에 내려놓았다. 자그마치 1억원어치다.
'한꺼번에 전부 파는 건 어렵겠고, 당장은 생활비가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팔자.'
나는 아직 길드도 없는 일개 헌터다. 이 정도 양을 한꺼번에 팔게 되면 괜한 의심을 만든다. 굳이 마족 때문이 아니더라도 여러모로 귀찮게 된다.
'마정석 말고도 앞으로 얻게 될 가치 있는 아이템은 꽤 있다.'
그런 걸 전부 판매하려면 일반적인 판매상으론 부족하다.
나는 어제 받았던 명함 한 장을 꺼내들었다.
- 호라이즌 정보 길드 '백묵'
검은 바탕에 새하얀 로고가 새겨진 심플한 디자인. 명함치고는 특이하게 직함이 써있지 않다.
앞으로 마정석과 아이템은 백묵을 거쳐서 팔 계획이다.
'백묵을 통해서 판매 루트를 만들어 놓으면 문제 없겠어.'
수수료는 꽤 떼이겠지만, 조용하고 은밀한 일처리에 있어서 백묵보다 더 믿을만한 사람은 없다.
'일주일 있다가 연락을 달라고 했었지.'
당장은 호의를 샀으니 문제 없다.
다만 백묵과 지속적인 거래를 트려면 만족스러운 미끼를 제시해야 했다. 거기에 대해선 생각해 둔 바가 있긴 하다.
'가장 베스트는 백묵이 나한테 제안을 하는건데.'
나는 적당히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직 정산해야할 중요한 게 남아 있다.'
바로 내 레벨에 관해서였다.
띠링.
나는 손가락을 올려 정보창을 불러냈다.
『 스테이터스 』
이름 : 이지한
나이 : 24
레벨 : 40 [ 잠김 ]
등급 : D
특성 : 무재조정(EX)
보유 포인트 : 313 point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20이었던 레벨이 40으로 올라있다. 이 잠금을 바로 해제하면 당장에라도 엄청난 레벨 업이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훨씬 더 강해질 방법이 있으니까.'
레벨을 올리고 등급을 올리는 일은 이전의 헌터들도 모두 해왔던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강해진 SSS급 헌터들조차, 마족들을 막아내지 못했다.
단순히 레벨만 올려선 안된다. 압도적으로 강해져야했다.
띠링
'잠김'이라고 쓰인 부분을 터치했다.
내 특성의 특수 효과인 '한계돌파'에 의한 퀘스트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어떤 퀘스트랑 보상이 나오려나.'
『 최대 레벨 40에 도달하여 새로운 퀘스트를 지급 받습니다. 』
『 '무재조정:한계돌파'의 효과로 아이템을 보급 받습니다. 』
기대감에 부푼 나는 두 손을 비볐다.
지금까지의 보상을 보건데,
기대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20화 VIP(1)
『 D등급의 최대 레벨인 '40' 을 달성하셨습니다. 』
『 한계 돌파 퀘스트를 받습니다. 』
레벨이 잠기는 대신 새로운 퀘스트가 생겨난다.
특성 '무재조정:한계돌파'의 효과였다.
잠시 레벨업을 할 수 없지만, 목표만 달성할 수 있다면 그 보상은 막대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 < D등급 > 한계 돌파 퀘스트 』
- 목표 : 마기의 원천 회수 ( 0 / 3 )
- 클리어 보상 : 레벨당 능력치 증가량 1.3배, 지정 스킬 한계 레벨 2증가, 인과역전 상점 NEW 카테고리 개방, 특성 무재조정 신(新) 특수효과 개방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진짜 미쳤네.'
보상은 이전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러나 하나 같이 좋은 보상이란 건 변함 없다. 심지어 무재조정의 새로운 특수효과가 생긴단다.
'무재조정의 새로운 효과라······. 기대되는 걸.'
이게 고작 D등급 한계 돌파 퀘스트라니.
'나중에 가면 대체 어떤 보상을 주려고 이러는 건지.'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목표다. 보상을 받기 위해선 목표를 달성해야 하니까.
- 목표 : 마기의 원천 회수 ( 0 / 3 )
'마기의 원천이라.'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우연 치고는 너무 정확해.'
퀘스트의 달성 목표는 내가 하려던 일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시스템은 무언가를 알고 내게 이런 퀘스트를 내주는 것인가. 아니면 내 의지가 시스템을 통해 나타나는 것인가.
나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그 답을 지금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내게 도움이 된다는 거다.
'나야 좋지. 하려던 걸 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으니까.'
마족도 막고, 보상도 받고 일석이조다.
마기의 원천.
이건 마족들의 성물이다. 고농도의 마기가 압축되어 있는 아이템이라고 보면 된다.
'이걸 모아서 전부 폐기시켜야 한다.'
현시점에서 마족들 전부가 이쪽 세계로 쳐들어오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의 환경이 마계와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건 마력, 놈들이 주로 사용하는 건 마기.'
마기가 없는 세계에서 마족들은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고위 마족은 예외다. 놈들은 체내에 마기를 쌓아 둘 수 있으니까.
이 세계에 마기가 충분히 퍼지면 그때부터 마족들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세계에 마기를 퍼뜨리기 위한 마족들의 작전.
나는 회귀 전에 들었던 이야기의 한 단락을 떠올렸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사내는 떠벌리듯 말했었다.
- 침략이 갑자기 일어났다고? 모르는 놈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근데 그게 아니야.
- 마족 놈들은 우리 인류가 눈치 채기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해왔던거야.
- 프로젝트 마기, 마족 놈들은 그렇게 불렀더라고.
반쯤 취해서 한 말이었지만 신뢰도는 높았다. 마족의 편에 섰었던 배신자가 한 말이라서.
- 나는 진짜 몰랐어. 마족 이 개같은 새끼들 인간을 싹다 죽여버리려고 줄은, 정말 몰랐단 말이야······.
후회하듯 중얼거리는 놈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그 죄책감 때문인지 입에 술을 달고 살았다. 그때만해도 술 같은 기호품이 남아 있을 때였다.
-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이젠 다신 배신 안한다니까! 정말로!
근데 하도 입이 가벼운 탓에 영웅들이 끌고 가버렸다. 사람들한테 공포를 조장한다는 이유였다.
하여튼 결론은 내가 마족들의 본격적인 침략 준비를 막아야 한다는 것.
'프로젝트 : 마기'
이게 시작되는 걸 막으려면, 내가 가장 먼저 마기의 원천을 손에 넣고 파기해야 했다.
지금의 내 수준에서 마기의 원천을 전부 회수하는 게 가능한가?
'아쉽지만 내가 막을 수 있는 건 대한민국까지다.'
이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전부 막는 건 힘들다.
알려주는 것도 곤란하다. 고래고래 위험하다고 소리쳐도 미치광이 취급 받다가 마족한테 암살 당하고 끝나겠지.
'우선은 한국만 막자.'
이것조차 성공할지 어떨지는 미지수.
나는 곰곰히 그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뒤 확신할 수 있었다.
'······해볼만 하겠어.'
인간 세계에 숨어든 마족들이라고 해서,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마계의 도래를 외치고 다니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 틈에 숨어 헌터를 가장하고 살아간다.
놈들은 지능적이다.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힘을 아끼며 숨어 지낼 줄 알았다.
바꿔 말하면 아직은 놈들이 인류의 눈치를 볼 때라는 것. 특히 한국처럼 땅덩어리가 좁은 곳에선 더더욱.
'그 틈을 노려서 전부 파기한다.'
목표는 정해졌다. 이제 준비만 제대로 하면 된다.
'그 전에.'
아직 중요한 이벤트가 남아 있었다.
'이걸 잊을 순 없지.'
나는 아직 살피지 않은 메시지 창을 눌렀다.
『 '무재조정:한계돌파'의 효과로 아이템을 보급 받습니다. 』
레벨의 한계치에 도달 할 때마다 받는 아이템.
F급에 받았던 무기가 '영혼 포식자'였다. 엄청나게 잘 쓰고 있었다.
그 무기가 아니었다면 성장의 마족 처치는 어림도 없었을 거다.
그러면 과연 이번에는 무엇을 줄 것인가?
심장이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군침이 돌 정도다.
'스읍, 과연 무슨 아이템일까.'
샤아아—!
기대하는 내 앞으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아이템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창?'
새롭게 나타난 아이템은 창이었다.
『 아이템 정보 』
- 이름 : 회수의 창
- 등급 : 유니크
- 능력치 : 공격력 45
- 기능 : 회수 Lv.5 관통 Lv.5
'오······.'
겉보기엔 별 다를 게 없는 창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창대의 끝에 날카로운 쇠붙이가 달린 평범한 창.
하지만 거기에 달린 스킬이 심상치가 않다.
'회수랑 관통이라. 미쳤네.'
그것도 레벨이 각각 5다.
'확실한 건 직접 사용 해봐야겠지만.'
수납 Lv.3의 일반 마법 가방 하나가 5400만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 창의 가치는 그보다 훨씬 뛰어나다. 최소 집 한 채 값은 나오지 않을까.
겸사겸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잡고 슥슥 휘둘러봤다. 내가 봐도 어설픈 모양새였다.
'역시 창을 쓰는 방법은 잘 모르겠네.'
그래서 그런지 창술 스킬이 새로 생겨나진 않았다. 근데 그냥 멀리서 던지기만 해도 회수 스킬이 붙어 있어 쓸모가 많아 보인다.
'보조 무기로 유용하게 쓸 수 있겠어.'
주무기로 사용하긴 어렵다. 내 주력 기술인 일자베기는 검으로만 구현할 수 있으니까.
'내일 훈련 센터에 가서 성능을 확실하게 테스트 해봐야겠다.'
나는 창을 인벤토리에 고이 모셔 놓고 잠자리에 누웠다.
일주일간 특별한 예정은 없다. 소속된 길드가 없는 마당에 게이트를 공략하러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위 게이트에선 어영부영 넘어가줬지만, 게이트 등급이 높아질수록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관리되는 편이다.
길드의 안전과 수입에 직결되는 문제인지라.
그렇다고 마냥 놀 순 없었다.
마기의 원천을 찾으려면 몇 가지 준비가 선행 되어야 했으니까.
'앞으로를 대비해서 스킬 레벨을 올려놔야겠어.'
백묵과의 연락이 닿을 때까지진내가 가진 스킬을 갈고 닦아야 한다.
'빨리 강해져서 마족 놈들 전부 족쳐야 두 다리 뻗고 자지······.'
채굴을 열심히해서 그런가, 나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부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을 보니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다.
평생 일어나본 적 없는 시간대였다.
그런데도 몸과 정신이 개운함을 넘어 상쾌하다. 졸리다는 느낌이나 찌뿌둥한 기운이 일절 없다.
'새로 얻은 정신력 스킬 때문인가.'
확실히 어제 아침과는 다른 느낌. 어렴풋한 활력마저 느껴진다.
정신력과 자연 회복 스킬까지 합쳐지니 자연스레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어색하네. 내가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아닌데.'
그래도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단 건 좋은 일이다. 남는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수련해서 스킬 레벨을 올려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먼저 근처 매입소에 들러 마정석을 200만원어치 팔았다. 그 정도는 추적을 당할 일도 없다. 용산보단 좀 덜 쳐주지만 시간이 금이니까.
이어서 버스를 타고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헌터 트레이닝 센터에 도착했다.
높은 연봉을 자랑하는 헌터들이 이용하는 시설답게 건물도 휘황찬란하다. 웬만한 종합시설 못지 않은 크기다.
이른 아침부터 여러 헌터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나는 감격스런 마음이었다.
'내가 여기에 오게 될 줄이야.'
여기엔 헌터에게 맞춤화 된 훈련 장비가 가득하다. 헌터는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존재기에 일반적인 장비로는 기초적인 훈련도 힘들다.
여긴 그런 헌터들의 훈련을 가능케 해주는 곳이다.
물론 그 비용이 상당하다. 나 같은 F급 헌터는 발을 들일 엄두도 못내던 곳이었다보면 된다. 물론 이젠 다르지만.
"어디보자."
감격스런 마음으로 발을 뻗는데, 뒤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끼이익.
웬 스포츠카 한 대가 급정거를 하더니 순식간에 멈춰섰다. 차문이 열리고, 훤칠한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는 나를 보며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스승님! 이런 곳에서 다 뵙네요! 역시 사제지간의 연이란 대단한 건가봐요."
미래에 검성이 될 신태양이었다. 녀석은 밝은 얼굴로 꾸벅 인사를 했다. 나는 잠시 신태양과 스포츠카를 번갈아 쳐다봤다.
'길드에서 돈 많이 받았나보네.'
묻지도 않았는데, 녀석이 술술 말한다.
"저거요? 길드 계약금으로 하나 질렀습니다. 역시, 스타 헌터하면 스포츠카니까요. 주차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여기 발레파킹해주거든요. 으하하."
"어디 길드."
"아, 제가 길드에 들어갔다는 걸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수호 길드요. 저한테 와달라고 얼마나 극성이던지.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수호 길드.
대한민국 3대 길드 중 하나였다.
'돈 많이 받을만 했네.'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이 점은 과거와 같았다. 내 개입이 있었음에도 신태양은 이전과 같은 수호 길드에 들어갔다.
수호자의 검, 은빛의 날개, 오성(五星).
현 대한민국에선 이렇게 세 개의 길드가 최상위 길드로써 군림한다. 수호자의 검, 줄여서 수호 길드에선 검성의 재능을 잘 알아본 거다.
"여기서 이럴게 아니네요. 들어가시죠, 스승님."
"잠깐."
"네?"
"스승이라고 부르지마라."
"왜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내가 무슨 스승이냐. 고작 일자베기 스킬 하나 신태양을 뛰어넘었을 뿐이다.
과거의 검성 신태양에게는 중요한 스킬이 맞지만, 지금 이 시점에선 본인도 그 잠재력을 모르고 있었을텐데.
괜한 어그로가 끌린다. 어디 듣보잡 헌터였으면 몰라도 이 놈은 나중에 검성이 될 자질까지 가졌다.
그리고 외관상으론 나이 차이도 얼마 안나는구만. 스승은 무슨 스승.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부르지말라면 부르지마."
"윽, 그러면 뭐라고 부르면 좋죠?"
"형······. 아니다. 평범하게 불러 평범하게."
"이지한씨? 이것도 좀······."
나는 신태양과 함께 센터 로비로 입장했다. 처음 와보는 장소에 입이 살짝 벌어진다. 여느 호텔 로비 못지 않게 고급스럽다.
"어서오세요. 어떤 방에서 훈련하시겠습니까?"
로비에 있는 직원이 친절한 표정으로 묻는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뒤쪽의 화면으로 가격표가 보인다.
'얼마나 하나 보자.'
트레이닝 룸은 A랭크부터 SSS랭크까지 있다. 여기에 붙은 랭크는 그냥 기분 좋으라고 붙인 이름일 뿐, 실제 헌터 등급과는 상관 없다.
트레이닝 룸의 설비 차이일 뿐이다.
제일 낮은 A랭크가 1회 50만원.
가장 높은 SSS랭크가 1회 500만원이다.
한 번 들어가면 하루 종일 사용할 수 있기는 하다만.
'가격이 정상은 아니네.'
마정석을 조금 팔고 남은 돈이 200만원 뿐이다. 아니, 1억이 있어도 SSS랭크는 못 가겠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은 자기네 길드 놔두고 왜 여기에 온거지?'
분명 대형 길드에 가입했을텐데.
내가 의뭉스런 눈빛으로 슬쩍 보자, 신태양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인다.
"아, 저희 길드 그러니까, 수호 길드 트레이닝 센터가 당분간 리모델링 중이거든요. 길드에서도 외부 트레이닝 센터를 이용하라고 하더라구요."
그런 거였다.
대형 길드의 경우는 대부분 트레이닝 룸이 완비되어 있다. 그런 게 없는 중소형 길드는 이런 식으로 따로 센터를 방문해 훈련을 한다. 그게 더 싸게 먹힌다나.
신태양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알았다.
이제 각자 갈 길 가면 되겠구나 싶은 때였다.
신태양이 손에 든 카드를 자연스레 직원에게 내밀었다.
"VIP룸으로 주세요."
가격표에도 없는 등급을 부른다. 직원이 카드를 확인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네, 알겠습니다. 수호 길드분이시군요. 비용은 삼천만 원입니다. 두 분이서 사용하시는 건가요?"
삼천만 원.
하루 쓰는데 삼천만 원이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가격이지만······.
S랭크 이상 되는 헌터라면 개인적으로도 쓸만 하다.
대형 길드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수준이다. 신태양이 든 카드도 길드에서 받은 거겠지.
가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신태양이 나를 쳐다본다.
"저랑 가실거죠? 물론 비용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응?"
같이 가자고 할 줄은 몰랐다.
'으음······.'
잠시 고민하는 척 눈을 감았다.
궁금했다. 삼천만원짜리 VIP 트레이닝 룸은 얼마나 좋을지. VIP룸이면 일반 헌터는 이용도 못하는 곳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공짜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썅, 삼천만원짜리를 어떻게 거절해.
나는 짐짓 근엄한 투로 말했다.
"그래, 제자야. 가보자."
잠시 멍하니 날보던 신태양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어······."
"뭐해. 안내해."
"이, 이쪽으로 가시죠. 스승님."
내가 언제 공짜 VIP룸을 이용해 보겠어.
21화 VIP(2)
'와, 이게 다 뭐냐.'
VIP룸의 시설은 남달랐다.
단순하게 근력 운동을 할 수 있는 각종 운동기구 및 기술 테스트를 위한 자동재생 더미는 물론이고 가상 전투를 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룸까지.
'와, 하이텍트제 덤벨이잖아. 원하는대로 무게 조절이 가능하다 그랬지.'
잡지에서만 침 흘리며 보던 것들을 실물로 보니까 확 다르다. 눈이 휙휙 돌아간다.
'시뮬레이션 룸도 지금 제일 잘나가는 로드옵스 꺼네.'
거의 한 층 전체가 VIP룸이었다.
벽 한쪽 면에는 각종 훈련용 무기가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다. 다양한 종류의 음료수와 다과가 준비된 드링크바는 덤이다.
"여기도 꽤 좋네요. 길드 트레이닝 룸보다는 못하지만······."
나랑 마찬가지로 주위를 둘러보던 신태양이 흘러가듯 말했다. 이것보다 더 좋을 수가 있나. 대형 길드의 재력은 역시 장난아닌가보다.
'VIP룸답게 보안은 철저한 것 같네.'
인지 스킬로 구석구석까지 살핀 뒤 내린 결론이었다.
헌터의 트레이닝 룸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자신의 기술이나 스킬을 밝히고 싶지 않은 헌터는 얼마든지 있었으므로.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현재 가지고 있는 스킬들의 레벨을 11까지 끌어 올리기 위함이었다.
스킬 목록을 불러왔다.
『 보유 스킬 목록 』
검술 Lv.10, 근력 Lv.10, 인지 Lv.10, 보법 Lv.10, 체술 Lv.10, 민첩 Lv.10, 자연 회복 Lv.10, 맷집 Lv.10, 기억 탐색 Lv.10, 지력 Lv.10, 해체 Lv.10, 위압 Lv.7, 일자베기(R) Lv.10, 정신력 Lv.11, 채굴 Lv.11, 행운 Lv.1
펼쳐지는 스킬의 갯수가 무려 16개다.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걸쳐진다.
레벨 40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스킬의 수와 레벨이었다.
그렇다고 이걸 모두 수련할 수는 없고.
'이 중에서 내가 수련할 스킬은 정해져 있다.'
근력과 민첩 그리고 일자베기.
이 두 가지가 수련하기도 쉽고 효과도 가장 눈에 띈다.
'10레벨과 다르게 11레벨을 달성하려면 노력이 더 필요하다.'
그간의 경험으로 살피건데, 스킬의 경험치가 오르려면 몇 가지 조건이 붙는다.
특히 Lv.10에서 11로 갈 때 그 조건이 중요해진다.
'우선 의미 있는 경험이 아니라면 경험치가 안쌓인다.'
특히 내가 재능 없는 분야에선 그게 더 두드러졌다. 반대로 내가 재능이 있는 듯한 채굴이나 해체 같은 건 경험치가 참 잘오른다.
'아니면 아예 전수 받은 스킬이거나.'
일자베기는 전수 받아서 그런지 레벨이 쭉쭉 오른다. 경험치도 벌써 24%가 찼다. 허공에 대고 쓰는 것만 아니면 경험치가 오르는 것 같다.
슥 고개를 돌리니, 신태양이 나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심한 듯 말했다.
"뭐해, 니 훈련 할 거 해."
지난번에 봤지만 일자베기를 제외하고 신태양에게 배울만한 기술은 없다. 아직 내 수준이 부족한 탓이다.
그러니 각자 할 일해야지.
근데 내 말에 아랑곳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녀석은 결연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 일자베기 다시 한 번만 보여주시면 안될까요? 부탁드립니다!"
아직도 일자베기를 마스터하지 못한 모양.
지난번에 헤어질 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한지라, 문제 없는 줄 알았는데.
하긴. 신태양을 만난 뒤로 아직 일주일이 채 안지났다. 지극히 정상적이다. 아무리 천재여도 모든 걸 단숨에 깨칠 순 없으니까.
나는 그런 신태양을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했다.
'······내가 아는 검성이랑 너무 달라서 적응이 안되네.'
자만심과 자존감으로 어깨가 하늘까지 솟았던 검성은 어디간 건지.
살짝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긴하다.
'원래대로라면 검술에 관해서 신태양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었을 거야.'
그러니 두려워하는 사람도, 무서워하는 것도 없었을 거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최고니까.
일생 동안 검술에 있어선 그가 정답이고, 길이었을테지.
그런데 그 앞에 내가 나타나버렸다.
'그게 엄청난 충격이었다고 생각하면 이해는 간다.'
어찌보면 다행이다. 지금부터 검성이 일자베기를 수련한다면 미래에는 더 강력한 아군이 될테니까.
"한 번만 보여줄테니 잘 봐."
살다살다 내가 검성을 다 가르친다.
* * *
쉬익! 콰아앙!
내가 던진 창이 바람을 가르고 쏘아져 목표물에 적중했다. 훈련용 목각 인형은 산산조각이 나며 부숴졌다. 창은 그대로 인형을 뚫고 벽에 깊숙히 박혔다.
'회수.'
속으로 의지를 표명하자, 벽에 꽂혀있던 창이 자석처럼 내 손으로 날아온다.
처억.
나는 창을 움켜쥐었다. 손맛이 좋다. 이 정도면 실전에서도 충분히 사용해 볼만하다.
구경하던 신태양이 눈을 반짝였다.
"벌써 완성하신건가요. 기술 이름이 뭔가요? 그냥 던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파괴력이 보통이 아니네요."
"······."
녀석, 제대로 봤군.
신태양 말대로 그냥 던지는 게 맞다.
'기술 이름이 어딨어. 그냥 세게 던지는 건데.'
레벨업 보상으로 받은 유니크 창.
열심히 그 창을 던져서 투척 스킬을 만들어냈다. 매일 꾸준히하니까 스킬이 생겼다.
『 스킬 '투척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투척 데미지, 속도, 정확도 25% 증가 』
창술이나, 투창 스킬은 생기지 않더라.
그래도 11레벨 정도 되면 던진다는 수준이 아니다. 대포처럼 쏘아내는 수준이다. 순간 공격력은 오히려 영혼 포식자보다 강하다.
'실전에서 충분히 활용할만 하겠어.'
서브 무기로 쓰기에 모자람이 없다.
6일이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동안은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았다. 급하지도 않고, 괜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었으니까.
신태양 덕분에 VIP룸에서 편하게 수련에 매진할 수 있었다.
무게 증가 마법이 걸린 최신 운동 기구로 근력을 키우고, 시뮬레이션 룸에서 회피 훈련을 거듭했다.
『 스킬 '근력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근력 능력치 + 10% 』
『 스킬 '민첩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민첩 능력치 + 10% 』
"후우······."
아무리 경험치 10만배라지만 노력하는 과정이 쉽진 않았다. 거의 쉬지도 않고 훈련을 거듭했다. 정신력 스킬이 없었다면 6일 안에는 못 했을 거다.
'그래도 일반적인 수련은 역시 시간이 꽤 드네.'
물론 6일만에 최고 레벨을 한 단계 올린 게 말이 안되는 일이긴 하다.
그 증거가 바로 저기에 있다.
"창을 활용한 기술을 새롭게 마스터하신 스승님에 반해 저는······. 쓰레기에요."
신태양이 중얼거리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좌절한 모양새다.
"전 이제 한계인가봐요. 이제 경험치가 안올라요. 깨달음도 없고요."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신태양은 진심이었다. 내가 하루에 한 번 보여주는 일자베기를 보며 수련에 매진했지만 큰 성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딱히 해줄 말이 없는데.'
가르치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지라.
그래도 VIP룸을 빌려준 값을 생각하면 뭐라도 알려줘야겠지 싶다.
별로 있지도 않은 검성 관련 기억을 끄집어 냈다.
- 내 일자베기가 배우고 싶다고? 크하하하! 이만한 기술이 없기는 하지. 시스템이 일자베기를 인정할 때까지 휘둘러라! 너희 같은 둔재들한텐 방법이 없다, 나같은 천재라면 모르겠지만······.
- 그러니까 하늘과 땅을 하나로 잇는다 생각하고 죽어라 휘둘러. 마족한테 뒤지기 싫으면 죽기 직전까지 휘두르란 말이야.
다행히 기억에 남는 말이 하나 있긴 했다. 검성이 말이 많은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된다.
근데 하늘과 땅을 잇는 건 신태양이 이미 나한테 알려준 방법이다. 본인도 알고 있으니 무의미하겠고.
그러면 남는 건 하나인데.
나는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을 때까지 휘둘러."
"네?"
"뒤지기 싫으면 죽기 직전까지 휘두르라고."
"네, 넵."
신태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러더니 검을 열심히 위아래로 휘두른다.
전에 없이 진지한 태도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련한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되겠지.'
내가 지어낸 말도 아니다. 지가 한 말인데 뭐 어쩌냐.
『 일자 베기 Lv.10 [ 97% ] 』
시범을 보여주다보니 내 일자베기도 11레벨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읏차.
나는 기지개를 폈다.
뒤에 있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몸을 혹사 시킨 뒤에 취하는 휴식이라 몸이 녹는 것 같다.
'올릴만큼 올렸다.'
트레이닝으로 경험치를 쌓을 수 있는 스킬들은 이미 최대치를 올렸다. 나머진 실전에서 틈틈히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고보니, 신태양 이 녀석은 길드에서 안 찾나?'
6일 동안 신태양도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이따금 수호 길드와 연락을 하는 것 같기는 했는데, 밖에 나가는 꼴을 못봤다.
덕분에 최고급 시설에서 편하게 훈련을 하긴 했다만.
나는 떠오르는 질문을 그대로 했다.
"근데 너 게이트 공략이나 길드 훈련은 안가냐?"
"아, 게이트를 잡아 줄 때까지는 자율 훈련 기간이랬거든요. 가르쳐 줄 사람 없다고 혼자하라던데요."
뛰어난 재능을 가진 헌터는 길드 차원에서 직접적인 관리가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근데 그 재능이 지극히 뛰어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길드 내에서도 검술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겠구나.'
그래도 헌터로써 기초적인 교육은 받아야하는 거 아닌가 싶다. 실전에서 교육하겠다는 건가?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오늘은 좀 일찍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단독 게이트가 잡혀서요. 이른바 데뷔전이라는 거죠."
신태양의 취급은 길드의 슈퍼 루키.
수호 길드에선 단독 게이트를 잡아 몹을 몰아주면서 신태양을 중점적으로 키우려는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 지금 헌터 등급이 뭐지?
"지금 등급이 어떻게 되냐."
"아, 말씀을 안드렸네요. 아직 C등급이에요."
생각보다 높진 않았다.
헌터의 등급은 각성과 동시에 정해진다.
운이 좋거나, 재능이 뛰어나다면 처음부터 A급인 경우도 더러 있다.
"근데, 입단시험때 보니까 A급도 이기더라구요. 그때 싸웠던 상대 이름이 진영민? 저 때문에 탈락했으니까 안타깝게 됐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제 빛나는 재능을······."
"······물어본 것만 대답하자."
물론 재능이 모든 걸 씹어 먹는 경우도 있다.
"하여튼 열심히 해라."
"그러면 스승님의 등급은—."
"마지막으로 일자베기 보여줄테니 잘 봐."
어차피 신태양 정도 되면 내 등급도 대략은 알 거다.
'신태양에겐 일자베기를 하루에 한 번씩만 보여줬다.'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신태양 본인이 그다지 매달리지 않았서였다.
한 번 보고선 그걸 곱씹으며 수련하는 게 신태양의 방식이기도 한 것 같았고.
'괜히 신태양 앞에서 11레벨에 도달해서 귀찮아지는 게 싫었던 거긴 한데.'
사실상 오늘이 마지막이니 잡다하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나는 푹신한 소파에서 일어나 훈련용 검을 집었다. 왼편에 위치한 검술 훈련 영역으로 향했다.
스윽
사람의 형상을 한 타격용 더미 앞에 서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신태양이 있을 때 일자베기를 11레벨로 올려두는 게 낫겠어.'
며칠간 깨달았다. 스킬의 전수자가 옆에 있으면, 경험치 오르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러니 지금 나머지도 올려두는 게 맞았다.
서걱-!
서슬퍼런 검날이 더미를 대각선으로 갈랐다. 겉에 새겨진 직선의 균열이 더미를 파고 들었다. 이내 더미가 반으로 나뉘어 떨어졌다.
훈련용 검인데다가 마력을 두르지도 않았데도 이 정도 위력이다.
"와우······. 다시 봐도 대단하네요."
어느새 다가온 신태양이 심각한 표정으로 내 일자베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동작, 한 호흡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눈빛이다.
여기까지가 10레벨 일자베기였다.
『 스킬 '일자베기 Lv.1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레벨 11을 달성하여 추가효과를 획득합니다. 』
나는 훈련용 검을 들어 올렸다.
잠시 기다리자, 부숴진 더미가 다시 제 모습을 되찾는다. 고레벨의 수복 스킬이 붙어 있어서 아무리 베어도 원상 복귀 된다.
검을 단단히 쥐고서 숨을 들이마셨다.
- 일자베기
공간의 시작과 끝을 잇는 직선 하나를 그려낸다.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단출한 검격이다.
그러나 그 안에 함축된 검의 진수는 보잘 것 없지 않다. 이제서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갈라낸 공간 위로 찬란한 빛이 새겨졌다.
"······."
바람 한 점 없던 실내의 공기 흐름이 뒤바뀌고 있었다. 가녀린 한줄기 바람이 모든 걸 집어 삼킬 듯한 광풍이 되는 과정이 생생히 느껴진다.
검격은 훈련용 더미 따위를 가뿐하게 가르고도 멈추지 않는다.
원근을 무시한 상처가 트레이닝 룸의 벽면을 가로지르고 나서야 바람은 잦아들었다.
좌에서 우로, 10m의 벽면 전체를 양단하는 한 줄기의 선이 그려졌다.
투두둑······. 투둑······.
부숴진 벽에서 특수 콘크리트 자재의 파편이 떨어져 나왔다.
'뭐냐.'
그제서야 내가 쥐고 있었던 게 훈련용 검이란 사실이 떠오른다. 내가 해놓고도 상상 을 뛰어넘는 효과에 놀라고 있는 그 때였다.
털썩.
뒤쪽에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신태양이었다.
아무리 충격을 받았거니와, 쓰러지는 건 좀······.
근데 녀석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 공허한 눈이 나를 향했다. 그대로 무어라 중얼거린다.
"괴물, 스승님은 괴물이야······."
나는 신태양에게 다가갔다.
"야, 정신차려. 게이트 공략 가야 된다면서."
* * *
천외천(天外天).
하늘 밖에도 하늘은 있는 법이었다.
신태양은 검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검을 다루는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분명히 그랬는데.
"신동이야, 신동."
"이제 겨우 중학생인데, 검도 사범들도 못 당해낸다던데."
신태양은 어렸을 적부터 검에 관한 재능이 뛰어났다. 검도장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그런 신태양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아버지를 닮아서 태양이가 대단한가 봅니다."
"자재분을 키운 훌륭한 비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버지를 뛰어 넘는 천재. 그런 질문을 받던 아버지의 씁쓸한 눈빛이 신태양의 뇌리에 아직도 선명했다.
어쨌든 그의 재능은 천재적이었다.
신태양은 내노라하는 검술 대회를 휩쓸고 다녔다. 날고 긴다하는 천재들도 신태양 앞에서 무너졌다. 나이 차이를 막론하고 그의 검을 뛰어 넘는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검도를 잘할 수 있어?"
"연습을 얼마나 해야 태양이처럼 검을 쓸 수 있을까?"
쏟아지는 질문과 선망의 눈빛.
신태양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하면 되는데.'
TV에서 방송하는 세계 대회에 나선 이들조차 신태양의 눈에는 허접하기 그지없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국제 대회에서 큰 성적을 거머 쥔 검도 선수와의 승부조차도 신태양은 간단히 이겼다.
"대박, 국가대표 선수를 신태양이 이겼어."
"멋있다! 신태양! 대한민국에 천재가 나타났다!"
주변 사람들은 난리를 쳤지만 그게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었다.
책을 찾아봐도, 동영상을 뒤져봐도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발단이 된 생각은 가벼웠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 만들까.'
그 날부터 신태양은 자신만의 검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휘두르는 검이 규칙이고 정도(正道)였다.
비교할 대상 따위 없었다. 있더라도 그의 검술 앞에 모두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는 헌터조차 비각성자인 신태양의 검술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게 끝이에요? 아직 난 시작도 안했는데."
신태양이 느끼기엔 검에 대해서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서 검술은 연마한 게 겨우 그 정도라고?'
그러나 그런 생각을 토로할수록 주변 사람들은 멀어져 갔다.
"천재라서 평범한 사람들 마음을 모르는 거겠지."
"대단한데, 너무 건방져."
"원래 천재는 본인 잘난 맛에 사는건가?"
선망을 넘어선 시기와 질투. 그것은 비단 주변 사람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감당하기에 네 그릇이 너무 큰 것 같다. 미안하다."
심지어는 아버지조차도 그리 말하며 떠나갔다. 자식을 질투하는 못난 부모가 있다는 걸 어린 신태양은 알지 못했다.
그저 검에 깊이 빠져들 뿐이었다.
- 축하드립니다. 각성하셨습니다.
그러던 와중 신태양은 각성했다.
- 스킬 '신태양류 검술'을 획득합니다.
- 스킬 '일자베기'를 획득합니다.
- 스킬 '만월일섬'을 획득합니다.
자신이 구사하던 검술은 모두 스킬로 변해 있었다. 그가 상상만으로 그리던 기술이 손끝에서 구현되기 시작했다.
떠나간 아버지를 잊기 위해 더욱더 검에 몰두했다.
언젠가 찾아올 찬란한 미래를 그리며.
밖에선 검을 휘두르고, 방에선 싸인을 연습했다.
그러던 도중.
누군가가 도장을 찾아왔다.
처음엔 자신을 보러 온 팬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아직 활약한 일이 없어서 팬이 없었다. 그냥 팬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한 번 해보세요."
검에 소질이 없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
그가 자신을 넘어섰다.
신태양은 일자베기의 다음 경지를 보고 말았다.
검술만큼은 최강이라고, 최고라고 자부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게 한순간에 꺾여버렸다.
"대, 대체 어떻게······."
그의 이름은 이지한.
'아직 나는 애송이였구나.'
세상은 아직 넓었다. 자신이 검도장에 쳐박혀 있는 동안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정해야 다음이 있다.'
무채색이라고 생각하던 신태양의 세계에 하나의 색이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이 남자만큼은 나를 뛰어넘었다. 자신이 만들어 낸 기술을 순식간에 따라잡고 그것 마저 뛰어넘었다.
일생의 경험이 부정되는 순간 앞에서 신태양은 결심했다.
'앞으로 내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이 유일하겠구나.'
이 사람에게선 시기와 질투를 받을 일이 없었다. 나보다 뛰어나니까.
가야할 길을 순식간에 개척해버린 그의 천재성에 반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이제 배우면 되는 거니까.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느낌이 와.'
스승의 한 단계 진보한 일자베기를 눈에 새기며 신태양은 납득했다.
노력한다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과 일주일.
이지한, 스승님은 그 단계마저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의 검이 그려낸 한줄기의 직선은 감탄을 넘어 경이롭기까지했다. 지금의 신태양으로선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영역.
'앞으로 내가 저런 검의 경지에 닿을 수나 있을까?'
신태양은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예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새로운 경지.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신태양은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22화 VIP(3)
"야, 정신차려. 게이트 가야지."
수호 길드에서 찾겠다.
나는 신태양의 뺨을 툭툭 쳤다. 반응이 없다.
"이게 이렇게 충격 받을 정도의 일인가."
『 스킬 설명 』
- 이름 : 지한류(流) 일자베기
- 등급 : 레어
- 레벨 : 11
- 설명 : 태양류 일자베기를 개량하여 더 높은 수준까지 끌어 올린 베기술.
- 추가효과
Lv.10 : 비물질을 베어낼 수 있음
Lv.11 : 위력 및 범위 35% 증가
'······스킬 이름이 바뀌었네.'
일자베기의 원래 정식명칭은 '태양류 일자베기'. 11레벨에 도달하니까 그 앞에 내 이름이 붙었다.
'11레벨이 되면서 위력이랑 범위 증가 효과가 붙었다.'
애초에 10레벨과 11레벨은 기본 위력 차이가 극심하다. 근데, 거기에 추가 효과까지 붙으니 따라잡지 못할 격차가 발생하는 거고.
신태양이 기겁을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으음······."
정신을 차린 신태양이 몸을 일으켰다. 녀석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
"스승님."
"왜."
그러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기 짐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내 앞에 서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게이트 공략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어······. 그래."
애가 말수가 확 줄었다. 몇 걸음 앞으로 가더니, 신태양은 벽에 새겨진 일자베기의 흔적을 잠시 응시했다.
그러더니 주먹을 꽉 쥐고는 룸 밖으로 나갔다.
'······뭐, 괜찮겠지.'
열심히 할 동력이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다. 신태양에겐 꽃 피울 재능이 분명히 있으니, 자극 좀 받아서 나쁠 건 없다.
'신태양 덕분에 시간을 알차게 보내긴 했다.'
VIP룸의 시설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근력, 민첩, 투척에 더해 일자베기까지 11레벨로 만들었으니까.
그 기간이 6일이었으니 돈으로 계산하면 1억 8천. 이게 정말 맞는 액수인가 싶지만, 신태양 덕에 공짜로 이용했으니 만족스럽다.
나도 슬슬 나갈 때가 되었다.
"스승님."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신태양이 돌아왔다.
"뭐야, 공략 안 가도 돼?"
"아뇨,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데스크에 물어봤는데, 저기 벽 값은 신경쓰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아아, 그래."
벽에는 수복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았다. 다만, 더미 구역은 원래 파괴 될 걸 감안하고 만들어진 장소다.
'오히려 흔적이 남으면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헌터의 정보는 곧 돈이 된다. 트레이닝 룸에는 CCTV가 없기 때문에 사후 관리를 하는 센터 관리자 입장에선 박수치고 좋아할 일이었단다.
망한 센터 직원이 자기 입으로 그랬었다.
'내가 했다곤 생각 못하겠지. 신태양이 했다고 여기려나.'
어쨌든 신태양은 날 신경 써준 거였다.
"그럼 진짜 가보겠습니다."
"그래, 힘내라······."
나는 슬쩍 손을 저어줬다. 충격이 심하긴 한 모양이다. 풀이 확 죽었네.
'그럼 나도 일어나야겠다.'
락커룸에 놓아둔 짐을 챙기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미리 저장해 둔 번호였다.
- 백묵
슬슬 연락하려했는데, 먼저 전화를 줄 줄이야. 나야 좋다. 나는 스마트폰을 받아들었다.
* * *
""안녕히가세요!""
센터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신태양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신태양이 완전히 빠져나가자 여성 직원 하나가 잡담을 시작했다.
"방금 나간 사람. 수호 길드 신입이래. 멋지지 않아?"
"진짜로? 엄청 잘 생겼어. 나 오늘부터 팬해야겠다. 이름이 뭐야?"
"신태양."
"와, 다음에 오면 사진 찍어 달라 해야겠다."
"이제 안 올걸. 수호 길드에 트레이닝 룸 리모델링 끝났다더라."
그들이 사담을 나누는 사이, 신태양과 함께 들어갔던 남자 한 명이 1층으로 내려왔다.
""안녕히가세요!""
마찬가지로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남자가 사라지자 직원들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방금 그 사람은 누구야? 신태양이랑 같이 들어 갔던 사람이잖아."
"글쎄? 같은 수호 길드인가? 잘 생겼어."
"에이, 잘 생겼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않나. 호불호 갈릴 듯."
흠흠.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센터장이었다.
"괜한 이야기들 하지 마시고, 일합시다. 일."
"네에—."
헌터들은 이런 이야기에 민감하다. 오감이 뛰어난만큼 직원들의 사소한 소리도 헌터의 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특히 방금 고객들은 수호 길드의 손님들이었다. 쓸데 없는 잡담은 안하는 게 좋다.
센터장은 카운터로 다가갔다.
"트레이닝 룸 정리하기 전에 확인 해야하니까, 키 좀 줘."
"아, 701호 VIP룸 말인데요."
키를 건네 주던 카운터 직원이 방금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더미 구역 벽면에 큰 손상이 생겼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
"수호 길드 분이셔서 문제 없는 걸로 처리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내가 먼저 확인해 볼테니까 아무도 올려보내지마."
"네, 알겠습니다."
센터장은 직원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나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듣자하니 수호 길드에서 굉장히 아끼는 헌터라던데, 무슨 짓을 해놨나 한 번 볼까.'
센터장은 방문하는 헌터들이나, 길드 지인들을 통해 헌터계가 돌아가는 사정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반대로 정보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정보가 돈이지.'
이러한 정보는 향후 투자를 하거나, 미리 특정 길드에 줄을 설 때 유용하게 쓰였다.
거대한 규모의 센터를 운영하려면 타 길드와의 협력은 필수.
그런 생각을 하며 701호 VIP룸으로 나왔다.
'다른 곳도 난리 쳐놨을 줄 알았는데, 깔끔하게 해두고 갔네.'
진짜 미친 놈들이 간혹 있기는 했다. 기구를 박살을 내놓고 나몰라라 하는 놈들. 그 정도만 아니면 괜찮았다.
'어디보자. 수호 길드 신태양이라고 했었지.'
다른 놈도 하나 껴있기는 했는데, 보자하니 수호길드 소속은 아니었다. 지인에게 물어보니 그런 사람은 없단다.
그냥 매니저 같은 거였겠지.
그리 생각하며 센터장은 발걸음을 옮겼다.
트레이닝 룸 한가운데에서 센터장은 멈춰섰다.
그의 시선이 더미 구역으로 향했다.
확실히 벽면에 큰 균열이 생겨 있었다.
'허······.'
그걸 바라보는 센터장의 얼굴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듣기론 아직 C급이라고 그랬는데.'
벽에 생긴 균열은 결코 C급 헌터가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특히 더미 구역의 벽은 특수 재질로 마감처리가 된 곳이라, 이런 식의 흔적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읽어내는 솜씨만큼은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
센터장은 자부하고 있었다.
그는 차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내뱉었다.
"크하하! 수호 길드가 괴물 신인을 영입했구만. 이런 정보를 이리 쉽게 얻을 줄이야."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한바탕 웃어젖힌 그는 다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당장 수호 길드 신태양한테 지원금 넣고, 최대한 성장 지원해. 싹 다 들이 부어! 우리 쪽에서 먼저 후원 하겠다고 해야지. 지금부터 미리미리 줄을 잘서야 될 거 아니야."
신태양이 S급이 되고나서 움직이면 늦는다.
센터장의 입에서 탐욕스런 웃음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 * *
백묵과의 약속 시간까지 30분.
'버스 시간이랑 맞춰서 오다 보니까, 더 일찍 도착했네.'
이번 일이 잘 성사되면 소형차 한 대 정도는 뽑아야겠다. 계속 버스만 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근처 서점에 들렀다. 단순한 시간 때우기는 아니고, 확인하고 싶은 잡지가 있어서였다.
'월간 헌터.'
회귀 전에 애독하던 잡지였다. 인터넷 상에서 얻기 힘든 정보가 이 안에 듬뿍 들어 있다.
언젠가는 상위 헌터가 되겠노라 다짐하며 참 열심히 잡지를 읽었었다.
촤르륵.
잡지를 넘기자, 익숙한 사진과 기사가 보인다.
'그 당시엔 별 도움 안됐지만, 회귀하고 나니까 여기 있는 지식들이 상당히 도움이 된다.'
나는 밑바닥 F급이었던 것 치고는 정보에 빠삭했다. 그게 다른 던전에 대한 정보를 잘 아는 이유였다.
'오, 김민수가 표지에 나왔네.'
그 표지를 장식하는 건 최후의 5인 중 하나였던 대마법사 김민수다. 성실하게 생긴 얼굴이지만 한껏 꾸며 놓으니 인물이 산다.
'한참 젊구만.'
나는 잡지를 펼쳐 내용을 살폈다. 과거의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대부분의 내용은 기억 탐색을 사용하면 떠올릴 수 있는 거긴 하다만, 직접 보는 느낌은 또 다르다.
'대한민국 세계 최초 게이트 제어 성공, 미국의 헌터 '그렉스' 최고 등급 게이트 단독 격파······.'
나는 과거에 내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구석구석까지 잡지를 탐독했다.
붉은 혜성 천성호, 성녀 채아연.
나와 멸망한 세계의 한국 사람들을 이끌던 영웅 둘.
그들의 이름은 아직 어디에도 없다.
'역시 둘의 이름이 알려지는 건 더 나중의 일이다. 나보다 나이가 더 어리기도 했고.'
지금은 고등학생 정도일 거다. 심지어 아직 각성을 안했을 수도 있다.
'오히려 각성 전인 게 좋기는 하지.'
혹시 모를 마족과의 연결고리를 배제할 수 있으니.
'문제는 찾아보고 싶어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단 거다.'
내가 팔도강산을 뒤지면서 찾아 돌아다닐 순 없다. 나는 나 성장하기도 바빴다. 대신 누가 찾아줘야 한다.
이번 백묵과의 만남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다.
잡지를 덮고 서점을 나서려는데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호수 공원 앞쪽으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 최상위 길드 '은빛의 날개'가 S급 게이트 공략을 앞두고 있습니다!"
"미쳤습니다. 최단기 기록이에요! 이러면 '은날'이 이번에 오성을 꺾고, 한 단계 순위가 올라가는 게 확정입니다."
기자랑 유튜버, 구경꾼들이 뒤섞여서 혼잡하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S랭크 길드 '은빛의 날개'가 예정된 공략을 마치는 날이었다.
'윤서현 헌터의 언니가 있는 길드였지.'
실제로 이번 공략은 성공적으로 끝난다. 오성을 뛰어 넘고 은날이 2위가 된다.
'관련 주식 좀 사두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이번에 마정석 팔면 투자 좀 해야겠다.
그런데 빽빽한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협회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는 천막 아래에 윤서현이 있었다.
아직 공략의 성공 여부는 가늠할 수 없는 상태. 그럼에도 언니에 대한 신뢰가 상당한지, 여유로운 모습으로 커피를 홀짝인다.
'윤서현은 원래 죽을 예정이었다만······.'
쿠훌렌에게 살해 당해야했을 윤서현은 내 개입으로 인해 살아남았다. 자연스레 그녀의 언니인 윤지은의 미래도 바뀌었을 거다.
최후의 11인이자 무한의 궁사라고 불렸던 윤지은.
그녀는 고블린을 지극히 혐오하던 영웅이었지만, 이제는 그 이유가 없어졌다. 동생 윤서현의 죽음은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때문에 윤지은의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런 계기가 없더라도 강인한 사람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만.'
그녀는 동생과 길드원들을 잃고도 끝까지 마족과 싸웠던 진짜 영웅이었다.
그때 윤서현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녀의 얼굴을 보자 잊고 있던 약속이 떠올랐다.
'밥 사기로 했었지.'
다행히도 윤서현은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후. 다행.'
약속을 어기려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백묵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사주고 싶어도 못 사준다.
'다음에 사자.'
지난번 사건이 협회에서 어떻게 해결 됐는지도 물어볼 겸.
나는 들킬세라 서둘러 백묵과의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 * *
한 자그마한 카페.
백묵은 먼저 도착해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 커피가 두 잔 놓여 있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오셨네요. 음료는 미리 시켰어요. 아메리카노 괜찮죠?"
멋대로 내 커피까지 시켜놨다.
'내가 아메리카노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사실 공짜면 다 좋다.
나는 그의 앞에 앉았다. 백묵은 안경을 고쳐쓰며 말했다.
"지난번 일은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자세히는 말씀 못드리지만 그걸로 저희 길드의 입지 자체가 달라진지라."
1주일 전, 내가 헌터 사무소를 습격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백묵이 운영하는 정보 길드 '호라이즌'이 내가 건네 준 영혼 계약서 덕에 큰 이득을 본 모양.
'그러고보니 뭐였을까.'
거기 새겨진 문자와 문양은 기억에 남아 있다. 해석 스킬을 얻는다면 내용을 알아낼 수 있다만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정말이지, 천운이라고 할까요?"
백묵은 빨대로 커피를 휘휘 저었다. 둥둥 뜬 얼음이 커피를 따라 빙글빙글 돈다.
"그 종이를 빼돌린 범인이 다섯 정도로 좁혀지긴 했는데, 그렇다고 모든 장소를 들쑤시고 다닐 순 없잖아요."
백묵은 정보 길드의 수장인 동시에 S급 헌터다. 때문에 직접 행동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재밌는 건 활동량에 비해 그의 얼굴이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거다. 현시점에서는 그렇다.
"그럴 때 이지한씨가 딱 나타난 거예요. 제겐 구세주나 다름 없었죠."
백묵은 과장된 찬사를 늘어 놓았다. 알듯 모를 듯한 미소는 덤이었다.
그는 차가운 커피를 살짝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의 보답을 드리고 싶은데요."
멸망한 세계의 정보상이라 불렸던 백묵.
그가 구축하고 있는 네트워크와 정보는 내 상상이상으로 방대할 거다.
나는 지금 그것을 이용할 기회를 얻었다.
23화 VIP(4)
백묵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제가 은혜를 입었으면 무조건 갚자는 주의거든요. 빚지는 걸 싫어해서요."
사람 좋아 보이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건 백묵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나는 미소 너머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다. 내 기억 속 그는 한없이 가라앉은,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 나는 인류의 편이에요. 하지만 모두를 도울 수는 없습니다. 나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니까요. 살고 싶다면 도움이 될만한 정보나 능력을 가지고 오세요.
그 모습은 일반적인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백묵은 철저한 계산하에 움직이는 사람이다.
내게 먼저 전화를 건 것도 다 본인에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서겠지.
어렵게 생각할 건 없었다.
각자 필요한 걸 교환하면 될 뿐이다.
"제 입으로 말하긴 그래도 제가 발이 참 넓거든요. 헌터와 관련한 일이라면 뭐든지 도와드리죠."
백묵의 말을 사양할 건 없었다.
터억.
나는 옆에 내려두었던 가방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이건?"
"윤정수가 몰래 소유하던 D급 던전을 공략하고 얻은 마정석입니다. 이걸 백묵, 당신을 통해서 거래하고 싶습니다. 그것도 이번 한 번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내 말에 백묵의 동공이 미세하게 커졌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하하, 조금 놀랐네요. 제가 하는 일이 전부 알려져 있지는 않거든요. 저에 대해 조사를 하신건가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좋습니다.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는 법이죠. 제 입으로 뭐든지 도와드리겠다고 했으니까요."
어디서 나온건지 모를 대량의 마정석. 이런 건 길드 단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거래가 아니면 하기 힘들다.
하지만 백묵은 돈 되는 일이라면 출처가 불분명한 아이템도 신경쓰지 않는다.
"가치를 확인하는 데로 돈은 보내드리겠습니다. 문제가 안되는 방식으로요. 아, 수수료가 좀 붙을 거에요. 괜찮죠?"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괜찮겠네요. 필요한 건 그게 전부인가요?"
"한가지 더 있습니다."
나는 품 안에서 잘 접은 종이 한 장을 건네었다.
그것을 펼쳐 본 백묵이 고개를 기울였다.
"······사람들의 이름인가요? 장소도 있고. 아이템의 이름 같아 보이는 것도 있네요."
거기에 쓰여 있는 건 내가 알고 있는 파편적인 과거 지식들의 나열이었다.
큼지막하게는 알고 있지만 세세한 것까지는 알지는 못하는 정보들.
'백묵 정도 되는 능력자라면 찾아낼 수 있을 거다.'
나 혼자서 조사하거나 찾기에는 방대한 정보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마기의 원천이 존재하는 장소 혹은 내가 소문으로만 들었던 아이템이 있는 장소. 아니면 꼭 필요한 존재지만 이름만 아는 사람이라던지.
백묵을 통해 찾을 수 있을 터.
내가 가진 미래의 정보가 아니면 이득을 보기 힘든 것들로 추렸다. 백묵이 독자적으로 확인해 내더라도, 그 이유를 알아내긴 힘들 거다.
"찾아줬으면 합니다."
종이에 적힌 글자를 읽던 백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당황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낸다.
"음, 저도 가능하면 그대로 찾아드리고 싶은데 말이에요. 생각보다 규모가 커질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이지한씨도 절 조금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이렇게 나올 줄은 알고 있었다.
"이지한씨는 아직 길드가 없으셨죠."
"예."
"따로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으신거죠?"
"당장은 없습니다."
백묵은 잘 됐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차라리 좋네요. 그런 신분이 활용하기에 따라 이득이 될 수도 있거든요. 이지한씨처럼 실력만 있다면요. 용병 헌터라고 들어보셨죠."
용병 헌터.
길드에 소속되지 않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헌터를 의미한다. 소속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SSS급 용병으로 이름을 날리던 헌터도 있었다.
"등급은 아직 D급이시죠?"
"맞습니다."
"좋아요. 감탄스러울 지경이에요."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사무소에 있었을 때 F급이었으니, 아무리 급성장을 했어도 D급이라는 게 당연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레벨을 따지면 C급이나 마찬가지긴하지만.'
백묵은 옆에서 꺼낸 태블릿을 두드리더니, 내 쪽으로 화면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어느 던전의 정보가 나와 있었다.
『 D등급 특수 던전 』
- 내부 마력 등급 C+
- 특수 제한 : D등급 이하의 헌터만 입장 가능
- 예상 보상 : 알드리아의 보석
"이건?"
"지금 공략을 준비 중인 특수 던전인데 제한이 걸려 있어서 이지한씨 같은 실력자가 필요한 상황이거든요."
그는 손가락으로 태블릿의 화면 한구석을 가리켰다.
"보이시죠,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곳의 보상은 '알드리아의 보석'인데요. 이걸 가지고 와주시면 됩니다. 제가 이게 꼭 필요해서요."
드디어 나왔다.
이게 백묵이 나를 부른 진짜 목적이었다. 그 근간에는 나에 대한 좋은 평가가 깔려있기는 하다지만.
"당연히 보수도 드릴거고요. 어떤가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특수 던전의 정보가 범상치 않아서였다. 그걸 읽는 내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여기 참여하는 건 저 혼자입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 D등급 중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친구들이 있거든요. 그 친구들하고 함께 파티로 공략해주시면 돼요."
백묵이 공략을 제시하는 던전은, 내가 알고 있는 곳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딱 이 던전이었다.
'마기의 원천'이 숨겨져 있는 장소. 우연인지 몰라도 백묵은 내게 이곳을 공략할 것을 제시했다.
마기의 원천은 마족들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건이다. 헌터 등급 상승을 위해서라도 꼭 찾아야 했다.
감탄하던 나는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우연일 리가 없지. 이건 우연이 아니다.'
재물 획득의 물약은 분명히 백묵의 명함을 가리켰었다. 여기까지가 재물 획득의 물약의 효과인거다.
굉장하다.
살짝 소름이 돋는다.
팔을 쓸어내린 나는 고개를 슬쩍 들어 백묵을 바라봤다.
'D등급 헌터들로 구성된 파티라.'
그의 표정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실력자들로 파티를 구성해 놓았을 거다.
'으음, 어쩐다.'
백묵이 어떻게 그 던전을 소유하게 된 건지는 몰라도, 원래대로라면 그건 어느 빌런 조직의 소유였을 거다.
잠시 인류의 배신자였던 김상욱의 이야기를 떠올려 봤다.
- 마기의 원천, 그 중 하나는 내가 관리하는 던전에 숨겨져 있었거든. 원천에서 내뿜는 마기가 던전을 특수한 성질로 바꾸는데, 그러면 신기하게도 던전 브레이크가 안 일어난단 말이지.
- 즉, 내부의 마수가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프로젝트 마기가 시작될 때까지 마기의 원천을 오랜 기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었던 거야.
-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내가 그 빌런 조직 대빵이었거든. 아, 미안, 미안하다고. 으악! 아니, 아무리 그래도 돌은······.
김상욱의 이야기를 듣다가 분노한 사람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해서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백묵은 모르고 있겠지만, 파티가 던전을 공략하려고 하면 당연히 김상욱의 끄나풀들이 막으러 올 거다.
'근데 그냥 하자.'
여길 공략했을 때 나한테 이득 되는 게 너무 많다. 백묵과의 거래를 계속해서 이어가려면 이번 일은 필수기도 했고.
'백묵의 목적은 던전 공략 보상인 알드리아의 보석. 내 목적은 마기의 원천.'
서로가 윈윈하는 공략이었다. 물론 백묵은 그 사실을 알 리 없고.
'게다가 김상욱의 부하들도 간단하게 막을 방법이 생각났다.'
마기의 원천, 포인트, 돈.
거절하기엔 너무 달콤한 제안이었다.
"하실건가요?"
"좋습니다. 하죠."
나는 백묵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 * *
다음날.
경기도 외곽의 산 중턱.
D등급 헌터들 중에서도 유망주라고 불리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백묵이 엄선한 4명의 헌터.
일반적으로 D급 던전을 공략할 때 필요한 헌터의 수는 D급 5명이다.
하나가 모자르지만, 백묵은 서류상에 인원을 하나 추가하는 걸로 때웠다.
네 명의 헌터가 서로를 어색하게 마주했다.
나를 포함해 남자 셋과 여자 하나다.
"안녕하십니까!"
"예······."
"안녕하세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자리에 서서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놀랍게도 셋 다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역시 백묵인가. 보는 눈이 굉장하네. 정말로 미래에 유명한 사람들만 모아놨네.'
이들은 모두 훗날 이름을 날리게 된다.
가장 먼저 큰 덩치의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스포츠 머리를 한 그는 커다란 방패를 등에 매고 있었다.
"저희끼리 가볍게 자기소개부터 하고 들어가죠. 저는 박인성입니다. 올해로 27이고요, 방패를 사용하는 탱커 역할을 주로 맡았습니다. 딜러분들은 절 믿고 공격해주시면 됩니다."
남자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철벽의 박인성.
이름과 반비례하는 인성으로 유명했다.
헌터계 갑질 끝판왕, 저 세상 인성 쓰레기, 후배 살인자······. 참 별명이 많다.
각종 갑질 논란이 끊이질 않았으며, 길드를 창설해 A랭크까지 끌어 올리지만 후배 길드원에게 지속적인 괴롭힘을 자행했다.
결국엔 자기 후배를 게이트 내부에서 후드려 패서 죽였다.
'감옥에 갔던 것까진 기억하는데, 그 뒤는 모르겠네. 마족이 쳐들어 올 때 죽었나?'
아마 그럴 거다.
다음으로 초췌한 인상의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 저는 이예준이에요."
"무기는 뭘 쓰십니까?"
"아, 전기 마법을 써요······."
자신감 없는 목소리와 축 처진 어깨. 별 실력이 없어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전기 싸이코패스 이예준.'
이 녀석은 나중에 빌런이 되서 사람을 참 많이 죽인다. 빌런이란 범죄를 저지르는 헌터를 의미하는데, 조직적이거나 전문화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반 범죄자와 차별된다.
이예준은 국내에서 가장 큰 빌런 조직 '환령'의 간부까지 올라가는 진짜 미친 놈이다.
진짜 유명한 놈들만 모였다. 나는 속으로 박수를 짝짝쳤다.
기가 찬다.
'와, 백묵 이 미친놈······. 진짜 실력만 보고 사람을 뽑았네. 최소한의 인성검사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기야 백묵이 초능력자도 아니고 개개인의 인성이나 미래의 일을 알 리가 없다만.
마지막으로 한 사람은 고등학생이었다. 학교 끝나고 바로 왔는지 교복 차림 그대로였다. 팀의 유일한 여자다.
"진세아입니다. 주무기는 단검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진세아는 은근히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그럴만 해.'
그래, 이런 미친 놈들 사이에 있으면 경계심이 드는 게 당연하다.
근데 날 보더니 그 눈빛이 한층 진해진다.
이런, 내가 제일 정상인데.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서야.
'근데.'
나는 그 눈빛을 그대로 돌려줬다.
'니도 정상은 아니야······.'
진세아는 최후의 11인이었다.
훗날 SSS급의 경지에 오르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그녀의 별명은 '환세의 도둑'이다.
멸망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과 고통을 하나씩은 품고 있다. 잃어버린 가족이나, 지키지 못한 약속, 끔찍한 트라우마 속에서 사람은 미치기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특출나게 미친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기인'이라고 불렀다.
'진세아는 그런 기인들 중 하나였지.'
그녀는 모든 생활을 도둑질을 통해서만 영위했다.
일하지 않으며, 거래하지 않고, 협상하지 않는다.
오로지 도둑질만으로 살아가는 미친 인간.
그 대상은 마족, 마수, 인간 가릴 것 없었다. 물론 불쌍한 피난민이어도 예외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피해자였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자식 같던 영훈이와 함께 피난민 생활을 하던 어느날.
그 날은 영훈이의 생일이었다.
- 영훈아, 생일축하한다. 보여 줄 게 있다.
- 또 뭐에요, 아저씨.
- 조용히 따라와. 다른 사람들 모르게.
나는 영훈이를 데리고 한적한 숲 근처로 향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다음, 조심스레 땅을 파냈다.
묻혀 있는 것들을 확인한 영훈이의 얼굴이 그라데이션으로 밝아졌다.
- 이, 이거 다 먹을 거잖아요! 과자랑 음료수? 이걸 대체 어디서 구했어요?
- 몰래 몰래. 진짜 열심히 모았다. 너 주려고.
- 혀엉······. 사랑해요.
- 야, 징그러. 남자끼리 사랑하고 그러는 거 아냐.
녀석이 기뻐하니 나도 기뻤다.
그렇게 땅 속에 묻어 넣었던 과자와 음료수를 꺼내는 순간이었다.
뻐억!
- 여, 영훈아?
어디선가 나타난 그림자가 영훈이의 머리를 가격했다.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영훈이가 쓰러졌다.
- 너, 너는······!
말을 미처 끝 마치지도 못했는데, 나도 별안간 눈 앞에 별이 보이더니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잠시 뒤.
- 으으윽······.
- 아야야, 아저씨 괜찮으세요? 대체 뭐였죠?
우린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둘 다 멀쩡했다. 그런데 멀쩡하지 않은 게 하나 있었다.
- ······없어졌어.
- 네? 뭐가요?
- 간식······. 간식이 없어졌어. 이런 개같은!
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내 머리를 후려치던 그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가 영훈이와 함께 파티를 벌이려고 열심히 모아두었던 간식들을······.
멸망한 세계에서는 금은보화나 다름 없던 그것들을······.
진세아 이 녀석은 그냥 훔쳐갔다.
24화 환세의 도둑(1)
경기도 외곽의 한 건물.
빌런 조직 '흑결'의 거점.
표면적으론 일반 길드와 다를 바 없지만, 그들이 맡는 일은 더럽고 피비린내 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이 병신 새끼들이······."
그곳의 수장이자 후에 인류의 배신자라고 불릴 김상욱이 있었다.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대체 뭔 지랄을 하면 우리 소유 던전이 다른 놈한테 넘어가는 거야!"
분노한 김상욱이 담배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가 하나가 그대로 박살이 났다.
그의 눈치를 보던 부하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저희도 지금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저희 애들 중 하나가 사고를 친 모양입니다."
"씨발, 그러니까 사고를 친 거랑 우리 던전이 왜 듣도 보도 못한 새끼한테 넘어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붉어진 김상욱의 이마에 핏대가 잔뜩 섰다. 사실 지금 가장 살 떨리는 건 김상욱 자신이었다.
'좆됐다. 진짜.'
그는 꽤 오래전부터 마족의 명령을 받아 오고 있었다.
'흑결'이라는 길드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A급 헌터라는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마족의 덕분이었다.
그 분에게 받았던 가장 중요한 명령.
'마기의 원천이 숨겨긴 던전을 아무에게도 넘기지 말 것.'
마족께서는 적절한 시기에 그것을 회수하실 거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던전이 누군가에게로 넘어가버렸다.
'젠장, 이 멍청한 새끼들.'
미리 알았으면 조치라도 취했으련만, 하루나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그때 바깥에서 급하게 전화를 마치고 들어온 다른 부하가 소리쳤다.
"소유자를 확인했습니다! 김철수라는 헌터가 소유한 천만 길드라고 합니다!"
그 정체는 정보상 백묵이 가짜로 만들어 낸 유령 길드였지만, 지금의 김상욱이 그걸 알 순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네?"
"누가 소유했는지 알면 뭐가 바뀌냐? 나보고 김철수 찾아가서 돌려주십쇼 대가리라도 박으라고?"
김상욱이 이를 악물며 말하자, 정보를 가져 온 부하의 눈동자가 사정 없이 흔들렸다.
누가 소유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어떻게 막느냐였다.
'설마 공략되지는 않겠지. D급 헌터밖에 못 들어가는 던전인데.'
마기의 원천이 존재하는 던전은 특수한 성질을 띠게 된다. 때문에 해당 던전은 D급 밖에 못 들어가는데다가 난이도 또한 기형적이다.
쉽게 공략되지는 않을 터.
그러나 만약이라도 던전이 공략 된다면······.
던전이 닫히면서 마기의 원천도 사라진다.
'그러면 난 그날로 그 분한테 뒤지는 거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부와 명예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위태로워진다. 반드시 막아야 했다.
그렇게 생각한 김상욱이 고개를 들었다.
"아까 던전 쪽으로 보낸 애들 도착했냐?"
"네, D급 중에서도 쓸만한 애들로 골라서 보냈습니다."
흑결은 평범한 길드가 아니다. 흑결을 구성하고 있는 길드원들 대다수가 사회에서 사고를 치고 잠적한 빌런들이었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엔 적절했다.
법에 구애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로 꼬리를 잘라 버리면 그만인 패들이다.
"그래, 어차피 던전은 새로 구하면 되고. 안에 있는 마기의 원천만 무조건 회수해 오라고 그래."
그것만 건져내면 어떻게든 된다. 그의 표정을 살피던 부하가 슬그머니 물었다.
"그······. 이미 다른 길드가 공략 중이면 어떻게 합니까?"
"뭐?"
김상욱은 뭘 그런 걸 묻냐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조용히 해결해야지. 근데······."
만약이라는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충돌이 일어난다거나 던전 침입을 문제시 한다거나.
거기에 대한 해답은 간단했다.
흑결은 빌런 조직이다. 오로지 그 분을 위한 도구기도 하고. 김상욱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걸리적거리는 건 싹 다 죽여버리라고 해."
천만 길드? 들어 본 적도 없는 하위 길드였다. 고작해야 D등급 헌터들이 모인 허접한 길드겠지.
그리고 던전은 그런 것들을 묻어 버리기엔 딱인 장소였다.
* * *
빌런 둘, 미친년 하나 그리고 유일한 정상인 한 명.
당연히 그 정상인 한 명은 나다.
'갑질헌터 박인성, 전기빌런 이예준, 환세의 도둑 진세아.'
백묵의 인재 선택에 감탄하며 나는 파티원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기억 속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직 고등학생인 진세아만 빼고.
'환장의 파티를 만들어줬구만.'
그래도 실력이 괜찮다는 것만큼은 인정한다. 던전을 공략하는 건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뒤통수만 안 맞는다면 말이지.
"그러면 이제 출발할까요?"
방패를 짊어진 박인성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나는 잠시 팔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출발하기 전에 해둬야만 할 일이 있었다.
"잠시만요. 잠깐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거 참, 미리하고 오시지."
나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법한 장소까지 이동했다. 파티원 중 누군가가 청각 강화 스킬을 가졌을 수도 있었으니까.
스마트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원래 이 던전은 백묵 소유가 아니었을 거야. 내가 영혼 계약서를 넘겨주면서 미래가 바뀐 게 분명해.'
여긴 본래 인류의 배신자 김상욱이 쭉 소유했을 던전. 이 던전에 보관되고 있는 마기의 원천 또한 간단히 마족에게 넘어갈 예정이었고.
'던전은 갑자기 백묵에게로 넘어 온 거다. 즉, 김상욱도 무슨 수를 쓸거란말이지.'
빌런 조직을 운영하고 있을테니 부하들을 보낼 게 분명했다.
나는 전화가 연결된 스마트폰에 귀를 가져다 댔다.
"영웅 협회 맞죠? 신고 좀 하려고 합니다."
영웅 협회는 헌터 협회와는 다른 곳이다. 속칭 '영협'은 빌런들을 상대하는데 특화 되어 있는 각성자 집단이다.
히어로 영화에 흔히 나오는 영웅이 그들이다.
나는 간단히 용건을 전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이건 일종의 보험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잘만 풀린다면 손 안대고 코를 풀 수 있는 찬스다. 나는 다시 파티원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돌아왔다.
"끝났습니다."
"이런, 그렇게 급하셨으면 솔직하게 말하셔도 되는데. 생리현상은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런 거 아닙니다."
"아하하, 멀리 가시길래."
박인성이 내 등을 치며 웃어 젖힌다. 그걸 농담이라고······.
"그러면 다 모였으니 들어가시죠."
입구는 층층이 쌓인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내부는 캄캄해서 보이지 않지만 던전이 확실하다.
우리는 박인성을 필두로 던전에 들어갔다.
일순 산 속이었던 풍경이 노랗게 변한다.
『 특수 던전에 입장합니다. 』
『 모든 인원이 던전의 특수 제한(D등급 이하 입장)을 충족합니다. 』
나는 레벨이 40이지만 D등급이다.
원래대로라면 40이 되는 순간 C등급이 된다. 무재조정의 효과 덕분에 등급이 유예된 것.
최대한의 능력치로 던전에 입장할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어우, D급 던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넓이네요."
박인성이 놀라며 주변을 둘러봤다.
작열하는 사막.
새파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모래 언덕.
저멀리 이글거리는 열기 너머로 두 개의 피라미드가 보인다.
그 중간에는 오아시스 같은 숲도 하나 있다.
'특수 던전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긴 하네.'
하위 던전은 이런 개방형 필드가 아니라 동굴 같은 폐쇄형인 경우가 대다수다. 이건 마기의 원천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할 거다.
"으아, 태양이 뜨거워요."
"죽을 것 같아요······."
사막의 열기와 쨍쨍한 태양의 직사광선이 심각했다. 진세아와 이예준의 얼굴이 벌개졌다. 덥기는 나도마찬가지였다.
"잠시만요. 금방 아이스 키트를 나눠드리겠습니다."
이번 파티의 리더는 박인성이었다. 그는 미리 백묵에게서 받아온 아이스 키트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나눠주었다.
팔에 붙이는 패치 형태였다.
『 아이스 키트를 사용하여 체온이 일정하게 유지 됩니다. 』
'후우.'
효과는 확실했다. 온 몸으로 냉기가 퍼져나가며 타오를 듯 뜨거웠던 몸이 시원해졌다. 이런 것까지 챙겨주는 백묵의 센스가 훌륭하긴 하다.
"그러면 주변을 경계하면서 쭉쭉 나아갑시다."
사막 필드는 사방이 탁 트여 있어 주변을 살피긴 좋다.
'풍경이 좋긴하군. 내가 언제 사막에 와보겠어.'
그러고보니 여긴 어디인가 싶다. 이집트도 아닌데 커다란 피라미드가 있다. 다른 세계에도 비슷한 장소가 있는건가.
마기의 원천이 남겼을지도 모르는 흔적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 스킬 '인지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 해당 스킬의 경험치가 오릅니다. 』
멀지 않은 정면에서 모래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게 보였다. 나는 파티원들을 멈춰세웠다.
"잠시만요."
"뭡니까?"
박인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다. 나는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저기 마수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박인성은 고개를 내밀어 보는 척을 하더니 씩 웃는다.
"어차피 마수가 나와도 상관 없습니다. 제가 안전하게 막아드릴테니까요. 제가 리더이니 걱정마시고 따라오면 됩니다. 아시겠죠?"
어지간히 자기 능력을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 충고를 아예 무시한 건 아닌지 방패를 꺼내 쥐더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 나아갔을 때였다.
푸슈우!
흔들리던 모래가 하늘 위로 치솟으면서 전갈들이 튀어나왔다. 크기가 2m는 되어 보이는 거대 전갈들이었다.
그 수는 자그마치 일곱 마리.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그 가운데로 들어와있다는 것. 마수들이 우리를 포위한 형국이었다.
"오, 진짜였네요. 눈썰미 좋으신데요. 그래도 모두 걱정하지 마시죠. 제가 있습니다."
박인성은 이런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박인성은 숨을 크게 들이 마시더니 자신의 큰 방패를 다른 손에 쥔 도끼로 쿵쿵 두드렸다.
그러자 파티를 향해 다가오던 전갈들이 순식간에 박인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발 스킬인가.'
박인성은 광역으로 어그로를 끌어 마수들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집중시켰다.
퍼버버벅!
그에게로 다가간 일곱 마리의 전갈들이 연신 꼬리를 찍어댔지만, 박인성은 방패를 들어 전부 가드해냈다.
"······빠져주세요. 전격 마법 시전합니다."
전갈이 나올 때부터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이예준이 중얼거렸다. 박인성에겐 들리지도 않았을 거다.
"빠지래요!"
단검을 꺼내든 진세아가 대신 소리쳤다. 그 말에 박인성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동시에 이예준의 손에서 한줄기의 푸른 전기가 쏘아졌다.
파지직!
첫번째 전갈에게 명중한 전기는 스파크를 튀기며 근처의 전갈들에게로 퍼져나갔다. 감전된 전갈들이 일제히 마비되어 경련했다.
그 틈을 파고든 진세아가 종횡무진 전갈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단단하던 전갈의 껍질이 벗겨지고 진세아의 단검이 녀석들의 급소를 파고들었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백묵이 파티 하나는 기깔나게 짰네.'
맞춰본 적도 없는 공격의 연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들의 등급이 고작해야 D급이란 걸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근데 내가 할 게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파티원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였다.
"······."
진세아가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다가오더니 한마디했다.
"저기요, 움직이는 척이라도 하시죠?"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다른 놈들이 말하면 그러려니 싶은데, 이 녀석이 말하니까 왠지 열 받는다.
무어라 대답하려하는 그때였다.
드드드드······.
모래로 뒤덮인 대지가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뭔가 옵니다!"
푸화악!
대처할 새도 없이 모래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동시에 거대한 지네가 땅에서 솟구쳐 올랐다. 녀석은 진세아의 뒷목을 잡아채더니 그대로 쭈욱 위로 올라갔다.
"끄아아아아!"
진세아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지네는 자신의 몸 길이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높이 올라가버렸다. 그 높이가 족히 15m는 되어 보인다.
오.
나는 그 생생한 광경을 눈에 담았다. 왠지 가슴이 후련해진다. 과거에 묵혀둔 감정이 조금 씻겨나가는 느낌이다.
"어, 어떡하죠?"
"젠장, 도발이 안 먹혀!"
당황한 이예준과 박인성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그래도 이 빌런들에 비하면 진세아는 선량한 영웅이다. 비록 내 원수이기는 하나 구해줘야겠지.
새 무기를 시험해 보기에 적격이기도 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들었다.
"박인성씨, 방패!"
그대로 땅을 박차고 박인성에게로 달려들었다.
"아? 아아!"
눈치는 있었다. 박인성이 내 쪽으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가볍게 뛰어올라 박인성의 방패를 밟았다. 한박자 늦게 박인성이 방패를 힘주어 밀쳐냈다.
나 또한 타이밍을 맞춰 방패를 박차고 뛰어 올랐다.
파앙!
박인성의 근력과 내 다리의 각력이 합쳐지자, 나는 순식간에 지네의 머리 위까지 날아오를 수 있었다.
'내가 빌런이랑 연계 플레이를 다 할 줄이야.'
지네 입에 물려 있는 진세아가 보인다. 녀석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반짝였다. 어지간히 무섭기는 한 모양.
나는 창을 든 손을 뒤로 뻗었다.
콰드득!
『 스킬 '근력 Lv.11'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창을 쥔 팔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하고 그 위로 두꺼운 핏줄이 돋아난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거대 지네의 약점은 머리.'
허공에서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침착하게 녀석의 머리를 조준했다. 워낙에 커서 진세아를 피해서 맞히기란 어렵지 않았다.
『 스킬 '투척 Lv.11'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남은 건 그대로 창을 던지는 것 뿐.
모아 둔 힘이 일시에 방출되며 내 손에 쥐어진 창이 대포알처럼 쏘아졌다. 창은 거센 풍압을 뿜어내며 지네의 머리를 향해 쇄도했다.
지네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창은 녀석의 머리 한가운데에 명중했다.
투두두두두두!
지네의 안면을 파고든 창이 그대로 몸통을 타고 내부를 돌파했다. 몸을 꿰뚫린 거대 지네가 격하게 몸부림 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
그 탓에 진세아가 다시 한 번 하늘 높이 떠올랐다.
'효과가 좋네. 관통스킬이 붙어서 그런가.'
가벼운 감탄과 함께 나는 바닥에 착지했다. 모래가 비산하며 가벼운 연기를 만들어낸다.
『 거대 지네를 처치하여 92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 영혼 포식자가 대상의 영혼을 흡수합니다. 현재 영혼 농도 : 23% 』
'창으로 쓰러뜨렸는데도 영혼 포식에 영혼이 흡수 될 줄이야.'
새로운 사실도 알았다.
쿠우웅!
뒤이어 목숨을 잃은 거대 지네가 몸을 눕혔다. 한바탕 모래가 흩날리며 일대를 뒤덮는다.
포옥
마지막으로 진세아가 머리부터 떨어졌다. 그래도 헌터인지라 단단했다. 진세아는 그대로 모래에 폭 파묻혀버렸다.
"으엑. 퉤퉤. 으으······."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킨 진세아가 입 안에 머금은 모래를 뱉어냈다. 달라붙은 모래 때문에 머리가 완전 엉망이었다.
거대 지네가 쓰러진 걸 확인하고서야, 박인성과 이예준이 다가왔다.
"크흠, 이런 힘을 숨겨두고 계셨군요."
"오우······."
나를 바라보는 두 빌런의 눈빛이 달라져있었다. 아까도 내가 놀고 싶어서 논 게 아니라니까.
근데, 미래의 빌런들한테 칭찬을 받아도 마냥 좋아하기가 그렇다.
"예, 뭐."
적당히 대답하는데, 또 다시 미세하게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나만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진동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진세아를 바라봤다. 근데 이미 늦었다.
스르르······.
"에?"
진세아의 발밑이 푸욱 꺼져가고 있었다. 한가운데에 위치한 거대 개미지옥이 진세아를 사정없이 끌어들인다.
"끄아악! 왜, 왜 나만!"
진세아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왜긴 왜겠어······.
업보가 아닐까. 미래의 업보.
25화 환세의 도둑(2)
"예, 길드장님. 도착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잘 처리하겠습니다."
빌런 조직의 '흑결'의 D급 헌터들.
정확히는 D급 빌런들이 보고를 마쳤다.
그들의 수는 총 세 명.
전화를 품에 넣은 리더격의 빌런 김형진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얘들아, 길드장님께서 가능하면 조용히 처리하라고 하신다."
가능하면.
일반적인 길드였다면 그 뜻 그대로 받아들였겠지만, 흑결은 빌런 길드다.
길드장의 말은 여차하면 범죄도 허용하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오케이, 간만에 재미 좀 보겠는데. 조금만 수틀리면 그냥 죽여 버려도 된다는 거잖아?"
"그게 그렇게 쉽진 않을 걸. 놈들이 아직 공략을 안하고 있을 수도 있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김형진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여기에 모인 이들은 평범한 헌터로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구를 분출하기 위해 모인 범죄자들이었다.
살인, 강간, 강도 같은 강력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이들.
"그리고 만약 있어도, 그냥 죽여버리는 건 안 돼. 천천히 제대로 즐겨야지."
진작에 감옥에 끌려갔어야 빌런들을 끌어모은 게 빌런 조직 '흑결'이었다. 그 중에서도 김형진은 살인에 쾌감을 느끼는 싸이코패스였다.
귀찮게 구는 일반인을 죽였을 때부터 그는 자신의 감정에 눈 떴다.
꽤 오랜시간 길드의 은신처에서 숨어지낸 탓에 그 감정은 더욱 커져 있었다.
물론 모든 빌런들이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굳이 불필요한 싸움은 안하는 게 낫지 않나?"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동료 하나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김형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응? 뭐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마기의 원천만 가져오면 되는 거잖아. 가뜩이나 수배령도 내려진 상황에서 불필요한······. 커헉!"
김형진은 그대로 동료의 턱을 후려쳤다. 동료가 바닥에 쓰러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길질을 해댔다.
"니가 말하는 그 개같은! 수배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지하에서 개지랄을 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짜져 있으라고?"
얼마나 거세게 발길질을 해댔는지 후드려 맞은 동료가 기절해버렸다. 그 모습을 옆에 있던 다른 동료가 재밌다는 듯 바라본다.
"하하, 진짜 웃기네."
"퉤."
김형진은 쓰러진 동료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가자. 이런 겁쟁이 새끼 없어도 충분해."
"길드장이 화낼 것 같은데. 난 그래도 데려갈래."
동료가 기절한 녀석을 등에 업었다.
"그러던지."
상대해야 할 건 고작해야 몬스터나 잡는 헌터들이다.
김형진은 흑결의 선배들로부터 살인을 배웠다. 그 차이는 크다.
산을 올라온 김형진 무리는 던전 입구에 도달했다. 던전 주변으로 낙엽이 흩어진 흔적이 보였다.
"들어갔나본데. 이러면 충돌을 피하기가 힘들겠어."
힘들겠단 말과 달리 김형진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들이 던전의 입구로 향하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진짜 왔네. 심지어 한 놈은 기절해 있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올려다보니, 왠 곱상하게 생긴 남자 한 명이 던전 입구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내 김형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이 건방진 새끼는. 너 천만 길드냐?"
한 명 정도는 공략을 안하고, 망을 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김형진은 인벤토리에서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천만 길드라면 단숨에 처리하면 된다.
아니어도 던전에 끌고 들어가면 되고.
"뭐, 상관 없지."
타악!
돌연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김형진이 검을 휘둘렀다. 상대를 죽일 생각으로 한 공격이었다.
그런데.
"어이구, 아예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왔구만?"
남자는 너무나 가볍게 점프 한 번으로 김형진의 공격을 피했다.
"오케이, 확인 끝."
그러더니 품 안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 보여준다. 하지만 김형진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이 새끼가 여유를 부려?"
"잠깐만······. 저건······."
동료가 뒤늦게 그 수첩을 알아봤다. 동료의 얼굴이 굳어졌다.
"야, 야 도망쳐!"
"뭔 소리야? 저 새끼가 뭐라고······?"
그제서야 김형진도 수첩에 눈이 갔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영웅 협회라고.
"영웅 협회 소속 A급 각성자 이태현이다. 거참 새끼, 새끼 말 많네. 그냥 입 다물고 처맞을 준비나해. 이 새끼들아."
이태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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