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 시각 던전.
나는 뒤쪽을 흘끔흘끔 살피면서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안오는 걸 보면, 잘 처리됐나본데.'
김상욱이 보냈을 빌런들이 코빼기도 안보였다. 아예 안 왔을리는 없고. 내 보험이 잘 먹힌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밤이 되어서 그런지 춥군.'
던전의 하늘은 어느새 완연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밤이 된 사막의 지독한 추위가 몰아쳤다.
"에취!"
진세아가 재채기를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주머니에서 티슈를 꺼내서 건네줬다.
'빌런들 사이에서 그나마 멀쩡한 녀석이니까.'
개인적인 원한은 제쳐두더라도 이 정도 호의는 나쁠 거 없겠지.
티슈를 받아든 녀석이 눈을 가늘게 뜬다.
"설마 이거 아까 화장실 갈 때 썼던 거?"
"······싫으면 내놔."
"농담 농담. 땡큐요."
진세아가 내 어깨를 툭 치더니 티슈를 가져간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래······.'
생각해보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두 번이나 구해줬으니까. 지네 한 번, 개미지옥 한 번.
"흠, 특수 던전이라 그런지 시간도 변화무쌍하네요. 일단은 저기 오아시스에서 좀 쉬다 갑시다."
앞서가던 박인성이 손짓했다. 확실히 지금 같은 밤은 더욱 위험했다. 언제 땅을 파고 마수들이 달려들지 몰랐으니.
"조금만 쉬면 낮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추워하는 것 같으니 모닥불을 피우겠습니다."
박인성은 갑질헌터라는 별명과 다르게 자기가 알아서 불까지 피웠다.
화르륵.
그 열기에 주위가 따뜻해졌다.
오아시스 주변으로 작은 숲이 형성 되어 있어서 캠프 파이어를 하는 기분이었다. 주변에 있던 나무를 하나 잘라, 의자로 삼으니 분위기가 산다.
'멤버가 좀 그렇지만.'
특히 박인성과 이예준. 당장 이 빌런 둘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다. 아직은 범죄자도 아니기에 괜히 손댔다간 내가 철창 신세를 지게 된다.
이 둘이 스스로 무덤을 판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이렇게 있으니까, 캠핑하는 느낌도 나고 좋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감상에 젖은 박인성이 밤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전 나중에 제 손으로 길드를 하나 만들 생각입니다. 누구한테도 구애 받지 않는 자유로운 길드를 꾸려나가는 게 제 꿈입니다."
갑자기 뭔 소리를 하나 했다. 개소리였다.
'자유롭기는 하겠지, 너 혼자만.'
박인성은 그렇게 만든 자신의 길드에서 온갖 갑질과 패악질을 벌인 뒤, 후배 하나를 때려 죽이기까지 한다.
"혹시 그때가 되면 저희 길드에 들어오시지 않겠습니까?"
박인성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징그럽게 씩 웃는다.
'너한테 맞아 죽을 일 있냐.'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박인성은 다른 파티원들을 마저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실력이 좋으시던데요."
"······저는 괜찮아요. 나중에 할 일이 있거든요."
이예준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더니 숨 죽여서 킥킥 웃는다.
'······.'
앞서 말했듯이 이예준은 빌런 조직의 간부가 되어 사람을 죽인다.
불길한 생각 밖에는 안 드는데. 부디 사람 죽이는 미친 생각만 아니길 빈다.
"저도 거절할게요. 전 길드에 안들어 갈거라서요."
모닥불을 쬐던 진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은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전 영웅 협회에 들어 갈 거에요.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정의로운 영웅. 그게 제 꿈이에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친 놈들 뿐이구만.
그 이후로도 쓸데 없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적당히 듣는 척을 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진세아가 물었다.
"어디가요?"
"주변 좀 살펴 보고 오겠습니다."
이대로 낮이 안 올 수도 있었다. 마냥 기다릴 순 없다. 무엇보다 내겐 마기의 원천 회수가 우선이었다.
나는 오아시스 주변의 수풀을 헤치며 바깥으로 향했다. 저 멀리 피라미드 두 개가 보인다.
작은 피라미드 하나와 큰 피라미드 하나.
'마기의 원천은 작은 쪽에 있다.'
인류의 배신자 김상욱은 술만 마시면 과거 이야기를 그렇게 해댔다. 재미삼아 들었던 게 도움이 크게 된다.
부스럭.
'응?'
그렇게 가고 있는데, 뒤쪽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내 스킬은 그 미세한 차이를 찾아냈다.
『 스킬 '인지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 인지 스킬의 경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
나는 모르는 척 앞으로 나아가다, 단숨에 뒤로 돌아 뛰어들었다.
퍼버벅!
이런 건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대충 쓰러뜨리고서 몇 대를 쥐어박자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으악, 아파!"
"뭐야, 너였냐."
나는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세아인 줄은 알고 있었다.
녀석은 머리에 붙은 풀떼기를 털어내며 불평했다.
"숨어서 오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피라미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근데 진세아가 끝까지 날 따라왔다.
"뭐야, 왜 따라와."
"거기 있던 두 사람 눈빛이 음흉해서요."
음, 그건 맞긴하다.
'어쩐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일단 진세아가 회귀 전에 나한테 잘못을 하긴 했지만, 지금의 진세아에겐 죄가 없다.
있었어도 아까 때리면서 전부 풀렸다.
'진세아가 있으면 일이 쉽게 풀리겠는데.'
이 녀석은 아이템을 훔칠 수 있는 '스틸' 스킬을 가지고 있다. 분명 거기에 맞는 특성도 가지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세아를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따라 와."
"왜요?"
"······."
그냥 두고 갈까.
"아, 어디가요!"
* * *
나는 작은 피라미드의 입구 앞에 도착했다. 결국엔 뒤따라 온 진세아가 내 옆에 섰다.
"여기는 좀 불길한데요······."
녀석은 입구를 쳐다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무시하고 들어가려는데 진세아가 날 붙잡았다.
"진짜로요! 저 위기 감지 스킬있거든요? 여긴 아마 함정이 많을 거에요."
"······. 그러면 아까는 왜 그랬는데."
위기감지 스킬이 있다면서 지네한테 잡혀가고, 개미지옥한테 끌려가나.
"스읍, 그거는······.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았나? 하여튼요."
없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불현듯 몇몇 정보가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아마 위기 감지 스킬 계열 중에서도 최상위 등급의 스킬인가본데.
미래 예지, 위기 관리, 절대 감각······. 떠오르는 스킬은 많다. 대부분이 미래를 살짝 엿볼 수 있는 스킬이다.
'현 시점에선 상당한 고급 정보지만, 나중에는 유명해지는 스킬들이지.'
진세아의 스킬이 작동하지 않은 건, 내가 녀석을 구해줬기 때문일 거다. 앞을 내다보는 미래시(未來視)의 능력을 이용하는 스킬들이 그렇다.
결과적으로는 안전해졌으니까.
진세아가 괜히 공격을 피하려 하는 것보다 내가 구해주는 게 안전한 결과를 낳는단 의미였다.
'이쪽이 불길하다면 더더욱 이쪽으로 가야겠군.'
마기의 원천 때문에 그 주변이 불안정해졌을 확률이 크다. 즉, 제대로 된 길인 셈이다.
"엥. 갑자기 또 괜찮아졌네."
진세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날 따라온다.
피라미드 내부에는 긴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길만 따라가면 중심부에 쉽게 도달할 것 같다.
"진짜 보여줄게요."
길이 익숙해진 건지 진세아가 자기의 위기감지를 보여주겠다며 앞장섰다. 나보다 한참을 앞서가서는 소리친다.
"봐봐요, 괜찮잖아요!"
『 인지 스킬의 경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
『 스킬 '인지 Lv.11'를 획득합니다! 』
『 스킬이 레벨 11을 달성하여 추가효과를 획득합니다. 』
『 이제 동료의 시스템 메시지를 일부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잠깐, 거기는 가면······."
"뭐래, 저 위기 감지 있다니까요. 걱정 안해줘도······. 엥."
달칵.
진세아의 발이 닿은 바닥이 버튼처럼 눌리며 살짝 낮아졌다.
드드드······.
복도 앞쪽을 바라보는 진세아의 안색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거대한 돌이 이쪽을 향해서 거침없이 굴러오고 있었다.
녀석은 바로 몸을 틀더니, 내 쪽으로 허겁지겁 도망쳤다.
"오, 오늘은 진짜 이상하네!!"
나는 영혼 포식자를 꺼내들었다.
쿠구구구······!
"도망 안 가요?"
소리치는 진세아를 무시하고 검을 들어 올렸다. 굴러오는 기세가 대단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정확한 타이밍을 노렸다.
바위가 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나는 검을 휘둘렀다.
- 일자베기
번쩍하는 빛과 함께 복도 내부에 굉음이 울려퍼졌다. 잔잔하던 복도에 바람이 휘몰아치며 솟구친 흙먼지를 몰아냈다.
반으로 나뉜 거대한 바위가 회전력을 잃고 그대로 멈춰섰다.
'오.'
짧게 썼는데도 이만큼의 위력이었다. 11레벨의 위력이 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허얼. 진짜 D급 맞아요?"
내 뒤에 숨어 있던 진세아가 쪼개진 바위를 쳐다보며 입을 벌렸다.
D급은 맞지.
레벨이 40이라 그렇지. 특성의 효과만 아니었다면 C급이었을 거다. 거기에 11레벨이 된 근력과 민첩 같은 스킬들이 더 해졌으니 강할 수밖에.
'그러고보니 방금 인지 스킬도 11레벨이 됐지.'
그래서 그런가?
평소라면 보지 못했을 미묘한 흔적이 눈에 띄었다. 일자베기로 베어낸 바위의 뒤편, 미세하게 금이 간 벽돌.
나는 곧장 다가가서 발로 그 부분을 세게 찼다.
와르르!
『 지름길을 발견했습니다. 』
벽돌이 지탱하던 벽이 무너지며 새로운 통로를 드러냈다. 이걸 진세아 덕분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아니, 그냥 행운 스킬 덕일지도.
"오오, 대박! 얼른 올라가요!"
지름길은 피라미드의 중심부로 이어졌다. 통로를 빠져나오자 넓직한 공간 위의 거대한 석상이 보였다.
스핑크스 비스무레한 생김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기에 마기의 원천이 잠들어 있을 거다.
우리가 석상 앞으로 다가가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사막을 찾은 도전자들이여 모래 폭풍의 시련을 받으라. 』
"시련?"
진세아의 물음과 동시에 스핑크스의 주위로 수많은 마법진이 생겨났다. 붉은 선으로 그어진 마법진 위로 불기둥이 차례차례 솟아올랐다.
'원래대로라면 이 아래에서 시련을 견뎌야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앗, 뜨거! 이거 진짜 불이잖아요! 이제 어떻게 해요?"
"스핑크스 위로 올라가."
"아하, 그러면 되네요."
나는 단숨에 스핑크스 위로 올라왔다. 진세아도 헥헥대며 나를 따라왔다.
"근데 이제 어쩌죠?"
환세의 도둑 진세아.
회귀전, 나는 그녀에게 식량을 빼앗겼었다. 해프닝으로 웃어 넘기기에는 그 당시 나와 영훈이에겐 간절한 것들이었다.
나는 분노했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 열심히 긁어 모았다. 진세아에게 복수할 방법이 없나하고. 그녀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비록 내가 마땅한 복수를 하기도 전에 진세아는 마족에게 죽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의 능력에 대해선 잘 알게 되었다.
"진세아, 석상에 손을 대고 스틸을 써봐."
"네?"
진세아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도 그럴게 녀석은 자신의 능력인 '도둑질'을 우리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 그게 무슨 소리······."
드드드드······!
스핑크스가 몸을 일으키려하고 있었다. 제대로 시련에 참여하지 않는 나와 진세아를 떨어뜨리려는 거겠지.
어느새 바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독한 연기가 여기까지 올라온다. 그 정체는 마기의 원천에서 흘러나온 독극물.
진세아의 안색이 파랗게 질린다.
"죽기 싫으면 빨리 해."
"하, 하면 되잖아요!"
진세아는 의아해 하면서도 손을 석상에 대고 두 눈을 감았다.
"석상한테 써봤자 아무것도 안될텐데······."
그러나 녀석의 중얼거림과 달리.
샤아아—!
진세아의 손에서는 새하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거세게 흘러 나오는 찬란한 백광에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다.
『 스킬 '인지 Lv.11'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 동료로 인정된 대상의 스킬을 일부 확인합니다. 』
그러나 확신할 수 있었다.
'됐다.'
높아진 인지 스킬이 내 앞으로 푸른 메시지 창을 자아냈다.
『 동료 진세아의 스킬 '절대 강탈 Lv.4'가 발휘됩니다. 』
『 NPC 스핑크스의 보상 아이템을 강탈합니다! 』
26화 환세의 도둑(3)
회귀 전 진세아는 기인이라 불리며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도둑질을 일삼았다.
진세아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그녀는 영웅이라 불렸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진세아의 능력이 압도적이었으니까.'
신들린 듯한 도둑질.
좋게 말하자면 적으로부터 아이템을 빼앗아가는 능력 하나만큼은 뛰어났다. 최후의 11인으로 남아 있던 그녀가 훔치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열받은 내가 사람들한테 물어물어 조사한 사실이니까. 틀림 없다.'
그녀는 멸망한 세계에서도 각종 던전과 게이트를 털며 수많은 아이템들을 영웅들에게 보급했다.
'던전과 게이트를 공략하지 않고도 아이템과 보상을 챙기는 능력.'
시스템을 초월한 도둑질.
그게 진세아의 능력이었다.
인지 스킬이 11레벨에 도달하며 새로 생긴 추가 효과 덕분에 그녀가 가진 스킬의 정체가 드러났다.
『 동료 진세아의 스킬 '절대 강탈 Lv.4'가 발휘됩니다. 』
'등급이 짐작도 안가는구만.'
그냥 도둑질도 아니고, 강탈이란다. 나는 새삼 알게 된 스킬의 이름에 혀를 내둘렀다.
'효과가 이렇게 좋은데, 본인도 아직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지금의 진세아는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거에요?"
후두둑 쏟아져 나온 보상이 진세아의 손을 타고 굴러 떨어졌다. 진세아 본인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 보상이 지급됩니다. 』
『 모래 폭풍의 두번째 시련이······. 』
『 □상이 □□됩니□. 』
파지직.
시련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연달아 떠오르며 노이즈를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킬 것 같던 스핑크스 석상도 덩달아 멈췄다.
『 시련□ 끝□······. 』
『 보□이 지급됩□다. 』
넘실거리던 검은 독액의 수위도 점점 낮아진다.
'시련이 강제로 끝났다. 진짜 미친 스킬이군.'
데구르르······.
나는 발 밑으로 굴러가는 잔 하나를 집어들었다.
'덕분에 간단하게 하나 찾았네.'
황동 재질의 잔에는 검붉은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곳에서 불길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 오른다.
이게 바로 내가 찾던 '마기의 원천'이다.
그걸 줍자마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 마기의 원천을 회수하였습니다. ( 1 / 3 ) 』
『 첫번째 마기의 원천을 회수하여 일시적으로 특수한 버프를 지급합니다. 』
『 재능 보충 : 1시간 동안 상위 스킬을 획득할 가능성이 대폭 증가합니다 』
'오오.'
생각치 못한 이득이었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잘하면 상위 스킬을 얻을 수 있겠는데.'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들은 전부 일반 등급이다. 전수 받은 일자베기만이 레어 등급이다.
10만 배의 경험치를 받고도, 상위 스킬을 습득하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더럽게 재능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런 부족한 재능을 보충해주는 버프를 받았다.
'최소 레어 등급의 스킬만 얻을 수 있어도 대박이다.'
레어 등급 스킬인 일자베기만 놓고 봐도 무지하게 강력했으니까. 기대해 볼만했다.
'······어떤 스킬을 습득하게 될지는 운에 맡겨야겠지만.'
어느 정도 방향성은 잡을 수 있어도, 원하는 스킬을 딱 손에 넣는 건 불가능하니까.
나는 손에 쥔 잔을 바라봤다.
'우선은 마기의 원천부터 없애자.'
잔을 가볍게 던지고서, 영혼 포식자를 휘둘러 푸른 선을 그었다. 반으로 나뉜 마기의 원천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피오른 연기는 그대로 영혼 포식자에게 빨려 들어왔다.
『 도검 영혼포식자가 마기를 포식합니다. 공격력 + 3 ( 3 / 5 ) 』
『 영혼포식자의 현재 공격력 : 30( +9 ) 』
성장의 마족, D급 던전 보랏빛 기사 그리고 이번 마기의 원천까지. 총 3스택을 쌓았다.
맨 처음보다 공격력이 30% 증가한 셈이었다. 곧 있으면 유니크 등급과 맞먹을 정도의 공격력이 된다.
만족스럽게 검을 집어 넣는데 진세아의 시선이 느껴졌다. 녀석은 보상으로 나온 아이템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살펴보니 기민함을 살짝 올려주는 팔찌였는데, 나한테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뭔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녀석이 물었다.
"뭐에요?"
"뭐가."
"내 스킬 어떻게 알았냐구요."
"그런 스킬이 있거든."
나는 대충 얼버무리곤 석상에서 뛰어내렸다. 진세아한테 모든 걸 세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 알아서 생각하라지.
"아, 어디가요!"
어쨌든 진세아 덕분에 빨리 끝났다.
피라미드 밖으로 나오자 어둠이 걷히는 게 보였다. 빨리 감기를 하는 것 같은 속도로 어둠이 물러나고, 태양이 솟아오른다.
이제 파티로 돌아가자.
"나도 몰랐던 걸 어떻게 알았냐구요!"
여전히 포기를 못한 진세아가 열심히 나를 따라왔다.
* * *
"오셨습니까. 두 분 다 사라지셔서 걱정했습니다. 찾으러 갈까 했는데, 딱 맞게 돌아오셨네요."
박인성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나는 진세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꼬맹이 인생상담 좀 해주느라."
"그게 무슨······이 아니라. 맞아요. 인생상담. 되게 도움 됐죠."
진세아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진세아도 작은 피라미드에서 아이템을 하나 챙겼다. 그걸 굳이 말할 필요 없다는 것 정도는 아나보다.
"그랬군요, 그러면 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가도 되겠습니까? 마침 해도 떴으니까요."
"괜찮습니다."
일행은 박인성을 따라 큰 피라미드를 향해 움직였다.
내 목적인 마기의 원천은 찾았지만, 아직 백묵이 요구한 '알드리아의 보석'은 찾지 못했다.
그건 던전을 공략해야 얻을 수 있는 보상이다.
'마기의 원천을 없애긴 했지만 아직 그 영향은 남아 있단 말이지.'
따라서 보스의 등급은 최소 C등급 상위는 되지 않을까. D급 헌터밖에 못들어오는 던전치고는 상당한 난이도가 될 거였다.
'이 파티의 공략 성공 유무를 나는 모른다.'
원래는 여기에 이 파티가 모일 일 자체가 없었다. 내가 건넨 영혼 계약서 탓에 미래가 조금 바뀌었다.
그 덕에 백묵이 김상욱의 던전을 빼앗은 거다.
'뭐, 나야 좋지만.'
백묵의 신뢰도 얻고 마기의 원천까지 회수했으니 일석이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일행은 큰 피라미드 앞에 도달했다. 조용히 따라오던 미래의 전기빌런 이예준이 손짓했다.
"······작은 피라미드는 안가봐도 될까요?"
어차피 가도 아무것도 없을텐데.
"우리 목적은 던전을 공략하고 알드리아의 보석을 챙기는 겁니다. 괜히 체력과 시간을 낭비하지말고 빠르게 보스부터 공략합시다."
박인성이 씩 웃으며 말했다.
좋은 판단이다.
크고, 강해보이는 장소에 보스가 잠들어 있다는 건 게이트와 던전의 상식이다.
큰 피라미드 내부의 구조는 작은 것과 비슷했다. 대신 복도가 훨씬 넓었다.
"헉, 저기봐요!"
으어어······.
벽의 틈새 사이에서 미라들이 기어나오고 있었다. 박인성이 방패를 들고 앞으로 다가갔다.
"초입부터 몬스터가 많은걸 보니 보스가 있는 곳이 확실하네요. 제가 먼저 어그로를 끌겠습니다. 지원 부탁드리겠습니다."
눈대중으로 세어봐도 스무 마리가 넘는 숫자다. 상대가 어렵진 않았다. 이전처럼 박인성이 도발을 쓰고, 이예준이 전기 마법을 날렸다.
마찬가지로 진세아가 뛰어들어 단검을 휘둘렀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전투였다.
이번에는 나도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니라, 창을 들어 올렸다.
『 보유 포인트 : 357 point 』
'포인트 벌어야지.'
1000포인트짜리 재능 획득의 물약을 꼭 먹어 보고 싶거든.
슬슬 새로운 스킬도 필요할 때였다. 근력, 민첩, 지력 같은 기초 스킬들은 대부분 얻었다.
더 빨리 새로운 재능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도 인과역전의 상점을 이용할 포인트를 모아야했다.
나는 가벼운 도움 닫기 후에 손에 쥔 창을 내던졌다.
『 스킬 '투척 Lv.11'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쐐애액!
창날이 공기를 가르며 미라를 향해 쇄도했다. 이내 날카로운 창끝이 미라의 머리를 꿰뚫었다.
창은 미라 하나의 머리를 관통하고도 가속력을 잃지 않았다. 그대로 두번째, 세번째를 연달아 통과하더니 뒤쪽에 서 있던 미라마저 뭉탱이로 넘어뜨렸다.
『 몬스터 '미라'를 6마리 처치하셨습니다. 』
『 42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내가 쫙 핀 손을 들어 올리자 창이 다시 날아와 손에 안착했다. 미라에게서 나온 희미한 기운 또한 내쪽으로 모여들었다.
굳이 영혼 포식자로 몬스터를 처치하지 않아도 그 영혼이 흡수되고 있었다.
'아주 좋아.'
이후로는 같은 동작을 반복할 뿐이었다. 미라들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박인성은 흡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처음부터 눈여겨보긴 했지만, 창 던지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시군요. 같은 D급 중에서도 이지한씨만큼 강한 헌터는 못 봤던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속보이는 칭찬을 해 온다. 박인성은 미래에 길드를 세울 작정이다. 나랑 친분을 만들어 놓는 게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겠지.
어느새 다가온 진세아가 속삭인다.
"솔직히 D급 아니죠."
"아니었으면 여긴 어떻게 들어왔겠냐."
"수상해······."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선 날 째려봤다. 니가 수상해 하면 어쩔건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파티는 순조롭게 나아갔다.
* * *
보스의 방에 도착했다. 작은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넓은 공터였다.
그 가운데에는 10m 높이의 정육면체가 있다. 그 재질은 노란빛을 띄는 석재였다.
보자마자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필이면 저건가.'
보스 중에서도 악질인 놈이 뽑혔다. 특히나 우리 파티와의 상성이 안좋다.
"······저게 보스인건가요?"
이예준이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장기인 전기 마법이 먹히지 않을 걸 걱정하는 모양.
실제로도 그럴 거다.
쿠구구구······.
정육면체의 틈이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투박한 인간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골렘인가 봅니다. 이건 애 좀 먹겠는데."
박인성의 표정도 그리 좋지 못했다. 골렘의 무게에서 오는 파괴력은 확실히 위험하다. 박인성이 제대로 막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애만 먹으면 다행일텐데 말이야.'
골렘은 C급 이상의 던전에서 출현하는 마수. 우리 파티가 능력 좀 있는 D급들로 짜여졌다곤 하나 그래봤자 D급이다.
여기 있는 빌런 두 놈이 진짜 뛰어난 놈이었으면 진작에 대형 길드에서 채갔겠지.
푸쉬이익!
골렘의 관절 부분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골렘은 땅을 울리며 전차처럼 돌진해왔다.
쿵, 쿵, 쿵!
그래도 박인성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다, 이놈아!"
그는 고함과 함께 도발 스킬을 발동했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골렘의 주먹이 박인성을 향해 날아왔다.
박인성이 아무 생각 없이 도발을 사용한 건 아니었다.
그의 주위로 푸른 방어막이 생겨났다. 역시 아이템 하나 정도는 숨기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걸론 부족했다.
콰아앙!
볼 것도 없었다. 골렘의 주먹 한 방에 방어막이 산산조각나며 부숴졌다. 보스의 주먹은 그대로 박인성과 충돌했다.
"커허억!"
박인성의 눈이 돌아갔다. 붕 떠오른 박인성이 그대로 뒤쪽의 벽에 쳐박혔다. 쩌저적하는 소리와 함께 벽면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박인성은 팔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미, 미친······!"
그 모습을 지켜 본 이예준의 앞으로 푸른 전기가 모여들었다. 본인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푸른 전기 구슬이 골렘의 안면을 향해 쏘아졌다.
파아앙!
잠깐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 게 전부였다. 오히려 골렘이 이예준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겁 먹은 이예준이 마구 소리쳤다.
"으, 으아아! 오지마!"
그러나 골렘이 그 말을 들어 줄 리가 없었다. 골렘은 새하얀 증기를 배출해내더니 이예준을 향해 달려나갔다.
쿵! 쿵! 쿵!
크기에 걸맞지 않는 가공할 속도였다. 골렘의 거대한 발이 뒤로 뻗어지더니, 다음 순간 이예준을 차올렸다.
콰앙!
그대로 허공으로 솟아오른 이예준이 천장에 처박혔다. 저 정도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돌았네.'
손 써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두 명이 쓰러졌다. 마기의 영향을 보스가 몰아 받은 모양.
어쩐지 피라미드 내부가 너무 쉽더라.
골렘답지 않은 기동력에 나까지 등골이 서늘해진다.
덜커덩.
골렘의 고개가 나와 진세아를 향해 돌아갔다. 안면의 붉은 보석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야, 정신 차리고 반대편으로 뛰어. 내가 부르면 와라."
진세아가 상대하기엔 적이 너무 강하다.
나는 진세아의 어깨를 툭 쳤다.
"아, 아! 넵!"
내 말에 멍하니 있던 진세아가 정신을 번뜩차리고선 반대 방향으로 뛰어나갔다.
동시에 10m에 달하는 골렘이 뛰어올랐다.
콰아앙!
놈의 양 주먹이 내가 있던 땅을 깨부쉈다. 조각난 바닥에서 큼지막한 돌덩어리가 비산했다.
『 스킬 '인지 Lv.11'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 스킬 '민첩 Lv.11'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처음의 공격부터 마지막 돌멩이 하나까지 완벽하게 피해냈다.
'좋아.'
스킬의 도움 덕이었다. 그대로 바닥에 착지해서 창을 손에 움켜줬다.
'혹시라도 맞으면 그대로 끝이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공격은 스쳐서 맞아도 중상이다.
공격의 반동으로 골렘이 주춤거리는 사이, 나는 창을 던지기 위한 자세를 잡았다. 뒤로 뻗은 팔 위로 부풀려진 근육이 꿈틀거렸다.
골렘이 자세를 잡기 전에 그대로 던져냈다.
콰아앙!
날아간 창이 골렘의 머리에 명중했다. 놈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한쪽으로 넘어질 듯 기울었다.
타격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닐 거다.
'어차피 몸 속에 잠든 핵을 파괴하는 게 아니면 무의미하다.'
핵을 보호하고 있는 몸통은 가장 단단한 재질로 이루어져 있을 거다. 당장에 거길 깨부수려고 하는 것보다는, 확실한 수를 취하는 게 낫다.
타악
나는 재빨리 골렘의 위로 올라 탔다. 그대로 놈의 팔을 거친 뒤, 어깨를 발판 삼아 크게 도약했다.
동시에 영혼 포식자를 꺼내 쥐었다. 스산한 냉기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는 몬스터를 잡으며 모여 들었던 영혼이 일제히 방출했다.
『 영혼 포식자 : '혼령 개방'을 사용합니다. 』
『 일시적으로 공격 범위 및 위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
새파란 연기가 칼날에서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그 기세를 몰아 단숨에 골렘을 베어내렸다.
- 일자베기
골렘의 팔에 푸른 선이 새겨졌다. 11레벨의 일자베기와 혼령개방이 합쳐지자 그 위력은 막강했다.
쿠구궁!
흙먼지와 함께 놈의 거대한 팔이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아직 부족해.'
땅이 발에 닿자마자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시 한 번 놈을 향해 뛰어올랐다.
푸쉬익!
증기를 내뿜은 골렘은 하나 남은 팔을 휘둘러 나를 막으려했다. 방어를 하겠다는 심산인가본데, 나야 좋다.
혼령 개방이 불과 1초 가량 남은 상황. 내 일자베기가 작렬하며 놈의 팔을 잘라냈다.
쿠우웅!
골렘의 남은 팔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걸로 보스를 거의 무력화 시켰다.
지금이었다.
"진세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야 한켠으로 녀석의 잔상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단숨에 골렘에게 접근한 진세아 스킬을 발동했다.
그 주위로 새하얀 빛이 솟아난다.
『 동료 진세아의 스킬 '절대 강탈 Lv.4'가 발휘됩니다. 』
마공학 핵을 에너지원으로 움직이는 골렘은 일종의 기계다. 이 경우 진세아의 능력이 완벽한 상성의 우위다.
『 대상과의 격차가 지대하여 강탈에 실패합니다. 』
물론 진세아의 능력치가 높다는 가정하에.
'그렇게 쉽게 풀리진 않는건가.'
그래도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이, 이제 어떻게 해요?"
당황한 표정의 진세아가 물어왔다.
"도망쳐."
내 말에 진세아가 허둥지둥 도망쳐 나왔다. 나는 그 사이 아까 던졌던 창을 손으로 회수했다. 영혼 포식자는 인벤토리에 집어 넣었다.
푸쉬익!
위험을 감지한 건지, 골렘은 등 뒤로 미친듯이 증기를 뿜어냈다. 놈은 그 추진력에 힘 입어 자세를 바로 잡으려 했다.
'어딜.'
나는 곧바로 창을 투척했다.
『 스킬 '근력 Lv.11'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 스킬 '투척 Lv.11'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콰아앙!
굉음과 함께 날아간 창이 골렘의 가슴팍에 꽂혔다. 그러나 골렘은 등쪽에서 증기를 뿜어내며 내 공격의 충격을 무시했다.
'뭐 저런 미친 골렘이······.'
아무리 마기에 의해 변형 되었다지만 저건 심하잖아.
그래도 데미지는 충분히 줬다. 창이 꽂힌 부분 주위로 깊은 균열이 생겨있었다.
그럼에도 골렘은 멈추지 않고 나를 향해 돌진했다. 두 다리로 쿵쿵 달려 온 골렘의 발이 뒤로 뻗어졌다.
'문제는 다음이다.'
이제 한걸음으로 골렘의 발길질이 내게 닿을 것이다.
피하기엔 늦었다. 골렘은 내 창을 무시하고 달려 온 거니까.
그렇다고 저걸 정통으로 맞았다간 나도 지금 벽에 박혀 있는 놈들 꼴이 될 게 뻔하다.
선택지는 하나 뿐이었다.
'쓰러뜨리는 수밖에.'
그리 생각하며 인벤토리에서 다시 한 번 영혼 포식자를 꺼내 한 손에 움켜쥐었다.
이제 준비한 수도 없다. 순수하게 내 기량으로 승부를 봐야했다.
'해보자.'
각오를 다진 그 순간이었다.
팅!
갑작스레 알림 하나가 내 앞으로 떠올랐다.
『 버프 '재능 보충'에 의해 상위 스킬 습득 가능성이 대폭 증가합니다 』
마기의 원천을 없애며 받은 버프였지만,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던가.
긴박한 전투 상황에선 도움이 되지 않는 메시지기에 무시하려고 했지만.
"!"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 해당 버프의 효과로 특수 레어 스킬을 획득합니다. 』
'특수 레어?'
그냥 레어도 아니고. 특수 레어란다. 스킬의 등급 중에서도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 등급. 얻고 싶어도 얻을 수도 없는 그런 등급.
샤아아!
내 의문과 동시에 푸른 빛이 내 몸을 미친듯이 휘감기 시작했다.
27화 환세의 도둑(4)
『 특수 레어 스킬 '체인지 웨펀 Lv.1' 을 획득합니다. 』
『 이제 빠르게 무기를 교체 할 수 있습니다. 』
『 무기 교체 후 일시적으로 무기의 파괴력이 3% 증가합니다. 』
내 시야 끝으로 떠오른 메시지창의 내용을 나는 단숨에 이해했다.
'······!'
『 무기를 교체하여 체인지 웨펀의 효과가 적용 됩니다. 』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순했다.
나는 다가오는 골렘을 향해 뛰어 들었다. 높아진 인지 스킬 속에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우선은 그대로 검을 휘두른다.'
콰아앙!
골렘의 흉갑 위로 내 일자베기가 그대로 작렬했다. 균열을 파고든 일격에 골렘의 흉갑을 이루고 있던 파편들이 솟구쳤다.
'그리고 무기를 바꾼다.'
영혼 포식자를 던지다시피 인벤토리에 집어 던지며 몸을 회전시켰다.
이어서 스킬을 발동시켰다.
『 스킬 '체인지 웨펀 Lv.1'을 발동합니다. 』
스륵!
골렘의 가슴팍에 꽂혀있던 창이 한 줄기 빛이 되어 내 손에 쥐어졌다. 기가 막힌 효과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 스킬 '체인지 웨펀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체인지 웨펀 Lv.3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체인지 웨펀 Lv.4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체인지 웨펀 Lv.5를 획득합니다. 』
『 교체한 무기의 파괴력이 15%증가합니다! 』
'이제 다시 던진다······!'
콰아앙!
내 회전력을 발판 삼아 골렘의 몸통에 창을 꽂아 넣었다. 굉음과 함께 골렘이 뒤로 밀려났다.
쩌저적!
단단하게 핵을 보호하던 골렘의 외피가 전부 벗겨졌다.
꽈악.
창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인벤토리에서 흘러나온 빛이 내 손에 쥐어진다.
영혼 포식자의 칼날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다시 한 번 시스템 메시지가 쏟아졌다.
『 스킬 '체인지 웨펀 Lv.6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체인지 웨펀 Lv.7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체인지 웨펀 Lv.8를 획득합니다. 』
『 교체한 무기의 파괴력이 24%증가합니다! 』
거듭하며 무기를 바꿀 때마다 그 속도와 위력이 증대 되었다. 나는 공중에서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체인지 웨펀의 효과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연격이었다.
푸쉬이이!
골렘의 뒤로 증기가 끝없이 배출된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게 보인다.
나는 떨어져 내리면서 스킬로 창을 회수했다. 창은 빛이 되어 쏜살같이 내 손에 안착했다.
『 스킬 '체인지 웨펀 Lv.9를 획득합니다. 』
『 스킬 '체인지 웨펀 Lv.10를 획득합니다. 』
『 교체한 무기의 파괴력이 30%증가합니다! 』
타악.
바닥에 착지한 나는 곧바로 골렘을 향해 창을 조준했다.
『 체인지 웨펀 Lv.10 달성 추가효과를 얻습니다. 』
『 이제 교체한 무기에 희미한 마력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
창끝에서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아직은 희미하지만 언젠가 찬란하게 빛날 오러.
그것이 창과 함께 쏘아졌다.
콰아아앙!
푸른색의 선명한 궤적이 더 없이 올곧은 직선을 만들어냈다. 단단한 내피와 골렘의 핵이 일시에 격파되었다.
『 던전의 보스 '마공학 골렘'을 처치하셨습니다. 』
『 428 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총 744point ) 』
보스의 중심부에서 산산히 부숴진 붉은 핵의 파편이 반짝거리며 허공을 수 놓았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미소지었다.
'해냈다.'
고양감으로 끓어오르는 감정 속에서 움직임이 멎은 보스를 바라봤다. 단 한순간만 늦었더라도, 내 꼴은 벽에 박힌 박인성이나 이예준처럼 되었을 거다.
"이, 이긴거죠?!"
뒤쪽에 빠져있던 진세아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골렘의 상태를 요리조리 확인하더니 나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양 손의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대박, 핵 멋졌어요."
미래의 대도둑, 아니 최후의 11인에게 듣는 칭찬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다른 사람들!"
진세아가 포션을 들고 부랴부랴 응급처치를 하러 갔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그 둘을 내버려두는 게 좋다만.
'진세아가 있으니 당장은 봐준다.'
던전에서 치명상을 입었다고 놈들의 인성까지 교화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놈들이 문제를 일으키기까지는 시간이 좀 있다. 그 전에 조치는 취해 놓아야 겠지. 지금은 때가 아닐 뿐.
『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
허공에 맺힌 빛무리가 내 손 위로 내려왔다.
『 보상 알드리아의 보석을 획득합니다. 』
『 아이템 설명 』
- 이름 : 알드리아의 보석
- 등급 : D++
- 분류 : 재료
- 설명 : 생명을 불사른 왕비의 혼이 여기에 담겨있나니.
설명은 알쏭달쏭하지만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었다. 백묵이 찾던 보석이 이거였다.
'오케이, 획득 완료.'
이번 던전은 공략에서 얻은 수확은 컸다. 마기의 원천도 회수했고, 특수 레어 스킬까지 얻었다.
'조금이지만 무기에 마력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무기에 마력을 부여하는 것 또한 재능의 영역이다.
'체인지 웨펀'은 스킬 자체가 가진 효과도 뛰어났지만, 추가 효과마저 훌륭했다. 11레벨엔 무슨 추가효과를 받을지 더욱 기대가 된다.
나는 바닥에 잠시 주저 앉았다.
'잠시, 쉬자.'
대부분의 기력을 소진해서 이제 꼼짝할 수가 없다.
* * *
"이제 나가죠!"
"그래."
보스의 방 한가운데에 바깥으로 향하는 게이트가 생겨 있었다. 진세아와 함께 쓰러진 놈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김상욱의 부하 빌런들은 잘 처리된 모양이네.'
영웅 협회에 미리 신고를 해두었는데 잘 잡아간 모양이다. 영웅들은 정의감과 의협심이 뛰어나니 빌런들을 상대하기엔 적격이었을 거다.
산을 조금 내려가자,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아, 끝나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백묵님은 지금 해외에 계서서 저희가 대신 왔습니다."
백묵의 부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세아가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보석은 확인했습니다. 나머지 분들도 목숨은 붙어 있네요. 부상자들은 저희가 바로 병원으로 데려가겠습니다."
그들에게 부상자와 알드리아의 보석을 넘겨줬다. 그것으로 이번 공략은 일단락 되었다.
부하들이 사라지는 걸 확인한 뒤, 남아있던 진세아가 내 앞으로 오더니 뭔가를 내밀었다.
"이거 오빠가 가져요."
나랑 본지 얼마나 됐다고 오빠래. 쓸데없이 붙임성 좋네.
녀석이 내민 건 녹색의 보관함이었다. 열쇠를 넣어 열 수 있게 되어 있는 형태.
"가는 길에 재밌어서 이것저것 훔쳐봤더니 나왔어요. 덕분에 내 스킬 쓰는 법을 알았기도 하구, 솔직히 보스도 오빠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으니까요······."
그래, 준다니 고맙게 받아야지.
터억.
바로 보관함을 쥐었는데, 진세아가 손에서 힘을 안 푼다. 녀석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근데요, 어떻게 알았어요? 나도 모르는 걸."
나는 힘을 쥐어서 보관함을 가져왔다. 진세아가 살짝 휘청였다.
"아앗! ······그거 줬으니까 대답해줘요!"
그러더니 날 노려본다.
이 세상에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게 있는 법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고. 진세아에게는 이 정도 설명이면 충분하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뒤를 돌아 산 밑으로 발을 내딛었다.
"앞으로 착하게 살면 알려준다."
짧은 만남으론 왜 진세아가 환세의 도둑이 되었는지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세계가 멀쩡하다면 녀석도 멀쩡하게 살지 않을까 싶다.
적당히 뒤로 손을 흔들어주며 산을 내려왔다. 멀리서 녀석의 짜증 가득한 외침이 들렸다.
"지금도 착하거든요!"
* * *
공략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후우······."
넓지도 않은 단칸방이지만 집에 오니 마음이 놓인다.
큰 부상은 없었지만, 긴장감 때문인가. 도착하자마자 퍼질러져서 잤다.
『 자연 회복 스킬이 대량의 경험치를 얻습니다. 』
『 자연 회복 Lv.10 [ 75% ] 』
"뭐야, 몇시야."
스마트폰을 보니 1시간밖에 안지났다.
'개운하구만.'
정신력 스킬이 높아진 것도 있고해서 회복이 진짜 빠르다.
'자연 회복도 곧 있으면 11레벨이 되겠네.'
자연회복은 꾸준히 성장 중이었다. 딱히 신경쓰지 않아도 저절로 경험치가 쌓이는 게 좋다.
'그러면 이제 해야 할 일은······.'
나는 퀘스트창을 열었다.
『 < D등급 > 한계 돌파 퀘스트 』
- 목표 : 마기의 원천 회수 ( 1 / 3 )
- 클리어 보상 : 레벨당 능력치 증가량 1.3배, 지정 스킬 최대 레벨 2증가, 인과역전 상점 NEW 카테고리 개방, 특성 무재조정 신(新) 특수효과 개방
'나머지 마기의 원천을 회수 해야겠지.'
이제 두 개 남았다. 마기를 퍼뜨리기 위한 마족들의 계획을 막기 위해선 반드시 찾아야했다.
'대한민국만이라도 청정 국가로 만들 수 있으면 충분하다.'
그걸 기반으로 차례차례 다른 나라에 도움을 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보상도 미쳤으니까 그냥 넘어갈 순 없지.'
문제가 있다면 내가 다른 두 개의 마기의 원천이 언제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거다.
대강은 알고 있지만 말그대로 대강이다.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이름이나 던전의 특징 정도.
주먹구구식으로 찾아다녀서는 끝이 없다. 내가 너무 눈에 띄기도 하고.
'백묵의 역할이 중요하겠어.'
이미 백묵에게 그 정보를 알려줬으니 남은 건 기다리는 것 뿐이다.
'당장은 저녁 메뉴나 먹으면서 정보수집이나 해야겠다.'
배달 어플로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켰다. 이제 이 정도 사먹을 여유는 생겼다.
백묵에게서 마정석을 판 돈과, 게이트를 공략한 대가까지 받을 걸 생각하면 이 정도 소비는 괜찮다.
금방 배달이 왔다.
나는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며 인터넷 기사를 살폈다.
던전 공략이 반나절에 끝나서 딱히 새로운 소식은 없는 줄 알았는데······.
[ 수호자의 검 길드 '신태양' 화려한 데뷔전 ]
[ 화제의 신입 헌터 신태양 그는 누구? ]
[ '괴물 신입' 수호 길드의 뉴페이스 ]
사이트를 온통 신태양의 이름이 도배하고 있었다. 기사에 링크 되어 있는 동영상을 클릭하니 게이트 내부에서 찍은 영상이 보였다.
신태양이 검을 쥔 채 서 있다. 그의 얼굴로 클로즈업 되어 있던 화면이 전환되며 일대를 비추자 그를 노리는 수십 마리의 멧돼지 마수들이 보였다.
'일부러 몰아주려고 모아 온 건가.'
말 그대로 신태양에게 몰아주기 위한 게이트 공략이었다. 밥 먹으면서 보기에 딱 좋은 영상이었다.
흥분한 마수들이 신태양에게 달려들기 일보직전.
무수한 섬광이 멧돼지들 사이에서 솟아 올랐다.
마치 수천 송이의 벚꽃이 일제히 개화하는 듯 하다.
멧돼지들이 견디기엔 가혹하면서도 아름다운 공격이었다. 마수들은 순식간에 도륙되더니 넝마짝이 되어 날아갔다.
'······.'
나도 넋을 놓고 볼 정도였다.
'이 놈은 왜 나한테 들러붙는거야.'
오히려 내가 스승으로 모셔야 할 판인데.
마지막으로 신태양의 얼굴이 다시 나오면서 영상은 끝이 났다. 댓글이 난리다.
ㄴ 와, 미친 개존잘이다. 오늘부터 신태양 팬합니다
특히 이 댓글에 좋아요가 엄청 많다. 나는 싫어요를 눌렀다. 나머지 댓글도 반응이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ㄴ 이 정도는 돼야 헌터를 하는구나. 진짜 말이 안 나오네······.
ㄴ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게 C급헌터 수준? 수호 길드 영입 폼 미쳤네 ㅋㅋㅋ
ㄴ 수호 길드 감 다 살았네. 이런 애를 어디서 데려왔냐
내 일자베기를 보고 나서 기가 죽어서 돌아가길래 괜찮나 싶었는데 잘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신태양이 이대로 수호자 길드의 지원을 받아 강해지면 마족과 싸울 강한 영웅이 하나 느는 거니까.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전화가 울렸다.
- 신태양
"이런."
동영상을 넘기려는 타이밍에 전화가 와서 실수로 받아버렸다. 전화 번호를 교환했던 게 실수였다.
스마트폰 너머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 스승님! 혹시 제 동영상 보셨나요? 반응이 장난 아니에요. 지금 실시간 인기 동영상 1위에요, 1위! 전부 스승님 덕분이에요!
내가 뭐했는데.
"어, 그래. 앞으로도 열심히 하고."
- 응원의 말씀까지 해주시다니! 크윽, 감동했습니다. 제 기사 링크로 보내 드릴테니까 부디 봐주세요! 아, 그리고 스승님이 말씀 하셨던대로 죽어라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난 걱정을 한 적이 없다.
- 훈련 시간이 돼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알고보니 배울 게 엄청나게 많더라구요. 검술은 그렇다쳐도 지식적인 부분은 제가 부족하니까요.
"그래, 바쁘면 빨리 끊어라."
-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다음에는 전화는 받지 말아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 화면이 사라지자, 다시 동영상 사이트로 화면이 바뀌었다. 영상은 신태양의 얼굴이 대문짝하게 박혀 있는 장면에서 멈춰 있었다.
"······."
나는 곧바로 댓글을 달았다.
ㄴ 말이 너무 많음.
* * *
'그러고보니 그게 있었지.'
식사를 끝마치고 나니, 아까 진세아에게 받았던 상자가 떠올랐다.
인벤토리에서 상자를 꺼내 정보를 확인했다.
『 아이템 설명 』
- 이름 : 알 수 없는 보관함 (잠김)
- 등급 : C+
- 설명 : 잠금 해제시 무작위 아이템을 획득합니다.
'역시 랜덤 박스였네.'
마침 나는 이걸 열기 위한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 마정석이 박힌 열쇠(C) 』
재물 획득의 물약을 마시고, 윤정수의 사무소에서 얻은 물건이었다. 열쇠만 천 만원이나 하는 물건인지라 개봉을 할지 잠시 망설여졌다.
'고민할 게 뭐 있어, 직접 까야지.'
운이 좋다면 그 이상의 이득을 얻을 수도 있다.
'행운 스킬도 있으니까.'
아직 1레벨이기는 하지만 이게 있고 없고의 차이는 엄청나다고 들었다. 결정했으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열쇠를 상자의 구멍에 끼워 맞췄다. 그대로 돌렸다.
철컥
무언가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며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슬쩍 열린 상자 위로 희미한 붉은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미친, 붉은 빛이면······. 유니크잖아.'
『 스킬 '행운 Lv.1'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해당 스킬이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 스킬 '행운 Lv.2'를 획득합니다. 』
덩달아 행운의 스킬 레벨도 한 단계 올라갔다.
C급 상자에서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이 나올 확률은 그야말로 천운. 뭐가 나오든 엄청난 이득이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상자를 완전히 열어 젖히자 그 내용물이 드러났다.
자그마한 병에 담긴 빨간 액체. 그 양은 1ml 정도로 아주 적었다.
처음에는 포션인가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 아이템 설명 』
- 이름 : 유니콘의 붉은 피
- 등급 : 유니크
- 분류 : 소모품
- 효과 : 사용 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 설명 : 환수의 피에는 신비한 힘이 숨어 있다는 전설이 있다.
아이템의 이름을 확인하던 내 눈이 점점 커졌다. 아까 떠올랐던 행운 메시지도 다시 살펴봤다.
'정말로 이게 나왔다고?'
유니콘의 피는 정말 희귀한지라 엄청난 고가에 거래된다. 이만한 양으로도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여기 쓰여 있는 설명.
- 사용 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만 보고 사람들은 유니콘의 피에 엄청나게 강력한 치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정도로 굉장한 효과가 있다.
'틀린 사용법은 아니지만.'
진짜 활용법은 따로 있었다.
나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방어의 반지를 빼냈다. 솔로 플레이로 던전을 공략했을 때 얻은 아이템이었다.
'한때 군단장이 사용했다던걸로 추측되는 성장형 아이템.'
이 반지는 성장형 아이템이다.
다만 봉인된 탓에 원래의 힘을 내진 못하고 있었다. 근데 이제는 아니다. 아니게 될 거다.
'그 본래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있게 하는 아이템이 내 손에 있으니까.'
그게 바로 유니콘의 피였다.
작은 병의 마개를 따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실수로 흘리면 대참사다.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반지의 위로 유니콘의 피를 한방울 떨어뜨렸다.
또옥.
그 한방울이 반지에 닿는 순간.
어슴푸레한 빛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 대상 아이템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
『 유니크 아이템 '방어의 반지'의 봉인이 해제 됩니다. 』
'성공이다.'
『 특수 유니크 아이템 '무패의 반지(성장형)'를 획득하셨습니다. 』
반지를 들어 올리는 내 입가로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28화 성장형 아이템(1)
길드 은빛의 날개가 게이트 공략을 마친 다음날.
"푸하하하! 아, 배 아파. 서현아 언니 좀 살려줘······."
윤지은이 배를 붙잡고 소파를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아, 언니! 그만 좀 웃어."
협회 소속 헌터인 윤서현이 이지한과 게이트에서 있었던 말하고 난 뒤였다. 성장의 마족을 쓰러뜨렸을 때의 일이었다.
게이트에 들어가 있느라 사정을 몰랐던 윤지은에겐 이것보다 재밌는 이야긴 없었다.
"어쨌든 정리하자면 까였다는 거잖아.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김갑환?"
"아니, 그건 가명이었고. 이지한이라니까."
윤지은이 눈가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미소지었다.
"그래 이지한. 축하해 서현아. 좋은 동료를 얻었네. 얼마나 좋아. 그래도 협회 실적은 쌓았잖아."
"그만 놀려. 실적 쌓아서 뭐할건데······."
언니의 이죽거림에 윤서현은 테이블에 있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곤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으으······. 어떻게 관심이 조금도 없을 수가 있어. 번호 달라고······. 분명히 그쪽이 먼저 그랬는데······."
"내가 너 착각한 걸 줄 알았다. 그래도 변칙 게이트에선 별 일 없었다니 다행이네."
"별 일이 없······었지. 응."
사실은 게이트에서 죽을 뻔했다. 거기까지 얘기했다간 언니의 비웃음이 매서운 잔소리로 바뀔 것 같아 윤서현은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근데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언니도 그 사람이 좀 궁금해진다. 날 아는 사람이라고 했었지. 길드 관계자래?"
"그건 몰라."
"그 사람이 밥 사기로 했다며, 전화라도 해봐. 언니도 얼굴이나 한 번 보게."
윤서현이 윤지은을 찌릿 째려봤다.
"언니가 왜?"
"또, 또 인상쓴다. 왜긴 네 말 들어보니까 꽤 유능한 사람인 것 같아서 그러지."
윤지은의 길드 은빛의 날개가 S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일주일 동안 바깥에선 꽤 여러 일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주목할만한 건 '수호자의 검' 길드의 신입 영입.
'이름이 신태양이라고 그랬지.'
그의 존재는 인터넷 상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고 있었다. 헌터계의 판도를 뒤흔들 슈퍼 루키 신태양 따위의 제목으로 계속해서 기사가 양산되고 있었다.
'C급 헌터가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가 아니었어.'
영상을 같이 보던 은빛의 날개 길드원들의 경악스런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만약 그가 수호 길드의 두둑한 지원을 받아 S급을 달성하게 된다면? 수호 길드의 행보에 날개가 달린 듯 거침이 없어질 거다.
가뜩이나 수호자의 검이 압도적인 1위라는 소문이 자자한데 이제서야 2위가 된 은빛의 날개에겐 가혹한 일이었다.
'진짜로 은빛의 날개가 수호자의 검을 따라잡는 게 불가능해질지도 몰라.'
조금 과한 생각일지도 몰랐으나, 은빛의 날개도 미리 대비해야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인재라면 확인해야 했다.
은빛의 날개의 부마스터로써.
윤지은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녀는 동생인 윤서현에게 물었다.
"일주일 뒤에 은빛의 날개에서 헌터 선발 시험 여는 거 알고 있지?"
"응? 게이트 공략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크게 하는 건 아니거든, 거기에 그 사람 추천해볼까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동생을 구해 준 은인이었다.
그리고 F급 게이트에 있었다는 이름 있는 고블린 쿠훌렌. 동생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보고서에도 이름을 가진 몬스터가 출현한다는 내용이 있었어······.'
그러한 마수들이 가진 능력은 그야말로 예측불허.
공략을 마치고 나온 윤지은이 직접 보고 받은 내용이었다.
그런 이름 있는 마수를 몰아낸 게 이지한이라는 남자였다. 그러니 더더욱 직접 만나서 확인해 볼 가치가 있었다.
"서현아, 빨리 전화 해봐. 밥은 언니가 산다고 해."
"싫어, 죽어도 안 걸거야."
"으음. 그래?"
윤지은은 소파에서 일어나 윤서현의 옆에 걸터 앉았다.
딸칵, 치익!
윤지은이 테이블에 놓여진 맥주캔을 땄다.
"그래, 뭐가 중요해. 일단 마시자! 제대로 까인 윤서현을 위하여!"
"까이긴 누가 까여!"
유난히 기분 좋은 날이기도 했다. 은빛의 날개 길드가 무사히 S급 게이트를 공략하며 2위를 달성하기도 했고.
캉!
윤지은이 캔을 부딪혔다. 윤서현이 그에 맞춰 소리쳤다.
"절대로, 절대로! 먼저 연락 안할거야!"
* * *
- 바ㅂ왜 아넘그은 너뭏ㄹ. [ 발신자 윤서현 ]
"뭐야."
자고 일어나니 뜬금 없이 윤서현 헌터한테서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해석해보려다가 포기했다. 뭐라고 쓴 거야. 밥?
'그때 일이 잘 처리 됐는지 물어보긴 해야 되는데.'
무소식의 희소식이라고 잘 됐으니까 날 안찾는 거겠다 싶지만, 슬슬 밥을 사긴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였다.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백묵
멸망한 세계의 정보상. 바로 그 백묵한테서 온 전화였다. 해외에 갔다더니 벌써 귀국했나. 전화를 받자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제 공략이 끝나고 잘 들어가셨나요? 늦게 연락드려서 죄송하네요. 진세아양한테서 들었는데 엄청난 활약을 하셨다면서요.
"예, 뭐."
엄청난 활약이라.
그에겐 내가 D급 헌터라는 정보가 각인 되어 있을 거다. 어제 공략한 던전은 D급 헌터밖에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 겸손해 하실 거 없어요. 이번 공략, 저는 정말로 감명 받았거든요. D급을 뛰어 넘는 엄청난 능력. 설마 그 정도일 줄은 저도 몰랐어요.
그렇게 본다면 충분히 인상적인 활약이긴 했다.
잠시 숨을 삼킨 백묵이 씁쓸한 척 말했다.
- 그 활약의 이면에는 던전의 난이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제 잘못도 있어서요. 솔직히 가슴 한구석이 아리네요.
그의 말에 진심은 없어 보인다.
향상된 인지 스킬 아래 백묵의 연기 톤이 느껴졌다.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이란 인상을 심어주려는 듯하다.
'뭐, 백묵은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내 존재가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한 이용하려 들겠지. 뭐, 그거면 충분했다.
"같이 던전에 들어갔던 박인성과 이예준은 어떻게 됐습니까?"
- 아, 그 둘은······. 유감스럽게도 헌터 생활을 다시 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듣던 중 좋은 소식이다.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 대개 정신적인 문제죠. 예준군은 아예 스킬을 못 쓴다고 하더라구요.
게이트 공략에 실패하거나, 죽을 뻔한 헌터들이 흔히 겪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였다. 헌터는 목숨만 붙어 있으면 죽지는 않으니까.
"둘이 멀쩡해지면 꼭 알려주시죠."
- 꽤나 정이 드셨나보네요?
"예, 뭐."
정은 무슨.
그 둘이 사고치기 전에 막아야 해서 그렇다. 그래도 꼴을 보아하니 당분간은 냅둬도 되겠다.
- 이야기가 잠시 다른 길로 샜네요. 지난번에 마정석을 판 돈이랑 이번 던전 공략 비용. 둘 다 방금 보냈습니다.
그 말에 스마트폰의 앱을 확인해보니 정말로 돈이 들어 와 있었다.
계좌 잔액 : 121,093,040 원
'드디어.'
헌터로써 많은 돈을 버는 순간이었다. 자그마치 1억 2천만원이다. 던전 하나를 나 혼자서 독식하고 이만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 던전이 특이한 거긴했지만.'
일반적으로 하위 등급의 던전을 돌아서 한 번에 이만한 금액을 챙기기는 쉽지 않다. 혼자서 던전을 휩쓸면서 독식한다면 모를까.
- 마정석을 판매한 금액이 1억 천이고 나머지 천만원이 이번 던전 공략에 대한 돈이에요. 저희쪽 수수료는 이미 뗐고요, 세금도 처리했습니다.
"좋네요."
-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셨던 정보말인데요.
지난번 만남 때 마기의 원천에 대한 단서나, 중요한 인물들을 단편적으로 적어둔 종이를 백묵에게 줬었다.
사실상 던전 공략이 그에 대한 대가였다.
- 거기 쓰여 있는 게 우선 순위 맞죠?
"맞습니다."
- 그것도 조만간 좋은 소식 들려드릴 것 같네요. 아직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엔 좀 이르지만요.
일이 잘 진행 되고 있단 소리였다. 정보 조사와 관련해서는 백묵에게 맡기는 게 낫다.
- 이지한씨 만나고 나서부터 뭔가 일이 잘 풀리네요. 더 거래할 아이템이나 부산물이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럼 이만.
전화가 끊겼다.
'드디어 목돈이 생겼다.'
나는 계좌에 찍힌 잔액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자그마치 1억 2천만원이다.
'흠······.'
근데 이걸로 아이템도 사고, 투자도 하려고하니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헌터용 아이템이 어지간히 비싸야지.'
투자처는 이미 정해두었다. 오늘은 그곳에 들를 거였다.
'그 전에······.'
나는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다시 확인했다.
어제 유니콘의 피를 뿌려 봉인을 해제 했던 방어의 반지였다. 그것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무패의 반지로 이름이 바뀌었다.
『 아이템 설명 』
- 이름 : 무패의 반지(성장형)
- 등급 : 유니크
- 레벨 : 0 / 100 ( 0% )
- 효과 : 방어력 10 ( + Lv당 0.15 )
'다시 봐도 미쳤어.'
반지는 레벨 100까지 달성할 수 있다. 달성하면 방어력이 25가 될 거다. 반지 하나를 꼈는데 방어력이 25다.
레어급 아이템을 전신에 둘둘 둘러야 얻을 수 있는 방어력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게 좋은거지.'
이러한 반지는 대개 레벨 100에 도달하면 특수 기능이 개방 된다.
'아이템 등급 자체를 올릴 수도 있을 거야.'
솔직히 그 방법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군단장이 끼고 다녔을 정도면 겨우 유니크 급에서 멈추는 일은 없겠지.
'백묵에게 말해서 게이트를 하나 빌려볼까.'
돈도 생겼겠다. 일단은 아이템 구매가 먼저였다. 솔로 플레이 전에 다시 한 번 제대로 정비를 끝내야 한다. 나는 반지를 단단히 끼고서 현관을 나섰다.
* * *
"감사합니다."
터억.
차문을 닫자, 택시가 매연을 내뿜으며 떠나갔다.
'좋군.'
버스타다 택시타니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이번 기회에 차를 살까 생각했는데, 좀 더 여유가 생기면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가 온 곳은 경기도 인근의 장인 거리.
직접 스킬로 망치를 두드리고 담금질하는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진다. 현대에 걸맞지 않은 풍경이다.
가게 바깥으로 각종 무구를 전시해 놓은 곳도 있었다.
'오랜만이야.'
몇 번 심부름을 하러 온 적은 있었지만 내가 아이템을 사러 온 건 이번이 처음.
나에게 맞는 방어구를 얻기 위해선 주문 제작이 필수다. 나는 장인들이 만들어 낸 아이템들을 살피며 거리를 나아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장인들이 몇 보인다.
'장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장인도 헌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각성자다. 직접 몸을 부딪혀가며 전투를 하는 헌터와 달리 아이템을 제작하는 것으로 간접적인 지원을 한다는 것만 달랐다.
관련 스킬만 습득한다면 평생 직업으로 나쁘지 않다. 그들이 창출해 내는 가치는 전문직 뺨치는 수준이니까.
'뭐, 스킬을 배울 수 있다면 말이지만.'
전수 되는 스킬에 관해선 특히 민감한 분야이기도 했다. 이들 장인은 함부로 타인에게 자신의 스킬을 전수하지 않는다.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나서야 배울 수 있다나.
'좋은 건 많은데, 살 돈이 부족하네.'
1억 2천으로는 우습게도 레어 아이템 풀세트를 맞추기도 어렵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식을 쓸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그 사람을 찾아야하는데······.
혹시나 놓칠세라 좌우를 살피며 나아가는데 왠지 앞쪽이 시끄러웠다.
"이 새끼야! 돈 갚으라고! 말로하면 못 알아 듣지?"
"으아악! 갚는다니까요! 무조건!"
"지랄하고 있네, 그 개소리에 몇 번을 넘어갔는 줄 알아?"
덩치 큰 남자 셋이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뒤지게 패고 있었다.
'저런.'
주변의 장인들도 전부 나서지 않고 보고만 있는 걸로 봐서는 무슨 이유가 있어보였다.
맞고 있는 사람도 각성자 같았다.
'복장을 보아하니 이 거리의 장인인가본데.'
그렇게 가고 있을 때였다.
내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쳐맞는 녀석의 얼굴이 묘하게 익숙했다.
나는 뒤로 후진해서 다시 그 얼굴을 확인했다.
"으아악! 진짜로! 진짜 갚을게요! 제발!"
젠장.
하필이면 내가 찾던 게 바로 이 놈이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쓰러진 남자의 얼굴을 지긋이 살펴봤다. 남자를 두들겨 패던 덩치 하나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구경났어? 괜히 참견하지 말고 가던길 가쇼."
나야 모른 척 지나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분명했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눈썹을 확인하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김건'
멸망한 세계,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에는 기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존재했다.
가령 이전에 만났던 진세아가 도둑질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도둑놈이었다면.
바닥에 쓰러진 이 남자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재료로 사용해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미친놈이었다.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서슴치 않는 놈.
진짜로 자신의 뼈를 갈아 넣고, 코딱지만한 재료를 얻으려 마족 진영에 뛰어들고, 동료를 던전에 유기하고······. 그런 소문이 끊이질 않던 미친 인간.
'한마디로 또라이.'
나는 덩치의 어깨를 잡았다. 어깨에서 꽤 힘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 일반인은 아니다. 그래도 상관 없다.
이 남자를 구해야했다.
"아무리 그래도 대낮에 길거리에서 사람을 패면 안되죠."
김건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성장형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 인간이니까.
29화 성장형 아이템(2)
어깨를 붙잡힌 덩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여기 이 새끼랑 아는 사이요?"
"그건 아닌데, 그 사람 손님이 될 거라서."
그 남자는 세계적으로도 몇 없는 성장형 아이템의 제작자거든.
남자를 둘러싸고 있던 다른 깡패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모였다. 신나게 쳐맞던 김건의 눈동자에도 얼핏 안도감이 스쳤다.
"근데 이건 좀 치우고 말하지."
덩치의 시선이 그의 어깨에 올려진 내 손을 향했다. 나는 일부러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이거 말로 하면 못 알아 듣나본데."
미간을 찌푸린 덩치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가 손아귀에 힘을 넣었다.
꽈악.
상당한 수준의 완력이 느껴졌다.
'······D등급 상위 쯤 되나.'
윤정수에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 있던 양아치들하고는 달랐다. 그들과 이 사람들을 비교하는 건 미안할 정도다. 그 녀석들은 제대로 된 스킬도 없는 D급 최하위였으니까.
꽈악.
녀석이 힘을 주는 것에 맞춰 나도 손아귀에 힘을 넣었다. 이내 남자의 얼굴이 구겨지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어윽!"
꼴사나운 소리와 함께 덩치는 바닥으로 주저 앉았다.
20레벨부터 상승한 내 능력치는 일반 헌터보다 1.2배 가량 높다. 거기에 더해 내 근력 스킬은 최대 레벨 10을 초과한 11이다.
어깨를 놓아주자 주저 앉은 덩치가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봤다.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이었다.
"주, 주창 형님!"
"괜찮으십니까?"
주창이란 사내가 쓰러지자 주위에 서 있던 녀석들이 주춤했다. 아마 이 남자가 제일 강한 사람이었나보다.
"크윽, 일단 물러나자. 얘들아."
부축을 받아 일어난 주창은 삼류 악당 같은 소리를 했다.
좋은 판단이었다. 기본 능력치부터가 차이 난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
주창은 바닥에 쓰러진 김건에게 삿대질을 하며 그대로 멀어져 갔다.
"다시 올 거니까 기다려라, 김건! 큰 형님한테 니 새낀 죽었어."
내 눈은 못 마주치고 김건한테만 딴소리다. 그들이 멀어진 걸 확인하고서, 나는 김건에게 다가갔다.
김건이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가, 감사합니다. 진짜 은인이시네요. 헤헤······."
나는 김건이 아니라 주위 상인들을 살폈다. 상황이 정리 된 걸로 보이자, 그들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본데.'
또라이 아이템 제작자 김건.
멸망 후에 유명한 양반이고, 이 사람과는 이야기를 꽤 자세히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래도 자세한 과거까지는 모른다.
"그으······. 제 손님으로 오셨다고 하셨죠. 우선 들어가서 얘기하실까요?"
김건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자기 가게 앞에서 두드려 맞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를 따라 가게 내부로 들어갔다.
철물점인지, 아이템 제작소인지 구분이 안간다. 가득 쌓인 잡동사니 사이로 모루나 망치 같은 대장장이의 도구가 언뜻 보였다.
"정신이 좀 없죠?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시면 커피라도 타올게요."
검성 신태양네 검도장 사무실도 이렇게 더러웠던 기억이 난다. 특출난 놈들은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건가.
"네, 주시죠."
많이 두드려 맞기는 했어도 각성자라 그런지 괜찮아보인다. 그리고 자주 맞았으면 맷집 스킬 같은 거라도 얻었겠네.
'내가 아예 스킬을 전수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성장형 아이템을 제작하는 건 김건의 특성탓이다. 특성만큼은 가져올 수 없다.
그냥 아이템을 제작하는 기술만이라도 내가 배워두면 좋겠지만, 어지간한 금액으론 안 될 거다.
'장인이니, 이 바닥 돌아가는 건 꿰고 있을테고.'
"여기, 커피 받으세요."
김건이 조심스럽게 종이잔에 담긴 믹스커피를 내려놨다. 살짝 홀짝이니 달콤씁쓸한 향이 입 안에 퍼진다. 그 맛에 깜짝 놀라 종이잔을 바라봤다.
'뭐야, 믹스 커피는 또 왜 이렇게 잘 타.'
물 계량을 잘한 건가? 그냥 믹스 커피인데 엄청 맛있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이 양반도 멸망 후의 모습하고는 이미지가 딴판이구만.'
그의 행동에서 세심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성격이 느껴진다.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똘끼가 문제인거지만.
나는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 맞고 계셨던 겁니까?"
"아아, 별 거 아니에요."
별 거 아닌 것 치고는 오지게 쳐맞던데.
김건은 파마 머리를 쓱쓱 문지르더니 말을 이었다.
"여기선 흔한 일이에요. 정변 길드라고, 박종필이란 사람이 차린 길드인데 장인들 상대로 자금을 빌려주거든요. 여기 사람들 대부분이 그 길드의 도움을 받았을 거에요."
아, 그래서 쳐다보기만하고 나서서 돕는 사람이 없었던거구만. 싸한 분위기의 이유를 알았다.
"거기까진 좋은데, 그걸 빌미로 터무니없는 단가로 아이템을 뜯어가는 일이 빈번해서 말이에요."
흔히 말하는 악덕 길드였다. 근데 무슨 깡패도 아니고 사람을 그렇게 때리냐. 그에 대한 답은 놀라웠다.
"제가 그 사람들이 속한 길드에 아이템을 납품하기로 했는데 그게 세 달째 밀려서 화난 거겠죠. 전 괜찮아요. 아직 그렇게 맞은지는 한 달 밖에 안됐거든요."
"······."
퍽이나 괜찮겠다.
성격은 순해도 심지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그가 미래에 기인으로 변모하는데에 정변 길드도 지분을 어느 정도는 차지한다고 봐야겠지.
하여튼 김건은 아직 미치지 않았다.
"그래서 저한테는 무슨 일로 오신거죠?"
"하나밖에 더 있겠습니까. 아이템 제작을 의뢰하려고요."
"아······."
그는 입술을 깨물더니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말했다시피 정변 길드 때문에 다른 의뢰도 맡기가 그렇네요. 거기에 아이템을 납품해주기 전까지는 다른 일을 하기가······."
"납품을 못하고 계시는 이유가 뭐죠?"
악덕 길드에게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 같은 거라면 내가 할 말은 없다. 부당한 일에 맞서 저항하는 걸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왠지 그게 아닐 거란 느낌이 든다.
김건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재료가 쓰레기라서요. 좋은 재료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만들겠어요."
이럴 줄 알았다.
미치지 않았단 말은 취소다.
* * *
멸망한 세계에서 기인이라 불린 사람들.
우리나라에선 다 합쳐봐야 열 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기인들은 그 종류도 가지각색이었다.
도둑, 사기꾼, 카사노바, 광인 등등······.
'그 중에서도 김건은 또라이라고 불렸지.'
그는 아이템에 대한 집착이 광적으로 심했다. 아이템을 제작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망설이지 않았다.
- 최고의 장비를, 아이템을 계속해서 만들어야 해······.
김건은 반쯤 미친 사람처럼 중얼 거리며 더 좋은 무구를 빚어내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뭐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쨌든 제대로 된 재료가 없어서 장비를 못 만들겠다는 거죠."
내 말에 김건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놈들한테서 빌린 돈은 이미 다썼어요. 아이템 대금을 받긴 했지만, 그런 돈으론 괜찮은 재료를 못 사거든요. 그래서 아무것도 만들 수가 없어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아뇨,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재료가 있어야 좋은 장비가 나오는 거니까요. "
또라이니까 그럴 수 있지.
근데 내 말을 들은 김건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 알아봐주시는 거군요."
소매로 눈물을 슥슥 닦더니 말한다.
"절 구해주신 것만해도 감사한데, 제 생각을 다른 사람한테 이해 받을 줄은 몰랐어요······."
엄청 감동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쪽 창고 좀 봐도 될까요?"
"제 창고요? 안 될거야 없지만 쓸모 있는 재료는 없어요."
김건이 말하는 쓸모 있는 재료의 기준은 모르겠지만, 그의 창고에는 분명히 쓸만한 게 있을 터였다.
"일단 한 번 보기나 합시다."
김건은 의아해 하면서도 나를 창고로 안내했다. 건물 뒤편에 있는 전용 창고였다. 큰 문을 열어 젖히자 내부가 드러났다.
의외로 깔끔했다. 가게는 그렇게 개판 쳐놓고, 창고는 또 멀쩡하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 물품들을 쓱 훑어보았다.
'없네. 왜 없지.'
미래의 김건은 이렇게 말했었다.
- 그때의 나는 고급스런 재료를 쓰는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어. 그런데 그 재료는 진작에 내 손에 있었어······. 낡아빠진 망치. 녀석은 빛이 닿지 않는 창고의 한구석에서 줄곧 잠들어 있었던거야. 나를 기다리면서.
그게 피난민을 패고 보석을 빼앗은 것에 대한 변명이었다.
-그걸 다루는 도구 그 자체가 재료가 되는거야. 중요한 건 자신의 손 안에 있는 법······. 이런 보석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어······.
명언 같은 걸 중얼거리면서 영웅에게 연행 되어 갔다. 그냥 또라이였다.
"혹시 여기에 낡은 망치 거 있지 않았습니까?"
"예? 그걸 어떻게······. 있기야 있었어요."
"어디갔습니까?"
"지금은 뺏겼어요. 그 박종필이라는 사람한테요."
이거 일이 귀찮게 됐다. 망치만 찾아서 손에 쥐어주려고 했는데.
"빚을 갚아야 받아올 수 있는데, 대단한 물건은 아니라 괜찮아요."
댁은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수. 언제 마기의 원천의 위치를 찾을지 모르는 지금 아이템은 빨리빨리 맞춰야 했다.
"빚이 얼마에요?"
"3억 정도······?"
"······."
진작에 아이템 만들어서 팔았으면 갚았을 것 같은데. 이건 내 전재산으로도 못 갚는다.
망치 찾아주고, 적당히 투자만 해주고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고심하고 있었던 그때였다.
"어이, 김건!"
뒤쪽에서 우렁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양복을 걸친 다섯 명의 덩치들이 우리를 에워싸듯 다가왔다.
"여기 있으면 모를 줄 알았어? 이 친구야. 아이템은 대체 언제 줄거야."
그 중 가장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김건에게 다가와선 어깨 동무를 했다. 김건이 기겁하며 중얼거렸다.
"바, 박종필······!"
이 남자가 박종필인가. 그 뒤로 아까 봤던 양아치 무리들도 있었다. 그 둘 중 하나가 꼰지르듯 말했다.
"저 사람입니다. 아까 말했던 사람이."
박종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를 훑어보고는 피식 웃는다.
"우리 길드원들이 그쪽한테 신세졌다고 하던데······. 당신 뭔데 남의 영업장 와서 행패야?"
으름장을 놓던 박종필이 손을 휘휘 저었다.
"괜히 우리랑 엮여서 인생 꼬이기 싫으면 적당히 하고 가십쇼. 아니지, 장인 필요하면 내가 소개시켜 줄게. 얘말고 다른 애로. 김건이는 지금부터 우리 길드 납품할 아이템 만들어야하니까."
"싫다면 어쩔겁니까."
그가 뚜벅뚜벅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보다 머리가 하나는 컸다.
그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뭘 믿고 그러는진 모르겠는데, 한 번 해보자는 거요?"
한 번 해도 나쁘지 않지만.
나는 박종필이 끼고 있는 배지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독특한 문양이기에 기억 속에서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박종필이 운영하는 정변 길드가 백묵의 산하 길드인 것 같은데.'
정확히는 산하도 아니라, 호라이즌 길드에 줄을 대고 싶어 안달난 떨거지. 그런 자들이 저런 표식의 배지를 들고 다닌다고 들었다.
"잠시만요."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백묵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정도 용건은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 무슨 일인가요?
수화기 너머에서 백묵의 상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간단하게 상황과 용건을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박종필과 똘마니들은 나를 째려만 보고 있었다.
백묵이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 아, 그런 거라면 간단하죠. 앞으로도 자주 전화주세요.
전화는 그대로 끊어졌다.
어쩌다보니 내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박종필이 미간을 좁혔다. 팔을 걷으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그냥 넘어가려고 그랬는데 이거 안되겠구만. 얘들아. 이리 와라."
띠리링
그 순간이었다.
박종필의 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렸다.
"뭐야?"
언짢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아든 박종필. 이내 그의 눈이 커졌다.
"전화 받았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몇 마디가 웅얼웅얼 들려왔다. 박종필의 얼굴이 점차 새파래져갔다.
"예, 옙! 알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주머니에 꽂더니, 부하들에게로 다가갔다.
뻐억!
그리고선 부하 한 명의 얼굴을 갈겼다.
"이 새끼야! 상대를 보면서 까불어야지. 이 빌어먹을 새끼가, 누구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어?!"
영문도 모르고 맞는 부하들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씩씩거리며 부하를 패고 돌아온 박종필이 내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백묵님과 아시는 분이었으면 진작에 말씀하시지!"
30화 성장형 아이템(3)
백묵의 입김 한 번에 박종필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의 얼굴에서 험악한 표정은 쑥 사라지고,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피어났다.
"말씀하셨던 망치입니다."
그는 허리를 깎듯이 숙이며 두 손으로 망치를 내밀었다. 백묵과의 통화 이후에 그가 부랴부랴 부하들을 시켜 망치를 가져왔다.
"김건이 가지고 있던 것 중에 그나마 값이 나가 보이는 걸 담보물 형식으로 맡고 있었던 겁니다."
그 뒤로 땅에 일렬로 엎드린 부하들이 보인다.
'전화 한 통했을 뿐인데. 효과 좋네.'
이게 인맥의 힘인가. 멀리 돌아가야 할 길을 단숨에 건너온 기분이었다.
근데 이 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백묵하고 그렇게 대단한 사이는 아닌데.'
하여튼 힘들이지 않고 김건의 망치를 되찾았다. 나는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다. 내가 찾던 그게 맞다.
나는 색이 바랜 망치를 김건의 눈 앞으로 들어 올렸다.
"재료가 시원치 않아서 아이템을 못 만들겠다고 했었죠."
"네······."
"이걸 보면 마음이 달라지실 겁니다."
"글쎄요······. "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보면 알 거다.
인벤토리에 고히 모셔두었던 '유니콘의 피'를 꺼내들었다. 조그마한 유리병 안에 조금 줄어든 미량의 붉은 액체가 보였다. 반지의 봉인을 해제하는데 한 방울을 소모했었다.
'이번에 써도 몇 방울 남겠어.'
망치만 되찾아 준다고 끝날 거였다면 김건이 알아서 망치를 쥐고 아이템을 만들고 있었을 거다.
이 망치에 숨겨진 힘을 일깨워야했다.
또옥.
『 대상 아이템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
유니콘의 피를 한 방울 흘리자, 오래 되어 굳은 백갈색의 껍질이 망치에서 투두둑 떨어졌다. 그 안에서 광택을 머금은 검은 철제 망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공이다.'
『 유니크 아이템 '다이달로스 망치'를 획득하셨습니다. 』
어떤 아이템에는 현세의 역사나 신화가 깃들기도 한다. 이 아이템이 그런 경우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명장 다이달로스.'
그는 미궁 라비린토스를 만든 장인이다. 밀랍 날개를 매고서 너무 태양 가까이 올라간 탓에 죽은 이카루스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허억······."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김건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의 입이 천천히 벌려졌다.
그도 장인이니 보자마자 알았을 거다.
'미래의 본인이 자기 입으로 말했었을 정도로 중요한 장비니까, 당연히 끌리는 게 있겠지.'
어느새 김건이 얼굴을 망치 가까이 들이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손에 들어 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홀린 듯 손을 뻗어왔다.
"대체 이걸 어떻게 아시고······?"
"잠깐만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는 망치를 휙 뒤로 잡아뺐다.
"이 망치의 소유자는 김건씨였지만, 제가 아니었다면 창고에서 썩거나 박종필씨 길드의 소유물이 되었을 겁니다."
내 말에 정신을 차린 김건이 눈을 꿈뻑였다.
"그, 그거야 그렇죠."
"그리고 이 아이템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데에도 돈이 들었습니다. 유니콘의 피가 얼마나 하는지는 알고 계시죠?"
나는 유니콘의 피가 담긴 병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김건이 내게 매달렸다. 아직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뭐든지, 뭐든지 할테니까! 그 망치를 들게만 해주세요!"
김건은 반쯤 미친 사람처럼 나를 향해 소리쳤다. 원하는 것을 향한 집념과 똘끼가 장난이 아니다.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이템은 본래 자기꺼였다 우길 줄 알았는데. 뭐, 나야 좋다.
나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일단 계약서부터 작성하시죠."
나는 그 자리에서 노예, 아니 거래 계약서를 작성했다.
별 건 아니고 내가 원할 때 나를 우선적으로 아이템을 만들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걸로 박종필의 문제도 해결이 될 거다.
"감사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달려든 김건이 싸인을 휘갈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종필이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후드려 패도 말을 안듣던 놈이 저렇게 단박에······."
* * *
다이달로스의 망치를 쥔 김건이 모루 앞에 섰다. 망치를 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망치가 휘둘러지려는 찰나, 김건이 얼어붙은 듯 멈춰섰다.
"저기요······."
"또, 왜 뭐! 이 새끼야! 아이템 좀 그냥 만들어!"
박종필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니 새끼 때문에 우리 길드도 지금 공략 일정 미루고 있는 거 안 보여? 애써 얻은 게이트 소유권이 딴 놈들한테 넘어가게 생겼다고!"
김건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C급 마정석 하나는 있어야 뭘 만들겠는데요······. 큰 걸로요······."
"이 새끼 진짜 안 되겠네. 지금 C급 마정석을 어디서 구하냐? 그냥 있는 F급 섞어서 만들라니까."
각종 에너지의 원천인 동시에 마력 부여의 기초가 되는 마정석의 수요는 엄청나다.
'큰 거라면 보스급이겠지. 금방 구하긴 어렵겠는데.'
김건도 지지 않고 말했다.
"큰 게 없으면 안돼요. 큰 게 없으면······."
"가져다 줄게! 근데 아이템을 먼저 내놔! 니가 원하는 그 C급 게이트를 공략할 장비가 없어서 우리가 공략을 못하고 있는 거잖아. 이 미친 놈아!"
박종필이 소매를 걷어 붙이며 김건에게로 다가갔다.
근데 그 정도면 그냥 다른 장인한테 맡기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박종필에게 물었다.
"지금 C급 게이트를 가지고 있는 겁니까?"
"예? 아, 그렇죠. 원래 이번주에 공략 예정이었는데 저 놈 때문에 다 꼬였습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한탄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 놈이 아이템 하나는 기깔나게 만들거든요. 기왕이면 싼 값에 효율을 최대로 뽑아보려고 했더니 이 사단이 난겁니다."
패거리를 모아 사람을 후드려 팬 놈이 할 소리는 아니다. 김건은 또라이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괜찮은 기회였다.
"결국 C급 게이트를 공략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예? 아, 그렇죠. 각종 투자비용을 회수하려면 그렇습니다. 게이트 붕괴 조짐은 아직 없지만 다른 길드에 넘기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어쨌든 C급 게이트 하나를 잡아 놨다는 이야기다.
"그럼 내가 하죠. 용병 한 번 하겠습니다."
게이트 하나 잡아서 포인트도 모으고, 반지를 성장 시킬 계획이었다.
내 말에 박종필의 눈이 커졌다.
"예? 실례지만 헌터 등급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는 게 당연하다.
"······."
나는 대답 대신 백묵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 레벨은 40이지만, 등급은 D급인지라 박종필을 설득하긴 무리가 있으니까.
띠링
OK 라는 문자가 왔다.
동시에 박종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백묵이 아니었다. 그의 부하들 중 하나겠지.
전화가 끝나고, 사색이 된 박종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바로 가시죠."
* * *
드넓게 펼쳐진 논밭 위.
검은 게이트 하나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근처로 열 명의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여기입니다. 정말 바로 공략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박종필이 조금은 미심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지한이라고 했나.'
박종필은 백묵이 운영하는 호라이즌 길드에서 상당한 수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지역 장인 거리를 장악할 수 있던 것도 사실상 호라이즌 길드의 정보와 자금 덕이었다.
'정말로 이 남자가 C급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다고?'
최대한 이지한의 의도를 존중하라는 게 위쪽의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 C급 게이트 공략은 박종필에게도 큰 의미가 있었기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게이트 공략하려고 내가 얼마를 썼는데. 잘못되면 절대 안 된다고.'
그런데 어쩌겠어.
위쪽에서 까라니까 까야지.
박종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눈 앞의 남자 이지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충분합니다."
백묵님의 지인만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무시해 버렸을 건데. 하긴, 그 고집쟁이 김건이 망치를 들게 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게이트에서 있는 일은 바깥에 새어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합죠."
비위를 맞추며 대답은 했지만 속으론 비웃음이 났다.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 있으시길래 비밀로 하라는건지. 한 번 보기나 하자.'
박종필은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박종필은 C급 하위의 헌터였지만, 부하들은 전부 D급이었다.
그래서 아이템이라도 입혀 놓고 가려한건데. 김건 빌어먹을 개자식.
'그래, 뭐가 됐든 제발 적자만 면하게 해줘라······.'
기도하며 게이트 내부로 들어오자, 평원이 펼쳐졌다. 듬성듬성 굵은 나무가 있기는 했지만 넓은 초원을 가리진 못했다.
이지한은 뒤에 있는 부하들을 쓱 훑어보더니, 박종필을 가리켰다.
"그쪽만 따라오고, 나머지는 여기서 기다리시죠."
"지금 저희 둘이서 C급 게이트를 공략하자는 겁니까?"
기가 막힌 박종필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C급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한 적정 인원은 C급 헌터 5명이다. 그걸 두 명이서 공략하자고 하니 제정신인가 싶다.
'설마 고등급 헌터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고작 김건 따위를 만나러 오진 않았을 거다. 유명한 장인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행색도 썩 대단해보이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곤란하다는 말을 꺼내려고 했는데, 이미 이지한이 저 멀리 앞서 가고 있었다. 어찌나 멀리 갔는지 벌써 점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흐어, 엄청 빠르시네."
부랴부랴 박종필이 그를 따라잡았다.
"응?"
고개를 든 박종필의 주변으로 몬스터의 사체가 한가득이었다. 사납고 끈질기기로 유명한 홉고블린들이 몽땅 가슴이 꿰뚫린 채 죽어 있었다.
'진짜 혼자서 이걸 전부 다 한거야?'
그것도 이 짧은 시간에. 여기가 정말 C급 게이트가 맞나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키야악!
죽은 척 쓰러져 있던 홉고블린 하나가 박종필에게로 달려들었다.
"이, 이 새끼가!"
손에 쥔 너클로 머리를 두들겨 팼지만 홉고블린은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오히려 손에 쥔 칼날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박종필은 바닥에 몸을 던졌다. 그 충격에 홉고블린이 주춤한 사이 다시 너클로 두들겨 팼다.
"허억, 허억."
한 마리를 잡는데 정변 길드의 마스터인 자신조차 잠시 애먹을 정도였다.
박종필이 고개를 들자 이지한이 또 저멀리 뛰어가고 있었다.
"벌써?"
박종필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쫓아가는 속도보다 이지한이 마수를 잡아 죽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눈으로만 그를 쫓았다.
앞에서 보이는 이지한은 창을 던지고 회수하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홉고블린들 서넛이 꼬챙이가 되어 딸려 돌아왔다.
'하, 백묵님 지인이 괜히 지인이 아니었구만.'
괴수도 저런 괴수가 없었다. 이지한을 향했던 의심은 어느덧 씻은 듯 녹아내렸다.
'의심한 내가 멍청이였지.'
손해를 면할 수 있다 생각하자 박종필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이지한은 순식간에 던전을 휩쓸며 마수들을 도륙내고 있었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몇 번.
필드에 있던 마수들의 씨가 말라갔다. 이제 남아 있는 건 보스 뿐이었다.
* * *
나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 체인지 웨펀 Lv.10 [ 7% ] 』
『 스킬 '위압 Lv.10' 을 획득합니다. 』
『 위압 당한 대상의 모든 능력치가 30% 감소합니다. 』
『 특성 : 무재조정의 효과로 아이템 경험치를 10만 배 획득합니다. 』
『 무패의 반지(성장형)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Lv.76 ) 』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들이 하나 같이 훌륭하다.
'드디어 위압 10레벨을 달성했다.'
스킬의 경험치 통이 크기도 하고,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만 통하다보니 레벨을 올리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내 재능이 부족했던 게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
'그래도 잡몹 사냥할 때는 이만한 게 없겠어.'
무패의 반지도 어느덧 76레벨이 되었다. 미친 속도였다.
반지의 레벨이 오를 때마다 필요한 경험치도 기하급수적으로 오르기에 단번에 만렙을 찍진 못했다.
'상위 헌터들이 하위 게이트를 휩쓸지 않는 이유기도 하지.'
심지어 하위 등급의 마수들에게선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낮아진다. 때문에 자신에게 맞는 게이트를 선택하는 게 중요했다.
'뭐, 나랑은 크게 상관 없는 이야기다만.'
경험치가 10만배니까. 이제 보스만 처치하면 무패의 반지를 거의 만렙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키야약!
삽시간에 부하들을 잃고 분노한 홉고블린 족장이 소리쳤다. 일반 홉고블린보다 세 배는 커보이는 크기다. 족장이 이번 게이트의 보스였다.
그의 옆에 있던 홉고블린 마법사들이 해골 지팡이를 마구 휘둘렀다. 마력의 파편이 폭죽처럼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나는 마법사들을 무시하고 족장을 향해 달려 들었다.
키약?!
마법사들이 쏘아낸 마력 파편들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그러나 파편들은 내 몸에 닿자마자 사그라들었다.
당황한 홉고블린 마법사들이 나를 쳐다본다.
'오.'
마력에 닿은 부분이 살짝 가려울 뿐이었다. 성장한 반지의 방어력이 벌써부터 체감된다. 여기에 더해 갑옷까지 걸치게 된다면 얼마나 단단해질지.
촤아악!
영혼포식자의 일자베기에 보스의 목이 솟구쳤다. 이어서 옆에 서 있던 마법사 놈들의 머리도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C등급 게이트치고는 낮은 난이도였다. 아니면 내가 강해졌던가. 둘 다일 거다.
"후우······. 벌써 끝내신겁니까?"
뒤늦게 도착한 박종필이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어서 부른 건데. 필요 없게 됐다.
"이야, 진짜로 보통이 아니십니다."
아부하는 박종필을 뒤로하고, 쓰러진 보스에게로 다가갔다.
스윽
검으로 놈의 배를 가르고 마정석을 끄집어냈다. 10레벨의 해체 스킬 덕분에 단번에 찾아냈다.
이게 바로 김건이 원하던 큼지막한 C급 마정석이었다.
'이거면 당분간은 알아서 하겠지.'
내가 가진 돈의 절반 6천만원도 재료비 투자 명목으로 내어주면 이제 아이템을 못 만드는 일은 없을 거다.
장인은 돈을 잘 버니까 템도 알아서 사겠지.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나는 떠올라 있는 메시지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 무패의 반지(성장형)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Lv.76 → Lv.96 ) 』
『 반지의 현재 방어력 : 10 + 14.4 』
단 한 번의 공략으로 이 정도 레벨이라니. 흡족스러운 결과다. 지금 내 방어력은 레어 갑옷을 몸에 두른거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진짜는 따로 있지.'
『 245 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 현재 소유 포인트 : 1239 point 』
모인 포인트를 확인하는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1000포인트가 모였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좋았어.'
이제 고대하던 재능 획득의 물약을 마시러 갈 수 있게 되었다.
31화 성장형 아이템(4)
어느 C급 게이트 내부.
수호 길드 신입 신태양이 목을 축였다.
꿀꺽, 꿀꺽.
신태양은 스포츠 드링크를 목구멍에 들이붓다시피해서 마셨다. 그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후아, 이번 게이트는 유난히 힘드네요."
수십 마리의 마수들을 혼자서 사냥했으니 어찌보면 힘든 게 당연했다. 그런 사냥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신태양은 일반적인 전대미문의 속도로 성장 중이었다. 태블릿 PC를 살피던 수호 길드의 선배 길드원이 신태양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레벨이 몇이라고 했지?"
"레벨은 44요. 경험치는 31% 정도에요. 처음보다 2 올랐네요."
"좋아, 아주 빠른 속도야. 사흘만에 이 정도 성과라니······. 알려지면 다시 한 번 매스컴이 난리가 나겠는데."
선배의 입꼬리가 흡족하게 올라갔다. 안경을 올려 쓴 그녀는 계속해서 신태양의 데이터를 분석했다.
'이 친구는 진짜 천재야.'
이 정도 기세라면 반 년 후에는 A급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A급, 아니 B급만 되어도 즉시 우리 수호 길드의 전력이 될 수 있을 거야.
이 말도 안되는 성장속도는 사실상 신태양이 가진 재능 덕분이었다. 사냥감을 몰아주더라도, 모든 경험치를 독식하려면 혼자서 그 모두를 쓸어 버릴 능력이 있어야 했다.
'길드장에게 보고해서 더 많은 지원을 받아야겠어. 언론에서 관심을 가지는 규모가 차원이 달라질테니까.'
수호자의 검 길드에서는 신태양을 빠르게 성장 시키기 위해 모든 자원을 아낌 없이 쏟아 붓는 중이었다.
'신태양이야말로 우리 수호 길드의 미래다.'
선배는 부푼 마음으로 들떠 있었지만, 신태양의 마음은 달랐다.
미래의 검성이 될 예정이었던 신태양.
그의 마음은 어수선한 상태였다. 신태양은 자신이 스승으로 삼은 남자인 이지한을 떠올리고 있었다.
'부족해.'
아무리 화려하고 강력한 기술을 사용해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스승이 보여준 일자베기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지금의 내가 따라잡을 수나 있는 경지인가?'
솔직히 맨 처음 그의 일자베기를 보았을 때는 노력만한다면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건 오만이고 자만이었다.
신태양이 마주한 스승의 일자베기는 다시금 한계를 뛰어넘어 있었다.
'그건 스킬의 레벨을 초월한 무언가였어.'
지금의 자신으로선 그 경지에 닿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자리에 앉은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신태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손에 쥐고 자세를 잡았다.
'스승님 말씀대로 죽어라 휘둘러야겠어.'
그렇다면 뭔가 보이는 게 있으리라.
'그리고 언젠가는 스승님의 뒤를 따라가야지.'
어제 벼락 같은 충격을 받은 뒤 다짐했다. 이런 길드 같은 건 잠시 지나가는 장소에 불과했다.
인기와 돈, 명성을 얻고난 뒤에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 같은 거대한 존재를 담아 두기에 길드라는 틀은 너무 좁다. 그게 설령 대한민국 1위의 길드라고 해도다. 스승님 정도 되는 그릇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리 생각한 신태양은 자신의 선배에게 말했다.
"잠깐만 저쪽가서 혼자 연습 좀 해도 될까요?"
"응? 안 쉬어도 돼?"
"네, 괜찮아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
한쪽 구석으로 이동한 신태양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를 지켜보던 수호 길드 관계자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씩 했다.
"와, 진짜 재능까지 뛰어난 놈이 노력까지 한다고?"
"정말 기대 이상이네요. 이 성장세를 유지만 한다면 분명 미래의 수호 길드를 이끌어가는 존재가 될거에요."
"저런 애가 어디에 숨어 있었던건지. 참."
쉬는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금 게이트 공략이 이어졌다.
신태양의 독무가 재개 되었다.
서걱—!
신태양의 검에서 나온 백광이 일대를 뒤덮었다. 마수들은 신태양의 옷깃을 스치는 일조차 불가능했다.
그의 빛살 같은 검은 보스 오크의 머리까지 단숨에 꿰뚫었다.
"신태양님! 고생하셨어요!"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신태양에게 각종 버프 스킬을 주던 버퍼와 힐러들이 힘차게 인사했다. 그들은 수호 길드가 외부에서 고용해 온 이들이었다.
"예, 감사합니다."
평소라면 밝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줬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신태양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인사 때문이 아니었다. 신태양의 이상을 감지한 선배가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아뇨, 그냥······."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이번 게이트는 뭔가가 달랐다. 조금 더 마수들이 강하면서도 비정상적인 것 같은 느낌.
무엇보다 그의 검끝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검은 기운.
'이 느낌은 대체······.'
신태양은 그 찜찜한 기분을 쉽사리 지울 수 없었다.
* * *
나와 박종필은 C급 게이트의 공략을 끝마치고 입구로 돌아왔다. 순조로운 공략이었다.
"벌써 끝난겁니까?"
"C급 게이트 공략이 이렇게 금방 끝난다고요?"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서 기다리던 박종필의 부하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끝났으니까 왔지 새끼들아, 빨리 가서 마정석이랑 부산물이나 챙겨와!"
"아, 알겠습니다!"
박종필이 손을 들어 올리자 부하들이 질겁을 하면서 흩어졌다. 해체 방식은 길드마다 다르다. 마수를 잡으면서 해체를 동시에 하는 곳도 있고, 다 끝내고 하는 곳도 있다.
여긴 후자였다.
박종필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게이트 밖으로 안내했다.
"이거 도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실력자셨군요."
"고마워할 것도 없습니다. 공짜 아니니까."
난 자선단체가 아니다.
유료란 말에 박종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지만 이내 바로 표정관리를 했다. 억지로 지은 미소 위로 금이빨이 보인다.
"예? 아, 그럼요. 당연합죠. 용병이라고 하셨으니까요. 섭섭치 않게 챙겨드리겠습니다."
내가 백묵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아는 이상 돈 떼먹힐 일은 없을 거다. 박종필의 시선이 내가 든 보스의 마정석으로 향했다.
"근데 그 마정석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한 걸 묻고 있다.
"김건 줄겁니다."
"씁, 그런다고 그 놈이 아이템을 진짜 만들까요?"
"네, 만듭니다."
그 놈은 니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또라이란 말이다. 이 깡패놈들아.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괜히 패지나 마시죠."
그 말에 박종필이 어색하게 웃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
박종필 길드의 가장 큰 문제였던 게이트 공략을 도왔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다.
김건은 이제 내가 계약을 맺은 전속 장인이나 마찬가지. 김건이 다치면 내 손해로 이어진다.
논밭을 벗어나 도로변에 주차 된 박종필의 차에 올라탔다. 차를 타고 장인 거리로 돌아온 나는 김건에게 C등급 마정석을 건네주었다.
그 크기는 틀림 없는 보스급이다.
"허억, 정말로 가져와주셨군요."
마정석을 받아든 김건의 눈이 빛났다. 이제 저걸 활용해서 아이템을 만드는 건 김건에게 달린 일이다.
이래도 못 만든다고 하면······.
다이달로스의 망치를 챙겨가면 된다. 다행히 김건은 망치를 들고 제작대 앞에 섰다.
깡, 깡!
잡동사니처럼 쌓여 있던 재료 중 하나를 꺼내 망치로 두들기기 시작한다.
그러고보니 잊을 뻔했다.
나는 박종필을 향해 말했다.
"아, 내 아이템부터 만들어도 됩니까? 게이트는 공략했잖아요."
"그거야 물론입죠. 저희 길드는 천천히 받아도 됩니다. 김건이 아이템을 만들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요."
끝까지 억지 미소를 유지하는 박종필도 보통 놈이 아니었다. 백묵 덕에 어째 많이 편하다.
나는 망치를 두들기고 있는 김건에게로 다가갔다.
"계좌번호 부르세요. 일단 6천은 장비 값이고, 나머지 5천은 투자 명목으로 빌려드리는 겁니다. 재료를 사서 쓰세요."
"예? 저, 정말로요?"
다 계약서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풀세트 방어구를 일반등급으로 만들어주세요. 재질은 딱히 상관 없습니다."
레어등급을 맞출 엄두가 안난다. 어차피 일반 등급이어도 김건이 만드는 방어구에는 성장 옵션이 붙어 있어서 괜찮다.
"그리고 제 걸 가장 먼저 만들어주시고요. 이건 저쪽도 동의한 내용입니다."
턱짓으로 박종필을 가리키자, 그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진짜, 진짜 감사합니다······."
내 손을 붙잡더니 콧물까지 훌쩍인다. 그러다가 돌연 근처를 두리번 거리더니 서랍 안에서 무언가를 집어선 내게 건네었다.
"그러면, 일단 이거라도 가져가세요. 전에 만들어뒀던 건데 그냥 드릴게요."
장식이 없는 목걸이였다.
"뭘 이런 걸 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인벤토리에 바로 집어 넣었다. 이것도 성장형 아이템이려나? 집에 가서 따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이 정도면 여기서 볼 일은 전부 마쳤다.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살펴 가십쇼!"
김건을 따라 박종필까지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내가 백묵이랑 그리 대단한 사이는 아닌 걸 알면 까무러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엄청난 이득이다.'
겸사겸사 게이트 공략까지 하면서 포인트랑 아이템의 레벨까지 챙겼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김건은 순식간에 다시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까앙! 까앙!
김건이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푸른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 불꽃에서 희미한 마력이 느껴진다. 다이달로스의 망치가 좋기는 한가 보다.
'금방 장비를 받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장인 거리를 빠져나왔다.
* * *
'후, 오늘 하루 알차게 보냈네.'
집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백묵의 특수 던전을 공략했던 게 바로 어제였다.
그런데도 피곤하기는 커녕 에너지가 남아 돈다. 정신력, 자연회복, 체력 같은 스킬들을 다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맞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녹색 호리병 하나를 꺼내 쥐었다. 돌아오는 길에 장인 거리에서 구매한 물건이었다.
『 백 년 묵은 소나무의 마력 진액 』
가격은 무려 150만원이지만, 한 번 사면 여러번 쓸 수 있으니 돈 값을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목걸이가 성장형 아이템인지 확인해 봐야지.'
김건에게 받은 목걸이를 꺼내 바닥에 내려 놓았다.
'아마 맞을거야. 김건이 만드는 아이템은 모두 성장형 아이템이 되니까.'
그건 그의 특성 때문이었다. 김건 본인도 아직은 그 쓰임새를 잘 모르는 듯하지만.
진짜 또라이 취급을 받으면서도 멸망한 세계의 영웅들이 그를 살려 놓은 것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나는 그릇을 가져와 물을 가득 담고, 소나무 마력 진액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퐁당.
그러곤 목걸이를 그릇에 담았다.
'이제 하루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
미래의 김건이 하던 걸 직접 보기까지 한 거니 틀림 없다.
무패의 반지처럼 유니콘의 피를 쓸 필요는 없다. 김건의 아이템이 가진 특징은 그것과는 달랐다.
기능이 숨겨진 게 아니라, 특정 조건을 바탕으로 성장형으로 변하는 것에 가깝다.
'순수한 마력이 장시간 일정하게 스며들기만하면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일단 하루는 기다려봐야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뭐, 대단한 기대는 안 한다.
지금의 김건이 만드는 아이템의 성장 한계는 한 등급 정도일 거다. 일반 아이템이 레어가 되고, 레어가 유니크가 되는 만큼의 성장 가능성.
'그것만해도 당장은 충분하다.'
5천만원으로 레어 갑옷 풀세트를 맞추게 될 미래를 상상하니 입꼬리가 올라간다. 김건과는 계약으로 맺어진 든든한 사이다.
다음 등급의 아이템도 재료와 돈만 갖춰지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다.
'문제는 갑옷이 오면 전부 이 짓을 해야한다는 건데······.'
가뜩이나 좁아터진 방인데. 대야라도 하나 구해놔야겠다. 장비에 관한 건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이제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일을 할 차례였다.
'재능 획득의 물약.'
『 보유 포인트 : 1239 point 』
지금까지 모은 포인트와 C급 게이트를 돌고 얻은 포인트를 합쳐 총 1239.
드디어 1000포인트짜리 재능 획득의 물약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 인과역전의 상점 - 소모품 』
- 재물 획득의 물약(일반) : 0/1
- 재능 획득의 물약(일반) : 1/1 ( 1000 Point )
이미 재물 획득의 물약의 능력을 체감해 봤기에 더욱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경험치가 10만배인 내게 부족한 게 있다면.'
그것은 재능. 빌어먹을 재능이었다.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재능이란 곧 스킬이었다. 재능이 없다면 스킬 하나를 얻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회귀 전 내가 가지고 있던 스킬은 근력Lv.1 하나가 전부였다.'
간절하게 다른 스킬들을 얻고 싶었으나, 결국 그것 뿐이었다. 그거 덕분에 영훈이를 살렸으니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만.
그만큼 재능이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는 의미였다.
'정말로 재능을 획득하게 해 줄 것인가.'
고민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포인트를 모으는 것도 무모하다. 다음에 뭐가 나올지 가격이 얼마일지도 모른다.
나는 손가락으로 홀로그램창을 터치했다.
『 재능 획득의 물약(일반)을 구매하셨습니다! 』
『 1000포인트를 소모합니다. 잔여 포인트 : 239 Point 』
스르륵 흘러 나온 푸른 빛이 내 손에 놓였다. 재물 획득의 물약과 마찬가지인 청록색의 잘록한 호리병이다.
'아무리 그래도 마시기 전에 설명은 확인해야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빛의 물방울이 나타나는 걸까? 그 정도는 알아두고 싶었다.
『 아이템 설명 』
- 이름 : 재능 획득의 물약
- 등급 : 일반
- 효과 : 인과를 역전시켜, 사용자에게 필요한 스킬을 얻을 수 있게 합니다. 효과는 1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자세한 건 안 써있네.'
다만 단순하게 재능을 습득하는 게 아닌 스킬을 얻을 수 있게 한다는 부분은 확인했다.
'스킬이 재능이고, 재능이 스킬이라는 건가.'
나한테는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말이지. 다만, 필요한 스킬을 얻게 해준다면 나는 원하는 게 있다.
'적어도 레어 등급의 스킬을 얻을 수 있을만큼의 재능을 줘라.'
내 재능은 기초적인 일반 스킬을 습득하는데서 그쳐 있었다. 레어 스킬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도 전부 따지고보면 재능 탓이었다.
그 개같은 내 재능이 늘어나기를. 그렇게 바라면서 물약을 원샷했다.
꿀꺽, 꿀꺽.
매콤한 맛의 액체가 목구멍 너머로 흘러들어왔다.
『 재능 획득의 물약을 사용하셨습니다. 』
"크으······. 맛이 왜 이래."
그리 불평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오, 생겼다.'
그런 내 앞으로 붉은 물방울 하나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물방울을 따라가는 건가?'
그렇다면 누구에게로, 어떤 방식으로 스킬을 얻게 되는 걸까. 잠자코 붉은 물방울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찰나.
붉은 물방울이 순식간에 커지기 시작했다. 콩알만 했던게 주먹만하게, 주먹만했던 것이 어느새 나를 집어 삼킬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그렇다.
그것은 내게로 단숨에 다가왔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느낌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정돈 되지 않은 단칸방 위로 먹물이 번지듯 세계가 바뀌어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 해당 존재의 적합성을 판정합니다. 』
『 아이템의 사용자가 특성 '무재조정'의 소유자임을 확인합니다. 』
『 해당 인과의 특수성이 인과조정 프로토콜의 우선도를 뛰어넘습니다. 』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장소였다.
『 '무재조정 - 재능 초월'의 공간이 개방됩니다. 』
32화 재능 획득의 물약(1)
"허억, 허억······."
나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콰아앙! 끼기긱.
하늘에서 착지한 목각 인형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고작 대련용 목각인형일텐데, 꼼짝도 못하겠다.
"젠장······."
도망도 쳐보고 맞서 싸워도 봤지만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나는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니 맘대로 해라."
이 놈의 목적이 그거라면 이건 반항해도 끝나지 않는다.
목각 인형의 무자비한 폭력이 나를 덮쳤다.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별의별 기술이 내게로 쏟아졌다.
퍼버벅!
아파 뒤질 것 같다. 근데 진짜 못 피하겠다.
퍼버버벅!
애초에 맞으라고 주는 시련이니 그냥 맞는 수밖에.
그렇게 얼마나 쳐맞았을까.
『 스킬 '맷집 Lv.10'이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 스킬 '맷집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모든 종류의 데미지 5% 감소 효과 』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목각 인형의 움직임이 멎었다.
나는 엉망진창이 된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맷집 스킬 덕분에 아프기도 덜 아프고, 그렇게 맞고도 몸이 움직여진다.
"젠장······. 더럽게 무식하네······."
스킬이 올랐으니까 괜찮다만.
키륵, 키륵!
이제 좀 쉬어볼까 했는데, 저멀리 검은 구멍에서 검은 고블린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까만색의 고블린들이 나를 향해 달려온다. 이제 저 놈들이 왜? 같은 생각은 들지도 않는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제 놀랍지 않다.
나는 쓰게 웃었다.
"젠장, 1시간은······. 진작에 넘었겠구만."
재능 획득의 물약.
그 덕에 들어오게 된 재능 초월의 공간은, 나를 놔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 * *
약 1시간 30분 전.
무한하게 펼쳐진 새하얀 공간.
'여기는······.'
재능 획득의 물약을 마시니, 이런 공간으로 이동 되었다.
어디서부터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가 없다. 그 기이한 감각에 내 몸을 살필 때였다.
선명한 푸른색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무재조정 - 재능 초월'의 공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 설명을 확인하시겠습니까? 』
'당연히 확인해야지.'
내가 생각했던 재능 획득 물약의 효과랑 달라서 당황스럽긴 하지만, 뭔가 더 상위의 개념 같아 보인다.
손가락을 움직여 확인을 누르자 안내창이 떠올랐다.
『 해당 공간은 사용자의 재능을 판단하며 가장 효율적인 수련 방법을 제시합니다. 』
안내를 읽은 내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재능 획득 물약의 지속 시간은 1시간일텐데, 그 안에 제대로 된 수련이 가능할까?
내 의문과 별개로 메시지 창이 차례차례 떠오른다.
『 사용자의 재능을 파악합니다. 』
『 대상 '이지한'의 재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
'내 재능?'
궁금하긴 하다. 나한테 재능이 남아 있기는 한건지.
파직.
그런 내 기대를 배신하듯 붉은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 ······. 』
『 사용자의 재능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
『 재능 파악을 대체하여 사용자의 스킬을 파악합니다. 』
덩달아 나도 할 말을 잃었다.
『 소유한 스킬의 갯수 : 총 18개 』
『 일반 등급 : 16개 』
『 레어 등급 : 2개 』
내 등급이 D인 걸 감안하면 엄청난 수와 레벨이지만······.
'재능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훨씬 많았겠지.'
일반 뿐만 아니라 레어 스킬도 여럿 가질 수 있었을 거다.
촤르륵!
이어서 지금까지 내가 모아 온 스킬들의 목록이 펼쳐졌다.
『 보유 스킬 』
- 검술 Lv.10, 근력 Lv.11, 인지 Lv.11, 지력 Lv.10, 보법 Lv.10, 체술 Lv.10, 민첩 Lv.11, 자연 회복 Lv.10, 맷집 Lv.10, 기억 탐색 Lv.10, 위압 Lv.10, 일자베기(R) Lv.11, 정신력 Lv.11, 행운 Lv.2, 체인지 웨펀(SR) Lv.10, 채굴 Lv.11, 투척 Lv.11, 해체 Lv.10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펼쳐 놓고나니 많다.
'대부분 10 레벨은 찍었는데 말이야.'
행운은 유일하게 2 레벨에 머물러있다. 행운은 원래 경험치가 올라가는 것 자체가 운의 영역인 특수한 스킬이다.
'11레벨을 못 달성한 것도 보자면 꽤 있네.'
모두 지나가며 사용은 했지만 11레벨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양하다.
경험의 질이 낮으면 경험치가 오르지 않거나, 정말 조금 오른다. 애초에 스킬의 경험치 통이 클 경우 그 속도는 더욱 더뎌진다.
해당 분야에 대한 내 재능이 지극히 낮은 경우도 경험치가 적게 오른다.
'경험치가 10만배여도 여전히 재능이 필요하단 의미다.'
나는 궁금했다.
그런 부족한 재능을 이 공간이 채워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의문을 해소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 해당 공간은 재능 획득의 물약(일반)의 효과로 개방되었습니다. 』
『 재능 초월 1단계 : 기초 스킬 조정 』
『 현재 보유한 기초 스킬 : 근력 Lv.11, 민첩 Lv.11, 지력 Lv.10, 인지 Lv.11, 정신력 Lv.11 』
메시지가 기초 스킬들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줬다.
'이 중에서 11레벨이 안 된 건 지력 뿐.'
처음 기억 탐색을 얻을 때만 사용하곤 쓸 일이 없었다.
지력은 마력을 증가시켜주는 기초 스킬이다. 근데 나는 마법과 관련된 스킬이 없다. 그 이유는 늘 그렇듯 재능 부족.
몸을 쓰는 게 아닌 감각에 의지하는 마법은 더더욱 익히기 힘들다.
'그러면 이제 스킬 레벨을 올려주는 건가?'
나는 기대에 차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재능 획득 물약의 지속시간은 1시간이다. 그 안에 내게 재능을 심어주려면 그 수밖에는 없지 않은가?
『 현재 기초 스킬 '체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
아니면 체력 스킬을 그냥 준다거나.
쿠구구구······.
새하얀 공간 위로 녹빛의 구조물들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헌터라면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 '체력' 스킬의 획득 가능성이 있는 시련을 실행합니다. 』
시스템 이 놈은 절대로 무언가를 그냥 주는 법이 없다는 걸.
『 퀘스트 정보 』
- 이름 : 첫번째 시련
- 목표 : 체력 스킬 획득 및 레벨 11 달성
- 실패 패널티 : 사망
『 대상 '이지한'의 사망 확률 : 56% 』
『 시련이 시작됩니다. 』
'하, 사망이라.'
여태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공격적인 메시지. 공격적인 걸 넘어 험악하기까지하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위험한 일에는 그만한 보상이 따른다는 거다.
'좋아, 한 번 해보자.'
이미 한 번 죽은거나 마찬가지인 삶이었다.
새로운 스킬을 얻고, 재능을 연마하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는가.
나는 인벤토리에서 영혼 포식자를 꺼내 손에 쥐었다.
쿠구궁!
새하얀 공간이 순식간에 여러 구조물들로 가득 찼다. 거대한 절벽이 사방을 감싸고 있다. 구조물들의 모양은 각양각색.
탑도 있고, 집도 있고, 동상도 있다. 녹색으로 코팅되어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구경할 시간은 없다.
벽면에서 독액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치이익!
독액에 닿은 구조물들이 연기를 뿜으며 아래에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죽기 싫으면 올라가라는 건가.'
높이 솟은 녹빛 기둥만이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다.
'어떻게 되나 한 번 해보자.'
나간다거나 취소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다면 전진할 뿐이다.
콰득!
나는 한달음에 기둥으로 뛰어 올라 도검을 박아넣었다.
* * *
『 스킬 '체력 Lv.11'을 획득합니다. 』
『 체력이 영구적으로 10% 증가합니다. 』
"후우······."
탑의 정상에 오른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시련의 난이도는 굉장했다. 탑을 오르면서도 쉴 수 없도록 계속해서 방해가 들어왔다. 화살, 불덩이, 마력 탄환······.
한 대라도 잘못 스치면 독액으로 떨어져 죽는 함정.
'이 정도 난이도라 이거지.'
결국 통과하기는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극한의 상황에선 경험치가 더 빨리 오른다는 것.
이건 쿠훌렌과의 전투 때부터 경험한 일이었다.
'그래도 스킬 레벨이 빨리 오르기는 하네.'
목숨을 담보로 하는 대신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스스스······.
구조물들이 일시에 사라지고, 나는 또 다시 하얀 공간 위에 있었다.
『 '지력' 스킬의 레벨 상승을 위한 두번째 시련을 시작합니다. 』
하늘 위로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수백 개의 창과 검이 쏟아진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필사적으로 생각해야했다.
'젠장!'
나는 사력을 다해서 떨어지는 무기들을 피해다녔다.
시련은 내가 지력의 레벨을 11까지 달성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쉬는 시간도 없다.
『 재능 초월 2단계 : 심화 스킬 조정 』
『 심화 스킬 : 보법, 체술, 맷집, 검술, 위압, 투척, 자연 회복 』
"이거, 지옥 훈련이 따로 없구만······."
그 강도는 목숨의 위기를 느끼는 순간이 있었을 정도.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시련이었다.
오히려 좋다.
'어디 끝까지 해보자고.'
나는 차례차례 시련들을 통과해 나갔다. 하나의 시련에서 살아남을 때마다 스킬의 레벨이 확실하게 올라갔다.
『 스킬 '보법 Lv.11'을 획득합니다. 』
『 보법 사용시 기력 소모가 사라집니다. 』
『 스킬 '체술 Lv.11'을 획득합니다. 』
『 몸을 사용하는 기술의 숙련도가 5% 상승합니다. 』
『 스킬 '맷집 Lv.11'을 획득합니다. 』
『 이제 모든 종류의 데미지를 5% 감소시켜 받습니다. 』
『 스킬 '검술 Lv.11'을 획득합니다. 』
『 검을 사용한 기술의 위력이 10% 증가합니다. 』
시련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이유는 몰라도 1시간이 지나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미친듯이 나를 몰아붙여 스킬 레벨을 올리겠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결과 보법, 체술, 맷집을 거쳐 검술 스킬까지 11레벨이 되었다.
'이번에는 위압의 차례인가.'
어둠 구멍에서 솟아난 블랙 고블린들이 눈을 빛내며 돌진해 온다. 그 수는 자그마치 30마리.
이 시련의 목적은 사냥이 아니다. 내가 이 놈들을 전부 잡아도, 스킬 레벨을 올리지 못했다면 소용 없다.
'위압 11레벨을 찍을 때까지 나오겠는데.'
나는 회수의 창을 들고 놈들이 사정거리까지 다가오는 걸 기다렸다.
목각 인형에게 후드려 맞았던 상처가 회복되며 메시지가 떠올랐다.
『 스킬 '자연회복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자신에게 적용되는 모든 회복량 + 5% 』
'좋아.'
시련 하나가 줄어 들었으니 환영할 일이었다.
그건 그거고.
블랙 고블린들은 내가 위압 Lv.11을 달성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거다.
창을 잡은 팔을 뒤로 뻗었다가 앞으로 휘둘렀다.
『 스킬 '투척 Lv.11'을 발휘합니다. 』
회수의 창이 날아가 놈들 중 하나의 몸통을 꿰뚫었다. 진짜 몬스터가 아니라 그런지 포인트는 지급되지 않는다.
키륵! 키륵!
고블린 중에서도 흉포하기 그지 없다고 알려진 블랙 고블린. 동료가 당하자 놈들이 걸음이 빨라졌다.
'블랙 고블린들은 협동력이 뛰어나다.'
저만큼의 수가 협공을 해오면 위험하다. 나는 창의 스킬을 사용해 창을 다시 내 손으로 회수했다.
창에 뚫린 블랙 고블린이 그대로 딸려 들어 왔다.
나는 놈의 머리를 잘라내서 창 위에 걸었다. 위압 스킬의 발동 조건은 나보다 적의 능력이 낮을 것.
『 스킬 '위압 Lv.10'을 발휘합니다. 』
『 위압 Lv.10 [ 6% ] 』
놈들의 움직임이 조금 느려졌다.
근데 스킬 경험치가 확실히 안 오른다. 회귀 전에 평생 웅크려 살아서 그런가. 남을 위압하는데는 소질이 없는 걸지도 모르지.
그래도 상관 없다.
내가 회귀한지 이제 2주.
그걸 생각한다면 이 성장세는.
'미친 속도다.'
나는 고블린 머리를 땅에 던져버리고선 다시 창을 투척했다. 고블린 하나의 머리가 꿰뚫렸지만, 블랙 고블린들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서로의 간격을 벌리며 일사불란하게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영악한 놈들이다.
적중률 100%였던 창이 빗나가기 시작한다. 그래도 일단은 최대한 수를 줄여야했다. 창을 던지고, 거리 벌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놈들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키르윽! 키륵!!
살아남은 열 다섯 마리의 블랙 고블린이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나는 영혼 포식자를 움켜 쥐었다.
『 스킬 '위압 Lv.10'을 발휘합니다. 』
『 스킬 '체인지 웨펀 Lv.10'을 발휘합니다. 』
이젠 나도 이판사판이다.
* * *
결국 어찌어찌 해냈다.
『 스킬 '위압 Lv.11'을 획득합니다. 』
『 이제 위압 스킬에 마력이 깃듭니다. 』
블랙 고블린 피를 잔뜩 뒤짚어 쓴 나는 숨을 거세게 몰아쉬었다. 내 피인지 고블린의 피인지도 구분되지 않는다.
남은 고블린은 하나.
위압에 걸린 녀석이 나를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다.
서걱—!
영혼 포식자로 잘라낸 놈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 '재능 초월' 2단계를 클리어하셨습니다. 』
『 소유한 심화 스킬의 레벨이 모두 11에 도달했습니다. 』
『 소유한 기초 스킬의 레벨이 모두 11에 도달했습니다. 』
털썩.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자연회복과 정신력이 있는데도 그렇다.
얼마만큼의 심력과 기력을 소모한건지.
'그래도······. 하기는 했다.'
기초와 심화 스킬 레벨이 전부 11이 된 건 의미가 깊었다. 본래 한 달이 넘게 걸렸을지도 모르는 스킬들을 단번에 최대 레벨까지 올렸으니까.
새하얀 공간에 다시금 홀로그램창이 뜬다.
움직일 힘이 없어서 가만히 쳐다만 봤다.
『 재능 초월의 공간이 본래의 목적을 다했습니다. 』
『 ······. 』
『 보상을 정산합니다. 』
보상? 그냥 끝나는 게 아니었나.
『 근력, 민첩, 지력, 체력 4가지 스킬이 하나의 스킬로 통합됩니다. 』
『 기존의 추가효과는 전부 유지 됩니다. 』
『 통합 스킬 '기초 능력 Lv.11' 을 획득합니다. 』
'기초 능력······?'
들어 본 적 없는 스킬이었다. 애초에 스킬을 통합할 수 있다는 것조차 지금 처음 듣는다.
『 추가효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
『 Lv.10 : 일반 스킬을 획득할 확률이 매우 증가합니다. 통합 가능한 스킬이 통합됩니다. 』
'와, 대박인데?'
지금까지 획득하지 못했던 일반 스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전투적인 부분은 그렇다쳐도 비전투적인 스킬들도 아직 셀 수 없이 존재한다.
그런데, 다음 내용은 더더욱 내게 의미가 있었다.
『 Lv.11 : 기초 레어 스킬을 획득할 확률이 다소 증가합니다. 』
'레어 스킬 획득 확률 증가.'
글을 읽어나가는 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래, 이거지!'
단지 재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상위 스킬을 얻을 길이 없었다.
그런 내게 한줄기 빛이 생겼다. 안도의 안숨이 새어나왔다.
'다행이다.'
훈련의 성과가 스킬로 나타난 셈이다. 재능 획득의 물약을 마시길 백 번 잘했다.
죽을만큼 굴렀지만 결과가 좋으니 됐다.
상위 스킬 획득 확률을 올려주는 기초 능력.
그걸 재능이라고 부르긴 어딘가 애매하다.
하지만 스킬이 모여 새로운 스킬을 만들어내는 건 맞으니까.
파스스······.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새하얀 세계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조각 조각 떨어져 내리는 공간의 틈새로 익숙한 자취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시간이 조금도 지나지 않았다.
'후우.'
나는 이불 위에 몸을 뉘였다.
그러다 문득 떠올렸다.
'잠깐.'
시간이 하나도 안 지났다. 스마트폰을 들어 다시 시간을 확인해보니, 맨 처음 물약을 마셨을 때 그대로였다.
재능 초월의 공간은 원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뭐, 그런 거라고 이해하면 된다.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이 그대로라는 건······.
나는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미친.'
현관 앞에서 붉은 물방울이 통통거리며 손짓하고 있었다.
33화 재능 획득의 물약(2)
'바깥으로 나가라 이거지.'
붉은 물방울은 현관문 손잡이를 맴돌고 있다.
물약의 지속 시간은 1시간.
알차게 쓰려면 고민하는 시간도 아껴야 했다.
나는 신발을 신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때였다.
위이이이이잉!
갑자기 어디선가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불안감을 유발하는 높은 음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그 소리의 크기가 범상치 않다.
[ 경보! 현시점부로 인근 주택가에 게이트 브레이크가 발생하였습니다. ]
[ 외부에 계신 주민 여러분은 가까운 지하시설로 대피하시고, 지속하여 안내 방송에 귀를······. ]
빌라의 복도 바깥으로 내다보니 경찰차들도 사이렌을 켜고 달려가고 있다. 그 뒤를 소방차 서너대가 따라간다.
'게이트 브레이크인가본데.'
게이트 브레이크 혹은 던전 브레이크.
게이트나 던전의 몬스터가 폭주하여 바깥으로 나오는 사고다. 보통 길드가 공략에 실패하거나, 게이트가 오래 방치 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게이트 등장 초기에는 그 피해가 막심했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예측과 대비가 가능한 재난.
큰 사고로 번지는 일은 적다.
'알고는 있었지만, 가만히 있으려 했는데.'
특히나 이번 게이트 브레이크는 큰 피해를 내지 않고 끝난다. 때문에 굳이 나설 필요성을 못 느꼈다.
모든 일에 참견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런데 붉은 물방울이 그쪽으로 간단 말이지.'
빌라를 내려와 붉은 물방울을 따라가자 소란스러운 현장이 보였다. 경찰차에 소방차까지 모여서 구역을 통제하고 있다.
혹시라도 남아 있을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거였다.
비대해진 게이트에선 계속해서 몬스터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 정체는 샐러맨더였다.
불을 머금은 도마뱀. 놈들은 네 다리로 걸어나와 헌터들을 향해 불을 뿜어댔다.
화르륵!
뜨거운 불길이 연달아 치솟았다.
"으아악!"
온 몸에 불이 붙은 헌터 하나가 마구 발버둥친다. 소방수들이 다급하게 물을 뿌려 불을 제압했다.
"왼쪽 막아! 뚫리겠어!"
게이트를 막고 있는 헌터들의 수는 7명. 본래 게이트를 공략하던 길드원 같았다.
"조심해! 그 쪽으로 두 마리 더 간다!"
"지원! 지원은 아직입니까!"
"시발, 이대로는 못 막아!"
그들도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소방 대원들도 멀리서 최대한 물을 뿌려가며 혹시 모를 화재를 진압하고 있었다.
상황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위태위태한데.'
게이트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온 마수는 평상시보다 훨씬 강해진다. 게이트 내부에선 시스템으로 억제 되던 힘이 해방되는 것이다.
'나도 도와야겠어.'
나도 헌터이니 도와준다는 걸 막진 않을 거다. 그런데, 붉은 물방울이 휙하니 뒤쪽으로 돌았다.
그곳을 바라보니 윤서현 헌터와 눈이 마주쳤다.
"이지한씨?"
"윤서현 헌터?"
그러고보니 윤서현도 이 동네에 살았었지. 협회 사람이기도 하니,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지자마자 달려 온 모양.
지난번에 성장의 마족을 처치하고 나서 이번에 보는 건 처음이다.
'밥 사기로 했었는데.'
그게 중요한 상황은 아니긴 했다.
그때, 윤서현 헌터의 뒤쪽에서 또 다른 여성이 걸어나왔다. 그녀의 등장에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경찰관과 소방관들이 먼저 환호했다.
"윤지은 헌터다!"
"은빛의 날개 윤지은 헌터가 왔어!"
"윤지은 헌터!"
"저, 정말이야?! 윤지은이 왔다고?"
"조금, 아주 조금만 더 버텨!"
게이트를 막고 있던 헌터들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게 보였다.
은빛의 날개는 대한민국 2위 길드다. 윤지은은 그곳의 부길드장이고.
또한 그녀는 윤서현 헌터의 언니였다.
"아, 이 분이시구나?"
윤지은은 날 한 번 보고 은근한 미소를 짓더니, 가져온 활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게이트 근처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며 방어선을 만들고 있던 헌터들이 튕겨나갔다. 활을 조준한 그녀의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아무래도 인사는 나중에 해야겠네요."
윤지은의 손에 녹색빛의 마력이 맺혔다.
파앙!
그녀가 시위를 놓자 가벼운 돌풍이 일었다. 허공으로 쏘아진 한줄기의 마력이 수십 갈래로 나뉘었다.
녹빛을 머금은 마력 화살이 밤하늘을 수놓는다.
파바바바박!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수십 발의 빛줄기가 샐러맨더들의 머리를 꿰뚫었다. 다시금 그녀의 손에 마력이 맺힌다.
'이게 S급 헌터 윤지은.'
그녀는 미래에 SSS급에 오르고, 최후의 11인이 되어 사람들을 지킨다.
가장 적극적으로 마족을 막으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동생을 잃은 아픔을 가지고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길드를 움직였다.
'은빛의 날개 길드원들 대부분이 마족의 손에 죽게 되지만······.'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최전선에 나섰던 선인(善人)이 바로 윤지은이었다.
"다들 조심해!"
"뭔가가 나온다!"
콰아앙!
윤지은 혼자서 상황을 다 정리하나 싶던 그때였다. 또 한 번 큰 폭발이 일어나더니, 게이트를 뚫고 거대한 샐러맨더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윤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활의 시위를 당겼다가 놓을 뿐.
파앙!
다시 한 번 쏘아진 그녀의 화살 세례.
아쉽게도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거대 샐러맨더가 화염을 내뿜어 윤지은이 쏜 화살들의 궤도를 틀어낸 탓이다.
그 아래로 작은 샐러맨더 수십 마리가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윤서현 헌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언니가 큰 놈을 상대하는 동안, 저희는 작은 녀석들을 막아요."
붉은 물방울 또한 윤서현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게이트 근처로 향했다.
"협회 소속 헌터 윤서현입니다!"
윤서현이 협회 수첩을 들이 밀며 갔기 때문에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도검 영혼 포식자를 꺼내 손에 쥐었다.
스르륵!
붉은 물방울이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헌터 하나가 샐러맨더의 꼬리에 맞아 바닥을 굴렀다.
"도, 도와줘요!"
나는 망설이지 않고 쓰러진 헌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물방울이 구조하라는 듯 맴돌고 있었다. 물론 그게 아니어도 구했을 거다.
콰아아!
헌터를 내쪽으로 끌어당기자마자, 샐러맨더의 화염이 바닥을 녹였다.
『 시스템이 숭고한 이타적 행동을 감지합니다. 』
촤르르륵.
『 스킬 '구조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구조 Lv.2'을 획득합니다. 』
『 스킬 '구조 Lv.3'을 획득합니다. 』
..
.
『 스킬 '구조 Lv.10'을 획득합니다. 』
『 타인을 위기에서 구해낼 때, 모든 능력치가 3% 상승합니다. 구출한 대상이 조금 치유됩니다. 』
일반 스킬 하나를 단숨에 획득했다. 재능 초월의 공간에서의 수련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 거기서 얻은 보상 '기초 능력'의 추가효과 덕이었다.
'일반 스킬을 얻을 확률이 오른다더니.'
동시에 물약의 효과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날 안내한 건 붉은 물방울이었으니까.
근데 진짜 별에별 스킬이 다 있다.
『 스킬 '구조 Lv.10'을 발휘합니다. 』
희미한 빛이 부상을 당한 헌터의 몸에 스며들었다. 상처가 조금 나은 듯 보였다.
"가, 감사합니다."
그래도 치명상이라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였다. 부상을 입은 헌터를 뒤쪽의 사람들에게 넘겨줬다.
그 사이 윤서현 헌터가 빈자리를 맡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솟아난 마력 구체가 샐러맨더 사이로 떨어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나도 윤서현의 옆으로 다가가 샐러맨더들과 마주했다.
윤서현이 놀리듯 물었다.
"이거 C등급 게이트가 터진건데 괜찮으시죠? C등급 상위도 버거울지도 몰라요."
윤서현과 만났던 게 1주일 전이다. 그녀는 내 이전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거다.
나는 성장의 마족을 잡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그때는 20레벨 F등급이었지만, 지금은 40레벨 D등급이니까.
"윤서현 헌터도 C등급 상위 아니었습니까. 위험하겠네요."
내 말에 윤서현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전 어제 B등급으로 올랐거든요?"
그녀의 양 손에 모인 마력 구체가 일시에 쏘아졌다. 확실히 전에는 못 봤던 기술이다. 성장한 건 나뿐이 아니었나보다.
"좋네요."
나는 남아 있는 샐러맨더에게로 돌진했다. 윤서현 헌터가 다시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공백을 메꿔야했다.
콰아아아!
내 앞의 샐러맨더 세 마리가 동시에 머금고 있던 화염을 쏟아냈다. 그 뜨거운 열기에 피부가 익을 것 같다.
잠시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붉은 물방울이 화염을 향해서 움직였다.
'들어가라고?'
잠깐 머뭇거렸지만 고민은 짧았다. 그곳에 스킬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얼마든지다.
"자, 잠깐만요!"
뒤에서 윤서현 헌터가 기겁하는 소리가 들린다. 일단은 무시했다.
'크윽.'
샐러맨더의 화염은 뜨겁기로 유명하다. 발을 내딛자 피부가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이 엄습한다. 그러나 그건 잠시뿐이었다.
고통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10만배에 달하는 경험이 내게 축적되고 있으므로.
『 스킬 '화염 저항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화염 저항 Lv.2'을 획득합니다. 』
『 스킬 '화염 저항 Lv.3'을 획득합니다. 』
..
.
『 스킬 '화염 저항 Lv.10'을 획득합니다. 』
『 화염 저항이 10% 상승합니다. 간접적인 열기에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
내가 스킬을 얻을 수 있는 타이밍을 물약이 완벽하게 짚어주고 있었다.
'좋아.'
그렇다고 화염을 있는 그대로 뒤집어 쓸 요량은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영혼 포식자를 들어올렸다.
- 일자베기
푸른 직선이 화염을 갈라냈다. 일자베기의 10레벨 추가 효과 비물질 베기. 화염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마력이 담긴 불이라면 논외겠지만.
파아아—.
일자베기에서 쏟아진 풍압에 의해 화염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내가 가야할 길이 드러났다.
땅을 박차고 뛰어 올라 샐러맨더 한 놈의 목에 도검을 찔러 넣었다.
키야악!
놈은 괴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그 매서운 발톱이 나를 향했다.
『 스킬 '보법 Lv.11'을 발휘합니다. 』
나는 어렵지않게 공격을 피해냈다.
'쉽게는 안죽는군.'
확실히 가죽이 질기다. 일반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C급 게이트 브레이크니까.'
그 위험성은 C급 상위에 맞먹는다. 아니, 이 정도면 B급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 스킬 '체인지 웨펀 Lv.10'을 발휘합니다. 』
영혼 포식자가 한줄기 빛이 되어 인벤토리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나온 빛이 창으로 변모했다.
『 체인지 웨펀의 추가효과로 3초간 무기에 마력이 둘러집니다. 』
창날에 희미한 마력이 깃들었다. 그와 동시에 붉은 물방울이 형광처럼 빛나며 유려한 곡선의 궤적을 그렸다.
'저기에 맞추란 의미인가.'
춤추듯 주위를 맴도는 붉은 물방울을 따라 창을 휘두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연거푸 돌고 찌르고 벤다.
『 스킬 '창술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창술 Lv.2'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창술 Lv.3'을 획득합니다. 』
..
.
『 스킬 '창술 Lv.10'을 획득합니다. 』
내게 조금도 없었던 재능이 단숨에 타오르기 시작한다.
압도적인 거리 차이.
좁혀지지 않는 간격.
촤아악! 촤악!
도망가지도, 다가오지도 못한 채 샐러맨더들은 가죽을 꿰뚫렸다. 모든 동작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어, 언제 창은 또 배운거에요?"
윤서현이 나를 보면서 눈을 꿈뻑였다. 그녀의 손에 깃든 마력 구체가 허무하게 사그라든다.
"방금요."
"아, 예······."
사실을 말했지만 믿는 눈치가 아니다.
캬아아!
"오른쪽분들! 다섯 마리가 더 나왔어요!"
반대 방향에서 마수들을 막던 헌터가 소리쳤다. 나는 샐러맨더들의 안쪽으로 파고 들었다.
촤아악! 촤악!
이번에는 영혼 포식자를 들고 놈들의 머리를 베어냈다. 몇 마리가 나와도 마찬가지였다.
서걱—!
윤서현의 엄호까지 받으니, 움직임이 한결 자유로워진다. 화염 저항 덕에 불이 쏟아져도 당황할 필요가 없었고.
촤아악!
『 무패의 반지가 Lv.100을 달성했습니다. 』
『 추가 능력 '방어막 Lv.10'이 개방됩니다. 』
기분 좋은 알림도 떠올랐다.
그렇게 열 마리를 더 처리했을 때였다.
쿠우우웅!
윤지은의 화살 세례를 받은 거대한 샐러맨더가 쓰러졌다. 죽은 놈의 몸에서 붉은색의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치이익!
이건 단순한 피가 아니다. 뜨거운 용암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뜨겁지는 않겠지만, 혹시 뒤집어 쓰기라도 하면 치명상이 된다.
그 위를 샐러맨더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기어온다. 뜨거운 땅 속에서도 활동하는 놈들이라 그런가 개의치 않고 달려 든다.
그러나 제대로 된 위협은 되지 못했다.
파바바바박!
밤하늘에서 쏟아진 마력 화살이 놈의 머리를 꿰뚫었으므로.
"와아······."
"윤지은 헌터."
한바탕 전투 태세를 갖추려던 헌터들이 멈춰섰다. 그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봤다.
저벅, 저벅.
활을 든 윤지은이 샐러맨더들의 시체 위를 자연스레 걸어왔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놈들의 피가 사방에 널려 있지만 상관 없었다.
허공을 딛는 스킬. 바람 정령의 걸음이다.
잠시 주변을 둘러 본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 게이트 내부로 진입해서 보스를 처치할 겁니다. 나머지 분들은 현장을 정리해주세요."
일반적인 게이트라면 쏟아지는 마수 무리,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 게 고작이었겠지만 여기엔 S급 헌터가 있었다.
내부로 들어가서 보스를 처치하면 게이트를 일찍 닫을 수 있다. 즉, 거대 샐러맨더는 보스가 아니었다는 것.
현장을 휘어잡은 윤지은이 내 쪽을 바라봤다.
"서현이랑 이지한씨는 저랑 갈까요?"
윤서현은 동생이니까 그렇다쳐도 나까지 부를 줄이야. 윤서현이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무어라 항변한다.
S급 헌터인 윤지은만 들으라고 한 소리겠지만.
11레벨 인지 스킬 덕에 전부 들렸다.
이 사람은 왜? 언니 진짜······.
그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못들은 척 윤서현 헌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빨리 가죠."
붉은 물방울이 윤지은을 빙글빙글 맴돈다. 이건 오지 말라고 해도 가야지.
문제는 게이트 내부로 들어가고 나서였다.
윤지은, 윤서현 자매와 약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 마(魔)를 추종하는 자의 영역에 진입하셨습니다. 』
『 열화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간접적인 제약이 발생합니다. 』
'이게 지금 왜······?'
성장의 마족과 마주쳤을 때 보았던 것과 비슷한 메시지.
그 메시지를 확인하는 내 눈이 커졌다.
34화 재능 획득의 물약(3)
'상상했던 것 이상이야.'
윤지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끊임 없이 마력 화살을 쏘아내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게이트 앞쪽에 머물러 있었다.
자신의 동생을 구해준 헌터 이지한.
그는 샐러맨더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무위를 펼쳐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화염을 가르고 그 안으로 뛰어들기까지 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간결한 동작에는 낭비가 없다. 적절한 힘의 배분과 속도의 조절. 기술적으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야기로 들었을 때도 짐작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잖아.'
동생에게 들은 바로 이지한은 잘 쳐봤자 D급 헌터였다.
그런데 D급 헌터가 저런 움직임을 보인다니?
심지어 그 상대는 C급 게이트 브레이크에서 튀어나온 강화 마수들이었다. 실질적인 강함은 B급에 필적한다.
아무리 그 상대가 일반 몬스터들이라지만 이지한은 D급이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윤지은은 확신했다.
'지금 우리 은빛의 날개에게 꼭 필요한 인재야.'
은날의 부길드장인 그녀에게 있어 미래를 위한 인재 영입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단순하지만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윤지은은 며칠 전 수호 길드에서 영입한 신태양이라는 남자를 떠올렸다. 이지한은 영상 속 그 사람만큼 화려하거나 특출난 기술은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허울 좋은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니야. 당장 선전하기엔 좋을지 몰라도, 중요한 건 얼마나 빠르게 마수를 죽이고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는가야.'
윤지은은 이지한이 무기에 미미한 마력을 부여하는 것 또한 놓치지 않고 보았다.
'마력부여까지 익숙하게 다루고 있네.'
심지어 무기 두 개를 다루면서 자유자재로 전환까지 한다.
'어쩌면 신태양과 견줄 수 있을만큼의 인재······.'
D급부터 재능을 발휘하는 헌터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 재능은 어디까지나 D급 수준에서의 재능.
이지한의 능력은 그 재능의 범주를 뛰어넘고 있었다. 오랜기간 헌터로 살아오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 본 윤지은이기에 알 수 있었다.
진짜 보석은 저기에 있다는 걸.
'저런 사람이 왜 F급에 오랜 기간 머물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파아앙!
마지막 화살을 발사하자 거대 샐러맨더의 미간이 그대로 꿰뚫렸다. 놈이 거대한 몸뚱이를 바닥에 눕혔다.
윤지은은 걸어가며 생각했다.
'다른 길드에 빼앗기기 전에 은빛의 날개 길드에 영입해야 해.'
수호 길드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데려가기라도 한다면 큰 일이었다.
단순히 길드의 부흥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참 고마운 사람이야.'
그는 동생을 구해 준 사람이었다. 동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서현이는 거짓말이 서툴다.
위험한 상황이 있었다는 건 간단히 짐작할 수 있었다.
'딱이야.'
동생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이성으로서는 통 관심이 없어보였다. 어차피 안될 사이라면, 다른 방향으로 이어가는 게 낫다.
'반드시 우리 길드로 영입해야지.'
다음주에 예정되어 있는 비공개 헌터 채용 시험. 이지한이 활약하며 눈도장을 찍기에도 좋은 자리였다.
수호길드처럼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려면 길드원들을 설득 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은빛의 날개는 대한민국 2위다. 이제 오성을 누르고 갓 2위가 된 거긴 하지만. 설마 이 제안을 거절하겠어?
'채용 시험, 거기부터 시작해야겠어.'
그러려면 일단은 친분을 쌓는 것부터다.
"서현이랑 이지한씨는 저랑 갈까요?"
윤지은이 자연스런 미소와 함께 이지한을 바라봤다.
* * *
나는 윤지은을 따라 게이트 안으로 발을 옮겼다.
황량한 땅 위로 잿빛을 띈 앙상한 나무들만이 드문드문 서 있다. 화염 도마뱀 샐러맨더의 땅이었다.
"이제야 얘기 나눌 틈이 생겼네요."
우리가 들어 온 걸 확인한 윤지은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지한씨라고 했죠? 동생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녀의 호의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손을 마주잡았다.
윤서현이 나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해 준 모양.
'윤지은은 내가 아는 영웅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리더였던 천성호보다도 더.
나와 영훈이를 위험에서 구해준 적이 있거니와, 그녀는 멸망한 세계에서도 가장 영웅다운 사람이었다.
'이 만남도 재능 획득의 물약 덕분인건가.'
마침 내 실력을 보여줄 수 있어 좋았다. 그녀에게 눈도장을 찍어 놓는 건 의미가 있었으니까.
윤지은은 마족 처치에 있어 가장 적극적이었던 영웅.
그녀는 앞으로 마족들을 막아내는 데에 있어 중요한 핵심 인물이 될 거다.
'당장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만.'
관계를 잘 만들어 둔다면, 상황에따라 마족에 대해 넌지시 흘릴 수도 있게 된다.
백묵과는 달리 윤지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족의 존재를 없애려할테니까.
"근데 서현이 말로는 절 알고 계셨다던데요."
알고 있기는 했지. 최후의 11인으로. 윤지은은 내 얼굴을 확인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저희 길드 관계자셨나요? 뵌 것 같기도하고······."
뭐라 대답해야하나 고민하던 그때였다.
『 마(魔)를 추종하는 자의 영역에 진입하셨습니다. 』
『 열화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간접적인 제약이 발생합니다. 』
『 게이트 내부의 생물은 '회복' 할 수 없습니다. 』
'이게 지금 왜······?'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마를 추종하는 자? 이게 무슨 말이죠?"
윤지은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지만, 옆에 있는 동생 윤서현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윤서현 헌터는 이와 비슷한 메시지를 알고 있었다.
"······이건 지난번 게이트에서 봤던 거잖아요. 설마 여기에도 그 괴물 같은 몬스터가 있다는 건 아니죠?"
윤서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여기서 섣불리 내가 아는 척을 해도 그림이 이상해진다.
"글쎄요. 확인해 봐야겠죠."
내 말에 윤서현의 눈이 못 믿겠다는 듯 가늘어졌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마족은 아니다.'
메시지가 떠올랐을 때는 나도 흠칫 놀랐다. 마족과 벌써 마주치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기에.
자세히 읽어보니 마족은 아니었다.
마를 추종하는 자, 열화 마도, 간접적 제약.
이 단어들이 의미하는 건 '권속'이다.
'마족의 권속이 여기 어딘가에 있다.'
마족과 계약을 맺어 그 힘을 일부 발휘 하는 일종의 부하다. 마족에는 훨씬 못 미치는 존재.
'회복 금지······. 그런 마족의 권속이 국내에 있었던가?'
제약의 성질로 마족의 정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내가 기억을 뒤지는 사이 윤지은 헌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 게이트 브레이크를 끝내려면 보스를 잡아겠죠? 저혼자 혼자 갔다 올테니, 두 사람은 여기서 혹시 마수가 빠져나가는지만 체크 해주세요."
그 전에 말해야 할 게 있다. 열화 마도에 의한 제약. 이걸 우습게 봐선 안된다.
"근데, 이 회복이 안된다는 말 단순히 체력만을 의미하는 게 아닐겁니다."
이건 사람이 움직이며 소모하는 에너지 전체를 가리킨다. 기력, 마력, 체력, 정신력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해당된다.
"어머, 정말이네요."
잠시 손 위로 마력 화살을 만들어 보던 윤지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았다면 됐다. S급 헌터를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러면 갔다 올게요."
S급 헌터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 잠깐만 언니!"
윤서현의 부름을 무시하고 윤지은은 보스를 향해 달려나갔다.
파앙!
바람이 윤지은의 몸을 감싸는 순간, 그녀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
이제 나와 윤서현 둘만 남았다. 아까 전투할 때는 잘만 말하더니, 막상 둘이 되니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쩝, 나도 밥 사겠다고 해놓고 연락을 안한 죄가 있어서······.
그렇게 한 5초 정도 지났을까.
윤서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밥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이야기가 나왔다.
"······혹시 그 문자 봤어요?"
보기는 봤다. 근데 뭐라고 써놓은 건지 하나도 모르겠던데.
"네. 봤습니다."
"윽, 취소 눌렀는데······."
윤서현이 머리를 움켜쥐더니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러더니 내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거 오해에요."
"뭐가요?"
그때였다.
빙글.
붉은 물방울이 회전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에 타서 거멓게 변한 나무 뒤로 이동했다.
'우선은 따라가자.'
윤서현하고 이야기는 나중에 나눠도 되니까.
"자, 잠깐 어디가요!"
내 뒤를 허겁지겁 윤서현이 따라왔다.
"뛰면 안됩니다."
"아, 그렇네요.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거에요? 입구를 지켜야되는데."
"글쎄요."
여기서도 입구는 보이니 괜찮다. 그리고 어디로가는지는 나도 모른다. 붉은 물방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동할 뿐.
메마른 땅 위로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순간, 샐러맨더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촤악!
나는 가볍게 몸을 틀어 녀석의 습격을 피했다. 놈의 발톱과 화염이 날 스쳐지나가긴했지만, 조금의 상처도 남지 않았다.
'······전투 센스 좋네.'
윤서현 헌터의 보호막 덕분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샐러맨더에 대응해 바로 스킬을 펼쳤다.
반응 속도 하나는 끝내 준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 동료 윤서현의 스킬 '공간 격리' Lv.3가 발동합니다. 』
『 지정 공간 내의 피해를 완벽히 차단합니다. 』
떠오른 메시지가 예상과 조금 달랐다. 아니, 아주 많이.
'응?'
인지 스킬이 레벨 11에 오르며 획득한 추가 효과 덕에 동료의 스킬이 보였다. 그런데 윤서현이 가지고 있던 스킬은 단순히 방어막이 아니었다.
'······.'
공간을 개변하는 최상위 스킬이다. 환세의 도둑 진세아가 가지고 있던 절대 강탈과 맞먹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 언니에 그 동생이었구만.'
쿠훌렌과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그녀도 멸망한 세계에서 한 자리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잠시 가만히 있자 윤서현이 물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어막 좋네요."
"후후, 이 정도는 하죠."
뿌듯해하는 윤서현을 두고, 나는 다시 물방울을 따라 움직였다. 이내 물방울이 한 자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빙글 빙글.
근데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 허공을 돌고 있는거지?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
옆에 있던 윤서현이 잔뜩 긴장해서는 물었다.
"저기에 뭐가 있는건가요?"
아무것도 없다. 인지 스킬을 써봐도 느껴지는 건 조금도 없다.
'근데 있을 수도 있겠어.'
나는 인벤토리에서 회수의 창을 꺼내 손에 쥐었다. 자세를 잡고 물방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창을 던졌다.
쐐애액! 파악!
공기를 가르고 날아간 창이 허공에 부딪혔다. 뭔가의 비명이 들렸다. 별안간 책 하나가 공중으로 던져졌다.
"크아악!"
동시에 열 개 가량의 메시지창이 쏟아졌다.
『 스킬 '간파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간파 Lv.2'을 획득합니다. 』
『 스킬 '간파 Lv.3'을 획득합니다. 』
..
.
『 스킬 '간파 Lv.10'을 획득합니다. 』
스킬창보다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장소에서 금빛을 띄는 고블린 한마리가 나타났다.
"뭐냐, 인간 놈······. 어떻게 알아낸 거냐. 여러모로 운이 안좋은 날이군."
놈은 내 창에 맞은 머리를 문지르면서 중얼거렸다. 놈의 날카로운 눈이 황금빛으로 번뜩였다.
나름 세게 던졌는데 상처 하나 없다.
"마, 말하고 있네요? 그때 그 고블린처럼요······."
윤서현이 손가락으로 고블린을 가리켰다.
"크큭, 신기한가? 어지간히 견문이 좁은 계집인가보군."
고블린은 그런 윤서현을 비웃더니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찾는건지 열심히 두리번 거린다.
"으음, 어디갔지?"
참 애타게 찾길래, 나는 손에 쥔 책을 들어 보였다.
"이걸 찾나?"
"네 놈 인간······."
금빛 고블린 녀석은 이를 꽉 물었다.
녀석이 내 창에 맞아 넘어질 때 책 한 권이 같이 떨어졌다. 붉은 물방울이 그 책을 가리키길래 냉큼 주웠다.
나는 그 책의 정보를 확인했다.
『 마기의 원천 : 이계 규율의 서 』
'뭐야, 이게 왜 여기에?'
이건 마기의 원천이었다. 다만, 내가 찾던 것은 아니다.
'이건 한국에 있을 게 아닌데.'
마기의 원천도 각자 생김새와 용도가 다르다. 특히 이 마기의 원천은 유명했기에 잘 알고 있다.
무려 군단장이 사용했던 책이니까.
'이 녀석이 다른 나라로 옮기고 있던 거구만.'
그제서야 대충 상황이 파악되었다. 나는 금빛 고블린의 얼굴을 바라봤다.
'저 특징적인 색깔은 몰라볼 수가 없지.'
황금 고블린 자볼.
놈은 미래에 고블린 왕이 되어, 고블린 일족을 일으키는 네임드 마수다. 멸망한 세계의 고블린들이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이유다.
"그건 고작 인간이 가질만한 물건이 아니다. 내놔라."
자볼의 손 위로 불길한 기운이 일렁였다. 돌연 허공에서 솟아난 보랏빛 안개가 나를 향해 쏟아졌다.
『 동료 윤서현의 스킬 '공간 격리' Lv.3가 발동합니다. 』
윤서현의 반응속도는 놀라웠다.
내 주변을 빙빙 맴돌던 안개는 나에게 닿지 못한 채 흩어졌다. 황금 고블린 자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허어. 편하게 죽여주려고 했건만."
자볼의 시선이 윤서현을 향했다.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윤서현 헌터. 윤지은 헌터를 불러와줘요."
"네?"
"당장요."
"혼자서 괜찮겠어요?"
그녀의 시선이 나와 자볼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 게이트 내부의 생물은 '회복' 할 수 없습니다. 』
회복 제한. 이 제약은 생각보다 성가시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장요."
"아, 알겠어요."
상황의 심각성은 전해졌을 거다. 이전에 성장의 마족을 경험했으니 지금 떠 있는 제약 메시지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 터.
공간이 일렁이더니 그녀가 사라졌다.
자볼이 킥킥대며 손짓했다.
"괜찮겠나? 저 여자의 보호막이 없어도?"
놈의 손에서 뿜어나온 안개가 다시금 나를 감쌌다.
『 정신계 마법 '세뇌'가 당신의 정신에 강력히 침투합니다. 』
자볼은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네임드 마수다. 모든 네임드 마수가 마족과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놈은 마족에게 빌붙어 한 자리를 얻어냈다.
'덕분에 자볼에 대한 건 꽤 자세히 알고 있다.'
『 스킬 '정신력 Lv.11'을 발휘합니다. 』
『 정신계 마법의 부정적인 효과를 모두 차단합니다. 』
놈의 주특기가 정신계 마법 세뇌라는 것도. 보랏빛 안개가 내 주변으로 자욱하게 차올랐다.
그러나 나는 멀쩡했다.
자볼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저항하지말고 얌전히 그 책을 가져와라."
저벅저벅.
나는 녀석이 시키는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래, 이제 책을······. 응?"
그러고선 인벤토리에서 영혼 포식자를 꺼내 휘둘렀다. 일자베기가 녀석에게 정통으로 적중했다.
콰아앙!
"커헉!"
강한 참격에 고블린이 그대로 튕겨나가 나무에 쳐박혔다. 나무가 바스라지며 파편이 튀어올랐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네.'
여지껏 만난 어떤 상대보다 높은 방어력이었다. 일자베기에 베이지 않을 정도니까. 당황한 건 나뿐이 아니었다.
자볼 또한 당황해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단 표정이었다.
"뭐, 뭐냐. 인간 따위가 어떻게 내 마법을······?"
확실히 일반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신력 스킬이 11레벨에 오르고 나서 받은 추가효과니까.
어쨌든 정신계 마법은 극복한지 오래.
나는 바닥에 쓰러져 콜록대는 놈의 머리를 향해 영혼 포식자를 들이 밀었다. 외상은 없다곤 하나, 아예 데미지가 없는 건 아니다.
"황금 고블린 자볼. 맞지?"
"······!"
나를 바라보는 놈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진다.
네임드 몬스터, 황금 고블린 자볼.
고블린 일족의 부흥을 위해서 움직이는 마수.
동시에 침체 마족의 권속.
놈에게 이 책을 넘겨 줄 순 없다.
붉은 물방울이 미친듯이 책의 주위를 휘감고 있다.
35화 재능 획득의 물약(4)
"네 놈······.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미간을 찌푸린 자볼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잘 알고 있지.'
황금 고블린 자볼.
이 놈은 네임드 몬스터다. 지성을 가지고 게이트를 넘나드는 특이한 마수.
그들의 목적은 개체마다 다른데, 자볼의 경우에는 고블린 일족의 부흥을 목표로 하고 있을 거다.
놈은 멸망한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던 대악(大惡) 중 하나였다. 마족의 편에서 인간들을 농락하던 마수.
놈이 이끄는 고블린 군단이 얼마나 잔인하고 포악한지는 말하고 싶지도 않다.
'이 무렵부터 활동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
나는 오히려 놈에게 질문했다.
"글쎄, 내가 왜 네 이름을 알고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자볼이 눈이 커졌다. 이내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설마 마(魔)를 따르시는 분이십니까?"
네임드 마수에게 있어 이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성도, 지성도 없이 야생에서 동물 같은 삶을 살아가는 동족들과 구별되는 유일성.
그들에겐 특별한 칭호나 다름 없다.
'확실히 이 시점에서 자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겠지.'
그러니 자볼은 내가 마족이 아닌가 의심하는 거다. 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 책은 제게 있어 아주 중요한 물건인지라, 무례를 무릅쓰고 청하건데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내 거짓말은 어느 정도 먹혔다. 놈이 드러내고 있던 이빨을 숨겼다. 하지만 의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
"혹 마족이시라면 그 힘의 편린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마족이 가진 특수 능력인 '제약'을 발휘하라는 의미였다.
여기에 대한 답은 이거다.
"더러운 고블린 새끼가 말이 많구나. 목숨이 아깝다면 네 놈의 목적부터 말해라."
나는 놈의 목에 닿은 칼날을 더 깊숙히 들이밀었다.
『 스킬 '거짓 연기 Lv.1'을 획득합니다. 』
『 스킬 '거짓 연기 Lv.2'을 획득합니다. 』
『 스킬 '거짓 연기 Lv.3'을 획득합니다. 』
이런 스킬이 다 있다.
살짝 어설프던 내 말투에 힘이 들어가고, 찌푸린 표정에도 그럴 듯한 언짢음이 깃든다.
내가 알기로 마족놈들은 인성이 전부 쓰레기. 강하게 나가야 자볼도 허튼 수를 못 부리겠지.
내 예상은 적중했다.
인상을 찌푸린 자볼이 마지못해 말했다.
"그저 책 한 권을 옮기고자 했을 뿐입니다."
"어디로?"
"그 다음은 힘을 보여주신다면 말씀드립죠. 예, 제 목숨을 걸고 말입니다."
네임드 몬스터라고 해도, 마족 앞에서 그 목숨은 바람 앞 촛불과 다름 없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배짱이다.
'이 정도 연기로는 부족한건가. 아니면, 마족이던 아니던 상관 없다는 건가.'
말로 속여 넘길만큼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어쨌든 미래의 고블린 왕이니.
'마족을 혐오한다고 하다던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인지 모르겠네.'
나는 책에 붙은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 마기의 원천 : 이계 규율의 서 』
'이계 규율······.'
분명 군단장 중 하나가 사용하던 능력에 그런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군단장은 반역을 이유로 마왕에게 살해 당하긴 했지만.
그 놈의 이름은 불사(不死).
"불사의 마족이 시킨 짓인가?"
내 말에 자볼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 스킬 '간파 Lv.10'을 발휘합니다. 』
간파는 상대의 거짓을 파악하게 해주는 스킬이다. 거짓은 은신이나 환영 같은 것을 포함한다.
『 대상과의 격차가 지대하여 스킬이 효과를 잃습니다. 』
얻은 김에 사용해보려고 했지만 녹록치 않다.
"힘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볼의 눈이 가라앉았다.
파스스!
어느새 퍼져나간 안개.
그 안에서 세 마리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전 내가 싸웠던 던전의 보스와 같은 생김새다.
'쉽지 않겠는데.'
현시점에서 자볼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고블린 왕이라고 불렸던 놈이니 보통은 아니겠지.
자볼은 내가 제약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물러서지 않을 태도다.
나도 어줍잖은 연기를 계속할 필욘 없겠지.
콰아앙!
일자베기가 만들어 낸 푸른 선이 자볼의 목을 강타했다. 튕겨나간 자볼이 바닥을 몇 번 구르더니 날 노려봤다.
"크으윽! 빌어먹을. 마족이든 아니든 상관 없다. 이 자리에서 묻어주마."
이를 바득바득 갈며 소리친다.
원래 그런 놈이다. 마족에게 붙어 있는 것도 본인의 목적을 위해서일 뿐.
파아아—!
나를 둘러싼 세 마리의 기사가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보랏빛 안개가 검기처럼 쏘아졌다.
나는 공중으로 뛰어 올라 놈들의 공격을 피했다.
붉은 물방울이 유려한 곡선을 만들어내며 내가 검을 휘둘러야 할 궤적을 미리 보여줬다.
서걱—!
떨어져내리며 쓴 일자베기에 기사 하나가 반으로 나뉘었다. 이어서 다른 기사에게 달려가며 일자베기를 시전한다.
이 놈들 하나하나가 중간 보스급인지라 기본 공격으론 단박에 끝낼 수 없다.
마지막 기사 한 마리까지 잡았을 때였다.
'자볼은 어디에 있지?'
그 사이에 은신을 써서 사라진 모양. 놈의 은신은 상위 스킬이다. 간파 스킬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놈을 찾을 수 있다.
휘릭.
붉은 물방울이 급선회하며 내 뒤를 향해 움직였다. 내 영혼 포식자 또한 같은 궤적을 그려냈다.
콰아앙!
검에 맞은 자볼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붉은 물방울의 효과가 대단하다. 내가 감지 못하는 놈의 위치까지 알려주고 있으니.
"커허억?! 어떻게?"
『 스킬 '간파 Lv.10'이 막대한 경험치를 얻습니다. 』
나는 기세를 놓치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들었다.
『 스킬 '체인지 웨펀 Lv.10'을 발휘합니다. 』
가녀린 푸른색의 불꽃이 창에 깃듦과 동시에 나는 자볼을 베어냈다. 아니, 베어냈다고 생각했다.
콰아앙!
바닥에 내다 꽂힌 자볼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역시 별다른 외상은 보이지 않는다. 고블린이 이렇게 단단할 수가 있나.
"이, 이 새끼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자볼이 손에서 마력을 터트렸다. 폭발음과 함께 보랏빛 안개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일순 시야가 제한 되었다.
그러나 놈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붉은 물방울을 따라가면 되니까.
퍼어억!
다시 한 번 놈의 옆구리에 창이 작렬했다.
"끄허억!"
그대로 날아간 자볼이 안개를 뚫고 나왔다.
놈이 정신 차리기 전에 창으로 한 번, 도검으로 한 번.
번갈아가며 연격을 날린다.
"크헉! 그만, 그만!"
말도 안되는 방어력과 피통이다.
『 열화 마도 : '회복 불가'에 의해 회복할 수 없습니다. 』
놈의 신체 능력 자체는 별 거 없다. 놈의 주요 능력인 세뇌는 강력하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뭐가 이리 단단해.'
다만, 내 공격도 놈의 방어력을 뚫기엔 역부족이다. 그 무엇도 회복되지 않는 게이트 속에서 내 체력과 기력만이 소비되어 갔다.
"후우······."
나는 잠시 공격을 멈췄다.
"아이고, 간만에 온 몸이 쑤시는 경험을 하는구만."
바닥에 쳐박힌 주제에 말은 잘한다. 놈도 몰골이 말이 아니긴 했다. 군데군데 멍이 든 걸로 보아 공격이 의미 없는 건 아니었다.
"인정하마. 강하구나, 하지만 날 죽일 정도는 아니야. 네 놈의 체력이 다하기 전에 내게 제대로 된 상처나 만들 수 있을까?"
놈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후우······."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한계다. 일자베기는 가뜩이나 기력을 많이 소모하니까.
우우웅.
자볼의 손 위로 검은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농구공만해진 마력이 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내 마력은 아직도 충분히 남아 있다. 만약 네 놈이 마족이라면 안 됐지만 걱정마라. 대업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으니 말이야. 너 하나 죽는다고 달라질 건 없다."
그리 이죽인 녀석이 손 위의 마력을 던졌다.
부웅!
마력 구체가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날아왔다.
피하기 위해 몸을 트는 순간, 마력 구체가 방향을 꺾어 내게로 날아왔다. 유도 성능이 있는 공격이었다.
그 사이 자볼은 다시 한 번 모습을 감췄다.
후우.
나는 달리면서 깊게 숨을 쉬었다. 체력이 회복 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피하기는 글렀다.
결론은 하나다.
마력 구체를 잘라낸다.
『 스킬 '체인지 웨펀 Lv.10'을 발휘합니다. 』
『 스킬 '일자베기 Lv.11'을 사용합니다. 』
일순 영혼 포식자의 칼날에 푸른 마력이 깃들었다. 나는 침착하게 내게로 다가오는 마력의 구를 단번에 양단했다.
콰아앙!
반으로 나뉜 마력 구체가 바닥에 닿자 폭발을 일으켰다.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나는 녀석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자볼, 자볼은 어디에 있지?'
찾는 건 간단했다. 지체 없이 붉은 물방울을 따라 창을 던졌다.
퍼억!
다시 한 번 창을 맞은 자볼이 벌러덩 넘어졌다. 무슨 촌극인지 모르겠다.
"크허억!"
『 스킬 '간파 Lv.11'를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레어 등급 이하의 은신류 스킬을 100% 간파합니다. 』
놈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이, 이해가 안가는군. 그만한 통찰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을텐데······."
"내가 할 소리다. 학습을 못하는 건지 머리가 멍청한 건지."
"크윽, 이 버러지 새끼가!"
상당히 상위 스킬인가본데, 붉은 물방울 앞에선 어림도 없다. 무려 인과역전의 상점에서 얻은 아이템이니까.
콰악!
나는 자볼의 몸통을 발로 짓눌렀다.
놈은 끝까지 날 노려보며 이죽였다.
"그래도, 그래도 네 녀석은 절대 날 못 죽인다. 날 때리다 이곳에서 체력이 다해 죽을거야. 크크큭······."
그건 그렇다. 마력 구체를 베어내는 순간 내 체력은 거의 방전 되었다. 이제 일자베기를 쓸 기력도, 마력을 부여할 힘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기력이 없으면 만들어내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나는 품 안에서 유니콘의 피를 꺼내 들었다.
'생각보다 윤지은이 늦어진다.'
저쪽에서도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가급적이면 아끼려 그랬지만 그랬다 죽는 것보단 나으니. 그리고 붉은 물방울도 그 사용을 격렬히 반기고 있었고.
"이, 이 새끼······!"
유니콘의 피를 확인하는 자볼의 눈이 커졌다. 놈도 알고 있는 거다. 자신의 제약이 가진 유일한 약점인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 유니콘의 피를 섭취하셨습니다. 』
회복 제약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확실한 게 이거다.
『 대상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
유니콘의 피의 효과는 확실했다. 그 한 방울에 기운이 돌아왔다. 심지어 아직 몇 방울이 더 남았다.
회복 제약의 약점.
회복은 못해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제약이 없다.
콰아앙!
이어지는 일자베기의 충격에 자볼이 바닥을 굴렀다. 방어력은 높지만 놈의 신체 능력 자체는 뛰어나지 않다.
"크으윽!"
회복 제약은 권속인 자볼에게도 유효하다. 축적되는 데미지는 회복 될 리가 없다. 그럼에도 놈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만 포기해라. 소용없다. 아무리 두들겨도 나는 죽지 않는다. 내게 참격을 먹이지 못하는 한 나는 죽지 않는단 말이다. 이제 포기하고 책을 내놔라. 그러면 갈 길을 가게 해주지."
아까의 위세가 좀 죽었다. 죽이겠다는 말은 없어졌다. 놈도 맞는데에 이골이 난 모양. 근데 쳐맞는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확실히 효과가 없을지도 모르지."
붉은 물방울이 놈의 가슴팍을 맴돈다.
"근데 그렇다고 널 살려 보낼 수도 없거든."
마기의 원천을 내놓을 생각은 더더욱 없다.
스킬 체인지 웨펀을 사용했다. 인벤토리에서 흘러나온 빛이 창으로 바뀌었다. 다시 한 번 사용하자 내 손에 도검이 쥐어졌다.
'조금 더, 조금 더 확실한 공격을 해야한다.'
화르륵.
그 위로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려나가 일자베기를 시전했다. 길게 뻗어진 직선의 꼬리가 푸른 빛을 쏟아냈다.
붉은 물방울이 가리킨 지점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커헉! 그래 봤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자볼린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촤르륵!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미친듯이 쏟아졌다.
『 시스템이 치명적인 일격을 감지합니다. 』
『 스킬 '방어무시 Lv.1'를 획득합니다. 』
『 스킬 '방어무시 Lv.2'를 획득합니다. 』
『 스킬 '방어무시 Lv.3'를 획득합니다. 』
···
..
.
『 스킬 '방어무시 Lv.10'를 획득합니다. 』
『 대상의 방어력을 5% 무시합니다. 』
붉은 물방울이 내놓은 해답은 이거였다.
촤아악!
아무리 베어도 공격을 받아내던 황금 고블린이 가죽이 찢어졌다. 붉은 피와 함께 자볼이 바닥을 굴렀다.
"뭐, 뭐야?"
놈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볼은 비쩍마른 손으로 가슴께에 흘러나온 피를 닦아내더니 중얼거렸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는데······."
놈이 자신만만하던 가죽이 처음으로 뚫렸다. 무슨 원리로 그렇게 단단한 건지 모르겠지만 자신에는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 자신감이 방금 무너졌다.
"빨리 도망쳐야······."
스륵.
한순간에 놈의 모습 사라졌다. 여전히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놈이 끝까지 살아남아 고블린 왕이 되는데엔 다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그러나.
붉은 물방울 앞에서 그러한 능력은 무용지물이다. 부풀어 오른 물방울이 녀석의 위치를 가리켰다.
다급히 어디론가 도망가려는 녀석의 움직임. 책을 회수하겠다는 생각은 버린지 오래 같다.
나는 그곳을 향해 창을 던졌다.
파악!
힘껏 던진 창이 그곳에 작렬했다. 은신이 풀린 자볼이 쓰러졌다.
콰득.
나는 재빠르게 달려가 놈의 몸뚱이를 발로 밟았다.
"내가 고작······. 이런 놈한테 죽을 리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다.
『 영혼 포식자 : '혼령 개방'을 사용합니다. 』
『 일시적으로 공격 범위 및 위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
혼령 개방을 사용했다. 치솟아 오르는 푸른 연기. 창을 거쳐 도검을 쥐었다.
『 스킬 '방어무시 Lv.10'을 발휘합니다. 』
"이걸로 끝이다."
내 모든 힘을 실은 일자베기가 자볼에게 작렬했다. 놈의 볼썽 사나운 비명이 메마른 땅 위로 울려퍼졌다.
* * *
자볼은 죽었다.
『 영혼 포식자가 마(魔)의 기운을 흡수합니다. 공격력 + 3 ( 4 / 5 ) 』
『 영혼 포식자의 현재 공격력 : 30( +12 ) 』
마기를 흡수한 영혼 포식자가 옅게 떨렸다.
그 공격력은 무려 42. 혼령 개방 능력까지 포함하면 이제 유니크 못지 않은 좋은 무기가 되었다.
『 1321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또한 막대한 양의 포인트가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 마(魔)를 추종하는 자의 존재가 사라졌습니다. 』
『 게이트 내의 제약이 완전 해제됩니다. 』
파스스······.
자볼의 시체가 빛나더니 조그만 황금 돌멩이로 변했다. 네임드 마수는 이런 식으로 영혼석을 남긴다.
『 자볼의 영혼석 』
『 황금왕의 창고 열쇠 』
'열쇠라.'
예상치 못한 소득이었다. 자볼이 모아둔 재화와 보물이 가득 쌓인 창고를 열 수 있는 키다.
'근데, 현 시점에서는 놈의 창고에 접근할 방법이 없는데······.'
그래도 나중에 쓸모가 있겠지. 나는 영혼석과 열쇠를 둘 다 인벤토리에 넣었다.
'윤지은 헌터가 늦는데.'
자볼이 게이트 내에 오래 머무른 탓이겠지. 본래라면 놈은 바로 게이트를 빠져나갔어야 했다.
'놈을 처리했으니, 이제 괜찮겠지.'
상황을 살피러 가기 전에 해야할 일이 있었다.
나는 자볼이 탐하던 책을 꺼내들었다.
스스스······.
붉은 물방울 또한 책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사라졌다.
『 아이템 정보 』
- 이름 : 마기의 원천 - 이계 규율의 서
- 등급 : 없음
- 종류 : 스킬북
- 설명 : 해당 내용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마기의 원천의 형태는 여러가지다. 지난번에는 잔이었다면 이번에는 책. 그런데 그냥 책이 아니라, 스킬북의 형태다.
'스킬을 얻을 수 있는 책.'
자세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지만, 이 능력은 미래의 군단장이 가지고 있던 것이다. 나 또한 딱 그 정도로만 알고 있다.
'붉은 물방울이 여기서 멈췄다는 건······.'
앞으로 스킬을 습득하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단 의미였다. 백묵의 명함이 미래의 재물과 연결 된 것처럼 말이다.
'고민할 필요는 없다.'
더욱 강해져서 스킬을 모을 수 있다면 못할 게 없으니까.
나는 책을 펼쳤다.
파아아!
그 안에서 강렬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금빛을 띈 고리 하나가 내 팔을 감쌌다.
『 이계의 규율이 당신의 영혼에 깃듭니다. 』
고리는 내 팔목에서 멈추더니 점점 줄어들었다. 기이한 금색 문자가 새겨진 팔찌가 팔목에 완전히 달라붙었다.
빛을 잃은 팔찌는 검은색이 되어 문신처럼 피부에 깃들었다.
'이건 대체······.'
문신은 희미해지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시스템 메시지는 계속 떠올랐다.
『 이계 규율이 EX급 특성 '무재조정'을 인지합니다. 』
『 대상의 인과적 특이점이 관측 한계를 초월합니다. 』
파직!
시스템 창에서 붉은 노이즈가 튀어 올랐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전에도 경험했던 현상이다. 두 개의 스킬이 충돌이라도 일으키고 있는 건가?
『 이계 규율 대상에 대한 판단을 유보합니다. 』
그런 의문이 끝나기 전,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솔직히 나도 이계 규율이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 모른다.
그저 아랫입술을 깨물며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할 뿐.
『 이계 규율 첫번째 : 업적 기록 』
'업적?'
업적이라면 게임 같은데 나오는 시스템 아니던가. 헌터의 시스템도 상당히 게임 같기는 하지만 완벽한 게임은 아니었다.
업적이나 칭호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메시지는 담담히 텍스트를 출력해냈다.
『 해당 업적을 정산합니다. 』
- 업적명 : 네임드 몬스터 고블린 자볼 처치
- 기록 : 성장력 SSS, 데미지 C+, 전투 S, 간파 S, 미래시 S······.
- 종합평가 : S+
그런데 그 평가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다. 너무 과하다.
'설마.'
내가 녀석에게 먹인 데미지는 C+가 적당한 것 같다. 다만, 전투나 간파 같은 것은 전부 물방울의 도움을 받은 거였다. 내가 직접한 부분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평가는 S.
인과역전의 물약이나 무재조정의 성장치를 고려하지 않은 기록이었다.
결과적으로 내 종합평가는 S+란다.
홀로그램 메시지와 함께 금빛 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시야를 완전히 뒤덮을 정도로 화려하고 요란한 이펙트였다.
『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
『 해당 업적의 실현 가능성은 0.00001% 미만입니다. 』
『 보상을 지급합니다! 』
'이, 이게 맞아?'
메시지를 바라보는 내 눈이 커졌다.
36화 드래곤 슬레이어(1)
『 이계 규율이 업적에 대한 보상을 지급합니다. 』
『 칭호 : 초성장(超成長)을 획득합니다. 』
『 해당 칭호를 가진 플레이어는 두 배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이, 이게 맞아?'
메시지를 바라보는 내 눈이 커졌다.
- 기록 : 성장력 SSS, 데미지 C+, 전투 S, 간파 S, 미래시 S······.
무언가, 무언가가 뒤틀려 있다. 업적 평가부터가 내 무재조정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그 보상조차 정상이 아니다.
이미 경험치가 10만배인 나한테 2배의 경험치라니? 그럼 20만배가 되는건가? 거기까진 모르겠다.
'이계 규율과 무재조정은 뭔가 결이 다른 것 같은데.'
같은 시스템 내에서 메시지를 표시하지만 근본적인 무언가가 다른 느낌이다.
하나는 확실했다.
'이계 규율의 첫번째 능력은 업적 시스템이란 것.'
이렇게 본다면 불사의 마족이 그리 강대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마족의 2인자 자리에 올랐던 불사의 마족.
'불사의 마족은 그걸로 성장한 거야.'
이런 식으로 보상을 받으며 강해졌겠지. 다만, 나처럼 사기적인 평가를 받았는지까지는 모르겠다.
'결국 마계왕한테 반역하다 죽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사 마족의 이름은 널리 퍼졌다. 미국 전역을 불사의 마족 하나가 휩쓸었으니 그 강력함은 짐작 가능했다.
'그 힘이 내 손에 들어왔다.'
당장은 경험치 두 배지만, 사실은 그 두 배조차도 다른 헌터들이 봤다면 기겁을 할 사기적인 능력이지.
나는 피어오르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
'앞으로 어떤 보상을 얻을 수 있을지······.'
그 끝을 가늠할 수가 없다.
파스스.
이계 규율이 내 몸에 깃든 뒤, 책은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아직 확인해야 할 게 하나 남았지.'
바로 마기의 원천에 대한 메시지.
『 마기의 원천을 회수하였습니다. ( 2 / 3 ) 』
이걸로 총 두 개의 마기 원천을 없앤 셈이다.
'예정에 있는 회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회수는 회수지.'
이 책은 원래 물 건너 해외로 반출될 마기의 원천이었다.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두 개의 마기 원천이 남아있다.
'뭐, 다 가져올 필욘 없다.'
'프로젝트:마기'를 막기에는 충분하다.
어쨌든 이제 남은 건 하나.
『 두번째 마기의 원천을 회수하여 보상을 지급합니다. 』
『 재능환(5년급)을 획득하셨습니다. 』
'이건 또 뭐지?'
『 아이템 정보 』
- 이름 : 재능환(5년급)
- 효과 : 일시적으로 5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의 재능을 얻습니다. 지속시간 : 1시간
'오······.'
5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한 천재라. 애매한 듯하면서도 천재라고 하니 마음이 혹한다.
재능 없는 나에겐 감지덕지다.
'이건 재능을 배울 때 사용하면 유용하겠어.'
재능을 전수 받을 일이 몇 번 더 있다. 그때 사용하면 힘들이지 않고 스킬을 획득할 수 있을 거다.
'아니면 전투 직전이라던가.'
아이템과 메시지 창의 확인은 끝났다.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긴 했다.
'자볼을 잡은 게 앞으로 어떤 영향을 불러 올지 모르겠네.'
녀석은 마기의 원천을 해외로 가지고 갈 예정이었다. 놈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바치려고 한 건 아닐거고, 불사 마족과의 교섭 재료로 사용하려던 것 같은데.
'정확한 예측은 어렵지만, 놈들의 움직임이 달라질 수 있겠지.'
자볼은 마족의 권속이었다. 침체의 마족이 그의 주인인데, 녀석은 자볼이 죽었단 걸 알았을 거다.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진 못하겠지만.'
운 나쁘게 윤지은 헌터에게 걸렸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자볼은 그만큼 강했으므로.
'무엇보다 권속 하나 죽였다고 나설 마족은 없다.'
마족의 권속 취급은 노예 정도.
'그럼 이제 윤지은 헌터쪽의 상황을 보러갈까.'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황량한 땅과 확연히 대비되는 신선한 공기였다.
타앗.
어디선가 나타난 윤지은 헌터가 사뿐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네요. 괜찮으세요? 서현이 말로는 아주 위험했다고 하던데······."
"괜찮습니다."
그녀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아마 그쪽에서도 무슨 일이 있었을 거다. 잘 해결된 모양이라 다행이다.
"휴,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사실 보고 있기는 했어요. 이기고 계시길래 확실히 마무리 짓고 돌아왔거든요."
"그런 거였군요."
윤지은의 스킬 천리안. 멸망한 세계의 그녀는 전장에서 마수와 싸우면서도 피난민의 상태를 체크할 수 있었다.
윤지은만큼 피난민들을 신경 써주는 영웅은 없었기도 하다.
'사실은 윤지은 헌터의 참전도 상정한 싸움이었지만, 결과가 좋으니 상관 없지.'
천리안은 소리가 들리는 스킬은 아니었다. 싸움만 놓고 보면 내가 이기고 있는 그런 싸움이긴 했으니까.
털썩.
윤지은의 뒤쪽으로 윤서현 헌터가 쓰러졌다.
"흐아······. 다, 다행이다. 아무일도 없었던거죠?"
윤서현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급하게 S급인 언니를 따라오느라 숨이 찬 모양이었다.
"그럼, 이지한 헌터님이 있는데 무슨 일 있겠니?"
윤지은이 놀리듯 말했다.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윤지은의 눈이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
그녀가 짝하고 박수를 쳤다.
"그럼, 게이트 브레이크도 막아냈는데, 식사라도 하고 갈까요? 할 이야기도 있고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