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천하의 병마장군왕(兵馬將軍王)
대제(大齊) 선평(宣平) 45년.
도성의 교외에 자리한 다 허물어져 가는 낡은 정원.
한차례, 그리고 또 한차례 큰 눈이 내렸다. 거위 깃털 같은 눈송이는 쌩쌩 부는 찬바람과 함께 빼곡히 날려, 세상천지를 온통 은빛으로 소복이 덮었다.
뽀득, 뽀득-
정원 한가운데에서 여인의 가벼운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꽃이 수놓아진 꽃신이 쌓여 있는 눈을 조금씩 밟아 내려갔다. 여인은 붉은 피풍에 달린 모자를 써서 음험한 눈빛을 가린 채 뾰족한 턱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내 고운 손을 내밀어 방문을 잡은 여인은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삐걱-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던 스산함이 방 안까지 퍼졌다. 그러자 침상에 기대있던 수척하게 야윈 여인의 얼굴을 덮은 얇은 흰 천이 멈추지 않는 기침 소리와 함께 아래로 위로 오르락내리락했다.
기침 소리를 듣자 붉은 피풍을 입은 여인의 입꼬리가 더욱 큰 곡선을 그렸다. 그녀는 진운서(秦雲舒)가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방문한 이가 누군지를 알아본 진운서가 두 손으로 침상을 힘껏 밀치듯이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무미건조하면서도 냉랭함이 배어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뭐하러 왔어?”
가볍게 웃으며 피풍을 벗은 소여옥(昭如玉)은 명문가의 귀부인다운 자태를 뽐내기라도 하듯 느릿하게 한 발 앞으로 다가가더니, 경멸하는 시선으로 진운서를 바라보았다.
“지금 네 꼴을 좀 봐. 예전 그 기품 넘치던 대제의 이름난 미인이 이 지경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침상을 짚고 있던 진운서가 그 말에 손을 꼭 쥐었다. 하지만 진운서의 눈빛은 여전히 담담했다. 진운서는 자신이 화를 낼수록 소여옥이 더욱 의기양양해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반드시 침착해야만 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동요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잠시 후 누군가의 이름 세 글자를 들었을 때, 진운서의 모든 인내심은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다.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친 천하의 병마장군왕, 내 부군인 소근언(蕭瑾言)이 제후에 봉해졌어.”
소여옥에게서 그 말을 듣자, 찬바람에 물이 얼어붙은 것처럼 진운서의 눈가에 처량하게 눈물이 맺혔다. 요 몇 년 사이, 그녀는 마음속에 높고 견고한 보루를 쌓아왔다.
진운서는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자신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을 거라고 믿었으며,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소여옥이 비웃는 투로 물었다.
“소근언이 왜 나랑 혼인했는지 알고 싶니?”
진운서는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을 만큼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소여옥더러 닥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또다시 시작되는 기침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쿨럭, 쿨럭!”
소여옥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네가 소근언에게 이미 네 혼사가 결정되었다고 말하던 그 날, 난 소근언의 제수를 매수해서 술에 뭔가를 탔어. 그 사람, 몸도 정말 근사하고 힘도 대단하던 걸? 비록 나를 너로 착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난 개의치 않았어.”
그 말에 진운서의 창백한 얼굴이 일순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울분이 순식간에 솟아오르는 바람에 숨을 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아니야!’
그녀는 애초에 다른 사내와 혼약을 맺은 적이 없었다. 그날 그녀가 성질을 부리며 한 말은 그저 모두 화가 나서 생각 없이 내뱉은 것에 불과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자 소여옥은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늘 고고하고 점잖던 진운서가 이 꼴이 되어 자신에게 화를 내다니!
“진운서, 8년 전 오늘을 기억해?”
소여옥은 그렇게 말한 후 치켜 올라간 눈을 점점 가늘게 떴다.
진운서는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 8년 전 오늘, 섣달 초파일을 그녀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날, 연자갱(*蓮子羹: 연밥을 넣고 끓인 요리)을 먹고 잠이 든 그녀는 옷매무새가 다 흐트러져 맨살이 드러난 몸으로 궁중의 대나무 숲에 있던 정자 위에서 깨어났다. 그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불결하다며 손가락질했고, 그녀의 평판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당연히 잊지 못했겠지. 진가 대소저, 모든 일은 내가 벌인 거야. 내가 남몰래 계획한 일이라고. 세상의 어느 사내가 수치도 모르는 여인을 원하겠어?”
“이…… 이 파렴치한!”
극도로 분노가 차오른 진운서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손을 꽉 쥐는 바람에 손톱이 장심(掌心)을 깊게 파고들어 두 손이 붉게 물들었으며, 목구멍 속에서도 비릿한 피 냄새가 솟아올랐다.
“쿨럭!”
기침과 함께 붉은 피가 솟구쳐 진운서가 얼굴에 쓰고 있던 흰 천 위에 흩뿌려지더니,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질 정도로 선명하고 소름 끼치는 핏자국을 남겼다.
그러자 소여옥은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 죽어가는 마당에 아직도 그런 천을 쓰고 있어? 하긴, 굉장한 불이었지. 그렇게 계속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면, 그 흉한 꼴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일은 없겠네!”
말을 마친 그녀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노려보지 마. 난 네 숙모 앞에서 몇 마디 거들었을 뿐이니까. 그 여자가 감히 너한테 불을 지를 줄 누가 알았겠니?”
“넌…… 천벌을 받을 거야, 천벌을…… 쿨럭!”
울화가 치민 진운서는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나 숨이 목구멍에 턱 막혀 말 한마디 제대로 내뱉을 수 없었다.
진운서는 눈앞의 저 여인을 몹시 증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후회되는 과거의 일을 되돌릴 방법이 이 세상에는 없었다. 자신을 속이기 위한 그 모든 모략을 미리 알아차렸어야 했다. 이런 뻔한 수법에 걸려든 결과는 그녀 자신이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된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진부(秦府)까지 지위를 잃게 되었다.
그리고 진운서가 좋아하던 그 사람, 소근언. 그녀는 거만과 오만 때문에 소근언을 영원히 잃고 말았다.
진운서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굴러떨어져 얇은 흰 천을 적시자, 젖은 천 사이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한 화상 자국이 드러났다.
목구멍에 턱 막혀 있던 숨은 끝내 트이지 못했다.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도 진운서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크게 숨을 내쉰 소여옥이 그녀의 몸 위에 거칠게 침을 퉤, 뱉으며 말했다.
“천벌? 내가 바로 정북후(定北侯)의 부인이며 내 부군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데, 누가 감히 내게 천벌을 내린단 말이야?”
말을 마친 그녀는 우아하게 돌아섰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슬며시 씁쓸한 기분이 번지고 있었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 소여옥 자신은 고귀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 소근언 그 사람은…….’
* * *
정원 가문비나무의 푸른 가지들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새하얀 눈을 덮어쓰고 있었다. 대나무 숲 안의 정자에서는 옅게 화장된 얼굴 위로 얇은 흰 천을 뒤집어쓴 여인 하나가 돌로 된 탁자에 기대어 있었다. 그녀의 허리띠는 이미 한참 아래로 흘러내려, 붉은색 두두(*肚兜: 앞가슴과 배를 가리는 옛 중국식 속옷)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문득 눈을 뜬 여인은 무의식중에 오른손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더듬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몹시 부드러운 비단이 잡혔다.
그 촉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인 진운서는 너무 놀라서 숨이 턱하고 막혔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난 이미 죽었잖아. 오만방자한 소여옥의 앞에서 죽어가던 내가 어찌 여기에 와있단 말이야?’
옷을 따라 시선을 내려가 보니, 허리띠가 흘러내린 채 옷매무새가 모두 흐트러져 있었다. 진운서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짙은 설매(雪梅)향 속에 잠긴 어화원(御花園)……. 이곳은 바로 황궁의 대나무 숲에 자리한 정자였다.
진운서는 떨리는 온몸을 애써 전정시켰다. 그녀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이 광경을 잊지 못했다.
8년 전 섣달 초파일, 진운서는 바로 그날로 돌아왔다. 다시 태어나, 8년 전의 그 순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끝없는 기쁨이 감격으로 변해, 진운서는 아무리 자제하려 해도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탁, 타닥, 탁-
그런데 그때, 먼 곳에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발소리가 멍해진 그녀를 순간 다시 현실로 끌어다 놓았다.
전생의 오늘,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궁중의 정자에 누워 있던 진운서는 다수의 사람에게 목격되어 평판이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어젯밤, 진운서는 소여옥이 건네준 연자갱을 마셨다. 다행인 건 그녀가 다시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8년 전 그날로 깨어난 시간이 마침 적당했다는 점이다.
진운서는 재빨리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몇 분 후 사람들이 근처까지 달려왔을 때, 그녀는 붉은색 겉옷을 제대로 차려입은 채 정자에 단정히 앉아, 매화 향기를 음미하면서 겨울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태자 전하, 어젯밤 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소녀는 과일주를 너무 많이 마시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깨어나 보니 방에 있던 운서가 보이지 않았지요. 운서가 밤이 새도록 돌아오지 않아, 소녀도 몹시 초조합니다.”
멀리서 소여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어 하나하나 모두 소여옥이 지난 생에 했던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적서 차별이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출은 황궁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나 진운서는 소여옥의 끈질긴 요청에 못 이겨 그녀를 궁으로 데려오고 말았었다.
어젯밤 연회 상에 오른 과일주의 맛과 향이 훌륭하여, 사람들은 그만 과음을 해버렸다. 이에 태후는 그들더러 궁에서 하룻밤 묵고 가라고 명했다.
평범한 연회처럼 보였던 이날이 진운서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필코 전생과 다르리라. 비로소 비통하게 마감한 인생을 뒤집어 만회할 기회가 진운서에게 찾아왔다.
진운서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입꼬리를 올리며, 옷소매 안에 감춰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태자 전하, 저 사람은…….”
초조함에 가득 차 있던 소여옥의 맑은 목소리가 뚝 그쳤다. 이내 진운서가 몸을 돌려 가볍게 웃었다. 순간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로 소여옥의 놀란 눈동자였다.
전생에서 여러 사람에게 발견된 진운서는 옷 속에 입은 두두까지 모두 보여주고 말았다. 규방에서 곱게만 자라온 그녀는 당시 너무나 당황하여 이 모든 일을 수습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혼란스러워하면서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걸음걸이 하나조차 예전과는 다르게 움직일 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