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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허풍을 떨다

12화. 허풍을 떨다

주변에 사람이 사라지길 기다리던 사경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 약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것이오?”

사람들이 보기에는 남장군주가 약을 마셨으니 더는 의심할 것이 없었다.

이내 소운이 냉소를 지었다.

“그건 불임약이었어요.”

남장군주는 이미 자녀가 있으니, 그 약은 그녀에게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할 터였다.

순간 사경신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행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분노하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의술을 배우지 않으셨다면 저 자들 의도대로 됐겠네요. 어쩜 그리 잔인할까요? 그래도 아가씨께서 총명하셔서, 남장군주께선 괜히 자기 발등만 찍게 되셨네요.”

소운이 찬물을 끼얹으며 말했다.

“남장군주는 진짜로 약을 마신 게 아니었어. 그저 마신 척하고 내게 보여주신 거야.”

그러자 행아는 정말 화가 났다.

“소인이 동향후 나리와 마님께 가서 모두 고하겠습니다!”

소운이 행아를 붙잡으며 말했다.

“이 일은 부모님께 알리지 마. 어쨌든 나도 멀쩡하고, 괜한 걱정 안겨드리고 싶지 않아.”

도성에 기반이 없는 동향후부가 어찌 진국공부의 적수가 되겠는가. 증거도 없이 함부로 나선다면, 괜히 소운이 남장군주를 모욕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 어찌한단 말입니까?”

행아가 입을 삐죽 내밀며 물었다.

“토비의 복수는 삼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 법이야.”

“저 자들이 이리 악랄한데 삼 년이나 살아남을 수는 있을지, 소인은 자신이 없습니다…….”

소운이 사경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셨나요? 우리집 여종도 이해하는 것을 명색이 큰 공자인 당신께서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사경신이 침묵하더니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듣기 좋소.”

“하! 부끄러운 줄 모르고!”

“…….”

“…….”

행아와 사경신은 할 말을 잃은 채 소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운은 울고 싶었다.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뱉어져 나와 버렸다. 방금 한 말을 취소할 수는 없을까?

그러나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소운은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사경신이 낮게 웃으며 뒤를 따랐다.

소운은 그 웃음소리를 듣자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번 실수가 천추의 한이 된다더니, 두아(*竇娥: 중국 원대의 희곡 두아원竇娥寃의 주인공으로, 억울하게 살해 혐의를 뒤집어쓰고 살인죄로 사형 당함)도 자신만큼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걸음을 걸어가던 소운이 몸을 돌려 사경신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당신, 돈은 얼마나 있는 거예요?”

곁에서 행아가 생각 없이 입을 놀렸다.

“아가씨, 고야께서 아가씨를 도우시려고 삼만 냥이나 주셨잖아요. 이렇게 고야의 돈을 빼앗을 게 아니라, 진국공부에 사람도 많으니 차라리 그 자들의 돈을 털어버리죠.”

그러자 소운은 머리가 아파져, 행아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물었다.

“이 큰 진국공부에서 누구의 돈을 턴단 말이냐?”

행아가 머리를 문지르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가씨, 변하셨어요. 전에는 토비가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에 털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아가씨 눈에 들었다 하면 아가씨가 스스로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닌 이상, 아가씨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없다고 그러셨잖아요.”

“……그거 다 내가 허풍 떨었던 건데, 몰랐어?”

“소인도 알았지만, 소인은 아가씨께서 허풍을 떠는 게 좋단 말이에요.”

소운은 할 말을 잃고 있다가, 사경신이 웃는 소리를 듣고는 얼굴부터 귀까지 전부 빨갛게 달아올랐다.

‘웃긴 뭘 웃는 거야?’

소운이 사경신을 째려봤다.

“웃다가 옆구리 터지겠어요.”

사경신은 웃음을 꾹 참았지만, 즐거운 기분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나는 한 번도 당신이 허풍 떠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내게 한 번 보여주면 안 되겠소?”

그 말에 소운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사람이 허풍 떠는 걸 듣고 싶다니, 이게 무슨 취미란 말인가.

“당신이 소를 끌고 오면, 바로 부는 걸 보여줄게요.” (*吹牛皮: 소가죽을 분다는 뜻으로 허풍을 떤다는 뜻)

이 여인은…… 역시 머리 회전이 빨랐다.

사경신이 웃으며 소운의 손을 잡아끌었다.

“갑시다, 내가 양우장(养牛场)으로 데려다줄 테니 한 번 실컷 불어보시오.”

소운이 얼굴을 붉히며 잡힌 손을 뿌리치고 사경신에게 말했다.

“귀찮아요. 양우장은 분명 냄새가 지독할 텐데, 정말 보고 싶으면 굳이 멀리 가서 찾을 필요 있나요? 바로 보여줄게요.”

사경신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눈썹을 치켜세우자, 소운은 능글맞은 눈빛으로 다가와 그를 향해 바람을 불었다.

“느껴지죠?”

마치 이슬을 머금고 핀 연꽃 같은 티 없이 맑고 고운 얼굴이 눈앞에 다가와,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사경신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재차 묻는 소리에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꼬집으려 했다. 이 여인은 그를 소라고 칭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손이 소운의 얼굴에 닿기 전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저쪽의 큰 나무 옆을 바라보았다.

“숨지 말고 나와라!”

말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한바탕 제멋대로 통쾌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나무 위에서 훤칠해 보이는 그림자 하나가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재빠르고 시원스럽게 뛰어내렸다.

남자는 사경신보다 한 살 정도 어려 보였지만, 의기양양하고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곧이어 내뱉은 매를 버는 말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해주었다.

“‘소’ 형님과 ‘소’ 형수님을 뵙습니다.”

그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소운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엿듣고 있다 들켰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오히려 그들을 놀리는 것을 보니, 이 남자는 사경신과 사이가 꽤 좋은 것 같았다.

사경신에게 소개를 받고 나서야 소운은 그가 정국후 세자 초순(楚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경신이 초순을 보고 물었다.

“국공부에는 무슨 일로 온 것이냐?”

그러자 초순이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길거리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듣고 안심이 되지 않아 형님을 뵈러 온 것 아니겠습니까?”

소운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유언비어를 들어 안심이 되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초순이 들은 말은 분명 듣기 좋은 말은 아닐 테니, 불편한 상황을 피하려면 듣지 않는 편이 나았다.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면 초순은 여토비가 얼굴을 붉힐 줄이야, 라며 의아해할 테고, 반면 얼굴을 붉히지 않으면 역시 여토비는 얼굴이 두껍다고 놀라며 감탄할 게 빤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소운은 몸을 돌리자마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초순은 사경신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형님, 정말 순결을 잃으신 겁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사경신이 화를 내자, 초순은 어깨를 움찔했다.

“거리에 형님이 여토비에게 강제로 추행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게다가 이 소문은 진국공부에서 시작된 걸요. 형님이 어젯밤 정신을 잃은 사이 여토비한테 발가벗겨져서 이리저리 만져지고 농락당했다고요.”

사경신의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온몸에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초순은 낙담하며 말을 이었다.

“결국, 제가 직접 보니 소문과는 영 딴판이네요. 형님이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고 자결이라도 하시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부랴부랴 달려왔는데…….”

오는 내내 그는 형님을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까 싶어 걱정했었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두 사람이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며 시시덕거리는 모습이었다. 초순은 사경신과 알고 지낸 오랜 세월 동안, 그가 이렇게 기쁘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초순이 놀라서 얼이 빠질 만도 했다.

초순은 마음이 복잡했고, 속상하기도 했으며, 형님이 더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한스럽기도 했다.

“그럼 여토비가 형님이 자는 사이 덮친 겁니까?”

사경신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믿는 것이냐?”

초순이 탄식했다.

“형님이 깨어 계셨다면, 형님께서 분명 한사코 거부했을 것이라고 믿었겠지만, 의식 불명이시지 않았습니까? 저 여인이 형님을 좋아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일인데, 이리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믿기 힘든 일입니다. 저는 절대 비웃지 않을 테니 부인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경신은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초순이 자신을 구해줬던 일이 아니었다면, 그는 진작 초순을 발로 걷어차 호수에 빠뜨려 버렸을 것이다.

소운은 그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서있었다. 곧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오더니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왔다.

그녀는 정국후 세자 초순이 자꾸 자신이 있는 쪽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그녀는 사경신과 초순이 서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소운이 잠시 서있으니 초순이 다가왔다. 그리고 사경신은 어젯밤 깨어나 그녀를 보고 그녀의 목을 조를 때보다도 더 흉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정국후 세자 초순은 싱글벙글하면서도 할 말이 많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초순의 눈빛에는 의아함과 궁금증,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만연했다.

“앞으로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형수님께 와서 폐를 좀 끼치겠습니다. 요 며칠 동안 형수님께선 바깥 구경을 하고 싶으셨을 테지요? 바깥으로 나가실 때는 꼭 형님을 데리고 나가서, 형님께서 형수님께 썩은 달걀이 날아오는 것을 막게 하세요.”

소운의 눈초리가 매서워지더니, 곧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제 꽃가마를 타고 오는 길에 누군가 썩은 달걀을 던졌던 것이 떠올랐다. 거리에 나가면 얼마나 비참한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으니, 사경신을 끌고 나가 애정을 과시해주지 않으면 앞으로는 마음대로 거리를 거닐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소운은 우울했다. 현대에서는 사랑하다 헤어지는 과정이 빠르게 진행됐는데, 고대에서는 완전히 반대였다. 이렇게 사랑한다고 티를 내고 다니면 그 이후에 어떻게 사경신에게 이혼장을 달라고 하겠는가?

소운이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자, 초순의 부채가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이에 소운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물었다.

“정국후 세자께서도 썩은 달걀을 준비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초순은 목에 사레가 들려 연거푸 기침을 해댔다.

“저는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 큰 형수님께서 물으시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준비한 것은 돌멩이였습니다.”

“…….”

그 솔직한 대답이 소운의 아픈 곳을 찔렀다.

이내 초순은 결국 말을 바꿔 웃으며 말했다.

“제가 형수님께 농담한 것입니다. 저처럼 무공이 뛰어난 자는 적엽비화(*摘叶飞花: 비화적엽이라고도 함. 나뭇잎과 꽃잎을 날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기술)만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데, 돌멩이를 쓸 수 있을 리가 없죠.”

소운이 눈을 깜박거리며 사경신을 바라보자, 곧이어 담담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는 지금 도성 사람들이 어떻게 허풍을 떠는지 당신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오.”

초순이 손을 내젓더니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제가 형수님을 가르친다니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지요. 그저 서로 조언을 구한다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마을마다 풍속이 다른 법이라, 보통 사람들이 허풍을 떨고 속인다면 듣기 싫겠지만 형수님께서 허풍을 떠는 방식은 신선하고 진부하지가 않습니다. 가벼운 입김 한 번으로 형님을 소로 만들어 버리지 않습니까. 이 정도 경지에 다다른 자는 평생 본 적이 없습니다.”

“…….”

그러자 어느 ‘소’ 나리께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경신이 곧 화를 낼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초순은 떠나기 전에 소운에게 한마디를 남기고는 황급히 사라졌다.

“꽃은 피었을 때 꺾어야지, 꽃이 져버리면 빈 가지만 꺾게 되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