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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강의



25화. 강의

강서가 해당거로 돌아오자 아교가 푸른 보자기에 싸인 물건과 서신 한 통을 내밀었다.

“첫째 아씨께서 사람을 통해 보내오셨습니다.”

보자기는 겉보기엔 평범했으나, 매듭을 공들여 묶은 티가 났다. 그 세심함에 강의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보자기를 펼쳐 보니 고운 꽃신과 밑창, 양말 몇 쌍 그리고 여의결(*如意結: 행운을 기원하는 붉은색 매듭)이 들어 있었다. 강의가 그녀를 위해 정성들여 만든 여홍(*女紅: 바느질, 자수 등의 수공예품)이었다.

강서의 시선이 꽃신 옆에 놓인 붉은색 목갑에 머물렀다. 손을 들어 함을 열어보니 순금과 비취로 만든 떨잠과 옥비녀, 비단으로 만든 조화가 고이 담겨 있었고, 그 밑에 서신 한 통이 있었다.

정갈한 글씨로 수놓아진 서신을 읽으니, 온화하고 부드러운 강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 때문에 가슴앓이할 필요 없단다. 앞으로 더 좋은 혼사 자리를 찾을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렴. 직접 가지 못해 미안해.’

강서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더니 또르르 떨어졌다.

손재주가 좋은 우리 큰언니. 언제나 온화하고 상냥한 큰언니. 그녀가 심약하다고 무시했던 큰언니. 고작 스물의 나이에 죽어 버린 큰언니.

전생에서 그녀의 오라버니와 큰언니, 그리고 그녀 자신은 모두 스무 해를 넘기지 못하고 단명하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었다.

큰언니의 사인은 자살이었다. 간통을 한 죄로 시댁에서 쫓겨나 백부로 돌아온 뒤 기둥에 목을 매었다.

큰언니의 부고를 들은 강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강의는 천성이 심약하고 따듯한 봄바람처럼 유순한 여인이었다. 그런 언니가 다른 이와 간통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서는 당장 주가(朱家)로 달려가 항변을 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풍 씨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무능력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언니를 애도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아씨…….”

갑작스런 강서의 눈물에 아만과 아교가 어쩔 줄 몰라 쩔쩔맸다. 아교가 얼른 따뜻한 물에 적신 손수건을 건넸다.

손수건을 받아 든 강서가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아교에게 큰언니의 선물을 잘 보관하라 일렀다. 감정을 추스른 그녀가 다른 서신을 집어 들었다.

이 서신은 둘째 언니 강청이 보내온 것이었다.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장흥후부로 그녀와 백부의 다른 자매들을 함께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서가 잡고 있던 서신의 귀퉁이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렇게 빨리 서신을 보내온 것을 보니, 강청도 꽤나 다급한 모양이었다.

* * *

강서가 침음을 흘리더니 몸을 일으켜 서쪽 방으로 향했다.

서쪽 방은 그녀의 서재였다. 방의 한편에는 칠현금이 놓여 있었는데, 환생 이후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던 터라 금선 위에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강서가 책상 앞에 앉자 아교가 눈치껏 먹을 갈기 시작했다.

금세 서신 하나를 완성한 강서가 아교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것을 장흥후부로 가져다주고 오너라.”

“아씨, 정말 장흥후부로 가시려고요?”

강서가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께서 저리 편찮으신데 어떻게 맘 편히 가겠니?”

이것은 거절의 서신이었다.

장흥후부의 일은 그녀의 가슴에 깊숙이 꽂힌 바늘과 같았다. 바늘 끝에는 독이 발려 있어서, 하루라도 빨리 빼내지 않으면 찔린 부위부터 차차 썩어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서신에 쓴 것처럼 할머님께서 편찮으시지 않은가.

강서는 자심당에서 홀대를 당한 강청이 이 서신을 받으면 당장 내일 아침이라도 문안 인사를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전생대로라면 풍 씨의 왼쪽 눈은 통증이 점점 심해지다가 내일 시력을 잃게 될 터였다.

강서가 의도한 대로 이미 풍 씨의 마음속은 강청을 향한 의심의 씨앗이 무럭무럭 싹을 틔우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내일 강청의 방문 이후 눈이 멀게 된다면, 그 의심은 확신으로 바뀔 것이었다. 풍 씨는 손녀를 일 순위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강서는 이런 함정을 계획하면서 강청에게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전생에서 강청이 그녀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풍 씨의 눈이 먼 이후 무당이 강담을 지목한 것도, 이방(二房)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분명했다.

전생에서 둘째 숙부는 황제의 목숨을 구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반면에 아버지는 실의에 빠져 기루에 살다시피 하다가 살인 사건에까지 휘말리며 아우와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결국 아버지는 작위를 빼앗기고 집안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고, 둘째 숙부는 자연스럽게 동평백의 작위를 이어받으며 황제를 구한 공으로 작위의 세습도 인정받게 되었다.

풍 씨는 필생의 염원을 이뤘다며 기뻐했고, 능력 없는 장남의 생사는 그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후에 강서가 황자비의 신분으로 수도로 돌아왔을 때는 그 후로부터 일 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모든 일이 마치 짜 맞춘 것처럼 일어난 것이 못내 의심스러웠던 그녀는 욱칠에게 뒷조사를 부탁했지만, 사건의 윤곽이 겨우 잡혀 갈 즈음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랬기에 강서는 당장 증거가 없어도 괜찮았다. 그저 칼을 가는 심정으로 이방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다 보면 언젠가는 진상이 밝혀지리라 생각했다.

* * *

“이 서신은 큰언니에게 가져다주렴.”

강서가 또 다른 서신을 완성해서 아교에게 건넸다. 괜스레 가슴이 답답해진 그녀는 서재에서 나와 정원의 그네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그네가 앞으로 밀려나더니 소녀의 붉은 치맛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강서가 뒤를 돌아보자 잘 빚어놓은 도자기처럼 매끈한 소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오라버니, 돌아오셨군요.”

그녀가 땅을 짚어 그네를 멈추고 강담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염낭은요?”

강담이 대답 대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안 주던가요?”

강서가 흑단 같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욱칠이 모르는 여인의 염낭을 탐할 작자는 아닌데…….’

이번 생에서 그녀와 욱칠은 전혀 모르는 사이었다. 오라버니를 계기로 그와 가까워질까 화까지 내며 거리를 두지 않았는가.

“이게 다 그놈의 개 때문이야. 사매의 염낭을 뼈다귀처럼 몰래 숨겨 놓았나봐!”

강담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강서의 미간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이우도 그럴 개가 아닌데…….’

“설마 그 염낭에 중요한 것이 담긴 거야?”

염낭을 찾아오지 못한 강담의 얼굴이 약간의 죄책감으로 물들었다.

“중요한 것은 없었어요.”

“그럼 염낭에 특별한 표식을 해두었어?”

강서가 고개를 저었다.

강담이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개가 물고 빨던 것이라 아무도 주워 가지 않았을 거야. 설령 주워 갔다 해도 사매 것인지 알아볼 수 없을 테고.”

결국 강서도 운이 없었다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 * *

한바탕 소란을 떨던 강담이 처소로 돌아가자, 강서도 방으로 돌아와 보석함 하나를 꺼내들었다. 함 안에는 금팔찌 한 쌍이 들어 있었다.

강의가 출가할 때 강서에게 남겨 준 어머니 소 씨의 팔찌였다.

열 살 소녀의 눈엔 그저 투박하고 못생긴 팔찌여서 보석함 깊숙이 던져 놓은 것이었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요긴하게 쓰일 물건이었다.

금팔찌 속이 비어 있고, 옥으로 칸이 나뉘어 있어서 제조한 약들을 숨기는 데 안성맞춤이기 때문이었다.

백부의 여식이라는 신분이나 시종들의 비호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를 구해 주지 못했다. 이번에야말로 다른 이가 절대 뺏어 가지 못하는 그녀만의 진정한 힘을 기를 때였다.

* * *

날이 밝자 강서의 짐작대로 강청이 바리바리 선물을 싸 들고 자심당을 찾아왔다.

하지만 풍 씨는 아침부터 강청의 생글생글 웃는 낯을 보니 왼쪽 눈의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금계가 또 무슨 일로 온 거지?’

강청을 의심의 눈초리로 응시하던 풍 씨가 돌연 눈에 힘을 풀었다.

‘내가 너무 민감했군.’

하지만 풍 씨의 불편한 기색을 읽은 강청의 마음은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강청은 풍 씨가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백부 강안성보다 뛰어났고, 자신이 아버지의 유일한 적녀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장흥후부로 시집을 간 이후, 풍 씨의 편애는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최근 두 차례의 방문에서 그녀는 그동안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홀대를 받아야 했다.

강청이 물끄러미 초 씨를 바라보았으나, 공손한 미소를 띠고 있는 초 씨의 표정에서는 어떤 단서도 읽을 수 없었다.

강청의 시선이 초 씨에서 강서로 옮겨 갔다.

방 한편에 조용히 앉아 있는 소녀는 단정하게 쌍상투를 틀어 올려 수수한 뒤꽂이를 꽂고, 반쯤 낡은 담녹색 당의를 입고 있었다. 먹으로 그린 듯한 눈썹과 반쯤 감긴 눈망울이 초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행색에도 소녀는 방 안에서 홀로 빛나는 별 같았다. 소녀의 자태는 정말 아름다워서, 신의 불공평한 안배를 원망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

강서의 옷차림을 찬찬히 훑던 강청의 마음속에 다시 커다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백부의 여섯 여식 중 큰언니는 심약하고, 셋째는 서출의 자식이며 다섯째와 여섯째는 서녀였다. 그리고 넷째 강서는 과시욕이 가장 강했다.

강서는 자신의 외모가 갖는 권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백부 안이라도 늘 완벽한 모습으로 처소를 나서야만 속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거지?’

강청의 사고의 흐름이 이틀 전 자심당에 방문했을 때로 이어졌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도 강서의 옷은 평범했었다. 다만 강서가 그녀를 몇 번이고 도발하는 바람에 바뀐 옷차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강청은 심증만 가지고 때를 쓰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아무 증거도 없이 할머니의 변화를 강서와 연관 지을 순 없었다.

“청아야, 너도 출가를 한 몸인데 이렇게 자주 친정에 와서 되겠니? 후부에서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항시 몸가짐을 조심하거라.”

풍 씨가 왼쪽 태양혈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강청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 명심하겠습니다. 그저 지난번에 뵈었을 때 할머님의 안색이 좋지 않던 것이 줄곧 마음에 걸려서 다시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강서가 슬며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강청은 풍 씨를 향한 효심을 강조하기 위해 강서의 서신을 언급하지 않았다.

“역시 청아는 마음씨가 곱구나. 이제 곧 땅에 묻힐 노구가 안색이 좋고 말고가 어디 있겠니.”

사탕처럼 달콤한 강청의 말에 풍 씨의 마음이 사르르 풀어졌다.

강청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씀 마셔요. 할머니께서는 덕을 많이 쌓으셔서 오래오래 장수하실 거예요.”

“청아 말이 맞습니다. 창아가 혼인을 하고 아들을 낳으면 어머님께서 증손자 며느리도 골라 주셔야지요.”

창아는 집안의 장손 강창을 말했다. 강창은 강청과 이란성 쌍둥이였는데 아직도 혼인하지 않은 상태였다.

대부분의 훈귀가 혼인을 서두르는 것과 달리, 과거를 준비하는 공자들은 혼인을 늦게 하는 편이었다. 과거에 급제하면 신부 가문의 격도 크게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과거를 준비하느라 서른이 넘어서야 혼인하는 자들도 넘쳐 나는지라, 고작 스물을 넘긴 강창은 더더욱 혼인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풍 씨가 그 말을 듣고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갑자기 왼쪽 눈에 강렬한 통증이 찾아왔다. 마치 바늘 하나가 눈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