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염낭
전생에서 그녀는 강청 부부의 마수에서 달아난 후 차마 안국공부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남쪽 변방의 오묘족 족장을 만나, 그녀의 죽은 손녀를 대신하여 그들 무리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강서는 새로운 인생을 선물 받은 것 같아 진심으로 기뻤다. 도성에서의 생활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 낯선 곳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과거를 알지 못했다. 원한다면 준수한 사내를 골라 새로 혼인을 할 수도 있었다.
여칠이 나타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오묘족 족장과 오랜 인연이 있던 그는 자꾸 강서의 앞에 나타났고, 가랑비에 옷 젖듯 강서도 서서히 그에게 빠져들게 되었다.
강서는 안국공부와의 혼사를 겪으면서 권세, 허영, 체면 따위는 결코 아무런 행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허황된 것들을 위해 사는 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일임을 알고 있었다.
빼어난 용모에다 재기에 능한 이 남자는, 심지어 그녀에게 한없이 다정하기까지 했다. 어떤 여인이 이 남자에게 반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햇살이 유난히 반짝이던 날, 가득 핀 해바라기로 황금빛 물결이 이는 들판 앞에서 남자가 말했다.
“나와 혼인해 주겠소?”
강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이 혼인이 모두 사기였을 줄!
이름부터 거짓이었다. 여칠은 무슨, 그는 주나라 황제의 칠 황자 욱칠(郁七)이었다!
그의 진짜 신분을 알았을 때, 강서는 마치 냉수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그녀가 첫 번째로 한 행동은 손을 들어 냅다 욱칠의 따귀를 때리는 것이었다.
남편을 잡아먹은 안국공부의 과부든, 도성에서 수 천리 떨어져 있는 오묘족의 손녀든, 그런 신분으로 황자비의 자리는 애초에 어불성설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강서는 그에 대한 애정이 한순간에 깡그리 말라 버렸다. 우롱당했다는 분노만이 가슴 가득히 들끓었다.
그를 진심으로 마음에 담았던 만큼,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손바닥이 붉게 터질 때까지 계속해서 욱칠의 뺨을 때렸다.
잠자코 그녀의 손길을 받고만 있던 그가 낮고도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래 중매를 통해 그대를 내 아내로 맞이하려 했소. 믿어 주시오. 그리고 이 혼인은 당신도 승낙하였으니 이제 와 무를 수 없소.”
그녀가 냉소 어린 얼굴로 말했다.
“황제의 사혼 성지(*赐婚聖旨: 혼인을 지시한다는 뜻이 담긴 황제의 서한)를 가져올 것이 아니라면 앞으로 제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어차피 잃을 것 없는 신세였다. 이 신분으로 황자비의 자리는 애초에 가당치도 않을 터이니,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주나라 군대가 남란(南蘭)군을 격파할 때, 오묘족이 큰 도움을 준 공을 치하하기 위해 황제가 직접 칠 황자와 오묘족 여식의 혼인을 명하였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얼이 빠져 있던 강서는 정신을 차려 보니 정말로 칠 황자의 황자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얼떨결에 오른 황자비 자리도 본래 자신의 자리가 아니었다는 것은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욱칠이 마음에 둔 것은 사실 강서가 아니라 오묘족장의 친손녀 아상(阿桑)이었다.
욱칠은 강서가 아상과 닮았다는 이유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공을 들였던 것이었다.
두 번의 혼인에서 한 번은 개보다 못한 찬밥 신세, 다른 한 번은 누군가의 대체품이라……. 강서는 억울함에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진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욱칠과 부부의 연을 맺은 뒤였고, 지독하게 엉킨 운명의 끈은 풀고 싶어도 풀 수 없었다.
물론 욱칠은 강서에게 성심을 다했다.
그렇다 해도 강서는 열다섯 살의 어린 자신을 만나면 말해주고 싶었다.
‘계숭역에게서 도망쳐! 욱칠에게서 멀어져!’
* * *
강서가 차갑게 돌아서서 떠나자 욱칠은 어찌할 바를 몰라 강담을 쳐다봤다.
강담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형님. 제 누이가 본래 심성이 고운 아이인데, 아무래도 오늘 기분이 안 좋았나 봅니다. 오늘은 먼저 돌아가세요. 다시 날을 잡기로 합시다.”
강담은 큰 걸음으로 강서를 쫓아가 그녀를 잡아 세웠다.
“사매야, 어찌 그러느냐?”
“별일 아닙니다.”
사매가 고개를 살짝 들어 눈가에 고인 눈물을 삼켰다.
“네가 여칠 형님을 오해한 것 같구나. 우리가 기루 뒷골목에서 만나긴 했으나…….”
강서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강담도 덩달아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내 이어갔다.
“여칠 형님은 절대 기루나 드나드는 사람이…….”
“그만하세요.”
“허나…….”
“굳이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찌 되었건 익우는 아닌 듯하니, 오라버니께서는 그분과의 왕래를 자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서의 기억 속 욱칠은 끈질긴 사람이었다.
‘오라버니에게 일부러 접근했을지도 몰라.’
그녀는 두 사람의 만남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형님은 나의 목숨을 구해 준 분이 아니더냐. 사매는 내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거야?”
강담이 꿋꿋이 할 말을 이어갔다.
결국 강서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의리를 중히 여기는 것이 둘째 오라버니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니었던가. 그녀가 막는다 한들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됐다. 그놈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접근한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사내인 오라버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
강서는 방금 전의 상황을 상기해 보았다.
욱칠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는 했으나,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또한 일부러 독한 말을 내뱉고 왔으니, 존귀하신 신분의 공자님과는 다시 엮일 일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강서는 길게 숨은 내뱉고는 이내 살풋 웃으며 강담에게 말했다.
“제가 지나쳤습니다. 이우라는 개가 제 염낭을 빼앗아 달아나는 바람에 덩달아 주인에게까지 성이 나서 그런 것입니다.”
“아니다! 그 이우 놈은 맞아야 정신 차리지! 내가 언젠간 손 한번 봐주려고 벼르고 있던 참이다.”
강담이 눈을 이글거리며 동조했다.
‘잠시 정신이 없어 마두라 한 것을 가지고 꽁하기는. 번번이 사람 깔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정말 분해서 원…….’
강서는 사납게 싸우던 이우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으며 물었다.
“오라버니, 정말 한판 붙어 보실 요량이세요?”
순간 강담의 머릿속에 이우가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음…… 허허.”
그가 바보 같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백부 앞에 다다랐을 때, 강서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오라버니, 아까 잃어버린 제 염낭을 찾아다 주시겠어요? 누가 주워 갈까 걱정됩니다.”
“그래. 내 당장 여칠 형님에게 염낭을 받아올 테니 염려 말거라.”
강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만과 함께 백부로 들어갔다.
* * *
작자골목은 동평백부가 있는 유전골목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강서 남매가 헤어졌을 무렵, 욱칠은 이미 대추나무가 드리워진 집으로 돌아온 후였다.
“이우, 나오너라!”
욱칠이 텅 빈 앞마당에 서서 소리쳤다.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에 마당 한편에 우뚝 솟은 자귀나무 가지들이 서로 부대끼며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욱칠이 무표정한 얼굴로 두 글자를 뱉었다.
“냉영(冷影).”
욱칠의 낮은 목소리가 울리자, 순간 누군가 허공에서 튀어나와 곧장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욱칠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주군, 하명하시옵소서.”
“일어나거라.”
그가 즉시 일어나 반듯이 섰다. 스물 남짓의 젊은 사내는 반듯한 이목구비에 충직함을 담고 있었다.
“이우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느냐.”
“예,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욱칠의 눈빛에 근심이 더해졌다.
“주군, 소인이 가서 찾아오겠습니다!”
또 다른 한 명이 나무 위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앳된 얼굴을 한 이 사내는 욱칠의 또래로 보였다.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는 냉영과 달리, 이 소년은 욱칠 앞에서도 해죽해죽 웃는 낯을 했다.
“그리하거라, 용담(龍旦).”
욱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앳된 얼굴의 소년은 착지하면서 순간 휘청거리고는 민망한 듯 잽싸게 중심을 잡고 섰다. 그리고는 무표정하게 서 있는 냉영을 원망스런 눈길로 노려봤다.
‘대체 왜? 어째서! 둘 다 주군의 호위 무사인데, 누구는 ‘냉영’ 같은 멋있는 이름으로 부르고, 나는 왜 ‘용담’이야!’
용담은 투덜대고 싶은 심정을 꾹 참고 담장을 훌쩍 뛰어 넘어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를 데리고 들어왔다.
개를 발견한 욱칠은 엄숙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이우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용담을 바라봤다.
“어디서 모르는 척이야? 너를 부르고 계시잖아!”
용담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이런 요망한 짐승을 보았나, 어수룩한 척 사람을 속일 줄도 알다니.
이우가 두 귀를 축 늘어뜨리고 우물쭈물 욱칠 앞에 가 섰다.
“어디다 놨어?”
욱칠이 손을 내놓고 채근했다.
그러자 이우의 눈에 번뜩 총기가 돌면서, 획 돌아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윽고 입에 염낭을 물고 돌아와서는 주인 앞에 서서 꼬리를 발랑발랑 흔들었다.
욱칠이 염낭을 받아 들어 살펴보니 끝이 축축해져 있었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가 놓아진 정향꽃잎 색의 염낭이 이우의 침에 흥건히 젖은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욱칠이 이우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이우는 억울한 듯 끄응 소리를 내고는 이내 주인을 향해 다시 꼬리를 흔들었다.
“다음번엔 절대 그러지 말거라! 그 여인이 놀라기라도 하면 어쩔 것이냐.”
욱칠이 얼굴을 굳히고는 엄하게 꾸짖었다.
주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이우의 귀가 축 처졌다. 염낭을 물어다 주면 칭찬을 받을 줄 알았는데 도리어 꾸중만 들었으니. 시무룩해진 개는 꼬리로 기운 없이 바닥만 쓸었다.
“주의하거라.”
욱칠은 개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옷깃 속에 염낭을 챙겨 넣었다.
“…….”
“여칠 형님, 안에 계십니까?”
그때 문밖에서 강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냉영과 용담이 기척도 내지 않고 재빠르게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이우도 덩달아 풀쩍 뛰어올랐다가 자신은 숨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착지했다.
“가서 손님을 모셔 오너라.”
욱칠이 이우의 등을 탁 쳤다.
이윽고 이우가 강담을 데리고 왔다.
욱칠을 보자마자 강담이 난처한 얼굴빛을 띠었다.
“여칠 형님, 사죄드립니다. 오늘 제 누이가 한 말은…….”
욱칠이 웃으며 강담의 사죄를 만류했다.
“그런 말 말게,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일세. 저놈 버릇이 잘못 들어 갈수록 말썽이라네.”
강담이 언짢은 기색으로 개를 노려보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이우 단속 좀 잘 하셔야겠습니다. 여인의 염낭이 뼈다귀도 아니고, 어찌 물고 도망을 가냐는 말입니다.”
이우는 무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강담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바보 같은 놈!’
“자네 말이 맞아. 모두 내 불찰이네.”
이우와 한바탕 눈싸움을 한 강담은 정신을 차리고 본론을 꺼냈다.
“형님, 아까 이우가 제 누이의 염낭을 물어다 어디에 둔지 아십니까? 아시다시피 아녀자의 물건이 함부로 돌아다니면 좋을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고말고. 한데 이놈이 사고를 쳤네.”
욱칠이 짐짓 멋쩍은 얼굴을 했다.
“그렇다면 염낭은……?”
“이우야, 대체 염낭을 어디에 둔 것이냐?”
욱칠이 이우에게 물었다.
“월!”
이우가 크게 짖었다.
‘염낭을 어디 두었냐니……,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나무에 걸터앉아 있던 용담이 아래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오늘 영 다른 사람 같으시단 말이지.”
그가 궁금함을 못 이기고는 냉영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저리 하시는 데는 분명 깊은 뜻이 있으시겠지.”
냉영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용담을 쳐다보았다.
“왜, 잃어버렸어?”
“월!”
이우가 엎드려 누워 큰 꼬리로 바닥을 툭툭 때렸다. 그 바람에 먼지가 풀풀 일었다.
강담은 인내심이 또 한 번 시험받는 듯했다.
욱칠이 겸연쩍은 기색을 보였다.
“이우가 염낭을 잃어버린 모양인데……. 자네가 이놈을 흠씬 두들겨 패게. 내 말리지 않을 테니.”
강담이 노기가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자 이우도 기세를 꺾지 않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강담이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고는 탄식했다.
“됐습니다. 짐승이랑 아웅다웅 겨루어 무얼 합니까. 형님,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이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자네가 누이에게 가서 잘 좀 말해 주게나. 아니, 후일 내가 직접 가서 사과하겠네!”
“괜찮습니다. 제 누이는 그리 속이 좁은 아이가 아닙니다. 제가 돌아가서 잘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욱칠은 대추나무가 있는 곳까지 나와 강담을 배웅해 주었다.
대문이 닫히자, 냉영과 용담이 나무에서 풀썩 뛰어내려왔다.
“주군, 그 염낭 안에 보물 지도라도 있는 것입니까?”
용담이 두꺼운 낯가죽을 하고는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