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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화 던전 탐색 (1)

가의도 안전구역의 규모는 무인도인 월광도보다 훨씬 작았다.

그리고 그건 상점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월광도의 상점이 마트 느낌이라면 가의도의 상점은 동네 할인점 느낌이다.

다만 두 상점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공구]

[생활용품]

[미술용품]

식품을 안 팔기는 마찬가지란 점이다.

"에라이."

그리고 두 상점에서 파는 아이템의 컨셉이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

-가의도: 공구, 생활용품, 미술용품

-월광도: 건축자재, 주방용품, 악기

두 곳에서 재료를 구매하면 집도 짓고, 내부의 시설도 완벽하게 꾸밀 수 있을 것 같다.

덤으로 취미를 위한 물건까지 구비되어있으니, 먹을 것만 빼고, 나머진 다 구할 수 있는 상태다.

"식량은 절대 쉽게 안 내어주네."

나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이곳에서 살만한 상품들을 구매했다.

공구 코너에서 사냥에 필요한 스테인리스 와이어와 못을 구매하고, 생필품 코너에선 휴지와 물티슈, 수건 등을 구매했다.

"그나마 물 걱정은 없어져서 다행이다."

물은 가의도 주민들에게 요청하면 부족함 없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긴 지하수가 뚫려 있어서 수도꼭지만 돌려도 깨끗한 물이 콸콸 나오니까.

'앞으로 한 달 정도만 더 지나면 본격으로 추워질 텐데 걱정이야.'

조금씩 겨울을 대비해 둬야 하는데, 그놈의 먹을 게 문제다.

이곳 주민들의 도움을 받으면 어찌어찌 겨울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원이 한정되어있는 건 이곳 역시 마찬가지니, 마냥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궁리가 필요해 보인다.

"나도 농사를 지어야 하나?"

월광도와 가의도 상점의 물품을 합치면 얼마든지 비닐하우스 정돈 만들 수 있다.

마침 내게 식사를 대접해준 김용근이 텃밭에서 감자를 기르던 것 같으니, 씨감자 구해 심는 것도 방법이다.

"가만···. 굳이 내가 농사까지 지어야 하나?"

그런데 그때.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차라리 월광도가 아니라 이곳 가의도에 비닐하우스를 잔뜩 지어서 주민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겨우내 식량이 궁하긴 이곳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즉, 힘을 합치자는 거다.

'내 코인으로 비닐하우스 등, 농사를 위한 자재를 구입하고, 이곳 사람들은 노동력을 제공하여 식량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거야.'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도 먹고 알도 먹고.

아무래도 월광도에 가기 전에 이곳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 봐야겠다.

겸사겸사 그놈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살펴보고.

나는 상점을 나서며 가의도의 안전구역을 살폈다.

[화장실][목욕탕][호텔][상점]

위 네 가지 시설은 월광도와 같고, 이곳엔 공방과 신전 대신, '도박장'이라는 시설이 딸려 있었다.

순간,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머릿속이 번뜩였다.

이유는 내 인벤토리 10칸 중 1칸을 사치스레 차지하고 있는 아이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행운의 탈리스만 / 희귀]

-소유자에게 행운을 더해주는 아이템.

-인벤토리에 보관해 두면 효과가 적용된다.

도박은 운빨 게임.

그런데 이 아이템이 있다면 단순히 운빨이 아니게 되는 거 아닐까?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도박장에 들어섰다.

도박장엔 슬롯머신과 온갖 게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험 삼아 슬롯머신 앞에 앉았더니.

-띠링.

[공정을 위해 행운 관련 아이템의 효과가 일시적으로 사라집니다.]

이런 메시지가 뜨며, 기대를 산산조각냈다.

역시 이놈의 시스템은 만만치 않다.

"쯧."

나는 혀를 차며 도박장을 나서기로 했다.

[아이템 뽑기]

하지만 출구 쪽에서 시선을 확 잡아끄는 슬롯머신을 발견했다.

[일반 등급의 재료템부터 희귀등급의 무구까지. 당신의 행운을 시험해보세요.]

"허···."

역시 세상에 닥친 이변은 K-게임을 기초로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

누가 봐도 코인을 빨아 먹기 위해 만들어진 슬롯머신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슬롯머신 상단에는 친절하게도 확률표가 공개되어 있었다.

[일반등급 90%, 고급등급 9%, 최고급등급 0.9%, 특수등급 0.09%, 희귀등급: 0.01%]

덕분에 아이템의 등급 체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확률도 참 K-게임스럽네.

"함정이구만. 아이템 등급만 확률로 표기되어 있잖아. 0.01%의 확률을 뚫고 희귀등급 아이템이 나오더라도, 재료템 하나만 덩그러니 나올 수 있는 거 아냐?"

아마 희귀등급의 무구가 나올 확률은 표기된 것보다 훨씬 낮을 거다.

나는 냉정히 이성을 유지하며 해당 슬롯머신을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 했다.

"그래도···. 시험 삼아 한두 번 정돈만 돌려볼까?"

그냥 지나치기엔 광고 문구가 너무도 자극적이다.

그리고 최근 행운의 탈리스만을 얻기 전부터 운은 꽤 좋은 편에 속했기에 '혹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 번만 당기고 가자."

슬롯을 한번 당기는데 드는 비용은 10코인.

열 번을 당기더라도 100코인이니, 내게 그리 무리한 금액은 아니었다.

[고블린 가죽을 획득했습니다.]

[고블린 가죽을 획득했습니다.]

.

.

.

뭔가 벌써 쎄하다.

다섯 번을 당겼는데, 오로지 고블린 가죽만 나왔다.

덕분에 멈출까 싶었지만, 그래도 10번까지만 당겨보기로 했으니, 정한 횟수는 채우기로 했다.

[단검(일반)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물건 다운 물건이 나왔다.

"오오!"

덕분에 기대감에 차오른 나는 감탄하며 계속 슬롯을 당겼다.

[고블린 가죽을 획득했습니다.]

.

.

하지만 이번에도 3연속으로 고블린 가죽이 걸렸다.

그럼 그렇지.

"이거 사기네. 오크는커녕 고블린 가죽만 나오잖아."

이제 남은 마지막 한 번.

별 기대 없이 슬롯을 당기는데.

[개 목걸이(고급)를 획득했습니다.]

뭔가 특이한 게 나왔다.

나는 고급등급 아이템의 등장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개 목걸이 / 고급]

-개 또는 늑대류의 몬스터 한 마리를 길들일 수 있다.

-지나치게 높은 등급의 몬스터를 길들이려 할 경우, 아이템이 파괴될 수 있다.

꽤나 흥미로운 아이템이다.

이것을 얻자마자 가장 먼저 그랑 다이어 울프가 떠올랐다.

"집 지키는 개 얻었네."

그랑 다이어 울프는 인간 분쇄기란 별명이 있을 만큼, 강한 축에 속하는 몬스터이기 때문에 초반은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개목걸이를 챙겼다.

쓸만한 아이템이 나오자 슬롯머신이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애초에 정한 10회를 넘겨 20회, 30회 슬롯을 당겼고···.

[고블린 가죽을 획득했습니다.]

[고블린 가죽을 획득했습니다.]

고블린 가죽만 잔뜩 얻었다.

-쾅!

나는 슬롯머신을 발로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률이 생각보다 더 쓰레기인 것 같다.

"다시 오나 봐라!"

나는 그대로 안전구역을 벗어났고, 월광도로 돌아가기 전에 농사 관련 문의를 하고자 마을로 돌아갔다.

"뭐야?"

그런데···.

마을로 돌아갔더니, 분위기가 어수선한 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다.

혹시 그 녀석들이 다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녀석들이 주민들에게 반항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박살 냈다.

그래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포션을 갖고 있었나? 아니야. 그건 녀석들의 수준으로 구할 수 없는 아이템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내게 음식을 대접해 주었던 김용근이 아는 체를 해왔다.

"어어? 자, 자네. 간 것 아니었어?"

"제안할 것도 있고, 한 번은 둘러보고 가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내 물음에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김용근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녀석들의 처우를 두고 마을 사람들끼리 의견이 갈려서 말이야."

"그래요?"

다행히 그 녀석들이 다시 설친 건 아닌 모양이다.

하긴 슈퍼맨도 아니고, 그 부상에서 부활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김용근과 함께 소란의 중심지로 다가갔다.

그러자 내가 제압한 9명이 뒤로 팔이 묶인 채 무릎이 꿇려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새끼들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 그런데 뭐? 용서해 주자고?"

"아니, 용서를 해주자는 게 아니라, 그래도 살인은 안 된다는 거지."

"그게 그거지! 이 좁은 섬에서 이놈들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두고두고 얼굴 보고 살라는 뜻이잖아! 내 어미 죽인 놈들이랑!"

"끙···. 김씨 일단 진정하고."

"진정은 무슨 진정! 박씨랑 다른 사람들도 모두 법이 걱정돼서 이러는 거 아냐? 그럼 날 내버려 둬! 칼춤은 나 혼자 출 테니까!"

김용근의 말대로 마을 사람들의 의견은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뒤탈 없이 죽여야 한다'는 쪽과 '그래도 살인은 안 된다'는 쪽으로.

그런데 누가 봐도 분위기는 죽여야 한다는 쪽으로 기운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까?"

"김씨 어머니가 천식이 있으셨거든. 그런데 저놈들이 재미로 호흡기를 빼앗아갔어."

"이런···."

"그런데 김씨 어머니뿐만 아니야. 저기서 벼르고 있는 조씨의 부인과 최씨의 동생도 녀석들의 괴롭힘에 변을 당했으니까."

결국, 죽일 놈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저런 쓰레기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건 나라의 법뿐이다.

하지만 세상이 붕괴하고 '법치'가 힘을 잃은 지금, 가족을 빼앗긴 사람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엔 '비 살인파'의 원론적인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잘들 생각해! 이 자식들 살려 두고, 마음 편히 잘 수나 있을 것 같아? 언제 어디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놈들하고 같이 살 수 있겠냐고!"

결과는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끝내 대다수 주민들이 심판파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녀석들은 처우가 결정되었다.

복수심에 이를 갈던 김씨와 조씨, 최씨에게 녀석들은 일사천리로 처리되었다.

"난 살인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저들을 비난할 수가 없어. 심정이 이해가 되거든. 아마 나도 아들을 잃었다면 저 틈에 있었겠지."

김용근은 침통한 표정으로 내게 그리 말했다.

나도 이들의 감정을 이해하기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변했구만."

"그렇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 때로는 타인을 해쳐야 하는 세상이 되었어."

"맞습니다."

사고가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이들은 운이 좋은 걸지도 모른다.

변해버린 세상의 진리를 빨리 깨달았으니까.

"혹시라도 죄책감은 느끼지 말게나. 이건 우리 마을의 뜻이니까."

김용근은 내 짐을 덜어 주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봐도 동정심이 생기지 않아서···.

오히려 지금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감옥에서 5년만 보내면 멀쩡히 사회에 복귀할 수 있던 기존의 '법'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제안할 게 있다고 했지?"

김용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안전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닙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지금은 말할 분위기가 아니네요."

"······. 그래 주겠나? 안 그래도 다들 흥분해서 진정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네."

"알겠습니다. 그럼 며칠 뒤에 찾아뵙죠."

*

몬스터를 너무 많이 잡았을까?

아니면 이것도 시스템의 영향일까?

가의도의 주민들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스스로의 상태가 이상하단 사실을 깨달은 건 월광도 안전구역에 돌아온 직후였다.

"뭐지? 나 사이코패스였나? 사람의 죽음을 보고도 왜 동요가 없지?"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윌리아에게 힐을 부탁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내게 힐을 사용했고, 그러자 스트레스와 피곤함까지 모조리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사이코패스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럼요?"

"성장하신 거죠."

아무래도 그녀는 무언가 알고 있는 느낌이다.

내가 지그시 바라보자 윌리아는 잔잔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능력치가 향상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능력치요?"

"마력이란 능력치는 단순하게 스킬을 사용하기 위한 에너지만 늘려 주는 게 아닙니다. 사용자의 정신력도 강화시켜 주는 거죠."

이어진 그녀의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덩달아 걱정이 밀려왔다.

"혹시 마력이 계속 높아지면 인간의 감정도 메말라버리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의 개성까지 지워버릴 만큼 막돼먹은 시스템이 아니니까요. 정신력이 강화되면 위급 상황에서의 동요가 적어지고, 냉정함을 잘 유지할 수 있게 될 뿐입니다. 흔한 말로 '강철 멘탈'이라고 하죠."

"그럼 다행이네요."

나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윌리아가 갑자기 뒤로 돌아와 어깨를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의외의 서비스에 나는 깜짝 놀랐다.

"본인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제가 보기엔 충분히 놀라신 상태입니다."

"그런가요?"

"네, 그러니 잠시 이대로 계세요."

주물주물.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손길로 어깨를 주무르는데, 꽤나 시원했다.

윌리아는 NPC고 우리 인간과 다를지 모르지만, 보면 볼수록 내 이상형에 가깝다.

'천사구만···.'

그렇게 약 10분에 걸친 마사지가 끝나고, 내가 교대로 해주냐고 묻자 그녀는 거절했다.

혹시 내 표정이 음흉했을까?

"아, 맞다."

그때, 나는 무언가를 떠올리며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물건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줬다.

"가의도 기념품입니다."

"뭔가요?"

그건 바로 무인도에선 절대 구할 수가 없는 물건.

바로 콜라였다.

인벤토리가 온도 유지도 되는지 처음 알았다.

내가 건넨 콜라는 매우 시원했다.

"!!!!!!!"

곧이어 콜라의 맛을 본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두 눈을 반짝였다.

처음 보는 모습에 나는 웃음을 흘렸고, 그녀는 콜라가 입에 맞는지 계속 홀짝였다.

이어서 윌리아와의 호감도가 5%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맛있어요!"

"하하, 마음에 드셔서 다행입니다."

볼일은 끝났다.

슬슬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야겠다.

내가 그대로 신전을 나서려 하자, 윌리아가 나를 붙잡았다.

"백호님."

"네?"

"이제 바쁜 일은 모두 끝나신 거죠?"

"그렇죠."

"혹시 뭔가 잊으신 거 없으세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잊은 거?

그에 윌리아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NPC 윌리아로부터 퀘스트 요청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아!"

잊고 있던 게 뭔지 떠올랐다.

레벨 20이 되면 얻을 수 있다던 그녀의 퀘스트였다.

017화 던전 탐색 (2)

[윌리아의 시험 / 퀘스트 등급: 중]

-내용: 윌리아는 신전에 배치된 프리스트로 높은 잠재력을 가진 NPC이다.

일부 뛰어난 NPC 중엔 직접 파트너가 될 자를 선택하고, 자질을 시험해 보기도 한다.

윌리아의 시험에 통과하여 그녀의 인정을 받도록 하자.

-달성 조건: 몽마의 던전 타임어택 성공

-완료 보상: 윌리아와의 호감도 20% 상승, 최고급 장비 선택권 1장

윌리아가 건넨 퀘스트의 내용을 살핀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보상으로 주어지는 대량의 호감도도, 최고급 장비 선택권도 좋지만, 퀘스트의 내용에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파트너가 될 자를 선택하고 자질을 시험하는 NPC?'

뭔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나는 궁금한 점을 솔직하게 묻기로 했다.

내 물음에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욕구가 있거든요. 더 강해지고 싶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고. 하지만 주어진 임무가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활동이 힘들죠. 그래서 함께할 파트너가 중요한 겁니다."

인간처럼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말.

다른 거창한 이유보다 왜인지 그 말이 와 닿았다.

"혹시 다른 NPC의 파트너와 싸움 붙이고 그런 거 아니죠? 막 최강의 1인을 선별한 다던가."

"흥미로운 아이디어군요."

농담 삼아 한 말인데, 서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괜한 말을 한 것 같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퀘스트를 수락했다.

"어서 윌리아님과 파트너를 짜는 날이 오면 좋겠네요. 뒤를 받쳐주는 힐러가 있다면 훨씬 안정적인 전투가 가능할 테고, 쓸쓸하게 혼잣말을 하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까요."

내 말에 윌리아는 한 걸음 다가와 힐끗 나를 올려 보며 말했다.

"과연 이유가 그것뿐일까요?"

이 요망한 NPC.

묘하게 사람의 심리를 잘 아는 느낌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에게 버프를 부탁했다.

"바로 도전하시려고요?"

주기적으로 힐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안전구역 때문인지, 그다지 피곤한 느낌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이만 쉬려 한다.

모름지기 인간은 잠을 잘 자야 제 컨디션을 발휘하는 종족이니까.

"그럼 버프가 왜 필요하세요?"

"자기 전에 처리해놓을 일이 한 가지 있거든요."

"일이요?"

나는 궁금한 게 많은 그녀를 향해 따봉을 날리며 답했다.

"개 한 마리 길들이려고요."

당연히 윌리아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랑 다이어 울프.

덩치가 곰 만한 경험치 100을 주는 늑대형 몬스터.

순수 전투능력은 매혹 스킬이 차단된 하급 서큐버스와 비슷한 수준이며, 공격패턴이 단조로워서 그렇지, 피지컬만큼은 오히려 하급 서큐버스를 압도한다.

"옳지, 옳지. 이리 온."

내가 갑자기 그랑 다이어 울프의 프로필을 읊은 이유.

그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개목걸이 / 고급]

-개 또는 늑대류의 몬스터를 길들일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높은 등급의 몬스터를 길들이려 할 경우, 아이템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가의도 도박장에서 따온 테이밍 아이템이다.

나는 해당 아이템을 얻자마자 그랑 다이어 울프를 가장 먼저 떠올렸고, 마침 윌리아의 퀘스트도 받았으니 전력 강화의 수단으로 써먹기로 했다.

'몽마의 던전에 그랑 다이어 울프를 데려가면 안전성이 높아지겠지.'

하지만 이 개목걸이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었으니···.

-그르르르릉!

"개목걸이 사용!"

"가라, 개목걸이!"

바로 사용법이 첨부되지 않은 불친절한 아이템이란 거다.

그래서 베이스 캠프 근처에서 단독으로 젠이 되는 그랑 다이어 울프와 대치하며 온갖 쌩쇼를 하고 있는 중이다.

명령어일 것 같은 말이란 말은 전부 내뱉어 보고, 몬스터볼을 던지듯 개목걸이도 던져봤다.

그러나 그랑 다이어 울프는 나를 비웃듯 공격해올 뿐이었다.

"직접 씌워야 하나?"

그건 난도가 너무 높아서 아닌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이 방법 저 방법 닥치는 대로 도전해 보는 수밖에.

나는 달려오며 칼날과도 같은 이빨을 들이미는 녀석의 공격을 타이밍에 맞춰 피했다.

그리고 그랑 다이어 울프의 주둥이가 아슬아슬 스치고 지나갈 때, 얼른 팔을 뻗어 헤드락을 걸었다.

-크르르릉!

그랑 다이어 울프와 이렇게 가까이 붙어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털이 제법 뽀송뽀송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잊으면 안 되는 점이 있으니.

그랑 다이어 울프는 범처럼 앞발을 휘두르는 공격도 즐겨 사용한다는 거다.

헤드락으로 머리를 제압했다고 해서 안심하면 등이 난도질을 당할 것이다.

"읏챠!"

-콰앙!

나는 온 힘을 다해 레슬링을 하듯 녀석을 들어 올려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자자, 진정해. 목걸이 차보자."

이후 녀석의 배에 올라타서 양 무릎으로 앞발을 봉인하고 왼팔로 턱을 짓눌렀다.

'살다 살다 늑대를 상대로 그라운드 기술을 쓰다니.'

이어서 남는 오른손으로 개목걸이를 꺼내 그랑 다이어 울프의 목에 씌웠다.

"응?"

그런데 어째 반응이 없다.

"또 꽝이야?"

나는 바둥대는 그랑 다이어 울프를 강하게 압박하며 고민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좀 패야 하나?"

어느 게임에서 몬스터를 길들일 때, 공격 후 체력을 뺐던 게 기억났다.

복잡하게 할 필요 없이, 나는 이 자세 그대로 파운딩을 하기로 했다.

-크르르르.

하지만 왜일까?

그랑 다이어 울프가 겁을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덕분에 조금 미안해졌지만, 어차피 녀석은 사람을 죽이는 몬스터였기에 불필요한 동정심은 지우기로 했다.

그리고 주먹으로 내려치는데···.

한발 늦게 테이밍 메시지가 떴다.

[그랑 다이어 울프를 테이밍 했습니다.]

"어?"

내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그랑 다이어 울프의 목덜미를 스치며 바닥을 꽂혔다.

-쾅!

나는 의문을 표했다.

타이밍이 조금 뜬금없어서.

"설마 몬스터를 굴복시켜야 한다든가 그런 건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어쨌든 성공했으면 됐다.

나는 바닥에 배를 드러낸 채 엎어져 있던 그랑 다이어 울프에게서 벗어났다.

"잘 지내자 멍멍아."

테이밍 된 그랑 다이어 울프의 이름은 멍멍이로 정해졌다.

"이 정도면 타고 다닐 수도 있겠는데?"

나는 바로 길들여진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꽤나 안정감이 드는 탈것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잠들기 전까지 멍멍이를 타고 뛰어다녔고, 문뜩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테이밍 목걸이로 와이번도 길들일 수 있다면 어찌 될까?'

흥미로운 궁금증이었다.

*

대재앙이 발생하고 4일째.

안전텐트의 온도조절 기능 덕에 쾌적하게 꿀잠을 잔 나는 부모님께 생존 신고를 했다.

언제 통신이 끊길지 모르는 상태다 보니, 통화의 순간은 각별할 수밖에 없고, 이전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던 가족의 소중함을 곱씹을 수 있었다.

하지만 통화 시간이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버지로부터 전해 듣는 육지의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좋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말씀은 주요 도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버리겠단 뜻인가요?"

[······. 그래, 그렇게 되는 거겠지.]

그동안 정부에선 군인들을 갈고 있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국민의 구조에 힘을 쏟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을 피난처로 데려가는 이송 과정에서 적지 않은 군인들이 희생되고 있어서 무식한 방식이라며 군 내부에 불만이 많다고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이런 방식으로 구조된 국민이 많느냐 한다면 또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군대를 전국 9개 지역에 집중 배치하여 견고하게 방어 라인을 꾸리고, 해당 방어 라인을 중심으로 생존구역을 넓혀간다?'

즉, 선택받은 9곳을 제외한 지역의 군인들을 철수시킨다는 뜻이다.

군인들이 철수된 지역의 주민들은 정부에게 버림받은 것.

앞으로 각자도생해야 한다.

"극단적이네요."

[전부를 살리긴 힘드니, 소수를 희생해서라도 다수를 보호하자는 거야.]

아버지도 내키진 않아 하시는 것 같지만, 이 이상 좋은 방법은 없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

그만큼 육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어쩌면 나와 가의도 주민들이 고립되어 있긴 하지만, 생활 환경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섬은 육지에 비해 몬스터의 밀집도도 낮고, 몬스터의 종류도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앞으로 정부에서도 레벨업을 적극 장려할 거야. 아예 사냥터나 몬스터의 정보 등을 제공해서 성장을 지원할 셈이지.]

그건 좋은 방법 같다.

살려 주는 게 아니라 살 방법을 알려주는 거니까.

"보면 볼수록 우리 가족은 운이 좋네요."

[그래, 가족을 잃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월등히 많은 상황이니까.]

도시에는 방 한 칸을 벗어나지 못해 굶주리는 사람도 있고, 가족의 시체를 끌어안고 기약 없는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린 행복한 거다.

적어도 이 절망 속에서 미래를 그릴 수 있으니까.

이후 우린 각자가 가진 정보를 공유했다.

아버진 군에서 시범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적응군(레벨업 병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가장 레벨이 높은 사람이 이제 10을 넘겼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레벨 올리기가 힘들어요?"

[네가 이상한 거라니까? 현실은 게임이 아니잖아. 너만 게임 감성 그 자체야.]

내 반응에 아버지는 헛웃음을 흘리며 '네가 오면 부대장을 시켜 줄 수도 있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셨다.

물론, 나는 다신 군대에 갈 생각이 없는지라 강하게 거부했고, 통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끄응!"

나는 기지개를 켜며 안전텐트를 나섰다.

그러자 길들어진 그랑 다이어 울프 멍멍이가 나를 반겨주었다.

"으악! 깜짝이야."

그런데 멍멍이를 쓰다듬던 나는 깜짝 놀라야 했는데, 이유는 녀석의 옆에 거대한 멧돼지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시체가 따끈한 게 사냥을 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설마 나 먹으라고 잡아 온 거냐?"

-컹!

테이밍의 효과일까?

지능이 생각보다 높은 느낌이다.

설마, 주인 먹으라고 사냥을 해올 줄이야.

"하하, 그래 고맙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나는 웃으며 녀석을 쓰다듬었다.

이래서 개를 키우는 모양이다.

뭐, 녀석은 개가 아니라 늑대형 몬스터긴 하지만, 기특한 건 기특한 것이다.

덕분에 아침부터 포식하게 생겼다.

*

멍멍이 덕에 든든하게 배를 채운 나는 본격적인 몽마의 던전 탐색에 나섰다.

[하급 서큐버스를 토벌하여 경험치 200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서큐버스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34코인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서큐버스의 머리카락 1묶음을 획득했습니다.

비록 던전의 최초 발견 보너스 효과가 사라지면서 경험치와 보상이 절반으로 줄었지만, 멍멍이의 보조 덕분에 매우 빠른 속도로 서큐버스를 토벌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시간대비 수익은 어제보다 늘어난 느낌이고, 동시에 두 마리의 서큐버스를 상대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리고 나는 의외의 사실을 추가로 알게 되었는데.

[테이밍 몬스터 멍멍이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바로 테이밍 몬스터도 성장이 가능하단 사실이었다.

"오오! 멍멍이 대단한데?"

-컹!

비록 녀석은 이름과 달리 '멍멍'하고 짓진 않지만, 단 하루 만에 내 단짝이 되어 함께 던전을 누볐다.

018화 던전 탐색 (3)

*

던전이 무서운 이유는 근처에 접근한 인간을 집어삼켜서 몬스터가 있는 공간으로 강제 전송을 시킨다는 점이다.

던전을 빠져나가기 위해선 탈출구를 찾거나, 입장 가능 시간이 끝날 때까지 버티고 있어야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던전에 빠지면 다신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시스템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레벨업에 진심인 나라도 지나치게 난도가 높은 던전에 예고 없이 빠진다면 살아 나올 수 없을 거야.'

이건 던전이라기보다 함정이라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피할 방법은 신전이 있는 안전구역 주변을 가지 않는 것뿐인데, 이것도 근본적인 해결법은 아니다.

레벨업과 능력치 상승, 아이템 파밍 등, 성장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해 놓고, 열심히 돌아다니는 사람일수록 위험할 수밖에 없는 이런 함정을 왜 만들었을까?

보면 볼수록 모순적이란 느낌을 받는다.

'생각이 있다면 이런 모순을 타개할 시스템도 만들어 놨어야 돼.'

때문에 나는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을 뿐, 뭔가 해결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긍적적인 사고방식인 것 같지만, 아직 우린 바뀐 세상에 적응 중이고 모르는 게 더 많았으니 말이다.

*

"멍멍아 빠져!"

-커엉!

"이 새끼가."

몽마의 던전 2층을 목전에 둔 1층 마지막 구역.

나와 멍멍이는 조금 특별한 서큐버스와 일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의 서큐버스들이 손톱을 칼날처럼 강화하여 휘둘러 왔다면, 이번의 서큐버스는 레이피어와 스몰소드 중간의 세검을 들고 펜싱선수처럼 공격을 해왔다.

복장도 고급스럽고 단정하게 꾸민 모습이 마치 다른 서큐버스들과는 급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챙! 챙!

녀석의 가공할 찌르기 스피드와 긴 리치는 숨을 쉬기 힘들 정도.

그래도 검도를 배워온 짬밥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몬스터와 여러 실전을 겪어왔기 때문일까?

처음 상대하는 부류의 적임에도 제법 전투를 잘 이끌어가고 있었다.

"큭!"

앞서 녀석의 공격을 맞고 뒤로 튕겨 나간 멍멍이의 상태가 신경 쓰였지만···.

뱀처럼 이리저리 빈틈을 노려오는 적의 세검 앞에서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여러 대전 스포츠를 배워온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건, 냉정히 상대를 탐색하고 대응하는 것이다.

나는 최대한 방어 위주로 검을 펼치며 녀석의 공격에 익숙해지고자 노력했다.

'이런 전투는 초조해하면 안 돼. 여유를 가지자.'

-챙! 챙! 챙!

격렬한 움직임으로 마치 춤을 추는 듯한 서큐버스와 심플 그 자체인 나의 검 놀림은 큰 대비를 이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녀석의 공격에 자잘한 생채기가 늘어갔다.

하지만 치명타는 없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나는 녀석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움찔.

그 덕분일까?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미소를 짓던 서큐버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대충 알겠어.'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서큐버스의 세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을 잡았다.

'발동작이다. 녀석은 나와 달리 발동작이 커.'

녀석의 발을 보면 어느 정도 다음 동작을 예측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게 나는 서큐버스의 특정 발동작이 나오길 기다렸고.

'지금!'

녀석이 발을 크게 앞으로 내딛는 장면을 포착한 순간.

사선으로 몸을 날렸다.

탄환과도 같은 직선 찌르기가 날아들 것임을 예측한 움직임이었다.

-휘익!

직선거리에 더 이상 나는 없다.

이대로 검을 휘둘러 봤자 크게 빗나갈 뿐이니, 당황한 서큐버스가 재빨리 검의 경로를 바꿔왔지만.

직선으로 뻗어 나가던 검로를 힘으로 돌려봤자, 속도만 떨어질 뿐이었다.

초승달처럼 휘어 들어오던 세검이 내 검에 의해 맥없이 올려 쳐졌다.

-챙!

결과는 나왔다.

나는 춤을 청하듯 녀석의 품에 파고들어 손으로 허리를 감쌌고, 근거리에서 얼굴을 마주한 서큐버스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크게 당황했다.

너무 바짝 붙어서 우린 서로에게 검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안녕."

-아느?

느닷없는 인사에 서큐버스는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고, 나는 싱긋 웃으면서 그대로···.

"으럇!"

저먼 스플렉스로 녀석의 대가리를 돌바닥에 찍어 버렸다.

-컥!

-빠각!

인간의 수준을 초월한 근력과 순발력이 더해지니, 서큐버스는 기절한 개구리처럼 사지를 꿈틀대다가 그대로 절명했다.

"좋았어. 이 개 같은 것."

서큐버스는 하나하나가 남성을 홀리는 미모를 갖고 있다.

하지만 실루엣 고글을 쓴 내겐 몬스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고글 너머로도 미인이라는 게 뚜렷하게 보이긴 하지만, 실루엣 고글은 기본적으로 몬스터를 빨갛게 표시하기 때문에 피칠갑을 한 것처럼 흉측하게 느껴졌다.

"후우."

이어서 실루엣 고글을 벗자 요란하게 떠오른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네임드 서큐버스 멜리아를 토벌하여 경험치 2,500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라 '부상'과 '상태 이상'이 모두 회복됩니다.]

[네임드 서큐버스 멜리아의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552코인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회복물약 3개를 획득했습니다.

-스킬북 '탐색'을 획득했습니다.

뭔가 좀 특별한 녀석이란 걸 알긴 알았는데, 네임드 몬스터일 줄은 몰랐다.

네임드라는 특수성 때문일까?

경험치와 보상 모두 일반 서큐버스와 급이 달랐다.

하지만 나는 보상에 신경 쓰기보다 아까 칼침을 맞고, 뒤로 빠졌던 멍멍이의 상태부터 살폈다.

"괜찮아?"

-컹!

어깻죽지에 관통상을 입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하급 회복 물약을 꺼내 멍멍이를 치료해 주었다.

아직 던전 밖으로 나가려면 2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괜히 포션 아끼다가 멍멍이가 죽으면 더 큰 손해이기에 망설임 없이 사용했다.

-컹컹!

[멍멍의 부상이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부상을 회복한 녀석이 벌떡 일어나 내게 비비댔다.

덩치도 큰 녀석이 엉기니, 마치 이리저리 치이는 느낌이다.

나는 멍멍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비로소 네임드 서큐버스를 죽이고 얻은 보상 중 메인이라 할 수 있는 스킬북을 확인했다.

[탐색 / 상급 스킬북 / 패시브]

-사람의 이름과 레벨이 머리 위로 표기된다.

-NPC의 이름과 레벨이 머리 위로 표기된다.

-몬스터의 이름과 레벨이 머리 위로 표기된다.

-50미터 이내의 숨겨진 던전을 탐색한다.

-50미터 이내의 숨겨진 필드를 탐색한다.

-10미터 이내의 숨겨진 약초를 탐색한다.

-10미터 이내의 숨겨진 보물을 탐색한다.

"이건?"

그리고 그 내용을 살핀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처음으로 얻은 상급 스킬북이란 것도 놀랍지만, 내가 갖고 있던 의문을 해소시켜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런 게 있어야 마음 놓고 필드를 돌아다닐 수 있지!'

이 스킬이 있어야 아무 이유 없이 던전에 빠져 개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사라질 것이다.

던전의 기습 납치에 대책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스킬이 존재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탐색 스킬을 익힌 사람들이 미리 던전을 탐색해 놓으면 이전처럼 엉뚱하게 휘말리는 일도 없어질 테니까.

덤으로 몬스터가 얼마나 강한지도 레벨로 표기가 되니, 무리한 전투를 피할 수 있어서 여러모로 생존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약초와 보물을 탐색한다?'

또한 마지막 두 줄의 문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무래도 약초에 아버지가 말씀하신 영약 같은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다.

숨겨진 보물도 그렇고 나중에 한 번 제대로 다뤄봐야겠다.

[탐색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스킬을 익힌 나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로써 내 생존능력이 더욱 향상되었다.

"멍멍아 가자."

나는 네임드 서큐버스가 지키고 있던 던전 2층의 문으로 다가갔다.

[몽마의 던전 2층에 입장하시겠습니까? YES/NO]

그리고 거리낌 없이 2층으로 향했다.

던전은 언제 어디서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다는 게 무서운 점이지만, 적어도 이 문제는 내게 해당되지 않는다.

이미 던전의 지도를 갖고 있으니까.

'지난번 메인 시나리오 11번째 조각을 얻었을 때, 획득한 그 지도 말이지.'

덕분에 던전 탐색은 순조롭고, 멍멍이가 적당히 어그로를 끌어주는 덕에 전투시 위험도가 크게 감소했다.

방금은 중간 보스 느낌의 네임드에게 쉽게 당하긴 했지만, 일반 서큐버스를 상대로는 멍멍이가 밀릴 이유가 없다.

"멍멍아!"

몽마의 던전 2층도 등장 몬스터의 숫자가 조금 많을 뿐, 상대하는 건 하급 서큐버스였기에 우린 큰 고비 없이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

서백호의 아버지 서인호 대령은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이 녀석 또 던전에 들어갔나 보네."

이틀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당연히 겁이 없는 자식이 걱정이지만, 황당하게도 전화를 할 때마다 레벨이 팍팍 올라 있는 아들의 상황에 마냥 쓴소리를 하기도 힘들었다.

원체 신중하고 제 앞가림을 잘하는 녀석인지라, 적정 수준의 안전 대책은 갖고 있을 거라 믿었다.

'검도나 격투기 실력 역시 뛰어난 녀석이기도 하고.'

자신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서인호 대령은 서백호가 매우 특별하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운동 분야에서만큼은 가르치는 선생마다 종목을 가리지 않고 모두 선수 시켜야 한다고 말했을 만큼 천부적인 감각을 갖고 태어났다.

'백호는 진짜입니다. 녀석이라면 일본의 신성이라 불리는 아키라조차 넘어설 수 있을 겁니다.'

당시 백호의 검도 스승이 했던 말을 떠올린 서인호 대령은 고개를 내저었다.

검도뿐만이 아니었다.

태권도, 이종격투기, 유도 등 다양한 종목에서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덕분에 서인호 대령은 어쩌면 지금의 세상이 아들에겐 더 잘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아니야. 그건 너무 갔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지 못해 살고 있는데, 배가 불렀지."

물론, 바로 부정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던 스마트폰을 빤히 바라보던 서인호 대령은 본부 회의에 참석할 시간이 되었단 사실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 대령님!"

그런데 그때였다.

서인호 대령과 친한 최소령이 소란스레 달려오는 바람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무슨 일이야?"

"지금 전국의 통신이 다운됐습니다. 전기도 1시간을 버티지 못한다고 합니다."

"뭐? 왜!?"

방금까지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던 서인호 대령은 깜짝 놀라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러자 어느새 스마트폰의 통신이 끊겨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황한 서인호 대령의 물음에 최소령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몬스터들이 기반 시설들을 중점적으로 공격하고 있답니다. 심지어 해양 몬스터들도 해저 케이블을 끊고 있는 것 같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런 미친."

언젠가 기반 시설이 기능을 잃을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이런 식이 될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마치 명령에 따르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몬스터들이라니.

서인호 대령은 마른 침을 삼켰다.

'백호야.'

더불어 연락이 힘들어진 아들을 떠올리며 손톱을 깨물었다.

***

"잘하면 제한 시간 안에 깰 수 있겠는데?"

몽마의 던전 2층은 역시 1층보단 난도가 높았다.

기본적으로 등장하는 몬스터의 수가 1.5배 더 많았고.

[네임드 서큐버스 티에리를 토벌하여 경험치 2,500을 획득했습니다.]

[네임드 서큐버스 티에리의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524코인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회복물약 2개를 획득했습니다.

-티에리 소드를 획득했습니다.

네임드 몬스터도 2차례 튀어나오기도 했다.

1층에서는 최대한 스킬을 배제하고 검에 대한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신체 능력으로만 싸웠다면, 2층부턴 스킬이고 뭐고 다 쏟아부어야 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사냥과 탐색을 이어가길, 약 2시간.

나와 멍멍이는 보스룸으로 보이는 공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음···."

보스룸을 앞에 두고 짧게 고민을 했다.

들어갈지, 아니면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볼지.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불리해지면 튄다는 마인드로 보스에게 도전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들어가지는 않고, 완벽하게 개인정비를 마치고 들어가기로 했다.

[티에리 소드 / 한손반 장검 / 등급: 최고급]

-네임드 서큐버스 티에리의 장검이다.

-모든 능력치 +1

이건 방금 네임드 서큐버스를 처치하고 얻은 장검이다.

네임드 서큐버스들은 모두 검을 사용했는데, 검의 형태는 제각각이었다.

그런데 그중에 한 녀석이 떨군 검이 손에 너무도 잘 맞았다.

드디어 늑대검을 대신할 장검을 손에 넣은 것이다.

추가옵션이 무려 모든 능력치를 1씩 높여 준다.

"보스룸에 들어가기 직전에 새로운 무기를 얻게 되다니."

마치 빠르게 던전을 클리어하라는 뜻 같지 않은가.

019화 던전 탐색 (4)

*

현재 내 레벨은 27.

능력치는 아이템의 효과를 더해 근력과 순발력이 16이고, 마력이 14다.

여기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전투 스킬은 마력탄이 있으며, 보조 스킬로 도약과 중급 방어막, 중급 회복이 있다.

중급 방어막과 중급 회복은 장비 내장 스킬이라 하루에 2번씩밖에 사용하지 못하는데, 이미 던전 2층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한 번씩 사용했다.

그로 인한 스킬의 부족은 걱정할 필요 없다.

이를 커버해 줄 포션이 꽤나 많았으니까.

중급 회복 물약이 4개, 하급 회복 물약이 13개.

중급 회복은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베어도 바로 회복할 수 있고, 하급 회복은 베이거나 꿰뚫리는 등의 외상을 바로 회복한다.

"멍멍이도 주요 전력이지."

게다가 함께 싸울 수 있는 동료가 있다.

처음 길들였을 때보다 더 커진 듯한 멍멍이가.

[멍멍이 (그랑 다이어 울프) / 레벨 15]

멍멍이는 이번 몽마의 던전에서만 무려 레벨업을 5번이나 했다.

레벨이 15인 하급 서큐버스와 레벨 25인 네임드 서큐버스의 사냥을 도운 덕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비록 네임드 서큐버스를 상대하는 건 어려웠지만, 언제든 뒤를 공격할 수 있는 아군은 존재만으로 적에게 부담을 주니, 무시할 수 없는 큰 전력이다.

"검이 조금 가볍긴 한데···. "

이 정도면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한다.

한 번에 공략을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죽지만 않는다면 다음 공략에 도움이 될 거다.

나는 새로 얻은 티에리 소드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달라진 무게감에 적응한 후, 보스룸에 손을 얹었다.

[타임 어택 종료까지 남은 시간: 17분 32초]

[보스 공략 중 타임 어택 시간이 끝나면 강제로 퇴장됩니다.]

[보스룸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아무래도 얼마 남지 않은 활동 시간을 우려한 경고 메시지 같은데.

나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오히려 좋은 것 같다.

불리하다 싶으면 시간이 종료될 때까지 도망 다니면 되는 거니까.

"가자."

-컹!

나는 그대로 보스룸에 들어섰다.

지금까지 던전 내부의 공간들이 동굴의 느낌이 강했다면, 보스룸은 이슬람의 건축 양식을 따라 만들어진 것 같은 번듯한 공간이었다.

바닥엔 기하학적인 패턴과 묘한 색감의 타일이 깔려있고.

벽면과 천장은 돌을 깎아 무늬를 입혔다.

곳곳에는 흰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가 놓여 있어서, 마치 기도를 위해 마련된 공간 같았다.

[침입자인가?]

그리고 그때.

또렷한 한국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윽.'

입으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직접 의사가 전해지는 느낌이다.

그 느낌이 어찌나 불쾌한지, 나는 말을 걸어온 대상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침입자다."

방 한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던 여인.

그녀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보스 서큐버스 칼리아 / 레벨: 30]

그녀는 신관을 연상시키는 복장을 하고 얼굴에는 베일을 쓰고 있었다.

일반 서큐버스는 거의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복장이었고, 네임드 서큐버스들은 어느 정도 노출이 있긴 해도 기사 느낌이 나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칼리아'란 서큐버스는 완전히 다르다.

노출이 전혀 없고, 살이란 살을 전부 가리고 있었으며, 복장도 펑퍼짐했다.

[공격적인 사내로군.]

혓바닥이 길 필요 없다.

어차피 녀석은 죽여야 할 몬스터인데, 교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전까지와 다르게 말이 통하는 몬스터라는 게 살짝 꺼림칙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검을 앞세우며 전투를 준비했고, 멍멍이는 나와 거리를 벌려 녀석의 측면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뭐, 좋다. 상대해주지.]

그리고 칼리아는 펑퍼짐한 로브 안에서 마법처럼 기다란 창 한 자루를 꺼내 쥐었다.

약 2미터쯤 되어 보이는 그 창은 그녀의 신장보다 훨씬 길었다.

'이 동네 서큐버스들은 매혹 스킬을 빼면 죄다 물리 전투네.'

나는 칼리아의 모습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아무리 봐도 그녀의 복장이 전투에 방해가 돼 보였다.

'뭐, 적이 불편하면 좋은 건 나지.'

나는 느릿느릿 그녀에게 다가갔다.

창을 상대하는 건 처음인지라, 긴 리치를 주의했다.

그런데 그 순간.

칼리아가 기습적으로 움직였다.

-후웅!

창날이 뒤쪽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채찍처럼 횡으로 크게 휘두른 것이다.

마치 창대가 그녀의 몸에 휘감았다가 풀린 것 같은 착시현상이 일었다.

-타타탁!

나는 즉시 움직여 칼리아의 품 안에 파고드는 것으로 대응했다.

'원심력을 한껏 머금을 창날과 대결할 필요는 없지.'

회전반경이 큰 창끝보단 창 안쪽의 파워가 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최대 속도로 칼리아에게 접근해 검으로 창의 중간 부분을 때렸고, 그 충돌로 인해 생긴 반발력을 내 힘으로 만들었다.

휘둘러오던 창대는 기세가 크게 죽고, 내 검은 신속하게 칼리아의 목을 베어간 것이다.

-쉭!

"헙!"

그러나 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언제부터 거깄었는지, 단검 한 자루가 정확하게 내 미간으로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검도 던진다고?'

기겁한 나는 급히 고개를 꺾었고, 그로 인해 검의 경로가 어긋나고 말았다.

덕분에 칼리아 역시 내 공격을 쉽게 피해냈다.

-퍽!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칼리아의 팔꿈치가 시야 한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팔꿈치는 내 얼굴을 가격했다.

"큭!"

순간 정신이 날아갈 뻔했다.

대체 근력이 얼마나 되는 건지, 금속 방망이에 얼굴을 힘껏 강타당한 느낌이다.

-크왕!

-퍽!

-깨갱!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곧추세웠다.

때마침 멍멍이가 끼어들어 시간을 끌어줘서 다행이지, 바로 후속 공격이 이어졌다면 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 좀 치네."

내 감상에 칼리아는 웃어 보였다.

[너도 제법이구나. 그 상황에서 끝까지 공격을 하다니.]

내 시선은 어깨 부분이 길게 찢어진 그녀의 로브로 향했다.

칼리아에게 얻어맞음과 동시에 나는 마력탄 두 발을 날렸고, 그중 하나가 어깨를 스친 것이다.

"걱정 마. 다음엔 목을 따줄 테니."

첫 충돌은 내 패배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밀린 느낌은 아니다.

-힐끔.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멍멍이의 상태를 살폈다.

내 마력탄에 놀랬던 건지, 칼리아는 멍멍이를 확실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덕분에 멍멍이는 한 대 얻어맞긴 했어도 전투 속행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휙!

첫 번째 충돌로 날 인정했을까?

칼리아가 자신의 로브 벗으며 복장을 체인지했다.

"쉣···."

펑퍼짐한 로브 안에는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수영복 형태의 전투복이 숨겨져 있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그런 복장.

'왠지 그럴 것 같았어.'

이게 게임이었다면 남성들은 환호성을 지르는 이벤트씬이었겠지만, 나는 매혹 스킬이 무서워 실루엣 고글을 벗을 수가 없다.

최고의 시각 효과를 즐길 수 없음이 아쉽긴 했지만, 녀석을 맨눈으로 바라보면 바로 사망이니 괜한 상상을 털어냈다.

-후우웅! 후웅!

한껏 가벼워진 그녀는 전투 자세를 바꾸었다.

창끝을 쥔 게 아니라 정 가운데를 잡고 봉 돌리기를 시작한 것이다.

분명 창이 그녀의 신장보다 훨씬 클 텐데, 땅에 닿지 않는 게 신기했다.

-핏! 훅! 훅!

그러나 화려한 그 묘기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회전하던 창날이 갑자기 늘어나듯 생각지 못한 각도로 찔러왔기 때문이다.

-챙! 챙! 콰앙!

나는 그 창을 놓치지 않고 검으로 쳐내거나, 피하면서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했다.

칼리아는 창으로 찌르기 공격뿐만 아니라, 베기와 치기도 적극 활용하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더욱 다가가기 힘들었다.

'일단 공격패턴에 익숙해지자.'

때문에 항상 하던 대로 그녀의 전투 패턴을 읽기 위해 노력했지만···.

조금 익숙해지려 하면 전투 스타일을 바꾸고, 또 익숙해지려 하면 단검을 날려오는 등 너무도 변칙적이었다.

심지어 하이라이트도 남았으니.

-촤악!

"허억!"

[아쉽군.]

내 마력탄처럼, 녀석도 공격 스킬을 보유하고 있던 것이다.

창날 위로 푸른색의 기운이 길게 솟구쳤다.

마치 무협의 검기처럼.

'뒈, 뒈질 뻔했네.'

거리를 계산하며 공격을 피했던 나는 하마터면 골로 갈뻔했다.

갑자기 창날 위로 푸른 기운이 약 50cm 정도 솟아났으니 말이다.

덕분에 나는 아끼고 아끼던 '중급 방어막'을 펼치고, 연격으로 쏟아지는 푸른 기운에 결국 옆구리를 깊게 베어 '중급 회복' 스킬까지 사용했다.

두 개 모두 한 번씩밖에 사용기회가 남지 않은 아이템 내장 스킬이었다.

"후우."

황급히 거리를 벌린 나는 놀란 마음을 다잡으며 칼리아를 바라보았다.

녀석도 아쉬워하는 거 보니, 방금 공격이 필살기였던 모양이다.

"더 꺼낼 건 없냐?"

[글쎄···?]

나는 힐끗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던전의 타임 어택 시간이 이제 3분도 남지 않은 게 보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다소 밀린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나름 치열하게 전투를 이어왔단 뜻이다.

그것도 처음 보는 보스몬스터를 상대로 말이다.

하지만 변칙 공격이 계속된다면 더 이상은 힘들다.

멍멍이도 부상이 쌓여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고, 나도 마력이 진즉에 바닥났기 때문이다.

'만약 새로운 패턴이 또 나오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그런데 만약.

녀석에게 새로운 수가 없다면···.

지금까지 봐온 것과 다름없는 전투 패턴이 이어진다면···.

타임어택 시간이 끝날 때에 맞춰서 도박수를 던져 볼 생각이다.

-챙!

약간의 대치.

그리고 이어지는 칼리아의 공격적인 접근.

나는 그녀가 공격 일변도로 나오자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방식은 이미 보았던 거다.

다만 제자리에서 빈틈을 노려오던 이전과 달리, 앞으로 적극 전진하는 게 달라졌고.

'이젠 아예 대놓고 쓰네.'

심지어 검기(창기)와 같은 공격 스킬을 수시로 발현했다.

-핏!

"큽!"

그 공격을 막을 때면 나는 엄청난 반발력에 뒤로 밀려나거나 튕겨졌고, 무기는 이빨이 나가면서 톱처럼 변해갔다.

"······."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칼리아가 이 공격을 주구장창 쓸 수 있다면 진작에 사용했을 테니까.

스킬은 많은 마력을 소모한다.

인간처럼 몬스터에게도 이 법칙이 적용된다면 한계는 분명 올 것이다.

[타임어택 종료까지 30초 남았습니다.]

그리고 신호처럼, 던전의 타임어택 종료 예정 메시지가 떠오른 그 순간.

칼리아가 전진을 멈추고 물러났다.

이후 칼리아의 창에서 공격 스킬이 발현하는 일은 없고, 이전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나는 때가 되었음을 느끼며 외쳤다.

"멍멍아!"

-크앙!

곧 죽어갈 것처럼 비실대던 멍멍이의 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칼리아는 깜짝 놀라 힐끔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멍멍이는 내 장단에 맞춰 소리를 내질렀을 뿐, 다친 상태 그대로 제자리에 있었다.

그에 아차 싶은 칼리아가 내게 시선을 돌렸지만, 잠깐의 틈은 나를 한 걸음 그녀에게 가깝게 만들어 주었다.

"나도 필살기 있어! 이 자식아!"

내 외침에 칼리아가 헛바람을 삼켰다.

나는 그 순간 인벤토리를 열어 그 안에 잠자고 있던 아이템을 꺼냈다.

어제 바다를 건널 때 사용한 스티로폼.

핑크색 단열 스트리폼이 발사되듯 허공을 수놓았다.

일종의 시야 가리개인 셈인데, 이런 얄팍한 수에 당할 만큼 보스 몬스터는 멍청하지 않았다.

녀석은 창을 휘둘러 스티로폼을 쳐냈다.

그로 인해 내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뭣?]

그러나 나를 본 녀석이 흠칫 놀란다.

이유는 양손에 장검이 각각 한 자루씩, 쌍검이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티에리 소드를 득템하면서 후 순위로 밀렸던 늑대검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왼손에 쥔 것이다.

설마 내가 쌍검을 쓸 거라 생각 못 한 녀석이 크게 당황하며 어디서 자꾸 꺼내는 건지 모를 단검을 날려왔다.

동시에 창도 휘둘러왔으나, 나는 그 두 공격을 묘기 부리듯 쌍검으로 하나씩 막아냈다.

뭔가 이럴 때 그럴싸한 스킬명을 외쳐야 할 것 같은데···.

"스타 더스트."

나는 그냥 아무 대사나 내뱉었다.

"스트림! 이 새꺄!"

-핏!

처음으로 보스 몬스터인 칼리아에게 유효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나는 쌍검을 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에 몇 번 합을 나누면 칼리아가 금방 허접함을 알아챌 것이다.

다만 지금은 내 쌍검술의 수준을 모르니, 그녀는 맞서 싸우기보다 뒤로 물러나는 선택을 했고.

[타임어택 종료까지 5초 남았습니다.]

이는 악수가 되고 말았다.

-크왕!

[이런···.]

-콰직!

어느새 멀쩡해진 멍멍이가 칼리아의 뒤에서 나타나 목을 물어뜯은 것이다.

그녀가 스티로폼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한 움큼 꺼내 멍멍이에게 던졌다.

하나라도 녀석에게 맞아서 치료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결과, 작전은 성공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칼리아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곧이어 내 쌍검이 그녀의 가슴과 복부에 틀어박히니.

[축하드립니다. 몽마의 던전 보스 칼리아를 토벌했습니다.]

[몽마의 던전 클리어,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최초의 던전 클리어, 위대한 업적이 명예의 전당에 기록됩니다.]

타임 어택이 끝나기 직전, 던전의 클리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

통신이 끊기고 머지않아 전기까지 끊겼다.

당연히 전국이 난리가 나고, 정부의 각 부서는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그건 계룡대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는데···.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서백호의 아버지 서인호 대령은 초조하게 부하들의 보고를 기다렸다.

"가의도에 위성 전화 배치되어 있는지 아직도 확인이 안 돼?"

"죄, 죄송합니다."

몇 년 전, 서해 섬마을에 재난을 대비한 위성전화가 설치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전해 듣고 이를 부하들에게 확인해 달라 했다.

하지만 통신이 끊기니 기존에 간단히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될 일마저 처리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아···."

서인호 대령은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힌 느낌에 연신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국인 서** 님께서 몽마의 던전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세계 최초로 던전을 클리어한 업적은 명예의 전당에 기록이 됩니다.]

[모두 한국인 서** 님을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서인호 대령은 예상치 못한 메시지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씨 성의 사람은 수없이 많다.

"이, 이건?"

하지만 그는 해당 메시지의 주인공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확신했다.

애초에 '몽마의 던전'이란 단서가 첨부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이 자식. 뭐 하고 다니는 거야?"

황당함이 가득 담긴 그의 음성 속엔 아들의 안위를 확인한 아버지의 안도가 담겨 있었다.

020화 정비 및 준비 (1)

***

일반 몬스터보다 네임드 몬스터가 압도적으로 강하고,

보스 몬스터는 그런 네임드 몬스터보다 월등히 강했다.

마지막 순간을 제외하고 단 한 번의 우위도 가져가지 못한 전투였기에 서큐버스 칼리아에게 승리한 건 기쁨이 클 수밖에 없었다.

"으오오!"

나는 환호하며 멍멍이를 껴안았다.

[멍멍이(그랑 다이어 울프) / 레벨: 20]

보스를 토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서인지 멍멍이는 한 번에 레벨이 5나 올라 있었고, 어느새 덩치도 훌쩍 커져서 고개를 들어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흐읍, 후···."

그렇게 얼마나 멍멍이를 안고 호들갑을 떨었을까?

나는 슬슬 미뤄놨던 메시지들을 읽기로 했다.

[최초의 던전 클리어. 위대한 업적이 명예의 전당에 기록됩니다.]

명예의 전당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 건지는 몰라도, 최초라는 타이틀은 나쁜 기분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몽마의 던전 클리어,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몽마의 던전 최초 클리어,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던전 최초 클리어,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그 최초라는 타이틀에 뒤에 붙은 추가 보상이 너무 달달했다.

보상은 이랬다.

-최고급 장비 뽑기권 1장(몽마의 던전 클리어)

-최고급 장비 선택권 1장(몽마의 던전 최초 클리어)

-희귀 등급 아이템 뽑기권 1장(던전 최초 클리어)

뽑기권 2장에 선택권 1장.

더구나 그중 하나는 무려 희귀 등급이다.

"희귀 등급이 장비 선택권이면 좋았을 텐데. 아이템 뽑기권이라니."

아쉽지만 꽁으로 주는 보상이니 만족하기로 했다.

'최고급 장비 선택권은 윌리아에게 퀘스트 보상을 받으면 1장이 더 생기니, 그때 가서 선택하기로 하자.'

나는 우선 두 개의 뽑기권을 사용하기로 했다.

먼저 '최고급 장비 뽑기권'부터.

-팟!

뽑기권을 사용하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빛이 모이더니, 이내 어떤 형상이 만들어졌다.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이펙트 모션.

왜일까?

K-게임의 뽑기가 떠오르는 이유는.

그리고 눈앞에 뽑힌 아이템의 설명이 떠올랐다.

[쉴드 스케일 건틀렛 / 최고급]

-탄소섬유에 와이번 비늘을 덧대 만든 방어형 건틀렛.

-뛰어난 강도와 높은 반발력을 지니고 있다.

-하루 3번 하급 방어막을 사용할 수 있다.

팔등에 유선형의 작은 방패가 달린 건틀렛 한쪽.

"가벼운데?"

딱 봐도 방어에 적극 활용하라는 디자인을 가진 장비다.

덤으로 하급 쉴드도 3번이나 사용할 수 있어서 여러모로 전투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추가 능력치가 붙지 않았다는 점인데, 그만큼 장비가 뛰어나서 그런 것 아니겠냐는 의미로 해석했다.

나는 건틀렛을 왼팔에 장착했다.

"좋네, 팔등까지 가려져서 안전해 보여."

만족한 나는 다음 뽑기권을 눈에 담았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희귀 등급의 아이템 뽑기권을.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 행운의 탈리스만님! 장비아이템 부탁드립니다!'

나는 이미 희귀 등급의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다.

바로 '행운의 탈리스만'이라는 물건을.

아무래도 내가 운이 좋은 게 이 물건의 영향이 아닐까 싶지만, 역시 이왕이면 전투에 도움이 되는 장비가 나오길 바랐다.

-팟!

그리고.

이런 나의 절실한 기도가 통했을까?

[빛을 엮어 만든 투구 / 희귀]

-보유자의 머리 전체를 보호하는 투구이며,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개념 장비.

-미스릴 합금 이상의 강도를 가지고 있어, 최상급 스킬로도 쉬이 파괴되지 않는다.

-물 속이나, 불 속에서도 사용자에게 신선한 공기를 제공한다.

-빛 속성, 마력+6

"오?"

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록 한 번 휘두르면 보스 몬스터의 뚝배기도 따버리는 오버스펙의 무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 뚝배기만큼은 보호해줄 최고의 투구가 등장했다.

-스스스.

"진짜 안 쓴 것 같네?"

반투명한 형태의 투구를 얼른 뒤집어쓰자, 바람이 머리를 감싼 느낌이 들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착용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개념 장비라니.

이것이 바로 궁극의 방어구 아닐까?

혹시 다른 장비를 사용해도 방해가 되지 않는지 궁금해서 실루엣 고글을 써보니, 아무런 문제 없이 착용 되었다.

'얼굴에 날아드는 공격을 굳이 피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 그럼 전투에 엄청난 도움이 되겠는데?'

너무 아이템을 맹신해서 적의 공격에 대가리부터 들이미는 짓은 하지 않겠지만, 중요한 순간 가능성 높은 도박수로 사용하기 좋아 보였다.

그리고 또 마음에 드는 건 높은 등급만큼, 마력을 무려 6이나 상승시켜 준다는 점이다.

현재 내 마력은 아이템 효과를 더해 14.

거기에 +6이 된다면 거의 50%가 상승하는 거다.

스킬의 사용횟수가 증가한다는 건 그만큼 전투력과 생존능력이 증가한다는 의미다.

'추가 옵션인 빛 속성 부여의 효과는 뭔지 잘 모르겠지만···.'

-컹?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멍멍이와 춤을 췄다.

이런 내 모습에 녀석은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일단 장비 뽑기는 끝.'

행운의 탈리스만의 효과인지, 아니면 원래 이 정도의 아이템이 나오게 되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뽑기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결과라 생각한다.

'하지만 보상은 이게 끝이 아니지.'

내겐 아직 보스몬스터를 토벌하고 얻은 보상이 남았다.

나는 메시지 창을 조작해 보스 토벌 직후의 내용을 찾았다.

[던전 보스 칼리아를 토벌하여 경험치 12,000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라 '부상'과 '상태 이상'이 모두 회복됩니다.]

지금까지와 단위가 다른 토벌 경험치.

하지만 레벨이 오름에 따라 요구 경험치도 높아졌기에 보스 몬스터를 잡았다고 레벨이 몇 단계씩 오르는 일은 없었다.

'이름을 가진 네임드 몬스터나 보스 몬스터는 경험치를 많이 주는 대신 최초 토벌 보너스는 안 주는 모양이네.'

애초에 토벌 난이도가 다르기도 하지만, 네임드의 경험치가 일반몬스터의 12.5배, 보스몬스터는 일반몬스터의 60배인 걸 보면 틀리지 않은 추측인 것 같다.

물론, 칼리아 같은 보스 몬스터를 잡는 것보다, 일반 서큐버스 60마리를 잡는 편이 안전할 거다.

그러나 시간 대비 수익을 따지면, 특출난 한 개체를 잡는 게 훨씬 이득이란 생각이 들었다.

[던전 보스 칼리아의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3,200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스킬북 '검기'를 획득했습니다.

-인벤토리 4칸을 획득했습니다.

-칼리아의 전투복을 획득했습니다.

들인 노력에 비하면 짧은 네 줄의 보상.

하지만 칼리아가 사용했던 스킬과 인벤토리 4칸이 보상으로 딸려 온 것을 본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검기 스킬은 이미 몸소 체험했기에 얼마나 강력한 스킬인지 잘 알고 있다.

내심 칼리아와 싸우면서 그 스킬이 보상으로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는데, 정말 나와주다니.

원거리의 마력탄과 더불어 근거리 전투를 책임져줄 스킬이 등장했다.

[검기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인벤토리 4칸이 확장됐습니다.]

더불어 인벤토리도 10칸에서 14칸으로 늘었는데, 이 역시 무시하지 못할 확장이다.

더 많은 물건을 인벤토리에 보관할 수 있다는 건, 경우에 따른 전략의 선택권이 많아졌단 뜻이기도 했다.

바다에서도 그랬고 던전 보스 때도 그랬고, 핑크 스티로폼이 대활약을 하지 않았는가.

그만큼 인벤토리 역시 전투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칼리아가 자꾸 어디서 단검을 꺼내 던지나 했는데, 인벤토리를 갖고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지?"

몬스터도 인벤토리를 사용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건···."

나는 마지막 보상을 집어 들었다.

[칼리아의 전투복 / 최고급]

-활동성에 중점을 둔 초경량 전투복.

-얇은데도 질겨서 칼에 잘 베이지 않지만, 찌르는 공격엔 약하다.

-남성이 입으면 신체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매우 불편할 수밖에 없다.

-순발력 +2

손 한 줌에 다 들어오는 천 쪼가리.

바로 칼리아가 입고 있던 전투복이다.

그 수영복같이 생긴···.

이딴 걸 어디에 쓰나 싶었지만.

순간 머릿속에 '띵'하고 윌리아의 존재가 스쳐 지나갔다.

"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챙겨는 둘까?"

나는 굳이 나온 아이템을 버려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여, 고이 주머니에 챙겼다.

"좋아, 돌아가자."

그렇게 보상 타임이 끝이 났다.

안전구역에서 윌리아에게 퀘스트 완료 보상을 받으면, 최고급 장비 선택권 2개가 남게 되지만, 그건 그때를 위한 재미로 남겨 놓기로 했다.

*

나는 던전을 빠져나온 직후, 바로 윌리아에게 퀘스트 완료를 보고했다.

당연히 그녀는 이렇게 빨리 깼냐며 놀랐고, 호감도 60%를 돌파한 기념으로 우린 멍멍이가 잡았던 멧돼지로 삼겹살 파티를 즐기려 했다.

"이제 호감도 80%까지 얼마 안 남았네요."

"그때가 되면 동료가 되는 거죠?"

"물론입니다."

"하하, 기대되는군요. 나중에 제가 선물로 드릴 전투복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윌리아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불판을 세팅하던 도중.

"응?"

"왜, 그러세요?"

"스마트폰이···."

나는 너무 조용한 스마트폰에 의아함을 느껴 확인했고, 뒤늦게 통신이 끊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잠깐 가의도 좀 다녀와 봐야 할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천천히 볼일 보고 오세요."

그래서 윌리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확인하고자 웨이포인트를 이용해 가의도로 날아갔다.

-팟!

"아저씨!"

"오, 자네 왔는가?"

마침 가의도 안전구역에서 쉬고 있었는지, 웨이포인트 근처에 평상을 놓고 앉아 있던 김용근과 몇몇 주민이 나를 반겨 주었다.

"어어? 자, 자네 뒤! 뒤!"

하지만 그들은 머지않아 나를 따라 공간이동이 된 멍멍이를 발견하곤 기겁하며 평상에서 굴러떨어졌다.

가뜩이나 큰 그랑 다이어 울프가 더 커졌으니, 그 포스가 무시무시했다.

"아, 얜 제가 길들인 애라서 괜찮아요. 멍멍아 손."

-턱!

"허어, 세상에···. 그, 그 늑대를 길들였다고?"

간단히 멍멍이의 무해함을 증명한 뒤에서야 그에게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우리 역시 통신이 끊겼어. 그나마 LT텔레콤이 늦게 끊겨서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 있지."

"어떤 상황입니까?"

"몬스터들이 기간시설을 파괴하고 다닌다는구만. 그래서 통신은 물론, 전기, 상하수도도 끊길 거라 들었어."

몬스터들이 기간시설을 노렸다?

조직적으로?

갑자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몬스터들이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여기 상황은 어떤데요?"

"가의도도 기지국이 당하긴 했는데, 우리만 통신시설이 살아 있다고 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야. 그나마 태양광 발전소는 건드리지 않아서 당장 전기 사용은 문제가 없으니 다행이지."

그나마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부모님과 통화를 못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언제고 통신이 끊길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식이 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내 모습에 무언가 알아챘는지, 김용근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혹시 어디 전화하고 싶은데 있는가?"

"네?"

"마을 회관에 재난대비 위성전화가 설치되어 있거든. 혹시 그걸로 가능하면···."

"정말요!?"

"그, 그래."

하늘이 도운 걸까?

김용근의 이야기에 나는 크게 안도했다.

아버지와 연결할 수 있는 위성 전화의 번호는 몰라도 계룡대라면 건너 건너 연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을 회관이 어딘데요?"

"이 길 따라서. 저기로."

"멍멍아."

-컹!

내 명령에 멍멍이가 돌연 김용근의 윗도리를 물더니 자신의 등 뒤로 던졌다.

얼떨결에 멍멍이에게 탑승한 그는 벙찐 표정을 지었고.

우린 전력으로 마을 회관을 향해 내달렸다.

"응?"

"엄마야!"

덕분에 원치 않게 마을 주민들에게 겁을 줬지만, 마을 회관까지는 30초도 걸리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어!? 자네 왔는··· 으아아악!"

마을 회관에 도착하니, 나를 알아본 이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오다가, 등 뒤의 멍멍이를 발견하곤 기겁했다.

나는 다시 그들에게 멍멍이가 무해하단 사실을 설명한 뒤에야 위성전화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20분 전쯤 계룡대에서 전화가 왔었어. 서 대령이란 사람이 자네의 아버지 아닌가?"

"맞습니다."

"여기 그 사람이 자네 오면 건네주라면서 전화번호 남겼네."

역시 아버지.

조치가 빠르시다.

나는 바로 그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고.

[백호니?]

"네, 아버지."

[후우···.]

무사히 아버지와 통화할 수 있었다.

[적절하게 가의도 가는 길을 뚫어 놓은 게 신의 한 수가 되었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우린 얼굴을 보지 못해도 서로 쓰게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내가 아무리 게임 감성으로 성장하고 있다지만, 지금 닥친 현실은 게임이 아니란 게 다시금 와 닿았다.

그리고 이어진 아버지의 이야기에 나는 더욱 표정을 굳혀야 했다.

[몬스터를 부리는 고등 몬스터가 등장하기 시작했어.]

021화 정비 및 준비 (2)

기본적으로 몬스터는 지정된 활동구역에서만 스폰되며 이 영역을 이탈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외가 있으니, 바로 인간에게 어그로가 끌렸을 경우다.

몬스터가 인간을 발견할 경우, 정해진 활동영역을 이탈해 계속 쫓아온다.

내가 가의도로 헤엄쳐 갈 때, 와이번이 수백 미터나 날아와서 나를 공격했던 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쫓아오는 몬스터를 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

그냥 죽여서 처치하거나, 숨어서 어그로를 푸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고등 몬스터는 달라, 녀석들은 정해진 활동영역 없이 자기들 멋대로 돌아다녀. 마치 개인의 의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런 녀석들이 몬스터들을 조종해서 끌고 다닌다는 거예요?"

[그래.]

고등 몬스터는 시스템 메시지가 알려준 호칭이 아니다.

정부에서 임시로 정한 호칭이다.

나는 처음 고등 몬스터를 '필드 보스' 같은 게 아닐까 추측했다.

몽마의 던전에서 상대한 보스 몬스터 칼리아만 해도 말이 통하는 높은 지성의 몬스터였으니까.

하지만 추가 설명을 들으니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던전이라는 특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칼리아는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보스 몬스터와 또 다른 부류의 몬스터란 걸까?'

확신할 순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고등 몬스터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생존이 더욱 힘들어졌다는 거다.

세상이 격변하여 지상에 몬스터가 등장하고, 그다음 비행 몬스터가 등장하고, 또 그다음 해양 몬스터가 등장하더니, 이번엔 고등 몬스터라는 게 등장했다.

'너무 적응할 틈도 없이 몰아붙이는 거 아닌가?'

사람들이 나만큼 레벨을 올리고 있다면 모를까, 생존 난도가 너무 높아 보인다.

[이러다가 내일은 용이 등장하는 거 아니냐며 다들 불안해하고 있어.]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그 정도로 아버지의 추론은 무섭지만 일리 있어 보였다.

"그 고등 몬스터들이, 다른 몬스터를 조종해서 기간시설들을 파괴했다는 거죠?"

[그래.]

"음, 자율 의지가 강하다는 것치고, 하는 행동이 똑같은 게 이상하지 않아요?"

[맞아, 하지만 기간시설의 공격이 끝나면 전부 제멋대로 움직이니, 이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어.]

"뭔데요?"

[그게 시스템의 지령이라고.]

시스템.

언젠가부터 다들 그렇게 부르고 있다.

지금의 사달을 일으킨 정체 모를 존재를.

"거기 상황은 어때요?"

[말해 뭐해, 지옥이지.]

"레벨을 올리고, 안전구역을 이용하는 등의 시스템 활용이 이젠 선택이 아닌, 필수인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쩌면 자꾸 사태가 심각해지는 게 인간들의 빠른 적응을 위해서일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이 죽는 건 부수적인 결과고요?"

[인간의 목숨을 신경 썼으면, 이렇게 급진적인 사건을 일으키지도 않았겠지.]

아버지와 나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나는 고등 몬스터에 대해 캐물었다.

"고등 몬스터는 얼마나 많은 부하를 끌고 다니던가요?"

[몇십 마리부터 몇천 마리까지, 다 달라. 주한미군의 이야기에 따르면 몇몇 나라에선 만 단위 이상의 이동도 목격되었다고 해.]

"고등 몬스터는 어떻게 상대하고 있어요? 현대 무기로 죽일 수 있어요?"

[공격에 적중되면 죽기야 죽지. 하지만 녀석들이 무기를 학습하고 있는지, 점점 잘 숨어다녀서 토벌하는 게 쉽지 않아.]

"외형은 어떤 형태예요?"

[다양해. 오크도 있고, 늑대인간도 있고, 인간 형태도 있어.]

"전투력 수준은요?"

[한 녀석에게 중대가 몰살당한 적도 있으니, 일반 몬스터완 급이 다르다고 봐야지. 보고에 따르면 마법을 사용하는 녀석도 있다더군.]

마법이 아니라, 마법형 스킬이라 보는 게 맞을 거다.

아버지의 말만 들어선 고등 몬스터가 얼마나 강한지 제대로 감이 오지 않았다.

지금의 나도 지형지물과 스킬(방어막, 마력탄 등)을 잘 활용하면 개인화기로 무장한 중대 하나는 전멸시킬 수 있지 않을까?

"점점 제가 섬에 있는 게 다행인 것 같은 상황이 펼쳐지네요. 여기서 큰 고비 없이 성장을 하고 있으니."

내 말에 아버지는 쓰게 웃으며 동의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생각지 못한 말을 해오셨다.

[참, 너 던전 클리어 그거 뭐냐?]

"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메시지 뜨던데? 한국인 서** 님이 최초로 던전을 클리어하여 명예의 전당에 기록이 된다고.]

"그, 그게, 사람들이 전부 볼 수 있게 떴어요?"

[그렇다니까? 그나마 이름이 가려져 있어서 다행이지. 공개되었으면···.]

"난리 났겠네요?"

[누군지 알았다면 국방부에서 특수 부대를 조직해 잡으러 갔을지도 몰라.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잡으려 한다고 쉽게 잡히지도 않겠지만, 이름이 가려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만약 지금 정부에 잡히면, 성장에 지장이 생기고, 활동에 여러 제약이 더해질 테니까.

정부의 눈에 띄는 건 내가 더 강해진 다음이어야 한다.

[일단 네 존재에 대해선 철저히 함구할 테니, 너도 가의도 주민들과 함께할 땐 조심해. 레벨 물어봐도 절반 정도로 낮춰 말해.]

"알겠어요."

말 안 해도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지금 내 레벨이 28인데, 14 정도로 낮춰 부르기만 해도 마을 사람들에겐 엄청 높아 보일 것이다.

"내륙이 점점 위험해져서 걱정이네요."

[우리 걱정은 하지 마. 아무리 강한 몬스터가 몰려온다고 해도 계룡대 방어라인을 뚫긴 힘드니까.]

"그럼 다행이고요."

[너야말로 항상 조심하고. 빠른 성장도 좋지만, 나와 네 엄만 아들의 안전이 제일이란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네, 명심할게요."

그리고 약 10분 정도 시시콜콜한 대화가 이어지다가 우린 비로소 통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적지 않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아버지는 누가 들을까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으니, 다른 사람들은 통화 내용을 모를 것이다.

"무슨 일이세요?"

내 물음에 대부분 40대 이상 중년으로 이뤄진 마을 주민들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나를 반겨주었다.

"저번에 워낙 혼란스러워서 다들 감사 인사를 못 했잖나.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려고 온 거네."

김용근의 말과 함께 사람들이 내게 몰려들며, 이것저것 쥐여주기 시작했다.

고구마, 감자, 김치, 된장 등.

나는 신경 쓰지 말라며 극구 사양했지만, 어찌나 강경한지, 양손 가득 쇼핑백이 들렸다.

세상이 난리가 난 상황 속에서 아마 이 만큼 평화로운 동네도 얼마 없을 거다.

'마을 근처에서 나오는 몬스터라곤 슬라임뿐이니까.'

아버지와의 통화로 들었던 바깥의 긴박한 상황과 대비된다.

새삼 가의도의 환경이 축복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뚱맞게 섬에 고등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이 평화가 깨질 일은 없겠지.'

*

"제안이 어떻습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군."

나는 마을 이장과 김용근 등, 가의도의 주요 인물들을 모아 놓고, 곧 다가올 겨울을 나기 위한 식량 마련 계획을 제안했다.

내가 비닐하우스 자재를 제공하고, 그들은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겨우내 식량을 생산하기로 말이다.

확인 결과 약 50평의 비닐하우스를 만드는 데, 250코인이 필요했다.

그랑 다이어 울프 20마리 혹은 서큐버스 10마리를 잡으면 얻을 수 있는 비용이다.

"일단 비닐하우스는 50평 규모로 6개 동, 100평 규모 2개 동을 지으면 될 것 같네."

우린 마을의 지도를 펼치고 이리저리 궁리한 결과 총 500평 면적의 비닐하우스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게 최대 면적인가요?"

"더 확장할 수는 있지. 다만 지금 지정한 장소처럼 안전성을 보장할 수 없어서 문제인 거야."

나는 그들이 내민 지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을 곳곳에 붉게 칠해진 지역이 있었는데, 고블린이나 코볼트 등, 다소 위험한 몬스터에게 공격을 당할 수 있는 장소였다.

나는 그 지도에서 두 개 지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하고, 여기에 콘크리트 벽을 치면 50평짜리 2개 동은 더 지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내 말에 사람들은 순순히 수긍했다.

내가 말한 곳에 벽을 세우면 비닐하우스를 더 지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안전도도 높아질 것이다.

"그런데 괜찮겠나? 코인이 엄청 많이 들 텐데."

"있는 거 없는 거 털어서 마련해야죠. 대신 식량은 확실히 챙겨갈 겁니다?"

"당연하지. 그리고 약소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모은 코인도 보태겠네. 자네의 지출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겠지만 말이야."

"하하, 좋네요.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현재 마을 사람은 28명.

이 중 노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24명이고, 3명은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 1명은 10살짜리 남자아이다.

우린 최종적으로 60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만들 게 되었는데, 50평 비닐하우스엔 2명, 100평 비닐하우스엔 4명을 배치하여 관리하기로 했다.

"인당 관리면적이 25평인데, 무리하는 건 아니죠?"

"당연하지. 더구나 손도 많이 가지 않는 고구마나 감자 위주로 심을 텐데. 그 정돈 소일거리 수준이니 신경 쓸 필요 없네."

이야기는 원만히 끝났다.

이로써 가의도에서의 볼일이 끝나 월광도로 돌아가려 했는데.

"그, 자네 레벨이 몇이라 했지?"

"14입니다."

"엄청 높구만."

절반으로 낮춰 부른 건데도 그들은 높다며 감탄했다.

그리고 그들은 작당을 하듯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왔다.

"지난번 그 미친놈들 사건으로 확실히 안 사실이 있네."

"그게 뭔데요?"

"약하면 먹힌다는 거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픈 걸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남성 3명과 여성 1명이 나타났다.

"지난번에 보니, 자넨 레벨이 높은 것뿐만 아니라, 싸우는 법을 전문으로 배운 사람 같았어. 맞나?"

"네, 뭐···."

"혹시 청년들에게 싸우는 법을 알려 줄 수 없겠나?"

청년이라 말한 것치고 나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나마 김용근의 아들과 이장의 딸이 20대 중반으로 나와 나이가 가까웠다.

"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긴 시간을 투자할 순 없지만, 하루 1시간씩 시간을 내서 가르치겠습니다."

"오오!"

나는 큰 고민 없이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가의도는 식량 생산을 위한 주요 거점이니, 내가 없더라도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전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을 잘 키우면 언젠가 도움이 될 일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 허락에 긴장하고 있던 가의도의 청년단이 표정을 풀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장담컨대, 내게 배우기 시작하면 웃음이 쏙 들어갈 거다.

나는 그리 친절한 타입의 선생은 되지 못할 것 같으니까.

"일단 네 분의 교육과 자재 공급은 내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괜찮겠죠?"

"그래, 편하게 하게."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늦게 월광도 안전구역에서 삼겹살 파티를 위해 불판 앞에 앉아 있을 윌리아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서백호가 가의도로 향하고, 불판 앞에 얌전히 대기하고 있던 윌리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웬 검은색의 뭉치가 서백호가 앉아 있던 자리에 떨어져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게 뭐지?"

그녀는 서백호가 오면 돌려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 물건은 부드러운 재질의 천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한 손으로 움켜질 수 있을 정도로 부피가 작았다.

그래서 멋대로 '손수건 같은 건가 보다'라고 판단하며 별생각 없이 펼쳐보았는데···.

-펄럭!

전혀 예상치 못한 그 천의 정체에 그녀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

그건 누가 봐도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수영복이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지도 않고 작게 뭉쳐서 서백호가 있던 자리에 던져 놓았다.

덕분에 윌리아는 서백호가 돌아올 때까지 사색에 잠겨 있어야 했다.

다행인 건 그녀가 타인을 욕하고 무시하기보다 그 사람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부류란 점이다.

'많이 외로우신가 보다. 하긴 갑갑한 섬이니, 그러실만하지.'

그리고 잠시 후.

가의도에 갔다가 돌아온 서백호가 바닥에 떨어진 수영복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 황급히 주머니에 챙기는 것을 보았다.

이어서 멋쩍게 웃으며 음식을 손질하는 그를 보며 윌리아는 생각했다.

'앞으로 더 잘해드려야겠다.'

윌리아가 서백호를 측은하게 여기게 된 계기였다.

***

022화 정비 및 준비 (3)

*

"후아···."

삼겹살 파티는 성공적이었다.

비록 사육장에서 자란 돼지가 아니라 이전에 먹던 수준의 질은 아니지만, 최대한 좋은 부위를 선별해 고기를 얇게 썰고 코인 상점에서 산 돈가스 망치로 서너 번 두들긴 후 구워 먹었더니, 생각 이상으로 맛있었다.

덩치에 비해 의외로 어린 개체였을까?

고기도 그리 질기지 않고 누린내도 나지 않았다.

멧돼지라 하면 향도 강하고, 뭔가 뻣뻣할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만족하셨어요?"

"네, 너무 맛있게 먹었습니다. 특히, 그 쌈장이라 하셨나요? 그게 고기랑 엄청 잘 어울리네요."

더구나 가의도에 간 김에 이런저런 조미료를 챙겨왔는데, 덕분에 더욱 맛있게 삼겹살을 즐겼고, 윌리아의 만족도 또한 매우 높았다.

특히 고기를 쌈장에 찍어 먹고 보인 윌리아의 외국인 수준의 리액션은 유튜브에 올린다면 꽤 많은 조회수를 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윌리아의 호감도가 2% 상승했습니다.]

[윌리아의 호감도가 70%를 달성했습니다.]

'좋았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호감도가 80%가 되면 그녀를 동료로 영입할 수 있게 되고, 그럼 파티에 힐러 겸 버퍼가 생기게 되니 전투력과 생존율이 크게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호감도가 오르면 좋은 게 또 있으니···.

"그러고 보니, 육지에 이상한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 엘더 몬스터 말씀하시는 거군요."

"엘더 몬스터요?"

"네, 자율활동이 가능하고 일반 몬스터를 부하처럼 부리는 보스급 몬스터죠. 그걸 말씀하신 게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 몬스터를 엘더 몬스터라 부르는군요? 저흰 단순하게 고등 몬스터라 칭했거든요."

호감도가 상승함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많아진다는 거다.

"엘더 몬스터에 대해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네, 제가 알고 있는 선에서 최대한 알려드리죠."

호감도 70%가 되니, 이전처럼 '답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딱 끊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최선의 답을 주려 했다.

나와 윌리아는 나란히 쪼그려 앉아서 열심히 멧돼지의 뼈를 뜯고 있는 멍멍이의 털찐 등을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앞서 말했듯 엘더 몬스터는 자율활동이 가능하고, 일반 몬스터들을 부하로 부리는 특수 종입니다. 하지만 이외에도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중요한 특징이요?"

"일반 몬스터는 서로를 아군으로 인식하여 공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엘더 몬스터에겐 영역이란 개념이 존재해서, 다른 엘더 몬스터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서면 적으로 인식합니다."

"그 말은 엘더 몬스터끼리 치고받고 싸울 수 있단 의미입니까?"

"네, 맞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엘더 몬스터를 처치하면 상대의 힘을 흡수하여 더욱 강해질 수 있죠."

전혀 몰랐던 이야기.

이건 꼭 아버지에게 전해야겠다.

"엘더 몬스터의 스폰 조건이 따로 있나요?"

"뚜렷한 법칙은 없지만, 인간이나 몬스터가 많은 지역에서 등장할 확률이 높습니다."

확실치 않은 대답.

그만큼 엘더 몬스터의 등장은 랜덤 요소가 강하단 뜻인 걸까?

"무인도인 월광도에 등장할 확률은요?"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0%는 아닙니다."

불확실 요소가 포함된 몬스터란 점에서 꽤나 무서운 적이란 느낌이다.

그리고 엘더 몬스터의 전투력은 제각각인데, 기본적으로 레벨 20~50 사이라고 한다.

다만 엘더 몬스터는 다른 엘더 몬스터를 잡아먹을 수 있기에 많은 성장 가능성을 품은 몬스터였다.

"이게 제가 아는 엘더 몬스터의 모든 것입니다."

"성장하는 몬스터라는 게 무섭네요."

뭐, 인간도 성장할 수 있으니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야 할까?

나는 쓰게 웃으며 호감도 70%를 넘긴 기념으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당연히 그 안에는 세상이 이렇게 된 이유나, 시스템을 운영하는 존재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윌리아는 이 점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며 이렇게 답했다.

"여러분은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법칙을 시스템이라 표현한다죠?"

"그렇습니다."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저희도 비슷하게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우린 그걸 '세상의 의지'라 부릅니다."

"세상의 의지?"

"세상의 의지 덕에 제가 탄생했고 이렇게 백호님과 마주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럼 이 신전이 숭배하는 대상도?"

"맞습니다. 실체를 가진 누군가가 아닌, 세상의 의지를 숭배하는 겁니다."

결국, NPC는 어디선가 넘어온 다른 세계의 주민 같은 게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탄생된 존재란 뜻이다.

시스템의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 궁금증을 해결할 키워드는 이미 내가 갖고 있었으니···.

"사건의 근원, 해결책을 찾길 바란다면 메인 시나리오를 완성하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몽마의 던전에서 손에 넣은 메인 시나리오 조각이 그것이었다.

"백호님께서 지금처럼 계속 강해지시면, 자연히 나머지 시나리오 조각들도 접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윌리아는 친절하게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었다.

"무인도란 폐쇄성 때문에 백호님께선 월광도가 답답하실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 이곳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동안 레벨업에 몰두하시는 게 어떨까요?"

맞는 말이다.

그게 최선이겠지.

나는 윌리아의 제안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몽마의 던전도 다시 한번 방문해 보세요. 아마 많은 게 바뀌어 있을 겁니다."

"네?"

몽마의 던전이 바뀌어 있을 거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녀는 빙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여유가 되실 때 월광도 북부지역을 탐색해 보시는 것도 추천 드리겠습니다."

거긴 또 뭐가 있길래?

호감도가 70%를 달성했더니, 마치 매니저가 된 듯한 윌리아였다.

*

"어?"

나는 윌리아의 말대로 바로 몽마의 던전으로 향했다.

그랬더니 내 눈앞에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몽마의 던전에 입장 하시겠습니까?]

-클리어된 던전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습니다.

-현재 던전 내에 네임드 몬스터와 보스 몬스터가 없습니다.

-보스 몬스터는 토벌 후 일주일 뒤, 네임드 몬스터는 토벌 후 하루 뒤에 재등장합니다.

던전이 사람을 납치하던 방식을 버리고, 너무도 친절하게 입장할 거냐는 질문을 던져 온 것이다.

"오오."

예상치 못했던 기능이기에 나는 감탄사를 흘려야 했다.

"멍멍아 들어가보자."

-컹!

그래서 내부에 들어갔더니, 지난번처럼 던전 중간에 던져지는 게 아니라, 입구부터 차근차근 전진하여 언제든 밖으로 나올 수 있는 형태가 되었다.

일반적인 형태의 던전이 된 것이다.

'던전 보스와 네임드는 한번 잡으면 일정 시간을 두고 재등장하나 보네.'

이거 나중에 변화한 세상에 적응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던전 보스를 독차지하려고 사람들끼리 다투게 될지도 모르겠네.

실제로 비슷한 시스템을 가진 게임에서 그러지 않던가.

'그럼 나는 던전 하나를 독차지 하고 있는 거네?'

나는 피식 웃으며 무언가 또 바뀐 게 있나 천천히 던전을 돌았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클리어까지 꽤나 고전을 한 던전이었는데, 한번 클리어한 경험 때문인지, 단순히 나와 멍멍이가 강해진 덕인지, 쭉쭉 전진할 수 있었다.

"던전 한 바퀴를 도는데 2시간밖에 안 걸리다니···."

비록 던전 보스와 네임드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2시간 사이 벌린 경험치와 코인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아마도 한동안 몽마의 던전을 계속 돌게 될 것 같다.

'덤으로 네임드와 보스가 등장할 때마다 따박따박 잡으면 아이템과 스킬 파밍에도 큰 득을 볼 수 있겠지.'

반복 사냥이 지루할 수도 있지만, 현실은 게임이 아니다.

안전하게 레벨을 올릴 수 있다는 건, 이 미친 세상에서 엄청난 이점이었다.

몽마의 던전에서의 레벨업과 윌리아가 이유 없이 제안하지 않았을 월광도 북부 탐험.

거기에 가의도의 일까지 처리하면 꽤나 바쁘게 지내야 할 것 같다.

'겸사겸사 월광도 베이스 캠프도 꾸미고 말이지.'

***

가의도는 섬의 대부분이 산으로 이뤄져 있다.

더구나 산의 규모도 작지 않아 실제 마을 주민들의 활동구역은 섬 면적의 1할도 되지 않았다.

그 1할의 땅에선 고작 슬라임 정도밖에 나오지 않으니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주민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엔 강력한 몬스터와 예상치 못한 이상 지형이 숨겨져 있기도 했다.

그런 가의도 남쪽의 직각에 가까운 해안 절벽을 낀 어느 산속.

-크륵.

오크의 영역이 위치한 그곳에 회색의 피부를 가진 근육질의 남성이 빛과 함께 등장했다.

남성의 머리엔 하나의 뿔이 길게 자라 있어서 누가 봐도 인간이 아니었지만···.

"여긴 어디?"

그의 입에선 너무도 자연스러운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작업복을 연상시키는 펑퍼짐한 바지가 복장의 전부인 그는 꿈틀거리는 자신의 상체 근육을 살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누구?"

하지만 혼란스러워 보이던 그의 행동은 잠깐뿐이었다.

"그래, 나는 빼앗는 자. 인간의 영토를 다스릴 선택받은 존재다."

그는 언제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 오만한 표정으로 상체를 곧게 펴며 근처에서 자신의 눈치를 살피던 오크들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자 오크들은 뭐에 홀린 것처럼 황급하게 달려와 회색의 남성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오늘부터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다."

-크룩!

서백호가 가정한 최악의 상황 중 하나.

그의 활동영역에 엘더 몬스터가 등장한 순간이었다.

***

[상태창]

-레벨: 30

-칭호: 없음

-능력치

근력: 16(+1) 순발력: 17(+1) 마력: 11(+9)

잔여 능력치 포인트: 0

-보유 코인: 12,571

윌리아와 삼겹살 파티를 즐기고, 하루가 지난 다음 날.

나는 드디어 레벨 30을 달성했다.

낮에 가의도에 가서 비닐하우스 자재를 전달해주고, 그곳의 청년단 4인방을 교육시키고 오느라 약 2시간 정도를 소모하긴 했지만, 그 시간을 제외하곤 하루 종일 몽마의 던전에 처박혀있었다.

덕분에 해가 지기 전에 레벨 30을 달성할 수 있었고, 오늘 목표로 한 할당량을 채울 수 있었다.

"음... 결국 안전구역 근처가 최고네. 안에 화장실도 있고, 목욕탕도 있으니까."

조금 더 빨리 레벨 30을 달성해서 해가 높게 떠 있었다면, 이후의 일과는 월광도 북부 탐색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곧 해가 넘어가는 상황인지라, 나는 활동구역을 어슬렁거렸고, 이내 어느 분지에서 걸음을 멈췄다.

"신혼집···. 아, 아니지. 숙소를 차린다면 여기가 낫겠네."

뒤로는 안전구역을 접하고 앞으로는 광활한 바다뷰가 펼쳐진 장소.

-쿠엑! 컥!

-컹!

비록 오크의 영역과 접한다는 게 불편하긴 하지만, 그거야 벽을 치면 시선을 마주칠 일도 없으니 상관없다.

무엇보다 내겐 안전 텐트도 있고, 오크들 정돈 지금처럼 멍멍이가 알아서 처리해 주기도 하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바로 윌리아와 함께 묵을 숙소를 지을 공간을 알아보고 있다.

'윌리아가 내 동료가 되면 묵을 곳까지 내가 제공해야 한다지? 흠흠.'

그녀가 나를 따라 다니게 되면 신전엔 새로운 NPC가 배정이 된다.

윌리아는 이제 신전 소속이 아니게 되는 거다.

즉, 새로운 보금자리가 필요하니, 이왕이면 분위기 좋은 곳을 찾아 이렇게 발품을 팔고 있는 거다.

023화 각성 (1)

"멍멍아, 여기 이 정도 깊이로 파줘."

-컹!

나는 삽으로 집의 형태를 흙바닥에 그린 후, 멍멍이에게 땅을 파달라 지시했다.

개과 동물들은 생각보다 땅을 잘 판다.

그런데 덩치가 웬만한 불곰보다 커진 멍멍이가 마음먹고 땅을 파니, 흡사 포크레인에 버금갔다.

집은 그리 크지 않게 14평으로 지을 예정이다.

화장실이나 욕실은 안전지대의 것을 사용할 예정이기에, 잠잘 곳과 식사할 곳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집은 벽돌을 쌓아 조적으로 지을 생각이다.

아무리 조적조 집이라고 해도 실제 건축이라면 쉽지 않겠지만, 상점의 건축자재 코너엔 편의성을 더한 신박한 제품들이 많았다.

'비싼 게 흠이지만.'

예를 들면 '매직 블록'이란 게 있는데, 이건 쌓기만 하면 중간중간 시멘트를 바르는 등의 공정 없이 하나의 통 콘크리트 벽이 된다.

심지어 철근을 넣은 것처럼 튼튼하며 단열에도 효과적이라고 하니, 매직 블록만으로 바닥을 채우고 벽을 쌓을 예정이다.

거기에 덮기만 하면 완성이 된다는 세라믹 판넬 지붕이란 게 있어서, 간단히 몇 시간만 투자하면 집의 외형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컹컹!

그때 땅을 다 팠다고 멍멍이가 신호를 보내왔다.

녀석은 50cm 정도 깊이로 땅을 제법 깔끔하게 파놨다.

나는 멍멍이의 일 처리를 칭찬하며, 땅을 다진 후 그 안에 매직블록을 차곡차곡 채웠다.

"정말 통짜 콘크리트가 되네?"

그랬더니 빈틈없이 말끔한 콘크리트 바닥이 만들어졌다.

자동으로 수평도 맞춰주는지, 바닥이 평평했다.

나는 바로 벽을 쌓았고, 그대로 약 2시간 정도가 지나 그럴싸한 집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아직은 바닥과 벽, 지붕의 형태만 갖추고 있을 뿐이지만, 급한 대로 당장 들어가 살아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게임하는 것 같네."

건축이 쉬우니 꽤나 재미가 있다.

마X크래프트를 하는 느낌이랄까?

"가운데를 거실 겸 부엌으로 두고 양 끝에 파티션을 쳐서 나와 윌리아의 공간을 방처럼 나누면 되겠지."

욕망 같아선 방이고 뭐고 중간에 킹사이즈 침대 하나만 놓고 싶지만, 그건 너무 노골적이다.

NPC도 감정이 있는 존재이니 순리에 따르는 게 맞겠지.

굳이 벽을 치지 않은 이유는 일말의 미련 같은 게 아니라, 가운데에 난로를 설치할 예정이기 때문에 그러했다.

곧 추워질 텐데 온돌을 설치할 능력이 안 되니, 난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난로로도 감당이 안 될 만큼 추울 땐 온도 조절 기능이 있는 안전 텐트 안에서 자야겠지.'

안전 텐트가 아늑하긴 하지만, 캠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 거다.

아무리 텐트가 좋아도 침대에서 자는 것과 비교할 순 없다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샷시 달고 담을 설치하는 건 내일 하자."

-컹!

간단히 1차 공사를 마친 나는 멀리 석양 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태양은 이내 바다에 완전히 잠겼고, 나는 씻기 위해 안전구역의 목욕탕으로 향했다.

오늘 일과는 이걸로 끝이다.

***

대재앙 발생 7일 차, 대한민국 서울.

[빠르게! 신속하게 이동합니다!]

-타타타탕! 탕탕!

[몬스터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앞만 보고 갑니다!]

수많은 군인이 포위한 공간에서 단 일주일 사이 완전한 거지꼴이 된 국민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모두 일주일 사이 지옥을 경험했기에 이렇게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축복이라 생각했다.

"젠장! 와이번이다!"

"괜찮아! 대공포 배치됐어! 그냥 신경 쓰지 말고 피난 유도 계속해!"

-두두두두두!

대규모 인원이 결집하여 이동하다 보니, 사방에서 몰려드는 몬스터 떼와 군인들의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들 결연하게 제 할 일을 했다.

이번 계획이 실패하면 대한민국은 완전히 무너진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시 방향 트롤 온다!"

-콰아앙!

몬스터의 등장으로 전 세계가 위기에 빠져 신음하고 있다.

그 상황 속에 대한민국은 전국 9개 대도시를 중심으로 방어라인을 꾸리는 결단을 내렸고, 현재 국민들의 피난이 이뤄지고 있는 서울이 그 계획의 첫 번째 실행구역이다.

정부는 서울 시민들을 4개 장소로 나눠 배치하고 있었는데, 그 4개소는 용산공원과 현충원, 경복궁, 서울숲이었다.

해당 지역이 몬스터의 등장 빈도가 낮고, 터가 넓어 대피소로 사용하기 적합하다 판단했다.

현충원과 경복궁은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곳이지만, 당장은 생존이 우선이었기에 사용을 지시했다.

"얼마나 모였어?"

그렇게 서울 방위 작전을 지휘하게 된 수방사 사령관은 자신의 부관에게 시민들의 피난 상황을 물었다.

"85만 명입니다."

"뭐? 100만 명도 안 된다고? 분명 주변 경기도 도시에서도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앞으로 수용인원이 계속 늘긴 하겠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면 잘해야 100만 명 전후로 끝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집계된 국민들의 피해현황은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다.

덕분에 회의실에 모인 모두가 표정을 굳혔다.

"설마 단 일주일 사이 9할 이상의 국민이 죽었단 뜻은 아니겠지?"

서울의 인구수가 1천만 정도이니, 단순 계산으로 9할이 죽은 것 아니냐고 계산하는 사령관의 행동은 오류라 볼 수 있지만, 부관은 답을 못했다.

워낙 변수가 많은 상황이라 무엇하나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령관은 입을 닫은 부관의 모습에 혀를 차며 화제를 바꿨다.

"괴물들의 공세는?"

"많이 약해졌습니다. 아무래도 고등 몬스터들이 집결된 군대에 달려들지 않고 있는 게 큰 것 같습니다."

"그 녀석들 이틀 전에 기간시설 파괴하고 다녔잖아?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고등 몬스터는 지능이 굉장히 높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 대군 앞에 나서봤자 싸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 한 거 아닐까요?"

"참, 괴물 새끼들 주제에."

그나마 고등 몬스터들이 끼어들어 사태가 커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사령관은 한숨을 내쉬며, 화마와 연기로 가득한 서울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종말의 도시를 그림으로 그린듯한 풍경.

"앞으로 어찌 될는지."

힘겹게 생존자들을 모으는 데까지 성공하긴 했지만, 여전히 미래는 불투명했다.

급하게 확보한 식량만 하더라도 고작 보름 치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

-키에에엑!

"빌어먹을!"

월광도 북부, 미탐색 지역.

나는 발이 푹푹 빠지는 늪지에서 기세 좋게 달려오는 리저드맨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런 지형이 있을 줄은 몰랐다.

드론으로 봤을 땐 그냥 숲인 줄 알았는데···.

"멍멍아!"

-컹!

그나마 나보다 네발로 달리는 멍멍이가 늪지에서 조금은 자유롭게 움직였다.

물론, 평소보다 느린 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나보단 나았다.

멍멍이가 달려드는 리저드맨 중 한 마리를 물고 늘어졌고, 덕분에 당장 내가 상대해야 하는 리저드맨은 세 마리에서 두 마리로 줄었다.

-키엑!

송곳 같은 이빨이 주렁주렁 달린 아가리.

오크를 상회하는 몸집과 전신을 뒤덮은 갑옷 같은 비늘.

더불어 무식하게 큰 포효까지 리저드맨의 기세는 오크 따위와 급을 달리했다.

'검기.'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녀석들을 맞이했다.

-촥!

-키엑!

우선 선행한 리저드맨의 글레이브를 쉴드 건틀렛으로 쳐내고, 검기를 담아 단번에 목을 날렸다.

[리저드맨을 토벌하여 경험치 200을 획득했습니다.]

[리저드맨의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40코인을 획득했습니다.

-리저드맨 가죽 2장을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앞선 녀석이 아닌, 뒤따라오던 다른 리저드맨이다.

내가 다른 놈을 상대한 동안, 그 리저드맨은 영악하게 측면을 파고들었다.

발을 붙잡는 늪지 때문에 신속한 대응이 힘들었고, 녀석은 그런 나를 비웃듯 매섭게 글레이브를 찔러왔다.

-휘익!

하지만 나는 그 공격에 오히려 박치기하듯 머리를 가져다 댔다.

-콰아앙!

-키륵!

그러자 리저드맨의 글레이브는 내 두개골을 가르는 게 아닌, 강렬한 충격음과 함께 뒤로 튕겨져 나갔다.

"뚝배기!"

나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놀란 리저드맨의 목을 베었다.

이게 모두 형태가 드러나지 않은 희귀등급의 방어구, '빛을 엮어 만든 투구' 덕이었다.

[리저드맨을 토벌하여 경험치 200을 획득했습니다.]

[리저드맨의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39코인을 획득했습니다.

-리저드맨 가죽 1장을 획득했습니다.

이어서 멍멍이가 상대하던 리저드맨까지 함께 처리한 나는 근처의 온전한 땅을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드디어 늪을 벗어나, 질퍽거리는 신발을 벗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급 서큐버스랑 보상이 거의 같네."

하지만 상대하는 건 하급 서큐버스가 편하다.

거긴 이곳처럼 늪지도 아니고, 매혹 스킬만 파훼하면 서큐버스의 전투력은 그리 높지 않았으니 말이다.

"더구나 최초 보상은 다른 누군가가 먹었고. 역시 꽤 시간이 흘러서 그런가?"

아마 앞으로는 정말 강력한 몬스터가 아니라면, 최초 보상을 차지하기 힘들 것이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가.

운으로 잡든, 머리를 잘 써서 잡든, 다수가 협력해서 잡든, 방법은 다양하다.

굳이 나처럼 한 번에 목을 날리지 않아도 먼저 죽이기만 하면 보상을 가져가는 시스템이 최초 토벌 보너스 아닌가.

"일단 돌아가자. 늪지대를 탐색하려면 준비가 필요하겠어."

-컹!

나는 굳이 무리하지 말고 멍멍이와 함께 안전구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만만치 않네. 월광도 북부."

어제 북부지역의 탐색을 못 한지라, 오늘은 일정을 바꿨다.

북부 탐색은 밝을 때 하고, 어차피 몽마의 던전은 낮밤 구분 없는 곳이니 차라리 늦게 입장하기로 했다.

그래서 보무도 당당하게 북부지역 탐색에 나섰는데, 고작 한 시간 만에 복귀를 결정하고 말았다.

'오늘 북부 탐색은 여기까지 하고, 씻은 다음 가의도나 다녀오자.'

아무런 소득 없이 윌리아를 마주할 생각을 하니 살짝 창피했지만, 무리하다가 다치면 나만 손해니 여유를 갖기로 했다.

뭐든 내 페이스로 하면 된다.

이곳엔 내 방식에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어? 벌써 오셨어요?"

"하하, 가려면 이것저것 준비가 필요하겠더라고요."

나는 안전구역에서 윌리아와 짧게 인사를 나누고 목욕탕에 향했다.

목욕탕에 비용을 지불하고 들어갔다가 나오기만 하면 입고 있던 복장이 알아서 깨끗한 상태가 돼 빨래방 대용으로 사용했다.

그렇게 늪의 뻘을 털어낸 나는 다음 일과를 위해 가의도로 향했다.

*

북부 탐색이 예정보다 일찍 끝난 것도.

급똥 같은 것에 괜한 시간을 쏟지 않은 것도.

평소라면 윌리아와 수다를 떨며 여유를 부렸을 텐데, 바로 가의도로 향한 것도.

모두 이 상황을 예기했기 때문일까?

"어?"

웨이포인트를 이용해 가의도로 넘어온 나는 공간이동 효과인 빛이 걷힘과 동시에 두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이유는 불길에 휩싸인 마을의 풍경이 나를 반겨 주었기 때문이다.

"뭐, 뭐야?"

본래 사건 사고는 예고 없이 발생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것 아닐까?

예상치 못한 급전개에 뇌정지가 온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거금을 들여 마련한 비닐하우스와 집이 불타오르고, 마을 사람들이 오크들에 쫓겨 다니며 아우성을 치는 모습 보게 되자 정신을 차렸다.

'분명 마을 주변에 오크 영역은 없는데?'

가장 먼저 그 의문이 들었지만.

언제까지 감상에 빠져 있을 수 없었기에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주민 구조가 우선이야.'

전력으로 내달리니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거기에 도약 스킬을 점프가 아닌 앞으로 튀어나가는 용도로 사용하자, 더욱 가속도가 붙어 제비가 된 듯 지면 가까이 날았다.

"사, 사람 살···."

그리고 어느 아주머니를 붙잡고 돌도끼를 내려치려던 오크를 발견한 나는 빠르게 방향을 틀며 발검을 했고.

-꾸익?

[오크를 토벌하여 경험치 50을 획득했습니다.]

[오크의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12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오크의 멍청한 목소리가 등 뒤로 울려 퍼지며, 보상 메시지가 떠올랐다.

몬스터가 반응하기도 전에 처리하고 지나친 것이다.

-촤악! 촥!

"어어?"

"자, 자네."

이후로도 나는 매섭게 달려나가며 눈에 띄는 오크란 오크는 모조리 처리했다.

일 검에 정확하게 한 마리씩.

달리는 와중에서 흐트러짐이 없이 검격을 뿌렸다.

나도 스스로가 이렇게 잘 싸울 수 있었나 싶을 만큼, 달리고 베고를 반복했다.

당연히 이런 내 모습을 마을 주민들이 똑똑히 보게 되고, 공포에 질려 있던 표정들은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트롤?'

그리고 마을 회관 뒤쪽에서 트롤 한 마리가 몸을 일으켰다.

녀석의 손에는 내게 싸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마을 이장의 딸 김민희가 붙잡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것 같은 모습.

겁에 질린 김민희의 표정이 크게 클로즈업돼 보였다.

"꺄아아악!"

트롤은 월광도에도 있지만, 아직 정면으로 붙은 적이 없다.

신장이 7~8미터에 달하는 녀석의 덩치 때문에 쉬이 덤빌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질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탓!

나는 도약 스킬을 사용해 하늘 높이 뛰어오르며 검에 검기를 담아 휘둘렀다.

허공에 푸른 빛의 반달이 새겨지고.

트롤의 목이 맥없이 날아올랐다.

[트롤을 토벌하여 경험치 500을 획득했습니다.]

[트롤을 최초 토벌하여 경험치 2,500을 획득했습니다.]

.

.

.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경험치.

그동안 큰 덩치에 괜히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이어서 쓰러지는 트롤의 몸에서 김민희를 떼어낸 나는 그녀를 대충 풀밭에 던져두었다.

"고, 고맙···."

아직 할 일이 많다.

구해야 할 사람도 많고.

그래서 감사의 인사를 들을 틈도 없이, 마을을 습격한 나머지 몬스터들을 정리해 나갔다.

본래라면 하지 않을 다소 무리한 공격도 가의도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가감 없이 쏟아부으니, 나조차 놀랄 만큼 압도적인 무위를 발휘했다.

무아지경, 물아일체란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024화 각성 (2)

몬스터를 처치하면 시체가 분해되듯 푸른빛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고난을 이겨낸 표시라 그런 건지, 몬스터 사망 이펙트는 미쳐버린 세상에서 몇 안 되게 마음에 드는 풍경 중 하나이다.

"허억···. 허억···."

정신을 차려보니, 아비규환에 빠져 있던 가의도가 침묵에 물들어 있었다.

더불어 마을 곳곳에서 푸른빛 가루가 눈꽃처럼 흩날리니, 여기가 내가 알고 있던 가의도가 맞나 헷갈릴 만큼 몽환적이었다.

'아니, 몽환적인 게 아니라 단순히 숨이 차서 시야가 흐린 걸지도.'

죽인 오크가 오십이 넘는다.

그것도 고작 몇 분이 되지 않아서.

'나중에 가선 오크 녀석들도 협력해서 힘들었지.'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했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머리 위에 얹혀져 있던 실루엣 고글을 내려 눈 위에 씌웠다.

실루엣 고글은 인간이나 NPC는 흰색으로 표시하지만, 몬스터는 붉은색으로 표시된다.

때문에 숨어 있는 몬스터 찾기에도 최적의 아이템이었다.

"고, 고생 많았네. 이제 좀 쉬는 게 어떻겠나?"

이런 내 모습에 몇몇 마을주민들이 슬금슬금 다가왔지만, 멍멍이가 나타나 스윽 내 앞을 가로막아 그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주민들은 몬스터가 눈에 띄지 않으니 사태가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나는 아니다.

'마을 근처에 오크 구역은 따로 없었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오크의 존재가 계속 걸렸기 때문이다.

'어?'

그러다가 슬라임 스폰 지역 근처에서 유독 붉은 점 하나가 실루엣 고글에 포착되었다.

"멍멍아!"

나는 바로 멍멍이의 등에 올라탔고, 이런 내 부름에 녀석은 담벼락이건 건물의 지붕이건 모조리 밟고 뛰며 내가 지정한 장소를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멍멍이가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나는 인벤토리에서 하급 회복 물약을 꺼내 마셨다.

딱히 어딘가 다친 곳은 없지만, 지친 몸을 빠르게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곧이어 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하고.

"미안, 밟고 뛸게."

-컹!

거칠게 달려나가던 멍멍이의 등을 밟고 뛰어올랐다.

휙휙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 가의도가 발 아래 펼쳐진다.

곧이어 찾고 있던 표적을 발견한 나는 바로 마력탄을 날렸다.

-퉁! 퉁!

[큭!]

급하게 날린 마력탄 두 발 중 한발이 도망치려던 표적의 다리에 명중했다.

나는 그대로 지면에 슈퍼히어로 랜딩을 선보이며 멋들어지게 착지했다.

도약 스킬에는 착지 보정이 포함되어 있기에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충격이 크지 않았다.

-턱!

그리고 마주한 몬스터는 대략 2미터에 달하는 건장한 체구를 가진, 회색 피부의 야성적인 남성이었다.

인간과 흡사한 외형을 갖고 있지만, 피부색보다 더욱 눈에 띄는 이질적인 특징이 있었으니.

녀석의 머리 위로 길게 뿔이 돋아 있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강해 보이는 외형이지만, 나는 쫄지 않고 검을 앞세우며 성큼성큼 의문의 몬스터를 향해 다가갔다.

-꾸익!

그때.

근처에 매복하고 있던 오크들이 기습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착지 과정에서 실루엣 고글로 매복을 알아챘기에 동요 없이 녀석들을 해치웠다.

[하프 오우거 제르카 / 레벨: 30]

곧이어 탐색 스킬이 정체불명 몬스터의 정보를 표기해줬다.

[너, 너 대체 뭐지?]

하프 오우거란 처음 보는 명칭도 그렇지만, 녀석이 대뜸 내게 말을 걸어 오는 것을 본 순간 이게 말로만 '엘더 몬스터'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이런 섬에 어째서 엘더 몬스터가?'

엘더 몬스터는 사람 또는 몬스터가 많은 지역에서 등장한다고 들었다.

물론, 외딴 섬에 등장할 가능성이 0%가 아님을 윌리아가 밝히긴 했지만, 극히 낮은 확률인데, 그걸 뚫고 등장한 거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 해야 할지.'

만약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가의도 마을은 전멸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예정보다 빠르게 가의도에 도착하는 바람에 재앙이 비껴갔다.

이건 마치 가의도의 악운에 나란 행운이 더해져 상충된 결과를 만들어낸 느낌이다.

그리고 내 입장에선 썩 나쁘지 않은 게···.

'이렇게 상대하기 좋은 레벨의 엘더 몬스터를 마주하다니.'

녀석의 존재가 맛있는 먹잇감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뭐긴, 네놈이 공격한 마을 사람들의 일행이지."

윌리아가 알려준 엘더 몬스터의 초기 레벨은 20~50 사이.

게다가 엘더 몬스터끼린 서로를 흡수하여 강화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흡수할 다른 엘더 몬스터가 없고, 레벨도 어중간한 이 녀석은 그냥 보물상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젠장, 왜 너 같은 놈이 이런 오지에 있는 거냐!]

"너희 몬스터들 때문에 갇혔다. 씨발아."

나는 검을 들며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그랬더니 하프 오우거 제르카는 예상치 못한 말을 해왔다.

[잠깐. 일단 대화로 풀어 보자.]

설마 몬스터에게 대화를 요청받다니.

엘더 몬스터의 지능이 높다는 이야긴 들었지만, 황당한 전개였다.

그런데 녀석은 왜 싸우기 전부터 이렇게 설설 기는 걸까?

혹시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걸까?

"허, 대화?"

[그, 그래.]

"공격당한 건 이쪽인데, 뭔 대화?"

굳이 몬스터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 따윈 없다.

나는 더 이상의 대화를 삼가고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젠장!]

제르카는 설득에 실패하자 악에 찬 포효를 내지르며,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곧게 뻗은 장검을 뽑아 들었다.

'일단, 인벤토리 추가 확정.'

다른 건 몰라도 녀석을 죽이면 인벤토리를 얻을 수 있는 건 분명한 것 같다.

덤으로 녀석이 쥐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장검도 토해 주면 좋겠다.

-챙! 채채챙!

나는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제르카는 야성적으로 생긴 것과 달리 정석에 가까운 검술을 펼쳤는데, 빠르고 파괴적이지만, 정석적인 공격인 만큼 오히려 상대하기 쉬웠다.

[촐랑대긴!]

같은 레벨의 보스 몬스터 칼리아가 변칙적인 전투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면 제르카는 정직하게 힘으로 찍어 누르는 타입이었다.

-훙!

그리고 나름 실력도 있어서 중간중간 무시하기 힘든 일격을 날려왔다.

녀석의 공격은 눈앞의 모든 것을 일도양단하겠단 기세를 품고 있다.

빈틈을 파고든 그 일격에 검기까지 깃들자 나 역시 검기를 일으켜 대응했다.

-깡!

물론, 힘 대결을 할 생각은 없다.

검기는 단순히 검을 보호하기 위함이고, 나는 제르카의 공격을 받을 때 손목과 어깨의 힘을 빼서 흘렸다.

덕분에 녀석의 공격은 맥없이 나를 스쳐 땅에 박혔다.

동시에 힘을 빼고 있던 손목과 어깨에 한 번에 힘을 주자, 내 검이 발사되듯 솟구치며 제르카의 목을 노렸다.

-핏!

[큭!]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공격을 피했지만, 녀석의 뺨이 길게 베였다.

또한, 제르카가 뒤로 물러나는 과정에서 마력탄에 당했던 다리의 상처가 움직임을 방해하니···.

-휙! 휙!

이를 예측해둔 나는 자연스레 연격을 쏟아내며 제르카를 압박했다.

-쾅!

물론, 내가 칼질을 두 번 할 동안 녀석이 한 번도 휘두르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비록 연격은 막혔으나, 나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어."

[뭣!?]

-콰작!

제르카의 온 신경이 내게 집중된 순간, 타이밍에 맞춰 멍멍이가 공격을 가했다.

멍멍이의 단검과도 같은 이빨이 녀석의 어깻죽지에 틀어박혔다.

[놔라!]

-컹!

그런데 가죽이 어찌나 단단한지, 생각보다 깊게 박히지 않은 모양이다.

'이거면 충분해.'

조금 아쉽지만, 1:1 상황에서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던 녀석이 추가로 부상을 당했다.

이어질 전투의 향방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니다! 지금부터다!]

비록 제르카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지, 마지막 혼을 불태우듯 열을 올렸지만···.

"어쩔."

나는 녀석의 열의에 어울리지 않고, 거리를 벌리며 약 올리듯 마력탄을 난사했다.

[이익! 비겁한!]

유리하다고 방심하지 않고 더욱 상대를 약하게 만들기.

목숨이 걸린 싸움이니 비겁하건 뭐건 이기면 그만이다.

-챙! 채채채챙!

마력탄으로 무릎과 복부에 추가 부상을 입힌 나는 그제야 녀석이 바라던 대로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이어진 건 난타에 가까운 자잘한 속검으로, 제르카에게 검을 휘두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 그만.]

결국, 녀석은 오래 버텨내질 못하고 기브업을 선언했다.

그런데 우린 스포츠를 하는 게 아닌지라, 나는 듣지 않고 더욱 몰아붙여 제르카를 빈사 상태로 몰고 갔다.

"흐읍, 후···."

들고 있던 검조차 놓치고, 농락이란 단어가 순해 보일 만큼 일방적으로 당한 녀석은 내 앞에 바짝 엎드렸다.

[살려다오. 살려만 주면 뭐든 하지.]

이런 거 보면 높은 지능이란 건 성가신 것 같다.

미련 없이 죽어 주면 좋겠는데, 제 목숨 귀한 줄 아니까.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공격한 건 녀석인데, 이래선 마치 내가 악당이 된 기분이다.

당연하지만 살려줄 생각 따윈 없다.

아이템으로 길들어진 멍멍이와 달리, 말만 듣고 녀석을 받아들이기엔 신뢰가 부족하다.

'좋은 생각이 났다.'

하지만 죽일 땐 죽이더라도, 두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생겼다.

"뭐 쓸만한 정보를 주면 살려 줄 수도 있고."

[정보라면?]

"엘더 몬스터의 약점이라든가, 앞으로 활동 계획이라든가."

[무슨 말인지···.]

첫 번째.

엘더 몬스터에게 정보를 수집할 수 있냐는 것.

그런데 녀석이 아는 거라곤 자신의 능력과 싸우는 방법뿐이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검, 좋아 보인다?"

[필요한가?]

확인하고 싶은 것 두 번째.

그건 바로 몬스터에게 장비를 강탈할 수 있는가다.

몬스터가 죽으면 소지한 아이템을 랜덤으로 떨어뜨리지만, 강탈이 가능하다면 원하는 아이템을 100%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몬스터와의 거래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

역시 몬스터는 NPC와 달리 이래저래 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다.

'쓸모없네.'

한숨을 푹 내쉰 나는.

-핏!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엘더 몬스터 제르카의 목이 툭 하고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엘더 몬스터의 공격으로부터 가의도를 지켜낸 것이다.

***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에 대대적인 생존 캠프 구성이 시작되자, 계룡대 역시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젠 너의 일, 나의 일 구분 없이 명령이 내려지는지라 얼떨결에 보급임무를 지원하게 된 서인호 대령은 짙어진 다크서클을 비비며 앓는 소리를 냈다.

물론, 밖에서 생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배부른 입장임을 알지만, 그렇다고 힘든 일이 쉬워지는 건 아니었다.

"30분만 쉬지."

"넵!"

결국, 서인호 대령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휴식을 택했고, 함께 임무를 보던 부하들이 기쁜 듯 일제히 답했다.

서인호 대령은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자신이 사라지지 않으면 부하들이 편히 쉬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딱 30분만 눈을 붙이려 하는데···.

[한국인 서**님 께서 최초로 엘더 몬스터를 토벌했습니다.]

[이 위대한 업적은 명예의 전당에 기록 됩니다.]

[한국인 서**님을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눈앞에 어딘가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걸 본 서인호 대령은 황당함에 헛웃음을 흘렸다.

"또?"

이번엔 지난번과 달리 해당 인물이 '서 씨'란 점을 제외하면 그의 아들이란 단서는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

서인호 대령은 메시지 속 인물이 자신의 아들이라 확신했다.

"이 녀석 대체 얼마나 강해진 거야?"

다른 사람들은 죽으네 사네, 혼란에 빠져 있는데 그의 아들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

[엘더 몬스터 최초 토벌. 위대한 업적이 명예의 전당에 기록됩니다.]

[엘더 몬스터 토벌,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엘더 몬스터 최초 토벌,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던전을 최초 클리어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

얼떨결에 한국인 서**의 존재감을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말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이어진 메시지로 눈을 돌렸고.

[하프 오우거 제르카를 토벌하여 경험치 15,500을 획득했습니다.]

[하프 오우거를 최초 토벌하여 경험치 10,000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라 '부상'과 '상태 이상'이 모두 회복됩니다.]

[하프 오우거 제르카의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4,552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오크 테이밍 목걸이 1개를 획득했습니다.

-인벤토리 3칸을 획득했습니다.

-제르카의 검을 획득했습니다.

[하프 오우거의 최초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1,000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상급 회복 물약 3개를 획득했습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문구들이 나를 반겨 주었다.

'오, 그 좋아 보이던 검 나왔네?'

나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검을 집어 들었고, 이내 생각지도 못한 아이템 설명에 두 눈을 크게 떴다.

025화 각성 (3)

제르카의 검이라 이름 붙여진 장검의 정보는 이러했다.

[제르카의 검 / 한손반 장검 / 등급: 특수]

-엘더 몬스터 제르카가 사용하던 검으로 미스릴이 대량 포함된 합금검이다.

-검기 등 무기 스킬의 위력이 50% 상승한다.

-근력+2, 순발력+2

-자체 스킬: 거력참

그 검은 지금까지 갖고 다니던 무기들과 급을 달리했다.

능력치가 한 번에 4씩이나 오르는 것도 대단하고, 검기 등 무기 스킬의 위력이 50%씩이나 오르는 것도 대단하지만···.

"거력참."

-후우웅! 콰아앙!

막강한 전투 스킬을 보유하고 있어서, 이 정도는 돼야 '특수' 등급의 무기인가 싶을 만큼 감탄사를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 내장 스킬이 있는 아이템을 몇 번인가 구했었다.

하지만 해당 아이템들의 내장 스킬은 하나같이 '하루 2~3회 사용 가능' 이런 식으로 제한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제르카의 검에 붙은 내장 스킬 거력참은 내가 가진 마력을 소비하여 발현되기에 횟수 제한이 없었다.

즉, 거력참이란 스킬을 새로 익힌 것이나 다름없단 소리다.

"와우···."

거력참의 위력은 굉장했다.

단순 파괴력만 따지면 검기를 크게 상회하는 한방공격이다.

시험 삼아 근처의 나무 그루터기를 찾아 휘둘러 봤더니, 그루터기를 베는 게 아니라 터뜨리는 수준의 위력을 냈다.

"그야말로 일격 필살이네."

어중간한 검으로 이 공격을 막으려 하면 100% 양단될 것이다.

검이 부러지지 않더라도 근력이 충분하지 않다면 어깨나 팔이 부서질 테고.

비록 일격에 마력을 3이나 소모하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발휘되는 위력이 소모되는 마력 이상의 출력을 뽑아내니 불만 따윈 없었다.

"검기랑도 상성이 좋아 보이고."

이후 내 전투에 날개를 달아줄 스킬이자, 검이었다.

'칼날이 조금 길고, 이 전에 사용하던 검보다 살짝 무겁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야.'

나는 착용하고 있던 최고급 등급의 티에리 소드를 인벤토리에 던져 놓고, 새로 얻은 제르카의 검을 바로 허리에 채웠다.

그리고 계속해서 보상을 살폈다.

'인벤토리가 3칸 추가되어 17칸이 되었고.'

인벤토리 공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전투력이 부족해도 인벤토리를 잘만 활용하면 불리함을 극복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참고로 인벤토리엔 내가 직접 들 수 있는 물건만 넣을 수 있는데, 근력이 높아짐에 따라 인벤토리의 사용 폭이 넓어지는 것도 재밌는 부분이다.

'다음 보상은 상급 회복 물약? 상급 회복 물약은 처음이네.'

제르카 토벌 보상으로 상급 회복 물약도 3개나 얻었다.

상급 회복 물약은 신체가 뜯겨 나가도 단숨에 회복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이미 하루 1회 상급 회복이 가능한 회복의 반지를 보유하고 있지만, 안전장치는 많아서 나쁠 것 없으니, 기쁜 마음으로 물약을 챙겼다.

'마지막 보상은 오크 테이밍 목걸이.'

나는 이름부터 멍멍이의 개목걸이를 연상시키는 아이템을 집어 들었다.

[오크 테이밍 목걸이 / 특수]

-레벨 30 이하 오크 류 몬스터를 길들일 수 있다.

-길들인 후 레벨이 30을 넘는 경우 문제없이 효과가 유지된다.

-길들인 오크가 죽을 경우, 아이템을 수거해 다른 오크에게 재사용할 수 있다.

별 기대 없이 본 아이템 설명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레벨 30 이하 오크 류' 몬스터에 사용 가능한 아이템이라니?

레벨 7짜리 오크밖에 본 적 없는 나로선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크 따위가 뭐라고 아이템이 특수 등급이야?'

오크를 길들이는 아이템이 제르카의 검과 같은 급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추후 기존 몬스터들의 상위종이 등장하려나?'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비행 몬스터와 수중 몬스터, 엘더 몬스터가 차례로 업데이트되었듯, 오크 궁수나 오크 전사, 오크 족장 같은 게 또 나오지 말란 법 없다.

'아니면 내가 모르고 있을 뿐, 특수한 오크가 이미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지. 던전 같은 형태로 말이야.'

던전이라면 네임드 몬스터와 보스 몬스터가 등장할 테니, 이 역시 일리 있는 추론이었다.

즉, 이로 인해 얻어지는 결론은···.

"어쨌든 당장은 일반 오크에게 밖에 사용 못 한다는 거잖아."

그나마 해당 아이템이 재활용이 가능하단 게 다행이다.

일단 아무 오크를 길들여서 써먹고, 나중에 더 강하고 뛰어난 오크를 발견했을 때, 다시 사용하면 되니까.

나는 테이밍 목걸이를 인벤토리에 때려 넣었다.

오크는 월광도에도 많으니, 굳이 가의도에서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어?"

그런데 그때.

한가지 가능성이 번뜩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크 형태의 엘더 몬스터가 존재할 수도 있지 않나?"

만약 오크 형태의 엘더 몬스터를 길들이는데 성공한다면.

내겐 몬스터 대군이 생기는 거다.

물론, 예측이 적중한다는 보장도 없고, 오크 형태의 엘더 몬스터를 찾아도 길들이는 데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행복회로 돌리기 딱 좋은 아이템인 건 분명했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따져보니, 비로소 아이템 등급이 특수인 이유가 이해되었다.

'육지로 나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네.'

나중에 육지로 진출하면 오크형 엘더 몬스터를 꼭 찾아봐야겠다.

"좋아, 좋아."

이걸로 엘더 몬스터 제르카의 토벌 보상을 모두 확인했다.

하지만 아직 남은 보상이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엘더 몬스터 토벌 보상]

-최상급 장비 선택권

[엘더 몬스터 최초 토벌 보상]

-상급 스킬북 뽑기권

최상급 장비 선택권은 사용하지 않고 묵혀 놓은 것까지 총 3개가 되었다.

딱히 아끼려고 아낀 건 아니다.

근시일 내로 날을 잡아서 아이템을 정비할 생각이라 잠시 선택을 미뤄놨을 뿐이다.

그동안 수집한 소재 아이템으로 공방에서 장비를 제작하고, 제작템과 시너지를 낼 수 있을 아이템을 선택할 예정이다.

'이번에 얻은 것도 그때 사용하자.'

그래서 나는 상급 스킬 뽑기권만 사용하기로 했다.

'전투 스킬 나와라!'

-팟!

뽑기권을 사용하자, 예전의 K-모바일 게임 특유의 뽑기 이펙트가 발생했다.

그리고 쥐어진 스킬북은 이것.

[디딤판 / 상급 스킬북 / 액티브]

-공중에 투명한 디딤판을 만들어 밟고 뛰거나 일시적으로 공중에 뜰 수 있다.

-디딤판 유지 시간 5초

"어어···."

좋은 것 같다.

그런데 원하던 부류의 스킬이 아니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실용적이고, 활용법에 따라 전투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긴 하다.

아쉬워하기에도 뭐하고 환호하기에도 뭐한, 딱 그 정도의 느낌이다.

"그동안 너무 좋은 것만 먹었나 보다. 이걸 아쉬워하네."

나는 스스로를 훈계하며 디딤판 스킬을 익혔다.

"확인 끝."

이로써 보상 타임이 완전히 끝났다.

예상치 못한 급전개에 당황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엘더 몬스터는 내게 큰 이익을 안겨주었다.

"가자 멍멍아. 너도 수고 많았어."

-컹!

볼일이 끝났으니, 가의도의 피해 상황을 살펴봐야겠다.

"아까 보니까 내 코인으로 지어진 비닐하우스들도 불타고 있던데. 비닐만 갈면 되려나?"

나는 멍멍이와 함께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

마을로 가니, 주민들이 모두 안전구역에 모여 있었다.

나름 열심히 사람들을 구한다고 움직였으나, 부상당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안전구역에 머물면 부상이 조금씩 치료되기 때문에 이는 적절한 조치였다.

"애초에 안전구역으로 도망치면 피해가 적었을 텐데요."

"그럴 여유가 어딨었겠나. 느닷없이 들이닥친걸."

나는 김용근, 마을 이장과 함께 부상자들을 살폈다.

대부분 간단한 외상이었지만, 돌도끼에 연거푸 찍혀 온몸이 으스러지거나, 내장이 드러날 정도로 심한 열상을 입은 주민도 있었다.

나는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주민에게 회복의 반지 내장 스킬인 상급 회복을 사용하고, 추가로 중상자를 위해 중급 회복 물약도 2개를 꺼내 사용했다.

하급 회복 물약으로 치료될 부상은 어차피 안전구역에 머물고 있으면 치료될 터이니, 필요 이상으로 낭비하지 않았다.

"미안하네. 자네에겐 도움만 받는군."

감성적으로 판단하면 능력이 되는데도 얼굴을 마주하던 사람들을 죽게 둘 수 없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그들 하나하나가 소중한 노동력이었기에 함부로 버릴 수 없다.

아이템 내장 스킬이야 하루가 지나면 리셋되고, 중급 포션은 10개나 있으니 아까워할 필요 없었다.

"서로 돕는 거죠."

하지만 물약을 쓴다고 모두를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망자는 혼자 살던 분들입니까? 딱히 가족 같아 보이는 사람이 없네요?"

"팬션을 운영하던 성씨는 혼자였는데, 박씨 할머니는 손주와 둘이 살고 있었지."

"손주요?"

"저기 저 아이 말이야."

이번 일로 가의도 주민 28명 중 2명이 죽었다.

죽은 사람 중 한 명은 독신의 팬션 사업가였고, 나머지 한 사람은 10살짜리 손주와 단둘이 살던 할머니였다.

'그러고 보니, 섬에 어린아이가 한 명 있었지.'

나는 마을 아주머니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엘더 몬스터의 습격으로 인해 갑자기 고아가 되어버린 소년.

그 소년이 모습이 묘하게 눈에 밟혔다.

"혹시나 싶어 하는 말인데, 자네는 일말의 책임감도 느낄 필요 없어. 덕분에 26명이 살았고, 저 둘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니까. 아이는 마을 차원에서 책임지고 키울 테니, 걱정 말게나."

맞는 말이다.

하지만 보게 된 이상 무시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빤히 소년을 바라보다가 품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일전에 가의도 안전구역 도박장에서 뽑은 일반 등급의 단검이다.

단검치고 날이 꽤 긴 게 특징이다.

"뭐하려고?"

그리고 나는 캠핑 나이프를 추가로 꺼내 그 위에 검기를 씌웠고.

앞서 뽑은 단검의 날 부분을 슥슥 비볐다.

-사각. 사각.

덕분에 오래지 않아 단검은 가검이나 다름없이 날이 죽어버렸다.

손에 움켜쥐어도 베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그걸 들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음?"

내가 접근하자 마을주민들이 알아서 비켜주었고, 방해 없이 아이 앞에 설 수 있었다.

"받아."

그리고 날이 죽은 단검을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가 드니, 단검이 숏소드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다.

단검을 받아든 소년은 그때서야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고는 뒤로 물러났다.

"할머니를 잃었어도, 아이에겐 자네가 영웅으로 보일 거야."

김용근은 그런 나를 보며 쓰게 웃었다.

"왜요?"

"기억 안 나나? 아이를 둘러싸고 있던 오크들의 목을 자네가 한 번에 날렸는데?"

그땐, 오크를 닥치는 대로 죽이고 다녀서 누굴 구했는지 자각이 없다.

이 아저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후 우린 사망자들을 안전구역 근처에 묻어 주고 간단히 장례를 치렀다.

"잘 가시게. 아이 걱정은 말고."

담담한 사람,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

다양한 사람들의 감정을 지켜보다가 김용근이 대뜸 내게 물어왔다.

"육지는 매일 매일이 이렇겠지?"

"······."

가의도에서 이번 사건은 예외적인 일이다.

하지만 육지에선 이런 일이 빈번할 것이다.

죽은 사람의 넋을 기리는 와중에도, 나는 가의도 주민들은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했다.

*

엘더 몬스터 사건으로부터 하루가 지났다.

가의도에서 사망자가 나왔다고 해서 내 일정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팍팍 밀어!"

-꾸익!

현재 내 레벨은 32.

어제 엘더 몬스터를 사냥했을 때 레벨이 오르고, 이후 몽마의 던전에서 레벨 1을 또 올려 32가 되었다.

그리고 날이 바뀌고 해가 중천에 뜬 지금.

나는 다시 월광도 북부 탐색에 나섰다.

다만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나무판과 스티로폼을 덧대 만든 제법 튼튼한 뗏목을 타고 있으며, 웬 오크가 뒤에서 열심히 뗏목을 밀고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나는 발에 진흙 하나 묻지 않고 늪지대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키에엑!

그때.

어제처럼 리저드맨이 등장했다.

리저드맨 세 마리가 날카로운 기세를 뽐내며 달려들었고.

"멍멍아 한 마리 맡아!"

-컹!

어제처럼 멍멍이가 한 마리를 물고 늘어지며, 두 마리의 리저드맨이 달려들었다.

"이 도마뱀 새끼들, 오늘은 어제와 다를 거다."

출렁이는 뗏목 위에서 나는 전투태세를 취했다.

뗏목을 밀던 오크는 리저드맨의 기세에 겁을 먹은 듯 보였고, 그러다 보니 가뜩이나 흔들이는 뗏목이 더욱 요동을 쳤다.

이대로는 제대로 싸울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디딤판.'

디딤판 스킬을 사용하자, 발아래 가로세로 2미터 크기의 투명하면서 튼튼한 발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촤악! 촥!

-켁! 큭!

덕분에 나는 지면을 딛고 싸우는 것처럼 흔들림 없는 편안함으로 리저드맨 두 마리를 썰어 버렸다.

이어서 멍멍이가 끌고 온 리저드맨까지 처리하니, 마침 디딤판의 유지시간인 5초가 지나면서, 나는 다시 출렁이는 뗏목 위에 섰다.

"최고구만."

단 한 번도 늪에 들어서지 않고 전투에 승리했다.

깔끔하지 않은가.

"가자 뚱이야!"

그렇게 나는 새로 테이밍한 오크가 미는 뗏목을 타고 월광도 북부지역의 탐색을 이어갔다.

026화 육지행 단서 (1)

*

본래 월광도는 약 22만 평의 면적을 가진, 어중간한 크기의 섬이었다.

하지만 대재앙이 발생한 직후 '이상 지형'이 생기면서 월광도의 규모가 무식하게 커졌다.

이 정도면 울릉도나 백령도 같은 섬에 비견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월광도를 확장시킨 이상 지형을 통틀어 월광도 북부라 칭하고 있는데, 초입 부분인 늪지대를 시작으로 무엇하나 예측과 맞지 않는 '특이함'으로 이뤄진 장소였다.

"왜 이제야 나타났니···."

[실풀 / 일반]

-실을 뽑을 수 있는 채집 소재, 천과 가죽 방어구 제작에 사용되는 필수 재료이다.

[회복초 / 고급]

-상처를 치료하는 약초, 트롤의 피와 조합하여 회복물약을 제작할 수 있다.

늪지를 빠져나오자 눈 앞에 펼쳐진 광경.

그건 그토록 찾아다녀도 보이지 않던 채집 식물로 가득 채워진 숲이었다.

특히 실풀은 실을 뽑아낼 수 있는 채집 식물로 이게 있어야 장비를 제작할 수 있는데, 보이지 않아서 꽤나 찾아다니던 거였다.

그런데 그토록 보이지 않던 게 이렇게 널려있다니.

"뚱아, 뭐해? 전부 뜯자."

-꾸익!

나와 뚱이는 봄이 되면 산등성이에서 자주 보이는 할머니들에 빙의하여 열심히 채집을 시작했다.

[회복초를 채집하여 경험치 2를 획득했습니다.]

[실풀을 채집하여 경험치 1을 획득했습니다.]

채집물을 캐니 조금이나마 경험치도 벌렸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게 모이고 모이면 무시하기 힘든 수준이니, 또 다른 레벨업 요소라 할 수 있다.

물론, 일반인이 채집으로 레벨을 올리기 위해선 몬스터란 위험요소를 해결해야겠지만.

[실풀: 185개]

[회복초: 42개]

그렇게 풀 뜯는 머신이 되어 실풀과 회복초를 쓸어 담은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숲 지대 탐색을 이어갔다.

이 숲 지대는 사전에 드론으로 살펴봤던 지역이다.

-꾸익!

등장 몬스터는 이젠 눈 감고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우리 뚱이의 친구 오크들.

문제는 이전과 달리 오크 열댓 마리가 떼거리로 몰려다닌다는 점이다.

-쉬익!

하지만 나는 당황한 기색 없이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무광택의 회색 장검, 제르카의 검이 휘둘러 질 때마다 오크의 목이 허공에 떠올랐다.

스킬이고 뭐고 없이, 오로지 강화된 신체 능력만으로 오크들을 학살했다.

"벌써 다 죽였네?"

그리고 채 2분을 넘기지 않아, 열댓 마리의 오크를 모조리 쓰러뜨렸다.

"뭔가, 가의도 사건 이후 사냥이 쉬워진 느낌이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의도에서의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던 전투가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까?

검을 다루는 나 자신에게 여유가 생겼음을 느꼈다.

더불어 무엇을 상대하든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도 함께.

'오만은 사고의 지름길임을 알지만···.'

뭔가 다르다.

능력치에 큰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니고, 검술 실력이 향상된 것도 아닌데, 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적의 움직임이 더 잘 보이게 되었다고 할지.

갑자기 하드모드로 플레이하던 게임의 난도가 노말모드로 낮아진 느낌이다.

'뭐, 강해졌으면 그만이지. 길게 생각할 필요 없어.'

덕분에 위기다운 위기 없이 숲 지대를 돌파할 수 있었고.

나는 월광도 북부지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호수 지대에 다다랐다.

"물색이 뭐 이래?"

이상 지형과 함께 생긴 호수.

규모가 꽤나 크다.

그런데 물색이 사파이어나 에메랄드빛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시커멓다.

마치 마리아나 해구를 하늘에서 촬영한 것처럼.

"호수가 아니라, 싱크홀이라고 해야겠는데?"

내가 쓰고 있는 빛을 엮어 만든 투구는 어떤 환경에서도 투구를 쓴 사람에게 신선한 공기를 제공한다.

즉, 물속에서도 유용한 아이템이란 건데, 시커먼 물의 색에 감히 직접 들어가서 투구의 성능을 확인해보겠노라는 허튼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안에 물고기는 있나?"

그래서 호수에 얼굴만 들이밀어 내부를 살펴보기로 했다.

만약 안에 물고기가 많다면 이 호수는 내 식량 창고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어둠 속에서도 사물 분간이 잘 되는 실루엣 고글을 쓰고 물속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스스스스.

그리고 찬찬히 깊고 어두운 호수를 살피기 시작했는데.

잠시 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을 발견했다.

'건물인가?'

수심 150미터 정도의 공간에서 건축물 같은 게 눈에 들어온 것이다.

'물속에 잠겨 있는 시설이라니.'

너무도 신비로운 풍경이다.

나는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 것 같아 모험심을 발휘하며 호수 여기저기를 살폈다.

"응?"

그런데 그때.

건축물보다 더 깊은 호수 바닥에서 무언가 꿈틀대는 게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스스스스.

나는 그게 뭔가 싶어 집중해서 살폈고.

복잡하게 뒤엉켜 꿈틀대는 뱀장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레이크 서펜트 / 레벨: ???]

[레이크 서펜트 / 레벨: ???]

[레이크 서펜트 / 레벨: ???]

거리를 염두에 둬도 하나하나의 덩치가 족히 수십 미터는 달할 듯한 거대 뱀장어들을···.

'레이크 서펜트?'

등 뒤를 오싹하게, 서늘한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대로 스르르 물속에서 얼굴을 뺐고.

"튀어!"

-컹!

-꾸익!

이내 멍멍이, 뚱이와 함께 호수에서 도망쳤다.

알고 보니 저건 호수가 아니라 지옥의 입구였다.

탐색 스킬을 익힌 후, 한 번도 보지 못한 '레벨: ???' 몬스터가 족히 수십 마리는 되어 보였으니까.

'대체 뭐가 있길래.'

한참이나 달려 호수에서 멀어진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까 했던 생각을 취소했다.

'무엇을 상대하든 지지 않을 것 같다'란 속마음 말이다.

저건 못 이긴다.

덤비면 100% 죽는다.

"여긴?"

잠시 후, 우린 늪지대, 숲 지대, 호수 지대에 이어, 작은 정글 지대에 다다랐다.

빼곡하게 수풀이 우거진 장소.

드론으로도 살펴볼 수 없던 지형 중 하나이다.

아까 호수의 존재로 급격히 자신감을 잃은 나는 들어갈까 말까 고민을 했지만, 그래도 물속과 달리 땅 위에선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갈 수 있단 자신감이 있기에 조심히 발을 들였다.

"오?"

겨우 햇빛 몇 줄기가 들어올 뿐인 정글의 풍경.

살짝 어둡긴 하지만 묘하게 몽환적인 느낌이 드는 그런 장소였다.

어째서 묘한 분위기가 나나 했더니, 나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이끼가 야광 물질처럼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네."

[야광이끼 / 고급]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이끼. 병에 넣어 횃불 대용으로 쓸 수 있다.

-습도를 잘 유지하고 하루 3시간 이상 햇빛을 쬐게 해주면 제법 긴 수명을 가진다.

그 야광이끼도 채집물이었다.

챙겨가면 좋을 것 같아서 손으로 떼봤더니, 야광이끼는 손에 닿자마자 말라 빛을 잃었다.

그래서 검으로 긁자, 이번엔 아무 문제 없이 채집이 되었다.

아무래도 야광이끼를 채집하기 위해선 도구가 필요해 보인다.

"밤을 밝힐 수 있는 수단이 생기는 건 환영이지."

세상이 변하고 지구의 밤은 빛을 잃었다.

만약 다른 곳에서도 야광이끼를 채집할 수 있다면, 이 야광이끼는 새로운 세상에서 밤을 밝혀줄 귀한 존재가 될 것이다.

'나중에 육지에 가게 되면 교역 물품으로 써도 좋겠어.'

육지행을 위해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 나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후로도 우린 정글 이곳저곳을 탐색했는데.

"신전?"

머지않아 수풀에 뒤덮인 낡은 신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앙코르와트를 연상시키는 그런 장소였다.

[숨겨진 필드, 정글 신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무심코 다가갔더니, 위의 메시지와 함께.

-크르르.

범상치 않은 기세를 뽐내는 검치호 3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치호 / 레벨: 25]

[검치호 / 레벨: 25]

[검치호 마르크 / 레벨: 30]

두 마리는 일반 몬스터였지만, 한 마리는 무려 이름을 가진 네임드 몬스터였다.

나는 이게 뭔 상황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전투태세를 갖췄고, 내 옆으로 멍멍이가, 등 뒤로 약하디약한 뚱이가 근처 나무 뒤로 숨으며 사태를 주시했다.

"멍멍아 한 마리 맡아."

-컹!

그리고 전투가 개시됐다.

마침 멍멍이의 레벨이 27이어서, 레벨이 낮은 검치호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본적인 종족 값이 차이가 나는 걸까?

멍멍이는 쉬이 검치호 한 마리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그사이 나는 네임드 검치호 마르크와 일반 검치호 한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까앙!

"큭!"

마르크의 앞발 공격을 검으로 쳐냈다가 금속 마찰음과 함께 뒤로 크게 밀려 놀라고 말았다.

'발이 완전 금속이네.'

게다가 일반 검치호는 네임드 검치호 마르크를 보조하며 영리하게 나를 견제했다.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며 다가올락 말락 하는 녀석의 모습이 신경 쓰여 마르크를 향한 대응이 늦었다.

-핏!

덕분에 나는 어깨에 제법 길고 깊은 상흔을 입고 말았다.

짐승 주제에 제법이다.

-크르르릉!

나는 즉시 하급 회복 물약을 꺼내 마셨다.

당연히 검치호들은 그런 나를 매섭게 압박해왔지만, 뒤로 몇 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치료를 완료하고 다시 전투태세를 취할 수 있었다.

'아마 예전의 나였다면 신중하게 적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기회를 노리는 식으로 싸웠겠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녀석들이 강하긴 해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크와아앙!

그때, 마르크와 일반 검치호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치직!

나는 제르카의 검에 검기를 담으며, 일반 검치호에게서 신경을 끄고, 오로지 마르크만을 응시했다.

검 역시 그런 마르크를 겨눠, 일반 검치호는 없는 것 취급을 했다.

마르크와 검치호는 짐승이라 표정을 알 수 없지만, 아마 의아한 기색을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검기가 깃든 검을 크게 휘둘렀다.

'거력참.'

제르카의 검에 깃든 자체 스킬.

마력을 3이나 잡아먹는 거력참이 검기를 머금고 휘둘러졌다.

-쉐에에엑!

가공할 기세에 두 짐승이 크게 움찔거렸지만, 이제 반응해봐야 늦었다.

스킬의 위력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에 정확하게 마르크의 앞발과 충돌했으니까.

-콰아아앙!

-크엉!

그로 인해 수류탄이 터진 것 같은 소음이 울려 퍼졌다.

모르긴 몰라도 최소 발 하나는 날아갈 거다.

아니면 그대로 죽어 버리거나.

-크왕!

하지만 잊으면 안 되는 것이 또 있었으니.

적은 마르크 하나가 아니었고, 일반 검치호가 동시에 달려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와 마르크가 충돌하는 순간, 녀석이 나를 향해 아가리를 벌려왔다.

단숨에 목을 물어뜯겠다는 듯이.

칼날 같은 검치호의 이빨은 위협적이다.

녀석의 아가리가 피할 수 없는 속도로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짧게 한마디 내뱉었다.

"디딤판."

-쾅!

그러자 투명한 디딤판이 내 눈앞에 생성되며, 검치호의 접근을 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검치호가 디딤판과 강하게 부딪히며 머리가 돌아갔다.

그리고 그 잠깐의 빈틈은 내가 검을 회수해서 한 차례 더 휘두를 여유를 제공했다.

[검치호를 토벌하여 경험치 500을 획득했습니다.]

[검치호를 최초 토벌하여 경험치 2,500을 획득했습니다.]

[검치호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120코인을 획득했습니다.

-검치호 가죽 2장을 획득했습니다.

-검치호 이빨 1개를 획득했습니다.

[검치호 최초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검치호 가죽 4장을 획득했습니다.

검기에 양단된 검치호가 보상을 토해냈다.

'디딤판을 꼭 밟는 데만 쓰란 법은 없지.'

기본적으로 디딤판은 원하는 장소에 만들 수 있다.

이 말은 즉, 사용하기에 따라 적에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단 뜻이다.

비록 디딤판을 수직으로 세워서 방어막처럼 사용하진 못하지만, 이렇게 적절히 움직임을 막는 용도로 사용하기만 해도 내겐 여러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고, 이내 앞발을 잃고 낑낑대는 마르크를 볼 수 있었다.

"신전에 뭐가 있길래 파수꾼 역할을 부여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고생했다."

아무리 네임드 검치호가 강하고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앞발을 잃은 상태론 상대가 되지 않았다.

[네임드 검치호 마르크를 토벌하여 경험치 8,500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라 '부상'과 '상태 이상'이 모두 회복됩니다.]

[네임드 검치호 마르크의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2,012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중급 회복물약 3개를 획득했습니다.

-마르크의 이빨 단검을 획득했습니다.

[마르크의 이빨 단검 / 단검 / 등급: 최고급]

-마르크의 이빨로 만들어진 단검이다.

-면도날과 같은 예리함을 항상 유지한다.

-모든 능력치+1

이어서 멍멍이가 고전하고 있던 검치호까지 해치우는 데 성공한 나는 단검 하나를 제외하곤 소재 아이템뿐인 보상에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은 행운의 탈리스만이 일을 안 하네."

이런 날도 있는 게 당연한 거다.

오히려 그동안 내가 너무 운이 좋았던 거지.

-꾸익!

나는 머쓱한 듯 다가오는 오크 뚱이를 향해 말했다.

"뚱아, 이제 네 차례다."

-꾸익?

당연하지만 저 수상한 신전에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안전이 확인되지 않은 건물에 막 들어가기가 꺼려진다.

게임 같은 데서 보면 이런 건물에 함정이 깔려있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나는 뚱이를 앞세웠다.

이름을 붙여준 펫을 실험에 써먹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래도 내 목숨이 제일 소중하다.

더구나 멍멍이에 비하면 함께한 시간도 적고, 정감 안 가게 생긴 외모를 한 탓에 친밀함도 살짝 부족했다.

내 지시에 녀석은 무언가 결심한 듯 굳건히 고개를 끄덕이며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도 없네?"

-꾸익.

다행히 정체 모를 신전엔 함정 같은 게 설치되어 있지 않아 뚱이는 무사할 수 있었다.

신전 내부엔 넓은 광장이 존재했다.

그런데 그 중심엔 흙이 차 있었고.

그 흙 위로 한줄기의 햇빛이 핀포인트처럼 떨어지며 붉은 열매가 달린 식물 하나를 비추었다.

[천년삼 / 영약 / 희귀]

-섭취 시 일정량의 마력이 영구적으로 향상된다.

아버지에게 들었던 영약을 이런 곳에서 발견할 줄이야.

027화 육지행 단서 (2)

현재 내 능력치는 이렇다.

-레벨: 33

-능력치

근력: 근력: 17(+2) 순발력: 18(+2) 마력: 12(+8)

잔여 능력치 포인트: 0

아이템의 옵션을 더해 근력이 19, 순발력과 마력이 20이다.

레벨업을 통해 벌리는 능력치 대부분은 근력과 순발력에 투자하고, 마력은 아이템의 보조를 받는 식인데.

기본적으로 마력보다 근력과 순발력을 우선으로 여기다 보니 이렇게 됐다.

'물론, 마력이 높으면 좋다.'

한방 공격, 뛰어난 이동기 등 더 많은 기술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레벨업을 통해 마력 수치를 하나 높인다고 해봐야 전투력에 큰 변화는 없고.

나는 전투 지속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신체 능력이 뛰어난 게 낫다고 판단했다.

결과, 높은 신체 능력을 이용해 기본 검술로 적과 싸우다가, 중요한 순간에 큰 한 방을 넣는 방식이 주요 전투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차선을 택한 결과야. 레벨업을 해봤자 주는 포인트가 겨우 1이어서 모든 능력치를 고루 올릴 수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 마력 수치를 단번에 급등시킬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이 말은 즉, 어쩔 수 없이 택한 차선책이 최선책으로 바뀐다는 뜻이다.

"맙소사."

나는 정글 사원 한복판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천년삼을 바라보며 건들면 시들라, 불면 꺾일라, 조심조심 아기 다루듯 어루만졌다.

'천년삼이라니,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영약이잖아!'

혹시 윌리아가 내게 북부행을 추천한 게 이것 때문일까?

머릿속에 떠오른 윌리아의 존재가 등에 날개를 달고 머리 위에 링을 얻은 천사의 모습이 되었다.

'마력이 얼마나 오를까?'

보통 무협에서 영약이라 하면 내력이 급증진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때문에 기대가 될 수밖에.

물론 마력이 한 번에 100씩 오르는 건 말도 안 되지만, 30 정도, 아니 적어도 10만 올라도 나는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건 거저 오르는 능력치 아닌가.

그래서 나는 조심조심 땅을 파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잔뿌리가 상해서 천년삼의 약효가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꾸익?

그런데, 이런 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

미친 돼지, 아니 뚱이가 내 옆에 쪼그려 앉더니, 아까 실풀과 회복초를 뜯을 때처럼 천년삼을 확 잡아 뜯어 버렸다.

"야, 야이 미친놈아!"

순간 이 녀석이 뭐하나 지켜보던 나는 상상치도 못한 전개에 기겁했다.

덕분에 쪼그려 앉아 있던 상태에서 뚱이에게 개구리 펀치를 날렸고, 그로 인해 맥아리 없이 뽑힌 천년삼이 허공을 풀풀 날다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꾸익!

"내 영약!"

나는 붕 떠올랐다가 털썩 쓰러진 뚱이를 뒤로 하고, 급히 천년삼에게 달려가 상태를 봤다.

[천년삼 / 영약 / 희귀]

-섭취 시 일정량의 마력이 영구적으로 향상된다.

하늘이 도왔을까?

아니면 뚱이의 풀 뜯는 스킬이 극에 달했을까?

다행히 천년삼은 아무 문제 없어 보였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뒤늦게 뚱이에게 미안해졌다.

녀석이 미친 짓을 한 거긴 하지만, 한 줌 되지 않는 뇌로 나름 날 도우려 한 행동이었을 텐데.

나는 코피를 쏟고 있는 녀석에게 다가가 사과의 의미로 하급 포션을 발라주었다.

'이걸 어쩐다? 지금 여기서 먹긴 조금 그렇지?'

보통 무협지 보면 영약 먹을 때 엄청 고생하던데, 이것도 그럴까?

천년삼과 눈싸움을 벌이던 나는 일단 인벤토리에 넣어두고, 안전구역에 가서 섭취하기로 했다.

윌리아라면 영약에 대해 이것저것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섭취 중 이상이 생기면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마침 예상했던 것보다 월광도 북부에 깊게 들어오기도 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다.'

월광도 북부 탐사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보물을 발견했다.

어쩌면 나를 육지에 다다르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보물이.

*

어제 디딤판 스킬을 얻었을 때,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도약 스킬에 디딤판 스킬을 더하면, 가의도에서 육지까지 허공을 달려 건널 수 있지 않을까라고···.

그래서 나는 시험해 보았다.

공중에 디딤판을 만들어 도약 스킬로 껑충껑충 뛰어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력 20으로 약 450m를 이동할 수 있었다.

대충 도약 스킬 한 번에 45미터를 건넌 셈인데, 이것만 해도 높은 신체 능력과 도약 스킬 효과, 뛰어난 스킬 숙련도가 더해져 만들어낸 최상의 결과였다.

'하지만 450m 이동으로 육지행은 턱도 없지.'

가의도에서 육지까지의 거리는 3km.

그런데 중간에 휴식 거점으로 쓸 암초섬이 있어서, 1.5km만 한 번에 건널 수만 있으면, 그 뒤로 암초섬이 수백 미터 간격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육지에 다다를 수 있다.

'1.5km가 이렇게 멀게 느껴질 줄이야.'

바다엔 높은 레벨을 가진 거대 해양 몬스터가 득실댄다.

수영으로 건널 수 없으니, 결국 도약과 디딤판 조합을 떠올렸던 건데.

때마침 스킬의 사용횟수를 늘려줄 천년삼을 얻은 거다.

덕분에 어쩌면 육지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적어도 윌리아에게 천년삼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나는 미간을 좁히며 윌리아에게 재차 물었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죠?"

"천년삼이면 섭취 시 마력이 10 정도는 상승할 겁니다."

마력 10.

지금의 마력이 도합 20이니, 섭취할 경우 30이 된다.

거기에 윌리아의 블레스(능력치 20% 상승)가 더해지면 36이 되고.

아쉽게도 이건 육지를 건너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치다.

'분명 마력이 10이라도 거저 오르면 만세를 부를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정말 10일 줄은 몰랐다.

내가 생각하던 것 중 최소치였는데···.

"와, 와아···. 그렇군요."

"억지로 좋아하실 필요 없으세요. 티 나니까요."

윌리아의 대답에 나는 쓰게 웃어야 했다.

"그렇게 육지에 가고 싶으세요?"

"그야 그렇죠. 부모님이 모두 육지에 계시니까요."

육지에 가더라도 내 주요 거점은 월광도가 될 것이다.

월광도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나만의 땅이니까.

하지만 육지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냐, 아니냐의 차이는 매우 크다.

심리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그리고 왜일까?'

초반에 육지의 웨이포인트를 찍어 놓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 같다.

그래서 겨우 보인 육지행의 가능성이 사그라드니 실망감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모습에 윌리아는 자신의 일처럼 함께 고민해주었다.

"그럼 일단 천년삼을 섭취하고 최대한 마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아이템을 수집해놔야겠네요."

아마도 그게 최선일 거다.

'꾸준히 레벨을 올리고, 필요 아이템을 모으다 보면, 언젠가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긴 하겠지. 단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시간의 흐름에 맡겨야 하는 걸까?

"마력 회복 물약이라도 있으면 좀 수월할 텐데, 아쉽네요."

그런데 그때였다.

윌리아가 생각지 못한 아이템의 이름을 읊은 것이.

"마력 회복 물약이요?"

"네, 마력을 회복시켜 주는 소모템입니다."

순간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그러고 보니, 왜 그게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지?

이 게임 같은 설정을 가진 세상에서.

만약 마력을 회복시킬 수단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하늘을 달려서 육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거칠게 윌리아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획득방법은요?"

"마법이나 주술형 몬스터를 처치하면 되는데, 아쉽게도 월광도엔 해당 몬스터들이 없어서 습득할 수 없습니다."

나는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섬에서 마주한 몬스터는 모조리 물리 전투형뿐이다.

심지어 서큐버스도 무기를 휘둘러 오는 곳이니···.

"어쨌든 그런 아이템이 존재하긴 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아이템 등급은요?"

"소비 아이템 등급으론 상급, 일반 아이템 등급으론 '특수'급입니다."

순간 나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가의도에 자리한 도박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의도의 도박장 이야기를 윌리아에게 했다.

"도박장의 아이템 뽑기 슬롯이요?"

"네, 거기서 마력 회복 물약을 뽑을 수 있을까요?"

현재 윌리아와 나와의 친밀도는 73%.

내가 시도하려는 일이 가능하다 아니다 정돈 가르쳐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뽑을 수야 있죠. 그런데 돈이 많이 들 텐데···."

그거면 됐다.

지금 중요한 건 '가능하다'는 대답이었으니.

나는 씩 웃으며 천년삼을 입에 쑤셔 넣었다.

"제가 남는 게 코인뿐이거든요."

그리고 도박장에서 예상치 못한 득템을 하게 될 수도 있는 노릇 아닐까?

[천년삼의 많은 기운이 흡수됩니다.]

[안전한 장소에 누워 휴식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