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

000화 프롤로그

2017년 전국체전 서울시 고등부 검도 대표 선발전.

[예선 1차: 김현수(성만고) 대 서백호(삼중고)]

검도 명문으로 이름 높은 성만고의 3학년 김현수는 최근 문체부장관배 대회서 3위에 입상한 뛰어난 선수다.

그의 실력이라면 예선 없이 바로 서울 대표에 이름을 넣어도 이상할 것 없으나, 최근 대회 규정이 바뀌는 바람에 시드도 아닌 예선 1차부터 참가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덕분에 김현수와 같은 조에 편성된 선수들은 죽상이 되고, 다른 조에 편성된 선수들은 크게 안도했다.

예선전에서 김현수의 존재는 그야말로 생태계 교란종이었다.

"큭!"

하지만···.

모두가 예선을 쉽게 통과할 거라 생각했던 김현수는 지금 혼란에 빠져 있다.

이유는 단 하나, 그와 죽도를 맞대고 있는 예선 1차전 상대 때문이다.

'내가 이런 듣도 보도 못한 놈에게 고전한다고? 더구나 이 새낀 1학년이잖아!'

검도부가 있는지도 몰랐던 삼중고 소속 1학년 '서백호'.

경기 전까지만 해도 쓸데없이 강해 보이는 이름에 비웃음을 흘렸는데, 검을 맞댄 직후 김현수의 표정은 빠르게 굳어졌다.

'돌려 머리치기'와 '머리 받아 허리치기', '손목 머리치기'까지.

눈으로 좇기 힘든 검 놀림에 연이어 타격을 허락했다.

비록 그 공격이 심판들에게 유효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판정이 후한 심판진을 만났다면 이미 경기가 끝났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탁! 타악!

"머리!!!"

"이앗!!!"

그리고 동시에 벌어진 머리치기에서 서백호의 속도가 김현수를 압도하며, 결국 1점을 빼앗기고 말았다.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섬전 같은 공격이었다.

'대체 이런 자식이 어디 있다가 이제 튀어나온 거야?'

김현수가 3위로 입상했던 문체부장관배의 우승자도 매서운 속검의 소유자였지만, 서백호의 쾌검과 비교하면 오히려 평범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두 판째!"

검도 경기는 2점을 먼저 따낸 사람이 승리한다.

이제 김현수가 한 점을 더 내어주게 되면 지게 된다.

겨우 지역 예선 1차전 경기.

여기서 무명의 1학년에게 패배한다면 그가 쌓은 커리어를 부정당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목표로 했던 대학 진학에도 문제가 생기고 만다.

'빌어먹을!'

때문에 김현수는 이를 악물고 싸웠다.

이 경기는 단순한 지역 예선 1차전이 아니다.

그의 미래가 달린 경기가 되어버렸다.

김현수는 서백호의 공격이 유효타가 되는 것을 막으며, 신중하게 빈틈을 찾았다.

'젠장! 틈이 안 보여!'

그러나 쉽지 않았다.

방어만 하다가 오히려 위험한 일격을 허용할 만큼.

"머리!!!"

-탁! 타앗!

그림과도 같은 서백호의 '스쳐 받아 머리치기'가 작렬한 것이다.

'파, 판정은?'

다행히 심판들은 이를 유효타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김현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것도 잠깐.

이내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어느새 상대가 자신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탁! 타타탁! 탁!

"큭!"

이길 수 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이 김현수는 너무 싫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경기를 이어가던 그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기권하겠습니다."

"뭐?"

돌연 서백호가 기권을 선언한 것이다.

승기가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다.

자괴감을 느낄 만큼 기량 차이도 컸고.

김현수는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요···. 윽, 나온다."

그리고 황당한 이유와 함께 서백호가 창백해진 얼굴로 죽도를 내팽개치며 대회장을 벗어났다.

"······."

"······."

"······."

김현수는 물론, 세 명의 심판까지 바보 같은 표정으로 두 눈을 껌뻑여야 했다.

"청띠 승리."

이런 걸 기사회생이라 해야 할까?

하늘이 도왔는지 김현수는 상대의 배탈 덕분에 예선 1라운드를 돌파했다.

그러나 기뻐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서백호가 보여준 모습이 압도적이었으니까.

'머지않아 또 만나게 되겠지. 검도 세계는 의외로 좁으니까.'

김현수는 다음에 반드시 굴욕을 설욕하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이날 이후 검도판에 서백호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001화 무인도 (1)

내 이름은 서백호, 나이 23세, 전역 10개월 차의 반백수다.

백수면 백수지 스스로를 반백수라 칭한 이유는 하고 있는 일이 있으나 아직 그 일에서 수익이 발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유튜버다.

구독자 6,200명을 가진 하꼬 유튜버.

주요 콘텐츠는 '캐치 앤 쿡'으로 낚시나 채집 등을 통해 식재료를 구하고, 그걸 요리해 먹는 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내가 유튜버가 된 이유는 간단하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그럼 오지랖 넓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한다.

유튜버가 돈을 간단히 버는 것 같아도 그들 나름의 고충이 있고, 경쟁이 심한 세계라서 쉽게 성공할 수 없다고.

이는 실제로 친구들에게 많이 들은 대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면 나는 항상 이렇게 답했다.

'미안한데, 나도 알아. 내가 언제 쉽게 성공하고 싶어서 유튜버가 되겠다고 했어?'

애초에 경쟁 없이 쉽게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이 어딨겠나.

전부 힘들지.

그런데 꼭 초를 치는 사람이 있더라.

잴 것 다 재고 유튜버에 도전한 건데.

'성공하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상당한데도, 다른 사업들과 달리 초기 자본이 많이 들지도 않고, 실패 시 리스크가 큰 것도 아니잖아?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장점 아닌가?'

그리고 나는 유튜버에 분명한 성공 공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하는데, 그건 바로 영상에 재미를 더할 '편집능력'과 시청자가 흥미를 느낄 '콘텐츠'다.

다행히 영상편집 능력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군대에서부터 계속 공부를 했었고, 반년 동안 다른 유튜버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실전 감각을 키웠으니까.

문제는 콘텐츠인데, 고심 끝에 '캐치 앤 쿡'을 주력 콘텐츠로 택했다.

국내에서 인기 있는 장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영어 자막을 만들기가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어 자막을 다는 순간, 타겟이 되는 시청자가 한국인에서 전 세계 사람으로 확장된다. 그럼 한국인만 상대하는 것보다 내 컨텐츠에 흥미를 보이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지.'

다행히 이러한 궁리는 어느 정도 통하고 있다.

꼭 망하길 비는 듯한 주변 사람들의 오지랖 속에서도 나의 채널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상태니까.

업로드와 동시에 찾아보는 시청자도 계속 늘고 있고, 구독자 수에 비해 조회수도 높은 편이다.

지금은 비록 하꼬지만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 떡상할 것이라 자부한다.

"안녕하세요! 유튜브 시청자 여러분! 오늘 제가 할 콘텐츠는 바로! 무인도에서 일주일 생존하기입니다!"

그런 내가 이번에 선택한 영상의 주제는 바로 '무인도 생존기'.

어그로를 끌 수 있는 자극적인 펀치가 필요한 때라고 판단하여 야심차게 준비한 콘텐츠다.

"제가 머물 무인도는 충남 태안에 위치한 섬 '월광도'입니다. 한때 주민 20가구가 살았으나, 2004년 마지막 주민이 육지로 떠나면서 현재는 무인도가 되었죠."

캐치 앤 쿡의 상위 장르인 서바이벌은 꾸준히 인기 끄는 전통 있는 콘텐츠다.

하지만 인기에 비해 도전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장르기도 한데, 이유는 준비 과정(구청의 허가 등)이 까다롭고, 촬영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월광도는 약 22만 평의 면적을 가진 섬으로 제법 큰 산을 끼고 있습니다. 산에는 멧돼지와 멧토끼, 꿩 같은 야생 동물도 많다고 하죠."

나는 이번 촬영을 위해 액션캠 2대와 고정형으로 사용할 미러리스 2대, 섬의 전경을 찍을 드론 1대를 챙겨 왔다.

당연히 카메라 수가 늘어나면 소모되는 배터리와 메모리 카드도 많아지고, 나처럼 일주일이나 야외 촬영을 이어갈 예정이라면 소형 발전기까지 갖춰야 한다.

아무리 사업 초반엔 투자가 필요한 법이라지만, 하꼬 유튜버가 감당하기엔 소모 비용이 크다.

이러니 무인도 서바이벌이라며 어그로를 끄는 유튜버 대부분이 당일치기 또는 1박 영상을 찍어 올리는 거다.

"제가 굳이 사람의 흔적이 남은 이 월광도에서 서바이벌 영상을 찍으려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폐가 체험'을 함께 진행하기 위해서죠! 근 20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폐가 마을···. 상상만 해도 오싹하지 않습니까?"

과한 투자를 했으면 뽕을 뽑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굴려 한 번의 촬영으로 서바이벌과 폐가체험, 두 가지 콘텐츠를 뽑고자 했다.

"서바이벌을 시작하면 제가 갖게 될 아이템은 정글도 한 자루가 끝입니다. 나머지 아이템은 전부 파밍해서 사용해야 하는데, 되도록 폐가에선 파밍을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그걸 바라시겠죠?"

나는 안전한 촬영을 위해 구급함과 항생제 등의 약품도 충분히 챙겨 왔다.

하지만 이 점은 굳이 고지하지 않았다.

안전 대비는 당연한 건데,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 섬을 둘러보기 시작할까요? 함께 가시죠! 고우!"

이걸로 오프닝 촬영 끝.

나는 다음 촬영 장소로 카메라들을 옮겼다.

대형 유튜버라면 직원을 고용해서 이런 일에 써먹겠지만, 나 같은 영세 유튜버는 모두 혼자 해야 한다.

"모래사장은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전형적인 무인도의 모습이네요. 어쩌면 건질 아이템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잠시 후, 나는 모래사장을 살피며 생존에 필요한 도구들을 파밍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노끈과 폐그물, 비닐을 챙겼다.

"투명한 비닐을 얻었습니다. 잘하면 쉽게 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네요. 안에 물을 채워서 동그랗게 만들면, 돋보기를 사용하는 것처럼 태양광을 이용해 불을 피우는 게 가능하거든요."

"그리고 비닐이 있으면 바닷물을 증류해 식수로 바꾸기도 편하죠. 초반부터 유용한 아이템을 얻었네요."

나는 계속 해안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다가 문뜩 이상한 점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런데 섬이 예상보다 더 큰 것 같은데요? 22만평 맞나요?"

22만 평이면 에버랜드의 절반 크기다.

작진 않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광활하다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자주 놀러 갔던 제부도보다 훨씬 큰 느낌입니다. 분명 제부도가 더 큰 섬일 텐데, 이상하네요. 월광도가 커졌을 리도 없고···."

때문에 나는 의문을 표하며 촬영을 이어가야 했다.

"제방에 섭(자연산 홍합)과 굴이 제법 붙어 있군요. 10월이면 패류 독소를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불을 피운 후 구워 먹으면 될 것 같습니다."

"앗! 양은 냄비 뚜껑을 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7일 동안 머무르며 사용할 접시 겸 후라이팬을 구한 것 같네요."

그렇게 1차적으로 해변을 살핀 나는 폐허들이 모여 있는 마을을 지나 산에 발을 들였다.

"칡덩굴이 많이 보이지만 땅을 팔 도구가 없으니 패스하겠습니다. 괜히 에너지 소모만 하게 되니까요."

"어? 저거 대추 같은데요? 맞네요. 야생 멧대추입니다. 크기는 작지만, 제법 맛이 괜찮죠. 이건 보이는 대로 따서 챙겨가겠습니다."

"바로 옆에 산다래도 보이네요. 과육의 생김새도 그렇고 맛도 키위랑 비슷한 열매죠."

10월의 야산엔 먹을 거리가 제법 많았다.

멀리 감나무와 밤나무도 보였지만, 처음부터 너무 많은 음식을 구하면 재미가 반감되니, 적당히 모른 척했다.

나름 자신이 있어서 선택한 서바이벌 콘텐츠지만, 섬의 풍부한 식자원을 확인한 나는 예상보다 촬영이 수월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바이벌의 묘미는 채집보단 수렵 아니겠습니까? 산에 오른 김에 아까 주운 그물과 노끈으로 포획덫을 놓아 보겠습니다."

야생 동물이 많이 다닐 것 같은 지형을 발견한 나는 챙겨온 폐그물로 뚝딱뚝딱 포획틀을 만들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선 아무나 야생 동물을 잡을 수 없습니다. 유해조수라 해도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 수렵활동을 하면 결국 밀렵이 되거든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의아하실 겁니다. '그걸 알면서 밀렵하는 거냐'고.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짜잔! 오늘을 위해 수렵면허 2종을 취득했기 때문이죠!"

"사전에 지자체로부터 멧돼지와 멧토끼, 꿩, 오리 등, 일부 야생 동물의 수렵을 허가받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컨텐츠를 위해 수렵면허까지 취득하다니, 꽤나 열정적이지 않은가?

성공하길 바란다면 적어도 이 정도 노력은 기울이는 게 당연하고 생각한다.

참고로 수렵면허 2종은 총기 사용이 불가능하다.

대신 활이나 그물 등을 사용한 사냥이 가능한데, 추후 활을 제작해볼 생각이다.

만약 서바이벌 중 직접 만든 활로 수렵에 성공한다면 엄청난 어그로를 끌 수 있을 테니까.

"산은 이 정도 살폈으면 된 것 같네요. 이제 슬슬 베이스 캠프를 만들기 위해 이동하겠습니다."

어디서 멧돼지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야산이니, 깊게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

어차피 지형을 익힐 목적으로 탐색에 나선 것인 만큼 굳이 산행에 목을 매지 않았다.

그래서 하산을 하기 위해 촬영 장비들을 챙기는데···.

-키아아아아악!

"뭐, 뭐야?"

난데없이 비명과도 같은 날카로운 외침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느낌상 100미터도 안되는 근거리에서 울려 퍼진 소리 같았다.

"고라니인가?"

섬에 고라니라니.

황당하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멧돼지와 토끼도 있는데, 고라니가 있다고 이상할 것 없지 않은가.

누군가가 풀어놨을 수도 있고.

아니, 꼭 그랬으면 좋겠다.

저 소리가 고라니의 것이 아닐 가능성은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어?"

나는 태연한 척 굴면서도 빠르게 하산했다.

그런데 꺼림칙한 느낌은 오프닝 장소에 도착하자 더욱 강해졌다.

"······."

차곡차곡 쌓여 있던 짐들이 누군가가 파헤친 것처럼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인도라서 거리낌 없이 짐을 두고 다닌 건데 이게 대체 뭔 상황일까?

002화 무인도 (2)

'야생동물의 짓인가?'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짐을 살폈다.

다행히 분실물은 없었다.

그러나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는 짐은 누가 봐도 인위적이다.

바람에 의해 쓰러졌다던가 그런 게 아니다.

때문에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의 소행이라 의심하면서도 '사람의 짓'이라는 경우의 수를 배제하지 않았다.

'월광도가 무인도지만, 출입이 금지된 섬은 아니니까.'

나 이외 다른 누군가가 섬에 있을 수도 있다.

낚시꾼일 수도 있고, 어쩌면 캠핑족일 수도 있고.

분명한 것은 사람의 짓이면 매우 곤란하단 사실이다.

멋대로 남의 짐을 뒤지는 인간이 결코 정상일 리 없으니까.

'차라리 야생동물의 짓이면 좋겠네.'

내가 바란 건 서바이벌에 재미를 더한 오락 영상이지, 미스터리나 공포 스릴러가 아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대응할까 고민을 하던 나는 한 가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드론을 띄워보자.'

풍경을 찍기 위해 대여해온 드론을 이용해서 섬을 탐색해 보기로 했다.

드론을 이용하면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드론 가방을 찾았는데.

-크르르르.

갑자기 뒤에서 짐승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폐가 마을에서 개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어째서 무인도에 개가?'

그 개를 본 순간 안도감과 당혹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짐을 어지럽힌 유력한 용의자가 인간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고.

저 개가 야생화된 들개로 보인다는 점 때문에 당혹감을 느꼈다.

멋대로 남의 짐을 뒤지는 인간을 상대하지 않게 되어 다행이지만, 들개도 멧돼지 못지않게 위험한 야생동물이니 조심해야 한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무인도에 개를 갖다 버린 거야.'

세상에 참 제정신 아닌 인간들이 많다.

키울 자신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입양을 보내야지, 왜 이런 섬에 풀어 버린단 말인가.

나는 들개가 흥분하지 않게 느릿느릿 뒤로 물러났다.

야생동물을 만나면 등을 보이지 않고 자연스레 퇴장하는 편이 좋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다만 개는 눈을 마주 보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슬쩍 시선을 피해줬다.

-크르르르!

그러나 이런 방법이 모두 통하는 건 아니다.

배가 고프거나 번식기에 접어든 야생동물이라면 바로 공격해 올 수도 있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크와아앙!

"젠장!"

들개가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눈알을 굴려 숨을 장소나 이 상황을 회피할 물건을 찾았다.

그러다가 무인도에서 가장 흔한 쓰레기인 폐그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던져서 잡을 수 있을까?'

투망도 아니고 일반 그물을 넓게 펼쳐서 날렵한 들개를 잡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방법이 없으니, 일단 들개가 걸려 넘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닥에 그물을 펼쳐 두고, 추가로 던지기용으로 쓸 그물을 움켜쥐었다.

-다다다닥!

"허···."

이어서 고개를 들어 들개를 보니, 어느새 거리가 다섯 걸음 이내로 좁혀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까워진 들개와의 거리보다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곤 헛바람을 삼켰다.

'원근감이 왜 이래?'

시야를 가득 채운 들개의 덩치가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건 생김새만 개지, 곰이나 다름없는 몸집을 갖고 있었다.

네발로 달리고 있는데도 눈높이가 나와 비슷할 정도로.

'말이 돼!?'

나는 황급히 들고 있던 그물을 뿌리며 정글도를 뽑아 들었다.

저런 괴물이라면 내 목 정돈 간단히 물어뜯을 수 있을 것이다.

동물 보호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겠다.

-촤악!

그물이 덮쳐오자 거대 들개가 재빠르게 자세를 낮췄다.

그물은 녀석의 등을 쓸고 지나갈 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거대 들개가 그물을 벗어난 순간을 기다렸다.

곧이어 그물을 돌파한 들개의 얼굴이 드러나자, 정글도를 있는 힘껏 찔러 넣었다.

"큭!"

엄청난 반발력이 정글도를 타고 오른손에 전해졌다.

그로 인해 나는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맥없이 뒤로 튕겨 나갔다.

높은 질량을 가진 짐승이 돌진해 오는데, 가만히 서서 칼을 찔러 넣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숨이 턱 막히고 정글도를 쥐고 있던 오른손은 뼈가 부러진 것처럼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커엉! 컹! 컹!

나는 이를 악물며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거대 들개의 상황을 살펴보니, 한쪽 눈에서 제법 많은 피를 쏟고 있었다.

거대 들개는 무섭게 짖어댔지만, 기세만 사나울 뿐 직접적인 위협은 되지 않았다.

이유는 바닥에 깔아놨던 그물이 들개의 발에 엉키면서 얼떨결에 포박되었기 때문이다.

'왜 물지 않나 했네.'

정글도 끝이 날카롭지 않아 생각보다 데미지를 많이 주지 못했다.

그래서 물어뜯길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이건 하늘이 도왔다고밖에 볼 수 없다.

-크아아앙! 컹!

들개는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도 요란하게 짖어댔다.

반드시 나를 죽이겠다는 것처럼.

'이게 개가 맞긴 한 건가?'

상식적으로 이렇게 큰 개가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섬에 늑대가 살고 있을 리도 없고.

아니, 애초에 늑대도 이렇게 클 리가 없다.

이건 진짜 괴물이다.

-뚜둑!

그때 어디선가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뚝두둑뚝!

-크아아앙! 컹!

거대 들개가 난리를 치자 폐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근처에 숨을 데도 없고, 녀석을 다시 포박할 여유도 없다.

금방이라도 그물이 터져나갈 것 같은 상황.

이젠 선택을 해야 한다.

"미안하다."

결국, 부상을 입은 오른손을 대신해 왼손으로 정글도를 움켜쥔 나는 거대 들개의 목덜미를 찔렀다.

-푹!

날붙이가 살덩어리에 파고들다가 딱딱한 뼈에 걸리는 감각이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미지근한 피가 얼굴에 튀었다.

앞선 공격은 충돌로 인한 통증이 워낙 커서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너무도 노골적인 감각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는 정글도에서 손을 떼며 뒷걸음질을 쳤다.

-후욱··· 후욱···. 훅.

그러자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 들개가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이다.

거친 숨소리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나를 노려보는 눈빛은 점차 흐리멍덩해졌다.

곧이어 녀석의 숨이 완전히 멈춘 것을 확인한 나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팔, 이게 무슨 상황이야."

서바이벌 영상을 찍기 위해 무인도에 온 거지만, 내가 바란 서바이벌은 이렇게 피가 낭자하고 목숨을 위협받는 생존 게임이 아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감정을 추스르던 나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들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녀석을 다시 바라보았다.

"어? 어어어?"

하지만 그런 내 눈에 보인 것은 핏물을 뒤집어쓴 거대 짐승의 사체가 아니라···.

사방으로 흩날리는 푸른 빛 가루의 향연이었다.

-사르르르.

현실감이 떨어지는 너무도 기이하고 아름다운 풍경.

나는 이게 뭔 상황인가 싶어 입을 떡 벌린 채 경악했다.

"뭐, 뭐야?"

온몸에서 밀려오는 통증도 잊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방금까지 거대 짐승이 쓰러져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바닥엔 폐그물과 정글도가 나뒹굴고 있을 뿐이다.

어디에도 짐승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 여기저기 튀었던 피도 어느새 증발해 버렸다.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네.'

계속되는 오른손의 통증이 내가 경험한 게 헛것이 아님을 증명할 뿐이다.

그런데 기현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

눈앞에 반투명한 '파란색의 평면 사각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 낌새 없이, 아무 이유 없이,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파란색의 사각형은 마치 홀로그램처럼 눈앞에 존재했다.

"······. 이건 또 뭐야?"

내가 미친 걸까?

도무지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침착하게 뺨을 때려 보고 허벅지를 꼬집어봐도 바뀌는 건 없었다.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현 시간부로 지구의 시스템이 일부 변환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파란 사각형에 글자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비로소 파란 사각형이 스마트폰의 메시지창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한번 메시지가 떠오르니, 그다음부터 알 수 없는 정보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각지에 웨이포인트가 생성되었습니다.]

[각지에 안전구역이 생성되었습니다.]

[각지에 특수 지형이 생성되었습니다.]

[각지에 특수 자원이 생성되었습니다.]

[각지에 몬스터와 NPC가 생성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 이게 조현병인 걸까요?'

만약 이게 조현병의 증상이라면 모든 게 납득이 된다.

내가 미쳐서 헛것을 보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가슴팍에 차고 있던 액션캠을 떼서 영상을 돌려 보는데···.

-크와아앙!

"어?"

거대 들개와의 전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게 아니겠는가?

혹시 이런 영상들마저 망상장애가 만들어낸 환상일까?

이마를 짚으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눈앞에 계속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업데이트 도중 토벌한 몬스터의 경험치와 보상이 정산됩니다.]

[그랑 다이어 울프를 토벌하여 경험치 100을 획득했습니다.]

[그랑 다이어 울프를 최초 토벌하여 경험치 500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라 '부상'과 '상태 이상'이 모두 회복됩니다.]

[능력치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상태창을 열어 능력치를 분배하세요.]

마치 게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메시지들.

나는 그것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고, 이런 내게 황당해할 필요 없다는 것처럼 푸른 빛이 몸에 깃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빛 때문인지 통증에 시달리던 오른팔과 자잘한 부상이 치료되었다.

"······."

덕분에 눈앞에 벌어지는 이상 현상들을 더는 단순한 정신병으로 치부하기 힘들었다.

나는 얼른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에 접속했다.

[눈앞에 이상한 글자 나만 보임?]

[지금 우리 아파트 난리 났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 나고!]

[도심 속에 늑대 무리라니 이게 뭔 상황이야? 강남 S백화점에 오지 마! 늑대 밥 될 수도 있어!]

[112하고 119전화 전부 먹통임!]

[이 짐승 뭐야? 동물원에서 탈출한 원숭이인가? 그런데 왜 피부색이 초록색이지?]

그러자 패닉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무언가에 공격을 당하고, 정체불명의 메시지를 받은 상태였다.

SNS엔 위급상황에 빠진 사람들의 다급한 구조 요청이 쏟아져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혼란에 정점을 찍듯, 요란한 알람과 함께 재난문자가 왔다.

-띠이이이! 띠이이!

[동시다발적인 테러 발생]

[국민 여러분께선 외출을 자제해주시고, 외부에 계신 분들은 빠르게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정신 상태가 온전하단 건 알겠다.

그런데 이런 미친 상황이라면 차라리 내 정신이 온전치 않은 게 낫지 않을까?

"이게 말이 돼?"

현실이라기엔 너무도 몰상식한 상황.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사건 사고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인데,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묻지마 범죄처럼, 신이 미쳐서 인간에게 묻지마 장난을 치는 걸까?

나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허공에 떠 있는 메시지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사이 메시지 창엔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어있었다.

[그랑 다이어 울프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15코인을 획득했습니다.

-그랑 다이어 울프 가죽 2장을 획득했습니다.

[그랑 다이어 울프 최초토벌 보상이 추가 지급됩니다.]

-75코인을 획득했습니다.

-늑대검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업에 이어 아이템까지 나와 준다.

무슨 게임도 아니고,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

'일단 선장 아저씨한테, 데리러 와달라고 해야겠지?'

촬영이고 뭐고 일단 섬부터 떠야겠다.

나는 월광섬까지 실어 준 어선 선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다시 연락 주겠······. 허억! 괴, 괴물! 끄악! 컥!]

수화기 너머로도 들리는 아비규환의 대환장 쇼.

"선장님! 선장님 괜찮으세요!? 선장님!"

-뚜뚜뚜.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좆된 거 같다.

003화 무인도 (3)

*

게임을 연상시키는 메시지 내용도 혼란스럽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현재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보았던 거대 들개··· 아니, 그랑 다이어 울프 같은 괴물이 사람들을 무차별 공격하며 큰 인명 피해를 내고 있다.

지금은 이런 일이 어째서 발생한 건지, 이런 공격이 앞으로도 계속되는 건지에 대한 의문은 뒤로 미뤄 놓고, 신변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나야 운이 좋아 무사할 수 있었으나, 보통 사람이 '그랑 다이어 울프'같은 괴물을 만난다면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육지에 있을 내 가족까지도···.

-뚜우우. 뚜우우. 뚜우우.

"이런 젠장···."

선장과의 통화가 끝난 직후,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두 분 다 연락이 통하지 않았다.

혹시 우려할 사태가 벌어진 걸까?

'부모님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어야지, 이 병신아.'

나는 스스로를 욕했다.

사실 선장보다 전화를 먼저 걸었다고 해봐야 불과 20~30초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부모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그 20~30초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빨리 전화를 걸었으면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오오오오!

그렇게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때, 폐가 마을 쪽에서 정신을 일깨우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건지···.

녀석들이 이쪽으로 오기 전에 일단 숨어야 한다.

나는 마을 반대편 쪽 해변가 위에 컨테이너가 있단 것을 떠올리며, 약품과 비상용품이 든 가방과 전동 드릴 같은 공구가 든 가방을 움켜쥐고 자리를 옮겼다.

-크륵...

낡은 컨테이너는 문이 잠겨 있지 않아서 무사히 숨어들 수 있었다.

먼지로 가득한 창문을 살짝 열어 보니, 그랑 다이어 울프가 선착장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녀석은 허공에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삼키며 그랑 다이어 울프의 행동을 주시했고, 다행히 거대짐승에게 재차 공격받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저 새끼는 왜 계속 선착장과 폐가 마을을 오가는 거야? 마치 짜여진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혹시 게임처럼 활동 영역이 정해져 있는 걸까?'

어쨌든 그랑 다이어 울프는 이곳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나는 안심하고 부모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백호니!? 서백호!?]

"아버지!"

하늘이 도운 건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족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막혀 있던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 들었다.

나는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정신이 없어서 받을 수가 없었어.]

"괜찮으신 거죠? 어머니는요?"

[······. 우린 괜찮아.]

전혀 안 괜찮은 느낌.

바로 이어지지 않는 대답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왜 뜸을 들이시는 거예요? 설마 어머니께 무슨 일 생겼어요?"

[후우, 그래. 엄마가 조금 다쳤어.]

청천벽력과도 같은 대답.

크게 당황한 나는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돈 아니라니까.]

"얼마나 다치셨는데요?"

[오른팔하고 왼쪽 허벅지를 조금 깊게 베였어. 그래도 큰 혈관은 베이지 않아서 꿰매고 관리만 잘하면 문제없을 거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가 다쳤단 사실에 걱정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목숨에 지장은 없다고 하니까.

"지금은 두 분 모두 부대에 계신 거예요?"

[그래, 계룡대 안에 있는 병원이야.]

아버지는 군인이시다.

그것도 육군본부에서 근무 중인 대령 계급의 군인.

아버지 말에 의하면 어머니와 함께 부대 밖에서 점심을 먹다가 사고에 휘말리셨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괴물 때문에 고생하긴 했지만, 지금은 두 분 모두 계룡대에 들어간 상태이니, 나보다 훨씬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린 걱정할 필요 없어.]

"다행이네요."

[그런데,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 안전한 거야?]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에겐 지방으로 여행 영상을 찍으러 간다고만 했지, 걱정하실 것 같아서 무인도에 간다는 이야긴 안 했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레 지금의 상황을 이야기했고···.

[뭐!? 무인도!? 야이 미친놈아!]

아버지에게 욕 한 사발 들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죠."

[후우···. 그건 그렇지.]

"일단 안전한 곳을 찾아서 숨어 있어요. 이대로 사태가 진정되길 기다려 봐야죠."

[거기가 어디라고?]

"충남 태안의 월광도요."

[아빠가 헬기를 공수해 보마.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꼬라지 보면 당장은 힘들 거야. 분명 장군들도 제 가족 챙긴다고 헬기부터 알아보고 있을 게 뻔하니까.]

대령이면 낮은 직급은 아니지만, 비상 상황에서 멋대로 헬기를 운용할 수 있을 정돈 아니다.

그게 사적인 이유라면 더더욱.

그나마 아버지가 육사 출신이라 여기저기에 인맥이 많아 헬기 구하는 걸 시도라도 할 수 있는 거다.

[식량은 있어?]

아버지 말에 나는 약을 포함해 긴급물품들이 담겨 있는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압축식량과 칼로리바가 들어 있었다.

"고립을 대비해서 4일 치 식량을 챙겨오긴 했어요."

[그나마 다행이네. 알았어. 그 사이에 헬기가 도착할 수 있게 아빠가 최대한 노력해 볼게. 움직이지 말고 안전한 곳에 잘 숨어 있어.]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진급 막히지 않게요."

[쓸데없는 걱정 하긴.]

이후, 아버지는 자신이 아는 선에서 현재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사람을 공격하는 괴물들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으며,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신기루처럼 등장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괴물은 고블린이나 오크, 다이어울프, 검치호 등, 게임 속의 몬스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형태이며, 마법처럼 신비한 힘을 사용하는 괴물의 목격 정보도 입수되었다.

또한 괴물은 실내보단 실외에서의 등장확률이 높고, 죽이고 또 죽여도 계속 새롭게 등장하기 때문에 군대를 투입해도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 한다.

"그럼 이 섬이 오히려 안전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당장 늑대 한 마리 빼면 다른 괴물은 보이지 않던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계룡대보다 안전하진 않을 거 아니냐.]

"그건 그렇죠."

그리고 괴물 외에도 기존에 없던 '이상 지형'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호수나 산처럼 말 그대로 새로운 지형이 생기거나, 건물이나 조형물처럼 지구의 것이 아닌 듯한 시설도 발견되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 육군본부에 근무하시는 만큼, 정보취득이 빠르시다.

하지만 아직 사건 발생 초기라 추가적인 조사와 자료 정리가 필요하다.

아버지는 중요 정보가 입수되면 그때그때 알려주겠다고 하셨다.

"육본의 정보를 그렇게 막 알려줘도 되는 거예요?"

[생존 정보인데, 뭐가 문제겠어.]

아버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몸 조심하고,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해.]

"알겠어요. 어머니 통화 가능해지면 먼저 문자로 연락 주세요. 그럼 제가 전화할게요."

[그래.]

통화는 이걸로 끝.

보통의 부자지간이 그런 것처럼 지금까지 아버지와 30초를 넘게 통화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역대급으로 길게 통화했다.

"후우···."

아무튼 여러모로 다행이다.

부모님의 안전을 확인해서인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참 멍하니 있다가.

비상 가방의 내용물을 다시 살폈다.

'이걸 챙겨와서 다행이네.'

안에는 약품뿐만 아니라 비상식량도 들어 있었다.

날씨의 영향으로 배가 뜨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챙겨온 건데, 이런 상황 때문에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식량은 2500kcal의 압축식량 3개와 320kcal의 칼로리바 2개, 추가로 산에서 따온 과일 조금이 있다.

'비상 상황인 만큼 식량을 아껴야 해. 압축식량과 칼로리바는 그냥 까지 말자.'

이 섬엔 먹을 게 많다.

당장 근처 제방과 선착장만 가도 굴과 섭이 덕지덕지 붙어있지 않은가.

그래서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유통기한이 긴 보존식량들은 건들지 않기로 했다.

그냥 아버지의 말을 믿고 먹어버려도 되지만,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미쳤는데, 계획이 뜻대로 되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시팔, 진짜 서바이벌이 되어 버렸네.'

급전개도 이런 급전개가 어딨단 말인가?

하도 어이가 없으니 절로 웃음이 났다.

'나머지 짐들도 가져와야겠어.'

지금 숨어 있는 컨테이너가 낡긴 했지만, 생각보다 아늑하다.

창문을 빼면 전체가 금속으로 되어 있어서 방어력도 제법 높아 보이고.

나는 이 컨테이너를 베이스 캠프로 삼기로 했다.

그래서 나머지 짐들도 이곳으로 옮겨오기로 마음먹었다.

'늑대가 마을로 향할 때 나가면 안전하게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아.'

그랑 다이어 울프는 계속해서 폐가 마을과 짐이 쌓인 선착장을 오가고 있다.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완전히 일정하지는 않지만, 녀석이 10번 넘게 왕복하는 동안 폐가 마을에서 가장 짧게 머물렀던 시간조차 짐을 나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타이밍을 맞춰 컨테이너를 나서려는데···.

'능력치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상태창을 열어 능력치를 분배하세요.'

'늑대검을 획득했습니다.'

문뜩 잊고 있던 메시지창의 내용이 떠올랐다.

아직도 시야 끝에 매달려 있는 반투명한 메시지창.

나는 '혹시'라는 생각으로 허공에 혼잣말을 했다.

"상태창?"

[상태창]

-레벨: 5

-칭호: 없음

-능력치

근력: 5 순발력: 5 마력: 5

잔여 능력치 포인트: 4

-보유 코인: 90

그러자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허, 이게 되네?"

게임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 같은 내용과 소설에서 본 것 같은 상황.

진짜 신의 짓인지, 외계인의 짓인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게 내겐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짧게 혀를 찬 나는 상태창을 살폈다.

004화 의외로 좋아 (1)

[상태창]

-레벨: 5

-칭호: 없음

-능력치

근력: 5 순발력: 5 마력: 5

잔여 능력치 포인트: 4

능력치는 '근력', '순발력', '마력' 3가지로 매우 심플 했다.

잔여 포인트가 4인 걸 보니, 이건 레벨업을 할 때마다 하나씩 주는 모양이다.

능력치는 모두 5로 통일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게 기본 능력치가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들도 능력치가 나랑 같나?'

나는 아버지에게 능력치가 몇이냐고 물어보려다가 바쁘실 수도 있으니 일단 스마트폰으로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상태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확인 결과 능력치는 5로 모두 같았다.

남녀노소 예외 없이.

'잘하면 군필이 여고생에게 얻어터지는 장면을 볼 수도 있겠네.'

너무도 평등한 조치에 헛웃음이 나왔다.

능력치가 통일되었단 뜻은 누군 능력치가 하락하고, 누군 능력치가 상승했다는 의미일 텐데, 신기하게 이질감을 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 역시 그렇고.'

아마 이런 것도 세상에 발생하고 있는 이상 현상의 일부인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근력에 포인트를 투자해 보기로 했다.

"오오."

근력이 5에서 6이 되며 20%가 향상되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놀랍도록 명확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컨디션이 최고조일 때 이상으로 활력과 힘이 넘쳐나는 느낌이다.

겨우 능력치 하나를 상승시켰을 뿐인데 이렇게 체감되자, 나머지 포인트도 근력에 모조리 때려 박으려 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신중하게 해야지. 마력은 제쳐놓더라도 순발력까지는 확인해야 해.'

나는 검도뿐만 아니라 다양한 격투 스포츠를 경험했다.

때문에 어떤 스타일의 싸움이 자신에게 맞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다.

나는 힘으로 찍어 누르는 타입이 아니다.

그래서 이번엔 순발력을 높여 보았다.

"좋은데?"

순발력 역시 근력만큼이나 상승 수치가 체감되었다.

-후후훅!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쉐도우 복싱을 해보니, 감각이 더욱 기민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신체의 반응 속도 또한 빨라졌고.

바라는 대로 몸이 움직여 주다니, 너무 신기했다.

그간 여러 운동을 하면서 몸이 머리를 따라가질 못한다고 느꼈는데, 그 답답함이 해소된 기분이다.

'능력치를 어떻게 올려야 할지 알겠어.'

남은 능력치는 2.

나는 근력과 순발력에 잔여 포인트를 하나씩 추가했다.

-능력치

근력: 7 순발력: 7 마력: 5

잔여 능력치 포인트: 0

지금이라면 정글도만으로도 그랑 다이어 울프를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자신해선 안 된다는 걸 안다.

앞선 전투는 운빨로 얻어걸린 거나 마찬가지니까.

'능력치가 상승했다고 해서 체형이 변하지는 않네.'

만족감을 드러낸 나는 상태창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발견하곤 손을 멈췄다.

상태창 상단에 웬 아이콘이 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상자와 검, 스크롤 모양의 아이콘 세 개.

나는 그게 뭔가 싶어 손가락으로 찔러 봤고, 인벤토리창과 스킬창, 퀘스트창을 불러오는 버튼임을 알게 되었다.

'어쭈? 스킬하고 퀘스트도 있어?'

스킬창과 퀘스트창은 공란이므로 패스하고, 인벤토리창을 확인하니 그랑 다이어 울프를 토벌하고 얻은 보상이 들어 있었다.

[그랑 다이어 울프 가죽 2장]

[늑대검]

인벤토리는 총 10칸인데,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칸이 100칸 정도로 매우 많았다.

아마 퀘스트나 아이템, 재화를 통해 인벤토리를 추가 확장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사달을 일으킨 게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K-RPG를 참고하신 모양이군요?'

확인 결과 인벤토리에 여러 물건이 담긴 가방은 보관이 안 되고, 한 칸에 한 종류의 아이템만 담을 수 있었다.

[늑대검 / 한손반 장검 / 등급: 고급]

-그랑 다이어 울프의 이빨에는 강철의 강도를 높여주는 성분이 있다고 한다. 잘 제련된 강철 검에 그랑 다이어 울프의 이빨 가루를 더한 검이다.

-근력+1

늑대검은 그랑 다이어 울프 '최초 토벌'에 따른 추가 보상이다.

정글도와 달리, 제대로 된 서양식 장검이었다.

더구나 날의 길이와 손잡이의 길이도 죽도와 비슷해서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무기 같았다.

'좋네, 검이 능력치까지 올려주다니.'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정체불명의 시스템을 사용하며 만족해하는 나 자신 역시 정상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살기 위해선 뭐든 이용해야 한다.

서바이벌에서 '적응'만큼 중요한 미덕도 없으니까.

'이제 슬슬 나머지 짐을 찾아오자.'

나는 그랑 다이어 울프가 선착장을 떠나는 타이밍에 맞춰 컨테이너를 나섰다.

밖에 있는 나머지 짐들을 안전한 컨테이너 안으로 가져오기 위해서.

*

어느 권투 선수가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뜬금없이 이게 뭔 개소리냐면, 지금의 내 상황이 그렇단 뜻이다.

컨테이너 안에서 지켜본 결과 그랑 다이어 울프의 활동엔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녀석이 멀어지는 타이밍에 맞춰 나가면 마찰 없이 짐을 찾아올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결과가 어찌 되었냐 하면···.

-깡!

"젠장!"

지금 그랑 다이어 울프에게 존나게 처맞고 있는 중이다.

내 통계에 따르면 녀석은 폐가 마을로 이동해서 3분 20초 동안 돌아오면 안 되는데, 어째서인지 단 1분 30초 만에 복귀한 것이다.

당연히 돌발 상황은 여지없이 생존을 위한 전투로 이어졌고, 결국 지금에 이르렀다.

-크앙!

"큭!"

명색이 이름표에 '울프'라는 단어를 달고 있으면, 늑대답게 아가리만 들이밀 것이지 왜 범처럼 앞발을 휘둘러 오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나는 온몸이 칼로 베인 듯한 상처와 피로 혈인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치명타는 허락하고 있지 않다는 점일까?

높아진 능력치와 제대로 된 무기가 없었다면 진작에 끔살을 당했을 것이다.

'아깐 정말 운이 좋았구나.'

묶여 있는 그랑 다이어 울프를 상대할 때는 몰랐는데, 직접 부딪힌 녀석은 도저히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피지컬이 아니었다.

그랑 다이어 울프가 힘을 쓰면 속절없이 뒤로 밀려나기 바빴다.

지금의 이런 모습은 절망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순간.

나는 승리를 위한 실마리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어.'

그랑 다이어 울프의 전투 패턴에 익숙해진 것이다.

이는 반격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촥!

지금까지 방어 일변도였던 나의 검이 처음으로 그랑 다이어 울프의 공격보다 먼저 뻗어졌다.

줄곧 늑대의 공격을 보고 대응했다면, 이번엔 공격을 받기 전에 패턴을 읽고 미리 대응한 것이다.

그 결과는···.

-컥!

성공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찌른 나의 검을 향해 그랑 다이어 울프가 아가리를 쑤셔 넣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대로 녀석의 입속에 빨려 들어갔다.

아마 제삼자가 봤다면 늑대가 일부러 검에 달려든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이템이랑 경험치나 왕창 토해라."

검도도 그렇고 다른 격투기도 그렇고, 1:1 승부가 기본인 스포츠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나를 분석하고 연구해온 상대다.

분석이 완벽하다면 어느 정도의 기량 차이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녀석에게도 여지없이 통했다.

나름의 난이도 조절인지, 그랑 다이어 울프는 생각보다 움직임이 단조로워서 패턴 파악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서걱! 파팍!

-컹! 깨깽!

아마 늑대 새끼는 꽤나 재밌었을 것이다.

짐승 주제에 인간을 샌드백 취급했으니까.

이젠 녀석이 샌드백이다.

[그랑 다이어 울프를 토벌하여 경험치 100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라 '부상'과 '상태 이상'이 모두 회복됩니다.]

[그랑 다이어 울프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16코인을 획득했습니다.

-그랑 다이어 울프 가죽 2장을 획득했습니다.

나는 철저히 그랑 다이어 울프를 괴롭히다가 죽였다.

딱히 원한 때문이라기보다 패턴 타이밍을 조금이라도 완벽하게 숙지하기 위함이었다.

-파앗!

레벨이 오르면서 모든 부상이 회복되고, 나는 새롭게 얻은 능력치를 순발력에 추가했다.

순발력과 근력은 1:1 비율로 투자할 생각인데, 늑대검에 '근력+1' 옵션이 있어서 순발력을 올린 거다.

그렇게 무사히 위기를 넘긴 나는 짐들을 컨테이너로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고, 마지막 짐을 컨테이너 안에 넣을 때.

-아우우우!

그랑 다이어 울프 한 마리가 하울링과 함께 근처 허공에서 뿅하고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게임 속의 리젠 같은 느낌.

바로 앞에서 리젠 된 바람에 그랑 다이어 울프는 곧바로 내게 달려들었다.

-컹!

[그랑 다이어 울프를 토벌하여 경험치 100을 획득했습니다.]

-12코인을 획득했습니다.

-그랑 다이어 울프 가죽 3장을 획득했습니다.

패턴은 유효했다.

한번 싸움에 익숙해지니, 이번엔 앞선 전투처럼 피범벅이 되는 일도 없었고, 능력치가 높아진 만큼 더욱 수월하게 처치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이면 쉽게 레벨업하겠는데? 처리하기 좋게 한 마리씩 나와주니까.'

레벨업에 목맬 필요 없다.

현실은 게임이 아니고, 오만하게 굴다가 삐끗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체 능력의 상승효과를 맛봤기 때문일까?

더욱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우선 드론으로 섬의 상황부터 파악하고 사냥을 계속 진행할지, 고민해 보자.'

그러나 나는 냉정함을 유지했다.

이곳은 위기에 빠져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무인도라는 걸 다시금 상기하면서.

-위이잉!

나는 드론을 날리며 본격적인 탐색을 시작했다.

*

005화 의외로 좋아 (2)

*

드론이 날아오르고, 조종기에 부착된 화면으로 영상이 출력됐다.

비싼 값을 준 만큼 드론은 만족스런 화질을 자랑했다.

"섬의 전경부터 살피자."

일단 섬의 전체적인 형태를 파악하기 위해 드론의 고도를 계속 높였다.

어디에 어떤 지형이 있고, 어떤 몬스터가 있는지를 기록해서 나만의 지도를 만들 생각이다.

"왜 아직도 전경이 안 담기는 거야?"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드론이 꽤 높이 올라갔음에도 섬의 풍경이 한 화면에 담기지 않았다.

"월광도 22만평, 해안선 길이(둘레) 4.5km."

나는 월광도란 섬의 정보를 내뱉었다.

이유는···.

"족히 몇 배는 더 커 보이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월등히 큰 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유튜브 촬영을 할 때부터 섬의 규모가 생각보다 큰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긴 했었다.

"설마."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의문을 이어가던 나는 문뜩 아버지가 알려줬던 정보를 떠올렸다.

'곳곳에 이상 지형이 생기고 있어. 방금까지 도로였던 곳에 난데없이 산이 들어서기도 하고,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 호수가 생기기도 해. 이 이상 지형 중엔 건물이나 동상 같은 시설물도 있다고 하더라.'

이상 지형.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다.

'이 월광도에 이상지형이 생겨났단 뜻인가.'

그게 아니면 지금의 상황이 설명되지 않는다.

과연 섬이 커진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도를 만들기 위해 일단 섬의 형태를 노트에 그렸다.

본래 월광도는 산 하나, 분지 하나, 모래사장 하나를 조촐하게 품고 있는 둥근 섬이다.

하지만 영상에 나오는 변형된 월광도는 산봉우리가 두 개였으며, 분지 셋, 모래사장도 셋이 딸린 타원형의 섬이었다.

뿐만 아니라, 산 너머로 호수와 작은 규모의 숲도 있어서 규모가 더욱 커 보였다.

"드론이 없었다면 큰일 났겠어."

드론이 있기에 섬의 상태를 조기에 파악할 수 있었고, 쉽게 지도를 그릴 수 있었다.

만약 혼자 싸돌아다니며 지형을 파악했다면 패닉에 빠졌을 거다.

"이쪽에서 젠되는 그랑 다이어 울프는 3마리구나. 한 마리는 마을 입구와 선착장을 오가고, 나머지 두 마리는 마을 내에서만 활동하네."

나는 생존을 위협할 괴물들의 이동 경로를 지도에 하나하나 기입했다.

조사결과 그랑 다이어 울프 외 9종의 괴물을 추가로 발견했고, 이 괴물들은 17개소에 분산 배치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중엔 고블린이나 오크를 연상시키는 인간형 몬스터도 있었는데, 녀석들이 드론을 향해 돌을 던져서 하마터면 추락할 뻔했다.

'괴물들끼리 활동 구역이 정해져 있다니, 마치 게임 속 사냥터를 보는 것 같네.'

사냥터 중엔 두 종류의 괴물이 동시에 나오는 곳도 있고, 구역이 겹치는 곳도 있었다.

'섬 전체에서 괴물들이 차지한 영역은 약 3할 정도. 그 말은 3할의 땅만 피하면 아무 지장 없이 일반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단 뜻이다.'

덕분에 안전하게 해산물을 채집하고 과일을 딸 수 있을 것 같다.

당장 식량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신경 쓰이는 게 괴물들만이 아니란 거야. 이것도 이상지형이겠지?'

드론으로 알아낸 것 중엔 몬스터 관련 내용만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몸을 숨기고 있는 컨테이너에서 200미터 정도 이동하면 나오는 폐가마을.

그 폐가마을 북쪽에 누가 봐도 인위적인 시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거대 수정이다.

'스타그래프트 푸로토스의 파일런 같이 생겼네.'

마름모 형태의 거대 수정이 허공에 둥둥 떠서 푸른 빛을 뿜고 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수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누가 봐도 월광도의 것이 아닌, 유럽 양식의 건물 여섯 채도 자리하고 있어서 의문을 자아내게 하였다.

뭔지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드론의 고도를 낮춰 가까이 접근시켜 봤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 중요한 시설 같긴 한데, 정체를 알 수 없으니 꺼림칙할 뿐이다.

드론을 이용한 섬의 탐색이 끝나면 인터넷이나 아버지를 통해 알아봐야겠다.

"지도 작성은 이 정도면 되겠지."

지금 만든 지도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

나무가 우거져서 드론의 고도를 낮춰도 시야가 확보 안 된 장소도 제법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곳엔 안 가면 그만이다.

"응?"

마침 드론의 배터리가 거의 다 떨어졌단 알림이 떴다.

그래서 귀환 명령을 내렸는데.

"저건 또 뭐야?"

복귀하던 드론에 의외의 것이 찍혔다.

"내가 쳐놨던 덫인 거 같은데?"

촬영을 위해 산에 올랐을 때 쳐놨던 폐그물로 만든 포획덫.

그 덫에 무언가가 걸려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이거 설마."

그것도 심상치 않은 녀석이 걸려 있었다.

*

-바스락.

나는 긴장감을 유지하며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곳은 산속.

괴물의 영역 한복판은 아니지만, 멀지 않은 곳에 오크를 닮은 괴물의 영역이 위치한 곳이다.

원랜 드론에 저장된 영상을 차근차근 살피면서 지도의 완성도를 높일 생각이었으나, 포획덫에 걸린 무언가를 발견한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만약 덫에 걸린 녀석이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면 반드시 잡아야 했다.

-키에에엑!

"오, 진짜 그거인 것 같은데?"

현재 지구에 닥친 이상 현상은 게임의 시스템을 닮아있다.

그래서 '혹시'란 생각으로 조심조심 산에 오른 건데···.

이거 아무리 봐도 내 예상이 맞는 같다.

"아까 고라니 울음소리를 낸 게 너였구나."

작은 체구를 가진 인간형 몬스터.

생김새는 고블린을 닮아있고, 피부는 황금빛으로 번들거린다.

"현실에서 황금 고블린을 보다니."

그렇다.

내가 친 덫에 걸린 건 다름 아닌 황금 고블린이었다.

여러 게임 속에서 등장하는 보너스 몬스터 같은 존재.

워낙 빨라서 그렇지, 잡기만 하면 많은 보상을 주는 몬스터.

그게 황금 고블린이다.

'물론, 현실의 황금 고블린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거야 처치하고 보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늑대검을 치켜들었다.

황금 고블린은 내 검을 보며 잔뜩 위축되었다.

그 모습이 불쌍해 보이지만, 신기하게 동정심 따윈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녀석으로 인해 내 생존환경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죽어."

-푹!

예리한 늑대검이 황금 고블린의 목에 틀어박혔다.

그에 녀석은 고통스레 발버둥을 쳤다.

칼로 무언가를 찔러 목숨을 빼앗는 게 처음이라면 움찔 놀랐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세 번의 경험 거쳤기에 쫄지 않았다.

나는 손에 힘을 더욱 주고 그대로 칼을 비틀었다.

-뚜둑!

[황금 고블린을 토벌하여 경험치 500을 획득했습니다.]

[황금 고블린을 최초 토벌하여 경험치 2,500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라 '부상'과 '상태 이상'이 모두 회복됩니다.]

과연 황금 고블린!

대량의 경험치를 쏟아내면서 눈앞에 레벨업 메시지가 연이어 떠올랐다.

기존의 내 레벨은 6이었는데, 덫에 걸린 녀석 목 한번을 찌르고 단번에 레벨 12가 되었다.

그로 인해 능력치 포인트 역시 6이 추가되었다.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

"하하···."

하지만 진짜는 지금부터다.

황금 고블린의 주머니는 피부색만큼 두둑하기로 유명하니까.

[황금 고블린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1,520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중급 회복 물약 3개를 획득했습니다.

-회복의 반지를 획득했습니다.

-매직 로브를 획득했습니다.

-안전 텐트를 획득했습니다.

-스킬북 '마력탄'을 획득했습니다.

[황금 고블린 최초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스킬북 '도약'을 획득했습니다.

-행운의 탈리스만을 획득했습니다.

"이게 웬 떡이냐?"

이름만 봐도 어떤 아이템인지 예상이 되는 물건들.

8줄의 보상 메시지는 절로 입꼬리를 위로 솟구치게 하고,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월광도는 외부와 단절된 무인도긴 하지만, 어쩐지 축복받은 섬인 것 같다.

***

서백호의 아버지 서인호 대령은 스마트폰에 계속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과장님, 뭐하십니까?"

그런 그에게 '최 소령'이란 친한 부하가 다가와 물었고, 서인호 대령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들 녀석에게 대재앙에 대해 정보 좀 전해주려고."

"어? 백호 계룡대 안에 없습니까?"

"유튜브 영상 찍는다고 싸돌아다니다가 고립되고 말았거든."

"이런, 하필 지금···."

"그래도 신변에 문제는 없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다만 지금 있는 장소가 무인도라 그렇지."

"······. 엄청 심각한 거 아닙니까?"

"심각하지."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메시지만 적고 있어서 걱정할 정도는 아닌가 싶었는데···.

이건 보통 큰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최 소령은 서인호 대령이 무슨 정보를 쓰나 싶어서 슬쩍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웨이포인트]

전 세계 곳곳에 등장한 거대 수정.

일정 액수의 코인을 지불하면 다른 지역의 웨이포인트로 공간이동을 시켜준다.

단, 사용자가 방문한 적이 있는 웨이포인트로만 공간이동이 가능하다.

[안전구역]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 말 그대로 안전한 구역.

안전구역 안에서 휴식을 취하면 부상이 빠르게 회복되고, 짧은 휴식만으로도 피로감을 해소할 수 있다.

또한 안전구역 안에는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상점이 입점해 있으며 판매 아이템은 구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안전구역은 보통 웨이포인트 주변에 형성되어 있으며, 코인으로 이용료를 지불 해야 한다.

[화기통제]

몬스터는 화기(총, 폭탄 등)로 사살할 경우 경험치와 아이템, 코인을 주지 않는다.

냉병기를 사용해 몬스터를 처치해야만 보상을 얻을 수 있다.

그 외에도 꽤나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는데, 관심을 갖고 정보를 모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도 많았다.

그래서 최 소령은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소한 내용이어도 허가 받지 않고 정보를 외부에 공유하는 건 추후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거 알려줘도 되는 겁니까?"

"왜? 찌르게?"

"아, 아닙니다. 괜히 나중에 트집 잡혀서 대령님 진급에 문제 생길까 봐 그런 겁니다."

"그럼 진급 안 하면 되지. 상관없어."

서인호 대령은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군인이다.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문제없이 별을 달 수 있을 거란 평가가 주를 이룰 인물.

그런 그가 이리 말하니, 헛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장교에게 별이 어떤 의미인가.

다른 사람들은 별 하나 달겠다고 온갖 똥꼬쇼를 다하는데, 그까짓 거 안 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말을 하다니···.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상사였다.

"그러고 보니, 안전구역을 이용하면 사모님 치료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다친 마누라 끌고 계룡대 밖에 나가면 참 무사하겠다. 그치?"

"음···. 그것도 그렇네요."

안전구역 외에도 레벨업을 이용한 치료법도 알게 되었지만, 모두 부상자인 그의 부인에겐 어찌할 수 없는 그림의 떡과 같은 이야기였다.

괜히 다친 서인호 대령의 부인 이야기를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최 소령.

그는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저도 하나 새로운 정보를 얻은 게 있습니다."

"그래?"

최 소령은 흥미를 보이는 서인호 대령의 모습에 성공적으로 화제를 바꿨다고 생각하며, 건너 건너 들은 이야기를 알려주었다.

"혹시 영약이라고 아십니까?"

"영약? 무협지에 나오는 그거?"

"맞습니다. 누군가 산에서 아이템으로 분류가 되는 약초를 캤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초에 능력치 상승 옵션이 붙어 있었답니다."

"오, 확실히 처음 듣는 이야기네. 말대로라면 진짜 영약이라 불러야겠어."

서인호 대령은 최 소령의 이야기에 흥미를 표하며 그 내용을 문자에 추가했다.

***

006화 의외로 좋아 (3)

***

나는 황금 고블린을 처치하고 나온 보상을 정리해 보았다.

'우선 1,520코인.'

코인은 분명 어딘가 쓸데가 있을 텐데, 아직 용도를 모르겠다.

현실에 더해진 게임 같은 설정을 생각하면 앞으로 이게 화폐 용도로 사용될 것 같다.

아직 이상 사태가 발생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중급 회복물약 3개.'

[중급 회복 물약 / 소모 아이템]

-섭취하면 외상 및 골절, 장기의 손상을 치료한다.

-피로도와 기력이 대폭 회복된다.

아이템은 터치를 하게 되면 설명을 볼 수 있는데, 중급 회복 물약의 설명을 읽은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왠지 '중급'이라고 하면 하급과 상급 사이에 위치한 어중간한 물건으로 여겨지는데, 설명에 나온 효과는 꽤나 대단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의료기술을 비웃는 듯한 기적의 약품이 아닌가.

"하긴 지금 벌어지는 있는 모든 일이 비현실적인데, 포션 정도야 뭐."

그러고 보니 레벨업을 하면 부상이 회복되던 게 떠오른다.

그건 어느 수준의 회복능력을 보일까?

'부상과 상태이상을 모두 회복한다'는 알림이 뜨던데, 그럼 목숨이 오락가락해도 레벨업만 하면 완치되려나?

그게 맞다면 레벨업은 가장 중요한 회복 시스템이 된다.

'다음으로 확인해볼 건···. 생활 아이템?'

[안전 텐트 / 생활 아이템]

-안전 텐트를 설치하면 직경 5미터 이내에 몬스터가 접근하지 못한다.

-겨울과 여름에도 실내 온도는 20도를 유지하며, 조명 on/off 기능이 있다.

-실내 공간: 3m*2m*2m(가로*세로*높이)

"오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아이템.

무인도에서 실질적인 삶의 질을 높여줄 최고의 물건이다.

더구나 일정 영역 몬스터의 접근을 막아 준다는 점에서 머리를 잘만 굴리면 꽤나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안전 텐트를 건물 출입구에 설치하게 되면 몬스터의 침입이 자동으로 걸러지지 않겠는가.

내가 베이스 캠프로 선택한 컨테이너 역시 같은 방법으로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좋아, 좋아."

만족스러움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음 물건을 살폈다.

'장비 아이템 2종.'

[회복의 반지 / 최고급]

-착용 시 피로를 덜 느끼고 활력을 더해준다.

-하루 2번 중급 회복, 또는 하루 1번 상급 회복을 사용할 수 있다.

[매직 로브 / 최고급]

-하루 2번 중급 방어막을 사용할 수 있다.

-마력+2

회복의 반지는 포션 대용이다.

다만 포션과 달리 매일 사용량이 리셋되는 무료 포션이라 할 수 있겠다.

방어막을 펼칠 수 있는 매직 로브와 함께 생존 능력을 극대화 시켜주는 아이템이다.

나는 기꺼운 마음에 바로 회복의 반지와 매직 로브를 걸쳤다.

회복의 반지는 금가락지 형태고 매직로브는 움직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숏로브 형태의 외투였다.

"왠지 중2병스럽지만···. 무려 방어막을 펼칠 수 있는 장비잖아. 디자인보단 생존 능력이 우선이지."

만화 속 주인공이나 입을 법한 복장이었으나, 패션쇼를 할 것도 아니기에 만족했다.

이제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물건이 남았다.

'스킬!'

[도약 / 중급 스킬북 / 액티브]

-마력을 소비하여 도약력을 향상시킨다.

-마력을 추가 소비하면 도약력을 더욱 높일 수 있다.

-습득제한: 마력 5

[마력탄 / 중급 스킬북 / 액티브]

-마력탄으로 지정된 타겟을 공격한다.

-최대 사정거리 100m.

-습득제한: 마력 10

두 스킬의 등급은 같지만, 익히기 위한 마력 필요량이 달랐다.

도약과 달리 마력탄은 공격형 마법스킬이라 그런 걸까?

나는 스킬을 두고 고민했다.

당장 생존에는 근력과 순발력을 높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도약을 익혀보자."

그래서 마력탄은 잠시 뒤로 미뤄 두고 우선 도약 스킬을 배워서 사용해 보기로 했다.

[도약 스킬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스킬을 사용해 보았다.

-팟!

"우악!"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스킬을 사용하자 내가 보유하고 있던 마력 일부가 깎여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몸은 5미터 가까이 뛰어올랐고, 마력은 7분의 1이 소모되었다.

이 정도 높이면 착지 시에 어느 정도 충격이 와야 하지만 스킬의 영향인지, 가볍게 착지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이구나."

착용 중인 매직 로브에 붙은 마력+2 옵션 덕에 지금 내 마력은 7이다.

마력 1당 도약을 1번 쓸 수 있다는 뜻인데, 너무 적은 횟수 같다.

'이번엔 더 많은 마력을 불어 넣어보자.'

스킬 사용법을 익힌 나는 이번엔 2배의 마력을 소모해 도약을 썼다.

-파앗!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는 주변 풍경.

나는 10미터를 넘게 뛰어올라 주변의 나무들을 발아래 둔 상태가 되었다.

무섭기도 하지만 묘하게 신이 났다.

-탓!

이번에도 부드럽게 착지를 한 나는 결정을 내렸다.

마력에 능력치를 투자하기로.

생각보다 스킬이 마력을 많이 잡아먹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원거리 공격 수단이 있으면 좋으니까."

나는 마력 수치는 10에 맞추고 나머지 능력치 포인트는 근력과 순발력에 투자했다.

[근력: 9(+1) 순발력: 9 마력: 8(+2)]

그리하여 만들어진 능력치는 이렇다.

정 삼각형에 가까운 비율.

지금 나만큼 능력치가 높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마력탄 스킬을 배웠습니다.]

나는 바로 마력탄 스킬을 배웠다.

그리고 근처 나무를 향해 스킬을 사용했더니.

-핏!

푸른 빛이 번쩍할 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빗나간 건가?"

마력은 도약과 소비량이 같았다.

다만 조준이 조금 어려웠다.

그래서 조준을 보조하기 위해 타겟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마력탄을 사용했다.

-팍!

이번엔 명중.

아무래도 마력탄은 익숙해질 때까지 이렇게 사용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구멍이 난 나무에 다가갔다.

그러자 손가락 하나가 다 들어가는 구멍이 생긴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름이 마력탄이긴 한데, 총알 수준의 위력까진 아니다.

날아가는 속도도 무척 빠르기는 하나 희미하게 눈에 보이는 정도고.

"좋네."

예상에 살짝 못 미치지만 그럼에도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 위력이면 머리나 목에 공격을 맞힐 경우 충분히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수준의 위력이니까.

물론, 파워가 더 강했다면 좋겠지만, 예상치 못한 보상으로 이 이상을 바라는 건 도둑심보일지도 모르겠다.

[마법형 스킬은 숙련도가 높아지면 위력이 상승하며, 비슷한 계열의 스킬과 조합해 사용할 경우 강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킬 사용 후 눈앞에 떠오른 추가 메시지가 많은 가능성을 부여했다.

덕분에 약간의 아쉬움도 털어낼 수 있었다.

"후후."

황금 고블린 덕에 처음부터 현질로 남들보다 유리한 고지에서 게임을 시작한 느낌이다.

물론, 현실은 게임이 아니라지만···.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또 걸려주려나?"

나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반쯤 부서진 덫을 고치기 시작했다.

이번에 얻은 과실이 너무도 달콤한 만큼, 계속 덫을 설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응? 아, 이것도 있었지."

그렇게 덫 설치가 끝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을 내려가려는데.

[행운의 탈리스만 / 희귀]

-소유자에게 행운을 더해주는 아이템.

-인벤토리에 보관해 두면 효과가 적용된다.

장비 아이템과 스킬의 임팩트에 밀려 잊고 있던 마지막 보상을 인벤토리에서 발견했다.

그런데 내용이 특이하다.

행운을 더해준다니.

열 칸밖에 되지 않는 인벤토리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흥미로운 아이템 설명과 '희귀'라는 처음 보는 등급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일반, 고급, 최고급이 지금까지 확인된 아이템 등급인데, 희귀면 어느 수준이지? 최고급 다음? 아니면 더 위?"

어쨌든 매우 귀한 것일 테니, 인벤토리 첫 번째 칸에 고이 모셔두기로 했다.

"어? 바로 행운이 오나?"

그렇게 많은 것을 얻은 산행이 끝나고 이제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려는데···.

고개를 돌리자 제법 맛이 좋았던 산다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곳을 발견했다.

레벨업과 아이템으로 마음속 배는 불렀지만, 아직 현실의 식량과 식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과즙이 많은 산다래의 등장은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산다래를 채집하여 인벤토리 보관했다.

[산다래 34개]

중복아이템이 몇 개까지 보관되는지 아직 확인되진 않았지만, 인벤토리 덕에 양손 가볍게 채집을 이어갈 수 있었다.

*

베이스 캠프에 복귀하자 아버지로부터 장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거기엔 아버지가 열심히 수집한 정보로 가득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답장을 했더니, 위와 같은 메시지가 추가로 전해졌다.

[네 엄마 무사히 깨어났어. 그런데 아들이 무인도에 있다고 말해줬더니, 지금 다시 쓰러졌다. 나중에 깨어나면 또 알려 주마.]

나는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괜히 나 때문에 어머니 수명이 줄어드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미안함에 헛웃음을 흘린 나는 아버지가 보내 준 정보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메시지엔 내가 아는 정보도 있지만, 모르는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현대 무기로 몬스터를 죽이면 보상을 안 준다고? 몰랐네.'

나는 그랑 다이어 울프와 황금 고블린의 최초 보상을 차지했다.

당연히 최초 보상 덕에 강해지는 건 좋았지만, 속으론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선 그랑 다이어 울프가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인간 분쇄기라 불리는 몬스터고, 황금 고블린은 차량을 앞지르는 스피드로 인간을 농락하는 몬스터라지만, 총을 쥐면 쉽게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총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제치고, 내가 최초 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제한이 있었다니,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그럼 몬스터는 냉병기로만 잡아야 한다는 거네?'

다들 목숨 간수하기 힘든 상황에서 몬스터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과연 나 말고 레벨 10을 넘긴 사람이 있긴 할까?

"아, 그게. 웨이포인트와 안전구역란 거구나."

그 외에도 영약에 대한 이야기나 협동사냥으로 몬스터를 처치하면 보상을 나눠 갖는 다는 등 여러 정보가 있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웨이포인트와 안전구역에 대한 정보였다.

이유는 드론으로 월광도를 탐색하다가 폐가 마을 위쪽에서 해당 시설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웨이포인트는 아직 쓸모없을지 모르지만, 안전구역은 달라.'

안전구역 안에는 상점이 있다고 한다.

코인으로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상점이.

지역에 따라 판매 물품이 다르긴 하지만, 생존에 도움이 되는 도구와 무기는 물론, 식량을 파는 곳도 있다고 한다.

"무조건 가야 하네."

그 시설이 뭔지 몰랐을 땐 굳이 접근해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용도를 알게 된 지금은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곳이 되었다.

'문제는 그곳을 가려면 오크 여섯 마리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 지역을 돌파하거나, 트롤 같은 거인이 버티고 있는 쪽을 돌파해야 갈 수 있다는 거야.'

강화된 능력치와 새로 얻은 장비, 스킬을 사용하면 충분히 싸워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여러모로 경험과 정보가 부족하니 말이다.

"음···."

나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무사히 안전구역에 도달할 수 있을지.

물론, 무리할 필요는 없지만 궁리해서 손해 보는 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문뜩 좋은 생각이 났다.

'안전 텐트랑 마력탄을 이용하면 쉽게 해결될지도 모르겠는데?'

007화 없는 게 없는 무인도 (1)

***

단 30분.

이상 현상이 지구에 발생하고, 도시가 기능을 잃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예고 없이 나타난 몬스터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생존자들은 건물 속에 숨어 구조를 기다렸다.

"씨발. 정부는 뭐하는 거야."

"뭐하겠어. 안전하게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탁상공론이나 벌이고 있겠지."

대한민국은 군사 강국이다.

특히 육군에 한해서라면 미국과 러시아, 중국 다음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강력하다.

하지만 그런 강대한 육군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전국에서 일시에 발생한 대재앙을 바로 진압하는 건 불가능하고.

무엇보다 육군 대부분이 전방에 집중되어 있는지라 민간인 구조를 위한 부대 전개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타탕! 타타타타!

"어? 총소리?"

"군인이다! 군인!"

"사, 산 건가?"

그리고 어찌어찌 부대가 전개되더라도 문제가 끊이질 않으니···.

몬스터는 죽이고 또 죽여도 다시 등장하고, 수십 수백만의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는 등장하는 몬스터의 자릿수부터 달라서 민간인의 구조가 쉽지 않았다.

"어어? 군인들이 물러가는데?"

"뭐? 아니, 왜!?"

물론, 대량살상 무기를 사용하면 조금은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민간인들이 곳곳에 숨어있는 도시에서 그런 무기를 펑펑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

덕분에 군대의 파괴력은 반감되고, 개인화기에 의존해 몬스터와 줄다리기를 하니, 사태가 해결될 리 없었다.

"한 번에 많은 사람을 구하려고 부대를 분산시키니까 해결이 안 되지. 부대를 집중시켜서 한 지역씩 장악해 나가야 돼."

"사실 사람들을 구조해도 문제야. 이 많은 사람을 어디에 수용하는데?"

"만약 수용할 곳을 찾더라도, 공장이 멈추고 자원 수급도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식량 문제는 금방 닥칠 거야."

그렇다 보니 상황판단이 빠른 사람들은 무작정 구조만 기다릴 게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뭐? 직접 움직이자고?"

"미쳤어?"

당연히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일리 있어."

"방법은 있고?"

일부 공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다.

"인터넷을 보니, 지금 세상에 닥친 이상 현상은 게임 시스템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어. 그럼 우리도 그 방식에 적응해야지."

"설마 괴물들하고 싸우자는 거야?"

"필요하다면."

"미친!"

"지금까지 괴물들이 달려드니까 도망치기만 했지 맞서 싸울 생각은 안 했잖아. 여럿이 힘을 합치면 충분히 승산 있어. 약한 괴물들부터 차근차근 잡아가는 거지."

"너무 극단적이야. 기껏해야, 안전한 장소를 찾아서 움직이자느니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괴물이 존재하는 한 안전은 없어. 안전을 손에 넣고 싶다면, 개죽음을 당하지 않을 정도의 능력이 있어야 해."

"차라리 경찰서의 무기고를 털자고 하지?"

"그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경찰서를 털든, 괴물을 잡고 레벨을 올리든, 결국 외부 활동을 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야."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는 만큼 다양한 생각이 존재했다.

진취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월등히 많지만,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고자 하는 도전자는 계속해서 생겨났다.

"어? 거대 늑대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은데?"

"이런 미친! 도망쳐!"

"어? 오, 오지 마!"

-크아아앙!

"끄아아악! 살려줘! 사, 살려!"

"뭐해! 다 같이 찔러!"

"꾸, 꿈적도 안 하는데?"

물론, 도전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몬스터에겐 정해진 활동 구역이 있지만, 어그로가 끌리면 그 자리를 벗어나 달려들고, 어그로 범위도 넓어서 원치 않는 몬스터와의 전투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랑 다이어 울프 같은 강력한 피지컬의 몬스터가 달라 붙으면 사람들의 도전정신은 순식간에 후회와 절망으로 바뀌었다.

"너 검도 선수였다며! 뭐하는 거야!?"

"병신아! 실전하고 경기랑 같냐!"

"인터넷에 누가 쓴 글 보니까, 몬스터는 게임처럼 싸울 때 일정 패턴이 있대! 잘 보고 분석해봐!"

"뭐라는 거야! 당장 목숨이 간당간당 한데 누가 그런 걸 신경 쓰겠냐!"

괜히 인간 분쇄기란 별명이 붙은 게 아닌 것처럼, 하나의 파티가 다시 그랑 다이어 울프에 의해 전멸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몬스터 사냥.

분명 많은 사람이 도전하고 있지만, 적응이 쉽지 않은 시스템이었다.

그런 면에서 서백호는 여러모로 매우 희귀한 케이스에 속했다.

운과 냉정함, 적절한 전투 센스를 가진 그는 남들과 달리 너무도 손쉬운 성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

-크와아앙!

"이제 하나도 안 무섭다. 똥개야."

나는 달려드는 그랑 다이어 울프의 기세에 움츠러들지 않고, 편하게 검으로 주둥이를 올려쳤다.

-쾅!

그러자 녀석의 목이 훤히 드러나고, 나는 그런 그랑 다이어 울프의 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스킬을 사용했다.

'마력탄.'

-팟!

핏물이 튐과 동시에 그랑 다이어 울프의 목젖에 구멍이 생겼다.

마력탄의 위력은 진짜 총알에 미치지 못할 뿐, 일반적인 칼질보다 훨씬 위협적이었다.

-크륵.

아무래도 마력탄이 목젖에 구멍을 낸 것에 그치지 않고 목뼈에까지 타격을 준 듯 그랑 다이어 울프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목이 뚫려 고통스레 헛숨을 쉬던 녀석이 혀를 길게 내빼며 죽음을 맞이했다.

-파앗!

너무도 쉽게 끝나버린 전투.

그랑 다이어 울프는 이내 빛이 되어 사라지고 보상 메시지가 떴다.

"이제 슬슬 스킬 사용이 익숙해진 느낌이네."

현재 레벨은 13.

황금 고블린을 처치하고 난 후, 레벨 1이 더 올랐다.

레벨업에 따른 능력치 포인트는 순발력에 투자했고, 그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10을 달성했다.

능력치가 전부 기본 수치의 두 배가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내 신체 능력은 어느 운동을 하더라도 올림픽 금메달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수준이 되었다.

서전트 점프는 1.5미터가 가볍게 넘고, 달리기도 100미터 마의 9초를 돌파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근력이 크게 증가해서 그랑 다이어 울프와의 힘 싸움에도 쉽게 밀리지 않으니, 일반적인 인간의 규격을 초월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단순 운동 능력만 그 정도라는 거지.'

높아진 신체 능력에 도약 스킬을 더하게 되면, 영화 속 슈퍼히어로 수준의 모습을 연출할 수도 있다.

도약은 높이 뛰기 용으로만 쓰는 게 아니라 앞으로 뛰쳐나가는 순간에 사용하면 돌격 스킬의 효과를 낼 수도 있다.

비록 마력 소모량이 크다는 단점이 있지만, 전투에선 다양한 옵션이 되어주는 만큼 아주 유용했다.

"이 정도면 연습은 충분하겠지."

당장에라도 안전구역에 쳐들어갈 것처럼 굴어 놓고 그랑 다이어 울프와 놀고 있는 이유는 높아진 신체 능력과 새로 얻은 스킬에 적응하기 위해서다.

성장세가 가파른 만큼 새로이 얻은 능력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린 판단이다.

"일단 마력부터 충전하고."

이제 충분히 조율이 된 것 같으니 안전구역으로 향하려 한다.

하지만 그전에 컨테이너 앞에 쳐놓은 안전 텐트 안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소비된 마력을 충전하기 위함이다.

마력은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차오르는데, 가만히 서 있을 때보다 앉아 있을 때가 충전이 빠르고, 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안전텐트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는 편이 빠르게 충전이 된다.

'충전 끝.'

충전 시간은 마력 1에 10초 정도가 소요된다.

앉아서 쉬면 20초, 가만히 서 있으면 1분의 충전 시간이 소요된다.

[안전 텐트를 해체하시겠습니까? YES/NO]

"예쓰."

잠시 후, 텐트를 해체한 나는 계획을 실행했다.

일단 그랑 다이어 울프 영역을 피해서 폐가 마을에 접근했다.

그리고 오크 영역을 앞에 두고 안전 텐트를 설치했다.

[안전 텐트를 설치합니다. 설치 해제는 10분 후부터 가능합니다.]

참고로 안전 텐트는 전투 중엔 설치가 안 된다.

마음 같아선 더 가까이 가고 싶지만, 오크에게 어그로가 끌린 순간 전투 상태로 인정이 되기 때문에 이곳이 가장 안전하게 텐트를 설치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제 무얼 하냐.

'마력탄.'

오크를 끌고 오면 된다.

나는 마력탄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오크를 공격했다.

-팍!

[오크를 토벌하여 경험치 50을 획득했습니다.]

[오크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9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오크 가죽 1장을 획득했습니다.

시작부터 운이 좋다.

마력탄은 코를 파고 있던 오크의 미간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고, 즉사 판정이 떴다.

-크락!

이왕이면 서로 멀리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나씩 저격으로 죽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녀석들은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한놈이 죽자마자 나머지 놈들이 한 번에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남은 오크의 숫자는 총 다섯.

나는 녀석들이 가까워질 때까지 계속 마력탄을 날렸다.

[오크를 토벌하여 경험치 50을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움직이는 상대를 맞히는 건 쉽지 않았고 다행히 한 마리를 추가로 제거할 수 있었다.

남은 오크들과 나와의 거리는 약 2미터.

거친 숨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가까워졌다.

흉흉한 기세로 달려온 오크 4마리가 돌도끼를 치켜든 그 순간.

"바이."

나는 한 걸음 물러나 안전 텐트의 몬스터 접근 금지 구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오크 4마리 걸음을 멈추고 벙찐 표정을 지었다.

몬스터의 접근을 막는 안전 텐트의 효과 확실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라지?'

이후 벌어진 전투는 졸렬함의 극치였다.

나는 안전 텐트의 안전구역을 들락날락하며 녀석들과 싸웠고, 오크들은 어리버리를 까다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안전 텐트는 몬스터의 공격을 막아주는 대신 나도 몬스터를 공격할 수 없어서 이런 식으로 싸워야 했다.

[비정상적인 전투 방법으로 인해 보상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비정상적인 전투 방법으로 인해 보상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비정상적인 전투 방법으로 인해 보상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비정상적인 전투 방법으로 인해 보상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는 이런 내 졸렬함을 나무라듯 항의를 보내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목적은 달성했다.

내 목적은 안전구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오크들을 치우는 거지, 경험치 벌이가 아니다.

당연히 나도 무협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장풍(마력탄)도 쏘며 멋지게 싸워보고 싶지만, 굳이 익숙하지 않은 다대일 싸움으로 변수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흠흠, 그럼 안전구역에 들어가 볼까?"

나는 당당하게 텅빈 오크 영역을 지나쳐 안전구역으로 다가갔다.

008화 없는 게 없는 무인도 (2)

*

"허어."

안전구역으로 다가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크리스탈, 웨이포인트였다.

유명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속 건축물을 빼닮은 그것은 은은한 푸른빛을 머금고 있어서 태양이 크리스탈을 비추면, 주변을 일렁이는 쪽빛의 바다로 만들었다.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자태.

잘 가공된 거대 보석을 마주한 느낌이다.

나는 무심코 웨이포인트에 다가가 손을 얹었고.

[월광도 웨이포인트가 저장되었습니다.]

[월광도 외에 저장된 웨이포인트가 없어 이동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안내 문구와 함께 웨이포인트에서 빛이 솟구쳤다.

레이저처럼 곧게 뻗어 나간 푸른빛은 하늘을 꿰뚫을 듯 강렬하다.

한번 저장된 웨이포인트는 계속 빛을 내뿜는데, 해당 웨이포인트를 저장하지 않은 사람에겐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방금까지 내게 보이지 않던 것처럼.

"이 빛의 기둥을 이정표 삼으면 어딜 가더라도 길을 잃을 일은 없겠네."

월광도엔 웨이포인트가 이것뿐이다.

아니, 오히려 무인도에 웨이포인트가 있는 게 기적이라 해야 할까?

서울 같은 대도시에도 딸랑 네 군데가 있을 뿐이니 말이다.

'웨이포인트가 있으면 뭐하나. 써먹질 못하는데.'

웨이포인트는 선택한 장소로 공간이동을 시켜주는 기물이다.

하지만 직접 방문하여 활성화 시킨 웨이포인트로만 공간이동을 할 수 있으니, 지금의 내겐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데 문뜩 긍정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월광도를 벗어나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이 섬은 나만 오갈 수 있는 땅이 되는 거 아닌가? 이런 무인도의 웨이포인트까지 활성화 시키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거 아냐."

나만의 비밀 장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탈출에 성공해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헛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인 나는 사람을 홀리는 웨이포인트에서 시선을 뗐다.

'저게 안전구역이란 말이지?'

웨이포인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

중세 유럽 느낌의 건물들이 자리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양식이 중세스럽다는 거지, 낡은 느낌은 없고 건물들이 하나같이 웅장했다.

[안전구역에 입장했습니다. 안전구역은 하루 30분 동안 제한 없이 이용 가능하며, 그 이후 10분당 1코인이 소비됩니다.]

[유료 시설을 이용할 경우 안전구역의 이용비용은 중복으로 청구되지 않습니다.]

[안전구역에선 피로도가 빠르게 해소되며, 부상과 상태이상, 소모된 마력이 빠르게 회복됩니다.]

하루 동안 겨우 30분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야박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뒤이은 추가 기능 설명에 그럼 돈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르르르.

나는 손등을 간질이는 느낌에 그곳을 바라보았고, 오크와 싸우면서 생긴 쓸린 상처가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확한 수준까지 파악되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웬만한 외상은 30분 내로 회복되지 않을까?

앞으로 안전구역이 생존 활동에 필수 요소가 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무인도에 맞지 않게 규모가 큰 것 같은데?'

안전구역도 조금씩 규모가 다르다고 들었다.

안에 있는 시설도 조금씩 차이가 있고 상점에서 파는 물건도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꼭 포함되어 있는 시설 3개가 있다.

그건 바로 이것이다.

[화장실]

[목욕탕]

[호텔]

화장실은 말 그대로 화장실이다.

사용비용은 따로 없으며 안전구역을 이용 중인 사람에겐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변기는 전부 건식이며, 휴지는 각자 해결해야 하고, 세면대도 없다.

똥오줌을 쌀 공간만 제공한단 뜻이다.

'씻고 싶으면 목욕탕을 가라는 거지? 역할 구분 확실하네.'

목욕탕은 유료다.

10분당 5코인 꼴로 이용할 수 있다.

[입장과 동시에 복장이 해제되며, 퇴장 후 깨끗해진 기존 복장으로 자동 착용 됩니다.]

목욕탕=물이다.

목욕탕을 잘만 이용하면 식수가 해결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목욕물은 외부로 반출할 수 없습니다.]

화장실이 건식일 때부터 알아봤는데, 시스템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해진 용도 이상의 혜택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쪼잔하긴.'

그래도 최악의 상황에선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목욕물의 외부 반출이 안 될 뿐이지, 내부에서 먹는 건 상관없다는 뜻 아닌가.

만약 상점에서 물을 안 판다면 이런 식으로 목을 축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호텔은···."

호텔은 욕실과 화장실이 모두 딸린 일반적인 형태의 방을 제공한다고 한다.

다만 호텔은 8시간 동안 머물 수 있는데, 그 비용이 무려 100코인이다.

아무리 봐도 이건 일반인을 위해 만든 시설이 아니다.

코인은 몬스터를 죽여야만 얻을 수 있고, 100코인이면 오크 열댓 마리를 잡아야 얻을 수 있는 금액이니까.

'VIP 서비스란 건가?'

지금 내가 가진 돈이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굳이 불필요한 지출을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내겐 안전 텐트가 있지 않은가.

"기본 시설 3개는 살폈고."

이제 남은 시설 3개가 무엇인지 살필 차례다.

[상점]

[공방]

[신전]

그토록 바라던 상점이 떴다.

내가 안전구역을 방문한 주목적이기도 하며, 판매하는 물품에 따라 생존 난이도가 대폭 낮아질 수도 있다.

때문에 나는 기대를 품고 상점 안에 들어갔다.

내부는 마트처럼 여러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진열된 상품을 본 나는···.

[건축 자재]

[주방용품]

[악기]

"에라이 시팔."

욕설을 내질렀다.

식품의 식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 물 정도는 어디에 끼어 있을지도.'

그래서 이리저리 상품을 살펴봤으나, 애석하게도 물은 보이지 않았다.

'주방 코너에서 물병은 파는데 물이 없네?'

이대로 내 식수는 목욕탕 물이 되는 걸까?

한숨을 내쉰 나는 상품들을 살폈다.

"음···."

그러다가 바닷물을 담수로 만들어줄 증류장치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코너 자재로 아궁이 만들고, 그 위에 주방코너에서 산 냄비를 얹어 바닷물을 끓이면 어찌어찌 식수문제는 해결되겠네.'

조금 쉽게 가나 했는데, 서바이벌의 묘미를 잊지 않는 월광도다.

허무한 표정으로 상점을 벗어난 나는 공방이란 곳에 들렸다.

공방은 사냥과 채집을 통해 얻은 소재를 이용해 장비를 만들어주는 곳이었다.

[오크가죽 갑옷 상의 제작]

-재료: 오크가죽 5장, 실 5묶음

--오크가죽: 오크 사냥으로 수집

--실: 거미형 몬스터 사냥으로 수집, 모풀 채집

이런 식으로.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바로 채집기능이 있다는 거다.

앞으로 주변을 잘 살펴보고 다녀야할 것 같다.

어디에 채집 아이템이 있을지 모르니까.

이로써 안전구역 내의 시설 6곳 중 5곳을 살폈다.

이제 남은 시설은 신전뿐이다.

"으리으리하구만."

지금까지의 건물들이 일반적인 중세 유럽의 양식이라면, 신전은 고대 그리스의 양식을 떠올리게 만드는 건물이었다.

신전에 대한 이야기는 아버지에게도 들은 적이 없어서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내부에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전사님."

"으악!"

그랬더니, 하얀로브 차림의 여성이 반갑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는 게 아니겠는가.

설마 월광도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거라 생각지 못했기에 나는 기겁했다.

"누, 누구세요?"

곧이어 마음을 추스른 나는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정체를 물었다.

"저는 이 신전의 관리자. 윌리아라고 합니다."

"······."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긴 마찬가지.

그녀의 자기소개에도 '얜 뭐지?'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데 그때.

이상현상이 발생했을 당시 떠올랐던 메시지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각지에 웨이포인트가 생성되었습니다.]

[각지에 안전구역이 생성되었습니다.]

[각지에 특수 지형이 생성되었습니다.]

[각지에 특수 자원이 생성되었습니다.]

[각지에 몬스터와 NPC가 생성되었습니다.]

그중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NPC란 단어가 거론되었던 게 기억났다.

"당신이 NPC군요?"

이게 가상현실 게임이라면 NPC에게 '너 NPC지?'고 묻는 건 비매너일지 몰라도 여긴 현실이다.

쓸데없는 배려는 집어치웠다.

나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그녀는 그저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것이 신에게 사명을 받고 이 땅에 내려온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면. 맞습니다."

NPC라···.

윌리아는 아무리 봐도 같은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게 상식을 벗어난 초월적인 것이었지만, NPC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마주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존재라서 그런지, 이 상황이 더욱 기이하게 다가왔다.

"이곳에서 뭐 하시는 거죠?"

"저는 전사 여러분을 돕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어떤 도움이요?"

"중증 부상자를 치료하거나 전투에 도움이 될 축복을 걸어드리고 있죠. 그리고 때로는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기도 합니다."

선량한 미소와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그 모습에서 나는 은은한 분노와 적개심을 느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세상에 닥친 이변에 이들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진정하시지요."

그런데 내게서 좋지 않은 감정이 읽은 걸까?

윌리아가 나를 향해 손을 뻗어왔고, 곧 따뜻한 기운이 전신을 감싸며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감정까지 조절한다고?"

내가 경악하자 그녀는 오해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저 긴장감을 풀어드린 것뿐입니다."

윌리아는 연신 사람 좋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많이 혼란스러울 겁니다.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고요."

아까까지만 해도 그녀의 미소에 인중 펀치로 답을 대신하고 싶었지만···.

마음이 진정되고 나니 화풀이를 하는 것보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단서를 얻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단서 말입니까?"

"네."

내 물음에 그녀는 외모에 어울리는 상큼한 말투로 답했다.

"저와의 친밀도가 낮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못 드릴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뭔 쌉소리란 말인가?

친밀도?

설마 게임처럼 친밀도 작업이 필요한 존재라고?

"다만 지금 단계에서 드릴 수 있는 조언은 한 가지 있죠."

"뭔데요?"

황당해하는 내 표정에 무안해졌는지 그녀는 돌연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강해지세요."

"네?"

"이대로 강해지다 보면 자연히 원하는 답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윌리아는 대뜸 내게 팔짱을 껴왔다.

산뜻한 향기와 함께 인간과 다름없는 온기가 느껴졌다.

뭐지? 나 꼬시나?

외모는 이상형에 가깝긴 한데···.

"현재 서백호님은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순간 NPC도 인간과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란 상상까지 갔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 말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나단 뜻입니까?"

"뜻대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윌리아가 인간인지 아닌지를 떠나 사람 다루는 솜씨는 매우 능숙한 것 같다.

적개심이 어느새 무뎌져 있었으니 말이다.

"뭐···. 이 무인도에서 말동무가 생겨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죠."

톰행크스에게 윌슨이 있었다면 내겐 윌리아가 있는 셈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신전의 기능을 물었다.

그 결과 상급 회복 물약 수준의 '힐' 스킬을 30코인이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받을 수 있고, 모든 능력치가 20% 상승하는 '블레스' 스킬을 20코인에 받을 수 있단 걸 알게 되었다.

블레스 스킬은 1시간 동안 유지가 되며 하루 3회까지 받을 수 있다.

"나쁘지 않네요."

"그렇죠?"

"그런데 아까 신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셨는데, 그건 퀘스트를 준다는 의미입니까?"

"퀘스트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녀가 말을 얼버무리면 그 부분은 친밀도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신전의 기능을 알게 된 나는 마지막으로 친밀도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친밀도가 올라가면 뭐가 달라지나요?"

"그럼요. 많은 게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요?"

"많은 것을 함께 할 수 있죠."

"???!!!!"

의문을 표하던 내 머릿속에 번개가 친다.

그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동료로 절 고용할 수 있단 의미입니다."

009화 없는 게 없는 무인도 (3)

한국에 위치한 NPC라 그럴까?

윌리아는 동양인의 외모를 갖고 있다.

참한 외모에 그렇지 못한 강력한 몸매.

남자라면 모두가 반할 수밖에 없는 부류의 미인이다.

그런 여성이 오해할 수밖에 없는 대사를 내뱉으니,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밖에···.

뒤늦게 그녀가 던진 공이 변화구란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지만, 애써 태연한 척 윌리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아, 동료요? 좋은 시스템이네요."

"뭔가 아쉬워 보이시는데요?"

"제가요? 아닌데? 무슨 말씀이시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일부러 오해할 수밖에 없는 뉘앙스를 풍긴 게 분명했다.

아까 스킨쉽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주 요망한 NPC다.

NPC라고 해서 게임 속 인공지능처럼 정해진 일만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같은 지성과 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사람 중엔 NPC를 괴롭히거나 해코지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경우 어떻게 대응하죠?"

딱히 그녀를 해코지하겠다는 마음으로 물은 게 아니다.

나도 윌리아란 존재를 처음 봤을 때 거부감이 들었다.

분명 사람 중엔 NPC들을 재앙을 일으킨 원흉의 끄나풀 정도로 여기고 공격하는 경우도 있을 거다.

이번 일로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저희는 기본적으로 시스템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 없이는 손가락 하나 건드릴 수 없죠."

"그렇군요."

자신만만한 태도.

나는 시스템의 보호란 게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궁금해서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쿡 찔렀다.

방어막 같은 게 생겨서 접근을 막는 거려나?

-푹.

그런데 아무런 방해 없이 손가락이 부드러운 살에 파묻혔다.

"······? 손댈 수 있는데요?"

이런 내 돌발행동에도 그녀는 친절함을 잃지 않고 말했다.

"제가 서백호님에게 흥미가 있거든요. 그래서 막지 않은 겁니다."

마치 유혹하는 듯한 모습에 기겁한 나는 손가락을 뗐고, 그런 내 눈앞에 의외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NPC 윌리아의 호감도 20% 상승했습니다.]

"이건?"

뺨을 찔렀더니, 호감도가 올랐다?

영문 모를 상황에 나는 윌리아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예요."

지나치게 친절하다.

이 섬에 인간이 나 하나밖에 없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순조롭게 레벨업 중인 사람이라서?

아무튼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호감도라는 건 NPC의 재량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동료로 영입하기 위해선 호감도가 80을 넘어야 합니다."

"호감도를 높이는 방법은요?"

"보통 사람들처럼 차근차근 친분을 쌓아가거나, 제가 하는 부탁을 들어주시면 됩니다."

부탁은 퀘스트를 의미할 것이다.

내겐 기준이 모호한 친분 쌓기보다 퀘스트가 공략하기 편해 보였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 저에게 할 부탁은 없습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레벨을 20까지 올리셔야 부탁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레벨이 13이니, 7은 더 올려야 한다.

머쓱해진 나는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이 신전에서 물을 구할 수는 없나요?"

"애석하지만 없습니다."

"엥? 윌리아 씨는 물 안 마셔요?"

"물이나 음식 등을 먹을 수는 있지만, 굳이 먹지 않아도 활동에 지장은 없습니다."

"윌리아 씨는 레벨이 몇입니까?"

"정해진 레벨은 없습니다. 하지만 서백호님의 동료가 된다면 자연히 제 레벨도 서백호님과 같아질 겁니다."

"보유 스킬은 힐과 블레스 두 개뿐입니까?"

"네. 하지만 조건에 맞는 스킬은 추가로 습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러는 것처럼요."

"신관 스킬 중에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부활은 없나요?"

"없습니다."

일방적인 질문과 답.

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질문을 마구 던졌고, 그녀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답을 주었다.

"안전구역의 규모는 조금씩 차이가 있던데, 이건 단순히 랜덤입니까? 아니면 뭔가 이유가 있는 겁니까?"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런 오지에 신전과 윌리아 씨가 배치된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신전이 기리는 신은 누구입니까?"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질문이 무거워졌고, 결국 호감도 부족으로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질문 타임을 끝낼 때가 온 것이다.

"귀찮을 텐데, 친절하게 답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입만 움직이는 건데 어려울 건 없죠."

새삼 호감도 시스템이 참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NPC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하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스윽 신전 내부를 살펴본 나는, 미련 없이 윌리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용건은 끝났다.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때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시려고요?"

"네, 할 일이 많으니까요."

상점에서 식료품을 팔았다면 조금은 쉬웠을 텐데, 식수든 식량이든 뭐든 자급자족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럼 해가 떠 있는 동안 일을 처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윌리아란 NPC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미인이지만, 그 미모가 배를 채워주는 것은 아니다.

"아쉽네요. 대화 상대가 생겨 기뻤는데···."

그러지 마라.

그럼 나 또 오해한다.

"자주 오겠습니다. 좋든 싫든 저도 대화 상대가 당신뿐이니까요."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서백호님의 재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신전을 나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윌리아를 마주한 순간 들었던 적개심도 어느새 사라지고, 묘하게 발걸음이 무거운 게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다.

마치 뭐에 홀린 느낌이다.

"NPC들이 모두 저런 느낌인가?"

NPC가 모두 윌리아 같다면 사람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것 같다.

하나는 적개심에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외모에 빠져서 허우적대거나···.

아무리 봐도 저건 사람을 홀리는 요물이다.

*

안전구역을 벗어나자 오크들이 다시 리젠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등 뒤에 안전구역을 낀 상태로 이전에 사용했던 '졸렬 전투'를 재현했고.

[비정상적인 전투 방법으로 인해 보상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비정상적인 전투 방법으로 인해 보상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비정상적인 전투 방법으로 인해 보상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무사히 안전 텐트를 수거한 뒤 베이스 캠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뉘엿뉘엿 저물어가 가는 태양에 나는 바삐 움직여 굴과 섭을 캐오고, 상점에서 사 온 내화벽돌로 간이 아궁이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땔감을 구해오니, 어느새 완전히 밤이 되어 있었다.

"안전 텐트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무인도의 밤은 어둠 그 자체다.

다행인 건 안전 텐트에 조명 기능이 딸려 있어서 텐트 문을 열어 놓으니, 충분히 시야 확보가 된다는 거다.

나는 상점 주방코너에서 구입한 은박지에 섭과 굴을 싸서 타오르는 땔감 속에 던져 놓고, 냄비에 바닷물을 받아와 끓이기 시작했다.

바닷물을 끓여서 냄비 뚜껑에 맺힌 물방울은 바로 먹어도 되는 담수니, 잘 걷어서 모았다.

그 결과 30분이 지나지 않아 깨끗한 물 한 컵과 잘 구워진 조개 구이를 획득할 수 있었다.

"후우, 후우. 앗뜨."

아주 배부른 정도는 아니어도 충분히 한 끼가 되는 양이었다.

조개구이를 해치우고 단숨에 물 한 잔을 들이킨 나는 텐트 앞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도시에선 보이지 않던 별들이 너무 잘 보인다.

상황에 맞지 않게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감상을 내뱉었다.

"완전 감성 캠핑이네. 빌어먹을."

그리고 디저트로 한 움큼 따온 산다래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먹으며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한차례 어머니와 통화를 마쳤지만, 그땐 한창 일하고 있던 때라서 여유롭게 통화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 아들!]

어머니는 반갑게 내 전화를 받으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곧이어 엄청나게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하셨고, 머지않아 내 걱정에 울먹이셨다.

그때, 아버지가 옆에서 안 그래도 힘든 애 힘 빠지게 하지 말라는 말이 들렸다.

어머니도 아차 싶으셨는지, 결국 애써 웃으며 힘내라고 나를 응원하셨다.

[조심 또 조심하고. 괴물들 근처로는 가지도 마.]

"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야말로 몸조리 잘하시고요."

나는 차마 어머니에게 강해졌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몬스터와 싸우며 레벨을 올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면 경기를 일으킬 테니 말이다.

어머니와의 통화가 끝나고 이번엔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거긴 정말 괜찮은 거예요? 인터넷 보니까 다들 난리도 아니던데."

[육군, 공군, 해군 사령부가 모여 있는 곳이 계룡대 아니냐. 고난에 빠진 국민들에겐 미안하지만, 이곳의 안보태세는 청와대 못지않아서 아주 안전해.]

부모님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는 게 지금의 상황에선 축복이나 다름없다.

적어도 나는 내 신변만 걱정하면 되는 거니 말이다.

"그런데 군인들이 명령에 잘 따르긴 해요? 가족들이 위험에 빠져 있는 상황에선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텐데."

[아무래도 그렇지. 그래서 탈영병이 많긴 한데, 얌전히 지시에 따르는 장병이 더 많아. 전시나 다름없는 지금 상황에서 탈영해봤자 그 끝은 좋지 않을 테니까.]

"다들 불쌍하네요."

[불쌍하지.]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다녀오는 군대.

하지만 지금 복무를 하고 있는 남성들은 완전히 코가 꿰이고 말았다.

어쩌면 무인도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 빼면, 내 상황이 훨씬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신전? 거기에 신전이 있다고?]

이후 우린 통화로 그사이 손에 넣은 정보를 교환했다.

그러다가 신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버지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단순히 아는 척을 하는 게 아니라 놀라신 느낌이랄까?

[젠장. 하필이면···.]

"왜 그러세요?"

나는 이유를 물었다.

그에 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신전이 10개 정도 목격되었어. 그런데, 문제는···.]

"문제는요?"

[그 신전 주변엔 꼭 사람을 잡아가는 위험한 던전이 존재한다는 거야.]

"······. 네?"

[너도 게임을 해봤을 테니, 던전이 뭔지 알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나는 말을 잃었다.

010화 특별한 무인도 (1)

'신전이 있는 곳엔 던전이 있다?'

드론으로 섬을 정찰할 때 던전 같은 걸 본 기억이 없다.

혹시 드론으로 탐색하지 못한 구역에 숨겨져 있는 걸까?

그렇다면 크게 신경 쓸 것 없다.

적어도 섬의 전면부라 할 수 있는 선착장 라인은 모두 탐색했고, 수풀이 우거져서 탐색하지 못한 곳은 모두 섬의 후면부에 위치해 있으니까.

'하지만 만약 던전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고, 이후 내 활동 구역과 겹친다면···.'

아버지는 던전을 '사람을 잡아가는 위험한 던전'이라 표현하셨다.

즉, 나도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밖으로 나와 사람을 잡아가는 건가요?"

[그건 아니고, 특정 지역에 들어서면 온갖 괴물이 득실대는 던전에 강제로 보내지는 방식이야. 마치 공간이동처럼.]

악랄하다.

이건 함정이나 다름없는 시스템이다.

아버지는 우려 섞인 말투로 설명을 이어갔다.

[던전은 일부 생존자들에 의해 존재가 알려졌어. 하지만 문제는 생환율이 처참하단 거야. 부산에선 53사단의 보병대대 일부가 던전에 빨려 들어갔는데, 총기로 무장하고 있었음에도 실종자 230명 중 겨우 4명만 복귀했어.]

"······."

아버지는 경고를 위해 겁을 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꽤나 효과적인 작전이라 할 수 있다.

던전이라는 단어가 무섭게 들리기 시작했으니까.

'엉뚱한 곳 갔다가 던전으로 전송되면 안 되니, 다녔던 길로만 움직여야겠어.'

섬은 넓어졌지만, 던전의 위협으로 인해 활동영역은 대폭 줄어들었다.

[당연히 조심해야겠지만, 그래도 혹시 던전에 빠지면 괜히 이리저리 움직이지 말고 안전한 곳을 찾아 숨어 있어. 그나마 이게 생존율이 높은 거 같으니까.]

그리고 아버지는 겁만 주는 게 아니라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를 대비한 행동 요령도 알려 주셨다.

"무슨 뜻이에요?"

[던전엔 '시간제한'이라는 게 있다더구나.]

"그 시간만 버티면 탈출할 수 있단 건가요?"

[그래. 아니면 던전의 출구를 찾아야 하는데, 괜히 출구를 찾다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도 있잖아. 차라리 안전한 장소를 발견하면 그곳에서 버티고 있는 게 나아.]

"음···."

잠깐.

그 말은 안전텐트를 갖고 있을 경우, 생존이 수월하단 의미 아닌가?

덕분에 아주 약간이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당연히 그 약간의 호기심을 위해 목숨을 도박하듯 걸 생각은 전혀 없지만.

[걱정이구나. 하필이면 왜 무인도에 신전까지 있어서···.]

나는 아버지의 깊은 한숨에 멈칫했다.

항상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목소리에 깊은 슬픔과 자조가 배어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나를 구해주지 못하는 거라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던전이란 위협이 등장하면서 평정심을 잃은 모양새다.

"저, 아버지···."

그에 미안함을 느낀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실은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그래, 뭐냐?]

"아버지가 제게 괴물들과 싸우지 말고 마주치더라도 도망 다니라 하셨잖아요."

[그랬지.]

결국, 내 상황을 밝히기로 했다.

지금 레벨이 13이고.

모든 능력치가 보통 사람의 2배인 상태이며.

안전텐트와 회복의 반지, 포션 등 생존을 위한 아이템을 보유 한데다가.

제대로 된 무기와 스킬을 손에 넣어서 오크나 그랑 다이어 울프 정돈 아무렇지 않게 썰고 다니고 있다고.

[······.]

"······."

이야기가 끝나자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내가 지금까지 상황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안전한 곳에 잘 숨어 있다고 말했다.

굳이 괴물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봤자 걱정만 커질 테니까.

하지만 던전의 등장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오히려 지금은 내 상황을 알려 주는 편이 조금이나마 안심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실을 밝힌 거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황당함을 담아 되물어 오셨다.

[진짜?]

"네."

[으으음···.]

뭔가 굉장히 많은 감정이 담긴 감상.

이어서 아버진 헛웃음을 삼키며 입을 뗐다.

[실은 국방부와 각 군에서 특수부대원들로 레벨을 올려 보기로 했거든. 강화병사 프로젝트라나 뭐라나···.]

군대에서 생각할 법한 계획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시나 싶어서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런데 계획을 짰으면 실용성을 파악해야 하잖아. 그래서 레벨을 올린 사람들을 찾아봤지. 가족들에게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주겠다는 미끼로. 그렇게 모은 사람 중 가장 높은 레벨이 몇이었을 것 같냐?]

뜬금없이 퀴즈가 이어졌다.

나는 대충 이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은 숫자를 댔다.

"10정도요?"

나도 내가 비정상적인 성장을 했다는 것 정돈 안다.

그래서 나만큼 높긴 힘들 거라 생각해서 10을 불렀다.

[레벨 5였어. 그것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유명 격투기 선수가. 넌 그 사람보다 3배에 달하는 레벨을 올린 거야.]

"그래요?"

[레벨 1에서 2가 되려면 경험치 100이 필요해.]

"경험치 100이면 그랑 다이어 울프 1마리 또는 오크 2마리네요."

역시 초반이라 그런지 필요 경험치가 낮다.

몬스터 1마리 내지, 2마리를 잡으면 레벨업이니까.

[레벨 1이 그랑 다이어 울프나 오크에게 덤비면 그냥 바로 황천길이지! 보통은 경험치 5의 슬라임이나 경험치 10의 고블린을 잡아서 경험치를 쌓기 때문에 그렇게 바로 레벨을 올리지 못해.]

경험치 5짜리 몬스터면 20마리, 10짜리면 10마리를 잡아야 최초 레벨업을 한다는 소리다.

그렇게 따지니 레벨업이 쉬운 느낌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레벨을 올려서 능력치를 높이고 조금씩 전투에 익숙해지면, 경험치 20의 코볼트, 경험치 30의 놀을 잡고, 경험치 50인 오크에 도전하는 게 일반적인 루트라 판단하고 있어.]

"전 처음 본 몬스터가 그랑 다이어 울프고 그 다음으로 본 게 오크라서···."

슬라임과 고블린은 인터넷을 통해 많이 접했다.

하지만 그 몬스터들이 오크나 그랑 다이어 울프보다 약하긴 해도 이렇게까지 격차가 클 줄은 몰랐다.

'하긴,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랑 다이어 울프를 인간 분쇄기라 부르는 건가?'

나는 지금까지 스스로 운이 굉장히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뭐가 뭔지 모를 상황에서 그랑 다이어 울프를 마주하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에겐 재앙이고, 골로 가는 게 당연한 상황일 테니까.

아버지 말에 의하면 내가 살아남아 이렇게 성장한 것 자체가 기적이란 의미였다.

[새삼 네가 멀쩡히 살아있어서 다행이고, 그만큼 성장했다는 게 놀랍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 대단하네.]

화를 내실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의외로 쓴소리 없이 순순히 감탄하셨다.

다만 목소리엔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이 깃들어 있어서 많이 놀란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네가 무얼 가지고 있다고 했지?]

나는 아버지의 걱정을 덜어 드리기 위해 내 상황을 상세하게 알려 드렸다.

이야기를 다 들으니, 커졌던 걱정이 조금이나 줄었을까?

아버지가 작게 안도하는 게 느껴졌다.

[안전텐트가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물건이구나.]

특히 몬스터의 접근 자체를 막아 주는 안전텐트의 존재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렇다고 너무 스스로를 맹신하진 말고. 무리하다가 골로 가는 수 있다는 거 명심해.]

"네, 알겠습니다."

나는 신중한 성격이다.

어쩌다 보니 이번엔 여러모로 모험을 한 듯한 모양새가 되었으나, 그 안에도 분명 안전을 도모하는 시스템을 하나둘 정돈 깔아뒀다.

때문에 아버지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듣지 않았다.

"이왕이면 어머니에겐 던전이나 레벨업 등의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가뜩이나 몸도 안 좋으신데, 걱정하실 테니까요."

[그래야지.]

우린 이후로도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각자 바쁘게 사느라 가족들끼리 터놓고 대화할 기회가 없었는데, 재앙이 닥치고 나서야 이리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다니, 상황이 참 아이러니했다.

[헬기는 안면 있는 사단장님들께 부탁해서 알아보고 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무리하지 마세요."

어쩌면 내 레벨이나 스킬 등의 정보를 상부에 제공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편이 쉬울지도 모른다.

분명 아버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복귀 후 이리저리 이용 당하는 신세가 된다.

차마 이 계획을 꺼내 들 수 없는지, 아버지는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구출하고자 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응원했다.

"쉬세요."

[그래, 고생 많았다. 항상 조심하고.]

"하하, 알겠습니다."

그렇게 장장 1시간에 걸친 통화가 끝이 났다.

"힘든 하루였다."

날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수 있을까?

오늘 하루가 마치 한 달 같았다.

나는 늘어지라 하품을 하며 안전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하암···."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노곤함이 몰려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다.

*

나는 제법 편하게 쉬었다.

남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생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공격 걱정 없이 안전텐트에서 꿀잠을 즐겼고, 소변이 마려워서 눈을 떠 보니 어느덧 태양은 중천에 떠 있었다.

그렇게 생존 2일차가 밝았다.

"아, 시팔···. 무슨 플래그 회수도 아니고."

원래라면 오늘의 일과도 어제와 다르지 않아야 정상이다.

식사 거리를 채집하여 먹고.

근처에서 그랑 다이어 울프나 잡으면서 경험치를 벌고.

시간 되면 안전구역 가서 윌리아와 대화 좀 나누고.

"재수도 없지."

구조가 올 때까지 최대한 안전에 유의하며 일과를 반복하면 되는 건데···.

또 다시 변수가 발생하고 말았다.

-고고고고.

사방이 회색인 공간.

누가 봐도 인위적으로 형성된 동굴.

그 한복판에 선 나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던전에 있다.

-띵!

[몽마의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등급: 일반

-시간제한: 5시간

-클리어 조건: 제한 시간 이내 보스 토벌

원해서 들어온 게 아니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이 사달이 벌어지고 말았다.

정말 재수도 없지.

011화 특별한 무인도 (2)

'아버지가 어제 그렇게 신신당부하셨는데···. 지금 상황 보시면 까무러치시겠네.'

그나마 다행인 건 주변에 몬스터가 없다는 거다.

던전의 덫에 걸렸음을 인지한 순간, 바로 매직로브의 내장 스킬인 '중급 방어막'을 펼쳐서 몬스터의 공격을 대비하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만큼 얼른 안전 텐트를 꺼내 들었다.

'설마, 던전 안에서는 설치가 안 되는 거 아니지?'

안전 텐트가 설치되냐 안 되냐에 따라 생존능력이 크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설치 버튼을 눌렀고.

[안전 텐트가 설치되었습니다.]

[설치된 안전 텐트는 10분간 해체할 수 없습니다.]

무사히 설치되었음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혼란스런 머릿속을 정리하잔 생각에 일단 텐트 안에 기어들어가 대자로 누웠다.

"하하···."

고요한 텐트 속, 가만히 누워서 텐트의 박음질 상태를 살피던 나는 돌연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던전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분 전.

나는 운 좋게 마력탄으로 잡은 꿩을 어떻게 요리해 먹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솔잎을 넣어 쪄먹어도 좋고, 단순하게 구워 먹어도 좋고.'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해결해 주겠다는 듯, 갑자기 멧돼지가 나타나 내가 사냥한 꿩을 물고 산속으로 도망가 버렸다.

그에 단단히 빡친 나는 녀석의 뒤를 따랐고, 끝내 마력탄을 멧돼지 뒷다리에 맞히면서 승기를 잡았다.

그렇게 아침밥이 꿩고기에서 멧돼지 고기로 업그레이드되기 직전.

어디서 나타난 건지 새끼 멧돼지 한 마리가 내게 몸통 박치기를 가해왔다.

아무래도 내가 죽이려던 개체의 새끼 같았다.

보통 사람이면 어미를 살리겠다는 새끼의 발악에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하지만···.

'성체보다 새끼가 부드럽고 맛있겠지?'

내겐 고기 1인분 추가의 상황일 뿐이다.

단백질의 대량 수확을 기뻐하며 새끼멧돼지를 제압하려던 그때.

나는 보았다.

새끼멧돼지 너머에 위치한 산속의 우물을.

'어? 여기 우물이 있었나?'

[몽마의 던전을 발견하였습니다.]

[최초 발견 보상으로 하루 동안 던전 내에서 얻은 경험치와 아이템 습득량이 2배 증가합니다.]

[몽마의 던전으로 전송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이어진 거다.

짧은 회상을 끝낸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멧돼지를 쫓던 길이 황금 고블린을 잡으러 갔던 길이라 너무 방심했다.

새끼 멧돼지의 박치기에 정신이 팔려 무심코 원래의 길을 살짝 이탈했고, 고작 그 몇 걸음 차이로 던전에 빨려 들어왔다.

아무래도 던전의 경계 끝에 딱 걸린 모양이다.

던전의 입구로 보이는 우물도 원래 다니던 길에선 보이지 않는 사각에 위치해 있었고.

"너 행운을 가져다주는 거 아니었냐? 등급이 높으면 그만한 값을 해야지."

나는 인벤토리 창 첫 번째 칸을 차지하고 있는 '행운의 탈리스만'을 보며 불만을 토해냈다.

[행운의 탈리스만 / 희귀]

-소유자에게 행운을 더해주는 아이템.

-인벤토리에 보관해 두면 효과가 적용된다.

황금 고블린을 잡고 얻은 보물이건만 어째 성능이 시원치 않은 것 같다.

아니면 이 던전에 들어오는 편이 행운이라는 걸까?

"몽마의 던전이라."

그냥 텐트 안에서 제한시간이 끝날 때까지 버티면 문제없이 탈출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최초 발견 보상으로 경험치 습득량과 아이템 습득량이 두 배 증가한다는 내용이 눈에 밟혔다.

'일단 던전을 살펴볼까? 안전 텐트 주변 정돈 조사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안전 텐트는 직경 5미터의 몬스터의 접근을 막는 보호구역이 있다.

텐트 밖으로 나가더라도 일정 공간은 사용자를 지켜준다는 뜻이다.

그럼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되는 거니 조사 정돈해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가보자.'

그래서 나는 느릿느릿 텐트를 나섰다.

"어?"

그런데 텐트 밖의 상황이 이전과 달랐다.

고요하기만 했던 공간에 낯선 존재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몽마의 던전이란 거 보고 혹시나 싶었는데···.'

마치 나를 유혹하듯 나신이나 다름없는 육감적인 몸매의 여성이 손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RPG를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종류의 몬스터, 서큐버스였다.

겉모습은 인간과 다름없는 모습이지만, 등 뒤로 작은 박쥐 날개와 꼬리를 달고 있어서 약간의 이질감이 들었다.

물론, 그마저 색기로 승화시키는 게 눈앞의 존재였지만 말이다.

"저걸 유혹이라고 하는 건가?"

그런데 잘난 외형과 유혹하는 듯한 몸짓을 빼면 별것 없었다.

보기엔 좋지만, 이런 정체 모를 것에 발정하는 인간이 있긴 할까 싶은 느낌.

눈앞에서 열심히 춤도 추고 애교도 피우며 안전 텐트의 구역 밖으로 나오라고 유혹하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뜩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달았다.

"혹시 안전 텐트 안에 있어서 서큐버스의 유혹에 안 넘어가는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론.

그래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텐트의 경계 앞에 서고 상체를 채찍처럼 휘둘러서 머리를 잠깐 보호구역 밖으로 내보냈다 들어오게 하는 거다.

그렇게 나는 괴상한 자세로 실험을 시작했고.

-우흉~!

-쿠쿵!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기분을 느꼈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혈관의 피가 빠르게 돈다.

더불어 어서 저 여인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텐트 안에서 가만히 지켜본 그녀의 모습이 모노톤의 흑백 영상이었다면, 지금 보이는 모습은 컬러풀한 고해상도의 3D 영상이었다.

심지어 비음 가득한 목소리는 싸구려 PC방 스피커에서 웅장한 서라운드 사운드의 홈시어터로 변해 있었다.

"헉헉!"

상체의 반동에 의해 머리가 잠깐 구역 밖으로 나갔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무섭네. 서큐버스.'

저건 지금까지 상대한 몬스터와 전혀 다른 종류의 몬스터다.

그저 몸만 힘든 다이어 울프나 오크와 달리 서큐버스 앞에선 맨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래선 졸렬 전투도 불가능하다.

텐트의 보호구역 내에선 적을 공격할 수 없으니, 공격할 때는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이건 나가는 순간 끝이다.

바로 붙들려서 사망 엔딩.

"그냥 텐트 안에서 강제 퇴장될 때까지 존버해야 하나."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유혹의 댄스를 멈추지 않는 녀석에게 그냥 등을 돌려 버렸다.

나는 고민했다.

저 녀석의 정신 공격만 어찌어찌 막으면 서큐버스의 전투력은 높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엔 돈이 들지 않고 남는 게 시간이기 때문에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그때.

"응?"

눈알을 굴려 던전 내부를 살피던 내게 무언가 포착되었다.

그게 뭔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며 자세히 살폈더니···.

"상자?"

벽을 판 공간에 낡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던전에 상자라니···.

절로 흥미가 샘솟는 소재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 가져오고 싶지만, 문제는 서큐버스다.

녀석을 뚫고 상자에 닿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젠장, 처음 텐트 칠 때 주변을 잘 살펴보고 치는 거였는데."

쉽게 손에 넣을 수도 있던 것을 급하게 텐트를 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조급함은 시야를 좁게 만든다는 교훈을 얻게 된 순간이다.

'잠깐···. 시야를 좁게 한다?'

그렇게 자신의 안일함을 아쉬워하고 있을 때.

나는 문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서큐버스의 유혹이 시각 효과에 의한 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던전 바닥의 먼지와 흙을 모아 움켜쥐고 서큐버스 쪽을 향해 뿌렸다.

그러자 먼지에 의해 서큐버스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그 순간 나는 다시 반동을 이용한 머리 내밀기를 시도했다.

"오?"

먼지에 의해 서큐버스의 모습이 흐릿하게 가려지자 이전처럼 파괴적인 효과는 없었다.

이로써 서큐버스는 제대로 바라보지만 않으면 유혹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슨 메두사도 아니고.

"이러면 여러 가능성이 열리지."

내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먼지 가루를 활용해 서큐버스를 공격해 보는 거고, 다른 하나는 상자를 챙겨 오는 거다.

'상자를 가져오는 동안 서큐버스가 물리 공격을 해오지 않는단 보장이 없지. 어차피 녀석을 제거해야 마음이 편해져.'

결국, 서큐버스를 공격하기로 했다.

-쓱! 쓱! 쓱!

나는 열심히 바닥을 쓸며 먼지가 잘 날리는 흙을 모았다.

그래서 그걸 인벤토리에 넣어 봤고, 문제없이 저장되는 것을 확인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허공에 흙먼지를 뿌리며 안전 텐트를 벗어났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고개 숙이고 튀는 거야.'

전투 방식은 심플하다.

굳이 검을 휘둘러서 먼지를 이리저리 날릴 필요 없이, 마력탄을 모조리 쏟아붓기로 했다.

만약 마력탄을 전부 쓰고도 죽이지 못하면 안전 텐트로 돌아와 마력을 채우고 다시 나가서 마력탄을 쏠 예정이다.

-투투투투툭!

그런데 그렇게 복잡한 방법은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10발의 마력탄을 맞은 서큐버스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급 서큐버스를 토벌하여 경험치 400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서큐버스를 최초 토벌하여 경험치 2,000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라 '부상'과 '상태 이상'이 모두 회복됩니다.]

실컷 고민하고 여러 걱정을 한 것치곤 의외로 싱겁게 끝나 버렸다.

물론, 이 싸움을 가능케 하기 위한 궁리와 마력을 한 번에 소진한 전투 방식 덕이긴 하지만, 상상치도 못한 공격을 해올지도 모른다고 걱정했기에 맥이 탁 풀렸다.

[하급 서큐버스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62코인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서큐버스의 머리카락 2묶음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서큐버스 최초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스킬북 '매력'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서큐버스의 머리카락 / 고급 소재]

-하급 서큐버스의 마력이 깃든 머리카락으로 로브나 망토 제작에 사용할 수 있다.

[매력 / 중급 스킬북 / 패시브]

-이성이 나에게 느끼는 매력이 증가한다.

던전의 최초 발견자 보상과 서큐버스의 최초 토벌 보상이 더해진 덕일까?

황금 고블린이 아니라 일반 몬스터를 잡고 스킬북을 먹은 건 처음이다.

그런데 스킬이 매력이라니, 서큐버스 답다.

[매력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나는 바로 스킬을 익혔다.

전투에 도움은 되지 않지만, 인생엔 도움이 될 테니까.

"휴우···."

무사히 서큐버스를 토벌한 덕분에 안전 텐트가 쳐져 있는 동굴엔 다시 적막이 감돈다.

그리고 내 시선은 자연히 정체불명의 상자로 향했다.

'미믹은 아니겠지?'

나는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돌 하나를 주워 상자에 던졌다.

-퉁퉁.

묵직한 나무 울림 외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가까이 다가가 검으로 상자를 찔러봤지만, 반응이 없어서 일반 상자라 판단했다.

"오? 오오!"

그리고 상자의 내용물을 본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루엣 고글 / 최고급]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환경(어둠, 분진, 연기 등) 속에서도 사람과 몬스터의 모습을 실루엣 형태로 볼 수 있으며, 사람은 흰색, 몬스터는 붉은색 실루엣으로 표시된다.

놀랍게도 그 속에서 나온 아이템은 이 던전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설명만 봐선 야간 투시경을 떠올리게 하는데, 디자인은 라이딩 고글처럼 생겼다.

경량과 기능에만 중점을 둔 못생긴 고글 말고 나름 디자인도 신경을 쓴 형태.

'시인성이 좋은데?'

고글을 착용하자, 마치 나를 위해 제작된 것처럼 부담 없이 눈가에 안착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놀라운 건 기능이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색감이 빠진 듯한 회색의 세상이었지만, 시인성이 좋아서 야간투시경과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이 정도면 고글을 쓰고 칼질하는데도 문제없어 보였다.

나는 만족감을 드러내며 고글을 머리 위로 올린 뒤, 상자에 든 나머지 물건들을 살폈다.

[450코인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포션 5개를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금화 형태의 코인과 하급 포션 외에 특별한 아이템이 눈에 띄지 않았다.

고글만으로도 충분한 보물이라 할 수 있기에 나는 아쉬워하지 않고 상자를 닫았다.

-툭.

"응?"

그런데 상자의 뚜껑이 닫힌 뒤,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다시 상자를 열었더니, 상자의 앞쪽에 판자 하나가 떨어져 있고, 그 위에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뭔가 그럴싸한 물건.

나는 그것을 가지고 안전 텐트로 돌아왔고, 조심조심 펴서 내용을 살폈다.

[몽마의 던전 지도를 획득했습니다.]

그건 이 던전의 지도였다.

지형만 그려진 게 아닌,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나오고, 몬스터들의 활동 반경까지 상세히 표기된 정밀 지도.

그뿐 아니다.

[한반도에 배정된 메인 시나리오 20조각 중 11번째 조각을 획득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의 파생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파생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지도 뒤쪽에는 편지와 같은 어떤 문구가 적혀 있었고, 그 문구를 눈에 담는 순간 위와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메인 시나리오?'

012화 특별한 무인도 (3)

보통 게임 같은 곳에서 '메인 시나리오'라 하면 해당 게임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주요 스토리 라인을 의미한다.

'그럼 이 메인 시나리오라는 것에 접근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재앙의 발생 원인을 알게 된다는 뜻 아닐까? 어쩌면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도.'

지나치게 희망적인 판단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무려 '메인 시나리오'란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걸, 왜 무인도에 숨겨 놓은 거야?"

시스템은 이게 한반도에 배정된 메인 시나리오 20조각 중 11번째 조각이라 알려줬다.

그럼 앞으로 19개의 조각을 더 찾으면 메인 시나리오가 완성된다는 의미일 텐데···.

조각들이 숨겨져 있는 상태가 이딴 식이면 곤란할 수밖에 없다.

여기만 해도 무인도에 위치한 은밀한 던전이고, 주변을 잘 살피지 않으면 찾을 수 없게 숨겨져 있지 않은가.

다른 조각들의 습득 난이도도 이와 같다면 그냥 찾지 말란 뜻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욕도 안 나온다.

"아, 퀘스트."

메인 시나리오에 정신이 팔려 '파생 퀘스트를 진행하겠냐'는 메시지를 방치하고 말았다.

나는 길게 고민할 것 없이 퀘스트 진행을 선택했다.

'정 위험하다 싶으면 도망치던가 진행을 포기해야지.'

곧이어 파생 퀘스트의 내용이 공개되었다.

[외모지상주의 / 퀘스트 등급: 상]

-내용: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지 않다.

누군가는 공부를 잘하고, 누군가는 운동을 잘하고, 누군가는 예술을 잘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재능이란 것은 실존하며 수많은 사람을 절망시키는 요소라 할 수 있다.

그 재능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외형적 재능.

외모지상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평균 이하'인 당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달성 조건: 여성 NPC 2명과 호감도 100 달성.

퀘스트 내용을 본 나는 입꼬리를 씰룩였다.

"이게 뭔 개소리야?"

어쩐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다르다.

메인 시나리오의 파생 퀘스트라고 해서 엄청 거창한 것일 줄 알았는데,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서큐버스 던전과 어울린다면 어울린다고 볼 수 있는 퀘스트지만, 이건 시비 거는 거 아닌가?

"그리고 누구보고 평균 이하란 거야, 나 정도면 상급은 아니어도 중상급은 되지."

이 퀘스트를 보고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퀘스트는 수행자에 따라 내용이 일부 조정될 수 있다는 것.

멋대로 외모 평가를 받아 기분이 나쁘지만, 그로 인해 퀘스트가 수행자의 상황을 참고한다는 것이 확인됐다.

"응?"

하지만 기분 나쁜 것도 잠깐.

퀘스트의 보상을 확인한 나는 놀란 표정을 지어야 했다.

-완료 보상: 특수 등급 장비 선택권 1장, 상급 스킬 선택권 1장.

농담 같은 내용치고 보상은 무척 후했기 때문이다.

'장비와 스킬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고? 더구나 높은 등급의 것을?'

덕분에 불쾌했던 마음이 싹 사라지고 진지하게 퀘스트에 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월광도에 친밀도를 높일 수 있는 NPC가 단 한 명뿐이란 건데."

퀘스트 달성에 제한시간이 없어서 다행이다.

이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해선 섬을 빠져나가는 게 필수 조건 같으니까.

퀘스트 창을 닫은 나는 텐트를 나섰다.

그러자 어느새 리스폰이 된 건지 서큐버스 하나가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모델워킹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메인 시나리오에 정신이 팔려서 그렇지, 던전에 진입하고 얻은 이익이 상당하다.

그리고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그게 끝이 아니다.

'여기서 서큐버스를 한 마리씩 처치하기만 해도 꽤나 경험치가 짭짤할 것 같단 말이지?'

실루엣 고글로 인해 서큐버스와 편하게 싸울 수 있게 되었고, 던전의 최초 발견 보너스로 하루 동안 경험치와 아이템의 습득률이 두 배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순발력이 1 증가했습니다.]

방금 레벨이 오르면서 얻은 능력치 포인트를 순발력에 투자한 뒤, 나는 실루엣 고글을 쓴 채 안전텐트의 보호구역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좋아. 유혹 방어되네.'

그리고 실루엣 고글이 서큐버스의 유혹을 막아준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검을 빼 들었다.

아깐 마력탄을 쏟아부어 잡았기 때문에 서큐버스의 전투력이 어는 수준인지 파악되지 않았다.

그래서 위험하지 않게 충분히 조심하는 선에서 직접 부딪혀 보기로 했다.

-낄낄.

서큐버스는 내게 유혹이 통하지 않자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며 육탄 공격을 가해왔다.

-챙!

서큐버스의 무기는 손톱.

검과 서큐버스의 손이 부딪쳤는데,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과 함께 작은 불꽃이 튀었다.

"큭!"

한 번의 충돌로 녀석의 근력과 순발력이 나보다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큐버스의 움직임은 민첩하고 유연한 데다가 파괴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크윽! 아크락샤!

"뭔 말이야!?"

그래도 그랑 다이어 울프를 처음 상대할 때보단 할 만했다.

-핏!

서큐버스는 검을 쳐내는 손을 제외하곤 신체의 방어력이 그리 높지 않았고, 그랑 다이어 울프와 달리 고만고만한 질량을 가진 인간형 몬스터였기에 상대하기가 조금 더 수월했다.

-챙! 챙!

결국, 서큐버스는 나의 검에 생채기를 더해가다가 움직임이 둔해졌고, 끝내 목이 꿰뚫리며 최후를 맞이했다.

-컥···.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서큐버스는 인간과 흡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격변 이후 계속 몬스터와 싸워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게임 시스템이 사냥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주고 있는 건지, 특별히 부정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승리로 인해 상쾌한 기분이 든달까?

[하급 서큐버스를 토벌하여 경험치 400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서큐버스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72코인을 획득했습니다.

-하급 서큐버스의 머리카락 2묶음을 획득했습니다.

"던전의 최초 발견 보너스가 더해져서 서큐버스가 주는 경험치는 그랑 다이어 울프의 4배, 코인은 5배네."

그랑 다이어 울프와 서큐버스를 계속 비교하는 이유는 보상 차이가 4배 이상인 반면, 전투 능력은 비슷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유혹 스킬이 차단되니, 서큐버스는 최고의 사냥 효율을 자랑하는 몬스터가 되었다.

"너무 좋은데?"

아직 서큐버스의 패턴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여기저기 베여 피가 줄줄 흐르는 상태.

그러나 만족스레 올라간 입꼬리는 한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이게 모두 행운의 탈리스만 덕일까?'

확신할 수 없지만, 좋은 일이 생기니 '행운의 탈리스만'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인벤토리 첫 번째 칸을 차지하고 있는 그 아이템에게 아까 쓸모없어 보인다고 했던 말을 취소하며 사과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일단 던전의 최초 발견 보너스가 적용되는 오늘 하루 동안은 계속 사냥으로 레벨을 올려야겠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 최초 발견 보너스가 없어지면 던전을 탐색해 볼 예정이다.

마침 던전의 지도도 손에 넣었고,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 있을 테니까.

*

[이 자식아!]

자정이 다가오는 2일 차의 깊은 밤.

던전을 벗어나자마자 울리는 스마트폰 벨소리에 전화를 받았더니, 아버지가 내게 호통을 치셨다.

[전화를 안 받아서 걱정했잖아.]

"죄송해요."

던전에선 전화가 터지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몽마의 던전 이용시간은 5시간.

한번 들어가면 5시간이 지나야 나올 수 있다.

나는 그 몽마의 던전을 두 타임이나 뛰고 왔다.

즉, 10시간 동안 던전에 처박혀 있었단 거다.

처음 다섯 시간은 우연치 않게 던전에 빠진 거지만, 그 뒤 다섯 시간은 내 발로 직접 재입장했다.

당연히 던전에 재입장을 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바빠서 전화를 못 받을 것 같단 문자를 남겼지만, 그 문자 하나만 덜렁 믿고 있기엔 지금의 세상이 너무 흉흉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냐?]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던전에 다녀와서 그렇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랩을 하듯 거하게 욕을 쏟아내셨다.

[던전 위험하니까 조심하랬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미안하단 말을 반복해야 했다.

그렇게 3분여가 지나서야 아버진 진정하셨고,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식량을 구하다가 재수 없이 던전에 빠졌고요."

"생각보다 던전의 난이도가 만만해서 들어간 김에 몬스터 사냥하고 레벨 올렸어요."

"그런데 벌리는 경험치가 많다 보니, 타임아웃으로 던전에서 쫓겨난 다음, 제 발로 다시 들어가서 2차전을 벌였죠."

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그토록 걱정하던 던전의 존재가 생각보다 위협적이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시면서도, 너무 수월하게 사냥을 이어가는 내 상황을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너 지금 레벨이 몇인데?]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레벨: 22

-칭호: 없음

-능력치

근력: 근력: 12(+1) 순발력: 14 마력: 10(+2)

잔여 능력치 포인트:

-보유 코인: 6,562

"22요."

[뭐?]

그리고 전해 들은 내 레벨에 어제와 비슷한 반응을 보여주시는 아버지.

사실 이것도 많이 못 올린 느낌이다.

레벨 20이 되고 나서부터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급속도로 불어났으니까.

[너 혹시···. 회귀자나 뭐 그런 거야?]

"예?"

[그 섬에 들어간 것도 무슨 기연을 얻기 위해 갔다던가.]

아무래도 아버지가 소설을 너무 많이 보신 모양이다.

[아니, 말이 안 되잖아. 너만 게임하는 느낌이야.]

"아무래도 월광도가 저랑 맞나 봐요."

[이쯤 되니, 나도 그 섬이 궁금해지네.]

솔직히 나는 운과 타이밍이 여러모로 잘 맞았다.

다른 사람들이 이곳에 온다고 해서 나와 같은 이득을 볼 거라 생각되지 않는다.

"무슨 일 있어요?"

아버지에게 계속 전화를 건 이유를 물었다.

그에 아버지는 잠시 말을 멈추셨다가.

씁쓸한 목소리로 답하셨다.

[미안하다.]

나도 아까 전화를 못 받아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긴 했지만, 아버지의 사과는 느낌이 달랐다.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진 거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아직 인터넷 안 봤지?]

"네."

나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볼까 싶었지만, 어차피 아버지가 알려 주실 거란 생각에 가만히 기다렸다.

[오늘 오후 3시쯤부터 하늘을 나는 비행 몬스터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어.]

비행 몬스터?

잠깐···. 그 말은 설마?

[항공기 사용이 전면 금지됐다.]

"허."

섬을 빠져나갈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버지가 알아보던 하늘길, 다른 하나는 바닷길이다.

그중 한 가지가 막혔으니, 이제 남은 건 바닷길뿐인데···.

문제는 헬기를 타면 바로 계룡대 안까지 배송될 수 있지만, 바닷길을 이용하면 육지에 도착하더라도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계룡대까지 모험을 떠나야 한다는 거다.

"지금 군대 투입해서 몬스터들 토벌하고 있죠?"

[그렇긴 한데.]

말끝을 흐리는 아버지의 모습에 군대가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상황이 좋지 않음을 의미했다.

"그럼 여깄는 게 오히려 안전한 거 아니에요?"

아버지는 아니라고 말 못했다.

"통신망 유지되는 게 용할 정도네요."

[그것도 언제 끊길지 몰라.]

통신망이 끊기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이거 정말 섬에서 윌리아와 단둘이 오순도순 살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아버지와 나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백호야.]

그러다가 아버지가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아빠가 제안할 게 있다.]

013화 잠깐의 탈출 (1)

아버지는 내게 제안할 게 있다고 말씀하시며, 일단 그 계획을 밝히기 전에 두 가지 실험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실험이요?"

[하나는 드론을 날려서 섬에 비행 몬스터가 있는지 확인해보는 거야.]

나는 바로 드론을 날렸다.

그 결과.

-키에엑!

"이, 있어요!"

드래곤을 작게 축소 시켜 놓은 듯한 몬스터 3마리가 매섭게 소리를 내지르며 드론을 쫓아왔다.

비행 몬스터가 발견된 곳은 아직 가보지 않은 월광도의 북부.

나는 필사적으로 드론을 도망치게 하여, 나중에 주우러 갈 수 있게끔, 안전구역 근처에 떨궜다.

비행 몬스터의 존재를 확인해서 다행이다.

아버지가 사전에 탐색을 시키지 않았다면 자칫 돌발상황을 겪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 멋대로 와이번이라 이름 붙인 녀석들은 드론이 조용해지자 다시 자신의 구역으로 날아갔다.

[두 번째 해줬으면 하는 실험은 이동하는 뗏목 위에 안전텐트를 설치할 수 있냐는 거야.]

어버지 천재신가?

움직이는 이동체에 안전텐트를 설치하다니?

꽤나 기발한 아이디어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여러 방법으로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안전텐트는 고정된 장소에만 설치할 수 있습니다.]

"실패네요···."

하지만 모든 게 뜻대로는 되지 않는 법.

아쉽게도 해당 실험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아버지는 크게 아쉬워하지 않으셨다.

혹시 계획이 한 가지가 아니셨던 건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잠깐의 휴식 후.

아버지는 진지하게 제안을 해왔다.

[일단 유인섬으로 이동하는 게 어떻겠니?]

"유인섬이요?"

예상치 못한 제안.

홀로 고립되어 있지 말고, 일단 사람들 속에 들어가란 의미 같다.

그런데 이 근처에 유인섬이 있던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의도라는 섬 알아?]

"알죠, 태안에 위치한 제법 큰 섬이잖아요? 그것도 육지랑도 꽤나 가까운."

누가 지은 건진 몰라도 서해의 하와이란 별칭을 가진 섬이다.

인구는 많지 않지만, 두 개의 항구를 갖고 있고, 숙박시설도 제법 있는 데다가 관광객과 낚시꾼들이 많이 찾아 매일 여객선이 들락날락하는 섬으로 알고 있다.

자세히는 아니어도 대충이나마 가의도를 알고 있는 이유는 월광도와 그 유명한 격렬비열도가 '가의도리'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의도에 안전지대와 웨이포인트가 존재하는 게 확인이 된 상태야.]

주민들이 거주하는 웨이포인트가 있는 섬.

확실히 이곳보단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문제가 있으니···.

월광도에서 가의도까지는 10km 이상 떨어진 꽤나 먼 거리란 점이다.

"하지만 어떻게 가죠? 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버지가 배를 보낸다면 애초에 가의도로 가지 않고 태안으로 바로 가면 된다.

이런 제안을 한 데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비행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긴 배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배도 쓰기가 힘들어.]

아아, 하긴 비행 몬스터가 비행기만 공격하란 법은 없지.

아버지는 무게감 있는 톤으로 말했다.

[그러니, 너는 가의도까지 걸어서 가야 해.]

그런데 진지한 말투와 달리 이어진 이야기가 너무 황당해서 나는 벙찐 표정을 지어야 했다.

"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10km 넘게 떨어진 섬까지 걸어서 가라고?

내가 레벨을 많이 올려서 무협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내 반문에 아버지는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월광도와 가의도 사이에 웅도와 단도란 섬이 있어.]

"네, 알아요."

[그런데 그 두 개의 섬이 간조 시간이 되면, 물이 빠지면서 가의도와 육로로 연결된다고 하더라.]

아버지가 대충 하고자 하는 말씀을 알겠다.

즉, 그 중간 섬에 닿기만 하면 간조 시간 때 가의도까지 걸어갈 수 있단 뜻이다.

그런데 가의도에 바닷길이 열리는 이벤트가 있었나?

'뭐, 월광도도 몇 배가 커졌는데, 그깟 바닷길쯤이야 생길 수도 있지.'

워낙 이상 지형이 많으니, 간조 때 바닷길이 열리는 것쯤은 애교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주장엔 여전히 문제가 있다.

"그런데 월광도에서 가까운 웅도 역시 5km 이상 떨어져 있을 텐데요?"

5km면 수영으로 도전해볼 만한 거리라 생각할 수도 있다.

나의 경우 신체가 크게 강화된 데다가 수영 실력도 준수한 편이니까.

하지만 가능할 것 같다고 해서 도전하기엔 너무 위험하다.

자칫 방향을 잃으면 망망대해에서 미아가 될 수도 있는 게 바다수영이다.

[웅도 말고 가까운 섬이 또 있어.]

-띠링.

그때 아버지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뭔가 싶어서 열어보니, 위성 사진이 담겨 있었다.

딱 짚어 내 주변을 찍은 게 아니라, 충청남도의 사진이 찍혀 있었는데, 구석에 빼꼼하고 월광도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

별생각 없이 사진을 살핀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의도와 월광도 사이에 위치한 섬은 웅도와 단도.

그 두 개의 섬은 가의도쪽에 붙어 있어서 월광도와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다.

그런데.

"설마 이상지형입니까?"

[맞아, 가의도에 바닷길이 길게 열리는 원인이 그 이상 지형 때문인 것으로 보여.]

지도에는 가의도와 월광도 사이에 자리한 섬은 두 개가 아닌 세 개였다.

새로운 섬이 하나 솟아났다는 뜻이다.

[그 미상의 섬에 닿기만 하면 유인섬인 가의도까지 걸어갈 수 있어. 그 섬과 월광도의 거리는 1.5km다.]

거리가 확 줄었다.

이 정도 거리면 바다 위에서도 그 섬을 보면서 헤엄쳐 나아갈 수 있다.

"바닷속에 몬스터가 있는 건 아니죠?"

[해군이 계속 소나로 확인하고 있는데, 아직 바다 속에 몬스터가 확인된 적은 없어.]

당장 수중 몬스터가 없다고 쭉 없으란 법은 없다.

비행 몬스터도 갑자기 업데이트되듯 생겨났으니까.

시간을 끌다가 수중 몬스터가 생기면 월광도 탈출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일단 가의도에 갔다가 웨이포인트를 타고 다시 월광도로 돌아오자. 그곳의 웨이포인트만 활성화시키면 언제든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으니까. '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가의도는 육지와 가깝지 않은가.

언제고 육지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가 되어 줄 것이다.

'아마 아버지도 그걸 바라고 육지와 가까운 가의도로 나를 보내시려는 거겠지.'

생각이 정리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할게요."

[내가 한 제안이지만, 정말 조심해야 한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인벤토리에 비상 상황을 대비한 물품들 꼭 챙겨가도록 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너라면 잘할 것 같아.]

바다만 잘 건너면 크게 위협이랄 것 없이 가의도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 많은 조사를 하셨다는 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100%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인지라,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셨다.

*

간조에 의해 가의도의 바닷길이 열리는 건 하루 2번, 이동 가능한 상태는 2시간 정도가 유지 된다.

아버지와의 통화가 끝나고 8시간 후에야 이동 가능한 상태가 되었기에 나는 한타임 더 몽마의 던전을 돌고 왔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레벨이 25다.

"설마 안 돌아오시는 건 아니죠?"

오늘 하루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계속 몬스터와 드잡이질을 했기에 나는 피로를 해소하고자 안전구역을 찾았다.

내가 가진 '회복의 반지'만으로도 어느 정도 피곤함이 가시지만, 안전구역이 효과가 더 강력하고, 윌리아에게 힐을 받으면 완전히 쌩쌩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호감도: 28%]

나는 윌리아에게 잠시 월광도를 떠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크게 놀라며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어쩐지 그런 모습도 연기처럼 보이지만, 내 말 하나, 내 행동 하나에 따라 호감도가 오르고 내릴 수도 있으니 예쁜 말만 해야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곳에 가더라도 웨이포인트만 찍어두고 다시 돌아올 거니까요. 전 이 월광도가 마음에 들거든요. 윌리아 씨와도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고요."

"정말요? 다행이다."

여자친구 눈치도 이렇게까진 안 살필 거다.

하지만 뭐···.

윌리아가 예뻐서인지 마주 보고 대화하면 재밌긴 하다.

'서큐버스들도 예쁘지만, 느낌이 다르단 말이지.'

서큐버스들은 인공적인 느낌이라면 NPC인 윌리아는 정말 사람을 대하는 느낌이다.

윌리아는 대뜸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 보였다.

"머리가 부드러우시네요."

역시 요물.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다.

"목욕탕 다녀왔거든요."

정확하겐 씻는 것보다 수분섭취에 목적을 두고 들른 목욕탕이었다.

하지만 겸사겸사 씻길 잘한 것 같다.

[윌리아의 호감도가 2% 상승했습니다.]

[윌리아의 호감도가 30%를 달성했습니다.]

이렇게 보너스가 있으니까.

'한 번에 5~10%씩 오르면 안 되나? 처음엔 잘 오르는 것 같더니만···.'

첫술에 어찌 배부르겠는가.

윌리아와의 호감도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생각한다.

"블레스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월광도를 떠나기 전 윌리아에게 한 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를 20% 상승시켜 주는 버프를 받았다.

사용료는 20코인.

"별일 없으실 거예요. 이건 응원선물입니다."

-쪽.

내게 힘을 내라며 뺨에 아주 살짝 입을 맞춰오는 윌리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호감도 30%에 볼 뽀뽀를 받았다.

그럼 50%는? 80%는? 100%?

흐뭇한 망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씩씩하게 월광도 안전구역을 나섰다.

*

바다와 일반 수영장에서의 수영은 차원이 다르다.

일반 수영장에선 내가 힘을 쓰는 만큼 앞으로 쭉쭉 나아간다면, 바다는 파도와 조류를 이겨야 앞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간다 해도 수시로 방향을 잃을 것이다.

바다가 나를 이리 밀고 저리 밀어서 방해를 해올 테니까.

"스트레칭부터."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블레스 효과까지 더해 일반인의 3배가 넘는 능력치를 보유한 상태이고.

[근력: 13(+4), 순발력: 15(+3), 마력: 11(+5)]

-블레스(능력치+20%) 효과가 적용 중입니다.

회복의 반지와 꽤 많은 포션을 보유하고 있으며.

"후웁, 후우···."

무엇보다 인벤토리라는 필살기가 있다.

나는 수영을 하다가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바로 상점 건축자재 코너에서 산 대형 스티로폼 단열재들을 꺼내 들 것이다.

하나하나가 뗏목 수준의 부력을 지닌 것들이니 올라가 휴식을 취하기 안성맞춤이다.

심지어 딸랑 하나만 산 게 아니라, 인벤토리 한 칸이 보관할 수 있는 최대 용량인 100개를 사서 채워놨다.

이정도면 바다 위에 작은 섬을 만들 수 있을 정도.

이동 중에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과잉 대응이 되어 버리지만, 나는 안전이 최고로 중요하기 때문에 모자란 것보다 과한 게 낫다고 생각한다.

"가자."

1.5km의 거리.

공교롭게 올림픽 철인3종의 선수들이 수영하는 거리와 같다.

선수들은 보통 20분대의 기록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과연 나는 얼마나 걸릴까?

-찰박. 찰박.

나는 아저씨들처럼 물로 심장마사지를 하며 바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예열하듯 천천히 헤엄치기 시작했다.

'가자, 유인섬 가의도를 향해.'

아마도 '잠깐의 외출'이 되지 않을까 싶지만.

꽤나 기대된다.

014화 잠깐의 탈출 (2)

*

오전 9시 즈음의 고요한 아침의 바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파도를 조심조심 헤치며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최대한 물장구를 치지 않고, 중간중간 잠영으로 바닷속에 몸을 숨기며 월광도가 멀어질 때까지 조용히 헤엄쳤다.

그럼에도 전진 속도가 그리 느리지 않은 게 의외인 부분.

모두 능력치가 높은 덕분이다.

'이제 조금씩 속도를 높여도 되겠지?'

내가 이리도 조심스레 헤엄을 치는 이유는 비행 몬스터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함이다.

비행 몬스터는 소음에 민감하고 눈도 좋은 편이라 들었다.

그래서 나는 검은색 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조용히 헤엄을 치면서 최대한 이목을 끌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통했는지 점차 월광도와 멀어졌고, 조금씩 헤엄치는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우왁! 시팔 깜짝이야. 뭐야 저거?'

그렇게 1차 목적지인 미상의 섬에 절반 이상 도달했을 때.

나는 바다 속에서 보이는 몇몇 커다란 그림자를 발견했다.

상어나 고래인가 싶어 실루엣 고글을 꺼내 눈에 대봤더니···.

'이, 이거 아무래도.'

누가 봐도 물고기의 형상이 아닌, 기형적인 모습을 갖고 있었다.

실루엣 고글은 인간과 NPC는 흰색, 몬스터는 붉은색으로 표시하며 그 외의 것은 회색으로 표시한다.

이형의 존재들은 방금까지 회색이었으나, 점차 붉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파파파파파파!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이 있고, 세상을 살다 보면 '공교롭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들이 펼쳐진다.

지금 내 상황이 그렇다.

쉽게 말해 엿 됐다는 뜻이다.

'시팔! 왜 하필 지금 수중 몬스터가!'

잔잔한 바닷속에 몬스터들이 스폰되기 시작했다.

비행 몬스터가 갑자기 업데이트되듯 나타났을 때, 언제고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타이밍이 최악일 줄은 몰랐다.

만약 사전에 이상을 알아챘다면 굳이 월광도를 벗어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목적지까지 절반 이상 온 상태여서 월광도로 돌아갈 수도 없다.

무조건 눈앞에 보이는 미상의 섬에 도달하는 수밖에.

-파파파팟!

다행히 아직은 수중 몬스터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수시로 꿈틀댈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없다.

느낌이지만, 머지않아 녀석들이 공격해올 것 같았다.

'도망쳐야 돼.'

나는 이 잠깐의 여유를 허투루 쓰지 않고 전력으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지금의 난 인간 모습을 한 돌고래.

피륙으로 이뤄진 모터보트다.

-키에에엑!

요란하게 솟구치는 물보라 덕분에 머지않아 월광도에 있던 와이번들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다.

비행 몬스터가 아무리 눈이 좋다고 해도 설마 이 거리까지 날아오겠나 싶었는데···.

'어쩔 수 없어! 와이번보다 바닷속의 저것들이 훨씬 위험해 보이니까!'

일단 육지에 닿아야 뭐라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뒤도 안 보고 전력으로 계속 헤엄쳤다.

'젠장!'

그러다가 와이번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현재 미상의 섬과의 거리는 약 300미터.

내가 그 섬에 닿는 것보다 와이번이 내게 닿는 게 훨씬 빨라 보였다.

-키에에엑!

나는 결국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비상용으로 사온 2m*2m사이즈의 거대 스티로폼들을 꺼냈다.

-투투투투

핑크색의 스티로폼들이 따발총처럼 요란하게 허공에 떠올랐다가 하나씩 해수면 위로 착지했다.

상점에서 파는 수많은 물건 중 이 단열 스티로폼을 대량으로 챙겨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높은 부력을 가진 만큼 어렵지 않게 위에 올라탈 수 있어서고.

다른 하나는 강렬한 핑크색의 색감으로 바다를 뒤덮으면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핑크빛 스티로폼으로 뒤덮인 바다 아래를 잠영으로 이동했다.

-키엑?

와이번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워했다.

웬 미친 인간이 요란하게 헤엄을 치고 있어서 잡아먹으러 왔더니, 핑크색 똥을 거하게 싸지른 것 아니겠는가.

녀석들은 스티로폼이 넘실대는 바다 위를 배회하며 나를 찾아다녔다.

"푸핫!"

-키아아!

그러다가 호흡을 위해 바다 위로 고개를 내밀 때면, 기세 좋게 덤벼들었으나, 곧바로 잠영으로 도망치니 쉽게 나를 잡지 못했다.

장거리의 바다 수영에선 호흡이 편한 자유형이 잠영보다 월등히 빠르다.

비록 이전만큼의 속도는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능력치가 높은 덕분에 잠영 한 번으로 수십 미터씩 이동할 수 있었다.

"푸핫!"

-키아아악!

"푸핫!"

-키아아악!

그렇게 두더지 게임을 하듯 핑크색으로 물든 바닷속을 헤엄쳤을까?

드디어 목적지인 섬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미친!'

그러나 진짜 위기는 지금부터였으니···.

-슈우우욱!

잠자코 있던 수중 몬스터들이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등 뒤로 느껴지는 기척이 하나하나 범상치 않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대형 몬스터들이 나를 쫓아오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푸핫!"

결국, 나는 물 밖으로 도망쳤다.

-흠칫.

그리고 스티로폼을 밟고 서서 바닷속으로 시선을 옮기니···.

주변 공간을 잠식하며 다가오는 거대한 아가리들을 볼 수 있었다.

'도약!'

나는 기겁하며 스티로폼 여러 개를 겹쳐 밟고 도약 스킬로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뒤이어 상어 몸에 아귀 얼굴을 붙여 놓은 듯한 거대 물고기와 바다공룡같은 몬스터가 나를 따라 솟구쳤다.

대체 크기가 얼마나 큰 걸까?

10미터? 20미터?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온몸에 소름 돋았다.

-텁!

다행히 녀석의 입은 내게 닿지 못했다.

도약 스킬에 마력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은 덕에 족히 30미터는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다에 초거대 아귀와 공룡이 있었다면.

하늘엔 이 녀석들이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키에엑!

지금까지 내게 실컷 놀림을 당한 와이번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활강을 하고 있었다.

'어? 각도 좋고?'

그런데 이때, 나는 하나의 도주로를 포착했다.

점프가 고점에 달해 슬슬 자유낙하를 시도할 때쯤, 눈앞으로 칼날과도 같은 발톱을 세운 와이번들이 날아들었다.

나는 그 녀석과 충돌하기 직전.

'중급 방어막 생성!'

황금 고블린을 처치하고 얻었던 매직 로브의 내장 스킬을 사용했다.

-콰앙!

그러자 발톱이 살을 파고드는 소음이 아닌 망치로 철판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나는 포환처럼 날아갔다.

'땡큐!'

포환이 된 나의 예상 낙하지점은 다름 아닌 오늘의 1차 목적지, 미상의 섬이다.

나는 그대로 수풀이 우거진 산에 추락했다.

"큭!"

방어막이 추락의 충격을 일부 흡수해주었지만, 그럼에도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상당했다.

"드디어 땅이네. 하하···."

나는 회복의 반지에 내장된 스킬인 중급 회복으로 부상을 치료하곤 어서 더욱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몸을 숨겼다.

-키에에엑!

계속 나에게 끌려다니다가 끝내 이용까지 당한 와이번의 분노어린 외침이 울려 퍼졌다.

'앞으로는 바닷속에 못 들어갈 것 같다.'

갑자기 수중 몬스터가 등장하는 바람에 정말 골로갈 뻔했다.

저런 위험한 바다를 무사히 빠져나온 내가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비록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해양 쓰레기를 만들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유는 상점표 아이템이 꽤나 친환경 제품이기 때문이다.

[해당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고 원자재 상태로 방치할 경우 일주일 후, 자동 소멸됩니다.]

이렇게.

그래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걸음을 옮겼다.

*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이상 지형이라고 해서 반드시 의미 있는 사용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도 그런 걸까?

섬이 원체 작기도 했지만, 몬스터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을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덕분에 나는 해당 섬을 빠져나와 갯벌이 드러난 바닷길을 걸을 때까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다.

[방금 해군에게 이야기를 전달 받고 어찌나 당황했는지···. 정말 괜찮은 거냐?]

"네, 괜찮았어요. 아무래도 아들이 악운이 강한 모양입니다."

[미안하다. 아빠의 제안이 악수가 되어버렸어.]

"아뇨, 이렇게라도 나와서 다행이죠. 이번 타이밍마저 놓쳤다면 앞으로 영영 월광도를 나오지 못했을 것 같아요."

해군은 수시로 소나를 이용해 수중 몬스터의 등장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수중 몬스터가 등장해 버렸고, 이는 바닷길의 완전 봉쇄를 의미했기에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버지는 다른 의미로 난리가 나셔야 했지만 말이다.

[후우, 장하네.]

아버지는 쓰게 웃으시며 한가지 전달사항을 알려왔다.

그건 바로.

[가의도에 뭔가 사고가 있는 것 같다. 몬스터에 의한 사고가 아니라 사람끼리의 마찰이.]

"그래요?"

[가의도 이장이 어촌계를 통해 경찰과 군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고 들었어.]

대재앙이 시작되고 112나 119 같은 신고 전화는 기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육지의 어촌계를 통해 도움의 손길을 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는가.

소용없는 짓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자세히는 모르고요?"

[마을주민들과 관광객들 사이에 파벌이 형성되어 있는데, 관광객들이 마을주민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터전을 빼앗았다고 해.]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한쪽의 말만 믿을 수는 없었다.

[요는 섬의 상황이 흉흉하니 최대한 조심하란 이야기야. 굳이 다른 사람들 일에 간섭하려 말고.]

"네, 알겠습니다."

역시 가의도의 웨이포인트만 찍고 월광도로 돌아가야겠다.

사람들 간의 싸움에 끼어들어서 골머리 썩일 필요 없으니까.

'몬스터들로부터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같은 인간끼리 싸우고 있다니.'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저게 웅도인가?"

아버지와의 통화가 끝난 후, 미상의 섬을 벗어나 한참 동안 불편한 길을 걸어 웅도에 다다르고, 웅도에서 오크들과 드잡이질을 벌인 후 단도로 향하는 바닷길에 올랐다.

***

-키에에엑!

"뭐, 뭐야?"

가의도의 마을 주민 40대 김용근은 가의도의 새로운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와이번들이 갑자기 포효를 내지르자 기겁했다.

그는 얼른 건물 안에 몸을 숨겼고, 그건 다른 주민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와이번들의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의문을 표해야 했다.

"뭐지? 저 새끼들 뭘 발견해서 저러는 거야?"

그런 김용근의 물음에 같은 장소에 몸을 숨긴 그의 아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김에 그 모리배 녀석들이나 콱 물어가 버렸으면 좋겠구만."

"아버지, 비행괴물들은 서쪽으로 갔고, 그 인간들은 동쪽에 있잖아요."

"아, 그런가?"

어쨌든 와이번이 자신들을 발견하고 공격하는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조심조심 실내를 벗어나 마당 앞의 텃밭으로 이동했다.

아무리 세상이 미쳐도 사람은 먹고 살아야 하기에 그들이 하는 일은 이전과 크게 다름이 없었다.

"아이고, 이 젤리 새끼들이 또 기어 나왔네."

그러나 그의 텃밭엔 선객이 있었다.

녹색의 반투명한 몸체를 가진 몬스터.

슬라임이었다.

너무도 무해해 보이는 생김새와 달리, 피부에 닿으면 화상을 입히는 몬스터라 꽤나 위험했다.

[슬라임을 협동 토벌하여 경험치 3을 획득했습니다.]

[슬라임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1코인을 획득했습니다.

김용근은 아들과 괭이를 휘두르며 슬라임을 처치했다.

그에 따라 조촐한 경험치와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뭐야, 슬라임 잡아 레벨업 해서 복수하시게?"

"음?"

슬슬 밭일을 시작하려는데.

20대의 한 사내가 두 사람에게 이죽거리며 다가왔다.

김용근은 그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고.

사내는 그런 김용근의 행동에 피식 실소를 흘리며 물었다.

"방금 도마뱀 새끼들 어디로 날아갔어?"

"몰라, 네놈을 물어 죽이려 갔나 보지."

"이 아저씨 말본새 보소?"

김용근의 말에 사내는 발끈했고, 아들은 빠꾸 없는 아버지 행동을 만류해야 했다.

현재 가의도는 저 사내의 패거리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상황.

밉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이 사내의 물음에 답했다.

"그, 그 괴물들은 서쪽으로 갔습니다."

그에 사내는 그렇냐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고.

김용근은 혀를 차며 텃밭에서 감자들을 캐기 시작했다.

"오, 감자? 줘봐."

그리고 사내는 김용근으로부터 감자 한 보따리를 빼앗았다.

김용근은 속에서 솟구치는 화에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여기저기서 몬스터가 몰려들 테고, 아들도 위험에 빠질 수 있어서 참았다.

그런데 그때.

-철컥. 철컥.

서쪽 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사내라기보다 청년이라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은 2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기에 말을 삼갔고, 낯선 청년은 세 사람을 스윽 한번 바라보곤 말없이 언덕길을 올랐다.

그런 청년의 허리춤엔 기다란 장검이 걸쳐져 있었다.

015화 잠깐의 탈출 (3)

가의도에 등장한 낯선 인물.

그에 감자를 강탈해가던 사내도, 김용근 부자도 말을 잃었다.

지금 섬이 어떤 상황이던가.

와이번이 등장한 이후 배를 띄우지를 못해 섬에서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와이번의 둥지가 산림에 위치해 있고, 마을에선 슬라임 정도밖에 나오지 않아 생활에 큰 문제는 없지만, 고립에 의한 생존자들의 스트레스는 극심했다.

그런데 태연하게 마을을 활보하고 있는 저 청년은 누가 봐도 외부인이다.

당연히 '어떻게?'란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마을에 저런 사람이 있었어?"

사내의 물음에 방금까지 신경전을 벌이던 김용근도, 그의 아들도 고개를 도리질했다.

결국, 사내는 무심히 걸음 옮기는 청년을 따라가 붙잡았다.

"너 뭐야?"

하지만 사내는 청년의 발길을 붙잡고 나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허리춤에 길다란 검을 차고 있는 인물이다.

더구나 신장도 180이 넘는 데다가 몸도 다부지고.

비록 얼굴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남이지만, 분위기와 눈빛이 학창 시절 일진도 건드리지 않던 '운동하는 애'의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사람인데요?"

"아니,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그럼 질문을 똑바로 하시던가요."

사내는 장검의 청년이 자신을 놀린다 생각하여 발끈했지만, 인내심을 발휘하며 참았다.

"너 외부인이잖아? 이 섬에 어떻게 들어왔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면 이해할 순 있다.

하지만 왜일까?

눈앞의 청년이 정상적인 루트로 섬을 방문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헤엄쳐서요."

"뭐?"

그리고 이어진 청년의 대답에 사내는 두 눈을 가만히 깜빡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새끼가 자꾸 날 놀리네?"

결국, 참다못한 사내의 손이 올라갔다.

하지만 청년이 자신의 장검에 손을 얹자, 사내는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너, 너 거기서 딱 기다려."

그리고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를 내뱉으며 동료들을 부르기 위해 부리나케 도망쳤다.

청년은 그런 사내의 볼품없는 모습에 고개를 내저으며 기다리란 말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봐 학생."

그러나 청년의 걸음은 다시 멈췄다.

텃밭에서 지금의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김용근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네, 말씀하세요?"

"시원한 음료수 한잔하겠나?"

"······."

뜬금없는 제안.

김용근의 아들은 아버지의 돌발행동에 기겁했지만, 장검의 청년은 그 말에 관심을 보였다.

"콜라 있습니까?"

"콜라는 물론 사이다와 주스도 있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

"크으으으으!"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콜라는 훈련소 종교활동 때 초코바와 함께 받았던 콜라다.

그런데 그때의 맛을 오늘 갱신했다.

몬스터에 쫓기며 바다를 헤엄치고, 약 두 시간 동안 자갈 갯벌을 걸어 온 끝에 다다른 섬 가의도.

이제 안전구역으로 가서 목욕탕물이나 한잔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친절한 주민이 건네준 콜라 뚱캔 하나는 극상의 청량함을 선물해주었다.

"하나 더 하겠나?"

그리고 친절한 주민이 이번엔 사이다를 내밀었고, 나는 또 원샷을 때렸다.

원랜 마을 주민들과 관련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강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상황에서, '음료수 한잔하겠냐'란 제안은 서큐버스의 유혹만큼이나 강력해서 도무지 거역할 수가 없었다.

콜라에 이어 사이다까지 한 번에 710ml의 음료를 해치운 덕에 갈증은 싹 가셨다.

덕분에 뒤늦게 가의도 주민과 엮이고 만 것에 대한 리스크를 떠올리게 되었다.

"밥은 먹었고?"

"괜찮습니다."

그래서 이어진 친절을 거절하려 했는데···.

"참치김치찌개와 계란후라이, 김 정도는 바로 내어줄 수 있네만···."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갈증만큼 허기가 진 상황에서 한국인이라면 거절하기 힘든 메뉴를 읊는 바람에 다시금 굴복하고 말았다.

결국, 나는 음료수를 얻어먹었을 뿐만 아니라 식사에 사과로 디저트까지 대접을 받고 말았다.

'아차' 싶었을 땐 이미 너무 늦었다.

어느새 목욕까지 마치고, 마당에 나와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서운 곳이다.'

뒤늦게 이상을 깨달은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도 편안해서 하마터면 자고 갈 뻔했다.

주섬주섬 인벤토리에서 검과 매직로브를 꺼내 착용했다.

덕분에 남들이 보면 만화 속 주인공 같은 모습, 내가 보면 중2병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가려고?"

"네, 웨이포인트 찍고 안전구역 가서 상점 좀 둘러보려고요."

"웨이포인트로 돌아갈 곳은 있나?"

"네."

자신을 김용근이라 소개한 친절한 주민은 길게 이것저것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그 집을 떠나려는데···.

그냥 이대로 가는 건 왠지 먹튀 같고 찜찜해서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레벨: 25

-칭호: 없음

-능력치

근력: 근력: 13(+1) 순발력: 15 마력: 11(+2)

잔여 능력치 포인트:

-보유 코인: 7,352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유 코인 부분을 터치했다.

[출금하실 금액을 입력하세요.]

그러자 이런 메시지와 함께 숫자 입력 칸이 등장했다.

나는 300을 입력하고 출금 버튼을 눌렀다.

눈앞에 황금빛이 번쩍이고 그것을 손으로 움켜쥐자 100코인 3개가 현물이 되었다.

"밥값입니다."

나는 그것을 김용근에게 건넸고.

그 금액을 본 김용근과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들이 헛바람을 삼켰다.

"아니, 300코인이라니···. 너무 많네. 필요 없어."

역시 안전구역을 낀 마을인 만큼, 코인의 사용법을 이해하고 있었다.

300코인이면 많은 금액이긴 하다.

그랑 다이어 울프 20마리 또는 하급 서큐버스 10마리 값이니까.

하지만 그만큼 귀한 식사를 대접받았기에 아깝지 않았다.

필요 없다며 코인을 돌려주려는 김용근을 뒤로하고 나는 그 집을 나섰다.

"여깄었네?"

그런데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집 밖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남자 7명에 여자 1명.

연령은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했다.

특이한 점은 그들이 모두 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식칼을 붙여 만든 창이나 도끼, 괭이 등을 쥐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안전구역 상점에 무기점은 없는 것 같다고 판단했다.

"뭡니까?"

내 물음에 아까 시비를 걸어왔던 사내와 함께 일행의 리더로 보이는 남성이 다가왔다.

리더는 평범한 30대 회사원처럼 보였다.

"딱히 그쪽하고 드잡이질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너무 경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기 들고 우르르 몰려와 놓고 할 말인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분명히 말했다.

"이 섬이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압니다. 이곳 일에 관여할 생각 없으니, 내버려 두시죠."

그리고 나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자신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다가가자 오히려 놀란 건 그쪽이었다.

"어딜 가려고.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에 따르란 이야기 들었지? 여기서 법은 바로 우리야."

그러나 리더는 내 앞에 도끼를 내밀며 길을 막았다.

그냥 뚫어 버릴까 싶었지만, 문뜩 궁금해졌다.

이들이 뭘 바라고 이러는 건지.

"뭘 원하시는데요?"

내 물음에 이제야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을까?

리더가 그럼 그렇지란 표정으로 실소를 흘렸다.

"너, 헤엄쳐서 왔다며, 사실이야?"

"네."

"경로는?"

"신진도요."

"언제 도착했는데?"

"아까요."

왠지 월광도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육지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쳤다.

'신진도'는 본래 섬이지만, 태안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육지나 다름이 없고, 가의도와의 거리는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인터넷을 보니까 이제 바닷속에도 괴물이 나온다던데?"

"이 섬에 도착하기 직전에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라고요. 운이 좋았죠."

"굳이 힘들게 이곳에 온 이유는?"

"섬에 웨이포인트가 있다고 들어서요. 뭔가 특별할 줄 알았죠."

이게 뭐하는 건가 싶은데.

적당히 대화만 하고 상황이 해결되면 나쁠 것 없으니,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섞으면서 적당히 답했다.

"레벨은 몇이야?"

"12이요."

레벨은 절반 정도 낮춰 불렀다.

하지만 실수였다.

내 입장에서 나름 낮춰 부른다고 낮춰 부른 건데, 이들에겐 지나치게 높은 수치였나 보다.

"이게 어디서 구라를!"

"인터넷에서 제일 레벨이 높은 사람도 10도 안 된다던데!"

그렇게 차이가 크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레벨이 10을 넘긴 사람은 충분히 있을 거다.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레벨 10 정돈 금방 올리죠. 아마 저 말고도 많을 걸요?"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리더의 도끼를 빼앗아 손잡이를 수수깡 꺾듯 똑 부러뜨렸다.

"······."

그때야 거짓말하지 말라던 사람들의 입이 오므렸다.

자신의 무기를 아무렇지 않게 부러뜨린 내 모습에 리더는 흠칫하더니, 헛기침을 했다.

"그럼 자넨 웨이포인트만 찍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겠군?"

"그렇죠."

나를 지칭하는 호칭이 너에서 자네가 되었다.

"그럼 자네에게 제안하지."

이제 슬슬 지루해져서 그냥 무시하고 돌파할까란 생각이 들 때.

리더는 제안이란 흥미로운 단어를 꺼냈다.

"자네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외부를 오갈 수 있는 사람이야."

"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건이 있으면 자네가 바깥에서 구해다 주게. 인벤토리가 있으니 제법 많은 물건을 옮길 수 있지 않나."

이런···.

거짓말하다가 발목을 붙잡혔다.

나 실은 육지에 못 가는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였지만, 나는 애써 태연하게 행동했다.

"결제와 보상은 어떻게 하시게요?"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내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네?"

"자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보복을 당할 테니까."

신박한 계산법이다.

난생처음 보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거래를 제안해온다고?

무슨 삼류 악당 같은 짓을···.

'뭐지? 나만 계산법이 이상한 것 같은가?'

내가 황당해하자, 리더는 나와 시비가 붙었던 사내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그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등지고 있던 김용근의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무슨 짓이야?"

-빡!

당연히 그런 헛짓을 용납할 리가 없다.

나는 아까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사내의 팔을 꺾은 후, 주먹으로 턱을 올려쳐 기절을 시켜 버렸다.

너무도 간단히 한 사람을 제압해서일까?

그들은 황급히 나와 거리를 벌렸다.

"움직이지 마!"

그리고 그때.

근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30대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내며 내게 소리쳤다.

놀랍게도 그의 손에는 사냥총이 들려 있었다.

"당신들이 마을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을지 눈에 선하네."

총기가 등장한 순간 레벨이고 뭐고 소용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리더의 얼굴에 뻔히 드러났다.

나는 득의양양해 하는 리더를 향해 물었다.

"내가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냥 서로 도우며 살면 좋잖아?"

어느새 내 말투는 반말로 바뀌어 있었다.

더는 상대를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세상이 무너지고. 법과 질서가 파괴되었잖나."

"그래서 내키는 대로 살겠다고?"

"그래, 이제 억압을 받을 필요가 없단 뜻이지."

"병이네, 병. 그거도 중증 중2병."

뭐, 조금은 이해가 되긴 한다.

강한 규율 속에 살아온 사람이라면 해방감을 느낄 법도 하니까.

안 그래도 세상이 파괴되고, 모두가 목숨을 위협받는 이 상황을 평등의 도래라 여기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인터넷으로 보았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럼 나도 내키는 대로 하면 되겠네?"

내 물음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럴 능력이 있긴 하고?"

비웃는 그들의 태도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사람에게 손가락을 겨눴다.

*

"어디 다치신 데는 없나요?"

내 물음에 김용근과 그의 아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부를 묻는 내 뒤로 관광객 파벌의 9명이 피떡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으으으."

"사, 살려."

"아파."

그렇다.

자신들이 세상의 주인인 양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던 이들에게 강제로 윤리와 도리라는 것을 뼛속에 새겨준 것이다.

원랜 간단하게 웨이포인트만 등록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들 때문에 괜히 피를 보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이런 놈들은 살려둬서 좋을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해양 몬스터의 밥으로 던져 주는 게 어떨까요?"

"그, 그건 좀."

무시무시한 내 제안에 김용근 부자는 기겁했고, 쓰러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왜 얌전히 갈 길 가겠다는 사람까지 건드려서 이 꼴을 당한단 말인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그럼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좋을 대로 처리하세요. 직접 피해를 본 건 여러분들이니까요."

"고, 고맙네."

어느새 마을 밖으로 김용근 부자 외에도 많은 주민이 나와 있었다.

일단 이들의 처우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상황 봐서 주민들이 감당 못 할 것 같으면, 바다에 던저 버리던가 해야지.

[가의도 웨이포인트가 저장되었습니다.]

[이동 가능한 웨이포인트 1개가 검색되었습니다.]

-월광도 (비용: 52코인)

나는 원래 목적지인 가의도의 안전구역에 향했다.

우선 웨이포인트를 저장시키고.

그 다음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안전구역의 상점을 살펴보았다.

016화 던전 탐색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