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레펜하르트는 멍청한 얼굴로 테스론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분명 얼굴은 테스론이 맞는데, 머리 위치가 상당히 높았다. 신장이 결국 2미터를 넘어 버린 그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전신을 감싼 저, 갑옷도 아니고 골렘도 아닌 괴상한 금속 덩어리는 대체?
당황하며 레펜하르트가 입을 더듬거렸다.
"뭐냐, 그 꼬락서니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테스론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네놈을 쓰러트리기 위한 힘이다."
레펜하르트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왠지 상황이 짐작이 갔다.
"네놈도 스테반인가 하는 놈처럼 이상한 거 얻어 입은 거냐?"
"이익! 이것은 위대한 고대의 힘을 집결시킨 아티팩트, 아다만드릴 슈트다!"
"...그러니까 그걸 얻어 입었다는 거 아냐?"
사 입지는 않았으니 얻어 입은 게 맞긴 하지.
테스론은 신음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부님이 보면 무덤에서 통곡하시겠군."
"응? 그 양반 아직 안 죽었을 텐데?"
"아, 실수. 나도 모르게 내심이 흘러나왔다."
나이도 많은 양반, 슬슬 천수 다 하지 않았으려나 라는 생각을 매일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저런 말이 나온 것이다. 머쓱해하며 레펜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변모한 테스론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찬다.
"용케도 그런 몰골을 하고 있구나, 테스론."
도구를 써 육체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치졸한 도피이며 부끄러움이라 여기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이 그냥 무기 정도가 아니라 도구로 온몸을 도배해 버리냐? 확실히 제라드가 보면 기가 막혀 거품 물었을지도 모르겠다.
테스론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사실 그도 어느 정도 부끄럽긴 했던 것이다.
하지만 테스론은 이내 표정을 풀었다.
"모든 것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작은 수치쯤은 감당할 수 있다."
테스론이 손을 들어 다시 안갑을 썼다. 매끈한 금속 얼굴 위로 눈동자만이 드러나 빛을 발한다. 자세를 잡으며 테스론이 말했다.
"이제 악몽을 끝내겠다, 마왕!"
레펜하르트도 로브를 벗어 던졌다. 두꺼운 근육이 달빛 아래 여실히 드러났다. 레펜하르트가 등 뒤로 지시를 내렸다.
"이놈은 내가 맡겠다! 다들 동족들을 이끌고 제플린을 빠져나가라!"
그러자 이종족 전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카다마이트의 시체를 수습하고, 시리스를 부축하고, 노예들을 다독이며 레펜하르트와 테스론을 피해 성문 쪽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니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다친 몸을 이끌며 레펜하르트 곁으로 와 선다.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도 피하도록 해요, 이니야."
이니야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는 것은 저 괴물뿐이 아닙니다."
그녀는 성벽 위의 마법사, 필레나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과연,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상당히 강력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렇군... 죄송하지만 부탁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저 마법사가 도주하는 탈주 노예 무리를 향해 마법이라도 난사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누군가는 남아서 저 마법사를 견제해야 하는 것이다.
카다마이트도 시리스도 쓰러졌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부상을 입은 이니야에게 그런 일을 맡겨야 하다니....
걱정 어린 레펜하르트의 표정에 이니야가 애써 웃으며 남은 한 팔로 알통을 만드는 시늉을 해 보였다.
"걱정 마세요. 저, 보기보다는 튼튼하답니다."
미소를 남기며 이니야는 등을 돌렸다. 레펜하르트를 스치고 지나가며 그녀가 귓속말을 건넸다.
"조심하세요, 갑옷도 문제지만 저자는 마법을 씁니다. 그것도 어지간한 고위 마법사 수준이에요."
그 마법이 아니었다면 그녀도 이렇게까지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이니야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평소에 비하면 느려 터진 움직임이었지만 그래도 오러 유저는 오러 유저였다. 마치 평지를 걷듯, 성벽 위를 빠르게 타고 올라간다.
성벽 위에 서 있던 필레나가 당황한 목소리로 메시지 마법을 날렸다.
"어쩌지, 테스론? 저놈들 도망가는데? 그리고 엘프 오러 유저는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고."
잠깐 고민한 테스론이 빠르게 대꾸했다.
"오러 유저를 상대해라. 오합지졸보다는 강자 하나를 해치우는 쪽이 나아. 상대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긴 하지만 부상이 심하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다."
"아, 알았어."
이니야의 모습이 성벽 위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제 이 자리에 남은 것은 테스론과 레펜하르트, 둘뿐.
레펜하르트가 두 발을 넓게 벌려 안정된 자세를 취하며 주먹을 겨누었다. 테스론도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마치 거울로 비친 듯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며 입을 열었다.
"잘도 이런 짓을 해 주었구나, 테스론! 네놈에게 죽은 카다마이트의 원혼을 달래 주마!"
"더 이상 옛날의 내가 아니다, 레펜하르트! 진정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힘을 맛보여 주마!"
두 거구가 동시에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두 사람의 기합이 허공에서 겹치며 메아리처럼 제플린의 밤하늘을 떨쳐 울렸다.
"타아아앗!"
3
강철의 육체가 포효한다. 치솟는 오러를 휘감고 대기를 찢으며 한 줄기 섬광이 되어 허공을 격한다.
"타앗!"
고함과 함께 테스론이 펀치를 내질렀다. 흠 잡을 데 없는 깔끔한 스트레이트, 한 치의 낭비도 없이 모든 힘이 한 점에 뭉쳐 레펜하르트의 안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 정도쯤이야!"
팔을 휘둘러 레펜하르트가 펀치를 걷어 냈다. 동시에 왼발을 길게 뻗어 미들 킥을 날렸다. 테스론이 재빨리 무릎을 올려 옆구리를 방어했다. 강철처럼 단련된 육체와, 정말로 강철을 능가하는 금속의 육체가 서로 맞붙었다.
터텅!
미들킥을 막은 테스론이 킥을 걷어 내며 양팔을 번갈아 휘둘러 댔다. 좌우 훅이 회전을 타며 레펜하르트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레펜하르트가 왼팔을 들어 방어하며 동시에 오른 주먹을 뻗었다. 황금빛 오러가 실린 붕권이 테스론의 명치를 향해 뻗어 갔다.
테스론이 눈을 빛냈다. 각도도 자세도 타이밍도 완벽한 일격이었다.
역시 자신의 육체다. 마법사의 손에 들어가고도 이 정도의 위력을 보이다니!
"제법이구나, 마왕!"
테스론이 몸을 비틀어 타점을 흘렸다. 레펜하르트가 손등치기를 날리며 후속 공격을 노렸다. 테스론도 마찬가지로 팔을 휘둘러 반격에 나섰다.
펑!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의 팔이 교차하며 부딪쳤다. 팔뚝과 팔뚝이 맞붙으며 뻐근한 감각이 전해져 왔다.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충격이 뼛속까지 느껴졌다.
반면 똑같은 충격을 받았을 테스론은 인상을 쓰긴 커녕 오히려 유쾌해하고 있었다.
"크크큭! 이 느낌이다! 이 느낌이야!"
얽힌 팔을 걷어 내며 테스론이 킥을 뻗었다.
"가스트리젠!"
하필 자세가 흐트러진 순간을 노린 터라 피하거나 공격을 흘릴 틈이 없었다.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하지만 이성과는 별개로, 혹독한 수행을 쌓은 그의 육체는 자연스럽게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피하지도 막지도 못할 때 짐 언브레이커블은 이렇게 가르친다.
-이왕 맞을 거면 같이 때려라! 그래야 덜 억울하다!
"가스트리젠!"
레펜하르트 역시 앞차기를 마주 질렀다. 서로의 명치에 서로의 발끝이 정확히 꽂혔다.
양측의 등 뒤로 금빛과 적황색의 오러 파문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뒤로 날려 갔다.
"크윽!"
그래도 마주 앞차기를 날린 덕에 공세의 위력이 상당히 감소되었다. 설사 피하지 못한다 해도 마주 공격을 하면 충분히 상대의 돌진을 막아 낼 수 있으니까.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르침이 일견 단순 무식할 뿐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꽤나 합리적인 면이 있는 것이다. 그저 무식하기만 했을 뿐이면 어찌 역대 후계자들이 대대로 권왕의 자리를 독점했을까?
통증을 애써 참으며 레펜하르트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느새 테스론이 발을 구르며 코앞까지 쇄도해 있었다.
"가르침은 잘 받았군! 반응이 괜찮아!"
날카로운 수도가 레펜하르트의 정수리를 찍어 왔다. 몸을 틀어 어깨로 수도를 받아내며 레펜하르트도 마주 펀치를 날렸다.
"스트레이트 캐논!"
황금빛 장막이 테스론의 전신을 뒤덮어 갔다. 하지만 테스론은 오히려 비웃음을 흘렸다.
"스트레이트 캐논은 다수의 적을 상대나 유용한 수법! 파괴력이 일점에 집중되지 않으니 막기도 쉽다!"
테스론의 주위로 누런 오러가 소용돌이치며 오러의 장막을 산산이 찢어발겼다. 스파이럴 가드로 스트레이트 캐논의 기세를 모조리 날려 버린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욕설을 흘렸다.
"제길!"
비웃음을 던진 주제에, 이번엔 테스론이 같은 기술로 응수했다.
"스트레이트 캐논!"
똑같은 형태의 오러 장막이 레펜하르트의 전신을 덮친다. 당연히 레펜하르트도 스파이럴 가드를 펼쳐 방어하려 했다.
그 순간, 테스론이 스트레이트 캐논에 실린 오러를 회전시키며 또 한 방의 펀치를 날렸다.
"스트레이트 캐논, 스파이럴!"
첫 번째로 날아온 오러 장막이 스파이럴 가드와 부딪치며 서로 상쇄되어 버린다. 레펜하르트가 구사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뒤이어 날아온 두 번째 스트레이트 캐논이 정통으로 레펜하르트를 덮쳐 갔다.
콰콰콰쾅!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며 레펜하르트는 수십 미터나 뒤로 날아가 버렸다. 어찌나 강력한 위력이었는지 충격파만으로도 도로가 파헤쳐지고 가로등이 몇 개나 꺾여 분질러진다. 강타를 맞은 레펜하르트의 육체가 건물 깊이 파묻혔다. 굉음과 함께 3층 건물이 통째로 무너지며 무수한 먼지와 파편이 비산했다.
"으으윽...."
레펜하르트는 신음을 흘리며 돌더미를 파헤치고 몸을 일으켰다. 이 육체로 건물 한두 개쯤 뚫는 거야 일도 아니니 등 쪽은 그리 아프지 않다. 하지만 스트레이트 캐논에 정통으로 당한 부위는 상당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테스론이 다가오며 껄껄 웃었다.
"스파이럴 가드는 같은 스파이럴 가드끼리 서로 상쇄된다. 사부로부터 이런 것도 안 배웠나?"
그는 첫 번째 연타에 스파이럴 가드를 섞어 레펜하르트의 방어를 깨부순 뒤 두 번째 스트레이트 캐논을 날렸던 것이다.
몸을 일으키며 레펜하르트가 안면을 구겼다,
'배운 적 없어, 그런 거....'
실제로 제라드는 저런 건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애초에 스파이럴 가드는 오직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예만이 구사할 수 있는 기술, 그리고 대대로 짐 언브레이커블은 후계자 구하기 힘들어 한 세대에 하나 구하면 다행인 무문이었다. 스파이럴 가드끼리 부딪칠 일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과연, 테스론도 그 사실은 금방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건 그냥 내 스스로 깨친 거였군."
역시 같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예라도 레펜하르트와 테스론의 경지는 차이가 심하다. 한쪽은 비록 기억뿐일지언정 권왕으로 수행해 온 수십 년의 경험과 경지가 있는 반면 레펜하르트는 순수하게 20대의 테스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단지 테스론의 육체가 워낙 부실한 탓에 예전엔 레펜하르트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대체 저 아티팩트는 뭐지?'
이를 갈며 레펜하르트는 테스론, 정확히는 그가 걸친 갑주를 바라보았다. 저 갑옷을 걸친 테스론은 완벽하게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가 되었다. 모든 기술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며 모든 방어법을 완전하게 소화해 버린다.
'완전히 예전의 권왕이 되어 버렸잖아? 뭐, 전생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테스론의 육체에 비하면 그래도 여전히 손색이 있지만....'
문득 레펜하르트는 전생의 테스론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저 갑옷, 이름이 아다만드릴 슈트라고 했던가?
확실히 저 아티팩트의 강도나 위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권왕으로 대륙의 최강자 자리를 양분하던 테스론에 비하면 아직 약했던 것이다. 멀쩡히 맨몸뚱이로 고대의 아티팩트조차 능가했었다니, 새삼 짐 언브레이커블이라는 무문이 얼마나 무식한 것들인지 실감이 난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피식거리자 테스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 공격이 아직도 우스운가 보지?"
"아니, 그래서 웃은 것은 아닌데...."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는 목을 좌우로 꺾었다.
그래, 확실히 테스론의 경지는 그보다 위였다. 무인으로서,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예로서.
하지만 레펜하르트 역시 전생에 놀고만 있지는 않지 않았는가? 그는 고금 제일의 마법사, 그가 이룩한 마법의 경지는 테스론과 비할 데가 아니다.
비록 마력이 모자라 지금은 빌빌대고 있지만 그는 한때 테스론뿐 아니라 대륙의 최강자 5인을 동시에 상대했던 최강의 마법사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자세 그대로 그가 주먹을 뻗었다. 익숙한 공격에 테스론이 코웃음을 치며 반격하려는 참이었다.
주먹을 뻗음과 동시에 레펜하르트가 마법 스펠을 토했다.
"나는 포효하는 노래, 래디언스 송!"
테스론은 눈을 크게 떴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펀치가 붕권의 형태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만이면 전혀 놀라울 것이 없겠지만 문제는 그 뒤로 다섯 줄기의 섬광 주문이 따라오는 게 아닌가?
"엥?"
당황하며 테스론은 상대의 붕권을 회피함과 동시에 스파이럴 가드로 섬광 마법을 걷어 냈다.
마법이 튕겨 나는 순간 레펜하르트가 점프해 크게 공중제비를 넘었다. 몸을 반회전시키며 발꿈치로 테스론의 정수리를 노린다.
이것 역시 그냥 흔한 발차기 기술 중 하나이지만....
"회전하는 불수레, 화염 바퀴를 토해 내 적을 친다! 휠 플레어!"
발차기의 궤도를 따라 화염 마법이 원반 형태로 맺히며 테스론의 눈앞 가득 피어올랐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이제는 테스론도 마법에 대해 익히 아는 것이다. 휠 플레어나 래디언스 송은 꽤나 고위 서클의 주문, 결코 수인 없이 발동시킬 수 있는 수준의 마법이 아니다.
"하아아압!"
당황한 테스론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계속 공세를 퍼부었다. 연달아 펀치를 뻗고 킥을 날린다. 훅과 스트레이트, 하단 차기와 상단 돌려차기 등 모범적인 체술의 연격이 계속 쏟아졌다.
그리고 그 동작 하나하나마다 계속 각종 공격 마법이 따라붙는다.
"프리즌 오브! 플레임 이그니션! 섞이고 관통하라, 포스 해머!"
화염과 냉기가 연달아 테스론, 아다만드릴 슈트를 두들긴다. 뒤이어 레펜하르트의 보디블로가 포스 해머를 동반하며 테스론의 복부에 정확히 꽂혔다.
콰아앙!
폭발과 함께 테스론이 저 멀리 날려 가 건물 깊숙이 처박혀 버렸다. 슈트의 투구 속에서 신음과 함께 피가 토해졌다.
"쿠, 쿨럭!"
무너진 건물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테스론은 믿을 수 없어 했다. 아다만드릴 슈트, 온갖 귀한 마법 금속으로 만들어진 이 아티팩트의 복부 부분이 움푹 파여 있었다. 게다가 육체의 충격도 장난이 아니다. 피를 토한 걸로 보아 내장까지 충격이 닿았음이 분명했다.
레펜하르트의 오러만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 하지만 각종 마법의 효과를 이용해 충격을 계속 중첩시키니 이 정도의 파괴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마법도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하게 구사하면 이 정도까지 위력을 보일 수 있는 건가? 과연 마왕....'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수인 없이 주문을 외우는 거지?"
그때 레펜하르트가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바꿨다."
"응?"
레펜하르트가 허공에 가볍게 잽을 뻗었다. 스피드 위주로 빠르게 끊어 치는, 더도 덜도 아닌 평범하고 모범적인 잽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레펜하르트의 손끝에 전격이 맺힌다. 빠지직 방전하는 뇌전의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주먹질하면서 마법까지 쓰기가 벅차서 말이지, 모든 마법 주문의 소매틱을 짐 언브레이커블의 동작에 맞춰서 바꿔 버렸지!"
테스론이 기가 막혀 입을 쩍 벌렸다.
"미친! 그런 짓이 가능하단 말이야?"
☆ ☆ ☆
테스론은 멍하니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경악 때문에 잠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우리 무문의 저 무식한 동작이 마법의 소매틱이 된다고? 저게 말이 돼?'
단순했던 옛날의 테스론이라면 그냥 '어, 그놈 신기한 짓을 하네?' 하고 무심히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에 먹물 좀 들어가고 나니 너무 놀라워 머리가 텅 비어 버릴 지경이었다.
'마왕쯤 되면 저런 것도 가능한 건가?'
소매틱, 수인을 맺는 이유는 바로 마나를 재배열하는 데 필요한 정확한 수치를 지정하기 위해서이다. 설계도를 그릴 때 자를 대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랄까? 그래서 경지에 오르면 수인을 제외하고 언령만으로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
마법 자체에 직접적으로 개입되는 것이 아니기에 각 학파마다 소매틱의 손동작은 모두 다르다. 그러니 짐 언브레이커블의 동작이 곧 소매틱이 되는 것도 아주 이치에서 어긋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각 학파의 소매틱은 모두 정해진 마나의 속성에 따라 오랜 세월 갈고닦으며 가장 최적화된 움직임이다. 각 학파마다 최고의 효율을 보이는 수인을 개발하기 위해 몇백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지금 레펜하르트는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마법사들이 갈고닦아 겨우 완성시킨 수인을 고작 혼자서, 이렇게 단시간에 재구성해 버린 것이다!
'천재, 천재,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새삼 마왕의 저력이 두려워지는 테스론이었다.
한편, 레펜하르트는 재차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연환 기격탄!"
레펜하르트가 허공에 연달아 펀치를 뿌렸다. 십여 개의 오러 탄환이 주먹을 통해 쏘아졌다.
"윽!"
당황은 당황이고 전투는 전투, 지금은 마냥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얼른 머릿속 상념을 지운 뒤 투지를 끌어 올린다. 테스론이 금속 부츠로 땅을 강하게 밟았다.
파아앗!
싯누런 오러가 간헐천처럼 솟구치며 날아오는 기격탄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격탄이 솟구치는 오러에 휩쓸려 위쪽으로 빗나갔다. 기격탄을 튕기며 테스론이 안색을 굳혔다.
'연환 기격탄 정도야 쉽게 막을 수 있지만....'
기격탄은 탄환 형태의 투사체이기 때문에 수직 방향의 충격에 약하다. 굳이 스파이럴 가드를 쓸 필요도 없이, 이렇게 살짝 오러 충돌을 일으켜 주기만 해도 바로 궤도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테스론은 반격에 나설 수 없었다. 기격탄을 날리는 자세가 곧 소매틱이 되면서 레펜하르트가 또다시 주문을 발동시켰으니까.
"터지며 얼어붙어라! 쿼터즈 프리즌 오브!"
곡선 궤적을 그리며 네 개의 냉기 구슬이 크게 돌아가 테스론의 등 뒤를 노렸다. 테스론이 혀를 찼다.
'역시 저 동작도 소매틱화시켰나!'
프리즌 오브의 파괴력 자체야 아다만드릴 슈트로 충분히 버틸 수 있겠지만 저 마법은 냉기 폭발을 일으키며 상대를 강제로 얼어붙게 만드는 부과 효과가 있다. 지금 상황에서 움직임을 제어당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도박, 반격을 포기하고 테스론이 오러를 끌어 올렸다.
"스파이럴 가드!"
그렇게 테스론이 프리즌 오브를 갈아 버리는 틈을 타 레펜하르트가 다시 공세를 취했다. 접근전으로 나서며 좌우 훅을 맹렬히 뿌려 댄다.
휘휘휙!
좌우 훅이 쉴 새 없이 연계되며 펀치의 폭풍이 되어 테스론을 엄습해 갔다. 테스론도 가드 형태를 취하며 맞섰다. 펀치와 킥이 허공에서 몇 번이나 맞부딪쳤다.
육체의 강도나 기술의 숙련도는 여전히 테스론이 위,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마법을 추가해 공세를 퍼부으니 점점 승기가 그쪽으로 기울었다.
상대의 명치에 낮은 위치의 스매시를 날리며 레펜하르트가 시동어를 내뱉었다.
"배리어 오브 다크!"
간단한 어둠의 장막을 만드는 1서클 주문, 그것이 테스론의 투구를 감쌌다. 일순간 시야가 어두워졌지만 테스론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스매시를 막아 낸 테스론이 버럭 호통을 치며 좌우 미들 킥을 번갈아 날렸다.
"흥! 오러 유저가 눈 좀 가려졌다고 당황할 것이라 생각했나?"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미들 킥이 정확하게 레펜하르트를 향해 뻗어 왔다. 오러 유저쯤 되면 설사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기감만으로 상대의 모든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무릎과 팔뚝을 붙여 미들 킥을 방어하며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알아, 나도 그쯤은!"
테스론이 바로 휘돌려 차기로 레펜하르트의 머리를 노렸다. 무릎을 굽힌 뒤 레펜하르트가 크게 어퍼컷으로 반격했다. 테스론이 목을 뒤로 틀어 어퍼컷을 피하는 순간, 다시 마법이 발동되었다.
"하이드 마나 스트림!"
마력의 흐름을 감추는 정신계 마법이었다.
테스론은 당황했다.
분명히 기감은 그대로였지만, 이제껏 주위에서 흐르던 마력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상대의 움직임은 보여도 마법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소리다.
사실 마법사가 전사를 상대로 시야를 멀게 하는 수법을 쓰는 것은 별로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경우 최대한 몸을 보호하며 마법사의 본체를 노리는 것이 전사의 상식이다. 날아오는 마법이 안 보인다 해도 마법사 자신의 기척은 그대로 느껴지고, 육체가 약한 마법사라면 공격이 조금만 스쳐도 시야 제어 마법이 깨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 마법을 쓴 자는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육체를 지닌 이 중 한 명인 것이다. 스치긴 커녕 정타로 두들겨 패도 마법이 깨질 리가 없다!
'크으, 우리 무문이 마법까지 쓰면 이렇게 치사한 전법도 가능해지는 거냐?'
당황한 테스론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옆차기를 찔러 넣었다. 발차기 자체도 위력적인데, 당연하게 마법까지 그 뒤를 따른다.
"플레임 캐논!"
킥을 피해 몸을 트는 테스론의 어깨에 불꽃의 탄환이 적중했다. 폭발과 함께 자세가 일순 흔들린다. 허점을 놓치지 않고 레펜하르트가 연달아 족도足刀를 뻗었다.
"가스트리젠!"
가공할 파괴력이 실린 앞차기가 테스론의 명치를 가격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동시에 발동된 마법, 포스 캐논이 정확한 타이밍으로 가스트리젠과 교차하며 몇 배의 충격을 가했다.
"크윽!"
이중, 삼중으로 증폭된 타격이 아다만드릴 슈트를 뚫고 본체에게까지 전해진다. 테스론이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목구멍에서 핏물이 올라왔다. 입가에 작게 뚫린 투구의 틈새 사이로 선혈이 흘러나왔다.
'젠장,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이대로 눈뜬장님이 되어 계속 마법에 난타당할 수는 없었다. 테스론이 허공에 수인을 맺으며 소리쳤다.
"디스펠 매직! 뷰 마나 스트림!"
이중 영창을 구사해 테스론은 시야 제어 마법을 풀고 마력을 다시 감지하게 해 주는 마법을 걸었다. 테스론 역시 지금은 누구 못지않은 고위 마법사인 것이다. 하지만....
"더블 캔슬레이션!"
테스론의 마법이 발동되기가 무섭게 바로 취소되어 버렸다. 같은 고위 마법사라지만 레펜하르트와 테스론의 마법 경지는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수준, 진작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내 앞에서 마법을 쓰느냐!"
호탕하게 외치며 레펜하르트는 테스론을 몰아붙였다. 펀치와 킥, 마법이 폭풍처럼 난무하며 테스론에게 쏟아졌다.
펀치와 킥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만 마법의 공격엔 도저히 반격이 불가능하다. 테스론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젠장, 고작 눈 좀 가려진 정도로 이 꼴이라니!'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배리어 오브 다크는 단순한 1서크 주문, 테스론도 충분히 해제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는 레펜하르트처럼 '동시에' 마법과 무술을 구사할 수가 없다. 쉴 새 없이 공격이 날아드는데 마법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스론은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마법을 맞아 가면서도 억지로 밀고 들어와 반격을 시도한다.
쾅! 쾅 콰콰쾅!
금빛 오러와 적황색 오러, 각종 마법이 허공에서 계속 충돌하며 대기를 울린다. 하늘이 노한 것처럼 뇌성이 끝없이 울리며 충격파로 인한 폭풍이 불었다.
공방을 주고받으며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쳇, 저 갑옷 진짜 단단하네.'
승부 자체는 레펜하르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테스론이 한 방 때릴 동안 레펜하르트는 족히 두세 방은 더 때린다. 마법과 오러의 타이밍을 맞춰 제법 충격을 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래도 저 아다만드릴 슈트를 부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몇 번은 방심하다 제대로 맞은 테스론도 이제는 진지하게 정신을 집중하고 타점을 흘려 정타를 허용하지 않으니 치명타를 먹일 수가 없다.
'역시 저 갑옷을 뚫고 본체에 충격을 가해야 해.'
계속 공격을 퍼부으며 레펜하르트는 점점 테스론에게 접근했다. 연타로 정신을 돌리며 점점 더 상대의 가슴께로 파고든다.
둘 사이의 거리가 코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무렵.
레펜하르트가 아다만드릴 슈트의 가슴에 주먹을 가져다 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거리를 제대로 잡았다! 이 거리라면 테스론도 피하거나 흘리지 못해!
주먹을 통해 가공할 관통력이 뿜어져 나왔다!
"제로 임팩트!"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몰랐다. 테스론이 몰라서 그가 접근하길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는 걸.
"걸렸구나, 마왕!"
쾌재를 외치며 테스론 역시 레펜하르트의 가슴에 주먹을 가져갔다. 이제까지는 그놈의 마법 때문에 도저히 정타를 날릴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붙어 있으면 마법이 아무리 난무하건 상관없는 것이다.
"제로 임팩트!"
퍼엉!
터텅!
타격음과 금속음이 동시에 울리며 양측의 등 뒤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서로에게 제로 임팩트를 날린 두 사람의 신형이 공처럼 뒤로 튕겨 날아갔다.
두 줄기 신음이 양쪽 모두에게서 터졌다.
"크윽!"
"커어억!"
4
숨을 헐떡이며 레펜하르트는 테스론을 노려보았다.
그토록 두들겼는데도 테스론은 여전히 두 다리 굳건히 대지를 밟고 서 있었다. 아다만드릴 슈트 역시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금은 갔을지언정 여전히 제 위용을 발하며 번뜩이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여기저기 터지고 부어 피투성이 상태다. 전신에서 통증이 올라오고, 그토록 단련한 육체 여기저기서 선혈이 흐르고 있다.
입맛이 썼다.
'체술도 열심히 수행했고, 마법과 오러를 융합하는 방법까지 개발했는데도 이 꼴이라니....'
그토록 단련하고 단련한 육체를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다니, 테스론도 테스론이지만 저 아다만드릴 슈트의 위력에 치가 떨렸다.
'저놈, 대체 어디서 저런 걸 얻은 거야, 도대체?'
새삼 10서클의 자신이 그리워진다. 10서클을 구사할 수 있다면 이렇게 고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쓸데없이 아다만드릴 슈트 죽어라 두들길 필요도 없이 A.M.P 쇼크웨이브 한 방으로 간단하게 고철덩이로 만들 수 있었을 테니까.
한편, 입맛이 쓰기는 테스론도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아다만드릴 슈트를 얻었을 때만 해도 충분히 마왕을 해치울 수 있을 거라 여겼거늘....'
똑같이 육체가 뒤바뀌어 비슷한 장, 단점을 얻게 된 두 사람이다.
그런데 테스론은 현 상황에서 도저히 레펜하르트를 당해 낼 방법이 없어 강력한 고대의 기물, 아다만드릴 슈트의 힘까지 빌려 가며 싸우고 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아무런 아티팩트 없이 오로지 본신의 힘으로만 이런 위력을 보이는 것이다.
'똑같은 처지인데 이런 비참한 상황이라니....'
절로 이가 악물어진다. 하지만 잠시 후, 테스론은 굴욕감을 떨쳤다.
'아니, 생각해 보면 똑같은 처지인 것은 아니지.'
전생 때의 마왕은 테스론 자신뿐 아니라 검성 사이러스며 빛의 마도사 제이드, 성녀 엘린과 용사 알렉스마저 동시에 감당해 내던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다. 솔직히 그 당시에는 진짜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았었다.
'그에 비하면 뭐, 많이 양호한 거군.'
그때는 감히 일대일로 상대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자였다. 비록 아티팩트의 힘을 빌렸다고는 해도 이렇게 맞상대할 수 있게 된 것이 어디인가?
테스론은 피식 웃었다. 조금 전 제로 임팩트를 제대로 먹인 덕인지 시야를 가리던 암야 마법은 이미 풀려 있었다. 레펜하르트를 똑바로 노려보며 테스론이 입을 열었다.
"역시 대단하구나, 마왕 레펜하르트. 아다만드릴 슈트를 얻고도 이렇게 고전할 줄은...."
테스론이 자세를 잡았다. 그가 차갑게 뇌까렸다.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떤 괴물이 될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 기필코 네놈을 이곳에서 쓰러뜨리고 인류의 미래를 구하겠다!"
레펜하르트도 자세를 잡았다. 투기를 피어 올리며 그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놈의 인류 미래 타령도 지겹다! 후딱 끝내자!"
기합을 길게 늘어트리며 두 사람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두 거체가 부딪칠 때마다 파문이 시가지를 마구 부수어 댔다. 안 그래도 이미 제플린 서부 성문 근처는 둘의 전투 여파로 폐허가 된 상태, 거기에 또다시 오러 파문이 덮치니 이젠 숫제 쑥을 키워도 쑥쑥 잘 자랄 지경까지 와 버린다.
쉴 새 없이 테스론과 레펜하르트는 계속 상대를 가격했다. 그때마다 서로 피를 흘리고 신음을 토했다. 하지만 둘 다 좀처럼 쓰러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주먹을 내지르며 레펜하르트는 생각했다.
'역시 저 무식하게 단단한 갑옷은 보통 기술로는 부술 수 없어.'
펀치를 걷어내며 테스론도 생각했다.
'과연 내 육체다, 어설픈 공격은 먹히지 않겠어.'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공유했다.
'캘러미티 혼밖에 없다!'
공방을 주고받으며 둘 다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테스론도 레펜하르트도, 이제껏 괜히 힘 아끼려고 캘러미티 혼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캘러미티 혼은 심기체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궁극기. 그런 만큼 완벽한 자세를 취해야 비로소 제 위력이 나온다. 적절한 타이밍 없이 아무 때나 막 쓸 만큼 편한 기술이 아닌 것이다.
타 유파의 오러 유저와 상대할 때야 캘러미티 혼에 대해서 모르니 적당히 타이밍 맞춰 쓸 수 있지만 테스론이나 레펜하르트나 모두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예, 캘러미티 혼을 쓰려는 기색만 보여도 바로 훼방이 들어올 것이라 함부로 시도하기엔 위험이 너무 크다.
"타앗!"
풍차처럼 연달아 몸을 돌려 연환돌려차기를 날리며 레펜하르트가 소리쳤다.
"컨트롤 오브젝트!"
부서진 건물의 파편이 레펜하르트의 마법에 이끌려 허공으로 떠오른다. 돌려차기로 테스론을 밀친 뒤 바로 파편 더미를 컨트롤 해 내던진다. 무수한 돌 우박이 테스론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말이 좋아 파편이지, 하나하나가 수 톤 가까이 되는 돌덩이들이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테스론이라도 주춤하지 않을 수 없을 터!
파편을 던진 뒤 바로 레펜하르트가 캘러미티 혼을 준비하는 참이었다. 테스론이 날아오는 바위덩이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조잡하구나, 레펜하르트!"
그러더니 대뜸 바위를 향해 돌진하며 스파이럴 가드를 펼쳤다. 평소의 스파이럴 가드라면 바위를 튕겨 내며 딜레이가 생겼을 텐데....
"하아압!"
테스론의 스파이럴 가드가 송곳처럼 뾰족해지며 그대로 바위를 관통해 버렸다. 스파이럴 가드를 뾰족하게 만들어 전신을 드릴처럼 만든 것이다.
그대로 바위를 뚫고 나오며 테스론이 바로 레펜하르트의 코앞까지 닥쳤다. 그리고 막 오러 파문을 중첩시키려는 그의 무릎을 걷어찼다.
"윽!"
정확하게 오러를 전달하는 기혈 부분을 노린 것이라 준비하던 캘러미티 혼이 깨졌다. 역시 같은 문파답게 캘러미티 혼의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며 레펜하르트가 펀치를 내뻗었다.
"기격파!"
충격파를 쏘아 테스론의 접근을 저지하며 레펜하르트는 거리를 벌렸다. 도중에 멈춘 테스론이 발 하나를 들더니 히죽 웃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이라면!"
그대로 옆에 있는 가옥의 벽을 걷어찬다. 오러 파동이 건물 전체를 휘감으며 굉음을 냈다. 반파된 건물 한 채가 기둥째 뽑히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응당 통 크게 놀아야 하는 법!"
허공에 뜬 건물을 테스론이 펀치로 후려갈겼다. 레펜하르트가 치를 떨었다.
"저, 저 무식한 새끼!
통 큰 것도 정도가 있지! 아예 집째 뽑아 던지다니!
레펜하르트가 두 팔로 정면을 감싸며 스파이럴 가드를 시전했다. 그의 역량으로는 테스론처럼 스파이럴 가드를 자유자재로 변환시킬 재주가 없다. 그래서 그저 강렬하게 회전시키며 몸을 방어하는 데만 치중했다.
콰지지지직!
오러의 회오리가 건물 모서리를 갈아 버리며 산산이 박살 냈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방어하는 동안 테스론이 캘러미티 혼을 준비했다.
양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오른 주먹을 허리 뒤로 뺀다. 전신의 오러가 정명한 이치에 따라 기혈을 타고 흐르며 빛의 고리가 된다.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지하기엔 너무 늦었다. 남은 방법은 그 역시 캘러미티 혼으로 맞서는 것뿐!
고오오오!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의 전신으로 황금빛 오러가 불길처럼 피어올랐다. 빛의 고리가 서로의 주먹 위로 차곡차곡 맺히기 시작한다. 1중첩, 2중첩, 3중첩, 4중첩....
캘러미티 혼을 준비한 레펜하르트가 테스론을 노려보았다. 순간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윽?"
테스론의 주먹 위로 또 하나의 오러 파동이 요동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번쩍 떴다.
"설마 5중첩?"
유쾌하게 웃으며 테스론이 몸을 날렸다.
"이제 끝이다! 마왕 레펜하르트!"
이를 갈며 레펜하르트도 마주 몸을 날렸다. 두 줄기 오러가 섬광이 되어 제플린 시가지를 일도양단한다. 서로를 향해 두 명의 권왕이 동시에 주먹을 뻗었다.
"캘러미티 혼!"
거대한 파괴력을 담은 재앙의 뿔, 그것이 서로 충돌했다. 막대한 파괴력이 양방향으로 폭포처럼 터져 나갔다. 대지가 흔들리고 하늘이 요동치며 짙게 깔린 먹구름이 휩쓸려 잘게 찢어져 버렸다.
천지조차 흔드는 가공할 일격의 교차, 그 승자는 테스론이었다.
사지가 모두 찢기는 듯한 끔찍한 고통 속에서 레펜하르트가 처절한 비명을 터트렸다.
"크아아악!"
☆ ☆ ☆
창도 칼도, 그 어떤 공격도 버텨 내던 불굴의 육체.
그것이 걸레짝처럼 비틀어진 채 허공을 나부낀다. 굳건하던 근육은 모두 뒤틀리고 칼날도 튕겨 내던 피부는 참혹하게 찢겨 선혈을 줄줄 흘린다.
피투성이가 되어 레펜하르트는 제플린 성벽 깊숙이 파묻혔다. 얼마나 혹독하게 당한 것인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이 없다. 신음을 흘리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테스론이 혀를 찼다.
"용케도 그런 짓을...."
캘러미티 혼, 4중첩과 5중첩의 파괴력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중첩을 쌓을 때마다 몇 배로 증폭되는 기술이 바로 캘러미티 혼, 중간에 상쇄된 힘을 제하고서라도 지금 레펜하르트는 최소, 캘러미티 혼 4중첩을 아무 오러 방어 없이 맨몸으로 맞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아무리 단련된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라도 산산조각이 났어야 장성인데....
"거기서 마법으로 몸을 지키다니...."
저 가공할 마왕은 그 순간에서도 프리스매틱 배리어를 비롯, 각종 마법 장벽을 펼쳐 캘러미티 혼의 위력을 줄였던 것이다. 뭐, 무슨 수를 썼는지야 대충 짐작이 가지만.
"하긴, 다른 동작 다 소매틱화시켰는데 캘러미티 혼이라고 안 될 것도 없겠지."
테스론의 주먹에 떠오른 다섯 개의 오러 고리를 본 순간 레펜하르트는 공격을 포기했다. 부딪쳐 봐야 100퍼센트 패할 것이 뻔하니 대신 위력을 줄이는 데 전력을 다한 것이다.
4중첩의 캘러미티 혼으로 최대한 충격을 상쇄하며 구사할 수 있는 모든 마법으로 몸을 방어한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빈사 상태가 되었으니, 그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 만큼, 테스론도 무사하진 않았다.
"나도 아슬아슬했군."
아다만드릴 슈트를 내려다보며 테스론이 고개를 저었다. 그 단단하던 아다만드릴 슈트의 전신에 거미줄 같은 금이 쩍쩍 가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파편이 투둑투둑 떨어지는 형상이 당장이라도 부서지기 일보 직전으로 보였다.
본체 역시 여기저기 뼈에 금이 가고 근육이 부어 한동안 요양을 필요로 할 정도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캘러미티 혼끼리의 충돌은 아다만드릴 슈트의 충격 허용량을 아득히 뛰어넘어 내부의 테스론에게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것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에 비하면 실로 양호한 상태다. 지금의 마왕은 실로 다 잡아 놓은 사냥감이나 다름없다.
테스론이 레펜하르트에게 다가가며 살기를 피웠다.
"용케 즉사는 피했다만... 그래 봤자 죽음이 조금 미루어졌을 뿐이다."
레펜하르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부상이 너무 심한 탓일까? 숫제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텅 빈 채 기묘한 감각만이 머릿속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
그저 떠오르는 것은 자신을 덮쳐 왔던 테스론의 캘러미티 혼, 그 속에 담겼던 강렬한 5중첩의 오러뿐이었다. 그 힘을 마주한 순간 전신의 모든 감각이 최대로 활성화되었다. 아주 사소한 것조차 세밀하게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가공할 감각, 그 감각 덕분에 마법을 발동시켜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뭔가? 이 감각은?
마치 멀리서 세상 전체를 바라보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코앞에서 아주 작은 것을 들여다보는 듯한 감각.
갑자기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
한 줄기 벼락이 그의 전신을 관통했다. 머릿속으로 뭔가가 폭발했다.
그래, 폭발이다. 영감靈感의 폭발.
"아아아!"
기억 속 풍경의 일부가 자연스럽게 뇌리 속에 재생되었다. 그것은 부서진 비석의 파편,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던 글자가 새겨 있던 수많은 조각들.
그 조각이 심상 속에서 차곡차곡 짜 맞춰지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머리로 퍼즐 조각을 외우고 재배열하여.
무인의 감각으로 그 글귀를 읽고 받아들인다.
'이건....'
순간 레펜하르트는 깨달았다. 희열로 몸이 떨려 왔다.
'이것은...!'
그의 스승이 남겼던, 진정한 의미로 제자에게 주는 선물.
'캘러미티 혼 5중첩!'
기억과 감각이 합일하며 결국 마지막 둑이 무너졌다. 깨달음의 홍수가 뇌리를 가득 흘러넘치며 기혈로 흘러내려 말라붙었던 전신을 촉촉이 적셨다.
"하하...."
쓰러진 레펜하르트의 입에서 통쾌한 광소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핫!"
☆ ☆ ☆
"저, 저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레펜하르트의 모습에 테스론은 눈을 부릅떴다.
아니, 그뿐이 아니었다. 분명 꼼짝도 못 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던 레펜하르트가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레펜하르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허공을 응시한다. 겉보기엔 정신이 나간 것 같지만 기감을 통해 확연히 느껴진다. 갑작스럽게 증폭한 레펜하르트의 오러가 사지를 흐르며 놀라운 속도로 그를 회복시키고 있다!
우우웅!
일어선 레펜하르트의 전신으로 황금빛 오러가 흐르며 상처가 빠른 속도로 수복되어 갔다. 아무리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가 자가 치유에 특화되어 있다고는 해도 말도 안 되는 회복력이다.
저 현상을 테스론은 잘 알고 있었다. 그도 왕년에 몇 번이나 겪어 본 적이 있었으니까.
"이 마당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어?"
오랫동안 막혀 있던 벽이 허물어지며, 그 속에 담겨 있던 거대한 생명의 우물이 단숨에 흘러넘치는 것.
바로 오러 유저들이 각성, 혹은 깨달음이라 부르는 경지다.
"하아...."
완전히 몸을 일으킨 레펜하르트가 호흡을 골랐다. 여전히 전신이 상처투성이였지만, 그래도 방금 전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육체가 호전되어 있었다. 저 정도면 더 이상 다 잡은 사냥감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순간 테스론은 자신의 약점을 깨달았다. 아무리 왕년과 비슷한 감각이라 할지라도 아다만드릴 슈트는 어디까지나 신외지물, 그의 육체가 아니었다. 레펜하르트와 달리 아다만드릴 슈트는 오러로 스스로를 치유하지 못한다.
"제기랄!"
욕설을 흘리며 테스론이 재차 자세를 잡았다.
아직이다. 아직은 괜찮다.
아무리 깨달음을 얻었다 한들 그것은 테스론과 동일한 5중첩의 경지일 것이다. 아무리 회복이 되었다 한들 평상시와 비하면 여전히 중상일 터였다.
그 정도면 아직 충분한 승산이 있다!
"마왕이면 마왕답게 마법이나 잘 쓸 것이지! 주제에 무슨 각성이야?"
툴툴대며 테스론이 다시 한 번 주먹을 허리 뒤로 빼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캘러미티 혼을 쓸 정도 여력은 있었다.
웅웅웅웅웅!
다섯 개의 오러 파동이 테스론의 건틀렛을 타고 흐르며 터질 듯 요동을 쳤다. 주먹을 겨눈 채 테스론이 소리쳤다.
"질기기도 하구나, 마왕! 하지만 두 번의 요행은 없다!"
레펜하르트도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불끈 쥔 주먹으로 오러를 이끌어 낸다. 오러 파동이 연달아 생성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알 수 없는 희열이 가슴 가득 벅차오른다. 레펜하르트 역시 테스론을 향해 주먹을 겨누었다.
'이것이 캘러미티 혼, 5중첩....'
테스론이 차갑게 웃었다.
역시 예상대로 5중첩의 경지는 뚫은 모양인데....
'같은 5중첩이라고 해도, 그 속에 담긴 경지는 결코 나와 같지 않을 터.'
같은 서클의 마법을 구사하더라도 테스론과 레펜하르트의 수준은 차원이 다르다. 비록 현재 경지는 낮다 해도 그 속에 담긴 영혼은 틀림없는 10서클의 궁극 마도사이니까.
즉, 같은 5중첩 캘러미티 혼을 날려도 레펜하르트는 테스론을 따라갈 수 없다. 몸이 따라가지 못할지언정, 그의 영혼은 이미 7중첩까지 다다른 캘러미티 혼의 경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니까!
테스론이 자신만만하게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힘으로 뭉개 주마!"
그때였다.
5중첩을 준비하던 레펜하르트가 나직하게 읊조렸던 것은.
"권마합신拳魔合身."
순간 테스론은 눈을 의심했다. 레펜하르트의 팔뚝에 맺혀 있던 다섯 개의 오러 고리, 그 앞에 마력이 응집하며 또 하나의 빛의 고리가 생성된 것이다. 오러가 아닌, 고도의 마력이 응집된 마나 파동이었다.
"6, 6중첩?"
레펜하르트가 씨익 웃었다.
"아, 이제 이거 되네."
테스론의 눈동자에 불신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말도 안 된다. 저런 짓이 허용될 리가 없다!
'어디서 헛수작을!'
이를 악물며 테스론이 전력을 다해 주먹을 내뻗었다.
"캘러미티 혼!"
레펜하르트 역시 공중의 테스론을 향해 주먹을 올려 쳤다. 장대한 일격이 용솟음치며 허공을 갈랐다.
"6중첩, 캘러미티 혼!"
빛이 세상을 꿰뚫었다.
☆ ☆ ☆
차탄 왕궁의 한 높은 석탑.
은발의 작은 소녀, 세렐라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신음을 흘렸다.
"아...."
새벽이 다가오는 제플린의 밤하늘, 그 일부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새벽을 일찍 불러들인 듯한 거대한 황금색 빛의 기둥, 그것이 대지를 통해 솟구쳐 아득한 창공에 닿아 구름을 물들이며 대기를 뒤흔든다.
"저건...."
제플린 시내 어디에서든 볼 수 있을 거대하고 가공할 빛, 너무도 찬란해 위엄마저 느껴질 것 같았다.
천신이 강림한 듯한 화려한 빛무리 속에 담긴 힘과 권능을 느끼며 세렐라인은 자기도 모르게 팔꿈치를 감싸 안았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떨렸다.
"뭐지...."
자기도 모르게 그녀는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어릴 적에 불안감을 느낄 때마다 해 왔던 버릇이었다. 하지만 은의 수호자가 된 지 어언 수십여 년, 불로의 힘을 얻은 후로는 사라졌던 버릇이었는데....
세렐라인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언제나 무심하던 그녀의 고운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고운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불길해... 저 빛은 너무 불길해...."
<10권에서 계속>
10권
제33장 승자와 패자
1
제플린 서부를 크게 가로지르는 두꺼운 성벽 위.
그곳에서 두 여인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보랏빛 머리의 엘프 여검사, 이니야와 적갈색 로브 차림의 마법사, 필레나였다.
"바람이여! 내 손에 임해 나의 인도를 따르라! 윈드 커터!"
윈드 워크 마법으로 빠르게 뒤로 이동하며 필레나가 주문을 영창했다. 다섯 바람의 칼날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흡!"
짧은 기합을 터트리며 이니야가 검을 연속으로 찔러 갔다. 은빛의 오러를 머금은 찌르기가 날아드는 바람의 칼날을 일일이 허공에서 분쇄시켰다.
필레나가 바로 마법을 연계했다.
"윈드 봄버!"
강렬한 풍압을 유도하는 윈드 봄버는 그 자체로는 그렇게 살상력이 높은 마법이 아니다. 하지만 필레나는 절묘한 타이밍으로 분쇄된 윈드 커터를 촉매 삼아 윈드 봄버를 시전했다. 덕분에 풍압 속에 수많은 윈드 커터의 파편이 실려 이니야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큭! 제법인데...."
거리를 좁히려던 이니야가 혀를 찼다. 그냥 평범한 윈드 봄버라면 돌진력을 높여 통과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안에 파편이 섞여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돌진을 멈춘 뒤 그녀가 화려한 손놀림으로 검을 휘둘렀다. 찬란한 검화劍花가 피어오르며 검에 맺힌 은빛 오러가 허공에 얽히며 빛의 방패를 자아냈다.
그렇게 파편을 모조리 막은 뒤 이니야가 다시 몸을 날렸다. 성벽을 박차며 날아드는 이니야를 향해 필레나가 마법을 이었다.
"다중 화계, 매스 파이어 애로우!"
십여 줄기의 불꽃의 화살이 이니야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니야가 손을 내밀어 오러 방어막을 펼쳤다. 파이어 애로우는 화염계 중에서도 꽤 저급 주문이라 이런 단순한 방법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공격을 튕겨 낼 수 있었다.
간단히 상대의 마법을 분쇄하며 이니야는 무서운 속도로 필레나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필레나도 애초에 공격을 위해 파이어 애로우를 날린 것이 아니었다.
"화염의 눈이여! 플레임 볼트!"
허공을 움켜쥐며 필레나가 다음 시동어를 외쳤다. 튕겨나간 파이어 애로우가 허공에서 폭발하며 다음 마법 주문의 촉매가 되었다. 폭발 속에서 화염 광선이 이니야의 등 뒤를 노리며 쏘아졌다.
물론 이니야는 오러 유저, 뒤돌아보지 않아도 기감만으로 연계 공격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바로 그녀의 주위로 은색의 막이 펼쳐져 화염 광선을 튕겨 냈다. 튕겨 난 화염 광선이 주위의 성벽 위에 적중해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단순한 플레임 볼트의 위력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폭발이었다. 이니야의 오러 방어에 의해 튕겨 난 화염 광선들이 정확하게 한 점으로 모이며 폭발력을 가중시킨 것이다. 필레나가 자신의 마법이 튕겨지는 반사 각도까지 절묘하게 조절했다는 의미다.
필레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테라 브레이크! 에어 봄!"
굉음이 울리며 이니야의 발치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사실 테라 브레이크는 원래 3서클 주문으로, 끽해야 얇은 벽에 구멍을 뚫는 정도의 위력밖에 없다. 하지만 폭발로 인해 성벽이 약해진 데다가 테라 브레이크를 시전한 지점이 성벽의 하중을 지탱하는 부분이었던 탓에 고위 마법 정도의 위력이 나와 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공기 폭발, 풍계 주문 에어 봄.
오러 유저에게는 산들바람처럼 느껴질 단순한 1서클 주문이다. 그러나 필레나는 이니야를 노리고 에어 봄을 시전하지 않았다.
그녀가 책정한 에어 봄의 유효 좌표는 무너지는 성벽 외곽의 허공. 무너지는 성벽의 파편들이 무수한 에어 봄의 풍압에 의해 낙하 궤도가 변경되며 정확히 이니야의 머리 위를 노렸다.
말이 좋아 파편이지, 부서진 성벽의 일부라면 그야말로 바윗덩어리다. 쏟아지는 바위들을 올려다보며 이니야가 절로 혀를 내둘렀다.
'하위 마법만 가지고 잘도 이런 짓을 해 대네.'
엄청난 범위의 파이어 월을 선보일 때 이미 예사롭지 않은 마법사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현재 필레나의 역량은 이니야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높은 수준의 마법도 대단하지만....'
그보다는 저 전투 센스가 더 놀랍다.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해 적절한 마법을 구사하는 것이 바로 마법사의 임무다. 진정 강력한 마법은 높은 서클이 아니라 가장 상황에 걸맞은 마법이라는 것이 바로 마법사들 사이의 속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레나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아예 마법으로 상황 자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가로막힌 마법마저도 다음 공격을 위한 밑거름, 주문의 강약을 조절해 딜레이를 없애고 영창 시간을 확보한다. 상대의 움직임을 통찰하고 지형지물을 이용함으로써 하위 마법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인 공격을 이어 간다.
인간 세상을 떠돌며 수많은 마법사를 만나 본 이니야조차도 이 정도로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마법을 구사하는 이는 본 적이 없었다.
'뭐, 감탄은 감탄이고 피하긴 해야겠지.'
이니야가 허공에 검을 찔러댔다.
절묘하게 낙하하는 바위의 궤적을 읽어 힘을 옆으로 흘린다. 쏟아지는 바윗덩어리에 비하면 너무도 연약해 보이는 그녀의 레이피어가 허공을 찌를 때마다 바위들이 마치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이니야의 주위를 벗어나 밖으로 떨어졌다.
이쑤시개로 칼날을 쳐 내는 수준의 신기에 필레나가 기겁했다.
'테스론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하는 거야? 무슨 마법인가?'
놀라는 와중에도 필레나는 바로 다음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델 피아 라스텔 로운, 나 부르노라, 내 적을 가로막는 마의 장벽."
쏟아지는 바위들을 튕겨 낸 이니야가 눈을 빛내며 바로 검의 궤적을 바꿨다. 찌르기가 베기로 변화되며 은빛의 오러가 허공을 격해 뻗어 나갔다.
"동토의 칼날!"
은빛의 창이 섬광처럼 필레나에게 쇄도했다. 동시에 그녀가 시동어를 외쳤다.
"아케인 포스 실드!"
강렬한 마력의 장벽이 은빛의 창과 맞부딪쳐 충돌을 일으켰다. 공기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오러와 마법이 동시에 상쇄되었다. 이니야가 다시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쳇, 잘도 저런 짓을...."
지금 필레나는 이니야가 원거리 공격을 날릴 줄 미리 예상하고 방어 마법을 먼저 외운 것이다.
'감이 좋은 건지, 통찰력이 뛰어난 건지....'
어느 쪽이건 보통 실력이 아니다. 이니야는 경각심을 드높이며 저 냉정한 표정의 여마법사를 바라보았다.
한편, 필레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사, 살았다....'
겉으로는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실 필레나는 지금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역시 오러 유저는 무서워....'
오러 유저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8서클 이상의 대마법사뿐. 이것은 대륙의 상식이고 또 사실이기도 하다. 다중 복제의 지팡이가 있다 한들 아직 7서클 초반인 필레나에게 저 엘프 오러 유저는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존재다. 아무리 지금 이니야의 몸 상태가 엉망이라지만, 그래도 필레나가 평범한 7서클 고위 마법사였다면 벌써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껏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어릴 적에 배웠던 가르침, '마법적 상황 제어 이론' 덕분이었다.
'고마워, 레펜하르트. 아니, 지금은 테스론이지, 참.'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자신의 소꿉친구를 떠올리며 필레나는 새삼 감사했다.
☆ ☆ ☆
아직 테스론이 기억을 잃기 전, 레펜하르트라 불리던 때의 일이었다.
필레나와 레펜하르트는 둘 다 비천한 고아 출신으로 델피아의 마탑에 거두어져 마법을 배우고 있었다.
원래 마법사들은 쉽게 제자들에게 마법을 전해 주지 않는다. 단순한 1서클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만도 최소 3년은 노예처럼 허드렛일만 해야 하는 것이 마탑의 상식, 아홉 살 때 마탑에 거두어진 필레나가 제대로 마법을 입문하게 된 것은 열두 살이 넘어서였다.
이후 그녀는 또래에 비해 상당히 두각을 드러냈다. 마법에 입문한지 반년 만에 1서클을 모두 마스터하고 2서클에 들어설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필레나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천재라는 실감을 하지를 못했다.
당시 열한 살이었던 레펜하르트는 마법을 배운 지 사흘 만에 1서클까지의 모든 주문을 마스터해 버렸으니까.
너무나 빠른 레펜하르트의 진도에 델피아의 마법사들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소동이 일어났다.
지나치게 뛰어난 재능은 위험을 부른다는 의견도 있었고, 이야말로 델피아의 마탑을 부흥시킬 인재이니 본격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델피아의 마탑 전체가 둘로 갈라져 싸워 댔다.
그때 어린 레펜하르트는 영특하게도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이면 위험하다는 걸 고작 열한 살의 나이에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이후 레펜하르트는 적당히 진도를 나갔다. 바로 옆에 있던 필레나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으로.
'필레나 넌 바보니까, 너를 기준으로 하면 어른들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거 아냐?'
당시 레펜하르트의 말을 떠올리며 필레나는 살짝 인상을 썼다. 다시 생각해 보니 참 싸가지 없는 꼬마였다.
'두 살이나 어린 주제에!'
뭐, 그렇게 재능을 감추고도 남들이 보기엔 여전히 위협적이어서 상당히 가르침에 제한을 받기는 했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그냥 경계해야 한다 수준이라, 어린 레펜하르트는 계속 마탑에 머물 수 있었다.
그렇게 4년이 지나고 레펜하르트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남들은 주어진 지식 소화하느라 벅차하는 반면, 레펜하르트는 언제나 한가했다. 마법사의 도제라면 온갖 허드렛일이 많았으니 육체적으로야 한가했다고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레펜하르트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마학 이론이 바로 이 '마법적 상황 제어 이론'이었다.
단순히 마법을 상황에 맞춰 구사하거나 연계하는 수준을 떠나, 아예 전장 전체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시뮬레이션해 원인과 결과를 통째로 제어함으로써 상황 자체를 이끌어 가는 마학 인과론.
그것은 열다섯 살짜리가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고도의 이론이었다. 당장 학회에 발표해도 불멸의 명성을 얻기에 충분한 굉장한 기법이었던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바보도 아닌데, 이거 발표했다가 또다시 경계를 받을 거란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론을 만들어 놓고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저, 소꿉친구였던 필레나에게만 심심풀이로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과거를 상기하며 필레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 그때 그거 이해하느라 죽는 줄 알았지.'
레펜하르트는 장난 삼아 만들었다는데, 듣는 필레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뜬구름 같은 소리였다.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그렇다고 두 살이나 어린 꼬맹이가 '너 바보 아냐? 이게 뭐가 어려워?'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니 자존심 때문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자는 시간까지 줄여 가며 죽어라 익혔다.
그 외에도 어린 레펜하르트는 틈틈이 마력 응집법이며 서클 구현법, 명상법 등의 기존 이론을 새롭게 창안했고, 심심할 때마다 필레나에게 가르쳐 주곤 했다.
두 살이나 어린 이 검은 머리의 꼬맹이가 가르쳐 주는 내용은 너무도 복잡하고 어려워 마탑의 가르침에 비할 데가 아니었지만, 이해하고 나면 확실하게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만큼 하나같이 기존의 마법학에 비해 뛰어나기 그지없는 방식이었다. 비록 마법의 경지 자체는 3서클 언저리에 머무르고 있던 레펜하르트였지만, 그 깊이만큼은 어지간한 고위 마법사 못지않았다.
이것이 필레나가 20대 후반의 나이에 이토록 높은 경지에 다다른 이유였다. 어린 시절 레펜하르트로 인해 워낙 탄탄하게 기본을 닦아 놓으니 이후, 각종 마법의 지식을 습득할 때 시간 낭비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필레나의 재능을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레펜하르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시점에서 이미 그녀 역시 천재는 천재였으니까. (실제로, 당시 마탑에 같이 거하던 정규 마법사 토드는 그들의 수다를 듣고도 그게 마법 이론인 줄도 못 알아챘다.)
하여튼, 당시 그녀의 소꿉친구는 진짜 괴물 같은 천재였다. 비록 기억을 잃으며 그 천재성도 함께 잃었지만....
'대신 오러 유저가 되어 버렸지. 그것도 고작 스무 살에. 진짜 천재란 건 정체를 모르겠어.'
세상은 사이러스인가 하는 자를 최연소 오러 능력자라며 추앙하고 있지만 필레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저 마탑에서 마법만 배우던 애가 어느 날 갑자기 기억을 잃더니 자신의 이름을 테스론이라 개명하고는 무술을 혼자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해, 대뜸 오러를 내뿜으며 초인 중의 초인이라는 오러 유저가 되어 버렸다.
가르쳐 준 이도 없는데 오러 유저가 되었다? 충분히 의심해 볼 일이지만 필레나는 그리하지 않았다.
원래 그녀의 소꿉친구는 그런 아이였다.
하늘이 내린 정도가 아니라, 하늘조차도 못 내려 줄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재능의 소유자. 뭘 해도 이상하고 뭘 해도 이상하지 않은 아이.
중요한 것은 그녀가 너무도 많은 은혜를 입었다는 점이었다.
레펜하르트라 불리던 시절에는 마법사로서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테스론이라 불리게 된 후로는 여인으로서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초경을 시작한 이래, 필레나는 언제나 성性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녀의 육체가 무르익을수록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 마법사들의 눈빛 역시 뱀처럼 변해 갔다.
그나마 그라임 왕국에서는 소아 성애자를 혐오하기에 열여덟 살까지는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어쩔 수 없이 마탑의 남자 마법사들에게 몸이 더렵혀질 운명이었다.
그것을 막아 준 것이 바로 테스론이었다.
레펜하르트라 불리던 시절엔 전혀 눈치채지도 못했던 주제에, 기억을 잃고 난 후로는 귀신같이 그런 분위기를 알아채고 사전에 강간 시도를 차단했다. 열여섯 살의 소년임에도, 마법의 기억을 모두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테스론은 쉽사리 그들을 제압하고 그녀를 구할 수 있었다. 가볍게 손발을 놀리기만 해도 3, 4서클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마법 한번 외워 보지 못하고 두들겨 맞아 쓰러졌다.
-그런 빈약한 육체로 여자를 안으려 하다니? 남자라면 부끄러운 줄 알아라!
뭔가, 하는 말은 좀 이상했지만 어쨌건 지켜 준 것만은 틀림없었다.
오러를 각성해 마탑에서 빠져나갈 때 그녀를 데리고 가 주기도 했다. 덕분에 필레나는 여자로선 이례적으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도 정규 마법사가 되어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토록 많은 것을 받은 그녀가 테스론의 충실한 숭배자가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뜬금없이 대륙을 불태울 사악한 자를 막아야 한다고 했을 때에도, 그것을 위해 은의 현자라는 정체불명의 비밀결사에 몸을 담았을 때도 그녀는 아무 의문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필요 없었다.
왜 저러는지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소꿉친구가 이해 불가의 존재라는 건 이미 열네 살 이후부터 절실히 실감하고 또 실감했다.
중요한 진실은 하나뿐.
기억을 잃기 전에도, 잃은 후에도 변함없이 그녀를 아껴 주고 모든 것을 베풀어 준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테스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필레나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떨어진, 반파된 성벽 위에서 보랏빛 머리칼의 엘프가 블레이드 오러를 전개한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랑하고 숭배하는 '그이'를 위해, 필레나는 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나락의 폭우여, 북풍과 빙설의 혀를 놀려라!"
그녀의 양손이 빠르게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블리자드 스톰!"
☆ ☆ ☆
마법사와 전사의 전투는 일종의 술래잡기와 같다.
거리를 좁혀 위력적인 일격을 날릴 수 있을 만큼 마법사에게 접근할 수 있으면 전사의 승리.
이동 주문으로 계속 도망 다니며 각종 마법으로 접근을 제지해 멀리 있는 전사를 쓰러뜨리면 마법사의 승리다.
이는 대마법사와 오러 유저의 전투에도 그대로 통용이 되는 이야기였다.
오러 유저쯤 되면 일반 전사와 달리 원거리에서도 충분히 강력한 공격을 날릴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직접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는 것에 비하면 현저히 위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대마법사쯤 되면 원거리에서 날아드는 블레이드 오러 정도는 충분히 마법 장벽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온갖 마법이 필레나의 손끝을 통해 이니야에게 작열했다. 일부는 직접적으로 날아가고, 일부는 간접적으로 피해를 주며 어떻게든 원거리에서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은빛의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이니야도 계속 몸을 날렸다. 덮쳐 오는 각종 파괴적인 마법을 정교한 검술로 비껴 흘리고 때로는 쳐 내며 계속 거리를 좁히려 노력한다.
"하압!"
이니야가 블레이드 오러를 날려 필레나에게 쏘아 보냈다. 필레나가 재빨리 마법의 장벽을 펼쳐 공격을 막았다.
"엠브레스 실드!"
아직 8서클에 다다르지 못했다 보니, 필레나가 바로 반응해 시전할 수 있는 마법 장벽은 4서클의 엠브레스 실드 정도가 한계였다. 고작 4서클의 방어 마력장, 원래대로라면 이니야의 블레이드 오러가 꿰뚫어야 정상이겠지만....
콰앙!
폭음과 함께 오러와 마력장이 부딪쳐 동시에 소멸했다. 이니야가 혀를 찼다.
"끙, 이젠 저런 거 하나 뚫을 힘도 안 남았나...."
그녀의 부상이 너무 심한 것이 문제였다.
원래 이니야의 기량은 오러 유저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한다. 본격적으로 붙는다면 안타레스 백국에서도 칼켄이나 아틸카, 레펜하르트 정도만이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검술과 오러 제어 능력은 달인의 경지에 올랐으니까.
하지만 이니야는 어쩔 수 없는 엘프였다.
지상의 모든 종족 중에서도 가장 육체가 허약한 것이 바로 엘프.
엘프치고는 강건한 육체의 소유자인 이니야였지만, 그렇다 해도 다른 오러 유저에 비하면 손색이 많았다. 기껏해야 평범한 성인 인간 남자나 오크 소년 정도 수준이랄까? 근력도 지구력도 내구도도 다른 종족에 비하면 심각하게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테스론에게 정통으로 맞은 두 방만으로도 현재 이니야의 육체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아직까지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극에 다다른 오러 제어력 덕분이었다. 현재 이니야는 근육 대신 오러 구동력으로 육체를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엉망인 몸 상태, 체내 오러의 대부분을 헝클어진 기혈을 다스리고 육체를 움직이는 데 쓰고 있다 보니 위력도 움직임도 평소의 1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오러양이 너무 부족해 북해의 숨결도 못 쓰겠고... 그거면 저 여자 붙잡아 두는 것쯤은 일도 아닌데, 쳇....'
정말이지 한심할 정도로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투덜대는 이니야를 향해 필레나가 반격을 날렸다.
불꽃과 얼음이 동시에 피어나며 이니야에게 쏟아졌다. 발치가 얼어붙고 곧바로 폭발하니 자잘한 얼음 파편이 전신을 노리고 날아든다. 그렇게 시야를 희롱하며 곧바로 아케인 볼트, 응축된 마력 화살이 강렬한 관통력을 동반해 쏘아졌다.
하지만 지친 와중에도 이니야는 바로 방어 태세로 들어가며 모든 공격을 흘려 냈다.
굵직한 공격은 검으로 쳐 내고 자잘한 공격은 오러 방어막을 비스듬히 기울여 비껴 흘린다.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굳이 오러 방어막도 필요 없었겠지만, 오러만으로 육체를 움직이다 보니 평소의 정교한 검술을 쓰기가 힘들었다.
필레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어떻게 저런 짓을 하는 거지?'
이니야 기준에선 한심할 정도로 수준 떨어지는 방어술이었지만, 남이 보기엔 그것도 충분히 굉장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목을 노린 채, 두 여인은 생명을 건 술래잡기를 계속했다.
심각한 부상을 당했지만 그래도 최상위 오러 유저인 이니야, 그리고 아직 7서클이지만 어린 레펜하르트의 가르침 덕분에 전투 센스는 대마법사 못지않은 필레나.
상황이 겹치다 보니 쉽사리 결판이 나질 않았다. 각자 날린 필살의 공격이 계속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비껴간다.
그렇게 정신없이 전투를 이어 가고 있을 때였다.
쿠우우웅!
갑자기 황금빛 기둥이 허공을 꿰뚫었다. 그야말로 신이 강림한 게 아닌가 싶은 엄청난 크기의 빛무리, 지진이라도 난 듯 대지가 흔들리고 꿰뚫린 허공을 통해 폭풍이 불어닥칠 정도로 엄청난 파괴의 힘이었다.
사방을 대낮처럼 밝히는 그 가공할 빛 속에서 두 여인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를 크게 뜨며 필레나와 이니야가 놀란 외침을 터트렸다.
"테스론?"
"레펜하르트 님?"
2
하늘을 꿰뚫는 빛의 기둥, 그 속에서 근육질 거구의 사내가 오른 주먹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빛의 기둥이 점점 가늘어지며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황금빛이 사라지고 제플린의 밤하늘 위로 여명이 아스라이 푸른빛을 뿌리며 새벽하늘을 물들인다.
하늘을 꿰뚫은 사내, 권왕 레펜하르트는 조용히 주먹을 거두었다. 그리고 말없이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흥분한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권마합신... 이론은 대충 세워 놓았었지만 이렇게까지 잘 먹힐 줄은 몰랐는데...."
죽어라 연습해도 다다르지 못했던 경지, 5중첩 캘러미티 혼.
이걸 어떻게든 편법으로라도 구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얼마나 연구했던가?
이리저리 분석하며 마법과 오러를 융합시키는 연구를 계속했다. 그 와중에 태어난 것이 오러를 융합하는 마법 술식, 저가형(?) 캘러미티 혼인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이었다.
권사의 기술이면서 동시에 마법사의 술식이기도 한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 이는 오러와 마법의 융합 술식, 권마합신의 기초가 되어 주었다. 확실히 권마합신을 이용하면 원래의 캘러미티 혼에 중첩을 더하는 것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뭐가 부족한지 계속 시도만 하면 기존의 캘러미티 혼이 깨져 버리는 탓에 그동안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5중첩을 깨달으며 이 문제까지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 것이다.
'과연, 오러의 흐름과 안정이 균형적으로 파괴력으로 화하는 것은 5중첩부터군. 4중첩까지는 기반이 되는 오러 파문이 흐르는 기세에 비해 위치 고정이 불안정해서 그동안 되지 않는 거였어.'
문득 레펜하르트는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해도 진짜 6중첩이라고 할 수는 없겠군, 이거."
참으로 크고 아름다운 빛의 기둥이 솟구쳐 주기는 했다. 그러나 기술을 시전한 레펜하르트 본인은 저게 불완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빛의 기둥이 굵다는 것부터가 틀렸다. 제대로 힘이 집중되었다면 저렇게까지 어마어마한 빛의 기둥을 보일 리가 없다.
'진짜 6중첩 캘러미티 혼이라면 보다 가늘고 관통력이 강한 형태로 구현되었겠지?'
비유하자면, 레펜하르트가 한 짓은 활로 화살을 쏠 때 화살촉에 철을 더 부어 중량을 늘인 것과 비슷했다.
무게가 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파괴력은 물론 높아진다. 하지만 제대로 6중첩을 구사한다는 것은, 철을 덧붙일 뿐 아니라 그것을 날카롭게 갈아 관통력을 높여 완전한 화살촉으로 만드는 것까지 이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완벽한 6중첩 캘러미티 혼이라 할 수 있다.
레펜하르트가 구사한 것은, 굳이 말하자면 5.5중첩 정도?
"그래도 5중첩에 비하면 월등한 위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렸다.
10여 미터쯤 떨어진 성벽 아래의 폐허, 그곳에 테스론이 쓰러져 있었다.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고 눈과 코, 귀에서도 핏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것이 시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토록 가공할 위력을 보였던 고대의 아티팩트, 아다만드릴 슈트의 상태는 더 처참했다. 상체 부분은 아예 산산이 박살 나 가루가 되어 흩어져 있었다. 하체 쪽도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을 뿐,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스론은 아직 살아 있었다.
"크, 크으윽...."
신음을 흘리며 테스론이 힘겹게 눈을 떴다. 부들부들 손가락을 떨며 그가 악을 썼다.
"이, 이 빌어먹을 마왕...."
메마른 목소리로 테스론이 외쳤다.
"그, 그게 무슨 6중첩이야? 감히 짐 언브레이커블의 궁극기를 마법으로 땜빵해? 이 새끼가 어디서 멋대로 짝퉁을 만들어!"
레펜하르트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중얼거렸다.
"역시 살아 있었군, 테스론."
아무리 제대로 된 6중첩이 아니었다지만, 권마합신을 통한 레펜하르트의 캘러미티 혼은 분명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테스론의 5중첩 캘러미티 혼을 간단히 압도하고 아다만드릴 슈트까지 가루로 만들 정도로.
즉, 상식적으로는 테스론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시체도 못 남기고 사라져야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테스론이 살아 있고, 심지어 소리까지 지를 수 있는 이유를 레펜하르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공격이 테스론을 적중했던 그 순간이었다.
테스론의 5중첩 캘러미티 혼이 모조리 상쇄되며 가공할 파괴의 힘이 그를 덮쳐 가는 그때, 레펜하르트는 똑똑히 보았다.
"삼중의 포스 실드에 더블 아케인 실드, 그리고 일곱 속성의 프리스매틱 배리어였나?"
레펜하르트가 살아남았을 때처럼, 테스론 역시 그 위기의 순간 온갖 마법 장벽을 전개해 공격을 막아 냈던 것이다.
심지어 테스론은 레펜하르트와 달리 고위 서클을 구사하면서 수인을 맺지도 않았다. 오로지 가공할 마법 연산력, 그것만으로 저 모든 마법을 즉시 시전해 발동시켰다!
이건 테스론이 그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그냥 그만큼 레펜하르트의 원래 두뇌가 괴물 같았기 때문인 쪽이 컸다.
왜, 가끔 머릿속에 노랫가락이 저절로 떠올라 흥얼거리게 되는 일이 있지 않은가? 이유도 없이, 게다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뇌리를 맴돌아 신경이 쓰이는데도 그만둘 수 없는 그런 경험.
지금 테스론이 한 짓이 그것과 비슷했다. 생명의 위기를 느낀 그의 두뇌 일부가 멋대로 가장 적절한 마법 장벽을 강제 구동해 테스론의 의사와 상관없이 마법을 발동시킨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내 머리지만 정말 괴물 같군...."
자기 것일 때는 몰랐는데, 막상 타인의 시선으로 보니 진짜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 복잡하고 골치 아픈 마법 술식이 저 두뇌에게는 그냥 일반인 노랫가락 흥얼거리는 수준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거기에, 프리스매틱 배리어는 7서클이잖아? 그 와중에 7서클도 뚫었어?"
기가 차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주먹패답게 주먹질이나 잘 할 것이지, 주제에 무슨 마법사처럼 전투 중에 정신 고양을...."
말하다가 레펜하르트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자기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여하튼, 막판에 굉장한 짓을 해 즉사는 면했다만 그래도 현재 테스론이 죽어 간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사지는 근골이 뒤틀려 흉측한 모습이고 과도한 두뇌 연산 때문에 칠공에서 피를 쏟고 있다. 굳이 레펜하르트가 마무리를 짓지 않아도, 이미 반쯤 저승의 강에 몸을 담근 상태다.
레펜하르트가 테스론을 향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테스론...."
테스론이 힘겹게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크윽... 레펜하르트...."
죽음을 각오한 테스론이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아쉽구나... 네놈의 팔 하나쯤은 가져갔어야 했는데...."
주먹을 겨눈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원래는 최후의 일격을 날려 숨통을 끊을 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후환을 없애 버릴 셈이었지만....
"으으음...."
막상 자신의 얼굴을 한 상대방을 보고 있으니 쉽사리 손이 나가질 않았다.
물론 더 이상 예전의 육체에 미련은 없다.
이미 이 육체에 적응할 대로 적응했고, 마왕이 아닌 권왕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자신의 이상을 펴는 데 도움이 되는지도 깨달았다. 이제 와서 굳이 예전의 육체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분명 자신의 육체였고, 자신의 얼굴이었다. 쉽사리 손이 나갈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레펜하르트가 망설이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기 몸이 아니라 해도, 제3자의 시선으로 본다 해도 저 재능, 저 두뇌는 너무나 탐이 난다.
테스론이라는 영혼을 담은 상태로도 저런 짓이 가능할 정도인, 마법이란 측면에 있어선 실로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고의 두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말이지.'
단순한 타인으로 인식한다 해도, 그냥 죽여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재능인 것이다.
레펜하르트의 망설임을 느꼈는지 테스론이 다시 눈을 떴다.
그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무슨 수작이냐, 마왕?"
레펜하르트는 안색을 굳힌 채 테스론을 내려다보았다.
잠깐 고민하다, 레펜하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살아볼 생각은 없는가? 테스론?"
☆ ☆ ☆
테스론의 눈매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분노를 숨기지 않은 채 그가 대꾸했다.
"무슨 헛소리냐, 마왕! 내가 목숨이 아까워 인류를 배신할 것 같은가!"
"예전의 그대였다면 그럴 리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도 그리 생각하나? 남의 좋은 머리 가져갔으면 생각도 좀 바뀌지 않았을까 싶은데?"
레펜하르트가 차분히 질문을 이었다.
"아직도 그대는 내가 저들을 마법으로 조종했다고 생각하나? 아직도 저들이 마성에 물들어 저렇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나?"
테스론이 입을 다물었다.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그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는 더 이상 마왕이라 불릴 정도의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의 그대는 고위 마법사이기도 하다, 테스론. 아직도 저들이 인간의 노예로 지음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 단순한 머리로 그 수준까지 마법을 익히지도 못했을 터다. 그러니 묻겠다. 아직도 저들이 노예로 타고난 이들이라고 생각하나?"
테스론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종족들은 그저 단순하게 마왕의 지배를 받아 타락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마왕에게 그런 짓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테스론 본인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종족들은 자유를 꿈꾸며 행동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점점 더 구겨지는 테스론의 얼굴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쐐기를 박듯 질문을 맺었다.
"그 머리로 잘 생각해 봐라, 테스론. 아직도 저들이 내 마법에 의해 마성에 물든 자들로 보이는지."
테스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빛났다. 드디어 테스론이 자신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막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밝아지려던 찰나였다. 차가운 테스론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서 더더욱, 저들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응?"
테스론의 두 눈동자가 검은 불꽃을 안고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렇기에 더더욱 저들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지 않은가? 저들이 단순히 마성에 젖은 것이 아니라면, 사실은 그 모습이 그들의 본질이라면!"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테스론이 소리쳤다.
"더더욱 인류가 저들을 제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있었다. 안타레스 제국 휘하의 이종족들, 그들이 어떤 습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전생에서 레펜하르트와 대적하며 수차례나 그것을 몸소 경험했다.
"인간의 몇 배나 장수하는 엘프와 드워프들, 그야말로 전투를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오크들, 인간의 몇 배나 되는 힘과 재생력을 가진 트롤들!"
그때는 별생각 없이 흘려 넘겼지만 지금은 다르다. 만약 그것이 마왕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이종족들 본연의 힘이었다면!
"반드시 저놈들을 무찔러 후환을 없앰이 옳지 않은가?"
강한 의지를 담은 그 말에 레펜하르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아무리 머리가 좋아진다 한들 세상을 보는 관점마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약육강식, 강자가 약자를 먹어 치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이 시대의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저것이 진리일 테지.
답답해진 레펜하르트가 혼잣말을 흘렸다.
"...어째서 저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을까? 서로 공존할 수도 있는 것을...."
그러자 테스론이 콧방귀를 뀌었다.
"하? 어째서 공존을 꾀해야 하지? 지금 인간은 충분히 대륙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다. 그런데 저놈들이 다시 힘을 키운다면 그만큼 인류의 영역이 침범당할 터. 세계는 유한하고 그 자리는 이미 인류가 차지하고 있으니 저놈들이 힘이 생긴다면 인간의 세상은 5분의 1로 축소되어 버릴 것이 아닌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테스론은 레펜하르트를 마주 바라보았다.
굳건한 테스론의 태도에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세계는 유한하니, 이종족들이 일어서면 인간의 영역이 5분의 1로 줄어들 것이라고?
"이종족의 새로운 문화, 새로운 생각을 인류가 접한다는 것은 세상이 5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다섯 배로 늘어나는 것이란 걸 모르는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마왕?"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테스론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딱히 테스론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테스론뿐 아니라 이 시대 대부분의 인간들은, 세상을 오로지 영토로만 재단하는 근시안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설득은 무리인가...."
조금이라도 생각을 바꿀 기미가 보이면 카르사스 공자의 경우처럼 일단 포로로 끌고 가서 회유하거나 하겠는데, 저토록 강경하니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카르사스 공자와 달리 테스론은 오러 유저이면서 동시에 7서클 마법사이기도 했다. 저 정도의 강자는 붙잡아 두는 것도 쉽지 않다. 혹여 힘을 되찾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아쉽군, 테스론."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가 다시 살기를 피워 올렸다.
"역시 그대와 난 양립할 수 없는 사이인 것 같군."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테스론이 애써 미소를 떠올렸다.
"난 인간이다. 인간이 인간 편을 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그리고 도리어 어이없다는 듯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네놈이 더 이상하다, 레펜하르트. 그대 역시 인간이지 않나? 어째서 인간이 인간을 적대하는 거냐?"
레펜하르트는 허하게 웃었다.
'내가 정말 인간을 적대했다면 전생에 그런 꼴이 되었을 것 같냐?'
애당초 인류 다 없애고 이종족들만의 세상을 만들 생각이었으면 그토록 밀리지도 않았다. 그 전에 각국 수도며 인류 밀집 지대에 10서클 마법 펑펑 터트려서 깡그리 몰살시켰겠지. 어떻게든 인류와 공존해 보려고 쳐들어오는 적만 해치우다가 그 꼴 난 것 아닌가?
"난 사람이다. 당연히 사람 편을 들 뿐이다."
우우웅!
레펜하르트의 주먹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테스론이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강렬한 파괴의 오러가 주먹 가득 넘실거렸다. 마음을 굳히고 레펜하르트는 한때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깝지만, 아까운 만큼 내버려 두었다간 더욱 큰 위협이 되어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포기할 때는 포기해야지. 전생의 실수를 돌이키지 않으려면.'
결심을 내린 레펜하르트가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저 멀리 들려왔다.
"안 돼!"
동시에 강력한 마력이 레펜하르트의 등 뒤로 느껴진다. 그는 살짝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이니야와 싸우던 그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이니야가 미처 해치우지 못했나? 하긴, 부상이 워낙 심했으니....'
별생각 없이 레펜하르트는 준비한 기격탄의 방향을 돌렸다. 마법사부터 먼저 해치울 셈이었다. 어차피 테스론은 다 죽어 가고 있었으니, 순서를 좀 바꾼다고 별문제가 생길 리는 없었다.
그렇게 날아오는 마법사를 바라본 순간.
"어?"
기격탄을 날리려던 레펜하르트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마법사의 얼굴이 지나치게 낯이 익었다.
'필레나?'
☆ ☆ ☆
20대 후반의 여인이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을 가르고 날아오고 있었다.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게 해 주는 마법, 플라이는 8서클의 고위 주문이다. 하지만 지금 저 여마법사는 하급 마법만으로 플라이와 맞먹는 스피드를 보여 주고 있었다.
5서클 부유 주문 레비테이션으로 신체를 띄운 뒤 윈드 워크와 에어 봄을 병행해 방향을 잡고 추진력을 부여하는 저 마법 연계 방식은 레펜하르트에게 대단히 익숙한 것이었다. 전생의 그가 아직 낮은 서클의 마법사였을 때 창안했던 '마법적 상황 제어 이론'이었다.
이 시대에 저 이론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뿐.
'이니야가 말한 마법사가 필레나였어?'
예전에 테스론을 따라다니는 걸 잠깐 보긴 했지만, 설마 이 자리에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무엇보다 제플린 서문 주변에 펼쳐진 저 어마어마한 파이어 월의 흔적은, 결코 그가 아는 필레나가 구현할 수 있는 수준의 마법이 아니었으니까.
'당연히 다른 사람일 줄 알았는데....'
당황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일단 기격탄을 거두었다. 추억 속의 소꿉친구를 죽여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 틈에 필레나가 마법을 발동시켰다.
"내려치는 뇌신의 철퇴! 라이트닝 블래스터!"
강렬한 뇌격이 레펜하르트의 정수리를 노리고 번뜩였다. 레펜하르트가 무심코 오러를 펼쳐 마법을 방어하려 할 때였다.
필레나가 손에 든 지팡이를 휘두르며 외침을 이었다.
"다중 복제!"
떨어지는 뇌격이 허공에서 연속으로 복제되며 총 여덟 줄기의 뇌전이 되어 연달아 레펜하르트를 강타했다. 다중복제의 지팡이로 라이트닝 블래스터를 연속 일곱 번 더 복제한 것이다.
"으엑? 뭐야, 이거?"
화들짝 놀라 레펜하르트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마법이 동시에 중첩되니 위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단순한 오러 가드로는 도저히 방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스파이럴 가드!"
황금빛 오러가 용솟음치며 여덟 줄기 뇌전을 모조리 튕겨 낸다. 워낙 전격이 강렬하다 보니 방어한 상태로도 레펜하르트의 거구가 뒤로 몇 미터나 밀려 나갔다.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콰콰콰쾅!
그 틈에 필레나가 쓰러진 테스론 곁에 착지했다. 착지하자마자 바로 레펜하르트를 경계하며 테스론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 상태로 그녀가 외쳤다.
"테스론! 괜찮아?"
대답은 없었다. 간신히 대답을 이어 가던 테스론이 결국 부상으로 인해 혼절해 버린 것이다. 필레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스파이럴 가드를 풀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뭐야, 저 엄청난 아티팩트는?'
마법의 극에 달했던 자답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방금 필레나가 선보인 다중 연계 마법이 저 작은 지팡이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단순한 마력 증폭용 탈리스만 같은 마도구가 아니야. 주문 하나 외웠더니 그게 일곱 개가 더 불어나? 저런 말도 안 되는 아티팩트가 세상에 있었나?'
레펜하르트를 향해 다중 복제의 지팡이를 겨눈 채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 물러서라, 권왕!"
상대를 노려보며 필레나는 후들거리는 양다리를 애써 가누었다. 비록 다중복제의 지팡이를 겨누고는 있었지만, 사실 이건 허세였다.
이미 그녀는 이니야와 싸우며 다중 복제의 지팡이를 두 번이나 사용했다. 방금 레펜하르트에게 날린 전격이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그걸 맞고도 긁힌 상처 하나 없다니...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하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지.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필레나는 차가운 눈으로 눈앞의 거한, 권왕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이 사람에게 더 이상 손 끝 하나 댈 수 없어!"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혹스러웠다.
그리운 추억 속의 소꿉친구가 강렬한 적의를 피우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지독한 증오의 표정이었다.
"필레나...."
필레나의 표정에 당황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저자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생각해 보면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쪽도 레펜하르트 수하의 강자 명단을 모두 알고 있으니, 저쪽도 테스론 쪽 인물들의 이름과 얼굴 정도야 충분히 알아두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치부하기엔 상대의 표정이 너무 이상했다.
분명 적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그리움과 당혹만이 섞인 얼굴. 그 속에 적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당황한 얼굴로 제 자리에 서서 어쩔 줄을 몰라 할 뿐.
'뭐지? 왜 저러는 거지?'
하지만 필레나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지금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상대에게 공격 의사가 보이지 않는다.
'잘 하면 도망칠 기회가 생길지도....'
눈치를 보며 필레나는 살며시 테스론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때까지도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달래며 그녀는 왼손을 기절한 테스론의 가슴께에 올렸다. 그리고 로브를 뒤져 작은 깃털 하나를 꺼냈다.
필레나의 표정에 화색이 떠올랐다.
'됐어!'
깃털에서 풍겨 오는 마력 흐름을 느낀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그제야 일변했다. 이미 그는 제이드와 조우했을 때 저 아티팩트를 본 바가 있었다.
"어, 저건?"
이대로라면 다 잡아 놓은 적을 또 놓치게 생겼다!
정신이 번쩍 든 레펜하르트가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굳이 필레나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팔을 잡아끌기만 해도....
하지만 필레나가 귀환의 깃털을 발동하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파아앗!
눈부신 빛이 레펜하르트의 망막을 뒤덮었다.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허공을 허우적댔다.
"윽!"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자리에 더 이상 필레나와 테스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부서진 아다만드릴 슈트의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런...."
☆ ☆ ☆
레펜하르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이 터오는 제플린의 하늘, 그 어디에도 테스론과 필레나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이드 때와 똑같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 원 참, 닭 쫓던 개꼴이 되어 버렸군."
딱히 그가 실수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필레나가 쓴 귀환의 깃털은 레펜하르트조차도 전생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기물이다. 현생에서 제이드가 쓰는 걸 딱 한 번 보았을 뿐이다.
그가 예언자도 아닌데 필레나가 저런 귀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예상했다면 오히려 그쪽이 비현실적이겠지.
당연히 다 잡아 놓았다고 확신했다. 실제로도 그랬고.
그래서 굳이 마저 손을 쓰지 않았다.
이미 제압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대, 게다가 추억 속의 소꿉친구이기도 하다. 레펜하르트가 무슨 살의의 파동에 눈을 뜬 엽기 살인마도 아닌데, 굳이 불필요한 살인을 더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딱히 레펜하르트가 물렁하거나 우유부단해서가 아니라, 그의 입장에서는 저것이 당연한 태도였다.
레펜하르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아니, 어떻게 필레나 쟤가 저걸 가지고 있는 거지? 저거 사실은 되게 흔한 건가?"
물론 귀환의 깃털은 은의 현자 내에서도 굉장히 귀한 물건이다. 일회용 소모품인 데다가 다시 만들 수도 없으니, 어지간해서는 은의 현자 내에서도 함부로 내주지 않는다. 그래서 세렐라인도 저 귀환의 깃털은 남들 몰래 테스론과 필레나에게만 건네주었다.
딱히 저 두 사람의 안위를 걱정해서는 아니었다.
테스론에게 내준 아다만드릴 슈트는 절대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금단의 기물, 그러니 만약 패할 경우 어떻게든 회수해야 하는 것이다. 필레나야 언제나 테스론 곁에 찰싹 붙어있으니 보험 삼아 내준 것이고.
뭐, 레펜하르트야 저런 제반 사정까지는 모른다. 하지만 직면한 사실만으로도 몇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필레나가 저 깃털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드도 똑같은 걸 가지고 있었지? 그렇다는 건 양쪽이 뭔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린데....'
턱을 매만지며 레펜하르트는 상념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제이드 놈이나 테스론 쪽이나, 죄다 듣도 보도 못한 아티팩트들을 잘도 들고 나타났단 말이야?'
테스론의 아다만드릴 슈트는 실로 어마어마한 성능의 기물이었다. 유서스의 마갑 엘드라드 따위는 싸구려로 치부해도 좋을 정도의 규격 외 품, 스테반의 버서커 아머나 필레나의 지팡이 역시 인세에 보기 드문 아티팩트다.
'그래, 제이드 놈이 쓰던 장갑이나 부츠처럼 말이지....'
그런데 그는 저 아티팩트 중 어느 것 하나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알고 있던 것은 기껏해야 제이드의 블링크 부츠 정도? 이것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이지 세상에 알려져 있던 것은 아니다.
유서스의 마갑 엘드라드 정도만 되어도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일반인조차 그 존재를 알고 있는데....
'저 정도 위력을 지닌 아티팩트들이 이렇게까지 안 알려질 수가 있나?'
예전에 테스론을 만났을 때는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스테반의 버서커 아머 말고는 다들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지 않았었으니까. (유서스의 엘드라드야 원래 갖고 있던 것이고.)
그래서 그냥 알려지지 않은 던전 같은 데서 운 좋게 구했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스테반의 버서커 아머도 이상하게 개조된 데다가 테스론이나 필레나도 새로운 아티팩트들을 들고 나타났다.
자고로 아티팩트란 것은 어마어마하게 귀하기 때문에 아티팩트라 불리는 법. 돈으로 쉽게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냥 고급 마도구다. 아무리 신나게 던전을 털어 낸들 저 정도의 기물이 막 쏟아지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음...."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10서클의 대마법사였던 그조차도 감탄할 만큼 엄청난 성능의 아티팩트들.
그런 엄청난 기물임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테스론 일당이나 제이드는 저런 걸 자꾸 들고 나타난다?
심지어는 출처도 비슷해 보인다?
'이래서야 어딘가에 아티팩트 쟁여 두고 있다가 펑펑 대 주는 놈들이라도 있는 것 같잖아? 아니, 그런데 이것도 이상한데? 저 정도의 위력을 지닌 기물들을 잔뜩 보유하고 있을 정도면 최소 3대 학회 이상, 그런데 그런 기물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세상에 알리지도 않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저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필레나 실력도 영 납득이 안 가....'
사실 레펜하르트의 기억 속에서 필레나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이야 나이 먹고 철들었다지만, 당시의 레펜하르트는 젊은 천재답게 오만하기 그지없어 자신을 친동생처럼 아껴 주는 필레나를 보고도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가끔 심심할 때마다 자랑 삼아 자신이 창안한 이론을 가르쳐 주며 잘난 척했었다 정도가 기억의 전부다.
'으, 다시 생각해 보니 참으로 재수 없는 놈이었구나, 나.'
하여튼, 그 기억 속의 필레나는 분명 대단한 마법사는 아니었다. 나름 재능은 있었지만 결국 마탑을 나온 뒤로는 소식이 끊긴, 그냥 어릴 적의 추억 속 인물일 뿐이었다.
'그 이후 전혀 이름을 듣지 못한 걸 보면 분명 평범한 마법사로 살고 있었음이 분명한데... 저 나이에 저 정도였다면 절대 무명일 리가 없단 말이지?'
마지막 뇌전 중첩 마법이야 아티팩트를 이용한 것이라지만, 그걸 차치해도 현재 필레나의 솜씨는 레펜하르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하위 마법을 연계해 고위 비행 마법의 효과를 낸다. 말로야 간단하지만 이건 마법의 경지와는 별개로, 굉장히 복잡한 계산을 요구하는 기법이었다.
세 종류의 마력 충돌을 동시에 억제하면서 변화하는 공기 흐름을 세밀하게 계산해 수시로 출력을 변화시킨다. 유체 역학에 기반한 각종 수식들을 전부 순간적으로 처리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저런 곡예비행이 가능한 것이다.
창안한 레펜하르트 본인조차도 지금의 두뇌로는 연산력이 달려 시행하지 못할 정도로 고도의 계산을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마법적 상황 제어 이론.
"필레나, 쟤 머리가 분명 저렇게까지 좋지는 않았거든?"
이론이야 레펜하르트 본인이 가르쳐 주었으니 당연히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 이론을 5서클에까지 적용시킬 정도로 필레나의 술식 연산력은 뛰어나지 않았다.
물론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마법 연산력도 어느 정도 오르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결코 저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노력해서 해결될 문제였다면 왜 현생의 레펜하르트가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구하려 그리 난리를 쳤겠는가?
'그런데 다시 만난 필레나는 엘류시온의 목소리라도 쓴 양, 연산력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가 있단 말이지.'
그가 아는 한 마법사의 연산력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엘류시온의 목소리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 아티팩트는 현재 자신이 지니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머릿속이 복잡해 정리가 되질 않았다.
필레나의 일도 그렇고 저 정체불명의 아티팩트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이 시대로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 생겨 버린 것이다.
"테스론이 무슨 짓을 했나? 하지만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저런 일이 생기는 거지?"
☆ ☆ ☆
이니야는 한참 뒤에야 레펜하르트에게로 돌아왔다.
필레나야 테스론이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있는 마력 없는 마력 다 동원하며 허겁지겁 날아왔지만, 이니야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승리했음이 명백했으니까.
그래서 뒤를 쫓지 않고 일단 그 자리에서 오러를 운용해 상처 회복에 열중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육체가 회복되고 나서야 다시 합류한 것이다.
다가오는 이니야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안부를 물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이니야?"
"예, 그럭저럭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돼요."
그녀가 부끄럽다는 듯 사과를 건넸다.
"죄송해요, 그 여자 마법사를 해치우지 못했어요."
"부상이 심하셨잖습니까? 괜찮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레펜하르트는 이니야를 달랬다. 그때, 그녀가 문득 눈매를 날카롭게 치켜 올렸다.
"그런데...."
이제는 폐허가 되어 버린 제플린의 성벽 일부, 테스론과 필레나가 있던 그 무너진 자리를 노려보며 그녀가 싸늘하게 물었다.
"어째서 그자를 바로 해치우지 않으신 건가요, 레펜하르트 님?"
"예?"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는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제가 마법사를 놓치지 않았다면 그들을 놓칠 일도 없었겠지요. 그 일은 전적으로 제 잘못이에요."
차분한 목소리로 이니야가 다시 한 번 사죄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바로 언성을 높이며 질문을 이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 님이 그 사내를 바로 해치웠다면 그 여마법사가 구출할 틈도 없었을 겁니다. 왜 바로 숨통을 끊지 않으셨나요?"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혹시 적을 놓친 것에 대해 탓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 일에는 이니야 역시 책임이 있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것을 인정했다. 그러니 그런 이유는 아닐 것이다.
이니야의 눈동자가 레펜하르트를 똑바로 응시했다. 언제나 부드러웠던 그녀의 눈빛은 지금 얼음처럼 빛나고 있었다. 전생 때 자주 보았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과연, 이니야가 진정으로 화낸 이유를 입 밖으로 꺼냈다.
"혹시, 상대를 회유하기 위해 그런 것인가요?"
"아, 그게... 죽이기엔 재능이 너무 아까워서...."
이니야의 표정이 더더욱 차가워졌다.
"카를 재상에 대한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그 역시 적이었고, 지금은 마음을 바꿔 우리의 동료가 되었지요. 그래서 혹시나 레펜하르트 님이 그런 생각을 하신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네, 뭐 그랬지요...."
어깨를 움츠리며 레펜하르트는 슬쩍 이니야의 눈치를 보았다. 카를 때처럼 테스론의 재능이 아까워 회유하려 한 것이 대체 왜 저리 화를 낼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이니야가 나직하게 뇌까렸다.
"그는... 카다마이트를 죽였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 역시 그에게 죽을 뻔했지요."
"이니야...."
"검을 든 무인으로서, 그자에게 패한 것이 분할지언정 억울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카다마이트 역시 그랬겠지요. 그 또한 긍지 높은 전사였으니까."
이니야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에요. 그자를 회유하려 했을 때, 레펜하르트 님의 머리에 카다마이트의 죽음이 과연 들어 있었는지."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무심코 카다마이트가 쓰러져 있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그 자리에 카다마이트의 시체는 없었다. 이미 다른 이들이 시신을 수습해 성 밖으로 빠져나갔으니까.
그래, 카다마이트의 시신을 본 순간, 분명 분노했다. 그리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는 드워프 최강의 전사이며 오러 유저였으니까. 뜻을 함께하는 소중한 동료, 아까운 인재를 잃었으니 당연히 안타깝고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순간 슬픔을 느꼈던가?
레펜하르트는 그렇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전생에서 너무나 많은 죽음을 보고, 너무나 많은 슬픔을 겪었다. 그래서 카다마이트의 죽음 앞에서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너무 쉽게 슬픔을 뒤로하고, 냉정하게 전투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래, 그 상황에서 마냥 슬퍼하고 있을 수만도 없잖아?'
카다마이트는 분명 소중한 동료였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처럼 잃는 순간 슬픔이 벅차오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이다.
'동료나 수하가 죽을 때마다 일일이 눈물을 보일 정도로 여리다면 오히려 우두머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 아닌가?'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쓰며 반박하려던 차였다.
무뚝뚝한 이니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만약 죽은 이가 시리스 양이었다면, 그래도 레펜하르트 님은 똑같이 행동하셨을까요?"
"...."
레펜하르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수시로 뒤바뀌었다.
잠깐 발끈했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니 결국 이니야의 말이 옳았다.
어떤 핑계를 댄다 한들, 방금 동료를 죽인 자를 오히려 회유하려 한 것은 분명 도리가 아니다.
가식적으로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니라 해도, 최소한 카다마이트의 죽음은 존중해 주어야 했다. 그의 죽음이 의미가 있도록 합당한 태도를 보였어야 했다.
그것이 올바른 일일 터다.
"후우... 제가 어리석었군요, 이니야."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의외로 순순히 실수를 인정하는 모습이다. 이니야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화가 난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 미움 받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건넨 말이었다.
다행히 레펜하르트는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하게 그녀의 조언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으로 카다마이트의 죽음을 안타까워해서인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도리를 어겼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
상식적인 감성을 지닌 인간의 반응이 아니다. 엘프인 이니야가 보기에도 거슬릴 정도로.
'...이 사람, 뭔가가 어긋나 있어.'
사실은 이후 추궁할 부분이 남아 있었다. 저 검은 머리의 사내와 여마법사, 그들과 레펜하르트의 관계에 대해서.
'어째 잘 아는 사이처럼 보이던데....'
레펜하르트가 발끈하면 계속 따져 볼 생각이었는데, 분위기가 이렇게 되고 나니 그러기도 좀 어색하다. 둘은 그렇게 잠시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화는 풀렸다지만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까지는 쉽게 가시지 않는 것이다.
"어쨌건, 우리도 어서 빠져나가죠. 앞선 이들을 따라잡아야 하니"
현 상황이 느긋하게 대화나 나누고 있을 때는 아니다. 슬쩍 눈치를 보며 이니야가 분위기를 전환했다.
"아, 그러지요."
그제야 레펜하르트도 정신을 차리고 제플린 성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모두 땅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성벽 위로 날아오르던 이니야가 문득 등 뒤를 돌아보았다.
채 밤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흐릿한 제플린의 시가지.
지금도 다른 이들은 저곳 어딘가에서 열심히 동족들을 이끌고 탈출 중일 것이다. 그리고 개중 누군가는 그들처럼 인간의 군세에 가로막혀 사투를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겪었던 위기를 떠올리니 다른 이들 역시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쪽은 괜찮은지 모르겠네...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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