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0

☆ ☆ ☆

소란스러운 밤거리를 작은 소녀가 창문 너머로 힐끔 내다본다. 뒤에서 어미 된 아낙이 굳은 얼굴로 소녀를 만류하며 창문을 굳게 닫는다.

"엄마, 무슨 일이야?"

"어서 방으로 들어가렴!"

제플린 시내는 혼돈에 빠져 있었다.

왕궁에서 불기둥이 솟구칠 때만 해도 시민들은 호기심은 가질지언정, 두려움이나 공포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어둠이 깔린 제플린 곳곳에서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달리고 있다. 모두가 노예로 학대받던 종족들이었다. 수백의 오크, 엘프, 드워프들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며 제플린 외곽을 향해 달려간다.

저들이 딱히 고함을 지르거나 호통을 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발소리와 숨소리, 그리고 작게 읊조리는 혼잣말이 수백이 모인다면 그것은 충분히 거대한 굉음이 될 수 있다.

저벅저벅저벅.

웅웅웅웅웅.

소란 속에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노예들의 집단.

어둠 속의 그 광경은 제플린 시민에게는 실로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상인들은 일제히 문 앞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호위 병력을 내세워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려 했다. 힘없는 일반 시민들은 그저 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문외한이라도 이 상황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대탈주!

노예로 살아가던 이종족들이 일제히 봉기한 것이다!

"좋아, 모든 것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어."

로브를 뒤집어쓴 채 레펜하르트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왕궁 거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한 상인 저택의 지붕, 제플린에선 상당히 높은 건물이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횃불의 강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전생에서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의지해 수동적으로 자유를 얻은 전생의 오크, 엘프, 드워프, 트롤 들.

하지만 저들은 달랐다. 자신의 손과 발로 밑바닥에서 일어나 스스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굳은 이들이라도 이제는 변화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하하핫!"

그렇게 뿌듯하게 제플린 시내를 내려다보던 레펜하르트의 귀에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란의 목소리, 그것도 원거리에서 음성을 전달하는 보이스 주문으로 전달되는 음성이었다.

"이봐요오~ 레펜 씨?"

레펜하르트는 지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 실란과 러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큰 소리를 못 지르니 보이스 주문을 쓴 모양이다.

실란의 질문이 이어졌다.

"아니, 왜 합류하러 잘 가다 말고 거기 올라가서 낄낄대는 건데요?"

지금 그들은 예정대로 다른 이들과 합류하기 위해 제플린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폴짝폴짝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가더니 괜히 밤하늘 내려다보며 폼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본인이야 어떨지 모르겠다만 따라가던 실란 입장에서는 대단히 생뚱맞은 광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붕 아래를 내려다보며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응? 아, 그냥 습관인지라...."

"대체 뭘 어떻게 살아야 야밤에 남의 집 지붕 올라가서 낄낄대는 습관이 붙는 건데요?"

"...."

하여튼, 잠시 감상에 좀 빠져 보려니까 바로 초 치고 들어온다. 인상을 구기며 레펜하르트는 지붕에서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문득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에 저 멀리, 불길이 번져 가는 차탄 왕궁의 모습이 보였다.

보아하니 기대했던 대로 악마들이 제대로 날뛰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 정도면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저쪽 상황 진정되긴 힘들겠군.'

만족스러워하며 레펜하르트는 지붕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탓에 그는 미처 보지 못했다.

자신이 시선을 돌린 직후, 차탄 왕궁이 안개에 뒤덮이며 불길이 급속도로 꺼져 가는 광경을.

제31장 공국의 역습

1

"게트란 필 라타!"

우렁찬 악마어를 토하며 세피아탄이 입을 벌린다. 거대한 불기둥이 열기를 뿌려 대며 대지 위로 길게 파괴의 흔적을 남긴다. 불기둥이 스치고 갈 때마다 땅이 파헤쳐지고 수목이 불타오르며 돌이 녹아 흘러내린다.

화르르륵!

붉게 달구어진 차탄 왕성 곳곳은 붉은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휘날리는 재와 검은 연기, 이글거리는 불길이 자아내는 열기 속에서 클라트 경은 정신없이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2대대, 황금궁을 지켜라! 4대대는 내궁의 왕족들을 보호하도록!"

차탄의 유일한 기사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게 이미 클라트 경은 출현한 악마 중 하나, 붉은 피부의 피엔드를 다시 이계로 되돌린 후였다. 하지만 악마의 숫자는 셋이고 그의 몸은 하나, 그가 피엔드를 상대하는 틈에 다른 두 악마는 이미 왕궁 곳곳으로 흩어져 광포하게 날뛰는 중이었다.

"크아아아!"

"크라라!"

악마들이 포효를 터트릴 때마다 검은 마력이 분출되어 건물을 부수고 피의 강을 자아낸다. 악마 자체의 파괴력도 어마어마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악마들이 소환하는 또 다른 소형 악마들이었다. 소형 악마들이 몇백 개체나 출몰해 왕궁 여기저기를 미친개처럼 치달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소환이 아니라 악마의 신체 일부나 권능을 분리해 창조하는 분신이지만,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별 의미 없는 구별이다.

'제길, 제플린 나이츠가 왕궁을 비우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현재 제플린 나이츠는 모종의 임무를 받아 전원 왕궁을 비운 상태, 아쉬워하며 클라트는 소형 악마들을 상대하는 근위 기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차탄 기사단! 홀로 상대할 생각은 버려라! 왕실 근위대와 함께 3인이 조를 짜 하나를 상대하라!"

말이 소형이지, 저 소환된 악마들의 덩치도 어지간한 성인 장정을 능가한다. 아무리 마법기로 전신을 무장한 차탄의 마법 기사라도 홀로 상대하기에는 벅찬 괴물들인 것이다. 여럿이 하나를 상대하는 것은 기사의 명예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네, 단장님!"

"알겠습니다!"

클라트의 명령이 떨어지자 차탄 기사들이 바로 왕실 근위대와 힘을 합쳐 소형 악마들의 진군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클라트는 혀를 찼다.

"...명예 안 따지는 우리나라 기사들 습성이 이럴 땐 또 도움이 되는군."

다른 나라의 기사라면 여럿이서 하나를 핍박하라는 이런 명령을 내릴 경우, 수치를 느끼며 움직임이 둔해졌을 것이다. 일대일 결투는 기사도의 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하지만 평소에도 기사답지 않게 살아온 차탄 기사단은 이렇듯 조 짜서 한꺼번에 덤비라는 명령도 전혀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니, 눈치를 보니까 '진작 이렇게 하시지.'라는 표정도 간혹 보였다.

지금 상황에선 참 바람직한 광경이지만, 그래도 뼛속까지 기사인 클라트 경이 보기엔 참 입맛이 쓰다.

'으이그, 저 기사 같지도 않은 놈들... 그래도 다행히 더 이상 밀리지는 않겠군.'

주변 상황을 파악한 뒤 클라트는 다시 눈앞의 악마, 세피아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크으으...."

자신이 소환해 낸 시종마들의 진군이 가로막히자 세피아탄이 분노의 울음을 흘리며 재차 불기둥을 토해 냈다. 잽싸게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한 클라트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하압!"

검을 머리 위로 길게 들어 올린 뒤 오러를 실어 길게 내리친다.

"블러디 레인!"

수십 줄기의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비처럼 쏟아져 세피아탄의 전신을 두들겨댔다. 세피아탄도 대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 보았지만, 워낙 공세의 숫자가 많다보니 여기저기 작은 찰과상이 연달아 생겨났다.

하지만 제대로 공격을 먹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라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크으, 역시 저 악마의 육체가 너무 단단해. 좀 더 강력한 일격이 필요한데....'

블러디 레인은 분명 뛰어난 필살기지만 세피아탄 같이 강력한 하나의 개체보다는 다수의 병력에 보다 유용한 기술이었다. 파괴력이 모자란 것이다.

아까 해치운 피엔드는 스피드 타입의 악마인지라 광범위 공격이 가능한 블러디 레인으로 충분히 해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피아탄은 거구의 파워 타입 악마, 블러디 레인을 아무 갈겨 봤자 피륙의 상처만 줄 뿐 치명타를 먹일 수가 없다.

'하지만 블러디 레인 말고 더 강력한 기술도 없고....'

같은 오러 유저라도 익힌 검술에 따라 오러 운용법은 천차만별로 차이가 나는 법, 클라트가 익힌 검술은 단순 무식한 일격보다는 정밀하고 세련된 연격을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이 스타일도 좀 더 경지에 오르면 연격을 일점에 집중해 파괴력을 보일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아직 그 정도 수준에는 오르지 못했다.

"델 카라타 마카!"

전신에서 푸른 마혈을 흘리면서 세피아탄이 다시 공세를 가해 왔다. 거대한 대검이 불길을 머금고 허공을 갈랐다. 열기가 파도처럼 밀려와 사방을 달구어 댔다.

공격을 피하며 클라트는 연달아 블러디 레인을 날렸다. 붉은 오러가 화살처럼 계속 세피아탄의 사지를 두들겨 댔다.

그때마다 세피아탄이 신음과 함께 피를 흘렸지만, 그럼에도 움직임이나 파괴력은 전혀 줄지 않는다.

세피아탄을 상대하며 클라트는 힐끔 등 뒤의 상황을 살폈다. 절로 이가 갈렸다.

"한 놈은 어떻게 막는다 쳐도 다른 한 놈이 문제군."

클라트가 세피아탄의 움직임을 막는 동안에도 나머지 한 악마, 푸른 뇌전의 젠타렐은 마음껏 왕궁을 유린하고 있었다. 여전히 왕궁 여기저기서 푸른 전격이 번뜩이며 불길이 치솟고 비명이 아우성친다.

'환장하겠군. 어서 저쪽도 처리해야 하는데....'

하지만 세피아탄을 해치우지 않는 한, 이 자리를 뜰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클라트가 초조함으로 입술을 깨물 때였다.

갑자기 새하얀 안개가 왕궁 전역을 뒤덮기 시작했다.

"음?"

안개가 화염 가득한 차탄 왕궁 전체를 휘감아 간다. 동시에 이글거리던 불길의 위세가 눈에 띠게 줄어든다. 오러 유저의 감각으로 클라트는 이 안개가 강력한 마력을 담은 마법의 안개임을 눈치챘다.

'마법사 하질 공인가? 아니, 그 양반도 자리 비웠댔는데?'

차탄 왕궁 마법사 하질은 8서클 초입의 대마법사로 많은 제자들을 부리며 차탄 왕실의 마법 전력을 담당하고 있었다. 사실 평소 상황이었다면 아무리 출현한 세 악마가 강력하다 한들 차탄 왕궁이 이토록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계의 상위 악마에게는 오러 유저보다 고위 마법사가 더욱 잘 상대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지금, 하질 역시 제플린 나이츠처럼 모종의 일로 자신의 수제자들을 대동하고 왕실을 비웠다는 점이었다.

'하필 이런 시기에 왕궁 마법사와 제플린 나이츠가 모두 자리를 비우다니, 대체 뭔 일이기에....'

혹시나 하질이 다시 돌아온 건가 싶어 클라트 경은 마력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순 놀랐다.

'응? 하질 공이 아니잖아?'

안개가 피어오르는 마력의 중심지, 백양궁의 석탑에 서 있는 것은 클라트가 알고 있는 꼬장꼬장한 인상의 늙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놀라울 정도로 젊은, 아직 앳되어 보이기까지 한 어린 여인이었다.

"흘러라, 뒤덮어라, 나는 힘의 사역자, 그릇된 것을 누르는 권능의 그릇을 부어 평온을 부르는 자...."

아무리 높게 쳐줘도 20대 중반을 넘어 보이지 않는 여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마법 영창을 잇고 있었다. 동시에 여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안개가 되어 불붙은 건물들을 휘감아 가며 화기를 억누른다.

"허어!"

클라트는 감탄하며 입을 쩍 벌렸다.

마법 자체는 6서클 후반 수준이었지만 범위가 엄청났다. 저 마력의 안개는 차탄 왕궁 전역을 거의 대부분 뒤덮고 있었다. 저 정도의 광범위 주문은 마법사 하질이라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저렇게 어린 여인이 저런 어마어마한 주문을? 설마 대마법사인가?"

하지만 아직 그가 놀랄 일은 더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탁! 탁! 탁!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안개 저편에서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거리가 놀라운 속도로 좁아진다. 안개 탓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기감만으로도 상대의 움직임이 인간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러 유저였다.

"크르?"

또 다른 강자의 기척을 느끼며 세피아탄이 고개를 돌렸다. 클라트와 세피아탄의 시선이 똑같이 한 점을 응시했다.

이윽고 안개 속에서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싯누런 오러가 일렁이는 검을 든, 젊디젊은 청년이었다.

"흐읍!"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나타난 청년이 짧은 기합을 터트리며 그대로 세피아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세피아탄도 아까부터 경각심을 끌어 올린 터, 바로 대검을 휘두르며 반격에 나섰다. 대검이 청년의 검과 부딪치는 순간....

"스파이럴 블레이드!"

청년의 오러가 눈부시게 빛나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숫제 거대한 드릴처럼 변한 청년이 검이 그대로 세피아탄의 대검을 부수며 악마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비늘이 깨지고 파편이 튀며 푸른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세피아탄이 비명을 터트렸다.

"크아아악!"

놀라운 위력이었다. 클라트가 그동안 죽어라 후려갈겼던 수십 번의 공격, 그보다 저 이름 모를 청년의 일격이 더욱 큰 상처를 주었다.

"누, 누구지? 저자는? 저런 젊은 나이에 오러를 각성한 자가 있었나?"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최근 크로방스 내전으로 명성을 떨친 안타레스 백국의 오러 유저, 사이러스였다.

하지만 저 흑발의 청년은 사이러스와 인상착의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단 머리색도 그렇고, 그냥저냥 잘생긴 편에 속하는 사이러스에 비해 저 청년의 미모는 실로 경국지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보통은 미녀나 독점하는 저 호칭이 남자에게 붙으려면 어지간한 미모로는 힘들다. 사이러스의 외모가 저 수준이었다면 소문 속에 그 얼굴에 대한 부분이 없을 리가 없지.

"타앗!"

흑발의 청년이 연달아 블레이드 오러를 회전시켜 휘두르며 세피아탄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너무 당혹스러운 상황이라 클라트는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막 정신을 차리고 협력하기 위해 몸을 날리려던 때였다.

"차탄의 왕궁 기사단장, 클라트 경이시지요?"

고운 여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조금 전 마법의 안개를 펼쳤던 그 여마법사가 어느새 그의 등 뒤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평소라면 클라트의 감각으로 못 알아차릴 리 없거늘, 지금 눈앞의 광경이 너무 놀라워 잠시 정신을 놓은 모양이다.

"그, 그대는?"

"델피아 마탑 출신의 필레나라고 합니다. 공왕님의 초청에 따라 여기 왔습니다."

"아... 도움에 감사하오. 차탄 기사단장 클라트라 하오."

더듬거리며 클라트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들이 아군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으니까.

"상황이 다급하다 보니 정식으로 인사치 못하는 결례를 용서해 주시오, 마법사 필레나."

인사를 건네자마자 클라트는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려 했다. 그때 필레나가 그를 만류했다.

"저 악마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클라트 경은 내궁의 악마를 처리해 주세요. 제가 비록 급한 불은 껐다지만 아직도 피해가 크니까요."

"아, 하지만...."

잠시 클라트는 세피아탄과 내궁 안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기사답게, 그는 자신의 상대를 남에게 미루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단장답게, 그는 지금 상황이 기사의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님을 인정했다.

"미안하게 됐군, 그럼 부탁하겠소."

굳은 얼굴로 목례한 뒤 클라트는 검을 들고 내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과연 오러 유저답게 일단 땅을 박차자 순식간에 수십 미터를 뛰어넘어 안개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필레나가 클라트의 뒷모습을 보며 뺨을 긁었다.

'사실, 이 경우에는 두 오러 유저가 힘을 합쳐 악마 하나를 해치운 다음 바로 다음 놈을 해치우는 것이 더 상황을 빨리 종료시킬 수 있는 길이겠지만....'

그럼에도 굳이 필레나가 그를 내궁으로 보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당신이 보아서는 안 될 부분이니까요."

필레나는 안개 속, 흐릿하게 비쳐지는 거대한 악마의 실루엣을 보았다. 거대한 그림자를 상대로 광검을 쥔 채 빠르게 움직이는 인간의 실루엣이 안개 너머로 비친다.

필레나가 소리를 질렀다.

"테스론! 가방 던질까?"

안개 속에서 느긋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차피 이대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하지만 이왕이면 예행연습은 될 거 아냐?"

이어진 필레나의 질문에 청년이 웃음을 흘렸다.

"하핫, 그건 그렇군. 좋아! 던져!"

"응! 테스론!"

필레나가 로브 안쪽을 뒤지더니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겉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네모난 가죽 가방, 그것에 들더니 필레나가 마법을 이용해 안개 속으로 멀리 던졌다.

"받아! 테스론!"

짙은 안개 속으로 네모난 케이스가 휘익 날아가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잠시 후, 기괴한 금속음이 안개 속에서 흘러나왔다.

우웅, 위잉, 철컹철컹!

세피아탄의 그림자를 비추는 백색 안개, 그 위로 우람한 거인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나타난다. 거인을 앞에 두고 당황한 악마의 목소리가 안개 너머로 들려왔다.

"크, 크렐?"

거인의 그림자를 통해, 느긋한 청년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역시 뭐든지 연습을 해둬야 몸에 익는 법이지."

거인의 그림자가 세피아탄의 그림자와 겹쳐졌다. 그림자가 겹쳐질 때마다 안개가 붉게 물들며 악마의 형태가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신음과 포효가 연달아 들리며 수풀이 흔들리고 굉음이 흐른다.

쾅! 쾅! 우직! 우지직!

잠시 후 세피아탄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악!"

☆ ☆ ☆

차탄 왕실의 중심부, 화려한 금박과 우아한 가구로 장식된 집무실에서 50대의 사내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화려한 복색에 금으로 수놓은 외부가 사내의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증명한다. 밖을 내다보던 사내가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

"은의 현자여, 이제 원하는 바대로 되었소?"

사내 곁에 서 있는 작은 은발의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차탄의 왕. 그대의 협력에 감사하는 바이다."

사내, 차탄 공국의 왕, 나틴 2세는 떨떠름한 얼굴로 은발의 소녀를 응시했다. 나틴 2세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탓에 제플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소. 미리 알고 있었으니 좀 더 대비할 수도 있었을 것을."

은발의 소녀, 세렐라인이 나틴 2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심하게 질문을 던졌다.

"차탄의 피를 이은 자여. 은의 현자에게 협력한 것을 후회하는가?"

사내가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의미는 아니오. 오랜 전통에 따라 당연히 협력해야겠지. 그것이 우리 가문에 주어진 의무이니."

일국의 왕이 보이기에는 지나치게 비굴한 모습이다. 하지만 나틴 2세는 잘 알고 있었다. 은의 현자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차탄 공국은 국가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애초에 그라임 왕국의 일부였던 이 나라를 차탄 공국으로 만들게 된 것이 바로 저들의 조력 덕분이었으니까.

"단지, 저들의 계획을 알면서도 왜 사태를 여기까지 끌어왔는지가 궁금할 뿐이오, 수호자 세렐라인. 적어도 은의 협력자로서 그 정도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오만."

세렐라인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제플린에 잠입한 자들은 모두 권왕을 따르는 최고위층, 안타레스 백국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강자들이다. 평소엔 안타레스 백국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놈들이라 전면전이라도 일으키기 전에는 처리하기가 불가능하지."

세렐라인이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광이 충천한 제플린 시내를 바라보며 그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런 자들이 보금자리를 떠나 스스로 이곳에 모여 주었다. 일망타진할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2

제플린 남부 지구의 한 거리.

원래라면 야경꾼을 제외하곤 인적이 없어야 할 깊은 밤이지만 지금은 요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난무하고 있었다. 탈출한 수백의 오크와 엘프, 드워프들이 저마다 무장을 갖춘 채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으니까.

"헉, 헉, 헉...."

"숨이 차서...."

"더 뛰기 힘들...."

아무리 자유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 해도, 전문적인 단련을 받지 않은 노예들에게 이 야밤의 질주는 꽤나 힘든 일이다. 특히 긴장한 상태에서 두려움에 떨며 뛰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육체노동이 익숙한 오크들도 간간히 지친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체력이 약한 엘프들 중에는 퍼져 버린 이들도 제법 있다.

잘카토며 푸른 곰 부족의 전사들은 그런 이들을 열심히 격려하는 중이었다.

"기운을 내시오!"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소!"

각지에서 탈출한 노예들은 미리 계획한 대로 제플린 여기저기서 합류해 거대한 무리를 이루었다. 덕분에 소수일 때와 달리 통솔에 장애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십여 명의 무리 중 한둘이 쓰러진다면 어떻게든 부축해 데려갈 수 있지만, 무리의 숫자가 수백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노예들을 바라보며 무리의 선두에 선 오크 오러 유저, 카루가 하다툼은 달의 위치를 확인했다.

"시간이 아슬아슬하군. 제 시간에 성문에 도착하려면 좀 더 서둘러야 해."

현재 제플린에 투입된 안타레스 백국의 오러 유저는 총 열 명, 레펜하르트와 러스를 제외하고 여덞 명은 각 지역에 분산되어 탈주 노예 무리들을 이끄는 중이었다. 하다툼 역시 그 축 중 하나를 담당, 오크들을 탈출시킨 잘카토 일행이며 엘프들을 탈출시킨 스티리아 일족과 합류해 이동하고 있었다.

잘카토가 하다툼에게 다가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낙오자가 생길 겁니다, 카루가 하다툼."

하다툼이 혀를 찼다.

"늦장 부리다가 군대가 출동하면 골치 아파질 걸세."

현재 이 무리를 이끄는 이들은 하다툼과 오크 전사들, 그리고 단하임과 스티리아 일족의 엘프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이들은 가로막는 모든 병력을 간단히 해치우며 이곳까지 달려왔다. 거리에 상주하는 제플린의 치안대 정도는 오러 유저인 하다툼과 안타레스 백국의 최정예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군대가 출동한다면 아무리 오러 유저인 하다툼이라도 저 수백의 탈주 노예들을 모두 지킬 수가 없다. 아무리 무장을 시켰다 한들 저들은 군대가 아니다. 일단 교전이 일어나면 그 와중에 무수한 피가 흐르리라.

스티리아 일족의 엘프 한 명이 하다툼에게 다가왔다.

"카를 공의 계획대로라면 아직 저들이 대응하기엔 좀 더 여유가 있을 겁니다. 조금 휴식을 주는 것이 어떨는지...."

비교적 체력이 좋은 오크들에 비해 엘프들 쪽이 훨씬 지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하다툼이 혀를 찼다. 확실히 스티리아 엘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주저앉아 쉴 여유는 없소. 하지만 이동 속도를 좀 줄이긴 해야겠군."

밤거리를 울리던 뜀박질 소리가 조금 잦아들고, 차분한 발걸음 소리로 바뀐다. 그렇게 속도를 좀 늦춘 채 하다툼은 무리를 이끌고 계속 거리를 걸었다.

한창 사방을 경계하며 두 블록을 지나 막 성문이 보이는 커다란 광장에 돌입했을 때였다.

"...!"

하다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감을 통해 광장 저편에서 백여 명이 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질서 정연하게 도열한, 의심할 여지조차 없이 확실하게 훈련된 정규군의 기척이었다.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탈주 노예 무리의 앞길을 막았다. 하다툼이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광장에서 성문으로 통하는 길이 가로막혔다.

그뿐이 아니었다. 어느새 광장을 둘러싼 건물 여기저기서 궁수들이 나타나 탈주 노예 무리들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어 댄다. 잘카토며 다른 오크 전사들의 안색도 굳었다.

병력 사이로 지휘관이 나타나 광소를 터트렸다.

"여기까지다, 이 비천한 것들! 하하하핫!"

"으음...."

신음을 흘리며 하다툼은 광장 좌우를 바라보았다. 저 건물에서 인기척이 있다는 것쯤은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투혼의 축복을 받은 오러 유저였고, 기감으로 그 정도쯤은 충분히 파악할 능력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아무리 기감이 있다 한들, 저 건물 안의 인간이 병사인지, 아니면 일반 시민인지를 구별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곳은 깊은 산속이 아니라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 제플린이다. 이제까지도 지나쳐 온 모든 건물마다 제플린 시민들이 살고 있었으니, 당연히 광장 주변의 인기척도 원래 거주민이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지휘관, 전신을 마갑으로 뒤덮은 차탄의 마검사가 통쾌하다는 듯 외침을 이었다.

"노예들 따위가 부린 잔꾀를 설마 우리들이 몰랐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탈주 노예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공포가 전염병처럼 노예들 사이로 퍼져 간다. 하다툼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확실히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만....

'정면에 백여 명, 그리고 건물 사이에 궁사 스무 명 정도인가?'

아직 밀린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그와 비견할 만한 강자의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 정도면 솔직히 포위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부우웅!

하다툼의 전신에서 투기가 피어올랐다. 투혼의 축복, 그 강렬한 오러의 기운을 사방으로 퍼트리며 하다툼이 비아냥을 던졌다.

"용케 우리 움직임을 파악한 것은 좋은데, 이 정도로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그런데, 상대는 오러의 힘을 보고도 별로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과연, 오러를 쓰는 오크가 있을 것이라더니 사실이었군."

"응?"

당황하는 하다툼의 눈에 다섯 명의 기사가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화려한 마갑과 마검으로 단단히 무장한 이들이었다. 마법에 문외한인 하다툼조차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도구, 상대의 정체가 바로 짐작이 갔다.

"제플린 나이츠...."

다섯 명의 제플린 나이츠라면 오러 유저인 하다툼에게도 벅찬 상대다. 게다가 제플린 나이츠는 마검사라는 특성상, 기사도에 그리 구애받지도 않는다. 부담 없이 합공을 해 버리는 작자들인 것이다.

긴장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하다툼과 오크 전사들을 바라보며 차탄의 마검사가 쐐기를 박듯 외침을 이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다른 제플린 기사 분들도 병력을 이끌고 포위망을 구축 중이다! 지금 네놈들의 등 뒤로 천 명이 넘는 군세가 몰려오고 있단 말이다! 으하하핫!"

☆ ☆ ☆

'...젠장, 포위되었단 말인가....'

레펜하르트는 굳은 얼굴로 눈앞의 병력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는 러스, 실란과 함께 제플린 남서부 쪽의 탈주 노예 무리와 합류한 후였다.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것은 드워프 오러 유저 말로이드와 그랜드 포지의 전사들, 그들은 현재 모두 당황한 얼굴로 무리 외곽으로 달려가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들 역시 하다툼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정예 중의 정예에 오러 유저라 한들 고작 십여 명의 인원으로 다섯 명의 제플린 나이츠와 수많은 병사들로부터 모든 노예들을 지킬 수는 없다.

불안해하는 노예들을 바라보며 길을 가로막은 제플린 나이츠가 위엄 있게 외쳤다.

"아무리 강자라 한들 저들을 모두 구할 수는 없을 터! 저들의 목숨이 아깝다면 당장 항복하라!"

눈앞에 도열한 병력들을 보며 러스가 레펜하르트에게 귓속말을 날렸다.

'어떡합니까, 형님? 피해를 무릅쓰고 뚫고 나가야 할까요?'

'그 방법밖에 없긴 하겠지만... 그럴 경우 노예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게 될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붙잡혀 줄 수도 없지 않습니까?'

결국 레펜하르트는 결심했다.

"힘으로 뚫고 나간다!"

러스가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레펜하르트도 양 주먹을 불끈 쥐며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제플린 나이츠가 코웃음을 쳤다.

"반항할 셈이냐? 이미 포위되었는데? 이제 곧 천 명의 병력이 네놈들을 덮칠 것이다! 네놈들에게 더 이상 살 길은 없다!"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천 명의 지원군은 대체 언제 오는 건데요?"

확실히, 아까부터 저 차탄의 기사가 큰소리 뻥뻥 치고 있는 걸 제외하면 포위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러스와 레펜하르트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기감을 끌어 올려 사방을 살핀다.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뒤를 보고 하늘 위를 바라본다.

어째 등 뒤가 조용하다.

천이라는 숫자가 이동하는데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다.

러스가 제플린 나이츠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치켜떴다.

"...안 오는데?"

☆ ☆ ☆

안타레스 백국. 백왕성 내부의 재상실.

밤이 깊은 시간이지만 재상실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멍하니 테이블에 앉아 카를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재상실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 자요, 카를?"

카를의 연인, 틸라가 간단한 속옷 차림으로 그의 곁에 다가와 앉는다. 어린 소녀처럼 보이지만 풍만한 가슴이 속옷 사이로 내비치니 꽤나 야해 보인다.

"티, 틸라...."

카를이 머쓱해하며 틸라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틸라가 배시시 웃었다. 이미 한 침대를 같이 한 사이임에도 이런 모습을 보는 건 부끄러운 걸까?

'누가 기사 아니랄까 봐.'

속으로 혀를 날름 내민 뒤 틸라가 카를의 무릎에 올라앉았다.

"잠이 오지 않나요?"

카를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제플린에서는 다른 이들이 목숨을 걸고 있을 텐데, 내가 잠이 올 리가 있겠소?"

"그건 그렇군요...."

틸라도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 시각, 제플린의 밤하늘 아래서는 그녀의 가족, 친구들이 동족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을 터였다. 아무리 그들의 강함을 믿고, 카를의 전략을 믿는다 한들 걱정이 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들 무사하겠죠?"

"계획대로만 된다면."

"계획대로 되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카를이 짠 계획은 완벽하잖아요?"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완벽한 계획이란 없소. 인간인 이상, 어디 한 군데라도 반드시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지."

"하지만 카를, 당신은 제가 본 사람들 중 가장 영리한 분인 걸요."

"날 높게 봐 주니 고맙긴 하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카를은 틸라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는 법, 내가 세운 작전이 확실한 강자들을 동원해 확실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확률 높은 작전인 것은 분명하지.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오. 만약 우리의 작전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안타레스 백국은 그 자리에서 멸망하게 되겠지."

그러자 틸라의 안색이 굳었다. 확실히 카를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백왕인 레펜하르트를 비롯, 현재 제플린에는 안타레스 백국의 지도층 전원이 나가 있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신생 국가인 안타레스 백국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간신히 자리를 잡은 이종족들의 보금자리 역시.

"틸라...."

사랑하는 연인이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며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소. 나 역시 그런 경우를 상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거든."

"네?"

의아해하며 틸라가 카를을 올려다보았다. 카를이 피식 웃었다.

"세상 일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뼈저리게 느낀 바 있소.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갔다면 난 지금 크로방스의 국왕 자리에 있었겠지? 난 내 자신을 그렇게 과신하지 않는다오."

문득 카를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미리 작업을 좀 해 뒀지. 제플린의 군세, 그들의 중추인 중간 장교들 전원에게 뇌물을 먹여 놓았거든. 혹시나 계획이 들통 나 중앙에서 명령이 떨어진다 해도 저들은 제때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 ☆ ☆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제플린 나이츠는 경악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왜 지원군이 오지 않는 것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기사단 본부에서는 제플린 각지의 주둔군에 제대로 명령을 하달했다. 그것도 이런 사태가 터지기 전, 어제저녁 때 보내 놓은 명령이었다. 명령이 누락되거나 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명령이 누락되었다 해도 한두 부대에 한해서이지 전원이 이렇게 명령을 받지 못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뭐가 어떻게 된 거죠?"

"글쎄, 또 카를이 뭔가 한 모양이긴 한데...."

러스와 대화를 나누며 레펜하르트는 절로 혀를 내둘렀다.

만일을 대비해 제플린의 주둔군의 움직임을 억제해 놓겠다는 소리는 들었었지만, 대체 무슨 수를 써서 이렇게 한 건지는 짐작이 가질 않는다.

"혹시 모르니 뇌물을 좀 풀어 놓겠다는 소린 들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 차탄 공국이 분명 돈이면 장땡인 나라이긴 하다. 그리고 제플린 주둔군 대부분이 푹 썩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다른 나라라면 어림도 없겠지만 차탄 공국의 경우엔 뇌물을 이용해 군대의 움직임을 막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한두 부대의 이야기다.

아무리 차탄 공국의 군기가 썩다 못해 발효되어 치즈처럼 물렁한 상태라 한들, 그래도 명색이 정예병이다. 타국의 뇌물 때문에 자국의 위기를 도외시할 정도는 아니라는 의미다.

뇌물도 다 자기 잘되자고 먹는 법. 아무리 썩었다 해도 그렇지, 생판 모르는 타국인이 나타나서 '이 돈 줄 테니 출동 명령 무시하고 제 자리 지키고 있어 주시오.'라는 요구를 군대 전원이 들어줄 정도면 차탄 공국이 여태껏 유지되지도 않았을 터다.

'진짜 신기하네, 카를 이 친구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 ☆

"그런데 카를, 아무리 뇌물을 먹었다 해도 자기 임무가 있는데 제플린의 병사들이 그렇게 눈앞의 명령을 도외시할까요? 게다가 모르는 사람이 슬쩍 돈 찔러 준다고 의심도 하지 않을 만큼 중간 장교 전부가 멍청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틸라의 의문에 카를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대 말이 옳아요, 내 사랑. 아무리 차탄 공국이 썩었다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지."

"그럼 쓸데없이 돈만 날린 것 아닌가요?"

의아해하는 틸라를 보며 카를이 자신 있게 웃었다.

"뇌물을 준 것이 내가 아니거든."

"네?"

"그들이 받은 뇌물은 어디까지나 평소의 연장선상에 있다오."

카를은 분명 제플린 주둔군에 광범위하게 뇌물을 먹였다. 덕분에 안타레스 백국의 재정이 한차례 휘청거릴 정도로. (이게 카를이 돈 없다며 레펜하르트에게 징징댄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레스 백국의 이름으로 뇌물을 건네지는 않았던 것이다.

"제플린 주둔군의 대다수는 원래부터 이런저런 상단에 각종 명목으로 뇌물을 받고 있었소."

온갖 상단이 오가는 제플린이다. 그리고 상인에게 있어 가장 골치 아픈 것 중 하나는 바로 규제인 법, 당연히 그 규제를 펼치는 관리와 군대에게 뇌물을 먹여 사업을 좀 더 편하게 하는 것이 제플린 상인의 철칙이었다.

쉽게 말해서, 제플린 주둔군은 원래부터 꾸준히 뇌물을 받아 오던 기존 루트가 있다는 의미다.

"내가 건넨 뇌물은 전부, 그들이 원래부터 뇌물을 받아 오던 기존 상단의 이름으로 주어진 것이지."

제플린에서 카를의 수하들이 뇌물을 건네며 요구한 것은, 제플린이 불바다가 되어도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금액이 크다 한들 자신의 목이 위태로운데 시키는 대로 할 바보는 세상에 없으니까.

그들이 받은 요구는 이것이었다.

-요 근래, 제플린에 큰 난리가 생길 거란 정보를 입수했다네. 물론 국가가 하는 일이니 일개 상인인 내가 어쩔 수야 없겠지만, 난리통 속에 우리 가족이 어떻게 될지 영 걱정이 되더군. 그래서 말인데, 정말 난리가 나면 일단 우리 가문의 안전을 좀 확인해 주지 않겠나? 잠깐 우리 가문으로 와서 좀 지켜 주다가 명령에 따른다면 딱히 명령 불복종이라 할 수도 없을 테고. 만약 그로 인해 피해를 본다면 아무 탈 없도록 뒤처리는 확실하게 해 주겠네.

평소부터 지갑 잘 챙겨 주던 이가 저런 요구를 한다면―그것도 짭짤한 금액을 동반하며― 거절하기 힘든 법이다.

그리고 아예 출동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잠시 지연되는 정도로는 크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적어도 차탄 공국의 법에 따르면 간단한 벌금으로 무마가 된다. 그리고 그 벌금은 그들이 받은 뇌물에 비하면 대단히 사소한 액수다.

다른 상단의 이름으로 뇌물을 건네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당초 뇌물이란 떳떳치 못한 돈이다. 당연히 얼굴 숨기고 남몰래 돈이 오가는 법, 이름을 사칭하며 건넨다 해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

물론 그 요구가 이상하다 싶으면 당연히 의심을 하겠지만, 요구 자체는 전혀 어색할 것이 없지 않은가?

당연히 주둔군들의 반응은 '우리 지갑 풍족하게 해 주고 우리 뒤를 열심히 봐준 XX상단을 잠깐 들렀다 가야겠다!'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카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법과도 같은 단어 역시 끼워 넣었다.

-제플린의 병력이 일만이나 되는데 거기서 '자네들 하나쯤' 빠진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나 하나쯤이야~라는 말이야 말로 사람을 부패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주문이라오."

모든 주둔군이 죄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사상으로 무장했다면, 제플린 전역의 군대를 일시간 마비시키는 일도 가능하다!

"단지... 주둔군 거의 대다수가 뇌물을 먹고 있었다는 건 나도 상상치 못했지. 난 잘해 봐야 절반 정도만이라도 먹히면 다행이라 생각했거든. 하지만 막상 조사해 보니 이건 뭐, 막장도 이런 막장 국가가 없더군."

어깨를 으쓱이는 카를의 모습에 틸라는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용케 이런 사람을 상대로 전쟁에서 이겼구나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머나먼 제플린의 하늘 아래 있을 레펜하르트를 떠올리며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와, 레펜하르트 님. 정말 이 사람 살려 두길 잘하신 것 같아요....'

새삼 안타레스 백국과 드워프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카를을 꽉 잡아 둬야겠다고 다짐하는 틸라였다.

☆ ☆ ☆

같은 시각, 제플린 시내.

패닉에 빠진 차탄의 병사들을 보며 러스는 빙그레 웃었다.

"어쨌거나 우린 그럼 계획대로 계속 움직이면 되겠군요?"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원군이 오지 않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부우웅!

러스의 검에서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솟구쳤다. 말로이드 역시 오러를 뿜어내 자신의 대검을 감쌌다.

"으윽...."

느긋해 보이던 제플린 나이츠의 안색이 변했다. 분명 듣기론 오러 유저 한 놈일 거라 했는데, 어디서 한 놈이 더 튀어나왔다. 두 명의 오러 유저라면 다섯의 제플린 나이츠로는 감히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다!

'아니, 대체 왜 안 오는 거야? 지원군은?'

안색이 바뀐 제플린 나이츠를 향해 러스와 말로이드가 앞으로 나섰다. 말로이드가 차갑게 웃으며 뇌까렸다.

"그러니까, 저놈들만 처리하면 우리 앞길을 막는 이들은 없다 이거지?"

그때였다.

"하여튼 이놈의 나라는... 도대체가 제대로 돌아가는 꼴을 못 보겠군!"

굵은 목소리와 함께 광장 저편에서 누군가가 밤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새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사뿐히 레펜하르트와 러스 앞에 착지하니, 그 순간 찬란한 빛이 어둠을 사르며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눈부신 황금빛으로 전신을 뒤덮은 두꺼운 갑주의 기사, 그를 보며 차탄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 오셨다!"

"테네스의 검!"

"그라임의 황금기사!"

제플린 나이츠들의 표정 역시 활짝 밝아졌다. 마법 기사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존경스러운 무인은 명성 높은 당대의 검성 바나텔이나 권왕, 이제는 권황이 된 제라드가 아니었다. 바로 같은 마검사로 오러 유저와 맞상대가 가능한 황금기사인 것이다.

상대를 바라보는 러스의 안색이 굳었다.

"...유서스 형님?"

유서스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탈주한 노예 무리 전부를 천천히 오갔다. 차가운 안광이 닿을 때마다 노예들이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그라임의 황금기사, 그 드높은 명성은 제플린의 노예들에게조차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까.

잠시 후 유서스는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와 흡사한 외모의 젊은 청년, 자신의 배다른 동생을 향해 유서스가 싸늘한 목소리를 토했다.

"오랜만이구나, 러스...."

러스도 굳은 얼굴로 유서스를 바라보았다. 두 형제의 눈빛이 허공을 교차했다.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자가 어떻게 이 자리에?"

이 자리에서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이 나타났으니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유서스가 나타났다는 것은 테스론도 이곳, 제플린에 왔다는 의미....

레펜하르트를 보며 유서스가 빙그레 웃었다.

"탈주 노예 무리 중 어디에 있을 지 통 짐작할 수 없었는데...."

그리고 다시 러스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권왕뿐 아니라 저 비천한 놈까지 이 자리에 있다니! 그야말로 세이어의 가호가 있음이로다, 크크큭!"

웃음을 터트리는 유서스의 태도에 레펜하르트는 의아해했다.

'뭐지? 저 자신만만한 모습은?'

분명 유서스의 등장이 당혹스럽긴 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현재 유서스는 홑몸이었다. 뭐, 뒤에 다섯의 제플린 나이츠와 백여 명의 병사들이 도열해 있으니 정확히 말하면 혼자라고 할 순 없지만, 어쨌거나 평소 함께하던 다른 동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레펜하르트 측에는 레펜하르트 본인은 물론 오러 유저인 러스에 원래 이 무리를 이끌던 드워프 오러 유저, 말로이드까지 있다. 몇 달 전만 해도 러스 한 명에게 처참하게 당하던 유서스가 저렇게 오만한 모습을 보일 처지는 결코 아닐 텐데?

'뭔가 믿는 것이 있는 건가?'

평소라면 대뜸 두들겨 쓰러뜨리고 갈 길 갔겠다만,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니 어째 몸을 날릴 마음이 들지 않는다.

레펜하르트가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유서스에게 물었다.

"...그대가 여기 있다는 건 테스론도 이곳에 왔다는 소리겠군?"

은근슬쩍 떠보려는 것이었는데 의외로 유서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론 경이라면 그대를 찾아 제플린 서부로 향하고 있겠지."

그리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당연히 그대가 그 '엘프 암컷' 곁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든."

순간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시리스?"

레펜하르트가 제플린 시가지 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스론이 이곳에 있다고? 그리고 시리스 쪽으로 향했단 말인가?'

현재 시리스는 이니야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 정령술이 경지에 오른 시리스와 최강의 엘프 오러 유저 이니야, 두 사람의 실력을 생각하면 사실 현재의 테스론이라도 감히 무시할 처지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차분히 따져 보면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태연한 유서스의 모습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저건 절대 허풍이 아니다.

뭔가 믿는 것이 있는 표정이다.

레펜하르트가 양 주먹을 굳게 쥐었다. 그리고 등 뒤로 소리쳤다.

"러스! 말로이드! 이 자리를 부탁하네! 난 시리스 쪽으로 가 봐야겠어!"

유서스가 믿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이곳에도 말로이드와 러스, 두 명의 오러 유저가 있다. 특히 러스는 지금도 계속 성장을 하고 있는 상황, 몇 달 전 유서스와 맞붙었을 때보다도 더욱 오러 유저로서 경지가 높아진 상태.

'함정이 있다 해도 저 두 사람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지?'

러스가 자신 있게 대꾸했다.

"맡겨 주시죠, 형님!"

말로이드도 걱정 말라는 듯 손짓을 했다.

"걱정 말고 먼저 가 계시오, 구원자 양반!"

"이 자리를 부탁하네!"

짧은 외침을 남긴 채 레펜하르트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황금빛 오러의 잔상을 밤하늘 가득 남기며 그의 거구가 시가지 지붕을 연달아 밟으며 제플린 시내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예상 외로 유서스는 굳이 레펜하르트의 뒤를 쫓지 않았다. 그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띠운 채 흐릿한 잔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권왕은 테스론 경에게 양보해야겠군."

애초에 유서스가 테스론과 합류하게 된 이유는 바로 레펜하르트와의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유서스는 그에 대한 원한이 상당히 희박해진 상태였다.

그날 이후, 레펜하르트는 전장을 오가며 계속 명성을 높여 갔다. 당대의 권왕 레펜하르트의 이름이 대륙 전역에 자자하게 울린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그렇다 보니 이젠 레펜하르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큰 수치가 아니게 된 것이다. 여전히 원한이야 품고 있긴 하지만, 지금의 유서스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증오의 대상이 존재한다.

러스를 향해 유서스가 마검 엘드란을 겨누었다. 살기를 흘리며 그가 안광을 흘렸다.

"지금은 더 중요한 용무가 있으니까 말이야."

유서스의 살기를 받아 흘리며 러스도 마주 자세를 취했다. 양손을 모아 검을 쥐고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테네스 가문 특유의 내려치기 자세였다.

휘이이잉!

두 형제 사이로 살기가 아지랑이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황금의 검, 엘드란을 들어 올리며 유서스가 살기 어린 외침을 터트렸다.

"목을 내놓아라, 더러운 사생아 놈! 이번에야말로 네놈을 단죄하겠다!"

살기를 정면으로 받으며 러스도 걸음을 옮겼다.

"단죄라... 대체 내가 무슨 죄가 있고 당신이 무슨 자격이 있어 나를 단죄하겠다는 건지는 굳이 따지지 않겠어. 어차피 말이 통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

블레이드 오러를 유서스에게 겨누며 러스가 입가를 비틀었다.

"그냥 여기서 끝내 버리겠어, 유서스. 이젠 더 이상 당신 얼굴 보는 것도 지겨워."

3

레펜하르트는 연달아 제플린 시내의 지붕들을 건너뛰며 달렸다.

몸을 날리는 내내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상하게 불안한 기분이 가슴 언저리를 떠나질 않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별문제는 없을 텐데.'

이미 레펜하르트는 현생의 테스론과 한번 맞붙어 보았다. 테스론의 강함에 대해서 대충 파악해 놓은 상태다.

분명 현재의 테스론은 강했다. 하지만 그 실력은 결코 이니야의 윗줄은 아니었다.

어째 다시 만난 이니야가 워낙 멍하게 굴어서 별로 실감은 못 하고 있지만, 사실 예나 지금이나 그녀는 엘프족 최강의 전사이자 오러 유저다. 칼켄이나 스탈라, 아틸카 혹은 오크 대전사 시절의 타시드와 맞먹는 강자인 것이다.

실전이라면 짐 언브레이커블 특유의 몸뚱이 탓에 레펜하르트가 유리하겠지만, 대련이라면 그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이니야의 실력이었다..

거기에 정령술이 월등히 강해진 시리스도 함께 있으니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테스론이 그들을 습격한다 해도 충분히 대처할 힘이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유서스의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뭔가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면 유서스가 세 명의 오러 유저를 상대로 그리 태연한 태도를 보일 리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유서스가 수작을 부렸다면 테스론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지....'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다급하게 지붕 하나를 뛰어넘던 중이었다.

갑자기 건물 아래쪽 거리에서 증오를 가득 담은 음성이 길게 늘어지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레~펜~하~르~트!"

증오와 환희가 동시에 담긴, 마치 미치광이의 포효를 연상케 하는 섬뜩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검은 빛무리가 몸을 날린 레펜하르트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건?"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는 허공에서 몸을 뒤틀었다. 저 검은 섬광에 담긴 기운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등 언저리가 저릿저릿할 정도로 가공할 힘이 그를 덮쳐 왔다!

"하압!"

반쯤 무의식적으로 레펜하르트가 오러를 끌어 올렸다. 황금빛 오러가 그의 전신을 비호하며 섬광과 맞부딪쳤다. 폭음이 울리며 레펜하르트의 전신이 뒤로 튕겨 나갔다.

콰앙!

육중한 충격이 전신을 강타한다. 뻐근한 통증이 가슴께를 타고 올라 뇌를 두들겨 댄다.

자세를 바로잡아 착지하며 레펜하르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크윽?"

스파이럴 가드를 구사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황금 오러는 그 자체로 금강석 같은 방어력을 자랑한다. 그 오러를 정확히 펼쳐 대부분의 힘을 해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검은 섬광은 여력을 채 잃지 않고 그의 가슴을 정확히 강타한 것이다.

'이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자가 제플린에 남아 있었던가?'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섬광이 날아온 곳에서 한 청년이 칠흑같이 새까만 검을 든 채 광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드디어 만났다! 크하하하하!"

칠흑의 검을 든 채 청년이 발을 굴렸다. 가벼운 발놀림만으로 3층 높이의 지붕 위를 가볍게 뛰어올랐다. 레펜하르트는 눈가를 찌푸렸다.

'으음....'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적어도 상식적인 인간의 한계는 가볍게 뛰어넘은 능력이었다.

지붕으로 올라온 청년이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미친놈처럼 낄낄대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 젠장! 만났어! 만나 버렸어! 좋아! 아주 좋아!"

아니, 말하는 걸 보면 그냥 미친 게 맞는 것 같다.

청년을 빤히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 낯이 익기는 한데....

"...누구더라?"

그러자 청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악귀처럼 안면 근육을 뒤틀면서 청년이 고함을 질렀다.

"레펜하르트! 레펜하르트! 네놈이 나를 못 알아봐? 네가? 네놈이! 으아아아!"

처절한 절규가 청년의 목구멍을 통해 사방을 울렸다. 어찌나 처절한지 일순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상관없지! 네놈을 베고 나면 싫어도 기억하게 될 테니까!"

청년이 칠흑의 검을 지붕에 꽂았다.

"오라! 나의 분신이여!"

칠흑의 검에서 암흑이 쏟아져 나왔다. 터져 버린 둑처럼 암흑이 밀려와 청년을 머리부터 집어삼켰다.

그 속에 담긴 어둠의 기운에 레펜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흑마법, 그것도 상당히 지독한 계열의 흑마법이다.

암흑을 움켜쥔 채 청년이 처절한 외침을 터트렸다.

"광기의 영혼으로 내 몸을 감싸라!"

어둠이 물질이 되어 현세에 구현되기 시작했다. 암흑이 투구가 되고 건틀렛이 되며 플레이트 아머가 되어 청년의 사지를 뒤덮어 간다.

잠시 후, 그 자리에 더 이상 청년의 모습은 없었다. 전신에서 불길한 검은 투기를 풀풀 풍기는 흑기사의 모습만 남아 있을 뿐.

그 모습을 보고서야 레펜하르트가 손바닥을 쳤다.

"아, 저 갑옷."

뭔가 했더니 저거, 예전 테스론과 조우했을 때 보았던 그 버서커 아머인가 하는 마갑이 아닌가?

"스테반인가 하던 그 친구였구먼."

얼굴 보곤 모르다가 갑옷 보고서야 겨우 알아채다니, 레펜하르트에게 저 스테반이란 존재가 얼마나 희미한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였다.

스테반 역시 그 사실을 바로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던 살기가 더더욱 짙어졌으니까.

"으아아! 레펜하르트으으으!"

☆ ☆ ☆

레펜하르트는 생각했다.

'하긴, 유서스가 여기 있으면 저놈도 있을 수 있겠군. 저놈도 테스론을 따라다니는 듯했으니.'

이것이 스테반과 조우한 감상의 전부였다. 애당초 레펜하르트에게 스테반이란 존재는 그냥 테스론을 따라다니는 졸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기억나는 부분은 실란 만났을 때 옆에서 재수 없게 굴던 놈, 그리고 타시드가 오러 유저로 각성하기 위한 좋은 밑거름이었다 정도?

"갓 오러를 각성했던 타시드에게도 졌던 놈이 뭘 믿고 이렇게 자신감 과잉이 돼서 설치지?"

어이없어하며 레펜하르트가 펀치를 날렸다.

"스트레이트 캐논!"

황금빛 오러의 정권이 스테반의 정면으로 날아갔다. 거대한 황금의 장막이 스테반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스트레이트 캐논이 막 스테반을 직격하려는 찰나, 스테반이 칠흑의 검을 휘두르며 괴성을 질러댔다.

"으아아아아!"

칠흑의 검, 그 새까만 칼날에서 검은 섬광이 솟구쳤다. 묵빛의 광채가 검날을 휘감고 황금빛 장막을 가른다. 가로로, 세로로, 사선으로, 섬광이 장막을 찢어발기며 사방으로 파괴의 여파를 날려 댔다.

콰아아아앙!

폭풍이 불며 지붕 일부가 사정없이 날려 갔다.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라?"

깨졌다. 스트레이트 캐논에 실린 그의 황금빛 오러, 그것이 너무도 간단히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단순히 가로막혔다거나 흘린 게 아니라 분명히 파쇄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러?"

스테반이 이글거리는 어둠의 검을 치켜들고 자랑스레 소리쳤다.

"보아라! 이것이 나의 오러다! 나도 이제 오러 능력자란 말이다!"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벅였다. 도무지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자는 분명 오러 유저가 아닌데?"

기감으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러 유저 특유의 존재감, 그리고 발산된 오러의 흐름과 기세는 같은 오러 유저라면 결코 못 알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오러 유저로서 레펜하르트는 단언할 수 있었다. 스테반은 절대 오러 유저가 아니었다.

"하지만 저건 분명 블레이드 오러...."

스테반이 광소를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크하하하하!"

칠흑의 검이 레펜하르트의 요혈을 노리고 연달아 찔러 왔다. 단순한 찌르기라면 피할 필요도 없겠지만....

"스파이럴 가드!"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오러를 회전시켜 전신을 휘감으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펑! 펑펑!

검은 오러와 회전하는 황금의 오러가 스쳐 지나가며 연이어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오러와 오러가 반발하며 일어나는 특유의 모습이다.

틀림없었다.

저 검은빛은 블레이드 오러였다.

'이해할 수가 없군.'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바로 역공에 들어갔다. 지붕을 박차 몸을 날리며 단숨에 스테반의 정면으로 돌진한다. 전신의 탄력을 주먹에 싣고서 레펜하르트가 연거푸 펀치를 날렸다.

"타아앗!"

수십 발의 펀치가 스테반의 마갑 여기저기를 강하게 두들겼다. 단순한 원투 스트레이트를 연달아 날린 것뿐이지만 일격, 일격이 공성추에 맞먹는다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펀치다. 타격음이 쉴 새 없이 울리며 스테반이 뒤로 밀려났다.

"크윽! 크윽! 크으...으하하하하!"

순간 레펜하르트는 소름이 돋아 주먹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투구 사이로 흘러나오던 스테반의 신음이 도중에 자연스럽게 광소로 바뀌었다?

'뭐, 뭐야? 이 새끼?'

자고로 맞으면서 즐거워하는 놈과는 절대 상종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미친놈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더니, 그 격언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레펜하르트였다.

스테반이 자신의 갑옷을 내려다보더니 통쾌하게 웃었다.

"으하하! 버틸 수 있어! 버틸 수 있다고!"

레펜하르트는 식은땀을 흘렸다. 저 자의 광기도 광기지만, 능력 자체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오러 유저 이상의 움직임과 괴력을 보이는 데다가 그의 정권을 정면으로 맞고도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을 정도라니?

'엘드라드 같은 특급 마도구인가? 아니, 마법에 의한 강화가 아니야. 다른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이 파괴력은 도대체... 게다가 마법으로는 오러를 구현할 수가 없는데...?'

마법의 원천이 되는 원소, 마나는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본질적인 힘이다. 쉽게 말해서 무생물적인 속성을 띠고 있다.

그 무생물을 생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생명기, 오러.

속성이 비슷한 신성 주문으로는 오러와 비슷하게 효과를 낼 수 있지만―세이어 교단의 신성검이 대표적인 사례다― 마법으로는 절대 오러를 구현할 수가 없다.

이는 마법의 경지나 수준과는 전혀 상관없는, 세계의 법칙에 따른 문제였다. 물과 불은 분명 상극에 위치하고 있지만 불을 얼린다고 물이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분명 눈앞의 이 스테반이란 자는 저 검은 갑옷의 힘을 빌려 블레이드 오러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죽어라, 레펜하르트으으으!"

스테반이 검을 고쳐 쥐고 다시 덤벼들었다. 레펜하르트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전투에 임했다.

검은 오러와 금빛 오러가 수십 차례나 허공에서 격돌하고 또 격돌했다. 그때마다 지붕이 날아가고 건물이 뒤흔들린다. 근처에 거주하던 시민들이 공포에 질려 집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으악!"

"괴물이다!"

"사람 살려!"

사방이 부산스러워지자 스테반이 버럭 신경질을 냈다.

"아!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그리고 대뜸 칠흑의 검을 거리를 향해 휘두른다. 십여 줄기의 새까만 오러 칼날이 파공음을 내며 도망치는 시민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스테반을 상대하던 레펜하르트가 기겁하며 거리 쪽으로 양 주먹을 번갈아 뻗었다.

"이런! 연환 기격탄!"

십수 개의 금빛 오러탄이 허공을 가르며 쏘아져 오러의 칼날을 뒤쫓아 갔다. 그렇게 기격탄으로 검은 칼날들을 죄다 요격한 뒤에야 레펜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기막혀하며 스테반을 향해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스테반? 당신은 기사가 아니었나? 죄 없는 사람의 목숨은 노리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날 텐데?"

하지만 스테반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벙실벙실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광기 어린 눈으로 반문하기까지 했다.

"응? 무슨 사람? 여기 사람이 어디 있는데?"

어깨를 으쓱거리며 스테반이 입을 벌렸다. 입고리가 좌우로 길게 찢어지며, 미소라기엔 지나치게 흉악한 표정으로 킬킬거린다.

"아무도 없잖아? 응? 여긴 너랑 나뿐이라고! 안 그런가! 권왕 레펜하르트! 크크크큭!"

"...진짜 미쳐도 제대로 미쳤구먼...."

스테반이 또다시 몸을 날렸다. 또다시 검은 블레이드 오러가 정신없이 날아들었다. 레펜하르트도 열심히 스파이럴 가드를 양팔에 감싸며 방어해 냈다.

공격이 계속 가로막히자 스테반이 표정을 한껏 구겼다.

"아씨! 왜 안 잘리는 거야! 응?"

갑자기 스테반이 뒤로 펄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칠흑의 검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고 괴성을 흘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검은 오러가 검 끝에 모이며 점점 파괴력을 높여간다. 레펜하르트는 눈을 빛냈다.

'호오?'

역시 미친놈은 어쩔 수 없는 미친놈인 모양이었다. 이 상황에서 저렇게 허점을 훤히 드러내 보이다니.

레펜하르트가 사뿐히 발을 놀려 앞으로 돌진했다.

'기회다!'

낮은 자세로 지붕 위를 미끄러지며 스테반의 턱 밑을 자연스럽게 파고든다. 안 그래도 양팔을 번쩍 든 덕에 스테반의 가슴께는 아주 훤히 드러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저 두꺼운 검은 갑옷, 버서커 아머에 의해 튼튼히 가로막혀 있지만....

"흐읍!"

스테반의 가슴에 주먹을 가져가며 레펜하르트는 짧게 기합을 터트렸다. 동시에 전신을 회전하며 그 회전력을 주먹으로 옮겨 모든 것을 꿰뚫는 강렬한 관통력으로 바꾼다!

"제로 임팩트!"

스테반의 갑주 속에서 희미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주먹을 마주 댄 채 레펜하르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상대의 전신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맞닿은 주먹을 통해 확실히 느껴졌다.

"짐 언브레이커블에는 갑옷을 투과해 공격하는 기술도 상당히 많거든?"

주르륵....

투구 사이로 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투구의 틈새로 보이는 스테반의 눈동자가 핏발이 서 붉게 빛난다. 레펜하르트는 주먹을 뗐다. 이걸로 승부는 끝났....

"킬킬킬...."

그때, 투구 사이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스테반이 붉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아파... 안 아프다고...."

곧바로 칠흑의 검이 레펜하르트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쳐졌다.

쩌어엉!

검은 벼락이 허공을 찢었다. 충격파가 대기를 가르며 둥글게 퍼져 나간다. 검은 파문이 퍼져 나가 주변 가옥 여기저기 충돌해 폭발을 일으킨다.

우르르릉!

결국 그들이 밝고 있던 3층 건물은 무너져 버렸다. 흙먼지가 오르고 파편이 튀어 도로 위로 떨어졌다. 잔해 속에서 스테반이 검은 투기를 흘리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피했군, 레펜하르트... 피했어... 클클클."

충혈된 핏빛 눈동자가 무너진 잔해 일부를 응시한다. 파편 더미가 흔들리며 이내 먼지와 함께 거구의 사내가 잔해를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아슬아슬했군...."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몸을 빼서 망정이지.'

스테반이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더니 비아냥을 던졌다.

"피했어, 짐 언브레이커블에 회피는 없다더니 피했어... 부끄럽지? 응, 부끄러울 거야... 권왕!"

비아냥거리다 말고 끝에 가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걸 보니 여전히 정신은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었다. 레펜하르트는 순간 실소를 터트렸다. 하긴, 그가 순수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계승자라면 부끄러워할 법도 했겠다.

'다행이군. 안 부끄러운 것 보니 아직 덜 물든 모양이야, 나도.'

어쨌거나 용케 피해서 망정이지, 제대로 맞았다면 이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로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정도로 가공한 일격이다.

내심 안도하며 레펜하르트는 유심히 스테반을 바라보았다. 코앞까지 다가간 덕분에 드디어 저 검은 마갑의 운용법에 대해 감이 잡힌 것이다.

"다크니스 드레인에 암성 변환, 거기에 강제 심연 각성화까지...."

모두 고도의 흑마법이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마법이라면 대륙의 그 누구보다도 일가견이 있는 몸.

"대체 무슨 수를 쓰나 했더니...."

차가운 비난을 담아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저 미친놈, 억지로 자신의 목숨을 태워서 오러로 바꾸고 있었군."

☆ ☆ ☆

시전자의 생명을 오러로 바꾸는 방식의 변환 마법 개념은 사실 그리 독특한 발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러는 생명기.

그리고 흑마법은 주로 생명의 기운을 그릇되게 움직여 사이한 수법을 쓰는 것.

당연히 고위 흑마법사치고, 흑마법으로 시전자의 생명을 변환해 오러로 바꿔보려는 시도를 안 해 본 자는 하나도 없다.

심지어는 이름조차도 뻔하게 버서커 아머라고 붙여 놓지 않았는가? 문외한이 들어도 누구나 '저거 제 수명 깎아서 날뛰게 만드는 물건이겠구나.'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명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펜하르트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누가 저렇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마갑을 만든 거야?'

흑마법으로 생명을 강제로 끌어내 오러로 바꾼다.

이론만 들어 보면 참 유용할 것처럼 같겠지. 오러 유저의 힘은 실로 엄청난 것이니 마법으로 인공적인 오러 유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전력이 될 테니까.

그럼에도 레펜하르트나 다른 마법사들이 저런 방식의 마법을 연구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엄청나게 비효율적인데, 저거.'

아무리 절세의 흑마법을 총동원해 마갑을 만든다 해도, 그 갑옷의 소유주가 모두 오러를 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애당초 억지로 생명기를 끌어내는 방식이다 보니 중간에 낭비되는 기운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렇다 보니 평범한 인간, 아니 어지간히 단련된 이라 할지라도 오러를 끌어내기 전에 생명력이 먼저 고갈되어 버린다.

쉽게 말해서 남들보다 월등한 기운을 지닌 강력한 전사여야지 겨우 저 수법이 먹힌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월등한 기운을 지닌 강력한 전사의 종착점이 바로 오러 유저지.'

즉, 저 수법은 어차피 오러 유저가 될 놈을 편법으로 일찍 오러를 발현하게 만드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흑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예전에 사장된 방식이었다. 내버려 두면 멀쩡히 오러 유저가 될 놈을 몇 번 써먹고 꽥 죽게 만드는 수법인데 누가 굳이 쓰려고 하겠는가?

스테반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나직하게 물었다.

"알고는 있는 거냐? 그 마갑을 쓰면 쓸수록 자기 수명이 깎이는 건?"

히죽 웃으며 스테반이 대꾸했다.

"크크큭, 수명 따위가 뭐가 중요할까?"

말 들어 보니 본인도 저 부작용에 대해 익히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생명력이 쪽쪽 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테니 못 알아차릴 리가 없겠지.

스테반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멍청한 놈아! 그대로 10여 년만 더 착실히 수련하면 네놈은 어차피 오러 유저가 될 수 있었어!"

"하지만 스테반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굴욕 속에서 벌레처럼 삶을 이어 갈 바에야 기사답게 명예를 되찾고 승리 속에 죽겠노라!"

"아니, 기사 주제에 마도구의 힘으로 이긴들 무슨 명예가 생긴다는 거냐?"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 말하는 태도에 그저 어이만 실종할 뿐이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제 고집 못 이겨 생목숨 날리는 멍청이 같으니.'

세상엔 가끔 저런 종자들이 있다.

무의미한 목표를 세워 놓고 치달리다가 결국 주객이 전도되어 자신이 뭘 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게 되는 이들. 너무 하나만 바라보아서 전혀 주변을 보지 못하게 되어 버린 자들.

전생에서 수없이 만나고 또 만나 온, 자칭 영웅이라는 놈들!

레펜하르트가 살기 어린 미소를 띠었다.

"그래, 그렇게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그 싸구려 목숨, 내가 거두어도 별로 억울할 것은 없겠지."

광기 어린 눈을 번득이며 스테반이 다시 돌진했다.

"시끄러워! 닥쳐! 이만 죽어! 죽으란 말이다, 레펜하르트!"

칠흑의 검이 정신없이 레펜하르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아까의 타격으로 내장이 여럿 꼬였을 텐데도 움직임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육체가 반쯤 죽었다는 의미다.

양손을 들어 올리며 레펜하르트가 비웃음을 흘렸다.

"소용없다."

뒤로 물러서며 레펜하르트는 스파이럴 가드를 휘감은 양 팔뚝으로 차근차근 공격을 받아 냈다.

확실히 목숨마저 도외시한 스테반의 오러는 강력했다. 일격, 일격 막을 때마다 팔뚝이 저려 올 정도다. 하지만....

"이런 식의 오러 발현은 전혀 의미가 없어."

분명 스테반의 움직임이나 파괴력은 어지간한 오러 유저를 아득히 능가한다. 그리고 그 위력은 지금도 전혀 쇠퇴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와 달리 레펜하르트는 무난하게 스테반의 모든 공격을 받아 내고 있었다.

스테반의 표정이 점점 구겨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갑자기 공격이 하나도 안 먹히지?"

딱히 레펜하르트의 실력이 아까보다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공격이 죄다 도중에서 차단된다. 마치 미래를 죄다 예측하는 것처럼!

레펜하르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리 오러라고 해도 마법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라면, 마력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지.'

아까와 달리 레펜하르트는 스테반이 아닌, 그가 걸친 버서커 아머에 감각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대의 오러는 확실히 예측 불허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기반은 버서커 아머의 마력 변환, 그렇다면 굳이 오러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냥 버서커 아머의 마력 흐름만 파악하면 자연스럽게 오러의 움직임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공격이 점점 빗나간다. 스테반의 이마에 점점 더 핏발이 곤두섰다.

스테반은 악을 쓰며 더더욱 칠흑의 검을 휘둘러댔다.

"으윽! 이이익!"

물론 먹히는 공격은 하나도 없었다. 일단 구동 원리를 파악한 이상, 스테반의 검은 오러는 더 이상 레펜하르트의 상대가 되질 못한다.

"목숨까지 버려 보았자, 편법으로 얻은 힘은 결국 이 정도일 뿐이지."

나직한 한마디와 함께 레펜하르트의 앞차기가 스테반의 가슴을 정확히 적중했다.

"가스트리젠!"

오러의 흐름 사이, 채 방어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을 때 날린 일격이라 아까와 달리 제대로 타격이 들어갔다. 스테반의 눈과 귀로 붉은 피가 철철 흘렀다.

그럼에도 스테반은 쓰러지지 않았다. 움푹 파인 가슴팍을 내밀며 괴성을 지르고 또 지른다.

"으아! 으아! 으아아!"

오러 방어가 없었는데도 갑옷 자체가 워낙 튼튼하다 보니 버티는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이대로 계속 두들기다 보면 뭐, 질 리야 없겠지만 그는 갈 길이 바쁜 몸이었다. 여기서 계속 스테반을 상대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다.

'캘러미티 혼을 써? 하지만 테스론을 두고 이런 놈을 상대로 오러를 낭비하고 싶지는 않은데....'

게다가 이래저래 무인다운 마음가짐이 된 터라, 저런 놈을 상대로 진지하게 최강의 기술을 날리는 것은 어째 치욕이라는 느낌도 든다.

그렇게 잠시 레펜하르트가 갈등하는 사이, 스테반이 다시 기이한 신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죽어, 레펜하르트... 죽어...."

스테반이 칠흑의 검을 치켜들었다. 검은 갑주로부터 시꺼먼 어둠이 풀풀 흘러나온다.

검은 어둠이 검에 맺히며 점점 거대해졌다. 뭉치고 뭉치고 또 뭉쳐 10여 미터가 넘는 거대한 칼날로 화한다.

"죽어 버려...."

가공할 기운이 칼날 가득 넘실거린다. 레펜하르트가 입맛을 다셨다.

"또 저 짓거리냐?"

아까 저러다 한 방 거하게 맞은 주제에 또 시도하다니 참 학습 능력도 없다. 뭐, 미친놈에게 학습 능력을 기대하는 것도 웃기지만.

'하지만 제로 임팩트도 버텨 내는 놈이니 어지간한 건 날려 봤자 반격할 테고.'

결국 캘러미티 혼을 써야겠다며 레펜하르트가 막 자세를 잡을 때였다.

순간 머릿속에 섬광처럼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가만? 그걸 써 볼까?'

캘러미티 혼의 자세를 풀고 레펜하르트가 대신 양 주먹을 허리로 가져갔다. 그리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델 파라 아케인 포스, 흐름은 힘이 되고 바위를 부수어 강이 되리니...."

마력이 양 주먹에 응집되며 희미하게 백열했다. 그 상태로 레펜하르트가 오러를 끌어 올렸다. 황금빛 오러가 마력과 뒤섞이며 더욱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스테반이 포효를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카아아악!"

칠흑의 대검이 어둠과 동화되어 거대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온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양 주먹을 마주 때렸다.

쾅!

마력과 오러가 부딪히며 파문을 일으켰다. 일어난 파문이 빛의 고리가 되어 오른 주먹에 맺혔다. 레펜하르트는 계속 양 주먹을 서로 두들겼다.

쾅! 쾅! 쾅!

웅웅웅웅웅!

마력과 오러가 뒤섞인 빛의 고리, 그것이 연달아 생성되며 오른 주먹에 휘감겼다. 네 개의 빛의 고리를 오른 주먹에 떠올린 채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었다.

"뇌전권 만들다 떠올린 건데 되는구먼."

코앞까지 다가온 스테반이 고함을 지르며 검을 내리쳤다.

"슈팅 크로스!"

칠흑의 검이 세상을 가를 듯 레펜하르트의 정수리를 노리고 쏟아졌다. 레펜하르트도 마주 몸을 날렸다.

"타아아앗!"

동시에 그가 주먹을 뻗었다. 마력의 고리가 오러와 충돌하며 중첩, 또 중첩되었다. 백색의 고리와 황금빛 오러의 파문이 연달아 융합하며 연쇄 폭발을 일으킨다. 그 폭발력을 모조리 한 방향으로 유도하며 레펜하르트가 시동어를 외쳤다.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

콰아아아앙!

백색과 황금색의 빛이 서로 얽혀 소용돌이가 되며 스테반의 전신을 강타했다.

☆ ☆ ☆

마법과 무술을 융합하는 한편, 레펜하르트는 본연의 짐 언브레이커블 기술에 대한 훈련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몸을 단련하고 특히 캘러미티 혼의 다음 단계를 위해 계속 수련, 또 수련했다.

하지만 캘러미티 혼 5중첩의 관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리지 않았다. 뭔가 될 듯 말 듯 하면서도 아주 작은 무엇인가, 아주 사소하지만 절대적인 마지막 조각이 없어 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답답해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꾸준히 캘러미티 혼을 연습했다. 그리고 문득 아쉬움을 느꼈다.

'캘러미티 혼, 이거 위력은 나무랄 데가 없는데 너무 힘 소모가 크단 말이지? 위력 조절도 안 되고.'

캘러미티 혼은 상황에 따라 힘 조절이 가능한 기술이 아니었다. 4중첩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서 상황 따라 1중첩이나 2중첩만 쓸 수 있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는 의미다.

일단 오러를 정해진 흐름대로 끌어내면 경지에 따라 자연스레 파동이 따라오는 방식이기 때문에 위력 조절이 불가능한 것이다.

'뭐, 역대 권왕들은 힘 조절할 생각도 안 했겠지만.'

역대 권왕들이야 뒷생각 같은 것은 안 하고 일단 지르고 보는 호쾌한 작자들이라 주변에 민폐가 되건 말건 있는 힘껏 캘러미티 혼을 날려 대곤 했으니 딱히 보완할 생각을 못 했겠지.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마법사이기도 했고, 그렇다 보니 힘 조절이 안 되는 이 캘러미티 혼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이미 그는 위력 조절 함부로 못 하면 어떤 꼴 당하는지 겪은 바가 있었다. (그놈의 뉴클리어 버스트 한번 잘못 날렸다가 대륙 공식 마왕으로 찍힌 사태는 지금도 떠올리면 후회막급일 뿐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보완책을 강구했다. 하지만 고작 4중첩에 불과한 레펜하르트의 현 깨달음으로 이미 완성된 기술인 캘러미티 혼을 뜯어고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대신 구상한 것이 이 기술, 뇌전권 방식을 응용해 마력을 주먹에 모으고 물리력으로 바꾸는 주법을 통해 '인공적인 오러-마력 파문'을 끌어내는 마법 술식,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인 것이다.

"자고로 하이브리드가 출력은 낮아도 효율은 좋은 법이지, 후후후."

제플린의 거리 한복판에 움푹 파인 크레이터를 내려다보며 레펜하르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이브리드라곤 해도 엄연한 캘러미티 혼, 그 위력은 스테반의 검은 블레이드 오러를 박살 내고, 버서커 아머를 부수고, 제플린 도로를 파헤쳐 직경 5미터의 크레이터를 새성할 정도로 충분히 강력했다.

"소모되는 오러양은 연환 기격탄 정도인가? 시전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체력을 보존하며 파괴력을 유지하기엔 적당한 수준이군. 하지만 역시 파괴력은 오리지널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네. 이래저래 보완할 점이 많군. 그래도 오리지널과 마력 융합 캘러미티 혼을 함께 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전투의 폭이 상당히 넓어지니...."

그렇게 머릿속으로 술식을 정리하며 레펜하르트는 몸을 돌렸다. 어쨌거나 상황 종료했으니 어서 시리스 쪽에 합류해야 한다.

그렇게 막 자리를 뜨려는 참이었다. 문득 크레이터 안에 널브러진 시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숨이 끊어진, 비참한 몰골로 죽은 스테반의 시체였다.

어쩌니저쩌니 해도, 저 마갑을 걸친 스테반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과연... 자신만만해할 만했지, 저 갑옷의 위력은...."

그리고 유서스 역시 스테반처럼 이상하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었다.

'역시 그 작자도.... 이거, 러스 쪽은 괜찮을라나?'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러스에게 돌아갈 수도 없었다. 유서스가 스테반처럼 예상 이상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면 테스론은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는 않을 테니까.

레펜하르트는 굳은 얼굴로 몸을 날렸다.

'일단은 계속 시리스 쪽으로 가 봐야겠군. 지금은 그저 러스와 말로이드를 믿는 수밖에....'

4

"프리즌 블레이드!"

"에어 블래스트!"

"익스플로전!"

제플린의 마법 기사들이 저마다 시동어를 외치며 마검의 힘을 끌어낸다. 냉기가 맺힌 검이 말로이드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놈들, 칼 든 주제에 뭔 마법질이야?"

툴툴대며 말로이드가 대검을 횡으로 베어 갔다. 진홍색 블레이드 오러가 쇄도하는 냉기를 가볍게 흩어 버렸다. 프리즌 블레이드는 꽤나 강력한 냉기 주문이었지만 역시 오러와 상대하기에는 손색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검째로 베어 버리려는 찰나, 강렬한 풍압이 말로이드의 좌측을 덮쳐 왔다. 다른 제플린 나이츠가 발동시킨 풍계 주문, 에어 블래스트와 폭발 주문 익스플로전이었다.

폭압으로 인해 돌진하던 말로이드의 움직임이 살짝 균형을 잃었다. 그 틈에 얼음의 검을 든 자가 다른 마법을 발동시켰다.

"린포스 실드!"

아무리 블레이드 오러라도 타격점이 빗나가면 위력은 극감하기 마련, 살짝 타점이 어긋난 진홍빛 오러가 마법 방어막에 의해 가로막혀 버렸다. 그 틈에 상대가 뒤로 빠지고 다른 두 명의 제플린 나이츠가 공세에 나섰다.

"스트렝스 부스트!"

"그리스! 홀드! 슬로우!"

일순간 근력을 강화하는 마법을 걸고 좌측의 마법 기사가 검을 길게 찔러 왔다. 말로이드가 인상을 쓰며 대검을 옆으로 뉘여 공격을 막아 냈다. 대검과 마검이 충돌해 쇳소리를 울렸다.

타앙!

오러 유저인 말로이드의 기량이라면 여기서 충분히 방어를 하며 동시에 반격에 나설 수 있다. 하지만 그 찰나에 절묘하게 마찰 제어 주문과 두 종류의 신체 억제 주문이 들어온 탓에 타이밍을 잃었다.

"이, 이거 참...."

반격을 포기하고 말로이드는 오러를 운용했다. 진홍빛 오러가 회오리치며 전신을 뒤덮어 순식간에 제어 마법들을 깨트렸다. 저 제어 주문들은 비교적 낮은 서클의 마법, 전신의 오러를 환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쉽게 파훼할 수 있다.

그 틈에 이미 저 다섯의 제플린 나이츠들은 다시 안정적인 진형으로 돌아가 다음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법이 깨져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상대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바로 공격이 이어진다.

"블리저드!"

"에어로 봄!"

눈보라와 공기 압축 폭발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공세를 피하며 말로이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차라리 화염이나 전격 공격을 날리면 오러의 방어력을 믿고 육탄 돌격이라도 시도해 보겠는데, 쩝.'

가장 보편적인 파괴 마법이라면 역시 화염계나 뇌전계, 혹은 섬광계인 법.

하지만 제플린 나이츠는 철저하게 빙계 마법이나 풍계 마법만으로 말로이드를 상대하고 있었다.

빙계 마법은 화염계처럼 순간적인 파괴력은 없지만 지속적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풍계 계열의 폭발 마법은 설사 파괴력을 감당하더라도 그 풍압만으로 자세가 흐트러지니 바로 반격할 수가 없다.

몇 번 공방을 나누고 나니 바로 알 수 있었다. 스텝을 밟아 연신 마법 공세를 피하며 말로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들, 오러 유저 상대하는 수법에 아주 도가 텄군."

제플린 나이츠 넷이 모이면 오러 유저 하나를 상대할 수 있다는 소리는 미리 카를에게 들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말로이드는, 그것을 그저 단순하게 제플린 나이츠가 오러 유저 바로 밑의 강자라는 소리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냥, 상황 맞춰 각개격파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붙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물론 저들 개개인의 기량은 감히 그와 비교할 수 없다. 일대일 대결이고 전력을 다한다면 1분 안에 쓰러트릴 자신이 있다.

하지만 제플린 나이츠는 다섯이서 마치 한 명의 마검사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그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것도 단순한 합공 정도가 아니라 톱니바퀴처럼 철저히 짜인 연수 합격이었다.

명색이 기사라면 여럿이서 한 명을 상대하는 것에 수치를 느껴야 정상일 것이다. 실제로 타국의 다른 기사단은 집단 대 집단의 전투는 연습할지언정 절대 다수 대 일의 전투를 상정하고 수련을 쌓지는 않는다.

하지만 차탄의 기사들은 원래 기사도 따위 서임 받을 때 한번 외우고 바로 까먹어 버리는 작자들이다. 기사의 명예나 도리보다는 월급과 뇌물에 더 관심이 많은 이들이 바로 차탄의 기사들, 그렇다 보니 썩기도 썩었지만 이렇듯 쓸데없는 허례허식 따위 신경 끄고 오직 승리만을 위해 움직이는 것에도 그리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탄 기사들의 정점이 바로 이들 제플린 나이츠, 이기기 위해서라면 합공이면 기습이건 뒤통수 때리기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이다. 당연히 다수 대 일의 전투 정도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시행할 수 있다.

"아이스 포그!"

"에어 웨이브!"

"소닉 바이브레이션!"

제플린 나이츠들이 계속 말로이드를 공격해 갔다. 마법을 연달아 쏘아 대고 조금만 상황이 위태로워지면 바로 자리를 교체해 위기에서 탈출한다. 가끔씩 몰래 독침이나 암기를 날리는 등의 치사한 짓도 마다하지 않으니 긴장을 풀 수가 없다.

"으으음...."

말로이드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공방을 주고받으며 그는 힐끔 주변 상황을 살폈다.

'러스 경은 아직도 그자와 싸우는 중인가?'

조금 떨어진 광장의 한편, 그곳에서 황금빛과 푸른 섬광이 연달아 격돌하고 있었다.

☆ ☆ ☆

"기간틱 블레이드!"

포효를 터트리며 러스가 검을 찔러 넣었다. 고도로 압축된 푸른 오러가 빛의 창이 되어 유서스의 가슴을 강타했다.

콰앙!

폭음이 울리며 유서스가 뒤로 10여 미터 이상 날아갔다.

하지만 유서스는 쓰러지지 않았다. 뒤로 날아간 상태로 허공에서 자세를 잡더니 가볍게 공중제비를 넘어 착지한다.

러스의 인상이 구겨졌다. 분명 정통으로 기간틱 블레이드가 먹혔는데, 투구 속 유서스의 얼굴에는 조금의 고통도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태연한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것이다.

"하하핫! 고작 이 정도냐, 러스!"

통쾌하다는 듯 웃으며 유서스가 자신의 마검, 엘드란을 허공에 휘둘렀다.

엘드란의 검신이 빛나며 눈부신 금빛의 문자를 떠올린다. 아로새겨진 문자 위로 마력이 흐르며 복잡한 술식이 순식간에 완성된다. 검을 내리치며 유서스가 시동어를 외쳤다.

"울부짖어라! 엘드란!"

금빛의 섬광이 광장을 파헤치며 러스에게 쏘아졌다. 스치는 곳마다 벽돌이 부서지며 파편이 튀어 오른다. 실로 엄청난 파괴력, 하지만 러스는 옆으로 몸을 날리는 것만으로 간단히 공격을 피했다. 섬광의 스피드는 물론 엄청났지만, 현재 러스라면 피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흥!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코웃음을 유서스가 허공에 계속 검을 휘둘렀다. 마치 채찍이라도 된 듯, 엘드란이 내뿜는 금빛 섬광이 계속 러스를 쫓아가며 광장 여기저기 파괴의 손톱을 긁어 댔다. 건물이 반으로 쪼개지고 거대한 석재 조각이 광장 바닥에 떨어져 육중한 굉음을 흘렸다.

자욱한 파괴의 향연, 그 속을 뚫고 지나며 러스는 연달아 땅을 박찼다.

탁! 탁! 탁!

세 번 뛰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유서스와의 거리가 좁아진다. 날아오르는 매처럼 날쌔게 광장을 가로지르며 러스가 검을 길게 뒤로 뽑았다.

"타아앗!"

기합을 터트리며 러스는 연거푸 찌르기를 날렸다. 눈부신 푸른 오러가 매의 발톱처럼 정밀하게 유서스의 전신을 찔러 갔다.

"세븐 스타즈!"

검 끝의 푸른 오러가 유서스의 갑옷 여기저기를 정확히 강타했다. 황금의 갑옷 곳곳에 푸른 오러가 맺혀 반짝인다. 잠시 후, 오러가 서로 연동되며 갑옷 전체에 폭발이 일어났다.

스탈라에게서 배웠던, 예전 유서스를 만났을 때 마갑 엘드라드를 한 방에 박살 냈던 바로 그 기술이었다.

콰아아앙!

우렁찬 폭음이 유서스와 러스 사이를 가로막는다. 폭발의 여파로 바닥이 파헤쳐지며 자욱한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러스는 굳은 얼굴로 연기 사이를 노려보았다. 예전에는 이걸로 쉽게 유서스를 처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안 먹히나...."

연기가 걷히며 멀쩡하게 서 있는 유서스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갑옷 역시 재차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세븐 스타즈의 흔적 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주 미세하게 금이 갔을 뿐, 저 황금빛 갑옷은 여전히 굳건하게 유서스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러스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세븐 스타즈를 날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이미 아까부터 몇 번이나 유서스를 향해 기간틱 블레이드와 세븐 스타즈를 날린 후였다. 그리고 현재 유서스를 감싸고 있는 저 마갑을 모든 공격을 막아 낼 뿐 아니라 모든 충격을 해소시키고 있었다. 마갑 엘드라드가 아무리 초특급 아티팩트라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유서스가 걸치고 있는 것은 평소의 엘드라드가 아니라, 그보다 두 배는 더 두꺼운 새로운 형태의 황금 갑옷이었으니까.

"소용없다, 러스! 네놈 따위는 절대 이 위대한 고대의 갑옷을 뚫을 수 없어!"

안면 가득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유서스를 보며 러스는 혀를 찼다.

'대체 어디서 저런 아티팩트를 얻은 거지?'

처음에 검을 꺼낼 때만 해도 러스는 유서스를 자신의 상대로 여기지도 않았다.

예전에 붙었을 때도 이미 유서스는 러스보다 훨씬 아래의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유서스는 마검사로서 완성된 상태, 더 이상 성장할 여지가 남지 않은 자였다.

반면 러스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때보다 훨씬 실력이 늘어난 상태였다. 마갑 엘드라드의 위력이 갑자기 급등할 리도 없으니 아무리 이리저리 재어 봐도 그가 패할 일이 없는 것이다.

유서스에게 다가가며 러스가 비웃음을 던졌다.

"나에 대한 증오로 눈이 멀어 상황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나, 유서스? 당신의 기량으로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저번에 이미 느꼈을 텐데?"

그런데, 의외로 유서스도 태연하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건 맞는 말이지."

"...음?"

러스는 의아해했다. 아니, 그럼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자신과 싸우려는 건가?

'자살이라도 하고 싶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너무 자신만만하다. 혹시 뭔가 바뀐 게 있나 싶어 러스는 유서스의 마갑, 엘드라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없었다. 예전부터 지겹게 보아 온 바로 그 엘드라드, 그대로였다.

유서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의 패배는 인정한다. 네놈이 분수에 맞지 않은 힘을 지녔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갑자기 그가 바닥에 마검 엘드란을 푹 꽂았다.

"하지만 나도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니다!"

유서스가 고함을 질렀다.

"오라! 위대한 고대의 힘이여! 흔들림 없는 그 빛으로 나를 감싸라!"

엘드란에서 눈부신 섬광이 솟구쳤다. 섬광이 순식간에 유서스의 전신을 뒤덮으며 밤하늘을 찬란히 밝힌다.

'무슨 수작이지?'

경계심을 높이며 러스가 전투태세를 취했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으니 함부로 뛰어드는 경거망동을 범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러스는 어이없어하며 눈앞의 배다른 형을 바라보았다. 러스가 멍한 목소리를 흘렸다.

"...뭐야, 그거?"

유서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걸친 마갑 역시 여전히 찬란한 황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단지, 그 부피가 두 배로 커져 있었다.

투구는 비교적 거대해지지 않았지만 건틀릿이나 어깨 보호구, 경갑이나 가슴 갑옷 부위가 어마어마하게 두껍다. 유서스의 체구 자체가 거의 두 배로 부풀어 오른 듯한 모습이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무진장 두꺼워졌다!

기가 막혀 러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뭐냐, 유서스, 그 몰골은...."

원래 유서스는 8등신의 훤칠한 미남이었다. 마갑 엘드라드를 걸치면 그야말로 천상의 군신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모습의 기사였다.

그런데 지금의 유서스는 달랐다.

갑옷은 지나치게 두꺼운데 신장은 그대로, 그렇다 보니 몰골이 대단히 우스꽝스럽다. 팔다리도 작달막하고 몸통도 육중한 것이 지나치게 비만해진 시골 귀족을 보는 것 같은 것이다.

그 상태로 유서스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이것이 내가 얻은 새로운 힘! 네놈을 쓰러뜨리기 위해 위대한 고대의 현자가 전해준 무구, 엘드릴 기간투스다!"

러스는 눈을 껌뻑였다.

"엘드릴 기간투스?"

다른 건 몰라도 기운을 읽는 것만큼은 이미 달인을 능가하는 러스다. 그 어마어마한 기감 덕분에 온갖 남의 오러 기술 빼먹는 일이 가능한 것이니까.

그리고 그 기감을 통해 본 저 새로운 갑옷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데?"

마력 출력이야 마법사가 아니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마력을 바탕으로 한 유서스 본연의 신체 능력은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유서스의 상태는, 예전 마갑 엘드라드를 입었을 때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과연 그럴까?"

조소를 흘리며 유서스가 땅을 박찼다. 뒤뚱거릴 것 같은 육중한 형태의 갑옷이지만 날렵하게 허공을 날아오른다.

순간 러스는 놀랐다. 저 짜리몽땅한 몰골로 의외로 스피드가 빠르다?

'허어?'

그대로 유서스가 러스를 향해 엘드란을 내리쳤다. 황당해하면서도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러스는 차분히 공격을 받아 냈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저 두꺼운 갑옷 입고 저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굉장하다 못해 기적 같은 일이지만....

'그래 봤자 그냥 엘드라드랑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움직임도, 스피드도, 검에 실린 위력도 예전 엘드라드와 완벽하게 동일하다. 그럼 대체 뭐가 새로운 힘이라는 거야?

러스는 검을 등 뒤로 당겼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시간을 끌 상황이 아니었다. 후딱 해치우고 제 갈 길 가야 한다.

그리고 속전속결이라면 역시 검증된 일격이 제일인 법!

"세븐 스타즈!"

일곱 섬광이 유서스의 전신을 두들겼다. 역시 딱히 회피 능력이 올라간 것도 아니었는지 공격이 죄다 정확히 적중한다. 그렇게 대수롭잖게 러스가 손가락을 튀기고.

콰아앙!

폭발이 일어났다.

그때부터였다. 러스의 안색이 변한 것은.

"크하하하!"

폭음 속에서 유서스가 통쾌한 듯 웃었다. 껄껄대며 그가 소리쳤다.

"내가 네놈에게 패한 것은 어디까지나 엘드라드의 방어력이 너무 낮았기 때문! 이제 새로운 갑옷이 나를 비호한다! 네놈의 오러 따위론 이 무적의 성채를 부술 수 없어!"

☆ ☆ ☆

은의 수호자, 세렐라인은 버서커 아머를 개조해 스테반에게 오러의 힘을 주었다. 하지만 유서스에게는 그런 방식이 불가능했다.

유서스는 이미 몇십 년이나 엘드라드를 사용해 그것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티팩트를 바꾼다 해도 바로 능력이 올라가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마갑 엘드라드는 그 자체로 완성품이기에 딱히 더 개조를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은의 현자는 엘드라드를 개조하는 대신, 거기에 강화 파츠를 붙이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마법으로 인간이 강해지는 한계는 명확하다. 그리고 유서스는 이미 그 한계에 다다랐다. 그러니 강화 파츠를 붙인다고 유서스의 전체적인 능력, 스피드나 파워, 반사 신경이나 동체시력이 더 올라가진 않는다. 이미 유서스는 엘드라드에 적응해 최고의 효율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딱 하나, 지금 상태에서도 더 올릴 수 있는 능력치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방어력만큼은 더더욱 강화할 수 있거든!"

희희낙락하며 유서스가 엘드란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엘드릴의 빛이 러스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공격을 피하며 러스도 바로 반격에 나섰다. 푸른 오러가 몇 번씩이나 유서스를 때리고 또 때렸다.

하지만 유서스는 여전히 조금의 충격도 받지 않았다. 그저 몸으로 모든 공격을 때우며 쉴 새 없이 엘드릴의 빛을 난사할 뿐.

콰콰콰쾅!

금빛 섬광이 광장을 신나게 갈아엎는다. 공세를 피하며 러스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젠장....'

유서스의 저 새로운 마갑, 엘드릴 기간투스는 단순히 그냥 두꺼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냥 두꺼운 갑옷일 뿐이라면 아무리 뚫리지 않는다 해도, 두들긴 충격이 유서스에게 전달되어 어느 정도 타격은 입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인지, 갑옷 자체가 중간에서 모든 충격을 흡수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관절 부분 이음새조차도 뭔가로 싸 놓았군.'

러스도 바보는 아니다. 당연히 다음 방법으로 관절과 관절 사이의 틈새를 노려 보았다. 아무리 갑옷이 두껍고 강력해도 이음새만큼은 약할 테니까.

그런데 저 갑옷은 이음새조차도 처음 보는 소재로 감싸져 있었다. 블레이드 오러를 틈새에 찔러 넣을 때마다 기묘한 탄력이 느껴지며 위력이 도중에 죽어 버린다.

"울부짖어라! 엘드란!"

난처한 얼굴로 연신 도망 다니는 러스를 보며 유서스가 더더욱 엘드릴의 빛을 난사했다. 그 모습에 러스는 저 마갑의 능력이 방어 말고 다른 것도 있음을 깨달았다.

'파괴력은 그대로지만 어째 마력이 떨어지질 않잖아? 벌써 몇 방째야, 이거?'

원래 엘드릴의 빛은 마검 엘드란이 가진 궁극의 필살기, 마검의 모든 마력을 일순간 모아 날리는 기술이다. 필살기로써 한두 번 쓸 기술이지 저렇게 난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런데 벌써 수십 차례나 엘드릴의 빛을 쏘면서도 전혀 위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술식 자체를 건드릴 수는 없으니 출력을 높이지는 못하지만 기존의 마력 저장량을 대폭 늘린 것이다.

"하하하하!"

유서스의 광소가 허공 가득 울렸다. 엘드릴의 빛이 비처럼 러스를 향해 쏘아졌다. 원래 엘드라드에는 엘드릴의 빛 말고도 각종 다양한 마법 술식이 저장되어 있지만 유서스는 다른 마법은 아예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저 부서지지 않는 갑옷을 믿고 최강의 일격을 난사할 뿐.

때려도 소용없고.

맞으면 끝장인데.

그 최강의 일격이 쉴 새 없이 날아온다.

러스는 치를 떨었다. 이거 어째 익숙한 느낌이 아닌가?

"이거 완전 레펜하르트 형님을 상대하는 기분이잖아? 유서스 성격에 저런 무식한 방법을 택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뭐, 사실은 유서스 생각이 아니라 정통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 테스론의 아이디였지만.

유서스의 공격을 계속 피하며 러스는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다섯 명의 제플린 나이츠를 상대로 말로이드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드워프 전사들 역시 탈주 노예 무리를 감싼 채 차탄의 기사들과 싸우는 중이다. 다들 잘 싸우고는 있었지만 눈치를 보니 그리 쉽게 상황이 정리될 것 같진 않았다.

곤란하다.

시간이 없다.

어쩌서인지는 몰라도, 지원군이 오지 않아 좀 시간을 벌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지원군이 영영 안 올 리는 없었다. 어서 저들을 이끌고 제플린을 탈출해야 하는데....

초조해하며 러스는 침을 삼켰다.

'젠장, 어쩌지?'

제32장 권왕대전拳王對戰

1

탈주 노예 무리를 이끌고 카다마이트는 계속 제플린 서부로 향했다.

그는 운이 좋게도 다른 이들처럼 중간에 제플린 나이츠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 원래 그쪽을 담당해야 할 제플린 나이츠가 자기 뇌물 주던 상단으로 쪼르르 달려간 덕이었다. 카를의 사전 작업은 공국 최정예라는 제플린 나이츠에게도 통용이 되었던 것이다.

하다툼이나 러스, 말로이드를 가로막은 이들은 그래도 제플린 나이츠 중 비교적 청렴한 이들이라 뇌물 무시하고 주어진 임무에 임했다. 뭐, 정확히는 뇌물은 받았는데 상황이 예사롭지 않아 그냥 무시했다는 쪽이 옳지만.

그러나 모든 제플린 나이츠들이 전부 제때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시간 맞춘 것은 한 절반 정도? 그나마 명색이 최정예인지라 반이라도 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차탄 공국 내에서 이 정도면 상당히 깨끗한 부대에 속한다.

하여튼, 그 덕에 카다마이트 쪽은 다른 이들과 달리 별 어려움 없이 작전대로 움직였다. 가로막은 차탄의 기사들 몇몇만 가뿐히 베어 넘기고 계속 달려가니 제 시간에 합류 장소인 제플린 서부 관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문 앞으로 향하니 거리 반대편에서 또 한 무리의 탈주 노예들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선두에 선 두 엘프 여인들을 보며 카다마이트가 손을 흔들었다.

"오! 시리스! 이니야! 무사히 도착했구려!"

이니야가 나는 듯이 도로를 미끄러지며 카다마이트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중간에 몇몇 방해가 있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어요."

"나 역시 마찬가지라오."

카다마이트의 대꾸에 이니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참 희한한 놈들이었어요. 지원군이 온다고 큰소리쳐서 처음에는 좀 긴장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던데요?"

"이쪽도 마찬가지요. 오러 유저가 나타날 줄 알았다는 듯 말하더니 그냥 별거 없더만."

고개를 끄덕이며 카다마이트는 이니야의 말에 동조했다. 무사히 이곳까지 오긴 했지만, 그래도 그놈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눈치 보니까 어느 정도 알아채고 있었던 것 같긴 한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러게요. 전 꼼짝없이 함정에 빠진 줄 알았어요."

이니야와 카다마이트는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하는 눈빛을 교차했다.

멀쩡히 자신들의 계획 미리 다 눈치채 놓고도 저렇게 허술하게 대비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카를의 사전 작업에 대해 듣지 못한 그들로서는 그야말로 괴이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어서 이곳을 빠져나갑시다!"

"그래요!"

카다마이트와 이니야는 사이좋게 제플린 서부 성문으로 달려갔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두 오러 유저의 힘이라면 저 정도 성문을 부수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다. 물론 일국의 수도답게 성문에 온갖 강력한 방어 마법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 마법은 어디까지나 전시에 마법사들이 발동을 시켜야 위력을 발휘하는 법. 비활성 상태인 성문은 그저 두꺼운 나무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성문을 바라보며 카다마이트가 애병의 이름을 외쳤다.

"할트론!"

이니야도 품에서 날렵한 검신의 레이피어를 뽑아 들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성문을 향해 참격을 뿌렸다.

"하아앗!"

"터업!"

은색과 적갈색, 두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대기를 진동시키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뿜어져 나간다. 강렬한 파괴의 힘을 담은 섬광이 성문을 직격하려는 찰나였다.

퍼엉!

폭음과 함께 싯누런 섬광이 날아와 공격을 가로막았다.

누런 섬광이 회오리가 되어 이니야와 카다마이트의 블레이드 오러를 튕겨 낸다. 오러의 흐름이 빗나가며 궤적이 어긋났다. 두 블레이드 오러가 각자 좌우로 비껴 나가 성벽에 충돌하며 폭발했다.

"응?"

"이건?"

이니야와 카다마이트가 긴장하며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녹아내린 성벽에서 검은 연기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 속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에 이니야가 인상을 썼다. 조금 전까진 전혀 감지되지 않았던 기운이다.

레이피어를 들어 가슴께로 올리며 이니야가 입맛을 다셨다.

"오러 능력자네요, 기운을 감추고 있었나 보군요...."

도끼 창을 고쳐 쥐며 카다마이트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쩝,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 했다."

연기 사이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서서히 나타났다. 검은 머리에 놀랍도록 잘생긴 외모의 청년이었다. 손에 든 검에는 싯누런 블레이드 오러가 넘실거리며 맺혀 있다.

청년이 성문 앞을 가로막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도대체 이놈의 나라는... 작전을 세워 봤자 말을 안 들으면 무슨 소용이야? 덕분에 일이 단단히 꼬여 버렸잖아?"

청년의 얼굴을 보고 시리스가 놀라 중얼거렸다.

"앗, 저자는...."

갑자기 청년이 고개를 들어 성벽 위로 소리를 질렀다.

"필레나! 저들을 포위해!"

성벽 위에서 낭랑한 대꾸가 돌아왔다.

"알았어, 테스론!"

나직한 주문 영창이 뒤를 이었다. 사방의 마력이 흔들리며 고정된 마나가 뒤틀려 새로운 조합으로 짜 맞춘다.

"하스트 펜 그레이드 판테라, 하늘을 붉게, 땅은 검게, 천지를 차단하는 홍염의 장막을 여노라...."

마법을 외우며 필레나가 손에 쥔 붉은 지팡이를 땅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입에서 언령이 토해졌다.

"파이어 월!"

불꽃의 장벽이 화르륵 일어나 탈주 노예들의 좌우를 둥글게 포위해 갔다. 열기를 피하며 노예들이 기겁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으, 으악!"

"뜨겁다!"

"피하세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노예들이 이리저리 날뛰어 댔다. 아무리 자유를 추구하며 일어나 봤자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오합지졸인 것이다.

시리스며 안타레스 백국의 이종족 전사들이 허겁지겁 좌중을 진정시키려 소리를 질렀다.

"다들 진정해요! 질서를 잃으면 더욱 피해가 클 뿐입니다!"

"대열을 흩지 마시오!"

"정령술로 열기를 막아요!"

그러는 동안에도 불꽃의 벽은 계속해 범위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거대한 불의 벽이 자꾸 옆으로 넓어지며 거의 천 명에 달하는 탈주 노예 무리를 완전히 감싸 버린다.

물의 정령을 소환해 열기를 차단하며 시리스가 놀라 중얼거렸다.

"맙소사, 뭔 파이어 월이 이렇게 길지?"

원래 파이어 월은 5서클의 화염 결계 마법, 전방에 높이 5미터, 길이 20미터 정도의 화염벽을 설치하는 주문이다.

그런데 지금 시전된 파이어 월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거의 150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길이로 좌우며 후방을 완전히 에워싼 것이다. 이 정도로 광범위한 화염 결계라면 대체 얼마나 방대한 마력이 필요할 것인가?

성벽 위에 서 있는 여마법사, 필레나를 바라보며 시리스는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여자가 이렇게까지 엄청난 마법사였어?'

☆ ☆ ☆

테스론은 차갑게 웃으며 눈앞의 탈주 노예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노예들은 다들 한 곳에 모인 채 공포에 떨고 있었다. 앞에는 제플린의 성벽, 좌우와 뒤는 불꽃의 벽, 도망칠 곳이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성벽 위에서 메시지 마법을 통해 필레나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시키는 대로 저들을 포위했어, 테스론."

이제는 테스론도 단순한 권사가 아니라 고위 마법사, 같은 메시지 마법을 발동해 답문을 보냈다.

"잘했어, 필레나. 대단하네, 그 다중 복제의 지팡이."

"응, 정말 굉장한 아티팩트야, 이거."

필레나가 나이에 비해 뛰어난 마법사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런 어마어마한 위력의 마법을 선보일 정도는 아니다. 이 놀라운 위업은 전적으로 그녀가 은의 현자로부터 받은 아티팩트의 힘이었다.

은의 현자 내부에서도 유출이 금지된 고대의 아티팩트, 다중 복제의 지팡이.

이 기물은 시전자의 마법을 최대 일곱 배까지 복제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은 술식을 통해 마나를 재배열하여 현실을 뒤틀어 위력을 보이는 것, 그렇다 보니 설사 외부에서 방대한 마력이 주어진다 해도 마법 자체만으로는 원래 술식 이상의 힘은 낼 수가 없다. 마력량이 세 배 차이가 나는 마법사라고 같은 파이어 볼이 세 배의 위력이 나오는 것은 아니란 의미다. 상대가 한 방 쏘고 지칠 때 세 방까지 쏠 수는 있을지언정.

하지만 다중 복제의 지팡이를 이용하면, 한 가지 마법을 '동시에' 일곱 번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필레나가 차탄 왕궁 전역을 뒤덮는 어마어마한 마력의 안개를 생성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정확히는 필레나의 파이어 월을 저 지팡이가 그대로 복제해 일곱 번 시전할 뿐이지만.'

물론 이런 엄청난 권능답게 그에 걸맞은 페널티도 있다.

"두 번 썼으니 이제 남은 횟수는 세 번인가, 필레나?"

테스론의 확인에 필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고 나면 지팡이가 자체적으로 마력 차징을 끝낼 때까진 못 써."

"세 번이라, 그 정도면 이번 전투에서 쓰기엔 충분하겠군."

문득 필레나가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그나저나 대체 다른 병사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원래대로라면 이미 저 노예들을 포위하고 있어야 하지 않아?"

테스론이 혀를 찼다.

"원래대로라면 그렇지."

은의 수호자, 세렐라인으로부터 각종 아티팩트를 얻은 테스론 일행은 그 이후 바로 안타레스 백국의 동태를 염탐했다. 사실은 세렐라인이 예의 그 '알 수 없는 정보 수집 능력'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테스론 일행은 그저 얻어 들었을 뿐이지만, 하여튼 테스론 일행은 레펜하르트가 차탄 공국, 그것도 제플린의 노예 무리를 노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레펜하르트 쪽도 최대한 기밀을 유지하는 사항이었으니 자세한 계획까지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정도로 큰 규모로 일을 일으키려면 아무래도 움직임이 새어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략적인 날짜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고, 미리 제플린에 도착해 대비를 해 두었다.

주둔군 전체에 비상경계를 내릴 수는 없다. 낌새가 이상할 경우 레펜하르트 측이 눈치채고 거사를 중단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래서 모든 대비는 평시 상태를 유지하되, 일이 터질 경우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노예 선동에 대한 것은 극히 일부의 지휘관들에게만 알려 놓고 나머지는 명령 체계를 정비해 난이 터질 경우 정해진 장소로 군대를 움직이는 데 중점을 뒀다.

미리 알고 대비해 계획을 짰으니 원래대로라면 제플린 전역에서 군대가 모든 탈주 노예들을 체포해야 정상일 터, 그런데 정작 일이 터지니 제플린의 병력이 그들의 계획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 빌어먹을 차탄 군대, 미리 시켜 놓은 짓도 제대로 못 한단 말이야?"

테스론은 이를 갈았다. 대륙에서 군기 빠진 병사들을 조롱할 때 '이런 차탄 나라 군대 같은 놈들!'이란 관용구가 있는데, 그 말이 왜 나왔는지 실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모든 병사들이 이렇게 엉망으로 움직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나마 밑에 놈들만 엉망이면 모르겠는데....

'어떻게 기사란 놈들조차 죄다 늦장을 부리는 거야? 수뇌부라는 제플린 나이츠도 제대로 움직이는 건 반밖에 안 되고.'

심지어는 명색이 궁정 마법사라는 하질 공조차도 감감무소식이다. 이제는 단순한 권사가 아니라 고위 마법사이기도 한 테스론이기에 잘 알 수 있었다.

대마법사인 하질 공이 마법을 구사한다면 제플린 어디에 있건 그 여파가 느껴지지 않을 리 없을 터, 그런데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 봐도 마법이 감지되지 않는다.

필레나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하지만 테스론,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최고 기사나 궁정 마법사 정도 되는 사람들까지 그냥 게을러서 늦장 부린다고는 볼 수 없지 않아? 혹시 저쪽에서 무슨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대체 뭔 수작을 부려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건데?"

"하긴, 그것도 그러네."

결국 필레나도 그냥, 현 상황을 차탄 공국의 높은 발효도 탓으로 돌렸다. 카를의 존재를 모르는 이상 그 정도가 이들이 유추할 수 있는 한계였다.

"뭐,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놈들은 포기해야지."

한숨을 쉬던 테스론이 갑자기 눈을 빛냈다.

"어차피 진짜 중요한 건 마왕 한 놈뿐이다. 저 엘프 암컷만 잡아 놓아도 미끼로는 충분해!"

차갑게 빛나는 테스론의 검은 눈동자가 저 멀리, 열심히 정령술로 열기를 막고 있는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에게로 향했다.

☆ ☆ ☆

사아아....

새하얀 냉기가 사방으로 퍼진다. 이니야는 계속 레이피어를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오러 스킬, 북해의 숨결이 필레나가 발동시킨 파이어 월을 가로막고 불길을 살라먹기 시작했다.

조금씩 열기가 낮아지며 탈주 노예들이 한층 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악, 하악...."

"이젠 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살 거 같다. 안 뜨겁다."

하지만 이니야는 별로 편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오, 그냥 제자리에 가만히 좀 있으란 말이야! 그럼 어련히 지켜 줄 것을.'

냉기의 안개를 조율하는 데 있어 그녀는 이미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마음먹은 대로 범위 내의 모든 사물을 원하는 것만 얼리고, 필요 없는 부분에는 전혀 냉기가 닿지 않게 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지켜야 할 '사물'이 자꾸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기껏 냉기의 안개로 불길을 잡으려고 하면 자꾸 중간에 노예들이 웅성대며 끼어들어 제어를 방해한다. 그때마다 다시 오러 입자를 재조정해서 움직여야 하니 아무리 이니야라도 집중력이 크게 소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이니야뿐 아니라 시리스며 다른 이종족 전사들도 열심히 움직인 덕에 파이어 월의 열기는 상당히 감소했다. 달구어진 땅에서 계속 열기가 올라오고 있어 포위된 상황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탈주 노예들이 열기로 인해 피해를 입을 일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니야는 적당히 열기가 수그러지자 바로 오러를 거두고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곳을 벗어나려면 성문 쪽으로 향해야 한다. 딱히 저 필레나라는 여마법사가 포위망을 구축하지 않았다 해도, 지금 그들은 뒤로 물러설 상황인 아닌 것이다.

'이 정도면 뭐, 대충 급한 불은 껐으니까.'

관용구가 이토록 현실과 밀접하게 적용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이니야와 카다마이트는 차분한 눈으로 성문 앞을 가로막은 인간 청년, 테스론을 바라보았다. 둘은 동시에 눈빛을 교환했다. 성문을 부수려면 저자부터 해치워야 한다.

"허업!"

카다마이트가 먼저 몸을 날렸다. 도끼 창을 높이 치켜드니 블레이드 오러가 도끼날에 맺히며 거대한 빛의 형상으로 화했다.

"흐읍!"

이니야도 자세를 낮추며 미끄러지듯 돌격했다. 레이피어가 은색의 블레이드 오러를 휘감고 창처럼 길게 뻗어 갔다.

테스론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어깨를 회전시키고 팔꿈치를 회전시키며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전신의 오러를 한 점에 집중한다. 싯누런 오러가 회오리치며 드릴처럼 요란한 굉음을 울린다.

"스파이럴 블레이드!"

세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에서 격돌했다. 폭발과 함께 형형색색의 오러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 갔다. 파동으로 인해 건물이 무너지고 성벽에 금이 가며 파괴의 여파를 날린다.

문제는 그 파괴의 범위 속에 탈주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 시리스가 허겁지겁 양손을 교차하며 외쳤다.

"나와 줘요! 나의 맹우! 테라투스!"

광장의 벽돌을 파헤치며 신장 3미터의 거대한 돌 거인이 나타나 파문 앞을 가로막았다. 세 오러 유저의 힘이 집중되었으니 단순한 충돌의 여파조차도 그 파괴력이 장난이 아니다. 파문을 가로막은 테라투스가 전신이 쩍쩍 갈라지며 이내 소환이 해제되어 무너져 내렸다.

시리스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둘 다 좀 조심해서 싸워요! 기껏 구해 내고 자기 손으로 죽일 셈이에요?"

허공에서 격돌한 이니야와 카다마이트, 테스론이 동시에 다시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 착지해 자세를 가다듬으며 카다마이트가 쓴웃음을 흘렸다.

"아, 그거 미안하군. 미처 생각을 못 했어."

이니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뭔가 위화감을 느낀 채 계속 테스론을 바라볼 뿐이었다.

'강해, 하지만 감당치 못할 정도로 강하진 않아.'

일격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오러 유저끼리는 대충 상대의 강함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니야가 파악한 테스론의 경지는 대단하긴 하지만 그녀와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상대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실로 어마어마한 경지라 하겠지만, 어차피 안타레스 백국에는 20대 오러 유저가 둘이나 있는지라 별로 신기할 일도 아니다.

그래서 이니야는 당혹스러웠다.

'저 정도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쉽게 해치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지하게 싸우면 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 그녀 곁에는 드워프 오러 유저 카다마이트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높게 쳐줘도 저 테스론이란 청년은 두 오러 유저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눈빛이 전혀 초조해하는 기색이 아니다. 여전히 자신들을 깔보고 무시하는 눈빛!

그때였다. 테스론이 갑자기 손에 든 검을 버렸다.

"생각보다 실력이 제법이군. 하찮은 노예 종족 주제에...."

열세인 주제에 무기마저 버리다니? 카다마이트가 눈을 껌뻑거렸다.

"뭐지? 항복하는 건가?"

이니야가 피식 웃었다.

"저렇게 오만하게 항복하는 사람은 내 평생 본 적이 없는데요."

테스론이 허공에 손짓을 했다.

"필레나!"

"응! 테스론!"

성벽 위에서 대꾸와 함께 네모난 상자 하나가 뚝 떨어진다. 떨어지자마자 상자가 열리며 찬란한 빛이 흘러나왔다. 무슨 수작인지 몰라 이니야와 카다마이트가 긴장하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테스론이 뚜벅뚜벅 상자를 향해 걸어갔다. 걸음을 옮기며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어차피 이 저질 몸뚱이만으로 네놈들을 전부 상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하지 않도록 하지."

상자에서 솟아 나오는 찬란한 빛, 그 속으로 테스론은 한 발을 내디뎠다. 그의 전신이 빛 속에 휘감긴다. 그 상태로 테스론이 외쳤다.

"장착! 아다만드릴 슈트!"

기이한 기계음과 함께 상자 속에서 산산이 분해된 강철 거인의 잔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순간 시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작은 상자 안에 어떻게 저런 거대한 물건이?

'무한의 주머니 같은 건가? 저렇게까지 공간 압축 비율이 높은 무한의 주머니가 있었어?'

떠오른 각 파츠를 향해 테스론이 팔다리를 내밀었다.

위이이잉!

나사 돌아가는 소리를 동반하며 강철 거인의 각 부위가 테스론의 전신을 착착 뒤덮는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더 이상 인간 청년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신장이 카다마이트의 두 배가 넘는 거구의 강철 거인이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번들거리는 금속 주먹을 들어 올리며 그가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주제를 알게 해 주마, 타락한 마왕의 종들아."

☆ ☆ ☆

테스론은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그때마다 육중한 쇳소리가 바닥을 통해 들려온다. 카다마이트가 도끼를 겨누며 중얼거렸다.

"해괴한 갑옷일세, 저런 걸 입고 어떻게 움직이겠다는 거야?"

아무리 큰 게 좋다지만 저 갑옷은 너무 크다. 아니, 원래의 팔다리보다도 갑옷의 팔다리가 훨씬 길면 어쩌라는 건가? 저래서야 손이 건틀렛 안에 들어가지도 않겠다.

어쨌거나 저대로 놔둘 수는 없다. 이니야가 먼저 선공을 날렸다.

"합!"

짧은 기합을 터트리며 이니야의 신형이 섬광처럼 거리를 가로질렀다. 은빛 궤적이 되어 그녀가 레이피어와 혼연일체가 된 채 단숨에 강철 거인, 테스론의 코앞까지 다다른다. 몸을 날리며 이니야는 문득 의아해했다.

'방어를 안 해?'

블레이드 오러가 코앞까지 닥치는데도 상대는 멍하니 서 있을 뿐인 것이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이니야는 더더욱 오러를 끌어 올렸다. 한 자루 오러의 창이 테스론의 금속 가슴을 직격하는 순간이었다.

"스파이럴 가드!"

우렁찬 외침과 함께 테스론의 전신에서 오러가 소용돌이치며 이니야의 공격을 튕겨 내 버렸다.

"윽!"

신음을 토하며 이니야가 뒤로 날려 간다. 시리스가 눈을 번쩍 떴다.

"어? 저거?"

경악한 것은 시리스뿐이 아니었다. 카다마이트도, 다른 안타레스 백국의 전사들도 모두 같은 표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지금 저 강철 거인이 구사한 기술은 그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 아닌가?

"레펜하르트 님의 기술이잖아?"

경악한 와중에도 카다마이트가 바로 공격에 나섰다.

"큭! 가라, 할트론!"

전신의 탄력을 실어 오러와 합일시키며 도끼 창, 할트론을 던진다. 오러가 맺힌 배틀 액스가 굉음을 울리며 테스론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흥!"

코웃음을 치며 테스론이 주먹을 내뻗었다.

"기격탄!"

눈부신 오러의 탄환이 공중에서 배틀 액스를 요격했다. 대기가 진동하며 배틀 액스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손을 뻗어 무기를 회수하며 카다마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록 색채는 살짝 달랐지만 틀림없는 레펜하르트의 기술, 기격탄이었다.

도끼를 재차 쥐며 카다마이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구원자랑 동기 동창인가?"

두 오러 유저의 공격을 간단히 튕겨 낸 테스론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보여 주마, 진정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힘을!"

테스론이 땅을 박찼다. 육중한 거구에도 불구,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카다마이트를 향해 날아든다.

카다마이트도 몸을 날리며 맞섰다. 배틀 액스가 횡으로 휘둘러져 테스론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타앙!

요란한 금속음이 울렸다. 카다마이트는 인상을 썼다. 손맛으로 바로 알 수 있었다. 타점이 빗나갔다. 상대가 공격이 적중하는 바로 그 순간, 절묘한 타이밍으로 몸을 비틀어 타격을 감소시킨 것이다.

말로야 쉽지만, 그 타이밍을 잡는 것은 오러 유저에게도 힘든 일이다. 더구나 공격자 역시 오러 유저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런 짓이 가능하다니?"

놀라며 뒤로 물러서는 카다마이트의 귀에 이니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펜하르트 님의 방어 수법이랑 완전히 똑같군요."

"진짜 동기 동창인가 본데?"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은 한 세대에 한 명뿐이라 하지 않았나요? 혹시 저자가 그 스승이란 양반?"

"그건 아닌 것 같소. 그 영감은 맨몸으로 저만하다던데."

두 사람은 다시 몸을 날렸다. 저 정체불명의 청년이 레펜하르트와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현재 그들의 적임은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전력을 다해 맞설 뿐!

"동토의 칼날!"

냉기의 오러를 최대한 응축한 채 이니야가 테스론의 좌측을 노리고 들어갔다. 카다마이트도 정면으로 도끼를 내리친다. 두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현란한 빛무리가 되어 폭풍처럼 불어닥쳤다.

하지만 테스론은 태연하게 가슴을 활짝 펼 뿐이었다.

"스파이럴 가드!"

탕! 타탕!

반발력으로 밀려나며 이니야와 카다마이트는 치를 떨었다. 온갖 페인트와 전력을 다한 연격이 저 오러의 소용돌이에 가로막혀 죄다 튕겨져 버리는 것이다.

"크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군!"

광소를 터트리며 테스론은 연달아 주먹을 내뻗었다. 공성추를 연상케 하는 가공할 권격이 카다마이트를 도끼째로 후려갈겼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카다마이트가 뒤로 주욱 밀려난다. 얼마나 강렬한 일격이었는지, 도끼를 통해 전해진 충격파가 양팔을 마비시켜 움직여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카다마이트는 경악의 눈빛을 테스론에게 보냈다. 오러 유저인 자신이 직격타도 아니고 간접적으로 타격을 입었는데도 이 정도 충격을 받은 것이다.

'대체 저 괴물은 뭐냐?'

그 틈에 테스론이 이번엔 이니야에게 공세를 가했다. 2.4미터의 강철 거인이 가냘픈 체구의 여인을 향해 펀치와 킥을 소나기처럼 퍼부어 댔다.

정신없이 공격을 피하며 이니야가 인상을 구겼다.

'아까랑은 위력이 완전히 달라....'

테스론의 오러양 자체는 아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힘으로 휘두르더라도 솜방망이와 망치의 위력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주먹 자체의 강도도 올라갔을 뿐 아니라, 육체 자체의 강도가 높아진 덕에 부하가 걸려 그동안 사용치 못했던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술을 100퍼센트 구사하니 파워도 스피드도 맨몸이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타아아앗!"

기합을 길게 늘어트리며 테스론은 계속 펀치와 킥을 퍼부었다. 감히 맞받아칠 엄두가 나지 않아 이니야는 계속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블레이드 오러를 유연하게 운용해 모든 공격을 비껴 내는 묘기를 보이고 있었다. 날아오는 펀치의 옆면을 오러로 툭툭 건드려 펀치며 킥의 궤도를 빗나가게 하는 것이다.

수법 자체야 그리 신기할 것이 없지만 그 타이밍과 정밀함이 실로 놀랍다. 테스론이나 다른 오러 유저들처럼 살짝 타점을 흘려 공세를 줄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모든 힘을 옆으로 비껴 나가게 할 정도라니? 게다가 평범한 상대도 아니고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술을 제대로 구사하는 지금의 테스론을 상대로 저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히 신기라 부를 만한 기술이었다. 저 정도로 정밀한 검술이라면 아마, 날아오는 발리스타도 툭 건드려서 비껴가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지, 이 엘프 계집은? 단순히 검술만 보면 거의 왕년의 사이러스 수준인데?'

이종족을 무시하는 테스론조차도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고작 엘프 주제에 놀라운 기술이군...."

이니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흥! 이상한 갑옷 입고 설치는 주제에 고작 엘프란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입을 열고 있는데도 공격을 흘리는 손 속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그녀가 확실히 카다마이트보다 윗줄의 경지에 든 오러 유저란 증거였다. 계속 주먹을 내지르며 테스론은 속으로 혀를 찼다.

'쳇, 이거 쉽게는 안 되겠는데?'

이 엘프 여인의 기량을 보니 앞으로 한참을 더 주먹을 휘둘러 봐야 치명타를 먹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테스론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겐 오러 말고도 또 다른 무기가 있었으니까.

문득 테스론의 입에서 작은 영창이 흘러나왔다.

"사지를 얽매는 빛의 족쇄, 홀드!"

순간 이니야의 주위에 빛의 고리가 생겨나 그녀를 옭아맸다. 갑자기 움직임이 봉쇄되자 이니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러 유저의 대결에서 마법을 쓰는 경우는 절대 없는지라, 심적으로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윽?"

물론 홀드는 그리 고위 서클의 마법이 아닌지라 오러 방어를 시도하는 것만으로 금방 풀려 버렸다. 하지만 그 대가로 아주 잠깐,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테스론에겐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파앗!

결국 이니야의 어깨로 테스론의 돌려차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정통으로 맞은 것도 아니고 스쳤을 뿐인데 지독한 통증과 함께 자세가 흩어져 버렸다. 그 허점을 테스론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먹어라! 건방진 엘프 계집!"

외침과 함께 섬광 같은 레프트 훅이 반원을 그리며 이니야의 복부를 강타했다. 다급한 가운데서도 그녀는 재빨리 몸을 비틀어 타격을 흘렸다. 하지만....

"커어...."

그녀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힘을 상당수 흘렸는데도 몸통이 통째로 도려내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하긴, 힘의 대부분을 흘렸으니까 그냥 '듯한 충격'으로 끝났지, 아니면 정말로 몸통이 도려내졌을지도 모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이니야를 향해 연격이 이어졌다. 레프트 훅의 반동을 이용한 강렬한 어퍼컷이 그녀의 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이니야의 두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아, 안 돼!'

말이 좋아 어퍼컷이지, 현재 테스론의 주먹은 그녀의 머리통보다도 더 크다. 저런 걸 정통으로 맞을 경우 머리가 통째로 뽑힌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설사 운 좋게 버틴다 해도 이빨 수 개쯤은 박살 날 것이 뻔한 것이다.

아무리 미녀라도 합죽이가 되어 버리면 더 이상 미녀라 할 수 없을 터.

'아직 레펜님 다 꾀지도 못했단 말이야!'

실력이라기보다는 얼굴에 대한 여인의 무한한 집착 덕분에, 이니야는 간신히 어퍼컷과 턱 사이에 왼팔을 끼워 넣었다. 동시에 테스론의 주먹이 그녀를 가차 없이 후려갈겼다.

터엉!

육중한 금속성과 함께 이니야는 피를 흘리며 저만치 날려 가 버렸다. 그녀를 보며 카다마이트가 격정 어린 외침을 터트렸다.

"이니야!"

쓰러진 이니야가 허공에서 자세를 바로잡아 바닥에 착지했다. 볼품없이 나가떨어지진 않았지만 한쪽 팔이 축 늘어져 있었다. 운 좋게 턱은 보호했지만 그 대가로 왼팔이 부러진 것이다.

테스론이 정말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맙소사, 그 상황에서도 타격을 흘렸어?"

솔직히 테스론 자신도 저런 상황이었다면 아무 대책 없이 모든 공격을 허용했을 것 같았다. 뭐, 짐 언브레이커블의 특성상 허용한다 해도 큰 피해는 없겠지만.

하여튼 대단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새삼 테스론이 감탄의 눈으로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그때 카다마이트의 외침이 그의 시선을 돌렸다.

"이 잔인한 놈!"

분노하며 카다마이트는 테스론을 향해 미친 듯이 돌격해갔다.

모든 힘을 한 점에 모아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도끼날 형태의 적갈색 오러가 테스론의 강철 육체를 연달아 두들겨 댔다.

타타타탕!

하지만 테스론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찮은 도끼질을 무시하는 천년 거목처럼, 모든 공격을 태연하게 스파이럴 가드로 받아 낼 뿐이다.

"크윽!"

이를 악물며 카다마이트는 도끼를 옆구리 뒤로 길게 뺐다. 이대로는 안 된다. 저 무식한 방어를 꿰뚫을 보다 큰 파괴력이 필요하다.

'다행히 저놈은 공격을 피할 생각은 없어 보이니....'

짐 언브레이커블에 회피는 없다더니, 과연 테스론은 모든 공격을 갑옷 자체로 받아 내거나 스파이럴 가드로 튕길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방법이 있다. 카다마이트가 눈을 반짝였다.

화아악!

카다마이트의 발밑으로부터 오러의 기류가 휘감아 올랐다.

육체를 방어하는 최소한의 오러마저도 모두 한 점에 실으며, 동시에 대지 공명의 힘을 끌어 올린다. 그리고 전신의 탄력을 실어 도끼를 찍는다.

이미 더 이상 기술도 아니다. 그저 나무를 베는 나뭇꾼의 도끼질처럼, 몇 배로 증폭된 힘을 가장 단순한 동작으로 휘두른다!

"타아앗!"

150년 넘게 무술을 매진해 온 드워프 전사의 모든 힘이 한 점에 집중되어 테스론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이제껏 모든 공격을 몸으로 때우던 테스론이 갑자기 몸을 크게 틀며 공격을 피했다. 카다마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설마 하필 이 타이밍에서 피해 버릴 줄이야!

아다만드릴 슈트의 투구 사이로 짧은 조소가 흘러나왔다.

"이럴 줄 알았다. 우리 무문을 상대하는 놈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분명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법에 회피가 없다는 말은 대륙 전역에 퍼져 있다. 그리고 역대 권왕들 모두, 거의 대부분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몸으로 때우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회피 없이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아 내며 돌진하는 역대 권왕들을 상대로 오러 유저들은 대부분 같은 판단을 내려 버린다.

-어차피 피하지도 않을 것, 방어 따위 신경 끄고 모든 힘을 파괴력에 싣는다!

그것이 바로 짐 언브레이커블이 깔아 놓은 함정인 것이다.

평소 영혼에 각인되도록 익힌 기술을 버리고 단순 무식한 일격을 노리니 당연히 공격도 단순하고 사방에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바로 그 틈을 노린다. 굳이 자주 피할 필요도 없다. 딱 한 번이면 족하다.

절대 상대가 피할 거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마음의 틈새를 노리기만 하면 충분하다!

"데스 카운터!"

서로의 몸이 교차하며 테스론의 주먹이 카다마이트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육중한 굉음과 함께 테스론의 주먹이 카다마이트의 가슴 깊숙이 처박혔다.

"...!"

젊은 드워프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눈과 코, 입과 귀에서 선혈이 터져 나왔다.

오로지 파괴력만을 바라고 아무런 대비조차 하지 않은 일격이다. 그 돌진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 그것이 몇 배의 파괴력이 되어 돌아왔으니 아무리 오러 유저인들 감당할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끄르르...."

피거품을 토하며 카다마이트의 눈동자가 점점 빛을 잃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에서 생기가 사라져 갔다.

이니야가 경악해 소리쳤다.

"카, 카다마이트!"

2

금속 거인이 가볍게 손을 털었다. 카다마이트의 시체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군다. 시리스는 시선을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카다마이트는 죽었다.

탈주 노예 무리들 사이에서 경악과 공포의 감정이 흘러나왔다. 노예뿐 아니라 안타레스 백국의 이종족 전사들 역시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맙소사...."

"이럴 수가...."

"카다마이트 님이...."

그랜드 포지 최강의 전사, 카다마이트.

오러 유저이며 테츠발트 경을 베어 그 무위를 이미 증명한 그는 명실공이 드워프 최강의 전사라 할 법했다. 그런 그가 너무도 맥없이 죽어 버린 것이다.

카다마이트를 내팽개친 후 테스론은 얼굴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모여 있는 탈주 노예 무리로 향한다. 안타레스 백국의 전사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무기를 쥐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테스론은 그들 따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이는 단 한 명뿐.

육중한 거체를 이끌며 테스론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계획이 상당히 어긋나긴 했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계획은 이미 실패했다. 빌어먹을 차탄 군대의 훌륭한 군기 덕에 안타레스 백국을 뿌리 뽑을 기회는 날아가 버렸다. 아마도 다른 곳으로 향한 이종족들은 다들 별문제 없이 제플린을 탈출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마왕 레펜하르트! 그자만 해치운다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된다. 구심점이 없는 무리 따윈 조금만 건드려도 바로 흩어지게 되어 있으니까.

갈색 피부의 백금발 엘프 소녀, 시리스를 보며 테스론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마왕을 낚을 미끼를 준비해 볼까."

자신을 향한 테스론의 시선에 시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차갑고 무심한 눈빛, 마치 뱀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싸늘한 냉기가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 공포가 가슴을 치고 올라와 목구멍 밖으로 치고 나올 것 같았다.

도망칠 곳도, 도망칠 수도 없다.

시리스는 침을 삼키며 쌍검을 뽑아 들었다. 제이드에 의해 박살 난 것들 대신 그랜드 포지에서 새로 맞춰 준 시미터였다.

검을 들어 자세를 취하며 문득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칼 맞춘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분질러 먹게 생겼네. 그랜드 포지에서 엄청 잔소리 하겠다... 아니, 그때쯤이면 잔소리 들을 내가 세상에 없으려나?"

공포 속에서도 애써 호승심을 일으키며 전투 자세를 취하는 시리스의 모습에 테스론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저 마녀와 맞붙는 것도 오랜만이군. 마왕의 애첩, 광기의 발렌시아.'

레펜하르트의 사천왕과 테스론을 비롯한 일명 '용사 일행'은 수차례나 서로 맞붙은 바가 있었다. 비록 오러 유저는 아니었지만 기이한 정령술로 오러 유저 이상의 위력을 보이며 8서클의 마법까지 구사하는 당시의 시리스는 권왕 테스론에게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저 엘프 마녀가 광기를 흩뿌릴 때마다 얼마나 많은 인간 병사들이 대지에 피를 뿌리며 죽어 가야 했던가?

"하지만 지금은 모든 면에서 병아리일 뿐."

테스론이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싸늘하게 말을 걸었다.

"저항은 무의미하다. 순순히 무릎 꿇으면 그 비천한 목숨만은 건질 수 있을 터."

"웃기지 마, 이 고철남!"

야멸차게 대꾸하며 시리스는 전신으로 정령력을 돌렸다. 각종 정령들을 운용해 신체 능력을 포괄적으로 상승시키며 그녀가 두 자루 시미터를 허공에 교차시켰다.

"나와 줘요, 이그나시스! 우다르 묠니르!"

전기와 불의 거인이 시리스의 좌우에서 나타나며 두 팔을 휘둘러 댔다. 푸른 뇌전과 붉은 화염을 토하며 두 정령 거인이 금속 거인을 향해 맹렬히 돌진해 간다. 스치는 대지마다 전격이 방전하고 화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 여파만 봐도 지금 시리스의 정령술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다다랐는지 증명이 되고도 남는다. 단순히 정령술의 경지로만 치면 렐하드나 이니야도 시리스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테스론은 오히려 실망하는 눈빛이었다.

"고작 이거냐? 내 기억 속의 정령 거인들은 훨씬 더 가공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우다르 묠니르가 우레 망치를 던졌다. 이그나시스가 두 팔을 뻗으며 화염 폭풍을 쏘아 냈다. 번개와 화염이 테스론의 전신을 뒤덮으며 밤하늘을 밝혔다.

하지만 테스론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저 가공할 공격 속에서도 그가 걸친 아다만드릴 슈트에는 조금의 흠집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흡!"

공격을 태연히 받아 낸 테스론이 전신의 탄력을 실어 두 팔을 뻗었다. 반질거리는 금속팔의 표면으로 뇌기와 화기가 반사되어 번뜩였다. 그대로 테스론은 이그나시스와 우다르 묠니르을 향해 양 주먹을 꽂아 넣었다.

"제로 임팩트!"

짐 언브레이커블의 초근접 타격기, 제로 임팩트가 두 정령 거인의 가슴에 작열했다. 충격파가 뇌격과 불꽃을 꿰뚫으며 두 개의 파문을 낳았다. 불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수십 줄기의 전격이 방전한다.

시리스가 경악해 입을 벌렸다.

'마, 말도 안 돼! 저렇게 쉽게?'

이그나시스와 우다르 묠니르는 그녀가 구사할 수 있는 최강의 정령들, 비록 먹힐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타격은 줄 줄 알았는데!

화염과 번개의 폭풍을 뚫고 나오며 테스론이 시리스에게로 돌진했다. 거대한 금속 거인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달려온다. 주먹을 쥔 채 테스론이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산 채로 잡아야 하니 적당히 힘 조절을 해야겠지?"

"이익!"

신경질적인 기합을 터트리며 시리스도 마주 몸을 날렸다. 테스론이 거리를 격한 채 주먹을 빠르게 내질렀다.

"기격파!"

파아아앙!

황금빛 충격파가 시리스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충격파가 시리스를 통째로 휘감으며 전신의 정령력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옷가지가 찢어지고 두 자루 시미터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가냘픈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악!"

☆ ☆ ☆

시리스의 가녀린 몸이 비참하게 날려 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입가에도 붉은 피가 맺혀 있고 전신이 찢겨 여기저기 피부가 터진 것이 보였다. 그래도 가슴께가 희미하게 들락날락하는 걸 보니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테스론은 태연하게 쓰러진 시리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숨통을 끊으려는 걸까? 아니, 저 자의 기량을 생각하면 아직까지 시리스가 살아 있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다. 아마도 일부러 힘 조절을 한 듯하다.

'인질로 잡을 생각인가? 어쨌거나 저대로 둘 수는 없지....'

이니야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전신의 통증이 뇌를 태워 혼절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애써 이를 악물었다.

"크윽...."

지금 그녀의 상태는 심각했다. 단순한 육체의 부상뿐이 아니었다. 체내 오러 흐름이 심각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솔직히 스스로 생각해도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다.

남은 한 팔로 이니야는 힘겹게 레이피어를 들어 올렸다. 테스론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호오? 아직도 움직일 힘이 남아 있었던가?"

이니야가 애써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대꾸했다.

"아아, 생각보다 주먹이 물렁하던데? 고철남?"

무릎을 살짝 굽히며 전신의 체중을 분배한다. 한 팔을 축 늘어트린 채 이니야가 전투태세를 취했다. 테스론이 흥미로워하며 말했다.

"그 몸으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상대의 기량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의 하수로는 보이지 않는데?"

이니야가 발끈했다.

"방심하지 않았으면 나도 이렇게 밀리진 않았어! 오러 유저 주제에 치사하게 마법을 쓰다니!"

"하지만 방심했고, 치명타를 허용했지."

"흥, 전사는 검을 쥐고 있는 이상 패배한 게 아니야. 그것도 모르나, 고철남?"

음, 시리스가 붙인 별명인데 이거 은근 마음에 든다. 어차피 죽을 거, 맘껏 갖다 써야지.

검은 든 채 이니야는 천천히 쓰러진 시리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의외로 테스론은 그런 이니야를 제지하지 않았다. 역시 무인답게, 비록 엘프라지만 경지에 다다른 검사인 그녀를 어느 정도 존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테스론이 입을 열었다

"얌전히 항복하면 죽이진 않겠다, 엘프 계집. 아무리 엘프라지만 그대의 기량은 꽤 아깝거든. 날 주인으로 섬긴다면 아껴 주마."

빙그레 웃으며 이니야가 고개를 저었다.

"어머나? 고마우신 말씀. 하지만 얼굴이 재수 없어서 기각이야."

"...엥?"

테스론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육체로 전생하고 그가 가진 불만을 모두 적으면 족히 책자 서너 권은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런 테스론조차도 이 얼굴만큼은 불만이 없었던 것이다. 여자가 부대 단위로 줄줄 따라오는 놀라운 미모! 전생 때 증오를 불태우던 그의 동료들도 '그놈의 마왕, 생긴 거 하난 참 미끈하게 잘생겼다.'며 인정할 정도였으니까.

이니야의 취향을 알 길 없으니, 테스론 입장에선 그저 이해 못 할 소리일 뿐이었다.

'얼굴도 계집애 같고 몸도 부실한 게 어디서 추파를 던져?'

뭐, 지금의 테스론이라면 사실 단련될 대로 단련된 남자다운 육체를 지니고 있으니 부실하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겠다. 하지만 이미 현재의 레펜하르트를 남자의 기준으로 삼아 버린 이니야에겐 똑같은 멸치였던 것이다. 그냥 좀 더 살이 통통하게 오른 멸치 정도?

어쨌거나,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니야는 계속 움직여 테스론과 쓰러진 시리스 사이를 가로막았다.

시리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니야 씨?"

저런 중상을 입고도 자신을 보호하려는 건가? 왠지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감동한 듯한 이 작은 엘프 소녀를 힐끔 보며 이니야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에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딱히 너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라고.'

솔직히 말해서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는 아이였다. 레펜하르트와 분위기 좀 잡으려고 하면 칼같이 나타나 초를 쳐 대니 내심 짜증도 꽤 냈었다.

'하지만 저 아이를 잃으면 레펜하르트 님은 슬퍼하시겠지....'

문득 이니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런데... 레펜하르트 님은 내가 죽어도 슬퍼하시려나?'

어째 생각해 보니 아쉬워하기야 하겠지만 딱히 슬퍼할 것 같진 않았다. 아니, 소중한 동료가 죽었으니 눈물 정도야 흘려 주겠지. 그래, 딱 저기 죽은 카다마이트를 위해 흘려 줄 눈물 정도?

'어? 떠올리고 나니 뭔가 되게 서럽다?'

하지만 이니야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아직 뭘 제대로 시작해 본 것도 아닌데. 레펜하르트 입장에서는 그녀는 아직 흔한 동료 중 하나일 뿐일 테니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겠지.

'이왕 죽을 거면 진도나 좀 뽑고 죽었음 싶었는데, 쳇.'

"후우우...."

이니야는 낮게 심호흡을 했다. 그것만으로 흔들리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어깨 위로 한기 섞인 투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그녀는 평생 검에 매진한 무인, 이 정도로 평상심이 흔들릴 만큼 경지가 얕지 않다.

"상대가 되지 않을 줄은 알지만...."

검을 겨누며 이니야가 차갑게 소리쳤다.

"그래도 팔 하나 정도는 가져가야겠어!"

레이피어를 수평으로 든 채 이니야가 찌르기 자세를 취했다. 테스론의 안색이 변했다. 단순한 찌르기로 보였지만 그 속에 깃든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과연, 그녀의 주위로 냉기가 응집되며 은빛 오러가 피어오른다. 피어오른 오러가 레이피어를 뒤덮으며 거대한 얼음 창의 형상으로 화했다. 날카로운 창날의 끝에 냉기를 띤 입자가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으음...."

감히 방심할 수가 없어 테스론도 자세를 잡았다.

안개가 점점 더 창끝으로 모여들었다. 검극에 맺힌 기운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냉기의 입자가 모여들며 서로 뒤엉켜 융합과 분리를 계속하며 빛을 발했다.

얼음창 끝에 맺히며 거대해지는 저 빛의 구체, 그 속에 담긴 가공할 파괴력을 읽어 내며 테스론은 혀를 내둘렀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명색이 권왕이라고까지 불렸던 테스론인 만큼, 상대의 기술이 어떤 식으로 운용되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융합과 분리 속에서 서로의 미세 오러 입자가 충돌을 반복하며 수십, 수백, 수천의 오러 파동을 낳는다. 그 파동의 파괴력이 밖으로 흐르지 않고 계속 안으로 뭉치며 더더욱 거대한 힘으로 화한다.

정교함과 세밀함이 극에 달해, 가공할 파괴력을 낳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읽어 낼 수는 있어도, 감히 따라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어마어마한 오러 제어력이다.

이것이 눈의 여왕이라 칭송받으며 엘프 중 최강의 전사로 군림하던 그녀의 궁극기.

"앱솔루트 스피어...."

차가운 뇌까림을 흘리는 이니야를 보며 테스론은 주먹을 허리 뒤로 뽑았다.

카다마이트 때와는 달랐다. 저건 감히 데스 카운터를 노릴 만한 기술이 아니었다. 상대에 맞게 그 역시 최강의 기술로 응해야 했다.

웅웅웅웅!

테스론의 오른팔로 오러 파문이 연달아 일어났다. 다섯 개의 오러 파동이 고리가 되어 금속 팔뚝 위로 연신 휘감긴다. 저 정도 위력이라면 그 역시 최강의 기술로 응해야 할 터!

"캘러미티 혼...."

두 오러 유저가 서로를 노려보며 힘을 끌어 올렸다. 은색과 적황색의 오러가 서로의 어깨 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허공에서 얽혀 시야를 일그러트리기 시작했다.

준비를 마친 채 테스론이 혀를 찼다.

"아쉽군, 그대의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좋은 승부가 되었을 것을."

"흥! 치사하게 마법 써 놓고 뭘 이제 와서 무인인 척 굴어?"

콧방귀를 뀌며 이니야가 무릎을 더더욱 굽혔다. 서로가 서로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던 바로 그 찰나.

"타아앗!"

우렁찬 외침이 성벽 위에서 울려 퍼졌다. 동시에 황금색 빛의 기둥이 허공을 꿰뚫었다. 대기를 찢고 뇌성을 울리며 빛의 기둥이 두 사람 사이를 작열했다.

우르르릉!

폭발이 일어나며 먼지와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뒤로 물러서며 테스론이 고개를 돌려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이건... 기격포?"

거의 대부분 근접전만을 추구하는 짐 언브레이커블에도 원거리 기술은 있다.

오러를 뭉쳐 탄환 형태로 쏘아 내는 기격탄과 충격파 형태로 넓게 퍼지는 기격파, 그리고 한 점에 집중해 대포처럼 길게 쏘아 내는 기격포가 그것이다. 뭐, 캘러미티 혼 같은 경우는 사실 근접 타격기였는데 워낙 위력이 무식하다 보니 원거리까지 닿아 버리는 경우지만.

어쨌거나 이 기술이 이 장소에 작열했다는 의미는....

"나타났구나, 마왕 레펜하르트!"

테스론의 입에서 희열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 ☆ ☆

기격포를 날리자마자 레펜하르트는 바로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몸을 날리는 그의 표정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맙소사, 이니야가 저렇게까지 당할 줄이야!'

레펜하르트가 나타난 걸 보고 힘이 빠졌는지 이니야가 휘청거리며 몸을 늘어트린다. 레펜하르트는 허겁지겁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쌌다.

"괜찮습니까, 이니야?"

이니야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레펜하르트 님...."

창백하던 얼굴에 홍조를 띤 채 이니야가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아잉! 날 먼저 부축해 주셨어!'

레펜하르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부축해 편히 앉혔다. 힐끔 쓰러진 시리스를 흘겨보며 이니야가 씨익 웃었다. 물론 레펜하르트에겐 안 보이게.

'이겼지롱, 호호호!'

그리고 시리스는 멍한 얼굴로 그 꼬락서니를 보고 있었다.

"...."

조금 전까지는 진짜 존경해 마지않을 위대한 검사의 모습이더니, 레펜하르트가 나타나자마자 불여우처럼 돌변해 버린 것이다. 뭔가, 아까 감동한 것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우와, 무서워.'

레펜하르트가 이번엔 시리스를 향해 소리쳤다.

"시리스? 괜찮니?"

"네, 뭐...."

어째 표정이 미묘하다. 뾰로통해 보인달까? 의아해하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이 아픈가? 하지만 어째 그런 문제가 아닌 것도 같고....'

어쨌건 이니야를 뒤로 물린 뒤 레펜하르트는 상황을 살폈다.

방금 날린 기격포로 인해 밀려난 거대한 금속 거인은 조금의 흠집조차 보이지 않은 채 굳건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저 시체는....

"카다마이트?"

레펜하르트는 눈을 의심했다. 강인한 드워프 전사, 그랜드 포지 최강의 오러 유저인 카다마이트가 지금 숨이 끊어진 채 쓰러져 있는 것이다.

사인은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카다마이트의 가슴에 움푹 파인 저 함몰 흔적, 그것은 저 금속 거인의 주먹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으니까!

이니야가 고개를 저으며 숙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이 카다마이트를...."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금속 거인을 바라보았다.

'오러 유저인 카다마이트가 저런 메탈 골렘 따위에게 당했단 말이야?'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긴장한 레펜하르트를 향해 금속 거인이 음성을 흘렸다.

"흐흐흐, 다시 만났구나. 레펜하르트!"

레펜하르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골렘이 말도 하네?"

순간 벌컥 화를 내며 금속 거인이 투구의 안갑을 들어 올렸다.

"나다!"

안갑 속에서 대단히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전생에서 거울을 볼 때마다 보였던 바로 그 얼굴이다. 레펜하르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테스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