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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50

142. 마력장(1)

"나 던전 간다!"

강현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은 흘깃 강현을 쳐다봤다가, 이내 자신의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 걸릴 수도 있으니까 찾지 마!"

모두가 무시로 일관했으나 강현은 굴하지 않았다.

"좋았어!"

기합을 넣은 강현이 힘차게 사무실을 나섰다.

"거리가 꽤 머네."

오늘 강현의 목적지는 경기도에 있는 야산.

강현은 이제 제법 번쩍번쩍해진 번틀리 4호에 올라탔다.

처음 500만 원에서 시작한 번틀리는 몇 번의 파괴를 거쳐서 5,000만 원이 넘는 세단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실 강현의 재력이면 수억 원 대의 차량도 끌 수 있었지만, 딱히 차량에 욕심이 없던 강현은 적당히 멋져 보이는 국산차를 뽑았다.

"차는 굴러만 가면 그만이지."

사실 5,000만 원도 주위에서 돈 좀 쓰라는 잔소리에 산 것이었다.

"하여간 남 일에 관심은 더럽게 많아요. 그리고 돈을 많이 벌면서 너무 싼 차를 타면 가식적이라고 욕한다고? 쯧쯧.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신문을 읽으며 혀를 차는 할아버지처럼, 강현의 불평은 던전을 가는 내내 계속됐다.

**

"으음, 이쯤인 것 같은데..."

목적에 도착한 강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아닌가? 아! 저거다."

강현이 찾아온 것은 B등급 던전인 '폐허가 된 도마뱀의 성지'였다.

원래 이 던전은 '가이스'라는 길드가 소유한 던전이었으나 길드가 망하며 정부에게 넘어가게 됐다.

"그 친구들에게는 안타깝지만, 나한테는 고마운 일이지."

중형 길드인 가이스의 입장에서 B등급 던전을 구매한 것은 엄청난 도박이었다.

던전 구매에 들어간 돈만 7억.

B등급 치고 굉장히 저렴한 금액이었음에도, 가이스는 길드의 여윳돈을 모조리 때려 넣어서 겨우 던전을 구매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성장과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희망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이스는 달콤한 꿈에서 깨어났다.

던전의 난이도가 너무 높았고, 그다지 큰 가치를 지닌 부산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가이스의 길드장은 무리하게 보스 공략을 강행했다.

그 과정에서 정예 멤버 대부분이 죽는 대참사가 벌어지고, 결국 길드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이미 지나간 일.

"애초에 B등급 던전이 7억밖에 하지 않았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지."

길드가 무너지고, 가이스 길드가 가지고 있던 던전은 모두 경매에 넘어갔다.

하지만 이 던전만은 아무도 사지 않았고, 결국 정부에서는 던전 공략에 포상금을 걸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았어."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적합한 던전을 찾고 있던 강현은 이 던전을 알게 되고, 냉큼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면, 들어가 볼까!"

강현이 힘차게 던전을 열어젖혔다.

**

폐허가 된 도마뱀의 성지.

던전은 이름 그대로 늪지대에 버려진 고대 유적 같은 모습이었다.

"도마뱀 놈들 잡는 건 오랜만이네."

도마뱀. 통칭 리자드맨.

놈들은 두꺼운 가죽에, 강인한 육체를 가졌다.

지능이 뛰어나 단체 활동을 하며, 개개인의 전투술 또한 준수하다.

거기에 늪지에서 싸울 때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까지.

평균적인 스펙만 놓고 보면 깡패라 불리는 오크보다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캬아아아!"

멀리서 놈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맞춰 물장구를 치며 강현이 새로 배운 스킬을 확인했다.

마력장(F) : 자신을 중심으로 반경 1m의 공간에 마력장을 만든다.

상당히 심플한 설명의 스킬.

강현은 미리 상세 효과에 대한 조사를 끝마쳤기에 문제는 없었다.

"마력장 내에 적의 움직임 둔화. 마법 시전 방해. 마법 방어력 상승이라..."

모두 강현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그 효과가 있으나 마나 할 정도로 미약한 수준이라 문제였지만.

"바로 주술사부터 찾아야지."

강현은 굳이 리자드맨 전사를 잔뜩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오늘의 목표는 리자드맨 주술사.

사실 이 주술사들이 리자드맨의 악명을 높인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리자드맨은 알려진 거의 모든 종족 중 마법 능력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오크, 고블린, 코볼트, 베난디, 쿠르카 등.

지금까지 '종족'이라고 분류될 만한 몬스터는 굉장히 많이 있었다.

하지만 리자드맨은 그중에서도 단연코 압도적인 마법 실력을 자랑했다.

신체 스펙과 지능, 마법 능력까지 뭐하나 빠지는 게 없는 몬스터 계의 엄친아 같은 스타일이었다.

"생각해보니 재수 없는 놈들이네."

강현은 재능충 놈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크롹! 콱!"

"카르! 쿠아르!"

징그럽게 생긴 거대 도마뱀들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놈들에게 다가간 강현이 귀를 후볐다.

"뭐라 씨불이는 거야."

"인간. 콰륵! 맛있다!"

통역 능력이 아직 F등급이라 그런지 통어가 완벽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널 잡아서 구워 먹으면 맛있다는 뜻이지?"

"오크같은 인간. 크룩! 멍청이!"

해석이 완벽하지 않았지만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사실 굳이 통영 능력이 없어도, 비웃고 있는 놈의 면상만 봐도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넌 뒤졌다."

강현이 쏜살같이 달려가 리자드맨 전사의 모가지를 틀어쥐었다.

"케에엑!"

"주술사 어디 있어?"

"캬악, 놔라!"

놈은 대답하지 않고 강현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발악했다.

강현은 그대로 놈의 머리를 신전 벽에 처박았다.

-콰아앙! 퍼억!

벽에 처박힌 놈의 머리에 재차 주먹을 꽂아주자 그대로 리자드맨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손에 묻은 피를 탁탁 털어낸 강현이 신전 내부로 향했다.

"흐음... 지금까지는 잘 모르겠단 말이지."

마력장을 계속해서 유지했지만, 특별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단지 몸 안의 마력이 뿜어져 나와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것만 느껴질 뿐이었다.

"대충 어떤 흐름인 건 알겠는데 말이야."

고민을 이어가며 강현은 신전의 더욱 깊은 곳으로 향했다.

폐허가 됐음에도 신전의 내부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벽이 깨지고 온갖 식물들이 자라나 얽혀 있는 상태.

강현은 이것 또한 나름의 멋이라고 느껴졌다.

"캬아악!"

"죽인다! 인간!"

적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 마리. 두 마리. 가끔 다섯 마리의 무리가 나오기도 했다.

강현은 그때마다 놈들을 썰어가며 계속해서 마력장을 유지했다.

"슬슬 감이 잡히는 것 같은데."

아직 주술사는 나오지 않았지만, 마력장을 어떻게 활용되는지 조금씩 알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스킬 '마력장'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F등급이었던 마력장이 E등급으로 상승했다.

"뭐야? 벌써?"

스킬을 사용한 지 한나절도 되지 않아서 등급이 올라버렸다.

"그럼 이게 맞다는 건데..."

이것은 전적으로 강현의 마력 운용이 A등급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스킬은 시전자의 마력을 임으로 변환해서 강제로 마법을 발현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마력 변화의 메커니즘을 지구의 능력자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반복 숙달로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는 것에 그친다.

하지만 마력장의 경우는 다르다.

마력장은 스킬을 사용해도 마력의 성질이 복잡하게 변하지 않는다.

시전자 본인의 마력을 거의 그대로 뿜어내서 활용하기 때문이다.

마력의 변화가 최소화된 스킬.

덕분에 강현이 그 시스템을 좀 더 쉽고 빨리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에 마력폭발의 위력을 증가시키는 연습을 했던 게 도움이 될 줄이야."

강현은 과거에도 이런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그때도 마력폭발의 등급이 하루 만에 빠르게 상승했었다.

그 모든 경험과 마력운용(A)가 작용하며 결과적으로 이렇게 단기간에 마력장의 등급이 오를 수 있었다.

"좋았어. 이 기세로 A등급까지 찍어보자!"

강현이 주먹을 쥐며 힘차게 외쳤다.

"케에에엑!"

그 소리에 반응하듯이 안에서 우렁찬 기합이 들려왔다.

"그래그래. 갈 거니까 보채지 마."

조금 전부터 느껴지던 강한 마력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오. 도착했네."

마침내 보이는 코어와 그것을 지키는 주술사를 보며 강현이 미소를 지었다.

**

"크로아아! 타르카!"

다른 리자드맨보다 몇 배는 거대한 덩치.

근육이 아닌 지방이 뒤룩뒤룩 들어찬 리자드맨 대주술사가 보였다.

"시작부터 대주술사네."

현재 강현이 있는 곳은 던전의 일반 핵(normal core).

노말 코어를 부수면 던전이 클리어되지는 않지만, 던전이 안정되며 개방 시간이 초기화된다.

상대는 그 노말 코어를 지키는 준보스 급의 몬스터였다.

"그 유명한 리자드맨 주술사 솜씨 좀 볼까?"

"인간! 건방지다!"

"그래. 나도 내가 잘난 거 알어."

강현이 마력장에 온 신경을 집중함과 동시에 엔트리아의 외피를 사용했다.

'피하지 않고 막는다.'

어떻게든 마력장으로 놈의 스킬을 막고, 만일 그게 실패했을 시 엔트리아의 외피로 견딜 생각이었다.

'마력장으로 1차 피해 감소, 엔트리아의 외피로 다시 피해 감소. 거기에 내 맷집이면 그렇게 아프지 않을 거야.'

강현이 무술 고수처럼 팔을 휘두르더니 기마자세를 취했다.

"하압!"

마치 차력사라도 된 듯한 모습.

'대'주술사는 그런 강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인간! 죽여주마."

휘둘러지는 육중한 팔.

그 끝에 달려있던 지팡이에서 엄청난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강현은 놈이 마법을 쓰든 말든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우우우웅

몇 초가 흘렀건만 마법이 날아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마력이 모이기만 할 뿐이었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강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시벌, 피해야 하는 거 아냐? 무슨 시작부터 필살기를 쓰고 지랄이야.'

짧은 순간. 강현은 몸을 피할까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가오가 있지! 빠꾸 없어!'

마침내 모여든 마력이 강현을 향해 쏘아졌다.

-퐈아아아악!

거대한 초록빛의 레이저.

마법은 강현의 앞에 놓인 모든 것을 녹여내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그러나 강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력장! 저 마법을 막는 거야!'

강현의 마력장과 초록색 죽음이 격돌했다.

'응..?'

효과는 제로.

적의 마법은 두부를 으깨듯 강현의 마력장을 날려버리고 강현의 몸에 직격했다.

"쿠어억!"

마법에 당한 강현이 마법과 함께 허공을 날기 시작했다.

-콰앙, 쾅! 쾅! 쾅! 콰아앙!

마법은 두꺼운 신전 벽을 다섯 개나 박살내고 나서야 멈췄다.

그 마법의 선두에서 벽을 부수던 강현의 몸은 순식간에 걸레짝으로 변했다.

"아아... 이건 진짜... 존나 아프네."

순간적인 위력만 보면 바노 쿨사. 그 해골에 근접할 정도였다.

"크흠, 시작부터 대주술사한테 실험하는 게 아니었어. 그래."

세상의 모든 것에는 단계라는 것이 있다.

전신에 화상을 입고, 뼈가 부러진 다음에야 배운 교훈이었다.

"일단 저놈은 조진다."

강현이 몸을 회복하는 데는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완전히 몸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강현이 땅을 박차고 달렸다.

"쿠르아악!?"

강현이 살아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대주술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크로아! 지켜라!"

놈이 외치자 사방에서 리자드맨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부 꺼져!"

강현은 '웨인의 비기'와 '거인의 힘'을 사용한 뒤 필시언의 해머를 휘둘렀다.

"케에에엑!"

해머가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리자드맨들이 산채로 터져나갔다.

강현은 양 떼 속에 들어온 코뿔소처럼 리자드맨 사이를 휘저었다.

불과 1분도 지나지 않아 강현은 대주술사 앞에 당도했다.

당황한 대주술사의 얼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인간! 어떻게!"

"다음에는 마법 좀 살살 써라."

물론, 놈에게 다음은 없을 것이다.

-푸하아아악!

해머질 한 번에 대주술사의 육중한 몸이 터져나가며 엄청난 양의 피가 튀었다.

신전 벽과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는 피를 보며 강현이 인상을 구겼다.

"어휴. 마정석 찾기 힘들겠네."

143화 마력장(2)

143. 마력장(2)

이즈미르.

400만 명이 넘게 거주하는 터키의 3대 도시 중 하나였다.

또한, 터키 제1의 수출 무역항으로 엄청난 활기를 띠고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네. 10분 안에 도착하니 조금만 기다려요."

이즈미르에 있는 수많은 무역회사들. 그중 하나에 다니고 있는 멜리스는 바쁜 커리어 우먼이었다.

오전 11시.

원래라면 한창 사무실에서 서류와 전화기를 붙들고 씨름해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중요한 고객과의 미팅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네. 그렇게 처리해 주세요."

멜리스는 미팅 장소로 가는 길에도 전화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뭐야? 이게 왜이래?"

이유도 없이 전화가 먹통이 됐다.

스마트폰을 확인하자 마치 고장이라도 난 듯 지직거리는 액정이 보였다.

"안 돼... 제발! 산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 거야! 응?!"

멜리스는 열심히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직-거리던 스마트폰은 이내 완전히 전원이 꺼져버렸다.

"하아, 지금 고치러 갈 시간도 없는데..."

그녀가 한숨을 내쉴 때였다.

-끼이이익! 빠아앙!

갑자기 전쟁이라도 터진 듯 곳곳에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혼란의 도가니.

불과 1분 만에 조금 전까지 활기차고 평화롭던 도시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벌어졌다.

-콰아앙! 쾅! 콰아앙!

도로들 달리던 자동차들이 연속해서 부딪히며,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다.

언뜻 보면 대형 테러라도 일어난 것 같은 모습.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나 다행히도 주위는 금세 다시 조용해졌다.

오직 사람들의 비명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멜리스가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신고하기 위해 전화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

그 누구도 통화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빛도 내지 않는 신호등.

대형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카페의 실내등도 모두 꺼져있었다.

"설마 EMP...?"

EMP라도 터진 것일까. 그게 아니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진짜 테러라도 벌어진 거야? 후우, 침착하자.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때였다.

그녀의 앞, 도로 한가운데의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지진이라도 난 듯 울리는 땅.

그와 함께 거대한 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의 정체는 그녀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던전..?"

첫 번째 A등급 던전의 등장이었다.

**

[스킬 '마력장'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끄아아아! 됐다!"

마침내 마력장이 A등급으로 상승했다.

고작 2주 만에 이뤄낸 쾌거.

엄청난 성장 속도였다.

"이제 진짜로 감 잡았어."

마력장은 최민준이 사용하는 붉은 마력과 비슷했다.

마력을 뿜어내서 물리력을 가하고, 다른 마력을 막아내는 것.

"생각보다 훨씬 쓸모 있는 스킬이야."

원래라면 모든 작용은 스킬로 이루어진다.

시전자가 딱히 의식하지 않더라도 스킬을 사용하면 마력이 뿜어지고, 마력이 스스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것의 효과는 너무 미약하다.

때문에 강현은 직접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스킬을 사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자신의 능력을 응용한 것이다.

-우우우웅...

그 결과.

강현은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마력을 자유자재로 뿜어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훌륭하다. 이 정도면 검에 마력을 실어 방출하는 것도 가능하겠군.

"웬일로 네가 칭찬을 다 하냐."

-잘한 것을 잘했다고 말한 것뿐이다.

칭찬에 인색한 베일이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정말 대단한 성과인 것이 분명했다.

-바로 시험해 보도록 해라. 나도 결과가 궁금하군.

강현이 빌게인의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푸른 마력이 단단하게 검 주위를 둘러싸고, 안정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하압!"

강현이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에 실려있는 마력이 약 10cm 정도 앞으로 쏘아졌다.

"뭐야 이게 끝이야?"

-첫 시도로 그만큼이나 보낸 걸 감사해라. 평생을 노력해도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하는 검사들이 대다수다.

베일의 설명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그래? 너는 어땠는데?"

-나는 마력에 대한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더욱더 검술에만 매진했지.

"그래서 얼마나 쏘아냈냐고. 설마 마력을 쏘지도 못한 건 아니지?"

-멍청한 놈. 아무리 마력에 재능이 없었다고 해도, 나는 왕국의 수호하는 검이었다. 지금 네놈의 경지 따위는 우습게 짓밟을 수준이었으니 묻지 마라.

베일의 말에 강현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아닌 것 같은데? 쪽팔려서 거짓말하는 거 아냐? 너 해골이었을 때 별로 강하지도 않았잖아."

-흥. 그때는 이지를 상실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뿐이다.

"솔직히 말해. 거짓말이지?"

-이놈! 지금 네놈이 날릴 수 있는 거리보다 수십 배는 더 길게 검기를 내보낼 수 있었다. 도대체 나를 뭐로 보는 거냐!?

강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어. 왜 화를 내고 그러나."

-단순히 마력을 길게 보내는 것이 모든 경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검사로써 얼마나 마력을 다룰 수 있는가를 보는 하나의 척도에 불과하지. 검사는 어디까지나 검으로 말하는 법이다.

"그래그래. 하여간 잔소리는."

-그래도 네가 대단한 성과를 이룬 것은 맞으니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쓰레기 같은 네 검술이 조금이나마 더 보완되겠군.

"그래도 B등급인데, 쓰레기라니... 능력 이름도 심지어 베일의 검술. 너한테서 온 거야 인마."

-네가 내 검술을 구사하는 것은 맞으나, 전성기 시절과 비교하면 절반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대략 내가 스무 살에 무렵의 수준과 비슷하겠군. 참고로 내 검술은 마흔이 넘어서 완성됐다.

"..."

-그만큼 네 검술 능력이 형편없다는 것이지. 물론, 내가 뛰어난 것도 맞다. 검의 기술, 기교만 놓고 봤을 때는 왕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혔으니 말이야.

"이게 갈수록 말이 많아지네."

더는 지루한 자랑질을 듣기 싫었던 강현이 빌게인의 장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됐다! 이쯤 했으니 슬슬 나가야지."

자신이 언제 던전에 들어온 것인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그동안 외부와의 연락은 전혀 할 수 없었기에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던전에 들어온다고 말을 하고 왔던가?"

딱히 말을 하지 않았어도 관계는 없을 것이다.

길드는 자신이 없어도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갈 테니까.

"재문이가 고생이 많지."

돌아가면 보너스라도 좀 챙겨주자고 생각하며 강현이 메인 코어 앞에 섰다.

"너도 그동안 고생했다."

메인 코어의 앞에는 던전의 보스인 리자드맨 제사장이 쓰러져 있었다.

"주, 죽여라..."

놈은 무려 열흘 넘게 이어진 강현의 괴롭힘에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그래도 미운 정이라는 게 있는데 깔끔하게 보내줄게."

강현이 필시언의 해머를 들었다.

"잘 가라."

휘둘러지는 거대한 해머.

그것을 바라보는 리자드맨 제사장의 얼굴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드디어 쉴 수 있겠군...'

-콰아아앙!

**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강현을 맞이해 주는 것은 따스한 햇빛이었다.

쾌적하고 선선한 가을 날씨.

한동안 던전의 숲과 늪지에서 찝찝하게 시간을 보냈던 강현은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아직 세상은 살만하구만!"

강현은 물을 뿜어내는 스킬을 이용해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트렁크에 있는 새하얀 셔츠와 검은 슬랙스로 옷을 갈아입고, 번틀리 4호에 몸을 뉘었다.

"으아아! 좋구나!"

던전에 길게 다녀올 때마다 새삼 느끼는 것인데, 21세기 대한민국의 쾌적함은 정말 소중한 것이었다.

"어디 연락 온 곳 없나."

길드 사무실로 출발하기 전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전원을 켜자마자 엄청난 양의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들이 보였다.

"뭐야?!"

자세히 확인해 보자 알람의 절반은 신태길 팀장의 것이었다.

"이 집착남이 또..."

지금까지 경험상 신태길 팀장이 이렇게 집착할 때는 뭔가 좋지 않은 사건이 터진 것이다.

"으음... 연락하기 싫은데..."

강현은 오랜만에 밖에 나왔는데 시작부터 기분을 잡치고 싶지 않았다.

신태길의 잔소리는 답답하고 짜증나지만, 전화로 들으면 더더더 답답하고 화가 난다.

잠시 고민하던 강현은 문자를 하나 보내기로 했다.

-던전에 좀 오래 있었어요. 3시간 뒤에 길드 사무실에 도착합니다. 중요한 일이면 거기서 봐요.

그 문자만 넣은 채로 강현은 길드 사무실로 향했다.

**

"오셨습니까?"

길드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초췌해 보이는 신태길의 얼굴이었다.

일부러 시간을 넉넉하게 불렀던 강현은 당황했다.

"아직 1시간은 넘게 남았는데요?"

"일이 생각보다 잘 해결되어서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일이나 더 하지 뭐하러 일찍 왔어요? 맨날 바쁘다고 찡얼 대면서."

"열흘 넘게 사무실에 박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쉬려던 차에 강현 씨에게 연락이 와서 바로 온 겁니다. 그리고 찡얼댄 적 없습니다."

신태길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농땡이 피우러 왔다는 거죠?"

"비슷합니다."

신태길은 의외로 쿨하게 인정했다.

"그러면 편하게 맥주나 마시다 가요."

"예. 한 캔 주시죠."

"뭐야? 이 양반이 왜이래!? 정부에서 짤렸어요!?"

"안 잘렸습니다. 정말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이니 괜찮습니다. 오늘 오후 반 차를 내기도 했고."

강현이 시원한 캔맥주를 꺼내 신태길에게 건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요?"

항상 일에 치여 사는 실태길이다.

그중에는 정말 나라가 들썩일만한 대형 사건들도 많았다.

이제 어지간한 사건이라면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신태길이 이런 반응을 보이니, 강현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시는 길에 뉴스 확인 안 했습니까?"

"안 했는데요."

"며칠 전, A등급 던전이 터졌습니다."

"오호, 조만간이라더니 결국 터졌네요."

"예. 전 세계에 총 3개의 A등급 던전이 생겨났습니다."

"3개?"

"이집트에 하나, 터키에 하나, 브라질에 하나입니다."

강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전 세계에 3개 뿐이라... 난이도가 어떨지 벌써 기대되네요."

"그렇게 가볍게 이야기할 만한 게 아닙니다. 던전 개방까지 여유 기간이 무려 2개월입니다."

"2개월이요? 엄청 기네."

던전은 일정 시간 동안 클리어하지 않으면 문이 열리고,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다.

그 기간은 1개월.

아주 가끔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2개월 이상으로 시간이 길어진 적은 없었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겠네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던전이 생기고 난 이후 주변의 환경입니다."

환경이라는 말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방 10km내의 모든 전자기기가 먹통이 됐고, 그 범위가 점점 커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신태길 씨가 전에 말한 대로네요."

"예. 다행히 이집트와 브라질은 비교적 외곽에 던전이 생성돼 큰 문제는 없었지만, 터키는 달랐습니다."

"대도시 한복판에서 터지기라도 했어요?"

"한국으로 치면 부산과 같은 대도시에 던전이 생성됐습니다. 그 결과 도시 대부분이 암흑으로 변한 상황입니다."

"그건 큰일이긴 하네요."

부산 전체에 전기가 끊어지고, 전자기기가 먹통이 된다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파급력일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터키 쪽에서 전 세계에 지원 요청을 해왔습니다. 특히 한국은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무조건 가야 할 상황이었죠."

"그래서 그렇게 전화를 했구만. 그런데 그게 잘 해결 됐나 봐요?"

"터키의 랭킹 1위 길드. 하리카 카흐라만에서 나섰습니다. 최초로 A등급 던전을 공략해서 자국을 위기에서 구하겠다고 외치면서요."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랭킹 1위면 알아서 잘하겠지."

"예. 튜토리얼 8단계 졸업자이자 터키 최고의 능력자인 브락과 그가 이끄는 길드의 정예가 모조리 나섰다고 하니, 기다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강현과 신태길. 둘뿐만 아니라 세계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던전들처럼 A등급 또한 큰 피해 없이 클리어될 것이다.

그것이 한낱 오만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44화 이세계 왕녀님(1)

144. 이세계 왕녀님(1)

A등급 던전 '카린슈테인의 성'.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부길드장의 말에 브락이 미간이 좁혀졌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자고?"

"이대로 간다고 해도 노말 코어에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왔던 길을 돌아가면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있나?"

"적어도 코어에 도달하는 것보다는 살 확률이 더 높을 겁니다."

브락이 이끄는 길드 '하리카 카흐라만'이 던전에 들어온 지 벌써 1주일이 흘렀다.

그 사이 길드원의 3분의 1이 죽거나 중상을 입어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아... 잠시.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줘."

한숨을 내쉰 브락이 바위에 걸터앉았다.

'어디부터 잘못된 거지...'

자신은 터키 최고의 능력자다.

그런 자신이 이끄는 길드는 당연히 터키 최고의 길드.

그들이 지금까지 공략한 B등급 던전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너무 자만했어.'

자신이라고 이렇게 급하게 던전에 들어오려 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기존에 없던 새로운 난이도의 던전.

당연히 오랜 시간 탐색하고 조사를 한 뒤에 공략을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놈의 돈과 명예가 뭐라고.'

하리카 카흐라만. 위대한 영웅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길드는 터키에서 가장 거대한 기업의 후원을 받는다.

정부의 지원 또한 마찬가지.

-당장! 지금 당장 던전에 들어가서 국민을 안심시켜야 합니다!

-이보게 브락. 이건 기회일세.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지금. 자네들이 나서서 던전을 클리어한다면 세계 최고의 길드가 되는 거야!

-우리가 지금까지 당신의 길드에 투자한 돈이 얼마인지 잘 알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들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줄 때가 됐습니다.

이즈미르에서 던전이 생성된 그 날.

그 순간부터 24시간 동안 받은 메일과 전화가 수백 통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압박했다.

-당장 던전에 들어가게!

-당신들은 위대한 영웅. 국민들의 영웅 아닌가요? 이즈미르에 사는 수백만 명이 불안에 떨고 있어요.

그 상황을 떠올리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기들 잇속을 챙기기 바쁜 놈들이 말만 번지르르했지.'

사실, 이 던전을 클리어한다고 해서 이즈미르가 정상화된다는 보장은 없다.

던전이 클리어 된 이후에도 마력의 잔재가 남아있어 이즈미르에서는 여전히 전자기기의 사용이 불가능하다.

그게 모든 전문가의 공통된 견해였다.

그리고 높은 위치에 앉은 자들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이즈미르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을 이 지옥에 밀어 넣었다.

국민에게 무언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으니까.

"길드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 부길드장이 브락을 상념에서 깨웠다.

"길드원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미안해. 생각이 길어졌어."

"돌아가시겠습니까..?"

부길드장의 말에 브락이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봤다.

고작 1주일 만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길드원들이 보였다.

그들의 떨리는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모두 주목!"

브락이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이대로 돌아가는 것. 다른 하나는 코어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브락의 말에 길드원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돌아가면 아마 우리 중 절반 이상은 살아남을 거다. 대신 우리 길드는 끝이겠지. 그리고 이즈미르에 살고 있는 수백만의 국민들이 위험해진다."

"..."

"앞으로 나아간다면 우리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 대신! 공략에 성공하면, 우리는 진정한 영웅이 되어 돌아간다."

하리카 카흐라만(harika kahraman).

위대한 영웅.

그것은 길드원 모두가 꿈꾸는 일이었다.

"선택은 너희들에게 맡기지. 비밀 투표를 진행해서 더 많은 표가 나온 쪽으로 결정하겠다. 불만 있는 사람 있나?"

브락이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좋아. 투표를 진행하지."

**

"이걸로 오늘 교육 영상을 마치겠습니다."

강현의 말에 채팅창이 빠르게 갱신됐다.

-아 벌써 끝임? 좀 더 해줘요.

-저번에 태한 시에서 메테오 터졌다는 말 있던데. 썰 좀 풀어주세영.

-ㄹㅇ 태한 사건 정보도 별로 안풀리고 너무 궁금함.

-가지마요ㅠㅠ 오랜만에 왔는데 좀만 더 있어요 ㅠㅠㅠㅠ

빠르게 올라오는 채팅을 읽으며 강현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태한 시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해달라는 분이 많네요."

-오? 여기서 드디어 비밀이 풀리는건가

-오오 오늘 방송 보길 잘했네요.

-개꿀ㅋㅋㅋㅋ

베일에 싸여 있던 태한 시 사건.

그것에 대한 정보가 풀릴 것 같자 사람들은 흥분에 휩싸였다.

격한 반응을 지켜보던 강현이 씨익 웃었다.

"궁금하면 500원."

-와 ㄹㅇ 드립 개썩었따.

-ㅁㅊ 언제적 500원이야?

-아재... 제발 이런것좀 하지마요...

-퉤!

채팅창을 보며 낄낄거리던 강현이 순간 정색을 했다.

-대가리가 오크 수준인가. 여기서 저딴 드립을 치네.

"방금 오크 드립 친 새끼. 누구냐. 시벌, 너 밤길 조심해라."

시청자들과 옥신각신하는 강현을 보며 윤나래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저러니까 별명이 인간 오크지."

"안 맞은 지 오래됐지?"

"사람들! 여기 봐요! 대형 오크가 미소녀를 협박해요! 빨리 신고해!"

"잡히면 뒤진다!"

서둘러 방송을 종료한 강현이 미친 듯이 윤나래에게 달려갔다.

"꺄아악! 오크다 오크!"

재빠르게 윤나래를 잡아챈 강현이 헤드락을 걸어 꿀밤을 먹였다.

"아악! 잘못했어요. 살려줘!"

그 모습을 보며 안유성이 생각에 잠겼다.

"피규어에 오크 에디션을 추가해야겠어"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운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 순간.

"응?"

"뭐야?"

"지금 뭔가..."

강현과 일행이 모두가 멈춰 섰다.

"모두 느끼셨습니까?"

신성아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 근방인 것 같은데..."

"저쪽인 것 같아요."

그들이 멈춰 선 이유는 바로 마력 때문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엄청난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떤 미친놈이야?"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가 웃음기가 사라진 모습이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초대형 마법을 갈긴 것이 아니라면 이 마력의 파동이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현을 필두로 일행은 빠르게 마력의 근원지로 나아갔다.

"무슨 일이 터지긴 했나 보네."

처음처럼 강한 마력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지에 제법 강한 능력자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한 학교.

오늘은 평일이었기에 많은 학생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떤 잡놈들이 학교에서 싸움질이야!"

일행은 곧장 마력이 느껴지는 운동장으로 향했다.

"저놈들이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세 명의 남녀였다.

"애들은 건들면 안 되는 거 모르냐 이…."

말을 하던 강현이 멈칫했다.

당황한 것은 강현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일행들도 예상 밖의 상황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윤나래. 혹시 오늘 너희 동아리 모임 있냐?"

강현의 물음에 윤나래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개소리예요?"

"꼬라지가 너랑 똑같잖아."

마치 코스프레 모임이라도 하는 듯한 셋을 본 강현의 말이었다.

**

두 무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한쪽은 Badass 가 적힌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은 사람들.

다른 한쪽은 마치 판타지 세계에서 온 듯한, 현대에서 보기 힘든 복장을 한 사람들이었다.

"어, 음... 하이?"

강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디 유럽 길드인가...'

일단 동양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서양인들과도 조금 다른 모습.

'일단 기사 하나에, 마법사 하나. 나머지 하나는 사제인가..?'

셋의 차림새를 보며 강현이 고민했다.

"bastio si osleno?"

그때 그들의 가장 앞에 있던, 화려한 로브를 입은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언어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할 때,

"당신이 여기의 책임자인가요?"

강현만이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책임자라...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쪽은 누구입니까?"

강현의 말에 여성이 고풍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헤이그란 왕국에서 온 올리엔이라고 해요."

"강현입니다."

강현도 엉거주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강현님. 저 여자가 뭐라고 하는 겁니까?"

"무슨 왕국에서 온 대표라는데?"

"왕국... 입니까...?"

"어. 그렇다네..."

강현의 말에 일행이 또다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국 같은 곳인가?"

"몰라 인마."

그 모습을 보던 여성, 올리엔이 미소를 지었다.

"저와 대화하시는 분은 통역 마법을 익히신 것 같네요. 혹시 이곳의 귀족이신가요?"

'귀족'이란 단어에 또다시 강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으음, 귀족은 아니고..."

"어머, 그러면 평민 마법사?"

"마법사도 아닌데..."

그때였다.

올리엔의 뒤에서 검을 차고 있던 여성이 갑자기 검을 빼 들었다.

"하찮은 평민 놈이 책임자를 자처하며 우리를 우롱하는가! 당장 이곳의 영주를 부르고 예를 갖춰라. 이분은 올리엔 헤이서스. 헤이그란 왕국의 왕녀시다."

여성의 말에 강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형. 뭐라는 거예요?"

"하찮은 평민 새끼들은 얼른 예를 갖추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사납게 웃은 강현이 말을 이었다.

"코스프레를 하다가 뇌까지 액세서리로 바꿔버린 것 같은데."

강현의 말에 올리엔의 미간도 좁혀졌다.

"코스프레..?를 하다가 머리가 장신구가 됐다가 무슨 뜻인가요?"

"머리에 꽃을 꽂은 사람처럼 예쁘장하다는 뜻이요."

"어머! 고마워요!"

혼란의 도가니였다.

상큼한 미소를 짓는 올리엔.

화가 난 듯한 기사.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마법사.

강현은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거기 평민. 내가 왕녀께 예를 갖추라고 했을 텐데."

그때였다.

벼락같이 움직인 기사의 검이 강현의 목덜미에 닿았다.

강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양성평등을 선호해서 사람 가라지 않고 패거든? 그러니까 뒤지기 싫으면 이거 치우는 게 좋을 거야."

"이놈이 그래도..!"

둘 사이에 싸움이 벌어질 것 같자 올리엔이 앞으로 나섰다.

"가넷. 그만 해요.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곳을 탐사하는 것. 불필요한 싸움은 피해야 해요. 강현.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아닙니다! 왕녀님이 왜 이런 놈들에게!"

"그래그래. 가넷이라 했나? 이런 거 함부로 내미는 거 아니야. 그러다 큰일 난다."

강현이 손을 뻗어 가넷이 내민 검을 붙잡았다.

'이놈이 감히!'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기사 가넷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정신을 차리게 내주지.'

자연스럽게 검을 빼내며 손목을 베어내리라.

그녀의 곁에는 어차피 뛰어난 마법사 갈리우가 있으니, 고통에 몸부림쳐서 살려 달라 할 때쯤 손목을 붙여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가넷은 검을 휘두르려 했다.

"어, 어...?"

"자자. 이런 건 집어넣으라고. 뒤지기 싫으면."

가넷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검이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강현은 맨손으로 검날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조심하기는커녕 우악스러운 손길로 가넷에게서 검을 뺏어갔다.

'이, 이게 왜!?'

가넷은 필사적으로 버티려 했으나 불가항력이었다.

결국, 가넷은 허무하게 검을 강현에게 빼앗겼다.

"오오, 검이 제법 괜찮은 것 같은데?"

기사 가넷은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올리엔은 그런 가넷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가넷? 왜 검을..?"

기사에게 검이란 목숨과도 같은 것.

자신이 싸움을 멈추라고 했지만, 검을 주라고 명하지는 않았다.

가넷은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 그것이..."

가넷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터지기 직전,

"자. 여기 돌려줄게."

강현이 검을 가넷에게 돌려주었다.

"..."

가넷은 치욕스러운 마음에 고개조차 제대로 들 수 없었다.

올리엔은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더는 일을 키우지 않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강현. 괜찮다면 저를 이 나라의 국왕과 만나게 해주시겠어요?"

올리엔의 말에 강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음, 우리는 그런 거 없는데요."

"네?"

145화 이세계 왕녀님(2)

145. 이세계 왕녀님(2)

"네? 국왕이 없다고요...?"

올리엔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졌다.

"설마... 벌써 불사자들에게 나라가 멸망한 건가요?"

자신들의 세계를 집어삼키고 있는 불사자들.

그들의 마수가 이미 이곳에 미쳐 국가가 파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깨끗해 보여...'

당장 강현의 뒤로 보이는 거대한 건물만 해도 굉장히 깔끔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창으로 빼곡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혹시 여기는 피난처인가요?"

"여기는 학교라는 곳인데..."

"학교?"

올리엔의 머리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교육시설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국가가 사라졌을 것 같지는 않은데...'

올리엔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혹시 하켄인가 뭔가 하는 데서 넘어온 거 같은데, 맞아요?"

강현의 말에 올리엔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저희는 하켄 대륙에서 왔어요."

"하...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하나. 일단 따라와요."

솔직히 강현도 두 세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몰랐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네?"

"따라오라고요. 언제까지 여기 서서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 길드 사무실로 가서 이야기하죠."

"아아, 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으나, 선택지가 없었던 올리엔은 강현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왕녀님! 무얼 믿고 이런 자를!"

"가넷. 지금 우리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예요. 강현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우선 그에게 설명을 듣는 게 좋아 보여요."

"그래. 가넷. 네 왕녀님 명령을 잘 들어야지."

가넷은 옆에서 깐족거리는 강현의 입을 당장에라도 꿰매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왕녀 올리엔의 호위 기사.

그녀의 말은 모든 것을 우선한다.

"예... 알겠습니다."

**

"와아! 사람이 정말 많네요! 이 신기하게 생긴 건 뭔가요? 안에 사람들이 잔뜩 타고 있어요! 여기 이 반짝거리는 건 또 뭔가요?"

학교 밖으로 나온 올리엔은 연신 감탄했다.

"이건 자동차라는 건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자동차는 자동차고, 신호등은 신호등이고, 핸드폰은 핸드폰이다.

이걸 설명하라고 하니 강현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가넷! 저 사람 좀 봐! 옷이 엄청 화려해. 귀걸이도 너무 예뻐! 저런 치장을 하고 다닐 정도면 귀족인 것 같은데 왜 혼자 다니지?"

"이 나라에 귀족은 없어요."

"네? 국왕도 없다고 하시더니, 귀족도 없나요?"

"그렇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쪽 말로 하면 평민이라고 해야 하나?"

강현의 말에 올리엔이 정말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을 했다.

"세상에! 이 화려한 건축물들. 옷. 마차. 모든 게 다 평민들의 소유란 말씀이신가요?"

올리엔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세상에! 너무 대단해요! 어떻게 이런 나라가 존재할 수 있죠!?"

올리엔의 호들갑은 정말 한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 기빨린다 기빨려.'

강현은 오랜만에 피로감을 느꼈다.

"가넷! 갈리우! 말 좀 해봐요!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이런 세계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예..."

기사 가넷과 마법사 갈리우도 그리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저희를 자꾸 쳐다보는 것 같은데. 왜 그런가요? 혹시 저희 복장이 문제인가요?"

거리로 나온 이후부터 끊임없이 따라오는 시선들.

올리엔은 그런 시선들이 이곳과는 다른 자신들의 복장 때문이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올리엔의 의문은 금세 해결됐다.

"와아! 강현이다. 저 팬이에요. 싸인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예예."

"사진 한 번만 찍으면 안 될까요?"

"찍어요."

길을 지나며 마주친 사람들이 강현과 일행에게 다가오며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며 올리엔과 가넷. 갈리우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강현! 아까 귀족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들 강현을 알고 있네요?"

"귀족은 아니고,.. 그냥 좀 유명하긴 하죠."

"와아... 강현은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하하하하!"

올리엔의 칭찬에 들뜬 강현은 승천하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윤나래와 신성아. 안유성은 그런 강현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쯧쯧, 헤벌쭉한 꼴이라니."

"강현 님. 실망입니다."

"형이 그렇죠. 뭐. 이제 와서 실망할 거 있어요?"

강현은 뒤에서 쏟아지는 악평들을 무시하고 힘차게 걸었다.

**

"다 왔다. 여기가 우리 길드 하우스야."

"길드 하우스?"

"아지트, 숙소 같은 거지."

"아하!"

올리엔의 엄청난 친화력으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강현은 어느새 말까지 편하게 하고 있었다.

가넷이 당장에라도 칼로 베어버릴 듯 사납게 노려봤지만, 강현에게는 어떠한 타격도 줄 수 없었다.

"길드장님. 오셨습니까."

"어어."

"그런데 뒤에 분들은..?"

"손님이야. 간단하게 다과 좀 준비해줘."

"알겠습니다."

길드에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들이 강현에게 고개를 숙여왔다.

그런 모습을 보며 올리엔이 또다시 감탄했다.

"와아! 사람들이 전부 강현에게 인사하는 거죠? 대단해요."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여기 있는 사람들. 다들 굉장한 것 같아요. 강한 마력이 느껴져요."

"뭐야? 마력도 느낄 줄 알아?"

"그럼요. 이 정도면 제법 큰 영지의 기사단 수준인 것 같은데... 이들 모두 강현의 수하들인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정말 대단해요!"

"크하하하하하!"

평생 처음 당하는 칭찬 공격에 강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가 말했던가.

칭찬은 마약과 같다고.

강현은 정말 약에 취해 신난 사람처럼 보였다.

"말씀하신 다과입니다."

"어. 고마워."

잠시 후.

응접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 차와 간단한 디저트가 놓였다.

그것들을 음미하며 올리엔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고급스러운 맛이에요. 이런 융숭한 대접이라니 고마워요."

"별거 아니야."

"가넷도 앉아서 들어요."

"저의 임무는 왕녀님을 호위하는 것입니다. 다과는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어요..."

가넷이 저렇게 나오면 올리엔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 신기한 맛이네. 갈리우도 입맛에 맞아요?"

"예..."

한동안 응접실에는 올리엔이 차를 마시고, 과자를 먹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강현은 말없이 커피를 마시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때 뒤쪽에 있던 신성아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아직 뭔가 계획이 있는 건 아니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자! 즐거운 다과 시간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이야기를 해볼까?"

강현이 손뼉을 쳐서 이목을 모았다.

"이야기요?"

"언제까지 이렇게 하하호호 하고 떠들고만 있을 건 아니잖아?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조금 전 가벼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강현은 진중한 눈빛으로 올리엔을 바라봤다.

'이 느낌... 뭐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사나운 맹수와도 같은 기세.

순간 올리엔은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네요. 너무 제가 들떠있었나 봐요."

"아냐. 그럴 수 있지."

"강현이 궁금한 게 뭔가요?"

올리엔의 물음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전부 다.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 목적은 뭔지. 그 외에도 그쪽 세계에 관한 것 전부. 올리엔. 네 이야기가 끝나면 나도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해 줄게. 오케이?"

강현의 말에 발끈한 가넷이 나서려는 찰나,

"좋아요."

손을 들어 가넷을 제지한 올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법이니까요."

**

올리엔의 이야기는 제법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들이 언제부터 대륙에 존재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다만,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건 약 300년 전이죠."

"그들?"

"불사자들이요."

불사자.

강현은 그것이 언데드를 의미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켄 대륙에 거대한 전쟁이 벌어졌어요. 인간과 모든 이종족이 역사상 처음으로 힘을 합쳤죠. 하지만 불사자들은 너무 강했어요. 우리 필멸자들, 생명이 있는 종족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졌지만, 불사자들은 전쟁을 치를수록 강해져만 갔죠."

"해골들이 질기긴 하지."

강현의 말에 올리엔이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네. 결국 우리는 대륙 3분의 2를 그들에게 빼앗겼어요. 인간의 국가는 이제 3개만 남았고, 이종족들은 거의 무너져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죠. 사실 그때쯤 모두가 포기했어요. 그저 조금이라도 늦게 멸망이 다가오기를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버텼죠."

올리엔은 그때를 회상하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이변이 일어난 건 약 2년 전이에요. 갑자기 모든 불사자들이 진군을 멈춘 거죠."

"2년 전?"

"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덕분에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평화를 만끽했죠."

2년 전이라는 말에 강현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던전이 생긴 시점과 일치해.'

지구에 처음 튜토리얼이 등장하고, 던전이 생긴 지 약 2년이 흘렀다.

하켄 대륙이란 곳에서 언데드들이 공격을 멈춘 것도 분명 그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대충 상황은 알겠어. 그러면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게 된 거야?"

"그건..."

올리엔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아,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부끄럽지만. 있는 그대로 말씀드릴게요."

"편하게 이야기해."

고개를 끄덕인 올리엔이 입을 열었다.

"사실 세계가 멸망에 처한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있어요. 아까 인간의 국가가 3개 남았다고 했죠?"

"어. 그랬지."

"이해가 안 되겠지만 3개의 국가는 아직도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어요. 솔직히 욕심 때문이죠."

많은 것이 빠진 부족한 설명이었지만, 강현이 받아들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원래 두 놈만 모여도 서열을 정하는 게 인간이니까.'

언뜻 보면 인간은 합리적인 듯 하지만 사실 굉장히 비합리적이다.

생명이 꺼지는 순간에도 욕심과 탐욕을 놓지 못하는 자들을 강현은 너무나 많이 봐왔다.

"그래서. 그게 이쪽으로 온 거랑 무슨 관계야?"

"저희 쪽에서 아그란 제국에 보낸 첩자가 정보를 보내왔어요. 제국이 다른 세계와 연락을 취하는 것 같다고."

"다른 세계..."

"네. 강현이 있는 바로 이곳이요. 그 사실을 알게 된 헤이그란 왕국에서는 조사를 하기로 했고, 그 첫 번째 조사단으로 파견된 것이 바로 저예요."

"흐음..."

이야기를 듣던 도중 강현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올리엔은 분명 왕녀라고 했지? 그러면 엄청 귀한 신분 아닌가?"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그런 편이죠."

올리엔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이런 곳에 첫 번째로 온 거야? 별다른 호위도 없이?"

보통 왕녀라면 굉장히 고귀한 신분이다.

절대로 이런 위험한 일에 달랑 호위 둘만 데리고 올만한 신분이 아닌 것이다.

"그건... 제가 정실의 딸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말만 왕녀지 사실은 웬만한 귀족보다도 못한 처지라서. 하하하..."

"너도 사연이 많구나."

"딱히 불만은 없어요. 그래도 왕실의 후광으로 행복하게 살았으니까요."

"그래."

강현은 대견한 아이를 보듯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가 학자라는 것도 여기 온 이유 중 하나예요."

"학자?"

"네. 저 이래 봬도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 중 하나거든요. 주 분야는 역사지만, 이번 파견에 제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다고 해서 오게 됐어요."

"그랬구나."

그렇게 둘의 대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응?"

강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무슨 일이에요?"

-강현 씨. 지금 어딥니까?

전화 너머로 들리는 신태길의 목소리는 꽤나 다급해 보였다.

"어디긴 어디에요. 길드지. 손님이 와서 이야기 좀 하고 있었어요."

-거기 그대로 계시죠.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마시고.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궁금하면 sns를 확인하는 게 빠를 겁니다. 지금 당장 제가 거기로 갈 테니 어디 가시면 안 됩니다!

신태길은 본인이 할 말만을 하고 곧장 전화를 끊었다.

"뭐야?"

"무슨 일이십니까?"

강현이 인상을 찌푸리자 신성아가 다가왔다.

"신태길 팀장인데, 여기로 찾아온다고 어디 나갈 생각 하지 말라는데? 그리고 뭐 sns를 확인하라는 헛소리도 하고."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아마 이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146화 이세계 왕녀님(3)

146. 이세계 왕녀님(3)

"뭐야? 이게 왜?"

신성아가 내밀은 스마트 폰을 확인한 강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현신동 강현 실시간.

액정에는 유명한 sns의 게시글이 떠 있었는데, 조금 전 밖에 있을 때 강현이 찍힌 사진들이었다.

"이건 항상 있는 거잖아?"

강현의 사진이 인터넷상에 떠도는 것. 따지고 보면 도촬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다.

"딱히 문제될 건 없어 보이는데."

"아마 저들과 함께해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신성아가 다른 게시물로 화면을 옮겼다.

-나 현신동 카페 앞에서 강현 만났음.

-오늘 강현이 외국인들이랑 같이 다니는 거 보신 분.

-회색 단발에 화려한 망토 입은 여성분. 엄청 예쁘던데 외국 배우에요?

-회색 ㄴㄴ, 은색 단발.

-유럽에 유명 능력자 아닐까요?

-신기해서 잠깐 따라다녀 봤는데, 처음 듣는 언어였어요. 유럽 쪽은 아닌 것 같은데.

그곳에는 오늘 강현과 함께 다닌 외국인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게 문제 될 건가?"

"자세한 이야기는 신태길 씨에게 들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강현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 무슨 문제가 있나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올리엔이 물었다.

"별거 아니야. 조금 있다가 누가 올 건데 인사나 해."

"누가 와요?"

"어. 그러니까 귀족은... 아니고 뭐라고 해야 되지? 그냥 국가를 위해 일하는 높은 공무원이야."

"내정을 돌보는 문관이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강현의 말에 올리엔이 잔뜩 기대한 표정을 지었다.

"강현은 그런 사람과도 알고 있나 보네요? 대단해요!"

"내가 좀 대단하긴 해! 하하하!"

강현은 올리엔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신태길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강현 씨!"

상당히 초췌해 보이는 신태길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왔어요?"

강현은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했다.

"하아, 이번엔 또 무슨 일을 벌이신 겁니까?"

"무슨 일을 벌이긴, 뭘 벌여요. 아무것도 안했구만."

"하아... 항상 말은 그렇게 하시죠."

신태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이분들이군요."

신태길이 올리엔과 일행을 바라봤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태길이라고 합니다."

신태길이 인사를 건네자 올리엔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 이분이 뭐라고 하시는 건가요?"

올리엔의 입에서 나오는 낯선 언어.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신태길이 사과를 했다.

"아! 이런. 실례했습니다."

신태길이 품에서 통역 장치를 꺼내들었다.

"강현 씨. 이걸 저분들에게…."

신태길이 통역장치를 건네려는 찰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올리엔의 옆에 있던 마법사 갈리우가 말했다.

"왕녀님. 통역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고마워요. 갈리우."

갈리우의 마법으로 모두가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자 신태길이 감탄했다.

"역시 저쪽 세계에서 오신 분은 다르군요."

"뭐야. 신태길 씨 알고 있었어요?"

"저도 방금 알게 됐습니다. 다른 세계에서 건너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럼 왜 그렇게 큰일 난 사람처럼 굴었어요?"

강현의 말에 신태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게... 하아..."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강현 씨."

"예."

"미국에서 저분들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예?"

**

"미국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뜬금없이 등장하는 미국이란 단어에 강현이 인상을 구겼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미국에서 저분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왜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신태길의 대답에 강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도 없이 사람을 보내라고? 싫다고 해요."

"강현 씨.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쉬운 게 아니면요?"

"강현 씨! 지금 농담할 때가…!"

신태길의 언성이 높아지려 하자 강현이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지들이 뭔데 사람을 보내라 말라 지랄이에요?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생각 없으니까 꺼지라고 해요."

"싫다고 거절할 수 있는 거였으면 제가 굳이 강현 씨에게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강현과 신태길의 대화가 심상치 않자 올리엔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희 때문에 문제가 생겼군요."

"별거 아니야. 신경 안 써도 돼."

"그 미국이란 곳은 이곳과 다른 국가인가요?"

"그렇지."

"아마, 이곳에서 가장 강한 국가일 거고요."

올리엔의 말에 강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으음?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어떻게 알았어?"

마치 전부터 미국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올리엔의 태도.

신태길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올리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국에 보낸 스파이로부터 보고받은 내용 중에 미국이란 단어가 있었어요.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지만, 그 미국이란 곳이 제국과 교류하는 국가인 것은 분명했죠."

올리엔의 설명에 신태길의 미간이 좁혀졌다.

"제국이란 건 뭡니까?"

"신태길 씨. 일단 앉아서 이야기 좀 하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대화를 하든 말든 하니까."

"하아... 알겠습니다."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자리에 앉고, 한동안 설명이 이어졌다.

"정리하면, 하켄 대륙에 남아있는 3개의 국가. 그중에서 가장 거대한 아그란 제국은 이전부터 미국과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까?"

"네."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십니까?"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최소 2달이 넘었다는 건 확실해요."

마침내 모든 것을 이해한 신태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지금까지 미국이 그걸 왜 숨겨왔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정보가 퍼져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확실하군요."

"그렇죠. 그게 아니면 올리엔을 데려가려 할 이유가 없으니까."

"흐음..."

신태길과 강현의 대화에 모두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 씨.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선택권이 없다니?"

"상대는 미국입니다."

던전이 나타나고 세계가 급변했지만, 미국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공고해질 뿐이었다.

이제 막 새로운 산업으로 자리 잡은 마정석에 관한 연구조차 미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과를 내고 있었다.

"세계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미국의 위상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런 미국의 중용한 동맹국이죠."

"그래서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한테 살랑살랑 꼬리나 흔들면서 떨어지는 콩고물 주워 먹자는 말이잖아요."

강현의 직설적인 말에 신태길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런데 별로 관심이 없어서. 이런 일은 본인 의사를 존중하는 게 맞지 않겠어요?"

"본인 의사라면..."

"올리엔한테 물어야죠."

강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올리엔에게 향했다.

"올리엔. 대충 어떤 이야기인지는 이해했지?"

"네."

"어떡할래?"

강현의 물음에 올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에게 미안하지만, 저는 미국이란 곳에 갈 수 없어요."

신태길이 내쉬는 한숨이 응접실의 분위기를 더욱 가라앉혔다.

"저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만약 제가 미국이란 곳에 간다면 아마 제국에게 붙잡힐 거고, 그럼 헤이그란 왕국은 더 이상 이곳에 사람을 보내지 않을 거예요. 아마 모두가 비탄에 빠진 채로 다가올 멸망을 기다리겠죠."

올리엔이 결의에 찬 얼굴로 눈을 빛냈다.

"저는 반드시 이곳의 상황을 왕국에 알리고, 정식 사절단을 불러와야 해요."

올리엔의 이야기를 끝내자 강현이 씨익 웃었다.

"왕녀님이 그렇다고 하네! 그럼 어쩔 수 없지. 안 그래요?"

신태길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대통령께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올리엔도 갈 생각이 없고, 저도 보내줄 생각이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해요."

"강현 씨. 이번 사건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는 거고.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요?"

"후우, 알겠습니다..."

잔뜩 풀이 죽은 신태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가요?"

"강현 씨 덕분에 바빠질 것 같습니다. 처리하려면 빠르게 움직여야죠."

"미안해요."

지나가듯 흘러나온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피식 웃었다.

"아닙니다. 어쩌면 강현 씨의 선택이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방법은 이제부터 찾아봐야겠죠."

"웬일로 멋진 말을 다 하시네."

"제 생각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럼 이만."

신태길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곧장 응접실을 떠나갔다.

"저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겨버린 것 같아서 죄송해요."

올리엔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곤란은 무슨. 신경 쓰지 마. 원래 내가 이상한 명령질 하는 걸 못 참는 성격이라 그런 거니까."

이 일로 미국이 어떤 짓을 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강현도 쉽게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재미있겠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기대하며 강현이 미소를 지었다.

**

대통령의 집무실.

대통령 한승훈은 주름이 잔뜩 생겨버린 이마를 붙잡았다.

"미안합니다. 그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게 최선입니까?

그가 대화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미국의 대통령 하워드.

"저희로서는 불가항력입니다."

신태길에게 보고를 받은 한승훈은 심사숙고 끝에 하워드에게 요청을 거절하기로 결정하고, 전화를 걸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직접 그들을 데려가겠습니다.

"그건..."

-한국 정부에서 안 된다면 직접 나설 수밖에요.

순간 한승훈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하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렇게 통화가 끝나려는 찰나,

"잠시만요."

한승훈이 하워드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죠?

"미국이 숨기고 있는 게 뭡니까?"

-숨기고 있는 거라니. 이해할 수 없군요.

"제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세계가 힘을 합쳐야 하는 지금. 미국은 무얼 꿈꾸는 겁니까..."

-하하. 그거야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인류의 미래입니다.

"인류의 미래..."

-그나저나 한국이 우리에게 그런 질문이라니. 우습군요.

"예?"

갑작스러운 하워드의 말에 한승훈이 당황했다.

-저야말로 한국에 묻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당신들은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그게 무슨..."

-서로 숨기고 싶은 게 많은 처지인 거로 아는데. 가능한 이런 곤란한 질문들은 피하도록 하죠.

"..."

-지금까지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에게 많은 정보를 무상으로 제공했습니다. 나는 우리의 이런 관계가 틀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하워드는 통화를 종료했다.

한승훈은 한동안 하워드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정보가 새어나갔나...'

물론, 단순히 찔러본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미국이다.

한국이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눈치를 채고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야..."

한승훈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147화 아메리칸 드림(1)

147. 아메리칸 드림(1)

금발의 포마드를 한 남성. 에든이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한국은 여전하구나."

"뭐가?"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닌다고. 그나저나 얼마 만이지?"

에든의 말에 갈색의 장발을 흩날리는 여성. 엘라가 생각에 잠겼다.

"작년 12월에 왔으니... 10개월? 거의 1년 정도 되었네."

"벌써 그렇게 됐다고? 시간 정말 빠르네."

에든과 엘라.

그들은 미국의 유명 길드 워리워즈의 길드장과 부길드장이었다.

"그때 참 재미있었는데."

"재미있었다니...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날이었다."

에든과 엘라는 이번이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방문은 작년 12월.

한국에서 열린 세계 던전 정상회담에서 미국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길드원들을 이끌고 왔었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어. 이 작은 나라에 얼마나 강자들이 많던지."

"그 사실이 지금 우리에게는 큰 문제지. 이번 목표는 잘 알고 있겠지? 우리는 여기에 놀러 온 게 아니야."

"당연하지. 강현과 나는 잘 아는 사이라고. 걱정하지 마."

"에든. 네 말에 더 걱정되기 시작했어..."

"엘라. 너는 매사에 너무 부정적이야. 인생은 즐거운 거라고!"

에든이 해맑은 미소를 엘라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알겠으니 닥치고 가지."

"그래그래."

공항을 벗어나고, 미리 대기 중이던 차량에 탑승한 에든이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강현이라는 남자... 지금은 얼마나 더 강해졌을까?'

짧은 만남이었지만, 에든은 똑똑히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날 전투에서 보여준 강현의 모습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국가에서 길드장들을 모아 놓고 이번 일을 의뢰할 때 적극적으로 나선 것 또한 강현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얼른 만나고 싶어. 강현.'

**

지구에 온 이후. 가넷은 단 한시도 올리엔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숙소에 틀어박혀 있는 올리엔의 곁을 지키는 것이 지루할 만도 했지만 가넷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올리엔의 곁에 서 있었다.

"가넷. 다른 분들이랑 좀 어울리는 건 어때?"

"왕녀님의 곁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니까요."

가넷이라고 이곳이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지구의 신기한 문물,

그리고 능력자라 불리는 사람들.

길드에 돌아다니는 자들은 하나같이 강력했다.

가넷은 그들과 검을 겨루고, 새로운 문물을 배우고 싶었다.

'나는 왕녀님의 호위 기사야.'

하지만 그 모든 욕구를 억누르고 올리엔의 곁을 지키는 본분에 충실했다.

그런 충직한 가넷의 마음이 변한 것은 오늘 점심이었다.

"고블린!?"

식당에서 올리엔과 식사를 하던 도중, 케르고를 마주친 것이다.

"여기에 왜 고블린이 있나요?"

올리엔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길드원에게 케르고에 대해 물었고, 통역 장치를 하고 있던 길드원은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아하! 고블린이 검술 교관이라니. 정말 대단하네요."

현재 대륙에는 고블린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한때는 그들이 왕국을 이루고, 번영을 누렸다고 전해졌으나 그것은 역사책에 적혀있는 기록일 뿐.

수백 년 전에 인간의 공격으로 멸망한 이후 고블린들은 이제 한낱 몬스터가 된 지 오래였다.

"가넷. 고블린 기사라니 궁금하지 않아요? 예전에 고블린들의 검술이 정말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잖아요!"

"예..."

가넷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고블린들은 성정이 포악하고 잔혹하나,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인간의 그것을 뛰어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인간만큼 전략과 모략에 능하지 못했던 그들은, 결국 인간들의 합공에 멸망했다.

"가넷. 저 고블린과 겨뤄보고 싶지 않아요? 새로운 것을 배울 기회인데."

"저는 왕녀님 곁을 지켜야 합니다."

가넷이 끝까지 떠나려고 하지 않자, 올리엔은 약간의 충격요법을 수행하기로 했다.

"가넷...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여기에 가넷만큼 강한 사람은 정말 많아요. 그렇지 않나요?"

"그, 그건..."

"만약 저들이 해를 끼치려 했다면 진작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올리엔의 말에 가넷이 침묵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저 고블린에게 다녀와요. 거기서 가넷이 성장한다면 앞으로 저를 호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가넷은 케르고와 함께 훈련장으로 향했다.

떠나면서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올리엔을 바라봤지만, 올리엔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왕녀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해주지 못했는데... 이 기회에 좋은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배울 기회가 부족했던 가넷.

결국, 그녀의 목표였던 왕실 기사단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신의 호위 기사로 남게 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올리엔이었다.

"가넷. 잘 다녀와요!"

또다시 뒤를 돌아 자신을 바라보는 가넷에게 올리엔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

"강현! 사냥은 잘 다녀왔어요?"

한국에 온 이후, 올리엔과 일행은 배데스의 길드 하우스에 머물렀다.

현재 강현은 작은 빌딩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길드원들을 위한 휴식 공간. 식당. 샤워 시설까지 완비되어 있었기에 머무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오늘도 공부했어?"

"네. 지구라는 곳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마력이 없이 이런 기술이라니!"

"그래?"

"그렇다니까요! 하켄에도 마도공학이란 학문이 존재하긴 하지만... 지구의 것과 비교하면 정말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한 것 같아요."

올리엔이 신이 나서는 21세기의 과학 문명에 대한 찬양을 늘어놨다.

"이런 찬란한 문명을 불과 200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이뤄내다니... 어떻게 이런 발전 속도가 존재할 수 있죠?"

올리엔과 함께 있으면 넘쳐나는 에너지에 휘둘리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피곤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넷이었나? 그 기사는 어디 갔어?"

"가넷은 훈련장이라는 곳에 갔어요."

"그래? 웬일이래? 절대 너랑 안 떨어진다고 하더니."

"그러니까요. 누굴 닮았는지 고집이 정말 대단해서. 보낸다고 고생했다니까요? 하하."

사실 강현은 모두 보고를 받아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었다.

다만, 온종일 혼자서 말없이 있었을 올리엔을 생각해서 말동무가 되어 주고 싶었기에 모른 척을 한 것이었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밖을 봐. 완전히 어두워졌잖아."

"아... 그러네요."

지구에 관한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저 때문에 식사도 못 하고."

올리엔은 자신의 곁에서 지구의 역사를 알려주던 선생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그녀의 선생님은 한때 교편을 잡았던 길드원있는데, 올리엔의 질문세례에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였다.

"올리엔. 저녁 먹으러 가자."

"식당으로 가는 건가요?"

"아니. 밖으로 나갈 거야."

"와아! 외식인가요!?"

강현의 말에 올리엔이 잔뜩 들떴다.

"그렇지. 하루종일 여기 박혀 있으니 심심하잖아. 내가 특별히 한우로 쏜다."

"한우를 사격한다...? 가 무슨 뜻이죠?"

올리엔의 말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소고기를 사준다고."

"소고기? 그건 또 뭐죠?"

소고기를 모르는 듯한 올리엔의 대답에 강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소고기를 몰라!?"

"네. 소고기가 뭔가요?"

"이런..."

강현이 안쓰러운 눈으로 올리엔을 바라봤다.

"가자. 먹고 너무 맛있어서 울지는 말고."

"맛있는데 왜 눈물을 흘리는 건가요?"

"아! 됐으니까 따라와! 가자!"

더 이상 대화를 했다가는 답답해서 화병이 날지도 몰랐다.

**

"와아... 냄새가 정말 좋아요."

소고기를 본 올리엔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왕녀님이라면서. 이런 거 안 먹어봤어?"

"왕녀라고 해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왕실에서는 저를 없는 사람 취급했어요. 귀족들도 무시했고요."

"아, 그래..."

아픈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강현은 굳이 그것을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가넷. 이 소고기라는 거. 정말 맛있어 보이지 않아요?"

"예... 추르읍!"

대답하던 가넷의 입에서 침이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갈리우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올리엔과 함께 온 마법사 갈리우는 회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본국에 위치 신호를 보내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뭔가요?"

올리엔이 자신의 앞에 놓인 노란색 액체를 보며 물었다.

"맥주라는 거야.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음료지."

"냄새가... 술인데요?"

"맞아. 보리로 만든 건데,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아! 제가 있던 곳에도 비슷한 게 있었어요."

올리엔은 알 것 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로 평민들이 마시는 술이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맛보기는 처음이네요."

"먹고 놀라지나 마. 자! 원샷!"

"원샷?"

"한 번에 마시라고!"

강현이 잔을 들어 올리엔, 가넷의 잔과 차례대로 부딪쳤다.

"원샷!"

"원샷!"

강현이 가장 먼저 잔을 비워내고, 가넷과 올리엔도 차례로 맥주를 모두 마셨다.

"크하하! 이거지!"

"크흐. 이거 맛이 정말 특이해요!"

"지금! 지금 바로 고기를 집어 먹어야 돼. 얼른!"

강현이 올리엔과 가넷의 앞에 소고기를 한 점씩 놓아주었다.

올리엔은 침을 꿀떡 삼키고는 포크로 소고기를 찍었다.

"여기. 소금에 살짝 찍어서 먹어."

"네."

올리엔이 소고기를 소금에 살짝 찍고, 곧장 입에 넣었다.

"어때? 장난 아니지!?"

순간 올리엔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강현이 말한 게 이런 거였군요.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나올 수 있는 거였어요..."

왕녀의 신분에도 대부분의 식사로 풀떼기로 보냈던 올리엔.

그녀는 처음 맛보는 소고기에 완전히 매료됐다.

"가넷.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말을 하며 옆을 돌아본 올리엔은 깜짝 놀랐다.

가넷이 소고기를 입에 우물거리며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넷! 울어요?"

"크흡, 큽... 아닙니다. 흡!"

"그래. 그럴 수 있어. 이게 한 점에 얼마짜리인데."

이날을 위해 아껴뒀던 최고급 한우 전문점.

강현은 그 보람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자자. 마셔! 지금 맥주를 마시면 아까보다 두 배는 맛있다고!"

신이 난 강현이 재차 맥주를 잔에 따랐다.

"건배!"

"건배에!"

처음에는 쭈뼛거리던 가넷은 어느새 가장 큰 목소리로 건배를 외치고 있었다.

"크흐흐! 이게 행복이지."

강현이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으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 순간.

"응?"

무언가를 느낀 강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여기로 오는 건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현이 있는 방의 문이 열리며 두 명의 남녀가 들어섰다.

"강현! 오랜만이야!"

**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미 자신을 알고 있는 듯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금발을 남성.

강현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외국인을 만난 게 언제지...'

강현이 에든을 기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억났다! 그 대검!"

"맞아! 역시 기억하고 있었구나?"

"에릭!"

"에든이야."

"그래! 에든!"

"하하. 잘 지냈지?"

에든이 인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와우. 맛있는 걸 먹네. 나도 합석해도 될까?"

"이미 앉아놓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둘.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이들은 미국의 유명한 길드의 길드장과 부길드장이었다.

'올리엔 때문인가...'

어째서 이들이 찾아온 것인지는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왕녀 올리엔. 그녀가 목적이리라.

"어... 저기 이분들은?"

올리엔은 갑자기 나타난 둘을 보고 당황했다.

가넷 또한 잔뜩 몸을 긴장시킨 상태였다.

"나? 강현이랑 잘 아는 사이지. 너무 긴장하지 마."

통역 능력을 익히고 있던 에든은 올리엔을 안심시키려는 듯 편안하게 말했다.

"하아... 에든. 이게 뭐하는 짓이야?"

태평하게 인사를 하고 고기를 집어 먹으려는 에든을 본 엘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엘라. 일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 정도는 나눠야지."

"에든!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엘라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럴 때가 아니지."

강현이 젓가락을 들어 소고기를 집으려는 에든의 젓가락을 막아냈다.

"나는 먹어도 된다고 한 기억이 없는데 말이야."

"이런, 친구끼리 이 정도는 괜찮잖아?"

"친구라... 그건 앞으로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달린 거겠지."

강현이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하아... 일 이야기는 최대한 늦게 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에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고, 여기 온 용건이나 말해. 어차피 뻔하겠지만."

"맞아. 이미 예상했겠지만. 여기 온 이유는 저 둘 때문이야. 듣기로는 남자가 하나 더 있다고 했는데 여기엔 없네?"

"여기 있든 없든 상관없어. 어차피 네가 올리엔을 데려갈 일은 없을 테니까."

둘의 대화를 듣던 올리엔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강현. 이분들은... 친구가 아닌가요?"

올리엔의 말에 에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지. 정식으로 인사할게. 워리어즈 길드의 마스터 에든이야. 나는 너희를 데려가기 위해 왔어."

148화 아메리칸 드림(2)

148. 아메리칸 드림(2)

"나는 오늘 너희를 데려가기 위해 왔어."

에든의 말에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봐봐. 이래서 내가 일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했잖아."

"에든. 장난은 집어치워. 우리는 이들의 적이야."

"엘라. 굳이 그렇게 딱딱하게..."

강현이 손을 들어 에든의 말을 끊어냈다.

"저 여자 말이 맞네. 나도 시시콜콜하게 농담 따먹기나 할 생각 없어. 바로 본론으로 가지."

에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그렇다 하면 어쩔 수 없지..."

에든이 손을 들어 올리엔을 가리켰다.

"강현. 미안하지만 저 여성분은 우리에게 넘겨줘야겠어."

"싫다면?"

"무력으로 해결해야겠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강현과 에든 사이에 불꽃이 튀겼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에든이었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내가 길드원을 두고 직접 이렇게 찾아온 건, 강현. 너에 대한 배려야."

"배려?"

"그래. 배려지. 물론, 직접 너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에든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약 이 일을 자신이 아닌 다른 능력자가 맡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겠지.'

그들은 치밀했고, 또한 비열했다.

자신보다 더욱 강한 힘을 지녔음에도 말이다.

에든은 그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법.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일을 자신이 자처한 것이기도 했다.

"깔끔하게 일대일 결투. 내가 이기면 저 여성들은 내가 데려가겠어. 대신 강현. 네가 이기면 깔끔하게 물러날게. 어때?"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바보 같을 정도로 정직한 제안.

그래서 더욱 강현의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드네. 내가 이기고 나서 소고기 한 번은 사준다. 살아 있으면 말이지."

강현의 말에 에든이 미소를 지었다.

"그 말. 기억했어."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엘라가 고개를 저었다.

"저 멍청이들..."

이번 일에 실패하면 미국 내에서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어린아이 같은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에든이 답답하기만 한 엘라였다.

"우선 자리를 옮길까."

"그러든지."

그렇게 강현이 일어나려던 찰나,

"지금 뭐하는 거냐."

가넷이 강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뭐하다니?"

"왕녀님의 호위기사는 나다. 네가 뭔데 왕녀님을 두고 이런 대결을 벌이는 거지?"

가넷의 말에 올리엔이 안절부절못했다.

"가넷..."

"왕녀님. 저는 왕녀님의 호위기사입니다. 이런 꼴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가넷이 에든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쓰러지기 전에는 절대로 왕녀님을 데려갈 수 없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너부터 쓰러뜨려야겠네."

에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들이 이동한 곳은 인근에 위치한 던전이었다.

F등급의 던전으로 소유 중인 길드가 따로 존재했지만,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사람이 있지는 않았다.

"던전이라... 일을 치르기엔 나쁘지 않겠어."

이곳에선 누군가가 죽어도 알 수 없다.

던전이 클리어되는 순간 모든 증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검을 들어라."

가넷의 말에 에든이 자신의 애병기인 대검을 들었다.

"일단은 살려서 데려오라고 했으니까. 죽이지는 않을게."

"건방진 말. 후회하게 해주지."

신경전을 벌이는 둘을 올리엔이 불안하게 바라봤다.

"강현. 괜찮을까요?"

"아마도..."

사실 강현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1분이라도 버티면 다행이지.'

지난 며칠 사이 가넷의 실력은 완전히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그녀의 실력은 길드 내의 공략팀의 팀장들과 비슷한 수준.

'그에 반해 저놈은...'

에든을 만난 지 제법 오래돼 잊고 있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기억이 선명해졌다.

약 1년 전.

그 당시 에든은 이미 지금의 가넷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그때, 기합과 함께 가넷이 돌진했다.

"하압!"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움직임.

속도 또한 수준급이었다.

정석과도 같은 공격이었으나, 그것을 보고 놀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딱 예상한 정도의 실력.'

강현은 에든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

말을 하며 에든이 벼락같이 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대검을 다루는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움직임.

-채애앵!

그것으로 끝이었다.

단 일 합 만에 가넷의 검이 날아가고,

"커헉!"

두 번째 검격에 가넷이 그대로 쓰러졌다.

"잠시 쉬고 있어."

에든이 검면으로 후려쳤기에 그녀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강한 충격에 기절했을 뿐이었다.

"가넷!"

올리엔은 쓰러지는 가넷을 보고 달려갔다.

"가넷... 괜찮아요?!"

강현은 가넷을 들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바위 뒤에 내려놨다.

"강현. 가넷은 괜찮은 거죠?"

"그냥 기절한 거야. 올리엔. 여기서 나오지 말고 있어."

"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여기 있으라고."

강현의 말에 올리엔이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오랜만에 제대로 한판 하겠네."

강현이 어깨를 풀며 다시 에든에게 돌아가려는 순간,

"강현!"

올리엔이 강현을 불렀다.

"왜?"

"이길 수 있죠..?"

걱정이 한가득 담긴 올리엔의 말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당연하지."

**

"인사는 잘했어?"

"덕분에."

돌아온 강현은 곧장 빌게인의 장검을 꺼냈다.

"바로 시작하는 건가?"

에든의 물음에 강현이 사납게 웃었다.

"굳이 대화가 필요해?"

"맞는 말이네."

에든이 검을 들어 자세를 취했다.

-쏴아아아아...

내려앉은 긴장감을 날리려는 듯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 날아온 나뭇잎 하나가 둘 사이를 지나치고, 동시에 강현이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타앗!

'시작부터 전력으로 간다.'

'웨인의 비기'와 '거인의 힘'은 이미 활성화한 상태.

강현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검에 날카로운 마력을 둘렀다.

"하아압!"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적이 저항합니다]

[적의 능력치가 소폭 감소했습니다]

분노의 사자후는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했다.

강현도 기합을 넣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와라!"

에든 또한 고함을 내지르며 기합을 넣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둘의 거리가 좁혀지고, 검이 격돌했다.

-까아앙!

강현과 에든의 검이 부딪히며 굉음이 일고, 서로의 마력이 흩어지며 마력풍이 불었다.

'크윽! 힘이 강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건 완전히 괴물이잖아!'

더욱 거대한 대검을 들고 있음에도, 에든의 검이 허무하게 밀려났다.

에든은 엄청난 근력을 바탕으로 패도적인 검술을 구사하는 검사.

힘에서는 밀려본 적이 거의 없는 그였지만, 강현은 차원이 달랐다.

검이 부딪힐 때마다 손목이 저릿하게 울려왔다.

'레일러보다 한 수 위겠어.'

미국에서 근력으로는 최강을 자랑하는 능력자 '레일러'.

그도 이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지는 못했었다.

'다행인 건 힘에 비해 기술이 부족하군.'

강현의 근력은 같은 인간이라고 믿기 힘든 수준으로 강력했지만, 검술은 그렇지 않았다.

'충분히 할만해!'

에든과 강현의 공방이 더욱 치열해졌다.

본격적으로 공격에 스킬을 섞기 시작하는 둘.

전투는 이제 인간들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었다.

-콰아아앙!

빗나간 공격이 지면을 때릴 때마다 땅이 갈라졌다.

바위가 두부처럼 허무하게 부서지고, 나무는 주먹과 발길질에 수수깡처럼 부러진다.

강현의 몸짓이 더욱 거칠어지자 에든은 공격을 막기보다는 회피하는 데 신경을 집중했다.

'분명 빈틈이 나온다.'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강현의 신체 회복력은 사기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런 강현에게 자잘한 상처를 늘리는 건 의미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경각심을 키울 뿐이지.'

그것보다는 강현의 실수를 유도해서 단숨에 싸움을 끝내야 한다.

'제압하기는 불가능해.'

강현을 제압한다는 건방진 생각은 처음 검을 부딪치자마자 버렸다.

지금은 자신의 목숨을 보살피기도 벅찬 중요한 때.

'단숨에 목이나 심장을 찔러서 끝낸다.'

가슴으로 날아오는 검을 피하며 에든이 뒤로 물러섰다.

강현이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잽싸게 쫓아왔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생각이야!?"

"네 힘이 빠질 때까지?"

강현의 검을 피하며 에든이 말을 하던 순간이었다.

'이런 제기랄!'

갑자기 강현의 검에 둘려 있던 마력이 쏘아져 나갔다.

에든은 기겁하며 최대한 몸을 비틀었다.

'다행히 급소는 피했어.'

에든의 목에 기다란 상처 생기며 피가 흘러나왔다.

다행히 동맥이나 정맥은 지켜냈기에 치명상은 아니었다.

'단순히 무식하게 싸우는 줄 알았더니 이런 수를 쓸 줄이야.'

에든은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강현이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것은 모두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음을.

자신이 강현의 공격 패턴에 익숙해지고 그것에 맞춰 회피하는 것을 기다린 것이다.

'거기에 영악하게 말을 걸어서 집중력을 흩어지게 했어.'

어떻게 보면 치졸하다고 생각할 방법이었으나, 에든은 강현이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장단점을 알고 있어.'

에든은 속수무책으로 강현에게 밀렸다.

한번 자세가 흩뜨려지자, 강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에든에게 달라붙었다.

'한 번이라도 걸리면 끝이다!'

강현은 온몸이 무기나 다름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손이 날아오고, 발이 날아온다.

손을 뻗는 것 같아 뒤로 피하면 마력구가 쏘아져 나왔다.

'분명 위력은 대단하지만, 기술적인 수준은 낮아. 그런데 왜!?'

부족한 기술을 메꾸는 경험.

에든 또한 많은 던전을 돌며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 경험을 쌓아왔다.

그러나 강현은 다르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싸움.

그것도 같은 인간과 벌여온 수많은 전투는 강현의 경험을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다.

'이대로 가다간 진다. 아니, 죽는다.'

매 순간이 아슬함의 연속이었다.

이미 흐름은 완전히 강현에게 넘어간 상태.

'항복해야 하나?'

애초에 에든은 강현에게 원한 같은 것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현에게 호감이 있던 상태.

에든은 단지 이번 기회에 강현과 겨루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른 미국의 능력자들이 강현과 싸우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최대한 원만하게 일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애초에 저 왕녀한테는 관심도 없었고 말이지.'

이번 일로 미국에서의 입지가 좁아지겠지만, 그것이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래. 항복하자.'

에든이 그렇게 다짐한 순간이었다.

강현의 뒤로 누군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런 젠장! 엘라!'

워리어즈의 부길드장 엘라.

암살에 특화된 그녀가 강현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강현은? 눈치챘나!?'

다급히 시선을 돌려 강현의 눈을 바라본 에든.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에든은 보았다.

강현의 눈이 웃고 있는 것을.

**

'쳇, 빗나갔나.'

자신의 회심의 일격이 빗나갔으나, 강현은 상심치 않았다.

'자세를 완전히 무너뜨렸어. 그거면 충분하지.'

최근에 강현이 익힌 검에서 마력을 쏘아내는 기술.

강현은 그것을 완벽하게 이용하기 위해 처음부터 판을 설계했다.

비록 회심의 일격이 에든의 피부를 베어내는 것에 그쳤지만, 전투의 흐름을 완벽하게 가져왔기에 만족했다.

'이대로 끝낸다.'

에든의 몸에 점차 상처가 늘어가고 있었다.

강현은 쉬지 않고 더욱 에든을 몰아붙였다.

그 순간.

'뒤쪽?'

뒤에서 미약한 마력이 느껴졌다.

마력과 기척을 최대한 숨기고 있었지만, 감지능력이 뛰어난 강현은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에든은 당황하고 있어.'

에든 또한 그것을 확인한 것 같았는데, 눈을 보니 의도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같이 있던 여자. 엘라였나?'

아마도 그녀가 독단적으로 움직인 것 같았다.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강현도 찝찝하던 차였다.

혹시라도 엘라가 올리엔을 빼돌리거나 한다면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서 주면 고맙지.'

적의 공격을 눈치챈 이상 기습의 이점은 사라진다.

오히려 독이 될 뿐이다.

"멈춰! 엘라!

에든도 그것을 잘 아는지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어느새 강현에게 바짝 다가온 엘라가 독이 묻은 단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안녕?"

강현은 재빠르게 뒤돌아 엘라를 붙잡았다.

"어떻게!?"

엘라는 강현을 떨쳐내려 했지만, 그녀의 완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그 모습을 본 에든이 엘라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커허억!"

강현은 엘라를 방패처럼 앞에 내세우고, 복부를 발로 차서 날려버렸다.

엘라가 피를 토해내며 에든에게 날아갔다.

"엘라! 이런 젠장!"

에든이 날아오는 엘라를 받아든 순간, 강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 나갔다.

'원한은 없어.'

단번에 둘을 꿰뚫어 죽일 생각이었다.

강현의 검이 쏘아지고, 엘라의 몸을 뚫기 직전.

"그만! 내가 졌어."

에든이 손을 들어 항복했다.

149화 아메리칸 드림(3)

149. 아메리칸 드림(3)

"그만! 내가 졌어."

에든의 말에 강현이 멈춰 섰다.

"휴우... 강할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이건 정말 상상 밖이네. 하하."

에든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항상 말끔하게 정리돼 있던 에든의 머리칼도 땀에 젖어 잔뜩 헝클어진 채였다.

"엘라.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한 거야?"

에든이 자신의 품에서 헐떡이는 엘라를 보며 말했다.

"에든. 이번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길드의 명예가…."

"그깟 명예가 뭐 어쨌다고 그래? 길드 랭킹 1위를 내려놓은 지도 오래 됐잖아."

"..."

"그리고 진짜 명예를 더럽히는 건 지금 너의 이런 비열한 행동이야."

에든의 말에 엘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강현. 미안해. 정말 이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말이야... 그리고 고마워."

진심이 느껴지는 에든의 사과.

강현은 피식 웃었다.

'진짜 대책 없이 해맑은 놈이네.'

올리엔과는 다른 의미로 밝은 사람이었다.

올리엔이 아픔 속에 해맑음을 가장했다면, 에든은 애초부터 밝은 사람이었다.

가식이 아닌, 뼛속까지 긍정적인 인간.

서로를 죽고 죽이는 지금 시대에 어떻게 저토록 해맑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올리엔은 깔끔하게 포기하는 건가?"

"당연하지.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쪽이 곤란해질 것 같은데."

"그거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에든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강현!"

그때였다.

뒤쪽에서 올리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울먹거리고 있는 올리엔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는 가넷도 함께였다.

"둘이 꼴이 아주 볼만하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보기 좋다고."

강현의 말에 올리엔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대충 상황도 정리된 것 같은데. 하던 거마저 해야지?"

"네?"

"소고기.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나왔잖아. 다시 가서 먹어야지."

강현의 말에 모두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 상황에 음식 생각이 나요?"

"아까 고기 먹으면서 질질 짰던 게 누군데. 그래서 안 먹을 거야?"

"강현이 먹고 싶으면 가요."

강현의 말에 올리엔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잠깐 기다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에든이 손을 들었다.

"나도 끼워 주는 거지?"

에든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강현이 씨익 웃었다.

"까짓 거 가자! 오늘 청춘 영화 한 편 찍어야겠네."

대책 없이 밝은 분위기에 엘라와 가넷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

깜짝 놀라며 눈을 마주치는 두 여성.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

"와우! 한국의 소고기도 제법 먹을 만한데!?"

"먹을 만해!? 감히 한우한테 그딴 망발을 지껄여!?"

사람이 늘어난 만큼 술자리는 더욱 왁자지껄해졌다.

강현과 에든은 불과 몇 분 전까지 검을 맞댄 사람들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편하게 식사를 했다.

"야야. 이거 비싼 거야. 사줄 때 먹어."

강현은 말없이 소주만 들이켜는 가넷의 앞에 소고기를 한 점 올려놨다.

"먹고 싶지 않다..."

"싸우다 보면 질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심각하고 그래? 내가 잘 해결했잖아?"

강현의 말에도 가넷은 여전히 소주를 들이켤 뿐이었다.

"그게... 그게 문제란 말이다..."

"먹기 싫으면 마. 올리엔은…."

혹여나 올리엔도 풀이 죽어서 힘들어하고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강현이 고개를 돌리자, 고기를 입에 잔뜩 집어넣고 햄스터처럼 우물거리고 있는 올리엔이 보였다.

"...?"

먹느라 바쁜데 왜 부르냐는 눈빛.

"아냐. 많이 먹어라."

강현의 말에 올리엔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술잔이 몇 번 돌고, 모두의 배에 적당히 고기가 들어찼을 때쯤.

"궁금한 게 있는데."

에든이 강현을 불렀다.

"저 친구들.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이야?"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왜 물어봐?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면서?"

"아니, 나는 포기했지. 하지만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는 나도 몰라."

에든의 걱정은 옳았다.

그가 포기했다는 것이, 미국이 포기했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앞으로 미국에서 또 누구를 보낼지,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얘들이 그렇게 중요한가? 미국은 전부터 무슨 제국이란 애들과 알고 지낸다면서?"

강현의 말에 에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기까지 알고 있었구나. 맞아. 솔직히 말하면 나도 미국에서 저들을 원하는 이유를 몰라. 그래서 그들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지, 아니면 예상외로 싱겁게 물러설지도 짐작할 수 없지."

"흐음..."

"만약 미국이 포기하지 않고 저들을 데려가려 한다면, 다음은 이번처럼 쉽지 않을 거야."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에든이 특이한 경우였을 뿐이다.

다음에 누군가가 찾아온다면, 이렇게 정직하게 찾아와서 수다나 떨 일은 없을 것이다.

"내 걱정은 됐어. 생각이 있으니까. 나는 그것보다 네가 어떻게 할지가 궁금한데."

강현이 웃으며 에든을 바라봤다.

"나? 딱히. 그냥 미국으로 돌아가서 평소처럼 지내는 거지."

"그래도 괜찮은 건가?"

"당연하지. 내가 이끄는 워리어즈는 규모만 보면 미국에서 가장 큰 길드라고. 비록 랭킹 1위 자리는 빼앗긴 상태지만."

"뭐야? 그 정도였어?"

에든이 미국에서 유명한 길드의 길드장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미국에서 가장 큰 길드라니, 상상이 안 가네.'

강현이 놀란 것처럼 보이자 에든이 싱글벙글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당연하지. 내가 이래 봬도 엄청난 부자야."

"엄청난 부자..?"

에든의 말에 강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래. 솔직히 감당하기 힘들 정도야. 생각을 해봐! 수천, 수만 명의 능력자가 매일매일 값비싼 마정석을 캐오는 모습을."

확실히 순수 전투원은 300명이 조금 넘는 배데스 길드만 하더라도, 월에 수십억 단위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만큼 나가는 돈도 많지만...'

길드가 커지는 만큼 지출도 커지겠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해도 길드원이 수천 명이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일 것이다.

"길드가 커지면 관리가 쉽지 않을 텐데."

길드의 규모가 크다고 해서 무작정 좋은 것은 아니다.

수많은 길드가 소수 정예를 추구하는 이유는 그만큼 거대 길드에 장단점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관리 문제였다.

"사고 같은 게 터지면 어떡해?"

능력자들은 칼밥을 먹고사는 만큼 일반인들보다 거친 성정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그런 이들이 모이고 부대끼다 보니 사고가 없으래야 없을 수가 없었다.

강현의 물음에 에든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관리가 쉽지는 않지. 그래도 생각처럼 그렇게 힘든 건 아니야. 나는 워리어즈 길드의 길드원들만 신경 쓰면 되거든. 공략팀만 보면 대충 1,000명 조금 넘는 정도지."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난 거대 길드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에든이 말한 수천, 수만 명의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 나머지는?"

"워리어즈 길드 아래에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중소 길드가 잔뜩 있어. 기업으로 치면 자회사와 비슷한 개념이랄까."

"자회사?"

자회사(子會社). 다른 말로는 종속회사라고도 불린다.

"쉽게 말하면, 우리 워리어즈에 종속된 길드들을 두고, 우리는 그들에게서 일정 돈을 받는 거야."

"대신 너희는 뭘 해주는데?"

"여러 가지가 있지. 작은 규모의 길드가 진행하기에 힘든 사업들이 있잖아? 우리는 그런 걸 지원하고 컨설팅해 주는 거야. 아니면 다른 길드와의 분쟁이 생겼을 때 도와주기도 하고."

그제야 강현은 에든이 이야기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정말 사소한 것들까지 신경 써서 도와줄 때도 많아. 대신 사고가 터졌을 때의 책임은 온전히 그들의 몫이야."

길드의 운영에 관여하고, 돈을 받는다.

대신 잘못되었을 때 책임은 지지 않는다.

강현은 나쁘지 않은 서비스라고 생각했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과 받는 쪽. 양쪽 모두에게 득이 될 수 있는 거래였으니까.

'그만큼 충분한 신뢰도와 인지도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겠지.'

단순히 돈이 많고 길드가 거대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마 에든이 지금까지 쌓아온 인지도와 사업수완으로 완성된 길드일 것이다.

"아무튼!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조만간 한국에도 지부를 낼 예정인데, 궁금하면 어떤 식으로 운영하는지 자세히 알려줄게."

"됐어. 나는 지금 있는 길드 굴리는 것만 해도 머리 아프니까."

배데스 길드는 실질적으로 한재문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 야근하던데 말이야.'

여기서 쓸데없이 길드를 확장한다고 하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마시고 놀자고! 나도 오랜만에 즐기는 휴가니까!"

"에든. 우리는 휴가를 즐기러 온 게 아니야..."

엘라의 말에 에든이 검지를 들어 흔들었다.

"노노. 엘라. 그렇게 워커홀릭으로 살다가는 일찍 죽을 거야.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두라고."

"그래! 네가 뭘 좀 아네.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가 있어? 몸을 쓰면 그만인데."

"역시 너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줄 알았어. 하하!"

죽이 잘 맞는 강현과 에든을 보며 엘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멍청이들."

**

며칠 후. 평소처럼 훈련을 끝낸 강현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크흐으! 좋다!"

"강현 님. 소식 들으셨습니까?"

"응? 무슨 소식?"

함께 훈련했던 신성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터키에서 생성된 A등급 던전이 클리어 됐다고 합니다."

"그래? 잘됐네. 그쪽 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길드라더니, 결국 클리어 했구만."

터키의 랭킹 1위 길드 '하리카 카흐라만'.

'위대한 영웅'이라는 뜻을 가진 길드는 그 명성에 걸맞게 A등급 던전 공략에 성공했다.

"거기 들어간 지 대충 2주 정도 지났나? 그러면 바로 메인 코어를 공략했나 보네."

"그건 아닙니다. 이제 노말 코어 공략을 끝냈다고 합니다."

"흠, 던전이 어렵긴 어려웠나 보네."

일반적으로 노말 코어를 공략하는 것에는 1주일도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터키 최고의 길드가 무려 2주나 걸려 공략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던전이 크고 난이도가 어렵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아무튼, 공략했으면 됐지. "

자신이 외국으로 출장 가는 일은 없어졌다고 생각하며 강현이 해맑게 웃었다.

"그게... 공략에 성공하기는 했는데, 피해가 좀 큽니다."

"어느 정도기에?"

"생존자가 3명입니다."

"3명? 저번에 거기 300명 넘게 들어갔다고 하지 않았어?"

"맞습니다."

생존 확률 1%.

역대 모든 던전의 기록을 갈아치우는 경이로운 수치였다.

"길드장과 길드원 둘을 제외한 전원이 죽었다고 합니다."

"으음..."

"이집트와 브라질의 경우에는 완전히 공략에 실패한 것으로 보고, 군대를 투입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현재 A등급 던전은 총 세계였다.

터키. 이집트. 브라질.

그중 터키를 제외한 두 곳이 공략에 실패한 것이다.

"아니지. 터키도 메인 코어 근처도 가지 못해서 거의 다 죽었으니 사실상 실패나 다름없지..."

"예."

"어려울 거라 예상은 했는데... 진짜 쉽지 않겠는데."

모두 각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거대 길드들이 공략을 시도했다.

그런데 제대로 클리어한 곳이 한 곳도 없으니, 던전이 얼마나 험난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거 잘못하면 진짜 파견 가는 거 아냐?"

강현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누구지?"

늦은 시간에 울리는 스마트폰.

액정에는 신태길의 이름이 떠 있었다.

"예. 어쩐 일이에요."

-강현 씨.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해외 파견이라면 갈 생각 없어요."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잠시 침묵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금 A등급 던전 공략 실패라고 뉴스에서 난리던데요 뭐."

-예? A등급 던전 말입니까?

신태길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강현 씨.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무슨 오해요?"

-강현 씨에게 파견 요청을 한 곳은 미국입니다.

"예?"

150화 건방진 놈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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