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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142

134화 지긋지긋한 놈들(5)

134. 지긋지긋한 놈들(5)

지옥이 실존한다면 어떨까.

메테오가 떨어진 장소는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주는 것 같았다.

곳곳에서 타오르는 불길.

완전히 무너져버린 지반.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매캐한 먼지.

바노 쿨사는 삐걱거리는 관절을 붙잡으며 겨우 일어났다.

-큰일 날 뻔했어.

수백 년 동안 살아온 그가 낯선 땅에서 허무하게 죽을 뻔했다.

아마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조금 녹이 슨 탓일 것이다.

-그동안 너무 쉬었다.

쿨사의 작위에 오르고, 전투라고 부를 만한 것을 치른 지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때문에 방심한 것이다.

이런 하찮은 인간들에게 위기를 느낄 정도로.

-그래도 결국 승리자는 나다.

마지막 순간.

실드를 최대한으로 전개해서 버텨냈다.

덕분에 마력이 뒤엉키며 상처를 입어 한동안 쉬어줘야 할 정도였다.

그래도 자신은 불사자.

죽지 않는 언데드니 금세 회복할 것이다.

-놈은 어디 있지?

육안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위의 마력이 요동치는 탓에 마력으로 감지하는 것도 무리였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타버렸군.

바노는 강현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판단이다.

이 정도 공격에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우선 이곳을 벗어나야겠어.'

아직 놈의 동료들이 건재할 것이 분명하니, 이곳이 정리되기 전에 떠나야 했다.

놈들을 만난다고 해서 자신이 패배할 리는 없으나, 만일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렇게 바노 쿨사가 걸음을 떼려 할 때였다.

-으음?!

무언가가 바노의 두개골을 움켜쥐었다.

"어디 가냐?"

-너, 너는..!

다급히 돌아선 바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지옥의 사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날아가 버린 한쪽 어깨.

화상으로 모조리 벗겨진 피부.

짓이겨진 얼굴은 원래 누구였는지 알아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어떻게! 네놈이 어떻게 살아있는 거냐!

"내가 말했지? 뒤지면 조상님한테 물어보라고."

-아, 안돼! 이럴 수는 없다!

바노가 마법을 전개하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강현에게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마력이 자신의 마법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압도적인 마력으로 강현의 마력을 짓눌렀겠지만, 지금은 바노도 온전치 못한 상황.

덕분에 강현에게 짧은 틈을 내주게 됐다.

1초도 되지 않은 짧은 순간.

강현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잘 가라."

강현이 바노의 두개골을 힘껏 바닥에 처박았다.

-콰아아앙!

두개골은 콘크리트 잔해를 박살내며 강하게 바닥에 꽂혔다.

-아, 허무.... 죽, 다...

반쯤 남은 두개골에서 흘러나오던 음성이 끊어지고, 이내 놈의 안광이 완전히 꺼졌다.

"후우, 내가 잡히면 뒤진다 했잖아. 이 지긋지긋한 새끼야."

한숨을 내쉰 강현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피곤하다. 진짜 뒤지겠네."

부서진 몸이 회복되고 있었지만, 너무 느렸다.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 정도면... 웨인의 비기가 끝나는 순간 죽겠네."

메테오에 부딪히기 직전, 강현은 '웨인의 비기'와 '엔트리아의 외피' 등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충격에 대비했다.

그런데도 버티기 힘들었지만, 우습게도 구명줄은 적에게서 내려왔다.

자신의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력 실드를 전개하던 바노 쿨사.

놈은 다급한 나머지 최대로 마력을 전개했고, 그 과정에서 마력 제어가 완벽하게 되지 않아 실드의 범위가 커져 버렸다.

강현은 그것을 파악하고 재빨리 놈의 실드 범위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솔직히 나도 살 수 있을지 몰랐는데 말이야."

팔 한 짝이 날아가고 온몸이 짓뭉개 졌다.

전신에 입은 화상은 덤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남긴 했다.

"한 1분 정도 남았나?"

'웨인의 비기'가 얼마나 남았나 계산한 강현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이곳에서 동료들을 기다리지 않는 것인가?

"어차피 좀 있으면 죽을 거야."

-동료 중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있는 것으로 안다만.

베일의 말대로 윤나래가 제법 준수한 치유사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치료받는다고 해서 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웨인의 비기로 힘이 남아 있을 때 조용히 사라지는 게 맞아."

-그런가... 그게 너의 뜻이라면.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베일도 더 이상 나서지 않았다.

"아무리 다시 살아난다 해도, 죽는 걸 보여주는 건 그렇잖아?"

강현이 피식 웃었다.

아니, 웃으려 했으나 녹아버린 근육으로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쪽팔리기 싫으니까 얼른 가자."

**

-콰아아아앙!

메테오가 떨어진 충격은 1km가 넘게 떨어진 이곳에서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신성아는 폭풍처럼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릿결을 붙잡았다.

"강현 님은..."

죽었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 있는 셋은 모두 알고 있었다.

강현이 저 공격에 버틸 수 없음을.

과거 싸이클롭스와의 전투에서 메테오에 맞은 강현이 살아남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그때는 사이클롭스의 단단한 두개골 안에서 보호받고 있었고, 지금처럼 완벽하게 직격으로 당하지도 않았다.

"슬슬 가보죠."

어느 정도 먼지가 가라앉자 안유성이 먼저 움직였다.

신성아와 윤나래도 침울한 얼굴로 그 뒤를 따라나섰다.

"여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크레이터의 한가운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맞네요. 여기 해골이랑 마정석."

윤나래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바노 쿨사의 잔해를 확인했다.

"뭔가 이상하군요."

그때였다.

무언가를 발견한 신성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 정도로 거대한 폭발에서 두개골만 완벽하게 부서지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녀의 말대로였다.

바노 쿨사의 육체는 비교적 멀쩡했다.

처음처럼 윤택이 나고 단단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온전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두개골은 유독 완벽하게 박살이 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이것만 부순 것처럼.

"강현 님께서 살아있는 게 분명합니다!"

신성아가 다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강현님! 어디 계십니까!?"

"누나. 됐어요. 그만 해요."

"안유성 씨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건 분명 강현 님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성아의 말에 안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죽었어요. 살아있었다면 여기 있어야죠. 우리가 올 걸 알았을 텐데."

"그건..."

"아마,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서 놈을 부수고 형도 죽은 걸 거예요."

안유성이 말을 하며 슬그머니 자리를 발을 옮겼다.

그곳에는 강현이 이동하며 흘렸던 핏자국이 나 있었다.

안유성은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핏자국을 지웠고, 상심에 빠져있던 신성아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같으니까.'

안유성은 강현이 사라진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띠리리리

그때였다.

적막 한가운데서 신성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신성아 씨. 방금 폭발은 뭡니까? 강현 씨와는 연락도 안 되고. 거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상황 종료됐습니다."

신성아가 신태길의 말을 끊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상황이 종료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적은 완전히 제거됐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거 다행입니다.

"신태길 씨.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잠시, 강현 씨는 왜 연락을….

전화 너머로 무언가 말을 하는 것이 들려왔지만, 신성아는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길드로 돌아가죠."

"그래요."

"여기! 마정석 챙겨야죠!"

신성아가 곧바로 떠나려 하자, 윤나래가 마정석을 쥐여 주었다.

"이건..."

"해골에서 나온 거예요. 길드장 돌아오면 성아 씨가 직접 줘요."

"예. 알겠습니다."

윤나래의 말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래. 강현 님은 금방 다시 돌아오실 거야.'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강현의 죽음을 마주한 것이 사실상 처음이기에 생기는 감정이리라.

'강한 힘이 느껴져...'

그래도 돌아온 강현이 마정석을 보고 기뻐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

"익숙한 천장이네."

눈을 뜬 강현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자신의 집 천장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마치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부활 페널티로 인해 모든 스텟이 절반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상태창을 확인하자 레벨이 한 계단 하락해 85로 내려온 것이 보였다.

"시벌, 86레벨 찍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바로 떨어졌네."

거의 한 달 가까이 고생해서 올린 레벨이 조금 아깝긴 했지만, 강현은 만족하기로 했다.

그 전투로 인해 체력과 마력이 각각 1스텟 올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부활 페널티로 하락한 레벨은 비교적 빨리 복구된다.

아마 86레벨을 복구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게다가 '마력운용'이 한 계단 상승해서 '강현식 사투'에 이어 두 번째 A등급 능력이 됐다.

"결과적으로 이득을 봤어."

앞으로 언제까지 레벨이 오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 속도로 봤을 때 조만간 완전한 정체기에 들어설 것은 분명했다.

그때가 되면 이렇게 레벨 외적으로 오른 스텟 하나하나가 더욱 귀중해질 것이다.

"장비는 전부 멀쩡하고... 됐네."

신체와 장비를 점검한 강현은 샤워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애들은 잘 돌아갔으려나.'

차가운 물줄기를 맞고 있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밀려왔다.

'확실히 전투 패턴이 너무 단조로워. 다른 능력이나 스킬을 익힐 필요가 있겠어.'

'놈의 말로 미뤄봤을 때. 하켄 차원이라는 곳에서 넘어온 것 같은데... 그놈이 끝은 아닐 거야.'

'소고기 한 점에 시원한 맥주 마시고 싶다.'

계속되던 상념은 언제나처럼 쓸데없는 생각으로 끝이 났다.

샤워를 끝내고 옷을 꺼내 입은 강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핸드폰이 어디 갔지?"

완전히 박살 났다.

철근 구조물이 부서지고, 땅에 거대한 크레이터 생길 정도로 격렬했던 전투에서 연약한 전자기기가 살아남았을 리가 없었다.

"이걸 써야겠네."

다행히도(?) 강현은 이런 경험이 아주 많았다.

덕분에 대비 또한 잘 되어 있었다.

서랍장을 열자 최신식 스마트폰이 일렬로 정렬된 모습이 보였다.

언제든 강현이 불편 없이 당장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된 스마트폰들.

"좋아. 너로 정했다."

강현은 그중 마음에 드는 색을 집어 들고는 집을 나섰다.

**

"강현님!"

"형. 왔어요?"

"고생하셨습니다."

강현이 길드 사무실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를 건네 왔다.

"뭐야. 전부 모여 있었네? 신태길 씨는 어쩐 일이에요? 바쁘다면서."

"거기서 있었던 일은 신성아 씨에게 모두 들었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뭘 고생까지야. 라고 하고 싶은데, 이번에는 진짜 위험하긴 했어요."

"예. 강현 씨가 아니었다면 정말 엄청난 재앙이 일어났을 겁니다."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보상 문제에 대해서도 인색하게 굴지 않을 거라 믿어요. 우리 신태길 팀장이 그렇게까지 양아치는 아니잖아요?"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어색하게 웃었다.

"예... 우리가 어떤 사이입니까! 하하하! 일단 이거 받으시죠."

신태길이 강현에게 책을 한 권 건넸다.

"이건... 오, 통역 스킬북이네요? 구하기 어렵다더니."

"중국의 부자에게 웃돈을 주고 겨우 구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 편으로 조금 전에 막 도착한 따끈따끈한 겁니다."

"오오. 진작 이렇게 해주면 얼마나 좋아요?"

"강현 씨와 저희는 파트너 아닙니까. 강현 씨의 요청이라면 항상 최선을 다해서 들어드리고 있습니다."

"그건 그래요. 자꾸 삐지고 툴툴대서 그렇지."

"크흠."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헛기침을 했다.

"이건 됐고, 이제 보상 이야기를 할까요?"

"방금 드린 건..."

"이건 선수금이잖아요. 이제 일을 마쳤으니 제대로 된 보상을 받아야죠. 설마 이거 하나로 퉁칠 생각이었어요? 와! 신태길 씨.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이거 완전 양아치…."

"하아, 알겠습니다. 말씀하시죠."

신태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좀 구해줘요."

강현이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쪽지를 꺼냈다.

"이건... 스킬북입니까?"

종이를 받아 들자 빼곡하게 적힌 스킬과 능력이 보였다.

"예. 거기 있는 거 전부 구해줘요."

"이 많은 걸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당연히 내가 써야죠."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부분 강현 씨에게 필요 없거나 사용하기 힘들어 보이는 능력과 스킬입니다만."

"이번 전투로 좀 깨달은 게 있어서 이것저것 시도해 볼 생각이에요. 그리고 조금 전까지 파트너니 뭐니 해놓고 이것도 못 해줘요!?"

"여기 적힌 것을 전부 구하려면 예산이..."

"맨날 그놈에 예산! 예산! 세금 받아서 어디 쓰나 모르겠네."

"강현 씨한테 씁니다만."

"내가 뭘 그렇게 받았다고."

순간적으로 신태길에 받은 것들이 강현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것들을 모두 금전으로 환산하면 아마 수백억은 가뿐히 될 것이다.

"크흠, 우리는 파트너라면서요."

"하아... 알겠습니다. 최대한 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요즘 정부에서 하는 마정석 장사가 너무 쏠쏠했다.

이 정도는 그리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능력과 스킬을 무리하게 익히면 부작용이 있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뭐야? 그런 말이 있어요?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있습니다."

강현이 실눈을 뜨며 신태길을 노려봤다.

"지금 이거 구하기 싫어서 지어낸 말이죠?"

"아닙니다."

"맞는 것 같은데."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맞구만 뭘."

강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니라고! 몇 번을 이야기합니까!"

"알겠어요. 알겠어.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나? 가만 보면 은근히 다혈질이라니까."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아..."

"어어, 그거 하면 탈모 옵니다."

언젠가는 통쾌하게 복수할 것이다.

그래서 이 지긋지긋한 놈의 고통에서 해방되리라.

신태길은 진심으로 다짐했다.

135화 블랙 마켓(1)

135. 블랙 마켓(1)

바노 쿨사와의 전투 이후, 강현의 최대 관심사는 새로운 힘이었다.

"더 이상 날파리 같은 놈들한테 당할 수는 없어."

강현도 원거리 공격이 존재했지만, 그것의 한계는 분명했다.

강현은 지난 전투로 그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 때문에 신태길에게 스킬북을 닥치는 대로 요청한 것이기도 했다.

"시작은 너다."

강현은 가장 먼저 하늘을 날 수 있는 비행 스킬을 익혔다.

이미 공격의 위력은 충분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공격을 하기 위해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 중요했다.

"으아아아아!"

결과는 대실패.

강현은 하늘을 나는 것에 재능이 없었다.

"하하! 역시 바보 길드장 답네!"

"이게 가르쳐 달라고 불렀더니 초를 치고 있어!?"

"또 때리려고? 때려봐! 때려보라고! 못 쫓아오지요~"

공중으로 떠오른 윤나래가 혀를 내밀며 강현을 놀렸다.

"그렇게 느릿느릿하게 날아서 언제 쫓아오려고? 거북이도 그것보단 빠르겠다."

"잡히면 넌 뒤졌어."

"평생 안 잡힐 건데!"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하늘을 날게 됐지만, F등급의 스킬로는 땅에서 걷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날 수 없었다.

"하아... 시작부터 꼬이네."

자신은 마력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기에 금세 스킬과 능력을 익힐 줄 알았다.

그러나 강현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마력 운용과 스킬의 활용은 별개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력에 대해 별다른 재능이 없어도 자신의 스킬과 능력을 완벽하게 다루는 능력자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비행 마법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강현은 몇 가지 스킬과 능력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

"와아! 길드장님 감사합니다!"

"역시 길드장님! 통이 크다니까!"

남는 스킬북은 모조리 길드원들에게 뿌렸는데,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하아, 이제 어쩌지..."

맥주를 마시며 고민하던 강현은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면 되지!"

**

대한민국 능력자 연합의 수장이자 던전 공략의 바이블과 같은 남자.

오랜만에 만난 최동우는 여전했다.

예상치 못한 강현과의 만남을 그는 굉장히 즐거워했다.

"동생! 오랜만이구만!"

"형님. 제가 좀 자주 찾아뵀어야 했는데."

"아니야. 서로 바쁘면 못 볼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동생은 대한민국의 영웅 아닌가!"

짧은 해후를 나누고.

강현은 곧장 자신이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크흠, 사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여쭤볼 게 있어서입니다."

"편하게 말해보게."

"전투에서 자신보다 강한 적, 혹은 상성에서 우위에 있는 적과 싸울 때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보다 강한 적이라... 어려운 질문이구만."

강현의 물음에 최동우가 생각에 잠겼다.

"동생도 잘 알겠지만, 전투는 단순히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쓴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네.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요소가 서로 작용하지."

"예에..."

솔직히 검과 망치, 주먹을 휘두르는 단순한 것들만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자신과 상대의 능력을 알아야 하고, 그 밖에도 여러 변수를 고려해서 판을 짜야 해. 어떤 악조건에서도 자신이 이길 수 있게끔 말이야."

"어렵군요."

"말로 설명하려니 쉽지 않구먼. 간단하게 설명하면 전투에서 일어날 모든 요소를 고려해 미리 판을 설계하는 걸세. 모든 것이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게끔."

최동우의 설명에 강현이 미간을 좁혔다.

"항상 계획하고 싸우는 건 아니지 않나요? 갑작스러운 전투가 언제 벌어질지도 모르고."

"항상 계획하고 변수를 고려하는 습관을 들이면, 갑작스럽게 벌어진 전투에서도 빠르게 판을 설계할 수 있다네. 순간적인 기지가 발휘되는 것이지."

"그렇군요..."

생각해보면 최동우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강현보다 더한 무투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치밀한 전략가다.

능력자 교육 학교에서 지금도 최동우가 초창기에 만들어둔 전술을 발전시켜 교범으로 사용할 정도니 긴말이 필요가 없었다.

"그럼 감사했습니다."

"벌써 가려고?"

"예. 조만간 제가 소고기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나야 언제든지 환영이라네!"

최동우에게서는 딱히 배울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 쓸 시간에 주먹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이득이지."

최동우가 들었다면 기겁할 만한 소리를 하며 강현이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단군 길드였다.

"어쩐 일이에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단군의 길드장, 한세연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자신보다 강한 적과 싸울 때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합니까?"

강현의 물음에 한세연이 피식 웃었다.

"글쎄요. 아직 제 검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못 만나봐서... 모르겠네요."

한세연이 말을 하며 묘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 눈에는 명백한 무시가 담겨 있었다.

"오호, 그러니까 자기보다 센 놈을 못 만나봐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렇죠. 예전에 한창 유명하던 능력자와도 싸워본 적이 있는데, 힘만 무식하게 강할 뿐 딱히... 별건 없더라고요."

한세연이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직역하면 '너도 예전에 나한테 발리지 않았냐?' 라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네요."

"그런가요?"

"예. 힘이 다 빠진 상대를 기습한 아주 야비하고 더러운 칼잽이 하나가 생각나네."

순간 한세연의 고운 미간이 좁혀졌다.

"지금 야비한 검사라고 했나요?"

"야비한 칼잽이라 했습니다만.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요?"

"..."

강현의 말에 한세연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갔다.

"자기보다 센 놈을 못 만나 봤으면 오늘 구경시켜줄 수도 있는데."

"그거 정말 재미있겠어요. 저도 요즘 정체기가 와서 심심하던 차였거든요."

두 남녀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 모두 그만하시죠..."

한세연을 옆에서 보필하던 김이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냉철하고 도도하신 분인데, 강현 씨만 만나면 왜...'

그렇게 한세연과의 만남은 상처만을 남기고,

"후우... 얘는 진짜 찾아가기 싫었는데."

강현이 마지막으로 찾은 사람은 최민준이었다.

"네놈이 어쩐 일이지?"

강현을 본 최민준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 새끼는 만나자마자 시비야?!"

"우리가 그렇게 웃으며 볼 사이는 아니지 않나?"

"내가 좀 도와줄까? 영원히 웃게 해 줄 수도 있는데. 아주 입이 귀까지 찢어지게 말이야."

"헛소리할 거면 꺼져라. 너와는 다르게 바쁜 사람이다."

최민준의 말에 한숨을 내쉰 강현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됐고, 뭐 물어볼 거 있어서 찾아왔으니까 들어봐."

그리고는 최동우와 한세연에게 한 것처럼 강한 상대와 싸우는 법에 대해 물었다.

"흥미롭군."

"그렇지? 아무거나 생각나는 거 있으면 편하게 말해봐."

"네놈의 멍청함이 어디까지인가 흥미롭다는 말이었다."

"진짜 뒤지고 싶냐?"

순간 강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됐고, 진지하게 묻는 거니까 대답이나 해봐."

강현이 진지한 태도로 묻자 최민준도 자세를 고쳐 잡았다.

"강한 적과 싸우는 법이라... 과거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시련을 통해서 강해진다."

"그래서?"

"너의 경우에는 굉장한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 어떠한 시련이든 반복해서 도전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계속 뒤질 때까지 싸워라?"

"그렇다. 강한 적과 싸우는 법? 네가 더 강해지면 해결될 문제다. 애초에 자신보다 강한 적을 만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강해지는 것이지."

최민준의 설명이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이 안 통하네."

"이상한가? 하지만 이게 정답이다. 끊임없는 시련을 겪으며 더욱 성장한다. 그 외에 해답이 있다면 내가 궁금할 지경이군."

"어휴. 물어보러 온 내가 미친놈이지."

"잘 아는군. 용건이 끝났으면 꺼져라."

"더러워서 간다. 새꺄!"

강현은 쿵 소리가 나게 묻을 닫고는 최민준의 거처를 나왔다.

"캬악! 퉤!"

대문 앞에 시원하게 침을 뱉어준 강현이 차량에 올라탔다.

"저 새끼. 다시는 만나나 봐라."

운전하며 길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도 강현은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오늘 만난 이들은 현재 국내에서 가장 강한 능력자들이다.

그런데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애초에 타깃을 잘못 잡은 건가?'

저들은 처음부터 튜토리얼을 8단계까지 통과하며 탄탄대로를 걸어온 재능충들이다.

자신보다 강한 적? 한두 번쯤 만났을 수도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상식적인 성장 속도로 뛰어넘어버렸을 것이다.

"하아... 갑갑하네. 그냥 던전이나 돌까."

던전에 들어가서 한바탕 싸우면 이 답답함이 가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시련을 통해서 강해진다.

-네가 더 강해지면 해결될 문제다.

최민준의 말들이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았다.

"괜히 기분만 잡쳤네."

애써 상념을 떨쳐낸 강현이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

드넓은 홀(hall).

건물 내부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광활한 이곳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웅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

기둥. 창틀. 손잡이 하나까지 장인의 손길이 닿아 예술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그 홀의 한가운데에는 화려한 왕좌가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자를 위한 것처럼 높고 화려하게 치장된 의자.

그곳에는 왕관을 쓴 언데드가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지.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를 앞에 두고 무릎을 꿇고 있는 이 또한 해골, 언데드였다.

-지구로 이동한 쿨사들 중 하나가 당했습니다.

-쿨사가 당했다?

-예. 아시아라는 대륙의 동부를 담당했던 바노 쿨사입니다.

-바노 쿨사라...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아마 쿨사들 중에서는 가장 오랜 세월을 버텨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보고받은 바로는 함께 있던 올룬 중 하나인 알로스 올룬이 먼저 인간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노 쿨사는 그 인간을 직접 응징하려 나섰다가 도리어 당하고 만 것 같습니다.

왕관을 쓴 자가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두개골을 긁었다.

-지구라는 곳에 마력이 흘러간 지 이제 겨우 2년이 흘렀다. 그런데 내가 직접 쿨사의 작위를 하사한 종이 당했다라... 재미있군.

역대 쿨사 중 가장 빠르게 그 작위에 오른 이가 20년이 조금 넘었다.

그조차도 극히 예외적인 경우고, 보통 100년은 넘게 걸리는 당연시 된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 말은 지구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마법을 쓰고 검을 휘두르는 자들. 능력자라고 했던가?

-예. 맞습니다.

-흥미로워. 수십, 수백 년을 앞당길 수 있는 그 성장의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곳에도 인간은 있다.

자신 또한 한때 인간이었으니 잘 알고 있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배워도 재능이 없으면 평생 입문자 수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법이다.

가끔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영웅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들은 규격 외의 존재들.

-차원의 관리자가 아주 재미있는 짓을 벌였어.

처음 자신에게 달콤한 제안을 할 때, 순진하게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이미 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자신이다.

당연히 무언가 조처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올룬(Olun)과 쿨사(Culsa)를 지구로 보낸 것도 그러한 수작을 사전에 알아채기 위함이었다.

-좋아. 아주 재미있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오랜만에 흥미가 동했다.

-아사스(Asas)가 지구로 넘어가는 것은 아직인가?

-예. 아직 지구에 충분한 마력이 모이질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던전이란 것이 다음 단계로 진화하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게 언제쯤이지?

-선지자들은 최소 1달 뒤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알겠다. 물러가도록.

그것을 끝으로 홀은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오직 한 존재를 위한 거대한 공간.

그곳에 홀로 남은 언데드는 가볍게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관리자. 다음은 뭘 할 거지?

136화 블랙 마켓(2)

136. 블랙 마켓(2)

강현은 회장님 의자에 앉은 채로 두루마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흐음..."

그것의 정체는 얼마 전 태신 길드의 길드장, 이백서에게 박은 마력 고착화 스크롤이었다.

이름 : 마력 고착화 스크롤

등급 : B

내구도 : 5/5

설명 : 마법사를 사냥할 때 주로 사용되는 스크롤. 스크롤을 찢는 즉시 발동된다. 단, 강력한 마력 컨트롤이 가능한 마법사는 마력 고착화를 무시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능력 : 5분간 반경 100m의 모든 마력이 고정된다.

"이걸 왜 진작 쓰지 않았지?"

이런 때에 적절한 격언이 하나 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

그것을 몸소 보여주는 강현이었다.

"이걸 썼으면 그 해골 쉽게 잡았을 텐데..."

확실하지는 않다.

설명에도 나와 있듯이 마력이 강한 적에게는 그 효과가 떨어질 수도 있다.

"그래도 B등급이니 잠깐은 멈출 수 있지 않았을까?"

1초라도 적의 움직임을 제한했다면, 적을 하늘에서 떨어뜨렸다면, 적의 실드를 무력화했다면.

그러면 싸움은 허무하리만큼 쉽게 끝났을 수도 있다.

"시벌... 생각하지 말자."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혹시 이런 스킬은 없으려나?"

무언가를 떠올린 강현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스킬, 마력장이라..."

설명을 읽어보자 F등급 기준으로 반경 1m에 마력을 뿜어내는 스킬이었다.

"마력을 뿜어내고, 다음은?"

뿜어낸 마력은 역장을 형성해서 상대의 마법이나 움직임을 방해하고, 마법 방어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설명만 보면 굉장히 뛰어난 스킬 같았으나, 이 스킬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효과가 거의 체감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수요는 엄청나게 많았는데, 많은 길드와 기관에서 교육용으로 물량을 쓸어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나도 없냐."

국내 아이템 거래소 중 가장 거대한 '정부 공식 거래소'에 접속해도 매물이 단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신태길 팀장한테 구해달라고 할까?"

그렇게 하면 아마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구해줄 것이다.

마력장은 본인이 쓰기엔 쓰레기지만, 원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있으니 공급량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다지 비싼 스킬도 아니었으니 아마 흔쾌히 구해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참에 시장에 한 번 다녀오자."

결심한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아무도 없네."

사무실을 둘러보자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늘 함께하는 안유성, 신성아, 윤나래. 누구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강현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야. 어디냐?"

-형. 지금 훈련 중이니까 나중에 전화해요.

"어어. 그래. 열심히 해라..."

통화를 종료한 강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웬일이래..."

그러나 낙담하지 않았다.

아직 그에겐 신성아가 남았으니까.

"어디야?"

-훈련 중입니다. 나중에 통화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열심히 해..."

강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아, 얘한테까지 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지막 타자, 윤나래의 차례가 돌아왔다.

"야. 어디야?"

-왜요.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는 대놓고 귀찮다는 어투가 팍팍 묻어져 있었다.

"왜요는 뭘 왜요야. 어디 좀 가자고."

-누구랑요.

"누구긴 누구야. 너의 길드장님이시지."

-유성이 훈련 중이지 않아요?

"어. 그렇던데."

-그럼 길드장님이랑 나랑 둘이?

전화 너머로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진심으로 싫어하는 거다.

"왜 싫냐?"

-뚝.

윤나래를 통화를 종료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흐으으음..."

꽉 쥐어진 강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됐다! 더러워서 혼자 간다!"

소리친 강현이 그대로 사무실을 떠났다.

**

"케륵, 케륵!"

"아! 여기선 이렇게 막으면 안 됐군요. 이쪽에서 이렇게..."

"케륵!"

케르고는 요즘 정말 신났다.

그가 좋아하는 검술을 매일 연습할 수 있었고, 인간들은 친절했다.

항상 나오는 산해진미. 진수성찬은 덤이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다."

자신에게 깍듯이 대하는 인간들을 보며 케르고가 흐뭇하게 웃었다.

'인간. 착하다. 강현만 나쁘다. 강현은 쓰레기다.'

그러나 행복은 영원하지 않았다.

뒤에서 익숙한 악마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야아~ 좋아 보여. 선생님 소리도 듣고."

"케륵...?"

순간 케르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큰일 날 뻔했다.'

저 인간은 어떻게 된 게 뒤에서 접근하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만날 때마다 점점 괴물이 돼가는 강현을 보니 케르고는 굉장히 암울해졌다.

"뭐하냐."

"훈련 중이다."

강현은 새로 배운 통역 능력으로 장비가 없어도 케르고와 대화가 가능했다.

"어디 좀 가자."

"어디?"

"나랑 좀 나가자고."

강현의 말에 케르고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케르고 선생님. 바쁘다."

"쓰읍! 내가 가자면 가는 거지 말이 많아."

"케르고 선생님이다. 똑바로 해라."

케르고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강현의 이마에 아주 굵은 힘줄이 돋았다.

"강현은 저승사자다. 뒤지기 싫으면 똑바로 해라."

"미안하다. 때리지 마라."

강현의 인상이 구겨지자 케르고가 다급히 팔을 저었다.

"어휴... 됐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갑자기 밀려온 허탈감.

흔히 현자 타임이라 부르는 것에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노릇 열심히 해라. 간다."

"케르고 안 간다. 괜찮나?"

"그래그래. 여기서 대접받으면서 편하게 살아. 맛난 것도 먹고."

"고맙다. 강현. 강현은 천사다."

강현이 떠나자마자 케르고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오크 같은 강현. 악마 오크다. 그런데 갔다. 평화다. 행복이..."

-두두두두두두!

순간, 나갔던 강현이 미친듯한 속도로 달려왔다.

"강현. 오해다."

"아가리 꽉 깨물어."

**

강현은 혼자서 움직이기로 했다.

"그래. 내가 언제부터 같이 다녔다고. 다 필요 없어!"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쳐버렸다.

몰리는 이목에 강현이 괜히 헛기침했다.

"크흠, 그런데 시장이 어디지?"

강현이 말한 '시장'은 흔히 생각하는 전통 시장이 아니었다.

능력자들이 '시장'이라 부르는 곳은 바로 암시장(Black Market)이다.

암시장이 등장한 것은 제법 오래되었는데,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약 3달 전이다.

몇 달 전.

돈을 밝히는 정부는 과감한 투자로 국내 최대의 '정부 공식 거래소'를 만들었다.

동시에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국내에 있는 암시장을 모조리 몰아내 버렸다.

그때 강현도 신태길의 요청으로 암시장 하나를 박살 낸 기억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암시장을 더 키운 꼴만 됐지."

그렇게 정부는 암시장을 뿌리 뽑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예상보다 더욱 질겼다.

포탈을 이용해 해외에 엄청난 규모의 암시장을 차린 것이다.

오지에 위치한 안전한 암시장.

그곳의 소문이 퍼지며 외국의 자본이 흘러오기 시작하고, 결과적으로 지금은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암시장이 돼버렸다.

해외에 있지만, 한국 능력자들이 운영하는 세계적인 암시장.

규모가 너무 커져 버린 탓에 지금은 정부도 손을 놓아버린 상태였다.

"분명 이 근처에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강현은, 이내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예. 강현 씨. 무슨 일이십니까?

전화를 받은 사람은 신태길이었다.

"길드 사무실에서 제일 가까운 암시장 입구가 어디예요?"

-예..? 방금 뭐라고….

"암시장 입구요."

강현의 당당한 말에 신태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정부 관계자에게 암시장 입구를 물어보는 겁니까?

"아, 빡빡하게 굴지 말고 알려줘요. 다 알고 있잖아요."

-하아... 지금 위치가 어딥니까?

"여기 사무실 앞에 동신네거리요."

-거기서 헤이마트 쪽으로 걸어가시면 악당 비어라는 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요?"

-그게 끝입니다.

"뭐야? 이렇게 가까웠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강현이 당황했다.

-악당 비어 2층은 예약석입니다. 그곳에 암시장으로 향하는 포탈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오케이. 고마워요."

-아닙니다... 가서 사고 치시면 안 됩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매일 사고만 치고 다니는 줄 알겠네."

-아닙니까?

"끊어요."

전화를 끊은 강현은 곧장 신태길이 말한 장소로 찾아갔다.

"그냥 동네 술집이네."

악당 비어라는 웃기는 이름에 비해 술집 내부는 평범했다.

바(Bar)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바텐더로 보이는 남자가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

강현은 곧장 바텐더에게 다가갔다.

"2층 쓰고 싶은데요."

대뜸 다가와서 하는 말에 바텐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손님. 예약은 하셨습니까?"

"안 했어요."

"죄송하지만, 2층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바텐더의 말에 강현이 선글라스와 후드를 벗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데 좀 쓰면 안 될까요?"

강현의 얼굴을 알아본 남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유명하신 분이라도 예약 없이는 안 됩니다..."

친절하게 말을 하긴 했으나 바텐더는 여간 짜증 나는 것이 아니었다.

'하필 이놈이라니...'

강현은 정부와 연줄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인지도 또한 국내 탑의 유명인이다.

'그런 주제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마음에 안 들면 깽판을 치고 다니지.'

보통 유명인이거나, 정부 쪽의 일을 한다고 하면 주위 눈치도 좀 보고, 법의 테두리와 도덕을 지키고, 이런저런 제약이 많아진다.

그런데 강현은 그 둘 모두에 해당하면서 아무것도 지키지 않았다.

여기서도 수틀리면 힘으로 2층으로 진입할 것이 뻔했다.

"그러면 지금 예약할게요."

"아... 음..."

평소 같았으면 경찰에 신고한다고 윽박지르거나, 능력자들을 불러서 쫓아냈겠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도리어 사건만 더 크게 키울 테니까.

바텐더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용건이 어떻게 되십니까?"

"구경 좀 하게요. 살 것도 있고."

"시장에서 지켜야 할 룰은 알고 계십니까?"

"그런 것도 있어요?"

바텐더는 들고 있는 술병으로 강현의 머리를 내려치려 하는 오른손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참아야 한다.'

암시장은 무법지대지만 나름의 룰이란 게 있다.

그런 것들을 확실하게 하려고 중개인의 보증으로 출입증이 발급된다.

지금 상황에서 강현을 안으로 들여보내려면 바텐더가 그 보증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말은 강현이 사고를 치는 순간 자신이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돼.'

진퇴양난의 상황.

바텐더의 선택은 상부에 연락을 취하는 것이었다.

책임을 떠맡길 누군가가 필요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출입증 발급과 관련해서 상부에 요청을 해야 합니다."

"그쪽한테는 권한이 없어요?"

"예. 죄송합니다."

당연히 권한이 있다.

그러라고 있는 자리니까.

하지만 지금 마음대로 움직였다가는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었다.

"어쩔 수 없죠. 여기서 기다릴게요."

강현의 말에 바텐더가 다급히 상부에 연락을 취했다.

137화 블랙 마켓(3)

137. 블랙 마켓(3)

암시장의 간부 중 하나인 최시현.

그녀의 나이는 27살로 간부 중 가장 어렸으며, 몇 안 되는 여성 간부였다.

그만큼 그녀의 능력이 출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시현은 자라온 환경 탓에 범죄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한 것이 결국 그녀를 강인하고, 끈질긴 능력자로 만들어 주었다.

"음? 웬일이래?"

최시현은 이른 아침부터 울리는 전화에 미소를 지었다.

암시장은 24시간 운영되지만, 이렇게 이른 시각에 연락이 오는 경우는 잘 없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제 그녀의 위치가 높아진 만큼 어지간해서는 직접 연락을 받지 않는다.

일은 최시현의 아래에 있는 부하들이 처리하고, 그녀는 그 보고서만 받을 뿐이었으니까.

'심심하던 차에 잘 됐어.'

최시현이 가벼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 무슨 일이야?"

-서울 외곽에 위치한 술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딘데?"

-악당 술집입니다.

들어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소규모로 운영되는 작은 술집이었다.

"그래서. 왜 연락이 왔는데?"

-강현이 출입증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뭐?"

순간 최시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강현? 내가 아는 그 강현이야? 배데스 길드의?"

-예.

"그 또라이가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강현은 일반인들에게도 정보가 많이 풀려있는 유명한 능력자였다.

하지만 그 괴상한 기행과 무력은 능력자들 사이에서 더욱 유명했다.

특히, 범죄와 관련된 자들.

'예전에 부산 암시장을 혼자 박살 낼 때는 전부 난리였지.'

전국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암시장인 부산 암시장을 강현은 길드원 세 명만 데리고 박살을 내버렸다.

인명피해. 기물파손.

그 어떠한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압도적인 폭력.

단 한 번의 사건으로 강현은 법의 테두리 밖에서 일하는 자들 사이에서 블랙 리스트 1순위에 올라 있었다.

'어떡하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다.

암시장의 규모가 커진 만큼, 국내 최고의 길드인 배데스도 분명 관심을 가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강현이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직접 찾아온 곳이 하필 자신이 관리하는 지부일 줄은 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잠깐 기다리라고 해. 내가 직접 간다."

-직접 강현을 찾아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우리 지부에서 들여보내 줬다가 사고라도 치면 어떡하려고? 그 또라이 새끼 보증인도 없이 왔을 거 아냐?"

-예. 없다고 합니다.

"하아..."

기대도 하지 않았다.

최시현은 다급히 옷을 입으며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맥주 좋아한다던데, 꿍쳐놨던 비싼 것들 꺼내서 먹여놔. 돈 같은 건 받을 생각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아, 혹시나 먹을 거에 장난칠 생각 꿈에도 하지 말라 해!"

-예.

혹여라도 바텐더가 미쳐서 술에 독이라도 타는 순간, 자신의 지부는 끝장이다.

독 따위로 죽을 능력자였으면 강현은 아마 수백, 수천 번도 더 죽었을 것이다.

'강현은 독극물을 포커리 마냥 처마시는 놈이니까.'

이미 그렇게 골로 가버린 범죄 단체가 그녀가 아는 것만 해도 세 개 정도 있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지랄인지..."

**

"이건 무슨 맥주예요?"

"서플리케이션입니다. 국내에서는 판매처가 그리 많지 않은, 제법 귀한 맥주입니다."

이리저리 맥주를 살펴보던 강현은 단번에 한잔을 비워냈다.

3초 만에 5만 원이 넘는 돈을 날린 바텐더가 쓰라린 표정을 지었다.

"어떠십니까?"

"쓸데없이 시기만 하고 별로인 것 같은데. 됐고 그냥 국산 맥주나 줘요. 하스나 헤이트 같은 거 없어요?"

"있습니다..."

울상을 지은 바텐더가 생맥주 한잔을 내왔다.

"캬하! 역시 이거지."

강현이 연거푸 다섯 잔을 들이켰을 때였다.

-딸랑딸랑

악당 술집의 문이 열리며 방울 소리가 울렸다.

"오셨습니까!"

문을 열고 나타난 여성을 본 바텐더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강현도 들어온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누구예요?"

"서울, 경기의 모든 출입을 담당하는 상무님이십니다."

"대단한 분이 오셨네."

화려한 색으로 치장된 헬멧을 벗은 최시현이 바에 앉아있는 강현에게 다가갔다.

"반가워요. 최시현이라고 해요."

"배데스 길드의 길드장. 강현입니다. 듣자 하니 높으신 분 같은데 여기는 어쩐 일로?"

"강현 씨에게 직접 시장에 대해 알려드리기 위해 찾아왔어요. 제가 강현 씨의 보증인이 되는 거죠."

최시현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바텐더에게 간략한 설명을 들었기에 보증인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는 강현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높으신 분이 올 필요는 없었는데."

"국내 최고 길드의 길드장님인데 이 정도는 해야죠."

아부성 발언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럼 바로 가죠. 피차 서로 바쁜 사람인데, 굳이 시간 날릴 필요 없으니까."

"좋아요."

강현과 최시현은 곧장 술집의 2층으로 올라갔다.

최시현이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 적힌 문을 열자, 특이한 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암시장으로 향하는 포탈을 여는 장치예요."

최시현이 무언가를 만지작거리자 금세 푸른 포탈이 생겨났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돼요."

"오호. 이런 거 비싸지 않아요?"

"처음에는 적자였는데, 지금은 생산 단가가 많이 내려갔어요. 출입자들에게 받는 입장료로 충분히 운영이 가능해요."

"입장료가 있었어요?"

"강현 씨에게는 받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요."

"그렇게 해주면 고맙죠."

최시현의 말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그럼 먼저 들어갑니다?"

"예."

강현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포탈 안으로 진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최시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함정 같은 거면 어쩌려고..."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행동하는 것.

그만큼 자신감이 받쳐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더 주의해야겠어."

절대 강현이 사고를 치지 못하게 하리라 다짐하며, 최시현 또한 포탈로 진입했다.

**

"허어... 좋네."

포탈 안쪽은 완전히 신세계였다.

한국보다 조금 따뜻한 기온.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오늘의 마정석 시세]

곳곳에는 거대한 전광판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나라별 마정석 시세가 적혀 있었다.

"출입증을 제시해 주시죠."

포탈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강현에게 다가왔다.

"출입증?"

그런 거 모른다고 말하려던 찰나, 다급히 달려온 최시현이 뭔가를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방문을 환영합니다."

그것을 본 남자가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 강현과 최시현은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암시장은 처음인가요?"

"그렇죠.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거대하네요. 예전에는 이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강현이 말한 예전이란, 본인이 박살 냈던 부산 암시장을 말하는 것이리라.

"국내에서 추방당한 암시장이 하나로 뭉쳤고, 거기에 외국의 자본까지 들어왔으니까요. 지금은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암시장이 됐죠."

"이런 곳의 상무라니. 돈 잘 벌겠어요?"

"그냥. 적당히 벌고 있어요."

최시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간단하게 룰을 말씀드리면, 이곳의 일은 절대 외부 발설 금지. 사진, 영상 촬영은 안 돼요."

초창기에는 규칙을 어기고 SNS 같은 곳에 암시장의 사진과 영상을 올리는 관종들이 가끔 있었다.

암시장을 운영하는 자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 자료들을 지우고, 게시글을 올린 능력자들을 처벌했다.

그들 모두가 조용히 사라진 이후.

이제는 암시장의 정보를 대놓고 발설하는 자는 없었다.

"상대의 정보를 묻는 것 또한 금지. 이곳에서는 오직 물건을 사고파는 것만 가능해요."

"간단하네요."

"당연한 말이지만 싸움도 절대 금지예요. 시비가 붙으면 결투장이 있으니 거기를 이용하면 돼요."

"결투장이 있어요?"

싸움이 안된다는 것은 이해가 갔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투장은 의외였다.

"워낙 호전적인 사람이 많으니까요. 결투장을 이용하면 시간이 공지되고,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받아서 구경을 할 수 있게 시스템을 구축했어요."

"오호..."

"굳이 그런 사건이 아니라도 사람과 몬스터의 대결 같은 것도 있으니 관심 있으면 한번 가보시는 것도 괜찮겠네요."

불안 요소를 제거함과 동시에 수익을 올린다.

비록 비인도적인 방법이지만, 어차피 법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니 그런 것을 신경 쓰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필요한 것부터 구해야지. 스킬 파는 곳은 어디예요?"

"이쪽이요."

강현의 질문에 최시현이 길을 안내했다.

한 골목으로 접어들자 온갖 종류의 책을 진열해놓고 파는 상인들이 보였다.

"와, 종류가 엄청 많네."

"특별히 찾으시는 게 있나요?"

"마력장이요."

"으음..."

마력장이면 굳이 이곳을 찾아온 것도 이해가 갔다.

교육용으로 찾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 매물이 올라와도 금세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번 둘러보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그런 것들은 일반 시세보다 조금 비쌀 수 있어요."

"그 정도는 감수하고 온 거니 안 써도 돼요."

강현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현은 마력장 스킬을 구할 수 있었다.

알고 있는 시세보다 30% 정도 비쌌지만, 강현은 군말하지 않고 구매했다.

"마정석으로도 구매가 가능하다니 신기하네."

"요즘 어디든 마정석이 귀하니까요. 실제로 이곳에는 마정석을 구매하기 위한 딜러들도 많이 활동하고 있어요."

현재 세계는 마정석의 국외 반출을 금지하는 추세였다.

동시에 어떻게든 마정석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암시장은 아주 훌륭한 구매 수단이었다.

"예전에는 환시세 차익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딜러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가격이 많이 안정돼서 그냥 마정석을 국내보다 조금 싸게, 대량으로 사고 싶은 사람들이 딜러를 이용하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강현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정식 거래소를 쓰지 않고 암시장을 이용하는 이유가 있어요?"

"이유는 아주 많아요. 암시장은 신원을 밝힐 수 없는 범죄자들도 이용이 가능하고, 거래 기록이 남지 않으며, 물건의 출처가 불분명한 것도 사고팔 수 있죠."

정부에서 운영하는 거래소는 투명성을 중시한다.

그 때문에 물건을 거래하기 위해서는 제법 까다로운 서류 절차를 거쳐야 했다.

암시장은 그 모든 과정이 생략되어 있으니 편할 수밖에 없었다.

"더 중요한 건 수수료가 없다는 거죠."

"오호, 수수료가 없다? 그럼 어떻게 먹고 살아요?"

"이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입장료,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내는 자릿세. 그 외에 결투장이나 도박장 같은 기타 수입들. 그것만 해도 규모가 엄청나거든요."

확실히 이 정도의 유동 인구면 음식 장사만 해도 떼돈을 벌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신기한 곳이네요. 종종 이용해야겠어요."

"예...?"

"가끔 들릴 테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강현의 말에 최시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귀찮게 됐네.'

어쩔 수 없었다.

강현을 무력으로 어찌할 수도 없고, 그가 사고를 치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것이 더 나았다.

"그럼 오늘 볼일은 다 끝난 건가요?"

"예. 원래 마력장 스킬북을 사면서 겸사겸사 구경이나 해보려 했거든요. 장비 같은 것들을 좀 둘러볼까 싶기도 한데... 일단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강현은 얼른 마력장 스킬을 시험하고, 연구하고 싶었다.

장비 구매는 다음에 길드원들을 데리고 와서 해도 될 것이다.

"그럼 바로 나가죠."

최시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사고 없이 끝났어.'

아무런 문제 없이 강현과 암시장 투어를 끝냈다.

직접 대화를 나눠본 강현은 소문과 다르게 제법 멀쩡한 사람이었다.

'딱히 호전적이지도 않고, 말도 잘 통하고. 괜찮은데?'

의외로 괜찮은 고객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최시현이 걸어갈 때였다.

"이것들은 또 뭐야?"

갑자기 들려오는 강현의 목소리.

뒤를 돌아보자 열댓 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강현이 보였다.

'저 멍청한 새끼들이...'

익숙한 남자들을 보며 최시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138화 결투장의 저항자(1)

138. 결투장의 저항자(1)

현재 암시장은 대한민국의 능력자들로만 운영되지 않는다.

타국의 자본이 들어오며, 동시에 외국의 능력자들도 경영에 가담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결투장이었다.

결투장은 미국의 범죄단체가 운영하는 곳으로 상당히 악질적인 곳이었다.

정기적으로 잡히는 결투 외에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비열한 수를 쓰기 일쑤였다.

그 대표적인 방식 중 하나가 고의로 암시장 고객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다.

고객이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 결투장에서 싸우도록 유도한다.

이후는 뻔한 스토리.

결투에서 죽은 고객의 아이템을 가져내고, 동시에 도박에 베팅한 것으로 막대한 돈을 창출했다.

상당히 리스크가 큰 사업이었지만, 지금까지는 별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만큼 결투에 나서는 능력자들의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오늘은 뭐 없나?"

레이건은 결투장에서 싸우는 전사들의 수장이었다.

여느 때처럼 그는 하이에나처럼 암시장을 돌아다녔다.

적당히 장비가 좋아 보이며, 동시에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툭

"아! 뭐야?"

가볍게 어깨를 부딪치며 순간적으로 마력을 측정한다.

상대가 강해 보이면,

"암 쏘리."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응?"

그러다가 상대의 마력이 낮은 것이 드러나면,

"헤이! 웟더퍽!"

바로 시비를 거는 것이다.

오늘은 운이 좋게도 빠르게 먹잇감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들은 또 뭐야?"

혼자서 길을 걷고 있는 건방진 동양인.

놈이 바로 타켓이다.

**

최시현은 강현을 둘러싼 남자들의 정체를 곧장 알아차렸다.

결투장을 운영하는 남자의 수하들.

그들이 어떤 양아치 짓으로 돈을 버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건들면 안 돼! 이 멍청한 새끼들아!'

외국인이라 강현을 모르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래도 강현을 건드리는 건 아니지! 도대체 왜!?'

강현 정도면 놈들의 타켓으로 지정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강현이 평상시에도 마력운용을 연습하기 위해 마력을 감추고 있어서였다.

그 사실을 모르는 최시현은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인지 생각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일단 상황을 진정시켜야 해.'

진정한 최시현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저 멍청이들을 좋게 돌려보내는 것이다.

"이봐! 뭐하는 거야?"

강현을 둘러싼 남자들.

그들의 대장인 레이건에게 다가간 최시현이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너는 또 뭐야?"

영어로 자신에 말을 거는 동양 여성을 보고 레인건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한민국 서울, 경기지방 출입소의 상무 최시현이다. 당장 이 남자에게서 물러서."

"뭐?"

최시현의 말에 레이건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 남자가 나에게 시비를 걸었으니 나는 끝장을 봐야겠어."

최시현이 정말 암시장의 중요한 간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관계없다.

'간부의 고객 정도면 더 돈이 빵빵하겠지. 완전히 대박이야.'

어차피 자신은 미국 소속.

대한민국의 간부가 어떤 곤란에 처하든 알 바가 아니었다.

애초에 결투장과 암시장을 운영하는 이들 사이에는 묘한 세력 싸움, 신경전 같은 것을 벌여왔기에 오히려 더욱 잘 됐다고 생각했다.

'한국 간부의 고객. 돈은 많고 허약한 놈들. 아주 최고의 조건이야.'

레이건이 말이 통하지 않자 최시현이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말을 듣지 않으면 다이안에게 전화하겠어."

다이안은 결투장을 운영하는 고위 간부 중 하나였다.

"마음대로 해봐."

레이건의 말에 최시현은 정말로 핸드폰을 들었다.

"잠시만요."

그때 앞으로 나선 강현이 최시현을 제지했다.

"이놈들 하자는 대로 하죠."

"네...?"

"이 호로새끼들. 지금 양아치 짓 하는 거 맞죠?"

대충 상황을 눈치챈 강현이 씨익 웃었다.

'이런 놈들 수법이야 뻔하지.'

멀쩡한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어서 돈을 뜯어내는 놈은 한국에서도 지겹게 봐왔다.

"야. 내가 시비를 걸었다고?"

"그래. 네가 와서 내 어깨를 쳤잖아? 나는 거기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겠어."

강현이 통역 능력을 사용해 말하자 레이건이 대답했다.

"보상은 어떻게 할 건데?"

"10만 달러. 싫으면 결투장에서 승부를 보지. 아니면 나는 절대로 비켜주지 않을 거야."

고작 어깨 한 번 부딪쳤다고 1억 넘게 요구하는 놈들을 보며 강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재미있네. 가자고."

"뭐?"

"네가 말한 결투장으로 가자고."

예상외로 강현이 쉽게 승낙하자 레이건이 쾌재를 불렀다.

'멍청한 놈. 한국에서 대접받다 보니 현실을 전혀 모르는군.'

자신의 팀은 레벨 60 이상의 강한 능력자들로만 운영된다.

게다가 이들은 대인전의 스페셜리스트다.

온갖 치졸한 수단을 동원해서 싸우는 이들은, 비록 적이 자신보다 강한 능력자라 하더라도 어떻게든 승리를 쟁취했다.

평소 몬스터와만 싸워왔던 오만한 능력자들은, 자신의 힘에 심취해서 결투를 받아들였다가 지옥을 경험하고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 그럼 정식으로 결투장에 대전을 신청하겠다. 따라와라."

앞장서서 길을 걷는 레이건.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강현의 옆에 붙어서 걸음을 재촉했다.

"크큭. 오랜만에 아주 재미있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강현은 신이 나서 낄낄댈 뿐이었다.

"하아... 이젠 나도 모르겠다."

깊은 한숨을 내쉰 최시현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

결투장은 정말 거대했다.

어지간한 축구 경기장보다 거대한 건축물을 보며 강현이 감탄했다.

"역시 범죄자 새끼들이 돈은 잘 번다니까."

수많은 접수처 중 하나로 걸어가자 친절한 접수원이 맞이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결투 신청."

"서류를 작성해 주십시오."

접수원에게 서류를 두 장 받아 든 레이건이 강현에게 하나를 건넸다.

"여기 적혀있는 내용을 작성해라."

"그래그래."

종이에는 이름과 출신 국가, 소속 길드 등 간단한 것을 묻는 문항이 있었다.

그 뒤는 긴 설명과 함께 결투를 동의하냐 물었는데, 대충 네가 죽어도 아무런 보상을 못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인을 완료한 강현이 종이를 내밀었다.

"접수 감사합니다."

상냥한 얼굴로 종이를 받은 접수원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배데스 길드의... 강현?'

잘은 모르지만, 들은 적이 있다.

한국의 정신 나간 능력자.

단순히 미치기만 한 게 아니라 무력 또한 대단하다고 한다.

접수원이 입술을 깨물며 레이건을 바라봤다.

'이 멍청이는 이런 거물을 끌어들여서 어쩌자는 거야?'

하지만 자신보다 상급자에게 뭐라 할 순 없는 일.

게다가 결투 당사자인 강현 앞에서 자신과 레이건이 관계가 있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됐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직속 상급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레이건. 제물 배데스 강현. 확인 바람.

문자를 보낸 지 10초도 지나지 않아 레이건에게 연락이 왔다.

"레이건입니다."

-너 뭐하는 거야!?

갑자기 전화해서는 윽박지르는 목소리에 레이건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입니까?"

-결투 상대는 무조건 잡아먹기 쉬운 놈으로. 안전하게! 몰라!?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 놈이 강현을 끌어들여!?

"그게 무슨...?"

순간 레이건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강현... 강현...!?'

얼핏 이름을 들은 것 같기는 했다.

한국에 특이한 능력자가 있다고.

'하지만 이놈은 분명 마력이 약했는데?'

레이건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그를 재촉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사과하고 물러나라.

"하지만..."

-아니면 네가 직접 싸워서 책임을 지든지! 알아서 해!

그것으로 통화는 끝이었다.

레이건이 곤란한 듯 보이자 강현이 다가왔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니다..."

레이건이 생각에 잠겼다.

'이제 와서 사과를 하라고? 이 레이건이?'

자신은 튜토리얼 5단계를 통과했다.

그 이후로 수많은 수라장을 거쳐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 강인한 손에 죽어 나간 능력자만 해도 100명이 넘어간다.

그중에는 제법 이름을 날리는 놈이라며 거들먹거리는 놈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레이건은 덤덤한 표정으로 접수원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결투 시간은 언제지?"

"5시간 뒤에 일정이 비어있습니다. 두 분께서 괜찮으시다면 그때로 잡겠습니다."

"알겠다."

"맘대로 해요."

그렇게 강현과 레이건의 결투가 성사됐다.

**

"이야기 들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어."

레이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부하를 밀쳐냈다.

"놈이 유명하다 해봤자, 나약한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우쭐대는 놈일 뿐이야."

"강현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는데, 보통 놈이 아닌 건 확실합니다..."

부하가 레이건에게 한 영상을 보여주었다.

-참 쉽죠?

그곳에는 주먹 한 방에 오우거 머리를 터뜨린 강현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게 대략 8개월 전의 영상입니다. 지금은 더욱 성장했을 겁니다."

"..."

주먹으로 오우거의 머리를 터뜨리는 것.

지금 자신이 시도해도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강한 맷집과 압도적인 괴력으로 밀어붙이는 전형적인 탱커형. 그렇다면 승산은 충분하다.'

자신이 싸웠던 적 중에서도 비슷한 놈들이 있었다.

그런 놈들의 특징 중 하나가 너무 육체를 믿은 나머지 기술적인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인간인 이상 약점은 있기 마련이다.'

국부. 눈. 그 외에도 살이 연약한 부분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곳을 공략하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앞으로 3시간 뒤. 결투장에서 이벤트 매치가 있을 예정입니다. 고객 여러분의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곳곳에 위치한 확성기에서 홍보 문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완전히 이용하기로 결정한 건가.'

놈이 거물이라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주최 측은 자신의 목숨보다는 이번 기회에 어떻게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대대적인 홍보.

사람이 모이고 판돈이 커질수록 수익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흥. 마음대로 하라지."

레이건은 가진 돈을 모두 자신에게 걸기로 했다.

놈들이 어디에 돈을 베팅해서 얼마를 날리던 관심 없다.

이 싸움에 살아남는 것은 자신이고, 돈을 쟁취하는 것도 자신일 테니까.

**

"이봐 이번 결투장 대진표 봤어?"

"왜? 뭔데 그래?"

"강현이라는 능력자와 레이건이 싸운다고 하더군."

"강현? 그게 누구야?"

"한국의 유명한 능력자라는데, 장난이 아니야. 위튜브에 올라온 것만 봐도 이놈은 진짜라니까?"

강현의 결투 소식에 암시장 전체가 들썩였다.

레이건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검증된 결투장의 강자.

그에 반해 강현은 결투장이 처음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는 능력자였다.

외국의 경우 일반인들은 잘 몰라도 능력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강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그리 많지 않은 튜토리얼 8단계 졸업자.

그런데도 정보가 굉장히 많이 풀려 있으며 활동이 활발하다.

그 발자취 또한 일반적인 능력자들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결투는 볼만하겠어."

"입장권이 50만 원? 오늘따라 왜 이렇게 비싸?"

"그게 대수인가. 좋은 구경 하는 셈 치고 내야지."

당연히 베팅 또한 엄청난 규모로 이뤄졌다.

"자네는 어디에 걸 텐가?"

"으음, 고민 중이네. 자네는?"

"나는 레이건에게 걸지. 아무리 강현이 강자라 해도 레이건은 이 분야의 스페셜리스트야. 쉽게 질 리가 없어."

두 사람에게 걸리는 베팅 액이 천문학적인 단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펼쳐지는 축제와도 같은 결투에 암시장 전체가 흥분에 휩싸여 갔다.

**

전광판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고 강현이 흐뭇하게 웃었다.

"걱정 안 돼요?"

"무슨 걱정이요?"

"나름 유명인인데, 이렇게 노출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해서요."

최시현의 물음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여기 보안 철저하다면서요?"

"이 정도로 사람이 모이면 장담하지 못해요. 그것뿐만 아니라 강현 씨 본인의 능력도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질 거예요."

"그래서요?"

"그래서라니요! 이런 일이 터지면 앞으로 다툼이 있을 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요!"

"상관없어요."

최시현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보여줄 것도 별로 없을 것 같으니까."

"예?"

최시현의 의문을 뒤로하고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보면 알 테니까."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요? 뭐하러 벌써 가요?"

아직 경기까지는 한 시간이 남은 상황이었다.

"베팅하러 가야죠. 꽁돈 벌 기회인데! 혹시 결투 참여자는 베팅 못 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갑시다! 얼른!"

긴장한 모습이라고는 전혀 보이질 않는 강현이었다.

139화 결투장의 저항자(2)

139. 결투장의 저항자(2)

"와아아!!"

무려 1만 석에 달하는 객석이 대부분 채워져 있었다.

마치 결투장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질러대는 함성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죽여버려!"

"강현! 너한테 걸었다! 지기만 해봐라!"

"레이거언!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마라!"

단번에 빠져나간 사람들로 암시장 전체가 한산해졌을 정도.

두 남자는 그 열광의 도가니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긴장할 법도 했으나, 강현은 여유로워 보였다.

그런 강현을 마주하며 레이건이 숨을 가다듬었다.

"후우..."

결투장에서 잔뼈가 굵은 레이건도 이 정도 인파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제야 강현의 이름값을 실감했지만,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긴장되냐?"

강현의 물음에 레이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혀."

"시작하기 전에 하나만 묻자."

"뭐지?"

"지금까지 얼마나 죽였냐?"

강현의 물음에 레이건이 사납게 웃었다.

"너는 지금까지 죽인 몬스터의 숫자를 기억하나?"

레이건의 대답에 강현 또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높은 단상에 서 있던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오늘도 저희 결투장을 찾아준 신사, 숙녀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

사회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강현과 레이건을 소개했다.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고, 그것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참혹한 결투! 지금 시작합니다!"

"와아아아!"

결투가 시작됐다.

**

결투가 시작되자마자 레이건은 앞으로 달렸다.

'길게 끌면 스텟이 밀리는 내가 불리해.'

껄렁하게 서 있는 강현.

한눈에 봐도 놈은 방심하고 있다.

길게 끌 것 없이 바로 끝을 내야 한다.

"흐읍!"

레이건의 장기는 두 개의 검을 이용한 현란한 쌍검술.

그리고 치명적인 독이다.

검에 발라져 있는 극독은 스치는 것만으로 피부를 썩게 하고 몸의 근육을 경직시킨다.

"죽어!"

갑옷조차 입지 않은 오만한 적에게 레이건이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강현은 빌게인의 장검을 꺼내서 레이건의 검을 막았다.

붉은 검과, 초록빛의 쌍검이 격돌하며 날카로운 소음을 일으켰다.

"와아아아!"

빠르게 격돌하는 둘을 보는 사람들이 열광했다.

'생각보다 검술도 제법이군. 하지만 이건 어떨까?'

예상보다 수월하게 검을 받아내는 강현을 보고 레이건이 다음 수를 꺼냈다.

-치이익!

순간적으로 발을 빠르게 놀려 흙먼지를 일으킨 레이건.

동시에 품에서 함정 아이템을 바닥에 뿌렸다.

이름 : 폭발 주머니

등급 : D

내구도 : 1/1

설명 : 레이건이 제작한 덫이다. 약간의 충격에도 폭발한다.

능력 : 충격이 가해지면 폭발을 일으킨다.

심플하지만 효과적인 아이템.

그것을 강현의 주위에 빠르게 뿌린 레이건이 물러났다.

사람들은 이런 레이건의 결투 방식이 치졸하다고 욕했지만, 레이건은 개의치 않았다.

이 결투에는 반칙이라는 것이 없으니까.

'정정당당? 개나 주라지.'

승리하는 자가 정의이고, 살아남는 자가 모든 것을 독차지한다.

애초에 그런 결투다.

"음?"

강현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챔과 동시에.

-콰과과광!

강현의 주위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레이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하압!"

극독을 발라둔 단검을 강현을 향해 쉴 새 없이 던졌다.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는다!'

흙먼지에 가려 강현이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없다.

상대의 마력을 가늠하는 것으로 그 위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강현은 갑옷을 입지 않았으니, 어디에 던지든 맞기만 한다면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화아아아...

잠시 후.

불어오는 바람에 흙먼지가 날아가고, 마침내 강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레이건은 이번 공격으로 강현이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최소한 중상 정도는 입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강현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오롯이 서 있었다.

'허세인가... 분명 타격은 있을 텐데.'

옷이 찢어지고, 불에 탔으며 피부 곳곳이 베여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다못해 독이 들어간 것만은 분명하다.'

레이건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끝이다!"

빠르게 달려간 레이건이 두 개의 검을 동시에 휘둘렀다.

이 공격으로 단번에 강현의 목을 끊어내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 검이 강현의 손바닥에 잡히기 전까지는.

'이게 말이 돼!?'

레이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의 검에는 독은 물론이고 날카로운 마력까지 두른 상태였다.

강철까지 썰어버릴 수 있는 일격.

그런데 강현은 맨손으로 그것을 붙잡고 있었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레이건의 말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냐?"

"뭐...?"

"결투장 에이스라길래 어떤지 구경 좀 하려 했는데. 별거 없네."

검날을 붙잡은 강현이 천천히 검을 잡아당겼다.

칼날이 파고든 손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

'무슨 힘이...!'

분명 자신은 검의 손잡이를 확실하게 잡고 있었다.

그런데도 칼날을 붙잡고 잡아당기는 강현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괴물과도 같은 완력에 결국 검을 놓친 레이건이 빠르게 물러났다.

'독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 놈이다.'

정신이 나가버릴 만한 광경이었지만, 레이건은 최대한 침착하게 생각했다.

'신체 내구도는 어지간한 갑옷 이상. 근력 또한 최소한 오우거 정도로 판단해야겠군.'

말이 되지 않는 신체 스펙이었다.

그 불합리함에 레이건은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으나, 필사적으로 참았다.

'지금껏 나보다 강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건 바로 나. 레이건이었어.'

어떠한 상황에도 침착을 유지한다.

이 법칙만 지킨다면 반드시 기회는 오기 마련이다.

-채앵!

레이건이 인벤토리에서 또 다른 검을 꺼내 들고, 자세를 잡았다.

"준비 끝났으면 간다."

그런 레이건을 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은 강현이 땅을 박차고 달렸다.

**

경기를 지켜보는 최시현은 긴장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지는 않겠지..."

미리 강현에게 레이건의 전투 스타일을 알려주기는 했다.

-얍삽한 놈이네.

-그러니까 더 조심해야 해요. 강현 씨가 아무리 강자라도 방심하는 순간 죽는다고요.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강현은 여유로워 보였다.

강현이 강자라는 것은 알지만, 너무 태평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지금까지 결투장에서 죽어 나간 수많은 강자들도, 싸우기 전에는 모두 여유로운 모습이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은 강현이 싸우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저 강하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반면에 레이건은 검증된 강자다.

그가 이곳에서 능력자들을 도륙하는 것을 수도 없이 봐왔다.

그들은 대부분 그리 강하지 않은 능력자였지만, 개중에는 자신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들도 섞여 있었다.

그런 자들을 레이건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쓰러뜨려 왔다.

'제발 지지마라... 소문의 반만 됐으면!'

가진 돈을 모두 강현에게 걸은 도박꾼의 절실한 기도였다.

-콰아아앙!

그때였다.

강현의 주위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미리 경고했던 레이건의 아이템 중 하나였다.

그 후에도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레이건의 공격.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저런 공격에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살아남더라도, 반쯤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와아아아아!"

잠시 후.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쏟아져 나오고, 그 안에 태연하게 서 있는 강현이 보였다.

"휴우... 다행이다."

다행히도 소문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맷집 하나로 레이건을 이길 수는 없어."

결국 승리하기 위해선 상대방을 공격해야 한다.

이렇게 맞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와아아!"

그때 다시 함성이 터져 나오고, 강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순간 최시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강현이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어느새 레이건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가 이렇게 빨라..?"

멀리서 지켜보는 자신이 이 정도라면, 레이건은 정말 그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시나 잔뜩 당황한 레이건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거 놔라!"

"그래. 놔줄게."

레이건의 멱살을 쥐고 있던 강현이 그대로 놈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커헉!"

쿠웅- 하는 소음과 함께 땅바닥에 처박힌 레이건이 피를 울컥 토해냈다.

"그거야! 화끈하잖아!"

"와아아아! 더! 더 공격해!"

관중이 외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지만, 최시현은 온전히 전투에 빠져들고 있었다.

"벌써 끝나면 안 되지?"

레이건을 강제로 일으킨 강현이 뺨을 후려쳤다.

-차아악!

찰진 타격음이 관중의 함성을 뚫고 최시현의 자리까지 울려왔다.

그 공격 한 번에 레이건은 피에 젖은 붉은 이빨을 잔뜩 토해냈다.

-짜악! 짜악!

강현의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강현의 손이 휘둘러질 때마다 터져 나오는 타격음이 최시현의 몸을 파고들었다.

"커헉, 컥..."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건의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놈을 강현이 집어던졌다.

"죽여! 죽여라!"

"뭐하는 거야! 당장 끝을 내라고!"

결투장에서 패배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레이건 또한 그렇게 죄 없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죽여왔다.

"죽이라고! 이 새끼야!"

강현이 마무리를 하지 않자 관중들이 잔뜩 흥분했다.

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외침.

그 속에서 강현이 오롯이 서있었다.

'웃고 있어?'

최시현은 볼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압박 속에서 강현이 웃고 있는 것을.

그렇게 관중을 둘러보던 강현이 돌연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중지를 힘차게 세웠다.

"뻑큐! 엿이나 먹어라! 씹새들아!"

그 말을 끝으로 강현은 경기장을 벗어났다.

**

"뭐하는 거야!? 당장 죽이라고!"

"내가 낸 돈이 얼마인지 알아!?"

사방에서 날아오는 쓰레기들.

음식물은 물론이고, 심지어 날붙이까지 날아왔다.

그 모든 것을 여유롭게 맞으며 강현은 안으로 들어왔다.

"속이 다 후련하네."

대기실로 들어오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최시현이 보였다.

"왜 그랬어요?"

"뭐가요?"

"왜 레이건을 안 죽였냐고요. 그건 이 결투장의 암묵적인 룰이에요."

최시현의 물음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그냥. 그러기 싫어서요."

이제 와서 생명존중 같은 것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강현은 이미 수도 없이 많은 전투를 거쳐왔고, 많은 생명을 죽였다.

그중에는 같은 인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놈은 아주 죄질이 나쁜 범죄자. 살인자이기까지 했다.

"꼴보기 싫지 않아요?"

"네...?"

갑작스러운 강현의 말에 최시현이 당황했다.

"저기 관중석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이 죽는 걸 보고 시시덕대는 놈들. 꼴 보기 싫잖아요. 누구한테 명령질이야? 쓰레기 같은 것들이."

최시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진짜 하고 싶은 대로 사는 놈이구나...'

그제야 강현에 대한 소문이 과장된 것이 아니라, 되려 축소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놈은 진짜 제정신이 아니다.

"강현 씨가 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레이건은 죽을 거예요."

"상관없어요. 범죄자 새끼들끼리 누구를 찔러 죽이든 말든."

"..."

"됐고, 내 배당금이나 타러 갑시다. 3억 정도 태웠는데 얼마나 땄으려나?"

"그 정도면 아마 1억 5천 정도 떨어질 거예요. 강현 씨 배당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요?"

강현이 대답하며 은근한 눈으로 최시현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얼마 걸었어요?"

"무, 무슨! 저는 아무것도 안 걸었어요!"

최시현이 필사적으로 변명했지만, 이미 늦었다.

"똑바로 불어요. 안 그러면 진짜 깽판이 뭔지 보여줍니다. 내가 난리 치면 보증인인 최시현 씨한테도 타격이 가죠?"

이미 지금까지 벌어진 것만 해도 하루 종일 서류와 씨름해야 될 정도였다.

더 이상 강현이 사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하아... 3억이요."

"어허, 통이 그렇게 작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는데."

"5억 걸었어요. 가진 돈을 전부 다 때려 넣었다고요."

강현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거짓말하면 손모가지... 아니, 후회할 겁니다."

"알겠어요! 10억! 10억 걸었어요. 됐어요!?"

"내가 거짓말을 탐지하는 능력이 있는데, 거짓말이네요."

순간 최시현은 당황했지만, 다행히 티를 내지는 않았다.

"흥, 그런 능력이 어디 있어요?"

"진짠데. 이렇게 나오면 앞으로 매일 암시장에 와야겠네."

"하아... 12억이요."

"보자, 12억이면 대충 5억 이상은 떨어지겠네요? 많이는 됐고, 2억만 줘요. 오늘 스킬북 산다고 돈을 좀 써서."

"맡겨놓은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나 때문에 공돈 벌었는데, 그 정도는 줄 수 있잖아요?"

결국, 최시현이 항복했다.

"알겠어요. 줄 테니까 이제 제발 가요."

그녀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오오! 오랜만에 짭짤한데!?"

자신에게 떨어진 배당금을 받고, 추가로 최시현에게 또 돈을 받은 강현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됐으니까 얼른 가죠."

포탈을 통해 악당 비어로 돌아오고, 긴장이 풀린 최시현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소고기나 먹으러 가죠. 맥주도 한잔하고."

"지금 작업 거는 거예요?"

"작업은 무슨. 싫으면 마요! 혼자 먹으러 갈 테니까."

강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최시현이 다급히 1층으로 내려왔으나 그곳에는 그릇을 닦는 바텐더밖에 없었다.

"강현은?"

"갔습니다."

"예의상이라도 한 번 더 물을 줄 알았더니..."

"뭔가 소고기 어쩌고 중얼거리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 굉장히 신이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텐더의 말에 최시현의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미친놈이네. 하하..."

최시현은 앞으로 절대 강현을 만나지 않았으면 했지만,

'한 번쯤은 괜찮을지도..?'

왠지 한 번 정도라면 만나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40화 각자의 가치(1)

140. 각자의 가치(1)

-강현 핸드폰 맞나요?

"예. 맞습니다. 누구세요."

-야! 나 민수야. 민수.

민수라는 이름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민수? 그게 누군데?"

-김민수 몰라? 파천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잖아. 너 동창회 나올 생각 없냐? 얘들이 보고 싶다고….

"안 갑니다."

강현이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전화를 끊었다.

"동창회는 지랄이야. 연락 한번 없던 것들이."

강현이 욕지거리를 내뱉을 때였다.

전화가 다시 울렸다.

"아, 시바. 동창회고 운동회고 안 간다고!"

-저는 강현 씨와 동창회를 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만.

전화를 건 사람은 신태길이었다.

"크흠, 미안해요. 자꾸 이상한 전화가 걸려와서."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확인 정도는 하시죠.

"알겠어요! 실수할 수도 있지..."

민망했던 강현이 괜히 큰소리를 쳤다.

"그나저나 왜 전화했어요?"

-엊그제 암시장 다녀오시지 않았습니까?

"예. 그랬죠."

-그때 제가 분명 사고만 치지 말라 했고, 강현 씨는 알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랬습니다.

"예예. 그래서요?"

-이미 이쪽 바닥에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습니다. 암시장 결투장에 미친놈이 나타났다고.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났어요? 재미있네요."

-재미? 지금 이게 재미있다고 할 상황입니까?

"뭐 어때요? 큰일 난 것도 아니고."

-하아... 제발 조용히 좀 다녀 주십시오. 강현 씨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어떻게 사건이 끊이지가 않습니까?

"내가 명탐정인가 보죠."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알겠어요. 알겠어. 맨날 화를 내고 그러시네. 그러다가 뒷목 잡고 넘어갑니다."

-제발, 정말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알겠다고요! 바쁘니까 끊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절대로 사고치지….

강현은 신태길의 말을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거 잔소리 더럽게 심하네."

쪼아대는 솜씨가 딱따구리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무슨 일 있어요?"

짜증을 내는 강현을 보고 안유성이 다가왔다.

"아니야. 그보다, 너 어디 가냐?"

"던전 가는데요."

"그래? 누구랑?"

"혼자요. 뭐 해보고 싶은 게 좀 있어서."

안유성의 말에 강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다. 그래..."

요즘 들어서 다들 바쁜 것 같았다.

강현 패거리라 할 수 있는 간부진이 길드 사무실에 거의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

그저 문자로 근황 보고를 계속해올 뿐이었다.

-강현님. 오늘은 혼자서 던전을 돌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그래. 잘 다녀와.

하루 이틀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일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강현님. 오늘도 던전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조심하고.

-강현님. 오늘도 던전에 가겠습니다.

-그래. 조심해. 다음에 보자.

계속해서 짧아지던 문자는 최근에 이르러서 아주 극단적으로 변해버렸다.

-던전갑니다.

딱히 문자 내용으로 뭐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단지 조금 걱정될 뿐이었다.

"야야! 잠깐만 기다려봐."

강현이 사무실을 떠나려는 안유성을 붙잡았다.

"왜요?"

"요즘 성아 뭐 하는지 아냐?"

"던전 돌잖아요. 몰랐어요?"

"아니. 알지. 그런데 그게 벌써 며칠 째야?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강현의 말에 안유성이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누나가 최근에 안 좋아 보이긴 했지.'

순간 안유성은 무언가를 떠올렸다.

-폐관 수련이요? 21세기에?

-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요?

-제 쓸모를 찾을 생각입니다.

며칠 전 신성아가 스쳐 지나가듯 한 말이었다.

'농담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아마 바노 쿨사와의 전투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이 제법 충격이었던 것 같았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이런저런 생각이 계속 밀려왔지만 안유성은 무시했다.

자신의 역할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그런 일조차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에게 베풀어줄 호의는 없다.

"음, 아무 일도 없을걸요?"

"없으면 없는 거지. 없을걸요는 뭐야?"

"그렇게 걱정되면 형이 직접 가보지 그래요?"

"으음, 그럴까..."

강현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찾아가지 않은 것은 조금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얘도 사생활이 있는데 괜히 내가 찾아가고 그러면 그렇잖아."

"형이 언제 남을 그렇게 배려했다고 그래요?"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막 내뱉네."

정곡을 찌르는 말에 강현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형한테 새벽마다 문자 오죠?"

"어. 던전 간다고 문자 보내더라."

"그럼 그 시간에 한 번 찾아가 봐요. 누나는 아마 그때쯤에 항상 집에서 나올 거예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감이죠. 감."

안유성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 잘났다. 새꺄."

"아무튼, 저는 바빠서 갑니다. 가보든지 말든지. 형이 알아서 해요."

그 말을 끝으로 안유성은 사무실을 떠났다.

"으음... 가봐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강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됐다! 알아서 하겠지. 성아가 애도 아니고."

**

-따르르르르...

시끄러운 종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침대에서 눈을 뜬 신성아는 시계를 조작해 알람을 껐다.

"후우우..."

잠에서 깨어난 신성아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스트레칭이었다.

아침마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깨우고, 그날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것은 그녀의 습관 중 하나였다.

"던전, 가야겠지."

최근 며칠 동안 그녀의 생활은 아주 단순했다.

던전 그리고 집.

눈을 뜨자마자 던전을 갔다가, 늦은 시간이 되면 돌아와 곧바로 잠자리에 든다.

길드원들과 함께했다면 던전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도 가능했으나,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가 혼자이고 싶은 이유.

그것은 자신을 짓누르는 고민의 해답을 찾고 싶어서였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오늘도 어김없이 상념이 밀려왔다.

'내 쓸모, 가치를 찾아야 해.'

이제 강현에게 자신이 필요한 것 같지 않았다.

강함의 차원이 다르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강현과 벌어진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자신이 한발 걸어가면, 강현은 어느새 다섯 걸음. 열 걸음 앞서가 있는 느낌이었다.

-쏴아아아.

차가운 물을 맞으며 머리를 비워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이다.

"안유성 씨는 괜찮겠지."

빠르게 강해지는 강현.

안유성도 아마 비슷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유성과 자신은 다르다.

안유성은 싸움에 타고난 천재.

잠시 주춤하는 것 같아도, 금세 엄청난 성장을 이뤄내며 강현을 쫓아갈 것이다.

그러고 나면 자신만 남는다.

늘 그랬듯이.

"또 혼자인가..."

신성아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돌이켜 보면 자신은 놀 혼자였다.

어릴 적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

항상 술에 절어 살며, 학대를 일삼던 아빠.

아빠가 죽고 고아가 된 이후에는 늘 혼자였다.

고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한 자신을 거둬주는 친척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어.

보란 듯이 성공해서 자신을 버린 이들 앞에 당당하게 나타나리라.

그렇게 다짐했으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회는 냉혹했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다.

한때는 편하게 돈을 버는 방식에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용납할 수 없었다.

무너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나름 노력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더 미친 듯이 던전에 드나들었다.

던전 사태 초창기.

아직 아무런 능력도 없던 시절.

여성의 몸으로 삶과 죽음이 오가는 던전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몬스터들은 강했고, 사람들은 잔인했다.

던전 안에서 모진 일을 당할 뻔한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거의 매일이 죽음과 줄타기를 하는 아슬아슬한 나날이었다.

강현을 만나기 전까지의 삶은 그러했다.

한없이 치열했고, 고독했으며, 위태로웠다.

-저는 신성아라고 합니다.

-강현입니다.

그러던 와중 만나게 된 강현.

제법 오래전이지만 신성아는 아직도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강현의 첫인상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미친놈'이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광기는 주위 사람들을 압도했다.

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 또한 특이한 점이었다.

마치 '다크 히어로'와 같은 남자.

만화 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항상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며 혼자 시간을 보내왔던 신성아는 단번에 강현에게 매료됐다.

강현과 함께라면 한낱 어릴 적 꿈이라 치부했던 영웅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이루기는 했어. 완벽하진 않지만."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강현과 함께한 그 시간은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들이었다.

유명인이 됐고, 많은 돈을 벌었으며, 누군가의 영웅이 되기도 했다.

자신의 바람처럼 충분히 성공했다.

'그래. 여기서 만족하고 끝내자.'

더 이상 강현을 따라가는 것은 욕심이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해지는 적들. 놈들 앞에서 자신이 있어봤자 강현에게 방해만 될 뿐이다.

그런 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강현을 떠나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다.

결심한 신성아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했다.

해조차 뜨지 않은 새벽.

조용한 거리에 신성아가 걷는 발소리만이 울렸다.

"돌아가면... 한동안은 집에만 있는 거야."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미뤄왔던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실컷 보고,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을 것이다.

돈은 충분했고, 부족해지면 그때는 다시 던전을 돌면 된다.

'그래. 그거면 된 거야.'

마침내 집에 도착한 신성아가 현관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다.

이제 이 손잡이만 당기면, 그래서 집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게 끝이다.

"..."

현관문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 문을 열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열어. 그리고 들어가는 거야.'

아무리 힘을 줘도 당길 수 없었다.

-파가각!

너무 강하게 힘을 준 탓에 현관문 손잡이가 그대로 부서졌다.

"하아..."

한숨을 내쉰 신성아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늘 강현과 함께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습관이 된 행동이었다.

"내가 뭐하는 거지."

신성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릴 때였다.

"그러게. 너 지금 뭐하냐?"

그녀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뭐하고 있어?"

"이제 막 던전으로 출발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문손잡이가 던전 보스라도 되나 보네. 아주 작살을 내놨어."

강현의 농담에도 신성아의 굳은 얼굴은 풀어질 줄 몰랐다.

"내가 돌려서 말 못하는 거 알지?"

"예."

"고민이 뭐야?"

"고민은... 딱히 없습니다."

신성아의 대답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딱히 없는 거 좋아하네. 내가 멍청해 보여도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아."

"아닙니다. 정말 없습니다."

신성아는 강현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말할 수 없어.'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구구절절 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지금까지 버텨온 자신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래? 그러면 같이 드라이브나 하자."

"예?"

뜬금없는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당황했다.

"너 오토바이 있잖아. 그거 타자고."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나 오토바이 한 번도 안 타봤거든. 왜? 싫어?"

"싫은 건 아닙니다만..."

"그럼 됐네. 가자."

강현이 신성아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예..."

신성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이크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평소처럼 헬멧을 쓰던 도중 신성아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강현님. 제가 헬멧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됐어. 난 필요 없으니까."

"위험합니다만..."

"내가? 위험해?"

생각해보니 강현이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정말 위험한 것은 강현이 아니라 강현과 부딪힐 무언가이다.

"그래도 헬멧이 없으면 불법입니다."

"혹시나 경찰한테 걸리면 신태길 팀장이 알아서 해주겠지."

신태길 팀장은 만능이었다.

"됐으니까 얼른 가자!"

"예. 그럼 출발…."

"잠시만! 깜빡할 뻔했네."

강현이 재킷을 뒤적거리더니 맥아더 선글라스를 꺼냈다.

"어때? 간지 나지?"

"아저씨 같습니다..."

신성아의 솔직한 반응에 강현이 미간을 좁혔다.

"출발이나 해."

"예.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꽉 잡으십시오."

신성아가 씨익 웃으며 힘차게 스로틀을 감았다.

141화 각자의 가치(2)

141. 각자의 가치(2)

"이야! 이거 끝내주네!"

안면을 때리는 바람을 느끼며 강현이 환호했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신성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글쎄!? 일단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강원도 어때!?"

바람에 옷이 쉴 새 없이 펄럭였다.

귓가를 때리는 엄청난 소음.

일반인이라면 대화가 힘든 상황이었겠지만, 인간의 육체를 뛰어넘은 둘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제대로 밟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

"과속 딱지 끊깁니다!"

"신태길 팀장이 알아서 할 거야!"

마법의 단어 신태길. 그는 만능이었다.

"알겠습니다!"

신성아가 더욱 속력을 올렸다.

때마침 오늘은 월요일이다.

서울 밖으로 나가는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차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너도 뚜껑 벗는 게 어때!?"

갑작스러운 강현의 제안에 신성아가 당황했다.

"위험합니다!"

"누가!?"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멈칫했다.

'아닌가..?'

헬멧 착용은 매우 당연한 것이다.

그래야만 불시의 사고가 일어났을 때 운전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일반적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능력자.

강현처럼 몸에 바늘도 들어가지 않는 괴물은 아니었지만, 자신도 어지간한 충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충격을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사고가 일어나는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몸을 피할 동체 시력과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괜찮겠습니까!?"

"괜찮다니까! 벗어! 시원해!"

고민하던 신성아가 결국 헬멧을 벗었다.

미친 듯이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 느껴졌다.

'시원해...'

처음 느끼는 감각.

항상 헬멧을 착용했기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어푸, 어후! 으어어! 머리!"

그때였다.

뒤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돌아보니 자신의 머리카락에 허우적대는 강현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다시 쓰겠습니다."

"돼, 됐어! 그대로 가!"

강현이 신성아의 머리칼을 정리해서 붙잡았다.

"가자!"

차량이 드문드문 있는 고속도로.

신성아는 정말 오랜만에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녀의 얼굴에 걸쳐져 있는 강현의 맥아더 선글라스.

강현이 썼을 때는 양아치스러움을 부각하는 아이템이었지만, 신성아가 쓰자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여기서 총만 쏘면 딱인데! 완전 신날 것 같지 않아!?"

가끔 강현의 헛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다음 휴게소에서 쉬자!"

**

분명 출발했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그런데 휴게소에 도착하고 보니 어느새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강현은 휴게소의 별미라고 할 수 있는 통감자와 맥반석 오징어를 사 왔다.

"캬하! 시원하다!"

당연히 맥주도 함께였다.

"너도 한잔할래?"

"운전해야 합니다."

"한잔 마시고 여기서 하루 자고 가면 되지."

"휴게소에서 말입니까...?"

"안될 거 있어?"

"그냥 사양하겠습니다."

"그러던지 뭐."

피식 웃은 강현이 맥주를 마시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신성아는 오징어 다리를 하나 씹으며 멍하니 주변을 구경했다.

"벌써 가을이네."

"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때가 가을이었나?"

"그때는 한여름이었습니다."

"그래?"

"예. 정확히는 8월 10일입니다."

"어... 그렇구나."

설마 날짜까지 알고 있을 줄 몰랐던 강현이 당황했다.

"기분은 좀 어때?"

강현의 물음에 신성아가 미소를 지었다.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냐."

강현도 신성아를 마주 보며 웃어 주었다.

"지금 하는 고민.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너무 혼자서 무리하지 마."

"예."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 님.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제가 지금보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 생각하십니까?"

더욱 강해지는 방법.

강현은 최근에 자신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흐음, 강해지는 데 필요한 거라. 재능과 노력이겠지."

강현의 대답에 신성아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재능은 어쩔 수 없는 거고, 노력은 지금 너도 충분히 하고 있잖아?"

신성아가 잠시 고민했다.

"어느 정도는... 예. 노력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그럼 그걸로 된 거 아니야? 뭐가 부족해?"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싶습니다. 아니, 강해져야만 합니다."

신성아의 말에 강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최근 전투에서 활약을 못 한 것 때문에 그래?"

고개 숙인 신성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을 긍정이라 받아들인 강현이 생각에 잠겼다.

'반다레코와 싸울 때부터였나?'

전투에서 신성아의 역할이 줄어든 것 같기는 했다.

어지간한 던전에서는 위험할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B등급 보스 정도는 돼야 위기라는 것이 발생했는데, 그때도 신성아의 역할은 한정적이었다.

그 외에도 굵직한 사건이 많이 있었지만, 신성아가 제대로 나설 만한 상황이 없었기는 했다.

'그래서. 그게 잘못된 건가?'

강현은 전혀 신성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너 일반 길드에서 B등급 보스를 공략하는데 몇 명이 가는지 알아?"

"적게는 20명, 많으면 50명 정도가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게 우르르 몰려가도 꼭 한두 놈씩 뒤지잖아. 그에 반해 우리는 몇 명이지?"

"4명입니다..."

"그럼 된 거 아냐?"

"제가 없이 3명에서 갔더라도 충분히 공략했을 겁니다."

"그래서 너는 쓸모가 없다?"

신성아가 또다시 침묵했다.

잠시 핸드폰을 확인하던 강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예?"

갑작스러운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당황했다.

"가자고. 갈 데가 있어. 이 주소 보이지? 이리로 달려."

강현이 지도를 켜서 보여준 곳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산골이었다.

"여기는 왜..."

"아, 글쎄 가자니까! 얼른!"

"알겠습니다."

**

한 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강원도의 시골 마을이었다.

신성아는 어째서 강현이 이런 곳에 오자고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보자... 이쯤인 것 같은데..."

강현은 계속 지도를 확인하며 어딘가로 이동했다.

"아! 여기네."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

"던전...?"

"어. 던전이지."

그곳에는 지겹도록 봐온 던전의 입구, 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신성아가 정보를 확인하자 D등급 던전으로 확인됐다.

"강현님. 여기는 갑자기 왜..?"

"여기에 우리 길드 공략 8팀이 있거든."

강현의 말에 신성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공략 8팀이라면...'

가장 최근에 들어온 길드원들로 이루어진 던전 공략팀이다.

길드 내에서 가장 낮은 레벨을 가진 능력자들.

팀장과 부팀장을 제외하고 전원이 레벨 40 이하로 이루어진 팀이었다.

"자자, 됐으니까 일단 들어가."

강현의 뒤에서 신성아를 재촉했다.

"알겠습니다."

신성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던전에 들어섰다.

**

"야! 이쪽 막아!"

"박성훈! 진짜 죽고 싶냐!? 정신 똑바로 안 차려!?"

"그쪽으로 간다!"

던전에서는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강현과 신성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전투에 방해가 될 수도 있기에 자신들이 왔다는 것은 알리지 않은 채였다.

"팀장님. 3조가 위험합니다! 도와주십시오!"

"거기만 위험해? 뒤지면 본인 손해야. 알아서 버텨!"

"시발! 뭐 이딴 길드가 다 있어?"

"억울하면 나가던가! 아니면 레벨업 해서 네가 팀장 해. 인마!"

현재 배데스 길드의 팀장은 대부분 과거 수호자 길드 출신이다.

8팀의 팀장, 권지섭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본래 인류를 수호한다는 이름 아래 모인 굉장히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리틀 강현이 되어 있었다.

"어때?"

사력을 다해서 싸우는 길드원들. 그들을 보며 강현이 물었다.

강현의 뜬금없는 물음에 신성아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그거 말고."

"다른 게 있습니까?"

"쟤들 겁나 약하지 않아?"

"그렇습니다..."

당장 저기에 신성아가 뛰어들면, 단검 한 자루만 쥐여줘도 대량 학살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 상대로 길드원들은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분명 약하지. 그런데 내가 왜 길드에 받아들였을까?"

강현은 지금도 모든 길드원을 직접 면접을 통해 뽑고 있었다.

그중에는 이미 레벨이 높고 강한 능력자도 있었고, 지금 저 길드원들처럼 낮은 레벨의 능력자도 있었다.

"길드를 운영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것도 맞지. 세력을 키워야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 하니까. 그런데 그럴 거면 애초에 강한 능력자만 받으면 더 쉽지 않았을까? 아니면 무작정 사람을 많이 받아들이거나."

"으음..."

강현의 말대로였다.

그는 무조건 고레벨의 능력자만 받지 않았다.

강현의 면접에서 떨어진 이들 중에는 상위권의 길드에 바로 들어갈 만한 강한 능력자들도 제법 있었다.

"나는 결과론주의자고, 성악설을 믿고, 염세주의에 찌든 인간이긴 하지만 말이야. 사람은 저마다 가치 있다고 생각해. 물론, 그 가치가 전부 같지는 않겠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으음...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서 강현이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진의를 파악하기 힘든 말에 신성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오랜만에 머리 쓰려니 골 아프네. 쉽게 말하면! 나는 노력하는 인간이 마음에 든다 이 말이야. 내 경험상 그런 인간은 어디를 가든 최소한 제 역할은 하거든."

"지금 한 말씀이 아까 전의 가치와 연결되는 겁니까?"

"대충 알아들어."

"예."

강현이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각자가 가진 가치는 모두 다르고, 내 길드에 들어온 이상 그 가치는 길드장인 내가 판단한다."

신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아. 현재, 네 가치는 길드 내의 누구보다 높아. 중요도로 따지면 나 다음이란 말이지."

"..."

"그러니까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란 말이야."

강현의 말에 신성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보다 약한 쟤들도 저렇게 발악하면서 강해지려 하는데, 쟤들이 트럭으로 와도 이길 인간인 네가 그렇게 풀이 죽어있으면, 쟤들 노력이 뭐가 돼?"

"저들은 강현 님과 함께 다니는 길드원이 아니지 않습니까."

"길드에 들어온 이상 다 내 식구야. 중요도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가족 같은 거란 말이야. 그리고 너는 진짜 가족이나 다름없고."

"지금 한 말씀들 약간 모순되지 않습니까?"

신성아의 물음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예."

신성아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고개 들고! 당당하게 다녀! 지금도 넌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어. 우리 팀에서 그나마 정상적으로 판단하는 게 너 말고 누가 있냐."

안유성은 판단이 빠르고 정확하나, 무언가 핀트가 어긋나 있다.

윤나래는 덜렁대는 성격 탓인지 오더에는 딱히 소질이 없었다.

강현은 결정적인 순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을 내리는 자질이 뛰어난 편이기는 하나, 기복이 너무 심하다.

"결과적으로 팀을 총괄하고 균형을 맞추는 건 너란 말이야."

"예...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래. 그리고 너 아니면 누가 내 거지 같은 성격을 받아주겠냐? 옆에서 심부름해주고, 멘탈 케어해주고... 네가 없었으면 나는 아직도 미쳐서 던전만 돌고 있었을지도 몰라."

강현은 진심이었다.

만약 신성아와의 우연한 만남이 없었다면, 그녀가 함께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길 끝에는 완전히 미친 살인귀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기죽지 말고 어깨 펴. 너 히어로 좋아하잖아. 히어로가 그렇게 풀이 죽어있으면 안 되는 거 아냐?"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피식 웃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가족인데 돕는 거지."

때마침 전투가 끝나고 휴식을 취하는 길드원들이 보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인사나 할까?"

그 순간.

8팀의 팀장인 권지섭이 하는 말이 들려왔다.

"야! 뭘 이 정도로 지치고 그래? 나 때는 말이야! 온몸에 뼈가 부서졌는데, 길드장이 그걸 손으로 맞춰서 치료하고 그랬어."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다가가던 강현이 몸을 숨겼다.

"그 악마 같은 새끼가 실실 웃으면서 뼈를 만지작거리는데, 마취도 안 하고 했다니까!"

권지섭의 말에 길드원들이 불신이 가득 들어찬 표정을 지었다.

"어? 이것들 표정 봐라. 안 믿네? 우리 길드장. 소문보다 더 또라이다. 방송에서 실실 웃으면서 나오는 거 그거 다 가식이야. 너희들은 면접만 봐서 잘 모르지? 같이 사냥가면 진짜 그런 미친놈이 없다고. 완전히 정신 나간 새끼라니까!"

순간 길드원들의 표정에 두려움이 가득 들어찼다.

'무서울 만하지. 흐흐.'

그 반응 만족한 권지섭이 속으로 웃었다.

"그래그래. 그러니까 내가 팀장인 걸 고마워하라고. 그 악마 같은 놈이랑 같이 다니지 않는 걸 고마워하라! 이 말이야."

한참을 떠들던 권지섭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길드원들의 표정이 갈수록 어두워진 것이다.

"뭐야? 다들 표정 풀어. 너희들한테는 안 그럴 테니까 안심해도 돼."

그때 한 길드원이 손가락을 들어서 자신을 가리켰다.

아니, 자세히 보니 자신의 뒤를 가리키고 있었다.

"응?"

권지섭이 뒤로 돌아서려는 순간,

"지섭아... 안녕..?"

그의 귓가로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끄아아아아아아!"

그날 권지섭은 거의 1년 만에 강현의 접골 시술을 다시 체험할 수 있었다.

142화 마력장(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