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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화. 승급전(8) >

그림자 교환으로 이동한 나는 곧바로 전광석화부터 발동시켰다.

그리고는 지체 없이 사제를 찾아 그쪽으로 돌진했다.

"······!"

"······!"

리암이 있던 위치는 무리의 중심부.

그 뒤쪽으로 다섯 명의 기사가 사제를 에워싼 채 지키고 있고, 그 바깥으로 20명 정도의 기사들이 더 큰 원을 그린 채 대기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사제는 다섯 흑기사의 경계 안쪽에서 손바닥만 한 구슬을 든 상태로 무언가를 영창 중이었다.

'사제만 죽인다.'

악마의 눈으로 누가 팔라딘이고 누가 흑기사인지 확인할 겨를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창을 찔러 넣을 뿐.

푹!

녀석들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사제의 목만 딸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방심하고 있던 건 아니군.'

내 창이 사제의 목을 관통하자마자 다섯 개의 검이 나에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 정도 반응 속도라면 미리 경계를 하고 있었다는 것.

다만 스텟이 100을 넘는 초인의 세계에서는, 0.1초의 반응 속도 차이만으로도 치명적이었다.

[발리노르인 '아이작 머니쿠츠 드 데이커'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사제를 죽이는 데 성공한 나는 곧바로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이걸로 세 번째 방향까지 클리어.

이제 한 명의 사제만 더 죽이면 된다.

"사자님!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됐습니다!"

"쿠오오오오오!"

아이작의 외침과 동시에 북쪽에서 몬스터의 포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이작에게 고개를 끄덕인 채 바닥을 박찼다.

오늘 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할 것이다.

서걱!

[킬 수 현황]

[1위. '렌' 52,111킬]

[2위. '고군백' 1,584킬]

[3위. '이청명' 1,502킬]

[4위. '카롤' 1,447킬]

셋째 날의 몬스터 웨이브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몬스터의 숫자는 첫날에 비해 50% 정도 늘었지만, 한쪽 성문으로밖에 쳐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렌님."

"수고하셨습니다."

함께 사냥을 나섰던 플레이어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고 북쪽 성문 안으로 들어오자, 전날과 달리 밝은 표정의 병사들이 보였다.

오늘의 몬스터 웨이브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모두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오늘도 바로 나가실 겁니까?"

곁에서 피를 닦으며 성문 안으로 들어오던 고군백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뿌리를 뽑아 놓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서요. 다녀올 테니 오늘도 신성석 좀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오늘 병사들이 전투를 치르지 않았으니 성문 수리도 진행해 달라고 하면 좋을 것 같군요."

"네, 알겠습니다. 아이작에게 전달해 놓지요. 그런데 성문은 왜······?"

"혹시 모르니까요. 부상병들 회복에도 신경 좀 써달라고 해주세요. 저는 다녀오겠습니다."

고군백의 그림자에 표식을 남긴 나는 다시 북쪽 성문을 빠져나갔다.

[신성석 사수까지 남은 시간 : 109:51:33]

아직 경기가 종료될 때까지 4일 넘게 남아 있었지만, 오늘 안에 남은 한 명의 사제를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녀석들이 그사이에 사제를 추가해 오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위험 요소가 될 만한 것들은 모두 지워버리고 싶었다.

'숨기 전에 서둘러야 해.'

녀석들은 더 이상 나를 맞상대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벌써 세 명의 사제를 죽였으니까.

그래서 몰래 숨어 있다가 기습적으로 나타나 몬스터 웨이브를 소환하고 다시 숨기를 반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녀석들이 북쪽에 있는 아리투아포 산맥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

이제 막 몬스터 웨이브가 끝났기에, 서두른다면 녀석들의 뒤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은 유독 트롤의 비율이 높았지.'

지도로 트롤의 영역을 확인한 나는 빠르게 내달렸다.

북쪽 성문에서 엄청나게 죽여댄 덕분인지, 아리투아포 산맥을 돌아다니는 몬스터의 숫자가 별로 없었다.

그들의 먹잇감인 동물들만 간간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내가 목표로 했던 트롤의 영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벌써 빠져나갔군.'

밟힌 덤불이나 꺾인 나뭇가지를 통해 어둠의 교단 녀석들이 이곳에 있었다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귀 기울여봐도 몬스터나 동물의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이동한 지 제법 된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주 미세하게나마 남아 있는 흔적들을 통해 녀석들이 이동한 방향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초감각이 아니면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흔적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찾을 수 있어.'

흔적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녀석들을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체 스텟이 낮은 사제가 있기 때문에 중간에 흔적만 끊기지 않는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키륵키륵."

"키륵."

녀석들 중에 뛰어난 길잡이가 있는지, 곳곳에서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을 최대한 피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존재하는 몬스터의 사체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추적해 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거겠지.

검에 베여 죽은 것과 송곳니에 물려 죽은 것은 확연하게 다른 법이니까.

'어디로 가는 거지?'

흔적은 아리투아포 산맥을 서쪽으로 횡단하고 있었다.

가는 경로로 유추해 보자면 아마 아리투아포 산맥을 넘어, 그 밑에 있는 둠베스 산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

그때 순간적으로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무심코 넘겼을 정도로 무척 작은 소리였다.

'녀석들이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녀석들의 대화 소리도 점점 뚜렷해져 갔다.

그중에는 귀에 익은 목소리도 있었다.

"피곤하시겠지만 조금만 힘내십시오, 사제님."

"사도님들이 열 분이나 계신데, 꼭 이렇게 도망가야 할까요?"

"나자란 산에서도 사도가 여섯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이교도에게서 제레미 사제님을 지켜드리지 못했죠. 둠베스에서는 루이스 사도가 그 이교도에게 죽었고, 리암 사도님은 사라진 이후로 지금까지 연락이 안 되는 걸로 보아 신의 품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이자벨라 사제님까지 잃게 된다면 저희는 더 이상 신성석을 깰 방법이 없어집니다."

녀석들은 내 얘기를 하면서 도망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림자 표식 스킬에 대한 압박감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하긴, 나라도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 상대방이 그림자 표식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이자벨라라는 사제가 마지막인 모양이군.'

신성석을 깰 방법이 없다는 말에서 추가로 사제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곳에 있는 저 사제를 죽인다면 사실상 몬스터 웨이브는 끝이라는 것.

'승급이 멀지 않았어.'

문제는 열 명의 팔라딘 사이에서 어떻게 저 사제를 죽이냐는 것이었다.

'지금은 안 돼.'

조금만 있으면 아리투아포 산에서 내려와 탁 트인 평지로 들어선다.

거기서 싸우는 것 만큼은 피해야 했다.

은엄폐물이 없어 녀석들에게 둘러싸이면 도망칠 공간이 없다.

그러다가 위험에 처해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면 녀석들을 완전히 놓치게 될 확률이 높았다.

'아리투아포 산을 내려가기 전에 처리하느냐, 아니면 둠베스 산을 들어왔을 때 처리하느냐. 결국 둘 중 하나군.'

아리투아포 산에서 잡는 것과 둠베스 산에서 잡는 것 둘 다 장단점이 있었다.

아리투아포에서는 적어도 녀석들을 놓칠 가능성은 없다는 것.

대신 뒤쪽을 경계하며 가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에 치명적인 기습을 하긴 어려웠다.

반면에 크게 돌아서 둠베스 산에 먼저 자리를 잡으면 녀석들도 예상하긴 힘들 터.

다만 녀석들의 경로가 둠베스 산인지 확신하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이 어디쯤이지?'

나는 서둘러 바닥에 지도를 펼쳤다.

아리투아포 산맥의 서쪽을 넘어, 5분 정도 지나면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아리투아포 산맥을 완전히 내려오는데 1시간 정도 소요될 거고.

둠베스 산과 아리투아포 산맥 사이의 평원은 대충 10킬로미터 정도 거리니까 시간적으론 여유가 있었다.

둠베스 산으로 오르면 경사까지 있으니, 녀석들이 평원으로 내려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해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 거리라면 녀석들이 둠베스 산으로 오지 않더라도 따라잡을 수 있기도 하고.

'둠베스 산으로 가자.'

나는 곧장 지도를 품속에 넣으며 바닥을 박찼다.

2시간 정도 크게 한 바퀴를 돌며 전속력으로 아리투아포 산을 내려온 나는 곧장 둠베스 산의 초입에 숨어들었다.

[<스킬:그림자 표식>]

[액티브]

[재사용 대기 시간 : 03:27:19]

10분 정도 지나자 저 아래의 평원에서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보였다.

다행히 녀석들은 둠베스 산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곳이라면 사제를 죽일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녀석들이 어디로 길을 잡을 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몬스터 영역의 경계선을 따라 움직이겠지.'

그게 리스크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방법일 테니까.

나는 계속해서 어둠의 교단 녀석들과 일정 거리를 떨어트린 채 앞서 나갔다.

앞으로 3시간 후.

'둠베스 산에서 끝을 봐야겠어.'

그림자 표식의 쿨타임이 끝나는 순간, 사제를 죽일 것이다.

* * *

둠베스 산의 중심부.

어둠의 교단 열두 개의 검 중 일인, 해럴드는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혹시 함정은 없는지 전방을 살펴야 했고, 뒤따르는 이는 없는지 후방도 체크해야 했으며, 거기다 언제든 형제들에게 검을 날릴 준비까지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까 잡은 검자루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이자벨라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한시름 놓아도 되지 않을까요? 아무리 이교도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둠베스 산으로 이동한 것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할 거예요."

수많은 사도들이 지키고 있음에도 벌써 세 명의 사제가 죽었다.

다음 표적이 자신이라는 걸 이자벨라 사제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저런 얘기를 하는 건.

'우릴 배려하기 위함이겠지.'

해럴드를 포함한 열 명의 팔라딘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단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은 채 호위를 하다 보니, 정신력 소모가 엄청났다.

그 모습을 딱하게 여긴 사제, 이자벨라가 해럴드에게 조금은 편안히 있을 것을 주문했지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됩니다, 사제님. 어제도 불시에 나자란 산으로 이동했지만, 습격을 당했습니다. 그 이교도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를 저희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녀석은 엄청나게 빠르고, 강했다.

그런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 창을 찌른다면 집중하고 있지 않은 한 막아낼 수가 없었다.

이미 어제 한차례 겪지 않았던가.

여섯 명의 팔라딘이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결국 제레미 사제 한 명을 지켜내지 못했다.

리암 사도님과 모습이 뒤바뀌고 고작 0.1초만에 반응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위치를 맞바꾸는 마법이라고 했나요? 사도님들과 비견될 정도의 강자가 어떻게 그런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는 거죠?"

이자벨라의 물음에 해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다만, 헤르세벨그의 주민들이 믿는 태양신의 전사가 아닐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태양신의 전사요?"

이자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예. 그의 수준은 리암 사도보다 뛰어났습니다. 한마디로 마스터급이라는 뜻이죠. 그 정도의 강자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날 리 없습니다. 어둠의 신께서 저희에게 '헬리퍼'님을 보내주신 것처럼, 태양신이 저들에게 내려준 전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네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이 땅에 신의 권속이신 필로타누스님만 강림한다면, 태양신도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직접 강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말입니······."

쿠구구구구구구궁-

그때였다.

무수한 진동에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한 해럴드는 곧바로 이자벨라의 앞을 막아섰다.

"취이이이익! 취이이익!"

그와 동시에 전방에서 들리는 몬스터들의 포효 소리.

주위에 있던 팔라딘들도 모두 긴장한 채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이교도다!"

"모두 전투 준비!"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방향에서 이교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취이익! 가만두지 않겠다, 인간!"

그 이교도의 뒤에서 엄청난 숫자의 뿔 오크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순간 해럴드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 이교도 놈이 어떻게 알았는진 모르지만, 자신들이 향하는 방향에서 몹 몰이를 하며 나타난 것이다.

"모두 뿔 오크의 돌격에 대비하라!"

해럴드가 큰 소리로 외치며 속으로 읊조렸다.

저 개새끼.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욕을 입에 담아본 적이 없었던 해럴드였다.

* * *

녀석들의 주위를 배회하던 나는 그림자 표식의 쿨타임이 끝나는 순간, 뿔 오크의 영역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피의 강화 특전이 켜지자마자 뿔 오크들을 어둠의 교단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유인했다.

"취익! 절대 놓치지 않겠다!"

동족이 죽었기 때문인지, 뿔 오크들은 눈이 뒤집힌 채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녀석들을 피해 경사 아래로 달리자, 저 멀리서 어둠의 교단 녀석들이 보였다.

뿔 오크들의 포효 소리를 들은 것인지, 모두들 전투 태세를 갖춘 채 대기하고 있었다.

'빙고.'

마침 태양이 슬슬 저물어 가는 상황이라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 상태로 뿔 오크와 팔라딘들을 싸움 붙여 놓고 표식을 등록하면 될 것 같았다.

"모두 전투 준비!"

거대한 방패를 마치 벽처럼 쌓는 팔라딘들.

콰지지지지직!

나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방패 벽에 돌진했다.

카가가가가강!

벽력섬전을 겨드랑이에 고정시키고 녀석들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지만, 팔라딘들은 몇 발자국 뒤로 밀려났을 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교도여! 너를 반드시 신의 곁으로 보내주겠다!"

내 돌진을 막은 팔라딘들이 방패벽을 해제하며 내게 검을 휘둘렀다.

나는 녀석들의 공격을 피하는 것에 집중하며 계속해서 좌우로 이동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발리노르인 '롤란스'의 그림자에 표식을 남기시겠습니까?]

[발리노르인 '해럴드'의 그림자에 표식을 ······.]

그러자 무수히 뜨는 알림창들.

하지만 뿔 오크들이 바로 뒤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리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쯧. 일단 빠져야겠군.'

그래서 일단 몸을 빼려 할 때였다.

띠링!

[발리노르인 '이자벨라'의 그림자에 표식을 남기시겠습니까?]

'표식 등록!'

운이 좋게도 몸을 빼던 순간에 사제의 그림자를 밟을 수 있었다.

표식을 등록한 나는 그대로 측면으로 빠지며 뿔 오크와 팔라딘의 사이를 벗어났다.

'침묵의 망토.'

그리고는 곧장 근처 나무 뒤로 숨으며 은신을 사용했다.

캉! 카가가강! 카카카강!

대규모 뿔 오크 군단과 팔라딘들의 방패벽이 부딪히며 엄청난 쇳소리를 만들어 냈다.

"취익! 인간! 방금 도망치던 그 인간을 내놓아라!"

"동족의 원수! 취익! 동족의 원수를 죽여야 한다!"

"한낱 오크 따위가 신의 종들을 핍박하다니! 신을 대신하여 우리가 네놈들에게 철퇴를 내리겠다!"

둠베스 산의 중턱에서 순식간에 난전이 펼쳐졌다.

'엄청 잘 싸우네.'

일곱의 팔라딘과 열 명의 흑기사가 방패로 막고 있고, 세 명의 팔라딘이 사제의 주위에 선 채 내 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확실히 탱커의 숫자가 무척 많다 보니까, 뿔 오크 군단의 돌파가 통하지 않았다.

뿔 오크들은 방패에 가로막힌 채 맨 앞줄부터 차례차례 죽어 나갈 뿐이었다.

'슬슬 나가볼까.'

뿔 오크의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자 나는 은신을 풀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곧장 뿔 오크 군단 사이를 파고들었다.

"취익! 동족의 원수!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내 모습을 발견한 뿔 오크들이 검과 도끼를 방방 휘둘러댔다.

'지금!'

뿔 오크의 도끼가 내 머리를 쪼개려는 순간.

[발리노르인 '이자벨라'에게 <그림자 교환> 능력을 사용합니다.]

"꺄아아아아악!"

그러자 내 위치가 순식간에 세 명의 팔라딘 사이로 바뀌었고, 그와 동시에 뿔 오크 군단의 한가운데에서 이자벨라라는 사제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무, 무슨!"

"안돼!"

그리고는 곧장 고군백에게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제에에엔장!"

고군백의 곁으로 순간 이동하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살기로 인해 두 눈이 빨갛게 변한 채 내게 검을 휘두르는 해럴드의 얼굴이었다.

'안녕.'

광기와 피비린내로 가득하던 전장에서 평화로워 보이는 중앙 광장으로 한순간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그림자 이동으로 고군백의 곁에서 나타난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다.'

네 명의 사제를 모두 죽였다.

이걸로 몬스터 웨이브는 끝.

[신성석 사수까지 남은 시간 : 86:17:29]

이제 86시간 동안만 신성석을 잘 지키면 된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내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놀라지 않고 고군백이 차분하게 물었다.

"예. 마지막 사제까지 처리했습니다. 이제 몬스터 웨이브는 없을 겁니······."

띠링!

[경기 종료 시점까지 신성석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킬 수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갑자기 나타나는 알림창.

거기엔 경기가 종료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아직 86시간이나 남았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플레이어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1위. '렌' 52,111킬]

[2위. '고군백' 1,584킬]

[3위. '이청명' 1,502킬]

[4위. '카롤' 1,447킬]

[킬 수 ― 52,111 킬]

[놀라운 업적!]

[압도적인 킬 수를 기록하셨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52,111 킬을 달성하셨기 때문에 기본급 x 3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압도적으로 킬 수 1위를 달성하셨기 때문에 20,000 P 보너스를 추가로 지급받게 됩니다.]

하지만 종료 콜이 뜬 이상 경기가 종료된 것은 확정된 사실이었다.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상위 리그.'

경기가 끝났다는 것은, 내가 승급에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대단한 업적!]

[몬스터 웨이브를 조기에 끝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악마 강림 계획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단한 업적을 세웠기 때문에 추가로 x 2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07 의 메인 이벤트 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154,0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66,000 P 차감)]

[기본급 +10,000 P / 승리 수당 +10,000 P / 추가 보너스 +100,000 P / 서브 미션 수당 +100,000 P / 수수료 -66,0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20,000 P 로 책정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미션의 원인을 없애면 조기 종료도 가능한 거였군.'

1회차에서는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하긴.

지금의 나도 그림자 표식 스킬이 없었다면 조기 종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매일 밤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다른 플레이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바빴겠지.

내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미션의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자칫 잘못했으면 미션에 실패할 뻔했을 정도로.'

[플레이어 '렌'이 상위 리그로 승급하셨습니다!]

이걸로 하위 리그는 끝.

이제 상위 리그를 치를 차례였다.

이제야.

진정한 출발점에 선 것이다.

'1회차 때와는 많이 다를 거야.'

내 몸을 감싸는 빛무리 속에서.

나는 작게 읊조렸다.

< 65화. 승급전(8) > 끝

<66화. 플레잉 코치(1)>

└게임 잣같이 하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칭찬)

└와, 메인 이벤트 치고 난이도가 되게 높았는데 이걸 깨네 ㅋㅋㅋㅋㅋ

└난 진짜 처음에 미션 내용 보면서 게임 메이커가 렌 승급 안시킬려고 일부러 그러는줄 알았음······.

└저 스킬 뭐임? 쟤는 하위 리그에서 도대체 1티어 스킬을 몇 개나 쓰는거??

└ㄴㄴ 오늘 쓴건 1티어 이상이었음. 플래티넘 등급 같은데, 성계 대항전 MVP로 뽑히면서 받은게 아닐까 추측해봄.

└ㅊㅋㅊㅋ 어서와~ 상위 리그는 처음이지?

└솔직히 하위 리그에서나 보기 힘든 거지, 상위 리그에선 저 정도는 널렸음 ㅋㅋㅋ 상위 넘버링까지 올라오면 개 털리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ㅇㅇ 괜히 상위 리그가 네임드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게 아님. 상위 리그부터는 재능만으로 안 되지 ㅋㅋㅋ 렌 보니까 기초 스텟은 낮은 모양이던데. 그게 노력을 안해서 그런 거임 ㅉㅉ. 상위 리그는 재능에 노력까지 겸비한 놈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무대임.

└윗 댓글 동감 ㅋㅋ 요즘 뭐 초신성이라고 불리는 것 같던데 얼마나 추락할지 기대중 ㅋㅋㅋㅋ

* * *

팍! 파바박!

팜으로 돌아오는 순간 커다란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팀에 소속된 모든 플레이어들이 밖으로 나와 나를 향해 폭죽을 터트리고 있었다.

"상위 리그로 승급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드디어 우리 팀에도 상위 플레이어가 나오다니!"

"축하드려요, 안우진님!"

아세리안과 천사들, 사인방, 그 뒤에 들어온 신입 플레이어들과 사용인들까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나를 축하해 주었다.

아세리안이 대표로 나와 내게 꽃다발을······.

'아, 이런 건 좀 하지 말지.'

"고생 많으셨어요. 깨기 쉽지 않은 미션이었는데, 그걸 조기 종료시키시다니! 완전 최고였어요!"

"감사합니다."

"팀 창설한 지 9개월 만에 상위 리그 플레이어가 나올 줄이야! 이걸로 팀 투지도 중견 팀으로 거듭났네요. 아,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들어가죠. 오늘은 파티를 엄청 성대하게 준비해 놨거든요!"

아세리안의 손길에 이끌려 식당으로 들어가니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축제예요! 모두들 먹고 마셔요! 밤새도록 즐기세요!"

"우와아아아아!"

아세리안의 우렁찬 외침에 모든 플레이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꿈에서 마시는 건지, 현실에서 마시는 건지 모르는 1주일을 보낸 나는 아세리안이 따로 마련해 준 내 집무실에 앉아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상위 리그.

또렷하게 쓰여 있는 그 단어에, 내가 상위 리그로 올라왔음을 실감했다.

한번 올라왔던 곳이었기에 크게 감동적이라거나, 기쁜 건 아니었다.

그저, 막연한 불안함과 기대감이 나를 휘감았달까.

'이번엔 고위 리그로 올라갈 수 있어.'

나는 상태창을 열어 현재 보유 중인 포인트를 확인했다.

승급전에서 퍼오블과 파오블까지 선정되면서 어느새 36만 포인트가 쌓여 있었다.

피의 여명에서 107,100 포인트, 승급전에서 168,000 포인트를 벌었으니, 사실상 마지막 두 경기에서 전체 포인트의 76%를 벌어들인 셈이었다.

'두 경기 모두 서브 미션에서 잭팟이 터졌군.'

상위 리그로 올라갈 때 대충 15만 포인트 정도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예상을 크게 상회하는 성과였다.

안 그래도 슬슬 포인트를 쓸 날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상위 리그는 밸런스가 가장 처참한 리그로 유명했으니까.

엄청 강하거나.

엄청 약하거나.

중간 수준의 플레이어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상위 넘버링 경기로 가면서 보통 절망을 맛보지.'

1회차의 내가 그랬으니까.

어떻게 해도 절대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쳐져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초반에 구르면서 개고생하고, 블랙 허브를 판매하기 전까지 매 경기마다 불안함에 떨면서도 버텨냈던 인내의 과실이.

[남은 포인트 : 361,000 P]

그 벽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상위 리그에서도 화려하게 비상해 주겠어.'

슬슬 포인트를 쓸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앞으로 적게는 두 경기.

많으면 세 경기 안에서 저 포인트들을 모조리 스텟에 때려 박을 것이다.

그때까지 난, 최선을 다해 기본 스텟을 끌어올리고 있으면 된다.

'그나저나 갑자기 개인 집무실은 왜 준거지?'

나는 의자와 책상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어 휑한 집무실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애초에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체력 단련장과 대련장에서 보낸다.

그 외에는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숙소에서 잠을 자는 것 뿐.

내가 그런 톱니바퀴 같은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아세리안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내게 집무실을 마련해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상위 리그 플레이어에 대한 예우 때문에 준 것일까?

'쯧. 그냥 가끔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할 때 사용하면 되겠지.'

한동안 이 집무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체력 단련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똑- 똑-

"안우진님. 들어가도 될까요?"

노크와 함께 들려오는 아세리안의 목소리.

"예. 들어오시죠."

내 대답에 아세리안이 작은 화분을 든 채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내 책상 한쪽 구석에 화분을 내려놓으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선물이에요. 집무실은 마음에 드시나요?"

"네, 마음에 드네요. 근데 갑자기 집무실은 왜······?"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방긋 웃었다.

이 여신은 툭하면 미소부터 지으니까, 얘가 화난 건지, 기쁜 건지, 우울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저 미소 뒤에 어떤 말이 이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달까.

"글쎄요. 으으으으음. 제가 왜 집무실을 마련해 드렸을까요?"

"······상위 리그에 올라간 기념으로 그냥 주신 것 아닙니까?"

"아앗, 제가 설마 그런 이유로 드렸겠어요? 기념 선물이었다면 좋은 아이템이나 스킬북을 드렸겠죠!"

아세리안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그럼 나한테 사무적인 일거리를 주겠다는 건가?

'쯧.'

기분이 차게 식었다.

내가 지금까지 팜의 관리를 많이 도와주긴 했지만, 그건 내게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랬던 것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스텟을 올릴 때 필요한 건물들은 모두 다 지어져 있고, 팀의 분위기도 아주 좋다.

거기다 이젠 트레이너 엔젤까지 두 명이나 들어온 상황.

이제는 그녀를 도와준다고 해서 딱히 내게 좋아질 만한 것이 없었다.

'내가 그녀를 도와줘서 이득 볼 게 없어.'

그래서 딱 잘라 도와주지 못하겠다고 얘기하려 할 때였다.

"플레잉 코치라고 아세요?"

"······?"

"후훗, 안우진님은 뭐든 다 아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요?"

아세리안이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플레잉 코치?

처음 들어보는 개념인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세리안에게 물었다.

"그게 뭡니까?"

"상위 리그부터는 플레이어에게 팜의 관리를 맡길 수 있는 권한을 줄 수 있어요. 마치 트레이너 엔젤들 처럼요."

트레이너 엔젤처럼.

관리를 맡길 수 있는 권한을 줄 수 있다고······?

"예를 들면, 음. 랜덤 뽑기라든가, 팀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의 스텟을 체크할 수 있다든가, 아니면 다른 팀에 이적 혹은 영입을 할 수 있는 권한이죠."

"······그런 게 된다면 다른 팀들은 왜 플레잉 코치를 안 씁니까."

플레이어에게 시스템이 허락한 건 골드를 이용한 아이템 매매 및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확인하는 것까지였다.

그런데 아세리안의 말대로라면, 천사들에게 허락된 것까지 플레이어가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뜻.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척 많아지는 것이다.

물론 초월 리그로 올라가는 데 크게 도움 될만한 것들은 아니겠지만.

"뭐,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메리트가 없다는 거죠."

"메리트가 없다?"

"네. 사실, 코치가 필요하다면 굳이 플레이어를 고용할 게 아니라 차라리 천사 한 명을 더 영입하면 되니까요."

아세리안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팀의 주인이라도 굳이 플레이어를 쓰진 않았을 것 같았다.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플레잉 코치는 경기를 뛰면서 동시에 팜의 관리까지 맡긴다는 뜻이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또 관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플레이어에게 맡길 바에야 천사를 고용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그나저나.

"플레잉 코치 얘기를 꺼내신 건 제게 제안을 하고 싶다는 뜻이겠군요."

"네, 맞아요. 저는 제 동생들을 믿지만, 그보다 더 신뢰하는 게 안우진님이랄까요? 어차피 전담으로 관리하는 건 피넛엘과 포로도엘이 할 테니, 안우진님은 중간중간 잘못된 게 있으면 고쳐주거나, 더 나은 훈련법으로 발전시켜 주기만 하셔도 돼요."

한마디로 팀 투지의 고문 역할을 해달라는 것 같았다.

"코치직을 제안한다고 하셨으니, 급여도 있겠죠?"

"아, 물론이에요. 급여는 팀 투지 순이익 포인트의 3%예요. 사실 더 드리고 싶긴 한데, 천사들이랑 다르게 플레잉 코치는 계약할 수 있는 상한선이 3%까지밖에 안 되네요."

뭐?

3프로?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골드가 아니고 포인트로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원래 모든 천사들이 포인트로 받아 가요. 사실, 신이나 천사들에겐 골드가 딱히 쓸모없거든요. 플레잉 코치도 결국 천사 고용 시스템과 동일한 베이스니까 포인트로 지급이 되더라구요."

이건 무조건 해야 한다.

플레이어가 포인트를 벌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경기를 뛰는 것 뿐이었다.

'플레이어는 포인트 거래를 아예 할 수 없으니까.'

편법이 있다면, 중급신 루디악이 한 것처럼 쉬운 서브 미션을 걸어서 주는 방법인데, 그것도 자기 팀 소속의 플레이어에겐 걸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아세리안이 내게 포인트를 줄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급여로 팀 투지가 벌어들이는 순이익 포인트의 3%?

이건 내게 플레이어 훈련을 전담 시킨다고 해도 반드시 맺어야 하는 계약이었다.

'이래서 상위 리그의 플레이어들 수준이 극과 극이었군.'

아마 알게 모르게 다른 팀에서도 플레잉 코치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자기 팀의 대표 플레이어에게 포인트를 몰아줘서 고위 리그로 올리기에 이만한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러한 사실이 같은 팀의 플레이어들에게 알려지면 질투심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 알려지지 않은 것이리라.

"플레잉 코치, 제가 꼭 하고 싶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아직은 플레이어의 숫자도 적고, 상위 리그 플레이어도 안우진님 한 분밖에 안 계셔서 피넛엘이나 포로도엘에 비해 급여가 훨씬 적을 거예요. 그래도 괜찮나요?"

아세리안의 물음에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팀 투지의 수익이 적어?

그럼 내가 엄청나게 늘려주면 된다.

지금까지야 팀이 커져도 내게 직접적으로 떨어지는 이득이 없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벌게 만들어 주지.'

"그럼 수락하시는 걸로 알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세리안이 손바닥을 펴서 내게 내밀었다.

강아지나 고양이에게 하듯 손! 하고 뻗는 모습이었다.

'올리라는 거겠지?'

그래서 나도 아세리안의 손바닥에 한쪽 손을 척! 하고 올렸다.

띠링!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 님에게서 플레잉 코치 계약서가 도착했습니다.]

[플레잉 코치를 수락하시면 기존에 사용할 수 없었던 시스템들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보상 : 팀 '투지' 순이익 포인트의 3%]

[플레잉 코치를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눈앞에 뜨는 알림 창.

나는 망설임 없이 수락을 눌렀다.

[Yes (선택) / No]

[팀 '투지'의 플레잉 코치가 되었습니다.]

[플레이어 '렌' 에게 허락된 플레잉 코치 권한은 <플레이어 영입> <플레이어 판매> <사용인 고용> <소속 플레이어 스텟 확인> <랜덤 뽑기> <팀 보유 포인트 사용> <팀 보유 골드 사용> 입니다.]

[<팀 보유 포인트 사용>의 경우 <랜덤 뽑기><플레이어 영입>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팀 '투지'의 보유 포인트 : 473,000 P]

[팀 '투지'의 보유 골드 : 9,862,400 G]

그러자 눈앞에 여러 가지 탭이 뜨며 내게 허용된 권한이 표시되었다.

아세리안이 말한 것들이었다.

"플레잉 코치를 맡아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서, 팀 투지의 플레잉 코치로서 어떤 걸 가장 먼저 하실 생각이신가요?"

아세리안의 질문에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팀 투지의 순이익에 따라 내가 받을 포인트가 달라지는 상황.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신입 플레이어들을 받아야죠."

피넛엘과 포로도엘이라는 전문 육성 인력이 있고, 매뉴얼이 확립되어 있다면 최대한 많은 숫자의 플레이어를 키우는 게 좋다.

그래서 랜덤 뽑기로 팜을 빠르게 키울 생각이었다.

피넛엘과 포로도엘에겐 미안하지만.

"그것도 아주 많이요."

그녀들이 제법 고생 좀 할 것이다.

< 66화. 플레잉 코치(1) > 끝

< 67화. 플레잉 코치(2) >

아세리안과의 면담을 나눈 다음 날부터 나는 4기수 신입들을 대량으로 받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3기수로 들어온 플레이어들을 안정화시키는 것.

네트워크 시스템의 성장법은 기수가 내려갈수록 플레이어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특징이 있지만, 욕심을 부리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단점도 있었다.

그렇기에 4기수 신입들을 대량으로 받기 위해선 먼저 3기수가 안정화 되어야 했다.

'아무래도 맞춤 훈련을 시켜야겠어.'

나는 아세리안이 이론 수업을 하기 위해 만든 강의실로 사인방과 신입 플레이어들을 불러 모으고, 각자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었다.

"이게 뭐예요?"

"근력 운동, 민첩 훈련, 체력 단련, 식사, 숙면, 휴식, 명상, 대련, 무기 숙련 등등, 여러분의 하루 일과를 세분화한 표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일주일 동안 해당 항목에 얼마의 시간을 투자하고, 각 훈련을 몇 세트, 몇 번 하는지 적어주시면 됩니다."

"정확하게 적어야 하나요?"

"제대로 적을지, 대충 적을지 결정하는 건 여러분의 몫입니다. 다만, 정확하게 적을수록 더 빨리 강해질 수 있다고 장담하죠."

내 말에 플레이어들은 진지한 표정이 되어 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생각에 잠긴 채 자신이 일주일에 얼마나 훈련을 하는지 산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평소에 주어진 커리큘럼 대로만 훈련하다 보니, 자신이 일주일에 얼마나 훈련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게 가장 큰 문제지.'

남들보다 더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선 스스로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계속해서 성장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다 적었다면 잘 들으세요. 앞으로 3일에 한 번, 지금 적은 항목들을 1%씩 개선시켜 나가야 합니다."

"1%씩이요?"

"예. 근력 운동으로 100개를 했다면 3일 후엔 101개를 한다든지. 더 잘 자기 위해 숙소의 환경을 바꾼다든지. 그런 식으로 계속 1퍼센트씩 개선시켜 나가는 겁니다."

내가 신입 플레이어들에게 제시한 전략은 영국의 브리티쉬 사이클링 팀 감독, 데이브 브레일스퍼드가 쓴 방법이었다.

'사소한 성과들의 총합 전략.'

그리고 실제로 검증된 전략이기도 했다.

이 방법으로 브리티쉬 사이클링 팀은 110년간 단 한 번도 우승해 보지 못했던 투르 드 프랑스 대회에서 6년 동안 다섯 번이나 우승했으니까.

1%는 일견 무척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이게 복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 년만 이런 방식으로 해도 모든 부분에서 처음보다 333%나 상승하는 셈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꾸준히 하다 보면, 여러분은 금세 강해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내 말에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고작 1%씩 늘려서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까요?"

"직접 해보면 알 겁니다. 그 1%를 3일마다 늘려나가는 것도 무척 어렵다는 것을."

다음날부터 플레이어들은 내가 지시한 방법대로 훈련을 시작했다.

성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훈련을 덜 하거나, 혹은 다른 플레이어들과 한 묶음으로 훈련이 진행되다 보니, 체력이 남던 사람들도 각자가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쥐어짰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꾸준히 할 수 있는 개개인의 맞춤형 훈련이 만들어졌달까.

신입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에 가장 고무된 건 다름 아닌 피넛엘이었다.

"한 달 사이에 성장률이 20%나 상승했다. 훈련법을 바꾼 것도 아니고 그저 종이 한 장 쥐여주는 걸로 이게 가능하다니······."

"꾸준하게, 그리고 점진적으로 과부하를 주는 게 가장 빨리 성장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전 단지 그게 가능하도록 생각을 바꿔줬을 뿐입니다."

"그대 덕분에 내가 고정 관념에 갇혀 있었다는 걸 알았다. 단순히 훈련의 효율화만 생각했지, 정신적인 부분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노라. 앞으로는 나도 더 넓게 보는 능력을 길러야겠군."

이 훈련법 덕분에 피넛엘도 한 단계 성장한 느낌이었다.

그녀라면 앞으로 내가 보지 못한 부분까지 생각해 주리라.

새로운 훈련 도입 결과는 대성공으로 돌아왔다.

[플레이어 '카밀라' 가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12의 3경기에서 생존했습니다.]

[팀 '투지'의 수수료로 300 P를 지급합니다.]

[플레이어 '주창범' 이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13의 7경기에서 승리했습니다.]

[팀 '투지'의 수수료로 1,800 P를 지급합니다.]

[플레이어 '지그' 가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14의 6경기에서 ······.]

[플레이어 '루치아노' 가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14의 7경기에서 ······.]

하위 리그에 참가한 신입 플레이어들 중에서 사망자가 3명 밖에 안 나온 것이다.

무려 생존율 81%.

물론 두 번째 경기까지 사망률이 제법 높지만, 이 상태라면 생존율이 크게 차이 나지 않을 것이다.

'3%가 적긴 적구나.'

[플레잉 코치 '렌'에게 9 P가 정산되었습니다.]

[플레잉 코치 '렌'에게 54 P가 정산되었습니다.]

[플레잉 코치 '렌'에게 45 P가 정산······.]

그야말로 한숨만 나오는 수준.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포인트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면 3%가 내 파이트 포인트보다 높아질 수도 있지.'

뭐, 어쨌든.

3기수의 플레이어들이 많이 안정화되었으니, 이제 4기수 신입들을 뽑을 시간······.

벌컥!

"안우진님!"

그때 집무실 문을 열며 아세리안이 급하게 들어왔다.

무슨 일이라도 났나?

"왜 그러십니까?"

"상위 리그 게임 메이커한테 연락이 왔어요."

게임 메이커한테······ 연락이 왔다고?

'오퍼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직감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게임 메이커한테 연락 올 일이······.

"상위 리그에서도 성계 대항전을 개최하고 싶대요."

아세리안이 한걸음에 다가와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성계 대항전?

내 기억으론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은 열린 적이 없었는데?

무엇보다······.

"상위 리그에는 지구 출신 플레이어가 몇 명 없을 텐데요?"

내가 회귀하기 전에도 상위 리그엔 지구 출신이 드물었다.

나까지 포함해서 5명 정도였나?

고위 리그는 아예 한 명도 없었고.

"현재로서는 안우진님 말고는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성계 대항전을 어떻게 연다는 겁니까?"

"그······ 각 성계마다 100명에서 200명 정도 출전할 것 같은데, 지구 출신은 안우진님 한 분만이라도 참여해줄 수 있냐고······."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이 조건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건가?

물론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처럼 경기장 안에서 죽어도 부활하겠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우승 성계가 차원 특전을 받는다는 것.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결국 어떤 성계가 더 강해진다는 뜻이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제안이군요. 갑자기 왜 이런 무리수를······?"

"하위 리그 게임 메이커가 성계 대항전을 대성공으로 이끌면서 엄청난 수익을 가져갔다고 하더라구요. 그걸 보고 상위 리그 게임 메이커가 배가 아팠던 거죠."

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1회차 때와 달리 이번 성계 대항전은 나로 인해 대성공을 거둔 상황.

그런데 성공을 이끈 주역이 마침 상위 리그로 올라왔으니 자기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겠지.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상위 리그의 수준은 하위 리그와 차원이 다르다.

특히 상위 넘버링으로 넘어가는 순간 준고위급 플레이어들이 득실댄다.

그런 녀석들과 1대 100 혹은 1대 200으로 싸우라고?

잘해야 본전. 그게 아니면 손해밖에 나지 않을 일이었다.

내게 큰 메리트를 주지 않는 한, 상위 리그에서 성계 대항전이 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알겠어요. 게임 메이커한테는 그렇게 전달할게요. 참, 이제 랜덤 뽑기를 해야죠?"

"네. 이제 슬슬 4기수를 받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럼 바로 뽑으러 가죠!"

나는 아세리안과 함께 공터로 나갔다.

그곳엔 이미 포로도엘과 피넛엘이 나와 있었다.

새로 들어와 혼란스러울 신입들을 통제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이번 랜덤 뽑기는 안우진님이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음."

"한 번도 안 해보셨잖아요. 솔직히 저도 좀 궁금하네요. 안우진님이 금손일지 똥손일지."

랜덤 뽑기라.

솔직히 1회차 때부터 랜덤 뽑기 하는 모습을 워낙 많이 봐 왔기 때문인지, 굳이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세리안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금손인지 똥손인지 궁금하다는 말에 흥미가 동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해보죠."

[<잡화:주사위 >]

[평범한 주사위다. 아무 효과도 깃들어있지 않다.]

[등급 : 일반]

[판매가 : 100 G]

나는 중개 거래소에서 주사위를 구입해서 굴리기 시작했다.

연속으로 같은 숫자가 세 번 나온 이후에 랜덤 뽑기를 할 생각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지구의 RPG 게임 같은 걸 보면, 이런 식으로 굴려서 운이 좋은 타이밍이 왔을 때 강화 같은 걸 했단 말이지.'

물론 아무 검증도 되지 않은 방법이었다.

사실상 미신과 같은 거랄까.

그럼에도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앞으로 내게 포인트를 벌어다 줄 소중한 신입들을 뽑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운이 좋은 순간에 랜덤 뽑기를 진행하고 싶었다.

기왕 뽑는 거 네임드 같은 애들이 나와주면 이후에 들어올 포인트가 제법 많아질 테니까.

"뭐 하시는 거예요? 혹시, 그렇게 하면 네임드를 뽑을 수도 있나요?"

아세리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제 나름의 의식 같은 겁니다."

"무슨 의식인데요?"

"운이 조금이라도 좋을 때 뽑으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내 대답에 아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주사위를 던지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던져 숫자 6, 6, 6이 나왔을 때였다.

"뽑겠습니다."

나는 상태창에서 랜덤 뽑기 버튼을 눌렀다.

신입으로 뽑을 인원은 52명이었다.

띠링!

[<랜덤 뽑기>를 하셨습니다.]

[<랜덤 뽑기>를 하셨습니다.]

[<랜덤 뽑기>를 하셨습니다.]

[<랜덤 뽑기>를 하셨······.]

그러자 공터에 하얀 빛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밀짚모자를 쓴 농부, 가죽 갑옷을 찬 용병, 정장 차림의 회사원 등등 각양각색의 복장을 입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새로 들어온 신입들 답게, 모두들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여, 여긴······?"

"이곳이 콜로세움인가······."

"천사다! 대, 대체!"

"조용, 조용!"

웅성대는 플레이어들을 피넛엘이 통제하는 사이, 나는 악마의 눈을 이용해 스텟부터 체크했다.

확인하는 족족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의 사인방 수준.

그렇기에 기대감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는데, 그 뒤의 사람들 스텟을 차례로 확인할수록 내 눈이 점점 커져갔다.

'준네임드 급!'

띠링!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모용악]

[성향 : 중용]

[근력 : 46] [민첩 : 49] [체력 : 44]

[정신 : 47] [지력 : 19] [마력 : 42]

[각성 능력 : <최상급검술 > <상급살기 > <중급마나운용 > <중급박투술 >]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고건하]

[성향 : 선]

[근력 : 51] [민첩 : 42] [체력 : 45]

[정신 : 49] [지력 : 16] [마력 : 39]

[각성 능력 : <최상급궁술 > <상급살기 > <상급마나운용 > <하급박투술 > <하급치료술 >]

랜덤 뽑기에서 준네임드 급이 두 명이나 뽑혔다.

지금 막 들어온 녀석들이 9개월 차가 된 주창범보다 스텟이 높은 것이다.

천 번 뽑아야 두세 명 나올까 말까 하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헐, 대박."

아세리안도 모용악과 고건하의 스텟을 확인하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경지도 최상급이었고, 스텟도 코메인 이벤트에 참여하던 케일 정도의 수준이었다.

'잘만 키우면 상위 리그까지 노려볼 만 하겠는데.'

생존을 위한 싸움 경험도 충분할 거고.

물론 부족한 것도 있겠지만, 그건 앞으로 채워 나가면 된다.

준네임드 급이 두 명이나 들어왔기에, 안심하며 나머지의 스텟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릴 때였다.

'미친······!'

주변이 환하게 느껴질 정도로 밝은 은발에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여성의 스텟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카이로시아 아타나신느 폰 퀘이사]

[성향 : 신념]

[근력 : 3] [민첩 : 4] [체력 : 4]

[정신 : 64] [지력 : 102] [마력 : 88]

[각성 능력 : <천재 > <원소통달 > <고급마법 > <특급마나운용 > <고속영창 > <상급치료술 > <마력관통 >]

상태창을 보는 순간 뒷목이 쭈뼛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뭐야, 이 괴물은?

천재? 원소 통달?

마치 아르웬의 스텟창을 봤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었다.

< 67화. 플레잉 코치(2) > 끝

< 68화. 플레잉 코치(3) >

'이 정도의 플레이어가······ 어째서 1회차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거지?'

카이로시아는 특수한 각성 능력들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보아하니 마법사 계열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 봤던 게 고주몽 분신의 신궁과 패왕, 아킬레우스의 대영웅, 시구르드의 용살검 정도.

아무리 내가 악마의 눈을 얻은 지 얼마 안 됐기에 다양한 플레이어들의 상태창을 보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저게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란 건 알았다.

'뭐가 됐든 대박이 터진 건 분명해.'

이 정도 수준이라면 상위 리그는 거의 확정인 셈이었다.

그리고 내가 받을 포인트도 덩달아 껑충 뛰겠지.

아세리안과 나, 둘 다 횡재를 한 것이다.

"아, 이······ 이게······."

고개를 돌려 보니, 아세리안도 기쁨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4기수 신입들을 통제하고 있던 피넛엘과 포로도엘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카이로시아의 스텟을 확인하곤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준네임드 급이 천 명 뽑아야 두세 명 나올 정도라면, 카이로시아는 십만 명 뽑아야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이었으니까.

"아, 안우진님. 지금 이거. 꿈, 아니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리안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침착하시죠. 새로 들어온 신입들이 보고 있는 자리 아닙니까. 여신으로서 그리고 팀의 주인으로서 체통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흐읍, 후우. 흐읍, 후우. 고마워요, 안우진님. 저도 모르게 너무 흥분했네요."

내 말에 아세리안이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저 세 사람은 내가 직접 관리해야겠어.'

원래대로라면 3기수의 밑에서 교육을 받겠지만 카이로시아와 모용악, 고건하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주창범 정도나 돼야 상대가 가능할 정도로.

한마디로 나 말곤 이 안에서 저들을 이길 사람이 없달까.

저들도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 탐탁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시스템에 균열이 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

어쩔 수 없이 내가 관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 세 사람은 제가 직접 훈련 시키겠습니다."

"앗,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런데 이미 사인방도 관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괜찮으시겠어요?"

다행히 아세리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저들을 관리함으로 인해 내 시간을 제법 뺏기게 되겠지만, 저들이 벌어다 줄 포인트를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관리하는 게 나았다.

괜히 분란을 일으키고, 경기에서 비명횡사해 버리면 곤란할 테니까.

"괜찮습니다. 2기수 사인방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왔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도 이미 기초가 잡혀 있는 상태니까 초반에만 반짝 신경 써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환한 미소를 짓는 아세리안에게 고개를 끄덕인 난 카이로시아와 고건하, 모용악에게 다가갔다.

"안우진입니다. 앞으로 제가 여러분을 담당할 겁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 소협. 무림에서 온 모용악이라고 합니다."

"졸본에서 온 고건하입니다. 많은 가르침 바랍니다."

"카이로시아 아타나신느 폰 퀘이사. 탐리엘."

내 소개에 모용악이 포권했고, 고건하가 고개를 숙였다.

그와 다르게 뻣뻣한 자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카이로시아.

순간 내 눈썹이 꿈틀했다.

그때였다.

"엇! 퀘이사 공작가의 카이로시아 영애다!"

"퀘이사 가문이 반역으로 몰려 풍비박산 나면서 노예로 팔려나갔다지?"

"레이폴드 후작한테 팔려나갔다더니 여기 있었군."

탐리엘에서 들어온 신입들이 그녀를 바라보며 웅성댔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주제에 말이 짧다 했는데, 꽤 고위 귀족이었던 모양이다.

"와, 엄청 예쁘다."

"노예로 팔려나갔다면······ 성 노예라는 뜻이겠지?"

그러자 다른 신입들도 그녀를 바라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 뱉었는데, 정작 카이로시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도도함을 유지했다.

"분명 조용히 하라고 했을 텐데! 지금부터 한 번만 더 입을 연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쯧, 이곳에선 안 되겠군.'

피넛엘이 4기수 신입들을 다시 통제하는 사이, 나는 고건하와 모용악, 카이로시아를 대련장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이곳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 콜로세움에 들어오셨죠. 여러분은 하위, 상위, 고위 리그를 거쳐 초월 리그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간절하게 바라던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

"네."

끄덕.

"이곳은 말하자면 투기장과 같은 곳으로, 관객은 모두 신들입니다. 그리고 상태창이란 시스템이 있는데······."

"예."

"네."

끄덕.

그렇게 필수적인 정보들을 빠르게 설명한 나는 말을 이었다.

"저는 얼마 전에 하위 리그에서 상위 리그로 승급했습니다. 아직 상위 리그에서는 경기를 한 번도 뛰어보지 못했죠. 즉, 여러분은 적어도 저보다는 강해야 상위 리그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겁니다."

사인방을 받기 전에 내가 죽였던 찬경, 지든, 듀라크를 통해 깨달은 게 있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강해야 상위 리그로 올라올 수 있는지."

그건 바로.

서열 정리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특별히 여러분에게 제 실력을 보여드릴까 합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무기고에서 각자 원하는 무기를 골라서 대련장으로 올라오시죠."

특히나 이 세 사람은 각자 성계에서 이름 좀 날렸던 강자들.

그러다 보니, 룰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든가, 아니면 내 지시에 불응할 수도 있다.

'시작부터 제대로 밟아놓고 시작해야겠어.'

그래서 초장부터 그 싹을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플레이어 '카이로시아 아타나신느 폰 퀘이사'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왜 혼자 올라옵니까? 다른 사람들도 전부 올라오시죠."

"저희 세 사람을 혼자서 상대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음······. 상위 리그란 것에 대해 자부심이 강하신 것 같소만, 일단 한 명씩 상대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는 눈이 있지만, 제 검에는 눈이 달려있지 않습니다."

모용악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당신 같은 사람 100명이 와도 상대할 수 있으니 올라오기나 하시죠."

"······소협의 그 오만함이 곧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그러자 모용악이 서늘한 눈빛을 쏘아 보내며 검을 쥐고 대련장 위로 올라왔다.

고건하의 표정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카이로시아는······.

"······."

무시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제대로 실력 좀 보여 줘 볼까.'

나는 벽력섬전을 꺼내며 역천자, 최강의 성계, 천둥의 숨결을 활성화시켰다.

'다시는 찍소리도 내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지.'

콰지지지지지지지직!

그리고는 뇌전을 피우며 단숨에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무, 무슨!"

"위험!"

고건하와 모용악이 놀라 피하려고 했지만, 애초에 스텟에서부터가 넘사벽이었다.

고작 녀석들 정도의 수준으로는, 내 창을 받아낼 수가 없었다.

서걱! 서걱!

단번에 녀석들의 목을 베어버린 나는 곧장 카이로시아에게 창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바람의 춤!]

카가가가가강!

순간 카이로시아가 만든 마법의 회오리가 내 창에 부딪히며 금속이 갈리는 소리를 만들었다.

띠링!

[마력 상쇄율 : 50%]

[플레이어 '카이로시아 아타나신느 폰 퀘이사'의 마법이 마력 상쇄를 무시합니다.]

눈앞에 뜨는 메시지 창을 본 나는 뒤로 물러났다.

어쩐지 마력 스텟 100이 넘는 뇌전으로도 마법을 부술 수 없다 했더니, 내 마력 상쇄를 카이로시아의 마법이 무력화 시킨 것이다.

그녀의 각성 능력에 있던 마력 관통 효과인 모양이었다.

[폭렬하는 붉은 꽃잎!]

카이로시아의 손에서 작은 구체 하나가 내게 쏘아지더니 이내 팍, 하고 터졌다.

낯이 익은 마법이었다.

'빛의 이면에서 도로시가 썼던 마법이군.'

나는 바닥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퍼져라!]

그러자 작게 피어난 불꽃이 강하게 회전하며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빨간색 꽃잎이 바람에 휩쓸려 날아다니는 모습이었다.

마법은 단숨에 대련장 전체를 휘감았다.

'제법이네.'

띠링!

[<달의 메아리> 가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달의 메아리가 있기 때문에 여유롭게 피하긴 했지만, 정말 무시무시한 화력이었다.

'영창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

도로시는 저 마법을 쓰기 위해 한참을 캐스팅해야 했는데, 카이로시아는 고작 몇 마디 중얼거리는 걸로 마법이 발동한 것이다.

[들이치는 격류의 메아리!]

또다시 이어지는 마법.

파바바바바박! 파바박!

이번엔 물방울이 비비탄 총알처럼 사방으로 퍼지며 곳곳을 때리고 있었다.

바람에, 불에, 물 속성 마법까지.

그제야 그녀의 원소 통달이라는 능력이 뭔지 알 수 있었다.

'4대 속성을 모두 다룰 줄 안다는 거였어.'

보통은 한 계통의 마법을 특화시켜 나가는 쪽으로 마법의 숙련도를 올리는데, 그녀는 네 가지 원소 마법을 모두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대련장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으며 곳곳에서 수증기가 퍼져나갔다.

이제 그녀에게 알아볼 만한 것들은 다 알아본 상황.

'슬슬 끝내야겠군.'

[플레이어 '카이로시아 아타나신느 폰 퀘이사'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안개처럼 퍼져나가는 수증기 사이로, 무언가를 읊고 있는 카이로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내가 갑자기 코앞에서 나타나자 눈을 치켜뜨며 무언가를 외치려고 했다.

'그렇게는 안 될걸.'

나는 곧장 그녀의 목에 창을 찔러 넣었다.

푹!

그걸로 끝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게 목이 날아가고 카이로시아의 마법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겨졌던 고건하와 모용악의 시체가 꿈틀대더니 이내 원래의 형체를 되찾았다.

"헛!"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흠칫 몸을 떨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에서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니까요."

잠시 시간이 지나자 죽었던 카이로시아도 다시 살아나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카이로시아는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자기 목을 감싸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고건하와 모용악도 이전과 달리 자중하는 모습이었다.

"뭐 하십니까?"

"······?"

"고작 한번 싸운 걸로 끝낼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

내가 창을 겨누자, 고건하와 모용악이 각자의 무기를 챙기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이로시아도 이전과 달리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들의 뒤에 가서 섰다.

그리고.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굉음이 터지며 세 사람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고작 단 한 번의 공격에 벽력이 발동된 것이다.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나는 녀석들이 부활할 때마다 계속해서 죽여댔다.

나에게 덤비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아예 내면 깊숙한 곳까지 심어줄 생각이었다.

카이로시아의 화력이 가장 좋기 때문에 그녀를 우선적으로 공략하고, 나머지를 죽이는 순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내게 단 한 번도 공격을 하지 못한 채 계속 무력하게 죽기만 해야 했다.

"저,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우진님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안우진님이 지시하시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끄덕끄덕끄덕.

그렇게 열 번쯤 죽이자 세 사람이 기겁하며 내게 양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쯤 하면 됐나.'

"좋은 교훈을 얻어서 다행이군요. 그럼 앞으로는 제 지시를 잘 따라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카이로시아님?"

"······?"

"이곳은 엄연히 당신이 살아왔던 세상과 다른 곳이고, 이곳만의 룰이란 게 존재합니다. 단체 생활을 하려면 지금의 태도로는 좋지 않습니다. 이곳에선 절대로 귀족임을 내세우지 말아 주세요."

"······."

"대답하셔야죠?"

"······네."

작은 목소리였지만, 어쨌든 카이로시아가 존댓말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만족한 나는 세 사람을 이끌고 대련장을 나섰다.

확실하게 정신 교육을 했으니, 이제 사인방과 인사를 시켜줄 차례였다.

한순간에 플레이어의 숫자가 급증함에 따라, 팜에도 변화가 생겼다.

기존에 있던 사용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플레이어의 숫자가 늘었기 때문에, 식당이라든가 숙소, 체력 단련장 같은 건물을 더 지은 것이다.

그로 인해 조금은 휑해 보였던 공터에 수많은 건물들이 생겨나면서 조금은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좀 중견급 팜 같은 모습이랄까.

'나쁘지 않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건물의 숫자가 더 늘어나면, 그때는 하나의 작은 도시 같은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체력 단련장으로 향할 때였다.

"안우진님!"

날 부르는 아세리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가 나를 향해 한달음에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게임 메이커한테 다시 연락이 왔어요."

게임 메이커한테?

또 나에게 할 말이 있나?

"그······ 적은 숫자를 무시할 정도로 많은 메리트를 안우진님께 주겠대요."

"메리트라면?"

"아직 성계 대항전에 대한 기본 골자 정도만 계획해 둔 상태라, 어떤 식의 메리트를 주겠다는 얘기는 없었어요. 하지만 안우진님께는 차고도 넘칠 정도로 메리트를 줄 테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더라구요."

차고도 넘칠······ 정도로······?

아무래도 상위 리그 게임 메이커가 많이 급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얘기할 정도라니.

'하긴. 내가 승낙하지 않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프로젝트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만약 내가 원하는 대로만 된다면.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도 지구를 우승으로 이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성계 대항전 내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플래티넘 급 스킬 3개를 달라고."

< 68화. 플레잉 코치(3) > 끝

< 69화. 플레잉 코치(4) >

그날 이후 고건하, 모용악, 카이로시아에 대한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어차피 이론적인 부분은 아세리안의 수업 때 들을 터.

나는 그들에게 스텟과 싸우는 법에 관련된 부분만 채워주면 됐다.

"여러분이 살았던 세상과 달리, 이곳에선 무한히 강해질 수 있습니다. 시스템의 보정을 받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가장 먼저 했던 훈련은 역시 근민체 단련이었다.

"저주셋을 착용하고 훈련하면 스텟이 훨씬 빠르게 오릅니다. 이걸로 여기 있는 사인방도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죠. 물론 더 빠르고, 강하다고 해서 무조건 이기는 건 아닙니다만, 적어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는 있죠."

"예."

"네."

끄덕.

"그래서 모용악님과 고건하님은 앞으로 여기, 2기수로 들어온 플레이어들과 함께 훈련을 진행하게 될 겁니다. 주창범씨, 이 두 분을 잘 부탁합니다."

"네, 형. 걱정하지 마세요!"

모용악과 고건하의 교육은 사인방에게 거의 맡길 생각이었다.

어차피 두 사람은 무기에 대한 기초가 잡혀 있기에 훈련 방법과 이곳의 룰 정도만 알려주고, 그 외적으론 사인방과 대련시키면서 경험을 쌓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관리한다고 한 이유는 하나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 녹아들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

만약 주창범이나 지그 같은 사인방의 밑으로 들여보냈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사인방은 방금 들어온 모용악과 고건하가 자기들보다 강하기에 질투심을, 그리고 두 사람은 자기들보다 약한 사람에게 선배 대우를 해줘야 하기에 불만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세 사람을 직접 관리함으로써 서로 간의 알력 다툼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내 걱정은 기우일 뿐이었다.

"전 검을 잡은 지 15년 정도 됐습니다. 그런데도 저와 비슷한 수준이라니······."

"헉, 15년이나 되셨어요? 전 이곳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검을 잡았어요. 아직 9개월밖에 안 됐죠."

"그래서 더 허탈하군요. 내 15년은 무엇을 위한 시간이었는가······."

"에이, 모용악 형도 금방 강해질 수 있어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오히려 같이 훈련을 하거나 대련을 하는 등 오히려 모용악과 고건하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사인방이 무척 세심하게 도와주었다.

덕분에 고건하와 모용악의 훈련은 순조로웠다.

이제 남은 건.

"······."

옆에서 어울리지 않은 기초 가죽 갑옷 세트를 입은 채 멀뚱멀뚱 날 쳐다보고 있는 카이로시아 뿐이었다.

후.

'머리가 아프네.'

그날 이후로 카이로시아가 다른 사람에게 반말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와 동시에 말 수도 줄어들었다.

그저 차가운 표정으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을 뿐.

그래서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지도 못한 채 내 주위에서만 서성이고 있었다.

'쯧. 내가 더 잘 챙기는 수밖에.'

소중한 포인트 수급원을 잃을 순 없으니까.

파이팅 넘치게 훈련을 하고 있는 사인방과 고건하, 모용악을 뒤로하고 나는 카이로시아를 데리고 새로 지어진 체력 단련장으로 이동했다.

내가 카이로시아를 교육 시킬 때 필요하다고 새로 지어달라고 한 것이었다.

그녀의 외모를 힐끔힐끔 쳐다보느라 다른 플레이어들이 훈련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시죠?"

나와 단둘이 있게 되자 카이로시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카이로시아님은 저 두 사람과 다른 방법으로 훈련해야 하거든요."

"······?"

"콜로세움은 단체전도 있지만, 개인과 개인의 전투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렇기에 개인전, 특히 근접 전투 훈련을 많이 해야 하죠."

끄덕.

"그런데 카이로시아님은 근접전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어 보이시더군요. 주로 후방에서 다수의 적을 향해 마법 폭격만 하셨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게 마법사의 역할이었으니까요."

카이로시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는 현대로 치면 전술 무기와 같은 존재.

한 명의 적을 죽이기 위해 미사일을 투하하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이곳은 콜로세움.

전술적 활용을 위한 마법사는 이곳에서 필요 없다.

'그래서 전투 마법사라는 혼종이 생겨난 거지.'

어제 그녀를 상대해보고 확실하게 깨달았다.

1회차에서 이런 존재가 이름을 떨치지 못하고 죽은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건 바로.

'근접전이 너무 약해.'

아무리 마법을 마음껏 폭격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해도, 칼 맞으면 죽는 건 똑같았다.

그렇기에 공수 밸런스에서 수비의 비중이 높은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공격 몰빵 타입.

엉뚱한 곳에서 비명횡사할 확률이 무척 높았다.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어서 이곳에 들어오셨겠죠."

"당연한 것 아닌가요?"

카이로시아가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며 눈을 치켜떴다.

"그럼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때요, 이렇게 가까운 거리까지 누군가 다가온다면,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내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가자 그녀가 학을 떼며 뒤로 물러났다.

예를 들기 위해 했던 행동에 이렇게 과민한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

"흠, 흠. 숙녀를 대할 땐 좀 더 예의를 갖춰 줬으면 좋겠네요."

그녀도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걸 알았는지, 헛기침을 했다.

'하. 쉽지 않네.'

이전이라면 카이로시아가 죽든 말든 상관 안 했겠지만, 지금은 내가 너무나도 아쉬운 입장이었다.

상위 리그, 어쩌면 그 이상으로 올라갈지도 모르는 플레이어였으니까.

"어쨌든, 요점은 일대일 싸움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거죠?"

"예."

"그럼 왜 이곳으로 데려온 거예요? 그러려면 아까 있던 대련장에서 훈련하는 게 맞지 않나요?"

카이로시아의 눈빛엔 여전히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뭔가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는데, 이럴 땐 해결 방법이 있었다.

'마구 굴리는 거지.'

지옥 훈련을 할 때 아세리안이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던 이유를 깨달았다.

카이로시아를 갈아버릴 생각을 하니까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안 그래도 그녀의 태도로 인해 조금씩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상황.

이번 기회에 제대로 굴려줘야겠다.

"일대일을 하려면 먼저 몸부터 만들어야겠죠."

"그거랑 몸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다시 이전으로 얘기가 돌아가서, 이렇게 근접 거리에서 누군가 검을 날린다면. 막을 수 있겠습니까?"

"보호 마법을 펼치면 되잖아요."

쉬이이이익!

그녀의 대답에 나는 기습적으로 주먹을 뻗어 그녀의 코앞에서 멈췄다.

내 주먹이 일으키는 바람의 그녀의 은발이 조금 흩날렸다.

"······!"

뻐끔, 뻐끔.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카이로시아가 입을 벌린 채 얼어붙었다.

나는 주먹을 거두며 다시 물었다.

"다시 한번 여쭤보죠.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뇨."

그래.

이렇게 재깍재깍 대답해야지.

"대답이 됐군요."

나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방독면을 건넸다.

"······?"

"일단 체력부터 만들어보죠."

내가 했던 지옥의 훈련을.

그녀에게도 경험시켜 줄 생각이었다.

* * *

중급신 루디악은 요즘 기분이 무척 좋았다.

렌 덕분에 엄청난 대박이 터졌고, 덕분에 낭떠러지에서 구사일생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요즘 지구 플레이어들 성적이 무척 좋네.'

내보내기만 하면 죽었던 지구 출신들이 연달아 생존하면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도 했고.

이게 다 플러스 10프로나 되는 차원 특전 덕분이었다.

덕분에 렌의 광팬이 된 루디악은 요즘, 지구 출신 플레이어들에게 가면을 사준다거나, 검은색 로브를 입히는 등 렌 따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와, 저 플레이어는 누구죠? 제2의 렌인가요? 센스가 무척 좋네요.

―하하하, 닉네임도 그렇고. 복장이나 가면까지 쓰고 있으니까 정말 렌처럼 보이는군요. 어디 보자······. 아, 여기 있네요. 얼마 전까지 '안우정' 닉네임을 쓰던 플레이어였군요. 어쩐지 처음 보는 닉네임이다 싶었습니다. 이전 경기에서는 위태위태해 보였는데, 오늘 경기에서는 여유가 넘치네요.

―네, 말씀드리는 순간! 또다시 두 명의 플레이어를 처치하며······.

'확실히 센스가 좋아.'

루디악은 안우정의 플레이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위 리그 플레이어를 몽땅 잃어버리며 나락으로 떨어지나 했는데.

팀 불굴에서도 어느새 새싹이 자라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특히 눈에 띄는 녀석은 바로 안우정.

'언제나 눈에 독기로 가득 차 있는 녀석이지.'

루디악은 저렇게 악에 받쳐 있는 플레이어들을 선호했다.

저런 녀석들은 거름만 잘 줘도 쑥쑥 큰다는 것을 경험에 의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보유 포인트도 넉넉하다 못해 넘치는 상황.

이번 기회에 안우정을 중심으로 팀을 다시 한번 키워볼 생각이었다.

'아이템도 쓸만한 것들로 맞춰주고. 아 맞다, 유능한 트레이너 엔젤도 고용해야겠어.'

스킬도 빼먹을 수 없었다.

렌처럼 온몸에서 번개가 뿜어져 나오게 만들고 싶었지만, 번개 속성은 희귀해서 잘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불꽃 관련된 스킬들이 줄줄이 올라와 있는 상황.

루디악은 검은색 로브에 하얀 가면을 쓴 채 온몸에서 불꽃이 이글이글 올라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개 멋지잖아!'

띠링!

[<스킬북:화신 > 을 3,850,000 G 에 구입했습니다.]

[<스킬북:화룡의 분노> 를 3,000,000 G 에 구입했습니다.]

[<스킬북:염왕 > 을 4,770,000 G 에 구입······.]

그 모습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구입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스킬북 하나하나가 무척 비쌌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루디악은 자신의 팀에서도 렌 같은 플레이어가 나오길 희망했다.

그렇기에 스킬북의 가격이 비쌌지만, 주저 없이 구입한 것이다.

'좋았어. 이 정도면 충분할 거야.'

마침 안우정이 경기를 승리로 끝내고 나왔기에, 루디악은 그를 붙잡고 승리 포상이라며 스킬북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꼭 초월 리그까지 올라가겠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거는 바가 크다는 것을 명심하며 언제나 정진하도록."

"예."

대답하는 안우정의 눈은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 * *

"새로 들어온 신입들은 어때요?"

점심시간.

내 앞에 앉는 아세리안의 물음에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나쁘지 않습니다. 모용악과 고건하는 이미 완전히 적응한 분위기더군요. 당장 경기에 출전해도 충분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내 대답에 아세리안이 방긋 웃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사실, 네임드 급 플레이어들이 들어온 건 좋은데, 기존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랑 마찰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안우진님이 잘 이끌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제가 한 게 있나요. 2기수가 편견 없이 잘 받아준 덕분이죠."

"그래도요. 안우진님이 사전에 교통정리를 잘 해주시지 않았다면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고 저나 피넛엘, 포로도엘이 나서서 관리했다면 차별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구요. 같은 플레이어인 안우진님이 해주시는 게 그나마 모양새가 보기 좋은데, 아무래도 워낙 바쁘시다 보니까······."

아세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네임드를 뽑고 나서 팀의 케미가 박살 나는 일이 워낙 흔했기에.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니, 특히 조심해야 했다.

"카이로시아는 어때요? 잘 돼 가고 있나요?"

"음······. 아직은 좀 더 보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워낙 수비적인 부분이 취약해서요. 그것만 보완하면 바로 상위 리그도 노려볼 수 있을 겁니다."

"좋네요. 팜에 적응하는 부분은 어때요?"

아세리안의 질문에 나는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쉽지 않습니다. 뭐랄까, 두터운 벽을 세워놓은 것 같더군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요."

내 말에 아세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아니,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것 같기도.

"잘 해주세요. 아마, 뭔가 상처가 있어서 그럴 거예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고위 귀족에서 단번에 노예로 전락했다죠? 그래서 그럴 수도 있어요."

"음."

"거기다 또 엄청 예쁘잖아요. 얼마나 모욕적인 일들이 많았겠어요. 잘 좀 부탁드릴게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잘 알았으니까.

"아 참, 먼저 전해야 할 소식이 있었는데, 말이 너무 길었네요. 게임 메이커한테 연락이 왔어요. 플래티넘 급 스킬 3개는 어렵다고 하더라구요."

아세리안이 아쉬워하며 말했다.

'그럴 것 같았지.'

애초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림자 표식 같은 스킬을 세 개나 달라고 한 것은 정말 양심 없는 요구였으니까.

"그렇군요."

"대신, 안우진님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스킬 중 3개를 성계 대항전에 한해서 업그레이드 시켜 주면 안 되냐고 묻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보유 중인 스킬 3개를 업그레이드 시켜준다라······.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검지로 식탁을 톡, 톡 두드렸다.

너무 애매모호한 말인데?

어떤 식으로 업그레이드를 해준다는 거지?

"너무 추상적인 말이군요. 좀 더 자세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가 거절한다는 뜻을 내비치자 아세리안이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 안우진님. 제 생각엔 아무래도 그냥 승낙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뜻밖이었다.

아세리안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어필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째서죠?"

"제 생각엔 아무래도 게임 메이커가 시위를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시위······?"

그러자 아세리안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상위 리그로 올라온 지 어느새 10주나 지났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오퍼가 안 들어오고 있어요. 뭔가 이상하지 않으세요?"

"좀 늦긴 하군요."

"제 생각엔 아무래도······. 안우진님이 성계 대항전을 수락할 때까지 게임 메이커가 오퍼를 안 넣을 생각인 것 같아요."

"······!"

< 69화. 플레잉 코치(4) > 끝

< 70화. 플레잉 코치(5) >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오퍼를 안 넣는다고?

"아무리 게임 메이커라고 해도······. 관객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을 텐데요. 지금도 제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신들이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하아. 어디서부터 설명해 드려야 할지. 게임 메이커가 누군지는 아시나요?"

아세리안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커뮤니티를 뒤져봐도, 게임 메이커라는 직책만 나올 뿐, 누구인지 특정해서 얘기가 나온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등급이 좀 높은 신이 아닐까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상위 리그의 게임 메이커는 1급 치천사熾天使 라파엘이에요. 다섯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대천사죠."

"······ 그래봤자 천사 아닙니까. 아세리안님이 더 높은 것 아닌가요?"

"아뇨. 계급상으로도 저보다 높을뿐더러, 애초에 치천사들은 그런 계급의 범주를 넘어선 존재들이에요."

아세리안의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 상식으로는 당연히 천사보다 신이 더 높은 존재들이었으니까.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음. 천사들이 일정 계급이 되면 신으로 승격할 수 있는 건 아시나요?"

"예."

"4급 주천사主天使 가 되면 하급신으로 승격할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3급 좌천사座天使 가 되면 중급신이, 2급 지천사智天使는 상급신으로 승격할 수 있죠. 그래서 1급 치천사는 고신과 같은 존재들이란 거예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어떤 시스템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고신 위에 대신과 주신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치면 엄청 높은 계급은 아닐 텐데요."

"이론상으론 그런데, 사실 치천사들은 주신과 거의 비슷한 예우를 받아요. 왜냐하면, 아버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다섯 천사라는 상징성 때문이죠."

"······."

"우리에게 계속 오퍼를 넣지 않고 있는 라파엘은 그런 다섯 천사 중 한 명이구요."

"······!"

젠장.

아세리안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실수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한마디로, 주신과 일개 상위 플레이어가 힘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높은 존재라면 관객들의 요구사항을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나 하나쯤 매장시키는 거야 일도 아니겠지.

'내가 검자루를 쥐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까 상대가 내민 검날을 쥐고 있던 상태였다.

그렇다면 아세리안의 말대로 계속해서 이렇게 뻗대고 있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고위 리그로 올라가지 못한 채 평생 상위 리그에서 썩을 수도 있는 상황.

손해를 보냐 안 보냐를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음. 말씀을 들어보니, 제가 거절할 수가 없는 상황이네요. 알겠습니다."

"휴우. 현명한 선택이세요. 그럼 게임 메이커한테 성계 대항전에 참가하겠다고 전할게요."

그제야 아세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 속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쯧. 내가 너무 경기에 관한 것만 생각했군.'

앞으로는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도 충분히 체크해둬야 할 것 같았다.

성계 대항전에 참석하겠다고 얘기한 이후, 나는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주창범씨. 요즘 표정이 안 좋네요. 무슨 일 있습니까?"

"아, 형. 요즘 제 실력이 늘질 않아서요. 스텟은 오르는데, 뭔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느낌이에요."

"오, 아주 좋네요."

"좋다구요?"

"네. 최상급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고작 9개월 만에 최상급이라니, 정말 대단합니다."

"앗, 그렇게 생각하니까 진짜로 좋아해야 하는 상황이었네요! 감사해요, 형.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어요."

"또 무슨 걱정이 있으면 얘기해요. 안에 담아두지 말고."

그동안은 플레이어들의 스텟과 테크닉 등 경기에 관한 부분만 챙겼다면, 이제는 경기 외적인 부분까지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할 일이 특별하게 많아진 건 아니었다.

"모용악님.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제가 이곳에 적응이 덜 됐다 보니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루치아노님께 말실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엔 저를 멀리하더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루치아노씨도 모용악님이 아직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 겁니다. 다만, 앞으로는 더 조심해줬으면 좋겠다, 라는 어필을 하고 있는 걸 테니까 며칠 동안 모용악님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면 루치아노씨도 평소처럼 돌아올 겁니다."

그저 내 훈련을 하면서.

뭔가 힘들어 보이는 플레이어들이 있으면 얘기를 들어주었을 뿐.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나는 아세리안에게 팜에 내려진 금주령을 풀어달라고 건의했다.

"금주령을요?"

"예. 플레이어들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것 같더군요. 사소한 일에도 예민한 모습을 많이 보이네요. 사실, 인간인 이상 기계처럼 매일매일 훈련만 하면서 살 순 없으니까요."

"음······. 스트레스 해소하기에 음주만큼 좋은 게 없죠. 근데 괜찮을까요?"

"물론 전보다 사건 사고가 많아지긴 하겠죠. 하지만 이대로 두면 더 크게 문제가 될 겁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편하게 플레이어들을 관리해왔다고 생각하시죠. 그리고 이젠 천사도 두 명이나 있지 않습니까."

"하긴, 요즘 모두들 표정이 안 좋더라구요. 음, 좋아요. 금주령을 해제하도록 하죠."

플레잉 코치를 맡고, 플레이어들을 케어하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이다.

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 그래도 경기에 나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

거기에 매일같이 고된 훈련을 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맛이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세리안에게 허락을 받은 나는 모든 플레이어들을 공터로 불러 모았다.

"오늘부터는 술을 마셔도 됩니다. 이세연씨에겐 제가 미리 얘기해 두었으니, 일과가 끝난 이후로는 자유롭게 드세요."

"우와아아아아! 술이다!"

"정말요? 정말 마셔도 됩니까?"

"하······. 살았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플레이어들은 웃음꽃이 핀 채 환호했다.

무척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그동안 다들 술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 차가운 얼굴로 일관하던 카이로시아까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끝내면 안 되지.'

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순간적으로 내 몸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진득한 살기가 공터를 가득 메웠다.

"마시는 건 좋습니다."

그러자 시끌벅적하던 플레이어들이 순식간에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모두들 환호하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음주로 인해 사망사고나 성범죄에 관련된 일이 발생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죠. 그 입에서 제발 죽여 달라는 말이 나오도록 해드리겠습니다."

"······!"

내뿜는 살기로 인해 플레이어들이 온몸을 벌벌 떨었다.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 있던 플레이어들의 감정을 한순간에 밑바닥으로 처박았다.

그렇기에 녀석들은 내 경고가 더 섬뜩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 정도면 경각심은 충분히 심어준 것 같고.'

싸늘하게 깔리던 살기를 거둬들인 나는 방긋, 미소 지었다.

"허억, 허억."

그러자 플레이어들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모두 제 말을 알아들은 것 같으니, 여기까지만 하죠."

금주령 해제는 무척 예민한 문제인 만큼, 녀석들을 들었다 놨다 함으로써 오늘 일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내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나쁘지 않군.'

지난 일주일 동안 음주로 인한 사건 사고가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전날 과음해서 훈련에 지장이 생기는 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성공적으로 음주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다.

"우진이 형. 오늘 술 한잔 어떠세요? 다른 형들도 같이 먹기로 했거든요."

일과가 끝나고 저녁 시간.

주창범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 넵! 혹시나 마음이 바뀌면 제 방으로 오세요!"

주창범에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숙소로 향했다.

일과도 끝났겠다, 이제 방에 들어가서 쉴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흑흑······."

누군가 소리 죽여 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소리의 진원지는 내가 카이로시아와 함께 훈련을 하는 체력 단련장 뒤쪽이었다.

조용히 다가가 보니, 카이로시아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쯧.'

자존심 강한 카이로시아 이기에, 섣불리 위로를 건넬 수도 없는 상황.

나는 그녀를 못 본 척 한 채,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이세연의 방 문을 노크했다.

"누구세요? 앗, 안우진님!"

"쉬고 있는데 미안합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아, 아뇨! 혹시 시키실 일이라도······."

고개를 갸웃하는 이세연에게, 나는 카이로시아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세연씨가 카이로시아님의 술친구가 되어주실 순 없을까 해서요. 무리한 부탁인 걸 알지만, 제가 마땅히 도움을 청할 만한 분이 이세연님 밖에 없더군요."

"아······."

"물론 불편하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이건 지시가 아닌, 부탁입니다."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이세연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지금 체력 단련실 뒤편으로 가 볼게요."

"아, 다음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따로 얘기해 둘 테니, 내일은 편한 시간에 출근하세요."

플레이어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 식사와 청소 같은 일을 하는 이세연에 대한 배려였다.

"앗, 감사합니다."

이세연이 식당에서 술을 챙겨 카이로시아에게 향하는 모습을 본 나는 근처 건물의 지붕으로 숨어들었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엿듣고자 함은 아니었다.

그저, 압도적으로 강한 카이로시아가 이세연에게 어떤 해코지라도 할까 걱정되었을 뿐.

'내 부탁 때문에 이세연이 피해를 보는 건 안 되지.'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우는 모습을 들킨 카이로시아가 잠시 까칠하게 나왔지만, 이내 이세연이 가져온 술을 마시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쉽지 않네.'

마치 보모가 된 느낌.

카이로시아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네임드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울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엔 내 갈 길이 너무 바빴으니까.

'이렇게 여유롭게 밤하늘을 보고 있는 것도 오랜만이군.'

밤하늘 가득 뿌려지는 별빛을 보고 있자니, 문득 가족들 생각이 났다.

순간 가슴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오랜만에 한잔해야겠네.'

천장에 몸을 기댄 나는 품속에서 술 한 병을 꺼내 들었다.

이세연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챙겨온 술이었다.

'보고 싶다.'

한 모금 들이켜자 목구멍이 불에 데인 듯 화끈했다.

1회차까지 합쳐서, 가족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 어느덧 11년.

'어머니. 형.'

정말 미안해.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가족들 얼굴이.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약해지지 말자.'

나는 곧바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럼에도 한 번 고개를 든 그리움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휙!

'어?'

내 창을 피하는 카이로시아의 모습에 등골이 서늘했다.

내 공격이 실패했다는 건.

[사그라드는 눈꽃!]

그녀의 마법이 발동된다는 거였으니까.

'그림자 이동.'

콰과과과과과과광!

주창범의 뒤로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폭음이 귀를 때렸다.

뿌옇게 생겨난 먼지 위로, 카이로시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내가 그랬죠? 이젠 이길 수 있다고."

그 모습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특전과 그림자 표식을 안 쓴다는 조건이었긴 하지만, 설마 날 쓰러트릴 줄이야.

내 예상보다, 카이로시아는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인정합니다. 이젠 정말 못 당해 내겠네요."

"그럼 저도 이제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거죠?"

카이로시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데뷔전을 가진 모용악, 고건하와 달리 카이로시아는 아직까지 경기에 뛰지 못한 상태였다.

나를 이기기 전까진 출전시키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라면 이제 충분할 것 같군요. 물론, 앞으로도 근접 대련은 계속할 겁니다."

사실 카이로시아가 이렇게 빨리 성장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적어도 3개월 이상은 걸릴 줄 알았는데······.

'근접전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고작 5주 만에 내 공격을 막아낼 줄이야.'

물론, 특전을 켜면 여전히 상대도 안 될 수준이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하위 리그에서 경기를 치를 것이기에.

나보다 뛰어난 네임드가 아닌 이상, 그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모두 고생 많았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고생 많으셨어요, 형."

"오늘도 정말 감사합니다."

어느새 저녁 6시.

일과를 끝내고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함께 대련했던 플레이어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남긴 나는 대련장을 나섰다.

그러자 카이로시아가 익숙한 몸짓으로 내 뒤를 따라왔다.

"요즘은 지내는 게 좀 어떻습니까."

"똑같아요."

"어렵거나 힘든 점은 없습니까?"

"네."

카이로시아는 여전히 쌀쌀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벽을 세우고 있달까.

하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요즘은 이세연과 친하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고위 귀족이었던 그녀가 사용인인 이세연을 무시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잠시나마 노예의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 이세연과 죽이 척척 맞았다.

'카이로시아가 상위 리그까지 올라오면 포인트가 제법 되겠어.'

빠르게 치고 올라가는 중인 모용악과 고건하.

요즘 한참 주가를 끌어올리고 있는 사인방.

정신적으로 많이 안정을 찾은 카이로시아.

수월하게 성장하고 있는 3기수와 4기수까지.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남은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식당으로 향할 때였다.

"안우진님!"

집무실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아세리안이 나를 불렀다.

나는 카이로시아에게 먼저 식당으로 가라고 손짓한 후 집무실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네! 드디어 왔어요! 첫 경기 오퍼가!"

"후. 이제야 들어왔군요."

아세리안에게 성계 대항전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지 2주째.

그동안 감감무소식이었던 게임 메이커에게 오퍼가 들어온 것이다.

"네. 오래 기다리셨죠? 안 그래도 요즘 답답해하시는 것 같았는데, 다행이네요."

"경기는 언제입니까?"

"하이블러드나이트112, 1경기에요. 유형은 팀 PvM."

< 70화. 플레잉 코치(5) > 끝

< 71화. 대가의 제단(1) >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팀 PvM 미션?"

"네. 5인 1조로 편성되는데, 어떤 팀 상위 플레이어가 4명밖에 안 돼서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안우진님이 다른 팀에 껴서라도 참가할 의향이 있다면 출전시켜 주겠다고 했어요."

다른 팀 사이에 껴서 출전한다라······.

팀 PvM 미션은 팀원 간의 케미가 무척 중요한 경기.

그런데 다른 팀 4명 사이에 내가 낀다면 케미가 엉망이 될 수도 있었다.

'변수가 너무 많은데.'

거기다가 팀 운이 꽝일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마음 같아선 오퍼를 거절하고 싶었다.

'길들이기로군.'

하지만 이 오퍼는 절대 거부해선 안 된다.

연이은 성계 대항전 거부로 인해 상위 리그 게임 메이커한테 찍힌 게 확실해진 상황.

만약 여기서 내가 이 오퍼를 거절한다면?

'더 확실하게 날 짓밟으려 하겠지.'

또 한참 동안 오퍼를 안 주다가, 나중에 가서 선심 쓰듯 더러운 미션 하나를 내밀 게 분명했다.

결국 언젠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오퍼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가하겠습니다."

"네, 그럼 오퍼 수락할게요."

"성계 대항전은 언제쯤 열린다고 합니까?"

"앞으로 1년 정도? 워낙 초대형 이벤트다 보니까, 그 정도 걸린다고 하더라구요.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도 그 정도 걸렸구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1년이라······.

'사람 잘못 건드렸다는 걸 알려주지.'

나는 이를 빠득 갈았다.

현재 내 위치는 그저 상위 리그의 신입생일 뿐.

하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날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슈퍼스타가 되고 말 거니까.

"훈련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럼요. 이번에도 제가 열심히 도와드릴게요!"

상위 리그는 하위 리그와 다르게 2주에 한 번 경기가 펼쳐진다.

이번 주에 110 경기가 시작되니, 앞으로 4주 정도 남은 셈이었다.

마침 팜의 상황도 어느 정도 안정화된 상황.

'일단 이번 경기부터 집중하자.'

그렇게 해서 하이블러드나이트 112 경기에 출전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하위 리그의 초신성! 하이블러드나이트 112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렌이 과연 상위 리그에서도 통할까 궁금해하시는 분들이라면? 하이블러드나이트 112에서 확인하세요!

―지구 출신의 유일한 네임드이자, 상위 리그 첫 지구 출신 플레이어. 그의 최초 기록은 언제까지 쓰여질 수 있을까?

└와 씨;; 기다리느라 목 빠질 뻔했다. 주변에서 하도 렌, 렌 거리길래 나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솔직히 성계 대항전 본 신들이라면 다 ㅇㅈ함. 얘는 상위 리그도 다 때려 부수고 올라갈듯.

└ㅇㅇ 오랜만에 나타난 찐임.

└ㅋㅋㅋㅋㅋㅋ 다들 과장이 심하넼ㅋㅋㅋ 요즘 하급신들 수입이 시원찮다더니, 이젠 댓글 알바까지 함?ㅋㅋㅋㅋㅋ

└오, 엄청난 네임드가 등장했다고? 뭐? 지구 출신이라고?! 응, 믿거~~~

└화려한 임팩트와 시원시원한 양학. 근데 거기까지였음. 그 이상 느껴지는 건 없더라.

└일단 중립 기어 박아 본다.

└중립222222

└어서 와. 네임드의 무덤은 처음이지?

아세리안과 함께 훈련한 지 4주째.

어느덧 하이블러드나이트 112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드디어 상위 리그.'

무려 3년이나 몸담았던 리그였고.

내게 절망을 선사했던 곳이었다.

과연 난, 회귀 전과 비교해 얼마나 더 강해졌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 좋은 설렘이 찾아왔다.

"첫 상위 리그 경기인데, 안우진님은 떨리지도 않으세요?"

내가 담담하게 공터에서 게이트가 생성되길 기다리자, 곁에 서 있던 아세리안이 물었다.

"음. 떨리긴 하죠. 다만, 제가 해왔던 노력들을 믿으니까요."

띠링!

[상위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112 1경기가 잠시 후 시작됩니다.]

[출전하는 플레이어 분들은 모두 입장을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대답과 동시에 경기를 시작한다는 알림창이 나타났다.

슈우우우웅-

잠시 후 공터에 경기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워프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좋은 결과 있을 거예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다 찢어버리고 오세요!"

"그대라면 상위 리그에서도 충분히 두각을 드러낼 것이다. 가서 멋지게 증명하고 돌아오거라."

양손을 가슴팍에 모은 채 내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아세리안.

가서 다 부숴버리고 오라는 포로도엘.

그리고 조용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피넛엘까지.

배웅해 주는 여신과 천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장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경기장으로 들어오니,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폐허가 보였다.

곳곳에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있는 걸 보니,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니 네 명의 플레이어들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 커뮤니티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 우리 팀으로 들어오는 거였군. 반갑습니다. 이 파티의 리더, 고창신입니다. 궁수죠."

그때, 가장 앞에 서 있던 궁수가 내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악마의 눈.'

띠링!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고창신]

[성향 : 인내]

[근력 : 80(+?)] [민첩 : 87(+?)] [체력 : 89(+?)]

[정신 : 88(+?)] [지력 : 22(+?)] [마력 : 72(+?)]

[각성 능력 : <최상급궁술 > <최상급보법 > <고급마나운용 > <고급기마궁술 > <상급박투술 > <최상급추적술 > <중급치료술 >]

[업적 특전 : 저격의 달인]

고창신의 스텟은 상위 플레이어 치곤 무척 낮은 편이었다.

하위 플레이어 최상급 수준이라고나 할까.

다행이라면 스텟이 딱 궁수에게 최적화 되어 있었다.

'쯧. 팀 운은 꽝인 거 같은데.'

의외라면 업적 특전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

"렌입니다."

고창신과 악수를 나눈 나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악마의 눈을 사용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고창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방금 전에 팀 운이 꽝이라고 했던 표현을 취소해야 할 정도로.

그렇기에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스텟이 제일 낮음에도 불구하고 이 네 명 중에서 리더라는 것이.

고창신 뒤로 다른 플레이어들도 한 명씩 자기소개를 했다.

"이든, 기사입니다."

중갑을 착용한 채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기사, 이든.

"비욘이오."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는 대머리 전사, 비욘.

"로만이라고 합니다. 대지의 마법을 주로 사용하죠."

중세 시절의 제복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마법사, 로만.

'조합은 아주 좋아.'

탱커와 근접 물리 계열이 둘, 원거리 딜러가 둘이었다.

팀전을 치르기에 가장 좋은 구성.

띠링!

[경기 : 상위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112의 제 1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보스 몬스터 처치(단체 PvM)]

[게임명 : 죽음의 구도자]

[맵 : 갈망의 지하 유적(중)]

[관객 수 : 188,666 명]

[승리 조건 : 지하 유적 어딘가에 존재하는 보스 몬스터 처치]

[단체 PvM 미션은 승리한 파티에 한해서 모두 부활합니다.]

[현재 생존한 파티 수 : 20 개]

[보너스 포인트 조건이 있습니다.]

[유적 내부의 몬스터를 많이 죽일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적 플레이어를 많이 죽일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몬스터 킬 수 현황 ― 없음]

[파티 킬 수 현황 ― 없음]

[3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미션은 보스 몬스터 처치.

마침 파티 조합이 좋아서 사냥 속도도 빠를 테니까, 나쁘지 않은 미션이었다.

'보스 몬스터를 빨리 찾는 쪽이 유리하겠군.'

유적의 어디에 보스 몬스터가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초감각 덕분에 탐색 반경이 남들보다 훨씬 넓은 내가 있으니, 충분히 해볼 만 할 것이다.

[2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팀 미션은 리딩이 중요하죠. 제가 리딩을 맡아도 되겠습니까?"

고창신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띠링!

[플레이어 '고창신'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이미 다른 팀원들이 리더로 고창신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

여기서 내가 한다고 나선다 해도, 통제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지휘자가 두 명으로 나뉘는 것 만큼은 피해야 했다.

어느 정도 유대감이 생긴 이후라면 모를까.

[1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모두들 엄숙한 표정이 되어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나도 특전과 천둥의 숨결을 모두 켜고, 벽력섬전을 빼들었다.

누가 더 빨리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느냐의 문제이기에 신속하게 움직여야 했다.

[경기 시작!]

시작 콜이 뜸과 동시에 우리는 누가 지시한 게 아님에도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현재 우리는 폐허 한 가운데에 있는 상황.

보스 몬스터가 있는 곳이 지하 유적이라고 그랬으니, 어딘가에 있을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를 찾아야 했다.

'경험이 풍부하네.'

상위 리그쯤 되니까, 누가 일일이 얘기해주지 않아도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각자 눈치껏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서 통로를 찾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한마디로 센스가 좋다고나 할까.

'찾았다.'

마력장을 펼치자 수많은 폐허 가운데,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다가가 보니, 넝쿨 같은 것들로 감싸여진 지하 계단이 폐허 바로 옆에 있었다.

사람 하나가 가까스로 내려갈 수 있을 만큼 좁은 계단이었다.

"여기!"

나는 곧장 소리치며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오면 충분히 계단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미리 내려가서 정찰을 해둘 생각이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지하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복도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오랫동안 방치됐던 것인지 곳곳에 곰팡이가 펴있었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찾아왔다.

'무슨 몬스터가 사는 거지?'

상위 리그 경기인 만큼, 하위 리그보다 훨씬 더 강한 몬스터들이 출현한다.

그게 아니고서야, 상위 플레이어들에게 경기를 배정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복도 형태로 되어 있기에, 작은 소리에도 큰 울림이 있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일단 조금 더 들어가 봐야겠군.'

나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주변을 경계하며 이동했다.

무슨 몬스터가 등장하는지 알아내기 전까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로 구성된 지하 유적인지, 아니면 소수의 상위 몬스터가 등장하는 건지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은신 계열의 몬스터가 나오거나, 아니면 함정이 존재한다면 섣부르게 움직였다간 낭패를 보게 될 수도 있으니까.

타다다다닥-

내가 복도의 끝부분에 다다를 때쯤 다른 팀원들도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왔다.

내가 살금살금 걷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이내 숨소리와 발소리를 죽인 채 따라오기 시작했다.

'일단은 파티장의 판단에 맡겨야겠군.'

복도 끝, T자 형태의 양 갈래 길로 나눠지는 길목에서 멈춰선 나는 다른 팀원들이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

그리고는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지금까지 모아놓은 정보를 전달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결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빠르게 치고 나가느냐, 아니면 느리더라도 안전하게 가느냐."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고창신이 입을 열었다.

"정면 돌파 하겠습니다. 변수를 하나하나 따지기에는 정보가 너무 없군요. 제가 길을 잡겠습니다."

다행히 고창신의 판단은 내가 잠정적으로 내렸던 것과 같았다.

다른 팀원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부터는 대열을 짜서 이동하겠습니다. 내가 전방 척후를, 그리고 이든님, 비욘님, 로만님 입니다. 렌님께 후방 척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 주시죠."

고창신이 짠 진형은 나쁘지 않았다.

궁수이자, 길잡이인 고창신이 선두에서.

탱커인 이든이 바로 뒤를.

난전에 강한 전사가 중앙에 섬으로서 변수에 대비하고.

근접전에 취약한 마법사가 네 번째, 그리고 내가 마법사를 보호하면서 퇴로를 체크하는 역할이었다.

'한두 번 리딩해본 게 아니군.'

어쩐지 스텟이 가장 낮은데도 불구하고 고창신이 리더를 자처하나 했더니, 판단력이 무척 좋았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믿고 따라도 될 것 같았다.

그때부터 스피드 있게 유적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악마의 눈이 있는 나와 다르게, 고창신은 깜깜해서 앞이 잘 안 보일 텐데도 불구하고 움직임이 무척 부드러웠다.

스텟은 낮지만, 그 외의 센스나 감각이 무척 좋은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묘한 구조네.'

복도를 따라가다 보면 항상 끝부분에서는 T자 형태의 양 갈래 길이 나왔고,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커다란 공동 같은 게 있었다.

공동에는 낡고 부서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구조물들이 있었고, 또다시 수많은 복도로 나눠지게 되는 구조였다.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미국의 지하 비밀 연구소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뭔가 기시감 같은 게 느껴졌다.

'유적이라기보단 미궁이라고 보는 게 맞겠어.'

그렇게 미로처럼 뻗어 있는 유적을 돌아다니길 한참.

그동안,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마주치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 미로를 헤쳐 나가다 보면, 중간중간 준보스 개념의 몬스터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빨빨거리며 내부를 수색할 때였다.

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

공동을 지나고 있는데, 무언가 기분 나쁜 떨림이 우리를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승급전에서 만났던 사제가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킬 때 만들어졌던 느낌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투득- 투드드득- 투드득- 투드드득-

지하 유적의 흙바닥에서 무언가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고 있는 해골들이었다.

'언데드!'

엄청난 숫자.

적게 잡아도 몇천은 되어 보일 정도였다.

"방진을 짜겠습니다. 이든님과 비욘님, 렌님이 삼각형을 그려주세요. 로만님은 곧바로 광역 마법을 준비해주시구요."

우리는 기민하게 움직여 방진을 만들었다.

이미 공동의 한가운데에서 사방으로 언데드들에게 둘러싸인 상황.

공동뿐만 아니라 유적 전체에 언데드들이 출현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돌파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 부분을 고창신도 염려한 건지, 굳이 돌파보다는 수비에 초점을 둔 것 같았다.

'상급 언데드의 숫자는 많지 않아.'

거의 대부분이 하급 언데드인 스켈레톤이었고, 그보다 상위인 듀라한은 간간이 보일 뿐이었다.

일단은 원거리 딜러들을 보호하면서 녀석들의 숫자를 줄여나가는 데에 집중하는 게 맞았다.

"조급해하지 말고 차분하게!"

고창신의 외침과 동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직!

나도 뇌전을 뿜어내며 녀석들에게 창을 휘둘렀다.

그때였다.

서걱! 서걱!

"······?"

내 창에 뼈가 박살 나며 쓰러지는 스켈레톤들.

서걱!

그런데, 왜.

서걱! 서걱!

피의 강화와 피의 회복 콜이 안 뜨는 거지?

[<피의 회복>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체력이 1% 회복된다.]

[<피의 강화>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모든 스텟이 일시적으로 1% 상승한다. 1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스텟 상승이 초기화되며, 최대 30%까지 상승한다.]

설마.

얘네들은 생명체로 보지 않는 건가?

'젠장.'

나는 곧장 천둥의 숨결부터 해제했다.

< 71화. 대가의 제단(1) > 끝

< 72화. 대가의 제단(2) >

예상치 못하게 피의 강화 특전과 피의 회복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전에 아세리안과의 대화를 통해 이런 일이 언젠가 한 번쯤은 생길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괜찮아.'

내 기초 스텟은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역천자와 최강의 성계 특전이 있기 때문에 같은 팀원들의 평균 정도 수준은 된다.

거기다 상위 리그 경험도 더 풍부하고, 실력도 더 뛰어나니 당황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푹! 푹! 푹!

곧장 찌르기 위주로 스타일을 바꿨다.

휘두르는 건 한 번에 많은 숫자의 언데드들을 죽일 수 있지만, 체력 소모가 훨씬 크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최대한 간결하면서, 효율적으로 싸워야 한다.

"인간을 상대한다고 생각하고 싸우면 안 됩니다! 모두들, 뼈를 아예 부숴버린다는 생각으로!"

뒤에서 고창신이 조언을 해주었지만, 언데드 사냥은 내가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녀석들은 해골로 되어 있기에, 목을 벤다거나, 팔을 자르더라도 계속 움직이므로 부숴버린다는 개념으로 싸우는 게 맞긴 하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결국 인간과 같은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

찌르기로도 충분히 스켈레톤들을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척추 같은 곳.

푹!

내게 복부를 찔린 스켈레톤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녀석은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기 위해 바둥거렸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애초에 척추는 신체를 지탱하는 핵심 뼈.

척추가 부러지면 인간은 걷지도,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건 언데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척추가 창에 관통해, 쓰러진 언데드 중 하나가 양팔로 바닥을 기어 오며 내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엎드린 상태로 검을 휘둘러 봤자, 내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체중을 싣지 못하기에 느리고 의미 없는 휘두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콰직!

바닥에서 기어 오던 녀석을 발로 밟아 박살 낸 나는 다른 스켈레톤들에게 창을 뻗었다.

"모두 척추뼈를 노리시죠! 척추를 부수면 무력화 시킬 수 있습니다!"

스켈레톤과 듀라한을 향해 화살 세례를 뿜어대고 있던 고창신이 외쳤다.

내가 싸우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남은 체력 : 81%]

'나쁘지 않아.'

초반에 천둥의 숨결로 인해 체력 소모가 제법 있었지만, 비활성화 시킨 이후로는 고작 5% 정도밖에 내려가지 않았다.

체력 스텟이 90을 넘어선 덕분이었다.

이 정도라면 경기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고요한 태고의 손길!]

마침 로만의 마법이 발동되며 우리가 동그랗게 그린 원 바깥의 바닥이 늪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언데드들이 빨려 들어가며 허우적거렸다.

콰직! 콰직!

그러자 내 왼쪽 뒤편에 있던 비욘이 거대한 도끼를 방방 휘두르며 스켈레톤들을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끼는 난전에 특화되어 있는 무기.

그동안 수비 위주로만 싸우려니 좀이 쑤셨을 것이다.

'무리하지 말고 한 마리씩 정리하자.'

언데드들이 출몰하는 유적인 만큼, 언제 어디서 높은 등급의 언데드가 나타날지 모르는 일.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최대한 체력을 아껴놓을 계획이었다.

"후.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로만의 마법과 비욘의 활약 덕분에 빠르게 언데드들을 정리한 우리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많은 시간을 잡아먹힌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번 경기는 누가 먼저 보스 몬스터를 죽이냐 하는 타임 어택 미션.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돌파하지 않길 정말 잘했군.'

공동에 있는 복도 중 하나로 빠져나오니, 고위 언데드인 데스 나이트가 진을 치고 있었다.

방어에 특화된 몬스터들인 만큼, 돌파를 감행했다면 큰 피해를 봤을 것이다.

"비욘님도 앞으로 나와주시죠. 이든님이랑 저까지 셋이서 돌파해야겠습니다."

"그 말을 기다렸지. 으랴아앗!"

"체력 떨어지면 바로 말해줘야 합니다!"

"아직까진 문제없소!"

전방에서 이든과 비욘, 고창신이 데스 나이트들을 정리하는 사이, 나는 뒤쪽에서 몰려오는 스켈레톤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좁은 복도를 끼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어려운 싸움은 아니었다.

"팀장님 리딩 나쁘지 않죠?"

한동안 스켈레톤을 정리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로만이 내게 물었다.

"판단력이 정말 좋군요. 뛰어난 분이네요."

"맞아요. 정말 다재다능하달까요. 거기다 렌님처럼 센스있는 분까지 팀원으로 들어오셔서 속도가 더 빨라진 것 같아요."

로만의 말에는 고창신에 대한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헉, 헉, 젠장! 데스 나이트가 끝이 없군!"

"렌님! 비욘님과 교대를!"

그 사이 전방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다 보니, 비욘의 체력이 금세 바닥난 모양.

고창신의 말에 나는 크게 창을 휘둘러 스켈레톤들을 정리하곤, 곧장 전방으로 달려갔다.

'천둥의 숨결.'

콰지지지지지직!

그리고는 로만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메우며 데스 나이트들에게 창을 휘둘렀다.

까앙! 까앙! 까앙!

데스 나이트는 숫자가 적은 대신, 방어력이 높기 때문에 단숨에 박살 내고 나아갈 생각이었다.

내 창이 한번 번쩍할 때마다 데스 나이트가 한 마리씩 바닥으로 쓰러졌다.

"오! 공격력이 엄청나군!"

그 모습에 곁에서 검을 휘두르던 이든이 감탄했다.

'금방 뚫을 수 있겠어.'

창을 휘두르는 내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잘 싸우긴 하네. 근데 저게 그렇게 열광할 정도인가??

└잘 싸우긴 개뿔. 평범한 수준이구만.

└..? 도대체 요즘 하위 리그는 수준이 얼마나 떨어졌길래 저런 플레이어를 보고 GOAT를 논함?

└야, 그 전에 렌이 올라오면 상위 리그 다 뿌수고 올라간다는 넘 어디갔냐 ㅋㅋㅋㅋㅋㅋ 가서 상위 넘버링 경기 보고 와서 다시 댓글 달아라 ㅡㅡ ㅅㅂ

└이래서 어그로 끄는 애들은 걸러야 함 ㅡㅡ 쟤 앞으로 두세 경기 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에 내 왼쪽 손목 건다. 참고로 내 여자친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성계 대항전 혼자서 지구 우승 시키고, 하위 리그 터트리고 올라왔다는 얘 수준이 저정도임?ㅋㅋㅋㅋ 하.. 이제 콜로세움도 끝물인가 보다..

└음.. 오늘 렌이 좀 이상하네. 왜이렇게 약한거 같지? 원래 저렇게 약하지 않았던거 같은데..

└윗댓 / 군계일학이라는 용어 암? 무림에서 쓰는 말인데, 닭 떼 속에 섞여 있는 두루미 한 마리라는 뜻임. 하위 리그에서는 특출나 보일지 모르지만, 상위 리그에서는 어림도 없지.

└ㅋㅋㅋㅋㅋㅋ 역시 지구 출신~~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 믿거~~~!

콰과과과과광!

언데드들을 사냥하며 앞으로 전진하고 있을 때였다.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지하 유적이 찌르르 떨렸다.

천장에서 바스러진 모래들이 떨어졌다.

'다른 팀 플레이어들이군.'

선두에서 달려가고 있던 고창신이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자세를 낮추자, 뒤따라가던 팀원들이 숨을 죽인 채 멈춰 섰다.

"앞쪽에 다른 팀이 있는 모양입니다. 지금의 진동으로 보면 마법인 것 같네요. 저들은 우리가 있다는 걸 모를 테니까, 우리가 훨씬 유리합니다. 단숨에 기습하겠습니다."

고창신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미션에 실패한다고 해서 사망하는 것도 아니기에, 고창신이 전투를 피하자고 하면 어쩌나 걱정한 것이다.

'그건 절대 안 돼.'

어차피 우리가 기습을 할 것이기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

상황에 따라 전투를 피할 순 있겠지만, 지금은 고려할 필요도 없는 경우의 수였다.

'워낙 생존에만 초점을 맞춘 채 플레이하는 녀석들이 많으니까.'

나도 생존이 우선이긴 하다.

하지만 내 최종 목표는 오랜 생존이 아닌, 초월 리그에 올라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 관객들에게 인기를 끄는 것은 필수였다.

그래야 오퍼도 더 잘 들어오고, 기본급도 계속해서 오를 테니까.

관객들에게 외면받은 플레이어에게는 오퍼가 들어오지 않는다.

'괜히 지구에 있던 격투기 단체에서 상위 랭크에 있는 녀석들이 제명당하는 게 아냐.'

생존만을 위해 지루한 경기 운영을 하는 플레이어는 가차 없이 버린다.

그건 콜로세움도 마찬가지였다.

여기도 결국, 관객들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곳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아르웬처럼 항거 불능의 적을 만나거나, 체력이 부족해 싸울 수 없는 게 아니고서는 전투를 피해선 안 됐다.

"최우선 타겟은 1번, 정령사. 2번, 마법사. 3번, 궁수입니다. 저와 로만님은 1, 2, 3번 타겟을 우선적으로 노릴 겁니다. 이든님?"

"예."

"이든님은 저와 로만님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해 주세요. 비욘님은 가장 빨리 죽일 수 있는 녀석부터 한 명씩 차근차근 줄여 주시구요."

"알겠습니다."

"맡겨주시오."

"렌님께는 프리롤을 부여하겠습니다. 상황에 따라 알아서 움직여주세요."

고창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의 언데드 들과의 전투에서 내가 상황에 따라 스타일에 변화를 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한마디로 나라면 상황에 맞게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뜻이었다.

'나쁘지 않군.'

"바로 출발하죠. 적의 모습이 보인다고 바로 달려들지 말아주세요. 제가 화살을 쏘는 걸 신호로 전투를 시작하겠습니다."

고창신을 선두로, 우리는 폭음이 들렸던 방향으로 내달렸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인가, 다른 팀이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의 영창 소리.

방패의 둔탁한 쇳소리와 길다란 무기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 그리고 발톱 같은 게 쇠를 긁는 소리까지.

"마법사 하나. 기사 둘. 창술사 하나. 그리고······. 수인족이 한 명 껴있는 것 같군요."

들리는 소리로 추론해서 얘기해주자, 다른 팀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렌님.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까?"

고창신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예. 이번 T자형 복도에서 왼쪽으로 가면 나오는 공동에 있는 것 같습니다."

"대단한 청력이군요. 덕분에 전투가 훨씬 수월해지겠습니다. 그럼 1타겟 마법사, 2타겟 수인족, 3타겟 창술사로 지정합니다."

"알겠습니다."

T자형 복도로 들어서니, 언데드가 단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싸우고 있는 녀석들에게 어그로가 끌린 모양이었다.

'기습하기에 딱 좋겠는데.'

덕분에 우리는 조용히 T자형 복도의 끝부분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이제는 적팀이 하는 말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챙! 채채챙! 콰과과과광!

"로렌! 마력 아껴!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하겠다!"

"알겠어요!"

마법사로 추정되는 자에게 마력을 아끼라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녀석들의 전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세를 낮춘 채 복도 끝에 멈춘 고창신은 잠시 기다리라는 수신호를 보내더니, 화살 한 발을 시위에 걸었다.

뿌드드득-

시위를 당기는 소리와 함께 고창신이 입 모양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천둥의 숨결 사용.'

하나.

핑!

고창신이 복도를 돌며 화살을 쏘는 것과 동시에, 나와 비욘이 튀어 나갔다.

그러자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이 스켈레톤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 예상대로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여자 마법사 하나,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기사 둘, 창술사 하나, 그리고 낭인족 한 명이었다.

'악마의 눈.'

다행히 전력은 우리와 비등비등.

그렇다면.

기습을 하는 우리 쪽이 훨씬 더 유리할 것이다.

"적이다!"

"비연! 남은 스켈레톤들을! 나랑 루딘이 녀석들을 막는다! 로렌은······."

팅! 팅! 팅! 팅! 팅! 팅!

적 팀장이 지시를 내리는 사이, 고창신이 쏜 화살 세례가 녀석들을 두들겼다.

비욘과 나를 막기 위해 앞으로 나오려던 두 명의 기사는 화살로부터 동료들을 지키다 보니, 방패를 세운 채 움직이지 못했다.

'낭인족부터.'

'알겠소.'

내가 낭인족을 향해 턱짓하자, 비욘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

우리가 쇄도하자, 기사의 방패 뒤에서 화살을 피하고 있던 낭인족이 발톱을 세운 채 나와 비욘을 막아섰다.

콰지지지지지지직!

'단숨에 죽인다.'

내 창과 비욘의 도끼가 낭인족에게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스스스스스슥-

녀석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비욘의 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틀며 비욘의 뒤쪽으로 창을 내질렀다.

챙!

그곳에는 양손을 휘둘러 비욘을 공격하려다 내 창에 막힌 누군가가 있었다.

"······!"

방금 사라진 낭인족이었다.

'암습 계열 스킬이군.'

쐐애액!

비욘에게 날아오는 공격을 내가 걷어내는 사이, 비욘이 본능적으로 몸을 틀며 낭인족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자 녀석의 모습이 흐릿흐릿해지더니, 다시 기사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하위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괜찮은 스킬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예리한 칼날!]

수인족을 막느라 주춤하는 사이, 상대 마법사가 쓴 바람 마법이 우릴 향해 날아왔다.

콰지지지지지직!

[마력 상쇄율 : 50%]

나는 단숨에 마법을 찢어버리며 두 명의 기사가 만든 방패 벽으로 창을 내리쳤다.

챙! 콰직!

창과 방패가 부딪치며 뇌전의 불꽃이 퍼지고, 상대 기사가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끅, 뇌전 속성! 조심!"

기사가 움찔하는 사이, 나는 다시 한번 창을 내질렀다.

방패 벽을 서둘러 뚫어내고 뒤에 있는 마법사를 처치할 계획이었다.

[포근한 산들바람의 숨결!]

그러자 마법사가 내 행동을 예상한 건지, 바람 보호막을 만들어 내 돌진을 저지했다.

[거인의 발걸음!]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날아오는 로만의 대지 마법.

쾅! 콰과광!

거대한 바위 같은 게 날아와 방어막을 두들기며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다 처치했습니다!"

수인족에게 막혀 돌파에 실패한 사이, 마법사의 뒤쪽에서 남은 스켈레톤들을 정리하던 적 창술사가 합류했다.

'쯧.'

"그럼 비연과 몰케가 상대 궁수와 마법사를 처리한다. 이들은 우리가 막을 테니, 서둘러!"

상대 팀의 창술사와 수인족이 무리에서 이탈하며 고창신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어딜!'

나는 곧장 좌우로 움직이며 이든을 향해 달려가려는 플레이어들에게 창을 휘둘렀다.

이든 혼자서 저 두 명을 막아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욘은 적 탱커들을 공략하고 있는 상황.

프리롤을 부여받은 내가 움직이는 게 맞았다.

'한 명이라도 발을 묶어놔야 해.'

그렇기에 나는 적들이 그쪽으로 다가가지 못하도록 견제를 해주어야 했다.

챙! 콰지지직!

그때부터 난전이 시작되었다.

쾅! 콰과과광! 챙! 팅팅! 채챙! 쾅!

마법과 마법이 부딪혀 작은 빛무리를 만들어 내고, 서로의 무기가 격돌하며 마력이 깨져 나간다.

상위 플레이어들 간의 전투는 하위 리그와 다르게 각종 스킬 임팩트로 가득했다.

나는 비연이라고 불린 창술사와 수인족의 주위를 배회하며, 녀석들이 이든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려 할 때마다 등을 노리고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녀석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나를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안 통해.'

녀석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미리 예상한 나는 빠르게 거리 조절을 하며 녀석들의 공격에서 빠져나왔다.

애초에 녀석들을 쓰러트리려는 것이 아닌, 견제를 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발을 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견제 실력이 제법이군. 갓 상위 리그에 올라왔다고 하더라도, 역시 네임드라 이건가."

"흥! 무서워서 정면 대결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네임드는 무슨."

창술사가 작게 읊조리자, 수인족이 콧방귀를 뀌며 뾰족하게 손톱을 세웠다.

녀석들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뭐지?'

무언가가 우릴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아무 기세도 담겨져 있지 않은 뾰족한 물체였다.

'화살!'

마력장이 아니었다면,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은밀한 공격.

그리고 여기서 화살을 날릴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힐끗 녀석들을 살피니, 놈들은 화살이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나는 지금까지완 달리, 곧장 녀석들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거리를 유지하며 견제에만 초점을 맞춘 스타일에서, 정면으로 파고 들어간 것이다.

그러자 마침 잘 됐다는 듯, 창술사와 수인족도 나를 향해 공격을 찔려 넣으려 했다.

그리고.

푹!

"끄윽······!"

자세를 낮추며 내게 파고들려던 수인족의 허벅지에 정확하게 화살이 박혀 들었다.

'굿 어시스트.'

그 탓에 수인족이 무게 중심을 잃으며, 자세가 무너졌고.

나는 고창신이 만들어준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걱!

< 72화. 대가의 제단(2) > 끝

< 73화. 대가의 제단(3) >

머리가 잘려 나간 수인족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띠링!

[플레이어 '몰케'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0)]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상승분이 초기화됩니다.]

이번 경기에선 처음 보는 피의 회복과 피의 강화 알림창을 뒤로하고, 나는 곧장 창술사에게 달려들었다.

"몰케! 젠장."

일대일 상황이 된 이상, 내가 녀석에게 밀릴 이유가 없었다.

챙! 콰지지직!

내 창이 녀석의 창을 뱀처럼 휘감으며 찔러 들어가자, 녀석이 황급하게 거리를 벌렸다.

[격랑 하는 겨울의 향기!]

[잠재워라, 땅의 숨결이여!]

어떻게든 자기편을 돕기 위해, 적 마법사가 마법을 날려댔지만, 로만의 마법이 동시에 날아들며 나를 지켜주었다.

확실히 경험과 센스가 많다 보니, 적 마법사의 영창 속도에 맞춰 마법을 커버할 줄 알았다.

덕분에 나는 오롯이 창술사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든님도 합류해 주세요!"

"예."

고창신의 말에 이든도 싸움에 가세하며 녀석들을 밀어붙였다.

한 명을 줄인 이상, 이대로 계속해서 수적 우위를 이용한다면 금세 녀석들을 전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크윽!"

이든이 방패를 앞세워 적 창술사의 공격을 끊어내고, 내가 그 빈틈을 노리며 녀석을 찔러 들어갈 때였다.

마력장으로 뒤쪽에서 비욘이 두 명의 기사에게 밀려 쩔쩔매고 있는 게 느껴졌다.

비욘이 빠르게 빠져나오려 하자, 두 명의 기사가 방패를 앞세워 도주하려는 공간을 잘라냈다.

팅! 팅! 팅! 팅! 팅! 팅!

고창신이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 화살을 날려댔지만, 적 기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화살 몇 발 정도는 몸으로 받아내며 거칠게 비욘을 몰아세웠다.

'쯧.'

나는 곧장 인벤토리에서 여유분의 창을 꺼내 비욘이 있는 방향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적 창술사를 이든에게 맡긴 채, 빠르게 비욘과 합류했다.

카앙!

내가 던진 창을 받아낸 기사가 한 걸음 크게 밀려났다.

창에 담긴 힘을 온전히 흘려내지 못한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나는 창을 앞세워 녀석에게 찔러 들어갔다.

그로 인해 빈 공간이 생겨난 비욘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쯧. 다 잡았거늘."

적 기사가 작게 읊조리며 마법사에게 합류하기 위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욕심부린 대가는 치러야지.'

나는 힘으로 몰아붙이며 적 기사가 마법사에게 합류하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고창신의 화살이 적 마법사의 보호 마법을 두들기고, 로만이 마무리를 하기 위해 영창을 하고 있는 상황.

지금 이 기사를 내가 물고 늘어지면, 적 마법사는 로만의 마법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천중千重의 겁박!]

마침 로만이 시동어를 읊으며 마법을 시전했고.

"아······."

꽈직!

적 마법사는 작은 단말마를 남기며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암석에 찌부러졌다.

안 봐도 즉사였다.

이제 남은 건 두 명의 기사와 한 명의 창술사뿐.

완벽하게 우리 팀 쪽으로 승기가 넘어온 것이다.

"씨발!"

고창신과 로만의 일점사를 받게 된 적 창술사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갓 상위 리그로 올라온 것 치고는 잘 싸우네. 원래 팀전 경험이 많았나?

└솔직히 강한 건 잘 모르겠는데, 판단력이나 전술 이해도는 ㅅㅌㅊ인듯. 오늘 처음 만난 팀원들을 저렇게까지 맞춰주는 건 분명 놀라운 재능임.

└이게 다 ㅂㅅ처럼 빨아주던 놈들 때문이야ㅡㅡ. 솔직히 저 정도 실력이 욕먹을 수준은 아니긴 한데, 다른 새끼들이 설레발을 너무 쳐서 기대감을 높여놨음.

└ㅇㅇ 스텟 낮은데도 저런 움직임을 보여줄 정도면 떡잎은 좋네. 잘만 키우면 상위 리그에서도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을 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경기 하루 이틀 보냐? 야 저 정도는 상위 리그에 널리고 널렸음 ㅋㅋㅋㅋㅋ 그리고 그런 애들이 상위 리그 밑바닥 쿠션을 이루고 있지 ㅇㅇ

└아니 애초에 네임드라매. 요즘은 네임드 기준이 많이 낮아졌나?? 아니면 지구 출신이라서 네임드라고 불러주는 거야? 저게 어딜 봐서 네임드냐고.

└ㅋㅋㅋㅋㅋㅋㅋ 그냥 기대하지 말고 봐~ 그럼 볼만 하니까.

서걱!

"커헉······."

적 팀장으로 보이는 마지막 기사를 죽이는 걸 끝으로,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후. 다행히 피해는 별로 없군요."

비욘이 두 명의 기사에게 공격을 당하느라 왼쪽 어깨에 상처를 입은 것 말고는, 다친 사람이 없었다.

5대5로 싸운 것 치고는 정말 경미할 정도의 피해였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특히, 렌님. 덕분에 비욘도 무사하고, 별 피해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띄워주는 고창신의 칭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팀원이지 않습니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요.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빈자리를 잘 메꿔주신 덕분에 다른 사람들도 전투를 수월하게 치를 수 있었습니다."

고창신의 말에 다른 팀원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비해 모두들 눈빛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번 전투를 통해 같은 팀원이라는 유대감이 생긴 것 같았다.

찰그락- 찰그락-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전투의 여파로 인해 주변에 있던 언데드들이 공동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제길. 쉴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치유의 물약을 들이켜고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비욘이 투덜거리며 도끼를 들고 일어났다.

[남은 체력 : 42%]

상위 플레이어들과의 전투로 모두들 기진맥진한 상황.

'쯧.'

거기다 나는 천둥의 숨결까지 켜고 있었더니, 체력을 많이 소모한 상태였다.

그나마 마지막 세 명을 내가 마무리했기에 체력이 3% 회복되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헥헥거리고 있었을지도.

"일단 보스 룸까지 돌파하며 중간에 쉴 만한 공간이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모두 전투 준비. 비욘님 상태가 안 좋으니까, 지금부터는 렌님이 선두를 부탁드립니다."

고창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나를 선두로, 다시 지하 유적의 탐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갈수록 상황이 조금씩 나빠졌다.

데스나이트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길목을 빼곡하게 가로막고 있을 정도로 많아진 것이다.

"헉, 헉. 젠장. 앞쪽으로는 뚫고 가기 어려워 보이는군요. 일단 뒤로 빠지겠습니다. 아무래도 한번 재정비 후에 다시 도전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고창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타임 어택 미션이긴 하지만, 체력이 없는 상태에서 저 데스나이트 군단을 무리하게 뚫으려고 하다간 위험할 수 있었다.

잠시나마 휴식할 공간이라도 찾고 싶었는데, 어딜 가더라도 언데드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행이라면, 앞쪽에선 데스나이트가 막고 있지만, 우리가 왔던 방향은 거의 스켈레톤 정도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쉴 공간을 찾긴 쉽지 않겠군."

나와 교대해, 전방에서 길을 뚫고 있는 기사, 이든의 말에 모두들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해도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초감각으로 인해 증폭된 청각이 미세한 소리 같은 걸 들을 순 있어도, 아무도 없는 공간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니까.

"모두들 체력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헉, 헉. 33프로 남았소."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던 비욘의 체력 소모가 무척 컸다.

"전 딱 40프로네요."

"뒤에서 마법만 때려 넣었더니 52프로 남아 있습니다."

이든과 로만의 체력은 아직 양호한 수준.

"렌 님은 얼마나 남으셨죠?"

"34프로 입니다."

팀원들의 남은 체력을 들은 고창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뚫고 들어가기엔 체력이 너무 적고, 그렇다고 아예 유적 밖으로 빠져나가는 건 그냥 경기를 포기하자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니까.

밖에서 체력을 모두 회복하고 돌아온다고 해도, 결국 또다시 길을 뚫고 들어와야 한다는 것도 문제였고.

"쉴 만한 공간을 딱 20분만 더 찾아보죠. 그래도 못 찾는다면 아예 밖으로 빠져나가겠습니다."

고창신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빠져나가는 건 안 돼.'

"만약 빠져나가게 된다면 그때부턴 저 혼자 남아서 플레이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림자 표식 스킬 덕분에 언제든 몸을 뺄 수 있다.

그만큼 리스크가 적기 때문에 혼자서라도 계속해서 경기를 진행하고 싶었다.

혼자서라면 클리어할 확률이 무척 낮겠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내 말에 고창신이 잠시 동안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음······. 굳이 말리진 않겠습니다. 어쨌든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니, 일단 최대한 돌아다녀 보죠."

그때부터 우리는 유적을 돌아다니며 언데드가 없는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쉴 만한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공동에서 언데드들을 모조리 죽여도, 잠시 후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

그 광경에 모두들 얼굴에 그늘이 졌다.

결국 밖으로 나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진짜 더러운 맵이군.'

몰려드는 스켈레톤들을 처리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3분 정도면 고창신이 얘기한 20분이 된다.

잠시 후면 나 혼자서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다.

'어?'

직경 30미터 정도의 커다란 공동을 지날 때였다.

낡아서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난 나무 조각들.

그 너머에 있는 벽에 무언가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문양인데.'

어디서 봤더라.

하위 리그에서는 저런 문양을 본 적이 없었다.

1회차?

1회차 땐 어차피 두 눈이 없었기······.

'아!'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 유적에 들어올 때부터 계속해서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계속 기시감이 느껴졌던 거군.'

"갑자기 왜 멈추십니까, 렌님?"

저 문양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났다.

"잠깐만 대신 언데드들을 상대해 주시겠습니까."

"예."

이든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곳곳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내가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묘하게 익숙한 것 같더라니.'

그때와 다르게 폐허가 되고, 깜깜하고, 가구들이 모조리 박살 나 있었기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하지만 공동의 벽에 그려져 있는 문양을 보니, 확실했다.

'대가의 제단이었어.'

1회차, 하위 리그에서 활동할 당시 내가 직접 본 기억 중에 남아 있는 마지막 맵이자.

내가 두 눈을 바쳤던 곳.

바로 그곳이었다.

'그땐 분명 흑마법사와 흑기사들로 가득한 곳이었는데.'

1회차에서 이곳은 생체 실험을 하는 실험실이었다.

그래서 지하에 위치해 있었고, 내부를 미로처럼 꼬아뒀었다.

그리고.

"모두들 이쪽으로!"

나는 곧장 문양이 그려져 있는 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것인지, 다른 팀원들도 기민하게 내 뒤를 따라왔다.

"······!"

내가 벽의 곳곳을 더듬기 시작하자, 눈치 빠른 고창신도 재빨리 벽에 달라붙어 이곳저곳을 만지고, 누르고, 쓸었다.

탈칵-

'찾았다.'

드르르르르륵-

벽의 어딘가에 존재하던 버튼을 누르자, 벽이 움직이며 빈 공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너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방이 있었다.

내가 그 안으로 성큼 내딛자, 안전한 공간인지 눈치만 보고 있던 팀원들도 나를 따라 들어왔다.

찰그락- 찰그락-

스켈레톤들이 우릴 따라 안 쪽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다시 문이 닫힌 덕분에 무사히 녀석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후. 여기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이야······. 어떻게 찾으신 겁니까?"

"아, 벽의 틈새가 미세하게 보이더군요. 그래서 혹시 숨겨진 공간이 있지 않을까 하고 찾아본 것 뿐입니다."

"덕분에 살았네요. 그나저나, 유적은 분명 사람의 손길이 타지 않은 곳 같아 보였는데, 이곳엔 횃불이 켜져 있다니······?"

10평 정도의 작은 공간.

벽의 곳곳에 횃불이 켜져 있었고, 중앙에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 같은 것이 있었다.

"흥미롭군요. 횃불이 마력으로 구동되는 방식입니다. 어디선가 마력이 계속해서 주입되고 있다는 뜻인데, 그 어디에도 마력 주입구가 없군요."

곳곳을 살피던 마법사, 로만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커헉, 이제야 살겠군."

이든과 비욘은 각자의 자리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바깥과 같이, 대가의 제단이 있는 곳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을 관리하던 흑마법사와 흑기사들이 사라져서 그런 모양이었다.

'제단 위에 적혀 있던 글귀도 사라졌군.'

어떻게 해야 이 제단을 이용할 수 있는지 쓰여져 있던 것이었는데, 그것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가운데에 있는 제단을 보자 여러 가지 감정이 몰려왔다.

여기서 왕을 처음 만났으니까.

'안 그래도 물어볼 것이 있었는데.'

나는 제단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손을 뻗었다.

그리고 벽력섬전으로 손바닥을 그어, 제단 위에 피를 떨어트렸다.

툭. 툭. 툭. 툭.

제단 위로 피가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섯 방울째 피가 제단으로 떨어질 때였다.

툭.

잘게 쪼개지며 튀어 오르던 피가 허공에 뜬 상태로 멈췄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팀원들도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모습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이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엄청나게 악의에 차 있는 귀곡성이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오랜만이구나.

그 존재가 나타났다.

―결국, 다시 상위 리그까지 왔군.

1회차 때.

내 두 눈을 가져감으로써 하위 리그에서 허덕이던 나를 상위 리그로 올라갈 수 있게 해주었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영혼을 담보로 회귀까지 시켜주었던 존재.

"나도 다시 만나보고 싶었지."

왕.

그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73화. 대가의 제단(3) > 끝

< 74화. 대가의 제단(4) >

1회차 시절.

<제단에 피를 뿌리는 자. 원하는 것을 얻을 자격을 갖출 수 있노라>

"제단에 피를 뿌리면······. 원하는 것을 얻을······ 자격을 갖출 수 있다고?"

제단 앞에 쓰여 있는 글귀를 본 나는 눈을 치켜떴다.

정말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피가 아니라 심장을 갈라서 뿌려줄 수도 있어.'

나는 곧장 제단 앞으로 다가가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내 손목에 대고 망설임 없이 그었다.

푸슈우우욱!

요골동맥이 끊어지며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핏방울들.

순식간에 제단이 피로 물들었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제단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멍청했군.'

그 모습에 나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고작 이런 걸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이 그렇게 악착같이 초월 리그로 올라가려 할 리가 없었다.

절박함에 속아, 나도 모르게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젠장.'

나는 혀를 차며 인벤토리에서 붕대를 꺼내 들었다.

그때였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순간 들려오는 귀곡성에 나도 모르게 휘청했다.

악의로 가득 찬 비명들이 내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

그와 동시에 온 세상이 내 몸을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뭐, 뭐야!'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그리고 나타난 존재.

―재미있는 인간로구나. 설마하니, 그렇게 피를 뿌려댈 줄이야. 그래, 무엇을 원하는가.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했다.

"우, 우리 가족들을. 다, 다시 되살려줘."

―호오, 좋다. 내가 그대의 가족들을 다시 살려준다면. 그댄 무엇을 내놓겠는가.

"내 심장, 아니 내 모든 걸 다 바치겠어. 원하는 것을 들어만 준다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제발.

그렇게만 해준다면.

지금 당장 죽더라도 아무 여한이 없을 테니까.

'제발······!'

날 내려다보던 존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장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턱없이 부족하구나, 인간이여. 이곳은 대가의 제단.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놓아야 하는 곳이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안 되는구나.

씨발.

'잠깐만.'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놓아야 하는 곳이라고?"

―그렇다.

"그럼 내 목숨을 제외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지. 대신, 초월 리그로 올라가는 데 도움이 되는,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줘. 그건 되나?"

그러자 한참 동안 날 빤히 쳐다보고 있던 존재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것참 기대되는구나. 그래, 네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

나는 망설임 없이 손가락으로 내 눈을 가리켰다.

"내 두 눈을 바치지. 이게 지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거니까."

두 눈을 바친다면, 초월 리그의 챔피언이 되어 소원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우리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가족들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는 건 내 욕심일 뿐이었으니까.

그보다 중요한 건.

'내 욕심 따위. 전혀 중요하지 않아.'

가족들에 대한 속죄였으니까.

―눈을 바치겠다라······. 좋다. 네 눈의 가치에 상응하는 능력을 주겠노라.

존재의 말이 끝나자마자, 불이 꺼진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보이는 것은, 한없이 깊은 어둠과.

그리고.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시스템에 알 수 없는 힘이 개입을 시도합니다.]

[시스템에 알 수 없는 힘이 개입을 시도합니다.]

[시스템에 알 수 없는 힘이 개입을 시도합니다.]

[시스템에 알 수 없는 힘이 개입을······.]

[시스템에 알 수 없!@#$#!%$!]

띠링!

[거래가 성사되었습니다.]

[<초감각 > 능력을 획득했습니다.]

내가 초감각을 얻었다는 상태창 뿐이었다.

* * *

머리 위에 씌워진 왕관과, 그 왕관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거대한 뿔.

걸치고 있는 로브로도 숨길 수 없는 탄탄한 몸.

나를 바라보고 있는 자줏빛 눈동자.

그러자 1회차 때 녀석에게 눈을 바쳤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정말 무모한 짓이었지.'

―날 보고 싶어 했다라······.

흥미롭다는 듯이 날 바라보는 왕.

나도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회귀한 뒤로 쭉 궁금했던 내용이었다.

어째서 신들은 내가 회귀했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리고.

"나를 회귀시켜 준 이유가 뭐지?"

내 물음에 왕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은은한 어둠 속에서 비치는 자줏빛 눈동자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 떨릴 정도였다.

한동안 날 바라보던 왕이 씨익, 웃었다.

―그대 영혼에 대한 대가였으니까.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가의 제단 원칙은 등가 교환. 내 영혼이 모든 만물 중 최초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높아 보이진 않는데."

내 말에도 왕은 그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그가 뿜어내는 기색은 오직, 여유 하나뿐이었다.

"최근에 재미있는 얘기 하나를 들었지. 신이라는 존재들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 그저 우리보다 상위 차원의 존재들이라는 걸 말이야."

말을 하면서 왕을 살폈지만, 그의 무엇도 읽혀지지 않았다.

그의 입으로 직접 내뱉는 것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위에 초월자라는 단 한 명의 존재가 있다고 하던데. 혹시 그 초월자가, 당신인가?"

―크흐흐흐흐.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왕이 실소를 흘렸다.

그는 뭐가 웃긴 건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참 동안 웃었다.

―이곳은 대가의 제단.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 곳이지. 그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내놓아야 한다라······.

그래.

그런 곳이었지.

"내가 뭘 내놔야 들을 수 있지?"

―재미있는 가면을 쓰고 있구나. 그래, 그 가면 정도라면 충분히 들려줄 용의가 있지.

왕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들을 가치도 없는 제안이군.'

왕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블라디미르 가면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아이템.

저 대답을 듣자고 내놓기엔, 내 손해가 너무 막심했다.

애초에 성사될 수가 없는 거래였달까.

그런 내 표정을 본 왕이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보아하니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군. 다섯 방울의 피에 대한 시간이 끝났다. 그럼,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도록 하지.

"글쎄.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 난 초월 리그까지 올라갈 거라서.

―그래, 그렇게 발악해 보거라. 운명은.

왕의 모습이 조금씩 흐릿해져 갔다.

―쉽게 바꾸지 못할 테니.

그러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제단에 떨어져, 잘게 쪼개지며 튀어 오르던 핏방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뭐 하고 계십니까?"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다른 팀원들은 이미 회복의 물약을 마시고 곯아떨어진 가운데, 고창신만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제단 같은 곳을 보면, 제물로 피를 바치니까요. 무사히 이번 경기를 마칠 수 있도록 몇 방울의 피를 헌납한 겁니다."

"그러셨군요. 피곤하실 테니, 어서 이쪽으로 와서 좀 쉬시죠."

고창신의 말에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벽에 털썩 기대고는, 인벤토리에서 회복의 물약을 꺼내 들이켰다.

그리고는 두 눈을 감았다.

별 수확은 없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알아낼 수 있었다.

―이곳은 대가의 제단.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 곳이지. 그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상응하는 대가.

내 영혼을 바친다는 행위가, 적어도 회귀라는 대가를 받기에 충분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영혼으로는.

회귀라는, 초월적 대가를 받기에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뭘까.'

숨겨진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왕과 대화를 나누면, 뭐라도 알아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계약 내용에 뭔가 허점이 있는 게 분명해.'

초월 리그가 되더라도 영혼을 뺏길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았다.

영혼을 뺏을 수 없다는 건 왕의 일방적인 주장이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뭔가 또 다른 노림수가 있는 거겠지.

'나도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모두가 얕은 잠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제 슬슬 출발하겠습니다."

고창신의 목소리에 눈을 뜨자, 기지개를 켜고 있는 팀원들이 보였다.

상태를 보아하니, 고창신도 나처럼 잠을 자지 않은 모양이었다.

'철두철미한 성격이군.'

[남은 체력 : 98%]

상태창 우측 하단에 있는 시계를 보니, 어느새 1시간이 지나 있었다.

"렌님도 안 주무셨군요."

고창신도 내가 잠을 자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감이 무척 좋은 녀석이었다.

"예. 그나저나, 이제부터는 제가 리딩을 해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고창신이 눈을 치켜떴다.

다른 팀원들도 불쾌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제 리딩이 마음에 안 드셨나 보군요."

고창신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왜······."

뭐라고 얘기해야 좋을까.

여길 이전에 한 번 와봤다고 할 수도 없고.

"이곳이 미로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미로가 아무래도 심리의 영향을 많이 받는 구조물이다 보니까, 혹시 리딩하는 사람을 바꾸면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내 대답에 고창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팀원들도 내가 고창신을 못 미더워해서가 아닌, 사고의 변화를 주고자 해서라는 걸 알고는 표정을 풀었다.

"음, 좋은 생각이네요. 안 그래도 저도 같은 길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럼 지금부터는 렌님이 리딩을 해보시죠."

고창신이 허락하자, 다른 팀원들도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내 리딩으로 이루어진 2차전이 시작됐다.

"그럼 제가 선두에, 그 뒤로 이든님, 로만님, 고창신님, 비욘님 순으로 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곧장 벽에 있는 버튼을 눌러 대가의 제단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막아서는 스켈레톤들을 정리하며 빠르게 이동했다.

팀원들을 이끄는 내 발걸음엔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1회차일 때, 하위 리그에서 진저리 칠만큼 굴렀던 맵이었기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선 오른쪽으로 가겠습니다."

이곳이 진짜 악질인 이유가 있었다.

대부분의 미로는 틀린 길로 가면 막다른 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하지만 이곳은 애초에 막다른 길이란 게 없었다.

틀린 길로 가면 계속해서 같은 곳을 돌게 되니까.

그럴 의도로 애초에 모든 공동과 복도를 똑같은 모양으로 설계한 것이었다.

"왼쪽 네 번째 복도로 가겠습니다."

'여기서 보스 몹이 있을 만한 위치는 한 군데밖에 없어.'

직경 30미터 정도의 공동과 똑같은 폭의 복도로 가득한 이 맵에서.

유일하게 딱 한 군데에만 200미터가 넘는 공간이 있었다.

아마 보스몹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보시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가는 것이오?"

"아뇨."

"답답하군. 어딜 가도 똑같은 형태의 공간만 나오니 이게 제대로 가는 건지 아닌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비욘의 말에 다른 팀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체력이 줄어가고 있기에 모두들 예민해져 가고 있는 상태였다.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도는 느낌일 테니, 지금까지 참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러자 고창신이 내게 힘을 실어 주었다.

"제 생각엔 잘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켈레톤이나 듀라한만 나오던 것도, 이젠 데스 나이트의 비율이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지금 이게 우리 팀만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고창신의 말에 다른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단숨에 잠재운 것이다.

'리더십이 대단하네.'

나는 고맙다는 의미로 고창신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잠시 후면 보스 룸에 도착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그의 도움 덕분에 한결 더 나은 리딩을 할 수 있게 된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이야;;; 리딩 실력 쥑이네..

└와 ㅋㅋㅋ 다른 팀이랑 싸우느라 한참 외곽에 있었는데 이렇게 단번에 거리를 좁힌다고?

└쟤 뭐임? 맵핵이라도 쓰나? 어떻게 길을 찾는 거지?

└궁수가 리딩할 때만 해도 다른팀들처럼 헤매던데, 렌이 운전대 잡자마자 속도가 달라짐 ㅋㅋㅋㅋ

└아, 쟤 유명하다는 이유가 혹시 리딩 실력 때문이었던거임?ㅋㅋㅋㅋㅋ

└저 정도면 어뷰징인지 확인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 맵 전체를 보고 있는 나도 보스 룸으로 향하는 길을 못찾겠는데?ㅋㅋ

└말이 되는 소리들을 해라 진짜 ㅋㅋㅋ 여기가 진짜 게임 속이라고 착각하는거 같은데 ㅋㅋㅋㅋ 그래서 뭘로 맵핵을 한건뎈ㅋㅋㅋㅋ 제발 현실에서들 좀 살아라 ㅡㅡ

└윗댓 동감, 순간 내가 콜로세움 게시판이 아니라 게임 게시판 들어온줄 ㅋㅋㅋ 미래시같은 스킬일수도 있는거고 아니면 감각이 뛰어난가 보지ㅋㅋㅋㅋ

└응~ 그래봤자 리딩 실력, 그거 하나밖에 볼거 없음 ㅅㄱ

보스 룸에 가까워지니, 이제는 데스 나이트 뿐만 아니라 데스 메이지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창신님이랑 로만님은 데스 메이지부터 최우선적으로 처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데스 메이지가 크게 위협적인 마법을 쓰는 언데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1순위로 처리해야 했다.

아무리 약한 마법이라고 하더라도, 맞으면 타격이 클 테니까.

그전까진 길잡이의 역할밖에 수행하지 못했던 고창신.

그때부터 그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저격의 달인이라는 특전을 가지고 있을 만했네.'

고창신의 화살은 정확하게 데스 메이지만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핑! 핑! 핑! 핑! 핑! 핑! 핑!

거기다 1초에 네다섯 발을 쏠 만큼 무시무시한 속사였다.

언데드는 어차피 해골이라 화살 한두 발로는 쓰러트릴 수 없는 몬스터.

그러자 고창신은 아예 데스 메이지의 온몸에다가 화살로 도배를 해버렸다.

그가 화살을 쏠 때마다 데스 메이지들이 맥을 추지 못한 채 허물어졌다.

'인벤토리 사용도 능숙하고.'

화살 한 통에 들어 있는 화살의 숫자는 3, 40발 정도.

고창신은 화살이 떨어지는 순간에 맞춰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화살통을 꺼내며 화살을 쏘고 있었다.

그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보면 볼수록 다재다능한 스타일이었다.

그렇게, 데스 메이지라는 난관을 고창신 덕분에 무사히 넘기고, 보스 룸으로 향할 때였다.

'이미 다른 팀들도 도착해 있었군.'

보스 룸의 근처까지 다가와 귀를 기울여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못 해도 여덟 팀 아니, 열 팀은 되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길을 잘 찾아냈는데?'

이런 미로 같은 맵에서도 보스 룸을 잘 찾아온 것을 보면, 수준은 얘기할 필요도 없었다.

모두들 평균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콰과과과과광!

마법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저렇게 많은 팀이 싸우는 와중에 마법사가 광역 마법을 사용할 리 없으니, 아무래도 보스 몬스터가 사용한 것 같았다.

'1회차에서는 대마법사를 죽이는 미션이었는데.'

하지만 그땐 하위 리그 미션이었고, 지금은 상위 리그 미션.

당연히 그때와 다른 보스 몹이 있을 게 분명했다.

'대충 어떤 보스 몹이 있을지는 예상이 되는군.'

언데드들을 부리면서 마법까지 쓰는 존재.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에서 레이드 보스 몬스터 사냥으로 등장했던.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진리의 틀에서 벗어난 고위 언데드.

'리치.'

아마 녀석일 것이다.

< 74화. 대가의 제단(4) > 끝

< 75화. 대가의 제단(5) >

"날, 보고 싶어 했다라."

왕좌 위에 앉아서 중얼거리던 왕이 씨익, 미소 지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재미있었기에.

"후후. 제법 많이 성장했군. 하지만 아직 부족해."

왕이 왕좌의 팔걸이를 검지로 툭, 툭 두드렸다.

그래.

기특하게도 자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 했으니.

"선물을 줘야겠지."

어둠 속에서.

왕의 자줏빛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