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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화. 여우 사냥(5) >

[제한 시간 : 228:33:52]

평양 시내.

대로변에 심어진 나무 뒤에 은폐한 나는, 군인들을 죽이는 데 집중했다.

탕! 타다다다다당! 탕! 탕!

"으윽!"

소총이 불을 뿜을 때마다, 한 명씩 머리가 터지며 쓰러졌다.

피가 낭자하며, 쓰레기 하나 없이 깔끔했던 콘크리트 바닥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비상사태를 선포해서 그런가 민간인은 아예 없네.'

길거리엔 오직 군인뿐.

내 입장에서는 훨씬 좋은 일이었다.

그냥 근처에 있는 모든 인간을 죽여버리면 됐으니까.

―해방산 거리에서 총격 발생!

―어제 수장 각하를 노린 녀석이거나, 그 일당으로 보인다!

―어서 지원을!

죽은 북한군에게서 탄알집을 꺼낸 나는, 근처에 있던 평양 국제 문화 회관이라고 적힌 건물로 들어갔다.

조금씩 병력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

'너무 많으면 총구 방향을 읽어도 피할 수가 없지.'

어느 정도 은엄폐물이 뒷받침 해주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들어온 건물 안.

8층 정도 높이의 건물이었는데, 제법 깔끔한 인테리어로 시공된 1층에는 아무도 없다.

―소좌님! 근처에서 교전 중인 것 같습니다!

―나도 들었다. 모두 수색 중지! 전원 창가로 붙어서 반동분자를 찾는다!

위층에서 수색 중인 군인들만 느껴질 뿐.

'여기서 시간을 끌어야겠군.'

콰직! 화르륵!

건물 입구에 불을 지른 나는 곧장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리철순이! 너는 나를 따라, 헉!"

오르는 길에 계단을 내려오는 몇몇 군인들을 마주쳤지만, 녀석들이 오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에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서걱! 서걱!

'위에 있는 녀석들은 아직 내가 들어온 줄 모르고 있어.'

단검으로 내려오던 녀석들을 죽이고, 2층에 도착하자 보이는 11명의 북한군.

"발견 즉시 보고하라!"

"이쪽은 아직 안 보입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모두들 창문에 바짝 달라붙어서 바깥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잘 가라.'

나는 조정간을 연발로 놓은 채, 총을 난사했다.

타다다다다당!

"끄아악!"

"헉, 언제······ 크윽!"

총알에 맞고, 흐느적거리며 쓰러지는 북한군들.

내가 뒤에 있다는 걸 알아챈 몇 명이 급하게 총구를 돌렸지만, 총알이 날아가는 속도보다 빠를 순 없었다.

'이걸로 2층은 끝났고.'

죽은 북한군들의 탄알집을 챙긴 나는 창문 너머로 총구를 꺼낸 채, 건물로 다가오는 북한군들에게도 난사했다.

죽은 북한군들이 제법 많은 여유분을 가지고 있어서, 어차피 총알은 넘쳐흐르는 상황.

거기다 워낙 숫자가 많았기에 마구잡이로 쏴도 우수수 쓰러질 정도였다.

"1중대, 2중대 진입! 3중대랑 4중대가 엄호한다. 대가리 내밀지 못하도록 마구 쏴버려!"

"대대장님! 불 때문에 진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 정도는 괜찮으니까 그냥 가! 다들 총 맞아 뒈지고 싶어? 이봐, 뭐해! 녀석이 대가리를 내밀잖아!"

파바바바바바박!

벽 뒤에 숨어서 내가 계속 총을 쏴대자, 대응 사격하는 북한군들.

날 지켜주던 콘크리트 벽이 순식간에 총알로 난자되었다.

터진 시멘트 가루에 의해,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를 정도였다.

'이대로 끝낼 순 없지.'

나를 가려주던 벽이 걸레짝이 됐다?

하지만 이곳엔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창문이 존재한다.

자세를 낮춘 나는 창문 사이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북한군들을 괴롭혔다.

"불길이 더 심해집니다!"

화르륵! 화륵!

1층에 불을 낸 지 어느덧 20분여.

그 사이 화마가 건물을 집어삼키며, 엄청난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그로 인해 건물 전체가 연기에 뒤덮였을 정도.

물론 내게 나쁠 건 없었다.

"대대장님! 일단 후퇴, 끅!"

"젠장, 도대체 어디서 쏘는 거야?"

자연적으로 발생한 연막탄 같은 효과를 발휘해 줬으니까.

'나쁘지 않군.'

마침 내 인벤토리엔, 훈련할 때 쓰던 방독면이 존재하는 상황.

덕분에 연기에 의한 피해는 전무했다.

앞을 볼 수 없다는 건 내게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으므로.

[제한 시간 : 227:55:17]

'슬슬 옮겨야겠는데.'

허수아비 패듯, 일방적으로 적들을 사살하길 한참.

나는 재빨리 4층으로 올라갔다.

밟고 서 있는 땅바닥에서 열기가 느껴졌기 때문.

그렇다는 건, 1층을 집어삼킨 불길이 2층으로 넘어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건물을 선택한 이유가 있지.'

평양 국제 문화 회관 7미터 옆에는 3층짜리 건물이 존재한다.

일반인에게 7미터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

하지만 현재의 내 육체 스텟이면 충분히 가능하다.

―사다리는?

―가져왔는데 너무 짧아서 닿지 않습니다. 다른 걸 들고 오겠다고 합니다.

―이런 머저리 같은 새끼! 분명 거리가 꽤 있으니까 넉넉한 걸로 가져오라고 했잖아!

―아무래도 시간을 끄는 것 같습니다. 괜히 잘못 들어갔다간 우리가 비명횡사하니까요.

―야 이, 병신아! 이대로 가다간 여기서 살아남아도 곧 목이 따일 거라는 걸 왜 몰라!

4층으로 올라가자, 옆 건물에서 북한군들의 목소리가 들어온다.

불길 때문에 1층으로 진입을 못하니, 옆 건물에서 넘어오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북한군들이었다.

'내가 올라왔다는 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인벤토리에서 장검을 꺼내 들었다.

최대한 시간을 오래 끌기 위해선, 내가 옆 건물로 넘어왔다는 걸 적들이 몰라야 한다.

조용하게 죽일 때, 검만큼 좋은 무기가 없다.

'가 볼까. 흐읍!'

크게 숨을 마신 뒤, 방독면을 인벤토리에 넣은 나는 옆 건물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소좌님! 왜 아직도 진입하지 않냐고 상부에서 여쭤봅니다!"

"이런 제길. 목 따이면 다 너희들 때문인 줄 알아, 알았어? 이봐, 통신병. 5분 내로 진입할 예정이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그러자 보이는 14명의 군인들.

7미터나 떨어진 데다가, 연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 정확히 창문 안으로 뛰어넘지 않는 이상 이곳으로 넘어올 수 없을 테니, 내가 있는 방향을 신경 쓰고 있는 군인은 한 명도 없었다.

'생과 사는 찰나의 순간에 결정되지.'

긴 시간 콜로세움에서 싸워온 내게, 녀석들은 먹잇감에 불과할 뿐.

서걱! 서걱! 푸슈우우욱!

"헉, 언제······끅!"

한 번 검이 번뜩일 때마다, 잘려나간 머리가 한두 개씩 허공을 날았다.

검을 휘두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0.2초.

이동 거리까지 감안하더라도, 14명의 군인을 죽이는 데에는 5초가 채 필요하지 않았다.

'여기 위치 너무 좋은데?'

3층에 있던 군인들을 모두 죽인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엔 불에 휩싸인 평양 국제 문화 회관뿐이라, 위에서 침투해 들어올 수 없다.

게다가 창문 바로 옆에 계단이 있고, 죽은 군인들은 수류탄을 제법 많이 가지고 있던 상태.

'총으로 갈겨대다가, 누가 올라올 때마다 수류탄을 던지면 되겠어.'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과감하게 행동했다.

타다다다다다당!

―헉, 대대장님! 옆 건물에서 쏩니다! 불 때문에 넘어간 모양입니다!

―차라리 잘 됐다! 1소대랑 2소대는 1층으로 침투해. 이번에야말로 녀석을 사살해야 한다!

―옛!

탱! 태댕! 탱!

계단을 타고 떨어지는 수류탄의 쇳소리.

"헉! 수류탄이다! 모두 숙······."

꽈아아아아앙!

수류탄이 터지자, 건물이 잘게 흔들렸다.

"······."

계단을 올라오던 무수한 기척들이 단숨에 사라졌다.

과연 무시무시한 위력.

'여길 뚫고 들어오는 건 쉽지 않을걸.'

아래층에서 위로 수류탄을 던지는 건 쉽지 않다.

정확하게 던지지 않는 이상, 자기들에게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

'대전차 로켓이라도 들고 오지 않는 이상 말이지.'

―제길! 고작 한 명을 어쩌지 못해서 이 꼴이란 말인가!

그걸 깨달은 적 대대장이 분개했다.

'한동안은 걱정 없이 괴롭혀 줄 수 있······ 어?'

그때였다.

털덜덜덜덜덜덜덜덜덜―

어디선가 들려오는 거대한 엔진음.

육중한 무게로 인해, 땅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전장에서 이런 소리와 진동을 만들어 내는 건 딱 하나.

'전차!'

창문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자, 대로변을 점거한 채 다가오는 수십 대의 전차가 보였다.

위이이이잉!

내가 있는 건물을 향해 포신을 돌리는 전차들.

'젠장.'

그 순간, 나는 반대편 쪽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꽈앙! 퍼어어어어어어어엉!

강한 충격파가 내 몸을 밀어낸다.

단단한 콘크리트가 종잇장처럼 찢겨나가고, 잘게 쪼개진 시멘트 덩어리가 내 몸을 두들겼다.

응축된 불꽃이 퍼지며 사방을 집어삼켰다.

└와 씨발 ㅋㅋㅋㅋㅋㅋ 저거 뭐냐?ㅋㅋㅋㅋㅋㅋ

└순간적으로 두 눈을 의심했음 ㄷㄷ 여기 성계 진짜 대박이넼ㅋㅋㅋㅋㅋ

└화력이 무시무시함 ㅁㅊ 통짜 쇳덩이 같은 것들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건지 신기;;

└전에 누가 성계끼리 통합되면 지구애들 바로 노예행이라고 그러지 않았냐? ㅋㅋㅋ 지금 보니까 다른 열한 성계가 고마워해야 할 정도인데?

└ㅇㅈㅇㅈ 소드 마스터고 뭐고 총알 피하는 것도 쉽지 않을 듯 ㅇㅇ

└앗 대마법사가 저기 있습니다! 그랭? 모두 발사해! 빠앙~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ㅎ

'더 이상 버티는 건 쉽지 않겠군.'

시멘트 가루를 뒤집어써서 온몸이 하얗게 변한 나는, 사라진 한쪽 벽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병끼리의 시가전은 충분히 할 만했는데, 기갑병기가 투입되자마자 상황이 180도 달라진 것이다.

전차를 무력화시키는 건 어렵지 않다.

중장거리 무기라서, 검을 들고 근접전을 펼치면 되기 때문.

'보병들 때문에 그게 어렵지.'

하지만 문제는, 주변에 쫘악 깔린 북한군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다가가기도 전에 총알 세례를 맞아, 벌집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제한 시간 : 226:27:33]

'시간은 충분히 끌었어.'

시가전을 펼친 지 어느덧 2시간째.

딸깍―

남아 있는 수류탄을 모두 밖으로 던져버린 나는 미련 없이 스킬을 사용했다.

'또 보자고.'

띠링!

[지구인 '지앙훈밍'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읍읍!"

미리 구해둔 은신처.

'후우.'

긴장이 풀리며 짙은 피로감이 날아들었다.

직전까지 총알이 빗발치고, 화약 터지는 소리를 듣다가, 갑작스레 찾아온 정적이 적응이 되질 않았다.

피가 뚝뚝 흐르는 내 모습에, 몸을 파르르 떠는 강간범.

'피곤하군.'

화장실로 들어간 나는 피를 씻겨 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강간범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고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콰지지지직!

"으으으읍! 읍! 으읍!"

흘러들어오는 뇌전에, 강간범이 몸을 파닥거리며 고통스러워한다.

나는 녀석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들어. 소리를 지르는 순간 방금 전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될 거야."

"읍······."

"여기 주변엔 아무도 없으니까 괜히 힘 빼지 말자고."

"읍읍······."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기에, 나는 놈의 입에 붙였던 테이프를 뜯어냈다.

그러자 곧바로 입을 여는 녀석.

"도,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원하는 게 있으니까 이러는 것 아니오!"

"여기서 한마디라도 더 하는 순간, 또 온몸이 찌릿찌릿할 거야."

"······."

녀석을 닥치게 만든 나는, 미리 준비해 둔 도시락을 밥그릇에 담았다.

대충 담다 보니, 개밥 같은 비주얼.

"먹어."

그러고는 강간범에게 내밀었다.

좋든 싫든, 1주일 간은 살려둬야 하기 때문에 식사는 챙겨줘야만 했다.

"······."

그러자 머리만 움직여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는 강간범.

나는 녀석의 곁에 앉아, 핸드폰으로 구글 지도를 켰다.

'다음 그림자 이동 타임은 밤 시간대야.'

아직까진 보름달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

나와의 전투로 평양 동남부는 초토화됐고, 전력 손실도 무척 컸을 것이다.

'이번엔 측근이랑 고위 당원들을 암살하러 다녀야겠군.'

밤에 녹아든 암살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구글에 올라온 당원 목록과 위치를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 * *

금으로 치장된 번쩍번쩍한 방 안.

"동무."

"옛, 수령 동지!"

"내래 분명 금방 정리할 수 있다고 들은 것 같은디."

"죄, 죄송합네다!"

"위대한 북조선의 전사들이 고작 한 명의 반동분자에게 농락돼서야 되갔소?"

독재자의 물음에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김두진 대좌.

"솔직히 말해주시오. 놈이 쳐들어오면 막을 수 있소, 없소?

"반드시 녀석을 처단하갔습니다!"

"내 눈을 똑바로 보시오. 입 발린 말을 원하는 것이 아니오. 있, 소, 없, 소."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얘기하는 독재자.

그러자 김두진 대좌가 고개를 떨군 채 대답했다.

"······쉽지 않을 것 같습네다. 놈에게 죽은 고위 당원만 벌써 100명이 넘고, 얼마나 신출귀몰한 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있습네다."

"흠······."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동지의 안위를 위해 우리는 주기적으로 이동 중에 있습네다! 절대 이곳을 찾아내지 못할 겁네다."

확신이 담긴 김두진 대좌의 대답.

하지만 한번 불신이 싹튼 독재자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다른 동무들에게 배치된 부대원들을 모두 소집하시오."

"도, 동지! 그럼 다른 동무들은······!"

"내가 있어야 공화국이 있는 것이오."

더 이상의 첨언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얘기하는 독재자.

그 모습에 김대진 대좌는 곁에 있던 974부대원에게 지시했다.

"······알갔습네다. 이봐, 모두 은밀하게 모이라고 전해."

그때부터 평양 곳곳에 있던, 정장에 007가방을 든 974부대원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 * *

―북한, 연일 미사일 도발.

―위대한 수령 동지를, 남조선 아새끼들이 노리고 있다. 공화국 내부로 침투한 남조선의 벌레 새끼들을 빼지 않는다면, 수령 동지께서 남조선을 불바다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셨다!

―청와대 "유감."

―국정원이 독재자를 암살하기 위해 요원 투입? 국정원장 "사실무근."

그림자 이동으로 왔다 갔다를 반복하며 죽이고 다니길 1주일.

그동안 10명이나 되는 고위 당원들에게 표식을 남기며 그림자 이동을 반복했지만, 독재자가 있는 곳으로 의심 되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엔 친위대한테 남겨봐야겠군.'

그렇게 해서 장성이 아닌, 친위대에게 남기게 된 표식.

"······!"

상태창을 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표식으로 등록된 사람 중 처음으로 평양을 벗어난 것이다.

'어디 가는 거지?'

나는 서둘러 구글 지도를 열었다.

974부대원이 향한 곳은 평양에서 북쪽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정치군사대학과 중앙식물원 사이.

'룡성역 근처군.'

룡성역 근처에 독재자의 은신처가 뭐가 있더라······.

한동안 기억을 되뇐 나는 금세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지하전시사령부가 위치해 있으며, 지하에 독재자 전용 열차가 있는 곳.

'룡성 은신처.'

지평선 너머로 고개를 내민 태양을 바라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영리한 여우가 냄새에 쫓겨, 결국 꼬리를 드러낸 것이다.

'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어.'

쿨타임이 거의 다 돌아왔음에도, 나는 차분하게 앉아서 대기했다.

영롱한 달빛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더 이상 달빛 아래 없어도 옵션이 발동되는 상황.

'달이 뜨는 순간, 반드시 죽여주지.'

벌써부터 밤이 기다려졌다.

< 194화. 여우 사냥(5) > 끝

< 195화. 여우 사냥(6) >

명상을 하며,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던 상황.

띠링!

[하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3% 상승합니다.]

[<목걸이:영롱한 달빛>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나는 알림 소리에, 두 눈을 감은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시간이 됐군.'

미션 완수까지 남은 시간은 5일.

어떻게 보면, 독재자를 죽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쉽지 않겠지.'

평양 곳곳에 퍼져 있던 모든 병력이 집결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지난 1주일 간 평양을 넘나들며 녀석들에게 공포를 심어줬으니까.

지금쯤 내가 오지 않을까, 녀석들이 역으로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후우.'

지나간 기억의 편린들이 날아든다.

두 눈을 바쳐, 초감각을 얻으며 치렀던 회귀 전의 상위 리그 승급전.

성계 대항전 보상으로 얻은 <그림자 표식>을 사용하며 치렀던 상위 리그 승급전.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치르는 고위 리그 승급전까지.

'시작해 볼까.'

나는 천천히 두 눈을 떼었다.

띠링!

[지구인 '리영길'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시야가 뒤바뀌자마자, 역수로 쥐고 있던 단검을 휘둘렀다.

푹! 푸슈우우욱!

"······!"

그러고는 몸을 틀어, 죽은 리영길과 함께 경계를 서고 있던 사람도 목을 찔러 죽였다.

"저, 저승사자가 왔다!"

이제 남은 건,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두 사람.

'어딜!'

죽은 녀석이 손에 쥐고 있던 권총을 빼앗은 나는, 곧바로 총구를 겨누는 두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털썩―

총알이 박히는 반동에, 두 사람이 몸을 뒤튼 채로 고꾸라진다.

이걸로 복도에 있던 군인들 정리는 완료.

'지하 벙커 안이군.'

높이 3미터 정도의 복도.

주변을 둘러본 나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하게 움직였다.

죽은 네 명이 보고 있던 방향은 6시.

그렇다면 독재자는 12시 방향에 있을 것이다.

탁! 탁! 탁! 탁! 탁!

―방금 총소리를 확인. 저승사자는 이미 내부로 침투.

―위치는 J구역 7번 복도. 바로 지원을 보내주기 바란다.

'ㄹ'자 형태의 복도 너머로 둔탁한 군홧발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불필요하게 코너가 많네.'

아마 지하전시사령부의 역할도 겸하고 있어서, 이런저런 장비들이 매립되어 있는 모양.

이런 형태의 복도일수록 침투하기가 까다롭다.

코너 한쪽을 점한 채, 농성을 벌이면 뚫기가 쉽지 않기 때문.

'나한텐 오히려 유리해.'

코너 바로 앞에 도착한 나는, 벽을 박차며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그리고 3미터에 가까운 위치에서 총을 겨누며 코너를 빠져나왔다.

"헉, 위다!"

벽 너머로 총구를 고정한 북한군 중 한 명이 뒤늦게 날 발견했지만.

탕탕탕탕탕!

권총이 불을 뿜는 것과 동시에, 눈을 번쩍 뜨며 쓰러질 뿐.

'서둘러야 해.'

'ㄹ'자 형태를 벗어나자, 길게 쭉 뻗은 일자형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을 전력 질주하니, 주변에서 수많은 기척들이 느껴진다.

'독재자를 다른 곳으로 빼돌리려고 하는군.'

내게 가까워지는 병력 반, 그리고 멀어지는 병력 반.

절반은 날 막아서려는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독재자에게 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타깃을 지킨다는 건,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어.'

현재 내 스텟으로는 100미터를 5초 내로 주파가 가능하다.

막아서는 북한군을 뚫어내야 한다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그것 또한.

"모두 집중. 놈은 여기로 향할 가능성이 크, 헉······!"

"뭐야, 어떻게 벌써!"

탕! 탕! 탕!

내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

'내 움직임을 눈에 담는 것도 어려울 거니까.'

세 명의 북한군을 죽이고 다시 'ㄷ'자 형태의 코너.

코너를 돌면 두 명이 대기 중이고, 또 그 너머를 돌면 아홉 명이 날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시간을 잡아먹히면 안 돼.'

나는 슬라이딩하며, 바닥에 딱 달라붙은 상태로 코너를 벗어났다.

"헉······!"

예상치 못한 자세로 등장한 나를 보며, 숨을 들이켜는 북한군들.

탕! 탕!

한 공간에 세 명의 사람이 있었지만, 총 소리는 두번 만 울렸을 뿐이었다.

곧장 몸을 일으킨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녀석들을 지나쳤다.

'이제 아홉 명만.'

딸깍―

그리고 들려오는, 기분 나쁜 스트라이크 클립 소리.

'수류탄!'

반사적으로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든 나는, 크게 팔을 휘두르는 누군가의 움직임에 맞춰 단검을 던졌다.

복도 끝에서 작은 수류탄이 모습을 드러낸다.

작게 회전하는 수류탄을 향해 날아가는 단검.

탱!

'좋았어!'

맑은 쇳소리와 함께, 단검과 부딪힌 수류탄이 궤도를 틀었다.

수류탄이 향한 곳은.

"헉, 미친!"

"모두 엎드려!"

아홉 명의 북한군이 숨어 있던 복도의 코너 뒤.

'잘 가라.'

꽈아아아아아아앙!

순간 밀가루 포대가 터지듯, 어마어마한 먼지가 복도를 집어삼켰다.

땅이 흔들리고, 천장에서 작은 돌가루가 부스스 떨어졌다.

'다 죽었군.'

지하다 보니, 쉽게 가라앉지 않는 먼지.

그 너머로 상반신이 터지거나, 온몸에 쇳조각이 박혀서 고꾸라진 아홉 구의 시체가 느껴진다.

밟지 않도록 세심하게 발을 놀린 나는, 그대로 복도를 빠져나왔다.

그러자 보이는 무수한 숫자의 방들.

'여긴 없어.'

나는 그 공간들을 본 척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모두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퇴로가 막힌 방들.

저런 방에 독재자가 몸을 숨기고 있을 리가 없었다.

―녀석이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못해도 10분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10분이라······. 그 정도면 충분해. 어서 여길 빠져나간다.

―녀석은 어떻게······.

―지금까지 그 많은 시도를 하고도 느껴지는 바가 없나? 못 죽이니까 일단 대피하자고.

거기다 복도 끝 계단에서 이런 대화가 들리기도 했고.

'여기서 더 내려가는 길이 있었군.'

아마 전시 사령부보다 더 밑에 지하 도로가 뚫려 있는 모양.

'세 번째 방.'

탕!

"끄억!"

'네 번째 문 뒤.'

탕!

"쿨럭······!"

'왼쪽 계단 위."

탕!

나는 비상구로 돌진하며, 방에서 튀어나오는 모든 북한군을 사살했다.

모두들 총을 겨눈 채 잔뜩 경계하고 있었지만, 거의 투시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나보다 유리할 수는 없었다.

'바로 밑층이 아닌가 보군.'

비상구로 들어오자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계단들.

나는 한 번에 예닐곱 개의 계단을 뛰어내리며 무서운 속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띠링!

[<복수의 칼날> 지정 대상 : 지구인 '독재자']

[복수 대상자와 조우했습니다!]

[모든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역시 여기 있었어.'

눈앞에 뜬 알림창을 본 나는 진한 미소를 피웠다.

영리한 여우의 꼬리를 결국 찾아낸 것이다.

'드디어 그 낯짝을 볼 수 있겠군.'

나는 들고 있던 총을 내던지곤,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근접전을 펼치기엔 최고의 무기.

장검과 단검의 중간 길이, 70센티미터짜리 글라디우스였다.

띠링!

[<스킬:뇌룡의 포효>이 활성화됩니다.]

[<스킬:뇌룡의 포효><스킬:뇌신 강림>으로 각성합니다.]

[근력과 민첩 스텟이 + 40% 상승합니다.]

[<스킬:천뢰십보 >가 활성화됩니다.]

[민첩 스텟이 + 30% 상승합니다.]

그러고는 가지고 있는 모든 스킬을 활성화시켰다.

'여기서 반드시 죽여야 해.'

이번에 놓치면 끝.

다음 기회는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체력의 안배를 따질 상황이 아니라는 뜻.

그래서 나는 과감하게 배수의 진을 쳤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은 것이다.

"헉! 위에서 저승사자가 내려옵니다!"

'ㅁ'자 형태로 끝없이 이어진 내리막 계단.

밑에서 뛰어 내려가던 북한군 중 한 명이, 계단 틈으로 위를 올려다보더니 소리쳤다.

"뭐? 벌써?"

"예, 4층 정도 위에 있습니다!"

"제기랄! 벌써 여기까지 오다니. 이봐, 너희들은 여기에 남아!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서 최대한 시간을 벌어!"

제법 고위직인 듯한 인물의 외침에, 20명 정도의 북한군이 계단 곳곳에 위치를 잡는다.

그러고는 숨을 짧게 끊어 쉬며, 계단 위로 총을 겨눈 채 대기한다.

그 모든 게 마력장을 통해, 똑똑히 느껴졌다.

'할 수 있어.'

좁은 계단 복도에서, 20개의 총구를 피해야만 하는 상황.

하지만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북한군들의 평균 스텟은 12에서 16 사이.

반면에 난.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 리그]

[근력 : 45(+5)(+20)] [민첩 : 51(+5)(+26)] [체력 : 37(+5)(+12)]

[정신 : 51(+5)(+26)] [지력 : 32(+12)] [마력 : 37(+5)(+12)]

'충분해.'

녀석들보다 세 배에서 네 배 더 높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놈들이 1미터를 이동할 때, 나는 4미터를 주파할 수 있다는 뜻.

총을 쥐고 있다 하더라도, 내 움직임을 따라잡을 순 없을 것이다.

그렇게 녀석들과 반 층 정도의 구간을 사이에 뒀을 때였다.

"온다! 모두 집중하······!"

나와 눈이 마주친 누군가의 외침.

띠링!

[<섬전 >을 사용합니다.]

꽈앙!

나는 섬전으로 순간 이동해, 녀석들의 간격 안에 들어오는 데에 성공했다.

4배 가까이 차이 나는 스텟.

근접 무기 대 중거리용 무기.

거기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경험까지.

'단숨에 돌파해 주지.'

그때부터 계단 복도에서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서걱! 서걱! 서걱!

제일 선두에 있던 세 명의 목이 굴러떨어진다.

목과 몸이 분리되며 좁은 복도 계단에서 피 분수가 터져 나왔다.

"쏴, 쏴라!"

탕! 탕! 탕! 탕!

'어딜.'

총구의 방향을 읽은 나는 2미터 정도 빠졌다가, 총이 격발되는 것과 동시에 다시 대쉬했다.

서걱!

총알에 의해 깨진 시멘트 조각들.

스스로의 힘에 못 이겨, 잘게 조각나며 튕겨 나오는 탄알의 부스러기들이 흩날린다.

"끄아아악!"

"컥!"

"제발 죽어 이 괴물 같은 자식아아아아!"

탕! 탕! 탕! 탕!

붉게 물든 세상 속에서, 살고 싶다는 의지가 담긴 절규와 함께 총알이 난사된다.

그 속에서 글라디우스가 번뜩이며, 춤을 추었다.

띠링!

[<벽력 >이 발동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직!

때마침 터진 벽력.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플라즈마가 사방을 덮쳤다.

"끄윽······."

털썩― 털썩―

무시무시한 데미지에, 주변에 남은 네 명의 북한군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후우.'

제법 잘 훈련된 스무 명의 군인들임에도, 처치하는데까지는 5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좁은 공간이다 보니, 오히려 일방적인 도륙에 가까웠달까.

이걸로 계단에 있던 적들의 정리는 끝.

적들을 모조리 죽이고 계단의 복도를 나서자, 깜깜한 지하 터널이 나를 반겨주었다.

60미터 앞.

'독재자.'

뚱뚱한 남자를 사방으로 에워싼 다섯 남자가 보였다.

"이럴 수가! 그 많은 인원이 벌써 죽었다고?"

"모두 사격 개시!"

탕! 피잉! 피잉! 타앙! 타앙!

그러고는 나를 향해 총을 겨눈 채, 방아쇠를 당겼다.

'왼쪽 가슴, 우하복부, 왼 허벅지.'

방향을 읽고 총알을 모조리 피한 나는, 녀석들을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서걱! 서걱! 서걱!

그리고.

"으으······."

남은 건,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던 독재자뿐.

'끝났군.'

글라디우스에서 피가 뚝, 뚝 떨어진다.

살기를 뿜으며 다가가자, 녀석이 볼살을 떨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엄습하는 공포에 다리가 풀린 모양.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뚜벅뚜벅 걸었다.

"남길 말은?"

"내, 내가 누군지 아느냐? 백두혈통을 물려받은 위대한 통치자다!"

내 물음에,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는 독재자.

"날씨가 굉장히 춥더군."

참고로 지금은 여름이었다.

"내가 죽으면 공화국의 수천만 백성들이 고통받을 것이다!"

"아, 돼지 닭다리 패티 햄버거도 나쁘지 않았어."

돼지와 닭은 엄연히 다른 종.

돼지엔 닭의 다리가 없다.

"굶어 죽을 수많은 백성들이 불쌍하지도······."

"비오는 날 뜬 해를 본 적 있나?"

"간악한 코쟁이놈들과 대륙놈들의 손아귀에서 민족을 수호할······."

"지하의 공기는 역시 상쾌하군."

"무, 무슨 말이냐?"

내가 계속 딴소리를 하자, 의아해하는 독재자.

"헛소리."

"······?"

"헛소리하지 말라고."

"······!"

"그럼 잘 가라."

독재자에게 다가간 나는 서브 미션을 수행한 후, 망설임 없이 글라디우스를 휘둘렀다.

서걱! 푸슈우우우욱!

[제한 시간 : 115:47:37]

[승리 조건 :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독재자, '독재자獨材慈'를 처치하라]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기본급 x 1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그리고 눈앞에 뜬 미션 성공 표시.

'서둘러야 해.'

알림창을 본 나는 곧바로 강간범에게 그림자 '교환'을 사용했다.

"······."

그러자 보이는 어둡고 좁은 방.

[<영리한 여우> 미션을 완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보너스로 100,000 P를 지급합니다.]

[각종 페널티를 가진 상태로 어려운 미션을 성공하셨습니다.]

[추가로 x 2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손에 묻은 피를 로브에 슥슥 닦은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사진을 두 손으로 꼬옥 쥐었다.

'통과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리고는 소중하게 품속으로 갈무리했다.

[상위 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143의 8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824,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206,000 P 차감)]

[기본급 +150,000 P / 승리 수당 +150,000 P / 추가 보너스 +300,000 P / 서브 미션 수당 +430,000 P / 수수료 -206,0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200,000 P로 책정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팜으로 이동하기 위해, 하얀 빛무리가 나를 감싸 안는다.

떨리는 순간.

'제발.'

눈앞에 새로운 창이 떴다.

띠링!

[지구 성계의 물품이 감지되었습니다.]

[천상계, 중간계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

[물품 반입을 허락합니다.]

[고위 리그로의 승급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플레이어 렌이여.]

물품 반입 허락.

'됐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승급 선물로 미카엘이 허락해 준 모양.

'드디어 고위 리그.'

벅찬 마음을 끌어안고, 나는 하얀 빛무리에 몸을 맡겼다.

[플레이어 '렌'이 고위 리그로 승급하셨습니다!]

* * *

경기도 분당의 한 납골당.

'어? 별일이네?'

청소를 위해 돌고 있던 김명식은 고개를 갸웃했다.

故 정미숙.

지금껏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던 유골함 앞에, 꽃이 놓여 있었기 때문.

'그래, 인간적으로 너무했지. 가족이 없던 것도 아니고 말이야.'

생전 한 번도 뵙지 못한 분이지만, 가족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유골함의 유리에 가족사진이 붙어 있었으니까.

가운데에 앉은 채 환하게 웃던 고인과, 그 양옆에 듬직하게 서 있던 두 청년.

'엉? 이게 어디 갔지?'

하지만 그날 이후, 그 사진은 다시 볼 수 없었다.

그저, 유골함 옆에서.

'꽃을 놓고간 사람이 가져갔나?'

로즈메리의 꽃잎 만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뿐.

< 195화. 여우 사냥(6) > 끝

< 196화. 새로운 시야(1) >

'뭐야, 이건?'

부푼 마음을 안고 팜으로 돌아오자,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팀원들이 반겨주었다.

"고생많%$#%니다! $@#$님!"

"고위@%$#라니! 정말 @$#@해!"

"와아아아아아아!"

아니, 숫제 전투를 치르듯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어느새 소속된 플레이어가 2만 명을 넘긴 팀 투지.

'엄청나네.'

모든 팀원들이 나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보니, 그로 인해 팜이 잘게 흔들릴 정도였다.

"고생 많으셨어요, 안우진 님. 분명 승급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실 줄 알았습니다."

"크으······. 처음 들어왔을 땐 같은 하위 리그였는데, 어느새 고위 리그까지 훌쩍 올라가셨군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형! 정말 축하드려요!"

그 환호성을 뒤로하고, 몇몇 플레이어들이 다가와 축하해 주었다.

주창범, 고건하, 모용악, 지그, 당소소, 카이로시아 등등.

대체적으로 나와 오랜 시간을 보낸, 2기수부터 5기수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만으로도 이미 삼백 명을 훌쩍 넘어설 만큼, 어느새 팀이 거대해진 상황.

"모두 축하해 줘서 고맙습니다."

제법 많은 숫자임에도, 나는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고마움을 표했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팀원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

"앗, 여신님 지나가십니다."

"모두 양옆으로 빠지세요."

누군가의 외침에 팀원들이 양옆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아세리안이 하얀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다가온다.

"축하드려요, 안우진 님. 아, 그렇게 안 보셔도 돼요. 전에 보니까 꽃다발 받는 걸 거북해하시길래 준비 안 했거든요."

그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함께한 시간이 제법 되다 보니,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아세리안을, 그리고 아세리안은 나를.

"배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서 나 또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모두 파티를 시작하죠!"

그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넵!"

팀 투지가 생기고, 가장 성대한 파티가 시작되었다.

치이이이익―

불판에 삼겹살을 올리자, 고기 굽는 소리가 공터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여기서 먹는 고기도 나쁘지 않군.'

초창기에는 각 성계별로 모여서, 자신들의 고향 음식을 먹곤 했다.

입맛이라는 것이 자라온 환경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었기 때문.

"고기 부족하신 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 성계의 음식으로 통일되었다.

플레이어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재료 수급이 어려워졌으니까.

이제는 그날 열린 경기 중, 가장 높은 넘버링 미션을 치룬 플레이어의 성계 음식으로 준비된다.

그리고 오늘은.

'여기서 김치를 보게 될 줄이야.'

당연히 지구 성계의 음식으로 준비될 수밖에 없었다.

"형, 그건 뭐예요?"

그렇게 이세연표 지구 음식을 먹고 있을 때였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주창범이 내 손에 쥐어진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가족사진이요."

"가족사진이요······?"

고개를 갸웃하는 주창범에게,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었다.

"네, 승급전이 지구에서 열렸거든요. 미션 진행 중에 잠시 들러서 가지고 왔습니다."

"형, 저 한 번만 봐도 돼요?"

가족사진이라는 말에 눈을 빛내는 주창범.

"구기거나 찢지만 않는다면요."

"에이, 형. 제가 설마 형 가족사진을 찢겠어요?"

"그럼, 뭐."

고개를 끄덕인 나는, 흔쾌히 주창범에게 사진을 넘겨주었다.

말 그대로, 설마 주창범이 사진을 찢어버리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사진? 그게 뭔데?"

"실제 모습이랑 똑같이 그린 그림 같은 거예요."

"뭐? 그런 게 가능해?"

"어, 저도 한번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주창범과 내게 쏠리는 관심.

같은 테이블에 앉은 다른 팀원들이 앞다퉈 주창범 곁으로 모여들었다.

'쯧.'

그 순간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콰지지지지지지직!

"······?"

"······?"

"미리 말씀드리죠. 보는 건 상관없습니다만, 훼손되면 정말 크게 화낼 겁니다. 정, 말, 로, 요."

"어······. 저희 집 가보처럼 소중하게 다루겠습니다."

"저, 저도요."

내가 목소리를 착- 내리깔고 한 단어 한 단어 잘라 말하자, 팀원들의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졌다.

주창범이 두 손으로 조심히 사진을 들고,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깨 너머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구경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한데 모여 있자, 우아하게 고기를 구워 먹고 있던 옆 테이블의 관심도 쏠렸다.

"뭔데요?"

"안우진 님 가족사진이래요. 콜로세움에 들어오기 전 모습이 찍힌."

"앗, 정말요? 저도 보고 싶어요!"

"근데 구겨지거나 하면 혀를 뽑고, 사지를 잘라서 죽이겠다고 하셨어요."

"······제 차례를 기다릴게요."

고건하의 말에 꼬리를 내리는 당소소.

"······?"

'내가 사지를 잘라 죽이겠다고 한 적 있었나?'

나는 그 상황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안우진 님, 제가 사진에 상태 보존 마법을 걸어드릴까요?"

당소소 옆에서 오물오물 씹던 고기를 꿀꺽 삼키곤 얘기하는 포르도엘.

"그게 뭡니까?"

"사진 위에 신성 보호 마법을 거는 거라고 이해하시면 돼요. 그럼 구겨지거나 찢어질 일이 없거든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그럼 시작할게요."

내 부탁에 개구쟁이 미소를 지은 포르도엘이, 이내 근엄한 목소리로 주문을 영창했다.

[새벽의 소성에서 깨어난 한줄기 바람이여]

[이곳에 차가움을 머금은 새벽 폭풍이 되어 격랑하라]

[성령으로 권능을 위임받은 나, 4급 주천사 포르도엘이 이르노니]

"쟤는 도대체 사진에다가 무슨 마법을 때려 박는 거야······?"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짓는 아세리안.

[거룩한 그 이름에 응한 그대여, 웅크린 힘을 깨워라!]

길게 이어지던 주문 영창이 끝나며, 포르도엘이 시동어를 외쳤다.

[태고의 염원!]

"······!"

"······!"

거대한 신성력이 팜을 내리눌렀다.

사진이 밝게 빛나고, 주변의 마력이 신성력에 반응하며, 가족사진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1분 후.

"······."

엄청난 고위 신성 마법으로, 모두를 놀라게 한 포르도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됐어요. 이제 어지간한 고위 마법을 수십 번 때려 박지 않는 한 끄떡 없을 거예요."

"······?"

어지간한 고위 마법을 수십 번이나 때려 박을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사진을 건네받았다.

"······감사합니다."

뭐가 어쨌든, 날 위해서 해준 것임은 틀림없었으니까.

덕분에 그때부터 팀원들이 좀 더 편하게 사진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와, 이게 진짜 안우진 님이에요? 완전 다른 사람 같아요."

"분명 같은 사람인데, 분위기가 딴판이군. 뭐랄까, 이땐 좀 순둥순둥했던 거 같은데······."

"옆에 서 있는 분이 팀 불굴 소속의 룬 님이죠? 형님분이랑은 조금 다르네요. 어머니를 많이 닮으신 듯."

"약간 학자 같은 분위기도 나는데요? 이때의 안우진 님은 어떤 모습일지 좀 궁금하네요."

과거의 내 모습을 보며 놀라워하는 팀원들.

'찍은지 정말 오래되긴 했군.'

콜로세움에 들어오기 3년 전에 찍은 사진이지만, 햇수로는 어느덧 17년 째.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구에선 검 들고 싸울 일이 없거든요. 여기 들어오시고 변한 거겠죠. 저는 마냥 형이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지실 정도면 정말 고생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한동안 사진을 빤히 보던 주창범이, 나를 위로했다.

'고생이라······.'

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긴 했지.

나는 속으로 주억거렸다.

"음······. 처음 들어오셨을 때부터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팀원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사진을 보며 작게 읊조리는 아세리안.

그 후로도 팀원들은 파티를 뒤로한 채, 한참 동안 사진 삼매경에 빠졌다.

―플레이어 렌, 승급 성공! 드디어 고위 리그로.

―열한 성계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지구. 그곳에서 펼쳐진 숨막히는 전투.

―지구 성계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서브 미션으로 잭팟을 터트린 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밌었음 ㅋㅋㅋㅋ 총이라는 무기로 치루는 전투는 색다른 묘미가 있더라ㅋ

└이번 승급전에서 렌의 실력에 또 한 번 놀람 ㄷㄷ 쥐꼬리만 한 스텟으로 도대체 어떻게 총알을 피하고 다닌 거지?

└보니까 왜 지구에서는 미션 안 내려주는지 알게됨 ㅋㅋㅋ 고도문명화된 것 때문에 그런가, 사회가 너무 복잡해짐 ㅡㅡ 애초에 지구에서 쭉 살던 사람이 아니면 적응 하기가 쉽지 않을듯;

└ㄹㅇ 자동차라는 것만 봐도 다들 눈알 튀어나올걸? ㅋㅋㅋ 지구인들 사이에 녹아들지 못하면 미션 진행도 어려울 거임 ㅋ

└그래도 앞으로는 지구 맵이 자주 나와줬으면 ㅠ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내일 오전에는 일정 좀 비워주세요. 손님이 방문하시기로 했거든요.

전날 파티에서, 아세리안이 미리 양해를 구했기 때문이었다.

'손님이 온다라······.'

내심 불안했다.

외부 인물이 팜에 방문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으니까.

나도 딱 한 번밖에 경험해 보지 못했다.

'미카엘이 왔었지.'

거기다 고위 리그에 올라온 지 하루만에 누군가가 방문한다?

'또 성계 대항전에 관한 얘기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기에 더욱 불안했다.

"아세리안 님, 안우진입니다."

"아, 네. 바로 나갈게요."

아세리안의 집무실.

문을 노크하자, 제법 격식을 갖춘 복장의 그녀가 걸어나온다.

"마침 슬슬 온다고 전해 받았는데. 타이밍이 좋네요? 어서 가죠!"

그리고는 나를 잡아 끌고, 전에 만들었던 접객실로 향했다.

"무슨 이유로, 누가 오는 건지는 안 알려 주실 겁니까?"

"흐응······. 조금만 있으면 알게 돼요, 헤헷."

혹시나 해서 물어보면, 이런 대답만 할 뿐.

하지만 그녀의 반응에서 나는, 적잖이 안심되었다.

'게임 메이커가 오는 건 아닌가 보군.'

고위 리그의 게임 메이커가 오는 거였다면, 이런 식으로 장난치진 않았을 테니까.

잠시 후.

우우우우우웅―

접객실 공터 앞에 그려지는 기하학 문양의 마법진.

작게 떨리는 공간의 파동.

찰그락― 찰그락―

그리고 게이트가 생성되며 모습을 드러낸, 순백의 갑옷을 입은 세 존재.

'지천사가 세 명이나 왔다고?'

팜에 방문한다던 손님은, 여덟 쌍의 날개를 가진 세 명의 2급 지천사들이었다.

솔직히 깜짝 놀랐다.

별것도 아닌 일에, 2급 천사가 세 명이나 올 리 없으니까.

"어서 오세요.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입니다."

"고신 아세리안 님을 뵙습니다. 2급 지천사 카시미엘입니다."

"맞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급 지천사 테라엘이라고 합니다."

"고귀한 분께 2급 지천사 에르미엘이 인사드립니다."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아세리안과, 정중하게 예를 표하는 천사들.

최근 아세리안이 또 한 번 승급한 덕분인지, 이전에 만났던 파사엘이라는 지천사보다 훨씬 정중한 모습이었다.

"플레이어 렌입니다."

고위 존재들 간의 인사가 끝났다고 판단한 나는 천사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상대는 고위 천사.

순서상, 내가 먼저 하는 게 맞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플레이어 렌."

"그동안의 활약상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대처럼 강한 존재가 승급하다니, 기쁘기 그지없군요."

"승급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걸로 통성명은 끝.

그러자 가운데에 있던 천사, 카시미엘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고위 리그의 상징인 날개옷을 전달하겠습니다. 아세리안 님, 신성 마법 사용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날개옷······!'

그 말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싸우던 고위 플레이어들.

그들이 날개를 얻을 수 있게 해준 아이템.

나는 그제야 세 천사가 왜 직접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것 때문에 왔군.'

날개옷을 전달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허락합니다."

아세리안의 말에,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세 천사.

[멸악滅惡]

[정화淨化]

[용기勇氣]

세 천사 사이에서, 삼각형을 그리며 마법진이 생겨난다.

마법진은 이내 빠르게 회전하더니, 나풀거리는 의복 하나를 만들어 내며 사라졌다.

"2급 지천사, 카시미엘. 플레이어 렌에게 날개옷을 전달합니다."

두 손으로 옷을 받친 채 다가오는 천사.

나는 날개옷을 받아들었다.

"전달 완료했습니다. 고위 리그 게임 메이커님의 말씀을 전달하겠습니다. 승급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앞으로의 활약상을 기대하겠습니다."

'진짜 고위 리그에 올라왔어.'

날개옷을 받자 실감되었다.

내가 정말로, 꿈꿔왔던 고위 리그에 올라왔다는 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추가로."

"······?"

"고위 리그에선 성계 대항전이 없습니다. 그 부분과 관련하여 상위 게임 메이커님이 우려를 표하시기에, 고위 리그의 입장을 전달드립니다."

'뭐?'

카시미엘의 말에, 나는 받아들었던 날개옷을 꾸욱 쥐었다.

성계 대항전 없다.

그 확답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카엘한테 빚을 졌군.'

아마 그녀가 날 위해서 따로, 내용을 전달한 모양이었다.

미카엘은 사대 천사의 수장이었으니까.

"날개옷은 어떤 장비를 착용하든 상관 없이 날개가 돋아납니다. 다만,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자주 연습하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예."

"그럼 마지막 의식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에르미엘?"

테라엘의 말에 앞으로 나서는 에르미엘.

펄럭!

그녀가 여덟 쌍의 날개를 활짝 폈다.

'또 치러야 할 의식이 있나?'

그리고는 양 손을 맞잡은 채, 두 눈을 감았다.

"성임聖任을 위임받은 2급 지천사 에르미엘이 권능을 사용하고자 하노니, 거룩한 이름께 청합니다."

에르미엘의 몸에서 흘러나온 신성력이 팜을 가득 메운다.

그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는.

'포근하고, 따뜻하군.'

부드럽고 맑은 신성력이.

그때였다.

쏴아아아아아아―

"······!"

'뭐, 뭐야!'

순간 소름이 돋았다.

온몸이 덜덜 떨려오고, 뒷목이 쭈뼛했다.

팜을 가득 채웠던 에르미엘의 신성력에, 갑자기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깃들며 내 어깨를 짓눌렀다.

두 눈을 감은 채, 양손을 맞잡고 있던 에르미엘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간다.

에메랄드 빛을 띠고 있던 눈동자가, 어느새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 부름에 답하노라]

그리고 울려오는 장엄한 목소리.

'이게······.'

마치 에르미엘의 몸에 누군가가 강림한 것 같았다.

[천계에 뜬 새로운 신성新星이여]

아세리안, 카시미엘, 테라엘이 고개를 숙인 채 납짝 엎드렸다.

'몸이 안 움직여.'

나 또한 그들을 따라하고자 했으나,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겸손謙遜 자선慈善 친절親切 인내忍耐 순결純潔 절제節制 근면勤勉]

'후우, 침착하자.'

느껴지는 존재감, 경의를 표하는 아세리안과 천사들의 몸짓.

직전에 에르미엘이 했던 행위까지.

그 모든 걸 종합해보니,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했다.

'천계의 초월자.'

현재 에르미엘의 몸속엔, 천계의 모든 존재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존재가 깃들어 있다는 것.

[그대에게 일곱 개 가치의 수호를 맡기는즉]

쏴아아아아아아―

'도대체 뭘 하는 거지?'

팜을 가득 채웠던 에르미엘의 신성력이 내 몸속으로 빨려들어오기 시작했다.

피부, 뼈, 혈관, 근육으로 스며들어, 곳곳에 자리를 잡는다.

우드득― 뿌득―

'크윽.'

그리고는 내 몸에 있는 모든 것을 재구성한다.

[살아 숨쉬는 모든 존재를 대신해, 그대를 축복하노라]

근육이 꿈틀거리고, 뼈가 뒤틀리며 느껴지는 통증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정도.

'으으윽.'

나는 이를 앙다문 채, 이 상황이 끝나길 기다렸다.

1초가 억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띠링!

[플레이어 '렌'이 인간 → 반천사半天使로 승격했습니다!]

[정신에 걸려있던 1차 리미트가 해제됩니다!]

눈 앞에 새로운 알림창이 등장했다.

< 196화. 새로운 시야(1) > 끝

< 197화. 새로운 시야(2) >

[플레이어 '렌'이 인간 → 반천사半天使로 승격했습니다!]

[정신에 걸려 있던 1차 리미트가 해제됩니다!]

'드디어.'

알림창을 본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세리안의 말대로, 고위 리그로 승급하자 정신 스텟에 걸려 있던 리미트가 해제되었다.

이제부턴 정신 스텟을 계속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드시 잡아먹어 주지.'

나는 블라디미르 가면을 생각하며, 의지를 불태웠다.

물론 1차 리미트 해제라고 했으니 한없이 올릴 순 없을 것이다.

올리다 보면 언젠간 2차 리미트에 부딪히겠지.

'그건 초월 리그에 올라가면 풀리는 모양이네.'

회귀 전, 왕 또한 이렇게 얘기했었다.

초월 리그에 올라가면 반신半神으로 승격하게 된다고.

아마 그때쯤 또 한 번의 리미트가 풀릴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것 때문에 천사들이 찾아온 거군.'

안 그래도 조금 의아했었다.

고작 날개옷을 전달하기 위해 지천사가 세 명이나 온다?

솔직히 말하면 인력 낭비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정도쯤이야 3급, 아니 4급 주천사 정도만 돼도 수행할 수 있는 임무였으니까.

'고위 플레이어부터는 따로 승급식이라는 게 존재했구나.'

세 명의 지천사는 그걸 위해 직접 온 것이리라.

'후우.'

나를 짓누르던 존재감이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미동도 하지 않던 몸이, 내 의지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아마 승급식은 이걸로 끝인 모양.

그와 동시에, 에르미엘의 눈동자도 원래의 빛깔로 돌아왔다.

투명한 하얀색에서, 에메랄드빛으로.

"후우, 아버지의 존재감은 고신까지 올라왔는데도 버겁네요."

"저희도 승급식을 해주러 다닐 때마다 느끼지만, 여전히 적응 되지 않습니다."

그제야 숙였던 몸을 펴는 아세리안과 다른 천사들.

고개를 든 아세리안이 나를 바라보며 눈웃음 지었다.

마치 '놀랐죠?'라며 웃는 듯한 모습.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숨겼던 거군.'

어쩐지 누가 오는지도 알려주지 않더라니.

아마 내가 놀라는 걸 보고 싶었던 거겠지.

그래서 나는 더욱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나름의 소심한 복수를 했다.

그때였다.

'아직 할 게 남았나?'

내게 다가오며 미소 짓는 카시미엘.

"진정한 고위 플레이어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이내 웃음기를 지우며 입을 열었다.

진지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이제부턴 다소 무거운 얘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인간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게 존재합니다. 혹시 아시나요?"

"정신 스텟이 더 이상 오르지 않는 게, 그 벽이라는 것과 관련 있는 것 같습니다만."

"맞습니다. 인간의 육체가 견딜 수 있는 한계라는 게 존재하거든요. 그러나 고위 플레이어부턴 조금 다릅니다.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넘게 해주죠. 그건 아버지만이 가능한 일이구요."

"아, 예."

카시미엘의 말에 나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그녀는 지금 정신 스텟이 리미트 되어 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런 얘기를 굳이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허락되지 않은 힘을 부여하는 만큼, 고위 플레이어부턴 새로운 의무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서, 나는 더욱 황당했다.

"의무······?"

의무라는 건, 어떠한 권리를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무게다.

하지만 나는 플레이어한테 어떠한 권리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굳이 꼽자면 카시미엘이 얘기한, 더 강해질 권리?

'그것도 권리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카시미엘 곁에 있던 테라엘이 입을 열었다.

"마계의 준동으로부터 중간계를 수호하는 것. 그게 콜로세움이 생겨난 이유입니다. 그를 위해 하위 리그와 상위 리그는 담금질의 과정이었다면, 고위 플레이어는 완성된 전력. 플레이어끼리 싸우는 미션이 아예 없죠."

"······아예 없습니까?"

"네. 중간계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모자랄 정도니까요."

'모자르다고?'

테라엘의 설명을 듣는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천사들은 어째서 나서지 않는 겁니까?"

아니, 이전부터 궁금했던 것이었다.

중간계에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어째서 플레이어들을 투입하는 것인가.

물론 그게 너희들 싸움에 왜 우리가 나서야 하냐는, 그런 뜻은 아니었다.

그저.

'저 많은 천사들 뒀다가 어디에 쓰려고?'

존재하는 천사들의 숫자를 보면, 천계 입장에선 플레이어가 있으나마나 한 수준이었으니까.

1급 치천사 한 명 때문에 상위부터 초월까지 모든 플레이어가 출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치천사는 네 명이나 남아 있는 상황.

게다가 2급 지천사는 최소 수십 명 이상 되는 것 같았다.

3급, 4급, 5급······.

한 계단씩 내려갈수록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근데 천계엔 천사들만 있는 게 아니지.'

거기다 신들까지 합치면 수치가 더욱 절망적으로 변한다.

상위 성계 대항전 당시 관객 숫자는 880만 명.

중간계의 수호를 부탁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전력이었다.

'굳이 번거롭게 플레이어들을 쓸 필요가 없는데?'

"그런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천사들이 직접 수호하지 못하는 건, 우리는 중간계를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죠."

"중간계로 넘어갈 수 없다?"

"네. 천계와 마계가 싸우는 전장이 될까 우려하신 아버지께선,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중간계에 결계를 치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방식이 아니면, 천사들과 악마들은 중간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특별한 방식이 아니면 천사와 악마는 중간계로 들어갈 수 없다.

'그랬구나.'

그 대목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콜로세움의 경기라는 이름으로 플레이어들을 때려 넣고 있더라니.

'단순한 유희 때문에 생긴 건 아니었군.'

리그를 네 개로 나누고, 플레이어에게 오퍼를 내리고, 경기를 만들고.

이런 식으로 관리한다는 건 천계 입장에선 인력 낭비나 마찬가지였다.

비유하자면 개미들을 이용해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수준.

'차라리 천사가 직접 강림해서 싸우는 게 훨씬 간단하지.'

그런데도 왜 리그를 운영하나 했는데, 애초에 들어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위 리그부터는 마계에서 중간계로 향하는 최전선, 삼지옥을 지키는 의무가 생겨납니다. 플레이어 렌도 앞으로 당직 근무를 들어가게 될 겁니다."

"당직 근무는 뭡니까?"

"여섯 명의 고위 플레이어가 한 조로 묶여, 일주일 단위로 지정된 구간을 사수하는 임무입니다. 물론 수당은 당연히 지급될 거고요."

'당직 근무라······.'

듣지 않아도 대충 어떤 개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삼지옥 곳곳에 축조되어 있는 성城.

그것들을 지키는데 고위 플레이어가 투입된다는 뜻이겠지.

'개꿀인데?'

듣는 순간 입꼬리가 올라갈 뻔했다.

1주일간의 당직.

혹시 무슨 일이 터졌을 때 투입될, 굳이 예를 들자면 군부대의 오분대기조 같은 역할일 것이다.

근데 중요한 건.

'아무 일이 안 터질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당시 근무를 섰던 플레이어는, 공짜로 포인트를 얻는 셈.

내 입장에선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제 당직은 언제죠?"

"플레이어 렌의 첫 당직은 8주 후입니다. 그러니 그 기간 안에 날개옷에 적응하셔야 할 겁니다."

'시간도 넉넉하네.'

첫 당직은 8주 후.

그때까지 날개옷에 적응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것 또한 감각의 문제.

'초감각이 이럴 때 정말 사기라니까.'

그 정도면 충분히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예, 전달 사항은 끝입니다. 혹시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십니까?"

"아뇨, 없습니다."

내 대답에 카시미엘, 테라엘, 에르미엘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에르미엘이 대표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바쁘실 텐데 실례했습니다. 팀 투지의 건승과 플레이어 렌의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펄럭―

아세리안에게 고개를 숙인 세 천사가 날개를 활짝 폈다.

용건을 마쳤으니 이만 가려는 모양이었다.

'일단 날개옷부터 입어봐야겠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잠시만요, 권능 부여 설명해 주셔야죠."

게이트를 생성하려던 세 천사를 아세리안이 붙잡았다.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세 천사.

"그거 하실 생각이십니까? 진짜 비싼데······."

'권능 부여?'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나는 아세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권능 부여가 뭡니까?"

"렌 님이 받은 날개에 권능을 부여하는 일이에요."

"스킬처럼 말씀이십니까?"

"네, 맞아요."

"······!"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안 그래도 영롱한 달빛에 들어있는, 추가 스킬 슬롯을 요긴하게 잘 쓰고 있는 상황.

'스킬을 추가할 수 있다면 아무리 비싸도 가치가 있지.'

포르도엘이 스킬북을 가지고 장난친 덕분에, 내 수중엔 대천사의 눈물을 사고도 9억 골드가 남아 있었다.

1억 골드, 아니 2억 골드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는 상황이랄까.

그러자 카시미엘이 부연설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부여되는 권능은 랜덤이고, 종류는 무궁무진해요. 엄청나게 좋은 것도 있고,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것들도 있죠. 근데 그에 비해 가격이 정말 비싸요."

"얼마입니까?"

"300만 포인트입니다."

"······!"

카시미엘의 설명을 듣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300만 포인트?'

골드가 아닌, 포인트로 구매해야 하는 것이었다.

300만 포인트면 근민체를 어마어마하게 올릴 수 있는 금액.

스킬 하나를 추가하는 것치고는, 비싸도 너무 비쌌다.

'차라리 그 포인트를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게 낫지.'

카시미엘이 굳이 설명도 해주지 않은 채 떠나려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으리라.

가격을 듣고, 권능을 부여할 만한 플레이어가 지금껏 없었을 테니까.

물론 나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 저는 권능 부여는 하지 않겠······."

"네, 렌 님의 날개에 권능을 부여하고 싶어요."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는 아세리안.

"······?"

"짜잔, 서프라이즈! 승급 선물이에요, 렌 님."

그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뭐야, 아세리안이 내줄 수도 있는 거였어?'

아무래도 이게 진짜로 준비한 서프라이즈였던 모양.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아세리안은 무려 2만 명의 플레이어가 소속된 팀을 가지고 있다.

내게 들어오는 플레잉 코치 정산 포인트를 보건대, 그녀에게 300만 포인트는 금방 벌 수 있는 금액이었다.

'오히려 골드가 부족해서 허덕이고 있었어.'

2만 명의 식자재값, 생필품, 거기다 최근 엄청나게 소모하기 시작한 독까지.

그걸 감당하느라 골치를 앓고 있었달까.

반면에 나는 골드는 넘쳐나는데 포인트가 부족하다.

그녀가 300만 포인트를 대신 내주고, 내가 골드를 지원하면 서로에게 윈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세리안 님.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행이네요! 혹시 거절하시면 어쩌나 했는데."

훈훈한 분위기가 흘렀다.

'마음에 안 들 수가 없지.'

마주 보며 웃는 우리 둘.

그 모습에, 세 명의 지천사가 한 마디씩 내뱉었다.

"팀 투지가 단시간에 명문 팀으로 거듭난 이유가 있었군요."

"와, 보기 너무 좋아요."

"분위기가 좋은 팀이 강팀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강팀은 분위기가 좋더군요."

모두 우리 팀을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300만 포인트라고 하셨죠? 지금 바로 결제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고위 리그 소모품 탭으로 들어가셔서, 권능석을 눌러주시면 됩니다."

허공을 응시하며,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는 아세리안.

마찬가지로 허공을 바라보던 카시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금 완료되었습니다. 테라엘?"

"여기 있습니다. 플레이어 렌한테 전달하면 될까요?"

"네, 맞아요."

아세리안의 대답에, 테라엘이 직경 2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구슬을 들고 다가왔다.

주홍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수정이었다.

띠링!

[<소모품:권능석 >을 획득하셨습니다.]

'어떤 스킬이 나오려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만큼, 부디 쓸만한 녀석이 나와야 할 텐데.

"권능석까지 전달 완료하였습니다.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게 권능석을 전달한 세 천사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어머, 세 분이 오신다기에 차랑 다과를 준비해 놓았는걸요. 잠시 쉬었다 가시지 않구요."

"아닙니다.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세 천사는 뭐가 나올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플레이어의 사적 영역.

'센스 있네.'

눈치껏 빠져주는 것이리라.

"네, 세 분 모두 고맙습니다. 빛이 함께하길."

"평화를 위해."

"영원한 빛을 위하여."

"빛을 수호하라."

또다시 공터에 생겨난 게이트를 통해 팜을 빠져나가는 세 천사.

그녀들을 뒤로하고 나는 아세리안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선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아, 뭐가 나올지 궁금하네요."

"그럼 바로 사용해 보겠습니다."

"앗! 잠시만요!

날개옷에 권능석을 가져다 대려고 하자, 나를 만류하는 아세리안.

"······?"

"그거 하셔야죠, 그거!"

"그거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앗, 너무 아깝다!"

접객실 한 켠에 딸린 공터.

주사위에서 숫자 6이 나오자, 아세리안이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쯧. 오늘따라 잘 안 나오네.'

나도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숫자 세 개가 연속으로 나오면 권능석을 사용하자는 아세리안의 제안에, 어느덧 주사위를 던지기 시작한 지 2시간째.

벌써 수천 번 넘게 주사위를 굴렸음에도 같은 숫자가 나오질 않고 있었다.

'이번엔 나왔으면 좋겠는데.'

한숨을 내쉰 나는 다시 주사위를 던졌다.

톡, 또르르―

첫 숫자는 1.

주사위를 주워 든 나는 또 한 번 던졌다.

"앗, 이번에도 1이에요! 마지막 한 번만!"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군.'

한 명은 고신, 그리고 한 명은 고위 플레이어.

이게 뭐라고 우리 둘다 열을 내고 있는지.

'이번에도 안 나오면 그냥 하자.'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마지막 주사위를 던졌다.

그리고 마지막 주사위 숫자는.

'후우.'

"휴우우."

숫자 1.

드디어 숫자 1이 세 번 연속으로 나온 것이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아세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사용해 보겠습니다."

"네, 저도 궁금하네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좋은 권능을 주지 않을까요? 안우진 님은 어떤 권능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어떤 권능이라······.

'흠.'

"정신이나 체력, 그게 아니면 근력 혹은 민첩. 이 네 가지 스텟 중 하나를 올려주는 권능이 나왔으면 좋겠군요."

스킬은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으니, 이제는 기초 피지컬을 채워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퍼센트로 스텟을 올려주는 권능이 가장 베스트일 것이다.

"분명 원하는 게 나올 거예요. 안우진 님은 대천사의 눈물도 가지고 계시잖아요?"

배시시 웃는 아세리안.

'그랬으면 좋겠군.'

대천사의 눈물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소유자에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온다는 옵션을 가지고 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날개옷에 권능석을 가져다 댔다.

띠링!

[<소모품:권능석 >을 사용했습니다.]

[<의복:날개옷 >의 날개에 권능을 부여하시겠습니까?]

[Yes / No]

그러자 눈앞에 뜨는 알림창.

'당연히 예스지.'

나는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띠링!

[<소모품:권능석 >을 사용하여 <의복:날개옷 >에 권능을 부여합니다.]

[<의복:날개옷 ><권속천사眷屬天使 >의 권능이 깃듭니다!]

그리고 나타난 권능.

어······.

'권속천사?'

저게 뭐지?

가늠이 안 되는 단어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뭐가 나왔는데요?"

"권속천사라는 권능이 나왔네요."

내 대답에,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아세리안.

그녀 또한 이게 무슨 능력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일단 설명을 읽어 봐야······.

"권속천······ 네에에에에에에에에?"

순간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했다.

< 197화. 새로운 시야(2) > 끝

< 198화. 새로운 시야(3) >

'뭔데 그래?'

아세리안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한 나는 권속천사의 권능 효과를 확인했다.

[<권속천사眷屬天使 >]

[계약을 맺으면, 시전자가 보유한 스킬의 25%를 권속자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여의 개념이 아닌, 부여의 개념이므로 시전자에게는 아무런 페널티가 없습니다.]

[계약을 맺으면, 시전자 스텟 상승분의 25%만큼 권속자가 함께 상승합니다.]

[최대 10명까지만 계약할 수 있으며, 한 번 적용 시 해제할 수 없습니다.]

[등록된 권속]

[없음]

"······?"

권속천사의 설명을 읽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다.

'이게 된다고?'

아니, 이해하지 못한 게 맞다.

이런 권능이 존재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10명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의 25 퍼센트를 부여한다.

조건도, 제약도 없다.

설정하면 파기가 불가능할 뿐.

"권속천사라니! 꺅, 완전 대박이잖아요!"

방방 뛰며 기뻐하는 아세리안.

"어······. 천사들은 이런 능력이 흔합니까?"

나는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등가교환이 아닌, 권속자에게 내 능력을 일방적으로 부여할 수 있다는 것.

이건 정말 사기적인 능력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뇨. 천계에서도 아버지만이 가지고 계신 권능이고, 마계까지 합쳐도 딱 두 명밖에 없는, 초초초특급 희귀 능력이에요!"

"······."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열 번을 읽어도 내가 이해한 게 맞았다.

열 명의 플레이어를 대폭 강화시킬 수 있다.

그것도 아무런 페널티 없이.

'미친.'

주창범이 내 스킬을 25% 효율로 사용할 수 있다면?

'정말 운이 좋으면 고위 리그까지도 넘볼 수 있을 거야.'

온몸에서 소름이 찌르르 울렸다.

"어떡해! 진짜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아요."

뒷목이 쭈뼛하고,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대박인데······?'

현재 내 플레잉코치 정산율은 7%.

거기다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한 층 한 층 쌓아올린 덕분에, 투지에 소속된 플레이어의 숫자만 2만에 달한다.

그런 상태에서 팀에 고위 플레이어들까지 늘어난다면?

팀의 주인과, 단 한 명의 플레이어로 출발했던 팀 투지.

'포인트 수급은 더 이상 문제없겠어.'

초창기에 뭉친 작은 눈덩이가, 어느새 초대형 스노우볼이 되어 구르고 있었다.

* * *

극한의 한기를 담은 북풍한설이 휘몰아치고, 매일 같이 눈보라가 쏟아지는 곳.

니플헤임에 위치한 마계의 거점據點, 프레미어.

"끌끌, 얼마 남지 않았군."

거대한 옥좌에 앉아, 허공을 응시하던 레비아탄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천계의 위선자들을 쓸어버릴 때가 다가오고 있다."

천계 쪽에서 자신과 공명하는 기운이 점점 커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

길다란 테이블의 우측 의자에 앉아있던 고위 악마, 살레오스의 물음에 레비아탄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은, 그릇이······?"

"머지 않아 곧 그릇의 색깔이 바뀔 것 같군. 그릇을 안전하게 데려올 위장 더미들은 어떻게 됐지?"

"그릇과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실수 없이 진행되어야 할 거다. 천계 쪽에선 눈이 뒤집혀서 죽이려고 달려들 테니."

대전쟁이 끝난 지 어느덧 11년째.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마계는 그동안 천계의 전력을 깎으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천계 존재들의 타락화.

'야금야금 갉아먹다 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왔군.'

천계의 전력은 마이너스가, 마계의 전력은 플러스가 된다.

이런 식으로 계속 흘러가면, 언젠가는 양측의 균형이 맞는 날이 올 것 같았다.

'근데 이젠 그것도 쉽지 않단 말이야.'

그러자 천계는 초강수를 꺼내 들었다.

타락화된 존재를 끝까지 추격하여 사살하는 것.

얼마 전에 타락한 라파엘이, 그 대표적인 예시였다.

설마하니 상위부터 초월까지 모든 플레이어가 동원될 줄은 몰랐기 때문.

"반드시 살려서 데려와야 한다. 반드시."

그래서 레비아탄은 더욱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릇이 죽는 순간, 지금껏 쌓아 올린 계획들을 송두리째 바꿔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동안 더미를 만드는 데 주력했으니,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살려 데려올 수 있습니다!"

"음, 음."

살레오스가 힘차게 대답하자, 레비아탄은 옥좌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다란 테이블.

그의 앞에는 현재, 삼지옥의 각 지형과 거점 및 성, 그리고 병력이 표현된 진영도가 놓여 있었다.

"여기, 그리고 여기."

레비아탄인 진영도의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쪽에서 국지전을 시작하라. 슬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놔야겠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숙주 쪽은 어떻게 되었는지······."

말끝을 흐리며 살레오스가 묻자, 레비아탄이 길게 흘러내린 수염을 쓸어내렸다.

"흠, 놈이 마수에서 벗어났더군."

"예? 어찌······."

"루시퍼는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긴 한데······. 뭐, 상관없다. 어차피 숙주가 마지막 하나를 남겨놓고 다 완성시켜 놓지 않았더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는 레비아탄.

그가 이내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릇에 옮겨심기 직전에 강제로 완성시켜 버리면 되겠지."

* * *

'색다른 기분이군.'

드넓게 펼쳐진 거대한 폐도시.

기류에 몸을 맡기자, 나를 스쳐가는 시원한 바람.

거기다 어마어마한 속도까지.

특수 중력 대련장에서 하늘을 날던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개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엄청 크네.'

날개옷을 입고 처음으로 창공을 갈라본 소감은, 효율성이 무척 좋다는 것이었다.

특히 체력적인 면에서.

'이래서 고주몽이랑 일리아가 별로 힘들어하지 않았던 거군.'

땅에 발을 디딘 상태에서 이동하려면, 계속해서 체력을 소모해야 한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기류만 잘 타면 해당되지 않는 법칙이었다.

날갯짓 한번 없이 미세하게 방향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계속 날아갈 수 있었으니까.

'시야도 굉장히 넓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팀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고건하는 나무 위에 숨어서 활을 겨누고 있고, 주창범은 방패를 들어 올린 채 주변을 수색하고 있다.

300미터 떨어진 곳에선 수호가 당소소를 피해 은신할 공간을 물색 중이다.

그 모든 게 한눈에 보였다.

'초감각의 활용도가 더욱 커지겠군.'

지금까지 감각의 범위가 가장 넓었던 건 청각과 마력장.

시각은 구조물이라든가, 나무 등등 엄폐물이 너무 많아서 활용에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날개가 생긴 순간, 그 모든 제약들이 사라졌다.

'엄폐물만 없다면 증폭된 시각으로는 몇 킬로미터 바깥도 내다볼 수 있지.'

날개가 생긴 순간, 말 그대로 시야가 달라졌다.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야가.

그때였다.

쐐애애애애액!

'뭐지?'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며, 급하게 날갯짓 했다.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급하강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

펄럭! 펄럭!

깔끔하게 땋은 백금발의 머리칼, 얇은 입술에 맺힌 장난기.

거기다 어깨 너머로 보이는 여섯 쌍의 날개까지.

'포르도엘이었군.'

대상을 확인한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리니 개구쟁이 미소를 띤 포르도엘이, 날개를 펄럭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마 나를 몰래 쫓아와, 마력장의 범위가 미치지 않는 높은 상공에서 떨어져 내린 모양이었다.

"우와, 이걸 피했······ 푸흡."

그 순간 웃음을 터트리는 포르도엘.

'쯧.'

양손으로 입가를 급히 막았지만, 나를 비웃는 중이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급하게 날갯짓하다 보니, 꼴사나운 모습이 연출됐기 때문.

'조금 더 연습해야겠군.'

"아하하하. 죄송해요, 안우진 님이 뭔가를 서툴러 하시는 모습을 처음 봐서."

"음, 그대도 못하는 게 있었군."

어느새 다가온 피넛엘 또한 보기 드물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날개옷을 입었다기에, 궁금해서 찾아온 모양이었다.

"제법 어렵죠? 저랑 피넛엘이 도와줄게요!"

"괜찮습니다."

"에이, 조금 있으면 첫 당직에 들어가신다면서요. 시간이 촉박하실걸요?"

가까이 날아와 눈을 빛내는 포르도엘.

그녀의 눈동자엔 마치, '어떻게 놀려줄까?'라는 감정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충분합니다."

"기어다니는 거에서 걷는 것까지도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리잖아요. 나는 건 그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린다구요."

"음, 내 생각도 같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아예 새로운 감각이니까, 더욱 어려울 것이다. 괜히 나쁜 습관을 만들 수도 있고."

포르도엘의 말에, 피넛엘까지 동조하고 나섰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말 그대로, 감각의 문제.

이 부분에 한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과연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

깔깔 웃는 포르도엘, 그리고 애써 미소를 감추고 있는 피넛엘을 향해 나는 의지를 불태웠다.

내게 배정된 집무실.

'형도 잘 지내고 있구나.'

지구에서 펼쳐진 승급전, 올라갈수록 더 강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숙명 등등.

포르도엘을 통해 전달받은 편지를 읽은 나는, 피식 웃었다.

온통 내 걱정으로 가득한 내용에서 형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

'형한테도 보내줄까?'

편지를 내려놓은 나는, 책상 한 켠에 놓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어머니, 형, 그리고 나.

우리 가족이 함께 있던, 순간의 작은 조각.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보내드려야겠군.'

편지지 안에 사진을 넣어서 보내줄까 했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히 사진을 봤다가, 형이 심란해 할 수도 있으니까.

안정화된 이후에 보내줘도 늦지 않을 것이다.

똑― 똑―

"우진이 형, 창범이에요."

"아, 네. 들어오시죠."

"형, 무슨 일이세요?"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집무실로 들어오는 주창범.

녀석은 불안한 듯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내가 집무실에 호출한 적이 없었으니까,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눈치였다.

"일단 앉으시죠.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오래 걸리는 일인가요?"

"아뇨, 금방 끝납니다. 어쩌면 1분 만에 끝날 수도 있구요."

"그럼 괜찮아요."

뚜벅뚜벅 다가온 주창범이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철제로 이루어진 갑옷을 입은 데다가 거대한 방패까지 들고 있다 보니, 녀석이 의자에 앉자 삐그덕 소리가 났다.

'주창범한테는 무조건 걸어줘야지.'

녀석을 부른 이유는 권속천사의 권능 때문.

내 스킬을 25%의 효율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자마자 주창범 생각이 가장 먼저 났다.

'지금 가지고 있는 방어력에, 공격력까지 추가된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현시점, 팀 투지에서 고위 리그에 가장 근접한 게 주창범이었으니까.

녀석이라면 25%에 불과한 효율로도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주창범 씨한테 제안할 게 있습니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받쳤다.

"제안이요?"

"네. 제가 최근에 한 가지 능력을 얻었거든요."

나는 주창범에게 권속천사의 권능을 설명했다.

내가 가진 스킬을 25% 효율로 사용할 수 있으며, 내가 스텟을 올리면 거기서도 25%가 상승한다는 것.

그리고 한 번 설정하면 해제할 수 없다는 것까지.

"······이걸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한 번 설정하면 절대 해제할 수 없으니까요."

"당연히 하죠!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인데. 거기다가 그걸로 인해서 불이익을 받는 것도 없잖아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주창범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지금까지 동고동락한 팀원으로서, 예의라고 생각해서 물어봤을 뿐.

"그럼 받아들이는 걸로 알고, 제 권속으로 설정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형!"

띠링!

[<권속천사眷屬天使 >의 권능을 사용합니다.]

[플레이어 '주창범'을 권속으로 설정하시겠습니까?]

[한 번 적용 시 해제할 수 없습니다.]

[Yes(선택) / No]

[플레이어 '주창범'이 권속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시전자가 보유한 스킬의 25%를 권속자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시전자가 스텟을 올리면, 권속자 또한 25% 비율로 상승합니다.]

[등록된 권속]

[플레이어 '주창범']

"앗, 형이 말씀하신 대로 알림창이 떴어요."

권속 등록을 마치자마자, 주창범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꼼꼼하게 읽어보세요. 혹시 제가 얘기한 내용 말고 다른 게 있으면 꼭 알려주시구요."

"아뇨, 딱 세 줄 떴어요. 제가 권속 설정됐다는 거랑, 각각 25퍼센트씩 사용할 수 있다는 거요."

콰지지지지지직!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녀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주홍빛 뇌전.

'나쁘지 않군.'

효율이 낮아짐에 따라서 검붉던 색깔이 주홍빛까지 연해졌지만, 분명 내가 사용하는 뇌전이었다.

"우와, 우와. 형! 막 붉은 실선이랑 파란 실선이 보이고, 제 몸에서 번개가 날뛰는 것 같아요!"

주창범이 어린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호들갑을 떨었다.

내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무척 신기한 모양.

"혹시 요즘 모용악 님과는 사이가 어떻게 됩니까?"

"악이 형이요? 음······. 나쁘지 않은데요. 왜 그러세요?"

뜬금없는 내 물음에 주창범이 고개를 갸웃했다.

"새로운 스킬을 얻었으니까요. 한 번 써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녀석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하핫, 안 그래도 요즘 상위 리그에 올라왔다고 저를 막 무시하더라구요. 그래도 전 착하니까, 동생으로서 악이 형한테 지구의 물리치료 맛을 한번 보여줘야겠네요."

주창범이 이를 드러낸 채 씨익 웃었다.

< 198화. 새로운 시야(3) > 끝

< 199화. 새로운 시야(4) >

"흐읍!"

챙! 채챙! 챙! 콰지지지직!

번쩍하는 빛과 함께 스파크가 터진다.

거친 숨소리를 동반한 흙먼지가 얕게 피어오른다.

'처음인데도 제법이네.'

펄럭! 펄럭!

하늘 위에서 주창범과 모용악의 대련을 보던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진 스킬의 25% 효율로 권속자가 사용할 수 있다.

일견 애매하다고 느꼈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심플한 설명이었다.

체력 소모가 네 배 커지고, 데미지도 4분의 1로 낮아지고, 쿨 타임도 같은 비율로 길어진 상태로 내 스킬을 사용 중인 주창범.

"하아앗!"

챙! 콰지지직!

'전세가 확 뒤집혔는데?'

원래대로라면 모용악이 공격을 퍼붓고, 주창범은 그 공격을 막아내며 빈틈을 찾아 찔러야 한다.

하지만 내 스킬 하나하나가 워낙 좋은 성능을 가진 탓에, 지금은 주창범이 일방적으로 모용악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마 검이 번쩍일 때마다 모용악은 간담이 서늘할 것이다.

그때였다.

쏴아아아아아아아―

주창범이 들고 있던 검에, 주홍빛 뇌전이 강하게 응축되며 강렬한 빛을 뿜어댔다.

저런 임팩트를 보여주는 건 딱 하나뿐.

'뭐야, 벽력도 사용할 수 있어?'

"크윽, 제길!"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저 공격이 벽력이란 걸 깨달은 모용악이 급하게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꽈아아아아아아아앙!

폭음과 동시에 뇌전의 칼날이 사방을 휩쓴다.

먼지가 가라앉자, 검을 쥐고 있던 모용악의 손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끝났군.'

그걸로 대련은 끝.

허공에 뜬 채 부지런히 날갯짓하던 나는,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우와, 대박! 진짜 대박! 우진이 형 보셨어요? 제가 악이 형을 가볍게 이겼어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내게 다가오는, 방방 뛰는 주창범과 허탈한 표정의 모용악.

나는 모용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떠셨습니까?"

"음, 안우진 님의 스킬을 사용하는 창범이의 수준이라면 보시는 대로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졌죠. 그런데 창범이가 어떻게 안우진 님의 스킬을······?"

몸에 묻은 먼지를 탁, 탁 털어내며 묻는 모용악.

그의 표정에서 숨길 수 없는 섭섭함이 묻어나왔다.

'또 주창범만 챙겨줬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새로 얻은 권능에 대해 설명했다.

"······그래서 현재 아홉 자리가 남아있는 상태죠."

그러자 내 설명을 듣고는 눈을 빛내는 모용악.

"혹시, 저도 권속으로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평소 과묵하고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라, 저렇게 기대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물론입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모용악 또한 리스트에 들어있었기 때문.

'모용악은 무조건 해야지.'

리그가 상승할수록, 그리고 상위 넘버링일수록 기본급이 높아진다.

권속을 설정해서 내가 얻는 건 딱 하나뿐.

팀원들이 강해져서 벌게 될, 7%로 들어오는 플레잉 코치 정산 포인트밖에 없다.

'최상위권 플레이어들과 권속 계약을 맺는 게 유리하지.'

당장 내 기본급만 해도 20만 포인트.

200명이 넘는 플레이어가 벌어들일 포인트보다 많다.

근데 승리 수당, 그 외에 특별 수당까지 합치면?

'그 차이는 더 크게 벌어져.'

나 혼자서 천 명 가까이 되는 플레이어의 포인트를 벌어들이는 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모용악이나 고건하, 제이스 같은 플레이어들과 맺는 게 가장 효율적일 것이다.

"그럼 바로 걸어드리겠습니다."

띠링!

[플레이어 '모용악'이 권속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오, 저도 권속으로 설정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안우진 님. 이런 식으로 창범이가 안우진 님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거군요."

"맞습니다."

"거기다 안우진 님의 스텟 상승분의 2할 5푼이라······. 이건 정말 좋네요."

"그럼 저도 열심히 스텟을 상승······."

'어?'

잠깐만.

순간 내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스텟을 올리면, 모용악의 스텟도 오른다.

"······?"

"······?"

그럼 모용악의 기본급이 높아지고, 내게 들어오는 포인트도 더 상승한다.

난 그 상승분으로 또 스텟을 올린다.

그렇게 계속 진행하다 보면, 서로에게 계속 선순환이 이어지는 구조.

이건 마치.

'이거 복리잖아?'

얘기하다 보니까 복리와 비슷한 개념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안우진 님?"

말을 하다 말고 생각에 빠지자, 고개를 갸웃하는 모용악과 주창범.

"아닙니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요."

"아,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래 잡아 두었군요. 다시 한번, 제게 권속을 걸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린 같은 팀원이니까요. 아무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저흰 조금 더 대련하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형!"

고개를 숙이는 모용악과 주창범.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날개를 활짝 펴고 창공을 날았다.

특수 중력 대련장을 나가는 길.

번쩍! 콰지지지지지직!

"와, 뭐야?"

"안우진 님인가?"

대련 중이던 플레이어들이, 주창범과 모용악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대박이야.'

등 뒤로, 희귀하다던 뇌전 스킬끼리 부딪히며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 *

"이걸로 지천사 승급 명단에 관한 안건은 종료하겠습니다."

높이가 30미터를 훌쩍 넘는 거대한 돔형 건물.

가운데가 뻥 뚫린 원형 테이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열두 존재가 둘러앉아 있었다.

"다음 안건은······. 지구 성계에 관한 거군요. 제안자는 오딘 님?"

서류를 넘기던 환웅이 고개를 갸웃했다.

최근에 지구에서 벌어진 일이라곤, 렌의 승급전밖에 없었기 때문.

그와 반면에 다른 주신들의 생각은 엇갈렸다.

'또 시작이군.'

'도대체 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거지?'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의장 자리를 오딘이 되찾을 수 있겠어.'

모두의 시선이 오딘에게 집중된 가운데, 환웅이 입을 열었다.

"어떤 의미로 이 안건을 올려주신 겁니까?"

환웅의 물음에, 자리에서 일어난 오딘이 테이블의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그러고는 대답하지 않은 채, 나머지 열 명의 주신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렌의 승급전을 보니, 지구는 퀴리오스 님이 맡은 뒤로 하나도 바뀐 게 없더군. 단, 하, 나도 말이지."

그리고는 한 글자 한 글자 뚝, 뚝 끊어 말했다.

"예호슈아 님이 영면에 든 이후, 지금껏 지구의 주신 자리는 공석이었소. 통제를 벗어난 지구는 고도로 발달하며,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지경까지 왔고."

"하고 싶은 말씀이 뭐죠?"

퀴리오스 바로 오른쪽에 앉아 있던, 알프헤임의 주신 위그드라실이 물었다.

최근 그녀가 내놓는 안건마다 오딘이 딴지를 걸었기에, 제법 까칠한 목소리였다.

"아버지께선 지금껏 공석이었던 지구의 주신에, 어디서 굴러들어 온 건지 모르는 퀴리오스를 임명하셨소. 나는 그 이유가, 고도로 발달한 지구에 공멸의 위기가 찾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나도 동의합니다."

아마츠카미, 반고, 자이로스, 제우스, 샤가 오딘의 말에 동조했다.

"허나 그 뒤로 바뀐 게 있소? 아니, 오히려 더 발달한 것 같소. 이대로 간다면 마계 때문이 아닌, 스스로 공멸할 정도로. 그래서 퀴리오스께 묻고 싶소."

오딘이 퀴리오스에게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 때문에, 제법 위압적으로 보일 법한 모습이었다.

"퀴리오스여, 장기간 주신의 부재라는 특수성을 배려해, 아버지께선 지구에 더 강력한 결계를 쳐 주셨지. 마계에서 절대 손댈 수 없도록, 중간계 관리 위원회와 주신인 그대밖에 볼 수 없는 아주 강력한 결계를."

"······."

"혹, 그 특권을 이용하여 의무를 방치한 건 아닌가?"

오딘의 말을 끝으로, 회당 내부를 거대한 침묵이 찍어 눌렀다.

모두들 숨죽인 채, 퀴리오스의 입을 바라보았다.

열두 주신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의 공개 저격.

추궁하는 듯한 말투.

거기다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주신이라는 말로, 은연중에 깎아내리기까지.

하지만 퀴리오스의 표정은 무척 평온했다.

"지구를 다스리지 않고, 방치했냐는 물음이지요?"

"맞소."

"그렇다면 확실하게 대답드릴 수 있겠군요.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퀴리오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군.'

그 태연한 모습에, 정작 오딘의 등줄기에 땀이 맺힐 정도였다.

그럼에도 오딘은 날카로운 눈빛을 유지한 채,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방치가 아니다라······. 그럼 최근 렌의 승급전에서 본 지구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도문명화됐지만, 지구는 공멸하지 않을 겁니다."

"공멸하지 않을 거다? 어떻게 확실할 수 있소?"

"운명이라는 거대한 순리의 흐름에 따라 움직일 테니까요."

"궤변이군. 그게 방치와 뭐가 다른 거지?"

"지구의 공멸을 해결하라, 저는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안배했을 뿐입니다. 무심無心이 아닌, 무위無爲입니다."

오딘은 퀴리오스와 대화할수록 답답함을 느꼈다.

온통 뜬구름 잡는 얘기뿐이었으니까.

"자, 자. 일단 침착하시죠."

그 광경에, 지금껏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던 환웅이 중재했다.

"아버지께서 소임을 맡기셨으니, 여기서 얘기해 봐야 달라질 게 없습니다. 오딘 님?"

"말씀하시오."

"우려하시는 바는 충분히 납득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죠. 해당 안건을 주신회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올리는 겁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감히 왈가왈부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닙니다."

"······."

"그럼 다수결로 결정하겠습니다. 한 분씩 의견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환웅의 말에, 동그랗게 둘러앉은 신들이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찬성합니다."

"찬성."

"찬성하오."

"저도 찬성합니다."

그렇게 돌고 돌아, 오딘의 차례가 되었다.

앞에서 열한 명의 주신들이 모두 찬성을 얘기한 상황.

"······나도 찬성이오."

그래서 오딘 또한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걸로 지구 성계에 관한 안건을 마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안건이군요. 지옥에서 시작된 마계의 준동. 위그드라실 님 안건입니다."

그렇게 넘어가게 된 다음 사안.

환웅이 화제를 꺼내자, 위그드라실이 살포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근 삼지옥 곳곳에서 국지전이 시작되었어요. 코드 제로의 여파에서 벗어났다는 뜻이죠."

그러고는 원탁의 중앙으로 살포시 걸어들어오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 또한, 고위 리그와 초월 리그의 확충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해요."

위그드라실의 말을 반고가 이어받았다.

"음, 이번에 렌이 고위 리그로 새롭게 올라왔지."

"맞아요. 모두들 반대하시더니, 정작 제가 추천했던 렌이 제일 빨리 올라왔죠."

뼈가 들어있는 위그드라실의 말에, 반고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아무튼, 렌을 필두로 열 명 정도의 고위 플레이어가 이번에 추가될 것 같더군. 상위 리그를 맡은 미카엘은 굉장히 유능한 인재니까."

"일단 안건 제안자의 말씀을 끝까지 들어보겠습니다. 위그드라실 님?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어떤 걸 제안하고 싶으신 겁니까?"

"전에 오딘 님이 상위 리그의 지원을 늘리자고 그랬죠? 하지만 정작 안건은 안 올라오길래, 그래서 바쁜 오딘 님을 대신하여 제가 올렸답니다."

다른 주신들과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방긋 웃는 위그드라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당신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오딘을 바라보며, 일부러 더 환하게 웃었다.

그동안 사사건건 딴지를 걸던 오딘에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기 때문.

"······."

하지만 오딘은 다른 생각에 잠긴 듯, 그녀의 도발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것 또한 바로 투표하도록 하죠. 한 분씩 의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찬성."

"반대."

"찬성합니다."

"반대에 한 표."

일전에 오딘이 얘기했던 안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웅, 누아다, 일루바타르, 마르둑, 퀴리오스가 찬성하고, 오딘의 측근들이 하나같이 반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딘만 남은 상황.

"······."

"오딘 님?"

"······찬성."

"······?"

"······!"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오딘의 입에서 찬성이 나오고, 주신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찬성에 표를 던졌던 주신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그리고 반대에 표를 던졌던 주신들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 모습에 환웅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위그드라실이 올린 안건을, 통과 쪽으로 옮겼다.

"찬성 칠, 반대 오. 이것으로 상위 리그의 대규모 지원에 관한 안건을 통과하겠습니다."

그 순간 고개를 들어, 환웅을 바라보는 오딘.

"······."

환웅은 오딘에게 묘한 미소를 지었다.

* * *

[등록된 권속(9/10)]

[플레이어 '주창범']

[플레이어 '모용악']

[플레이어 ······.]

특수 중력 대련장을 나온 나는 팜을 돌아다니며, 예정해두었던 아홉 명의 플레이어와 권속을 맺었다.

그리고 남은 마지막 한 자리.

원래는 형한테 설정하고자 했었다.

'형의 생존율을 더 높여줄 수 있을 거야.'

팀의 주인에게 지원도 빵빵하게 받은 형이, 내 스킬까지 보유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씨발.'

만날 방법이 없다는 것.

한참을 고민하고, 아세리안과 포르도엘에게 조언도 구해봤지만, 도저히 형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팀 불굴의 주인이 딴 마음 먹을지도 모르는데, 잠시 팔려갔다 올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지.'

다시 특수 중력 대련장으로 돌아온 나는, 창공을 날아다니면서 7기수와 8기수 플레이어를 하나하나 살폈다.

결국 형과의 계약은 포기했다.

그래서 마지막 자리는, 보유한 스텟보다는 센스와 감각이 뛰어난 플레이어와 계약할 생각이었다.

'당장의 수준보다는 잠재력이 큰 녀석을 넣어야 해.'

최소한 상위 리그, 상위 넘버링 이상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재능.

그 정도는 돼야 권속 계약을 맺을 생각이었다.

'마땅한 녀석이 없군.'

챙! 챙! 챙! 채챙! 챙!

"제법 많이 늘었는데!"

"흥, 아직 한참 멀었어."

빠르게 발을 놀리며, 검을 휘두르는 사람.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는 낭인족.

그리고 나무 위에서 활시위를 튕기는 엘프까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플레이어들 치고 잘 싸우고 있었지만, 내 눈에 차는 녀석은 없었다.

상위 넘버링은, 정말 괴물 중의 괴물들만 오를 수 있는 영역이었으니까.

그때였다.

'아세리안한테 추천을 받아야······ 어?'

내 시야에 들어오는 한 플레이어.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눈을 치켜떴다.

'뭐지, 이 이질적인 감각은······?'

녀석의 몸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 199화. 새로운 시야(4) > 끝

< 200화. 새로운 시야(5) >

"크윽, 제길!"

평범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한 20대 후반의 남자.

'뭐지?'

느릿느릿한 검, 거친 호흡, 바닥에 딱 달라붙듯 움직이는 다리.

한 눈에 보기에도 스텟이 엄청나게 낮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많이 느껴본 감각인데.'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나는, 플레잉코치 시스템을 열었다.

[이름 : 오현석(닉네임 : 오현석)]

[근력 : 28] [민첩 : 31] [체력 : 30]

[정신 : 48] [지력 : 19] [마력 : 0]

[아세리안 코멘트 : 안우진 님과 같은 지구의 대한민국 출신.]

[피넛엘 코멘트 : 전직 군인. 특별한 것 없음.]

[포르도엘 코멘트 : 대화 나눠봤는데 재미없음.]

역시나 별다를 게 없는 상태창.

'뭐였더라.'

나는 존재감을 숨긴 채, 조금씩 고도를 낮춰 오현석이라는 남자에게 가까이 갔다.

이질적인 기운을 더 자세히 느끼기 위해선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느끼게 된.

'아!'

익숙한 자연의 향기.

'정령이었군.'

어디서 만나본 익숙한 기운인가 했더니, 과거 아르웬에서나 느껴지던 자연의 기운이 오현석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오현석이라는 남자에게 향했다.

"헉, 안우진 님이다!"

"고위 리그······. 나도 언젠가는 꼭."

"우와, 날개 진짜 멋있어."

오현석과 30미터를 남겨놓고 부드럽게 착지하자,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대련하던 플레이어들이 움직임을 멈춘 채, 경외 어린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오현석 씨?"

"······!"

"오현석 씨!"

"예, 옛!"

짧게 끊어지는 호흡, 통나무처럼 뻣뻣해진 몸.

'완전히 긴장했군.'

내가 본인의 이름을 부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오현석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하죠."

"······저 말씀이십니까?"

"여기에 오현석 씨가 또 있습니까?"

내 물음에 동공이 흔들리는 오현석.

"갑시다."

나는 오현석을 이끌고 특수 중력 대련장을 나섰다.

그리고 가는 길에 마주친 이세연에게, 간단한 다과와 차, 그리고 포르도엘을 호출해달라고 부탁했다.

"여긴······?"

"제 집무실입니다. 편하게 앉으시죠."

5평 정도 크기의 방.

집무실 의자에 앉은 나는 오현석에게 자리를 권하며, 인벤토리에서 블라디미르 가면을 꺼냈다.

그리고는 악마의 눈으로 오현석의 상태창을 다시 한번 체크했다.

'과연······.'

"······!"

가면을 쓰고 바라보자, 흠칫하는 오현석.

왜 불렀냐고 묻지도 못하고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일단 포르도엘이 와야 하는데.'

똑― 똑―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 소리.

"들어오셔도 됩니다."

이세연이나 포르도엘, 둘 중 한 명일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별 생각 없이 말했다.

"네에, 실례할게요. 어머, 웬일로 가면을······. 앗, 손님이 와 계셨네요?"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존재는 예상 바깥의 인물이었다.

"아세리안 님?"

가슴깨까지 내려온 백금발의 머리카락 사이로, 아세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세리안이 집무실로 들어오자, 뻣뻣하게 굳어 있던 오현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6기수 이후로는 팀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면서, 아세리안과 대화를 나누는 플레이어의 숫자도 줄어들었기 때문.

요새는 극소수의 몇몇만이 아세리안과 독대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그중에 가장 빈번한 건 나였고.

"아, 당직 오퍼가 정식으로 들어와서요. 바쁘시면 조금 이따 다시 올게요."

"아뇨, 지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오현석을 힐끗 살핀 나는, 아세리안을 보며 자리를 권했다.

포르도엘이 오지 않는 이상 딱히 나눌 대화도 없었기 때문.

"그럼 얼른 말씀드리고 갈게요. 6주 뒤에 당직이 있구요,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불참이 가능해요. 대신 그게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주신회에 안건을 올려서 기본급 삭감이라는 불이익이 있을 수 있어요."

"6인이 한 조로 움직인다길래 무조건 참석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닌가 보군요."

"네, 맞아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첫 당직 정도는 제가 타당한 사유를 만들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지.'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잘하면 시간만 때우다 오는 걸로 포인트를 벌 수 있으니, 오히려 당직의 주기가 더 짧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아뇨, 참가하겠습니다."

"네, 그럼 오퍼 수락할게요. 그럼 전 이······."

철컥!

"안우진 님, 저 찾으셨다면서요? 어! 다시 가면 쓰기로 하신 거예요?"

"······?"

"어? 언니, 아니 아세리안 님? 그리고 이분은······ 오현석 님! 맞죠?"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선 다다다- 말을 쏟아내는 포르도엘.

"이게 무슨 상황이져?"

집무실 안에 있는 인물들을 싹 스캔한 그녀가 눈을 굴린다.

예상하지 못한 조합을 보고 조금은 당황한 모양.

갑작스러운 포르도엘의 등장에, 아세리안이 내게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마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일단 앉으시죠."

이제는 거의 각 잡고 앉아 있는 오현석을 뒤로하고, 나는 포르도엘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왜요? 무슨 일 생겼어요?"

"아뇨, 다름이 아니라 포르도엘 님이 정령술에도 조예가 깊으시다고 해서 말이죠."

"한때 정령술이 신기해서 깊게 파고든 적은 있어요."

"엘프 말고도 정령술을 쓸 수 있습니까?"

오현석을 보고 난 뒤, 계속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내가 콜로세움 내부에서 지금껏 만났던 정령술사는 모두 엘프였기 때문.

그러자 포르도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정령원소석인가? 뭐 특별한 아이템이 있으면 정령력 각성이 가능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정령원소석이라······.'

특별한 능력을 각성시켜 주는 각성석의 한 종류인 모양.

'어쨌든 가능하긴 하다는 거군.'

포르도엘의 대답에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분이 정령술에 재능이 있으신 것 같은데, 포르도엘 님이 전담으로 케어 좀 해 주시죠."

"······네?"

내 부탁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포르도엘.

곁에서 잠자코 있던 아세리안도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어······ 팀 내부에 엘프 몇 명 있지 않아요? 차라리 걔네를 키우는 건 어때요?"

그녀의 말대로, 이미 정령력을 다룰 줄 아는 엘프들을 키우는 게 훨씬 이득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이렇게 하면 되겠군.'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오현석에게 권속 계약을 걸었다.

[<권속천사眷屬天使 >의 권능을 사용합니다.]

[플레이어 '오현석'을 권속으로 설정하시겠습니까?]

[한 번 적용 시 해제할 수 없습니다.]

[Yes(선택) / No]

[등록된 권속(10/10)]

[플레이어 '주창범']

[플레이어 '모용악']

[플레이어 ······.]

"어······ 권속, 계약?"

그러자 지금껏 얼어있던 오현석이 작게 읊조렸다.

"에에에에? 설마 이분께 권속 계약을 거신 거예요?"

그 혼잣말을 들은 포르도엘이 경악했다.

아세리안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을 뿐,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볼 정도.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반응 속에서, 나는 한 마디를 툭 뱉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겠지.'

처음부터 권속 계약을 맺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단지 호기심일 뿐.

근데 블라디미르 가면을 통해 보게 된 상태창이 모든 걸 바꾸었다.

[이름 : 오현석]

[성향 : 열정]

[근력 : 28] [민첩 : 31] [체력 : 30]

[정신 : 48] [지력 : 19] [마력 : 0]

[각성 능력 : <정령왕 > <원소통달 > <마력관통 > <물아일체物我一體 > <하급검술 > <하급박투술 > <하급치료술 >]

'미친 각성 능력이군.'

하위 리그에서 내게 죽었던, 아르웬을 통해 정령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당시 그녀가 가지고 있던 각성 능력은 특급 정령술.

하지만 오현석은 이미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저, 정령력을 각성하지 못해서 지금 이 자리에 머무르고 있을 뿐.

'무시무시한 괴물로 키워주겠어.'

스텟이 좀 낮지만, 그건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어느덧 피넛엘이 팀 투지에 들어온 지 2년째.

그녀에게 부탁하면 제대로 굴려줄 것이다.

'이걸로 권속 설정은 끝났고.'

"······?"

어리둥절한 표정의 오현석을 뒤로하고, 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상위 리그에서도 돌풍을 이어 나가는 팀 '투지'. 하이블러드나이트143에서 146까지, 네 경기 연속 승리를 챙겨 가다!

―플레이어 고건하, 승급 성공! 이걸로 팀 투지엔 상위 플레이어만 일곱 명째.

―뇌전 스킬로 무장한 팀 투지. 피라미드 구조에서 나오는 포인트로 일부 몇 명의 플레이어들에게 지원 집중?

―상위 게임 메이커 "우리는 지금, 위대한 팀의 태동을 지켜보는 중일 수도 있다."

└와 씨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에 고건하도 뇌전 스킬 들고 있더라? 걔네는 돈이 썩어 나나?

└딱 보면 모름? 밑에서 번 포인트로 위에 몰빵 중인 거지 뭘 ㅋㅋ 저런 구조는 금방 무너질 수밖에 없음 ㅅㄱ 유망주도 잘 키워야지.

└윗 댓 / 눈이 삐었나 ㅋㅋㅋㅋ 팀 투지가 유망주 홀대한다고? 그런 팀이 역대급 생존율이랑 승률을 찍고 있는 거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최근 몇 경기 보면 피라미드 몰빵 중인 게 맞긴 한데ㅎ 거기가 팀 투지라면 얘기가 다르지 ㅎㅎ;

└ㅇㅇ 최근에 급성장한 거 치고는 뎁스가 굉장히 두꺼운 느낌임. 저런 팀은 무너지기가 쉽지 않지.

└근데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몇 개 있다? 팀 투지 애들 보면 스텟도 평타 이상, 템이랑 스킬도 잘 갖춰져 있고, 기본기도 확실함. 이게 한두 명이 아니라, 소속된 팀원 전체가 다 이럼 ㅇㅇ 이게 가능한 건가?

권속 설정을 완료하고 4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폭루유성爆淚流星!]

'열두 시에 27. 그다음 일곱 시에 19.'

위에서 흩뿌려지는 거대한 유성들.

공간을 읽은 나는 날개를 펄럭이며, 유유히 마법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펄럭! 펄럭!

"어딜!"

그러자 근처를 배회하다가, 순간적으로 쇄도해 검을 휘두르는 피넛엘.

'네 시 방향 13.'

앞뒤 좌우로만 피할 수 있었던 것과 다르게, 허공은 위아래도 존재했다.

고작 그것 하나만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의 크기가 몇십 배 이상 늘어났다.

공간 전체를 읽을 수 있는 내게 있어서, 하늘이라는 전장은.

"크윽, 도대체 잡을 수가 없군."

오히려 자유를 선사해 주었다.

아래로 활강하다가, 날개를 튼 나는 가볍게 피넛엘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이젠 내 몸의 일부 같아.'

어깨에 달린 두 개의 날개가 바람을 가르는 게 느껴진다.

날개의 가동 범위, 내가 원하는 움직임을 위한 적절한 힘,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식으로 통제하는 것까지.

이 모든 감각이 익숙해지자, 포르도엘과 피넛엘은 더 이상 내게 유효타를 넣지 못했다.

"이익! 이대로 포기 못 해!"

내가 모든 공격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포르도엘이 이를 악물고 주문을 영창했다.

'애쓰는군.'

[싸늘한 혹한의 창!]

격렬하게 들끓던 공기 중의 마나가, 이내 수천수만 개의 얼음으로 된 창을 만들어 낸다.

그러더니 64방위를 점한 채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건 쉽지 않겠는데?'

빠르게 판단을 내린 나는, 곧장 날개를 접으며 급하강했다.

날아드는 얼음 창들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춰야 했으니까.

'세 시 방향 17로.'

펄럭! 펄럭!

'이쪽 공간이 비는 군.'

그러고는 한 번씩 날갯짓으로 방향을 조금씩 바꾸며, 그 공격들을 모조리 피해냈다.

콰과과과과과과광!

"말도 안 돼! 저걸 피했다고?"

지상을 폭격한 마법들이 먼지구름을 만들어 내고, 그 사이에서 유유히 날갯짓한 나는 포르도엘에게 다가갔다.

직전의 마법을 끝으로, 60분의 제한 시간이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도망 다닐 필요가 없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와······ 저 살면서 이렇게 날개를 빨리 다루시는 분은 처음 봐요."

펄럭! 펄럭!

마치 허공에서 정지한 듯, 제자리를 유지한 채 입을 벌리고 있는 포르도엘.

곁에 있던 피넛엘 또한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진심으로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두 분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흠, 듣기 민망하구나. 그대는 우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깨쳤을 것이다."

"피넛엘의 말이 맞아요. 고작 6주 만에 이 정도의 비행이 가능할 줄이야······."

두 사람의 감탄에,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안정화시켰다.

1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피해다니기만 하는 건, 체력 소모가 제법 심한 일이었다.

"내일도 훈련을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당연하죠!"

지금까지 나는 적의 공격을 회피하는 것에만 집중해서 훈련했다.

기본기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데, 너무 많은 걸 하려고 하다간 안 좋은 습관이 들 수도 있었기 때문.

하지만 오늘부로 그것도 끝.

"그럼 내일부터는 저도 공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비행 자체는 마스터한 것 같거든요."

'이젠 싸움에 익숙해져야지.'

"안 그래도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을까 싶었다. 얼마든지 도와주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피넛엘.

"어······. 저는 좀 바빠질 거라······."

하지만 포르도엘은 쭈뼛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지난 6주간 신나게 공격을 퍼부으며 나를 약 올렸던 포르도엘.

내심 그녀에게 작은 복수를 해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걸 알아차리고 저러는 것이다.

"안 그래도 아세리안 님께 미리 허락을 구해놨습니다. 하루 종일 저를 도와주셔도 괜찮다더군요."

"아······."

"그럼, 내일 뵙죠."

나는 그녀를 향해, 방긋 웃었다.

일부러, 환하게.

'내일부턴 고생 좀 하게 될 거야.'

물론 진심에서 우러러나오는 웃음이었다.

그러자 내 미소를 본 포르도엘이 울상을 지었다.

"큰일나따······."

< 200화. 새로운 시야(5) > 끝

< 201화. 새로운 시야(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