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새로운 시야(6) >
"이번 독은 진짜 독할 거예요."
독 수련용으로 지어진, 부활이 가능한 대련장.
"후우······."
회복의 물약을 부어 만든 욕조 앞에서, 나는 크게 심호흡 했다.
"기존에 겪어보신 독에서, 졸본에서 들어온 독사의 피, 웨스테로스의 신경 증폭 약초, 알프하임의 쇠락 클로버, 미드가르드의 요르문간드 비늘, 나카츠쿠니 복어의 독, 티르너노그 저주받은 망령의 머리카락, 탐리엘 타란튤라의 피를 추가로 조합했거든요."
대충 독한 재료를 몽땅 때려넣었다는 뜻.
잠시 후에 있을 고통을 인지한 건지, 몸이 잘게 떨린다.
'침착하자.'
내 몸은 현재 고문 받기 직전에 보이는 것과 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인벤토리에서 꺼낸 저주셋을 착용했다.
'정신 스텟을 올리기에 이만한 방법이 없어.'
마의 구간을 넘었기에 안 오를 줄 알았던 정신 스텟이, 독 수련법에서만큼은 계속 올랐다.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뜻과 마찬가지였지만, 나한테는 스텟이 오른다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회복의 물약을 부어서 만든 욕조.
그 안에 들어가니, 시원하고 상쾌한 감각이 나를 감싼다.
'이게 통했으면 좋겠는데.'
최대한 오래 생존한 채로 독의 고통을 느끼면, 정신 스텟이 많이 오르지 않을까 싶어서 시도하게 된 방법이었다.
"한 방울만으로도 수백 명을 거뜬히 죽일 수 있는 독이에요."
그러자 내게 작은 유리병을 건네는 당소소.
그녀에게서 유리병을 받은 나는.
'할 수 있어.'
독을 단숨에 들이켰다.
띠링!
[<독:감각증폭신경쇠락독 >에 중독되었습니다.]
[<근육 경직> 상태에 빠집니다.]
[<감각 증폭> 상태에 빠집니다.]
[<마력 경색> 상태에 빠집······.]
[<마비 > 상태에 ······.]
[남은 체력 : 99%]
지금껏 본 적 없는 무수한 알림창이 나타났다.
하나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심상치 않은 효과들.
"어머, 조금만 드시지······."
"스읍, 후우."
걱정스러워하는 당소소를 뒤로하고, 나는 계속해서 심호흡했다.
"스읍―."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후우―."
잠시 참았다가 폐 속에 있는 모든 공기를 내쉬었다.
그렇게 한동안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있을 때였다.
"스으, 흡!"
식도를 타고 내려간 독.
위장에서 부글부글 끓는 느낌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끄윽······!"
근육이 수축하며 뼈와 혈관을 조여댄다.
마치 온몸의 근육에 쥐가 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두근― 두근―
폭주 기관차처럼 날뛰는 심장이 내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참을 수 있어.'
뒷목이 쭈뼛했다.
[남은 체력 : 54%]
"괘애앤차아느으세에······."
삐이이이이이―
당소소의 말이 길게 늘어지며 들리더니, 이내 이명만이 내 귀에 가득했다.
나는 이가 바스러질 정도로 앙다물었다.
욕조 속, 회복의 물약에 닿아있는 피부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촉각이 한계의 한계까지 증폭되면서, 무언가와 맞닿는 것만으로도 불구덩이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
'끄으으으으으으으윽!'
엄청난 고통에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근육이 수축하여 말을 듣지 않았다.
시야가 깜깜해지고, 감각이 느껴지질 않아서 내가 누워 있는지, 서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내 통제 안에 있는 건.
'크윽, 집중······ 하자.'
정신, 딱 하나뿐.
띠링!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남은 체력 : 17%]
'버텨······야 해.'
온갖 통증의 향연 속에서, 나는 딱 하나만 생각했다.
내가 이루고 싶은 소원.
초월 리그의 챔피언이 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임에도 나는 한 가지 사실에 감사했다.
'지구 성계에 다녀올 수 있어서 다행이야.'
콜로세움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머니의 얼굴이 흐릿하게 기억나던 상황.
하지만 최근에 가져온 가족사진 덕분에, 희미해져 가던 어머니의 얼굴이 다시 또렷해졌다.
그것만으로도.
'다시 볼 수 있어.'
충분히 버틸 만 했다.
띠링!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남은 체력 : 3%]
그렇게 억겁과 같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후우······.'
삐이이―
"······차리세요, 안우진 님."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이명이 줄어들면서 당소소의 목소리가 천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독에 중독되면서, 몸이 보내오는 신호에 따라 상황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감각이 서서히 돌아온다는 건, 딱 하나.
'결국 죽지 않고 버텼어.'
내가 저 지긋지긋한 독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괜찮으세요?"
어느새 화끈거리던 통증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음. 음.'
혀도 서서히 움직이고, 깜깜하던 시야가 조금씩 밝아지면서 여러 겹으로 겹친 당소소의 모습이 보였다.
잃었던 감각을 되찾은 덕분에, 지금 내가 욕조 안에 앉아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남은 체력 : 17%]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백독불침百毒不侵 >이 <천독불침千毒不侵 >으로 각성합니다!]
눈앞에 뜬 천독불침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짜 지독한 독이었어.'
지금까지 겪었던 독 중 가장 지독했던 녀석의 통증이 1 정도였다면, 오늘 경험했던 건 족히 5는 되는 것 같았다.
"괜찮으세요?"
그때 귓가를 파고드는 당소소의 목소리.
'아, 아까부터 계속 물어보는 것 같던데.'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서둘러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아, 괜찮습니다. 이제야 좀 정신이 드네요."
"휴우, 걱정 진짜 많았어요. 안우진 님 얼굴이 퍼렇게 변했다 하얗게 질리기를 계속 반복하는데, 중간에 죽여야 하나 고민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안 좋았습니까?"
"보통 통증이 심하면 금방 죽잖아요. 근데 회복되는 욕조 안에 들어가 계시니, 만의 하나를 생각할 수밖에요. 고문받다가 정신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거든요."
당소소는 긴장이 풀렸는지 욕조 곁에 무너지듯 털썩 앉았다.
감각이 돌아오면서, 여려 겹으로 겹쳐 있던 그녀의 모습도 또렷이 보인다.
아마 흔들리던 내 동공이 안정되는 걸 보면서 안도한 모양.
'정신이 얼마나 올랐지?'
나는 가장 먼저 내 스텟창부터 체크했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고위 리그]
[근력 : 177] [민첩 : 185] [체력 : 157]
[정신 : 102] [지력 : 104] [마력 : 153]
정신 스텟 102 포인트.
'대박이군.'
리미트가 해제되고 첫 훈련에서만 무려 3 포인트나 상승한 것이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 효율이 무척 좋네요. 이 독, 앞으로도 계속 만들 수 있겠습니까?"
덕분에 방금 전까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내 목소리는 무척 밝았다.
"이걸 또 하신다고요?"
"예. 스텟이 오르지 않을 때까지는 계속해야죠."
"하······."
나는 욕조에서 일어나, 곁에 있던 가운으로 몸을 슥슥 닦았다.
코와 입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나왔는지, 욕조에 가득 담긴 청명한 빛깔을 띠던 회복의 물약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다른 팀원들에게도 추천해볼 만한 훈련법이네요. 넉넉하게 좀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아무도 안 하려고 할 것 같은데요."
"자, 이만 가시죠. 늦겠군요."
현재 시각은 17시 23분.
17시 30분에 집무실에서, 권속으로 계약된 팀원들과의 미팅이 예정되어 있는 상황.
"여기 정리 좀 부탁드려요. 독이 엄청 독하니까 조심하시구요."
"예, 저희가 잘 정리하겠습니다."
"다 마무리된 다음에 저 약품으로 꼭 세척하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질린 표정의 당소소를 잡아끌자, 그녀가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에게 말했다.
처리 중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당부를 거듭하면서.
'당소소가 우리 팀으로 들어와서 다행이야.'
나는 내심 그녀와의 인연에 감사했다.
"앗, 형. 오셨어요?"
"모두들 이미 와 있었군요."
내 집무실.
당소소를 데리고 들어가자, 아홉 명의 팀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창범, 제이스, 지그, 루치아노, 모용악, 고건하, 카이로시아, 당소소, 수호.
내 바로 뒤에서 우리 팀을 이끌어가는 최상위 플레이어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떨떨한 표정의 오현석까지.
"자, 모두 모였으니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집무실에 빼곡히 둘러앉은 팀원들을 본 나는, 벽 한쪽에 설치한 칠판에다가 무언가를 적었다.
「근력 스텟 23, 민첩 스텟 25, 체력 스텟 43」
"······이게 뭐예요, 형님?"
칠판에 쓰여진 내용을 본 팀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오늘 올릴 스텟들입니다."
"저걸 다 올리신다구요?"
"포인트가 도대체 얼마나 있으셔야······?"
올릴 스텟을 모두 합치면 91.
어마어마한 숫자에, 모두들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남은 포인트 : 2,497,800]
'많이 모이긴 했네.'
코드 제로에서 얻은 포인트가 64만.
승급전에서 82만 4천 포인트를 얻었다.
한마디로, 나머지 103만 포인트는 플레잉 코치를 통해 벌었다는 뜻.
'이 상태라면 고위 리그도 문제없겠어.'
플레이어들이 팀 투지에 내는 수수료는 30%.
그 30%에서 93%를 아세리안이, 나머지 7%를 내가 가져가는 식이다.
그걸 역순으로 계산하면, 팀원들이 평균적으로 얼마의 포인트를 벌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세리안이 벌어들인 포인트는 1,300만 정도. 팀 전체가 벌어들인 건 5천만에 가까워.'
5천만 포인트.
어마어마한 양이지만, 소속된 플레이어의 숫자가 2만 명이다.
즉, 한 명당 평균적으로 2,500 포인트 정도 벌었다는 얘기였다.
고작 해봐야 하위 리그의 넘버링 3에서 4 정도면 벌어들일 수 있는 포인트.
'아직 발전 가능성이 훨씬 커.'
우리 팀이 가지고 있는 커리큘럼이라면, 넘버링 6에서 8까지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근데 스텟 올리는 건, 왜 갑자기 얘기해주시는 걸까요?"
감탄하는 팀원들 사이에서, 카이로시아가 흘러내린 은발을 쓸어올리며 물었다.
"앞으로는 내가 스텟 올리는 걸 감안하고 포인트를 써야 효율적이니까."
"네?"
나는 칠판에 쓰여진 숫자들을 4로 나눴다.
"여러분은 오늘 근력 5, 민첩 6, 체력 10 스텟이 오를 겁니다. 근력이나 민첩보다, 체력 스텟의 상승 폭이 훨씬 크죠. 앞으로 포인트를 쓸 예정이라면, 이걸 감안하고 올리라는 뜻에서 설명해 주는 겁니다."
권속 계약을 맺으면 내가 올리는 스텟에서 4분의 1만큼 상승한다.
이미 설명했음에도, 이런 자리를 가진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걸 보너스 스텟이라고 생각해선 곤란해.'
스텟 1포인트도 세세하게 분석하고, 고민해서 올려야 한다.
나는 은연중에 그런 뜻을 내비친 것이다.
더 높은 곳을 지향한다면, 그래야만 했으니까.
"아,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요."
그러자 고개를 주억거리는 팀원들.
"모두들 지금까진 아주 잘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세요. 상위 리그엔 통곡의 벽이라는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 모습에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발 그 벽을 무사히 지나가길.
그래서 상위 넘버링, 랭커, 더 나아가서 이들 중 한 명이라도 고위 리그까지 올라오길.
나는 그런 바람을 담아서 얘기했다.
"조금만 더 힘내시죠. 모두들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어서 들어오신 분일 테니."
오늘 내가 할 얘기는 이걸로 끝.
마지막으로 감성적인 부분을 자극해 주었다.
아마 식어가는 열정에 새로운 동기 부여가 되었을 것이······.
"전 소원 이뤘는데요?"
"저도 지금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도요."
'뭐?'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나는 당황했다.
사후에 콜로세움으로 입장하는 모든 플레이어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뤄야 할 소원이 없다면?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소원을 이뤘다는 이들에게 물었다.
"원래 소원이 뭐였습니까?"
"누구도 쉽게 넘보지 못하도록 강해지고 싶었습니다."
모용악이 말했다.
"저는 굶어 죽었거든요. 그래서 배불리 먹고 있는 요즘, 너무 행복합니다."
지그가 말했다.
"원래는 있었는데, 안우진 님이 대신 이뤄주셨어요."
당소소가 말했다.
계속 강해지고 싶다는 모용악은 현재 진형행.
굶어 죽기 싫다는 지그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진 셈이었고, 당소소는 뭐.
'그럼 열심히 할 이유가 없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소원이 없으면 왜 매일같이 힘든 훈련을 견디고 있는 겁니까."
동기가 없다면 행동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저들은 여전히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상황.
"지금의 일상을 지키고 싶으니까요."
내 물음에 모용악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그, 당소소도 같은 생각인지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의 일상을 지키고 싶다라······.
팔짱을 낀 채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군.'
누군가에겐 지옥 같은 생활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소중한 일상일 수도 있으니.
모용악의 말에 납득한 나는 스텟 상점에 접속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25,000 P를 소모하셨습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25,000 P를 소모하셨습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25,000 P를 소모하셨······.]
물론 내 생각 또한 같다는 건 아니었다.
'내 동기는 여전히 하나뿐이야.'
소원을 이루는 것.
그걸 위해, 방금전까지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고 왔다.
그리고 내일 또한 그럴 것이며, 1달 후, 1년 후, 10년 후.
'포기하지 않아.'
100년이 흐른다고 해도 같을 것이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고위 리그]
[근력 : 200] [민첩 : 210] [체력 : 200]
[정신 : 102] [지력 : 104] [마력 : 159]
쏴아아아아아아아아―
살을 에는 듯한 북풍한설이 휘몰아친다.
격렬하게 춤을 추는 눈발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
'여긴······.'
시야를 가리는 거대한 성벽.
하늘 위에는 얇게 펼쳐진 푸른색 막이 감싸고 있다.
[니플헤임에 입장하셨습니다.]
[<달의 메아리>가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고위 리그의 첫 당직 근무가 치러지는 장소는.
"죽은 필릭스를 대신해 들어온다는 게 그대였군. 플레이어 렌."
얼음의 세계, 니플헤임.
그곳에서 날개를 편 다섯 존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201화. 새로운 시야(6) > 끝
< 202화. 엇갈림(1) >
띠링!
[<니플헤임 당직 미션>을 시작합니다.]
[유형 : 경계(단체 PvP)]
[게임명 : 극한의 대지]
[맵 : 니플헤임(특대)]
[관객 수 : - 명]
[생존한 플레이어 수 : 6 명]
쐐애애애애애애액―
칼날을 머금은 싸늘한 바람에 로브가 찢겨나갈 듯 펄럭인다.
얇게 뭉친 눈발이 항복하라는 듯 내 몸을 두들겼다.
새벽의 소성이 담긴 듯 어두껌껌한 하늘은, 마치 남극의 극야를 보는 것 같았다.
'니플헤임.'
띠링!
[상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3% 상승합니다.]
[<목걸이:영롱한 달빛>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위명은 익히 들었다. 상위 리그를 휩쓸고 왔다지? 나는 조장을 맡고 있는 구트룬이라고 한다."
마치 문짝을 들고 있는 듯한, 거대한 방패에 검을 패용한 남성.
그가 두 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렌이라고 합니다."
가면을 쓰지 않아서 스텟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딱 보기에도 무척 강인해 보이는 사내였다.
조장 구트룬을 시작으로 남은 네 명이 자기소개를 했다.
"송화경. 무림에서의 활약을 전해들었소. 수많은 무림인들을 대표해 감사를 표하오."
짙은 청색 무복 가슴께까지 내려온 수염.
한 쌍의 날개, 검을 들고 있는 중년인이 포권했다.
"나는 스벤. 이 조에서 가장 유명한 플레이어를 만나 반갑군."
거대한 도끼와, 우락부락한 몸에 가득 둘러진 각종 무기들.
전사 타입의 마초남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쳇, 궁수가 들어왔으면 좋았을걸. 나는 사브르다."
머리 위로 뽈록 세워져 있는 귀에, 동물의 그것처럼 노란 눈동자가 빛난다.
손에 끼워져 있는 장갑에 거대한 갈퀴가 돋보이는 낭인족이 말했다.
"볼티노. 앞으로 나랑 파트너로 움직이게 될 거야."
실용적으로 보이는 가죽 갑옷에, 이마부터 턱까지 사선으로 새겨진 흉터.
반월의 곡도를 들고 있던 중년인이 한 손을 흔들었다.
'고위 플레이어들이라······.'
한 명 한 명 살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두들 범상치 않은 기세를 가지고 있다.
성계 대항전에서 만났던 쿠 훌린을 아득히 능가할 만큼.
"사브르, 렌 정도면 어지간한 궁수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니 그만 투덜대도록."
"우리 조만 궁수가 없어서 푸념 좀 해본 겁니다. 이봐, 악의는 없으니까 오해 말라고."
구트룬의 핀잔에,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미안함을 표시하는 사브르.
아무런 감흥도 없었던 나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괜찮습니다."
"새롭게 합류한 조원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군. 자세한 건 파트너인 볼티노에게 듣지."
그리고는 이어지는 구트룬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시간이 없다고?'
비상 상황에 대비하는 오분대기조 역할인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과 다른 미션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모두들 건투를 빌겠다."
"조장도요."
"으으읏! 출발해볼까."
두 명씩 짝지어 제각기 방향으로 흩어지는 조원들을 뒤로하고, 나는 눈치껏 볼티노에게 따라붙었다.
쏴아아아아아아―
창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우리 둘.
밑으로는 거대한 대지가 펼쳐져 있다.
'실제로 안 봤으면 못 믿었을 거야.'
그걸 보면서 나는 가슴 한 켠이 섬뜩했다.
물 한 방울 존재할 수 없는 극한의 온도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극악의 환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플헤임엔 수많은 몬스터들이 존재했다.
'이런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엄청나게 강하겠지.'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포효하는 지옥 곰.
수백 마리가 무리 지어 달리는 헬 하운드.
입김을 뿜어대며 도끼를 휘두르는 화이트 오크들까지.
'상위 플레이어라고 해도 애를 먹겠는데.'
한마디로 저들 하나하나가 중간계를 위협할 고위 몬스터라는 뜻이었다.
펄럭! 펄럭!
그때 크게 날갯짓하며 내 근처로 붙는 볼티노.
"첫 당직이라 생소하지?"
나는 날개가 부딪치지 않도록 간격에 신경 쓰며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목적지가 있는 건 아냐. 그냥 순찰을 돌고 있다고나 할까."
"순찰······?"
내가 말끝을 흐리자, 볼티노가 들고 있던 검으로 지상을 가리켰다.
"땅에도 영역이 있듯 하늘에도 영역이 있지."
하늘의 영역.
말하자면 영공領空을 뜻하는 것이리라.
"지상에서도 누군가가 들어와서 정찰 및 첩보 활동을 하지 않을까 경계하는데, 하늘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네. 아니, 오히려 하늘이 더 까다롭지. 시야도 넓은 데다가, 워낙 넓어서 발각될 위험도 적고 말이야."
"그럼 우리는 누군가가 영역 내부로 들어오진 않나 감시하는 역할입니까?"
내 물음에 볼티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제법 힘들 걸세. 특히 스타팅 포인트였던 엘린 성城은 천계가 니플헤임에서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영역. 마계에선 호시탐탐 이곳을 노리고 있지."
펄럭! 펄럭!
볼티노의 설명을 듣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검은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한 악마가 보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래서 전투 준비를 위해 창을 고쳐 잡고 있는데, 볼티노가 한 팔을 뻗어 나를 만류했다.
"······?"
"아직 영역 내부로 침투하진 않았어. 저어기 저 산 보이나?"
"예."
"저 산까지가 신성력이 미치는 범위일세. 저길 넘어오지 않으면 굳이 싸우지 않아. 그사이에 다른 악마가 침투해 들어올 수도 있거든."
그 말과 동시에, 날개를 펴며 크게 선회하는 볼티노.
나도 활공하면서 그를 뒤쫓았다.
"비행이 제법 훌륭하군. 적어도 못 따라와서 전력 이탈할 일은 없겠어."
"······."
"아무튼, 우리의 역할은 제거가 아니라 저지일세. 영역을 침투해, 엘린 성 근처로 오지 못하게 막는 거지. 그래서 쉬지 않고 돌아다녀야 하니까 제법 바쁠 거야."
펄럭! 펄럭! 펄럭!
크게 날갯짓하며 더 높은 상공으로 날아가는 볼티노.
나는 우리가 움직인 경로를 그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렇게 움직였군.'
부채꼴 모양의 영역 중심부를 빙글빙글 돌면서 고도만을 조정하던 상황.
뭐 하고 있었나 했는데, 순찰에 가장 용이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볼티노의 뒤를 쫓아, 한참을 비행했다.
그것도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지루하네.'
쏴아아아아아아아―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눈보라.
도화지처럼 하얗기만 한 세상.
볼티노의 설명 이후, 그 위를 비행한 지 어느덧 다섯 시간 째.
영롱한 달빛이 체력을 회복시켜 주니, 그저 무의미한 비행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지루하지?"
내 심정을 눈치챈 볼티노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고는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3일 뒤에는 죽을 맛일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라고."
"······?"
3일 후.
'3시 방향 1,824에 하나. 1,827에 두 명.'
영공을 침투한 세 명의 악마.
두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걸로 보아 상위 악마였다.
'돌아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녀석들을 발견한 나는 곧장 날갯짓하며 녀석들을 따라붙었다.
"흥."
펄럭! 펄럭!
그러자 날 무시한 채 엘린성으로 향하는 악마들.
'도착하기 전에 다 죽여주지.'
3일 동안 10명의 악마를 죽이며 얻은 경험에 따라, 나는 인벤토리에서 활을 꺼내 들었다.
쐐애애애애애애액!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에 귀가 얼얼해진다.
'고급 궁술로 올려둬서 다행이군.'
보통 이 정도의 속도에선 공기 저항 때문에 화살이 똑바로 날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의 대련을 통해, 화살에 마력을 담을 수 있게 된 상태.
핑! 콰지지지지지지직!
활시위를 놓자, 뇌전을 머금은 화살이 섬광처럼 날아갔다.
"헉, 조심!"
"궁수였군. 제길."
하지만 하늘이 워낙 넓다 보니, 악마들은 가볍게 날개를 트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바누젤! 우리가 엄호할 테니, 그대로 가라."
그러고는 따로 떨어져 나오는 두 악마.
'일단 한 명씩 처리해야겠어.'
나는 선두를 날아가는 악마를 뒤쫓으며, 계속해서 화살을 날려댔다.
딱히 화살로 죽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속도를 줄여주기만을 기대할 뿐.
"뒤를 잡았다!"
그때 내 등 뒤로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휘이이잉!
따로 떨어져 나간 두 악마가 어느새 내 뒤를 점한 채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나한텐 안 통해.'
"레에에에에에엔! 내가 엄호하지!"
한참 뒤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악마를 척살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던 볼티노가, 어느새 합류하여 두 악마의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
제일 앞에서 날아가는 악마와, 그를 뒤쫓는 나.
그리고 그 뒤로 따라붙은 두 악마, 마지막으로 제일 뒤에 있는 볼티노까지.
그때부터 우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분주히 날갯짓해야 했다.
'마치 전투기 간의 싸움을 보는 것 같네.'
평소의 전투는 전장이 허공으로 옮겨졌을 뿐, 지상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갈 땐 얘기가 다르다.
멈추기 위해선 최소 1초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정도면 적의 목을 베기 충분한 시간.
그렇다고 뒤로 돌 수도 없었다.
날개의 가동 범위가 있기에, 뒤를 돌면서 날갯짓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내가 먼저 죽일 수 있겠어.'
뒤에서 따라붙는 악마들과의 거리는 227미터.
내 앞에 있는 악마는 고작 103미터밖에 차이가 안 난다.
이 상태라면 내가 먼저 악마를 잡아먹을 수 있을 것이다.
'어딜!'
그러자 먹잇감으로 찍어두었던 악마의 날개 근육이 미세하게 변한다.
이대로라면 따라잡힐 거라고 판단하곤, 급선회를 시도하려는 것이다.
마력장을 통해 한발 빠르게 알아차린 나도 급하게 날개를 틀며 선회했다.
"흐읍!"
그러자 빠르게 가까워지는 먹잇감과의 거리.
내 포물선의 크기가 훨씬 작았기 때문에,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
서걱!
그저 눈을 부릅뜬 채, 창으로 스왑한 내 손에 찢겨 나갈 뿐.
'이걸로 한 놈은 끝났고.'
"안 돼!"
"젠장, 바누젤!"
두 조각으로 나뉘어, 붉은 선혈을 흩뿌리며 추락하는 동료를 보곤 경악하는 악마들.
그 순간 나는 날개를 접으며 지상으로 낙하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
다른 두 악마, 그리고 볼티노 또한 날개를 접으며 따라붙는다.
나와의 거리는 어느새 100미터.
반면에 볼티노는 그사이 가까워져, 70미터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있다.
파아아앙!
몸을 웅크려서 최대한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나는, 지상을 코앞에 두고 날개를 펼치며 저공비행했다.
그와 동시에 바로 선회하면서 녀석들이 도달하기 전에 몸을 정방향으로 돌렸다.
서걱!
"컥······."
'나이스 볼티노.'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상을 내려오던 악마 중 한 명의 날개가 찢어진다.
녀석은 그대로 지상에 처박히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이로 바뀌었다.
이제 남은 녀석은 딱 하나.
"죽어어엇!"
마지막 악마가 눈을 부릅뜬 채 내게 날아들었다.
현재 속도는 마하 이상.
전투기들이 날아다니는, 초신속의 세계.
즉, 소리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찌르고 들어오는 검이, 마치 벼락이 날아드는 것 같았다.
'좌상복부로 공격이 들어올 확률이 47프로.'
너무 빨라서 적의 공격을 보고 피하는 건 쉽지 않다고 판단한 나는, 녀석의 검이 향할 궤적을 빠르게 읽어내렸다.
그리고는 확률적으로 가장 낮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왼쪽 쇄골.'
그와 동시에 녀석이 공격을 피하기 가장 어려운 곳에 창을 찔러 넣었다.
빠아앙!
악마와 내 몸이 순간적으로 겹쳤다가 떨어졌다.
나는 녀석의 검을 피하는 데 성공했고, 녀석은.
"끄아아악!"
왼쪽 어깨와 쇄골, 그리고 갈비뼈 몇 개가 통째로 사라진 악마가, 바닥을 수백 바퀴나 구르고서야 멈추었다.
내가 찔러넣은 곳은 왼쪽 쇄골.
급소는 아니지만 속도가 속도인지라, 대포알에 맞은 것처럼 살점이 통째로 뜯겨나가 있었다.
"수고했네. 내가 마무리하지."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악마에게 다가간 볼티노.
그가 검을 휘둘러 악마의 목을 친다.
'후우, 끝났군.'
그제야 긴장을 내려놓은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보다도 빠른 초신속의 세계.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치명적인 결과가 연출될 수 있다.
그래서 바짝 긴장한 채 전투를 치르다 보니, 정신력의 소모가 너무 컸다.
"정말 대단하군! 이게 승급하고 첫 당직이라고 하지 않았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다가온 볼티노.
"맞습니다."
"첫 공중전인데도 이렇게 잘 싸우다니! 실제로 보지 못했으면 믿지 않았을 것이야."
"아, 네."
"급박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릴 정도였지. 당직 마지막 날에 모이면 조원들에게 얘기해 줘야겠구만. 아마 모두들 믿지 않을 테지, 크흐흐."
그는 감탄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다다다다 연속으로 말했다.
"볼티노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영화를 많이 봐 둔 덕분이지.'
다른 성계와 다르게, 지구에는 전투기가 존재했으니까.
물론 실제로 전투를 볼 수는 없지만, 영화를 통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어떤 포인트를 잡고 싸우는지를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나 또한 전투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애를 먹었을 것이다.
"휴우, 적당히 쉬었으니 이만 가 보자고."
한숨 돌린 우리는 다시 고도를 높이며 순찰을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아―
'정말 개같은 세상이네.'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곳의 날씨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칼바람이 불어닥치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쏟아진다.
창공을 누빌 때마다 얼굴에 부딪히는 눈발이 굉장히 거슬렸다.
그때였다.
꽈아아앙! 꽈아앙! 꽈아아아아앙!
저 멀리 지상 한 쪽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뭐지?'
자세히 살펴보니, 한 무리의 생명체들이 땅에 발을 붙인 채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시작했군."
그러나 볼티노는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뭡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나. 3일 뒤에는 죽을 맛일 거라고."
"······?"
"상위 플레이어들이 미션을 치르고 있는 거라네."
"상위 플레이어?"
내가 되묻자, 볼티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상위 리그가 열리는 날이니까."
< 202화. 엇갈림(1) > 끝
< 203화. 엇갈림(2) >
띠링!
[현재 니플헤임에서 상위 플레이어들이 미션 진행 중입니당!]
[☆미션에 끼어들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여!☆]
[그리구 상급 이상의 악마들이 미션에 끼어들지 않도록 저지해 주셔야 합니다!]
[남은 시간도 파이팅이에요! (づ ̄ ▽ ̄)づ]
"······?"
날갯짓하며 지상의 전투를 감상하던 상황.
미션창을 본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마치 지구의 채팅을 보는 듯한 느낌.
뭐랄까, 말투만으로도 까불까불한 치천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고위 게임 메이커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왠지 포르도엘과 비슷한 성격일 것 같았다.
"푸하하,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군. 상위 게임 메이커님이랑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
"······예."
"나도 처음 올라왔을 때 두 눈을 의심했다네. 뭐,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내 표정을 보곤 껄껄 웃는 볼티노.
고위 리그에 올라온 지 2년이나 됐다는 그는, 이미 채팅 같은 말투에 적응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미션창을 보며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지옥에서 미션을 펼칠 때마다, 주변에 고위 플레이어들이 있었겠군.'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 플레이어의 존재 유무를 찾기가 쉽다.
몬스터가 워낙 많기에 필연적으로 전투가 펼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
반면에 하늘은 훨씬 넓은 데다가, 지상처럼 전투가 빈번하지 않다.
아마 초감각에 걸려들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창공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상급 이상의 악마들을 저지하라는군요."
"음, 음. 잠시 쉬고 있게. 다들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볼티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각기 다른 방향에서 두 명씩 날아오고 있었다.
근무가 시작되면서 헤어졌던 다른 조원들이었다.
펄럭! 펄럭! 펄럭!
"모두들 3일간 고생 많았다.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저희도요."
조장 구트룬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 송화경과 볼티노.
"리그가 시작됐으니, 그럼 여기서 세 명씩 찢어지도록 하겠다. 세 명은 이곳에 남아서 상위 리그가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나머지는 이전처럼 순찰을 돌겠다. 볼티노?"
"문제없소. 상상 이상으로 공중전에 대한 이해도가 높더군. 어떤 역할을 맡아도 잘 해낼 것이오. 혼자서 상급 악마 두 놈쯤은 찜쪄먹을 테니까."
구트룬의 시선을 받은 볼티노가 대답했다.
맥락을 보건대 아마 내 수준을 물어본 모양.
"그럼 송화경, 사브르, 볼티노가 남아서 지원하고, 나와 스벤, 렌은 그대로 순찰을 돌도록 하겠다."
"알겠소."
"예."
순식간에 역할이 분담됐다.
나는 이전과 같이 순찰조.
'아쉽군.'
내심 이곳에 남아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싶었다.
순찰을 도는 것보다, 여기에 남아 있는 게 악마와 마주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날개가 생긴지 얼마 안 된 내게 필요한 건 실전 경험.
하지만 이런 개념의 미션을 진행해 본 적이 없으니,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다.
'전부터 서로가 잘 알고 있는 눈치였어.'
조원으로 배정되면 앞으로의 당직 근무에서도 변동 없이 그대로 투입되는 것 같았기 때문.
굳이 여기서 저들에게 나쁜 인상을 심어줘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중급은 놓쳐도 되지만, 상급 이상은 무조건 죽여야 한다. 적의 숫자가 많으면 쉽지 않겠지. 하지만 이 부분을 꼭 명심해다오. 상급은 흘리면 안 된다."
구트룬이 송화경, 사브르, 볼티노에게 당부했다.
"걱정 마시오, 조장. 하루 이틀 해보는 것도 아니고."
"상급 악마를 최우선 표적으로 삼겠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지원 조.
그 모습에 만족스럽게 끄덕인 구트룬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볼티노와 돌던 구역을 기억하는가?"
"예."
"그럼 이번에도 그 구역을 부탁한다. 혼자서 도는 것이니, 여러 가지 변수가 존재할 것이다. 만약 혼자서 감당하기 너무 버거우면 이쪽으로 오기 바란다."
품속에서 지도를 펼쳐, 한 점을 찍는 구트룬.
볼티노와 내가 담당하던 부채꼴 영역의 최외곽 부분이었다.
"여긴 스벤과 나, 그리고 그대의 영역이 겹치는 유일한 지점이다. 내가 정반대편에 있을 땐 스벤이 돌고 있을 것이고, 스벤이 정반대에 있을 땐 내가 지나갈 테니 아마 충분히 대처가 가능할 것이다."
구트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그랬군.'
어쩐지 악마들을 사냥한 뒤 볼티노가 분주하게 움직이길래 의아했었다.
알고 보니 서로 간에 시간까지 약속되어 있었던 모양.
'시간까지 외워두길 잘했네.'
3일간 날아다니며 어떤 타이밍에 어느 지점을 지나는지는 숙지해 두고 있었다.
충분히 저들의 보조를 맞출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악마를 추살하는 데 실패했다면 이쪽, 그리고 이쪽으로 몰이하라. 우리의 영역과 엘린 성 간의 최단 루트니까 공조해서 사냥하기 유리하다."
이외에도 하나하나 세심하게 설명해 주는 구트룬.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대다수였지만, 나는 최대한 집중해서 들었다.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자부하더라도,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예상치 못한 변수가 끝없이 등장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짝!
"이걸로 역할 분담을 끝내겠다. 모두들, 건투를 빌겠······."
띠링!
[비상! 비상!]
[전방에 대규모 적 출현! (๑°ㅁ°๑)‼]
[이대로 가다간 자라나는 새싹들이 위험에 처할 거예요!]
[나쁘고 못생긴 악마들의 마수에서 새싹들을 구해주세요!]
[조건 : 영역 내부로 들어온 적 악마 섬멸]
"뭐?"
각자 배정된 역할에 따라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
눈앞에 뜬 알림창에 우리는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
"······!"
휘몰아치는 눈보라 너머, 저 멀리에서 수백 개의 까만 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중급 이상의 악마가 최소 200에서 300은 되는 것 같았다.
'쉽지 않겠군.'
중급 악마들만 몰려온다면 굳이 비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테니, 상급 이상의 악마도 제법 많을 것이다.
"후후, 아주 좋은데?"
"차라리 잘 됐군. 안 그래도 계속 돌아다닐 생각에 좀이 쑤셨는데."
"한 번에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낫지."
하지만 내 우려와 다르게 미소를 보이는 조원들.
고개를 돌리며 목을 풀고, 무기를 고쳐 잡는다.
'하, 그래.'
다가올 전투에 대비하며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기세가 180도 달라지고, 눈빛도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마치 사나운 맹수의 목줄이 풀린 느낌.
'우린 고위 플레이어였지.'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은, 지금보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았기에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들.
고작 저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였다.
"모두들."
무표정 일색이던 구트룬이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의 얼굴에 깃든 감정은.
펄럭! 펄럭! 펄럭!
"사냥을 시작하지."
자신감이었다.
"한바탕 놀아볼까!"
구트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는 날개를 펄럭이며 적 공중군을 향해 돌진했다.
가장 선두에 구트룬이, 나머지는 전투기처럼 편대 비행을 하며 그 양옆으로 쭉 늘어선 모양새.
'첫 집단전이군.'
창을 고쳐잡은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모두 전투 준비! 적은 고작 여섯밖에 안 되지만, 모두 고위 플레이어들이니 주의하도록!"
1킬로미터 정도를 앞두게 되자, 우리를 발견한 적 지휘관이 포효했다.
검은 날개가 거대한 벽처럼 새하얀 세상을 가득 메운다.
"건투를 빈다!"
그곳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던 우리는 뿔뿔이 흩어지며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시작해 볼까.'
쐐애애액! 챙! 콰지직! 채챙! 콰직!
나는 섬세하게 날갯짓하며, 적들의 공격을 피하는 데 집중했다.
"헉! 녀석이 렌이다! 모두 조심해!"
'이 녀석은 패스. 빈틈이 없군. 이 녀석은······ 허점!'
서걱! 서걱!
일격에 죽이는 건 어려워 보이는 상급 악마들.
반면에 중급 악마들은 곳곳에 허점이 보인다.
'일단 숫자를 줄여야겠어.'
그래서 나는 중급 악마들 위주로 창을 내질렀다.
"끄아악!"
"날개를 노려!"
그러자 내 날개를 집요하게 노리는 악마들.
'어림없지.'
하지만 나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평소의 저돌적인 스타일과 다르게, 나는 지금 섬세하면서 정확하게 움직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전까진 무기가 날아오는 궤도를 무의식중에 계산하고 피하면 끝.
'지금 그랬다간 날개가 찢어지기 십상이지.'
무의식이 아직 날개를 내 몸의 일부라고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주의해야만 했다.
[비애와 절망의 칼날!]
그때, 내게 날아드는 검붉은 초승달 모양의 마법.
채앵! 콰지지직! 챙! 채챙! 콰지직!
가볍게 범위를 벗어난 나는 뇌전을 흩뿌리며, 주변 악마들에게 창을 휘둘렀다.
"제에엔장!"
악마들의 몸이 두 동강 나며, 검은 비가 내리듯 지상으로 추락했다.
└요즘 지옥에서 국지전이 늘어났다더니, 간만에 눈 호강하네 ㅎㅎ
└ㅇㅈㅇㅈ 덕분에 지상 공중전 함께 관람 가능ㅋ
└어 뭐야? 렌도 있었음? ㅋㅋㅋㅋ 이제 알았네ㅅㅂ 가면이 없으니까 왜 이렇게 적응이 안 되냐 ㅋㅋㅋ
└난 날개 달린 것도 적응이 안 됨.. 근데 이제 막 날개 생긴 걸 텐데도 공중전이 되게 익숙해 보이는데? 원래 렌처럼 감각 좋은 애들이 더 애를 먹지 않음?
└아무래도 신경 써야 하는 범위가 수정되니께 ㅇㅇ 기존에 쌓아 올린 감각을 무너트리고 새로 쌓아야 해서 더 오래 걸리는 편이지ㅇㅇ 근데 진짜 빨리 적응했네? 기계처럼 딱딱 오차범위 내로 움직이는 느낌임.
└고위 플레이어가 ㅈㄴ 쎔 ㅋㅋㅋ 고작 여섯 명한테 악마 수백 마리가 개털리구 있네 ㅋㅋㅋ
└저쪽은 그냥 힘을 부여받고 강해진 애들이고, 이쪽은 싸우고 또 싸워서 살아남은 애들만 있는 건데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다.
"도망치지 못하게 차단해!"
"어어! 놈이 빠져나갑니다!"
"그럼 날개를 갖다 대서라도 놈을 막아야지, 이 병신아!"
서걱! 서걱! 서걱!
중급 악마들만 골라서 죽이고 다니길 한참.
'이제 서른 명밖에 안 남았군.'
어느새 두 쌍 이상의 날개를 가진 악마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 쌍을 가진 최상급 악마가 하나.
그리고 상급 악마가 스물아홉.
파아앙! 챙! 채챙! 챙!
무기가 맞닿을 때마다 공기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최상급은 신경 안 써도 되겠고.'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조장, 구트룬이 최상급 악마를 붙잡고 일대일로 싸우고 있었다.
"마법사분들! 마력 아끼세요!"
"탱커분들도 빠져도 됩니다. 나머지는 그냥 정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글바글하던 지상의 악마들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었다.
지상전은 플레이어들의 압승.
'상급 악마들만 처리하면 돼.'
띠링!
[<스킬:뇌룡의 포효>가 활성화됩니다.]
[근력과 민첩 스텟이 +25% 상승합니다.]
남은 체력을 힐끗 살핀 나는 그제야 뇌룡의 포효를 활성화했다.
체력 소모를 두 배로 늘리더라도, 스텟이 상승하는 게 상급 악마들을 처치하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꽈아앙!
그리고 둘러싸였을 때를 대비해 아껴두었던 섬전도 과감하게 사용하며 상급 악마들 사이를 누볐다.
띠링!
[<벽력 >이 발동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미, 미친!"
벽력이 발동되고, 뇌전의 플라즈마가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압도적인 위력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상급 악마들마저 우수수 떨어졌다.
'가면이 없어도 충분하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고위 리그]
[근력 : 375(+5)(+170)] [민첩 : 457(+5)(+242)] [체력 : 325(+5)(+120)]
[정신 : 240(+5)(+133)] [지력 : 166(+62)] [마력 : 259(+5)(+95)]
[각성 능력 : <초감각 > <뇌신창 > <뇌살자雷殺者 > <뇌혈雷血 > <특급검술 > <고급단검술 > <고급투척술 > <고급박투술 > <최상급치료술 > <고급궁술 > <고급검방술 > <특급채찍술 > <고급둔기술 > <천독불침 >]
[보유 스킬(6/6) : <천뢰십보 > <뇌신 > <뇌룡의 포효> <마력 상쇄> <그림자 표식> <열반 >]
[업적 특전 : 역천자] [차원 특전 : 최강의 성계] [종족 특전 : 없음]
기초 스텟도 많이 올랐고, 각성 능력도 훌륭하다.
거기다 각종 특전에 고급 아이템들까지.
어느새 난 가면의 도움 없이도 고위 리그에 걸맞은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서걱!
"끄윽······."
결국 구트룬이 최상급 악마의 목을 베는 걸 마지막으로, 엘린 성의 영역에서 펼쳐진 전투가 끝났다.
띠링!
[조건 : 영역 내부로 들어온 적 악마 섬멸]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기본급 x 1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모두 고생 많았다."
천천히 날갯짓해서 다가가자, 피에 흠뻑 젖은 채로 말하는 구트룬.
"수고하셨습니다."
"오랜만에 몸 좀 제대로 풀었군."
다른 조원들도 피투성이이긴 했지만, 별달리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대승이네.'
무려 300 가까이 되는 적의 전력을 상대하는데,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
지상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내려 보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쿠 훌린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복잡 미묘한 눈빛.
'너도 어서 올라와라.'
나는 녀석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띠링!
[완벽한 대승! 모두 수고 많았습니다!]
[예상한 것보다 잘 싸워주셔서 너무 기분이 좋아요.]
[<( ^.^ )>]
[그런 의미에서 추가 미션을 부여하고자 합니닷!]
[조건 : 엘린 성에서 500킬로미터 떨어진 마계의 알츠카인 성 공략]
[상위 플레이어들과 협동 미션이에요. 새싹들을 잘 이끌어 주세요.]
[이번 기회에, 니플헤임에 천계의 영역을 넓혀보자구욧!]
[파이팅! 빠샤! (// ̄3 ̄// )]
"······."
< 203화. 엇갈림(2) > 끝
< 204화. 엇갈림(3) >
새롭게 내려진 미션.
목표는 엘린 성에서 500킬로미터 떨어진, 마계의 알츠카인 성.
'기회군.'
적응 안 되는 말투는 차치하고, 미션 내용을 본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을 공략한다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될 전리품.
고결한 수정을 얻을 기회였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지휘하도록 하겠다! 혹시 회복에 시간이 필요한 플레이어 있는가!
상위 플레이어는 400명 정도.
거기다 고위 플레이어가 여섯이나 있다.
'어떻게든 공략은 할 수 있어.'
전에 경험했던 록탄 성의 공성전을 고려하면 엄청난 피해가 강요되겠지만,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알츠카인 성으로 진격하겠다! 고위 플레이어들이 보폭을 맞춰줄테니 편하게 이동하도록!
철컥! 철컥!
구트룬의 지시에, 상위 플레이어들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장비를 제외하고 모조리 인벤토리에 넣었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만들어서 이동 중에 소모될 체력을 줄이려는 의도였다.
"우리도 이만 가세."
"예."
나는 볼티노와 함께, 날개의 각도를 조절하며 천천히 그들 위를 날았다.
분주하게 이동하는 상위 플레이어들과 달리, 무척 한가로운 모습으로.
―저어기,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이 렌이죠?
―맞을걸. 나도 가면을 벗어서 누군지 몰랐어.
―와아, 저 날개 부럽다······.
지상에서 무수한 시선이 날아와 내게 꽂힌다.
선망, 부러움, 동경, 질투 등등 다양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1회차 때 나도 저런 눈길을 보냈었지.'
새삼 내가 고위 리그에 올라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리고 내 소원에도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음이 느껴졌다.
저런 시선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남들보다 한참 앞서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계속되는 시선에 불편해진 나는 볼티노에게 물었다.
"우리라도 빨리 가서 공략하고 있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게 훨씬 낫지. 근데 우리한텐 마법사가 없지 않은가. 성문을 뚫어야 성을 공략할 수 있다네."
"그거야 우리가 태워서 가면 되죠."
무척 간단한 해결책.
하지만 볼티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노리고 어딘가에 악마들이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우리가 먼저 간 사이에 최상급 악마 한두 명만 와도 저들은 전멸할 것이야."
아마 그럴 것이다.
최상급 악마는 콜로세움으로 따지자면 고위 플레이어급.
압도적으로 강하고, 기동력 면에서도 차원이 다르다.
치고빠지는 식으로 괴롭히면 저들 중에서 살아남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성 공략도 중요하지만, 저들을 큰 피해 없이 살려 데려가는 것도 우리의 임무일세. 그리고 기다릴 사람들도 있고."
"그렇군요."
볼티노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살려가는 것도 임무라······.'
상위 리그와 다르게, 고위 리그는 지휘관으로서의 역할도 겸하는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이제부터는 팀원들의 생존율에도 신경 써야 한다는 뜻.
지금까지 미션의 성패 여부만을 고민했던 내게는 생소한 마음가짐이었다.
펄럭! 펄럭! 펄럭!
그때였다.
나랑 볼티노 곁으로 따라붙으며 편대 비행을 하는 조원들.
모두들 나를 바라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휴우, 이제야 말 붙일 짬이 좀 나는군. 이봐, 렌. 너네 팀 유명하던데?"
"흠, 흠. 사브르, 예의 좀 지키게. 아랫사람 대하듯 하지 말라고 분명 경고했을 텐데."
낭인족 사브르의 말에, 무복을 입은 송화경이 타박했다.
그러자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는 사브르.
"미안, 미안. 내가 인간들의 예의에 익숙하지 않아.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아무튼 궁금한 게 있어. 팀원들이 모두 잘나가던데, 비법이 있나?"
다른 조원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나와의 거리를 미세하게 좁혀 들어왔다.
"······."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침묵 뿐.
내가 입을 꾹 닫자, 거대한 도끼를 어깨에 걸친 전사가 입을 열었다.
"전에 소개했지만 나는 스벤이라고 한다.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예."
"상위 리그에 올라온 지 고작 2년 만에 고위 리그로 올라왔다고 들었다. 평소 어떤 일과를 수행하는지 물어보고 싶군. 지구 출신이면 기초 스텟이 무척 낮았을 텐데?"
"······."
또 다시 이어진 정적.
그때부터 조원들이 다양한 것들을 물어왔다.
물론 내가 대답할 수 없는 것들로만.
"······."
그때마다 나는 그저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워낙 예민한 부분이니 저들 또한 딱히 답을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얘기해 주면 좋고, 안 해 주면 말고라는 마인드였달까.
"모두 그만. 렌을 곤란하게 하지 마라."
"칫, 신입생 좀 구워삶아 보려 했더니만."
"크흐흐, 보아하니 아마 안 통했을 것 같은데."
구트룬의 중재에 껄껄 웃는 조원들.
그들에게선, 곧 있을 전투에 대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일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리라.
전투가 이미 삶의 일부가 되었기에 보일 수 있는 모습이겠지.
'벌써 반 넘게 왔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덧 엘린 성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앙!"
"먹잇감이다······. 머, 먹잇감······."
곳곳에서 출몰해, 상위 플레이어들의 앞을 가로막는 각종 몬스터들.
그때마다 마력이 깃든 무기의 궤적이 난무하고 각종 마법이 흩뿌려지며, 새하얀 눈 위에 붉은 물감이 칠해졌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
무심코 내려봤다가 마주친 시선.
'쟤는 왜 나만 쳐다보는 거야?'
쿠 훌린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할말이 있어서 저러나 다음 반응을 기다렸지만, 되돌아온 건 다양한 감정이 버무려진 눈빛뿐.
"왜? 얼마 전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던 사이라서 우월감이라도 느껴?"
그러자 곁에 있던 볼티노가 짓궂은 질문을 했다.
입가에 담긴 미소가, 장난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아뇨."
"근데 왜 그렇게 신경을 써?"
"예전의 제가 떠올라서요. 하위 리그에 있을 때 내가 저런 눈빛을 했겠구나."
"음음, 첫 경기라 더 감회가 새로울 테지."
"근데 저런 눈빛을 받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드네요. 소원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 것 같다고."
평범한 말이었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 콜로세움에 들어왔고, 고위 리그에 왔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법한 대사.
하지만 이어지는 반응은 무척 의외였다.
"뭐? 아직도 소원을 간직하고 있어?"
내 말에 몇몇 조원들이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이다.
"소원이 없는데도 콜로세움에 들어오신 겁니까?"
"아니. 있었지, 소원. 예전에는 말이야."
"······?"
"하지만 이 위치까지 올라오면 대부분 잊어버려. 초월 리그의 챔피언? 현실적으로도 거의 불가능한 데다가, 사람의 기억, 감정, 목표는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지니까."
"······."
"이쯤 되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 여기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고. 그냥 두 번째 삶의 기회를 얻었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나 할까?"
볼티노의 말에, 다른 조원들이 주억거렸다.
물론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소원이 있소."
무림 출신의 플레이어, 송화경이 내 편을 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조금 의외였다.
"그때는 소원이긴 했지만 지금은, 흠. 소망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더군. 당시에는 꼭 이루고 싶었으나 이제는 언제든 그 정도는 이룰 수 있게 됐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
송화경의 말에, 감정 표현이 드물던 구트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이라기보단 소망이라는 것.
그 모습을 보고 든 생각은.
'다행이야.'
안도였다.
초월 리그를 바라보며, 모두들 아등바등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내게 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내 목표와 저들의 목표가 충돌하지만 않는다면, 경쟁 상대가 아니라는 거였으니까.
'기억, 감정, 목표는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진다라······.'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1회차, 그리고 2회차의 시간 동안 내게 희미해진 건 가족들의 얼굴뿐.
그마저도 이제는 가족사진을 얻은 덕분에 또렷하게 기억났다.
"저기 성이 보인다!"
"휴우, 오는 길에도 몬스터 때문에 지긋지긋했는데 또 싸워야 하네."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우뚝 솟은 검은 성벽.
성벽 위로는 돔 형태처럼 얇은 막이 처져 있다.
'난 포기하지 않았어.'
그걸 본 나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때였다.
"오는군."
볼티노의 작은 읊조림.
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전투기가 지나갈 때나 있을 법한 소닉 붐이 들려왔다.
펄럭! 펄럭! 펄럭! 펄럭!
그리고 나타난.
"오랜만이군, 구트룬."
"고주몽 님. 잘 지내셨습니까."
열여덟 명의 플레이어.
"음, 반가운 얼굴도 있군."
알츠카인 성을 공략하기 위해, 천계에서 추가 지원군을 보내준 것이었다.
'이 정도면 확실하게 점령할 수 있어.'
고주몽의 눈인사에 고개를 숙여 화답한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위 플레이어의 숫자가 더 많아지면서 고결한 수정의 경쟁률이 높아졌지만 오히려 좋다.
저들이 오지 않았다면 얻을 기회조차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그럼, 공략을 시작해 보도록 하지."
* * *
"천계에서 알츠카인 성을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니플헤임과 무스펠하임의 모습이 비교적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는 지형도.
그 위에는 하얗게 칠해진 말과, 까맣게 칠해진 말들이 어지러이 펼쳐져 있었다.
딱―
"무스펠하임에 있던 당직 조들도 일부 투입된 것 같습니다. 각 영역마다 두세 명만이 남아 있는 걸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빨간 세상에 있던 하얀 말들의 일부가, 눈이 뒤덮인 하얀 세상으로 옮겨진다.
그 주변에는 수많은 검은 말들이 숨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추가로 천계의 거점에 초월 플레이어 두세 명이 투입된 것 같습니다."
딱―
"어떻게든 니플헤임의 영향력을 늘리겠다고 아등바등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신중한 움직임입니다."
곁에서 보고하는 악마의 말에, 무스펠하임 위로 다른 것들보다 더 거대한 하얀색 말 세 개가 자리를 잡는다.
무스펠하임에 자리한 하얀색 말의 개수는 50개 안팎.
반면에 검은색 말들은.
"그것까지 계산하고 움직였으니 상관없지."
무려 300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형도에서 손을 거둔 레비아탄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성? 그까짓 거 주마. 크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저택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 *
꽈아아아앙! 꽈광! 꽈아아앙! 꽈과과광!
알츠카인 성 쪽에서 어마어마한 폭음이 들린다.
땅이 울리며, 거대한 쇼크웨이브가 우리를 훑고 지나갔다.
마법 포격이 시작된 지 어느덧 10분째.
"성문이 뚫렸습니다!"
성문 한쪽이 날아가고, 다른 문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박살 난 채, 가까스로 성벽에 붙어있을 뿐이었다.
"싸그리 쓸어버리도록."
"예."
펄럭! 펄럭!
고주몽의 말에 날개를 펴는 고위 플레이어들.
'시작해 볼까.'
그들 사이에서, 나는 전력으로 날갯짓하며 성문으로 향했다.
고결한 수정을 얻고 공헌도를 운운할 때,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탱커들이 선두를 선다!"
"방패를 쌓아 올려! 녀석들이 들어오게 해선 안 돼!"
성문 입구에서 방패를 들어 올린 채 임시 방벽을 만드는 악마들.
'소용없어.'
뇌전을 끌어올린 나는, 그 속도 그대로 창을 내밀었다.
창이라는 아주 좁은 면적에 깃든 엄청난 속도.
그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를.
꽈아아아아앙!
"젠장! 고작 한 번에 뚫리다니!"
고작 방패만으로 막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급 악마들뿐이군.'
성 내부로 들어오자 거대한 건물들이 보인다.
그 사이를 악마들이 빼곡하게 메우고 있다.
서걱! 서걱! 서걱!
"끄아아악!"
"지옥의 겁화여, 그대가 이 땅에, 크윽······!"
나는 하급 악마들을 향해 거침없이 창을 휘둘렀다.
창이 한 번 번뜩일 때마다, 서너 명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펄럭! 펄럭!
날갯짓하며 아래쪽을 향해 창을 휘두른다.
창이라는 긴 리치,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뻗는 공격들.
말하자면 지금 나는 기병이고 저들은 보병이나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날개를 노려! 날개를 노리라고!"
결국 녀석들은 나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돌파력까지 갖추고 있는 데다가, 높이 상의 이점까지 가지고 있는 나를 상대하기란 불가능할 테니까.
'슬슬 돌파해야겠군.'
우리의 목표는 알츠카인 성의 함락.
다른 플레이어들이 진입할 공간은 만들었다.
이제는 마성석을 부술 차례였다.
―모두 진격 금지! 내부의 공간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라!
하지만 이어지는 외침에 나는 날갯짓을 멈춰야만 했다.
'왜지?'
어차피 지상에 있는 건 하급 악마들뿐.
상위 플레이어들만으로도 정리가 가능한 수준이다.
스물네 명의 고위 플레이어들이 함께하는 건 전력의 낭비나 마찬가지.
'하는 수 없군.'
그때부터 나는 속력을 높이는 것보다, 적들의 숫자를 줄이는 데 집중하며 창을 휘둘렀다.
"고위 플레이어 집합!"
펄럭! 펄럭! 펄럭!
"너무 하급 악마들밖에 없군."
"저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고주몽의 말에, 구트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일 수 있으니 신중하게 움직이겠다. 일단 지상부터 소거 완료하고, 그 뒤에 지하로 투입한다. 사브르?"
"예, 고주몽 님."
인간의 예의 따윈 모른다며 막말을 하던 낭인족, 사브르가 고주몽의 부름에 즉답했다.
"마법사들에게 광역 마법을 지시하라. 건물 재활용은 필요 없다. 지상에 있는 모든 걸 지운다는 마음으로 움직이도록."
"알겠습니다!"
"테세우스?"
"옛!"
고주몽과 함께 도착했던 열여덟 명 중, 방패와 단창을 쓰던 플레이어가 대답했다.
"그대가 상위 플레이어들을 지휘한다."
"알겠습니다."
펄럭! 펄럭! 펄럭!
고주몽의 지시가 끝나자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는 고위 플레이어들.
'공헌도를 챙길 생각에 너무 조급했군.'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나는, 침착하게 지상의 악마들을 정리해 나갔다.
[차가운 염화의 칼날!]
[작열하는 불꽃의 춤!]
[들이치는 격류의 메아리!]
[한중월아寒重月牙!]
[심연에 잠긴 소나기!]
꽈아아아앙! 꽈아앙! 꽈과과과과광!
온갖 속성의 마법이 흩뿌려지고,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사, 살려줘!"
지상에 존재하던 모든 건물이 초토화되며, 화마에 휩싸인 악마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걸로 지상의 전투는 끝이었다.
"지금부터 침투를 시작하겠다. 셀릭스, 루시엔, 이안이 지상에 남아서 테세우스를 돕는다. 테세우스, 그대가 성문 사수를 지휘하라."
"옛."
"나머지는 내부로 침투한다. 그럼 모두······."
지상의 소거를 완료하고, 남은 건 마성석을 부수는 것뿐.
빠르게 역할을 부여한 고주몽 덕분에 모두들 지하 계단으로 향하려고 할 때였다.
"헉, 악마들입니다!"
"······?"
누군가의 외침에 성문 쪽으로 다가가는 고주몽.
다른 고위 플레이어들도 고주몽에게 따라붙었다.
성문 밖으로.
'못해도 수천은 되겠군.'
하늘이 새까맣게 변할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악마들이 날아오고 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지상으로도 하급 악마들이 보폭을 맞춘 채 진격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우리가 든 감정은.
"······?"
"뭐야, 저 멍청이들은?"
의아함이었다.
< 204화. 엇갈림(3) > 끝
< 205화. 엇갈림(4) >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군."
고주몽의 중얼거림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지금 오는 거지?'
나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성 공략을 막고자 했다면 내부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플레이어들이 모두 진입한 뒤에 나타났다는 건?
'쌈싸먹기를 하려는 건가?'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쌈싸먹기는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우릴 잡아먹고 싶은 모양인데······. 고위 플레이어 스물넷이면 한 개 군단급. 정말로 그걸 노리고 오는 거라고 보긴 어렵겠군."
"맞습니다. 천장의 보호막은 여전히 유효하니까요. 성문만 사수해도 우릴 어쩌지 못하겠죠."
고주몽의 말에 성문 사수 역할을 부여받았던 테세우스가 동의했다.
말 그대로, 지형적 조건이 너무 좋았다.
이쪽엔 일당백 아니, 일당천 이상의 강자만 스물넷.
몰려오는 악마들 쪽을 보아하니, 대다수가 중급 악마들이었다.
좁은 성문을 뚫고 내부로 들어오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적들이 천장의 결계를 해제한다면요?"
그때 갈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린 채 완드를 들고 있던 한 플레이어가 물었다.
알츠카인 성 공략을 위해 지원을 나왔던 고위 플레이어.
닉네임을 마리아라고 소개했던 마법사였다.
"물론 그 상황도 염두에 두긴 해야겠지. 허나,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상위 플레이어들은 전멸시킬 수 있겠지만, 날개가 달린 우리까지 어쩌진 못할 테니."
모두들 머리를 맞댄 채 여러 가능성을 고민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부분.
왜 이제야 나타났는가에 대한 의문을 풀 수가 없었기 때문.
"상대는 멍청하지 않다. 결국 무언가 의도가 있다는 건 분명할 터.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겠군. 성을 공략하면서 저들의 의도대로 끌려갈 것이냐, 아니면 성 공략을 미루고 저들을 먼저 상대할 것이냐."
"······."
"이 문제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 같군."
상황을 정리한 고주몽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위 게임 메이커에게 판단을 맡기려는 모양.
'나쁘지 않아.'
나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지금으로선 가장 좋은 선택을 한 것이다.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결국 한 개 영역만을 염두에 두고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전체적인 틀을 만들며, 대전략을 짜는 고위 존재들은 더욱 큰 관점에서 지시를 내려줄 것이다.
여차하면 성문을 사수하는 사이, 지원 병력을 보내줄 수도 있고.
고위 존재들의 판단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띠링!
[미션을 변경합니당!]
[적들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어요. ㅠㅁㅠ]
[슝슝! (꒰ঌ ๑•́ -•̀)໒꒱]
[새롭게 편성된 지원군이 엘린 성에서 날아가고 있습니닷!]
[일단은 성문을 사수한 채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세요!]
[성 공략을 이어간다면, 마성석을 부수는 건 상황 판단 후에 부탁드려용!]
새롭게 내려온 알림창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무리한 요구를 하진 않는군.'
반면에 숨죽인 채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상위 플레이어들은.
"······?"
상태창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저들에게도 고위 게임 메이커가 내린 메시지가 뜬 모양이었다.
"모두들 수정된 미션을 확인했겠지. 지금부터 새롭게 역할을 부여하겠다. 테세우스는 그대로 성문 사수. 셀릭스, 루시엔, 이안도 여기 남아서 테세우스를 돕는다."
"예."
"알겠습니다."
기존 성문 사수조에게 역할을 부여한 고주몽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슈우사쿠, 송화경, 위즈덤, 어셔, 마리아, 스벤. 이상 여섯 명도 여기 남아서 테세우스를 돕는다. 나머지 열여섯은 내부로 침투해 마성석을 부술 것이다. 테세우스, 인원이 더 필요하나?"
고주몽의 물음에 테세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열 명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성문이 좁아서 다섯 명 이상은 싸울 수도 없을 테니까요. 교대로 번갈아 가면서 막으면 됩니다."
"좋다. 혹시 지원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하도록. 그럼 시간이 없으니 바로 들어가도록 하지. 렌?"
"예."
"전에 록탄 성에서도 선두를 섰다고 들었다. 이번에도 부탁해도 되나?"
'나이스.'
안 그래도 내가 부탁하려고 했던 부분이었다.
공헌도 때문에라도 내가 선두를 서야 했으니까.
"가능합니다."
"좋다. 일단 하나씩 해결해 나가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주몽이 플레이어들을 쓸어보며 말했다.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동자엔, 강한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시작하지."
* * *
팀 '불굴' 팜의 트레이너 엔젤, 지슈엘.
"후우. 어렵다, 어려워."
그녀는 조용한 팜 내부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점심시간.
팀원들은 식사를 위해 모두 식당으로 들어간 상태다.
그 덕분에 각양각색의 건물로 가득한 팜에 고즈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요즘 들어 팜의 분위기가 너무 흉흉하단 말이야.'
그럼에도 지슈엘은, 마치 폭풍 전야를 보는 듯한 감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요 며칠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
'어떻게 해야 좋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팜의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에서, 렌의 광팬이 되었던 루디악.
그 이후로 팀 불굴은 지구인만을 뽑아서 육성시켰다.
다른 성계인들도 있긴 했지만, 그건 성계 대항전에서 대박이 나기 전에 들어온 팀원들.
그 이후로 뽑게 된 타 성계인들은 모두 다른 팜에 판매하며, 지구인만을 키우는 팀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힘들지만 보람은 있었어.'
지구 출신 플레이어들은 검이라곤 한 번도 쥐어본 적 없는 사람이 대다수.
아니, 아예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하위 리그에서 제법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건, 힘들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서로가 가족처럼 힘이 되어준 덕분이었다.
각자 부족한 점을 공유하며, 장점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좋았던 팀의 분위기가 망가진 건.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건지.'
아이러니하게도 상위 리그의 성계 대항전 직후.
렌이 가면을 벗게 되면서, 루디악이 렌의 광팬 자처를 그만둔 것이다.
그때부터 팀 불굴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지구인만으로는 팀 투지를 따라잡을 수 없어.
더이상 지구 성계만을 고집하지 않게 되었고, 그로 인해 다른 성계의 플레이어들이 대거 들어오게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중에는 제법 뛰어난 네임드도 들어 있었다.
'알프하임 출신의 호인족, 세호.'
호인족은 무척 뛰어난 종족이다.
개체 수가 적지만 육체 능력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데다가, 종족 특전도 가지고 있고, 사냥본능이라는 각성 능력도 기본으로 보유하고 있다.
한마디로, 남들보다 훨씬 앞선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벌어진 일의 이후 선택이 어떻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팀 '불굴'의 선택은 좋지 않았다.
―차라리 세호를 판매하시고, 그 포인트로 기존 플레이어들의 전력을 보강하는 건 어떠십니까?
―세호는 긁지 않은 복권. 녀석을 파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라고 할 수 있지. 놈이 성장해서 안우정을 잘 보조해줄 것이다. 팀 투지를 봐라. 렌의 원맨팀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주변에 렌을 밀어주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오히려 루디악이 세호를 편애하며,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그에 대해, 지슈엘은 끊임없이 우려를 표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무척 확고했다.
―지금 상태로는 위험합니다. 서열 정리가 되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약육강식의 세계 아닌가. 우리 팀은 먼저 들어왔다고 높은 서열을 주지 않는다. 위아래의 흐름이 막히는 순간 물은 고여 있을 수밖에 없지.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다.
―지금껏 세워온 팜의 매뉴얼을 새로 들어온 아이들이 무너트릴 수도 있습니다.
―너무 과한 걱정이군. 아무리 호인족이라고 해도, 안우정은 상위 플레이어. 녀석에게 질 리가 없다. 그리고 내가 있고, 그대가 있는데 무얼 걱정하는가? 전에 보니 신과 천사에 대한 경의를 가지고 있더군. 매뉴얼이 무너질 일은 없을 테니, 너무 심려 말거라.
'또 고질병이 도지셨구나.'
루디악은 이전부터 독불장군의 성향이 강했다.
본인의 능력을 과신하며, 남의 말은 잘 듣지 않았다.
그 탓에 한때, 팀 불굴이 보유하고 있던 상위 플레이어들이 모조리 죽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었으니까.
그 일 이후로 조금이나마 달라졌나 했지만, 결과는 보는 대로.
'후우, 더 강하게 어필했어야 했어.'
안우정을 보조해줄거라던 세호가, 오히려 신입 플레이어들을 규합하며 안우정을 긁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지구인만 있던 팜에, 문화도, 종족도, 상식도, 이념도 다른 타 성계 플레이어들이 잘 융화될 리가 만무했다.
세호가 루디악이나 지슈엘 앞에서는 고분고분한 척했지만, 없는 자리에선 사사건건 안우정에게 시비를 걸었다.
'루디악님이 호인족이라는 종족을 너무 모르시는 것도 문제야.'
하나의 산에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지 않는다.
설혹 자신보다 강한 존재가 있다고 해도, 산을 차지하기 위해 발톱을 휘두르는 것이 호인족이라는 종족이었다.
'넘을 수 없는 벽을 보여주지 않으면 수그리지 않지.'
호랑이는 은신과 기습에 특화되어 있는 생물.
상황만 따라준다면 이길 수 있겠다는 마음을 꺾지 않는 한, 서열 정리가 쉽지 않았다.
물론 안우정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서열 정리를 할 수 있다.
사실, 전력상으로는 비교조차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건 딱 하나.
―아직 어린 새싹이니 건들지 말거라. 그대를 더욱 높은 곳에 올려줄 지원군이니라.
세호에 대한 루디악의 비호 때문이었다.
안우정이 손 봐주려고 할 때마다, 루디악이 계속 중재를 했었으니까.
그 모습에 기세등등해진 세호가, 안우정의 신경을 건드리면서 조금씩 분위기를 흐리고 있었다.
'며칠 동안 팜에 계셔 달라고 부탁이라도 드려봐야겠군.'
아마 루디악이 팜에서 업무를 본다면, 지금처럼 날뛰진 못하리라.
"후우······. 다음 훈련 일정이 뭐였더라."
생각을 마친 지슈엘이, 플레이어들의 다음 일과를 위해 집무실로 향했다.
그때였다.
"지, 지슈엘 님!"
"······?"
식당에서 달려나온 한 사용인.
그녀를 보는 순간 지슈엘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무슨 일이지? 그 피는 뭐고?"
그녀의 옷에 피가 한가득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지슈엘의 등골이 서늘했다.
팜에서 피를 보게 되는 경우는 딱 하나뿐.
문제는 죽어도 부활하는 대련장이 아닌, 사용인이 식당에서 나왔다는 것이었다.
"크, 큰일 났어요! 식당에서 싸움이······!"
펄럭! 펄럭!
사용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슈엘은 식당을 향해 날아갔다.
'제발.'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300미터 남짓의 짧은 거리를 날아가고 있음에도, 마치 몇백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것 같았다.
'제발 별일 아니길······.'
그리고 보게 된 광경.
서걱! 서걱! 서걱!
식당 한 켠에서 기다란 소태도를 휘두르고 있는 안우정.
"아······."
곁에는 짐승의 발톱 같은 자국이 길게 난 송준경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쓰러져 있다.
바로 옆에는 세호가, 목과 몸이 분리된 채 죽어 있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다시는 개기지 않겠습니다. 제발, 제발!"
"우리는 모르는 일이오! 세호가 독단으로 덤벼든······ 컥!"
세호에게 죽은 듯한 송준경.
이성을 잃은 채 검을 휘두르는 안우정.
그리고 뽑아 든 무기를 버리며, 중간중간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며 비는 신입 플레이어들.
그 일련의 과정을 보자, 지슈엘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안우정을 향해, 세호가 식당에서 기습 공격을 가한 것이리라.
송준경은 그걸 막으려다가 죽었고, 가장 절친한 친우의 죽음에 안우정이 분노한 거겠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식당에서······!'
안색이 하얗게 질린 지슈엘은 서둘러 안우정에게 향했다.
세호와 송준경이 죽으면서 팜의 전력이 대폭 깎여나간 상황.
이미 일은 벌어졌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야만 한다.
어차피 세호의 죽음은 정당방위니까, 안우정에게 큰 불이익이 있진 않을 것이다.
"헉, 헉.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지슈엘 님!"
"저, 저자가 가만히 있는 우리를 모두 죽이려고 합니다······!"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그녀를 발견하곤 헛소리를 지껄여 대는 신입 플레이어들.
문득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들에 대한 처분은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멈춰라, 우정!"
채애앵! 챙!
"제발 분노를 가라앉혀라, 제발!"
채애애애앵!
세검을 뽑아 들고 안우정의 앞을 가로막은 지슈엘.
그녀는 방어에 전념하며, 안우정을 향해 애타게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안우정에게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성을 찾게 해야 해.'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안우정이 청염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
무의식 한 켠에, 곁에 죽어 있는 송준경의 시신을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채애애애앵!
"도, 동생을 생각하거라! 렌! 아니, 안우진! 우진이를 생각하거라! 내일이면 안우진의 편지가 도착하지 않느냐!"
흠칫!
지슈엘의 말에 몸을 우뚝 멈춰 서는 안우정.
그 모습에 지슈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됐어, 이성을 찾았어.'
그러고는 안우정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헉, 허억, 헉, 허억."
"그래.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거라. 옳지."
괜히 자극하지 않도록 검을 늘어트린 채, 아주 조심스럽게.
"허억, 허억."
"그대에게 아무런 불이익이 없을 거라, 내 신성을 걸고 약속하마. 자, 일단 검을 내려놓고······."
푸욱!
안우정과의 거리를 1미터 남겨놓은 상황.
양팔을 벌린 채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지슈엘의 가슴을 무언가가 뚫고 들어온다.
"······?"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문득 정신이 흐릿흐릿해져 가고, 주변 사물이 서너 개씩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지, 지슈엘 님!"
"이럴 수가, 지슈엘 님마저······."
"쿨럭······."
불그스름한 검신을 가진 안우정의 검, 레바테인.
그녀의 가슴을 관통한 안우정의 검이 쑤욱 하고 뽑혀 나갔다.
온몸의 힘이 풀린 지슈엘이 바닥에 쓰러진 채, 짧게 경련했다.
"도, 도망쳐!"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하, 한 번만 용서를······!"
주변의 시야가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역시······. 세호를 다른 곳에 팔아야 했어.'
그 하나의 선택이.
너무나 많은 걸 뒤집었다.
"······."
4급 주천사 지슈엘.
생기를 잃어가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꺄악! 아, 안우정 님! 전 김진주에요! 김진주라구요!"
"틀렸어, 완전히 이성을 잃었어!"
화륵! 화르륵!
푸른 불꽃을 몸에 휘감은 채 주변의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한 악마의 모습이었다.
화르르르륵!
'안······ 돼······.'
푸른 불꽃이 이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 205화. 엇갈림(4) > 끝
< 206화. 엇갈림(5) >
지하 공동으로 향하는 끝없이 펼쳐진 나선형 내리막길.
"죽어······ 크윽!"
"제길, 하필 모두들 자리를 비웠을 때······!"
무기고, 식량 창고, 치유의 샘 등등.
내리막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방들에서 악마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온다.
"어떻게든 마성석을 지켜야 해!"
창과 도끼를 휘두르며, 내 앞을 가로막는 악마.
"루드비온 님께 어서······!"
보고를 위해 밑으로 뛰어 내려가다가, 따라잡혀 두 동강 나는 악마.
"빛에 가려진 공허한 떨림이여, 이곳에 너의 힘을······."
아예 지하를 무너트리기 위해 마법을 영창하는 악마까지.
서걱! 서걱!
나는 그 악마들을 베어 넘기며, 단 한 번의 끊김 없이 계속해서 내달렸다.
티끌 같은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은 내리막길에 피가 흩뿌려진다.
잘려 나간 팔다리와 떨어져 나간 살점들이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고위 플레이어들.
"움직임에 군더더기 하나 찾아볼 수 없군."
"과연이라고나 할까. 정말 뛰어난 실력이다."
모두들 내 창술을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역시 뭔가 있어.'
반면에 나는 굳은 표정으로 창을 휘둘렀다.
불안감이 끝없이 날아들었다.
요새보다 더 높은 성城 급인데도 불구하고, 앞을 가로막는 악마들은 거의 다 중급.
상급 악마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대체 뭘 노리는 거지?'
성 공략이 쉽다면, 니플헤임에 천계의 영역이 딸랑 하나뿐일 리가 없다.
결국 지금의 상황 역시 무언가 노리는 게 있다는 뜻.
'또 다른 노림수가 있다면 지하 공동일 가능성이 커.'
아무래도 마성석이 있는 공동까지 내려가 봐야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리막길의 절반가량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띠링!
[비상! 비사아아앙!]
[비상사태입니다!]
[타락 플레이어 열두 명 발생!]
[지금부터 알츠카인 성 공략은 취소!]
[입구를 막은 악마들을 뚫고, 최대한 빨리 무스펠하임의 입구로 향해주세요!]
[더럽고, 못생기고, 칙칙하고, 사악한 마계의 녀석들이 천계에 수작을 부렸답니다.]
[(╬•᷅д•᷄╬)]
[무스펠하임의 입구를 봉쇄해서 타락 플레이어들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주세요.]
[부탁해용 O(╥﹏╥)o]
기존의 미션이 모두 취소되며, 새로운 미션창이 등장한 것이다.
'역시.'
미션 내용을 통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한 나는, 천천히 속도를 줄여나갔다.
뭔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던 상황.
다만 마계가 노렸던 건 우리가 아니라, 타락한 플레이어들이었던 것이다.
"흠. 단순히 우릴 가둬두는 목적이었군."
"제대로 걸려들었네요. 니플헤임의 모든 병력이 이곳에 몰려 있지 않습니까."
상태창을 본 고주몽과 다른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지상으로."
"알겠습니다."
나를 선두로, 지하 공동을 향해 빠르게 내달리던 열여섯의 플레이어.
그때부터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번 싹 정리하면서 이동했기 때문에 우릴 가로막는 악마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그렇게 빠져나온 지하 내리막길.
'전투 흔적이 없네.'
극야로 인해 내려앉은 어둠.
지상에선 성문을 사이에 두고 플레이어와 악마가, 미묘한 신경전 속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전력을 묶어두기 위해 모여든 병력이었기에, 굳이 성문을 돌파하려는 시도 조차 없었던 것 같았다.
"고생했다, 테세우스. 상황은?"
"내려가신 뒤로 특이사항 없었습니다."
고주몽의 물음에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테세우스.
전투가 없었음에도 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까다롭게 됐어.'
우릴 잡아먹기 위해 모여든 병력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상황은 이전보다 훨씬 안 좋아졌다.
"엘린도 이런 식으로 봉쇄됐겠군. 비프로스트를 열 수 있으니까 그쪽은 더 많은 병력이 모여들었겠지."
"그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든 뚫어야 한다는 건데······."
문제는 하나였다.
우릴 지켜주던 저 성문이, 이제는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
펄럭! 펄럭! 펄럭!
그 사이, 성문 바깥으로 세 쌍의 날개를 가진 최상급 악마들이 모여들었다.
숫자는 여섯.
뚫고 나가기엔 쉽지 않은 숫자였다.
"지키는 것과 갇히는 것은 한 끗 차이. 이제는 우리한테 족쇄가 되었군."
고주몽의 읊조림에,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고위 플레이어들.
모두들 좋은 수가 없나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뚫고 나간다라······.'
나도 최대한 두뇌를 회전시켰다.
무스펠하임의 입구 봉쇄 여부의 관건은 결국, 여길 뚫고 나갈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잠깐. 굳이 성문을 뚫고 나갈 이유가 있나?'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좁은 틈이 문제라면, 없애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그로 인해 발생할 자잘한 문제들이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한테 이득이 될 수도 있어.'
한동안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고주몽을 바라보았다.
"이건 어떻습니까?"
"좋은 생각이 있나, 렌?"
내가 입을 떼자, 모두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마성석을 부수면 결계도 사라지지 않습니까. 굳이 저 좁은 성문을 비집고 나가야 할 이유가 없죠."
내가 떠올린 건 간단했다.
이곳에 있는 전력 대부분은 고위 플레이어.
날개를 가지고 있다.
거기다 성을 공략하기 위해 성문을 비집고 들어왔던 것과 다르게, 우리는 현재 성 내부에 존재하는 상황.
결계를 치워버릴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야 빠져나갈 수 있겠지. 하지만 상위 플레이어들은? 결계가 풀리면 이들이 전멸할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사실."
하지만 내 의견에 고주몽은 고개를 저었다.
"타락 플레이어들을 죽이기 위해 이들을 희생양 삼을 순 없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짓이다."
고주몽의 의지는 굳건했다.
누군가를 희생해서 나가는 방법은 제외.
고주몽의 말에, 곁에서 숨죽인 채 대화를 듣고 있던 상위 플레이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찌릿! 하고 날카로운 눈총을 보냈다.
자신들을 버리자고 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내게 악감정을 가질 수밖에.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에겐 성문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
"성문보다 더 좁고 튼튼한 보호막이 있죠."
내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고주몽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말뜻을 이해한 것이다.
"지하 공동에서 입구를 막고 농성을 벌이자는 말이군."
"어차피 마성석을 부수려면 지하 공동도 정리해야 하니까요. 게다가 결계가 사라지더라도, 악마들은 우릴 막기 위해 기를 쓰고 달려들 겁니다. 대규모 전투는 피할 수 없을 거고, 그때 반 이상의 악마가 죽게 되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남은 악마들 중 최상급 악마가 있다면, 그 입구도 금세 뚫릴 것인즉."
그러나 고주몽이 여전히 부정적이라는 뜻을 내비쳤다.
그의 말대로 최상급 악마가 있다면 좁은 길목이고 뭐고, 모두 전멸할 테니까.
그만큼 상위 플레이어들과 최상급 악마 사이엔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그것도 다 방법이 있지.'
순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갈 뻔했다.
앞으로 있게 될 상황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고 한 것이다.
"어차피 마성석을 부수려면 고위 플레이어 중 한 명은 지하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탈출은 애초에 불가능하니, 함께 남아서 입구를 지키면 최상급 악마가 있어도 막을 수 있습니다."
"흠, 고위 플레이어라······."
그러자 고위 플레이어들을 한번 쓸어보는 고주몽.
나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제가 남아서 마성석을 부수고, 상위 플레이어들을 지키겠습니다."
"······그대가?"
"예."
"신중하게 생각하라. 저길 탈출하는 것과, 아예 퇴로가 끊기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고주몽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구원조가 늦으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래도 하겠는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고주몽.
곁에서 대화를 듣던 상위 플레이어들의 눈빛도 어느새 180도 달라져 있었다.
자신들을 사지로 밀어 넣으려는 줄 알았는데, 함께 남겠다고 하니 내게 향하던 감정이 바뀐 것이다.
"예, 대신에 마성석을 부수고 나오는 고결한 수정을 제가 모두 먹겠습니다. 그러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결한 수정.
내가 노린 게 바로 이거였다.
'잘하면 모두 챙길 수 있어.'
뇌신을 플래티넘 등급으로 올려서, 결국 다이아몬드 등급인 폭뢰爆雷를 각성하는 것.
평소 같으면 고위 플레이어가 스물넷이나 되기에 고결한 수정을 얻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특수한 상황.
잘만 한다면 고결한 수정을 독식할 수 있을 것이다.
'리스크도 전혀 없고.'
띠링!
[플레이어 '고주몽'의 그림자에 표식을 남기시겠습니까?]
[그림자 표식 목록이 가득찼습니다!]
[플레이어 '사브르'의 그림자에 남겨진 표식을 삭제합니다.]
[표식 목록]
[플레이어 '볼티노']
[플레이어 '구트룬']
[플레이어 '고주몽']
나는 기존에 있던 사브르의 표식을 지워버리곤, 생존 확률이 가장 높은 고주몽의 그림자에 대신 표식을 남겼다.
그리고 타이밍 또한 무척 절묘했다.
'곧 있으면 달도 뜰 거야.'
니플헤임은 극야로 인해 해가 뜨지 않는 곳.
그런 이유로 현재는 암흑이 내려앉았음에도 달이 떠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앞으로 20분에서 30분 후, 달이 떠오를 것이다.
"흠······."
그러자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긴 고주몽.
이내 고개를 든 그가, 다른 플레이어들을 바라보았다.
무언의 시선 교환.
"······."
고주몽과 눈빛을 교환하던 플레이어들이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잘 부탁하지."
'됐어.'
결과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리겠습니다."
표정 관리에 주의하며 대답한 나는 쿠 훌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부터 제가 지휘합니다. 선두 또한 제가 맡을 겁니다."
"예."
"빠르게 움직일 테니, 잘 쫓아오시죠."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쿠 훌린.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그때부터 두 번째 지하 공동 침투가 시작되었다.
└뭐임? 알츠카인 주변으로 악마들이 계속 모여드는데? 왜 성을 안 지키고 바깥에서 오는 거임?
└님들 큰일 남 ㄷㄷ 니플헤임뿐만 아니라 무스펠하임에도 대규모로 악마들 출현함. 지금 고위 플레이어들 소집되고 난리 났음!!
└요 근래 전투가 많아지긴 했는데 또 뭔 일 터지려나?
└ㅋㅋㅋㅋㅋ 개꿀잼. 안 그래도 요즘 심심했는데 잘 됐당ㅋㅋ
└속보) 플레이어 열두 명 타락. (1보)
└?????????????
└한 번에 열두 명?????
└치천사 타락한 거 때문에 한 번 싸그리 청소하지 않았나? 근데도 열두 명이나 나왔다고???
└뭐임 갑자기 불안하게 ㅡㅡ
└속보) 상위 플레이어 대거 소집. (1보)
└이걸 보고 개꿀잼이라는 새끼는 뭐냐..? 천계가 어찌 될는지..
└대전쟁 때처럼 사건 사고가 하나씩 터지는 중. 평화가 끝날 날이 머지 않은 듯ㄷㄷ
'한 번 정리해서 그런가 별로 없네.'
다시 지하 공동으로 향하는 내리막길.
서걱!
죽은 악마들의 피가 옅은 강물처럼 흘러내린다.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찌르고, 잘려 나간 살점 따위가 곳곳에 나뒹굴었다.
"젠······장······."
서걱!
고주몽과 헤어진 지 어느덧 20분째.
"모두 정지."
어두컴컴하고 좁은 복도 끝.
흘러나오는 보랏빛에, 나는 뒤따라오던 상위 플레이어들을 멈춰 세웠다.
어느새 지하 공동의 입구에 도착한 것이다.
'후우.'
50미터 정도를 조용히 내려가자, 거대한 공동의 모습이 보였다.
높이 30미터, 크기는 1만 평을 가뿐히 넘는다.
그 한 가운데에서 보랏빛을 밝게 뿌려대는 마성석의 모습이 보였다.
"광대 새끼들이 왔군."
"흥! 동료들이 우리의 복수를······. 뭐야, 날개를 가진 녀석이 별로 없는데?"
"정확히는 한 명밖에 없다."
"크흐흐흐,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지."
펄럭!
공동 내부에는 단 여섯의 악마만 존재했다.
'여섯이라······.'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상급 악마가.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창을 고쳐 잡은 나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쿠 훌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동으로 들어오지 말고 봉쇄만 부탁드립니다."
"······안 도와줘도 됩니까?"
"예."
펄럭!
그리고는 공동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 뒤, 날개를 활짝 펴며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날 수는 있지만 30미터라는 한정된 공간.
상급 악마 여섯이라는 수적 열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띠링!
[보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5% 상승합니다.]
[<목걸이:영롱한 달빛>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3일이란 시간이 흐른 덕분에, 상현달이 보름달로 바뀐 상황.
'이 정도면 충분해.'
"놈만 죽이면 나머지는 피라미들이다!"
"크흐흐흐, 산 채로 찢어 죽여주지."
고결한 수정을 얻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시작해 볼까.'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나는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 206화. 엇갈림(5) > 끝
< 207화. 엇갈림(6) >
이글거리는 불길과 폭력적인 열기에 지배된 광활한 대지.
'여긴······.'
삼지옥三地獄 중 하나이자 불의 세계라고 불리는 세상.
―분한가.
무스펠하임.
화륵! 화르륵! 꽈아아아앙!
불길이 일렁이고, 저 멀리 화산 분화구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꾸덕꾸덕꾸덕―
"배고프다, 취익. 먹잇감을 찾아야 한다. 취익!"
용암이 흐르는 소리 사이로, 헬 오크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질투가 나는가.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불개미가 땅을 파는 소리, 생명체가 움직이며 만들어지는 작은 진동, 어마어마한 열기에 끓어오르는 희미한 아지랑이.
평소라면 들을 수도,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았을 아주 미세한 것들.
―이리로 오라. 원하는 만큼 힘을 내려주겠노라.
그 사이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안우정의 귓가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니, 평소 들려오던 작은 목소리가 감각이 증폭되면서 거대한 소음이 되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크윽······.'
물밀듯이 들어오는 온갖 감각 정보에, 안우정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오다 보니 뇌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
'내가······ 누구지?'
나는 누구였지?
머릿속 통증이 잦아든 안우정이,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이곳에 있는 건지.
다만 확실한 건.
'개같네.'
현재 기분이 무척 더럽고, 짜증 나고, 다 때려 부수고 싶다는 것.
상위 존재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들먹거리는 신과 천사들도 꼴 보기 싫다.
운 좋게 콜로세움에 먼저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더 위에 있는 고위·초월 플레이어들도 찢어버리고 싶다.
같은 지구인인데도 나보다 훨씬 강한 렌.
재능빨 하나로 올라가는 그 새끼도 팔다리를 분질러······.
'같은 지구인?'
내가, 지구인이었던가?
―신도, 천사도. 그리고 렌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불태울 힘을 주겠노라. 이리로 오라.
안우정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모르겠어.'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잘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난 왜 여기에 있는지.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정신 스텟이 1 하락······.]
꽈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저 멀리서, 천지가 요동칠 정도의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가 들릴 때마다 땅이 크게 흔들렸다.
"······."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진원지가 어디인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서 시작된 충격파가 안우정을 덮쳐왔다.
그 소음과 떨림을 뒤로하고.
―이리로 오라.
안우정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저기, 타깃이다!"
그때였다.
"다행히 금방 찾았군."
"타천사에 비하면 플레이어 죽이는 건 식은 수프 먹기지."
안우정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10명의 플레이어들.
'지긋지긋해.'
"밝게 뛰노는 물의 아이들이여, 손을 잡고 춤을 추며······."
고함을 지르며 달려온 플레이어들이 각종 무기를 뽑아 들고, 일부가 주문을 영창한다.
'왜 내가 강해지는 걸 방해하려는 거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죽여버려야 자신을 가로막는 존재가 없을 것 같았다.
스르릉―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소태도小太刀.
힘과 파괴를 상징하는 황천의 불꽃.
대재앙과 파멸의 전조를 알리는 무기, 레바테인이 안우정의 손에 뽑혀 나왔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불태워 버리는 수밖에.'
상대가 누구든, 얼마가 됐든 상관없다.
―더 강한 힘을 원한다면 이리로 오라.
'난 저 힘을 꼭 손에 넣어야겠어.'
화르륵! 화륵!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릴 만큼 새파란 불꽃이, 안우정의 몸을 휘감으며 찐득한 마기를 발산했다.
"에이브릴 님, 몰려드는 몬스터를! 네로 님은 탱킹을 부탁드립니다! 후딱 처치하고 가죠!"
"옛!"
"알겠소."
플레이어들과 안우정의 거리는 어느덧 500미터 안팎.
안우정도 자세를 낮추며 레바테인을 겨눴다.
'같잖은 것들이.'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려고 할 때였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액! 펄럭! 펄럭!
"헉, 뭇······."
"미친······!"
서걱! 푹! 푹! 서걱! 서걱! 떼구르르―
아지랑이처럼 열기가 올라오는 검붉은 대지에 피가 낭자한다.
사지와 몸통이 절단되고, 우악스럽게 뜯겨나간 머리통이 바닥을 구른다.
한줄기 섬광처럼 나타난 한 악마가, 열 명의 플레이어를 단숨에 도륙했다.
털썩. 뚜벅, 뚜벅, 뚜벅.
"······."
날렵하게 뻗어 나온 여섯 쌍의 날개.
이마 위로 위엄있게 솟아오른 거대한 뿔.
이글이글 불태울 것만 같은 새빨간 눈동자.
우뚝 멈춰선 안우정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악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무척 친숙한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조우한 친우, 혹은 같은 피를 나눈 가족 같은.
"마계로 가던 중인가?"
꽈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앙!
이전보다 거세진 굉음과 뒤따라오는 충격파에, 안우정의 로브가 찢겨나갈 듯 펄럭인다.
펄럭! 펄럭! 펄럭!
눈앞에 있는 악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수히 많은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 오고, 하늘을 가득 메운 검은 날개들이 주변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리로 오라. 강대한 힘을 안겨주겠노라.
"다시 한번 묻겠다. 마계로 가던 중인가?"
듣기 좋은 묵직한 저음.
그 목소리를 감싸는 다양한 날갯짓과 숨소리.
꽈아아아아아아아앙!
하모니처럼 울려오는 충격파.
잠시 그 모든 걸 음미한 안우정이 피식 웃으며 입을 뗐다.
"따라가면."
"······?"
"저들처럼 강해질 수 있나?"
안우정이 기다란 소태도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네 쌍의 하얀 날개를 가진 플레이어와, 다섯 쌍의 검은 날개를 가진 악마가 무시무시한 위용을 보이며 싸우고 있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따라가면 저들처럼 강해질 수 있나?"
잠시 그 둘의 싸움을 눈동자에 담던 악마.
"저것보다 더 강해지겠지."
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군."
원하는 대답을 들은 안우정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지. 너희가 말하는 마계로."
씨익―
안우정의 말에, 악마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낮춰, 안우정에게 예를 표했다.
"뜻대로."
팍- 파팍- 팍- 팍-
그의 뒤로, 대지에 무릎을 찍는 수많은 소리가 들렸다.
―환영하노라.
* * *
'네 시 방향 17. 다섯 시 14.'
"플레곤, 퇴로부터!"
"리린! 무시하고 그냥 뿌려!"
콰과과과과과광!
'여기서 둘러싸이면 안 돼.'
띠링!
[<섬전 >을 사용합니다.]
꽈과광!
"제길! 도대체 몇 번째 놓치는 건지!"
"저 스킬의 쿨타임이 너무 짧은데!"
'열한 시 27. 여덟 시 방향 19.'
챙! 채챙! 콰지지지지직!
"흥! 어차피 딱 한 번만 유효타를 넣으면 돼! 다들 집중!"
"리린, 얼음 위주로!"
띠링!
[<목걸이:영롱한 달빛>이 달의 힘을 빌려와, 체력을 5% 회복합니다.]
[남은 체력 : 42%]
펄럭! 펄럭! 펄럭!
격렬한 날갯짓 소리로 가득한 지하 공동.
검, 창, 손톱 등 다양한 무기가 나를 향해 쇄도하고, 제각기 다른 방향에서 정령 마법이 쏘아진다.
'아홉 시 12. 열두 시 방향 22.'
나는 그 공격을 피하거나 막는 등 방어 일변도로 녀석들을 상대했다.
지금은 둘러싸이지 않는 것에 집중해야 했으니까.
'쉽지 않군.'
현재 내 수준으로는 다른 고위 플레이어들처럼 이들을 압도하는 건 불가능했다.
블라디미르 가면을 쓰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힘.
'아직은 말이지.'
다른 고위 플레이어들을 따라잡으려면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 그들의 발끝을 따라갈 수 있다.
언제?
마성석을 부수고 고결한 수정을 챙겼을 때.
'다이아몬드 등급 스킬을 보유한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고결한 수정을 챙기지 못해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플레잉 코치라는 거대한 스노우볼이 구르고 있었으니까.
복리처럼 늘어나는 포인트.
지금의 추세로 봤을 때, 일 년 혹은 이 년이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띠링!
[<목걸이:영롱한 달빛>이 달의 힘을 빌려와, 체력을 5% 회복합니다.]
[남은 체력 : 46%]
"제길, 이 자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왜 쌩쌩해지는 것 같지?"
"모두 침착해라. 어차피 녀석만 처리하면 다른 놈들은 별거 없을 거다."
"리린! 마기가 얼마나 남았지?"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어요!"
날 죽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악마들.
쐐애애액! 후웅! 후웅! 콰과과과과광!
턱을 스치고 지나가는 검, 날개로 날아드는 각종 마법.
공방을 주고받을 때마다 위태위태한 장면이 연출된다.
하지만 나는 점점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슬슬 눈에 익어가고 있어.'
서로가 서로의 공격과 움직임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상황.
상태창을 힐끗 살핀 나는 미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은 체력 46%.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음에도, 달이 뜨면서 오히려 체력이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승부수를 띄워야겠군.'
이 정도라면 체력 소모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뇌룡의 포효 활성화.'
띠링!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고위 리그]
[근력 : 399(+5)(+194)] [민첩 : 482(+5)(+267)] [체력 : 349(+5)(+144)]
[정신 : 252(+5)(+145)] [지력 : 179(+75)] [마력 : 278(+5)(+114)]
[적용 특전]
[역천자 : 모든 스텟 +20%] [최강의 성계 : 모든 스텟 +17%]
[달의 메아리 : 모든 스텟 +5%] [영롱한 달빛 : 모든 스텟 +30%]
[천뢰십보 : 민첩 +30%] [열반 : 정신 +30%] [대천사의 눈물 : 정신 +40%]
[뇌룡의 포효 : 근력, 민첩 +25%]
'이제부턴 내 차례야.'
뇌룡의 포효를 활성화시킨 나는, 곧장 공세로 전환했다.
악마들은 직전까지 마음 놓고 공격만 퍼붓던 상황.
한참 동안 공방을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던 움직임.
거기다 갑자기 빨라진 힘과 스피드까지.
챙! 채챙! 콰지지지직!
"헉, 놈이 갑자기 빨라졌어!"
"모두 조심!"
'쉽지 않을걸.'
수많은 요인들로 인해, 순식간에 전세가 180도 바뀌었다.
내가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여섯 명은 오히려 수비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숫자가 여섯이나 되는 데다가, 나름 상급 답게 제법 잘 막아내는 악마들.
하지만 잘 막는 것만으로는 이미 뒤집힌 전세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띠링!
[<벽력 >이 발동합니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플래티넘 등급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벽력의 발동 확률이 5배나 상승한 상황.
창날에 엄청난 마력이 응축되면서, 강렬한 빛이 흘러나온다.
강제로 붙잡힌 뇌전들이 풀어달라는 듯 미쳐 날뛰었다.
숨길 수 없는 진한 미소가 내 입꼬리에 걸렸다.
'잘 가라.'
꽈과광!
아껴뒀던 <섬전 >을 사용해 순간 이동한 나는.
"······!"
"······!"
눈을 부릅뜨는 악마들 사이에서 창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빛기둥이 솟구치고, 주변을 사정없이 난도질하는 뇌전의 칼날.
"리린! 안 돼!"
"제에엔자앙!"
폭발하는 플라스마의 범위 안에 있던 두 명의 악마가 바닥으로 힘없이 고꾸라진다.
벽력을 정면으로 받아내던 정령사, 리린이라는 악마는 상반신이 통째로 날아갔고, 나머지 한 명은 무수히 많은 자상刺傷을 입은 채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이걸로 남은 악마는 네 명뿐.
"대장! 전략을 바꿔야 하오! 이대로 끌려가다간······ 크윽!"
"나도 알고 있다! 지금부터 B 포메이션으로!"
갑자기 날개짓하며 전열을 가다듬는 악마들.
'어림없지.'
어떤 식으로 움직이려고 하는지 대강 감을 잡은 나는, 곧바로 인 앤 아웃 스타일을 구사했다.
지금까지 정말 많은 플레이어와 싸워오면서 느낀 게 있다.
진짜 강자는 수비할 때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한 번 전세가 기울었을 땐 그걸 이용해서 더 밀어붙이는 법을 알고 있었어.'
그런 의미에서 전술을 바꾼 녀석들을 보고, 다른 스타일을 구사하기 시작한 나는?
'이젠 나도 강자 중 한 명이지.'
한 번 기울어진 승부의 추를 뺏길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채애앵! 콰지지직!
"대, 대장!"
"이런 미친······!"
서걱!
방패를 앞세우며 어떻게든 나를 가로막으려던 탱커의 몸이 두 동강 난다.
그와 동시에 섬전을 사용해, 전열을 가다듬던 바로 뒤의 악마가 목이 잘리며 피 분수를 뿜어댄다.
꿈틀꿈틀―
'재생 능력?'
그리고 마력장으로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한 나는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며, 목만 남은 한 악마의 뿔을 도려낸다.
"이렇게 어이없게 진다고······?"
남은 건 각각 검과 창을 쥐고 있는 두 명의 악마뿐.
'고결한 수정이 몇 개나 나오려나.'
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띠링!
[<벽력 >이 발동합니다.]
'록탄 성에서는 두 개가 나왔었는데.'
남은 두 녀석을 마저 사냥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207화. 엇갈림(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