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이 화끈거린다. 이런 기분은 한번도 느껴본 적 없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너한테 반말해도 괜찮을 입장이 될 때까지.]
가슴은 두근거리는 수준이 아니다. 마치 펌프기로 강제로 혈액을 집어넣는 수준으로 심박이 울리고 있다.
[아직 난 종자야. 하지만 거기에 안주할 생각은 없어.]
뜨겁고도 정열적인 한마디, 한마디가 귓가를, 표정을,
[그러니까 부탁할게.]
그리고 심장을 뒤흔든다.
[기다려줘.]
지금 자신의 얼굴은 어떨까?
거울은 없지만 확실한 건.
'...이 표정은, 이 표정만큼은...! 아무한테도.... 보이면...!'
이 표정을 누구에게도, 특히 레오나르도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불 지른 것만큼이나 뜨겁고, 벼락을 맞은 것 같이 떨리는 얼굴,
이 낯빛을 보여주면 박동이 더 빨라져 가슴이 터져버릴 것이다.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녀는 저택 복도를 뛰기 시작했다.
팍
"억?!"
"어...?!"
그 순간, 복도의 꺾어지는 길에서 그녀는 한 남성과 부딪치게 된다.
"이건 설마...!"
남자는 흥미있게 자신과 부딪친 소녀를 바라보았다. 운이 좋으면 이를 통한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될 수도 있을 거다.
아주 극심히 희소하고 희박한 확률로 아마도.
"...아...아..."
부딪친 아리아스필은 최대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실수라도 얼굴을 보였다간 평생의 놀림거리가 될 것이다.
"아리아? 왜 얼굴을 가리니~? 오빠한테 얼굴도 보이기 싫을 정도로 다친 거야~?"
저 소름끼치는 말투, 그리고 자기를 '오빠'라고 3인칭라고 말하는 정신나간 발상, 저런 광기로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
그 사람은...
"...오빠."
자신의 오빠, 리오스 라인하르트였다.
"오오~ 그 얼굴 마치 순애에 빠진 소녀의..."
달아올랐던 마음이 차갑게 식는다. 들뜬 가슴은 깊은 짜증으로 빠져든다.
저 졸렬한 실눈, 옹졸하게 올라간 입꼬리, 좀팽이스러운 말투까지 보니, 얼굴이 정색으로 굳는다.
"...왜 일순에 얼굴이 그렇게 역변하니?"
"...누구 때문이겠어."
"그래, 순애를 체험하기엔 아직 버거운 나이일 테니까. 착한 오빠가 이해하마."
'닥치라고' 말이 나올 것 같지만, 그녀는 최소한의 교양을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로 온 거야?"
"내 집에 내가 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닥치... 아니, 참아야한다.
"원래는 빨라도 다다음 주에나 오잖아. 일찍 온 이유가 뭐야?"
퉁명스러운 질문 때문인지, 리오스의 어두워졌다. 얼굴에는 음영이 생기고 눈가의 짙은 그림자가 배인다.
"사실은... 알프레드가 쓰러졌다고 해서 걱정돼서... 알프레드가 죽으면... 난..."
"사기치지 마. 이미 건강한 거 전보로 보냈잖아. 답장도 보냈으면서."
연기는 씨알도 안 먹혔다.
연기를 그만두고 리오스는 다시 웃었다.
"들켰네~"
이때, 아리아스필은 마음 속 깊은 곳, 살의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진짜 궁금한 건..."
리오스는 주머니에서 챙겨놓은 신문을 꺼냈다.
[13살의 소년, 농담 살해자가 되다.]
신문에는 사진을 곁들여 레오 역사에 영원히 남을 굴욕이 인쇄돼있었다.
"여기 나오는 이 농담 살해자거든~! 빨리 보고 싶어서 뛰어왔지."
"...레오나르도?!"
냉랭한 그녀의 얼굴이 다시 붉어진다.
"...응?"
그 반응을 라인하르트의 장남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흠..."
리오스는 신문을 들었다.
"어?! 어어?!"
그러자 아리아도 함께 고개를 꺾어 신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천천히 신문을 든 팔을 돌린다.
"어어...?! 아...!?"
그녀의 시선도 신문과 함께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내려놓았다.
신문과 동시에 그녀의 마음도 내려놔졌다.
"이해했어."
"...갑자기 뭐가?"
"이런 느낌의... 순애, 나쁘지 않아. 오히려 좋을지도..."
아리아의 표정이 다시 썩는다.
"닥쳐."
"...순애에 그렇게 반응하다니, 오빠는 슬프단다."
"헛소리할 거면..."
"어, 저기에 레오나로드가!"
"어디!?"
그녀의 고개가 꺾인다. 하지만 이상했다. 레오나로드는 연무장에서 수련 중일텐데, 저기는 완전한 반대 방향이었다.
"오빠, 어디에 레오나르도가..."
돌아봤을 때는 그의 오빠는 이미 사라졌있었다.
아니, 이미 '가버렸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다시 곱씹었다.
자신의 오빠는 쳐죽일 새끼라는 걸.
***
[농담 살해자, 꼴받으니까 농담이나 씨부려봐.]
'...'
무시하자. 아무 생각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아니다.
[국가에서 허락하는 유일한 살인 기술 좀 보여줘라. 어?]
"..."
참자. 참으면 언젠가 저 노친네도 질릴 것이다.
[후훗... 나의 이름은 농...]
죽인다. 뭐가 됐든.
"농담 살해자! 농담 살해자 맞...!"
"진짜 뒤질라고 환장했나?!"
레오는 현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귀신인지라 검은 맞지 않고 허공을 갈랐다.
"우왁!!"
"...어?!"
유령 너머에는 한 남성이 있었다. 백발에 벽안을 지닌 것으로 그가 이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하잖아. 죽일 거면 설정 지키면서 농담으로 죽여야지."
저 지랄 맞은 말내용과 귓가를 핀셋으로 헤집는 것 같은 간드러진 목소리, 그런 자식은 레오가 아는 사람 중 한 명밖에 없다.
"...리오스 라인하르트님?"
"맞아. 농담 살해자가 날 알고 있다니, 나도 인생을 헛산 건 아닌가 보네."
농담 살해자라고 하니, 갑자기 '그냥 지금 죽여버려서 인생 헛살게 할까?'라는 충동이 들었다. 그래도 우선은 참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리오스 님께 큰 무례를 저질렀군요."
"괜찮아~ 죽을 뻔했지만, 죽을 죄까지는 아니거든."
...하...
속으로나마 나직이 한숨이 새어나온다.
[이 시대 사람들이 다 미친 거냐? 아니면 내가 너무 뒤떨어진 거냐?]
그 질문에 아련히 지나가는 두 얼굴이 보인다. 독특한 점은 두 명 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피가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어려우니까 다 같이 더불어 미친 거로 하죠.>
[그래. 도태된 것보단 미친 게 나아.]
레오는 내리친 검을 집어넣으며 리오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리오스님."
"...음, 미안하단 말이지."
아, 저딴 쓰레기를 갈아마신 듯한 미소.
리오스가 괴랄한 생각을 품을 때, 늘 짓는 표정이다.
"...그럼 알프레드가 기절할 때, 썼던 농담 좀 알려줘~"
"네, 알려드릴게요."
"진짜~?!"
다행히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야, 괜찮겠어? 그 노인네 진짜 죽일 생각이야?]
<괜찮아요.>
레오는 고민없이 리오스의 귀에 대고 농담 기술의 비전을 알려주었다.
"정말이야...? 정말 그딴 말로 사람이 기절해?"
농담의 원천을 들은 리오스는 실눈으로 의심스럽게 레오를 바라보았다.
"...저도 믿기진 않았지만, 그랬습니다."
레오의 눈엔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 맑은 눈동자에 리오스도 넘어갔다.
"...그렇단 말이지."
"리오스 도련님."
마치 속담의 한 구절처럼, 이야기의 주체인 알프레드가 걸어왔다.
"오, 마침 잘 왔어!! 알프레드!!"
"좋은 상황에 온 거군요. 다행입니다. 도련님."
리오스는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모기가 요기조기 있네~?"
"..."
정색
"...어? 알프레드?"
그는 정색했다.
"...왜 그래? 왜 그런 표정을..."
노집사는 유례없는 표정으로 정색했다.
"...미안함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반성했다니 다행입니다. 도련님."
"...왜 그런 거야...?"
"침묵은 스스로가 부끄러움을 깨닫게 하는 데 가장 좋은 훈계 방식입니다. 도련님."
이 상황을 관전하던 농담 살해자와 현자는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왜 안 웃냐? 저 영감?]
<재미없잖아요.>
[그건 알아. 근데 저번에는 웃다가 뒤졌잖아. 누가 들어도 똑같은데.]
<제가 해야 웃어요. 알프레드 씨는.>
처음 농담이 성공했을 때, 반응에 놀란 가문 사람들은 각자 본인 나름대로의 농담을 시전했다.
<그리고 전부 실패했죠.>
[근데 저렇게 정색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아? 그렇게 쌀쌀맞은 영감 같지는 않았는데.]
<그건 농담 친 사람이 저 인간이여서 그래요.>
리오스 라인하르트.
그는 라인하르트 가문의...
[생긴 거로 봐선 망나니인가?]
<아뇨.>
그냥 등신.
장남이자 등신.
장래 유망한 등신이었고, 등신일 것이다.
"잠깐..."
하지만 그 장남(등신)인 리오스가 왔다는 건...
"가주님이... 왔다는 거잖아."
가주, 그녀의아버지인 글라디오 라인하르트도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
EP.14 친구-3
현재 저택 내부는 한층 더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본가는 물론이고, 본가에서 떨어진 별채조차 급박하고 어지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때는 임금님 납시온데, 지금은 황제가 온 수준인데?]
<그럴 수밖에요. 가문에선 진짜 황제나 다름 없을걸요.>
라인하르트 뿐만 아니라, 어떤 명문가에서도 가주가 올 때는 그에 대한 응대를 허접히 하지 않는다.
이유는 가문 자체의 위신을 세우는 것도 있지만, 이를 통해 가문 주인이 누구인지 가문의 일원들이 다시 되새길 필요도 있으니까.
[근데 그럼 보통 아들하고 같이 오지 않아? 따로 나갔나?]
<나가는 건 같이 나갔을 거에요. 근데 들어오는 건...>
"도련님."
레오가 대답하기 이전에 집사장인 알프레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돌아오실 때는 가주님과 함께 돌아오시지, 그러셨습니까?"
"뭔가 부담스러워서 텔레포트로 들어왔지!"
[아, 등신 맞네.]
저 당당함에 현자가 가문의 차기 가주를 등신이라 인정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가주님께는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알프레드는 레오 자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레오나르도 군, 함께 가주님을 뵈러 가시죠."
"예? 같이요?"
보통 가주를 맞이할 때는 종자는 종자들끼리, 집사는 집사들끼리 모여 행렬을 만든다.
하지만 일개 종자가 집사장과 같이 가주를 맞이한다는 건, 그리 전례 있는 일은 아니었다.
"괜찮겠습니까? 집사장님과 함께 가도..."
"괜찮습니다."
알프레드는 소매에서 작은 편지를 꺼내었다.
"아예 가주님께서 레오나르도 군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뭔가 불길하다.
***
저택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입구에 행렬을 만들고 있었다. 마치 현자가 했던 비유가 적절한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기사들은 깃발과 검을 든 채 자신의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사람들이 선 차례는 시종, 종자, 기사, 그리고 가문 내 간부와 혈족들 순서였는데, 현재 그 규칙에 작은 예외가 생겼다.
[오, 너 한번 라인 잘 탔다. 이게 바로 농담의 힘...?]
<입 좀 다물어봐요. 안 그래도 부담돼 미칠 것 같으니까.>
한 어린 종자가 가문의 고위 간부인 집사장 옆에 있으니 말이다.
<...하... 그때 왜 농담을 씨부려가지곤...>
그냥 예절만 잘 지켰어도 반은 갔을 것이다. 괜히 최선을 다하겠다고 농담을 친 것이 인생의 화근이 되었다.
당장 지금만 봐도 종자들이나 기사들이 레오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아마 이유를 찾자면 고작 종자 주제에 집사장 곁에 있는 것이 원인일 테지.
[니가 택한 농담 살해자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
이젠 저 늙은이의 말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나팔이 울리고 있는 거로 봐선 지금 가주가 들어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일동! 차려!!"
그 말에 기사들은 군기가 새겨진 기세로 발을 모았다.
스릉!
기사단장이 검을 뽑자 다른 기사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빛나는 검날이 하늘 높게 치켜드는 장면은 라인하르트의 위상과 가치를 빛내는 것만 같았다.
"오랜만이군."
그 말을 시작으로 화려한 백마를 탄 남자가 기사단을 이끌며 저택 정원으로 들어왔다. 맞이하는 기사단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원정을 통해 라인하르트의 영광과 긍지를 가져온 듯 보였다.
'글라디오 라인하르트...'
가문의 주인이자 6성의 오러를 지닌 기사.
왕국 내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강자였다.
"...이번에는 많이 일찍 오셨군요."
접대하는 기사들 중심으로 나온 것은 한 여성이었다.
그는 기사도 아니었고, 또한 무인도 아니었다.
'시리카 라인하르트.'
가주의 유일한 아내이자 가문의 안주인이었다.
'과거니까 확실히 젊으시긴 하네.'
원래부터 관리를 잘하시는 분이어서 괴리감이라 할 것까진 없었지만, 전생의 모습을 바라보니 기분이 묘하기는 했다.
새삼스럽지만 이곳이 과거라는 걸 되새기는 느낌이 들었다.
"가문에 많은 일이 있다고 들어서 말이오. 가주인 내가 집을 오래 비울 수는 없었소."
백마에서 내린 글라디오는 자신의 반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저 양반 이쪽을 보는데?]
집사장 옆에 있는 레오도 바라보았다.
<하... 그 망할 놈의 신문...>
알아본 까닭은 의심할 것도 없는 신문 때문일 것이다. 어디서 구한 지도 모른 얼굴 그림이 떡하니 인쇄되어 있으니 못 알아보는 것이 더 이상할테지.
"알프레드, 실신했다 들었는데 몸은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가주님. 오히려 오랜만에 웃은지라 몸이 가볍군요."
"그런가? 옆에서 보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워지는군."
그리고 글라디오의 시선은 천천히 레오나르도에게로 향했다.
"자네가 그 유명한 농담 살해자인가?"
참아야한다. 여기서 날뛰면 심문실에 가는 게 아니라, 즉결처형을 당할 것이다.
"...소문이 와전되어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만, 전 그 별명을 부정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알프레드 집사장님은 정정하시니까요."
최대한 예절을 지키고, 미소를 그리며 예법에 맞는 인사를 시작한다.
"종자 레오나르도, 가문의 주인이신 가주 글라디오 라인하르트 님을 알현하여 영광입니다."
레오는 허리를 숙이며 고개를 가볍게 내리고 예에 맞는 인사말을 꺼내었다.
"...오, 전통적인 인사법이로군. 알프레드가 알려준 건가?"
"아닙니다. 가주님."
"호오, 그럼 누가 가르쳐준 거지?"
"용병으로 살면서 때때로 교양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더군요. 예전에 만난 귀족들의 예절 방식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갸웃거리던 현자는 물었다.
[진짜야?]
<진짜겠습니까?>
사실은 거짓말에 가까웠다.
이 예법은 전생에 종자로 일하면서 알프레드에게 직접 교육받은 방식이었다. 용병 생활을 하면서 예법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알겠네."
이번에 그의 시선은 다른 친족들에게로 향했다.
"오랜만이네요. 아버지. 만수무강하셨습니까?"
그 중 가장 먼저 인사를 꺼낸 것은 장남인 리오스 라인하르트였다.
"그래, 30분 전만 해도 같이 출발했지만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인 거겠지."
근데 따지고 보면 리오스도 원정을 갔다온 사람이긴 했다는 게 문제였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다음으로 인사한 것은 장녀인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였다. 오빠인 리오스와는 다르게 차갑고 절개있는 인사였다.
"4달 사이에 키가 제법 컸구나. 아리아. 없는 동안 잘 지냈니?"
그때 기분 탓이었을까, 그녀의 눈빛은 레오나르도를 향해 힐끔거려졌다. 그러곤 다시 글라디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나름 즐거운 수련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말에 글라디오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제법 놀라운 눈치로 자신의 딸을 바라봐야했다.
"의외로구나. 항상 '보통'이라고 대답하던 너였는데."
"정말 즐거웠으니까요."
자식 간의 상봉을 끝낸 뒤에는 본가에 있는 친족 간의 인사를 시작해야했다.
"원정은 잘 끝내셨습니까? 가주님."
무릎을 굽히며 크리스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오빠와 인사를 나누었다.
"오랜만이군. 크리스, 좋은 종자를 데려왔다고 들었는데."
다시 라인하르트 가문의 시선은 다시 레오에게로 향했다. 이건 두렵고 말고로 떠나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좋은 수준이 아닐 겁니다. 가주님. 편지를 쓰려고 했으나 마침 잘 됐군요. 식사라도 하면서 천천히 얘기하시죠."
"좋은 생각이군."
가주는 주변 친족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가벼이 저녁이나 먹지. 다들 따라오게."
가주의 말에 라인하르트의 친족들은 대답으로 그를 따라갔다.
<...아, 드디어 한시름 놓겠네요...>
"아, 그리고."
돌아서 가던 글라디오는 안심하던 레오에게 긴장을 동메여주었다.
"자네도 따라왔으면 좋겠군."
"...예?"
"가문에 자네가 온 뒤로 흥미로운 일이 많이 일어났다고 들었네. 이럴 땐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직접 듣는 편이 낫지 않은가?"
[...아무래도 너 찍힌 것 같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이번에는 현자의 말이 맞았다.
***
넓고도 긴 식탁보 너머로 차례로 음식이 쌓인다.
현생이든, 전생이든 쉽게 먹지도 보지도 못할 음식들이 한꺼번에 진열된다.
아마 음식값만 총합하면 레오가 가져왔던 짐의 가격과 동일... 아니, 그 이상일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야... 이름값 하네. 라인하르트.]
정작 자리에 앉은 레오는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 속으론 떨떠름한 감정을 삼켜야했다.
<지금부턴 말 좀 줄여주세요. 아무래도 시험인 것 같으니까.>
[시험? 뭔 시험?]
<저라는 인간에 대한 시험이요.>
일개 종자를 가문의 식사 자리에 데려온 것은 단순히 밥이나 한 끼 하자고 한 의도가 결코 아닐 것이다.
그걸 명령한 게 가주이면 더더욱 말이다.
[그럼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데?]
<잘요, 잘하면 돼요.>
[그건 당연한 거고 쨔샤. 좀 구체적으로...]
<그런 게 있으면 차라리 시험지 가져와서 문제로 테스트하겠죠.>
싸가지 없다고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전생에서 본 글라디오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확인해왔다.
"우선 가볍게 들게. 차린 게 많이 없어서 미안하군."
"아니요. 충분합니다. 오히려 차린 게 많았더라면 먹기도 전에 식탁 다리가 부러졌겠군요."
상황을 풀기 위해 가벼운 농담을 던진다. 이런 게 큰 영향을 주진 않을 테진 레오 본인의 긴장을 푸는데는 큰 도움을 주었다.
"크...흡...!"
그때 뒤에서 대기 중인 한 고통스러운 노집사가 보였다. 폐 밖으로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누르기 위해 알프레드는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게 진짜 되네..."
"역시 농담 살해자..."
...아,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알프레드, 잠시 방에 가서 쉬고 있게. 오늘은 식사가 길어질 것 같으니."
알프레드 집사장은 허리를 숙이며 식사실 밖으로 나갔다. 나간 직후 웃음소리가 중간에 들린 건 기분 탓일 거다.
"내 딸이 자네에게 많이 신세를 졌는다고 들었네."
레오가 스테이크를 작게 잘라 입에 넣는 순간, 글라디오는 질문을 시작했다.
"신세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오히려 아리아스필 님 덕분에 제게 부족한 점을 많이 깨우칠 수 있었죠."
거짓이나 아부가 아닌, 마음 속에 나오는진심이었다.
현생이든, 전생이든 그녀에게 배운 것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가? 그렇게 생각해주다니 고맙군."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와인을 가볍게 흔들고 있는 글라디오는 잔을 입에 대며 물었다.
"흠... 자네는 출신이 어딘가?"
"동쪽 끝 지방에 있는 도론이라는 마을에서 왔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지방이로군."
"괜찮습니다.가주님뿐만 아니라, 도론 앞산 너머에 있는 마을만 가도 이름은커녕 위치도 모르는 게 태반이어서요."
나름 재치있는 답변에 글라디오는 나름 인자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그 뒤로도 계속 식사와 함께 문답이 이어졌다.
아리아스필과의 첫만남도,
발록 간의 전투도,
종자로서의 생활도,
마나체련술에 대한 정보도,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글라디오의 표정에는 흥미가 깊어져만 갔다.
"혹시 설명이 부족한 게 있습니까?"
"음... 이건 공적인 장소에서 묻긴 그렇다만, 혹시 지금 물어도 괜찮은가? 너무 궁금한지라 참을 수가 없군."
"그렇게 흥미를 느낀다면 답변하는 제가 더 영광입니다. 어떤 질문이죠?"
지금까지 잘 대답해왔다. 상황도 많이 누그러졌으니 그리 어려운 질문도 아닐...
"내 딸을 어떻게 생각하나?"
아닐 게 아니었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몹시.
<+--|-|--+>
EP.15 친구-4
[장인어른!! 따님을 제게 주세요!!]
<아가리 닥치시고, 아리아는 물건 아니니까 그딴 표현 쓰지 마세요.>
안 그래도 머리가 어지러워서 깨질 것 같은데, 저 늙은이는 지랄을 숨 쉬듯 내뱉는다. 유령만 아니었으면 배트로 얼굴을 난타시켜 붓기로 입을 꿰매버렸을 것이다.
"...그 질문은 너무 포괄적이네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우선 냉정히 이성적으로 묻는다. 이것도 아마도 레오 자신을 확인하기 위한 시험일테니, 침착하게, 냉정히, 풀어나가야 했다.
"글쎄, 어떤 의미인 것 같나? 레오나르도 군."
역시 강적이다. 간을 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군.
그렇다면,
"제가 생각하는 아리아스필 님은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정공법으로 나서는 수밖에.
"오호, 그런가?"
유연하고도 우직한 답변에 글라디오는 조금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요약이라도 해보겠나?"
"건방지다 말할 수 있겠지만, 아리아스필 님은..."
진심으로 답하는 것, 그것만이 답이었다.
"제 목표입니다."
그 대답에 식사 중이던 모두가 멈췄다. 단순히 말을 멈춘 것이 아닌, 식사도, 심지어 눈을 깜빡이는 것마저 멈춰졌다.
그럴 만도 했다. 들리기에 따라서는 당신의 딸을 꺾어버리는 것이 내 목표라는 뜻도 될 테니까.
"...그게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나오면 조금 장난기가 생기지.
"글쎄요, 어떤 의미인 것 같습니까? 가주님?"
"...흐, 흐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렇게 도발적으로 반문하자 가주는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이젠 웃는 사람을 볼 때마다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넌 어째 말하는 사람마다 조증을 만든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내 팔자가 어찌 되려고...>
레오는 농담으로 꼬여버린 기구한 인생을 되새기며 웃고 있는 글라디오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고정시키는 이유는 중간에 호흡곤란이 오면 아예 직접 응급처치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 재밌는 식사 시간이었네. 다들 식사가 끝난 것 같으니 먼저 일어나보도록 하지."
웃음을 가라앉히며 글라디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가 일어나자 다른 식구들도 식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맛있어 보이던데... 맛이 어땠냐?]
확실히 식사는 군침으로 탈수될 만큼 먹음직스러웠다. 그런 식사를 맛없다고 표현하는 건 미각이 없는 거나 다름없겠지.
<모르겠어요. 코로 들어가는 건지 눈으로 들어가는 건질 모르겠어서... 그것보단...>
이 식사가 최후의 만찬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
[내 딸을 어떻게 생각하나?]
이 말이 나왔을 때, 레오와 마찬가지로 아리아스필 또한 사고가 정지했다.
딸이라는 게 누구였지? 여기 아버지 딸이 한 명 더 있었나? 아니라면...
그건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으니까.
동공이 떨리며, 먹는 음식이 목에 걸릴 것만 같다. 간신히 음식을 삼켜도 더 식사를 이어갈 자신은 없었다.
그것보다 걱정되는 건 레오나르도의 대답이었으니까.
괜스레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런 지독하고 이상한 질문을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다른 마음 한편으로는...
'...뭐라고 대답할까?'
레오나르도의 답이 너무나 궁금했다. 최대한 고개를 숙이며 관심 없는 척, 대화를 관전했다. 조금 붉게 물든 귓가를 활짝 열어둔 건 덤이었다.
그리고 나온 답변은,
[아리아스필 님은 제 목표입니다.]
그 대답은 귓가의 열기가 귓바퀴를 넘어 얼굴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데 성공시켰다.
'목표...!?'
목표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단순한 라이벌? 아니면 호적수? 그것도 아니면...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볼과 뺨 너머가 뜨겁게 물들었다.
아버지가 처음 했던 질문처럼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기에,
점점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흥분을 주체못한 아리아는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듣기 위해 귀를 더 열었지만,
[글쎄요, 어떤 의미인 것 같습니까? 가주님?]
안타깝게도 그 의미까지 정확히 알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으으...'
달아오른 얼굴은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모호한 말의 의미가 소녀의 감정에 기름을 붓는 것 같았다.
오늘 그녀의 밤은 그리 편안치 못할 것 같았... 아니, 못 할 것이다.
***
그 만찬의 저녁 이후
레오는 현자를 마주 보며 의자에 앉았아 있었다. 앞에 있는 현자는 열띤 표정으로 수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암..."
[그러니까 그렇게 돼서...]
"하아아암..."
[마법의 기본은...]
"카하아아아아아암..!"
[아 좀 닥쳐!]
연속된 하품이 점점 길어지자 현자 그조차 역정을 내었다.
"하아아함..."
<죄송합니다.>
나른한 하품과 함께 레오의 오러로 대답했다.
[사과할 짓도, 사과를 동시에 하는 것도 능력이긴 하다.]
"하아아암...!"
<과찬이십니다.>
그 신묘한 테크닉에 현자의 안면 근육이 일그러지기 직전으로 다가갔다.
[비꼰 거야. 새끼야. 그리고 지금도 하품 처하고 있잖아.]
<그치만 어쩔 수 없잖아요. 지금 새벽 3시에요.>
현재 시각은 정확히 새벽 3시 2분, 이렇게 야심한 밤에 갑자기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도저히 하품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말이야. 이런 가르침을 받으면 누구라도 눈 또랑또랑하게 뜨고, 귀를 활짝 열어둔다고. 넌 이게 마법사로서 얼마나 가치있는 건지 몰라서 그래.]
확실히 지금의 레오로서는 현자의 가르침이 얼마나 지고한 것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수업을 이해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마법에 대한 관심이 처음부터 적었으니까.
<그럼 안 하도록 노력해보죠. 하아아아암...>
[야이 새끼야. 너 방금 오러로 하품했어.]
아, 들켰네.
[하... 왜 이런 자식을 후계자로...]
<현자님이 택한 후계자입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세요.>
[악으로 깡으로 패주랴?]
<그건 싫어요.>
어차피 유령인지라 서로를 공격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그럼 닥치고, 수업이나 들어.]
<노력하죠.>
현자는 헛기침하며 맥이 끊긴 수업을 이어서 시작했다.
[그러니까 마법의 기본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
[이건 대답해. 새꺄.]
<마법진이라고 하셨죠.>
시원치 않은 제자치곤 시원한 대답이었기에 현자는 언성을 줄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법의 기본은 마법진이지. 영창이나 수인이니 같은 건, 이후에 생긴 보조 기술 정도야.]
<그럼 마법진만 있으면 영창이나 수인은 필요 없습니까?>
[테크닉만 있다면, 부족하면 우선 그걸로 메꿔야 하지만.]
무술로 치자면 일종의 준비 과정이나 자세 정도로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이해가 쉬워졌다.
[그런 거로 놓고 보자면 넌 싹수는 괜찮은 편이야. 1서클 마법이라도 일주일 안에 익히는 건 쉽지 않거든.]
<현자님은 몇 번 만에 성공했는데요?>
[나? 바로.]
정말 새삼스러운 경악이지만 세상에는 괴이스러운 천재가 수두룩했다.
[낙심할 거 없어. 그 정도면 괜찮은 거지.]
<위로가 아프네요.>
[어쨌든 1서클을 배웠으니, 이제 뭘 해야겠냐?]
<글쎄요. 1서클을 더 잘해야겠죠?>
[...오...]
레오의 답변에 현자는 짧은 감탄을 내었다.
<...왜요? 혹시 틀린 답인가요?>
[너 생긴 거랑 다르게 싹수는 진짜 괜찮구나.]
저렇게 칭찬과 욕을 동시에 하는 테크닉은 지금 봐도 경이로웠다.
[솔직히 난 다른 등신들처럼 2서클에 목맬 줄 알았거든. 진짜 의외네.]
<의외일 것도 없죠. 배움에 기초만큼 중요한 게 어딨겠어요.>
[...그게 의외인데.]
욕과 칭찬이 한마디로 합일을 이루니 이보다 기묘한 감정이 요동칠 수 없었다.
이젠 불쾌하긴커녕 경이롭기까지 했다.
[어쨌든 네 말대로야. 지금은 어설프게 2서클을 익히느니, 1서클에 집중하는 게 나아. 심화 단계에 성급할 필요는 없지.]
<그럼 1서클 마법을 연습해야하나요?>
[그것도 방법이지만, 지금은 따로 생각해둔 훈련법이 있지.]
현자의 주변에 다시 마나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흡사 처음 마나수련법을 알려줬을 때와 비슷한 형상이었다.
[핫!]
기합과 함께 응집된 마나가 선의 형태로 엮어지기 시작했다. 줄기처럼 이어진 선을 곡선으로 이어지며 이내 원형으로 작도되었다.
[...자, 여기서...]
그 원 안에 또다른 원이 얇은 거리를 둔 채 다시 그려졌다. 그 원을 그리는 작업이 계속해서 반복되자 이내 속이 비어있던 원은 색을 칠한 듯 완전히 채워졌다.
[이런 느낌으로, 마나로 원 안에 계속 원을 그리면 돼.]
<그렇게 촘촘히 해야해요?>
[이렇게 해야 실력이 올라. 나 때는 말이야, 선생님이 시키면 고분고분...]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암.>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귓가를 활짝 열고 훈화를 듣기에는 너무나도 졸린 하루였다.
***
원을 그리는 것 자체는 그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이것조차 실력이 없었으면 발록과 싸울 때, 화염 마법이 발동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으으으...!"
그 속을 원으로 다시 채우는 과정이었다.
[왜 이렇게 끙끙대? 머리에 딱 힘 주고! 시신경에 빡 감 잡아!]
"아, 좀 닥쳐요. 집중 안 되니까."
말을 하는 동시에 선이 흐트러진다. 다시 마나를 불어넣으며 레오는 선의 중심을 고정시켰다.
[뭐 임마? 야, 난 몸뚱아리 없이도 바로 했어! 요즘 것들은 이래서 문제야... 열심히 해보지도 않고...]
"제 심장에 현자의 돌을 꽂아놨으니까 그런 거겠죠. 기생충마냥."
[뭐...뭐? 기생충?]
"기생충 아닙니까? 따지고 보면 지금 유령으로 돌아다시는 것도 제 마력 덕분이잖아요."
회귀의 여파일까,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현재 레오의 심장에 있는 현자의 돌에는 현자가 저장시켜놓은 마력은 한 줌도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술식으로 저장해둔 마법과 사념은 남아있었으니 이런 식으로 대화할 수는 있었으나, 레오가 마나가 고갈된다면 현자의 돌도 작동을 멈출 것이다.
[야야...! 내가 니 목숨을 구해주느라 그런 거 몰라!?]
"네, 구해주고 '기생'하셨네요."
[그럴 거면 차라리 심장에서 뽑아내든가!]
"어이구, 그런 소름끼치는 걸 어떻게 합니까요? 무서워서 엄두가 안 납니다요."
[하하... 시발... 왜 이딴 놈을...]
그렇게 총 5개의 원을 채워가던 와중,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시간이 제법 지났다고는 하나, 아직 야심한 시각인 건 분명했다.
[누구냐? 이 밤에?]
"글쎄요."
레오는 원을 그리는 것을 멈추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십니까?"
문을 열기 전에 레오는 문구멍 너머를 보며 조심히 물었다.
"늦은 시각에 미안하다만,내동기들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 당장 얘기할 수 있겠나?"
구멍 너머로 보인 것은 흰색 벽과 같은 무언가였다. 몇 번 확인한 끝에 그게 사람의 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목소리도 전에 들어본 익숙한 음색이었기에 레오는 별 의심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고맙군."
들어온 건은 거구의 남성이었다. 그는 견습 기사가 아니라 정식 기사라 믿을 정도로 육중한 근육을 자랑한 채 방으로 들어왔다.
"늦은 밤에 들어와서 미안하다."
"그런 만큼 중요한 사안이겠죠."
"그렇다."
짧은 대답과 함께 그는 의자에 앉았다.
[뭐냐? 쟤는?]
그런 기묘한 견습 기사를 보며 현자는 눈을 찌푸린 채 물었다.
<제 선배님입니다.>
"소개가 늦었군."
레오가 말한 걸, 이어 레오의 선배는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내 이름은 알폰스 암스트롱, 견습 기사이자 관계로 봤을 때는 너의 선배지."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알폰스 암스트롱, 전생에도 인연이 있던 인물로 선배로서도, 전우로서도 그의 근육만큼이나 듬직한 인물이었다.
[그런 녀석이 왜 이런 시간에 오냐? 그것도 남자들끼리.]
<좋은 분이니까 걱정하지 마시죠. 전생에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종자는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
...
......
[좋은 사람이래매.]
<+--|-|--+>
EP.16 친구-5
알폰스 암스트롱
지금은 단지 견습 기사일 뿐이지만, 전생에는 기사단 대장을 맡을 정도로 능력 있는 인물이었다.
능력이라는 단순히 전투력만을 논하는 것이 아닌, 전체적인 인망이나 인성 면에서도 높게 평가받아 기사의 귀감이라 칭송받았던 그였다.
평소에도 나름 인정하고 존경했던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종자는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지금 자신에게 사퇴를 권유하고 있었다.
[좋은 사람이래매.]
당황한 건 레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저런 말을 할 이유를 찾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단도직입적입니다만... 세부적인 설명도 해줄 수 있습니까?"
"그러지. 이유를 듣지 못하면 너도 납득 못 할 테니 말이야."
알폰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다른 종자들과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다. 기억하고 있겠지?"
기억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얼마 전 일이었다. 레오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들은 내 동기였지. 그들은 아직 종자지만, 난 얼마 전에 견습 기사로 승급했어."
[그럼 설마 그걸 복수하러 온 건가? 이런 게 좋은 놈...]
"오해하지 않아도 된다. 동기들이 잘못됐다는 것도 알고, 복수하려는 것도 아니니까."
복수가 아니라는 건 전생의 기억으로 이미 감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의 제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 어째서죠?"
"나 이외에 다른 종자들과 견습 기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
알폰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오늘 저녁, 내 동기들은 징계를 받은 후, 다른 견습 기사와 종자들을 불러 모으며 너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군. 그 중엔 나도 있었어."
그제야 조금은 흐름이 잡혔다.
"...썩 긍정적인 얘기는 아니었겠군요."
"태반이 너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었고, 품게 되었어. 다들 부조리함을 느끼기 바빴지."
이해는 되었다.
현재 레오는 표면적으로 낙하산에 가까웠고, 내부적으로 봐도 정식적인 형태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집사장과의 동행 및 가주와 한 대면 식사까지 생각하면...
불만이야 새어 나오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건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걸 극복하는 게 제 능력이겠죠."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아예 널 무시하는 수준이 아닌, 짓밟아버릴 테니까."
대강 예상은 갔다. 처음 했던 신고식 이상으로 자신을 쳐부수러 올 것이다.
그래야 조금 '공평'하고 '위신'이 선다고 생각할 테니까.
"늦든 빠르든 너를 철저히 누르겠지. 군기를 잡는다는 핑계로 너에게 어떤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아. 그러니..."
"하라고 하세요."
"그래? 뭐...?"
"해도 상관없다고요."
근데 상관없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나? 그때 그녀석들과는 비교가 안 돼. 심하면 경상으로 그치지 않고..."
"압니다. 격부터가 다르겠죠."
종자면 몰라도 견습'기사'인 이상 그들 또한 한 명의 기사로 인정받은 전사였다.
각종 무기술부터 마나량까지, 시종에 가까운 종자와는 비교하는 것부터가 무례겠지.
"근데 그래서요?"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래서라니..."
"이런 식으로 도망치면, 결국엔 다른 상황에서도 또 도망칩니다. 사람한테도 도망쳤으니 정작 싸워야 할 마물에게도 쉽게 도망치겠죠."
뭐든지 반복되면 일이 쉬워지는 법이다.
당장 했던 수련도 그렇고, 지금 권유한 도망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건 네가 어떻게 할 문제가..."
"해봐야 알죠."
"...뭐?"
"해봐야 아는 문제잖아요.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그걸 알아보는 게 결투고 싸움 아닙니까?"
그것은 단순한 호기가 아니었다.
알폰스의 눈에 비친 것은 레오의 깊은 확신뿐이었다.
그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일단 알겠다. 선택을 하는 건 너 자신이니까."
알폰스는 문손잡이를 잡으며 문을 열었다. 그때는 그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나도 널 그렇게 고운 시선을 보지는 않았다. 넌 통상적인 규칙을 어기고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니까."
문 너머를 갔을 때, 그는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널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크리스 님이 왜 데리고 왔는지 이해가 되는군."
"...감사합니다."
레오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할 필요 없다. 단순히 내 생각이 바뀐..."
"거기에 감사한 게 아닙니다."
레오의 감사는 그런 시선의 변화에 초점을 두지 않았다.
"탐탁지 않은 상대를 위해, 배려해준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겁니다."
알폰스는 굳이 이런 경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견습 기사들끼리 단합해 레오를 짓밟아놔도 그리 어색한 풍경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알폰스 씨는 이곳에 와서 경고해주셨죠. 그래서 감사한 겁니다."
이 말이 전생의 옛 동료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감사였다.
"...멋지군. 내 동료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번만큼은 네가 이겼으면 좋겠어."
"부응해 보이겠습니다."
문이 닫히고 알폰스는 방 밖으로 나갔다.
[근데 레오야.]
<예, 왜요?>
[아침 다 됐는데? 안 자도 괜찮냐?]
아침 햇살이 레오의 건조한 안구를 더 따갑게 만들고 있었다.
레오는 오늘 28분밖에 자지 못했다.
망할
***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너한테 반말해도 괜찮을 입장이 될 때까지.]
아리아는 몸을 뒤척인다.
"...으으..."
[제가 생각하는 아리아스필 님은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가냘프게 나오는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읏...흐으으..."
이불을 계속 발로 밀어내게 되었다. 마음 같아선 이불을 발로 차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이었다.
[아리아스필 님은 제 목표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한 소년이 눈앞에 나타났다.
짙은 검은 머릿결 아래에 빛나는 적안은 꿈이라 할지라도 생생했다.
[아리아, 넌 나의..]
눈과 입이 동시에 번뜩인다.
"흐아아아아아...!!!"
부우욱!!
꿈이 지나치게 생생했던 탓일까? 아니면 발힘이 너무 거셌던 것일까, 이불을 차자 이불의 천이 조금 뜯겨 나갔다.
"...흐앗?!"
그 소리에 당황해 아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버렸다.
"...으... 아끼는 거였는데..."
아끼던 이불은 발과 손아귀의 힘에 벌어져 솜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마 알프레드가 이걸 보면 분명 한소리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이..."
시계를 보자 그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어...?!"
시곗바늘은 이미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너무 오래 잤잖아...!"
그녀는 급하게 찢어진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계속 잠을 설친지라 역으로 침대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져 버린 것이다.
평소 시종이 깨우지 않아도 제 시각에 일어나던 아리아였기에 이런 늦잠에조차 그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기 전에 그녀는 급하게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내리고 얼굴을 닦았다.
짧은 시간, 급하게 했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깔끔한 차림으로 방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저택 안은 그날따라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시종의 숫자가 눈에 띄이게 적었다.
"...아, 리나!"
그때, 빨랫감을 옮기고 있는 하인인 리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부름에 리나는 놀란 눈초리로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구경 안 나가셨어요?"
"...구경? 무슨 구경?"
"지금 연무장에서 결투하잖아요. 아가씨께서 제일 먼저 가신 줄 알았는데."
그 상황까지 그녀는 부끄러운 몸부림을 치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연무장에서 하는 결투 같은 건 알 턱이 없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다들..."
"아가씨도 가보세요. 다른 시종도 재밌겠다면서 찾아갔어요."
"아니, 괜찮아. 차라리 못 잔 잠이나 더..."
"그러시군요. 그래도 새로 온 종자하고 다른 견습 기사들하고 결투를 한다는데..."
그 순간 아리아는 리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유는 '새로 온 종자'라는 단어에 숨겨져 있었다.
***
연무장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있었다.
아니, 차있었다는 표현보다는 둘러싸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마치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과 같은 형태로 저택 사람들은 둘러싸여 결투를 구경할 준비를 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냐고?"
급히 연무장으로 뛰어온 아리아 뒤에는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
투기장처럼 변한 연무장.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 나타난 사람.
'우연히'라고 하기엔 너무나 절묘했고, '고의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기묘한 상황이었다.
"...오빠?"
그걸 할 사람은 가문에 한 놈밖에 없었다.
"오늘 늦잠 잤나 봐? 사실이러면 제일 먼저 올 줄 알았거든."
리오스는 실눈을 구부려 눈웃음을 지었다. 눈꺼풀 사이로 작게 보인 벽안은 아리아의 얼굴을 되비추고 있었다.
"이게 뭔... 상황이야?"
"간단해. 싸움 구경하는 거지."
전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오빠가 이런 거야!?"
"오해하면 곤란해. 시작한 건 견습 기사들하고 레오나르도 쪽이었어."
레오나르도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아리아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렇게 되자 어째서인지 리오스의 웃음은 짙어졌다.
"난 가문의 장남으로서 그들을 잘 다독였을 뿐이야. 가장 좋은 해결책으로."
아리아는 저 연무... 아니, 결투장을 바라보았다.
"...저게?"
"무작정 말리기만 해선 해결이 힘드니까, 차라리 판을 크게 벌여준 거지."
"부추긴 거잖아!!"
"말은 원래 '어' 다르고 '아' 다른 법이란다. 동생아."
그런 궤변 따위를 들어줄 여유는 없었다. 그게 무시가 오히려 유희라는 듯 리오스는 큰 컵을 내밀었다.
"너무 그러지 말고, 너도 하나 해."
"이게 뭔데?"
희고도 노란 빛깔의 덩어리들이 컵에 산 형태로 소복이 쌓여있었다. 얼핏 봐서는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지 갈피도 잡히지 않았다.
"원정을 가게 됐을 때, 알게 된 음식이야. 팝콘이라는 건데 이럴 때 먹을려고 레시피를 배워놨지."
"...난 됐어. 기분 나빠."
팝콘 뿐만 아니라 리오스도 포함해서 한 말이었다.
"난 먹어보고 싶군."
흑암이라는 걸맞는 여성은 이명에 걸맞게 소리없이 둘의 곁에 섰다.
"아, 흑암님. 마침 잘됐네요! 식기 전에 드시죠."
"원래 기사란 탐험가처럼 모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그건 음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야. 아리아."
소설에서 배운 지론을 자랑스럽게 말하며 그녀는 입에 팝콘을 집어넣어 씹었다. 그러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흠...계속 먹어도 돼나?"
"물론입니다. 이럴 줄 알고..."
그는 다른 컵을 꺼내들었다.
"더 준비해놨죠."
"칭찬하지."
그 컵을 받아들며 크리스와 리오스는 팝콘을 즐기며 결투를 즐길 준비를 마쳤다.
"시작할 건가 본데요?"
리오스와 크리스는 어렵지 않게 관전할 수 있었나 아리아는 신장이 작았던 탓일까 쉽사리 현장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아리아는 두 일행을 뒤로하고 인파를 비집기 시작했다. 완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시종들이 영애인 자신을 무시할 일은 없었다.
흡사 바다가 갈라지는 것처럼 인파가 갈리더니 레오가 있는 결투장까지 길이 열렸다.
굳이 다가가지 않아도 레오가 보였을 정도였지만, 그녀는 호기심에 못 이겨 점점 그 방향으로 다가갔다.
레오는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앞 방향에 있는 상대만을 집중했다. 그 눈매는 처음에 봤던 수라의 눈빛과 완전히 동일했다.
"오, 그렇게 따르는 영애님이시잖아? 직접 봐주시니 기분 좋겠어? 안 그래?"
누구 봐도 도발의 어조.
기사의 격이 떨어지는 말소리가 크게 울리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도발하며 검을 잡아들었다. 검의 날은 예리하게 서 있는 것이 언제라도 레오를 벨 수 있었다.
"...할 말은 그게 다입니까?"
"뭐?"
"참고로 하나 알려드리죠."
레오가 사라졌다.
"검은 그따위로 잡는 게 아니야."
이미 움직였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단지 몸 뿐만이 아닌, 검도 마찬가지였다.
"...?!"
할 말은 그게 다일 수밖에 없었다. 찰나 순간 모든 건 끝나있었다.
수습 기사의 검은 부러지고, 레오는 그의 후방로 달렸다. 그리고 뒤에서 손잡이로 견습 기사 뒷덜미를 내리쳤다.
풀썩
견습 기사는 쓰러졌다.
승리의 함성은 없었다.
콜로세움 같다는 말이 무색하게 연무장은 마치 묘지 앞의 조문객들처럼 엄숙하리만치 조용했다.
침묵은 깬 건 결투의 승자였다.
"다음."
다음 상대를 찾으며 승자는 침묵을 헤집어놓았다.
<+--|-|--+>
EP.17 친구-6
"다음, 다음 안 나옵니까?"
분명 경어였다.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고 존대하는 어투 말이다.
그럼에도 분위기가 언제 깨져도 이상할 게 없는 살얼음판과 같았다.
관중석에 있는 사람은 숨을 죽였고, 승리를 예감하던 견습 기사들은 심장 고동마저 죽였다.
그 소년은 그림자가 드리운 눈동자로 다음 상대를 살폈다. 그 시선은 하나의 뱀이 수십 갈래로 찢어져 전신을 기어오르는 감각을 연상시켰다.
[꼬운 건 알겠는데 눈깔은 좀 피자. 저러다 가만히 있는 애들까지 쓰러질라.]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고, 졸려서 그래요. 30분만 자고 싸우는데 웃을 일이 어딨습니까?>
단지 그는 피곤해서 그랬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수습 기사들에게는 충분한 위협이 되어주었다.
"내...! 내가 하겠다!!"
수습 기사 중 창을 든 기사가 말했다. 검을 들고 싸웠던 기사보다 키가 크고 목청도 괜찮은 편이었다.
"올라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검을 집어던졌다.
"...뭐하는...?"
무시한 채 그는 무기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견습 기사가 들고 있는 무기와 같은 형태의 창을 꺼내 잡았다.
"...시작하죠."
"...뭐하는 거지...!? 검을 들어라!"
눈 앞의 견습 기사뿐이었을까, 주변 관중들도, 아리아마저도 이해하지 못했는지 다들 기색을 여실히 뿜어내었다.
'...레오나르도는 분명 검을 썼는데...?'
그녀가 본 레오는 롱소드 중심의 외검술, 또는 쌍검술뿐이었다. 그 검술만으로도 충분히 그 나이대에는 찾을 수 없고, 없을 만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레오를 제외한 이들은 몰랐다.
"창을 쓰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습니까?"
이인자의 독기를.
이류의 범재가 택한 길을 말이다.
"...날 놀리는 거냐?! 특기인 검으로 싸우란 말이다!!"
"제 특기가 왜 검술입니까?"
그 말에 관중이 조용해졌다.
대부분은 저 말이 어이없어 말을 않는 거였지만, 몇몇 이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저 말의 의미는 단순히 '검술을 못한다'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면 창술이 네 특기란 말이냐?!"
"설명을 말로 해야 합니까? 기사라는 작자들이 길바닥 광대처럼 떠드는 것도 우스우니 덤비시죠. 얼른."
도발은 효과적이었다.
기사의 반반한 얼굴에 선 핏대가 그 사실을 몇 번이고 증명해주고 있었다.
"건방진...!!"
연무장에 올라선 수습 기사가 돌격해왔다. 달려오는 예리한 창날은 언제 살갗에 닿아도 확실히 꿰뚫을 것이다.
카앙!
"엇...!?"
그래, 닿는다면 말이다.
레오의 창날은 그런 어설픈 날카로움을 인정하지 않았다. 쾌속의 창격은 레오를 향해 직진했지만, 결코 몸에는 닿지 않았다.
"자세는 괜찮고, 힘도 괜찮네요."
창을 몇 번 받아낸 레오가 내린 감상이었다.
"뭐...?! 결투 도중에 무슨...!"
당황에 멈추긴커녕 레오는 비평을 이어갔다.
"하지만 회전도 거지 같고, 반동과 탄력도 쓸 줄도 모르시군요."
그 모양뿐인 창술이 불쾌하다는 듯 일일이 창격을 흘려내며 레오는 말했다.
"이딴 게 창술이냐?"
레오는 그 평가를 일순 창에 담아내었다.
캉! 카앙!! 카아앙!!
"크악?!"
이어지는 삼연격, 같은 창임에도 전혀 다른 소리가 세 번 울리며 충격이 울려퍼졌다.
견습 기사의 창이 떨어지고, 기사는 그대로 바닥으로 넘어졌다. 창의 충격 때문이 아닌, 정신의 충격으로 인해 다리가 풀렸기 때문이었다.
"다음."
넘어진 패자에게 창날을 겨누며 승자는 유유히 외쳤다.
"다음 나오시라고."
더 이상, 존대는 느껴지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