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게... 무슨..."
결투장에선 환호도, 함성도 나오지 않았다.
그건 그 자리의 전투가 하찮기 때문이 아니었다.
때때로 자신의 상식을 넘어선 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게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너 이 자식...!"
한손검와 방패를 든 기사는 고함을 치며 달려들었다. 단지 관중이 보기엔 저건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흠이었다.
"검하고 방패의 연계가 지랄맞아. 이럴거면 방패는 버리라고."
마찬가지로 한손검과 방패를 든 레오는 반격을 이어갔다. 돌진한 기사의 검을 패링으로 튕겨내며 방패를 검으로 내리찍었다.
"그렇게 막으면 손목 다 부러져."
조언으로 끝으로 수습 기사는 쓰러져 널부러졌다.
"자, 다음."
다음이라고 외친지도 6번째였다.
지금까지 사용한 무기의 종류는 총 4가지, 장검, 창, 전투 도끼, 그리고 지금 든 한손검과 방패였다. 그 다양한 병장기를 전부 소화하며 레오는 철저히 적들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마치 그들의 실력과 비교라도 하듯, 레오는 아예 상대방과 무기를 똑같이 장비한 채 상대해왔다.
"...이건 말도 안 돼!!"
제일 먼저 진 롱소드의 기사는 레오에게 삿대질하며 외쳤다.
"뭐가요?"
땀은 한방울도 흘린 채, 레오는 많이 건조해진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너 일부러 이런 거지!?"
"그니까 뭐가요?"
주어가 없는데, 특정한 행동을 꼬집어 설명하기는 무척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설사 할 수 있더라도 저런 태도로 묻는다면 레오는 공손히 답변하지도 않을 테고.
"우리를 망신주려고...! 이딴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잖아!!"
"세 번째 물어봅니다. 뭐가 어떻게 망신을 줬는지 제대로 말하세요."
분명 언성은 그보다 몇 배는 낮았다. 하지만 위압은 그 허세 뿐인 목청 따위는 누르고도 남았다.
"...왜 무기를 같은 걸 쓰는데!? 우릴...!"
"쓰고 싶으니까요."
단순한 이유였고 근본적인 이유였기에 그들은 더욱이 납득하지 못했다.
"장난쳐?! 고작 그딴 이유로 사람 망신을 줘!?"
"장난?"
레오는 검을 잡아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수직으로 꽂아넣었다.
"이게, 장난으로 보이십니까?"
레오는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당신들 뭔가 크게 착각하나 본데."
눈가에는 붉은 동공이 음영 아래에 빛나고 있었다.
"싸움을 건 것도 당신들이고, 판이 커지는 걸 인정한 것도 당신들이에요."
점차 그 적안은 견습 기사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전 연속으로 일곱 명이나 상대해야 했죠? 그것도 똑같은 무기로."
말문이 막혔다.
저 말과 행동에 견습 기사 일행들은 혼란스러웠다.
자신들의 입을 열 수 없는 건, 고작 13살의 소년에게 논파 당한 탓일까, 아니면 20년도 살지 못한 어린 몸에 서려 있는 위압감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수치였다.
기사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말이다.
"그러면."
레오는 이미 견습 기사의 얼굴에 다다라 있었다.
"이건 망신을 준 걸까요? 아니면 저 자신에게 핸디캡을 걸고, 당신들에게 기회를 준 걸까요?"
"...이...평민놈이...!"
레오는 짧은 생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인간은 자신이 불리할 때, 태생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트집을 잡는다.
굳이 찾을 필요도 없이 앞에 있는 저 귀족의 견습 기사가 그 예시였다.
"예, 저는 평민입니다."
레오는 그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 사람들 모두 고귀한 혈통을 지닌 인간으로 수두룩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민일 겁니다. 아마 부모하고 핏줄을 바꾸지 않는 이상, 전 영원히 평민일테죠."
그리고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 비천함에 욕하고 지탄해도 상관없습니다. 전부 사실이고 저도 개의치 않으니 얼마든지 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근데 기억해두시죠."
그 소년이, 그 청년이 오직 바라는 건.
"당신은 그런 저조차 이기지 못했습니다."
단지 각인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그 비루한 태생이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레오는 주변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제 출신, 직급, 오게 된 경위, 그리고 존재 자체가 불쾌한 사람이 있다는 건 압니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맞는 말이었기에 입을 닫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어린아이가 스스로 저런 말을 외친다는 것에 그들은 할 말을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쫓아낼 이유가 있다면 가감 없이 가져오세요. 타당하다면 언제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저 어린 소년은 누구보다 자신의 처지를 알며, 자신의 위치를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없는 동안은 전 제 목표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누구보다 높은 곳을 목표하고 있었다.
"제 목표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전 언제든 그걸 극복하고, 배제할 거고요."
이건 허락이나 통보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게 제가 선언하고 싶은 말입니다."
선언이었다.
연설이라 말해도 무방한 길고도 짧은 선언이 끝났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레오는 그렇게 말하며 연무장을 걸어나갔다.
[어디 가는데?]
레오의 걸음에 자신보다도 경력 있고, 고직인 시종과 기사들이 길을 비켰다.
<자러요. 조금은 자도...>
털썩
그 순간 레오는 넘어졌다.
"레오나르도!!"
아리아가 달려와 쓰러진 소년을 붙잡았다.
"의사... 아니 치료 사제를 불러라!! 빨리!!"
크리스는 급히 사람을 불렀다. 시종들은 마찬가지로 급하게 그 명령을 따라 달려갔다.
"일어나봐...! 레오나르도...!"
아리아는 쓰러진 레오나르도를 흔들며 이름을 연신 불렀다. 따귀를 때리지 않았다는 점에 있어서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역시 무리하고 있었군. 그렇게 빠르게 회피하기 위해선 마나에 무리를 줘야할테니..."
사람들은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레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야, 너 깨어있지?]
현자는 아니었다.
<...>
[크큭...]
<닥치세요.>
그 '말'은 자명종보다 효과가 좋았다.
[근데 왜 그러냐? 안 일어나도 돼?]
<일어나기 쪽팔립니다.>
레오는 눈을 감은 채로 방금 전의 해프닝을 다시 떠올렸다. 분명 연설은 혀를 꼬고 씹지 않은 채 잘 이어갔지만, 문제는 걸어갈 때였다.
[어떻게 축지법 쓰던 새끼가 돌바닥 틈에 넘어지냐? 그것도 능력이긴 하다. 대단해.]
<닥쳐요. 잠 못 잤는데, 마나까지 몰아서 써서 그렇다고요.>
이미 마나는 동나버린지 오래였다. 기절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발밑에 돌부리가 있는지, 홈이 있는지는 구분이 안 갈 정도로는 지쳤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언제 일어나게?]
<안 일어날 겁니다.>
[뭐? 왜?]
<동방에는 이런 속담이 있죠.>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
레오는 넘어진 김에 다 못 잔 숙면을 취했다.
***
따뜻하고도 포근한 기분, 이건 부드러운 이불만의 감촉만이 아닌, 고급 침대의 푹신함도 몸을 충분히 받쳐줘야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었다.
[뒤져...]
저주가 들렸다. 환청일테니 무시하고 이 기분을...
[뒤져라...]
저 치매 노령은 무시하고 침대에...
[뒤져서 지옥에나...]
<작작하세요.>
눈을 슬며시 뜨며 레오는 대답했다. 이젠 오러로 짜증내는 게 더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일어났냐? 그럼 다시 뒤져.]
<뭔 개소리에요? 대낮에 약주 했어요?>
[너 때문에 약 빨은 기분이긴 해. 그리고 지금 밤이다.]
그러곤 현자는 턱짓으로 침대 아래쪽을 가리켰다.
"아리아스필?"
침대 아래에는 아리아스필은 잠들어있었다. 같이 발록을 잡았을 때처럼 그녀는 내 곁에서 잠이 들어있었다.
[걔 네가 계속 걱정된다면서 여기 계속 남겠다고 했어.]
<그럼 제가 뒤지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원래 너 같은 놈은 죽어야 제 맛이야. 미소녀한테 두 번이나 간호 받은 새끼는 말이야.]
<...>
뭔가 이해가 되는 듯하면서도, 눈빛으로 경멸을 쏟아내는 걸 참아낼 수는 없었다.
[야, 눈 깔아.]
<아 예.>
눈 깔자 아래에 있는 아리아스필이 있었다.
"...레오...나르도..."
아리아스필은 레오의 이름을 조금씩 중얼거리며 그가 덮고 있는 이불을 쥐고 있었다.
'...전생하고는 좀 다르네.'
자신이 달라진 탓일까, 지금의 아리아스필은 자신이 기억해왔던 그녀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조금 둥글어졌다고 해야할지, 상냥해졌다고 해야 할지 아리아스필이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꼭 성격뿐만이 아니라 외모로도 그녀는 충분히 매력을 끌 만한 소녀이기도 했고.
부드러워 보이는 볼도 그렇고, 만지면 정말 고울 것 같은 피부와 머릿결도 정말...
"...쓰읍... 이쯤에서 일어날까."
괜히 피곤하니 잡생각이 드는 거다.
레오는 이불을 조심히 걷은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아리아스필을 부드럽게 잡아 가볍게 들어올렸다.
[뭐하게? 덮치...]
<지랄할 거면 아가리 싸물고, 질식해 죽어주세요.>
날도 추운데 침대에라도 눕혀놔야겠다. 레오는 그녀를 양손과 팔으로 상냥히 안으며 침대에 놓을 준비를 했다.
"실례하겠네. 레오나르도 군."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이 열렸기에 반응도 하지 못했다.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괜..."
가주 글라디오 라인하르트였다.
즉 아리아스필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었다.
"...아."
어두운 방, 넓고도 따듯한 침대, 그리고 헤집어진 이부자리.
마지막으로 자고 있는 아리아를 양팔로 안고 있는 자신.
한 소녀의 아버지는 그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가주님,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30초만 시간을 주세요.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
EP.18 친구-7
침묵이 흘렀다.
고요하고 조용한 시간만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
마치 정적이 방 안에 고여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의 침묵이 이어졌다.
"...왜 가만히 있나?"
그게 흐르고 흘러 깊게 담겨진 침묵을 퍼낸 말이었다.
"예?"
가주는 아리아스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침대에 눕힐 생각 아니었나? 계속 들고 있으면 깰 것 같다만?"
너무나 정확하고 냉정한 분석에 레오가 오히려 당황했다. 생각해보면 저게 일반적인 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13살의 소년이 가주의 저택 안에서 또래의 딸을 덮친다는 것은 상식을 넘어서도 한 참 넘어섰다.
[쯧, 재미없게 됐...]
<재밌는 걸 보고 싶으면 거울이나 보세요.>
저런 면상이 있는데 웃을 일을 찾게 그리 쉽겠는가. 거울만 봐도 하루하루가 웃음으로 넘쳐날 것이다.
[나 유령이다.]
아차, 그러면 본인 얼굴을 못 볼 수밖에 없었다.
저런 코미디를 다신 경험할 수 없다는 것에 애도를 표하며, 레오는 다시 가주에게 집중했다.
"아, 맞습니다."
레오는 팔에 안아든 아리아스필을 살포시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 위로 이불을 덮은 것은 종자로서 당연한 배려였다.
"고맙군. 잠시 할 얘기가 있는데 나와줄 수 있겠나? 너무 시끄러우면 깰 수도 있으니."
레오는 그 말에 따르기라도 하도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방 밖으로 나갔다. 글라디오는 그 행동에 얇은 미소를 지으며 레오와 함께 저택을 걸어다녔다.
"좋은 밤이로군. 계절에 비해 선선한 날씨야."
저택 밖을 나가 글라디오는 정원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군요. 확실히 이런 밤은 놓치면 후회하겠습니다."
레오의 말에 또다시 재미를 느낀 건지 글라디오는 이번에는 굵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참 드문 사람이야. 아, 물론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일세."
"제가 유별나다는 소리는 많이 듣습니다."
"긍정적인 방향인가?"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상상은 가주님 자유였지만, 그게 어떤 추측을 불러올진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았다.
"자넨 용병치고는 훌륭히 겸공하고, 그렇다고 귀족이라고 하기에는 경이롭게 야성적이네. 내 비록 선대 가주님들에 비하면 짧은 삶을 살았지만, 자네와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지."
처음 가주님을, 그러니까 전생에 가주을 뵈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평가였다. 전생에는 그저 '호기로운 소년이로군.' 정도의 평가 정도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너무 높게 평가한지라 조금 부끄럽군요."
"너무 스스로를 낮게 평하지 말게. 내 진심이니 말이지."
정원의 산책로는 저택의 크기에 비하면 조촐한 규모에 불과했다.
'어디까지나 저택의 크기에 비하면'이었지만, 이 정원은 여타 저택의 분위기와는 다른 분위기를 내보였다.
"난 처음 이 산책로를 봤을 때, 의아함을 느꼈네. 라인하르트의 위엄과는 조금 거리가 있게 보였거든."
가주님은 수풀과 수풀 사이의 길로 걸음을 걸어나갔다.
"라인하르트에선 위엄이 없는 걸 찾는 게 더 힘들 것 같습니다."
"하하, 맞는 말일세. 하지만 이 산책로의 장점은 바로 그곳에 있더군."
그 산책로를 걸으며 그는 자신의 지론을 꺼내었다.
"알다시피 위엄은 격을 세우기 마련이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게 하고 격조를 만들어."
그 말에 레오는 동의했다. 종자로서 살면서 그 소년이 제일 먼저 배웠던 것은 검술도, 마나호흡도 아닌, 예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위엄은 때론 사람에게 거짓을 만들기 마련이야. 위선을 만들고, 아부를 지어내지."
"안타깝지만 정론이군요."
"그래. 그래서 이 정원은 좋은 것 같네. 적어도 이 장소에선 위엄이 덜 할 테니 긴장도 덜하지 않겠는가?"
"라인하르트의 혜안엔 언제나 탄복하고 있습니다."
그 라인하르트에서 익힌 예절을 선보이며 레오나르도는 대답했다.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
저런 도발에도 대답하지 않는 인내를 만들어줄 정도의 교육이었으니 언제나 탄복할 만도 했다.
"...오늘 한 결투와 연설은 잘 봤네."
"물의를 일으켰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할 일은 아니지. 자네는 자네의 목표와 할 일에 충실했을 뿐이야. 사과를 꼭 들어야겠다면 판을 키운 사람에게 들어야겠지."
그 사람은 라인하르트 가문의 장남이자 등신이었으며 굉장히 장래가 유망할 거라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지."
"그건 염두해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난 고민할 수밖에 없었네. 자네를 어떻게 대우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었지."
'처리'에 대한 고민이었다면 걱정했을지도 몰랐지만, '대우'라는 용어에 레오는 조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만약 자네가 이대로 종자로 있게 된다면, 아무도 납득하지 않을 테지. 강한 인물일수록 높은 직급을 놓는 것이 정당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능력 순으로 자리를 배분하는 건, 적재적소의 기본 원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직급을 주자니 나올 반발이 어렵게만 느껴졌네. 그 직급을 다른 이들이 인정할지도 미지수였고."
그것 또한 정당한 반론이었다. 레오는 실력 이외에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그만큼 공격하기도 쉬웠다는 의미도 되었다.
"마찬가지로 맞는 지적입니다."
"그렇기에 고민은 깊어졌네. 어느 쪽을 고르든 단점은 확실히 존재했으니까."
그리고 가주님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래서 낸 절충안이 있네."
"어떤... 안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가주님은 레오의 눈을 마주 보며 방도를 말했다.
"레오나르도 군, 아리아의 기사가 되어주게."
"...호위기사 말입니까?"
예상 외의 제안에 조금 당황한 듯, 고르지 못한 목소리로 레오는 물었다.
"호위기사라... 물론 호위도 해야겠지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그것만이 아니야."
그는 저택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각도로 봐선 아리아가 자고 있는 방의 창가였다.
"아리아, 아리아스필은 내 딸이지만... 다른 사람하고 많이 달랐지. 특별하다는 말로 끝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범접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분이긴 하시죠."
"하하, 그렇게 봐주니 내가 다 고맙군."
웃고는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어두웠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리 단순히 생각하지 않았지. 시기나 질투와 같이 단순한 악의 정도는 귀여울 정도로..."
아리아스필을 질투하고 시기한 사람은 당연히 있었다. 레오도 한때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고. 하지만 그녀는 그런 질투와 시기가 무의미하리만치 경이를 일으켰다.
"...경외인가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아비인 나조차 저런 재능은 무서우니까."
"원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죠."
"...하하, 자네는 언제나 여유롭군."
레오를 보자 그의 어두운 눈빛에 생기가 깃들었다.
"생각해보면 아리아가 변한 건, 자네랑 만난 뒤였어."
"...검술을 봐주긴 했습니다만..."
"그런 의미가 아닐세."
다른 의미를 떠올리는 건 그리 오랜 시간과 많은 생각을 소요시키지 않았다.
"아리아의 눈에는 권태로움이 가득했어. 살고 있는 시간의... 삶의 밀도 자체가 달랐지. 아마 나조차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걸세."
아버지였던 탓일까, 아니면 덕분이었을까.
글라디오는 누구보다 딸의 이질성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레오조차 그녀의 권태로움을 이해하기까지 년 단위의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자네를 만난 뒤로, 아리아가 처음으로 했던 말이 있었네."
한 소녀의 아버지는 조금 씁쓸하면서도 밝은 미소를 지었다.
"즐겁다고 했네."
"...즐겁다고요?"
"수련이 즐겁다고 말했어. 그게 정말 즐겁다고 말했지."
비교하긴 어폐가 있었지만, 레오조차 정말 드물게 들었던 말이었다. 아마 아리아에겐 처음이라 말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희귀한 단어였다.
"그 말에 난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질투를 했어. 내가 여태까지 느꼈던 감정은 그저 장난으로 치부될 정도로 말이야."
레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나보다 앞서 딸을 즐겁게 한 건 누구였을까, 어떻게 딸을 즐겁게 했을까. 정말 그 말 한마디에 갖은 생각이 머리를 채웠지."
그러기엔 저 가장의 말이 너무나 진솔했기에
"그리고 자네와 식사했을 때, 나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네."
레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그럴만한 사람이라는 걸, 질투나지만 자격이 있는 아이였어."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너무하는군. 거기서 겸손하면 질투한 내가 뭐가 되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레오는 그 칭찬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은 회귀라는 편법을 사용했으니까.
"그래서 부탁하고 싶네."
그렇기에 저 평가는...
"아리아의 곁에 있어주게."
"..."
"무작정 좋은 말만 해주고 이해해줄 필요는 없네. 때때로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지적해주고, 옳지 않다고 느끼면 말려주게. 그 일에는 자네가 제일 적합할테지."
"...그건..."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다양한 관계에서 가능했다. 부모 또는 스승, 아니면 형제... 하지만 레오의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친구...가 되어달라는 건가요?"
건방진 표현일 수도 있었다. 일개 평민의 용병이 용사 가문의 영애와 친구라니, 소설에서조차 허황되다 느껴 사장된 지 오래였던 이야기였다.
"그랬으면 좋겠군. 기사가 되어달라는 말도 그런 의미였네. 아무래도 아리아의 기사가 되어준다면 그러는 게 더 편하겠지."
"...그렇군요."
그럼에도
"물론 자네가 거북하다 느낀..."
"하겠습니다."
그게 망설일 이유는 아니었다.
"...고맙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승낙하는군."
"...혹시 처음 제가 가주님과 만났을 때, 했던 말이 기억나십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아리아스필 님은 제 목표입니다."
그게 레오의 목표니까.
"..흐하핫...!"
그 목표는 그는 조금 웃음을 터뜨렸다. 단단히 동메여왔던 긴장의 끈이 풀리듯, 실없는 웃음이 말이다.
"이거 미안하군. 연무장에도 분명 선언했을 텐데, 내가 잊고 있었어."
"괜찮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고 각인시킬테니까요."
"안심이 되는군. 마음이 한결 놓여."
가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이 많이 어두워졌군. 너무 늦은 시간까지 불러세웠군. 들어가 봐도 좋네."
"늦은 시간을 낼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쇼. 가주님."
레오는 그렇게 말하며 정원 밖을 나가 별채의 숙소로 돌아갔다.
"...후..."
방 안으로 들어간 레오는 얼굴을 쓸어넘겼다. 얼굴에는 땀이 흠뻑 젖어있었는지 물기가 묻어 잡혔다.
"...어?"
그런데도 이상했다. 얼굴에는 미묘한 습기가 남아있었고, 눈가에도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시야가 흐려지는 것이 눈 앞에 안개가 낀 것만 같았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너 우냐?]
자신은 울고 있었다.
우는 사유는 찾을 수 없었다.
없었기 때문이 아닌, 너무 많았기에.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으..."
전생의 삶이 무의미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를 이기기 위한 노력이,
거기에 바쳤던 삶이,
처음으로 그 가치가 인정받았다.
그 감상에 조금 눈에 물이...
[야 우냐? 울어? 우냐 새꺄?]
고이기도 전에 저 양반이 감상을 유리잔 갈기듯 깨부쉈다.
내 인생이란.
<+--|-|--+>
EP.19 전속 기사-1
침대에서 눈을 떠자마자 아리아는 숨을 들이켰다.
"...쓰읍..."
숨과 함께 깊은 향기가 코를 흝으며 폐로 들어왔다.
"하..."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몹시 익숙하면서도 자주 맡지 못해 아쉬웠던 향내음, 이건...
"레오나르도...?"
반밖에 떠지지 않은 완전히 떠진다.
이 향의 주인이 누군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나...! 나 왜 여기서...?!"
아리아는 이불을 걷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분명 자신은 레오나르도의 옆에서 그가 일어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는 생각나지 않는다.
"...어떻게 된..."
똑똑
그 몽롱함 속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리나에요. 들어가도 될까요?"
"...어?"
동의의 의미는 아니었지만, 몸에 잔류하고 있는 잠기운은 그걸 모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저번에 늦잠을 주무신 것 같아서요. 깨워드리려고 왔는데... 혹시 방해됐나요?"
리나의 말에 그녀는 살짝 뻣뻣한 입으로 대답했다.
"아, 아니야. 그냥 잠이 덜 깨서 그래."
"그러시군요. 다행이에요."
"저기, 레오나르도는...? 어디 갔어?"
리나는 창가 밖의 별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글쎄요. 아무래도 레오나르도 종자님은 별채에 계시니까요."
"그래...?"
떨떠름한 기색을 무표정에 녹여낸 채 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혹시 머리를 빗어드려도 될까요? 많이 헝클어져 계셔서요."
"아, 고마워."
리나는 아리아의 뒤로 가, 빗으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어제... 레오나르도는 어디로 갔어?"
아리아는 뒤에서 머리를 빗어내리고 있는 리나에게 물었다.
"그게... 방을 나가시고 가주님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셨어요."
가주라는 단어에 아리아의 몸이 움찔거렸다.
"...아버지하고...?"
"네, 같이 정원을 산책하고 계셨어요. 말씀을 나누던 것 같았는데..."
"얘기를 나눴다고?"
그날, 밤에 시간을 내면서까지 이야기를 나눌만한 화제는 하나밖에 없었다.
일개 종자가 가문의 주인과 직접 대면해 얘기할 만 것은 그 일 이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무슨 얘기를 나눴어...?"
"그건 모르겠어요. 저도 멀찍이서 보기만 해서요. 하지만..."
조금 리나는 말에 뜸을 들였다. 괜한 사족을 붙이는 것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르도 종자님은 우시는 것 같았어요. 별채로 가는 길에 얼굴을 봤거든요."
그 순간.
"...울었다고?"
그때, 아리아는 정색했다.
정색한 얼굴을 봤기에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뒷편에 있는 리나조차 그녀가 정색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네?"
"레오나르도가 울었다고?"
말의 어투, 몸의 자세, 그리고 주변의 공기마저 엄정한 기세로 깔려있기에, 누구라도 아리아가 정색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저도 정확히는..."
"지금 레오나르도 어딨어?"
당황해하는 리나의 말을 자르며 아리아는 단호하게 질문을 내었다. 분노가 차갑게 울리는 것이 아무 죄 없는 리나조차 섬뜩함을 느꼈을 정도였다.
"...아마 별채에..."
"잠깐 갔다 올게."
허락을 구하는 말은 아니었다. 통보에 가까운 의사를 남긴 채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머릿결은 완전히 다듬지 않았지만, 그게 그녀의 외모를 낮추는 요인이 되지는 못했다.
급하다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기계적으로 보일 만큼 정확하게 그녀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침은 거른다고 말씀드려줘."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여유롭게 아침을 먹을 시간은 없었다. 아버지께 무슨 말을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레오나르도가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무거우면 무거웠지 가벼운 일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마 쫒아낸 건 아니겠지...?'
그것만큼은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만은 막아야했다.
아버지와 싸운다고 할지라도 레오나르도가 가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
"조식은 거르실 겁니까?"
"어, 지금 당장..."
그 순간 그녀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리나가 대답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목소리로 보나, 방향으로 보나 리나가 대답하기엔 상황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좋은 아침입니다. 아리아스필 님."
그 목소리의 주인이 지금 아리아가 만나러 갈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르도?"
"예, 부르셨습니까?"
레오나르도는 정중한 태도와 함께 미소를 지었다.
"...너...너 간 거 아니었어?"
"어디로 갑니까?"
"그니까... 아버지랑 얘기해서..."
"아, 그 건에 대해선 저도 말씀드려야할 것이 있습니다."
당황한 아리아스필에게 레오나르도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에게 정중히 말을 올렸다.
"종자 레오나르도, 가주 글라디오 라인하라트 님의 명령을 받들어 아리아스필 님의 전속 기사가 되었습니다."
"...어?"
당황한 표정은 더욱 당황스럽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삐뚤어진 표정은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그러니까 산책하는 동안, 그렇게 정해진 거구나."
"예, 어디까지나 가주님과 제가 결정한 일이니 아리아스필 님이 거절하신다면..."
"아니야!"
단호하면서도 감정적인 외침.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던 레오마저도 놀라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나, 난 괜찮아! 전속 기사가 돼도 좋아! 어!"
거절할 이유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레오나르도가 가문에 올 때부터 바라던 일 아니였는가.
두 팔 벌리고 환영해도 모자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뭘 하는 거야?"
그녀는 조금 기대가 찬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물론 아주 '조금'이었기에 눈치가 부족한 레오가 깨달을 정도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는 아리아스필 님의 계획과 생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전 그 근처에서 동행할 거고요. 물론 개인적인 시간을 원하신다면 동행은 안 하겠습니다."
사실 그런 걸 물은 것보다는 하고 싶은 걸 질문한 것에 가까웠으나, 레오의 무딘 눈치로는 그런 사실까지 밝혀낼 수 없었다.
"그럼 연무장으로 가자."
"조식은 안 드셔도 괜찮겠습니까?"
"응, 배는 안 고파."
그것보다는 레오와의 훈련이 더 기대되었다.
***
연무장에는 황량한 평야를 보는 것처럼 조용했다. 그 원인이 자신인 걸 레오는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럼 시작하죠."
레오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마나체련술이었으나 기술적인 면모에서 더욱 섬세하게 발전되었다.
"알았어!"
그녀도 검을 잡으며 체련술을 시작했다. 아리아도 마찬가지로 한층 더 세련된 마나체련술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쟤 진짜 천재이긴 하네.]
<괜히 제가 질투했겠습니까?>
주변을 떠다니는 마나의 입자들이 아예 아리아를 향해 휘몰아치고 있었다. 레오 정도의 기술이 없었다면 그녀 곁에서 마나수련을 하는 게 무의미하고 벅찰 정도였다.
[근데 저런 녀석을 도대체 누가 죽인 거야?]
그 말에 레오의 표정이 굳었다.
어쩌다 나온 말일 뿐이었다. 눈치가 없다면 없는 거였고, 무례하다면 무례한, 그정도의 발언일 뿐이었다.
하지만 레오의 표정은 유례없이 굳어있었다.
<...그건...>
"레오나르도?"
그 기색을 눈치챈 아리아는 레오나르도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아."
"...괜찮습니다.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을 뿐이에요."
"그럼 조금 쉴래?"
"아뇨. 수련을 하는 편이 머리를 맑게 해줘서요."
그 말에 아리아는 동의했는지 다시 검을 잡으며 훈련을 시작했다.
[혹시 내가 심한 말 한 거냐?]
<괜찮습니다. 안 심한 말 듣기가 더 드문 분이면서.>
[...그래그래, 내가 쓰레기지.]
<쓰레기라니요. 그래도 쓰레기는 한때 쓸모라도 있었다고요.>
[뒤질래?]
레오는 다시 안색을 풀며 검을 휘둘렀다.
"근데, 레오나르도."
마찬가지로 다시 검을 휘두르는 아리아가 물었다.
"레오나르도는 누구한테 무기술을 배운 거야?"
"무기술 말인가요?"
"그렇게 많은 무기를 다루는 사람은 처음 봤어. 가문에서도 그런 사람은 없을 거야."
레오는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며 대답했다.
"가르친 사람은 딱히 사람은 없어요. 손에 집히는대로 쓰다 보니 이렇게 된 거죠."
각종 무기술을 익히게 된 건, 단지 아리아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돈이 없으니 무기를 구할 수 없는 상황도 많았고, 때때로 상대방의 무기를 뺏어쓰거나 주변에 있는 물체를 무기 대용으로 쓸 때도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쓸 수 있는 무기가 늘어났고요."
물론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아리아 때문이 컸지만 그건 아직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대단해. 혼자서 그렇게 배운 거잖아."
"그런가요? 사실 이건 어머니께서 용병 때문인 것도 컸어요."
레오의 어머니, 그녀는 나름 유명한 용병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주변 마을 사람들은 레오 고향 지명은 몰라도, 레오 어머니 이름은 꼭 기억해둘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구나. 몰랐어."
"모르는 것도 당연해요. 전국적으로 유명한 건 아니었거든요."
"그럼 어머니는 어디 계셔? 여기서 멀어?"
그 말에 래오는 태연히 대답했다.
"죽었어요."
"...죽었다...고...?"
너무 덤덤히 말하자 듣는 아리아 쪽의 표정색이 변했다.
"대략 10살 때쯤이었나요, 엄마가 3달 정도 집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레오의 어머니는 용병으로서 먼 곳까지 오가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레오가 아기였을 당시엔 그러지 않았지만, 레오가 말을 깨치고 걸음걸이도 좋아지자 일주일 단위로 들어오지 않은 경우도 종종 생겼다.
[혼자 어떻게 살았냐?]
<뭐... 마을 사람들도 제법 도와줬죠. 게이트가 열렸을 때, 종종 어머니께서 잡아주시기도 해서 보답이라는 느낌으로요.>
하지만 3달이나 안 들어오면 죽었다고 의심할 법도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사정이 있어서..."
"아, 근데 이렇게 생각하라고 한 건 어머니 쪽이에요."
"음...?"
"용병이 대략 3개월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죽은 거나 다름없대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죽었다고 생각해달라고 말했죠."
그 설명을 들은 사람의 표정은 각각 달랐다. 아리아는 동공에 공진이라도 일어난 듯 급격히 떨리고 있었고, 현자는 이국의 문화에 충격이라도 먹은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진도가 너무 빠른데?]
<워낙 조기교육을 좋아하시는 분이셨어요.>
그렇게 된 뒤의 일은 간단했다.
어머니의 무덤을 만든 뒤,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현재가 되었다.
"...그...그렇구나."
"그런 셈이죠."
"...미안, 괜히 물어봐서..."
"괜찮아요. 사람 일이 다 그런 거더라고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꼭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럼... 좋은 일도 있었어?"
레오나르도은 웃으며 말했다.
"아리아스필 님과 만났잖아요. 그리고 친해졌고요."
조금 낯간지러운 말이긴 했으나 이건 확실히해둘 필요가 있었다. 전에 친구와 존댓말 문제로 생겼던 논쟁을 생각하면 이건 더욱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있었다.
물론 옆쪽에 있는 현자가 사람을 쓰레기를 넘어 폐기물 보듯 쏘아보고 있었지만... 어차피 노망났으니 무시하기로 했다.
"...그, 그렇구나..!"
아리아스필은 고개를 돌려 친해졌다는 말을 연신 읊었다. 돌린 고개는 분명 붉게 익었겠지만, 레오는 경이로울 정도로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혹시..."
잠시 머뭇거리던 아리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날 아리아...라고 불러줄 수 있어?"
"...아리아라고요?"
존댓말을 그만두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괜찮지 않겠냐는 생각도 들었기에, 그녀는 본인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이었다.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레오가 용기에 응하는 대답은 그 정도였다.
얼굴에 열기가 급격히 식으며, 올라간 입꼬리에도 힘이 빠진다.
역시 레오나르도는 자신을 그리 특별히...
"하지만 원하신다면 '아리아 아가씨'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어떠신지요?"
화악, 이라는 의성어가 실제로 체감되었다. 최대한 얼굴을 가려보지만 홍조는 물에 퍼지는 붉은 잉크처럼 피부 전체에 뻗어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레오로서는 단지 절충안일 뿐이겠지만, 아리아에겐 호칭의 협공이나 다름 없었다.
마치 연상의 여성에게 그저 누나라고 말하기 부끄러워 이름과 동시에 누나를 붙이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게 오히려 더한 포상인데도 말이다.
"...그, 그래...! 그게 좋겠네...!!"
"다행입니다. 아리아 아가씨."
"...으으..."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떻게 저런 호칭을 저리 간단히 부를 수 있는 걸까?
자신이 부탁한 거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아리아 아가씨?"
그녀가 얼굴을 안 보여주자 레오나르도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전속 기사가 된 이상 그녀를 최선으로 만족시키는 것이 레오의 의무였다.
"그 대신이라 하긴 뭐하지만... 그럼 아가씨는 절 '레오'라고 부르시는 게 어떻습니까?"
"...응...?"
"레오나르도는 너무 긴 이름 같아서요. 짧게 줄여서 레오라고도 자주 부릅니다만... 어떠신지요?"
그녀는 천천히 레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호칭'만큼은 얼굴을 보고 해야만 의미가 있었다.
"...좋아...레오..."
"...네,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렇게 서로는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
EP.20 전속 기사-2
한 달
하루의 30번이 모이고, 1년을 12번 쪼갠 시간이 흘렀다.
그 길고도 짧은 시간을 흐르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레오 자신의 변화였다.
[이젠 썩 봐줄만 해졌는데?]
이 한달 동안, 레오는 마법에 대한 기초를 제대로 다져놓았다. 쌍욕을 입달던 현자마저 호평할 정도였으니 그 업적은 괄목하다 말할 만했다.
1서클의 마법 또한 분야별로 익혀놨으니 실전에서 사용해도 무리는 없었다.
두 번째는 가문에서 받는 대우의 변화였다.
처음 왔을 때는 마치 운 좋게 얻어걸린 시골 얼뜨기 정도의 시선과 경멸을 받았지만, 현재는 적어도 본인 앞에서는 그런 일은 없어졌다.
그 이유는 앞서 있었던 일들에서 상상해본다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은...
"고마워! 레오!"
아리아스필의 성격 및 태도의 변화였다.
전생의 아리아스필은 항상 아랫것으로 자신을 내려보았으나… 지금은 뭐랄까, 같은 인격체로 바라봐주는 것 같았다.
소위 말하는 친구의 정도로 말이다.
[예전에는 어땠길래?]
<사람이 개미 보는 시선 정도요?>
현자님은 아리아와 레오를 번갈아보며 되물었다.
[질투심 때문에 눈이 어지간히 삐었구만.]
<부정은 안 하겠지만, 과장한 것도 아니에요.>
질투심 때문에 왜곡하거나 예단한 것도 있을 테지만, 당시 아리아스필은 정말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을 단순한 '동일한 종족'으로 놓을 뿐, 그 이상의 가치도, 그 이하의 차별도 두지 않았다.
마치 용사를 하기 위해 태어난 기계처럼.
[그건 좀 무서운데.]
<그러니까요. 지금은 아직 어려서 그런 거겠죠.>
아직 세월의 풍파를 맞지 않았기에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일 거다.
"...레오?"
"네?"
어느샌가 그녀의 얼굴은 레오의 정면에 다다라있었다.
"괜찮아? 아까부터 불렀는데..."
"예? 예예. 생각을 좀 하느라요."
"훈련 끝났으니까 이제 내려가자. 선물 사러 가야지."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버린 아리아스필을 따라갔다.
[선물? 뭔 선물?]
<시리카 부인님께 살 선물이요.>
시라카 라인하르트, 그녀는 가주인 글라디오의 아내로 다르게 말하면...
[아, 아리아 엄마?]
<...맞긴 한데, 현자가 원래 그렇게 격조 없게 말해요?>
마법사가 아닌지라 현자에 대한 환상은 없었지만, 인간으로서의 상식은 이미 깨지고 찌부러진지 오래였다.
[내가 여기 초대 용사랑 밥도 먹고! 목욕도 같이하고! 뭐 할 거 다 했어!]
그리 알고 싶지 않은 인맥이었다.
근데 그렇게 친밀한 관계였으면 왜 용사 가문에서 초상화 하나 걸리지 않은 것일까.
[...뭐냐? 못 믿겠어? 내가 지금 조금 힘들어져서 그렇지...! 예전엔 막...! 엄청났어!]
현자는 동태눈으로 코를 파며 레오를 노려보았다. 어째서인지 저 추태가 용사 가문의 대우와 행동을 이해시켜주고 있었다.
<...쯧.>
[혀 차지 마.]
<죄송해요. 이에 뭐가 낀지라...>
[넌 오러로 이빨 닦냐?]
아, 이걸 안 낚이네.
"레오! 얼른 와!"
저택 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갑옷을 벗은 소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네! 갑니다!"
그런 아가씨를 따라 레오도 저택 밖을 나섰다.
***
[300년 뒤의 시장도 제법 괜찮은데?]
현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휘파람을 내며 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300년 전 시장의 형태도 조금 궁금해졌으나, 주변 상가의 풍요와 활기 앞에선 그런 말을 쉽사리 꺼낼 수 없었다.
골목의 가장자리에 있는 상인들은 각자 준비해두었던 상품을 자랑하기 바빴고, 도보에 있는 사람들은 그 상품의 가치를 보고 가격을 흥정하는 것에 사력을 다했다.
[근데 귀족 영애가 이런 누추한 곳에 올 필요가 있어?]
<세상 물정 정도는 알 필요도 있고, 기분 전환도 되니까요.>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아리아는 시장의 생기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레오!! 이거 좀 봐봐!"
그 생기를 같이 즐기고 싶다는 듯 그녀는 손을 흔들며 자신의 기사를 부르기까지 했다.
"...이건..."
아리아스필이 본 것은 푸른 꽃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꽃이 아닌, 푸른색 장미였다.
"파란색 장미야! 이런 장미는 처음 봤어!"
"오호호! 아가씨께선 정말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남자인데도 묘하게 간드러진 말투를 구사하는 꽃장수는 자신있게 푸른 장미를 내밀었다.
"이 장미로 말할
것 같으면 저 높은 고원, 엘림 산맥에서 모험가가 채취해온 장미로, 얼음 근처에서 자라는 꽃이기에 프로스트 플라워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답니다! 원래는 2골드는 받아야 마땅합니다만… 선남선녀를 위해 실버 9장으로 깎아드리겠습니다!"
휘황찬란하고 현란한 언변이었지만, 아리아를 사로잡은 것은 오직 하나의 단어뿐이었다
'선남선녀...'
제법 어울리는 울림 아닌가.
그 말 한마디로도 충분히 용사 가문의 영애를 홀리기에 충분했다.
"그럼 하나..."
"아저씨."
레오가 그 꽃장수의 손목을 잡아들었다.
"어디서 사기치냐?"
"...사기?"
하지만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용병 놈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무슨 말이시죠? 이건..."
"첫째, 엘림 산맥은 아직 꽃이 필 계절이 아니다. 그러기엔 아직 덥거든."
하지만 이 꽃은 아직 싱싱했다. 만약 조화라면 당연히 앞에서 한 말은 사기가 될테지.
"그건... 저희 꽃집의 특별 보관방식으로
"둘째, 말뜻은 똑바로 쓰자. 프로스트 플라워는 푸른 꽃을 마법으로 얼린 장식에나 쓰는 말이야. 이건 누가 봐도 생화인데?"
"그건 네가 어리니까...!"
반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오는 장미를 잡아들었다.
"셋째, 이건 애초에 푸른 장미가 아니다."
레오는 푸른 장미의 줄기를 꺾었다. 그러자 속 안에 옅은 청색의 진액이 흘러나왔다.
"겉에 염료를 안 바른다고 눈치 못 챌 줄 알았냐? 사기도 사람 봐가면서 쳐야지."
"이...! 꼬맹이가...!!"
꽃장수가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팍!
아리아가 빠르게 그 주먹을 손목째로 내리쳤다.
"끄아악!!"
"...거짓말을 해? 감히...!"
살기등등한 눈, 칼만 안 들었을 뿐, 언제라도 저 건장한 남성을 죽일 수 있는 기세였다.
[...오우...]
<이게 제가 봐온 아리아입니다.>
물론 이 정도로까지 살기를 띄우지는 않았지만, 태반은 냉소로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으...아...!"
"일단 진정하시죠. 기왕이면 평화적으로 해결해보죠."
레오는 흰색 장미를 몇 개 잡아들었다.
"아니면 손모가지하고 같이 장사판 날아가고 싶으세요?"
용병의 경험은 협상에서도 유용했다.
***
"굉장해! 레오! 어떻게 안 거야?!"
"그냥 말하는 것부터가 수상했습니다. 말이 많으면 의심부터 해보는 게 맞거든요."
떳떳한 장사꾼은 설명을 최대한 간결히 하는 편이다. 그래야 손님이 상품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고, 추가적인 질문도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럼! 그럼 어떻게 꽃이 색칠된 걸 안 거야?!"
아리아는 반짝이는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싸움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두뇌까지 명석하니 그녀 입장에서도 충분히 놀랄 만했다.
"그건 그냥 잡지식입니다. 색이 담긴 물에 흰 꽃의 줄기를 담으면 그 색으로 물든다고 하더군요."
무사 수행의 성취는 단지 전투 기술이나 힘뿐만이 아니었다. 여행을 통해 이런 가벼운 잡상식부터 마법 같은 고급 정보까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다.
1서클 마법식을 금방 익힐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어쩐지 배우는 게 빠르더니만.]
<칭찬하는 목소리가 어째 그럽니까?>
원래 목소리가 그런 지는 모르겠지만, 비꼬는 느낌이 지나치게 강했다.
[아니, 진짜 잘한 건 맞아. 마탑에 박혀서 글씨나 종이가 끄적이는 것보단 여행을 하는 게 더 실전에 쓸모 있어.]
저렇게 말하니 칭찬은 맞았다.
이젠 조리돌림 자체가 칭찬에 전염된 것 같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조의를 표하자.
"...그럼 그 흰꽃은?"
"선물이에요. 이게 왠지 좋을 것 같아서요."
"엄마는 흰색 꽃 그다지 안 좋아하셔. 예전에 좋다고 했더니 주변 사람들이 전부 백합을 보내왔거든."
그건 레오도 전생을 통해 알고 있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제가 선물할 건, 무지개색 꽃이거든요."
레오는 씩 웃어보이며 물감과 염색약을 판매하는 상점을 가리켰다. 그 간판을 보자 조각조각으로 떨어진 정보가 연결되며 아리아에게 답을 내주었다.
"아...! 그러면 우리도 만들 수 있겠구나!"
"그런 셈이죠. 일주일이면 충분히 만들고도 남아요."
그렇게 말하며 아가씨와 전속 기사는 가게 내부로 들어갔다.
물론 용병으로서 흥정은 기본이었다.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날은 점차 저물고 있었다. 해는 저물면서 푸른 하늘을 붉게 익히고 있었다.
"너무 흥정을 길게 끌어나봐요."
"아니야. 덕분에 좋은 걸 많이 살 수 있었는 걸."
그녀는 그렇게 웃어 보이며 레오가 산 염료들을 보았다. 사실 용사 가문씩이나 되면 흥정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경제 관념은 어릴때부터 가르쳐야 효과가 컸다.
[야, 근데 뒤쪽에 누가....?]
현자의 반응은 끝까지 듣지 못했다.
"어...?"
뒤쪽으로 달려든 한 남자가 레오 일행의 짐을 낚아챘으니까.
"도둑...?!"
의문을 품은 질문은 아니었다. 본인의 정체는 이미 달려가는 소매치기가 달려가면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다.
"...이...!!"
"아가씨 잠깐...!!"
아리아는 이미 달려뛰고 쫒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레오도 그녀를 쫒아 함께 소매치기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냐?]
<이상하죠.>
현자가 눈치챘듯 레오 또한 그 이질감에 눈치챘다.
[왜 소매치기 새끼가 더 막다른 골목으로 가는 거지?]
그 이유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레오와 아리아 모두 모르는 골목길이 있다던가.
두 번째는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 레오! 막다른 골목이야! 잡을 수 있어!"
"그건 아닌 것 같네요. 아리아 아가씨."
레오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일개 소매치기를 대응하는 것치곤 지나치게 느껴지기도 했다.
"레오...?!"
"기사로서 죄송하지만..."
검 손잡이에 힘을 주며 레오는 말했다.
"잡은 게 아니라 잡힌 것 같습니다."
레오의 반응에 소매치기는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아니, '소매치기가 아니었기'에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표현이 올바를 것이다.
"...꼬맹이치곤 눈치가 좋은데?"
골목의 입구, 그리고 주변의 외벽 너머로 복면을 쓴 자들이 튀어나왔다.
생각하기도 싫었던 두 번째 상황.
그건 매복이었다.
"...뒤로 계세요."
레오는 다른 손으로 자신의 아가씨를 지키려고 했다. 아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검을 잡은 두 소년소녀를 보자 암살자들은 코웃음을 쳤다.
"이거 너무 무서운데. 항복이라도 해야할까?"
"해주면야 고맙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잖아."
소매치기로 나섰던 암살자가 크게 웃었다.
그래, 저놈이 두목일테지.
"그래, 항복할 생각은 없지. 하지만 협상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야."
두목은 단검으로 레오를 겨누며 말했다.
"검 내려놓고, 양손 들어. 그러면 여자친구는 보내줄게."
"어떻게 믿고?"
두목은 턱짓으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부하들은 일제히 골목 밖으로 길을 비켰다.
"이러면 믿겠어?"
"다 나가면 믿겠다. 골목 밖으로 나가서 500m 거리가 떨어지면."
"300m."
"400m, 그 이하는 안 돼."
"애새끼가..."
"꼬우면 뒤지든가."
두목은 한숨을 내쉬더니 부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 보내주지."
"하지만 두목...!"
두목은 자신의 부하를 노려보았다. 부하는 반론 하나 내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가세요. 아가씨."
"....하지만...! 레오...!"
레오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아무리 강해도 상대는 실력자에 한둘이 아니었다.
"괜찮아. 아리아."
레오는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사람을 불러줘. 네가 나보다 빠르잖아."
그 속삭임에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리아는 결심을 굳히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레오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기사를 믿기에, 그의 실력을 믿기에 아리아는 앞으로 달릴 수 있었다.
"이제 칼 내려놔."
"좋아."
레오는 주저없이 검을 놓았다.
"야, 묶어."
레오에게 가까이 있는 부하는 급히 밧줄을 갔고 와, 레오의 양팔을 묶었다.
"인질로 잡게? 일개 기사를?"
"...아까부터 말이 짧다?"
"글쎄다. 너희들 이제 다 죽은 목숨인데 상관없지 않나?"
그 말에 다들 일제히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자신을 묶은 남성을 포함해 두목까지도, 전부.
"크핫...너, 아까 그 여자친구가 살아서 갔을 거로 생각해? 그리고 속삭인 대로 사람을 불러주고?"
다들 폭소하기 바빴다. 1년치 웃음을 한꺼번에 몰아서 웃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이미 추격자를 보내놨다고. 이미 그년은 잡혔어."
거기에 나오는 건 깊은 한숨 뿐이었다.
"...하..."
레오의 한숨에 다들 더욱 비웃기 바빴다. 저들 눈에는 레오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일 것이다.
"왜 다들 처웃고 지랄이지?"
그 순간에 폭발이 일었다.
폭발음과 함께 타닥거리는 소리가 밧줄을 잡고 있는 사람에게로 옮겨붙는다.
"끄아아아악!!"
[파이어볼]
연속되는 1서클의 화염마법, 폭발음을 끝으로 그 자객의 비명이 멈췄다.
"야, 10초 줄게."
이미 불꽃으로 밧줄은 탄 지 오래였다.
"양심적으로난 안 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
적어도 레오 앞에서는
"나머진 다 죽일 테니까."
폭소는 참아야 마땅했다.
<+--|-|--+>
EP.21 전속 기사-3
"...마법...?!"
[윈드 불릿]
바람의 탄환이 손 너머로 응축되어 발사되었다. 바람의 탄환에 옆쪽에 있는 남성의 가슴팍째 몸을 날려버렸다.
"난... 난...! 안 웃...!"
"그래, 넌 잇몸이 예뻐서 기억에 남더라."
퍼억!
레오의 주먹이 잇몸미소가 도드라지도록 그의 구강 구조를 뒤틀어놓았다. 위력 때문에 뇌에도 충격이 가 거품을 물긴 했으나, 잇몸의 매력을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건 얘기가...!"
"오, 그래. 얘기해준 의뢰인이 있었구나."
[스톤 랜스]
암석이 솟아오르며 뭉툭한 창을 형성시켰다. 아마 창보단 긴 몽둥이라는 평도 괜찮을 것이다.
퍼석!
"끄아악...!!"
"근데 넌 덧니가 비호감이야."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그의 명치를 꿰뚫었다. 날이 없었기에 죽지는 않겠지만, 입을 다물게 하고, 명치를 골절시키는데는 충분했다.
덧니가 안 보이자 얼굴이 퍽 보기 좋았다.
"이 자식이...!!"
이번에는 다른 녀석이 외쳤다. 동시에 단검 여러 자루가 레오에게로 빗발쳤다.
"단검술... 방식으로 봐선 '핏빛 그림자'의 방식이네."
가벼운 평가, 창으로 회전시킨 것만으로 튕겨낼 만큼 가벼운 단검술이었다.
동시에 창날로 돌파해 접근하는 것조차 용납할 만큼 어리숙한 기술이기도 했다.
"끄아아아악!"
비명이 살점을 꿰뚫는 소리를 뒤덮는다. 뭉툭해도 창은 창, 힘을 준다면 살점 정도는 뚫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뼈마저도 부술 수 있었고.
"저...! 저 새끼! 그 새끼야!!"
"누군데...!?"
"신문에 나온 새끼! 농담암살...!!"
퍽석!!
안타깝게도 말은 '농담암살...'로 끝났다. 힘차게 날아간 창은 힘차게 떠들던 푼수의 입술 위 인중을 으스러뜨렸으니까.
저래선 누굴 말하려고 한 건지 모를 것이었다.
몰라야만 했다.
"...죽...! 죽여버리겠어!! 농담...!"
레오에게 농담이란 살인이었다.
실제로 농담이라는 단어를 듣자 광기와 같은 경기를 내보이고 있지 않은가.
"야, 내가 누구라고?"
"...농담 암살자님...이십..!"
우두둑
틀린 대답이었다.
부하의 목이 조금 꺾임으로서 마지막으로 남은 암살자, 두목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누구냐고."
두목
"...레...! 레오나르도 기사님이십니다."
"눈치는 괜찮구나."
푸욱
문제를 맞힌 상으로 떨어진 단검이 그의 손바닥과 함께 바닥을 찍어박혔다.
"...끄아아악!!"
"진정하자고. 아직 묻고 싶은 게 많거든."
암살자의 멱살이 레오에게 붙잡혔다.
그로 인해 손목에 찍힌 단검이 상처를 더 벌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비명을 지를 수가 없다.
저 아이가 내포한 공포는 비명마저 틀어막고 있다.
아니, 애초에 아이가 맞긴 한 걸까.
인지의 부조화... 그 이상으로 부조리함을 느꼈다.
생각이 깨지고 감각이 어지러워진다.
이대로 두면 고문이 시작될 것이다.
저 존재에겐 그런 행동은 하품하듯 간단히 이루어질 것이다.
이빨 사이에 급히 혀를 집어넣어 알약을 끄집어낸다.
암살자 사이에서 사용되는 자결용 독.
기밀누설에 대비해 준비해둔 약이지만, 지금은 저 고문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것이다.
"아, 맞다."
턱
레오의 손아귀가 두목의 입을 벌린다. 그리고
"끄아아아악!!"
그는 반대 손으로 알약을 숨겨둔 이빨을 뽑아내었다. 핏줄기가 바닥에 흐르며 잇몸의 살점이 붙어있는 어금니가 레오의 손에 잡히게 되었다.
"...뭐리 급히 가실까. 천천히 얘기해보자고."
알약과 어금니를 바닥에 집어던지며 레오는 '대화'를 준비했다.
"이름."
독도 없고, 힘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허세밖에 없었다.
"너...! 너 이거 후회...!"
퍼억!
주먹이 날아왔다. 코뼈가 부러졌다.
"이름 말해."
"아까 그 말이 허풍인 줄...!"
무릎이 가격해왔다. 턱뼈가 금이 갔다.
"뭐? 아까 아리아한테 추격자 보낸 거?"
"...그, 그래! 쫒아가지 않으면...!"
살점이 잡아뜯긴다. 귓불의 살이 손톱 아래에 뜯겨 나간다.
"상관없어. 애초에 니들 조직 다 같이 가도 아리아는 못 잡아."
추격자라고 해봐야 이 중에서 중상위권 정도의 실력인 자객이 쫒는 것일 뿐이다. 그것도 해봤자 두세명 정도로 적게 말이다.
그 정도면 아리아를 걱정할 게 아니라, 그 추격자의 신상을 걱정하는 게 적절했다.
"...그럼...! 그럼... 왜...?!"
통증이 밀려온다. 오른편이 시야가 어둠으로 잠긴다. 엄지손가락은 동공을 찌부려뜨린 지 오래였다.
"질문은 내가 하고 있는데? 마지막이니까 잘 대답해."
레오는 단검을 들었다. 하해와 같은 인내심에도 한계인 법이다.
"이름."
"칸..."
단검이 칸의 마지막 눈으로 겨누어졌다.
"...입니다...!"
레오는 단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문답을 이어갔다.
"소속."
"핏빛 그림자...입니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였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였다.
"의뢰 내용."
"...그건..."
늦은 대답, 인내심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끄아아아악..!!"
레오의 손톱은 칸의 엄지 손톱을 뿌리째 뽑아냈다. 그 비명이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레오는 그의 상상력을 자극할 문제를 출제했다.
"하나 알려줄까? 손톱은 총 10개, 그에 따라 손가락도 10개지. 그럼 손만 해도 20번의 고문이 가능한 거야. 그럼 발까지 합하면 얼마일까?"
어렵지 않은 산수 문제였다.
"레오나르도...님을 납치하라고 말했습니다...!!"
문제의 효과는 굉장했다.
확신하지 못했던 정보가 이젠 확실해졌다.
처음부터 무언가가 기시감이 느껴지긴 했다.
협상의 조건으로 기사를 인질로 잡는 것도 그랬고, 굳이 힘줄을 끊을 수도 있었는데 '상냥히' 포박으로 끝낸다는 점도 그랬다.
"누가 시켰어?"
"...그...그건...!"
"아,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대강 감은 잡혔거든. 죽이는 편이 내 쪽에서 편하고."
레오는 단검을 역수로 쥐며 내리찍을 준비를 했다.
죽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의 원초적인 반발심이었을까.
"제하드...!!"
그는 입을 열었다.
"제하드 다이논스...! 그자가 의뢰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왔다.
감 잡았다고 사기치길 잘했네.
"제하드?"
가물가물하지만 확실히 기억나는 인물이긴 했다.
그 찌질함과 옹졸함은 소인배 중에서도 일품이었으니까.
"네! 돈은 두둑히 줄테니까 살려서 데려오라고...!"
"그러니까 라인하르트의 호위기사로 일한 제하드?"
"네! 그러니까...!"
"그래. 필요한 건 다 물어본 것 같네."
"그럼...!"
물론 약속은 지키는 게 도리였다.
콰앙!
머리통째로 바닥에 내리찍으며 레오는 약속을 지켰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는지, 그대로 두목은 다리 없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쓰러졌다.
[역시 농담암살자. 성능 확실하구만.]
<이젠 짜증 내기도 지치네요.>
[근데 안 죽여도 되겠어? 죽인다며.]
사실 죽인다는 예고와는 다르게 레오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실제로 암살자들 전부 기절이나 불구에 이를 정도의 부상을 입었을 뿐, 죽지는 않았다.
<나중에 어차피 사형될 텐데. 굳이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죠.>
아직은 안 죽였을 뿐이었다.
라인하르트의 영애를 습격한 건, 변호할 여지도 없는 중죄니까.
[이미 많이 묻은 것 같은데? 손 봐라.]
<괜찮아요. 아리아한테는 안 보여줬으니까.>
사실 아리아를 보낸 건, 그녀의 안전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그러기엔 그녀는 규격 외의 천재였으니까.
다만 이런 더러운 상황을 보여주기엔 아리아스필은 아직 소녀였다. '이런 걸'정신적으로는 받아들이는 건 버거울 나이일테지.
[그보다... 제하드? 그때 처맞고 짤린 호위 등신 아니야?]
<맞아요. 그 새끼.>
제하드의 추태가 어지간히 기억에 남았는지, 다 늙은 현자마저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복수해? 진짜 미친 거 아니야?]
현자는 경멸하기 바빴지만, 정작 레오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널브러진 시체 직전의 암살자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미친 걸까요.>
레오, 회귀자인 자신의 개입으로 전생과 현생에는 분명 판이한 차이가 생겼을 것이다.
지금의 습격도 그 변화 중 하나였고.
하지만 상황 자체의 부자연스러움은 여전했다.
<아무리 복수에 눈이 멀었어도, 상식적으로 라인하르트의 영애와 기사를 습격하려고 할까요?>
아무리 복수에 미쳤어도 용사 가문은 어지간한 정신병자도 건드리지 않는 존재였다.
직접적인 대응이 없어도, 언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말살되는 건 물론이고, 때때로 과격한 추종자들이 대리로 복수해주는 경우까지 있으니까.
[그래서 널 중점적으로 공격했잖아.]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해요.>
처음 암살단이 습격했을 때는 레오는 방어적으로 검을 들었다. '핏빛 그림자' 출신의 암살자들은 단검 투척에 능숙했으니.
더더욱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더군요. 마치 조건이 '상처 하나 없는 것'이 전제인 것처럼.>
[아까는 던졌잖아.]
<죽는 것보다야 의뢰 실패가 나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복수라는 명분에 어폐가 생긴다. 굳이 복수할 사람에게 그리 상냥한 대우를 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직접 복수하겠다.'라는 명예를 알기엔 제하드의 졸렬한 전과는 너무나 화려했다.
[...그럼...]
<아무래도 흑막이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제하드 이상의 흑막이요.>
이런 전투로 매듭져질 결말은 아니었다.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그런 확신이 든 사이,
"레오!!"
아리아가 달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철컥
거칠게 수갑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레오는 체포되었다...?
***
"..."
[...]
"..."
[...]
익숙한 상황, 익숙한 방, 익숙한 침묵이 이어졌다.
"...아...하..."
침묵이 오가던 끝에 레오는 폐 깊숙이 한숨을 내쉬었다.
[넌 어째 감방하고 인연이 있다? 아예 말뚝 박지 그래?]
저 지랄맞은 말투를 들으니 점차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낸들 좋아서 이럽니까?>
이야기의 전말은 이러했다.
아리아는 추격자를 간단히 따돌리고 근처 경비병과 가문에 연락을 취했다.
그렇게 연락을 끝낸, 아리아는 경비병과 같이 골목으로 돌아와 레오를 엄호하려고 했는데,
그때 경비병들은 레오를 체포한 것이다.
괴이한 사건이었지만, 체포 사유는 간단했다.
[그러게 누가 마법을 쓰래?]
마법사가 아닌 일개 용병이 마법을 쓴 것, 그것만으로 정황상 의심하고 체포해야 마땅했다.
<쓰라고 가르쳐준 거잖아요. 망할.>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정황만으로도 의심해도 충분했다. 특히 파이어볼로 타버린 지면이 증거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그래서 이번엔 어떻게 되는데? 이번에도 바로 석방이냐?]
<그렇게 운좋게 해결되면 좋겠지만, 바로 그럴 리는 없어요.>
[너 용사집 아가씨 꼬셨잖아. 그걸로...]
이 양반은 어째 까도 까도 혐오할 면모밖에 보이지 않을까. 정말 존경스럽기 그지없었다.
<개소리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만약 자신이 단순히 검술이나 오러로 암살자들을 쓰러뜨렸다면 이렇게까지 과민한 대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마법을 썼다는 거에 있어서요.>
[그게 뭐? 내 시대 때에는 그 정돈 장난...]
<그게 문제라고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현자는 300년이나 넘게 묵은 노총각 꼰대였다. 그만큼 현시대에는 뒤떨어지는 상식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니까 왜?]
300년 동안, 모든 것은 바뀌어왔다.
강산도, 마을도, 도시도, 그리고.
법률마저도.
<마법, 마법사, 마도구... 어쨌든 그런 문제라면 거품 물고 경기 일으키는 조직들이 있거든요.>
[그게 누군데?]
덜컹
잠금돼있는 문이 열리며 로브를 입은 두 사람이 들어왔다.
두꺼운 로브를 입고, 긴 챙 모자를 쓴 것이 그들의 정체를, 어림 이상으로 짐작시켜주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마탑이요.>
현자의 아득하며 까마득한 후배이기도 했다.
<+--|-|--+>
EP.22 전속 기사-4
[마탑? 내가 아는 그 마탑?]
<300년 동안 바뀔 건 다 바뀌었겠지만, 역사적으론 같겠죠.>
현자가 있었던 시절에도 마탑은 있었다. 현자가 아무리 화석마냥 묵혀졌어도 한 집단의 역사를 뛰어넘을 정도는 아닐 테니까.
[연구에 매진해야 할 마탑이 여긴 어인 일로?]
<300년이면 법이 아예 뜯어 고쳐져도 이상할 게 없어요.>
현자의 시대엔 마탑은 그저 마법을 연구하는 학당이나 연구소 수준이었을 것이다.
마법이나 역사에는 문외한인지라 확신할 수 없었지만, 현자의 저런 반응이 그 추측의 근거가 되어주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널[불법 마법 사용자]로 검거하고 구금하고 있다. 알고 있나?"
대답 대신 잠시 정적이 울렸다.
[씨바… 뭔 마법에 불법이고 말고 지랄이야.]
...라고[마법의 정수이자 모든 마법의 시초, 현대의 마법을 정립한]현자가 말했다.
솔직히 레오도 무릎을 '탁' 치고 동의하고 싶었지만, 우선은 교양을 지킬 필요는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만, 동의는 할 수 없군요."
"네 동의 여부는 상관없다. 판별하는 건 우리니까."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고는 마탑의 두 마법사는 자리에 앉았다. 레오도 의자에 앉으며 그 둘을 마주했다.
"앉으라고 한 적은 없는데?"
진짜 쓸데없이 겉멋만 들어선.
"전 범죄자가 아닙니다. 범죄자로서 잡혀온 것도 아니고요. 고작 착석마저 억압받을 이유는 없을텐데요."
"...그건 봐야 아는 법이지."
위협 말곤 딱히 할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마법사들은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럼 그냥 감방에 박히게?]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럽니까?>
여기에 순순히 잡혀들어온 건, 어디까지나 사건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도주라도 하면 악착같이 죄를 불리는 족속들이니까.
[그럼 어떻게 하게? 말이라도 잘 씨부려야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물론 씨부리는 것보단 '변호'라는 격조 있는 어법을 사용할 테지만.
"넌 묵비권 행사 및 변호사 선임이 가능하고, 네가 한 증언은 증거로서 제출될 수 있다. 인지했나?"
"예. 이해했습니다."
이해했다는 말을 기다렸다는 듯, 청색 옷을 바탕으로 입은 여성은 레오에게 사진 몇 장을 내밀었다.
"오후 8시에서 8시 30분 사이, 이 사진에 시내 골목에서 마법을 이용한 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알고 있겠지?"
사진에는 다양한 구도로 파괴된 골목의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덤으로 널브러져 있는 핏빛 그림자의 암살자들은 골목의 파괴를 한 층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
"알고는 있습니다만, 폭행은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먼저 여기서 기선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마법으로 인한 폭행이 성립하려면, 먼저 제가 마법을 이용해 공격, 혹은 그럴 의사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상황과 맞지 않죠."
자신 주변에 있는 3명의 마법사들이 전부 눈과 입을 조금 벌리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레오는 마법과 법에는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환경적으로도, 관심사의 방향도 두 학문은 레오에게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게 범죄와 폭력하고 관련된 법안이라면 이야기의 전제는 달라진다.
"만약 암살과 같은 기습 및 선제공격을 당했을 경우엔 마법으로서의 반격도 허용됩니다. 이를 정당방위라 하는데, 아닙니까?"
저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아마 저들은 자신을 최소 세 가지 전제를 두고 심문을 시작했을 것이다.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레오는 마법을 쓸 줄 안다.
레오는 마법을 쓸 줄 모르고, 허가 받지 않은 마도구 사용을 했다.
레오는 흑마법 및 범법적인 마법 사용을 했다.
그 정도 전제가 13살 소년에게 쏟을 수 있는 상상력의 한계였을 것이다.
만약 레오가 회귀자에 현자의 돌까지 있는 걸 예상했다면, 그건 천재를 넘어 미친 놈일테지.
"제가 만약 잘못 알고 있는 거라면 정정해주시죠. 경험이 적은지라 확신하긴 어렵군요."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저들의 표정은 훌륭한 답변이 되어주었다.
"...어린 나이에 그걸 아는 건 대단하지만, 네 말대로 경험은 부족하군."
[...쯧쯧...]
현자님은 심기에 불편함이 끼였는지 혀를 몇 번 찼다. 레오도 심기에 몹시 불편이 끼는 걸 느꼈으나 우선 참기로 했다.
"어째서 정당방위가 성립할 수 없죠?"
"먼저 네가 암살자인 칸을 고문했다는 점에서 그 점은..."
"호위 기사는 의무적으로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추가적인 적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그에 대한 고문은 필요한 과정이었죠."
생각할 찰나도, 여지도 주지 않는다.
언변은 몰라도, 마법적, 법률적 지식은 마탑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니 기세만큼 본인이 압도한다.
"오른쪽 안구 파손. 그리고 안면의 턱, 코, 광대 골절, 거기에 전신에 있는 부상을 생각해보기는..."
"만약 제가 마법으로 대응하지 않았더라면 저 또한 같은 꼴, 아니 그 이상으로 험하게 대해졌을지도 모르죠."
이건 단지 압도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승리는 확신할 수 없었다. 레오가 이겼던 건, 단지 그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마법이라는 인지하지 못한 와일드카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어째서 그런 마법을 쓴 거지?"
"그런 마법이 뭐죠?"
"감히 시치미를 떼나?"
검은 옷을 입은 남성은 사진은 다시 내밀었다. 사진에는 검게 그을린 지면, 부서진 돌의 창, 바람의 탄환으로 패인 벽면이 찍혀있었다.
"이걸 보고도 그 말이 나오나보군?"
"예, 무슨 문제가 있죠?"
"정당방위로 3서클의 마법을 쓴다라, 타당하다고 생각하나?"
[...음?]
"...음?"
마치 데칼코마니를 보는 것처럼 현자와 레오는 똑같은 반응을 내보였다. 너무 같은지라 오히려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레오가 당황한 반응을 보이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 마법사는 말꼬리를 물어잡기 시작했다.
"잡아뗄 생각은 안하는 게 좋을 거다. 위력도, 형태도 최소 2서클이니까."
"형법상 허가 받지 않은 3서클 이상의 마법은 처분이 가능하다. 때에 따라선 징역도...
"...큽..."
레오는 간신히 말과 호흡을 눌러내었다. 둘 중 하나라도 삐져나왔다가는 큰 실례가 될 터였다.
[큭...크가하하하학...!!]
현자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됐기에 웃음을 터뜨리기 바빴지만... 일단은 참아야했다.
"...뭐가 웃기지? 사태의 심각성을..."
"하...1서클이니까요."
"...뭐? 뭐가..."
"제가 쓴 마법은 물론, 제 서클도 1서클이라고요."
미묘하게 기묘하다고는 생각했다.
마탑의 인간들이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겨우 1서클의 마법에 흑마법을 본 것 마냥 몰아가는 것도 사실 이상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위협의 의도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거였군.'
처음부터 저들은 1서클 마법, 그러니까 기초적인 마법 사용을 혐의로 잡은 것이 아니었다.
[그니까...! 큭...! 니 마법을 3서클이라고...]
<착각한 거죠. 1서클 마법을 3서클로요.>
3서클이라는 고위 마법을 어떻게 배우고, 사용했는지 그에 대한 심문을 하는 것이 본목적이었다.
"거짓말하지 마! 우릴 우롱하는 건가?"
[지가 지 입으로 지를 우롱하네.]
...라고 현자와 똑같이 대답하고 싶었지만, 레오는 다 된 변호를 망칠 순 없었다.
"그렇다면 증명해볼까요?"
레오는 한 손을 들어 손바닥 앞으로 마법 술식을 전개시켰다. 도형을 그리는 특훈의 성과였을까 1초라는 찰나도 안 되어 [파이어볼]의 마법진이 구축되었다.
"...이게 무슨..."
"마법식만 놓고 보면 파이어볼이죠. 마법식만 놓고 보면요. 믿기 어려우면 제 몸의 마나를 체크해보시죠. 확신할 근거는 충분할테니까요."
조금 더 깊게 생각하면 이 위력 또한 당연했다.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분은 명실상부한 [마법의 정수이자 모든 마법의 시초, 현대의 마법을 정립한 존재]였으니까.
[그래! 이게 마법이지!! 알겠냐!? 그지깽깽이들아!!]
...그래, 저 사람이 '현자'였다.
아마 「현실은 시궁창이란다, 자식아.」의 준말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랄까, 아니 솔직히 확신이 들었다.
"...그...그러면...! 도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지...?"
레오는 곁눈질로 그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뭐? 왜?]
그 지고한 가르침을 가르쳐준 이는 귀가 간지러웠는지 새끼 손가락으로 귀를 파고 있었다. 그게 코를 판 손가락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레오는 눈을 돌렸다.
"말할 수 없습니다."
좋게 말해 거짓말, 나쁘게 말해 위증이었다.
하지만 저 어린 마법사 꿈나무 친구들의 우상과 희망을 짓밟기에는 레오의 심성은 사포결처럼 고왔다.
***
[근데 왜 그렇게 말했냐?]
<사실대로 말한다고 믿을 리는 없으니까요.>
대략적인 거짓 증언은 이와 같았다.
레오는 어느 날 비를 피하러 동굴에 들어갔다가, 한 두건을 쓴 남자를 만났다.
그는 며칠 굶은 채, 동굴에 있었고, 레오가 가진 식량과 물을 요구했다.
그리고 물과 식량을 주자 남자는 보답이라며 마법을 가르쳐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병으로 죽고 레오는 그를 묻어준 채 길을 떠났다.
...라는 대강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기연으로 짜깁기했다.
[너무 내가 불쌍하게 나온 거 아니야? 게다가 마지막에 죽는 건 뭐냐?]
<어쩔 수 없잖아요. 최대한 빌미를 없애려면 죽이는 게 최선이었어요.>
그리고 솔직히 이정도면 많이 미화시켜준 거였다. 지금 이 상황을 전부 다 말하면 마법사들은 우주적 공포를 맞이해 자신의 머리카락을 뜯어 어떻게든 귀를 막아버릴 것이다.
[왜 그딴 눈으로 보냐?]
<...어쨌든 현자님 덕분에 마법을 쓸 수 있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현자의 마법 덕분에 레오는 위기를 타파할 수 있었다. 이 결과는 감사는 표해야 마땅하겠지.
[...짜식, 알면 됐다. 근데 말이다.]
잠시 턱과 수염을 쓸던 노현자는 입을 열었다.
[이제 마법 어떻게 배울 거냐?]
<...마법이요? 하던대로 하면 되잖아요.>
뭘 새삼스레.
[그게 아니고 새꺄. 그 레파토리대로면 넌 2서클 마법을 배울 수가 없잖아.]
확실히 지금 시나리오대로면 혼자서 독학해서 마법을 배웠다는 말을 쓸 수가 없다. 특히나 한단계 더 위인 2서클인 마법은 홀로 깨우쳤다고 무마할 수가 없을 것이다.
<괜찮아요. 스승 대리는 구해놨거든요.>
[스승 대리?]
스승 대리, 누군가가 레오에게 어설프게라도 2서클 마법을 가르친다면, 배울 수 있는 명분은 생긴다.
애초에 굳이 마법을 사용한 것도 그 대리인에게 배울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누군데? 가문에는 마법사가 없던데?]
<있잖아요.>
레오는 철문을 나와 옆쪽을 가리켰다.
<애초에 제가 왜 마법에, 특히 마법 범죄에 관한 법에 유식하겠습니까?>
순간이동으로 찾아온 한 등신이 레오에게로 다가왔다.
능글맞은 실눈과 아리아만큼이나 유려한 백발이 퍽 인상적이었다.
굳이 레오가 이런 분야의 법률에 능통한 까닭을 찾자면 2할이 용병업, 8할이 저 등신 같은 양반 때문이었다.
[야, 설마.]
라인하르트의 등신이자 장남, 그리고
<저래봬도 텔레포트까지 쓸 줄 아는 마법사에요.>
동시에 현재 4서클의 마법사인 리오스 라인하르트가 등장했다.
"꽤 일찍 출소했네. 그 꼰대들을 구워삶다니 역시 농담암살자!"
리오스는 그렇게 도발과 말을 하며 신문으로 싼 두부 한 모를 내밀었다. 왜 푸딩만큼이나 연약한 두부를 신문에 싸는지는 몰랐지만, 리오스니까 이해하도록 했다.
"동방에선 이런 식으로 출소하면 두부를 준데. 맛있게 먹으렴~"
"...아... 네."
이젠 뭐라 반박하기도 힘들었다. 배도 고프니 이거라도 먹어야지.
그렇게 신문 포장을 열며 두부를 한 입 베어문 순간.
"농담암살자, 마법 농담술로 핏빛 그림자를 제압해..."
"...씨바... 쿨럭...!"
푸딩만큼이나 부드러운 두부가 식도를 막아 호흡을 정지시켰다.
제하드하고 흑막을 찾기 전에 신문사부터 때려부수는 상상이 목 기도의 확장과 수축을 반복시켰다.
<+--|-|--+>
EP.23 전속 기사-5
"근데 다른 사람은 안 오셨나요?"
어째서인지 리오스 이외에는 레오를 마중하러 온 사람이 없었다. 딱히 사고를 안 쳤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이 정도로 삭막한 대우를 받을 줄은 몰랐다.
"왜? 아리아가 안 와서 섭섭해?"
능글거리는 실눈 사이에 벽안으로 레오의 얼굴이 비쳐졌다.
"...섭섭할 것도 없습니다. 제 불찰로 피해를 보신 거니까요."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섭섭한 것은 맞았다. 회귀한 뒤론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이런 냉담한 반응을 내보일 줄은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 애가 어찌나 울고 불고 난리던지~"
"...예? 아가씨께서요?"
전생에도 눈물은커녕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그녀였다. 실제로도 공격하려고 해도 한 대도 안 맞아서 안 나오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런 사람이 울며 불며 난리를 피운다니,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내가 걔가 그렇게 우는 건 처음 봤어~ 옹알이할때도 내 얼굴 보고 정색하던 앤데."
[그건 너여서 그런 거고.]
속마음을 대변해주는 현인의 말씀은 뒤로 한 채, 리오스에게 말했다.
"많이 힘들어하셨나요...?"
"...뭐 제법. 감방으로 간 사랑하는 기사를 두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지. 지금 방에 계속 박혀있어."
묘사가 거지 같긴 했지만,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아리아 입장에선 자신이 거의 처음으로 생긴 친구이니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저기... 리오스님, 바쁘시지 않다면 잠시 어딜 들렀다 가도 되겠습니까?"
레오도 친구로서 도리를 다해야만 했다.
***
전부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패배했다.
처음으로 배웠고,
처음으로 보람을 느꼈으며.
그리고,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그 소년은 자신에게 많은 처음을 선물해줬다.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은 채,
그게 본인의 행복이라는 듯, 당연하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그에게 뭘 해주었을까.
"...아가씨."
알프레드는 아리아의 방문을 두드린다.
"..."
노크 소리는 분명 들렸을 것이다. 다만 그 소리가 그녀의 닫힌 무언가를 열기에 부족했을 뿐.
"...오늘도 안 나올 생각이십니까?"
"..."
부정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레오나르도 군이 무죄 처분 받고 출소했다고 합니다. 마중 안 가셔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을까? 알프레드..."
장고의 정적 끝에 나온 말이었다.
처음 대답이 나온 만큼 알프레드는 최대한 대화를 이끌어갔다.
"괜찮을 겁니다. 아가씨. 레오나르도 군이라면 분명 좋아하실..."
"...알아. 레오는 착하니까... 근데..."
아리아의 목소리는 그날따라 낮게 들렸다. 음색 자체는 그대로였으나 말투의 깊이는 유례없이 바닥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 울렸다. 알프레드는 방문의 손잡이를 만졌다 놓는 것을 연거푸 반복했다.
"...레오는 가문에 온 뒤로... 아니, 나랑 만나고 나서 항상 사고를 겪었어."
자신하고 만나지 않아 얼마 지나지 않아 발록과 만나 격전을 벌이고 다쳐야만 했다.
"그건 사고였지 않습니까...! 아가씨...!"
"알아... 하지만... 그 뒤에는...?"
사건 사고는 끝없이 일어났다.
농담 한번 쳤다고 사람이 실신해 잡혀가고,
거슬린다는 이유로 종자들한테 괴롭힘 받고,
그리고 지금은 암살자에게 습격당하기까지 했다.
"...그때 레오 봤어?"
급하게 체포되고 잡혀갔기에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레오의 몸은 피로 뒤덮여있었다.
아무리 강한 레오더라도 그런 암살자들 상대로 상처 하나 안 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만약에...내가 가문 사람들 더 먼저 불렀다면 어땠을까...? 아니, 애초에 가문에 안 왔다면..."
의미 없는 후회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리아는 인간관계에는 천재이지 못했다. 거기에 13살의 어린 나이는 소녀의 미숙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
알프레드는 대답이 없었다. 아무리 관록 있고 연륜을 겸비한 집사더라도 제3자인 이상, 해결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역시...내가 잘못...'
그러니
"아리아 아가씨."
당사자끼리 해결하는 것이 제일 적절했다. 레오가 나타나자 알프레드는 신사로서 자리를 비킨지 오래였다.
"...레오나르도...?"
아리아는 급히 문쪽으로 달려가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도 마찬가지로 문손잡이를 만지작거리기만 했을 뿐, 문을 열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딱딱하게 말이 나온다. 사과를 하고 싶은데, 입은 마치 다른 인격을 지닌 것처럼 차게 말이 꺼내진다.
"아가씨가 걱정돼서요. 제대로 안전한 지도 확인 못 했으니까요."
저 상냥함이 아프다. 만약 저 온기를 받아들여 사과한다면,
"...그래? 넌 어떤데?"
저 소년에게 더 미련이 생길 것 같기에, 더욱 덤덤히 말이 나온다.
"전 괜찮아요. 딱히 다친 곳도 없어서요."
"...그렇구나."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피범벅이 됐는데 안 다쳤다고 말하는 건, 단순히 걱정하지 말라는 허세일 테니까.
"...레오."
"네, 아가씨."
"...전속 기사는 그만두는게 어떻겠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제안을 꺼낸 아리아마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기엔 자신의 전속 기사가 할 답변이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두려웠다.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저 정중함은 모질다. 결국 이유를 말하면 더욱 보내기 싫어질 테니까.
"...서로한테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그 배려를 모질게 내쫓는다. 바보 같지만 레오에게 본인이 해줄 수 있는 최대의 배려였다.
"...그런가요?"
현 켠 내려간 목소리, 아무리 레오라도 이런 대우는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 너무하네요."
그러니 저런 반응은 당연했다.
그니까... 천장을 바라보며 입을 막는다.
고이는 눈가의 물이 흐르지 않도록, 고여가는 목의 슬픔이 새지 않도록.
...참아낸다.
"전 같이 있는 게 좋은데요. 서로라는 표현은 조금 이기적인 것 같습니다."
"...좋다...고...?"
슬픔을 누르지 못하고 말이 새어나왔다.
"네, 좋았어요. 지금도 좋고요."
"...왜...?"
자신이라면 몰라도 레오는 자신에게 얻을 것이 없다. 가문이라면 몰라도 온전히 자신에게서는 아무것도.
"이유는 많은데, 큰 것부터 하나씩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절의 의미가 아닌, 단지 당황스러웠고, 그 이상으로 기뻤으니까.
"...사실 아리아 아가씨께서 절 친구라고 해주셨을 때, 내색은 안 했지만 뛸 듯이 기뻤어요."
거짓 하나 없는 진솔한 이야기,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간단한 진심이었다.
"용병, 그것도 방랑 용병은 동료를 만들기 힘들어요. 친구라면 더 어렵고요."
고향에 있었을 때라도 다를 건 없었다. 도론은 낙후된 마을로 노인들이나 중장년층 이외에는 사는 사람이 드물었으니까.
또래의 동료나 친구를 찾기는 게이트의 마물을 찾는 것보다도 어려웠다.
"그래서 기뻤어요. 저한테 처음으로 친구가 생겼으니까요."
그 토로에 아리아가 느꼈던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리아 본인도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으...읏..."
지금 그녀에게 닫힌 감정은 확실히 열렸다는 것이다.
레오는 문에 기댄 채로 좋은 이유를 계속해서 꺼내기 시작했다.
부모도 없어진 자신이 처음으로 있을 곳이 생긴 것,
자신이 목표할 만큼 강한 상대가 생겼다는 것,
함께 수련을 즐길 동료가 생긴 것도,
같이 시내에 나가 실없는 말이나 주고받으며 선물을 사는 것마저,
레오에겐 충분한 행복이었다.
그 감사를 들을 때마다 아리아의 표정은 붉어지고 있었다. 하나 확실한 점은 그녀가 방금처럼 분한 슬픔을 누르는 건 절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레오나르도."
하지만
"나랑 있으면 넌 계속 다칠 거야."
아직 아리아에게 잔류한 죄악감은 그녀를 옥죄고 있었다.
이번으로 끝이 아닐 거야. 가문에 있으면 이런 일이..."
"아리아스필."
단호한 어조, 죄악감 정도는 간단히 잘라낼 예리한 단호함이었다.
"그 말은 그냥 넘길 수 없겠는데."
처음 봤을 때의 건방진 말투도, 지금까지의 정중한 말투와도 거리가 멀었다.
"...뭐, 갑자기 왜...?"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 해."
"...그런 적 없어! 난... 그저...!"
"내 몸 본 적 있지?"
갑작스러운 질문, 부끄러운 나머지 말문이 막힌다.
그 몸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동갑임에도 야성적인 피부, 그리고 탄탄한 근육, 그리고 특히 복근의 형태는 한번이라도 만져보면... 정말...
"내 몸의 흉터도 봤을 거야."
아리아는 급히 자신의 볼을 잡아 꼬집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삿된 기억과 상상을 떠올린 최소한의 벌이었다.
"...봤어."
진정하며 다시 낮은 목소리로 그녀는 답했다.
"칼에 찔린 흉터도 있고, 몽둥이 맞아서 생긴 자국도 있어. 마수의 잇자국을 찾는 건 일도 아닐 거야."
전부 기억난다. 고작 13살의 나이에 생긴 상처라고 하기엔 잔인하다 못해 가혹한 삶이었을 거다.
"죽는 건 무섭지. 하지만 그건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아."
추측을 넘어선 확신,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이미 레오는 죽음을 겪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니까 네 멋대로 내 삶의 안전을 결정하지 마. 나도 충분히 아니까 너의 기사를 택한 거야."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왜 이 질문을 한 건지도,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지도 전부 모르겠다.
"이미 말했잖아."
그러나 레오는 망설이지 않았다.
전부 아는 것처럼
"넌 내 목표니까."
시야가 흐려진다. 천장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물 한방울씩 볼을 타고 내려온다.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난 울고 있었구나.
"혹시... 이제 문 열어도 될까요?"
"...안...으...안 돼."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레오였기에 더욱 보이면 안 되었다.
"조금 섭섭한데요."
레오는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서운한 이유을 설명했다.
"그럼 문밖을 봐주실래요? 열쇠구멍이라도 괜찮으니까요."
레오의 부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정도면 괜찮을 거라는 안심 때문이었을까, 눈물로 불어오른 그녀의 시선은 열쇠구멍으로 향해있었다.
"아직 약속한 일이 남았잖아요?"
레오는 밝게 미소를 내보이며 백장미와 염료가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 상처 하나 없는 얼굴은 어째서인지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싫다면 나중에라도 찾아올테니..."
벌컥
레오가 돌아서 가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
"...가지 마."
소년은 안은 것은 자신의 기사를 곁에 두고 싶은 소녀였다.
"...절대 가지 마..."
눈물이 흐른다. 부끄럽고 보이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내 곁에도 있어줘... 평생 내 전속 기사로 있어줘..."
그럼에도 목소리는 쉬지 않는다. 저 소년을, 기사를 놓치고 싶지 않기에.
나도... 너랑 있어서... 좋아...! 그러니까...!"
소녀는 용기를 낸다.
"...네, 영광입니다."
그녀의 기사는 허리에 감싸쥔 소녀의 손을 잡은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최선을 다해 모실게. 아리아."
이는 불변하지 않을 마음의 뜻이었으리라.
<+--|-|--+>
EP.24 성장-1
깊은 어둠 속, 라인하르트를 지탱하는 짙은 그림자들이 가문을 해하는 적을 처리하러 왔다.
"...흑암님...아무래도..."
현재 있는 곳은 제하드의 거주지, 다이논스 가문의 저택이었다.
"...젠장..."
흑암, 크리스 라인하르트는 저택 내부를 돌아보며 시가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러곤 입에 시가를 문 채 한숨을 내쉬었다.
궐련에 불은 붙이지 않았지만, 그 기행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이미 다 죽인 건가."
그러기엔 이미 끝나있는 저택의 학살극이 참혹했기에.
아무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여긴 흑암... 보고하겠다."
간신히 통신 마도구를 꺼낸 크리스는 입을 열었다.
전달된 보고는 이와 같았다.
제하드 다이논스 두부가 참수된 채 발견,
그의 아버지 젠 다이논스,
어머니 혜린 다이논스,
약혼자 레인 리포드, 그리고 남동생 엘리 다이논스까지
이상 다이논스 가 5인 전원 사망.
시가를 문 입에선 연기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
라인하르트 가의 저택 내 분위기는 활기로 분주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기류를 전환하기 위해 저택의 사용인은 급하게라도 밝은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오, 축제 분위기인데~]
<가문 안주인의 생신이니까요.>
가주의 반려, 시리카 라인하르트의 생일이었으니까.
[근데 말이야. 생일이면 더 올 사람이 있어?]
<대부분 올 사람은 다 옵니다. 시리카님을 포함해 가주님께도 잘 보일 기회니까요.>
귀족들이라고 단순히 유흥과 사치를 위해 사교계를 여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관계와 상황 그리고 힘을 파악하기 위한 일종의 회의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꽤나 유식하네. 용병 아니었냐?]
<종자 짬이 몇 년인데, 이정돈 기본이죠.>
학당의 개가 3년이 있으면 풍월을 읊듯, 레오도 종자로서 익혀둔 상식을 자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놀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거들 일이라도 찾아야죠.>
쉬는 것도 좋았지만, 이대로 계속 놀고 있는 것도 눈치는 보였다. 원래부터 쉬는 것보다 일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했고.
[...근데 일이라고 해봤자 딱히...]
"아가씨!!"
복도에서 벌어지는 육상 대회, 선두에 서고 있는 것은 백발의 소녀였다.
"아리아스필 님!"
용사 가문의 영애는 사교계만 되면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말괄량이가 된다.
"멈춰주세요! 아리아스필 아가씨!"
각종 드래스를 든 메이드들은 힘겹게 아리아스필 아가씨를 쫓아갔다. 하지만 전력을 줄행랑을 치는 1성급의 기사를 일반인이 쫒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생겼네요. 할 일."
레오는 그런 경주에 참여라도 하듯 자신의 아가씨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복도를 달리며 코너에서 꺾어지기를 몇 번을 반복한 끝에 아리아는 질주를 멈췄다
"...후...여기라면..."
긴 복도를 넘어서 바깥의 정원 뒤편에 있는 마구간, 그곳의 짚더미에 몸을 숨긴 채 아리아스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여기에 있었군요."
레오의 목소리였다.
"...어?!"
그 익숙한 목소리에 아리아는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자신의 전속 기사는 상쾌한 미소로 그녀를 마주했다.
"...어떻게...?"
"그냥요. 감이 좀 왔거든요."
아까도 말했듯 레오는 종자의 인생을 헛보낸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모시던 아가씨가 주로 도망치는 곳을 찾아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이런 걸 보면 참 눈치가 있는데... 역시 하반신에 문제가...]
<닥쳐요. 천연기념물.>
그렇게 훈훈한 독설을 주고받으며 레오는 아리아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문제로 도망치셨나요? 아가씨."
"도망친 거 아냐. 그냥 하기 싫어서 피한 거지."
[그걸 세간에선 도망이라고 한단다. 허허.]
무슨 놈의 현자가 저리 옹졸하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럴 때일수록 잘 보듬어주는 것이 미덕인 법이지.
"도망치신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자꾸 드레스를 입으라잖아. 난 입기 싫은데..."
알만했다.
다른 귀족가 영애들이 인형이나 가지고 놀 때, 검부터 잡았던 아리아였다. 그것도 애들장난 수준이 아닌, 건장한 기사들조차 때려눕힐 정도로 강한 전사인 그녀였기에.
조금 부드러운 사슬갑옷이면 참아도, 드레스와 같이 하늘하늘한 옷을 참기에는 제법 버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입기 싫으신가요?"
"응. 입기 싫어."
너무 단호한 나머지 절삭음과 착각할 뻔했다. 그래도 이럴 때일수록 포옹하는 전략으로 가야 하지.
"그럼 입지 않은 것도 방법이겠네요."
"...응?"
우선 이렇게 동조를 하는 것으로 아리아의 경계를 푼다.
"어쩔 수 없잖아요. 본인이 싫다는데 강요한 것도 보기 좋지 않고요."
"...그치만... 그러면 파티에 참가할 수 없잖아. 계속 다른 시종들도 입히려고 할 거야."
[그걸 알면 입으면...]
<아, 닥쳐요. 동심 파쇄하지 말고.>
그렇게 만악의 근원에게 핀잔을 준 뒤, 레오는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그럼 같이 도망치죠. 이런 식으로."
"...도망 아니... 같이...?"
도망이라는 말을 부정하려던 순간, 같이라는 말에 아리아의 관심이 훔쳐졌다.
"같이 도망친다고?"
"저도 그런 격조 있는 자리는 부담스러워서요. 혼자보다는 같이 피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괜히 파티장에 있었다가는 다른 귀족들에게 시비나 안 걸리면 다행이었다.
차라리 이런 가벼운 일탈로 기분 전환이라도 된다면 아리아의 정서에도 좋을 것이다.
전생에도 오히려 하기 싫은 것을 강요시켰기에 15살이 넘도록 드레스는커녕 프릴 달린 옷 하나 입지 않았다.
"...같이...도망..."
이때 레오는 몰랐다.
'...같이 도망친다고...? 이건... 연인들이 꼭 하는 것 같은...!'
전혀 아니었지만,
'...데이트...!?'
아리아의 생각은 대강 이랬다는 것을, 레오는 전혀 알지 못했다. 전혀 아니었지만.
"...괜찮으세요? 얼굴이 붉어지셨는데..."
"어어?! 괜찮아! 그것보다..."
그녀는 긴 머리를 귓가로 넘기며 조심히 홍조를 숨겼다.
"...도망치고... 뭘 할 건데...?"
"마침 월급도 받았으니, 시내라도 돌아다닐까요?"
레오는 태연히 도망치는 계획에 대해 짜면서 설명해나갔다.
같이 밥을 먹는다던가.
차를 마시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초상화를 그려주는 가게에 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던가.
적당한 변명거리도 필요하니, 암살자 때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다는 거로 둘러대는 건데 어떠다던가.
그녀에게는 분명한 데이트의 계획일 거다.
레오에겐 전혀 아니었지만.
현자가 사회의 폐기물을 보는 듯 시선으로 경멸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거 좋네!"
"좋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그렇게 할까요?"
"응...!! 꼭 그렇게 하자!"
드레스를 안 입겠다고 도망칠 때는 내심 걱정했지만, 이렇게 레오가 든든히 자기 편이 되어주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더 좋을 지도...!'
"저도 턱시도 입는 건 좀 힘들거든요. 드레스만큼은 아니겠지만..."
누누이 말했지만, 아리아는 천재였다.
반사신경도, 판단력도 범인을 넘어선 초인.
"턱시도...?"
그랬기에 레오의 지나가듯 말한 짧은 단어조차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청력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
"아...네. 알프레드 씨께서 턱시도를 사주셨거든요."
알프레드는 전생에도 레오나르도에게 턱시도 하나를 마련해준 적이 있었다.
물론 이때보다는 나이가 많았지만, 저번에 아리아를 달래준 것이 평가에 영향을 준 것인지 회귀 전보다 일찍 받게 되었다.
"...그럼... 입을 거야...?"
"...네?아무래도 파티에 참여하면 입어야겠죠?"
어디까지나 아리아스필이 파티에 참여한다는 전제 하의 얘기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몰랐다.
'...턱시도... 레오의 턱시도...!'
지금 한 천재가 모든 생각을 끌어모으며 고민에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레오는 항상 편한 복장을 입고 있었지...'
한달 동안 옷을 안 산 것은 아니지만, 레오는 지금까지 턱시도와 같이 완벽히 용모에 신경을 쓴 옷은 입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분명...엄청나겠지...?'
갈등과 고뇌의 연속이었다.
[쟤 왜 저러냐?]
<글쎄요? 몸이 안 좋나?>
안타깝게도 두 정신적 고자에겐 깨달을 수 없는 수 없는 번뇌였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데이트가 턱시도보다는 낫지. 그냥 선물 사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
"게다가 아리아 아가씨도 사교 댄스를 추는 건 힘드시잖아요."
뇌세포에 과부하가 올 때 즈음, 레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어? 어어!"
당황하긴 했으나 아리아는 고민에서 벗어나 대답할 수 있었다.
"저도 사교 댄스는 좋아하는 편은 아니여서요. 같이 안 하길 잘했네요."
"그래! 같이 안 하길... 잠깐 같이?"
이번에도 '같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귀를 훔쳤다.
"같이 한다니...? 사교 댄스를...?"
"아, 네. 알프레드 씨께서 최대한 아가씨와 같이 춤을 춰달라고 설득해달라고 해서요. 그럴 거라면 차라리 같이 하기도 해서... 하지만 아가씨는 딱히 춤을 안 좋아..."
라고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포상이었다.
레오에겐 강요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왜 없는 걸까에 대한 고민은, 보는 사람의 속을 가연성으로 태우는 고통을 자아내었다.
***
"와아...! 아가씨...!"
그 이상, 아무런 추임새도 시종들은 넣지 않았다. 수수해서도, 어울리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보는 사람의 말문이 막힐 정도의 변화, 갑옷으로 간신히 가리고 있던 가녀린 미색을 드레스가 하염없이 강조하고 있었다.
"...그...그래? 이상하지 않아?"
이제 그녀가 걱정하는 건 드레스의 불편함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의 파트너로 만나게 될 한 소년이 어떤 감정을 느낄 지가 중요했을 뿐.
"네! 분명 모두가 좋아할 거에요!!"
"...레...오...도 좋..."
그 이상으로는 말하기도, 묻기도 힘들었다. 목과 얼굴에 몰린 핏기가 그 이유를 간접적으로나마 설명해주고 있었다.
"얼른 가시죠! 시리카님도 분명 기뻐하실 거에요!!"
그러면 좋겠지만, 더 좋은 거는 자신만큼이나 얼굴을 붉히는 레오의 얼굴을 보이는 것이다.
문이 열리고
화려한 사교장이 아리아의 시야를 채웠다. 샹들리에가 일으키는 화려한 불빛도, 그만큼이나 화사한 옷차림으로 사교계를 빛내고 빛낼
것인 또래의 귀족들도 아리아스필이라는 소녀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레오...! 레오나르도는 어디에...!'
그렇기에 드레스 자락을 붙잡으며 그녀는 사교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가주인 아버지보다, 생신의 주역인 어머니보다도 빨리 그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순간 레오의 인영이 인파 사이에서 보였다. 턱시도 차림도 눈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레오!! 레오나...!"
이름은 끝까지 부르지 못했다.
"...르도..."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레오나르도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으니까. 당황스럽다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자신이 아닌, 다른 소녀에게.
그것도 한명이 세네명은 넘는 여자들한테 둘러싸인 채,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아리아스필의 눈은 이미 죽었다.
당장 허리춤에 검이 없는 것이 몹시 아쉬웠으니까.
<+--|-|--+>
EP.25 성장-2
지금부터 생길 광기와 집착이 뒤섞이는 혼돈의 도가니가 되기 전,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을 5분 정도만 뒤로 되감아보겠다.
***
[꽤 화려한데?]
휘황찬란한 파티장의 경치를 바라보며 늙은 현인은 감탄했다.
<현자님 때에는 파티가 없었어요?>
[...얌마, 넌 내가 무슨 원시인인 줄 아냐? 그냥 추임새야.]
하긴 원시인이라 하면 고대인에게 너무나 큰 실례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는 문명인의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근데 네 애인은 어딨냐?]
<전 솔로인데요?>
[...등신 새끼... 아리아 어딨냐고.]
왜 혼자 착각하고 쌍욕을 날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시인보다도 못한 인간이니 이해하기로 했다.
<아리아는 드레스를 입고 있을 거에요. 그런 자리까지 같이 있을 수는 없죠.>
아무리 전속 기사이더라도, 탈의하는 현장까지 있을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있으면 미쳤다는 소리밖에 더 듣는가.
<음식이나 먹으면서 기다려야죠.>
이럴 땐 먹는 게 남는 것이었다.
파티장엔 평소 잘 먹지 못하는 고급 요리도 많이 준비되있으니 말이다.
[그럼 저기 검은색 과자부터 먹어봐. 왠지 저게 맛있어 보이네.]
<그럴깝쇼?>
레오가 브라우니 쪽으로 걸어가자, 주변의 사람들의 시선이 레오에게로 향했다.
[왜 이렇게 널 바라보냐?]
<글쎄요. 평민 냄새라도 나나.>
[신랄한 자기 비하일세.]
레오는 쟁반에 있는 브라우니를 집었다. 쟁반에는 절묘하게도 남은 브라우니는 하나밖에 없었다.
"앗..."
그 순간 다른 사람의 손이 레오의 손결과 닿았다.
"...어..."
반대쪽에서 손을 뻗은 사람은 제법 작은 체구를 한 소녀였다. 화려한 드레스에 머리장식을 한 거로 봐선 평민, 그것도 시종은 결코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드시지요."
그 귀족가의 영애에게 레오는 다과를 양보했다.
"아, 고마워요."
영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과자를 집어 베어물었다. 어차피 저것 이외에도 디저트는 많았고, 차라리 이렇게 배려하는 것이 사람들의 시선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흠..."
근데 무언가 기묘했다. 소녀의 시선이 계속해서 레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왜 저러죠?>
[잘생겨서는 아닐테고...설마...]
"아...!!"
현자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현인의 직감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농담 암살자님이시군요!!"
부정적인 예감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네?"
"농담 암살자님 맞으시죠?!"
과자는 먹지도 않았는데, 목이 막히고 속이 타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침착해야했다.
[으학...! 카하하하하하하하학...!!]
옆쪽에 미친 늙은이가 광소를 터뜨린다할지라도 말이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듯 하군요. 전..."
"맞네!! 농담 암살자야!!"
이번엔 다른 소녀가 외쳤다. 아예 그녀는 따로 뜯어둔 신문의 사진을 내밀며 말했다. 타는 것 같은 속이 수치심으로 타오르다 못해 폭발하기 시작했다.
"농담 암살자라고?!"
"맞네!! 신문에 나온 그 사람하고 똑같아!!"
그런 수치심에 석탄을 들이붓듯 소녀의 지인들과 친구들이 레오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시사상식에 정통한 교양인이었기에.
"알프레드 집사장을 실신시켰다면서요?! 고작 농담 한 마디로!"
"저도 그 농담 좀 가르쳐 주세요!! 호신술로 좋을 것 같아요!!"
"아니야!! 용언처럼 고유의 발음이 있어서 쉽게 배울 수 없대!! 그 핏빛 그림자도 일순에 당했다잖아!"
농담암살자의 전설을 익히 읽고 듣고 있었다.
[크헝...! 커허허허허허헉!!]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현자는 호흡곤란을 동반한 개웃음을 내질렀다.
저 늙은이의 콧볼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 나머지, 얼굴이 붉그락하게 변했다.
"...하하...하하...!"
농담으로 자살하자
***
그리고 현재.
"아리아스필님과 밀회를 나눌 정도로 사랑하는 사이라면서요!?"
"이미 가주님과 대놓고 아리아스필님을 가지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정말인가요?!"
"아니야! 아예 모든 저택 모든 사람들한테 아리아스필 님이 자기 목표라고 했데...!!"
"거기에 암살자들에게서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금지된 농담 암살술까지 썼다면서요?!"
어째서인지 화제가 '농담 암살자'에서 '아리아스필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 이야기로 전환되어가고 있었지만, 차라리 이게 나았다.
'이건 신문에라도 안 나왔으니까...'
아리아스필과의 관계는 오해할 수도 있었고, 이정도는 풍문 수준이었으니, 언제라도 무마할 수 있었다.
당장 꺼야 할 불은 그 빌어먹을 농담 암살자였다.
농담 암살자의 헛전설은 여기서 종지부를 내야 했다. 이러다간 대악마나 드래곤도 농담로 죽였다고 말할 판이었다.
[될 것도 같은데?]
<싸물어요.>
최대한 화사한 미소를 유지한다. 여기서 괜히 감정적으로 반응했다간, 반감이나 역효과를 살 수도 있었다.
"저기,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아, 아리아스필 님!!"
고난의 도가니 속, 고된 해명을 하려던 찰나, 구세주와 같은 이름이 들렸다.
그 이름을 들은 모두는 시야와 시선을 용사 가문의 영애에게로 옮겼다.
[오, 진짜 예쁜데.]
현자 말대로였다. 둘러싸고 있는 소녀들 사이로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벽안과 백발을 지닌 소녀의 미색을 가리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랐다.
평소 외모에 대한 관심이 박정했던 레오나르도마저 제법 놀란 눈치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각또각
딱딱하고도 고고한 음색, 구둣소리마저 아름답게 느껴졌다.
수면을 걷는 고니처럼 고결하게 아리아스필은 레오나르도에게로 걸어왔다.
[...야 근데...]
현자는 이성적으로나,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현재의 상황을, 좁혀서 아리아스필이란 소녀의 상태를.
[쟤 눈이 죽었는데...? 꼭...]
따각따각
저 날카로워져만 가는 구둣소리가 현자의 직감을 확신시켜주고 있었다.
하지만 더 말할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이미 아리아스필은 레오나르도에게 아슬아슬하게 접근해있었다.
주변에 자욱이 있는 인파는 하나의 기적을 내보이듯 아리아와 레오의 주변으로 갈라져 있었다.
"...아...네...?"
생기라고는 전혀 보이지는 않는 탁한 눈빛, 저 정도의 눈빛은 가족이나 친구가 죽는 충격 이상을 겪지 않는 이상 볼 수 없는 이색채였다.
"...따라와."
"...예? 갑자기요...? 무슨 일..."
"따라오라고."
결국 이유를 묻지 않고 따라갔다.
물론 그런 건 레오 자신이 충성심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주인을 따르는 건 기사도의 본분 아니던가.
절대, 결단코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아니고말고.
"..."
"...아...저기..."
아리아가 고개를 돌려 눈을 내보였다.
그냥 닥치고 걷는 게 맞았다.
말하면 기사도 잘리고 목도 잘릴 것이다.
비유 아니다.
"...레오나르도."
사교장의 외부, 아직 개방되지 않은 테라스의 쪽에서 아리아는 멈췄다.
"...네...? 아가씨...?"
"...파티는 어때?"
무슨 목적의 질문일까?
말 한번 잘못하면 내 인생도 잘못될 거다.
"대답."
아니, 목숨이 잘못된다.
"아주...! 아주 좋았습니다!! 음식도 맛있고!! 파티장도 화려하고!! 멋있고!!"
[너무 비굴하게 발악하는데?]
레오도 안다.
<그럼 여기서 죽어요?!>
알기에 이러는 거다.
목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거였다.
"...그래? 좋아?"
"네네!! 좋아요!! 무척 좋아요!! 사람들도 다들 착하고!! 상냥하고!!"
공포로 피부에 있는 털이 빠릿빠릿하게 선다. 만티코어... 아니, 드래곤과 싸울 때도 이런 감각이 든 적은 없었다.
"...그렇게 좋아?"
맞는 건가? 맞으니까 되묻는 거겠지?
"네!! 좋습니다!!"
"좋아?"
맞는 건...가...?
"네...?"
식은땀이 흐른다.
"좋냐고."
아니었다. 현자가 마치 토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을 보는 것처럼 보는 것이 그 확답을 내려주었다.
"...사실은... 싫..."
"싫어?"
"예...?"
"싫냐고."
이것도 아니었나보다.
생기 대신에 눈빛에 살기가 등등해졌다.
객관식 퀴즈인 줄 알았는데, 주관식 서술형이었나 보다.
"...지금 거짓말하는 거야? 사람 눈치 보고?"
"그게 아니고... 죄송해요."
우선 제 3의 답인 사과를 내본다.
짝!
갑자기 현자가 이마를 쳤다. 뭐지? 뭔가 틀렸냐?
"뭐가?"
"네?"
"뭐가 미안하냐고?"
죽는다. 저걸 제대로 변명하지 못하면 척살당한다.
"...뭐가 미안한 지도 모르는데 사과해?"
농담이고 뭐고 저 눈빛이면 그냥 즉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말이죠..."
최대한 두뇌 회로를 돌린다. 시각, 청각, 촉각과 같은 정보를 최선을 다해 떠올린다. 1초 늦을 때마다 내 명의 1년씩 주는 것 같다.
"...지금..."
"구두 때문에 발 아프신데 급하게 걷게 만드셔서요!!"
이미 죽었다. 이게 뭔 대답이냐. 사실이긴 해도 이딴 대답은 절대 기대하던 대답이 아닐...
"...어...?! 알고 있었어...?"
...뭐지 아직 목이 붙어있나? 이승에는 있는 건가? 지옥에 계신 어머니가 보일락말락 했는데...
"예? 아무도 몰랐어요?"
구둣발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중간에 또각거리던 울림이 따각거리던 시점에서 다들 눈치챘을 텐데.
[아, 맞다. 이 새끼 여자 근골격 다 외우는 새끼였지.]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두서없이 설명하니 엄청난 미친놈이 되어버리지 않았지 않은가.
"...아프시겠다고 생각했죠..."
"...그... 그래? 그렇구나..."
눈에 살기가 사그라들며 생기가 돌아온다. 레오도 본인 목숨에 생기가 돌아온 감각을 느꼈다.
"...혹시 아프시면 발을 내밀어주실 수 있을까요?"
"...발을...?"
레오의 부탁에 따라 아리아는 자리에 앉아 발을 내밀었다.
"...굽이 너무 높은 걸 신으셨네요. 조금 부으셨어요."
원래부터 초인적인 몸을 지닌지라 심하진 않았지만,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이렇게 아프시면 차라리 다른 걸 신으시지 그러셨어요?"
"그게... 옷을 준 사람이 이게 예쁘다고 해서..."
그거라면 더욱 납득이 안 되었다.
"왜요? 지금도 충분히 예쁘신데?"
"...예...?"
웬 존댓말?
"예쁘다고...?"
"예? 예예. 예쁘시죠."
눈깔이 현자마냥 어지간히 찌부러지 않은 이상, 그녀가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쪽이 이상했다.
"애초에 예쁘시잖아요. 머릿결도 빗하고 향수로 잘 다듬으셨고, 드레스도 다른 사람들보다 잘 어울리시는데."
뭘 저리 새삼스럽게.
"...그...! 그렇구나...! 고...고...!"
아리아가, 그 이전에 사람이 저리 빠르게 진동할 수 있는 건 처음 봤다. 공진이라도 하는 건가?
[...레오나르도, 넌 둘 중 하나야.]
<뭔데요?>
[옴므파탈, 인간말종.]
뭐지, 바보냐, 멍청이의 차이인가.
"...어쨌든 그 발로 걷는 건 무리네요."
"...그럼?"
"업어드릴게요. 자."
레오는 자신의 등을 내밀었다. 얼른 업히라는 뜻이었다.
"...그건...그건 조금..."
"...왜요? 별로인가요?"
"아...아니...! 업히긴 할텐데... 뭐랄까... 그게..."
아리아는 조심히 레오의 등판을 붙잡았다. 넓은 등에 몸을 기대자 편안한 온기가 느껴졌다. 같은 13살인데, 이 소년의 등판은 듬직하게만 느껴졌다.
"갈게..."
레오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 몇배는 큰 등판과 체구,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마비가 되는 감각.
"내 손녀딸과 제법 친해보이는군?"
마르켄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의 집행기사단 단장이자.
"...하...할아버지?"
아리아의 할아버지인 그가 있었다.
참고로 전생에 마르켄은 아리아를 가지고 음담패설을 한 기사의 성기 한쪽을 뭉개버린 전적이 있었으니.
그게 대략 20초 뒤의 자신의 미래가 아닐까, 레오나르도는 심히 두려웠다.
<+--|-|--+>
EP.26 성장-3
[...너 뒤지기 직전이지?]
<예.>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저 눈빛을 보면 모르겠는가. 저건 같은 인간을 보는 시선이 아니다. 잘 쳐줘봤자 변소의 파리나, 여름철 모기 정도겠지.
[왜 저러는데? 저번에 얘 애비는 가만히 있었는데.]
레오도 그게 의문이었다. 고작 업어주는 것뿐인데, 마치 자신을 손녀딸을 어떻게든 꾀어보겠다는 발정난 짐승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저 인간 처지에선 짐승은 죽여야 마땅하겠지. 애당초 레오는 짐승이 아니지만.
<마르켄 씨는... 뭐랄까... 올곧은 분이십니다.>
[어차피 안 들리니까 편하게 말해.]
<꼰대입니다. 줏대가 꼬여서 승천하기 직전이죠.>
[역시.]
늘 현자를 꼰대라고 깎아내리긴 했으나, 마르켄 씨는 등외 수준의 꼰대, 현자와 붙는다면 판정승으로 현자한테 패배할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선 최선의 패배였다.
[왠지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계속 지랄할 것 같아.]
<어? 역시 같은 꼰대여서 그런가.>
[무슨 의미냐?]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이미 서로 통하고 있을테니까.
"...뭘 가만히 있지?"
"...예?"
"내 손녀를 얼른 내려놓지 그러나?"
레오는 업힌 아리아를 순순히 내려놓으려고 했다. 말로 내려놓는 게 수명 연장에 그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꽈악...
어째서일까, 어깨에 올린 아리아의 손아귀가 억세진 느낌이 들었다. 어깨를 너머 승모근마저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얼른."
하지만 역시 승모근보단 목숨이 중했다. 그녀의 악력을 이겨내며 레오는 아리아를 내려놓았다.
"..."
등에서 내려가자 아리아는 시무룩한 감을 내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하긴 맨발이나 불편한 구두를 신고 걷는 수밖에 없으니 기분이 썩 좋진 않을 테지.
"아리아, 할아비한테 업혀라. 그 편이 낫겠지."
마르켄이 어부바를 위해 등을 내민 순간, 아리아의 눈빛은 다시 생기를 잃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냉랭하고 딱딱한 거절에, 손녀를 사랑하는 조부의 마음에 조금 금이 간 듯 보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저 노익장은 냉철한 눈빛으로 레오를 쏘아보고 있었다.
"엄마가 널 찾고 있다. 아직 선물도 못 드렸을 테니 얼른 가지."
생각해보니 선물도 못 드리고, 사교장 밖을 나갔다. 예의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있었다.
"전속 기사라는 놈이 이런 상황 하나 관리 못 하나?"
문제는 저 배배꼬인 꼰대는 그 원인을 본인이라 단정 짓는 것에 있었다.
[근데 맞긴 맞잖아?]
다른 꼰대의 말은 무시하자. 지금은 한 꼰대로도 벅차다.
***
사교장은 비교적 활발한 편이었다. 아리아스필의 난입과 동시에 탈주로 혼란스럽기는 했으나,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지 사교계의 분위기를 띄우는 해프닝 정도로 취급한 느낌이었다.
문제는...
"오, 오랜만입니다. 아버님."
마르켄 라인하르트의 출현이었다.
아까의 상황이나 가십거리로 떠들기에는 저 고고한 노인의 기류가 너무나 싸늘했다.
"언질 없이 와서 미안하군. 여러 상황이 맞물려 그렇게 됐네."
"아...! 아닙니다! 아버지!"
가주님이 저렇게 당황하는 상황은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그렇게 흔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 희귀한 광경을 흔하게 만드는 장본인, 확신하건대 조부인 마르켄밖에 없었다.
"선물은 이런 것밖에 챙겨오지 못했군. 미안하군. 적당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마르켄은 투박한 상자에 포장된 선물을 내밀었다. 파티의 주인공인 시리카는 오히려 눈치를 보며 선물을 받아드렸다.
"...이건 이빨이네요...?"
정확히는 짐승의 송곳니였다.
송곳니는 뭉툭한 부분에 구멍을 내 사슬끈을 꿰어 목걸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집행 도중에 잡은 늑대 우두머리의 이빨로 만든 목걸이다. 부적으로 나쁘지 않겠지."
"정말 감사합니다. 꼭 걸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꽤나 놀란 눈치로 이빨 목걸이를 바라보았지만, 정작 받은 시리카는 덤덤히 송곳니를 목에 걸었다.
늑대 뿐만 아니라, 악어, 상어, 곰, 그리고 와이번까지도, 박물관의 면상을 후려칠 만큼 각종 생물의 이빨 장식을 선물로 받았으니까.
[창의성 부족일세.]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다네요.>
[그럼 난 뭔데?]
<그 예시요.>
그렇게 마르켄을 시작으로, 조금 이르지만 다른 이들도 선물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귀한 보석부터 시작해 명인이 만든 장식품, 귀금속 등이 차례로 시리카의 손을 너머 테이블을 채우기 시작했다.
"어머니, 전 이겁니다!!"
장남 리오스는 실눈과 입꼬리를 올리며 선물상자를 내밀었다.
[뭔지 혹시 아냐? 어째 불안한데.]
<괜찮을 겁니다. 이상하게 생겼어도...>
상자를 열자 작은 손잡이가 달린 무언가가 쿠션에 담겨 있었다.
"이건...?"
지잉
갑자기 손잡이에서 검날이 튀어나왔다.
논지는 단순히 칼날이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칼날이 튀어나오는데 '찰칵'이나 '철컥'같은 소리가 아닌 '지잉'이라는 기묘한 소리가 나왔는가,
그에 대한 의문은 시각 정보를 통해 해소할 수 있었다.
[...광선검인데?]
검날 대신 광선이 튀어나오는 단검, 그것도 붉은색이었다.
<...예, 전생에도 이런 적이 있었죠.>
시리카는 그 광선검을 당황스럽다는 듯 몇 번 휘둘러보았다. 근처에 있는 라인하르트의 흑암이 광선검을 보다 유심히 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림자로서 상대방의 선물을 탐하는 추태를 부리지 않았다.
"...이게... 뭐니? 리오스...?"
"예! 빵칼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빵칼이었다.
"...뭐...?"
"하하! 설명해드리옵지요!"
리오스는 광선 빵칼을 들어 페이스트리를 잘랐다. 가열음과 함께 빵껍질이 바삭해지며 잘려나갔다.
"이젠 빵을 자르는 것만으로도 토스트를 만들 수 있죠."
주변 사람들은 그 혁명에 손뼉을 치기 바빴다. 저 혁명적인 재능 낭비를 보고 가만히 있기는 몹시 힘들 것이다.
[...쟨 천재냐? 등신이냐?]
<...전 천재에 한 표요.>
[난 등신에.]
동점이니 타협해서 리오스는 천재적 등신이라고 하자.
"...레오..."
아리아가 레오의 소매를 붙잡았다. 생각이 깊어진 나머지 자신들의 차례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 여기 이건..."
아리아는 레오를 옆에 세운 채, 준비해둔 선물을 내밀었다. 선물이 선물인 만큼 굳이 상자에 담아두지 않은 채, 고급 천과 리본으로 동여매어 두었다.
"이건... 참 아름답구나."
오색으로 빛나는 꽃, 하나의 작은 무지개를 꽃잎마다 부드럽게 마법으로 입힌 것 같았다.
"...어디서 구한 꽃이니? 이런 꽃은 처음 보는데..."
"구한 게 아니라, 만든 거예요. 레오가 알려줬어요."
그러면서 아리아는 레오나르도의 소매를 붙잡았다. 사람들이 시선이 레오와 무지개 꽃을 번갈아 바라보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군."
시리카는 오색빛의 꽃다발을 들며 레오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네, 생신 감축드립니다. 부인님."
레오나르도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가문의 부인에게 감축을 표했다. 그런 예법에 그녀는 기쁜 듯 인자한 웃음을 내보였다.
"감사해요. 레오나르도 군."
"아닙니다, 가문에 받은 은덕에 비하면 약소한 것이시죠."
가문이 준 것에 비하면 저 꽃은 그저 간단한 예의에 불과했다.
레오는 고개를 반 정도 숙이며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후후, 아리아가 왜 당신을 총애하는지 알 것도 같네요. 그 애 곁에 있어서 줘서 고마워요."
안주인의 포용을 내보이며 시리카는 꽃다발의 향을 맡아보았다. 고개를 든 레오는 그 반응에 안심했는지 다시 아리아 쪽을 바라보았다.
"...총애, 으으... 왜 그런 말을..."
어째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조금 달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홍조에 신경 쓸 기색도 없이 시리카의 주변에 파티장의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으니까.
그건 선물을 주는 것도 끝났으니, 한 번이라도 더 많이 가문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인파에 섞인 것은 레오와 아리아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나르도라고 했나?"
그 인파 사이에서 마르켄은 다시 레오에게로 걸어오게 되었다. 싸늘한 공기가 화사한 파티장을 가르며 마르켄과 레오만의 공간을 암묵적으로 형성시켰다.
"네, 마르켄 님."
"듣기로는 아리아와의 만남은 비공식적인 결투였다고 들었는데, 그게 맞나?"
'비공식적'이라는 수식어에 강조를 두는 거로 봐선, 긍정적인 발언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레오 또한 인정하는 사실이었으니, 받아드려야지.
"일개 철없는 용병의 호승심이었죠."
"자각하고 있다니 다행이군."
마르켄의 눈은 차가웠다. 눈가에 맺힌 초점은 마치 호수의 수면을 얼린 살얼음을 보는 것처럼 예민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누가 이겼지?"
"무승부였습니다. 비공식적이고 공정하지도 못한 결투였으니까요."
대답에 그의 눈살이 약간 찌푸려졌다.
썩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닌 듯 보였다.
찌푸린 눈가를 피지 않은 채 그는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두 번째에도 결투했다고 들었는데, 그건 어떻게 됐지?"
"...그 승부는 도중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마을에 발록이 출현해서 끝맺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조리있는 답변에도 그의 눈살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역으로 눈살의 주름은 점차 늘어나고 깊어져가고 있었다.
"그럼 자네는 아리아를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게로군."
싸늘하다 못해 주변의 공기가 아예 얼었다. 아마 한숨이라도 내쉬면 김이라도 서릴 게 분명했다.
"아버님, 갑자기 그런 말씀은..."
"이건 확실히 해야 할 문제니 말리지 말게나."
[저 새끼 진짜 꼰대 놈일세.]
<인정합니다.>
지금은 당일 점수 차로 마르켄이 우세했다. 이 세기의 역전극을 혼자만 보는 것이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결국, 이기지 못한 것은 사실 아닌가?"
"아버지! 그걸 말하려고 급히 온 게 아니잖습니까!"
멀찍이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마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는지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걸 말하기 위해서라도 이건 필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크리스'티나' 라인하르트,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시키지 마라."
그 명령에 싸늘한 분위기에서도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쟤 이름 크리스티나였냐? 크리스 아니었어?]
<각자 숨기고 싶은 건 있는 법입니다.>
마르켄의 우직한 틀니 덕분에 전부 밝혀졌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프라이버시는 지켜주는 게 도리겠지.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려울 거 없지. 아리아와 재대결을 하는 거다."
"재대결 말입니까?"
"전속 기사로서 자격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는 있으니까. 혹시 반론하고 싶은 것이 있나?"
레오나르도는 잠시 고개를 돌려 아리아스필의 안색을 살폈다.
"전 괜찮습니다만, 아리아님의 의견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괜찮아요!"
즉답이었다. 안색을 살핀 게 무의미할 정도의 속도였다.
"...저도 제대로 결판을 내고 싶어요."
생각 좀 하면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아리아스필에게도 레오와의 결투는 의미가 남다를테니까.
"..."
레오는 잠시 망설였다. 마법은 쓰는 것이 맞을지, 그리고 더는 봐주는 것이 맞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전..."
고민의 끝에서 승낙하려던 순간, 마르켄이 먼저 말했다.
"정 힘들다면이렇게 하지. 아리아에게 이긴다면 내 친히 내 무기고에서 무기 한 자루를 가질 수 있게..."
"하겠습니다."
뭔가 속물적인 의도로 보이긴 했으나, 죄책감은 없었다.
애초에 싸울 생각이었으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기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화염 검기를 날릴 수 있는 검이나 번개가 뿜어지는 창 같이 부차적인 것에 흑심 없는.
깨끗한 감정으로 승부에 임할 것이다.
<+--|-|--+>
EP.27 성장-4
용암검 화청, 볼카노 화산에서 나오는 특수한 광석을 제련해 만든 검으로 휘두를 때 마다 검기에 화염이 둘리는 화염의 병장기였다.
낙뢰창 풀고르,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를 흡수시켜 만든 창으로, 번개를 통한 폭발력과 속도로 보이는 쾌속이 일품이다.
거울의 방패, 유적의 거울을 갈아 만든 방패로 단단하기도 단단하지만, 공격을 반사해 튕겨낼 수 있다는 독특한 장점이 있다.
[그런 사기적인 무기가 다 보관되있다고?]
"그렇다니까요. 그것도 마르켄 님의 무기고만 한정해도요."
개인 무기고 뿐만 아니라, 라인하르트 가문 자체 소유의 무기고까지 고려하면 왕국 군대가 올지라 할지라도 상대 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만큼 개방하는데 허가와 제약이 많긴 하지만 말이다.
[그걸 꼬불치려고 지금 결투하는 거냐?]
<에이, 설마요. 제 목적은 엄연히 아리아스필의 성장과 결투라고요.>
물론 굳이 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지 않은가. 어른이 주는 건 '감사합니다'하고 받는 것이 예절이고 범절이었다.
[뭐... 그래. 이번 기회에 길쌈한 걸로 하나 맞추면 좋긴 하지.]
<에헤이~ 그런 사심은 전혀 없습니다! 암요!>
레오는 낡은 철검을 보며 말했다. 이길 수만 있다면, 이런 싸구려 검하고도 작별이었다.
[그렇다고 방심하진 마. 그 꼬맹이, 아직 어려도 재능만큼은 일품이니까.]
<그건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여유가 있어보여도 레오 또한 나름대로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긴장은 200번 이상의 결투와 패배를 통해 얻은 이성적 본능이었다.
끼이이익
준비가 끝났을 무렵, 결투장으로 가는 문이 열렸다.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결투장을 향해 레오는 발걸음을 옮겼다.
***
결투장은 연무장 이상으로 크고 웅장했다.
파티장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떨떠름한 표정으로 관객석에 앉아있었다. 처음부터 이런 목적으로 파티에 참석한 것은 아니었으니,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연무장하곤 비교도 안 되는데?]
<아무래도 가문의 영애가 정식으로 벌이는 결투이니, 아낄 필요는 없죠.>
결투장의 자리를 밟자 정면에 있는 가문의 영애가 들어왔다.
[...기류부터가 다르군.]
기류가 다르다. 그 표현은 실로 적절했다.
부드러운 드레스 대신, 입은 가죽 갑옷은 아리아스필의 기량을 암묵적으로나마 표출하고 있었고, 꽃다발 대신 쥔 장검은 레오의 호승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레오, 생각해보면 우린 여태까지 전력을 다한 적이 없었지."
그 말대로였다.
첫 결투에서 아리아는 단검을 사용해 밀렸고, 두 번째 결투에서 레오는 스스로에 대한 제약으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상황적인 제약은 있었지만, 그게 승부에 대한 열정을 식힐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검집에서 장검이 뽑혀 나왔다. 곧이어 칼끝은 자신의 호적수를 향해 곧게 뻗어나갔다.
"전력을 다해 싸워. 나도 그럴 테니까."
레오나르도의 검도 그에 응하듯 그녀에게 겨누어졌다.
"봐준 적은 없습니다. 이번에도 그럴 거고요."
두 기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 미소의 이유는 같았다.
"이제부터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와 레오나르도의 결투를 시작합니다!"
심판은 대결장의 위 좌석에서 손을 든 채 시합을 준비했다.
"시합의 승리 조건은 상대의 항복 또는 전투 불능 상태, 그 이외에 허가받지 않은 마도구 및 난입이 있을 경우 반칙패입니다."
설명이 끝나고, 곧게 올린 손이 서서히 내려갔다.
"시작!!"
외침과 동시에 아리아스필의 자리에 흙바람이 일었다.
"사라졌어?!"
관객들은 경악했지만, 정작 레오나로도는 침착했다.
카앙!!
사라진 아리아는 레오의 검 앞에 멈췄다. 울리는 금속음, 찰나라도 반응이 늦으면 베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예전보다 빠른데?]
예전을 넘어서 전생의 어린 아리아보다도 상회하는 속도였다. 단순한 민첩성만 놓고 보자면 레오나르도 자신보다도 빨랐다.
채앵!
검날을 튕기며 레오는 아리아의 맹공을 흐트려놓았다.
동시에
[스팀 스모크]
마법진 너머로 뜨거운 물안개가 아리아에게로 분출했다. 그대로 입자에 밀려난 아리아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크윽...!!"
눈을 떴을 땐, 이미 열기를 품은 물 입자가 경기장을 뒤덮은 뒤였다.
'어디지? 레오나르도는 어디에...?'
쐐액!
그녀가 찾는 상대는 대답 대신 단검으로 응수하기 시작했다.
"빨라...!"
연이어 투척된 단검, 못 튕겨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벼운 공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단검은 바닥날 거야. 거기에...'
자욱하게 깔린 물안개도 점차 걷혀갔다. 1서클 정도의 일회적인 마법으론 오랜 시간 시야를 가둬놓을 수는 없었다.
'거기구나...!'
안개 너머로 레오의 적안이 보였다. 아리아는 이미 돌진해 검을 휘둘렀다.
[라이트닝]
반격으로 나선 건 1서클의 전격 마법, 직선적으로 뻗어나는 마법이었기에 아리아에게 피하는 건 간단했다.
'잡았...!'
검이 닿기 직전,
파지지지직!
곧게 뻗던 단순한 전격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체인 라이트닝]
사슬처럼 이어진 전격에 아리아도 함께 말려들었다.
"끄아아아악...!!"
"...이게 무슨...!"
관객 전원이 경악했다. 지루하거나 떨떠름한 기색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투척한 단검에 와이어가 연결돼 있었군."
눈치챈 건 크리스(티나)가 먼저였다.
크리스의 설명대로 레오나르도가 던진 단검들에는 와이어로 연결되어 있었다. 철사인 만큼 전도율은 라이트닝의 위력이 확실히 전달될 정도였다.
"처음에 스팀 스모크를 쓴 것도 전격 마법의 위력 상승 때문이었네요."
거기에 자욱하게 뿌린 물 입자는 전격 마법을 상승시키기에 충분했다. 공기 중뿐만이 아니라 아리아의 몸에도 수분은 듬뿍 묻어있었다.
"...제법 잔재주는 잘 부리는군."
마르켄마저도 건조하게나마 레오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해치웠냐?]
<마무리를 지어야 해요.>
레오는 와이어를 잡아당기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검격을 먹일 수만 있다면 승리는 레오의 것이었다.
"...으...!"
하지만
[뭐야...!?]
주변에 깔린 전격이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리아 중심으로 마나의 바람을 밀려나오고 있었다.
"설마..."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
그녀가 강한 이유는 검술, 신체능력, 감각, 혈통, 다양한 요인이 존재했다.
하지만 레오는 알고 있다.
그녀의 본질적인 재능은
[2성...이잖아...]
"오러의 형태가 2성으로...!"
마나의 정수, 그 자체라는 걸.
그녀의 몸 밖으로 두 개의 오러의 응집체가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응축된 마나 코어는 동시에 전격을 밀어내 튕겨내었다.
"윽...!!"
마나의 압력으로 레오도 조금 밀려나갔다.
"...뭐지...! 이 힘...?"
아리아도 자신의 성장에 놀란 것인지 바로 공격으로 테세를 옮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틈을 비우지 않고 레오는 공격을 이어갔다. 빠른 전진과 동시에 쾌검이 이어졌다.
[야, 변신하는 건 좀 기다려줘라. 남자가 얍삽하게.]
<이기는 게 정의입니다.>
결국은 승자가 옳은 법이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 레오는 공격하는 테세를 멈추지 않았다.
카아앙!!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의 힘에 적응을 끝내놓았다. 레오의 저돌을 튕겨내는 것이 그걸 입증하고 있었다.
"...후..."
이제 전황은 아리아스필에게로 흐르고 있었다.
"계속 간다. 레오나르도."
아무래도 무기고에 들어가는 건, 쉬울 것 같지 않았다.
***
몸이 타오르는 것 같다.
단순한 작열통을 설명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신경 줄기 위에 얇은 철사를 얹어 이중으로 꼰 감각, 근육, 그리고 혈관 한 올 한 올에 혈액 대신 달아오른 쇳물을 부은 자극을 체감했다.
보다 함축적으로 표현하자면.
심장이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길 수 있어...'
그 기이한 의식이 아리아라는 존재를 더 예리하게 벼려내었다.
'레오나로도, 난... 너한테...!'
갓 생성된 두 번째 코어가 박동했다.
"이기겠어!!"
아리아스필의 마나가 경기장을 뒤덮었다.
[...이길 수 있겠어?]
영체로도 체감할 수 있는 마나에 현자는 조심히 물었다.
<...글쎄요. 저도 확신하진 못하겠네요.>
[그러냐? 그런 것치곤...]
자신 없다는 말과 달리 레오는 자신의 검을 다잡았다.
[너무 실실대는데?]
그의 미소는 긴장한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저 괄목한 성장이 기쁘기라도 한 듯, 반격의 검을 휘둘러 나갔다.
[근데 어떻게 이길 생각이야?]
본래라면 처음 썼던 전략으로 약화시킨 뒤, 맹공으로 승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코어가 2성이 된 이상, 그런 무른 전법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오러의 코어 수, 양, 세기만 놓고 봐도 이미 그녀는 레오나르도를 상회하고 있었다. 그걸로도 불리하다는 설명의 근거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런 강력한 검기는 레오에게 한 번도 닿지 않았다.
'...어째서... 일격도 닿지 않는 거지...!'
검의 무게, 속도, 마나량마저도 아리아 자신이 유리했다. 갑자기 격상한 능력에 그녀가 어설프게 통제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검기조차 레오나르도라는 존재 앞에 무력해졌다.
"...단순히 감이 좋은 건 아니네요."
레오의 검술을 보며 리오스는 나직이 감탄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저건 재능이나 감의 영역이 아니야."
가주의 자리에 오르는데까지 글라디오는 많은 인재를 경험하고, 등용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안목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냉철하고 정확하다 말할 수 있었다.
"믿기 힘들지만, 저 아이는 어린 나이에 농도 짙은 경험을 겪은 거겠지. 13살이라는 나이에."
가주의 설명에 동의라도 하듯 크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레오나르도의 몸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흉터만 놓고 보자면 몇 번 사선을 넘나든 노장이나 다름없었죠."
그 말에 정말 노장인 마르켄은 한팔로 얼굴을 괴었다.
"...아직은 방어적이긴 하지만, 못 봐줄 정도는 아니군."
그 말대로 레오는 공격으로 전황을 뒤집지 못했다.
[이대로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한 건 너야. 알잖아?]
현자의 말대로 장기전으로 가게 되면 전황은 레오에게로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다. 아리아는 점차 2성의 코어에 익숙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1성인 레오는 절대적인 마나량에 밀릴 테지.
그러니
[라이트닝]
속전속결로 끝맺는다.
폭발하는 전격에 아리아는 한발 물러가 열기를 피했다. 물러난 채로 아리아는 검을 쥔 채 숨을 가다듬었다. 마찬가지로 레오도 짧게나마 호흡의 박자를 되새겼다.
아마 이 호흡이 끝나면, 결착은 지어진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해. 순수한 힘으론 네가 밀려.]
정면으로 상대해도 불리한 건 마찬가지였다. 더 빠르고, 더 강한 마나와 신체를 지닌 쪽이 유리한 싸움이었으니까.
[라이트닝]
하지만
파지지지직!!
그 부족한 점을 만회해온 것이 레오의 싸움이었다.
라이트닝의 전류가 레오의 전신을 타고 내리며 그의 몸을 가속했다.
<이거라면 가능하겠네요.>
[...뭐? 뭐가...]
아리아가 돌진했다. 정직한 수직베기, 속도와 힘 모두 레오를 압도해왔다.
레오는 자신의 검을 쥐었다.
이인자는 떠올린다.
5년 동안, 저 검술을 깨부수기 위해 무얼 해왔는지.
어떤 무(武)를 쌓아올렸는지를.
감각의 상정과 공정이 끝나고.
일순 검은 뽑혔다.
잔재주도, 잡다한 기술도 아니었다.
하늘이 내린 인재를 벤 것은 기초의 근본, 기본기의 극치였으니.
•베기 제1형 할(割) 수평베기
기본의 심화가 천재의 검을 베어넘겼다.
<+--|-|--+>
EP.28 성장-5
함성은 없었다. 경탄도 없었으며, 야유조차 없었다.
침묵의 시선만이 경기장을 채우고 있었다.
"...하..."
침묵을 깬 건 아리아였다.
"역시 강하네. 레오..."
인정, 그녀는 자신의 패배를 승복하며 쓰러졌다.
레오는 검을 휘두른 자세를 유지한 채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그 승패의 교차에 심판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승, 승자!! 레오나르도!!"
그 확답에 몸에 힘이 풀렸다.
"쿨럭...!"
마른 기침과 함께 핏방울이 입가에 새어나왔다.
[괜찮냐?]
<아뇨. 내장 대신에 전기 뱀장어를 꼬아서 처넣은 느낌이에요.>
그것도 조리한 것이 아닌, 전기를 듬뿍 뿜어내며 꿈틀대는 싱싱한 뱀장어가 들어찬 감각이었다.
[전격 마법을 육체강화에 쓰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라이트닝을 몸에 바로 때려넣으니까 그래. 애초에 단순한 1서클 마법으론 너무 위험하다고.]
그건 설명하지 않아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땐, 공격 마법이 아닌 가공된 버프 형태의 마법을 쓰는 게 정론일 것이다.
[...그래도 봐줄만 했어. 짜샤.]
"존나 고맙네요... 그건..."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레오의 무릎은 구부려져 바닥에 닿게 되었다.
[...기절했냐?]
"아뇨. 아직... 기절할 순 없죠..."
레오는 검을 지팡이 삼아 지면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쓰러진 아리아에게로 다가갔다.
'이쪽도 지친 건 마찬가지군.'
아리아는 2성 코어의 마나를 버티지 못하고 기절해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련한 손으로 굳고 단단히 검을 쥐고 있었다.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갑니다. 아가씨."
레오는 근육통이 저릿거리는 양팔로 그녀를 안은 채,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관중석에 있는 마르켄을 바라보며 외쳤다.
"...무기는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그제야 관객들은 전원 환호했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순수히 저 전사가 벌인 격전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
무기고까지 들어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몇몇 기사나 식솔들은 반대하기도 했지만, 의외로 레오를 제일 껄끄럽게 바라보던 마르켄이 완고히 의견을 밀어붙였다.
본래 개인 무기고의 주인인 마르켄의 주장인 만큼, 반대하던 일행들의 주장은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런 행동에 의아할 틈도 없이 레오는 무기고 앞으로 다다를 수 있었다.
"...도착했다."
라인하르트 가문이 소유한 산 중 하나의 정상에 올라왔을 때 즈음, 마르켄은 한 동굴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멈춘 자리에 그 거구의 노인은 비대한 동굴의 대문을 맨손으로 밀어 열어내었다.
둔탁하고 뻣뻣한 소리를 듣는 것으로 저 문의 방범 원리가 단순한 무게라는 걸, 감으로나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들어가지."
마르켄의 지시대로 레오는 무기고의 주인과 함께 무기의 창고로 들어갔다.
[...오... 늙은이가 제법 운치는 있네.]
현자의 감탄대로 동굴은 운치가 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단지 자연적인 동굴이라고 하기엔 조금 기묘한 부분이 있었는데, 마치 조각가가 깎은 것처럼 깔끔하게 지면과 단면이 잘려 다듬어져 있었다.
"여긴 내가 직접 만든 동굴이다. 훈련을 위해 일일이 검과 망치로 산을 깎아내었지."
현자는 제법 감탄을 내었지만, 레오는 조금 시늉만 할 뿐 진심으로 놀라지는 않았다. 전생의 시절에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니까.
"훈련으로 쓰고 버리긴 아까우니, 지금은 내 무기고로 쓰고 있지. 가문의 식솔이 아닌, 외부인 중에 들인 건 네가 처음일 거다."
그건 조금 의외였다. 누가 봐도 마르켄은 레오나르도라는 존재를 썩 너그러이 보지 않았으니까.
"그런 영광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 생각을 반증하기라도 하듯 마르켄은 혀를 차며 눈매로 쏘아보았다.
"착각하지 마라. 널 인정하는 건 아니니까."
[거 생긴 것만큼이나 꼬장꼬장하네.]
현자의 말은 너무 심했지만, 그다지 감싸주고 싶은 감정은 들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도리를 지킨 것이리라.
"널 들여준 이유는 어디까지나 보험이다."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마르켄은 손가락을 튕겼다. 절도 있는 반응과 함께 벽면에 걸린 촛불이 차례로 피어올랐다.
불꽃은 타오르며 동굴 내부의 어둠을 빛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이건 좀 쩌는데.]
밝아진 동굴 안에는 각종 무기들이 정갈히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도 단순히 품질이 좋은 것이 아닌, 하나하나가 전부 고유한 능력을 보유한 재보였다.
"우선 원하는 무기를 골라라. 설명은 그 뒤다."
레오 입장에선 감사한 명령일 따름이었다.
거절하지 않은 채, 레오는 자신을 기다리는 귀염둥이를 향해 뛰어갔다.
[근데 뭘 고르게?]
<그러게요. 이 이쁜이 중에 어떤 게 좋으려나~?>
[네가 이쁘다는 걸 알긴 아는구나. 미의식이라는 개념이 없는 줄 알았다 얘.]
저 지랄을 듣기엔 눈 앞에 있는 잘 빠진 친구들의 교태가 레오의 시선을 자극했다.
<역시 화력하면 용암검이... 아니, 신체강화까지 고려하면 풀고르가... 쓰읍... 차라리 방어구를 고를까?>
장단점들이 전부 뚜렷한지라 바로 고르기가 정말 힘들다 못해 고통스러웠다. 마르켄만 없었더라면, 아공간 장갑을 가진 뒤 모든 무기를 때려넣어 가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흠...음...?!]
그렇게 행복한 고민을 하던 와중, 현자의 시선이 한 물건의 중심으로 꽂혔다.
<왜요? 뭐가 있어요?>
레오의 시선도 자연히 현자의 시선과 겹쳐지게 되었다.
시선의 종착지에는 검은 구슬이 있었다. 기이하게도 무척이나 둥글고 매끄러운 흑옥이었으나, 촛불의 빛은 전혀 반사되지 않았다.
"저걸 고를 건가?"
레오의 시선이 저 검은 옥에 멈추자 마르켄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 그게..."
"고를 거라면 난 추천하지 않도록 하지."
[대답 안 들을 거면 왜 물은 거야?]
그건 같은 부류의 인간끼리 이해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레오는 아무 말 없이 흑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저 검은 구슬은 예전에 한 유적에서 얻은 유물이다. 나름 희귀해보여서 챙겨왔다만 감정을 해봐도, 가공해보려고 전부 실패했지."
"불괴석 같은 부류의 물건인가요?"
때때로 순도 높은 불괴석은 쉽게 가공할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저 구슬도 그런 용도의 소재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대장장이들도 썩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도 아니었지. 그리고 불괴석이었다면 감정도 가능했을 거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레오도 별 관심없이 다른 무기로 눈을 돌리려고 했다.
[저걸로 해.]
하지만 다른 옹고집이 그 선택을 저지했다.
<네? 왜요?>
[잔말 말고. 저게 좋아.]
현자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고작 농을 하나 던지기에는 심히 아까울 연기일 정도였다.
<알겠다고요.>
"저걸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레오는 한번 속아보기로 했다.
제자가 스승 한 명을 못 믿어서야 무엇 하나 배울 리가 없을 테니까.
"분명 경고했다. 난 기회를 여러번 줄 만큼 관대하지 않아."
"제 감을 믿어봐야죠."
레오는 그렇게 말하며 흑색 구슬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미동 하나 없는 손길로 구슬을 붙잡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돼죠?>
[남은 건, 내가 하면 돼.]
현자는 영체인 상태로 흑빛의 돌에 팔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진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암호 입력, 메멘토 모리.]
...
...
......
<된 거예요?>
현자의 눈동자가 느리게 돌아 굴러갔다. 제발 아니라는 대답만은...
[...어...아니...?]
뭐가 아니라는 걸까, 현재로선 저 인간이 절대 현자가 '아니'라는 게 유력했다.
[잠깐, 기억났어. 다시 해볼게.]
그렇게 설득력 없는 소리를 하며, 현자는 다시 주문을 읊었다.
[암호 입력, 메이거스 메멘토 모리.]
...
...
이번엔 기대도 안 했다.
<역시 안 돼...>
"인식 완료, 소체 [검은 돌] 작동을 시작합니다."
소리가 주변에 울리며 검은 돌이 푸른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촛불과는 비교가 무례할 정도의 휘광이었다.
[자, 이제 만져보라고.]
<전 믿고 있었습니다.>
[구라치지 마. 새꺄.]
서로의 돈독한 신뢰를 잘 확인하며, 레오는 검은 돌에 손을 올렸다.
"마력이 있는 생명체 확인, 각인 작업을 시작합니다."
검은 돌이 레오의 팔에 달라붙었다. 형태로 봐선 굵직한 팔찌와 같았다.
"...어...! 어떻게...!?"
"저...저도 모르겠어요!"
주인이 된 레오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황한 채로 팔찌가 달린 팔을 황당하게 흔들어보았다.
[이제 검을 상상해봐. 네가 생각하는 가장 쌈박한 검을.]
<...검을요...?>
레오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확실히 머릿속에 검의 형상을 구축시켰다.
그러자,
"...무슨...?"
마치 검은 슬라임을 보는 것처럼, 팔찌는 다시 형태를 바꾸며 예리한 검을 형상시켰다.
[어때? 쩔지? 내가 만든 것 중에서도 제법 완성도가 높다고.]
<현자님이 만드신 거예요?>
[어, 현자의 돌 만들다가 어찌저찌 튀어나온 건데, 나름 괜찮아 보여서 가공했지.]
설명한 투만 들으면 두부 만들다가 비지가 나온 수준이었다.
[검은 돌은 네 마력을 먹고 성장할 거야. 지금도 강철보다 단단하지만, 잘만 하면 여기 있는 무기들보다 쓸 만해지겠지. 거기에 가변형 무기여서 자유롭게 사용도 가능해.]
레오는 몇 번이고 묵빛 검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써서 흥미가 없었던 여성이 가리던 걸 벗자 한눈에 반한 느낌이었다.
"...어...어떻게...!? 그보다 그걸 어떻게 사용할 줄 알지?!"
[...여기선 대충 얼버무려. 저번에 했던 삼류 무협지 설명마냥. 알겠지?]
그거라면 레오의 주특기였다.
"...모...모르겠습니다. 어느샌가 손이 돌에 닿아있었고, 깨닫고 보니... 이미 이렇게..."
"...설마... 성검과 같은 부류의 무기인가?"
마르켄은 짧은 레오의 변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멋대로 상황을 정리하고 상상해버렸다. 물론 '심장에 있는 현자가 방법을 알려줬다.'라는 사실은 떠올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혹시, 가지면... 안 되는 겁니까?"
"아니. 약속은 지켜야 마땅하지. 그런 형태로는 회수도 어려울 것 같고."
마르켄은 그렇게 납득하고 무기고 출구 쪽으로 발을 돌렸다.
"이제 나가지. 할 말은 가면서 하겠다."
"알겠습니다."
마르켄을 따라 레오도 무기고 출구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내가 말했을 터였지. 무기고의 무기는 보험이라고."
"예,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하드는 이미 살해당했다."
그 대답에 레오의 손에 힘이 풀렸다. 아마 팔찌 형태로 부착되지 않았더라면 얻은 무기마저 떨어뜨릴 정도였다.
"예?"
"제하드 뿐만 아니라 다이논스 가문 전부 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어."
제하드의 짓이라고 증언했을 때는 별 의심없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암습이긴 해도 집행기사단의 정보력과 실력이라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핏빛 그림자의 소행입니까?"
"확신은 없다. 이미 핏빛 그림자는 처부쉈지만, 거기뿐이 아닐 테니까."
태연히 상급 암살단의 파멸을 말하며, 그는 편지 몇 장을 내밀었다.
"제하드가 보낸 밀서다. 읽어봐라."
"이건..."
레오는 뜯어진 편지 봉투를 확인해 보았다. 그러자 그 소년의 눈빛이 커졌다.
"...그래. 저들의 목적은..."
마나체련술, 그에 대한 방식과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편지에 써진 날인과 인장이 그에 대한 증거를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이미 마나체련술의 이름은 각종 정보처, 암살 길드에 뿌려졌다. 다른 나라, 기사단의 귀에 들어가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러면...]
직관적으로 표현하면.
"전 살아있는 비급이군요."
그것도 현재로서 최적의 마나, 육체 단련법을 지닌 비급으로 말이다.
납치 대상으로 선정되는 건 당연할 정도의 가치는 있었다.
<+--|-|--+>
EP.29 성장-6
마나체련술
회귀한 직후, 현자의 가르침과 레오 자신의 경험을 접목해 만든 기술로
단순하고도 빠르게 얻은 것과는 별개로 그 단련술의 가치는 역대 기사단과 가문들의 무공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크리스님이 괜히 호들갑을 떤 게 아니지.'
마나 단련과 육체 단련의 결합은 가히 혁명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절 납치하는 건..."
이런 식으로 납치를 벌이는 건, 솔직히 말해 완벽히 이해되지 않았다.
마나체련술을 익힌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가문의 기사를 습격하는 것도 썩 안전한 선택은 아니었다.
"...가주의 영애를 납치하는 것보다야 현명한 판단이었지."
그것도 맞는 말이긴 했다. 가문의 영애보다야 기사를 납치하는 것이 훨씬 안정적인 선택지였다.
"영애를 지키다가 죽는 기사는 흔하지. 아마 핏빛 그림자는 그런 전개로 널 납치하려고 했을 거다."
뻔한 레퍼토리였다.
아리아스필을 납치하려다가 실패한 암살자들은 입막음이라도 하기 위해 기사를 잡아 죽였다.
조금 이상할지라도 이의를 제기할 정도의 사건은 아니었다.
"그리고 너에게서 무공을 빼내려고 했겠지. 회유든, 고문이든 전부 동원해서 말이야."
회유나 고문 쯤이야 수없이 당했기에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상급 마법을 사용해 기억을 빼내거나, 약물과 최면을 다 동원하면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약물하고 최면은 좀...]
<뭔 상상을 하든, 그건 아닐 겁니다.>
경험도 없는 분이 왜 저러실까.
"그러니 보험으로 무기를 주신 거군요."
이런 암습 정도야 몇 번이고 더 반복될 것이다. 대처는 할 수 있겠지만, 현재 레오의 실력으론 불안한 감이 있을 테지.
레오 본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착각하지 마라. 널 걱정해서가 아니니까. 불순한 자들이 그런 능력을 지니게 되면 곤란해서 주었을 뿐이야."
[아까부터 가만히 있는데 지멋대로 착각했대.]
<그러게요.>
이젠 마르켄을 감싸는 것도 힘드니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장단 한번 맞추자 10년 묵은 체증이 찬물에 씻기듯 내려갔다.
"하지만 무기를 준다 할지라도 근본적인 건 변하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이 포기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 테지."
그건 정확한 예측이었다. 오히려 레오의 무구를 탐내고 습격이 늘어날 가능성도 고려해야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래서 난 생각했다. 그러던 도중, 크리스티나가 제안했던 안건이 떠올랐지."
크리스(티나)가 제안했던 안건, 그건 레오가 처음으로 마나체련술을 시연했을 때의 몇 번이고 강조했던 제안이었다.
"설마 마나체련술을..."
"...그래,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만, 네 마나수련법을 라인하르트 가의 수련법에 편입시킬 거다."
불쾌함을 드러남과는 별개로 이건 큰소리로 비명을 지른다 할지라도 이해할 제안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거냐?]
대단한 정도가 아니었다. 몇백 년은 족히 넘긴 한 기사단의 유파, 그것도 용사 가문에 열 살배기 소년의 기술을 정식으로 넣어준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못해 아예 유례가 없었다.
[마탑으로 치자면 어린이가 만든 마법을 성인들이 배우는 정식 교과목에 편입시켜주는 수준이군.]
어투에 비해 정확한 비유였다.
"...그러셔도 괜찮습니까? 라인하르트에 누를 끼치는 건 아닌지..."
"라인하르트가 고작 햇병아리 한 명에게 누가 끼쳐질 것 같나?"
딱딱한 말투인 것치곤 결과적으로 레오를 위해주는 행동이었다. 현재 레오가 얻은 건 있을지라도, 잃은 것만큼은 전무했다.
"...그리고 인정하기는 싫다만, 크리스티나가 한 말대로 마나체련술을 정식으로 가르칠 가치가 충분해. 다듬기만 하면 역대 수련법들조차 뛰어넘겠지."
[그럼 인정하겠다고 해. 왜 자기 인격하고 갈등하고 지랄이야.]
"크흡..."
너무 상쾌한 한 마디에 레오는 입술이 파랗게 변할 때까지 깨물며 웃음을 참아내었다.
[근데 그렇게 넣어주면 뭐가 달라지나? 결국은 암살은 가능하잖아.]
그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걸로 뭐가 달라지냐고 묻고 싶은 표정인가보군."
간신히 웃음을 인내하는 표정이었지만, 그렇게 오해해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제 그 훈련법을 훔치게 되면, 네 개인의 비급을 훔친 것이 아닌, 라인하르트의 무술을 훔친 것이 된다."
일개 기사를 납치한 것에는 대응하는데 있어 한계가 생긴다. 용사 가문이라 할지라도 다른 대가문들과 국가 쪽에서 견제 또는 압력을 넣게 되면 힘을 쓰기는 어려워질 테니까.
<하지만 무공을 같이 훔치게 되면 판도는 달라져요.>
한 무공의 유파를 훔치는 것, 그건 기술 하나라 할지라도 조직 전체를 공격할 명분이 생긴다.
그 행동은 라인하르트에 대한 모욕과 선전포고라고 간주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위협을 이용한 수단으론 널 협박할 수는 없게 되겠지. 아무리 멍청해도 라인하르트 전체를 적으로 지는 얼간이는 없을 테니까."
그건 다르게 말하면 레오 자신을 단지 라인하르트의 기사가 아닌, 가문의 한 일원으로 받아준다는 뜻이었다.
이정도의 취급은 결혼이나 입양을 하지 않는 이상, 받을 수 없는 대우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네놈한테 감사 받으려고 한 판단은 아니다. 감사를 표하고 싶다면 내가 준 보험을 잘 사용해라."
그 말의 숨은 뜻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막아낼지 몰라도, 음지에 있는 습격을 완전히 막아낼 수 있을 리는 없지.'
마인이나 흑마법사와 같이 상식에서 벗어난 놈들이라면, 그런 안전책으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선 어떤 선을 넘어도 이상할 게 없으니까.
"보험 이상으로 사용해보죠."
그러니 그런 적들은 레오 스스로가 해결해라.
지금 준 무구는 그런 의미였을 거다.
"아, 참고로."
마르켄이 다시 동굴의 출입구에 도착했을 무렵, 그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눈에는 수라가 깃들어있었다.
"인정받았다는 핑계로 아리아에게 손을 대면, 무기와 함께 목숨을 가져가도록 하지."
"...예?"
"얼빠진 대답은 듣지 않는다. 그러니..."
"아... 그게 분명 무기고 들어올 땐, 인정 안 했다고 하셨잖습니까."
하도 진지하게 박은 독설인지라 잊어버리기가 어려웠다.
"...그...그건 멋대로 생각해라."
[여자가 저랬으면 모르겠는데, 쭈그렁 할아뭉탱이가 저러니까 역하네.]
"푸흡...!"
이건 도저히 못 참았다.
웃음을 듣자 쭈그렁 할아뭉탱이 수라가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편안히 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
"와~ 그래도 할아버지가 인정할 줄은 몰랐네요."
결투를 보며 먹다남은 팝콘을 입에 털어넣으며 리오스는 말했다.
"전 분명 어떻게 안 주려고 억지를 부릴 줄 알았거든요."
"집행기사단장님은 딱딱하게 말할지언정, 한번 말한 약속은 꼭 이행하지. 다들 오해하는 것 중 하나야."
"그렇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크리스티...!"
퍽
갑자기 흑암이 그림자와 함께 사라졌다. 그녀의 그림자는 이미 자신의 조카를 목째로 붙잡아 올리고 있었다.
"호칭에 대한 교육이 부족한가? 내 이름이 뭐였지?"
"아빠...! 아부지!! 살려주...세요...!"
"거기까지만 하게. 크리스. 아리아가 배우면 어떡하나."
크리스라고 다시 말한 것 덕분일까, 크리스는 리오스를 내려놓았다.
"감사함다...! 아버지...! 꼭 효도할게요...!"
"그럼 효도를 위해 한 달 동안 순정 소설은 금하도록 하지. 그에 관련 발언도 금지고."
"불 속성으로 효도해도 될까요?"
"안 돼."
단호한 발언에 리오스의 표정에 그림자가 드리누웠다.
"근데 레오나르도 군은 뭘 고를까요?"
시리카는 화제라도 돌릴 겸, 무인들이 좋아할 만 주제를 꺼내들었다.
"흠... 내 생각엔 용암검 화청이라고 생각하네만. 아무래도 화력이 좋은 것이 레오나르도의 성격과 맞아."
"제 생각엔 거울의 방패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공격을 반사하는 거로 전략적인 전투도 가능할 테니까요."
"아니, 이번 전투를 생각하면 낙뢰창 풀고르도 나쁘지 않아. 전격으로 육체를 강화하는 방식은 마법보단 풀고르가 안정적인 편이지."
서로의 의견이 팽팽하게 갈렸다. 하지만 그중 출중한 재능을 지닌 어린 무인은 유일하게 입을 닫고 있었다.
"아리아, 넌 어떻게 생각해?"
"...어째서..."
아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리오스의 말이여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리아? 듣고 있니?"
"...네? 네, 죄송해요. 집중하고 있는 게 있어서."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지? 어려운 문제라도 조금 도와주도록 하지."
크리스의 말에 아리아는 깊게 품고 있는 고민을 꺼내었다.
"...그게 어떻게 제 검보다 레오의 검이 먼저 닿은 건지 잘 모르겠어서요."
단순히 레오가 강하다는 걸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정확히 '어떻게' 레오나르도가 자신을 이겼는지 분석해 대처하기 위한, 연구와 고민이라고 봐야 마땅했다.
"...분명 속도도, 힘도 비슷했을 텐데... 어째서..."
그런 고민이 기특했는지 크리스는 흑암의 연륜을 자랑하며 전투에 대한 분석을 설명해주었다.
"그건 신장의 문제 때문이지."
"신장... 키요?"
"그래. 레오나르도는 체격이 아리아, 너보다 크니까."
전투에 있어서, 그것도 1대1의 접전에서 중요한 건 신장 또한 포함되었다. 근거리전에서 있어서 체격이 크다는 점은 리치, 즉 사정거리가 길다는 뜻도 되었다.
"너와 레오나르도는 대략 6~7cm 정도 차이가 나니, 리치를 통해 승부가 갈려도 이상하지 않아."
그 자세한 설명을 들으니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신장 차이는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분야였다.
"잘 먹고, 잘 자면 잘 클 거다. 아리아. 그 나이대는 눈 깜박이는 사이에 크는 법이니까."
"근데 그만큼 레오도 크지..."
아버지인 가주가 노려보자, 푼수인 리오스마저 입을 다물었다. 저러다간 음유시인에게 사랑 이야기를 듣는 것마저 금지될 판이었다.
"...그래도... 뭔가 극복할 방법이..."
그렇게 고민하던 와중, 아리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그건 레오나르도와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결투를 하기 전까지 같이 훈련하며 들은 정보였다.
"레오라면 알고 있을 것 같아요!"
"레오라르도가?"
"확실히 레오나르도라면 방랑하는 동안, 여러 정보를 얻었을 테니... 성장에 도움이 되는 식품이나 훈련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너무 과대평가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렇게 성장 비법을 잘 알았다면 레오나르도는 커진 체격으로 승부했을 것이다.
"저기! 레오나르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이 오가던 사이, 산에서 내려오는 두 기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근데... 왜 이렇게 너덜너덜하지?"
중상은 아니었지만, 얼굴과 몸에는 생채기 투성이였고 옷도 제법 헐어서 넝마가 되어있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별거 아니다. 저 애송이가 받은 무기를 잘 소화했는지 확인했을 뿐이지."
레오도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얇은 형태의 곁가지로 붙어있는 이유일테지만,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라도 믿어야 덜 억울했다.
"그래서 무슨 무기를 받았습니까?"
레오는 자신있게 팔을 들었다. 팔에는 검은 팔찌가 차져있었다.
"...그건 처음 보는구나. 원정 때 새로 얻은 무구입니까? 아버지?"
"잘 봐라. 나도 저게 저렇게 변할 줄은 몰랐으니까."
마르켄이 턱짓을 하자, 레오는 팔찌의 형상을 변환시켰다. 검은 팔찌는 구슬처럼 변하는가 싶더니 한손검, 장창, 방패로 차례로 변해갔다.
"...오오, 가변형 무기로군요.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아무래도 성검과 같이 주인을 택하는 무구인 것 같다. 그러니 크리스티나."
마르켄은 입을 떡 벌린 채, 검은 돌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는 크리스티나에게 주의했다.
"탐내지는 말아라."
"...제가 무슨 애입니까?"
"때론 애보다 더 심하지."
크리스티나는 그 말에 수치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고, 리오스는 웃기도 전에 다시 크리스에게 다시 목을 졸렸다.
"저기...! 레오...!!"
그런 난장판 속, 아리아는 간신히 떠올린 기억에 의지한 채 레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러 다가갔다.
"네, 아리아 아가씨."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라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에 아리아는 밝게 웃으며 고대했던 부탁을 했다.
"날... 키잡해줄래...?"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예?"
레오의 목뒷덜미도 싸늘해졌다.
이유는 뒤에 있는 두 가장 때문일 것이다.
확신할 수 있다.
"저번에 말했던 그거, 처음 훈련할 때 말했던 거 있잖아. 불량배들의 은어라면서...!"
레오의 목숨도 싸늘해졌다.
<+--|-|--+>
EP.30 3주간의 휴가-1
시간이 참 빠르구나.
거울을 보자마자 나온 감상이었다.
[키도 제법 컸는데?]
레오의 키는 이미 청년의 것으로 성장해있었다. 적게 잡아도 180cm는 족히 넘었다. 마찬가지로 체격도 건장해져 성인 기사와 완력으로 승부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뭐, 2년이나 지났으니까 당연하죠.>
말은 그렇게 해도 레오도 자신의 괄목한 성장에는 놀라고 있었다. 전생에조차 이렇게 급격하게 성장한 적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역시 키잡의 힘은 대단하구먼. 나도 비법 좀 알려줘라.]
<키잡 소리는 하지도 마세요. 트라우마 있다고요.>
지금도 키잡 소리만 들으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몸통에 얕게 난 흉터가 쓰라렸다.
[2년 전 일인데, 잊을 때도 됐잖아.]
<한 명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 몽둥이로 휘두르고, 다른 한 명은 바위를 망치 삼아 내리치는데 잘도 잊히겠네요.>
아마 그건 죽기 전 주마등에도 떠오를 기억이었다. 실제로 그 한 달 동안은 악몽으로 잠을 설쳤으니까.
"이제 가봐야겠네요."
[그래, 어여 가봐라. 키잡은 자제하고.]
<현자님은 지랄 좀 자제하세요. 체할라.>
불지옥 같이 훈훈한 걱정을 주고 받으며, 레오는 방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간 레오가 향한 곳은 수련과 기합이 오고 가는 연무장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알폰스 선배."
"괜찮다. 이른 아침에 매번 빼놓고 오는 건 생각보다 고된 일일테니까."
수련과 기합이 오고 간다 할지라도 지금 연무장에 있는 건 알폰스 한 사람밖에 없었다. 레오까지 왔으니 이젠 두 사람이었다.
"선배가 부르면 바로 가는 게 후배의 도리죠."
"선배라, 여러모로 스스로에게 무안해지는 호칭이로군."
현재 레오나르도의 표면적 직책은 아리아스필의 전속 기사였지만, 가문의 일원들은 암묵적으로나마 레오의 가치를 높게 사고 있었다.
그 증거로 레오의 마나체련술은 라인하르트의 정식 수련법에 편입되어, 2년 사이에 가문 상급 기사들의 주류 수련법이 될 정도였으니까.
'그 대가로 내가 만들었다는 건, 최대한 숨겨야했지만.'
그런 사실을 떠올리며 레오는 목창을 집었다.
"오늘은 창이군."
"오늘따라 창술이 하고 싶거든요."
"그럼 난 하던대로 하지."
거구의 체격을 자랑한 알폰스 암스트롱은 비대한 대검을 손에 쥐었다. 목검이긴 했지만, 맞기라도 하면 뼈가 부러지는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럼 시작하지."
레오와 알폰스가 서로에게 돌진했다.
이어지는 충격음, 눈으로 쫒을 수 없는 연격이 서로 부딪쳤다. 속도뿐만이 아닌, 위력 면에서도 경악은 멈출 수 없었다.
맞부딪칠 때마다 검기의 풍압이 연무장 주변에 난무했다.
"...흡...!"
이어지는 대검의 수직 베기, 목창으로 방어한다면 분명 부러짐과 동시에 몸체에 검이 내리쳐질 것이다.
그렇기에
파앙!
레오는 창을 수직으로 내리찍은 채, 반동을 탄성 삼아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대검을 회피하며, 동시에 반격의 기회를 내주는 기술이었다.
"...공중으로...?!"
경악에 응하듯 레오는 공중에서 창을 연속으로 찔러 알폰스의 대검을 튕겨내었다.
"윽...!"
그대로 착지한 레오는 알폰스에게 목창의 날을 겨누었다.
"제 승리입니다."
"...그래, 이번에도 내 패배다."
승복이 끝나자 레오는 창날을 치우며 목창을 내려놓았다.
"아직도 너에겐 못 당하겠군. 그런 움직임은 어떻게 한 건가?"
"그건 근육 덕분도 있지만, 아무래도 유연성을 단련한 까닭이 크죠. 단련된 근육의 응용력을 높여주거든요."
"흠... 유연성이라, 확실히 내가 부족한 점일만 하군."
남성의 몸이다 보면 자연히 여성보다 유연성이 떨어지게 된다. 아리아에게서 그 점을 깨달은 레오는 체조와 스트레칭으로 그 단점을 만회했고, 장점으로 승화해내었다.
"그래도 근육은 선배님이 저보다 위에요. 아까 수직 베기는 방어가 불가능할 정도였어요."
"칭찬 고맙군. 말 나온 김에 오늘 같이 하체라도 조지는 게 어떤가?"
윤기가 흐르는 근육을 움직이며 알폰스는 교양있게 운동을 제안했다.
"그게... 오늘은 안 됩니다. 선배님. 오늘은..."
레오의 거절에 알폰스는 깨달았다는 듯, 제안을 도로 가져왔다.
"아, 오늘은 마법 훈련일이었지. 미안하군. 잊고 있었어."
"아닙니다. 그럼."
레오는 가볍게 목례하며 몸을 훈련하는 장소에서 마법을 훈련해가는 장소로 몸을 옮겼다.
***
"오~ 내가 너무 늦었나?"
라인하르트 가의 자랑스러운 장남, 리오스가 약속 시간에 8분 늦은 채 정원으로 달려왔다.
"늦긴 늦었습니다."
"너무는 아니구나. 그러면 됐어~"
[저렇게 욕하기 애매한 시간에 정확히 오는 것도 능력이네.]
<그러게요. 텔레포트도 쓸 수도 있는 양반이.>
텔레포트를 쓸 수 있는 시점에서 시간만 잘 확인하면, 바로 장소로 도착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럴 것도 없이 이 마법 훈련장은 리오스 옆방에 있었다. 애당초 마법 훈련장은 리오스를 위해 만들어진 전용실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하, 그런 표정은 너무하다고! 아우!"
"하하, 그런 호칭은 너무하네요. 리오스 님."
"너무하긴, 편하게 말하자고."
리오스는 레오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2년 동안, 항상 레오를 아우라고 불렀다.
저 능글맞은 호칭이 마법을 가르치는 조건에 있었기에, 레오는 이 이상의 반항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숙제는 잘 해왔어?"
레오는 대답 대신에 양손을 펼치며 원형의 마나를 펼쳐내었다. 다른 속성의 두 마법이 둥글게 전개되며 차례로 화염과 냉기를 뿜어내었다.
"브라보! 백점 만점일세!"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그렇지~? 역시 내 덕분이라고, 나도 생각해!"
옆쪽에 계신 마법의 대부가 몹시 싱거운 시선으로 노려봤지만, 우선 시선은 피하도록 했다.
현자의 덕분에 빠른 성장을 할 수 있는 것도 맞았지만, 솔직히 리오스의 덕도 많이 본 것은 사실이었다. 그 덕분에 현자의 부족한 현대 마법의 지식을 보충시킬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사실 이 정도로 잘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2년만에 2서클 달성, 그리고 더블 캐스팅까지. 이건 상급 마법사들 중에서도 드문 편이라고."
싱거운 눈빛의 현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레오의 성장은 타인보다도 월등했다는 의미였다.
"이제 2서클에서 내가 가르칠 건 없어."
"그럼 이제 3서클인가요?"
"아니."
리오스는 드물게 단호한 어투로 외쳤다.
"...예?"
"이제 난 아우를 가르칠 수가 없거든."
"...왜...왜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겨우 마법의 이치에 발을 담근 기분이었는데, 여기서 리오스가 가르치는 걸 중지하면 3서클을 익힐 명분이 사라진다.
"오해하지 마. 나도 아우를 무척 가르치고 싶은데..."
리오스는 서랍에서 흰 서류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마탑」중급 마법 허가서]
...라는 명제와 그와 관련된 사항들이 줄지어 항목대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마탑에서 정식으로 허가를 받지 않는 이상, 중급 마법인 3서클은 배울 수가 없어. 익히면 몇 년 전처럼 감방에서 소개팅해야 돼."
그제야 레오는 리오스의 말이 이해되었다.
"중급 마법을 배우려면 마탑에 가서 허가를 받아야하는군요."
"아무래도. 물론 정식 교사나 강사의 자격증을 얻는다면, 그런 절차는 생략할 수 있지만 난 야매인지라 그런 게 없어."
"왜 없어요?"
"왜겠어?"
레오는 리오스를 눈으로 쓸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해했습니다."
"바로 이해하니까 좀 상처인데."
리오스는 서류가 담긴 서류철을 내밀며 피식 웃어보였다.
"어쨌든 잘 다녀오라고. 꼰대들이야 많겠지만, 그만큼 재미진 것도 많거든."
"리오스 님도 같이 가시는 게 아닌가요?"
"난 사양할게. 그리고 같이 가면 감점 요인만 되지 득이 되진 않을 거야."
레오는 다시 리오스를 쓸어보았다.
"아, 그렇네요."
"...그렇게 이해하는 거 상처라니까."
리오스는 그렇게 말하며 지팡이를 들어보였다.
"그래도 즐거웠어. 라인하르트는 무가 중심인지라 마법보다 무술이거든. 그래서 마법 얘기할 일이 많아서 즐거웠다고~ 아우~"
그건 전생에도 얘기한 적이 많았다.
전생에도 몇 번 정도는 마법을 가르쳐주겠다고 권유하기도 했었으니까.
[근데 왜 안 배웠냐?]
<왜 안 했겠어요?>
[아, 그러네.]
현자는 리오스를 1초 정도 보며 납득했다.
상처받는 이해 속도였다.
"근데 왜 리오스 님은 무술을 안 배우시고, 마법에 종사하시게 된 건가요?"
리오스는 아리아에 비하면 부족하긴 하지만, 무술에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다. 검을 휘두르는 묘리 정도는 알 정도였으니 재능 자체는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음... 그건 마법이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고..."
머리를 살짝 긁적이던 리오스는 서재의 책 한 권을 뽑았다.
"음... 혹시 현자라는 사람 알아?"
"네?"
모를 리가 없었다.
바로 옆에서 지금 둥둥 떠다니는 부유물이 그 장본인이 아니더냐.
"하긴 들어본 적도 있을 거야. 현자에 관한 이야기는 민담이나 낭설, 동화는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을 테니까."
전생의 삶에서도 그 이명을 '들어보기'는 했다. 그에 대한 전설과 민담은 용사와 비견될 정도로 넘쳐났다.
"근데 솔직히 아무도 현자가 실존한다고 믿지는 않지."
그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자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너무 말도 안 되거든. 수명이고 하는 일이고 간에 말이야."
인간의 위업이라고 하기엔 너무 허무맹랑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마법의
시초, 서클 마법의 창안만으로 말이 안 되거든. 뭐 혼자서 드래곤을 마법만으로 때려잡았다던가... 정령만으로 아예 군대를 꾸려서
언데드 천지가 된 섬을 정화했다던가, 뭐 그런 것도 있지만, 하여튼 허무맹랑하지."
그 말에 레오는 다시 그 무용담을 넘어선 신화 속 인물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적도 있었지 참. 늙다보니 기억력이 퇴화한단 말이지.]
코와 귀를 동시에 파며 그 지혜의 영웅은 덜떨어지게 인정했다.
과거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화산이나 운석이라도 터져서 대격변이라도 일어난 건가.
"근데 난 현자가 실존한다고 믿어."
그건 레오도 마찬가지였다. 심각한 문화 충격이긴 했지만, 실시간으로 그 믿음을 강제로 전도받고 있으니까.
"...어째서죠?"
"그건 이 책 때문이지."
그렇게 말하며 리오스는 책장에서 뽑은 책을 내밀었다.
"이건..."
[현자와 용사]
해져있는 표지와 속지의 책, 두깨로 봐선 소설이나 사전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가문에 고서고에 있던 동화책이야. 내가 처음 발견했어."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전생에조차 접하지 못한 정보였다.
"별 내용은 없어. 다른 신화랑 비슷한 느낌인데, 초대 용사였던 루벤 라인하르트님의 스승이 현자였다는 이야기지."
그건 지나가듯 들은 적이 있다. 현자 장본인한테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안 믿는 눈치였어. 용사님은 마법보단 무술 중심이었고, 현자에 대한 기록도 얼마 없었거든."
"...리오스 님은 믿으시군요."
"...뭐 사실은 반신반의지. 하지만 가진 근거는 제법 그럴듯해."
리오스는 책을 테이블에 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이 책이 가문의 서고에 있었다는 점이 그래. 만약 상상으로 대충 엮은 책이었다면, 당시 가문 측에서 불경하다며 바로 소각했을테니까."
맞는 반론이었다. 유서 깊은 가문일수록 정통성을 중시하기 마련이니까. 있지도 않은 스승의 존재를 논하는 것 또한 불경한 행동에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이거."
리오스는 동화책을 펴 맨 마지막 장을 내밀어 보여주었다.
"...이건..."
현자의 초상화였다. 동화풍도 아닌, 극화체에 현자와 완벽히 일치하는 그림이 책장 끝에 그려져 있었다.
"이 초상화야."
"근데 이런 건 있을 법도 하잖아요."
진짜로 있지만, 우선 모른 척한다.
"있을 법하지. 근데 이거랑 똑같이 일치하는 초상화는 마탑밖에 없어. 그것도 정상층에나 안치되어있지."
그렇게 되면 신빙성은 더 올라간다.
음유시인과 화백이 장난삼아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그러니까 난 현자가 있을 것 같다. 이 말이야."
"그럼 현자라는 존재를 밝혀내기 위해 마법을 연구하시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뭐 이유를 따지자면 재미가 8할, 현자가 2할이지만, 밝혀내면 그것대로 가문의 영광 아니겠어?"
지금 레오는 가문의 영광이 될 수도 있는 인간을 옆에 두고 있다.
[...뭐? 왜?]
때론 진실이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걸, 레오는 뼈 속 골수 내부가 저리도록 느낄 수 있었다.
"뭐 그냥 그렇다고. 기회 되면 마탑 구경 갈 때 봐봐. 잘하면 보여줄 수도 있어."
"아...네..."
레오는 하얀 거짓말로 떡칠을 한 표정을 지으며 간신히 리오스에게서 떨어졌다.
어느 정도 떨어지자 레오는 입을 열었다.
"현자님."
[엉? 왜?]
<300년 전에 도대체 뭘 한 겁니까?>
[...뭐? 드래곤 잡은 거?]
<아니 전부 다요. 그거 다 진짜에요?>
[이제와서 말하는 거지만, 너무 늦게 물어본 거 아니냐?]
레오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현자가 은근히 그런 이야기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감안해야했다.
[전부 다 맞아. 지금은 좀 이래도, 예전에는 좀 열정이 있었거든.]
<그게 아니라요. 왜 이런 식으로 사라졌냐고요.>
결국 사람들은 현자를 제대로 기억하지도 않고, 단지 신화 속의 인물로 치부해버렸다.
이래선 현자가 아니라, 은자라는 이명이 맞은가.
늦고, 화나고를 떠나서 이젠 물어볼 수밖에 없는 안건이었다.
[별거 없어. 현타가 온 거지.]
<...네?>
[신물이 난 거야. 세상살이에. 존나게.]
천박한 말투,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천박함은 씁쓸한 뒷맛을 지우기 위한 자극처럼 보였다.
<+--|-|--+>
EP.31 3주간의 휴가-2
현자
어질고 총명하며 성인에 다음가는 인물.
모든 마법의 시초, 현대 마법 서클식의 창시자.
이 대표적인 업적을 제외해도 인간이 세울 수 없는 위업을 태연히 세워온 현인.
이건 그런 그가 현자(賢者)에서 은자(隱者)가 된 이유는,
[세상도 정도껏 더러워야지, 기분 더러워서 때려쳤다.]
세상의 비관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법하네요.>
마찬가지로 염세의 시선을 가진 레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납득하냐? 뭐 더 안 물어봐?]
<세상이 썩은 건 사실이니까요.>
고작 10살에 가족의 품 없이 혼자 살아온 레오였다. 그것도 약육강식을 맨살로 느끼는 용병으로서 살아왔으니 속세에 대해 그리 낙관적인 생각을 가질 수는 없었다.
[뭐...기왕 얘기 꺼내는데 더 물어봐라. 오랜만에 썰이라도 풀게.]
<...그럼 여태껏 봤던 것 중 인상깊게 더러웠던 건 뭡니까?>
[그건 말이지...]
오랜만에 옛얘기를 꺼낼 수 있는 게, 현자는 혀에 기름칠을 한 채, 빠르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아름다운 모험과 환상이 아닌, 무거운 분위기와 잔인한 전개가 담겨 있는 비극이었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레오는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뭐... 그런 것도 있었지. 기껏 광산 개발용 폭발 마법을 개발해줬더니, 그걸 테러니, 반역이니 그딴 거에 쓰질 않나. 그 땐 참 말세였지.]
<지금도 개판이긴 해요. 이젠 아예 골렘에다가 마법 폭탄을 집어넣어서 원격으로 폭사시키기도 하죠.>
[하... 개자식들, 마탑 놈들은 뭘 하는 거야? 고작 1서클 쓸 때는 게거품 몰고 쳐들어왔잖아.]
2년 전 일이었지만, 그 두 마법사의 횡포는 아직까지도 여실히 기억에 남았다. 지금 허가증을 받으러 가는 것도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간단해요. 전 만만하고, 그 폭탄마들은 건들기 무서운 거죠. 법이란 게 원래 그렇더라고요.>
[마탑에 가면 탑 부러뜨리고 기강부터 잡아겠는데? 이것들이 300년 사이에 빠져가지고.]
<그전에 신문사부터 부숩시다. 오늘도 아침에 개소리부터 쓰던데.>
현재 레오에게 파괴 1순위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신문사였다. 그리고 특히 '농담 암살자'라는 단어의 창조자는 확실히 척살해야 마땅했다.
그게 순리고 정의인 법이다.
[어쨌든 그렇게 썩은 짓도 몇백년씩 보니까 눈깔이 썩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산에 틀어박히고 대충 뒤졌지.]
자신의 죽음을 저리 간단히 두 줄로 요약한 것도 지혜라면 지혜였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했을 때는 무언가 기묘한 점이 있었다.
<그럼 현자의 돌은 왜 남겼습니까?>
[...]
속세에 불쾌하다 못해 경멸하는 그가 어째서 유산이나 다름 없는 물건을 남겼지, 심히 의심되었다.
<그렇게 빌어먹을 세상에 무언가를 남길 이유는 없잖아요.>
[...그래도 믿고는 싶었다. 누군가가 이 빌어쳐먹을 세상을 바꿔줄 거라고. 그래서 남겨준 거야. 이런 귀신이 되가면서까지.]
그 말을 듣고 레오가 떠올린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녹을 먹고 있는 가문의 시초.
인류를 지킨 구원자.
'...루벤 라인하르트.'
초대의 용사가 현자의 마지막 믿음이었을 거다.
[...뭐 너무 부담갖지는 말라고. 루벤만큼은 기대도 안 해.]
<그럼... 왜 절 고른 겁니까?>
[그건 이미 말했잖아.]
현자는 짧게 말했다. 그 언어의 감정은 천박도, 가식도 존재하지 않았다.
[넌 천재라니까.]
저 지혜의 현인에겐 당연한 진실이었으니까.
<...으...>
근데 조금 오글거리긴 했다.
[왜 칭찬해도 지랄이야.]
<미안하고, 그럼 부탁한대로 마탑에나 가보죠.>
[싸가지 없는 새끼.]
그래, 이러는 게 현자지.
나름 만족스러운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