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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 *

그날 오전, 란델을 만나기 전.

칼리안이 하룻밤 하고도 반나절을 잠으로 보낸 뒤.

텅텅 비어있던 오러가 어느 정도 돌아옴에 따라 피로감도 함께 사라졌다. 운동을 조금 많이 한 그 나이대 소년이 가질 수 있을 정도의 것으로 내려갔던 체력과 근력도 다시 소드마스터의 검을 쓸 수 있도록 회복되었다.

사실 회복이라기보다는 다시 강화되었다 하는 것이 맞겠지만 어쨌거나 평상시의 상태를 어느정도 되찾았다. 오러를 담아두기 전과 후의 신체 상태가 너무 극명하게 달라지는 것을 여실히 체감하게 되어 두 번 다시는 오러를 한계까지 소비하지 않겠다 다짐을 한 채였다.

그렇게 익숙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칼리안은 곧바로 앨런을 찾아갔다. 앨런이 분명 헤이시아 궁에서 발견된 것이 무엇인지 확인을 하면 알려주겠다 하였으나 도무지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어서였다.

"스승님!"

빌헬름 관에 들어가려던 칼리안이 때마침 밖으로 나오고 있던 앨런과 마주쳤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을 부르는 칼리안을 반겨했을 앨런이 조금 타박하는 말부터 꺼냈다.

"더 쉬고 오셔도 될 것을 무엇하러 벌써 오셨습니까."

"궁금해서요."

"아무튼 왕자님 고집이 제 입보다 질기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칼리안이 앨런을 보며 생글거리는 얼굴을 했다.

이제 저 얼굴이 자신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지어보이는 것임을 알면서도 절대 이기지 못할 앨런이 짧은 한숨을 탁 내뱉었다.

"함께 가시지요. 안 그래도 그 쪽으로 가는 길이니."

그렇게 사제가 나란히 빌헬름관에서 벗어나 헤이시아 궁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앨런이 짧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전하께는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궁의 지하가 있던 것을 아셨는지도 확인할 겸."

당연한 일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왕비의 거처에서 생긴 일이니 당연히 르메인이 알고 있어야 했다. 때문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물었다.

"전하께서는 무어라 하셨습니까."

"헤이시아 궁에 지하가 있었음을 모르셨다 합니다. 나온 물건에 대해서는 일단 확인된 결과를 보신 뒤 결정하겠다 하셨지요."

"그럼 전하께서도 몰랐던 공간에서 물건이 나왔다는 말이네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며칠 전에 세이렌 경을 만나고 왔을 때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얇은 막이 둘러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칼리안이 다소 긴장한 얼굴을 했다. 마법사 협회장 에우리아와 앨런이 만났고 그 일로 사일런트를 발현하여 이야기를 꺼낼 정도라면 중요한 일일 테니까.

"왕자님께서 가지신 돌, 어쩌면 인위적인 신물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칼리안의 눈이 고요하게 잠겨들었다.

"인위적인 신물이라 하면 만들어진 신물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것이 가능한지, 그에 대한 결과가 그 돌이 맞는지 확인된 것은 없습니다만 유사한 내용을 세이렌 경이 찾았습니다. 조금 더 알아보려 하는 것을 제가 막았습니다."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칼리안이 잠시 눈을 내리 떴다. 빌헬름 관의 구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헤이시아 궁에 도달할 때까지 칼리안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앨런은 그런 칼리안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다.

"······ 신물을 인간이 만든다니. 그것은 이미 신물이라는 범위를 벗어난 것이 아닙니까. 신의 축복을 받은 물건이라는 뜻을 가진 것이 신물인데 그것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부터 이미 모순인데요."

질문인지 아닌지 모호한 칼리안의 말에 고개만 끄덕여보인 앨런이 에우리아가 알아낸 내용을 칼리안에게 전했다. 사실 전할 것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추측일 뿐 정확히 확인된 내용은 없었으니까.

고요한 눈으로 앨런의 말을 모두 들은 칼리안이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 외에 알아낸 것은 더 없었습니까."

"돌에 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새로 발견된 것은 일단 도착해서 확인해 보시지요. 둘이 연관이 있을지 없을지는 조금 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의 목소리에 깊은 근심이 어려 있었다. 대체 무엇이 발견됐기에 저러는지 하는 마음이 된 칼리안이 걷는 속도를 높였다.

헤이시아 궁의 입구는 여섯 명의 마법사들이 막고 서 있었다. 창단식 이후 처음으로 마주한 진지한 얼굴의 마법사들을 지나친 칼리안에게 마법사 니들렌이 다가와 예를 보였다.

술집에서 사고를 낸 뒤 [우리는 왜 가게를 부쉈나?] 라는 제목의 반성문을 냈던, 아르센 다음으로 무력이 강한 마법사임을 알아본 칼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움직여 예를 받았다.

"이 쪽으로 오십시오, 왕자님."

그렇게 말한 니들렌이 마법사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곳으로 칼리안을 안내했다.

그 곳에는 어디론가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헤이시아 궁이 사라짐으로 인해 드러나게 된 지하 어딘가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안쪽에서는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제가 앞서 갈테니 뒤따라 오시지요."

이렇게 말한 앨런이 칼리안의 주변에 붉은 빛이 감도는 실드를 둘러줬다.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칼리안을 보호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과보호임을 말하는 대신 칼리안은 얌전히 앨런의 뒤를 따랐다.

앨런은 이미 여러차례 계단 아래를 내려가보았던 듯 옅은 불빛으로만 밝혀져 있는 다소 어두운 계단을 익숙하게 내려갔다. 칼리안도 어둠 속의 물체를 또렷이 구분할 정도의 시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별 어려움 없이 앨런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 타박 타박.

둥글게 생긴 계단이라서 어느 정도를 내려왔는지 가늠이 어려웠다. 앨런도 칼리안도 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기만 했다.

아마도 서너 층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은 깊이까지 내려왔을 때 석문 하나가 눈에 보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실소하며 입을 열었다.

"······ 시스파니안입니까."

석문에는 검은 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위에 오망성과 몇 가지 문양을 덧그려 넣는다면 그것은 곧 카이리스의 문장이 될 테지만 벽에는 그저 새카만 몸과 날개 긴 꼬리, 그리고 붉은 눈을 지닌 드래곤을 형상화한 그림만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맞습니다. 이 곳에 오는 입구 자체가 헤이시아 궁으로 막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비밀 통로가 있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확인이 어렵습니다."

돌로 된 벽을 타고 조금 울리는 앨런의 대답에 칼리안이 설핏 웃었다.

어여쁘신 제자님이 궁을 날려먹었으니 통로가 어디로 연결됐었는지 확인 할 방법이 있겠느냐는 가시가 담긴 말이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석문을 살펴봤다.

"분명 500년은 족히 지난 공간일텐데, 돌계단도 그렇고 석벽이나 시스파니안의 문양까지도 훼손되지 않았네요."

"시스파니안의 힘이 닿은 곳이라 그렇습니다. 다만 보물창고는 아니니 일확천금을 기대하지는 마시지요."

석문에 손을 가져가며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긴장한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보물창고라니.

만약 그녀가 그런 것을 모아두었다면 그 보물들은 이 왕궁의 지하가 아니라 지그프리드 저택 뒤에 있는 바위산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지그프리드의 방패가 지키는 그 곳보다 안전한 장소는 이 대륙에 없을 테니까.

"실망스럽네요."

그래도 칼리안은 이렇게 빈 말로 앨런의 농담에 맞장구를 쳤다. 긴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앨런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문을 열었다.

- 그르릉······.

묵직해 보이는 석문이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석벽 안으로 사라졌다. 잠금장치조차 없었던 것처럼 그냥 열렸다.

별다른 잠금장치조차 없는 문.

보물창고가 아니라는 앨런의 말은 정말이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밝아진 사위에 익숙해지자 널찍한 돔 형태의 공간이 보여졌다.

석벽에는 정밀한 조각이 있었다. 무언가를 그려놓은 것 같았으나 칼리안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니 관심을 둘 수 없었다 해야 맞을 터였다.

둥근 공간의 한 가운데 이 곳을 밝히고 있는 물건 때문이었다.

"직접 모시고 온 것은, 왕자님께서는 아마도 알아보실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이렇게 말해오는 앨런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 들으며 칼리안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원형의 고리.

알 수 없는 문자가 잔뜩 새겨져 있는 금색의 고리 한 개.

칼리안의 입에서 잠긴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알아보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 금색의 고리가 몇 겹인가 겹쳐져 있었다. 여전히 기억난다.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니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몇 겹으로 겹쳐져 서로 다르게 회전하는 금색의 둥근 고리들 안에 커다란 모래시계가 있었다. 그것을 좇아 1년을 보냈으니 어찌 잊겠는가.

사라졌어야 할 것의 잔재를 눈 앞에 둔 칼리안의 손 끝이 차갑게 식었다.

"······ 시간의 축."

그것은 바로 시간의 축의 조각난 일부였다.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 (5)

그냥 사라졌어야지.

차라리 그랬어야지.

사라져서 두 번 다시 눈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지.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갑자기.

······ 이렇게 갑자기.

대체 왜!

* * *

마치 베른처럼.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을 수 없는 시간과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었다.

조각나 온전하지도 않은 모습을 한 채로.

그래. 마치 베른처럼.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나았다.

모르는 것이 백배 천배는 나았다.

시간의 축이 왜 움직였는지, 누가 무엇을 위해 움직였는지를 알고자 했다. 그것을 좇았다. 결코 시간의 축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않았다.

- 단 한 번, 시간을 되돌린다 하더구나.

체이스의 말이었다.

오래 된, 아주 오래 된 책에서 찾아낸 딱 한 줄. 그것이 시간의 축에 대한 유일한 정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만 여겼다. 그 한 번을 썼으니 사라진 것이라고, 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보고 말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단어를 끌어모아서 입 밖에 낸다 해도 지금 칼리안의 심정을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허공에 홀로 둥둥 떠 있는 금색의 고리를 보던 칼리안의 입이 작게 열렸다.

"하······."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확실한 말을 담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숨을 내쉬는 것을 보니 그래도 다행히 생을 포기할 만큼 끔찍하지는 않은 모양이라, 한숨의 끝에 헛웃음이 함께 나왔다.

이 곳에 들어서기 전, 앨런이 평소 잘 하지도 않는 농담까지 해가며 칼리안의 기분을 풀어주려 한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들어와서 저것을 보는 순간 칼리안이 어찌 될지 그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놀라지 말아라, 동요하지 말아라, 차마 그런 언질조차 주지 못해서 농담이나 한 마디 건넸을 터였다.

"재밌네요. 제 형님께서 밥만 좀 제대로 처드셨어도 저딴 것을 이렇게 갑자기 볼 일은 없었을텐데."

헛웃음이라도 나온 김에 칼리안도 농담을 했다.

칼리안의 뒷통수만 보고 있을 앨런을 향해,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축의 파편이 다시 발견된 것과는 일말의 연관도 없이 무고한 이를 입에 담았다.

"다행입니다. 그나마 일부 뿐이라서, 일부가 여기에 있어서."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일부분이라서 다행이라고.

"하지 말아야 할 기대를 안 해도 되고, 같은 일이 반복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것은 정말 다행입니다."

일부 뿐이니 하지 말아야 할 기대를 하지 않아도 되어 얼마나 다행이냐고.

"일부가 여기에 있으니 나머지가 어디 있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는 않을 것이라서."

그 역시 얼마나 다행이냐고.

결국 칼리안 스스로를 위해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 이렇게. 베른의 생이 아예 지워져 잊힌 것을 알게 된 그 날처럼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

"······ 그리 삼키지 마시지요. 왕자님 속이 다 짓무를 터이니."

실리케의 독차를 꾸역꾸역 삼키다 속이 다 녹았던 칼리안이다. 다른 이들 앞에서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그걸 다 삼켰다. 멀쩡한 목소리로 다행이라 말하고 있다지만 이번이라고 다르겠는가.

안그래도 해진 속에 또 독이 들어갔는데.

칼리안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앨런은 당장 그 옆으로 가 칼리안의 얼굴이 어떤지 확인하고픈 마음을 애써 내리눌렀다.

칼리안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보냈다.

앨런은 아무 말 없이 칼리안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혹여 무너질까, 그것이 걱정되어.

"괜찮습니다. 심장이 튼튼해서."

한참이 지나 비로소 칼리안으로부터 대답이 들려왔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죽을만큼 끔찍한 기분은 아니었음을 알았으니 됐다고 여겼다. 이것을 보았다 하여 어찌 할 방도가 없음을 이해해냈다.

"이것이 있다 해서 이제와 달라질 것이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 시간의 축을 온전히 손에 넣어 시간을 다시 움직일 수 있다 해도 이미 이렇게나 어긋난 것을 또 어떻게 뒤바꾸겠습니까."

베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또 잊혀지면 어찌하려고.

칼리안이 아닌 다른 사람이 또 이름을 잃으면 어찌하려고.

그러니 그저 눈을 감을 밖에.

"······ 어떻게 처리하실 요량이십니까."

칼리안의 괜찮다는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앨런은 이렇게만 물었다. 차라리 다른 쪽으로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이 낫겠지 싶어서였다.

"저 하나로 족합니다. 더는 안돼요."

칼리안이 이렇게 대답인 듯 아닌 듯한 말을 하며 금빛 고리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일단은 그것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본 뒤 파괴하려는 생각이었다. 시간의 축이 신물이든 아니든,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저것에 그 어떤 힘이 담겨있든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 있든 상관없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끔찍한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했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 탁!

그러나 그 발은 채 세 걸음을 떼지 못하고 멈춰섰다.

고리의 바로 앞에서 발이 멈춘 까닭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에 막혀 더 다가가지 못했다 해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벽이 시간의 축과 칼리안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무언가가 축의 파편을 보호하고 있었다.

- 우웅······.

그것을 안 칼리안은 고민 없이 검을 꺼내들었다.

검붉은 오러가 가득 담긴 검이 짙은 공명음을 내자, 칼리안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앨런이 칼리안에게 둘러주었던 자신의 보호막을 거둬들였다.

그와 함께 칼리안이 검을 휘둘렀다.

- 카앙!

날카로운 소리가 시스파니안의 공간을 메웠다.

참담한 빛을 뚝뚝 떨궈내는 듯한 칼리안의 검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허공에서 멈췄다. 다시 검을 휘둘러 보았으나 모든 공격이 벽에 막혔다.

칼리안이 하는 냥을 잠시 두고 보던 앨런이 조용히 말했다.

"검은 그만 거두시지요. 저도 들어가보지 못하였으니."

칼리안이 입 속을 짓씹었다.

괜히 보안장치가 없던 것이 아니었다. 접근을 못하는데, 이것을 누가 건드리겠나.

결국 칼리안은 검을 이루던 마나와 오러를 흩어버렸다. 칼리안을 닮은 검붉은 빛무리가 이리저리 비산하다 사라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시스파니안······."

앨런도 어찌하지 못하는 힘으로 만들어진 장벽. 굳이 이 곳에 그런 장치를 해둘 만한 이는 하나 뿐이다. 이 공간의 주인임이 분명한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 말이다.

"시스파니안이 한 일이겠네요."

아니라면 세렌티겠지.

다만 칼리안은 세렌티에 대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이렇게만 말했다. 신의 개입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입에 담을 만큼 생각이 짧지는 않았으니까.

"스승님. 세크리티아에서 시간의 축을 보셨었죠."

"네. 한 번 보았습니다."

체이스가 시간의 축에 대해 알아보려 했을 때, 세크리티아로 앨런을 불렀다. 그때 앨런도 이것을 보았다.

"그럼 그 때는 세크리티아에 멀쩡히 잘 있었다가 제가 눈을 떴을 때 사라졌고,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곳에 일부가 들어왔다는 말이겠네요."

칼리안은 고개를 그대로 둔 채 시선을 내렸다. 빠른 생각과 말이 동시에 이어졌다.

"직접적이든 아니든 시스파니안이 연관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축의 파편은 시스파니안이 직접 숨긴 것 같으니까요. 저를 만나기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지그프리드령에 있는 시스파니안의 빈 둥지는 알려진 곳이다. 이 곳은 아무도 모르는 곳이다. 그녀가 만약 무언가를 숨기고자 했다면, 그런데 '자신의 이공간'이 아닌 다른 곳에 숨겨야 하는 사정이라도 있었다 가정하면, 이 장소가 가장 안전하다 여겼을 수 있다.

"그러다 궁이 부서지는 바람에 드러났고요."

아르센의 동상을 세우는 것까지는 허락을 해줘야 하나.

문득 든 이런 생각에 속 없는 웃음을 흘린 칼리안이 주머니에서 조약돌을 꺼냈다. 앨런이 '인위적인 신물'일 수 있다 말한 바로 그 검은 돌이었다.

축의 파편과 돌의 공통점, 바로 칼리안도 읽지 못하는 문자였다.

베른이었을 때 시간의 축에 새겨진 문자까지는 눈여겨 본 적 없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벽 안으로 들어가 가까이 살펴 볼 수가 없으니 이 곳에서라도 글자를 비교해보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확인을 하였습니다."

칼리안이 생각하는 것을 눈치챈 앨런이 말했다.

앨런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때문에 에우리아가 베껴간 글자를 가지고 이미 비교를 해 본 뒤였다. 그래서 이 곳에 오는 길에 돌에 대한 이야기도 꺼낸 것이었다.

"같은 글자는 없었습니다. 다만 비슷한 형식의 문자인 것은 확인을 하였습니다."

"같은 문자의 다른 글자라는 소리겠네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다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칼리안의 말을 기다리던 앨런이 주변을 둘러봤다. 양신전쟁을 승리로 이끈 8명의 이야기가 조각되어 있는 벽이었다.

그들 중 '세크리티아 대왕'의 얼굴만은 채워져 있지 않았다. 이름 없는 그녀의 얼굴은 오로지 윤곽 뿐. 눈 코 입 어떤 것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것을 떠올린 앨런이 쓰게 웃었다. 베른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겠지만, 그녀 역시 얼굴과 이름이 잊힌 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곧 칼리안의 목소리가 앨런을 상념으로부터 꺼내놓았다.

"아무튼 이제는 조금 더 서둘러서 움직여야겠네요. 발견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발견해버렸으니.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시스파니안을 만나보실 요량이십니까."

칼리안이 이 일에 대해 물어볼 수 있을 만한 이를 떠올린 앨런이 이렇게 물었고, 칼리안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이 자리에서 축의 파편을 없앨 수는 없는 것 같고······ 아무래도 만나보아야 하겠습니다. '과거'에서 쓰임새를 다하고 '현재'에서 사라진 시간의 축이 왜 일부분만 남아서 이 곳에 있는지. 나머지는 제대로 사라진 것이 맞는지. 그 이유를 알 만한 이들 중 칼리안이 만나볼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시스파니안 뿐이니까요."

또 대답하지 못할 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만나는 봐야했다. 생명과 죽음을 상징하는 주신 세렌티를 직접 만나겠다며 세뉴강을 건너가 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곧바로 가실 겁니까."

"아뇨. 이번 일 마무리 한 뒤에요. 아무리 이동 마법진이 있다지만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더 급합니다. 자리 비운 사이에 손 많이 가는 두 놈이 뭔 일을 또 저지를지 믿을 수가 없어서."

'손 많이 가는 두 놈'이 누굴 이야기하는지 알아들은 앨런이 슬쩍 웃었다.

어차피 시스파니안도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찾아오라 했지 않나. 축의 파편이 이 곳에서 발견된 것과 칼리안이 해야 할 준비는 서로 완전히 다른 문제였으니까.

"일단 란델 형님부터 다시 만나봐야겠네요."

시간의 축에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글자가 새겨진 검은 조약돌. 그리고 조약돌이 반응했던, 모종의 조직에서 사용하던 힘. 그들과 란델의 연관성.

손 많이 가는 두 놈 중 한 놈을 만날 결심을 굳히며,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 * *

"대답, 해주세요. 란델 형님. 제가 형님을 적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형님 역시 끌어안고 가야 하는지. 그것을 직접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리 말했다.

"맹세의 인에 숨겨진 것이 얼마나 있는지는 지금 당장 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일단 그것 하나만 알려주세요."

이렇게도 말했다.

"너는 브리센과 전하를 계속 함께 두고 있구나."

칼리안을 잠시 바라보던 란델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브리센과 르메인을 같은 선상에 놓고 있음을 안 것이다. 르메인은 물론이거니와, 만약 란델이 브리센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그것을 막겠다는 의도가 다분하지 않은가.

칼리안은 숨길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과 변경백을 브리센과 같은 위치에 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가문 전체를 적으로 두려던 생각을 접었습니다. 후작과 변경백, 레넌 브리센 자작까지. 그 셋만 지워내고 가문은 살려둘까 합니다. 쓸 곳이 있어서요."

"그것이 네 자만인지 자신인지 궁금하구나. 브리센이라는 세력은 유지하면서 머리를 모조리 없애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렇게 연명시킨 브리센을 제대로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성 낮은 일인지 모르는 것은 아닐 텐데."

"믿는 구석이 있어서요. 아마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찻잔의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 믿는 구석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생기면, 그때 가서 쳐내면 되니 어려울 것 있겠습니까."

브리센의 세력이 필요하지만 귀하지는 않다. 플란츠의 손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놈들이 생기면, 없애면 된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가지치기.

이미 너무 많이 해 본 일이 아니던가.

"네가 믿고 있는 그 아이를 의심하지는 않는구나."

믿는 구석이 플란츠임을 이미 알고 하는 말이었고, 칼리안이 잠깐 웃는 소리를 냈다.

란델의 말이 맞다.

애증해 마지않는 삶은 완두콩. 의심한 적 없었다.

베른은 제 사람을 잘 만들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울타리에 들어온 놈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뒤통수, 당연히 맞아봤다.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아픈지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사람은 의심하지 않았다.

"나를 더 믿으니까."

멍청하게 사람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배신 따위로 추락할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감일 수도 있고 자만심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지금의 칼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플란츠와 손을 잡기로 했을 그 때부터, 증오할지언정 의심은 안 했었다.

"그래. 알겠다."

"이제는 대답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란델이 이렇게 대답했고, 칼리안이 란델을 다시 응시했다.

잠시 칼리안을 보던 란델이 입을 열었다.

"다른 것이다. 전하나 브리센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말씀 못해주십니까."

"그래."

"계약 때문에?"

"그래."

일단 이 정도면 족하다.

일단은.

결정을 내린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르메인 생명이 단축되지 않도록 지키는 김에 시간의 축을 파괴하기 전까지 남들 손에 또 넘어가지 않도록 지키고. 풀 먹는 놈 심장 지키는 김에 첫째 형님 것도 좀 지키고.

다 지키면 되겠네, 뭐.

하는 김에 겸사겸사 하면 될 일이니 어려울 것도 없겠네.

"알겠습니다."

식어버린 홍차에서는 더 이상 베르가못의 향이 올라오지 않았다.

올라오지 않는 것인지, 그 향은 여전한데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이제는 쓴 향만 나고 쓴 맛이 났다.

"란델 형님께는 늘 등을 보이게 되는군요."

지금 란델과 마주보고 나눌 수 있는 것이 친목은 아니었다. 만약 마주본다면 검을 겨눌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이번에는 등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라는 사소한 차이가 있지만, 결국 칼리안이 란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등 뿐이었다. 그것이 지금의 최선이다.

"더 이상 제 그늘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칼리안의 붉은 눈이 란델의 심연을 응시했다.

"죽습니다."

숨막히게 죄여오는 그 짙푸른 바다 빛 눈을 향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손을 내밀었다.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 (6)

봄의 바람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

히나의 표현에 따르면 '햇빛 가루가 바람에 담긴' 느낌을 주는 것이다. 겨울처럼 매섭지도, 여름처럼 숨이 막혀오지도, 가을처럼 쓸쓸하지도 않은 봄의 바람은 정말이지 그 자체로 이미 훌륭했다.

바람을 타고 실려오는 장미향이 테라스까지 넘어온다.

- 내가 한 말을 되돌려 받는 것 같구나.

언젠가 손 위에서 벗어나지 말라 했던 자신의 말을 떠올린 란델이 이렇게 말했다. 목적은 완전히 달랐지만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이른 것은 맞았으니 칼리안은 그에 대해 달리 부정하지 않았다.

- 그리하마.

그리고 란델은 이렇게 칼리안이 내민 손을 붙들었다.

덕분에 언제나 마음 한 구석을 묵직하게 내리누르던 저 장미의 향기가 이제야 조금쯤 가볍게 다가왔다. 그 조금의 차이와 함께 찾아온 잠시간의 여유에 칼리안이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향기 좋다. 라임 향도 좋고 장미 향도 좋고."

칼리안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뒤 얀이 가져온 차에서도 장미 향이 났다. 동그랗고 얇게 자른 연두색의 라임 조각과 함께 들어있는 말린 장미 꽃잎에서 나는 향이었다.

"어제 많이 피곤하셨던 것 같아서요. 그리고 장미는 지난번에 주셨던 것을 히나가 차로 만들었어요."

딱 한 송이.

예전에 장미 정원에서 란델의 시선을 돌려놓느라 잘라냈던 장미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뒤 곧바로 체이스를 찾아가느라 얀에게 맡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차를 만들어 온 모양이었다. 피로한 것을 조금이나마 달래보라며 함께 넣은 라임도 마음에 들었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앉아서 바람결에 함께 불어오는 장미 향을 맡으며 라임과 장미가 든 차를 마시다니. 란델을 만나고 오지 않았더라면 새콤하고 향긋한 이 차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을텐데 지금은 별 다른 생각 없이 그저 여유롭다. 잠시뿐인 여유겠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고마워. 챙겨줘서."

그래서 이렇게 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챙겨준 것이 장미꽃인지 라임인지 혹은 칼리안인지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얀은 그냥 좋아하기만 했다.

- 똑똑.

다른 대화 없이 느긋하게 차 한 잔을 비워 낼 때 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작은 소리.

노크를 하기에 앞서 주저하는 것인지 거의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한 두 번 두드린 뒤 조금 더 세게 두드려 만들어내는 소리. 늘 그렇게 노크를 했다.

"들어와."

그래서 칼리안은 얀에게 그러하듯 이번에도 누구인지 묻지 않고 말했다. 물어보아도 들려 올 대답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곧 아주 작은 발소리와 함께 히나가 테라스로 왔다. 그런 히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말했다.

"잘 어울리네."

히나는 하얀 로브를 입고 있었다.

장식용 금단추가 달려 있고 왼쪽 가슴에는 카이리스의 문장을 등에는 히나를 위해 새로 만든 자주색의 치유사 표식을 수놓았다. 로브자락의 끝단과 소매 끝으로 갈수록 더 촘촘해지고 화려해지는 금색의 자수 그리고 로브가 벌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키기 위한 서로 다른 길이의 금색 체인 세 줄 때문에 그 외양이 상당히 화려했다.

바로 발칸의 제복이었다.

- 아직, 어색한 것 같아요.

칼리안의 말에 히나가 이렇게 말했다.

키리에와 히나를 구해냈던 날 칼리안이 둘러준 것을 입은 뒤로 처음 입어보는 제대로 된 로브였다.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 다음으로 히나가 보물처럼 아끼는 것이 바로 그 날에 입었던 검은 로브였다.

"가 보면 바로 실감날거야. 이 카이리스에 정신 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게 될 테고. 지내기 전에 실망부터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워낙 이상한 놈들만 모여 있어서."

돌은 놈들.

왕궁으로 향하는 길에 그나마 남아있던 제대로 된 사고 체계를 미련 없이 탈탈 털어버리고 온 것 같은 그런 놈들이 아닌가.

- 전부, 괜찮은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해요.

히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괜찮을 거야."

놈들이 너한테 안 괜찮게 굴면 나도 놈들한테 안 괜찮게 굴 거라서.

칼리안이 속으로 삼킨 말이 무엇인지 모를 히나가 티 없는 맑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 웃음, 그리고 향긋한 차 한 잔 덕에 휴식을 마치고 다시 움직일 기운을 낸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칼리안은 히나와 함께 빌헬름 관에 갈 참이었다. 그래야 히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써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가자. 데려다 줄게."

칼리안이 가볍게 발을 옮겼다.

히나를 데려다 준 뒤에 허전해진 손에 다시 쥘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 * *

타닥 타닥 하는 장작불 소리는 언제나 평화롭다.

죽은 것을 태우며 나는 그 소리가 평화롭다 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물었던 스승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때문에 아르센의 얼굴에는 잠시 고요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것을 본 에우리아가 물었다.

"꽤 괜찮지?"

왕궁을 떠나온지 이제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길을 헤맸다.

멀쩡한 왕도에서 정확히 하루 만에 길을 헤맸다. 갈래길에서 잘못된 쪽으로 향한 탓에 되돌아오다 하루가 다 갔다. 그 덕에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가 있는 도시를 찾지 못해서 결국 야영을 결정했다.

어차피 아무 곳에나 대충 앉아서 자는 것이 일인 마법사들이었으니 그것이 야외라 해서 특별히 불편할 것은 없었다.

그래서 에우리아는 신이 났고 아르센은 별 생각이 안 났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는 말이다.

해가 기울기 전에 밥이나 먹고 대충 자고 일찍 출발하자는 것은 에우리아의 의견이었다. 아르센은 역시 별 생각이 없었으므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에우리아의 응원을 받으며 야생 닭 한 마리를 잡아왔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모닥불 위에 둥둥 뜬 채 익어가는 닭고기의 노릇노릇한 냄새를 확인하는 에우리아를 향해 아르센이 적당히 대답했다.

근 10년만에 야영이라는 것을 해 보는 에우리아는 마법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요리에 굳이 모닥불을 피웠다. 다른 이유 없이 그냥 야영에는 모닥불이 제격이지 않느냐는 이유 때문이다.

숲 속으로 퍼져나가는 냄새나 조금 뒤 어둠이 내렸을 때 이 모닥불이 주변의 눈에 띌 것이라는 걱정은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다. 수도에서 고작 하루 거리의 숲에 도적이 있을 리도 만무했고 만약 그런 무리를 만나더라도 특별히 문제 될 것이 없어서였다.

주섬주섬 자신의 공간을 열어 찻잎을 꺼낸 에우리아가 허공에서 만들어낸 물로 두 잔의 차를 우려내어 아르센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받아든 아르센의 하얀 로브, 그리고 그 가슴에 새겨진 왕실의 문장을 보며 에우리아가 말했다.

"누구 밑에 있을 놈이 아닌데. 의외였어."

"저는 협회장님께서 정보원 노릇 하는 게 더 의외였습니다."

"생각보다 재밌더라. 정보원. 그래서 나중에 시간 나면 정말로 만들어보려고. 정보조직."

이렇게 말한 에우리아가 혼자 웃음 소리를 냈다. 둘 다 의외의 짓을 하고 있는 것이 똑같이 칼리안 때문이었음을 생각한 탓이었다.

"협회장님께서는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에우리아의 웃음소리가 끝나길 기다리던 아르센이 물었다.

"이동 마법진 살펴보러."

"왕자님께서는 모르셨던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있었습니다만 그레이스 경이 이미 가 있지 않습니까."

아르센이 말하는 '왕자'란 늘 칼리안이었다.

에우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긴 한데. 근처에서 다른 알아 볼 것도 좀 있고."

자세한 설명을 꺼려하는 것 같아서 아르센은 그냥 고개만 몇 번 주억거렸다. 이번에는 에우리아의 질문이 아르센을 향했다.

"헤이시아, 왕자님이 시키신거지."

헤이시아 궁을 폭발시킨 주동자를 묻는 말이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딱히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어서 꺼내든 참이었다. 에우리아의 질문에 아르센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실 만한 분이 또 있겠습니까."

"마나실 백작님이 한 소리 하셨겠네."

"못 하십니다. 마나실 백작님은 왕자님께 아무 말씀 못하시는 분입니다."

앨런이 칼리안을 어찌 대하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아르센일 터였다. 그제야 앨런의 무한한 제자 사랑을 상기한 에우리아가 '하긴 그렇겠구나' 하는 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보니 술집 사고는 어떻게 잘 넘어갔나보네? 왕자님 성격에 몇 놈 앓아누울 줄 알았더니."

아르센의 시선이 물끄러미 에우리아를 향했다.

발칸 내에서는 꽤 떠들썩했지만 칼리안의 '성의 가득한 배상금' 덕에 바깥에는 별 소문이 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에우리아가 남의 일에 관심 많은 귀족들조차 모르는 일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냥 질문입니까, 정보 수집입니까."

아무리 에우리아가 칼리안의 편에 서 있다지만 아르센은 그리 쉽게 사람을 믿지 않았다. 게다가 칼리안에게는 마법진을 살펴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수도를 벗어나 있으니 혹시라도 에우리아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어 꺼낸 말이었다.

"······ 꼬맹이 다 컸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말에 이런 대답이 돌아오자 에우리아가 곱게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제복 입더니 겁대가리 내려놓고 다니고."

아, 잊고 있었다.

순식간에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에우리아의 피어에 움찔한 아르센이 얼른 대답했다.

"찾아왔습니다, 겁대가리."

어디 발칸의 마법사들만 돌았겠는가. 마법사들은 다 돌았다. 그런 마법사들을 5년 넘게 무탈히 잘 이끌고 있는 유능하신 분을 앞에 놓고 의심 따위를 했다니. 내가 진짜 돌았었나보다 하면서.

그런데 에우리아의 피어가 사라지지 않았다.

말 실수에 너무 화를 내는 것 아니냐고 물으려던 아르센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눈에 매서운 빛이 뜬 것을 본 에우리아가 다시 말했다.

"크긴 컸네. 꼬맹이."

그리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진 것이 분명한 누군가의 움직임이 에우리아의 사위에 걸려들었다. 그것을 늦게나마 눈치 챈 아르센을 칭찬하는 말이었다.

아르센이 손에 든 차를 홀짝 마셨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조사하시는 일이 위험한 일입니까. 꽤 수가 많은데요."

에우리아는 보라색 머리를 느슨하게 묶고 있던 끈을 풀어 조금 더 단단히 묶으며 말했다.

"어, 좀."

그 역시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

아르센이 툴툴거렸다.

"위험할 것을 알면서 같이 가자 하셨습니까."

"그래도 싸울 줄은 알잖아, 너도."

발칸의 부군단장을 '싸울 줄은 아는 꼬맹이' 정도로 평가한 에우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것을 보던 아르센이 씩 웃으며 함께 일어났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목도하게 되었다.

얼음 속성의 5서클 마스터 아르센을 싸움 좀 하는 꼬맹이로 취급하는 마법사. 그럴 능력이 충분한 몇 안되는 마법사의 마법을.

- 파직, 파지직!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하는 하늘, 저무는 태양을 등지고 선 마법사의 손에 옅은 보랏빛의 스파크가 일었다. 발 밑에서는 물의 힘을 담은 푸른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중 속성.

물과 전기를 모두 다루는 5서클 마스터 마법사.

그것이, 에우리아 세이렌이었다.

* * *

국왕 르메인의 집무공간인 아르피아 궁.

국왕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머무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외부인의 방문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런 아르피아 궁의 1층에는 그 어떤 외부인의 방문도 허용되지 않는 오로지 왕족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역대 왕가의 초상화 원본이 전부 전시되어 있는 곳.

르메인의 집무실이 있는 층에 걸려있는 국왕들의 초상화는 전부 이 곳에 있는 것의 사본이었다.

'기억의 전당.'

있는 것은 알았지만 피했던 곳이다.

예전의 칼리안 역시 단 한 번도 그 곳을 찾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이 공간에 발을 들인 참이었다.

이 곳에 오기 전 히나를 빌헬름관에 데려다주고 얀을 함께 두고 왔다. 아직은 원활한 소통이 가능할 만큼 수어를 배우지 못했으므로 당분간은 그리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둔 뒤 혼자 이 곳을 찾아왔다. 왕족이 아닌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할 신성한 곳이었으니 호위기사들은 문 밖에 둔 채였다.

전당은 1층 전체를 할애하여 만든 탓에 단순히 넓다고만 하기에는 부족할 만큼 넓었다. 마치 그 유구한 역사를 직접 확인하라는 듯한 모양새인 것이다. 다만 역사만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조금 더 긴 시간을 이어왔던 왕조인 세크리티아에서 지냈던 칼리안은 그 수많은 초상화에도 그리 큰 감명을 받지는 않았다.

- 뚜벅, 뚜벅.

칼리안이 고요한 구두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시작은 당연하겠지만 초대왕 하츠아라와 시스파니안의 초상화였다.

지그프리드령에 갔을 때 만나보았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시스파니안과 익히 여러 번 보아 익숙한 하츠아라. 그들의 아들이자 2대 카이리스 국왕의 왕세자 시절이 담긴 초상화도 있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 곳을 지나쳐 계속 걸어들어갔다.

2대에서 3대로, 4대로.

그렇게 쭉 걸어들어간 칼리안의 발이 가장 마지막 초상화가 놓인 곳 앞에서 멈춰섰다.

'르메인 루 룬 카이리스.'

현 국왕이자 세 왕자의 아버지인 르메인의 조금 젊은 시절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아직 세자위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란델과 플란츠, 그리고 칼리안의 초상화는 없었다.

아랫쪽으로 란델의 모친인 아이샤 아리엘리의 초상화가 보였다. 그 옆의 빈 공간은 아마도 실리케의 자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었다.

눈 앞을 한동안 응시하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정말 닮으셨네요."

선홍색의 머리. 색이 달랐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거울 속에서 보던 모습과 참 많이 닮았다. 쌍커풀 없이 큰 눈 콧날 입매. 정말 많이 닮았다. 낯설지만 분명한 칼리안의 모친이었다.

후궁 프레이야 휘트린.

르메인의 집무실이 있는 복도에도 복제 초상화가 있지만 한 번도 그것을 바라본 적 없었다. 때문에 처음으로 마주한 그 얼굴을 칼리안은 말 없이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사과의 의미를 담은 인사였다.

- 달칵.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먼 곳에서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집무실이 아닌 그리고 걸음하기 조금 꺼려지는 곳에서 만나자는 요청에 응한 것은 물론 르메인이었다.

멀리 전당의 입구 쪽을 한 번 바라본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돌려 프레이야의 눈을 바라봤다. 그렇게 다시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르메인이 칼리안의 곁으로 걸어왔다.

르메인 쪽으로 몸을 돌린 칼리안이 예를 보였다.

칼리안으로부터 아이샤에게로, 그리고 비어있는 실리케와 프레이야의 초상화를 한 번씩 쳐다본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이 곳에서 만나자 하였느냐."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불편해하는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아이샤의 얼굴도 프레이야의 얼굴도 그리고 실리케의 빈자리도. 모두 다 편치 않을 터였다. 그것을 알면서 굳이 이 곳으로 와달라 요청한 이유를 말하기 위해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이라."

그렇게 되풀이하는 목소리가 실로 부드러웠다.

관심 두지 못한 사이에 죽어가던, 그로 인해 르메인으로부터 유일하게 '내 아들'이라는 말을 들은 막내아들. 어느새 달라져 온갖 사고는 혼자 다 치고 다니는 말썽꾸러기.

하지만 유일하게 르메인에게 '부탁'을 하는 아들이 바로 칼리안이 아니던가.

"어렵지 않은 일일 수도,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 이야기 해보거라."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초상화 속. 자신의 것과 꼭 닮은 붉은 눈을 응시하면서 칼리안이 말했다.

"제 어머니를 왕비로 추숭시켜 주십시오, 전하."

손에 쥔 것을 전부 내려놓은 칼리안이 이렇게.

정통성을 입에 올렸다.

제27장. 지금이었다면 (1)

칼리안의 말대로였다.

어렵지 않은 일일 수도 있고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프레이야를 왕비로 추숭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재 르메인에게 다른 왕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당연하겠지만 르메인은 그 일을 진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유일한 이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더냐."

"진심입니다."

곧바로 이어진 대답에 르메인이 짧은 숨을 쉬었다.

칼리안의 이 갑작스러운 부탁이 프레이야의 명예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닐 것임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혈통.

후궁 심지어 평민 출신의 후궁을 어미로 둔 왕자라는 꼬리표. 그것을 떼내려는 것일 터였다.

물론 이제와 그것을 떼려는 이유는 단 하나 뿐이었다.

"세자위에 마음을 두고 하는 소리일테지."

"그렇습니다, 전하."

칼리안은 이번에도 숨김 없이 대답했다.

이전에야 스스로 지닌 발칸이라는 강력한 힘이 있었으니 프레이야가 후궁이든 평민이든 상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칼리안은 그 힘을 모조리 플란츠에게 쥐여줬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내어 르메인을 만나러 온 길이었다.

전력이 아닌 세력을 가지기 위해서 말이다.

칼리안이 왕세자가 되리라 예상하는 귀족들도 어느정도 칼리안의 손을 들어주는 귀족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칼리안의 출신만은 '흠'이라 말했다. 비하의 의미든 아니든 왕비의 아들이 아닌 것이 문제라 여기는 것만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그런 상황이니 란델이나 플란츠를 지지하는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오래 전 왕실 몰래 신물을 거래하고 카이리스의 정보를 세크리티아의 세작에게 판매하다 체포된 헤일 라트란이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칼리안은 '평민의 자식'이라고.

칼리안이 아무리 특출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해도 아무리 강한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해도 아예 왕족으로 여기지를 않는 것이다. 브리센의 세력이 약해짐에 따라, 정말 만에 하나 플란츠가 세자위에 오르지 못한다면 차라리 란델이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 낫다고 그리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것만은 제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체이스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지 못하도록 체이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기사 서임을 받았던 베른이 아니던가.

귀족들이 그 대단하신 혈통을 따지는 모습은 세크리티아와 다르지 않았다. 단지 평민 출신의 후궁을 어미로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혐오하는 모습은 오히려 세크리티아보다 더 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카이리스의 귀족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르메인도 알고 있었다. 프레이야가 왕비의 위를 받게 되면 유일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사라지게 되는 것임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는 안다. 다만, 칼리안."

그렇게 말한 르메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진작부터 칼리안이었다.

르메인의 정치적인 파트너로서도 칼리안이 지대한 도움이 되고 있고 인품이나 능력을 보아도 차기 왕으로서 가장 어울리는 것은 칼리안이었다. 물론 가끔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지나치게 큰 일을 터뜨리기는 하지만 그것에도 확실한 이유는 있었다. 왕권이 내려갈대로 내려간 지금 상황에서는 르메인이 걸어왔던 것과 달리 과감하기 짝이 없는 그런 행보가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 진작부터 왕세자의 자리를 칼리안에게 내려주어야 하겠다는 마음은 먹고 있었다. 세자위를 내리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것만 따져본다면 당연히 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다른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리했으리라는 말이다.

"지금으로서는 위험한 일이다."

다만 아직은 위험했다.

그래서 하지 못했다.

때문에 르메인이 이렇게 거절의 의사를 담아 대답했다.

표정 없던 르메인의 얼굴에 침통함, 자괴감, 그리고 죄책감이 모두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르메인이 지닌 힘이 크지 않아서 생긴 문제였기 때문이다. 왕권이 조금만 더 강력했다면 르메인의 아이를 낳은 이를 '평민'이라 욕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하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르메인은 세자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칼리안이 주제 넘은 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 왕이 되려는 마음을 지나치게 쉽게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 등을 떠올릴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때문에 이렇게만 물었다.

"란델이 20세가 되기까지 아직 1년 이상의 시간이 남았다. 그 안에 왕권을 더 키우고 텐실과의 자잘한 문제를 해결하고 브리센의 손을 조금이라도 더 떨치고 나서. 그리하여 너를 반대할 세력이 조금이라도 더 줄어들면 그 때 부탁한 것을 이뤄주려 하는데. 어렵겠느냐"

"전하께서는 무엇이 위험하다고 여기십니까."

"당연히······."

지금 이 시기에 프레이야를 왕비로 추숭하는 것은 곧 르메인의 결심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직 왕세자위에 올려놓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결정을 내렸다는 표현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그것이 위험하다 여기는 것이었다.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놈 먼저 세자위에 올려놓으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라는 앨런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을 테니까. 브리센에서 그리고 텐실에서 별다른 세력 없이 홀로 강한 칼리안을 그냥 두겠는가.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던 르메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칼리안을 응시했다.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모를 칼리안이 아니다.

"네가 갑자기 그것을 부탁하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혹 무슨 일이 있는 것이더냐."

그 말에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섣부르게 안된다는 말만 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드리는 부탁이라기보다는."

르메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프레이야를 추숭하면 에반은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것으로 말미암은 명분을 만들어 브리센의 머리를 다 잘라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명분이 있는 가지치기와 명분이 없는 가지치기는 다르니까.

또 하나.

프레이야의 추숭 소식 이후 브리센이 흔들거리면 칼리안 쪽으로 발을 돌릴 귀족들. 그것이 칼리안이 손에 쥘 세력이었다. 칼리안이 만들어낼 '명분'을 빌미로 칼리안의 구명줄을 만들어 줄 세력 말이다.

명분 있는 가지치기, 그리고 새로운 세력.

그 두 가지가 함께 진행되어야 칼리안이 산다.

다만 이것을 르메인에게 사실대로 알릴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한 가문의 수장들을 살해한 혐의를 뒤집어 쓸 터였다. 광장에 칼리안을 위한 레니시타 잎이 깔리면 어찌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르메인은 분명히 반대할 것이었다.

"저는 그저······."

그래서 칼리안은 조금 더 솔직한 대답을 하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속에 감춘 꿍꿍이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이유를 꺼내겠다고.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들어 르메인을 쳐다봤다.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그린 채 잠시동안 르메인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르메인을 바라보며 남은 대답을 전했다.

"살려달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전하."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

그것은 르메인이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부탁이었다.

* * *

아르센은 화염 폭발을 좋아한다.

하지만 아르센을 이중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라 칭하지는 않는다. 할 줄 아는 것과 두 개의 주종을 가진 것은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아르센은 그저 화염을 함께 쓸 줄 아는 것 뿐. 두 속성의 마법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르센이 헤이시아 궁을 향해 화염구를 날려보낼 당시 동시에 사용했던 얼음의 벽이 현저히 불안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두 개의 속성 모두 주종으로 다루는, 그리하여 서로 다른 속성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든 아니든 상관 없이 언제나 완벽한 완성도를 지니는 마법사. 그것이 이중 속성의 마법사다.

물론 앨런은 예외였다.

7서클의 장벽을 넘는 순간 속성의 경계도 사라진다. 때문에 앨런에게 있어 속성이란 그저 무엇을 더 자주 사용하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법사들은 대개 본인에게 맞는 것 하나만을 주종으로 삼고 수련을 한다. 언젠가 나도 고서클이 되겠지, 하고. 두 개의 주종을 가지려면 마법적인 재능과 속성 친화력은 기본이고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뒤따라야 했으니까.

다만 에우리아는 굳이 앨런의 경지를 욕심내지 않았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뭐 이런 생각이었다. 그래도 남들에게 지는 것은 싫었으므로 두 개의 속성을 모두 주종으로 삼았다. 그리고 불가능에 가까운 그것을 성취해냈다.

그런 에우리아였으니 지금의 아르센보다도 한 살이 더 어렸던 나이인 5년 전에 마법사 협회장에 올랐던 것이리라.

"스물 셋."

그래서 아르센은 그냥 싸움 좀 할 줄 아는 꼬맹이 역할에 충실히 임하고 있었다.

- 파지지직!

눈부신 빛이 대지를 뒤덮었다라고 밖에는 표현하지 못할 마법이 에우리아의 손 끝에서 뻗어나왔다. 에우리아를 향해 달려들려던 다섯 명의 기사를 향해서였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검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설 수 있어야 공격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 손에 들린 것이 붉은 오러를 뿜고 있든 아니든 그것은 일말의 영향도 주지 못했고 에우리아에게 그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다.

- 쿠웅!

다섯의 기사가 온 몸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을 나뒹굴다 이내 잠잠해졌다. 스치기만 해도 죽을 정도의 힘에 저 정도의 저항을 하는 것은 분명 검에 두른 것과 같은 빛의 실드 때문일 것이다.

"열 여덟."

어찌됐건 에우리아 혼자로도 놈들을 잡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으므로 아르센은 에우리아와 놈들의 사이에 가상의 선 하나를 그어놓고 그 곳을 넘어오는 놈들만 처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다 별반 할 일이 없어서 이렇게 놈들의 숫자를 세어주는 역할까지 맡았다.

잠시 바닥에 쓰러져있는 놈들을 보던 아르센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스물 하나."

에우리아의 번개가 어느정도로 강한지는 아르센도 잘 안다. 이미 열 두 번은 더 절명했어야 할 공격을 맞았다.

그런데 쓰러진 다섯 중 셋이 다시 일어났다.

그러니 남은 놈들의 숫자를 세는 것도 생각해보면 꽤 어려운 역할이다. 쓰러져 누운 놈이 죽은 놈인지 다시 잠깐 일어났다가 죽을 놈인지까지 가늠해서 세어야 하니, 이 얼마나 헷갈리는 일이란 말인가.

"저 실드가 두꺼운 겁니까, 협회장님이 약해지신 겁니까."

그리고 이렇게 간간히 에우리아를 응원하는 고무적인 역할도 자처하고 있었다. 닭 잡아 왔을 때 에우리아가 해줬던 응원과 비슷한 것이었다.

에우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앞에 선 스물 한 명에 겁대가리 또 내려놓고 뒤에 서 있는 한 놈까지 포함해서 스물 둘. 그 스물 두 명을 싹 다 죽여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는 생각을 애써 접어놓기 위해서였다.

잠시 앞을 살피던 에우리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저 놈들이 쓰는 힘, '그거' 같은데."

작은 목소리였으나 아르센에게도 뚜렷이 들리는 말이었다. 저 기이한 붉은 빛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이었으므로 아르센이 가만히 물었다.

"면식 있는 힘이었습니까?"

붉은 빛이 일렁거리는 기분 나쁜 힘과 구면인지 묻는 말에 에우리아의 번개가 잠시 아르센을 향했다.

아르센이 씩 웃으며 에우리아의 옆에 섰다.

이제 그만 놀리겠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딱 네 번의 공격으로 마흔 명을 스물 한 명으로 줄여놓은 에우리아에게 계속 장난을 칠 수는 없으니까.

"마나실 군단장님의 실드도 붉은 빛을 내긴 하는데 저건 확실히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마나실 백작님은 화염이라 그렇고. 저런 것과 비교하면 안되지."

놈들의 능력이 굉장히 이상한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조금 전 쓰러졌다 일어난 놈들. 에우리아의 번개에 맞아 다 벗겨진 놈들의 피부가 재생되는 속도를 지켜 본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사람 맞습니까. 텐실의 치유사도 저 정도는 못 합니다."

"어. 사람 맞아."

번개의 힘을 가득 담은 물의 구체를 직격으로 맞고 죽은 듯이 쓰러진 것을 분명히 봤다. 물을 뒤집어 쓴 채 맞은 번개에 온 몸이 타들어가는 것도 분명히 봤다. 그렇게 두 번 만에 마흔 명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들 중 스물 세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이 끊이지 않은 이상 회복이 되는 것이다.

"놈들은 아마······."

칼리안을 습격했던 이들과 같은 힘을 쓰는 놈들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려던 에우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을 공격한 놈들에 대해 아르센에게 알려주어도 괜찮을지 그것을 결정할 수 없어서였다.

에우리아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방금 전 일어나 다시 검을 집어드는 놈들을 향해서였다. 에우리아를 향해 어떤 욕설을 퍼붓는 것 같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붉은 실드가 놈들을 다시 둘러싸기 직전 보라색의 빛줄기가 놈들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 쌔애액!

- 콰앙!

가늘고 긴 쐐기 형태를 지닌 보랏빛의 창. 번개의 힘을 담은 에우리아의 창이 채 실드로 보호되지 않은 세 기사의 머리를 꿰뚫었다.

놈들의 몸이 생명을 잃고 축 늘어졌다.

에우리아는 그 모습을 오래 보고 있지 않았다.

매섭게 가늘어진 눈이 이제 막 회복을 마치고 에우리아를 향해 다시 공격을 하려는 놈들을 빠르게 훑어냈다.

짙은 갈색의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들.

입고 있는 옷에는 그 어떤 표식도 없고 놈들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기사도 마법사도 모조리 같은 복장이다.

"마법사부터 처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드 때문이었다.

저 귀찮은 실드부터 쓰지 못하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뭐하러 그런 짓을 해. 귀찮게."

누굴 골라서 먼저 죽이는 건 에우리아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닌가.

전기의 힘은 얼음과 다르다. 광범위하다.

그러니 그냥 싹 다 잡아버리면 된다.

달려들면 붙들어놓고 멀리서 쏘면 막으면 되는 것을. 굳이 귀찮게.

두 대를 맞춰 죽이든 세 대를 맞춰 죽이든.

전부 다 죽여버리면 될 일이 아닌가.

"몇 명 남았지?"

번뜩이는 눈빛의 에우리아를 본 아르센은 실로 능력있으신 협회장 에우리아께서 만에 하나라도 '마법사부터 처치하자는 의견이 묵살된 아르센이 불만을 가진' 것으로 오해하지 않으시도록 유난히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십팔 명이요."

제27장. 지금이었다면 (2)

칼리안을 습격한 놈들은 대사막의 전사였다.

지금 에우리아를 찾아온 놈들은 그냥 사람이다.

카이리스인지 세크리티아인지, 혹은 텐실이나 리베른의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사막의 전사들이 아니라면 개개인의 무력은 엇비슷할 테니 그것이면 됐다.

"다섯 명만 잡아 꼬맹이."

"알겠습니다."

"붙어서 싸우지 말고. 너도 죽어."

"······ 네."

그렇게 덧붙인 에우리아의 로브 끝자락이 펄럭였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었건만 어느새 집중된 마력에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르센이 에우리아로부터 조금 떨어져 섰다.

곧 아르센의 손 끝이 살짝 움직였고 그와 거의 동시에 아르센에게 접근하던 기사 한 명의 머리 위로 얼음창이 떨어져 내렸다. 공격이라 하기보다는 놈들이 두르고 있는 실드가 어느 정도의 방어력을 지녔는지를 가늠해보기 위함이었다.

- 카가각!

단단한 무언가에 쇠가 긁히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며 얼음창의 끝이 갈려나갔다. 놈의 실드가 잠시 일렁이는가 싶더니 금세 회복되는 것도 보였다.

- 쌔애액!

적당히 놈들이 지닌 힘의 범위를 가늠하고 있던 아르센을 향해 거대한 바람의 창이 날아왔다. 앞에 선 기사가 아니라 멀찍이 숨은 마법사 나부랭이가 쏘아보낸 것이다.

하필이면 바람이라니.

바람 마법에 어울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딱 한 명 밖에 없는데.

문득 든 생각에 피식 웃은 아르센이 손을 휘두르자, 족히 두 뼘 너비는 될 얼음의 장벽이 순식간에 생성되어 아르센의 앞을 막았다.

- 콰강!

이 두께의 얼음 벽을 뚫고 들어 올 바람의 창은 아마 앨런이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아르센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람의 창은 얼음 벽을 반 쯤 파고든 뒤 멈췄다. 얼음과 바람의 힘이 맞부딪히는 굉음 때문인지, 혹은 생각 외로 강한 공격력 때문인지 아르센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얼음 방벽을 해제한 아르센이 바람의 창을 보낸 마법사를 향해 마력을 운용했다. 다가오던 기사는 일단 무시한 채였다.

- 쌔애액! 쌔액!

날카롭게 벼려진 두 개의 얼음창이 모두 마법사 쪽으로 날아갔다. 딱 막기 좋을 속도로 다가오는 얼음창을 본 마법사의 실드 앞면이 진하게 빛났다. 실드의 힘을 한 쪽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동시에 아르센의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 쌔액!

마법사의 뒤에서 나타난 얼음창이 내리꽂혔다. 당연하겠지만 이번에는 한낱 마법사가 몸을 움직여 피할 수 있을 속도의 것이 아니었다.

- 콰직!

마법사의 심장이 그대로 꿰뚫렸다.

쿵 하고 시신 한 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잠시 적막을 깼다.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얼음창이 생성되어 조금 전까지 아르센에게 달려들던 기사의 발을 멈추게 했다.

- 카각!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얼음창이 실드에 막혔다. 그것을 본 기사가 비죽이 웃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기사가 코 앞까지 다가왔음에도 피하지 않는 마법사라니. 아무리 발칸의 부군단장이라지만 너무 오만한 것이······.

- 우지직!

기사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무언가 바스라지는 소리와 함께 실드에 박힌 얼음창이 순식간에 형태를 바꾼 까닭이다.

화로 위에 놓인 얼음이 녹듯 형태를 바꾼 아르센의 얼음이 마치 거미줄이 뻗어나가는 모양새를 그리며 붉은 실드 위를 빼곡히 둘러쌌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것은 실드 겉면이 이미 푸른 얼음에 뒤덮인 뒤였다.

"반갑다."

기사의 검을 앞에 두고도 덤덤한 마법사의 목소리에 한껏 올라갔던 기사의 입꼬리가 천천히 돌아왔다. 자신의 시야를 방해하는 희뿌연 서리 때문에 정확히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파악을 하지 못한 채였다.

"나는 카이리스 마법사단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다."

스승님 가라사대, 사람을 만났으면 일단 인사부터 하라 하셨으니.

특별한 매개체도 없이 만들어진 실드를 얼려낸 얼음 마법사가 자기 소개를 마쳤다. 다만 놈을 기억해 둘 생각은 없었으므로 놈이 화답할 시간을 굳이 내어주지는 않았다.

아르센의 손 끝에 다시 한 번 차디찬 마력이 모여들었다.

- 쌔액!

- 콰지직!

얼어버린 실드는 한낱 석영 조각보다도 약하다.

보호 받지 못한 기사의 맨 몸은 그보다도 더 약하다.

- 쿠웅!

내리쳐진 얼음의 날에 실드와 함께 목의 절반을 잃은 기사의 시신이 잠시 기우뚱했다. 그리고 곧 바닥으로 추락했다.

쓰러진 기사의 시신 뒤로 푸른 물줄기가 대지를 가르며 쇄도해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르센이 싸우는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던 에우리아의 것이었다.

어느새 에우리아는 기사들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 쉬이이익!

에우리아의 발 밑에서 일렁이던 푸른 기운이 빛의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그것이 마치 땅을 가르며 뻗어나가는 날개 없는 용의 모습처럼 빠르고 날카롭다.

한 줄기에서 시작한 물은 마치 강이 갈라지듯 여섯 개의 줄기로 갈래갈래 나뉘었다. 그리고 에우리아를 향해 달려들던 여섯 명의 기사를 향해 제각각 뻗어져 나갔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한참 앞에 서 있던 여섯 놈의 발 아래까지 물이 당도했다.

- 쿠콰앙!

목적지에 다다른 물줄기는 일순간도 지체하지 않은 채 회오리치며 용솟음하는 여섯 개의 물기둥이 되었다. 그것이 그대로 놈들을 덮쳤다.

바람이 아닌 물로 만들어진 토네이도와 같이 거꾸로 회전하며 솟구치는 물의 힘은 실로 강력했다. 단지 물이었으나 그 안에 칼날을 담은 듯 물기둥의 한가운데 갇힌 채 간신히 서 있는 이들의 붉고 단단한 실드를 갈가리 찢어냈다.

- 파지직! 파직!

거의 동시에 놈들이 이고 선 하늘에서 보라색 빛의 번개가 떨어졌다. 대지에 도달하기 전 정확히 여섯 개로 나뉜 번개가 물기둥 속에 갇힌 기사들의 위로 내리꽂혔다.

말 그대로 멀쩡한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 콰아아앙!

숲을 쩌렁쩌렁 울려대는 굉음과 함께 놈들을 감싸고 휘몰아치는 물기둥이 번개의 힘을 고스란히 머금었다.

실드를 없애고도 사라지지 않은 물의 힘이 놈들의 온 몸에 상처를 냈다. 깊이 벌어진 상처 사이사이로 번개의 힘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치유력이 채 발동하기도 전에 피부를 태우고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 파지직!

에우리아의 힘은 아르센의 얼음과 달랐다. 오히려 앨런의 불과 비슷했다.

아르센의 얼음창은 순식간에 상대의 목숨을 앗아간다. 그러나 앨런의 불은 달랐다. 끊임없이 뇌를 깨워내어 심장이 멎을 때까지 고통을 느낀다.

에우리아가 다루는 전기의 힘 역시 마찬가지였다.

좀처럼 정신을 잃게 하질 않는 것이다.

온 몸의 감각 세포를 일깨우는 지독한 느낌에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났던 놈들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물에 젖은 몸에 스민 번개의 기운은 절대로 흩어지지 않았다.

- 콰아앙! 콰앙! 콰앙!

한 번 두 번 세 번.

지치지 않고 떨어져내리는 번개의 공격이 놈들의 몸에 모조리 적중했다. 그 심장이 모두 타버리도록 그 어떤 치유력으로도 재생되지 않도록.

순식간에 여섯 명의 기사가 여섯 구의 시신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열 둘."

놈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계속하여 공격을 해왔다.

그러니 에우리아와 아르센 역시 멈추지 않았다.

에우리아의 앞으로 달려드는 기사의 발목을 아르센이 얼리고 에우리아가 내리쳤다. 아르센에게 휘둘려지는 기사의 검붉은 검이 오러를 머금은 그대로 산산히 조각나 부서졌다. 그 위로 여지 없이 얼음창이 내리떨어진다.

"열."

아르센의 말과 동시에 에우리아의 손이 하늘을 향해 치켜올라갔다.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 쩌저저적!

이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청보랏빛의 하늘이 불안한 비명소리를 낸다. 말 그대로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새하얀 스파크가 하늘을 뒤덮었다.

천둥을, 그리고 번개를 모아갔다.

고양이의 그르렁거림이 하늘에 메아리친다. 그것은 어느새 냉혹한 범의 으르렁거림과 같은 소리로 바뀌었다.

- 쩌저적, 쩌적!

하늘이 두 갈래 세 갈래로 나뉘는 듯. 거대한 손아귀로 하늘 조각을 찢어내는 듯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하늘의 울음은, 천둥은, 모든 생명의 근원적인 공포를 자아내는 대상이다. 그런 하늘을 올려다 본 놈들의 발이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움직였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놈들의 발을 묶었다.

- 우르릉······!

번쩍이는 빛이 하늘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찾아 온 폭풍전야.

조용하기 짝이 없는 제 숨결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대지 위를 장악했다. 사위가 적막함에 잠겨들었다.

"모두······."

그 침묵을 이기지 못한 기사 한 명이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호가 되었다.

- 콰앙! 쾅! 콰아앙!

- 쿠콰과광! 콰앙!

모두 공격하라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모두 도망치라는 말이었을까.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소리가 터져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짙은 보랏빛의 번개가 줄기줄기 내리꽂힌다.

끊임 없이, 끊임 없이.

에우리아의 양 팔은 여전히 하늘을 향한 채였다. 계속하여 그렇게 하늘의 분노를 갈구했다.

그와 동시에 대지에서는 사방을 파헤치고 뿜어져 올라오는 푸른 물이 놈들의 온 몸을 적시고 시야를 방해했다.

- 파지지직!

에우리아의 말이 맞았다.

실드 따위 기사와 마법사의 구분 따위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입을 열었던 기사에게 내리꽂힌 번개는 바닥을 타고 물을 타고 그 옆에 서 있던 마법사에게로, 그 뒤의 기사에게로 계속하여 옮겨갔다. 마치 보라색의 스파크로 만들어진 감옥에 갇힌 듯 놈들은 제자리에 발이 묶인 채 고스란히 그 공격을 모두 맞았다.

- 콰과광! 쿠궁!

한 번 불러낸 번개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놈들의 재생력이 이미 다했음에도, 생명이 모두 꺼졌음에도 끊임없이 바닥을 내리치고 짓이겼다.

그렇게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에우리아의 팔이 비로소 아래로 내려왔다. 손에 머금던 스파크도 완전히 가라앉았다. 바닥에서 솟아오르던 물도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여기 저기 패이고 짓뭉개진 대지와 그 위에 놓인 마흔 개의 시신. 새카맣게 타버려 형체조차 찾기 힘든 그 시신들만이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듯 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아르센이 고개를 돌려 에우리아에게 시선을 보냈다.

"칼 잡는 폼은 엉성하기 그지 없는데 오러를 쓰고, 눈 앞의 것만 좇는 멍청한 마법사가 제 얼음을 뚫어낼 힘을 쓰고. 심지어 마법사와 기사가 치유력을 지녔습니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목소리.

"왕자님을 공격한 것, 저놈들입니까."

아르센의 질문에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을 소비한 탓에 아주 조금 창백해진 에우리아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맞아."

그래서.

그래서 발칸의 인원을 늘리라 하셨던 것일까.

아르센의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직접적인 이유는 달랐지만 칼리안이 준비를 요청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맞았다. 정확히 알지 못할 앞으로의 일에 대비하고자 함이었으니까.

"꼬맹이. 잡 생각 그만하고 이리 와. 닭 먹자."

어느새 태평해진 목소리에 아르센이 질렸다는 듯 말했다.

"바로 옆에 시체가 마흔 구 있습니다, 협회장님."

"그래서, 뭐. 나눠먹어?"

소싯적 투입되었던 야만족과의 전투에 꽤나 이골이 났다던 마법사협회 협회장이 그렇게 대꾸했다. 스승님과 함께 대사막을 누비고 다녔던 발칸의 부군단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그 옆에 앉았다.

어쨌거나 둘 모두 친숙한 것이다. 적의 죽음이라는 것에.

"아, 너무 익었다."

다섯 놈 잡으랬더니 세 놈 잡았지.

퍽퍽살 너 먹어. 힘들어서 못 씹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