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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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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를 친 놈이든.

사고 안 친 놈이든.

발칸의 마법사들은 오늘 지금껏 살아온 날 중 손에 꼽힐 수 있을 만큼은 될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아니 대다수의 마법사들에게 있어 오늘의 일은 지금껏 겪어 본 것 중 가장 섬뜩한 경험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술집을 날려먹은 마법사들이 '이번 일은 발칸과 관련이 없습니다' 라는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나 자상하게 웃던 칼리안이 단박에 달려와서 왕궁을 뒤흔들 만큼 화를 내며 욕설까지 뱉어낼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칼리안이 이렇게까지 화를 낸 근본적인 이유까지 완벽히 이해한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플란츠 뿐이었다.

'전쟁.'

칼리안은 전쟁을 겪었다.

그것은 플란츠의 머리로도 온전히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체르밀 궁까지 뻗어나와 플란츠에게 경고를 전한 소름 돋는 기운이 그저 그런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플란츠도 안다.

부숴버린 마차 값을 내 주는 것, 치료비를 갚아주는 것, 가게 기물을 보상해주는 것, 궁을 부순 죄를 덮어주는 것 같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제 윗사람을 믿고 의지해야 그런 끔찍한 현실에 당면했을 때 스스럼없이 목숨을 맡기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칼리안이다.

그 믿음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칼리안이 모를 리 없다.

누군가 맡겨온 것을 완벽하게 책임져줘야 더 큰 것을 맡기는 것임을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가르쳤다.

그렇게 쌓아올린 믿음이 있어야 한 명이라도 덜 죽는다는 사실을, 칼리안은 직접 겪어가며 배웠으리라.

전쟁을 치르면서.

"저도 사람이라서. 가끔 돕니다."

때문에 이렇게까지 심하게 화를 냈다는 것을 플란츠는 안다. 플란츠가 그것을 알고 있음을 아는 칼리안은 이런 말을 꺼냈다.

둘은 오늘 일에 대해 앨런에게 보고하러 간 아르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또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오늘 잠깐 돌았었다고.

자신도 사람이라서.

세크리티아의 왕제였을 때의 칼리안은 아마 오늘 보여준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플란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체이스가 분명 '많이 무뎌졌다' 했으니 어쩌면 더 호전적이고 더 잔인했을지 모르지만 제 사람을 끔찍이 아끼던 놈이었으리란 것은 분명하다고.

그런 놈이 전쟁을 겪었다. 아마도 전부 죽었을 것이다.

같은 일을 또 겪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리가 없다.

사람이니까. 그러니 돌았던 거다.

"······ 알아."

훈련장 밖 의자에 앉아있던 플란츠가 이렇게 대답하며 훈련장 쪽을 봤다. 그런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가 형님께 화를 낸 것은······."

"알아. 그것도."

몇 달 전.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발칸의 훈련을 지켜보던 플란츠가 발칸을 맡아보겠다 마음을 먹었다. 칼리안이 먼저 의사를 묻기는 했지만 결심을 했던 것은 분명 플란츠였다.

그랬으면서 발칸을 그저 자신의 목숨 유지를 위해 잠시 빌려온 힘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거리를 두고 책임지기를 피하려 하지 않았나. 감당해야 할 몫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모습이 르메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는 제 사람은 커녕 자신의 목숨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똑같이 굴고 있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발칸의 대원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플란츠에게도 화를 냈다.

"그래야 사니까. 나도, 저 마법사들도."

플란츠가 어쩐 일로 말을 덧붙였다.

이제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칼리안의 의도를 파악했음을 제대로 확인시켜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귀찮음을 감수한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씩 웃었다.

"역시 형님은 똑똑하십니다."

"또 짖지."

분명 화를 낼 때와 완연히 다른 웃음임에도, 플란츠는 잠시 손 끝이 차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전 마주봤던 칼리안의 한기가 다시 떠오른 탓이다.

아주 잠시동안 칼리안의 앞에 섰던 플란츠가 이 정도였으니 플란츠가 말을 달려 오는 동안 칼리안의 화풀이를 고스란히 감당한 마법사들은 훈련을 받을 만한 꼬락서니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때문에 플란츠와 아르센은 오늘의 훈련을 취소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것은 분명 집에 가서 쉬라는 의미였다.

결코 '저런 짓'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들이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를 본 플란츠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내 아우님은 매일 짖는 것이 일이고 저놈들은 하루 하루 미쳐가는게 일이군."

그 말에 칼리안의 웃음보가 터졌다.

그 플란츠가 굳이 입을 열어 이렇게 긴 소리를 꺼낼만 했기 때문이다.

아르센의 분류에 따르자면 '답 없는 또라이'인 마법사들은 지금 여전히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 칼리안의 동상을 먼저 세울지 아르센의 동상을 먼저 세울지 따위를 토론하고 있었다.

그러라고 허락해 준 휴일이 절대 아니었음에도.

누가 보면 새로운 마법 주문식이라도 만드는 줄로 착각할 만큼 열띤 모습이었다. 지극히 마법사답게 평화로운 모습이다.

한참을 웃던 칼리안이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마법사답지 않습니까."

옆에 앉은 망할 동생놈도 마법사였음을 잠시 잊었던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대답하지 않던 플란츠가 마법사들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강했겠지. 그 때에도."

갑작스러운 질문에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날의 발칸 말씀이십니까."

"그래."

마법사를 보호하려는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의 눈에 서린 그 수많은 감정들. 그 안에 단 하나, 원망은 없었다. 그래서 물어볼 수 있었다. 그때와 지금의 자신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것을 알았으니까.

"······ 강했습니다. 끔찍할 만큼."

그래서 대답할 수 있었다. 칼리안도.

절대로 알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잠시 접고 그 날의 일을 처음으로 입에 올렸다.

플란츠가 얼마나 강한 집단을 만들어냈는지를.

칼리안의 말에 플란츠는 고개를 숙이는 대신 발칸의 답 없는 또라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그렇게 행동하게 된 원인이 사라져버린 헤이시아 궁일지, 딸기 아이스크림일지, 체이스의 말 때문이었을지는 플란츠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여전히 앞을 쳐다보는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발칸의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일부터는 기사단도 둘러보셨으면 하는데. 어떠십니까. 이제 슬슬 발칸의 통합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요."

플란츠에게 과거의 일에 대해 더 자세히 풀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발칸이 얼마나 강했는지 그것만 알면 될 일이니까. 생각해보아야 좋을 것 없을 기억을 꺼내놓아서 무엇하겠는가.

"부지런히 움직이셔서 발칸에 대한 훈련도 계속 하고 카렌과 라온 기사단에 가서 얼굴도 비추고 하셔야죠. 어차피 하루 아침에 합쳐질 수 있는 병력이 아니니 저는 저대로 맹세의 인에 대해 알아보고, 형님은 형님대로 기사단을 손에 넣고.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가능한 빠르게 발칸으로 합쳤으면 해서요."

어쨌거나 플란츠가 그들의 힘을 가져오기로 한 이상 미뤄 둘 이유가 없었다.

물론 빠르게라 하더라도 시일은 걸릴 것이다.

당장 플란츠가 기사단부터 온전히 손에 쥔 뒤에 합쳐야 별 탈이 나지 않을 테니까.

때문에 안그래도 그렇게 할 생각이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관리는 오늘 보신대로 하시면 됩니다."

사람을 제 것으로 만들어 다루는 방법은 오늘 칼리안이 알려줬다. 기사들에 맞추어 대응하는 것이야 플란츠가 알아서 할 일이다. 실수하면 그때 다시 알려주면 되니까.

플란츠는 이번에도 고개만 움직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다시 한번 길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무력으로 누를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형님이 집니다. 의외로 엄청 약하시니, 싸우려 들지는 마시고 알아서 잘 처신하시면 됩니다."

"짖지 좀 말라고."

오늘도 양껏 짖은 칼리안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짖을 만큼 짖었으니 그만 짖겠다는 소리였다.

제25장. 있어야 할 곳 (5)

별을 녹여내어 만든 검.

그 재료의 독특함 때문에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는 묵색의 검.

- 콰앙! 카가강!

그리고, 마주한 이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고스란히 비춰낼 듯 반짝이는 은색의 검.

플란츠의 검이 밤을 담았다면 드미레아의 검은 한낮의 태양을 담은 듯 했다.

이렇듯 완벽히 다른 두 검의 공통점을 굳이 찾아본다면 그 무게감이라 해야 할 것이다. 둘 모두 칼리안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묵직한 검이었으니까.

그래서 칼리안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기사들을 열심히 양성하고 있을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 역시 무게감 있는 검술을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이리스 검술의 원류가 지그프리드니까.'

카이리스에서 역사가 깊다 할 만한 몇몇 기사 가문의 검술은 결국 슬레이만의 검을 기준으로 조금 더 무겁거나 혹은 조금 더 가볍거나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터였다.

- 카가가강! 카아앙!

그랬으니 카이리스의 양대 기사가문이라 지칭되는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의 검이 맞닿는 소리가 이렇게나 요란할 수 밖에.

드미레아의 검을 맞받아 친 플란츠의 검에서 불꽃이 튀었다.

둘이 그 정도로 진심을 다해 대련에 임하고 있다거나 뭐 그런 뜻의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불꽃이 튀었다. 비등비등한 힘의 칼날이 계속 얽히고 있으니 검이 맞닿을 때마다 사방으로 불티가 비산하는 것이다.

- 카아아앙! 카앙!

정통으로 맞부딪힌 검이 튕겨나오자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의 회전 방향을 바꾼 드미레아가 다시 한번 검을 내리그었다. 그러나 그것은 드미레아의 움직임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한 플란츠의 검에 막혔다.

그렇게, 주로 드미레아가 공격을 하고 플란츠가 방어를 하는 식의 공방이 이어졌다.

아직 싸움을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칼리안은 지금 플란츠가 드미레아의 검을 '분석'하고 있는 중임을 알아보았다.

칼리안은 검을 주고 받는 것에도 머리를 쓰는 플란츠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싸움 중에 머리 쓰는 것이 그리 좋은 버릇이 아니라는 말을 꼭 해줘야겠네."

"플란츠 왕자님이요?"

"응."

"저는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고 레아가 많이 는 것 같아 보이네요. 사실 바로 질 줄 알았거든요."

빌헬름 관에서 쓸데 없는 동상 얘기나 하며 뭉그적거리는 마법사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아르센은 아직 오지 않았고, 칼리안의 옆에 있던 플란츠는 지금 수련장 안에서 드미레아와 대련중이었다.

덕분에 혼자 앉아있던 칼리안의 옆으로 얀이 다가와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왕자의 시종이나 지그프리드의 장자라기 보다는 동생 얘기하는 그냥 흔한 오빠의 모습을 한 채였다.

"드미레아가 내 형님에게 바로 질 것 같았어?"

"아직 어리고, 또 아무래도 힘의 차이가 있으니까요."

당연하겠지만 얀도 검을 쥘 줄은 안다.

말 그대로 쥘 줄만 알지만 아무튼 안다.

그러므로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의 검을 다루는 데에 있어 '힘'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힘의 차이······. 글쎄, 어떠려나."

이렇게 중얼거린 칼리안이 살짝 웃는 얼굴을 했다.

둘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해내지 못하는 얀의 눈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칼리안을 꽃 같은 왕자로만 보듯 드미레아를 그저 어린 동생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 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오러 다루는 칼리안이야 논외겠지만 어찌됐건 드미레아는 '힘'에 있어 플란츠에 비해 불리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성별에 따른 신체적인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고.

그러나 드미레아다.

그냥 검을 좀 다루는 열 다섯의 소녀가 아니라, 지그프리드의 드미레아다.

그런 차이 따위는 개한테나 줘버리라는 듯, 드미레아의 검격은 하나같이 세차며 묵직하다. 칼리안이 가벼운 몸과 검을 극한에 가까운 속도를 내는 것에 몰았다면 드미레아는 가벼운 만큼 빨라진 속도에서 나오는 힘을 무게로 다시 치환한다.

그러므로 드미레아의 검은 충분히 강하다.

- 콰앙! 카아앙!

충돌이라 해야 맞을 듯한 모습을 띄며 두 검이 다시 한 번 정면으로 부딪혔다. 드미레아가 튕겨나온 검을 다잡으려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사이, 플란츠의 검이 꽤 그럴듯한 일격을 가했다.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뻗어나간 뒤에는 드미레아가 검을 되돌리는 틈을 정확히 파고든다.

"앗."

그것을 본 얀이 짧은 소리를 냈다.

누가 뭐라 해도 코끼리의 핏줄이 맞다는 듯, 드미레아에게 공격이 가해지는 순간을 얀도 본 것이다. 때문에 꽤 의외라는 얼굴이 된 칼리안이 아주 잠시 동안 얀을 쳐다봤다. 드미레아에게 빈 틈이 생기는 순간과 플란츠의 검을 따라갈 만큼은 되는 눈을 가졌다는 뜻이니까.

그러면서도 칼리안을 방금 구워낸 도자기인형 쯤으로 취급하고 있으니, '넌 저런 걸 볼 수 있으면서도 나를 걱정하는거냐' 하는 눈빛을 한 채였다.

- 카강!

팔과 목 사이를 노리고 달려드는 검 끝을 본 드미레아가 검 손잡이를 틀어 플란츠의 일격을 막았다. 그리고,

- 카아앙! 카앙! 캉!

세 번의 연계 공격을 물 흐르는듯이 쏟아냈다.

조금 전까지 플란츠에게 보여줬던 공격 패턴과 완전히 다른 방향, 완전히 다른 회전력, 완전히 다른 힘이다.

이번 공격 역시 막히기는 했으나 칼리안은 플란츠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자신의 검을 살펴보고 있음을 간파한 드미레아가 공격 방식을 달리했음을 눈치 챈 듯했다.

지그프리드의 검을 머리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 고스란히 담겼다.

"저래도 질 것 같아?"

칼리안이 흡족하게 웃으며 물었다.

드미레아는 맹수다.

검을 쥔 드미레아는 치밀하게 움직여 사정 없이 목을 물어뜯는, 절대적으로 힘의 우위에 선 맹수였다.

그런 드미레아로부터 맹렬하게 쇄도해오는 공격을 받아낸 플란츠도 태도를 바꾸었다.

언젠가 칼리안을 앞두었던 그 때처럼, 숨을 죄여오는 맹수를 앞에 둔 늑대와 같이.

사나움과 침착함을 모두 담은 그런 눈빛을 한 플란츠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준다. 드미레아로부터 뻗어나온 검을 막고, 내리치고, 몸을 돌려 되 찌르는 공방이 이어진다.

"그래도 레아가 이길 것 같기는 하네요."

얀의 대답에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들의 싸움을 살피던 칼리안이 웃었다. 플란츠가 평소에 좀만 더 잘 처먹었으면 칼리안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드미레아가 '이길 것 같기는' 하다고.

키리에를 구하러 갔던 도박장에서 모든 승패를 맞췄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둘이 처음으로 검을 마주댔을 때, 이미 칼리안의 머릿속에서는 승패가 결정났다. 플란츠의 검 끝이 미세하게 밀려났던 것을 보았으니까.

"드미레아가 무조건 이길 거야. 아직 내 형님은 드미레아의 상대가 못 되겠네."

드미레아는 모르겠지만 플란츠 스스로도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느꼈을 터였다. 그래서 더 머리를 쓰려 한 것이리라.

- 카아앙!

둔중하면서도 예리함을 잃지 않은 굉음과 함께 두 검이 세 번째로 정면 충돌했다. 힘대 힘이 맞붙었으니 그 소리가 마른 하늘을 조각내는 천둥과도 같다.

"키리에를 부를 걸. 이런 좋은 눈요기를 놓친 걸 알면 많이 아쉬워하겠는데."

이 곳에 오기 전 키리에부터 찾은 칼리안은 빌헬름 관에서 무언가를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수련이나 하고 있으라 말했었다. 칼리안의 안전과 관련 있는 일이 아닌 것을 안 우직한 키리에는 살기가 뿜어지든 말든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레아는 왕자님과 대련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는데요."

이렇게, 드미레아보다 늦게 빌헬름에 도착한 얀이 질문 아닌 질문을 했다. 칼리안과 대련을 해 보고 싶다 해서 이 곳에 칼리안이 있으리란 사실을 알려준 것이 얀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오늘 안돼."

다른 설명을 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칼리안은 그냥 이렇게만 말하고 웃었다.

상대가 누구든 오늘은 칼을 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바로 조금 전 '베른'에 근접할 만큼 화를 냈으니 혹시라도 키리에와 같은 일을 벌이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라도 대련과 실전을 구분하지 않게 될까봐.

"그럼 따뜻한 차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조금 안정이 되실 텐데요."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를 알아들은 것일까. 얀이 어느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로 이렇게 물어왔다.

얀은 참 신기하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눈치가 없으면서도 칼리안의 기분 하나는 완벽에 가까울 만큼 잘 읽어낸다.

커피를 싫어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도 그랬다. 아무것도 티 내지 않았는데 딱 한 번 커피를 내 온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커피를 꺼내놓지 않았다.

그런 얀을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몬 넣은 꿀차 먹고 싶어."

"네,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드미레아와 플란츠의 공방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당장 더 걱정해줘야 할 것은 그 쪽의 대련이 아니었다. 드미레아가 다치거나 질 일은 없을 것 같아 보였으니 말이다.

때문에 얀은 미련 없이 일어나 차를 준비하러 빌헬름 관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다시 수련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카가가강! 카앙!

플란츠의 호흡이 다소 가쁘게 변한 것이 보였다.

불편할지 모를 검은 재킷 차림 그대로 대련에 들어섰던 드미레아의 얼굴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곧 드미레아가 검을 들어 수직으로 내리쳤다. 마치 거울과도 같은 검신에 반사된 햇빛이 눈부시다. 그 반짝임을 거부하듯 플란츠가 검을 올려쳤다. 어두운 밤하늘을 담은 검신이 드미레아의 공격을 막았다.

- 카아앙! 카강! 카강! 캉!

그리고 플란츠의 반격이 이어졌다.

검 끝을 밀어내듯이 되받아친 뒤 힘이 뻗어나간 방향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빠르게 연이어 급소를 찔러나가는 공격. 마치 검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듯한 모양새를 내는 그것을 보던 칼리안이 한 번 더 놀란 얼굴을 했다.

이번에는 얀 때문이 아니라 플란츠 때문이다.

"저거······ 내 껀데."

그것은 분명, 이전에 플란츠를 상대할 때 칼리안이 딱 한 번 보여줬던 공격이었다.

"형님께서 배워가신 게 생각보다 많네."

가르쳐 준 적 없는 것까지 배워간 머리 좋은 형을 향해 중얼거린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플란츠를 가르치는 것이 생각만큼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어서다.

칼리안의 이런 반응을 알 리 없을 드미레아가 넓은 검격을 펼치며 플란츠의 공격을 막아냈다.

- 쉬이익!

곧 드미레아의 검이 마지막 파공음을 냈다. 플란츠의 검이 그 앞을 가로막았고, 온 힘과 온 무게를 다한 공격을 실은 은색의 검이 묵색의 검을 저만치 먼 곳으로 날려버렸다.

- 카아앙!

- 챙강!

몇 미터를 날아간 검이 수련장 바닥에 떨궈지며 수련장을 다시 한 번 울렸다. 플란츠는 검이 날아간 쪽을 보지 않았다. 자신의 심장 앞에서 정확히 멈춘 드미레아의 검 끝, 그리고 그 무거운 검을 지탱하며 대련을 했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손, 그만큼 굳건한 청회색의 두 눈을 차례로 쳐다봤다.

"졌군."

그리고 이렇게, 패했음을 인정했다.

드미레아가 검을 거뒀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검을 집어넣은 드미레아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왕자님."

그리고는 날아가 떨어진 검을 주워 손잡이 쪽을 플란츠에게 내밀었다. 승리자의 친절에 피식 웃은 플란츠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험하게 다뤄졌음에도 조금도 상하지 않은 검날을 살짝 훑은 플란츠가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드미레아가 말했다.

"아주 좋은 검입니다."

아마 이 말을 칼리안이 들었다면 미안한 얼굴을 했을 것이다. 같은 재료로 만들어 키리에에게 건넸던 또 하나의 검. 과거에서는 그 검의 본래 주인이 드미레아였던 듯 했으니까.

플란츠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 대꾸했다.

"좋은 만큼 무겁던데."

비밀 지켜주는 값이라며 칼리안이 건넸던 검이다.

그것이 결국은 이렇게, 삶에 미련 한 줌 없던 플란츠의 발을 땅에 묶어놓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 어떤 것보다 플란츠에게는 무겁게 느껴지는 검이기도 했다.

다소 더워진 탓에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친 드미레아가 대답했다.

"생과 사의 길을 나누어 놓는 물건인 것을요. 무겁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서로 다른 이유.

하지만 결국 같은 결론이었다. 플란츠도, 드미레아도. 손에 쥔 검이 무겁지 않은 이는 없을 테니까.

물론 그들로부터 저만치 먼 곳에 앉아 꿀차를 홀짝이고 있는 칼리안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아, 귤이네."

"레몬보다 귤을 더 좋아하시게 된 것 같아서요."

"응. 좋아."

얀은 이것을 어떻게 또 알았는지.

레몬 대신 귤을 한껏 담은 꿀차의 향이 달았다. 그 향기에, 가장 무거운 검을 쥐고 사는 칼리안이 얀과 마주보며 함께 웃었다.

제25장. 있어야 할 곳 (6)

똑같은 블론즈 색의 곱슬머리.

똑같이 동그란 눈 속에 담긴 청회색의 눈동자.

누가 보아도 남매라는 생각이 들 법한 외견이었으나 그 누구도 그런 의심을 하지 못했다. 한 명은 3왕자의 시종이었고 다른 한 명은 무려 카이리스 유일의 공작가를 이끌어나갈 소공작이었으니까.

본래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차남이었으나 현재는 장남이 된 시로이안은 슬레이만의 첫째 아들이 죽은 일로 충격을 받아 저택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다 알려져 있었다. 물론 한 때의 얀이 정말로 그리 굴었던 것은 맞았으므로 그 소문이 영 잘못되었다 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바로 그 시로이안이 지금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채로 '우리 꽃 같은 왕자님'을 쫄래쫄래 따라다니고 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니 저 둘이 남매지간이라는 생각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여기 좋네요."

자박자박 소리를 내는 자갈 위를 걷던 드미레아의 말이었다.

플란츠와 드미레아의 대련이 끝난 뒤 그 둘에 아르센을 포함하여 석찬이나 함께 하자는 칼리안의 제안이 있었다. 발칸과 기사단의 일로 서로 공유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던데다 생각보다 더 성질을 부린 칼리안의 배가 아주 많이 고파졌던 이유가 컸다.

다만 세뉴관에서의 석찬 전까지 두 왕자와 아르센이 먼저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다 하기에 코끼리 남매는 이렇게 잠시 산책이나 하던 중이었다. 언젠가의 칼리안과 앨런이, 그리고 언젠가의 체이스와 플란츠가 찾아갔던 바로 그 산책로 말이다.

"맞아. 왕자님께서 마음에 든다 하신 곳이거든."

"칼리안 왕자님이 마음에 들어해서 좋다는 겁니까."

얀은 무엇 때문에 드미레아가 질문을 했는지도 모르는 얼굴로 대답했다.

"왕자님께서 좋아하시면 좋은 거지."

얀은 그야말로 칼리안을 모시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 같다. 모든 것에 있어 칼리안을 우선으로 두는 것이다.

물론 드미레아는 그런 얀의 사고방식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삶에 있어 우선하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드미레아에게는 검과 가문이었고 얀에게는 칼리안임을 안다.

만약 그것을 칼리안이 모른다면 드미레아의 우려가 있을 지도 모르겠으나 칼리안은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얀의 말에 대한 다른 평가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여기가 좋다는 게 중요한 것이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산책로의 중간 지점에 다다를 때까지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몇몇 있었기 때문에 스스럼없는 말을 나누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재킷 들어줄까?"

얀은 인근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이렇게 물었다.

호위기사는 물론 하인 한 명 대동하지 않고 혼자 말을 타고 왕궁에 온 드미레아는 검은 재킷을 여전히 직접 들고 있었다.

"저한테까지 그러지는 않아도 됩니다, 오라버니."

드미레아는 꽤 정색하는 얼굴로 대답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책로가 좋은 이유조차 시종다운 얀이 자신의 앞에서까지 시종처럼 굴지 말았으면 해서 하는 소리였다. 그것을 알아들었는지 얀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 정도로 직급이 낮지는 않거든. 불편해 보여서 한 말이야."

칼리안의 손님이 들고 있는 짐을 대신 들어주는 것은 상급 시종인 얀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얀은 진작부터 드미레아를 동생으로 대하고 있던 터였다.

"들어주세요, 그럼."

그제야 드미레아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에 들린 재킷을 얀에게 넘겨줬다. 굳이 재킷 하나에 불편할 일이 있겠냐만은 그나마라도 오빠 노릇을 해주고 싶어하는 듯 보여서 장단을 맞춰준 것이었다.

- 절그럭.

팔을 들어 재킷을 건넬 때 드미레아의 다리 쪽에서 소리가 났다. 기사는 아니었지만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이기 때문에 왕궁에 들고 들어오는 것이 허락된 때문에 조금 전 플란츠의 검을 멀찍이 날려버리는 것에 사용될 수 있었던 드미레아의 검에서 난 소리였다.

만약 제 자리를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얀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기도 했다.

잠시동안 얀의 눈길이 드미레아의 검에 머물렀다. 그런 얀의 모습을 그냥 못본 척 할까 하던 드미레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뭘 해도 오라버니보다 제가 나았습니다."

생각이 더 깊은 것도, 셈이 더 빠른 것도, 귀족들을 앞에 두고 더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도, 바이올린을 더 잘 켜고 검을 더 잘 다루는 것도 모두, 드미레아였다.

"어차피 제가 더 잘 하는 일이었고, 제가 하고 싶어 하던 일이었고, 결국은 제가 하게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은 그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드미레아의 말이 맞았다.

따라서 500년을 이어 온 방패의 무게를 견디는 것도 본래부터 드미레아의 몫이었을 터였다.

- 내가 죽으면 넌 좋은 것 아냐?

얀은 단 한 마디 말의 무게조차 견디지 못했으니까.

검을 보던 얀의 눈에 들어있는 것은 부러움이나 놓친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니었다. 고작 한 마디 말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망친 것, 그래서 나라 유일의 공작 가문이라는 그 무거운 이름을 동생에게 전부 떠넘긴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다만 드미레아가 말한 것처럼, 드미레아가 소공작의 자리를 받은 것은 얀보다 나아서였지 얀을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드미레아는 지그프리드의 소가주로, 얀은 칼리안의 시종으로 각자의 위치에 잘 있으면 될 일이었다.

"우리 레아 다 컸네."

그래서 얀은 언젠가 칼리안의 키가 훌쩍 자란 것을 보았을 때 지어보였던 것과 같은 웃음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드미레아는 꽤 부드러운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나저나 벌써 다 컸다니.

이것이 칭찬인가 아니면 악담인가.

하여튼 멍멍이 오라버니보다 생각 짧은 오라버니라는 말은 굳이 입에 담지 않은 채였다.

* * *

칼리안이 조용히 이마를 감싸쥐었다.

"제가 왕자님을 따른다고 했지 왕자님 형님이신 플란츠 왕자님까지 따르겠다고는 안 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뒤 과묵하게 앉아있는 파란머리 마법사와 짜증난 얼굴을 지우지 않고 다리를 꼰 채 앉아있던 풀먹는 형 때문이다.

앞으로 기사 세력까지 들이게 될 테니 발칸 내부적으로 분란이 없게 해달라는 말이 시발점이었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쟤만 잘하면 된다'는 투로 이야기를 했고 아르센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둘의 말싸움이 또 시작됐다.

플란츠가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 정말 내가 쟤를 데리고 전쟁을 낸 것이 맞나?

그 차분한 눈에 딱 이런 질문이 담겨 있는 것 같았으므로 칼리안은 어깨만 한 번 으쓱여 보였다. 난들 아느냐는 소리다.

아무튼 사이가 좋은 듯 거지같은 둘을 앞에 둔 칼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얀의 꿀차가 한 잔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얀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하."

안 그래도 오늘 이런저런 일로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화도 많이 쌓인 칼리안이 아니던가. 때문에 흘러나오는 한숨 끝에 미미하지만 명백한 살기가 실렸다. 그것을 안 둘이 조금 놀란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8월 말."

그리고 칼리안은 '더 떠들면 둘 다 죽여버릴거야' 라는 눈을 한 채 이렇게 입을 열었다.

"8월 말에 발칸은 마법사단과 기사단을 모두 갖춘 군대가 될 테고 그 전에 마법사 인원을 두 배 이상 늘릴 생각입니다. 그러니 헤르츠 부군단장은 빨리 저 잔해 다 치워버리고 마나실 백작과 상의해서 추가 인원 들여놓으세요."

말이 좋아 8월 말이지 고작 세 달 안에 인원을 두 배로 늘리라니. 갑작스러운 통보에 아르센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리고 내년 2월. 그 때의 마법사단은 적어도 300명 이상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때가 되면 체이스가 즉위한다.

그리고 체이스는 왕위에 오른 즉시 세크리티아만의 강력한 군대를 만들게 될 터였다. 비록 베른이 없는 세크리티아라 하나 그들의 새로운 왕은 여전히 강인하고 현명할 것이다. 그런 왕이 만드는 새로운 군대는 어쩌면 칼리안도 예상하지 못한 강력함을 지니게 될지 모른다.

"그 뒤로도 마법사 수는 계속 늘려나갈 생각이니 긴장 풀지 말아요."

때문에 칼리안도 발칸의 육성에 전력을 다할 예정이었다.

"왜 갑자기."

플란츠가 이렇게 물었다.

칼리안이 소리 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저도 갑자기 이렇게 덩치를 키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카이리스가 '약소국'의 힘을 넘보면 안 될 일이 생겼지 않습니까."

아르센이 함께 있었기에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못했으나 플란츠가 알아듣기에는 부족함 없는 설명이었다.

체이스의 강력한 군대를 견제하려 할 르메인과 귀족들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카이리스에서 세크리티아를 경계하지 않으려면 발칸의 힘이 명백하게 우위에 있어야 하니까.

그것을 위해 발칸의 규모를 최대한 키워놓아야 한다는 것이 칼리안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의 마법사가 모이면 그 때는 내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날 겁니다. 기사단으로 마법사들을 견제하기 어려울 것이라 여길 사람이 있으니까요."

마법사의 수가 갑작스럽게 늘어나면 에반 브리센 후작이 경계를 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비등비등하게 힘의 균형이 맞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헤이시아 궁의 폭발로 힘의 우위를 조금쯤이라도 깨달았을 터였다.

그런 상태에서 1년도 되지 않아 마법사 수가 몇 배로 늘어난다면 에반은 당연히 마법사들의 힘이 커지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것이다.

칼리안과 같은 생각을 한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문 칼리안은 자신의 무릎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그동안 생각하고 결정한 내용을 마음속으로 되짚었다.

그렇게 얼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그때 쯤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을 발칸에 보내겠습니다."

그 말에 플란츠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아이즌 에이프린의 기사단은 분명 칼리안이 가지기로 했던 힘이 아니던가. 곧 그들을 수도로 불러들여 칼리안이 직접 키워나갈 생각을 하고 있음을 플란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플란츠였으니까.

그런데 칼리안은 지금 그들을 직접 가지지 않고 발칸으로 들이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플란츠에게 기사단을 넘기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왜 또."

"지난 번과 같은 이유는 아닙니다. 마법사단이 커지는 만큼 기사단이 커져야 형님이 안 죽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툭 건드려 보였다.

"형님께서 발칸의 마법사 수가 늘어나는 것을 손 놓고 보고 있는 것이 '브리센을 배반하는' 행위에 들어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이유가 아니라 하더라도, 형님의 기반 세력이 얼마 없는데 제가 기사단을 쥐고 있으면 그것 때문에 형님 죽을 수도 있고요."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은 언젠가 플란츠 모르게 에반 브리센 후작의 숨통을 끊어버릴 생각을 곱게 숨겨 놓으며 입을 열었다.

"브리센 후작이 정해놓은 '배반'의 선을 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범위가 방대하니 이것저것 다 조심해봐야죠."

"그렇다고는 해도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군."

플란츠의 말이 맞았다.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다.

칼리안이 아이즌의 기사단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왕실 기사단 카렌과 라온을 손에 넣으려 했던 플란츠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에반과 맹세의 인을 나누었다. 그런데 칼리안은 맹세의 인을 조심하겠다며 아이즌의 기사단을 플란츠에게 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마법사단의 규모가 커지는 것이 맹세의 인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결정한 일이다.

그런데 마법사단의 규모를 키우는 것은 카이리스에서 세크리티아의 새로운 힘을 경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세크리티아의 힘이 커지는 것은 플란츠가 체이스에게 '준비'를 하라 일러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 결국 칼리안은 이번에도 플란츠로 인해 손에 쥔 것을 다시 내려놓게 된 셈이었다.

"있어야 할 곳에 가는 것뿐이니 괜찮습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도 괜찮다고.

제25장. 있어야 할 곳 (7)

"죄송합니다만. 안 괜찮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훈훈한 형제간의 대화에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아르센은 본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누구를 만나든 좀처럼 한 번에 마음을 주는 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가져온 버릇 아닌 버릇이었다. 때문에 아르센은 사람 뿐 아니라 마법 주문식 하나도 의심 없이 믿은 적 없었다.

누군가는 그런 아르센이 꼼꼼하다며 좋아했고 또 누군가는 그저 깐깐하기만 하다며 마뜩찮아 했다. 그리고 의외의 지적 생명체 한 명은 다 됐으니까 그냥 꺼지라고 했다.

아무튼.

그리 존경했던 스승도 처음부터 믿지는 않았던 아르센이 의심 없이 믿어 본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주위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칼리안이다.

이유는 단 하나.

첫인상이 지극히 좋았던 탓이다. 어처구니 없을 만큼 단순한 이유일지 몰라도 아르센은 정말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칼리안을 믿었다.

- 굳이 망자의 걸음을 방해할 이유가 없지.

그의 생에 있어 유일한 '어른'이었던 스승의 영결식. 누가 보아도 평민임을 알 수 있을 만큼 허름한 상복 차림이었던 아르센.

검은 말, 검은 로브.

세뉴강의 안네루시아를 묵묵히 바라보던 모습. 그리고 붉은 눈.

왕자.

이제 막 앨런을 만났을 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 기억에 두지 않았으면 하네만.

그것이 칼리안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망자를 위해 말에서 내릴 줄을 알고 진심어린 목소리로 명복을 빌어주며, 자신을 알아본 평민에게 함구하라 명령하는 대신 '기억에 두지 않았으면' 하고 부탁 같은 말을 내려놓던 위태롭기 짝이 없는 붉은 눈의 왕자.

떠내려가는 안네루시아를 바라보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았다. 로브로 가려져 표정이 어땠는지 전혀 알 수 없었음에도 그 얼굴이 선명히 그려졌다 하면, 그 심정이 아르센에게 모조리 전해졌다 하면 누군들 믿어줄까.

결국 아르센은 칼리안의 부탁을 어겼다.

머릿속에 새겨진 그 날의 칼리안을 고스란히 기억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리라는 믿음을 의심치 않아서였다.

그래서 아르센은 '있어야 할 곳에 가는 것 뿐이니 괜찮다'는 칼리안의 말에 괜찮지 않다 말했다. 칼리안의 명령 하나는 정말 잘 듣지만 그 외의 것은 알아서 잘 어기는 아르센이 아니던가.

"저도 왕자님께서 왜 그러시는지는 압니다. 왕자님께서 플란츠 왕자님 살려두려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정도는 저도 이미 압니다. 이유는 하나도 모르고 이유를 알아도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어쨌든 왕자님께서 지금 플란츠의 살 길을 열어주려고 무리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르센은 바보, 혹은 머저리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왕자님 살 길 막고 플란츠 왕자님 살 길 열어주는 것은 백 번 천 번을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르센이 플란츠에게 시선을 둔 채로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이 말을 함께 듣게 된 플란츠는, 눈을 감지도, 비웃음을 띄우지도, 모르는 말을 들은 것처럼 굴지도 않은 채 그냥 테이블의 한 쪽 모서리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아무리 아르센이라지만 이 정도로 매몰찬 말을 꺼낼 만큼 플란츠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해서라도 칼리안의 생각을 고쳐놓아야 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 날 세뉴강의 다리 위에서 로브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표정이 지금 칼리안이 짓고 있는 것과 똑같았으리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잃어버리는 것에 묵묵히 순응하는 그런 표정 하지 마시고 왕자님 살길도 좀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헤르츠 경."

칼리안이 아르센을 부르는 호칭은 참 제멋대로였다.

언제는 경이고 언제는 부군단장이다. 특별한 구분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그냥 되는대로 대충 불렀다. 어떻게 부르든 아르센은 잘 대답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아르센은 칼리안의 말을 안 들었다. 대답 대신 다른 것을 말했다.

"이유를 알면 제가 입을 닫겠습니다, 왕자님."

형제애라고는 말라 비틀어질 것도 남아있지 않은 사이.

성인식인 로젤리타를 떠나기 직전까지 칼리안과 플란츠 관계가 어땠는지도 알고 실리케로 인해 엮인 둘의 악연도 안다.

말이 좋아 형제였지 저보다 더한 악연이 또 있을까. 그러니 서로 생긴 것만큼이나 판이하게 다른 길을 걷던 둘이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그리고 아르센은 칼리안이 플란츠를 살리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르센의 이런 태도에 잠시 머리가 아프다는 얼굴을 하던 칼리안이 한숨을 쉬듯 중얼거렸다.

"내가 괜찮다는데도 믿지를 않고. 이유나 알려달라 하니."

그 말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누가봐도 그것은 명백한 자조였다.

"내 아우님께서 거짓말을 다 하시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뱉는 '괜찮다'의 절반은 거짓말일 테다. 그에 비해 칼리안의 괜찮다는 아마 9할 이상이 거짓말이지 않을까.

시스파니안을 닮았다 알려졌고 대마법사의 제자인 왕자가 아니던가. 르메인의 총애도 받고 있는데다 지그프리드의 방패까지 얻었다.

그러나 칼리안이 쥔 것은 결국 옹립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방패 뿐. 스스로 검도 마법도 쥐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플란츠와 에반 브리센 후작이 쥐게 되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에반이 칼리안을 그냥 두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칼리안의 말은 플란츠에게 향할 검 끝을 자신에게로 돌려 놓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걸 알았으니 아르센이 이렇게까지 반발을 하는 것이었다. 발칸의 힘을 엉뚱한 곳에 베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였다.

"꼭 무력으로만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자님. 브리센 후작의 세력을 우습게 보시면 안됩니다. 왕자님이 아무리 강하시고, 또 마나실 군단장님의 보호를 받는다 해도 결국 그것은 목숨을 지키는 것에만 쓸모 있는 겁니다. 왕자님 것을 전부 플란츠 왕자님에게 넘긴 뒤에 브리센 후작과의 세력 싸움에서 어떻게 이기시겠다는 겁니까.'

칼리안은 플란츠의 앞에서 대놓고 자신의 손을 들고 있는 아르센을 보며 잠시 웃었다.

과거에는 플란츠의 명으로 베른의 숨을 끊었던 아르센이 플란츠와의 세력 대결에서 칼리안이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설득을 하고 있다.

"이것 참······. 의도한 것은 아닌데. 되게 묘한 상황이네."

덮어두기 힘든 그 묘한 기분에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플란츠와 아르센은 그런 칼리안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플란츠는 의미를 알아들었기 때문이었고 아르센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헤르츠 경."

아르센을 다시 부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걱정 말아요.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도 아니고 자리 싸움 하는 방법은 내가 경보다 더 잘 압니다. 많이 겪어 보기도 했고. 그리고······ 우리가 이러는 이유도 분명히 있지만. 입에 담는 것은 나중으로 미뤘으면 좋겠는데. 그 의문 잠시 접어두는 것은 어렵겠습니까."

플란츠가 맹세의 인을 했다는 것도, 그런 플란츠를 왜 굳이 살려놓으려 하는지도 당장의 아르센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르센이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플란츠를 쳐다봤다. 자신의 앞에서 칼리안의 손을 들고 있는 아르센을 보면서도 플란츠는 그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칼리안 역시 플란츠가 그리 구는 것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 여기고 있었다.

정말로 말해주지 못할 이유가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 알겠습니다. 다만."

고집 가득한 마법사의 신의를 담은 파란 눈으로 아르센이 못을 박듯 말했다.

"소유자가 누구든 발칸의 마법사는 칼리안 왕자님을 따를 겁니다."

그 말에 남은 두 사람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낯간지러워서 들어 줄 수가 없군."

"아니. 전하와 군단장 말을 들어야죠. 나 말고. 군대잖아."

적당히 대꾸한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어찌됐건 이 정도로 넘어가 주니 고맙다는 뜻이었다.

곧 칼리안이 플란츠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 이상의 계획에 대해서는 형님께도 말씀 안 드릴 겁니다."

"그래."

이제부터는 칼리안이 에반에 대응할 계획을 세워야 했다. 세자위 싸움에서 지면 칼리안을 위한 레니시타 잎이 광장에 깔릴 터였다. 란델로부터 정보를 얻어 놈들에 대해 알아내거나 플란츠를 브리센 후작으로 만들려면 일단 칼리안부터 살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플란츠에게 공유하거나 들켜서는 안 될 것이기도 했다. 계획을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 역시 맹세의 인에 반하는 행동일 수 있었으니까.

때문에 칼리안은 플란츠를 보며 당부하듯 다시 말했다.

"똑똑하신 내 형님 또 혼자 눈치 채버리시면 안 됩니다. 모르고 계셔야 안 죽습니다."

"내 아우님은 이제 짖는 게 버릇이지."

늘 그렇듯 칼리안이 한 번 더 씩 웃었다.

형님이 알면 죽는다 말하며 웃는 동생과 그런 동생을 개 취급하는 형의 모습을 본 아르센이 얼마나 복잡한 기분이 됐는지는 모르는 채였다.

* * *

얀이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외부 손님인 드미레아가 함께 하는 자리였으니 석찬은 체르밀 궁이 아닌 세뉴 관에서 진행됐다. 다만 그 준비는 체르밀 궁의 주방장이 직접 했다. 왕자들이 함께 하는 식사를 다른 이가 준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언제나 그렇게 진행되었던 일이었으니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만 얀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 때문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식단인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네요."

딸기를 졸여 만든 소스를 가득 얹은 송아지 고기 스테이크, 말린 딸기를 넣고 구운 빵, 딸기 식초로 마무리 한 샐러드, 생딸기와 생크림으로 장식한 와플과 팬케이크, 딸기 향이 가득한 크레이프와 샌드위치.

후식으로 준비되고 있는 딸기 타르트와 딸기 푸딩, 딸기 청을 넣은 탄산수에 딸기 티라미스.

그리고, 딸기 아이스크림.

온통 딸기다.

정성들여 달지 않게 만들어낸 딸기 가득한 석찬 메뉴에 식당에 먼저 들어와 검수를 하던 얀이 질린 얼굴을 했다.

"아무리 왕자님께서 딸기를 좋아하신다지만······."

그런 얀과 함께 들어온 히나가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 제가 말을 했는데, 내용이, 잘못 전달 됐나봐요.

좋은 왕자님이 딸기를 많이 좋아하셔서 오늘 석찬에 다른 음식과 더불어 딸기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주면 안되겠는지.

히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주방장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 왕자님이 딸기를 좋아하시니 '오늘 석찬의 다른 음식과 아이스크림에 딸기를 더불어 만들어주면 안되겠는지' 물어오는 히나의 부탁을 아주 흔쾌히 들어줬다.

때마침 얼마 전에 왕궁으로 선물 된 딸기를 나누어 받은 참이었으니 재료도 충분했다. 덕분에 만들어진 붉디 붉은 식단을 보던 얀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 죄송해요. 이걸, 어떻게 하죠.

열심히 수어를 배우고 있지만 아직 원활한 의사소통이 될 정도는 아니었던 탓에 생긴 문제를 두고 뭐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칼리안이 그것에 대해 싫어할 성격도 아니었고 이 일의 원흉인 플란츠는 저 좋아하는 딸기 가득한 밥을 먹게 생겼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드미레아야 잘 이해해 줄 테고, 미친 따까리는 알아서 처먹으라지.

"우리 왕자님도 딸기 좋아하시니까 괜찮아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그렇게 얀이 얼추 상황을 파악할 때 쯤 생각보다 빠르게 칼리안 일행이 들어왔다.

딸기 향 가득한 식단을 본 일행의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예상한대로 드미레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아르센은 이게 무슨 장난인지 궁금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플란츠는 질린 얼굴로 메뉴를 살펴보다 히나를 보곤 피식 웃었다.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와. 전부 다 딸기네."

이렇게 말하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런 칼리안의 얼굴을 본 얀이 잠시 멈칫했다.

그것은 분명, 즐겨하지 않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 할 때의 표정이었다.

제25장. 있어야 할 곳 (8)

향이 강한 것을 싫어했다.

르니에리가 생각나서 문득 싫어졌다. 몇 년 전의 일이었는지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래 전 언젠가부터 그렇게 됐다.

주위의 것들을 모조리 자신의 향으로 덮는 그 지독함이 몸서리쳐져서 향이 지나친 것은 다 싫었다. 그것이 정말 혐오였을지 혹은 그 반대의 감정을 덮어두려는 반발일지 플란츠는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그냥 싫어하기만 했다.

그런 이유까지 가늠했든 아니면 그냥 무식하게 하나하나 지켜봤든 아무튼 동생놈이 그 사실을 알았다. 물론 플란츠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오늘 플란츠만큼 조용한 히나가 생소한 것을 물어왔다. 그래서 한참의 고민 끝에 대답을 해줬다.

그래. 딸기를 좋아한다고.

그렇게 대답했다.

딸기를 좋아한다고 했지 딸기에 미쳐있다고는 안했다.

"혹시. 왕궁에 무슨 딸기 농장이라도 있습니까."

무표정하게 앉아있던 드미레아가 식사 말미에 결국 이런 말을 했다. 마지막 디저트로 기어코 딸기 아이스크림이 나왔을 때였다.

드미레아의 말에, 플란츠의 팔이 아주 잠시 갈 곳 없이 멈췄다 다시 움직였음은 아마 히나만 봤을 것이다. 때문에 히나의 고개가 하염없이 수그러들었다.

만약 이런 뒷이야기를 알았다면 칼리안은 아마도 또 한 번 난리를 쳤을 터였다. 천만다행으로 칼리안은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를 알아채지 못했다.

- 딸기를 좋아하세요, 형님?

족히 며칠은 입에서 딸기 냄새가 날 것 같은 음식들을 야무지게 잘 먹어치우던 중, 툭 하고 던져지듯 떠오른 생소한 기억을 함께 삼켜야 했던 탓이다.

지금의 칼리안이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아주 오래 전 언젠가의 기억 말이다.

"······ 딸기 좋잖아."

때문에 칼리안은 드미레아의 말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다소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말을 인지하고 고개를 든 칼리안은 그야말로 정신 나간 메뉴임이 분명하다 장단을 맞춰주는 대신 이렇게 말하며 작게 웃었다.

"그러고보니 히나가 제일 좋아하지, 딸기 아이스크림."

그리고 히나를 향한 말로 화제를 돌리며 히나에게도 아이스크림을 꼭 챙겨주도록 얀에게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이상 이 기괴한 저녁 메뉴에 대해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한 것이기도 했다. 이 자리의 주인인 칼리안이 불만이 없다는데 누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얼마 후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

이 사달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 만큼 나름대로 열심히 식사를 마친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것이 대답이었으니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전하께는 에이프린 백작의 기사단을 언제쯤 들이겠다 말씀하셨습니까."

딸기 향 만큼 가까이 하기 힘든 기억이 떠오른 칼리안이었다. 그것에 잠시 머뭇거리느라 식사 중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해서 이제야 말을 꺼내놓은 참이었다.

탄산수의 분홍색 거품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잠깐 쳐다본 플란츠가 대답했다.

"6월 중순 전."

칼리안은 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드미레아를 보며 말했다.

"그때까지 기사들 맡아 줄 준비 좀 해줘, 드미레아. 처음은 아마 200명 가량 될 거야."

"네, 왕자님."

적은 수는 아니었으나 드미레아는 별 문제 없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라고 포장하는 게 좋으려나. 아무리 지그프리드라지만 갑작스레 200의 기사가 늘어나면 주위의 시선이 끌릴 수 밖에 없는데."

"외가의 기사들이 다시 찾아온 것으로 해두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그프리드의 저택에는 슬레이만의 아내인 세리에와 세리에의 동생 부부, 그리고 그들 부부의 가솔과 기사들이 함께 머물렀었다. 세리에 혼자 그 넓은 저택을 지키게 두기에는 슬레이만의 걱정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지난 해 말 그들 부부 사이에 아이가 생겨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간 상태였다.

따라서 드미레아는 그 기사들이 다시 저택을 찾아와 머무르기로 했다 하는 것이 가장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슬레이만이 이끄는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기사 200명이 수도를 찾아왔다 하면 에반 브리센 후작의 가벼운 엉덩이가 또 들썩거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 들어가는 비용은 내가 부담할 테니 알려줘. 내가 그것까지는 셈이 어려워서."

"알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칼리안이 핑크빛 소다수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얀. 미안한데, 자리 좀 물려 줄 수 있을까?"

주방장을 포함한 식당의 시종들은 후식을 내옴과 함께 이미 자리를 벗어난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은 플란츠의 시종인 레릭과 호위기사들 그리고 히나와 얀 본인에게 자리를 비켜달라 말을 한 것이었다.

얀은 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숙여보인 뒤 다른 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다시 쳐다봤다.

이제 에반 브리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였다.

물론 그것은 플란츠가 몰라야 하는 이야기였으니 이만 자리를 비켜달라는 뜻이 담긴 눈빛이기도 했다.

"그래."

소리 없이 일어선 플란츠가 아직 꺼내지도 않은 칼리안의 말에 대해 대답했다. 의도가 무엇이든 축객령은 축객령이 아닌가. 그러니 '죄송합니다만' 이라는 사과로 시작될 것이 분명한 칼리안의 말이 나오기 전에 막은 것이었다.

"네."

시종과 기사를 먼저 내보낸 뒤 플란츠에게 말을 꺼낸 것으로 왕자의 입장에 대해 나름의 배려를 해준 칼리안이 짧은 답으로 사과를 대신했다. 그것 역시 잘 아는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곧 플란츠까지 밖으로 나가고 드미레아와 아르센을 포함해 셋만 남겨진 식당에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처음은 아르센을 향해서였다.

"헤르츠 경. 나 대신 브리센 변경백 좀 만나고 와줬으면 좋겠습니다. 알다시피 내가 외출 금지 상태라서."

이렇게 말하는 칼리안은 마치 평범한 사고를 친 뒤 평범한 벌을 받은 평범한 열 다섯 살 소년같은 얼굴이었다.

"네, 왕자님. 무슨 말을 전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보냈다 하지 말고 경이 마음을 바꿀 것처럼. 변경백이 수도에 올 생각이 아직 있는지 물어봐줘요. 혹시 아직도 란델 형님과 연락을 하는 상태인지 확인해주면 더 좋고."

"제가 왕자님을 배반하고 플란츠 왕자님이나 란델 왕자님의 편에 설 것처럼, 그리고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과 손을 잡을 것처럼 굴며 의중을 떠보라는 말씀이십니까."

"정확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르센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정말 평범한 부탁을 받은 것처럼.

"세이렌 경이 브리센 변경백령 쪽으로도 이동 마법진을 구축할 예정이라 하니, 궁에는 관련 업무로 자리를 비운다 해두면 될 겁니다."

이렇게 아르센을 향한 지시를 마친 칼리안이 드미레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드미레아. 형님들이나 내 편에 서지 않은 이들 중에 새로운 변경백이 될 만한 사람들이 있을지 알아봐 줄 수 있을까. 전하께 추천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완전한 중립을 고수하는 새로운 변경백.

그레이가 수도로 왔을 때 그레이의 빈 자리를 대신 할 수 있을 사람.

르메인의 인사 평가를 믿지 못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르메인이 그것을 알아보려 할 때 르메인의 주변에 있을지 모를 에반의 귀에 내용이 전해질까 우려한 이유가 더 컸다. 그래서 드미레아의 눈을 빌리려는 것이었다.

플란츠가 그리했던 것처럼 탄산수의 기포가 퐁 하고 터져 사라지는 것을 잠시 쳐다보던 드미레아가 대답했다.

"공작께서 아셔도 될 일입니까."

슬레이만에게 조언을 구해도 될지, 드미레아의 선에서 처리해야 할 일인지를 묻는 말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

"얀이 나갔잖아."

얀에게조차 비밀로 해야 할 일이니 슬레이만 역시 몰랐으면 한다는 뜻의 대답이었다.

변경백 후보를 물색해보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다른 말 없이 알겠다는 대답만 했다.

이쯤 되니 드미레아와 아르센은 칼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가늠해냈다. 그래서 드미레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의 자리 싸움에 직접 관여하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아르센이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른 것이 아닙니까. 아직 왕자님의 기반 세력이 그리 많지 않으니 발칸이 자리를 잡은 뒤에 움직이셔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에반 브리센 후작 숙청. 혹은 암살.

둘 중 어느 쪽으로 발을 옮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칼리안이 지금 에반이 사라진 이후의 상황을 대비하려는 것임은 분명했다.

에반을 치워내면 브리센의 지지세력이 이곳 저곳에서 들고 날 터였다. 그런 그들이 여전히 브리센을 옹호할지 혹은 칼리안이나 란델에게로 떨어져 나갈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왕자님께서 내년 2월까지 발칸의 몸집을 불려 놓겠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때 시작하시는 것은 안됩니까?"

"발칸의 마법사단이 자리를 잡더라도 그것은 전력이지 세력이 아니니까요."

무슨 일이 있을 때 아르센의 말처럼 칼리안을 위해 직접적인 싸움에 나서줄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발칸 자체가 귀족 사회의 한 조각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칼리안의 말대로 발칸의 마법사단은 전력이지 세력이 아니니까. 물론 귀족들이 칼리안의 편에 설 이유가 되어 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시기에 맞게 저를 지지하는 세력이 생기도록 제가 때를 맞춰 움직일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헤르츠 부군단장은 우선 브리센 변경백 의중 먼저 정확히 확인해주세요."

칼리안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세력을 어떻게 만들 생각인지, 에반을 어떻게 치워낼 생각인지, 그 후에는 어떻게 정리할 생각인지. 이런 것들은 아직 칼리안의 머릿속에 꼭꼭 숨겨진 채 나오지 않았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행히 칼리안의 속내까지 속속들이 알고자 하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으므로 아르센은 이번에도 쉽게 수긍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칼리안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석찬을 마쳤다. 억지로 좋은 척 먹어댄 딸기 향이 여전히 입 속을 맴돌았다.

* * *

- 똑바로 봐.

문득.

정말 문득.

- 피하지 말고, 제대로 봐, 나를. 죽어가고, 있다는 걸, 외면하지 마.

기억 속 깊은 곳에 가만히 묻어두었던 것.

그 날의 모습이 떠올라 버렸다.

- 그래. 그렇게 보고, 이제는, 제대로 알아야지. 너도.

얀에게 있어 그것은.

- 왜 그래. 내가 죽으면 넌, 좋은 것 아냐?

핏기 없고 작고 가는 손가락이 만들어 낸 소리없는 비수였다.

* * *

똑바로 피하지 말고 나를 제대로 보라던 말.

그것이 하필이면 칼리안의 얼굴을 보았을 때 생각이 나 버렸다.

드미레아와 이야기하는 동안 잠시 떠올렸던 기억 때문일 터였다. 굳이 꺼내두지 않았던 그 기억이 피할 곳 없이 불어닥친 바람처럼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간 것이다.

식당에서 나온 얀이 문 앞에 멈춰 섰다.

"먼저 가 있어요, 히나."

그리고 바닥을 향해 시선을 둔 채 히나에게 말했다. 히나가 대답하는 것을 확인하려면 그 손을 보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히나가 발을 돌려 멀어지는 것이 언뜻 보였다. 아마 알겠다는 대답을 했을 것이다.

"후우."

잠시 숨을 내쉰 얀이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 때 식당 문을 한 번 더 여는 소리와 누군가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안에서 나올 사람은 칼리안이 중요한 대화를 하겠다며 남겨둔 이들이 아니던가. 때문에 얀이 고개를 뒤로 돌려 누가 나온 것인지 확인하려는데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

문 앞을 지키는 기사들까지도 물려두었던 탓에 직접 식당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물론 플란츠였다.

아.

저 자식이 왜 하필 지금.

이런 생각이 든 탓에 결코 곱지 않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왜요."

플란츠가 실소했다.

지금 플란츠는 얀을 '지그프리드'라 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얀이 이런 식의 답을 한 것이다.

"······ 내 아우님의 시종이 주제를 모르는데."

그래서 플란츠는 굳이 '시종'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물론 최근의 얀이 플란츠에게 그리 좋은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얀의 머릿속이 지금 뒤죽박죽인 것 같아 보여서 플란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정리를 해 준 것이었다.

"아."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따져 본 얀이 낭패한 얼굴이 됐다. 3왕자의 시종이 2왕자에게 '왜요'라는 대답을 하다니. 당장 궁에서 쫓겨날 만큼의 큰 실수가 아닌가.

"제가 잠시······."

"됐어."

그리고 플란츠는 이렇게 얀의 말을 잘랐다.

당연하겠지만 미안하다는 말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사과 됐다고. 둘 다 없는 셈 치자고."

순간 얀은 이런 와중에도 레릭을 잠시 동정했다. 칼리안이 저 따위로 말을 했다면 얀은 쫓겨나기 전에 제 발로 궁을 뛰쳐나갔을 거다.

대체 저게 뭔 소리냐고.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이런 말이 얀의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얀이었으니까. 때문에 인내심 강한 플란츠는 짜증났다는 표정이 되면서도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나이프."

말이 또 짧았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이해를 했다.

칼리안이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다. 얀에게 나이프 던진 일에 대해 얀에게 사과하도록 말을 해두겠다고. 그러니 지금 플란츠는 그 때의 일과 지금 얀의 실수를 맞바꾸자는 말을 하는 것일 테다.

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제대로 기억도 안 나는 일과 지금의 실수를 같이 묻어주겠다 하니 얀으로서는 오히려 고맙다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 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플란츠가 지나가려다 말고 입을 열었다. 얀의 얼굴에 드러난 것이 그것 뿐만은 아니었던 탓이다.

"······ 원래 싫어했는데. 내 아우님은."

오늘따라 플란츠가 참 말이 많다.

그래도 조금 전 실수한 것이 있었으므로 마음이 복잡한 것을 잠시 미뤄둔 얀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또 못알아들은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좋아해도 저 정도로 차려놓으면 누구든 질색할테고. 원래 싫어했기도 했고."

조금 전 식당에서 칼리안의 표정을 보던 얀이 멈칫한 것을 플란츠는 놓치지 않았다. 칼리안이 웃는 이유가 화가 나서인지 기뻐서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얀이 유일하지 않던가.

그런 얀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해서 어울리지도 않는 실수를 했는지 예상하는 것은 플란츠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얀을 그대로 두면 그 생각이 어디로 향할지를 눈치채는 것 역시 똑똑한 플란츠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뇨. 왕자님은 분명 좋아하셨는데. 오늘 갑자기······."

"원래 싫어했다고."

얀의 말을 자른 플란츠가 이렇게 말했다.

고작 딸기 하나를 두고 칼리안의 시종과 말싸움을 벌이는 것이 귀찮고 짜증났으나 일단은 계속 말을 이었다.

"억지로 좋아하는 척. 그랬던 거라고. 너 궁에 오기 전에."

······ 나한테 말 한 번 걸어보려고.

칼리안은 거짓말을 잘 못했다.

지금의 칼리안만 거짓말을 잘 못했다.

옛 칼리안은 아니었다.

그러니 얀의 눈에는 그것이 억지인지 아닌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변하지 않나. 그러니까 내 아우님 입맛 하나 놓친 걸로 그렇게 유난 떨지 말지."

고작 딸기 하나 가지고 다른 것까지 의심하지 않도록, 혹여 나중에 또 같은 일이 있어도 별 생각 하지 않도록. 플란츠가 이렇게 말했다.

누구보다 많이 바뀐 플란츠가 이런 말을 한다.

덕분에 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주십니까."

왜 이렇게 참견을 했느냐고.

어울리지 않게.

그 말에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모든 진실이 반드시 밝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영원히 덮어두어야 할 진실도 있음을 플란츠는 안다.

나중에 언젠가 결국 밝혀질 일이라 해도.

그것이 적어도 지금은 아니어야 함을 안다.

"손에 쥔 것 다 내려놓은 내 동생이 마지막으로 기댈 구석은 있어야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칼리안에게 있어 그것 하나만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 역시 플란츠가 안다.

그러니까 얀은 그냥 얀 답게.

그냥 얀은 얀 처럼.

그랬으면 해서 건넨 말이었다.

제25장. 있어야 할 곳 (9)

석양이 지고 먹구름이 든다.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아서, 석찬을 마친 칼리안은 드미레아와 아르센에게 각각 마차를 내어주도록 했다.

그 뒤 세뉴관에서 나온 칼리안이 체르밀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얀과 만나고, 플란츠가 혼자서 체르밀에 가버린 것을 안 레릭이 방황하고, 집에 돌아가는 대신 술집에 모인 창백한 얼굴의 마법사들이 탄산수를 홀짝이며 칼리안의 동상을 어떻게 만들어야 덜 혼날지 토론하던 시간.

두 개의 분홍색 아이스크림을 든 히나가 수련장을 찾았다.

키리에에게 '미련 없이 죽는 것이 멋있는 줄 아느냐'며 화를 낸 이후로 아직 키리에를 제대로 만나 화해하지 못한 탓이다.

사실 화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키리에는 계속 히나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걸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히나가 키리에를 찾아간 것으로 이미 화해를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키리에는 아주 오랜만에 히나의 은색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속상했겠네."

오늘 석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막 설명을 마친 뒤였다. 히나의 말을 제대로 전해듣지 못한 주방장이 그 말도 안되는 주문에 대해 얀이나 레릭에게 확인 한 번을 하지 않고 딸기 가득한 메뉴를 준비했다고.

얼핏 들으면 재밌다 할 일이겠으나 키리에는 웃지 않았다.

블루베리 때문에 히나와 말싸움을 했던 키리에는 그날 히나가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단지 입을 열어 소리를 내지 못할 뿐인데 불편하고 억울한 일이 너무 많다는 것도 잘 알았으니까.

- 여기 사람들, 다 이상해.

키리에의 말에 히나는 속상했는지 아닌지를 대답하는 대신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뭐가 이상한데?"

- 아무도, 화를 안내. 아무 말도, 안해.

당연하다는 듯이 수어를 배우겠다 하질 않나 수어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을 불편해하기는 커녕 말하는 방법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며 그냥 넘어가질 않나.

"너를 아껴서 그래."

이렇게 말한 키리에가 히나로부터 받은 딸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었다.

플란츠가 수어를 배운 것은 키리에로서도 의외였지만 발칸의 마법사들에게 수어를 가르친 것은 키리에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칼리안이 시키지 않았어도 앨런이 나서서 수어 교육을 이야기했다 하지 않나. 만약 앨런이 아니었다면 아르센이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체르밀의 몇몇 사람들이 수어를 배운 것도 칼리안의 지시가 아니었다. 그 역시 모두가 히나를 아껴서 그런 것이리라고, 키리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하나 뿐인 핏줄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주관적인 관점을 버리고 생각해보아도 히나는 누구나 아껴줄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 나, 여기가 너무 좋아.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

그것을 히나라고 모를까.

이 곳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벙어리' 혹은 '장애'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히나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괴상한 저녁 식단을 나무라는 대신 딸기 아이스크림을 챙겨 준 칼리안과, 히나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웃고 넘어간 플란츠가 생각난 까닭이다.

- 나, 다음 주부터, 저기로 가서, 일하게 될 거야. 정말, 열심히 할 거야.

발칸에서의 일.

그 말을 들은 키리에가 조금 걱정하는 눈빛을 했다. 다시 새로운 일을 하게 된 상황에 대한 걱정이었다.

체르밀의 사람들은 다 좋았다 하지만 과연 발칸의 마법사들은 어떨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물론 아르센이 어련히 알아서 챙겨주겠냐만은 오빠로서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 그리고, 베,로,니,카, 님이, 오신다고 했어. 나, 도와주신대. 그러니까, 걱정 하지 마.

세심하지 못한 칼리안은 이런 얘기를 키리에에게 전해주는 것도 잊어버렸다. 때문에 키리에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베로니카님이?"

상대적으로 신분에 따른 차별이 적은 리베른에서 자란 탓인지 아니면 앨런의 영향인지 몰라도 베로니카는 히나를 꽤 격 없이 대했었다. 게다가 로젤리타에서 돌아오는 한 달 동안 일행 중 또래의 여자아이라고는 둘 뿐이었으니 히나와 베로니카는 상당히 친하게 지내기도 했었다. 그것을 생각한 키리에가 조금 안심한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다행이네. 그래도 너무 버릇없게 굴지 않도록 조심해."

고개를 끄덕여보인 히나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 그분도 좋고, 마법사님들도, 다 좋아. 자상한 왕자님도 좋고, 좋은 왕자님도 좋아. 무서운 왕자님은 조금 무섭지만, 그래도 괜찮았으니까. 여기에서도, 발,칸, 에서도, 잘 지낼 수 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렇게 말한 히나가 내려놓았던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며 행복한 표정을 했다.

세 명의 왕자 중에서 자상한 칼리안과 무서운 란델을 제외하는 간단한 뺄셈을 끝낸 키리에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는 보지 못한 채였다.

"······ 그랬구나, 히나."

히나의 손에서 '좋은'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히나식 표현에 따르면 '착하고 듬직한' 그냥 오빠 키리에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의 저 말을 조금만 일찍 들었어도 플란츠와의 대련 중에 그렇게 쉽게 칼을 거둘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분간 그 불한당 같은 놈과 직접 대련할 일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면서도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 맞다. 좋은 왕자님도, 딸기, 좋아하셔. 나도 좋아하는데.

애써 덤덤한 척 딸기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져가던 키리에의 손이 딱 멈췄다. 그리고 키리에는 아이스크림을 고스란히 다시 내려놨다.

키리에가 선호하는 과일 목록에서 딸기가 영원히 사라지는 순간은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 * *

"미야앙 애옹!"

체르밀 궁으로 돌아온 칼리안은 조용히 테라스로 나가 자리에 앉았다.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찾아와 무릎에 올라왔다. 그리고는 관심을 받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칼리안의 손에 제 머리를 부벼댔다.

칼리안이 녀석의 머리와 턱 밑을 간질이듯 쓰다듬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딸기 아이스크림 같은 분홍색 발바닥을 그대로 보여주며 칼리안의 손가락을 붙들려는 장난을 걸어 왔다.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녀석의 모습에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고양이가 이렇게 사람을 좋아했나."

칼리안이 아는 고양이는 늘 경계심이 많고 발톱을 세웠다. 무슨 일이 있든 그것이 누구든 제 곁을 온전히 내어주지 않는 도도한 사냥꾼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녀석은 달랐다.

늘 누군가의 곁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장난을 쳤다. 제 곁에 사람이 없으면 살지 못할 것처럼 굴었다.

- 똑똑.

두 번의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칼리안은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확인할 것도 없이 허락을 했다.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저 소리는 분명 얀의 것이니까.

곧 작게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테라스로 얀이 찾아왔다. 상쾌한 민트 향이 코 끝을 감돌았다.

테이블에 시원한 차 두 잔을 내려놓은 얀이 칼리안의 옆에 앉았다. 따로 허락을 구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칼리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얘기가 잘못 전달돼서 오늘 실수가 있었습니다."

얀은 굳이 히나를 입에 담지 않은 채 말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얀과 얀이 내려놓은 차를 한 번씩 쳐다봤다. 그리고 고양이의 장난을 봤을 때처럼 작게 웃었다.

평소보다 더 많은 민트 잎, 그리고 시나몬을 넣은 탄산수였다. 혹시라도 소화가 되지 않았을까봐 이렇게 준비를 해왔음이 분명하다.

"드시기 불편하셨죠. 딸기 싫어하셨던 것 제가 몰랐어서······.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언젠가 얀이 말린 딸기와 민트를 넣은 차를 건넸을 때가 생각났다. 그 때는 용케 넘어갔는데 이번에는 꺼려하는 것이 티가 난 모양이다.

'익숙하지 않았다는 게 맞을 테지만.'

옛 칼리안의 진짜 입맛은 오늘 식사 중에 알았다. 새로 접하게 된 기억의 끄트머리를 붙들고 떠올라서 알았다. 그 전까지는 칼리안도 그저 좋아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베른일 때는 그리 즐겨한 것이 아니었어서 그 많은 딸기 요리에 억지 웃음을 지었는데 얀이 그것을 알아 본 듯 했다.

"맛있게 잘 먹었어. 미안해 할 일 아니야.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대답을 하다가 사과를 건네는 얀의 태도가 조금 묘하다는 느낌을 받은 칼리안이 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작 입맛 하나 맞춰주지 못한 것을 사과하는 태도는 분명 시종이었다. 그런데 허락 없이 옆에 앉은 모습은 시종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얀은 시종인 얀과 오랜 시간 칼리안을 지켜봐 온 보호자 시로이안, 두 사람의 입장에서 모두 사과를 건네는 것일 터였다.

"그 말 하려고 왔어? 식사 시간이잖아."

칼리안이 얀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때문에 보통은 칼리안이 식사를 모두 마친 뒤 시종과 시녀들이 따로 모여 식사를 했다. 다른 날이었다면 지금쯤 얀도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인데 이렇게 칼리안을 찾아왔으니 하는 말이었다.

"그냥, 생각이 많아져서요. 아까 플란츠 왕자님이 무슨 말을 하셨는데······."

이렇게 운을 뗀 얀의 말이 한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칼리안은 조용히 앉아서 점점 검게 변해가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제가 왕자님에 대해 전부 다 아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에도 제가 똑바로 보지 않고 있는 걸까, 왕자님이 변한 것을 제대로 못 보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요."

나를 꽃 같다고 할 때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어.

라고 말하거나 고작 딸기 하나로 대체 어디까지 고민을 한 것이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말 없이 아직 끝나지 않은 얀의 말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왕자님께서 손에 든 것을 다 내려놓으셨다고도 하셨는데. 저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이해를 못했어요."

그 뒤에 이어졌던 원수같은 동생 놈 걱정해주던 형 다운 말이 생략된 까닭에, 칼리안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원수같은 형 놈이 어린애한테 대체 뭔 소리를 한 건가 싶어서였다. 그러다 플란츠가 더 어렸음을 깨닫고 얼른 다시 인상을 폈다.

아무튼 얀은 자신이 칼리안에 대해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으나 조금씩 어긋나는 것들이 눈에 보여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똑바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지는 몰랐으나 대충 그런 의미일 터였다. 그것을 눈치 챈 플란츠가 얀에게 무슨 말을 한 듯 했고.

대충의 상황을 파악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나는 내 고양이가 내 형님을 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

그리고는 이렇게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내 형님이 고양이를 좋아해서 얘가 그렇게 기를 쓰고 올라갔던게 아닐까. 아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어."

민트도 시나몬도 향이 강했다.

적당히 넣었으면 잘 어울렸겠지만 칼리안을 걱정하는 만큼 듬뿍듬뿍 넣은 탄산수 맛은 최악이었다.

딸기보다 더 맛없는 그것을 또 맛있게 삼킨 칼리안이 말했다.

"나는 내 고양이가 어떤 녀석인지도 몰랐는데 네가 나를 어떻게 다 알아. 모르는 게 당연하지."

비밀을 알게 돼서 슬퍼하면 얼마든지 같이 슬퍼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었다. 혹시라도 지금의 칼리안이 싫어졌다 해도 어떻게든 붙들어 옆에 둘 자신도 있었다.

"나에 대해 모르는 걸 또 알게 되든 내가 어떻게 변하든. 어차피 넌 계속 같이 있을거잖아."

이곳에서 처음으로 눈을 떴던 날.

손톱 자국 가득한 손으로 옷 주름을 펴주던 얀이다.

아무리 무시받는 왕자였어도 얀에게는 그 자체로 생의 전부였음을 칼리안이 안다. 그러니 칼리안의 한 발자국 뒤. 혹은 옆. 그 자리는 늘 얀의 자리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단 한 번도 얀에 대해 불안해하고 걱정한 적 없었다.

"손에 들린 것 다 내려놔도 상관없어. 중요한 것 아니야. 몰랐다고 자책하지 않아도 돼. 나에 대해 똑바로 안 봐도 돼. 보고 싶은 것만 봐도 돼. 내 새끼코끼리는 원래 그랬어. 괜찮아."

뚝뚝 하고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 비린내.

언젠가의 좋은 기억이 코 끝을 스쳤다.

비 비린내, 짙고 짙은 민트와 시나몬 향이 썩 잘 어울린다. 이전의 칼리안이 그것을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뭐 어떻겠는가.

이제부터 좋아하면 되지.

"얀. 나랑 내기 하나 할래? 내 키가 너보다 커질지 그렇지 않을지."

금화 한 개 걸고.

[외전] 안녕

당연하게 여겨온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될 때.

사람들은 보통 화를 내거나 울거나 웃거나.

혹은 도망친다.

그리고 소년은 도망친 사람이었다.

* * *

- 왜, 이걸, 배워야 해요?

이렇게 물어보았을 때 소년의 어머니는 차마 다시 떠올리지도 못할 얼굴로 웃었다. 그래서 소년은 두 번 다시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손 끝으로 말을 하는 법을 모두 배웠을 때.

소년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저택의 어딘가로 찾아가게 되었다. 손을 쥔 어머니의 손이 얼마나 더웠는지 얼마나 떨리고 있었는지 소년은 오랫동안 그것을 잊지 못했다.

저택 2층의 가장 오른쪽 끝 방.

아무도 그 곳에 가지 말라 한 적 없지만 괜한 무서움에 한 번도 가까이 가 보지 못했던 방. 나무가 녹이 슬면 이런 소리를 내지 않을까 싶은 무거운 음색과 함께 늘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소년은 어머니와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을 애써 움직여 웃어보이는 이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소년은 저도 모르게 어머니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바로 그날 아침까지 열심히 연습한 말을 만들어냈다.

- 안, 녕.

서툰 손짓으로 소년의 형을 향한 첫 인사를 건넸다.

- 나는, 시,로,이,안, 입니다. 반가워, 반갑, 습니다.

바보같은 말이었으나 소년의 형은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침대에 앉은 채 기꺼워하는 얼굴로 자신의 양 팔을 펼쳐 보였다.

그것은 굳이 손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소년은 조심스럽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괜찮은지'를 묻는 말이었고 어머니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활짝 웃으며 쪼르르 달려가 침대 위로 올라갔고 자신과 똑같은 블론즈 색 머리와 청회색 눈을 가진 그리고 자신과 아주 많이 닮았지만 조금 더 큰 소년을 꼭 안아주었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낯설고 앙상하고 차가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형아, 안녕."

들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꼭 불러보고 싶었어서.

소년은 형을 만난 첫 자리에서 그렇게 말해보고 싶던 짧은 말을 입에 담았다.

형아 안녕.

내가 시로이안이야.

* * *

그 방의 공기는 언제나 농도가 짙은 느낌이었다.

숨을 들이키고 내뱉는 것을 의식해야 할 만큼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서 항상 웃어주던 형이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소년의 형은 아팠고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년의 여동생은 그 방에 자주 가지 못했다. 혹시라도 소년의 형이 앓는 병이 어린 동생에게도 옮겨갈까봐서였다. 그래서 여동생이 소년만큼 크면 그때부터 같이 가기로 했었다.

- 오늘, 매미가, 울었어.

- 매미?

- 응, 매미. 매미가 우는 건, 신기해. 어느 날 갑자기, 매앰, 매앰, 해. 언제부터 우는지, 아무도 몰라. 그냥 갑자기, 매앰, 매앰. 이렇게 울어.

소년의 형은 저택 밖을 나가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걷는 것을 못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밖에 나가면 더 아팠다. 기침을 하고 열이 났다. 그래서 소년은 형을 대신해 열심히 매일매일 밖에 나갔다.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보려고 매일매일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리고 매일매일 2층의 가장 오른쪽 끝 방을 찾아가 이야기를 해주었다.

- 여름이 되면, 이만한, 까맣고 못생긴 게, 어느 날 갑자기부터, 엄청 시끄럽게 울어. 매앰, 매앰, 하고.

- 까맣고 못생겼어?

- 응. 날개가 달렸고, 까매. 배에서, 소리를 내.

- 그게 뭐야. 괴물 같아.

- 아니야. 못생겼지만, 괴물 같지는 않아.

매앰 매앰 하고 우는 까맣고 못생긴 날개 달린 것. 게다가 배에서 소리를 내는 것이라 하면 누구라도 괴물 같다고 생각할 텐데. 그 생각을 못했다.

그러니 내일은 매미를 잡아와 볼까 하고. 소년은 그런 생각을 했다.

- 보고 싶으면, 내가, 내일 잡아올게.

매미를 보면 형이 놀랄까?

재밌어 할까?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형에게 도움이 될까.

아니면······.

- 보고 싶지 않아. 괴물처럼, 생겼을 것 같아. 그냥, 바이올린 들려줘.

소년의 형이 이렇게 말했다.

소년은 매미는 괴물이 아닌데 하고 말하는 대신 그냥 알겠다고만 했다. 그리고는 형이 듣지도 못하는 바이올린을 열심히 연주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굳이 보아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소년의 형은 보고 듣고 싶은 것조차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 * *

소년은 그렇게 매일매일 형을 찾아갔다.

그리고 매일매일 소년의 형은 조금씩 무너져갔다.

조금씩 닳아가는 바이올린 현처럼, 한 줄씩 끊어져가는 바이올린 활처럼, 조금씩. 하지만 착실하게 무너져갔다.

소년은 그것을 몰랐다.

소년의 형은 건강하지 못한 자신과 건강한 동생을 비교하는 마음을 미워했다. 그것이 다시 병이 되었다. 그 사실을 소년은 너무 늦게 알았다.

때로는 부러움 만큼 키워진 상실감이 병이 되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이미 늦은 뒤에야 그것을 알았다.

바보같이.

* * *

'병세가 날로 심해집니다. 마나실 경의 아드님이 약을 잘 다룬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는 다시 한 번 마나실 경에게······.'

'다른 일이 있다 하는데 내가 붙들 수는 없지.'

처음엔 그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주님······.'

'내 아들이 아프다 하여 길을 막을 수가 있겠나.'

병세가 심해지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약을 다룬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지금 소년의 아버지가 무엇을 포기하겠다 말하는 것인지. 소년은 모두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또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 형.

소년은 언제나와 같이 2층의 맨 오른쪽 방을 찾아갔다.

- 형. 레,아, 를 데려왔는데······.

소년의 여동생도 이제 곧잘 수어를 했다. 형에게 다른 병이 옮지는 않으리라고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허락을 받아 함께 온 자리였다.

처음으로 셋이 모이는 자리였다.

그래서 동생은 머리에 예쁜 꽃도 달았다. 잘 입지도 않던 치렁치렁한 치마도 입었다.

- 나가.

소년의 형은 이렇게 말했다.

너무 예쁘게 꾸민 동생에게 미안해서 소년은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 형. 많이 피곤해? 잠깐 레아만.

소년의 형은 처음 보는 얼굴을 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얼굴을 했다. 무서운 얼굴을 했다.

- 내가, 피곤한 것처럼 보여?

소년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어린 동생의 손을 꼭 잡은 채 형이 하는 말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 똑바로 봐. 피하지 말고 제대로 봐, 나를.

소년은 동생의 눈을 가렸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 죽어가고 있다는 걸, 외면하지 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제 눈을 못 감고 동생의 눈을 가렸다.

- 그래. 그렇게 보고, 이제는, 제대로 알아야지. 너도.

그래서 형의 말을 고스란히 다 보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저 울기만 했다.

- 왜 그래. 내가 죽으면 넌, 좋은 것 아냐?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했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 * *

그리고 어느 날 소년은 악몽을 꿨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 속을 혼자 헤매는 꿈을 꿨다.

사방에서 바이올린 소리와 매미 소리가 윙윙 울렸다. 앞으로 가야 할 지 뒤로 가야 할 지도 모르는 그런 곳에서, 온통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해서 길을 잃고 마는 그런 꿈을 꿨다.

"공자님, 공자님!"

그 꿈 때문에 한참이 지난 뒤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기사 유란이었다.

소년이 눈을 뜬 것을 확인한 유란은 다른 말 없이 소년을 붙들어 안았다. 그리고 작은 담요로 소년의 몸을 감싸고 그대로 방 밖으로 달려나갔다.

"왜 그래?"

소년은 이렇게 물었고 유란은 잠깐 뒤에 대답했다.

"불이 조금 났습니다.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왜 밖으로 나가?"

유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담요로 소년의 머리를 감싸고 그 위를 제 팔로 끌어안았다. 한 팔로 소년을 안고 한 팔로 소년의 양쪽 귀를 막으려고.

소년이 숨차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유란은 그것을 풀어주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그리하여 제 삶의 흔적을 지우려 방에 불을 낸. 말 못하는 형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 그 끔찍할 만큼 아픈 소리를 소년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것을 소년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바보같이.

* * *

그 누구도 소리내지 않는 며칠이 다시 지났다.

그리고.

"얀."

놀라지 말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그렇게 이어진 아버지의 말.

그것은 눈을 뜨면 어느새 들리는 매미 소리 같았다.

"네 형이. 어제."

준비도 없이 들려와서는 제멋대로 여름이 되었다 외치는 매미 소리 같았다.

* * *

매미가 울었다.

여름의 마지막을 보내기 싫은 것처럼 매앰 매앰, 하고.

소년도 울었다.

전부 다 타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2층의 오른쪽 끝 방에서 이제는 주인마저 사라진 그 방에서 매일매일 엉엉 울었다. 해주지 못한 말을 매일같이 혼자 꺼내놓으며 그렇게 매일매일 울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되고.

그렇게 봄이 왔다 가고.

또 다시 매앰 매앰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결국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을 데리고 억지로 집 밖을 나섰다. 나가기 싫다며 자지러지는 소년을 품에 안고 성 밖으로 공작령 밖으로 억지로 그렇게 나섰다.

별을 보여주고 하늘을 보여주고 강을 보여줬다.

소년의 형이 보지 못해서 자신도 보지 않겠다는 고집쟁이의 눈에 억지로 이것 저것 다 담아줬다.

그렇게 얼마 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2층의 오른쪽 끝 방에 갔던 그 날처럼.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거대하고 아름답지만 삭막하기 짝이 없는 어딘가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삭막한 곳에서, 누구보다 화려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를 보았다.

그래.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은.

"저 아이, 누구예요."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1년 만이었다.

소년은 1년 만에 스스로 무언가를 보고 물어왔다.

"이 나라의 셋째 왕자님이시란다."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의 질문에 감격하는 대신 얼른 이렇게 대답을 했다.

소년은 그 말을 듣지도 않았다.

홀린 듯 아이에게로 걸어갔다.

"······ 안녕."

그리고 이렇게.

인사를 건넸다.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 (1)

- 똑똑.

사실 노크를 할 때마다 작은 고민을 한다.

만약 안에 있던 이가 '누구냐'라고 물어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안에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런 고민은 하지 않았다.

물론 아무도 없다면 왜 노크를 하느냐 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비어 있는 곳이라 해도 왕자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 히나의 정론이었다.

생각한대로 노크에 화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때문에 히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뒤 불을 켰다.

- 탁!

그리고 재빨리 다시 밖으로 나왔다. 굉장히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 채였다. 주변을 휙휙 둘러본 히나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소리 없이 외쳤다.

'아닌데? 맞는데?'

시녀로서의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칼리안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시트를 확인하고 방을 청소해놓기 위해 들어간 참이었다.

어차피 칼리안은 자리에 없을 것이라 했으니 조금 여유있게 청소를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 이후로는 자신의 손으로 청소를 해 줄 일도 없을 것이라서 더 꼼꼼하게 보아 줄 마음도 먹었다.

그런데.

'왜 저 분이 여기 있지?'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은 히나가 소리를 지르지 못했기 때문이지 이 상황에 놀라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히나는 정말 많이 놀랐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방이 검은색 일색임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경황없이 되돌아 나올 만큼 놀랐다.

눈이 화등잔만큼 커진 히나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봤다. 3층과 4층을 하도 많이 오갔으니 층 수를 헷갈린 것인지를 거듭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3층 맞아."

히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소리 없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방 안에서 들려 온 탓이다.

곧 히나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짙은 색의 커튼과 카펫, 소파. 멀리 침실 안 쪽으로 보이는 검은 시트, 검은 가구. 주인의 평소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검은 색 일색의 내부가 이 곳이 칼리안의 방이 맞다는 것을 다시 알려줬다.

그런데 하얀 고양이와 검은 소파 사이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연두색 왕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히나가 들어오는 소리에 칼리안의 방에 또 멋대로 들어와 멋대로 생각에 잠겨 있던 플란츠가 눈을 뜨고 히나를 쳐다봤다. 그래야 히나가 하는 말을 볼 수 있으니까.

플란츠의 시선이 닿은 히나가 얼른 말을 꺼냈다.

- 제가, 실수를 했어요. 정말······.

칼리안의 방에 플란츠가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예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나갔었으니 그에 대한 사과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됐어."

플란츠는 이렇게 히나의 말을 잘랐다. 어차피 남의 방에 들어와 있던 것은 플란츠였다. 그러니 사과를 받을 이유도 없었다.

왜 자신이 이 곳에 왔는지 설명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플란츠를 향해 히나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저는, 청소를 하려고, 왔어요. 자상한 왕자님께서는, 지금 안 계세요. 숲에, 가셨어요.

히나의 말 중 몇 마디 말을 알아듣지 못한 플란츠가 잠시 대답 없이 히나를 쳐다봤다. 이해하지 못한 말이 있을 때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는 히나가 수첩을 꺼내 '숲'이라는 글자를 써서 보여줬다.

칼리안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 갔음을 안 플란츠의 눈꼬리가 살짝 찌푸려졌다. 다만 그 곳에 왜 갔는지를 물어볼 성격도 되지 못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곧 플란츠의 무릎에 있던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애옹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보던 플란츠가 고양이 턱을 몇 번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데려와도 돼. 빌헬름에. 없잖아. 봐 줄 사람."

고양이.

카이리스에서 정신 나간 놈들만 잘 모아서 뭉쳐놓은 듯한 곳이지만 그래도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내지 못할 만큼 엉망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 하는 입모양을 만든 히나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 감사합니다, 좋은, 왕자님.

또 좋은 왕자란다.

칼리안을 언급할 때에도 알아보지 못할 수어가 하나 붙어있었다. 때문에 히나가 이름을 말하기 어려우니 나름대로 구분해 부르는 호칭인 듯 하다는 것까지는 플란츠도 눈치를 챘다.

다만 자신에게 붙는 저 호칭이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플란츠는 조용히 히나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 잘 먹었어. 딸기."

너무 많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식단의 석찬을 마친 뒤 벌써 닷새가 지났다. 그 후로 히나는 빌헬름 관에 갈 이런저런 준비를 하느라 플란츠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 역시 이제야 저 말을 꺼냈다.

아마도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해보는 것이 아닐까 싶은 '고맙다'는 의미의 말 말이다.

플란츠의 말에 다시 한 번 놀란 얼굴을 해 보였던 히나가 소리 없는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에는, 아이스크림만, 가져다 드릴게요.

여기 사람들은 다 이상하다.

실수를 해도 괜찮다 하고. 다 이해해주고.

"그래."

고맙다고 말해주는 정말 좋은 왕자님도 있고.

* * *

달빛을 가득 머금은 바람이 싱그럽다.

카이리스 왕궁의 후문과 이어진 왕실 숲에서는 녹빛 짙은 풀내음이 났다. 개울이라 하기엔 크고 계곡이라 하기엔 어울리지 않을 물줄기에서 시원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르피아 궁의 후원에도 분명 그럴싸한 인공 개울이 있지만 아무렴 진짜만 할까.

언제나 고요한 세뉴강을 향해 흐르는 물 소리를 들으며 칼리안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숲이 이렇게 클 줄도 몰랐고 이렇게 좋을 줄도 몰랐다. 베른은 물론 옛 칼리안도 몰랐다는 소리다.

카이리스 왕궁의 크기만큼 숲은 정말이지 상상 이상으로 컸다. 칼리안은 분명히 이 곳이 그리 크지 않은 숲이라 들었다. 그런데 직접 와 보니 시스파니안이 아닌 이상 이 숲을 작다 느낄 이는 없을 정도의 크기다. 도대체가 넓이에 대한 카이리스 사람들의 배포가 얼마나 크면 이 숲을 보고 그런 평가를 한 것인지.

"전하께서도 여기에 오셨던 적이 없나봐."

사냥대회를 위해 찾는 숲은 따로 있었다.

숲은 왕실과 마찬가지로 시스파니안의 손길이 닿은 곳이었기 때문에 짐승이 없었다. 그랬으니 책상 앞에만 앉아있다 가끔 사냥대회나 개최하는 르메인이 이 곳에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신 적이 있었으면 나더러 여기 오라고는 못하셨을 것 같은데."

만약 르메인이 이 숲에 왔었다면, 그래서 이 곳이 돌아다니다 길을 잃기 딱 좋을 곳임을 알았다면 칼리안이 이 곳에 와도 된다는 허락은 절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무튼 난 너만 믿어."

어둑한 주변을 둘러보다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 칼리안이 레이븐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렸다. 오랜만의 산책, 그것도 초록색 가득한 숲으로의 밤 산책에 신이 난 레이븐이 푸릉 하는 소리를 내며 대답 비슷한 것을 했다.

레이븐이 있는 한 이 곳이 얼마나 어두워지든 혹은 얼마나 깊은 곳으로 들어가든 걱정할 것이 없었다. 지금 당장 레이븐의 등에 기대 잠이 든다 해도 알아서 체르밀에 돌아가 줄 레이븐이 아닌가.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진작 와 볼 걸."

적막함이 감도니 혼잣말이 늘어난다.

그 역시 칼리안의 버릇이었다.

- 다각, 다각.

단단히 마른 흙길을 밟는 레이븐의 작은 발 소리가 물 소리와 참 잘 어울린다.

곧 레이븐은 달빛을 고스란히 받는 너른 땅 앞에 멈춰섰다. 칼리안이 원하던 장소를 귀신같이 찾아낸 것이다.

레이븐의 위에 앉은 채 바람을 즐기던 칼리안이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잠시 선 채 하늘을 쳐다봤다.

"보여, 레이븐?"

마치 칼리안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레이븐이 살짝 고개를 치켜 들었다. 정말로 하늘을 보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칼리안이 웃었다.

"별이 다 파란색이야. 너도 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렇게 혼잣말일지 레이븐에게 건네는 말일지 모를 이야기를 했다.

봄과 여름의 사이에 든 하늘에는 유난히 푸른 별이 많다. 별의 색은 곧 그 별의 나이라는 말을 언젠가 들었었는데 그것과 연관짓기 어려울 만큼 이 시기의 하늘에는 푸른 별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세크리티아에만 찾아오는 '세렌티의 시간'을 지상이 아닌 하늘에 불러낸 것처럼.

마치 파란 반딧불이가 온 세상에 내려앉은 것 같은 모습이 되는 시간. 베른이 태어났던 시간이기도 한 그 특별한 순간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려보던 칼리안의 입에 쓴웃음이 그려졌다.

이 왕궁에서 그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 사람은 아마 칼리안 자신 뿐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 와 그것을 떠올려 보아야 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멀리 가 있어. 부를 때까지 오지 말고. 위험하니까."

곧 칼리안이 레이븐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플란츠로부터 뺏어오게 된 이런저런 것들 중 가장 귀하다 할 수 있을 레이븐이 다시 한번 푸르륵 소리를 내곤 이제껏 온 길로 돌아갔다. 칼리안이 부를 때 까지는 알아서 먼 곳으로 가 있을 터였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칼리안이 작은 바위 위에 곱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것이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칼리안은 근 며칠동안 서류를 들고 씨름을 했다.

체이스가 남겨놓고 간 '란델이 텐실의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의 귀족세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상세히 적어 둔 서류였다. 그것을 모조리 기억해낸 것도 모자라 그 정도의 분량을 직접 적어서 건네 준 것도 참으로 감사할 일이었다.

손가락 두 마디는 될 두께의 종이 뭉치를 이해하고 통째로 외웠다. 그리고 내용을 모두 외웠다는 것을 확인한 즉시 그것을 불에 태워 없앴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정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칼리안의 금고에 잘 보관해두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이 아닌가.

'오늘 출발합니다, 왕자님.'

그렇게 며칠을 보냈을 때 아르센이 왕궁을 나섰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을 만나 그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때마침 구축중인 이동 마법진의 일로 마법사 협회장 에우리아가 그 곳에 갈 일이 있다 하여 아르센과 함께 보냈다. 인근까지만 동행을 한다 하더라도 아르센 혼자 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아무튼 그렇게 아르센을 보냈으니 칼리안도 준비라는 것을 해야 할 때였다. 그러려면 일단 근처에 사람이나 건물이 없어야 했다. 누군가 혹은 무엇이 있으면 분명 부서질 테니까.

그래서 이렇게 부서질 것 없는 숲을 찾아 온 참이었다.

그 후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 저벅, 저벅.

오도카니 앉아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칼리안을 향해 다가오는 그리 크지 않은 발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이 자리에 있어도 절대 부서지지 않을 한 사람이 칼리안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칼리안이 반가운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스승님."

앨런이었다.

칼리안은 어여쁜 제자의 '준비'를 돕기 위해 흔쾌히 이 곳까지 걸음한 앨런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투명한 오러의 검을 만들어냈다.

- 쉬이익!

예리한 파공음이 공기를 가른다.

칼리안이 앨런을 향해 마력과 오러를 가득 담은 검격을 날린 것이다.

주저하지 않는 어마어마한 속도의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은 앨런의 손 끝에서는 붉은 빛의 장막이 펼쳐졌다.

그와 함께 칼리안의 신형이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듯 사라지고,

- 콰아앙!

폭발음에 가까운 굉음이 고요한 숲을 뒤흔들었다.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 (2)

그날 낮.

'오늘 일과 끝나시면 잠깐 시간 좀 내주세요, 스승님.'

집무실을 직접 찾아온 칼리안의 이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앨런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필요하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따라 나서지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르메인이 넘긴 일 따위 칼리안에 비하면 중요할쏘냐. 늘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는 앨런이 아니던가.

그런데 칼리안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오러를 뒤집으려면 아침보다는 밤이 나아서요.'

그러더니 이렇게 앨런으로서는 알쏭달쏭하기만 한 말을 했다.

뭐 어쨌든 어여쁜 제자가 그렇다는 데 그런 것이겠지. 밤이 낫다 하면 낮을 밤으로 바꾸어서라도 밤에 만나야지, 암.

다행히 칼리안은 앨런에게 낮을 밤으로 바꾸는 일까지 부탁하지는 않았다. 얌전히 조금만 기다렸다가 숲 속의 적당한 장소를 자신이 먼저 보아 둘 테니 찾아와 달라고만 했다. 때문에 앨런은 흔쾌히 알겠다 답했다.

그렇게 밤이 되고 보름달이 떴다.

앨런은 조금 남은 일거리를 아르센에게 넘길까 하다가 녀석이 지금 칼리안이 시킨 일을 하러 궁을 떠난 것을 기억해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맞은편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남은 서류를 집무실 주인의 책상 위에 곱게 올려놨다. 그리고는 책상 앞에 앉은 사람에게 '늙은이 힘들어서 오늘은 먼저 갑니다' 하고 자신있게 말한 뒤 멋지게 돌아나왔다. 그 뒤에는 후다닥 숲으로 왔다.

- 다각, 다각.

때마침 숲과 왕궁의 경계선 너머에서 검은 말 한 마리가 걸어나왔다. 오른쪽 앞 발목만 하얀 가끔 고약하지만 그만큼 똑똑한 칼리안의 말이었다.

"네 주인은 숲 속에 있느냐?"

앨런이 이렇게 묻자 도도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 슬며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푸르릉 소리를 내고는 돌아섰다. 그것이 마치 칼리안을 찾는 중이라면 알아서 찾아가라는 것처럼 여겨진 앨런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고놈 성깔 참 제 주인이랑 잘 어울린다 싶어서였다.

아무튼 칼리안이 숲에 이미 도착한 것을 알았으니 숲 속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어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것이 없었다. 시스파니안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 해도 마법은 쓸 수 있었으니까.

숲에 들어서고 오래지 않아 칼리안을 찾은 앨런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니 주변은 온통 달빛에 젖은 녹빛이다. 빨간 눈의 고양이같은 제자는 새하얀 달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앉아 있었다.

"스승님."

마주 쳐다보면 낯이 닳을까 같이 걸으면 발이 부르틀까 그저 부둥부둥 업고만 다녀도 모자랄 그 어여쁜 제자가 반가운 얼굴로 앨런을 불렀다.

- 쉬이익!

그러더니 곱디 고운 그 손으로 서슬퍼런 칼을 날렸다.

찰나의 순간, 앨런이 허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칼리안은 분명 잠시 시간을 내어 달라 했지 잠시 목숨을 내어 달라고는 안했으니까.

뭐 아무렴 어떠한가.

그러니 저러니 해도 어여쁘기만 한 것을.

때문에 앨런은 자신의 목젖을 향해 치닫는 그 야무진 칼날을 흐뭇한 마음으로 쳐다봤다. 기꺼운 미소가 그려지고, 칼을 막기 위한 붉은 장막과 소리를 막기 위한 대규모 사일런트가 동시에 펼쳐졌다.

- 콰아앙!

그리고 이렇게 거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아침부터 계속 앨런이 바빴다.

아르센은 그날부터 자리를 비웠다.

플란츠는 기사들을 만나느라 빌헬름관에 없었다.

발칸의 마법사들은 신이 났다.

딱 두 시간 동안 신이 났다.

아르센이 해야 할 일이 마법사들에게 내려온 까닭에 애석하게도 그 이상 신이 나 있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날 아침 마법사들은 오늘로 끝나게 된 헤이시아 궁의 잔해 처리 마무리 작업과 아르센이 남겨놓고 간 서류 처리 업무를 어떻게 나눌지 깊이 고민했다. 딱 두 시간 동안 고민했다.

"난 잔해 처리."

"나도 잔해 처리."

"나도."

"그래 나도."

그렇게 쉰 명이 전부 다 잔해 처리에 지원했고 점심 시간이 됐다. 그래서 놈들은 일단 점심을 먹고 제비 뽑기를 통해 인원을 반반 나눴다. 그것 역시 딱 두 시간이 걸렸다.

무의미한 여섯 시간을 날려버린 50인의 또라이들이 부랴부랴 일을 하기 시작했다. 훈련은 하지도 못하고 야근만 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잔해 처리와 서류 처리에 다시 네 시간이 흘렀고, 결국.

저녁 시간이 됐다.

아, 물론 마법사들은 똑똑하다.

단지 돌았을 뿐이다.

아무튼 똑똑해서 돈 것인지 돌아서 똑똑한 것인지 모를 발칸의 마법사들은 부랴부랴 저녁을 챙겨 먹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일을 끝냈다.

문제는 그 뒤에 생겼다.

"이게······ 뭐지?"

분홍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마법사 니들렌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겉으로 드러난 모든 잔해가 싹 치워진 헤이시아 궁 터의 한 가운데 선 채였다.

그다지 한 일은 없지만 늦은 시간까지 고생한 덕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탄산수를 홀짝이던 마법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한결같이 미간을 찌푸렸다.

"헤이시아 궁에 지하는 없었지 않나?"

"없었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것 같은 진지한 얼굴이 된 채로 마법사들이 바닥의 한 지점을 쳐다봤다. 섣불리 다가서거나 손대려 하지 않은 채였다.

"군단장님 모셔오겠네."

낯선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가장 잘 아는 것이 바로 마법사가 아닌가.

때문에 그들 중 한 명이 아르피아 궁으로 갔고 나머지 마법사들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같은 곳을 계속 주시했다.

흙더미 속.

마법사들의 시선이 모여든 곳에서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 * *

- 대부분의 기사들은 오러를 깨치기 전에 마나부터 쌓는다. 어차피 그렇게 해 봐야 검의 길에 오르는 건 극소수 중에서도 극소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들 그렇게 하지. 너도 그랬을 테고.

칼리안이 앨런을 불렀던 것은 과거의 스승이었던 기사 테일란의 말 때문이었다.

- 마법사들은 쌓아 둔 마나 그 자체를 쓰니 상관 없지만 기사는 다르다. 잘못 쌓인 마나는 아무리 많아도 오러로 발현되지 않지. 다만 오러를 깨치기 전에 쌓아 둔 마나가 많아 봐야 얼마나 많겠나. 마나를 그렇게 많이 쌓아 둘 정도면 기사 말고 마법사를 하는 게 나으니까. 그러니 차이가 미미해서 다들 무시하고 넘길 뿐이지.

그 때에는 베른도 그 말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테일란도 그저 참고하라 말해줬을 뿐 무언가를 바꾸길 원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미미했으니까.

그랬던 칼리안이 테일란의 말을 상기하게 된 것은 늑대들의 습격을 받았던 날의 일 때문이었다.

분명 그날 칼리안은 뽑아낼 수 있을 만큼의 오러를 모두 뽑아내어 검을 운용하고 있었다. 그러다 검술만으로는 놈을 상대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고 윈드 스피어를 사용했다.

발현된 마법은 그대로 놈의 몸을 관통했다.

놈은 그 붉은 빛의 오러를 사용하는 이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칼리안의 마법이 놈의 몸을 한 방에 꿰뚫었다. 마치 아르센의 공격처럼 말이다.

'마법이 너무 강했어.'

그 후 남은 네 명을 상대할 때에도 마법이 발현됐다.

그 때의 일을 떠올리니 테일란의 말이 생각났다. 그 날 그렇게 마법이 강했던 이유도 짐작하게 되었다. 바로, 오러로 바뀌지 않았던 잔여 마나였다.

그래서 앨런을 불렀다.

'오러를 뒤집는' 일을 하려고.

베른에게 있어서는 치환되지 않은 마나가 지나치게 미미했을지 모르지만 칼리안은 아니었으니까. 시스파니안의 축복을 받은 옛 칼리안의 마나는 결코 미미하지 않았으니까.

- 콰아아앙!

뻗어나간 검 끝이 붉은 막에 걸렸다.

여섯 번의 공격이 가해졌으나 애석하게도 앨런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처음 만들어 낸 붉은 장막을 새로 펼치지도 않았다.

- 우웅!

칼리안의 검에 푸른 빛이 어렸다.

오러의 힘을 얻은 칼리안의 검이 찬 빛을 뚝뚝 흘렸다.

칼리안은 조금의 주저함 없이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앨런의 앞에 놓인 붉은 장막을 향해서였다.

- 서걱!

오러의 힘을 싣고 나서야 붉은 장막이 잘려나가듯 길게 갈라지더니 흩어졌다. 그와 함께 앨런의 모습도 사라지며 저만치 먼 곳에 다시 나타났다.

앨런은 검을 다루는 이가 아니었으므로 그 눈이 칼리안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굳이 그런 것을 눈으로 보아야 할 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장막이 사라짐을 직감한 즉시 몸을 옮긴 것이었다.

칼리안의 모습이 다시 한 번 사라졌다.

그리고 득달같은 공격이 이어졌다.

- 쌔애액! 카강! 카아앙!

어느새 다시 생성된 붉은 막이 크게 흔들리다 사라졌다.

몸을 감싸던 장막을 잃은 앨런의 모습이 먼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몸을 보호하는 대신 거대한 창을 만들어 쏘아보냈다.

- 쉬이익!

이글거리는 불의 창이 칼리안의 심장을 노리고 짓쳐들어왔다.

드디어 공격을 해 오는 스승의 모습에 씩 웃은 칼리안이 검을 넓게 휘둘렀다.

- 카앙!

아르센의 창이었다면 부서졌거나 튕겨 나갔을 것이다. 그것은 얼음이니까.

앨런의 불은 달랐다.

투명한 검에 맞부딪힌 불꽃의 창이 마치 먹잇감의 몸을 휘감는 거대한 뱀과 같이 칼리안의 검날에 얽혀들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길이를 늘려가듯 몸집을 부풀리며 칼리안의 팔을 집어삼키려 했다.

살아있는 불.

앨런의 불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보게 된 칼리안의 미소가 짙게 변했다.

- 우우웅!

그와 함께 손에 들린 검이 깊은 울음소리를 내며 조각조각 흩어졌다 다시 뭉쳤다. 일순간 숙주를 잃은 불이 투둑투둑 함께 끊어져 공기 중으로 사라져갔다.

칼리안의 검에 푸른 빛의 회오리가 감겨들었다. 불을 상대하는데 있어 가장 좋은 것은 얼음이니, 들고 있던 검에 얼음의 속성을 담은 것이다. 청명한 물빛으로 빛나는 그 검을 든 채 칼리안이 다시 한 번 모습을 숨겼다.

앨런의 팔이 조용히 움직였다.

칼 좀 다루는 마법사 제자가 과연 어디까지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즐거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 따악!

손가락 끝에서 경쾌한 소리가 울린다.

- 화아악!

칼리안의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붉은 빛을 넘어 새하얗게 타오르는 그 불길이 금방이라도 칼리안을 태워 없앨 것처럼 모든 것을 제 아가리 속에 넣고 삼켜낼 것처럼 위협을 해 왔다.

칼리안의 손에 들린 검이 넓은 방패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전신을 감싸안을 만큼 넓어진 방패에 어린 푸른 빛이 마치 지금의 하늘을 모아 담은 것처럼 반짝였다.

- 쉬이익!

지면을 뚫고 솟아오른 물줄기 같은 여러 갈래의 불이 그런 칼리안의 온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온기도 한기도 느끼지 않게 된 몸 속에 저릿한 열기가 든다.

불길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쏟아지듯 이어지는 불길 속으로 뛰어든 칼리안이 몸에 불이 붙을 여유를 두지 않을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칼리안의 모습이 다시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가히 찰나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시간이 흐른 뒤 칼리안의 신형이 앨런의 바로 뒤에서 나타났다.

- 카가강! 콰앙!

칼리안은 손속에 여유를 두지 않았다. 있는대로 오러를 뽑아내며 앨런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붉은 빛이 일렁임과 동시에 다시 한번 앨런의 보호막이 사라졌다.

칼리안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속에 감춰진 앨런의 등을 그 안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 쌔애액!

여지 없이 앨런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로 불의 창이 다시 날아왔다. 칼리안은 재빨리 몸을 비틀어 그것을 피하며 한번 더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 카아앙! 캉!

마법사와 기사의 공방이다.

아니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의 공방이다.

칼리안이 밟고 지나간 자리는 모조리 타올랐다. 앨런이 사라진 자리는 모두 잘려나갔다. 오로지 두 사람만 조금도 상하지 않은 모습으로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 카가강!

앨런은 끊임 없이 자리를 바꿔가며 공격했고 칼리안은 그것들을 쳐내거나 피해내며 앨런의 뒤를 쫓았다. 언제 어디로 사라질지 모를 앨런의 흔적을 따르는 칼리안의 공격에 머뭇거림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공격이 날아오면 쳐내거나 막아내고 뒤이어 검을 내뻗고 휘둘렀다.

칼리안의 입에 긴 호선이 그려졌다.

앨런이 강하리라는 것은 당연히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일 줄은 몰랐다.

- 카아앙!

다시 한 번 칼리안의 검이 붉은 막을 가격했다. 푸른 빛과 붉은 빛이 서로 얽히다 붉은 막이 파스스 흩어졌다.

이 쯤 되면 또 다른 곳으로 피하던 앨런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붉은 막도 만들지 않은 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발현된 말 머리통만한 화염구가 칼리안의 복부로 날아들었다.

칼리안은 위험을 느낌과 동시에 검을 방패로 바꾸었다. 몸을 보호하던 오러를 모조리 방패의 곁에 둘렀다. 그 위에 얼음의 막을 덧씌웠다. 그것으로 부족하여 실드까지 발현했다.

- 콰아아앙!

순식간에 주변의 산소를 빨아들인 화염구는 다급히 대처하는 칼리안을 비웃듯 곧바로 새하얀 폭발을 일으켰다. 푸른 솔새가 내던진 마력탄이나 아르센의 화염구와는 비교조차 불가하다. 흰 빛의 화염구는 그 위력부터 달랐다.

- 콰직! 카가강!

불에 닿음과 동시에 실드가 조각나 깨어지고 얼음은 사라졌다.

오러의 푸른빛이 출렁일 정도의 거대한 폭발력에 칼리안의 몸이 저만치 먼 곳으로 나가 떨어졌다. 오러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어디 한 군데는 사라졌을 만큼의 위력이다.

저도 모르게 큭 하는 소리를 내뱉은 칼리안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쉼 없이 검을 생성했다.

- 우우웅!

조금 전보다 확연히 옅어진 푸른 빛이 검을 감쌌다. 칼리안은 지치지도 않고 다시 앨런에게 달려들었다. 앨런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칼리안의 눈 앞으로 새하얀 화염의 창이 뻗어나왔다. 머리보다 빠르게 반응한 팔의 움직임이 그것을 떨쳐냈다.

- 콰지직!

갈라져나간 창 끝이 바닥에 박히며 대지가 붉게 타올랐다. 그런 모습에는 시선조차 두지 않은 칼리안이 또 한 번 앨런에게 달려들려 할 때.

- 파삭!

단단한 것이 완전히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 들린 검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다시 한 번 오러를 운용하려 하였으나 텅 빈 단전에서 올라오는 힘이 없었다. 사용할 수 있을 오러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드디어.'

단전이 텅 빈 것을 느낀 칼리안이 제 자리에 멈춰섰다.

몰려오는 탈력감에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고 싶은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선 채로 칼리안이 긴 숨을 내뱉었다.

붉은 눈이 서서히 감겨든다.

- 두근!

오러를 남김없이 비워낼 때.

단 한 줌의 오러도 남아있지 않을 때.

그리하여 그저 마법으로만 발현되었던 옛 칼리안의 마나까지도 모두 오러로 변환할 수 있을 때.

그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 두근!

칼리안의 심장이 요동쳤다.

소비되는 기존의 오러가 자연스럽게 다시 쌓이는 시간조차 주지 않을 만큼의 맹공을 퍼부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칼리안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시스파니안의 축복을 받아 쌓아올렸던 옛 칼리안의 마나 세 개의 서클을 이루고 있던 그 방대한 마나가 심장에서 흘러나와 칼리안의 단전으로 향했다.

칼리안은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흘러들어오는 마나를 오러로 바꾸기 시작했다. 심장에서 뻗어나오는 순수하기 짝이 없는 마나를 쉼 없이 운용해나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그 힘이 칼리안의 단전을 가득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 두근!

칼리안의 주변으로 냉막한 기운이 몰려든다.

화염의 힘에 달아올랐던 대지가 식는다.

언젠가 아르센이 느꼈던 예리한 칼날과 같은 마력이 칼리안의 몸을 휘감아돈다.

단전을 거쳐 오러로 변환된 마나가 다시 심장의 서클로 들어간다. 여전히 세차게 회전하는 세 개의 서클을 이루는 힘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 두근!

바뀐 것이 있다면.

오로지 네 번째의 서클만 오러의 힘이었던 예전에 비해 이제는 네 개의 서클이 모두 오러의 힘이라는 것. 그리하여 그 네 개의 서클을 이루는 마나를 모조리 오러로 전환해 사용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 옛 칼리안이 쌓아 둔 마나를 기반으로 다시 제대로 된 오러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아마도 이제는 에반의 앞에서 오러를 감출 필요가 없으리라는 것.

"이제."

검게 변한 대지의 한 가운데 선 칼리안이 깊이 고개숙여 인사했다.

"되었습니다. 스승님."

옛 칼리안을 닮은, 그리고 베른을 닮은.

검붉은 빛의 검이 칼리안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 (3)

대륙에 여섯, 아니 사실상 다섯 뿐인 소드 마스터.

그리고 대륙에 셋 뿐인 7서클 마법사.

되도록 피하려 했고 어지간해서는 피했어야 했을 둘의 대련이었다. 물론 앨런이야 칼리안의 공격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준 정도라 해야 하겠으나 칼리안은 아니었다. 지니고 있던 오러를 모조리 털어낼 만큼 온 힘을 다해 앨런을 상대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둘의 대결이 불러온 결과는 어마어마했다.

일단 칼리안의 오러가 전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달라졌다.

그것은 마치 짙은 핏빛 같기도 했고 어둠 속에 모질게 남겨진 단 하나의 불씨같기도 했으며 지독한 죽음과 지고한 생명을 함께 담은 것 같기도 했다.

"실로 유일무이한 오러가 아닙니까, 왕자님."

물론 에반 브리센 후작을 만나 그의 오러가 느껴지는지를 확인해야 정확하겠지만 에반보다 오러의 양이 많아진 것이 맞다면 더 이상 오러를 숨기는 마법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되면 정신력의 소모도 덜 할 것이고 얀과의 키 크기 내기에서 이길 확률도 늘어날 터였다.

그러니 이 얼마나 대단한 성과란 말인가.

때문에 앨런은 칼리안의 오러를 보며 축하를 보냈다.

"축하드립니다. 아무튼 제가 제자 하나는 잘 두었습니다."

물론 칼리안은 기뻐했다.

칼리안의 오러가 늘어난 것이 이번 대련이 가져 온 결과의 전부였다면 앨런이 그러하듯 그저 기뻐하기만 했을 것이다.

"······ 음."

하지만 칼리안은 기뻐하기만 할 수가 없었다.

칼리안이 달빛을 받으며 앉아있던 조그만 바위는 멀쩡했다. 그것만 멀쩡했다. 바위를 중심으로 온 사방이 초토화됐다.

칼리안의 검은 카이리스 왕궁에서 가장 날카로울 것이고 앨런의 불길은 이 대륙에서 가장 뜨거울 것이다. 사정 없이 조각났다 하면 딱 어울릴 바위와 나무들, 그리고 숯처럼 검게 그을린 대지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나.

물론 여기까지는 예상했으므로 주변의 상황이 칼리안의 감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칼리안은 숲을 엉망으로 만든 것을 그냥 모르는 척 하려 했다. 어쨌거나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곳이니 알려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만약 르메인이 알게 된다 한들 뭐 어쩌겠는가.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부서질 바위이며 시간이 흐르면 어차피 다시 자랄 나무인 것을. 그리고 이제 르메인도 이 정도 사고는 그냥 그러려니 할 정도의 담력은 쌓였을 터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앨런과 함께 기뻐하기를 마친 뒤 레이븐의 등에 얹힌 채 체르밀 궁으로 돌아가려 했다. 돌아가서 그 좋아하는 목욕이나 하며 피로를 푼 뒤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건, 흠. 그래. 이건 좀 고민이 되는군."

"상황을 보면 군단장님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위 아래를 생각하면 그래도 왕자님이 먼저 아닐까?"

앨런을 찾으러 간 마법사는 분명 한 명이었다.

아르피아 궁에 앨런이 없자 마법사 대표는 급한대로 칼리안을 찾아갔고 칼리안의 시종을 통해 칼리안과 앨런이 '숲'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마법사는 숲으로 왔다. 호기심 많은 몇몇이 숲으로 따라왔다.

그래서 빌헬름 관에 총 세 개의 동상이 들어앉게 생겼다.

일의 원인과 결과가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 기분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됐다. 칼리안이 앨런과 대련을 했고 빌헬름 관에 세워질 동상이 늘어났다.

아무래도 히나가 빌헬름에 가면 가장 먼저 치료해야 할 것은 저들의 머리가 아닐까.

'그렇게 되면 히나의 동상을 세우겠다 하겠지.'

정말 다 돌았나봐.

어떡하지.

이런 생각에 칼리안은 그만 이마를 부여잡고 레이븐에 기대 앉아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린 앨런은 칼리안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얼른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는 들어가 쉬시지요. 헤이시아 궁 쪽의 일은 제가 확인을 하겠습니다."

지금 칼리안의 피로를 불러온 것이 앨런과의 대련인지 아니면 하얀 로브 입은 미친자들이 세우고 있는 빌헬름관의 인테리어 계획인지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칼리안이 녹초가 된 것만은 분명해서 하는 소리였다.

"잠시 들르기만 할 것이니 괜찮습니다."

칼리안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앨런을 부르러 온 것이라 하지만 함께 이야기를 들은 이상 칼리안도 앨런과 같이 움직일 생각인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헤이시아 궁이 아닌가.

시스파니안이 머물던 곳에서 '빛을 내는' 무언가가 있다는데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칼리안을 향해 앨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 것을 또 혼자 드십니까. 확인 후에 말씀을 드리러 갈 터이니 오늘은 쉬십시오."

분명 고민거리를 나눠 주기로 해놓고 이런 말을 하니 또 혼자 무리하려 드느냐는 의미로 꺼낸 소리였다. 이래서야 조약돌이 '사람이 만든 신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칼리안에게 알릴 수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러가 싹 빠져서 일반인 체력으로 돌아온 탓에 피로가 몰려오고 있던 칼리안에 비해, 앨런은 가벼운 밤 산책을 마친 듯한 정도의 컨디션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확인되는대로 꼭 알려주세요."

"걱정은 마시지요."

그리하여 칼리안은 헤이시아 궁에서 발견됐다는 것에 대한 궁금증과 기어코 숲까지 부순 것에 대한 약간의 미안함, 그리고 어떻게 해야 발칸에 동상이 세워지는 것을 막을지에 대한 걱정 등을 일단 모두 앨런에게 넘긴 채 체르밀로 향했다.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체이스의 정보를 외워 놓느라 닷새 동안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으니 앨런의 말을 들어 일단은 좀 쉬기 위해서였다.

- 다각, 다각.

칼리안의 결정을 눈치 챈 레이븐이 체르밀 궁을 향해 알아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앨런의 모습이 사라졌다.

헤이시아 궁이 있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남겨진 발칸 마법사들은 다시 돌아가기 위해 각자의 말에 올랐다.

앨런을 따라 공간이동을 하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숲에서 헤이시아 궁 까지의 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앨런 정도가 아니라면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었으니까.

* * *

그래. 분명히 있었다.

옅은 베이지색 소파와 은백색의 고양이 사이에 검은 색 칼리안이 앉아있던 적이 분명 있었다.

- 타악!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검은색의 소파와 은백색의 고양이 사이에 삶은 완두콩같은 연두색 놈이 앉아 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

자신의 방 문을 열었다가 곧바로 닫은 칼리안이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도 제 발로 한 번 그런 짓을 해 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리고 자신의 방이 무슨 색인지도 익히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곳이 3층인지 4층인지를 둘러보는 헛짓을 하지는 않았다.

"안 들어와도 돼. 알아서 잘게. 너무 피곤해서."

대신 함께 들어와 잠자리를 정리해주려 하는 얀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남의 방에 멋대로 들어와 있는 플란츠를 얀이 곱게 볼 리 만무했으니까.

칼리안의 얼굴이 정말로 좋지 않았으므로 얀은 한껏 걱정하는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것 있으면 부르세요."

"푹 자면 괜찮아져. 걱정 마."

그렇게 얀을 안심시켜 돌려보낸 칼리안이 방의 불을 켜며 사일런트를 간신히 발현했다. 문 밖에 서 있는 두 명의 호위기사에게 이 시간에 몰래 찾아온 손님이 있음을 들켜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후에는 이렇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도 하필, 오늘, 그리고 지금.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다.

대련의 여파로 몰골이 엉망인 것은 아니었다.

칼리안은 마법사들이 숲에 찾아온 그 순간 이미 옷매무새를 싹 정리했다. 남들의 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파리하게 변한 안색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칼리안의 얼굴을 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은 무리하는 것이 취미인가보군."

"내 형님께서는 이제 걱정을 다 해주시는지."

"짖지 말고."

어김 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곧 플란츠가 고양이를 안은 자세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꼬박 하루는 퍼질러 자야 할 것 같은 놈을 앞에 두고 떠들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플란츠가 일어났는데도 깨지 않는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보던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이 저 정도로 잠에 빠져들 만큼 한참 동안 이 곳에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말씀하세요. 괜찮습니다."

한동안 그런 칼리안을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같은 높이에서 칼리안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기사단에 새가 있는 것 같은데."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왕실 기사단에 숨어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와."

진심어린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체이스와 플란츠 모두를 향한 감탄이었다.

"몰랐습니다."

플란츠가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칼리안은 정말로 몰랐던 사실이다. 과거에는 기사단에까지 세작을 심어두지 않았었다. 그러니 이것은 체이스가 한 일이다.

타국의 왕실 기사단에 세작을 둔다니.

기사단 카렌과 라온에는 르메인의 손이 닿지 못한다. 르메인이 하는 일은 이미 확정된 기사단원에 대한 마지막 보고를 받는 것뿐이니까. 그러니 이것은 기사단에 한해 여전히 변함 없는 르메인의 무능과 에반의 빈틈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라고도 보아야 할 일이다.

아무튼 칼리안은 에반의 몸통에 세작을 심어 둔 체이스의 대담함에, 그리고 그것을 알아낸 플란츠의 눈치에 감탄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몰라. 누구인지도."

"그럼 새가 있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플란츠가 작게 접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어느새 주머니에 있던데."

기사단을 만났을 테니 기사들과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든 이야기를 나눠보든 했을 터였다. 그 사이 누군가 플란츠에게 이 쪽지를 넘긴 모양이다.

플란츠 역시 검을 곧잘 다룬다. 그런 플란츠에게 몰래 무언가를 전해 줄 수 있을 정도라면 만만치 않은 실력자라는 뜻이다.

하기사. 왕궁에 직접 들어 올 세작이니 그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을 테지.

플란츠로부터 쪽지를 받아든 칼리안은 내용은 확인하지도 않은 채 잠시 눈을 내리떴다. 고민에 가까운 생각을 하기 위해서였다.

세작을 숨기는 것은 브리센에 반하는 것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선택지에 대해서.

잠시 후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브리센 후작에게 전하십시오. 세작이 있다고."

"알려지면.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 곤란해지실텐데."

체이스와 세크리티아의 곤란함.

그리고 플란츠의 심장.

어떤 것의 무게가 더 나가는가.

"전하시는 것이 낫습니다."

"숨겨두면 역으로 쓸 데가 있겠지."

칼리안의 답에 피식 웃은 플란츠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세작을 그대로 두면 세크리티아의 왕세자를 속이는 것에 쓸모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가짜 명분이겠지만 그렇다 해서 거짓인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반대로 이용하기 위해 세작을 살려두는 것은 브리센에 반하는 행동이라 보기 어려울 테니까.

"전서구 노릇이나 하는 새는 무시해도 돼."

"기사단에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있는 것을 알게 된 카이리스의 왕자님이 그런 말을 하십니까."

"상관없잖아."

사실 새들이 더 알아갈 것도 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기밀은 플란츠가 제 입으로 직접 다 알려줬지 않나. 게다가 플란츠 나름대로 체이스나 칼리안을 배려하려는 것임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때문에 더 이상의 반박 없이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은 그제야 손에 들린 쪽지를 펼쳤다.

- 그날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부드럽기 그지없는 글씨체.

바로 오늘 아침까지 칼리안이 기를 쓰고 외웠던 자료에 있던 것과 똑같은 글씨체.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주었다 했을 때 이미 예상했지만 그것은 체이스의 것이었다.

쪽지에는 간단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 믿는 이와 부정하는 이를 만나게 한 것은 주인의 아들입니다.

칼리안은 그 내용을 두 번 읽지도 않았다.

세렌티를 믿는 신관과 세렌티를 부정하는 대사막의 전사들이 손을 잡도록 힘을 쓴 것은 텐실의 국왕이 아닌 왕세자라는, 이해하기에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말이었으니까.

손에서 작은 불을 일으켜 쪽지를 태우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말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텐실이라면 계약에 어긋날 일 없지 않나. 내가 알아도."

"여기 적힌 내용이나 그날 제가 체이스 왕세자님과 마지막으로 나눴던 일에 대해 형님께서 아시게 되더라도 계약에 침해되는 것이 없기는 하겠습니다만."

잠시 생각해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됩니다."

"왜."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절대 말씀 안 드릴 거라고. 란델 형님과 관련된 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그것도 이미 말씀 드렸을텐데요."

"그런 낯짝으로 잘도 짖지."

"신경쓰실 일 아닙니다."

칼리안의 대답에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재수없는 웃음이다.

"내 아우님이······."

이렇게 운을 뗀 플란츠가 테라스 밖을 잠시 쳐다봤다. 그 시선이 어느 방향을 향한 것인지 본 칼리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대마법사와 싸울 만한 이유가 대체 뭘까."

"······ 하."

칼리안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지금 플란츠가 무엇을 입에 담는지 알아서였다.

"지금 형님 심장 두고 저를 협박하시는겁니까."

"내 머리가 내 아우님 것보다 나을테니, 꺼내. 그만 짖고."

텐실에 대한 조사를 자신에게 맡기라고. 그렇지 않으면 '칼리안이 무엇을 준비하려 앨런과 대련하는지'에 대해 더 생각하겠다고.

"도와줄테니까."

도와주겠단다.

제 목숨을 걸고 협박하는 망할 형 놈이 도와주겠단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료.

괜히 태웠다.

······ 다시 써야 한다.

제26장. 어렵지 않은 일 (4)

많이 향긋하고, 조금 달고, 적당히 쓰다.

베르가못의 향이 나는 홍차 잎, 그리고 단맛과 쓴맛이 함께 느껴지는 자몽. 이 둘이 어우러진 케이크의 맛이 그랬다. 많이 향긋하다가 조금 달더니 적당히 썼다.

그 뒤섞임이 어찌보면 란델과 썩 어울리는 것도 같고 또 어찌보면 영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다고, 칼리안은 그런 생각을 했다. 란델은 그만큼 복잡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가구 외에 놓인 것이라고는 오로지 책 뿐인 방은 고요했다. 심해를 담은 눈을 가진 이가 지내는 곳으로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 것 같다가도 또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한 곳이었다.

그 겉은 장미 정원처럼 화려하며 조금의 어긋남 없이 완벽하지만 마치 이 방처럼 속에 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 이것 저것 많은 것이 뒤얽혀 있지만 또 한 편으로는 텅텅 빈 사람.

케이크도, 그리고 이 방도 꼭 란델 같다고.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짙은 붉은 색 커튼 사이로 스민 햇빛이 금빛의 머리카락을 비췄다.

"처음이구나."

향긋하고 달고 쓴 케이크의 맛이 한꺼번에 감도는 입으로 조금 더 쓰고 조금 더 향긋한 홍차를 삼킨 란델이 이렇게 말했다.

란델에게 시간을 내어 달라 먼저 이야기 한 것도 처음이었고 란델의 방에 찾아온 것도 처음이었고 이 형제가 마주보고 앉아서 차를 마시는 것도 처음이었다.

게다가 란델과 플란츠는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때문에 플란츠와는 거의 속마음을 읽고 대화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모양새를 만들어내는 칼리안도 란델이 무엇을 두고 처음이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쉬이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칼리안은 그냥 이렇게 물었다.

그 푸른 눈을 대신해 갈색 같기도 하고 붉은 색 같기도 한 찻물을 쳐다보는 채였다.

"나를 경계하지 않는 것이."

란델은 이런 대답으로 칼리안이 할 말을 놓치게 만들었다.

지금껏 칼리안을 자신과 같은 눈높이에서 보지 않은 것은 란델이었다. 심지어 1년 전까지는 아예 칼리안을 보고 있지도 않았던 란델이었다. 그런 란델이 이런 말을 한다. 칼리안이 자신을 경계했다고.

그것이 누구 때문인데.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칼리안이 란델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거짓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곧은 눈매로 대답했다.

"단 한순간도 란델 형님을 경계하지 않았던 적 없었습니다. 지금도요."

옛 칼리안도 그리고 지금의 칼리안도.

란델은 항상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던가.

"그래."

막냇동생의 솔직한 대답을 들은 란델은 표정을 바꾸거나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외면하지도 않았다.

"얘기 해보려무나."

칼리안을 마주보던 란델이 이렇게 자신을 만나자 청해 온 이유를 말할 시간을 내어주었다. 괜스레 입이 써진 칼리안은 자신보다 더 복잡할 것이 분명한 란델의 인성 같은 케이크를 한 입 더 먹었다.

그 맛이 꼭 처음으로 커피를 접했던 그 때를 생각나게 한다. 향긋하려면 향긋하기만 하고 쓰려면 쓰기만 할 것이지.

무턱대고 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까이 할 수도 없을 것 같은 첫째 형을 향해 칼리안이 물었다.

"카이리스입니까, 텐실입니까."

돌려 말하지 않았다. 란델에게는 그 편이 나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오는 란델의 눈에 시선을 맞추며 덧붙였다.

"가지고자 하시는 자리. 어느 쪽의 왕좌입니까."

찻잔을 내려놓은 란델이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늘 감춰두고 깊이 내려놓는 것에 익숙한 생각을 겉으로 꺼내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채근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왜 묻느냐 할 법도 하건만 란델은 다른 것을 물었다.

"네 눈에는 어떤지 궁금하구나. 내가 어느 쪽을 원하는 것으로 보이는지."

"모르겠어서요. 이제와서는 자리를 원하시는 것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왕좌를 원하는 것이 맞기는 한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원한다면 그것이 카이리스의 것인지. 아니라면 텐실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란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란델이 다른 내용을 더 꺼내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생각했었다. 조금 더 큰 조각이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을 뿐."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려 란델의 텅 빈 방을 둘러봤다.

란델은 무엇을 가질 생각조차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왕좌를 원하는 이유는 결국 한 가지다.

"목적으로서의 자리가 아니라 수단으로서의 자리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겠죠."

나처럼.

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왕좌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그래."

"무엇을 위한 수단입니까."

이 말의 끝에서 칼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대답을 듣지 못했던 것을 다시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브리센을, 그리고 전하를 향해 칼날을 드리울 생각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으신지. 이번에는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맹세의 인과는 관련 없는 사실일 테니까요."

이번에는 란델이 먼저 자리를 피할 수도 없으니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으로 물었다.

란델의 눈빛이 깊은 곳으로 침잠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란델의 심연을 더 헤집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스스로 꺼내 보여주기를 종용하듯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것이 왜 궁금해졌느냐."

란델은 그제야 이유를 물었다.

자신에 대해 왜 그렇게 알고자 하는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왜 알려 하는지. 이미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것으로도 모자라 왜 반대로 뒤흔들어 놓으려 하는지.

칼리안은 어느새 날카롭게 변한 눈빛을 채 지우려 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결정해야 할 것 같아서요. 란델 형님을 마주봐야 할지. 등을 보여드려야 할지. 란델 형님과 마주 보고 검을 드리울지, 란델 형님을 제 등 뒤에 놓고 그 앞을 막아서야 할지."

이제는 결정해야했다.

생각지도 못한 것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대답, 해주세요. 란델 형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