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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식량난을 해결할 방법 (1)

홀쭉이 샤일로와 뚱뚱이 미트로프.

두 사채업자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물론 도망치기 전에 그들은 로이드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옆에서 오크 아로쉬가 콧김을 풍풍 뿜어댔다.

성난 고릴라 같은 눈으로 두 사채업자를 노려보았다.

로이드의 입에서 '이들이 프론테라 남작령의 적'이라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즉시 테이블을 들어 올려 두 사채업자의 정수리를 알차게 찍어 버릴 기세였다.

아마도 그런 성난 오크를 옆에 두고 태연할 수 있는 인간은 몇 없으리라.

두 사채업자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면 진짜로 죽을지도 몰라.'

샤일로와 미트로프의 등짝에서 땀샘이 풀가동되었다.

그저 막연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아니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오크 전사에게 있어서 인간의 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수틀리면 그냥 여기서 우릴 죽이고 황야로 도망쳐 버릴 수도 있겠지.'

말 그대로 성난 오크에게 비명횡사를 당하는 셈이다.

두 사채업자는 그런 개죽음은 사양이었다.

둘은 머릿속 계산을 마친 즉시 입가에 영업용 미소를 한껏 띠었다.

"어허? 우리가 언제 도련님의 요구를 안 들어준다고 했나? 당연히 들어줘야지. 아암, 그렇고말고."

미트로프가 황급히 말했다.

샤일로도 다음 말을 넙죽 이어받았다.

"당연한 일이지.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각서 없나? 당장 써줄 수도 있는데."

"그렇습니까? 어이쿠. 이렇게 감사할 데가."

로이드의 입가에 영악한 미소가 한껏 피어났음은 물론이었다.

그렇게 로이드는 두 사채업자에게 각서를 내밀었다.

각서의 내용은 딱 두 가지였다.

앞으로 남작이 진 채무의 일부 상환을 허용할 것.

남은 채무의 금액에 따라 이자의 금액을 줄여줄 것.

'....'

두 사채업자는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각서에 동의했다.

로이드가 째릿 선사하는 무언의 압박에 떠밀려 서명은 물론이고 지장까지 찍어야 했다.

"그럼... 우린 이만!"

지장을 찍자마자 샤일로와 미트로프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줄행랑을 쳤다.

저들에게 협상(?)을 시도한 로이드.

그의 목적이 달성된 셈이었다.

'딱 좋아. 지금 상황에서 얻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결과를 뽑아냈어.'

오크 아로쉬를 동원한 협박은 매우 효율적이었다.

오크 전사는 맹목적이다.

인간의 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법보다 가까운 주먹이 그대로 실체화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법과 제도를 악용하길 즐기는 두 사채업자.

놈들의 완벽한 카운터 픽이 되는 셈이었다.

'물론 기분대로 하자면 제대로 협박해서 빚 자체를 없는 걸로 해 버리고도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불법이니까. 사채라고는 해도 법적인 빚이 있는 게 엄연한 사실이니까.'

그런 빚을 협박을 통해 무효화한다면?

두 사채업자가 반드시 신고를 할 것이다.

죄목은 대략 협박을 통한 금융범죄가 될 터.

즉, 남작가 전체가 법적으로 큰 곤경에 처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 건 곤란하지.'

반면 아까 각서를 통해 얻어낸 두 가지 합의 사항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일의 최대치였다.

즉, 상황에 적절한 최대의 이득을 뽑아낸 셈이었다.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하자. 너무 크게 먹으려고 하다간 체해. 한 걸음씩 차근차근. 그러면 길이 보일 거야.'

아직은 갚을 길이 까마득한 금액의 빚이었다.

하지만 열심히 땀 흘리다 보면 언젠가는 모두 청산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남작과 아로쉬를 돌아보았다.

"자아, 이렇게 모처럼 우리 영지와 강철모래 부족이 손을 잡게 되었으니 기념으로 다 함께 셀카... 아니, 기념화라도 한 장 남길까요?"

"그거 좋겠구나."

남작이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로쉬가 기념화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이드는 저택의 행정관에게 화가를 불러오라 일렀다.

왕국 동쪽 구석의 시골 영지 프론테라 남작령.

그리고 동부 산맥 너머의 강자 강철모래 부족.

두 판이한 세력이 공식적 혈맹으로 거듭나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다음날부터였다.

로이드는 산맥을 넘어온 여정의 피로를 풀기도 전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멍 때릴 시간이 없으니까.'

시간은 자신의 편이 아니다.

이렇게 있는 동안에도 날짜는 째깍째깍 흘러간다.

그렇게 날짜가 흐를 때마다 이자 납부일 또한 따박따박 다가온다.

하니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더 부지런해져야 했다.

로이드는 처리해야 할 일의 순서를 정했다.

'우선 오크 부족에게서 석빙고 공사 대금으로 받아온 보물 더미를 처분하고 싶은데.'

오랜 시간 운동기구로 활용된(?) 금은보화였다.

덕분에 손상이 제법 심하긴 했다.

그래도 그걸 한꺼번에 처분한다면?

제법 목돈이 될 것이다.

오랜 시간 운동 기구로 험하게 쓰이느라 생긴 손상을 감안해도?

아마도 채무의 20% 정도는 갚을 수 있을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틈틈이 방울이가 뽑아준 강철 끙가 철근도 제법 쌓여 있었다.

나중에 벌일 여러 공사에 대비해서 비축한 분량 외에도 판매용으로 따로 쟁여둔 철근이었다.

'보물에다 저것까지 전부 처분하면 원금의 30퍼센트 정도는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저것들을 당장 팔아치울 방법이 없어.'

아무리 귀하고 비싼 물건이라도 그걸 사줄 사람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한데 이곳 프론테라 남작령은?

그저 평범한 농부와 나무꾼, 가끔 영지를 들르는 변두리 상인이 다였다.

저 보물들과 철근을 구매할 사람도, 그 가격을 치러줄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채꾼들에게 저것들을 생으로 넘길 수도 없어. 그랬다간 가격을 후려치려 들 테니까. 무조건 금화로 바꿔야 돼.'

사채꾼들을 상대할 때는 현금박치기로.

그렇게 원칙을 정한 로이드는 조만간 저 보물과 철근을 처분하고 금화로 바꾸기 위해 큰 도시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무런 준비 없이 가는 것은 금물이었다.

그렇게 무턱대고 대량의 물자를 가지고 먼 길을 갔는데 허탕을 친다면?

판매할 곳을 찾지 못한다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게 된다.

말 그대로 헛걸음만 잔뜩 하는 셈이 된다.

하여 로이드는 남작을 찾아갔다.

이번에 얻어온 물품을 처리할 상인에 대한 수소문을 부탁했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가장 먼저 처리해야겠구나. 알겠다. 상인은 내가 수소문해보마. 연락이 닿으면 당장 물품을 가지고 크레모 시로 갈 수 있도록 말이다."

크레모 시는 프론테라 남작령이 포함된 크레모나 지방의 중심 교역도시였다.

'후우, 일단 그럼 물건 처분은 준비가 갖춰지길 기다려야 하는 거고. 그럼 그 사이에 다른 일을 처리해볼까.'

남은 우선순위의 일.

바로 석탄 채굴이었다.

'그걸 위해 오크 광부들을 모셔왔으니까.'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광산 입구 앞 공터.

그곳에 120명의 우락부락한 오크 광부들이 모여 있었다.

로이드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자아, 오늘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 미리 이야기 들었으리라 믿습니다."

"들었다, 꾸익!"

"파낸다, 꾸익!"

"부순다, 꾸이익!"

오크 광부들이 커다란 주먹을 붕붕 치켜들었다.

로이드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네, 맞습니다. 여기 이 갱도로 들어가서 석탄을 파내고, 돌을 쪼개고, 부술 겁니다."

"부수는 건 재미있다, 꾸익!"

"신이 난다, 꾸이익!"

오크 광부들이 더욱 흥분했다.

작업용으로 지급된 곡괭이며 삽을 치켜들었다.

숫제 당장이라도 전쟁터로 보내도 될 듯한 기세였다.

그래서였을까.

이어지는 로이드의 말에 오크 전사들은 왕방울만 한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여기 계신 모든 인원이 다 함께 일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일에는 순서가 있으니까요."

"뭐, 꾸익?"

"그게 무슨 소리냐, 꾸익?'

의아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모든 것은 작업의 효율과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자, 그쪽에서 거기까지. 그리고 여기부터 거기까지. 네, 좋습니다. 조를 나누어보도록 할까요."

로이드가 손짓으로 오크 광부들을 지휘했다.

약간의 소란 끝에 120명의 오크 광부들이 30명씩으로 구성된 4개의 조를 이루게 되었다.

"잘하셨습니다. 그럼 구분하기 쉽도록 조별로 이름을 정해볼까요."

"가슴, 꾸익!"

"등짝, 꾸익!"

"어깨, 꾸익!"

"하체, 꾸이익!"

오크 광부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그렇게 4개 조의 명칭이 순식간에 정해졌다.

로이드가 말했다.

"네, 잘하셨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조별로 작업 일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오크 광부들을 조별로 나누어 작업에 투입하는 것.

그것이 로이드의 계획이었다.

'1일 주야 2교대로. 그리고 격일제로.'

총 6일을 일하게 된다.

7일째엔?

'모두를 쉬게 하는 거야. 휴식은 중요하니까.'

그리고 다음 6일은 주야를 맞바꾸어서 투입시킨다.

이전에 낮에 일했던 조는 야간에, 야간에 투입됐던 조는 낮에 일하게 되는 식이었다.

그러한 로이드의 계획이 발표되자 오크 광부들 사이에 소란이 일어났다.

"그럼 우리 조가 제일 먼저 들어갈 거다, 꾸익!"

"우리는 온종일 석탄 캘 거다, 꾸이익!"

"운동! 운동, 꾸익!"

...광산 일마저 운동으로 여기는 오크 광부들이었다.

덕분에 로이드는 그들을 다독이느라 한참 진땀을 흘려야 했다.

계획적으로 운동하고 쉬는 게 근육 성장에 유리하다는 말을 하고서야 모두를 설득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로이드는 여러 방면으로 작업자 관리를 했다.

'광산 일은 고되고 위험하니까.'

조별로 따로 5명의 공병대 병사를 붙여주었다.

그들을 안전요원으로 삼았다.

또한, 갱도 내에 추가로 환기통을 설치했다.

분진을 막아줄 마스크도 지급했다.

일체의 잔업을 금지시켰다.

거기에 광산 출입구에 목욕 시설도 설치했다.

오크 광부들이 쾌적하게 휴식하며 지낼 숙소도 마련해주었음은 물론이었다.

'거기에 창고까지.'

남작가 저택에 딸린 창고를 확장했다.

채굴한 석탄을 비축할 저장 시설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채굴 체계를 잡는 데에만 꼬박 한 달이 걸렸다.

그 사이, 오크 광부들은 자신들의 위용(?)을 마음껏 과시했다.

그들은 애초 로이드가 품었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해주었다.

정말로 최고의 광부가 따로 없었다.

작업을 알찬 운동으로 여겼다.

결코 지치지 않았다.

의욕마저 넘쳤다.

경이로운 근력으로 곡괭이질을 해댔다.

엄청나게 무거운 탄광 수레를 잘도 밀어댔다.

덕분에 석탄 채굴에 폭발적인 탄력이 붙었다.

매시간 수레 가득 석탄이 실려 나왔다.

묵직한 수레가 포장도로로 신속히 옮겨졌다.

남작가 저택 창고가 차곡차곡 석탄으로 채워졌다.

그럴 때마다 로이드의 입가에도 차곡차곡 미소가 배어났다.

'좋아. 매우 좋아.'

지금 쌓이고 있는 역청탄.

겨울이 오면 알짜배기 돈으로 바뀔 것들이었다.

그 생각에 흐뭇한 웃음이 절로 실룩실룩 흘러나왔다.

거기에 로이드를 흐뭇하게 하는 일이 또 있었다.

딩동.

[영지 전체에 당신에 대한 미담이 퍼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일찍이 흑마법사에게 납치된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나서는 용기와 솔선수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구조받은 공병대 병사들이 한 달 내내 가족, 친척, 지인들에게 입이 마르도록 당신을 칭송하고 다녔습니다.]

[이제 프론테라 영지의 모든 주민이 당신의 미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영지민 모두가 당신의 고결한 용기에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업적에 따른 보너스로 대량의 RP가 특별 지급됩니다.]

[30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911]

'좋아.'

내심 영지로 돌아올 때부터 기대했던 또 다른 성과였다.

그게 마침내 300 RP라는 알찬 결실로 돌아왔다.

'RP는 모아두면 두고두고 쓸 자산이 되니까.'

오직 자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형의 자산이자 무기였다.

물론 그렇듯 연이은 성과 속에서도 로이드는 결코 마음을 놓지 않았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먼 길이 오직 탄탄대로일 리는 없다.

반드시 자잘하거나 굵직한 장애물이 곳곳에 있을 터.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장애물은 일찌감치 치우거나 대비를 해두어야 했다.

"이를테면 오크 광부들의 경이로운 먹성도 그런 잠재적 문제 중의 하나겠지."

"먹성이라니요?"

그날 저녁.

로이드의 말에 하비엘이 반문했다.

은발의 기사는 눈길을 들어 자신의 호위대상인 도련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도련님, 로이드가 침실 책상에 걸터앉은 채로 싱긋 웃었다.

"말 그대로 먹성이지. 정말이지 미친 듯이 먹어댄달까."

사실이었다.

오크들의 먹성은 어마어마했다.

만약 대한민국에서 먹방 BJ로 데뷔한다면 대성공이 무조건 보장될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당연해. 덩치가 엄청나잖아? 게다가 그 덩치가 모조리 근육이야. 반나절 내내 광산 일을 하느라 체력 소모가 심하기도 하고."

"하긴, 저도 아까 그들이 먹는 걸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그렇지? 지금이야 영지에 비축된 식량이 있으니까 버티는 거지, 내후년쯤이 되면 난리가 날 거야."

그 또한 사실이었다.

지금이야 비축된 식량으로 저들을 먹일 수 있었다.

하지만 1년, 2년이 지나면 비축 식량도 바닥날 것이 뻔했다.

"그러면 비싼 돈을 주고 이웃 영지에서 곡식을 사야 할 거야. 이대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말이지."

"어째 그 말씀은 꼭, 대책을 미리 세워두셨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그래?"

"예."

"딩동댕."

로이드가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 하비엘, 그동안 이 형이랑 찰싹 붙어 다녀서 그런가. 많이 똘똘해졌네?"

"원래부터 똑똑했습니다만."

"아, 그러셨어?"

"예. 그리고 저는-"

하비엘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로이드 님의 동생이 아닙니다."

"어, 그런 거였냐?"

"예."

"가끔씩 나 형이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막 그러지 않아?"

"전혀, 절대로, 결단코, 맹세코, 한사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나 싫은 거냐?"

"예."

"흐음, 한 번만 형이라고 부르면 이 몸의 근사한 비법을 전수해주려고 했는데."

"...."

"혹시 어떤 비법인지 궁금해?"

"아니오. 절대로."

"쯧, 건방진 녀석."

"감사합니다. 다만, 심중에 품고 계실 대책은 조금 궁금해지는군요."

"미래에 닥칠 오크발 식량난을 해결할 방법?"

"예."

하비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저 도련님.

보고 있자면 간혹 혼란스러웠다.

지금과 같은 순간이 바로 그러했다.

'실체를 알 수가 없어.'

종종 실없는 소리만 해댔다.

그런가 하면 쪼잔하기도 했다.

영악하거나 사악한 면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얄밉고, 껄끄러웠다.

그러나 가끔씩은 파격적으로 가늠할 수 없고, 불가사의하고, 신비롭기도 했다.

이를테면, 대수롭잖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자신이 감히 상상도 해보지 못한 계획을 태연하게 입에 담는, 지금과 같은 순간이 그러했다.

"간단해. 영지 남쪽의 버려진 늪지대를 농사가 가능한 땅으로 바꿀 거야. 뭐, 방법을 따지자면 연직배수(Vertical Drain, VD) 공법을 섞어서 응용해보면 어떨까 하는데."

"...."

"어때?"

이쪽을 향해 싱긋 웃는 로이드.

어쩐지 하비엘은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43화. 식량난을 해결할 방법 (2)

마레즈 습지는 버려진 땅이었다.

곳곳에 질척이는 늪이 가득했다.

진득한 늪 속엔 이름 모를 생물이 우글거렸다.

당연히 건물을 짓는 것도, 농사를 짓는 것도 불가능했다.

쓸모가 없는 땅.

써먹을 수도 없는 땅.

그렇게 마레즈 습지는 대대로 없는 땅 취급을 받아왔다.

습지 북쪽의 프론테라 남작령.

습지 남쪽의 라코나 자작령.

양쪽 모두에게 똑같은 무시를 당했다.

애초에 개발이 불가능한 땅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라지만 그건 옛날이야기가 되겠지.'

이제부턴 달라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물론."

뒤를 따라오던 프론테라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가 남작의 위아래를 재빠르게 힐끔 살폈다.

남작은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있었다.

기름 잔뜩 먹인 가죽이라 거의 완벽한 방수 성능을 자랑하는 장화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만은 장화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별로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이미 장화 안쪽까지 물이며 진흙이며 다 들어간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늪지는 무릎보다 훨씬 깊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벅다리까지 푹푹 잠겼다.

덕분에 남작의 장화 안쪽은 이미 완벽한 물바다였다.

바지 또한 뽀송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남작은 뜻밖의 근성의 사나이였다.

"괜찮다. 이 정도쯤 예상하고 왔다."

"흐음, 그런가요."

딱히 그렇진 않으셨던 것 같은데.

문득, 로이드는 두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두 시간 전.

로이드는 남작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남작에게 영지 남쪽의 마레즈 습지를 개발할 생각을 밝혔다.

습지 개발의 이유와 목적은 명확했다.

앞으로의 영지 식량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함이었다.

'오크 광부들을 먹여야 하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영지의 농토가 늘어나는 건 무조건 장려할 일이기도 하고.'

식량 생산.

농업은 모든 산업의 근본이다.

제아무리 최첨단의 사회라 해도 그렇다.

일차적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다음 단계가 가능해진다.

영지의 일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오크 광부는 시작일 뿐이야. 언젠가는 인구도 늘어날 거야. 그런데 그때 가서 영지의 식량 생산 능력이 인구를 뒷받침하지 못하면 곤란해져.'

늘어나는 입만큼 생산력도 올려야 했다.

하지만 영지엔 새 농토를 개간할 곳이 딱히 없었다.

가능한 곳이라면 바로 이곳, 영지 남쪽의 마레즈 습지가 유일했다.

그래서였다.

습지의 물을 빼야 했다.

간척 공사를 벌여야 했다.

그러려면 남작의 허락이 필수였다.

그 허락을 받기 위해 남작에게 계획을 밝혔다.

남작이 반대하면 펼칠 설득 방안도 내심 준비했다.

한데 웬걸.

남작이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 혹시 그 습지의 지형을 관찰하러 갈 생각인 것이냐?"

"네? 뭐, 네. 그렇습니다."

"좋다. 그럼 나도 함께 가자꾸나."

"...네?"

"하인들은 데려가지 말고. 너랑 이 아비랑 둘이서만 가는 것도 괜찮겠구나. 우선 옷부터 편한 것으로 갈아입어야겠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거라."

그때부터였다.

남작은 이쪽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활동하기 편한 상하의와 가죽 장화를 갖추었다.

허리에는 휴대용 검도 찼다.

심지어 하녀를 시켜 도시락까지 챙겼다!

"으음, 저, 이거 소풍 가는 거 아닙니다."

"안다."

"그런데 왜 도시락을...."

"습지에 가더라도 배가 고프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으음, 그래도...."

"혹시 내 말이 틀렸니?"

"...."

로이드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틀리진 않으셨는데.

근데 아무래도 정말로 이걸 소풍쯤으로 생각하시는 건 맞는 것 같다.

'그것도 꽤나 즐거운 소풍 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온통 눅눅한 늪투성이 습지를 살펴보고 측량하러 가는 걸음이었다.

한데 소풍 가는 사람처럼 저렇게 들떠서 준비하는 모습이라니.

'뭐가 저렇게 즐겁다는 걸까.'

남작과 함께 저택을 나서면서도.

습지가 있을 남쪽을 향해 영지를 가로질러 이동할 때도.

마침내 습지에 도착해 질척이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로이드는 남작의 저러한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지금도 그랬다.

"후우, 후우우!"

남작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질척이는 늪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슬랩스틱을 온몸으로 구현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도시락을 지키느라 두 팔을 치켜들고 있어서였다.

보다 못한 로이드가 말했다.

"저기, 그 도시락 바구니는 제가 들면 안 될까요."

"아니다. 괜찮다."

"하지만 그렇게 만세 하듯 계속 들고 계시면 팔도 아프고 균형을 잡기 더 어려우실 텐데요."

"안 어렵다. 넌 네 일에 집중하거라."

"뭐, 그거 하나 든다고 여길 살펴보는 일에 딱히 방해될 것 같진 않은데 말이죠."

사실이었다.

실은 아까부터 측량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로이드였다.

하지만 측량을 한다고 해서 집중을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측량 결과가 알아서 데이터로 저장되니까.'

나중에 저택에 돌아가서 측량 데이터를 언제든 불러오고 살펴볼 수 있다.

집중은 그때 하면 된다.

따라서 지금은?

도시락 바구니 하나쯤 대신 들어드리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남작은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내가 먼저 따라오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 너한테 부담을 지우겠니."

"으음, 너무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나야말로 정말로 괜찮으니 앞이나 잘 살피거라."

"네. 그럼 우선 저쪽에서 좀 쉬기로 할까요."

저 멀리 앞쪽.

마침 습지대 중앙에 약간 높은 지대가 보였다.

뽀송뽀송한 땅이 봉긋 솟아오른, 일종의 작은 둔덕이었다.

'뭐, 그래 봐야 몇 미터 되지도 않지만.'

지금 잠깐 쉬어가기엔 딱 적당해 보였다.

"그럼 잘 따라오세요. 넘어지지 마시고."

"걱정말거라. 후우, 후!"

로이드는 남작을 이끌고 둔덕으로 향했다.

둔덕에 올라와서 보니 제법 평평하고 넓은 바위도 있었다.

로이드는 바위에 앉아 숨을 골랐다.

그 사이 곁의 남작이 도시락 바구니를 열었다.

안쪽에는 새하얀 천으로 덮인 목제 찬합이 담겨 있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어떤 걸 챙겨오셨길래 그렇게 애지중지하신 겁니까?"

"어떤 것이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걸 가지고 왔지."

남작이 빙긋 웃으며 찬합을 열었다.

그 찬합 안쪽에 담겨 있는 건....

"삶은 달걀과 토마토란다."

"예?"

"토마토엔 꿀도 듬뿍 뿌렸단다. 자, 여기 포크 받거라."

"...."

조금 뜻밖이었다.

그래도 귀족이니까.

이것보단 그럴싸한 내용물일 줄 알았는데.

남작의 입가에 걸린 흐뭇한 미소가 더욱 푸근해졌다.

"오랜만이라 조금 얼떨떨하니? 그래도 너 어릴 땐 제일 좋아했던 음식 아니더냐."

"...."

"지금도 눈에 선하구나. 온갖 기름진 좋은 식사를 마다하고서 넌 한사코 떼를 썼지. 삶은 달걀과 꿀 바른 토마토가 제일 맛있다고. 그럴 때마다 얼마나 난감했던지."

"...."

"지금도 가끔은 후회가 되곤 한단다. 그때 네가 좋다던 삶은 달걀과 토마토, 원 없이 줄 것을 그랬구나... 하고 말이지."

"...."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로이드는 포크를 든 채 입술만 우물거렸다.

어느새 측량 스킬도 사용을 중단했다.

그저 묵묵히 빈 포크만 쳐다보았다.

남작이 빙긋 웃으며 직접 껍질을 깐 달걀 알맹이를 쥐여주었다.

"자, 여기 소금 있으니 찍어서 먹거라. 목 막히지 않게 물도 꼭꼭 마셔주고."

"...."

"어째 조금 전부터 말이 없구나. 이런 아비가 어색하니?"

"어, 으음, 그건 아니구요."

"아니, 충분히 이해한다."

"...."

이쪽을 보는 남작의 눈빛.

알 수 없을 후회의 감정이 엇비쳤다.

하지만 그런 감정도 잠시.

남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이런. 이러다가 체하겠구나. 자, 어서 먹자."

"...예."

그 뒤로 남작도, 로이드도 입을 열지 않았다.

회색 늪지의 이름 모를 바위에 앉아 푸석한 삶은 달걀과 토마토를 먹었다.

그동안 남작은 지난 자신의 시간들을 후회했다.

자신의 기대와 달리 엇나갔던 아들에게 실망했던 시간들.

그 시간 내내 아들을 아픈 손가락 취급했던 자신.

그랬던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말로 꺼내고 표현하는 게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대신 남작은 묵묵히 로이드에게 물병을 건네주었다.

로이드가 말없이 물병을 받아 목을 축였다.

대신 달걀에 찍을 소금을 남작에게 건넸다.

여전히 둘은 말이 없었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엔 로이드가 도시락 바구니를 들었다.

이번만은 남작도 그런 로이드의 행동을 사양하지 않았다.

올 때보다 가벼워진 도시락 바구니.

그만큼 둘의 걸음도 약간은 가벼워져 있었다.

그렇게 로이드의 습지 측량 첫째 날이 지나갔다.

이후로도 로이드는 한동안 측량에 매달렸다.

마레즈 습지는 생각보다 넓었다.

그 면적을 측량 스킬로 커버하려니 하루 이틀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도 측량 스킬이 중급이라서 다행이야.'

이제는 한 번에 가로세로 약 40미터, 즉 1600제곱미터의 면적을 측량할 수 있었다.

그걸 한계까지 여러 번에 걸쳐 펑펑 써대자 꽤 넓은 면적을 측량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약 20일이 더 지났다.

그동안 로이드는 1차로 간척 시공을 실행할 범위를 대부분 측량할 수 있었다.

범위 내의 모든 지형 데이터를 얻어낸 셈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쉬운 건 아니었지만.

'설계는 또 다른 문제야.'

측량으로 얻어낸 마레즈 습지의 지형 데이터.

그걸 살펴보며 로이드는 미간을 좁혔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변수가 너무 많아.'

습지는 두 개의 강줄기 지류에 둘러싸인 저지대에 자리해 있었다.

강물이 주기적으로 범람할 때마다 습지에 물이 들어오고, 그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여 고이면서 오랜 세월 늪지대가 형성된 것이었다.

'하여간 어딜 가나 고인물이 문제야.'

게임도, 땅도 그렇다.

고인물을 적절하게 조절해야 게임도 살고 땅도 산다.

그 진리를 떠올리며 로이드는 습지에서 간척 시공을 벌일 방법을 궁리했다.

'사실 방법이야 이미 떠올렸지. 연직배수 공법에 환상종을 참가시켜서 응용하면 될 거야. 압밀 현상을 촉진하면 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방과 수로의 위치를 한 번에 제대로 잡아야 하는데.'

워낙 면적이 넓었다.

그만큼 변수가 많았다.

설계한 대로 물이 깔끔하게 빠질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시공부터 벌이고 보자는 식으로 덤볐다간 큰 낭패를 보겠지.'

기껏 힘들여 제방을 만들고 수로를 팠는데 물이 제대로 안 빠지면 난감해진다.

말 그대로 수많은 인력과 돈을 들여 뻘짓, 삽질만 하는 셈이 된다.

로이드는 그런 사태만은 피하고 싶었다.

'흐음. 시뮬레이션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측량 스킬로 따낸 마레즈 습지의 지형 데이터.

그걸 슈퍼컴퓨터에 넣고 시뮬레이션을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여기선 불가능한 꿈나라 이야기였다.

그때였다.

"으으음...."

침실 한쪽 구석.

그곳에 놓인 안락의자에서 하비엘이 꼼지락거렸다.

혹시 나쁜 꿈이라도 꾸는 걸까.

우아한 눈썹이 찡그려져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잠에서 깨어날 것 같았다.

로이드는 잠을 뒤척이는 은발의 기사를 향해 마법(?)의 주문을 읊었다.

"드레인 공법은 홍수 시에 제방으로 침투한 강우 및 하천수를 집배수하기 위한 드레인 부분과 배수를 받아 이것을 일정한 율로 이끌기 위한 측구수로, 드레인 부분의 막힘을 방지하기 위한 필터 부분으로 구성된다. 드레인공의 두께는... 어쩌고저쩌고... 제방 내 지반보다 최소한 0.5m 이상을... 미주알고주알... 드레인공 전면에서의 평균 동수경사(H/D)가 0.3을 상회하지 않으며... 블라블라... 미끄럼 파괴에 대해 일정한 안전율을 확보하는 구조로... 잠들어라, 뿅."

"...쿠우울."

하비엘이 잠들었다.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은발의 기사를 잠재우느라 전공서 내용을 읊는 사이.

시뮬레이션을 대체할 방법이 문득 떠오른 덕분이었다.

'제방 축조 파트를 읊길 잘했어. 역시나 해답은 전공서에 있었던 거야. 한번 해보자'

그는 침실을 나섰다.

저택 뒤뜰로 나갔다.

그곳에서 달빛 아래 삽을 들었다.

뒤뜰 연무장의 흙을 파고, 한쪽으로 모으고, 세심하게 매만졌다.

물을 퍼오고, 짓이긴 풀과 황토를 물에 적당히 섞었다.

자잘한 돌멩이도 주워서 모아왔다.

달밤의 달빛 아래 로이드의 땀이 반짝였다.

그 뒤로도 로이드는 계속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침이 밝아올 무렵.

로이드의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가로와 세로 각각 4미터 정도로 축소되어 조성된 마레즈 습지의 미니어처 모형이었다.

"후우. 이 정도면 되려나."

몰려오는 피로감 속에서 로이드가 흐뭇하게 웃었다.

자신이 보아도 모형이 제법 그럴듯하게 만들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지. 측량 스킬로 따낸 데이터를 그대로 반영했으니까.'

전체적인 지형의 높낮이와 기울기.

물이 고인 정도와 흐름.

그 밖에도 수많은 요소를 반영했다.

이 정도면 나름 정교한 아날로그식 시뮬레이션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로이드는 아예 소매와 바짓단을 걷었다.

모내기 패션으로 변신해서 모형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설계 스킬을 병행하며 모형에 미니어처 제방을 만들었다.

지면에 구멍을 뚫고, 한쪽에는 수로를 팠다.

그리고 물 빠짐을 관찰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침을 지나 정오로 접어들며 한여름의 땡볕이 필터도 없이 쏟아졌다. 등을 때렸다. 아니, 지졌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저택 사람들의 시선도 잔뜩 모였다.

"저기, 로이드 도련님이 이번엔 무슨 일을 벌이시는 거지?"

"진흙 놀이에 눈을 뜨신 건가?"

"아니야. 분명 뭔가 있으실 거야."

그나마 예전처럼 자신을 씹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로이드는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계속해서 아날로그식 시뮬레이션을 실행했다.

그때마다 매번 실패했다.

물 빠짐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헐렁하게 물러설 생각이었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어!'

실패할 때마다 근성을 불태웠다.

'다시!'를 외치며 두 손으로 지형을 복원하고, 걸쭉한 물을 추가로 붓고, 여러 형태의 제방과 수로를 만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도와 실패가 이어졌을까.

정오를 지나 오후.

오후를 거쳐 저녁놀이 등을 비출 무렵.

마침내 그는 제대로 배수가 되는 제방과 수로의 모형을 찾아냈다.

'됐다!'

짙은 피로감과 흐르는 땀 속에서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물이 제대로 빠지고 있었다.

제대로 빠질 뿐만 아니라 그 상태가 유지됨에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온종일 노가다에 가까운 짓을 벌인 보람이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눈앞에 뜻밖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곤경 속에서 지혜와 근성을 통해 제한된 조건을 극복하였습니다.]

[그 특별한 경험이 <스킬 : 설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스킬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44화. 세 번째 랜덤 뽑기 (1)

딩동.

[새로운 스킬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설계 스킬 전용 옵션 ③ : 시뮬레이션 모드 - 측량 스킬로 얻은 지형 데이터를 가상의 설계 공간에서 조작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지형 내에서 생겨나는 각종 물리적 변화를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어?'

로이드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마를 타고 내려온 땀방울이 눈에 들어와서?

아니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그 내용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 까닭이었다.

'헐. 뭐야 이거.'

설계 스킬의 옵션 개방이라니.

심지어 그 옵션이 그토록 바라던 시뮬레이션이라니.

생각지도 못했고 예상도 못 했던 성과였다.

하지만 로이드는 넋만 놓고 있지 않았다.

이미 측량과 설계, 아스라한 연공법까지.

여러 스킬의 성장을 통해 스킬 옵션의 위력을 제대로 체감한 바 있는 그였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설명서 백날 읽어봐야.

튜토리얼 종일 붙잡고 있어봐야.

욕 진탕 먹으면서 게임 한 판 실전으로 뛰는 게 더 나은 법이었다.

로이드는 곧바로 설계 스킬을 발동했다.

'설계.'

츠츠츠츠...!

눈앞으로 가상의 홀로그램 공간이 펼쳐졌다.

주위의 다른 이들에게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로이드에게만 보이는 가상의 설계 공간이었다.

로이드는 그곳으로 마레즈 습지의 측량 데이터를 불러왔다.

츠즈즈!

가상의 설계 공간에 마레즈 습지의 지형이 떠올랐다.

여기까지는 평소에 수없이 했던 측량-설계의 과정과 똑같았다.

한데 바뀐 점이 딱 하나 있었다.

가상의 공간 아래에 생긴 선택창이었다.

[시뮬레이션 모드 On]

'이거네.'

딱 봐도 뭘 하는 선택창인지 감이 왔다.

로이드는 선택창을 눌렀다.

[설계 스킬 옵션 ③ : 시뮬레이션 모드를 실행합니다]

[현재 설계 공간에 불러온 지형 데이터를 시뮬레이션 대상으로 지정합니다.]

츠팟!

가상의 설계 공간 배경이 밝아졌다.

설계 공간에 띄워두었던 마레즈 습지의 지형에 수많은 점과 선이 생겨났다.

마치 폴리곤으로 구성되고 쪼개진 그래픽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럼 조작법도 비슷하려나.'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이드는 손을 뻗었다.

어느 둔덕을 이루고 있는 선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위로 당겼다.

쿠구구...!

지형이 손가락으로 당기는 만큼 위로 딸려 올라왔다.

즉, 가상의 설계 공간 속 마레즈 습지 한쪽에 언덕이 생겨났다.

그곳에 눅눅하게 배어 있던 진흙과 물이 주위의 낮은 지대로 흘러내려 가는 게 확연히 보였다.

'오오.'

마치 신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혹은 시뮬레이션 게임에 딸려 있는 지형 조작 에디터를 쓰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대박이다, 이거.'

절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자신은 토목공학도였다.

그리고 토목공학은 건물만 짓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건축물을 짓는 일은 건축공학도가 하는 일이지. 토목공학은 건물 하나에 머무르지 않아. 그것보다 훨씬 방대해.'

어느 유명한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있었던가.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라고.

로이드는 토목공학이 지형을 맞이하는 방식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뭐 그래도 완전 비슷하진 않으려나. 지형은 계산하고, 동시에 극복하는 거니까.'

즉, 수많은 지형을 인간의 삶과 생활에 윤택하도록 계획하고 가공하는 일이 토목공학이라 할 수 있었다.

산에 구멍을 내서 터널을 파고.

울퉁불퉁한 해안선을 정비해서 항만을 만들고.

수많은 지형을 계산하고 극복하며 길과 철도를 잇는 것.

상하수도를 설계하고, 땅을 메우고, 때로는 쌓는다.

가파른 절벽 위로 다리를 놓고, 인간의 삶을 연결한다.

고대로부터 인류가 문명을 꽃피운 이래.

인류의 삶에 가장 큰 규모로 영향력을 행사한 학문이 토목공학일 것이라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따라서 그런 규모의 일을 해내려면 지형에 대한 면밀한 계산과 실험은 그야말로 필수라 할 수 있었다.

'한데 그런 무기를 손에 넣은 거야, 내가.'

주먹이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뒤뜰에 설치한 미니어처를 곧바로 해체했다.

목욕으로 온몸에 묻은 진흙을 털어냈다.

장장 닷새에 걸쳐 침실에 틀어박혔다.

그 시간 내내 시뮬레이션 모드로 마레즈 습지에 수많은 제방과 수로를 파고, 지우고, 또 만들었다.

최대한 많은 시뮬레이션을 실행했다.

습지 개발 계획을 꼼꼼하게 수립하고, 점검했다.

덕분에 뒤뜰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처음 성공했던 시공 모델을 훨씬 세련되게 가다듬을 수 있었다.

물론 그동안 하비엘이 그런 로이드의 시중을 도맡다시피 해야 했다.

"로이드 님, 점심 드실 시간입니다."

"어. 거기 놔둬."

"지금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으음, 지금 바쁜데? 말 걸지 말지?"

"하지만 아까 드린 아침도 아직 드시지 않으셨잖습니까."

"오호라. 너 지금 잔소리하는 거야?"

"염려가 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염려? 네가? 나를?"

"예."

"말도 안 돼. 네가 날 염려한다고? 이봐. 너 누구야. 우리 하비엘 어디 가둬놨어?"

"...."

"농담이고. 넌 내가 집중하고 있는 거 안 보이냐?"

"예."

"내 진지한 표정이랑 눈빛이 보이지 않아?"

"안 보입니다. 다만-"

하비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온종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허우적대는, 미치고 돈 자의 괴팍한 행동만 똑똑히 보인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 그렇게 또 은근슬쩍 씹는 거 보니까 우리 하비엘 맞네. 근데 어떡하냐. 나 안 미쳤는데."

로이드는 여전히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리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사실 하비엘의 말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설계 스킬로 생성하는 가상의 공간은 나한테만 보이는 거니까.'

실제로 지금도 자신은 시뮬레이션 모드에 띄워둔 마레즈 습지의 지형을 세심하게 조작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연직배수 공법을 응용할 방안을 실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비엘에겐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터.

오직 허공에 허우적허우적 손짓하는 괴상한 모습만 보이고 있을 터였다.

"그냥 뭔갈 궁리하는 거야. 그런 말도 있잖냐. 사람 손에는 온몸의 신경이 다 몰려 있다고."

"그래서요?"

"이렇게 손을 활발하게 움직이면 신경이 자극돼서 두뇌 활동도 활발해지는 거라고 해야 하나. 암튼 나 진짜로 집중해야 되거든?"

"하지만 로이드 님. 식사를 거르시면 안 됩니다."

"아, 진짜. 우리 엄마도 아니고."

"자꾸 이러시면 로이드 님이 계속 식음을 전폐하고 있노라고 남작부인께 고하겠습니다."

"...쯧, 안 되겠네."

"예?"

"쫑알쫑알 시끄러워서 안 되겠다고, 이 바른 생활 사나이야. 알았어. 그럼 여기 안락의자에 좀 앉아볼래?"

"뭘 하시려는 겁니까?"

"얌전히 앉아 있으면 점심 먹어줄게."

"정말이십니까?"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알겠습니다."

하비엘이 안락의자에 앉았다.

로이드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착하지. 그럼 잠깐만 좀 쉬어라. 팩 드레인(Pack Drain, PD) 공법은 원리 면에서 샌드 드레인이나 페이퍼 드레인 공법과 마찬가지로... 재잘재잘... 전용 타설기에 부착된 직경 12cm의 케이싱 4본, 또는 6본을 지중에 동시에 압입한 후... 조잘조잘... 설치 심도는 35m까지 가능하고 설치 직경은 12cm로 시공성이... 블라블라...."

"어? 무슨...."

스르르.

기습적인 자장가 서비스였다.

전공서 내용을 떠올리며 열심히 낭독해주었다.

하비엘의 표정이 멍해지는가 싶더니 눈빛이 나른해졌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면서 몸이 기울었다.

로이드가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기우뚱하는 녀석의 몸을 살포시 받쳐서 안락의자 등받이 쪽으로 밀어주었다.

고이 잠들 때까지 파괴적인 자장가 서비스를 이어갔다.

"플라스틱 보드 드레인, 즉 PBD의 종류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부직포 배수재로서 두께가 약 5mm인 니들펀치 부직포의 판을 약 100mm의 폭으로... 옳지. 잠들어라, 뿅."

"...쿠우울."

어느새 하비엘은 깊은 잠에 푹 빠졌다.

그렇게 환경을 정비(?)한 로이드는 계속해서 시뮬레이션 모드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났다.

하비엘의 잔소리와 자장가 서비스가 매일마다 오갔다.

그동안 마레즈 습지를 간척할 계획이 착착 수립되었다.

"됐어."

닷새째 되는 날.

마침내 로이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이제는 시공 계획에 적합한 작업반과 중장비를 구성할 차례였다.

"뽀동아? 방울아?"

"뽀동!"

"방울!"

달빛 휘영청한 밤이었다.

로이드는 저택 뒤뜰에 나와 있었다.

물론 하비엘은 푹 재워둔 채였다.

"이제부터 너희 새로운 친구를 좀 불러볼까 해."

"뽀동?"

"방울?"

"아무래도 너희도 함께 구경하면 더 괜찮을 거 같아서."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오늘 밤, 그는 새 환상종을 뽑을 생각이었다.

이제부터 시작하게 될 마레즈 습지 간척 시공을 위해서였다.

"가능하다면 물에 관련된 환상종이 나오면 좋겠네. 하지만 뭐, 아니라도 크게 상관은 없어. 너희만큼 덩치 큰 녀석이 나와주면 돼."

마레즈 습지 간척.

그 시공에 로이드는 연직배수 공법을 응용해서 사용할 생각이었다.

연직배수 공법.

그것은 기본적으로 습지 바닥에 수많은 수직 구멍을 뚫고 배수재를 투입하여 연약 지반을 탄탄히 다지는 공법이라 할 수 있었다.

'측량 결과 마레즈 습지는 간척이 시도되기 전의 네덜란드 땅과 비슷했어.'

오랜 시간 진흙과 흙탕물이 켜켜이 고인 저지대.

두터운 이탄층 지반 속에 물이 가득했다.

물렁거리고 쉽게 주저앉는 지형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성공적으로 물을 빼냈을 때는?

'오히려 일이 쉬워져.'

이탄층은 특성상 수분이 빠지면 자체의 하중, 즉, 무게로 인해 아래로 압축된다.

압밀(consolidation)이라고 부르는 현상이었다.

'그러니 물을 빼내는 일이 가장 중요해. 하지만 내겐 연직배수 공법에 쓰이는 장비가 없지. 물을 빼낼 펌프조차 없어.'

물론 비슷하게 대체할 수는 있다.

지면의 구멍은 하비엘이 발파로 뚫으면 된다.

습지의 물은 환상종이 퍼내면 된다.

그렇기에 로이드는 지금 추가로 환상종을 뽑으려 하는 것이었다.

"뽀동아? 방울아?"

"뽀동!"

"방울!"

"새로 뽑힐 아이들이 너희만큼 물을 잘 퍼내 주면 좋겠다."

로이드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뽀동이와 방울이는 물을 퍼내는 능력이 출중했다.

뽀동이는 커다란 용량을 자랑하는 양쪽 볼주머니로.

방울이는 제법 통통하게 불어나는 위장의 크기로.

어지간한 물탱크 뺨치는 양의 물을 담아서 옮길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었을 때 엄청난 덩치로 커질 수 있는 덕분이었다.

'그러니 다른 환상종도 비슷할 거야. 뽀동이나 방울이 정도 덩치를 지닌 환상종이 너댓 녀석만 더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환상종은 각기 특수한 특기와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이 변신했을 때 커다란 덩치 또한 지녔다.

로이드는 그 덩치 자체에서 나오는 장점을 십분 활용할 계획이었다.

'특수능력이 무엇이든 상관없어. 물론 물에 관련된 능력을 지녔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런 행운까진 바라지도 않아. 일단 무조건 큰 놈으로! 변신했을 때 엄청 큰 덩치를 지녀서 입으로건 몸통으로건 많은 물을 옮길 수 있는 녀석으로!'

뽑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실 지금까진 운이 무척 좋았으니까.'

뽀동이와 방울이.

둘 모두 필요한 순간에 가장 적절한 능력을 제공해준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에도 그런 행운이 따를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나으리라.

그렇게 마음가짐을 정돈한 로이드는 랜덤 뽑기 창을 켰다.

딩동.

[환상종 랜덤 뽑기]

[RP를 투자하여 환상종을 뽑을 수 있습니다.]

[강력하고 개성 넘치는 환상종은 자신을 소환한 주인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며 다양한 능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랜덤 뽑기 비용 (3회차) = 100 RP]

'흐음.'

방울이를 뽑던 2회차 때보다 비용이 1.5배 정도 상승해 있었다.

'하지만 괜찮아. 그동안 알뜰살뜰 RP를 모아뒀으니까.'

로이드는 보유한 RP를 점검했다.

무려 931이나 모여 있었다.

최근 남작과 늪지대 피크닉(?)을 다녀오며 추가로 20을 획득한 결과였다.

'RP는 충분해.'

그동안 RP를 얻을 때마다 확 써 버릴까 충동구매 욕구가 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RP가 자신의 최종병기라 여기며 아껴두었다.

그러길 정말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는 뽀동이나 방울이 정도의 덩치와 물 운반 능력을 지닌 환상종 네 마리를 추가하는 것.'

매번 1.5배 정도씩 늘어나는 뽑기 비용이라면?

대략 총 800쯤의 RP가 있으면 가능할 듯했다.

'해보자.'

결심한 로이드의 시선이 아래쪽을 향했다.

[랜덤 뽑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고민 없이 'YES'를 선택했다.

[환상종 랜덤 뽑기를 실행합니다.]

파아앗...!

허공에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창백한 빛이 사방을 물들였다.

공간이 요동치며 생소한 실루엣을 불러왔다.

가장 먼저 엿보이는 것은 동글동글한 몸통이었다.

뒤이어 보이는 머리도 동글.

궁디도 동글.

다리도 동글.

전체적인 실루엣이 마치 공처럼 동글동글했다.

'설마 또 뽀동이랑 똑같은 종류인 건 아니겠지?'

로이드는 시력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새로 나오는 환상종을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따끔한 충격파와 함께 세 번째 환상종이 그 실체를 드러냈다.

파치칙!

"하망!"

뭔가가 앙증맞게 외쳤다.

이쪽의 품을 향해 휘릭 날아와 포옥 안겼다.

로이드는 새로운 환상종을 두 손으로 받아냈다.

손바닥에 통통하고도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감촉을 느끼자마자 녀석의 모습부터 확인했다.

이윽고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설마 이거, 물 먹는 하마가 왜 여기서 나와?"

"하망!"

그의 손바닥 위에서 작고 오동통한 핑크색 아기 하마, '하망이'가 그를 올려다보며 해맑게 웃었다.

45화. 세 번째 랜덤 뽑기 (2)

"하망!"

"...어?"

로이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손바닥 위에서 작고 오동통한 궁디가 씰룩이는 게 느껴졌다.

동글동글한 머리와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물 먹는 하마?"

"하망!"

"정말로 하마야, 너?"

"하마망!"

손바닥 위에 놓인 핑크색 아기 하마가 고개를 뽀잇뽀잇 끄덕였다.

이쪽 덕분에 세상에 나오게 됐다는 기쁨을 느끼는 걸까.

아기 하마는 너무나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깜찍했다.

'하지만 환상종은 이 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

귀여움은 환상종의 첫인상일 뿐.

진짜 모습은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었을 때 드러난다.

그때야말로 환상종이 본연의 진가를 내보이는 순간인 것이다.

로이드는 그 기대를 품으며 아기 하마에게 물었다.

"그래, 만나서 반가워. 너 이름이 하망이, 맞지?"

"하마망? 하망?"

"어떻게 알았냐고? 나 천재냐고?"

"하망!"

"나 천재 아냐. 그냥 평범해."

"하마망! 하망!"

"정말이야. 그냥 네 울음소릴 듣고 추측했을 뿐이야. 아무튼 만나서 반갑다, 하망아."

"하망!"

새로운 환상종은 언제든 환영이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선배 환상종들도 하망이를 진심으로 반겨주었다.

"뽀동!"

"방울!"

"하망!"

세 환상종의 통성명(?)이 끝났다.

로이드가 물었다.

"하망아? 그럼 너도 혹시 설명서 가지고 있어?"

"하망? 하마망!"

"혹시 보여줄 수 있니?"

"하망!"

하망이가 입을 벌렸다.

역시나 그 안에 꼬깃꼬깃 접힌 쪽지가 있었다.

로이드는 쪽지를 받아서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하망이 사용설명서]

[하망이는 사랑스러운 아기 하마입니다. 사랑과 관심으로 보살펴 주세요.]

[하망이는 소환자인 당신에게 절대적인 신뢰와 충성을 바칩니다. 환상종은 평생의 반려동물이자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함부로 유기하지 말아 주세요.]

[하망이는 다른 환상종과 달리 해바라기씨를 먹지 않습니다.]

[하망이는 다른 환상종과 달리 별도의 거대화 변신 능력이 없습니다.]

<하망이 보유 스킬 목록>

[원샷 (Lv. 1)]

'어?'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샷? 스킬이 저거 하나밖에 없다고?'

조금 의아했다.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해바라기씨도 먹지 않고, 거대화 능력도 없어?'

지금까지 뽑았던 뽀동이나 방울이와는 좀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짝 쎄하고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로이드는 쑴펑쑴펑 피어나는 뽑기 폭망의 불길함을 애써 억누르며 하망이에게 물었다.

"저기, 하망아?"

"하망?"

"으음, 이런 질문을 하긴 정말 미안한데, 으음, 혹시 너 해바라기씨 싫어해?"

"하마망? 하망!"

하망이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하망! 하마망! 하망!"

"...그렇게까지 싫은 거냐?"

"하망!"

단호했다.

로이드가 재차 물었다.

"그럼 너, 뽀동이 형아나 방울이 누나처럼 뚜앙, 하고 커지는 것도 안 하는 거야?"

"하망!"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마망!"

"귀여우니까 된 거라고?"

"하망!"

"...."

아, 젠장.

'망했다.'

아무래도 이 아기 하마, 정말로 보유한 능력이 '귀여움' 원툴밖에 없는 환상종인 듯했다.

입맛이 조금은 씁쓸해졌다.

'쯧, 하긴. 지금까지 내내 운이 좋긴 했지.'

생각해보면 이건 환상종 '랜덤' 뽑기였다.

어떤 환상종이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대박도 있고 꽝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뽀동이 때도, 방울이 때도 연달아 운이 좋았어.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원하던 능력을 지닌 아이들이 뽑혀 나왔으니까. 그래서, 으음, 이번에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최소한 능력은 별개로 치고 거대화가 가능한 환상종만 나왔어도 됐을 일이었다.

거대한 덩치로 마레즈 습지의 물을 머금어 빼내려는 것이 그의 기본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거대화가 불가능한 아이가 뽑히다니.'

이번 뽑기는 꽝인 건가.

약간 실망감이 들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걸 티 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이 뽑은 환상종이었다.

뽑았으면 보듬고 책임을 져야 했다.

'그리고 당장은 유용하게 쓰지 못하더라도 나중엔 달라질 수 있으니까.'

새로운 활용법을 찾는다거나.

환상종 자체가 성장한다거나.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하망이를 따뜻하게 품었다.

"그럼 하망아? 여기 품으로 들어올래?"

"하마망?"

"뽀동이 형아랑 같이 들어오자. 옳지. 착하지."

"하망!"

하망이를 품속으로 챙겼다.

그는 남은 RP를 점검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831]

'좋아. 아직 넉넉해.'

워낙 많이 모아두었던 RP였다.

하망이를 뽑고도 아직 800 넘게 남아 있었다.

이 정도면 랜덤 뽑기를 서너 번은 더 실행할 수 있을 터였다.

로이드는 랜덤 뽑기 창을 열었다.

[환상종 랜덤 뽑기]

[랜덤 뽑기 비용 (4회차) = 150 RP]

'역시나 비용이 상승했네.'

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결심한 로이드는 뽑기 실행을 선택했다.

[랜덤 뽑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YES'를 선택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지지짓!

별안간 허공에 스파크가 튀었다.

동시에 'YES'를 선택한 손가락이 찌릿해졌다.

"엇?"

따끔함에 반사적으로 손을 움츠렸다.

이내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환상종 랜덤 뽑기는 하루 1회만 가능합니다.]

[다음 랜덤 뽑기 가능 시간 : 23h 47m 16s]

'헐.'

이런 제한이 있었다니.

생각지 못한 태클에 로이드는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쩝. 오늘은 완전 공친 건가.'

야심 차게 환상종 너댓 마리를 연달아 뽑으려 했다.

내일부터 당장 마레즈 습지 간척 시공을 시작하려 했다.

한데 이러면 계획이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뽑은 환상종은 능력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더 추가로 뽑을 수는 없고. 그럼 내일 시공 시작도 물 건너간 거네.'

차라리 하망이가 거대화라도 가능했다면 좋았을 텐데.

생각할수록 아쉽고 아쉬웠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뭐, 현장 다닐 때 생각하면 낯선 경험도 아니긴 해.'

대한민국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 돈이 급해서 가장 많이 다녔던 일이 현장 노가다였다.

일당을 그날그날 현금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조금 환상도 가졌더랬다.

'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일하면 한 달 동안 받을 현금이 엄청날 거라고 생각했어.'

정말로 그게 가능할 거라고 여겼다.

체력도 나름 자신이 있었다.

의욕은 당연히 넘쳐났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생각했던 것처럼 매일 일할 수가 없었어. 내 의지와는 별개로.'

비가 오는 등 날씨가 궂으면 쉬는 현장이 많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초짜 시절엔 새벽에 인력소까지 나갔다가도 일이 잡히질 않아 공을 치는 때도 있었다.

그나마 꾸준히 현장을 들락거려서 인정받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고정적인 팀이 생겼음에도 그랬다.

사수가 피치 못하게 쉬는 날이면 자신도 얄짤없이 쉬어야 했다.

결국 자신은 데모도, 즉, 사수를 보조하는 조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의외로 일을 못하는 날이 은근 많았지. 한 달 내내 일하면 모으는 일당? 그건 환상에 불과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해선 안 되었다.

그렇게 반강제로 쉬게 되는 날을 잘 지내는 게 또 중요했다.

일이 없다고 그 허전함에 딴짓을 하면?

기껏 전날 받은 일당이 줄줄 녹아 사라진다.

하루 일해서 벌고.

다음날 쉬며 쓰고.

정말로 하루하루 벌어서 먹고 사는 신세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지내는 분들을 로이드는 현장에서 제법 보았다.

'그래서 난 밀린 공부만 하면서 쉬는 날을 보냈지. 돈 모으려고 중간에 휴학을 했어도 그랬어.'

언젠가는 정규직 취업.

그렇게 나름의 나아질 인생을 꿈꾸었다.

정말로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어려웠던 대한민국에서의 기억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이런 상황은 별것 아니잖아.'

잠깐 일이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흘러가지 않는다 해서.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잠시 일이 막혔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예를 들자면 하망이가 그나마 딱 하나 가지고 있는 스킬을 확인해보는 정도가 되겠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로이드는 품속을 들여다보았다.

"하망아?"

"하마앙?"

품속이 따끈해서 졸고 있었던 걸까.

하망이가 조금은 나른해진 까만 눈동자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로이드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배어났다.

"하망아, 혹시 스킬 좀 물어봐도 돼?"

"하망?"

"너 가지고 있는 스킬 있잖아, 원샷."

"하망."

"그거 어떤 스킬이야?"

"하마망? 하망. 하망!"

"물 마시는 거라고?"

"하망!"

하망이가 고개를 뽀잇뽀잇 끄덕였다.

로이드가 물었다.

"음, 나도 물 마실 수는 있는데. 물 마시는 거 좋아해?"

"하망!"

"얼마나 좋아해?"

"하마망! 하망!"

"산더미만큼?"

"하망!"

또 고개를 끄덕이는 하망이.

이쪽을 올려다보며 짧은 팔을 나름 뽀잇 펼쳐 보였다.

"하마망. 하망. 하망! 하마망."

"으음, 지금 팔 벌린 만큼 마실 수 있다고?

"하망!"

팔 벌린 만큼이라.

절로 미소가 나왔다.

'큰 기대는 하면 안 되겠네.'

하망이의 덩치는 주먹 크기에도 미치지 못했다.

팔을 한껏 벌려봤자 한 뼘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겨우 그만큼만 마실 수 있다니.

힘껏 물을 마신다 해도 작은 물풍선 하나쯤 될까 싶은 용량일 듯했다.

'아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섣불리 넘겨짚어 판단하지 말자.

직접 눈으로 확인부터 해보자.

'어쩌면 생각보다 크게 부풀 수도 있잖아. 짐볼 정도 크기라거나. 혹은 그것보다 좀 더 크게.'

일단 그 정도만 되어줘도 그게 어디냐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걸음을 옮겼다.

한밤의 뒤뜰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럼 하망아?"

"하망?"

"물이 엄청 많은 곳이 있는데, 나랑 같이 물 마시러 가볼래?"

"하망!"

하망이가 신이 나는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로이드는 그런 하망이를 토닥토닥 쓰다듬으며 저택을 나섰다.

달빛 아래 영지를 가로질렀다.

기왕이면 물이 많은 곳으로.

남쪽으로 향했다.

마레즈 습지의 북쪽 경계에 도착했다.

왜애애앵-!

습지에 도착하자마자 모기떼가 그를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로이드는 손을 휘휘 저어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모기떼를 쫓아냈다.

그리고 결심했다.

'어휴. 이 습지 빨리 메워 버려야지.'

모기는 만악의 근원이다.

그 만고불변의 진리를 가슴에 새기며 로이드가 품으로 손을 넣었다.

품속에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던 하망이를 조심스레 꺼냈다.

"자아, 하망아?"

"하마앙?"

"자는 데 깨워서 미안해. 너, 물 마시는 거 좋아한댔지?"

"하망!"

'물'이라는 소리에 하망이가 눈을 반짝반짝 동그랗게 떴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좋다니 다행이네. 그래서 여기로 왔어. 앞에 뭐가 있는지 볼래?"

"하망?"

하망이의 동그란 고개가 돌아갔다.

하망이의 눈앞으로 드넓은 습지의 광경이 펼쳐졌다.

"하마아앙?"

하망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눈빛에 황홀한 감정이 스몄다.

마치 사흘쯤 굶다가 뷔페에 입장한 사람의 눈빛 같았다.

로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하망이의 통통한 궁디를 토닥토닥 밀어주었다.

"마음에 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물 실컷 마시라고 데려온 거야."

"하망! 하마망?"

"다 마셔도 되냐고?"

"하망!"

"어, 당연히 되지."

"하마망!"

신이 나는지 하망이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로이드의 쓴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정말로 다 마셔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는 너무 큰 기대는 품지 말자고 생각했다.

하망이의 덩치를 보아선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현실적으로 따지면 양동이 하나 정도의 물을 마시는 게 한계이리라.

이쪽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하망이는 물을 마실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하마망! 하망!"

궁디를 씰룩이며 치켜들었다.

그 반동으로 동그란 고개를 숙였다.

벌린 입을 찰랑이는 습지대 수면으로 갖다 댔다.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엄청난 기세로.

쏴아아아아아-!

"...어?"

습지의 수면이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갔다.

발치 앞에서 찰랑거리던 물이 단숨에 몇 걸음이나 멀어졌다.

그리고 하망이가 실시간으로 거대해졌다!

"하망! 하마망! 하망!"

2미터, 3미터, 5미터, 계속 풍선처럼 부풀었다.

부푸는 만큼 습지의 수면이 내려갔다. 멀어졌다.

그러면 하망이는 덩치를 더욱 불리며, 멀어지는 수면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마망!"

쑤와아아아아-!

습지의 물이 실시간으로 사라졌다.

아니, 하망이에게 빨려 들어갔다.

어느새 한 구역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제야 하망이가 고개를 들었다.

거대해진 머리를 치켜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망! 꺼어-억!"

"...."

로이드는 경이로운 경악감을 느끼며 하망이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러기에 앞서 하망이에게 깔리지 않도록 한참을 황급히 물러서야 했다.

거의 직경 50미터는 될 법한 초거대 물풍선.

그것이 하망이를 올려다보며 느낀 첫인상이었다.

"저기, 하망아?"

"하마앙?"

"너 괜찮아?"

"하망! 하마망!"

"배탈이 나거나 하진 않았고?"

"하망!"

"...."

정말로 멀쩡한가 보다.

로이드는 황당한 눈길로 습지, 아니, 한때 습지였던 땅을 돌아보았다.

찰랑이던 물이 죄다 사라져 있었다.

물이 빠진 자리에 송사리와 올챙이, 그밖의 수중 생물들이 퍼덕거리고 있었다.

물론 습지 전체의 물이 완전히 빠진 건 아니었다.

마레즈 습지는 광활했다.

하망이가 물을 마셔서 없앤 범위는 그런 광활한 습지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래도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습지 일부를 '원샷'해 버린 게 어디인가.

'이거 미친. 완전 초대박이잖아.'

이번 뽑기, 쪽박인 줄 알았는데.

패를 까고 보니 대박, 아니, 초대박이었다.

'이거면 됐어. 추가로 랜덤 뽑기 안 하고도 내일부터 당장 시공, 시작할 수 있겠어.'

습지에 찰랑이는 물을 퍼내는 것.

그 상태에서 연직배수 공법을 응용해서 시행하는 것.

그렇게 지면 아래 이탄층에 배어 있을 물까지 완벽하게 빼내고 압밀 현상을 촉진하여 연약지반을 안정화시켜 농토로 만드는 것까지.

그 모든 시공의 첫발을 내일 곧바로 내딛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본격적인, 마레즈 습지에 대한 무감조지간척(無感潮地干拓) 시공의 시작이었다.

46화. 땅을 만드는 방법 (1)

"오늘부터 우리는 이곳을 비옥한 밭으로 바꿀 거다."

"개굴!"

찰방!

로이드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때마침 늪지의 개구리 한 마리가 대답하듯 크게 울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120명의 공병대 병사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로이드의 바로 곁에 있는 하비엘과 바이에른 경이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누군가는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병사 대부분은 아니었다.

'이번 공사는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 걸까.'

온돌방.

포장도로.

석탄 광산.

일부는 석빙고.

그 후엔 창고 확장과 오크 광부 숙소까지.

한때는 그저 평범한 영지의 평범한 사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들은 이미 수많은 공사로 단련된 정예 공병대원으로 변모해 있었다.

따라서 오늘의 이 연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경험적으로 잘 알았다.

'로이드 도련님은 이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시니까.'

본격적인 시공을 앞두고 하는 연설.

미사여구 따위는 없었다.

쓸데없는 포부나 공치사도 없었다.

로이드의 입을 통해 나오는 연설은 오로지 공병대원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들로만 꽉꽉 눌러 담겨 있었다.

"자, 일단 작업 시의 주의점부터 말해준다. 여긴 늪지대야. 함부로 혼자 움직이지 마. 운 나쁘면 늪에 빠진 발을 뺄 수 없어서 조난돼. 게다가 그렇게 조난되면? 사방에 갈대가 가득해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아. 햇볕에 바싹 말린 육포 꼴 되기 딱 좋은 거지. 그게 싫으면 무조건 2인 1조로 움직인다. 알겠어들?"

"예!"

"그래. 다음 주의점. 날씨가 더워. 습지라서 습기까지 쩔어. 이럴 땐 뭐다?"

"한 시간에 한 번씩 휴식!"

"정답이야. 그리고 또 하나는?"

"휴식 시간마다 소금 탄 물을 마십니다!"

"딩동댕. 소금물은 작업지에 항상 마련해줄 거니까 그걸 마셔. 목마르다고 따로 맹물 챙겨서 벌컥벌컥 들이켜지 마. 핑 돌아서 쓰러진다?"

"저기, 하지만 소금물이 너무 밍밍해서 맛이 없게 느껴지면 어떡합니까?"

어느 공병대원이 쭈뼛쭈뼛 손을 들며 물어왔다.

최근 이래저래 공병대의 규모를 두 배로 늘리면서 들어온 신입인 듯했다.

로이드가 신입 공병대원을 보며 인심 좋은 미소를 빙그레 지었다.

"그래도 마셔야지?"

"구토가 나올 것 같아도 마셔야 합니까?"

"응. 안 마셨다가 쓰러져서 하루 날리면 보너스에서 일당 차감할 거야."

"알겠습니다!"

돈 앞에선 얄짤없다.

특히나 두둑한 보너스를 바라며 공병대로 자원한 병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주의점. 여기 늪지대 물은 하망이가 마셔야 할 물이야. 그러니까 작업하다가 쉬 마렵다고 늪지대에 실례하면 감옥에 가둬 버릴 거다. 용변은 반드시 따로 설치한 간이 화장실에서. 알았어?"

"알겠습니다!"

"자, 그럼 시작하자. 하망아?"

"하망!"

품속에서 하망이를 꺼냈다.

하망이를 처음 보는 공병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련님이 또 새로운 소환수와 계약하신 것 같다고.

잠시 공병대원들이 술렁였다.

그리고 잠시 후, 공병대원들이 경악으로 입을 쩍 벌릴 일이 벌어졌다.

"하망아? 혹시 여기 물 좀 마셔줄 수 있어?"

"하마망? 하망?"

"응, 다 마셔도 돼."

"하망?"

"아하, 마시고 난 뒤에는? 저쪽에 강줄기 지류 보이지?"

"하마망!"

"응, 저기로 굴러가서 뱉으면 돼. 대신 너무 한꺼번에 확 뱉진 말고. 하류에 홍수 나니까."

"하망!"

알았다는 듯 고개 끄덕이는 하망이를 습지에 내려놓았다.

하망이는 기다렸다는 듯 동글동글한 머리를 습지 물속에 쿡 들이박았다.

흡입이 시작되었다.

"흐믕! 호롤로로!"

쑤와아아아아악!

하망이가 물을 빨아들였다.

주위로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마치 거대한 진공청소기가 물을 빨아들이는 듯한 광경.

습지의 수면이 쭈욱 내려갔다.

그만큼 하망이가 부풀었다.

10미터, 20미터, 50미터까지.

"...허억."

미리 내려진 로이드의 지시로 멀찌감치 물러나 있던 공병대원들이었다.

그들의 턱관절 나사가 풀렸다.

놀랄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흐믕!"

거대하게 불어난 하망이가 몸을 움직였다.

로이드가 가리켰던 하천 지류로 굴러갔다.

50미터 물풍선이 구르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망이는 그곳에서 물을 천천히 뱉어냈다.

"흐므응! 오에엑-"

콸콸콸!

하망이에게 흡입되었던 수천 마리의 습지 송사리와 개구리, 수중 생물들이 졸지에 하천 지류로 주소지를 옮기게 되었다. 강줄기 생태계의 뉴비가 된 것이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이 몇 번에 걸쳐 반복되었다.

습지의 물을 흡입하고.

거대하게 부풀어서 구르고.

흡입한 물을 강줄기에 뱉고.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공병대원들의 멍한 혼잣말과 함께 근방의 찰랑이던 물이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습지 전체의 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 근처 구역의 물이 제거된 것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시공을 위한 준비로는 이 정도로 충분했다.

로이드의 지시가 떨어졌다.

"다들 들어, 삽."

"삽!"

"이제부터 내가 표시하는 곳의 지면에 남은 풀뿌리와 썩은 식물 잔해를 모조리 제거한다. 구호와 함께 힘찬 스타트."

"우오오!"

공병대원들이 투입되었다.

열심히 땀 흘리며 삽질했다.

제방 쌓을 곳에 남은 갖가지 수중 식물의 썩은 줄기와 뿌리 등을 파내고 제거했다.

로이드 또한 직접 삽질을 하며 병사들을 진두지휘했다.

'이 기초 과정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제방에 누수가 생기고 부실해지기 딱 좋으니까. 읏차!'

제방을 쌓는다고 하면 그냥 흙을 두툼하게 쌓아서 둔덕을 만들면 된다고, 쉬운 공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단순하게 생긴, 일상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흔한 제방에도 정교한 과학과 공학이 깃들어 있었다.

어린이 흙 쌓기 놀이를 하듯 흙만 많이 쌓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경우가 특히 그랬다.

'여긴 축축한 연약지반이니까.'

반드시 벌개제근 등의 지반에 대한 정리 작업이 필요했다.

지면 아래쪽에 깃들어 있는 물을 빼서 지반을 안정시키는 것도 필수였다.

"하비엘?"

"예."

로이드가 하비엘을 돌아보았다.

해야 할 일을 미리 들은 하비엘이 나섰다.

검을 뽑았다.

로이드가 표시한 지면에 연달아 검을 찔러넣었다.

푸큭! 푹! 푸극!

충돌하는 마나 써클.

그 충격력이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수직으로 지층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윽고 직경 50센티, 10미터 깊이의 수직 구멍이 4미터 간격으로 습지 곳곳에 새겨졌다.

로이드가 외쳤다.

"바이에른 경!"

"알겠습니다."

로이드의 외침에 바이에른 경이 화답했다.

그가 지휘하는 공병대원들이 움직였다.

11미터 길이로 일정하게 자른 대나무 줄기를 가져왔다.

하비엘이 발파로 지면에 뚫은 10미터 수직공에 쿡쿡, 심어 넣었다.

내부를 쭉 뚫어서 만든, 일종의 대나무 빨대였다.

그다음은 뽀동이의 차례였다.

"뽀동아!"

"쁘등!"

대기하던 뽀동이가 뚠실한 궁디를 흔들며 달려왔다.

양쪽 볼주머니에 가득 담고 있던 것들을 지면에 쏟아냈다.

"쁘드등! 오애애액-"

촤아악!

미리 강가에서 채취한 대량의 모래였다.

"공병대! 모래를 수직공으로!"

"명을 받듭니다!"

삽을 들고 대기하던 공병대원들이 움직였다.

뽀동이가 쏟아낸 모래의 산에 달려들었다.

모래를 퍼서 수직공에 넣었다.

자연히 대나무 빨대를 중심으로 둔 모래 말뚝(sand pile)이 수직공을 채우게 되었다.

'좋아. 다행히 잘되고 있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현장의 상황.

그 모든 과정을 지휘하며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연직배수공법, 그중에서도 샌드 드레인(Sand Drain, SD) 공법이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어.'

연직배수공법(Vertical Drain Method).

이것은 1936년에 처음 소개되고 1940년대 후반부터 기술적 급진전이 이루어진, 연약 지반 개량 공사법이었다.

즉, 물렁한 점성토 지반 사이에 인공적인 수직 구멍을 다수 파내고 배수재를 투입함으로써 지반에서 물이 빠지는 것과 압밀을 촉진시키는 공법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현대적인 공법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기에는 장비가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나름 잔머리를 썼다.

하비엘의 기술, 발파로 수직공을 파냈다.

그렇게 은발의 기사가 진동 타입식 샌드 드레인 시공장비의 역할을 대체했다.

거기에 미리 준비한 대나무 빨대와 모래를 채워넣었다.

나름 샌드 드레인과 페이퍼 드레인 방식을 혼합했다.

그리고 뽀동이를 지면 위에 구르게 했다.

"뽀동아? 굴러!"

"뽀동!"

데골데골!

수십 톤에 달하는 뽀동이가 마구잡이로 굴러다녔다.

그 하중이 고스란히 지층에 가해졌다.

마치 푹 젖은 채 쌓인 휴지를 누르듯.

지층에 배어 있던 수분이 빠져나왔다.

땅에 심은 모래 말뚝으로 모여들었다.

쿠그극....

지면이 미세하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곳은 수만 년째 습지를 이루고 있던 땅이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막대한 양의 식물이 물에 가라앉아 제대로 분해되지 못했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섬유질이 두껍게 퇴적되었다.

섬유가 다량의 수분을 머금었다.

이탄층(泥炭層)이라 불리는 물렁물렁한 지층을 이루었다.

한데 지금, 그 이탄층에 압력이 가해져 강제로 수분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곳곳에 일정하게 심은 건조한 모래 말뚝이 수분 배출을 더욱 부추겼다.

꾸그극...!

수분이 빠져나가며 이탄층이 압축되었다.

자체의 하중으로 더욱 뭉치며 단단해졌다.

압밀 현상이었다.

로이드는 다음 지시로 그 현상을 더욱 부추겼다.

"하망아? 대나무 빨대 좋아해?"

"하망!"

"그럼 마셔줄래?"

"하마망!"

대기하던 하망이가 땅 곳곳에 심은 대나무 빨대로 다가갔다.

빨대를 통해 모래 말뚝으로 고인 물을 후루룩 들이마셨다.

"흐믕! 흐므믕!"

지층 속 물이 하망이에게 고스란히 흡입되었다.

하망이가 거대한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 무게가 또 지층에 가해졌다.

압밀 현상이 더욱 가속되었다.

그때쯤 로이드와 공병대가 다음 과정의 시공에 돌입했다.

습지 전체를 둘러싸는 제방 쌓기였다.

"뽀동아! 뱉어!"

"쁘등! 퉤!"

뽀동이가 덤프트럭의 역할을 해주었다.

수시로 대량의 흙을 볼주머니에 담아왔다.

흙을 뱉어내면 공병대원들이 로이드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바쁘게 삽을 놀리며 토대를 튼튼히 쌓았다.

물론 로이드가 미리 설계한 구조대로였다.

'당연하지. 그냥 막 쌓았다간 비탈면이 침식되거나, 제방 안쪽 비탈면이 누수로 유동화하거나, 혹은 파이핑 현상으로 토사가 유출돼서 비탈 기슭이 함몰될 테니까.'

그 모든 현상은 제방 파괴로 이어질 것이다.

제방이 무너지면 하천의 물이 범람할 것이다.

범람한 물이 개간지를 다시 축축한 늪으로 만들 것이다.

따라서 모두의 행복지수가 힘찬 하락 곡선을 그리게 될 그런 엿 같은 상황을 예방하기 위한 꼼꼼한 설계는 필수였다.

제방 비탈면을 가급적 완만하게 만들었다.

제방의 높이, 즉 제방고는 앞으로 압밀로 내려앉을 땅의 높이를 고려하여 최대한 높게 잡았다.

그만큼 하천의 물을 막아줄 앞비탈과, 개간지 쪽에 놓일 뒷비탈 사이의 높이차가 발생했다.

뒷비탈 경사면에 생길 압력을 받쳐줄 측단을 든든하고 여유롭게 쌓았다.

양쪽 비탈면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뽀동이가 제방 비탈면을 바쁘게 데골데골 굴러다녀야 했다.

"뽀도동! 뽀도도도동!"

데골데골!

비탈면을 굴러다니는 뽀동이의 뚠실한 몸은 불도저, 혹은 진동 롤러 그 자체였다. 그 후엔 공병대원들을 투입해 잔디까지 줄떼 방식으로 촘촘하게 심었다.

잔디 뿌리가 비탈면 흙을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앞으로 토사가 쉽게 흘러내릴 일이 없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제방에 내릴 빗물의 배수를 위한 측구수로까지 꼼꼼하게 팠다.

그렇게 공사에 매달리길 열흘째.

마침내 한 구역의 공사가 끝났다.

'후아. 됐다.'

로이드는 땀을 닦아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열흘 전까지만 해도 온통 수초로 가득하던 눅눅한 늪지는 이제 없었다.

지금 그가 둘러보는 곳에는 온통 마른 땅과 든든한 제방이 가득했다.

비로소 한 구역의 간척과 제방 쌓기가 완료된 것이었다.

물론 로이드는 여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아직 간척되지 않은 면적이 훨씬 넓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움직여라! 다 끝나면 보너스 파티다!"

로이드의 독려를 받으며 공병대원들이 다음 구역으로 투입되었다.

이곳 마레즈 습지는 전체가 하나의 늪으로 이어져 있지 않았다.

습지라는 방대한 구역.

그 속에 수십 개의 늪이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었다.

따라서 늪 하나를 하나의 섹터, 구역으로 잡고 나누어서 공사할 수 있었다.

즉, 모듈식 공사 진행이 가능한 셈이었다.

게다가 마침 이곳 지방은 여름이 건조했다.

좀처럼 비는 오지 않으면서 땡볕만 내리쬐었다.

습지 간척 공사를 하기에 이렇게 좋은 날씨가 따로 없었다.

덕분에 공사에 더욱 탄력이 붙었다.

"더위 먹지 않게 조심하고! 휴식 시간은 철저히! 구호와 함께 제3구역, 투입!"

"우오오-!"

로이드와 하비엘.

환상종과 공병대.

그 모든 작업 인원이 혼연일체가 되었다.

파고, 마시고, 뱉고, 퍼내고, 담으며, 쌓고, 다지고.

그 반복되는 과정에 모두가 익숙해졌다. 능숙해졌다.

처음엔 열흘 걸리던 한 구역의 공사 기간이 점점 짧아졌다.

열흘에서 아흐레, 아흐레에서 여드레, 여드레에서 엿새까지.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났다.

모두의 팔뚝이 단단해지는 만큼 제방이 길어졌다.

한 방울의 땀이 흐를 때마다 눅눅하던 습지가 뽀송해졌다.

원래 마레즈 습지는 버려진 땅이었다.

곳곳에 질퍽대는 늪이 가득했다.

진득한 늪 속엔 이름 모를 생물이 우글거렸다.

당연히 건물을 짓는 것도, 농사를 짓는 것도 불가능했다.

쓸모가 없는 땅.

개발할 수도 없는 땅.

그렇게 마레즈 습지는 대대로 없는 땅 취급을 받아왔다.

인간이 이 땅을 처음 활보하기 전부터 그랬다.

수만 년이 넘는 시간 내내 그랬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여겨졌다.

지금까지 버려진 땅이었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로이드 님이 이걸 바꾸신 거야.'

영지민들도.

남작과 남작 부인도.

수시로 이 놀라운 광경을 구경하기 바빴다.

쓸모없던 습지가 논과 밭으로 바뀌고 있었다.

수십 년도 아닌, 단 3개월 만에 변모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경이로운 변화를 이끌어낸 인물이 자신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린 지금까지 없었고 상상해보지 못했던 종류의 기적을 목격하고 있는 건지도.'

어느샌가.

영지 구성원들의 로이드를 향한 시선이 다시 한 번 바뀌고 있었다.

그것은 호의를 넘어선 일종의 존경이었다.

딩동.

[프론테라 남작령의 모든 구성원이 당신이 보인 마술과도 같은 기적에 크나큰 감탄과 존경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커다란 사회적 업적에 따른 보너스로 대량의 RP가 특별 지급됩니다.]

47화. 땅을 만드는 방법 (2)

딩동.

[프론테라 남작령의 모든 구성원이 당신이 보인 마술과도 같은 기적에 크나큰 감탄과 존경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커다란 사회적 업적에 따른 보너스로 대량의 RP가 특별 지급됩니다.]

[45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1131]

'읏차!'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레즈 습지에 대한 대대적인 간척 시공.

그 과정이 막바지로 접어들며 분위기가 무르익는 걸 느끼긴 했다.

최근 공병대원들이나 영지민들의 자신을 보는 시선이 다시금 변했구나 싶었다.

그저 놀라움이 아닌, 감탄이 섞인 시선.

그냥 호의가 아닌, 뭔가 우러르는 듯한 눈빛.

그래서 이런 형태의 보상을 대략 예상했던 바였다.

'예상 그대로야. 딱 좋아.'

간척 시공에도 성공하고.

대량의 RP도 두둑이 챙기고.

순식간에 알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RP가 천 단위로 쌓였으니까.'

이걸 어디에 쓸까.

어떻게 투자하면 좋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졌다.

하지만 로이드는 상상 속 즐거움에 안주하지 않았다.

지금은 잠깐의 보상에 머무르며 즐거움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런 공사는 마무리가 무엇보다도 중요해.'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한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햇볕 쨍쨍한 푸른 하늘이 예전보다 조금은 더 높게 느껴졌다.

공사가 진행되는 내내 자신과 공병대원들의 등짝을 지져댔던 뙤약볕도 전보다는 좀 약해진 느낌이었다.

바야흐로 가을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비 내리는 계절도 함께 오겠지.'

이곳 프론테라 영지가 있는 지방은 봄철과 늦가을에 많은 비가 내린다.

한여름과 한겨울은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적고 건조한 편이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는 간척 시공이 무척 편했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젠 달라질 거야.'

가을이 깊어 겨울의 문턱이 다가오면 집중호우가 내릴 것이다.

그러면 지금껏 열심히 만든 이 간척지의 제방과 배수 성능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르게 되리라.

그중에서도 로이드는 배수 시설을 빈틈없이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가 올 때마다 물을 제대로 빼내야 해. 안 그러면 기껏 만든 이 간척지가 다시 물에 잠길 테니까."

"지대가 낮아져서 그런 겁니까?"

"어. 정답."

하비엘의 물음에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했다.

"여긴 이탄층을 압밀시켜 만든 땅이니까."

물렁했던 습지는 이제 완전히 단단해져 있었다.

지층에 잔뜩 배어 있던 물이 제거됐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흙 입자 사이가 좁혀지며 전체적인 지층이 단단해졌다.

동시에 내려앉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물이 빠지니까 그 부피만큼 지반이 침하하는 거지."

"침하라면, 내려앉았다는 뜻입니까?"

"어. 지대가 낮아진 만큼, 비가 오면 물이 더 쉽게 고일 거야. 빠져나가기도 어려울 거고."

"그러면 큰일일 텐데요. 흙을 더 쌓아서 지대를 올리면 어떨까요?"

하비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이드가 피식거렸다.

"아니. 그 방법으로는 해결이 안 돼. 왜냐. 역시나 이곳 땅이 이탄층이라서."

"무슨 말씀이신지."

"이탄층은 특성상 위에 흙을 쌓으면 그 무게 때문에 지반이 다시 내려앉아 버리거든. 그래서 아무리 흙을 열심히 쌓아도 소용이 없어요. 소개팅만 많이 받는다고 여자친구가 생기나? 아니잖아."

"소개팅이 뭡니까."

"그런 게 있어. 노력해도 마음대로 잘 안 되는 거."

"로이드 님의 얼굴처럼 말입니까."

"어. 네 불면증처럼."

예고도 없이 명치로 훅 들어오는 하비엘의 돌직구를 능숙하게 돌려보내며 로이드가 웃었다.

"어쨌건, 그래서 수차가 필요한 거야."

수차란 수력을 동력으로 삼아 움직이는 물레방아다.

그리고 이곳 마레즈 간척지는 두 개의 강줄기 지류에 둘러싸여 있다.

제방 바로 바깥에 사시사철 동력원으로 이용할 물이 있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면 내가 왜 간척지 곳곳에 수로를 팠겠냐."

"간척지에 고일 물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함이었던 겁니까."

"어. 한곳으로 모으는 거지. 그리고 지류의 수력을 이용한 스크루형 펌프 수차로 물을 제방 밖으로 퍼낼 거야."

간척 시공 후의 간척지 관리.

로이드는 마침 그 훌륭한 모델을 알고 있었다.

바로 킨더다이크(Kinderdijk)와 같은 네덜란드의 간척지였다.

'킨더다이크도 여기와 비슷했지.'

이탄층으로 된 습지였다.

오랜 시간을 들여 제방을 쌓고 물을 빼냈다.

압밀 현상을 거치며 땅이 단단해졌고, 동시에 낮아졌다.

그렇게 낮아진 지대에 수시로 들어차게 되는 물.

그 침수에 대비해서 네덜란드인들은 풍차를 만들었다.

국토 주위를 흐르는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기온이 높아 눈이 덜 쌓이고, 편서풍의 영향으로 항상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어온다는 이점을 십분 활용한 것이었다.

'훌륭한 롤모델이야. 참고하기 딱 좋아. 풍차만 빼고.'

여기선 구태여 풍차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지류의 수력을 활용할 수차면 충분했다.

게다가 남작령에는 대부분 영지가 그렇듯 전통식 스크루형 펌프 수차를 만들 줄 아는 기술공도 있었다.

"어쨌건 이제 슬슬 수차 건설도 시작될 거야. 미리 주문해뒀으니까."

사실이었다.

실은 간척 공사를 시작하던 첫날에 이미 기술공을 불러왔던 그였다.

미리 두둑한 선금까지 쥐여주며 주문까지 마친 터였다.

'슬슬 올 시간이 됐는데.'

마침 오늘이 기술공이 현장에 오기로 한 날이었다.

한데 어쩐 일인지 오라는 기술공은 오지 않았다.

대신 부르지도 않은 불청객이 그를 방문했다.

'뭐야, 저건.'

마레즈 간척지 남쪽.

제법 먼 곳에서 여기로 다가오고 있는 일군의 무리가 보였다.

인원수는 스무 명 남짓.

모두 말을 타고 있었다.

'기술공? 아닌데.'

공병대나 작업자들도 아니었다.

특히 선두의 백마에 탄 사내는 제법 호화로운 망토까지 요란하게 걸치고 있었다.

그걸 본 로이드는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의 내용을 떠올렸다.

'라코나 자작?'

프론테라 영지의 남쪽.

그곳에 마주한 이웃 영지가 라코나 자작령이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는 그곳의 영주인 라코나 자작이 무척 사치를 즐기는 인물이라고 잠깐 언급이 되었었다.

'이 날씨에 망토라. 걔 맞는 거 같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남쪽의 불청객이 근처까지 다가왔다.

그들이 다가오자마자 거두절미하고 물어왔다.

"그대는 이 건설 현장의 책임자인가?"

말을 걸어온 이는 흑마를 탄 사내였다.

가벼운 차림이었다.

하지만 다부진 체격과 허리춤의 검, 능숙하게 말을 다루는 모양으로 보아 기사가 확실해 보였다.

하비엘이 앞으로 나섰다.

"말씀에 예의를 갖추시길. 이분은 프론테라 남작령의 주인인 프론테라 남작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 님이십니다. 그쪽이 모시는 분은 누구이시기에 이곳을 찾으셨는지."

"로이드 프론테라? 흠, 우린 이곳의 영주에게 용건이 있다. 남작은 어디에 계신가."

"...."

하비엘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이쪽에 영주의 아들이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도 기사가 확실할 저쪽의 사내는 예를 표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있었다. 게다가 남작과 만나기만을 일방적으로 청했다.

안하무인인 태도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하비엘은 그런 상대의 무례를 따지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발끈한 그가 준엄한 일침을 내뱉으려는 찰나, 로이드가 재빠르게 먼저 나선 까닭이었다.

"혹시 리오네로 라코나 자작이십니까?"

"물론 맞소. 프론테라 가문의 공자는 먼저 자작님께 예의를 갖추...."

"워워. 귀족끼리 얘기하는데 떨거지는 좀 빠지시고. 라코나 자작 맞으십니까?"

로이드의 시선이 망토를 두른 사내, 자작을 향했다.

흑마 탄 기사의 표정이 굳었다.

스무 명에 달하는 자작의 기사들 전체가 그러했다.

그럴수록 로이드는 더욱 흐뭇하게(?) 웃었다.

"반갑습니다. 아까 우리 애가 소개했다시피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 자작께서는 오늘 어떤 용무로 이곳을 찾으셨는지?"

"...."

라코나 자작은 대답 대신 로이드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로이드도 그런 자작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가을이 다가오는 뙤약볕 아래.

자작과 로이드 사이에 묘한 냉기가 흘렀다.

결국, 먼저 침묵을 깬 쪽은 자작이었다.

"소문에 따르자면 프론테라 가문 장남의 행실이 매우 독특하고 방자하다고 하더니."

"제 소문을 접하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 지금 이렇게 만나고 보니 과연 그 소문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영광입니다. 제가 좀 잘났어야 말이죠."

"...."

"어쨌건, 이렇게 여기까지 찾아오신 용건을 밝혀주시겠습니까?"

"가급적 그대의 아비인 남작과 직접 의논하고 싶네만."

"전 가급적 자작님의 용무를 먼저 확인하고 싶습니다."

"쯧. 한마디도 지려고 들질 않는군."

"감사합니다."

"영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찾아왔네."

"영토라 하심은?"

"이곳 마레즈 습지 말일세."

자작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염소수염을 기른 그의 입매가 씰룩거렸다.

"나는 국왕 전하의 봉신으로서 영지를 가꾸고 수호할 의무를 지니고 있네. 한데 최근 불미스러운 소식이 들려오더군. 이곳, 마레즈 습지에 관한 소식 말일세."

"이곳에 관한 소식이라니요?"

"프론테라 가문이 나와 아무런 협의도 없이 이곳 습지를 무단으로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 말이네."

자작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도 알겠지. 마레즈 습지는 프론테라 남작령과 내 영지 사이에 걸쳐져 있다는 것을."

"예, 물론 압니다."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마레즈 습지는 남작령과 자작령 사이에 위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북으로 반반을 나누어 북쪽이 남작령이 영토였고, 남쪽이 자작령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자작이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마레즈 습지 남쪽 지대의 권리는 엄연히 내게 있네. 생각해보게. 영지라는 것은 위대한 국왕 전하에게 다스림을 위임받은 봉토가 아니겠는가."

"예, 그렇지요."

"그러면 그 봉토를 다스리는 것이 누구의 의무이겠는가."

"영주겠지요."

"그렇지. 이제야 조금은 말이 통하는군."

자작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로이드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하, 이젠 좀 알겠구만.'

혹시나 해서 확인해보고자 이야기를 들어봤더니 역시나였다.

이렇듯 남쪽 영지의 자작이 찾아온 이유.

그 저의가 대략 파악이 됐다.

간단한 것이었다.

'마레즈 습지는 대대로 쓸모없는 땅이었지. 한데 그걸 이웃 영지에서 개발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거야. 처음엔 의아했다가, 곧바로 계산기를 두들겼겠지. 그리고 개발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을 거야. 어째서? 손 안 대고 코 풀려고. 이렇게 뒤늦게 나타나서 권리를 주장하려고. 원래 여기부터 여기까지가 자기네 영지 땅입네, 하고. 공짜로 숟가락을 얹는 거지. 똥파리처럼.'

이익이 된다면 악착같이 달려드는 똥파리들.

어디에나 이런 종류의 인간이 있었다.

그가 살아왔던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를 속여 몰락시킨 사기꾼들이 그러했다.

하루가 머다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보이스피싱범이 그랬다.

범죄가 아닌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시때때로 '한 입만'을 시전하는 얌체 같은 녀석들.

혹은 게임에서도 내내 잠자코 있다가 막타만 챙겨가는 놈들.

'어차피 세상이 다 그런 거야. 양심? 그것보단 이득이 먼저인 놈들이 득시글하는 곳인 셈이지, 뭐.'

이곳도 크게 다르진 않으리라 여겼다.

새로이 개발하는 마레즈 습지.

이곳을 넘볼 똥파리들을 충분히 예상한 그였다.

물론 눈앞의 남작도 그가 예상한 똥파리 후보 중의 하나였다.

'너무 뻔해.'

지금 이런 상황.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마레즈 습지 개발을 처음 계획했던 때부터 그랬다.

'그러니까 당신, 상대를 잘못 골랐어.'

로이드는 피식 웃으며 자작을 쳐다보았다.

같잖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토록 땀 흘리며 개발한 이 땅.

이런 곳에 공짜로 숟가락을 얹으려 들다니.

이참에 아예 다시는 그런 생각을 못하도록 못을 박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쪽의 생각을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일까.

자작은 여전히 침을 튀겨가며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그러니 프론테라 가문은 마레즈 습지의 남쪽 절반을 내게 양보함이 도리에 맞는 일이 될 것일세. 왜냐. 이 땅이야말로 전하께서 내게 하사하신 신성한 봉토이며, 나는 충심을 다하여 봉토를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지. 알겠는가?"

"...."

"그러니 당장 남작을 불러와 주게나. 더는 나로 하여금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지 말게."

"...."

"내 말이 안 들리는가?"

"잘 들립니다. 귓가에서 설치는 똥파리 날갯짓이 참 요란하군요."

"뭐?"

자작이 인상을 썼다.

로이드가 귓구멍을 후비적 팠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조용했다.

아무도 없어서?

아니었다.

오히려 주위엔 사람이 바글거렸다.

자작이 데려온 스무 명의 기사.

삽질을 하다가 일손을 멈추고 있는 수십 명의 공병대원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해서 쭈뼛거리는 수차 기술공도 보였다.

즉, 도합 백 명이 넘는 시선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며 귀를 활짝 열고 있었다.

수많은 구경꾼들.

딱 적당한 판이 벌려진 셈이었다.

'특히나 이런 다툼에는 증인이 중요하니까.'

무대는 이만하면 만족이다.

로이드는 빙긋 웃었다.

여전히 말에서 내리지 않고 있는 자작을 올려다보았다.

"하시는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어떤 주장을 하시는지도 잘 들었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문득 든 생각인데, 자작님께선 참 헛소리에 조예가 깊으신 듯합니다. 혹시 가정교육을 독학으로 받으셨는지?"

"...뭐?"

"그럼 이제부터, 어째서 자작님의 이야기가 뚜껑 덜 닫혀서 말라비틀어진 물티슈보다 무가치한 헛소리인지를 법적으로 하나하나 조목조목 짚어보는 유익한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껏 빙그레 머금은 미소.

그 미소와 함께 로이드가 신랄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팩트 폭력의 시작이었다.

48화. 땅을 만드는 방법 (3)

아프다.

주먹으로 맞는 것도 아닌데.

발길질에 채인 것도 아닌데.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무척이나 얼얼하게, 저리도록, 아프다.

라코나 자작은 그렇게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백 명이 넘는 눈과 귀가 모인 곳에서 무방비로 팩트 폭력에 노출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정리해보겠습니다. 자작님은 마레즈 습지의 남쪽 절반이 자작령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겠지요?"

"당연하다."

"그래서 이번에 간척된 마레즈 개간지의 남쪽 절반이 자작님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겠지요?"

"그 또한 당연하다."

"하지만 그 주장에는 중대한 허점이 있습니다."

"허점?"

"네. 마레즈 습지가 오랜 시간 버려진 땅이었다는 허점이지요."

"그게 어째서 허점이 된다는 말인가."

"존엄하신 국왕 전하가 수호하는 왕국의 토지법에 어긋나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뭐?"

주춤하는 자작.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왕국의 토지법상의 법률 제321호. 불모지의 개척에 관한 특례법에 그 근거가 있습니다."

"토지법? 321호?"

"네. 버려진 불모지가 개척되었을 때의 토지 소유권을 정리한 법률이지요. 그럼 이제부터 차근차근 감상해보실까요?"

"그게 무슨...."

"제1조. 목적. 이 법은 장기간 방치된 불모지의 개척과 개척지에 대한 소유권의 확립을 목적으로 한다."

"이보게?"

"제2조. 정의. 이 법에서 불모지란 100년 이상 방치되어 어떠한 사람도 1년 이상 정기적으로 거주하지 아니하고, 어떠한 경작 행위도 발생하지 아니한 땅을 말한다."

"잠깐만 내 말부터...."

"제3조. 자격 요건. 다음 각 호의 요건을 모두 갖춘 토지는 개발된 토지로 간주한다. 첫째,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자본과 인력을 투입하여 개발한 땅일 것. 둘째. 사람의 안정적 거주를 위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 땅일 것. 셋째, 장기간 농경 행위가 가능한 땅일 것. 넷째, 법령의 세칙으로 정한 작물을 1회 이상 수확한 땅일 것."

"저기, 내 말부터 좀 먼저...."

자작이 황급히 주절거렸다.

하지만 그런 항의(?) 따위는 청산유수처럼 이어지는 로이드의 말에 금방 묻혀 버렸다.

"제4조. 소유권. 개발된 토지가 제3조 각 호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을 경우, 그 토지는 개발 주체의 소유로 인정되며 절차에 따라 왕국의 토지등기부에 등기할 수 있다."

"...."

"제5조. 왕국법 규칙. 이 법의 시행에 필요한 사항은 왕국법 규칙으로 정한다. 여기까지입니다. 다시 듣기는 1번. 상담원 안내 따윈 없으니까 닥치고 패배를 인정하시죠."

"...."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자작은 할 말을 잃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그는 어처구니가 없는 시선으로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프론테라 남작의 장남.

남작령의 구제불능 망나니.

그도 소문으로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매일 술독에 빠져 살며 온갖 행패는 다 부리는 놈이라 했다.

그러던 놈이 최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정신을 차렸다고도 했다.

그래서 내심 얕보았다.

그 소문의 망나니가 앞을 막았을 때도.

자신의 주장에 뭔가 반박을 시작할 때도.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 주제에 반박해봤자 얼마나 하겠느냔 생각만 품었다.

거슬리는 이놈을 얼른 입 다물게 하고 남작이나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아니었다.

'이놈, 만만한 놈이 아니야.'

아니, 만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젊다고 쉽게 보고 달려들었다간?

동전 한 푼도 건지기 어려울 것 같았다.

자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왕국 토지법에 저런 법령이 있었나? 처음 듣는데. 그렇지만 저렇듯 당당한 태도로 나오는 걸 보니 아예 거짓말로 꾸며낸 건 아닌 것 같고. 설마 저놈, 내가 이렇게 나설 것을 대비했던 건가?'

그래서 저 법령까지 미리 알아두었던 걸까.

오싹.

문득, 자작은 팔뚝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사실이라면 얕보지 말아야 할 정도가 아니라 무섭도록 철저한 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와서.'

자작은 생각을 정리했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마레즈 습지는 드넓었다.

그 면적의 절반에 해당하는 남쪽 지대.

그걸 개발비 하나 안 들이고 공짜로 삼킬 기회였다.

자작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라. 저 새파란 놈의 말에서 허점을 찾아. 찍소리도 못할 반박을 해서... 앗, 그거다.'

반짝.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

자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가 자신만만해진 눈길로 로이드를 내려다보았다.

"왕국의 토지법이라. 그거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그렇지요? 법은 언제나 공정하니까 말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나 같은 사람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주는 것이겠지. 지금처럼."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무슨 말씀이긴. 이런 말씀이지. 자네, 이곳 마레즈 습지를 개발하긴 했지만 중요한 요건을 아직 갖추지 못한 것 같은데."

"중요한 요건이라니요?"

"경작 말일세, 경작. 후후흐!"

자작이 흐뭇하게 웃었다.

사냥감의 약점을 발견한 짐승의 웃음이었다.

"분명 방금 자네가 왕국의 토지법을 읊으며 말했지. 불모지가 개발된 땅으로 인정되려면 여러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그중엔 작물을 한 번 이상 수확한 땅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을 텐데."

"네, 그랬지요."

"푸하핫! 그러니 자네가 애송이라는 것이야. 자네, 작물을 수확하긴 했나?"

자작이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승리를 확신한 자의 미소였다.

'내가 이겼다, 애송이 놈!'

뿌듯했다.

법까지 들먹이며 정교한 반격을 시도한 젊은 애송이 놈.

그런 놈을 똑같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분명, 그렇다고 여겼다.

로이드가 피식 웃음을 흘리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이거 참 재미있네요. 작물이라."

당황하기는커녕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한 웃음.

혹은 나름 발악하는 상대의 모습을 구경하며 즐기는 듯한 미소.

그렇게 로이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잖아도 마침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입니다. 잠깐, 타고 있으신 말을 조금 옆으로 움직이게 해주시겠습니까?"

"...뭐?"

"두 발짝이면 됩니다."

"지금 무슨... 어, 어엇?"

"옳지. 워워."

자작이 당황하는 사이, 로이드가 손을 뻗었다.

자작의 백마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삐를 자연스레 옆으로 이끌었다.

백마가 한 차례 푸르르 투레질하더니 옆으로 두 걸음을 움직였다.

자작이 말릴 틈도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예예, 잠시만요."

자작이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건성으로 대답한 로이드가 허리를 숙였다.

땅으로 손을 뻗었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곁들이며 말했다.

"어휴. 다행히 무사하군요. 아까부터 하필이면 여기 말을 세우셔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혹시나 이거 밟으실까 봐 말이죠."

"뭐?"

"여기, 보이십니까?"

쪼그려 앉은 로이드가 지면을 가리켰다.

자작의 의혹 가득한 시선이 로이드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발견했다.

"잡초?"

"땡. 양파입니다."

로이드가 지면 위로 길쭉하게 솟은 초록색 잎 한 덩이를 잡았다.

주위의 땅을 조심스럽게 파내며 당겼다.

뾱.

적갈색 둥근 덩어리가 탐스럽게 뾱, 뽑혀 나왔다.

로이드의 입가 가득 흐뭇한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어이쿠 이런. 축하합니다. 마레즈 개간지의 역사적인 첫 수확을 라이브로 감상하셨군요. 서비스로 구경 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전 야박하지 않거든요. 어쨌건 이거, 알이 튼실해서 참 다행이네요, 허허허."

"...."

자작의 표정이 멍해졌다.

로이드가 양파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냈다. 자작에게 내밀었다.

"자, 이로써 작물을 수확해야 한다는 법적 요건이 완벽히 갖춰졌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거, 먼 길 오셨는데 기념품으로라도 챙겨가시죠. 빈손으로 돌려보내려니 손님께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자작은 양파를 받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이게 실화냐 싶은 멍한 눈길로 로이드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벙쪄 있기는 자작이 거느린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화를 낼 겨를도 없었다.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자작의 말안장에 양파를 묶어주었다.

닫혀가는 관 뚜껑에 땅땅 못질하듯 딱 잘라 말했다.

"그럼 조심히 살펴 돌아가시지요. 하비엘?"

그의 경쾌한 목소리가 하비엘을 불렀다.

"귀한 손님이시다. 돌아가는 길 잘 모셔드려라."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비엘이 눈치 빠르게 나섰다.

이미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던 은발의 기사였다.

로이드가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도 했다.

바로 그가 양파를 키운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후우. 양파 농사라는 거, 은근 어려웠지.'

하비엘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창 연직배수공법을 시행하던 때였을 것이다.

정해진 구역의 지면에 구멍을 다 뚫은 다음 날 아침이었던가.

하여 이번 공사에서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 여기던 때였던가.

로이드가 자신을 불렀더랬다.

대뜸 이런 명령을 내렸더랬다.

'너 오늘부터 양파 좀 키워라.'

처음엔 무슨 은어인가 싶었다.

특별한 뜻을 담은 말을 자신이 제대로 못 알아들었나 싶었다.

한데 아니었다.

그 명령은 진짜로 양파를 키우라는 말이었다.

로이드가 알뜰살뜰 챙겨준 호미와 거름을 받고서야 그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당연히 반발심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공사 참여야 영지의 발전을 위한 것이었기에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낱 양파를 키우는 일이라니.

'어째서 제게 이런 일을 시키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건 기사의 일이 아니었다.

농부의 일이었다.

한데 어째서 이런 걸 자신에게 시키는 걸까.

최소한 그 이유라도 제대로 알고 싶었다.

그래서 물었다.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대수롭잖은 것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네가 키울 그 양파가 이 마레즈 개간지를 지켜줄 거니까.'

'....'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냥 흘려들을 수만은 없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 말까지 들은 판국에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뭔가 뜻이 있겠지.

숨기고 있는 목적이 따로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는 순순히 호미와 거름을 받아들었다. 이곳에 양파를 심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농사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뭔가를 땅에서 키우는 일이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일인 줄은 처음 알았어.'

그는 고아였다.

다섯 살 시절 전쟁통에 부모를 잃었다.

때마침 뻗어온 프론테라 남작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길에서 굶어 죽었을 것이었다.

그 은혜를 갚고자 열심히 검술에만 매달렸다.

주군을 지키는 검이 되겠노라는 맹세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다 보니 농사를 지어본 경험 같은 것은 전혀 쌓질 못했다.

양파 키우기도 마찬가지였다.

'농부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야 했지.'

수많은 조언을 들었다.

잔소리도 꽤나 들었다.

덕분에 양파를 무사히 키워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 양파 한 알이 정말로 마레즈 개간지를 자작으로부터 지켜냈다.

'로이드 님은 설마 이런 상황을 전부 예상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감탄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로이드의 치밀하고도 뻔뻔한 대응에 쿵짝을 맞춰야 할 때였다.

"프론테라 남작을 모시는 기사 하비엘 아스라한입니다. 여기서부터 돌아가시는 길은 제가 에스코트해드리겠습니다."

재빨리 나섰다.

자작이 어버버하는 사이.

능숙하게 예를 갖추었다.

뭐라 반박이 나오기 전에 자연스럽게 자작 일행을 이끌었다.

"가시죠. 이쪽으로."

"그읏...."

이제야 상황을 온전히 깨달은 자작이 치를 떨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이미 늦은 일이었다.

남작령의 공병대를 비롯한 수많은 눈과 귀가 자신에게 쏠린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 애송이에게 논리로 완전히 밀려 버렸다.

한데 여기서 물러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인다면?

논리에 수긍하지 않고 화를 낸다면?

자신의 위신만 뭉텅 깎일 것이다.

스스로 명예에 먹칠을 하는 꼴이 될 것이다.

'제대로 한 방 먹었구만.'

자작은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한 차례 로이드를 노려보곤 말 머리를 돌렸다.

하비엘의 에스코트를 받아 물러나면서 연신 이를 갈았다.

그렇게 자작이 떠나간 자리에는 뿌듯해진 표정의 로이드와, 그런 그를 바라보는 공병대 병사들의 기분 좋은 웅성거림이 남았다.

"방금 봤어? 들었어?"

"당연히 봤지. 라코나 자작 표정이 완전, 어후."

"분통 터져서 어쩔 줄을 몰라하더만. 크큭큭."

"어휴, 쌤통이다."

"그러게. 온통 질척거리던 여길 우리가 어떻게 개발했는데."

"후우. 맞아. 종일 삽질하면서 만든 땅인데 거기 공짜로 숟가락을 올리려 드냐, 저 자작은."

"진짜 양심 없는 거지. 그리고 로이드 님이 저 양심도 없는 놈을 제대로 물 먹여 쫓아내신 거고."

"아, 진짜 통쾌했다. 보는데 속이 쑥 내려가네."

공병대원들이 기분 좋게 히히덕거렸다.

이 땅은 온통 질퍽대던 습지였다.

쓰지도 못할 버려진 땅이었다.

한데 그랬던 이곳을 누가 바꾸었는가.

바로 자신들이었다.

자신이 쥔 삽 한 자루.

종일 삽질을 하느라 흘린 수많은 땀.

그러한 땡볕 아래의 노력과 노동으로 일구어낸 땅이었다.

한데 그 절반이나 되는 구역을 공짜로 내놓으라는 자작이 공병대원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로이드와 자작의 논쟁을 들으며 내심 로이드를 힘껏 응원하게 되었다.

자연 로이드의 승리가 자신들의 승리처럼 느껴졌다.

'우리 도련님 최고!'

현장의 모든 병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랑스러웠다.

뿌듯했다.

물론 그들의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의 대상, 로이드는 모두를 향해 인상만 팍팍 썼지만.

"뭘 그렇게 보시나들? 혹시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겼냐?"

파파팍!

핀잔이 떨어지자마자 공병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언제 논쟁을 구경했느냐는 듯 빛의 속도로 삽질을 재개했다.

벌써 로이드와 함께 수많은 공사를 소화한 공병대원들. 그들도 이제는 로이드의 성격을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크크, 이제 곧 보너스다!'

말은 저렇게 까칠하게 해도 사실은 공병대를 아끼는 로이드 도련님.

저렇게 일하라고 잔소리를 해도 실은 휴식 시간을 철저하게 보장해주는 도련님.

그리고 큰 공사가 끝날 때마다 두둑한 보너스를 꼬박꼬박 챙겨주는 고마운 도련님.

이제 곧 받게 될 보너스 생각에 공병대원들의 삽질이 싱글벙글해졌다.

왕국 동부 구석의 시골, 프론테라 남작령.

이 영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공사가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아직 몰랐다.

이 공사가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걸.

더욱 큰 개발 계획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렇게 로이드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가 간척의 시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개척의 시간이 될 터였다.

로이드는 간척 공사의 마무리인 수차 제작에 앞서 남작에게 한 가지 계획을 건의했다.

그의 계획을 들은 남작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남작령에서 이른바 '마레즈 개간지 이주 장려책'이 발표되었다.

덕분에 그 장려책의 내용을 전해 들은 남쪽의 이웃, 라코나 자작은 집무실에서 만지작거리던 양파 한 덩이를 벽에다 풀스윙으로 내던지고 말았다.

49화. 완벽한 완공식 (1)

"뭐가 어쩌고 어째!"

후우웅!

라코나 자작의 팔뚝이 허공을 맹렬히 갈랐다.

힘줄 잔뜩 선 손목과 손가락이 공기를 헤집었다.

그 손에 들려 있던 양파 한 덩이가 힘껏 내던져졌다.

그긁!

양파가 내던져지는 순간 마찰이 일어났다.

불그스름한 양파 껍질 한쪽이 검지와 중지 끝에 살짝 걸렸다.

마치 강속구 투수가 야구공 실밥을 긁어 던지듯, 양파에 회전이 걸렸다.

양파가 강렬한 투심 패스트볼의 궤적을 그렸다. 날아갔다. 집무실을 시원하게 쫙 가로질렀다.

그리고 벽면에 꽂히듯 부딪쳤다.

퍼석!

양파가 뭉개졌다.

이 한 덩이 양파를 키우기 위해 쏟아부은 하비엘 아스라한 경의 피, 땀, 눈물이 이웃 영주 집무실 벽지에 전위적 무늬로 알차게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라코나 자작은 그따위 사실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성난 눈길을 돌렸다.

애꿎은 행정관을 노려보았다.

"방금 들었던 보고, 다시 듣지."

"아, 예...."

행정관이 어깨를 바싹 움츠렸다.

주섬주섬 종이를 펼쳤다.

프론테라 남작령에서 제작하고 배포한 전단이었다.

"아까 드렸던 말씀대로 프론테라 영지에서 마레즈 개간지에 대한 이주 장려 정책을 담은 전단을 배포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단의 내용이...."

"후우, 계속."

"아, 예. 이번에 발표된 이주 장려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행정관의 낭독이 이어졌다.

"개간지로 이주를 결정한 주민은 3년간 보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파종할 씨앗을 무상으로 받으며, 세금이 전액 면제된다. 또한, 흉작이 발생할 경우 1가구당 1일 1끼니의 곡식이 제공될 것이다."

거기까지 읽던 행정관이 실눈을 떴다.

"또한, 마레즈 개간지로 이주한 주민은 향후 5년간은 개간지에서만 거주해야 할 의무를 지니며,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가 제한된다. 으음, 이 부분은 제일 아래쪽에 아주 작게 쓰여 있군요."

"끄응."

자작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아까도 들었을 때 혈압이 올랐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또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놈들이.'

이주 장려책을 아주 작정하고 짰다는 게 딱 느껴졌다.

단순히 엄청나게 퍼주는 정책을 줄줄이 써놔서?

아니었다.

핵심은 전단지 가장 아래에 자그맣게 쓰여 있는 마지막 줄에 있었다.

'이주를 결정하고 들어가면 무조건 5년은 그곳에 의무적으로 정착해야 한다는 거잖아.'

들어갈 땐 마음대로겠지만, 나올 땐 아니었다.

최소 5년.

그 시간 동안 개간지에 의무적으로 묶여 있어야 했다.

한데 위쪽의 엄청나게 퍼주는 듯한 혜택들은?

'딱 이주 초기 3년까지야. 그게 핵심이지.'

보호 혜택은 딱 3년.

그런데 의무 거주 기간은 5년이었다.

그럼 혜택이 끝나고 남는 2년은?

'아무런 부양책 없이 고스란히 버텨야 하지. 혹시나 농사가 망하면? 그대로 굶어 죽을 수밖에 없어.'

그게 이번에 프론테라 남작령이 발표한 이주 정책의 무서운 점이었다.

라코나 자작을 가장 초조하게 만든 부분이기도 했다.

개간지로 이주할 농민들이 걱정되어서?

물론 아니었다.

저 정책에 농민들이 보일 반응이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일단 3년 동안의 엄청난 보호 혜택만 보이겠지. 이후에 혜택 없이 지내야 하는 남은 의무기간 2년은? 알아도 무시할 거다. 아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처음 3년 동안 개간지를 열심히 가꾸면 남은 2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여길 거야.'

그게 사람의 심리다.

남들은 망해도 자신은 잘할 수 있다고.

수많은 통계를 보여줘도 자신은 다를 거라고.

쉽게 객관적인 태도를 잃고 자신감부터 장착한다.

그래서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게를 열었다가 망한다.

각종 투자에 손을 댔다가 재산을 날리기도 한다.

이후의 부담은 눈앞의 혜택으로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심리 때문이었다.

'그 부분을 아주 교묘하게 파고들었어.'

얼핏 보면 엄청난 혜택이 가득할 듯한 정책.

그러나 파고 보면 뒷감당이 무시무시할 정책.

처음엔 개간지에 들어가서 행복할 터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며 만만치 않다고 여기게 될 터다.

그때부터 개간지에 들어간 농민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서 농경지를 가꾸게 될 터.

'애초부터 그게 목적인 거야.'

혜택 뒤에 숨은 2년 동안의 부담감으로 이주민을 압박하는 것.

그 압박감을 최대한의 노동력으로 발휘하도록 이끄는 것.

그렇게 5년이 지난 뒤에는?

마레즈 개간지는 완벽히 풍요로운 땅으로 거듭날 것이리라.

그래서 자작은 배가 아팠다.

부럽고 샘이 나서 속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저 개간지의 남쪽 절반이 원래 자작령의 영토였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

자신의 것이었어야 했을 땅이었다.

이렇게 손가락만 빨며 물러나기엔 너무나 아까운 땅이었다.

포기하기 싫었다.

개간지가 정착되기 전에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어떤 짓을 벌어서라도 뺏어오고 싶었다.

자작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에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옳지. 그거다.'

자작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껏 눈치를 살피고 있던 행정관을 향해 명했다.

"자네는 지금 당장 염료 공방 감독관을 불러오도록."

명령을 내리는 자작은 어느새 한쪽 입술만으로 웃고 있었다.

계획의 성공을 확신하는 미소였다.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로이드의 계획도 착착 진행되었다.

꾸준히 간척되어 완공을 앞둔 마레즈 개간지.

그곳에 이주할 개척민들에 대한 지원 정책을 널리 알렸다.

생각보다 지원자가 제법 있었다.

하지만 간혹 불안감을 드러내는 지원자도 있었다.

이주 장려책에서 보장하는 보호 혜택 기간이 끝나는 3년 뒤에 대한 불안감은 아니었다.

'혹시 비가 와서 물이 안 빠지면 어떡하지?'

그것이 모두가 가장 걱정하는 바였다.

무리도 아니었다.

이곳은 오랜 시간 습지였다.

워낙 저지대라서 비가 올 때마다 인근의 강에서 물이 넘어와 고였다.

그렇게 까마득한 과거부터 늪지가 곳곳에 펼쳐진 땅이었다.

그런 곳을 사람의 힘으로 바꾸었다.

제방을 쌓고 물을 빼서 마른 땅으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싶은 불안감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곳 농민들에겐 아직은 '마레즈 개간지'보다는 '마레즈 습지'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당연히 늪지대로만 여겼던 땅.

그런 인식이 바뀌기엔 아직 시간이 모자란 까닭이었다.

물론 로이드도 그런 농민들의 불안한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

완공식이었다.

"자자, 줄 서시고!"

총 6대의 스크루식 펌프 수차가 완성되는 날이었다.

남작 부부와 공병대, 그리고 영지민 대부분이 제방에 모였다.

마침 하늘이 돕는지 큰 비가 내렸다.

습지 전체가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정교하게 고안한 배수로를 통해 빗물이 고였다.

그리고 수차가 기다리고 있는 배수장으로 모여들었다.

배수장에 모인 물이 수차 속으로 들어갔다.

아직 나무 냄새도 가시지 않은 새 수차가 힘차게 돌아갔다.

스크루식 펌프가 회전하며 배수로의 물을 끌어올렸다.

중력을 거슬러 반대편 배수관으로 밀어냈다.

콰아아아!

배수관을 통해 방출된 물이 제방 바깥쪽에 흐르는 강줄기 지류로 쏟아져 나갔다.

동시에 제방 안쪽, 배수장에 모인 물의 수면이 빠르게 내려갔다.

수차가 제대로 성능을 증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곧 비가 그쳤다.

로이드는 남작 부부와 영지민들을 이끌었다.

모두를 데리고 직접 걸으며 개간지의 구석구석을 보여주었다.

물론 아직은 휑뎅그렁한 황톳빛 대지였다.

듬성듬성 자라난 잡초 외에는 볼 것도 없는 빈 땅이었다.

하지만 개간지를 구경하는 농민들에겐 그 무엇보다도 탐스럽게 보이는 땅이었다.

빈 땅을 새로운 작물로 채우는 것.

그것이 농민들이 가장 바라는 바였기 때문이었다.

"여보, 여기 생각보다 좋지 않아요?"

"그러게 말이오. 아까 그렇게 비가 쏟아졌는데...."

"물이 고이긴커녕 웅덩이도 보이질 않아요."

"그렇구려. 이쪽에도, 저쪽에도 배수로가 있어서 물이 다 빠진 건가?"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신기하네요. 여기 땅은 계속 촉촉한 걸 보면요."

"빠질 물만 빠지고 흙이 머금은 물은 그대로 남은 것 같은데."

"네, 그렇네요. 게다가 여기 이 흙 좀 봐요."

"어디 보자. 으음, 이건 거름 뿌릴 필요도 없겠는데?"

"그렇죠? 이렇게 기름진 땅은 처음 봐요. 여긴 뭘 심어도 전부 잘 자랄 거 같아요."

"...."

"여보. 우리, 언제까지 남의 땅만 소작하며 살 수는 없잖아요?"

"...."

"애들도 슬슬 커 가는데...."

"...."

"큰애가 공부가 하고 싶대요. 공부를 시키려면 도시로 보내야 할 텐데, 그러려면 돈이...."

"...알겠소. 내 진지하게 생각해보리다."

농민들이 곳곳에서 땅을 매만지고, 배수 시설을 직접 목격했다.

개간지 곳곳에 거미줄처럼 만들어진 배수로.

그 모든 배수로가 로이드의 계산에 따라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덕분에 어떤 큰 비가 와도 개간지에 물이 과도하게 고이는 일이 없었다.

농사에 딱 필요한 만큼의 물만 흙에 남았다.

나머지 물은 모조리 배수로를 통해 빠져나갔다.

게다가 이곳 흙의 상태도 농사에 최상의 조건이었다.

무려 수만 년 동안이나 늪지였던 땅이었다.

그 긴 세월에 걸쳐 막대한 양의 식물과 생물이 죽고 물에 푹 불어나고 절었다.

그 상태로 반쯤 부패하여 켜켜이 쌓였다.

쌓인 유기물이 그대로 흙이 되었다.

말 그대로 거름 뿌릴 필요도 없는, 최상의 비옥한 토지였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든든한 배수 시설.

농부라면 눈이 돌아갈 비옥한 토지.

마레즈 개간지를 구경하는 영지민들의 마음이 실시간으로 쿵더덕쿵덕 뛰었다.

물론 로이드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개간지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 영지민들.

그 앞에선 어느새 로이드가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잽싸게 차려놓은 계약 테이블과 함께였다.

"자, 여기 편하게 앉아. 개간지 구경은 잘했어?"

"아, 예. 덕분에...."

"감상이 어때? 아, 물 마실래?"

"가, 감사합니다."

"그래, 날씨가 덥지?"

"아닙니다. 으음, 뭐랄까요. 땅을 둘러보니 더운 기분도 들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당장 심을 수 있을 작물들이 떠올라서요."

"허허. 개간지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봐?"

"예."

"그럼 혹시 여기로 이주할 생각이 있는 거야?"

"으음, 물론 그러고 싶기는 한데 말입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 아실진 모르겠지만, 제가 한스 씨네 밭을 소작하고 있는 게 있어서...."

"아하. 과수원 하는 그 양반?"

"예."

"왜? 그 사람이 당신 못 보내준대?"

"으음, 아무래도 좀...."

"그거면 됐네. 해결이네. 이번 이주 장려 정책, 들어봤지?"

"아, 예."

"그거 영지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거야."

로이드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씨익 웃었다.

농부가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왔다.

"공식적인 지원이라시면?"

"이주를 원하는 소작농을 막을 수 없다는 거지."

"하지만 지금 맡고 있는 밭은...."

"내일 당장 여기로 옮겨올 거 아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

"그럼 그 밭에서 맡은 일까지 마무리하고 건너오면 되지. 설마 평생 남의 땅만 일구면서 살고 싶었던 거야? 그런 거 아니잖아?"

"아, 예."

"그렇지. 그거지. 이게 그런 기회란 말이야. 당.신.땅.을.가.질.수.있.다.고.요."

"...."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거야. 5년 동안 정말로 힘껏 땅을 일궈야 해."

"그, 그건 알고 있습니다."

"어때, 자신 있겠어?"

"...."

"싫음 말고."

"아, 아닙니다!"

"아냐? 해볼 거야, 그럼?"

"예."

"정말이지? 나중에 무르는 거 없어. 마지막 기회야."

"하겠습니다."

"...좋아. 그렇게까지 원한다니까 어쩔 수가 없네."

로이드가 마지못한 듯 테이블 아래로 손을 넣었다.

능숙한 손길로 계약서 한 장을 팔랑 꺼냈다.

계약서 이곳저곳의 항목을 딱, 딱 가리켰다.

"그럼 서명하자. 여기, 또 여기. 그리고 여기. 이름만 쓰면 돼."

"저기, 제가 글자를 잘 몰라서...."

"그럼 지장으로 하면 되겠네. 손가락."

"아, 예."

"여기 찍고. 옳지. 잘하네. 다음 여기. 그렇지."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년부턴 여기서 힘껏 땅을 일구는 거야."

"알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가봐. 그럼 다음 사람!"

농부가 계약 테이블에서 일어나며 꾸벅 인사했다. 물러났다. 그 뒤로도 수많은 영지민들이 줄을 서 있었다. 주로 자신의 땅을 갖지 못한 소작농들이었다.

'됐다. 개간지 이주, 이걸로 완벽해.'

로이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날, 단 하루 만에 마레즈 개간지 이주 계약서가 모조리 동나고 말았다.

완벽한 완공식이었다.

거기에 로이드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수확까지 줄줄이 이어졌다.

딩동.

[기념비적 시공 업적 획득]

[당신은 오랜 세월 늪지대였던 곳을 인상적인 방법으로 간척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습지였던 이곳, 마레즈 개간지는 이제 농부들의 땀방울과 웃음 속에 풍작이 약속되는 풍요로운 땅으로 가꾸어질 것입니다.]

[당신은 로라시아 대륙의 토목공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세운 토목공학적 업적이 왕국의 건설 역사에 기록됩니다.]

[기념비적 업적에 따른 특별 보상이 지급됩니다.]

50화. 완벽한 완공식 (2)

[기념비적 업적에 따른 특별 보상이 지급됩니다.]

'어?'

로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레즈 개간지의 완공식.

개간지로 이주하려는 영지민들과의 계약을 모두 마친 직후였다.

한창 계약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그의 눈앞에 뜻밖의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옆에서 서류 정리를 돕던 하비엘이 물어왔다.

아마도 이상하게 보일 터다.

갑자기 허공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것도 아냐. 음, 조금 눈이 뻐근해서."

"피곤하면 조금 쉬시죠. 제가 마저 정리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고."

로이드는 하비엘에게 나머지 서류 정리를 맡겼다.

옆으로 돌아앉아서 눈가를 주무르는 척했다.

그동안 그의 눈동자는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읽어내리고 있었다.

[보상으로 대량의 스킬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측량 스킬의 레벨이 2단계 상승하였습니다.]

[중급 측량 : Lv 3]

[한 번에 측량 가능한 면적 : 3,600㎡]

[스킬 전용 옵션 : ① 토지 가격 감정, ② 지하 스캐닝]

[설계 스킬의 레벨이 2단계 상승하였습니다.]

[중급 설계 : Lv 3]

[한 번에 설계 가능한 구조물의 면적 : 216,000㎥]

[스킬 전용 옵션 : ① 도면 출력, ② 평면도 표시(2D), ③ 시뮬레이션 모드]

'헐, 이거 뭐야.'

그러잖아도 슬슬 RP를 투자해서 측량과 설계 스킬을 성장시킬까 고민하던 그였다. 특히 이번 마레즈 습지를 개발하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대규모의 면적을 다루기엔 모자란 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렇듯 때마침 스킬 레벨을 두 단계나 알아서 올려주다니.

'심지어 RP도 소모되지 않았어. 완전 공짜야.'

공짜 좋아하면 머리 벗겨진다?

그런 말 따위는 믿지 않는 로이드였다.

공짜라면 자다 벌떡 일어나서라도 챙겨야 한다.

그것이 로이드의 철칙이었다.

한데 보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진짜배기가 뒤에 더 남아 있었다.

딩동.

[대규모 면적을 설계 및 시공하며 특별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 특별한 경험이 <스킬 : 설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스킬 옵션, ② 평면도 표시(2D)가 강화됩니다.]

츠츠츠!

눈앞에 설계 스킬의 옵션, 평면도 표시(2D)의 내용이 떠올랐다.

옵션 내용을 표시하던 글자가 실시간으로 지워지고 새로 써졌다. 내용이 바뀌었다.

바뀐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스킬 전용 옵션 ② : 평면도 표시(3D) - 설계한 결과물을 원하는 실제 지형에 3D 형태의 홀로그램 구조물로 표시하여 보여줍니다. (특 : 나만 보임)]

"...."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이건 미쳤다.

진심으로 미친 옵션이었다.

'이건 설계만 하면 그 지형에 완전히 조감도를 미리 만들 수 있다는 거잖아.'

거의 실물과 똑같은 형태의 홀로그램 3D 조감도.

그걸 미리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언제든 수정할 수 있어. 게다가 이걸 시뮬레이션 모드와 결합하면, 구조물의 안정성을 실시간으로 점검하면서 시공을 할 수 있다는 뜻인 거야.'

대박.

아니, 대박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실로 활용하기에 따라 가능성이 무한한 옵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시험해보자.'

로이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하비엘의 반대편.

제방 비탈길 일부를 재빨리 측량했다.

측량한 공간에 시험 삼아 간단한 형태의 움막을 설계했다.

그리고 설계한 움막의 모델을 제방 비탈에 적용했다.

딩동.

[설계 스킬 전용 옵션 ② : 평면도 표시(3D)가 적용됩니다.]

츠츠츠츠츠....

실시간으로 제방 비탈면에 점과 선이 생겨났다.

확장되고, 연결되었다.

이윽고 3D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움막이 떡하니 세워졌다.

"어이. 야."

로이드는 손을 뻗어 하비엘의 어깨를 툭툭 쳤다.

홀로그램 움막이 세워진 제방 비탈면을 가리켰다.

"저기 좀 볼래?"

"예?"

"저기, 뭐 없냐?"

"제방이 있습니다만."

"그거 말고 다른 건?"

"로이드 님의 손가락 끄트머리가 시야에 함께 보이는군요. 새삼 느끼는 거지만 손가락도 참 못생기셨습니다."

"...다른 건 더 안 보이는 거지?"

"예."

"오케이. 됐어."

"됐다니, 뭐가 말입니까."

"네가 아무것도 못 봐서 됐다고."

"...."

하비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보며 로이드는 확신했다.

'평면도 표시 옵션이 3D로 발전했어도 여전히 나한테만 보이는구나.'

그 외에도 자잘한 보상이 더 이어졌다.

제방을 건설하느라 매일 삽질을 한 덕분일까.

연장숙련 : 삽 스킬이 초급 3레벨로 올랐다.

그만큼 삽을 사용할 때의 체력 소모가 20% 줄어들게 되었다.

삽의 움직임은 10% 빨라지고, 강해졌다.

삽을 놓칠 확률도 30% 낮아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RP까지.'

두둑하게 들어왔다.

남작 부부와의 호감도가 각각 5가 올랐다.

하비엘과는 3, 바이에른 경과 2가 올랐다.

거기에 영지민 전체와의 관계도 3이 올랐다.

덕분에 무려 206 RP를 챙길 수 있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1337]

'이러다가 배 터지겠네, 아주.'

보상을 알리는 메시지가 정말이지 끝도 없이 줄줄이 떠올랐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읽느라 바빴다.

온갖 보상과 특별 보너스를 받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저택으로 돌아와서도 그랬다.

아니, 막연하게 숫자로만 보이던 메시지 형태의 보상들보다 훨씬 피부로 선명하게 와 닿는 감정적 보람이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 도련님."

집사 역할을 하는 행정관.

일꾼 노릇을 하는 하인들.

살림꾼인 여러 하녀들까지.

모두가 앞다투어 마중 나와 자신을 반겨주었다.

'예전엔 복도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던 이들인데.'

노골적인 두려움과 불안감.

진심이 담긴 혐오감까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내비치던 사람들이었다.

한데 이제는 너무나 달라졌다.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보기만 해도 웃음을 지었다.

그저 영지의 도련님을 만나서 짓는 웃음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우러르는 사람과 마주하였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가운 미소였다.

솔직히, 조금은 얼떨떨할 정도였다.

"어, 흠흠! 내가 좀 매력이 넘치긴 하지. 아, 하하하."

침실로 돌아오는 내내 멋쩍은 웃음만 지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대접은 처음 받아봤기 때문이었다.

'여기선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그랬지.'

언제나 쩌리였다.

그저 가난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특히 집안이 몰락한 뒤론 정말이지 볼품없었다.

빚에 시달리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난 후엔 그야말로 밑바닥 찌꺼기처럼 살아야 했다.

새 옷을 살 엄두도 낼 수 없어 항상 후줄근한 차림이었다.

고시원에서 기본으로 주는 쌀밥과 김치로만 연명했다.

그러다 보니 안색도 별로 좋지 못했다.

언제나 얼굴빛이 누르스름했다.

자신감도 사라졌다.

표정도 어두웠다.

자신을 가꾸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어딜 가든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과 모임에 가도 은근히 따돌림당했다.

돈이 없으니 행사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조별과제라도 걸리는 순간이 제일 난감했다.

다 같이 카페에 가서 회의라도 할라치면, 커피 값도 부담이 상당했다.

고작 아메리카노 한 잔이 몇천 원씩 한다는 사실에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덕분에 조원들에게 거지 같다는 핀잔까지 들어야 했다.

학교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편의점에 가도 좀도둑 아닌가 하는 의심 어린 시선을 받기 일쑤였다.

고시원 총무는 마주칠 때마다 까칠한 눈매로 다음 달 원비 밀리면 안 된다는 말만 지껄여댔다.

그런 밑바닥 같은 대접은 급전이 필요해서 지원했던 생동성 알바 때가 절정이었다.

생동성 알바.

생물학적 동등성 실험.

출시를 준비하는 신약의 생리적 임상시험을 받는 알바였다.

며칠간 병원에 갇혀 정해진 약을 먹고, 멍하니 앉아만 있다가, 시간마다 피를 뽑혀야 했다.

마치 실험용 가축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시절에 그나마 날 환영해주던 사람은... 으음, 고시원 1층 김밥헤븐 아주머니밖에 없었구나.'

단골로 가끔 기본 김밥 한 줄만 사 먹던 김밥헤븐.

거기 들어갈 때 듣는 '어서 와, 총각'이라는 평범한 인사가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반겨주는 말이었다.

진짜로 그게 다였다.

딱히 서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자신이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발닦개 같은 존재라는 것.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의외로 덤덤할 수 있었다.

대신 그만큼 노력했다.

생활비를 벌려고 애썼다.

공부도 뒤처지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그래서 일주일에 일곱 번은 코피를 쏟아야 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고, 무사히 졸업하고 자격증을 따면 형편이 나아질 거라고, 일말의 희망을 품으며 힘껏 살았다.

그렇게 비좁은 고시원 방을 번데기 고치 삼아 세상에서 굴렀다.

'뭐, 덕분에 처음 여기 왔을 때도 적응하기 편하긴 했지.'

어딜 가든 환영받지 못하던 인생.

혐오나 무시하는 눈초리쯤엔 익숙했다.

설령 그 눈빛에 멸시가 잔뜩 담겨도 괜찮았다.

이쪽을 망나니 도련님이라고 헐뜯어도.

개차반 같은 진상이라고 험담해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늘상 당하던 무시에 비하면 오히려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그렇게 욕을 먹어도 세 끼 식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로도 이미 좋았다.

그랬는데....

'이게 제대로 인싸 된 기분이란 건가.'

혐오와 무시 어린 시선은 이제 없었다.

멸시나 험담도 더는 없었다.

대신 존경과 호의 담긴 시선과 따스한 환영의 말이 자신을 반겼다.

남작 부부와의 저녁 식사에서도 그랬다.

"자아, 여기. 많이 먹거라."

"아, 예."

"이것도 좀 먹어볼래?"

"어, 네. 우물우물."

"넌 왜 그렇게 고기를 안 먹니?"

"우물우물, 꿀꺽, 지금 먹고 있는데요?"

"그래도 더 많이 먹어야지."

"...."

남작 부인이 식사 내내 옆자리에 붙어 앉았다.

이쪽의 접시가 빈다 싶을 때마다 하녀를 불렀다.

고기며 빵, 과일에 쿠키까지 잔뜩 담아오게 했다.

행여나 샐러드라도 두 번 연달아 집어먹으면 어김없이 고기 좀 먹으라는 잔소리가 날아왔다.

'이거, 체하겠네.'

이미 뱃속은 경고의 신호를 계속 보내오고 있었다.

위장이 부르다 못해 아주 그냥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남작 부인의 식사 코칭은 끝이 날 줄을 몰랐다.

건너편에서 흐뭇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남작마저 한 패거리(?)였다.

"그동안 큰 공사를 힘껏 이끄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더냐. 얼굴이 아주 해쓱해졌구나."

"으음, 딱히 살이 빠지진 않았습니다."

"아니야. 얼굴이 반쪽이야."

"저기, 그건...."

"좀 더 팍팍 먹거라. 사내가 포크질이 그렇게 좀스러워서야 어디에 쓰겠느냐."

"으으. 저는 이제...."

"훈제로 구운 오리 고기가 먹고 싶었다고? 자, 여기 있단다."

"...."

차라리 죽여줘.

로이드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반대로 웃었다.

위장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푸근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이 시기에 남작가가 겪었던 운명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원래 지금쯤이면... 그래, 남작 부인이 몸져누웠지.'

이 시기의 소설 속.

남작 부부는 저택에 머무르지 못했다.

저택에서 쫓겨나 지인의 거처에 식객으로 머물렀다.

그저 머무르기가 민망하여 남작 부인이 소매를 걷었다.

직접 집을 청소하고, 설거지를 도맡으며 밥값을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남작 부인은 평생 험한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처음엔 남작 부인의 노동에 고마워하던 지인조차 점점, 그녀가 해주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됐다.

그래서 더욱 많은 일을 떠맡겼다.

한여름부터 가을철까지.

그렇게 남작 부인은 익숙하지 않은 가사노동과 스트레스에 과도하게 시달린 끝에 병을 얻는다.

결핵이었다.

밤마다 기침에 피가 배어났다.

곰팡내 눅눅한 이불보에 눈물이 배어났다.

비록 죽음은 면했지만,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었다.

결국엔 부인을 간호하던 남작마저 결핵에 걸리게 되었다.

그렇게 실의와 절망에 빠진 부부는 결국, 몰래 저택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때 가장 포근했던 이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바로, 모두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이 장소에서.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로이드는 생각했다.

자신이 이곳에 온 지 어느덧 반년 남짓.

그동안의 시간을 열심히 보내서 다행이라고.

소설 속에서와 같은 불행이 이 가족을 덮치지 않아서 정말 안심이라고.

그렇게 남작 부부를 바라보며 조금은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저만 계속 이렇게 먹으려니까 좀 이상한데요. 두 분께서도 좀 드시죠."

"아니다. 우린 이미 충분히 먹었단다."

"혹시 음식이 입에 안 맞니?"

"아니, 그건 아니긴 한데...."

"허허허. 역시 돼지고기가 먹고 싶었던 것이로구나. 사내라면 그래야지. 자, 여기 있단다. 마음껏 들거라."

"호호호. 여기 방금 구운 스테이크도 좀 먹어보지 않으련?"

"...."

마음 편하다는 말은 취소.

그날, 로이드는 과식으로 부글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으으."

로이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제대로 못 자서 이러나.'

밤새 제대로 배탈이 났다.

덕분에 몇 차례나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음은 물론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대로 뒹굴거릴 수만은 없지. 읏차!'

마레즈 개간지는 이제 갓 첫발을 떼었을 뿐이다.

농민들의 이주에 앞서 구획의 정비와 지정을 서둘러야 했다.

영지 본토와의 교통로도 정비해야 했다.

즉, 아직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어이, 일어나."

먼저 일어나 옷을 갖춰 입은 로이드는 하비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장가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로 어쩐지 아침 알람 역할이 자신의 것으로 바뀐 것 같아 쓴웃음이 나왔다.

"으으음...."

하비엘이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로이드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이젠 아주 내가 깨울 때까진 일어나지도 않는다?"

"으음, 죄송합니다."

"됐어. 일어나. 오늘도 할 일 많으니까."

"알겠습니다."

하비엘이 주섬주섬 일어났다.

그런데 그 표정이 어쩐지 심상치가 않았다.

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이?"

"예, 로이드 님."

"너 무슨 일 있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인상을 그렇게 계속 쓰고 있어?"

"아, 죄송합니다. 어쩐지 머리가 너무 지끈거려서 그만."

"뭐? 너도?"

"예. 혹시 로이드 님도?"

"어. 나도 아침부터 두통 때문에 좀 괴롭네."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묘한 우연의 일치에 둘은 함께 쓴웃음을 나누고 말았다.

하지만 잠시 후, 하녀가 아침 식사를 들고 침실로 들어왔을 때.

둘은 더 이상 쓴웃음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어이? 넌 또 표정이 왜 그래?"

"죄송합니다, 도련님. 어쩐지 오늘 아침부터 두통이 너무 심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하녀가 움찔 놀라며 대답한 한마디.

어쩐지 심상치 않은 그 대답에 로이드와 하비엘의 표정이 굳었다.

51화. 뭉쳐야 판다 (1)

"허허,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로 아비를 보러 온 것이더냐."

평범한 아침 식사 자리였다.

메뉴도 평소와 같았다.

통밀빵에 수제 소시지 한 덩이.

약간의 샐러드와 달걀 프라이에 염소 젖 치즈.

귀족치고는 상당히 소박한 아침 식탁을 앞에 두고 앉은 남작 부부였다.

그들이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조금은 다른 웃음이다.

환하지만 어쩐지 모를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평소의 웃음이 행복 100%라면, 지금은 행복 90에 통증 10 정도랄까.

로이드는 그 사소하지만 작은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에둘러 표현할 것도 없이 곧바로 핵심부터 찔렀다.

"혹시 머리, 아프십니까?"

"어?"

남작이 멈칫했다.

마치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한 눈빛.

이내 소탈한 웃음으로 물음에 답했다.

"허허, 그걸 어찌 알았느냐. 그러잖아도 새벽녘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애를 먹던 참이었다. 그렇지 않소, 부인?"

"네. 아무래도 우리가 같이 아픈 걸 보니 베개를 바꾸어야 할 것 같아요."

"흐음, 그저 베개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오."

"그럼 어째서인 걸까요?"

"아마도 우리가 부부라서?"

"부부끼리 닮는다는 뭐, 그런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허허, 당연하오. 어찌 그리도 내 마음을 잘 아오. 내가 부인을 생각하고, 부인이 날 아끼는 그 마음 때문에 아파도 같이 아픈 것 아니겠소."

"아이, 당신도 참."

"...."

이 와중에도 광역으로 돈독한 금슬을 자랑, 아니, 무차별 염장 폭격기를 이륙시키는 남작 부부.

그 모습을 보며 로이드는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내심 확신했다.

'일단 이 저택의 사람들은 모두 두통 당첨이네.'

아침에 깨어나던 시점부터 엄청난 두통에 시달리게 된 그였다.

처음엔 자기만 그런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하비엘도, 아침을 가져온 하녀도 그랬다.

셋의 증상이 모두 똑같았다.

정확히 양쪽 관자놀이.

그쪽이 심각하게 지끈거렸다.

그때부터 이거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단순한 두통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아침조차 거르고 이곳으로 왔다.

남작 부부를 찾아오는 길.

그 와중에 마주친 시녀와 하인들의 상태도 확인했다.

모두가 하나같이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들을 붙잡고 물었다.

혹시 머리가 아프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모두가 똑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오늘 아침에 깨어날 때부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남작 부부도 똑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거 뭔가 있어.'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증상의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이 상황.

분명 심상치가 않았다.

하지만 로이드는 빙긋 웃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어? 벌써 가니?"

"네. 인사만 드리려고 왔으니까요.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쉬엄쉬엄 하려무나."

"네. 그럼."

남작 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물러났다.

그때까지도 그는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굳이 지금 이 상황을 남작 부부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러기엔 시기상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남작 부부에게 이 두통에 관한 사실을 알려봤자 달라지는 게 없을 테니까. 그런다고 해결법이 나올 리도 없으니까.'

해결법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이 사태를 알려주는 순간부터 천하제일 걱정대회 대환장 파티가 벌어질 확률이 더 높았다.

'일단은 원인 파악이 우선이야.'

원인을 알아야 해결법도 찾을 수 있다.

남작 부부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은 그때가 적절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하비엘이 눈을 빛냈다.

"두 분께서는 어떠신지."

"역시나야. 똑같아."

"두통에 시달리고 계십니까?"

"어."

하비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로이드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렇게 간식 못 얻어먹은 강아지처럼 귀를 축 늘어뜨려."

"예? 전 강아지가 아닙...."

"가자. 할 일 많아."

"예."

로이드가 앞장섰다.

둘은 저택에서 나왔다.

가을을 맞이하는 이른 아침.

포장도로를 따라 영지 중심가로 내려갔다.

영지민의 가장 많은 발길이 드나드는 곳답게 그곳은 제법 북적였다.

아침 밭일을 나가는 농부.

새벽에 받은 양젖을 옮기는 아낙네.

오늘 쓸 장작을 힘껏 패고 있는 소년.

모두가 바쁜 하루를 목가적 아침의 풍경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그들 모두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미간을 약간씩 찌푸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흐음.'

로이드의 미간에도 주름이 생겨났다.

딱 봐도 머리 지끈거리는 걸 참고 있는 표정들.

그는 밭일을 나가고 있는 농부에게 다가갔다.

"어이, 힘 쎄고 강한 아침."

"어! 도련님?"

그제야 이쪽을 본 듯 농부가 멈칫했다.

이내 농부의 얼굴에 떠오르는 반가운 표정.

이쪽의 손을 덥석 잡으며 밝은 웃음을 띠었다.

"어이쿠,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그간 안녕은 무슨. 우리 어제도 보지 않았나? 마레즈 개간지 이주 계약서 쓰면서."

"아, 그건 그렇지요."

"그럼 이제 손 좀 놔줄래? 반겨주는 건 고마운데 좀 부담스럽다?"

"앗, 아아? 어이쿠!"

농부가 황급히 손을 놓았다.

로이드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농부를 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혹시 나한테 불만 있어?"

"예? 아이고, 그게 무슨... 아닙니다요."

"그런데 왜 웃는 것 같으면서도 인상을 쓰고 있어?"

"예에? 제가요?"

"어."

"정말입니까요?"

"응. 완전 정말로."

"어이쿠 이런.... 아침부터 두통이 심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침부터 머리가 아팠다고?"

"예에."

농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뿐만 아니라 마누라에 자식들까지 전부 아침 댓바람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난리가 났습죠. 그런데 뭐 어쩌겠습니까. 지난밤 어쩐지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구요."

"아하. 악몽을 꿔서 그런 거로구만?"

"예. 오늘 저녁엔 기도라도 드리고 자야겠습니다."

"그래. 꼭 그렇게 해."

"예, 도련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오늘도 힘내고."

"옙!"

농부가 꾸벅 인사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던 로이드의 표정은 어느새 굳어 있었다.

그가 하비엘을 돌아보았다.

"역시나인 것 같지?"

"예. 그런 듯합니다."

하비엘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저 농부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똑같다면 아마도...."

"우리 저택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영지민들도 똑같은 증상을 겪고 있다는 건가."

확실히 심상치가 않았다.

그 뒤로도 로이드는 영지민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들이 실상을 알아차리고 불안에 떨지 않도록, 은근슬쩍 능청스럽게 사람들의 증상을 떠보았다.

결과는 모두 같았다.

똑같은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즉, 영지민 전체가 똑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는 셈이었다.

로이드와 하비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건 좀 장난이 아닌데. 원인이 뭘까."

"전염병이 아닐까요."

"흐음, 그럴지도. 아니면 다른 환경적 요인 때문일 수도 있고."

"환경적 요인이라시면?"

"영지 전체에 두루 영향을 줄 정도의 환경적 요인이라면 공기나 물 정도가 있겠지."

이미 로이드는 환경적 요인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런 그의 추측은 맞았다.

두 사람이 그걸 확신한 것은 어느 양치기 소년의 대답을 들었을 때였다.

"네, 머리가 아파요. 근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

로이드의 반문에 양치기 소년이 난감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우리 애들이 어제부터 물을 마시질 않아요."

"애들?"

"양이랑 개요."

"아하. 동물들이 물을 안 마신다고?"

"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어제부터 계속 그래요. 억지로 떠서 먹이려고 해도 자꾸 고개를 돌려 버리구요."

"...그래? 한두 마리가 아니라 모두가 그러는 거야?"

"네. 그래서 미치겠어요. 왜 그러지, 진짜."

"응, 이제 알겠네. 고마워."

"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양치기 소년.

로이드는 소년을 놔두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하비엘과 나란히 걸으며 숨을 크게 내뱉었다.

"후우, 찾았다."

"원인을 말입니까?"

"어. 자작 그거 완전 강아지 새끼네, 진짜."

"예?"

"라코나 자작 말이야. 남쪽 영지 다스린다던, 마레즈 개간지 절반 내놓으라던 그 염소수염."

저택으로 걸음을 돌리며 로이드가 이를 갈았다.

"이거, 그놈 짓이야."

"어떻게 그런 추측을 하신 건지."

"추측은 무슨. 이 정도 증거면 뻔하지."

로이드가 픽 웃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를 읽으며 알고 있던 정보.

그걸 바탕으로 자신이 추론한 바를 떠올렸다.

"하나 묻자. 라코나 자작령의 특산품이 뭐였지?"

"음, 아름답게 염색된 옷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깊고도 신비로운 색감을 지닌 데다 물 빠짐도 적은 옷감. 그런데 자작령에선 특산품인 그 옷감을 어떻게 염색하지?"

"라도나 열매를 쓴다는 건 얼핏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맞아. 정확히는 라도나 열매의 즙을 농축시켜서 옷감에 입히지."

"한데 그걸 왜...."

"그 옷감에 쓰는 라도나 열매. 그게 두통을 일으키는 약간의 독성을 지니고 있거든. 딱 지금 우리가 시달리는 이런 두통 말이야."

"...."

하비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로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 영지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프로나 강. 이 강이 남쪽에서부터 자작령을 거쳐서 우리 영지로 흘러오는 건 알고 있지?"

"예."

"답 나왔네. 뭔지 알겠어?"

"...예, 믿긴 싫지만."

"맞아. 라도나 열매를 쓰는 염료 공방. 거기서 나오는 폐수를 프로나 강에 그대로 버린 거야."

"설마 일부러 말입니까?"

"어."

"대체 어째서...."

"협박을 위한 거겠지. 게다가 이거, 더없이 효율적인 협박이야. 강물이 지나갈 우리 영지의 북쪽엔 이웃한 영지가 없어. 험한 지형의 계곡뿐이지. 그러니까 강물이 먼 곳의 다른 영지에 닿을 때쯤엔? 이미 독성이 충분히 희석된 상태가 될 거야. 우리 영지만 독박으로 이 피해를 받는 상황일 거란 뜻이야. 그러니까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자. 최대한 빨리."

로이드는 걸음을 서둘렀다.

남작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아니었다.

만약 자신의 추측이 맞다면.

자작이 보냈을 사람이 슬슬 저택에 도착했을 거라고 짐작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내 쎄한 느낌은 잘 빗나가질 않거든.'

그는 저택을 향한 걸음을 재촉했다.

같은 시각, 남작의 집무실.

그곳의 상황은 로이드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미 남작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바로 라코나 자작이 보낸 기사였다.

크진 않아도 다부진 체격.

안정적인 자세와 날카로운 눈빛.

예전에 자작이 로이드를 찾아왔을 때, 자작을 대신해 입을 놀리던 자작령의 선임 기사 쿠르노 경이었다.

쿠르노 경은 지금도 프론테라 남작을 향해 건방진 입을 나불대고 있었다.

"제 주군이신 자작님의 요구는 딱 한 가지입니다. 귀측 가문에서 허가 없이 무단으로 개발한 마레즈 습지의 절반을 자작령으로 돌려주는 것입니다."

"허락 없이 무단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남작이 인상을 썼다.

"전날 내 아들에게 충분히 설명을 들었을 텐데? 마레즈 습지는 대대로 버려진 땅이었고, 이번에 우리가 특별히 자금과 인력을 들여 그 땅을 개발한 것일세. 그 경우엔 개발한 이가 땅을 소유한다는 법,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

"자작께서는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아 하십니다. 그래서 염료 공방에서 나오는 라도나 열매의 농축액을 강에 버리도록 명령하셨지요."

"...뭐?"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아침부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셨지 않습니까? 그만하면 자작님의 뜻을 충분히 느끼셨을 텐데요."

"지금 그게 무슨...."

"잘 들으십시오. 자작께서는 귀측이 마레즈 습지의 절반을 포기할 때까지 라도나 열매 농축액의 방류를 멈추지 않으실 거라 공언하셨습니다. 남작님 정도 되는 분이면 충분히 아시겠지요. 라도나 열매의 독성이 어떤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

"...."

"어떠십니까. 이제 습지 절반을 넘기실 생각이 드시는지."

"쿠르노 경. 내 하나만 묻지. 설마 이거, 협박인가?"

"네."

"...."

쿠르노 경이라 불린 기사가 대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은 할 말을 잃었다.

이내 이를 갈았다.

"이런 식의 저열한 협박이라니. 자네의 주인은 법도 두렵지 않은 것 같군. 이런다고 내 아들이 힘들여 개발한 개간지의 절반을 순순히 넘겨줄 것 같은가?"

"그렇게 되실 거라고 봅니다."

"그 전에 내가 왕국 귀족 법원에 이 일을 정식으로 제소할 것일세."

"하십시오."

"뭐?"

"하시란 말입니다."

쿠르노 경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법적인 제소. 뭐, 좋습니다. 끝까지 가면 아마도 남작님께서 승소하실 겁니다."

"그런데 안 두려운가?"

"안 두렵지요. 그때까지 못 버티실 테니까."

"무슨...."

"판결이 아무리 빨리 나와도 족히 일이 년은 걸릴 겁니다. 게다가 귀족 법원의 비용은 비싸기로 악명이 높지요. 한데 그동안 버틸 자신이 있으십니까?"

"...."

"최근 자금 사정도 안 좋으신 듯하던데."

쿠르노 경의 눈빛에 떠오르는 노골적인 무시.

남작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이게 대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이럴까.

분했다.

한데 대응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떠올린 반격이 귀족 법원에 제소를 한다는 것이었는데.

상대는 이미 그것마저도 염두에 둔 것인지 이쪽을 농락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막막해졌다.

생각해보니 저쪽의 말이 맞았다.

자신의 자금 사정은 최악이었다.

최근 로이드가 각종 기지를 발휘하고는 있다지만.

덕분에 이자를 밀리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곤 하지만.

그럼에도 앞날은 여전히 밝지가 않았다.

한데 여기서 귀족 법원의 소송비까지 감당해야 한다면?

'못 버틸 거야.'

최대한 냉철하게 판단하려 애썼다.

그런데 나오는 결론은 무리라는 것이었다.

즉, 길고 힘겨운 법적 공방을 이어갈 힘이 없을 거라는 결론만 나왔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계속 감수하고만 있을 수도 없고.'

두통을 참고만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이야 영지민들이 그저 평범한 두통이겠거니 여기고 있을 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모두가 이 두통의 원인을 알게 된다면?

'강물을 마시지 않고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렇다고 이토록 괴로운 두통을 가만히 감수할 리도 없어. 결국엔 못 버티고 하나둘 다른 영지로 이주하겠지.'

아마도 그렇게 옮겨가는 터전은 저쪽 자작령이 될 것이 뻔했다.

즉, 이쪽은 아무런 대응도 못 하고 얻어맞을 수밖에 없는 셈이었다.

한데 그런 최악의 상황을 방지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보였다.

'숙일 수밖에 없는 건가.'

저쪽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

마레즈 개간지의 절반을 넘겨주는 것.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남작에게 떠오른 유일한 선택지였다.

까드득!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생각 같아선 눈앞의 쿠르노 경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약자는 이쪽이다.

저쪽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입장이다.

영지민들의 생활과 영지의 안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어차피 쓰지도 못하던 땅이야. 그저 절반이라도 건질 수 있음에 감사하자.'

분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 정도로 만족하자.

그렇게 감정을 다잡았다.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비웃는 쿠르노 경을 쳐다보았다.

몇 번인가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후우. 좋...."

"까는 소리 하지 말고 당장 꺼지시지?"

콰앙!

별안간, 집무실 문이 쾅 열렸다.

남작과 쿠르노 경의 고개가 그쪽으로 홱 돌아갔다.

덕분에 둘은 목격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급해서. 저놈한테 한 얘깁니다."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며.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로이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쿠르노 경을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까지 뛰어오는 동안 떠올린 대응책을 입에 담았다.

"저따위 놈들한테 그 땅, 넘겨주지 않아도 될 방법이 있습니다. 천천히 말씀드릴 테니 일단 저 싸가지 없는 놈부터 좀 쫓아내죠. 기왕이면 좀 패서라도."

52화. 뭉쳐야 판다 (2)

"저따위 놈들한테 그 땅, 넘겨주지 않아도 될 방법이 있습니다. 천천히 말씀드릴 테니 일단 저 싸가지 없는 놈부터 좀 쫓아내죠. 기왕이면 좀 패서라도."

"...뭐?"

집무실 문을 박차며 들어온 로이드.

녀석의 말에 남작은 깜짝 놀랐다.

절망하고 있던 그였다.

낙담하고 있던 차였다.

아침부터 극심하던 두통.

뭔가 심상치 않다고 막연히 느끼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게 라코나 자작이 저지른 일일 거라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라코나 자작이 보낸 쿠르노 경의 전언은 충격이었다.

염료 공방의 독성 폐수를 일부러 강물에 방류했다니.

그 폐수 때문에 영지민 전체가 두통에 시달리게 될 거라니.

'그것도, 내가 마레즈 개간지의 절반을 넘겨줄 때까지 계속.'

마레즈 개간지의 절반.

그것이 자작이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걸 넘겨주기 전까지 계속 폐수를 방류하겠다고 했다.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부당한 협박이기도 했다.

한데 반격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왕국 귀족 법원에 제소하겠노라 엄포를 놓았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판결이 나게 되기까지의 긴 시간을 버틸 수 있다면 해보라는 비웃음만 들어야 했다.

분했다.

굴욕감이 들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물론 귀족 법원 제소 외에도 이 지방을 다스리는 대영주, 크레모 백작에게 이 일을 알려 '공정한 중재'를 요청하는 방법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 방법도 그리 좋은 수가 아닐 터였다.

'크레모 백작이 딱히 분쟁 해결에 적극적일 리가 없으니까.'

아니, 돈이 많은 라코나 자작이 백작에게 뒷돈을 먹일 가능성마저 있다.

오히려 항복하는 것보다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세상은 올바른 자의 편이 아니라 힘과 돈 있는 자의 편일 가능성이 높은 법이니까. 그게 이 세상의 더러운 법칙이니까.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워낙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건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결국, 남작은 냉정한 현실과 타협했다.

이건 영지민들을 위한 것이라고, 맞서 싸울 방법이 없으니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렇게 쿠르노 경을 향해 항복을 선언하려던 순간이었다.

한데 그때 로이드가 집무실로 난입해 들어온 것이었다.

"므, 무슨. 그게 무슨 말이더냐. 그리고 네가 이 일을 어떻게?"

남작은 깜짝 놀랐다.

쿠르노 경을 통한 자작의 협박.

그 협박과 마주한 자신의 고민.

그건 오직 여기, 집무실에서 자신과 쿠르노 경 사이에서만 오간 이야기였다.

그것도, 지금 실시간으로 오가고 있던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나갈 방법도, 시간도 없었다.

한데 자신과 쿠르노 경이 나누던 이야기의 내용을 어떻게 로이드가 알고 있는지 놀라웠다.

설마 집무실 문밖에서 몰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로이드는 숨을 헐떡이며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으니까.

즉, 여기까지 급하게 뛰어왔다는 뜻이다.

"후우, 후. 다행히 제가 늦진 않은 듯하군요. 놀라실 것 없습니다. 아침부터 두통의 원인을 찾기 위해 조사하다가 짐작해낸 사실이니까요."

"짐작?"

"네. 지금 자작의 협박을 듣고 있으셨겠지요? 마레즈 개간지를 넘기지 않으면 계속 염료 공방의 독성 폐수를 방류하겠다는 협박 말입니다."

"...."

완벽히 정곡을 찌르는 로이드의 추측.

그 앞에 남작이 입을 다물었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레즈 개간지, 한 뼘도 넘겨주어선 안 되십니다. 아니, 넘겨줄 필요조차 없으십니다."

"개간지를? 라코나 자작에게?"

"네."

로이드가 이마에서 볼로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았다.

숨을 고르며 집무실 중앙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느새 쿠르노 경과 마주 서게 되었다.

쿠르노 경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남이 열심히 노력해서 개발한 땅을 공짜로 꿀꺽하려는 거지 같은 것들에게 뭣 하러 양보를 해줍니까?"

"...."

이쪽의 말 때문에 발끈한 걸까.

쿠르노 경의 눈동자에 희미한 열기가 피어났다.

하지만 로이드는 상대가 그러건 말건 계속 말했다.

"그러니 저들에게 돌려줄 대답은 딱 하나뿐입니다. 땅을 얻고 싶으면 직접 땀 흘리며 노력을 하라고. 기생충처럼 남한테 질척대며 들러붙어서 피 빨아먹을 생각 말고."

"그거, 설마 저 들으라고 한 소립니까?"

쿠르노 경이 입술을 비틀며 반문했다.

로이드의 입술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어. 다행히 기생충치곤 이해가 빠르네."

"절 모욕하시는 겁니까, 지금?"

"오. 눈치도 빠르셔라. 박수."

"지금 실수하는 겁니다."

"아. 지금 네가 자작의 전언을 전하러 온 사람이고, 따라서 자작의 대리인이니까, 널 모욕하는 건 곧 자작을 모욕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근데 어쩌나. 나 지금 자작 욕하는 거 맞는데."

"그 말, 진심입니까?"

"응."

"...."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로이드의 대꾸.

쿠르노 경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로이드의 능글능글한 모욕이 계속해서 쿠르노 경을 두들겼다.

"야. 너 솔직히 좀 힘들지 않냐? 응? 그런 주인 밑에서 진짜 괜찮은 거야?"

"제 주군이야 물론...."

"양심 없는 놈이지. 그 인간 그거 평생 양심 유지비도 안 들이고 살걸."

"아니, 나는...."

"근데도 포기를 못 하겠어? 충성심이 아직도 사그라지질 않아? 그럼 넌 평생 등산은 안 해도 되겠네."

"내가 왜 등산을...."

"네 인생이 산으로 가고 있잖아."

"...."

"어때. 이젠 좀 마음이 좀 변할 것 같아?"

"아니, 전혀. 로이드 프론테라. 당신은 계속해서 내 주군을 웃음거리로 삼으며 심각하게 모욕하고 있소."

"쯧쯧. 녀석, 그사이에 360도 변했구만."

"...."

"그러니까 이제 꽁무니 빠지게 돌아가서 네 주인한테 똑똑히 전하란 소리야. 마레즈 개간지는 못 넘긴다고. 절반은 물론이고 제방 한 뼘, 흙 한 톨도."

"우리가 계속 독성 폐수를 방류할 텐데, 그건 두렵지 않은가 보군요."

"그게 어때서? 내가 인마, 일 년 내내 마스크도 없이 미세먼지 마시면서 무럭무럭 큰 사람이야."

"그게 무슨...."

"아직 할 말 남았어? 거 참 되게 질척거리네. 좀 가라."

로이드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쿠르노 경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당신은 오늘의 행동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오."

"어쩌라고."

"...."

"뭐. 왜. 뭐."

"...."

"세상에. 아직도 안 갔어?"

"...후우. 두고 보겠소."

쿠르노 경이 턱 근육을 실룩거리며 물러났다.

집무실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으며 떠났다.

그제야 남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로이드의 소매를 붙잡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이거, 괜찮겠느냐?"

"네? 괜찮겠느냐니, 뭐가 말입니까."

"그렇게 자작의 요구를 거절한 것도 모자라 그의 전령에게 모욕까지 잔뜩 주었는데, 뒷일이 괜찮겠느냐는 말이다."

"예, 뭐."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참으로 다행이다.

아침부터 두통이 심상치 않다고 느껴서.

부지런히 움직이며 두통의 원인을 찾아내서.

그렇게 이곳까지 뛰어오는 동안 대응책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놈들한테 마레즈 개간지, 넘겨주지 않아도 될 방법이 있다고 말입니다."

"방법이라니. 어디 들어보자꾸나. 아니, 그보다 우선 좀 앉거라."

남작이 로이드를 자리에 앉혔다.

그렇게 로이드와 하비엘, 남작까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자 비로소 어수선하던 집무실 분위기가 좀 차분해졌다.

남작의 머릿속도 아울러 차분해졌다.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분명 확실한 방법이 있는 듯한데. 맞느냐?"

"네."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참에 상수도 하나 깔아보죠, 뭐."

"뭐?"

남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수도라니.

그게 뭔가 싶었다.

"좀 더 설명해 보거라."

"음, 쉽게 풀어드리자면, 설치된 배관을 통해 먼 곳의 맑은 물을 영지까지 직통으로 흘러오도록 하는 방법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먼 곳의 맑은 물을?"

"네."

고개를 끄덕이는 로이드.

남작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물을 끌어온다, 라. 어디서도 그런 방법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전부터 생각했던 겁니다."

"네가?"

"네."

재차 고개를 끄덕이는 로이드.

사실 전부터 생각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고전적 상수도 체계.

그건 그가 있던 세상의 로마 제국이 기원전 시기에 구현했던 기술이었다.

로마는 일찌감치 맑은 물을 먼 급수원에서 도시까지 끌어오는 기술을 도입했고, 생활용수의 부족함 없이 번성할 수 있었다.

로이드는 이번 기회에 그 상수도 체계를 도입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를 위해 얼굴에 철판을 까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끔 생각해봤습니다. 생활을 위한 물을 강줄기에만 의지하다 보면 곤란한 때가 종종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건 그렇지."

"네. 가뭄이 들어서 강이 마르거나, 혹은 홍수 때문에 탁류가 내려와도 물을 쓰기가 곤란해지지요. 그래서입니다. 일 년 내내 물이 안정적으로 공급될 취수장을 선별하고 그곳에서부터 물을 끌어오면 참 좋겠다고 말입니다."

"으음, 확실히 대단한 생각이구나. 한데-"

남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만들어낼 방법이 있겠느냐?"

"네. 전부터 쭈욱, 열심히, 맹렬히 고민했으니까요."

물론 제가 아니라 고대의 수많은 토목공학자들이 말입니다.

로이드가 뒷말을 뻔뻔하게 생략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에도 남작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못했다.

아무리 훌륭한 상수도 체계를 만든다 해도, 지금 당장 모두를 괴롭히는 문제가 한동안 해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 생각은 참으로 훌륭하다. 대담하기도 하고. 하지만 여전히 나는 고민이구나. 그 상수도라는 것, 다 만들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네."

"그럼 그동안 우리 영지는 어디서 맑은 물을 구해야 하겠느냐."

당장 물을 구할 방법.

그것이 남작이 고민하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상수도가 좋아도 다 지어지기 전엔 무소용이다.

즉, 수도 체계가 완비될 때까지는 저 독성 폐수 섞인 강물을 마시고 두통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남작의 고민은 기우에 불과했다.

같은 문제를 이미 로이드도 충분히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로이드는 일찌감치 답을 만들어 온 상태였다.

"그것 또한 해결법이 있습니다."

"해결법이라면?"

"제가 계약한 소환수 중에 하망이, 기억하십니까?"

"아, 물을 마시면 엄청나게 커지는 소환수인데, 평소에는 숨 막히도록 동글동글 귀엽고 옆구리에 솜털이 보일 듯 말 듯하게 난 분홍색 아기 하마 말이더냐?"

"...의외로 굉장히 디테일하게 파악하고 계시네요."

"흠, 크흠! 내 보기에 좀 깜찍해서 말이다."

"...."

"어쨌건, 그 소환수를 이용할 생각이더냐?"

"네."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망이로 대량의 물을 퍼올 겁니다. 그 물로 임시 저수지를 채워보도록 하죠."

"과연. 그렇게 수시로 물을 가져오면 상수도를 만드는 동안에도 물이 부족할 일은 좀처럼 없겠구나."

"네. 그래서 말인데,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이라. 무엇이더냐."

"영주의 이름으로 영지민을 향한 포고문을 발표해주십시오."

"포고문을?"

"네."

로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럼 잠시 귀 좀... 그러니까... 이러쿵저러쿵...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 한 겁니다."

"흐음, 과연."

로이드가 열심히 설명하고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남작의 얼굴에 배어 있던 걱정의 기색이 점점 옅어졌다. 사라졌다. 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조금씩 피어났다.

너무나 불리해서 승산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분쟁.

그걸 말끔하게 뒤집고 엿까지 묵직하게 먹일 희망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날 오후, 프론테라 영지민들은 영주의 포고문을 접하게 되었다.

포고문의 내용은 간결했다.

모두가 시달리고 있는 두통.

그 두통의 원인을 말끔히 밝히고 있었다.

"뭐? 그러니까 지금 우리 머리가 아침부터 깨질 듯이 아팠던 게, 라코나 자작이 저지른 일 때문인 거였다고?

"그렇다니까."

"자넨 그걸 어디서 들었나?"

"어디긴. 영주님이 아까 발표한 포고문이지."

농부와 농부들.

나무꾼과 양치기 소년.

아낙네와 이웃집 할멈들.

영지민들 사이에 포고문 내용이 순식간에 퍼졌다.

"글쎄, 염료 공방 있잖아요. 거기서 나오는 독극물을 강에 풀었대요."

"세상에나. 실수로?"

"아뇨. 일부러요."

"에그머니, 미친. 뭐 그런 것들이 다 있대?"

"그러게나 말이죠. 게다가 말여요, 그 자작이라는 자가 우리 영주님한테 이상한 요구까지 했다고 그러네요."

"요구? 무슨 요구?"

"마레즈 개간지 아시죠?"

"알지. 우리 아들이 공병대원인데."

"그 개간지 절반을 넘기라고 했대요."

"그 자작인지 뭐시긴지 하는 놈이?"

"네."

"무슨 그런 억지를 부려? 그게 우리 아들이 얼마나 힘들게 땀 흘려 삽질해서 만든 땅인데! 그걸 공짜로 넘기라고? 이거 아주 말세네, 말세여!"

"그러게 말여요."

영지민들이 폭발할 듯 부글거렸다.

누군가는 분노해서 주먹을 쥐며 자작을 성토했다.

또 누군가는 우리가 왜 당하고만 있어야 하냐며 울분을 토했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영주의 아들 로이드 프론테라가 독극물 방류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한다는 소식이 퍼졌을 때.

노동력을 지닌 영지민 대부분이 공사에 자원, 아니, 참전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