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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찬란한 결의 (1)

쩌적! 쩍!

체내에서 울리는 거친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로이드는 생각했다.

'맹독이라는 거, 이거 진짜 장난이 아닌데?'

진짜로 장난이 아니었다.

국왕의 명치에 갖다 대고 있는 손바닥.

그 손바닥을 통해 흡수하고 있는 맹독의 기운.

시시각각 혈관과 그 주위의 조직을 공격해 왔다.

그럴 때마다 근육 조직과 혈맥이 비명을 질러댔다.

쩌저적! 쩍!

조직을 찢으려는 맹독의 기운과 저항하는 신체 조직.

그 줄다리기 사이에서 로이드는 진땀을 뚝뚝 흘렸다.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했다.

아스라한 심법에 더욱 힘을 실었다.

세 갈래 써클이 한층 맹렬히 돌아갔다.

국왕의 체내에 침범한 독을 한껏 흡수했다.

"그대는... 이런 걸 어떻게 익힌 거지?"

이쪽을 올려다보는 국왕의 눈초리.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마나 흡수 기법.

경악과 의아함, 의혹과 감탄이 한데 섞여 있었다.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피어났다.

"으으읍, 후우, 그렇게 말을 하시면...."

"안 되나?"

"응급처치에 집중하기가 좀 어려워지지 말입니다."

"하지만 내뱉는 말과 달리 독을 잘도 빼내가는데?"

"뭐, 엄살이라고 하시면 달리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로이드가 아스라한 심법을 유지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기왕 말을 꺼내시는 거라면 제가 좀 으샤으샤 힘낼 수 있도록 응원이라도 해주시면 더 좋겠지 말입니다."

"응원이라. 한데 이렇듯 무작정 독을 흡수하면 오히려 그대가 위험해질 텐데. 따로 대책이 있는 건가?"

"물론 있습니다. 배출해야겠지요."

"그렇군."

독기가 빠져나가서일까.

혹은 이쪽에게 대책이 있음을 알아서일까.

국왕의 표정이 약간 편안해졌다.

다만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길만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짐은 궁금한 것이 두 가지가 더 있도다."

"네, 물어보시죠."

"하나.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찌 눈치채고 여기까지 달려왔지?"

"제가 감이 좀 좋습니다."

"감이?"

"예."

"구체적으로 말하라."

"어, 으음, 혹시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만약 제가 체르니 경과 한패였다면 이렇게 제 목숨을 걸고 독을 제거해드리고 있지도 않았겠지요."

"...."

"정말입니다. 체르니 경이 시종장과 나누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수상한 낌새를 느꼈을 뿐입니다."

"수상한 낌새? 그가 시종장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더냐."

"달이 질 때까지 연회가 이어지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더군요."

"평범한 말인 듯한데. 그게 어째서?"

"그냥 느낌이 그랬습니다. 말투라든가, 눈빛이라든가, 좀 느끼하더군요."

"느끼했다니?"

"사실 저도 처음엔 역모 같은 건 예상 못 했습니다. 다만-"

"다만?"

"체르니 경과 시종장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 줄 알았습니다."

"...."

"그래서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있겠거니 생각해서 뒤를 밟았지 말입니다. 한데 여기 와보니 이런 난리가... 아무튼, 그랬습니다."

"못 볼 꼴을 보였군."

"아닙니다."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로이드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날 향한 의심은 풀어냈네.'

국왕 시해 미수 사건.

소설 철혈의 기사를 읽어서 미리 깨달을 수 있었던 오늘의 이 사태.

그걸 이곳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

국왕도 모른다.

저들 암살자들이 나누는 암호 또한 그렇다.

그건 오직 소설을 읽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래서 의심받기 딱 좋은 상황이긴 했지.'

국왕을 구하기 위해 무턱대고 달려오긴 했는데, 그 행동 자체가 의심받을 행동이기도 했다.

아무도 모르는 암살의 정황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는 것.

그래서 암살자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는 것.

그 행동만으로도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일단 그런 의심부터 걷어낼 필요가 있었다.

하여 나름의 꼼수를 시전한 로이드였다.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기. 언제나 잘 통하는 야바위지.'

체르니 경의 암호를 들은 사실을 말했다.

거기에 '체르니 경 게이설'의 거짓을 섞었다.

이곳으로 온 자신의 행동을 단순히 호기심으로 가십거리를 찾아온 치기 어린 행동으로 셀프 폄하했다.

거기에 실제로 지금 자신은 목숨을 걸고서 국왕의 몸에서 독을 빼내고 있었다.

그런 요소들이 모두 모여 시너지를 일으켰다.

로이드가 의도한 대로 국왕의 의심을 걷어냈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국왕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그렇군. 하지만 짐은 궁금한 것이 하나 더 있도다."

"예, 이번엔 무엇이신지."

"조금 전부터 말이 좀 편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예?"

"아까 응급처치를 위해서랍시고 다짜고짜 짐을 눕히던 때부터 말이다. 은근히 짐을 향한 말투에서 예법을 걷어내고 있는데. 그건 혹시 의도된 행동인가?"

"물론 아니옵니다, 전하."

"말투의 전환이 바람보다 빠르군."

"오해이시옵니다, 전하."

"오해가 아닌 것 같은데."

"실로 억울하옵니다, 전하."

"뻔뻔하기까지."

국왕의 입술이 피식,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한데 아스라한 경이라 하였던가."

"예, 전하."

"그자는 괜찮을까. 체르니 경을 상대로 말이다."

"...."

로이드는 입을 닫았다.

섣불리 확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사실 그래서 지금 자신도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부으며 맹독을 흡수하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응급처치를 끝내고 하비엘을 도우러 달려가기 위함이었다.

'아직 하비엘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으니까.'

한데 소드마스터인 체르니 경과 맞서게 되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장담할 수가 없었다.

예측도 되지 않았다.

'물론 쉽게 지진 않을 거야. 하지만 안심할 수도 없어.'

남다른 재능을 지닌 하비엘이긴 했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를 이룩했고, 트리플 써클까지 지녔다.

하지만 그걸 모두 합한다 해도?

'소드마스터와의 사이엔 여전히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을 거야.'

그만큼 소드마스터는 대단하고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소드마스터는 오로지 소드마스터로만 막을 수 있다.

존재만으로 전략 병기에 버금갔다.

현대 세계에서의 핵무기와 같았다.

보유하고 있는 소드마스터의 숫자.

그 숫자가 곧 국가의 군사력 척도가 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와 혼자 맞서게 된 거야, 하비엘은.'

물론 나중에는 소설 속 하비엘도 소드마스터가 된다.

아예 소드마스터를 뛰어넘은, 역사상 최초의 그랜드 마스터로 등극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건 소설 속 이야기였다.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오늘은 여차하면....

'하비엘이 죽을 수도 있어.'

자신의 앞날을 든든히 지켜줄 버팀목이자 가장 큰 보험이 하비엘이었다.

그런 녀석을 이곳에서 허무하게 잃고 싶진 않았다.

키이이이잉-!

로이드는 써클의 회전력을 더욱 올렸다.

자신이 낼 수 있는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국왕에게서 흡수되는 맹독이 점점 써클 주위에 쌓여갔다.

하지만 그는 상관치 않았다.

'다 흡수하면, 배출하고, 달려간다.'

그리고 하비엘을 도와 함께 싸우리라.

다짐하는 그의 얼굴에서 진땀이 뚝뚝 떨어졌다.

떨어진 땀이 국왕의 볼을 톡톡 적셨다.

하지만 국왕은 그를 책망하지 못했다.

아스라한 심법에 집중한 로이드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한 까닭이었다.

'볼수록 놀라운 자로다.'

들어본 적도 없는 현수교 건설.

그 호언장담을 현실로 이루며 능력을 증명한 자였다.

한데 지금 보니 그 이상의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

'외부의 마나를, 그것도 다른 사람의 마나와 특정 성질을 자신에게로 흡수할 수 있는 기법이라니. 이런 것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하였건만.'

그 상상 속의 일이 현실로 실현되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서 시시각각 빠져나가고 있는 맹독.

그것이 가장 명확한 증거였다.

그 사실이 소드마스터인 그녀를 경악게 하고, 경탄시켰다.

'이자가 지닌 능력의 끝은 어디일까.'

가능하다면 확인해보고 싶었다.

흥미로웠다.

궁금했다.

그렇듯 국왕이 호기심 서린 눈길로 로이드를 올려다보는 가운데, 고요한 휴게실의 응급처치가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서컥!

발파가 둘로 쪼개졌다.

오러 소드가 쇄도했다.

하비엘의 가슴을 베었다.

그러나 핏방울이 튀지 않았다.

'음?'

꿈틀, 체르니 경의 눈썹이 요동쳤다.

잠깐이나마 분명 상대를 베었노라 생각했다.

한데 검을 휘두른 직후 느꼈다.

손맛이 약하다.

얕게 베었다.

체르니 경이 그걸 깨달은 순간.

하비엘의 반격이 섬전처럼 날아왔다.

쐐애액!

"...!"

오러가 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빛살처럼 빨랐다.

체르니 경이 검을 들었다.

카아앙-!

하비엘의 검이 오러 소드에 튕겨 나갔다.

그 충격파 속에서 비로소 체르니 경은 볼 수 있었다.

'아까의 내 일격, 옷만 베었군.'

언뜻 보이는 하비엘의 앞섶.

사선으로 길게 찢겨 있었다.

그 사이로 하비엘의 가슴 맨살 일부가 보였다.

'놀라운 반응 속도야.'

체르니 경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사실 아까 하비엘의 발파를 둘로 쪼갰을 때.

그 기세를 몰아서 하비엘의 가슴을 베어 갔을 때.

승부가 끝났다고 확신했던 그였다.

한데 아니었다.

'소드마스터도 아닌 주제에 강하고 빠르다. 심지어 정교하기까지 해. 어쩌면 기술만으로 따진다면 나와 호각, 아니면 그 이상일지도.'

눈앞의 은발 애송이.

이제 겨우 스물을 갓 넘긴 것 같은데.

말 그대로 괴물처럼 경악스러운 재능이었다.

한데 만약 저놈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다면?

'단숨에 날 뛰어넘겠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난폭한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네놈이 날 뛰어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왜냐. 오늘 여기서 죽을 테니까.'

역사에 길이 남을 재능의 싹을 잘라내고 짓밟는 쾌감.

그 폭력적 충동에 체르니 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오늘 반드시 죽여주마. 어디 실컷 저항해보거라!'

이제 오러 소드도 일으킨 마당이었다.

더는 두려울 것도 없었다.

휘리릭, 스칵!

체르니 경의 검이 기묘한 각도로 짓쳐들었다.

활활 타오르는 오러가 검에 실려 하비엘을 덮쳐갔다.

츠카앙-!

오러와 검이 충돌했다.

그 순간, 하비엘의 검날 일부가 부서졌다.

오러에 뭉개지고 뜯겨 나갔다.

하비엘의 표정이 굳었다.

체르니 경이 비웃음을 흘렸다.

"감히 그 정도 실력으로 오러 소드를 막으려 들어?"

콰삭!

다시 내리쳐 오는 오러 소드의 일격.

그 앞에 점점 부서져 가는 하비엘의 검날.

체르니 경의 비웃음도 짙어졌다.

"또 막았어? 오러 소드를 막아내고도 검이 통째로 잘리지 않은 걸 칭찬해줘야겠군."

크컥!

다시 한 번 내리치는 오러 소드.

하비엘의 검날 한쪽이 또 뭉개졌다.

체르니 경의 비웃음에 살기가 배었다.

"호오. 세 번이나 방어를. 역시 국왕의 보검이라서 그런가? 어때, 아까 그 기술이라도 쓰면서 저항해보는 건?"

"...."

하비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겨를 따윈 없었다.

처음 오러 소드를 방어한 순간부터 속이 온통 뒤집혔다.

오러를 막아낸 충격이 내부를 완전히 헤집었다.

마치 거인이 내리치는 망치를 손가락으로 막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스라한 심법을 이용한 마나의 흡수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방어를 할 때마다 막대한 충격이 내부에 쌓여갔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도저히 말을 듣질 않았다.

쌓이는 충격에 의해 아예 굳었다.

'발파라도 쓸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발파로는 안 된다.

자신이 지닌 그 최강의 기술도 아까 오러 소드에 두 쪽으로 갈라졌다.

다시 그걸 썼다간 이번엔 진짜로 가슴이 베어질 것이다.

'내가 소드마스터였다면.'

그 경지에서 쓰는 발파라면 체르니 경의 오러 소드 따윈 단숨에 꿰뚫으리라.

아니, 발파를 쓸 것도 없이 똑같이 오러 소드로 받아칠 수 있으리라.

'로이드... 님.'

콰아앙!

다시금 내리쳐 오는 충격.

바닥에 박히는 말뚝이 되는 듯한 느낌.

"쿨럭!"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써클의 회전이 점점 느려졌다.

그리고 다섯 번째.

잔혹한 일격이 벼락처럼 떨어져 왔다.

카컥!

"...!"

마침내 국왕의 보검이 잘렸다.

잘린 보검 사이로 오러 소드가 떨어져 내려왔다.

'여기서 끝날 수는!'

1초라도 더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래야 로이드 님이 국왕을 치료한다.

그러면 로이드 님이 살아날 확률이 생긴다.

국왕은 소드마스터니까, 체르니 경과 맞설 수 있을 테니까.

'크으읏!'

하비엘은 자존심을 굽혔다.

떨어져 내려오는 죽음 앞에 1초라도 더 살아남고자.

자리에 넘어져 옆으로 굴렀다.

츠카악!

오러 소드가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긁었다. 불똥을 튀겼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잠시라도 좋았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연장한 목숨으로 시간을 벌고자 했다.

어떻게든 로이드가 무사해질 확률을 높이고자 반 토막 남은 검을 휘둘러 맞섰다.

그 순간, 자비 없는 발길질이 날아왔다.

콰앙-!

"...!"

가슴을 찍어 차는 앞차기.

그 묵직한 일격 앞에 하비엘은 복도 안쪽으로 아홉 걸음이나 날려갔다.

복도 모퉁이 탁자에 부딪히고 바닥을 굴렀다.

콰당탕, 콰각!

부서진 나뭇조각 파편.

잔해 속에서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포기하지 않았다.

손을 뻗었다.

부서진 탁자 다리를 움켜쥐었다.

체르니 경이 지척까지 돌진해 왔다.

활활 타오르는 오러 소드를 내리쳐 왔다.

"끝이다!"

쐐애애액!

오러 소드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하비엘이 탁자 다리를 치켜들었다.

체르니 경이 활짝 웃었다.

오러 소드는 오직 오러 소드로만 막을 수 있다.

그것은 절대적인 법칙이다.

'한데 감히 오러 소드 앞에서 탁자 다리 따위로? 하!'

어디 실컷 버둥거려 봐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터커엉-!

오러 소드가 나무토막 탁자 다리에 막혔다.

"어?"

대체 무슨?

체르니 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그때, 탁자 다리에 미증유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츠...!

서늘한 빛이 줄기줄기 피어났다.

탁자 다리를 사나운 광휘로 감쌌다.

그것은 검의 극의를 깨달은 자만이 벼려낼 수 있는 찬란한 결의.

오러였다.

98화. 찬란한 결의 (2)

터커엉-!

기억은 언제나 아프다.

타오르는 시커먼 불길.

그 아래 나뒹구는 주검.

엄마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빠의 눈길에 초점이 없었다.

어깨를 잡았다. 밀었다. 흔들었다.

돌아오는 대답도, 미소도 없었다.

터커어엉-!

어깨를 뒤흔드는 충격.

충격이 기억을 찌른다. 비튼다.

헛간 밖에서 날아오던 외침.

저쪽에 뭔가 있는 것 같다고.

듣자마자 일어났다. 기었다. 굴렀다.

헛간 구석 건초더미에 몸을 구겨 넣었다.

비좁고 쾨쾨한 건초더미 속에서 다짐했다.

부모님이 숨기고 살려준 목숨이라고.

헛되이 죽지 않겠노라고.

살아남으리라고.

그리하여 언젠가 먼 훗날.

자신이 죽을 곳은 스스로 정하겠노라고.

터커어어엉-!

다시금 어깨를 두드려 오는 충격.

그 충격 속에서 하비엘 아스라한은 눈을 떴다.

여섯 살 헛간 건초더미 속 기억에서 벗어났다.

스물한 살 현재를 마주하며 고개를 들었다.

당황한 적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적의 얼굴을 밝히는 사나운 광휘.

탁자 다리를 벼려내듯 휘감은 찬란한 결의.

자신의 손에 들린 나무토막에서 오러가 피어나 있었다.

나무토막뿐만이 아니었다.

손아귀를 넘어 손목으로.

손목을 통해 팔뚝과 어깨로.

마침내는 가슴 속 힘찬 심장 울림까지.

쿠웅, 쿠우웅!

미증유의 산울림이 심장을 감쌌다.

단단한 마나하트를 두드려 열었다.

하늘을 떠받치는 거인이 신음하듯.

마나하트가 쪼개지고 흩어져 갔다.

재생을 위한 파괴.

부활을 향한 죽음.

부서짐과 재구성.

소멸과 탄생.

흩어지고, 갈라졌다.

모여들고, 연결되며, 호흡했다.

처음과 끝이 순환했다.

끝이 처음을 불러왔다.

자극과 자극 사이.

균형적 파괴와 혼돈의 재생 끝에서.

기억 속 다짐처럼 태초의 심장이 뛰었다.

쿠우웅-!

새로이 태어난 마나하트가 첫 울음을 토해냈다.

이전과 차원이 다른 힘이 혈맥을 두드려 깨웠다.

전신 구석까지 번져가며 날뛰었다.

날뛰며 스며갔다.

세포 하나하나가 반응했다.

소드마스터만이 이룰 수 있는 마나의 끝없는 순환이었다.

그 속에서 하비엘이 움직였다.

투콰앙!

"...!"

나무토막 탁자 다리를 휘둘렀다.

탁자 다리에 휘감긴 오러가 스스로 반응했다.

살아 있는 짐승이 사냥감을 추적하듯.

오러 광채 하나하나가 날을 세웠다.

탁자 다리의 궤적을 따라 광포한 노도의 힘을 뿌렸다.

체르니 경이 내리누르고 있던 검을 튕겨냈다.

콰창!

일격에 검이 튕겼다.

체르니 경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저 은발 애송이가 쥔 탁자 다리에 왜 오러가 맺혔는지.

아니, 고작 탁자 다리 따위에 오러를 생성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

의문과 충격, 경악과 불신 속에서 그는 가까스로 검을 수습했다. 끌어당겼다. 위기를 느꼈다. 본능적으로 좌상단을 방어했다.

콰아앙-!

하비엘의 탁자 다리가 떨어져 내려왔다.

탁자 다리에 맺힌 오러가 야수의 송곳니처럼 쏟아져 왔다.

"...큽!"

가까스로 막아냈다.

단 한 번의 검격을 막았을 뿐인데.

허리가 휘청거렸다.

무릎이 꺾일 뻔했다.

'말도 안 돼!'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고작해야 나무토막일 뿐이다.

부서진 각목, 탁자 다리에 지나지 않는다.

한데 거기에 맺힌 오러의 위력만으로 자신을 물러나게 만들다니.

'거짓말이다. 사기야, 이건!'

까드득!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

자부심마저 산산조각으로 짓밟히는 듯한 치욕감.

그 속에서 체르니 경이 이를 갈았다.

검을 더욱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 또한 천재적인 검사였다.

인간 흉기, 전략 병기라 일컬어지는 소드마스터였다.

'기세부터 되찾는다.'

후으읍, 한 번의 호흡.

그것만으로 감정을 수습했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다잡았다.

충격과 경악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흔들리던 내면을 정리하고 눈앞의 적에게 집중했다.

냉정한 눈길로 상대를 분석했다.

쐐애애액!

섬전처럼 횡으로 베어오는 하비엘의 탁자 다리.

그 궤적을 따라 줄기줄기 피어나는 서늘한 오러.

'인정하자. 놈도 소드마스터가 된 거다.'

저건 오러가 맞다.

인정해야 한다.

그러니 더욱 강력한 오러로 받아치고 부숴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저 괴물 같은 재능의 은발 애송이를 꺾을 방법이리라.

다짐한 그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흐읍!'

꽈드득!

정면 승부.

벼려낸 각오와 함께 돌진했다.

모든 마나를 검에 밀어 넣었다.

최고의 오러 소드를 일으켜 마주 휘둘렀다.

'오러끼리의 싸움에선 내가 밀릴 리가 없으니까!'

자신이 소드마스터로 지낸 시간이 훨씬 길다.

그만큼 오러의 위력도, 그걸 다루는 기량도 몇 수는 위일 것이다.

스스로를 믿었다.

확신을 담았다.

'오러 싸움을 먼저 제압하고, 놈의 나무토막 탁자 다리를 베고, 그 기세를 몰아 목을 친다!'

쐐애애액!

체르니 경의 오러 소드.

하비엘의 오러 담긴 탁자 다리.

두 짐승의 송곳니가 충돌했다.

콰창-!

검이 깨졌다.

수십 조각 파편으로 터졌다.

체르니 경의 전신에 박혔다.

"...!"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고통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어째서?'

경악 어린 의문을 떠올리는 순간.

하비엘의 탁자 다리가 서늘하게 번득였다.

체르니 경의 오른쪽 어깨를 벼락처럼 저며냈다.

서컥!

날뛰는 핏방울.

그 속에서 체르니 경의 잘린 오른팔이 허공을 날았다.

부러진 검을 움켜쥔 모습 그대로,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붉은 무늬를 새기며 떨어졌다.

"...크으읏!"

체르니 경의 얼굴이 격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오른팔 잘린 자리를 미처 감싸지도 못했다.

자비 없는 발차기가 날아왔다.

뻐억-!

"...!"

일격에 코뼈가 뭉개졌다.

비틀비틀, 넘어졌다.

아니, 그 전에 뒷덜미를 붙잡혔다.

"이제부터 이쪽으로 한 걸음이라도 다가오는 자가 있다면, 이자의 목을 베겠습니다."

뒤쪽에서 하비엘의 서늘한 음성이 울렸다.

그제야 체르니 경은 자신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내가... 인질이 됐다고?'

온통 흔들리는 눈동자로 앞을 보았다.

연회장의 광경이 보였다.

입을 틀어막고서 비명을 참는 귀부인들.

그런 귀부인들을 보호하는 창백한 귀족들.

뽑아든 검을 들고서 주춤주춤, 당황하고 있는 근위대원들.

그리고... 오른팔이 잘린 채 은발 애송이에게 뒷덜미를 붙잡혀 인질이 되어 버린 자신까지.

츠스스스스...!

어느새 자신의 어깨 위에 탁자 다리가 올려져 있었다.

탁자 다리를 휘감은 오러가 오른쪽 귓불을 서늘하게 날름거렸다.

그 순간 절절히 피부로 느꼈다.

자신이 패배했음을.

인질이 되었음을.

조금이라도 저항을 시도하려다간 단번에 저 오러에 목이 잘릴 것임을.

'내가... 겨우 이런 애송이에게... 그으읏.'

체르니 경의 표정이 애써 붙들고 있던 자부심과 함께 무너졌다. 물론 그의 절망적 감정 따위는 하비엘에겐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하비엘의 서늘한 눈동자는 오직 근위대원들을 향해 있었다.

체르니 경을 붙잡고서 한 발짝, 두 발짝, 복도 출입구로 물러났다.

그러다 문득,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필이면 이런 자가 인질이라니.'

국왕을 지키기 위해 국왕 시해 미수범을 인질로 삼은 아이러니.

그러나 상관없었다.

지금은 복도 안쪽 휴게실로 아무도 들이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근위대원 중에 또 어떤 배신자가 섞여 있는지 모른다.

아직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누구도 통과시킬 수 없다.

'그러니 로이드 님. 부디 지금의 시도, 꼭 성공하시길.'

그리하여 국왕을 무사히 살려내시길.

하비엘은 바라고, 믿으며 기다렸다.

로이드가 자신을 믿기에 이번 사건에 뛰어들었듯.

자신도 로이드를 믿으며 이곳을 지켜내자고 다짐했다.

의지 서린 눈길로 사위를 압도했다.

탄생의 검명을 발산하는 새로운 소드마스터.

그 철혈의 기사가 벼려내는 위용 앞에, 근위대원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단지 검 끝을 숙일 뿐이었다.

키이이잉-!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④ : 써클 시프트를 발동합니다.]

[모든 써클의 기어가 6단으로 설정되었습니다. RPM 6,000으로 고정.]

'흐으읍!'

고요한 왕의 휴게실.

그곳에 로이드의 땀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그때마다 그의 심장 주위로 고속의 써클 회전이 일어났다.

맹렬한 회전이 흡인력을 생성했다.

그의 심장 주위로 맹독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거의 다 됐다.'

국왕에게서 흡수한 맹독.

그렇게 심장 둘레에 쌓은 독의 양이 엄청났다.

기세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조금만 실수하면 전신으로 다 퍼질 거야.'

그러면?

반드시 죽는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만큼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독성이 너무나 맹렬했다.

'퍼지는 순간 신경을 차단하는 건 물론이고 주위 조직까지 다 녹여 버리겠지.'

조직에 광범위한 손상을 입힐 것이다.

대량으로 생성된 혈전이 혈관을 막을 것이다.

신체 말단까지 산소 공급이 차단되고, 각종 장기가 부전을 일으켜 쇼크 상태에 빠질 것이리라.

'그러니까 써클의 회전력을 절대로 낮추면 안 돼.'

로이드는 주의하고 또 주의했다.

현재 자신의 상태는 독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힘껏 돌리고 있는 상황과 흡사했다.

양동이를 세게 돌리고 있는 동안은 원심력이 유지된다.

원심력이 유지되면 양동이 속에 독을 가둘 수 있다.

그러나 양동이를 돌리는 힘이 약해지면?

그래서 회전이 느려지면?

원심력이 사라지자마자 맹독이 양동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걸 흠뻑 뒤집어쓰는 자신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세 개의 써클이 양동이 역할을 하는 셈인 거야. 자, 됐다.'

키이이이잉-!

써클이 회전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이제 써클로 들어오는 맹독이 없었다.

흡수가 끝난 것이었다.

"자아. 다 끝났습니다, 고객... 아니, 전하."

로이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행여나 써클의 회전이 느려질까 최대한 느릿느릿.

아침잠이 덜 깬 나무늘보처럼 매우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국왕에게서 물러났다.

'흡수가 끝났으니 이제는 안전하게 배출할 차례.'

마침 물러나는 방향에 미리 보아둔 와인 병이 있었다.

그는 와인 병을 집었다.

코르크 마개를 뽑았다.

병에 담긴 내용물을 쏟아 비워냈다.

빈 병 주둥이에 오른손 검지를 쿡 찔러 넣었다.

'맹독, 순수한 엑기스로 정제하면 다섯 방울쯤 될까.'

그는 자신의 써클 회전에 갇혀서 날뛰는 맹독의 실제 양을 가늠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호흡을 조절했다.

키이이이-!

써클의 회전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방향을 바꾸었다.

채집에서 정제로.

흡수에서 배출로.

지금까지와 반대의 과정을 밟아갔다.

그리고 실패했다.

터어엉-!

"...컥!"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았다.

순간 무언가가 심장을 꽉 쥐어 터뜨리는 듯한 격통이 몰려왔다.

너무나 큰 충격에 잠깐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하마터면 발동하고 있는 써클 시프트가 중단될 뻔했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무슨. 이거 뭐야.'

당황스러웠다.

그저 하던 대로 했을 뿐인데.

외부의 기운을 흡수하고, 배출하는 패턴.

그 익숙하던 과정을 평소와 똑같이 수행했을 뿐인데.

'그런데 왜 배출이 안 되는 거지?'

맹독이 배출되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써클에 달라붙었다.

마치 끈적한 기름 찌꺼기처럼, 회전하는 써클에 뻑뻑하게 엉겨붙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섬뜩해졌다.

'어떡해야 하지?'

시간이 별로 없었다.

대책을 궁리하는 짧은 사이에도 맹독은 더욱 집요하게 써클에 들러붙어 오고 있었다.

그럴수록 써클의 회전이 조금씩 느려졌다.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④ : 써클 시프트의 움직임이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외부 요소의 강력한 간섭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써클 시프트의 최고 회전수가 5단으로 제한됩니다.]

[모든 써클의 기어가 5단으로 강제 조정되었습니다. RPM 5,000으로 고정.]

키이이... 기기긱!

급기야 써클 기어가 강제로 5단으로 내려왔다.

최대 분당 회전수가 5/6로 줄어들었다.

그만큼 회전력에 갇혀 있던 맹독의 기운이 더욱 거칠게 반응했다.

마치, 우리를 부수고 뛰쳐나오려 날뛰는 짐승 같았다.

'미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건 진짜로 장난이 아니다.

이대로 대응을 못 하면 계속해서 기어가 내려갈 거다.

그러면 결국엔 맹독이 회전력에서 풀려나오게 된다.

'내가 그 꼴을 겪을 줄 알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가능성과 희망.

갖은 시도와 결과.

그 모든 시나리오를 순식간에 검토했다. 점검했다. 계산했다.

그런 이쪽의 초조함이 훤히 읽힌 것일까.

수척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국왕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혹시 일이 잘못되고 있는 것인가?"

"...."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국왕의 얼굴이 굳었다.

"흡수한 독을 밖으로 꺼내지를 못하고 있는 건가?"

"...."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의 눈빛이 독해졌다.

"혹시 한쪽 팔로 독을 집중할 수 있는가?"

"...."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싫다.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가 떠올랐다.

한쪽 팔에 맹독을 억지로 집중시키고, 그 팔을 잘라내는 것.

그게 철혈의 기사에서 국왕 알리시아가 스스로를 향해 감행한 응급처치였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왼팔을 잃어야 했으니까.

'사양합니다, 그런 건.'

눈빛으로 거절했다.

물러나 달라고 눈짓했다.

'팔을 자른다는 거, 안전빵 치고는 너무 과격하잖아.'

손해가 확실시된 방법이라면 당연히 기각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모 아니면 도가 낫다.

바로 지금, 자신이 각오한 방법처럼.

'후우.'

숨을 몰아쉬었다.

국왕이 있는 반대편.

벽면을 향해 마주 섰다.

그 순간, 다시금 불길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④ : 써클 시프트의 움직임이 지속적인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외부 요소의 더욱 강력해진 간섭으로 인하여 써클 시프트의 최고 회전수가 4단으로 제한됩니다.]

[모든 써클의 기어가 4단으로 강제 조정되었습니다. RPM 4,000으로 고정.]

쿠우웅-!

써클의 회전에 더욱 큰 저항이 걸렸다.

늪에 빠진 바퀴처럼 힘겹게 돌아갔다.

맹독의 기운이 슬금슬금, 약해진 회전력 밖으로 촉수를 내밀어 왔다.

부서지려는 쇠창살 속 짐승.

섬뜩함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탁자 위 식사용 나이프를 쥐었다.

꽈득!

두 번은 없다.

한 번에 깔끔하게.

다짐하며 기어 시프트를 조절했다.

'2대 3대 3으로.'

키이이이잉-!

알파 써클을 2,000 RPM으로.

나머지 써클을 3,000 RPM으로.

회전력을 떨어뜨렸다.

마침내 맹독이 쇠창살 우리를 찢었다.

써클의 회전력 밖으로 탈출해 나왔다.

곧바로 심장을 향해 침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세 써클이 2대 3대 3의 회전비로 공명했다. 서로를 끌어당겼다. 맹독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그리고 충돌했다.

투화학-!

어느새 내뻗는 로이드의 나이프.

그 은빛 직선 너머, 맹렬한 마나의 폭풍이 쏟아져 나갔다.

그가 맹독을 배출할 유일한 가능성을 엿본 최후의 수단.

삼중 발파가 시도되는 순간이었다.

99화. 찬사의 밤 (1)

투화학-!

세 갈래 써클이 충돌했다.

로이드의 심장을 둘러싸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마나하트 스킬 옵션 ① : 충격 상쇄가 발동됩니다.]

[당신의 마나하트는 써클의 보호 없이도 발파의 충격을 자체적으로 상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발파로부터 어떠한 타격도 받지 않습니다.]

철커덕, 카각!

마나하트가 단단해졌다.

발파의 충격을 흡수했다. 흘려냈다.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덕분에 발파의 충격이 모조리 외부를 향했다.

콰아아아!

혈맥과 림프구, 근육 조직을 타고 거침없이 질주했다.

로이드가 이끄는 의지를 따라 쇄도했다.

심장을 박차고 대흉근과 소흉근으로.

일부는 승모근과 등세모근으로.

갈래치고 합쳐지며 회전근개를 거쳐.

삼각근과 오훼완근, 상완삼두를 박찼다.

손목의 동맥을 돌파하고, 수많은 인대와 관절 조직을 관통했다.

마침내 로이드의 손에 들린 나이프를 통해 폭발했다.

투콰학-!

삼중 발파의 거대한 불기둥이 위쪽으로 비스듬히 쏘아졌다.

순수한 마나의 충돌이 만들어낸 난폭한 불꽃.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태웠다.

저몄다. 녹였다. 소멸시켰다.

휴게실의 옷장도, 벽면도, 그 너머의 천장도 예외가 없었다.

물론 써클의 회전력에서 빠져나오려 날뛰던 맹독의 기운도 마찬가지였다.

'됐다!'

나이프로 발파를 내쏘는 로이드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성공의 예감이 들었다.

써클 시프트를 발동하며 의도적으로 써클의 회전력을 낮춘 그였다.

그 과정에서 뚜렷이 느꼈다.

써클의 회전이 약해지는 순간, 맹독의 기운이 회전력이라는 철창 밖으로 짐승처럼 튀어나오려 했다.

그때 세 써클이 모조리 충돌했다.

맹독이 미처 탈출하기도 전이었다.

맹독마저 집어삼킨 거대한 충돌.

이윽고 일어난 폭발적인 분출.

맹독은 그 흐름을 버텨내지 못했다.

급류에 빠진 승냥이처럼 거침없이 휩쓸렸다.

때로는 허우적대고, 빠져나오려 발버둥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러기엔 삼중 발파의 기세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밖으로 분출되었다.

나이프를 통하여.

발파의 폭발에 실려.

허공에서 강렬한 힘에 노출되었다.

프츠츠츳!

발파로 분출되는 힘의 상당량이 열에너지로 소모되고 있었다.

그 막대한 열기가 맹독 성분을 태우고, 지졌다.

독성을 이루고 있던 단백질 조직이 변형되었다.

고분자 결합의 고리가 깨지고, 끊어졌다.

변질되고, 퇴색되었다.

열기를 버티지 못했다.

마침내 완전히 탄화되어 버렸다.

파샤삿....

맹렬한 열기 속에서 맹독 성분이 소멸되었다.

그러고도 삼중 발파의 기세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니, 더욱 난폭하게 뻗어 갔다.

휴게실 천장에 지름 2미터의 구멍을 뚫었다.

천장 위쪽의 벽과 수많은 구조물을 거침없이 돌파했다.

그리고 마침내 연회장 건물 지붕을 꿰뚫고서 밤하늘로 쇄도했다.

콰아아아아-!

왕도 어디에서나 목격할 수 있을 마나의 불기둥이 70미터나 치솟았다.

그 서슬에 놀란 왕도 시민들이 눈을 부릅뜨는 사이, 발파의 불기둥이 수그러들었다.

"...쿨럭! 큭! 커훌럭!"

삼중 발파는 역시 몸에 엄청난 무리가 간다.

아무리 심장이 충격을 받지 않는다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으으,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잖아.'

전신 근육이 망치로 두드려 맞은 것처럼 쑤셨다.

순간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힘을 통과시킨 탓인 듯했다.

게다가 마나하트도 완전히 텅텅 비었다.

극단적인 몸살과 독감을 함께 겪는 기분이었다.

절로 다리가 풀렸다.

엉덩방아를 풀썩 찧고 말았다.

'이거 진짜 장난 아니네.'

현수교 기초 공사를 하느라 삼중발파를 쓸 땐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이번엔 목숨 걸고 전력을 다 쏟았다.

그 차이가 생각보다 컸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러한 통증에도 기절하지 않았다.

사실 마음 편히 기절하고 싶긴 했다.

그럼에도 그가 쓰러지지 않은 이유.

눈앞에 힘차게 떠오르는 메시지 덕분이었다.

딩동.

[당신은 치명적인 맹독, 루나티카의 성분을 다량으로 체내에 받아들이고도 살아남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인상적인 방법으로 독성분을 배출하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경험이 당신의 두 가지 스킬에 유니크한 특성을 부여합니다.]

'유니크한 특성? 설마... 스킬 전용 옵션?'

극도로 지쳐 주저앉은 로이드.

그런데 눈앞에 떠오르는 핵이득 알림.

그걸 놓치고서 기절하긴 싫었다.

기절해도 궁금해서 다시 깨어날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마나하트 스킬에 새로운 전용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② : 만독불침 - 당신은 강력한 합성독 '루나티카'에 영향을 받았음에도 무사히 살아남았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당신의 마나하트에 영구적인 독 내성을 부여하였습니다. 이 옵션은 현존하는 모든 독에 대한 강력한 저항력을 선사할 것입니다.]

[아스라한 심법 스킬에 새로운 전용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⑤ : 급속충전 - 극단적 마나 고갈 상태에서의 마나 회복을 가속시킵니다. 옵션 사용 시 보유한 써클이 한계 이상의 속도로 회전하며 5분간 주위의 무작위한 대상으로부터 대량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제한 : 하루 1회만 사용 가능.)]

'허허? 허허허.'

옵션 안내를 읽은 로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수확이었다.

'그저 살려고 발버둥쳤을 뿐인 건데.'

단지 그뿐이었다.

아무리 난리를 쳐도 맹독 성분이 밖으로 배출되지가 않았다.

써클을 갖가지 방법으로 돌려도 그러했다.

아스라한 심법의 잠력 폭발 옵션을 써볼까도 싶었다.

'하지만 그걸 써도 실패하면 뒤가 없었어. 탈진 상태에 빠져서 아스라한 심법을 사용 못 하게 되니까. 써클의 회전력이 완전히 상실되니까.'

그랬다간 맹독이 써클의 회전에서 풀려났을 터다.

속수무책으로 죽게 되는 셈이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발파가 답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지금 이처럼, 생각지 못했던 옵션을 둘이나 얻게 되었다.

'만독불침. 앞으로 살면서 독살당할 걱정은 없겠네. 매우 마음에 들어. 그리고 급속 충전. 이건, 으음... 삼중 발파로 마나를 텅텅 비워내고도 기절하지 않은 덕분에 생긴 옵션인 건가.'

로이드의 눈길이 급속충전 옵션 안내를 꼼꼼히 훑었다.

'주위에서 무작위로 마나 흡수라.'

마나 흡수.

원래 아스라한 심법의 핵심이자 기본이었다.

한데 새로 생긴 이 급속충전이라는 옵션은 그 기본적인 핵심 성능을 극단적으로 발휘하게 해주는 듯했다.

'어디 시험해볼까.'

마침 마나가 완전히 고갈된 판국이다.

그래서 일어나는 것도 힘겨울 지경이다.

아니, 조금이라도 긴장이 풀리면 이대로 기절할 상태였다.

즉, 급속충전 옵션을 시험해보기에 딱 안성맞춤인 상황이었다.

'해보자.'

스킬창을 열었다.

옵션 발동을 선택했다.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⑤ : 급속충전이 발동됩니다.]

[주위의 무작위한 대상으로부터 대량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그때부터였다.

키이이이잉....

삼중발파의 충돌을 겪고서 잠잠해져 있던 세 갈래 써클에 시동이 걸렸다.

마치 겨우내 창고에 박아뒀다가 오랜만에 켜는 선풍기처럼.

처음엔 덜걱대며 힘겹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점점 회전이 원활해졌다.

빨라졌다.

강렬해졌다.

한계를 넘어섰다.

미풍에서 약풍을 지나, 강풍을 뛰어넘어, 태풍으로.

키이이이잉-!

세 갈래로 회전하며 울부짖는 써클이 문자 그대로 소용돌이가 되었다.

동시에 로이드의 주위로 강력한 마나 흡인력이 생성되었다.

마치 블랙홀처럼, 주위의 모든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크그그그극!

건드리는 사람도 없는데 탁자가 요동쳤다.

마호가니 원목 속에 깃든 소량의 마나가 흡수되었다.

탁자를 이루는 나무가 푸석해졌다.

주위의 다른 사물도 마찬가지였다.

탁자 위의 장미가 순식간에 시들었다.

화장대 뒤를 기어 다니던 톡토기가 그 자리에서 말라 죽었다.

심지어 바닥에 깔린 대리석마저 특유의 광택을 서서히 잃어갔다.

그 와중에 사람이라고 예외일 리가 없었다.

"무슨... 그대는 지금 무얼 하는 건가."

국왕 알리시아가 기겁했다.

로이드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그녀였다.

맹독에 완전히 중독되었다가 간신히 풀려났다.

당연히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로이드의 삼중 발파를 눈앞에서 목격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마법이 아닌, 순수한 마나의 분출로 그런 엄청난 위력을 낸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는 상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어.'

한데 그런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소드마스터도 아닌, 로이드가 그걸 선보였다.

순수한 마나로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오직 오러뿐일 텐데.

로이드가 눈앞에서 선보인 폭발은 그런 오러를 한낱 장난감으로 전락시킬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충격이었다.

자신이 지닌, 보편타당한 상식이 산산조각으로 깨지는 기분이었다.

한데, 그러한 충격과 경악도 아직 끝이 아닌 것 같았다.

"마나가... 우으읏!"

실시간으로 몸에서 마나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섯 걸음 앞에 주저앉아 있는 로이드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국왕 알리시아는 황급히 마나하트를 일깨워야 했다.

"그으읏!"

쿠웅! 쿠우웅!

지친 마나하트를 억지로 움직였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나 많은 마나를 대량으로 흡수당해 비쩍 말라 죽을 것 같았다.

쿠우웅-! 두쿵!

그녀의 심장이 묵직하게 뛰었다.

체내의 마나가 조화를 이루며 순환했다.

소드마스터가 어떤 전투에서도 쉽게 지치지 않는 비결, 소드마스터 특유의 마나의 순환이었다.

'그럼에도... 빼앗기는 마나의 양이 조금 더 많아. 우으윽.'

그나마 다행히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속을 메슥거리게 할 정도는 충분히 됐다.

알리시아는 마나의 순환을 유지하느라 입도 열지 못했다.

로이드에게 빼앗기는 마나를 조금이라도 더 보충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그 노력이 로이드에게 훌륭한 도움이 되어 주었다.

키이이이잉-!

실시간으로 엄청난 마나가 흡수되었다.

그는 현재 마나의 블랙홀과 같은 상태였다.

무아지경에 빠진 채, 주위 모든 것의 마나를 탐식했다.

특히, 국왕 알리시아로부터 가장 많은 마나를 빨아들였다.

'후우.'

내쉬고 마시는 숨결.

그 간격 사이에서 본능적으로 가장 순수하고 정제된 마나를 찾았다. 탐했다. 빼앗고, 자신의 것으로 흡수했다.

그 대상이 바로 국왕 알리시아의 마나였다.

무려 소드마스터의 마나다.

전력을 기울여 마나의 순환으로 정제한 힘이다.

그저 자연에 무작위로 퍼져 있는 마나와는 밀도와 순도, 모든 면에서 격이 달랐다.

그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자연에 퍼진 마나가 그저 평범한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이라면, 소드마스터인 국왕 알리시아가 정제한 마나는 극단적인 압력으로 압축된 중성자 축퇴물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미국의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

그 구조물을 중성자별의 밀도로 압축하면 좁쌀 하나 크기가 된다.

지금, 로이드가 흡수하고 있는 국왕의 마나가 바로 그러했다.

자연의 것과 격을 달리하는 경이로운 밀도와 순도.

그러한 양질의 마나가 텅텅 빈 로이드의 마나하트를 채웠다.

아니, 채우다 못해 찢었다.

강제로 용량을 늘렸다.

실시간으로 로이드의 마나하트를 변화시켰다. 진화시켰다.

딩동. 딩동.

무아지경에 빠진 로이드의 눈앞으로 수많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나하트 스킬의 경험치가 폭증하고 있었다.

폭발적으로 쌓이는 경험치.

쉴 틈 없이 오르는 레벨.

그 소식을 알리는 메시지가 끝도 없이 떠올랐다.

그럴수록 그에게 마나를 흡수당하는 국왕 알리시아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으읏, 세상에 이런 게 가능할 줄은....'

정말로 몰랐다.

상식이 송두리째 뽑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로이드를 향해 다가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가까이 가면 더 많은 마나를 빼앗길 테니까.

그녀는 조금이라도 로이드에게서 멀어지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 수조차 없었다.

겨우 1센티를 움직이는 것마저 힘겨웠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로이드의 마나하트를 채워주는 보조배터리 역할이 고작이었다.

'이런 미친!'

그녀는 조금이라도 마나를 지키려 애썼다.

어떻게든 덜 빼앗기려 몸부림쳤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로이드의 마나하트 스킬이 오를수록 마나 흡수량도 더 많아졌다.

마나하트가 강제로 찢기고, 넓어질수록 담을 수 있는 마나의 양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듯, 뺏기는 국왕과 가차 없이 빼앗는 로이드.

그 사이의 불공평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만약 국왕이 그저 평범한 익스퍼트 등급이었더라면 진즉 모든 마나를 빼앗기고 미라 꼴이 되었을 것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소드마스터였다.

미라가 되는 대신 끝없는 마나의 순환으로 저항했다.

덕분에 로이드의 마나 흡수도 계속 끊기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다.

원래라면 주위의 자연 마나를 약간 흡수해서 기력 회복 용도 정도로만 쓰일 급속충전 옵션.

그 옵션이 곁에 무력하게 앉아 있던 소드마스터 국왕이라는 존재 덕분에 원래의 용도를 넘어선 폭발적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로이드의 마나하트가 계속 채워지고, 한계를 넘어 찢기고, 더 확장되었다.

레벨도 끝도 없이 치솟았다.

2레벨에서 3레벨로.

4레벨에서 5레벨로.

10레벨을 순식간에 돌파했다.

마침내 11레벨을 달성하는 순간.

남들에겐 몇 년은 걸릴 위업이 불과 5분 만에 세워졌다.

[스킬 등급 업!]

[마나하트 스킬의 등급이 <소드 익스퍼트 하급>으로 상승했습니다.]

100화. 찬사의 밤 (2)

[스킬 등급 업!]

[마나하트 스킬의 등급이 <소드 익스퍼트 하급>으로 상승했습니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러나 로이드는 여전히 무아지경.

눈을 뜨고는 있되,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키이이이잉-!

세 갈래 회전하는 써클에 감싸인 마나하트.

써클을 통해 경이로운 밀도와 순도의 마나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 경험은 로이드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크으읍!'

그저 한 조각.

숨결 한 모금.

그만큼의 마나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마나하트가 온통 요동쳤다.

자그마한 찻잔 속에 태풍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혹은 양동이에 바다가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 노도와도 같은 마나의 유입을 버틸 수가 없었다.

아주 일부의 양을 간신히 담아냈다.

그것만으로도 마나하트가 찢어졌다.

콰창-!

'크윽!'

마나가 통째로 찢기는 충격.

엄청난 통증이 내면을 뒤흔들었다.

그러는 동시에 시원한 느낌도 들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해체된 자리에 찾아오는 재생의 쾌감.

어느새 마나하트가 복구되었다.

이전보다 더 크고 튼튼해졌다.

약간 더 많은 마나를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쏟아져 들어오는 국왕의 마나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그렇게, 방금 재생된 마나하트가 다시금 찢기고, 깨졌다. 복구되었다. 또 깨졌다. 재생되었다.

쉼 없는 파괴와 재생의 순환.

그 속에서 로이드는 비 오듯 땀을 흘렸다.

시커먼 땀이 온몸의 모공에서 배어 나왔다.

그동안 살아오며 몸 곳곳에 쌓인 탁한 기운, 탁기였다.

한데 그 탁기가 소드마스터의 강대한 마나를 정면으로 받아내고 흡수하며 생기는 내부의 파장에 모조리 밀려나 배출되고 있었다.

'크읏....'

전신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무아지경 속에서 견뎌냈다.

마치 혹독한 고문과도 같은 5분이, 그렇게 지나갔다.

마침내 블랙홀처럼 날뛰던 세 갈래 써클이 잠잠해졌다.

키이이이....

회전 속도가 느려졌다.

포악하고 게걸스럽던 흡수가 중단되었다.

그 사이, 로이드의 주위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반경 7미터.

그 범위 안쪽엔 멀쩡한 물건이 없을 지경이었다.

탁자는 아예 말라비틀어져 부스러졌다. 가루가 되었다.

탁자 옆에 있던 의자도 마찬가지였다.

장미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벌레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쇠로 이루어진 물건은 모조리 녹이 슬었다.

심지어 벽면과 천장을 이루는 벽돌마저 푸석푸석해졌다.

그렇듯 살벌한 흡수 반경 안쪽에서 그나마 무사한 건 국왕 알리시아밖에 없었다.

"헉, 허억... 헉!"

이제 겨우 끝난 건가.

설마 또 시작되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더는 버틸 자신이 없는데.

백지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국왕 알리시아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실로 흉악한 마나 흡수였다.

그 폭풍 속에서 살아남은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마도 어지간한 소드 익스퍼트 중급, 아니, 상급이라도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지닌 마나를 모조리 빼앗겼으리라.

종국엔 생명력마저 흡수당했으리라.

그렇게 비쩍 마른 미라 꼴이 되어 죽었을 터다.

절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가정이었다.

'대체 무슨... 이런 기술이.'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가 로이드를 향했다.

살벌하고도 흉험한 마나 흡수 지대의 중심에 그가 고요히 앉아 있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전과 같은 검은 눈동자.

하지만 체내의 모든 탁기가 배출된 후였다.

눈빛이 이전보다 맑아졌다.

'아.'

그렇게 눈을 뜨고서야 비로소 로이드는 눈앞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딩동.

[스킬 등급 업!]

[스킬명 : 마나하트]

[단계 : 소드 익스퍼트 하급 Lv 1]

[신체 능력 향상률 : 300%]

[보유 중인 스킬 전용 옵션 : ① 충격상쇄 / ② 만독불침]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300]

[마나하트 스킬의 등급이 <소드 익스퍼트 하급>으로 상승했습니다.]

[당신의 마나하트는 우연한 계기에 의해 무아지경 속에서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이 특별한 경험이 스킬에 새로운 전용 옵션을 부여합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③ : 무아지경 - 옵션 발동 시 60초 동안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집니다. 무아지경 상태에서는 옵션 발동 직전에 설정한 목표만을 위해 맹목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동안 모든 통각이 차단되며 절대로 기절하지 않습니다. 또한, 근력과 맷집, 지구력, 반사신경이 200% 상승합니다. (제한 : 하루 1회만 사용 가능.)]

[현재 보유 중인 RP : 4,029]

'뭐냐, 이건.'

멍한 가운데 로이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쁘고도 황당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그저 아스라한 심법의 급속충전 옵션을 발동했을 뿐이다.

새로 생긴 옵션이 딱 지금 상황에 적절하게 보여서.

마침 성능을 테스트하기에 적당하다 싶어서.

그래서 발동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 뒤로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냥, 딱 몇 초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았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자신이 소드 익스퍼트 하급이 되어 있었다!

'설마 벌써 5분이 다 지난 거라고? 아니, 5분이 지났다고 쳐도, 그사이에 내가 익스퍼트 하급이 됐다는 게 말이나 돼?'

잘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안 믿을 수가 없었다.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어 버린 주위의 광경 때문이었다.

아예 부스러져 버린 탁자와 의자.

녹이 슬어버린 금속 장식들.

벽돌마저 버석거렸다.

카펫은 100년쯤 지난 것처럼 색마저 바랜 모습이었다.

그리고 정면 다섯 걸음 앞에선 국왕이 망연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너, 아니, 그대는... 대체 뭐지?"

평소답지 않게 떠듬떠듬 물어오는 국왕 알리시아.

그녀의 안색이 아까보다 훨씬 나빠 보였다.

그냥 독에 중독됐을 때도 저 정도로 창백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마치 1년쯤 중병을 앓으며 햇볕을 한 번도 못 본 사람처럼 핏기가 아예 없었다.

'설마 내가 그런 거야?'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메시지로 안내되던 옵션, 급속충전의 내용을 되새겨보자니 딱 그러했다.

'주위의 대상으로부터 무작위로 대량의 마나를 흡수한다고 그랬지.'

한데 이 정도로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 줄은 몰랐다.

이만큼 무지막지한 기세로 마나를 빨아들일 줄도 진짜로 몰랐다.

로이드는 조금 머쓱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지금은 주위의 자잘한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어쨌건 국왕의 중독이 풀렸다.

자신도 다행히 살아났다.

그러니 이제는 하비엘을 도우러 가야 할 때다.

'하비엘 녀석, 무려 소드마스터와 싸우게 됐으니까.'

걱정이 됐다.

아무리 하비엘이 하늘이 내린 재능러라 해도 그랬다.

어쨌건 상대인 체르니 경은 강력한 소드마스터였다.

그런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비(非)소드마스터인 하비엘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아니, 운이 나쁜 거라면 벌써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제발 그런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초조한 마음에 몸을 불쑥 일으켰다.

다행히 다리가 풀리거나 하진 않았다.

아니, 소드 익스퍼트 하급으로 등급이 오른 덕분인지 몸에 제법 힘이 넘쳤다.

그는 재빨리 움직여 국왕을 부축했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그대는 짐이 괜찮아 보이는가."

"...."

"다시 묻고 싶군. 그대는 대체 뭐지? 방금 무슨 짓을 벌인 것인가."

이쪽을 향한 국왕의 의혹 가득한 눈초리.

그녀의 눈길이 밤하늘을 훤히 보이게 하는 천장의 구멍을 향했다. 그리고 다시 이쪽의 얼굴로 날아와 꽂혔다.

"아까의 그 폭발적인 마나의 분출도, 방금 짐에게서 마나를 앗아가던 그 엄청난 흡수도... 짐은 결코 그런 기법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어."

"예, 아마 그러실 것이옵니다."

"이야기해 줄 수 있는가?"

"물론이옵니다. 다만, 그 이야기는 조금 후로 미루면 어떨까 하옵니다."

"그대를 따르는 은발 기사, 아스라한 경 때문에?"

"예, 전하."

"그가 걱정이 되는 것이로군?"

"시급히 움직여 그를 돕고 싶사옵니다."

"짐 또한 같은 마음이다. 일단 움직이도록 하지. 날 업을 수 있겠는가?"

"영광이옵니다."

냉큼 등을 내밀었다.

국왕은 망설임도 없이 이쪽의 등에 업혀왔다.

"그럼 뛰겠사옵니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곧바로 땅을 박찼다.

콰아앙-!

예전보다 훨씬 빨라진 도약.

그 기세를 발판 삼아 휴게실을 나섰다.

기나긴 복도를 재빠르게 뛰었다.

그동안 속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하비엘, 제발 무사해라.'

연회장에 도착하면 곧바로 싸움에 가세하리라.

하비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체르니 경에게 맞서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이젠 나도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소드 익스퍼트 하급이 됐으니까.'

거기에 트리플 써클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여차하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삼중 발파를 터뜨려 버릴 수도 있다.

거의 반쯤 로또 샷에 가까운 시도겠지만, 체르니 경이 이쪽의 기술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걸 감안하자면 의외의 큰 타격을 먹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타다닷! 타탁!

일렁이는 샹들리에 아래, 통로를 가로질렀다.

모퉁이를 돌고,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렸다.

그동안 로이드의 등에 업힌 국왕도 나름 회복에 집중했다.

'좋아. 조금만 더.'

소드마스터 특유의 순환.

그 마나의 순환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로이드의 등에 업힌 잠깐 사이에 그녀의 안색은 몰라보게 나아졌다.

창백해진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탈진됐던 근육이 활력을 되찾았다.

'이 정도면 평소의 삼 분의 일 정도의 힘인가.'

물론 썩 만족스러운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싸움을 감당할 정도로는 충분했다.

게다가 하비엘과 로이드, 연회장에 있을 근위대원들까지 합세한다면 넉넉히 체르니 경을 제압할 수 있으리란 계산이 섰다.

'체르니 경.'

그녀의 눈동자에 서글픈 분노가 떠올랐다.

자신의 오랜 근위대장이자 검술 스승.

세상 누구보다도 믿었던 신하.

하지만 오늘,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배신자.

'어째서. 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왜 자신을 배신했는지.

누가 그의 배후에서 일을 꾸민 것인지.

비통한 분노 속에 추측을 거듭해도 선뜻 나오는 답이 없었다.

모든 의혹과 사실이 안갯속에 파편으로 흩어진 듯 모호하기만 했다.

그럴수록 국왕 알리시아의 눈동자에 독기가 배어났다.

'체르니 경. 짐은 그대를 포기하지 않겠어. 절대로 쉽게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 친히 그대의 배후와 흉계를 모두 밝혀낼 것이야.'

그 후에 속 시원히, 직접 목을 베리라.

'오직 그것만이 아꼈던 신하를 떠나보내는 짐의 송별 방식이 될 테니까.'

으드득!

살벌한 분노.

냉엄한 상실감.

그 속에서 국왕은 어깨를 떨었다.

동시에 이제부터 펼칠 피비린내 가득할 전투를 대비했다.

그 순간, 복도를 내달리던 로이드가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

타아앗!

"어?"

기세를 살려 계속 뛰려던 로이드가 흠칫 놀랐다.

저도 모르게 황급히 도약을 멈추었다.

그리고 앞을 보았다.

"하비엘?"

시선이 멎는 복도 출구.

그곳에 뒷모습으로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연회장 가득 밝혀진 샹들리에.

홀 곳곳에서 번득이는 장검.

그 광채와 서늘한 빛살을 역광으로 받은 탓에 모습이 자세히 들여다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그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하비엘? 괜찮은 거냐."

"예, 로이드 님."

이쪽을 돌아보는 하비엘.

피식 웃고 있었다.

그래서 한마디 쏘아붙여 주려 했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고.

그렇게 핀잔이라도 주려 했다.

그러다가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닫고 말았다.

하비엘의 손에 뒷덜미를 붙잡힌 채 축 늘어진 남자의 실루엣을 뒤늦게 눈에 담은 까닭이었다.

한데 그 남자의 실루엣이 또 익숙했다.

'설마?'

혹시나 했다.

눈을 깜박였다.

다시 보니 역시나였다.

"너 설마, 체르니 경을 잡은 거냐?"

"예, 로이드 님."

"오른팔도 네가 잘랐고?"

"예, 로이드 님."

"그럼 너는?"

"예?"

"다친 곳, 없냐고."

"예. 다행히."

"그래, 그럼 됐어."

정말로 됐다.

그거면 된 거다.

비로소 피식, 안도의 웃음이 나왔다.

터덜터덜, 뒤늦은 피로감을 느끼며 하비엘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사이, 업혀 있던 국왕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이쪽과 하비엘 사이에 섰다.

"모두는 들으라."

엄숙하고도 위엄 있는 목소리.

한 마리 사자 같은 그녀의 일갈에 연회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비엘을 겨누고 있던 근위대의 검 끝이 아래로 수그러졌다.

연회장을 둘러싸고 있던 수십 겹의 포위망이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 밤, 근위대장 체르니 경이 짐에 대한 시해를 시도하였고, 여기, 짐과 어깨를 나란히 한 두 사람이 크나큰 위험을 무릅쓰고 짐의 목숨을 구원하였도다."

독상을 입었어도.

기력이 쇠했어도.

그녀는 불굴의 군주,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였다.

그 오만하고도 거침없는 선언 앞에 연회장의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감히 고개를 치켜드는 자도, 곁눈질을 시도하는 자도 없었다.

모두는 내심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비로소 일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믿었던 근위대장 체르니 경이 배신자였다.

그 순간, 모두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지금도 국왕을 부축하고 있는 로이드가 보였다.

이윽고 모두는 깨달았다.

로이드 프론테라.

저 사람이 오늘 밤, 왕가를 수호했다.

그 깨달음의 순간, 로이드의 눈앞에 뜻밖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오늘 밤, 또 하나의 찬란한 공적을 이룩하였습니다.]

[지금껏 당신이 이룩한 수많은 공적과 업적의 거대한 힘에 의해 히든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이에 새로운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찬사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101화. 뜻밖의 스포일러 (1)

[지금껏 당신이 이룩한 수많은 공적과 업적의 거대한 힘에 의해 히든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이에 새로운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찬사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어?'

눈앞에 불현듯 떠오르는 메시지.

그 뜻밖의 내용에 로이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찬사 시스템?'

처음 들어보는 거다.

지금껏 호감도니 RP니 하는 메시지는 숱하게 들어봤지만, '찬사'라는 시스템에 대한 언급은 한 번도 들은 바가 없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상황에 대한 답은 메시지에 있었으니까.

'히든 조건이라.'

지금껏 이룩한 수많은 공적과 업적.

로이드는 자신이 이곳 세상에 온 뒤로 벌이고 이루어낸 일들을 떠올렸다.

'커리어로 치자면 엄청난 수준이긴 하지.'

그냥 엄청난 게 아니었다.

대강 추려보기만 해도....

망해가던 남작령 살려냈음.

야생의 오크 부족과 동맹 맺음.

크레모에서 아파트 한 동 사이즈의 괴물을 물리치고 백작 사위가 될 뻔함.

거기에 오늘 밤엔?

국왕 시해 시도를 막아냈다.

한마디로 나라를 구한 셈이다.

'그런 여러 공적이 계속해서 쌓였고, 그게 히든 조건을 충족시켰다는 거로구만.'

어떤 상황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기대감이 절로 무럭무럭 피어났다.

'찬사 시스템이라. 어떤 걸까.'

지금껏 쌓고 꾸려온 호감도와 RP.

그 시스템은 자신에게 날개와도 같았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여러 차례의 위기에서 자신을 건져주기도 했다.

한데 지금 개방된 또 다른 시스템은 자신에게 어떤 힘이 되어 줄까. 어떤 불가능을 가능의 영역으로 끌어당겨 줄까.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메시지 아래를 눈짓했다.

그곳에 선택창이 있었다.

딩동.

['찬사 시스템 안내'를 선택하셨습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 당신이 이룩한 업적이 각각의 찬사로 만들어집니다. 사람들은 찬사를 통해 당신을 칭찬합니다. 보유한 찬사는 당신에게 각각의 능력 보너스를 제공합니다. 또한, 매달 보름달이 뜨는 자정마다 일정량의 찬사 포인트 (CP = Compliment Point)를 지속적으로 제공합니다.]

'능력 보너스... CP라고 불리는 찬사 포인트라.'

여기까지 읽어서는 어떤 내용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로이드는 찬사 목록을 열어보았다.

딩동.

['보유한 찬사 목록'을 선택하셨습니다.]

눈앞에 주르륵.

이쪽이 보유하게 된 찬사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일벌백계의 집행자]

[몰락한 영지의 건설자]

[야만 부족의 명예 전사]

[크레모의 수호자]

[마젠타노를 업은 자]

'...설마 이거, 칭호 시스템 같은 건가.'

문득, 대한민국에서 종종 즐겼던 갖가지 온라인 게임이 떠올랐다. 게임에서 퀘스트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주던 칭호도 떠올랐다.

'칭호를 장착하면 갖가지 능력치나 버프를 보너스로 주곤 했지. 어쩐지 딱 그게 생각나는데. 일단 확인부터 해볼까.'

로이드는 시험 삼아 찬사 하나를 선택해 보았다.

딩동.

[보유하신 찬사, <크레모의 수호자>를 선택하셨습니다.]

[크레모의 수호자]

[찬사 등급 : 지역 민담]

밤하늘 덮은 괴수의 눈길.

그 앞에 오연히 맞선 의지.

그의 외침에 도시의 불길 가라앉고.

그의 걸음마다 괴수의 심장 떨었네.

재난의 밤 제아무리 깊다 한들.

아침은 반드시 밝아 오리니.

오라. 심해의 괴수여.

오라. 수호의 여명에.

[찬사 효과 : 당신보다 10배 이상의 체중을 지닌 상대와의 전투에서 '불굴'의 특성을 발휘합니다. 상대에게 입히는 데미지 2배 상승. 상대에게 받는 데미지 1/2 감소.]

[찬사 지역 : 교역도시 크레모를 포함한 크레모나 지방 전체]

[찬사 유지 기간 : 120년]

[찬사의 효력은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 내에서 24시간 언제나 적용됩니다. 또한, 추후 당신의 행적에 따라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이 확장 및 연장, 축소 및 단축될 수 있습니다.]

[찬사가 매달 제공하는 CP : 6]

[현재 보유 중인 CP : 0]

"...."

여전히 CP가 무엇인지, 어디에 쓰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상세 내용을 보자니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무려 유통기한 120년짜리 버프를 받게 된 거네. 크레모나 지방에 있을 때를 한정으로.'

생각해보니 엄청난 조건이었다.

게다가 그 효과도 장난이 아니었다.

절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럼 다른 것도 볼까.'

이번에는 가장 처음 생긴 찬사, '일벅백계의 집행자'를 선택해보았다.

딩동.

[일벌백계의 집행자]

[찬사 등급 : 영지 풍문]

저 망나니가 또 무슨 사고를 치려는군!

모두의 비웃음 감수하였다네.

불신과 의혹 속에 땀 흘렸다네.

배신자의 검에 당당히 맞섰다네.

물러남 없이 지혜를 발휘하였다네.

마침내는 커다란 쥐 떨어뜨렸다네.

재치와 의지로 불의를 뿌리 뽑은 자.

그가 프론테라의 망나니였던 장남이라네.

[찬사 효과 : 당신의 명령은 하급자들에게 크나큰 권위를 지닙니다. 하급자들이 당신의 말에 보다 귀를 기울입니다. 당신에 대한 하급자들의 명령 불복종, 항명이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찬사 지역 : 프론테라 남작령]

[찬사 유지 기간 : 7년]

[찬사가 매달 제공하는 CP : 1]

[현재 보유 중인 CP : 0]

'이것도 제법 좋은데?'

찬사의 내용으로 봐서는 예전, 남작령의 배신자였던 노이만 경을 처단했던 때의 업적으로 만들어진 찬사인 듯했다.

물론 크레모에서 세운 업적에 비해 소소하긴 했다.

기간이나 지역도 훨씬 한정적이었다.

'그래도 없는 게 어디야.'

게임에서처럼 하나만 장착할 수 있는 칭호가 아니다.

이런 찬사가 여럿 모이면 큰 힘이 된다.

많이 모일수록 더욱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찬사가 적용되는 기간이 길고 지역 범위가 넓을수록 더욱 그렇다.

'게다가 찬사를 지니고 있으면 매달 자동으로 제공되는 CP도 그렇고.'

여전히 CP가 어디에 쓰이는 점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메시지 구석까지 다 훑어보아도 그것에 관련된 내용도 없었다.

'하지만 모아두면 분명 도움이 되겠지.'

예상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주위를 힐끗 보았다.

주변의 분위기를 재빨리 살피며 시스템 창을 닫았다.

더는 메시지를 한가하게 읽을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내용이 궁금하지만 나중에 마저 읽자.'

연회장은 어수선한 가운데 조용했다.

아니, 싸했다.

수많은 귀족과 근위대원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국왕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국왕의 준엄한 목소리가 그런 모두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짐이 고하노라. 오늘 밤, 이곳 연회장에 발을 들인 모두는 조사가 끝나는 시점까지 임시 구금 처분을 받을 것이다. 이는 왕가의 안위를 위한 긴급한 조치이니 모쪼록 충심으로 협력하여...."

임시 구금령.

오늘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조사받아야 함.

국왕 시해 미수 사건의 배후가 밝혀질 때까지 얄짤 없음.

그러한 내용의 선언이 국왕의 입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딱 적절한 조치네.'

무려 국왕이 시해될 뻔한 판국이다.

심지어 범인은 근위대장인 체르니 경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다.

모두를 의심하고, 짚어봐야 한다.

설령 고위 귀족이라 해도 예외 없는 전수조사.

조금 가혹하고 전격적이지만, 지금 상황에 가장 필요한 조치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국왕의 선포는 즉각 실행되었다.

철걱! 철커덕!

새로운 병력이 연회장에 도착했다.

그리 많은 숫자의 병력은 아니었다.

모두 합쳐봐야 서른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근위대 이상의 기세를 지녔다.

로이드는 그들의 갑옷에 새겨진 문양을 통해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세 송이의 장미. 왕의 직속 부대인 가시나무 기사단.'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 속 내용이 떠올랐다.

비밀스러운 국왕 직속의 무력 집단.

근위대가 국왕의 평상시 호위를 담당하는 경비견이라면, 저들 가시나무 기사단은 오직 반역 색출에만 동원되는 국왕만의 사냥개라고 언급된 적이 있던가.

'다들 인상이 장난이 아니네.'

모두가 소드 익스퍼트 최상위급.

감정 없는 살인 기계들.

소설에서의 묘사였다.

한데 실제로 보니까?

소설 속 묘사가 애교처럼 느껴졌다.

한데 그런 자들이 바로 곁으로 철컥철컥 갑옷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이내 국왕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로이드 프론테라여."

"하명하소서, 전하."

"그대와 아스라한 경은 오늘 밤 짐의 목숨을 구하였지. 하니 한 번만 더 수고를 해주었으면 하는데."

"혹시 저들 가시나무 기사단을 도우라는 하명이시온지."

"정확하다. 이래서 그대가 좋아. 말귀가 트였거든."

국왕의 흡족한 웃음.

로이드는 쓴웃음으로 화답했다.

'긴 밤이 되겠구나.'

국왕을 구한 공적.

덕분에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대신 가시나무 기사단을 도와 함께 용의자 색출작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명, 받드옵니다."

찬사 시스템은 나중에 마저 살펴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바쁜 밤의 시작이었다.

아침이 밝았다.

로이드는 해가 뜬 후에야 연회장에서 나올 수 있었다.

"후아."

꼬박 밤을 지새워서 그럴까.

혹은 국왕을 구하느라 난리를 피운 탓일까.

밝은 아침 햇볕을 쬐자 멀미가 느껴졌다.

'띵하구만.'

피곤했다.

그러잖아도 지친 통에 밤샘 조사에 동참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평생 이번만큼 많이 고자질한 날도 없을 듯.'

어제 낮엔 아카데미의 비리를 고발했다.

그리고 밤엔?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증언하고, 국왕과 조사관에게 알려줘야 했다.

국왕 시해를 사주한 배후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뭐, 시종장이고 뭐고 다 꼰질렀으니 이젠 왕실에서 알아서 하겠지.'

이후의 조사는 자신이 알 바 아니다.

어쨌건 국왕을 살려냈다.

그녀의 흑화(?)도 막았다.

그 정도만으로도 이쪽의 목적은 달성인 셈이었다.

'이런 경험은 두 번 다시는 사양이야.'

한바탕 난리를 치렀던 지난밤을 떠올리며 그는 넌더리를 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야."

"부르셨습니까."

하비엘의 대답이 곧바로 날아왔다.

피식,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라. 난 그냥 '야'라고 했을 뿐인데. 널 불렀다는 걸 어떻게 알았냐."

"그냥 직감입니다. 물어보시죠."

"물어보다니, 뭘?"

"저한테 궁금한 거 있지 않으십니까?"

"...혹시 독심술사세요?"

"왠지 그러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하, 심리학자셨구나."

"...."

"다른 게 아니라. 너, 혹시 된 거냐."

"소드마스터 말입니까?"

"어."

"예, 됐습니다."

푸읍!

뭔가를 뿜는 소리는 하비엘의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줄리앙이 당황한 얼굴로 이쪽과 하비엘을 번갈아 눈짓하고 있었다.

"무슨... 아스라한 경이? 소드마스터?"

"어."

"그걸 왜 그렇게 편안하게 말해?"

"그럼 어렵게 말해야 하냐?"

"아니, 그건 아니긴 한데."

"그럼?"

"그게 꼭, 방금 형이랑 아스라한 경 말야. 무려 아스라한 경이 소드마스터가 된 이야길 한 거잖아? 그런데 그걸 아침밥 먹었냐고 묻고 답하는 것처럼 너무나 태연하게 얘기하니까."

"으음, 점심 먹었냐는 것처럼 물어야 했던 걸까."

"아, 좀. 농담하지 말고."

"뭐, 그렇다고 난리법석 부릴 것까진 없잖아?"

로이드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비엘이 소드마스터가 된 것, 물론 기뻤다.

하지만 언젠가는 매우 당연하게, 반드시 올 일이었다.

단지 그게 소설 속 시기보다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었다.

"딱히 요란 떨 것도 없어. 어차피 하비엘한테는 올해의 목표를 달성한 것밖에 안 되니까. 안 그러냐?"

"맞습니다."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다행입니다. 마침 여름도 지나가던 참이라 조금씩 초조했거든요."

"올해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까 봐?"

"예. 하지만 오늘, 이뤘습니다. 기쁩니다."

"근데 그거에 대해서 국왕님이 따로 뭐라고 안 하디?"

"하셨습니다."

"자길 섬기라고 그랬지?"

"예."

"그래서 넌?"

"거절했습니다."

다시 한 번 줄리앙이 마시던 음료를 푸읍.

하비엘의 말이 태연히 이어졌다.

"그러잖아도 아까 조사가 끝난 직후에 저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제게 심각하게 말씀하시더군요."

"뭘?"

"근위대장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너한테 무려 근위대장 자리를 주겠다고 한 거야? 국왕님이?"

"예."

하비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싫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절하는 이유를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넌 뭐랬는데?"

"제 주군은 오직 프론테라 남작님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스스로의 말에 확신을 느낀 걸까.

하비엘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다행히 국왕 전하께선 그런 제 진심을 알아주셨습니다. 가만히 웃으시며, 주군이 부럽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정말로 다행입니다."

"그래, 다행이네."

듣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역시 하비엘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소설에서도 이랬지, 아마.'

철혈의 기사 속 하비엘.

녀석은 국왕은 물론이고 황제의 영입 제의까지 거절했다.

그러면서 꺼낸 멘트 또한 방금 녀석이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평생 주군은 오직 한 사람, 돌아가신 프론테라 남작뿐이라고 했었지, 아마.'

솔직히 그 실력이면 온갖 부귀영화, 다 누릴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의리 하나 때문에 그런 꽃길을 모조리 거절하다니.

'하여간 진심으로 대단한 놈.'

로이드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하비엘을 보았다.

녀석은 방학 숙제를 마친 학생처럼 웃고 있었다.

물론 그런 웃음도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한데 대체 누가 꾸민 일일까요."

"국왕 시해?"

"예."

하비엘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다른 이도 아닌 체르니 경을 포섭해서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한 왕국의 소드마스터이자 근위대장을 말입니다."

"그래, 엄청난 일이지."

한숨이 나왔다.

사실 누가 꾸민 일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소설 철혈의 기사를 읽었음에도 그러했다.

'거기선 정확한 흉수가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소위 미완성 떡밥.

국왕 시해 미수 사건이 딱 그랬다.

뭔가 흑막에 감싸인 조직이 있는 듯했는데, 그게 끝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소설 속 엔딩 시점의 하비엘이 남은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는 각오를 남몰래 다지는 모습도 나왔더랬다.

'요즘 작가들은 그게 참 그래. 은근히 2부로 이어가려는 설계지, 뭐.'

엔딩인데 엔딩이 아닌 엔딩.

인기가 생기면 또 2부를 내기 위해 남겨두는 미완성 떡밥.

국왕 시해 미수 사건의 배후가 소설 속의 딱 그런 요소였다.

'쯧. 왜 2부가 안 나온 거야.'

안타깝게도 철혈의 기사는 1부로 끝이었다.

2부는 나올 듯하다가 발매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미완성 떡밥의 실체를 모른다.

그게 바로 지금의 문제다.

'찜찜하단 말이지.'

원래는 2년 반 뒤에나 실행됐을 국왕 시해 시도.

하여서 2년 뒤쯤에 넌지시 국왕에게 귀띔을 해주려 했는데.

그 사건이 이렇게나 앞당겨진 이유가 뭔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뭐, 어쨌건 막아냈으니까.'

바스락, 바스락.

어느새 내려앉은 성격 급한 낙엽 몇 장.

걸을 때마다 발끝에 가을이 툭툭 차인다.

그렇게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자니, 머릿속이 조금은 맑아졌다.

'신경 쓰지 말자.'

어쨌건 국왕 시해는 막아냈다.

이제 더는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목표는 영지로 돌아가 꿀벌처럼 꿀만 빠는 여생을 보내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왕국을 뒤흔들 환란이나 천재지변, 호환, 마마, 뭐 그런 것만 없으면 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숙소로 돌아왔다.

밀린 잠을 자고, 뒹굴거렸다.

조금 늦은 저녁을 먹고, 밤하늘을 보았다.

마침내 기다렸던 보름달이 환하게 떠올랐다.

그러고도 로이드는 계속해서 기다렸다.

숙소 앞뜰 잔디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기다리는 김에 아직 확인하지 못했던 찬사의 효과를 둘러보았다.

'몰락한 영지의 건설자는 내가 벌이는 토목 시공에 영지의 모두가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는 효과가 있고... 야만 부족의 명예 전사는 오크족의 포효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고... 마젠타노를 업은 자는, 으음, 국왕 알리시아의 절대적 신뢰를 받으며 역모 의심을 절대로 받지 않게 해준다, 라.'

각각 개성적이면서도 은근 효율적인 구성이라 썩 마음에 들었다.

그러는 사이, 자정이 다가왔다.

보름달이 중천에 떠올랐다.

바로 그때, 기다리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딩동.

[보름달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습니다.]

[보유 중인 5가지의 찬사로부터 CP가 제공됩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로이드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는 자세를 바로 하며 눈앞의 메시지를 읽어내렸다.

[일벌백계의 집행자이며 몰락한 영지의 건설자인 당신에게 프론테라 영지의 주민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3 CP를 획득하였습니다.]

[야만 부족의 명예전사인 당신에게 강철 모래 오크 부족의 찬사가 쏟아집니다. 2 CP를 획득하였습니다.]

[크레모의 수호자인 당신의 명성이 크레모나 지방 전체를 뒤흔듭니다. 6 CP를 획득하였습니다.]

[마젠타노를 업은 자가 당신임이 왕국 방방곡곡에 전해지는 중입니다. 11 C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CP : 22]

'22라.'

사실 아직 CP가 어디에 쓰이는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22라는 저 수치가 적은 건지, 많은 건지 잘 실감이 가질 않았다.

한데 그때였다.

딩동.

앞서의 메시지가 사라지자마자 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첫 CP 획득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CP를 소모하여 구현 가능한 절대 권능, '엔딩 스포일러'의 사용이 가능해졌습니다.]

[스킬명 : 엔딩 스포일러]

[스킬 등급 : ???]

[필요 CP : 20 (1회차)]

'...뭐?'

엔딩? 스포일러?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을 알려오는 메시지.

그걸 읽어가는 로이드의 눈이 서서히, 휘둥그레졌다.

102화. 뜻밖의 스포일러 (2)

'뭐? 엔딩 스포일러?'

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였다.

하도 믿기지가 않아서 스킬창을 두 번이나 더 꼼꼼히 읽어보았다.

'진짜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미 호감도 시스템과 RP 덕분에 수많은 이득을 본 로이드였다.

그는 차분하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엔딩 스포일러.

스킬명만으로도 어떤 성격의 스킬인지 대략 감이 잡혔다.

'그래. 난 소설 속에 들어온 셈이니까. 그런데 내 행동들 때문에 소설의 내용이 이미 많이 바뀌어 버렸으니까. 그런데 그 바뀐 스토리의 미래를 보여준다? 지금 나한테 딱 필요한 기능인 거네.'

생각해보니 진짜로 그랬다.

원래 철혈의 기사에선 벌써 망했어야 했을 프론테라 남작 가문이었다.

남작 부부도, 로이드도, 줄리앙도.

모두 비참하게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남작 가문은 쓰러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빚을 해결했고, 번성하고 있다.

아무도 죽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하비엘도 마찬가지야.'

소설을 기준으로 하자면 아직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거기에 아스라한 심법도 완성하지 못한 채 모험을 하고 있었을 하비엘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소드마스터가 되어 버렸지. 아스라한 심법도 트리플 써클의 경지에 올라서 발파를 펑펑 써대고 있고.'

거의 몇 년이나 성장이 앞당겨졌다.

지금 이대로 간다면 녀석이 얼마나 더 강해질지.

어쩌면 그랜드 마스터에 헥사 써클까지 다다랐던 원작보다 더 강해질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어쨌건, 그렇게 지난 1년 반 사이에 여기서 많은 걸 바꿔 버렸어. 내가 저지른 일이지. 좋은 일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단점이 아주 없는 건 아니기도 해.'

당연히 심각한 단점이 있었다.

점점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나 때문이지. 내 행동이 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 때문에 소설 속 인과관계가 바뀌고 뒤틀리니까. 소설과 완전히 다른 결과가 계속해서 생겨나고, 중첩되는 거야.'

그렇게 원래의 역사와 동떨어진 상황이 펼쳐진다.

그런 현상이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지리라.

'이번만 해도 그랬지.'

국왕 시해 미수 사건.

원래 소설을 기준으로 한다면 지금으로부터 2년 반 뒤에나 벌어져야 했을 사건이었다.

한데 이렇게나 앞당겨져 버렸다.

그런데 아직 원인도 제대로 모른다.

나름 머리를 굴려도 추측 가는 곳이 없다.

그게 문제였다.

'지금까지 내가 이 세계에서 가져왔던 상대적 우위가 점점 사라진다는 뜻이니까.'

정보의 독점과 비대칭성.

남들은 모르는데 나만 아는 정보가 있다는 것.

소설 철혈의 기사를 읽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곳 사람들이 보기엔 거의 예지 수준의 상황 예측을 해낼 수 있었다.

한데 앞으로 이곳의 상황이 소설 속 상황과 점점 달라진다면? 계속해서 원작과 멀어진다면?

'예측이고 뭐고 불가능해지는 거지.'

점점 자신의 최대 무기인 정보의 우위를 잃게 되리라.

생각해보면 난감한 일이었다.

'한데 그런 점이 아쉬워지려는 타이밍에 딱 이렇게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스킬이 생긴 거야.'

로이드는 다시 한 번 스킬창에 눈길을 옮겼다.

스킬 상세 내용을 살폈다.

딩동.

[스킬명 : 엔딩 스포일러]

[스킬 등급 : ???]

[필요 CP : 20 (1회차)]

[일정량의 CP를 소모하여 현재 스토리의 대단원에 펼쳐질 엔딩 장면 일부를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해피엔딩일 수도, 새드엔딩일 수도 있습니다.]

'역시.'

생각대로였다.

'그럼 시험 삼아 한번 볼까.'

이제부터 다가올 미래의 엔딩 장면.

그걸 본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절로 두근두근 뛰었다.

'제발 꿀벌처럼 꿀만 빨면서 늙어가는 인생이면 딱 좋겠네.'

부족함 없는 생활.

마음 잘 맞는 아내.

아들 하나 딸 하나.

강아지 두 마리에 고양이도 하나쯤.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고민하고.

여름 가족 휴가는 어디로 갈까를 궁리하는.

딱 그만큼이 인생 최대치의 고민거리인.

그렇듯 여유롭고 평화롭게 늙어가는.

그런 엔딩이 엿보이길.

'거기에 혹시 모를 암초를 대비하는 의미도 있고 말이지.'

혹시나 꿀벌 라이프에 방해가 될 요소가 보일 수도 있다.

그런 게 보이면 얼른 대비하고 치워야지.

그렇듯 보험을 하나쯤 들어두는 기분으로 로이드는 눈동자를 굴렸다.

스킬창 아래쪽의 '실행'을 선택했다.

달칵.

[엔딩 스포일러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소모 CP : 20 (1회차)]

[현재 보유 중인 CP : 22]

[YES / NO]

'당연히 예스지.'

딩동.

[엔딩 스포일러가 발동됩니다.]

[20 CP가 소모되었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CP : 2]

스킬 발동에 관련된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그 직후였다.

츠즈즈즈...!

주위의 시간이 멈추었다.

불어오던 바람도.

날아가던 풀벌레도.

떨어지던 초가을 낙엽마저.

모두 허공에 박제되듯 멎어 버렸다.

'무슨....'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다섯 걸음 앞 공간이 일렁였다.

일렁이고 번쩍이는가 싶더니 갈라졌다.

둥글고 새하얀 통로가 열렸다.

'포털?'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안쪽은 하얗게 물들어 엿볼 수 없었다.

다만, 이쪽을 향해 들어오라고 말하듯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방금 갓 짜낸 신선한 우유로 빚어낸 연못 같았다.

'괜찮을까.'

잠깐 의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시스템은 언제나 옳다.

믿어보기로 했다.

걸음을 떼었다.

손을 내밀었다.

찰랑.

손끝이 우윳빛 표면에 동심원을 만들었다.

동심원이 커졌다. 손끝을 당겼다. 부드럽게. 이끌듯이. 걸음과 걸음 사이. 그렇게 걸어 들어갔다.

이윽고, 눈앞이 섬광으로 물들었다.

파아앗...!

눈을 감았다가 뜬 걸까.

아니면 새로운 광경이 펼쳐진 걸까.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핏자국으로 가득한 땅바닥은 무얼까.

'무슨.'

로이드는 눈을 부릅뜨려 했다.

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마음은 눈을 부릅뜨려 하는데, 몸은 눈가를 질끈 일그러뜨렸다.

게다가 이쪽의 의지와 상관없는 혼잣말까지 내뱉었다.

"그때... 최대한 빨리 돌아왔어야 했어."

최대한 빨리? 돌아와야 했다고?

후회 가득한 목소리였다.

저건 대체 무슨 말일까.

이건 무슨 상황인 걸까.

입이 다시금 움직였다.

"그랬다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다시금 회한에 찬 목소리.

이내 서서히 들리는 고개.

비로소 주위의 광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온통 폐허가 된 마을의 광경이었다. 뜯어먹힌 집과 나무. 곳곳에 널브러진 시신. 침 흘리며 모여든 까마귀. 펼쳐졌다. 눈에 쑤셔 박히듯. 꿈속까지 낙인으로 지져 새기듯.

'무슨. 뭐야 이거.'

어째서 엔딩 스포일러에서 이런 광경이 보이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익숙한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잿더미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

곧게 뻗어 있다.

도로였다.

너비는 6미터.

중앙이 가장자리보다 볼록하게 높았다.

한 변이 70센티인 납작한 돌로 꼼꼼히 덮였다.

도로 가장자리에는 폭 50센티, 깊이 20센티의 배수로가 놓였다.

그 바깥으로는 탄탄하게 다져진 폭 3미터의 인도가 도로 양쪽을 감싸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쩐지 익숙했다.

그래.

아피아 가도.

오래된 로마식 도로를 본떴지.

뽀동이가 열심히 땅을 파고, 공병대가 다졌어.

사람들이 의심하고 고개를 갸웃거려도.

때론 의혹의 눈길 넌지시 던져와도.

꿋꿋이 파고, 다지고, 만들었지.

마침내 모두의 인정을 받았던가.

그런데 왜지.

그때 고개 끄덕이던 사람들.

내게 박수 보내던 많은 이들.

어째서 그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는 걸까.

도망치다 붙잡혀 죽은 주점 주인.

맞서 싸우다 뜯어먹힌 공병대원.

수없이 비명에 간 사람들.

그러니까 여긴....

'프론테라 영지라고? 여기가?'

오싹. 소름이 돋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부우우우우-!

먼 하늘에서 기괴한 굉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다. 그쪽 하늘을 보았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아니, 구름이 아니다.

평범한 수분 알갱이는 겹눈과 날개를 지니지 않았을 테니까.

"로이드 님, 피하십시오. 얼른."

앞을 가로막는 목소리.

하비엘의 뒷모습.

그 모습마저 금방 어둠에 물들었다.

먹구름 같은 형체에 하늘이 가려졌다. 태양이 뒤덮였다. 사방을 잠식하는 어둠. 그 속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수만 쌍의 겹눈. 폭풍 같은 날갯짓 소리.

"...!"

마지막 순간에 하비엘이 무어라 외친 걸까.

알 수 없었다.

파아앗...!

눈앞이 섬광으로 물들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

찌륵, 찌륵.

피부를 쓰다듬는 밤 공기 아래, 평온한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귀에 담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왕궁 숙소 뒤뜰의 광경이 보였다.

폐허도, 널브러진 시신들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후우."

이마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진땀.

팔뚝에는 닭살이 가득 돋아 있었다.

절로 이가 갈렸다.

"내가 뭘 본 거지."

분명 엔딩 스포일러라고 했다.

지금의 시나리오가 그대로 진행된다는 가정하에 이쪽이 맞이할 엔딩의 순간.

그 순간을 살짝 엿보여준다고 했었다.

확실히, 그랬다.

'그런데 지금 이대로 가면 맞이할 엔딩이 그런 모습이라고?'

남작가에 얹힌 사채를 모두 갚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야 평온하고 여유로운 인생을 살 여건이 됐는데.

이젠 남작령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는데.

'그 남작령이 저따위 잿더미 폐허가 된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무슨 농간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절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로이드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거짓말은 아닐 거야.'

호감도와 RP 시스템 덕분에 이제껏 승승장구한 자신이다.

한데 부정적인 뭔가를 보여줬다고 해서 스킬의 효과를 의심한다면?

그렇게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다면?

'그랬다간 정말로 방금 봤던 꼴을 겪게 될지도.'

최소한 대비는 해야 한다.

설령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렇다.

대비를 한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

일단 지금은 방금 봤던 엿 같던 엔딩을 예방해야 할 때다.

그러니 가장 처음 해야 할 일은, 분석이다.

'자, 방금 본 걸 되짚어보자.'

우선 로이드는 심호흡부터 했다.

온통 쿵쾅거리는 가슴부터 가라앉혔다.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차분함을 되찾았다.

'우선 장소. 프론테라 남작령이 확실했어. 폐허 속에서도 보이던 아피아 가도가 증거야.'

그렇다면 시점은?

'머지않은 미래였어.'

잠깐 엿보고 체험한 엔딩씬.

그 엔딩씬 속 자신의 목소리가 지금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늙거나 해서 목소리가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게다가 마지막에 얼핏 봤던 하비엘의 모습도 그랬다.

여전히 지금과 같이 앳되고 젊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복장은 왕도로 올 때 입었던 여행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어.'

그렇다면 이번에 남작령으로 돌아가는 시점의 일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확신이었다.

'그럼 다음은 그 사달이 난 이유.'

로이드는 엔딩 스포일러의 마지막 시점에 본 광경을 떠올렸다.

하늘을 뒤덮어 오던 먹구름 같은 존재.

수만 쌍의 겹눈.

폭풍 같던 날갯짓.

그 속에서 분명히 보았다.

무려 몸길이가 70센티에 달하는 거대 메뚜기 수십만 마리의 습격이었다.

'젠장. 금융적 위기 다음은 물리적 위기냐.'

1년 반이나 열심히 뛰어다니며 돈을 벌었더랬다.

그렇게 남작령에 얹힌 거액의 빚을 마침내 다 갚았더랬다.

한데 그런 평화를 누려보지도 못하고서 맞이하는 물리적 위기라니.

억울했다.

마치 허리띠 조여 가며 간신히 IMF의 위기를 넘겼더니, 곧바로 나라에 전쟁이 터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꿀단지를 그렇게 쉽게 잃을 줄 알고!'

남작령은 평생 빨대를 꽂아야 할 꿀단지였다.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가꾼 평생의 보험이자 적금 통장이요, 연금이었다.

그걸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잃으면?

결과는 뻔하다.

국왕이 유감과 애도를 표하며 갈 곳 없어진 자신을 왕도로 부를 것이다. 자신을 성실한 신하, 아니, 소환수로 부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평생 일만 하며 지내게 될 것이다.

군대에서 행보관의 소환수가 됐던 그 시절처럼 말이다.

그건 정말 싫었다.

로이드는 벌떡 일어났다.

'생각해보면 아까 그 말이 제일 마음에 걸려.'

그때 빨리 돌아왔어야 했다, 라던 엔딩 장면 속 자신의 독백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렇게 말한 '그때'가 바로 '지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이드의 걸음이 빨라졌다.

늦은 밤이고 자정이고 상관없었다.

곧바로 왕궁으로 향했다.

근위대를 대신하는 가시나무 기사단의 검문을 받았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국왕을 직접 구하신 몸이었다.

신분만 밝히니 프리패스였다.

"국왕 전하께 긴히 고하여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이쪽의 긴장감 서린 말투 덕분이었을까.

순식간에 국왕의 집무실까지 안내받을 수 있었다.

"들어오도록."

이쪽에서 용건을 밝히기 무섭게 국왕의 대답이 돌아왔다.

문이 열렸다.

국왕은 서류 더미 가득한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마도 이번 국왕 시해 사건에 관한 조사 결과를 살펴보는 중이었겠지.

그녀가 피로감 가득한 표정과 눈길을 이쪽으로 던져왔다.

"로이드 프론테라로군. 한데 이 늦은 밤에 짐에게 무슨 볼일인가."

혹시 시해 사건에 관련된 정보라도 얻었나?

라고 묻는 듯한 눈길이었다.

로이드는 쓴웃음을 얼른 지웠다.

대신 한결 진지하고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영지로 빨리 돌아가야 할 순간이다.

하지만 빨리 돌아가되, 급하다고 무턱대고 대비 없이 돌아갔다간 낭패만 보기 딱 좋은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원이 필요해. 지금 상황에서 받아낼 수 있을 최고 수준의 지원이.'

자고로 높은 분에게서 필요한 지원을 얻어내려면 적당한 낚시도 필요한 법.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짐짓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저 로이드 프론테라가 감히 고하여 드리건대, 조만간 프론테라 남작령을 포함한 크레모나 지방과 동부 국경 일대가 불구덩이에 무참히 휩쓸리는 대참사가 벌어질 것 같사옵니다."

"무어라?"

국왕의 고개가 갸웃.

살며시 찡그려지는 눈썹.

일단 미끼는 성공적으로 던져졌다.

그걸 확신하며 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103화. 마젠타노를 업은 자 (1)

"동부 국경 일대가 불구덩이에 휩쓸릴 것이라니, 대관절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국왕이 찡그린 눈길을 보내 왔다.

아마 황당한 소리로만 느껴지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로이드는 과감하게 낚싯대를 던졌다.

"사실이옵니다, 전하."

"사실이라고?"

"그러하옵니다."

"그럼 하나 묻지. 짐이 알기로 현재 동부는 평온하다. 어떠한 급보도 날아오지 않았으며, 전쟁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한데 그대는 한사코 동부의 위험을 알리고 있으니, 짐이 이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조만간 벌어질 참화에 대한 진언으로 받아주소서."

"진언? 조만간 벌어질 참화?"

"그러하옵니다."

국왕이 미끼를 물었다.

낚싯바늘이 입천장을 찔렀다.

이제는 낚싯대를 당길 때다.

"저, 로이드 프론테라가 감히 전하께 고하건대, 앞으로 한 달 이내에 동부의 크레모나 지방 전체가 잿더미가 될 것이옵니다. 집은 불탈 것이고, 백성들은 무참히 피 흘리며 죽어갈 것이며, 모든 농경지가 초토화될 것이옵니다."

"크레모나 지방 전체가? 한 달 이내에?"

"그러하옵니다, 전하."

로이드는 고개를 조아렸다.

물론 방금 자신이 말한 게 사실일지는 모른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프론테라 남작령만 참화에 휩쓸리고, 크레모나의 나머지 지방은 멀쩡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사건을 최대한 부풀려서 심각하게 알려야 할 때다.

그렇게 해서라도 국왕의 관심을 끌어내어야 했다.

약간의 지원이라도 받아내야 했다.

과연 그런 시도가 먹힌 걸까.

"흐음, 그럴 리가."

국왕의 태도는 아까보다 훨씬 진지해져 있었다.

더는 고개를 갸웃거리지도, 눈썹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대신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그대는 혹시 지독한 꿈이라도 꾼 것인가? 아, 이건 그대를 모욕하고자 하는 말이 아님을 먼저 알라."

"알고 있사옵니다, 전하."

"좋아. 한데 어째서 그대는 그런 터무니없는 진언을 하는 것인가?"

"저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어째서? 동부의 크레모나는 오늘도 평온하건만."

"한 달 뒤에는 아닐 것이옵니다."

"흐음, 한 달 뒤라. 혹시 동부 산맥과 황무지 건너편의 술탄국을 경계함인가?"

술탄국?

로이드는 귀를 쫑긋거렸다.

국왕 알리시아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최근 술탄국이 자신들의 서쪽 국경, 즉, 우리와 마주 보는 국경 지대에서 대규모의 군사 활동을 벌이기는 하였다. 짐도 그 일을 신경 쓰기는 하였어. 하나 그것이 우리에게 위협이 될 어떤 조짐도 아직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도다."

"혹시 그들이 침공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옵니까?"

"아니다."

딱 자르듯 말한 국왕.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첩보로 알아낸 결과 그들의 군사 활동은 국경 내에서만 이루어졌다. 통상적인 대규모 훈련을 치른 것이었겠지. 설령 그들이 실제로 침공을 시도한다 하여도 대규모 원정에 쓰일 막대한 물자의 이동과 비축이 먼저 첩자들을 통해 포착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류는 감지되지 않았어. 또한-"

그녀가 로이드를 굽어보았다.

"동부의 술탄국과 우리 국경 사이에는 두 가지나 되는 지리적 장벽이 있다. 그대도 익히 알고 있겠지? 거대 몬스터들이 들끓는 광대한 황무지, 그리고 군사를 움직이기에 지난할 정도로 드높고 험준한 동부 산맥 말이다. 그러니 술탄국이 동부를 통해 우리를 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야. 차라리 국경이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북부라면 모를까."

나직한 확신 담아 말했다.

그리고 국왕 알리시아는 생각했다.

'로이드 프론테라여. 이번만은 그대가 잘못 짚었구나.'

실제로 로이드는 고개만 조아리고 있을 뿐.

어떠한 반문이나 반박도 못 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국왕 알리시아는 그를 향해 흐뭇한 눈길을 보내었다.

'젊은 혈기로 범한 실수겠지.'

지금껏 제법 많은 재치와 숨겨진 능력을 보여준 자였다.

현재 시점에서 가장 탐나는 인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젊다.

혈기가 넘쳤다.

그런 혈기 때문에 의욕이 앞섰으리라.

어디선가 불분명한 정보를 듣고는 과대 해석하여 자신에게 달려온 것이리라.

'조금은 다독일까.'

충성심과 혈기, 의욕이 어울려 범한 실수다.

이럴 때일수록 실수를 보듬고 감싸줘야 한다.

의욕을 꺾어 버리기보다는, 더욱 좋은 방향으로 발산될 길을 터 주어야 한다.

그것이 지배자가 보여야 할 진정한 포용력이자 지도력일 터.

"로이드 프론테라여, 고개를 들라."

천천히 고개를 드는 로이드.

한데 그 눈빛이 조금 묘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깊은 생각과 계산에 몰두해 있었다.

실제로 로이드의 머릿속은 엄청나게 바쁜 상태였다.

이제부터 국왕을 향해 꺼낼 변명거리를 연구하느라?

혹은 2차 낚시를 시도하기 위해서?

아니었다.

방금 국왕에게 들은 몇 가지 정보.

그걸 통해 다가올 파국의 원인을 이미 깨달은 까닭이었다.

'미친. 바로 이거였어.'

동쪽 술탄국의 대규모 군사 훈련.

몬스터로 가득한 황무지.

그 두 가지 정보를 듣는 순간, 소설 철혈의 기사 속 어떤 내용이 떠올랐다.

'몬스터 도미노. 초기 전략 보존 교리.'

그것은 동부 술탄국이 선보이게 될 신식 군사 교리였다.

언제?

2년 반 후에.

어디서?

북부를 통해 마젠타노의 국경을 침공하며 선보이게 될 전략이다.

한데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

장소마저 바뀌었다.

바로 지금으로.

북부가 아닌 동부로.

'어째서? 왜?'

술탄국의 의도가 궁금했다.

시기와 장소가 바뀐 이유도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고민해봐도 선뜻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다만, 지금은 국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 다시금 고하여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흐음, 아직도 그 주장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인가."

난감해하는 국왕의 표정.

이미 끝난 얘기가 아니냐는 눈빛.

하지만 아니다.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말했다.

"방금 전하께서 말씀하신 저들 술탄국의 대규모 군사 훈련, 그것 때문에 우리의 동부 크레모나 지방에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이옵니다."

"...뭐?"

"사실이옵니다, 전하."

"흐음, 사실이라니. 그대는 어찌 그리 단정하여 말하는가. 술탄국이 저들의 국경 내에서 벌이는 군사 훈련 때문에 황무지 건너편 우리 쪽 동부에 피바람이 분다라, 그게 가능한 일인가? 짐은 이해가 아니 되는구나."

"충분히 그러실 것이옵니다. 아직 생소하고 새로운 군사 교리와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상세히 말해보라."

국왕의 표정이 굳었다.

로이드는 입술을 축였다.

"이것은 일종의 나비효과이옵니다."

"나비효과?"

"그렇사옵니다. 이쪽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수많은 인과의 고리에 의해 바다 건너편에 태풍이 부는 현상을 비유하며 이르는 말이옵니다."

"신기한 발상이로군. 한데 그런 현상이 저쪽 술탄국과 우리 동부 사이에 일어날 것이다?"

"예. 그러하옵니다, 전하. 태풍이 아닌, 몬스터의 대규모 습격이 있을 것이옵니다."

"몬스터?"

"예, 전하."

"자세히."

"전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다시피, 동부의 황무지에는 수많은 몬스터 군락이 각자의 영역에서 서식하고 있사옵니다."

"그렇지."

"저들 술탄국은 그걸 이용할 것이옵니다. 자신들의 국경에 맞닿은 몬스터 군락을 자극하고 토벌합니다. 서쪽으로 서식지를 옮기도록 압박할 것이옵니다."

"하면?"

"제아무리 거대하고 강력한 몬스터라 하여도 군대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는 법. 결국엔 서식지를 옮길 것이옵니다. 그것이 몬스터 도미노의 시작이옵니다."

"도미노?"

"그렇사옵니다. 처음 서쪽으로 서식지를 옮기는 몬스터. 그 몬스터 때문에 서쪽의 다른 몬스터가 서식지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도미노 블록이 넘어지면서 다음 블록을 넘어뜨리듯, 강제로 서식지를 옮기게 된 몬스터가 다른 몬스터의 서식 영역을 교란하여 움직이게 만들고, 그런 현상이 우리가 있는 서쪽을 향해 연쇄적으로 벌어질 거라는 뜻인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렇게 술탄국은 황무지에서 군사 작전을 이어가며 몬스터를 지속적으로 압박할 것이며, 그 여파가 우리의 동쪽 크레모나 지방을 덮치게 될 것이옵니다."

마치 지구 로마의 말기 역사에 벌어진 일처럼.

훈족에게 쫓겨 서쪽으로 피난한 게르만족.

그 게르만족의 민족대이동에 의해 로마 제국의 국경이 쑥대밭이 되었듯.

이곳의 동부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흐음."

국왕 알리시아의 눈빛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물어왔다.

"하면 저들의 이득은?"

"초기 전력 보존이옵니다."

서슴없이 답했다.

"몬스터 도미노 현상에 의해 이쪽의 국경이 쑥대밭이 되는 동안, 저들은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서 고스란히 전력을 보존할 수 있사옵니다. 그리고 이쪽의 간을 볼 수도 있게 될 것이옵니다."

"간을 본다고?"

"그러하옵니다, 전하. 도미노처럼 몰려드는 몬스터를 이쪽이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대로 송곳니를 드러내며 침공을 시도할 것이옵니다."

"만일 이쪽이 몬스터를 제대로 막아낸다면?"

"그때는 그저 군사를 물리면 되옵니다."

"흐음... 그렇겠군. 우리 쪽에선 따질 수도 없겠군. 어디까지나 그 시점에서 저들이 우리를 침공하지는 않은 것일 테니까."

"바로 그것이옵니다, 전하. 설령 우리가 그 사실을 지적한다 하여도 저들은 통상적인 유감 표시만을 할 것이오며, 오히려 자국의 군사 훈련에 관여한다며 적반하장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내정간섭을 들먹이며 반발하리라는 뜻인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

알리시아는 침묵했다.

방금 로이드에게 들은 이야기.

곱씹어보자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만약 정말로 술탄국이 그런 일을 꾸민다면, 동부가 제법 큰 타격을 받을 가능성도 엿보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의문을 느꼈다.

"한데 그대는 이러한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가."

국왕 알리시아의 눈빛이 엄격해졌다.

"그대가 방금 말한 것들, 분명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하나 그렇기에 짐은 궁금하다. 도대체 그대는 과연 어떻게, 우리의 첩자들도 알려오지 못한 정보를 입수하였단 말인가."

정말로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의심도 들었다.

만약 저 말들이 다 사실이라고 쳐도 그랬다.

마젠타노 왕실에서 파견한 첩자들도 캐내지 못한 정보였다.

그걸 자신에게 와서 태연히 말하고 진언을 올리는 로이드 프론테라.

의심이 아니 들 수 없었다.

한데 그런 자신의 질문을 받은 로이드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아니, 더욱 알 수 없을 눈빛으로 태연히 대답하여 왔다.

"동쪽 황무지의 친구들이 알려주었사옵니다."

"황무지의 친구들? 설마?"

"짐작이 맞으실 것이옵니다."

"오크. 강철모래 부족을 일컬음이로군."

"그러하옵니다, 전하."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강철모래 부족에게 저런 이야기, 들은 적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 철혈의 기사 다 읽어봐서 아는 건데요'라고 대꾸했다간 미친놈 취급받을 것이 뻔한 상황.

그렇기에 더욱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전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저희 프론테라 남작령과 강철모래 부족은 혈맹의 관계를 맺었사옵고, 이후로 잦은 교류를 이어오고 있사옵니다. 그런 교류에는 황무지 건너편의 소식 또한 포함이 되어 있었고 말이옵니다."

"흐음, 술탄국의 새로운 전략 교리를 오크들이 접하였고 혈맹인 그대에게 알려주었다?"

"그러하옵니다."

"하면 한 달 내로 그 새로운 전략이 실행될 것이라는 근거는?"

"제 감이옵니다."

"감?"

"그렇사옵니다."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국왕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눈길에 확신을 담았다.

"최근 국왕 전하를 향한 불미스러운 시해 시도가 있었사옵니다. 그 때문에 왕도는 일시적 혼란에 빠졌고, 각 지방의 일부 영주들은 전하의 권위에 일말의 의심을 품게 되었을 것이옵니다."

"...따라서, 술탄국이 이 혼란한 정국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렇사옵니다, 전하."

로이드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우리의 오랜 적국이옵니다. 저들도 분명 우리의 왕실에 첩자를 심어두었을 터. 이번에 생긴 불미스러운 사건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옵니다."

"흐음. 그러니 그대의 말을 믿어달라?"

"그러하옵니다, 전하."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 물증이 없어. 설마 그대는 단지 추측만을 근거로 대응을 위한 군사를 움직여 달라는 것인가."

"믿으셔야 하옵니다, 전하."

"믿어준다면? 그대는 짐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이번에 다가올 모든 위협을 오직 전하께오서 간파하시고 대비하신 것으로 대외에 널리 알리겠사옵니다."

"이번 일의 공을 모두 짐에게 넘기겠다?"

"그러하옵니다."

"만약 그대가 예상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저를 따끔히 혼내주소서."

"하."

알리시아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로이드가 알려준 정보와 그 허실.

로이드의 진언을 따랐을 때의 이득과 손해.

그 모든 것들을 면밀히 계산하고, 검토했다.

그동안 로이드는 고개를 숙인 채 기다렸다.

이제 모든 미끼를 다 뿌린 마당이다.

국왕으로선 거절하기 어려울 달콤한 미끼였다.

'적어도 내 진언을 따랐을 때 국왕이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어.'

국왕 시해 미수 사건.

그 사건으로 어수선해진 정국에 새 바람을 넣는 효과가 있다. 혼란과 동요를 단숨에 수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내외의 여론과 관심을 동부로 환기시킬 수도 있다.

국왕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꽃놀이패인 셈이다.

'그리고 내게도 반드시 필요한 거고.'

영지를 살려야 한다.

금융의 위기 다음에 다가올 것 같은 물리적 위기.

그 위기로부터 자신의 꿀단지를 지켜내야 한다.

그러려면 국왕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과 하비엘.

두 사람만 눈썹 휘날리도록 남작령으로 달려가는 것보다는 국왕이 지원해 주는 몇백, 몇천의 군사와 함께 달려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그래서였다.

남작령으로의 귀환만 무턱대고 서두르지 않았다.

서두르기 전에 국왕부터 찾아왔다.

과감한 협상 테이블을 열었다.

'자아, 예스라고 말해. 국왕님. 누님. 제발!'

로이드는 국왕의 결정을 기다렸다.

입술 잘근거리며 간절히 염원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딩동.

[당신의 염원이 보유 중인 특정 찬사를 일깨웁니다.]

[찬사, <마젠타노를 업은 자>가 국왕 알리시아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104화. 마젠타노를 업은 자 (2)

[당신의 염원이 보유 중인 특정 찬사를 일깨웁니다.]

[찬사, <마젠타노를 업은 자>가 국왕 알리시아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로이드는 멈칫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뜻밖의 내용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지원군이 희망의 횃불을 밝혀 오는 기분이란 게 이런 걸까.

딩동.

[마젠타노를 업은 자]

[찬사 등급 : 왕국 야사]

그대는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주었도다.

짐의 심장 탐하던 맹독 뽑았도다.

서슴없이 제 가슴에 꽂았도다.

짐의 호흡 대신 헐떡이고.

짐의 눈길 대신 비틀대며.

죽음마저 대신 받아내려 웃었도다.

그리하여 마침내 짐의 육신까지 업어내어.

짐을 진정한 불굴의 존재로 지켜주었도다.

그대 용감한 프론테라여.

짐이 어찌 모를까.

짐이 어찌 잊을까.

짐의 숨결 이어지는 한.

그대 심장 고요히 뛰는 한.

그대 영영 짐의 은인이리니.

[찬사 효과 : 당신은 국왕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의 생명의 은인으로서 그녀의 절대적 신뢰를 받습니다. 국왕 알리시아를 향한 당신의 의견과 조언은 대체로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얻을 것입니다. 또한, 그녀의 재위가 이어지는 동안 당신은 역모나 반역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받지 않습니다.]

[찬사 지역 : 마젠타노 왕국]

[찬사 유지 기간 : 국왕 알리시아의 재위 기간과 일치]

"...."

눈앞을 환하게 밝히는 메시지.

그걸 다 읽은 로이드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국왕 알리시아의 표정을 살폈다.

고민에 잠겨 있는 국왕의 얼굴.

그 얼굴이 조금씩 펴졌다.

찌푸리고 있던 미간의 주름이 사라졌다.

찡그리고 있던 눈썹이 서서히 누그러졌다.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 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이내 머금는 미소.

이쪽을 향하는 긍정적인 눈빛.

그 눈동자가 희미한 쓴웃음을 담고 있는 듯 보이는 건 이쪽의 착각일까.

"로이드 프론테라여. 그대는 참으로 방자하고도 대책이 없는 자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성은이 망극해? 짐이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제가 드린 청을 수락하여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실 것으로 믿고 있사옵니다."

"하. 자만이 넘치는군?"

"자만이 아니라 그만큼 전하의 심정을 헤아리고 있다는 뜻으로 여겨주소서."

"말은 참으로 청산유수로다."

"다시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한데 만약 지금 그대의 예상이 틀린 것이라면? 짐이 그대의 청을 윤허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때엔 역시나 저를 따끔하게 혼내주소서."

"쯧. 한마디도 지려 들지를 않아."

국왕 알리시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쪽이 기다리던 답을 내려주었다.

"좋다. 그대의 청을 수락하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

"...."

"그대의 진언을 꼼꼼히 따져보았다. 실로 교묘해. 짐을 끌어들일 궁리를 얼마나 했는지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웃음이 조소로 변했다.

"그대의 진언을 따랐을 때 짐이 손해 볼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점만 보아도 그렇더군. 만약 그대의 말대로 동부에 몬스터로 인한 재난이 펼쳐진다면, 그것을 미리 헤아리고 대응한 짐의 명망과 권위가 더욱 높아지겠지. 그리고 만약 그대의 예상이 틀린 것이라 해도-"

"전하께선 손해 보실 일이 전혀 없으시옵니다."

"맞아. 통상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한 것으로 치부하면 그만이니까. 그런 움직임만으로도 시해 미수 사건으로 어수선해진 왕도 정계의 시선을 바깥으로 잠시나마 돌릴 수 있을 터이니."

"하면, 지원의 규모는 어찌 생각하고 계시온지."

"짐의 직속군 오백을 내려줄까 한다."

"오백의 숫자라면 혹시, 백색창기병 말씀이시옵니까?"

"그러하다. 모자람이 느껴지나?"

"전혀 아니옵니다."

진짜로 아니다.

무려 국왕 직속 부대인 백색창기병을 보내준다니.

최고는 아닐지라도 최소 정예 중의 정예는 되는 부대였다.

어중간한 어중이떠중이 몇천의 병력보다 훨씬 나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 뒤로 로이드는 국왕과 몇 가지 사항을 더 조율했다.

지원받을 병력의 지휘권.

시기와 보급 등의 문제를 논했다.

물론 그 과정은 길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서둘러야 할 판국이었다.

그렇게 로이드는 국왕의 지원 약속을 받아내고는 물러났다.

곧바로 숙소로 돌아갔다.

남작령으로의 귀환을 서둘렀다.

그런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비엘과 줄리앙을 깨우는 것이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이지. 그럼 내가 괜히 이런 난리를 치고 있겠냐."

아까 국왕에게 알려주었던 정보를 대략 요약해서 둘에게 전해주었다.

잠이 덜 깨어 있던 둘의 표정이 단박에 굳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해야겠군요."

하비엘이 즉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서둘러 여정을 위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한데 줄리앙 또한 마찬가지였다.

"야, 넌 뭐하냐?"

"어?"

"지금 뭐 하는 거냐고."

하비엘을 따라 배낭을 꾸리기 시작한 줄리앙.

어설프게 짐을 챙기는 녀석을 붙잡고 물었다.

그러자 녀석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해 왔다.

"짐 싸는데?"

"왜?"

"왜라니. 나도 가야지."

"설마 집에?"

"응."

고개를 끄덕이는 줄리앙.

녀석이 똑 부러지게 말했다.

"우리 집이고 영지잖아. 위험해질 거라며. 그러니까 나도 갈 거야. 같이 지킬 거야."

"쯧. 아서라."

탁!

녀석의 품에서 배낭을 낚아챘다.

흠칫 놀라는 녀석.

녀석이 무어라 대들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너까지 같이 갔다가 같이 사이좋게 죽으면? 그 뒤는 어떡하려고 그러냐?"

"...뭐?"

"생각해봐. 이대로 다 함께 남작령으로 돌아갔는데 말이다. 만에 하나 계획이 실패하면? 영지를 지켜내지 못하고 거기서 다 죽으면? 가문의 명맥은 누가 잇는 건데."

"...."

그제야 이쪽의 말뜻을 깨달은 듯한 줄리앙.

그런 녀석을 향해 못 박듯 말했다.

"그러니까 너라도 여기 남아 있어야지. 최소한 한 사람은 안전빵으로 남겨놔야지. 안 그래?"

"저기, 하지만...."

"내 말 들어, 줄리앙."

살짝 허리를 낮추었다.

녀석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녀석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게 우리의 역할인 거야. 험하고 궂은일이 있으면 내가 나서서 처리하는 거. 그럼 너는? 가만히 있어. 뒤에서 응원해줘. 그거면 충분해. 그러다가 내가 쓰러지면? 그때 네가 나서는 거야. 그러기 위해 힘을 아껴두는 거야. 알겠어?"

"...형."

"왜."

"그렇게 분위기 잡으니까 진짜 안 어울린다."

"...젠장."

무안해졌다.

녀석의 곱슬한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헝클어뜨렸다.

그사이, 하비엘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로이드 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과연 소드마스터.

일반인을 초월하는 움직임으로 벌써 두 사람 몫의 짐을 모두 꾸린 모양이다.

로이드는 허리를 폈다.

줄리앙을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간다."

배낭을 짊어졌다.

쿨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아. 뒤치다꺼리 줄이기 작전, 성공.'

혹시나 줄리앙이 따라오겠다고 계속 똥고집을 부리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서 녀석을 왕도에 남겨놓을 멘트를 나름 공들여 준비했다.

다행히 그 작전이 잘 먹혔다.

'이제 남작령으로 돌아가면 정말 주위 챙길 여유가 없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여유는 고사하고 진짜로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한데 아직 제 몸도 못 지키는 줄리앙을 데리고 가면?

녀석이 위험해지는 건 물론이다.

주위까지 모두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은 녀석을 왕도에 남겨두는 게 나으리라.

그렇게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숙소를 나섰다.

숙소 앞에는 이미 국왕이 약속한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두 마리 준마였다.

심지어 질주 마법이 걸린 준마였다.

"휘유."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다른 이도 아닌 궁정마법사가 심혈을 기울여 걸어준, 최고 수준의 질주 마법이었다.

덕분인지 준마의 네 다리에는 반투명한 은빛 기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럼 가자."

곧바로 준마에 올랐다.

허겁지겁 따라나온 줄리앙을 한 번 힐끗.

"다음에 보자."

타악!

준마 옆구리를 박찼다.

그 순간, 준마가 질주를 시작했다.

"...!"

엄청난 속도였다.

순식간에 줄리앙이 멀어졌다.

앞쪽에서 쑥 다가오는 풍경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건 무슨 제로백 3초대 끊는 슈퍼카도 아니고.'

로이드는 이를 악물며 고삐를 잡았다.

말 등에 몸을 납작 엎드렸다.

예전에 하비엘에게 말타기를 배워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게다가 이 준마는 똑똑하기까지 했다.

장애물이 있으면 알아서 피해 가거나 뛰어넘는 것은 물론이고, 등에 태운 인간의 승차감(?)마저 나름 배려하는 구석이 있었다.

덕분에 무지막지한 속도에 비해 그리 흔들림이 심한 편은 아니었다.

로이드는 옆을 힐끗 돌아보았다.

"어이, 괜찮냐?"

"예, 물론입니다."

역시나 하비엘이 탄 준마도 이쪽 못지않았다.

아니, 하비엘은 이쪽보다 훨씬 능숙하게 준마의 속도에 적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럼 가자."

"예."

다그닥! 다그닥!

로이드와 하비엘.

두 사람의 준마가 은빛 잔광을 남기며 새벽의 왕도 대로를 주파했다.

그렇게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향해 줄리앙은 가만히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조금씩, 흔들던 손이 멈추어졌다.

서서히, 주먹이 쥐어졌다.

"...."

줄리앙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 질끈 깨물고 있었다.

'난 아직 형에게 도움이 못 되는 걸까.'

좋은 말로 자신을 달래준 형.

이곳에 남아 있으라고.

적어도 한 사람은 안전해야 한다고.

그래야 가문의 뒷날을 책임질 수 있는 거라고.

그렇게 말해준 형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형이 말하지 않은 부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짐이 되는 거야.'

바보가 아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애써 숨기려 들어도.

때로는 느껴지는 마음이 있다.

조금 전, 남작령으로 함께 돌아가겠다는 자신을 말리던 형의 마음이 그랬다.

'날 걱정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날 짐으로 여기는 것도 사실이었어.'

불끈.

주먹이 떨렸다.

분해서?

아니었다.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

지금껏 살아오면서 뭘 했나 싶다.

자신과 동갑내기인 하비엘은 벌써 소드마스터가 되어 있는데.

아니, 굳이 그런 천재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무언가 자신도 도움될 능력을 키울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나도 형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

그러려면 능력을 키워야 하리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하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줄리앙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로이드와 하비엘이 떠나가 뒷모습 발자취마저 사라진 쪽을 향해, 각오하듯 되새겼다.

'조금만 기다려, 형. 나도 노력할게. 그래서 형한테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그렇게 준비가 되는 날이 오면.

형과 하비엘이 그랬듯 남작령으로 달려가리라.

기꺼이 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역경을 함께하리라.

그렇게 깊어가는 늦여름 새벽하늘 아래.

줄리앙은 입술 굳게 앙다물었다.

투두두두두!

말발굽이 땅을 박찼다.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낙엽.

폭풍 같은 질주에 휩쓸려 흩날렸다.

그 속에서 로이드와 하비엘은 쉼 없이 달렸다.

궁정 마법사의 질주 마법은 실로 대단했다.

준마가 어지간해선 지치질 않았다.

최고 속도의 70퍼센트 정도로만 내달리면 온종일 체력이 유지가 되었다.

그런데도 이미 보통 말의 전력질주보다 더 빨랐다.

로이드와 하비엘도 달리는 데에만 집중했다.

식사와 휴식마저 최소한으로 했다.

각자 트리플 써클에 오른 아스라한 심법.

그 덕분에 간신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듯 두 사람은 필요 외의 대화를 나눌 여유도 없이 계속해서 내달렸다.

동쪽을 향해.

떠오르는 태양과 달을 향해.

위험을 맞이하게 될 남작령을 향해.

쉼 없이 고삐 움켜쥐고 박차를 가하였다.

마침내 불과 닷새 만에 남작령의 경계에 다다랐다.

"...."

지친 숨결 내쉬며 익숙한 땅을 둘러본다.

다행히 남작령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마레즈 개간지 곳곳을 물들인 초록빛 밭의 물결.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곧은 포장도로.

도로를 따라 연결된 서너 군데 촌락.

영주의 저택.

그 너머의 중심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지는 포장도로.

동쪽 산맥 기슭의 역청탄 광산까지 줄곧.

로이드의 시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더욱 동쪽을 향했다.

동부 산맥의 기슭을 타고 올라갔다.

산맥 중턱을 넘어, 꼭대기를 지나쳐, 그 위의 하늘을 보았다.

아침이었다.

원래라면 산맥 너머로 해가 떠오를 시간이었다.

하지만 태양이 보이지 않았다.

먹구름?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시커멓고, 이질적인 무언가.

꿈틀대는 거대한 검은 덩어리가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어떠한 먹구름의 우레성보다도 훨씬 기괴한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바츠즈즈! 부우우우우우-!

수천, 수십만의 날갯짓 소리.

실시간으로 커졌다. 다가왔다. 확장되었다.

어느새, 산맥 위의 동쪽 하늘 전체를 뒤덮어 왔다.

숫자를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대규모의 메뚜기 떼였다.

"로이드 님이 말씀하신 게... 설마 이것이었습니까."

공포스러울 정도로 경이로운 광경 때문일까.

곁에서 들려오는 하비엘의 목소리마저도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쪽은?

역시나 물론이다.

"너 떨고 있냐?"

"조금은요. 대책은 있으신 겁니까."

"물론이지."

당연히 대책은 준비했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내내 그것만 고민했다.

아마 멀지 않은 뒤쪽에서 급속도로 진군해 오고 있을 500기의 백색창기병.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만 시간을 끌어주면 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계획대로 영지를 지켜낼 차례다.

'여길 지켜야 내가 평생 탱자탱자 놀고먹을 수 있으니까!'

실패한다면?

살아서 왕도로 도망친다 해도 국왕의 소환수 꼴이 되어 평생 뼈 빠지게 일만 하다가 죽어야 할 것이다.

그런 미래는 사양이었다.

철컥!

안장에서 강철삽을 뽑았다.

하비엘을 돌아보았다.

눈빛을 나누었다.

"따라올 거지?"

"물론입니다."

"그럼 자세한 설명은 달리면서. 가자. 하!"

준마 옆구리를 박찼다.

바람을 가르며 언덕을 내리달렸다.

마레즈 개간지로 거침없이 진입했다.

난데없는 메뚜기 떼의 재앙.

그 앞에서 패닉에 빠지고 있던 개간지 주민들을 향해, 미리 생각해두었던 계획의 첫 필수품을 우렁차게 외쳤다.

"솥뚜껑! 제일 큰 걸로!"

105화. 캡틴 프론테라 (1)

브즈즈즈즈! 프츠즈-!

거친 날갯짓.

피막으로 이루어진 두 쌍의 날개가 요동쳤다.

길이 70센티에 달하는 몸체를 허공으로 띄웠다.

바람을 탔다.

활강했다.

그러다 옆에서 나란히 날던 동료와 날개가 부딪쳤다.

파츠즛!

공중에서 균형을 잃었다.

추락했다. 거침없이. 떨어졌다.

어느 이름 모를 나뭇가지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처퍽!

불시착의 충격.

커다란 가지가 묵직하게 출렁였다.

추락한 개체, 무리의 86,215번째 메뚜기는 몸을 부르르 털었다.

충격을 털어내자마자 커다란 위턱을 한껏 벌렸다.

눈앞에서 출렁대는 가지를 깨물었다.

끄드득!

성인 허벅다리만큼이나 굵고 튼튼한 나뭇가지였다.

그러나 메뚜기의 입질 앞에선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한 번의 입질에 껍데기와 속살이 한 움큼이나 단박에 뜯겨나갔다.

그러고도 메뚜기는 계속해서 위턱을 놀렸다.

끄드득! 까삭! 까그득!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깨물고 본다.

씹어서 부서지면 일단 삼킨다.

그렇게 끝도 없이 배를 채운다.

86,215번째 메뚜기는 그렇게 순식간에 가지 하나를 밑동까지 씹어먹었다.

그리고 나무줄기를 박차고 다시금 날아올랐다.

타아앗-! 파츠즈즈!

바람에 몸을 싣는다.

광활한 동부 산맥의 풍경이 배 아래로 지나간다.

푸르렀다.

그 녹색 광경을 보며 86,215번째 메뚜기는 문득, 자신이 떠나온 더욱 동쪽의 땅을 떠올렸다.

파츠즈!

동쪽의 땅.

인간들이 황무지라 부르는 지대.

86,215번째 메뚜기는 원래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봄철을 맞이하며 알에서 깨어났다.

몇 차례인가 허물을 벗으며 유충 단계를 지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86,215번째 메뚜기의 몸길이는 30센티 남짓할 뿐이었다.

한데 어느 날, 환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진군하라!"

황무지를 떨쳐 울리던 피리 소리.

삽시간에 몰려오던 자욱한 흙먼지.

흙먼지를 헤치고 인간들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횃불을 들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서슴없이 휘둘렀다.

그 서슬에 더듬이 끝이 그슬렸다.

놀라 날뛰었다.

인간이 내모는 대로 서쪽으로, 서쪽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해가 지는 방향을 향하여.

며칠을 이동했다.

한데 인간도 끈질겼다.

그들의 군대가 계속해서 뒤를 따라왔다. 주위를 얼쩡거렸다. 횃불을 휘둘렀다.

그 와중에 어떤 병사들은 이런 말을 지껄이기도 했다.

"백부장님, 이렇게 한다고 해서 황무지 건너편 서쪽의 오크 부족에게 무슨 타격이나 가는 겁니까?"

"당연하지. 자네는 아직 모르는군?"

"제가 모른다니, 뭘 말입니까?"

"이번에 맘루크 장군이 고안한 이 새로운 전략 말일세."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저 보잘것없는 메뚜기가 황무지 전체에 거대한 파국을 만들어낼 걸세."

"뭐, 메뚜기 떼, 그런 겁니까?"

"단순히 그런 게 아닐세."

"그럼...."

"메뚜기 떼는 시작일 뿐일세. 황무지에 서식하는 몬스터 생물군 전체가 저 메뚜기 떼에 의해 강제로 서식지 교란을 겪을 것일세."

"설마?"

"그 설마가 맞네. 메뚜기 떼는 게걸스럽지. 한데 황무지에 먹을 것이 뭐가 있겠나."

"배럴밀크 선인장 군락인 겁니까, 진짜?"

"바로 그걸세. 배럴밀크 선인장은 영양이 풍부하지. 그 군락에서 나오는 영양으로 황무지의 생태계 전체가 지탱될 정도이니. 한데 이곳 서쪽의 메뚜기 떼가 유례없이 그 선인장 군락이 있는 구역으로 날아간다면?"

"...배럴밀크 선인장이 다 먹히겠지요. 그 선인장을 주식으로 삼는 초식 몬스터를 시작으로 그걸 잡아먹는 육식까지, 황무지에 서식하는 모든 몬스터들이 식량 부족을 겪을 거고 말입니다. 맞습니까?"

"그래. 맞아. 그러면 자연히 모든 몬스터가 순서대로 서쪽을 향할 걸세. 그쪽에 산맥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 산맥 초입에는... 이번 작전의 목표인 강철 모래 오크 부족이 살고 말입니까?"

"바로 그거야."

인간 백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첩보에 따르면 그 오크 부족이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서 벗어났다더군. 석빙고라는 시설물을 지은 덕분이라던가? 그러면 곤란해. 그나마 놈들의 세력을 억제해주던 게 부족한 식량이었는데, 풍부해진 식량을 바탕으로 놈들의 숫자가 불어나기라도 한다면...."

"우리에게도 큰 위협이 되겠죠."

"그걸세. 그러니 놈들이 크기 전에 짓밟아야 하는 거지."

"하지만 저기,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에 메뚜기 떼나 몬스터들이 더 서쪽으로 산맥을 넘어가 버리면 그땐 어떡합니까?"

"음? 마젠타노 왕국 쪽으로 말인가?"

"예."

"그건 나도 몰라."

"예?"

"그런 문제는 윗대가리들이 알아서 하겠지. 일개 백부장과 부관인 우리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음, 하긴...."

"그러니까 위에서 까라고 시키는 것만 제대로 까자고. 자, 이렇게."

화르르륵!

껄껄 웃은 백부장이 횃불을 던졌다.

파츠즛, 놀란 86,215번째 메뚜기가 제자리에서 풀쩍 뛰어올랐다.

물론 86,215번째 메뚜기는 술탄국의 백부장과 부관이 나누는 대화의 의미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이 펼치는 이 작전이, 다른 세계의 조선이라는 나라가 종종 북방의 이민족들을 상대로 펼치던 토벌 작전과 비슷하다는 사실 또한 인지할 수 없었다.

86,215번째 메뚜기는 그저 횃불을 피해 뛰어오를 뿐이었다.

인간의 군대가 내모는 대로 서쪽을 향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피신처를 찾았다.

뾰족뾰족.

가시투성이 낙원이 펼쳐졌다.

배럴밀크 선인장 과즙은 달콤했다.

원래 메뚜기가 먹던 식량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제법 먹을 만했다.

그곳에서 86,215번째 메뚜기는 원 없이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계속 배가 고팠다.

마음 같아서는 배럴밀크 선인장 과즙을 홀로 독차지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불가능했다.

어느새 동족이 너무나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파츠즈즈즈!

사방에서 들리는 동족의 날갯짓 소리.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이 밀집하게 된 동족들.

그 틈바구니가 86,215번째 메뚜기의 신체에 변화를 불러왔다.

한 장소에 동족 개체의 밀도가 높아졌다.

동족 개체와의 접촉이 비정상적으로 많아졌다.

그런 환경이 지구의 메뚜기 떼가 겪는 것과 똑같은 호르몬 변화를 86,215번째 메뚜기에게 선사했다.

츠즈즈즈-!

며칠이 지나는 사이에 날개가 확연히 길어졌다.

상대적으로 뒷다리는 짧아졌다.

높아진 개체 밀도.

그 때문에 천적에게 잡아먹힐 위험은 줄었다.

대신 동족 간의 먹이 경쟁에서 앞설 필요성이 늘었다.

따라서 도망치는 도약에 필요한 다리는 짧아지고, 먹이를 찾아 장거리 이동에 필요한 날개가 길어졌다.

동시에 덩치가 2배 이상 커졌다.

동족 간의 약육강식에서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츠츠즛! 파츠즈!

어느새 싯누레진 몸체.

어느덧 70센티를 넘긴 몸길이.

그렇게 예전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으로 86,215번째 메뚜기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무리와 함께 동부 산맥 상공을 넘었다.

그 와중에 더듬이를 파르르 떨었다.

겹눈에 탐스러운 풍요의 땅을 담았다.

산맥 서쪽 아래.

인간들의 영지가 펼쳐져 있었다.

동부산맥의 울창한 수림과 달리 강력하고 위협적인 몬스터의 기척도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다.

오늘은, 저기다.

브즈즈즈즈-!

86,215번째 메뚜기가 하강 기류에 몸을 실었다.

바람을 타고서 급강하를 감행했다.

인간 영지의 풍경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오크 광부들의 거친 외침을 쏜살같이 지나쳤다.

포장된 도로 상공을 단숨에 가로질렀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오는 가장 큰 건축물을 향해 돌진했다.

콰창!

유리창을 깨뜨렸다.

창가 안쪽, 테이블 위를 난장판으로 만들며 불시착했다.

그 와중에도 게걸스럽게 위턱을 벌렸다.

입에 들어오는 아무것이나 일단 씹고 보았다.

꽈그작!

원목 탁자 가장자리가 단숨에 한 줌이나 뜯겼다.

그 서슬에 어느 하녀의 새된 비명이 울렸다.

"꺄아아아악!"

프론테라 남작 부인의 하녀 에밀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소녀였다.

그저 오늘은 남작 부인을 모시고 어디를 다녀오게 될까.

혹은 내일 점심 식사는 어떤 메뉴가 나올까.

때로는 새로 만든 십자수에 뿌듯해하는.

그런 평범한 소녀였다.

그렇기에 에밀리는 오늘, 이렇듯 아침 식사 테이블 위로 달려든 거대 메뚜기의 모습에 기절할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꺄아악! 아, 아아아악!"

혹시 악마의 농간이 아닐까.

혹은 사악한 마귀가 지상으로 내던진 생물이 아닐까.

그만큼 난데없이 창문을 깨고 테이블로 떨어져 내려온 메뚜기는 거대하며, 흉측하고, 끔찍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에밀리의 공포는 오래가지 못했다.

콰자작!

나무 의자가 휘둘러졌다.

위에서 아래로.

거침없고 서슴없이.

일말의 자비도 없이 메뚜기의 배 끄트머리를 내리찍었다.

꽈직!

거대 메뚜기의 키틴질 껍질이 으스러졌다.

배 끄트머리 반 뼘이 의자에 찍혀 으깨졌다.

키이이이이!

86,215번째 메뚜기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거칠게 버둥거렸다.

흘러나오는 내장 조각을 테이블 위에 묻혀대며 전신의 껍질을 사납게 비벼댔다.

그러나 그 순간, 86,215번째 메뚜기는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인간의 것보다도 사나운 외침을 청각 기관으로 감지해야 했다.

"에밀리! 날 돕거라! 어서!"

프론테라 남작 부인이 외쳤다.

방금 휘둘렀던 의자를 다시금 들어 올렸다.

힘껏 내리찍었다.

콰작!

이번엔 가슴이었다.

날개와 가슴 껍질 일부가 깨졌다.

86,215번째 메뚜기가 남작 부인을 향해 위턱을 벌렸다.

그 순간, 에밀리가 테이블을 들어 엎었다.

콰당탕!

인간은 위기에 처하면 괴력을 발휘한다 했던가.

16세 가녀린 소녀의 것치고도 굉장히 본격적인 괴력이었다.

어쨌건 덕분에 86,215번째 메뚜기는 남작부인을 깨물지 못했다. 균형을 잃고서 바닥에 떨어져 잠깐 버둥거렸다.

그리고 그 버둥거림이 생전의 마지막 몸짓이 되었다.

꽈즈각!

재차 내리친 의자가 86,215번째 메뚜기의 머리를 으깼다.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헐떡이는 남작 부인의 새하얀 드레스 곳곳에도 묻어났다.

하지만 남작 부인은 그런 사소한 일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에밀리, 괜찮으냐?"

"네, 네에, 부인."

"어서 내 손을 잡고 따라오너라."

평온하고 일상적인 아침 식사 시간은 이미 물 건너갔다.

무참히 깨진 창문 너머.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어 오는 메뚜기 떼의 모습을 보며 남작 부인은 손끝을 부르르 떨었다. 하녀 에밀리의 손을 굳게 움켜쥐고서 저택 복도를 내달렸다.

마침 프론테라 남작도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남작 부인의 드레스 곳곳에 묻은 메뚜기 체액을 눈에 담은 남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부인! 다친 곳은? 없소? 괜찮은 거요?"

"네, 괜찮답니다. 당신은요?"

"나도 괜찮소."

"하지만 당신도...."

남작 부인의 시선이 남편의 셔츠로 향했다.

새하얀 셔츠가 메뚜기 체액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게다가 남작은 한 손에 검을 들고 있기까지 했다.

아마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겪은 것이리라.

"일단 움직입시다. 이쪽으로."

남작이 앞장을 섰다.

바삐 복도를 따라 뛰었다.

그사이에도 복도를 따라 닫힌 문 안쪽에서 콰창, 콰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그때마다 남작과 부인, 에밀리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무얼 뜻하는지, 모두가 이미 겪은 바 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남작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갑자기 아침부터 메뚜기 떼라니.

이런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식의 재난이 덮쳐 오리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서 경비대를 모아야 해.'

복도 끝에 다다라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남작은 생각했다.

앞으로의 대응 방법을 나름 떠올렸다.

'바이에른 경과 함께 방어선을 구축하는 거다. 그나마 다행히 메뚜기는 야수개미처럼 강하진 않아. 잘 훈련된 우리 병사들이라면 혼자서도 대여섯 마리쯤은 거뜬히 해치울 수 있어. 그러니까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제대로 맞서면....'

벌컥!

생각의 끝에서 남작은 저택 문을 열었다.

그리고 굳어 버리고 말았다.

'무슨....'

굳은 표정.

그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남작의 눈동자.

시야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천천히 굴러가며 훑었다.

그 속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시각 신경을 따라, 뇌에 전달했다.

자신이 본 광경을 분석했다. 깨달았다. 이해했다.

'아무리 메뚜기 떼라곤 하지만... 저렇게 많을 수가 있는 거야?'

활짝 열어젖힌 문 너머.

저택 안뜰 모든 곳에 메뚜기가 있었다.

남작 부인이 평소 애지중지하며 키우던 꽃도.

남작 본인이 제법 신경 쓰며 가꾸던 갖가지 나무도.

모두 메뚜기에게 먹히고 있었다.

그렇듯, 70센티가 넘는 메뚜기의 숫자가 안뜰에만 수백 마리는 충분히 넘어 보였다!

그리고 놈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콰앙-!

남작은 반사적으로 문을 거칠게 닫았다.

어느새 비 오듯이 흐르는 식은땀.

전율처럼 온몸을 점령한 떨림.

호흡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빠졌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병사들을 모으고 어쩌고.

바이에른 경과 함께 대열을 만들고 어쩌고.

조금 전까지 나름 비장하게 떠올리고 있던 작전과 계획이 모조리 물거품처럼 스러지고 말았다.

안뜰을 가득 점령한 메뚜기 떼를 본 순간.

수백 마리 메뚜기의 이쪽을 돌아보는 눈길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모든 작전과 계획이 머릿속에서 박살이 났다.

'이건... 방법이 없어.'

새하얗게 탈색된 머릿속에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능한 대응법이라고는 그저 문을 굳게 걸어 잠그는 것. 그것만이 떠오르는 전부였다.

"당신? 바깥 상황이 어떤가요?"

아내가 물어왔다.

그녀가 바깥의 끔찍한 광경을 못 본 것을 행운으로 여겨야 할까. 아니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기서 숨어 있자고 말해야 할까.

남작이 망설이는 순간이었다.

뻐그걱! 까삭!

굳게 닫은 문이 크게 요동쳤다.

마치 누군가가 거대한 망치로 때린 것처럼.

혹은 탐욕스러운 야수가 문을 씹어대기 시작한 것처럼.

"꺄아아아악!"

곁에서 눈치를 살피던 에밀리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남작부부는 목격해야 했다.

벌어진 위턱 열 개가 문 곳곳을 꿰뚫은 모습을.

이내 가차 없이 다물리며 문에 주먹보다 큰 구멍을 만드는 광경을.

"허억."

남작은 기겁했다.

이내 상황을 깨달았다.

'저 메뚜기들, 아예 문을 씹어 먹고 있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저택 자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크으읏! 이놈들!"

검을 휘둘렀다.

게걸스레 문을 씹어 먹으며 머리를 들이미는 메뚜기들.

놈들의 머리통을 향해 검을 쑤셔 넣었다.

왈칵, 체액이 튀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 마리가 쓰러진 자리에 두 마리의 메뚜기가 달려들었다.

두 마리를 쓰러뜨리면 세 마리 메뚜기가 문을 뜯어먹으려 날뛰었다.

문의 구멍이 점점 넓어졌다.

그만큼 남작은 창백해진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남작 부인도 두 손으로 꽃병을 움켜쥐었다.

에밀리는 울면서 촛대를 집어 들었다.

마침내 문이 완전히 박살 났다.

꽈즉!

사방이 파먹히던 문짝이었다.

거기에 스무 마리가 넘는 메뚜기가 달라붙었다.

너덜너덜해진 문짝이 견뎌낼 무게가 아니었다.

문짝이 통째로 무너졌다.

콰자각! 커걱!

부서진 문짝으로 메뚜기 떼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쪽을 보며 허기로 가득한 겹눈을 번득였다.

"꺼지거라 이놈들! 우아아아악!"

남작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메뚜기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다.

남작이 혼자서 휘두르는 검으로는 놈들의 파도 같은 기세를 막을 수조차 없었다.

"뒤로! 어서!"

달려왔던 길로 황급히 물러났다.

뒷걸음질치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그런 후퇴도 2층 초입까지였다.

콰당! 콰당탕!

복도 곳곳의 문이 터지고, 깨지고, 넘어졌다.

넘어진 문을 밟으며 메뚜기 떼가 복도로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남작 부부와 하녀 에밀리는 계단참 꼭대기에서 앞뒤로 포위되고 말았다.

"이, 이런...."

남작이 입술을 깨물었다.

뒤에서 꽃병을 치켜드는 부인.

울며 촛대를 끌어안는 에밀리.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은데, 그럴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아니, 자신도 여기서 끝이겠구나 싶은 생각만 들었다.

"부인...."

검을 들지 않은 손을 뻗는다.

아내의 고운 손 끌어안듯 잡는다.

그사이에도 메뚜기 떼는 앞뒤에서 다가왔다. 지척까지 몰려왔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해서 그나마 다행인 걸까.

절망적 낭만 속에서 부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부부를 향해 메뚜기 떼가 위턱을 벌렸다.

먹잇감을 덮치기 위해 뒷다리를 웅크렸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데에엥... 데엥...!

어디선가, 불현듯, 온 세상을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가 아스라이 울려 퍼졌다.

마치 힘껏 종을 치듯.

혹은 커다란 솥뚜껑 두드리듯.

육중하게 공기를 울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메뚜기 떼의 동작이 일제히 멈칫했다.

이윽고 남작 부부에게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외침을 타고 날아왔다.

"이놈들아! 솥뚜껑 소리 들으니까 어쩐지 막 온몸이 들썩들썩하지? 관심이 확 끌리지? 엉!"

데에엥-!

어느새 더욱 가까이서 들려오는 맑은 울림.

그만큼 더더욱 확연히 알아들을 수 있는 반가운 목소리.

"여기다! 끌리면 와서 날 잡아봐! 오늘은 내가 캡틴 프론테라다, 이것들아!"

데에에엥-!

한층 웅장하게 울리는 공명음.

그 속에서 남작 부부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로이드?"

106화. 캡틴 프론테라 (2)

데에에에엥-!

낮고 맑은 공명음이 울렸다.

공기에 일정한 파장을 전달했다.

전달된 파장이 메뚜기의 몸체에 닿았다.

가슴과 뒷다리 연결부 아래의 청각 기관을 자극했다.

청각기관을 통해 신경 중추를 두드렸다.

그러자 신경중추가 자극해 화답했다.

저 울림을 따르라, 라고.

파츠즈즛!

프론테라 남작을 향해 도약하려던 132,645번째 메뚜기가 멈칫했다.

뒷다리의 힘을 풀었다.

먹잇감을 덮치기 위해 잡았던 자세도 풀었다.

그리고 재빨리 반대쪽으로 몸체를 돌렸다.

방금 낮고 맑은 공명음이 들려온 곳.

창문 밖을 향해서였다.

타앗!

132,645번째 메뚜기가 도약했다.

깨진 창문을 통해 저택 밖으로 빠져나갔다.

다른 메뚜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의식이 집단을 조종하듯.

첫 메뚜기가 창문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몸을 돌렸다.

한꺼번에 나가려고 우르르 뛰고 난리를 쳤다.

남은 창문이 다 깨졌다.

창틀이 뭉개졌다.

서로를 짓밟았다.

그렇게 저들끼리 난리를 부리며 썰물처럼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런 놈들의 청각 기관을, 공명음이 다시금 자극했다.

데에에엥-!

'이게 무슨....'

프론테라 남작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메뚜기떼가 저택에서 순식간에 멀어졌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당신, 방금 들었어요?"

아내가 물어오는 소리.

남작은 아내를 돌아보았다.

"들었소. 방금 그, 큰 종을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들려오던 목소리가...."

"로이드였어요."

남작과 부인은 서로의 눈빛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다.

세상의 끝, 설령 지옥 끝자락에 빠진다 하여도 알아들을 수 있을 아들의 목소리였다.

다음 순간, 남작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움직였다.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엉망이 된 현관을 지나쳤다.

순식간에 텅 빈 안뜰을 가로질렀다.

비교적 시야가 탁 트인 정문에 섰다.

그리고 보았다.

수천, 수만 마리의 메뚜기 떼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광경을.

그 선두에서 질주하고 있는 두 마리 준마를.

준마를 몰며 내달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로이드? 아스라한 경?"

부부의 경악 섞인 중얼거림.

그 중얼거림을 스치며 또 한 마리의 메뚜기가 뒤늦게 허겁지겁 허공을 날아갔다.

남작가 저택 진입로를 지나쳤다.

마을의 유일한 주점 지붕에 떨어졌다.

우와악, 놀라서 소리치는 주점 주인장을 무시하고 또 뛰어올랐다.

수만 마리 제 동족들의 행렬 속으로 합류했다.

그런 일이 프론테라 영지 곳곳에서 벌어졌다.

데에엥-!

공명음이 울린다.

헛간 짚더미 삼키던 메뚜기가 움찔.

물고 있던 짚더미마저 뱉어내고 공명음을 향해 뛰쳐나갔다.

데에에엥-!

다시금 울리는 낮고 맑은 소리.

외양간의 송아지를 덮치려던 메뚜기가 멈칫.

탐스러운 먹잇감을 포기하고서 외양간 밖으로 날아갔다.

데에에에엥-!

또 한 번 울리는 웅혼한 진동.

두려움에 질려 울부짖던 양치기 소년도.

소년의 곁에서 저항하던 사냥꾼 소녀도.

가족의 손을 잡고 기도하던 공병대원도.

젖먹이 아기를 지키려 소리치던 새댁도.

모두가 자신을 덮치려던 메뚜기 떼가 멈칫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먹잇감을 포기하고서 공명음을 따라 날개를 펼치는 메뚜기의 뒷모습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모두는 마침내 목격했다.

이 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상해보지 못했던 광경을.

데에에에에엥-!

하비엘의 검이 검집째로 움직였다.

세차게 떨어져 쇳덩이를 두드렸다.

데에에엥-!

직경 1.2미터에 달하는 시커먼 솥뚜껑이 묵직한 울림을 토해냈다.

솥뚜껑 뒤에서 로이드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좋아! 한 번 더!"

솥뚜껑을 방패처럼 들고서 준마를 내달리는 로이드.

곁에서 나란히 말을 몰던 하비엘이 검집 풀스윙으로 그 외침에 응답했다.

쐐애액, 데에에엥-!

때리는 하비엘과 막아내는 로이드.

휘둘러진 검집과 강타당한 솥뚜껑.

그렇듯 하비엘이 로이드가 치켜든 솥뚜껑을 때릴 때마다 낮고 맑은 공명음이 우렁차게 울렸다.

그때마다 모여드는 메뚜기 떼가 더 많아졌다.

물론 그렇다고 두 사람이 메뚜기떼에게 포위된 것은 아니었다.

질주 마법이 걸린 준마 덕분이었다.

"좋아! 역시 잡몹 사냥은 몰이가 빠지면 섭하지!"

"잡몹이 뭡니까!"

"그런 게 있어! 다시 한 번!"

"예!"

투두두두두, 데에에엥-!

질주의 선두에서 공명음을 떨쳐냈다.

그럴 때마다 뒤를 추격해 오는 메뚜기 떼의 규모가 점점 불어났다.

로이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성공적으로 모여드는 메뚜기 떼.

제대로 먹혀드는 몹 몰이 작전.

문득, 로이드는 소설 철혈의 기사를 떠올렸다.

'동부 황무지의 오크 부족에 대한 설명이었지.'

소설 속에서 오크들은 몬스터 사냥으로 식량을 구하며 살아갔다.

하지만 사냥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종종 굶는 일이 다반사였다.

게다가 비축된 식량마저 떨어지면?

그럴 때 오크 부족이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황야의 중심에서 커다란 징을 쳐서 낮고 맑은 공명음을 내는 방법이었다.

'이런 종류의 공명음이 황무지에 서식하는 로커스 메뚜기를 잘 끌어들인다고 했었지, 아마. 놈들이 짝짓기 시기에 짝을 부르기 위해 내는 소리와 이런 공명음의 파장이 비슷해서라고 설명하기도 했고.'

그 기억을 믿어보기로 한 그였다.

그래야 메뚜기를 한 장소로 모을 수 있으리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모아야지. 모아서 한 큐에 잡아야지. 안 그러면? 저 많은 걸 언제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다 때려잡아. 그러기도 전에 남작령에 풀 한 포기 안 남겠다.'

당장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영지에 풀이고 집이고 사람이고 다 뜯어먹힐 판국이었다.

그러면 자신도?

쫄딱 망하는 거다.

그런 새드엔딩은 당연히 극구 사양이다.

그따위 사달이 나기 전에 메뚜기떼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때려잡아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때려잡기 편하도록 한곳으로 모아야 한다.

'그게 바로 몹 몰이의 기본이니까. 이렇게!'

쐐애액!

하비엘이 내리쳐 오는 검집.

그걸 솥뚜껑으로 힘껏 막아냈다.

데에에에엥-!

'...그욱.'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솥뚜껑을 쥔 손아귀와 팔이 통째로 얼얼해졌다.

엄청난 진동과 파장이 온몸을 한 차례 쑤욱 훑고 지나가기도 했다.

마치 새해 첫날 웅장하게 울리는 보신각 종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 혹은 맹렬하게 쿵쿵거리는 콘서트용 초대형 우퍼 스피커를 죽부인처럼 꼭 끌어안고 있는 듯한 느낌.

속이 살짝 메슥거렸다.

"어이?"

솥뚜껑 가장자리로 가자미눈을 슬쩍 내밀었다.

건너편의 하비엘을 향해 정색했다.

"내가 조금 전부터 느낀 건데, 솥뚜껑 내리치는 검집 스윙에 감정이 좀 실린 것 같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서 준마를 몰던 하비엘이 이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그저 로이드 님이 제시하신 작전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만."

"어, 그러냐?"

"예, 이렇게 말입니다."

쐐애액, 데에에엥-!

'...우읍!'

또 한 번 속이 뒤집혔다.

로이드의 가자미눈이 한결 가늘어졌다.

"어쩐지 검집 스윙, 아까보다 좀 더 세진 것 같은데."

"이렇게 세게 쳐야 더 큰 공명음이 울릴 거고, 그래야 메뚜기 떼가 더 잘 모일 테니까요."

"그래? 그럼 바꿀까? 네가 솥뚜껑 쥘래?"

"어째서입니까?"

"내가 더 세게 칠 수 있을 것 같아서. 삼중발파로."

"거절합니다."

"어째서?"

"지금 이러는 게 좋으니까요."

쐐애액, 데에엥-!

한층 강력해진 스윙이 솥뚜껑을 후려쳐 왔다.

그 위력만큼 로이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그만큼 효과도 있었다.

메뚜기 떼가 더욱 집요하게 이쪽을 추격해 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작전이 먹히고 있어.'

솔직히 이 작전, 먹힐지 긴가민가했는데.

막상 해 보니 예상보다 훨씬 잘 먹히고 있었다.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 아니, 솥뚜껑 치는 도련님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자! 다시 한 번!"

기꺼이 솥뚜껑을 들었다.

하비엘이 내리치는 검집을 막아냈다.

지금은 누가 치고 누가 맞는 역할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실은 이렇게 백 번, 천 번을 두드려 맞아도 괜찮았다.

'영지만 무사하다면 이까짓쯤!'

그래서 행복한 여생과 노후가 보장된다면 이 정도쯤!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을 다지며 로이드는 주위 상황을 재빠르게 살폈다.

'좋아. 몰이는 제대로 되고 있다. 이제부터는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는 단계야.'

일단 작전 성공의 기본 대전제인 몰이가 성공적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몰이의 범위를 넓힐 때다.

어떻게든 최대한 많은 메뚜기 떼를 몰아야 한다.

그래야 한 방에 놈들을 정리하기가 더욱 편해질 테니까.

"자! 이대로 한 바퀴 쭉 돌자! 영지 외곽을 따라서!"

"알겠습니다."

둘은 말머리를 영지 외곽으로 향했다.

대로를 따라 내달렸다.

중심 마을을 벗어났다.

촌락 몇 개를 지나쳤다.

논과 밭, 과수원을 통과했다.

그럴 때마다 솥뚜껑을 때리고 막았다.

수시로 공명음을 힘껏 터뜨렸다.

두 사람의 질주가 이어지는 곳마다 새로운 메뚜기 떼가 추격의 대열에 합류했다. 오만 마리, 십만 마리, 십오만 마리, 마침내 이십만 마리를 넘었다. 그러고도 계속 끝도 없이 불어났다.

로이드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남쪽으로!"

프론테라 영지 외곽을 따라 한 바퀴를 크게 돌며 몹 몰이를 마친 직후, 로이드가 남쪽을 가리켰다.

마레즈 개간지가 있는 방향이었다.

아니, 그의 손가락은 개간지 더 너머의 지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작령으로 간다. 잘 따라와!"

"알겠습니다."

하비엘의 눈동자에 잠시 이채가 떠올랐다.

라코나 자작령이라니.

조금은 뜻밖이었다.

'설마 그곳도 도와주시려 함인가.'

사실 이쪽 남작령과는 사이가 곱지 못한 곳이다.

아니, 실은 원수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곳의 주민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라코나 자작과의 사사로운 원한은 잠시 접어두고 그곳 주민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신 것이로구나.'

하비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론테라 남작령이 메뚜기 떼에 습격당했다면, 나란히 남쪽에 붙어 있는 라코나 자작령도 결코 무사하지는 못할 터. 그곳의 주민들도 날벼락 같은 재난에 휩쓸리고 있을 터.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약간의 감탄을 담아 로이드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로이드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하비엘 아스라한이 당신의 의로운 행동에 감탄하여 호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3 상승하였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현재 관계 : +8]

[주요 인물과의 약간의 관계 개선으로 54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4083]

'허, 참. 의로운 행동이라.'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무래도 약간 오해를 받게 된 모양이다.

'의로운 의도로 가는 건 전혀 아닌데.'

도와주려는 건 맞다.

하지만 라코나 자작령이 불쌍하다거나 안타까워서, 치솟는 의협심에 달려가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가 지금 자작령을 향해 달려가는 이유는 단 하나.

잘 꽂아둔 빨대를 지키려 함이었다.

'라코나 자작령이 무사해야 두고두고 수도세도 받아낼 수 있을 거니까!'

그런데 쫄딱 망하면?

기껏 상수도 설치해 준 보람이 사라지고 만다.

앞으로 수십 년은 수도세를 내며 풍요로운 노후를 거들어 줄 빨대가 뽑히고 만다.

그런 안타까운 사태는 막아야 했다.

게다가 메뚜기 떼를 퇴치하는 차원에서도 지금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다.

'자작령을 덮친 메뚜기 떼를 남겨놨다간 우리 쪽으로 2차 피해가 생길 거니까.'

자작령을 초토화시킨 다음엔 남작령을 덮쳐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기왕 놈들을 박멸하려면?

라코나 자작령을 습격한 놈들까지 세트 메뉴로 묶어서 처리함이 옳을 것이다.

"그러니 가자! 더 빠르게! 하!"

준마를 다그쳤다.

솥뚜껑을 힘껏 움켜쥐었다.

질주 마법이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투두두두두-!

자작령 외곽으로 진입했다.

역시나 자작령도 아비규환이었다.

영지 전체가 거대한 메뚜기 떼에 뒤덮여 있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 메뚜기 떼의 날갯짓 소리가 뒤섞인 혼돈의 화음이 뿌려졌다.

"가자! 하!"

준마 옆구리를 박찼다.

거침없이 내달렸다.

대로를 건너뛰고, 마을을 통과했다. 자작령 전체를 가로질렀다.

하비엘과 더불어 우렁찬 공명음을 터뜨렸다.

피 흘리며 싸우던 경비병이.

도망치던 농부와 아낙네가.

울부짖던 소년과 소녀가.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메뚜기를 보며 방긋거리던 갓난아기까지.

모두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공명음을 귀에 담았다.

로이드와 하비엘이 만들어낸 울림에 구원받았다.

브츠즈즈즈!

자작령을 뒤덮고 있던 수십만의 메뚜기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각자의 먹잇감을 팽개치고 로이드와 하비엘의 뒤를 추격해 왔다.

성공적인 몹 몰이였다.

"좋아, 이제 다시 남작령으로!"

질주했다.

도합 오십만에 달하는 메뚜기 떼를 이끌고서 진군했다.

그것은 설계된 박멸을 향한 행군이었다.

'마레즈 개간지. 강둑. 거기까지만 가면 돼.'

로이드는 뽀동이와 방울이, 하망이를 대기시킨 지점을 떠올렸다.

이번 작전을 세우며 준비해둔, 이른바 박멸지대.

그곳에서 메뚜기 떼를 박멸하리라.

염라대왕 진로상담 교실 단체 티켓을 끊어주리라.

그렇게 로이드가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107화. 캡틴 프론테라 (3)

브즈즈!

"...!"

갑자기 앞쪽에서 달려드는 거친 날갯짓 소리.

그 소리에 로이드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프츳!

메뚜기 다리 하나가 뒷덜미를 스치듯 치고 지나갔다.

화끈했다.

발톱에 걸려 피부가 찢어진 걸까.

하지만 그런 사소한 따가움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앞쪽에서 날아오는 수백, 수천 마리의 메뚜기 떼가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젠장."

제대로 몰이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부분의 메뚜기 떼를 뒤로 두기 위해 세심하게 도주로를 설정했는데.

'역시 범위가 너무 넓어. 남작령과 자작령 전체에 놈들이 다 번져 있으니까.'

그러다 보니 아무리 도주로를 잘 짜도 약간의 메뚜기들이 앞쪽에서도 달려들고 있었다.

한데 그 '약간'이라는 규모가 수백에서 수천은 된다는 점이 문제다.

"로이드 님, 대비하십시오."

하늘을 덮어오는 한 덩이의 메뚜기 떼.

놈들이 토해내는 굉음에 가까운 날갯짓 소리.

그 굉음을 뚫고 하비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이드의 한쪽 입술 끝이 올라갔다.

"하 씨. 마음의 준비가 안 되는데."

진짜다.

자신은 영웅이 아니다.

옛날 이야기책에서나 나오는 용맹한 전사도 아니다.

당연히 저렇듯 살벌하게 달려드는 수백 수천 마리의 거대 메뚜기 떼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드는 지금 상황,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미치겠어!'

벌레가 싫었다.

원래도 싫었지만, 고시원 생활을 하면서 더 싫어졌다.

요즘 유행하는 원룸텔 같은 매끈한 고시원이 아니라, 완전 다 낡아빠져서 값싼 옛날식 고시원에 묵었던 탓이었다.

바퀴벌레, 그리마, 가끔씩은 손가락 사이즈의 지네까지.

아주 지긋지긋하게 겪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다리 여섯 개 이상 달린 것들만 보면 절로 진저리가 쳐지는 습관이 생겼다.

한데 지금은?

'무려 진돗개 사이즈 메뚜기 수백 수천 마리한테 돌격해야 한다니, 미친 거 아냐?'

그냥 영지고 뭐고 다 때려치울까.

이대로 말 머리 돌려서 도망칠까.

국왕한테 달려가서 제발 일 좀 시켜달라고 아양이나 떨까.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더는 딴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이미 도망가기엔 너무 늦었다.

어느새 정면의 메뚜기 떼가 지척까지 날아오고 있었다.

한데 자신은 그 메뚜기 떼를 향해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어오, 젠장! 내가 미친놈이지!"

이젠 될 대로 돼라.

솥뚜껑으로 정면을 막았다.

터터텅! 카크커터텅! 커터터터텅!

엄청난 충격이 연달아 솥뚜껑을 때렸다.

그냥 그런 충격이 아니었다.

'거흐흐흐헉!'

아까 하비엘이 솥뚜껑을 때리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충격이 수십 연타로 몰려왔다.

당연했다.

이쪽은 질주 마법이 걸린 준마를 타고 있는 상황.

대강으로 계산해도 시속 100킬로는 충분히 찍고도 남는 속도였다.

한데 몇 킬로그램은 될 법한 메뚜기가 시속 수십 킬로의 속도로 날아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이때 철수가 솥뚜껑에 받는 충격량을 구하시오... 는 개뿔! 살려줘!'

커터터터터텅!

팔에 감각이 점점 사라졌다.

어깨가 통째로 뽑힐 것 같았다.

허리가 꺾이고, 다리가 으스러질 듯했다.

만일, 트리플 써클을 전력으로 돌리는 힘으로 버티지 않았다면 반드시 낙마하고 말았으리라.

'그렇게 말 등에서 떨어지면? 난 저놈들의 한입만 신공 수천 번을 온몸으로 받아야겠지?'

오싹.

힘든 와중에도 그 생각을 하며 간신히 버텼다.

물론 하비엘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고개를 이쪽으로! 시야 없이도 경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저와 간격을 지키며 나란히 달리십시오! 그리고 솥뚜껑을 비스듬히 드십시오! 충격을 다 받기보다는 흘려내야 합니다!"

선풍기 수백 대를 켜놓은 듯한 날갯짓 소리.

그 와중에도 하비엘의 외침이 또렷이 들려왔다.

생각할 것도 없이 녀석의 말을 따랐다.

솥뚜껑을 살짝 비스듬하게 기울여서 앞세웠다.

그러자 솥뚜껑에 가해지던 충격이 살짝 줄었다.

덕분에 아주 살짝 눈길을 돌려볼 여유가 생겼다.

'하비엘 녀석은?'

솥뚜껑도 없이 어떻게 버티며 돌파하고 있는 걸까.

녀석, 목소리로 봐선 무사한 듯하긴 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보였다.

키이이잉! 투확! 투콰학!

옆쪽에서 나란히 준마를 내달리는 하비엘.

녀석의 전신이, 준마가, 모두 찬란한 오러의 광채에 휩싸여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저렇게 검을 휘두를 수가 있는 거야?'

스칵! 투확!

오러로 이글거리는 검이 춤을 춘다.

공간을 베고, 가르고, 헤집으며 노닌다.

그 앞에 잘리지 않는 물질이란 없다.

달려들던 모든 것들이 바람과 함께 잘려나간다.

'전기 파리채를 10개쯤 묶어서 휘두르는 느낌이네.'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말 그대로 하비엘은 탈인간급의 속도로, 오러의 폭풍처럼 검을 휘둘러대며 메뚜기 떼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었다. 아니, 아예 깍둑썰기로 토막 내고 있었다.

심지어 여유가 생길 때마다 이쪽의 전방에 발파를 쏘아주기까지 했다.

투확! 투투확!

한 번 쏠 때마다 서너 발을 묶어서 내쏘았다.

무작정 많이만 쏘는 것도 아니었다.

묶여서 나가는 발파의 각도와 경로.

그것들의 간격이 교묘하게 조절되고, 교차되며, 중첩되었다.

발파의 길지만 좁은 타격 범위.

그 범위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늘리며 쏘는 방법이리라.

투콱!

그냥 발파인데도 이쪽의 삼중발파와 비슷한 타격 범위.

오히려 힘의 사용에 있어서는 삼중발파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보였다.

'2+1 발파라고 부르면 되려나. 하여간 괴물 같은 놈.'

물론 그럼에도 정면에서 달려드는 메뚜기 떼는 여전히 많았다.

로이드는 더욱 허리를 숙였다.

자신을 태운 준마를 독려했다.

"조금만 더 버텨라! 힘내!"

"푸르히힝!"

숨을 헐떡이면서도 충실하게 달려주는 말이 고마웠다.

아마 질주 마법이 걸린 이 녀석이 아니었다면 이런 작전, 시도도 못 했을 테니까.

"가자!"

녀석과 일심동체가 되듯 움직였다.

투두두두!

무작정 직선으로만 달리지 않는다.

때로는 순간적인 감속과 회전.

왼쪽으로 트는 듯하다가 오른쪽으로 돌파.

돌파하며 따돌리고, 뿌리치고, 도약한다.

마주 달려드는 바람과 소리, 살의까지.

그 모든 흐름을 읽으며 반응한다.

점점, 요령이 생겼다.

"이렇게!"

터컹!

솥뚜껑을 세차게 휘둘렀다.

위에서부터 달려들던 메뚜기를 쳐냈다.

튕겨 나간 메뚜기가 다른 놈과 충돌하며 추락했다.

추락한 놈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그렇게 앞에서 달려들던 메뚜기 무리를 완전히 돌파했다.

물론 나머지 메뚜기 떼가 여전히 뒤를 추격해 오고 있었다.

어림잡아 수십만은 충분히 넘어 보이는 숫자.

저건 하비엘의 오러나 발파로도, 이쪽의 삼중 발파로도 감당이 안 되겠지.

뒤통수가 절로 오싹해졌다.

"계속 달려! 하!"

기세를 살려 질주했다.

라코나 자작령 경계를 벗어났다.

북쪽을 향해 내달렸다.

익숙한 길과 지형이 보였다.

언젠가는 습지와 늪으로 가득하던 땅.

그러나 모두가 힘을 모아 만들어낸 땅.

마레즈 개간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둔덕 너머 배수장 강둑으로!"

그곳에 미리 준비해둔 박멸 지대가 있다.

거기까지만 잘 버티며 달려가면 된다.

한데 그때였다.

투두두두두....

"어?"

지금껏 잘 달리던 준마의 질주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놀란 로이드는 얼른 준마의 상태를 살폈다.

"어이?"

"푸르르륵! 후흐힝! 헥헤엑!"

준마가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름 포기하지 않으려는지 더욱 애를 쓰며 달리는 모습이었다.

로이드는 깨달았다.

'지쳤구나.'

아무리 명마라도 반드시 한계가 있다.

질주 마법이라도 제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긴. 오늘도 새벽 일찍부터 달렸어. 영지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쉬질 않았지.'

게다가 남작령에 도착한 직후부터는?

메뚜기 떼를 유인하기 위해 그야말로 전력을 다해서 달려야 했다.

넓은 프론테라 남작령 외곽을 따라 한 바퀴를 돌았다.

자작령으로 건너갔다.

자작령마저 한 바퀴 돌았다.

그 모든 과정에서 단 한 순간도 설렁설렁 뛰지 않았다.

사람으로 치자면 마라톤으로 뛰어야 할 거리를 100미터 달리기 전력질주로 계속 내달린 셈이나 다름없었다.

'질주 마법으로도 커버가 안 될 정도로 너무 혹사시킨 건가. 어떡하지?'

옆으로 눈길을 보냈다.

혹시 하비엘의 말은 괜찮을까.

하지만 녀석의 말도 이쪽과 다를 바가 없었다.

딱 봐도 달리는 속도가 느려졌다.

다리도 힘차게 쭉쭉 뻗는 느낌이 많이 사라졌다.

이대로 계속 무리해서 달리게 한다면 반드시 쓰러질 것 같았다.

'차라리 그 전에 내리자.'

지금은 수십만 마리 메뚜기 떼가 뒤를 빠짝 추격해 오는 상황이다.

그런데 잠시 더 편하게 도망치자고 무리하게 말을 몰다간 말이 쓰러진다.

그러면 대비조차 못 한 상태에서 낙마를 하게 되고, 자칫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손해만 잔뜩 보는 거야. 그건 안 좋아.'

이쪽의 그런 생각을 깨달은 걸까.

혹은 자신이 탄 말의 상태를 파악한 걸까.

하비엘이 비슷한 눈빛을 보내왔다.

로이드는 하비엘과 순식간에 눈빛 교환을 마쳤다.

'여기서 말은 보내자.'

'알겠습니다.'

터억!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로이드는 말 안장을 한 손으로 짚었다.

두 발로 등자를 박찼다.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넌 조심히 도망가라! 조금 안전해졌다고 안심하지 말고 꼭 멀리!"

짜악!

"푸히힝!"

지금까지 수고해준 준마를 독려하기 위해 궁둥짝을 찰지게 때려주었다.

이쪽을 태우지 않게 되어 조금은 몸이 가벼워진 녀석이 크게 투레질을 하더니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멀어졌다. 이쪽이 바닥에 착지할 때엔 이미 이십 미터 이상 달아났다.

"...."

어쩐지 저 말대가리 녀석, 이쪽이 내리고 나니까 갑자기 확 생기가 살아나는 느낌인데.

로이드는 일말의 의심을 거두었다.

일단 지금은 계속 도망쳐야 할 때다.

다행히 마레즈 개간지에 마련한 박멸지대가 멀지 않으니....

"근데 넌 뭐하냐?"

옆을 돌아보던 로이드가 물었다.

하비엘이 검을 치켜들며 비장한 눈빛을 번득였다.

"로이드 님은 먼저 가십시오. 제가 여기서 퇴로를 지키겠습니다."

스르릉!

장렬한 각오와 함께 오러가 피어났다.

하비엘의 검을 줄기줄기 감쌌다.

오직 검의 극의를 깨달은 소드마스터만이 피워낼 수 있을 찬란한 결의.

주군과 명예,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만 빛나는 기사의 검.

그렇듯 하비엘은 결연한 뒷모습을 보였다.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수십만 마리 야수 같은 행렬 앞에 당당히 맞섰다.

그래서 로이드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거칠게 뛰는 심장처럼 손을 휘둘렀다.

하비엘의 뒤통수를 찰싹 때렸다.

"미쳤냐? 지금 여기서 저놈들이랑 맞서 싸우게?"

"로이드 님? 지금 무슨...."

"퇴로를 지키긴 개뿔! 너 죽게 두고 나 혼자 도망가라고? 빨리 업기나 해!"

"로이드 님을 말입니까?"

"얼른! 시간 없어, 인마!"

이제 메뚜기 떼와의 남은 거리, 30미터.

버럭버럭 소리치며 녀석을 닦달했다.

녀석의 대답도 듣지 않고 뛰어올라 등에 업혔다.

"달려!"

"...."

하비엘의 얼굴이 잠시 구겨졌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의 뜻을 깨달았다.

'지극히 실리적인 판단만 내리신 거로군.'

타악!

몸을 돌렸다.

땅을 박찼다.

로이드를 업고서 질주했다.

업힌 로이드가 한 손에 든 솥뚜껑을 다른 쪽 주먹으로 때렸다.

데에에엥-!

커다란 울림과 함께 메뚜기 떼의 추격이 더욱 거세졌다.

이제 메뚜기 떼와의 남은 거리, 25미터.

하비엘이 질주를 유지하며 말했다.

"로이드 님은 이런 것까지 다 계산에 두고 말에서 내리자고 눈짓을 보내신 겁니까?"

"계산이라니?"

"제게 업히는 것 말입니다."

"당연하지."

등 뒤에서 피식, 웃는 로이드의 목소리.

"나 달리기 안 빨라. 일반인보다는 빠르지만 메뚜기 떼한테서 도망칠 자신은 없거든. 근데 넌? 빠르잖냐."

"하지만 이렇게 로이드 님을 업고서 뛰면 저도 도주를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차라리 제가 뒤에서 놈들을 막아준다면 혼자서 충분히 도망치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그게 싫어서 이러는 건데?"

"...."

"넌 혹시 영웅호걸 페티시라도 있냐? 왜 자꾸 비장하게 못 죽어서 난리냐? 크레모에서도 그러더니."

"...."

"네가 멋있게 뒤에 남았다가 죽는다고 치자. 덕분에 내가 산다고 치자고. 근데, 그러면 내 마음이 편하겠냐? 엉?"

"로이드 님...."

"난 그런 거 싫다. 그러니까 더 달려. 이랴!"

찰싹!

"...말 취급은 하지 마시지요."

"복수하는 건데?"

"복수라니 무슨 말씀을."

"개미굴에서. 폭발 일으킨 뒤에. 빠져나올 때. 기억 안 나냐?"

"...."

"내가 너 업고 나왔잖냐. 그때 네가 어쨌더라?"

"기억, 안 납니다."

"아하. 그러세요? 그런데 어쩌나. 난 전부 다 기억하는데."

"...."

"어쨌건 지금은 같이 살아서 나가자. 누군 남아서 죽고, 누군 도망치고, 이거 찝찝하잖냐. 치사하고."

"...."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부터가 진심일까.

로이드 프론테라.

가끔씩은, 아니, 종종, 파악하기가 어려운 윗사람이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같이 살아서 나가자는 말.

"그거 하난 마음에 드는군요."

타아앗!

더욱 맹렬히 땅을 박찼다.

이제 메뚜기 떼와의 남은 거리, 20미터.

그러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럴 시간과 힘으로 더욱 힘껏 땅을 디뎠다.

행여나 넘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잃지 않도록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마나하트의 끝없는 순환을 일으켰다.

그 순환에 트리플 써클의 증폭력을 실었다.

투콰학!

지쳐가는 다리에 마지막 힘을.

가빠져 오는 호흡에 집요한 결의를.

바람을 가르고, 둔덕을 넘었다.

이제 메뚜기 떼와의 남은 거리, 10미터.

바로 뒤에서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반면 이제 남은 박멸 지대까지의 거리는, 30미터.

"다섯 걸음만 더!"

등 뒤에서 터지는 외침.

다섯을 세며 박차는 마지막 걸음.

다섯, 주군의 아들을 업고서.

넷, 함께 살자는 말을 지키려.

셋,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 위해.

둘,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유지하며.

하나....

"옆으로 뛰어!"

타핫!

외침에 즉시 반응했다.

땅을 박찼다.

옆으로 몸을 날렸다.

배수로 속으로 엎어졌다.

이젠 어떻게 되는 걸까.

그때, 로이드의 손이 뻗어왔다.

뒤통수를 움켜쥐어 왔다.

"숙여!"

내리누르는 손아귀.

그 힘에 수긍하듯 몸을 낮추었다.

이제 메뚜기 떼와의 남은 거리, 5미터.

그 순간, 하비엘은 보았다.

"방울!"

딸랑딸랑딸랑!

풀숲 속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솟구치는 방울이의 통통한 꼬리를.

이윽고 터져 나오는 파괴적인 폭풍을.

콰아아아앙-!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최대 규모의 화산 폭발 스킬이 메뚜기 떼를 휩쓸고 집어삼켰다.

108화. 종소리의 구원자 (1)

퍼석!

메뚜기가 떨어졌다.

길이 70센티에 달하는 몸체.

곤충답지 않은 그 큰 덩치는 새까만 숯처럼 탄 상태였다.

당연히 메뚜기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죽어 저항도 할 수 없었다.

피곤한 듯 하품하며 움직이는 어느 농부의 느릿느릿한 갈퀴질 앞에도 그러했다.

"흐아암."

퍼석, 퍼서석!

갈퀴질 한 번에 서너 마리의 메뚜기가 걸렸다.

모두 하나같이 숯처럼 탄 채로 이리저리 쓸렸다.

치워지고, 모였다.

산처럼 쌓였다.

"후우, 어마어마하군."

정리 작업을 독려하던 남작령의 선임 기사, 바이에른 경은 넌더리를 냈다. 어제 메뚜기 떼가 습격해 왔던 때에도 느꼈던 거지만, 정말로 징그럽게 많은 숫자였다.

'그래도 인명 피해가 거의 없어서 다행이야.'

바이에른 경은 문득, 어제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그저 평범했던 아침이었다.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아침 훈련을 서둘렀다.

동쪽 하늘에서 섬뜩한 굉음이 들려온 것은 그가 집을 나선 직후의 일이었다.

'그런 광경은 처음 봤어.'

동부 산맥 상공을 새까맣게 뒤덮어 오던 메뚜기 떼.

태양도, 구름도, 푸르던 하늘도 모조리 뒤덮였다.

아예 밤이 온 것처럼 사위가 캄캄해졌던가.

지금도 돌이켜보자니 소름이 돋았다.

'세상의 종말 같았지.'

당황스러웠다.

아니, 사실은 무서웠다.

그냥 모든 걸 팽개치고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창고 가장 깊은 곳에 틀어박혀서 숨어 있고만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이던가.

프론테라 남작령의 선임기사였다.

비록 검술 실력은 하급자인 하비엘 아스라한보다 한참 뒤처지지만, 자신에겐 영지의 공병대와 경비대를 지휘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특히, 어제와 같은 재난 상황에는 더더욱 그렇다고 믿었다.

그래서 달려갔다.

집에 숨는 대신 남작가 저택을 향해 달렸다.

그곳으로 가서, 공병대와 경비대를 집합시키고, 반격을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불과 200미터도 달려가지 못하고 메뚜기떼에게 둘러싸여야 했어.'

수십 마리 메뚜기가 달려들었다.

그 속에서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자신이 겪어본 최악의 혈투였다.

점점 힘이 빠졌다.

검이 무겁게 느껴져 갔다.

다리의 움직임도 더뎌졌다.

그대로 끝이 나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아무도 지켜내지 못하고,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벌레들의 틈바구니에서 허망하게 죽는 건가 싶었다.

한데 그때 뜻밖의 공명음이 귓가를 두드려 왔던가.

'로이드 님이셨어.'

바이에른 경은 고개를 들었다.

개간지 강둑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메뚜기 사체 정리 작업을 감독하는 남자가 있었다.

자신이 섬기는 주군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였다.

'저분이 아니었으면 난 어제 죽었을 거야.'

확실하다.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때마침 공명음이 울리지 않았더라면.

로이드 도련님이 솥뚜껑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그래서 메뚜기 떼가 그 소리에 홀린 듯 달려가지 않았다면.

자신은 산 채로 메뚜기떼에게 뜯어먹히고 말았을 터다.

'나뿐만이 아니야.'

영지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다.

거의 대부분의 주민들이 그러했다.

저쪽에서 메뚜기 사체를 모으는 개간지 농민도.

온종일 이어진 정리 작업에 피곤한 얼굴을 한 공병대원들도.

그리고 그들 각자의 가족들도 모두.

로이드가 아니었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바이에른 경은 그 사실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한데 그때였다.

"오늘은 이쯤 하면 될 것 같은데."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 소리에 바이에른 경은 흠칫 놀랐다.

옆을 돌아보았다.

"왜? 작업 더 하고 싶어?"

"...."

아까 강둑 위에 있던 로이드가 어느새 옆에서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이쪽이 멍하니 생각에 잠긴 틈에 다가오신 건가 보다.

바이에른 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로이드 님께서 작업 연장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더 하겠다고? 해가 지고 있는데?"

"저는 그저 명령을 충실하게 따를 뿐입니다."

"그래? 좋아. 그럼 내일 아침까지 철야로 작업 달려볼까? 기왕 하는 정리, 좀 더 빡세게 해서라도 빨리 끝낼수록 좋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공병대 상급 병사들을 부르려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병사들을 부르지 못했다.

로이드가 재빨리 먼저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워어, 워어. 설마 진짜 하려고? 철야 작업?"

"예, 그렇습니다."

"설마 내가 시켜서?"

"예."

"...철야 그런 거 무턱대고 하는 거 아니다."

"그럼 철야 작업 시행 명령을 취소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알겠습니다."

"...."

후아. 이 성실하지만 앞뒤 꽉 막힌 기사 같으니라고.

로이드는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바이에른 경은 이런 사람이었지.'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망해가던 남작가를 배신하지 않은 단 둘뿐인 기사.

그러나 주인공인 하비엘과는 달리 엑스트라였기에 출연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았던 기사.

'성실하고 충직함. 이 두 가지 성격을 묘사하는 언급이 다였지.'

그러나 그 두 가지면 충분했다.

주군인 남작을 배신하지 않는 충성심.

맡은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려 노력하는 성실함.

그 장점을 살려주기 위해 일찌감치 온돌방 사업을 시작하던 때부터 공병대의 지휘를 그에게 맡겼다.

그리고 바이에른 경은 지금까지 맡은 모든 공사를 성실하게 완수했다.

'하지만 딱 하나 단점이 있다면, 으음, 지나친 진지함이랄까.'

하비엘처럼 적당히 반항하고 튕겨주는 면이 있어야 놀릴 때 꿀잼인 법인데.

로이드는 사골육수처럼 피어나는 아쉬움에 쩝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오늘 고생했어. 어차피 저거, 하루 이틀 매달린다고 금방 정리될 양도 아니고. 이제 해도 슬슬 질 것 같으니 작업 정리하고 해산해."

"알겠습니다."

바이에른 경이 상급 병사들에게 신호했다.

공병대 병사들이 환호하며 작업 도구를 정돈했다.

종일 메뚜기 사체를 치우고 또 치우느라 모두 지친 탓이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공병대원들은 곧바로 해산하지 않았다.

서둘러 공병대 막사로 돌아가기에 앞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가오는가 싶더니 질서정연하게 줄을 섰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로이드 님께 감사드립니다!"

"...허허? 뭐하냐?"

시커먼 남자 놈들이 모여서더니 대뜸 감사하다고 외치는 상황이라.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공병대원들의 눈빛을 보며 그들의 진심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혹시 내가 어제 너희를 살렸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예, 그렇습니다!"

"워워. 됐고. 난 그냥 내 노후를 위해서 열심히 싸운 거거든?"

"...."

"그러니까 감사하고 싶으면 하든가. 대신 감사하려면 다음부터는 우렁찬 외침 말고 금화 두둑하게 담은 주머니로 하고. 알았어들?"

"예, 알겠습니다!"

저들의 진심 앞에 조금은 민망해졌다.

그래서 일부러 고약한 말만 골라서 내뱉었는데.

그런데도 진짜로 알았다며 우렁차게 외치고는 해산하는 공병대원들의 모습이란.

'내가 어제 너무 거창한 짓을 벌여 버렸나.'

마레즈 개간지에서 남작가 저택까지.

붉은 노을 사이를 혼자 걸어오는 내내 절로 흘러나오는 쓴웃음을 막을 수가 없다. 어제 자신이 이곳에서 벌였던 일을 돌이켜보자니 더더욱 그렇다.

문득, 어제의 다급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바로, 미리 준비해둔 박멸지대로 메뚜기 떼를 유인하던 최후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