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줄리앙 프론테라 (2)
"찾으시는 분이 줄리앙 프론테라,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방문자 분의 성함은?"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
"줄리앙 프론테라와 관계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관계라.
로이드는 잠깐 생각하고는 말했다.
"가족입니다."
혈연상 가족인 것은 맞다.
하지만 동생이라고 말하려니 어색하고 이상하다.
줄리앙과는 아직 얼굴 한 번 마주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도 동생이나 형제가 없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아카데미 기숙사의 사감은 이쪽의 대답을 별 문제 삼지 않았다.
"좋습니다. 신분을 증명할 증표를 보여주십시오."
"여기."
증명은 쉬웠다.
가문의 목걸이를 내밀었다.
목걸이의 마법적 증명장치가 발동됐다.
화아악....
목걸이에서 허공으로 홀로그램 같은 영상이 떠올랐다.
로이드 본인의 얼굴이었다.
로이드는 그 영상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댔다.
영상과 얼굴이 일치했다. 그러자 영상이 푸른색으로 변했다.
"본인이 맞으시군요. 그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로이드는 기숙사 로비에 앉아 기다렸다.
로비는 어두운 고동색 나무와 오래된 책 냄새로 가득한 고풍스러운 공간이었다.
그곳에 홀로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문득, 약간의 불안감이 사골 육수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라 왔다.
'줄리앙이랬나. 소설에서도 자세한 언급은 없었는데.'
로이드의 남동생 줄리앙 프론테라.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는 한 번도 직접 등장한 적이 없었다. 대신 소설 초반, 프론테라 남작가의 몰락 시기에 짤막하게 언급된 바만 있었다.
'남작가가 몰락하고 학비를 댈 방법이 막막해진 상황이 됐지. 결국엔 아카데미에서 쫓겨났어. 그리고 죽었지. 기숙사에서 나온 날 밤, 잘 곳을 찾아 뒷골목을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나 칼에 찔려서.'
강도를 앞에 두고 어머니의 펜던트를 지키려 고집을 부렸다. 그러다가 칼에 찔렸다고 했다.
즉사는 아니었다. 살아날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너무나 인적이 없는 골목인 탓이었다.
그렇게 골목 구석에 쓰러진 채 새벽까지 버둥거렸다. 미약해진 목소리로 애타게 사람을 불렀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 웅덩이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침이 밝기까지 불과 30분을 남긴 시점이었다.
실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나름 아카데미에서도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았기에 더욱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언급도 있었다.
'그게 다였어. 성실함.'
자신이 줄리앙 프론테라에 대해 아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정확히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로이드와의 실제 관계는 어떠했는지.
달리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쓰읍. 그래도 탄로 나는 일은 없겠지.'
어차피 줄리앙도 이쪽을 거의 3년 만에 보는 터다. 이쪽의 달라진 말투와 행동을 조금 이상하게 여겨도? 오래 못 보는 사이에 변한 거라고 느끼게 만들면 된다.
'마침 이럴 때 쓰는 딱 적절한 단어가 있잖아? 개과천선이라고.'
개과천선.
정신 차린 망나니 형.
오늘 잡을 컨셉은 그거다.
그렇게 로이드가 줄리앙과의 만남에 앞서 전략(?)을 수립하던 도중이었다.
"뭐야. 여긴 왜 왔어."
까칠한, 아니, 서늘하다 못해 뾰족한 목소리가 고막을 푹 찔러 왔다.
로이드는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
그곳에 앳된 얼굴의 '어른아이'가 있었다.
곱슬곱슬한 오렌지 색 머리칼. 주근깨 박힌 얼굴은 이제 겨우 열다섯에서 열여섯 살쯤 되어 보였다. 그런 앳된 인상에는 자그마한 체격이 더욱 한몫했다.
키가 작았다.
160센티를 간신히 넘길까 싶었다.
마른 체형이라 그런 작은 체구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게다가 이목구비마저 인형처럼 아기자기한 인상이었다.
'쟤가 줄리앙?'
로이드는 가만히 줄리앙으로 추정되는 '어른아이'를 쳐다만 보았다.
그러자 어른아이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여긴 왜 왔냐고."
여전히 까칠하고 뾰족한 반응이다.
그걸 보며 로이드는 확신했다.
'줄리앙 맞네.'
하비엘과 동갑인 스물한 살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앳되어 보이는 외모 탓에 조금 긴가민가했는데.
이쪽을 향해 대놓고 까칠함을 터뜨리는 저 태도.
그걸 보자니 저 녀석이 줄리앙이 맞는 듯했다.
로이드의 한쪽 입술에 피식거리는 웃음이 맺혔다.
"왜 왔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을 향해 성큼 한 발짝 다가갔다.
줄리앙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 와중에도 녹색 눈동자엔 고집이 가득했다.
아니, 그건 고집이라기보다는 마치 지지 않겠다고 바득바득 버티는 독기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길게, 깊게 얽히진 말자.'
로이드와 줄리앙.
두 형제 사이가 어땠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런 채로 섣불리 녀석과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엔 현수교 건설만 마치면 남작령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게다가 녀석도 소설에서와 같은 불행을 겪지 않을 테니, 굳이 깊게 얽힐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 남작부인이 신신당부한 것만 딱 하고 돌아가자.'
로이드는 보따리를 들었다.
뾰족한 눈매로 자신을 올려보는 줄리앙에게 내밀었다.
"이거."
포옥.
제법 커다란 보따리가 녀석의 작은 품에 안겼다. 아니, 얹혔다.
"무슨, 우읏."
생각보다 무거웠던 걸까.
줄리앙의 몸이 한 차례 휘청했다.
녀석에게 물었다.
"여기, 밥 먹을 곳 있냐."
"밥? 식사?"
"어."
"그건 왜."
"너랑 얼굴 보는 김에 식사 정도는 같이 하라고 하셔서."
"누가 그랬는데."
"누가 그랬겠냐."
이번에 남작령에서 출발할 때, 남작부인이 신신당부했던 내용 중에 하나였다.
줄리앙도 그걸 굳이 자세히 말해주지 않아도 대강은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아 진짜."
줄리앙의 동글동글한 콧등이 팍 찌푸려졌다.
"이쪽."
보따리를 안고 몸을 돌렸다.
앞서 복도를 걸었다.
1층 한쪽에 방문객용 식당이 있었다.
평소 아카데미의 학생을 면회하러 찾아오는 가족, 지인 등이 이용하는 장소였다.
"뭐 먹을 건데."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형, 로이드를 관찰했다.
'쯧.'
아니, 관찰은 그만두자.
역시 얼굴만 봐도 기분이 나빠졌다.
달리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전부터 그런 인간이었다, 자신의 형은.
"미리 말하지만 여기선 술은 안 돼."
혹시나 하는 생각에 미리 선수를 쳤다.
그래놓고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기억 속 로이드 프론테라의 모습 때문이었다.
'지옥 구석에 던져 놔도 술부터 찾을 인간이니까.'
하루라도 술이 없으면 몸에 두드러기가 난다고 스스로 말하고 다니던 게 로이드였다. 하루가 멀다고 술에 취해 행패를 부렸다. 집기를 부수는 것은 예사였고, 가끔은 사람도 때렸다.
물론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제일 많이 맞았다.
어릴 때는 시키는 심부름을 안 듣는다고 맞았다.
좀 크고 나서는 술 마시는데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모습이 기분 나쁘다고 맞았다.
급기야는 왜 맨날 성실하게 굴어서 사람 성가시게 만드냐며 더 심하게 맞기까지 했다.
그만큼 로이드는 쓰레기였다.
자신이 아는 가장 최악의 쓰레기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줄리앙은 지금의 상황이 잘 믿기지가 않았다.
'저 인간이 뭘 어쩌다가 그런 공적을 세웠다는 건지.'
문득,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왕실에서 사람이 왔다.
자신을 찾았다.
소식을 알려주었다.
교역 도시 크레모.
자신의 고향이 속한 크레모나 지방의 중심 도시.
그곳에서 거대한 괴수 기가티탄이 상륙을 시도하며 난동을 부렸다고 했다.
동상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띄워뒀던 배가 침몰당하고, 동상이 파괴되고, 초소가 폭파됐다고 했다.
심지어 시가지에 불이 나기까지 했다던가.
'한데 사람이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했어. 그것뿐만이 아냐. 어떤 사람이 초인적인 용기와 희생정신을 발휘해서 기가티탄을 물리쳤다고 했지.'
솔직히 순수하게 감탄했다.
절로 깊은 존경심이 들었다.
들으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을 정도였다.
어째서 왕궁에서 나온 사람이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가에 대한 의문은 둘째치고, 일단은 궁금했다.
그토록 엄청난 공적을 세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인생을, 어떤 멋진 포부를 안고 살아온 사람일까.
정말로 알고 싶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가능하다면 만나보고도 싶었다. 배우고 싶었다. 그토록 훌륭한 영웅의 면면을 직접 바라보면서, 자신도 그런 면모를 조금이라도 닮아보고 싶었다.
한마디로 줄리앙은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다.
그래서 기겁했다.
그 영웅의 이름을 듣는 순간, 줄리앙은 저도 모르게 몇 차례나 귓구멍을 거칠게 후비적거려야 했다.
'말도 안 돼!'
교역 도시 크레모를 구한 영웅.
그 사람의 이름이 로이드 프론테라란다.
당연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왕실에서 나온 사람이 전해주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거짓일 리가 없었다.
거기에 덧붙여 왕실의 사람이 당부까지 했다.
이 이야기는 당분간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아직 왕도에까지 퍼진 소식이 아니며, 조만간 국왕 전하께서 로이드 프론테라에게 서훈을 내리실 때 공식적으로, 대대적으로 대외에 알릴 것이라고.
들을수록 멍해졌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로이드 프론테라가? 진짜로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건 분명 뭔가 잘못된 거야. 착오가 있다거나. 사람들이 단체로 착각을 하고 있다거나. 혹은 뭔가에 홀리거나 씌었다거나.'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분명 뭔가 왜곡되거나 오해가 있는 거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자신의 쓰레기 같은 망나니 형은 그런 업적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사람이니까. 그저 매일 술 마시고 사고나 치는 인간말종. 그런 놈에 불과하니까.
'...라고 믿었는데.'
줄리앙은 고개를 들었다.
식탁 너머.
메뉴판을 찬찬히 살피는 로이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어쩐 일인지 술이 있는 페이지를 펼치지도 않고 있었다. 그저 나름 진지한 얼굴로 음식 목록만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처럼, 눈이 마주쳤다.
"뭘 보냐."
"...어?"
"혹시 고르고 싶은 메뉴 있으면 먼저 보든가. 내가 살 테니까. 여기 외부인 식당이라서 유료지?"
"어, 어어."
"그럼 골라."
툭.
이쪽으로 메뉴판을 내미는 손길.
약간은 피식거리는 웃음까지.
너무나 낯설고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저러니까, 좀, 이상하다.
"...."
줄리앙은 얼결에 받아 든 메뉴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메뉴판 내용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게다가 입은 또 왜 제멋대로 횡설수설인 건지.
"어, 그게, 아스라한 경은?"
"하비엘?"
"어."
"그놈은 왜?"
"같이 왔다고 들어서."
"혹시 내 소식 듣고 있었던 거냐."
"...어."
아 씨.
난 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거지, 저런 놈이랑.
줄리앙은 메뉴판을 꽉 쥐었다.
술을 찾지 않는 로이드 프론테라라니. 자신과 열 마디 이상을 섞으면서도 욕설이나 으름장을 놓지 않는 로이드 프론테라라니.
너무나 이상하고 어색하고 이질적이고 낯설고 생소하고 생경한 상황이며 모습이라 솔직히 과연 저 사람이 진짜로 자신의 형이 맞나 싶은 괴상망측한 생각마저 들었다.
한마디로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이드는 여전히 예전보다 훨씬 사람다운 말투로 대답해 오고 있었다.
"뭐,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고.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어."
"참. 하비엘 보고 싶었냐?"
"어? 어, 조금."
"안 데려와서 서운한 거냐?"
"그런 거까진 아니고."
"그럼 됐고. 사실 그 녀석, 따라오려고 은근 나서려던 거 못 오게 했거든."
"못 오게 했다고?"
"어. 그놈 데리고 움직이면 정신 사나워. 하도 시선이 몰려서."
"으, 응, 맞아. 잘생기고 멋있으니까."
"암튼 그래서 못 오게 했어. 고집부리길래 자장가 안 불러 준댔더니 바로 입 다물더라."
"자장가?"
"그런 게 있어. 암튼-"
이야기를 잘 섞던 로이드가 말을 멈추고 정색했다.
줄리앙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로이드의 입이 열렸다.
"먹고 싶은 건 정했냐?"
"응?"
"뭘 그리 놀래. 정했냐고. 먹을 거."
"어, 이거."
"좀 비싼 거 먹어라."
"괜찮아. 진짜로."
"메뉴 다 골랐으면 메뉴판은 내려놓고."
"...."
얼굴, 계속 더 가리고 있고 싶었는데.
저러는 로이드 프론테라, 이상하고 낯설어서 미치겠는데.
줄리앙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하, 돌겠네.'
오랜만에 보는 자리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만남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까 처음 사감이 와서 형이 찾는다는 말을 들었을 땐 귀를 의심했다.
로비로 내려오면서는 기선을 빼앗기지 말자고, 이제 더는 예전처럼 휘둘리지 말자고 독한 다짐을 품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러 더 까칠하게 대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뾰족하게 대했다.
그러면 저 인간의 성격상 대뜸 손찌검을 하거나 뭔가 행패를 부릴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면 사감님을 부르려고 했어.'
사감의 권한이라면 방문객인 로이드를 쫓아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해서라도 로이드와의 만남을 최대한 짧게 잘라내고 싶었다.
한데 그 계획이 10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모두가 저 인간의 괴상하도록 정상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대체 왜 저러는지 그냥 대놓고 물어볼까.'
솔직히 궁금한 게 많기는 했다.
왜 이렇게 정상인처럼 굴고 있는지.
크레모에서 세웠다는 공적은 무슨 사기를 친 건지.
이렇게 얼굴 마주하고 앉은 김에 물어보자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로이드를 향해 나름의 각오 담은 눈길을 던졌다.
그 순간, 줄리앙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모습을 보아야 했다.
86화. 폭력을 근절하는 법 (1)
'어?'
줄리앙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름의 각오를 담고서 고개를 든 줄리앙이었다. 크레모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로이드에게 물어보리라고 결심하던 터였다.
한데 고개를 드는 순간, 그런 각오와 결심이 싸그리 다 날아갔다.
로이드의 얼굴을 보니 그럴 생각이 사라져서?
아니었다.
식탁 건너편에 앉아 있는 로이드의 뒤쪽.
그의 어깨 너머로 다가오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디에고?'
같은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다.
나이도 자신과 동갑이었다.
한데 덩치는 자신보다 훨씬 컸다.
당연히 힘도 세고, 목소리도 우렁우렁했다.
그래도 다행히 비슷한 시기에 아카데미에 들어왔던 터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적어도 이곳에 입학하고 처음 한 달 정도는 그랬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줄리앙 프론테라. 너, 기숙사 안에서는 눈에 보이는 데서 식사하지 말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어느새 다가와 낮게 으르렁거리는 디에고의 목소리.
그 음성이 위협적으로 한쪽 고막을 쿡 찔러왔다.
줄리앙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식탁을 짚은 디에고의 우락부락한 손이 보였다.
'왜 하필 지금인 거야.'
줄리앙은 이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오랜만에 로이드를 만나고 있던 터였다. 항상 개차반 같던 형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 애쓰던 중이었다.
한데 하필이면 지금, 여기서, 자신만 보면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는 디에고와 마주치고 말다니.
운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어, 그게...."
"그게 뭐."
"...."
줄리앙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런 줄리앙을 내려다보는 디에고의 눈길에 고까운 감정이 배어났다.
'하여간 비리비리하게 재수 없는 놈.'
디에고는 줄리앙이 싫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곳 마젠타 대학, 아카데미에 입교했던 시절의 디에고는 외톨이였다.
워낙 먼 지방에서 온 터라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한데 그런 자신에게 손을 내민 이가 있었다.
줄리앙이었다.
'저기, 나도 어제 여기 왔어.'
딱 하루 차이.
비슷한 시기에 입교한 사이.
게다가 알고 보니 고향도 무척 가까웠다.
막막하던 처지에 의지가 되었다.
그렇게 줄리앙과 단짝이 되었다.
한 달 내내 붙어 다녔다.
그러면서 놀랐다.
줄리앙은 똑똑하고 영민한 녀석이었다.
문법학, 수사학, 논리학, 법학, 자연철학, 기하학, 거기에 천문학까지, 남들이 어려워하는 학문 대부분을 쉽게 이해하고 습득했다.
게다가 성실하기까지 했다.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면서 디에고는 한 번도 줄리앙의 늦잠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남들보다 한 시간은 먼저 일어났다. 깔끔하게 씻고, 반듯한 차림으로 아침을 먹고, 일찍부터 하루의 수업을 준비했다.
그래서 감탄했다.
딱 한 달 동안만.
'여기선 그런 똑똑함, 성실함, 다 필요 없다는 걸 한 달 만에 깨달았으니까.'
디에고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한 달의 아카데미 생활 끝에 깨달은 사실.
그걸 떠올리자 절로 비릿한 웃음이 나왔다.
이곳 마젠타 대학, 아카데미는 귀족 자제들의 공부를 위해 설립된 기관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곳의 학생들에게 공부는 별반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공부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따로 있었다.
바로 가문의 위세였다.
가문을 통한 인맥 형성이었다.
형성된 인맥으로 벌이는 정치질이었다.
그렇게 일찍부터 가문 사이의 관계를 다지고, 자신들만의 카르텔과 성역을 구축한다. 유지한다. 평생 그 관계를 가져간다. 각자가 가문을 물려받은 후에도 계속 가져간다. 그 관계를 우려먹으며 권력을 지켜나간다.
그러한 귀족만의 암묵적 이해관계 집단. 그들만의 카르텔.
그 관계의 기초를 다지고 만들어나가는 곳이 바로 이곳, 아카데미의 본질이었다.
'웃긴 일이지.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야.'
세상은 권력이다.
관계를 통해 권력을 단단하게 유지한다.
일은 따로 공부 열심히 한 놈들에게 시키면 된다.
그 진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디에고는 변했다.
'오늘부턴 나한테 아는 척하지 마라.'
제일 먼저 디에고가 한 일은 줄리앙을 멀리하는 것이었다.
정색하고서 줄리앙에게 친한 척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줄리앙은 처음엔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이쪽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먹질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쪽의 뜻을 전달할 겸 손찌검을 해주었다.
한쪽 눈에 멍을 새겨주니 비로소 녀석이 고분고분해졌다.
그렇듯 줄리앙과 거리를 두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시골구석 찌꺼기 남작가 아들이니까.'
귀족 중에서도 최하급.
권력도, 명성도 없었다.
그러니 친하게 지낼 이유도 없었다.
아니, 괜히 친하게 지냈다간 자신도 똑같이 저런 밑바닥 급으로 엮일 위험마저 있었다.
그렇게 되는 건 최악이라고 디에고는 생각했다.
'우리 집안도 그리 이름 날리는 편은 아니니까.'
사실 디에고의 가문도 자작가에 불과했다.
나름 특산품을 지닌 덕에 경제적인 사정은 넉넉했지만, 그렇다고 왕도의 진짜배기 귀족들에게 감히 비빌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디에고는 비굴해졌다.
아카데미의 상위 서열 학생들에게 빌붙었다.
왕도 귀족가문 자제들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힘쓸 일이 있으면 그들의 수족이 되어 움직였다.
그 와중에 줄리앙처럼 낮은 지위의 가문 자제들을 수시로 괴롭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낮은 가문 자제들과 명백히 다르며, 선을 긋는다는 사실을 주위에 지속적으로 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즉, 디에고는 왕도 가문 자제들의 헌신적인 사냥개가 되었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냥개는 사냥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디에고는 마치 사냥감을 관찰하듯 줄리앙의 얼굴 앞에 면상을 바싹 들이댔다.
"지금 내가 묻고 있잖아. 왜 여기서 식사할 생각을 했냐고."
"...."
"대답."
"어, 그게...."
"그게?"
"오늘은 상황이 좀 그래서...."
"상황? 무슨 상황?"
"...."
"너 만나러 누가 오면 막 얘기도 안 하고 예외가 적용되고 그러는 거야? 응?"
"...."
"우리가 법학 시간에 뭘 배우냐. 법이라는 건 물렁한 게 아니잖아. 그런데 지금 넌 법칙을 어기고 있네."
"...."
"이곳의 법칙이 뭐였지?"
"그건...."
"남작 가문 출신 떨거지들은 눈에 보이는 곳에서 함부로 식사하지 않는다. 왜냐. 거슬리니까. 잊었어?"
"...."
줄리앙의 입이 닫혔다.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반박하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저 개소리에 일침을 놓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모진 꼴을 겪는다.
아무도 그런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부당하다 외쳐도 귀 기울여주는 사람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들의 가문이 훨씬 힘 있으니까.
이미 수십 번쯤 몸에 새겨진 괴롭힘과 무력감의 기억이 줄리앙의 반발심을 억눌렀다.
줄리앙은 디에고에게 반발하는 대신 로이드에게 눈길을 보냈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
아니었다.
'상관하지 말아줘.'
로이드를 향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상황에 끼어들지 말아 달라고.
괜히 끼어들었다가 일을 키우면 가문에 누가 될 테니까. 쓸데없는 분쟁에 휘말리게 될 테니까.
그러니까 모른 척해달라고.
못 본 셈 치고 넘어가 달라고.
그래서 상황을 지켜보던 로이드는 눈빛으로 응답했다.
'응. 당연하지. 내가 왜?'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란 듯이 눈썹도 치켜들었다.
사실 처음엔 이게 뭔 상황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대략적인 틀을 다 파악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보았던 광경이기 때문이었다.
'뭐, 뻔하지. 왕따 학폭질이네.'
왕따.
학교 폭력.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얼마나 일상적으로 보았던 광경이던가.
물론 자신이 남한테 당한 적은 딱히 없었다.
다만 주위에서 수없이 목격할 수는 있었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도.
언제나 교실 이면에는 정글 같은 힘의 논리가 있었다.
소위 잘나간다는 일진, 그런 일진에게 착 달라붙어 다니는 떨거지들.
그런 녀석들한테 한번 찍히면 학교생활이 심히 고달파졌다. 아니, 그냥 고달파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온갖 비인간적인 괴롭힘과 착취가 자연스레 따라다녔다.
모두가 쉬쉬하지만 모두의 근처에 있는 것.
대한민국의 학생이라면 멀리할 수 없는 것.
그것이 학교 폭력이었다.
한데 여기라고 딱히 다르진 않은 것 같았다.
'여기도 사람 사는 데니까.'
로이드는 식탁 건너편의 줄리앙을 쳐다보았다.
키도 작고, 덩치도 왜소했다.
게다가 가문도 볼품없다.
물론 이 왕국 전체 백성을 기준으로 보자면 남작의 지위만 해도 대단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이곳이 마젠타 대학, 아카데미라는 것이 문제였다.
'귀족 중에서 추천을 받은 사람에게만 입학 자격이 주어지니까.'
줄리앙도 그렇게 추천을 받았다.
남작가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입학했다.
그리고 이 아카데미의 학생 사이에서 최하위의 서열로 낙인 찍혔으리라.
하지만 로이드는 팔짱을 풀지 않았다.
그저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줄리앙의 당부 때문에?
아니었다.
'일단은 좀 지켜볼까.'
섣부르게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여길 잠깐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다. 그저 딱 하루 이곳을 방문했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이다.
한데 이 상황에 끼어들어서 일을 키우면?
저 위협을 막아주고.
저 위협을 물리치고.
그리고 돌아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그렇게 줄리앙만 혼자 여기 남으면?
'저 녀석만 더 괴로워지겠지.'
후련함과 안도감은 잠시일 뿐.
지금까지보다 더 혹독한 괴롭힘이 줄리앙을 맞이할 것이다.
이미 대한민국에서 그런 광경을 수도 없이 목격한 로이드였다.
'그러니 일단은 파악부터 좀 하자.'
상황을 지켜보는 로이드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줄리앙이 스스로 어느 정도까지 맞설 수 있을 것인지. 줄리앙이 당하고 있을 괴롭힘의 수위가 어느 정도일지.
그걸 끊어내려면 어떤 방식을 동원할지.
그 과정에서 어떤 준비가 필요할 것인지.
로이드는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며 생각하고, 계산했다.
그러는 사이에 줄리앙을 향한 디에고의 언행이 점점 선을 넘어갔다.
디에고가 솥뚜껑처럼 큰 손바닥을 들었다.
줄리앙의 아담한 정수리를 툭툭, 내리쳤다.
"그러니까 너나 네 가문이나 모두 떨거지라는 거다. 알겠어? 솔직히 터놓고 말해서 너희 가문에 내세울 거라도 있냐? 신선한 공기? 맑은 물? 천박하고 지저분한 농민들? 그거 말고 뭐가 있는데."
툭, 툭.
"반면에 우리 가문엔? 왕국에서 두루 인정받는 특산품이 있잖냐. 너도 알지? 라코나타. 작년엔 우리 아버지가 그걸 전하께도 진상했거든?"
툭, 투욱!
"그러니까 거렁뱅이 같은 가문 출신은 제발 좀 찌그러져 다녀라, 엉? 식사도 좀 안 보이는 데서 하고. 알겠어?"
툭, 투퍽!
줄리앙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손바닥.
그 손바닥에 실린 힘이 점점 사나워졌다.
처음에는 툭툭 건드리는가 싶더니 나중엔 거의 내리치듯이 정수리를 찍었다.
"그러니까 나대지 좀 말라고, 엉? 눈 안 깔어?"
"...."
줄리앙은 반항조차 못 하고 그 난폭한 행위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작은 체구로 시도하는 방어라고는 제 머리를 어설프게 감싸는 게 고작이었다.
덕분에 살짝 말려 올라간 녀석의 소매.
그 사이로 팔뚝이 언뜻 보였다.
팔뚝은 멍투성이였다.
오래되어 누렇게 번진 멍에서부터.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선명한 피멍까지.
줄리앙의 가느다란 팔뚝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었다.
하루 이틀 맞아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로이드는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조금 전에 귀에 담은 단서 하나를 곱씹었다.
'라코나타. 역시.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 싶더라니.'
디에고를 쳐다보는 로이드의 눈동자가 서늘해졌다.
머릿속에서 계산이 팍팍 돌아갔다.
작전이 수립되었다.
행동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 얽히다 풀리는 실타래. 예측과 과정. 궁극적 결론까지.
"느그 아부지 뭐 하시냐?"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나직하지만 낮게 깔리는 소리로 물었다.
줄리앙을 향해 내리치던 디에고의 손이 멎었다.
놈의 시선이 처음으로 이쪽을 향해 끼기긱 돌아왔다.
"뭐?"
로이드를 보는 디에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자신의 아버지를 운운한 로이드를 향해 사나운 눈길을 던졌다.
'이건 또 뭐야?'
아까부터 줄리앙 맞은편에 앉아 있는 모습은 봤다.
그래도 무시했던 디에고였다.
어차피 거렁뱅이 떨거지 같은 줄리앙을 보러 온 방문객이리라 생각했다. 떨거지 친구니까 똑같은 떨거지겠거니 여겼다.
그래서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데 지금, 그 떨거지 친구 떨거지가 자신을 향해 이죽거리는 말을 툭툭 던져오고 있었다.
"내가 물었잖아. 느그 아부지 뭐 하시냐고."
"하. 현명하고 자비로우신 라코나 자작이시다. 넌 또 뭐냐?"
"뭐긴. 너, 나 모르냐?"
"뭐?"
어느새 로이드는 일어나 있었다.
덩치 큰 디에고와 마주 서 있었다.
그가 서늘하게 웃었다.
"이거 참. 철혈의 기사에서도 그러더만. 라코나 자작령과는 지리상으론 이웃이라도 실질적인 교류나 왕래가 거의 없어서 자식들은 서로 얼굴도 잘 모른다더니. 날 못 알아보는 걸 보니까 그게 사실이었네."
"지금 무슨... 컥!"
투컥!
디에고가 반문하려던 순간이었다.
섬전처럼 뻗어 나간 로이드의 앞차기가 디에고의 명치를 맹렬히 찍었다.
"커억!"
써클 하나를 돌리며 내지른 발차기였다.
디에고의 몸이 접혔다.
뒤로 퉁겨져 날아갔다.
식탁 두 개를 박살 내며 데굴데굴 굴렀다.
로이드의 한쪽 입술이 사납게 말려 올라갔다.
저놈은 운도 없다.
장소와 상대, 모두 잘못 골랐다.
국왕의 후원을 받는 아카데미에서 국왕의 초청을 받은 귀빈을 상대로 무례함을 선보였다. 이건 사감이나 학장이 와도 이쪽을 탓하지 못할 터다.
게다가....
"너 어떡하냐. 아직 현명하고 자비로우신 느그 아부지한테 수도세 얘기는 못 들었나 보다?"
로이드의 목소리에 진심 어린 동정심과 연민이 배어났다.
87화. 폭력을 근절하는 법 (2)
"수, 수도...흐세? 쿨럭, 컥!"
디에고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무나 갑자기 얻어맞은 일격이었다.
명치에 제대로 꽂혔다.
심지어 너무 강력했다.
위장이 온통 꽈배기처럼 꼬일 듯이 요동쳤다. 숨이 턱, 막혔다. 호흡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온몸이 아팠다. 제대로 나동그라졌다. 등짝으로 식탁 두 개를 박살 냈다. 등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디에고는 일어났다.
자신에게 발길질을 한 저놈.
누군지는 몰라도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다.
게다가 자신이 누군가.
무려 마나하트를 지닌 마나 유저다.
"그, 그으읍!"
디에고가 시뻘게진 얼굴로 무릎을 짚고서 일어났다.
감히 자신에게 선빵(?)을 날린 로이드를 향해 살기 어린 눈길을 던졌다.
하지만 그 순간 깨달아야 했다.
어느새 로이드의 주먹이 자신의 면상을 향해 급속도로 쇄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빨....'
뻐억!
눈앞에 별이 번쩍했다.
콧등이 망치로 맞은 듯 얼얼했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일순간 느려진 듯이 느껴지는 시간의 틈새 사이로, 신기한 광경이 보였다.
'저거, 내 앞니?'
하얗고 넙데데한 앞니 한 쌍이 핑글핑글 돌면서 날아가고 있었다.
약간의 핏방울과 침도 함께 섞인 채였다.
하지만 디에고에겐 그걸 감상(?)할 틈이 없었다.
자비도 없는 주먹이 또 날아와 명치에 꽂혔기 때문이었다.
뻐억!
"쿠업!"
다시금 몸이 기역자로 꺾였다.
저도 모르게 무릎이 오므려졌다.
귓가로는 냉랭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지금 왜 맞고 있는지 모르겠지? 어?"
"나는, 쿨럭, 컥!"
쩌업!
손바닥이 옆얼굴을 쩍, 하고 후려쳐 왔다.
맞은 쪽 귓속이 먹먹해졌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느 쪽이 위인지, 어디가 아래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냉랭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날아왔다.
"지금 왜 당하는 건지도 모르겠지? 어?"
"그으읏!"
빠각!
이번에 맞은 곳은 오른쪽 정강이였다.
구둣발로 쿡 찍어 찬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물건으로 때린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정강이뼈가 너무나 아팠다.
저도 모르게 허리가 숙여졌다. 두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목소리가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현명하고 자비로우신 라코나 자작? 웃기고 있네."
푸컥!
"...!"
식당 천장이 보였다.
고개가 치켜 들린 걸까.
어쩌다 치켜 들린 걸까.
턱은 왜 이렇게 아픈 걸까.
"어쩌면 아버지나 자식이나 하는 짓이 똑같냐. 엉? 약한 사람 괴롭히는 건 너희 집안 종특이냐?"
꽈작!
이번엔 왼쪽 쇄골이었다.
위에서부터 떨어진 손날이 왼쪽 쇄골을 무자비하게 찍었다.
"...컥!"
처음 겪어보는 통증이었다.
저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말려든 혓바닥이 입천장을 애타게 긁었다.
'왜! 어째서?'
디에고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무려 마나 유저였다.
열한 살 때부터 영지의 선임기사에게 검술을 지도받았다.
마나 연공법을 열심히 수련했다.
덕분에 4년 만에 마나하트를 생성할 수 있었다.
지금도 선임기사의 놀라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시 쿠르노 경이 그랬다.
디에고 도련님은 천재이신 것 같다고.
그랬기에 완력이나 드잡이질, 싸움엔 자신이 있었다.
덩치도 크고 마나하트마저 지녔으니 또래 사이에선 겁날 것이 없었다.
한데 지금은?
'감히, 감히 나한테! 그아아아!'
분했다.
너무나 아팠다.
나름 그 와중에 반격도 시도했다.
한껏 말아쥔 주먹을 휘둘러도 보았다.
한데 상대는 그 주먹을 피하지도 않았다.
퍼억!
디에고의 주먹에 맞은 로이드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순간 디에고의 입가에 희망의 미소가 배어났다.
할 수 있나? 나도?
그러나 그 희망이 부서지고 무너지기까진 3초도 걸리지 않았다.
홱 돌아갔던 로이드의 얼굴이 이쪽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터진 한쪽 입술을 손등으로 슥 닦아냈다.
너무나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히죽, 선보였다.
"이젠 쌍방폭행이 되는 거네?"
뻐각!
로이드의 손길에 더욱 자비가 없어졌다.
그야말로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되었다.
주먹으로 치고, 치고, 쳤다.
팔꿈치로 찍고, 찍고, 찍었다.
발길질로 차고, 차고, 또 찼다.
쓰러지면 세워서 또 두들겼다.
반항하면 받아주며 더 찍었다.
애원해도 무시하며 더 밟았다.
"그, 그만! 내가 잘못했어! 그마안!"
"그만은 개뿔."
뻑! 뻐벅! 퍽!
누워서 웅크린 놈의 등이며 머리를 대놓고 더 밟았다.
그런 로이드의 눈길은 지극히 냉랭한 계산적 독기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래야 다시는 줄리앙에게 헛짓거릴 할 엄두를 못 낼 테니까.'
적어도 이놈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니 기왕이면 확실하게.
어설픈 자비는 접어두고.
제대로 밟아야 한다.
로이드는 그런 사실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의 학창시절 경험 덕분이었다.
'너 같은 놈들한테는 이게 직빵이거든.'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당시의 반에도 일진이 있었다.
그리고 한 번은 그 일진에게 자신이 타깃이 된 적도 있었다.
그때 자신이 딱 이런 식의 극약처방으로 반응했다.
매점 가서 빵 사오라는 말에 싫다고 대꾸했다.
그랬다가 슬리퍼로 뺨을 맞았다.
짝, 짝, 왕복으로 여섯 대.
퍽, 퍽, 명치에 주먹질 두 대.
맞은 후엔 알았다고 대답하곤 교실 뒤를 향했다.
마침 그곳에 다 쓰고 버리려고 빼놓은 형광등이 세워져 있었다. 형광등을 각목처럼 들고 일진에게로 돌아갔다. 뒤돌아 앉아서 다른 일진들과 시시덕대고 있던 놈의 뒤통수를 향해 휘둘러 찍어 버렸다.
펑, 챙그랑. 피가 철철. 난리가 났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하는 거라면 확실하게.
그 말을 되새기며 의자를 들었다. 찍었다. 밟았다.
그날, 그놈을 병원으로 보냈다.
자신은 정학 처분을 받았다.
부모님이 학교로 불려 오셨다.
병원 간 놈의 부모님께 죄송하다며 치료비도 넉넉히 주셨다.
한데 그 외엔 뜻밖에도 뒤탈이 별로 없었다.
저거 미친놈이라는 수군거림이 뒤탈의 전부였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조용히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놈도, 다른 일진이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다시 매점 가서 빵 사오라는 말도 없었다.
굉장히 난폭한 수단이었지만, 누구로부터도 괴롭힘이나 업신여김을 받지 않을 무형의 권위를 직접 증명하고 획득한 사건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줄리앙을 건드리면 나한테 죽는다.
우리 가문을 욕보이면 나한테 죽는다.
내리꽂는 로이드의 주먹과 발길질에 스산한 메시지가 담겼다.
한 방씩 내리꽂을 때마다 디에고의 몸에 선명한 피멍으로 새겨주었다.
그걸 보는 줄리앙 프론테라의 가슴도 철렁철렁 내려앉았다.
'로이드 저거, 미쳤어!'
줄리앙은 경악했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행의 현장을 보자니 머리를 감싸고 싶어졌다.
단순히 놀라서?
아니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앞날이 막막해졌기 때문이었다.
'로이드 프론테라, 저거, 원래 미친놈인 줄은 알았는데... 지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이 일에 개입하지 말라고 그렇게도 눈짓을 보냈더랬다.
제발 못 본 척 넘어가 달라고 눈치를 주었더랬다.
그랬더니 저 인간이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해서 안심했었다.
그저 막 나가는 인간인 줄로만 알았는데. 항상 부모님 속만 썩이는 인간쓰레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한데 어쩐 일로 이런 상황에서 '자중'을 할 줄 알게 됐구나 싶었다.
한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자중은 개뿔.
완전히 미친놈처럼 디에고를 폭행하고 있었다. 아니, 때려죽일 듯이 구타하고 있었다!
"야! 그만 좀 해!"
보다 못해 줄리앙이 소리쳤다.
그만해야 한다.
이쯤에서 정말로 멈춰야 한다.
아니, 이미 사고를 제대로 치고 말았다.
디에고가 만신창이가 되도록 폭행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라코나 자작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게다가 아카데미에서 학생을 구타한 로이드는 어떤 처벌을 받게 될까.
그리고 자신은 이후에 또 어떤 괴롭힘을 더 당하게 되는 걸까.
생각할수록 얼음굴에 빠진 듯 몸서리가 쳐졌다.
견디다 못해 로이드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그만하라고!"
거칠게 외쳤다.
한데 그 직후, 줄리앙은 뜻밖의 경험을 해야 했다.
"미안. 조금만 더 하고."
"...어?"
오싹.
이쪽을 잠시 돌아보는 로이드.
그 눈빛과 눈길이 마주하는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로이드가 살벌한 눈빛을 하고 있어서?
아니었다.
전혀 살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없이....
'냉철해. 전혀 이성을 잃지 않고 있어.'
너무나 뜻밖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알던 과거의 망나니 형, 로이드 프론테라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지금 돌아오는 대답도 그랬다.
"여기서 어설프게 끝내면 네가 더 괴로워진다. 그래도 좋아?"
"그건...."
"그러니까 좀 믿어라."
퍼억!
다시 디에고에 대한 폭행이 시작되었다.
그 차분한 폭력의 이율배반적 모습에 줄리앙은 저도 모르게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디에고가 혼절하는 모습을 눈에 담게 되었다.
뻐걱!
마지막 주먹질에 디에고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반쯤 벌어진 입에는 어느새 거품이 물렸다.
그리고 이쪽을 쳐다보는 수많은 시선이 있었다.
난리 통에 황급히 달려온 사감의 외침이 날아왔다.
"지금!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
빼빼 마른 중년의 아저씨 사감이 뾰족한 소리로 외쳤다.
로이드는 그제야 허리를 폈다.
한 손을 들었다. 흐트러진 앞머리칼을 이마 뒤를 향해 쓸어넘겼다. 땀으로 푹 절어 거칠어진 숨결 뱉어내며 사감을 돌아보았다.
"훼손된 명예를 챙기던 중입니다."
"뭐요?"
움찔.
뜻밖의 대답에 사감이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만신창이가 되어 나뒹구는 디에고의 모습을 망막에 담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신은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를 잊은 것인가요? 이곳은 마젠타 대학입니다. 위대하신 국왕 전하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아카데미입니다. 당신은 그런 장소에서 행패를 부리고, 폭력을 행사했으며, 대학의 학생을 다치게 했습니다."
"그래서요?"
"만약 행사한 폭력에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이대로 당신을 경비대에 넘겨 엄중한 처벌을 받게 할 것입니다."
웅성웅성.
어느새 사감 뒤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학생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들.
대학의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까지.
누군가는 혀를 차며, 또 누군가는 개탄하고 기겁하며 디에고의 쓰러진 모습과 이쪽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로이드의 입가에 쓰디쓴 웃음이 피어난 것은.
'줄리앙이 당할 때는 다들 저렇지 않았을 텐데.'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보고도 외면했을 것이다.
학생들 사이의 일이려니 하며 넘어갔을 것이다.
아니, 가해자들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가해자들 집안이 대체로 빵빵했을 테니까.'
충분히 가능할 법한 부조리였다.
그래서였다.
로이드는 가슴을 당당히 폈다.
디에고에게 힘을 휘두르기 전에 미리 마쳤던 계산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정당한 이유라."
"이유가 있습니까?"
사감의 눈빛이 엄중해졌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예."
"무엇입니까."
"명예 훼손입니다."
"네?"
"이 친구가 절 모욕했습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고작이 아닙니다. 제가 모욕을 당하는 것은 곧, 국왕 전하께서 모욕받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지금."
사감의 눈빛이 의혹에 휩싸였다.
지금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느냐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럴 법도 했다.
'대체 왜 이 일에 국왕 전하를 들먹이는 거야. 그것도 고작 시골 남작가문의 일원인 주제에.'
로이드를 향한 사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모욕이니 어쩌니.
로이드의 하는 말을 듣자니 가소로웠다.
사실 그는 아직 로이드가 교역도시 크레모에서 어떤 공적을 세운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이곳 왕도에까지 크레모의 소식이 자세히 전해진 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로이드를 하찮게 보게 되었다.
그의 가문 때문이었다.
'저 방문객, 줄리앙 프론테라의 가족이라고 했지, 아마?'
그랬다.
프론테라 가문.
그곳의 남작은 자신에게 어떤 뒷돈도 찔러주지 않았다.
예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상식이 없는 건지.
부족한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두툼한 봉투 하나 사근사근 주머니에 꽂아주던 라코나 자작 가문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격 낮은 집안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감은 다짐했다.
이번 일을 기필코 문제 삼아 저 방문객이 엄격한 처벌을 받게 하리라. 그래야 자신에게 돈 봉투를 건네준 라코나 자작에게 책망받지 않을 수 있으리라.
"방금 전하를 입에 담은 의도가 무엇인지, 그게 무슨 뜻을 담은 말인지 정확히 밝히세요."
엄격한 눈빛으로 로이드를 몰아붙였다.
그런 사감 뒤에 모여 선 다른 이들도 비슷한 눈빛으로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쏟아지는 비난의 눈길.
로이드는 그 앞에서 여전히 태연했다.
"무슨 말이긴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느긋하게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둥그런 황금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
사람들을 향해 내밀었다.
"제가 이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헉."
일순간 사감이 헛숨을 들이켰다.
뒤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펜던트 하나에 저토록 놀라는 꼴들이란.
로이드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국왕 전하께서 특별히 초청하여 제게 내려주신 귀빈의 증표입니다. 다들 대학에 몸담고 계신 분들이니 이 물건의 의미를 충분히 알아볼 식견이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
로이드의 손에 들린 황금 펜던트가 모두의 망막에 꽂혔다.
펜던트의 중심에 새겨진 쌍두의 독수리 눈빛이 유난히 날카롭게 번득였다.
동시에 모두가 생각했다.
저건 왕실 귀빈의 증표가 확실하다고. 애초에 위조 자체가 불가능한 물건이니, 의심조차 할 수 없다고.
모두가 감히 토를 달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사감만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그렇게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식당 가득.
로이드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침묵하는 모두의 의식을 채찍처럼 준엄하게 질타했다.
88화. 폭력을 근절하는 법 (3)
"이제는 제 행동과 말이 이해가 되시겠지요. 그렇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국왕 전하의 부름을 받아 왕성에 머물고 있는 왕실의 귀빈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저를 모욕하는 행위는, 저를 왕도로 부르신 전하를 모욕함과 똑같은 죄를 짓는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군요."
"...."
로이드의 낭랑한 목소리가 식당 가득 울려 퍼졌다.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모두의 침묵 속에서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또한, 저는 이곳 아카데미가 국왕 전하의 은총과 후원 속에 운영된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또한 들었습니다. 즉, 이곳에 있는 학생들은 모두 전하의 후원을 입는 신분이라는 뜻이지요. 한데 전하의 후원을 받는 학생이 감히 전하의 초청을 받은 귀빈을 모욕하고 왕실의 권위를 사사로운 것으로 치부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로이드의 한쪽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대답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사감에게 눈길을 던졌다.
사감이 목을 움츠리며 반문했다.
"하지만, 으음, 그것은 그쪽 분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닌지요?"
"일방적인 주장이라니요?"
"우리의 학생, 디에고 라코나가 그쪽 분을 모욕했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는지요."
"증거라. 하하."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반문했다.
"당연히 넘치도록 있지요. 증거는 사감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 제가 무슨...."
"여기 이 줄리앙 프론테라라는 녀석 말입니다."
터억.
로이드의 손이 뻗어 갔다.
줄리앙의 아담한 어깨에 얹혔다.
순간 줄리앙이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로이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여전히 태연하게 어깨동무를 건 채로 사감을 쳐다보며 말했다.
"모르실까 봐 확인시켜 드리는 건데, 이 녀석, 제 동생입니다."
다시 한 번 줄리앙이 움찔.
사감의 눈동자도 미세하게 흔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보는 앞에서 제 동생을 모욕하고 핍박하는 일이 곧 저를 모욕하는 일이고, 그렇게 저를 모욕함은 곧 왕실 귀빈의 명예에 흠집을 새기는 일이며, 왕실 귀빈의 명예를 하찮게 여김은 곧 왕실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그런...."
"혹시 제 말을 부정하시려는 겁니까?"
"...."
사감의 입이 다시 합죽이가 되었다.
로이드의 신랄한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거기 계신 사감님도, 그 뒤에 있는 다른 학생들도 모두 이 디에고라는 녀석과 제 동생이 어떤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발뺌하진 않으시겠지요?"
"...."
다시금 모두가 침묵.
섣불리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줄리앙이 디에고에게 매일 괴롭힘을 당하는 건 모두가 공공연하게 아는 사실이었다.
아니, 디에고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상위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줄리앙을 무시하고, 차별하고, 모욕했다.
지금 사감 뒤에 늘어선 이들 중에도 줄리앙을 괴롭힌 자들이 수두룩했다. 심지어 누가 더 참신한 방법으로 줄리앙을 괴롭히는지 내기까지 벌이며 시시덕대기도 했다.
그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저 줄리앙이 시골 남작 가문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학업의 성취가 우수하여 교수들에게 몇 번인가 칭찬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즉, 주제도 모르고 행동한다는 것이 괴롭힘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듯, 줄리앙은 이곳 아카데미에서 차별과 멸시의 공공재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는 거야, 인마.'
로이드는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자신의 팔을 치우려는 줄리앙을 힘으로 눌렀다.
녀석이 이쪽을 쏘아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왜 이런 난리를 피우는 거냐고.
이러면 무슨 소용이냐고.
뒷감당만 고스란히 자신에게 떠넘길 셈이냐고.
그렇게 항의하는 듯한 줄리앙의 눈길이 실시간으로 옆얼굴에 팍팍 꽂혀 왔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 눈길을 무시했다.
부당한 차별과 폭력을 인내하고 삭이는 태도.
학교 폭력에 대한 대응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단지 참는 걸로는 아무런 해결도 안 되니까.'
진짜다.
그냥 이상론을 떠드는 것이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정말로, 현실적으로 그랬다.
그건 형광등 사건을 직접 경험하며 로이드가 얻은 교훈이기도 했다.
'나도 처음엔 일 저지르고 나서 쫄았거든. 근데 지나면서 보니까 아니더라고. 일이 완전 뜻밖의 방향으로 굴러가더라고.'
처음 형광등과 의자 등으로 일진을 피떡처럼 두들긴 직후.
당연히 학교에선 난리가 났다.
부모님들이 불려 오시고, 학폭위가 열렸다.
처음엔 일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사실 그럴 법도 했다.
일진이 자신에게 잘못한 것이라곤 고작 '빵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고 약간의 손찌검을 한 게 다였기 때문이었다.
한데 자신은?
상대를 병원으로 보냈다.
그래서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한데 아니었다.
'그 일진 놈, 알고 보니 그동안 벌인 일이 많더라고.'
일이 터지고 3일인가 지났을 무렵, 같은 반의 다른 학부모님이 아버지께 전화를 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자기 아들이 그 일진 학생한테 그동안 괴롭힘을 많이 당했던 것 같다고. 그런데 이쪽이 벌인 일을 보면서 용기를 얻었고, 그걸 처음으로 자신들에게 알려줬다고.
그게 시작이었다.
비슷한 제보가 줄을 이었다.
그 일진의 업보(?)가 낱낱이 까발려졌다.
작게는 가방이나 옷, 모자, 신발부터.
크게는 게임기, 현금, 자전거, 휴대폰, 노트북까지.
적게는 일이십 만원 수준에서.
많게는 이삼백 만원 이상까지.
제보를 모아 보니 그동안 다른 아이들에게 삥 뜯고 착취한 규모가 생각보다 엄청났다.
그렇게 그 일진은 제대로 역풍을 맞았다.
부모님들이 뭉쳐서 고소를 하고, 소년 법원에 세우고 말았다. 말 그대로 피해자들이 뭉쳐서 '인생은 실전이야, X만아'를 제대로 보여준 셈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일단 이런 일에 대처할 때는 쉬쉬하면 안 돼. 기왕 손대는 거라면 일을 확 키워야 해.'
학교만 믿고 있으면 안 된다.
법과 경찰과 언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일을 크게 벌여야 한다.
판이 커질수록 피해자가 유리해진다.
그렇기에 계산 끝에 행동에 나섰다.
디에고를 제대로 밟아 버렸다.
이제는 학교 측을 짓뭉갤 차례다.
"하니 사감님께서 한 말씀 해주시지요. 혹여나 아직도 제 행동을 문제 삼으실 생각이신지?"
"...."
고개를 한쪽으로 까딱, 기울이는 로이드.
사감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난감하군.'
사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물론 사감도 줄리앙이 평소 다른 학생들에게 치이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외면했다.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미안한 것도 아니었다.
이런 현상은 당연한 전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시골구석 남작가문 자제잖아.'
그러니까 왕도 고위 집안 자제들에게 무시받는 거다. 때론 멸시받고, 신체적인 린치도 당하는 거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지금까지 수십 년간 아카데미에서 흔하게 벌어진 일이니까. 당연한 현상이니까.
굳이 바로잡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괜히 그런 일에 개입하기도 싫었다.
고위 귀족 자제들과 척을 지는 건 손해였다. 그들의 등 뒤에 휘황찬란한 가문들이 버티고 있음을 떠올리자면 더욱 그랬다.
그래서 방관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괴롭힘을 당하던 학생의 형이 왕실의 귀빈이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문제를 삼는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감이 입으로만 웃었다.
재빠르게 굴린 계산대로 태도를 바꾸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이곳 기숙사를 관리하고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기숙사 내에서 불미스러운 소란이 일어났을 때 일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도 제 소관이지요."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모쪼록 차후에도 분쟁에 휘말리신다면 수고스럽게 직접 손을 쓰시기보다는 저를 불러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아하. 중재라는 훌륭한 분쟁 해결 수단을 서비스로 제공해주시겠다?"
"제 뜻을 알아주시니 기쁘군요."
귀족 자제들이 득시글대는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잔뼈가 굵은 사감이었다.
그런 사감의 미소를 보며 로이드는 생각했다.
'구렁이 같은 놈이네.'
어느샌가 은근슬쩍 디에고를 버렸다.
이쪽 코인에 슬그머니 탑승을 시도한다.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이쪽과 줄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다.
절로 코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사이, 이쪽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한 사감이 물러났다.
수군대며 모여들었던 학생들도 흩어졌다.
그때까지도 로이드는 그들 하나하나의 면면을 모두 똑똑히 확인하고, 기억했다.
'니들은 내가 골로 보낸다. 꼭.'
내심 다짐했다.
개입을 안 했다면 모르되,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여기서 어설프게 멈추면 자신도, 가문도 위신이 깎이리라. 그렇게 괜히 호구 이미지가 박히면 나중에도 두고두고 손해를 보게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이참에 매듭을 지어야겠지.'
로이드는 저들을 세트메뉴로 묶어서 쳐낼 계획을 시커먼 흑심에 꾹꾹 눌러담아 갈무리했다.
그리고 줄리앙을 돌아보았다.
"밥맛 다 떨어졌다. 가자."
"뭐?"
여전히 이쪽을 째려보던 줄리앙이었다.
이쪽이 걸어놓은 어깨동무를 풀어내려고 낑낑대던 녀석이기도 했다.
그런 녀석의 한쪽 눈썹이 치켜 들렸다.
"가자니. 어딜."
"가 보면 알아."
어깨동무를 한 채로 움직였다.
줄리앙을 반쯤 연행하듯, 혹은 끌고 가듯 식당을 나섰다.
복도 좌우에서 수군대고 숙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싸그리 무시했다.
버둥거리는 줄리앙의 몸부림도 무시했다.
그대로 거침없이 복도를 지나, 로비 반대편으로 갔다.
그곳에 아까 보아두었던 기숙사 집무실이 있었다.
일종의 학교 행정실과 비슷한 곳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벌컥 열었다.
"용건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미 내친걸음이다.
대뜸 집무실로 들어서는 이쪽의 행동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집무실 사람들. 무슨 일로 왔느냐는 질문을 얼른 꺼내지 못해 버벅대는 집무실 사무원.
그런 사무원을 말했다.
"휴학 수속을 밟고 싶습니다. 이름은 줄리앙 프론테라. 기간은 1년입니다."
그의 폭탄선언에 줄리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쳤어?"
한겨울의 아카데미 정문 앞.
그 앞에 선 줄리앙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가 차다 못해 기절할 지경이었다.
"네가 뭔데 기숙사에서 행패를 부린 건데. 어? 대체 뭔데 멋대로 내 공부를 중단시키고 휴학을 시키는 거냐고."
방금 일이 떠올랐다.
기숙사 집무실에 쳐들어간 로이드.
다짜고짜 자신의 휴학 수속을 진행했다.
어찌 말려볼 틈도 없었다.
그렇게 자신은 졸지에 아카데미에서의 공부를 1년이나 중단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말도 안 돼!'
화가 났다.
로이드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나 대책 없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만 느껴졌다.
'게다가 생각도 없어!'
디에고를 다짜고짜 폭행할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물론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긴 했다.
평소 자신을 무던히도 괴롭히던 디에고였다.
그랬던 놈이 누군가에게 얻어터지는 광경은 분명 크나큰 쾌감을 주었다.
형이 왕실 귀빈의 증표를 꺼냈을 때는 짜릿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게 뭐. 잠깐 기분 좋은 그런 게 무슨 소용인 건데?'
아무 소용 없다.
의미 또한 없다.
상쾌한 쾌감은 잠시일 뿐.
앞으로는?
로이드가 떠나고 나면?
그렇게 자신만 이곳에 남으면?
로이드가 벌이고 간 짓거리의 후폭풍을 자신이 혼자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분명 보복당할 것이다. 전보다 몇 갑절은 더한 괴롭힘이 가해질 것이다.
형이 왕실 귀빈의 증표를 보였다고 해도?
현실이 크게 바뀌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안 걸리게 괴롭히면 되니까.'
다른 귀족 자제들의 입장에선 안 걸리게 사람 하나 괴롭힐 방법이야 차고 넘치게 많다.
그 생각을 하자니 벌써부터 눈앞이 아찔했다.
감당해낼 자신도 없었다.
한데 로이드는 그것도 모자라 제멋대로 자신을 아카데미에서 휴학시키기까지 했다!
"말해봐. 설마 나보고 도망치라는 거야? 엉? 사고는 형이 쳐놓고. 그걸 책임져 줄 자신이 없으니까 무턱대고 날 아카데미에서 빼 온 거야? 어?"
그건 싫었다.
괴로워도 아카데미에 붙어 있고 싶었다.
아무리 힘들고 화가 나도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것만이 자신이 집안에 도움이 될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내가 공부를 안 하면 분명 우리 가문, 망할 거니까. 저 생각 없는 망나니 자식이 집안을 다 망쳐놓을 거니까.'
그걸 평생 수습해야 하리라.
그러려면 지식을 쌓고, 인맥을 만들어두어야 하리라.
벌써부터 그럴 각오를 다지고 있던 줄리앙이었다.
한데 난데없는 휴학 강요라니.
너무나 화가 났다.
자신이 품고 있던 각오마저 짓밟으려는 행패로만 느껴졌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피식 배어난 것은.
"하. 넌 지금 내가 아무 계산 없이 이러는 걸로 보이냐."
"...뭐?"
당연한 거 아냐?
줄리앙은 그렇게 대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로이드의 선언이 먼저 귓구멍으로 들어왔다.
"일단 넌 오해부터 좀 풀고, 빡세게 단련 좀 해야겠다."
"지금 무슨... 오해? 단련?"
"어."
"내가 뭘 오해한다는 건데."
"우선 하나, 내가 막무가내로 행동한다는 거. 둘, 너도 단련 받으면 아까 디에고인지 뭔지 하는 놈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거."
"...."
줄리앙은 꺼내려던 대꾸를 삼켰다.
어느새 이쪽을 돌아보며 말하는 로이드.
그런 형의 눈빛이 너무나 진지해 보였다.
어떠한 장난기도, 기만이나 유들거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은 뜻밖이었다.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어쩌면 그 눈빛에 저도 모르게 설득되어서였을 것이다.
혹은, 디에고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말에 솔깃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단련하면 된다니... 어떤 단련? 어디서? 검술 같은 거?"
줄리앙이 저도 모르게 떠듬거리며 되물었다.
로이드의 입가에 피식, 뜻 모를 미소가 걸렸다.
나약한 동생의 몸과 마음을 담금질할 비책을 꺼내주었다.
"어떤 단련이긴. 공사판에서. 삽질이지."
그렇듯 졸지에, 여리여리하고 똘망똘망한 미소년 줄리앙 프론테라는 팔자에도 없던 현수교 건설 프로젝트에 노가다맨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89화. 시공과 신뢰 사이 (1)
"그 소식이 전부 사실이라고?"
"예."
"정말로 착각이나 오해가 아니라 진짜였다고?"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크레모에 상륙하려던 기가티탄을 네가 막았고 형이 끝장냈다는 게 전부 아무런 가감 없는 실제 사건이었다는 말인 거지, 지금?"
"예. 물론입니다."
"...."
줄리앙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테이블 건너편을 쳐다보았다.
테이블 너머에는 이곳 호화로운 왕실 숙소마저도 수수하게 만들 법한 엄청난 은발의 미남자가 이쪽을 향해 마주앉아 있었다.
하비엘이었다.
"후우. 다른 사람도 아닌 아스라한 경, 네가 그렇다니까 안 믿을 수가 없네."
"그럼 전엔 안 믿으셨습니까."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이제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줄리앙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사실 처음엔 왕실에서 나온 사람이 알려준 소식을 통해 들었어. 당분간은 나만 알고 있으라더라. 아직 왕도에는 자세한 소식이 알려지지 않았다나."
"그랬습니까."
"응. 조만간 전하께서 형이랑 널 불러서 상을 내리고 그 소식을 대외에 널리 알릴 거라고도 했어. 근데 그게 다였어."
"다였다니요?"
"어떻게 해서 형이 기가티탄을 잡았다는 건지, 뭐 그런 이야기들."
줄리앙의 동글동글한 콧등에 주름이 잡혔다.
문득, 왕실에서 사람이 찾아왔던 때가 떠올랐다.
'실로 훌륭한 형을 두셨군요. 부럽습니다.'
왕실의 사람이 떠나며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영광스럽고 뿌듯해서?
절대로 아니었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었지. 생각해 봐. 훌륭한 형이래. 믿을 수 있겠어?"
"흐음, 왕실에서 나온 사람이 사기꾼인지 의심하진 않으셨습니까."
"물론 했지."
"역시."
"당연한 거 아냐? 난데없이 찾아와서 형이 어떤 공적을 세웠네, 훌륭하네, 그따위 믿기지도 않는 극찬을 늘어놓는데. 당연히 의심했지. 그런데 진짜 왕실 사람이 맞더라고."
"혼란스러우셨겠군요."
"응."
줄리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뭔가 착오나 오해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로이드 프론테라니까. 하루가 멀다고 술에 절어서 사고나 치고 다니던 게 그 인간이니까."
사실이었다.
줄리앙이 기억하는 로이드의 모습은 분명 그랬다.
3년 전,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프론테라 영지를 떠나오던 날도 그러했다.
떠나기 직전에 인사를 하려 했다.
그래도 형제니까.
미워도 형이니까.
로이드의 방으로 찾아갔었다.
그리고 10초도 머물지 못하고 쫓겨났다.
문을 열자마자 훅 풍기던 역한 술 냄새.
자는데 무슨 볼일이냐며 꺼지라던 고함.
이윽고 날아와 얼굴 바로 옆 문에 부딪쳐 박살 나던 술병까지.
술 냄새와 거친 고함, 깨지던 술병.
그게 3년 전, 고향의 집을 떠나오며 줄리앙이 겪었던 로이드 프론테라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래서였어."
줄리앙의 새하얀 손이 습관적으로 제 왼쪽 눈꼬리 어름을 매만졌다.
그곳에 아주 살짝, 점처럼 자그마하게 파인 흉터가 있었다.
3년 전의 그날, 로이드가 던진 술병 파편에 맞아 생긴 흉터였다.
"그 공적, 사실은 누군가 이름 모를 진짜 영웅이 세운 거라고. 형은 단지 그 근처에 있다가 남들 눈에 띈 거라고. 그래서 사람들이 오해를 한 거라고 생각했어."
"진짜 영웅의 공적을 로이드 님이 가로채거나 공짜로 주워 먹은 거라고 말입니까."
"응. 바로 그거."
힘껏 고개를 끄덕인 줄리앙이 덧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 외엔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전부 사실이었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
절로 기다란 숨이 푹 흘러나왔다.
하비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배어났다.
"하긴. 줄리앙 님의 그런 기분은 이해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아스라한 경도?"
"예."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부터였습니다. 아무런 전조도, 그럴 기색도 없던 평범한 날이었지요. 심지어 전날 밤에도 술에 취해 주점에서 난동을 부렸던, 그런 날 아침이었습니다."
"그날 어떤 일이 생긴 거야?"
"예. 로이드 님이 변했습니다."
"변하다니?"
"말 그대로 변했습니다.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온 것처럼 말입니다."
벽난로 따스한 실내.
외풍 하나 없는 포근한 숙소.
그 공간에 하비엘의 나직한 목소리가 채워졌다.
"성실해졌습니다. 배려라는 걸 하게 되었습니다. 술을 끊었습니다."
"...뭐어? 말도 안 돼."
"하지만 사실입니다. 술을 끊은 것은 물론이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각종 공사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크레모 백작의 의뢰를 받아서 만들었다는 그, 인공 지반이라는 것처럼?"
"예."
하비엘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 외에도 많은 일들을 해냈습니다. 성실함과 영민함, 그리고 쪼잔함과 영악함을 버무려서 말입니다."
"쪼잔에 영악이라니?"
"전에 없던 그런 면이 생겼습니다."
하비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생각 없이 사고만 치던 예전과 달라진 또 다른 면입니다. 쪼잔해졌습니다. 어떠한 자그마한 손해도 절대로 감수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날 받은 공사 대금이 모자란 걸 깨닫는 순간 먹던 식사도 팽개쳐두고 달려가서 동전 한 닢까지 받아내는 쪼잔함이랄까요."
"...후아."
"심지어 영악합니다. 사소한 약점이라도 잡으면 그걸로 사람을 끝까지 괴롭힙니다. 아주 손아귀에 쥐고서 흔듭니다. 하지만 반항할 방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상대의 모습을 대놓고 감상하며 즐기기까지 합니다. 실로 고약한 심성이랄까요."
"그거, 예전보다 더 나빠진 거 아냐?"
"물론입니다. 아, 또 하나 있습니다."
"뭔데?"
"은근 자신의 외모에 자부심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뭐? 형이?"
"예."
"말도 안 돼."
"사실입니다. 가끔씩 절 보며 경쟁의식을 불태우시거든요."
"쯧쯧. 감을 잃었네."
"그렇지요?"
"응. 비빌 곳에 비벼야지."
"맞습니다. 그래도 예전엔 최소한 본인의 얼굴 수준은 정확히 파악하고 지내셨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되신 건지. 심지어 가끔은 제가 받은 고백 편지 숫자를 보며 대놓고 부러워하거나 짜증을 부리곤 하십니다."
"안타까운 일이야. 불쌍해라."
"동감입니다."
남작가의 둘째 아들인 줄리앙 프론테라.
남작가의 충실한 기사 하비엘 아스라한.
3년 만에 재회한 두 동갑내기가 묘한(?) 주제로 공감하며 이야기꽃을 활짝 피웠다.
덕분에 옆방에서 설계에 몰두하고 있던 로이드는 개탄해야 했다.
"...다 들린다, 이 자식들아."
어쩌자고 저런 녀석들을 동생과 호위기사로 두었는지.
벽 너머 숙소 거실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뒷담화를 귓속 달팽이관에 차곡차곡 담으며 로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한숨과 달리 로이드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눈앞에 알차게 떠오르는 메시지 덕분이었다.
딩동.
[줄리앙 프론테라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2 상승하였습니다.]
[줄리앙 프론테라와의 현재 관계 : -59]
[주요 인물과의 약간의 관계 개선으로 28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2,164]
[줄리앙 프론테라와의 친밀 단계가 <극혐> 에서 <혐오>로 상향되었습니다.]
[친밀 단계 상향에 따른 보너스로 5 RP를 추가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2,169]
'후후후, 그래. 좋아.'
RP가 올랐다는 흡족한 메시지.
언제 봐도, 매일 봐도, 보고 또 봐도 새롭고 상큼했다.
게다가 이번의 메시지는 그에게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RP 공급처가 생겼다는 거니까.'
사실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줄리앙은 오랜만에 발견한, RP를 주는 인물이었다.
'지금까지의 경우를 보면 확실히 그랬어. 그냥 친해진다고 아무나 내게 RP를 주진 않았거든.'
예전, 처음엔 그냥 남과 친해지면 RP를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크레모 백작이었다.
'아무리 친해지고 은혜를 입혀도 호감도가 올랐다거나 하는 메시지가 뜨지 않았어.'
그렇다고 크레모 백작의 이쪽에 대한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이쪽에게 엄청난 호감을 드러냈다. 나중엔 사위가 되라는 혼담까지 직접 내밀게 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백작과의 사이에선 어떤 메시지도 뜨는 일이 없었다.
호감도가 올랐다는 메시지도.
RP를 획득했다는 메시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였다.
'내게 RP를 주는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는 거야. 특정한 조건이 성립되어야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호감도 시스템이 활성화되는 셈이랄까.'
내심 그런 추측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추측의 답을 얻게 되었다.
'내 세력의 구성원이 되어야 하는 거였어. 그게 답이야.'
줄리앙과의 메시지를 찬찬히 읽으면서.
과거 오크족과의 예도 떠올려보면서.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내게 RP를 제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남작령 소속이었어. 남작부부와 하비엘, 바이에른 경, 주민들, 거기에 추가로 공식적인 혈맹을 맺은 오크 부족원들까지 말이야.'
세력의 구성원이거나.
공식적인 동맹이거나.
그런 관계를 지닌 사람과의 사이에서만 RP 시스템이 활성화되는 것이리라.
로이드는 거의 확신했다.
그렇게 보자니 줄리앙이 또 새롭게 느껴졌다.
'어서와. 호구행은 처음이지?'
씨익.
녀석을 굴려먹을 생각을 하자니, 그러면서 RP도 쏙쏙 알차게 뽑아먹을 생각을 하자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잇몸을 만개시켰다.
동시에 그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일단은 녀석을 여기로 데려왔으니 이젠 책임도 져야겠지.'
줄리앙을 휴학시켰다.
그렇게 왕실 숙소로 데려왔다.
하지만 그건 줄리앙이 당하던 괴롭힘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되진 못한다.
'녀석 스스로가 강해지고 독해져야 해.'
강해지면 괴롭힘당하지 않는다.
독해지면 더욱 금상첨화다.
그게 가장 근본적인 대책이다.
진짜 더럽고 불공평한 일이지만.
진심 불합리하고 잘못된 것 같지만.
결국엔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물론 그런 불행을 방지하기 위한 규칙과 제도라는 게 있긴 하지. 하지만 그런 수많은 제도는 그저 불합리와 불공평을 다소 줄여줄 수만 있을 뿐이야. 절대적인 보호막은 못 돼.'
그는 아카데미 기숙사의 사감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근무하던 이들도 떠올렸다.
모두가 침묵하고, 방관했다.
괴롭힘 받던 줄리앙을 외면했다.
때론 규칙과 제도가 얼마나 무력한가를 잘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좀 굴려서라도 단련을 시켜야겠어.'
물론 줄리앙이 자신의 친동생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동생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저 녀석, 얼굴 본 지 겨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메시지와 RP 시스템이 알려주고 있었다.
마침내 확신한 시스템의 조건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 녀석도 내 사람이 된 거야.'
내 곁의 사람은 내가 챙긴다.
그 원칙을 확실히 해야 다른 이들이 그 사실을 피부로 느낀다.
그래야만 앞으로도 내 사람이 계속 늘어나고, 곁에 머물러 준다.
'그렇게 RP도 더 넉넉하게 얻는 거고.'
로이드는 그 사실을 명심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짰다.
현수교의 설계와 시뮬레이션에도 더욱 심혈을 기울여 집중했다.
그동안 벽 너머 거실에서는 줄리앙과 하비엘, 뽀동이, 방울이, 하망이의 화기애애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줄리앙의 목소리에 가장 큰 기쁨이 배어 있었다.
매일 자신을 들볶던 괴롭힘과 차별에서 벗어나 친근한 이들에 둘러싸인 안도감, 포근함.
목소리 구석구석마다 느껴지는 저 따스한 감정들.
그걸 들으며 로이드는 문득 생각했다.
기숙사에서 녀석을 빼 오길 잘했다고.
앞으로 더 잘 챙겨주자고.
그렇게 치열한 설계와 포근한 대화의 밤이 흘러갔다.
♣
다음날이 밝았다.
로이드는 바빠졌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숙소를 나섰다.
왕실 대장간을 향하는 그의 품에는 설계도 수십 장이 잔뜩 안겨 있었다.
지난 새벽, 설계 스킬의 옵션인 '도면 출력'을 통해 뽑아낸 여러 형태의 설계도였다.
"이곳의 책임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왕실 대장간을 찾아가 용건을 밝혔다.
국왕 전하께서 맡긴 공사의 시공자라는 말에 대장간의 최고 책임자가 나왔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소."
키는 약 120센티 정도 될까.
드럼통 같은 체구.
엄청난 어깨너비.
거기에 산타클로스 같은 수염을 지닌 노인이 나왔다.
고집 가득해 보이는 주름투성이 눈매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저게 드워프구나.'
소설로만 접하던 드워프를 처음 보았다.
하지만 그는 신기한 기분 담은 눈길을 금방 거두었다.
대신 사근사근한 영업용 미소를 재빨리 장착했다.
"안녕하십니까. 로이드 프론테라라고 합니다. 전하께서 맡기신 공사를 치르기 위해 몇 가지 제작 의뢰를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제작 의뢰?"
"그렇습니다."
"무슨 거창한 걸 만들려고? 여긴 아무 물건이나 만드는 곳이 아닐세. 하물며 무기나 갑옷도 아닌 공사에 쓸 물건이라니. 그런 건 다른 대장간에나 맡기지?"
"다른 대장간에서 만들 수 있는 물건이면 굳이 여기로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흐흠, 여기서만 제작이 가능하다?"
"그렇습니다."
"아첨이 노골적인 인간이로군."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 속 내용이 떠올랐다.
눈앞의 드워프 장인.
이곳 왕실 대장간의 총책임자.
왕국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했다.
금속으로 된 것이라면 못 만드는 물건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이번엔 반드시 저 드워프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른 드워프는 안 돼.'
막대한 하중을 버텨낼 현수교를 만들 재료다.
최고의 강성과 품질이 아니면 신뢰할 수 없다.
그러니 무조건 저 장인에게 일을 맡겨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저 드워프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일이 아니면 좀처럼 직접 망치를 들지 않고 휘하의 장인들에게 작업을 떠넘긴다는 데에 있었다.
'심지어 국왕의 주문도 자신의 흥미가 동하지 않으면 직접 움직이지 않기로 유명했다지.'
그러니 저 장인의 흥미를 끌어내야 한다.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라는 기분이 들게 해야 한다.
로이드는 그 사실을 되새기듯 다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빈 작업 테이블이 보였다.
그쪽으로 다가갔다.
설계도를 펼쳤다.
촤아악!
"여기, 이걸 한번 보시지요."
로이드가 자신 있게 펼쳐 보인 설계도.
드워프 장인의 눈길이 설계도를 향했다.
'이건....'
왕실 대장간의 책임자이자 최고 장인인 웰스 코기두스.
그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런 그의 귓가로 로이드의 의미심장한 한마디가 툭, 치고 들어왔다.
"혹시 하늘을 걷는 다리라고,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90화. 시공과 신뢰 사이 (2)
왕실 대장간의 책임자.
드워프 최고 장인인 웰스 코기두스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이건, 흐음... 무게를 지지하기 위한 뼈대 구조인가?"
드워프 특유의 고집스러운 눈동자가 설계도면을 훑었다.
도면에는 그로서도 처음 보는 구조가 그려져 있었다.
'마치 뼈대 같군.'
직선으로 이루어진 막대들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삼각형 구조를 이루며 줄지어 연결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기다란 직선으로 이어진 두 줄의 막대 사이를, 짧은 막대 수십 개가 대각선으로 놓이며 삼각형을 이루는 구조였다.
구조 위에 놓일 힘의 흐름.
구조가 받쳐낼 하중의 균형.
코기두스는 뛰어난 장인답게 도면 속 구조물의 용도를 단숨에 파악했다.
"설마 이건 다리에 쓰일 물건인 건가?"
"네, 맞습니다. 트러스라는 구조입니다."
로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역시 드워프 장인이다.
소설 속 묘사 그대로다.
코기두스의 질문이 다시 날아왔다.
"역시. 이러면 최소의 구조로 넓은 면적에 많은 하중을 받아낼 수 있겠구만. 한데 이걸 누가 설계한 건가. 설마 자네 쪽에도 드워프 장인이 있는가?"
"아닙니다."
"그러면?"
"제가 했습니다."
"뭐?"
"제가 설계한 겁니다, 이거."
"...."
이쪽을 올려다보는 코기두스의 눈길이 묘해졌다.
이내 깐깐한 장인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구만?"
"하하. 그렇습니까."
"그렇다마다. 자네, 사실은 날 협박하러 온 게지?"
"...벌써 눈치채셨습니까?"
"당연하지."
코기두스가 콧김을 풍, 뿜어냈다.
"이 물건은 어지간한 대장장이들은 못 만들어. 아니, 이 공방에서도 나 외엔 제대로 만들 수 있는 놈이 없을 거다. 이렇게 큰 쇳덩어리 구조 전체를 균일한 강성으로 제작해야 하니까. 한데 이걸 다른 장인 손에 맡기면?"
당연히 큰 사고가 날 터다.
코기두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멀쩡한 트러스 구조라고 해도 그럴 것이다. 조금만 제작이 어설퍼도 어디 한 군데쯤은 강성이 균일하지 못한 부분이 생길 터.
한데 멀쩡해 보이는 겉면만 보고 그걸로 다리를 만들면?
"반드시 무너질 테지. 쇳덩이라는 게 그래. 방금 전까진 멀쩡해 보이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탁 하고 끊어져 버리니까. 그게 제일 무서운 거야."
그렇게 트러스가 끊어지면?
그래서 다리가 무너지면?
수십 명은 족히 죽는 사고가 일어날 것이 뻔했다.
"한데 그런 물건의 설계도를, 굳이 나를 찾아와 보여준다고? 그 의도를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아뇨. 제발 이렇게 알아주시길 바랐습니다."
로이드가 살며시 웃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코기두스가 혀를 내둘렀다.
"내 양심을 시험하겠다는 건가?"
"뭐, 하기 싫으시면 어쩔 수 없고요."
"그래서, 훗날 사고가 나는 꼴을 목격하며 괴로워하라고?"
"개인의 선택이시니 강요는 안 합니다."
"내 흥미를 끌어내서 주문을 받게 할 자신은 없고?"
"예. 없습니다. 제가 뭐 잘났다고 그런 걸 자신하겠습니까. 그래서입니다."
"그래서라니?"
"이름난 장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게 성공 가능성이 더 높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그런 걸 이렇게 솔직히 밝혀도 되는 건가?"
"어차피 숨겨 봤자 다 아실 테니까요."
"허허허?"
코기두스의 무성한 수염이 들썩였다.
뻔뻔하기가 이를 데 없는 놈이다.
한데 어쩐지 그게 밉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 중엔 보기 드문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지위를 들먹이거나, 혹은 이런 물건을 만들 수는 있겠느냐고 내 호승심을 자극하는 부류가 대부분이었는데.'
오늘 눈앞에 나타난 로이드는 조금 달랐다.
명확하게 용건만 밝히고 있었다.
지위를 내세우지도, 호승심을 자극하는 등의 뻔히 보이는 도발을 감행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쪽의 도움이 있어야만 공사가 안전하게 치러지리라는 사실만 담백하고 깔끔하게 강조하고 있었다.
결국, 고민하던 코기두스는 마음을 정했다.
"어디 다른 설계도도 봄세."
"그 말씀은?"
"설계도부터."
"옙."
로이드의 손이 바빠졌다.
가지고 온 설계도를 순서대로 촥촥 펼쳐 보였다.
그럴 때마다 신선한 충격이 장인의 눈을 즐겁게 했다.
현수교의 케이블을 주탑에 고정할 대형 소켓.
교량의 온도 변화에 따른 신축을 고려한 링크형 조인트 이음 장치.
교량의 구조가 강가의 바람에 의해 겪을 진동을 감쇄시켜줄 제풍 장치인 플랩.
그 밖의 수많은 모듈과 부품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름난 장인의 눈동자가 책임감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결국, 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하자. 해."
"정말이십니까?"
"그럼 거짓말이겠나?"
코기두스의 깐깐한 눈동자가 로이드의 얼굴에 꽂혔다.
"자네가 보여주는 다른 도면을 보니 더 확실해지는구만. 이건 이 왕국에서 나밖에 못 만들어. 그런데 다른 놈 손에 맡겼다가 다리가 무너지는 사고가 나면? 이건 흥미 이전에 양심이 걸린 문제 아닌가."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개뿔. 나도 처음 만드는 것들이라 설명을 듣고 싶은 것이 많아. 오늘은 집에 돌아갈 생각도 말게."
"그러잖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로이드가 씨익 웃으며 배낭을 열어 보였다.
그 안엔 미리 야물딱지게 싸온 야식용 도시락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심지어 2인분이었다.
"허허허?"
설마 이런 상황을 미리 다 예상해고 왔다는 걸까.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 보통내기가 아니다.
로이드를 향하는 코기두스의 눈빛이 흥미를 넘어선 흡족함으로 물들었다.
♣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로이드는 코기두스의 왕실 대장간 공방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코기두스는 최고의 장인답게 깐깐하고 꼼꼼했다.
설계를 한 로이드조차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을 매번 딱딱, 짚어내며 원리와 제작 방향을 물어 오곤 했다.
덕분에 로이드도 몇 번인가는 내심 진땀을 흘려야 했을 정도였다.
'괜히 장인이 아니구나.'
사실 자신의 설계는 스킬의 도움을 받은 바가 컸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부분들은 그냥 쉽게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평소에는 실감하지 못했는데, 전공 교수님 뺨치는 장인의 질문을 받으니 새삼 그런 부분이 피부로 느껴졌다.
'앞으론 더 신경 써서 설계해야겠어.'
그렇게 다짐하며 3일 만에 왕실 대장간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한층 더 바빠졌다.
할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자아, 그럼 우리 즐거운 요리 시간을 가져볼까요."
뚜둑. 뚜둑!
로이드는 장갑 낀 손 마디를 풀며 앞을 보았다.
왕실에서 특별히 제공한 소연무장.
그곳에 산더미처럼 흙이 쌓여 있었다.
바로 오늘의 요리 재료였다.
'주문했던 대로 제대로 왔네. 역시 왕실이라고 해야 하나.'
기름 섞인 찰흙인 유토.
석분점토와 모래.
마사토와 자갈.
거기에 잘게 부순 현무암, 흑요석, 감람석, 청금석에 활석과 주석까지 각각 나뉘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일단은 유토부터.'
로이드의 삽질이 시작되었다.
유토를 퍼냈다. 삽으로 퍽퍽 치며 넓게 다졌다. 지름 1미터짜리 피자 반죽 모양으로 펼쳤다.
그 위에 갖가지 종류의 흙을 순서대로 깔았다.
그 위에는 현무암과 흑요석 등의 돌을 뿌렸다.
그리고 곁에서 배를 꼬르륵대며 기다리고 있던 방울이에게 진상했다.
"자아, 방울아?"
"방울!"
"전에 네가 말했던 레시피대로 만들어봤어."
"빠방울!"
"한번 먹어볼래?"
"방울!"
와구!
커다랗게 변신한 방울이가 흙피자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야물딱지게 꼭꼭 씹어서 삼켰다.
이윽고 꼬리를 세차게 떨었다.
딸랑딸랑딸랑!
꼬리에 달린 방울이 요란하게 울렸다.
방울이가 통통한 꼬리 끝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방울-!"
그 순간, 로이드가 움직였다.
미리 준비한 커다란 화강암 쟁반을 방울이의 궁둥이 아래에 받쳤다.
촤아아아악!
방울이의 궁둥이에서 평소보다 훨씬 가느다란 철근이 뿜어져 나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얇은 철근이 화강암 쟁반에 쌓였다.
로이드는 그 타이밍에 맞추어 쟁반을 빙글빙글 돌렸다.
뿜어져 나오는 얇은 철근이 쟁반 둘레를 따라 코일처럼 크게 돌돌 말렸다.
로이드가 외쳤다.
"부채질!"
그의 외침이 터져 나오기가 무섭게 양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미리 대기하던 하비엘과 줄리앙이 커다란 부채를 힘껏 휘두르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화아아아악!
맹렬한 바람에 철근이 빠르게 식어갔다.
그 철근의 직경은 고작해야 5밀리미터 남짓.
철근이라기보다는 철사에 훨씬 가까운 모습이었다.
'좋아. 일단 겉모습으로는 제대로 뽑혔어.'
로이드의 눈동자에 기쁨의 감정이 배어났다.
방울이가 했던 말이 사실이었다.
저 레시피대로 흙을 먹으면 얇은 철사를 뽑아낼 수 있다더니.
정말로 그 말 그대로의 결과가 화강암 쟁반 위에 알차게 담겼다.
'그럼 성능도 제대로 뽑혔는지 한번 볼까.'
이 철사는 현수교를 지탱할 케이블의 재료로 쓰일 물건이다.
그런 만큼 당기는 힘에 버티는 능력을 반드시 테스트해야 했다.
'이런 장력 측정에는 로드셀 계측기가 딱이겠지만.'
아쉽게도 여기선 그런 현대의 기기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직접 몸으로 철사의 장력을 시험했다.
"하비엘?"
"예."
"이거 잡아."
갓 식은 철사를 내밀었다. 하비엘에게 한쪽 끝을 붙잡게 했다.
그리고 반대쪽을 자신이 직접 잡았다.
"이제부터 내가 이걸 당길 거야. 넌 절대 흔들리지 않고 버텨야 해."
"알겠습니다."
"대신 조금도 당기면 안 돼."
"그냥 버티기만 해야 하는 겁니까?"
"응. 어느 정도 힘에서 끊어지는지를 정확히 테스트해야 하니까."
저쪽의 당기는 힘이 추가되어 버리면 계산이 복잡해진다.
그러니 하비엘이 잡고 있는 저쪽은 고정값으로.
이쪽이 당기는 힘만으로 계산을 해야 했다.
"그럼 시작한다."
꽈득!
철사를 꽉 쥐었다.
마나 써클 하나를 동원했다.
정확한 힘의 계측을 위해 스킬 옵션까지 사용했다.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④ : 써클 시프트를 발동합니다.]
'단계별로 힘을 시험해야 하니까 낮은 기어부터.'
기어를 1단으로 맞추었다.
써클이 즉시 반응했다.
[알파 써클의 기어가 1단으로 설정되었습니다. RPM 1,000으로 고정.]
키이이잉!
첫 번째 써클의 분당회전수가 정확히 1,000으로 고정되었다.
그렇게 증폭되는 마나의 힘을 오른팔에 실었다.
철사를 잡아당겼다.
끄드득...!
팽팽하게 당겨진 철사.
끊어지지 않았다.
잘 버텨주었다.
'그럼 2단.'
[알파 써클의 기어가 2단으로 설정되었습니다. RPM 2,000으로 고정.]
꽈드득!
철사가 더욱 팽팽하게 당겨졌다.
하지만 여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내친김에 기어를 더 올렸다.
3단, 4단... 마침내 5단까지 기어가 올라가는 순간, 철사가 끊어졌다.
터엉!
'좋아. 싱글 써클을 기준으로 4단과 5단 사이. 한 번 더.'
테스트가 연이어졌다.
처음에는 써클 시프트를 통해 고정적인 RPM으로.
나중에는 서서히 시프트 옵션을 끄고 더욱 디테일한 RPM으로.
덕분에 방울이가 뽑아내는 철사의 장력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대략 4,600에서 4,700 RPM 사이에서 끊어지는구만. 이걸 힘으로 계산하면, 으음, 괜찮은데?'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현대 세계에서 케이블의 재료로 쓰이는 와이어.
그것과 비교해도 크게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럼 이제는 케이블을 만들 차례.
로이드의 손이 안주머니로 들어갔다.
안주머니에서 코오 낮잠을 즐기던 환상종을 꺼냈다.
"저기, 뽀동아?"
"꿍얼꿍얼, 뽀동?"
"자는 거 깨워서 미안한데, 잠깐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뽀도동?"
"이제부터 방울이가 철사를 뽑아줄 거야."
"뽀동?"
"그 철사가 나오면 모았다가, 식으면 단단하게 뭉쳐서 말아줄 수 있을까? 딱 120다발 정도로. 마트에서 파는 건조 잔치국수 다발처럼 요렇게."
로이드는 나뭇가지를 들었다.
바닥에 그림을 슥슥 그렸다.
뽀동이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뽀동!"
동그란 머리가 힘차게 끄덕끄덕.
뽀동이는 로이드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이 좋았다.
로이드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고마워. 그럼 이것부터 먹을까?"
"뽀동!"
뚜왕-!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은 뽀동이가 10미터 덩치로 변신했다.
그때부터였다.
뽀동이가 두 손을 보비작보비작 힘차게 비볐다.
방울이도 강철 끙까 방출을 준비하며 궁딩이를 흔들었다.
"뽀도동! 뽀동!"
"빠방울! 방울!"
이로써 케이블 제작 준비, 완료.
이내 로이드의 고개가 스스슥 돌아갔다.
내심 정해두고 있던 세 번째 일꾼을 지목했다.
"어이."
"으, 응?"
처음으로 보는 환상종들의 거대한 모습.
그걸 자유자재로 부리는 로이드의 모습까지.
그 광경에 얼이 빠져 있던 줄리앙이 움찔했다.
로이드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난 이제부터 하비엘이랑 현수교 주탑 기초 공사 좀 시작할까 싶거든."
"어, 응."
"그러니까 이곳을 비워둬야 하거든."
"어, 그래서?"
"네가 여길 좀 맡아줬으면 하는데."
"내가? 어떻게?"
"어떻게긴."
로이드가 삽을 들었다.
줄리앙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거."
터억!
미처 대꾸할 틈도 없이, 줄리앙의 아담한 품에 커다란 삽 한 자루가 안겼다.
"자, 네가 고기를 구워먹고 있다고 상상해 봐. 고기가 맛있어. 그런데 익은 고기가 다 떨어졌어. 불판 위에 남은 고기는 덜 익은 것들뿐이야. 그래서 새 고기가 익기까지 기다려야 해. 맛있게 먹던 흐름이 끊겼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어, 으음, 조금 초조해지고 짜증이 날 거 같은데."
"그렇지? 역시 뭘 아네. 그러니까 말이다-"
로이드의 미소가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너, 삽질 좀 하자. 방울이가 흙 먹는 속도보다 빠르게. 레시피대로 정확하게. 알았지?"
"...."
"이제부터 네가 삽질하면서 옮기는 흙이 방울이를 거쳐서 와이어가 되고, 그게 케이블로 만들어져서 현수교 전체를 지탱하게 될 거야. 알겠어? 그러니까 열심히 해."
꿀꺽.
줄리앙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지금껏 얌전하게 공부만 하며 자라왔던 여리여리한 도련님.
비로소 그는, 로이드가 맡기는 이 단순해 보이는 삽질의 의미를 깨달았다.
"저, 저기, 잠깐만."
돌아서던 로이드를 황급히 붙잡았다.
잘 믿기지가 않아서 물었다.
"그럼 이거, 엄청 중요한 일 아냐?"
"어, 맞아."
"그런데 그걸 나한테 맡긴다고? 왜?"
궁금했다.
이상했다.
상대는 로이드 프론테라였다.
항상 자신이 미워했고, 믿지 않았던 형이었다.
물론 로이드도 자신을 믿어주거나 한 적이 없었다.
같이 술 마지자는 요구를 이쪽이 거부할 때마다 '샌님 같은 놈'이라며 성질 내고 욕설만 퍼붓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일까.
저토록 진지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은.
자상한 목소리로 당연하다는 듯 말해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니까 맡기는 거야, 너한테."
"...."
저도 모르게, 줄리앙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91화. 하늘을 걷는 다리 (1)
"중요한 일이니까 맡기는 거야, 너한테."
"어?"
줄리앙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중요한 일이라서 맡긴다니.
지금 저거, 진심인 걸까.
아니, 그건 둘째치고.
'이거, 로이드 프론테라 맞아?'
설마 살다 살다 자신의 형에게 저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꿈속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예언을 들었다면, 그 예언을 한껏 비웃었을 것이다.
한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방금, 자신의 눈앞에서, 부정할 수도 없을 정도로 또렷하게.
'중요해서 맡긴다니.'
두 손에 들린 삽을 쳐다보았다.
조금 멍했다.
그래도 어쩐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문득, 줄리앙은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건 바로....
"저기, 삽질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어떻게는 무슨. 너 삽질 한 번도 안 해봤냐?"
"어, 으응."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한 번도 안 해봤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맡아도 될까 싶었다.
'실망하겠지. 그것도 안 해봤냐고 핀잔주고 무시할 거야.'
그 정도도 미리 각오했다.
그리고 역시나.
"쯧. 어쩔 수 없지. 줘 봐."
로이드가 손을 내밀어 왔다.
그럼 그렇지.
줄리앙은 작게 실망하며 삽을 건네주었다.
한데 삽을 건네받은 로이드는 자신을 무시하지도, 핀잔을 주지도 않았다.
대신 소매를 걷더니 뚜둑, 뚜둑, 어깨를 풀었다.
"한 번만 보여준다. 잘 봐."
"어? 으응?"
"시범 제대로 보라고."
이쪽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어느새 로이드는 산처럼 쌓인 흙더미 앞에서 자세를 잡고 있었다.
하체와 허리를 슬쩍 낮춘 자세.
왼손의 손등을 하늘로 향했다.
"왼손을 잘 봐. 이렇게 역수로 잡는 거야. 삽 끝으로 찌르는 게 아니라 찍어서 까고 떠낸다고 생각해야 돼. 보여?"
"어, 응."
"이 상태에서 왼쪽 후방으로 이렇게, 이렇게!"
파파팍!
흙을 옮긴 삽이 부드러운 궤적을 그렸다. 쏜살같이 흙더미로 돌아갔다. 다시 찍었다. 흙을 까서 퍼냈다. 옮겼다. 뿌리듯 털었다. 쌓았다.
"알겠어?"
터억.
어느샌가 로이드는 지팡이처럼 삽을 짚고 있었다. 이쪽을 향한 그 미소가 마치 노련한 장인의 그것 같다.
줄리앙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어, 으응."
"좋아. 이제부터 방금 본 대로 하는 거야."
"응."
"대신 허리는 외발 수레 한 대 분량 가득 채웠을 때만 딱 한 번씩 펴고. 알았어?"
"그건 왜?"
"내 스타일이야."
"...."
"암튼 열심히 해라. 네가 삽질을 얼마나 빠릿빠릿하게 하느냐에 따라서 방울이 와이어 만드는 속도가 판가름날 거야. 이제 난 현장 좀 보러 간다."
로이드가 삽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았다.
삽자루와 손잡이에 따끈한 체온이 남아 있었다.
그 체온이 손바닥에 와 닿는 순간,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난 삽질 제대로 못 한다고 밝혔는데.
어째서 비웃거나 무시하지 않은 걸까.
오히려 이런 걸 열심히 가르쳐주는 걸까.
그리고....
"저기, 형."
"왜."
"나 좀 물어볼 게 있는데."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내내 궁금했던 걸 입에 담았다.
"형은 이런 거, 어디서 다 배운 거야?"
궁금했다.
이상했다.
자신의 형이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던 건지도 물어보고 싶었다.
'마치 딴사람이 된 것 같으니까.'
눈앞에 서 있는 자신의 형, 로이드 프론테라.
한데 자신이 알던 그 로이드와 너무나 달라졌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
자신에게 자상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전신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낯설었다.
"궁금해. 전엔 이런 삽질, 할 줄 몰랐잖아."
"그랬지."
"소환 마법도 마찬가지야. 저 소환수들, 형이 불러낸 거라며."
"응. 그랬지."
"게다가 아스라한 경이 그러더라. 형, 마나하트도 생겼다고."
"어, 맞아."
"형은 대체, 내가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을 겪은 거야?"
분명 무슨 일인가 있었다.
그러지 않고는 저럴 리가 없다.
한데 돌아오는 로이드의 반응이 또 이상했다.
"그럴 사정이 있어. 그건 다음에 말해줄게."
"언제?"
"준비가 되면."
"...."
쓸쓸한 미소를 짓는 로이드.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로이드.
그 모습이 또 말할 수 없이 낯설고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쩐지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결국, 줄리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로이드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통했다.'
분위기 잡으면서 그럴듯하게 얼버무리기 작전, 성공.
그렇게 교묘한 분위기 조성으로 줄리앙을 속여넘긴 로이드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현장을 둘러보는 일이 급하다는 말과 함께였다.
혼자 남은 줄리앙은 삽을 들었다.
"후우."
처음 들어본 삽이 무거웠다.
그래도 잘해보자고 다짐했다.
모처럼 자신을 믿는다는 형의 말을 들은 터였다.
솔직히 조금은 의아하긴 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약간은 기뻤다.
실망시키지 말자는 생각도 들었다.
로이드가 보여준 시범을 떠올리면서 삽을 쥐고, 움직였다.
나름 힘차게 삽으로 흙더미를 찍었다.
하지만 결과는 로이드의 시범과 너무나 달랐다.
피픽!
삽 머리가 삑사리(?)를 냈다.
흙더미를 제대로 파고들지 못했다.
오히려 미끄러지며 엉뚱한 경로로 뻗어 갔다.
그 서슬에 삽을 놓치고 말았다.
"어엇!"
탱, 태그렁!
저 멀리 날아간 끝에 완전 민망할 정도로 요란하게 굴러가는 삽.
그 모습을 구경하던 방울이가 통통한 꼬리로 바닥을 탕탕 때렸다. 뽀동이도 와이어로 새끼줄 꼬던 걸 잊고서 통실한 몸을 배배 꼬아댔다.
"방울! 빠바바바방울!"
"뽀동! 뽀도도도도동!"
설마 웃는 건가.
"...."
삽을 주우러 도도도 달려가는 줄리앙의 얼굴이 살구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키 작은 도련님의 고난은 이제부터가 시작일 뿐이었다.
♣
본격적인 공사도 시작되었다.
이미 측량과 설계도 마친 마당이었다.
현수교 상판에 쓰일 트러스와 케이블 준비도 착착 이루어지고 있었다.
로이드는 즉시 현수교 주탑 시공에 착수했다.
첫 과정은 기초 공사였다.
키이이이잉!
로이드의 트리플 써클이 맹렬히 회전했다.
2대 3대 3.
알파 써클을 중심으로 나머지 두 써클이 2 : 3 : 3의 비율로 회전했다.
이상적인 회전 비율을 발판삼아 맹렬히 충돌했다.
그 순간 로이드가 삽을 지면으로 꽂아넣었다.
삼중발파의 힘을 고스란히 삽에 실었다.
후우욱, 콰아아아앙-!
정확히 계산된 자리에.
무지막지한 힘으로.
지름 2미터, 깊이 35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구멍이 지면에 뚫렸다.
하루에 하나씩.
양쪽 강변에 각각 9개의 구멍이 뚫렸다.
현수교 주탑을 떠받칠 '현장 타설 말뚝'이 만들어질 구멍이었다.
그 구멍에 대량의 시멘트를 부었다.
교역 도시 크레모에서 해상 인공 지반을 만들었을 때처럼 방울이의 화산재를 기초로 만든 시멘트가 구멍을 꽉꽉 채웠다. 굳었다. 그 자체로 지하를 향해 뻗어내린 거대한 시멘트 말뚝이 되었다.
마침 기초 공사를 마친 직후, 봄비가 내렸다.
봄철 장마였다.
열흘 넘게 장대비가 쏟아졌다.
마제나 강의 수위가 금방 쑥쑥 상승했다.
그리고 현수교 건설 현장에서 하류 방향 100미터 지점에 있던 기존의 돌다리에 일부 균열이 생겨났다.
지은 지 61년 만에 생겨난 붕괴 조짐이었다.
로이드는 속으로 웃었다.
'마침 하늘까지 이쪽 현장을 돕네.'
붕괴 조짐을 보이는 옛 다리.
덕분에 왕실의 태도가 바뀌었다.
왕실은 손상된 돌다리를 보수하는 대신, 이쪽의 현수교 건설 현장에 적극적인 지원을 쏟아주기 시작했다.
대규모의 투자금이 현수교 건설 현장에 투입되었다.
전보다 대규모 인원의 인부는 기본이었다.
전문 석공 등의 기술자는 물론이었다.
왕실 소속 마법사들의 지원은 그저 땡큐였다.
'감사, 압도적인 감사!'
무려 마법사들의 시공 지원.
덕분에 시공에 미친 듯한 탄력이 붙었다.
로이드의 현미경을 장착한 듯한 측량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설계.
거기에 왕실의 전폭적인 자금과 최고 수준의 인력 지원이 합쳐졌다.
그 결과는 초광속 시공이었다.
'미쳤다. 이건 진심 미쳤어.'
시공을 책임지고 지휘하는 로이드조차도 혀를 내둘렀다.
주탑을 이루는 석재.
그걸 재단하는 사이즈만 알려주면 되었다.
블록이 어떤 모양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만 가르쳐주면 전문 석공들이 달라붙었다. 마법사들도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가공을 끝마쳤다.
주탑에 올리고 쌓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인력으로 돌리는 기중기, 혹은 뽀동이의 힘을 빌려서 올려야 할 대형 블록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하루에 열 덩이를 올리기 어려울 만큼 크고, 무거웠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투입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냥 마법사도 아닌, 왕실 마법사들이었다.
스샤아아아아...!
마법사들의 마법이 대형 석재 블록에 깃들었다.
무지막지한 블록의 무게를 무려 1/5로 줄여주었다.
그것만으로 시공 속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당겨! 구령 붙여서!"
"하나! 둘! 하나!"
수십 명이 달라붙은 기중기 레버가 돌아갈 때마다 대형 블록이 쑥쑥 올라갔다.
위에서 블록을 받아내는 하비엘과 뽀동이의 부담도 한결 줄었다.
아래에서는 마법을 걸어서 올리고.
위에서는 허리 삐끗할 염려 없이 받고.
모든 과정이 빈틈없는 톱니바퀴처럼 돌아갔다.
그 바탕에 로이드의 치밀한 설계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바람이 훈훈해졌다.
목련이 피었다 지고.
벚꽃이 바람에 날렸다.
아침마다 장미 향 흐드러지고.
삽질하는 줄리앙의 팔뚝이 탄탄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첫 매미가 힘껏 울음 뿌리던 날.
마제나 강 양쪽에 높이 90미터의 주탑이 우뚝 마주 서게 되었다.
그걸 지켜보던 왕도의 시민들이 환호했다.
기존의 돌다리가 불안하던 터였다.
언제 무너질지 몰라 두려웠다.
마지못하여 건널 때마다 노심초사했다.
한데 새로운 다리의 완공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현수교의 독특한 모습도 왕도의 시민들에게 큰 관심사가 되었다.
"저기, 저렇게 높은 탑을 세워서 대체 뭘 하려는 걸까요?"
"자네 못 들었나?"
"예? 뭘 말이죠?"
"저 탑 꼭대기 사이에 줄을 건다던데?"
"줄을 말입니까?"
"그렇다더구만. 빨랫줄 걸듯이 휙, 하고 말일세."
"그게 무슨...."
어떤 시민들을 이야기를 나누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다른 시민들은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세상에, 들었어요? 빨랫줄을 건대요."
"빨랫줄이라뇨? 설마 강 양쪽에 세운 저 탑 사이에 말인가요?"
"네. 옆집 새댁이 그러더라구요. 빨랫줄을 걸면 그게 다리가 된대요."
"에이, 그게 말이 되나요?"
"진짜예요. 이따 오후에 줄을 건다던데요?"
"정말요?"
"네. 정말요. 전 그거 구경하려고 자리도 맡아놨어요."
"어쩜 진짜. 저도 같이 가도 돼요?"
"물론이죠."
사람들이 강변에 삼삼오오 모였다.
현수교 주탑이 잘 보이는 자리마다 자리를 깔았다. 도시락도 펼쳤다. 그리고 놀랐다.
잠시 후, 주탑 아래로 옮겨져 오는 케이블의 실체를 봤기 때문이었다.
"뭐, 뭐야... 저거."
"세상에. 엄청 굵어요."
"빨랫줄이라고? 저게?"
"이건 빨랫줄 말도 들어봐야겠는데."
"어지간한 고목 줄기보다 더 두껍잖아?"
"게다가 저거, 그냥 밧줄이 아니라 쇳덩이야."
사실이었다.
케이블은 모조리 쇳덩이였다.
방울이가 뽑아낸 5mm의 와이어를 뽀동이가 엮었다.
그렇게 무려 120가닥의 와이어를 단단하게 뭉쳤다.
바깥 면에는 체인 메일에 쓰는 사슬 피복을 빈틈없이 입혔다.
말 그대로 '그냥 빨랫줄'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무겁고 본격적인 물건이었다.
덕분에 케이블을 본 시민들의 머릿속에 똑같은 의문과 걱정이 떠올랐다.
'저걸 어떻게 주탑 꼭대기에서 건너편으로 옮기지?'라는 의문이었다.
'힘센 거인이 와서 던지고 받아야 하나?'
'아님 배로 옮겨야 할까? 아닌데. 이 강엔 범선도 없고. 어중간한 배로 옮기려다간 배가 가라앉을 거 같은데.'
모두는 궁금해했다.
동시에 걱정했다.
저 크고 무거운 쇳덩이 밧줄을 허공에 띄워 양쪽 주탑 꼭대기에 빨랫줄처럼 걸 수 있을까.
아무리 봐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시도하다간 자칫 사고가 날 것 같았다.
걱정과 기대 속에 수천 쌍의 시선이 주탑 꼭대기로 집중되었다.
그곳 주탑 꼭대기에 로이드와 방울이가 있었다.
"방울아, 알지?"
"방울!"
"물고, 펑, 하는 거야."
"빠방울!"
미리 거대화를 마친 방울이가 동글동글한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주탑 아래에서 케이블이 올라왔다.
마법사들의 경량화 마법을 받고, 기중기로 올려진 케이블이었다.
그 케이블의 끝에는 사슬이 단단하게 엮여 있었다.
로이드는 사슬을 잡아끌어 한쪽에 놓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뒀던 양동이를 들었다.
양동이에는 흙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자, 방울아? 맛있는 거 먹자."
"방울!"
방울이가 커다란 입을 야물딱지게 벌렸다.
로이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의 입에 양동이의 흙을 탈탈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물러났다.
"자, 방울아. 연습했던 대로."
"와구와구, 방울!"
방울이가 흙을 꿀꺽 삼켰다.
동그란 머리를 뽀잇 돌렸다.
로이드가 한쪽에 놓아둔 사슬을 덥석 물었다.
그리고 웅크렸다.
부글부글!
방울이의 뱃속에서 화학작용이 일어났다.
방금 원샷한 흙이 급속도로 소화되었다.
"븡을! 쁘븡을!"
딸랑딸랑!
통통한 꼬리를 흔들었다.
맑은 방울 소리가 주탑 주위 모든 이들의 귓가를 두드렸다.
다음 순간.
방울이의 궁둥이에서 맹렬한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거칠게 내뿜어지는 화산재와 가스.
그 반발력으로 로켓처럼 내쏘아지는 방울이의 몸체.
그 와중에도 야물딱지게 힘껏 물고 있는 사슬.
사슬에 단단히 연결되어 함께 딸려오는 케이블.
"븡으으으으-을!"
파아아아앗...!
그날, 왕도의 시민들은 케이블 문 방울이가 밧줄 달린 화살처럼 마제나 강 상공을 가로지르는 장관을 목도하고, 경악했다.
92화. 하늘을 걷는 다리 (2)
"븡으으으으-을!"
콰아아앙-!
화산 폭발 스킬이 작렬했다.
방울이의 뱃속에서 생성된 마그마가 파쇄되었다.
수백만 조각의 먼지로 화하여 맹렬히 분출되었다.
5미터 덩치 통통한 방울이의 몸을 급격히 밀어냈다.
투화학!
방울이가 도약했다.
현수교 서쪽 주탑에서 날아올랐다.
단숨에 마제나 강 상공을 훌쩍 가로질렀다.
그런 방울이의 입에는 굵은 사슬이 야물딱지게 물려 있었다.
그리고 사슬에는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었다.
파아아앗!
밧줄 달린 통통한 화살.
아니, 사슬 깨문 방울이가 훨훨 날았다.
방울이를 필두로 기다란 케이블이 폭 238미터의 마제나 강 상공에 선명한 선을 그렸다.
그리고 동쪽 주탑 꼭대기를 향해 쇄도했다.
그곳에는 방울이를 받아낼 천연(?) 쿠션이 대기하고 있었다.
"뽀동! 뽀도동!"
10미터 덩치의 뽀동이가 두 발로 섰다.
두 팔을 활짝 펼치고서 뽕뽕한 배를 뽀잇 내밀었다.
완전 야무지게 숨도 뚜잇 참았다.
이윽고 방울이가 날아와 충돌했다.
뚜오옹!
방울이의 동그란 머리가 화살처럼 뽀동이의 뱃살에 폭 파묻혔다.
하지만 뽀동이의 배는 몇 겹의 구조로 보호받고 있었다.
솜처럼 도톰한 털이 첫 충돌의 힘을 흡수했다.
두꺼운 가죽이 2차로 데미지를 막아냈다.
퐁퐁한 뱃살이 나머지 충격을 분산시켰다.
뽀동이가 두 팔을 움직였다.
행여나 방울이가 튕겨 나갈까 얍 하고 붙잡았다.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끌어안고 데구르르 굴렀다.
그 끝에 두 환상종의 까만 눈망울이 마주쳤다.
"뽀동?"
"방울!"
"뽀도동?"
"빠방울!"
서로의 거뜬함을 확인했다.
해맑은 웃음 배시시 피어났다.
그 뒤에선 하비엘이 재빨리 움직였다.
"지금이야!"
건너편에서 날아오는 로이드의 목소리.
그 외침 속에서 손을 뻗어 사슬을 붙잡았다.
방울이가 물고 건너온 사슬이었다.
카드득!
사슬, 그리고 연결된 케이블이 떨어지지 않도록 버텼다.
마나하트와 세 개의 마나 써클을 모조리 동원했다.
"흐읍!"
꾸드드득!
뽀동이와 방울이도 달려왔다.
함께 붙잡았다.
버티고, 당겼다.
당기고, 잡았다.
마침내 사슬 끝에 달린 케이블이 손아귀에 잡혔다.
그 순간 몸을 돌렸다. 어깨 위로 짊어졌다. 걸었다. 전진했다. 목표를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 케이블을 주탑 꼭대기에 연결할 소켓이 있었다.
"집어넣어!"
로이드의 외침과 함께 케이블 끝을 소켓에 밀어 넣었다.
철컥! 끼기긱!
마치 자로 재서 만든 것처럼 케이블과 소켓이 빡빡하게 들어맞았다.
그걸 확인한 직후, 소켓을 돌렸다. 잠갔다.
케이블이 단단히 고정되었다.
그러나 하비엘은 안심하지 않았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강 건너편, 서쪽 주탑을 돌아보았다. 로이드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제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성공!"
로이드가 이쪽을 향해 두 팔을 흔들고 있었다.
약간은 헐떡이는 듯한 외침도 들려왔다.
저쪽 케이블도 연결을 끝낸 듯했다.
"후우."
가장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과정을 마친 하비엘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이드 님도 무사하다.
그거면 됐다.
♣
그 뒤로도 복잡한 공정이 연달아 이어졌다.
이제 겨우 메인 케이블을 걸었을 뿐이었다.
점점 뜨거워지는 땡볕 아래, 시공의 2막이 펼쳐졌다.
주탑 뒤쪽으로도 메인 케이블이 연결되었다. 탑 뒤쪽 각각의 육지 방향 앵커리지에 고정되었다.
그 후엔 사슬로 만든 현수재가 설치되었다.
주탑 사이에 걸린 메인 케이블이 빨랫줄이라면, 현수재는 빨랫줄에서 수직으로 드리운 수십 가닥의 하프 현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는 뽀동이가 대활약을 펼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뽀동이는 밧줄 타기의 달인이었다.
10미터에 달하는 그 커다란 덩치로 메인 케이블을 으샤으샤 잘도 타고 다녔다.
출렁이는 케이블 위를 평지처럼 내달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매달려서 다니는 것도 자유자재였다.
때론 통통한 뱃살로 미끄럼도 탔다.
"뽀도동!"
매일 자유자재로 케이블 위를 누비며 수많은 현수재를 케이블에 매달고, 고정했다.
그렇게 현수재 설치가 끝나자 가장 큰 작업이 남았다.
바로 교량의 상판을 올려서 연결하는 일이었다.
그걸 위해 로이드는 우선 상판을 강에 띄웠다.
"참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니, 뭐가?"
드워프 장인, 웰스 코기두스가 로이드를 올려다보았다.
로이드의 입가에 흡족한 웃음이 맺혔다.
"제가 주문 드렸던 교량 상판 말입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트러스 구조가 훨씬 튼튼하게 뽑혀서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누가 만들었는데."
"당연히 최고의 장인이신 코기두스 님이시지요."
"녀석, 아첨은."
코기두스가 콧김을 풍, 내뿜었다.
"그런데 건방진 인간 놈아. 이제부턴 어쩔 생각인 거냐."
"어쩔 생각이냐니요?"
"저거 말이다."
코기두스가 턱짓으로 강 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강에 띄워진 대형 뗏목이 있었다.
그리고 뗏목 위에는 거대한 철물 트러스 구조인 교량 상판 일부가 실려 있었다.
코기두스의 물음이 이어졌다.
"오늘 저 물건을 위쪽 현수재에 연결하겠다지 않았나?"
"예, 그랬죠."
"그런데 저걸 강에 띄운 것까진 좋은데, 무슨 수로 들어 올릴 생각인 게냐?"
"아, 그거 말인가요."
질문을 받은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다 방법이 있습니다. '잭 업 다운' 가설 공법이라고, 일단 그걸 지금 사정에 맞게 응용해서 적용해보려고 말입니다."
"잭 업 다운?"
"예."
"그게 뭐냐."
"으음, 쉽게 말씀드리자면... 에이, 그냥 보시죠."
"뭐?"
로이드는 그저 씨익 웃었다.
막상 이곳 사람에게 설명하려니 조금 난감했다.
그렇다고 '부산 광안대교 지을 때 사용한 공법인데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냥 어깨만 으쓱였다.
코기두스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음은 물론이었다.
'잭 업 다운인지 뭔지. 저걸 어떻게 들어 올리겠다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자신이 제작한 트러스 구조 교량 상판의 규모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휘하의 모든 장인을 동원했는데도 여섯 칸을 만드는 데에 무려 4개월이 걸렸지. 실로 무거워. 한 칸, 블록 하나의 무게만 해도 100톤은 족히 넘어.'
한데 그걸 어떻게 뗏목에서 현수재 높이까지 들어 올린다는 걸까.
의문과 함께 장인의 눈가 주름이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보그르륵, 하망!"
강 한가운데에서 돌연, 야물딱진 외침이 들려왔다.
그 직후였다.
쏴아아아아!
"어? 강물이 빨려 들어간다!"
어느 구경꾼의 외침처럼 갑자기 강물이 요동쳤다.
소용돌이치는가 싶더니 한 지점으로 쏴아아 빨려 들어갔다.
마치 없던 구멍이 강바닥에 생겨난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이내 코기두스와 구경꾼들은 목격하게 되었다.
물 먹는 하마가 뗏목 아래에서 보아앙 불어나는 압도적인 광경을!
"하망! 하마망!"
벌컥! 벌커컥!
하망이가 우렁차게 외치며 강물을 들이켰다.
한 모금, 두 모금, 그럴 때마다 하망이의 몸이 풍선처럼 불어났다. 끝없이 커졌다.
10미터, 15미터, 20미터....
꽈드득!
커지는 하망이의 등에 뗏목이 업혔다.
"하마망! 하망!"
하망이의 몸이 더욱 거침없이 커졌다.
녀석의 등에 업힌 뗏목도 위로 쑥쑥 올려졌다.
50미터, 60미터... 마침내 70미터까지 하망이의 몸이 커지는 순간, 로이드가 신호를 보냈다.
"하망아, 스톱!"
"...하망?"
"강물 마시는 거 잠깐만 멈춰줄래?"
"하마망? 하망?"
"나중에 또 마시게 해줄게!"
"하망!"
...그렇게 하망이가 70미터 크기에서 멈추었다. 덕분에 녀석의 등에 업힌 교량 상판이 강물 수면으로부터 48미터 높이에서 고정되었다.
그 높이는 앞서 설치한 현수재 끄트머리가 내려온 지점과 정확히 일치했다.
로이드가 외쳤다.
"자, 갑시다!"
대기하던 인부들을 이끌고 교량 상판으로 건너갔다.
상판 곳곳에 미리 만들어진 소켓 속으로 현수재 수십 가닥을 연결했다.
그렇게 상판 한 블럭을 연결하면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하망!"
작아졌던 하망이가 다시 커지며 다음 블럭을 밀어 올렸다.
위에서는 대기하고 있던 로이드와 하비엘, 인부들이 상판과 현수재를 연결했다. 미리 주문했던 링크형 조인트 이음 장치로 상판과 상판 사이도 연결했다. 마법사들이 일으킨 화끈한 불꽃이 용접 과정을 대신했다.
그렇게 며칠간 연결 작업이 이어졌다.
마침내 마지막 상판의 연결을 마무리했다.
철컥!
최후의 현수재를 소켓에 끼우는 순간.
로이드의 눈앞에 선명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왕도 마젠타에 현수교 건설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은 로라시아 대륙 역사상 최초의 대형 현수교 시공을 성공리에 끝마쳤습니다.]
[이 새로운 형식의 다리는 왕도 시민들의 깊은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시공자와 그의 잘생긴 기사의 이름을 따서 '로이하비 교'라고 불릴 것입니다.]
['로이하비 교'가 왕도 마젠타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로이하비 교'를 건설한 당신의 이름이 왕국과 대륙의 토목공학 역사에 뚜렷이 새겨집니다.]
[유의미한 건설사적 업적에 따른 보너스로 대량의 RP가 특별 지급됩니다.]
[85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3,019]
'됐어.'
업적을 알려주는 반가운 메시지.
언제 들어도 기쁨 가득한 RP 획득 메시지.
그걸 보며 로이드는 환하게 웃었다. 실감했다.
길었던 현수교 시공이 성공리에 끝났다.
또한, 그는 생각했다.
업적 RP는 그저 시작일 뿐이라고.
배 터질 정도로 두둑한 보상은 이제부터가 진짜라고.
♣
"짐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가 선언하노라."
쿠웅! 쿠우웅!
국왕, 알리시아의 조용한 목소리가 웅장하게 울렸다.
목소리를 키우기 위한 확성기 마법이 아니었다.
그녀는 소드마스터였다.
자신의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사방으로 증폭시키는 기술쯤은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그렇듯 웅혼하게 울리는 목소리.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떨어질 때마다 마법으로 조종되는 골렘 20마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로이하비 교'의 서쪽과 동쪽에서 각각 10마리씩 입장했다.
다리 중앙을 향해 행진했다.
쿠웅! 쿠우웅!
육중한 걸음마다 교량 상판이 흔들렸다.
그러나 교량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유연하고 견고하게 버텼다.
스무 마리의 골렘이 교량의 중심으로 모였다.
그때까지도 '로이하비 교'는 거뜬한 모습을 자랑했다.
쿠우웅!
스무 마리의 골렘이 멈추었다.
교량 중앙의 연단에 선 국왕 뒤로 도열했다.
국왕 알리시아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피어났다.
"이토록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리를 건설한 로이드 프론테라에게 짐이 친히 '명공'의 칭호를 내리는 바이다."
와아아아-!
수백 마리 순백의 비둘기가 하늘을 수놓았다.
강변을 따라 운집한 시민들이 환호했다.
옛 다리는 그들에게 불안한 존재였다.
봄철마다 홍수에 무너질까 노심초사했다.
특히 올해 봄에 균열이 생긴 뒤로는 더했다.
강을 건너려면 어쩔 수 없이 이용해야 하는 다리.
건널 때마다 불안했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무너질까 두려웠다.
그럼에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건너야 했다.
한데 이제는 불안해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름다운 새 현수교.
로이하비 교는 그들이 보기에도 안전했다.
빨랫줄에 매달린 듯한 신기한 형상은 둘째치고, 강물 속으로 드리운 교각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사나운 홍수가 와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리란 믿음이 갔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려 스무 마리나 되는 골렘이 행진을 하고, 중앙에 모여 있었다. 한데도 다리는 흔들리기는커녕 조금도 늘어지거나 처지지 않았다.
"로이드! 로이드!"
시민들의 환호에 로이드의 이름이 섞였다.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마침내 한목소리로, 운집한 시민들이 일제히 외쳤다.
이제부터 벌어질 현수교 완공 기념 축제에 앞서, 자신들에게 안전한 새 다리를 지어준 사람을 기리는, 시민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존중과 감사가 담긴 목소리였다.
덕분에 로이드는 어깨를 부르르 떨어야 했다.
'후아.'
혹시 세계적인 한류 스타가 되면 이런 기분이 들까.
자신의 이름이 도시 전체에 울려 퍼지는 상황이라니.
비현실적이면서도 가슴이 쿵쿵 울렸다.
그 뒤로도 국왕의 각종 찬사가 이어졌다.
여러 보상 또한 비엔나소시지처럼 이어졌다.
막대한 보수를 지급 받았다.
남작가의 사채를 갚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거기에 평생 연금까지 보너스로 주어졌다.
'됐다. 됐어.'
돈 이상의 보상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완공식 행사 내내 로이드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말아 쥔 주먹 속에 땀이 차도 그랬다.
뿌듯했다.
짜릿했다.
김수호로 살다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1년하고도 반째.
그동안 내내 염원하던 사채 갚기.
그걸 드디어 현실로 이루게 되었다.
'이제 남작령으로 돌아가면 평생 꿀만 빨고 뒹굴면서 사는 거야.'
마침내 빚도 다 갚고.
나라에서 연금은 따박따박 나오고.
시골 귀족이니까 거창한 역모니 뭐니 하는 일에 휘말릴 위험도 없고.
그곳에서 꿀벌 같은 평화로운 여생을 누려야지.
로이드는 행복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그러니까 이제 남은 딱 한 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
몇 달 전 줄리앙을 아카데미에서 데리고 나오며 남몰래 품었던 다짐. 그것만 실현하면 정말로 홀가분하게 남작령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타이밍을 쟀다.
국왕의 눈치를 살폈다.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완공식 행사를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오던 국왕을 향해 짐짓 비통한 어조로 고하였다.
"전하, 우선 오늘 내려주신 하해와 같은 성은에 감사하옵니다. 하오나 그와 별개로 저 로이드 프론테라가, 감히 국왕 전하께 긴히 간하여 드리고 싶은 일이 있사옵니다."
"뭐라고?"
연단을 떠나려던 국왕이 멈칫.
이쪽으로 스르르 돌아오는 그녀의 시선.
"짐에게 긴히 간하고 싶은 일이라니. 무엇인가."
됐다.
넘어왔다.
그걸 느끼며 로이드는 숙인 고개 아래로 미소를 머금었다.
마침 명공의 칭호를 받은 터다.
국왕의 호의와 신임도 얻어낸 상황이다.
그러니까, 때는 바로 지금이다.
"다름이 아니오라, 전하께서 친히 후원하시는 마젠타 대학, 아카데미에서 심히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이며, 비열한 행위가 지속적으로 자행되고 있사옵니다. 혹여 전하께서는 이 실태를 알고 계시온지, 저는 궁금하옵니다."
"...무어라? 아카데미에서 짐이 모르는 부조리가 자행되고 있다고?"
"안타깝지만 실로 그러하옵니다, 전하."
비통하게 깔리는 로이드의 목소리.
남몰래 의미심장한 미소 머금는 입술.
마침내, 기다렸던 반응이 돌아왔다.
"조금 더 자세히 고하여라."
그때부터였다.
가문만 믿고 아카데미에서 설치던 놈들.
그걸 옹호하고 감싸던 아카데미 관계자들.
그놈들을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박살 내기 위하여.
탱탱하게 꽉 찬 명란젓 알집처럼 팩트만 알차게 눌러 담은 로이드의 철두철미한 고자질이 시작되었다.
93화. 고자질과 야바위 (1)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동작 느린 이등병이 살았어요.
이등병은 항상 선임들에게 조인트를 까였답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등병이 소원을 빌었어요.
'별님, 별님, 선임들과 사이가 좋아지도록 도와주세요.'
그랬더니 세상에, 부대에 별님이 내려왔어요!
'...그리고 투 스타 별님의 진노 앞에 마음씨 고약한 선임들은 영창으로 산지직송 당했답니다. 아아, 해피엔딩. 해피엔딩.'
로이드는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문득 군대 시절이 떠올랐다.
자신과 알동기였던 녀석이 있었다.
그 녀석, 성격은 착했는데 군대 체질이 좀 아니었다.
동작이 느린 편이었다.
눈치도 좀 느렸다.
게다가 운마저 나빴다.
선임 중에 성격 더러운 놈들이 몇 있었다.
거의 매일 선임들한테 불려 가고 조인트를 까였다. 아니, 더 심한 일도 자주 당했다.
그러기를 몇 개월, 확 탈영할까 하고 반쯤 울며 말하던 녀석에게 충고했다.
네가 왜 탈영을 하냐고.
차라리 선임들의 부당한 행위를 소원수리로 찌르라고.
그리고 2주 뒤, 부대가 뒤집어졌다.
사단장이 부대에 온 것은 물론이고, 동기에게 린치를 가하던 선임들이 모조리 영창으로 끌려갔다.
동기가 감행한 소원수리의 힘이었다.
그렇게 동기는 행복해졌다.
나름의 해피엔딩이었다.
'후우. 오늘이 딱 그랬네.'
로이드는 거추장스러운 예복 겉옷을 벗었다.
풀어헤친 타이를 숙소 의자에 휙휙 던져 걸쳤다.
피곤해진 몸을 소파로 던졌다.
출렁, 기분 좋은 푹신함과 함께 노곤함이 몰려왔다.
오늘 겪었던 일들의 기억 또한 함께 밀려왔다.
'참 다행이야. 모든 게 생각대로 잘 끝나서.'
마침내 완공한 현수교.
그걸 기념하던 완공식.
국왕에게 명공 칭호를 하사받았다.
약속했던 각종 특혜와 보상금도 받았다.
마지막엔 보너스로 고자질도 했다.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의 고자질을 듣던 국왕 알리시아의 표정은, 정말로 살벌했다.
"...부조리? 비합리? 게다가, 비열?"
서늘하게 흘러오던 국왕의 목소리.
국왕 알리시아는 정의롭고 공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부당한 힘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행위를 특히 혐오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도 그런 사실이 몇 번이나 언급되었다.
적어도, 국왕 시해 미수 사건으로 팔 하나를 잃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그래서였다.
국왕의 성격으로 미루어 고자질이 먹힐 것이라 여겼다.
때마침 국왕이 자신을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기도 했다.
이건 기회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그걸 놓치면 바보가 된다.
확신한 자신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던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이제부터가 중요하리라.
단어 선택을 신중하게.
어휘의 배치도 전략적으로.
"감히 아뢰건대, 제가 목도한 아카데미의 실상은 설립 취지와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사옵니다."
"동떨어져?"
"그렇사옵니다, 전하."
"자세히 고하라."
"예, 전하."
역시나 작전이 먹혀들었다.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배움에 매진해야 할 학생들이 파벌에 매달립니다. 지닌 지식과 지혜를 겨루기보다 가문의 계급과 권위를 내세웁니다. 후작, 백작 가문의 자제들이 손을 잡고서 자작가 아들을 핍박하며, 자작가 아들은 등 떠밀려 남작가 자녀를 짓밟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침묵합니다. 학문을 닦을 시간에 권력의 달콤함을 탐닉하고, 세상에 대한 포부를 품을 시간에 계급의 벽이라는 부조리 앞에 좌절합니다."
지금껏 이날을 위해 가슴속에 담아온 생각들.
날카롭게 벼려내어 거침없이 꺼냈다.
"심지어 그런 학생들을 이끌어야 할 아카데미의 태도 또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부당함을 지적해야 할 사감은 부당한 뒷돈을 챙깁니다. 세상의 부조리를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교수는 귀족 가문의 눈 밖에 날 것만을 경계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이런 개탄스러운 현실을 타파해야 할 학장은 권세 약한 가문 학생들의 도와달라는 애원만 타파하고 있습니다."
사실이었다.
그날, 아카데미에서 줄리앙을 데리고 나온 이후부터였다.
현수교 건설에 매달리는 바쁜 와중에도 나름 틈틈이 수소문을 했다.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청소부, 식당 일꾼들을 만났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하급 귀족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들을 통해 수많은 증언과 제보를 들었다.
온갖 추잡한 비리.
부당함을 눈감아주며 뒷돈을 챙기는 사감과 학장.
그걸 믿고서 더욱 제 세상처럼 행동하는 고위 귀족 자제들.
그렇게 어느샌가 악습, 혹은 타성, 썩은 뿌리처럼 수없이 박힌 부조리들.
그에 관련된 증언들을 최대한 모았다.
증거도 꼼꼼히 수집했다.
그 증거를 품속에서 꺼냈다.
둘둘 말린 종이 뭉치였다.
"이것은 아카데미에서 종사하는 관련자들이 언제, 어디서 사적인 금전을 받았는지 제가 나름으로 조사하고 정리한 목록이옵니다. 매 항목 옆에는 각각의 일에 관련된 이들과 증인의 명단도 함께 첨부하였사옵니다."
"어디 펼쳐 보거라."
국왕의 명에 따라 펼쳤다.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그 뒤의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워낙 증거와 증인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서류였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부터 국왕의 눈빛이 변했다.
그리고 소원수리 적힌 군부대에 강림(?)하신 분노의 사단장으로 빙의했다.
"즉, 이제부터 관련자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족치게 될 거라는 뜻이지."
상념에서 빠져나온 로이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숙소 입구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줄리앙이 있었다.
몇 달 전에 처음 봤을 때보다 약간 까무잡잡해졌다.
왜소하던 체격도 이전보다는 좀 탄탄해지긴 했다.
하지만 특유의 동글동글하고 앳된 인상은 그대로였다.
그런 녀석이 이쪽을 쳐다보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할 얘기 있으면 해."
팡팡.
소파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줄리앙이 쭈뼛쭈뼛, 이쪽으로 다가왔다.
녀석은 소파 옆자리에 앉는 대신 선 채로 콧등을 찡그렸다.
"으음, 저기,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느냐니, 뭐가?"
"그놈들."
"아카데미 놈들?"
"어."
"혹시 걱정되냐?"
"그건 아니고. 궁금해서."
하긴, 궁금하긴 할 터다.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힌 놈들이었다.
그런 괴롭힘을 방관한 자들도 수두룩했다.
한데 그랬던 자들이 오늘, 모조리 국왕의 철퇴를 맞게 생겼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나도 몰라."
"어?"
"그놈들이 어떻게 되는지 내가 알게 뭐야. 죽든 말든."
"...죽기도 하는 거야?"
"뭐, 그 정도까지 심하게 처벌받진 않을 거고. 다만-"
"다만?"
"제법 따끔한 벌은 받을걸. 어떤 놈은 뇌물 수수의 죄목으로 감옥에 갈 거고, 또 어떤 높으신 귀족 도련님은 호된 채찍 형에 처해지고 몇 년간 저택에 구금돼서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올 거고."
"...."
"그밖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었던 자들은 모두 앞으로의 귀족 생활이 심하게 꼬이겠지. 왜냐. 나라에서 가장 높으신 분한테 제대로 찍혔으니까."
"설마, 처음부터 이걸 다 예상했던 거야?"
"대강은."
사실이다.
줄리앙을 아카데미에서 데리고 나올 때부터.
아니, 디에고에게 손을 쓰려고 각을 쟀을 때부터.
저놈들을 어떻게 건드리고, 들쑤시고, 자극하며, 박살 낼지를 모두 설계했다.
"별로 복잡한 것도 아냐. 마침 국왕님께 공사를 따낸 상황이었거든. 그 공사가 왕실에 꽤나 필요하던 상황이라서. 그걸 성공리에 마치면 점수를 딸 거고, 그렇게 신임을 얻으면 고자질이 먹힐 거라고 본 거지."
"...."
별것 아니라는 듯,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줄리앙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뭔가, 엄청났다.
전에는 저렇지 않았는데.
그저 즉흥적인 행패나 부려대던 인간이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억지로 휴학을 당하고 아카데미에서 끌려나온 날부터 지켜봤지만, 저 로이드 프론테라가 자신이 알던 그 개차반 망나니로 느껴지지 않았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
놀랍도록 성실해졌다.
특히 자신에겐 자상하기까지 했다!
'몇 달 동안 한 번도 나한테 화내질 않았어.'
자상하고 친절한 로이드 프론테라라니.
예전을 생각해보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과연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은 생각마저 종종 들 정도였다.
'그렇게 자상해진 거... 처음엔 어색했는데 계속 지내니까 나쁘지 않았어.'
자신에게 삽질을 시킨 일도 그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본 삽질이었다.
당연히 힘들었다.
처음 며칠은 근육통 때문에 고생도 했다.
심지어 손바닥엔 물집이 잡히고, 벗겨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쓰라림도, 근육통의 아픔도 별것 아니게 느껴졌다.
아카데미에서 매일 괴롭힘을 당하던 날들의 괴로움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후련했어.'
종일 땀 흘리며 삽질했다.
자신이 삽질을 할 때마다 무언가가 변했다.
흙더미가 옮겨졌다. 방울이가 그걸 먹었다. 그러면 와이어가 만들어졌다. 뽀동이가 와이어를 모으고 꼬아서 케이블을 만들었다.
그 케이블이 왕도에 세워진 현수교를 지탱하게 되었다.
뿌듯했다.
그 모든 과정의 시작에 자신의 삽질이 있었다.
자신의 삽질이 저 현수교를 떠받치게 된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가슴 한쪽이 벅차오르는 요즘이었다.
절로 자신감도 생겨났다.
몇 달간 삽질에 매달리며 튼튼해진 체력만큼, 자신이 흘린 땀방울로 세워진 결과만큼, 스스로를 더 믿게 되었다.
'어쩌면 형은 이런 걸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 삽질을 시킨 걸지도 몰라.'
줄리앙의 시선이 로이드를 향했다.
조금은 풀어 헤쳐진 복장으로 피식 웃고 있는 자신의 형.
항상 미웠고, 거추장스러웠고, 부끄럽기만 했던 형.
그랬던 형이 처음으로 조금 다르게 보였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줄리앙이 자신도 모르게, 절대로 로이드에게 하진 않을 거라 여겼던 말을 꺼낸 것은.
"고마워."
"엉?"
"고맙다고."
"너, 뭐 잘못 먹었냐."
로이드가 귓구멍을 후비적거렸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줄리앙의 얼굴이 팍 찌푸려졌다.
"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토 쏠려."
"사실 나도 그런데. 귓구멍에서 토 나올 듯."
"웃기지 마. 난 지금 소름도 돋았거든?"
"소름만? 난 혓가시도 돋았다."
로이드는 혀를 삐죽 내밀었다.
줄리앙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형."
"어, 왜."
"집엔 언제 돌아갈 거야?"
"글쎄다. 아마도 내일?"
"내일? 그렇게 일찍?"
"어."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왕도에 더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공사도 마쳤고. 국왕님한테 받을 것도 다 받았고. 이젠 영지로 돌아가야지. 거기 벌여놓은 일들도 만만치 않게 쌓여 있을 거라서."
진짜로 그랬다.
역청탄 광산에, 마레즈 개간지에, 상수도까지.
관리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 빚 갚을 돈도 다 모았어. 그런데 여기서 미적거리면? 이자 날짜 넘기면? 안 줘도 될 이자를 한 번이나 더 내야 하는 거잖냐. 그러니까 이자일 오기 전에 돌아가서 빚, 완전히 정리해야지."
"어, 하긴 그렇지. 그런데...."
줄리앙이 제 볼을 긁적였다.
"난 사실 그거, 몰랐어."
"몰랐다니, 뭘?"
"우리 가문, 형이 방금 말한 빚."
"아아. 그거?"
"응. 진짜로 몰랐어. 난 그냥 여기서 공부만 했으니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매달 편지를 보내주셨지만 그런 언급, 한 번도 해주지 않으셨으니까. 정말 꿈에도 몰랐어. 다들 그렇게 힘들게 지내고 있던 줄은."
줄리앙의 고개가 숙여졌다.
솔직히 조금은 부끄러웠다.
그동안은 자신이 제일 힘들게 지내던 거라고만 여겨왔었다.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지에서 고생하고 있다고.
열심히 공부에 매달리기도 바쁜 처지에 괴롭힘마저 견뎌내고 있다고.
그걸 나름 참아내고, 견디며, 가족에게 알리지 않는 자신이 대견하다고 여기고도 있었다.
한데 뒤늦게 알게 된 실상은 조금 달랐다.
하비엘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사기를 당했는지.
가문이 얼마나 큰 빚더미에 깔렸는지.
그 상황에서 로이드가 어떻게 달라지기 시작했는지.
"솔직히, 처음엔 좀 안 믿었어. 형이 그렇게 바뀌었다는 걸 어떻게 쉽게 믿겠어. 그런데 아스라한 경이 그러더라. 형, 정말 멋있었다고. 가끔은 치사했지만, 정말로 애쓰고 노력했다고. 만약 형이 아니었다면 우리 가문, 벌써 무너졌을 거라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저도 모르게 얼마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는지.
가족들이 감내했을 고초 떠올리며 얼마나 한숨 내쉬었는지.
비로소 깨달은 사실에 얼마나 자신을 자책했는지.
'알고 보니 내가 제일 편했던 거였어.'
한데 그걸 몰랐다.
그저 예전의 로이드일 거라고.
형을 믿지 않고 툴툴거리기만 했다.
말 그대로 어린애처럼 굴기만 했다.
"그래서 미안."
"미안하다고?"
"응."
줄리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망해서 로이드와 눈을 마주치진 못했다.
그래도 용기를 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
형은 내일 영지로 돌아갈 거다.
그러니까, 지금 말해야 한다.
그렇게 줄리앙은 지난 몇 달 동안 마음속에만 품고 있었던, 하지만 낯뜨거워서 차마 꺼내지 못했던 진심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나 이젠 형, 안 미워하려고."
그 순간이었다.
딩동.
[줄리앙 프론테라가 당신에게 진심을 전해 오고 있습니다.]
[줄리앙 프론테라의 가슴 속 감정의 응어리가 풀리고 있습니다.]
[줄리앙 프론테라가 당신을 자신의 형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줄리앙 프론테라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65 상승하였습니다.]
[줄리앙 프론테라와의 현재 관계 : +6]
[주요 인물과의 획기적 관계 개선으로 91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3,929]
[줄리앙 프론테라와의 친밀 단계가 <혐오>에서 <껄끄러움>, <무관심>을 거쳐 <일상적 관심>으로 3단계 상향되었습니다.]
[친밀 단계 상향에 따른 보너스로 100 RP를 추가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4,029]
생각지 못했던, 훈훈하고 뿌듯한 감정이 가슴을 살며시 노크해 왔다.
94화. 고자질과 야바위 (2)
"...녀석도 참."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흘러나온다.
눈앞에 서 있는 줄리앙.
녀석을 보자니 훈훈하고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손발이 인정사정없이 오그라들었다.
방금 녀석이 꺼낸 말을 돌이켜보자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니까, 이젠 날 안 미워하겠다고?"
"...어, 응."
"전엔 많이 미웠다는 소리네."
"응, 그랬지."
"그럼 이젠 어떻게 대할 건데?"
"어, 그게...."
"막 살갑게?"
"음, 그건 아니고."
"그럼? 친근하게?"
"...."
"완전 따스하고 훈훈하고 알콩달콩 부드럽게?"
"...아, 씨."
줄리앙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로이드의 입가에 얄미운 미소가 맺혔다.
"이젠 방금 네가 무슨 짓을 했던 건지 좀 알겠냐?"
"후우, 응."
"손발 오그라들었지?"
"어."
"난 아주 발가락 끝까지 닭살 돋고 그랬어, 인마."
"...."
"다시는, 그런 느끼한 말은 하지 마라."
"...."
"어휴, 십이지장에 경련 올 뻔했네, 진짜."
로이드가 자신의 배를 짐짓 퍽퍽 쓰다듬었다.
사실 말은 얄밉게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더없이 기쁘고 흐뭇했다.
단순히 RP를 많이 얻어서?
아니었다.
RP라는 눈에 보이는 핵이득 보상도 물론 흐뭇했지만, 그보다는 마음으로 느껴지는 훈훈함이 훨씬 컸다.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난 까닭이었다.
'그땐 나도 동생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실제로 형제가 있는 사람들이 듣는다면 기겁하며 말릴(?) 법한 생각이었다.
그래도 자신은 진심이었다.
외동으로 자라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씩 부모님께 떼를 써보기도 했다.
나도 동생 갖고 싶다고.
옆집 애들처럼 동생이랑 놀고 싶다고.
그러다 여덟 살 무렵이었던가.
하루는 거실 벽에 크레파스로 사고마저 쳤다.
남자 어린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태권브이 로봇을 삐뚤빼뚤 그렸다.
당시의 자기보다 한 뼘쯤 키가 작게.
나름 역동적인 만세 포즈도 잡아서.
색칠까지 야물딱지게 했다.
그렇게 그날 저녁, 난데없는 거실 벽화를 보며 놀라는 부모님을 향해, 오늘부터 쟤가 동생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얘기했더랬다.
당시의 부모님은 자신을 혼내기보단 그저 난감한 듯 쓴웃음만 지으셨던가.
그래서 당시엔 몰랐다.
자신도 시험관 시술로 간신히 태어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후우, 생각하지 말자.'
가끔, 아니, 간혹.
이렇게 불쑥 치솟듯 떠오르는 옛 기억이 문제다.
예고도 없이 사람을 쓸데없는 감상에 풍덩 빠뜨려 버리고 만다.
로이드는 살짝 흘려내는 한숨과 함께 날름대는 기억 끄트머리를 가슴속에 눌러 담았다.
그리고 줄리앙을 쳐다보았다.
"어쨌건, 내일 남작령으로 돌아갈 거야. 아, 물론 그 전에 오늘 저녁 일정부터 소화해야겠지만."
"저녁 일정?"
"어. 아까 국왕님이 그러시더라고. 저녁에 끝내주는 파티가 열릴 거니까 꼭 참석하라고."
"파티?"
"어. 연회. 현수교 완공 기념 왕실 연회라더라. 뭐, 가봤자 뻔하지. 악단이 음악 연주하고, 그 사이에서 귀족들 눈치 살피며 인맥 좀 다지고. 그러다가 무례한 젊은 귀족 놈이 까불면 결투다! 하고 외쳐주고. 완전 흔해빠진 레퍼토리잖냐."
"형, 상상력이 전보다 풍부해졌네."
"똑똑해진 거라고 알아들을게. 아무튼, 거기 너도 같이 가자."
"어? 나도?"
줄리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당연하지. 명공의 동생이잖아. 그것만으로도 자격이 충분해. 게다가-"
그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조금 전에 말한 대로 그 연회, 참석하면 고위 귀족들이랑 많이 마주칠 거다."
"으음, 그러면...."
"오늘 낮에 내가 고자질한 가문 사람들도 있겠지."
"그럼 좀 껄끄러운 거 아냐?"
"아니, 오히려 당당하게 참석해야 해. 말 그대로 넌 잘못한 게 하나도 없으니까. 피해자니까. 그런데 숨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정말이다.
이럴수록 당당해야 한다.
얼굴 가득 힘주고 티타늄 철판을 빡 둘러야 한다.
"그러니까 이참에 너도 좀 뻔뻔해지자. 알았어? 그래야 뒤가 편해질 거야."
"응, 알았어."
줄리앙도 이쪽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똑똑한 녀석이다.
로이드는 새삼 흐뭇함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스스로를 위한 각오 또한 다졌다.
'아마도 오늘 연회, 단순히 축하를 위한 자리는 아닐 테지.'
국왕은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니다.
분명, 자신을 곁에 두려고 할 것이다.
거창한 관직, 혹은 입이 떡 벌어질 포상. 그런 갖가지 꿀단지를 내밀며 자신을 왕도에 눌러 앉히려 들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부려 먹으려고 자신을 여기까지 불렀고, 능력을 시험한 것일 테니까.
'물론 나도 호락호락 남아줄 생각이 없지만.'
어디까지나 현재 자신의 장래희망은 꿀벌 같은 백수였다.
더 이상의 고생은 싫었다.
너무 애쓰면서 사는 것도 사양이었다.
이제는 남작령으로 돌아가 빚을 청산하고 꿀만 빨면서 살고 싶었다.
그러니 이제는, 남작령으로 홀가분하게 돌아가기 위한 마지막 야바위를 쳐야 할 때였다.
♣
느릿느릿 우아한 선율이 대리석 바닥을 간질였다.
샹들리에 가득한 반짝임이 별빛처럼 흘러내렸다.
그토록 화려하고 웅장한 왕궁 연회장, 영광의 홀.
그 속에서 로이드는 정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국왕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예를 차렸다.
대뜸 선빵을 치듯 말했다.
"위대한 국왕 전하 만세. 그리고 성은이 망극하오나, 싫사옵니다."
"...싫다니, 무엇이?"
국왕,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의 한쪽 눈썹이 뾰족하게 치켜 들렸다. 항상 느끼는 사실이지만, 참으로 뻔뻔하고 신기한 놈이다.
국왕이 재차 물었다.
"짐은 아직 아무것도 묻지 않았도다. 한데 그대는 대체 무엇을 그토록 거부하고 싶기에 짐을 향하여 대뜸 싫다는 말부터 꺼내는 것인가."
"이제부터 제게 적절한 봉토와 작위를 하사하겠노라 말씀하시려던 참이 아니시었는지요."
"짐이?"
"그러하옵니다."
"어째서?"
"제게 왕실의 관직을 받으라 말씀하시려는 뜻이 아니시온지."
"흐음, 혹시 그대는 독심술이라도 익혔는가?"
"아니옵니다."
"하면?"
"눈치이옵니다."
"하."
딸각.
국왕이 짧게 웃으며 크리스털 잔을 놓았다.
시종장의 쟁반에서 새 잔을 들었다.
살짝 기울이는 잔 가장자리 너머.
내리깐 눈동자에 로이드를 담았다.
"이쯤이면 인정을 아니 할 수 없겠구나. 그대의 추측이 맞도다. 짐은 오늘 그대에게 적절한 봉토와 작위, 막대한 금화를 안길 생각이었지. 아울러 그대에게 걸맞은 관직 또한 하사하려 하였다."
"그것을 두루 알리기 위하여 연회를 여신 것이시옵니까."
"그러하다."
두 번째 잔이 기울어졌다.
드라이하면서 산도가 높은 스파클링 계열을 첫 잔으로.
그다음부터는 풍미가 은은한 레드 계열을 단계적으로.
그것이 국왕 알리시아가 즐기는 음주 패턴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그 루틴을 충실히 지키며 말했다.
"하여 짐은 궁금하구나. 작위와 봉토, 금전, 거기에 관직까지 내려주겠다는데 어찌하여 그대는 그것을 싫다 말하는가."
"딱히 거창한 이유는 없사옵니다. 다만-"
"다만?"
"저는 그저 초야에 묻혀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사옵니다."
"...단지 그것뿐인가, 이유라는 것이?"
"그러하옵니다."
로이드는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세 번째 잔을 기울이며 침묵에 빠진 국왕.
그런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생각했다.
'좋아. 생각대로 굴러가고 있어.'
문득, 아까까지의 일이 떠올랐다.
오늘 저녁의 이 연회에 참석하기까지 계속 고민을 거듭했던 자신이었다.
반드시 날아올 국왕의 영입 제의.
그걸 어떻게 거절하는 것이 좋을까.
예복을 갖추고, 머리를 매만지고, 마차에 몸을 실으면서도 줄기차게 고민했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정공법이 답이리라는 것이었다.
'괜히 어설픈 핑계를 댔다간 자칫 외통수에 걸릴 수 있으니까.'
사실 핑계를 댈 방법은 많다.
몸이 아프다든가, 집안에 우환이 있다든가.
혹은 바쁘다든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든가.
갖다댄다면 모든 게 핑계가 될 수 있다.
양호실에 가려고, 조퇴를 하려고, 월차를 땡겨 쓰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핑계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했던가.
대한민국에서 핑계로 성공한 사람은 김건× 뿐이라고.
로이드는 지금 상황에도 그 명언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여겼다.
'핑계를 대는 순간, 스스로 만든 거미줄에 걸리는 거니까.'
건강 때문에 관직을 못 받는다면, 건강해지면 된다.
집안의 우환이나 바쁨도 마찬가지다.
모두 핑계의 원인이 제거되는 순간, 다음 변명거리가 없어진다.
하물며 지금 핑계를 받을 상대는 국왕이었다.
국왕을 상대로 어설픈 핑계를 대면서 관직을 거절했다간 나중에 정말 빼도 박도 못 하고 코 꿰여서 국왕의 신하가 되는 수가 있다.
'딱 황희 정승 꼴 나는 거지.'
고려 말기 시절.
태종 이방원과 과거시험 동기동창이었던 황희 정승이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방원의 아들인 세종대왕께 발탁되어 늙어 죽을 때까지 쉬지도 못하고 나랏일에만 매달려야 했다.
제발 좀 쉬고 싶다고 아무리 애원해도 씨알도 안 먹혔다.
건강을 핑계로 대고 가족사를 이유로 들어도 결국엔 벗어날 수 없었다.
평생 뼈 빠지게 일만 죽어라 했다.
그렇게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가 진짜로 죽었다.
'으으, 소름.'
로이드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팔자에도 없는 평생 노예 당첨은 진심으로 사양이다.
그러니 지금은 어설픈 핑계를 대기보다는 대놓고 정공법으로 승부하는 게 나으리라. 그쪽이 훨씬 승산이 높으리라. 그렇게 로이드는 판단했다. 행동했다. 실행에 옮겼다.
마침내 예상대로의 반응을 얻어내게 되었다.
"알겠다. 감히 짐을 상대로도 싫다고 자르듯 말할 만큼 싫은 것이로군."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마음이 없는 자를 억지로 곁에 눌러 앉혀봐야 서로에게 득 될 것이 없겠지. 마음도 없이 몸뚱이만 앉아 있는 자가 어찌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겠는가."
국왕의 입술에 피식, 쓴웃음이 배어났다.
"짐은 폭군이 아니야. 그대는 이곳 왕도에서도, 일찍이 크레모에서도 크나큰 공로를 세워준 공신이지. 그런 그대의 뜻을 존중하고 싶노라. 하니 그대는 원하는 대로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편히 보내도록."
"실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정말로?"
"...."
"내심 다행이라 여기고 있겠지. 그 마음 또한 알고 있다. 하여 짐이 그대에게 당부하노니,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면 왕도로 올라오길 바란다."
"...관직의 문이 언제나 열려 있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당연하다."
딸각.
네 번째의 잔을 들며 국왕 알리시아가 말했다.
"짐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노니, 그대를 위한 봉토와 작위, 관직은 언제든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훗날엔 정말로 망극해지길 바라지. 그럼 이만."
국왕의 몸 돌리는 소리.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가 멀어졌다.
그제야 로이드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후아."
폐에 갇혀 있던 숨이 비로소 확 내쉬어져 나온다.
가슴 쓸어내리던 주먹이 문득, 쥐어진다.
'성공이다!'
로이드는 내심 환호했다.
다행히 정공법 전략이 먹혔다.
'역시 아무리 국왕이라도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관직에 앉힐 수는 없는 법이니까.'
문득, 삼국지의 유명한 고사인 '삼고초려'가 떠올랐다. 당시 유비도 제갈량을 영입하기 위해 얼마나 발로 뛰는 영업을 해야 했던가.
이곳 세상도 사람 사는 곳이니 비슷할 거라 여겼다.
다행히 그 예상이 보기 좋게 적중했다.
'게다가 훗날 필요하면 작위와 봉토를 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았으니까, 이건 말 그대로 만일에 대비한 노후보장까지 완벽해진 거지.'
절로 흐뭇한 웃음이 실룩실룩 새어나왔다.
이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빚도 갚고.
평생 꿀 빨며 살 일만 남았다.
말 그대로 강남에 대출 없이 34평 신축 아파트를 마련하고, 독일제 외제차도 할부 없이 장만하고, 애들 학원비에 대학등록금이랑 결혼 자금에 본인 노후 연금까지 모조리 완비된 인생을 앞둔 기분이었다.
'후. 생각만 해도 빨리 남작령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제 마음 편하게 놀자.
왕궁 연회다운 맛있는 음식이나 즐기자.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사흘쯤 굶다가 뷔페에 입장한 사람처럼 걸었다.
음식 쟁반 든 시종들을 향해 다가갔다.
한데 그때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한마디가 덜컥, 그의 걸음을 멎게 했다.
"연회는 달이 기울 때까지 이어질 겁니다."
'어?'
어디선가 평범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수상하다는 냄새 따위는 조금도 느낄 수 없을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로이드는 얼음물을 흠뻑 뒤집어쓴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 말이 왜 지금 나와?'
불현듯, 소설 철혈의 기사 속 내용이 떠올랐다.
지금 시점으로부터 2년 반 후.
불운한 사건이 왕도를 덮치게 된다.
바로 국왕 시해 미수 사건이었다.
그날, 국왕 알리시아를 중독시키고 그녀의 한쪽 팔을 앗아간 자들이 나누던 암호가 있었다.
너무나 평범했던 한마디.
수상하다는 냄새 따위는 조금도 느낄 수 없을 한 마디.
'그게 바로 '연회는 달이 기울 때까지 이어질 겁니다'였어.'
그러니 저 말은 지금 들려와선 안 된다.
2년 반 뒤에나 들려와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걸 듣고 말았다.
로이드는 말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봤다.
시종장과 함께 웃고 있던 근위대장, 체르니 경과 눈이 마주쳤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로이드는 확신했다.
소설 속에서 끝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국왕 시해 미수 사건의 범인을, 어쩌면 자신이 찾아낸 것 같다고.
95화. 얼룩진 왕관 (1)
"후우. 술이 과했나."
또각, 또각.
복도 가득 울리는 구두굽 소리.
그 속에서 국왕 알리시아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평소와 똑같이 마셨을 뿐인데.'
어쩐지 속이 살짝 거북했다.
심장도 조금 빠르게 뛰었다.
'최근 너무 무리를 거듭해서인 건지도.'
복도를 걸으며 그녀는 자신의 최근 일정을 돌이켜보았다.
확실하고도 명백한 격무의 나날이었다.
'봄철 장마의 홍수 피해가 생각보다 컸어. 게다가 동부 황무지 건너편의 동향도 심상치가 않았지.'
왕국의 적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지금도 이쪽이 무너지길 바라는 세력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동부 산맥 너머, 황무지 건너편의 술탄국 '이스파한'과는 과거에도 큰 전쟁을 두 차례나 치렀을 만큼 전통적인 숙적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해.'
이스파한에 심어둔 첩자들.
그들이 전해 온 첩보가 떠올랐다.
최근 군비를 적극적으로 늘리고 있다고 하였다.
특히 이쪽과 마주하고 있는 저들의 서부 지방으로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고도 했다.
단순한 군사 훈련과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침공? 하지만 그건 아니야. 우리와 그쪽 사이에는 드넓은 황야 지대가 있으니까. 만약 정말로 침공을 시도하는 것이라면 그나마 국경이 맞닿아 있는 북쪽으로 병력을 집결했을 터.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위해?'
지난 몇 달간 그녀를 고민으로 빠뜨린 의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답은 오리무중이었다.
술기운이 올라오는 지금은 더욱 그러했다.
'쯧. 잠시 잊자.'
쓴웃음이 짙어진다.
지금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쓸데없는 피로만 더해질 뿐이다.
하니 지금은 현재에 충실하자.
술기운부터 누그러뜨리고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국왕은 전용 휴게실로 들어섰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숨을 골랐다.
하지만 어쩐지 술기운이 가라앉질 않았다.
여전히 속이 살짝 거북했다.
심장 두근거림도 가라앉질 않았다.
호흡도 평소보다 조금은 얕고, 빨라졌다.
'이상한데.'
국왕 알리시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
하물며 그녀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검사였다.
약간의 술기운 정도쯤은 체내의 마나를 다스리는 것으로 충분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한데 지금은 그게 잘 안 됐다.
아니, 오히려 눈앞이 어질어질해지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어.'
두근, 두근.
점점 더 빨리 뛰는 심장.
어쩐지 배어나기 시작한 진땀.
불길한 예감을 느낀 국왕은 소파에서 내려왔다.
구두를 벗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양반다리를 하고서 허리를 꼿꼿이 하였다.
본격적인 호흡을 시작했다.
심장을 일깨웠다.
강대한 마나하트가 그녀의 부름에 움직였다.
'우선 몸 구석구석에 대한 점검부터.'
그녀는 마나하트에 가득 담긴 마나를 모든 혈관으로 밀어 넣었다. 곧 그녀의 전신 혈맥을 따라 노도와도 같은 마나가 질풍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어야 했다.
쿠웅!
"...!"
허리가 꺾일 듯한 충격.
심장이 터질 듯한 통증.
"큽!"
국왕 알리시아는 눈앞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감각을 맛보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잃지 않았다.
황급히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독? 설마.'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심장에서 시작된 통증이 금방 전신으로 번졌다.
혈맥 속 마나의 흐름을 타고 내장 구석구석까지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그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독이라니. 대체 어떻게?'
알리시아는 이를 갈았다.
자신이 먹는 모든 음식, 음료는 시종들의 검사를 거친다.
각각의 음식과 음료를 시종들이 맛본다.
그리고 나흘을 기다린다.
자그마치 나흘이 지날 때까지 어떤 시종도 죽거나 이상 증세를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야 나흘 동안 저온 보관되던 음식이 자신의 식탁에 오르게 된다.
'오늘도 마찬가지였어.'
연회에서 자신이 먹은 음식, 술.
모두 평소와 같은 검사 절차를 거친 것들이었다.
물론 나흘 동안 어떤 시종도 쓰러지거나 죽지 않았다.
'그런데 왜?'
자신은 중독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다만 짐작되는 바는 있었다.
음식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분명 농간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이었다.
'일단은... 누군가를 불러야....'
도움을 받아야 한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독이 번지고 있었다.
마나를 사용해 억누르려 할수록 더욱 들불처럼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국왕 알리시아는 있는 힘을 쥐어짜서 외쳤다.
"밖에... 누구 없는가!"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 또한 매우 수상한 일이었다.
'젠장.'
휴게실에 들어오기 전, 편히 쉬기 위해 시종들을 물리긴 했다.
그래도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라 일러두었는데.
한데 어째서 아무도 대답이 없는 걸까.
"크으읏, 으읏...!"
그녀는 비틀비틀, 벽을 짚으며 문을 향해 걸었다.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입술을 질끈 깨물어야 가까스로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렇게 고작 몇 걸음을 걷는 사이에도 정신이 깜빡깜빡 꺼졌다가, 켜졌다.
'너무 멀어.'
평소엔 한 번의 도약으로 가볍게 움직일 거리.
한데 지금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휴게실이 너무 넓었다.
힘껏 움직이고는 있지만, 걸어온 거리보다 남은 거리가 훨씬 멀었다.
저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 내몰린 걸까.
그녀가 그런 절망감에 빠지려던 순간이었다.
달칵.
마치 기적처럼, 문이 열렸다.
가장 친숙한 사람이 휴게실로 들어왔다.
"체르니 경?"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남자.
언제나 곁을 지켜준 근위대장.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검술 스승이기도 한 소드마스터.
체르니 경의 모습에 알리시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체르니 경, 마침 잘... 왔군. 이렇듯 짐이 어려운 순간에 그대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자, 내 손을."
자신의 근위대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신을 부축해주길 바라며 미소 지었다.
물론 체르니 경도 자신의 주군을 향해 미소를 머금었다.
"예, 이렇듯 전하께서 어려운 순간에 제가 곁에 있어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그는 국왕이 내민 손을 맞잡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한때의 주군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체르니 경의 눈동자에 살기가 맺혔다.
♣
"아무래도 국왕 전하가 위험해지신 것 같다."
"...예?"
난데없이 속닥여 오는 로이드의 한마디.
하비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처음엔 로이드가 고약한 농담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로이드의 말이 진담이라는 것을.
"진짜야. 조용히. 목소리 낮춰."
"...."
"이유도, 자세한 내막도 나중에 알려준다. 일단 따라와."
"알겠습니다."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이 위험해진 것 같다는 말.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은 미적거릴 때가 아니리라.
이유도, 자세한 내막도 나중에.
지금은 일단 움직일 것.
너무 붙어서 오지는 말고.
몇 발짝 떨어져서 자연스럽게.
로이드는 눈빛으로 하비엘에게 지시했다.
눈치 빠른 하비엘은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시선으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저쪽.'
로이드의 눈동자가 연회장 한쪽을 가리켰다.
국왕의 휴게실이 마련된 쪽이었다.
'뻔하지. 국왕이 보이질 않아. 연회 도중에 자리를 비웠다면 지금 있을 곳은 거기밖에 없어.'
국왕도 사람이다.
연회 자리에선 취할 때도 있고, 지칠 때도 있다.
그런 순간에 술기운을 털어내거나 숨을 돌리는 동안 흐트러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마련된, 국왕만을 위한 휴식 공간이 휴게실이었다.
'게다가 철혈의 기사에서 국왕 시해가 시도된 장소이기도 하고.'
문득, 소설 속 내용이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2년 반 후.
첫눈 내리는 날.
연말 연회 도중에 휴게실에 들른 국왕 알리시아는 독살의 위기에 처한다.
소드마스터다운 마나 운용능력을 극한으로 발휘한다. 왼팔을 스스로 잘라낸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이 왕국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뀌는 대사건.
국왕 시해 미수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게 오늘이라니. 대체 왜?'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그 사건이 2년 이상 앞당겨진 건지.
나름 추측을 해보았지만 마땅히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아니, 유일하게 짐작이 되는 건 딱 하나.
'뭔가가 바뀐 거야.'
원래 흘러가야 했을 소설의 방향과 스토리가 바뀐 탓이리라.
만약 그렇다면, 그 원인은 자신일 수도 있겠다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일단은 확인부터 해보자.'
급해 보이지 않게.
연회장의 사람들 흐름에 섞여 자연스럽게.
때로는 잔을 집어 우아하게 들이켰다.
시종과 스쳐 지나며 미소도 지었다.
그렇게 연회장을 벗어났다.
긴 복도로 접어들었다.
그때부터는 하비엘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걸음도 조금 빨라졌다.
머릿속 계산도 더욱 핑핑 돌아갔다.
사실은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하필이면 체르니 경이라니.'
아까 우연히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연회가 달이 기울 때까지 이어질 거라던 말.
평범하게만 들리는 그 말은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나름 유명한 대사였다.
국왕 시해 미수 사건 때 암살자들이 나누었던 암호.
즉, 왕국의 역사를 바꾼 대사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로이드도 당연히 그 대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데 아까 그 대사를 뱉은 이가 하필이면 체르니 경이라는 게 문제였다.
'만약 정말로 체르니 경이 암살자인 거라면, 막을 수 있을까.'
베르가도 체르니 경.
왕실의 근위대장.
국왕 이상의 소드마스터.
그가 암살자일 수도 있다는 점이 충격이었다.
아니, 충격에 앞서 대적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사실 그래서 국왕을 구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나 깊은 고민까지 마친 그였다.
'오히려 역으로 당할 수도 있으니까.'
망설여졌다.
그래서 몇 분이나 생각에 잠겼다.
국왕을 구하는 것과 사건을 방치하는 것.
두 가지 선택지 사이의 이득과 손해를 철저히 따졌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다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국왕을 구하는 쪽이 훨씬 이득이야.'
사실 깊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현재 국왕 알리시아는 자신을 지극히 신뢰하고 있다. 게다가 과분할 정도의 호의마저 보이고 있다.
한데 그런 그녀가 오늘, 소설 속에서와 똑같은 위기에 처한다면?
그 끝에 한쪽 팔을 잃게 된다면?
마침내 폭군이 되어 버린다면?
'나만 왕창 손해지.'
자신을 지극히 신뢰하고 아껴주는 국왕.
원한다면 언제든 봉토와 작위를 주겠다는 국왕.
그렇게 자신을 둥기둥기 정성껏 예뻐해 주는 국왕.
말 그대로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국왕이 후원자가 되어준 상황이었다.
한데 그 후원자가 독에 당하고 팔을 잃는다면?
학살을 일삼는 폭군으로 타락해 버린다면?
'상상도 하기 싫네, 그건.'
최고의 후원자를 잃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칫 분풀이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애꿎은 죄목을 뒤집어쓰고,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고, 재산과 작위를 몰수당하고, 심지어는 목이 뎅겅 날아가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안 구할 수가 없잖아.'
체르니 경이 상대라 하더라도 무조건.
함께 있는 하비엘을 믿고서 늦기 전에 빨리.
탁탁탁탁!
어느새 로이드와 하비엘의 걸음은 달리기에 가깝게 바뀌어 있었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기나긴 복도를 달려가는 내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흔한 시종도, 시녀도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모퉁이를 세 번이나 돌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뭔가 수상합니다."
하비엘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로이드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런데 괜찮겠냐."
"예?"
"검, 없이 말이다."
"괜찮을 겁니다."
카앙!
대답과 동시에 하비엘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날이 복도 벽에 걸려 있던 촛대를 꺾었다.
꺾인 촛대가 불빛을 반사하며 허공에서 휙휙 돌았다.
하비엘의 손이 그 아랫부분을 낚아챘다.
타악!
"이거면 그럭저럭 충분합니다."
연회에 참석하느라 비무장이었던 문제가 해결되었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휴게실을 앞둔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휴게실 문 앞 바닥이 피바다였다.
그 피 웅덩이 속에 시종 여섯이 쓰러져 있었다.
모두 숨이 끊어진 채였다.
그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콰앙!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휴게실 문을 걷어찼다.
부서지는 문짝 파편 사이로 뛰쳐들어갔다.
안쪽에 두 사람이 있었다.
검을 짓누르는 체르니 경.
검을 힘겹게 막고 있는 국왕.
그 모습을 본 하비엘이 먼저 반응했다.
스칵!
하비엘의 손에 들린 촛대가 서늘한 검기를 품고서 공간을 저며냈다. 휩쓸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연격이 사납게 쏟아졌다.
체르니 경의 검이 마주 움직였다.
카카카카카카-캉!
촛대와 검이 연달아 격돌했다.
살벌한 불꽃을 허공에 수놓았다.
하비엘의 손목에 힘줄이 돋았다.
체르니 경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사나운 두 짐승의 눈동자가 얽혔다.
그사이 로이드는 재빨리 격전의 현장을 지나쳤다.
곧바로 국왕을 향해 달려갔다.
"...로이드, 프론테라?"
"죄송합니다. 지금은 입 좀 다물고 계시지요."
"무슨... 읍?"
로이드의 커다란 손이 국왕의 입을 막았다.
국왕이 어떻게 저항할 틈도 없이 바닥에 부드럽게 눕혔다.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고, 가능하지도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극독에 전신을 잠식당한 국왕이었다.
그걸 알기에, 로이드는 자잘한 예절과 예법 따위는 모조리 집어치워 버렸다.
대신 지금 필요한 응급처치에만 집중했다.
"독부터 빼겠습니다. 힘 빼십시오. 긴장도 푸시고."
키이이이잉!
로이드의 손바닥이 국왕의 명치를 짚었다.
세 개의 써클이 한계속도로 회전했다.
국왕의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
국왕 알리시아의 두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96화. 얼룩진 왕관 (2)
키이이이잉!
하비엘의 세 갈래 써클이 회전했다.
제각각의 속도로 회전하며 공명했다.
때로는 서로의 회전을 증폭시켰다.
또 때로는 회전을 억제시켰다가, 폭증시켰다.
그렇게 감속과 가속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마나를 분출했다.
찌르고, 베어 가는 촛대에 한껏 실었다.
카아앙-!
촛대와 검이 충돌했다.
허공에 강렬한 불꽃을 뿌렸다.
동시에 촛대 가지 하나가 잘려나갔다.
검이 짓쳐들어왔다.
곧바로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그에 대한 하비엘의 대응은 고개를 단 3센티만 까딱, 움직이는 것이었다.
후욱.
검이 코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머리칼 한 올도 베지 못했다.
하비엘의 냉랭한 눈동자가 검이 지나간 궤적 너머, 적을 향했다.
적, 체르니 경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왕실 근위대장, 체르니 경의 눈에 놀라움이 배어났다.
'그걸 피했어?'
분명 베었다고 생각했다.
타이밍, 검의 궤적, 상대인 은발 애송이의 흐트러져 있던 무게 중심, 그런 모든 상황이 완벽했다.
그런 상황에서 목이 베이지 않은 적수는 없었다.
한데 오늘은 아니었다.
은발 애송이가 자신의 검을 피했다.
그것도, 고작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고개를 까딱 움직이는 것만으로!
'설마 내 검의 궤적을 읽고 있다는 건가?'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내 코웃음으로 소름 털어냈다.
자신이 누군가.
왕국에 둘밖에 없는 소드마스터 중의 하나다.
저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놈 따위에게 당할 자신이 아니다.
"애송이 주제에!"
쿠우웅!
체르니 경의 한 발이 바닥을 거칠게 짓밟았다.
그 한 번의 발구름으로 모든 무게 중심을 바꾸었다.
빗나갔던 검을 순식간에 끌어당겼다.
체중과 마나를 실어 강렬하게 뿌렸다.
콰아아-!
횡으로 뿌려진 검이 포효하듯 공기를 터뜨렸다.
앞서의 베기를 피했던 하비엘이 미처 반격을 시도하기도 전이었다.
"...큿!"
이번만은 하비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기 자체를 베어서 생성한 충격파.
온몸을 때려왔다.
대응 방법은 하나.
츠카가가갓!
촛대를 휘둘렀다.
바람보다 빠르게.
공간을 저며내며.
마주 충격파를 만들었다.
투확!
새로 만들어진 충격파가 체르니 경의 충격파와 만났다.
서로를 밀어내고, 얽히다, 상쇄되었다.
충격파가 사라졌다.
체르니 경의 눈에 경악이 배어났다.
"이런 놈이 어디서... 읏?"
카카카카캉-!
무어라 말을 붙일 틈도 없었다.
하비엘이 돌진했다.
상쇄되어 흩어지는 충격파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촛대를 내리쳤다.
후렸다가 걸고, 찍고, 찌르고, 올려쳤다.
숨 막힐 듯한 속도로 체르니 경을 몰아쳤다.
'쉴 틈을 주면 안 돼.'
냉정한 상황 판단과 계산.
명확히 그려지는 승부의 흐름.
하비엘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어째서 근위대장이 국왕 전하를 시해하려 들었는지는 모른다. 아니, 그건 지금 싸움에 참고할 필요가 없어. 지금 명심해야 할 것은 단 하나. 몰아치고 압박하는 것.'
오직 눈앞의 상대에만 집중한다.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고, 전략을 수립하며, 전술을 실행한다.
'체르니 경은 소드마스터다. 쉴 틈을 주면 곧바로 오러 소드를 생성할 거야. 그러면 승산이 사라진다. 어떻게 해서든 계속 몰아붙여서 오러 생성을 막고 싸움을 길게 끌어야 해.'
하비엘의 눈이 힐끗 움직였다.
국왕과 로이드 쪽을 향했다.
'중독.'
대략의 상황이 그려졌다.
독에 당한 국왕.
그 독을 아스라한 심법으로 빼내려는 로이드.
그렇다면 자신이 할 일은 하나다.
로이드가 국왕을 살리는 동안 체르니 경을 붙잡고 시간을 끄는 것.
그가 외쳤다.
"검을! 이리로!"
카아앙!
그 순간, 촛대가 완전히 부러졌다.
순식간에 빈손이 되었다.
체르니 경의 검이 그 틈새를 파고들어 왔다.
쉭, 츠칵! 스큭!
검이 심장을 찌르고, 팔을 베고, 다리를 휩쓸어 왔다.
하비엘이 물러나고, 몸을 뒤틀고, 스텝을 바꾸었다.
뒤로 손을 뻗었다.
"받아!"
새 검이 날아왔다.
로이드가 뽑아 던진 국왕의 검이 하비엘의 손아귀에 그림처럼 잡혔다.
크카앙!
검과 검의 충돌.
하비엘의 푸른 눈동자.
체르니 경의 일그러진 눈매.
두 맹수의 눈길이 검을 사이에 두고 얽혔다.
힘과 힘의 균형.
탐색과 파악.
그것은 고요하고 격렬한 대치였다.
내쉬는 숨결 하나.
눈동자의 미세한 움직임.
그 모든 행동에 살기와 속임수가 섞였다.
하비엘을 향해 내뱉는 체르니 경의 말 또한 그랬다.
"크레모에서 기가티탄과 맞섰다던 말이 과장이 아니었군그래."
"...."
"그런데 이상하군. 아직 소드마스터는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내 검을 받아내는 거지?"
"...."
"하. 대답할 생각이 없는 건가. 아니면 대답할 여유가 없나?"
"...."
카앙!
하비엘의 검이 체르니 경을 거칠게 밀어냈다.
그렇게 만들어낸 순간의 틈새.
하비엘은 로이드를 돌아보았다.
눈짓을 주었다.
'시간을 만들어드리죠.'
'그래, 조심하고.'
두 남자의 눈빛이 짧게 얽혔다가 풀렸다.
하비엘이 체르니 경을 몰아붙였다.
키이이이잉!
써클 두 개를 충돌시켰다.
충돌이 막대한 힘을 생성했다.
생성된 힘을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투확-!
맹렬한 발파가 체르니 경을 향해 쏘아졌다.
체르니 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콰앙!
엉겁결에 마주 휘두른 검.
가까스로 발파를 튕겨냈다.
체르니 경의 몸도 7미터나 날려갔다.
아예 왕의 휴게실 밖 복도 벽에 등짝이 처박혔다.
투컥!
"크읍!"
그러고도 해소되지 않은 충격이 어깨와 팔뚝, 검을 찌릿하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무식한....'
투확!
두 번째 발파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체르니 경도 감히 막아낼 생각을 못했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투콰앙-!
방금 그가 있던 자리에 발파가 꽂혔다.
지름 50센티에 달하는 깊숙한 구멍이 벽에 새겨졌다.
"...."
이런 공격 수단은 들어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다.
검으로 저런 공격이 가능할 것이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
'위험한 놈.'
체르니 경의 감각에 경보가 울렸다.
더는 상대가 애송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싸움 장소마저 그에게 점점 불리해졌다.
투확! 투화학-!
"그읏!"
연달아 발파가 날아왔다.
그때마다 체르니 경은 가까스로 발파를 피해내야 했다.
'공간이 너무 좁아!'
좁고 긴 복도였다.
그런 곳에서 사정거리가 수십 걸음은 되는 발파가 계속해서 날아왔다.
반면 자신은?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기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반격은 고사하고, 자리를 지키는 것도 버거웠다.
만약 오러 소드로 맞선다면 저런 공격쯤, 손쉽게 갈라 버릴 터인데.
하지만 오러를 생성하려면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다.
상대인 은발 애송이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점점 초조해졌다.
'오러로 국왕을 베었다가 시신에 오러의 흔적이 남을 것 같아서 망설였건만. 그 결정이 발목을 잡는군.'
으드득!
체르니 경은 자신의 임무를 떠올렸다.
국왕의 숨통을 확실히 끊는 것.
그 임무를 마치려면 저 휴게실로 돌아가야 한다.
한데 웬 은발 애송이 놈이 튀어나와 자신과 대등하게 맞서고 있었다. 아니, 듣도 보도 못한 위력적인 기술로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날 국왕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수작인가.'
체르니 경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하비엘이 전진했다.
좁고 긴 복도에서 연달아 발파를 쏘아내며 앞으로 움직였다.
그때마다 체르니 경이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하비엘이 밀고, 체르니 경이 밀려나고.
발파가 쏘아지고, 가까스로 피해내고.
하비엘은 지쳐가고, 체르니 경은 독기가 오르고.
그렇게 얼마나 밀고, 밀려났을까.
뒷걸음만 치던 체르니 경이 마침내 복도에서 나오게 되었다.
투화학-!
다시금 내쏘아진 발파를 피하려 뒤로 훌쩍 뛰었다.
좁은 복도를 벗어나 드넓은 연회장 붉은 카펫 위로 착지했다.
챙그랑, 퍼석, 테이블이 넘어지고, 잔이 깨졌다.
콰장창, 꺄악, 샹들리에가 떨어지고,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하비엘이 복도 출입구에 버티고 섰다.
스르릉.
하비엘의 손에 들린 국왕의 검이 시리게 번득였다.
그 번득임으로 말없이 선포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어떤 누구도 복도에 발들이지 못할 것임을.
"하. 건방진 놈."
뚝, 뚝, 떨어지는 땀방울 사이로 체르니 경의 사나운 미소가 번졌다.
이제야 좀 알겠다.
무슨 의도로 여기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것인지를.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시간을 끌겠다는 거로군.'
국왕의 휴게실로 향하는 저 복도는 외길이다.
그러니 외길의 끝, 저곳만 틀어막고 있으면 된다.
그러다가 조금씩 밀려나면?
'밀려나더라도 죽지만 않고 버티면 남은 복도의 길이만큼 또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을 한 건가.'
체르니 경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비로소 파악되는 하비엘의 의도.
그걸 역으로 이용한 계책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그가 주위를 재빠르게 둘러보았다.
음악과 대화가 끊긴 연회장 구석구석.
날카로운 눈빛을 한 채 허리춤에 손을 얹은 자들이 보였다.
모두 익숙한 얼굴들.
자신이 이끄는 근위기사들이었다.
그들이 이쪽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은 아직 휴게실에서 일어난 일도, 내가 배신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으니까. 즉, 저들에겐 여전히 내가 근위대장이라는 말씀.'
체르니 경의 조소가 한층 짙어졌다.
짐짓 위엄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근위대원들은 들으라."
그의 검이 치켜들렸다.
복도 출입구에 버티고 선 하비엘을 가리켰다.
"저자가 감히 반역을 꾀하였다. 일당과 더불어 국왕 전하를 시해하려 들었으며, 지금은 국왕 전하를 인질로 삼아 복도 내부를 점거하려 들고 있다. 하니, 자랑스러운 근위대원들이여. 국왕 수호의 검을 높이 치켜들라!"
그의 명이 떨어진 직후.
촤아앙-!
연회장 곳곳에서 수십 자루의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복도 출입구를 반원으로 둘러쌌다.
그렇게 하비엘을 순식간에 반포위했다.
츠즈즈즈즈...!
근위대원 각자는 최소 소드 익스퍼트 중급에서부터 상급까지의 실력자.
그들의 검이 일제히 검기를 머금고서 섬뜩한 검명을 토해냈다.
그런 그들의 하비엘을 향한 눈동자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자신들의 지휘관, 체르니 경의 명을 굳게 믿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 검 때문인가.'
하비엘의 입가에 희미한 쓴웃음이 걸렸다.
사실 이쯤은 예상했던 바였다.
복도 끝까지 체르니 경을 몰아붙일 때부터 각오하기도 했다.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이 국왕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만.'
그런 이쪽의 사정 따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배신 사실을 숨기고 있는 체르니 경의 말을 더욱 믿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어. 이미 근위대장이 배신하여 국왕 시해를 시도한 상황. 저들 근위대원 중에 배신자가 또 없으리라곤 볼 수 없을 터. 이제부터는 그 누구도 이 안쪽으로 들이지 않는다.'
하비엘의 자세가 태산처럼 묵직해졌다.
전신에서 서늘한 기세가 쏟아져 나왔다.
한 마리 엄격한 맹수 같은 눈초리를 던졌다.
"나 하비엘 아스라한이 기사의 자격으로 묻노니, 국왕 전하께 올린 서약을 저버릴 자는 감히 앞으로 나오라."
"...뭐?"
근위기사들이 멈칫했다.
그들의 표정이 굳었다.
감히 국왕 시해를 시도하고 휴게실로 향하는 복도를 점거하고 있는 주제에, 지금 뭐라고?
그때였다.
"반역자의 궤변에 흔들리지 마라. 쳐라!"
체르니 경의 외침이 울렸다.
그 순간, 근위기사들이 일제히 땅을 박찼다.
"이야아아아아!"
국왕을 수호하려는 근위기사단의 검이 움직였다.
국왕을 수호하려는 은발의 기사를 죽이려 휘둘러졌다.
같은 뜻을 지닌 자의 전신을 찢어발기려 송곳니처럼 번득거렸다.
그러나 하비엘은 침묵했다.
자신을 향한 지독한 비합리적 공세 앞에 일말의 변명도 내뱉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향한 의심과 오해, 노도와 같은 공세에 맞서 오로지 검으로 대답했다.
츠칵! 카카카카캉!
한 번에 세 명씩.
일사불란하게 달려드는 검을 막고, 걷어내고, 밀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살의를 정면으로 받아쳤다.
그 속에서 서늘하게 빛나는 눈길을 들었다.
저 멀리, 하나의 상대만을 쏘아보았다.
체르니 경이었다.
그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잔챙이들 말고 당신이 직접 덤비라고.
그 전엔 간단히 쓰러져 줄 생각 따위, 조금도 없다고.
그 눈길이 체르니 경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좋다.'
체르니 경이 씨익 웃었다.
이 싸움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숨을 골라낸 그였다.
단 몇 번의 호흡으로 기세를 되찾았다.
비로소 소드마스터 특유의 마나 순환이 일어났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공명했다.
이윽고 사납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은빛 검날을 뒤덮는 섬뜩한 광휘.
오직 소드마스터만 구사할 수 있는 최후의 무기.
발동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일단 발동되면 무엇이든 베어내는 최강의 흉기.
오러 소드가 야수의 송곳니처럼 사나운 빛을 토해냈다.
'네놈이 이곳을 자신의 무덤으로 정한 것이라면 그 소원, 내가 들어주마.'
그의 서늘한 눈길, 살기 서린 걸음이 하비엘을 향했다.
저벅저벅, 성큼성큼, 악의 가득한 날붙이 치켜들었다.
순식간에 뛰어들었다.
공간을 좁혔다.
투팟!
"...!"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단숨에 두 걸음 간격 안쪽으로.
하비엘의 빈틈을 잡은 체르니 경이 씨익 웃었다.
"잡았다."
쏴아아아아-!
강렬한 오러 소드의 일격이 해일처럼 하비엘을 덮쳐갔다.
동시에 하비엘도 검을 뻗었다.
발파를 내쏘았다.
발파가 오러 소드와 충돌했다.
그리고 해일에 갈라졌다.
"...!"
서컥!
발파를 둘로 가르며 쇄도한 오러 소드가 하비엘의 가슴을 찢어발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