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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제3편 실력 확인 (1)

최대한 놀라지 않게 순화해서 말을 했지만, 어머니는 눈을 감으며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그저 평안하게 살기를 바랐는데...."

역시, 어머니의 촉은 무서웠다. 내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신 것 같았다.

나도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솔직히 내 능력이 아니었으면 이미 예전에 죽은 몸이었다.

평안하게 살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아득바득 움직여야만 했다.

"거기다 마누엘 공자와 대련이라니, 괜찮겠니?"

"네. 괜찮아요. 아! 그래요. 같이 가요. 어머니도 제 실력을 보셨으면 해요."

생각해 보니, 어머니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었다. 유학을 가게 되면 남은 어머니도 걱정이지만, 어머니도 유학을 가게 된 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대련 목적을 조금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이 대련으로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려야겠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저택의 뒤쪽 숲으로 향했다.

그동안 내가 수련해 온 가문의 연무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늙은 집사와 기사단장, 시몬과 공작부인까지.

그리고 그 사람들 앞에서 마누엘 둘째 공자가 손가락으로 스파크를 튕기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 자리.

아쉽게도 공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대련 준비를 하는 동안, 마누엘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콧대를 한껏 세우고 꺼낸 말은 아쉽게도 그리 새로운 말이 아니었다.

"나이치고는 꽤나 잘 싸운다며? 하지만 귀족의 싸움은 그런 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지."

나도 여러 번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물론 마나를 사용하는 기사의 전투도 일반인들의 싸움과 크게 달랐다.

평범한 중세 전투가 근현대의 전차전으로 바뀐 느낌이랄까.

장거리 포격이나 기관총 같은 것은 없긴 하지만, 마나를 사용하는 기사의 모습은 그 방어력이나 공격력을 생각하면 전생의 장갑차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기사의 전투도 귀족들 간의 싸움에 비하면 일반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귀족들 간의 전투는 능력의 크기와 상성을 따르는 초능력 싸움에 가깝다고 했지?"

완전한 판타지.... 아니, SF 초능력 소설에 나오는 그런 싸움이라는 이야기였다.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내 형님께서도 그런 싸움을 준비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는 제대로 된 갑옷도 입지 않았고, 손 위로 스파크를 띄우고 있었다.

하긴 쇠 갑옷이나 금속 검을 든 기사나 병사들이라면 저 전격 공격에 곧바로 쓰러지겠지.

갑옷을 입지 않는다고 아예 전류가 안 통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내 형님께서 제대로 된 갑옷을 입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려나.

나도 갑옷을 벗고, 목검을 들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건 제대로 된 대응이 아닐 것 같아 제대로 차려입었다.

사실 상성을 따지지 않고 이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솔직히 어린애를 상대로 뭘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도 어리니 별 상관없겠지.

그렇게 내 몸에 제대로 맞춘 갑옷을 입고, 연습용 강철 검을 들었다.

대검이나 유적에서 가져온 단검을 쓸 수는 없었다. 대검이나 단검으로 쓸 수 있는 능력을 보이지 않더라도 제대로 검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두 검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야 대충 둘러댈 수 있지만, 공작부인이나 기사단장, 총집사 같은 사람들이 눈여겨보게 되면 무척이나 곤란해질 게 뻔했다.

"흥, 결국 기사 흉내인 거냐. 제대로 된 귀족과 싸워 본 적이 없으니 그런 모습을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흠, 싸움 경험이라면 이쪽이 훨씬 많은데. 제대로 된 귀족이 아니긴 했지만, 여러 번 상속 능력과 싸워 보기도 했고.

나는 자신만만한 마누엘의 모습에 의문을 느꼈다.

어라? 설마, 동생한테 말 안 해 줬나?

나는 힐끗 시몬을 쳐다보았다. 싸우는 모습은 보지 못했겠지만, 여행을 하면서 대련을 하는 것은 계속 지켜보았을 텐데.

시몬의 실력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그런 생각으로 본 시몬의 표정은 뭔가 묘한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을 보는 중이었는데, 그 표정이 조금은 차가워 보였다.

아, 설마 동생이지만 경쟁자였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아니,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자꾸 떠오르는 잡생각을 옆으로 밀쳐 두었다. 지금은 대련에 집중할 때였다.

검을 쥐고 마누엘 앞으로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사단장과 총집사는 흥미로운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시몬은 굳은 얼굴인 공작부인 옆에서 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공작부인 옆에는 공작부인의 하녀장이 서 있었고, 좀 떨어진 곳에 어머니와 내 전속 하녀인 플로라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고, 플로라는 그런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마누엘 앞에 섰다.

마누엘은 얼굴에 비웃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마누엘의 얼굴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관중이 있어서인가?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검의 손잡이를 힘껏 움켜잡았다.

생사가 걸린 싸움도 아니었고, 크게 긴장을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느껴지며 몸에서 열이 올라왔다.

무척이나 기분 좋은 열기. 이게 관중이 있는 경기의 힘인가 보다.

정말 숨길 것은 숨겨야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싸워야 할 것 같았다.

마누엘과 내가 자리를 잡고 서자.

기사단장이 심판으로서 간단한 주의를 준 후 바로 신호를 주었다.

대결 시작.

번쩍!

그와 동시에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콰르르릉!

이어서 들려오는 천둥을 닮은 소리.

나는 억지로 눈에 마나를 돌려 겨우 시력을 회복했다.

시력은 회복했지만, 아직도 떨리는 눈꺼풀. 온몸은 전기를 맞아 부들거리고 있었다.

퉤!

나는 입속에 고인 피를 뱉으며 마누엘을 노려보았다.

얕보고 있었던 거 아니었나? 시작하자마자 공격이라니. 잘못했으면 그냥 당할 뻔했다.

거기다 따로 공격을 하기 위한 모션도 없었다.

손 위에 띄워 놓은 스파크도 변하지 않았고, 손을 내밀지도 않고 손가락을 튕기지도 않았다.

그냥 나를 향해 번개가 내리꽂혔다. 아니, 그냥 마누엘과 내가 번개 줄기로 이어졌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그의 공격은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앞에서 나를 보고 있는 마누엘은 한껏 인상을 쓰고 있었다.

시작 소리와 함께 공격을 성공시켜서 나를 비웃어 주려고 했겠지만, 그의 미소는 채 완성되지 못한 채로 입 끝에서 구겨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기습을 내가 피해 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의 공격 모션을 보고 피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마나를 보고 피한 것이다.

솔직히 마나를 느끼지 못했으면, 제대로 한 방 맞았을 게 분명했다.

원래 내가 있던 자리. 그와 나의 중간 땅은 검게 타 버렸고, 그 주변은 아직도 스파크가 흐르고 있었다.

거기다 마나로 공격을 알아차리고 최대한 몸을 날려 공격 지점에서 멀찌감치 물러난 나도 공격을 완전히 피해 내지 못했다.

예상보다 훨씬 강한 공격이었다. 정통으로 맞았으면, 최악의 경우 졌을지도 몰랐다.

나는 마나를 둘러 몸에 남은 전격을 털어 냈다. 예상대로 마나는 몸에 남은 전격을 쉽게 밀어냈다.

'마나란 게 거의 만병통치약이네.'

전격이 사라지자, 떨리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역시 숨겨진 한 수가 있었다.

아니, 그런 숨겨진 한 수를 형제간의 대결에 쓰는 게 맞는 건가?

거기다 숨겨진 한 수라는 게 언제나 그렇듯이 꽤나 무리가 가는 수법일 텐데.

내 생각대로 나를 노려보는 마누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숨은 바로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역시,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뭐, 봐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곧바로 끝내 버릴 생각으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누엘의 얼굴이 쭉 앞으로 다가왔고, 나는 그 얼굴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순식간에 원래로 돌아왔고, 헐떡이던 숨이 바로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뭐지?'

거기다 마누엘의 몸에 고갈되었던 마나가 순식간에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좋은 기회였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봐도 지금은 치고 들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쳇!"

나는 혀를 차면서 뒤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마누엘은 온몸에 힘을 주며 고함을 질렀고, 그의 몸 위로 전류가 치솟았다.

"크아아아아!"

이번 기술은 조금 전처럼 동작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말도 안 돼! 이번에도 그렇고, 대체 어떻게 피한 거야! 거기다 분명 감전되긴 했는데!"

그는 뒤로 물러선 나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아니, 싸우는 도중에 고함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거기다 나도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분명 마나 고갈에 가까울 정도로 마나를 썼는데, 바로 마나를 회복하는 방법은 뭔지.

지금도 저렇게 전격을 뿜어내고 있는데 마나가 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파지지지직.

물론, 스파크 속 얼굴은 조금씩 창백해지고 있기는 했지만, 저 나이에 저런 전격을 유지할 수 있는 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최 말이 안 되었다.

마누엘이 마나 회복 능력을 따로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도 못했는데.

더구나 능력을 두 개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다는 소리도 들은 적 없었고.

"설마, 마나 회복이 되는 유물 같은 게 있나?"

"그,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내 말에 마누엘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라? 혼잣말이었는데?

설마 진짜 그런 게 있는 거야?

더구나 마나로 강화된 귀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옆으로 눈을 돌리니 시몬 형이 손을 얼굴에 올리고 있었고, 공작부인께서는 한껏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정말, 그런 물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와 대련을 하고 있는 우리 형님께서는 그 물건을 몰래 사용하고 있는 거고.

아니, 몰래 쓰고 있으면 들키지나 말 것이지.

이래서야 제대로 된 대련이 될 리 없었다.

기사단장도 헛기침을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여기서 대련을 멈출 모양이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나는 아직도 몸 전체에서 전기를 뿜어내고 있는 마누엘을 보았다.

저 전기 때문에 다가가기도, 검을 휘두르기도 쉽지 않았다.

어떤 유물인지 몰라도 저렇게 전기를 계속 뿜어내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게 분명했다.

마누엘도 점점 힘들어하는 게 보이고.

뭐, 조금만 지나면 제풀에 나가떨어질 것 같기는 한데.

"이익! 죽어!"

마누엘도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는지, 뿜어내는 전기 일부를 내 쪽으로 쏘아 냈다.

파지지직! 파지지직!

하지만, 처음의 공격과 달리 뻔히 보이는 공격을 내가 당해 줄 리 만무했다.

슬쩍, 슬쩍 공격을 피하니 마누엘은 더 빠르게 지쳐 갔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그냥 이길 것 같기는 한데.

하지만, 그전에 기사단장이 대련을 중단시킬 것 같고, 나도 이대로 대련을 끝내기는 싫었다.

제54화

제4편 실력 확인 (2)

뭐, 접근하기 힘들면 멀리서 공격하면 되는 거니까.

얍!

마나를 검에 가득 주입한 뒤에 마누엘을 향해 힘껏 던졌다.

"으악!"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본 마누엘이 급하게 손을 뻗었다.

파자자작!

마누엘의 손에서 전기가 뿜어져 나와 날아오는 검을 휘감았다.

황당하게도 전기에 휘감긴 검은 점점 느려지더니 마누엘 코앞에서 멈추었다.

그걸 막았어? 마나를 가득 담은 검이었는데? 거기다 기사 이상의 힘으로 던진 거고.

"이익! 내 능력이 그냥 번개를 만들어 내는 것뿐인 줄 알았냐! 나는 금속으로 만든 물건을 멈출 수도, 움직일 수도 있어!"

오, 그 능력은 전기로 전자석을 만들 수도 있는 거였나? 의외로 다재다능한 능력인걸.

내심 감탄했지만, 아쉽게도 내 감탄은 그걸로 끝이었다.

날아오는 검을 막기 위해 그는 몸을 감싸던 전기를 모두 검을 향해 쏘아 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검을 던지고, 바로 그의 옆으로 접근한 뒤였고.

이미 검을 던져서 가지고 있는 무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공격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힘껏 후려쳤다.

퍽!

"크악!"

만약을 위해 주먹으로 후려친 곳은 그의 턱이었고, 그는 멋지게 공중을 빙글 돌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다행히도 바로 기절하지는 않았다.

"으윽, 뭐, 뭐야!"

하지만, 손으로 내뿜던 전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다시 전기를 일으키기는커녕 일어서기에도 벅차 보였다.

"으윽! 비겁한!"

아니, 댁이 그렇게 말하면 쓰나.

거기다 기사는 검을 잃을 때를 대비해서 체술도 배운다고. 다른 세상에서 온 나보다 모르면 어떻게 해.

나는 일어나기 어려워하는 마누엘을 일으켜 주며 그에게 말했다.

"항복하시죠."

부드러운 목소리로, 형의 안위를 걱정하는 동생의 모습으로.

"악! 내가 항복할 것 같아?"

역시, 내 예상대로 내 말이 귀족으로서의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항복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나는 겨우 일어난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이번에는 살짝 비꼬듯이.

"절대 안 해! 이익! 내게 항복을 받아 낼 수는 없을 거야!"

그는 말과 함께 다시 전기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손 위에는 스파크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능력이라는 것은 머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턱을 맞아 반쯤 뇌진탕을 일으킨 머리가 바로 능력을 구현하기는 어려웠다.

아무래도 쉽게 항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야 항복할 때까지 때리면 그만이었다.

최선을 다한 힘 조절로 큰 부상을 입지 않도록 하고 있으니, 항복이 나올 때까지 기사단장도 막지 않을 터였고.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바였다.

퍽!

"항복해요!"

퍽!

"그냥 쓰러져서 기절해도 봐드릴게요."

퍽!

"아니면 손을 들어 올리셔도 돼요."

나는 그 뒤로 흥겹게 내 둘째 형을 두들겨 팼다.

다행히 마누엘 형은 꽤나 인내심이 강했다.

덕분에 나는 이번 생에 느끼지 못했던 손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수도에 가서도 나를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물리적인 권유를 해 줄 수 있었다.

역시 주먹은 좋은 대화 수단이었다.

* * *

대련이 끝난 뒤 시간이 흘렀다.

해가 바뀌고, 내 나이 15살. 드디어 수도로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그사이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몇 가지밖에 없었다.

대련 뒤에 공작부인이 나를 따로 불러낸 일이나 시몬 형의 약혼자인 아드리아 영애가 찾아온 일 정도만이 기억에 남을 뿐이었다.

플로라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전날부터 계속 눈물을 훔치며 내 짐을 싸 주었다.

"도련님이 수도로 유학을 가시다니요. 수도는 정말 위험한 곳이라는데, 아직 어린 도련님이 그곳에서 어떻게 지내시려고요."

뭔가 듣기에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말을 이어 가며 그녀는 열심히 내 짐을 쌌다.

뭐,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각성은 했지만, 반쪽인 나를 사람들이 인정해 줄 리도 없었고, 그 공작 각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실 리도 없었다.

솔직히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암담한 결과만 나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도 평범한 서자라면 겁에 질려 안 간다고 떼를 썼을지도 몰랐다.

"너는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구나."

옆에서 짐을 싸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변함없는 내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기대 이상으로 스스로 잘 자라 주어서 감사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쉬울 따름이고."

내가 유학을 떠난다니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지신 모양이었다.

하기야 내가 떠나게 되면 어머니 혼자 남게 되실 터이니 외로우실지도 몰랐다.

하지만, 솔직히 어머니는 공작과 잘 지내고 있었고, 시빗거리가 될 둘째 부인은 내가 저 멀리 보내 버린 뒤였으니 그리 걱정할 점은 없어 보였다.

아직 첫째 공작부인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문제될 것이 없었고.

나는 걱정하는 어머니를 꼭 안아 주었다. 아직 어머니의 키에 닿지는 않았지만, 안아 주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내 뜻밖의 행동에 어머니는 놀란 듯했지만, 곧 두 손으로 나를 안으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넌 어디 가서도 잘해 나갈 아이니까. 내가 노심초사해도 아무 소용이 없겠지. 난 너를 믿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마."

역시 어머니였다. 자신의 걱정보다는 내 걱정이 우선이었다.

저 얼음 같은 공작 아. 버. 지와는 전혀 달랐다.

짐은 하녀들 손에 먼저 나갔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정문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가니 고용인들은 옆으로 비켜서며 우리 모자에게 인사를 했다.

아직도 쭈뼛거리며 인사를 하거나 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인간도 보였지만, 내가 어렸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정문 앞을 나서자, 아침 햇살이 눈이 부셨다.

마치 내 출발을 축복하는 듯 날이 무척이나 맑았다.

정문 앞에는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가문 마차와 고용인들이 탈 마차, 그리고 짐마차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말을 타고 있는 병사들.

병사들 중에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후안이 보였다.

오늘은 아들 마누엘의 유학 때문인지 공작 일가가 모두 나와 있었다.

공작과 공작부인, 첫째 아들인 시몬과 그녀의 약혼자인 이에로 영애.

그녀는 나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주변 상황 덕분에 더 아는 척을 하지는 못했다.

저번 삶에서 죽기 전에 꽤나 친해졌던 것을 떠올리면 꽤나 아쉬웠지만, 그녀가 무사히 살아난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나도 그녀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짐을 모두 싣고,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

언제나처럼 나는 마차 옆으로 물러섰고, 마누엘이 앞으로 나서 공작 부부와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수도에서도 그레시아 공작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누엘은 또렷한 목소리로 멋들어지게 작별 인사를 했다. 고위 귀족가의 자제라는 느낌이 드는 인사였다.

얼마 전에 있었던 대련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 역시 세뇌하다시피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다웠다.

그 뒤에 나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괜히 여기서 잘못 보였다가 어머니에게 피해가 가게 할 수는 없었다.

마누엘의 인사 뒤에 공작이 말했다.

"잘 다녀오도록 해라. 그곳은 경쟁자와 적들이 같이 있는 곳이니 항상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역시, 공작다운 말이었다. 내 앞에서만이 아니라, 정식 아들의 앞에서도 그는 다르지 않았다.

그는 마누엘에게 말한 뒤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말을 하기를 원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다시 고개나 숙여 볼까.

공작은 마누엘과의 대련 뒤에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 충분히 예상했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부르지 않아 편하기도 하고 살짝 아쉽기도 했다.

"수도에 가서도 연락 잘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외가에 부탁을 하도록 해라. 그리고...."

공작의 말이 끝난 뒤, 공작부인은 마누엘에게 다가가 그를 어루만지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머니라면 이해가 되는 모습이었다.

막내라서 그런가? 제대로 귀족으로 큰 첫째 시몬과는 다르게 마누엘이 아직 철이 덜 든 건 그녀 때문인지도 몰랐다.

마누엘에게 말을 하던 공작부인과 언뜻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자,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굳어진 그녀의 얼굴을 보니, 대련이 끝난 다음 날 그녀의 응접실에서 만났던 공작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보았던 모습은 평상시보다 훨씬 냉랭하고 차가웠다.

대련 뒤에 공작은 따로 부르지 않았지만, 공작부인은 달랐던 것이다.

마누엘의 패배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인지 그녀는 응접실에 들어오는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숙이니 그녀는 손을 휘저었다.

"인사는 되었다. 앞에 앉아라."

꼴도 보기 싫다는 표정이 얼굴 가득 떠올라 있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철저하게 귀족적인 품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그녀는 잠시 눈을 감더니 차갑게 식은 차를 들이켰다.

그렇게 좀 더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가 나이답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다. 실제로 그동안 벌인 일들도 확실히 그랬고."

"솔직히 마리아의 성격상 네가 살아남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오히려 마리아와 딸인 엘레나가 저택에서 쫓겨났지."

"상속 능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는 것을 얻어 놓고는 어린 나이에 기사들이 놀랄 정도의 실력을 보였고."

"어떻게 남편을 설득했는지 모르겠지만, 후작가에도 따라가서 꽤 활약을 벌였다지, 아마?"

"거기다 마누엘과의 대결에서 내 아들을 이겨 버리기까지."

"확실히 천재가 맞을지도 모르겠어. 비능력자인 엄마를 두고도 그런 능력을 보이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니까."

차분한 목소리로 꺼내 놓은 말은 칭찬처럼 혹은 비꼬는 것처럼 이어졌다.

"이런저런 말들이 있었지만, 솔직히 너는 내 관심 밖이었다. 어차피 반쪽인 네가 그레시아 공작가를 승계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다른 가문들의 서자들처럼 조금 쓸모 있는 말 중 하나가 될 뿐일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찻잔을 들어 올리다가 찻물이 다 떨어진 것을 깨달았는지 눈썹을 찡그렸다.

뒤쪽에 서 있던 하녀가 조용히 다가와 찻잔을 채웠고,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마누엘과 함께 수도로 떠나게 되고 마누엘을 이겨 버린 탓에 널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지."

역시, 이런 일이 생길 것 같더라니. 마누엘을 이겨 버린 것은 후회하지 않았지만, 예상대로 귀찮은 일이 생길 모양이었다.

서로 죽이는 일까지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 뒤, 난 공작부인이 묘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들은 것 이상으로 넌 이상한 아이구나. 표정은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네 눈빛은 그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구나. 눈빛만 보면 무척이나 지루해 보일 정도야."

이런, 긴장이 풀어졌나? 아니,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뭐, 신기하기는 하지만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상황은 아닌 것 같고."

내 걱정이 무색하게 그녀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

제55화

제5편 수도행

"마음에 안 들지만, 대련으로 네가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고, 무시해도 될 만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다시 따라 놓은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나를 노려보았다.

"다른 때라면 바로 멀리 산골 마을의 기사로 보내 버렸을 테지만...."

아니, 스톱. 얼음장 같은 음성 속에 뭔가 좋아 보이는 말이 들린 것 같은데?

"하지만, 비전하의 초청장을 받아 내 아들과 같이 수도로 가게 되었으니 그렇게 보내 버릴 수 없게 되었구나."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 능력을 얻었을 때라면 그녀의 말을 막고 그냥 산골 마을의 기사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떠나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그녀가 이어서 꺼낸 이야기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수도에 있을 동안, 네가 인맥을 쌓든 실력을 키우든 유명해지든 아무 상관을 하지 않으마."

쥐 죽은 듯이 지내라는 말일 줄 알았는데 맘껏 지내도 된다니, 무슨 생각이지?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니 전혀 기대를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내 실력을 우습게 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역시 수도의 환경 때문인가?

어쨌거나, 그녀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뭔가 요구 사항이 있다는 건데.

"네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지만 마누엘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도록 도왔으면 한다."

하, 이리저리 포장했지만, 결국 자기 자식을 지켜 달라는 이야기인가.

"네가 마누엘을 사고 없이 잘 지켜 주면 나도 네 어미인 아만다를 지금보다 훨씬 잘 대우해 주도록 하지."

거기다 은연중에 협박까지. 그것도 꽤나 잘 먹히는 협박이었다.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어머니를 가만 안 두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잖아.

뭐, 공작부인의 성격상 문제가 생긴다고 어머니를 죽이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책에서 본 정통 귀족의 괴롭힘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고용인 모두의 왕따와 이간질 등.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할 수 있겠지?"

솔직히 형제끼리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대련 뒤에는 마누엘에 대한 감정도 나쁘지 않아 도울 수 있으면 도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입맛이 썼다.

나는 고개를 다시 숙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마누엘 형님을 영지로 무. 사. 히 돌아오게 하면 되는 겁니까?"

형님이라는 말에 조금 언짢아진 듯했지만,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된다."

"알겠습니다."

저택으로 돌아올 때 몸만 무사히 오면 되겠지?

포션을 좀 많이 구해 두고 치료술사도 알아 놓아야겠다.

팔다리가 잘려 나간 것도 다시 붙을 수 있을까? 부활술사나 네크로맨서 같은 건 없으려나.

그날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공작부인의 응접실을 나섰다.

아차, 괜히 그때의 일을 떠올렸나 보다. 눈이 마주친 뒤에 공작부인의 눈이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 조심조심.

그 뒤에 슬픈 눈을 한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눈물짓는 하녀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와 마누엘은 마차를 타고 저택을 나섰다.

두 번째 영지 밖으로의 여행.

그리고 홀로서기를 위한 첫걸음이었다.

* * *

후작가로 갈 때와 달리, 공작 영지부터 수도까지는 낮은 구릉과 드넓은 평야가 쭉 이어졌다.

산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쭉 이어져 있었고, 비옥해 보이지만 방치되어 있는 벌판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래서인지 왕국의 중심인 수도로 향한 여행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다져진 넓은 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마차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도 자주 보였다.

물론,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고급스러운 마차의 모습에 사람들은 얼른 길을 비켜섰지만, 그들의 눈에 극심한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공작의 영지를 벗어날 때까지, 그리고 다른 영지를 지나갈 때도 도로 위에 마물이나 도적은 보이지 않았다.

한가로운 여정이 이어지자, 병사들과 고용인들, 그리고 일행을 이끄는 기사 앙헬까지 긴장을 풀고 여행을 즐기게 되었다.

앙헬 기사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나와 그리 가깝지 않은 기사였다. 그동안 꽤 많은 기사들과 알고 지냈지만, 공작부인이 잘 골라 놓았는지 이 기사는 잘 알지 못했다.

물론, 영지의 모든 기사를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앙헬 기사는 그동안 나를 일부러 피한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한가로운 시간이 이어지자, 마차 안에서 심심했는지 계속 나를 외면했던 마누엘이 입을 열었다.

"너를 부른 후원자가 도대체 누구야? 서자를 수도까지 불러서 교육을 시켜 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가 허락해 준 이유도 모르겠고...."

공작은 물론 공작부인도 후원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거기다 공작은 나에게도 최대한 소문이 나지 않게 하라고 주의를 주었고.

공작가가 괜한 정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공작다운 이유였고, 나로서도 괜한 시비에 휘말리지 않도록 가급적 조용히 있을 참이었다.

뭐, 시몬이나 마누엘이 왕비의 후원을 받게 되었으면 비밀로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으니 최대한 입을 닫고 있을 생각이었다.

"너는 알고 있을 거 아냐. 어머니에게 물어봐도 알 필요가 없다고만 하시고...."

아니, 제대로 대답을 들어 놓고 왜 나한테 묻는 건데? 알 필요 없다고 들었으면, 조용히 입 닫고 있을 것이지.

"저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거기다 공작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아...."

역시, 마누엘도 공작은 무서운 모양이었다. 공작이라는 말 한마디에 마누엘은 바로 질문을 멈추었다.

"아니, 내가 그걸 물어본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냐. 후원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생활비까지 다 지원해 주는 것은 아닐 거 아냐. 집이야 수도에 있는 우리 집이나 기숙사에서 지내면 될 테지만, 다른 생활비는 어떻게 할 건데? 설마 아버지가 따로 지원해 주신 거야?"

하지만 우리 형님은 질문을 멈추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변명을 거기에 끼워 넣었다.

"아뇨. 그동안 모은 돈과 어머니께서 지원해 주신 돈이 조금 있습니다. 정 돈이 모자라면 학원에 다니면서 일할 곳을 찾아봐야죠."

사실은 출발하기 전에 어머니가 내어주신 돈이 있었지만, 그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딱 봐도 그동안 모은 비상금 전부였는데, 그 돈을 전생처럼 날름 가져갈 수가 없었다.

거기다 내가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은 꽤 많았다.

특히 무덤 탐험 때 주섬주섬 가지고 나온 금화와 보석들은 아직 환전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돈이 될 게 분명했다.

수도에서 내 돈만 가지고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을 터였다.

아, 맞다. 출발하기 전 공작이 총집사를 통해 품위 유지비랍시고 준 돈이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데다 본인이 직접 주지도 않은 돈이었지만, 나는 감사한 표정으로 그 돈을 챙겼다.

공돈인데,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돈들은 내 품과 짐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었다.

그렇게 며칠간 야영을 하거나 마을의 빈집을 빌려 숙식을 해결하던 우리는 한 작은 영지를 지나게 되었고, 그 영지의 주인인 남작의 저택에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이 영지의 주인은 공작부인의 먼 친척이기도 했고, 남작의 자식들이 같은 시기에 수도로 올라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게. 어렸을 때 보고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군."

화려하게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1층 로비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공작부인 처가 쪽 사람이니 꽤나 무시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나에게까지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마누엘과 인사를 나눈 뒤, 그는 나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검사라고 들었네. 시몬과 마누엘에 자네까지. 공작가에 복이 내린 모양이야."

그는 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로비에는 그 외에도 성격이 반대로 보이는 두 여성. 아마 그의 아내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1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소년, 소녀가 서 있었다.

이들은 우리와 함께 수도로 가게 된 남작의 자식들인 것 같았다.

주변을 살피다 눈을 마주치게 되니, 남자애와 여자애의 반응이 각각 달랐다.

여자아이 쪽은 눈이 마주치자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고, 굳은 표정의 남자아이 쪽은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헐, 여자 쪽이 훨씬 빨리 어른이 된다더니.'

하지만, 나이 때문일까. 열심히 여우 흉내를 내는 중이지만, 딱 봐도 어색하기만 보였다.

하긴 내가 평범한 어린아이였으면 반했으려나? 꽤 예쁜 얼굴이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나였기에 그녀의 모습이 그저 안쓰럽게 여겨질 뿐이었다.

대신, 소년 쪽의 반응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래, 저게 제 나이대 소년의 모습이지.'

남작의 친절이 껄끄러웠는데, 소년의 표정을 보니 역시 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과 아내, 딸까지는 표정을 감추고 연기할 수 있었지만, 아들까지는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왜 이런 연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어.'

귀족답게 행동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공작부인이 시켰다고 보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어쨌거나 나태해진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다시금 마음속으로 다짐을 한 뒤, 나는 나를 노려보는 소년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아 미소를 지어 주었다.

움찔!

내 미소에 소년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는 얼굴이 벌겋게 변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오옷! 역시 아이들은 이래야지. 순진하니 좋네.'

옆에서 여우 짓을 하는 여자애는 물론이고, 애늙은이인 시몬, 철부지 귀족인 마누엘만 보다가 제 나이대로 행동하는 소년을 보니 그저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허둥거리는 소년 덕분에 지루한 인사가 금방 지나갔다.

인사가 끝난 뒤, 남작은 우리 형제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손님으로 온 기사도 같이 식당으로 안내하는 귀족도 있었지만, 남작은 그런 귀족은 아닌 듯했다.

여행으로 꽤나 피곤했지만, 역시 귀족가여서일까. 식사는 길게 이어졌다.

남작과 그 부인들의 알맹이 없는 말들. 그리고 아들의 투덜거림과 딸의 묘한 치근거림.

"아시겠지만, 우리 아이들도 같이 올라가게 되었으니 잘 부탁하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작의 말에 마누엘이 제 가슴을 두들기며 대답했다.

도착하기도 전에 파벌이 만들어지는 걸까? 뭐, 후계자는 아니지만 공작 아들과 같이 다닌다면 나쁘진 않겠지. 마누엘도 시몬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무리한 짓은 하지 않을 거고.

그런데 정말 안 하려나? 음, 이건 조금 걱정이 되었다.

"정말 대단한 검사라고 들었어요. 어른 기사들과도 대련이 가능하다면서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거죠? 정말 대단해요."

남작 아들 쪽은 말할 것도 없고, 꽤나 친절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남작이나 그 아내들도 나와 대화하기가 어려운 듯한데, 그 딸은 전혀 달랐다.

그녀는 완전히 성인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는 듯한 말과 행동을 이어 갔다.

제56화

제6편 남작가 (1)

그녀도 어리지만 더 어린 나를 상대로 하는 말이 꽤나 어울리지 않아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더니, 모두 억지로 외면하는 모습이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일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식사는 그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게 끝이 났다.

"피곤한 사람들을 너무 붙잡고 있었군. 내일 출발해야 하니 이만 마쳐야겠네."

도무지 이해 못 할 예의를 갖춘 말을 끝으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끝내고 로비로 나가자, 처음 보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여행자로 보이는 젊은 남녀였다.

남자가 식당에서 나온 남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남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배웅했다.

사람들은 모두 한쪽에 서 있었고,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는데, 마침 두 사람이 현관으로 나가며 내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꽤나 잘생긴 남녀였다.

평복을 입었지만, 걸음걸이나 얼굴이 결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니 나는 슬쩍 고개를 숙인 뒤, 관심을 거뒀다.

하지만, 일은 내 생각대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나는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겁니다."

나만 겨우 알아들을 정도의 작은 음성.

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말을 꺼낸 당사자는 아무 표정도 없이 그냥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평온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 조금 전에 내가 들은 말은 아무래도 잘못 들은 듯 느껴질 정도였다.

* * *

저택에서 멀어지자, 말없이 걷던 여자가 남자를 보고 눈을 흘겼다.

"아니, 일 잘 끝내 놓고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어쩌라고요."

"어라? 많이 놀랐나 보네. 어차피 계약, 아니 돈 받고 하는 일이잖아. 돈 잘 받고 해 줄 일 다 해 주었으면 끝난 거지 뭐. 일이 실패하건 성공하건 우리랑은 상관없는 거잖아."

놀리듯이 대답하는 말에 여자의 눈꼬리가 점점 위로 올라갔다.

"그게 할 말입니까? 조직에 관련된 일은 아니지만, 실패하면 신용이 떨어질 게 뻔하잖습니까!"

"뭐, 말 한마디 한다고 그렇게 쉽게 실패할 일도 아니니까."

결국, 여자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런데 왜 그런 소리를 하신 겁니까?"

"공작가의 서자잖아. 이에로 후작가 때는 실패했지만, 거기서도 서자를 꼬여서 잘 써먹었고. 혹시라도 멀쩡하게 살아나면 내 말을 기억해 줄 거 아냐. 이렇게 작게나마 끈을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써먹을 수 있겠지."

그는 자기 말에 감탄을 했는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역시 난 먼 미래를 생각하는 훌륭한 전략가야."

그의 말에 여성은 이마를 짚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또 마음에 드신 것 아닙니까?"

"뭐, 그런 점도 있긴 하지만."

그는 여성을 보며 싱글거렸다.

"너와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그 아이도 꽤나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있더라고. 닳고 닳은 귀족의 자식 같지도 않고, 분노를 담고 있는 서자의 모습도 아니고. 두고 보면 무척이나 재미있을 것처럼 보이더라고."

그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뭐, 그것도 무사히 빠져나올 때의 이야기겠지만."

두 사람이 빠져나간 뒤, 나는 어떻게 방까지 안내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남자의 음성을 듣고 오랜만에 눈앞에서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벤트가 발생했습니다. 새로운 '저장 지점'이 설정되었습니다.]

분명 죽은 적도 없고, 능력을 각성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뿐이었다.

* * *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남작가에서는 작지 않은 방을 홀로 쓰게 해 주었다.

밤이 깊은 시각.

방으로 안내된 나는 침대 위에 앉아 고민에 잠겼다.

남작과 그 가족의 이상한 행동들과 처음 본 사람이 남긴 말, 그리고 뜻밖의 시점에 등장한 '저장 지점'까지.

어느 것 하나도 평범한 것이 없었다.

"그동안 너무 편했긴 했어."

무덤 탐험 이후로 근래에는 편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죽지도 않았고.

"하아, 죽지 않은 게 편안한 것의 기준점이 되다니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어."

내 처지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문제가 있는데, 마냥 두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괜히 기다리다가 죽어 버릴 수는 없지."

어렸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은 경험이 트라우마가 된 것일지도.

뭐, 이제는 나이에 맞지 않는 실력이 있으니 쉽게 죽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앉아서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달밤의 산책이라고 둘러대지 뭐."

아니면, 밤에 오줌이 마려워서 나왔다고 하거나.

'그래, 아직 아슬아슬하게 핑계 댈 수 있는 나이이니 이 핑계를 대기로 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 깊이 담고 있던 마나를 끌어올려 주변으로 퍼트렸다.

우우우웅.

걸리는 것은 없었다. 적어도 숨어서 감시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옆구리에 걸려 있는 단검을 확인했다.

대검도 가지고 왔지만, 남의 집 안에 가지고 들어올 수 없어서 마차에 남겨 두었다.

뭐, 이 단검도 보기와 달리 꽤나 대단한 검이니까.

나는 깨워 놓은 마나를 몸에 둘러 몸을 가볍게 만든 뒤, 발소리를 줄인 채 복도로 나왔다.

밤이 늦어서인지, 복도는 어둡고 고요했다.

하지만, 드문드문 달려 있는 등 덕분에 복도를 살피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뭘 찾아야 할까.'

복도로 나오기는 했는데, 이 뒤에 어디로 갈지 정하는 게 조금 난감했다.

뭔가 문제가 있고 의심이 든다고 해도, 하룻밤 사이에 뭘 찾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오늘 꼭 무슨 문제가 생길 거라는 확신도 하기 어려웠다.

'뭐, 정말 달밤에 산책하는 것으로 하면 되겠지.'

각성 이후 하룻밤 정도 안 자는 건 몸에 별로 무리가 가지도 않았고, 방을 비워 두어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나쁘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편히 하고, 텅 빈 복도를 걸어갔다.

마나로 감싸서 내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복도.

흔들리는 등불만이 화려한 복도를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한가롭게 복도를 걸어가던 중이었다.

"...정말, 꼭 해야 해요?"

작은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마나로 강화하지 않았으면 들리지 않았을 소리.

어린 여자의 불만 어린 목소리였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역시, 이대로 끝날 리가 없었다.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님들 방이 있는 곳을 지나, 남작의 가족들이 있는 내실까지.

목소리는 예상대로 남작의 딸 목소리였고, 딸의 방에서 나고 있었다.

나는 문과 약간 떨어진 복도 구석에 몸을 붙인 채로 귀를 기울였다.

"그냥 친한 척 접근해서 발을 묶기만 하면 된다면서요. 팔다리 부러뜨리는 정도나 크게 다치는 정도면 되지 않아요? 서자라도 사람이 죽으면 무사히 넘어갈 리가 없잖아요!"

딸의 항변을 들으며, 방 안으로 마나를 흘려보냈다.

묘한 껄끄러움을 뚫고 마나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남작의 딸일 테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넌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돼."

목소리를 들으니 다른 한 명은 남작이었다.

설마, 내 이야기인가? 아버지가 딸에게 나를 죽이라고 시키는 것인가?

"하아, 왜 이런 집에서 태어났는지. 정말,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네요."

한심하다는 듯이 푸념을 늘어놓는 딸의 말에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동안 네가 벌인 일들을 수습하느라 고생한 걸 기억하고 있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하지는 못할 텐데. 내가 아니었으면 넌 진즉에 사형을 당했을 거야."

"흥,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때잖아요. 지금은 그런 일이 없다니까요."

철컥.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닫혔던 문이 열렸다.

어라? 분명 문 옆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봐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주변 감시는 확실히 하고 있잖아요. 쥐새끼가 듣고 있는 것도 바로 찾아내고요."

'제길, 들켰나.'

어떻게 들켰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물러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마나를 돌려 땅을 박찼다.

푹!

어? 땅을 밀어내던 발이 바닥 깊이 푹 파묻혔다.

분명 돌바닥이었는데? 놀란 내가 다리를 빼는 사이, 복도와 천장도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저 멀리 복도 끝까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벽과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환상인가? 아니, 실체가 느껴졌는데?

분명 이건 상대방의 능력이었다.

이곳 복도에는 창도 없었고, 환상이든 아니든 이대로 복도를 내달리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다.

'젠장, 정말 싫은데 답이 없네.'

결국, 남은 것은 정면 돌파밖에 없었다.

나는 출렁이는 바닥과 벽을 디디며 열린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 안쪽은 침실과 붙어 있는 응접실이었다.

남작의 딸치고 무척이나 크고 화려한 응접실. 응접실은 복도와 달리 원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응접실 안에는 마나로 느껴졌던 것처럼 두 사람이 있었다.

남작과 남작의 딸. 두 사람은 이 늦은 시간에 외출복을 입고 마주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방에 뛰어든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아~ 세상에 이게 누구야. 누나는 정말 놀랐네."

전과는 다른 말투.

하지만, 밤의 등불 아래서도 눈을 동그랗게 뜬 그 모습은 꽤나 예뻐 보였다. 아마 몇 살만 더 먹으면 귀족 파티에서 이름을 날리는 영애가 될 게 분명해 보였다.

고개를 돌려 나를 확인한 남작도 묘한 얼굴이 되었다. 조금 어처구니가 없다는 느낌이려나.

어쩌지? 싸울까? 하지만, 선수를 치기에는 애매한 분위기였다.

아니, 공격할 생각을 하자 몸속 깊은 곳에서 경고가 울렸다.

나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밖의 복도가 막 움직였어요. 잠이 안 와서 일어났는데, 복도를 걷다가 길을 잃었거든요. 그런데 좀 전에 막 바닥하고 벽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설마 유령이 있나요?"

놀란 표정을 가득 담고서 횡설수설 이야기를 쏟아 냈다.

"아! 이런, 많이 놀랐어요? 공자님이 잠결에 헛것을 본 모양이네요."

그녀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작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나랑 같이 가요. 내가 방으로 데려다줄게요."

"그래 주실래요? 고맙습니다."

그녀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나눴지만, 그녀가 다가올수록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자, 손을 잡아요."

다가온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나는 허리에 찬 검을 힘껏 휘두르며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쾅!

내가 휘두른 검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뒤로 쭉 밀리며 돌바닥이 치솟아 내 검을 막은 것이다.

돌은 잘려 나갔지만, 그뿐이었다.

예상대로 그녀의 모습은 다 연기였다.

"호호호, 역시 안 속네. 거기다 그쪽 연기도 무척 훌륭했어. 안아 주고 싶었다니까."

솟아오른 벽 뒤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창을 향해 달릴 뿐이었다.

그리고 온몸에 마나를 감싼 채 힘껏 창을 향해 몸을 던졌다.

제57화

제7편 남작가 (2)

콰앙!

쉽게 창문이 깨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폭음과 함께 나는 다시 튕겨 나왔다.

이건 환상이 아니었다.

출렁이고 움직이는 바닥과 달리, 창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창 위로 마나의 향기와 함께 강력한 힘과 반발력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솟구친 바닥도, 벽도, 일그러진 복도에도 같은 마나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마나는 벽 뒤에서 웃고 있는 소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나와 같은 향을 품고 있었다.

"와, 잘못하다가는 빠져나갈 뻔했네. 기사급이라더니 그 이상이잖아!"

벽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척이나 기쁜 듯한 목소리였다.

"와, 대단하잖아. 이런 먹이는 본 적이 없는데, 내 수집품으로 삼으면 안 될까요?"

남작에게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장난감을 사 달라는 소녀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남작의 대답은 단호했다.

"안 돼. 죽여라."

"아까운데...."

쾅! 쾅!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최대한 창을 부수기 위해 노력했다.

들킬 것을 각오하고 검에 마나를 밀어 넣어 창문을 가르려고도 해 보고, 벽을 뚫어 보려고도 해 보고, 그녀 앞을 막은 바닥을 부수려고 노력도 해 봤다.

하지만, 전부 소용이 없었다.

창문은 잘려 나가지 않았고, 뚫린 벽은 다시 메워졌다.

그리고 부서진 바닥 뒤로 계속 바닥이 솟구쳐서 한 걸음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정말 대단하네. 하지만, 발버둥쳐도 소용없어. 이 집은 내 영역으로 선포된 나의 왕국이야.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어!"

역시, 이 황당한 일들은 모두 그녀의 능력이었다.

일종의 '영역 선포' 같은 능력일까? 정말 황당할 정도로 대단한 능력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를 잡기도, 이곳을 빠져나가기도 어려워 보였다.

멀쩡하던 바닥이 다시 출렁이고 벽과 천장,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나를 공격했다.

그것도 마나를 씌운 내 검을 막아서면서.

그녀 말대로 이 방, 아니 이 저택은 그녀의 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삼켜진 뒤였고, 그녀의 몸속에서 발버둥치는 먹이일 뿐이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무색해지는 광경에 말을 잃었지만, 나는 끝까지 저항했다.

솔직히 이기기도 어려워 보였고, 당장 이길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기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다음번 삶에 제대로 된 정보를 주는 게 더 중요했다.

어느 정도 위력인지, 혹시 약점은 없는지, 그런 것을 알아내야만 했다.

"잘 싸우고, 잘 버티네. 하지만, 아버지 말을 들어야 해서 이제 끝내야 할 것 같아."

그녀의 말과 함께 주변을 감싸는 마나가 점점 짙어졌다.

공기가 무거워지며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졌다.

젠장, 영역 안에서는 공기나 중력도 조절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이어서 억지로 버티는 내 귀로 그녀의 선언이 들려왔다.

"지금 이 집은 나의 왕국. 나는 이 왕국의 지배자다!"

쿠쿵!

동시에 나는 바닥으로 무너졌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내장이 다 터져 나간 것 같았다.

치명적인 일격.

'아, 어떤 방식인지 알겠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녀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궁금증이 남아 있었다.

"쿨럭, 왜,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죠? 설마, 공작부인께서 나를 죽이라고 시킨 건가요? 하, 하지만, 여기서 죽으면 공작이 다... 다 알 텐데요?"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피를 토하며 물어보았다.

원래대로 돌아온 방 안에서 딸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 말이 그거라니까요. 이렇게 사고를 치면 어떻게 할 생각인지, 항상 치밀하던 아빠답지가 않다니까."

그녀의 말에도 남작은 지그시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다가왔다.

"귀를 막아라."

"네, 네."

그리고 자신의 딸을 물러서게 한 뒤에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귀에 나를 죽인 이유를 속삭여 주었다.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나는 남작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눈앞이 점점 어두워졌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 * *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눈을 뜨니, 전날 저녁 로비에서 여행자들과 마주친 뒤였다.

우리는 모두 방을 안내하는 하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어디가 안 좋으세요?"

내 옆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닙니다."

몸이 아픈 것은 아니지만, 죽기 전 당했던 통증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기는 했다.

환상통이라고 할까.

하지만, 지금 표정이 안 좋은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내게 말을 건넨 소녀 때문이었다.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넨 소녀가 조금 전에 나를 죽였던 바로 그 남작 영애였다.

아니, 조금 뒤에 죽였다고 해야 할지도.

아무래도 그동안의 내 연기는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분명 지금도 날 죽이라는 말을 들은 뒤였을 텐데, 저런 표정이라니.

본성을 몰랐다면 나는 물론이고,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일정 영역 - 어느 정도 영역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 안에서는 무적에 가깝게 되는 능력도 무섭지만, 나는 지금 저 연기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나도 최대한 멀쩡한 척 연기를 했지만, 역시 프로에게는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헤어진 뒤, 내게 배정된 방 앞에서 나는 떠나려는 하녀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밤에 내가 방에 없어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끔 잠자리가 불편하면 밖을 산책하는 일이 자주 있으니까요."

솔직히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지만, 알리바이는 확실히 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아, 밤에는 웬만하면 안 돌아다니시는 게 좋아요. 그... 마물들이 밤에 사람들을 데려가는 일들이 있었던 적이 있어서...."

내 말에 하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마물이요? 이 저택은 남작 영지의 한가운데잖아요. 마을과도 붙어 있고."

공작가처럼 도시급은 아니었지만, 남작의 저택은 작지 않은 마을의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뇨. 아뇨. 전에 있었던 일이에요. 남작님이 병사들과 처리하셔서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어요."

"어떤 마물이었는데요?"

내 질문에 하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남작님이 처리하셨다고만 하셔서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마물 때문에 실종되는 사람이 더 이상 없었어요."

"다른 이유로 실종되는 사람은 있었고요?"

내 말에 하녀는 입을 꾹 닫았다.

그녀의 표정이 대답이 되었다.

"걱정 마세요. 이야기는 들으셨잖아요. 아직 어려도 기사급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마물이 나타나면 제가 잡겠습니다."

호기롭게 내뱉은 말에 하녀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린 소년의 말을 믿기도 어려웠고, 서자지만 능력을 가진 귀족 아이의 말을 부인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녀는 내 말에 수긍하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방 안에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

끼이익.

죽기 전과 달리 창문은 잘 열렸다.

"자, 그럼 해가 지기를 기다려 볼까?"

창문턱에 기댄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낮은 산맥 위로 붉은 노을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것을 보며 나는 좀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밤에 사람을 납치하는 마물이라.

"그, 마물이라는 건 남작 딸을 말하는 거겠지?"

죽기 전에 남작과 그의 딸에게서 들은 말을 생각하면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능력을 얻은 뒤 남작 딸은 능력을 마구 남용했고, 사람들이 연이어 실종되자, 남작이 나서서 일을 무마했다라...."

그녀는 왜 사람들을 납치하고 죽인 걸까? 그냥 살인광인 걸까?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잠깐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이내 난 고개를 저었다.

이제 무슨 이유든 상관없었다.

남작도 그녀의 딸도 나의 적이었고, 적인 이상 확실하게 상대하면 그만이었다.

밖이 어두워졌다.

구름도 적지 않아 일반인은 등불 없이는 주변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나는 마나로 눈을 강화한 뒤 허리춤에 찬 단검을 두드리고,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저번에는 저택을 수색한답시고 설치다가 죽었으니, 이번에는 아예 저택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탁.

2층에서 뛰어내렸지만, 아주 작은 소리만 들렸다.

나는 저택 앞 정원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미로식으로 되어 있는 정원이었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창문에서 확인했기에 제대로 된 길로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다.

순식간에 정원을 빠져나간 뒤, 앞을 막아선 낮지 않은 담을 타고 올랐다.

전생이었으면, CCTV나 전기가 흐르는 담장이 있거나 했겠지만, 이곳은 담벼락 위에 뾰족한 창살이 전부였다.

저택을 나온 뒤, 나는 저택을 크게 돌아 뒤쪽의 언덕으로 향했다.

남작 딸의 능력은 저 저택만 적용될 것 같았지만, 예상보다 넓어 마을까지 영역에 포함되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풀만 가득한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었다.

하지만, 언덕에 올라서자 남작 저택과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구름도 물러가고, 별빛이 가득한 밤.

귀족 저택과 마을이 밤하늘 아래 그림같이 펼쳐져 있었다.

전생의 야경과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조금 씁쓸한 기분을 느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제 시간이 지나길 기다릴 뿐이다.

나는 낮은 돌 위에 앉아 단검을 무릎에 올려놓고, 저택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갔다.

창문의 불이 하나둘씩 꺼지고, 저택은 물론 마을 전체가 깊은 어둠에 잠겼다.

이제 내가 죽었던 시간이었다.

저택 전체에 잠깐 마나가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어제 경험한 것이 없었으면 느끼지 못했을 변화였다.

마나는 안채, 그러니까 내가 죽었던 남작 딸 방에서 시작해 저택 전체를 훑고, 마지막으로 내 방이 있는 곳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확인한 건가?"

혹시나 했지만, 저택 전체를 자신의 영역 안에 넣었을 줄이야.

미리 빠져나온 게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 뒤에 저택에 작은 소란이 일어난 것 같았지만, 그 소란은 금방 사라졌다.

하녀에게 미리 말해 둔 덕분이었다.

그 소란을 끝으로, 저택은 아침까지 고요했다.

나는 아침 이슬을 맞으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택 담을 지키는 병사를 피해 담을 다시 넘고, 미로 정원을 지나 저택 현관으로 걸어갔다.

방에 내가 없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현관으로 들어가도 상관이 없었다.

"밤새 어디를 다녀온 거죠?"

문 앞에는 남작의 딸이 피곤한 얼굴로 서 있었다.

밤새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잠자리가 낯설어서 밤새 검술 훈련을 했습니다."

나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단검을 두들겼다.

"정문에 있는 병사들은 나간 사람이 없다던데요."

"아, 병사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몰래 나갔습니다. 걱정하셨군요. 죄송합니다."

"하아.... 아뇨. 어쩔 수 없죠."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우면서도 안도가 섞인 한숨이었다.

그녀는 이마에 손을 짚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귀족가와 마찬가지로 남작 저택의 아침도 꽤나 늦었다.

제58화

제8편 비밀 (1)

늦은 아침 식사 시간.

식사가 시작되기 전, 마누엘은 굳은 얼굴로 나를 꾸짖었다.

"밤에 몰래 밖에 나갔다면서? 다른 귀족가를 방문해서 그러면 예의에 어긋난다는 걸 몰라?"

낮은 목소리였지만, 마나까지 실어서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크기를 키운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귀족 자제가 동생을 혼내는 표본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남작 부인들이 놀란 표정으로 마누엘을 쳐다보았고, 남작 아들도 감탄한 얼굴로 마누엘을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마누엘이 공작을 최대한 흉내 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다른 때와 달리 마누엘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그, 그래. 알면 됐어."

내 대답에 살짝 목소리가 흔들렸지만 마누엘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남작에게 사과했다.

"동생을 대신해서 밤에 시끄럽게 한 것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하, 괜찮네. 별일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혹시 사고라도 나지 않았나 걱정했을 뿐이라네."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남작과 딸을 살펴보았다.

남작의 표정은 대답과 달리 상당히 굳어 있었고, 그의 딸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런, 눈이 마주칠 뻔했다.

바로 시선을 피한 뒤, 마침 나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는 내 귀에 다시 남작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 길인데 하루 더 쉬어 가는 게 어떻겠나. 아이들 준비도 더 필요할지 모르고."

예상한 대로라고 할까. 남작은 우리를 더 머물게 하려고 애썼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더 있고 싶지만, 입학날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오, 역시 귀족 모드 상태일 때는 마누엘도 할 말을 제대로 하는군. 역시 교육 하나는 제대로 되었다니까.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지."

예상과 달리 남작은 쉽게 포기했다.

궁금해서 나이프에 비쳐 보니, 남작은 말을 하며 딸을 쳐다보았다.

뭔가, 아직 꿍꿍이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 번 죽었는데 그 꿍꿍이를 그대로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그 뒤 식사는 평범하게 끝이 났다.

얼마 뒤, 저택 앞에 다시 일행이 모였다.

별채에 묵었던 병사와 기사는 마차와 함께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남작의 아들과 딸은 각자의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들 쪽은 다른 모자간의 작별과 다르지 않았다.

"수도에 가서도 몸조심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편지하렴."

"알아서 잘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어머니도 몸 건강하세요."

걱정하는 엄마와 자신감에 차 있는 아들.

하지만, 딸 쪽은 분위기가 이상했다.

"갈게요."

"그, 그래. 잘 가라."

딸의 작별 인사에 남작 부인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마치 딸을 무서워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거기다 부인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흥!"

그 모습에 딸은 코웃음을 치고는 몸을 돌렸다.

아들 쪽도 인사를 끝내고 마차로 향했다.

인사가 끝날 동안, 남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작은 딸뿐만 아니라 다른 식구와도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남작님의 자제분들은 수도에 있는 동안 제가 최대한 잘 보살피겠습니다."

마누엘의 인사에 남작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작에게도 만족할 만한 작별이었다.

마누엘도, 나도 마차에 올라탔다.

전과 달리 네 명이 타게 된 마차였지만, 공작가의 마차답게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와, 확실히 대귀족은 다르네요.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차이가 안 나는데, 이게 내실이 있다는 건가요?"

남작 딸은 실내를 둘러보며 계속 감탄을 터트렸다.

남작 아들도 신기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마누엘이 이것저것 그들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마차는 마을을 벗어났고, 한참을 달려 해가 저물 무렵에는 남작의 영지를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오늘은 야영을 해야겠습니다."

해가 질 무렵, 말을 탄 기사가 마차로 다가와 마누엘에게 말했다.

마누엘은 허락을 했고, 마차와 일행이 멈추었다.

같이 따라온 사용인들과 병사들이 캠핑을 준비했고, 우리도 마차에서 내렸다.

저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차에 실린 대검을 꺼내 들었다.

"검은 왜 꺼낸 거야?"

마누엘의 물음에 나는 씩 웃었다.

"몸도 찌뿌듯해서 사냥이나 해 올까 해서요."

"저녁 식사 재료는 충분합니다. 사냥감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옆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병사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군데군데 나무들이 보이긴 했지만, 이곳은 너른 벌판 한가운데였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처럼 훈련 삼아 하는 거니까. 뭐, 늦으면 먼저 먹고 주무세요."

내 말에 병사와 기사는 금방 수긍했다.

후작가를 다녀온 여정 중에도 후작 서자와 대련을 하고, 또 이렇게 훈련 삼아 밤에 돌아다닌 적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마누엘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아침 식사 때 고개를 숙인 덕분인지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오늘은 첫날인데, 같이 식사하세요. 네?"

남작 딸이 옆에서 손을 모으고 부탁했지만, 나는 소름이 돋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자주 하던 일이라서요."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야영지 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야영지가 멀어지면서 점점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뒤 야영지에서 충분히 멀어지자, 나는 몸을 돌렸다.

목표는 오전에 떠난 남작 영지.

나는 다리에 마나를 밀어 넣고, 발을 박찼다.

쾅!

여유롭게 천천히 반나절을 왔으니 힘껏 달리면 2시간 정도면 돌아갈 거리였다.

* * *

나는 어젯밤을 보냈던 언덕 위에서 저택을 내려다보았다.

총 2시간. 야영지에서 이곳 언덕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다행히 오는 길에 마주친 사람은 없었고, 마을 가까이에 도착한 뒤에는 사람을 피해 마을을 멀리 빙 둘러서 이 언덕에 선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40㎞. 마라톤을 달린 것 같았다.

"전생이었으면 올림픽 신기록이었을지도...."

마나가 없었으면 나이와 상관없이 절대 불가능한 속도였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고 이대로 누워 쉬고 싶었지만, 가만히 마나를 순환시켰다.

다리를 달구던 마나를 몸 전체에 퍼트리자, 격렬히 움직이는 심장과 허파에 마나가 스며들면서 몸 상태가 점점 나아졌다.

"휴우...."

잠시 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금방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좋아."

역시, 마나는 사기였다.

몸 상태를 확인한 뒤에 나는 언덕을 내려갔다.

아직 밤이 늦지 않아 불이 켜진 방이 남아 있었지만, 달도 보이지 않는 흐린 날이라 몸을 숨기기에는 충분했다.

정문에 서 있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다시 담을 넘은 뒤, 미로 정원을 거쳐 현관 대신 내가 자던 방 아래로 갔다.

이 밤에 현관이 열려 있을 리가 없었고, 강제로 열었다가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으차."

방 아래에 도착한 나는 손에 마나를 모으고, 벽을 타고 올랐다.

이곳저곳에서 여러 번 해 본 경험 덕분인지, 전날 자던 방 창문 앞까지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손을 창에 대고, 마나를 일으킨 손을 당겼다. 손과 함께 창이 딸려 나왔다.

끼이이익.

작은 소리를 내며 창이 열렸다.

다행히 창을 고정하는 걸쇠는 아침에 내가 망가뜨린 그대로였다.

다시 찾아올 생각에 떠나기 전 걸쇠를 망가뜨려 놓았는데, 예상대로 아직 고치지 못한 것이다.

창은 그대로였지만,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차피 사람이 없는 것만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방을 지나 어두운 복도로 걸어갔다. 남작 방을 향해.

떠나기 전에 남작의 방은 알아 두었다. 딸 방 가까운 제일 안쪽 방. 다른 귀족들처럼 방은 그 혼자서 쓰고 있었다.

복도는 조용했다.

하루 전, 아니 죽기 전이었으니까 그보다 더 전이었나.

아무튼 그때는 사람들이 자고 있었어도 얼마간의 부스럭거리는 소리, 사람 사는 소리가 내 좋은 귀로 들려왔었다.

하지만, 지금 이 저택은 마치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무거운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인 보람도 없이, 남작 방에 도착할 때까지 복도에는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사람들이 아직 잘 시간이 아닌데....

잠시 뒤 남작의 침실 앞에 도착했다.

나는 도망칠 준비를 제대로 끝내 놓은 뒤,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마나를 흘려보냈다.

'이런, 허탕인가?'

방 안에는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듣기로는 남작은 이 시간에 항상 자신의 방에 있다고 하던데....

나지막이 혀를 찬 뒤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았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여니 남작의 집무실 겸 서재가 보였다. 서재 안쪽에는 반쯤 열린 침실 문도 보였다. 침실에도 남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느꼈던 것처럼 서재와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식들이 여행을 떠나서 평상시하고 달리 움직인 걸까? 하지만, 웬만한 일이 아니면 항상 이 시간에 방에 있다고 하던데.

기껏 이리저리 모은 정보가 헛수고가 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남작을 찾기 위해 저택 안을 뒤질 수도 없었다.

나는 지금 공식적으로는 40㎞ 떨어진 곳에서 숲을 쏘다니며 사냥을 하는 중이었다.

남작을 찾다가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곤란했다. 어차피 아직 크지 않은 나이라 변장도 소용이 없었고.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던 찰라.

텅 빈 서재의 모습이 묘하게 느껴졌다.

평범한 서재처럼 보였지만, 분명 공작의 집무실이나 공작 저택의 방들과는 다른 점이 느껴졌다.

'설마?'

비밀 통로가 있던 후작 저택에서 맡았던 바로 그 느낌.

"역시 제대로 된 귀족 서재는 비밀의 문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겠지."

바로 서재를 뒤지기 시작했다.

귀족 중에는 비밀의 문을 찾거나 사람의 흔적을 찾는 사이코메트리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법하긴 한데....

아쉽게도 지금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마나는 대신 다른 능력을 나에게 주었다.

휴우.

숨을 크게 들이켜고.

마나를 귀와 눈, 그리고 코와 피부까지. 오감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우우우웅.

어둠침침하던 방이 환하게 밝아지고, 각종 냄새가 느껴졌다.

스스스슥, 치칙.

이어서 조금 전까지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왔다. 살랑대는 바람에 서류가 살짝 들리는 소리, 촛불이 일렁이는 소리, 그리고 귓가를 살랑거리며 지나가는 공기의 느낌.

어라? 공기가 움직여?

들어온 뒤에 문을 닫아 놓았는데. 분명 침실과 서재의 창문도 닫혀 있고.

나는 가만히 서서 공기의 흐름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피부의 감각을 전부 일깨워 공기 분자 하나하나의 움직임까지 잡아낼 정도로 정신을 집중했다.

희미하지만 공기가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공기가 흘러 나가는 곳은 내가 들어온 방문도 아니었고, 닫힌 창문 쪽도 아니었다.

책장?

공기가 움직이는 방향은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책장이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책장 쪽으로 움직였다.

살랑거리는 미세한 바람은 바로 벽에 세워진 책장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59화

제9편 비밀 (2)

책장 뒤에 있는 비밀 통로라.

"전형적이라면 정말 전형적인 곳이긴 한데...."

나는 양쪽의 책장을 잡고 슬쩍 밀어 보기도 하고, 당겨 보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책장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분명 숨겨진 스위치 같은 것이 있을 텐데....

뒷일을 생각 안 한다면 그냥 부숴 버리면 그만이지만, 지금은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야 했다.

나는 책장을 신중하게 살펴보았다.

철학서들과 역사서 같은 딱딱한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거기다 전부 집에 있을 때 읽어 본 책들이었다. 남작의 개인 서재에 있는 책들은 공작이 자랑하는 장서에 감히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렇게 쭉 책들을 살피던 나는 한참 아래쪽 책 제목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책이 왜 여기 꽂혀 있는 거지?"

우리 왕국의 초대왕이자 공작의 선조이기도 한 [기사 카를로스의 일대기] 전집 옆에 엉뚱한 책이 꽂혀 있었다.

[카를로스 기사의 귀환]

제목만 보면 일대기의 한 부분처럼 착각할 만한 책이었지만, 이 책은 분명 카를로스 기사의 사랑 이야기가 적혀 있는 소설이었다. 일종의 팬픽이라고 할까.

초대왕에 대한 애정 소설이라 당연히 공식적으로 금서로 지정되어 있어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창고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굴러다니던 책을 보았기에 알아본 것이었다.

"아무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설이 왜 여기 있는 거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살짝 책을 잡고 조심스럽게 당겨 보았다.

철컥.

역시, 책은 뽑혀 나오지 않았고, 책장 뒤쪽에서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책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기대 어린 눈으로 책장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한참 동안 책장은 변화가 없었다.

"분명 영화 같은 데서는 책장이 쫙 하고 열리고 비밀 통로가 나타나던데."

그 책이 스위치 같은 게 아니었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책장으로 다가가 책장을 움직여 보았다.

스르르.

그런데 어이없게도 책장은 조금 전과 다르게 부드럽게 옆으로 밀려 나갔다.

아쉽게도 이 서재에 있는 비밀 문은 자동문이 아니었다.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열린 책장 뒤로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불빛이 없어 깜깜한 계단이었지만, 눈에 마나를 밀어 넣으니 내려가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발소리를 줄이고,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저벅, 저벅.

아래로 내려가던 계단은 얼마 뒤에 통로로 바뀌었다.

역시, 이 비밀 통로도 후작 저택 때처럼 밖으로 향하는 통로인 모양이었다.

설마, 저택 밖으로 나간 걸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다행히도 통로를 빠져나가기 전에 통로 벽에 닫힌 문이 보였다.

나무 문 틈새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빛과 함께 웅얼거리는 말소리도 들려왔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운 좋게 빠져나갔지만, 내 딸이 금방 좋은 소식을 가져다줄 테니까."

분명 남작의 목소리였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은 예상했던 그 사람인가?

죽기 전에 남작이 내 귀에 대고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네가 마리아를 내쫓는 데 한몫을 했다지? 바보같이 영지 밖으로 기어 나오다니. 공작은 손대기 어렵지만, 저택에서 기어 나온 네놈은 여기 이 자리에서 죽게 되는 거야. 이건 마리아의 복수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황당했는지.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고, 이제는 다시 떠올리지도 않는 일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때에 이런 장소에서 쫓아낸 두 번째 공작부인의 사주로 죽게 되다니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곳은 다른 눈도 없었고, 대화하는 것까지 들었으니 이제는 더 조심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는 대검을 움켜쥐고, 마나를 가득 모은 다리로 문을 박찼다.

쾅!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박살 났다. 작은 발로 걷어찼지만, 마나의 도움 덕분에 문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파편 사이를 뚫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 안쪽은 창고를 개조한 것 같은 작은 방이 있었다.

한쪽에는 여러 물건이 쌓여 있었고, 반대쪽에는 침대와 탁자, 그리고 와인 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탁자 앞에는 남작이 앉아 있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남작은 확인했고.

나는 남작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을 걸던 여자가 보였다.

아니, 여자가 아니라 여자가 그려진 그림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림 속에는 지금보다 좀 더 젊어 보이는 마리아 공작부인이 있었다.

내가 멍하니 그림을 보는 사이.

"네가 어떻게 여길?"

내 모습을 확인한 남작이 옆에 놓여 있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휙.

검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모습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검이 혼자 움직이다니, 설마 딸하고 비슷한 능력인가?

젠장, 그럼 지금은 꽤나 위험한 상황이잖아!

놀란 나는 급하게 검을 치켜든 뒤에 남작의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남작은 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검을 손에 쥔 그는 황당하게도 숨을 헐떡거렸다.

방금 그 능력을 써서 힘든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니, 그것 때문인가? 비슷한 능력이긴 한데, 엄청나게 약한 건가?

어쨌거나 이 기회를 날려 버릴 수는 없는 일. 나는 한걸음에 앞으로 달려가 그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그도 검을 어느 정도 배웠는지, 검을 들어 내가 휘두른 대검을 막았다.

콰아앙!

하지만, 기사급 이상이라는 힘과 속도를 가진 내 검을 제대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든 검이 부서지면서 그는 반대쪽 벽으로 튕겨 나갔다.

우당탕!

그는 한쪽에 쌓여 있던 물건들과 멋지게 격돌했고 물건들을 부수며 호쾌하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설마, 검면으로 쳤는데 죽지는 않았겠지?"

생각보다 허무하게 튕겨 나가서 남작이 너무 빨리 죽었을까 봐 걱정될 지경이었다.

"크으으윽."

다행히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물건들 속에 파묻혀 움찔거리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이제 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었다.

* * *

얼마 전 죽을 때 남작에게 들었던 말.

"네놈과 공작이 쫓아낸 마리아의 복수다!"

그때 들었던 말 때문에 나는 이곳에서 두 번째 공작부인을 만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녀 대신에 그녀의 초상화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덩그러니 초상화만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뭐, 당사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면 되겠지.

나는 물건들 속에 파묻혀서 끙끙거리는 남작을 꺼내 주었다.

아직 다 크지 않은 몸이지만, 성인보다 강한 육체 덕분에 그를 무사히 끌어냈다.

"컥, 커억."

끌어낸 뒤에도 그는 고통에 숨을 헐떡거렸다.

자신의 부서진 칼에 맞은 상처가 여럿 보였고, 팔은 부러진 것 같았으며, 갈비뼈도 부러져서 숨쉬기가 조금 곤란해 보였다.

그래도 말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으니.

나는 누워서 헐떡이는 그의 가슴을 발끝으로 툭툭 두들겼다.

"으억."

예상대로 그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안녕하세요. 다시 만났는데,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요."

나는 정신을 차린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대검을 바닥에 세운 채로 기사의 인사를 하니, 그는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너는 도대체...."

"다른 사람들의 눈이 없어도 이렇게 정중하게 대하는 게 좋죠. 나이가 어리더라도 아시다시피 나름 기사급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그제야 그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제대로 된 능력도 없으면서 나이가 어리다고 얕잡아 보다니. 갑작스러운 상황에 흥분한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그 실수가 무마되는 것은 아니었다.

뭐, 나에게는 반가운 실수였다.

"크윽,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거지? 거기다... 어떻게 돌아온 거지? 영지를 벗어났다고 들었는데."

정신이 드니 궁금한 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른 모양이었다.

거기다 우리 뒤를 따라오며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고.

의외로 철두철미한 부분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다 의미 없는 이야기지만.

"질문은 제가 하고 싶은데요. 왜 이런 곳에 둘째 공작부인의 그림이 걸려 있는지, 왜 나를 죽이려 했는지 알고 싶어요."

실제로 날 죽인 것은 남작에게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조금 전에도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거기다 공작부인의 그림이 왜 여기 있는지는 정말 궁금했고.

"감히! 어린놈이 남의 집을 침입해서 무슨 망발을 하는 거냐! 크으, 공작이 반쪽이라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은 거냐? 천한 출신이라 어쩔 수 없는 건가."

아픈 게 조금 나아진 건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는 대답 대신에 나를 향해 매도가 섞인 '어른의 훈계'를 퍼부었다.

당연히 효과는 하나도 없었다.

아니, 효과가 있었다. 반대쪽으로.

나는 발끝으로 건드렸던 가슴 위로 검을 거꾸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검을 든 팔의 힘을 살짝 풀었다.

꾹.

"으으윽."

억눌린 비명과 함께 남작이 꿈틀거렸다.

그 덕분에 검은 좀 더 아래로 내려갔고, 남작 가슴에 슬쩍 피가 비쳤다.

"천한 피가 흘러서 질문 대신 심문으로 바꿔야 할 것 같군요."

"크윽. 네, 네놈이."

그는 팔을 들어 올려 뭔가 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마나는 내 검에 실린 마나에 흩어져 버린 뒤였다.

"다시 물어보죠. 날 왜 죽이려고 한 겁니까?"

"크윽. 공작이 마리아를 쫓아낼 때, 네놈이 제일 큰 이유였잖아! 말도 안 되는 이유지만, 네놈이 죽기에는 충분한 이유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지만, 여기까지는 그가 나를 죽일 때 한 말로 대충 예상했던 이유였다.

"공작부인이 남작님께 하소연한 겁니까? 억울하게 당했으니 복수해 달라고?"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공작부인이 어디까지 가담해 있느냐는 거였다.

쫓아낸 뒤에 기억에서 지워 버리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게 되었으니, 남작의 대답 여하에 따라 앞으로의 계획을 바꿔야 할지도 몰랐다.

"불쌍한 마리아에게 또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 거냐! 사랑스럽고 청초한 한 떨기 꽃 같은 그녀에게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 거냐!"

고함을 지르는 남작의 표정이 몽롱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그녀를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고통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공작에게 팔려 가서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 가는 것도 모자라, 너 같은 반푼이를 죽이려고 했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나다니 그런 거짓말을 대체 누가 믿는단 말이냐!"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듯이,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표정으로 말을 토해 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도 내가 사랑하는 것을 알았고. 나는 그녀를 위해 내 모든 것을 걸었다. 너를 죽이고 공작을 파멸시키는 것이 지금 내 삶의 목표다! 그리고...."

방 안에 흐르는 야릇한 향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망상 때문일까? 그는 횡설수설 끊임없이 말을 이어 갔다.

제60화

제10편 수도

두서없이 늘어놓은 그의 말에 따르면, 공작부인은 이곳에 없었다.

공작부인이 그를 사주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공작부인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아주 오래전이었다.

공작가 만찬에서 공작부인을 보고 반한 뒤, 공작부인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맹세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없어도 그녀에게 첫 번째 공작부인의 정보를 보내 주고, 선물을 보내고, 가족과 아내들은 버려두고 맹목적으로 그녀에게 매달렸다.

그녀도 감사의 답장을 보내긴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편지 어디에도 불륜을 이야기하거나 사랑을 속삭이는 내용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녀와 나의 사랑은 그런 천한 것이 아니야! 어린놈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점에 대해 말해 주었더니, 저런 소리나 외치고 있었다.

결국, 불륜 혹은 사랑에 빠진 유부남이 혼자서 벌인 일이었나.

왠지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결과였다.

물론, 남작 혼자 사랑에 빠졌을 리가 없었다. 공작부인이 그렇게 유도했을 게 분명했다.

다르게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능력이었다.

자신에게 호감을 품게 하고, 그 호감이 계속 이어져 이런 일까지 벌이게 만들다니.

정치인으로 나섰거나 수도에 있었다면 나라를 발칵 뒤집어엎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의 집 귀퉁이에서 외로이 늙어 가겠지.

다행히 앞으로의 계획도, 수도에 가는 일정도 바꾸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설마 또 이런 인간이 나타나지는 않겠지.

"사랑하는 마리아, 내가 그대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했어. 당신을 위해 준비한 아이도 있어. 그리고...."

그는 이제 반쯤 정신을 놓고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다른 연관자가 없으니, 이제 계획대로 마무리하고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남작이 놓친 검을 들어 올렸다.

화려한 검이었다.

나는 그 검을 횡설수설하는 남작의 가슴 깊이 꽂았다.

남작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숨이 끊어졌다.

나는 검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흐트러진 방을 배경으로 자신의 검을 가슴에 박아 넣은 남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멍한 얼굴로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손을 꽉 쥐었다.

전생이었으면 감히 할 생각도 못 한 일이었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한 짓도 해야 했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꾸 손에 뭐가 묻은 것같이 느껴졌다. 옷에 손을 문질러도 닦이는 것 같지도 않았고.

한참 문지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옷에 문지르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역시, 아무리 외면해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수많은 죽음을 감당한 정신으로도, 이런 어린 몸으로는 충격이 없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인정을 하니 떨리던 손이 멈추었다.

다행이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방 안을 더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초상화도 길게 검을 긋고 술을 뿌렸다.

그렇게 헤집고 난 뒤에 살펴보니, 방 안의 모습은 술 취해 난동을 부리다 자살한 사람의 방 모습 같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들이 보이겠지만, 아마 그의 아내들이라면 그런 부분은 애써 외면할 게 분명했다.

뭐, 이상하게 생각해 파헤쳐도 상관없었다.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 야영하고 있을 어린 소년과 연관을 지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뭔가 비싸 보이는 물건들도 바닥에 굴러다녔지만, 전부 무시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고, 지하 통로를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귀족 저택의 비밀 통로라면 분명 반대쪽은 저택 밖의 숨겨진 문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달려 나가니, 예상대로 통로 끝에 위로 이어진 계단과 기관이 달린 철문 하나가 보였다.

계단을 올라가 닫힌 문을 살폈다.

바퀴와 판스프링으로 구성된 기관 문이었다.

생각보다 자주 사용했는지 문틈은 반들거렸고, 힘껏 바퀴를 돌리자 쉽게 문이 열렸다.

드르르릉.

문을 열고 위로 올라오니, 반쯤 허물어진 집 내부가 보였다.

아마도 버려진 집인 듯했다. 아니면 버려진 것처럼 위장했든가.

집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 있었다.

드르르륵.

밖으로 나오자, 판스프링 덕분인지 문이 다시 닫혔다.

지하로 통하는 문은 무척이나 잘 만들어져 있었다.

철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다른 바닥과 구별하기 어려웠다.

거기다 내 힘으로도 밖에서는 철문을 열기가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다시 열 이유도, 열 필요도 없는 문이었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갔다. 집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주변은 온통 무너진 집들뿐이었다. 마치 무슨 사건으로 이곳만 버려진 것 같았다.

아직 밖은 어두웠다. 해가 뜨려면 멀었지만, 거리가 거리인 만큼 서둘러야 했다.

"가 볼까."

등에 검을 메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다시 달려 나갔다.

시간이 지나 해가 뜰 무렵, 나는 다시 일행이 머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계를 서는 병사 외에 모두 잠들어 있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멍하니 한쪽만 바라보는 병사를 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나는 조용히 마차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서려는 순간.

"이제야 오는 건가요?"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쯤 잠긴 소녀의 목소리.

남작 딸이었다. 그녀는 여행복 차림으로 마차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여태 안 주무신 겁니까?"

"사람이 안 돌아왔는데, 먼저 잠들면 예의가 아니죠."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그녀의 웃음이 환하게 빛났지만, 아쉽게도 나에게는 의미 없는 웃음이었다.

공작부인처럼 사람을 홀리는 웃음도 아니었고.

"그런데, 설마 빈손으로 온 거예요? 사냥 잘한다고 했잖아요."

그녀는 내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무척이나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예상보다 잡을 만한 것이 없더라고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숙영지 외곽에 던져놓은 물건을 다시 끌고 왔다.

질질질.

내 몸보다 몇 배는 큰 덩치를 끌고 오자, 경계를 서던 병사가 깜짝 놀랐다.

"앗! 그건 멧돼지 아닙니까?"

평범한 크기가 아닌 멧돼지의 모습에 병사는 호들갑을 떨었고, 담요를 덮고 자던 사람들이 모두 잠에 깨어 나와 내가 잡은 멧돼지를 바라보았다.

마차 앞까지 멧돼지를 끌고 온 나는 그녀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겨우 한 마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다들 자고 있어서 밖에다 던져놓았죠."

내 말에 날카로웠던 그녀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다행이에요."

안심했다는 말투였지만, 그 말속에는 헛일했다는 푸념이 느껴졌다.

병사들과 사람들은 내가 잡아 온 멧돼지를 보며 떠들어 댔고,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적어도 한 시간은 먼저 도착할 수 있었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잡아 온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도움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왜 남작의 딸은 잠을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린 것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도련님이라면 그녀가 나에게 반해서 기다렸다든가, 혹시 천사 같은 마음으로 기다린 건 아닌지 착각하겠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추호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노려보았다.

* * *

뒤에 이어진 아침 식사 시간은 내가 가져온 멧돼지 덕분에 무척이나 활기찼다.

"아니, 이걸 잡느라 밤을 새웠다는 거야? 한심하기는."

예상보다 큰 멧돼지에 놀라긴 했지만, 마누엘은 언제나처럼 나를 무시했다.

당연히 나나 다른 사람들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런 모습을 손님인 남작가의 남매들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마누엘은 투덜댔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여행길 음식이 좋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힘쓰는 병사들이 잡은 멧돼지를 바로 해체했고, 멧돼지 고기는 아침 식사용 국에 들어갔다.

그렇게 아침 식사에 어울리지 않는 고깃국을 실컷 먹은 뒤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영지를 벗어나 수도를 향해서.

그렇게 수도로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나는 고민했다.

남작의 딸 발레아를 그냥 두어도 될지.

남작의 경우는 또다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내게 해를 입힐 사람이었기에 그냥 놔둘 수 없었다. 하지만, 발레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위험해 보이는 성격에 가지고 있는 능력도 대단했지만, 남작이 죽은 이상 과연 내게 해를 입힐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본인도 남작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고.

하지만, 그냥 놔두기엔 찝찝했기에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가면을 벗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후 우리는 드디어 수도에 도착했다.

* * *

카를로스 왕국의 수도. 용사와 함께 마왕을 무찌른 카를로스 기사가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와 왕국을 세웠다는 도시.

그가 왕국을 세우기 전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지만, 카를로스 기사가 왕국을 세운 뒤, 이 도시는 그의 검의 이름을 따 '팔마'라 불리게 되었다.

우리 눈앞에는 커다란 성벽이 둘러쳐진 거대한 도시.

공작 영지가 있는 메세타 시의 몇 배나 되는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와...."

성문을 통과하면서 수도를 처음 와 본 병사들은 연신 감탄사를 토해 냈다.

남작 아들, 딸도 주변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마누엘 형도 눈동자만은 사방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도 순수하게 감탄했다.

생각보다 훨씬 큰 도시였다.

5층 이상의 높은 건물들과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마차들과 말들. 하지만, 길은 그리 더럽지 않았고, 냄새도 나쁘지 않았다.

왕국의 수도는 공작가 영지의 수도인 메세타보다 훨씬 번화하고 복잡했지만, 그래도 꽤 보기가 좋은 도시였다.

우리는 검문 없이 성문을 통과해 바로 주택가로 향했다.

공작이나 가문 사람들이 수도에 올 때 지내는 저택.

당연히 영지에 있는 집보다는 작았지만, 공작의 품위에 맞게 고급 주택가에 자리 잡은 고풍스러운 3층 저택이었다.

저택 앞에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사로 보이는 중년 남자와 메이드 복장의 하녀들이 문 앞에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들은 마누엘을 향해 고개를 숙였지만, 막상 인사 다음에 꺼낸 말은 마누엘이 아니라 남작의 아들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연락 마법으로 남작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장 돌아오시라는 전갈입니다."

그는 남작 아들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수도 마탑 문양. 마법 통신문이었다.

남작 아들은 편지를 열어 본 뒤, 눈살을 찌푸렸다. 황당한 얼굴, 그리고 어쩔 줄 모르는 표정.

"무슨 일인데요?"

여동생이 묻자, 그는 편지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발레아는 편지 내용을 확인한 뒤에 나지막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오! 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은 슬픔이 가득했지만, 난 그 전에 들은 감탄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기쁨이 섞인 감탄사였다.

제61화

제11편 왕궁 (1)

"당장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남작 아들의 말에 집사가 조언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남작의 영지는 무척 멀었다.

"아침까지 준비할 수 있지?"

마누엘의 말에 집사가 대답했다.

"네. 준비해 놓겠습니다."

남작 아들은 마누엘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변고에 모두들 표정이 좋지 못했다.

고용인들은 빠르게 짐을 정리하고 내일 출발할 사람들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일행도 각자 정해진 방으로 움직였다.

저녁 만찬도 취소되었고, 남작 아들은 혹시 다른 소식이 없는지 밤늦게까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렇다고 손님방을 줄 줄 몰랐네."

방을 둘러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하긴 이곳은 왕국의 수도였다.

공작가의 영향력보다 공작부인의 집안인 란사로테 후작가의 영향력이 더 강한 곳.

서자인 내가 이런 취급을 받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근래 들어 본가에서 받은 취급이 나쁘지 않았기에 이런 취급이 새삼스럽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적진에 들어온 것에 가까울까."

충분히 각오한 일이었다.

이보다 더 심한 취급을 받아 죽기까지 한 게 한두 번도 아니었고.

방 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발코니로 나갔다.

밤이 깊어 나름 보기 좋았던 수도의 야경도 깜깜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내일 출발을 위해 준비를 하던 고용인들도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다만 나 말고도 잠들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여태 안 자고 뭐 하세요?"

옆 테라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어두운 발코니 위로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작 딸, 발레아가 발코니에 서 있었다.

내 방이 손님방인 것처럼 옆방들도 손님방이었고, 공작가의 손님인 발레아와 그녀의 오빠가 묵고 있었다.

내 옆방은 발레아의 방.

내가 발코니로 나온 것도 그녀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수도에 온 탓에 흥분한 모양이에요."

내 말에 그녀는 묘한 콧소리를 냈다.

"전에도 느꼈지만, 말투로 보면 그 위치와 나이에 걸맞은 느낌인데, 눈과 말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은 영 딴판인 것 같더라고요."

지나가듯이 꺼낸 말은 정확히 핵심을 짚었고, 남작 영지에서 죽기 전의 일을 떠올린 나는 살짝 주먹에 힘을 주었다.

내 연기가 안 먹히다니.

'이대로 보내도 될까?'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영애께서도 잠을 못 이루시나 보네요. 남작님 일은 다시 한번 위로의 인사를 보냅니다."

이야기의 전환에 발레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긴 숨을 내뱉었다.

남작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슬픈 한숨.

하지만, 한숨 뒤에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정말 아버지가 죽은 게 맞다면 정말 알맞게 잘 죽은 거예요."

나는 그 말에 입을 딱 벌렸다. 생전 처음 어이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다행히 마침 달도 구름에 가려 가라앉은 내 눈빛을 감춰 주었다.

"흥,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돼요.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지만, 이건 공자님에게 훨씬 더 좋은 일이니까요."

당연히 좋은 일이지. 내가 얼마나 힘들게 뛰어다녔는데.

하지만, 이 여자는 이런 이야기를 왜 나에게 떠들어 대는 걸까?

죽기 전 마지막에 보았던 그녀의 본모습은 반쯤 미친 것 같았는데. 설마 여기서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우울해 보이던 그녀의 표정이 점점 환하게 변해 갔다.

"물론 나에게도 무척이나, 무척이나 좋은 일이에요. 알아요? 이제 나는 새로 시작할 수 있어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남작 딸이 아니라 발레아로 살아갈 수 있다고요."

그녀의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모의 압박에서 벗어난 귀족 딸이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의 본뜻을 알고 있었다.

우리에 갇혔던 맹수가 우리를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나는 꾹 쥐었던 주먹의 힘을 풀었다.

우리에서 풀려난 맹수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이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요. 돌아가서 아버지가 죽은 것을 확인하면 그 전의 발레아를 지우고 새로 시작할 거예요."

이것도 본뜻은 전에 벌였던 범죄들의 증거를 없애 완전 범죄로 만들겠다는 뜻이려나.

거기다 그녀의 주변에 일렁거리는 마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게 했다.

다행히 마나는 바로 가라앉았다. 환하게 피어오르던 미소도 사라졌고,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돌아갔다.

"이런, 밤기운에 너무 떠벌렸나 보네요. 방금 한 이야기는 모두 잊어 주세요.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에 정신이 없었나 봐요."

자, 이럴 때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아, 네. 네.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나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과 함께 더듬더듬 대답했다.

내 모습에 그녀는 처량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나도 마주 인사를 했고.

인사를 끝으로,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내게 이런 말을 남기며.

"나중에 봐요. 가면을 쓴 작은 도련님."

발코니에 남겨진 나는 조용히 비어 있는 옆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난 정의로운 자가 아니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칼이 있었고, 수많은 악당과 광기가 있었다.

내가 알게 되었다고 그 모든 악당과 미친 자들을 처단할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저번 삶에 그들이 나를 죽였다고 다음 삶에 그들 모두를 찾아다니며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거라면 처음 나를 죽였던 하녀들 모두를 찾아내 죽였어야 했다.

그리고 기대되었다. 남작이라는 조종자가 사라진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나에게 향한 칼이 아닌 이상, 저 광기가 어디로 향하게 될지 궁금했다.

그래서 난 그녀를 그냥 보내기로 했다.

나도 방 안으로 들어온 뒤 창문을 닫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남작 아들과 발레아를 태운 마차가 길을 나섰다.

헤어지면서 남작 아들은 마누엘과 같이 아카데미에 다니지 못하게 된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 돌아가면 그가 영지를 계승해야 했다.

영지 관리인을 따로 두고 아카데미에 입학해도 되겠지만, 당장 영지에 붙어 있어도 관리가 쉽지 않을 터인데 관리인을 두다니 어불성설이었다.

한편, 발레아는 어떻게 하려나.

그녀는 지금 마차에 앉아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딸의 모습을 열연 중이었다.

남작가에 돌아가 영지를 뒤엎을지, 아니면 따로 독립할지, 그것도 아니면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내 손을 떠난 일이었다. 그저 그녀가 내 앞을 가로막지만 말기를 빌 뿐이었다.

그렇게 남작의 자녀들은 수도를 떠났다.

수도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가게 되는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남작가에 대한 일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마누엘과 이 저택의 사람들은 마누엘의 입학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예상대로 나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나도 슬금슬금 끼어들어 아카데미 입학을 준비했다.

고용인들은 최대한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들도 공작의 고용인들이었다. 어쨌거나 내가 시키면 해야 했다.

그렇게 재미있는 은따 생활을 하던 와중에 사람이 찾아왔다.

왕실 문장이 새겨진 옷을 입고 온 집사였다.

놀랍게도 나를 찾아온 왕실의 집사였다.

"리아 카를로스 왕비께서 알렉스 님을 부르십니다."

이 말을 하는 집사의 표정이 처음과 달라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 나를 아예 모른 척하던 집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행 부족이었다. 영지에 있는 총집사라면 표시도 안 났을 텐데.

어쨌거나 후원자님의 호출이었다.

나는 왕실 집사와 병사들의 뒤를 따라 왕궁으로 향했다.

* * *

"...음. 멋, 멋있네요."

나는 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왕궁을 보고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대왕인 카를로스 왕께서 만드신 훌. 륭. 한 왕궁입니다."

내 말에 앞자리에 앉아 있던 왕실 집사가 사무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왕궁이 멋있다든가 아름답다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점점 크게 보이는 왕궁은 기사였던 초대왕의 취향이 담뿍 담겨 있었다.

왕궁은 거대하고 튼튼하며 멋대가리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제대로 된 전투용 성채였다.

물론 대전쟁을 겪은 초대왕에게는 제대로 된 전투용 성채가 필요했겠지만, 그 뒤로 왕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적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수도가 커지고, 외부의 습격이 사라진 뒤로는 수도에 지내는 대다수 사람은 흉물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왕궁의 모습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초대왕 때 붙여진 '기사의 성'이라는 이름은 지금에서는 일종의 자기비하로 여겨질 정도였다.

왕비의 손님이라는 거창한 이름 덕분에 내성에 들어선 뒤에도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후궁으로 향할 수 있었다.

내성 안에 있는 왕궁과 이어진 '숙녀의 궁'으로 불리는 세 번째 왕비의 저택은 본성과 달리 꽤나 아름다웠다.

마차에서 내려 왕실 집사의 안내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복도 그리고 양옆에 멈춰 서서 고개를 숙이는 고용인들.

내가 누군지 알아서 하는 인사가 아니라 왕실 집사 때문에 하는 인사겠지만, 공작가에서 받는 인사와 달리 조금 긴장이 되었다.

몇 번을 죽어 본 경험 덕분에 더 이상 긴장 같은 것은 안 할 줄 알았는데, 왕궁이 풍기는 기백은 범상치 않았다.

"어서 오세요."

안내를 받아 화려한 문 안으로 들어서자, 나를 반기는 음성이 들려왔다.

문 안의 응접실은 난생처음 보는 화려한 방이었다.

방 안에는 하녀들을 제외하고 두 명의 여성이 있었다.

살짝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성과 젊은 여성. 둘 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젊은 쪽 여성은 아는 얼굴이니, 나이 든 쪽이 왕비로 보였다.

젊은 여성 쪽은 카트리네 드 라텐하마르.

이름을 몰랐을 땐 불새 사냥꾼이라고 불렀던 카트린이었다.

용병일 때도 예뻤지만 용병 모습이 아닌, 드레스를 입고 화장까지 한 모습은 바로 그녀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카트린에게 눈인사를 한 뒤에 왕비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왕비마마. 알렉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오랜만의 풀 네임이라 조금 더듬거렸지만, 크게 이상해 보이진 않은 듯했다.

"리아 데 카를로스랍니다. 리아라고 불러도 돼요."

즐거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왕비는 내 인사에 답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이름만 부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앞쪽 소파에 나를 앉게 하고는 말을 이었다.

"카트린의 부탁을 받고 무척 놀랐답니다.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일이 없었거든요. 덕분에 공자를 무척이나 만나고 싶었답니다."

하기야 공작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정식 후계자도 아니고 서자를 후원해 달라는 부탁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당연한 결과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카트린이 미안한 표정으로 왕비와 나를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었어요. 공작 아들인데 제가 후원을 하는 것도 이상하고, 아버님께 말씀드리기도 어렵잖아요. 그러니 왕비님께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카트린의 언니였지만, 이 나라의 왕비를 언니라고 부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리아라고 부르라니 농담이 너무 지나쳤다.

제62화

제12편 왕궁 (2)

어쨌거나 미안한 얼굴로 사죄를 하는 카트린의 모습은 용병 때의 모습과 달리 무척이나 여성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마치 이 모습이 원래 그녀의 모습인 것처럼.

더구나 그녀가 왕비를 대하는 모습은 언니와 동생이 아니라 엄마에게 칭얼대는 딸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치 가족과 다과를 나누는 모습처럼 편안해 보였다.

너무 편한 모습이었을까. 왕비가 그녀를 살짝 혼냈다.

"이 녀석아, 네 나이가 얼마인데 손님 앞에서 그런 모습인 거냐."

왕비의 꾸지람에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요. 손님이 아니라 같이 싸운 동료예요."

"흐음, 생각보다 더 친한 모양이구나."

왕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번 나를 살폈다.

덕분에 나른했던 신경이 바짝 조여졌다.

왕비의 관심이라니, 이건 이것대로 무척 곤란했다.

그냥 후원만으로 끝나면 좋을 텐데, 꼴을 보니 그렇게 끝날 것 같진 않았다.

차라리 신나게 싸우는 쪽이 편해 보였다.

칼에 목이 잘려 나가면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지만, 이런 정치적인 관계는 잘못했다가는 다시 시작도 못 하고 고생만 죽어라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일은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게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거잖니."

그녀는 아직 어려 보이는 나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내 모습을 보면 그동안의 일을 믿기가 어려울지도.

하지만, 그래서 더 후원할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카트린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공자가 카트린을 도와준 것은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해요. 카트린뿐만 아니라 라텐하마르 백작가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백작가의 일원으로 감사드려요."

확실히 그녀의 선조가 남겨 둔 유물을 같이 찾아 주었으니 감사하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도 그 덕분에 꽤 많은 보상을 받았기에 지금의 감사가 당연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꽤 이상한 단검도 받아 버렸고.

쩝, 그 이상한 단검은 뭔가 대단한 듯이 말까지 꺼내 놓고 지금까지 잠잠한 상태였다.

원래 그때 말하고 끝나는 거였는지 아니면 뭔가 새로운 계기가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꽤 시간이 지났는데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다행히 단검의 능력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아닙니다. 카트린. 아니, 카트리네 영애에게 충분한 보상을 이미 받았습니다."

"오, 카트린이라. 정말 공자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네요."

왕비는 여동생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카트린은 어깨를 으쓱였고.

그런데 여기는 분명 왕궁의 왕비 앞인데,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가 조성돼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자꾸 긴장이 풀려서 걱정되었다.

"그건 카트린과 집안이 드리는 보상이고, 이 후원은 제가 따로 드리는 보상으로 생각하면 될 겁니다.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돼요."

부담이 더 되는데요. 더구나 보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엮일까 봐 더 걱정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왕비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저 감사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소소한 이야기.

공작가에 대한 이야기와 카트린과 함께 모험을 한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왕비는 훌륭한 청취자였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카트린이 해 준 말은 정말 딱딱해서 무슨 보고서를 듣는 줄 알았다니까요."

나는 꽤 괜찮은 이야기꾼인 듯했다.

그렇게 담소가 끝나 갈 무렵, 왕비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는 무엇을 할 생각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갑자기 진로 문제라니, 난데없이 검에 푹 찔린 기분이었다.

곤란했다.

솔직히 여러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그 계획들을 여기서 꺼낼 수는 없었다.

질문을 꺼낸 왕비의 입은 지금도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는 중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 질문은 후원자가 후원받은 사람의 미래를 걱정해서 꺼낸 말이 아니었다.

분명 정치적인 내용이 다분히 들어간 질문이었다.

옆에 있는 카트린은 조금 난감한 얼굴이었고.

아무래도 내 뒷조사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카트린에게 너무 내 능력을 보여 주었는지도.

아직 14살 어린 소년이었는데, 두 여성이 나를 보는 모습은 분명 성인을 대하는 듯 했다.

어린 척하는 것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졸업한 뒤에는...."

똑똑.

그런데 말을 채 이어 가기도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인가? 그런데 왕비가 이야기 중인데, 문을 두드린다고? 대체 누구지?

"공주마마 오셨습니다."

메이드의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여니 꼬마 숙녀가 보였다. 10살 안팎의 작은 인형 같은 소녀.

그녀는 방 안에 카트린이 있는 것을 보고 환한 미소를 띠었다가 내가 있는 것을 보고는 바로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양손을 모으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어마마마, 아이샤가 왔어요."

그녀는 왕비를 향해 인사를 올렸고, 왕비는 그녀에게 말했다.

"어서 오렴. 소개할 사람이 있어서 불렀단다."

분명 공주마마가 들어온다고 했고, 왕비의 딸 이름이 아이샤였으니.

지금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은 분명 손이 귀한 이 나라 왕의 세 번째 자식이자 승계 서열 3번째인 아이샤 공주가 분명했다.

나를 공주에게 소개한다고? 도대체 왜? 뜻밖의 상황에 눈을 끔벅일 수밖에 없었다.

공주도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왕비가 말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주에게 기사식으로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주마마. 알렉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음, 이번에는 안 더듬거렸다.

"아이샤 데 카를로스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도 드레스를 손에 잡고 나에게 인사를 했다.

어린 소녀의 앙증맞은 인사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음. 뭔가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후후, 그림으로 남겨 두고 싶은 모습이네요."

공주와 내가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왕비가 작게 웃었다. 카트린도 옆에서 미소를 지었고.

음. 공주만 아니라 내 쪽도 아직은 귀여워 보이는 걸까.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아이샤 각성일이 얼마 안 남았어요."

분명 공주가 10살이었나. 아무래도 왕가의 각성 일은 우리와 다른가 보다.

아니, 그런데 공주의 각성과 나를 소개시키는 것은 무슨 상관인 거지?

왕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각성일이 남았고, 어린 나이이지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겠지요. 그래서 이번에 아이샤도 아카데미에 들어갈 예정이랍니다."

"아카데미 말입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어린애가 내 동기라고? 꼬맹이잖아! 나하고 나이 차가...!

어라, 몇 살 차이가 안 나잖아.

분명 꼬맹이가 분명한데. 아니, 아니, 따지고 보면 나도 아직 꼬맹이인가.

그렇게 보니 키 차이도 그리 나지 않는 것 같고.

맙소사, 주변에서 하도 성인 취급을 하니 나도 헷갈렸다!

그런데 이런 꼬맹이들과 같이 수업을 받게 되는 건가?

아니, 전생에서도 현대 사회가 아니었을 때는 여러 나이대가 같이 수업을 받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실제로 눈앞에 보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어라, 그럼 우리 마누엘 형님도 이 꼬맹이 공주님과 같은 신입생인 건가?

오! 난감한 쪽은 나보다 형님이 훨씬 심하겠군.

"같은 신입생이니, 공자가 우리 딸을 잘 돌봐 주세요. 아직 어린아이랍니다. 왕궁에서만 자라서 무척 걱정된답니다. 같은 신입생으로 우리 아이를 잘 부탁드려요."

어느새 다가온 왕비가 내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식은땀이 쭉 흘렀다.

망했다. 완전히 망했다.

졸업 후 진로가 문제가 아니었다. 후원으로 정치적 입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입학식 당일부터 큰일이었다.

이건 늑대를 피하다가 범 우리에 들어간 꼴이었다.

정신이 반쯤 날아가 버린 내 얼굴을 공주가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 * *

예상치 못한 만남에 충격을 받은 뒤 왕궁을 나오게 되었다.

카트린은 다음에 만날 때를 기대하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고민할 정신도 없었다.

저택에 돌아와서도 왕궁 방문이 궁금했던 마누엘이 자꾸 기웃거리고 관심도 주지 않던 저택의 고용인들이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놀란 마음을 다스리고, 다시 훈련하는 사이 왕립 아카데미 입학일이 되었다.

왕성에 다녀온 덕분인지 저택에서의 생활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입학식에 가는 길도 마누엘과 같은 마차를 타고 갈 수 있게 되었다.

"너도 그레시아 공작가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공작가의 체면을 손상하는 짓은 하지 않도록 해. 이상한 이야기가 들려오면 바로 집에다 보고를 할 테니 제대로 행동해야 할 거야!"

마차를 타고 가는 길에 마누엘이 눈에 힘을 주며 나에게 말을 꺼냈다.

나름 주의를 주겠다고 말을 꺼낸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마냥 귀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을 받은 건 나뿐인지 같이 마차를 타고 가는 수도 저택의 집사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수도의 남쪽으로 향했다.

수도의 중앙에 왕궁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여러 관청과 기사단, 그리고 귀족들의 저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도의 남쪽. 남쪽 외성과 맞닿은 넓은 부지에 왕립 아카데미가 자리하고 있었다.

왕립 학원 혹은 왕립 아카데미로 불리는 거대한 교육기관.

이곳은 대전쟁 이후 초대왕이 이 나라를 세운 뒤 제일 처음 만든 국립 기관 중 하나였다.

대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는 했지만, 아직도 세상에는 수많은 마물이 남아 있었고, 새로 시작되는 왕가의 기초를 세우기 위한 인력을 수급하기 위해서였다.

거기다 대전쟁을 승리로 이끈 용사들로부터 이어진 상속 능력을 체계적으로 교육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그럴듯한 이유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기는 했다.

바로 신왕국의 귀족들과 지방의 호족들의 자식들을 인질로 삼기 위함이었다.

아내를 많이 두는 결혼 동맹이라는 방식은 상속 능력이 무분별하게 퍼져 나가기에 쓰기 어려웠으므로 인재 양성을 핑계로 자식들을 인질로 삼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카를로스 왕국만이 아니라 제국과 다른 왕국들도 대전쟁 이후에 우후죽순으로 수도에 아카데미를 만들어 귀족 자제를 입학시키고 있었다.

마차는 끝없이 이어진 높은 담벼락 옆길을 한참 동안 달려간 뒤에 마침내 왕립 아카데미의 정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넓은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정문으로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고급 마차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귀족이나 권세를 지닌 자들의 마차였다.

그 옆에 난 문으로 사람들이 걸어서 들어가고 있었는데, 의상이나 두리번거리는 모습으로 보아 평민들이 분명했다.

중세로 보기에는 상당히 발전한 세계이자 왕국이었지만, 상속 능력이라는 초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철저한 계급사회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모습이었다.

나도 각성을 하지 못했거나 쓸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면 저들과 같이 갔을 테고.

아니, 그 전에 죽었으려나.

걸어서 들어가는 사람들은 경비병들이 한 명씩 철저한 검사를 했지만,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는 검문 없이 바로 통과했다.

우리가 탄 마차는 그레시아 공작가의 마차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오히려 경비병들의 경례를 받으며 통과할 수 있었다.

제63화

제13편 입학식

정문 안으로 들어선 뒤.

"와!"

창밖으로 보이는 넓은 부지와 건물들을 보고 마누엘이 입을 딱 벌렸다.

'장난 아닌데.'

전생에 거대한 대학교 건물들을 보아 왔던 나에게도 이 왕립 아카데미는 꽤 놀랍게 여겨질 정도였다.

아름답게 꾸며진 미로 정원과 넓은 연무장 그리고 담벼락에 가려진 시설들과 5층 이상으로 보이는 건물들, 중앙에 보이는 수십 층짜리 탑까지.

5층 이상의 건물이 거의 없는 수도의 건물들과 비교하면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법 계열 능력자분들이 힘써 주셨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 몰랐군요."

"중앙 탑을 세울 때는 대마도사까지 초빙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까요."

마누엘과 집사의 말에 멀리 보이는 우뚝 솟은 탑을 바라보았다.

전생에 보았던 원형 고층 타워가 탑이라는 이름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쪽 세상과 어울리지 않게 높게 솟구친 건물이었다.

대마도사라.... 대전쟁 때의 용사 중 한 명을 말하는 걸까.

대전쟁 시대의 용사들을 떠올리는 사이, 마차는 각종 시설들을 지나쳐 커다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외관이 마치 신전처럼 보이는 거대한 대리석 건물이었다.

하지만, 이 건물은 그런 종교적인 건물이 아니라 이번 신입생 입학식이 거행될 아카데미의 중앙 강당이었다.

대형 행사에 사용되는 곳인데, 지금 아카데미로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이 건물로 향하는 중이었다.

마차가 멈추고, 집사가 내린 뒤 내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모였다.

"그레시아 공작가다."

"이번에 둘째 아들이 입학한다고 들었는데."

"그럼, 지금 내린 사람이 둘째 공자야?"

"아닐걸. 둘째 공자는 육체 각성이 아니라고 했어. 저건 육체 능력자나 기사 같잖아."

"그럼 누구지?"

특별히 귀로 마나를 모으지 않아도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역시 왕국의 이름 높은 공작가다웠다.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다 마누엘의 입학은 모두 알았지만 내가 입학한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수도는 적서 차별이 더 심하다더니 아카데미에 들어서자마자 느낀 현실에 씁쓸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괜히 처음부터 시선을 받을 필요는 없겠지.'

나는 마차 문 옆에 서 있는 집사 뒤쪽으로 슬쩍 자리를 옮겼다.

다음에 내릴 마누엘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 집사는 내 모습에 만족한 얼굴이 되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벗어나 다시 마차로 향했다.

그리고 마누엘이 마차에서 내렸다.

"마누엘 공자다!"

"둘째 공자지?"

웅성거리는 사람들.

공작가의 후계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공작의 둘째 아들인 데다 어머니인 공작부인의 가문도 이름 높은 후작가이니 사람들의 시선이 이리 모이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몬 형이 들어왔을 때는 장난이 아니었겠네.'

둘째가 이 정도니 공작가의 후계자가 왔을 때는 과연 어땠을지 절로 상상이 되었다.

마누엘이 마차에서 내리자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에서 내리는 마누엘의 모습은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왕자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려한 의상에 절제된 미소, 격식에 맞는 몸짓 등. 공작가라는 배경이 없더라도 고위 귀족이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공작가의 교육은 대단했다.

찌질한 마누엘조차 이런 모습이라니. 나도 마음속으로 박수를 크게 쳐 주고 싶을 정도였다.

마누엘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를 보고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에고, 좋단다.'

포장이 바뀌어도 마누엘은 역시 마누엘이었다.

"그럼 들어가지."

마차가 떠나자, 마누엘은 다시 표정을 가다듬더니 강당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내가 따르고, 집사가 뒤를 이었다.

마누엘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의 뒤를 따르는 나의 정체에 의문을 느꼈지만, 이어 들리는 소리에 모두 고개를 돌렸다.

강당으로 향하던 마누엘과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샤 데 카를로스 공주마마의 마차요! 모두 왕실의 권위에 경의를 표하며 고개를 조아리시오!"

전생에 보던 차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멈추는 광경을 이곳에서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우리의 뒤를 따르던 마차들이 길가에서 좌우로 갈라지더니 급하게 멈췄다.

그리고 그 중앙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화려한 마차.

마부 옆에 앉은 궁중복을 입은 남자가 목이 터져라 앞의 말을 계속 외치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우르르 자리를 옮긴 뒤 몸을 낮추었다.

평민은 양쪽 무릎을 땅에 대고 몸을 숙였고, 귀족들도 길 양쪽에 서서 머리를 숙였다.

나도 그들과 같이 머리를 숙였다.

서자이긴 했지만, 그래도 각성을 했으니 평민들과 같이 엎드릴 필요는 없었다.

전생과 다른 차별대우에 기분이 영 찝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릎에 흙을 묻히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심정은 조마조마할 뿐이었다.

좀 더 일찍 출발하거나 늦게 출발할걸. 이렇게 딱 마주치다니.

머리를 숙인 채 기다리고 있자니 마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고, 뒤이어 마차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샤 데 카를로스 공주가 지나가십니다! 모두 예를 갖추시오!"

다시 한번 예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처음 아카데미를 세운 초대왕은 왕족이든 귀족이든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면 모두 같은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왕명을 내렸다.

교육을 위해, 그리고 왕국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내린 명령이었지만, 시대가 흘러 지금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권력 구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나마 왕명은 지켜지는 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왕족이나 귀족, 평민이 같은 수업을 받을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입학 전이었고, 공주의 행차에 모두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앞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나를 주위에 뿌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왕족과 귀족들, 기사들이 버글거리는 이곳에서 그런 행동이 들키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계속 소원을 빌 뿐이었다.

'지나가라. 지나가라. 제발 그냥 지나가라. 말 걸지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라.'

하지만, 지나가던 발소리가 내 앞에서 딱 멈추었다.

'제길!'

"알렉스 공?"

바로 앞에서 얼마 전에 들었던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죠? 고개를 들어 봐요."

망했다. 확실히 망했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모두의 시선이 이곳을 향하고 있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냉큼 도망가고 싶었지만, 감히 공주님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알렉스 공! 잘되었어요. 아는 사람 없이 입학식에 들어갈까 봐 걱정이 되었는데, 우리 같이 들어가요."

아직 꼬마인 공주님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말하는 중이었다.

뒤쪽에는 왕실 기사들, 그리고 왕궁에서 보았던 왕실 집사와 메이드들이 보였고, 공주 옆에는 카트린이 미안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공주. 하지만, 공주의 눈매가 묘하게 휘어져 있었다.

고의다. 분명 고의였다.

저건 멋모르고 말을 건 게 아니었다. 일부러 말을 건 거였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애매한 느낌이더니만, 이 어린 공주는 나이와 달리 아주 여우임이 분명했다.

"모두 고개를 들어요. 이제 같은 학생이 될 텐데, 이제부터 이런 예절은 받지 않겠어요."

공주는 큰 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와 공주를 보며 모두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완전히 당했다. 평화로운 아카데미 생활은 이제 끝이었다.

아니, 서자 따위에게 공주가 같이 움직이자고 하다니 이대로는 수도 정치의 거친 물살에 풍덩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서 가요."

공주의 말에 나는 난처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마누엘의 눈꼬리가 꿈틀거리고 있었고, 집사도 난감한 표정이었다.

"아, 마누엘 공자시죠? 처음 뵙네요."

공주의 말에 마누엘이 허둥거리며 인사를 했다.

훌륭한 공작가의 교육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공자님도 같이 가는 게 어때요? 알렉스 공자에게 말을 많이 들었어요."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는데....

어쨌거나 공주의 말에 마누엘의 표정은 다시 좋아졌고, 우리 일행은 공주의 일행과 함께 강당으로 향했다.

으, 시선이 따갑다. 날카로운 검에 찔리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되면, 입학식 날 학교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될 게 분명했다.

'제길, 자살이다. 그것밖에 없어.'

이대로 아카데미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한 번도 자살한 적은 없었고 죽음의 고통이 끔찍했지만, 이런 세파에 시달릴 수는 없었다.

나는 입학식이 끝나고, 밤에 자살하기로 마음먹었다.

옆에서 마누엘과 공주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배경으로, 나는 입학식장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뭐라고?!

* * *

전생에 겪었던 입학식과는 묘하게 비슷하면서 다른 입학식이었다.

신전 느낌이 물씬 풍기는 커다란 홀 안에 수많은 사람이 들어차 있었다.

마법 등처럼 보이는 불빛들이 천장에 매달려 홀 안을 밝히는 중이었고, 사방의 벽에 매달린 명화와 조각들이 홀의 품격을 높여 주었다.

홀 중앙에는 긴 테이블 여러 개가 죽 늘어서 있고, 그 양쪽으로 각양각색의 신입생들이 앉아 있었다.

어린 소녀부터 청년, 공주부터 평민까지.

그리고 홀 뒤쪽에는 학생들과 같이 온 사람들, 즉 가족과 수행원들이 모여 있었다.

나도 신입생들과 같이 긴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지금은 교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는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당연히 내 옆에 앉아 있는 공주 때문이었다.

거기다 앞에서 공주와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아는 선생 때문이었고.

공주의 이모이자 얼마 전까지 용병으로 뛰었던 카트린이 다른 선생들과 앉아 우리 쪽을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으득.

공주와 공주 이모가 쌍으로 나를 물 먹이는 중이었다.

거기다 나를 도와주던 능력까지 내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겼다.

아카데미 입학을 했다고 '저장 시점'이 설정되다니.

죽지 않고 '저장 시점'이 생성된 것은 각성일 이후로 처음이었다.

각성일까지 포함해서 생애 두 번째이고.

아무래도 죽은 뒤 '저장 시점'에서 다시 살아나는 이 능력은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능력과 다른 능력인지도 몰랐다.

방금 전까지 '상속 능력'과 비슷한 또 다른 내 능력이고, 각성일에 '저장 시점'이 만들어진 것은 상속 능력이 간섭을 벌여서 일어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만들어진 '저장 시점'은 능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만들어졌다. 능력 대신 아카데미 입학이라는 특정 이벤트로 발생한 것이다.

'이벤트나 트리거로 발생하는 걸까? 죽는 것도 일종의 이벤트인 거고?'

아직 정확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기존 생각과 다른 결과에 고심이 깊어졌다.

제64화

제14편 테러 (1)

"...그리하여 왕립 아카데미를 졸업한 수많은 졸업생은 수백 년 동안 왕국과 왕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왔습니다. 여러분도 최선을 다해 교육에 임하여 앞서 졸업하신 부모님과 선배의 뒤를 이어...."

전생에 보았던 영화나 만화에서는 고깔모자를 쓴 백발의 할아버지가 학장으로 나와 멋진 연설을 하곤 했는데, 아쉽게도 이곳 학장은 그런 멋진 노인이 아니었다.

대충 아랫배가 나온 중년과 노인의 중간쯤 되는, 지쳐 보이는 남자가 이 학원의 학장이었다.

수도에서 꽤 유명한 귀족이라는데, 딱 봐도 전형적인 낙하산 관료가 분명했다.

지금도 무척이나 졸린 연설을 끝없이 계속하고 있었다. 만약 연무장에서 연설했다면, 벌써 수십 명의 신입생이 기절했을 정도의 기나긴 연설이었다.

학생 일부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옆에 앉아 있는 꼬맹이 공주님도 허벅지를 꼬집는 것이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꽤 시간이 흐른 뒤, 학장의 연설이 끝나자 사람들은 학장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모두 긴 연설이 끝났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교사의 소개가 이어졌다.

공통 교과인 역사, 예절 교사로 어딘가의 현자가 나와 인사를 했고, 체육인지 교련인지 모를 과목의 교사로 왕실 기사가 등장한 뒤에 각성 능력 훈련을 위한 선생들이 인사를 했다.

딱 봐도 귀족으로 보이는 남녀들이 나와 자기소개를 했다.

어딘가의 자작가, 남작가 출신의 교사들이 인사를 한 뒤, 잘 아는 얼굴이 나와 인사를 했다.

"육체 각성 담당인 카트리네 드 라텐하마르 님이십니다."

사회자의 소개에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텐하마르 백작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백작가가 공주의 외척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 옆에 앉은 공주에게로 향했고, 공주 주변을 훑었다.

공주 주변에 마누엘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눈을 빛낸 사람도 많았지만, 나를 보고 의아해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또 쏟아졌다. 죽겠다. 제발, 빨리 끝나라.

당장은 자살도 물 건너갔으니, 입학식이나 빨리 끝나길 빌 뿐이었다.

그 뒤에 신입생 대표 선서도 있었고 기타 등등의 순서도 있었지만, 나는 멍하니 입학식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입학식이 드디어 끝났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목 뒤로 소름이 쭉 돋았다.

"마기가!"

연설 뒤에 멍하니 앉아 있던 학장이 외쳤고, 강단에 서 있던 선생들 중 몇몇이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놀란 고함이 들려왔고, 뒤쪽에서 마나가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카트린이 우리, 아니 공주를 향해 몸을 날렸고, 나도 반사적으로 마나를 일으켰다.

'뭐지?'

마나를 일으킨 순간, 소름이 돋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강당 안은 이상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나와 다른, 아니 마나를 이상하게 변형한 것 같은 기운이 이 홀 안에 가득 퍼져 나가고 있었다.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별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학장이 고함을 지르고, 카트린이 몸을 날리고, 내가 마나를 일으키는 순간.

콰아아아아앙!

홀에 가득 찬 기운이 터져 나갔다.

환한 빛이 홀을 가득 메웠다.

빛이 열로 바뀌었다. 열폭풍이 홀 안을 가득 메웠다. 날아오던 카트린의 표정이 바뀌는 게 눈에 보였다.

공주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뭉그러졌다.

온몸이 찢겨 나가는 느낌과 불태워지는 느낌.

'이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겠네.'

마지막 순간, 내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둠. 이어진 빛.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 * *

눈을 뜨자 작은 공주마마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막 입학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조금 전 만들어진 '자동 저장 시점.'

'되살아난 건가?'

깨닫는 순간,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손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문턱에 멈춰 서서 벽을 짚었다.

"X발, 엿 같네."

오랜만에 한국말로 욕이 터져 나왔다.

죽을 때 느꼈던 끔찍한 고통의 여파가 지금도 내 정신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평범하게 죽지 못한 탓이었다.

다행히 앞서 가던 공주와 마누엘은 눈치채지 못했고, 공주의 수행원과 집사는 그냥 지나가라는 내 신호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따라갔다.

다행이었다. 무시 받는 상황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었다.

나는 문 안으로 들어간 뒤에, 벽에 기대어 서서 큰 숨을 몰아쉬었다.

어차피 환상통. 정신적인 고통일 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가라앉히고, 지금의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그동안 죽으면서 나름 터득했던 방법. 큰 숨과 함께 마나를 작게 돌렸다.

조금씩 가라앉는 통증. 가라앉는 것인지 익숙해지는 것인지 구별이 잘 안 되었지만, 어쨌거나 슬슬 견딜 만해졌다.

정신을 차리니, 다시 욕이 나왔다.

몇 시간 전에 만들어진 황당한 저장 시점 덕분에 죽는 시점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금은 무슨 일인지, 어떤 상황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자연재해? 폭탄? 실수? 실험? 테러?'

당장은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이 건물 안에서 일이 벌어졌으니, 여기를 벗어나면....'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 가다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나 혼자 일을 피하고, 홀 안에 있던 사람이 모두 죽게 되면.

'그 뒤의 끔찍한 상황을 나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거겠지.'

마누엘이 죽고, 수많은 귀족과 귀족 자제들이 죽고, 아카데미 최초의 대형 폭파 사태까지.

거기다 제일 큰 문제는 조금 전 공주가 이 안으로 들어간 거였다.

내가 왕비에게 불려가 공주와 만났다는 걸 왕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왕비는 그렇고.

그런데 나 혼자 살아남게 되면.

아주 당연하게 왕족 살인 혐의가 씌워질 것이다.

공작가도 엉망이 될 테고, 혐의가 풀리더라도 의심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잘해야 암살, 나쁘면 교수형이겠지.

'제길, 도망가는 건 포기.'

최악의 상황에서도 공주는 살려서 데리고 나와야 한다.

아니, 마누엘도 살려야 하고.

카트린도....

하아, 그냥 폭발의 원인을 찾아 막는 게 더 쉬울 듯했다.

혼자 도망 나오는 것은 최후의 수단. 우선 원인을 찾아야 했다.

동시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죽지 않고 넘어가기는 어렵겠지."

한 번에 끝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 * *

입학식장을 터트린 이상한 기운. 분명 마나와 비슷한 기운이었다.

'학장이 제일 먼저 알아차렸지.'

평범한 꼰대 중년처럼 보였는데, 그래도 학장을 할 만한 능력을 가진 모양이었다.

비슷하게 나도 알아차렸고.

하지만, 마나를 끌어올리기 전에는 그저 뒷목에서 소름이 돋았을 뿐이었다.

'마나를 끌어올리면 느껴진다라....'

너무 늦게 끌어올려서 언제, 어디서 시작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 미리부터 마나를 끌어올리고 있으면 되잖아.'

오, 바로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가짜 천재이긴 하지만, 역시 머리가 나쁘지만은 않은 듯했다.

"괜찮으세요?"

조금 늦게 공주의 옆에 앉으니 공주는 내 얼굴을 보고 작게 말했다.

아무래도 얼굴이 꽤 굳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양손으로 한 번 쓰다듬고.

"조금 긴장한 모양입니다."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내 말에 마누엘은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무시하고 조금씩 마나를 끌어올렸다.

너무 끌어올리면 기사나 귀족들이 시끄럽게 굴 테니 조금씩 작게.

그렇게 마나에 신경을 쓰는 사이, 식이 시작되었다.

여러 식순이 지나고, 교장의 훈시가 끝난 뒤 교사 소개.

여러 교사에 이어 카트린이 앞으로 나오는 순간.

턱.

내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움찔.

누구? 기척도 못 느꼈는데?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고, 이어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주의 사항 못 들었나요? 훌륭한 운용 능력이지만, 입학식 중에 사용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납니다. 알렉스 학생 벌점입니다. 입학식에 벌점이라니 무척이나 드문 일이군요."

작은 목소리였다. 평범한 목소리였지만, 듣는 나는 소름이 돋았다.

말에 힘이 담겨 있었다. 능력자인지 기사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학생에게 벌점을 줄 수 있는 사람, 선생이 분명했다.

교사들과 학장이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카트린까지.

음, 찍혔다. 확실히 찍혔다.

이런 미약한 마나를 느낄 수 있는 교사가 있다니, 의외로 이 아카데미는 무시무시한 곳일지도 모른다.

마누엘이 혀를 찼고, 공주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일이 잘되든 말든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나에게 주의를 주었던 선생이 떠나갔다.

그는 수업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었는지 강당 귀퉁이로 가서 따로 서 있었다.

금발 머리를 한 평범한 30대 남자였다.

궁금한 사람이 한 명 더 나왔지만, 지금은 그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조금 더 약하게 줄인 뒤 다시 마나를 끌어올렸다.

금발 머리 선생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음, 잘하면 입학식 끝나고 바로 퇴학당할 수도 있을 듯했다.

그래도 다시 이쪽으로 오지는 않았다. 주의를 한 번 주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시 와서 경고할 정도는 아니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이번에는 죽기로 작정한 상황이었다.

'엄청 아프던데.'

다가올 고통에 인상을 쓰면서 나는 사방을 살폈다.

마나의 움직임. 사람들의 모습.

시간이 흐르고, 결국 다시 죽었던 시간이 다가왔다.

"이상으로 왕립 아카데미 입학식을 마칩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는 순간.

찾았다.

나는 폭발을 일으켰던 이상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공주의 뒷모습.

다시 한번 죽음에서 돌아왔다.

나는 벽에 기대 숨을 들이켰다.

'앞으로 몇 번 더 반복하면 정신이 버티질 못하겠는데.'

죽을 때의 고통이 너무 크고, 간격이 너무 짧았다.

겨우 두 번 만에 한계를 느꼈다. 앞으로 한두 번만 더 지나면 죽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쓸모없는 죽음은 아니었어.'

폭발이 일어나기 조금 전, 폭발을 만든 기운이 시작된 곳을 알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곳이었고, 이 세상이 전생과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던 순간이었다.

후유, 조금씩 통증이 가라앉았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를 지켜보는 몇 사람.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내게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럼, 움직여 볼까.'

몸을 바로 세운 뒤 표정을 숨기고, 공주와 마누엘이 앉아 있는 자리로 향했다.

제65화

제15편 테러 (2)

아직 행사가 시작되기 전.

"빨리 앉아요."

공주는 조금 전과 다르게 말했다. 다행히 내 표정을 잘 숨긴 듯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다른 자리에 앉겠습니다."

내 말에 공주와 마누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죠?"

공주는 황당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뭔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주변의 시선 때문인가요?"

어라? 나는 그녀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의 시선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음. 과연.

핑계로 삼기에는 딱 적당한 이유였다.

"제 처지에 이런 관심은 좀 과한 듯합니다."

내 말에 꼬맹이 공주님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고, 마누엘도 나지막이 혀를 찼다.

충분히 실망할 법하지만, 나는 전혀 상관없었다.

솔직히 평범한 귀족가 '서자'라면 당연한 말이자 행동이었다.

왕비나 카트린이 왜 나를 공주와 엮으려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귀족가 서자와의 친분은 공주에게도 좋을 리 없었다.

공주의 실망을 뒤로한 채 나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깐 앉겠습니다."

내가 자리에 비집고 앉자, 곁눈으로 나를 살피던 공주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시선이 불편해서 자리를 옮긴다는 사람이 홀 구석이 아니라 홀 앞쪽, 그것도 신입생 선서를 하는 학생들 옆에 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내가 찾은 기운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옆자리에 앉은 소년에게 인사를 했다.

* * *

아까 전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나는 폭발을 일으킨 기운의 시작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상한 기운이란 일종의 변형된 마나처럼 보였는데, 처음 예상과 달리 유물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이것도 상속 능력이겠지.'

결국 사람이 일으킨 테러. 거기다 폭발에 자신까지 휩쓸렸으니, 일종의 자살 폭탄 테러였다.

그 폭탄 테러범이 지금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갑자기 끼어 앉은 나를 보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끼어 앉은 자리 때문이겠지.'

내 오른쪽에 앉아 있는 남학생과 내 앞에 앉아 있는 여학생은 각각 귀족 신입생 대표였고, 나에게 밀려난 예비 자살 폭탄 테러범께서는 '평민 신입생 대표'였다.

'보복 테러일까?'

'외국의 스파이?'

'신분 개혁 테러인가?'

'프롤레타리아 혁명?'

귀족에게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가 능력을 깨우쳐 보복하는 상상에서, 귀족들에게 고통을 받는 평민들을 계몽하려는 테러까지.

평범하게 생긴 소년을 보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얼굴이 굳어 있던 소년은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풀었다.

뭐, 자리에 끼어 앉았다고 뭐라 하기에는 좀 그랬겠지.

다른 사람들도 뭐라 할 리 없었고.

"예의가 없군요."

아니, 뭐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앞에 앉은 붉은 머리 소녀가 나를 보며 나지막이 꾸짖었다.

이 소녀도 신입생 선서를 하는 학생이었다. 어디 백작가의 딸이라고 하던데, 선서할 때 제대로 듣지를 않아서 정확한 이름은 몰랐다.

내가 평민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알 테고, 공주와 같이 들어온 것을 보지 못했나?

"귀족이라면 작은 일에도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귀한 분과 알고 계신다면 그분에게도 폐를 끼칠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아실 텐데요."

아니군. 공주와 같이 들어온 것을 봤군.

꽤 예뻐 보이는 그녀가 이어서 한 말은 목소리가 크지는 않지만, 무척이나 단호했다.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꿈꾸는 소녀였나.'

어느 가문인지 무척이나 제대로 교육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실무 쪽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듯했고.

그녀와 달리, 내 왼편에 앉은 다른 소년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이드 데 차이프리입니다."

이 소년이 마지막 신입생 선서자였다.

이쪽은 제대로 현실을 알고 있는 귀족이고.

물론, 내가 서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외면하겠지만.

다른 때였으면 두 사람에 대해 좀 더 알아봤겠지만, 지금은 내 오른편에 앉아 있는 평민 대표에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갑자기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아는 분인 줄 알고 그랬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괜찮습니다."

소년에게 고개를 숙이니, 그도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알렉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아! 그레시아 가문.... 이런, 전 피아르입니다."

이어서 내가 이름을 대니 바짝 긴장하며 자신의 이름을 댔다. 그의 눈에는 내 뒤로 공작 가문의 깃발이 펄럭이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이름은 테러범의 피아르인가. 평민이니 성은 없을 테고.'

다행히 공작가의 이름이 괜찮게 먹힌 듯했다. 아직 행사가 시작되려면 조금 시간이 남았고, 이야기를 늘어놓아 정보를 얻으려 했다.

하지만, 반대쪽 옆자리에 앉은 소년이 내 계획을 망가뜨렸다.

"그레시아? 거기에 알렉스라는 이름을 가진 자녀가 있었나?"

소년은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첫째가 시몬, 둘째가 공주님 옆에 있는 마누엘. 그리고 여동생만 있을 텐데?"

오! 정보력이 상당하군.

거기다, 서자 무시도 대단하고.

사과로 표정을 풀었던 앞자리 소녀도 그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귀족 사칭은 아니겠죠? 최악의 경우 사형까지 당할 수 있어요!"

이런, 귀족가의 정보력을 너무 얕보았나.

거기다, 저 고지식한 소녀 덕분에 대충 넘어가기도 어려워 보였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나는 입을 열었다.

"알렉스 데 그레시아. 서자입니다."

"아...."

"...."

내 말에 소녀는 입을 크게 벌리고는 뜻 없는 감탄사를 터트렸고, 내 양옆의 소년들은 눈썹을 찡그렸다.

"미안. 내가 생각이 없었어. 사과할게."

소녀는 바로 표정을 수습하고, 내게 사과를 했다.

반말로.

역시 제대로 배운 모양이었다.

귀족의 예의는 차별을 전제로 하는 예의. 그들의 배려는 하층민들에 대한 베풂일 뿐이었다. 서자도 제대로 된 귀족이 아니었고.

그녀의 사과는 반말 덕분에 전혀 사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제대로 사과를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정보력이 좋았던 소년은 사과는커녕 나를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망했네.'

반대쪽에 앉아 있던 폭탄 테러범도 나를 외면했다.

아니, 넌 평민이잖아.

신입생 선서를 하게 된 평민이라서 그런가. 생각보다 훨씬 신분 상승 욕구가 강한 모양이었다.

공작 가문이라는 휘황찬란한 배경이 서자라는 신분 하나로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 뒤로 행사 내내 테러범을 포함한 세 사람 모두에게 말도 붙이지 못했다.

"...초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왕국의 번영에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맹세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 세 사람이 앞에 나가 선서를 하고, 우리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 맞춰 선서를 했다.

신입생 모두가 맹세하니, 홀 안에 마나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신전에서 하는 계약이 아니니 강제성은 없었지만, 상속 능력을 지닌 백 명에 가까운 사람의 맹세는 나름의 강제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아예 딴생각을 못 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반역하거나 나라를 배반하고자 하면 마음속에 껄끄러움을 불러일으키는 효과.

이것도 아카데미에 상속 능력자들을 몰아넣은 이유일 것이다.

이 왕립 아카데미에는 각성한 귀족의 자녀와 평민만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모든 각성자가 이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라가 점차 커지게 되면서 수도와 다른 지방에도 여러 아카데미가 설립되게 되었다.

이 아카데미를 본떠 만든 다른 아카데미에는 각성자 말고도 돈 많은 평민이나 기사 지망생, 관료 지망생 등 비각성자들도 다닐 수 있게 했다.

대신 왕립 아카데미는 유력 귀족가의 후계자, 좋은 상속 능력을 받은 귀족가의 자녀와 평민, 그리고 좋은 상속 능력은 아니지만 힘 있는 가문들이 후원하는 각성자들이 입학을 하는 최고의 아카데미로 남게 되었다.

당연히 서자인 나는 들어올 수 없는 곳이지만, 왕실 인사의 후원이라는 거창한 후원자 덕분에 이렇게 입학하게 된 것이다.

신입생 선서가 끝난 뒤 슬쩍 공주 쪽을 바라보았다.

우연히 주변을 둘러보던 공주와 눈이 마주쳤다. 공주가 인상을 쓰며 눈을 돌렸다.

이런, 이번에 살아나게 된다면 후원자에게 꽤나 욕을 먹을 것 같았다.

지금의 상황도 그렇고, 앞으로 할 행동 때문에.

신입생 선서 뒤, 이런저런 식순이 이어지고 이제 입학식이 거의 끝날 때가 다가왔다.

'테러범이 맞나?'

말을 붙이진 못했지만, 입학식 동안 테러범 피아르를 계속 살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자살 폭탄 테러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그건 아카데미에 들어온 신입생들이 보이는 그런 수준의 긴장이었고, 주변을 살피거나 뭔가 딴짓을 하려고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가 테러범이라면 엄청난 프로일 터였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배를 잡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크게 앓는 소리를 냈다.

"크윽 윽, 배, 배가!"

주변의 학생들이 모두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주변을 지나던 선생이 내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옆에 앉은 피아르의 허벅지를 쥐고, 몸을 웅크리며 계속 신음 소리를 흘렸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지고, 식순이 중지되었다.

달려온 선생이 나에게 물었다.

"왜 그러지?"

"배, 배가 너무 아파요. 긴장 때문에 장이 꼬인 것 같아요."

아픈 사람이 할 말이 아니었지만, 나는 아픈 척을 하며 열심히 상태를 설명했다.

괜히 큰 병으로 오해를 하면 곤란했다.

"잠깐 진료실에 가서 쉬면 될 것 같아요."

나는 피아르 쪽으로 기대며 계속 중얼거렸다.

선생뿐만 아니라, 주변의 학생들도 눈살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지. 네가 좀 데려가라."

선생은 우리 테러범을 지목해서 나를 부축하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주변에 평민은 그밖에 없었으니, 그에게 나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피아르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부축했고, 주변 사람들은 홀을 나서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주도 황당해했고, 마누엘도 혀를 찼다.

음, 확실히 아카데미 생활은 망한 듯했다.

나는 식이 끝나기 전에 피아르와 함께 건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다행히 홀 뒤쪽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에 신관은 없었다.

"진료실에는 내가 데려갈게. 너는 다시 자리로 들어가."

대신 뒤쪽에 있던 여선생이 나섰다.

하지만,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자폭범 피아르의 옷을 움켜잡았다.

"진료실까지 같이 가 줘. 제발 부탁해."

정나미가 떨어진 표정이었지만, 평민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부탁하는 공작가의 서자를 차마 외면하지는 못했다.

여선생도 떨떠름한 얼굴로 포기했고, 대신 공작가 저택의 집사가 나서서 나를 부축했다.

피아르와 집사는 나를 데리고 홀 밖으로 나갔다.

제66화

제16편 테러 (3)

미리 확인한 대로 진료실은 입학식을 거행하는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건물에 있었다.

걸어서 200걸음 이상. 전생의 기준으로는 100m 정도.

진료실은 공작가의 영지에서 보았던 신전을 작게 축소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진료실이자 신전이기도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 아카데미는 왕실의 힘을 키우기 위해 세운 곳이었다.

당연히 왕실과 대척이 되는 신전은 아카데미에서 최대한 배척을 하려 했고, 신전 쪽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아카데미에 발을 들이밀려 했으니.

그 결과, 진료실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신전이 세워지게 된 것이었다.

건물들 사이에 세워진 작은 건물. 두 사람은 그곳으로 나를 부축해서 데려갔다.

갑작스러운 환자의 등장에 진료실이라고 불리는 작은 신전은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바로 침대가 놓여 있는 개인실로 옮겨졌고, 이어 멋들어지게 생긴 중년의 신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곁눈질로 살펴보니, 평범한 신관은 아닌 듯했다.

다른 때였으면 통성명을 하며 서로 간을 봤을지 몰랐지만, 지금은 환자를 보는 신관일 뿐이었다.

신관이 다가와 내 배 위에 손을 올렸다.

그가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 판타지 세상은 전생을 기억하는 내 입장에서 웃긴 점이 여러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신관의 무분별한 치유 능력 시전이었다.

전생이었으면 문진이나 진단으로 병의 원인을 찾았을 텐데 - 물론 그 진단이 제대로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 이곳은 큰 병이나 고치기 힘든 병 이외에는 우선 능력부터 쓰고 봤다.

그 덕분에 내 꾀병이 먹힌 것이기도 했지만.

우우웅.

배 위에 올린 신관의 손이 빛나기 시작했다.

따뜻한 기운이 배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신관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음, 그냥 무식하게 치유 능력을 쓰는 건 아니었나?

그렇다면 뭔가 이상을 느끼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더구나 입학식이 끝날 시간도 되었고.

"잠, 잠깐 화장실을!"

나는 황당해하는 사람들을 방 안에 놔두고 급하게 방을 뛰쳐나갔다.

들어올 때 봐 두었던 화장실로 달려가 화장실의 문을 잠갔다.

그리고 마나를 끌어올려 주변을 살폈다.

복도에 나를 따라온 사람은 없었고, 다행히 화장실 밖에도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 구조 역시 다른 신전과 다르지 않았다. 묘하게 전생의 화장실과 비슷한 깔끔한 실내.

하지만, 지금 화장실 탐방 따위를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뺐다. 창문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다행히 아직 몸이 작은 나는 창문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입학식장으로 가 볼까?

곧 있으면 입학식이 끝날 시간이었다.

이 건물 안에 있는 피아르가 터질 시간이었고.

계획한 대로 입학식장에서 놈을 빼내는 데는 성공했다.

시간이 없어 확인을 못 했지만, 피아르의 자폭은 아무래도 그의 상속 능력인 듯했다.

그의 옆에서 계속 살펴본 바로는 그가 일부러 자폭을 선택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입학식장에서 그를 빼냈으니, 그가 자폭하더라도 입학식장은 안전했다.

"그럼 이번엔 이 진료실 쪽이 문제이려나."

그가 이번에도 자폭하고, 내가 여기서 벗어나 살아남게 된다면 이 진료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는 것으로 결론이 날 게 분명했다.

"뭐, 그동안 죽을 때마다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낸 것은 아니었으니, 별로 거리낄 것은 없지만."

아기 때는 메이드들이 실종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졌고, 내가 죽이거나 죽은 사람도 여럿이었다. 물론 적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모두 행복하게 끝나는 결과는 거의 없었다.

"내 생존이 우선이었지."

게다가 그동안 꽤 냉담한 성격으로 변한 점도 있었고.

다만.

"수도에서 이런 테러에 그냥 휘말려 버리면 앞날을 대비하기가 곤란하겠지."

뭐, 내 선택 때문에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을 죽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찝찝함도 조금 있고.

"하아, 정말 죽기 싫은데...."

한숨을 내쉬며 건물에 기댄 채 입학식을 하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지나가면 제일 좋겠지만, 죽더라도 뭔가 더 실마리를 발견했으면 좋으련만.

"다음번에는 그냥 납치라도 할까."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하며 입학식을 거행하는 건물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웅성, 웅성.

입학식장에서 웅성거리는 소란이 일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그냥 지나가는 건가?"

분명 폭탄이 터지는 순간은 입학식이 끝나는 순간이었는데?

뭔가 모호한 결과였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끝나게 되는 거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입학식장을 향해 걸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번쩍.

사람들이 나오고 있는 문 안으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입학식장 건물이 터져 나갔다.

천장이 부서지면서 하늘로 치솟고, 벽들이 튕겨 나갔다.

콰르르릉.

"꺄아아악!"

"으아아악!"

화염이 하늘로 치솟았고, 굉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귀청을 때렸다.

"젠장."

사방으로 파편이 날아갔다.

나는 마나를 가득 끌어올린 채로 주먹을 휘둘렀다.

쾅. 쾅.

내게 날아오던 파편이 내 주먹에 맞아 박살이 났다.

나는 파편들을 부수며 박살 난 건물로 달려갔다.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아냐. 분명 저번에 터진 건 피아르였어!'

예상치 못한 사태에 내 머릿속은 엉망이 되었지만, 그래도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최선을 다해 퍼트린 마나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껴졌다.

연기 속을 뚫고 건물로 다가가자,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건물 밖으로 나오던 사람들?"

화상과 검은 재를 뒤집어썼지만, 팔다리가 멀쩡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아직 불길과 잔해가 쏟아지는, 파괴된 건물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안의 광경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에 본 사람들이 살아남은 건 실로 기적이었다.

이 건물 안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불타고, 엉망이 된 시체만이 가득했다.

몇몇 사람이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로 신음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모두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공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마누엘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신음을 흘리는 중상자들은 모두 건물 구석에 남아 있었다.

폭발에 날아갔을 수도 있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열기와 폭발의 흔적은 건물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에 앉아 있던 공주도, 마누엘도, 다른 선생들도.

모두 불탄 시체가 되었을 뿐이었다.

연기와 시체. 그리고 죽음. 죽음. 죽음....

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사이, 다른 사람들도 열기가 남아 있는 폐허로 들어섰다.

"맙소사. 살, 살아 있는 사람은 없나요?"

진료실을 갈 때 말을 걸어 주었던 여선생이 재투성이의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연기 속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그녀도 끝날 때 건물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그녀 말고도 살아남은 학교 직원들이 피투성이 상태에서 폐허로 들어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세상에, 빨리 움직여요! 여기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 뒤에 나를 치료하던 신관과 여사제들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중년의 신관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뛰어다녔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뭐 하는 겁니까! 정신 차리고 여기 좀 도와줘요!"

화상으로 뒤덮인 사람에게 치유 능력을 쓰던 중년 신관이 멍한 얼굴로 서 있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끔찍한 참사를 바라볼 뿐이었다.

신관은 혀를 차고는 사람들을 살리는 데 온 정신을 쏟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돕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피아르와 집사도 현장에 나타났다.

하기야 신관들이 왔는데, 두 사람이 그곳에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집사는 나처럼 얼이 빠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피아르도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신관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여기 좀 도와주세요!"

그들을 향해 여사제 한 명이 소리를 쳤고, 그들은 나와 달리 그녀를 돕기 위해 움직였다.

두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신관과 사제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는 순간.

"어?"

피아르가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가 특정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번쩍!

다시 한번 빛이 솟구쳤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빛이 퍼져 나갔다.

콰아아아앙!

그리고 거대한 폭음과 함께 마나와 열기가 주변을, 아니 나를 강타했다.

엄청난 열기. 조금 전 터져 나간 그 폭발과 똑같은 폭발이었다.

나는 폭발을 막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대로 폭발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마지막 순간, 나는 피아르를 보지 않았다. 대신 피아르가 보고 있던 방향을 보고 있었다.

테러 현장 안에서 나는 멍하니 서 있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욕을 대차게 먹었지만, 나는 사람들을 돕는 대신 주변의 정보를 최대한 모으고 있었다.

피아르가 범인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폭탄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폭탄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폭탄을 터트리는 스위치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아직 전부 알아낸 것은 아니지만, 예상외로 많은 것을 알아냈다.

좋아. 다음번이 끝이다. 이번 루프는 여기서 끝이다.

어둠이 세상을 감쌌다.

그리고 작은 빛이 점점 다가왔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 * *

눈을 뜨자, 이번에도 작은 공주마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막 입학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통증이 온몸을 강타했다.

절로 욕이 터져 나왔다. 세상이 빙빙 돌고.

결국, 벽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죽음은 익숙해졌다고 여겼지만, 역시 짧은 시간 동안에 반복되는 죽음은 정신적으로 버티기 어려웠다.

계획대로 이번엔 꼭 끝을 내야 했다.

나는 정신을 차린 뒤, 바로 피아르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주와 마누엘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나를 보고 의아해했지만, 나는 그 시선을 무시했다.

서둘러야 했다. 입학식이 시작되기 전에 확인을 끝내야 했다.

나는 피아르 뒤로 다가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피아르 님이시죠? 알렉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피아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알렉스 그레시아 님이시라고요? 반, 반갑습니다.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피아르는 이번에도 그레시아라는 이름에 놀랐고, 그의 옆자리인 신입생 선언자 귀족 소년은 내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저놈이 또 초를 치기 전에 일을 끝내야 했다.

"같이 입학하시는 친구... 아니, 친척분에게 이름을 들었습니다."

"아, 미리사 누님 말인가요? 사촌 누나하고는 어떻게 아시는 사이인가요?"

피아르가 바라보는 곳을 보자, 주근깨 소녀가 놀란 얼굴로 이곳을 보고 있었다.

조금 닮았나?

어쨌거나 찍었는데 운 좋게 맞은 모양이었다.

폭탄이 하나가 아니고 둘. 상속 능력이 폭탄이라면 친척이나 가족이 또 다른 폭탄이라고 추리할 수 있었다.

물론, 저 폭탄이 고유한 상속 능력이 아닐 수도 있고, 또 다른 추리의 구멍이 많았지만, 이렇게 찍은 게 맞아 버리니 구멍이 숭숭 뚫려 있던 추리가 맞아떨어질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문제는 다른 의문이 생겨 버렸지만.

귀족도 아니고, 평민 사촌이 둘 다 상속 능력이 생길 수 있는 것인지. 그 상속 능력이 테러에 이용될 수 있는 것인지.

하지만, 이런 의문은 천천히 풀어도 됐다.

지금은 범인, 원흉을 잡을 시간이었다.

제67화

제17편 범인 색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