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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제17편 범인 색출

나는 황당한 표정의 피아르를 뒤로한 채 몸을 돌려 홀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 사람 앞에 서서 말을 건넸다.

"몸이 너무 안 좋은데, 진료실을 좀 안내해 주세요."

나는 배를 움켜쥐고, 그를 보며 도움을 구했다.

피아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홀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나 인사를 건네고 바로 떠나 버린 공작가의 아들과, 그와 함께 밖으로 나간 건 사람들을 안내하던 여선생이었다.

도무지 무슨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이 학원에 오게 된 것도, 신입생 선서를 하게 된 것도 신기한 일투성이였으니, 지금 일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넘어가면 될지도 몰랐다.

"스승님 말씀대로 내가 중심만 잘 잡고 있으면 되겠지."

어디 출신인지, 지금은 또 어디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스승님 말대로 이렇게 귀족들과 나란히 서게 되었으니 그의 말을 믿고 나아갈 뿐이었다.

평범한 평민이었던 자신과 사촌 누이를 각성시켜 주신 것도 스승님이었고,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 주신 것도 스승님이셨다.

이곳 아카데미를 알려 주신 것도 스승님이었고, 귀족들과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알려 주신 것도 스승님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아카데미에 와서도 평민 대표로 신입생 선서를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곳에 와서 귀족만이 아니라 평민도 일부 각성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자신과 사촌 누나를 각성시켜 주신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었다.

'각성시킨 것은 절대 비밀로 하라고 하셨지.'

다른 귀족에게 들키면 스승님은 물론이고, 자신들까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남긴 채 스승님은 마을을 떠나셨다.

물론, 피아르도 그의 사촌 누이도 스승님의 말씀을 꼭 지킬 생각이었다.

각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곳에 와서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스승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비밀은 꼭 지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공작 아들이 왜 나를 찾아온 거지?'

피아르가 그런 의문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동안,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은 다른 의문에 빠진 채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레시아 공작 자제들 중에 알렉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있었나?"

아쉽게도 바로 입학식이 시작되는 바람에 그의 중얼거림은 허공에 덧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 * *

"속이 많이 안 좋은 거니?"

"죄송합니다. 버티기가 좀 힘들어서요."

"그 정도면 진료실에 가서 신관님께 치료술을 받으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나를 데리고 진료실로 향하는 교직원 아니, 여선생은 나만큼 표정이 안 좋았다.

솔직히 나는 꾀병이니 당연히 지금도 괜찮았다.

하지만, 나를 걱정하는 착한 선생이 아니라면 저리 표정이 안 좋을 이유가 없었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 자꾸만 입학식장을 뒤돌아보는 모습.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전의 죽음으로 그 이유를 알아차렸기에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윽, 그런데 선생님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아, 학생 이름은 알렉스지? 난 이시도라야. 교양학부 강사지."

평범해 보이는 30대 초반의 여교사가 내 말에 대답했다.

평민. 그리고 정식 교사가 아니라 강사.

바로 이 여교사가 조금 전 피아르를 폭파시킨 장본인이었다.

파괴된 입학식장에서 다시 한번 피아르가 폭파되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홀을 폭파했을 때는 너무 많은 사람이 있어 전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조금 전의 폭발은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신관과 사제들, 교직원 몇 명과 부상자뿐.

그리고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여선생.

그녀는 홀이 터지기 직전에 홀을 빠져나왔고, 사건이 일어난 뒤, 다시 홀 안으로 들어왔다.

몸에 검은 재가 가득했지만, 어디에도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에는 나도 그녀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홀 뒤쪽에 있었으니 먼저 나갈 수 있었고, 테러가 일어난 뒤에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것도 교사라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 뒤에 생존자를 찾아 돌아다니는 모습도 당시에는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피아르가 도착한 순간 주변을 살피는 내 눈에, 내 감각에 다른 사람과 다른 그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누구보다 먼저 피아르를 확인하고, 그가 나타나자 주변을 살피며 현장에서 벗어났다.

그 모습에 나는 그녀를 주시하게 됐고, 현장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순간, 그녀의 몸에서 마나가 언뜻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피아르의 몸에서 마나가 솟구치고 다시 폭발.

그렇게 나는 다시 죽고 말았다.

만약 사람이 많았거나 그녀가 멀리 피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변화였다.

그리고 상속 능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죽은 이유도 알게 되었다.

피아르가 폭파되는 순간, 끌어올려 놓았던 마나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아니, 피아르에게 빨려 들어갔다고 해야 할까. 아마 피아르가 가진 능력은 그가 가진 마나만이 아니라, 주변의 마나 모두를 활용해서 폭파시키는 능력인 모양이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능력이었다.

강한 마나를 가진 사람이 많을수록 더 큰 폭발이 일어나고, 정작 능력자들은 마나가 사라져 폭발을 막을 수도 없다니.

게다가 일반인들은 막을 방법 자체가 없었고.

자신이 폭탄인지 알지 못하는 능력자 타깃용 상속 능력이라니.

상속 능력은 내 생각보다 더 다양하고 무서웠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걸으니, 진료실 건물이 바로 앞이었다.

"입학식장에 다시 가 봐야 해서 나는 계속 옆에 있지는 못할 것 같구나. 신관님들께 말해 놓을 테니 푹 쉬고 있어. 괜찮아지면 다시 입학식장으로 오고. 아니면 내가 끝나고 찾아갈게."

이런, 그건 좀 곤란한데요.

주변을 살펴보니, 길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곳을 보는 사람도 없었고.

오케이.

"선, 선생님, 잠, 잠깐만요."

나는 신음을 흘리며 선생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

놀란 선생이 내 몸을 잡았고, 나는 숨을 헐떡이며 선생을 끌어당겼다.

"어?"

선생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품에 당겨진 선생의 배에 손을 얹었다.

쿵.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가 선생의 배를 두드렸다.

화아아악.

내 마나가 여선생의 몸 안을 휩쓸었다.

"왜...?"

이시도라 선생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를 보던 그녀는 바로 눈을 감았다.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기절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평범한 평민 교양학부 강사가 아니라 상속 능력을 지닌 능력자였다.

하지만, 마나를 다루는 육체 능력자가 아닌 이상, 오래 단련한 기사급 육체 능력자의 기습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러 번의 죽음을 거쳐 수련한 내 마나가 그녀의 내부를 엉망으로 휘저었고, 그녀는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방심하지 말았어야죠."

나는 말도 안 되는 조언을 기절한 그녀의 귀에 속삭여 주었다. 그 뒤에 그녀를 부축해 진료실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여기요! 선생님이 아프세요."

놀란 여사제들과 중년 신관이 다가왔다.

아기 때부터 신관의 치료술을 계속 구경했었다.

중독되고 다치고 죽게 되는 동안, 이 세계의 신관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이 세계의 신관의 능력은 신에게 받은 신성력도, 믿음의 결과도 아니었다.

단지 귀족들과 같은 상속 능력이었다.

귀족들처럼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었지만, 대전쟁 때 치료 능력을 행사하던 용사의 능력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부상에 대한 치료 능력은 대단한 축에 들었지만, 그들은 연금술사도 알아차린 아기의 중독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마나 충돌에 의한 기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를 진료실에 누인 뒤, 신관이 바로 그녀의 몸에 손을 올리고 치료 능력을 펼쳤지만,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죠?"

"갑자기 몸이 안 좋다고 하셔서요. 잠시만 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근처에 있던 제가 같이 온 거고요. 그런데 이 앞에서 기절하셨어요."

"...착한 학생이네요."

신관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몸이 아프다고 입학식장에서 학생의 부축을 받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 여기서는 확인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방식은 다르지만, 난 착한 학생이 확실했다.

"호흡은 안정적인 것 같고 다른 이상도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하나...."

확실히 신관들도 자신들의 치료 능력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학생도 입학식장에 가 봐야 할 테고. 그럼 학생은 먼저...."

"제가 다른 교직원을 모셔 올게요."

나는 신관의 말을 끊고, 선수를 쳤다.

"...그게 좋겠네요."

잠깐 고민하던 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와의 관계 때문에 입학식장에 찾아가기가 껄끄러웠던 모양이었다.

나는 걱정하는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그럼 쉬고 계셔요."

마나가 엉킨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에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진료실을 나섰다.

그리고 입학식 건물로 향했다. 빠른 걸음으로 건물 안에 들어간 뒤에 홀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입학식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입학식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홀에 들어서자, 교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왔다.

"같이 갔던 이시도라 선생은 어디 계셔?"

나는 말을 꺼낸 교직원을 보았다. 평범한 20대 남자.

단지 내가 그녀가 같이 간 것을 본 교직원일까? 아니면 그녀와 같이 일을 벌인 사람일까?

지금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가 마나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상속 능력자가 아닌 보통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다른 일 먼저."

대신 양해를 구하고, 다른 사람에게로 걸어갔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내 말에 공주와 같이 온 왕실의 수석 기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왕실 기사단의 수석 기사 중 한 명이자, 공주의 어머니인 리아 왕비에게 소개를 받은 왕비 세력의 한 축이었다.

학원을 다니는 동안 공주를 도와주라는 말이 그냥 말로 끝났을 리 없었다.

당연히 공주의 수발을 드는 집사와 호위할 기사도 소개를 받았고, 마지막으로 무력의 한 축인 수석 기사 노아로와도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첫눈에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차렸다. 왕실의 수석 기사다웠다.

"무슨 일이지?"

슬쩍 구석으로 이동한 뒤에 작은 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윙윙거리며 내 귀 주위에 울렸다.

앞에서 들려오던 입학식 진행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가 마나로 소리를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테러 의심자가 있습니다."

내 말에 그는 표정을 굳혔다.

"설마, 같이 나갔던 선생?"

역시, 주위를 살피는 걸 게을리 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런 사람까지 떼 몰살이라니....

"네. 이시도라 강사입니다. 이에로 후작가 사태 때의 연관자 같습니다. 의문이 들어 통증을 핑계로 진료실로 같이 가면서 살짝 추궁했는데, 덥석 물더군요. 기절시켜서 진료실에 눕혀 놓았습니다."

후작가와 전혀 관련이 없겠지만, 솔직히 다른 핑계를 대기가 어려웠다.

제68화

제18편 수업 첫날 (1)

알지도 못하는 제1 왕자, 제2 왕자의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고, 나와 연관된 사건이라면 공작가를 빼고는 서자 문제로 박살이 난 이에로 후작가 밖에 없었다.

뭐, 관련이 없다고 결론이 나더라도 이곳이라면 심문이나 마법을 쓰든지 해서 테러는 밝혀낼 테니, 그때 가서 잘못 알았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이에로 후작가 건? 제국 쪽인가?"

역시, 알고 있었다. 하긴 공주를 도와 달라면서 내 일을 알아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뭐, 관계는 없겠지만.

"공주가 계신 입학식장에 같이 있다는 것이 위험해 보여서요. 잘못했나요?"

만약을 대비해서 살짝 발도 빼 보고.

"아니, 잘했네. 여기서 기다리게. 내가 확인해 보지."

그는 바로 다른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직접 진료실로 향했다.

자, 그럼 어떻게 되려나.

나는 자리에 앉지 않고 뒤에 서서 입학식을 구경했다.

식순이 진행됐고, 신입생 선서도 지나갔다.

피아르도 훌륭하게 선서했다.

시간이 흘렀다.

중간에 진료실 쪽에 소란이 일었고, 입학식이 끝나기도 전에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위기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 * *

진료실에 누워 있던 여강사는 깨어나자마자 자살했다.

위기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눈앞에 뜬 바로 그 시점이었다.

반복되는 죽음이 멈춘 것은 기뻤지만, 범인의 자살은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이런 식의 아쉬운 결말은 그 뒤 죽음의 위기가 계속 닥쳐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뒷일은 뒷일이고.

지금은 죽음의 고통이 멈춘 사실에 감사해야 할 때였다.

여강사의 자살은 생각보다 훨씬 조용히 묻혔다.

입학식은 정상적으로 끝이 났고, 여강사는 조퇴 후 퇴직한 것으로 처리된 모양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고, 왕실 담당자들과 학원 관계자 몇몇만이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내가 알려 준 진실만.

그렇게 입학식이 끝나고, 빠른 뒤처리 뒤에 나는 카트린의 호출을 받아 그녀의 교수실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카트린과 여강사의 자살을 지켜본 수석 기사가 있었다.

카트린의 교수실은 상당히 깔끔하다 못해 삭막하기까지 했다.

벽에 검 몇 자루가 걸려 있었고, 책상과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짓에 남은 의자에 앉아 카트린과 수석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이샤 공주의 호위 미팅이나 대책 회의라고 여기면 되려나.

"일어나자마자 추궁을 하려고 했는데, 눈치를 채고 바로 독약을 깨물었습니다."

수석 기사의 말에 카트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누가 사주를 했는지를 파악 못 한 건가요?"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아쉽게 되었네요. 오랜만에 찾은 끈이었는데."

아쉬워하던 카트린이 이번에는 나에게 물었다.

"혹시 다른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었나요?"

카트린의 말에 나는 고심에 잠겼다.

하지만, 처음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다.

"네. 그 여자도 우연히 기억한 것뿐이었습니다. 솔직히 확신도 없었고요."

바로 폭탄이 되었던 두 학생을 숨긴 것이다.

물론, 희생자에 불과한 어린아이들을 지키자는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미끼를 남겨서 끊어진 끈을 다시 이어 보자는 생각도 그리 크지 않았다.

숨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두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작 영지에서 둘을 보았다는 것도 말이 안 되었고, 두 학생과 여강사가 만난 모습을 본 적도 없으니 둘 사이를 연관지을 방법도 없었다.

두 학생이 폭탄이라는 것을 밝히려면 결국 내 능력을 드러내야 하는데, 나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면, 위기 상황 종료는 동일 조건으로는 반복되지 않았다.

적어도 '당장'은 두 학생이 터져서 죽음이 반복되지는 않을 터이니, 뭔가 알아볼 시간은 충분했다.

조금 위험한 생각이긴 하지만, 내 비밀을 지키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아카데미 교사 제복을 입고, 머리를 말아 올린 카트린은 용병 때와 달리 성숙하고 멋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생이었으면, 보자마자 전화번호를 물어봤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바로 딱지를 맞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나이가 어려져서 그런지 그녀에게 반하거나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새로 태어난 뒤에 취향이 변한 걸까....

어쨌거나 카트린과 수석 기사는 내 말에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죽은 여자에 대한 조사는 더 해야겠지만, 나머지 조사는 이대로 마쳐야겠군요. 아카데미 측에서도 부담을 느끼는 것 같고요."

카트린의 말대로, 결국 입학식 사건은 이렇게 끝나게 될 것 같았다.

죽기 전에 보았던 입학식 테러였다면 학원이 아니라 왕국 전체가 발칵 뒤집힐 일이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여강사 한 명이 자살한 일일 뿐이었다.

그것도 공식적으로는 묻혀 버린 일이고.

좀 더 과거까지 되돌아갈 수 있었으면, 숨겨진 놈들을 더 끄집어낼 수 있었을 텐데.

이번에는 무척이나 아쉬운 결말이었다. 아니, 아직 결말이 난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수고했어요. 본인도 입학생인데, 공적인 일로 고생했어요."

카트린의 말에 수석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카트린은 나를 보며 무척이나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아무리 봐도 공주의 호위를 잘 골랐다는 표정이었다.

예상보다 큰일에 휘말리게 되어 곤란한 점도 있었지만, 반대급부로 카트린이나 수석 기사의 신임을 얻게 된 것은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거기다 이렇게 되면 나도 작은 대가를 요청해도 될 듯했다.

"조금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 * *

입학식이 끝나고 다음 날, 나는 아카데미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른 학생들은 입학식 날 기숙사에 들어갔지만, 나는 여강사 자살의 뒤처리 문제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기숙사에 들어가는 게 늦을 수밖에 없었다.

왕립 아카데미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모든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수도에 집이 있어서 등하교를 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전생의 교통 시스템처럼 빠른 운송 수단이 없었기에 대다수의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길게 이어진 3층짜리 건물들. 남녀로 나누어진 기숙사 건물들은 전생에 보았던 대학교 기숙사보다 훨씬 크고 고풍스러웠다.

뒤처리로 다음 날 있었던 오리엔테이션도 건너뛰게 된 나는 저녁 식사 후에 기숙사 건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랜 역사가 느껴지는 넝쿨 담을 지나, 고풍스러운 문을 통과한 뒤에 예상보다 깨끗하게 보수된 계단을 올랐다.

"1동 3층 끝에서 두 번째 방이라."

애매한 시간이어서인지 지나가는 학생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직 서로 얼굴도 익숙하지 않았으니 지나가는 학생들끼리 슬쩍 눈인사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이것도 며칠만 지나면 온갖 편견에 휩싸인 시선들로 바뀌겠지.

3층에 올라 긴 복도를 지나고 알려 주었던 방 앞에 섰다.

짐이야 미리 보낸 뒤였으니, 나는 빈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2인 1실.

어제 먼저 입실한 학생이 나를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레시아?"

"안녕. 피아르."

나를 보고 눈을 끔뻑이는 신입생은 입학식 때 신입생 선서를 한 평민 대표이자, 나를 몇 번이나 죽게 했던 자살 테러 폭탄범이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무슨 일이긴. 저기 내 가방이 있잖아. 나도 이 방에 배정된 거지."

"그럴 리가.... 난 평민이고...."

말을 하다가 피아르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역시 이틀 만에 내 신분이 탄로 난 건가. 하긴 죽기 전에도 옆자리에 있던 귀족 신입생 대표가 바로 알아차렸으니 이번에도 금방 알 수 있겠지.

그동안 소문이 안 난 게 아니라 얼굴을 못 알아본 모양이었다. 편견에 찌든 눈을 보는 게 더 빨라지겠군.

"내가 귀족이긴 하지만, 서자잖아. 영지에서는 그래도 대우해 주던데 이 수도에서는 어림도 없는 모양이야."

"어.... 그런가...."

피아르는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어림없기는.

나는 공작가의 자제였다. 아무리 서자라고 해도 평민하고 같은 방을 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아이샤 공주의 라인까지 탔는데.

당연히 이 방을 같이 쓸 이유가 없었으나, 피아르와 방을 같이 쓰게 된 것은 내가 카트린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뭐 서자에다 여러 가지 경험을 해 보고 싶고 어쩌고 거짓말을 하면서 열심히 카트린을 설득한 덕분이었다.

폭파 스위치가 없어졌다고 폭탄을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여강사는 죽었지만, 피아르와 그의 사촌 누이는 꼭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애매한 마무리는 결국 또 다른 죽음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원인을 찾든가, 찾지 못하면 폭탄을 없애 버려야 다음번 죽음이 찾아오지 않게 될 것이다.

놀란 피아르를 뒤로하고 나는 침대에 놓여 있는 짐들을 정리했다.

짐들이 꽤 많았지만, 다행히 방이 상당히 컸다.

이층 침대도 아니었다. 가운데 창문이 있고, 양쪽 벽으로 침대가 두 개에 책상 둘.

벽장도 각각 따로 있었고, 세면실과 화장실은 하나였지만, 지내기에 불편함은 없어 보였다.

뭐, 지금 공주가 지내는 곳처럼 방 여러 개에 거실과 응접실까지 딸려 있는 호텔 스위트룸 같은 곳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작은 원룸 이상이었다.

평민인 피아르는 당연히 불편할 것 같지 않았고.

대충 짐을 정리하고, 세면을 한 뒤에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때까지 피아르는 긴장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도 창백한 것이 방 배정을 한 누군가를 무척이나 원망하고 있는 듯했다.

그 덕분에 카트린은 무척이나 오래 살 것 같았다.

어쨌거나 덕분에 대화를 나누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였다.

자, 그럼 슬슬 말이나 붙여 볼까.

"내일부터 정상 수업이지?"

"아, 오늘 오리엔테이션 나오지 않았더라...요?"

"일이 있어서."

"어.... 그래...요."

말을 놓을지 말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불쌍해 보였지만, 그냥 놔두었다. 고의로 날 죽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고생을 한 것을 생각하면 그와 좋게좋게 지내 줄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음, 그러고 보니 같은 방을 쓰려는 이유가 또 있었군.

어깨를 으쓱하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너는 행정 학부지?"

"공자...는 상속 능력 학부인가...요?"

"아니, 기사 학부."

"기사 학부?"

피아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놀랐는지 존댓말도 붙이지 못했다.

아카데미는 크게 3개의 학부로 나뉘어 있었다.

방금 말한 기사 학부와 행정을 가르치는 행정 학부. 그리고 상속 능력을 훈련시키는 상속 능력 학부.

물론 왕립 아카데미는 상속 능력을 각성한 학생이 대부분이지만, 상속 능력이 모두 유용한 것은 아니었다.

전임 왕령 행정관이 가지고 있었다는 완전 기억 능력이라는, 행정에 어울리는 상속 능력도 있었고, 내 능력처럼 기사에 어울리는 능력도 있었다.

물론, 피아르가 놀란 것처럼 귀족, 그것도 대귀족들은 대부분 상속 능력 학부를 다녔다.

제69화

제19편 수업 첫날 (2)

행정 학부는 가문을 이어받지 못하는 낮은 귀족의 자녀들과 평민들이 안정된 생활과 신분 상승을 위해 다니는 곳이었고.

기사 학부는 육체 강화 능력이나 전투용 마나 심법을 가진 자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가문의 후계자나 대귀족의 자녀들은 대부분 상속 능력 학부를 다니고 거기를 졸업했다.

솔직히 대귀족들은 상속 능력을 가문 내에서 배우고 훈련받는 것이 가장 유리했다.

왕립 아카데미의 훈련은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을 위한 것이고, 다른 면에서는 귀족의 자식들을 인질로 잡는 역할이 주였다.

결국, 제대로 된 귀족들은 상속 능력 학부를 다니며 서로의 친분과 카르텔을 강화하는 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공주도, 마누엘도 그리고 신입생 환영회에 나선 두 귀족 신입생도 모두 상속 능력 학부에 속했다.

"공작가라고 하지만, 나는 서자일 뿐이잖아. 각성한 것도 행정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정기사만 되어도 감지덕지하지."

뭐, 얼마 전이었으면 입으로 꺼낸 말이 사실이었겠지만, 지금에서야 기사 학부에서 배울 게 뭐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골치 아픈 높으신 분들의 눈을 피하는 게 중요했다.

공주를 부탁한다고 했지만, 수업 중에 공주에게 문제가 생길 리도 없고, 아니,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지내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했다.

애매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대충 이해시킨 모양이었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였다.

"나야 육체 능력 강화 쪽이라 기사가 당연하기도 했고.... 그런데 피아르는 어떤 능력이야?"

나는 피아르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자, 토해 내라. 네놈의 능력을.

* * *

반원형의 커다란 강의실.

신입생 모두가 강의실에서 첫 수업을 듣고 있었다.

"반갑다. 역사를 담당하고 있는 보가드다."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교수는 다른 이야기 없이 한마디로 자기소개를 끝내고 바로 수업을 진행했다.

"이 세상은 대전쟁 이전의 세상과 대전쟁 이후의 세상으로 나뉜다고 보면 된다. 대전쟁 이전의 고대 제국의 문화와 기술, 역사는 대전쟁으로 전부 흩어지고 사라져 지금은 유물로나 발견될 뿐이고, 지금의 문화와 정치, 국가는 모두 대전쟁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늙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힘이 있었고, 수업 진행 방식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열정적인 그의 수업은 학생들의 마음에 닿지 않았다.

소수의 학생들만 들을 뿐 대부분은 교양에 불과한 역사 수업에 별 관심이 없었다.

1학년 통합 교양 수업이라 모두 참여하기는 하지만, 점수 비중도 크지 않고 대부분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들었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집에 있을 때 역사서는 모두 완독했고, 가정교사와 열심히 토론도 했었다.

"...대전쟁의 위대한 승리와, 승리를 만들어 낸 영웅들의 업적은 그 누구도 헐뜯지 못하겠지만, 역사학자인 나로서는 그 전쟁 중에 파괴된 기록과 유물들이 무척이나 아쉬울 따름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전쟁 이전의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뒤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의 고대 제국을 생각하면...."

역시 왕립 아카데미인가. 역사서에 나오는 내용과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네. 그런데 왕립 아카데미에서 저런 말을 해도 되나 몰라.

뭐, 저 정도는 상관없으니 교사로 놔두는 것일 테고.

나는 호기심을 거두어들였다. 그래 봤자, 색다른 유물이 등장하지 않는 교수의 개인적인 의견이자 이론일 뿐이었다.

나는 교수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신입생 전체가 모인 만큼 큰 강의실에는 빈자리가 얼마 보이지 않았다.

지정 좌석이 아니어서인지 신입생들은 이리저리 모여 있었다.

크게 보면 세 그룹. 딱 봐도 서로 다르게 느껴지는 그룹이었다.

어제 예비교육 때문인지 학과별로 모인 게 여실히 느껴졌다.

강의실 맨 뒤쪽에는 건장한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대다수가 남자. 거기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용맹한 기세가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딱 봐도 기사 학부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기사 학부가 모여 있는 앞쪽, 강의실 중앙에는 화려해 보이는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여유로운 행동과 허식이 가득 찬 자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눈길.

전부 한가락 하는 귀족 집안의 자녀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당연히 그 중앙에는 다른 학생들보다 몇 살은 어려 보이는 아이샤 공주가 앉아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역시 공주는 공주였다.

불안해 보이지도 않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수업을 받고 있었다.

오히려 주변에 앉아 있는 학생들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받기 위해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런, 눈이 마주쳤잖아.'

눈이 마주치자 공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전과 다르게 조금은 인정한 듯한 눈길. 공주도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은 공주의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마누엘은 바로 알아차린 것 같았다.

공주의 모습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별일 아니니 신경을 꺼 주었으면 좋겠는데.

공주와 마누엘 말고도 대단한 집안의 후계자로 보이는 학생들이 몇몇 보였다.

나야 누군지 알지 못하지만, 마누엘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될 듯했다.

마지막으로 맨 앞쪽에는 다른 그룹과 달리 평범해 보이는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행정 학부 신입생들이었다.

모두 잘 모르는 학생들이었지만, 교단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남녀 두 학생은 아는 학생들이었다.

피아르와 그의 사촌 누이인 미리사. 두 사람은 그동안의 내 고생도 모르고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었다.

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니 저렇게 열심히 듣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고 보면 그나 그의 사촌 누이는 작은 영지의 마을에서 왔다는데 저 정도 교육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각자 뭉쳐 있는 그룹들 사이에 나는 홀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어제 자리에 없었으니 아는 사람도 없었고, 나에게 따로 접근하는 사람도 없었다.

공주도 공적으로는 아는 척 안 하는 것 같았고, 마누엘도 당연히 모르는 척.

룸메이트인 피아르도 완전히 나를 무시하는 중이었다.

어젯밤에 열심히 구슬렸던 게 하루 만에 다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가 어디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그리고 어떻게 왕립 아카데미로 오게 되었는지. 게다가 그의 능력까지.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 *

그가 태어난 곳은 소아트 자작이라는 귀족의 영지였다.

"소아트 자작이 다스리는 영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소아트 영지가 어디냐고...요? 음. 아르고시아 영지 아세요? 아니면 메세시아는요? 아, 메세시아는 아신다고요. 메세시아 남작 영지 바로 아래에 있어요."

소아트 영지는 잘 모르는 곳이었지만, 메세시아 남작가는 잘 아는 곳이었다.

수도에 오기 전에 들렀던 곳.

쫓겨난 두 번째 공작부인의 능력에 빠져 있던 남작이 나를 죽이려던, 아니 죽였던 곳이었다.

우연일까.

어쨌거나 이 내용은 기억에 담아 두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마을의 촌장이어서 저와 미리사 누님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제대로 글을 배울 수 있었어요."

"능력을 어떻게 얻었느냐고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별다를 게 없이 지냈는데, 마을을 지나가던 어떤 분이 저와 미리사 누님을 보고 혹시 상속 능력이 있는 거 아니냐고 말씀하셔서 알게 되었어요."

전생에 들었던 '지나가던 사람'인 건가.

뭔가 걸리는 게 있었지만, 이것도 우선 머리에 담아 두었다.

"저하고 미리사 누님의 능력은 비슷해요. 일종의 증폭 능력인데요. 입학 테스트 때 들어 보니 일종의 버퍼 능력이라고 하더라고요."

말을 하면서 피아르는 손을 들어 올렸다.

손으로 모여드는 마나.

미친!

나는 질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왜 그러시죠?"

그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나가 모여든 그의 손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능력을 조금씩 올려 줄 수 있대요. 시간도 늘려 줄 수 있고. 일종의 저장고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는데, 어쨌거나 대단한 능력은 아니라서 행정 학부로 지원했어요. 능력은 아카데미에서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하긴 자폭 능력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질겁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게 되었다. 때마침 잠을 잘 시간이 되었기에 흐지부지 넘길 수 있었지만, 정말 깜짝 놀랐다.

* * *

여러 가지 의심이 들 만한 내용을 머릿속에서 조합하는 중에 교양 수업이 끝났다.

이어진 수업은 다른 교양 수업인 '상속 능력 기초' 시간이었다.

"여기 모인 학생들은 모두 대부분 각성을 마친 능력자들입니다."

중년의 여교수가 말을 하며 강의실을 쭉 훑었다.

'대부분'이라는 말을 하는 중에 슬쩍 말이 흔들리는 게 보였지만, 나는 물론이고 모든 학생들이 그녀의 실수를 모른 척해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강의실에서 능력자가 아닌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강의실 중앙에 앉아 있는 아이샤 공주였다.

아직 10살. 각성일이 되려면 한두 달은 지나야 했다.

원래 각성한 뒤에 아카데미에 들어오는 게 맞는데, 아이샤 공주는 그 관례를 깬 것이었다.

물론, 왕족이자 공주인 아이샤 공주가 각성을 못 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왕족인 그녀가 관례를 깨고 미리 들어올 이유도 없었다.

나도 의문이 들어 왕비를 만났을 때 물어봤었다.

"카트린이 돌아왔고, 왕실이나 수도의 분위기도 복잡해지는 중이라 하루라도 빨리 아카데미를 끝내는 게 좋을 듯해서 보내는 거랍니다. 거기다 올해 들어가면 그대와 같이 수업을 받게 되니 더욱 좋고요."

왕이 시름시름 앓고 있고, 왕자들 사이에서 승계 다툼이 심화되고 있으니 이모인 카트린이 돌아온 김에 우선 아카데미로 보내 시선을 돌린다는 계획이려나.

나름 괜찮아 보이는 계획이었지만.

'내가 아니었으면 입학식 때 몽땅 죽는 거였잖아!'

그러면, 입학식 테러가 공주를 노린 테러였을까. 그래서 카트린도 수석 기사도 부산스럽게 움직인 거고.

흠, 위험한 걸 알았으니 입학을 취소하고 그냥 왕궁으로 돌아가면 안 되려나.

아니, 내가 테러를 막아 버려서 별 위험을 못 느낀 건가?

이어지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일이 단단히 꼬인 듯했다. 잘못하면 가면 갈수록 더 꼬일 수도 있을 듯했고.

결국, 누가 벌인 일인지 꼬리를 잡아야 할 이유가 더 늘어나 버렸다.

이어진 수업도 역사 수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능력의 종류와 위험, 거기다 상속 능력을 사용하는 귀족의 중요함과 왕실에 대한 충성 등.

상속 능력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일종의 정훈 교육이 되어 버렸다.

'설마 한 학기 내내 이런 수업은 아니겠지.'

전공 수업은 아니었지만 나름 기대를 하고 왔는데, 이런 식의 수업이 계속된다면 대체 뭘 배우게 될지 난감할 따름이었다.

'정말 사교가 다인 아카데미는 아니겠지?'

이러면 결국 전공인 기사 수업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한숨과 함께 상속 능력 기초 수업도 끝이 났고, 그와 함께 오전 수업이 끝났다.

제70화

제20편 수업 첫날 (3)

이어진 점심시간은 예상했던 대로 혼자 먹게 되었다.

첫날이라서 그런지 다행히 나만 혼자 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꼴을 보니 잘못하다가는 내내 혼자 먹게 될 것 같았다.

그건 또 곤란할 것 같아 대충 몇 명 꼬셔 봐야 할 듯하다.

다행히 식사는 훌륭했다. 집에서 먹던 식사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음식. 왕립 아카데미 만세였다.

식사 후에 이어진 오후 수업.

오후 수업은 오전과 달리 학부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나는 기사 학부의 수업이었다.

우리는 아카데미에서 지급한 가죽 갑옷으로 갈아입고, 검을 찬 뒤에 연병장으로 나왔다.

아카데미에 있는 여러 연병장 중 하나였는데, 이곳도 모인 사람들에 비해 엄청나게 큰 연병장이었다.

"빨리 집합! 모두 정신을 빼놓고 왔나!"

연병장 안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줄을 맞춰 서면서 나는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카랑카랑한 저 음성 때문이었다.

그리 오래전에 들은 것도 아닌데, 왠지 추억의 음성을 듣는 것 같았다.

지금 듣는 음성은 후작가에서, 지하 던전에서 듣던 음성이었다.

용병 때의 카트린의 음성. 왕실과 교사 때의 음성이 아니라 용병 때의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였다.

"나는 1학년 기사 학부를 담당하게 된 카트리네 드 라텐하마르다. 기사 작위는 없지만, 너희들을 훈련시키기에는 충분하니 걱정하지 말도록!"

우리와 같이 가죽 갑옷을 입고 단상 위에 서 있는 카트린은 용병 때 보던 그녀의 모습과는 또 달랐다.

아마 귀족이라는 직위와 단정한 그녀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기사 작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녀를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텐하마르 백작가가 무엇으로 유명한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거기다 그녀가 기사 학부를 담당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 그녀가 누구라는 것도 모두 알게 되었다.

왕비의 여동생이자 라텐하마르 백작가의 후계자라는 것을.

뭐, 그녀의 진짜 실력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지만.

단상 위에는 그녀와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서 있었다.

그녀는 줄을 맞춰 서 있는 우리를 훑어보며 말했다.

"처음 만났으니 우선 실력을 봐야겠지?"

그녀의 말에 불쑥 한 학생이 물었다.

"설마 저 기사들을 상대하라는 말씀은 아니겠죠?"

누구냐. 이 한심한 말을 꺼내는 자가.

나는 괴상한 말을 꺼낸 신입생을 바라보았다.

남들보다 훨씬 더 큰 덩치를 자랑하는 학생이었다. 거의 2m에 육박하는 덩치에 근육으로 꽉 찬 몸을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육체 강화 능력자였다.

어라. 그런데 그를 어이없게 바라보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는 학생이 더 많았다.

설마, 다들 나보다 강한 건가?

그럴 리가, 몇몇 빼고는 전부 허접해 보였는데?

"하아, 내가 이럴 줄 알았다."

학생들을 보고 카트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네놈들의 정신머리를 제대로 고쳐 주겠다. 모두 기사가 얼마나 강한지 제대로 보여 주겠다."

그녀는 기사들에게 부탁했다.

"제대로 혼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각 줄의 앞에 섰다.

오, 왕실 기사와의 대련이라. 실력을 얼마나 드러내야 하나. 제대로 싸워 보고 싶은데.

나는 왕실 기사와의 대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런 내 앞으로 카트린이 다가왔다.

"너는 나하고 대련이야."

"네?"

"네 실력을 아는데, 기사들하고 대련을 붙일 것 같아? 네놈 때문에 교육을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이쪽으로 나와."

그녀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련은 앞으로도 계속 있어. 충분히 싸워 볼 테니 오늘은 나하고 붙어 보자고."

얼마 전까지 얌전했던 그녀가 아니었다. 용병 때의 거친 그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솔직히 나도 궁금했다. 선대의 유산을 얻어 성장한 그녀의 실력과 그동안 성장한 내 실력이.

나는 줄에서 벗어나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

놀란 학생들의 시선이 내 뒤를 따라왔다.

자, 얼마나 실력을 보여야 하려나.

나는 그녀 앞에 서서 검을 들어 올렸다.

* * *

으악!

검이 날아가고, 학생도 바닥을 굴렀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오고.

"항복! 항복한다!"

"죽, 죽일 셈이냐! 진심으로 휘두르는 거냐!"

겁먹은 목소리들이 연신 악을 써 댔다.

조교 역할이라고 해야 할까. 왕실 기사들과의 대련은 학생들 순서대로 박살이 났다.

대부분의 남학생도, 몇 명의 여학생도 차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과거에 제대로 된 대련을 해 보지도 못한 학생들은 실전에 가까운 진심 대련에 공포를 느꼈다.

그들은 기사들에게 고함을 질러 댔지만, 이곳에 있는 학생들 대부분은 대귀족의 자제들도 아니었고, 가문의 후계자도 거의 없었다.

물론, 각성했기에 기사들보다 높은 위치를 지니게 되긴 하지만, 왕실 기사라면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시하지 못하는 몇몇 학생들에겐 기사들도 함부로 대하지도 못했다.

캉!

"윽!"

"잘 막으셨습니다."

피루나 백작의 둘째 아들 이케르는 기사의 검을 힘겹게 막아 냈지만, 이어서 들려온 기사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앞 학생과 주변의 학생들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이미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기사에 조금 밀리고 있었지만, 각성한 지 이제 5년. 거기다 아직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15살 소년이 완숙한 기사의 검을 받아 낸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사와 상대도 해 보지 못한 하급 귀족들과 달리 자신은 영지의 기사들과도 대련을 해 보았기에 기사들과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물론, 영지의 기사들보다 눈앞의 기사가 더 강한 것 같았지만, 이 정도면 가문에 누가 되지는 않을 듯싶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실력을 확인한 것 같습니다."

몇 번 더 검을 주고받은 뒤, 기사가 뒤로 물러섰다.

이케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기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마나가 바닥이라 상속 능력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 있는 사람이 몇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바닥에 눕거나 엎어져 있었고, 서 있는 사람은 기사들과 아직 대련을 이어 가고 있는 여학생 한 명.

그는 뜻밖의 광경에 놀라 그 여학생이 누군지 확인했다.

갈색 머리의 가냘픈 여학생이었다.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대귀족의 자녀도 아니었고, 얼굴이 특출나게 예쁘지도 않아 기억해 두지 않은 학생이었다.

기사 학부니, 몸이라도 건장했으면 그래도 관심을 두었을 텐데.

전혀 신경 쓰지 못한 학생이었는데, 지금 기사와 호각을 이루며 싸우고 있었다.

'여학생이라서 봐주는 걸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지금 싸우는 모습만 봐도 대련하는 두 사람의 검 속도가 자신보다 빨라 보였다.

'속도 강화형인가.'

몸을 봐도 파워형은 아닐 듯하니, 대귀족이 아닌데도 생각보다 좋은 상속 능력을 받은 모양이었다.

다만, 속도 위주의 능력으로는 마물을 상대하기 어려울 텐데.... 뭐, 기사가 하는 일이 마물을 상대하는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설마 내 쪽이 봐주었던 것은 아니겠지?'

그와 대련했던 기사를 잠깐 쳐다본 후 그는 고개를 저었다.

왕실 기사와 백작가 기사의 실력 차가 그렇게 클 리 없었다. 영지의 기사들이 그를 계속 봐주었다면 모를까.

어쨌거나 그래도 한 명은 대등해 보이는 여학생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그는 반대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슈욱! 슉!

지금 서 있는 사람들은 기사들과 그, 대련 중인 여학생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카트리네 교수와 그레시아 공작가의 서자.

처음 대련을 했던 학생들과 분명 같이 시작했는데, 여태 대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공작가의 서자는 검을 들고, 카트리네 교수는 특이하게도 검과 방패를 동시에 들고 있었다.

"저거 뭐 하는 거야?"

"춤추는 건가?"

"저 서자, 공주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도 있던데 실력을 포장해 주려고 장난치는 거 아닐까?"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그럼 저건 뭔데?"

"그래도 움직임은 좋네. 제대로 배우긴 했나 봐."

부상이 크지 않아 바닥에 앉아 쉬고 있던 학생들은 카트리네 교수와 공작가 서자의 대련을 지켜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검도, 방패도 부딪치지 않고 슬쩍슬쩍 몸을 피하며 검을 허공에 찌르고 피하고 있었다.

마치 합을 맞추고 검술을 연기하는 연극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학생들처럼 수군거리지는 않았지만.

둘의 대련을 지켜보며 기사들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케르도 이 대련을 보며 황당해했지만, 곧이어 머릿속으로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설마 아니겠지.'

저 대련과 비슷한 전투를 본 적이 있었다. 검이 서로 닿지 않는 싸움. 하지만, 검이 부딪치는 싸움보다 훨씬 고차원적이고 무서운 전투를.

검이 서로 닿지 않았지만, 검에서 솟구쳐 나온 빛이 상대방을 베어 내는 능력자들의 전투를 그는 봤던 것이다.

'아니겠지.'

제대로 된 마나 연공술을 배웠더라도 벌써 검 밖으로 마나를 뿜어낼 리가 없었다.

거기다, 분명 저 서자는 신체 강화형의 상속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공작가의 마나 연공술을 이었다면 이 학부로 올 리가 없겠지.'

공작가의 후계자도 기사 학부가 아니라 상속 능력 학부로 갔었고.

뭐, 마나 연공술을 이었으면 이렇게 수도로 오지도 못했겠지만.

서자가 가문의 상속 능력을 이었는데, 공작가에서 그대로 놔둘 리가 없었다.

숨겨서 뒷일에 사용하든가 아예 망가트렸겠지.

* * *

'으악! 살살 좀 해요!'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했다.

내가 피하지 않아도 검은 내 몸에 닿지 않았지만, 이미지화한 진짜 그녀의 검은 마나가 길게 자라나 내 몸을 베어 가고 있었다.

만약 옆으로 몸을 피하지 않았으면 반으로 잘려 나갔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검을 휘둘렀지만, 카트린은 슬쩍슬쩍 방패를 대는 것만으로도 내 검을 막아 내고 있었다.

그녀가 들고 온 방패는 유적에서 찾은, 마나로 확장이 되는 방패였다. 검과 닿지도 않았지만, 마나로 확장되는 영역을 포함하면 검을 빗겨 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저 방패까지 쓰니까 실력 차이가 나서 못 해 먹겠잖아!'

나는 제대로 대련해 보자는 말을 꺼낸 덕분에 괜한 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제대로 된 대련이면 서로 제대로 된 무기를 사용한다는 의미였다.

다만, 실제로 마나를 뿜어낼 수는 없었다. 마나를 뿜어낼 수 없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검과 방패에 마나를 실었다가는 주변에 피해를 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대신 마나로 확장된 검 길이를 이미지화하고 마찬가지로 방패의 확장도 머릿속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으로 무언의 약속을 한 뒤 대련을 시작했다. 서로 충분히 능력을 보았으니, 이미지 잡기도 쉬웠고.

다만, 마나를 싣지 않으니 움직임도 느려 터질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의 훈련 덕분에 기사급의 움직임은 어느 정도 가능해졌지만, 마나를 활용할 수 없으니 이리저리 몸을 날리는 생난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잠깐만 마나를 쓰지 못해서 맨몸뚱이를 움직이는데, 전용 무기까지 고려한 검기의 길이를 이미지화한다고?'

잠깐, 이거 뭐가 잘못된 것 같은데.

분명 이건 앞뒤가 맞지 않은 소리였다.

제71화

제21편 거짓된 스승 (1)

나는 손을 들어 이의를 제기했다.

"잠깐만, 잠깐만요.... 으악!"

뻑!

손을 들었지만 카트린의 검은 멈추지 않았고, 나는 검면으로 대차게 얻어맞아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아, 미안. 집중하느라 손드는 걸 못 봤어."

카트린은 미안한 얼굴로 사과를 했다.

설마, 그녀 정도 되는 능력자가 내 행동을 감지하지 못했다고?

분명 지금 입꼬리가 올라가 있잖아!

하지만, 모두가 보는 대련. 그녀에게 성질을 낼 수가 없었다.

비척거리며 일어나는 나에게 그녀가 물었다.

"왜 멈춘 거야? 대충 멈출 때가 된 것 같기는 하지만."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된 대련이 아닌 것 같아서요. 마나도 안 쓰는데 검기를 기준으로 싸우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아, 그러네. 말이 안 되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 실력 확인을 하는 데는 문제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말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대로 된 대련도 아니고 한바탕 운동한 것으로 쳐줘야 할 것 같았다.

거기다 대련을 끝내고 주변을 둘러보니, 뭔가 이것저것 오해들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끙. 어느 정도 실력을 보여 줘서 무시는 안 당하려고 했는데, 설마 전생의 소설 클리셰처럼 되는 건 아니겠지.

"모두 자신들의 실력을 알겠지? 각성한 귀족이라는 자부심은 너희들의 실력이 귀족의 이름값만큼 올라선 뒤에 가지는 것이 좋을 거다!"

카트린은 다시 단상에 올라 학생들에게 일갈을 터트렸다.

"우리 귀족은 상속 능력을 가진 특권층이 아니라 그 능력으로 마물과 외적을 막아 냈고, 또한 막아 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다. 제대로 된 실력도 없이 기사나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놈들은 내가 친히 대련으로 훈련시켜 실력을 만들어 줄 테니 단단히 각오하도록."

카트린이 단상에 서서 검을 짚고 외치는 모습은 물개박수라도 쳐 주고 싶을 정도로 무척이나 멋지고 훌륭했다.

문제는 바닥에 널브러진 저 귀족과 귀족 아류들이 그 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대전쟁, 그리고 왕국이 만들어진 지도 수백 년.

의무는 형식이 되어 가는 중이었고, 권리는 이미 특권으로 굳어져 버렸다.

실질적인 능력을 기반으로 계급이 정해져 있으니 레볼루션, 즉 혁명이 일어날 리도 없고.

결국 이곳도 굳어진 계급으로 계속해서 썩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뭐, 그런 건 나와 별 상관이 없었다. 그런 거창한 것을 생각하기에는 내 코가 석 자였다.

그렇게 오후 수업도 끝이 났다.

첫날 수업.

친구 0명. 대화 상대 0명.

아무래도 왕따 확정인 것 같았다.

한숨이 나오는 결과를 들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룸메이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저녁 식사도 혼자 해야 할 듯했다. 아니, 룸메이트가 있어도 식사를 혼자 했으려나.

우울한 예상을 머릿속에서 날려 버리고, 후딱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대충 숙제를 하다가 잠잘 시간이 되었다.

그 말인즉슨 기숙사 통금 시간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직 피아르는 돌아오지 않았다. 벌써부터 무단 외박?

내게 말도 안 하고 외박이라니, 그럼 숨겨 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바로 건물 1층에 있는 기숙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룸메이트가 아직 안 왔는데요."

"아, 피아르 학생은 면회가 와서 일일 외박입니다."

"아, 그런가요?"

아니, 미리 좀 알려 주지. 아니, 피아르가 내게 말했어야 하는 건가? 아무튼 헛걸음이었다.

고개를 젓고 다시 올라가려다가 머릿속으로 뭔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몸을 돌려 다시 기숙사 교직원에게 물었다.

"피아르만 외박입니까? 사촌 누나 미리사도 있는데?"

"아, 미리사도 외박.... 이런, 여학생 쪽은 말하면 안 되는 건데. 못 들은 걸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난감한 얼굴로 말하는 교직원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면회가 와서 둘 다 외박이라.

영지와 수도가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가족이라면 시골 마을 촌장 집안일 텐데, 가족이 찾아와 수도에서 두 사람을 외박시킨다고?

아무래도 금방 일을 끝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옷을 서둘러 갈아입고,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깊숙이 숨겨 두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벽에 세워 둔 대검이 있었지만, 밤 나들이에는 카트린이 준 단검이 제일 안성맞춤이었다.

오랜만에 단검을 쥐자, 손바닥에 전류가 이는 것 같았다.

처음 내게 말을 건넨 이후 이 단검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다시 말을 걸어 주길 기대하며 나는 단검을 허리에 꽂았다.

마지막으로 후작가에서 활약을 했던 망토를 위에 걸친 뒤.

방에 불을 끄고, 베개와 이불로 사람이 자는 것처럼 만든 뒤에 창문을 열었다.

마나를 끌어올렸다.

웅. 웅. 웅.

기분 좋은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멀리서 내가 심어 놓은 기운이 느껴졌다.

기껏 룸메이트를 한 이유도 내 기운을 피아르에게 심어 놓기 위해서였다. 기운을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다행히 그가 있는 방향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다.

나는 창밖으로 몸을 빼낸 뒤, 창문을 닫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구름이 가득한 밤.

검은 옷을 입은 어린 능력자가 아카데미 안을 가로질렀다.

* * *

상속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마나 연공술을 이용해 기사가 검을 사용하게 만드는 마나.

내가 전생한 이 세계는 마나를 기반으로 세워진 곳이다.

대전쟁 전, 고대 제국도 마법사와 기사가 마나를 사용해서 거대한 제국을 이끌었다.

대전쟁으로 기사도 그 지위를 내려놓았고 마법은 몰락했지만, 대전쟁 때 생겨난 상속 능력도 바로 이 마나가 기반이었다.

상속 능력이 그 강대한 위력으로 기사들의 마나를 눌러 버렸지만, 아쉽게도 상속 능력은 마법이나 기사의 검처럼 다양하게 활용하기는 어려웠다.

기사와 마법사는 알보병이라고 하면, 각각의 상속 능력은 대포와 전투기처럼 특화된 고화력 무기라고 할까.

고대 제국 때에는 몇몇 마법사도 상속 능력 같은 무시무시한 위력의 마법을 뿜어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지만, 대전쟁 무렵 전승이 끊어져 버렸으니 의미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유로 육체 강화 계열의 상속 능력과 기사의 마나를 같이 가지고 있는 나는 두 가지 능력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다.

거기다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마나 감지 능력까지 더하면, 이렇게 자신의 기운을 다른 사람에게 묻혀 놓아서 멀리서도 추적할 수 있었다.

그래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추적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목표물은 아카데미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 쇠창살이 삐죽이 올라온 담벼락을 뛰어넘으니, 목표물이 바로 앞에 보였다.

목표물이 느껴지는 곳은 아카데미 정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상가 지역이었다.

아카데미를 방문하는 사람들과 아카데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거리였다.

각종 음식점과 선물 가게, 그리고 숙박 시설까지.

전생에 보았던 대학교 앞 상가 거리나 군부대 앞 이수 지역 상가를 보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전생의 상가 거리처럼 밤 시간인 지금은 상가 대부분의 불이 꺼져 있었다.

다만 아카데미 앞이라서 그런지 가로등이 몇 군데 켜 있어 아예 다니지 못할 정도로 깜깜하지는 않았다.

'여관이 아니잖아?'

가로등을 피해 조심스럽게 마나의 향을 쫓다가 도착한 목적지는 예상과 달리 평범한 가게였다.

문을 닫아 놓아서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기념품 같은 것을 파는 가게였다.

"여관도 아니고, 의심스러운 기운이 풀풀 새어 나온단 말이지."

1층은 가게, 2층은 숙소로 보이는 그리 작지 않은 가게 건물.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건물 2층에서 내가 묻혀 놓은 마나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나는 2층에 나 있는 창을 바라보며 고심에 잠겼다.

* * *

2층의 불 켜진 방에서는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요. 모두 깜짝 놀랐어요."

"오호."

"그래도 생각보다 막 무시하지는 않더라고요. 아니 뭐, 신경도 안 쓴다는 쪽이 더 가깝겠지만요."

소녀는 신나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했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우리 같은 것을 누가 신경 쓰겠어요. 공작 아들에 백작가 후계자, 거기다 공주님까지 계시는데요."

"아, 아이샤 공주님이 입학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니까요. 괜히 나서지만 않으면 우리 같은 평민은 관심도 없어요."

소년의 말에 그는 맞장구를 쳐 주었다.

"스승님 덕분에 실수를 안 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귀족 예절 같은 거 하나도 몰랐잖아요. 스승님께 듣지 않고 왔다면 여러 번 사고를 쳤을 거예요."

"누나 말이 맞아요."

소년 피아르와 그의 사촌 누나는 자신들을 이곳까지 이끌어 준 스승을 기쁜 얼굴로 바라보았다.

오후 늦게 누군가 면회를 왔다는 말에 깜짝 놀랐는데, 스승님이라니.

피아르와 미리사는 깜짝 놀라 정문 면회실로 달려 나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스승님을 모시는 분과 함께 임시로 마련한 숙소라는 가게로 와서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루이라는 흔한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의 스승은 청년에서 중년으로 넘어가는 나이로 보이는 마른 남자였다.

조금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피아르와 미리사에게는 언제나 따뜻한 사람이었다.

수도로 오기 한참 전에 마을에서 헤어졌던 스승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다니, 두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스승님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리고 그들의 스승은 두 아이들을 위로해 주었다.

"잘 버티고 있어서 다행이야."

"스승님이 능력도 주시고, 저희를 이곳까지 보내 주셨잖아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스승님은 걱정스럽게 물어보기도 했다.

"너희 둘 다 상속 능력을 가졌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고?"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좀 있는 것 같은데, 그냥 신기해할 뿐이었어요."

"아, 맞다. 같은 방에 있는 애도 물어보긴 하던데...."

"누구?"

피아르의 말에 미리사가 금방 누군지 알아차렸다.

"아, 그 그레시아 공작 서자 말이지? 사람들이 막 쑥덕거리던데."

"뭐, 그렇게 이상한 애는 아닌데. 아닌가, 평범한 아이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피아르의 말에 스승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공작 서자라.... 무얼 물어봤는데?"

하지만, 피아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평범하게 대답했다.

"별거 아니었어요. 어디서 왔는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걸 물어봤어요. 그냥 같은 방에 사는 학생에게 물어볼 만한 내용이에요."

"그건 그러네."

"공작가 자제가 평민에게 물어봤다라...."

"그러니까 그게 좀 특이했어요. 서자라서 그런가...."

"아, 서자...."

피아르의 말에 미리사도, 스승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귀족의 아들이 평민에게 신경을 쓴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서자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래도 나름 인정받고 있다고 하던데...."

"네?"

스승의 중얼거림에 미리사가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좀 더 이야기해 주겠니? 입학식 때는 어땠어?"

"그게 말이죠. 그날...."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72화

제22편 거짓된 스승 (2)

그는 방 한쪽에 놓여 있는 물병에 준비한 차 가루를 넣은 뒤 피아르와 미리사에게 물었다.

"두 사람 다 목걸이는 잘하고 있지?"

"그럼요. 씻을 때도 항상 차고 있는걸요."

"네. 저도요."

두 사람은 가슴에 손을 올렸다.

두 사람은 스승님이 남에게 보여 주지 말라고 언제나 당부해 왔던 것을 잘 지키고 있었다.

만족한 그는 피아르와 미리사에게 준비한 차를 건네주었다.

"수면을 돕는 차란다. 내일 일찍 들어가야 할 테니 한 잔씩들 하고 자렴. 아까도 말했지만, 오늘은 안 들어가도 되는 거지?"

"네!"

"그래도 아쉽네요. 밤새워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나도 지나가다 잠깐 들른 거니까. 다음에 또 시간을 낼게."

차를 마시던 두 사람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맛있는 차네요."

"근데, 이거 수면을 돕는 정도가 아닌데요. 하암.... 벌써 졸려요."

"그러니까요. 세상에... 기분이 나른...."

두 사람은 컵을 내려놓자마자 바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털썩.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의자에서 굴러떨어진 채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이런, 바닥에 누워서 자면 어떻게 하니."

스승 루이는 자리에 앉아 바닥에 누운 두 제자에게 말했다.

이미 깊게 잠든 두 제자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든 제자들을 침대로 옮기지 않았다.

"역시 애들을 상대하는 것은 지치는군."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피아르와 미리사를 바닥에 똑바로 뉘었다.

그다음 두 사람의 목덜미에 손을 넣어 목걸이를 꺼냈다.

반짝이는 보석이 박혀 있는 깔끔한 목걸이였다.

보석도 크지 않았고 세공도 복잡하지 않은, 평범한 목걸이.

평민들도 기념 삼아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목걸이 같았다.

하지만, 스승 루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두 목걸이를 살폈다.

"목걸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진 않고.... 도대체 입학식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는 살피던 목걸이를 내려놓고 인상을 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입학식 때 몇 명 더 심어 놓는 건데. 쩝, 죽을 자리에 사람을 심어 놓는 것도 못 할 짓이라 여겨 사람을 뺐더니 이런 문제를 만드는군."

다시 한숨을 내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부터 영 일이 꼬이더니 나까지 문제가 돼 버리네. 뭐, 기껏 준비한 실험체들을 폭탄으로 써먹으려는 것부터 일이 잘못된 거지."

혼자서 중얼거리는 그는 조금 미안한 얼굴로 잠든 소년과 소녀를 바라보았다.

"너희들에게는 다시 사과해야겠지. 이런 일에 휘말려 젊은 나이에 죽게 했으니."

"내 잘못은 평민 주제에 능력도 얻고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해 준 것으로 용서받을게."

피아르가 깨어 있었다면 어이없어 했을 말을 늘어놓은 뒤, 그는 양손으로 목걸이를 잡았다.

우우우웅.

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고, 낮은 소리와 함께 목걸이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오전 수업이면 10시간 정도 남겨 놓으면 되려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귀로.

쾅!

1층에서 뒷문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나는 가게 2층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깜짝 놀랐다.

"마나?"

너무 조심했나?

2층에서 마나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나는 바로 뒷문을 박차고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누구냐!"

뒷문에서 이어진 복도로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총 세 명. 역시 잠자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기다 제대로 무장도 하고 있었고.

확실히 평범한 가게는 아니었다.

"누군지 말할 놈이 문을 부수고 뛰어들겠냐!"

나는 상대방의 질문에 대답하며 검을 휘둘렀다.

제일 앞쪽을 막아선 상대의 눈앞으로 짧은 단검을 휘둘렀다.

허공에 휘둘러진 검을 보고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황당한 얼굴을 했지만, 그 얼굴은 바로 반으로 갈라진 채 피를 뿜어냈다.

나는 쓰러져 가는 상대를 밀치며 계속 앞으로 달려갔다.

"설마, 검기?"

"젠장! 막아!"

확실히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첫 번째 놈이 일검에 쓰러졌는데도 착실하게 내 앞을 막아서다니.

실력 자체는 견습 기사 수준이나 중급 용병 정도로 보였지만, 움직임이나 하는 행동은 제대로 된 집단에서 배워 온 게 확실했다.

젠장, 꼬리를 따라가다가 호랑이를 만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지만, 몸은 그동안의 경험과 훈련대로 적을 향해 나아갔다.

나를 향해 휘둘러진 검 아래로 몸을 숙인 뒤, 마나가 실린 단검을 적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상대방은 가죽 갑옷 위로 가슴에 판금을 덧대고 있었지만, 붉은 잔상을 남기며 찔러 들어간 단검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검날 위로 검기가 솟구친 단검은 철판과 가죽을 뚫고 적의 가슴을 꿰뚫었다.

맨 마지막 남자는 석궁을 들고 있었다. 앞 사람들과 싸우는 중에 석궁을 날릴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이걸 봐도 확실히 대비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내 실력이 부족했으면 함정에 빠진 느낌이었을지도.

석궁이 나와 검에 찔린 남자 쪽으로 움직였다.

나는 적의 가슴에 박힌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그대로 검을 놓아 버린 뒤에 옆쪽의 벽을 박차고 위로 몸을 날렸다.

푹!

동시에 석궁이 쏘아졌다. 검이 박힌 앞쪽의 동료를 향해.

역시, 제대로 배운 자들이었다. 석궁이 동료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검을 뽑느라 시간을 보냈으면 나까지 저 화살에 맞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적의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내 무릎은 적의 얼굴과 맞닿아 있었다.

퍼걱!

무릎 쪽에서 머리뼈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곧바로 뒤로 움직여 검을 뽑아 든 뒤에 2층 계단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마나가 새어 나온 방의 문을 열었다.

피아르와 미리사가 바닥에 누워 있었고, 한 남자가 두 사람의 머리맡에 서 있었다.

지금도 방 안에는 마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바로 뛰어 들어오게 된 이유.

입학식장에서 느꼈던 그 마나 향기와 비슷한 마나가 누워 있는 두 사람의 가슴에서, 옷 위로 삐져나온 목걸이를 중심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워 있는 두 아이들을 향해 펼쳐진 손.

그리고 방 가득 터질 듯이 넘실거리는 마나는 입학식장을 박살 냈던 바로 그 마나였다.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간 뒤에 바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였다.

"누구지?"

두 학생의 머리맡에 서 있는 남자가 나에게 물었다.

중년이라고 해야 하나, 아직 청년이라고 해야 하나.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남자는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고 무언가 결심을 한 얼굴이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그는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질문에 나는 오히려 반문했다.

"그러는 너는 누군데?"

이미 치고 들어가기에는 늦었다.

남자의 표정을 봐도 이미 준비를 끝내 놓은 것 같았고.

일렁이는 마나를 봐도 저 남자를 바로 죽인다고 누워 있는 두 학생이 터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결국 플랜 B인가. 정신력이 조금 회복되었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1층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도 평범한 자들은 아니었는데, 한순간도 막지 못하고 이곳까지 뚫렸단 말이지. 적어도 기사급 이상인가."

그는 내 반문에 대답하지 않고 혼자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성인으로는 안 보인단 말이야."

나는 중얼거리는 그를 그냥 놔두었다. 어차피 지금은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을 듯했다.

대신 누워 있는 두 사람을 살폈다.

평범하게 호흡을 하는 것으로 봐서는 죽거나 기절한 것이 아니라 잠든 것처럼 보였다.

옆에 있는 탁자에 놓은 잔들을 봐서는 수면제일 확률이 높아 보였고.

하지만, 반항한 흔적이 보이지도 않았고 묶여 있었던 흔적도 없었다. 납치된 게 아니라 두 사람은 제 발로 찾아온 게 분명했다.

그럼 이 남자와 친분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잠을 재우고 마나로 뭔가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결국, 예상대로 피아르와 미리사는 속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걸까?

하지만, 무슨 친분일까? 어젯밤에는 그런 사람에 대해 듣지 못했는데.

뭐, 하룻밤 만에 그런 이야기를 알아내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

저 목걸이에 마나가 몰려드는 것을 봐서는 결국 저 목걸이에 뭔가 비밀이 있는 게 분명했다.

촉매나 매개체 같은 걸까?

뭔가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저 목걸이로 이야기를 풀어 가는 게 좋아 보였다.

"저 목걸이들이 입학식장 테러의 열쇠였나?"

대충 넘겨짚은 질문이었지만, 다행히 잘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기사단이나 병사들이 몰려온 것도 아니고, 혼자 쳐들어온 것 같은데 말이 되는 건가? 그런.... 뭐, 목걸이?"

중얼거리며 생각을 이어 가던 남자가 내 말에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네놈이 입학식장에서 일을 망친 놈인가?"

"내가 아니라 우리지."

혼자이긴 한데, 그렇게 생각하게 둘 이유는 없었다.

"흠, 굳이 혼자가 아니라고 정정하는 것을 보니 혼자가 맞는 것 같은데...."

쩝, 괜히 말한 것 같은데. 생각보다 훨씬 똑똑한 놈이었다.

"그런데 이 목걸이가 열쇠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기는.

마나가 저 목걸이에 모여서 피아르와 미리사의 목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게 눈에 빤히 보이니까.

하지만, 이것은 마나에 대한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나밖에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뭐, 들어도 소용없으니 의미 없는 질문이려나. 정말 이렇게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다니. 이 아이들만 없으면 제대로 붙어 볼 텐데."

그는 누워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왜 공격을 안 하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아이들 때문이었나?

"괜히 시간을 끌어 봤자 의미 없겠지? 일을 망친 놈을 같이 잡았다는데 의의를 두어야 하려나?"

그는 홀로 중얼거리며, 아이들을 향해 손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자리를 박찼다.

순식간에 다가오는 놈의 얼굴.

동시에 단검에 마나를 가득 밀어 넣었다.

슈악!

단검에서 붉은 마나가 길게 뻗어 나왔다.

나는 검을 휘둘러 그의 양팔을 잘라 버렸다.

서걱.

사방으로 뿌려지는 피.

피를 뿌리는 양팔 사이로 한 걸음 더 내디딘 뒤, 그의 가슴에 검을 밀어 넣었다.

푸욱.

붉은 마나가 그의 등 뒤로 튀어나왔다.

나는 검을 뽑지 않고, 몸을 돌려 아이들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잡아 뜯었다.

마나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하지만, 놈과 아이들 사이에 연결된 마나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쿨럭, 소용없다. 네놈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연결이 끊어지는 순간 바로 작동하도록 바꿔 놓았다. 바로 내가 연결을 끊거나 죽는 순간이지."

피를 토하며 비웃는 말에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럴 것 같았어."

역시 늦었군. 우려했던 대로였다.

"큭큭.... 거기다 심장도 정확히 찌르지 못했군. 어차피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아쉽게 되었어. 마나를 남겨서 내일 오전에 모두 모여 있을 때 터뜨리려고 했...는데."

검은 여전히 그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심장보다 조금 낮은 곳에.

제73화

제23편 실험체 (1)

그는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며 비웃었다.

"이미 늦었다. 큭, 도망가도 소용없어. 지금 안 터지는 것도 내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 아니면 지...금이라도 신나게 도...망가 보든가."

나도 별로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대신 그에게 질문했다.

"두 사람은 너를 믿은 것 같은데, 이렇게 배반해도 되는 건가?"

담담한 표정 때문일까. 그는 인상을 썼다.

그는 평온한 내 표정이 자신이 죽어 가는 것보다 더 싫은 듯했다.

그래도 좀 전과는 달리 내 말에 대답했다.

진작 이럴걸.

"바, 바보같이 스승이라고 떠들어 댔지만, 결국 실험체에 불과했던 거지. 나도, 이 애들도. 뭐, 이 애들은 이유도 모르고 당한 거니까 나보다 더 안된 건가.... 크윽. 그... 그래도 뭐 능력을 줘서 미래를 꿈꾸게 해 주었으니 둘 다 나를 용서해 주겠지."

"용서해 주기는 개뿔."

내 말에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시원해. 생각해 보니까 지금은 속으로 구시렁댈 필요가 없잖아."

반쯤 죽여 놓은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었다.

슬슬 대답도 어려워 보이니 지금은 더 정보를 뽑기도 어려울 것 같고.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보았다.

"네 소속은 어디야? 제1 왕자? 제2 왕자? 공국? 아니면 제국? 혹시 뭐 더 내게 알려 줄 건 없어?"

내 질문에 그는 황당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네, 네놈은...."

역시, 더 말하기는 무리였다.

한쪽 팔만 자를 걸 그랬나?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찔렀지만, 양팔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너무 많았다.

각성한 귀족이라도 이 정도면 오래 버틴 것이다.

쿨럭. 쿨럭.

그는 마지막으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피뿐이었다.

"또 만나."

나는 숨이 넘어가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는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끝으로 숨이 멈췄다.

뚝.

그 순간, 그와 아이들을 연결하고 있던 마나가 끊어졌다.

그리고 아이들의 몸이 환하게 빛났다.

입학식 때와 같은 현상.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입학식 때는 하나였는데. 건물도 튼튼했었고. 둘이면 이 거리가 다 날아가 버릴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갔지만, 나도 휘말리고 있기에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죽는 순간이라서 그런가. 빛이 천천히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플랜 B.

죽어서 다시 시작하는, 정말로 한숨 나는 계획의 시작이었다.

나는 다가올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번쩍!

세상이 온통 빛으로 가득했고.

다음 순간, 온몸이 부서지며 통증이 내 머리를 세게 강타했다.

그리고 암흑.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 * *

"이상으로 입학식을 마치겠습니다."

눈을 뜨니 입학식장 안이었다.

막 입학식이 끝나는 시간.

'그래도 이번에는 버틸 만하네.'

입학식장에서 죽음을 반복했던 때와 달리, 며칠이나마 텀을 주어서인지 오래지 않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도 고통은 여전했다.

벽에 기대어 숨을 헐떡이자, 주변에 있던 어른들이 괜찮으냐고 한마디씩 하고 지나가기까지 했다.

전생에 보았던 소설에서는 수백 번, 수천 번 잘도 죽던데, 한 번 죽기가 이렇게 힘이 들다니.

뭔가 해 보려고 하면 매번 죽음이 찾아오는 꼴을 보니, 역시 내 인생은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지독한 인생이었다.

그 뒤로 시간은 저번 삶과 같이 흘러갔다.

진료실에 누워 있던 여강사는 이미 자살한 뒤였고, 이번에도 여강사의 자살은 조용히 묻혔다.

입학식도 정상적으로 마쳤고, 카트린과 수석 기사와의 면담도 별다를 바 없이 지나갔다.

대신 마지막 부탁은 전과 달랐다.

"개인실을 주셨으면 합니다. 복도 끝 쪽으로요."

피아르와 같은 방을 달라고 할 때처럼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도 내가 방을 혼자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저녁에 기숙사 방 앞에 도착했을 때 옆방에서 나오는 학생이 있었다.

나는 그 학생에게 인사를 건넸다.

"옆방이 너였어?"

"아.... 네...."

내 말에 피아르가 움찔하며 대답했다.

인사와 달리 나는 그가 옆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번 삶에서 피아르 옆방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기에 이 방으로 부탁한 것이다.

나는 간단하게 인사만 한 뒤에, 방 안에 들어왔다.

피아르와 같은 방을 썼을 때처럼, 짐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나는 짐을 정리하기 전에 책상에 앉았다.

서랍을 열어 펜과 종이를 꺼낸 뒤, 계획을 정리했다.

이번에 죽기 전 며칠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시간이었다.

신입생들의 어수선한 움직임들 때문인지 나도 꽤나 허둥거렸고.

피아르의 갑작스러운 외출 탓에 준비 없이 적과 마주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솔직히 이번에는 죽지 않고 지나갈 수도 있었는데...."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 뒤에 그냥 도망쳤어도 괜찮았을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게 따지면 이 학교를 다닐 필요도 없었다.

자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 공작 각하께 넙죽 엎드린 뒤에 어머니를 모시고 멀리 시골로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쩝, 다시 생각해도 그쪽도 만만치 않네. 형들과 공작가에 딸린 귀족들이 그냥 놔둘 것 같지도 않고.

어쨌거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시간 동안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우선 그 스승이라는 자.

죽을 때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 누군가 상속 능력을 만드는 자들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게 가능한가?

전생이었다면 세기의 발명으로 대서특필되고 노벨상을 휩쓸 만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음. 실험체라고 했는데, 아직 임상 실험 중이라는 건가.

뭐, 인권이 개판인 이 동네 꼬라지를 보면 사람으로 임상 실험을 하는 것도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그런데, 입학식장을 날린 것도 그렇고, 스승이라는 놈을 봐도 학구적인 놈들이 꾸민 짓거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뭔가 대단한 놈들이 뒤쪽에서 암약한다는 소리인데.

왕립 아카데미 안에서 공주와 귀족들을 날려 버리는 테러를 자행하고, 이 세계의 계급을 지탱하는 상속 능력을 만들어 내는 어마무시한 놈들이다.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나만 신나게 죽어 나갈 것 같은데.

아니, 이미 끼어들어 버린 건가.

공주와 카트린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공주와 카트린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생각을 이어 나갔다.

피아르와 미리사의 목걸이.

피아르의 폭파는 그의 고유한 상속 능력이 아니라 목걸이를 매개체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마나를 과부하되게 만드는 아이템이려나. 이것도 확인해 봐야겠네."

그렇게 대충 일정과 만날 사람들을 종이에 적으며 머릿속에 남긴 뒤, 종이를 불태웠다.

그리고 대충 짐을 정리한 뒤에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무척이나 바쁠 게 분명했다.

"그것보다 짐 정리를 또 안 했으면 좋겠네."

나는 오늘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를 바라며 어서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오전 수업인 두 교양 수업.

역사와 상속 능력 기초는 저번 삶과 다르지 않게 지나갔다.

대충 왕따 비슷하게 된 상황도 똑같았고, 교수들의 지루한 수업도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점심도 혼자 먹었고.

결국, 오후 수업도 똑같이 진행되었다.

기사 학부 전공 수업으로 기사들과의 대련이 시작되었고, 나는 카트린에게 불려가 그녀와 대련을 하게 되었다.

캉!

검과 검이 부딪치고,

텅!

검이 방패를 튕겨 냈다.

"세상에, 설마 마나 없이 대련하는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돼. 마나 없이 저런 움직임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런가...."

"그래도 대단한데. 웬만한 견습 기사 수준은 되는 것 같아."

이미 대련을 끝낸 학생들은 나와 카트린의 대련을 보고 수군거렸다.

대련을 끝낸 기사들과 한두 학생들은 나와 카트린이 마나 없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고.

"역시,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네."

"그럴 리가 없죠."

검을 맞대며 카트린과 나는 대화를 나누었다. 마나를 쓰지 않고 있으니 정신력도 남아돌아 이 정도 여유를 부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저번 삶과 달리, 이번 대련에는 이미지를 잡고 싸우는 짓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대로 된 실력 확인이 어려운데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편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나를 써서 싸울 일도 아니었으니, 이렇게 땀을 흘리며 카트린과 검을 겨루는 수밖에 없었다.

"쩝, 그런데 이런 대련으로는 실력 확인이 어려울 것 같은데."

카트린이 아쉬운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한참 동안 검을 겨루었지만, 결국 이런 대련으로는 두 사람 다 제 실력을 보여 주긴 어려웠다.

나도 한 걸음 물러서며 검을 거두었다.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대련해야겠어. 괜찮지?"

"네."

나야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 중에서 그나마 내 실력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었고, 나와 등을 맞대고 싸운 전우이기도 했다.

실력을 계속 쌓으려면 실전 이외에도 제대로 된 대련이 꼭 필요했다. 그런 대련 상대로 그녀만 한 사람이 없었다.

마무리 인사를 마친 뒤, 주변을 둘러보니 저번 삶과는 확실히 다른 반응을 보여 주고 있었다.

시기, 질투, 감탄, 무시같이 다양한 표정들이 보였지만, 그래도 다들 내 실력을 얕보지 못하게 된 듯했다.

실력을 제대로 보여 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무난한 시작이었다.

이제, 기본 수업을 조금 더 진행하고 오후 수업이 끝날 터.

나는 먼저 카트린에게 양해를 구했다.

"살짝 베인 것 같은데, 양호실 좀 들른 뒤 먼저 들어가도 될까요?"

나는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팔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어? 언제 그렇게 다친 거야?"

"오랜만에 마나 없이 대련해서 실수했네요."

"이런, 조심했어야지."

조금 전 두 사람의 대련에서 마나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실전에 가까운 대련이었다.

마나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으니, 충분히 상처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카트린도 나도 이런 대련에서 상처를 입을 경지는 아니긴 했지만.

실수해서 다쳤다는데 그녀가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근육을 다친 건 아니지?"

"아뇨. 그냥 피부만 갈라졌습니다. 진료실에 가서 치료술만 받으면 됩니다."

신관의 치료술은 단순한 상처에 최고였다. 전생의 밴드나 외과 시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면 먼저 돌아가도 돼."

예상대로 카트린의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그녀와 기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연병장을 떠났다.

학생들은 내 팔에 난 상처를 보고 조금 안심하는 기색이었고.

나는 연병장을 벗어나, 사람들의 시야가 사라진 뒤에 손으로 팔을 쓱 닦아 냈다.

흘러내린 피와 달리, 상처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피도 바로 멈췄다.

마나로 상처 주변의 혈관들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상처는 상처로 취급받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신관에게 보일 정도도 아니었고, 쉽게 말해 침만 바르면 나을 상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입은 상처가 아니었다.

내 스스로 낸 상처였고, 그 상처를 쥐어짜서 피를 뽑아낸 것이었다.

제74화

제24편 실험체 (2)

멀쩡한 입학식장과 그 옆의 진료실을 지나 계속 걸어가니 정문과 그 옆의 면회실이 보였다.

슬쩍 안쪽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담당 교직원에게 물어봐도 아직 방문한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피아르와 미리사의 면회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할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늦지 않았다.

나는 감사 인사를 한 뒤에 면회실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면회실 뒤쪽 담벼락 옆으로는 무성한 나무들과 베어 내지 않은 긴 수풀이 자라나 있었다.

조경 때문인지, 아니면 교직원들의 게으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충분한 도움이 되었다.

나는 무언가 찾는 것처럼 몸을 굽히고는 수풀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감각을 끌어올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슬쩍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담벼락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전날 미리 숨겨 놓은 가방을 꺼내 들었다.

가방에는 망토와 평범한 옷이 들어 있었다.

나는 준비한 옷과 망토로 갈아입은 뒤, 입고 있던 교복을 가방에 넣어 다시 원래의 장소에 숨겨 놓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담벼락 너머에도.

휙.

나는 재빠르게 담을 뛰어넘은 뒤, 옷을 확인했다.

옷차림도 달라졌고, 망토로 얼굴도 가렸으니, 들킬 염려는 없었다.

나는 상점 거리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얼마 걷지 않아, 아는 사람을 보았다.

앞에서 걸어오는 남자는 저번 삶에서 본 적이 있던 남자였다.

피아르의 스승이라는 작자가 있던 건물 1층에서 나를 막아서던 남자였다.

맨 앞에서 나를 막아서던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

'면회 요청을 하러 가는 거겠지?'

지금 시간에 그가 아카데미로 가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을 듯했다.

다행히 엇갈리지는 않은 듯했고, 스승이라는 작자도 지금 와 있다는 소리였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아카데미 지역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카데미의 담벼락을 옆에 두고 돌을 깔아 놓은 대로가 쭉 이어져 있었다.

대로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가오는 남자 말고는 사람도, 마차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은 아카데미 정문과도 떨어져 있었고, 상가 거리도 언덕 너머에 있어 지금 당장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알기 어려워 보였다.

나는 다가오는 남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상대도 관심이 없는 듯이 걸어왔지만, 내 감각에는 그가 긴장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와 나는 서로 관심 없는 척 스쳐 지나갔다.

상대의 긴장이 바로 풀린 것이 느껴졌다.

나는 슬쩍 몸을 돌려 바닥에 손을 짚었다.

"여기 돈을 떨어뜨리신 것 같은데요?"

"네?"

그가 몸을 돌리자, 나는 몸을 일으켜 손에 쥐어진 은화를 보여 주었다.

"어? 그럴 리가 없는데?"

그는 옆구리로 손을 옮겼고.

나는 은화를 쥔 손을 그를 향해 뻗었다.

그리고 그에게 작은 마술, 혹은 손기술을 보여 주었다.

은화가 순식간에 마나를 품은 단검으로 변하는 마술을.

푹.

그는 가슴에 꽂힌 검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로서는 날벼락 같은 일일 거다.

아무래도 해명이 필요할 것 같아 내 쪽으로 쓰러지는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입학식 테러의 보답이야."

"아...."

그는 바로 이해했다는 얼굴로 쓰러졌다.

나는 쓰러진 상대를 들어 대로 옆 수풀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시체를 수풀 속에 밀어 넣었다.

"대낮에 대로에서 사람을 죽이다니...."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벌인 일이지만, 내가 봐도 정말 대담한 짓이었다.

전생 같았으면 며칠 지나지 않아 CCTV에 걸려서 바로 체포될 게 뻔한 짓이었고, 이곳에서도 함부로 벌이기 힘든 짓이었다.

아무리 이곳 치안이 좋지 않다고 하지만, 왕립 아카데미 근처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것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피아르와 미리사가 외박을 나가게 할 수는 없었다.

"일을 묻어 버리도록 만들 수밖에."

이 시체를 묻느라 시간을 보낼 수도 없고.

작은 일은 더 큰 일로, 작은 살인은 더 큰 살인으로 덮을 수밖에 없었다.

시체를 뒤져 봐도 특별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시체를 수풀로 위장한 뒤에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낮은 언덕을 넘으니 바로 상점 거리가 나타났다.

아직 아카데미 수업이 끝나지 않은 시각.

여기까지 오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은 것처럼.

아직 아카데미 수업이 끝나지 않았기에 아카데미 학생, 교사 등을 주로 상대하는 상점 거리는 무척이나 한산했다.

"여기 와서 구경해요!"

거리를 지나가는 나에게 호객을 하는 장사꾼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가게는 주인만 앉아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에고, 올해는 손님이 영 없어."

"공주님도 입학해서 대목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손님이 더 없는 것 같다니까."

"이게 다 수도 치안이 뒤숭숭해서 그래."

"쉿,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귀에 마나를 밀어 넣어 듣고 있자니, 왜 이렇게 한가한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정말 왕이 죽을 때가 된 건가.

전생에 시장 경기로 정치 상황을 알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곳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왕이 죽어 왕자들끼리 내전이라도 벌일 것 같았다.

'거기다 이상한 놈들이 테러도 벌이고 있고. 후작가 때를 생각하면 제국도 일을 벌이고 있었지.'

거기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공주 쪽에 한 발 깊숙이 걸쳐 놓은 상태였고.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상점 거리를 지나갔다.

상점 거리에는 여러 가게들이 있었다.

일상용품과 수업에 쓰는 물품을 파는 상점, 그리고 대장간과 연계된 무기점도 있었고, 식료품을 파는 상점과 음식점도 있었다.

또한, 입학식이 끝난 뒤로 파리만 날리고 있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나는 거리 안쪽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 들어갔다.

평범한 기념품 가게였다.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선반과 벽에 진열된 가게 안에 가게와 어울리지 않는 수염이 덥수룩한 주인이 가게 한쪽에서 졸고 있었다.

나는 졸고 있는 남자를 알고 있었다.

죽기 전에 이 집을 찾아왔을 때 두 번째로 나를 막던 남자였다.

'정말 졸고 있잖아?'

저번에는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는데, 지금은 진짜로 졸고 있었다.

상황에 따른 연기를 정말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도움이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기감을 높여 건물 안을 쭉 훑었다.

1층에는 졸고 있는 저 남자밖에 없었고, 2층에는 두 명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2층에 있는 사람 중 하나는 피아르의 스승이라는 그 남자의 마나가 확실했다.

나는 이리저리 물건을 살피며 졸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나는 졸고 있는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 손님이 오셨...?"

그는 깜짝 놀라 눈을 떴지만, 그 눈은 금방 감기고 말았다.

어깨를 치는 동안 마나를 헝클어 놓았고, 마지막은 마나와 함께 목 뒤를 깊게 눌러 그를 기절시켰기 때문이다.

나는 기절한 그를 벽에 기대어 놓았다.

몸속에 마나를 심어 놓았으니 다른 사람이 쉽게 깨우긴 어려울 터였다.

괜한 양심 때문에 그를 살려 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도 죽여야겠지만, 밖의 사람들이 지나가는 동안에 살인을 벌이기는 힘들었다.

나는 다시 문 쪽으로 다가가 조용히 가게 문을 닫았다.

아직 2층에서는 특별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고.

나는 바로 2층을 향해 움직였다.

* * *

저번 삶에서 한바탕 싸웠던 1층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복도를 지나 바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슬슬 2층에 있는 사람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게 분명했다.

나는 마나를 가득 끌어올렸다.

마나는 내 몸을 더 빠르고 강하게 만들어 주었고, 남은 마나는 단검으로 흘러 들어가 붉은 검기가 단검에서 치솟았다.

나는 몸속에 가득 찬 힘을 느끼며 2층 방문을 걷어찼다.

벌컥!

문이 잠기지 않아 문은 부서질 듯이 열렸다.

나는 방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한 명은 1층에서 싸웠었던 마지막 한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피아르의 스승이라는 남자였다.

두 사람 다 갑자기 들어온 나를 보고 놀란 눈치였지만, 이번에는 두 사람 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1층에서 싸웠을 때는 석궁을 들었던 남자가 이번에는 검을 들고 나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스승이라던 자는 나를 향해 두 손을 펼쳤다.

뭐지?

뜻밖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우선 달려오는 남자를 처리할 생각에 그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남자가 휘두른 검은 무척이나 질 좋아 보이는 검이었지만, 검기를 두른 검을 버텨 낼 수는 없었다.

나는 검과 함께 상대의 몸을 잘라 버릴 생각이었는데.

덜컥.

'마나가 멈췄다?'

몸속에 흐르던 마나도, 검 위로 피어오르던 붉은 검기도 갑자기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몸속의 마나가 굳어져 버린 것 같았다.

몸속에 충만하던 힘이 사라지고, 강력한 마나의 힘 대신 육체의 힘만 느껴졌다.

나는 마주 휘두르던 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덜컥 멈춘 것 같은 움직임에 달려오던 남자가 이를 보이게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푹!

"이런, 누구인지 확인도 못 했는데."

스승, 루이는 난감한 얼굴로 팔을 내렸다.

"뭐, 이렇게 갑자기 공격당하면 어쩔 수 없으니까. 아무래도 이번 일은 완전히 꼬인 것 같은데 우선 자리를 옮겨야 하나?"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던 루이는 검을 휘두른 채로 멈춰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왜 그러고 있지? 아직 다 안 죽은 건가?"

바로 대답이 들려왔지만, 대답을 한 사람은 검을 휘두른 그가 아니라 나였다.

"아뇨. 이미 죽었습니다."

나는 목에 박힌 단검을 뽑았고, 나를 감싸 안았던 남자는 피를 뿜으며 아래로 허물어졌다.

"어떻게? 마나를 멈췄는데?"

과연, 그의 능력이었나.

목걸이를 이용해 사람을 터트리는 남자였으니, 이런 능력도 충분히 가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능력인데....'

몸속의 마나를 멈추다니.

상속 능력도, 기사의 검도, 신관의 치료술도 모두 마나로 발현되는 힘이었다. 그런 마나를 멈추게 하다니.

제대로 쓴다면 귀족이나 기사들에게 실로 치명적인 능력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능력에 제한이 없을 리가 없으니.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그의 얼굴은 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피아르와 미리사에게 마나를 보냈을 때는 괜찮아 보였는데, 목걸이 때문이었을까?

그가 손을 내린 뒤에는 다시 마나가 제대로 움직였다.

나는 검기가 제대로 흘러나오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를 향해 걸어갔다.

"마나가 없다고 지면 그동안의 고생이 아깝지."

마나 없이도 기사와의 싸움을 충분히 이어 가도록 그동안 훈련해 왔다.

제75화

제25편 실험체 (3)

마나가 갑자기 멈춰서 깜짝 놀랐지만, 기사급도 안 되는 상대에게 질 이유가 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속 능력을 만들어 내는 대단한 자였지만, 기사와 용병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르는 모양이었다.

마나를 멈추는 상속 능력이라.

저번 삶에서 한 말 때문에 긴장했는데, 다행히 상대할 만한 능력이었다.

아니, 평범한 기사나 귀족이면 상대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제 그가 나를 막을 방법은 더 없었다.

그는 열심히 눈을 굴렸지만, 금방 나에게 제압당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인질도 없었다. 잠깐의 반격에 놀랐지만, 이번에는 오랜만에 계획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나는 그를 밧줄로 묶은 뒤, 목에 마나를 불어넣어 말소리를 줄이고 팔다리의 힘줄을 끊어 놓았다.

"크윽, 나에게서 무슨 말을 들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마라."

힘줄이 잘리면서도 강단 있게 말을 하는 그였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이미 들었었다.

"네가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어. 안 그래? 피아르와 미리사의 스승님? 아니, 너도 실험체지?"

그는 통증도 잊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너, 너는 누구지?"

아카데미 신입생에 그레시아 공작가의 서자였지만, 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준비한 물건들을 늘어놓았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으니, 이야기할 시간은 충분해."

기숙사 방도 혼자 쓰고 있었고, 공작가 서자인 나에게 찾아와 확인할 사람도 없으니 오늘 밤, 아니 내일 새벽까지 자유 시간이었다.

내가 늘어놓는 물건을 보고는 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고문에는 솔직히 자신이 없으니, 조금 실수해도 양해해 주면 좋겠어."

많은 것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중요한 몇 가지 정보만 들으면 충분했다.

나는 밤을 새워 이야기를 들었고, 날이 밝기 전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다.

[위기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 * *

시체들은 이틀 뒤 발견되었다.

이틀 동안 문이 닫힌 가게에 의문을 느낀 옆집 주인이 가게 문을 억지로 열었고, 가게 2층에서 시체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바로 경비대가 출동했다.

치안 기사와 경비병들은 사방에 피가 튀어 있고, 서로 간에 검을 찔러 댄 흔적이 역력한 현장을 보게 되었다.

현장을 확인한 기사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묻어 버리자."

그 말에 같이 온 경비병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괜찮을까요? 아카데미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인데. 이번에 공주님도 입학했다고 들었는데요."

"그러니까 묻자고. 어차피 가게 직원들 사이에서 벌어진 칼부림이잖아. 이 정도는 빈민가 쪽에서는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야."

"그건 그렇지만...."

"지금 수도 분위기가 장난 아니잖아. 아카데미 입학식 때도 뭔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거기다 이 일까지 터져 봐. 그럼 어떻게 될지는 잘 알겠지?"

아카데미 앞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었다.

이 동네의 치안을 담당하는 그로서는 진급이 막히는 정도가 아니라 잘못하다가는 목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를 사건이었다.

왕실에 충성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그런 기사라면 모를까, 그는 수도에 가족이 있는 안정된 생활을 하는 직업 기사였다.

괜한 일을 들추어내서 굳이 문제를 만들어 낼 이유가 없었다.

기사와 경비병들은 빠르게 가게를 치웠고, 주변을 다니며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그렇게 상가 거리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 * *

솔직히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전생의 스릴러 영화가 떠올라 혹시나 해서 꾸민 현장이었다.

너무 허접한 트릭이라 당연히 들킬 줄 알았는데, 살인 사건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공주의 호위 기사에게 물어봐도, 카트린에게 물어봐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도 왕실까지는 올라온 뒤에 묻을 거로 생각했는데, 말단 실무자가 그대로 묻어 버릴 줄이야.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으니 더 묻어 버리기 쉬웠으려나.

돌아오는 길에 대로 옆에 버려 놓은 시체를 묻느라 새벽녘까지 고생했는데,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날 밤 스승이라는 자에게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말이 많았지만, 아쉽게도 알고 있는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신이 소속된 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지도 못했고, 앞으로의 계획도, 연락 라인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훈련을 받은 곳과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는 들을 수 있었다.

북쪽에 있는 강대한 나라.

이에로 후작가 때 일을 벌인 자들의 출신 국가인 차르 제국이었다.

'제국 정부가 벌인 일인지, 아니면 제국 안에 있는 다른 조직이 벌인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에로 후작가에서 일을 벌인 자들과 이 남자가 같은 조직일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듣고 싶었던 내용은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었다.

"맞... 맞아. 그 목걸이가 마나를 폭주하게 만드는 매개체야. 마나를 다루는 상속 능력자들은 그 목걸이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의 마나를 폭주하게 만들 수 있어."

목걸이에 관한 이야기도.

"나는 지하 던전 같은 실험실에서 능력을 얻게 되었어. 잠...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찾고 깨우는 아이템이 있어. 테스트가 끝나서 수거해 갔어."

그와 피아르가 어떻게 능력을 얻게 되었는지도.

"테스트가 끝나서 폐기 처분을 하려고 한 거야. 마지막 테스트라고 해야 할지도. 나도 돌아가서 어떻게 될지 몰랐는데, 이게 맞는 끝일지도 몰라."

왜 테러를 벌였는지도 들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단순한 이유였다.

"폐기 처분이니까. 어차피 다 철수할 생각이었어. 모두 죽으면 더 올 사람은 없을 거야. 어차피 목걸이만 없어도 폭주는 불가능하고."

일의 뒤처리 문제도 들을 수 있어서 편하게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다 포기한 느낌이라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지.'

일을 마친 뒤, 며칠을 두고 본 뒤에 나는 피아르와 미리사의 목걸이를 슬쩍 빼돌렸다.

피아르는 밤에 몰래 방에 들어가 기절시킨 뒤 빼 왔고, 미리사는 복도에서 부딪치는 척하고 보석을 뺀 피아르의 목걸이와 바꿔치기했다.

두 목걸이가 똑같아서 미리사는 목걸이의 보석만 빠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목걸이 때문에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소란스러웠지만, 나는 무척이나 평안한 시간을 보냈다.

피아르와 미리사 주변에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지도 않았고, 공주를 노리는 사람도 없었다.

신입생 전체가 듣는 교양 수업들은 무척이나 지루했고, 기사 전공 수업은 제 실력을 드러내 보이지 못해 답답할 따름이었다.

어서 빨리 실전 시간이 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평안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신입생이 한 명 추가로 입학했다.

"집안 문제로 입학이 늦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입학했으니, 따라갈 수 있게 주변에서 도와주세요."

교양 시간인 상속 능력 기초. 여교수가 옆에 서 있는 여학생을 소개했다.

"발레아 드 메세시아예요.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입학이 늦었습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녀가 모두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을 일일이 맞추며 이야기를 하다가, 나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짓지 못했다.

서로 인사를 나눌 정도로 그녀를 알고 있었고, 친하다면 친한 사이였지만.

그녀는 한 번 나를 죽인 적이 있었다.

나도 그녀의 아버지를 죽였고.

아카데미 입학식이 끝나고 한 달 뒤, 내가 죽인 남작의 딸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이다.

"들어가서 앉아요."

인사가 끝나자, 선생은 발레아를 자리에 들여보냈다.

발레아는 강의실을 쭉 훑어보더니 내 쪽으로 걸어왔다.

언제나처럼 내 주위는 비어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어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나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했다.

"네. 안녕하세요."

나도 그녀에게 인사했다.

"장례식은 잘 치렀나요?"

"갑작스러운 장례식이라 이리저리 정신없었지만, 아버지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하겠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겠지만, 나는 그녀의 말속에 가시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혼자 오셨네요."

"기존의 남작이 죽었으니 새로운 남작이 되어야지요. 왕실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영지에서 남작 대행으로 생활하겠죠."

형제에 관한 이야기인데, 마치 남에 대해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는 눈치가 보여서 더 있기 어려웠어요.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그나마 남작 딸이라 영지에 붙어 있어도 괜찮겠지만, 배다른 동생이 남작 대행이잖아요. 다른 귀족가에 싼값에 팔려 가지 않으려고 냉큼 아카데미로 도망 왔어요."

그녀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즐겁게 이야기했다.

"그럼 남작 부인은...."

"어머니도 고향으로 돌아가실 예정이고요. 친정에서 구박받으면서 살아가겠죠. 뭐."

이번 삶에서는 나와 엮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본성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가족에 대한 환멸이 그녀의 말속에 깊게 배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말이죠...."

신기하게도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를 죽인 여성과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나도 그녀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그런데, 너무 대화에 몰입했던 모양이었다.

"거기 두 사람, 수업 시작했어요. 잡담은 나중에 해요."

교수의 말과 함께 우리를 향해 석필들이 날아왔다.

교수의 능력이 염력이었던가.

턱!

마나에 싸여 빠르게 날아온 석필이었지만, 나에게 날아온 석필은 내 손가락에 잡혀 부르르 떨었다.

텅!

발레아를 향해 날아온 석필은 그녀의 바로 앞에서 얌전하게 책상 위로 내려앉았다.

발레아의 능력, 일명 '영역 선포'였다.

짧은 대화 동안에 벌써 능력을 발휘했던 모양이었다.

얼마 전보다 더 발전한 것 같은 모습에 좀 더 긴장되었다.

교수는 석필을 잡는 우리들의 모습에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학생들은 교수의 꾸지람을 받은 우리들을 비웃었다.

"주변을 봐요. 나와 이야기하면 좋을 게 없어요."

작게 속삭이는 내 말에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씩 웃었다.

"제가 보기에는 저 바보들하고 친분을 맺는 것보다 공자님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쪽이 훨씬 더 제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그녀도 몸을 내 쪽으로 숙이고는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본성을 몰랐다면, 그녀의 말에 무척이나 감동했을 텐데.

아니, 내가 원래 나이였다면 그녀에게 반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녀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고민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친한 척하는 그녀 덕분에 그날 수업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학생 중에 대화가 되는 사람이 나를 죽이고, 내가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라니.

그날 남작이 벌인 일과 그녀의 특이한 능력까지.

앞에 닥쳐 올 일이 아니라면 발레아 문제를 고민하느라 머리털이 다 빠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눈앞에 공주의 각성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76화

제1편 테스트

어두운 밤.

방 안에 홀로 앉아 책상 속 깊은 곳에 숨겨 둔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보석을 뺀 피아르의 목걸이와 바꿔치기한 미리사의 목걸이였다.

그동안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되어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딱 봐도 번잡한 일들이 벌어질 것 같아 다시 꺼내 든 것이다.

뭔가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문제될 만한 것은 확인하고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목걸이는 무척이나 평범해 보였다.

유리처럼 보이는, 크지 않은 보석이 중앙에 박혀 있는 단순한 형태였다.

금 목걸이도 아니고, 쇠로 만든 얇은 체인으로 이루어진 목걸이였다.

"철이 아니었나? 보석도 평범한 보석이 아닌 것 같고."

하지만, 눈에 마나를 집중해서 살펴보니 목걸이의 재질도 철이 아니고 마나가 잘 통하는 합금 같았고, 보석도 평범한 보석이 아니었다. 기묘한 형태로 섬세하게 가공된 투명한 보석이었다.

딱 봐도 연구할 거리가 가득한 느낌의 물건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연구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지금 이 목걸이를 살펴보는 것은 목걸이를 어떻게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이 목걸이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전생에도 스마트폰이나 자동차의 원리를 알 필요는 없었다. 그저 어떻게 쓰는지 알면 그만이었다.

피아르의 스승이라는 자에게 들은 대로라면 마나를 증폭, 폭주시키는 목걸이였다.

마나를 담아 놓고 나중에 작동하도록 시한장치로도 쓸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까지는 자세히 듣지 못했고.

목걸이를 차고 있는 상속 능력자의 마나에 과부하를 걸어서 사람을 터트리는 물건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눈을 휘둥그레 뜰 정도로 무시무시한 물건 같았지만, 다행히도 제한이 덕지덕지 걸려 있었다.

우선 만들기가 무척이나 어렵다고 했다. 두 개를 만드는 데에도 1년 이상이 걸렸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미리사나 피아르같이 체내에 마나를 많이 담아 놓는 버퍼, 증폭형 능력자가 아니면 과부하를 걸어도 사람이 터져 나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아무에게나 목걸이를 채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마나 감지가 높거나 오랫동안 차고 있어서 목걸이와 체내의 마나가 잘 순환되어야 비로소 작동하는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목걸이를 작동시킬 수 있는 상속 능력자도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스승이라는 자가 아는 사람은 자신 말고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입학식 날 자살한 여강사. 그녀가 남은 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나 감지 능력이 높고, 체내의 마나를 잘 활용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자만이 이 목걸이를 작동시킬 수 있다고 자랑처럼 이야기했다.

"마나를 불어넣는 것은 나도 할 수 있기는 한데 말이지."

웅웅웅.

내 손 위에 놓인 목걸이는 마나를 받아들여 흐릿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그날 보았던 마나의 유동과 비슷한 느낌으로 마나를 밀어 넣으니 목걸이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나를 볼 수, 아니 느낄 수 있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나밖에 못 하는 거였으면 좋겠는데...."

나처럼 마나를 감지하는 사람을 또 보지 못했지만, 나만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무척이나 어려운 일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 봤자, 이걸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빛나는 목걸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스승이라는 작자나 자살한 여강사처럼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목걸이를 작동시키는 일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아무나 채운다고 작동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피아르, 미리사의 목에 다시 걸어 주고, 목에 손을 짚어 폭파하는 정도밖에 쓸모가 없었다.

"멀리서 터뜨리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자살 폭탄범이 되는 거네."

결국, 지금은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자살 폭탄범이라...."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목걸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살 폭탄범이 될 거면 굳이 피아르나 미리사의 목에 다시 걸 필요가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목걸이를 들어 내 목에 걸었다.

"...."

아무 이상이 없었다.

슬쩍 웃음이 나왔다. 괜히 긴장했다.

"역시, 뭐가 달라질 리가 없지."

그리고 이어서 마나를 움직여 보았다.

몸속에서 마나가 순환하기 시작했다.

"잘 돌아다니네."

역시, 이번에도 별문제는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목걸이 쪽으로 마나를 밀어 넣어 보았다.

가슴 쪽으로 움직이던 마나가 목걸이를 통과해서 다시 몸으로 스며들었다.

목걸이는 빛나지도 않고, 마나를 담지도 않았다.

"음, 평범한 마나로는 가동되지 않는 게 맞긴 한데...."

나는 손에 마나를 불어넣어 보았다. 조금 전 목걸이에 마나를 불어넣을 때와 비슷한 형태의 마나를.

손 위로 피어오르는 마나가 보였다.

나는 손을 목걸이 쪽으로 움직여 보았다.

20㎝.

10㎝.

5㎝.

1㎝.

마지막 순간, 나는 목걸이 앞에서 손을 멈추었다.

"설마, 자살이 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봐도 그럴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목걸이에 손을 가져다 대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실험을 내 몸 가지고 하는 것은 좀 무식한 짓이 맞지?"

슬쩍 손을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또 멈추었다. 그리고 한숨.

"다시 살아나지만 않았어도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목걸이에 손을 올렸다.

우우우웅.

손에서 흘러 나간 마나가 목걸이를 빛내기 시작했다.

"우앗!"

목걸이에서부터 전기가 흘러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찌르르 떨려 오고, 목걸이로 마나가 빨려들었다. 동시에 몇 배나 강한 마나가 다시 몸으로 빠져나왔다.

마나가 미친 듯이 순환했다. 고여 있던 마나가 모두 목걸이로 빨려들어 가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다시 튀어나왔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머리에서 김이 났다. 온몸이 마나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꽤나 시간이 지난 것 같았지만, 사실 손을 올리고 잠시의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젠장, 정말 죽는 건 아니겠지.'

몸이 터져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나가 빠져나가야 해. 뭔가 방법이....'

나는 필사적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온몸에 마나가 들끓어서인지 눈앞의 먼지도, 미세한 마나도 보이고 느껴졌다.

팔의 솜털에 닿는 바람도 느껴지고, 머릿속은 평소의 몇 배나 되는 빠른 속도로 핑핑 움직였다.

'단, 단검이 있어!'

나는 옷장 안에 있는 단검을 꺼내.

콰앙!

손에 쥐고 마나를 뿜어냈다.

부우우웅!

단검에서 붉은빛이 치솟았다. 엄청나게 두꺼운 검기였다.

'이러다 천장이 뚫리겠어!'

다급하게 앞으로 누이니.

쨍그랑.

붉은 검기가 창을 깨고 밖으로 뻗어 나갔다.

부아아아앙!

붉은 검기는 마치 레이저처럼 창문 밖으로 뻗어 나가다가 차츰 사라졌다.

털썩.

검기가 사라지는 순간, 나는 그만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이 멍했다. 온몸의 마나가 전부 사라져 버렸다.

마나 고갈이었다.

"으그그그극."

나는 몸을 덜덜 떨며 이를 악물었다.

마나가 사라진 근육이 마구 꼬였다.

마나 고갈 정도가 아니었다. 단순한 마나 고갈이 아니었다.

몸속에 있는 마나 한 톨까지 전부 쥐어짜 버린 느낌이었다.

그렇게 몸을 떨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죠?"

피아르였다.

옆방에까지 소리가 들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방 안에 사람을 들일 수 없었다. 목걸이를 차고 있어서 피아르는 더더욱 안 되었다.

떨리는 입을 겨우 열었다.

"...검 연습을 하다가 실수...했어. 조심할...게."

"...네. 조심하세요."

내 말에 애매한 침묵이 흐른 뒤,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이어서 다시 숨을 들이쉬고 계속 반복했다.

하지만, 마나는 느껴지지 않았고 통증이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겨우 실낱같은 마나의 기운이 몸속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꿈틀.

조금씩 모이는 마나.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마나가 흘러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자, 겨우 주위에 신경을 쓸 수가 있었다.

짹짹.

멀리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니, 창문으로 붉은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인가...."

분명 간밤에 자기 전에 일을 벌였는데, 정신을 차리니 아침이었다.

"밤새 마나를 모았다는 건데."

지금도 마나는 겨우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죽을 뻔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밤새 죽을 만큼 아팠다.

"역시 안 하는 게 좋았어."

때늦은 후회를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옷장은 부서져 있었고, 창도 박살이 나 있었다.

저 창은 마나가 뿜어져 나가 박살 낸 걸 테고.

"설마, 검을 꺼낼 때 옷장이 박살 난 건가?"

그냥 검을 꺼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목걸이가 작동되었을 때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온몸에 마나가 들끓고, 힘이 세지고 빨라지고 감각이 몇 배나 상승하고 검기가 날뛰었었다.

"머리 회전 속도도 빨라졌지. 전부 마나가 증폭되었기 때문이겠지?"

예상대로(?)였다.

이 목걸이는 마나를 증폭, 혹은 폭주시키는 것이니 죽지만 않으면 필살기 같은 괴력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강력한 효과라니.

하지만, 과부하가 걸린 이상 피해가 없을 수 없었다.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큰 피해였다.

"필살기는 필살기인데, 쿨타임이 그냥 쿨타임이 아니잖아. 자기희생 주문도 아니고, 이렇게 한번 쓰면 맛이 가 버리고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니. 이래서야 실전에서 쓸 수 있으려나 몰라."

나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온몸이 결리고 아팠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인 건가."

나는 목걸이를 빼내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대단한 쓸모를 찾은 것 같은데, 써먹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 스승 같은 자들이 더 있다면 안전하지도 않을 것 같고."

목에 걸었다가 다른 사람이 작동을 시키면 큰일이었다.

"그래도 조금 위력을 낮추면 위험할 때 써먹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목걸이를 가방 깊숙이 처박아 버렸다.

그날, 피곤한 몸으로 수업에 들어가자 발레아가 다시 내 옆자리에 앉았다.

"어제, 남자 기숙사에서 폭음이 들려왔대요. 유령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붉은빛이 하늘로 치솟았다는 소리도 있어요."

그녀는 말을 하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 주위로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녀의 손짓에 남자도 여자도 반갑게 인사를 받아 주었다.

어제는 괜한 말을 했던 모양이다.

내 옆에 있다고, 모두 같이 왕따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긴 저 얼굴에, 저 꾸며진 성격으로 왕따 같은 것을 당할 리가 없었다.

쩝, 결국 내가 못났기 때문일지도.

그보다, 생각보다 소란이 더 컸던 모양이다.

피아르가 그냥 돌아간 게 신기할 정도였다. 왕따인 덕분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가기 전에 발레아가 내 귀에 속삭였다.

"밤에 잠깐 만날래요?"

엥? 무슨 소리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니, 그녀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이 보였다.

"오늘 밤 저와 데이트를 해 주세요."

그녀의 미소와 부드러운 음성은 오늘 밤을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 일로 공자님께 물어볼 게 있어요."

그녀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제77화

제2편 계약 (1)

왕립 아카데미는 전에 말했듯이 수도 남쪽의 거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거대한 운동장들과 건물들. 그리고 창고와 실험실까지. 다양한 시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제일 큰 것은 왕립 아카데미의 1/4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숲과 공원이었다.

이곳은 학생들의 휴식처이기도 하고 각종 훈련과 실습 장소로도 활용되는 곳으로, 밤이 되면 그 거대한 지역이 불빛 하나 없이 오로지 곤충과 작은 짐승들의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오늘은 그런 작은 소리들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작은 발소리만 들려왔다.

그리고 낮은 허밍.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발레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나는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했다.

분명 잘 넘어간 것 같은데. 집에 잘 갔다가 오더니, 골치 아픈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남작에 대한 일이라니, 들킨 걸까?

아니면 뭔가 의문이 생길 여지가 남아 있었나?

아니, 의문 정도는 충분히 생길 수 있었다.

남작이 날 죽이고 싶어 한 것은 사실이었고.

남작이 죽은 그날, 나는 사냥한다는 핑계를 대고 사람들과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의심을 사긴 힘들었다.

거기다, 남작이 나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지금의 나는 모르는 일이고.

뭔가 알아차린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보려는 걸까?

하지만, 평범한 질문을 하려고 이 밤에 이런 외진 곳까지 나를 끌고 오지는 않을 텐데.

저벅, 저벅.

잘 가꿔진 공원을 지나 이제는 우거진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턱.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더 따라 들어가선 안 될 것 같았다.

뭔가 일이 틀어진 거라면 발레아의 상속 능력에 대비해야 했다.

"더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습니다만. 숲은 낮에도 학생 혼자 함부로 진입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뒤쪽 공원도 밤에는 웬만하면 다니지 말라고 했고요."

내 말에 그녀도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녀는 조금 아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금 더 가면 될 텐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겁이 많아서요."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샐쭉하게 변했다.

"밤새 사냥하러 다니셨던 분이 아니셨나요."

"사냥꾼도 무서울 때는 무섭습니다."

그녀는 뻔뻔한 내 말에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죠."

그녀도 더 들어가기를 포기하자 나는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남작님에 대해 물어볼 말이 뭔가요? 제가 남작님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데요."

내 말에 그녀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디 보자."

그녀는 발을 두드렸다.

콩. 콩.

발을 두드릴 때마다 바닥에서 마나가 퍼져 나갔다.

"다른 사람이 따라오거나 누가 보고 있지는 않네요."

그녀는 나를 보고 웃었다.

"우리 둘뿐이에요."

젠장, 설마 여기도 그녀의 영역 안인가.

목덜미에 땀이 맺혔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물어볼 말은요."

그녀의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공자님이 저희 아버지를 죽이신 건가요?"

뭔가 에두른 말도, 귀족적인 수사도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네?"

놀란 눈, 그리고 황당한 표정.

오랜만에 하는 표정 관리였다. 오케이, 들킬 여지는 주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범인은 너!'라는 질문을 던지다니.

예상한 것 중에 제일 나쁜 쪽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진짜 뭔가 아는 건가? 그럼 답이 없는데.

저장 시점이 짧아서 수습할 방법도 없고.

분위기가 싸하긴 한데, 지금은 모르는 척해야 했다.

"갑자기 무슨 말을...."

"정말 대단하다니까. 나조차도 연기인지 진짜인지 모를 정도예요."

당연하지. 그때 죽고 난 뒤에 얼마나 연습했는데.

지금 내 연기는 완벽에 가깝다!

"아니, 뭔가 알아듣게 이야기해야 내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황당한 것은 둘째 치고, 남작님을 내가 죽였냐고 물어보시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흠. 그러네요. 설명이 부족하기는 했어요."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설마.

"원래 아버지는 공자님이 우리 집에 오셨을 때, 공자님을 죽이려고 했었어요."

아니, 잠깐만.

"아버지는 공자님의 작은 어머니. 음, 공자님은 서자니까 그레시아 공작님의 둘째 부인이라고 해야 하려나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튼 아버지는 그 둘째 부인을 사랑했어요. 뭔가 미쳐 보이긴 했지만, 좋아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덕분에 우리 두 남작 부인께서는 멘탈이 파사삭 나가셨죠."

나는 입을 벌리고 그녀의 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왜 다 토해 놓는데?

"저도 고생했다니까요. 그 전에는 그래도 뭔가 이유가 제대로 있었는데, 이번에는 앞뒤 없이 공자님을 죽이느니 어쩌니 계속 그랬다니까요. 저도 엄청 힘들었어요."

아니, 죽이기 전에 싫다고 하는 목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뒤에는 신나서 나를 죽였잖아!

"공자님이 오신 날, 죽일 생각으로 준비해 놓았는데 공자님은 그날 밤 내내 보이지 않아서 취소되었어요. 아침에 문 앞에서 저와 만났잖아요. 그때 저는 밤을 홀딱 새웠답니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멋진 표정과 연출이었는데, 이 정도로는 그녀의 말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수도로 가는 길이나 안 되면 아카데미 수업 도중이라도 공자님을 죽이라고 지시하셨어요. 그게 나를 왕립 아카데미에 보내는 이유 중 하나라는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하지만, 집도 떠났는데 아버지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죠."

머리라도 쓰다듬어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 잘했죠?"

잘하긴 했는데, 왜 지금에 와서 내 뒤통수를 때리는 거지?

"다행히 중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명령은 끝나 버렸어요. 무척 다행이었어요. 딱 봐도 공자님은 무시무시했거든요."

아마도 그녀의 영역을 선포하는 능력은 내가 마나를 잘 감지하는 것처럼 그녀 주변의 힘들을 잘 파악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버지도 죽었고, 나도 해방되었고. 모두 행복하게 끝! 집에 돌아가기 전에는 이런 상황이었어요."

나도 그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발레아도 죽이지 않고 그냥 놔두었고.

"그런데 열심히 집에 돌아가서 확인해 보니까 아버지가 그냥 돌아가신 게 아니더라고요."

하긴 외부에 발표한 것과 달리, 지하에서 불타 죽었으니.

"실제 사인은 지하 창고에서 불타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들이나 가신들은 대충 자살로 생각하고 계시고요."

"아, 자살이셨어요? 아니, 자살이 문제가 아니라...."

중간에 말을 끊는 것은 무리수로 보였다. 우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 보기로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강조했다.

"하. 지. 만!"

하지만은 무슨.

"불탄 시체에서 검 흔적이랑 싸운 흔적을 찾을 수 있었어요."

"그...!"

큰일 날 뻔했다. 놀라서 잘못되었다고 소리칠 뻔했다.

흔적이 남아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전부 잘 타는 것을 확인했는데?

"정말 잘 탔더라고요. 금붙이도 다 녹고, 그 여자 사진도 불타 버리고, 아버지 시신도 뼛조각 몇 개만 남았어요."

"그래서 다들 지금도 아버지가 불타서 죽은 거로 생각하고 있죠."

어라?

"몰래 아버지 뼛조각을 뒤져서 부러진 흔적하고 검 흔적을 찾아내긴 했는데, 흔적이 흐릿해서 논란만 생길 것 같고, 다들 불타 죽은 사실에 납득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 안 했어요."

아버지 뼛조각을 몰래 뒤지다니 귀족가의 딸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안 했다고?

"지금 말대로라면 그냥 불타서 돌아가신 것 같은데요. 거기다 혹시 싸운 흔적이 있다고 해도 내가 돌아가시게 했다는 건 너무 심한 억측 아닙니까!"

어이없는 표정에서 조금 화난 표정으로. 목소리 톤도 조금 높이고. 음. 괜찮았어.

"그건 맞아요. 다만 제 상속 능력 때문에 공자님께 말한 거예요. 제 능력 가운데 영역, 아니 집 안에 있었던 마나의 흔적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어요. 불타 버린 지하 창고에는 공자님의 마나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설마, 발레아의 상속 능력인 일정 영역을 지배하는 능력에 그런 능력까지 포함되어 있었나.

이러면 곤란해지는데, 우선 말을 꺼내 보자.

"아무도 안 믿어 줄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로 누명을 씌운다고 될 줄 알았나요?"

내 말에 발레아가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그 말대로예요. 이런 이야기를 누가 믿어 주겠어요.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걸요."

본성을 알고 있으니 시무룩한 표정을 봐도 긴장으로 뒷머리가 뻣뻣해질 뿐이었다.

그래도 우선 한 발 뒤로 뺄 수 있을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더 하실 말씀 없습니까? 오해를 받아 기분이 안 좋군요. 전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뒤로 돌았다. 그리고 한 걸음.

두두두두두.

돌아가려는 벽돌 길이 위로 치솟았다.

4m 이상의 높이로 길게 이어진 돌벽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역시, 안 되는 건가.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어쩔 수 없어요. 아무도 믿지 않아도 제가 알고 있거든요. 어떻게 그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 지하실을 찾아서 아버지를 죽였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저는 공자님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해요."

결국, 최악의 결말이었다.

발레아 성격에 증거나 다른 사람의 확인은 필요 없었다. 알리바이가 있어도 앞뒤가 안 맞아도 그녀가 그렇게 믿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정말 증오하고, 매일같이 죽어 주었으면 하고 노래를 불러도 제 아버지잖아요. 죽은 아버지의 복수는 해야겠어요."

바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녀 뒤쪽에 늘어선 나무가 휘청거리며 다가왔다.

공기가 날카롭게 변하고, 숨을 쉬기도 어려워졌다.

이곳은 그녀의 영역 안이었다.

나는 허리춤에 숨겨 둔 단검을 꺼냈다.

우우웅!

붉은 검기가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죽은 아버지 이야기를 하자고 불러냈는데, 그냥 따라갈 리가 없었다.

갑옷이나 다른 준비는 못 해도, 단검 정도는 준비해 놓고 있었다.

"세상에! 밖으로 마나를 뿜을 수 있군요! 그 정도면 밤새 달려가면 시간이 되려나?"

그녀는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짓입니까? 여기는 아카데미 안입니다! 허락받지 않은 대결은 퇴학 사유입니다!"

대충 망한 느낌이었지만, 끝까지 연기를 하기로 했다.

다 포기하고 자살하기에는 저장 시점이 너무 가까웠다.

아카데미 수업을 다 포기하고 아카데미로 오는 발레아를 중간에서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출발하기 전에 남작 영지까지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카데미 안이라 여기서 발레아를 죽인 뒤, 숨기기도 어려워 보였고.

어쨌거나 우선 결판을 내야 했다.

발밑이 푹 꺼졌다.

나는 몸을 위로 솟구치게 했다.

둘러싼 벽에서 돌들이 튀어나왔다.

날아온 돌들을 검으로 튕겨 냈다.

그 모습을 보고, 발레아가 입을 열었다.

"발버둥쳐도 소용없어요. 이곳은 내 영역으로 선포된 나의 왕국이에요. 이곳 안에서는...."

죽기 전에 들은 이야기였다. 또 반복해서 들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다시 날아오는 돌을 박찼다.

출렁이는 숲 가까이 서서 나를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는 발레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상속 능력이었다.

이번에는 질 생각이 없었다.

제78화

제3편 계약 (2)

조용하고 평범한 공원과 숲이 나를 적대했다.

돌벽이 솟아올라 일대를 감싸고, 바닥이 출렁거려서 중심을 잡지 못하게 했다.

촤아악!

나뭇가지가 채찍처럼 휘어져 들어오고.

뿌드득.

뿌리가 땅을 헤치고 나와, 나를 휘감으려 했다.

바람에 실려 온 꽃가루는 미세한 칼날이 되어 내 피부에 상처를 냈고.

밤을 밝혀 주던 달빛은 일그러져 사물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어졌다.

어느새 발레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영역 안의 사물을 움직여서 자신의 모습을 숨긴 것이다.

전에 실내에서 싸웠을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하긴, 건물 안에서 싸웠을 때와 똑같을 리가 없었다.

나는 바닥에 발이 거의 닿지 않았다.

솟아오른 벽을 박차고, 찔러 오는 뿌리를 밀어내며 위로 솟구쳤다.

마치 전생에 트램펄린을 하듯이, 기사답지 않은 모습으로 마구 뛰어다녔다.

"그렇게 뛰어다니며 피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요. 공자가 제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기사라고 해도, 사람이 올 때까지 그렇게 버틸 수 없잖아요."

발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로도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허풍이 아니라면 그녀는 내 예상보다 마나 양이 많거나 영역을 만드는 능력이 생각보다 마나 소모가 적은 모양이다.

원소 계열이나 염력 계열의 상속 능력이라면 마나 소모가 많아 피하기만 하는 나보다 훨씬 빨리 마나가 떨어질 텐데, 그녀의 영역은 다른 것 같았다.

허풍으로 믿고 버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피하고 있는 것은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실내에서 본 것과 어떻게 다른지, 이 영역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지금 확인이 끝났다.

파아악!

공격해 오는 사물들을 피해 뛰어다니던 나는 솟구치는 돌기둥을 밟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

당연하다는 듯이 허공에 떠 있는 나를 향해 쏘아져 들어오는 돌조각들과 부러진 나뭇가지들.

나는 날아오는 물건들을 쳐 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상대로였다.

남작의 저택 때보다 훨씬 영역의 범위가 넓어졌지만 위쪽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녀의 영역 안에서는 사물들이 그녀의 의지대로 모양을 바꿀 수 있었지만, 이렇게 영역을 벗어나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물건들을 쏘아 내는 것밖에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펼쳐진 영역 밖으로 도망가면 그만이었지만, 그녀도 그것을 예상했는지 높은 돌담으로 영역 주변을 둘러쳤다.

거기다, 숲 쪽으로는 돌벽을 만들지 않아 유인하고 있었고.

최고 높이까지 솟구친 나는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나뭇가지와 뿌리, 돌과 흙까지 모두 나를 향해 공격할 준비를 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확실히, 발레아의 상속 능력은 정말 대단했다.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이 무기가 되다니.

사방이 막힌 실내이거나, 무기가 가득한 전쟁터 같은 곳이라면 그녀는 거의 무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과 같은 곳이라면 무기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돌무더기와 나무라니. 그녀의 능력으로 재질도 강화되었는지 평범한 돌이나 나무와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원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카데미에서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나와 싸울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하늘이 막혀 있지 않으니 이렇게 훌쩍 뛰기만 해도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물론,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것이니 눈 말고 다른 감각이 대단히 뛰어난 능력자나 기사만이 겨우 피하긴 하겠지만.

다만, 그녀의 영역을 두 번이나 경험해 보니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영역 내에는 그녀의 마나가 가득 차 있었다.

영역 안에 있는 사물들은 영역 안에 가득 찬 그녀의 마나에 의해 변형되고 움직였다.

마나가 움직이고 모여서 하늘로 솟구치면, 뿌리가 움직여 나를 향해 찔러 들어왔다.

나는 뿌리가 들이닥치기 전에 마나를 보고 슬쩍 몸을 움직여 솟구친 뿌리를 타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정말 대단하네요. 어떻게 그걸 다 피하는 거죠? 마나 심법이 좋으면 되는 건가요? 실력이 좋은 기사도 가능한 건가요?"

하도 잘 피하니, 발레아가 입을 열었다.

그거야 나도 알 수 없는 거고. 왕족들은 기본적으로 '마나 감응력'을 가지고 있다던데, 왕족들은 가능하려나.

발레아는 자신의 위치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 들키더라도 자신의 영역 안에서는 아무리 물건을 부숴도 다시 만들어지니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그녀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 영역 안에서는 마나를 찾는 내 감각으로도 그녀의 위치를 찾기 어려웠지만.

영역 안에 가득 찬 마나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니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발레아는 자신의 영역을 왕국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왕국이라기보다는 몸에 가까웠다.

움직이는 사물들은 그녀의 육체였고, 가득 찬 마나는 신경이자 근육이었다.

그리고 마나의 움직임이 시작되는 곳, 모든 마나의 중심에는 그녀가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쏘아져 들어오는 나뭇가지를 피하고 날아오는 돌들을 튕겨 내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나무들이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이제는 나뭇가지나 뿌리가 아니라 뿌리를 뽑아낸 나무들이 움직였다.

계속 뿌리를 뽑아낸 게 나무 자체를 움직이려고 그랬나 보다.

나는 단검에서 검기를 뿜어내 앞을 막은 나무를 베어 냈다.

서걱.

"소용없어요. 이 안에서는 무한하게 복구되니까요."

그녀 말대로 검기로 나무를 잘라 냈지만, 나무들은 잘린 그대로 나를 향해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서걱, 서걱.

하지만, 나는 계속 잘라 냈다.

"소용없다니까요. 그렇게.... 아니, 왜...."

그녀의 놀란 목소리와 함께.

쿵. 쿵. 쿵.

나무들이 쓰러졌다.

육체가 무한하게 복구된다고 해도, 신경과 근육을 전부 끊어 놓으면 다시 잇기까지 육체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잘린 나무가 버티는 이유는 마나 때문이었다. 마나의 흐름을 전부 끊어 놓으면 마나가 다시 이어지기까지 나무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막아섰던 나무들이 쓰러지고, 나는 한걸음에 뛰쳐나가 나무 중 하나에 검을 휘둘렀다.

다른 나무와 똑같은 평범한 나무였는데, 검이 닿기 전에 사람으로 변했다.

"항복이에요."

발레아가 양손을 들고 서 있었다.

우뚝.

그녀의 목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단검이 멈추었다.

들어 올린 손목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검기에 베인 것이다.

슈우우우욱.

그리고 그녀가 항복이라고 말한 그 순간, 주변 환경이 변했다.

흐느적거리던 나무들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고, 솟구쳐 있던 돌벽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엉망이 된 돌길이 원래의 모습으로 변했고, 달빛도 제빛을 되찾았다.

영역이 사라진 것이다.

원래의 평범한 공원과 숲. 하지만, 싸운 흔적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아카데미 관계자가 보면 골치 꽤나 아플 것 같았다.

"아버지의 원수라면서요?"

나는 검을 들이민 채로 그녀에게 물었다.

잘못 보았다고 하려나? 그리고 나중에 다시 덤빈다는 생각일까?

"원수는 맞아요."

그건 아니군.

"그런데 제가 이기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요. 포기하려고요."

끙, 역시 이 여자의 머릿속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딸로서 할 만큼은 했으니까요. 솔직히 딸이 아니었으면 싸우기는커녕 죽여 주었다고 좋아했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아버지가 죽어서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발레아는 피가 줄줄 흐르는 팔을 든 채로 말을 이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절 죽이려고 했잖아요."

"네. 그럴 생각이었죠."

"죽이는 걸 실패하고 항복하면 그만인가요?"

말을 하다가 보니 오해로 공격당했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테니.

아니, 그보다 뭔가 죽이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검을 멈추지 말 걸 그랬나.

"어쩔 수 없었어요. 딸로서의 의무감과 살고 싶은 욕망 사이의 고민이라고 할까요."

정말 뻔뻔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예쁜 척, 착한 척 온갖 가식을 부렸는데, 본모습을 보니 차라리 전과 같이 가식을 부려 주길 바랄 지경이었다.

"나를 죽이려고 했는데, 항복한다고 제가 살려 줘야 하나요?"

죽이는 대신 아카데미에 신고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내용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벌인 일이 한둘이 아닌데, 지금 같은 때에 남작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죽여야 할 것 같은데.

다시금 죽이는 쪽으로 저울추가 움직이려 할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동료가 되어 드릴게요. 목숨도 구해 주고요. 아시다시피 제가 약한 편은 아니거든요. 공작가 서자라는 위치 때문에 일 처리가 힘들었을 텐데, 드러내지 못하는 일 같은 것은 제가 다 처리할게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음. 뭔가 괜찮은 이야기가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를 믿기는 어려운데.

"신전에 가서 계약하죠. 원한다면 주. 인. 님. 이라고 불러 드릴게요."

그녀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변했다. 하지만, 달콤한 목소리는 별로 와 닿지 않았다.

그 대신 계약이라는 말은 귀에 쏙 들어왔다.

"정말인가요?"

"그럼요. 그 정도는 각오하고 벌인 일이에요. 거기다 주인님은 아버지처럼 고생도 안 시킬 것 같고요."

"주인님은 필요 없어요."

나는 검을 거뒀다.

"내일 바로 계약하죠."

"네!"

그녀도 팔을 내렸다.

결국 죽이지 않는 것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아직 그녀를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과 달리, 나는 이 결정을 되돌릴 수 있었다.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나는 궁금했던 내용을 그녀에게 물었다.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요? 분명히 들켰을 텐데요."

나도 그 이유로 발레아를 죽이기가 쉽지 않았다.

"바로 도망갈 생각이었어요. 아버지하고 아는 용병이 있어요. 그 용병을 찾아서 제국이나 다른 나라로 도망가려고요."

뭔가 고민도 앞뒤도 없었다.

그녀는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위치도, 남작의 딸이라는 지위도 별로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자유롭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계약하자는 말을 들어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다시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녀가 슬쩍 손을 들었다.

"저, 그보다 너무 어지러운데요. 잠깐 기절해도 되나요?"

말과 함께 발레아가 뒤로 쓰러졌다.

소매는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고, 바닥에도 피가 고여 있었다.

나는 쓰러진 발레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수건을 꺼내 발레아의 손목을 묶은 뒤 그녀를 안고 진료실 쪽으로 걸어갔다.

다음 날은 휴일이었다.

그녀와 나는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 신전을 찾았다.

아카데미 안에 있는 진료실에도 신관이 있었지만, 계약 전문 신관도 아니었고, 아카데미 안에서 계약을 하는 것은 보안 유지가 어려웠다.

마차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서 신관을 찾은 발레아와 나는 신관을 앞에 두고 계약서를 만들었다.

최대한 나에게 유리한 계약이었다.

나에 대한 비밀을 지켜 주는 것과 나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게 하는 계약이었다.

목숨을 보호하거나 동료로 삼는다는 것은 계약서로 만들기 어려웠지만, 위의 계약만으로도 충분히 불공평한 계약이었다.

계약서의 마나가 한계가 있어 평생의 계약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오랫동안 지켜야 하는 계약이었다.

계약서를 보고 신관이 깜짝 놀라 발레아에게 여러 번 물어보았지만, 발레아는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에 서명했다.

동료도 아니었고 믿기도 어려웠지만, 어쨌거나 비밀을 하나 공유한 사람이 생긴 듯했다.

제79화

제4편 공주의 각성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