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3

제27화

제2편 이에로 후작가 (1)

공작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 귀족을 향해 시몬이 인사를 했다.

"후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시몬 데 그레시아입니다."

후작을 향한 인사는 흠 잡을 데 없이 정중했지만, 그답지 않게 무척이나 딱딱한 인사였다.

후작 앞이어서 긴장했나?

그는 후작에 이어 귀부인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후작의 자식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처음 인사는 막 성인이 된 듯한 어린 청년이었다. 나이로 보아, 그는 후작의 첫째 아들인 것 같았다.

그를 보니 오는 길에 보았던 서자 마르틴이 생각났다.

큰 덩치와 자신감이 가득한 서자와 기가 약해 보이는 정식 후계자.

제삼자인 내가 봐도 두 사람은 너무 비교가 되었다.

그리고 평범해 보이는 다른 아들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딸들과 인사를 했다.

제일 먼저 맏딸인 아드리아.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시몬이 입을 열었다.

"정,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시몬 데 그, 그레시아입니다."

세상에. 귀족 예절을 몸에 새긴 것 같은 시몬이 말을 더듬다니.

이제야 그가 긴장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알아차린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후작과 귀부인들은 슬쩍 미소를 지었고, 아드리아의 여동생들은 손으로 입을 막고 작게 웃었다.

시몬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지만, 끝까지 인사를 마쳤다.

창피를 무릅쓴 저 모습은 역시 훌륭한 귀족의 표상이었다.

"뒤에 있는 소년은 누구지?"

뒤이어 기사단장과 총집사의 인사가 이어진 뒤, 후작이 나를 보며 물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질까 봐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후작이 물어온 이상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앞으로 나가 고개를 숙였다.

"알렉스라고 합니다. 후작님께 인사드립니다."

"알렉스? 아, 그 서자...."

슬쩍 그를 쳐다보니, 그는 한껏 인상을 쓰는 중이었다. 후작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기야 정략결혼을 준비 중인데, 상대 가문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모두 들어가지."

역시,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문 안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그러게 분위기 이상할 거라니까. 왜 물어봐서는.

후작 일가는 나를 보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사람도 있었고, 후작보다 더 나를 쏘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들 대부분은 서자가 괜한 자리에까지 따라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다만 한 사람. 시몬 형의 약혼 예정자는 서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반가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몬 형은 후작 일가에 둘러싸인 채로 안채로 들어갔다.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아드리아도 그들과 함께 안채로 사라졌다.

"지낼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기사들과 기사단장, 총집사 그리고 나는 따로 손님방으로 안내되었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따로 독실을 주었다. 애매한 내 위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독실을 내준 것 같았다.

점심 식사도 따로 방으로 가져왔다.

식사가 끝난 뒤, 내 방으로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후작가로 오는 동안, 열심히 꼬셔 놓은 병사였다.

후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는 다른 사람보다 과묵하고 성실했다.

나는 돈과 정성을 들여서 그를 내 편으로 만들어 놓았고, 기사단장도 여행 중에는 그가 나를 돕는 것을 허락했다.

후안의 입장에서는 어린 도련님의 수발을 드는 것이라 귀찮을 법도 했지만, 열심히 꼬셔 놓은 덕분에 내 부탁을 잘 들어주었다.

"알아봤나요?"

"네. 다행히 멀리 가지는 않았습니다."

"어디죠?"

"용병 거리에 있는 여관에 투숙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들키지는 않았죠? 감시받는다는 것 알면 오해를 살 수도 있어서요."

"네. 사복으로 갈아입고 지켜봤습니다."

역시 사람을 잘 선택했다. 그는 내 예상보다 더 잘해 주었다.

나는 후안에게 외성 앞에서 헤어진 마르틴을 몰래 미행해 달라고 부탁했다.

후안에게는 그를 미행하는 이유를 나중에 몰래 찾아가 놀라게 할 생각이라고 말해 놓았다.

뉘앙스는 다르지만, 실제로도 같은 이유였고.

"수고하셨어요. 나중에 꼭 보답할게요."

"괜찮습니다. 보답은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이 돈도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그는 가슴을 두드렸다. 가슴에서 내가 건네준 금화 소리가 들렸다.

그 금화는 아픈 그의 어머니의 치료약을 사기 위한 돈이었다.

후안이 아픈 어머니의 약을 사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소리를 듣고 냉큼 건네준 돈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후안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나에게도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여행 중에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돈보다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찾기 힘들었다.

뭐, 어디 투자할 곳도 없으니 성인이 되기 전에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면 그리 손해 보는 일도 아니었다.

'설마 떼먹지는 않을 거야. 암.'

불안해지는 마음을 꾹꾹 눌러 놓고, 나는 마르틴이 머물고 있다는 여관 이름을 물어보았다.

"은빛 용사 여관입니다."

은빛 용사. 후작가의 선조를 말하는 걸까?

어쨌거나 외우기 쉬운 이름이었다.

나는 방을 나서는 후안에게 몇 가지 부탁을 더 했다.

그가 나간 뒤, 나는 생각에 잠겼다.

도중에 마르틴을 만난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마르틴이 있는 곳도 알아냈고, 용병과 접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만났던 용병들과 같은 용병인지는 직접 확인해 보면 되었다.

겸사겸사 시몬이 언제 아드리아에게 반했는지도 알아냈고, 쓸데없이 마르틴이 왜 일을 벌였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증거를 찾는 건가."

최악의 경우가 아닌 이상, 내가 직접 처리하는 것은 무리였다.

다른 사람, 즉 후작가의 손을 빌려야 했고, 후작에게 고자질하려면 증거가 필요했다.

뭐, 상황을 보니 확실한 증거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후작이나 그 부인들에게 의심을 살 만한 정도면 충분해 보였다.

"자, 그러면 이제 나갈 이유를 만들 차례이려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단장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시몬 공자님이 언제 외유하실지 알고 싶다고요?"

"네. 외유하는 곳을 미리 둘러봐야 할 것 같아서요."

기사단장의 입가에 실소가 스쳐 지나갔다.

"사전 답사입니까. 그런 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뭐, 그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형의 경호로 온 거니까요. 후작가로 올 때나 돌아갈 때는 기사와 병사들이 있으니 제가 할 일이 없잖아요. 영주 성안에서도 마찬가지고."

반나절 동안 시몬 형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성안에 있는 동안에는 경호는커녕 얼굴 보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외유 때는 소수 인원만 움직일 테니, 그때야말로 제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맡겨진 일은 제대로 해내고 싶습니다."

나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열심히 거짓말을 했다.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허락을 했다.

"하지만, 사전 답사는 혼자 보낼 수 없습니다. 기사 한 명과 같이 가시죠."

"그럼, 우고 기사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우고 말입니까?"

"네. 우고 기사님이 잘하실 것 같아요."

기사단장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었다.

그거야 저번 삶에서 보았으니까....

나는 넘겨짚었다는 표정을 지은 채 기사단장을 마주 바라보았다.

외유는 삼 일 뒤로 결정되었다.

도착한 날부터 이어진 소개와 인사가 다음 날까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로 후작가와 그레시아 공작가의 정혼은 벌써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만찬이 여러 차례 열렸고, 그레시아 공작가의 차기 후계자와 안면을 익히고 싶은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들어 외유가 없어질 뻔했지만, 당사자들끼리 이야기할 시간도 필요하다는 후작부인들의 이야기에 겨우 외유가 잡혔다.

다행스럽게도 외유 코스 중에 용병 거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외유 전날, 사전 답사를 위해 영주 성을 나섰다.

우고 기사가 나와 함께 영주 성을 나섰고, 도시를 안내하기 위해 후작가에서 사람을 붙여 주었다.

후작가는 특이하게도 하녀를 붙여 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앙카입니다."

나는 또다시 이어진 인연에 그만 웃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

서자이긴 하지만, 나도 공작 일가의 한 사람이었다.

내 나이 때문에 하녀를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영주 성 밖으로 나가는데 아무 하녀나 보낼 수는 없었을 터였다.

영주 성을 나선 세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비앙카는 전에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실력을 숨긴 채 길 안내를 맡은 하녀의 모습만 보여 주었다.

하지만, 조금씩 흘러나오는 기세를 전부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고는 저번 삶과 다르게 그녀의 숨긴 기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도 미리 듣지 못했다면 비앙카의 실력을 알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우고만 못 알아차리는 걸까? 아니면 기사들은 다 못 알아차리는 걸까?

비앙카의 능력을 알아차린 것이 내 능력의 일부인지, 아니면 귀족의 특성인지 이것도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외유 코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코스는 도시를 벗어나지 않았다.

비앙카는 영주 성에서 멀어지자, 주변에 보이는 광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중앙 광장입니다. 전전대 후작님이 이 광장 분수대에서 후작부인께 사랑을 고백한 일화로 유명한 곳입니다."

무심한 얼굴로 꺼낸 이야기는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저기 보이는 신전은 1년 전부터 비어 있습니다. 담당 신관이 술을 먹고 성법을 역으로 거는 바람에 출입 금지 구역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 안에 들어가면 성불구가 되니 조심하십시오."

동네 아줌마가 몰래 나누는 소문에다가 사람들이 쉬쉬하는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우고 기사는 뜨악한 얼굴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역시, 그 성격이 어디 가진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뭔가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지금은 그 불만을 들어 줄 시간이 없었다.

우고 기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열심히 주변을 살폈고, 나도 그의 흉내를 냈다.

그렇게 여러 장소를 거쳐 드디어 원하던 곳에 도착했다.

"이곳은 용병 거리입니다.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곳입니다.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사고뭉치들이 모여 있는 곳이죠."

무척이나 신랄한 이야기였지만, 눈앞에 보이는 용병 거리는 그녀의 말을 부인하기 어렵게 했다.

거리 분위기는 무척 활기찼다.

무장한 용병들이 무리를 지어 걷고 있었고, 그들을 향해 소년 소녀들이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여관으로, 무기상과 다른 상점으로, 술집으로.

그리고 구석에는 술을 먹고 널브러진 용병들이 나뒹굴었고, 술집 여성과 용병들이 서로를 향해 고함을 치고 있었다.

그런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거리 한쪽에 내가 찾던 간판이 보였다.

[은빛 용사 여관]

마르틴이 머무는 여관이었다.

"잠깐 들러 볼 수 있을까요? 안쪽 분위기도 보고 싶은데요."

내 말에 두 사람은 의아해했지만, 둘 다 반대하지는 않았다.

나는 두 사람을 이끌고 은빛 용사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낮이라서 그런지, 여관 1층은 그리 시끄럽지 않았다.

전날부터 술을 먹고 널브러진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크지 않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용병들.

그 용병들 사이에 내가 찾던 남자가 보였다.

아니, 용병들도 아는 얼굴들이었다.

미친 여자 용병과, 아드리아와 날 죽인 남자 용병.

두 사람이 마르틴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28화

제3편 이에로 후작가 (2)

"마르틴 님, 여기 계셨네요?"

나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두 용병과 이야기를 나누던 마르틴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나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를 따라오는 비앙카를 보고는 바로 굳은 얼굴이 되었다.

"마르틴 님...."

비앙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렇게 빨리 만날 줄 몰랐어요."

나는 그런 분위기를 전혀 못 느낀 것처럼 마르틴에게 다가갔다.

마르틴 옆에 있던 두 용병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가가는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꼬맹이가 아는 척을 하는 것을 보면 저런 표정을 짓는 게 당연했다.

남자 용병이 마르틴에게 물었다.

"누구?"

"그레시아 공작가에서 온 분."

"아, 같이 왔다던."

마르틴의 대답에 두 사람은 얼굴을 찡그렸다.

나를 만난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아쉽군. 나는 무척이나 반가운데.

나는 마르틴이 앉아 있는 식탁 앞에 앉으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만나서 기뻐요. 답답한 영주 성을 빠져나온 게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사전 답사를 하기 위해 나왔다고 할 수 없으니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뻔한 말을 꺼냈다.

내 말에 비앙카와 우고가 나를 돌아보았다.

어라, 뭔가 한심한 듯이 보는 느낌이 드는데....

설마, 일을 핑계로 놀러 나온 거로 오해를 한 건가?

아니, 오늘 나를 처음 본 비앙카는 이해하지만, 우고는 그러면 안 되잖아!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유치한 행동을 해도 다들 믿어 버리다니.

나이가 어리다는 건 대단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마르틴도, 두 용병도 내 말을 믿었다.

"이렇게 만났는데 여기 좀 있다가 가도 되죠? 좀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같이 밥 먹고 가죠."

내 말에 우고가 조금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외유라고 해 봤자, 영주 성이 있는 안전한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뿐이었다.

사전 답사는 원래 계획에도 없는 일이었고, 방금 내가 그 일은 핑계에 불과하다고 했으니, 그의 허락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떠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자, 마르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내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두 용병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죠."

"그래야겠습니다."

마르틴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간다고?

"두 분 다 용병이시죠? 같이 식사하시면 안 될까요? 제대로 된 용병은 처음 보는데, 제가 밥을 살 테니 용병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반짝이는 미소와 천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꼬마 도련님, 미안해요. 저희는 높은 분들하고 이야기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일이 있어서 그만."

여자 용병은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고, 남자 용병은 정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둘은 여관을 빠져나갔다.

이런, 실패했다. 좀 더 정보를 얻고 싶었는데....

우선은 놈들을 찾았다는 거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와, 저렇게 간단하게 거절하다니 두 분 다 대단하신 용병들인가 봐요."

살짝 비꼬자, 마르틴이 그들을 감쌌다.

"둘 다 정말 바빠서 그래. 벤하민은 작지 않은 용병단의 단장이고, 노아도 부단장이라 할 일이 많거든."

드디어 이름을 알아낸 건가? 가명일 것 같지만, 이곳에서 쓰는 이름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마르틴과 나, 그리고 우고 기사와 비앙카는 여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기사와 하녀, 꼬마와 용병으로 보이는 남자의 점심 식사는 무척이나 어색했다.

나야 철판을 깔고 대화를 이어 갔지만, 우고 기사와 비앙카는 말없이 식사만 했고, 마르틴도 건성건성 대답할 뿐이었다.

우리 주변으로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하기야 용병들이 득실거리는 식당에 기사가 나타났는데 반가워할 리가 없었다.

식사 시간은 어색하게 끝이 나고, 마르틴과 인사를 나눈 후 여관을 빠져나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잡담 사이에 끼워 넣은 질문으로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다.

'붉은 곰 용병단이라고 했지?'

두 용병이 소속돼 있는 용병단 이름과 지내는 곳. 그리고 마르틴과의 관계 정도.

많지 않은 정보였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몇 가지 더 알고 싶은 것들이 있었지만, 대답해 줄 리도 없었고 대신 말해 줄 사람도 있었다.

여관을 빠져나온 뒤, 우리 일행은 남은 지역을 돌아보았다.

시끄러운 상업 지역과 도시의 전경이 보이는 외성벽 위까지.

예상대로 위험해 보이는 곳은 없었고, 우리는 늦지 않게 영주 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영주 성의 내성을 지나 우리는 헤어졌다. 우고 기사는 복귀를 신고할 모양이었고, 비앙카는 아드리아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아드리아를 보았을 때 옆에 없어서 지금은 서로 접점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도 바로 내 방으로 향하진 않았다.

나는 후안 병사를 만나 붉은 곰 용병단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다.

후작가 영지에 있는 용병단 조사를 우리 영지의 병사에게 부탁하다니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다행히 후안 병사는 이번에도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뭔가 전생에서 보았던 아이의 탐정 놀이를 지켜보는 어른의 인자한 미소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방에 돌아오자, 아드리아의 하녀가 와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초대 카드가 들려 있었다.

"티 파티 초대?"

"네. 시몬 님과의 차 모임에 같이 참석해 주시길 바라십니다. 내일 행사에 관해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시답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녀는 초대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이유를 들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태껏 나를 부른 적도 없었고 내일도 시몬 형과 놀러 가는 것뿐인데, 티 파티에 나를 부를 이유가 없었다.

'들러리로 부른 건가? 괜히 가서 시몬 형 눈치만 봐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고, 저녁 식사 전에 티 파티를 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나는 간단하게 씻고, 하녀를 따라갔다.

그녀의 응접실은 예상대로 깨끗하고 담백했다.

시몬은 방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이렇게 될 것 같더라니. 점심 식사도 속이 부대끼는 시간이었는데, 차 맛도 무척이나 떨떠름할 것 같았다.

"어서 와요."

아드리아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생각과 달리, 이 티 파티의 주인공은 시몬이 아니라 나였다.

"조금 전에 비앙카에게서 들었어요. 오늘 마르틴 오빠와 만났다면서요?"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나를 티 파티에 부른 진짜 이유를 말했다.

"저희 영지로 올 때도 마르틴 오빠와 같이 왔다면서요. 시몬 공자님이 말해 주지 않아서 몰랐어요."

그녀가 시몬을 흘겨보자, 시몬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하기야 골수 귀족인 시몬이 다른 귀족 가문의 서자 이야기를 꺼낼 리가 없었다.

아무튼 그녀는 배다른 오빠에 대해 알고 싶어서 나를 부른 것이었다.

그런데, 다소곳한 그녀의 모습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1년 만에 성격이 바뀔 리도 없으니 내숭이라는 건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말을 놓으셔도 됩니다. 제가 많이 어리잖아요."

내 말에 아드리아가 말을 뚝 멈추었다.

그녀는 슬쩍 시몬을 쳐다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녀도 전부 응접실을 나갔으니 우리 말고는 들을 사람이 없었다.

곧이어 그녀의 얼굴이 실룩거리기 시작했고, 시몬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녀는 내숭을 포기했다.

"푸하! 정말 반말해도 되지? 참느라 혼났네."

반말하라고 했지, 누가 내숭을 그만두라고 했나.

솔직히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긴 했지만,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다니.

나야 원래 성격을 알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깜짝 놀랐을 게 분명했다.

아, 맞다. 놀란 표정을 해야지.

"많이 놀랐어? 이게 원래 내 성격이야. 시몬 님도 알고 나서 많이 놀라셨지."

그녀의 말에 슬쩍 시몬을 바라보자, 시몬은 어두운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며칠 만나는 동안 시몬에게 이미 들킨 모양이었다. 하기야 나한테도 이렇게 금방 털어놓는데, 며칠 동안이나 참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약혼이 깨진다고 어른들이 요조숙녀 흉내를 계속 내라고 얼마나 닦달을 했는지 몰라. 시몬 님께 들키면 약혼이 취소될 거라고. 그러면 1년 내내 방 안에 갇혀서 꽃꽂이와 예절 수업만 주야장천 들어야 한다나?"

그녀는 시몬을 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전부 틀린 소리였지 뭐야. 시몬 님도 내숭인 걸 알고 놀라기는 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니까. 좋은 분이야."

그녀의 말에 시몬도 마주 웃었다. 그는 어둠이 내려앉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쉽게도 아드리아는 시몬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라서 그녀의 본성을 받아 준 게 아니었다.

지금 시몬의 얼굴에는 고뇌가 묻어나고 있었다.

왜 이런 성격의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아니 좋아하는 여자가 어떻게 이런 성격인지, 도무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거기다 아드리아가 말한 '좋은 분'이라는 말은 무척이나 안타깝게 들려왔다.

좋은 분. 좋은 사람.

전생에는 솔로인 남자들이 아는 여자 사람들에게 항상 저런 소리를 들어 왔다.

나도 몇 번이나.... 아니, 아니,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우울한 얼굴로 아드리아를 바라보는 시몬에게 위로를 보냈다.

'첫사랑은 다 그런 거라네. 브라더.'

잠깐의 소란이 지나가고, 응접실의 분위기는 전보다 훨씬 편안해졌다.

나도 놀란 표정을 지우고, 그동안의 일을 아드리아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마르틴을 만난 장면부터 그와의 대화, 그리고 대련까지.

아드리아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마르틴을 만난 장면에서는 놀라워했고, 그가 한 말을 기억에 담으려 했으며, 그와 대련했다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

어라, 대련 이야기는 뺄 걸 그랬나.

어쨌거나 그녀는 오래전에 헤어진 친오빠의 이야기를 듣는 얼굴이었다.

하긴 그녀는 저번 삶에서도 마르틴이 일을 벌였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 했었다. 지금 표정을 보니, 어렸을 때부터 무척 친하게 지냈었던 모양이다.

"마르틴 님과 사이가 좋았었나 보군요."

"응. 다른 형제들하고는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나하고는 정말 잘 지냈어. 집을 나간 뒤에 소식을 듣지 못해서 걱정이 많았어."

오케이, 드디어 원하던 질문을 꺼낼 때가 되었다.

"마르틴 님은 무슨 일로 영주 성을 나간 건가요? 각성도 하신 것 같은데...."

"알렉스!"

내 질문에 시몬이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쓸데없는 걸 묻지 말라고 주의를 시키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 준 게 고작 혼내려고 부른 거라니.

다시 봐도 정말 멋진 형이었다.

"아, 말하면 안 되는 건가요? 같은 서자라서 왜 그렇게 되었는지 궁금했어요."

말을 하면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늦기 전에 열심히 써먹어야 했다. 이제 몇 년만 지나면 효과는커녕 되레 역효과가 날지도 몰랐다.

아드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그녀는 시몬을 쳐다보고, 나를 바라보았다.

한쪽은 약혼을 위해 온 사람이고, 다른 쪽은 그의 동생이자 자신의 오빠와도 처지가 같은 서자.

그녀는 다시 한번 방 안을 둘러보고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르틴 오빠가 집을 나가게 된 건 오빠의 상속 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나서인 이유도 있었지만, 결국 오빠의 여동생 때문이었어요."

그녀 입에서 후작가의 비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29화

제4편 서자 대 서자 (1)

아드리아의 장황한 설명을 간단하게 줄이면, 이런 내용이었다.

마르틴은 공작가 저택에서 태어나 자란 나와 달리 영주 성 밖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후작가의 하녀였고, 그를 임신한 탓에 영주 성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쫓겨나면서 받은 돈으로 억척스럽게 일해 마르틴을 낳고 키웠다.

그리고 다른 평민 남자와 만나 결혼도 하고, 마르틴의 여동생을 낳았다.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였지만, 6살 때 후작의 부름으로 영주 성에 오게 되었다.

시찰을 나온 후작이 각성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그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운 좋게도 그는 상속 능력을 각성했고, 마침 평민인 남편이 죽어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어머니와 여동생도 함께 영주 성으로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하녀 출신인 데다 첩도 아니었기에 마르틴의 입지는 평범한 서자보다도 더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열심히 갈고닦아야 했다.

"마르틴 오빠는 열심히 훈련했어. 기사들에게도 열심히 배웠고, 공부도 열심히 했지."

말을 하는 아드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가 기사를 꿈꾸게 된 이유가 마르틴 때문이었을까?

"시샘도 많이 받았고, 오빠들이나 어른들 중에서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래도 마르틴 오빠의 실력은 다들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

같이 이야기를 듣던 시몬이 힐끗 나를 훔쳐보았다.

나와 비슷한 처지처럼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레시아 공작가에 딱히 불만이 없었다. 내가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이미 집에서 쫓겨났으니까.

"그렇게 모두에게 인정을 받고, 기사들과의 대련에서도 이겨 나가고 있었는데, 그만 일이 생겼어."

귀족가에서 벌어지는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마르틴의 어머니가 평민인 남편에게서 얻은 딸. 마르틴의 여동생이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누구 아이인지는 모르겠는데, 마르틴 오빠의 어머니 때문에 더 말이 많아졌지."

마르틴의 어머니도 하녀이면서 후작의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이었고, 그의 딸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후작가에서 그냥 놔둘 수는 없었을 터였다.

"뭔가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는 말도 있고. 결국 마르틴 오빠 가족들은 집을 나가게 되었어."

뭔가 이해가 안 되는 결과였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상속 능력을 얻은 서자를 쫓아내다니.

소문이야 잠재우면 되는 거고, 마르틴만 남기고 나머지 둘은 영주 성 밖에 따로 집을 얻어 주어도 될 텐데. 왜 그랬지?

생각을 이어 가던 와중에 조금 전 아드리아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맞아. 소문이 있었지. 당연히 악담일 테고, 제일 심한 악소문이라면 결국... 후작 일가와 연관되었겠군.'

최악의 경우, 후작 아들들 중에 임신한 아이의 아빠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냥 소문이 아닐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되면 족보가 보통 꼬이는 게 아니었다.

이쪽 세상의 귀족들도 일부다처제에다 가계가 복잡한 경우도 꽤 있었지만, 그건 전부 귀족들 간의 일이었다.

이곳 귀족들은 상속 능력 덕분에 귀족의 피를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피를 희석시키는 평민들과의 관계는 그들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일 뿐이었다.

아드리아와 시몬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 이런 일을 알지 못하는 풋풋한 소년, 소녀였다.

'그럼, 쫓겨난 이유는 알아낸 것 같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지 쫓겨난 일 때문에 마르틴이 그토록 분노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번 삶에서는 저택을 불태워 후작 일가를 몰살시켰고, 사람을 보내 살아남은 아드리아까지 죽였다.

후작가에 오면서 잠깐 들었던 그의 이야기에서도 그의 강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오래 보지는 않았지만, 마르틴이 단지 저택에서 쫓겨났다고 그렇게 강한 분노를 품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도, 아드리아가 모르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 게 분명했다.

"저택을 나간 뒤에는 쉽게 만날 수가 없었어. 사람을 써서 찾아봤지만, 영지 내에 없을 때도 많고 오빠도 피하는 것 같고. 나가기 전에는 정말 친하게 지냈는데...."

우울한 얼굴로 말소리를 줄이던 아드리아가 다시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오빠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고, 내일 나들이 코스에 오빠가 있다는 여관도 들어 있다며. 오빠를 볼 수 있을지 알고 싶어서 부른 거야."

다시 봐도 아드리아는 빈말을 못 하는 성격이었다.

인사로라도 나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서 불렀다는 말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말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뭐, 그런다고 마음이 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번 삶과 다르게 오빠만 찾는 모습이 조금 낯설어 보였다.

"글쎄요. 내일 여관에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낯설어 보여서일까. 대답이 퉁명스럽게 나와 버렸다.

방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한참 동안 감돌았고, 그렇게 다과 시간이 끝이 났다.

다음 날, 아드리아와 시몬과 나 그리고 비앙카와 호위 기사 몇 명이 함께 도시 나들이를 나섰다.

시몬과 아드리아가 따로 마차를 탔고, 나는 비앙카와 다른 하녀들과 함께 다른 마차에 타게 되었다.

꽤나 심한 차별 대우였지만, 약혼 예정인 두 사람을 위해서라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나는 얌전히 하녀들의 마차를 올라탔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번 도시 나들이는 꽤나 무료한 시간이었다.

공작가보다 더 깨끗하지도 않았고, 볼거리가 많지도 않았다.

예상대로 도시 안이라서 어떤 위험도 없이 나는 하녀들의 수다나 듣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끝난 외유는 세 사람 모두에게 완전히 망한 행사가 돼 버렸다.

우선, 아드리아는 마르틴과 만나지 못했다.

여관에 들렀지만 마르틴은 자리에 없었고, 계속 기다릴 수 없어 그녀는 자신이 왔다 갔다는 말만 여관 주인에게 남기고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덕분에 아드리아는 종일 우울했고, 아직 풋내기인 시몬 형은 둘만의 단란한 시간은커녕, 우울한 그녀를 위로하지 못해 온종일 쩔쩔매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나들이 동안에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다.

후안 병사가 '붉은 곰 용병대'의 숙소와 약간의 정보를 더 알아내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다른 영지의 병사가 조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라도 움직여 조사하고 싶었지만, 호위 중에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호위가 아닌 상황에서도 역시 나이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의미 없는 외유를 끝내고, 헤어질 때 아드리아가 나에게 물었다.

"밤에는 돌아오겠지?"

누굴 말하는 건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겠죠. 숙소 비용을 이미 냈으니까요."

아드리아 옆에 있던 하녀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아드리아를 바라보았다.

"아시겠지만, 밤에는 나가실 수 없습니다."

아드리아는 서슬 퍼런 하녀의 눈빛을 무시하고 나에게 다시 물었다.

"너도 마르틴 오빠가 다시 보고 싶지?"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의문이 들긴 했지만, 우선 평범하게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만, 방법이 없네요."

내 말이 끝나기 전에 하녀가 아드리아를 향해 소리쳤다.

"아가씨!"

"그냥 물어본 거예요."

아드리아는 하녀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고, 이어 시몬 형과 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평안한 밤 보내시길."

그녀는 한 손으로 치맛단을 들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시몬 형도 가슴에 손을 대고 인사를 했고, 나도 그를 따라 했다.

내 인사에 아드리아와 하녀들이 미소를 지었다.

꼬맹이가 어른이 하는 인사를 하는 것이 귀여웠던 모양이었다.

"흥!"

옆에서는 콧방귀가 들려왔다.

온종일 심기가 불편했던 시몬 형은 결국 꼬인 심사를 드러낸 것이다.

시몬 형은 아드리아가 보이지 않자, 고개를 휙 돌리고는 말없이 자기 방으로 향했다.

서자인 나를 무시하기 위한 귀족적인 방법인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그저 귀여울 따름이었다.

나도 손님방에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해가 넘어가 창밖은 어두웠다.

"예상보다 난관이 많은데...."

아니, 난관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앞이 꽉 막혀 버렸다.

어느 정도 정보를 얻긴 했지만, 이 정도 정보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좀 더 자세한 정보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했는데, 이렇게 영주 성에 붙잡혀 있어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영주 성을 방문한 손님이 홀로 성 밖으로 나가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어린 내가 밖으로 나가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밤에 외출한다는 말은 아예 꺼낼 수도 없었다.

암살자를 만났을 때, 한 수 정도 배웠으면 좋았을 뻔했다.

단도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별로 배우고 싶지 않았지만, 몰래 저택 안으로 잠입하는 것은 지금 같은 때를 위해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 똑.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있었나?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덜컥.

문을 열어 보았지만,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잘못 들었나?

똑. 똑.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아니야?"

노크 소리는 문 쪽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서 들리고 있었다.

"알렉스.... 알렉스...."

거기다 여자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소름이 쫙 돋았다.

"설마, 귀신까지 있는 거야?"

마나도 있고, 초능력도 있고, 성법도 있는데 귀신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아니, 그건 좀 봐주라."

하지만, 귀신은 영 내 체질에 안 맞았다.

뭐, 다른 세상에서 전생해 온 나도 있었지만, 귀신은 분명 다른 문제였다.

"귀신이 아닐지도 몰라. 환청일 수도 있지. 너무 신경을 많이 썼던 걸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툭!

불쑥 침대 아래쪽에서 바닥 판이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좀 도와줘. 그렇게 불렀는데, 도와주지도 않고."

이어서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 지금은 조금 전과 달리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드리아 님?"

나는 놀라 침대로 달려갔다.

"끙."

침대를 밀어 확인해 보려 했지만, 침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침대 아래에서 다시 아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도 침대가 안 움직이지? 어쩔 수 없네. 알렉스도 기어서 들어와야겠어."

그녀의 말에 나는 침대 옆에 엎드렸다.

침대 아래쪽을 바라보니, 바닥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사방 일 미터 정도 크기의 바닥 판이 사라졌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 아래쪽에 한 손에 등을 든 아드리아가 나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짜잔, 놀랐지? 우리 영주 성 비밀 통로야."

그녀는 자랑하듯이 계단과 뒤로 보이는 통로를 가리켰다.

나는 조심스럽게 계단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조금 내려오니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비밀 통로인가요?"

"응. 오래전에 폐쇄되어서 아는 사람이 없어. 내가 발견한 거야."

그녀의 말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저번 삶에서 보았던 아드리아의 성격이라면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찾았을 게 분명했다.

그녀가 아니면 이런 낡은 통로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다행이야. 이 손님방에 묵게 되어서. 연결 안 된 방도 많거든."

"그런데 갑자기 왜 비밀 통로입니까?"

"응. 이 비밀 통로를 통과하면, 영주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어. 우리 둘이 마르틴 오빠를 만나러 가는 거지."

그녀를 다시 확인하자, 아드리아는 남자 차림의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체형과 얼굴 덕분에 절대로 남자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요? 저랑 간다고요?"

"응. 아까 물어봤잖아."

아니, 그런 뜻인지 몰랐지.

하지만, 그녀의 권유는 무척이나 고마웠다. 앞뒤가 꽉 막혔던 나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었다.

다행히 나도 외출복 그대로여서 칼만 챙긴 뒤에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그긍.

기관이 있는지 아드리아가 벽 한쪽을 만지자, 계단 위의 통로가 다시 막혔다.

우리 두 사람은 아드리아가 들고 있는 등에서 나오는 빛을 길잡이 삼아, 비밀 통로 안을 걸었다.

비밀 통로는 무척이나 좁고 어두운 통로였다.

오래되었는지 아드리아 말대로 먼지가 가득했고, 사람 손이 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알렉스, 너한테 처음으로 보여 주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아니, 나한테 알려 준 게 더 문제입니다만?

외부인한테 영주 성 비밀 통로를 알려 주다니. 후작이 알았다가는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약속했다.

그녀와 후작가의 문제였지, 내 문제는 아니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생긴 이상, 열심히 써먹어 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앞장서서 걸어가며 계속 이야기했다.

"마르틴 오빠한테는 알려 줄 생각이야. 비밀 통로로 오면 다른 사람은 모를 테니까. 나중에 몰래 찾아오라고 할 거야."

마르틴에게 알려 준다고?

설마....

나는 저번 삶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후작의 성이 불타고, 마르틴이 승계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경계가 삼엄한 성이 어떻게 불타게 되었는지, 그리고 범인이 밝혀지지도 않았고, 또 어떻게 마르틴이 승계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아드리아가 지금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나는 아드리아의 뒤통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범인은 바로 너냐!'

제30화

제5편 서자 대 서자 (2)

"그런데 이렇게 밤에 몰래 나가면 사람들이 찾지 않을까요?"

"나는 괜찮던데. 성안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이젠 찾지도 않는걸."

다 포기한 건가.

영주 성의 비밀 통로는 평범했다.

중간에 해골이 있지도 않았고, 숨겨진 보물 창고가 있지도 않았다.

통로 중간에 다른 방과 연결된 곳들이 보였지만, 우리는 손도 대지 않고 바로 출구로 향했다.

길게 이어진 비밀 통로는 내성을 벗어나 영주 성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다.

막다른 지점에 도착하자, 아드리아가 벽 한 곳을 힘껏 눌렀다.

드르륵.

정면의 벽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천장에서 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전에서 보았던 신을 모시던 제단이었다.

제단은 바닥까지 내려왔고, 제단이 있던 자리는 위로 올라가는 통로가 되었다.

우리는 제단이 있었던 자리를 통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신전인가....'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이 먼지를 뒤집어쓴 신전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 어제 비앙카가 말했었지.

신전은 1년 전부터 비어 있었다고.

그 이유가 아마.

담당 신관이 술을 먹고 성벽을 역으로 걸어서 출입 금지가 되었다고 했었나?

어, 잠깐.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잖아요! 성불구가 된다면서요!"

기겁한 나는 아드리아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드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어려서 괜찮잖아."

아니, 괜찮을지 안 괜찮을지 어떻게 아는데! 9살이면 엄연한 남자라고!

신전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건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고자라니. 당장 자살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중대 상황이었다.

"훗, 어린애가 별 이상한 걱정을 다 하네."

한껏 긴장한 내 모습을 보고, 아드리아가 웃었다.

"마나 오염으로 생기는 저주라서 각성한 사람, 귀족들에게는 효과가 없어. 평민들만 걸리는 저주야."

"정말이죠?"

아드리아의 말에 겨우 안심했지만, 나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니까."

안 괜찮기만 해 봐라. 다음 삶에서는 절대 도와주지 않을 테다.

무척이나 꺼림칙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적막한 신전을 벗어나자, 도시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밤의 도시는 무척이나 어둡고 조용했다.

등을 밝힌 집들도 드문드문 보였지만, 거리는 어두웠고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전생의 밤거리를 생각했던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긴 전생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마나와 상속 능력이 있다지만, 밤의 도시를 전부 밝힐 수 없는데 밤거리가 활기찰 리가 없었다.

"여기는 너무 어둡다. 빨리 가자. 용병 거리 쪽은 밤에도 사람이 많다고 했어."

그녀는 앞장서서 어두운 거리를 걸어갔다.

낮에 왔던 길을 다시 걸으며, 우리는 용병 거리로 향했다.

잠시 뒤, 도착한 용병 거리는 아드리아의 말대로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거기 서!"

"제기랄! 내가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냐! 잠깐 화장실 갔다가 올 거라고!"

"우에엑! 젠장 술에 뭘 탄 거야!"

"다 튀었잖아! 죽을래!"

도망치는 용병과 그를 쫓는 용병. 거리에 술을 토하는 남자와 술이 튀었다고 그를 후려치는 다른 용병.

아직 초저녁인데, 거리는 온통 술주정뱅이들과 용병들로 가득했다.

"와! 엉망진창이다!"

아드리아가 놀란 눈으로 거리를 둘러보았다.

용병 사무소를 중심으로 용병들의 숙소와 여관, 상점과 술집, 그리고 대장간까지.

해가 졌는데도 불구하고 이 거리의 가게와 여관들은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전생처럼 불야성을 이루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마치 전생의 유흥가를 보는 것 같았다.

"아, 취한다."

신나게 주변을 구경하며 걸음을 옮기던 아드리아의 옆으로 술에 취한 용병이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용병이 아드리아의 옆을 지나가는 순간, 그의 손이 아드리아의 옷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소매치기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드리아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용병의 손이 빠져나간 다음 순간, 아드리아의 손이 잔상을 남기며 움직인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용병의 손과 달리 아드리아의 손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정확히 보지 못했지만,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손재주가 좋은 평범한 소매치기 따위가 가속 능력을 각성한 귀족의 눈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행히 고함을 치거나 팔을 자르거나 하진 않았네.'

그랬다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잔뜩 모았을 게 분명했다.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아드리아의 모습에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안심이 빨랐던 모양이었다.

"악, 돈주머니가 없어졌어! 내 주머니!"

비틀거리며 멀어지던 용병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정신없이 자신의 몸을 뒤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비틀거리던 모습은 사라졌고, 그의 얼굴에는 놀란 표정만이 가득했다.

저건 훔친 물건이 없어져서 나오는 표정이 아닌데?

설마 훔쳐 간 것만 되찾아온 게 아니라, 되레 소매치기의 물건도 훔친 거야?

아드리아는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소매치기가 그 모습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너! 이년이!"

소리를 치며 다가오는 소매치기를 보며 나는 품에 숨긴 검을 손에 쥐었다.

죽이지만 않으면 상관없겠지?

조금 소란스러워지더라도 빨리 처리해야 했다.

그렇게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는 사이,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휙!

"도둑질에 실패했으면 그냥 달아나라. 괜한 애들에게 시비 걸지 말고."

앞을 막은 사람은 머리까지 망토를 둘러쓴, 몸집이 크지 않은 용병이었다.

그는 검집에 넣은 검으로 다가오는 용병의 다리를 걸어 바닥에 쓰러뜨리고, 탁한 목소리로 쓰러진 소매치기에게 훈계했다.

갑자기 벌어진 활극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 자식이!"

엎어졌던 소매치기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치곤 몸을 일으켰고, 용병의 손에 들린 검이 다시 휘둘러졌다.

퍽!

머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소매치기는 다시 땅바닥에 엎어졌다. 이번에는 기절했는지 엎어진 채로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너희들 괜찮아.... 어라?"

그가 뒤돌아보기 전에 나는 아드리아의 팔을 잡고 서둘러 군중 속으로 숨어들었다.

대신 처리해 준 것은 고맙지만, 더 이상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는 없었다.

실력이 좋아 보였으니, 귀찮은 일에 휘말려도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드리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자기가 소란을 일으킨 것을 알았는지 내가 이끄는 대로 잘 따라왔다.

그렇게 군중이 모여 있는 곳을 벗어난 뒤, 아드리아의 팔을 놓아주었다.

"미안. 그렇게 빨리 알아차릴 줄 몰랐어."

그녀의 말에 나는 손을 내밀었다.

"응? 왜?"

"봐드릴 테니 반으로 나누죠."

"뭐?"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겠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훔친 것도 내가 아니었으니 걸릴 것도 없었다.

후안을 꼬시느라 큰돈이 나가서 돈이 부족했다. 소매치기의 놀란 표정을 보아하니 아드리아가 훔친 돈주머니는 꽤나 무거울 것 같았다.

아드리아는 입을 딱 벌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건지.

"어린애가 벌써 돈을 그렇게 밝히면 어떻게 해!"

어린애는 돈 쓸 일이 없나? 웬 아이 차별?

"말없이 빠져나와서 도와준 사람한테 미안한데, 돌아가서 그 사람에게 주는 게 어때?"

"사람 모여 있는 걸 보고도 그래요?"

내 말에 아드리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훔친 돈주머니를 반으로 나누었다.

역시 사람의 표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꽤나 쏠쏠한 벌이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보다 그 용병은 뭐지?'

언뜻 보았지만, 우리를 도와준 용병은 평범한 용병으로 보기에는 실력이 무척이나 좋았다.

크지 않은 체구였지만, 검을 휘두르는 모습으로 그 실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도 억지로 바꾼 티가 나는 걸 보니, 보통 의심스러운 게 아닌걸?'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치고는 오지랖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다 그가 휘둘렀던 검집에 싸인 검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평범한 검집에 특별해 보이지 않은 검이었는데.... 왜지?

"아! 저기 맞지?"

생각을 이어 가는 동안, 아드리아는 마르틴이 머문 여관을 발견했다.

<은빛 용사 여관>

"와, 정말 안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녀는 허름한 여관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뭐, 저 별명을 가졌던 용사는 별명처럼 아름답기도 했지만, 깔끔한 체하는 걸로 유명한 용사였다. 허름하고 지저분한 용병 여관과 어울릴 리가 없었다.

여관으로 들어가니, 1층 식당에는 식사하고 술을 마치는 용병들로 가득했다.

"아! 저기 있다!"

다행히 이번에는 마르틴이 식당에 있었다.

그는 식당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다. 마르틴은 세상의 고뇌를 모두 짊어진 얼굴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르틴 오빠!"

그녀는 환한 얼굴로 마르틴에게 달려갔다.

이름이 불리자 마르틴은 고개를 들었고, 그는 다가오는 아드리아를 보았다.

마르틴의 표정이 여러 번 변했다.

분노, 회한, 슬픔, 안타까움.

다채로운 표정을 짓던 그는 결국 아드리아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억지웃음인가.'

속마음을 잘 감춘 웃음이었지만, 같은 표정을 계속 흉내 냈던 나는 그 숨겨진 표정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여길 어떻게 나왔어?"

"마르틴 오빠를 보려고 몰래 나왔어요."

아드리아의 말에 마르틴이 나를 쳐다보았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짓을 하다니! 다들 걱정할 거야!"

"저녁 식사 뒤에 찾지 말라고 한걸요? 아침까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뭐, 나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아침 식사 전까지 찾는 사람이 없었다.

"보내지 말아요. 오빠가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요."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오해할 만한 말이었지만, 아드리아도 마르틴도 그런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 마르틴의 얼굴은 훨씬 더 복잡해 보였지만.

결국, 마르틴은 두 손을 들었다.

"그럼 좀 있다가 내가 바래다주마."

"응. 응."

마르틴의 말에 아드리아는 마냥 기쁜 모양이었다.

이야기가 잘 된 것 같았다. 나는 두 사람에게 말을 꺼냈다.

"저는 구경 좀 하고 올게요."

"응."

"혼자서 괜찮겠어?"

아드리아는 냉큼 허락했고, 마르틴은 나를 걱정해 주었다.

나는 품에 숨긴 검을 툭툭 두드렸다.

"하긴, 네 실력이면 문제없겠다."

마르틴은 내 실력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 실력이 그렇게 좋아요?"

"아, 올 때 여러 번 대련했는데 말이지...."

오랜만에 만난 배다른 남매는 나를 화제 삼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둘 다 밝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한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표정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당장 위험한 일은 없을 테니까.'

나도 있는데 아드리아를 건드려 후작가를 놀라게 할 리는 없었다.

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여관을 나섰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고 여관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용병 거리는 시끄러웠지만, 거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소음과 빛이 사라졌다.

나는 어둠 속에 몸을 묻은 채로 품속에 숨겨 놓았던 검과 망토를 꺼냈다.

그리고 검을 허리에 차고, 망토를 둘렀다.

망토 속에 몸과 얼굴을 숨기자, 나도 이 용병 거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아쉽게도 체형은 숨길 수 없었지만, 용병들 중에는 여자 용병과 난쟁이도 있었다.

적어도 내가 후작가 손님으로 온 소년이라는 사실은 숨길 수 있었다.

"그럼 가 볼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혼자 다니게 되었다.

처음 느껴 보는 자유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어둠을 타고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붉은 곰 용병단 숙소.

날 죽였던 자들을 찾아가 볼 시간이었다.

제31화

제6편 용병들 (1)

붉은 곰 용병단은 용병 거리에서 조금 벗어난 상점가 안쪽의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여관처럼 보이는 2층 목조건물과 창고, 작지 않은 공터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대부분 밖으로 나갔는지 불이 켜져 있는 곳은 몇 없었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나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남의 집을 몰래 염탐하기에는 좋은 상황이었다.

나는 발소리를 줄이고, 건물 벽에 달라붙었다.

건물 벽은 영주 성이나 공작 저택에서 보던 매끈한 석재 벽이 아니라, 우툴두툴한 회벽으로 되어 있었다.

감시가 심한 공작 저택이나 후작 영주 성을 들락날락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이런 평범한 집의 벽을 타는 것은 어려울 게 없었다.

1층과 2층의 불빛이 보이는 방들은 별다를 게 없었다.

장비를 정비하는 용병들과 편지를 쓰는 사람, 그리고 분홍빛의 야릇한 분위기가 흘러나오는 방도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빛이 흘러나오는 3층 창을 향해 위로 올라갔다.

마지막 방이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죠? 좀이 쑤셔서 못 견디겠어요."

운이 좋았다.

빛이 흘러나오는 창에서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 용병의 목소리였다. 이름이 노아라고 했지?

나는 창 아래에 찰싹 달라붙었다.

양 손가락을 각각 창틀과 회벽의 틈에 걸치고, 몸을 벽에 바싹 붙였다.

'아슬아슬한데.'

창틀도, 회벽도 엄청나게 낡아 있었다. 둘 다 내 몸을 겨우 버텨 주었다.

꼬맹이라서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무거웠으면 벽이나 창틀이 버텨 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방 안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아는 목소리였다.

"조금만 더 참으면 돼. 마르틴하고도 충분히 친해졌고, 후작 일가를 몰살시킬 방법은 마르틴이 금방 가져올 테니까."

"그거 믿을 수 있는 거예요? 요새 영 맞추지 못하잖아요. 이번에도 갑자기 몇 개월이나 일을 당기던데...."

일이 몇 개월이나 당겨졌다니, 무슨 이야기지?

"다른 지방은 틀린 적이 없었어. 이 지역에 뭔가 그의 능력을 방해하는 것이 있을지도 몰라."

"그럼 더 못 믿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큰 틀은 틀리지 않았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

"네. 네."

이번에는 상속 능력에 관한 이야기인가? 누구의 무슨 능력을 말하는 거지?

"준비는 다 된 거야?"

"일이 갑자기 당겨져서 훈련이 좀 부족하긴 한데.... 어쨌거나 애들 준비는 대충 되었어요. 다른 용병단들과도 이야기를 끝내 놓았죠. 우리 애들하고 이야기가 된 용병단이 내부를 정리하고 라팔마 백작이 기사단을 제때 데려오면 될 거예요."

들려오는 이야기가 점점 이상해져 갔다.

설마, 저번 삶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건가?

하지만 그건 몇 개월 뒤잖아! 왜 그걸 벌써 지금 준비한다는 거지? 설마 내가 이번 삶에서 한 행동 때문에 나비효과가 일어난 건가?

하지만, 내가 한 일이라곤 시몬 형의 여행에 참가한 것밖에 없었다.

마르틴을 만나 같이 오고, 아드리아와 같이 비밀 통로로 빠져나온 것까지....

음, 이렇게 보니 한 일이 꽤 있었네.

하지만, 그 일들이 저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긴 어려웠다. 시간대가 맞지 않았다.

나는 귀를 더 기울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같이 일하는 용병들 이야기 그리고 자질구레한 불평들.

아쉽게도 뭔가 딱 원하는 내용은 들려오지 않았다.

더구나 자리를 옮겼는지 말소리가 작아졌다.

"그래서.... 이렇게.... 그 문제는...."

자리를 옮겨? 그렇다고 말소리가 작아진다고?

그 순간,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팍!

나는 힘껏 벽을 박찼다.

그 순간.

"쥐새끼가!"

쾅!

창틀이 부서지고, 고함과 함께 남자가 창밖으로 튀어나왔다.

흩어지는 나뭇조각 사이로 검 하나가 쏘아져 들어왔다.

까앙!

벽을 박찼을 때 꺼낸 검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검을 막았다.

마나가 가득 담긴 검. 막았던 검이 비명을 질렀고, 순간 손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나는 겨우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뒤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허공에 떠 있으니 체중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짜증이 났겠지만, 지금은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는 튕겨 나가는 힘을 이용해 최대한 몸을 날렸다.

휘이익!

넓은 거리를 날아서 가로지른 뒤 발이 땅에 닿자, 그대로 달려 나갔다.

자, 도망칠 시간이다!

"진짜, 쥐새끼였나!"

"정말 몸집이 작은데요? 여자인가?"

"난쟁이든 여자든 상관없다. 빨리 쫓아!"

"네. 네."

어느새 여자도 내려온 모양이었다.

휘익!

뒤쪽에서 대화가 들리더니, 휘파람 소리와 함께 여자 용병의 음성이 들려왔다.

"와! 오랜만에 재미난 일이네! 쥐새끼인지 난쟁이인지 기다려!"

여자 용병의 목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제길, 코만 좋은 줄 알았는데 달리기도 빨랐다.

"적이야?"

"막아! 근데, 왜 이렇게 작아?"

거기다 거리 양쪽에서 용병들이 튀어나왔다.

올 때는 보이지 않던 용병들이었는데, 어디서 다 튀어나왔는지.

"설마, 꼬맹이야? 맨손으로 잡아도 충분.... 컥!"

검도 뽑지 않고 앞을 가로막던 용병을 검 등으로 후려쳐 주었고.

퍽!

"크악!"

그 뒤에서 검을 뽑으려던 용병은 옆구리를 걷어차 주었다.

가로막던 용병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만약을 대비해서 죽이지는 않았지만, 뼈 몇 개는 박살 난 것 같았다.

하지만, 날려 버린 용병들보다 더 많은 용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 병신들이! 애가 아냐! 실력자다! 포위만 해!"

거기다 그 잠깐 사이에 더 가까워진 여자 용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거리를 달려 도망가기는 무리였다.

뒷골목을 확인해 놓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냉큼 건물 사이로 뛰어들었다.

사람 한두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골목.

덩치가 있는 어른이라면 쉽게 도망치기 어려운 골목이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에 빛도 들어오지 않은 좁은 골목은 10살도 안 된 어린아이가 숨기에는 최고의 놀이터였다.

"어디야!"

"이쪽 골목에는 없습니다!"

"이쪽도 없습니다!"

골목 곳곳에서 용병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어디야! 문이 열려 있거나 창이 열려 있는 집도 다 확인해!"

"다 닫혀 있습니다만."

"열린 곳에 들어가 문을 닫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열어서 확인해!"

아까 들었던 말이 모두 사실인 것 같았다.

수색하고 있는 용병단이 하나가 아니었다. 숙소 주변의 다른 용병단들도 모두 한통속이었다.

용병단 숙소에 대해 듣고 냉큼 달려온 게 잘못이었다.

나름 조심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전에서는 실수가 자꾸 드러났다.

'조심해야지. 이래서야 또 죽어도 할 말이 없겠어.'

나는 아래쪽 골목을 뛰어다니는 용병들을 보며 다시 다짐했다.

역시, 지붕으로 올라온 게 정답이었다.

나를 찾는 용병들은 내가 건물 지붕으로 올라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못 하니 남도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뭐, 내가 봐도 보통 사람들은 그 짧은 시간에 지붕으로 올라오기는 무리였다.

내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이, 여자 용병이 아래 골목에 나타났다.

"흠, 어디로 도망쳤을까."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이크, 들킬라.

나는 거북이처럼 고개를 쑥 집어넣었다.

안 들켰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를 옮겼다.

냄새를 잘 맡는 여자였다. 들키지 않은 것 같지만, 후딱 도망칠 필요가 있었다.

거의 기다시피 몸을 움직여 자리를 피한 뒤, 다른 집 옥상으로 건너뛰었다.

내가 뛰어넘은 골목에는 용병들이 뛰어다녔지만,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계속 건물을 뛰어넘었다.

얼굴을 스치는 밤공기가 무척이나 시원했고, 뛰던 심장은 이제야 잠잠해졌다.

몇 건물 너머로 용병 거리가 보였다. 그리고 몇 건물 더 너머 마르틴이 있는 여관 지붕도 보였다.

여기까지 여관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한껏 활극을 벌이고 왔는데, 다른 곳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럼, 슬슬 돌아갈까."

여관이 있는 용병 거리는 시끄러웠지만, 이 주변은 무척 조용했다.

용병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곳까지 찾으러 올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전에 아드리아 옆에 있는 꼬맹이로 돌아갈 터였다.

나는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2층 지붕이라 꽤 높았지만, 이 정도 높이가 무서울 나이는 지나 있었다.

"찾았당!"

그때, 내 발아래 어두운 골목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아의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위로 뛰어올랐다.

밤의 어둠 속에서 벌겋게 상기된 여자의 얼굴이 빠르게 다가왔다.

흥분으로 붉어진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뭐가 그렇게 기쁜지 모르겠지만, 환한 그녀의 얼굴과 함께 녹색으로 번뜩이는 검이 빠르게 다가왔다.

'이 동네 용병들은 개나 소나 독이냐!'

나는 힘껏 검을 휘둘러 다가오는 독 검을 막아 냈다.

챙그랑!

그런데,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검에서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나는 뒤로 튕겨 나가 벽에 부딪혔다.

큭!

몸무게 차이를 다시 느꼈지만,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실력은 좋은데, 검은 왜 그 모양이야? 가난뱅이였어? 쥐새끼가 아니라 좀도둑이었던 거야?"

상대의 황당한 얼굴 이상으로 나도 한숨이 나왔다.

한 번 부딪쳤는데, 검이 댕강 부러지다니.

양산형 철검의 한계인 건가.

아까 용병 대장하고 검을 부딪쳤을 때 위험해 보이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부러질 줄은 몰랐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벽에 처박혀 등도 아프고, 검이 깨져 나가며 다리를 베였는지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길, 위험한데.

여자가 막고 서 있는 골목이 용병 거리로 향하는 골목이었다.

몸 상태도 안 좋고, 검도 잃었는데, 도망칠 길목도 막혀 버렸다.

다시 옥상으로 올라가기에는 피가 흐르는 다리 상태도 좋지 않았다.

휘이이익!

그때, 여자가 휘파람을 불었다.

"다들 금방 올 거야. 쥐새끼인지 좀도둑인지는 금방 알 수 있겠지."

용병들이 몰려오면 곤란했다. 눈앞의 여자도, 용병대장도 내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망토만 젖히면 내가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제길, 여기까지인가.'

다시 살아갈 시간을 생각하면 끔찍했지만, 죽지도 못한 채로 잡혀서 고문을 당할 바에는 여기서 끝을 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번 삶은 무척이나 아쉬웠다. 이제 어느 정도 파악을 했다 싶었는데, 내 자만심이 일을 그르치고 만 것이다.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아주, 아주 운이 좋다면 달아날 틈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렇게 다친 다리에 힘을 주어 달려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뭐 하는 짓이야!"

여자 쪽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다친 애를 겁박하다니! 넌 명예도 모르나!"

여자 용병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음성은 여자 용병의 뒤에서 들려왔다.

여자 용병 노아는 황당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명예? 용병에게 명예를 이야기한 거야?"

음,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리고 여자 용병 뒤쪽의 어둠에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망토를 둘러쓴 왜소한 용병. 얼마 전에 아드리아를 도와주려 했던 용병이었다.

"용병이든, 기사든, 검을 든 자는 검을 든 만큼 책임이 있는 거야! 그걸 모르는 너는 검을 들 자격이 없어!"

나도, 여자 용병도 입을 딱 벌리고, 새로 등장한 용병을 바라보았다.

전생의 영화에서나 나오던 오글거리는 대사를 직접 듣게 되다니.

분명 나를 구하러 온 사람이었지만, 당장은 모르는 척하고 싶을 뿐이었다.

제32화

제7편 용병들 (2)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여자 용병이 새로 나타난 용병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네놈은 또 뭐야! 한참 재미있는데 방해하지 마!"

"약자가 고통 받는 것을 보았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아니, 약자라니. 이 쥐새끼가 얼마나 우리를 귀찮게 했는데. 그리고 너, 거기 멈춰!"

망토를 뒤집어쓴 용병과 사이코 여자 용병이 떠드는 사이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는데, 아쉽게도 걸리고 말았다.

사이코 여자가 슬금슬금 움직이는 내게 검을 겨누자, 새로 등장한 망토 용병이 내 앞을 막아섰다.

역시 오지랖이 넓은, 좋은 용병이었다.

"아니, 내가 말로 하니까 장난으로 보이나? 죽어!"

앞을 막아서자, 사이코 여자 용병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동시에 망토 용병의 손에 들린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왔다.

번쩍!

그 순간, 눈앞에서 번개가 번쩍였다.

"으엑!"

달려들었던 사이코 여자가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다.

역시 실력이 좋았다. 방금 같은 검은 평범한 용병이라면 피하기 어려웠다.

"내 검을 피할 실력을 갖추고도 겨우 어린아이를 괴롭히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젠장, 죽을 뻔했잖아! 그리고 어린애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두 용병이 나를 두고 각기 다른 소리를 했다.

한쪽은 내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어린애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고, 다른 쪽은 내 실력을 보지 못했기에 내 체격을 보고 어린애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니, 그런 것치고는 어린애라고 꽤나 확신하는 어조였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내 눈은 조금 전부터 한곳에 계속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망토 용병이 검집에서 검을 뽑는 순간부터 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검집에서 뽑혀 나온 검은 검집과 달리 매우 고풍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관리는 잘되어 있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마치 번개가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는데, 검은 역사책에서 보았던 옛 제국 때의 검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넋을 놓고 검을 쳐다본 것은 역사책에서 보았던 형태의 검이라서가 아니었다.

검날에 새겨져 있는 문양 때문이었다.

태양을 향해 비상하는 새의 문양.

분명 저번 삶에서 보았던 문양이었다.

유적 지하의 동굴 입구에서, 그리고 버려진 묘지에서.

머릿속으로 그날 묘지에서 아드리아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이 구멍에 검을 찔러 넣으면 딱 맞을 것 같은데.... 검을 구멍에 밀어 넣으면 기관이 움직여서 숨겨진 보물 상자가 나타나는 게 아닐까?"

그녀는 관 바닥에 뚫려 있는 구멍을 보고 이렇게 말했었다.

좋지 않은 상황 때문에 초조함을 잊으려 마구 떠들었던 말이었고, 그냥 흘려들은 말이었는데, 눈앞에 같은 문양이 새겨진 검을 보자 아드리아의 말이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게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계속 찾아왔던 문양을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그때, 한참 넋을 놓고 검을 보고 있는 내 귀에 용병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젠장, 왜들 이렇게 늦는 거야. 영 걸쩍지근한 방해꾼이 나타났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나는 용병 거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멈추라고 했잖아!"

당연히 날 막기 위해 용병 여자가 달려왔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다시 방해꾼이 막아섰다.

"애를 보내 주시오!"

"이 새끼가!"

캉! 캉! 캉!

다시 번개가 치고,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쉬웠다. 좀 더 좋은 검이 있었다면, 이렇게 도망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번에도 저번 삶에서 당한 것을 갚지 못하다니.

만난 게 몇 개월 빨라졌다고 하지만,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저번 삶보다 강해졌다고 자신했는데.

자만심과 성급함 그리고 좋지 못한 검 탓에 모르는 사람에게 뒤를 맡긴 채로 이렇게 도망치게 되다니.

상처 때문일까? 달리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제길! 도망가 버렸잖아! 너, 조금만 기다려! 다들 오면 팔다리를 잘라서 박제를 해 줄 테니까."

"정말 몹쓸 사람이군. 도시 안에서 검에 독까지 바르다니. 영지병에게 들키면 벌금형으로 끝나지 않을 텐데!"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용병 맞아?"

두 사람은 검을 휘두르는 것 이상으로 말로도 계속 싸워 댔다.

싸움은 이미 한쪽으로 완전히 기운 상태였다.

검 실력도, 검의 위력도, 전부 망토 용병이 압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싸움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검에 묻은 독 때문에 망토 용병은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고 있었다.

둘이 싸우는 동안, 멀리서 들려오던 휘파람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호호, 다들 오나 봐. 날 화나게 한 난쟁이 대신에 네놈을 가지고 놀아야겠어."

여자 용병의 말에 망토 용병의 움직임이 멈칫거렸다.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내가 고민을 해결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슈악!

나는 반만 남은 검을 힘껏 던지며 망토 여자에게 외쳤다.

"공격해요!"

내 목소리에 두 사람은 모두 깜짝 놀랐다.

도망쳤다고 생각했던 놈이 다시 돌아왔으니 놀랄 수밖에.

하지만, 두 사람도 경험이 풍부했던 모양이었다.

"어디서 감히!"

깡!

여자 용병은 갑자기 날아온 검을 막는 데 성공했다.

"윽! 마나가 담긴 검이라고?"

하지만, 반검에 실린 힘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날아온 검에 밀려 자세가 무너졌고, 그 순간 치고 들어온 망토 용병의 손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큭, 네놈이...."

뭔가 뻔한 말을 남기고 여자 용병은 쓰러졌다.

나는 살짝 다리를 절며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도망친 게 아니었어?"

"그럴 생각이었지만, 그러질 못했네요."

용병의 거슬리는 음성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용병 거리로 달려가다가 무거워지는 다리에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골목의 어둠 속을 절뚝이며 달렸다.

특별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그냥 도망치기 싫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몰래 돌아와 골목의 어둠 속에 숨어 싸움을 지켜보고, 이렇게 검을 날려 도와주고.

냉정하게 생각하면 정말 바보짓이었다.

나와 관련도 없고, 한 번 만났을 뿐인 사람인데.

도움을 받았다고 순진하게 다시 도울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무덤의 단서인 문양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 어떤 이유든 잘한 짓은 아니었다.

"죽인 게 아니었네요."

내 말에 망토 속에 있는 시선이 조금 엄해진 것 같았다.

"어린애가 벌써 사람을 죽인다는 소리를...."

역시 용병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귀족들도 그런 소리는 안 하는데 어디 꽃밭에서 평생을 놀다 온 사람인가.

나는 옆에 나뒹굴고 있는 반검을 들어 올렸다.

반검에 남아 있던 검날도 사방으로 금이 가 있었다.

이제 완전히 못 쓰는 물건이 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여자 용병의 독검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나는 망가진 검을 손에 쥐고, 쓰러진 여자 용병 앞으로 걸어갔다.

휘파람 소리가 더 가까워졌고, 이제 고함이 들릴 정도였다.

시간이 없었다.

나는 쓰러져 있는 여자 용병 앞에 서서 검을 내려쳤다.

정확히 여자 용병의 목을 향해.

퍽!

하지만, 검은 여자 용병을 찌르지 못했다.

반검은 다른 검에 막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왜 막죠?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여자인데."

"정말.... 나라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건지...."

망토 용병은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린 뒤,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람들이 오잖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저들에게 잡히면 안 되는 거 아냐?"

망토 용병은 내 팔을 잡고 용병 거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순순히 망토 용병을 따라 달렸다.

이미 늦어 버렸다.

검은 부서지고, 이 오지랖쟁이가 막고 있으니 저들이 도착하기 전에 여자를 죽이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다리를 다친 사람을 뛰게 하다니.

"저 여자, 노아라는 용병 맞지? 붉은 곰 용병단 부단장."

상대를 모르는 게 아니었었다. 망토 용병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했었다.

"성격 안 좋은 거로 유명한 용병이던데, 실제로 보니까 그 정도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아무렴, 그 정도 문제가 아니지. 미친 듯이 위험한 문제라니까. 그런데 왜 말린 건데!

"하지만, 그런 여자라고 해도 붉은 곰 용병단 부단장이 이런 곳에서 죽으면 엄청 귀찮아질 게 뻔하잖아."

"너도 그렇고, 나도 이 영지에 더 이상 붙어 있지 못할 거야. 잘못하면 곰 용병단에게 평생 쫓길지도 몰라."

헐, 오지랖쟁이가 꺼낸 말치고는 무척이나 논리적인 말이었다.

"내 얼굴도 모르고, 꼬맹이는 완전히 착각하고 있으니 죽이지만 않으면 금방 잠잠해질 거야."

내 원래 모습을 알지 못하는 평범한 용병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었다.

나도 조용한 편이 좋았다.

어느 정도 계획이 잡혀 가는 중인데, 이런 소란이 벌어지면 좋을 리가 없었다.

죽이면 죽이는 대로 좋았지만, 죽이지 않는 것도 계획을 위해선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보다 무슨 일로 쫓기는 거야? 단순한 소아성애자라서 쫓는 것은 아닌 것 같던데?"

그런 이유로 쫓기는 것도 꽤나 무섭겠는걸.

"뭔가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에요. 이야기를 훔쳐 들었다면서 쫓아왔어요."

"흠. 이야기를 훔쳐 들었다고.... 너도 단순한 꼬맹이가 아니었나?"

어라? 단순한 설명이었는데 오해를 산 건가?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들었을 뿐이에요."

"용병 여럿의 추적을 피하고, 다리를 다쳤는데도 나도 모르게 접근해 검을 던지고, 그 검에는 마나도 실려 있는 꼬맹이라.... 거기다 그 꼬맹이가 우연히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실력을 들킨 덕분에 핑계가 안 먹혔다.

"뭐, 도와준 건 후회하지 않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도와준 값으로 어떻게 된 건지 들을 수는 있겠지?"

망토 용병이 물었을 때 마침 우리는 용병 거리에 접어들 수 있었다.

이곳은 아직도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아니, 밤이 깊어져서 더 시끄러워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를 아세요?"

"아까 봤었잖아. 내가 소매치기 잡아 준 거 기억 안 나?"

역시, 나를 알아보았다.

나는 망토를 벗었다.

"역시 미소년이네. 벗으니까 얼마나 좋아."

역시, 말을 하면 할수록 말투가 달라지고 있었다.

'변성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네.'

나는 망토 속에 숨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 얼굴도 알고 계셨으니.... 저는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아가씨? 누님?"

내 말에 상대는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난감한 모양이었다.

"들켰어?"

어색하던 목소리가 제 모습을 찾았다.

조금은 중성적인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확실히 여자 목소리.

"그런 어색한 말투는 말만 조금 많이 하면 들킬 수밖에 없어요."

"역시, 그런가.... 조심하려고 했는데, 너무 흥분했었나 봐."

어느 파트에서 흥분할 걸까? 오지랖? 전투?

어쨌거나 그녀처럼 나도 듣고 싶은 게 있었다.

"어디 묵고 계시나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따로 찾아갈게요. 보답도 해야겠고, 무슨 일인지 말씀도 드릴게요."

궁금한 게 많았지만, 당장은 다른 일이 급했다. 우선은 있는 곳을 듣고 다음에 만나야 했다.

다행히 그녀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지내는 곳을 알려 주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다른 여관이었다.

"저녁 시간에 오면 될 거야. 나가게 되면 주인에게 돌아올 시간을 말해 놓을 테니 물어봐."

그녀는 약속을 잡자, 내 손에 약병을 하나 쥐여 주고 가 버렸다.

약병 안에는 꽤나 고급스러운 약이 들어 있었다. 상처 치료 전용인.

나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한 뒤에 건물 구석에 앉아 상처에 약을 발랐다.

피가 멎고, 상처에서 바로 거품이 올라왔다.

좋은 약이었다. 처음 본 아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비싼 약.

의아했지만, 덕분에 다리의 통증은 많이 줄어들었다.

나는 다리를 확인한 뒤에 아드리아가 기다리는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에는 마르틴은 보이지 않았고, 아드리아가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빠가 바쁜 일 있어서 먼저 갔어."

음, 그 바쁜 일이 나 때문일 것 같은데....

"오랜만에 이야기를 많이 했어. 오빠도 많이 달라졌지만, 또 하나도 안 달라졌어."

여관을 나서 돌아오는 길에 아드리아는 마르틴과 대화한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았다.

주위에 낯선 용병들이 뭔가를 찾으며 지나갔지만, 남매로 보이는 우리 두 사람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용병 거리를 벗어나자 사람이 줄어들었고, 신전에 다가가자 거리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아, 맞다. 오빠에게 비밀 통로를 알려 줬어. 나중에 시간이 나면 오빠가 만나러 와 준대."

결국, 그녀는 마르틴에게 비밀 통로를 알려 주었다.

몇 개월이나 빨라졌지만, 결국 저번 삶과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제33화

제8편 정의란 무엇인가 (1)

도시 나들이를 한 다음 날.

후작가의 영주 성은 파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도시 나들이를 끝으로 시몬의 일정이 모두 끝났고, 시몬과 아드리아의 약혼에 관한 이야기도 마무리되어 우리 일행은 내일 영주 성을 떠나게 되었다.

오늘 저녁 파티는 공작가 일행이 떠나기 전에 거행되는 마지막 작별 파티였다.

이 동네는 왜 이리 파티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특히 이번 파티에 준비를 더욱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이번 파티는 아드리아의 남편감을 떠나보내는 파티라기보다 그레시아 공작가와 이에로 후작가의 결혼 동맹을 축하하는 파티 같았다.

영주 성이 파티 준비로 떠들썩했고, 시몬이나 다른 사람들도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나는 한가하게 손님방에 앉아 찾아올 사람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똑. 똑.

"후안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되는 사람이었다.

들어간 돈은 많았지만, 저렇게 열심히 일해 주니 좀 더 신경을 써 줘야 할 것 같았다.

방에 들어온 후안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용병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붉은 곰 용병단과 몇몇 용병단이 밖에 나가 있는 용병단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비밀 통로라는 큰 떡밥이 던져졌는데, 무시할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영주 성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

누가 알기 전에 써먹어야 했다.

거기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훔쳐 들은 사람이 있었으니 잘못되기 전에 일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아마 저번 삶에서도 아드리아가 공작가로 오기 전에 마르틴에게 비밀 통로를 알려 주었을 게 분명했다.

그녀가 떠난 뒤, 용병들과 마르틴은 비밀 통로를 통해 영주 성에 잠입해 불을 질렀고, 다른 용병들은 아드리아를 제거하기 위해 공작가로 달려왔던 것일 터였다.

지금 보면 일 처리가 상당히 과격했지만 결국 성공했으니, 어설픈 계획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이번에도 예상대로 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번 삶에서 보았기에 충분히 예상했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뭘 믿고 저렇게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따로 위에 알리지 않아도 될까요?"

"네. 제가 보고할게요."

"알겠습니다."

후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침에 보냈을 때와 다른 모습이었다.

귀족 꼬맹이의 재롱을 받아 주는 어른에서 상관의 지시를 받는 부하로 모습이 바뀌었다고 할까.

제대로 일을 알아보게 하려고 어느 정도 사정을 알려 주었더니 나를 보는 표정이 달라졌다.

뭐, 무시 받는 것보다야 백번 나으니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사람은 인정을 받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곧 내 위치를 떠올리고는 정신을 차렸다. 실패했던 삶을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후안을 내보낸 뒤, 나도 방을 나섰다.

이제부터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나 대신 일을 해 줄 사람에게 말을 전하면 될 뿐이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손님방의 문을 두드렸다.

똑. 똑.

"저, 알렉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알렉스?"

"네. 들어오십시오."

운이 좋게도 총집사, 기사단장 둘 다 있었다. 두 번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미소를 짓고 있는 총집사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기사단장이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기사단장의 무뚝뚝한 물음에 나는 입을 열었다.

"후작의 서자 마르틴과 그와 함께 있는 용병들에 대해 말할 게 있습니다."

관심을 보이는 두 사람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마르틴이 후작가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아드리아에게 들었던 비사, 그리고 아드리아와 비밀 통로를 빠져나가 용병 거리를 들렀다가 우. 연. 히 들었던 비밀 이야기.

마지막으로 조금 전에 후안에게 들은 용병들의 소집까지.

단지 사소한 관심을 보이던 두 사람은 내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표정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 같은 것은 아니겠죠?"

이야기가 끝나자 기사단장이 물었다. 역시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확인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이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죠."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기사단장이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고민스러울 거다. 어린아이가 한 말이라고 무시하기는 힘들 테니.

"후작님께 말씀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저희가 고민할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고민하는 기사단장에게 총집사가 이야기했다. 확실히 총집사의 말대로였다.

어차피 이곳은 공작가가 아니었다. 내가 기사단장과 총집사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둘은 후작에게 알려 주면 그만이었다.

노인의 관록인가.

"그게 맞겠습니다. 후작님께 말씀드려야겠군요."

기사단장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총집사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시겠지만, 모든 일은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아마 후작님이 따로 부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총집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장이 방을 나선 뒤, 총집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같이 가서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는 방을 나서기 전에 나를 보며 말했다.

"도련님이 가져오신 정보가 맞는다면 저희 그레시아 공작가는 후작에게 작지 않은 빚을 지우는 셈입니다. 알렉스 공자님 덕분이니 공작님이 기뻐하실 겁니다."

노인은 언제나처럼 내게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고개를 저어 총집사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뒷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자, 내 할 몫은 끝났다. 이제 일이 어떻게 굴러 가는지 지켜볼 차례였다.

두 사람이 방을 나서자, 나도 내 방으로 돌아왔다.

겉으로 보기에 성 분위기는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열심히 준비한 파티도 성황리에 거행되었다.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시몬과 아드리아는 파티에 참석해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고, 두 사람을 축하하러 온 하객들도 그레시아 공작가와 다리를 놓기 위해 열심이었다.

시몬은 물론이고, 기사단장과 총집사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다.

물론, 서자인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한가한 시간 동안, 나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주위를 살필 수 있었다.

역시 자세히 살펴보니 전과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총집사는 여느 때와 같은 표정이었지만, 기사단장이나 다른 기사들은 조금 어색한 얼굴들이었고, 후작가의 기사들과 병사들도 긴장한 표정이 조금씩 드러나 있었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과 다른 후작 기사와 병사들의 군기를 칭찬했지만, 대답하는 후작의 표정도 조금 어색했다.

그렇게 파티가 끝나고 모두가 잠자리로 돌아갈 무렵, 후작이 나를 불렀다.

늦은 밤이라도 자신의 집무실로 나를 불렀던 공작과 달리, 후작이 부른 곳은 개인적인 응접실이었다.

나를 안내한 집사는 응접실 밖에서 대기했고, 응접실에 혼자 있던 후작은 피곤이 역력한 늙은 얼굴로 방 안에 들어온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애 아닌가. 이런 애가 그런 정보를 물어 왔다고?"

충분히 예상했던 말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알렉스입니다."

"흥, 그래도 자기 위치를 아는 곁가지군."

그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내 인사를 받았다.

"왜 공작가에서 온 이들이 이 일을 너 같은 어린 서자의 공로로 돌렸는지 모르겠군. 비밀 통로는 아드리아에게 물어봐야 하나...."

공작가에서 계속 나를 보아 온 기사단장이나 총집사도 반신반의했는데, 후작이 어린 나를 인정해 줄 리가 없었다.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응접실 구석으로 걸어갔다.

아드리아에게 비밀 통로의 출입구를 찾는 법을 들어 놓았다.

다행히 이 방 아래에도 비밀 통로가 지나가고 있었고, 비밀 문의 표식도 쉽게 눈에 띄었다.

응접실 구석. 규칙적으로 금이 간 벽돌들을 위에서부터 하나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일반인의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마나를 사용하는 귀족이라면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드드드득.

전부 밀어 넣자, 구석 쪽 바닥이 밑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비밀 통로가 열린 것을 확인한 뒤, 나는 후작을 돌아보았다.

"아드리아 님에게는 알리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마르틴과 가까운 사이였고, 곧 저희 그레시아 공작가로 떠나실 텐데 처가에 회한을 남겨 두면 두 가문의 관계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내가 돌아보았을 때부터 후작의 표정은 바뀌어 있었다.

지루해 보이는 표정을 버리고, 노회한 족제비 같은 눈이 나를 훑고 있었다.

저릿한 감각이 피부 위를 훑고 지나갔다.

역시, 후작 정도 되는 사람이 평범한 사람일 리가 없었다.

"천재라고 듣긴 했지만, 거짓말이 아니었군. 그 나이에 기사급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니...."

역시 백번 이야기하는 것보다 한 번 실력을 보여 주는 편이 더 나았다.

"그것도 맞아. 자네 말대로 오점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으니까."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그는 달라진 태도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고, 나는 몇 가지 사항을 감추고 전부 대답해 주었다.

"천재라고 하기에는 연륜이 다른데.... 이런 형태의 능력도 있는 건가...."

대답을 들은 후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능력이라면 능력이지만, 그가 생각하는 능력이 아니니 나는 태연하게 그의 시선을 받았다.

그 뒤로도 몇 가지 제안을 하고 대화를 나눈 뒤, 후작은 나를 돌려보냈다.

방을 나서기 전에 뒤쪽에서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쉽군. 아쉬워. 일이 꼬이지만 않았어도 마르틴도 후작가에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시름이 담겨 있었다.

다음 날 오후.

그레시아 공작가에서 온 손님들은 사람들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영주 성을 빠져나갔다.

전날 파티의 뒷정리를 끝낸 고용인들 일부는 휴가를 받아 성을 떠났고, 영주 성은 평상시보다 훨씬 더 조용해졌다.

그날 밤, 후작의 손님이 떠난 덕분인지 영주 성과 도시의 경계는 전날보다 여유로웠고, 그 덕분에 용병들은 병사들의 눈을 피해 신전 앞에 모일 수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수십 명의 용병이 신전 벽에 붙어 주위를 살피는 중이었다.

이들 앞에는 붉은 곰 용병단 단장인 벤하민과 부단장인 노아 그리고 마르틴이 보였다.

"전부 모였지?"

"네. 처음 약속했던 이들은 다 왔어요."

벤하민 용병단장의 물음에 부단장인 노아가 대답했다.

"백작에게도 연락되었고?"

"네. 영지 밖에서 대기 중이에요. 성공했다는 신호를 보내면 바로 달려올 거예요."

벤하민은 또박또박 대답하는 노아를 보며 눈썹을 실룩였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네가 빠지면 놓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어."

"죄송해요. 그때 싸움에 다친 내상이 잘 낫지를 않아서...."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었는데, 저렇게 안 좋다고 하니 강요를 하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신호를 하면 바로 도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

"네."

벤하민은 고개를 돌려 마르틴을 쳐다보았다. 이쪽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공자님은 백작님과 같이 계시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아뇨.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마르틴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원래 마르틴은 일에 참여하지 않고, 뒤에서 기다리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일에 참여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노아가 빠지게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같이 가게 되었지만, 혹시나 죽게 된다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지도 몰라 상당히 걱정되었다.

위쪽과 연락이 되었다면 걱정을 덜 수 있었을 텐데....

일이 너무 급하게 진행돼서 연락할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문제는 없을 게 분명했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계획이었고, 위쪽의 지시는 지금까지 틀리지 않았다. 며칠 전 비밀 통로를 알게 된 것까지.

이번 작전도 당연히 성공할 것이었다.

그는 용병들을 데리고 신전의 열린 문으로 향했다.

용병들도 그의 뒤를 따랐고, 노아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뒤로 물러섰다.

그때, 신전으로 들어가던 용병 하나가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 신전에 들어가면 고자가 된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의 말에 다른 용병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모두 들었던 이야기였다.

영지의 주인인 후작의 성에 불을 지르는 것은 무섭지 않았지만, 고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헛소문이다."

"그렇죠?"

벤하민의 대답에 용병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들의 표정은 아직도 불안으로 가득했다.

용병들은 굳은 얼굴을 하고, 신전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제34화

제9편 정의란 무엇인가 (2)

책이 가득 찬 방.

중앙의 커다란 책상 뒤에 한 남자가 앉아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책상 앞에 있는 손님용 소파에는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여성이 앉아 홀로 와인을 마시는 중이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반쯤 열린 창으로 살랑이는 바람까지 들어와 방 안의 광경은 마치 그림처럼 보일 정도였다.

푸드덕.

그렇게 그림 같은 방 안으로 하얀 새가 날아들어 왔다.

새는 소리 없이 방 안을 선회한 뒤에 수북이 쌓여 있는 서류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갑자기 등장한 새에 남자도, 여성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남자는 살짝 눈썹을 찡그리고는 새의 다리에 묶인 종이를 풀었다.

그는 종이를 펼쳐 내용을 살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그는 혀를 차며 종이를 손에 쥐었다.

화르르.

그의 손안에서 종이가 불타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당신의 예언대로 되었군."

"...너무 늦었어요. 실패를 막지도 못하는 예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뭐, 아무리 강대한 능력이라도 모든 미래를 내다볼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이들은 모두 전에 전해 준 제 예언을 믿고 움직였는걸요. 저를 믿고 움직였을 텐데...."

"계획이 매번 성공할 수는 없어. 그동안 우리는 당신 때문에 너무 쉽게 성공해 왔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제 선조는 거의 모든 미래에 대처해서 다른 용사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셨어요. 그러고 저도 예전에는...."

10년 전, 아니 5년 전만 해도 눈앞에서 와인을 들이켜는 여성은 그 옛날 용사들의 앞날을 예지했던 선지자의 재림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예지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10년 전부터 자잘한 곳에서 조금씩 어긋나더니 5년 전부터는 예언이 계속 바뀌고 심지어 틀리기까지 했다.

물론 아직도 그녀의 선조를 제외하고는 그녀가 가장 위대한 예언자였고, 대부분의 예언은 그다지 틀리지 않고 있었다.

남자는 불타 버린 종이에 적힌 글을 떠올렸다.

이에로 후작 영지에 파견되어 있던 요원에게서 온 쪽지였다.

비밀 통로를 알게 되어 계획했던 작전을 진행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소식을 빠르게 전하는 능력을 이용하면서까지 보내온 글이었지만, 그곳까지의 거리 때문에 이미 작전은 진행 중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작전이 실패한다는 것을 글을 보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언가가 바뀐 미래를 너무 늦게 알게 되어 작전이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실패하고 남은 조직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려 했지만.

"남은 자들을 수습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면 더 위험하다니...."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들을 보내게 되면 붉은 기운이 파견된 사람들을 타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다른 때처럼 또렷하게 미래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말은 결국 꼬리를 밟힌다는 거겠지."

그녀의 예언을 듣고, 그는 이에로 후작 영지에 남아 있는 조직을 포기했다.

조직에서 오랫동안 키워 왔고 작지 않은 세력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는 깔끔하게 라인을 잘라 내 버렸다.

"...정말 죄송해요."

"네가 잘못한 건 없어. 아무리 봐도 네 능력의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까."

예언 모두가 안 맞는 것도 아니고, 특정 지역과 특정 이벤트들만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니 뭔가 외부의 요인이 있는 게 분명했다.

"뭐, 그건 따로 알아보도록 하고."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지만, 금방 알아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미 5년 전부터 조직이 계속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보다 작전이 실패하고 추적을 당할 수도 있다니. 후작가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건가? 내가 너무 이에로 후작을 얕보았어."

쓰레기 같은 자식들을 보고 후작가를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하기야 마르틴도 후작의 자식이었지."

마르틴을 떠올리니 마르틴과 함께 버려지게 될 부하들이 생각나 속이 안 좋아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의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그가 빈 잔을 들자, 여자가 잔에 와인을 가득 따라 주었다.

"고통을 잊는 데는 술이 최고예요."

하지만, 술로 고통을 잊을 수는 없다는 것을 술을 따르는 그녀도, 잔을 든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거북한 배 속을 가라앉히는 정도는 가능해 보였다.

그는 와인을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

"이쪽은 우선 보류하도록 하지. 매번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작전을 벌일 곳은 많으니까."

"괜찮으시겠어요?"

안 좋아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더 미안하지. 네가 보는 미래는 온통 핏빛으로 가득 찼을 텐데."

"괜찮아요. 저는 볼 뿐이잖아요. 당신은 그 피의 길을 직접 걸어가고 있는데요."

그녀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에서야 서로 의미 없는 위로일 뿐이었다.

"괜한 이야기를 했군. 어차피 서로 각오한 길이니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네. 제게 이런 힘이 내려진 이상 이것은 내 사명이에요."

"내 사명이기도 하고."

두 사람은 술이 든 잔을 입속으로 털어 넣으며, 버려진 자들의 기억을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 * *

신전의 비밀 문을 통해 비밀 통로로 들어선 뒤, 용병들은 무사히 영주 성 지하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비밀을 지켜야 했기에 많은 인원들이 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십 명이 완전 무장을 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걷고 있는 비밀 통로가 아니었으면 영주 성에 몰래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일행은 조심해서 움직여야 했다.

"앗! 조심해!"

소리 없이 나아가던 일행의 중앙에서 낮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용병 중 일부가 지고 가던 나무통 하나가 넘어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술을 담기 위한 오크 통처럼 보였는데, 나무통을 보는 용병들은 술을 보는 표정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용병들이 급하게 도와주어 오크 통은 멀쩡했지만, 오크 통을 지고 가던 용병은 여러 용병에게 정강이를 차였다.

"무슨 짓이야! 다 죽이려고 작정했어?"

"설마 술이 안 깬 거야? 이건 평범한 기름이 아니란 말이야! 못 들겠으면 다른 사람에게 맡겨!"

오크 통을 들고 가던 용병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른 용병의 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지고 가는 오크 통은 오늘 작전의 주인공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몰래 가는 이유는 후작과 그 일가를 모두 불태워 죽여 마르틴이 정당한 후계자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의혹이 남지 않게 모두 태워야 하는 만큼, 준비가 필요했다.

그 준비가 바로 이들이 들고 가는 오크 통이었다.

이 오크 통에 들어 있는 것은 위쪽에서 준비해 준 물건으로 대전쟁 이후 봉인되었다는 지옥의 불이었다.

다들 진땀을 빼고 있을 때, 앞장을 섰던 벤하민 단장이 나지막이 외쳤다.

"다들 준비해! 후작 일가는 하나도 남김없이 참살하고, 증인이 생기지 않게 목격자는 모두 제거하도록."

이제 목적지인 후작의 서재로 통하는 비밀 문이 바로 앞이었다.

여러 번 해 왔던 이야기였지만, 단장은 용병들에게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계획한 대로 각자 나누어 움직이고, 지옥의 불도 위치에 도착하면 바로 터뜨려."

그는 용병들이 준비된 것을 확인했고, 마르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벤하민의 신호에 마르틴은 아드리아에게 들은 대로 벽을 두드렸다.

기기기긱.

벽 한쪽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이 늦어서인지 계단 위 서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통로가 열리자, 계획했던 대로 날렵한 용병 두 명이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은 계단 위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용병들은 아래에서 그들이 신호를 보내기를 기다렸다.

하나, 둘, 셋....

시간이 계속 흐르자, 벤하민 단장이 눈썹을 씰룩였다.

신호가 너무 늦었다.

거기다 불길한 냄새가 위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쇠와 피의 냄새.

온몸의 마나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벤하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함정인가."

위에서 적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패 앞으로! 나머지는 천천히 뒤로 물러선다."

그의 말에 용병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방패를 든 용병들이 앞으로 움직이려는 순간.

슈슈슉!

어둠 속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억!"

"크악!"

"맞았어!"

비명과 고함이 통로 안에 가득 찼다.

"모두 죽여! 감히 영주님을 시해하려는 놈들이다!"

화살이 쏘아진 곳에서 마나를 담은 고함이 터져 나왔고, 이어 화살과 함께 갑옷을 두른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작전은 실패다! 모두 도망쳐!"

벤하민 단장은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는 말과 동시에 뒤로 몸을 날렸다.

제대로 당했다.

요새 예언이 가끔씩 삐거덕거리는 것 같더니, 재수 없게도 이번 작전에서 예언이 틀린 모양이었다.

'노아가 몸을 빼길 잘했군. 역시 귀신같은 감이야.'

후작의 기사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문이 열린 서재뿐만 아니라, 다른 비밀 문으로도 내려온 모양이었다.

'고의적인 함정일까? 아니면 중간에 들킨 걸까?'

잠깐 의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은 어느 쪽이었든 상관없었다.

'마르틴은?'

다행히 마르틴은 보이지 않았다. 능력 덕분에 먼저 도망친 듯했다.

크악!

사방에서 비명이 계속 이어졌다.

오랜 시간 단련시켜 온 용병들이었지만, 제대로 준비한 기사에게는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용병들은 채 몇 합도 나누지 못하고 쓰러졌고, 같이 도망치던 용병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대로라면 비밀 통로를 빠져나가기 전에 전멸이었다.

"젠장! 미치도록 무겁네. 이거 버려도 돼?"

"미친놈! 여태 그걸 메고 뛰고 있었어?"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던 기사를 밀어낸 뒤, 벤하민은 용병들이 떠드는 곳을 돌아보았다.

용병 한 명이 오크 통을 등에 짊어진 채로 도망치고 있었다.

오크 통을 보자, 벤하민은 옆에서 달리고 있는 용병의 횃불을 뺏어서 오크 통을 들고 있는 용병을 향해 횃불을 던졌다. 마나를 가득 실어.

슈아아악!

마나가 실린, 불타는 나뭇가지는 마치 화살처럼 오크 통을 향해 날아갔다.

벤하민은 횃불을 던지자마자 마나를 모두 다리에 싣고 미친 듯이 신전 쪽으로 달려 나갔다.

"피해!"

"막아! 단장! 모두를 죽일 셈이...."

벤하민이 횃불을 날리는 모습을 본 용병들이 고함을 질렀지만, 그 고함이 끝나기도 전에 횃불이 오크 통을 뚫고 들어갔다.

다음 순간.

콰아아앙!

오크 통이 있던 자리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오크 통을 메고 있던 용병은 폭발하는 순간, 온몸이 산산이 부서졌고 화염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화염이다! 마나를 돌려!"

"피해!"

"살려 줘!"

오크 통 주변에 있던 용병들은 피하지도 못하고 화염에 휘말렸고, 용병들과 싸우던 기사들도 반 이상이 화염에 휩싸였다.

화염은 계속 퍼져 나갔다. 공기가 부족한 비밀 통로가 아니었으면 성을 온통 불태웠을지도 몰랐다.

"불이 안 꺼져!"

"보통 기름이 아냐!"

"신관, 의사를 불러!"

미처 화염을 피하지 못한 용병과 기사들은 모두 죽었다.

용병들은 화염에 먹혀 버렸고, 몇몇 기사들은 다른 기사에게 이끌려 비밀 통로를 빠져나왔지만 그들의 몸에 붙어 있는 불을 끄지 못했다.

결국 추적은 중지되었고, 용병들은 전멸했다. 용병들을 추적하던 기사들도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다른 용병들은 모두 죽었지만, 신전까지 도망친 용병이 있었다.

바로 횃불을 던져 지옥의 불을 터트린 벤하민 단장이었다.

그는 검은 그을음을 가득 묻힌 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신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영주 성을 떠났다는 사람들. 바로 그레시아 공작가의 기사와 병사들이었다.

"네놈이 죄인들의 대장인가?"

시몬이 그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벤하민은 검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는 소년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포위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자신은 어이없게도 귀족가 도련님의 먹잇감이 될 모양이었다.

저 귀족 소년은 전혀 자신의 상대가 안 되었고, 다른 기사들도 충분히 해 볼 만했지만, 소년의 뒤에 서 있는 중년의 기사와 노인에게는 영 자신이 없었다.

시몬의 뒤에는 알론소 기사단장과 총집사가 손을 풀고 있었다.

제35화

제10편 그래도 복수는 했습니다 (1)

어두운 방. 달빛만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드드득.

침대가 있던 바닥이 아래로 내려갔다.

구멍 뚫린 바닥에는 아래쪽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고, 계단 아래쪽 멀리 이글거리며 다가오는 불빛이 보였다.

다가오는 불빛을 가로막으며 한 사람이 바닥 아래에서 튀어나왔다.

그의 몸에는 흙먼지와 그을음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는 방 안에 들어온 뒤에 급하게 바닥을 살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바닥의 돌 몇 군데를 두드렸다.

드드득.

내려갔던 바닥이 다시 위로 올라왔다.

다가오던 불빛이 올라오는 바닥에 가려지고, 열기가 점점 사라져 갔다.

덜컥.

바닥이 다시 메워지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에게 달빛이 비쳤다.

옷도 얼굴도 지저분했지만, 누구인지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후작의 서자인 마르틴이었다.

그는 지친 얼굴로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를 돌렸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어제부터 이곳에 있었으니까요."

나는 구석에서 걸어 나오며,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여긴 아드리아의 방일 텐데?"

"후작가의 중요한 비밀을 흘린 사람을 그 자리에 둘 리가 없잖습니까."

"전부 알고 있었군. 아드리아는 괜찮나?"

"어차피 다 죽이려고 한 것 아닙니까? 뭐, 그녀는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아드리아는 그레시아 공작가와 후작가의 연합에 중요한 연결 고리니까요. 그쪽과는 다르게 앞으로도 몸 건강하게 잘 지낼 겁니다."

"하.... 결국 버려지는 건 서자뿐이라는 건가."

슬쩍 비꼬았지만, 마르틴은 상관하지 않았다.

"네가 여기 있다는 이야기는 결국 아침에 떠난 것 같았던 너희 일행이 모두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것이겠지. 용병들은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한 건가."

그의 말대로였다. 공식적으로 영주 성을 떠난 공작가 일행은 비밀리에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시몬과 기사들은 비밀 통로의 출구인 신전으로 향했고, 나는 일의 결말을 보기 위해 이곳 아드리아의 방으로 온 것이었다.

후작의 방이 있는 쪽은 후작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신전은 공작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으니, 나는 비어 있는 아드리아의 방으로 왔다.

사람이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나는 마르틴이 살아난다면 이 방으로 올 거라고 생각했다.

이 방과 가까운 곳에 그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려던 일은 실패했을 텐데요. 다음 기회를 노리지 왜 혼자 찾아온 겁니까?"

내 물음에 그는 피식 웃었다.

"놀리는 건가. 도망치지도 못할 걸 알면서.... 하긴, 그건 지금 알게 된 거였지."

역시, 마르틴은 달아날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뭐, 내가 하려던 일은 같이 온 자들도 달랐으니까. 저들은 나를 이용해서 후작가를 장악하는 게 목표였겠지만, 나는 복수 그 자체가 목표지."

그는 지친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단아한 귀족 여성의 방.

동생을 떠올렸는지,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내 동생이 짐승 같은 후작의 두 아들에게 당하고 임신했다는 이유로 우리 가족이 쫓겨났을 때도 그냥 참고 있으려고 했다."

예상한 대로였다. 평범한 임신이었으면 가문에 보탬이 되는 마르틴을 내보냈을 리가 없었다.

"경제적으로 다시 어려워진 삶이었지만, 가족끼리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 능력을 얻은 덕분에 용병으로 먹고살 수도 있었고."

그는 말을 하는 도중에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얼마 뒤 아이를 지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은 내 동생을 죽이고, 그 장면을 목격한 어머니는 자살했다. 집에 돌아와 가족의 시체를 보게 된 나에게 복수 이외에 더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그는 피를 토하는 듯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충분히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나는 그의 심정에 동감하지도, 동정을 표하지도 않았다.

그도 바라는 일이 아니었고, 나도 그를 동정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내게 그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 나보고 그냥 물러나라는 건가요?"

내 말에 그는 내가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부러진 뒤에 새로 구한 검이었다. 저번처럼 양산형 검이었지만, 새것이니 어느 정도는 버텨 주겠지.

"다른 기사였으면 후딱 해치우고 가겠지만, 너는 나와 입장이 같으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아드리아도 죽일 결심을 한 사람인데, 같은 처지랍시고 생판 남인 저에게 그런 신경을 쓰실 리가 없을 텐데요."

내 말에 그는 쓰게 웃었다.

"그런가....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쉽게 뚫고 나가기 어려워 보여서야. 대련할 때도 느꼈지만, 지금은 더 가늠이 안 되는군. 도대체 네 나이에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가?"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마나를 가득 품은 검은 어두운 방 안에서도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대련 때와 달리, 나는 지금 가지고 있는 마나를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몸 밖으로 넘실거리는 마나. 내 마나는 몸 밖에서 마르틴의 마나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설마 이번 일을 망친 것도, 난쟁이 첩자도 전부 네가 한 일은 아니겠지."

"글쎄요."

무덤덤하게 대답하니 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정도니 공작이 너에게 일을 맡기는 거겠지. 하지만, 공작이 아무리 잘 대해 준다고 해도 그를 믿지 마라. 그는 귀족이고, 너는 반쪽일 뿐이다. 우리는 귀족도 자식도 아닌 도구일 뿐이니까. 가치가 없어지면 버려지고, 지워 버릴 물건이지."

그는 자신의 상황을 빗대어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나를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공작이 나에게 잘 대해 준 적도 없었고, 몇 번이나 죽음을 당하기까지 했다.

공작을 믿지도 않았고, 그의 인정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단지 나는 나를 죽이려는 자들을 쓰러뜨리고, 계속 살고 싶을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내 표정이 달라지지 않자, 그는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결국 싸울 생각인가? 그런가? 여기서 싸운다면 널 이기더라도 목적은 이루지 못할 테지."

그의 말대로 이기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아차리고 달려올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막을 생각으로 여기서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아뇨.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해 준다면 비켜 드리겠습니다."

"답을 해 주면 비켜 준다고?"

막 움직이려던 마르틴은 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제 목적은 다 이루었으니까요. 후작의 아들들이 죽든, 당신이 죽든 제겐 별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아드리아에게 슬픈 것은 매한가지겠죠."

후작가를 위해 뭔가 더 해 줄 마음은 없었다. 아드리아와 비앙카를 살리는 것으로 저번 삶의 빚은 다 갚았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이번 일은 전부 아드리아를 위해서였나."

뭔가 오해를 산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오해를 푸는 대신 질문을 했다.

"당신들, 아니 당신을 도와준 용병들의 배후 세력이 어디죠?"

"그 나이에 그 실력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벌써 다 이긴 싸움의 뒤를 파 볼 생각인 거냐? 정말, 너는 뭐 하는 녀석이냐?"

그는 별 이상한 물건을 다 보겠다는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런 표정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벌써 여러 번 보았었다.

"뭐, 이런 게 된 이상 비밀로 할 필요도 없겠지. 라팔마 백작이 뒤를 봐주고 있다."

라팔마 백작?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라팔마 백작도 당신처럼 이용당하는 처지입니다."

내 말에 마르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하긴 벤하민도, 노아도 백작에 대해 너무 편하게 말하기는 했지."

그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더 알아볼 생각은 없었어. 복수하게 해 준다면 마왕과도 손을 잡을 생각이었거든. 아마 노아와 벤하민 빼고는 누가 사주한 건지 아는 사람이 없을 거야."

신전 쪽으로 갈 걸 그랬나? 이래서야 시몬이 잘해 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다만, 노아와 벤하민은 이곳에 오기 전에 북쪽, 아마도 제국에서 지낸 것 같아. 둘이 이야기할 때 불쑥 나오는 말이나 말투에서 그쪽 지방 특유의 분위기가 났었지."

"차르 제국인가요?"

대전쟁 이후 멸망한 옛 제국을 잇는다고 외치던 나라들 중 제국이라는 이름을 다른 나라에 인정받은 북쪽의 강대국.

중간에 왕국 하나가 끼어 있어 조금 거리가 있는 나라였지만,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소문이 자주 들려오는 곳이었다.

뜻밖의 정보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가문 내의 일도 벅찬데, 왕국이 아니라 먼 제국이라니. 아무래도 이건 내가 알아볼 일이 아니었다.

내가 시큰둥한 얼굴이 되자,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더는 아는 것도 없고, 그럼 결국 싸워야 하는 건가?"

둘이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서로의 마나는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히는 중이었다.

그의 말과 함께 마나가 더 날카롭게 피어올랐고.

나는 밖으로 풀어내던 마나를 다시 갈무리했다.

"아뇨. 길을 비켜 드리죠."

나는 검을 물리고, 뒤로 물러섰다.

마르틴은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그냥 보내 주면 너한테도 문제가 될 텐데...."

"문제가 될 일은 없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이 온 것을 아는 사람도 없고요."

내 말에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내 말의 뜻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렇지. 나만 말하지 않으면 알 사람이 없겠지."

말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으면 비밀은 지켜질 터였다.

그도 마나를 갈무리한 뒤에 내 옆을 지나갔다. 그가 방을 나서기 전에 나를 돌아보았다.

"내일 떠나기 전에 후작이 선물을 주겠다고 하면, 내가 이곳에 있을 때 쓰던 검을 달라고 해. 내 힘을 견딜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튼튼한 검이니까."

그는 나에게 손을 흔들고는 방을 나섰다.

아마도 여자 용병에게서 내 검이 망가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나름 무사히 보내 준 데 대한 보답일까?

하지만, 후작이 그런 선물을 줄 정신이 있을지 모르겠다.

마르틴이 목적을 이룬다면 선물은커녕 장례식으로 바쁘게 될 텐데.

역시 지금이라도 나가서 막아야 하려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멀리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이 들려왔다.

"침입자다!"

"자객이다! 공자님들을 피신시켜!"

고함들 사이로 마르틴이 외쳤다.

"하하하! 뭘 믿고 도망치지도 않은 거냐! 더러운 내 동생들아!"

"모두 막아!"

"함께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함께하자고!"

"가까이 오지 마!"

탁한 비명과 고함이 계속 이어졌지만, 나는 아드리아의 방에서 나와 손님방으로 향했다.

* * *

한참의 소란이 지난 뒤, 나는 복도를 뛰어다니는 병사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마르틴의 복수는 반 이상 성공한 모양이었다.

후작의 첫째 아들은 그의 검에 목숨을 잃었고, 둘째 아들도 목숨이 위험했지만 신관의 도움으로 팔 하나가 잘려 나가는 것으로 생명을 구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후작의 후계자는 살아남은 둘째 아들이 되는 걸까?

뭐, 누가 되든 상관은 없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마르틴은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후작의 첫째 아들을 죽인 그는 형제들을 지키던 기사들 중 넷을 베어 버린 뒤, 마지막으로 후작의 둘째 아들의 목을 베기 전 다른 기사들의 손에 죽고 말았다.

후작가에서 쫓겨난 반쪽짜리 귀족치고는 대단한 활약이었지만, 그날 이후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후작이 직접 사람들의 입을 봉한 것이다.

얼마 뒤 후작의 첫째 아들은 병으로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고, 둘째 아들은 훈련하다가 다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시몬과 공작가에서 온 사람들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으로 이미 떠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은 이상한 소문이 돌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후작에게서 검을 선물 받았다.

후작은 나의 입을 봉하기 위해 선물을 주겠다고 했고, 나는 마르틴의 검을 요구한 것이다.

내 몸에 맞지 않게 무척이나 큰 검이었다.

쓰지도 못하는 검을 달라고 했다고 시몬은 투덜거렸지만, 나에게는 기념이 되는 물건이었다.

그렇게 다시 일행이 출발하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용병 거리를 방문했다.

떠나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제36화

제11편 그래도 복수는 했습니다 (2)

마르틴이 묵었던 여관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안에 있는 여관.

나는 여관을 이리저리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뜻하게 칠해진 간판과 깨끗한 건물 벽. 여관 안에서는 부드러운 빵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관이 맞긴 한데....'

전생의 호텔과도 다른,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의 여관이었다.

여태껏 보았던 여관은 용병들이 날아다니고 음식물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여관들이라 이런 여관은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여관에 들어선 뒤에도 낯선 느낌은 계속되었다.

1층 식당도 깨끗했고, 음식을 나르는 종업원의 옷도 깔끔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여관에 투숙객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데 왜 사람이 적지?'

의아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지나가는 여종업원에게 물었다.

"여기 투숙하고 있는 손님 중에 '불새 사냥꾼'이라는 분이 있나요?"

불새 사냥꾼이라니. 별명이 왜 이리 유치한지.

말을 하면서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내 말에 종업원은 나를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그냥 꼬맹이가 아니셨네. 지금 계세요. 불러 드릴까요?"

다행히 여관에 있었다.

"네."

"아버지! 손님 왔어요! 불새 님 좀 불러 줘요!"

종업원은 안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고는 나를 빈자리로 안내했다.

내 생각보다 그 별명은 이상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를 안내한 종업원, 아니 여관집 딸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보여 주었다.

"그럼 불새 님 손님이면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 주문 받을게요."

앞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나는 그 뜻을 고민하기도 전에 메뉴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이렇게 비싸!'

메뉴판에 적혀 있는 가격들은 부족함이 없이 지내던 나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손님이 없을 만했다. 숙박료까지 이렇게 비싸다면 귀족이 아닌 평범한 용병은 냉큼 도망갈 게 분명했다.

'이건 5성급 호텔이 시장 통 한가운데 있는 꼴인데.'

하지만, 내가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불새 사냥꾼 님이 드시던 음식 있으면 그걸로 두 명분 부탁할게요."

"좋은 선택이세요. 불새 님도 부담스럽지 않으실 거예요."

아, 설마 이 음식값들을 내가 내지 않고 그녀가 낼 거로 생각한 건가.

쩝,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머리에 쓴 두건은 벗었지만, 몸은 망토를 두르고 있으니 망토 아래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있어도 알 리가 없었다.

후작에게 새로 받은 검도 다른 사람이 알까 봐 천에 칭칭 감아 질질 끌고 왔으니, 짐을 나르는 일꾼 꼬마 정도로 보일 터였다.

그제야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종업원이 이해되었다.

'쫓아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한 여성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붉은색 단발머리를 한, 조금은 중성적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꽤나 잘생긴.

그녀는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망토 용병이 저렇게 생겼었나.'

허스키한 목소리와 잘 어울릴 것 같았지만, 처음 생각한 단단한 이미지와는 달랐다.

터프한 용병이 아니라 늘씬한 기사, 아니면 잘생긴 서기관 같은 느낌이었다.

하긴 여자니까 당연한지도 몰랐다.

"조금 늦었네. 그래도 때맞춰서 잘 왔어. 영지가 시끄러워서 다른 곳으로 뜰까 생각 중이었거든."

그녀는 내 앞에 앉아 종업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불새... 사냥꾼 님이 드시는 음식으로 2인분 시켰습니다."

"잘했어. 하하, 별명이 좀 그렇지? 하지만 내 별명보다 이상한 별명도 많아."

"불새 님이 어때서요. 우리 아빠는 젊었을 때 대검 왕발이라고 불렸다는데요."

어느새 식사가 나왔는지 음식을 내려놓으며 여종업원이 말했다.

음, 대검 왕발이라. 무척이나 직관적인 별명이었다. 이름만 듣고도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그럼 불새 사냥꾼도...."

나는 앞에 앉은 여성의 붉은 머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잘 지었죠? 저 붉은 머리카락을 보면 다른 별명이 안 떠오른다니까요."

음식을 내려놓은 종업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별명을 지은 사람이 눈앞의 종업원인 듯했다.

'이 영지에 온 뒤에 여관 종업원이 정한 별명을 쓰고 있다고?'

그렇다는 것은 원래 별명을 쓰지 않았거나, 원래의 별명을 숨겼다는 말이었다.

'이 여자도 뭔가 비밀이 있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매번 만나는 사람마다 어째 평범한 사람이 없었다.

차려진 음식은 상당히 먹음직했다. 따뜻한 스튜도, 빵과 고기도 영주 성이나 저택에서 먹었던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음식을 앞에 두고, 불새... 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내 소개를 안 했군.

난 별명도 없었고, 별명을 말할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내 이름을 말했다.

"알렉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족님이셨어?"

"반쪽 귀족이죠. 서자입니다."

"아하, 그래서 그랬군. 이제 이해가 되네."

귀족이란 것에도 그리 놀라지 않고, 서자라는 말을 들어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용병이라면 깜짝 놀라거나 존댓말이라도 썼을 텐데.

전에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남을 속이는 것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

귀족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서자라는 것을 알아도 색안경을 끼지 않는 사람.

'깨어 있는 귀족일까? 아니면 귀족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거나 실력이 있는 사람일까?'

노아라는 여자 용병을 쉽게 다루는 것만 봐도 실력은 나무랄 데 없었다.

내 이름을 들은 뒤, 그녀는 빵을 집어 들어 스튜에 담갔다.

그러고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잠깐만. 이번에 방문한 귀족 나리들이 그레시아 공작가 아니었어?"

역시 전생과 달리 소문이 느렸다. 아니면 그녀가 늦게 알아차렸거나.

"맞습니다. 그들과 같이 왔죠."

내가 인정을 하자, 그녀는 스튜에 담근 빵을 드는 대신에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아니, 일이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멀리서 지켜보던 일이 발등 앞에 떨어진 거지.

"지금 용병들이 후작가에 덤벼들다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고, 밖에는 병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거리를 휘젓고 다니고 있고."

그녀는 나를 가리켰다.

"그날 밤에 용병에게서 도망치던 꼬맹이가 후작가 손님이었고. 소문이 사실이라면, 난 꼬맹이를 구하려고 후작가를 쳐들어갔다는 그 용병들과 드잡이를 한 거야?"

그녀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설마 그때 같이 있던 소녀도 귀족이었어?"

"후작 따님이셨죠. 이번에 약혼하기로 한."

그녀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를 보는 사이, 빵은 스튜에 잠겨 들었다.

저건 다 먹었군. 아까운 마음에 나도 빵을 집어 들었다.

그녀처럼 빵을 스튜에 담갔다가 먹어 보았다.

오, 무척 맛있었다.

내가 빵을 먹는 모습을 보고는 그녀도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자신의 빵이 스튜에 잠겨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망했네. 여유 부릴 때가 아니잖아. 돌아가는 꼴을 보니 나도 이번 일에 보통 휘말린 게 아니었잖아."

제대로 휘말렸지. 누군가 아는 사람이 나온다면 살아남은 용병들과 병사들이 그녀를 찾아올 게 분명했다.

부탁한 것도 아니었고, 그녀의 오지랖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도움 받은 보답으로 이 식사비는 제가 낼게요."

"아, 그러지 않아도 돼. 별로 비싼.... 아니, 고마워."

에고, 끝에 가서야 자기가 용병이라는 게 떠올랐나 보다.

여하튼, 이 정도 식사도 비싼 게 아니라는 거네. 한 가지 정보를 더 얻었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아냐. 안 듣는 게 좋겠어. 귀족님들 일일 테니, 여기서 더 들어 봤자 귀찮은 일만 늘 테지."

그녀의 말대로였다. 귀찮은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보다 어디로 가야 하나."

"가실 곳이 없습니까?"

"이렇게 급하게 움직일지는 몰랐으니까."

어라, 일이 쉽게 될 것 같은데?

"그럼, 그레시아 공작의 영지로 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엥? 공작가로 초대하는 거야?"

"아뇨. 서자 따위가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죠. 단지 다음 있을 영지로 추천하는 겁니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쉽게 되는 일은 없었다.

"너무 멀어. 거기다 특별히 갈 곳을 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막 다니는 것도 아니라서. 다니면서 찾아야 할 것이 있거든."

말을 하면서 그녀는 식탁에 세워 둔 검을 쓰다듬었다.

찾아야 할 것과 검이라.... 흠, 한번 찔러 보자.

"혹시 찾아야 할 것이 그 검에 관련된 겁니까?"

내 말에 그녀는 움찔 놀랐다. 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딱 봐도 정답이었다.

"그럼 제가 도움이 될 듯합니다.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영지에서 그 검에 새겨진 문양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날아오르는 새였죠?"

내 말에 그녀는 흥분한 얼굴로 검을 반쯤 뽑아 올렸다.

검날에 새겨진 날아오르는 새의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문양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요."

그녀는 내 말에 무척이나 흥분했다.

"빨리 정리해서 따라갈게. 도착해서 어떻게 연락하면 되지? 대충 어디인지 미리 알 수 없을까? 물건이었어? 아니면 벽 같은데? 책은 아니지?"

너무 효과가 좋아 무서울 정도였다.

그래도 그녀는 금방 이성을 찾았다.

그녀는 바로 종업원을 불렀다.

"나 방 뺄게! 내일 나갈 거야!"

"네? 금액이 커서 내일 방값 환불은 어려워요."

아니, 환불도 되는 여관이었어? 거기다 며칠이나 계약했는데 환불이 어려울 정도야?

"안 받아도 돼."

"네? 정말요?"

그녀의 대답에 종업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도대체 얼마나 큰돈이길래.

하지만, 종업원의 얼굴은 금방 어두워졌다.

"자네에게 받을 수는 없지. 달아 놓을게. 나중에 올 때 받든가 그 기간만큼 무료로 지내게."

"아빠!"

안쪽에서 나온 남자의 말에 종업원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건장한 몸을 가진 중년 남자였다. 과거에 잘나가던 용병이 나이가 들어 여관을 하는 소설에 딱 어울리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손과 몸의 근육은 용병이 아니라 기사의 그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불새 사냥꾼과 그는 전부터 잘 아는 사이 같았다.

나는 여관 주인과 이야기하는 불새 사냥꾼을 쳐다보았다.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20대를 넘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나이가 많으려나?

그녀가 식사를 거르고 짐을 싸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나는 차분히 식사를 마쳤다.

충분히 돈값을 하는 식사였다.

나는 불새 사냥꾼과 약속을 정한 뒤에 여관을 나섰다.

여관 입구 위쪽에 팻말이 흔들리고 있었다.

<용병 쉼터>

여관 이름은 무척이나 평범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평범한 여관은 아니었다.

아냐. 아냐. 신경 쓰면 지는 거야. 여긴 그냥 비싸고 좋은 여관일 뿐이야.

또 올 일이 없는 곳이었다. 괜히 신경을 써서 일을 늘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여관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끝마치지 못한 일과 마주치게 되었다.

"정말 애일 줄을 몰랐다니까."

노아라는 여자 용병이 또다시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제37화

제12편 귀환

"역시, 망토를 뒤집어쓴 년을 감시한 게 정답이었어."

불새 사냥꾼의 말대로 그녀를 금방 찾아낸 모양이었다.

나는 사이코 여자 용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망치지 않았네?"

반쯤 미쳐 보이긴 했어도 살 곳을 찾는 능력은 엄청나게 뛰어나 보였는데, 영지에 아직도 남아 있었다니.

"일을 망가뜨린 것은 역시 꼬맹이 너였어."

그녀는 나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골목은 어느 사이엔가 텅 비어 있었다.

싸우는 것을 알고 도망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용병들이 사람들을 물린 것일까?

엉뚱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꽤 그럴듯했다.

"일을 망친 것은 내가 아니라 네 입이지."

이번 일도 그렇고, 저번 삶에서도 네가 알려 주어서 이 정도 할 수 있었는걸.

으득.

그녀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놈 때문에 일이 실패하고, 벤하민도 죽었어. 네놈을 잡으려고 돌아다니지만 않았어도 같이 갈 수 있었는데.... 다 네놈 때문이야."

아쉽게도 시몬은 벤하민 용병 단장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기사단장이 나서 준 덕분에 싸움은 어렵지 않게 이겼지만, 벤하민은 고문하기도 전에 자살해 버렸다.

그 자리에 이 여자가 없어서 의아해했는데, 그 이유가 나를 잡기 위해서였나?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의 경중이 완전히 제 마음대로였다.

용병단 단장이 죽었으니 이제 정보를 얻을 곳은 이 여자밖에 없었다.

나는 여자를 살펴보았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 수시로 튀어나와 입술을 핥는 붉은 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딱 봐도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여자는 아니었다.

"네놈을 죽여서 영혼은 벤하민에게 주고, 껍질은 잘 벗겨서 내 침대에 걸어 놓을게."

벌건 대낮에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여자와 대치하다니.

전생이었으면 바로 경찰을 불렀을 터였지만, 지금은 내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검을 치켜들고, 검날을 혀로 핥는 시늉을 했다.

녹색으로 빛나는 검날. 그냥 핥았으면 좋았을 텐데.

"다행히도 내 취향이야. 정말 맛있어 보여."

도대체 어떤 취향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여태 찾고 있었으니 어리다고 놓아줄 것 같지도 않았고, 도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드르륵.

검 손잡이를 다시 잡자, 천에 싸여 있던 검이 땅을 끌며 거친 소리를 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 검은 방에 두고 양산형 검을 들고 오는 거였나.'

좋은 검이라고 이렇게 가지고 다닌 것이 일을 귀찮게 만들었다.

후우욱.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자, 망토 속에 숨기고 있는 검을 뽑아 봐. 나를 즐겁게 해 주렴."

하지만, 망토 속에 검은 없었다.

나는 들이켠 숨과 함께 마나를 몸 전체에 퍼트렸다.

세포 하나하나에 힘이 느껴졌다.

나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바닥을 끌던 검이 땅에서 떠올랐다.

마나가 다시 팔로 몰려들었다. 이어서 손을 타고 밖으로 흘러나갔다.

파파파팡!

몸 뒤에서 천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감싸던 천이었다.

찢어진 흰 천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뭐야! 그거 검이었어?"

흩날리는 천 사이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빠르게 다가왔고, 나는 검을 힘껏 치켜들었다.

쾅!

검을 든 손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마나로 몸을 땅에 묶어 두지 않았다면 뒤로 밀려났을 정도의 큰 충격이었다.

"큭!"

하지만, 난 전혀 물러서지 않았고 충격으로 천들이 날아가 버려 훤해진 시야에 뒤로 튕겨 나가는 여자 용병이 보였다.

콰당!

벽에 부딪혀서야 겨우 멈춘 그녀는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말도 안 돼! 그 체구로 나를 튕겨 낸다고?"

아, 그런가. 몰래 이야기 듣다가 남자 용병에게 날려지고, 뒤에 만났을 때는 검이 부서지고, 다쳐서 도망쳤고.

그러고 보니 이번 삶에서는 그녀와 제대로 붙어 본 적이 없었군.

그래서 겁도 없이 날 잡으려고 설친 건가?

부웅, 부웅.

나는 검을 양손으로 잡고, 허공에 이리저리 휘두르며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역시 검이 아니라 거대한 노를 휘두르는 것 같았다. 내 체격으로는 이 큰 검을 제대로 휘두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검을 가지고 꼭 검술을 써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다리로 땅을 박찼다.

쾅!

마나가 가득 찬 발이 땅을 뒤로 밀어내고, 난 앞으로 쏘아졌다.

놀란 여자의 모습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녀는 나를 향해 힘껏 검을 휘둘렀지만, 난 커다란 검을 내 앞에 세웠을 뿐이었다.

캉!

검이 부딪쳤다.

상대는 날렵한 검을 쓰는 기사급 용병. 내 몸에 맞는 검을 쓰던 저번 삶에서는 승부를 가리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큰 검에 빛이 어리고, 여자 용병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검은 내 새로운 검을 버티지 못했다.

은은한 녹색을 뿌리던 그녀의 검은 검날이 뭉개지며 옆으로 튕겨 나갔다.

검과 함께 그녀의 팔이 크게 벌어지고,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검을 세운 채로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었다.

쿵.

커다란 검이 벽 속으로 깊게 박혔다.

"컥!"

여자 용병이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녀는 벽과 함께 자신의 배를 뚫어 버린 검을 잡고 나를 노려보았다.

"역시 애새끼가 아니었잖아. 애처럼 속이는 능력도 있었나? 넌 어디에서 온 거지?"

그녀는 떨리는 손을 나에게 향했다. 힘없는 손이 내 얼굴로 다가왔다.

나는 미련 없이 검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 알았지?"

"검을 쓰는 용병이 손톱을 길렀는데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지."

내 말에 그녀는 씁쓸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점점 내려가는 손톱 아래로 언뜻언뜻 초록빛이 엿보였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나를 죽이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정말 맛있어 보이는데 아쉬워...."

마지막까지 소름 돋는 말을 남긴 뒤,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잠깐 고개를 떨군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끝난 건가.'

드디어 저번 삶의 은원이 마무리되었다.

멀리서 사람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검을 뽑은 뒤, 빠르게 자리를 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가로웠다.

용병단장과의 실전을 경험한 시몬도 뭔가 깨달은 게 있는지 조용했고.

기사나 병사들도 처음보다 여유로웠다.

영지들을 넘으며 간간이 마물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병사들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한 약한 돌연변이들이었다.

그렇게 꽤나 정신없었던 여행을 끝내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몇 개월이 지났지만, 영지와 저택은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공작의 짧은 환영 인사 뒤 기다리던 사람들은 다들 시몬에게 몰려갔고, 기사와 병사들은 기다리던 동료들과 술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전과 달리 나에게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병사 후안은 돈주머니를 움켜쥐고 나에게 감사를 표했고, 우고 기사도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미겔과 술을 마시러 갔다.

총집사도 눈인사를 하고 공작을 따라갔지만, 기사단장은 본 척도 안 하고 돌아가 버렸다.

출발 때와 달라져서인지, 나를 훔쳐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묘하게 달라졌다.

하지만, 그런 시선보다 내 앞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있는 어머니가 더 중요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별일 없었지?"

별일이야 무척이나 많았지만, 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 * *

시몬 일행이 돌아온 다음 날, 공작의 집무실에 세 사람이 모였다.

공작과 기사단장, 총집사. 오랜만에 모인 세 사람이었다.

"...이렇게 해서 반란은 마무리되었고, 남은 잔당은 후작가에서 처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희는 영주 성을 빠져나왔습니다."

기사단장의 설명이 끝나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날아온 전서를 보니, 남은 잔당 정리도 끝났다는군. 아쉽게도 누구의 사주였는지는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야."

"후작가도 피해가 커 보였습니다."

"기사가 꽤 많이 죽은 모양이더군. 용병들 정리 건으로 영지도 소란스러워졌고.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후작의 후계자가 죽은 거겠지. 병사로 처리했지만, 냄새를 맡은 귀족들도 나올 테고, 이래저래 후작가의 입지가 상당히 흔들릴 거야."

공작의 말에 기사단장과 총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 사이에서의 악소문은 다른 무엇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들에게 큰 피해를 안겨 준다. 이에로 후작은 상당 기간 근거 없는(?) 소문에 시달릴 게 분명했다.

"그래도 약혼은 미루지 않을 생각이야. 이럴 때일수록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지."

공작의 말에 기사단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용병들과 서자만으로는 후작가를 집어삼키기 어려웠을 텐데, 사주한 사람은 누구일지...."

"글쎄, 우리와 후작가의 연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많으니까. 귀족파 쪽은 당연하고, 제1 왕자파나 제2 왕자파에도 없는 게 아니니...."

공작은 엉망으로 엉켜 버린 왕국의 정치 정세가 떠올라 눈썹을 찡그렸다.

"그래도 실제로 나설 만한 곳은 많지 않을 텐데요."

"계속 알아보고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꼬리를 잘라 놓은 것을 보니, 쉽게 찾기는 어렵겠군."

공작의 말에 기사단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요?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조금은 어설펐던 반란이었습니다. 거사 일도 즉흥적이었고, 들키는 과정도 그렇고...."

역사적으로 많은 반란이 즉흥적으로 벌어지긴 했지만, 그런 반란이 성공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이번 반란도 그런 흔한 반란일지도 몰랐다.

기사단장의 말에 총집사가 반론을 꺼냈다.

"어린아이에게 들켜서 그렇게 느껴진 게 아닐까요? 알렉스 님이 아니었으면 반란이 성공했을지도 모를 텐데요."

총집사의 말에 공작이 눈을 빛냈다.

"설마, 그 정도인가? 우연히 이야기를 엿들은 것일 뿐일 텐데?"

공작의 말에 기사단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본인 입으로 우연히 엿들었다고 했지만....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에는 좀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습니다."

난감해하는 기사단장의 말을 총집사가 이어 이야기했다.

"여행 중에 후작가 서자와 친해진 것도 그렇고, 시내 답사를 강하게 주장하고 답사 중에 서자와 다시 만나기도 했습니다. 아드리아 님이 비밀 통로를 알려 주어 같이 나가게 된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거기다 그 아이는 비밀 통로를 서자에게 알려 주었지."

공작은 전서에 적혀 있던 아드리아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기 방에 거의 반쯤 감금되었다고 했나.'

언제 어디서나, 잘 때도 호위라는 명목으로 감시자를 붙여 둔다고 했으니 그 아이의 삶도 편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런 일을 벌였는데 당연한 벌이자 감시였다.

솔직히 공작으로서도 그리 마음에 드는 며느릿감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몬도 좋아하고 정략적으로 후작가를 버릴 수도 없으니, 차라리 빨리 데려오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렇게 결정하니, 다시 원래의 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운이 말도 안 되게 좋든가 아니면 전부 계획하에 벌인 일인지도 모른다는 건가."

"천재라고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나이를 생각한다면 우연 쪽이 더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머리는 좋으시지만, 이중간첩 같은 일을 하기에는 아직 어리십니다. 수많은 우연이 겹쳐진 거겠죠."

기사단장도, 총집사도, 자신들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했으면서 공작이 의심하자, 바로 반대의 말을 꺼냈다.

그들의 말에 공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녀석이 마음에 든 모양이군."

공작의 말에 기사단장은 뭐라 대답하려고 했지만, 공작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우연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우연이 아니라면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공작가에는 후계자인 시몬이, 동생인 마누엘도 있었다.

나무랄 데 없는 두 아들이 있는데, 더 뛰어난 서자라니.

조금 전까지 후작가에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했던 기사단장과 총집사는 공작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제38화

제13편 비상하는 불새 (1)

후작가에서 돌아온 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길이 달라져 갔다.

후작가에서 일어난 일들이 사람들 사이에 알려진 것이다.

그때 있었던 내 활약이 이리저리 과장과 왜곡을 거쳐 사람들에게로 퍼져 나갔다.

어떤 사람은 나를 희대의 운빨 캐릭터로 알았고, 다른 사람은 머릿속에 수십 마리의 능구렁이를 품고 있는 음침한 책사로 믿게 되었다.

물론, 대다수는 고의로 축소된 소문을 들었다. 운이 좋아 나이에 맞지 않는 활약을 한 서자 정도로.

어쨌거나 저택 안에서의 위상은 후작가에 가기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나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기사들이나 관료들처럼 공작부인도 나를 지켜보기 시작한 것이다.

나름의 소식통이 있을 테니 후작가의 일을 들었을 테고, 나에 대해 경계를 하는 것이 당연했다.

'당연하면 안 되잖아! 괜히 잘못 보였다가 둘째 공작부인 때처럼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 여자 때문에 몇 번이나 죽었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계속 내가 모르는 일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고, 아직 미래에 어떻게 살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만큼 죽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렇게 바뀐 시선에 조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이, 후안이 찾아왔다.

"후안 씨가 왔어요. 들어오라고 할까요?"

후안이 찾아오자, 플로라는 후안을 문밖에서 기다리게 한 뒤에 안으로 들어와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냥 안으로 들어오게 해도 될 텐데....'

플로라는 후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와 대다수 고용인처럼 내가 운이 좋아 후작가에서 공로를 세웠다고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한참 혼냈고, 플로라도 오랜 시간 삐져 있었다.

다 나를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한참 동안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지금은 다 풀렸지만, 그런 이유로 그녀는 아직도 후안을 싫어했다.

더구나 내가 준 돈으로 어머니가 건강해져서 후안은 내 부하를 자처하고 있었으니, 그가 찾아올 때마다 플로라의 심통은 더욱 심해졌다.

내가 들어오라고 말하고 나서야 후안은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마침 비번이었는지 안으로 들어오는 후안은 평복을 입고 있었다.

플로라는 후안 옆을 지나갈 때, 내가 듣지 못하도록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후작가에서 경험한 실전 이후로 훨씬 민감해진 귀 덕분에 그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었다.

"플로라를 대신해서 사과할게."

"괜찮습니다. 다 도련님이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요."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무슨 일이야?"

후안은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이유 없이 찾아올 사람은 아니었다.

"불새 사냥꾼이라는 용병이 도착했답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다리던 사람이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후안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

후작가를 다녀온 뒤에 내 위치가 달라졌다는 게 다시 실감이 되었다.

그동안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게 쉽지 않았었다.

서자였지만 그래도 공작의 자식이었고, 나이도 어렸기에 밖으로 나가려면 사람들의 보호가 필요했었다.

하지만, 서자라는 위치는 내 사람이나 어머니의 하녀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일을 요청하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후작가에 다녀온 뒤에는 따로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후안과 함께였지만, 이렇게 밖에 나가는 것을 막는 병사도 없었고, 걱정하는 사람도 없었다.

넓은 앞마당을 지나 정문을 나서자, 고급 주택가가 이어진 시가지가 보였다.

도시의 북쪽에 자리한 공작의 저택. 그리고 그 아래에 이어진 고급 주택가.

도시에서 지내는 공작 휘하의 귀족들과 고급 관료, 기사들과 유력 상인들이 사는 곳으로 도시의 제일 상류층이 지내는 곳이었다.

도로는 깨끗하고, 공작 저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건물들도 크고 화려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자, 중앙 광장이 나왔다.

이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신전과 일반 주거지가 있었고, 서쪽으로 시장과 공방, 상업 길드들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용병들의 거리와 하층민들이 사는 주거지가 있었다.

나는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쪽은 나도 처음 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후작의 영지에서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에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생각과는 많이 다른데...."

"하하, 같은 용병들이지만 영지마다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죠."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거리를 바라보자, 후안이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우리 영지의 용병 거리도 소란스럽고 지저분한 것은 후작가의 그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후작가와 달리 이 거리는 조금은 경직된 느낌이 들었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라서 그런지,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싸우는 사람도 없었다.

혼자서, 혹은 일행이 자기 길을 가기에 바쁠 따름이었다.

"후작가보다 조금 삭막하죠? 저희 영지가 다른 영지보다 용병들 관리가 좀 빡빡해서 그렇습니다. 저희 공작님이 영지 내 안전을 중요시해서 용병들의 범죄나 일탈을 그냥 두고 보시지 않으시기 때문이죠."

분위기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 뜬금없는 공작의 칭찬을 듣게 되었다.

역시, 공작은 일 하나는 잘하는 사람이었다.

저택 안에서나 밖으로 나가도 곳곳에서 들려오는 공작에 대한 칭찬.

내가 공작의 서자가 아니라 평범한 영지민이었으면 남들처럼 공작을 칭송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입장이 같을 수 없었다.

후작의 영지와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활기차 보이는 용병들의 거리를 지나 한 여관 앞에 도착했다.

<붉은 장미 용병 여관>

용병들이 지내는 여관으로는 전혀 안 어울리는 이름이었지만, 깔끔한 여관 분위기를 보니 나름 어울리는 면이 없지 않은 여관이었다.

"이 거리에서 제일 비싼 여관입니다. 아마 북쪽 거리의 여관을 제외하면 제일 비쌀 겁니다."

이번에도 불새 사냥꾼이라고 불러 달라던 용병은 용병 거리에서 제일 좋은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따로 용병단에 가입한 것도 아니었고, 혼자 다니는 용병이 분명한 것 같은데, 저번에도 그렇고 이렇게 매번 좋은 여관에서 지낼 수 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부잣집 딸이거나 아니면 용병 일을 하다가 벼락부자가 되었을지도.

혹시 그녀가 부자가 된 것은 문양이 새겨진 검과 관련된 일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1층 식당은 한가해 보였다.

대부분은 비어 있는 테이블 가운데 그녀가 앉아 있었다.

"여기야! 여기. 일찍 왔네."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와 후안은 그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녀는 내 뒤에 따라오는 후안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옆에 있는 분은 누구?"

그가 평상시처럼 군복을 입고 있었다면 질문이 없었겠지만, 평복을 입은 후안은 덩치가 있는 보통의 평민처럼 보였다.

"후안이라고 해요. 오늘 저를 호위해 주시는 병사이십니다."

"호위?"

내 말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후안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자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오늘도 호위한 게 아니라 이곳까지 안내한 것뿐입니다."

그의 말에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형식상 호위. 같은 거지?"

조금 다르지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 앞에 있는 의자에 올라앉았다.

쩝, 언제 키가 클는지. 아직도 의자에 앉으면 발이 바닥에 잘 안 닿았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셨네요. 못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보다 며칠 늦게 도착할 줄 알았는데, 몇 개월이나 늦어졌다.

"정리하는 건 금방 끝났는데, 일이 좀 꼬여서 그걸 해결하느라고 늦었어."

일이 꼬였다라.... 뭔가 듣는데 찝찝한 기분이 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해결했다고 했으니 우선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그럼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녀는 인사도 채 마무리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딱 봐도 마음이 무척이나 급해 보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가하다곤 하지만,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이야기해도 되나요?"

내 말에 그녀도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건 곤란하지.... 그리고 많은 사람이 들으면 좀 그런데...."

그녀는 내 뒤에 서 있는 후안을 보며 말했다.

아직 그는 자리에 앉지 않고 있었다. 역시 마음에 들었다. 그는 확실히 자신의 위치를 정한 듯했다.

내가 대답하기 전에 후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시죠. 저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역시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 특히 기사들도 이렇게 눈치가 빨랐으면 좋으련만.

후안을 1층에 남겨 두고, 나와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2층 안쪽에 있는 그녀의 방은 상당히 크고 안락해 보였다.

이 여관의 스위트룸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빨리 말해 봐! 어떻게 안 거지?"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 나에게 달라붙었다.

다르게 보면 방에 여자와 남자 둘만 있는 데다 여자가 남자에게 달라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가 보든지 이상한 생각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오히려 나는 나보다 훨씬 큰 여성이 갑자기 달려들자,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저, 저기, 앉아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연기할 필요도 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내 말에 그녀는 뻘쭘한 얼굴이 되어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한숨을 돌린 뒤, 우리는 방 가운데 놓인 탁자에 마주 앉았다.

그녀는 조금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지만, 재차 재촉하지는 않았다.

음. 어쩐다.

그 모습을 보고 난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녀를 데리고 무덤으로 가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그녀를 속이든가 강압적으로 검을 뺏은 뒤 나 혼자 확인하는 것이 더 좋을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후자는 답이 될 수가 없었다.

강압적으로 혹은 죽여서 검을 뺏는 것은 혼자서는 아예 불가능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은 오히려 아는 사람을 늘리는 꼴이 되었다.

더구나 검만 달랑 들고 가서 일이 내 예상대로 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몰래 정보를 빼내는 것도 어려웠고, 결국 무덤을 확인하려면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이 제일 좋았다.

하지만, 무덤에 데리고 가는 것도 마냥 좋기만 한 게 아니었다.

과연 그녀를 믿을 수 있느냐였다.

여태껏 믿을 수 있는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무덤 안에서도, 보물이 발견되어도 같은 모습을 보여 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거기다 보물이 발견되어도 문제였다. 발견된 보물을 어떻게 나눌지, 나눌 수 없는 물건이면 어떻게 할지 미리 생각해야 했다.

그런 의미로, 나는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이게 뭐야?"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나는 내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 검에 새겨진 문양. 날아오르는 새 문양을 한 무덤에서 보았습니다."

"정말? 무덤 맞아?"

내 말에 그녀는 앞의 질문은 까먹고, 바로 반문했다.

"네. 비어 있는 관이 있는 무덤이었습니다."

"맞아! 내가 찾고 있던 곳이야! 거기가 어디야?"

그녀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전에 보았던 그녀의 모습과 딴판인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더욱 중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위치를 알려 드리기 전에."

나는 빈 종이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저택에서 가져온 먹과 깃털 펜을 꺼내 종이 옆에 놓았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가 꺼내 놓은 물건들을 쳐다보았다.

"계약서를 쓰시죠."

나는 펜을 들어 종이에 제목을 적었다.

<무덤 탐사에 관한 계약서>

그 뒤에 종이를 돌려 그녀 앞에 놓았다.

"서로의 안전에 대한 서약과 무덤에서 나온 물건에 대한 분배, 정보의 공유까지.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세세하게 토론해서 적죠. 아직 밤까지는 시간이 많고, 모자라면 내일이나 모레도 있으니까요."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보는 불새 사냥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계약서를 꺼낼 줄을 몰랐을 테니 크게 한 방 얻어맞은 듯한 그녀의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이 계약은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급한 것은 내가 아니니 제대로 작성할수록 내 이익은 더욱 커질 게 분명했다.

제39화

제14편 비상하는 불새 (2)

몇 시간 뒤, 불새 사냥꾼과 나는 후안과 함께 도시 동쪽에 있는 신전으로 향했다.

공작 영지의 신전은 후작의 도시에 있던 신전과 달리 아름답지만 평범한 신전이었다.

신전 안에는 여느 때처럼 신도들과 신관이 있었고, 나는 공작의 아들이라는 위치로 인해 신관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어렸을 때 내 병을 치유하기 위해 달려온 신관과 다른 사람이었지만, 신전에 있는 신관도 나름 실력이 있는 신관처럼 보였다.

그는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다행히 신을 믿는 사람이어서인지, 서자에 대한 멸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후안을 예배당에 둔 채로 용병과 나는 신관과 함께 내실로 향했다.

"공자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나는 그에게 종이 뭉치를 건네주었다.

불새 사냥꾼과 내가 여태껏 작성했던 계약서였다.

"공증을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계약서들을 받아 든 신관은 질린 표정으로 종이 뭉치를 살펴보았다.

"이게 다 계약서인가요?"

"네."

내 말에 불새 사냥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몇 시간 동안 나와 함께 계약서 내용을 채웠던 것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전생의 경험을 떠올리며 최대한 꼼꼼하게 적은 계약서였다.

"공증을 서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적은 계약서는 거의 없는데...."

신관의 말과 달리, 그렇게 특별한 계약서는 아니었다.

계약 기간 동안 위해 금지, 이익 발생 시 분배, 정보의 유출 방지 같은 꼭 필요한 내용만을 담았을 뿐이었다.

더구나 계약을 위반했을 때의 대응이나 보상 같은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다.

전생과 달리 이곳에서는 계약 위반을 해결해 줄 법원이나 검찰이 없었다.

뭐, 영지 내에서라면 영주가 비슷한 일을 하긴 하지만, 영주민과 달리 용병은 영지만 벗어나면 그만이었다.

더구나 나는 어찌 되었건 영주의 아들이자 귀족이니 내가 계약을 어겼을 때 그녀가 항의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상도 나름의 방법으로 계약을 지키게 만들 수 있었다.

바로 신관의 공증이었다.

신관의 말로는 공증은 신이 계약의 이행을 지켜본다는 뜻이라는데, 내가 보기에는 일종의 마나 활용이나 상속 능력 같았다(물론 신관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이 세상의 계약은 신관의 공증으로 효력을 발휘했다.

계약이 제대로 이행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계약을 어기게 되면 신의 저주가 내리게 되었다.

뭐, 신의 저주라는 게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추적 기능이 붙고, 다음 계약 시 신관이 알아차리는 것이었죠?"

"잘 아시네요."

신관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도 추적 기능은 나침판 형식의 단순한 방향 추적이었고, 다음 계약 때 신관이 알게 되는 것도 전 계약의 이행 여부뿐이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뭐, 남들 모르게 계약 상대를 죽이고, 다시는 계약 공증을 받지 않으면 들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전생에도 그런 범죄자는 잡기 꽤 어려웠었다.

공증 말고도 몇 가지 안전장치를 해 놓으면, 그래도 배반당할 확률은 최소한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럼 두 분, 이 계약서에 손을 올리세요."

공작 영지의 신관은 제단 위에 올려놓은 계약서를 가리켰다.

나와 그녀는 쌓여 있는 계약서에 손을 올렸고, 젊은 신관은 작은 단도로 손바닥을 베어 계약서에 피를 떨어뜨렸다.

피가 계약서에 흘러들었고, 그녀와 내 손에도 피가 묻었다.

이어서 그가 기도를 시작했다.

"이 약속은 신의 이름으로 맺은 약속. 어기는 자는 피가 강같이 흐를지니...."

눈을 감고 내뱉는 기도문은 의외로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계약 공증이 아니라 저주 같은 거 아니야?'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고, 그의 피가 은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로써 이름을 말하지 못하는 신의 이름으로 두 사람의 계약을 증명합니다. 카라트 브리트."

양손을 펼치고 선언을 했다.

"이 약속을 어기면 신의 이름으로 네 몸이 갈라지리니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의 이름으로 두 사람의 계약을 증명합니다. 카라트 브리트."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계약서와 계약서 위에 올려놓은 그녀와 내 손이 옅게 빛났다.

손으로 낯선 마나가 흘러들어 오는 게 느껴졌다.

'밀어내 볼까?'

약한 마나라 그런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이 마나가 계약을 지켜 준다는 생각에 몸속으로 스며들게 놔두었다.

마나는 내 몸을 훑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계약서에 고여 있던 피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상처가 났던 신관의 손도 멀쩡해져 있었다.

"다 된 건가요?"

"네. 신의 이름으로 계약이 증명되었습니다."

"설마 기도하셨던 것처럼 피가 쫙쫙 흘러 죽거나 하지는 않는 거죠?"

그의 기도가 들었던 이야기와 달라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대전쟁 때 현자님의 기도가 이어져 내려온 것뿐입니다. 현자님의 계약 증명은 기도의 내용과 비슷한 효력을 발휘했다는 전설도 있긴 하지만, 실제 효력은 알려진 그대로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 세상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마구 벌어지는 곳이라 걱정이 계속 느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자그마한 금액이지만 은혜를 내려 주신 신께 감사 봉헌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정해진 가격의 공증료일 뿐이지만, 신전이라서 그런지 전해 주는 방식이 꽤 번거로웠다.

돈주머니를 받아 든 그는 표정이 밝아졌다.

내가 인사를 멋지게 한 건가?

"오, 직접 가져오셨군요. 다행입니다. 따로 저택에 이야기해서 예물을 받으려면 일이 상당히 귀찮아지거든요."

그가 좋아한 이유는 내 인사 때문이 아니라 현찰 박치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계약서를 챙기고 신전 밖으로 나가는 동안, 직접 돈을 안 가져오는 귀족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 영지는 그래도 덜한 편입니다. 다른 곳들은 어음으로 끊어 주는 곳도 있는 판이니까요. 예물을 어음으로 끊어 주다니.... 자애로운 신이시니 망정이지, 신벌을 받을 사람이 넘쳐났을 겁니다."

신관의 위치가 낮지 않아서인지, 헤어지기 전까지 평민들은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귀족들의 흉을 계속 보았다.

예배당에서 후안과 만나 신전을 나선 뒤, 용병이 입을 열었다.

신전에 들어선 뒤로 처음 열리는 입이었다.

"그럼 내일 오전에 남문 앞에서 만나자."

그녀는 눌러쓴 망토 그대로 자신의 말만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떴다.

"끙, 내가 계약서를 너무 심하게 썼나?"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후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내일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보다 내일이 문제였다.

"내일은 또 무슨 변명을 하고 나와야 하나...."

제대로 준비하고 나와야 하니 제대로 된 핑계를 대야 할 것 같았다.

* * *

다음 날.

다행히 특별한 핑계를 대지 않고도 저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며칠 남지 않은 시몬의 약혼녀, 아드리아의 방문으로 사람들이 무척 바빠졌기 때문이었다.

시몬이 후작가를 방문한 것에 대한 답례이자 약혼을 확정 짓기 위한 방문이었다.

'저번 삶 때보다 며칠 더 늦어진 건가?'

그런 것치고는 방문 일자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많은 일을 벌여 놓아서 많이 달라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비효과가 크지 않았다.

잠깐, 아드리아가 왔었다고?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었나?"

"오늘이 무슨 날이었습니까?"

갑자기 말을 꺼내자, 같이 걷고 있던 후안이 물었다.

"아, 아니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게 말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계산해 보니 저번 삶에서 죽었던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아드리아와 요새를 보러 나가서 용병들에게 쫓기다 목숨을 잃었던 그날.

이제 몇 시간 뒤면 내가 죽는 시간이 될 터였다.

이미 나를 죽였던 이들은 모두 죽어 버렸고, 이제 갑자기 죽을 이유도 없으니 오랜만에 메시지를 볼 수 있을 듯했다.

4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목표가 있지 않았으면 무척 힘든 시간이었을 게 분명했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그 긴 시간을 다시 반복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후안과 나는 열심히 걸어 얼마 뒤 남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문 앞에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망토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어서 와.... 그거 정말 쓰려고 가지고 다니는 거야?"

그녀는 손을 흔들다 말고, 내 손을 가리켰다.

내 손에는 천으로 둘둘 말린 검이 들려 있었다.

크기가 너무 커서 오늘도 질질 끌고 온 검이었다.

후안이 들고 가겠다고 했지만, 손에 익어야 해서 거절했다.

"무슨 검인지 모르지만, 몸에 맞는 검을 쓰는 편이 좋지 않아? 그런 검을 쓰다가 이상한 습관만 들 텐데."

그녀의 말이 옳긴 하지만, 차마 내 몸에 맞는 검을 들고 죽었던 장소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내 몸에 맞는 검이 검술을 펼치기에는 제일 좋지만, 내 몸에 맞는 검이라 함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린아이가 쓰는 작은 칼일 뿐이었다.

거리도 짧고, 무게도 가볍고, 장난감 같은 작은 칼.

더구나 흔해 빠진 양산 훈련 검이라, 잘 제련된 검과 부딪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댕강 부러질 뿐이었다.

이미 그런 경험을 해 봤기에 적어도 부러지지 않는 튼튼한 검이 필요했다.

'뭐, 돈만 있었으면 제대로 된 검을 주문할 수도 있겠지만....'

어제도 그렇고, 근래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이 신나게 새어 나가는 바람에 남은 돈이 얼마 없었다.

"검 말고는 제대로 준비한 것 같은데 하필 그런 검을 가져오다니.... 정말 똑똑한 것 같았는데, 이상한 데서 아이 티를 내네."

그녀 말대로 확실히 준비해 왔다.

가죽 갑옷도 차려입었고, 후안도 제대로 장비를 하고 있었다.

"뭐, 이곳에서 싸울 일은 없을 테니 그런 검이라도 상관없겠지."

거기까지 말한 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곳 용병은 뭐 먹고사는 거야? 마물도 없고, 치안도 좋고, 결국 상행이나 따라다녀야 할 판인데 생활이 유지가 되나?"

"확실히 상행하고 귀족 경호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보다 안전한 영지이긴 하지만, 영지 경계의 산과 숲에서 마물이 나타나기도 하고요. 다른 영지보다 보상금이 많아서 횟수는 적지만 나쁘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후안의 대답에 불새 사냥꾼은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오, 영지에서 주는 보상금이 크다는 이야기지? 공작님은 좋은 영주님이신가 보네."

그녀는 나를 보며 공작을 칭찬했지만, 나는 그런 칭찬에 관심이 없었다.

"빨리 가죠. 이러다가 오늘 안에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아, 그래."

내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그녀는 민망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경비병들은 후안을 알아보고 우리를 내보내 주었다.

몇 년 전, 저번 삶에서 마차를 타고 지나갔던 길을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차 때보다 시간이 두 배는 걸렸지만, 우리는 멀리 유적이 보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과 같은 유적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유적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펼쳐진 커다란 숲. 온스 숲이 눈에 들어왔다.

저번 삶과 똑같은 길을 갈 이유가 없었다.

목적지는 버려진 무덤. 출구로 들어가는 편이 훨씬 빨랐다.

여자 용병과 나, 후안은 무덤의 출구, 즉 빈 우물이 있는 버려진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제40화

제15편 비상하는 불새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