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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제15편 형의 약혼자가 왔습니다 (1)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누구신지요?"

무척이나 예쁜 소녀였지만,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알렉스 아냐? 공작가의 세 번째 공자, 그리고 서자라고 들었는데?"

그녀가 꺼낸 '서자'라는 말에서 깔보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비하가 느껴지지 않는 점이 무척이나 참신했지만, 그만큼 예의가 없었다.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나보다 3, 4살 정도 많아 보였다. 전생이었으면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다.

문제는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가 무척이나 비싼 것 같다는 점이었다.

딱 봐도 귀족 가문의 여식이었다.

그녀에게 예의를 따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평범하게 대답했다.

"알렉스 맞습니다."

"맞잖아!"

"하지만 숨겨진 칼 같은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모르는 분과 검을 겨룰 이유도 없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 한가운데서 이런 이야기를 나눌 이유도 없었다.

연무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직 늦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드리아 데 이에로! 이에로가의 딸입니다. 시몬 공자의 손님으로 공작가를 방문했습니다!"

소녀는 목검을 양손으로 잡고 자신을 소개했다.

입고 있는 옷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절도 있는 기사의 인사였다.

황당한 상황이 이어졌지만, 최소한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게 되었다.

시몬 형의 약혼녀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공작가와 후작가의 연맹을 위한 정략이긴 했지만, 약혼 상대가 무척이나 아름다워 시몬 형이 내심 마음에 들어 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때는 10대 초반의 꼬맹이가 예뻐 봤자 얼마나 예쁠까 싶었지만, 지금 보니 확실히 소문이 돌 만큼 예뻐 보였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성격이라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는데?

더구나 공작가의 숨겨진 검이라니. 몇 년 동안 꼭꼭 숨어서 훈련만 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역시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임은 맞았다.

그런데, 시몬 형의 약혼자가 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는 다시 검을 내밀었다.

"자기소개를 했으니, 이제 싸워 볼 수 있겠지?"

그녀는 싸울 마음이 가득해 보였지만, 이미 시간은 충분히 벌은 뒤였다.

"아드리아!"

나지막한 고함이 그녀 뒤에서 들려왔다.

10대 중반의 귀족 소년, 시몬 형이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시몬 형이 다가오면서 묻는 말에 소녀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마침 상대가 보여 대련을 청하는 중이에요."

시몬 형은 힐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시몬 형은 눈썹을 씰룩였다.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생기면 늘 짓던 표정이었다.

"아직 저택 안내도 다 안 끝났습니다. 이렇게 마음대로 다니면 안 됩니다."

"공작님께도, 공작부인께도 인사드렸잖아요. 어차피 방 정리가 될 때까지 시간 보내기였으니, 남은 시간을 활용해야죠. 아니면 공자님이 대련해 주시겠어요?"

시몬 형의 얼굴이 좀 더 붉게 변했다.

그녀의 말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이곳에 있기 때문일까?

"지금은 저택을 안내하는 중입니다. 저에게 저택을 계속 안내하는 영광을 주시기 바. 랍. 니. 다."

시몬 형은 정중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림에 그린 듯한 예의 바른 귀족의 모습이었다.

시몬 형의 약혼자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저와 대련해 주세요."

그녀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후작가 자제가 예의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나한테만 그런 건가?

뭔가 괘씸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이곳을 어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대련은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확답은 피한 채 시몬 형이 대답했다. 역시 제대로 배운 처세술이었다.

시몬 형이 손을 내밀었고, 시몬 형의 약혼자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무례하게 시간을 빼앗았네요. 그럼 나중에 봬요."

아름다운 소녀가 손으로 가슴을 받치고 그림처럼 인사를 했다.

가슴이 뛸 만한 모습은... 개뿔. 조금 전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았기에 감흥은커녕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인사처럼 다시 그녀와 마주칠 일은 없었다.

저택에 살면서도 시몬 형과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시몬 형의 약혼녀라면 지금처럼 같이 다닐 터. 일부러 내가 다니는 동선을 피해 다니는 시몬 형이니만큼 앞으로도 그녀를 볼 일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혼을 잔뜩 빼놓고, 시몬 형과 시몬 형의 약혼자는 저택을 구경하러 떠났다.

두 사람이 떠나자, 나도 발걸음을 옮겼다.

저택 뒤쪽에 있는 연무장으로 가는 길. 몇 년 전까지 플로라와 같이 걷던 길이었지만, 이제는 나 혼자 다니고 있었다.

혼자 다닐 만큼 나이를 먹은 것이었다.

물론 아직 키도 작고, 변성기도 오지 않은 어린아이였지만, 저택의 고용인 그 누구도 어리다고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일가의 가족묘 옆을 지나 숲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갔다.

몇 년 동안 걸었던 길이라 이젠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었다.

잠시 걷고 나니, 나무로 둘러싸인 공터가 나타났다.

공작 일가의 연무장이었다.

연무장에는 언제나처럼 미겔이 홀로 기다리....

어라? 혼자가 아니었다.

중년 기사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미겔 옆에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기사의 표정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강렬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기사단장 알론스였다.

그가 왜 왔는지는 미겔이 이야기해 주었다.

"공자님의 실력을 보시겠답니다."

테스트인가? 하지만 미겔이 이야기해 주었을 텐데.

처음에는 공작도 가끔 찾아왔었고 기사단장도 얼굴을 비치었지만, 근래에는 연무장에 모습을 보인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숨겨진 칼이니 어쩌니 하는 소문이 난 건가?

아무튼 오지 않았어도 미겔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왜 갑자기 테스트를 보겠다는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테스트가 우선이었다.

"목검 대련입니까?"

목검을 꺼내 들며 말하자, 미겔이 고개를 저었다.

"목검이 아니라 진검입니다."

그가 철검을 건네주었다. 기사단의 검보다 조금 작은 검. 기사의 종자들이 사용하는 검이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미겔을 바라보았다.

근래 나도 많이 다뤄 본 검이었지만, 그것은 훈련 때뿐이었다.

"설마 진검으로 대련하는 건가요?"

"네."

그의 말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괜찮을까요?"

피식.

내 말에 기사단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진검이라고 해도 기사의 지도 대련에서 교육생이 다친다면 기사직을 내놓아야지."

기사단장의 말에 난 미겔을 쳐다보았고, 미겔의 목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문, 문제없습니다."

미겔의 더듬거리는 목소리에 기사단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와 미겔은 서로 마주 보고 섰다.

지도 대련답지 않게 미겔은 한껏 긴장해 있었고, 나도 무척이나 긴장했다.

"정확한 실력을 봐야 하니 최선을 다하십시오."

기사단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단순한 테스트는 아닌 듯했다.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오십시오!"

미겔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나는 미겔에게 달려들었다.

잠시 뒤, 대련이 끝났다.

나는 대자로 누워 숨을 헐떡였다.

온몸에 먼지가 가득했고, 이리저리 구르느라 이곳저곳에 멍이 가득했다.

그동안의 훈련으로 10살 나이에 성인 이상 아니, 거의 기사급의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

매번 훈련 때마다 성장하는 모습에 미겔은 무척이나 놀라워했지만, 정식 기사와의 대결에서는 이렇게 바닥을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육체는 강해졌지만, 어린 나이에 걸맞은 짧은 팔과 다리가 문제였다.

리치가 너무 차이가 났다.

팔 길이가 너무 차이가 나서 미겔의 검이 내 몸을 닿을 때도 내 검은 미겔의 팔을 겨우 벨 수 있을 뿐이었다.

움직일 때도 짧은 다리로 두 배는 열심히 뛰어야 했고, 검이 부딪칠 때마다 작은 몸무게 때문에 이리저리 튕겨 나가 버렸다.

거기다 진검으로 대련을 하자니, 정말 죽을 둥 살 둥 몸을 움직여야 했다.

나는 누운 채로 기사단장 쪽을 바라보았다.

기사단장이 심각한 얼굴로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제대로 보고한 게 맞나?"

기사단장은 미겔을 향해 꾸짖듯이 물었다.

미겔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하게 보고했습니다."

"제대로 보고했다고?"

"네. 기사급 육체에 준기사급 검술. 좋은 판단력. 약점은 아직 성장하지 않은 육체. 마지막으로 보고한 내용입니다."

잠시 생각을 더듬던 기사단장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내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건가."

기사단장의 말에 미겔이 머리를 긁적였다.

"뭐, 공자님 나이를 고려하면 보고대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죠."

나와 달리 땅을 구르지 않은 미겔은 옷도 몸도 멀쩡했다. 먼지도 흙도 묻지 않았고, 멍도 보이지 않았다.

기사와의 지도 대련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지만, 미겔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한껏 긴장한 덕분에 얼굴은 아직도 붉은 채였고, 입고 있는 가죽 갑옷 곳곳에 베어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겨우 흔적만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갑옷에 검이 닿은 흔적이었다.

지도 대련 중에 교육생의 검이 기사의 몸에 닿은 것이다.

기사단장의 말대로라면 미겔은 기사직을 내려놓아야겠지만, 알론스 기사단장은 미겔을 꾸짖지 않았다.

그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실력이 늘고 있군요. 공작님께 다시 보고를 드려야겠습니다."

기사단장의 감탄에 나도 만족스러웠지만, 나는 아직 실력을 다 보여 준 것이 아니었다.

내 몸속 깊은 곳에는 깨우지 않은 마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마나까지 보여 준다면 기사단장이 훨씬 더 놀라겠지만, 마나는 이런 대련에서 보여 줄 것이 아니었다.

마나는 '내 숨겨진 칼'이었다.

내 실력을 확인한 기사단장이 본론을 꺼냈다.

"이 정도면 걱정할 필요가 없군요."

역시 괜히 실력을 확인한 게 아니었다.

"공작님의 지시입니다."

공작의 지시라. 도대체 뭘 시키려는 거지?

누운 채로 듣고 싶었지만, 기사단장은 더 말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일어나라는 이야기였다.

끙. 꼰대 아재.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앞에 서자, 기사단장이 말을 이었다.

"오늘 시몬 공자님의 약혼자가 오셨습니다."

어라, 시작부터 뜬금없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에로 후작가의 따님이십니다. 공식적으로 방문한 것이 아니니 소란스러운 경호가 힘듭니다."

어, 뭔가 불길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설마 아니겠지?

"시몬 공자님이 바쁘셔서 옆에 계시기 힘드니 그분이 공작가에 머무시는 동안 경호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역시 불길한 예상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거절할 수는 없는 걸까?

"다행히 그분도 기쁘게 허락하셨습니다."

아까 만났던 소녀가 떠올랐다. 목검을 눈앞에서 까닥거리던 소녀. 대련하자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내일부터 경호하시면 됩니다. 평범한 친구처럼 같이 다니시면 됩니다."

친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거기다 시동생에게 경호를 부탁하는 법이 어디 있어. 분명 시몬 형이 알면 가만히 안 있을 텐데?

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입 밖으로는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제16화

제16편 형의 약혼자가 왔습니다 (2)

"봐. 금방 만났지?"

손님용 응접실 중앙에 서서 밝게 웃는 소녀를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루 만에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더구나 종일 붙어 다녀야 했다.

"알렉스입니다."

"응. 오늘부터 잘 부탁해. 안내 겸 경호 담당자님?"

"안내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경호는 모르겠지만 안내라니. 서재와 방, 연무장만 뺑뺑이 돌았던 내가 누굴 안내하는 것은 무리였다.

"안내는 제가 도와드릴게요."

사정을 아는 플로라가 옆에서 거들어 주었지만,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만난 지 1분도 안 되었는데, 벌써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온종일이라니.

도대체 언제까지 같이 다녀야 하지?

"방문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방문 일정?"

시몬의 약혼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갸웃거리는 모습은 꽤나 볼만했지만, 짜증이 가득한 지금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쯤 집으로 돌아가시는지를 묻는 겁니다."

내 말에 소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나랑 같이 있는 게 싫다는 이야기인 거야?"

음. 의외로 눈치가 좋군.

"네."

내 말에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쳐다보던 그녀가 잠시 뒤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너, 정말 재미있어. 너 같은 애는 처음이야."

쩝, 짜증이 나서 될 대로 되라고 질렀는데, 오히려 흥미를 돋운 모양이었다.

"응응, 잘됐다. 시몬과 다르게 같이 다니면 재미있겠어."

소녀는 정말 즐거운 얼굴로 내 물음에 대답했다.

"나도 잘 몰라. 아버님이 일이 끝나면 부르겠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니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

끙, 역시 도움이 안 되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일이 끝나면 부른다라.... 그럼 지금은 공작가에 와 있어야 하는 일이 있다는 소리인 걸까? 아니면 후작가를 떠나야 하는 일이 생긴 걸까?

'설마?'

뭔가 기분 나쁜 촉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아니, 뭔가 알아차려도 달라질 게 없었다.

'딴생각 말고 내 일이나 하자.'

"그럼, 오늘은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그냥 방에서 책을 읽으면 좋을 텐데. 응접실에서 다과회도 좋고.

"그럼, 바로 가자!"

내 생각과 달리 그녀는 응접실 문을 향해 힘차게 걸어갔다.

어라? 그러고 보니 그녀는 드레스를 입고 있지 않았다.

워낙 화려해서 몰랐는데,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드레스가 아닌 기사단 정복. 여성 기사들이 입는 옷이었다.

"첫 안내는 연무장으로 부탁해! 어제 못 한 결투, 아니 대련하자!"

결투라니.... 속마음이 나와 버렸다. 아무리 봐도 그녀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들어선 게 분명했다.

이건 분명 중2병이었다.

"빨리 와. 그리고 알렉스! 날 아드리아라고 불러!"

먼저 복도를 나서며 그녀가 말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드리아의 뒤를 따랐다.

연무장에 도착하자, 개인 훈련을 하던 기사와 종자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모아졌다.

"와, 여기가 그레시아 공작가의 연무장이구나. 그럼, 너도 여기서 훈련을 받는 거야?"

물론 내가 훈련을 받는 곳은 이 연무장이 아니었지만, 윗사람의 허락 없이 공작 일가의 연무장에 아드리아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아드리아가 연무장을 두리번거렸다.

몇몇 기사가 연무장을 찾아온 그녀와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니, 눈살을 찌푸린 것은 나 때문일 게 분명했다.

다행히 뭐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사 몇 명이 그녀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른 기사에게 수신호를 했고, 기사들 모두가 슬금슬금 연무장에서 벗어났다.

"어라, 내가 연습을 방해한 거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아드리아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돌아가시죠."

냉큼 말을 꺼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빨리 대련하자! 너도 사람들이 없는 편이 좋을 거잖아."

아무래도 '공작가의 숨겨진 검'이라는 소문을 진짜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게 진짜면 대련을 해 줄 리가 없잖아.

이건 민폐 캐릭터인지 순진한 캐릭터인지 가늠하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더는 피하기가 어려웠다.

이곳까지 오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 보았지만, 실력을 보여 주지 않으면 경호도 받지 않겠다고 해 버리는 바람에 이제 다른 핑곗거리를 대기도 어려워졌다.

솔직히 나도 궁금하기는 했다. 그동안 대련 상대는 미겔 기사뿐. 한 번도 이기지 못하는 바람에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경호를 위해 가져온 진검은 플로라에게 건네주고, 비치된 목검을 들었다.

아드리아는 벌써 검을 들고 자세를 잡고 있었다.

"대련 형식은 어떤 식으로 할까요?"

"죽으면 패하는 거로!"

나는 그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아니, 나를 죽이고 싶은 건가? 목검으로 생사결이라니. 도대체 목검으로 얼마나 패야 사람이 죽으려나.

"하.... 그냥 평범한 대련으로 하죠."

"그럼 재미없잖아."

아니, 사람을 죽이는 거로 재미를 느끼는 쪽이 이상한 거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플로라 옆에 서 있는 하녀를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말없이 아드리아를 수행하던 하녀였다.

"따로 말 안 해도 아시겠지만, 대련 중에 호위를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하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그게 무슨 소리야? 호위라니?"

그리고 아드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나와 하녀를 바라보았다.

아드리아는 모르는 건가? 그녀의 실력을?

나도 알아보기가 어려웠으니 아드리아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용인에게 실력을 숨기는 하녀라니. 아무래도 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착각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흥, 실없기는."

아드리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고,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좋아. 이렇게 된 바에 제대로 대련해 줘야겠다. 대련을 해 달라고 한 것은 저쪽이었으니 나중에 울고불고해도 내 책임은 아니었다.

나는 자세를 잡고 아드리아를 바라보았다.

차분한 그녀의 자세와 정갈한 호흡,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기세가 한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중2병은 아니었네. 제대로 배운 검술 실력이야.'

하긴 보통 귀족도 아니고, 후작이 자신의 첫째 딸을 생각 없이 검을 마구 휘두르고 다니는 망나니로 키울 리는 없었다.

귀족가 여식에게 제대로 된 검술을 가르쳤다는 이야기인데.

아! 그럼 상속 능력인가?

이에로 후작가의 상속 능력이 뭐였지?

...머릿속을 뒤져 보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서재 안에 있는 책과 서기관들에게 들은 정보만으로는 왕국 귀족들의 상속 능력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사실 신경을 안 쓴 거였지만.'

공작가와 주변 귀족들에만 신경 쓰느라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의 허술한 준비에 혀를 차고는 다시 아드리아에게 집중했다.

'대충 뛰어난 종자급쯤 되려나.'

기사를 수발하는 같은 나이대의 종자들과 비교해도 그녀의 실력은 뛰어나 보였다.

다만, 내가 한눈에 실력을 알아보는 것인 만큼 나와는 꽤 차이가 났다.

하지만, 방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상속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후작가 첫째 딸에게 검을 쥐여 줄 정도의 능력이었다.

무슨 능력인지 모르는데 먼저 달려들 수는 없었다.

나는 선수를 양보하기로 했다.

"오십시오."

10살짜리 아이가 꺼낸 말에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간다! 조심해!"

그녀는 크게 외쳤고,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번쩍.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니, 그녀의 모습을 놓치고 만 것이었다.

쳇!

그녀의 모습을 놓치는 순간, 나는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캉!

"우악! 막았어?"

검을 휘두른 곳에는 목검으로 내 검을 막은 아드리아가 나타나 있었다.

"가속 계열입니까?"

"와, 알고 있었어?"

"조금 전까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막은 거야? 설마 보였어? 상속 능력이 눈이 잘 보이는 그런 쪽인 거야?"

눈이 잘 보인다니, 그런 능력도 있는 건가?

"잘 보이진 않았습니다."

마나의 움직임을 느꼈고, 다가오는 기척에 반사적으로 검을 가져다 댔을 뿐이었다.

"끙, 역시 막혀 버리면 엄청 아프네."

그녀는 뒤로 휙 물러서며 검을 잡은 손을 털었다.

기사급 신체를 가진 나도 충격을 받았는데, 나보다 육체적으로 약한 그녀는 상당한 통증을 느꼈을 게 분명했다.

"아직 끝이 아니야."

아드리아는 검을 움켜쥐더니 다시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보다는 빨랐지만, 이번에는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캉! 캉!

나는 그녀의 검을 하나하나 막아 냈다.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그녀의 검 정도는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었다.

"큭! 이것도 막아 봐!"

의외로 그녀와의 대련은 꽤 재미있었다.

항상 약자의 위치에서 바득바득 덤벼 왔는데, 처음으로 반대편에 서니 왠지 모를 개운함마저 느껴졌다.

미겔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미겔에 대한 고마움이 사르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여러 번 검을 맞대니 아드리아의 상속 능력을 알 것 같았다.

나처럼 육체를 강화하는 것이 아닌, 마나를 이용한 신체 가속 능력이었다.

아직 능력이 완성되질 않아 가속, 감속의 제어도 불안정했고, 준비가 되질 않으면 최고 속도도 내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제대로 성장하기만 한다면 대단한 검사가 될 것 같았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시몬 형과 약혼을 시키는 거겠지.'

최고의 마나 심법을 지닌 시몬 형과 대단한 가속 능력을 가진 아드리아.

둘의 약혼은 두 가문의 결속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둘이 낳을 자식에 대한 기대도 가득 담겨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히 온 거지? 다시 의문이 치솟았다.

"너, 일부러 막고만 있는 거지? 막지만 말고 공격해!"

계속 막고 있는데, 아드리아가 버럭 소리쳤다.

"너무 공격이 빨라서 막기도 벅찹니다."

"거짓말 마! 지금도 여유롭게 대답하고 있잖아!"

이런, 들켜 버렸다.

좀 더 대련을 이어 가고 싶었는데 들켜 버렸으니 이제 끝을 내야 했다.

나는 차분히 검을 막아 낸 뒤, 공격 사이의 틈을 이용해 목검을 내질렀다.

퍼억!

검이 그녀의 몸을 때렸고,

"꺄악!"

아드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그녀가 튕겨지는 모습은 대련 때마다 내가 날아가는 모습과 무척 닮아 있었다.

이렇게 지켜보는 처지가 되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애처로웠는지 알 수 있었다.

아드리아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렸고, 그녀 옆에는 어느새 아드리아의 하녀가 다가와 있었다.

"어, 언제 거기로 가셨어요?"

플로라가 놀란 눈으로 텅 빈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살짝 실력을 보인 건가?

살짝 던진 떡밥을 냉큼 물어 버린 것을 보니, 하녀는 계속 자신의 실력을 숨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급하게 아드리아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에 맞은 순간 기절해 버렸지만, 멀리서 본 것과 다르게 상처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게 상처를 낼 리가 없었다.

필요에 의해 과하게 공격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공작가의 손님. 그것도 시몬 형의 약혼자를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심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봐주면서 공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실제로 대련 때마다 아등바등 덤비기만 했으니, 핑계로는 그만이었다.

좋아. 계획대로였다.

저렇게 기절해 버렸으니 적어도 며칠은 방 안에서 푹 쉴 게 분명했다.

꽁해서 경호를 바꿔 달라면 더 좋고.

보면 볼수록 이번 일은 단순한 경호가 아니었다. 이렇게 위험해 보이는 일은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게 좋았다.

거리를 두지 못한다면 시간을 벌어야 했다.

적어도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하녀가 아드리아를 업고 저택으로 향했고, 나는 플로라에게, 그리고 어머니께 한참 동안 혼이 났다.

기쁜 마음으로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내 눈앞에 시몬 형의 약혼자가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드리아는 생각보다 훨씬 몸이 튼튼했다.

젠장, 좀 더 세게 두들겨 패는 건데.

속으로 투덜거리는 동안, 그녀는 신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는 정말 최고였어! 정말, 소문 이상이었어. 그리고 오늘은 영지 나들이야!"

영지 나들이? 저택 밖으로 나간다는 소리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몰래 온 것 아니었어?

황당한 소리에 절로 말이 튀어나왔다.

"저택 밖은 거의 모릅니다. 안내는 무리입니다."

10살이 되도록 저택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아드리아가 나보다 공작가 영지에 대해 더 잘 알지도 몰랐다.

"안내는 내가 할 거야. 넌 멀리서 따라오면 돼."

그녀 옆에서 더 황당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몬 데 그레시아. 공작의 첫째 아들이 약혼자와 같이 나들이를 가겠다고 그녀 옆에서 무게를 잡고 있었다.

화사한 소년, 소녀가 나란히 서 있으니 절로 한 폭의 그림이었지만, 왜 거기에 내가 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행을 가는 애인 사이에 낀 친구도 아니고, 신혼여행을 따라가는 시동생인 거냐!

"공작님이 허락하셨으니 바로 준비해서 내려오도록."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는 말을 남기고, 두 사람은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집무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이런 때 나들이 허락이라니, 공작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17화

제17편 나들이를 하러 갑니다 (1)

현관 앞에 마차가 와 있었다.

가문 문장이 멋들어지게 그려진 마차였다.

마부석에는 가죽 갑옷을 입은 병사 둘이 앉아 있었고, 고용인들이 마차 뒤에 여러 물건을 싣고 있었다.

그리고 말을 달래고 있는 기사 한 명.

'역시 공작가인가.'

짧은 나들이였지만, 준비는 제대로였다.

저택 안에서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만 하고 있어서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레시아 공작가는 왕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가였다.

지금도 대단한 권력을 지닌 대귀족. 그런 가문의 첫째 아들이 나들이를 간다는데 대충 준비할 리가 없었다.

'그런 것치고는 오히려 검소한 준비이려나?'

하지만, 멀리 가지 않는데 과한 경호를 하는 것도 좀 이상했다.

'하지만,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닌걸.'

플로라에게 인사를 한 뒤 마차에 오르자, 이미 마차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마차 안에는 시몬 형과 약혼녀 아드리아, 아드리아의 하녀가 앉아 있었다.

"고용인은 더 없습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몬 형이 항상 데리고 다니던 고용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경호도 충분하고, 내가 오지 못하게 했다."

시몬 형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역시나 말 섞기도 싫은 것 같았다.

의아한 대답이었지만,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검을 옆에 세우고 자리에 앉았다.

"그럼 오늘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녀에게 묻자, 아드리아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마요르카 요새! 그리고 방어 성벽도 보고 싶어!"

뜻밖의 요청이었지만, 아드리아다운 말이기도 했다.

"메테나 시에는 커다란 시장이나 아름다운 신전도 있습니다. 도시 중앙에 있는 광장도 멋지고, 신전 첨탑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노을도 아름답습니다만...."

시몬 형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지만, 아드리아는 죄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대전쟁 유적을 제일 먼저 보고 싶어요."

시몬 형은 그녀의 말에 아쉬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레시아 공작의 첫째 아들은 약혼녀에게 몹시 휘둘리는 모양이다.

'좋을 때다.'

파릇파릇한 청소년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살짝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아드리아가 나를 쏘아보았다.

"왜 그런 이상한 웃음을 짓는 거야! 아빠가 짓는 웃음과 비슷하잖아. 너, 이상해!"

이런, 떠올린 생각이 표정으로 그대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잠깐 딴생각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미안할 건 없는데...."

내 사과에 그녀는 우물쭈물했다.

그녀와 말을 나누자, 시몬 형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왜, 저 녀석한테는 말을 놓는 겁니까? 말을 놓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맞다. 그랬었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말해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정중하게 대하잖아! 왜 나한테만 반말하는 건데?

"아! 그러네요."

아드리아는 놀란 눈이 되었다.

설마, 자신도 몰랐던 건가?

"왜 그랬지? 음.... 나보다 어려서? 아니, 집에 있을 때부터 소문을 많이 들었기 때문일까요? 처음 볼 때부터 왠지 낯설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아드리아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 아니, 죄송해요. 화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깨닫자마자 사과라니. 역시 심성은 나쁘지 않은 듯했다. 이제 나하고 관련만 안 된다면 천사로 봐줄 텐데....

"아니, 괜찮습니다."

나도 그녀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좋은 결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시몬 형이 끼어들었다.

"으흠, 그렇다고 바로 말을 올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친하게 말을 나누는 것을 보고 끼어들었으면서 이번에는 말을 높여 주자 그게 또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질풍노도의 시기인가. 역시 어린애들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드리아도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전처럼 편하게 대해 주시면 됩니다."

"응!"

아드리아가 환하게 웃었고, 시몬은 무척이나 복잡한 얼굴로 아드리아를 바라보았다.

저택의 정문을 빠져나온 마차는 바로 시내로 향했다.

저택은 영지의 중심 도시인 메테나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저택 북쪽으로는 넓게 둘러쳐진 숲과 산맥이 적들을 막아 주었고, 남쪽으로는 메테나 시의 넓은 시가지가 펼쳐져 있었다.

시가지 너머로는 시가지를 크게 두른 높은 성벽이 보였다. 메테나 시를 보호하는 외성이었다.

시 북쪽의 고급 주택가를 지나, 시몬 형이 말했던 도시 중앙의 광장을 지났다.

"이 광장은 영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서쪽에는 중앙 시장이 있고, 동쪽에 보이는 첨탑이 있는 아름다운 건물은 신전입니다. 대주교께서도 아름다움에 몹시 감탄...."

항상 예의를 지키고 점잖은 시몬 형이었지만, 지금은 들뜬 소년일 뿐이었다.

그는 마차 주변으로 스쳐 지나가는 경치를 열심히 떠들었고, 아드리아의 하녀와 나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관광객처럼 그의 설명에 열심히 고개를 돌렸다.

아쉽게도 아드리아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한참을 떠들던 시몬 형이 결국 말을 멈추었다.

아쉬웠다. 조금만 듣는 척 좀 해 주지. 이런 가이드 구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저택 밖으로 거의 나와 본 적 없었던 나는 거리의 모습이 무척이나 새로웠다.

뒷골목이 아니라서 그런지 도시는 생각보다 깨끗하고 활기찼다.

뭐, 전생에 살았던 현대 도시의 깨끗함은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책에서 보던 말똥으로 뒤덮인 중세 도시는 아니었다.

거기다 공작가는 이 도시의 영지민들에게 꽤나 인정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차가 지나가자, 사람들은 마차의 문양을 보고 몸을 피한 뒤 바로 고개를 숙였다.

두려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사람도 많았지만, 진심을 담아 인사를 올리는 사람도 꽤 많았다.

영지의 주인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진심으로 인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공작은 영지민의 인망을 꽤 얻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뭐.

전생에도 가정을 버리고 존경을 받는 위인들은 많았다.

위인이든 어쨌든, 공작을 인정하고 용서해 줄 마음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광장을 지나 대로를 가로지르니, 높은 성벽이 다가왔다.

낮이라 그런지 성문은 열려 있었고, 한쪽에서는 성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사람들을 정리하던 병사들은 공작가의 마차를 보자 경례를 붙였고, 줄을 서던 사람들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연하게도 검문은 없었다. 기사의 얼굴을 확인한 병사들은 길을 비켜 줬고, 마차는 성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마요르카 요새는 남쪽 성벽을 지나 마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목장 사이로 난 길을 지나 낮은 언덕을 올라가니 반쯤 무너진 건물이 보였다.

마요르카 요새.

용사들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마왕과 싸웠다는 대전쟁 때의 유적.

이곳에서 용사들과 연합군은 마왕군과 건곤일척의 혈투를 벌였고, 승리한 뒤에 두 명의 용사가 다시 돌아와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는 건국 신화의 배경이 되는 곳이었다.

뭐, 지금은 전쟁의 흔적만 남은 황량한 폐허일 뿐이지만.

문화재 보호를 하는 세상도 아니어서 유적은 폐허만 남게 될 뿐이었다.

병사들은 유적 아래에 마차를 세웠다.

기사는 요새 주변을 살피기 위해 말을 몰고 떠났고, 일행은 마차에서 내려 유적으로 향했다.

병사들이 마차를 지키는 것을 보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의 영지는 왕국 내에서도 안전하기로 이름 높은 곳이긴 했지만, 시몬도 있는데 안전에 신경을 너무 안 쓰는 것 같았다.

뭐, 같이 움직이는 일행 전부가 웬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어서 별로 문제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와! 이곳이 바로 그 마요르카 대결전이 있던 요새란 거죠?"

아드리아는 감격한 얼굴로 유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몬 형은 여러 번 와 본 듯했다. 그는 주변 구경보다는 약혼자의 옆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아드리아의 하녀는 마차에 있을 때와 달리, 굳은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무너진 유적을 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절대 관광객의 표정이 아니었다.

역시 그녀는 하녀가 아니라 경호원이었다. 아니, 하녀 일도 잘하니 경호원 겸 하녀이려나.

무너진 건물 더미를 피해 가며 안쪽으로 들어가니 아직 남아 있는 벽들과 조각들이 보였다.

그 시절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아드리아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 여기 남은 벽에 벽화 흔적이 있어요."

"아, 그건 말이죠. 원래 이 요새는...."

내가 보기에는 그냥 쓸린 흔적 같았지만, 시몬 형은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역시 다음 대를 이을 공작의 후계자다웠다. 그는 검술 말고도 뛰어난 지식과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지금은 연애 사업에 그 힘을 온통 쏟는 중이었지만, 공작가의 앞날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슬슬 물러나야겠네.'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자리를 비켜 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아드리아의 하녀에게 눈짓했다.

경호에 문제가 되지 않을 거리 정도로. 물러서자고.

그녀도 금방 이해했고, 그녀와 나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벌렸다.

대충 무너진 벽들로 시야가 가려지고, 시몬의 음성이 작게 들릴 정도 떨어진 곳.

그리고 주변이 잘 보이는 벽 위로 그녀와 나는 올라왔다.

"요새 주변도 잘 보이고, 이 정도면 괜찮겠죠?"

내 말에 하녀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이름을 못 들었군요."

"비앙카입니다. 하녀에 불과합니다. 말을 놓으셔도 됩니다."

"정말 하녀에 불과한가요?"

내 말에 비앙카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간을 벌어 보려는 계획은 물 건너갔으니,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비앙카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또,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말했던 걸까?

"천재라더니, 들었던 것 이상이네요."

아니, 도대체 어떤 소문이 났던 걸까.

"곧 아실 수 있으실 거예요. 그리고 언제나 하셔야 하는 일은 다르지 않아요."

"경호 말인가요?"

"네. 잘 부탁드려요."

알아도 경호는 같다라.... 그렇다면?

"경호 대상인 아드리아 양이 위험하다는 겁니까? 그런 것치고는 경계가 너무 허술한데?"

내 말에 비앙카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생각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어진 생각에 조금씩 톱니바퀴가 맞아 들어갔고, 머릿속에서 뭔가 떠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지막 순간에 방해를 받았다.

스스스스.

차가운 바람이 몸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칙칙했던 유적의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등을 타고 무언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

죽기 전에 몇 번이나 느꼈던 그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

'공기가 바뀌었다!'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나는 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비앙카와 눈이 마주쳤다.

비앙카도 굳은 얼굴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비앙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시몬과 아드리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반만 남은 조각상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뭔가 잘되고 있었던 걸까? 우리 두 사람의 난입에 시몬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시몬의 연애 사업 지원은 다음으로 미룰 때였다.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비앙카가 먼저 시몬에게 물었다.

"공자님을 보호하는 기사님들은 어디 계시죠?"

"나를 보호하다니? 무슨 소리지?"

비앙카는 시몬의 말에 인상을 썼다. 그녀는 뭔가 떠올렸는지 급하게 다시 물었다.

"따라온 고용인도 없고.... 설마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오신 건가요?"

설마? 말도 안 돼. 저 시몬이 남들 몰래 왔을 리가....

"...그게 왜?"

몰래 온 거냐!

"마차를 탈 때 다른 사람들이 봤을 텐데요. 기사님도 계시고 병사들도 있었습니다만."

내 말에 비앙카가 고개를 저었다.

"그분들이 오기 전에 마차를 탔어요. 다른 사람들은 못 봤을 거예요."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내 표정을 보았는지 시몬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상관없잖아! 약혼자 혼자 나들이를 보낼 수는 없잖아!"

훌륭하게 자란 공작가 장남은 아직 사춘기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원래 이 나들이는 아드리아 혼자만의 나들이였다.

어라, 왜 혼자 나들이를 보낸 거지? 시몬을 일부러 떼 놓기까지 하면서?

의문이 드는 사이, 아드리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습격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아드리아가 검을 뽑아 들었다.

"역시, 내가 모르는 일이 있는 거야?"

"죄송합니다."

"괜찮아.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아빠한테 들었어."

그녀는 비앙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알려 줄 수 있는 거지?"

나도 정말 듣고 싶었다.

"일이 끝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일이 좀 꼬였습니다."

비앙카가 시몬을 보지는 않았지만,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짐처럼 말하지 마!"

그녀의 말이 시몬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시몬은 벌게진 얼굴로 검을 뽑았고, 나도 한숨을 내쉬며 검을 쥐었다.

알 수 없는 일에 휘말렸는데 일까지 꼬이다니.

몇 년 무사히 살아왔는데, 이제 다시 고난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제18화

제18편 나들이를 하러 갑니다 (2)

"어서! 마차로 돌아가야 합니다!"

도무지 숨기는 게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긴 검을 들고 비앙카가 소리쳤다.

검을 든 순간, 그녀는 일행의 리더가 되었다. 고위 귀족 자제들을 이끄는 하녀라니.

평상시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검을 쥔 그녀의 기세에 우리는 모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비앙카는 우리가 봐도 웬만한 기사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후작가에서 몰래 키운 기사일까? 아니면 숨겨진 귀족일까?

어느 쪽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시몬마저도 그녀의 지시를 잘 따랐다.

우리는 남은 벽과 기둥들로 미로처럼 변한 요새 내부를 달려갔다.

비앙카를 제외하고는 다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일행 모두는 평범한 어른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

유적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가죽 갑옷을 입은 평범한 남자였다.

그는 검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찾았다! 여기 있.... 컥!"

그의 고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느새 가까이 다가간 비앙카가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서걱!

가슴에서 피가 솟구치고, 비앙카는 피를 뒤집어쓰며 계속 달렸다.

"멈추지 말아요!"

그녀는 뒤에도 눈이 달린 것 같았다.

시몬과 아드리아가 움찔하는 기색을 바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녀의 말에 두 사람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릴 수 있었다.

소리를 들은 것일까? 안타깝게도 요새를 다 벗어나기 전에 다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죽어!"

식상한 소리를 내뱉으며 검을 든 남자가 무너진 벽 뒤에서 튀어나왔다.

비앙카가 지나간 바로 다음 순간, 그는 아드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비앙카가 몸을 돌릴 시간이 없었지만, 아드리아 앞에는 시몬이 있었다.

공작가가 자랑하는 후계자 시몬은 침착하게 달려오는 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달려드는 자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것 같았지만, 기사에게서 제대로 배운 어린 귀족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캉!

습격자의 검이 튕겨 나갔고, 습격자는 검에 맞아 바닥에 쓰러졌다.

"후욱, 후욱. 이 정도 실력을 가지고 나한테 덤빈 거냐!"

시몬은 쓰러진 남자를 향해 거칠게 외친 뒤에 몸을 돌렸다. 한 수에 적을 쓰러뜨린 덕분에 무너진 자존심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돌아서는 그의 모습은 다시 자신만만한 공작가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를 보는 비앙카와 아드리아의 입에서는 칭찬이 나오지 않았다.

"위험해요!"

"위험!"

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소리쳤고, 시몬은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푹!

그리고 시몬은 엎드린 채로 단검을 던지려던 남자를 보게 되었다.

녹색으로 번들거리는 단검이었다.

하지만, 바로 던져질 것 같았던 독 단검은 남자의 손을 떠나지 못했다.

대신 그의 입에서는 피가 쏟아지고 있었고, 엎드린 남자 등에는 검이 깊게 박혀 있었다.

"대련이 아닙니다. 확실히 숨통을 끊어 놓아야 합니다."

나는 방금 남자의 등에 박아 넣은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륵. 그륵.

검을 뽑자, 습격자가 마지막 숨을 내뱉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검을 휘둘러 피를 털었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고개를 드니, 사람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앙카는 안심을 한 얼굴이었고, 아드리아는 나를 보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설마 또 대련하자는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시몬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시체와 나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죽였어?"

뜻밖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 아직 실전을 해 보지 못하셨군요."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었으니 내 살인에 저런 표정이 된 것이다.

하지만, 비앙카도 적을 죽였는데 급하게 지나가느라 잘 보지 못했나?

"너도 처음이잖아! 집에만 있었으면서!"

어라? 시몬 말대로였다.

죽기야 여러 번 죽었지만, 남을 죽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피 묻은 검을 보고, 시체를 다시 쳐다보았다.

흠....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심장도 그대로였고, 공포를 느끼거나 구토가 올라오지도 않았다.

역시 첫 살인의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중에 안전해지면 그때 떠오르려나?

그것도 아니면 너무 죽음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뭐, 지금은 계속 움직여야 하니 충격이 없는 편이 좋았다.

"지금 그런 것은 따질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빨리 움직이죠."

내 말에 일행은 정신을 차렸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선두는 비앙카, 후위는 나. 아드리아와 시몬은 중앙.

좀 전처럼 두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진형을 갖춘 일행은 요새 밖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멀쩡하지? 실수했어. 내가 죽였어야 했어."

앞에서 시몬의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그리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냥 바람결에 흘려버렸다.

요새를 빠져나오자, 이쪽으로 달려오는 기사가 보였다. 한차례 싸움이 있었는지 갑옷에 피가 튀어 있었다.

"무사하셨군요! 유인은 성공했습니다!"

유인이라니. 역시 이번 나들이는 꿍꿍이속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후작의 딸을 미끼로 삼은 거지?

달려오던 기사는 시몬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시몬 공자님이 왜 이곳에...."

"역시 말 안 하셨던 거군요."

비앙카의 말에 기사가 일행을 살펴보았다.

피를 뒤집어쓴 비앙카의 옷을 보고, 내 칼에 피가 튄 것을 확인했다.

피 묻은 내 칼을 보고 슬쩍 표정이 변했지만, 그것에 대해 따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벌써 습격이 있었던 모양이군. 시몬 공자님이 계시면 계획대로 일을 진행할 수 없소."

"네. 알고 있습니다. 계획은 취소입니다. 빨리 돌아가죠."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자신 때문에 일이 틀어진 것을 안 시몬은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를 위로할 시간은 없었다.

기사는 품에서 크지 않은 쇠막대기를 꺼냈다.

그는 쇠막대기를 치켜들었고, 쇠막대를 든 손에 마나를 집중했다.

쇠막대기가 점점 붉게 변했다.

그리고,

퍽! 슈우우웅!

막대기 끝이 폭발했고, 폭발과 함께 붉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저건 분명 마나로 화약을 터트려 하늘로 쏘아 올린 것이다.

화약 폭발을 추진력으로 쓰는 신호기라니.

아니, 화약도 있는 동네였나? 도대체 문명 수준이 어떻게 되는 세계인 거야?

"신호를 보냈으니 지원이 올 겁니다. 서둘러 마차로 갑시다."

기사의 말에 따라 우리는 유적 아래로 달려갔다.

* * *

같은 시각.

공작은 집무실에서 기사단장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기사 열을 주변에 배치하고 후방에 중대 규모의 병사를 준비시켰습니다. 추적을 위해 용병들도 배치를 마쳤습니다."

기사단장의 보고를 들은 공작이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절대 후작가 영애가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하네. 확실히 주지시켜 놓았지?"

"네. 여러 번 숙지시켜 놓았습니다."

자신에 찬 기사단장의 말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문제없겠군."

공작의 대답에 기사단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안전하더라도 아드리아 영애를 미끼로 내놓은 일입니다. 거기에 알렉스 공자도 있고."

"알렉스 공자라...."

공작의 말에 기사단장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성실하고 실력도 좋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능력을 무시할 생각은 없습니다."

공작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 아이는 만약을 위한 담보이네. 그 나이에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놀려 둘 수는 없지."

기사단장은 차가운 공작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아드리아를 미끼로 내놓는 한이 있어도 이번에 끝장을 내야 해. 이에로 후작가와 그레시아 공작가가 연합을 하려면 이 정도 위기는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어야 하고."

기사단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소문보다 더 왕국의 정세가 어지러운 모양이었다.

두 세력가의 결혼을 신부를 죽여 방해하려고 하는 세력이 있고, 공작과 후작은 신부를 미끼로 내놓아 그 세력을 잡을 생각을 하다니.

평화로울 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사정은 그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저도 자리에 가 보겠습니다."

기사단장이 집무실을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보고입니다."

병사 하나가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공작이 나가려는 기사단장을 멈춰 세웠다.

"방금 옆 영지, 테네리페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일주일 동안 우리 영지를 향해 출발한 용병대가 둘입니다. 마지막 용병대는 4일 전에 출발했다고 합니다."

병사의 말에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둘? 그중에 우리 영지로 들어온 용병대가 있었나?"

"일주일 동안 새로 들어온 용병대는 없습니다."

"란사로테 쪽에서 온 용병대는 하나였지?"

"네."

"그럼, 중간에 사라진 용병대가 셋이라는 건가?"

적 규모를 용병대 하나나 최대 둘을 생각하고 준비한 계획이었다.

공작이 검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 있는 인원이 용병대 셋을 막을 수 있나?"

공작의 물음에 기사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용병대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용병으로 위장한 것이라면 어렵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십 대 소녀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용병대 셋을 동원하다니.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일까요?"

기사단장의 말대로 영지전이라도 벌일 생각이 아니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공작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정도 인원이라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을 텐데...."

누가 벌인 일인지 들키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는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을 게 분명했다.

"설마, 들켜도 상관이 없다는 건가?"

공작은 떠오른 생각에 표정을 굳혔다.

그는 바로 기사단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병력은 전부 대기 상태지?"

"네!"

"계획은 취소한다. 가까이에 있는 병력을 바로 합류시키고, 지원병을 보내!"

"네!"

"경계수위를 최대로 올리고, 후작에게 전령을 보내서 상황을 알려!"

"알겠습니다!"

공작은 방을 나서며 계속 지시를 내렸다.

"나도 갈 테니 말을 준비시키도록."

"네!"

보고했던 병사가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그때였다.

반대편에서 노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총집사였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공작이 걸음을 멈추었다.

급한 분위기를 눈치 못 챌 노인이 아니었다. 평범한 일이었으면 말을 꺼낼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지?"

"시몬 공자님이 아침부터 보이지 않습니다."

"시몬이?"

그를 멈춰 세울 일은 아닌 것 같았지만, 총집사의 말에는 불길한 느낌이 흐르고 있었다.

"알아보니, 아드리아 아가씨가 탄 마차에 몰래 타신 것 같습니다."

총집사의 말에 공작이 눈썹을 실룩였다.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공작의 몸에서 마나가 넘실거리며 흘러나왔다.

근처에 있던 고용인들의 표정이 창백해지는 순간,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신호탄이!"

기사단장은 창문 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쪽으로 나 있는 창문.

멀리서부터 붉은 연기가 차례로 솟구치고 있었다.

제19화

제19편 유적 탐험(?) (1)

마차가 있는 곳까지 내려가니, 그곳은 이미 큰 싸움이 벌어져 있었다.

"커억!"

"제길! 막아!"

"죽어!"

고함과 비명이 귓속을 찔렀고, 피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마차는 이미 부서져 있었다. 마차를 지키던 병사들도 마차 근처에 죽어 나뒹굴고 있었다.

그렇다면 싸울 사람이 없어야 하겠지만, 현재 수십 명의 병사가 가죽옷을 입은 용병들과 싸우고 있었다.

병사들 중에는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몇몇은 경계 근무 때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병사들 사이에는 기사들도 보였다.

그들은 병사와 차원이 다른 검술로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밀리고 있었다.

상대는 분명 용병들과 다르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휘두르는 검은 기사와 동급, 아니 그 이상이었다.

"어디 기사냐! 기사가 용병들과 섞여서 습격하다니, 명예를 버린 건가!"

기사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지만, 가죽 투구를 깊게 눌러쓴 남자는 기사의 말에 비웃음을 날렸다.

"나는 그런 명예를 얻어 본 적이 없어서. 뭐 이번 일이 끝나면 나도 그 자리에 설 수도 있겠지."

기사들도, 병사들도, 처음 보는 용병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아니, 용병처럼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들은 용병처럼 보이지 않았다.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의 일이 벌어질 줄이야. 이건 미스터리물이 전쟁물이 되어 버린 꼴이었다.

저 용병들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 온 적일 테고, 기사와 병사들은 함정을 파고 적들을 잡기 위해 숨겨 놓은 병력일 터였다.

계획이 바뀌어 숨어 있던 병력이 모여 적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까진 알겠는데.

왜 밀리고 있는 거지?

함정을 파고 적을 잡을 생각으로 준비한 병력이 이렇게 밀리면 말이 안 되잖아!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기사와 영지병들이 적에게 하염없이 밀리고 있었다.

쓰러지는 병사들. 용병에게 밀리다 다른 용병에게 뒤를 찔리는 기사.

늦게나마 이곳으로 달려오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영지병들이 무너지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더구나, 용병 중에는 싸움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말을 타고 싸움을 지켜보는 남녀들.

그들 중 대장처럼 보이는 중년 용병이 검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아드리아다! 목표가 저기 있다!"

그의 말은 전장의 소리를 뚫고 모두의 귀에 들려왔다.

덜컥. 싸움이 멈추었다.

모두 우리를 바라보았다.

"곤란한데."

내려오기 전에 변장이라도 시킬 걸 그랬다. 쏘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척이나 따가웠다.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잡아라!"

다음 순간,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진형도 채 갖추지 못한 전투였다.

"비켜!"

"막아! 접근하지 못하게 해!"

병사들이 적을 막는 사이, 기사들은 속속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우고 경! 적을 막기 어렵습니다! 퇴각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요새로 퇴각해서 시간을 버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원군이 곧 올 겁니다."

기사들의 말에 우리를 이끌던 기사, 우고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위험해. 포위망을 뚫고 퇴각한다."

"네? 그게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기사 우고는 시몬을 가리켰다.

"일행에 공자님이 계신다. 지금 최우선 목표는 시몬 공자님의 안전이다."

"맙소사."

"시몬 공자님이 왜 여기에...."

기사들이 시몬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큭! 탈출이 가능하겠습니까?"

벌써 들이닥친 용병을 막아서며 다른 기사가 소리쳤다.

병사들의 방어를 뚫고 달려드는 용병들이 점점 많아졌다. 기사들이 급하게 막아섰지만, 달려오는 용병들을 보니 오래 막기는 어려워 보였다.

기사 우고가 아드리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인원을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아드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우고 기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시몬 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고, 거기다 인원을 나눈다면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끼가 되라는 겁니까!"

비앙카가 벌컥 화를 냈다.

"미끼?"

"미끼라니요?"

시몬과 아드리아가 의문을 표하자, 우고 기사가 빠르게 대답했다.

"저들은 아드리아 영애를 노리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을 안전하게 모시려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공작의 후계자를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후작의 딸을 미끼로 삼다니.

나중에 크게 문제가 될 게 분명할 텐데, 기사의 표정은 전혀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다.

아드리아가 입술을 깨물었고, 비앙카가 다시 화를 내려 했다. 하지만, 먼저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보호하는 것도 아니라 미끼가 되어 달라니. 기사가 할 수 있는 말인가!"

"네. 저는 그레시아 공작가의 기사입니다."

우고 기사가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공작가에 대한 충성심이라....'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기사가 보여 주는 충성심의 단면을 보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시몬 공자를 모시고 탈출하도록. 나는 아드리아 영애를 모시겠다."

"알겠습니다."

병사들을 막아서며 다른 기사들이 대답했다.

그들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우고 기사가 나에게 물었다.

"공자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실력을 보여 주어도, 인정을 받아도, 나이가 더 어려도, 역시 서자는 서자일 뿐인가.

시몬과 전혀 다른 대우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조금 비웃듯이 대답했다.

"우리 입장으로는 내가 남는 편이 좋겠죠?"

"네. 가문에서 한 명이 남게 되면 나중에 후작가도 뭐라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지독한 사람이었다.

내가 직접 당하고 보니 먼저 당한 두 여성에게 내가 다 미안할 정도였다.

기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황당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너무 똑똑한 척을 하지 않는 건데.... 아니 그러면 예전에 죽어 버렸으려나.

어쩔 수 없었다. 임무를 맡아 놓고 달아나 버리면 공작의 성격에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었다.

돌아가면 시몬도 대판 깨질 테지만, 덩달아 나까지 가 버리면 나는 후작가의 먹이로 던져질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되살아나지 못한다면 뒤도 안 보고 도망쳤을 텐데.'

죽으면 5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살아야 했지만, 그래도 다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휴, 저도 남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벌써 적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바로 출발해! 우리는 무너진 요새로 후퇴합니다!"

아드리아는 입술을 깨물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는 비앙카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와 우고 기사는 두 사람의 뒤를 따르며, 적들을 막아 냈다.

"목표가 도망친다! 추격해!"

우고 기사의 예상대로였다. 아드리아가 달아나는 것을 본 적들은 시몬과 다른 기사들을 지나 우리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시몬과 기사들은 금방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기사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시몬은 기사들을 따라 북쪽으로 달려갔다.

"바로 지원군을 데려오겠습니다! 조금만 버텨 주세요!"

마지막으로 시몬이 우리를 보며 큰 소리로 외쳤지만, 굳어진 아드리아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5명이 내려왔던 길을 이제 4명이 올라가고 있었다.

무너진 요새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미 지나갔던 길을 다시 가는 것이라 그런지, 일행은 금방 추적을 뿌리칠 수 있었다.

무너진 요새에 들어서면서 우고 기사가 선두로 나섰다.

그는 이 요새를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순식간에 길을 찾아 요새 깊숙이 나아갔다.

우고 기사의 뒤를 따르는 아드리아와 비앙카의 표정은 무척이나 비장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이제 죽음까지 각오한 표정이었다.

아직 어린 10대에 불과한 아드리아가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한 것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지만, 아드리아는 오히려 내가 더 대단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무섭지 않아? 죽을지도 모르는데, 전혀 무서운 얼굴이 아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아드리아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드리아의 말에 비앙카도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솔직히 무섭지 않았다. 죽음을 무서워하기에는 너무 많이 죽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경험도 싫었고, 5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죽지 않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뭐, 그렇다고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저도 무섭습니다."

"역시 그렇지? 나도 무서워."

내 대답이 그녀의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전보다 좋아졌다.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우리는 계속 요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비앙카가 결국 앞서 달리는 우고 기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죠? 안쪽으로 들어가 봤자 달아나기 더 어려운 것 아닌가요?"

바로 쫓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적은 제대로 포위망을 펼칠 모양이었다.

지원군이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이래서야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 뿐이었다.

우고 기사는 계속 달리면서 대답했다.

"왜 제가 책임자로 왔는지 아십니까? 이곳은 제가 어릴 때부터 놀이터로 지내던 곳이었습니다. 이 요새는 제가 속속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요새 안쪽을 가리켰다.

"제가 남은 것은 자살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드리아 영애와 알렉스 공자님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무너진 요새와 어울리지 않는 조각상이 서 있었다.

* * *

일행이 요새 깊숙한 곳으로 모습을 감추고 얼마 뒤.

요새 외벽 사이로 용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 선 용병들은 바닥에 난 흔적으로 목표물을 추적했고, 기사들을 상대했던 용병들과 말을 탔던 용병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 중앙에는 조금 전 이들을 지휘했던 중년의 용병이 자리하고 있었다.

달아나던 일행과 달리 그들은 급하게 서두르지 않았다. 차근차근 변수를 없애며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뒤쪽에서 날렵하게 생긴 용병이 그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포위망이 완성되었습니다."

용병의 말에 중년 용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적의 공격이 거셉니다. 오래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시간만 벌고 빠지라고 해."

"알겠습니다."

대장의 말에 용병은 다시 몸을 돌렸다.

전령이 사라지자, 일행 중 유일한 여성 용병이 대장에게 말했다.

"예상보다 편하게 되었네요. 기사들과 함께 달아나던 소년 덕분이에요. 혹시 공작 아들이 아니었을까요?"

"공작 아들 맞아."

대장의 대답에 여성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네? 그런데 그냥 보내신 거예요?"

"우리 목표가 아니다. 괜히 죽기라도 하면 곤란해."

"하긴, 괜히 그레시아 공작가가 설치면 안 되죠. 하지만, 공작가 영지 안마당에서 이렇게 설쳐 댔는데, 괜찮을까요?"

"목표만 처리하고 물러나면 문제없다. 증거도 없는데 바로 전쟁을 벌일 수는 없어. 나중에 증거를 찾는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끝난 뒤니까."

"네, 네. 윗분들이 하시는 일인데 어련하시겠어요. 그보다 열심히 함정을 팠는데 미안하게 되었네요."

"처음부터 잘못 짚었는데 준비가 제대로 될 리가 없지."

"그렇죠. 신부를 죽여서 결혼 동맹을 막는다니.... 겨우 그런 일로 귀여운 영애를 죽인다는 게 말도 안 되죠."

"잠깐."

중년 용병은 손을 들어 계속 이어지는 말을 막았다.

앞에서 추적하던 용병들이 멈춰 서 있었다.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중년 용병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자리에 도착하자, 그도 다른 용병들처럼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이런, 변수가 생겼네요. 이제 어쩌죠?"

여성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서 있는 앞쪽 바닥에는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있었다.

그리고 통로 옆에는 조금 전까지 통로 위를 덮고 있던 조각상이 쓰러져 있었다.

용병들은 통로를 내려다보았다.

아래로 이어지는 벽돌 계단은 어둠에 휩싸여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제20화

제20편 유적 탐험(?) (2)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계단을 내려오자 이번에는 큰 돌로 짜 맞춰진 지하 시설이 앞에 펼쳐졌다.

치이익.

때마침 우고 기사가 들고 있던 횃불이 그 힘을 다했다.

다시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우고 기사는 어디서 구했는지 다른 횃대에 불을 붙였다.

화악!

횃불을 밝히자, 어두워지려던 통로가 다시 밝아졌다.

"계단을 내려올 때도 그렇고, 그 횃불은 또 어디서 난 건가요?"

아드리아의 질문에 우고가 대답했다.

"영지 안에 대전쟁의 중요한 유적인 마요르카 요새가 있는데, 공작가에서 그걸 그냥 방치할 리가 없죠. 사람이 계속 상주하지는 않지만,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관리합니다. 그때 사용하기 위한 횃불들입니다."

아드리아는 그의 말에 신기한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느끼던 섭섭함과 분노는 이제 어느 정도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냥 사지에 내버린 것이 아닌 이상, 계속 화를 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무너져 잔해만 남은 유적이 아니라, 아직도 멀쩡한 부분이 많은 대전쟁 때의 시설을 보게 되니 다시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움직이죠. 계속 추격해 올 겁니다."

우고 기사의 말에 주위를 살피던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뭐 하던 곳인가요?"

이번에는 비앙카가 물었다.

"마요르카 요새의 지하 시설입니다. 구 제국이 한창때 만든 요새라 지하 시설이 무척 큽니다. 지상보다는 덜하지만, 지금은 많이 무너져서 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의 말대로 벽이 무너져 통로가 막힌 곳이 보였다.

무너진 곳도 많았지만, 지상과 달리 아직 멀쩡한 곳이 훨씬 더 많은 지하 시설이었다.

벽과 바닥은 큰 돌로 짜 맞춰져 있었다.

일행의 발소리와 멀리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리고, 횃불에서 멀어진 곳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음침한 곳이었다.

'대전쟁 때 무너진 유적의 지하 시설이라.... 이제는 던전물로 가는 건가?'

갑자기 떠오르는 황당한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아드리아가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이런, 웃음이 겉으로 새어 나온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그보다 이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에 다른 두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맞다. 나도 듣고 싶어."

아드리아도 내 말에 격하게 동의했다.

다행히 비앙카도, 우고 기사도 대답을 뒤로 미룰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시몬 공자님의 약혼을 반대하는 귀족들이 있다는 것은 아드리아 님도 잘 아실 겁니다."

나는 몰랐는데.

"응. 옆 영지에서 사절이 와서 항의하기도 하고. 그래서 공작 영지로 온 거잖아."

"네. 하지만, 그냥 피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니, 역시 위험한 일에 제대로 휘말리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두 가문의 연합을 막기 위해 아드리아 영애를 죽일 생각이라는 첩보를 받게 되었고."

"이 기회에 습격해 오는 자들의 뒤를 캐내서 누가 적인지 확인하고, 확인된 적들에게 압력을 줄 생각이었다는 겁니까?"

제1 왕자파인 그레시아 공작가와 제2 왕자파인 이에로 후작가, 거기에 귀족파까지 얽힌 대규모 정쟁의 결과가 이런 사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공작가 내부 일도 쉽지 않은데, 왕국의 정치 싸움이라니. 이러다가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더구나, 준비한 일이 잘된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계획이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내 말에 우고 기사와 비앙카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건...."

"시몬 공자님이 끼어들어서잖아요."

대신 아드리아가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몬 형에게 위로를....

앞으로 시몬 형의 연애는 무척이나 험난해질 것 같았다.

"...그것도 있지만, 적의 숫자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 아니었나요?"

우고 기사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정도 숫자면 습격으로 보기 힘듭니다. 뒤에 사태를 무마하기도 어려울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어떻게 된 일인지는 어느 정도 알게 되었지만, 일이 어그러진 지금은 알게 된 내용을 모두 믿기 어려웠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 건가요? 이 지하에 숨을 곳이 있나요?"

아드리아의 물음에 우고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여러 곳이 무너져서 복잡해졌지만, 따로 숨을 만한 곳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은 벌 수 있겠지만, 계속 피해 다니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 뒤로 우고 기사가 갑자기 역사 이야기를 꺼냈다.

"대전쟁 때 벌어진 마요르카 요새 전투는 처음에 요새가 마족들에게 포위당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좋아하던 이야기였을까? 아드리아가 냉큼 우고 기사의 말을 받았다.

"저도 그 이야기 알아요. 용사들이 구원을 와서 외곽에서부터 포위망을 부수고 전세를 역전시켜서 계속 밀리던 대전쟁에서 반격의 시발점이 되었다고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요새가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용사들과 지원군들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죠."

"아.... 그러네. 그때 혹시 천리안이나 예지 능력을 가진 용사가 있지는 않았죠?"

"아니었습니다. 능력이 아니라 포위망을 뚫고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드리아와 우고 기사의 대화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건 마치 유적의 역사를 설명하는 가이드와 여행객 같은데.'

적에게서 도망치는 와중에 나누는 대화로는 영 어울리지 않았지만, 우고 기사의 말은 우리 모두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혼자서 포위망을 뚫은 거예요? 요새에 용사가 있었던 건가요?"

"아뇨. 그는 싸움 한 번 없이 포위망을 빠져나갔습니다."

우고 기사는 위를 가리키던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요새 지하에 있는 비밀 통로로 빠져나간 겁니다."

비밀 통로? 여기에 그런 게 있었어?

"그럼, 지금 우리는 그곳으로 가는 건가요?"

물어보는 아드리아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네. 비밀 통로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두 여성은 모두 기뻐했지만, 나는 그의 설명에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비밀 통로가 있다면 포위당했을 때 모두 그리로 빠져나오면 되었을 텐데요."

"아, 그러네. 일부만 남기든가 허수아비 같은 거로 속일 수도 있고."

아드리아가 대단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비앙카는 심각한 표정으로 우고 기사를 쳐다보았다.

"아쉽게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도착하면 아실 겁니다."

정말, 일행을 계속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풀어졌던 분위기가 다시 팽팽하게 조여졌고, 일행은 다시 불안한 얼굴로 지하 통로를 나아갔다.

아쉽게도 요새 지하는 전생의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던 던전 같은 곳은 아니었다.

함정도 없었고, 괴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쥐를 닮은 작은 짐승들이 불빛을 보고 도망쳤을 뿐이었다.

우리는 통로를 돌고, 구멍 뚫린 벽을 지나 시설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주변은 점점 인위적인 느낌이 사라져 갔다.

정돈된 돌벽이 줄어들고, 자연적인 암벽이 늘어났다. 중간마다 천장을 받치는 목침이 보였고, 나중에는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동굴이 되었다.

이윽고, 동굴이 끝이 났다.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더 갈 곳이 없었다.

바위에는 갈라지고 부서진 흔적이 가득했고, 그 앞에는 곡괭이와 삽, 그리고 처음 보는 도구들이 흩어져 있었다.

우고 기사는 우리를 바위 앞으로 데려갔다.

비앙카가 바위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냥 바위인데요? 설마 여기가 비밀 통로라는 건가요?"

설마 '열려라, 참깨.'로 열리는 바위인가!

내가 바위에 손을 올리고 작게 웅얼거리자, 일행이 모두 쳐다보았다.

쩝, 이건 아니었나?

"네. 비밀 통로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바위 동굴, 아니 바위 사이에 난 틈이라고 해야겠죠. 요새 지하를 계속 확장하다가 바위로 막힌 곳입니다. 더 확장할 필요가 없어서 놔둔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밖으로 빠져나갈 길을 발견한 것이죠."

그는 횃불을 바위에 가까이 가져갔다. 횃불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그림자가 움직였고, 바위가 갈라진 틈이 모서리 쪽에 나타났다.

비앙카가 갈라진 틈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틈 앞에 멈춰 섰다.

"아까 말한 뜻이 이거였군요."

그녀의 말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바위 사이에 나타난 틈을 보니 나도 그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저기로는 요새의 모든 병사가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니, 한두 명이나 가능했을까?

바위 사이에 난 틈은 성인이 지나가기에는 너무 좁았다.

비앙카가 아드리아와 나를 보고 말했다.

"두 분은 가능하겠네요."

안심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드리아도 틈을 확인하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냐! 난 도망가지 않을 거야! 같이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거야. 응. 조금만 버티면 공작님이 병사들을 이끌고 오실 거야."

비앙카를 보며 아드리아가 외쳤지만, 비앙카는 아드리아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드리아 님을 부탁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숙인 비양카를 바라보다가 우고 기사에게 물었다.

"시몬 형을 보낼 때부터 이럴 생각이었습니까?"

"네. 시몬 공자님은 나이에 비해 덩치가 크시니까요. 여길 지나가기 어렵죠."

나를 데려온 것도, 마지막으로 아드리아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린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 정말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변명도 없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죽을 자리를 스스로 찾아온 기사.

나는 기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큰 덩치에 험상궂게 생긴 얼굴.

말투와 행동 모두가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충성을 하는, 고리타분한 기사의 표상 같은 남자였다.

하지만, 역시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니, 내가 그동안 이 세계 사람들을 바보로 여기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공작님께 당신이 한 일을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도 무. 슨. 일. 이 있어도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하하, 공자님이 기억해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험상궂은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당연히 그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비앙카도 결국 아드리아를 설득했다.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귀족의 의무라는 말을 듣고 아드리아는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우고가 틈 옆에 새겨진 작은 문양을 쓸며 말했다.

모든 것을 들었기 때문일까? 그의 음성이 편하게 들렸다.

"요새 주변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요새를 빠져나가 구원을 요청한 이가 용사 중의 한 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뭐 흔한 전설 중 하나일 뿐이죠."

어디서 본 것 같은 문양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하지만, 혹시나 압니까? 공자님이나 아드리아 영애님이 커서 그런 용사님 같은 분이 될지도 모릅니다."

나름대로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한 말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어두웠다.

멋쩍은 표정을 지은 그가 벽에 난 틈을 가리켰다.

"이제 출발하십시오. 절대 중간에 멈추거나 돌아오시면 안 됩니다. 적이 화공을 하거나 특수한 능력을 사용할지도 모릅니다."

비앙카가 이어 말했다.

"서둘러요. 언제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그녀의 말에 아드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죽으면 안 돼!"

"그럴 리가요. 저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결정한 이상, 시간을 끌 순 없었다.

나는 아드리아의 팔을 잡고, 틈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나도 정면으로 걷기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몸이 작은 덕분일까, 옆으로 몸을 틀자 쉽게 틈 사이로 움직일 수 있었다. 아드리아는 가슴이 걸리는 듯했지만, 팔다리를 움직여 억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틈 사이로 어린 소년과 소녀가 사라졌다.

비앙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셨네요. 무사히 도착하시겠죠?"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아이고, 그런 성격으로 잘도 이런 일을 책임지는 자리까지 갔군요."

"그 점은 공작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쉽네요. 일찍 알았으면 슬쩍 손수건이라도 흘리는 건데."

"흠. 그건 좀 아쉽군요."

두 사람은 피식 웃었다.

조금 전 이야기는 적진에 돌격하기 전 마지막 잡담 같은 것이었다.

두 사람은 검을 다시 쥐었다.

아드리아에게는 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지만, 두 사람은 그 말대로 할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적에게 혼란을 주어야 했다.

"이제 갈까요?"

"네. 마지막은 멋진 기사님과 함께네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두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고 기사가 든 횃불이 점점 작아졌고, 곧이어 비명과 고함이 작게 들려왔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얼마간 이어진 뒤, 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제21화

제21편 결혼은 조심해야 합니다 (1)

횃불 하나를 들고, 바위 사이에 난 좁은 틈을 비집고 움직이는 것은 무척이나 지치고 힘든 일이었다.

끝이 어디일지, 이대로 틈이 좁아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지, 도중에 숨이 막히게 되는 건 아닐지, 여러 생각이 자꾸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헉. 헉."

다행히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덕분에 엄습해 오는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힘든 것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헉. 헉. 둘 다 무사하겠지?"

"후....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걸까?"

"...."

거친 숨소리 사이로 아드리아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내 뒤를 따라오는 아드리아도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아니, 체형이 조금 더 큰 그녀는 나보다 더 힘들 게 분명했다.

"더 어린 꼬맹이도 힘든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데, 좀 더 힘내 봐요."

"흥, 완전 애늙은이면서...."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녀는 내 말에 힘을 내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좁은 동굴을 이동하는 데 조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거친 숨소리는 줄어들었고, 대신 말을 거는 빈도가 늘어났다.

무서웠던 것일까?

"기사가 되면 이런 일들을 겪게 되는 걸까? 우고 기사나 비앙카를 보니 자신이 없어졌어."

그녀의 말에 절실히 공감했다.

뭐, 전생처럼 전쟁이 없는 안정된 나라라면 군인이나 기사도 공무원에 가까운 직업에 불과하겠지만, 이쪽 세상은 예상보다 훨씬 무서운 곳이었다.

전생에는 의사당에서 의원들이 멱살을 잡는 것이 정쟁(政爭)의 모습이었는데, 여기는 직접 상대의 목을 날리는 거로도 모자라, 상대의 딸을 죽이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동네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세상이니 더욱 힘을 길러야 했다.

"검을 배우지 못했으면 도망치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런가? 하지만, 알렉스 너는 나하고 같이 안 와도 됐잖아."

그건 댁이 끌고 다녔기 때문이었어.

"그보다 내가 검을 배운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던 겁니까?"

"시몬.... 공자님이 우리 영지에 방문했을 때 같이 왔던 기사단장님이 내가 검을 배우는 것을 보고 알려 주셨어."

설마 '공작가의 숨겨진 검'이 기사단장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였나!

나만 보면 마음에 안 들어 하더니 후작가에 가서는 이상한 소문이나 퍼트리다니....

요즘 좀 괜찮아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한번 말문이 트이자, 아드리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갑자기 약혼이 잡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혼자 집으로 피난을 오고, 또 이렇게 도망치고...."

동굴이 어두웠기 때문일까? 그녀의 음성이 점점 가라앉았다.

"다른 귀족 영애들과 다르게 살고 싶어서 검을 배웠는데, 이래서야 다를 게 없어. 아니, 더 나빠졌나?"

말이 계속되니 완전히 넋두리로 변해 버렸다.

이해는 가지만, 그런 넋두리를 계속 들어 줄 마음은 없었다. 나는 경호원이지 심리 상담사가 아니었다.

슬슬 그녀의 입을 막으려 할 때였다.

휘이잉.

정면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살랑.

이어서 작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흘러오는 바람은 지금까지 들이켰던 텁텁한 공기가 아니었다.

"어? 바람이다!"

아드리아도 바로 알아차렸다.

"출구인가 봐!"

어두웠던 목소리가 단숨에 밝아졌다.

우리 두 사람은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앞으로 걸어갈수록 신선한 공기가 더욱 느껴졌다.

아직도 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신선한 공기만으로도 밖과 연결되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잠시 뒤, 우리는 계속 이어졌던 좁은 동굴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횃불을 들어 올려 주변을 살폈다.

"밖이 아냐?"

그녀 말대로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위로 꽉 막힌 동굴도 아니었다.

벽과 바닥, 천정은 바위가 아니라 사각형으로 이어붙인 석벽으로 되어 있었다.

"지하 석실?"

커다란 철문이 한쪽 벽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고, 석실 중앙 제단에는 커다란 관이 놓여 있었다.

관을 보는 아드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구 제국 시절의 무덤일까?"

구 제국 시절인지는 모르겠지만, 관이 있는 거로 봐서는 묘지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어차피 철문으로 가려면 관 옆을 지나야 했기에 나는 횃불을 들고 조심스럽게 관을 향해 걸어갔다.

"우리가 처음 발견한 걸까?"

아드리아가 뒤에서 기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그녀는 후작가 영애와 어울리지 않았다.

유적과 무덤을 보면 흥분하는 아드리아를 보니, 쌍권총을 들고 무덤을 털고 다니는 전생의 게임 캐릭터가 자꾸 떠올랐다.

"처음일 리가 없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게 기연 따위가 다가올 리가 없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갈림길도 없었으니, 첫 번째로 왔을 리가 없었다.

관 뚜껑도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선객이 먼저 무덤을 터신 모양이었다.

"용사가 아니라 도굴꾼이었나 보네요."

관 안에는 옷가지 일부와 뼛조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정말. 다 가져갔네."

관을 확인하고는 아드리아가 안타까워했다.

"아무것도 없었을지도 모르죠. 관에 담긴 지 오래되었으니 어차피 쓸모도 없었을 테고."

오래된 유물이니 돈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대전쟁 때 유적도 방치한 꼴을 보니 큰돈이 되긴 무리였다.

더구나 그때는 대전쟁 때였으니, 오히려 처치 곤란이었을지도....

"왜 쓸모없어? 신물로 이름 높은 무기나 갑옷은 다 구 제국 때 물건이잖아. 대전쟁 때 영웅들이 쓰던 신물들도 그런 거였고. 구 제국이 무너진 뒤로는 다시는 못 만드는 물건들이잖아."

잃어버린 기술이라니, 이 동네는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유적에서 쏟아지는 동네인 건가!

끙, 인터넷이 필요해.

역시 서재에 있는 책과 서기관에게 듣는 수업만으로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아, 여기 열쇠 구멍 같은 게 있어. 기관이 있는 걸까?"

아드리아가 관 안을 좀 더 살펴보다가 관 바닥에 뚫린 구멍을 발견했다.

손가락 길이 정도의 짧은 틈처럼 보이는 구멍 위에는 문과 동굴 입구에서 보았던 문양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검으로 찔러 넣으면 딱 맞을 것 같은데...."

아드리아가 구멍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럼, 시체와 함께 묻혔던 검이 열쇠일까? 검을 구멍에 밀어 넣으면 기관이 움직여서 숨겨진 보물 상자가 나타나는 거겠지?"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마구 늘어놓았다.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은 시체 때문에 이 구멍을 보지 못하고 검만 가져간 거고, 시간이 지나 시체가 썩어 없어져서 우리는 구멍을 보게 된 거지."

짝. 짝. 짝. 마음속으로 손뼉을 쳐 주었다.

아드리아 영애는 도굴왕에 이어 이제는 명탐정이 되신 것이다.

반박할 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나는 그녀의 팔을 잡고 철문으로 향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빨리 가야죠."

"...응."

밝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아드리아의 손은 잘게 떨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희생, 그녀가 휘말려 버린 일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까지.

아직 10대 소녀인 아드리아는 지금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무섭다고 멈추어 설 수는 없었다.

끼익.

다행히 철문은 쉽게 열렸다.

원래 쉽게 열리는 문은 아닌 것 같았지만,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원래 이쪽으로 들어오는 거군요. 우리가 온 길은 바위가 갈라져 생긴 샛길이었고요."

일부러 꺼낸 말이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마음을 다잡지 못한 것 같았다.

나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철문 뒤에도 동굴이 이어졌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럭저럭 큰 동굴이라 움직이기 어렵지 않았다.

앞서와 달리, 동굴 안에는 여러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쥐들과, 커다란 발톱을 가진 두더지, 팔뚝만 한 벌레까지. 모두 처음 보는 동물들이었다.

다행히 나와 아드리아가 처리할 수 없는 짐승들은 없었지만, 나는 이 동굴에서 처음으로 다른 세계에 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동굴 속을 지나니, 결국 빛이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원통으로 막힌 수직 벽 위로 하늘이 보였다.

"우물이네."

"버려진 우물이군요."

우리는 곧바로 우물 벽을 타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두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성인 이상의 힘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흙벽과 돌 사이에 손가락과 발을 걸고, 쭉쭉 위로 올라갔다.

잠시 뒤, 우리는 무사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흙투성이가 되어 버렸지만, 따뜻한 햇볕을 느끼느라 둘 다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물 주변은 나무로 가득했다.

오래된 집터들이 언뜻언뜻 보이기는 했지만, 마을은 오래전에 숲에 의해 집어삼켜진 것 같았다.

"기억에 잊힌 마을일까."

대전쟁 때 파괴된 마을인지, 아니면 그전에 이미 버려진 마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마을일 게 분명했다.

여기라면 버려진 우물 속에 고대 무덤으로 통하는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기 힘들 게 분명했다.

"한 명은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에서야 누구인지 찾기도 어려웠다. 찾을 생각도 없고.

지금은 빨리 영지군에 합류해야 했다.

"요새 근처에 있는 숲이라면 온스 숲일 겁니다. 요새 서쪽에 있으니 동북쪽으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응! 빨리 가자."

내 말에 아드리아가 힘차게 대답했다. 다행히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우리는 몸에 묻은 흙을 털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지금쯤이면 영지군이 적들을 정리하고 우리를 찾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했다.

영지군이 찾을 때까지 숲에 숨어 있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숲에서 밤을 새울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었다.

솔직히 적을 만날 확률은 거의 없었으니 최대한 빨리 숲을 벗어나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역시 확률은 믿을 바가 못 되었다.

99%의 확률로 총을 쏘아도 매번 빗나가는 게임이 있었다는 것을 까먹다니.

"호호, 이번에는 내가 잡았네."

갑자기 나타난 용병을 보고 나는 주사위의 신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정말 놀랐어. 여기까지 이어지는 동굴이 있었다니. 내 능력이 아니었으면 놓칠 뻔했다니까."

이런, 능력으로 추적한 거였나? 그럼 저주는 취소다.

그녀가 말을 하는 사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빠져나갈 곳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용병들이 우리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여자 용병은 두 손가락으로 손수건을 잡고 흔들었다.

"내 손수건을 어떻게...."

손수건을 보고 아드리아가 신음을 흘렸다.

아드리아의 손수건이라고?

손수건이 추적의 매개체인 건가? 손수건으로 뒤를 쫓다니. 정말 개 같은 능력이었다.

"아가씨와 친한 분이 구해 주셨어. 덕분에 계속 쫓을 수 있었어."

"내 손수건을 훔치는 사람과 친한 적 없습니다!"

"그럴 리가, 이번에 이에로 후작가의 새로운 주인이 되신 분인데?"

여자 용병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웃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 * *

용병과 영지병들의 시체가 요새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전장의 모습에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외부의 적들은 대부분 처리했습니다. 일부 달아난 용병들이 있어 추격 중입니다."

기사 한 명이 공작 옆에서 전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지하는?"

"기사단장님이 직접 들어가셨습니다. 곧 결과를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은 보이지 않았다. 공작이 병사들과 함께 저택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요새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을 쫓아 적의 주력이 지하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에 다들 기대를 버린 뒤였다.

복수라도 제대로 할 생각으로 기사단장이 직접 들어갔지만, 아이들을 구해 오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공작은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대체 왜 거의 전쟁 수준을 방불케 한 인원을 보낸 것인지.

겨우 여아 하나를 죽이겠다고 기사급 인력을 쏟아부은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궁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급보입니다!"

말을 타고 온 전령이 그의 궁금증을 풀어 준 것이다.

"이에로 후작가 저택이 불에 탔습니다. 일가는 전멸. 라팔마 백작이 기사들을 이끌고 와서 살아남은 후작의 서자를 새로운 가주로 세웠습니다!"

"아드리아를 죽이려는 이유가 그거였나?"

공작이 눈썹을 찡그렸다.

겨우 약혼 정도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후작 영지를 완전히 먹어 치울 생각이었다.

제22화

제22편 결혼은 조심해야 합니다 (2)

우리를 포위망에 가둔 채 여자 용병은 말을 이어 갔다.

"서자인 마르틴 데 이에로 님께서 이에로 후작가의 새로운 가주가 되셨다니까."

"거짓말! 마르틴 오빠가 그럴 리가."

"거짓말이 아냐. 아가씨의 배다른 오빠 맞아요."

그녀는 손수건을 뒤로 던지고, 쪽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조금 전에 소식이 왔어. 안타깝게도 저택에 불이 나서 후작 일가가 전부 돌아가셨다네. 저택 밖에서 지내던 마르틴 경이 다. 행. 히 살아남으셔서 새로운 영주 자리에 오르셨어요!"

아드리아는 계속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냐. 아냐. 아냐."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야 하는 아가씨가 안타까워서 알려 주는 것뿐이니까."

안타까운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즐거운 기색이 가득했다.

저런 걸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 걸까?

나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그녀의 말대로라면 남은 의문들이 모두 풀렸다.

후작 일가의 생존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서자가 가문을 승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맏딸인 아드리아가 살아 있으면 후작가는 아드리아가 이을 게 분명했다.

어떻게 저택에 불을 지르고 빠져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건지, 일이 벌어지자마자 바로 서자를 후계자로 올릴 수 있었는지,

아직 궁금한 것이 남아 있었지만, 이 정도면 알고 싶었던 내용은 거의 들은 것 같았다.

"자, 그럼."

여자 용병이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꼬맹이는 누구? 그 공자님의 하인이야? 이런, 못난 도련님 수발들다가 낙오되었나 보네."

어라? 나를 모르는 건가?

하긴 모르는 게 당연했다. 영지민들도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이들이 알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되려나?

나는 검을 잡은 손을 조금 흔들었다. 마치 떨리는 것처럼.

그다음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오랜만의 목소리 연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애처로움을 가득 담아 여자 용병에게 빌었다.

"제발, 제발 부탁해요."

충격을 받았는지 아드리아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연기에 더욱 몰입했다.

"에고, 불쌍해라."

포위한 용병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여자 용병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설마, 오랜만의 연기가 먹히는 건가?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네. 그래도 살려 두긴 무리예요.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한 네 주인을 원망하렴."

하, 기대한 내가 잘못이었다.

아드리아 때와 똑같았다.

저 사이코패스는 위로하는 말로 남을 절망에 빠뜨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괜히 힘만 뺐네."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바로 하자, 여자 용병이 눈을 크게 떴다.

"큭, 큭, 바보."

옆에서 아드리아가 비웃는 소리도 들려왔다.

내 바보짓 덕분에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저 여자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직접 확인하면 돼요. 우선 돌아갈 생각부터 하자고요."

"응, 네 말이 맞아."

내 말에 아드리아는 검을 굳게 잡았다.

"호. 호. 호. 재미있는 꼬마네."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자 용병의 웃음소리였다.

"영애가 죽을 때 어떤 소리를 낼지 기대했는데, 더 듣고 싶은 꼬마가 생겼지 뭐야. 어떻게 죽여야 예쁜 소리를 들려주려나."

관심을 너무 끌었나? 그녀는 나를 보면서 입술을 핥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질렸는지 용병들이 움찔 뒤로 물러섰다.

틈이 났으려나?

나는 빠르게 주변을 살피며 아드리아에게 물었다.

"설마 나한테 관심을 보였던 게 그 서자 때문인가요?"

"아! 그런 것도 있었지만.... 아니, 지금 그런 질문을 할 때야?"

아드리아는 내 말을 잘 받아 주었다.

말하는 동안, 나는 눈짓으로 계속 신호를 보냈다. 그녀도 대답하며 알았다는 신호를 보냈고.

셋.

둘.

하나.

"지금!"

내 말에 아드리아가 뒤로 몸을 날렸다.

슈악!

번개 같은 속도.

가속 능력이 빛을 발했다.

"멈춰!"

나는 놀라서 소리치는 여자 용병을 향해 달려갔다.

딱 봐도 이 여자가 이들의 통솔자이자 제일가는 실력자였다.

아드리아가 빠져나가려면 내가 이 여자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달려가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달려가는 속도에 맞춰서 들이마시고.

멈추었다.

그리고 몸속 깊은 곳에서 숨겨진 힘을 끌어올렸다.

지금은 마지막 한 수 같은 것을 남겨 둘 때가 아니었다.

솟아오른 힘, 마나를 온몸에서 풀어놓았다. 팔과 다리, 근육과 신경에.

좁았던 시야가 넓어지고, 답답하던 숨이 트였다.

시간이 느려지고, 적의 모습이 솜털 하나하나까지 보였다.

이것이 마나. 어린 내가 기사와 팽팽한 맞수가 될 수 있었던 힘이었다.

순식간에 적이 가까워졌다. 나는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놀란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팔이 움직이고, 검이 휘둘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검을 감싼 희미한 빛까지.

제길, 생각 이상의 실력자였다.

캉!

검이 튕겨 나왔다.

다행히 힘은 많이 밀리지 않았다. 검날도 깨지지 않았고.

다만, 체중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큭."

몇 발짝 밀린 나는 다시 검을 치켜세우고 적에게 달려들었다.

캉. 캉. 캉.

날아오는 검을 피하고, 피할 수 없는 검은 튕겨 내고, 가깝게 달라붙어 검을 휘둘렀다.

"넌 뭐야! 꼬맹이가 아니라 난쟁이였냐!"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설마 다른 종족도 있었나?

뭔가 오해를 받는 기분이었지만, 시간만 벌 수 있다면 어떤 오해를 받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날 선 줄타기를 하는 기분으로 여자 용병과 어느 정도 검을 섞은 뒤, 훌쩍 뒤로 물러섰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드리아가 도망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녀가 도망친 방향은 가속 능력을 쓰는 아드리아를 막을 만한 용병이 없었다.

아드리아라면 용병들을 제치고 도망쳤을 게 분명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였다. 후딱 틈을 찾아 빠져나가야....

빠르게 고개를 돌리다 나는 우뚝 멈추고 말했다.

아드리아가 달려간 방향으로 쓰러진 두 명의 용병이 보였다. 내 예상대로 아드리아는 훌륭하게 포위망을 빠져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용병들은 아드리아를 따라가지 않았다.

아드리아도 멀리까지 도망치지 못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렇게 좁을 줄 알았나. 그보다 까딱하면 일을 망칠 뻔했잖아!"

여자의 말에 대답하는 남자는 요새 아래에서 용병들을 지휘하던 자였다.

그는 두꺼운 팔로 아드리아의 목을 휘감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컥. 컥."

남자의 팔에 매달린 아드리아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나야 대장님만 믿은 거죠. 내가 대장님이 오는 걸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코를 두들겼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소설이나 영화처럼 되지는 않는 건가. 정말 생각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드리아를 감은 팔은 무척 두꺼웠다. 다른 쪽 팔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분명 처음 보았을 때는 저렇게 두꺼운 팔이 아니었다.

입고 있던 갑옷도 바지 빼고는 전부 벗어 버렸고, 우리처럼 온통 흙투성이였다.

조금 전 말과 저 모습.

"설마, 신체 변형?"

"오, 똑똑한데? 공작가에 너 같은 애가 있었나? 흠. 서자가 네 나이쯤이라던 것 같았는데...."

말 한마디를 꺼냈을 뿐인데, 상대는 바로 정답을 꺼내 들었다.

가짜 천재인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한 것 같았다.

하아, 이번에는 정말 운이 나빴다.

적은 능력도 알맞게 맞춰 왔고, 타이밍도 딱 맞았다.

"예언가라도 있는 거 아냐?"

답답해서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내 말에 남자는 묘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바로 명령을 내렸다.

"당장 저 녀석을 죽여!"

이어서 그는 아드리아의 목을 졸랐다.

"커억!"

"달아날 생각은 마라. 도망치면 영애의 목숨은 없다."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죽일 생각이잖습니까? 거기다 영애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실력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그 실력이면 분명 영애를 호위 중일 테지. 명예를 생각한다면 그냥 도망치지는 않을 거야."

그는 다른 팔에 새겨진 상처를 힐끗 쳐다보았다.

"요새 지하에서 만난 기사와 하녀도 목숨을 버려 가며 우리를 막아섰으니까."

"캭! 큭!"

아드리아는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미친 듯이 몸을 흔들었다.

"그럼 좀 더 놀아 봐도 돼요? 하마터면 밀릴 뻔해서 속이 얼마나 상했는지 몰라요."

"안 돼! 시간이 없다."

여자 용병이 혀를 차며 다가왔다.

곤란했다. 도망치는 게 정답이긴 한데, 쉽게 도망치지도 못할 것 같았고.

죽게 놔두고 도망치자니 잠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았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살 사람은 살아야지.

미안한 마음에 마지막으로 아드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드리아도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아드리아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컥. 컥. 도, 도망쳐!"

고마워요. 나도 그럴 생각이에요.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캭!"

아드리아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그녀는 크게 입을 벌리고, 혀를 깨문 것이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피.

피를 쏟으며 아드리아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쳇, 자결하다니."

놀란 남자가 아드리아를 던지고 내게 달려왔다.

뒤에는 여자 용병이 뛰어왔고. 용병들도 검을 치켜들었다.

"도망갈 생각이 없는 건가?"

내 앞에 멈춰 선 남자가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그때까지 바닥에 나뒹군 아드리아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하, 젠장.

괜히 쓸데없는 짓을.

겉멋에 겨워서 남에게 피해나 주고.

"얘 왜 이래? 아예 맛이 갔는데?"

여자 용병이 재미있다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그래. 이게 맛이 간다는 건가.

짜증이 나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영애가 쓸데없는 희생을 했군. 실력이 있어 봤자 아직 어린아이군."

남자가 검을 들어 올렸다.

"아까워라. 시간만 있으면 좀 더 가지고 놀 수 있었을 텐데."

여자 용병은 나를 보며 혀를 핥았다.

기분대로 한껏 어울려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물어볼 말이 남아 있었다.

"죽기 전에 하나만 묻죠."

"응?"

"두 사람은 어디 소속입니까? 그 서자라는 인간을 모시는 것도 아닐 테고."

침착한 내 목소리에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알 것 없다."

그가 다시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다행히 옆에 입이 가벼운 사람이 있었다.

"에이, 지금은 상관없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원래 소속은 말할 수 없고, 지금은 라팔마 백작 소속이지. 됐어?"

충분했다.

날 놀리기 위해 꺼낸 말일 테지만,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검을 휘두르는 남자와 웃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솜털 하나부터 눈썹 하나까지 잊지 않도록 머릿속에 새겨 놓았다.

절대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검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서걱.

시야가 뒤집히고 점점 낮아졌다.

숲과 하늘이 점점 흐려지고, 결국 어두워졌다.

완벽한 어둠.

적막.

그리고 빛이 쏟아졌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눈을 뜨자, 6살 아이의 작은 손이 보였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둘째 공작부인을 내보냈던 그날로.

나는 주먹을 쥐었다.

파랗게 질린 손. 하지만,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은 충분했다.

나는 미래를 바꿀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제23화

제23편 후작가로 갑니다 (1)

공작부인이 타고 있는 마차가 떠나고, 며칠 뒤에 엘레나 누나도 저택을 나섰다.

나도 미겔에게서 훈련을 받았다.

전과 다르지 않은 삶이었다.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변하지 않았고, 두 형제가 애써 외면하는 것도 똑같았다.

다만, 미겔은 나를 보며 다르게 말했다.

"저 말고 다른 기사에게 따로 배우시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실력이 갑자기 오를 리가 없는데...."

"끙, 그냥 천재라고 하기에는 검에 대한 이해도가 확연히 달라졌고."

나는 다시 어려지는 바람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답답했지만, 미겔은 전혀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몸은 6살 때로 돌아갔지만, 10살 때까지 받은 훈련과 실전 경험은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전과 똑같다면 되돌아온 보람이 없었다.

그 덕분일까. 전보다 훨씬 성장이 빨랐다.

검술을 이해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육체만 강화하면 되니 과거의 성장을 순식간에 앞지를 수 있었다.

전과 달리 기사단장도 얼굴을 보이고, 공작도 내게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머리만 좋은 줄 알았는데, 검술에도 천재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훈련 말고도 조사하고 준비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저번 삶에는 검을 배운답시고 주변 정세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10살도 안 된 꼬맹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만, 그 때문에 죽게 되었으니 남들 눈치를 볼 때가 아니었다.

우선 서재에 들러 왕국 역사에 관한 책을 모두 살펴보았다.

전에도 대부분 읽어 봤던 책들이었다.

다시 읽어 봐도 별 내용이 없었다. 왕국을 만든 용사에 대한 찬양과 그 피를 이은 왕가에 대한 칭송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내가 알고 싶은 현재 왕국의 상황에 대한 것은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여긴 신문이나 방송 같은 게 없으니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왕국의 현 상황 말입니까?"

미겔의 답은 예상보다 훨씬 처참했다.

"왕이 계시고, 두 아드님과 따님 한 분. 공작님과 다른 귀족분들이 있으시죠."

아니,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저는 기사입니다. 그 정도만 알면 충분합니다. 그보다 지금은 훈련 시간입니다. 훈련에 집중해 주시죠."

미겔의 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글쎄요. 기본적인 것은 말씀드릴 수 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으실 겁니다."

몇 가지 더 듣긴 했지만, 총집사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서기관에게서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건.... 제가 말했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입이 무거운 것 잘 아시잖아요."

내 말에 서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기름칠을 한 보람이 있었다.

"저희 왕국의 귀족은 크게 보면 둘, 좀 더 자세히 나눈다면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을 이었다.

"국왕 폐하께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는 국왕파와, 영지와 귀족들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귀족파, 크게 보면 이렇게 나뉘고요. 얼마 전부터 국왕파는 제1 왕자파와 제2 왕자파로 갈리게 되었습니다."

"국왕 폐하의 연세 때문인가요?"

"그렇죠."

서기관은 내 대답을 듣고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도 계시잖아요."

"어차피 고위 귀족과 결혼하거나 다른 나라로 가실 분이니까요."

이럴 때면 중세에 가까운 세상이라는 게 다시 한번 느껴졌다.

"그레시아 공작가는 제1 왕자 쪽이군요."

"오, 맞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죽기 전에 들어서 알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저희도 왕실 계보이니 국왕파일 거고, 정통성은 제1 왕자께서 가지고 계실 테니 제1 왕자 쪽을 지지하겠죠."

골수까지 정통 귀족인 공작이 다른 사람을 지지할 리가 없었다.

"잘 아시네요. 그레시아 공작가는 제1 왕자파입니다. 그래도 아직 폐하도 정정하시고, 왕자님들도 이제 막 성인이 되셔서 크게 갈리는 상황은 아닙니다."

그게 4년 뒤면 그렇지 않다는 거겠지. 제1 왕자파인 그레시아 공작가와 제2 왕자파인 이에로 후작가가 혼인으로 연합을 맺어야 할 정도로.

그런데, 그때쯤이면 귀족파도 양쪽 왕자에게 줄을 대고 있어야 하지 않나?

"혹시 귀족파의 수장이 따로 있나요?"

"네. 훌리안 데 카를로스 공국왕. 현 국왕 폐하의 동생분이시죠."

하, 개판이네.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공국도 그분이 직접 세운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꽤나 인기 있는 귀족인 모양이었다. 왕자들을 언급할 때도 시큰둥하던 서기관이었는데, 지금은 존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쨌거나 왕의 자리를 노리는 왕자 두 명과 귀족들을 모아 세를 이룬 삼촌.

결국 왕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세 명이었다.

그럼, 아드리아를 죽인 자들은 어디 소속일까?

"라팔마 백작은 어느 쪽이죠?"

라팔마 백작. 나를 죽인 자가 섬겼다는 귀족.

"라팔마 백작님은 조금 애매한데.... 옆 영지인 이에로 후작과 같이 제2 왕자파라는 이야기도 있고. 그래도 귀족파에 가까울 겁니다."

나는 서기관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런 사람이었나?

"정말, 잘 아시네요."

"하하, 천재를 가르치려면 아는 거라도 많아야죠."

6살을 한 번 더 살게 되니, 공부에서도 천재라는 별명을 계속 지니게 되었다.

아니 그보다, 서기관치고는 왕국 정세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가르치는 일 외에는 영지의 사무를 보는 평범한 서기관이었다.

그런 그가 왕국 정세에 대해 이토록 세세히 알고 있다니. 평범한 서기관도 마음속에 야망 하나는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젊은 서기관을 눈여겨보았고, 조금 전 대화를 가슴 깊이 담아 두었다.

서기관에게 정세를 들은 뒤에도 나는 틈틈이 사람들에게 물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왕국의 정세를,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영지에 대해.

그렇게 질문을 하고 돌아다니던 어느 날.

마누엘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나와 안 마주치려고 일부러 돌아가던 꼬맹이였는데, 오늘은 딱 중간에서 마주친 것이다.

12살짜리 마누엘을 보다가 다시 8살짜리 마누엘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한껏 비웃는 표정을 짓는 것이 무척이나 웃기고 귀여웠다.

"돌아다니면서 이상한 거 묻고 다닌다며? 조심해야 할 거야. 이야기 듣는 어머니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단 말이야. 요즘 예쁨 받는다고 너무 나대지 마."

아!

마누엘은 한껏 비웃는 어조로 말했지만, 나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잘못했다. 질문한답시고 너무 설쳐 댄 것이다.

사람들에게 왕국의 정세를 물으며 돌아다녔으니 오해를 받기 딱 좋았다.

특히 공작이나 마누엘의 엄마인 공작부인이 들었다면, 시몬의 자리를 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오해를 받을 때가 아니었다. 비슷한 오해로 몇 번이나 죽었는데, 그 고생을 다시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고마워, 형! 조심할게. 말 안 나오게 조심할 테니 걱정하지 마. 정말 말해 줘서 고마워!"

"어, 어, 어, 알, 알면 됐어."

마누엘은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짓고는 후다닥 도망갔다.

어느 정도 정보는 모았으니, 이제 자중할 때였다.

나는 계속 훈련을 받으며 이번에는 다른 조사를 시작했다.

마요르카 요새와 요새 지하에서 보았던 무덤의 문양에 대한 조사였다.

서재를 온통 뒤집어 놓으며 문양을 찾았고, 서기관들이나 사람들에게 문양과 요새에 관해 묻기 시작하니 어느새 내가 시몬의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은 가라앉았다.

사방으로 뻗치는 천재의 관심 정도로 여기게 된 것이다. 덕분에 괴팍한 천재라는 이야기가 나돌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마요르카 요새에 대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설화를 들을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문양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용사들이 사용했던 문양도 확인해 보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책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과거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귀를 계속 열어 놓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나는 드디어 미겔과 팽팽한 맞수가 될 수 있었다.

"이익! 이건 정말 말이 안 돼!"

미겔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미겔의 팔은 가득 부풀어 있었고, 얼굴은 벌겋게 변해 있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는 땅과 이어 놓은 마나가 흩어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미겔의 검과 내 검이 딱 붙어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몸무게 차이가 얼마인데 왜 안 밀리는 겁니까!"

그의 넋두리도 이해가 갔다.

키 차이도 확연하고, 몸무게는 무려 세 배나 차이가 나는데 내가 그의 검을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거야 새로 익힌 마나 사용법 덕분이었지만, 내 비밀을 말해 주지 않았으니 그가 분통을 터트리는 게 당연했다.

"그만하죠."

그가 뒤로 물러섰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기술입니다."

"하아, 기술이라니.... 그럼 제가 가르치는 것은 여기까지겠군요. 실력도 비등하고 제가 모르는 기술까지 사용하는데 제가 교관으로 있기는 무리죠."

이런, 공격이 제대로 들어왔다.

그래서야 곤란했다. 연습 상대가 달아나면 큰일이었다.

저런 호구를 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마나를 쓰지 않은 대결일 뿐이잖습니까. 마나를 얻는 법도 배워야 하고, 마나 심법도 배워야 합니다."

마나는 이미 얻었고, 마나를 사용한 대결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미겔이 모르니 문제없었다.

"그렇긴 하죠. 그래도 공자라면 금방 배워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마나 대결도 저를 이기실 겁니다."

이번에도 잘 먹혔다. 역시 내 훌륭한 호구 기사였다.

"어쨌거나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입니다. 기사단 소집이 있어서 가 봐야 합니다."

"무슨 일인데요?"

"며칠 뒤에 기사단장님하고 시몬 공자님이 이에로 후작가로 가신답니다. 그 일로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같이 갈 사람을 뽑고 업무를 재조정하려는 거겠죠."

이때였나.

드디어 기다리던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나는 미겔과 같이 저택으로 돌아온 뒤, 공작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들어오시랍니다."

더 늘어난 내 실력 때문일까.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들어가자, 공작이 펜을 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대우는 조금 달라진 것 같았지만, 찬바람이 부는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으니, 실망도 없었다.

"이번에 이에로 후작가로 가는 일행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암중으로 시몬 형의 경호를 맡겠습니다."

뜻밖의 말이었나 보다. 공작의 표정이 슬쩍 바뀌었다.

"흠. 쓸 만한 생각이긴 한데...."

예상대로였다. 공작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열심히 실력을 닦고, 티를 낸 보람이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책으로만 세상을 봤습니다. 이제는 밖으로 나가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으, 닭살이 돋았다.

정말 저택에 갇혀 지내는 꿈 많은 소년이 외칠 만한, 소름 돋는 대사였다.

"...그런가. 네가 9살이었지."

여태껏 무표정했던 공작이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길, 부끄러움이 배가 되었다.

"이유야 어쨌건 괜찮은 생각이군. 허락하마."

예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역시 공작은 냉철하고 합리적인... 쓰레기 같은 귀족이었다.

"그런데, 아만다에게는 말해 놓았겠지?"

"아...."

"네가 부탁한 거니 네 엄마한테 말하는 것도 네가 하도록."

망했다. 눈물짓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를 보는 공작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듯했다.

제24화

제24편 후작가로 갑니다 (2)

"인원은 여기까지이고, 총 인솔자는 우고 선임 기사다. 내일 출발이니 모두 준비를 마치도록."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의 말에 기사단원들은 힘차게 대답했다.

기사단장이 먼저 자리를 뜨자, 정렬해 있던 기사단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뜻밖이네요. 우고 선배님이 가시게 되다니."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던 미겔 기사가 우고 기사에게 말했다.

"글쎄, 뭔가 이유가 있으시겠지."

우고 기사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경호 업무라니.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특기는 경호 쪽이 아니었다.

"못 들으셨어요? 선배님이 가신다면 평범한 경호는 아닐 것 같은데...."

우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유가 있다면 알려 주셨을 것이다. 지금은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그보다 미겔, 너는 괜찮나? 다른 기사들이 조금 거리를 두는 것 같던데...."

"뭐, 어쩔 수 없죠. 진급을 생각한다면 미래의 주군도 생각해 두어야 할 테니까요. 뭐, 전과 다르지 않게 대해 주시는 선배님도 있으시니까요."

"...꽤 오래되었으니 이제 교체할 때도 되지 않았나? 한번 말씀드려 보지, 그래."

"제가 그만두면 선배님이 하실지도 몰라요."

"그런 지시가 내려온다면 따르면 그뿐."

그의 대답에 미겔은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하하, 아니에요. 말을 꺼낸 제가 잘못이죠. 뭐, 저도 아주 벅차서 바꾸어야 할 것 같긴 한데 교육생이 저를 놓지를 않네요."

"서자일 텐데.... 귀족이라고 말을 안 듣나?"

"이런, 말을 안 듣는 게 아니고요."

미겔이 슬쩍 주변을 살폈다. 두 사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르치기가 벅찹니다. 마나를 쓰지 않으면 저하고 맞수가 될 정도입니다."

"그게 무슨.... 지금 겨우 9살일 텐데."

"네. 겨우 9살이죠."

"설마, 성장 강화형 능력인가?"

"네. 육체 강화 쪽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9살이 그 정도라는 게 말도 안 되죠."

"그렇다고 해도, 이해 안 될 정도로 강한데...."

미겔은 젊은 기사 중에서도 상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기사와 동급이라니.

"육체 쪽 성장은 상속 능력 때문이라고 쳐도, 검술 실력은 저도 이해가 안 갑니다. 검술 이해력도 뛰어난 편이지만, 숙련도도 24시간 동안 검만 휘두른 것처럼 보일 정도니...."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고 들었는데, 검술도 마찬가지였나?"

"모르겠습니다. 귀족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천재라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건지...."

미겔의 말에 우고가 고개를 저었다.

"나름 잘하고 있다고 듣긴 했는데 그 정도라니. 그런데, 나는 그동안 그런 이야기를 왜 못 들었지?"

"선배님만 못 들은 게 아닙니다. 제가 입을 닫고 있었던 거죠. 다른 사람들도 조용했고요."

"왜?"

"괜한 분란이 일어날까 봐 그런 거다."

우고의 질문에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앗!"

미겔이 찔끔한 표정으로 정자세를 취했고, 우고도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대답한 사람은 기사단장이었다. 그는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 옆으로 다가온 것이다.

"제가 괜한 것을 물은 것입니까?"

"선배님이 물어보신 게 아니라 제가 알려 드린 겁니다."

두 사람 말에 기사단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성격도 영 다르면서 결과적으로 하는 짓은 별다를 게 없군."

착하고 충직하고. 둘 다 좋은 기사였다. 하지만, 앞을 생각하면 조금쯤은 때가 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우고라면 문제없겠지. 대단한 비밀도 아니니 어디 가서 일부러 퍼트리지만 않으면 돼."

"알겠습니다."

서자가 너무 실력이 뛰어나면 가문에 풍파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가게 된 후작가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었다.

하지만, 그레시아 공작 가문이야 공작님이 계시니 괜한 걱정일지도....

"아니, 우고가 아는 편이 더 좋겠지. 이번에 우고 네가 참가하게 된 것은 알렉스... 님의 추천 때문이다."

"네? 알렉스 님이요?"

기사단장의 말에 미겔이 놀라 외쳤지만, 우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저를 모르실 텐데요. 지나가면서 몇 번 보았지만, 따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습니다."

우고가 미겔을 쳐다보았다.

"저도 따로 이야기를 드린 적이 없었는데요. 아, 기사단을 궁금해하셔서 설명해 드린 적은 있었습니다."

그의 대답에 기사단장도 미겔을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그때도 선배님을 따로 칭찬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름만 나열한 정도였는데요."

"뭐, 이유야 나중에 들으면 되니까."

"그보다 둘을 찾은 것은 그 막내... 공자 때문이다."

기사단장은 먼저 미겔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가 후작가로 가는 일행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미겔은 돌아올 때까지 원대 복귀를 하도록."

"아, 넵!"

이어서 그는 우고를 바라보았다.

"우고는 그가 시몬 공자님의 비밀 경호를 맡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 두도록. 시몬 공자님에게는 비밀로 해야 하네."

시몬 공자가 동생, 그것도 서자의 호위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좋아할 리 없었다.

공작의 지시였지만, 기사단장도 우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기사단장이 미겔을 슬쩍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알렉스... 공자의 실력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네!"

두 사람을 보낸 뒤, 기사단장은 저택을 바라보았다.

반평생을 섬겨 왔던 공작가였다.

"왕국 분위기도 영 안 좋은데, 그래도 이번 여행은 조용히 마쳤으면 좋겠는데...."

비밀 경호라는 이유를 붙여 따라가기는 했지만, 실력을 드러낼 일이 없는 편이 좋았다.

뛰어난 서자가 등장한다면, 시몬 공자님의 자존심은 둘째 치고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왕국만큼이나 공작가도 시끄러워질지 몰랐다.

* * *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공작에게 말했던 사춘기적인 이유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모르고 있었지만, 그만큼 어머니는 내 안전을 두려워하고 계셨다.

어렸을 때 벌어진 독극물 사건과 암살 사건이 당신의 가슴속에 깊이 박혀 결국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알고 보니 내가 기사에게 훈련을 받는 것도 내 안전을 위해 받아들인 것이었다.

당신은 계속 반대하셨지만, 나도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의 실랑이 끝에 미겔까지 끌어들여 내 실력을 보여 드린 뒤에야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다 버리고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머니는 상행하는 외가 주소가 적힌 쪽지와 돈을 쥐여 주며 한 번 더 다짐을 시켰다.

"네."

저번의 삶이었으면, 무조건 따랐을 말이었다. 아니, 아예 집을 나서지도 않았을 게 분명했다.

아쉽게도 이번 삶은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긴 어려워 보였다.

'잠깐, 저번 삶에서 시몬 형이 후작가를 다녀올 때 별일이 없었지?'

내가 일을 벌이지 않는 한, 특별한 일 없이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일을 벌이러 가는 길이었다. 많이 소란스럽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번 여행은 요새 앞 나들이 때와 차원이 달랐다.

마차도 두 대가 넘었고, 수행하는 병력은 그때의 몇 배나 되었다.

기사단장과 우고 기사 그리고 10명의 평기사. 병사들도 수십 명이었다.

마차를 모는 고용인도 따로 있었고, 하녀들과 식사와 허드렛일을 해 줄 고용인들도 함께였다.

공작부인도 같이 가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 모양이지만, 저번 삶처럼 시몬 형의 반대로 같이 가지 않게 된 모양이었다.

어머니 품을 벗어나려는 사춘기 소년의 고집 덕분이었다.

대신 총집사가 가게 되었다. 공작도, 공작부인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노인이었다.

공작가 방계의 귀족이라고 들었는데, 모두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는 듯했다.

아무튼 그가 공작부인을 대신하기에 충분한 모양이었다.

일행의 출발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말을 타고 선두에 섰고, 병사들이 창을 세우고 그 뒤를 따랐다.

마차들이 병사들을 따라 이동했고, 나머지 병사들과 고용인들이 일행의 마지막 순서가 되었다.

저택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나와 일행을 배웅했다.

공작도, 공작부인도, 어머니도.

저택을 나선 뒤에도 메테나 시를 빠져나올 때까지 구경을 나온 영지민들의 인사를 계속 받게 되었다.

길 양옆을 메운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무척이나 장관이었지만, 아직 전생의 감각이 남아 있어서인지 조금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받는 인사가 아니라 공작가, 공작이 받는 인사라서 그런 것일까?

내가 받는 인사라면 조금 다른 기분이 들지도 몰랐다.

앞자리에 앉아 있는 시몬 형은 무척이나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정자세로 앉아 흐트러짐 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가끔 손을 흔들어 주는 그의 모습은 귀족의 표상 같았다.

가끔 표정이 꿈틀거리지 않았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어린 나이에 충분히 칭찬할 만했다.

조금은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일행은 도시를 벗어났다.

외성 문을 지난 뒤, 시몬 형은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수고하셨습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총집사가 시몬 형에게 잔을 내밀었다.

얼음물이 담겨 있는 유리잔이었다.

저걸 어디서 꺼냈는지, 어떻게 보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역시 총집사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시몬 형은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켰고, 그사이 총집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알렉스 님은 생각보다 무척 여유로우시군요. 마차 여행은 처음 아니신가요? 마치 여러 번 타 보신 것 같습니다."

전에도 한 번.... 아, 그 일은 없던 일이 되었지.

어쨌든 저번에 한 번 타 봤으니 새로울 게 없었다. 화려한 행렬이야 전생에 이것보다 대단한 걸 신물 나게 보았고.

"속으로 무척이나 놀라는 중이에요. 긴장하고 있는 걸 표시 안 내려고 하고 있어서일 거예요."

대외적으로 나는 형을 따라가는 별생각 없는 꼬맹이였다. 마음 넓은 시몬 형이 허락한 동생.

말투도, 행동도 그것에 맞게 해야 했다.

"아버지가 왜 허락하셨는지 모르겠지만, 함부로 행동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최대한 조심해라."

"네. 알겠어요."

내 대답에 시몬이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몬 형의 말도 그리 듣기 좋은 것은 아니었으니 어차피 피장파장이었다.

"그런데 이에로 후작가와 꼭 약혼해야 하나?"

시몬 형은 이번 여행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귀족이라면 가문을 위해 상대를 정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라? 저번 삶에서 보았던 시몬은 이렇지 않았는데?

"아드리아 영애 소문이 그리 좋지 않은 듯하고...."

아하, 아직 아드리아를 보기 전이었군. 아름답다는 소문 말고 다른 소문도 돌고 있었나?

"검술을 배운다는 소문 말입니까? 공작님도 시몬 도련님이 반대하면 강제로 진행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지가 내 말을 듣고 안 하실 거라고? 그럴 리가."

역시, 우리 공작님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초지일관한 그의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래도 뭐, 이번에는 시몬 형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할 리가 없을 테니.

시몬 형의 투덜거림을 흘려들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언덕 위에 버려진 요새가 보였다.

벌써 3년이 지났나? 아니, 1년이 남았나?

어쨌거나 저번에 보았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앞을 바라보았다. 선두에서 말을 몰고 있던 우고 기사가 요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천이 먹혀서 다행이야. 중간에 좀 친해진 뒤에 요새에 관해 물어봐야지.'

후작 영지까지 반달은 족히 걸리는 여행이었다. 왕복 길을 생각하면 시간은 충분했다.

전생이었으면 한나절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이쪽 세상은 보통 먼 게 아니었다.

마법 통신이라는, 거의 실시간 통신에 가까운 연락망이 있는데, 여행은 이 꼴이라니.

그게 다 대전쟁 이후 세상에 흩어진 마물들 때문이었다.

영지를 채 벗어나기 전 나는 처음으로 마물을 보게 되었다.

제25화

제25편 여행의 인연 (1)

옆 영지와의 경계로 삼은 숲 외곽에서 마물들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젠장, 중급 마물이다!"

"윽! 그쪽으로 간다!"

"뒤로 빠져! 기사님들이 상대하실 거야!"

"마나도 못 쓰면서 나대지 마!"

병사들이 방패로 마물들의 공격을 받아 내자, 기사들이 달려가며 외쳤다.

쾅! 쾅!

뒤이어 부서지고 터지는 소리.

시몬과 나도 급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두 분 다 저런 걸 보는 건 처음이시죠?"

뒤따라 내린 총집사가 우리에게 물었다.

"저게 마물인가?"

시몬이 기사들과 싸우는 것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들개, 아니 늑대인가.'

크기가 소형차만 해 들개는커녕 늑대로 보기도 어려웠지만, 생긴 것은 늑대를 많이 닮아 있었다.

아마 멀쩡했으면 커다란 늑대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기사들과 싸우는 두 마리 괴물들은 마물이라고 불릴 만했다.

반쯤 벗겨진 피부. 벗겨진 피부 아래로 드러난 근육에는 검붉은 피가 진흙 타르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머리와 가슴 같은 부위는 근육마저 파헤쳐져 뼈가 드러나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게임에서 보던 좀비견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크기는 몇 배나 컸지만.

'어떻게 살아 있는... 아니,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근육이 아니라 뼈만 연결된 상태로 움직이는 곳도 있을 정도였다.

기어 다니기도 벅차 보이는 모습이었는데, 마물들은 기사들을 상대로 열심히 날뛰고 있었다.

"언데드 울프다! 짐승형 언데드 대응 진형을 갖춰!"

우고 기사가 다른 기사들에게 소리를 쳤고, 기사들은 마물들을 상대하면서 빠르게 자리를 이동했다.

잠시 뒤, 언데드 울프라고 불린 마물들은 기사들이 만든 원형진에 갇히게 되었다.

설마 저게 언데드 마물인가? 마물에 관해 설명한 책이 그림책이 아니어서 이런 모습일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고름이 좀 있고, 무섭게 생긴 돌연변이를 생각했건만.

초대형 좀비견이라니, 이건 완전히 판타지 괴물이었다.

이래서야 스켈레톤 같은 건 정말 뼈다귀만 남은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내가 검을 들고 입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는 해골 군단을 상상하는 사이, 시몬 형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미 검을 손에 들고 있었다.

"참가하실 겁니까?"

뒤에서 지켜보던 기사단장의 말에 시몬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을 상대할 기회잖아. 놓칠 수 없어."

잠시 고민을 하던 기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조심해 주십시오."

기사단장은 앞을 향해 소리쳤다.

"왼쪽 놈은 시몬 공자님이 상대할 거다! 진형을 재조정해!"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의 말에 우고 기사가 대표로 대답했다.

우고 기사의 지시로 진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마물들이 계속 날뛰었지만, 차츰 거리가 벌어지더니 따로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다.

각각 다섯 명의 기사가 마물들을 포위했고, 시몬이 왼쪽 포위망 안으로 들어섰다.

"괜찮을까요?"

나는 기사단장 옆에 서서 그에게 물었다.

기사들이 포위망을 만든 채로 잘 싸우고 있었지만, 괴물에게 큰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휘두른 검은 마물들의 피부를 잘라내고 근육에 상처를 입혔지만, 이미 굳어진 피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괴물들의 움직임도 달라지지 않았다.

굵은 나무도 한 방에 잘라 버리는 기사들인데, 썩어 버린 것 같은 근육과 뼈를 잘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병사들이 창을 휘둘렀을 때는 상처도 안 났었나?'

그런 괴물을 시몬 형이 상대한다니 다른 기사들이 도와주겠지만 많이 위험할 텐데....

기사단장이 내 물음에 답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만나기 드문 중급 마물이지만 괜찮을 겁니다. 혹시 미겔에게서 못 들었습니까?"

"무얼요?"

"쯧."

기사단장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미겔이 뭔가 빠뜨린 모양이었다.

나중에 혼나게 될 미겔에게 위로를....

"그럼, 지금 보시죠. 왜 귀족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무뚝뚝한 말투에 분노와 서글픔이 느껴진다면 내 착각이었을까?

기사단장의 표정을 확인했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시몬은 반쯤 썩어 버린 거대한 늑대 앞에 서서 검을 치켜세웠다.

다른 기사들과 치받던 마물이 시몬을 쳐다보았다.

크아아앙!

늑대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뼈만 남은 턱을 벌려 으르렁거렸고.

곧이어 시몬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아악.

그 순간, 시몬의 검이 빛났다. 은은한 하늘빛. 검에 마나를 씌운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검에 마나를 씌운 채 싸웠었다.

마나를 씌운 덕분인지 병사들보다 상처를 많이 입혔지만, 치명상을 내지는 못했는데....

시몬은 전혀 겁먹지 않고 있었다.

죽기 전에 보았던 표정과는 전혀 다른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기사단장도, 기사들도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늑대는 입을 가득 벌린 채로 시몬에게 달려들었고, 시몬은 언데드 울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위험!

시몬이 소형차 크기의 늑대에게 뒤덮어 버렸다. 시몬의 머리는 늑대의 머리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서걱!

하지만, 다음 순간 늑대 머리가 기우뚱하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몸은 그대로 있고 머리만 떨어져 나간 것이다. 잘린 목에서 썩은 피가 꿈틀거리며 올라왔지만, 바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쿵!

뒤이어 머리를 잃은 언데드 울프의 몸이 반대쪽으로 쓰러졌다.

맙소사.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저렇게 강했다고? 분명 특별하지 않은 검이었는데. 저 정도면 기사 몇은 쉽게 이길 거 같았다.

하지만, 저번 삶에 보았던 시몬도, 지금 마물을 쓰러뜨린 시몬도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기사단장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장은 전과 달리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귀족들이 가진 상속 능력은 대전쟁 때 마왕을 무찌른 용사들의 능력을 물려받은 겁니다. 지금에서야 피가 옅어져서 약해지고, 일부만 물려받게 되었지만, 마왕이 이끌었던 마족과 마물들에게는 치명적입니다."

여러 가지 초능력을 가지게 된 히어로 같은 사람들을 용사라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 용사들은 대마왕, 대마족 특화 병기였나?

"마왕과 마족이 돌아간 지금도 남은 마물에게는 충분히 효과적입니다. 그 피를 쥐꼬리만큼 이은 저도 이렇게 기사단장을 하게 된 거고요."

무뚝뚝한 말 사이로 슬쩍 자괴감이 느껴졌다.

"공작님도, 시몬 공자도 저희 왕국의 시조이신 카를로스 용사의 마나 심법을 가지고 계시죠. 사람들을 상대할 때도 훌륭한 심법이지만, 마물 상대로는 몇 배 이상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일격에 목을 날릴 수 있었던 건가?

아직도 시몬은 마물 앞에 서 있었다. 첫 사냥의 흥분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쓰러진 마물 앞에 서서 빛나는 검을 들고 서 있는 시몬의 모습은 꽤나 멋져 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에는 환호성을 질러 줄 어린 소녀들이 없었다.

시몬이 무게를 잡는 사이, 다른 마물도 슬슬 마무리되는 중이었다.

내가 다른 싸움을 지켜보자, 기사단장이 물었다.

"알렉스 님도 싸워 보시겠습니까?"

다리 하나가 날아가 버린 마물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나도 제대로 못 다루는데요. 어차피 곧 정리될 것 같고요."

내 말에 기사단장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함정이 깔려 있었다.

내 주제를 아는지, 시몬에게 숨기고 있으라는 말을 기억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솔직히 내 마나가 통하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괜히 여기서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

쾅!

그때였다.

숲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반쯤 삭아 버린 늑대. 또 다른 언데드 울프였다.

울프는 멍하니 서 있는 시몬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포탄처럼 쏘아지는 언데드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나는 급하게 검을 던졌다.

팽그르르!

회전을 주어 던진 덕분에, 검은 언데드에 박히지 않고 검면으로 언데드의 몸을 때릴 수 있었다.

텅!

제때 마나를 실은 덕분일까. 검면에 부딪힌 언데드가 살짝 옆으로 밀려났다.

전생이었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마나를 쓴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마나 만세였다.

"헉!"

옆을 스치는 언데드에 시몬은 기겁을 했다.

멋졌던 모습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어린 소녀가 없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쿵.

어느새 달려 나간 기사단장이 바닥에 나뒹군 늑대에게 검을 휘둘렀다.

푸학!

뭔가 제대로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늑대의 머리가 박살이 났다.

"우와!"

나는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쥐꼬리만 한 능력이라며!

시몬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도 무척이나 놀란 모양이었다.

저게 쥐꼬리면 시몬은 정말 약한 거 아냐?

내가 그런 의심을 하는 가운데, 기사단장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는 머리가 박살이 난 마물을 살펴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죽었던 놈인데...."

그게 무슨 말이지? 언데드면 당연히 죽은 놈이잖아.

내 표정을 본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설명했다.

"제 검으로는 이렇게 부술 수 없습니다. 이리로 날아오기 전에 이미 망가진 마물입니다."

그의 말에 나는 언데드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나무들 사이에 건장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덩치에 안 맞게 단정한 얼굴의 남자였다.

그는 가죽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커다란 중검을 들고 있었다.

용병인가?

그는 미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거기까지 날아가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기사단장이 성큼성큼 걸어 내 앞에 섰다.

"귀족이십니까?"

기사단장은 먼저 그것을 물어봤다.

기사 혼자서 상대하기 어려운 중급 마물을 죽여서 날려 버린 남자였다. 아니, 죽이는 와중에 날아간 것일까?

아무튼 그 정도 실력자가 평범한 용병일 리가 없었다.

"귀족이긴 한데.... 가문에서 쫓겨났습니다. 땅도 가문도 없으니 평민으로 봐도 됩니다."

무슨 소리지? 귀족이면 귀족이지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평민이라니.

나는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기사단장은 아니었다.

기사단장은 나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혹시... 서자입니까?"

"네! 덕분에 평민과 다를 바 없답니다."

아, 그래서였나?

서자라니, 나와 같은 처지인 사람을 보게 될 줄이야.

"흥!"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몬은 자신이 놀란 것에 성질이 났는지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미 사과를 받았으니, 그의 성격에 화를 내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어, 도련님이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인데, 다시 사과해야 할까요?"

"괜찮습니다."

남자의 물음에 기사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요. 도련님이 깔렸는지 알고 깜짝 놀랐어요. 어려 보이는 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는 나를 보며 칭찬을 했다.

"덕분에 저도 살았어요. 겁이 나서 냉큼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니까요."

내가 없었으면 시몬이 저 죽은 마물에 깔리고, 남자는 열심히 도망쳤으려나?

전에도 느꼈지만, 나 때문에 달라진 상황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사이, 다른 마물도 정리가 되었다.

네 개의 다리가 다 잘려 나간 뒤, 장작을 패듯이 몇 번이나 머리를 패어 잘라낸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나는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말해도 되는 건가?

"이에로 후작가에 갑니다."

말해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단장의 말에 남자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무척이나 밝은 표정이었지만, 슬금슬금 불안이 떠올랐다. 뭐지?

"어, 그럼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그는 정말 기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쫓겨났지만, 이에로 후작가는 제 집이기도 하니까요."

제26화

제1편 여행의 인연 (2)

마르틴 데 이에로.

마물을 날려 버렸던 남자는 이에로 후작의 서자이자 아드리아의 배다른 오빠였다.

그가 합류를 원하자, 기사단장은 형식적이나마 시몬 형에게 허락을 구했다.

일행의 인솔자는 알론소 기사단장이었지만,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위치는 충분히 대접을 받을 만했다.

제대로 교육을 받아 온 시몬 형은 기사단장이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당연하게도 기사단장은 나에게는 묻지 않았다.

이에로 후작가의 서자가 말한 것처럼 귀족이지만 서자의 위치는 딱 그 정도일 뿐이었다.

뭐, 아직 10살도 안 된 어린아이이기도 했고.

어쨌거나 알론소 기사단장은 그가 같이 가는 것을 허락했다.

남자는 활기차고 사교적이었다.

그는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모두와 친해졌다.

그는 병사들과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기사들과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자이긴 하지만 귀족이 편하게 대해 주자 병사들도 기뻐했고, 혼자 마물을 해치운 것을 본 기사들도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시몬 형은 관심을 안 가지려고 했고, 기사단장과 총집사는 사무적으로 대했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금방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저번 삶에서 경험한 것이 있으니 아무리 그가 친절하게 대해 주어도 좋아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내가 서자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날아가는 마물을 검을 던져서 밀어내다니 웬만한 기사도 쉽게 못 하는 건데. 아까도 말했지만, 정말 대단했습니다."

기사들과 한바탕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나에게 다가와 서슴없이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반말하셔도 돼요. 근데 저보다 더 대단하시던데요. 검으로 그 마물을 그렇게 날려 버릴 수 있을 줄 몰랐어요."

나는 굳어지는 얼굴을 펴고 그의 칭찬에 감사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왔는데, 놓칠 수 없었다.

알아내야 할 것이 많았다. 집안에서 쫓겨났던 서자가 어떻게 사람을 모으고 권력을 차지했는지.

뒤를 봐주는 사람은 누구고, 저번 삶에서 우리를 죽였던 자들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의 실력과 약점을 알아내야 했다.

그를 죽이려면.

"말 놓아도 되려나...."

"네. 나이 차이도 있고, 둘 다 같은 처지인데요."

"그렇지. 같은 처지지. 그래, 편하게 지내자고."

역시, 친화력 만땅의 남자였다.

"그보다 내 실력은 전부 상속 능력 덕분이야. 실제 검술은 기사들에게 한참 못 미치는걸. 상속 능력 덕분에 이렇게 혼자서도 돌아다닐 수 있고...."

말하는 동안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뭔가 더 있는 것 같았다.

"아, 맞다. 나야 상속 능력 때문이지만, 알렉스가 보여 준 것은 검술이잖아! 기사들도 쉽게 하지 못하는 고난도 검술!"

그의 말에 나는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식사 뒷정리와 개인 장비 정리로 이쪽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싸우느라 못 알아차렸는데, 정작 마물을 날려 버린 사람은 내 실력을 제대로 본 모양이었다.

"딱 봐도 10살이나 그 아래로 보이는데, 그게 가능한 거야?"

"관련 능력을 얻어서 각성 때부터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 상속 능력이 그쪽이라.... 그래도 그 실력이 나올 수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르틴이 조금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훈련이라. 그레시아 공작가는 서자라도 제대로 키워 주는 곳인가?"

나는 주위를 신경 쓰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뭔가 쓸모가 있어서겠죠. 이건 비밀인데, 제가 왜 같이 왔겠어요?"

"아, 그렇군. 형제끼리의 여행이 아니었군."

그에게서 정보를 얻어 내려면 동질감을 심어 놓아야 했다.

전부 다 사실이니 거리낄 것도 없었고, 같이 온 이유도 공. 식. 적. 으로는 시몬 형만 모르면 그만이니 문제 될 건 없었다.

음, 문제가 생기려나? 에이, 아무도 안 들었으니 시치미 떼면 그만이었다.

"역시 귀족가는 전부 다를 바가 없군...."

"그러고 보니, 집을 나오셨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되신 거예요?"

나는 최대한 순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채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자, 슬슬 꺼내는 거다.

밤벌레들이 울고, 모닥불이 은은하게 불을 밝히는 중이었다.

좀 빠른 것 같았지만, 속내를 털어놓기에는 딱 좋은 분위기였다.

나는 순진하고 안쓰러운 표정을 최대한 유지한 채로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는 결심했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듣는 사람은 없겠지?"

없어. 내가 다 확인했어.

"알렉스도 비밀로 해 줄래?"

비밀을 지킬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뭐, 전에 말했다시피 집을 나온 게 아니라 쫓겨난 거야."

말을 하는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나름 도움이 되는 능력을 얻게 되어서 가문에 보탬이 되려고 열심히 살았는데, 그게 그만 다른 사람들에게 밉보인 거지. 뭐, 가문을 노린다나? 서자에게 가문을 물려주는 귀족가가 어디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

그의 말대로였다. 각성했더라도 서자가 가문을 이었던 귀족가는 왕국 역사에서 손에 꼽힐 정도였다.

하지만, 나도 어이없는 오해를 받아 죽은 적이 있었기에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뭐, 죽이지 않았으니 고마워해야 할까. 하지만 내 누이에게 한 짓은...."

말하는 도중에 그의 눈에는 섬뜩한 빛이 지나갔다.

빛은 바로 사라졌지만, 주위의 기운은 계속 분노를 담고 있었다.

"지금은 이 꼴이지만 언젠가는 갚아 줄 수 있겠지."

마지막으로 작게 중얼거린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해 주는 건 알렉스, 너도 조심했으면 해서야. 나이답지 않게 똑똑한 것 같으니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었겠지."

그의 말대로 무척이나 잘 알아들었다. 아니, 이미 죽음으로 깊게 새겨져 있었다.

아쉽게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르틴은 악당처럼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나를 어리게 보았기 때문이겠지만, 남에게 상처를 입은 뒤에도 다른 사람의 걱정을 해 주는 무척이나 좋은 사람이었다.

단지.

그가 원하고 미래에 행했던 일이 나에게 피해를 주었을 뿐이었다.

아드리아, 우고, 비앙카의 죽음과 나의 죽음이라는 큰 피해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죽음을 사이에 둔 적이 된 이상, 그의 정의는 나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내가 알아듣는 것처럼 보이자, 그는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

"아쉽군. 알렉스, 네가 조금만 더 컸어도 같이 일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어라, 이건 무슨 떡밥?

살짝 물어볼까?

"용병 같은 거 말인가요?"

"하하, 그래 보였어?"

"기사 같아 보이지는 않았으니까요."

"흠, 용병이라면 용병일까. 정식 등록한 것은 아니지만, 좋은 용병 동료들과 같이 일하고 있으니까 그게 맞을지도."

"와, 용병들하고 같이 일하세요? 무슨 일을 하는데요."

"하하, 영업 비밀이라 좀 더 커야 알려 줄 수 있어."

이런, 마지막에 와서 발을 빼다니.

그래도 저 용병들이 내가 아는 용병들이라면 의외로 쉽게 놈들을 찾게 될지도 몰랐다.

음, 가는 길에 틈을 보이면 죽일 생각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너무 빨리 마르틴을 죽이면 놈들을 놓칠지도 몰랐다.

뭐, 솔직히 여행 중에 몰래 죽이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여행 중 틈나는 대로 이어진 대련으로 그 생각은 더욱 확실해졌다.

퍽!

우렁찬 소리와 함께 머리 아래로 나를 올려다보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들 입장으로는 내가 지금 한창 날아가고 있었겠지.

쩝, 검술 실력이 뛰어나 봤자였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마스터들이 검을 들고 쫓아오겠지만, 힘에서, 체력에서 이렇게 차이가 난다면 기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 또래, 아니 기사급에 가까운 내 검술로도 그에게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사실 검술 실력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검을 부딪치지 않고 안쪽으로 파고들어야 하는데 그럴 정도로 그와 차이가 나는 실력은 아니었다.

덕분에 매번 대련 때마다 검에 맞아 이렇게 하늘을 날게 되었다.

뭐, 검에 마나를 싣는다면 이 정도까지 밀릴 이유는 없겠지만, 나중에 제대로 상대할 때를 위해 숨겨 놓아야 했다.

그리고 열심히 진 덕분에 그의 검술과 힘을 대충은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쿵.

"아야!"

한참을 날아 바닥에 나뒹구니,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하, 이번에는 그래도 오래 버티셨습니다."

"날아가기는 더 멀리 날아갔지만요!"

기사들이 웃으며 일어나는 나를 놀려 댔다.

병사들은 차마 나를 놀리는 데 참여하지 못했지만, 모두 고개를 돌리고 피식피식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대련할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친화력이 만땅인 마르틴과는 금방 친해진 기사와 병사들이었지만, 처음부터 나를 무척이나 껄끄러워했다.

나는 공작의 자식인 데다 서자였다. 그것도 나름 쓸모가 있는 서자.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려울 만했다.

하지만, 그들 앞에서 이렇게 대련을 계속하고 깨져 나가자, 나에 대한 거리감이 많이 없어지게 되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나름 귀여운 얼굴 그리고 애교 스킬까지.

거기다 지금처럼 놀리는 말을 해도 그냥 쿨하게 넘어가는 모습에 그들의 경계심이 허물어진 것이다.

다행히 기사단장도 뭐라 말하지 않았고, 총집사도 내 행동을 따로 지적하지 않았다.

시몬 형만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서자인 내 위치를 생각했는지 인상을 쓸 뿐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동과 대련을 이어 오는 사이, 어느덧 후작가 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다른 영지 4곳을 거친 먼 여행.

다른 영지를 지나는 도중에 영주 성에 들러 달라는 사절이 오기도 했지만, 공작의 행차가 아니라는 핑계를 대고 곧장 후작가로 향할 수 있었다.

여행하는 동안, 여러 번 마물을 만나게 되었다.

전부 시체처럼 보이는 괴물들이었다. 하지만, 처음 만났던 마물들처럼 강한 괴물들은 아니었다.

기사 혼자, 어떨 때는 병사들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했던 마물들이었다.

"언데드 울프가 매번 등장한다면 영지 간 상행이 가능할 수가 없지. 기사급 용병들을 매번 대동하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마르틴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마르틴과는 여행하는 동안 무척 친해졌다.

매일 대련하고 이야기도 자주 나누게 되니 친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헤어질 때까지 더 이상의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

물론 나도 쓸데없는 이야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는 후작가가 있는 도시의 외성 앞에서 일행과 헤어졌다.

"일 년쯤 뒤에 보자고. 멋진 모습으로 나타날 테니까."

일일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그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일 년까지 갈 필요 없죠. 곧 만날 겁니다."

그는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그가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자, 모두 기다리고 있으실 겁니다. 빨리 들어가죠."

총집사의 재촉에 일행은 외성문을 지나 도시를 가로질러 영주 성으로 향했다.

공작가 저택과 달리, 후작가는 성에 살고 있었다.

내성문 앞에서 병사들과 헤어진 우리는 기사들과 함께 내원을 가로질러 성 입구에 도착했다.

주위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배경으로, 멋지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부 모르는 얼굴들이었지만, 한 명은 아는 사람이었다.

전에 보았을 때보다 조금은 어려 보이는 소녀.

아드리아가 새침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2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