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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7

17화

마법대학

총수입 14,600골드.

비르타넨 파티의 용역비는 별도로 제하고 우리가 모아온 잡템들의 처분 수익금 총합이다. 각종 마석과 잡템들에 출구 보스로 판정되는 백어택의 소지품들까지 처분한 값.

그러니 용역비까지 합치면 2만이 넘는 금액이었고, 웬만한 미궁 1층 4인 파티의 1회분 수익에 필적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예르닐의 몫은······.

"20%."

조교는 금화더미에서 2,920골드를 떼어냈다.

"예르닐의 몸값은 3,000골드이고, 앞에서 용역비 5골드를 포함해도 2,925골드. 약간 모자라는군요."

아! 이런 미친!

어쩐지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더라니!

예르닐! 너도 이것저것 꽤 많이 하지 않았니? 아니 왜 20%밖에 안 나오는 거야!

"2,920골드요······?"

예르닐은 낯빛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그렇습니다. 예르닐. 실망스러우십니까?"

"······."

"예르닐의 수입은 마법대학의 노예관리부서 역사상 모든 미궁 1회차 수입을 통틀어서 상위 0.1%입니다."

조교는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원래 미궁에 들어가는 노예 파티는 90%가 전멸해요. 그리고 살아나오는 10%의 평균 수익은 겨우 4,000골드 안팎이에요. '팀 단위'에서 말입니다."

그 이유는, 애초에 노예 파티 중에서 미궁에서 파밍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들 부족한 물자 속에서 생존하려고 아득바득 애를 쓰거나, 포기해버린 상태로 대머리 파티처럼 헤매다가 우연히 출구룸을 찾는다.

그리고 필사의 전투를 벌인 후에 몇 명 죽고 가까스로 탈출.

대부분은 운빨이며, 실제 수입이란 것도 출구보스로부터 얻은 마석과 사체값 정도가 끝이다.

그래서 밖에 나왔을 때 그들 수익의 총합은 겨우 4,000 골드 정도에 지나지 않고,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금액도 초라한 것이다.

"보통 500에서 1,000골드 사이."

확실히 그 평균값에 비춰보면 한 번 미궁 탐험으로 3천 골드 가까이 벌어온 예르닐은 상위권이 맞다.

"당신 수입이 평균을 한참 웃돌게 된 이유는, 케일럽의 전략에 발 빠르게 움직여준 수행 능력 덕분입니다. 독화살을 제작하고 정확히 쏴서 백어택에게 큰 피해를 입힌 점, 사운드맵핑 재주를 이용해 다른 노예 파티의 추격을 간파한 점, 고블린 주술사의 위치를 찾아내고, 투명 상태의 백어택을 포착한 점. 그 값이 2,920골드예요."

조교, 제이콥은 딱딱하고 사무적인 사람이었다.

"마법대학에서 노예들을 미궁에 보내는 것은 범죄자들에 대한 일종의 형벌을 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노예의 몸값은 절대로 타인의 호의로 증여받을 수 없고, 미궁에서 누군가에게 업혀 갈 수도 없습니다.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번 돈이 본인의 몸값을 초과하여, 사회에 득이 됨을 증명할 수 있는 경우."

제이콥이 말했다.

"오직 그때만 자유민이 될 수 있어요. 위에서 제가 얘기했던 예르닐의 능력 값은 2,920골드. 당신이 다른 평범한 파티로 다시 미궁에 들어갔을 때, 기대해볼 만한 수익도 그 정도란 뜻입니다. 제가 볼 땐 적절한 평가금입니다. 케일럽의 경우에는 나머지 금액 이상을 일반 파티에서 벌어올 수 있다고 평가되는 것이고요."

"네······."

"여기에는 모험 전체의 설계 능력과 희생정신 같은 게 포함돼있습니다. 파이를 키운 게 케일럽이고, 백어택과의 전투에서도 케일럽이 목숨 걸고 희생했죠. 냉정하게 얘기해서, 예르닐은 독화살 두 발 쏜 게 전부입니다. 쏘라고 지시할 때 말이에요. 대체 가능한 포지션이란 게 그런 겁니다."

아니 조교야.

그래도 그렇게 말해버리면 어떡하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익 분배 비율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시다면, 지금 항변하십시오."

마치 재판정에서 피고에게 최후 변론 기회를 주는 FM 판사 같다.

"어, 없어요······."

불쌍한 예르닐은 풀이 잔뜩 죽었다. 얼굴을 빨개졌고.

어쩌면 그녀는 미궁 내 수익이 당연히 5대5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보통 모험가들은 똑같이 나누는 걸 표준 계약처럼 사용하니까. 드워프도 나한테 25% 어쩌고 했었잖아.

그래서 아마 예르닐은 우리 둘 다 자유민이 되어서 같이 술집에서 귀환주라도 한 잔 주고받는 낭만적인 장면을 상상했을 것이다.

어쩌면, '저는 노예 탈출로 족해요. 케일럽. 나머지는 전부 케일럽이 가지세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같은 대사를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근데 막상 뚜껑 까보니까 갑자기 조교가 찬물을 끼얹고 얼음송곳을 박아버린 거지.

용역비에서 네가 이쑤시개 두 발, 조명 화살 한 발 날린 것은 기여도로 치면 '5'골드 수준이란다.

······로 시작된 조교의 저울추 칼부림은 너무 날카로웠고, 아마 예르닐 성격상 지금 엄청나게 창피할 것이다. 그래서 얼굴이 빨개졌겠지.

자기 능력과 기여도를 과대평가해버린 자의식 과잉, 그리고 팀원의 몫으로 자유민이 되고자 했던 파렴치한 마음씨(?)에 대한 자괴감. 추가로 미궁에 다시 처박힐 생각에 밀려오는 공포까지.

오.

아주 끝내주는 기분이겠는걸?

그러니까 조교야.

그만 좀 때려······.

"제가 볼 때는 사실 케일럽이 진술을 공격적으로 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예르닐 몫을 배려해주신 것 같군요. 이 점까지도 파티 운이 좋았음을 명심하십시오."

"네······."

가스라이팅이 완료된 예르닐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음.

내 몫이 커진 것은 좋다만, 이 저울의 평가 시스템이 진짜 맞는 건가?

잘 모르겠다.

솔직히 저 마법 저울 자체가 맘에 안 든다. 서로 믿고 최선을 다하고 25%씩 나누는 비르타넨 파티가 더 멋있는걸.

달칵.

조교는 문을 살짝 열고 바깥에 있는 말단 마법사에게 지시했다.

"예르닐을 노예 숙소로 데려가."

***

이제 예르닐은 어떻게 되는가?

게임에서는 자유민이 되지 못한 노예는 둘 중 하나다.

완드를 가지고 클리어한 경우에는 마법 재능이 있다고 판단되어 마법 대학 입학.

예르닐처럼 다른 무기를 가지고 나온다면 모험가 길드에 판매된다.

과연 여기서는?

"모험가 길드에 팔 겁니다."

조교에게 확인해보았더니 내가 아는 그대로였다.

그럼 됐다. 나중에 모험가 길드에 가서 만나면 되겠군.

"그보다 케일럽."

조교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법대학에 입학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노예 마법사라면 이 과정이 간단하다. 마법대학 노예에게 제공되는 인프라는 빈약하기 짝이 없으므로, 따뜻한 방과 균형 잡힌 식사 같은 걸로도 충분히 영입할 수 있다.

물론 완드 한 자루 감자 한 알 주고 미궁에 처박아서 사지를 헤쳐나오게 만든 놈들이니 감정이 좋을 리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입학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 측의 갱생과 세뇌를 거치면서 천천히 진짜로 마법사가 되는 것이지.

그러나 나는 이제 노예가 아니다.

또한, 나는 무영창과 초고속 시전 재능에다 2인조로 백어택을 뚜까패고 나와버린 희대의 천재 마법사로 데뷔한 참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케일럽 같은 경우는 장학생으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갑을관계가 바뀌었군.

그 사무적이고 딱딱한 조교 제이콥이 한쪽 다리를 정서불안처럼 떨기 시작했다.

애초에 마법대학이 미궁에 노예들을 던져넣은 후에 인재들을 선별해서 마법사로 양성하는 이유가 마법사 숫자를 늘리기 위함이다.

적어도 게임에서는 그러했다.

미궁의 분출로 인해서 엄청난 인명 피해가 났고, 특히 마법사가 대규모로 사망했기 때문에 급하게 머릿수를 채우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놓칠 수 없겠지.

"입학하면 어떤 점이 좋나요?"

"모든 면에서 전부요. 일단 케일럽 같은 경우에는 마법 재능이 출중······."

쾅!

갑자기 소회의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면서 빨간 머리 인간 여자와 연세 지긋한 하플링이 나타났다.

여자 쪽은 미궁을 나왔을 때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던 조교다.

그리고 하플링은······.

"교수님!"

제이콥이 벌떡 일어났다.

"이 친구인가?"

하플링 마법사는 굉장히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키 차이 때문에 올려다볼 때는 목을 거의 끝까지 젖히면서.

"반갑네. 나는 마법대학의 부교수, 멜디니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이딴 브로셔는 집어치워!"

그는 제이콥이 줬던 브로셔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기숙사가 어쩌고, 장학금이 어쩌고, 커리큘럼이 어쩌고. 다 필요 없네."

난 필요하긴 하다.

일단 당장 잠잘 곳도 없다고.

"우리처럼 피가 뜨거운 진짜 마법사들을 움직이려면 이런 걸로 안 되지. 좀 더 인류 전반을 위한 숭고한 목적을 제시해줘야지. 그렇지?"

멜디니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이콥은 망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마를 탁, 쳤고, 빨간 머리 조교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법사의 사명이란 무엇인가? 사라진 마법을 발굴하는 것? 미궁 몬스터의 퇴치하는 것? 새로운 마법서 결속법을 개발하는 것?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멜디니는 충격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바로 '미궁의 심연'이라는 게임을 통해 넘어온 이세계 빙의자들을 척결하는 것이지!"

시발.

이 하플링 교수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부디 내가 방금 표정 관리를 잘 했길 바랄뿐이다.

침착하자, 침착. 당황하면 끝장이다. 천천히 숨 쉬자.

"자네에 대해서 노예 관리부서에 남아있는 자료를 살펴보았네. 그리고 자네가 어쩌다가 살인 전과를 갖게 됐는지도 알아보았지. 멀리 동쪽 미궁 도시 '윈덤' 출신이라지? 본래 미궁 모험가였고."

"······."

"그리고 재판정에서 그렇게 주장했다며? 자네가 죽여버린 그 동료가, 알고 보니 미궁의 심연에서 넘어온 빙의자였다고-."

뭐?

"그리고 자네가 제출한 증거들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네. 내가 만약 그곳의 판사였다면 자네에게 무죄를 선고했을 거야."

"······."

"윈덤 시민들을 대표해서 자네의 숭고한 희생과 용감한 결단에 감사를 표하는 바이네. 만약 자네가 그 동료를 처치하지 않았다면······."

멜디니가 말했다.

"윈덤의 미궁은 분출했을 거야."

***

교수님 말씀을 요약해보면 대강 다음과 같았다.

게임 미궁의 심연을 하다가 여기에 빙의되어 인생 조진 사람은 나 말고도 꽤 있다.

그리고 그들이 미궁에 2주 이상 들어가지 않을 경우.

가장 가까이에 있는 미궁이 분출한다.

그러면 미궁의 거의 모든 몬스터들, 심지어 마스터 플로어에 서식하는 심연의 몬스터들까지 올라오는 것이다.

당연히 지상은 초토화.

꽤 오래전부터 벌어지던 기현상인데, 그 원인을 추적하던 마법사들은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아냈다.

지상에 올라온 심연의 몬스터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

마치 공통된 표적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표적이란 바로 이세계 빙의자다.

"어째서 미궁이 이세계 빙의자들을 척살하려 그토록 애쓰는지는 알 수 없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심연의 몬스터들이 반드시 그 표적 하나만큼은 무조건 제거한다는 사실일세."

자유민 신분을 획득한 후에 지상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는 없을까.

나의 그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미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궁은 돈이 되는 곳이지만, 분출 위기는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위협적일세. 그걸 방지하기 위한 최선책은 결국-."

그리고 지상은 미궁보다 더 위험하다.

"빙의자를 우리가 먼저 찾아내서 제거하는 거야."

내 과거사의 기막힌 부분도 거기에 있다.

"자네는 이미 빙의자를 죽였어. 그것도 몇 년이나 동고동락한 동료를."

그 요호족 여자와 나는 무슨 관계였을까?

미궁 모험가로 몇 년이나 보냈다면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세계 빙의자는 미궁 분출의 원인이 되며, 따라서 제거 대상이라는 사실을.

그러니까 그녀의 정체는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는 중요한 비밀이었을 것이다.

근데 어쩌다 나한테 들킨 걸까?

설마 나를 동료로서 믿고 고백했는데 배신당했다, 같은 끔찍한 이야기는 아니겠지?

거기도 4인 파티였을 텐데, 나머지 다른 동료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게 지금 어떤 감정을 갖고 있을까?

머리 터지겠네 쓰발.

"케일럽."

차라리 백어택이랑 싸울 때가 마음은 편했다.

"내가 이끄는 마법대학 빙의자 색출 클럽에 들어오게. 우리 도시의 모든 빙의자를 제거하고 도시를 지키자고."

"······."

"설마 자네가 빙의자는 아닐 것 아니야? 하하하! 안 그래? 자네 혹시 빙의자인가?"

교수가 농담조로 물었다.

하마터면 따라 웃으면서 아니요, 라고 거짓말할 뻔.

'했으면 죽었다.'

왜냐면 아직 내겐 거짓말 방지 마법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

큰일이다.

이건 외통수다. 모래시계를 켜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

딱 벌어진 악어의 아가리 속에 머리를 넣는 서커스 쇼를 하고 있는 기분이다.

내가 뭘 실수했을까?

신전에서 일어났을 때 여기로 바로 온 게 잘못이었나?

엠마를 통해서 이세계 빙의자들에 대해 좀 더 조사하고 왔어야 했나?

아니지. 그랬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괜한 정보를 들쑤시고 다닌 걸 수상쩍게 여길지도 모른다.

아예 미궁에서 나온 것부터가 미스였나? 그 안에서 바깥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수집하고 나왔어야 했나?

아니, 지금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 하플링이 나한테 한 번이라도 대답을 재촉했다간 끝장이다.

이 상황을 그냥 웃어넘길 수 있을까?

내가 너희 클럽에 들어가겠다고 대답하면 그냥 넘어가줄까? 오히려 자기 팀이니까 빙의자인지 확실하게 검증하려고 할까?

살얼음판 위에 서있는데 실시간으로 바닥이 쩍쩍 깨지는 걸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그때.

똑똑.

누군가 노예 관리부서의 문을 두드렸다.

마찬가지로 미궁에서 막 나왔을 때 보았던 그 마법사였다. 아마 이름이-.

"클로렌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클로렌스는 하플링 교수와 인사하고는 조교들에게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문밖에서 케일럽이 나오길 기다리다가, 의도치 않게 엿듣게 되었습니다. 교수님. 그런데 벌써 클럽 영입을 하시는 것은 조금 빠르지 않습니까?"

"좋은 작물을 수확하려면 파종할 때부터 씨앗을 손수 골라야지."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케일럽."

클로렌스가 말했다.

"지금 결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법 대학에는 여러 클럽이 있어요."

"이실로프 교수님도 이 친구한테 관심이 있으신가?"

하플링 교수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빙의자를 색출하고 제거하는 데, 무영창에 초고속 시전 재능이 필요한가요?"

"······."

"미궁 탐험에 더 특화된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케일럽. 미궁 탐사 클럽에서 당신을 초대하려 하는데, 이실로프 교수님과 면담해보시겠어요?"

"아-."

뒤에서 이야기를 쭉 듣던 조교, 제이콥이 나와 클로렌스 사이로 끼어들었다.

"왜 교수님들께서 이렇게 앞서 나가시지? 아직 입학 서류도 안 찍었어요. 안 그래? 클로렌스. 이래서야 이 친구가 겁먹어서 입학하겠어?"

"······. 미궁에서 혼자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동료와 함께 백어택에게 도전할 정도로 용감한 사람이잖아요?"

클로렌스가 말했다.

"같은 맥락으로 그만큼 동료애가 출중한 사람이니, 빙의자라고 직접 동료를 살해했을 때 얼마나 상심이 컸겠습니까. 굳이 비슷한 업무를 맡아서 상처를 들쑤실 필요가 있을까요."

클로렌스는 제이콥 옆으로 내 손을 잡아서 슬며시 끌어당겼다.

"이실로프 교수님을 한 번 뵙고 가시죠? 자유민이 되신 케일럽."

나는 그의 손길을 따라서 최대한 침착하게 바깥으로 나왔다.

일단 지금은 저 하플링 옆에서 탈출만 시켜주면 미궁에 다시 가라고 해도 갈 것 같은 기분이다.

진심 저 새끼가 백어택보다 백 배는 무섭거든.

철컥.

부드럽게 닫히는 노예 관리부서의 문 너머.

-어린 게 건방지게 따박따박 받아치긴.

하플링이 나지막이 내려놓는 분노가 들렸다.

18화

마법대학 (2)

복도로 나오면서 머리가 식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까는 좀 멘붕이었다만, 지금은 적절하게 행동했다는 생각이 든다.

긍정도 부정도 없이 그냥 잠자코 있었던 것 말이다.

하플링 교수가 빙의자를 색출해서 제거하는 데 혈안이 된 것을 볼 때, 아까 전의 문답 자체가 날 대상으로 파놓은 함정이었을 공산이 커 보인다.

그 근거 첫 번째.

하플링 교수는 너무 급해 보였다.

내가 아직 입학을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50년대 매카시즘 광풍 속의 미국 정치인처럼 반공 연설을 좔좔 늘어놓고 은근슬쩍 나한테 '너 빙의자니?'

하플링은 왜 그렇게 급했는가?

거짓말 방지 마법이 풀릴까 봐.

풀리면 새로 걸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닐지도 모른다.

근거 두 번째.

그 편리한 마법을 쉽게 쓸 수 있다면, 애초에 윈덤에서 요호족 빙의자가 몇 년씩이나 미궁을 해먹은 게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내가 직접 요호족 동료를 살해한 것은 더 이상하고.

왜냐? 그냥 신고하면 끝이니까.

신고만 하면 알아서 재판정에서 요호족 빙의자를 잡아다가 거짓말 방지 마법을 걸어놓고, 너 빙의자니? 물어봤을 것이다.

근데 그렇게 간단한 길을 놔두고 왜 나는 그녀를 직접 살해했는가? 그 때문에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고 노예 신세로 전락하기까지 하면서?

'거짓말 방지 마법에 제약이 있는 거야.'

시전 자체가 어렵다거나, 의료용 마리화나처럼 허가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있다거나.

또는 인게임에서 마법의 등급이 낮을수록 실패확률이 커지듯이, 거짓말 방지 마법도 시전할 때 대상이 집중하면 쉽게 저항할 수 있다거나.

정확히는 몰라도 자유민에게 거짓말 방지 마법을 쓸 때는 상당한 제약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플링 교수는 내가 노예 신세일 때 기여도 평가 작업을 위해서 그 마법이 걸린 틈을 노렸다.

평가 작업이 끝나고 입학 상담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급하게 쳐들어왔다.

그리고 우리 모두 빙의자를 쳐죽이자며 일장연설을 늘어놓다가, 말미에 은근슬쩍 웃으면서 너 빙의자는 아니지?

그 신문법 역시 교묘하다. 거짓말 방지 마법에 논란이 많다면 나를 대놓고 신문하는 게 법적으로든 도의적으로든 본인에게 리스크가 될 수 있으니까 은근슬쩍. 기여도 평가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농담처럼.

'쓰벌. 진짜 눈 뜨고 코 베어가는 곳이네.'

만약 내가 당황해서 아니오, 대답했다가 마법이 발동했으면 그대로 처형했겠지?

그리고 발동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좋아. 너 우리 클럽에 들어와라?

'열 받네, 진짜.'

아까 모래시계를 뒤집을걸 그랬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니까 최대한 아꼈던 것인데, 만약 아까 모래시계를 뒤집었으면 20초 이내에 여기까지 추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활로도 찾았겠지.

그 상황에 활로가 있었느냐?

있었다.

오히려 불쾌한 표정으로 블러핑하는 것이다. 존나 세게 허세를 부린다. 나는 함께 동고동락했던 요호족 동료를 내 손으로 죽이고 온 사람이라고. 감히 나를 떠보지 말라고.

그래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내게 거짓말 방지 마법이 남아있는 시간을 노려서 유도신문을 벌인 그쪽이 켕길 일이지, 나한테 문제가 될 게 없으니까.

게다가 마법사 영입에 목마른 것은 대학 측이므로, 거칠게 나가면 저쪽에서 당황했겠지.

거짓말 방지 마법이 남용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지속시간이 끝날 때까지만 버티기만 하면 끝.

그렇게 간단한 걸 생각하지 못해서 사선을 넘나들었다니!

내 부족한 영악함에 새삼 화가 치민다.

정신 차리자. 케일럽.

미궁을 나오자마자 긴장이 풀려버리기라도 한 거야?

인제 보니까 미궁 바깥이 훨씬 더 위험하잖아! 정신 똑바로 차리자.

좆됐다 싶으면 일단 모래시계를 돌리고 생각하자고. 너무 아끼다가 똥 된다.

찰싹찰싹.

나는 아빠들이 스킨로션을 바를 때처럼 양쪽 뺨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정신 차리도록.

아.

생각해보니까 훨씬 강력하게 카운터 치는 방법도 있었다.

다음에 하플링이 또 빙의자 어쩌고 나불대면 이걸로 박살을 내버려야지.

"케일럽."

갑자기 클로렌스가 걸음을 우뚝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네."

"인사가 많이 늦었습니다. 저는 졸업반 마법사 클로렌스라고 합니다."

그가 정식으로 인사했다.

"반가워요."

"제가 멜디니 교수님은 좀 불편하다 보니, 빨리 멀어지고 싶은 마음에 말없이 쭉 걷기만 했네요."

"······."

"근데 거짓말 방지 마법이 걸린 상태로 대화하는 것 자체가 신의를 아는 마법사로서 예의는 아니죠."

"그 마법을 싫어하시나요?"

"모든 마법사가 싫어합니다. 매우 무례하다고 생각하죠. 법적으로도 아무한테나 쓸 수 없고요. 대학 내에선 노예 팀의 기여도 평가 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하지만 이제 케일럽도 슬슬 그 마법이 풀리셨겠죠."

"네."

확실하다. 왜냐면 거짓말 방지 마법에 걸렸을 때는, 혓바닥이 꼭 치과에서 마취한 것처럼 둔감해졌는데 지금은 다 돌아왔거든.

"그럼 정식으로 먼저 감사 인사부터 드립니다. 케일럽. 저는 당신이 구해주신 애비슨의 큰 형입니다."

어쩐지 약간 닮았더라.

"덕분에 애비슨의 시신을 쉽게 찾았습니다. 만약 케일럽이 아니었다면 제가 직접 들어가서 찾을 생각이었는데 말이에요."

"직접 들어오려고 하셨다고요?"

"네, 비르타넨 파티와 함께요."

"졸업반 마법사가 1층까지 올 줄이야."

애벌레가 죽고 몬스터 웨이브가 터지면 비르타넨 같은 1, 2층 파티는 그걸 뚫고 들어가서 백어택을 잡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목숨 걸고 싸운 건데 졸업반 마법사가 오는 줄 알았으면 그냥 어디 구석에 짱박혀서 존버할걸. 젠장.

"몇 층에서 주로 활동하세요?"

"5층입니다."

"5층 마법사를 1층까지 소환하다니, 애비슨 혈연이 엄청나네요."

"케일럽에겐 학연이 생겼죠."

클로렌스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악수하며 대답했다.

"저 아직 입학 안 했는데요."

"······!"

클로렌스의 눈이 커졌다.

"설마 아까 멜디니 교수님이 무례하게 행동하셔서 입학하지 않으시는 건······?"

"아니요. 그냥 아직 입학처를 못 찾아서."

"다행입니다. 아까 굉장히 불쾌하신 표정이어서 걱정했거든요."

불쾌한 표정?

아마 하플링의 신문으로 당황한 가운데 침착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쓴 표정 관리의 결산인가보다.

"마법이 남아있는 동안 개인사까지 들먹이며 신문하려 했으니 노여우실 만하죠. 아마 지금 멜디니 교수도 속으론 불안할 겁니다. 케일럽이 어디 가서 오늘 일을 들먹이면서 입학 안 하겠다고 할까 봐."

의도한 건 아닌데 내 침묵이 그 하플링에게 경고처럼 작용했다.

"게다가 이세계 빙의자에 대해서 멜디니 교수와 의견이 다른 교수진도 많거든요."

"그래요?"

"크게 셋 정도의 파벌이 있습니다. 발견 즉시 전부 척결해야 한다는 멜디니 교수파."

"······."

"그리고 그들의 미궁 지식이 탁월하니, 오히려 잘 관리하고 지원해주어서 미궁을 탐험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이실로프 교수파."

그쪽 교수가 미궁 탐험 클럽인가를 운영한다고 했었다.

"세 번째로는······.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떠받들어야 한다는 달스트림 교수파."

"떠받들어요?"

"네. 달스트림 교수는 고대 마법 연구 전문가인데, 미궁 깊은 곳에서 나온 문헌과 마법서를 연구한 끝에 어떤 마법사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대요. 일명-."

이어지는 단어에 어깨가 움찔했다.

"턴제의 마법사."

내 얘기 아니냐?

***

클로렌스가 들려준 달스트림 교수의 연구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세계 빙의자들은 미궁 마스터의 숙적이며, 미궁이 분출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미궁 입구를 전선 삼아서 벌어지는 양쪽 진영의 전쟁 같은 것이고, 이세계 빙의자들이 미궁 안으로 들어가면 미궁 마스터는 그들을 방어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이세계 빙의자들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미궁을 분출시켜서 선제공격한다는 것.

이 전황이 언제까지 이렇게 유지될지는 알 수 없다.

언젠가 미궁 마스터가 전 세계의 모든 미궁들을 한꺼번에 분출시키고 지상을 전멸시키려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여기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다.

왜냐면 미궁 마스터는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아 광기 상태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에.

오직 한 사람.

이세계 빙의자 중에 존재한다는 '턴제의 마법사'만이 그 광기에 저항할 수 있다.

"왜냐면 그 마법사의 정신력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물리 세계를 정지시키고 자신의 이성만 작동하게 할 수도 있다더군요."

그럴 수 있긴 하지.

근데 혹시 그 정지된 물리 세계에 내 몸도 포함된다는 거 아니?

"아무튼 그래서 그 마법사만큼은 광기에서 자유롭고, 그 인물이 바로 미궁 마스터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다······라는 게 달스트림 교수님의 생각입니다."

클로렌스가 말했다. 웃음을 덧붙이면서.

"물론 전설입니다, 전설. 고문헌에 나오는 낙서 비슷한 거예요. 사실 '턴제'가 무슨 뜻인지도 모릅니다. 문자 그대로 체스에서 차례가 오가는, 그런 걸 말하는 건지."

"······."

"아무튼 그래서 실제로 달스트림 교수파는 숫자도 극소수예요. 겨우 세 명 될까 말까."

"그걸 파벌로 볼 수가 있나요?"

"달스트림 교수가 원로라서 예의상 그렇게 봐주는 거죠."

클로렌스는 이실로프의 연구실 문을 열어주었다.

"이제 저희 교수님과 면담하시죠."

***

이실로프는 딱 맞는 정장 슈트가 잘 어울리는 중년이었다. 종족은 인간.

"1분만."

그는 나를 힐끗 보고는 검지를 들어 보였다.

책상에 놓여있는 서류에 무언가를 마구 갈겨쓰면서.

나는 클로렌스와 함께 소파에 앉아서 잠깐 기다렸다.

"미안합니다. 급한 거라서."

이실로프는 서류를 마저 채워서 봉투에 담더니 완드를 겨누었다.

"메시지 전송."

오랜만에 아는 마법이다. 실용 마법의 일종, 당일 특급 우편.

"반갑습니다. 케일럽. 교수들 사이에서도 시끌시끌한 화제의 인물이더군요. 다들 자기네 클럽에서 영입하고 싶어서 안달 나신 모양이던데."

이실로프는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입학은 결정하셨습니까?"

"네, 입학할 겁니다."

사실 이 결정은 미궁에서 나오기도 전에 했던 것이다.

왜냐면, 마법 대학 말고 적당한 선택지가 없거든. 지혜만 찍은 약골 멸치 전과자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많지 않다.

그러니 입학은 옳은 선택이다. 그래도 미궁에 들어가는 것은 싫으니 대학 사무직이나 연구직 같은 걸 노려볼까 생각했는데······.

'2주 이상 안 들어가면 미궁이 터진단 말이지.'

어쩔 수 없다.

미궁에 들어갈 거라면 마법 대학 입학은 더더욱 필수다.

"좋습니다. 교수들이 최고의 커리큘럼을 제공할 겁니다. 클럽에도 들어가실 겁니까? 필수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클럽 활동을 합니다. 저도 그렇고요."

마법 대학의 클럽은 인게임에도 존재했던 개념이다. 대학 연구실 같은 느낌으로, 교수들마다 관심 분야를 연구하는 가운데 필요 인력을 모집하고 급여도 준다.

멜디니는 빙의자 색출 클럽, 이실로프는······.

"저희 클럽은 미궁 내의 기현상을 조사하고, 모험가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파헤칩니다. 그밖에도 미궁의 비밀 방이라든지, 생태, 몬스터 같은 것도 연구하죠."

이실로프가 말했다.

"지금 관심 분야는 바로 빙의된 모험가입니다. 이세계 빙의자 말고요. 미스터 백어택처럼 미궁 마스터의 광기에 붙잡힌 사람들 말입니다. 제 가설에 따르면, 그 사람들의 영혼은 어딘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역시 이곳 사람들은 아직 영혼의 안식처에 대해 모른다. 마법 대학 교수조차도 이런 반응이라면-.

"마침 백어택이 나왔으니 좋은 기회가 생겼죠. 우리는 백어택의 영혼을 추적해보려고 합니다. 아까 보냈던 편지도 그것과 관련한 것이었고."

이실로프가 말했다.

"혹시 관심 있으시면, 저희 클럽에 지원해주십시오."

"다른 클럽은 어떤 게 있나요?"

"어떤 게 있니?"

이실로프는 클로렌스에게 질문을 토스했다.

"미궁에서 식용 동식물을 분류하는 미궁 미식 클럽, 신전과 연구 협력을 맺고 새로운 포션을 제작하는 연금술 클럽, 장비에 마법 부여를 연구하는 인챈팅 클럽, 미궁 내 원주민들에 대해 연구하는 미궁 외교 클럽······."

클로렌스는 클럽 몇 개를 나열해주었다.

"학생들이 만든 클럽도 알려드릴까요?"

"네."

"꽃꽂이 클럽, 뜨개질 클럽, 마법 폭죽 쇼 클럽, 라이딩 클럽······."

"그런 종류면 안 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교수진에 멜디니? 말이 되니?' 클럽도 있습니다."

"······."

하플링은 보아하니 빌런 교수로 악명이 높으시구만?

"저는 케일럽이 저희 클럽에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실로프가 말했다.

"재능도 출중하시고, 백어택하고 직접 싸워본 분이니까 영혼 추적을 할 때도 도움이 되실 것 같고요. 클럽에 들어온다고 해서 제가 일을 강제로 시키진 않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봐도 이쪽이 제일 나아 보이기는 한다. 빙의자를 떠받드니 어쩌니 하는 달스트림 교수는 너무 부담스럽다. 게다가 인원수도 적다니까 힘도 없을 것 같고.

다만······.

"클럽 활동을 제가 직접 파티를 꾸려서 할 수 있을까요?"

나한테는 나만의 육성법이 있다. 파티 단위에서.

"이렇게 묻는 사람은 또 처음이군요."

이실로프가 재밌어했다.

"보통은 미궁이 무서우니까 선배들 파티에 끼워달라고 하는 식인데 말이에요."

"······."

"원칙적으로 자기 파티를 스스로 꾸려서 하는 게 맞습니다. 파티 결성에 대해서는 제가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아요. 저한테 받아간 업무를 해낼 수만 있으면."

게임이랑 똑같군.

파티를 어떻게 짜든 상관없고, 교수들은 퀘스트를 내준다. 거절해도 되고, 받아서 완료하면 보상을 받고.

그럼 지금 이실로프가 관심 있는 퀘스트는 이거란 말이지?

"백어택의 영혼 찾기."

이건 나한텐 너무 쉽다.

"제가 파티 꾸려서 하겠습니다."

인게임에서 영혼을 되찾아준 빙의된 모험가는 동료로 모집할 수 있었다.

여기서도 가능할까?

19화

메모리북

입학 수속을 마쳤다.

입학처 조교의 안내를 받아서 기숙사 배정까지.

"여기, 문고리를 잡아보세요."

조교는 내 손을 기숙사 현관문 손잡이에 얹어놓고 보안 마법도 걸어주었다.

"출입자 인식. 보안 잠금."

문은 닫는 순간 자동으로 잠기고, 내 손으로 문고리를 만지면 열린다.

편리하구만.

조교의 안내를 따라서 들어온 기숙사 방은 엄청나게 넓었다.

"하루가 고단하셨을 텐데, 편히 쉬십시오."

조교를 문앞에서 배웅해준 다음, 집안을 둘러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원래 살던 은평구 녹번동의 녹두 빌라 201호보다 더 좋다.

조교가 4인실이라고 하기에 대학생 때 쓰던 닭장 같은 기숙사 방을 떠올렸는데 그게 아니었다.

4평짜리 방 하나에 2층 침대 두 개?

아아, 그것은 가난한 대한민국 대학의 기숙사라는 것이다.

갓겜의 마법 대학 기숙사를 보라. 커다란 소파와 커피 테이블이 딸린 화려한 거실에 화장실 두 개와 방 세 개가 붙어있다.

침실 두 개와 서재 하나.

너무 넓어서 외롭긴 하다만.

"이 큰 집을 나 혼자 써야 한다니."

그 이유는 기숙사가 죄다 텅텅 비어서다. 학생 수가 턱없이 모자라게 되어서.

"잠깐만요! 조교님!"

나는 재빨리 문을 열고 복도 끝에 저만치 멀어진 조교를 붙잡았다.

"혹시 제가 파티원을 모집하면 여기서 재워도 됩니까?"

예르닐 같은 애는 갈 데가 없다.

여관비도 아깝고.

"저는 안 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교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사람도 얼마 없는 기숙사에 사감 같은 것도 없죠."

"1층에 경비원은 계시던데요."

"우편 받아주는 게 주 업무인 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조교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옷장에 마법 대학 교복이 있으니 그거 입으세요."

***

다시 문을 닫고 들어와서 곧바로 목욕탕을 향해 달려갔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나는 아직도 마법 대학의 죄수 노예복을 입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예르닐과 함께 출구룸에 들어가서 보스전.

백어택과 애비슨 시신을 갖고 나와서 기절.

몇 시간 지나고 신전에서 깨어난 후에는 곧 마법 대학으로 가서 기여도 평가.

그리고 하플링을 만나고 요단강에 발 한 쪽 담갔다가 가까스로 유턴해서 이실로프를 만나고 클럽 가입까지······.

"이게 다 하루만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니."

죄수복 셔츠를 벗었다. '마법 대학 죄수 노예' 라는 큼직한 글씨가 등판에 워터마크처럼 박혀 있었다.

바지도 벗어 던지고 곧바로 욕조에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었다.

"아······."

목욕탕의 뜨거운 물에 들어온 아저씨들이 왜 그런 소릴 내는지 이제 알겠다.

"살 것 같다."

몸 여기저기가 따끔거렸다.

힐링 포션을 먹은 덕분에 큰 상처들은 대개 아물었지만, 아직 자잘한 긁힌 상처들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처음에 고블린한테 썰릴 뻔했던 목은 딱지를 떼어냈더니 피가 쭈르륵 흐른다.

미궁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제대로 씻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름때가 잔뜩 찌들어버린 몸과 얼굴을 더운물로 녹이고, 클렌징폼······은 없고 비누로 씻었다. 이것도 감지덕지다.

물론 샴푸도 없기 때문에 비누로 머리까지 감았다. 떡진 머리카락을 비누로 박박 문지르고 있으려니까 빨래하는 기분이라 웃음이 피식 났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수건으로 목을 지혈하고, 벽걸이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저녁 아홉 시 반.

아직 시간이 좀 있다.

이대로 푹신한 침대 매트리스에 파묻혀버리고 싶지만 조금만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자.

"옷장에 교복이 있다고 했지?"

옷장을 열어보니 바지와 셔츠, 카디건으로 구성된 쓰리피스가 나왔다.

"게임에선 옷은 안 줬는데."

인제 보니 출구룸 앞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던 애비슨의 복장이다.

애비슨은 부잣집 아들이라서 영혼 보존 서비스를 받았을 정도니까, 아마 집에서 장비도 빵빵하게 챙겨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복을 입고 들어갔다면 성능이 꽤 괜찮은 모양이지?

교복을 입어보았더니 자동 사이즈 조절 마법이 걸려있어서 입는 순간 기장과 허리가 내 몸에 딱 맞추어졌다.

오늘은 잘 때도 이걸 입고 자야겠군.

잠옷도 없거니와 성능 테스트도 해볼 생각이다.

그리고······.

"완드다."

교복 옆에는 1학년 마법대학생에게 지급되는 완드 한 자루가 나왔다.

이건 게임에서도 초반 보급품으로 받았던 거라서 안다.

지혜+2점짜리 완드.

내가 미궁에서 타노스가 인피니티 스톤 모으듯이 수집했던 완드들은 전부 마법 대학이 수거해갔다. 그러니 쌍수 완드를 쓰려면 완드 하나를 더 습득해야 한다.

머리까지 빗은 다음, 완드를 혁대에 끼우고 거울을 보았다.

봐줄 만하군.

노예 죄수의 비참함이 싹 가시고 그럴싸한 엘리트 대학생 마법사가 나타났다.

그새 이 몸에 정들어서 그런가, 이제 보니까 얼굴도 제법 괜찮게 생겼잖아?

"가볼까."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미궁 도시 '소헨.'

인간 마법사로 게임을 시작하면 나오는 스타팅 포인트다.

그 이유는 이곳의 마법 대학이 인게임에 있는 모든 마법 기관 중에서 가장 큰 곳이기 때문.

더불어 도서관도 제일 크다.

"도서관은 24시간 연다."

***

땡!-땡!-땡!

대학의 시계탑에서 종이 친다.

아홉 번.

지금 시각이 오전 아홉 시라는 뜻이고 내가 지각했다는 뜻이다.

"망할."

일곱 시에도 종이 치고 여덟 시에도 종이 치는데 어떻게 하나도 못 듣고 아홉 시에 눈이 떠졌지?

"아홉 시까지 입학처로 오라고 했는데."

어제 나한테 기숙사를 안내해준 그 조교가 말이다.

'대학 다니고 회사 다닐 때도 지각 한 번도 한 적 없었는데.'

아무래도 어제 너무 무리한 탓인 것 같다. 다행인 점은 교복 차림 그대로 잤기 때문에 바로 나가면 된다는 것.

더 다행인 점은 내가 잠든 곳이 기숙사가 아니라 도서관이라는 것. 간밤에 마법서를 연구하다가 잠들었는데, 기숙사보다 도서관이 입학처까지 훨씬 더 가깝다.

"씁."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내고, 책은 반납대에 꽂아 넣고 후다닥 뛰쳐나갔다.

'오리엔테이션을 해준다고 했지?'

예상컨대 메모리북을 만들 것 같다.

메모리북이 무엇이냐면 D&D 방식의 소설, 게임, TRPG 등등에 등장하는 유서 깊은 시스템, '주문 슬롯' 되시겠다.

설정상 메모리북은 마법사의 능력에 걸맞은 주문 슬롯을 제공하는데, 거기다가 사전에 마법을 등록해둔 다음에 완드로 간편하게 분출하는 게 마법 구사의 원리다.

마치 소총 탄알집에다가 탄알을 미리 채워놓는 것처럼.

그 메모리북은 게임에서는 이렇게 표현된다.

'키보드 버튼 B.'

그걸 누르면 '메모리북'이라는 이름의 시스템창이 뜨고 거기 나와 있는 주문 슬롯에다가 마법을 드래그앤드롭해서 등록하고 빼고 하는 거다.

현실이 되어버린 여기선 어떠한가?

'영창.'

메모라이즈! 라고 외침으로써 메모리북을 소환할 수 있다. 그밖에는 게임이랑 똑같다.

이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그래서 어젯밤을 도서관에서 꼬박 새운 것이다.

추가로 메모리북의 개념뿐만 아니라 지금 마법 대학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모든 마법과 마법 빌드업에 대해서 자료 조사를 마쳤다.

거짓말 방지 마법 같은 걸 몰라서 또다시 곤란을 겪는 것은 절대 사양이니까.

다행인 점은, 거의 모든 마법을 이미 내가 안다는 것이다.

이러면 기존의 내 마법사 육성법을 거의 그대로 써도 좋겠다. 물론 특수능력이 바뀌었으니, 약간의 조정은 필요하겠지만.

철컥!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본관의 입학처까지 전력 질주한 탓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헐떡거렸다.

9시 14분.

목덜미에 땀이 삐질삐질 난다.

"들어와서 여기 앉으세요."

입학처 조교 앞에는 1학년 학생 네 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노예 마법사'다.

나랑 같은 기수로 미궁에 들어가서 살아 나온 이들.

나랑 똑같은 마법사 교복을 받았지만, 등에는 여전히 '마법 대학 죄수 노예'라고 적혀 있었다.

'예르닐은 없군.'

아마 그녀는 오늘 모험가 길드로 넘어갈 것이다. 이따 가서 데려와야지.

"왔다."

노예 마법사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들 사이에서도 나는 지금 화제의 인물인 모양이다.

"저 때문에 기다리셨나요? 죄송합니다."

얼른 자리에 앉으면서 사과했더니 조교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직 교수님도 안 오셨으니까요. 어제 야근하셨나······."

나도 야근하고 아침에 지각한 건데, 왠지 동질감이 느껴지는걸?

똑똑.

마침 누군가 입학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으응."

그러자 엄청나게 나이가 많아 보이는, 허리가 구부정한, 엘프 노인이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마법 대학 골방 늙은이."

"······."

"달스트림이라고 합니다."

달스트림!

어제 클로렌스가 알려주었던 그 사람이다. 이세계 빙의자를 오히려 떠받들고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턴제의 마법사를 찾고 계신다는 그 원로 마법사.

"이실로프 교수님이 오시는 거 아니었어요?"

조교가 물었다.

"이실로프 교수가 지금 백어택 시신의 양도 건으로 신전이랑 한참 푸닥거리를 하는 모양이에요. 바빠 보여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달스트림 교수는 노예 죄수들을 쭉 훑어보다가 나하고 눈이 마주쳤다.

"화제의 신입생이군요."

"······안녕하세요."

"여러분께 이제 메모리북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달스트림 교수는 내가 이미 아는 메모리북에 대한 설명을 실컷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다음엔.

"메모라이즈."

메모리북을 소환했다.

현실에 와서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하얀색 빛나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완드 끝에 백과사전 만한 크기의 책자가 나타나서 허공에 둥둥 떠있었다. 메모리북 안에 어떤 마법이 들어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메모리북은 지혜의 신 위저스에게 하사받는 일종의 이능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저스와 계약을 해야만 메모리북을 얻을 수가 있지요."

교수는 미리 조교가 준비해둔 계약서를 하나씩 꺼내어 학생들의 싸인을 받고, 마법 영창으로 위저스에게 날려 보냈다.

어제 이실로프가 우편을 전송시킨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이제 여러분에게도 메모리북이 생겼을 겁니다."

내게는 그리 낯선 상황은 아니다. 게임에서도 이런 이벤트를 지난 이후부터 B 키가 작동하거든.

"영창해보세요."

"메모라이즈!"

"메모라이즈!"

노예 마법사들은 어렵지 않게 메모리북을 소환했다.

그리고 내 완드 끝에도 메모리북이 피어났다.

"슬롯을 얼마나 가지고 계십니까?"

교수는 학생들을 한 명씩 붙잡고 물어보았다.

"1등급 슬롯 두 개요."

"1등급 슬롯 하나요."

마법사 레벨에 따라서 마법 슬롯의 개수가 달라진다. 저레벨 때는 1등급 슬롯밖에 열리지 않는다.

내 경우에는 지금 5레벨.

"1등급 슬롯 세 개가 있습니다."

"오."

달스트림이 가볍게 탄성을 뱉었다.

"마법 슬롯의 개수는 중요합니다. 여러분. 마법들을 잘 배합하면 새로운 마법을 만들 수도 있거든요. 그 자세한 방법은······."

달스트림 교수는 의자에 풀썩 앉더니 조교를 가리켰다.

"조교가 가르쳐줄 겁니다."

"······!"

조교는 예정에 없었던 일인지 당황했다.

"이실로프 교수님은 직접 다 강의하신댔는데! 저 지금 할 일 많아요!"

"미안해요. 내가 허리가 아파서."

달스트림 교수는 허허 웃으면서 허리를 두드렸다.

조교는 한숨을 내쉬고 우리를 마법 연습실로 데려갔다.

***

마법 조합은 포커를 치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서 1등급 마법 슬롯 세 개에 파이어볼, 얼음송곳, 번개쇼크를 순서대로 배치하면 원소 마법 트리플.

그 효과로는······.

"2등급 마법 하나를 얻게 됩니다."

일명 '삼중 속성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마법들을 묶어서 상위 마법을 만들어내는 것을 마법서 결속이라고 불러요. 특장점은 2등급 마법 슬롯을 소모하지 않고도 쓸 수 있다는 것. 직접 보여드릴게요."

조교는 벽면에다가 삼중 속성탄을 발사했다.

대상에게 화상, 빙결, 감전 상태이상 중 하나를 초래하고 3원소 마법 피해를 동시에 입히는 개쩌는 파괴력의 2등급 결속 마법!

"어떻습니까?"

조교는 자랑스럽게 어깨가 으쓱했고, 노예 마법사들은 감탄했고, 나는······.

'아니 조교야.'

좀 당황했다.

'너 빌드 개망했어······.'

마법사는 메모리북의 주문 슬롯에 든 마법을 자유롭게 교체할 수 있지만, 모든 조합을 무한히 테스트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애초에 습득할 수 있는 마법의 양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지금 조교가 삼중 속성탄을 썼다는 건 파이어볼, 번개쇼크, 얼음송곳을 다 찍어버렸다는 소리잖아.

'고행' 난이도 이후로 저 빌드는 안 통한다.

"여러분의 1등급 마법 슬롯만큼 1등급 마법을 배우실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슬롯보다 더 많이 배울 수도 있는데, 일단은 슬롯 개수만큼."

그런 사정을 모르는 조교는 해맑게 설명했다.

"여기, 1등급 마법 목록에서 원하시는 걸 고르세요. 교수님께서 면담하고 빌드를 추천해주실 겁니다."

20화

마법 발명가

마법 대학 조교 소피아가 입학처에서 매년 보는 신입생 패턴이 하나 있다.

바로 자기 동네에서 마법 센스가 제법 있다고 소문난 똑쟁이들이 신규 마법을 개발해보겠다며 나대는 것이다.

'1등급 마법을 결속해서 기존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마법서를 만들어낸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가능성은 엄청나게 낮다.

1등급 마법은 숫자가 상당하며, 마법사들이 습득할 수 있는 마법의 개수는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법을 한 번 습득하면 다른 것으로 교체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지만 엄청난 시간과 노동력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마법 대학은 신규 마법서 결속을 시도하는 학생들을 막지 않는가?

내버려 둬야 신규 마법서가 나올 수 있으니까.

천재 소리 들으며 열정과 꿈에 부풀어 열심히 공부하는 신입생들은 자기가 언젠가 이실로프나 멜디니 같은 교수가 될 거라고 믿지만, 잔인하게도 대학은 그들을 소모품처럼 생각한다.

신규 마법서 결속을 해보겠다고? 응, 어서 해보렴! 응원할게!

실패하면 너는 아웃.

성공하면 이제부터 대학이 키워줄 최고의 인재.

후자를 꿈꾸고 도전하는 대부분의 신입생들은 망가진 빌드를 가지고 이리저리 분투하다가 삼류 마법사가 되거나 조용히 고향으로 떠난다.

근데······.

"정말로 마법 세 개를 이걸로 하시겠다고요?"

마법 대학 조교 소피아는 할 말을 잃었다.

"안 되나요?"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이건······. 대체 어떤 논리로 조합한 건지 도저히······."

케일럽.

이래저래 지금 대학에서 유명해진 그 신인이 광기 넘치는 제안서를 냈다.

[1등급 마법 3개]

▶전투 마법 : 탄진

▶전투 마법 : 열풍

▶실용 마법 : 가습

"케일럽. 전투마법으로 탄진은 나쁘지 않아요. 일정 지역을 장악할 수 있고 기침 발작을 유발해서 적들을 제압할 수 있으니까요."

소피아는 필사적으로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력한 마법도 아니에요. 열풍도 마찬가지예요. 몬스터에게 화상을 입힐 수도 있고 바람으로 쓰러뜨릴 수도 있지만, 파이어볼을 쓰면 아예 죽일 수 있잖아요? 결속이 되어서 강력한 2등급 마법이 나오면 좋겠지만, 확률적으로 어려워요."

그래서 보통은 결속 테스트에 실패하더라도 마법을 하나는 건지기 위해서 파이어볼 같이 범용적인 마법을 넣는 게 정상이다.

탄진, 열풍 같은 극단적인 마이너 조합 말고.

"게다가······."

제일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세 번째 마법은 왜 실용 마법인 거예요!"

마법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전투 마법과 실용 마법.

전자는 파이어볼 같은 것이고, 후자는 '거짓말 방지 마법' 같은 것이다.

'가습'도 실용 마법이다.

"케일럽. 일단 실용 마법은 배우는 사람 자체가 없어요. 전투에 도움이 안 되니까요."

오랫동안 마법을 연마해온 숙련자들은 마법 슬롯보다 보유 마법의 개수가 훨씬 더 많으니까, 실용 마법도 몇 개씩 곁들일 수 있다.

그러나 신입생은 얘기가 다르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습'은 더더욱 배우는 사람이 없죠. 말 그대로 주변 공기의 습도를 높여주는 건데, 수건에 물 적셔서 널어놓으면 그게 가습기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조교는 이 천재 신입생이 주위에서 오냐오냐 해주니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건 미친 짓이다.

이 조합으로는 얻을 게 하나도 없······.

"왜 이렇게 시끄럽나?"

달스트림 교수가 마침 옆으로 불쑥 다가왔다.

소피아는 재빨리 케일럽의 마법 제안서를 보여주었다.

"음······."

달스트림 교수는 제안서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케일럽에게 돌려주었다.

"한 번 해보세요."

"교수님!?"

소피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달스트림 교수를 쳐다보았다.

"새로운 방식의 마법서 결속은 언제나 환영이에요. 그리고 마법 대학이 법적으로 막을 수도 없습니다."

"······."

"스펠북은 마법 서점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

꼬치꼬치 캐물으면 좀 귀찮을 뻔했는데, 달스트림이 쿨한 사람이라 편해졌다.

나는 입학처를 나와서 곧바로 대학 내 마법 서점으로 이동했다.

전투 마법 코너에서 두 개.

[스펠북 : 탄진]

[스펠북 : 열풍]

실용 마법 코너에서 하나.

[스펠북 : 가습]

이제 다시 기숙사로.

인게임에서 마법의 습득은 '더블클릭' 이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조금 더 귀찮다.

메모리북을 펼쳐놓고 스펠북을 소리 내어 낭독하는 것이다.

그러면 메모리북이 마치 음성 메모 어플을 켜놓은 스마트폰처럼 스펠북으로부터 글자를 흡수해 메모리북에 기록한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메모리북]

▶보유 마법

-탄진, 열풍, 가습.

메모리북에 마법이 들어오는 것이다.

"됐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는 마법을 쓸 수 없고, 다시 메모리북의 등록 마법 항목으로 옮겨야 한다.

[메모리북]

▶보유 마법

-탄진, 열풍, 가습.

▶등록 마법

-1등급 마법 슬롯 (0/3)

인게임에서는 드래그앤드롭으로 슬롯에 넣으면 되고, 지금도 마찬가지.

'완드 끝으로 드래그앤드롭.'

의외로 게임이 아주 직관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완드 끝을 보유 마법 항목에서 '탄진' 위에 올려두자, 글자가 그대로 떠올라서 완드를 따라오는 게 보였다.

등록 마법 탭에다가 내려놓으면 끝.

[메모리북]

▶보유 마법

-탄진, 열풍, 가습.

▶등록 마법

-1등급 마법 슬롯 (3/3)

① 탄진

② 열풍

③ 가습

슬롯에 채워놓기만 하면 마법서 결속은 자동으로 이뤄진다.

이 점도 게임하고 똑같군.

[탄진과 열풍의 결속 마법서 획득]

『분진폭발의 서』

-2등급 마법 '분진폭발'이 메모리북에 기록되었습니다.

결속 마법서는 스펠북하고 비슷하다.

편의상 구별하려고 서로 나눠서 부르는 것이지, 사실 스펠북 하나를 습득해서 낭독한 것과 다름없다.

마법 서점에서는 판매하지 않는 스펠북 '분진폭발의 서.'

조교가 파이어볼 어쩌고 했던가?

이게 훨씬 강력하다.

그리고 두 번째 결속.

[열풍과 가습의 결속 마법서 획득]

『폭염의 서』

-2등급 마법 '폭염'이 메모리북에 기록되었습니다.

강력한 탈진과 열사병 상태이상을 유발해서 생물체 계통에게 쥐약인 메즈 마법.

마지막 세 번째 결속.

[열풍과 가습과 탄진의 결속 마법서 획득]

『적란운의 서』

-2등급 마법 '적란운'이 메모리북에 기록되었습니다.

처음 이 빌드를 인게임에서 시도했던 게 난이도 '전략의 신'쯤이던가.

습도를 높이고 열풍으로 상승 기류를 만들어 수증기를 올려보내는 가운데 탄진을 응집제 삼아 물방울을 응결시키면 구름이 될 것이다.

······같은 중학생 과학 시간에 할법한 실험적 발상이 인게임에서 적란운 마법서 결집으로 나타났다.

'사실 당시에는 이 빌드로 대박 치진 못했지.'

결국 마스터 플로어에서 패배하고 새 게임을 시작했었다.

근데 왜 지금 다시 했느냐?

마법 빌드 상당수는 특수 능력에 영향을 많이 받고, 적란운은 모래시계하고 궁합이 좋기 때문이다.

"번개 완드를 하나 살까."

적란운은 소환마법의 일종이고, 근처의 적들이 번개 마법을 맞을 때마다 강력한 추가 벼락을 내리친다.

이걸로 모래시계 턴에서 테스트해보고 싶은 게 있어.

[메모리북]

▶보유 마법

-탄진, 열풍, 가습.

▶등록 마법

-1등급 마법 슬롯 (3/3)

① 탄진

② 열풍

③ 가습

-2등급 마법 슬롯 (0+3)

① 분진폭발

② 폭염

③ 적란운

탁!

메모리북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덮었다.

이제 쇼핑 시간이다.

완드도 사고, 예르닐도 사야지.

아.

그 전에 신전 먼저 다녀오고.

신전은 일찍 문을 닫으니까.

***

플랑도르 시의 악명 높은 범죄자.

무려 100kg의 마약을 운반한 희대의 마약상(?) 예르닐!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몸이 75골드에 팔리는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다.

"······."

플랑도르에서 내지 못했던 벌금 3,000골드에 마법 대학으로 팔려올 때만 해도 이 정도로 비참하진 않았는데.

아니 진짜 75골드는 너무한 거 아니냐고!

"규칙은 알고 계시겠죠. 이 75골드는 벌금에서 남은 돈이므로,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미궁에서 번 돈으로만 변제할 수 있습니다."

마법 대학 조교 제이콥이 모험가 길드의 노예 용역 부서 팀장이란 남자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모험가 길드에도 저런 부서가 있었던 것이다.

"예르닐."

제이콥은 예르닐에게 다가와 가볍게 독려를 해주었다.

"모험가 길드는 저희처럼 기여도 평가 저울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미궁에서 나와서 정산할 때는 진술을 공격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

"케일럽처럼 파티원을 신경 써서 진술해주는 사람은 잘 없어요. 대부분 이기적으로 진술합니다."

"네······."

"하지만 남은 액수가 75골드뿐이니, 어지간하면 미궁에 한 번만 다녀와도 청산할 겁니다."

그 한 번이 문제다.

마법 대학에서는 전부 다 노예 팀에 묶어서 미궁에다 집어넣었지만, 모험가 길드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숙련 파티들이 예르닐을 픽해서 데려갈 것이다.

그럼 오히려 안전한 것 아니냐고?

숙련 파티니까 몬스터는 잘 잡겠지.

문제는 그 파티 자체가 위험할 거라는 점.

상식적으로 검증된 모험가들이 수두룩한데, 그 사람들을 모두 뒤로하고 장비도 스킬도 없는 전과자 노예 용역을 데려가는 파티가 제정신일까?

여기 두 개의 파티가 있다고 치자.

비르타넨 파티와, 자유민이 된 대머리 마법사 파티.

그 둘이 모험가 길드에서 사람을 구한다면, 예르닐을 데려가는 파티는 후자일 것이다.

비르타넨 파티는 애비슨이나 케일럽을 데려가려고 하겠지.

'케일럽.'

예르닐은 머릿속으로 그를 떠올려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보고 싶다.

케일럽처럼 파티원을 신경 써서 진술해주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제이콥의 말에도 공감이 간다.

"따라와. 이미 넌 파티가 배정됐다."

노예 용역 부서장이 예르닐을 데리고 이동했다.

'벌써 파티가 배정됐다니.'

어떤 사람들일까?

미궁에도 법과 도덕이 있지만, 노예는 그 대상에서 제외된다.

비르타넨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출구룸 앞에서 케일럽을 영입하려 했는데, 사실 다른 파티의 파티원을 꼬드기는 게 무례한 거였다며.

하지만 그때 비르타넨은 예르닐의 존재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으니 맘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날 데려가는 숙련 파티도 아마 그렇겠지.'

75골드는 푼돈이지만 지금 예르닐에겐 목숨값이었다.

'정말 살아나올 수 있을까?'

철컥.

사무장은 모험가 길드의 대기실 문을 열었고, 그 너머에는······.

케일럽이 있었다.

***

"케일럽!"

경악한 예르닐이 소리를 질렀다.

"깜짝이야."

진짜로 깜짝 놀랐네. 얘 목청이 이렇게 클 줄이야.

"여, 여기서 뭐해요?"

그리고 눈도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원래 엘프답게 얼굴은 작고 이목구비는 또렷했다만. 지금은 놀라서 눈이 두 배가 됐잖아?

"저를 데려가려고 오신 거예요?"

그녀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네. 당연하죠."

"왜······왜요? 비르타넨 파티에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요?"

비르타넨 파티.

음.

솔직히 거기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예르닐과 백어택을 둘 다 쓸 수 있다면 거기다 탱커 하나 끼워서 새 파티 만드는 게 백배 낫다.

게다가 예르닐은 내 턴에서 지시를 내릴 수도 있으니까.

"자유민으로 만들어드릴게요."

"······!"

"갑시다."

***

예르닐은 실시간으로 얼굴에 행복이 가득 차올랐다.

"너무······너무 맛있어요."

같이 모험가 길드 인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부터.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봐요."

그녀는 거의 감동해서 울기 직전이었다.

내 입에도 나쁘진 않았다.

현대인의 식습관을 기준으로 하면 파스타가 좀 싱거웠지만.

"예르닐. 식사하면서 천천히 들어요."

"네!"

"사실 저는 당신을 당장이라도 자유민으로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

예르닐은 몇 초간 굳어버린 채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질문했다.

"마, 맞춰볼게요! 마석값!"

그녀가 외쳤다.

"베노믹 스파이더를 잡고 나온 마석을 비르타넨이 판매하고 대금을 우리한테 20%씩 준다고 했잖아요! 그게 아직 정산이 안 된 건가요?"

예르닐이 똑똑해지고 있다!

오답이긴 하지만.

"그건 정산을 해주더라도 어차피 예르닐 몫을 마법 대학이 전부 다 징수해버릴 거예요."

"아······. 그럼 75골드만큼도 안 나와요?"

"네. 스파이더 잡았을 때 예르닐 몫이 겨우 5골드였잖아요."

"······그럼 무슨 방법이?"

"애비슨 시신 회수비."

"그건 이미 정산된 거 아니에요?"

사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클로렌스에게 들었다. 사례를 얼마나 할 거냐는 대학측의 질문에 '100골드'라고 써서 냈다고.

왜냐면 금액이 커지면 부당 취득액이라면서 마법 대학이 뺏어갈 테니까.

"그래서 애비슨이 부활하면 파티를 열 거니까, 거기 와서 보상을 따로 받아가라고 하시더군요."

"그럼······?"

"클로렌스한테 양해를 구하고 사례비 정산을 새로 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대학에 뺏기지는 않지만, 100골드보다는 크게."

"······."

"그러면 예르닐한테 75골드 이상은 갈 거예요. 그게 예르닐이 자유민이 되는 첫 번째 방법."

나는 솔직하게 얘기해주었다.

앞으로의 신뢰 관계를 위해서라도 이런 부분은 진실되게 공유하는 게 좋으니까.

"두 번째 방법은 저랑 미궁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겁니다. 예르닐은 자유민이 될 거고, 그다음에 저랑 같이 애비슨 부활 파티에 가는 거죠."

"아?"

"애비슨 집안에서는 마법 저울 같은 걸 가져다 놓고 까다롭게 굴지 않을 거예요. 대학보다 예르닐 몫을 훨씬 더 챙겨줄 겁니다."

"······."

"만약 예르닐이 전자를 고르신다면, 저는 애비슨 시신 회수비가 다시 정산될 때까지 예르닐을 제 파티원으로 유지할 거예요."

"왜요?"

"그래야 정산되기 전에 모험가 길드에서 다른 파티가 예르닐을 데리고 미궁에 들어가버리지 못할 테니까요."

"아······."

"예르닐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세요."

태연하게 말했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좀 쫄린다.

근데 이 질문은 꼭 예르닐을 위해서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에 예르닐이 자유민이 된 후에 미궁은 무섭다며 파티를 탈주하고 떠날 거라면, 차라리 지금 나가는 게 낫잖아.

그럼 나도 새 파티원을 키울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네가 안 나가는 게 베스트다만. 예르닐. 믿는다?

"케일럽은 미궁 모험을 계속 하실 거예요?"

예르닐이 물었다.

"네."

"그럼······."

그녀는 파스타를 배배 꼬면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 저도 계속 케일럽 따라다니면 안 되나요?"

"그럼 저는 좋죠."

"진짜요?"

"네."

"저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데요?"

하하.

예르닐.

별 걱정을 다하는구나.

너는 앞으로 지옥 트레이닝을 겪을 것이며, 천재 궁수로 이 동네에서 유명해질 것이란다.

"같이 미궁에서 돈 법시다."

예르닐은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졌다.

"저희 파티원 다른 두 명은 어떻게 해요?"

그녀가 물었다.

"이미 모험가 길드에 탱커 하나를 모집한다고 공고를 내놨습니다."

"다른 한 명은요?"

"이미 구해놨습니다."

"역시 케일럽은 철저해요."

그 한 명이랑 네가 잘 지낼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

나는 식사를 마치고 예르닐을 데리고 나가서 쇼핑을 했다.

무기상에 가서 활과 석궁을 열 개 정도 살펴보았다. 시위를 하나씩 당겨보면서.

"이걸로 할게요!"

"일단 제가 사지만, 예르닐의 다음 미궁 수입에서 제할 거예요."

"네!"

사주는 거 아니고 외상인데도 예르닐은 선물 받은 것처럼 싱글벙글했다.

"옷도 이거 입으세요."

궁수가 쓸만한 경갑 하나를 장만해서 입혔다. 투구도 하나 씌우고 부츠도 신기고.

"화살도 좀 보여주십시오. 특수 화살도 같이요."

오늘 땡잡은 무기상에게 소모품도 조금 구매했다.

그리고 꽉 채운 화살통을 그녀의 허리춤에 채워주면, 짜잔!

천재 궁수 예르닐 등장!

"······!"

그녀는 거울에 자신의 자태(?)를 비춰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캬.

내가 봐도 확실히 그림이 나온다.

원래 늘씬하고 예뻐서 그런가. 레인저답게 제대로 차려입으니까 반지의 제왕이 따로 없네.

내친김에 나도 번개쇼크 완드를 하나 사서 거울에 비춰보았다.

쌍수 완드의 천재 마법사 등장!

음.

그만하자······. 너무 멸치다.

아니 분명 기숙사에서 거울 볼 때는 그럴싸했는데? 이상하다. 예르닐을 보고 난 다음이라 그런가?

"앗, 참. 예르닐."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지금 잠 잘 데가 없죠?"

개쩌는 파티장은 파티원들의 식사와 장비와 잠자리까지 해결해주는 법.

"제 마법 대학 기숙사에 침실이 두 개인데, 저 혼자 씁니다. 다른 침실 하나를 예르닐이 써요."

"와, 정말요? 그래도 돼요?"

"네."

"고마워요! 저 잘 데도 없고 숙박비도 없거든요!"

그래서 제안했다. 얘 성격에 노숙할 것 같은데 뭐 도둑맞거나 시비 걸려서 다치거나 할 것 같아서.

"갑시다."

예르닐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애처럼 행복한 표정이 되었다.

"너무, 너무 좋아요!"

그녀는 내 손을 붙잡고 앞장섰다.

굉장히 신이 나서 조잘거리면서.

"케일럽. 마법 대학 노예 숙소는 쥐도 나오고 매트리스도 다 헤졌고, 엄청 춥잖아요."

그래? 사실 나는 모른다.

빙의된 이후에 노예 숙소에 가본 적 없으니까.

"근데 기숙사는 엄청 좋다면서요?"

"좋습니다."

그건 확실하다.

"따뜻한 물도 나와요?"

"잘 나옵니다."

"비누도 있어요?"

"있습니다."

"와아!"

"침대도 푹신푹신하고 좋아요."

"우와아!"

예르닐은 앞으로 호텔 같은 기숙사에서 푹 자고 슈퍼 천재 마법사 케일럽과 함께 미궁을 누비게 될 꿈과 환상에 부풀어 헤실헤실 웃었다.

그리고 함께 기숙사에 돌아와 308호 문을 여는 순간-.

툭.

예르닐은 들고 있던 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거실에 미스터 백어택이 서 있었기 때문에.

"사령술입니다."

낮에 나는 이실로프의 말단 마법사 직원으로서, 신전에 가서 백어택의 시신을 대리 구매해서 가져왔고, 이실로프에게 받은 사령술 스크롤을 뜯어서 백어택을 일으켜 세웠고.

"우리 파티원이에요. 인사해요."

이제 예르닐과 인사시켜주었다.

기숙사 308호에는 따뜻한 물도 있고, 비누도 있고, 침대도 있고, 언데드 백어택도 있다.

"그어어······."

"안녕! 하네요. 인사해요. 예르닐도."

"케일럽. 저는 여기서 나가야겠어요."

"안 돼."

21화

탱커 면접

예르닐은 비누와 더운물로 깨끗이 씻었다. 피부는 맨들맨들해졌고, 혈관이 확장되어 발그레해졌다. 젖은 머리카락과 목덜미에서 올라오는 비누 향.

"휴우."

목욕할 때만 해도 이대로 나가서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할 줄 알았는데.

"잠을······잘 수가 없어!"

매트리스는 굉장히 안락했으나 예르닐은 긴장해서 잠들 수가 없었다.

바로 거실에 있는 백어택 때문에.

그녀는 사운드맵핑 능력자였다.

"움직인다."

문밖에서 움직이는 언데드 백어택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정확히 그려졌다.

터벅. 터벅.

"거실 카페트 위!"

예르닐은 침대 이불 속에서 그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어어!

"창가!"

-헙? 텁. 쩝쩝!

"화분의 풀을 뜯어 먹잖아······? 언데드가 원래 채식하나?"

-으으으······.

이제 백어택은 유리창에 머리를 들이밀고 용을 썼다.

"유리로 막혀있는 줄 모르고 지나가려는 건가?"

-그어어!

그러나 백어택도 빙판 위를 달리거나 벽을 수직으로 뛸 순 있어도, 유리를 통과하는 마술쇼를 벌이진 못했다.

파괴 방지 마법이 걸린 유리는 쉽게 깨지지도 않는다.

-그악!

그래서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면서 매달리는 백어택.

"의외로······귀여울지도······?"

예르닐은 이불 속에서 헤헤 웃었다.

백어택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피 테이블 위.

카페트 위. 책장 옆. 주방 앞.

어?

그거 아니야, 백어택!

'식탁엔 올라가면 안 돼!'

백어택은 이제 식탁 위의 주전자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주둥이 부분을 키스하듯 쭉쭉 빨면서.

으악!

이러면 케일럽하고 나는 내일 물을 마실 수가 없어요, 백어택!

"배, 백어택!"

예르닐은 이불 속에서 거실을 향해 용감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럼 못써!"

백어택의 주의를 환기해서 주전자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어?"

그리고 그 소리를 포착하고 만 것이다.

주의를 빼앗는 데는 성공했다. 지나칠 정도로.

덕분에 백어택이 갑자기 식탁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의 몸뚱이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예르닐의 침실을 향해서 정면으로 날아든다.

"······!"

예르닐은 기겁하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탕!

떨어지는 백어택의 발소리 위치는······.

"문 앞!"

예르닐은 침대에서 사슴처럼 점프했다.

철컥! 하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순간 기가 막히게 몸으로 문을 들이박아 가까스로 멈추면서.

"으아아악!"

-구아아!

"안 돼! 들어오지 마!"

-그으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가악!

"돌아가! 가서 주전자 빨아!"

-가아아악!

"제발!"

역시 귀엽다는 말은 취소다. 예르닐은 문에 딱 붙어서 끙끙거렸다. 눈물도 찔끔 난다.

-백어택.

문밖에서 케일럽의 목소리가 들렸다.

"케일럽! 케일럽! 도와줘요!"

***

"뭐해요······?"

물 마시러 나왔더니 둘이서 문짝을 사이에 두고 씨름하고 있었다.

백어택을 떼어내서 거실로 돌려놓자 예르닐은 울먹거리며 날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내가 손에 든 물잔을.

"그······주전자 물 마시면 안 되는데······."

"왜요?"

이미 반쯤 마셨는데?

"······."

예르닐은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가르쳐주었다.

"백어택이 주전자 주둥이 입으로 쪽쪽 빨아서요."

시발.

그건 몰랐네.

남은 물을 바로 다 버렸다.

내일 주전자를 설거지하고 나면 백어택의 손이 안 닿게 찬장에다 넣어놔야겠군.

"케일럽! 같이 자면 안 돼요?"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예르닐이 백어택 눈치를 보면서 후다닥 쫓아왔다.

"미궁에서도 침낭 하나로 번갈아 가면서 같이 잤잖아요! 케일럽 방에 침대도 두 개 있잖아요. 옆에서 자면 안 돼요?"

어허.

예르닐.

여기가 미궁도 아니고 남녀가 유별할진대 어찌 그런 숭한 발상을 한단 말이더냐? 에잉 쯧쯔! 공자께서 보시면 경을 칠 것이다!

"저는 아직 안 자요."

장난이고 나는 방에서 할 일이 좀 있었다.

"왜요?"

"공부 좀 하느라."

"방해 안 할게요."

예르닐은 숨죽이고 조용히 따라와서 옆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내가 공부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12년 전 미궁 분출 사건에 관하여]

도서관에서 대여해온 논문이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 미궁도시 '소헨'에서는 12년 전에 미궁이 분출해서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았다.

이 논문의 저자는 이실로프 교수.

그가 직접 12년 전 미궁 분출 현상에 대해서 각종 실험과 연구를 진행했고, 현장의 중요한 특징들을 기록해두었다.

[12년 전 미궁 분출은 전형적인 폭발형 대분출이다. 몬스터는 3,000기까지 나왔으며, 그중 상당수가 심연의 몬스터였다.]

[대분출의 원인으로 지목된 표적의 이름은 '헨리.' 그는 소헨의 남쪽 빈민가에 숨어 지내던 이세계 빙의자였다.]

[아래의 참고 사진은 실용 마법 '촬영'으로 찍은 현장 사진이다.]

책장을 넘겨서 참고 사진을 살펴보았다. 박살 나버린 헨리의 집이 나타났다.

벽과 지붕이 거의 다 무너진 가운데, 그 가난하고 불쌍한 빙의자의 살림살이들이 드러났다.

깨진 물항아리. 바닥에 흥건한 물에 젖은 러그, 아마 몬스터들에게 저항할 때 쓴 것으로 보이는 부서진 의자.

습격당한 시점에 식사 중이었던 모양인지, 토마토 샐러드가 바닥에 으깨져서 굴러다녔다.

그리고 그 가운데의 시신은······.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군.'

마치 주인이 외출한 후에 불안해진 강아지가 휴지를 마구 물어뜯어서 난장판을 쳐놓은 것과 비슷했다.

그리고······.

[빙의자가 방안에 남겨놓은 메시지 (해독 필요)]

이실로프가 촬영해놓은 문자가 있었다.

영어였다.

[To All The Possessed]

'모든 빙의자들에게.'

[Watch out for MAGIC UNIVERSITY]

'마법 대학을 조심해라.'

음.

멜디니 같은 척살파를 조심하라는 뜻일까?

아니면······.

'마법 대학 자체에 뭔가가 더 있나?'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줄곧 의심스러워했던 문제가 하나 있다.

'미궁 분출 때 마법 대학이 유독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무엇인가?'

마법사들이 용감하게 맞서 싸웠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가설은 어때?

'마법 대학에는 이미 빙의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미궁 분출의 트리거가 된 표적, 12년 전 사건의 경우에는 '헨리'가 제거된 다음, 몬스터들이 다른 빙의자를 찾아 마법 대학으로 몰려들었다면?

마법 대학이 12년 전 사건 때 유독 큰 피해를 입은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면?

어쩌면 진짜 문제는 멜디니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마법 대학 안에는 멜디니를 앞세운 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빙의자 마법사 카르텔 같은 게 있을지도.

'아니면 멜디니 본인이 빙의자이거나.'

잘 모르겠네.

그 가능성은 없으려나? 멜디니가 그렇게 과격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한 번도 자신에게 거짓말 방지 마법을 걸고 셀프 증명한 적이 없었을까?

아무튼 내가 피아식별을 명확히 할 수 있기 전까지는 내가 빙의자라는 것을 무조건 감춰야겠다.

탁.

나는 책을 덮어서 책장에 꽂아 넣었다.

"예르닐."

"네?"

"피곤할 줄 알고 오늘은 그냥 주무시게 뒀던 건데, 굳이 안 자고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어쩔 수 없네요."

"에······?"

"오늘 잠 못 잘 줄 알아요."

"헉······?"

예르닐은 살짝 긴장했고, 나는 가방에서 서류를 잔뜩 꺼냈다.

"제 실험 좀 도와줘요."

오전에 암시장에서 사온 스크롤 한 묶음이었다.

통수의 갓겜 미궁의 심연을 플레이하는 모든 이들에게, 썩은물 케일럽이 알려드립니다.

게임에서 판정 공부는 생존을 위해 필수입니다!

***

밤 열두시 반.

마법 대학의 거의 모든 마법사들이 퇴근했다.

교내에서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 곳은 몇 군데 되지 않았다.

24시간 운영하면서 등대처럼 주변을 밝히는 도서관.

케일럽이 실험에 몰두 중인 기숙사 308호.

그리고······.

[이실로프 교수 사무실]

이실로프는 책상에 앉아서 손님을 맞이했다.

"아직도 퇴근을 안 했군?"

외투를 입고, 가방을 든 멜디니가 물었다.

"퇴근길에 굳이 또 제 방을 찾아와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낮에 신입들 오리엔테이션을 안 갔다던데?"

"맞습니다. 달스트림 교수님이 대신 가주셨습니다. 저는 새 프로젝트 때문에 너무 바빴거든요."

"빙의된 모험가의 영혼을 추적한다던 그거 말인가?"

"맞습니다."

"흐음."

멜디니 교수의 미간에 주름이 가득 생겼다.

"그 일은 누가 맡았나?"

"화제의 신입생이 직접 파티를 꾸려서 하겠다더군요."

"그 친구 입학했나?"

"네."

"내가 좀 떠보려 했더니 인상을 팍 쓰기에 혹시 그냥 나가버렸나 했는데."

"입학했습니다. 더불어 제 클럽에 들어왔고요."

"이실로프 교수."

멜디니는 미간에 꼬장꼬장한 주름이 잔뜩 졌다.

"그 친구를 정말로 믿나?"

"······."

"그게 천재 같은 단어로 설명이 되는 재능이던가? 나는 그 친구가 미궁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모든 증언을 다 들었네. 베노믹 스파이더의 독샘이 터지기 직전에 얼음송곳을 박아버려서 폭발을 막아버렸다더군."

"그랬습니까?"

"미궁에 대한 지식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풍부한 것은 이세계 빙의자들의 공통된 특징일세."

"원래 윈덤에서 미궁 탐험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알게 된 지식이었을지도 모르죠."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윈덤 모험가들은 모두 빈약한 물자에 급조된 2인조 파티로 백어택을 잡고 탈출할 정도의 실력자들이던가?"

"······."

"그냥 천재 마법사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멜디니가 외쳤다.

"하지만 빙의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단 말이야."

"무슨 얘길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 애가 빙의자인지 아닌지 확인해주게. 자네가 클럽 지도 교수이니 자네라면 할 수 있겠지."

"하아."

이실로프는 작게 한숨을 뱉으면서 창가로 이동했다.

창틀에는 큼직한 화단이 있었다. 빨간색 꽃이 이실로프의 냄새를 맡고 꽃잎을 팔랑팔랑 회전시켰다.

"이게 무슨 꽃인지 아십니까?"

"아이작베리?"

"맞습니다. 땅에 영양분이 풍부하면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우고 달콤한 열매를 맺죠."

이실로프가 말했다.

"하지만 땅에 영양분이 부족하거나 비가 모자란다면, 아이작베리는 열매 대신 '향'만 강렬하게 내뿜어서 그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

"그 신입이 빙의자든, 아니든, 그게 정말로 중요합니까? 꾸준히 미궁에 들어가서 대학에 도움이 되어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마법사가 너무 부족합니다."

이실로프가 말했다.

"제가 땅이 되어줄 겁니다. 멜디니 교수님. 제 지식을 자양분 삼아서 제가 직접 영양분이 풍부한 땅이 되어주겠습니다."

이실로프는 물뿌리개를 내밀었다.

"멜디니 교수님이 물뿌리개를 잡아주실 순 없습니까?"

"쯧."

멜디니는 작게 혀를 찼다.

"자네는 12년 전에 그 사고를 겪고도 정신을 못 차렸군. 지금 대학의 마법사들이 부족한 이유 자체가 무엇 때문이었나?"

"······."

"지켜보겠네."

멜디니는 사무실을 나섰다.

***

[파티원 모집 면접]

▶파티장 : 케일럽

▶모집 인원 : 1명

▶모집 분야 : 근접 전투에 능하고 전위를 지켜줄 수 있는 전사

모험가 길드에서 새로운 파티 결성이 시작되었다!

본래 나 같은 전과자 노예 출신의 미궁 초보자가 혼자서 파티원을 모집하면 지원자가 거의 없어야 정상이다.

게임에서도 이 시점에는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우리 파티원에 들어와달라고 설득 굴림을 실컷 해야 된다.

그러나······.

'엄청 많네.'

모험가 길드가 빌려준 면접 장소에는 지원자가 스무 명 가까이 있었고, 구경꾼도 바글바글했다.

아무리 내가 백어택을 잡고 유명해진 신인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몰려들 이유는 없다.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와 진짜로 시체 조종을 하네.'

'미친놈들인가?'

'저걸 데리고 미궁에 들어간다고?'

백어택 때문이다.

"이, 이리 온······!"

예르닐이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사냥꾼처럼 백어택을 면접 장소로 데려오고 있었다.

"아냐! 그쪽 말고! 여기 의자로 와서 앉아······."

약간 어린애 다루는 거 같기도 하고.

"의자에 올라가는 게 아니고! 벽걸음 타지마! 꺄악! 머리카락 뜯지 마!"

이 사고뭉치 언데드를 굳이 여기로 데려온 이유는 사령술이 이 동네에서 약간 논란이 되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도덕적으로 '진짜 저래도 되나······?' 하는 것이다.

따라서 파티 결성 전에 우리의 미궁행 목적을 분명히 하고, 사상적으로 거기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아울러 어그로도 좀 끌고.

"모험가 길드에서 파티 모집 공고를 안내해드릴 때 아마 설명해주셨을 텐데, 저희의 이번 미궁행 목적은 미스터 백어택의 영혼이 보존된 지점을 찾아내고, 그걸 이용해 백어택을 부활시키는 겁니다."

나는 백어택에게 걸려있는 마법들에 대해 설명했다.

"백어택은 미궁에 들어가면 도적답게 길잡이 역할을 해낼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잠들어있는 곳으로 이동할 거예요."

이 부분은 이실로프 교수의 아이디어다. 기반이 되는 마법은 '분실품 추적 마법.' 비르타넨도 이 마법을 애비슨의 신분증에 걸어서 애비슨의 시신을 찾아내려고 했던 모양이다. 내가 시신을 가지고 나와서 전부 필요 없게 됐지만.

분실품 추적 마법에 영혼 사슬을 이용해 변주를 주고, 언데드가 자기 영혼을 찾아서 걸어가게 만든다.

우리는 그 뒤를 쫓아갈 것이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짠, 백어택의 영혼 탈취!

······까지 이실로프의 아이디어인데, 인게임에서 내가 영혼의 안식처를 찾을 때 처음 시도했던 방식과 비슷하다.

물론 이것만으로 찾아낼 순 없고, 언데드를 따라가면서 내가 직접 해줘야 하는 일이 좀 더 있다.

"언데드 백어택과 함께 미궁에 들어가서 백어택의 영혼을 찾는 데 동참하실 수 있는 분만 면접 진행 부탁드립니다."

인게임에서는 스테이터스를 직접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 없다. 같은 파티원으로서 함께 잠들지 않는 이상.

대신······.

"앞에 나와서 오크통을 들어주세요."

차력쇼 면접을 시작했다.

비르타넨처럼 오크통을 던지기까지 하려면 힘이 최소한 15 이상 필요하다.

22화

탱커 면접 (2)

"죄송하지만 다음 기회에 함께 해요."

같은 말을 벌써 열다섯 번째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지원자들 중에서 태반이 오크통을 들지도 못했기 때문에.

"아! 한 번만 다시 하면 들 수 있어요!"

"오늘 아침을 못 먹어서 그래. 진짜로."

"통이 좀 이상하네! 중력 마법 건 거 아니야?"

"거짓말 아니고 제가 진짜로 들 수 있거든요? 오는 길에 허리 삐끗해서 그래. 진짜라니까?"

지원자들마다 내놓는 변명도 가지각색이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해서 우리 파티에 들어오려고 하는 이유도 빤하다.

'안전해 보여서.'

내가 직접 파티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이실로프 교수는 매우 흥미로워하면서 이런 사람 처음이라고 했었다. 대부분은 미궁이 무서우니까 선배들 파티에 업혀가려고 한다며.

여기 있는 모험가들도 똑같다.

우리의 목적지가 미궁 1층이기 때문에, 2층 이상의 숙련자들은 서로 단가가 안 맞아서 지원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 파티에 지원할만한 인물들은 자연히 1층 모험가들이 되는데, 그중에서도 쓸 만한 녀석들은 이미 자기 파티가 있다.

그럼 하루만에 급조된 이 파티 모집에 지원해서 이 자리에 와있는 모험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태반이 어중이떠중이.

미궁이 무섭지만, 미궁 모험가의 꿈을 갖고 있는 초보자들이다.

근데 1층 최강자였던 백어택을 줘패고 나왔다는 마법사가 파티를 모집한다?

그 정도 실력자라면 웬만큼 내가 트롤링을 해도 감당해주지 않을까? 거기서 경험을 좀 쌓으면 나도 어엿한 숙련 모험가!

······같은 계산으로 지원했겠지.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에 함께해요."

물론 내가 그들을 받아줄 이유 는 없다.

옥석을 잘 가려야 한다. 첫째로는 오크통으로, 두 번째로는 스킬 심층 면접으로.

"방패 돌진이나 도발 같은 스킬 쓰실 수 있나요?"

거의 모두가 거기서 떨어진다.

"케일럽."

중간에 잠깐 휴식할 때 예르닐이 조심스럽게 속닥거렸다.

"저도 사실······."

"네?"

"스킬 쓸 줄 몰라요······!"

정말 큰 비밀을 고백하는구나 예르닐.

보아하니 그녀는 이 까다로운 면접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저도 면접 봤으면 떨어졌을 것 같은데요······."

"예르닐은 조만간 스킬을 배울 수 있을 거예요."

게임에서 전사나 궁수, 도적 같은 경우엔 미궁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분수대를 이용하여 스킬을 습득한다.

설정상으로는 이렇다.

마법을 내려주는 지혜의 신 위저스처럼, 옛날엔 다양한 직업군의 신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미궁에 다 잡아먹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기술이 이따금 미궁을 여행하는 모험가들에게 축복처럼 내려지는데, 그게 바로 분수대에서 개화하는 스킬.

게임으로 플레이할 땐 굳이 이런 설정을 붙여가면서 스킬과 마법 찍는 걸 서로 다르게 해놓을 이유가 있나 싶었는데.

'어쩌면 그 황당한 시스템이 나름은 고증이었을지도.'

물론 이세계에 위저스 같은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불분명하다만.

"근데 우리 이렇게 해서 파티원을 뽑을 수가 있어요?"

예르닐이 다시 속삭이며 물었다.

"아마도요?"

나는 태연히 다음 지원자를 탈락시켰다. 무임승차 지원자는 모두 여기서 내리시면 됩니다. 여러분.

"다음 기회에 함께 해요."

"지랄하지 마!"

안타깝게도 이번 지원자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얼굴이 시뻘개진 드워프였다. 그는 화가 단단히 나서는 오크통을 발로 걷어차버렸다.

"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놈을 뽑으려고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그가 소리쳤다.

"너희도 미궁에 한 번밖에 들어간 적 없는 초보자들이잖아!"

솔직히 말해서 정확한 지적이다.

"운빨로 백어택을 잡았다고 의기양양해가지고 파티원을 상향 모집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운빨은 아니었다. 상향 모집도 아니고.

"웬만큼 이름 있는 놈들이 겨우 하루만에 열린 이딴 초보 파티 모집에 들어올 것 같아!?"

드워프는 나를 향해서 삿대질을 했고, 그 뒤에서 누군가 드워프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 실례. 볼일 끝났으면 비켜주시길."

중갑과 철퇴와 방패로 중무장한 키 큰 리자드였다.

"뭐, 뭐야······."

드워프가 당황하면서 뒷걸음질쳤다. 꽤 유명인이었기 때문에. 2층 파티에도 종종 불려간다는 나타니엘 신전의 프리랜서 리자드 팔라딘.

"버나드······?"

슬슬 나타나는군!

옥석에서 옥을 담당하는 사람들 말이다.

"아아! 세상에! 정말로 백어택이 언데드가 되어서 걷고 있잖아!"

리자드는 물갈퀴로 자기 눈을 가리면서 진저리쳤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

"뭐, 뭐야······. 버나드가 여길 지원한다고?"

드워프는 순식간에 분노조절이 되었다.

다시 얘기하지만 우리가 들어가는 게 1층이기 때문에 2층 이상 탱커들한테는 단가가 안 맞는다.

그러나······.

"나타니엘! 이게 정말로 당신께서 바라신 일이란 말입니까? 교단이 이걸 승인했다는 것을 저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언데드 백어택이 어그로를 끌어줄 거라고 믿고 있었지.

특히 나타니엘 교단을 말이다.

게임에서도 나타니엘 교단은 사령술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이실로프가 어떻게 구워삶아서 신전이 이 프로젝트에 동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시체만 주고 끝냈을 리가 없어.'

나타니엘 신전에서 사람을 보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이 프로젝트가 정말로 제대로 진행되는지 감시하기 위해서.

"나타니엘! 제가 교단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그럼 왜 나는 나타니엘 신전에 가서 지원자가 없냐고 묻지 않고, 모험가 길드에서 파티 모집을 했는가?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신전에 찾아갔어도 아마 길드에서 정식으로 파티 모집을 벌이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가 이 계약을 따낼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나타니엘!"

나타니엘은 금전 거래와 계약의 신이기 때문에.

교단은 대충 아는 사람끼리 뭐, 적당히 주먹구구로, 인맥으로 어떻게, 그런 것들을 몹시 혐오한다.

그리고 보아하니 신전에서 레벨 수준도 나한테 딱 맞춰서 보냈군.

그렇지. 그렇게 나와야지. 그게 적절한 인력 배분이지.

좋다. 이러면 이번에 연줄을 만들어놓고 비르타넨 파티의 엠마처럼 꾸준히 쓸 수도 있겠는데?

"광휘의 힘!"

근데 리자드야. 그건 좀 반칙 아니냐?

팔라딘 버나드는 근력을 +3점만큼 강화하는 버프를 스스로에게 걸고 무대에 뛰어들었다.

단숨에 오크통을 집어서 천장에다 수직으로 날려버린 다음.

"이제부터 본 팔라딘에게 나타니엘께서 내려주신 신성한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시 철퇴와 방패를 들어 무장했다.

쓸 만하다.

스킬은 어떤지 좀 볼까?

"수호자의 방패!"

버나드가 전방으로 방패를 힘껏 뻗었다. 그러자 방패를 중심으로 거대한 보호막이 나타나서 버나드를 감쌌다.

"징벌!"

그는 공격력도 훌륭하다. 철퇴에 신성력을 담아서 내리찍자 오크통이 박살나버렸다.

어?

아니지 잠깐만.

"그 오크통으로 뒷사람들 면접 봐야 하는데······!"

"멸악의 화살!"

버나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는 철퇴 끝에서 광휘의 레이저(?)를 발사해서 벽면을 태워버렸다.

"어떻습니까! 제가 그대들의 앞날을 축복하고 함께 여정을 완성시켜 저 불쌍한 언데드를 안식에 들게끔 하겠습니다!"

"잠깐만."

뒤에서 인간 남자가 앞으로 성큼 나섰다. 외모로 보아하니 동양 출신이다. 윈덤보다도 더 동쪽.

"안식에 들게 하면 안 되지. 부활시켜야 하는데."

게임에서는 그냥 아시아인 모티프로 만든 인종이라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봐도 아시아인처럼 생겼다.

그리고······.

'3층이잖아?'

장비 수준만 봐도 견적이 나온다. 그는 3층을 주 무대로 쓰는 양손검 파이터다.

"칼잡이 히지카타라고 해요."

과연 3층 모험가답게 여유가 넘치는 그는 박살난 오크통을 와그작 밟고 넘어와서 내게 악수부터 청했다.

이 정도 격차면 면접 같은 게 의미 없다는 듯.

뭐, 틀린 말은 아니다만.

"지원하실 겁니까? 3층 모험가를 영입하기에는 단가가 안 맞는 일인데요."

"단가는 필요 없습니다. 1층에는 관심 없으니까. 근데 마법 대학의 이번 임무 자체에 관심이 있거든."

히지카타가 말했다.

"내 친구 중에도 미궁에서 실종된 애가 있어서요."

내가 나타니엘 신전에 찾아가지 않고 모험가 길드에서 파티 모집을 한 두 번째 이유.

한가닥 하는 모험가들 중에서는 동료가 실종된 사람들이 종종 있다.

"진짜로 저 미스터 퍽치기를 부활시킬 수 있다면, 내 친구한테도 희망이 있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 임무를 내가 맡고 싶은데."

이런 사람들을 노리고 파티원 모집을 열었던 것이긴 한데······.

'애매하군.'

이 경우엔 좋으면서 나쁜 제안이다.

3층 파이터가 전위를 맡아준다면 나는 솔직히 개꿀 빨 수 있지. 그런 면에선 좋다.

하지만 저 파이터는 미션이 끝난 후에 다시 내 파티에 들어올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

"저희는 이번 임무 하나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같이 일할 수 있는 동료를 찾고 있습니다."

"백어택은 미끼고 속내는 쓸 만한 1층 동료를 찾는 거다?"

"미끼는 아니고요. 백어택의 부활은 반드시 해낼 겁니다. 그 임무도 진지하게 맡은 거예요."

"음······."

히지카타는 면도한 지 3일 정도 된 듯한 까끌까끌한 턱을 매만졌다.

"그럼 저 리자드를 뽑을 건가요? 솔직히 너무 시끄럽지 않나?"

"뭣!"

리자드가 발끈했다.

"이 팔라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나타니엘을 대변하는 것이니 감히 돌이킬 수 없는 결례를 저지를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시오!"

좀 혓바닥이 길긴 해.

"케일럽!"

이번에는 조금 그리운 얼굴이 나타났다.

"비르타넨?"

"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전위를 맡아줄 전사가 필요하면 나한테 연락하지 그랬나?"

"비르타넨은 이미 파티가 있으니까요."

"자기 파티 만든대."

히지카타가 나를 엄지로 콕 찍어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냥 일시적인 용역이 아니라? 아예 파티를 창설한다고?"

"네."

"그렇군······."

그러자 갑자기 비르타넨이 엄청나게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사람 표정이 이렇게까지 우울해질 수가 있다니?

"나는 자네를 우리 파티에 들이는 것만 줄곧 꿈꾸고 있었네만."

"죄송합니다······."

내 잘못은 아닌데 왠지 저 표정을 보니까 죄 지은 기분이다.

"괜찮네! 우수한 파티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은 모험가로서 희소식이니까."

비르타넨은 헛기침과 함께 기분을 환기했다.

"케일럽. 조심하게. 미궁에는 미친놈 천지일세! 다른 파티 중에서 절반은 적이라고 봐도 좋아. 아예 다른 파티를 습격해서 돈 뺏는 걸 목적으로 하는 놈들이 있을 정도지."

그러니까 믿을 만한 파티가 하나 늘어나는 것은 사실 기뻐할 일이라며 드워프가 중얼중얼 설명을 늘어놨다.

"대화 중에 죄송한데."

리자드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럼 저를 뽑으시는 겁니까?"

글쎄.

어떡할까? 솔직히 나쁘지 않다만 약간 아쉬운걸.

조금만 더 기다려봤으면 좋겠는데.

"잠깐만요!"

갑자기 면접장에 누군가 또 부리나케 뛰어들었다.

"엇!"

다들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놀라서 움찔했다.

아니 이건 팔라딘보다 더 귀한 타입이잖아?

'몽크!'

'힘 몽크'는 내가 턴제 마스터 난이도를 깰 때 썼던 메인 탱커다.

그는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숨이 턱끝까지 차서 헐떡거렸다.

"면, 면접 좀······. 봅시다."

"면접 끝났는데."

리자드가 바닥의 박살난 오크통 잔해를 가리켰다.

"안 돼! 면접이라도 보게 해주시오! 제발!"

그에겐 이 파티에 반드시 끼어야 하는 사정이 있었다.

"백어택은······."

몽크가 소리쳤다.

"내 동료였어!"

***

미스터 백어택.

일찍이 1층 최강자로 불렸으며, 모험가 길드에서 장래가 가장 유망했던 남자.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팀 동료들이 전부 다운되었을 때, 혼자서 블랙 호넷을 물리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날, 백어택에게 목숨을 빚진 몽크는 백어택을 파티에서 추방했다.

"미안한데 우리랑 너는 어울리지 않아."

몽크 파티장, 아이무스 레닉은 진지하게 말했다.

"넌 2층에도 갈 수 있어."

"······."

"우리는 1층에서 계속 헤매는 반푼이들이고."

실제로 백어택은 2층 파티에 들어가서도 1인분 이상을 해치웠던 사람이다.

"그땐 용병으로 잠깐 갔던 거지만, 네가 돌아올 때 그쪽에서 나보고 그랬어. 너를 놔주라고······."

삼류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잔인한 도덕률이 하나 있다.

바로 재능 있는 동료를 빨리 놔주는 것.

"넌 심층으로 갈 수 있어."

그들은 벌써 3년 넘게 같이 미궁을 탐험하면서 정이 잔뜩 들었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백어택은 그 파티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젊고 강하다. 영민하고 날렵하며, 스킬 구동력도 훌륭하다.

하지만 몽크는 벌써 나이가 40대 중반.

마법사나 신관이라면 모를까, 몸을 쓰는 클래스는 나이도 중요하다. 누가 봐도 몽크는 이미 전성기를 지나버렸다.

노움 마법사 허셀은 고향의 마법 대학에서 만년 낙제생이었다.

"레닉 씨 말이 맞네. 백어택. 자넨 2층으로 가도록 해. 진즉에 우리 통수를 치고 내려갔어야지. 왜 이름값을 못하나?"

농담을 던지면서 허셀은 눈가가 젖어있었다.

엘프 드루이드 카엘린은 아직도 정령 계약을 못 맺은 바보다.

"난······. 난 솔직히 헤어지기 싫어······."

그녀는 몽크나 노움 마법사보다 더 솔직했다. 오랫동안 정들었던 동료에게 형식적으로나마 추방령을 내리면서 카엘린은 훌쩍훌쩍 울었다.

"그래도 이게 맞는 것 같아. 백어택. 우리는 여기까지야."

정이 많이 든 친구들이었다.

"2층 가서도 건강해라."

허셀은 멋진 허리띠를 건네주었다. 작별 선물이었다.

"보고 싶을 거야."

카엘린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허리띠에 부착할 수 있는 폭탄을 선물로 주었다. 위급할 때 적들한테 던져버리라며.

"너는 2층에서도 잘 할 거야."

파티장 몽크, 아이무스 레닉은 단검을 선물해주었다.

"나름 비싸게 주고 샀어! 블랙 호넷 알껍질도 한방에 찢어버릴걸!"

레닉은 백어택과의 계약을 일방 파기했다.

직접 위약금을 물고, 백어택을 자유롭게 풀어주면서.

"2층으로 가."

그들은 백어택을 추방했다.

***

사건이 벌어진 것은 3주 후.

1층 미궁의 출구 게이트에서 누군가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튀어나왔다.

반푼이 드루이드 카엘린이었다.

새 파티원을 구하지 못해서 3인으로 플레이하던 그들은 출구룸을 깼지만, 지쳐있던 순간을 노린 약탈자들에게 급습당했다.

'도와주세요······!'

카엘린은 찢어진 아랫배에서 창자가 흘러나오는 걸 부여잡고 미궁 관리실 계단을 올라갔다. 도움을 요청하며 기절.

출구 게이트는 이미 닫힌 후였다. 약탈자들이 던져 넣은 마석 세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미궁 1층의 진입 게이트는 열려 있었다.

백어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안으로 뛰어들었고······.

"뭐야······."

몽크 레닉은 1층 미궁의 출구룸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기현상을 목격했다.

출구룸이 클리어되면 미궁의 구조가 바뀐다. 그리고 어딘가에 새로운 출구룸이 생긴다. 그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출구룸이······. 이 자리에 다시 생겼어······?"

허셀을 죽여버리고 레닉을 위협하던 약탈자들에게도 그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레닉의 등 뒤에 출구룸의 문이 나타난 것이다.

"출구룸 안에 출구룸이 생기다니?"

하지만 진짜 기가 막힌 상황은 거기서부터.

철컥!

갑자기 출구룸의 문고리가 돌아갔다.

모험가가 연 게 아니다. 그냥 안에서 저절로 열렸다. 출구보스가 직접 문을 열고 나온 것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1층 최강자가.

"하하하하!"

누가 봐도 비인간적인, 소름끼치는 그 웃음소리. 맛이 가버린 눈빛과 이마에 찍힌 미궁 마스터의 문장.

약탈자들은 순간 얼어붙었고, 백어택은 도약 암습으로 그중 하나의 목을 잘랐다.

"으아악!"

"괴물이다!"

이어지는 투검은 두 번째 약탈자의 심장을 뚫어버렸다.

"하하하하!"

백어택은 세 번째 약탈자를 붙잡고 그림자 도약으로 날아가 쓰러뜨려놓고 가슴을 수차례 난도질했다.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피.

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마지막 남은 약탈자는 와들와들 떨면서 활시위를 당겼지만, 백어택은 투명 상태가 되어버렸다.

"어, 어디 있어! 어디!"

약탈자의 비명을 뒤로하고 몽크 파티장 아이무스 레닉은 절뚝거리면서 앞으로 내달렸다.

문이 열린 출구룸으로.

***

"나는 도망쳤어."

그가 말했다.

"그간 용기가 없어서 얘기하지 못했지만."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제정신이 아니었네! 그때 백어택은 진짜로 괴물 같았어. 나는 공황 상태에 빠져서 백어택이 나온 출구룸으로 뛰어들었네. 그 안에는 게이트가 이미 열려 있었지."

"······."

"나는 그리로 들어가서 마을로 도망쳤어. 와보니까 이미 카엘린은 죽었더군."

음.

게임에서 저걸 일컫는 전문 용어가 있다.

'기행 보스.'

출구룸을 나와서 필드를 돌아다니는 보스다.

근데 1층에서 기행 보스가 나오는 경우는 나도 처음인걸? 보통은 저 아래 심층까지 내려가야 가끔 나오는데.

"그 후로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어."

몽크에게는 그 사건이 거대한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죽을 뻔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때······. 백어택을 버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

"그럼 백어택이 출구 보스로 전락하는 것도 막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솔직히 나도 모르겠는데, 아마 아닐 것 같다. 출구룸에서 나왔다면 이미 출구 보스가 됐다는 거잖아.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몽크의 죄책감은 덜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 출구룸이 내 등 뒤에 튀어나온 건······. 혹시······어쩌면······."

정상적으로 탐험한다면 백어택이 몽크 파티를 구해낼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미궁은 엄청나게 넓고, 진입 지점은 랜덤이므로.

"우릴 구해주려고······. 백어택이 미궁 마스터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거였을까?"

"······."

"그래서 출구룸이 내 등 뒤에 새로 생긴 거라면······. 만약 날 구해주려고 영혼까지 팔고 왔는데 내가 혼자 도망친 거면······. 그럼 나는······."

3류 파티의 최하위.

평범 이하의 소시민들에게도 드라마 같은 비극이 있다. 그 누구도 관심이 없겠지만.

그리고 40대 중반의 아저씨도 울 수 있다. 나는 회사 다닐 때도 가끔 봤다.

그리고 지금도.

"······."

몽크는 언데드가 된 백어택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오열이 터져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눈물로 어깨를 파들파들 떨면서.

"그아아?"

백어택은 눈치 없이 예르닐의 머리카락만 우물우물 씹었다.

23화

저 빙의자 아닙니다

유사 이래 모험가 길드에서 1층 모험가들의 파티 결성이 이 정도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뛰어난 장비와 힘과 신성 마법들로 중무장하고 모험가 길드에 찾아온 리자드 팔라딘, 버나드는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럴 수가."

"출구룸이 출구룸 안에 생기다니."

"기억나는구먼. 어떤 삼류 파티가 습격당했다고 해서 백어택이 게이트로 뛰어들었지."

"그때 살아나온 게 자네였나? 몽크?"

몽크의 감성팔이 때문에 현장 분위기가 죄다 백어택과 그의 사연으로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케일럽! 몽크를 뽑아요! 자기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줘야 합니다!"

감정적인 칼잡이 히지카타가 소리쳤다.

"단가만 맞으면 백어택의 영혼을 되찾는 것 정도는 함께 하게 해주는 게 어떤가? 인간적으로."

비르타넨도 헛기침을 하며 몽크 쪽에 힘을 실어주었다.

오!

이런 것은 옳지 않다.

버나드는 혀로 눈알을 날름날름 핥았다.

"신성한 금전 거래와 계약에 감히 감성으로 물을 타다니······."

나타니엘께서 보시면 진노할 것이다!

"면접 보라고 하시죠!"

버나드가 소리쳤다.

나타니엘의 팔라딘은 이런 종류의 도전을 우회하지 않는다. 정면으로 면접 대결을 벌일 것이다.

그리고 버나드는 반드시 이긴다.

왜냐?

저 몽크는 백어택 원툴 파티의 떨거지였으니까.

거기서도 1인분 못해서 파티를 공중분해시킨 녀석인데, 여기 들어갈 수 있을 리가.

그리고 몽크는 근접 전투 전문가로서, 지금 케일럽이 찾는 전위 포지션에 걸맞긴 하지만 성격이 좀 다르다.

몽크들은 민첩하지만, 힘은 약하거든.

"오크통부터 들어봐!"

시험 자체가 몽크한텐 쥐약이다.

"오크통, 당신이 부쉈잖아······!"

히지카타가 얄밉다는 듯 소리쳤다.

"대신 나를 들어보는 건 어떤가?"

비르타넨이 근육으로 가득 찬 가슴을 부풀렸다.

"갑옷 빼고 내 체중이 주점에서 쓰는 오크통 하나랑 비슷하네."

"그럼 갑옷 벗고······."

"괜찮습니다."

몽크는 앞으로 성큼 뛰어들더니 비르타넨의 혁대와 어깨보호대를 붙잡고 역도선수처럼 들어 올렸다.

"으앗!"

"제가 둔한데 힘만 무식하게 세서요."

"아니 뭐 저딴······."

"몽크가 힘이 왜 저래?"

"팔뚝 뭐야?"

"무슨 몽크가 괴력이······."

사방에서 모험가들이 술렁였다.

확실히 아이무스 레닉은 1층에서도 고전하는 못난 몽크다.

몽크들이라면 기본적으로 할 줄 아는 '신묘한 회피' 같은 패시브 스킬도 없고, '철새 주먹' 같이 몰아치는 공격기도 없다.

'너무 둔하기 때문에.'

그는 몇 번이고 1층에서 분수대를 맞닥뜨렸지만, 레닉에게는 다른 몽크들과 같은 스킬 축복이 내려지지 않았다. 자격이 부족했으니까.

그를 아는 모험가들은 이렇게 불렀다.

힘만 센 힘몽크라고.

***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케일럽! 이제 한 명 고르기만 하면 되겠군!"

조용히 해봐 드워프야. 생각 좀 하자.

'베노믹 스파이더 출구룸에서 비르타넨과 즉시 탈출하기vs예르닐.'

그때 이후로 제일 큰 선택지 시련에 맞닥뜨렸다.

이거 진짜 쉽지가 않네.

살짝 나사 빠진 도마뱀 팔라딘과, 40대 중반 힘 몽크.

오늘 진행된 탱커 이상형 월드컵 최종전이다.

진짜 황금 밸런스군.

둘 다 약간씩 아쉬운 부분이 있다. 내 입장에선 당연히 힘몽크가 팔라딘보다는 더 좋은데, 아쉽게도 팔라딘이 더 젊다.

게다가 정신적으로도 팔라딘이 좀 더 전위에 어울리는 인물 같다. 과연 저 40대 몽크 아재가 전위에 나서서 용감무쌍하게 탱킹할 수 있을까?

게임이라면 그냥 내가 앞에 배치하면 끝이니까 상관없지.

근데 현실이 되니까 사람 성격과 나이까지 고려하게 된다.

내가 앞으로 여기서 미궁질을 몇 년을 더 해야할 지 모른다.

보아하니 몽크는 이미 결혼도 했고 애도 있는 모양인데, 나이가 들고 가족들이 말려서 못하겠다고 탈주하면 어떡해?

그때 가서 팔라딘 갑옷에 똑똑 노크해봤자 쟤는 빈정 상해서 안 올 것 같단 말이지.

이거 진짜 신입 채용 지원자 상대로 면접 보는 기분이군.

음.

역시 이럴 때는 가격 협상이 최고지.

"두 분, 정산 비율을 얼마나 원하십니까?"

"교단의 팔라딘으로서 그 명예를 걸고, 절대 25% 이상을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금전 거래와 계약의 신 나타니엘께 맹세하지요."

리자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어서 몽크도 대답했다.

"저는 안 받아도 됩니다."

"몽크님 합격!"

"신성 모독이다!"

몽크 손을 들어주었더니 도마뱀이 좋아서 발작했다.

"0 퍼센트라니! 그딴 정산 비율은 존재할 수가 없어! 신성 모독이야, 신성 모독! 돈을 안 받고 어떻게 일을 하나!"

아아, 그것은 열정페이라는 것이다. 리자드야.

근데 사실 진짜로 완전 무상으로 부릴 생각까지는 없고.

"대신 제가 장비를 맞춰드리겠습니다."

힘 몽크가 수도사 가죽경갑에 주먹 무기? 아이고 세상에. 그러니까 댁은 1층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거야.

예르닐이 칼이랑 방패 들고 탱킹 하겠다고 나서는 꼴이잖아.

"잠깐만!"

리자드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 나타니엘의 팔라딘으로서, 내가 보기에는 이 채용 결과는 오염되었어! 철저한 계산과 합리적 판단이 아니라고!"

철저한 계산과 합리적 판단으로 고른 게 맞다.

하지만 리자드가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것도 이해는 되네.

"힘만 무식하게 셀 뿐, 둔해 빠져서 몽크다운 스킬을 하나도 못 쓰는 녀석을 채용한다? 누가 봐도 폐급이잖아!"

말이 너무 심했지만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돈을 안 줘도 되니까? 백어택이랑 아는 사이니까 불쌍해서? 웃기지 마! 감히 내 앞에서 신성 모독을 할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라! 이 채용은 공정한 능력주의 대결이어야 했어!"

리자드는 철퇴를 겨누며 외쳤다.

"그래도 파티장은 접니다. 제가 뽑는 거예요."

"······그건 맞지만······."

리자드는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해서 씩씩대더니 다시 소리쳤다.

"어차피 한 파티로 움직일 거라면 서로 스킬과 마법 궁합을 맞춰봐야겠지. 나한테 네 마법들을 보여봐라! 나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이 결과가 나타니엘의 뜻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이 몸은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나타니엘의 진노가 이 몸과 함께하시니까! 나타니엘! 제게 힘을 주십시오!"

진짜 말 많은 도마뱀이다.

근데 마법을 보여줘야 하는 것도 맞긴 해.

타이밍도 나쁘지 않다. 이쯤에서 마법 하나만 살짝 보여줄까?

팀워크를 위해서도 좋고, 예르닐도 아직 못 봤으니.

"열대지방의······."

완드를 겨누고 영창을 외었다.

"폭염."

"수호자의 방패!"

버나드는 방패 보호막을 덧씌우면서 눈을 끔뻑거렸다.

그걸로 못 막는데.

파이어볼 같은 마법 투사체인 줄 알았나?

"어······?"

어지럽겠지. 숨은 탁 틀어막히고 머리가 핑핑 돌 것이다.

그게 열사병이다.

변온종아.

***

게이트가 열리는 것은 8일 후.

그때 나는 아이무스 레닉, 예르닐, 그리고 백어택까지 세 사람을 데리고 들어갈 것이다.

이번에는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다. 거의 맨몸으로 미궁에 내던져진 노예 팀 시절하곤 다르다.

물론 막상 미궁에 들어가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영혼이 안식처가 그렇게 만만한 곳은 아니거든.

게다가 1층에서 백어택이 기행 보스로 나왔다는 걸 볼 때, 이곳의 미궁은 내가 게임으로 접했던 것보다 좀 더 변칙적이다.

하지만 이 같은 걱정들은 지금 고민한다고 해서 답 나오는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먼저 해결할 일이 따로 있지.

"레닉. 이제 가보셔도 좋아요. 제가 아까 얘기했던 거 연습해주세요. 예르닐도 백어택이랑 같이 기숙사로 가 있어요."

"케일럽은요?"

"저는 마법 대학에 잠깐 들릴 거예요."

지금 내 목숨을 옥죄는 제일 큰 위협 거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마법 대학 그 자체다.

마법 대학 안에 만약 어떤 빙의자 카르텔이 있다면, 지금 나는 사실 호랑이굴 깊숙이 들어와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내가 빙의자라고 거의 100% 확신하고 있겠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나한텐 어떤 선택지가 있나?

첫째, 달스트림 교수나 이실로프 같은 '빙의자 우호적인' 세력에게 빙밍아웃하고 그들의 비호 아래에 들어가는 것.

이 선택지는 쓸만한가?

아니.

당장 기각해버려야 한다.

내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정도로 약해빠진 시점인데 내 목숨을 타인에게 맡긴다? 정신 나간 짓이다.

하물며 아직 교수들 사이의 세력 구도와 정치질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파악이 되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제일 큰 문제는 그들 중에서 누가 빙의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저쪽은 정체를 밝히지도 않는데 나만 밝힌다니. 미친 짓이라고 해도 좋다.

그럼 두 번째 선택지.

'내가 빙의자가 아님을 입증한다.'

그래서 지금 내게 쏠려있는 과도한 감시의 눈길들을 치워버리고 수면 아래에 숨는다.

시한폭탄 같은 빙의자가 아니라, 그냥 개쩌는 천재 마법사인 걸로.

그래서 멜디니든, 이실로프든, 그 뒤에 숨어있는 어떤 빙의자 마법사 카르텔이든, 모두가 내게 우호적일 수 있게.

미궁 분출의 위험은 전혀 없으면서, 능력은 뛰어나서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천재 신인.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자.

가능한가?

가능하다.

"케일럽."

대학 본관으로 들어가는데 하플링 교수 멜디니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미끼를 물었구나, 멜디니.

나는 너를 자극하기 위해서 지난 며칠간 거침없이 날뛰었다.

달스트림 교수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생소한 마법들을 딱딱 골라서 제출했고, 그걸 실제로 결속하는 데 성공해서 모험가 길드에선 폭염이라는 브랜뉴 마법도 선보였다.

그리고 이실로프의 어려운 퀘스트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언데드 백어택을 모험가 길드에 데려가서 도시 전체를 시끌시끌하게 만들었지.

실제로 여기 오는 길에도 여기저기서 떠드는 게 들리더라.

지원자들이 스무 명 가까이 됐는데 다 떨어졌대. 심지어 버나드도 떨어졌대. 무슨 몽크를 뽑았대. 힘만 무식하게 센 느려터진 몽크를. 버나드가 마법을 맞고 한 방에 기절했대. 심지어 3층 모험가 히지카타까지 떨어졌대.

······같은 소문이 사방에서 들렸지. 사실 히지카타는 심사 탈락하곤 느낌이 다르다만.

"잠깐 얘기 좀 하세."

멜디니는 괘씸함과 긴장감으로 손을 바들바들 떨 정도였다.

감히 빙의자가 내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날뛰다니.

······같은 눈빛이군.

마침 점심시간이다. 연구실마다 대학원 조교들과 교수들이 식사하러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

로비는 다소 혼잡하다.

"마법 결속에 성공한 모양이더군. 그게 무슨 마법이었나?"

멜디니가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분위기가 심상찮은 것을 느꼈는지 다른 교수들이 멈추어서서 힐끔거렸다.

"모험가 길드에서 쓴 것 말입니까?"

"그래."

"폭염이라는 마법입니다. 가습과 열풍을 결속했습니다."

"케일럽. 마법서 결속이라는 게 말일세. 그냥 습도를 높이고 열을 주면 극심한 더위를 만들어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겠거니 하는 단순 추측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야. 그렇게 시도해서 실패한 사례가 훨씬 더 많아. 엄청나게 운이 좋은 모양이지?"

"······."

"그거 말고 탄진이란 마법은 왜 넣었나?"

"화산이 폭발하면 화산재가 응결제 역할을 해서 상승 기류를 타고 올라오는 습기를 잡아 물방울을 만들고 구름이 생깁니다. 그걸 마법으로 흉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마법들을 메모리북에 담았더니, 지혜의 신께서 결속 마법을 주시던가?"

"네."

"뭐라고!"

하플링 교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거칠어진 목소리에 다른 교수들과 시니어 마법사들도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럼······. 그럼 지금 1등급 마법 세 개를 가지고 2등급 마법 두 개를 결속했단 소리냐?"

하플링의 말투가 경어에서 반말로 바뀌었다.

"아니요. 세 개를 결속했습니다."

"세······세 개······."

과장 없이 진짜로.

멜디니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세 개를 결속했다고······? 투 페어에 트리플?"

"첫 번째 페어는 가습과 열풍의 결속으로 폭염. 두 번째 페어는 열풍과 탄진의 결속으로 분진폭발, 트리플 결속은 적란운이라는 마법이에요."

"야아-!"

갑자기 하플링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우리가 우습게 보여!"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거치네.

아무래도 12년 전의 그 미궁 분출이 당신한테 상당히 큰 상처였던 모양이지?

"지혜의 신이 너를 직접 축복한 게 아니고서야 그럴 수가 있느냐! 어! 그게 그냥 논리 추론 정도로 되는 일이야?"

"······."

"으음."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달스트림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정말로 지혜의 신께 축복을 받은 것일지도?"

"웃기지 마십시오! 교수님!"

멜디니는 원로 교수에게도 이제 예의 따위 차리지 않았다.

"마법서 결속을 하나만 해내도 논문도 쓸 수 있는 성과야! 근데 1등급 마법을 세 개 고른 게 결속을 세 개나 했다는 게 말이 돼!"

"멜디니!"

한 박자 늦게 튀어나온 이실로프가 경악해서 달려왔다. 아무래도 사고가 터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얼굴이 굳은 채.

"멜디니 교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지금······."

"가만히 있게!"

그는 제지하려는 이실로프를 뿌리치고 완드를 뽑았다.

"케일럽! 너한테 거짓말 방지 마법을 걸어야겠다."

"······."

"네가 빙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라!"

"멜디니!"

이실로프도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다.

"마법사답지 못하게 이 무슨 무례한 짓인가! 케일럽은 자유민이야!"

"자유민? 웃기지 마!"

멜디니가 소리쳤다.

"미궁 도시 소헨의 법에 따라, 이세계 빙의자는 자유민으로 보호받지 않아!"

"······."

"케일럽!"

하플링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네가 정말로 결백하다면 여기서 증명해라. 만약 정말로 네가 빙의자가 아니라면, 똑바로 사과하고 너한테 마땅히 배상하겠다. 하지만!"

그가 내 이마에 완드를 겨누었다.

"네가 빙의자라면 지금 죽여버릴 것이다. 물론 나는 처벌받겠지. 하지만 살인죄는 아니다! 왜? 너는 이 세상의 주민이 아니니까!"

"······."

"나는 거짓말 방지 마법을 무단으로 남용한 것에 대해 처벌받겠지만 그딴 건 상관없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내가 그 정도 희생으로 이 도시에 장차 위협이 될 폭탄을 제거할 수 있다면!"

"멜디니!"

이실로프가 달려와서 멜디니의 완드를 힘껏 쳐냈다.

이제는 이실로프도 완드를 빼들고 멜디니를 겨누고 있었다.

"내 클럽의 학생일세. 한 번만 더 그따위 무례를 저지른다면 여기서 나하고 끝장을 볼······."

"하십시오."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뭐······?"

두 교수의 동그래진 눈이 나를 향한다.

"거짓말 방지 마법. 저한테 거십시오!"

조연들은 다 모였고, 교수들도 전부 모였다. 이런 쇼는 벌일 거면 크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똑똑히 박아넣는 게 좋다.

아울러 그들의 표정도 관찰해줘야지.

"마법을······걸어라?"

하플링이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네. 멜디니 교수님. 노예 관리 부서에서도 저한테 그러셨죠. 제게 거짓말 방지 마법이 남아있는 동안, 그 틈을 타서 제 개인사를 들먹이면서 저를 떠보셨죠?"

"······."

"그런 식으로 의심하고, 감시하고! 사람 모욕하지 말고 그냥 지금 마법을 거세요!"

"거짓말······방지 마법."

분노에 찬 하플링의 완드 끝에서 마법이 분출했다.

"케일럽!"

이실로프가 소리쳤다.

"저항하게! 마법을 거부하겠다고 생각해! 거짓말 방지 마법은 간단히 저항할 수 있어! 뿌리쳐버려!"

역시 이실로프도 내가 빙의자라고 확신하고 있었군.

이제 나는 수면 아래로 숨는다.

"멜디니 교수님!"

힘껏 소리쳤다.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답을 다 정해놓고 왜 물으시는 겁니까? 그냥 이 말이 듣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해드릴까요?"

모두에게 들리도록, 목청을 높여서 힘껏.

"저는!"

소리를 질렀다.

"이세계 빙의자입니다!"

적막.

광역 마법으로 상태이상 기절을 걸어버린 것처럼 모두가 정지했다.

"됐습니까?"

멜디니 교수의 분노에 찬 손과 완드 끝이 파들파들 떨린다.

위아래로.

그리고 멈추었다.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60초]

[행동력 : ■■■■]

내가 모래시계를 뒤집었으니까.

***

이제 얼굴들을 살펴보자.

지금 이실로프처럼 '헉!' 하고 있는 사람들은 동그라미.

그들은 내가 빙의자라고 해도 나를 보호해주고 싶은 사람들이다.

멜디니처럼 '씨발 넌 이제 뒤졌다!' 하는 인물들은 세모.

그들은 내가 빙의자가 아님을 증명한다면 건드리지 않을 사람들이다.

마법대학 안에 빙의자 카르텔이 있다면 그들은 이 순간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아마 다음 둘 중 하나다.

'아, 저 새끼 급발진 해버렸네. 좀 지켜보다가 쓸만하면 영입할까 했는데 아까워라!'

또는.

'우리 카르텔은 이미 꽉 찼어. 불쌍한 새끼. 안 그래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는데 알아서 자폭해버리네. 다행이다.'

이런 표정을 지은 놈들은 누가 있는지 한 번 살펴볼까.

물론 이런 것으로 확신할 순 없겠지만, 러프 스케치는 할 수 있단 말이지.

일단 원로 교수 달스트림.

음.

'모르겠네.'

저 영감님은 표정이란 게 아예 없는 느낌이다. 타짜이신가?

그리고 다른 교수들.

조교들.

최대한 많이 체크해둔다.

섣부른 판단은 선입견이 되어 오히려 내 분석 능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으므로 가능한 보수적으로.

'엔버 교수.'

기대했던 것보다 건질 게 많지는 않다만, 저 사람 하나는 좀 의심스럽다.

왜냐면 지금 '신난' 얼굴이거든.

와, 심심하던 와중에 진짜 개꿀잼 터졌네! 이거 돌아가서 카르텔 형님들한테 얘기해줘야지!

······같은 느낌으로 킬킬 웃고 있다.

쟤는 체크 해놓고 지켜봐야겠군.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11초]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을까?

"멜디니 교수님."

내가 당신을 상대로 루어낚시를 벌인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멕인 것에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당신도 나름대로 이 도시와 대학을 지키려고 애쓰는 시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미안해요."

남은 시간 7초.

이제 깜찍한 거짓말 하나를 살짝 얹는다.

"미궁의 심연은 제 인생 최고의 갓겜으로 고티를 100년 연속 따도 되는 개쩌는 명작입니다. 제가 그 게임을 한 건 제 인생 최대 행운이었어요, 시발! 여러분! 미궁의 심연 하세요!"

[턴을 종료합니다.]

[모래시계가 다시 뒤집어졌습니다. 쿨타임 : 60초]

***

피부에 발진이 올라온다. 알러지 반응처럼 전신이 뜨겁다.

"커헉······!"

호흡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과 침이 질질 흐르면서.

거짓말 방지 마법이 걸린 상태에서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어······어엇······."

"케일럽!"

모두가 경악한 가운데 이실로프가 나를 붙잡아 안았다.

멜디니를 한 번 볼까? 어떤 표정 짓고 계신가.

음.

무고한 천재 마법사 신입생한테 불법으로 거짓말 방지 마법을 걸고 몰아붙여서, 야마가 돌아버린 혈기왕성한 학생에게 '이게 듣고 싶은 거죠? 저는 이세계 빙의자입니다! 됐습니까!' 같은 위증적 선언을 기어이 받아내고 발작이 오게 만든.

고약한 마법사 교수 멜디니는 상상 그 이상의 충격으로 덜덜덜 떨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약간 짠하네.

미안해요 교수님.

근데 당신이 먼저 시작했잖아.

"헉······! 헉······."

그리고 이 개같은 마법. 이거 생각보다 발작이 더 빡세다. 전신이 가렵고 뜨겁고 난리군.

그래도 너희 다 한 방 먹었지?

"······!"

아까 체크했던 요주의 인물, 엔버 교수도 굉장히 놀란 표정이다.

좀 전엔 신나서 웃더니 개새끼야. 꼴좋다.

내가 빙의자라고 확신하고 감시망 펼쳐놓고 지켜보고 있었지? 근데 아니니까 당황했지? 무협에서 주인공이 천라지망에 걸리는 거 봤냐?

나는 빠져나가지 당연히.

거짓 진술을 참으로 만들 순 없지만, 킹-갓-모래시계와 함께라면 참된 진술을 거짓 진술로 만들 수는 있다고.

그렇게 '저는 빙의자입니다'라는 말을 거짓말로 보이게 만들었다.

나는 잡히지 않는다.

나는 들키지 않을 것이다.

뒤를 먼저 잡는 건 나다.

내가 너희를 먼저 찾아낼 것이다.

협상이든 전투든,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는 것이 바로 이 망겜을 깨는 데 필수 소양이거든.

"뭣들 해! 안으로 데려가! 빨리-!"

이실로프의 고함을 들으면서 나는 의식을 잃었다.

24화

교수님 우리 화해해요

마법 대학 1층 로비에서 앞으로 몇 주는 시끄러울 사건이 터졌다.

괴팍하기로 소문난 교수 멜디니가 화제의 신입생과 한 판 붙은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파티 결성 보고를 올리러 학교에 찾아온 신입생의 손모가지를 갑자기 교수가 냅다 움켜쥐면서 이렇게 소리친 것이다.

'동작 그만! 빙의자냐? 방금 빙의자 지식으로 신규 마법서 결속을 세 개나 했지?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이 새끼야?'

아.

그는 미끼를 물어버리고 만 것이다.

손보다 빠른 눈보다도 빠른 모래시계를 체크하며 학생은 대꾸했다.

'꼭 그렇게 피를 봐야겠어? 좋아. 내가 빙의자가 아니라는 데 내 자유민 신분과 목숨을 건다. 쫄리면 뒈지시든지!'

경상도의 짝귀와 전라도의 아귀의 계보를 잇는, 이른바 '소헨의 멜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둘 다 묶어!'

거짓말 방지 마법으로 둘 다 묶어버린 다음.

모든 교수와 학생들이 입회하여 지켜보는 가운데.

자, 확인 들어가겠습니다잉!

짜라란, 짜라란, 쿵짜짝, 쿵짜짝.

패를 딱 까보았더니 어?

자유민이네? 자유민이여!

풉.

정신 나간 드립이 마구 떠오른다.

멜디니야······.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런 거 안 배웠어?

[교내 응급 마법 처치실]

나는 지금 그렇게 불리는 곳의 병실에 누워 있었다. 마법 실험을 하다가 어떤 사고가 터졌을 때, 응급 처치를 하고 회복하는 곳이다.

부상이 심각하다면 신전으로 옮겨지겠지만, 나 정도면 그냥 누워서 낮잠 자면 낫는다.

"케일럽."

발진이 가라앉을 때쯤, 이실로프 교수가 들어왔다.

식사를 하러 나가는 도중에 갑자기 초대형 사고를 겪게 된 이실로프는 잠깐새에 몇 년 늙어버린 듯 얼굴에 진이 빠졌다.

"좀 괜찮나?"

"네. 이제 마법도 풀린 것 같습니다."

혓바닥 감각이 다 돌아왔다.

"후우. 정말로 깜짝 놀랐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밖에 교수랑 조교들 전부 난리가 났어. 저 녀석 진짜 보통 독종이 아니라면서. 멜디니 같은 교수 상대로도 바락바락 잘도 받아치더군? 대학원생들도 멜디니 교수는 무서워하는데. 아주 성질머리가 내가 젊을 때를 보는 것 같아."

"클럽 멤버로 받은 걸 지금 후회하셔도 이미 늦었어요. 저 쫓아내시면 안 됩니다."

"하하."

이실로프는 웃음을 터뜨리며 내 이마를 쓰다듬었다.

"내가 왜 그러겠니? 마법사가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상급자한테 대드는 용기도 있어야지. 오히려 더 좋아."

처음 만날 때는 나한테 깍듯이 거리 두고 존대하더니, 이실로프는 이제 말을 완전히 놓았다. 자기 클럽 멤버이자 제자라고 못 박은 것처럼. 사실 나도 이게 더 편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처음엔 네가 빙의자가 아닐까, 하고 의심했었어."

역시.

나는 대체 얼마나 위험한 어그로 한복판에 있었던 거지?

"근데 심지어 다른 교수들한테 밉보일 위험조차 없다니, 내 입장에선 다이아몬드 원석을 주운 기분이야."

감사합니다. 교수님.

앞으로 당신을 핵우산처럼 펼쳐 들고 밑에서 열심히 세공할게요.

"멜디니 교수님은요?"

"식사를 거르고 자기 연구실에 틀어박히셨어."

"······."

"성격이 좀 괴팍하긴 해도, 실력 있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존경 받는 교수님이야. 나 역시 존경하는 분이고."

이실로프가 말했다.

"아마 오늘 안에 사과하러 오실 거야. 그리고 너한테 확실하게 배상도 하실 테고."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답했다.

"저도 멜디니 교수님께 사과하고 싶어요."

***

존나 세게 죽빵 쳐서 날려버렸으니까 이제 악수 타임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상황에서 먼저 손을 내미는 타입이다.

멜디니는 내가 빙의자가 아닌 척 연기만 잘 하면 내 편이 되어줄 것 같거든. 빨리 풀어버리는 게 낫지.

게다가 실제로도 마음이 좀 그래.

왜냐면, 나도 만약 멜디니 입장이었으면 눈에 불을 켜고 빙의자를 찾아다녔을 거 같으니까.

물론 함부로 학살하진 않겠지만.

똑똑똑!

멜디니 교수의 방을 찾아가서 문에 노크했다.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지만.

"교수님, 저, 케일럽입니다."

먼저 신원을 밝히자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뭔가가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났다.

내가 사운드맵핑은 없지만 당황해서 허둥대는 듯한 내부 사정이 어째 훤히 보이는 기분이다.

찰칵.

교수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하플링 교수의 저 표정, 나는 어디서 본 적 있다. 어디더라.

음.

노예 관리부서 조교 제이콥이 저울추로 칼춤을 췄을 때 예르닐의 표정.

5골드형 판결이 내려졌을 때 그 표정이다.

"들어오게."

나를 안으로 들이는 멜디니의 목소리에 우울감이 잔뜩 묻어났다.

"교수님."

나는 교수와 함께 소파에 마주 앉은 다음, 최대한 공손하고 진지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뭐······?"

이 사과는 매우 뜻밖이었는지 교수의 어깨가 움찔했다.

"제가 너무 흥분해서 버릇없이 굴었어요. 그냥 아니라고 좋게 해명만 해도 됐을 텐데, 무례하게 대든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

"아무래도 제가 옛날 일도 떠오르고 해서 감정 조절을 못한 것 같습니다. 부디 마음 푸세요."

사과할 기회조차 선수를 빼앗겨버린 멜디니는 갑자기 울컥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자네는······."

교수가 작게 한숨을 뱉었다.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군. 케일럽."

그리고 멜디니도 내게 진지하게 사과했다.

"내가 정말 미안하네. 자네가 윈덤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면서도 내가 경솔하게 행동했어."

"······."

"진심으로 사과하지. 내가 실수했어. 미안하네."

그의 얼굴에서 진짜로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절대 피하지 않고 확실하게 대가를 치르겠네. 자네한테 줄 게 있어. 잠깐만 기다려보게."

좋아. 그러셔야지.

이렇게 빠꾸 없고 불같은 사람들은 보통 둘 중 하나다.

자기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못하는 꼰대 부류.

또는 자기 부하들의 잘못까지 화끈하게 책임지는 부류.

멜디니는 후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맞았다.

'나한테 뭘 줄까?'

두근두근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가운데, 멜디니는 서랍에서 작은 나침반 하나를 꺼냈다.

'어?'

그 디자인이 내가 아는 물건이다.

잠깐만.

"탐욕의 나침반."

저걸 준다고?

"내가 가진 전설급 마법 도구 중 하나일세."

인게임에서는 일반, 마법, 보물, 전설, 이렇게 네 가지 등급의 아이템이 등장한다.

설정상으로는 마법 대학에서 물건을 감정해서 아무 능력도 없으면 일반, 특별한 능력이 담겼으면 마법, 그 능력이 유난히 강력하면 보물.

그럼 전설급 아이템은 무엇인가?

보물 중에서 아직 식별되지 않은 능력이 더 있다고 판단되는 물건이다.

하지만 어떤 능력인지는 모른다.

전설급 아이템은 마법 대학의 감정 능력을 초과한 물건들이다.

"미궁에서 보물상자를 찾아주는 나침반일세."

그게 나침반의 1단계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 나침반에는 다른 능력이 더 있을 거야. 아마 자네라면 언젠가 그 힘을 꺼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

아.

시발 이것도 혹시 함정 아냐?

원래 게임에서면 저런 건 아무리 빨라도 중반 넘어가서야 얻을 수 있는 물건이다.

너무 보상이 커지니까 오히려 부담스럽다. 적당히 지혜 몇 점 붙은 액세서리 같은 거나 받을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본인이 잘못한 게 있다고는 해도, 다짜고짜 학생한테 전설 마법 도구를 투척할 수가 있는 건가? 교수한테도 몇 개 없을 거 아냐? 그런 보물을 그냥 미안해서 준다고?

"케일럽."

근데 인제 보니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이 나침반은 자네한테 꼭 주고 싶은 물건이야."

이건 잘못에 대한 배상으로 주는 게 아니다. 멜디니는 지금······.

"자네는 앞으로 마법 대학 최고의 마법사가 될 테니까."

내게 뭔가 이상한 환상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빙의자를 혐오하고, 선량한 원주민 마법사들을 사랑한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마법사가 둘뿐이다.

1번. 쳐 죽여야 마땅한 빙의자 마법사.

2번. 빙의자가 아닌 선량한 마법사.

내가 제멋대로 날뛰는 1번에서 개쩌는 천재성의 2번으로 유턴해버린 지금.

"자네한테 거는 기대가 엄청나네!"

멜디니는 나의 극성 지지자로 변해버렸다.

"12년 전 미궁 분출로 인해서 마법 대학은 유례가 없는 침체기를 겪고 있네. 마법사 인력이 너무나 모자라고 교수진은 너무 나이가 들었지. 하지만 지금! 나는 확신할 수 있어. 자네는 마법 대학의 새로운 등불이 될 거야!"

아니 잠깐만요······.

"내가 우리 조교들한테 자네가 처음 미궁에서 한 일들을 쭉 들었을 때, 유독 기억에 남는 게 있었지. 바로 베노믹 스파이더 출구룸에서 있었던 일 말이네."

교수가 말했다.

"1만 골드 상당의 금화와 더불어, 미궁을 즉시 탈출하고 자유민이 되어서 상위 파티로 이적할 수 있는 기회까지. 그걸 전부 걷어차고 만난 지 불과 하루 된 동료의 곁에 남는다? 이게 보통 어려운 결정이 아니거든!"

확실히 그때도 어렵긴 했다.

"상당한 신용이 있단 말이지. 그때 그 드워프 모험가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젠 나도 알겠네. 이만한 사건이 터진 후에 내게 직접 찾아와서 오히려 먼저 사과를 했잖나? 자네는 인격적으로도 일류 마법사가 되기에 손색이 없어! 이런 게 바로 일류 마법사의 그릇이고 리더십이지!"

"······."

"앞으로 내가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겠네. 이실로프 교수가 주는 것 이상일 거야! 비록 내 클럽은 아니지만 상관없네! 빙의자들과, 그들로 인한 미궁 분출로부터 마법 대학과 이곳 소헨 도시를 지켜낼 수만 있다면 전부 내 편이야!"

흥분한 하플링 교수의 입에서 침이 튀었다.

"그러니까 그 나침반을 가지고 가게! 우리 조교들에게도 가끔 빌려주기만 했던 물건인데, 자네라면 그냥 줘버려도 아깝지 않군! 그걸로 차근차근 보물들을 찾아나가면서 강력한 마법사로 성장하길 바라네! 앞으로 지켜보겠네, 케일럽!"

"가, 감사합니다······."

약간 부담되긴 하지만 어쨌든 진심이란 건 알겠다.

나침반을 받고 인사하고 나오는데 교수가 따라오면서 응원을 마구 퍼부어댔다.

"앞으로 어려운 일 있으면 얘기하고!"

"네······."

"누가 괴롭히면 얘기하고!"

"······."

"마법 연구나 훈련에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고!"

그만 해요! 부담스러워!

***

멜귀가 손모가지를 내놓진 않았지만 대신 개쩌는 전설 도구를 줬다.

물론 이것도 단계적으로 능력이 해방되는 거라서 당장 효율이 뛰어나진 않겠지만.

'아무튼 기대 이상의 성과였어.'

그럼 이제 오늘의 마지막 일과로 넘어가 볼까.

미궁 도시 소헨의 모험가 길드에서 남쪽으로 약 1킬로미터 정도를 걸어서 은행을 지나 식당가 옆 골목으로 빠지면 주택들이 다닥다닥 줄지어 서 있다.

그중 한 군데에 그가 산다.

파티원 중 두 명이 사망하고 하나는 출구 보스가 되어버린,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파티를 해체한 비운의 몽크 파티장.

아이무스 레닉-.

머지않아 46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되는 그 아저씨는 약간 황당한 제안을 받았다.

나한테서.

"우리 같이 합숙해요!"

"합숙······말입니까? 오늘부터요?"

"네. 괜찮으시죠?"

레닉의 어깨 너머에서 대화를 듣고 있는 그의 와이프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같이 스킬 합도 맞춰보고 전략도 짜고. 술도 한 잔 하고, 잘 때 코 고는지도 보고. 미궁 들어가면 어차피 같이 야영해야 하지 않습니까? 서로 미리 호흡을 좀 맞춰볼 겸."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보통은 같이 잠들기 연습을 미리 하진 않는다.

그러나 내겐 그럴 필요가 있다.

몽크 형님!

당신 스탯 봐야 해요!

예르닐이 노예 숙소에서, 나는 도서관에서 밤새다 잠들었을 때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서로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지면 스탯창을 볼 수 없다.

아마 파티가 해제된 걸로 취급되는 모양이지.

그러니까 오늘 꼭 몽크를 데려가야 한다. 그래야 내일부터 거기 맞춰서 전략도 짤 거 아니냐고.

"일단 오늘 하루만이라도 합숙해요."

"음."

몽크는 망설이며 아내의 눈치를 보았고, 그녀가 물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이 사람을 데려가서 같이 외박하겠다고요?"

아니 잠깐만요 아주머니.

그렇게 표현을 하시면 마치 내가 무슨 따님하고 기념일 여행을 보내달라고 찾아온 청년 같잖아.

"솔직히 말해서······. 저는 저희 남편이 그 파티에 지원했을 때 떨어질 줄 알았어요. 저는 잘 모르지만, 엄청 유명한 마법사가 모집하는 거라면서요?"

"그 마법사가 저예요."

"어엇······정말요?"

그녀의 표정이 매우 미심쩍은 듯 보였다. 그래. 이해한다. 맨날 듬직한 곰 같은 몽크를 보다가 애새끼처럼 비쩍 마른 멸치를 보니까 믿음이 안 가시겠지.

"오늘 하루만 합숙하고 가볍게 파티 결성 파티도 하고, 내일 아침에 곱게 보내드릴게요. 약속해요."

"······."

레닉의 아내는 고민하다가 물었다.

"거기 여자도 있어요?"

"있······긴 한데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방에서 잘 테니까."

머리털은 빠지고 턱수염은 숭숭 난 46세 근육 빵빵한 몽크(기혼, 아들 둘에 딸 하나)한테는 당신 말고 아무도 관심 없다고.

"그리고 언데드도 한 명 있어요."

"언데드?"

그녀의 표정이 더더욱 불안과 혼란에 빠졌다.

"아니 당신 대체 무슨 파티에 들어간 거야······."

내가 생각해도 우리 파티가 좀 괴상하긴 해.

25화

다시 미궁으로

내가 마법 대학 로비에서 멜디니와 승부수를 벌인지도 벌써 8일째.

그간 미궁 도시 소헨은 마법 대학의 신입생 얘기로 시끌시끌했지만, 이런 종류의 이슈는 금방 잦아든다.

사람들은 다시 각자 먹고사는 문제로 돌아가서 분투하게 되었고, 이제 미궁 도시 소헨의 메인 이슈는 바뀌었다.

그것은 바로······.

"미궁 진입 게이트가 열리기 한 시간 전입니다!"

미궁이 열린다는 것이다.

***

미궁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밝혀낼 수 없는 수수께끼다.

다만 미궁 도시 소헨이 생겨나기도 전부터 미궁은 존재했던 모양이다.

정확히는 미궁으로 통하는 계단이.

그 계단 역시 땅속 깊이 파묻혀 있었던 걸 발굴한 것이다. 계단을 타고 15미터 정도 내려가면 작은 공터가 나오고, 그 공터에 주기적으로 게이트가 발생한다.

게이트를 넘어가면 미궁 1층.

"예르닐!"

"네에에!"

"준비됐나요?"

"예!"

오늘 우리는 그곳에 다시 들어간다.

"아이무스!"

"네."

"준비됐나요?"

"갑시다!"

솔직히 말해서 진짜 존나게 가기 싫다.

하지만 그래도 별 수 있나. 밖에서 2주를 채우면 미궁이 분출한다잖아.

"백어택!"

"가아아!"

"준비됐죠?"

"그어어!"

나는 축축 가라앉는 전의를 일부러 북돋기 위해서 파티원들한테 하나하나 기합을 넣었다.

힘내자.

들어가서 2주짜리 목숨줄을 연장시켜주고, 백어택도 부활시키고 돌아오자.

마법 대학이 일방적으로 날 쑤셔 박았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장비도 빵빵한 데다가 파티도 완성되어 있잖아?

동료들을 이끌고 미궁 관리소 카운터에서 접수를 마쳤다.

"미궁 진입 게이트가 열리기 10분 전입니다!"

나는 약간 긴장이 되었다.

아마 예르닐도······. 어?

"예르닐은 긴장 안 돼요?"

의외로 굉장히 평온해 보인다.

고블린이 뚱뚱이를 찔렀을 때 경기 일으키면서 질질 짜던 그 예르닐이 맞냐 정말?

"케일럽 말만 잘 들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예르닐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우리 1층에 가는 거잖아요? 근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케일럽이 시키는 대로만 했더니 살아서 나왔잖아요. 이번에는 더 간단하겠죠."

음.

미안한데 예르닐.

우리는 1층에 가는 게 아니란다.

영혼의 안식처가 있는 곳은 일명 '쩜오층'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미궁의 심연에는 각 계층 사이에 숨겨진 공간이 있다. 1층과 2층 사이의 1.5층. 2층과 3층 사이의 2.5층. 이런 느낌으로.

이걸 그 게임 유저들은 쩜오층이라고 불렀는데, 영혼의 안식처는 쩜오층에 있다.

빙의자 지식이라 미리 얘기해줄 수가 없다는 게 아쉽구나.

"나 잠깐만 아내랑 애들 좀······."

아이무스가 내 어깨를 쿡 찌르면서 미궁 관리소 입구를 가리켰다.

몽크의 아내가 애기 하나를 업고 어린애 둘 손을 잡고 와있었다.

아무래도 3류 모험가였던 나이 든 남편이 파티 해체와 더불어 은퇴까지 했다가, 미궁에 또 들어가는 게 상당히 불안한 모양이지?

이해한다.

"다녀오세요. 저희 먼저 대기실로 내려가 있겠습니다."

"예."

나는 아이무스를 남겨두고 예르닐과 함께 백어택을 이끌고 지하로 내려갔다.

2층 이상 진행한 파티들을 위한 승강기를 지나쳐서 1층 대기실 앞.

이 안에 들어가면 계단이 있다.

빙의 첫날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돼지처럼 노예 4인 파티로 여기 처박히던 게 생각나는군.

그때는 진짜 인생 조졌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이번엔 그래도······.

철컥.

별 탈 없기를 기도하면서 나는 대기실 문을 열었다.

***

'뭐야.'

약간 예상 밖의 장면이 펼쳐졌다.

30제곱미터 정도 되는 대기실 안에 이미 사람 넷이 있었기 때문이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우릴 딱 쳐다보는 눈빛이 빙의자 낚시하는 멜디니마냥 음습하다.

뭐지 이 새끼들?

우리는 아이무스를 기다려야 한다지만, 저쪽은 넷이 이미 다 와있는데 뭘 기다리고 있는 걸까?

게이트가 이미 열렸잖아. 왜 계단을 내려가지 않는가?

'설마.'

에이 아니겠지 설마.

불길한 느낌에 가슴이 쿵쿵 뛴다.

"······."

저쪽 4인 파티 중에서 중갑으로 무장한 양손검 인간 전사가 개과 수인한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입을 가리고 소곤소곤.

나도 입을 가리고 예르닐한테 소곤소곤했다.

"방금 쟤네 뭐라고 했어요?"

"생각보다 가진 거 별로 없어 보이는데? 라고요."

아 씨발 진짜.

대체 왜 불길한 느낌은 빗나가는 법이 없냐?

'약탈자다.'

다른 게임이면 좋은 아이템을 줍거나 비싼 장비를 맞췄을 때 그냥 기쁘기만 하겠지만, 미궁의 심연은 좀 다르다.

파티의 전력을 초과하는 가치의 파티 소지품은 약탈자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거든.

쟤네들의 머릿속을 한번 넘겨짚어 볼까.

아마 지난 일주일간 다음과 같은 대화들이 오갔을 것이다.

'마법 대학의 노예 마법사들 중에서 이번에 큰돈 벌어서 나온 애가 있대. 걔가 신규 파티를 결성해서 파티원들 장비를 싹 다 새로 맞춘 모양이야.'

'엘프 궁수한테 투구, 갑옷, 신발, 활, 화살통, 특수 화살까지 풀세트로 맞춰줬다던데?'

'백어택은 출구 보스다보니 나오자마자 마법 대학이 홀랑 벗겨서 다 팔아먹었잖아. 그러니 어쩌면 백어택의 장비도 새로 샀을지도 몰라.'

'언데드라서 뭘 입히거나 쥐여주진 않았겠지만, 파티장의 배낭 속에는 백어택이 쓸 단검 같은 게 들어있을지도.'

'백어택을 부활시키러 가는 거라며? 부활시킨 후에 출구룸을 깰 때는 백어택한테도 1인분을 시킬 테니까 장비를 가지고는 가겠지.'

'그게 없더라도 최소한 부활 스크롤은 배낭에 있을 거 아냐? 그것만 해도 얼마야?'

'파티 전력은 어때?'

'모험가 하류 중에서도 퇴적물 찌꺼기 수준인 삼류 몽크에 언데드? 그럼 벌써 두 명 나가리 아니냐?'

'와 벌써 군침이 싹 도네!'

······아마 이 정도?

게임에서 이런 놈들이 꼬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일부러 게이트 열리는 시간 맞춰서 1번 타자로 들어온 건데,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진짜 부지런도 하다.

나침반도 걸렸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약탈자 수준이 쟤네 정도가 아니었겠지.

그리고 나는 나침반을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고, 얘기한 적도 없고, 멜디니도 그럴 것이다.

그 역시 마법 대학의 교수로서, 미궁 모험가들이 약탈자로 골머리 썩이는 사정을 잘 아는데, 내가 표적이 될 만한 정보를 함부로 흘리진 않을 테니까.

"······."

저쪽 파티 네 명이 나와 예르닐과 백어택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우리의 무장 수준이 어떤지, 소모품에 어떤 게 있을지 체크하는 것이다. 습격했을 때 전투를 미리 머릿속에 그려보려고.

기분 더럽군.

나도 저쪽 파티 넷을 찬찬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럴싸한 철갑으로 중무장한 양손검의 인간 전사, 도적 타입으로 보이는 개과 수인, 여기까진 특별한 것 없다. 아이무스를 앞에 세우면 뚫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드워프는······.

'인형술사인가?'

이건 약간 까다롭군.

게다가 장비 수준으로 보아 숙련도가 제법 높아 보인다. 그리고 걱정되는 또 하나의 포인트는 저쪽에도 마법사가 있다는 것이다.

"안녕."

그 마법사가 나한테 인사했다.

20대 중후반쯤 됐으려나? 예쁘장하게 생긴 인간 여자인데, 한 손에 완드를 들고 정서불안처럼 흔들거렸다.

"네, 안녕하세요."

"대학생이니?"

"네."

"난 퇴학당했어."

그러면서 여자는 저 혼자 깔깔 웃었다. 옆에 파티원들도 같이 키득거리고.

게임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마법 대학 소속이 아닌 마법사들은 잔뜩 있다.

"가방에 뭐 들었어?"

여자가 완드로 내 배낭을 가리키며 물었다.

"왜 그게 궁금하십니까?"

"초보자들 걱정돼서 그러지. 뭐 비싼 거 들고 다닐까봐. 미궁에는 약탈자들이 잔뜩 있거든."

"······."

"너희는 만난 적 없겠지? 노예 파티 같은 건 털어도 얻을 게 없어서 안 건드리거든. 근데 이번에는 만날지도 몰라."

마법사가 씩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비싼 거 있으면 누나가 맡아줄까?"

"비싼 거 없어서 괜찮아요. 조언은 감사합니다. 게이트가 열렸을 텐데 먼저 내려가시죠."

"너희는 안 내려가?"

"저희는 파티원이 아직 한 명 안 와서요."

"힘만 세고 둔해빠진 몽크?"

이것 봐.

우리 파티를 싹 다 분석해놓고 대기타고 있었고, 그 사실을 숨길 생각조차 없다.

"교수님한테 중요한 임무를 받았으면 전위를 좀 더 신경 쓰지 그랬어? 미궁이 얼마나 위험한데."

"······."

"3층 히지카타가 단가가 안 맞는데도 뛰어주겠다고 했었다며? 그런 사람은 넙죽 받아들여서 파티를 이끌어달라고 했어야지."

"케일럽······."

위에서 위풍당당했던 예르닐이 순식간에 병아리처럼 작아졌다.

이 새끼들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그녀도 느낀 것이다. 굉장히 불안한 듯 나를 연신 힐끔거렸다.

"괜찮아요."

예르닐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사이 좋네."

저쪽 파티가 다시 한번 킬킬거렸다.

"우리 드워프가 싱글이라서 질투하거든. 약탈자로 변신할지도 몰라. 너무 자극하지 마."

그리고 다시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다가 우뚝 멈추었다.

왜냐면 우리 팀의 근육 괴물 몽크가 돌아왔기 때문에.

물론 아이무스가 헬창인 건 저쪽도 알고 있었겠지만······.

"뭡니까 그거?"

저 무기는 처음 봤나 보다.

그랬겠지.

지금까지 팔라딘 리자드 뺨치게 말 많은 마법사 혼자 주절주절 떠들고 나머지 셋은 입 닥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셋 다 입을 딱 벌렸다.

"무슨 몽크가······. 무기를······."

우리 몽크는 매우 크고 굵고 아름다운 강철 대봉을 들고 왔거든. 길이 2 미터에 약간 과장해서 예르닐 손목만큼 굵은.

"그게······그게 무기에요?"

인간 전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아이무스가 대꾸했다.

"본래 달라이 산에서 칼룽을 수련하는 승려들은 어릴 때 봉술을 배웁니다."

"죄다 주먹밖에 안 쓰던데."

"종교 계파적인 문제로 약관이 지나면 주먹만 사용하도록 방침이 잡혀 있으니까요."

"근데 댁은 철봉을 써도 되고?"

"저는 파계승이라서요."

그러니 결혼도 했고 애도 셋이나 있지.

"이번 모험은 파티장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이걸 써볼까 합니다."

게임에서는 칼룽의 수련 몽크에게 대봉을 쥐여주려면 고난도의 설득 굴림에 성공해야 한다.

근데 이번에는 그냥 주니까 받더라고.

단지 오랫동안 안 썼던 무기라서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걱정만 했을뿐.

"우리 파티장이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거든요."

아무리 하류에 삼류였다지만, 연륜과 경력은 무시 못한다.

"어쭙잖은 약탈자들은 역으로 털어먹을 수 있을 만큼."

그는 단번에 이놈들이 약탈자들인 걸 알아본 것이다.

역시 몽크 형님! 머리털은 없지만 눈치는 있군요!

"······."

마법사가 재수 없게 샐쭉 웃었다.

"행운을 빌어요."

그리고 그들은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

"분위기로 눈치챈 건 아니고, 밖에서 대화를 들었습니다."

미궁에 진입하면서 몽크가 말했다.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던데요."

"왜 그러는 거예요?"

예르닐은 얼굴에 시름이 잔뜩 내려앉았다.

"혹시 의외로 진짜 걱정해준 거 아니었을까요! 약탈자들 조심하라고!"

동시에 희망 회로도 가동했다.

"말도 안 돼요. 그놈들 표정부터가 입맛을 싹 다시던데."

"하, 하지만 만약 우리를 약탈할 거라면 일부러 그렇게 위협적인 분위기를 잡을 필요가 없잖아요? 만약 제가 약탈자 파티였다면, 저희한테 오히려 친절하게 대해줬을 거예요. 위협하면 미궁에서 저희가 그 사람들을 일부러 피해다닐 테니까요."

나름의 논리가 있긴 있었군.

하지만 그건 3류 약탈자들이 하는 짓이란다, 예르닐.

"일부러 위협한 겁니다."

아이무스는 눈치챘다.

"왜요?"

"그래야 우리가 벌벌 떨면서 온 사방을 경계하느라고 알아서 힘을 빼놓을 테니까요."

"아······."

그리고 저쪽은 언제든 우릴 쫓아올 수 있다.

왜냐?

개과 수인의 종족 특성이 냄새 추적이거든.

어쩐지 내가 대기실에 들어가자마자 코를 미친 듯이 벌름거리더라. 우리 냄새를 기억해두려는 거였겠지.

"저층일수록 약탈자들이 제일 위험합니다. 약탈자의 숫자도 많고요."

약탈당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3류 파티의 대장, 아이무스가 설명했다.

"왜냐면 심층으로 내려가면, 모험가들도 경력이 많은 사람들만 있으니까 어느 정도 보증이 되거든요. 하지만 저층에는 온갖 인간 군상이 다 모이기 때문에 약탈자도 많아요."

그 말도 맞고, 이유 하나 더 추가하자면 저층일수록 모험가 약탈의 수익성이 미궁 탐험보다 낫기 때문이다.

"······."

예르닐은 완전히 긴장해버렸다.

"예르닐."

"네?"

"너무 겁먹지 마세요."

벌써 어깨에 힘주고 있을 필요는 없다. 걔네가 상당한 숙련 파티인 건 맞지만, 우리도 이제 꽤 단단하다구.

정면에서 공격해온다면 아이무스를 뚫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 뒤를 밟는다면 예르닐이 포착할 것이다.

그리고 전투가 벌어지면 모래시계를 뒤집고 분진 폭발을 쓴다.

"우리 모험에 집중합시다."

걱정하면서 끙끙 앓고 스스로 힘을 빼주는 것은 저쪽이 딱 원하는 거니까.

"그으으."

백어택도 내 말에 동의하는지 앞으로 휘적휘적 나아갔다.

***

현실은 언제나 드라마보다 개연성이 없다.

그런 얘기 들어보았는가?

마크 저커버그랑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로 키보드 배틀을 뜨고 현피 신청을 주고받았을 때부터 나는 그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겨뒀다.

근데 이건 예상 못했네.

"제발요, 제발!"

아까 그 마법사다.

그녀는 지금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와들와들 떨면서 우리 앞에서 애걸복걸하고 있다.

"살려주세요!"

무릎 꿇고 손바닥을 싹싹 비비면서.

백어택을 앞세우고 미궁을 두 시간 정도 탐험했을 무렵, 갑자기 얘를 맞닥뜨린 것이다.

전방에서부터 울부짖으면서 달려오더니, 멈추라고 소리 지르는 아이무스 앞에서 진짜로 멈추고 눈물로 빌기 시작했다.

이 꼴이 되어버린 이유는······.

"습격당했어요······."

마법사의 얼굴에는 대기실에서의 그 여유가 싹 가시고 공포만 가득했다.

"2층 파티에요! 지금 저를 쫓아오고 있어요 제발요!"

"웃기지 마!"

나는 안 속는다, 씹새야.

"당신들을 어떻게 믿어? 당신도 우리를 약탈하려고 했었던 거 아냐?"

"그건······."

아니라고 잡아뗄 줄 알았는데, 마법사는 순순히 인정했다.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펑펑 울면서 그녀가 말했다.

대기실에서 시비 걸고 위협했던 게 엄청나게 후회된다는 듯,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저희가 잘못했어요. 살려만 주세요, 제발요! 케일럽! 제가 당신들 편에서 싸울게요! 제발!"

"물러나!"

"돌아가면 저 죽어요!"

"······."

"케일럽······."

약탈에 일가견 있는 아이무스조차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예르닐은······. 시발 이미 활을 내렸군. 예르닐! 정신 차려!

아니지.

나부터가 문제다. 나부터 정신 차려야 한다.

'케일럽 미친놈아!'

왜 저 마법사가 아직도 우리 앞에 있는 거야? 존나게 수상쩍잖아!

게임이었으면 어땠을까?

게임이었다면 이만큼 말을 섞을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진즉에 번개 쇼크를 영창해서 죽여버렸거나 쫓아냈거나 했겠지.

과연 개발자 난이도는 이 망겜의 수많은 난이도 중에서 제일 높은 게 맞다.

게임하고 너무 다르다.

쿼터뷰 시야로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1인칭 시점에서 직접 보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서 피를 철철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 얼굴에 마주 대고 차마 영창이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머리로는 그게 제일 안전한 길인 것을 알고 있는데도.

"셋까지만 센다."

하지만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당장 돌아가."

여기서 순간의 망설임과 어설픈 동정심은 지옥행 급행 열차 티켓이다.

누굴 함부로 믿는 건 미친 짓이다.

26화

약탈자와는 말도 섞지 마라

본래 우리를 약탈하려 했던 그 파티의 낙오된 마법사에게 죽음의 카운트를 센다.

"하나!"

최대한 단호한 표정에 큰 목소리로.

나는 숫자 셋을 다 센 다음 너를 공격할 것이다.

"둘!"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그 전에 꺼져!

"······."

하지만 그녀는 주저앉아서 울먹거릴 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예르닐은 내가 이 정도로 심하게 쳐낼 줄은 몰랐는지 조금 놀란 눈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미궁에서는 온갖 협잡과 사기와 통수가 난무하니까.

"셋······!"

"도, 돈을 드릴게요!"

마법사가 소리쳤다.

"살아서 나가면 돈을 드릴게요. 제가 모아놓은 거요. 정말이에요. 제발······."

마법사가 협상을 제시했다.

하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우리는 약탈자들하고 거래하지 않아."

게임에서도 약탈자들하고는 협상했다가 통수맞은 적이 엄청나게 많거든.

"카운트 끝났어."

그녀를 완드로 겨누었다.

"번개······."

"갈게요! 가, 갈게! 가요!"

마법사는 기겁하면서 펄쩍 뛰더니 양손을 들어 올렸다.

"갈게요. 쏘지 마세요······."

그리고 훌쩍거리면서 돌아섰다. 자기가 왔던 캄캄한 어둠 속을 향해서.

"······."

이 마법사가 약탈당했다는 이야기는 과연 진실일까 거짓일까?

모른다. 하지만 진짜일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우리가 리스크를 짊어질 이유는 없지.

2층 파티를 상대하게 되어도, 적란운과 모래시계를 잘 쓰면 해볼 만할 것이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약탈자가 아군에 섞여 있는 변수는 감당이 안 돼.

"잠깐만."

돌아가려는 마법사를 멈춰 세웠다.

그러고 보니, 나도 너무 흥분했군. 아직 얻을 게 있는데 그냥 보내면 안 되지.

"당신을 약탈했다는 파티가 어떤 사람들이었지?"

진짜로 그들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미리 상대 전력을 분석해놓는 게 좋겠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봐야 한다. 우리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는지 어떤지.

"서, 석궁을 든 하플링이랑······. 양손 도끼를 가지고 있는 바바리안, 그리고 리자드 마법사······."

"세 명?"

"아니요. 네 명이에요. 한 명은 제대로 못 봤어요. 키가 작았어요. 드워프나 하플링일 거예요."

"좋아."

나는 가방에서 작은 힐링포션 하나를 꺼내어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정보 값이다. 이제 가봐."

"아······."

"혹시 그 2층 약탈자들을 마주치게 되면 당신 파티의 복수는 해줄게."

"······."

나와 잠깐의 문답에서 어떤 희망이라도 품었던 건지, 마법사의 표정에 엄청난 실망감과 절망과 눈물이 올라왔다.

젠장.

기분 더럽군.

만약 이게 현대였다면 어땠을까?

내가 친구들하고 같이 길을 가는데, 어떤 여자가 부상을 입고 달려와서 싸이코패스 살인마가 쫓아온다며 눈물로 도움을 청하면?

웬만하면 도와준다.

목숨 걸고 그 살인마랑 싸우진 않더라도, 평범한 대한민국 성인 남성이면 최소한의 보호와 도움을 줄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고 어디 건물에 숨겨준다든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궁엔 경찰이 없다. 미궁은 각자도생하는 곳이다. 네 목숨은 네가 스스로 감당해라. 우리가 책임져줄 여유가 없······.

"케일럽!"

갑자기 예르닐이 활을 번쩍 치켜들었다.

"저쪽에서 누가 와요!"

"뭐!"

"뛰어와요!"

그녀가 소리쳤다.

"아······아······."

그리고 되돌아가던 마법사는 공포에 질려서 다시 우리 쪽을 향했다.

"멈춰!"

아이무스가 그녀에게 철봉을 겨누면서 외쳤지만 무시당했다.

마법사는 미치기 직전이다.

"오, 온다! 왔어! 아아악! 비켜줘! 제발 비켜!"

그녀는 앞을 막아서는 아이무스와 몸 씨름을 하면서 어떻게든 뚫고 들어오려고 했다.

"몇 명이에요!"

나는 예르닐에게 소리쳤다.

"네 명!"

만약 이 상황이 함정이라면 마법사녀를 빼고 나머지 파티는 셋이어야 한다.

넷이라면······.

쐐애애애액!

깡!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걸 아이무스가 기가 막히게 철봉으로 쳐냈는데, 석궁 볼트였다.

마법사의 파티에는 석궁이 없었다.

진짜다.

2층 약탈자 파티가 왔다!

"아아악!"

아이무스가 볼트를 쳐내는 사이에 풀려난 마법사가 패닉에 빠져서 내 옆까지 뛰어들었다.

"······."

찰나의 판단 미스는 치명적이다.

2층 파티와 전투가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저 여자가 들어오게 하면 안 됐지.

시발.

나는 바보 등신 머저리다.

2층 파티와 전투가 어떻게 되든 일단 이 마법사년한테 먼저 번개 쇼크를 박았어야지.

"누나 연기 어때?"

마법사 쌍년이 내 목에 완드를 들이댔다.

"광대의 주문 교란기-."

애교 섞인 영창을 외면서.

"케일럽!"

아이무스가 돌아보면서 고함을 질렀다.

"앞에 봐요! 앞에!"

나도 마주 고함을 질렀다.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60초]

[행동력 : ■■■■]

모래시계를 뒤집으면서.

***

진짜 정신 나갈 것 같은 상황인데, 침착하게 정리해보자.

지금 전방에서 나타난 적들은 2층 파티가 아니고, 우리는 이 불여우 같은 마법사 쌍년의 함정에 빠졌다.

그럼 그녀가 물몸 마법사 주제에 우리 쪽에 갖다 박을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그녀의 전략은 무엇이었나?

첫째.

그들은 아이무스 때문에 작전을 바꿨을 것이다. 철봉이 부담스러워서.

실력과 별개로 그 흉악한 무기는 미궁 1층처럼 통로가 좁은 데선 공간 장악력이 끝내준다.

게임적 표현으로, 아이무스가 통제 지역을 설정하고 진입 차단에 집중하면?

저 녀석들이 급습해서 난전을 벌여도 나와 예르닐에겐 어찌어찌 딜을 넣을 각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저놈들이 고육지책으로 짜낸 전략이 이거였다.

'아이무스를 통과하기.'

그 수문장을 지나쳐서 마법사와 궁수를 무력화시킬 트로이 목마 카드가 필요했다.

그럼 넷 중에서 누가 들어올 것인가?

중갑으로 중무장한 인간 전사? 개과 수인 도적? 비르타넨처럼 체격 좋은 드워프?

아무도 들여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근접 전투력이 제일 약한 마법사를 보낸다.

'머리가 왜 찢어져서 피가 철철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마법사에겐 주문 교란 마법이 있었다.

일정 시간 동안 대상이 전투 마법들을 발동하면 랜덤한 실용 마법이 나오게 하는 2등급 정신 마법이다.

그걸로 나를 무력화시키면 우리쪽 딜량은 반토막 이하.

멘붕한 예르닐한테는 마비 같은 걸 시전하려 했겠지.

우리 둘을 병신으로 만들어놓고, 아이무스를 요격할 것이다.

아이무스는 우릴 구해줄 수 없다. 전방에서 석궁 볼트가 날아오고 인간 전사가 돌진해올 테니까.

그럼 끝.

우리는 다 죽고 백어택은 영면에 들고 파티 전멸!

'그런 전략이었겠지?'

이 방법은 백어택이 언데드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지금 백어택은 도적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함정을 피해가며 길을 찾을 순 있겠지만, 스킬은 못 쓰거든.

게임에서는 '물어뜯기', '때리기' 같은 건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선 예르닐 머리카락 말고 얘가 뭘 물어뜯는 걸 본 적이 없다.

한 마디로 우리 후미를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소리.

저쪽도 마법사가 직접 몸으로 들이받는 것은 도박이었지만, 들이받힌 게 궁수랑 마법사면 도긴개긴인 셈이다.

그래서 이 마법사는 용감하게 우리 안쪽 깊숙이 파고들었고, 나는 머저리처럼 그걸 허용하고 말았다.

젠장.

아이무스 옆으로 나올 때 조건반사적으로 번개 쇼크를 박았어야 했는데.

변명 좀 해보자면, 적이 넷에 석궁 볼트가 날아와서 헷갈렸다.

진짜로 2층 약탈 파티가 존재하고, 걔네와 전투가 벌어질 줄 알았다. 그래서 마법 쿨타임도 아낄 겸 마법사년과 임시 동맹을 맺을까 했었다.

근데 아니다.

예르닐이 숫자를 착각한 이유는 아마 마법사년의 약탈 파티 4인 중에서 드워프가 인형술사였기 때문이겠지.

즉, 예르닐이 포착한 '네 명'에는 전투 인형 하나가 포함돼있었다.

그 인형이 발사한 게 석궁 볼트였을 테고.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불필요한 위기에 처하는 것은 항상 기분 더럽다. 그게 나의 판단 미스 때문이라면 더더욱.

처음에 예르닐이 함정을 밟았을 때, 대머리 파티가 우리를 뒤쫓아왔을 때, 그리고 이번에도.

위기의 순간들을 좀 더 일찍 파악하고 영민하게 대처할 순 없었을까?

싸이코패스마냥 이 마법사가 다가오자마자 그냥 번개를 냅다 박아버리고 지랄했어야 했나?

나라는 인간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인가?

"······."

모르겠다.

다만 내가 이번에 전술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내가 실수하면 우리 파티 전부 다 죽는다. 이건 확실하게 반성하고 넘어가자.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8초]

이 개새끼들 먼저 다 쳐죽이고 나서.

"이제 8초 남았다. 씹새야."

카운트가 끝나는 순간 너는 죽은 목숨이다.

***

예르닐을 모험가 길드에서 기숙사로 데려온 이후 첫날밤.

나는 백어택이 무섭다며 같이 자자고 찾아온 예르닐에게 실험을 도와달라고 했다.

그 실험이란 바로 암시장에서 사온 마법 스크롤을 이용한 판정 공부.

'모래시계 상태에선 쿨타임이 흐른다.'

이건 엄청나게 중요한 특성이다.

덕분에 내가 초고속시전 재능충이 되었잖아.

그리고 하나 더.

'모래시계 상태일 때도 고통을 느낀다.'

백어택이 내 아랫배를 칼로 쑤셔버린 다음, 내가 쓰러져있었을 때 말이다.

모래시계를 뒤집어놓고 이것저것 하는 동안에도 아랫배가 뒤지게 아팠단 말이지.

그럴 수가 있나?

움직이지를 못한다는 말은 운동 신경의 흥분이 모래시계에 의해서 제한되었다는 뜻 아닌가?

근데 어떻게 고통은 느끼지?

감각신경은 작동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말을 하는 것도 성대 근육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건 또 제한당하지 않았다.

과연 통수의 모래시계답게 일관성이 없다.

아무튼 내 턴에서도 통증을 느낀다는 건 나쁜 뉴스지만, 그 대신······.

'상태 이상 시간도 흘러갈까?'

쿨타임처럼 말이다.

가능성 있다.

예컨대 '중독' 같은 게 20초간 지속된다고 해보자.

이때 매초 들어오는 데미지와 통증은 신경학적으로 말하자면 독소가 신경조직을 파괴하고 혈전을 생성하는 과정일 거란 말이지?

그럼 모래시계를 뒤집은 상태에서도 그러한 신경학적 현상은 진행되지 않을까? 백어택이 쑤셔버린 내 아랫배의 통증이 진행되었던 것처럼.

이건 반드시 연구해봐야 한다.

그래서 없는 형편에 거금을 짜내어 암시장에서 사온 스크롤들을 가지고 예르닐과 실험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된다.

모래시계를 뒤집었을 때 상태이상 시간도 흘러간다.

그렇다면······.

[상태이상 시간 경감 스크롤]

이런 물건을 쓰면 어떨까?

인게임에선 당장의 상태 이상을 1턴으로 줄여주는 아이템이다.

개쩌는 성능이지만 페널티도 개쩔었기 때문에 유저들 사이에서는 폐급 취급 받았고, 현실이 된 여기서는 더 폐급이었다.

왜냐?

페널티는 그대로인데, 성능은 1턴으로 줄여주는 게 아니라 '60초'로 줄여주는 게 되었거든.

실시간 전투 도중 60초면 저승까지 넉넉히 걸어가서 환생하고 돌잔치도 할 시간이다.

그래서 이 스크롤은 전투용이 아니라고 암시장 상인이 경고했지만, 나는 그 60초를 모래시계로 비빌 수 있다.

"그래서 챙겨왔단 말이야."

마법사녀에게 주문 교란 마법이 들어오자마자, 스크롤을 뜯고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아이무스에겐 앞을 보라고 소리치면서.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3초]

그게 이제 3초 남았다.

이게 네 남은 수명이다.

2초.

1초.

스크롤 뜯기와 모래시계 뒤집기 사이의 시차를 이용해서 무영창 하나만.

"번개 쇼크."

***

꽈앙!

완드에서 작렬한 번갯불이 통로에서 번쩍인다.

그 불빛 때문에 아이무스 방향으로 돌진해오던 약탈 팀의 나머지 셋이 흠칫 놀라는 것도 보였다.

"끅······."

감전된 마법사는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았고, 나는 그녀에게 다시 완드를 겨누었다.

"뭐······뭐야······."

전혀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래. 납득이 안 되겠지.

나도 납득이 안 된다. 너희의 얄팍한 술수와 연기에 내가 당할 뻔했다는 게.

그리고 고맙다. 나를 좀 더 비정하게 만들어줘서.

역시 게임에서 하던 방식이 옳았다. 다음에는 약탈자 새끼들하고는 말도 안 섞을게. 됐냐?

"사, 살려······."

확실히 진짜는 좀 다르긴 하다.

공포에 질린 표정 말이다. 아까도 청룡영화제에서 상 받아도 될 만한 연기였는데 지금은 감정 실린 게 다르네.

"분진폭발."

***

콰광!

좀 과했다 생각이 들지만 당장 쓸 수 있는 마법이 이것밖에 없었다.

폭파돼서 튀어 오르는 마법사의 팔 한쪽.

불이 붙어서 활활 타오르는 몸뚱이에서 비명이 쏟아졌다.

그리고······.

'놀라서 굳어버렸군.'

예르닐 말이다.

추가로 약탈자 셋도.

그들은 아이무스 바로 앞까지 달려왔는데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예 우뚝 멈춰 섰다.

작전 성공인 줄 알았는데 자기네 마법사가 실시간으로 눈앞에서 폭사당하고 있었으니.

"주, 주문 교란 들어간 거 아니었······."

멘붕한 게 이해가 된다.

[임시 모래시계 획득!]

마법사가 사망했다.

이제 전방의 적들에게 완드를 겨누었다.

모래시계를 뒤집으면서.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60초]

[행동력 : ■■]

***

예르닐에게 인형술사 드워프를 쏘도록 한다. 번개 쇼크 영창으로 그 앞을 막아선 전투 인형을 감전시키면서.

반대편 완드로는 다시 분진 폭발.

대상은 철갑으로 무장한 인간 전사다.

"아아아악!"

강철 갑옷 안에 불이 붙자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되었다. 그리고 드워프 인형술사는······.

"컥······. 헉······."

화살에 목을 관통당했다.

멘붕한 예르닐도 모래시계 턴에서 내린 지시는 잘 듣는군.

인형술사는 즉사하진 않았지만 기도가 막힌 모양이다. 그리고 마지막 수인 도적은?

콰직!

몽크가 철봉으로 뚝배기를 깨버렸다.

아직 확인해야 할 게 있다.

"움직이지 마."

드워프를 붙잡고 목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 피가 흐르는 상처 부위에다가 힐링 포션을 조금 부었다.

"헉······커헉."

"물어볼 게 있다."

그의 멱살을 꽉 쥐고 다그쳤다.

내 추론에 아직 빈틈이 있다.

"아까 너희 마법사가 왜 나한테 주문 교란을 썼지?"

나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주문 교란 말고 공격 마법이었어야 맞잖아.

근데 주문 교란은 이상하다. 마치 무력화가 목적인 것 같은······.

"새, 생포하려······고······."

진짜로 무력화가 목적이었잖아?

우리를 어디다 팔아넘길 것도 아니고, 약탈자가 살생을 피하는 것도 아닐 테고. 대체 왜?

"그, 2층 파티······. 그, 그거 진짜로 있어······. 우리랑 한 번 마찰이 있었어······."

그래서 마법사 대가리가 깨져서 피가 흘렀던 건가?

"그, 그놈들 습격할 때 너희를 앞세우려고······."

그러니까 마법사년이 머리 찢어진 데 힐링포션을 붓는 대신 이걸로 우리 언데드 파티를 낚아보자!······고 제안했고, 우리 장비를 싹 다 벗겨서 팔아먹고, 우리를 고기방패 삼아서 2층 파티도 털어먹을 계획이었다?

알뜰하기도 해라. 살림꾼이 따로 없네.

"내, 내, 내가 앞에 설게······."

드워프 인형술사가 서로 포지션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살려줘······."

이제 본인이 고기방패가 되겠다는 뜻이다.

"제발······."

***

죽였다.

번개 쇼크로 직접.

대머리 파티와 이놈들. 만약 백어택까지 포함하면 지금까지 총 아홉 명.

내가 직, 간접적으로 죽인 사람 숫자다.

그중에서 방금 죽인 드워프는 좀 달랐다.

전투가 끝난 후에 죽였거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사람을 죽였다.

이게 맞나?

모르겠다.

찝찝한 기분이다. 마지막의 살인도 그렇고 전투도.

모래시계가 자동 발동되는 조건은 까다롭다. 고블린 칼이 목에서 20센티미터 앞에 와있거나, 함정 밟은 예르닐이 발을 떼기 직전이거나, 백어택이 도약 암습으로 경동맥을 찢어버리기 직전이거나.

그래서 그런가, 거짓말 방지 마법 같은 것엔 모래시계가 작동하지 않았단 말이지.

주문 교란 마법도 마찬가지고.

만약 마법사년이 나한테 파이어볼 같은 걸 쐈다면 어땠을까?

모래시계는 작동했을 것이다.

근데 내가 그걸 막거나 피할 수 있나? 코앞에서 발사된 불덩이를?

가습 같은 마법으로 파이어볼을 꺼뜨릴 순 없을 거 아냐?

글쎄.

막상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든 해내려나?

모르겠다.

왠지 전략 싸움은 패배하고 모래시계의 요행으로 살아남은 기분이다. 그게 마지막 살인 이상으로 찝찝하다.

좋게 생각하면, 미리 모래시계를 연구하고 스크롤을 챙겨둔 준비성이 빛을 발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정도론 안 돼.'

미궁 바깥의 문명을 2주가량 맛보고 긴장이 풀렸다면 뺨이라도 한 대 쳐라.

미궁은 만만치 않다. 내가 제일 잘 알잖아. 숙련 파티여도 언제 어떻게 비명횡사할지 모른다.

정신 차리자.

그리고 하나 더.

약탈자하고는 앞으로 말도 섞지 말자.

"저 좀 피곤해서 그런데 잠깐만. 쉬다가 갑시다."

상태이상 시간 경감 스크롤의 부작용이 오는지 자꾸 졸린다.

2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