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7-32

27화

축복 분수

상태이상 시간 경감 스크롤의 부작용.

일정 시간 후에 상태이상 '기면'이 온다. 그리고 일정 시간 후에 잠들어버린다.

지금 케일럽처럼.

모험은 일시 중지.

파티는 캠핑을 시작했다.

타닥, 타닥.

모닥불 옆에 예르닐은 쪼그리고 앉은 채, 침낭에 누운 케일럽을 내려다보았다.

적잖은 죄책감을 느끼면서.

이쯤에서 미궁에 들어오기 전, 로비에서 그녀가 뱉었던 망언을 떠올려보자.

긴장되지 않느냐는 케일럽의 질문에 그녀는 뭐라고 대답했는가?

'저는 긴장 안 되는데요. 우리 겨우 1층에 가는 거잖아요? 전에도 갔었죠. 그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는데도 케일럽이 시키는 대로만 했더니 살아서 나왔잖아요. 이번에는 더 간단하겠죠!'

지나가는 숙련 모험가들이 들었으면 킬킬 웃었을 것이다. 이런 대화를 주고받겠지.

쟤 좀 봐라. 미궁 1층은 간단하대.

쟤 고층 모험가야?

아니, 미궁 1층 한 번 들어갔다 나온 애. 이번이 두 번째.

정신 나갔네.

예르닐은 그 순간을 떠올리자 창피함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번 전투에서 그녀는 무엇을 했는가?

굉장히 수상쩍은 그 마법사녀가 도움을 요청하며 달려왔을 때, 아이무스는 진입하지 못하도록 길을 막았고, 케일럽은 완드를 겨누고 단호하게 소리치며 꺼지라고 했다.

예르닐은 그때 무엇을 했나?

아무것도 안 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케일럽이 그렇게까지 경계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오히려 이런 말들이 맴돌았다.

케일럽. 제가 의견을 내도 될까요? 저는 저 마법사를 받아들여도 된다고 생각해요. 혼자 피를 철철 흘리면서 왔는데 거짓말 같진 않잖아요. 우리도 2층 파티랑 마주칠지도 몰라요. 저 마법사를 들여서 우리 5인으로 진행해요!

그 멍청한 발언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이유는 그냥 그녀가 소심했기 때문이다.

'바보 같긴!'

게다가 더 최악이었던 순간은 파티가 당했을 때였다.

마법사가 케일럽에게 주문 교란을 시전했을 때 예르닐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번에도 아무것도 안 했다!

이럴 수가!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못했다.

전방에서 달려오는 네 명의 적들이 2층에서 온 4인 약탈 파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너무나 강력한 공동의 적이 코앞에 있는데 왜 이 마법사는 케일럽을 공격하는 걸까?'

일종의 인지부조화를 겪어서 얼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

아이무스는 전방을 담당해야 했고, 언데드 백어택은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주문 교란에 당한 케일럽을 지켜주는 것은 예르닐이어야 했다.

직무 유기.

그렇게 말해도 좋다.

주문 교란이 나오는 순간 예르닐은 어떻게든 마법사를 처리하고 케일럽을 구해야 했다.

근데 실제로는 오히려 그 케일럽한테 또 도움을 받기까지 했지.

무능함으로 따지자면 언데드 백어택과 비슷······.

어?

잠깐만.

'내가 언데드 백어택이랑 비슷하다고?'

말도 안 통하고 머리카락 씹는 것밖에 못하는 백어택하고?

예르닐은 충격적인 비교를 하게 되었다.

세기의 대결이다.

언데드 백어택 vs 예르닐.

1. 후미 방어에 도움이 되는가?

백어택 : 안 됨.

예르닐 : 안 됨.

무승부.

2. 이후 전투에서 도움이 되었는가?

백어택 : 안 됨.

예르닐 : 드워프 인형술사를 화살로 맞춤.

근소한 차이로 예르닐 승.

3. 모험에 도움이 되는가?

백어택 : 영혼을 추적하고 함정을 피해서 길을 찾아줌

예르닐 : 전투 인형을 간파하지 못한 탓에 적이 넷이라는 잘못된 정보로 파티를 멸망시킬 뻔함.

백어택 압승.

이럴 수가!

그럼 마지막 질문.

4. 파티 내에서 유지비는 얼마나 드는가?

백어택 : 전혀 들지 않음.

예르닐 : 밥도 먹고 잠도 잠.

백어택 승.

대결 결과는 2승 1무 1패로 언데드 백어택의 승리입니다!

짝!

갑자기 들린 큰 소리에 경계를 서던 아이무스가 예르닐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스스로 양 뺨을 찰싹 친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정신 차리려고요!"

"네?"

"지금 시체만도 못하게 됐거든요······!"

"뭔 소리여······."

예르닐은 눈을 부릅떴다.

지금 이 순간!

미궁 1층에서 사람이 하나 죽었다.

그것은 바로 나약하고 착해빠진 지난날의 예르닐.

이제 새롭게 태어난 예르닐은 훨씬 더 영악하고 기민한 진짜 레인저다!

누가 들어오기만 해봐!

걸리기만 해!

바로 쏴버릴 거야! 진짜야!

이제 인정사정 안 봐줘!

남녀노소 불문하고 다쳤거나 혼자거나 어쨌든 상관없어! 케일럽이 적대하는 녀석이면 아예 근처에도 못 오게······.

"예르닐."

"으악!"

갑자기 케일럽이 말을 거는 바람에 예르닐은 펄쩍 뛰었다.

케일럽이 깨어났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예르닐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보았던 모양이다.

"왜 그렇게 눈에 힘을 주고 있어요? 뭔 일 났어요?"

"······아, 아니요! 더 자요!"

"괜찮아요. 이제."

케일럽은 일어나서 침낭을 걷었다.

"다시 출발합시다."

***

잠든 사이에 예르닐과 아이무스가 약탈자들의 시체와 소지품을 정리해놓았다.

"어떤 걸 챙겨갈까요?"

아이무스가 물었다.

인간 전사의 강철 중갑은 살점이 눌어붙은 탓에 고철 수준이 됐다. 그래도 갖고 가면 돈이 되긴 하겠지만 무게 때문에 버렸다. 양손검과 투구, 건틀렛 등의 장비들 몇 개만 챙기자.

인형술사 드워프한테서는 큰 거 하나만 뽑는다. 가진 거 없는 인형술사라도 전투인형의 코어 하나는 값이 꽤 나가기 때문이다. 주먹만한 크기의 반짝거리는 코어를 뽑아서 가방에 넣었다.

마법사년의 가방은 드워프가 가지고 있었는데 열어보았더니 안에서 잭팟이 터졌다.

힐링포션 다섯 병과 함께.

[레이즈업 데드바디 스크롤]

[쿨타임 감소 영약]

꽤 쓸만한 소모품 두 개가 나와주었다.

그다음.

마법사년이 쓰던 마법 완드를 주워서 살펴보았다.

[샐리의 마법완드♥염동이]

본인이 직접 완드 끝에다가 새겨놓은 것 같다. 물품 감정을 해보지 않으면 원래 모르는 거지만, '염동이'라고 이름을 붙여놓은 걸 보면······.

"보이지 않는 손길로 움직여라."

맞다. 테스트해보니 염동력이 나온다.

이제 마법 대학에서 보급해준 기본 완드, 내가 직접 구매한 번개쇼크 완드, 그리고 염동력 완드.

세 자루가 되었다. 이거 오늘도 저번처럼 완드 수집가가 되는 건 아니겠지?

"개과 수인은 가진 거 그대로 백어택한테 다 씌웁시다."

체격도 적당한 데다가, 아이무스가 깔끔하게 죽인 덕에 장비 손상이 거의 없다.

수인한테서 신축성 좋은 평갑과 장화, 가죽장갑, 단검과 폭탄을 챙겼다.

단검과 폭탄은 내가 맡아두고, 평갑과 장화와 장갑을 백어택에게 착용시켜야 하는데······.

"제가 할게요!"

갑자기 예르닐이 손을 번쩍 든다.

***

예르닐이 이상하다!

얘 왜 이렇게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거야?

혼자서 끙끙대며 백어택 옷입히기를 어찌어찌 해치우더니, 그때부터 뭔 일이 생길 때마다 엄청나게 열심히 움직인다.

"케일럽은 뒤에서 쉬어요!"

고블린 잡몹들이 나오면 나를 강제로 휴식시키고 자기가 앞장서서 화살을 마구 쏴댔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마법을 마구 쓰다가 또 쓰러지거나 하면 어떡해요!"

나름은 이유가 있었다.

"케일럽! 가방도 저 주세요! 제가 대신 들게요!"

"아니 그렇게까지······."

"어엇! 위험햇!"

그녀가 내 앞으로 번개처럼 튀어나오며 화살을 발사했다. 30미터 앞에서 달려가던 생쥐를 향해.

"휴. 생쥐였구나. 무슨 소리가 들려서요."

아니 예르닐아 너 진짜 무서워.

"위험해!"

이번에는 날 붙잡고 펄쩍 뛴다. 덕분에 옆으로 함께 쿠당탕!

"뭐 하는 거예요!"

"위에서 뭐가 날아왔어요! 함정인가!"

"박쥐입니다."

아이무스가 저 뒤로 날아가는 박쥐 두 마리를 가리켰다.

생쥐 다음은 박쥐냐?

"아앗!"

예르닐이 또다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또 뭐야?

"어디서 삑삑 소리가 나요!"

"삑삑? 보통 그런 건 함정이거나 타이머 폭탄인······."

"위험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예르닐이 그대로 나를 덮쳐서 바닥에 누워버렸다. 내 위에 올라타고 내 머리를 품에 꽉 끌어안으면서.

"숨 막혀!"

"어?"

"진정 좀 해요! 함정이나 폭탄이라고 해도 예르닐 귀에만 들릴 정도면 우리 근처에 있는 건 아닐 거예요."

"케일럽!"

그녀가 내 머리를 놔주면서 고개를 들었다.

"인제 보니까 삑삑 소리가 케일럽한테서 나요!"

뭐?

잠깐만. 이거 혹시?

나는 가방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맞아요! 여기서 나요!"

그렇게 얘기해도 나는 안 들렸기 때문에, 나침반을 귀에 딱 갖다 붙이고 가만히 집중해보았다.

삑. 삑.

"정말이네."

"여기서 소리가 나요! 그쵸?"

예르닐의 얼굴에 엄청난 뿌듯함이 올라왔다.

"이 나침반은 멜디니 교수님한테 받은 물건이에요. 보물상자를 찾아준다고 했어요."

"보물상자요?"

아이무스도 관심을 보였다.

"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가면 나올 거예요. 하지만······."

나침반에서 소리가 나는 것은 희소식이지만 신호 세기가 이 정도로 약하다면 거리가 꽤 멀다.

"백어택을 살리는 것부터 먼저 합시다."

우리는 이번 모험에서 할 일이 많다.

"그리고 예르닐."

얘기 좀 해두자.

"소리가 들리는 걸 알려주는 건 좋은데, 작은 소리에도 지나치게 대응할 필요는 없어요."

"앗······."

"생쥐 발소리까지 반응하면 진행 속도가 너무 느려질 테니까요."

"죄송해요······."

예르닐의 고개가 푹 꺼졌다.

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아까 약탈 파티랑 붙을 때 제대로 한 게 없어서 부채감이 생긴 걸까?

"예르닐."

"네."

"그냥 지금처럼 하던 대로만 하면 돼요. 충분히 잘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전투인형을 캐치하지 못해서 네 명이라고 잘못된 정보를 줬잖아요."

예르닐이 면목 없다는 듯 말했다.

그게 마음에 걸렸었군.

"발소리가 네 사람만큼 들렸으면 그렇게 얘기하는 게 맞죠. 제가 판단을 잘못한 거지, 예르닐의 정보 수집이 틀린 게 아닙니다."

"······."

"가요. 앞으로도 소리가 들리는 건 말만 해주세요."

"네."

"너무 쓸데없는 건 얘기 안 해도 되고요."

"생쥐 발소리 같은 거요?"

"네."

"고블린 주술사 목소리도요?"

"지금은 필요 없어요."

"물소리 같은 것도요?"

"그런 사소한 거 전부 얘기 안 하셔도 될······잠깐만. 무슨 물소리 말입니까?"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나는데요? 시냇물이나 분수대처럼."

뭐?

"거기가 어디에요!"

그건 진짜 중요한 거다.

"거기 먼저 들렀다가 갑시다."

***

축복의 분수.

인게임에서 도적, 전사, 등의 몇몇 클래스가 스킬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설정에 따르면 스킬은 뛰어난 운동능력과 무기술 같은 게 아니라, 일종의 초능력이다.

예컨대 도적의 도약 암습도 보면 그렇다. 순식간에 등 뒤로 순간이동하는 게 상식적이고 물리적인 범주의 움직임은 아니잖아.

설정상으로는 스킬은 신들이 내려주는 축복 같은 것이다.

마치 마법사의 마법이 지혜의 신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처럼.

먼 옛날에는 다른 신들도 여럿 존재했지만, 모두 미궁에 잡아먹혔다. 그들은 이제 미궁의 일부가 되어 미궁을 여행하는 모험가들에게 자신이 가진 초능력을 조금씩 나눠준다. 그게 스킬이고, 그걸 획득하는 곳이 바로 이곳.

"분수대다."

나는 다가가서 분수대를 살펴보았다.

지름 6미터의 거대한 원형 분수 가운데에는 수사자의 상체를 본딴 석상이 솟아있다.

3미터 높이의 사자의 입에서 반짝거리는 보라색 폭포가 쏟아진다.

"잘했어요, 예르닐."

칭찬하려고 돌아보았는데······.

'엄청 뿌듯해하네.'

예르닐은 굉장히 만족한 얼굴로 헤실거렸다. 왜 자꾸 백어택을 힐끔거리는지는 모르겠다만.

"두 분, 분수에서 스킬 축복을 받아보실래요?"

마법사는 해당 사항이 없지만, 두 사람은 여기서 스킬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저는 몇 번 분수대를 만난 적 있었는데, 한 번도 스킬이 나온 적은 없었습니다."

아이무스가 말했다.

그 이유는 그가 민첩이 떨어지고 힘이 높기 때문이다. 스킬을 습득하려면 스탯이 받쳐줘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철봉으로는 해보신 적 없잖아요."

분수대는 무기 숙련을 분석한다.

축복을 받으러 찾아온 모험가가 들고 있는 무기를 보고, 그 무기에 대한 숙련도를 평가하고, 스테이터스까지 기준치 이상이라면 스킬을 주는 것이다.

"그렇긴 합니다만."

몽크는 철봉을 들고 영 자신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확신했다.

몽크 형님.

당신 근력이 순수값으로 15입니다.

그리고 몽크는 대봉에 기초 숙련이 이미 되어 있지.

그러니까 분수대에 얼굴을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

"······!"

분수대의 물속에 잠수하듯 얼굴을 집어넣은 아이무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스킬이 들어오는 것이다.

뭘 배울 수 있을까?

몽크의 레벨은 우리보다 더 높아서 무려 11이나 된다.

아무래도 1층만 돌았다곤 해도 경력이 많아서 그렇겠지.

만약 그 스탯을 전부 근력에만 찍었다면 지금 순수 힘 20점으로 봉술 2등급 스킬도 뽑았겠지만, 아쉽게도 아이무스는 민첩도 좀 찍혔고 건강도 찍혔다.

건강은 능력치 포인트 손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민첩은 좀 아깝단 말이지.

어쩔 수 없다.

민맥싱(TRPG 장르에서 효율만 추구한 스탯 분배)이 예르닐처럼 잘될 수는 없겠지. 여기가 게임도 아니고.

대신 오히려 민첩을 조금 더 찍어줘서 주먹 몽크의 체술 1등급 스킬 '기묘한 회피' 같은 걸 올려주면······.

음.

별로일까?

모르겠네. 원래 새로운 빌드는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잡캐다.

"······."

몽크가 고개를 들었다.

"진짜로 스킬이 생기는군요."

아이무스는 힘 15에 민첩 3, 건강 2.

아마 그가 배운 스킬은······.

"스매싱 가이아."

좋아. 내가 아는 대로다.

"이제 예르닐도 분수에 얼굴을 담가봐요."

예르닐은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아까 약탈자 파티를 제압한 덕분에, 나와 예르닐은 레벨도 올랐다.

이제 우리 둘의 레벨은 6.

예르닐의 민첩은 13.

가라 예르닐!

"후우웁!"

예르닐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잠수하듯 물속에다 얼굴을 집어넣었다.

"배, 배웠다!"

그리고 잠시 후에 굉장히 상기된 표정으로 나왔다.

"저 스킬 배웠어요."

굉장히 뿌듯해하며.

"3점 사격!"

이제 예르닐은 정말로 다시 태어났다. 자신감을 가져 예르닐!

"케일럽도 한 번 들여다보세요."

예르닐이 내게 분수대를 권했다.

"마법사는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게 없어요."

왜 그럴까?

마법을 내려주는 지혜의 신, 위저스는 미궁에 잡아먹히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래서 메모리북 계약을 통해서 직접 마법을 나눠주는 걸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궁금하긴 하네.

게임에서는 분수대를 그냥 클릭하면 스킬을 익히게 된다. 습득할 수 있는 게 하나뿐이라면 자동습득, 둘 이상이면 하나를 선택해서.

분수대의 물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나도 모른단 말이지.

한 번 들여다볼까?

28화

축복 분수 (2)

분수대에 다가가는데 예르닐이 스킬 축복 선배랍시고 조언을 해주었다.

"물에 얼굴을 넣으면 신의 목소리가 들려요."

"신의 목소리요?"

"네! 저한테는 활 솜씨가 뛰어나고 몸이 민첩해서 삼점사격을 주겠다고 했어요."

"······."

게임에선 그런 게 없었다.

신의 목소리 같은 것은 나레이션으로도 등장하지 않고, 대신 다음과 같은 메시지들이 떠오르곤 했다.

[예르닐이 축복 분수를 사용했습니다.]

▶클래스 : 궁수

▶무기 : 활

▶숙련도 : 기초

▶스테이터스 : 근력(0), 민첩(13), 지혜(0), 건강(0), 솜씨(2)

[예르닐이 '삼점 사격'를 익혔습니다.]

아무래도 게임적 인터페이스와 현실이 조금 다르긴 한 모양이지?

하지만 그러니까 오히려 더 분수대에 관심이 간다.

스킬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진 않지만, 어쩌면 미궁의 비밀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지.

게임에서도 말끔히 해소된 적 없었던 '미궁에 잡아먹힌 신들'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

나는 분수대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실망스럽게도 그 어떤 신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마법사들에게 마법을 내려주는 지혜의 신은 이곳에 없기 때문에.

대신 눈앞에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이 축복 분수를 사용했습니다.]

▶클래스 : 마법사

▶무기 : 턴제의 모래시계

▶숙련도 : 입문

▶스테이터스 : 근력(0), 민첩(0), 지혜(15), 건강(0), 솜씨(0)

이게 뭐야?

***

축복 분수는 무기 숙련도를 평가한다. 지금 장비하고 있는 무기에 대해서.

예를 들어 아이무스 레닉은 '주먹'과 '대봉'에 숙련되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맨주먹으로 분수대에 얼굴을 집어넣었을 때는 아무런 스킬도 받지 못했다.

왜냐면 민첩이 모자랐기 때문에.

그러나 이번에는 철봉으로 시도한 덕분에 스매싱 가이아 스킬을 얻은 것이다.

나는 어떨까?

내 무기는 마법 완드다.

그랬어야 한다.

게임에서는 완드를 들고 분수대를 클릭하면, '획득 가능한 스킬이 없습니다' 메시지가 뜨고 끝이다. 그런데······.

'내 무기가 턴제의 모래시계라고?'

이거 뭐 일종의 촌철살인 일침 같은 건가?

네가 지금껏 역경을 헤쳐온 무기는 완드도 전술도 아닌, 모래시계의 요행이었다, 같은?

솔직히 팩트로써 인정하는 바다.

근데 만약 모래시계가 무기로 판정되고, 내 스테이터스가 받쳐준다면······.

'모래시계의 스킬을 얻게 되는 건가?'

예르닐의 삼점 사격은 활을 장비했을 때 쓸 수 있는 스킬이고, 화살 세 발을 연속으로 발사한다.

아이무스의 스매싱 가이아는 대봉을 갖고 있을 때 쓸 수 있는 스킬이고, 지면을 박살내서 적들을 넘어뜨릴 수 있다.

그럼 내가 배우게 되는 스킬은 모래시계를 뒤집었을 때 쓸 수 있는 스킬인가?

설마 하는데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혜 10점을 초과했습니다.]

[모래시계 입문 스킬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음 중 하나를 고르세요.]

① 방향 조정자 : 행동력 소모 없이 완드 또는 스태프를 쥔 손과 팔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신체와 완드는 기타 사물과 물리적인 상호작용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스킬은 패시브 스킬로, 쿨타임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래시계 턴에 상시 적용됩니다.)

② 시간 거래자 : 모래시계의 시간 1초를 소모하여 특정 스킬의 쿨타임 1분, 또는 부정적 상태이상 시간 1분을 제거합니다.

(이 스킬은 모래시계 턴에서 발동할 수 있으며, 한 번 발동하면 60초를 전부 거래할 수도 있습니다. 쿨타임은 1시간입니다.)

③ 메모리북 편집자 : 당신의 턴에서 메모리북을 펼치고 주문 슬롯을 교체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슬롯을 교체하는 데 행동력 1점이 소모됩니다.

(이 스킬은 모래시계 턴에서 발동할 수 있으며, 쿨타임은 1시간입니다.)

④ 정신 통제자 : 행동력 2점을 소모하여, 플레이어보다 레벨이 낮은 파티원에게 신뢰도와 무관하게 명령을 내립니다. 성향에 반하는 명령일 경우, 명령을 이행하지만 일시적 '광기' 상태에 빠집니다.

(이 스킬은 모래시계 턴에서 발동할 수 있으며, 쿨타임은 1시간입니다.)

'와 시발 이게 뭐야······.'

어질어질하다. 네 가지 스킬이 전부 골때린다.

특히 마지막 정신 통제자는 뭐 이 정도면 그냥 미궁 마스터 아니야?

광기 상태에 빠뜨린다고?

'심신미약으로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변명하게 만들겠다는 소리잖아.

"······."

숨이 차는군.

물속에서 숨을 쉴 수가 없으니까.

숨 좀 돌리고 다시 들어올까?

아니.

사실 오랫동안 고민할 가치가 없는 선택지들이다.

쓰임새가 떨어지는 것부터 하나씩 소거해보자.

4번. 사실상 모래시계 확장 기능의 하위호환이다. 나는 지금도 예르닐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다. 정신 통제자 스킬은 성향에 반하는 명령도 내릴 수 있지만, 대신 광기에 빠뜨린다는 페널티가 너무 크고.

이 특성은 써먹는다면 전투보다는 오히려 미궁 바깥에서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빙의자 의심을 이제 겨우 지워낸 참이므로 밖에서는 조용히 지내고 싶단 말이지.

3번. 원래 메모리북은 인게임에서도 전투 중에 손댈 수가 없었다. 설정상 메모리북의 주문 슬롯을 교체하는 데는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슬롯 교체는 메리트가 분명 있지만······.

지금은 내가 가진 마법의 개수가 주문 슬롯과 똑같기 때문에 교체할 마법 자체가 없다.

2번. 고티어 마법으로 갈수록 쿨타임이 엄청나게 길어진다. 그래서 아예 '긴 휴식'이 필요한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스킬 쿨타임 가속은 장기적으로 쓸만한 스킬이다. 디버프 제거에도 괜찮아보이고.

하지만 지금 필요한가?

아니.

미궁의 심연은 고레벨로 가도 저레벨 스킬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 거래자는 나중에 필요해지면 그때 습득해도 늦지 않는다.

그렇다면······.

'방향 조정자.'

내 모래시계 턴에서 팔을 움직일 수 있는 스킬.

방향 조정에 행동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상당한 메리트지만, 지금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가 실현 가능하다면······.

[당신은 '방향 조정자'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실험 하나만 해보자.

"푸후우!"

물에서 나왔더니 예르닐과 아이무스가 바로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케일럽! 익사하는 줄 알았어요!"

"괜찮습니까?"

"음······. 네."

나는 허리춤에서 완드를 꺼냈다.

"괜찮아요."

모래시계를 뒤집으면서.

그리고······.

팔락!

턴을 종료했을 때는 예르닐의 머리끈이 풀렸다.

"어라?"

바람을 맞은 것처럼 풍성하게 휘날리는 머리카락. 어리둥절한 예르닐을 보면서.

'된다.'

나는 앞으로의 전략에 중요한 변수 포인트 하나를 확신했다.

"가시죠."

예르닐의 머리끈을 주워주었다.

***

언데드 백어택.

요즘 좀비 영화들에선 좀비들이 죄다 뛰어다니는데, 우리 백어택은 고전파다.

"끄으으······."

뒤에서 따라가고 있으면 마치 어린이를 혼자 등교하도록 보내놓고, 뒤에서 몰래 따라가는 부모가 된 기분이다.

"으어어!"

하지만 함정은 기가 막히게 피해가는 능력자 좀비다. 지금의 반응은 함정을 찾아냈다는 신호.

"백어택의 스텝을 따라갑시다."

우리는 일렬로 늘어서서 백어택이 통통 뛰면서 징검다리처럼 밟고 지나가는 지점만 정확히 밟으며 뛴다.

물론 이 작업을 제일 어려워하는 것은 바로 나다.

민첩이 개쩌는 예르닐은 그냥 점프해서 함정지대를 한 방에 넘어갈 수 있을지도.

아이무스도 칼룽의 수련승답게 잘 건너가지만 나는 까딱하면 함정지대 말고 요단강을 건넌다.

"휴."

하지만 무사히 통과했다.

이런 식으로 백어택을 추적한다.

언제까지?

백어택이 멈출 때까지.

바로 지금처럼.

"으아아?"

네 시간 정도 백어택을 추적했더니, 그가 갑자기 우뚝 섰다.

그리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으어어!"

이어서 납작 엎드려 바닥재를 손바닥으로 두들기고 마구 입질을 해대다가 나를 쳐다보았다.

"으으······?"

"좋아요. 여기서 멈춥시다."

"백어택이 왜 저러는 거예요? 이 밑에 백어택의 영혼이 있는 거예요?"

예르닐이 물었다.

"그런가 보죠. 여러분한테 이제 중요한 비밀 하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디 가서 얘기하시면 안 돼요."

"비밀?"

아이무스와 예르닐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밑에 층간 공간이 있습니다."

"층간 공간요?"

"1.5층 말 하시는 겁니까?"

예르닐은 금시초문이란 반응이고 몽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전에 모험가 일을 할 때 주워들었던 겁니다. 미궁의 계층 사이에 층간 공간이 있다고. 어떤 모험가들은 우연히 거기에 들어가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군.

사실 이 세계 사람들한테 층간 공간의 지식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왜냐면 나 말고 다른 빙의자들도 층간 공간 정도는 알았을 테니까.

거기서 이것저것 파밍도 했겠지. 안식처를 찾아내진 못한 모양이지만.

"근데 저는 어떻게 들어가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들어갈 방법이 있나요?"

"네."

층간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제일 간단한 방법이다. 게다가 이렇게 하면 안식처 바로 앞에 떨어진다.

나는 제자리에 퍼질러 앉았다.

"앉아서 기다리는 겁니다."

예르닐과 아이무스를 내 앞뒤로 3미터 간격만큼 한 명씩 배치해두었다.

"그냥 앉아있으면 돼요?"

예르닐이 물었다.

"네."

"얼마나요?"

"두 시간."

"두 시간!"

예르닐이 기겁했다.

"이러고 있다가 몬스터가 습격하면 어떡해요?"

"그럼 전투를 해야죠. 그리고 다시 두 시간 앉아있어야 하고."

"······그럴 수가."

"눕거나 움직이면 안 돼요. 엉덩이 딱 붙이고 가만히 있어야 해요."

"으아······."

"케일럽. 이렇게 하면 1.5층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까?"

아이무스가 물었다.

"네."

내가 이런 것을 어떻게 아는지 신기해하는 눈치군.

빙의자 지식입니다.

······라고 대놓고 말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마법 대학에서 거짓말 방지 마법에 대고 선서해서 모두의 머릿속에 내가 빙의자가 아님을 똑똑히 박아넣었고, 본래 이 몸의 진짜 주인이었던 케일럽은 빙의자 요호녀와 파티 짜고 미궁을 탐험하던 사람이니까.

내게 빙의자의 미궁 지식이 있는 것은 어색하지 않단 말이지.

하지만 구태여 거기까지 떠벌일 필요도 없기 때문에······.

"저는 소헨에 오기 전에도 미궁 모험가였습니다. 멀리 동쪽에서."

이 정도로 둘러댔다.

"거기서 얻은 지식이었군요."

"아이무스!"

갑자기 예르닐이 몽크의 주의를 끌더니 쉿! 하고 입단속을 시켰다. 내 눈치를 보면서.

비극적인 과거사를 들추지 말라는 듯한 표정이다.

예르닐아.

사실 그 과거사는 나도 잘 몰라.

***

"케일럽.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별안간 예르닐이 비장하게 손을 치켜들더니 의견을 개진했다!

"우리 보물상자 먼저 찾아오는 게 어때요!"

"안 됩니다."

"네······!"

기각시키자 재빨리 팔을 내렸다.

아마 예르닐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 나침반의 삑삑 소리가 전보다 훨씬 커졌고, 보물상자가 가까이에 있는 것 같으니 거길 먼저 탐험하자고.

혹시 아는가? 그 보물상자에서 유용한 아이템을 주워다가 1.5층에서 요긴하게 쓸지도.

그녀의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다.

보물상자가 가까이에 있는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보물상자는 가능하면 마지막에 찾는 게 더 좋다.

왜냐?

나침반이 찾아내는 보물상자는 높은 확률로 모험가가 꼭 필요로 하는 물건을 줄 수 있거든.

예를 들어서 우리가 백어택의 부활 과정에서 뭔가 실수해서 부활 스크롤이 망가졌다?

그럼 보물상자에서 부활 스크롤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일단은 보험으로 내버려 두자.

"심심하세요?"

예르닐에게 물었다. 시킨대로 얌전히 자리를 지키는 하체와 달리 그녀의 상체가 따분함에 배배 꼬였기 때문이다.

"약간요. 케일럽이랑 아이무스는 엄청 잘 버티네요."

나야 뭐.

앞으로 전략 짜느라고 정신없지.

그리고 아이무스는 몽크잖아.

"달라이 산에서 이런 수련은 많이 해봤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애 셋을 키우다 보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서 쉴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알게 될 겁니다. 예르닐."

갑자기 몽크 형님을 우리 기숙사로 데려와서 합숙하던 날이 생각난다.

집을 나올 때 나는 보고 말았다.

몽크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그 엄청난 해방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미소가 입꼬리로 자꾸만 치고 올라와서 관리가 안 되는 그 표정.

쓰발 자유다!

마음속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마 빚을 다 갚은 예르닐도 그 정도로 행복할 순 없을걸.

"근데 몽크이신데 왜 결혼을 하신 거예요?"

예르닐이 토크를 시작했다.

"별로 재미없는 얘깁니다. 제 아내는 본래 모험가 길드에서 일하던 카운터 접수 아르바이트생이었습니다."

아이무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스킬 하나 못 쓰는 3류 몽크이다보니 다들 무시하고 저를 파티에 끼워주지 않으려고 했었죠. 파티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는데, 제 아내가 저를 잘 챙겨줬어요."

그녀는 어떻게든 괜찮은 파티에 아이무스를 꼬박꼬박 꽂아 넣었다. 떨떠름하게 반응하는 파티장들을 붙잡고 당신들 초보자 시절을 생각해보라며 설득을 거듭해서.

하지만 아이무스는 어떤 파티에 들어가도 오래 가지 못했고, 일곱 번째 추방당했을 때는 카운터에서 엄청난 굴욕감과 창피함으로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파티에서 또 추방당했다, 면목이 없다, 혹시 새 파티를 구해줄 수 있겠느냐.

그는 자조적으로 넋두리를 늘어놨다.

제가 무능해서 자꾸 추방당하니 아가씨도 고생시킨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럼 미궁 말고 여기서 저랑 2인 파티 할래요? 저는 추방 안 할 건데······. 평생.'

농담처럼 그 플러팅을 승려에게 꽂아버린 것이다!

"그때 배시시 웃는 얼굴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그녀는 아이무스가 매번 파티에서 쫓겨나도 꾸준히 도전하는 모습을 좋게 보고 있었고,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다. 무려 셋이나.

아이무스의 백어택 파티를 만들어준 것도 그녀였다.

"그렇게까지 해줬는데, 저희 파티는 또 해체되고 말았죠."

"······."

"저는 은퇴했었어요."

아이무스는 목에 걸고 있는 펜던트를 매만졌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미궁에 들어가려니까, 저희 아내는 많이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이걸 주더군요. 어디서 약팔이한테 샀나 봐요. 미궁에서 위험이 닥치면 구해주는 보호 부적이라면서."

모험가 길드 로비에 배웅하러 왔을 때 저걸 줬던 모양이다.

"이번 모험에서 제가 돈을 하나도 안 받겠다 했는데도, 여기 들어오는 걸 허락해준 사람입니다. 백어택한테 제가 어떤 부채감을 갖고 있는지 아니까요."

"······."

"애 키우다보면 서로 지쳐서 싸울 때도 있고 지지고 볶고 투닥거리면서 살지만, 그래도 행복합니다. 파계승이 된 데 후회는 없어요."

아이무스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웃었다.

"살아 돌아가야죠. 그러니까."

하. 쓰벌.

이래서 한 집안의 중년 가장은 파티원으로 받기 싫었는데.

그 시끄러운 팔라딘 도마뱀을 뽑았어야 했나?

몽크 형님······.

아주 클리셰적인 사망 플래그잖아요! 왜 그럽니까 불안하게.

드르르르륵!

"어!"

갑자기 예르닐 주위의 돌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케일럽!"

"가만히 있어요."

안식처 근처에는 층간 공간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숨겨져 있고, 그 위에 두 시간 동안 앉아있으면 자동으로 계단이 열린다.

정확한 계단 위치는 어딘지 몰라서 3미터씩 띄엄띄엄 앉아서 기다렸던 것인데 예르닐 자리가 당첨이다.

쿠르르르!

출구룸을 클리어했을 때 미궁 구조가 바뀌는 것처럼, 예르닐 근처의 벽이 들어가고 나오고, 바닥이 빠지고 움직인다. 그리고 마지막에 발생한 것은······.

"계단이다!"

1.5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갑시다."

29화

1.5층

미궁에는 수없이 많은 계단이 있다.

보통은 한 층 단위로 내려가게 되어있지만, 지금처럼 반 층만 내려가는 비밀 계단도 존재한다.

나는 게임으로 플레이할 때도 이번과 비슷한 방법으로 1.5층을 처음 찾아냈다.

영혼을 추적하는 언데드를 앞세워 따라간 다음, 언데드가 더 이상 길을 못 찾고 방황하는 지점에서 정지.

친구 만나서 밥 먹고 왔더니 비밀 계단이 열려있더라고.

비밀 계단을 내려가면 작은 보일러실 같은 밀폐 공간이 나온다. 정면의 벽에는 게이트가 일렁거린다.

"이 게이트를 넘으면 1.5층입니다."

나는 1.5층에서 어떤 것들을 마주하게 되는지 간단한 설명과 작전 브리핑을 해주었다.

"그럼 준비됐죠?"

부디 작전대로 모든 게 잘 풀리길.

기도하면서 우리는 게이트를 넘었다.

***

'마을이에요.'

예르닐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게임하고 똑같다. 엄청나게 오래된 고대 마을의 폐허가 나왔다.

딱 봐도 귀신 나올 것 같은 폐건물이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고, 찢어진 깃발이 광장에서 혼자 나부낀다.

멸망해버린 마을에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1.5층이든, 2.5층이든, 3.5층이든, 모든 층간 공간은 전부 이런 풍경을 가지고 있다.

미궁이 신들을 잡아먹었다는 것처럼, 예전에는 마을도 삼켜버린 것일까?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예르닐이 다시 소곤거렸다.

이렇게 목소리를 낮춰 대화하는 이유는 몬스터 때문이다.

1.5층에 출몰하는 경계의 파수꾼.

게임에서 처음 여기에 들어왔을 때, 나는 그놈들 때문에 한 시간만에 게임오버 당했다.

하나하나는 대적 못 할 수준은 아니지만, 숫자가 엄청나서 아마 우리 파티로는 오래 못 버틸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파수꾼들은 평소 막사에 모여서 대기하고 있고, 마을에서 쓸데없이 시끄럽게 싸돌아다니지만 않으면 발각될 일이 없거든.

그리고 우리는 여길 헤맬 필요가 없다.

층간 마을은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엄한 곳에서부터 시작하면 안식처를 찾는 데 며칠씩 걸리겠지만 우리는 바로 찾을 수 있다.

'저깁니다.'

30여 미터 전방에 있는 거대한 성당 같은 건물을 가리켰다.

영혼의 안식처.

층간 공간으로 내려올 수 있는 계단은 여러 개 있는데, 지금 우리가 선택한 계단은 안식처 바로 앞으로 연결돼있었다.

비록 위에서 3미터 거리였던 것이 여기서는 30미터 정도로 늘어나긴 했지만.

'여기까진 내가 아는 것과 똑같다.'

혹시 예르닐이 뭔가 위험 신호를 감지하면 그대로 게이트로 되돌아가 도망칠 작정이었지만, 괜찮아 보이는군.

작전 속행!

끼이익.

숨을 죽이고 최대한 조용히 안식처의 문을 열었다.

***

콘서트홀처럼 거대한 방 안.

엄청나게 많은 양의 봉안함이 바닥에 깔려있다.

대충 어림해도 수천 개.

흡사 도자기 만드는 공방 같군.

"세상에."

예르닐이 보자마자 기겁했다.

"백어택의 영혼이 들어있는 봉안함을 가져가야 한다고 하셨죠?"

아이무스가 물었다.

"네."

"하지만 너무 많아요. 이 중에서 뭘 가져가야 해요?"

예르닐이 물었다.

"저것들은 전부 빈 함입니다. 우리가 찾는 건 저기 있어요."

정면에 있는 높이 5 미터의 커다란 진열장을 가리켰다.

그곳에 우유색 봉안함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다른 것들과 규격은 똑같지만, 내부에서 연두색 빛이 비쳐 나왔다.

"저게 백어택의 영혼이 담긴 봉안함인가요?"

아이무스가 진열장 쪽으로 다가갔다.

"아마 그럴 거예요."

왜냐면 최근에 영혼을 사로잡힌 모험가가 백어택 하나뿐이었으니까.

미궁 마스터에게 붙잡힌 모험가는 그 영혼의 봉안함이 이곳 진열장에 올려지고, 출구 보스로 등장한다.

이후에 만약 모험가에게 패배하고 그 시신이 시간이 지나 훼손되면?

그럼 봉안함은 자동으로 비워진다.

마치 애비슨의 시신이 너무 훼손되면 부활시킬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봉안함이 비워지면, 빈 함을 바닥으로 옮겨놓으려고 몬스터들이 여길 찾아올 거예요."

따라서 백어택을 부활시키는 장소는 여기가 아니다.

"봉안함을 챙겨서 1층으로 나간 다음, 거기서 백어택을 부활시키죠."

"좋습니다!"

아이무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간단하게 술술 풀릴 줄이야. 혹시 게임하고 뭐가 다를까봐 긴장했는데.

"사다리를 찾아볼게요!"

예르닐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다리 없어도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없을 테고.

"마법으로 꺼내면 되니까요."

우리를 털어먹으려다 털려버린 약탈자 그룹의 대장, '연기력의 마법사' 샐리의 염동력 완드를 꺼냈다.

염동력의 물리력이 대단하지는 않지만 저런 거 꺼내기에는 참 좋단 말······.

"뭐야?"

마법을 쓰려는 그 순간.

예르닐의 어깨너머로 충격적인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등골에 소름이 쫙 돋는다.

"뭡니까 저거?"

아이무스도 봤군.

바닥에 있는 빈 봉안함 중 하나에 녹색 불이 들어왔다!

"지금 어떤 모험가가 미궁 마스터한테 사로잡혔다는 겁니까?"

아이무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백어택을 생각하면 합리적인 추측이지만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1.5층 봉안함에 들어오는 영혼은 모두 1층 모험가들이다.

그리고 백어택 이후로 1층 최고 루키는 바로 나다. 1층에서 다른 유망주 얘긴 들어본 적이 없다.

미궁 마스터는 모험가를 사로잡을 때 신중을 기한다. 지금 봉안함에 채워진 건 미궁 마스터가 잡은 게 아닐 것이다. 그놈이 광기 면접을 보고 싶으면 날 노릴 테니까.

그럼······.

"케일럽."

예르닐의 표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사람 소리가 들려요."

"아."

시발.

설마 했는데 최악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미궁 마스터가 영혼을 포박하는 것 말고 봉인함에 영혼이 들어가는 방법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층간 공간에서 사망하는 것.

지금 이곳에 다른 모험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쪽으로 뛰어오는 거 같은데요······."

"전부 숨소리도 내지 마요!"

나는 예르닐과 아이무스를 단속시켰다.

"끄으으······."

신음 소릴 내는 백어택한테는.

"이것 좀 빌립시다."

예르닐의 머리끈을 풀어서 던져주었다.

저 언데드놈이 왜 예르닐 머리카락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아까도 머리끈 풀었더니 눈이 희번덕거리더라.

백어택은 개껌을 얻은 맹견처럼 머리끈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면서 얌전해졌다.

"조용히 기다려보죠."

"······."

"······."

방안에 적막이 흐른다.

나도, 예르닐도, 아이무스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긴장감에 목이 탁 틀어막히는 것 같다.

반면 바깥은 점점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으아아악!

비명 소리.

-레무스! 뛰어!

-아스틴! 아스틴을 두고 갈 수는 없다!

-아스틴은 포기하십시오! 이미 죽었습니다!

방금 봉안함에 들어온 게 아스틴이란 놈이군.

아니 대체 어떤 머저리 같은 새끼들이 여기 내려와서 저러고 뛰어다니는 거지?

저놈들은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몰라도 1.5층 계단을 타고 내려와서 탐험하다가 파수꾼들에게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전투를 치르면서 도망 다니다가 기어이 하나 잡혀서 죽은 거지.

'여기로만 오지 마라.'

제발.

미안하지만 너희 문제는 너희가 해결해라. 우리는 조용히 나가고 싶다. 이 난장판에 끼어서 싸우고 싶지 않아.

비정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저만큼 소란을 떨었으면 파수꾼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예르닐.

봉안함이 너무 높은 데 있어서 사다리를 찾으려고 했지?

여긴 사다리가 없다.

그럼 봉안함이 어떻게 그 높이까지 올라가있냐고?

안식의 관리자가 손 뻗으면 거기 닿거든.

영혼의 안식처를 관리하는 보스다. 그 괴물이 오면 우리는 다 끝장이야.

'제발.'

여기로 오지 마!

할 수 있다면 문이라도 잠가버리고 싶은데, 안식처 현관에는 잠금장치가 없다.

예르닐을 돌아보았다.

"······."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좆됐군.

-저 성당에 숨어!

그놈들이 여기로 온다.

***

1.5층에 대해서는 아이무스 같은 삼류 몽크도 주워들어 아는데, 안식처에 대해서는 마법 대학 교수도 모른다.

이 정황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이 세계의 모험가들이 1.5층의 존재는 알지만 탐험한 사례는 희박하다는 것.

그럼 퀴즈 하나.

그 희박한 사례가 하필 내가 1.5층에 들어가서 봉안함을 갖고 나오는 그 5분새에 동시에 발생하여 내 앞에 들이닥칠 확률은 얼마인가?

시발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리더라니.

콰앙!

머저리 모험가 셋이 문을 힘껏 박차고 뛰어들었다.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인가 했는데 한 명은 아는 얼굴이다.

"케일럽!?"

그 말 많은 도마뱀.

몽크 형님 대신 우리 파티에 들어올 뻔했던 나타니엘의 팔라딘 말이다.

"하아."

한숨과 함께 이마를 탁, 쳤다.

이름이 버나드였지?

"버나드. 대체 무슨 짓을······."

"케일럽!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모르시는군요!"

너희가 오기 전에는 안 위험했다.

"당장 전투 준비를 해야 해요! 바로 뒤에 괴물들이 쫓아오고 있습니다!"

너희가 끌고 온 거잖아 미친놈들아!

"코앞에 게이트가 있었는데 차라리 그리로 나가시지 그랬어요? 왜 여기로 들어오신 겁니까?"

"게이트가 있었습니까? 못 봤습니다!"

오냐, 그래 잘했다.

말을 할수록 내가 바보 되는 기분이야.

'어?'

이제 보니까 도마뱀 말고 나머지 두 명의 인상착의가 어디서 들어본 것과 똑같았다.

양손 도끼를 든 바바리안.

석궁을 든 하플링.

잠깐만.

"약탈자!"

예르닐이 펄쩍 뛰었다. 조건반사적으로 화살을 당기면서.

"2층 약탈자!"

연기력의 마법사, 샐리가 얘기했던 바로 그 팀이잖아?

"뭔 미친 소리냐!"

"우리가 뭔 약탈자예요!"

바바리안과 하플링이 동시에 무기를 뽑으며 소리를 질렀다.

"예르닐! 진정해요!"

나도 재빨리 예르닐에게 외쳤다.

이놈들은 약탈자가 아니다. 이것도 샐리의 거짓말이었다.

왜냐면 버나드가 있잖아.

애초에 '팔라딘 약탈자'라는 개념이 성립하기가 쉽지 않다. 거의 뜨거운 아이스티 수준이다. 미궁에서 팔라딘이나 신관은 신뢰의 보증수표처럼 통한다.

실제로 저 도마뱀 성격이 어땠는지 생각해보면 믿을 만하지. 저놈은 아마 누가 강제로 약탈을 시켜도 피해자한테 물건값이라고 돈 주고 올걸?

그 때문에 샐리도 저 팀을 두고 약탈자라고 입을 털 때 '리자드 팔라딘' 대신 '리자드 마법사'가 있다고 얘기했었다.

"잠깐만. 저 갑옷. 그 똥개 도적놈이 입었던 거잖아?"

하플링이 백어택이 입은 갑옷을 가리켰다.

"케일럽! 당신들이 약탈자 그룹을 물리친 겁니까?"

버나드가 물었다.

"저희를 습격해와서 저희가 죽였습니다."

"역시!"

갑자기 버나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타니엘께서 인도해주신 큰 그림이었군요!"

도마뱀 파티는 샐리 파티에게 습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보아하니 역으로 샐리 팀을 줘팼고, 샐리 팀은 간신히 도망쳐서 우리를 건드렸던 모양이지?

"여러분이 백어택의 영혼을 되찾는 여행을 떠난 이후, 저 역시 교단의 명령을 받아 파티를 꾸리고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그랬구나.

어떻게 계단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무스도 1.5층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던 걸 보면, 나타니엘 신전에도 층간 공간에 대한 정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랑 여기 들어온 시간이 겹쳤군. 어쩐지 확률적으로 너무 말이 안 됐어.

"여기서 만난 것은 함께 이 임무를 완수하라는 나타니엘의 계시입니다!"

감동을 잔뜩 받은 도마뱀은 소녀처럼 양손을 가지런히 가슴 앞에 모았다.

"몽크!"

그리고 아이무스에게 소리쳤다.

"지난번에는 제가 실례했습니다. 당신은 결코 부족한 몽크가 아닙니다. 정중히 사과하겠습니다."

뭐야 이 새끼 왜 갑자기 아이무스한테 친절해졌······.

"파계승이시라면서요! 전에는 몰랐는데,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결국 당신의 믿음이 잘못된 길임을 깨닫고 저버리셨군요! 이제 나타니엘의 품에 귀의하시면 됩니다! 그걸 위해서 나타니엘이 저 대신 당신을 그 파티에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하여튼 일관된 도마뱀이다.

"버나드!"

바바리안이 바깥을 내다보며 소리쳤다.

"괴물들이 몰려온다!"

"흡."

버나드는 힘껏 현관문을 닫고는 소리쳤다.

"파마의 결계!"

버나드는 2등급 신성 마법으로 현관문을 덮어 씌워버렸다.

"여기서 악마들과의 전투를 끝내겠습니다! 케일럽 파티는 저를 지원하십시오!"

쾅! 쾅! 쾅!

벌써 파수꾼들이 성당 문을 마구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리자다.'

창밖에 팔척 귀신 같은 괴물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씨발 진짜.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날 것 같네.

아니 솔직히 이게 정말로 이렇게 될 일이었냐?

"버나드."

"예!"

"뒤로 와서 제 지시에 좀 따라주시겠어요?"

"제가 케일럽의 지시에? 대가도 없이요?"

"샐리 팀한테 습격 당했던 것 아닙니까? 여러분 대신 샐리 팀을 저희가 처리했습니다."

"······!?"

버나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군요! 맞습니다! 나타니엘의 신자를 습격한 그 흉악범들을 마땅히 제가 응징해야 하는데, 제 할 일을 케일럽이 대신 해주셨근요! 그렇습니다! 저희에게 빚이 있었습니다! 나타니엘께서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해두셨군요! 하하! 명령하십시오!"

참 다루기 쉬운 도마뱀이다.

전력을 다시 분석해보자.

입만 열면 그냥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오는 샐리년의 개소리들 중에 하나는 진짜였다.

쟤네가 '2층' 파티라는 것.

버나드도 그렇고 나머지 둘도 괜찮아 보인다.

양손 도끼 바바리안 파이터.

석궁수 하플링.

팔라딘 리자드는 면접 봐서 대강 알고.

"바바리안하고 하플링 두 분! 가진 스킬 알려주세요. 빨리!"

베스트 조합은 아니어도 이 정도면 해볼만 해.

30화

마법사의 탈출 전략

언데드에게 부활 마법을 쓸 때는 신중해야 한다. 자칫하면 언데드가 소멸해버리거든.

애초에 부활 마법은 신성 계통이라서 언데드한테 쥐약이므로 바로 쓸 수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영면에 들어라."

이실로프가 준 언데드 영면 스크롤을 사용한다. 백어택의 몸에서 사령술을 빼낼 것이다. 봉안함과 부활 스크롤은 그다음.

"으······으으······."

다만 영면 마법이 완료되려면 1분 정도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그동안 힘 빠진 언데드를 잘 지켜줘야 한다.

"두 분 스킬 안 알려주십니까? 빨리 얘기해요."

샐리의 염동력 완드를 꺼내면서 하플링과 바바리안을 다시 채근했다.

"좋아요. 같이 싸울 거니까 알려는 드리죠. 제 스킬은 관통 사격과 도탄 사격입니다."

하플링이 얘기했다.

나는 백어택의 봉안함을 꺼내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옆에 바바리안 친구가 가진 스킬은 육중한 돌진과 야만용사 멀리뛰기."

스킬들이 나쁘지 않군.

얘길 들으면서 봉안함 꺼내기에 집중한다.

염동력은 물리력이 아주 미약하고 속도도 느리다.

그리고 봉안함은 깨지기 쉬운 도자기라서 신중을 기울여 조심스럽게 꺼내야 한다.

"그쪽도 스킬 정보를 공유하시죠."

이제 하플링이 예르닐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저는 삼점 사격, 그리고 옆에 몽크님은 스매싱 가이아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케일럽은······."

"마법사는 대강 압니다. 얘기 안 해도 돼요."

보아하니 하플링과 바바리안, 그리고 아까 죽은 아스틴이란 놈까지 셋은 원래 한 파티였던 모양이다.

"이제 아스틴의 원수를 갚자!"

바바리안이 저렇게 동료애를 불태우고 있으니까.

아까 밖에서도 아스틴을 두고 갈 수는 없다고 뭐라 했었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다음 우리의 임무도 완수하자!"

"좋습니다!"

바바리안이 다시 소리치자 버나드도 맞장구쳤지만, 하플링은 반응하지 않았다.

하플링은 이미 본인들 전력으로는 저 몬스터들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간파한 모양이지?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버나드는 아직 안식의 관리자에 대해 잘 모른다.

저게 나온 이상 우리 같은 좆밥들에게 최고의 시나리오는 살아서 게이트로 탈출하는 것뿐이다.

그것조차도 나와 몽크, 예르닐만으로는 어려웠겠지만, 저 2층 파티를 잘 쓰면 해볼 만할지도.

'이제 절반.'

봉안함이 찬장에서 반쯤 내려온 시점. 하플링은 동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는 임무를 진행하는 건 이제 글렀어. 마지막에 나타난 커다란 놈 못 봤어? 저건 보스일 거야. 여태 우리가 상대해온 거랑 차원이 다를 거라고. 우리는 아스틴의 복수도 못해."

저기서 하플링만 상황 판단을 할 줄 아는군.

"그러니까 1층 마법사 지시를 따르는 건 동의할 수 없어."

아니 방금 한 말 취소다.

"이제 막 결성된 신생 파티잖아! 게다가 몽크는 평생 최하위 모험가였고, 엘프는 미궁이 이제 두 번째잖아! 2층 구경도 해본 적 없는 놈들이라고! 저놈들 지시를 듣다간 우린 전멸이야!"

나름대로는 논리가 있다.

몽크 형님이 발끈하는 대신 연륜 넘치는 회유책을 폈다.

"그 못난이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우리 파티장의 지휘에 걸어볼 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안 통했다.

"파티를 구성하는 것도 능력이야. 여긴 우리가 지휘하는 게 맞아. 우리는 2층 숙련 파티니까. 너희가 우리 말을 들어."

콰앙!

결계가 벌써 반쯤 부서졌다.

"여러분이 지시한다면 어떻게 할 건데요?"

봉안함을 완전히 가져와서 품에 안으며 하플링한테 물었다.

"우리 파티장은 버나드야. 버나드. 어떻게 할 거예요?"

"저는 케일럽한테 지휘권을 넘겼습니다."

리자드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한 번 얘기만 해보세요."

편견 갖지 말자. 혹시 아나? 말 많은 도마뱀한테 개쩌는 아이디어가 있을······.

"그럼 정면으로 돌파합시다!"

······리가 없구나?

"저와, 바바리안 전사님, 몽크, 셋이 전위를 맡고 길을 뚫겠습니다! 케일럽이 얘기한 게이트로 탈출한 다음, 전열을 다듬어서 다시 옵시다!"

"다시 여길 오자고! 미쳤어요!"

곧바로 하플링이 반대표를 냈다.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때려치워요, 젠장! 이미 그건 물 건너갔어!"

콰앙!

이제 결계가 거의 다 깨져간다.

"여러분."

쓸데없는 지휘권 다툼은 여기까지.

좀 더 생산적인 딜을 하자고.

"지금껏 여러분 계획대로 움직여서 아스틴이 죽었죠?"

"······!"

"정면 돌파 같은 걸 시도했다간 다 죽을 겁니다. 하지만 제 지시를 따르면 여기 있는 모두를 살릴 수 있어요. 그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자.

"죽은 아스틴도 되살릴 수 있고, 여러분의 임무도 완수시켜줄 수 있습니다."

"뭐! 아스틴을!"

"뭐라고요!"

"무슨 소립니까 그게!"

세 사람 모두 기겁해서 펄쩍 뛰었다.

***

저 리자드 파티의 임무는 무엇이었나?

'백어택의 부활'은 아니다.

왜냐?

우리 파티에 들어오려다가 실패했잖아. 계약 실패는 나타니엘의 신도들에게 절대적이다. 나타니엘이 그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나드는 신전의 명령을 받고 여기에 내려왔다.

왜?

신전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인 영혼 보존과 부활 서비스에 앞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는 '미궁 내 영혼 보존 시스템'을 반드시 확인해야 하므로.

애초에 신전이 마법 대학하고 협력해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유가 그거였겠지. 고위 사제들은 1층 루키 백어택 나부랭이에는 관심 없다.

버나드는 아마 신전에서 이런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2층 수준의 숙련 파티 3인을 구해줄 테니, 정말로 미궁에 영혼 보존 시스템이 있는지 확인해라. 단, 마법 대학이 진행하는 백어택 부활과는 독립적으로. 그쪽은 계약 실패했으니까.'

만약 버나드가 돌아가서 백어택의 부활을 봤다며 임무 완료 보고를 올리면 존나 털릴 것이다.

나타니엘께서 그건 관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 임무의 근거를 거기서 가져올 수가 있느냐고.

백어택 부활과 별개의 증거물을 수집해오라고 하겠지.

또라이들 같다고?

정확히 봤다. 나타니엘 신자들은 미친놈들이다.

그 증거로 저 도마뱀은 지금 내가 백어택 부활을 시도하려고 영면까지 썼는데 아직도 임무 운운하고 있다.

게다가 내가 아이무스를 영입한 후 무려 8일 동안 나를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1층에서도 우리 파티를 찾아내 협력을 제안하는 대신 자기들끼리 1.5층에 쳐들어왔지.

"그 임무를 완수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당신들 동료인 아스틴을 부활시켜서. 대신 제 명령을 완전히 따라주셔야 하고, 이 일에 대한 보수도 주세요."

하플링의 눈에 동공 지진이 났다.

"보······보수는 얼마나?"

"그거 협상할 시간은 없으니, 나타니엘 신관들에게 물어봅시다. 저희가 기여한 부분의 정당한 값이 얼마인지."

"하겠다!"

바바리안이 대뜸 소리쳤다.

"근데 그게 정말 가능한가? 아스틴은 영혼 보존이 걸려있지 않았다. 미궁 마스터에게 잡힌 것도 아니고······."

나는 아까 아스틴이 사망할 때 녹색불이 들어온 봉안함을 가리켰다.

"층간 공간에서 사망하면 자동으로 봉안함에 영혼이 들어갑니다."

"뭐! 그럼 저게 아스틴이냐! 아스틴!"

"저걸 그대로 들고 미궁을 나가면 바로 깨져요. 하지만 여기서 부활시키면 아스틴이 신전에 가서 겪은 걸 직접 증언해줄 겁니다."

그래도 하플링은 아직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이해한다.

"우리는 아스틴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요."

하플링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처음인 데다가 패닉 상태로 도망치면서 길 잃은 지 오래니까."

"그것도 괜찮습니다. 할 거예요, 말 거예요?"

"저는 하겠습니다. 케일럽. 제가 직접 나타니엘의 사제들에게 보상 분배를 요청하죠!"

리자드가 소리쳤다.

콰앙!

이제 성당 정문이 깨졌다. 결계는 아직 조금 남았지만, 나무문이 못 버티는 것이다. 문짝이 떨어져 나가면 결계도 금방이다.

"조, 좋아요! 당신이 지휘하세요. 뭘 하면 되는지 알려줘요."

됐다. 하플링도 넘어왔다.

정말 모든 단계가 하나하나 고비구만.

"좋습니다. 그럼······."

나는 거대 진열장을 가리켰다. 이제 텅 비어버린.

"일단 이 진열장부터 옮겨서 벽에다 기대주실래요?"

이게 몽크 형님 혼자 힘으론 안 움직이거든.

바바리안, 리자드, 몽크 형님까지 세 근육의 힘을 하나로!

너희만 믿는다!

***

콰쾅!

결계가 깨졌다.

그리고 성당 건물의 지붕도 터져나갔다. 내가 분진 폭발로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진열장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벽에 붙이면 각각의 진열칸을 사다리 삼아 오를 수 있다. 그리고 제일 꼭대기에서 점프하면.

탁!

나 같은 멸치도 부서진 지붕에 매달릴 수 있단 말이지.

"······!"

근데 올라가질 못하겠군.

턱걸이 한 개조차 당길 힘이 없다니!

"예르닐!"

"네!"

버둥거리면서 도움을 청했더니 예르닐이 깡총거리면서 지붕에 올라가서 나를 당겨주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장면은······.

"하아."

진짜 한숨이 탁 나오는구만.

흡사 좀비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생존자들의 최후의 쉘터에 몰려든 좀비 무리, 아니 경계의 파수꾼 무리 수백.

눈, 코, 입이 없고 새까만 천으로 덮어쓴 괴물들이 칼을 들고 좁은 입구로 돌진하고 있었다.

그 앞을 막아선 것은 몽크 형님과 팔라딘과 바바리안.

"수호자의 방패!"

팔라딘이 방패로 정면을 막고, 바바리안과 몽크가 옆으로 새는 놈들을 하나씩 캐치해서 머리통을 깨버린다.

"하지만 오래는 못 버틸 거예요."

다시 내려간 예르닐이 하플링 석궁수와 함께 백어택의 시신을 지붕으로 올려보냈다.

끌어올리면서 보니 사령술이 거의 다 빠진 것 같다. 눈도 겨우 뜨네.

"봉안함도!"

하플링이 주는 백어택의 봉안함도 받았다.

예르닐은 아스틴의 봉안함을 옆구리에 끼고 혼자 올라왔다.

동시에 나는 몽크 형님 쪽에다 소리쳤다.

"너무 강하게 저항하지 말고 천천히 뒤로 후퇴해요!"

그 이유는 관리자 때문이다.

"뭐야 이 괴물은!"

신장 3.5미터 가오나시 비슷하게 생긴 안식처의 관리자는 손에 거대한 완드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관리자는 완드처럼 쓰지만, 저걸 아이템으로 습득하면 스태프로 판정된다.

크기가 하도 커서.

나는 공격력이 높은 쌍수 완드 빌드를 사용하지만, 저 스태프가 가끔 탐이 날 때가 있었다. 왜냐면······.

'언데드 회복 마법이 들어있거든.'

"몬스터들이 회복된다!"

도마뱀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미리 경고했음에도, 직접 보니까 충격이 큰 모양이지?

'관리자를 죽이면 어떨까.'

그럼 저 스태프를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전투 자체를 이길 수도 있다.

내가 제일 먼저 생각했던 전략인데 빠르게 포기했다.

우리도 절반은 죽을 것이고, 그 절반 중에 내가 포함될 확률이 매우 높거든.

마법사는 항상 우선 순위 타겟이다.

"시간 끈다는 생각으로 싸워요!"

경계의 파수꾼들은 몽크 형님한테 뚝배기가 깨지든, 바바리안한테 두 쪽이 나든, 안식처의 관리자가 완드 한 번 휘두르면 전원 회복이다.

'언데드 회복의 쿨타임은 15초.'

"뒤로 조금씩 물러나!"

"분진 폭발."

나는 빈틈을 노려서 언데드 가운데 한 마리를 폭파시켰다.

"다녀올게요. 케일럽."

뒤에서 예르닐이 비장한 표정으로 버나드에게 받은 부활 스크롤을 허리춤에 꽂아넣었다.

그리고 활을 어깨에 메고, 화살통을 잘 챙기고, 물약도 주머니에 넣고, 아스틴의 봉안함을 품에 안았다.

"갔다와요!"

탁!

예르닐은 지붕에서 점프했다.

파수꾼들이 몰려드는 방향의 반대편으로.

아스틴의 시신 위치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르지만, 예르닐만큼은 방향과 거리를 정확히 안다.

아스틴이 사망할 때 위치를 포착했으니까.

사운드 맵핑은 1티어 특수능력이다.

그리고 어그로가 이곳 성당에 다 끌려있기 때문에 예르닐이 위험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스틴은 마법사라고 했지.'

그놈을 살려서 반대편에서 호응해줘야 한다.

가라! 예르닐! 밑장 빼기!

아니.

윗장 빼기!

***

정면으로 나갔으면 다 죽었다.

나타니엘 신성 교단의 리자드 팔라딘, 버나드는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토록 나타니엘의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운 적이 있었던가?

'아까랑 차원이 다르잖아!'

아스틴이 죽었지만, 버나드는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바바리안도 전의가 불탔다.

그러나 하플링은 반대했다.

보스가 나왔으니까 어려울 거라고.

케일럽도 반대했다.

'안식의 관리자가 나왔으면 잡몹도 처리하기 어려울 거라고.'

그래도 좀 과장되었겠거니 했는데 진짜다.

아까와 차원이 다르다. 훨씬 빠르고 힘이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악취!'

시체 썩는 냄새 같은 악취를 뿜어내는데 그게 머릿속을 이따금 아찔하게 만든다.

'안식의 관리자는 언데드를 회복시키고, 강화시키고, 악취의 오라 마법을 걸어줍니다.'

케일럽은 그렇게 설명했다.

그 악취는 근접한 적들의 저항력을 낮추고 몽롱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그런 주의를 받았음에도······.'

버나드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으아아아!"

무리하게 괴성을 질러대는 걸 보니 바바리안도 당황한 모양.

'벌써 몇 마리를 죽였지?'

바닥에 쓰러진 괴물 사체가 다섯, 여섯, 일곱, ······아홉 구.

삐이잇!

또 저 소리다. 3.5미터의 악마가 거대한 마법봉을 가볍게 휘두르면서 휘파람 소리 비슷한 걸 낸다.

그러면······.

"버나드!"

일어나는 파수꾼 시체 아홉 구 앞으로 바바리안이 뛰어들었다.

양손 도끼로 두 마리를 후려치면서.

"정신 차려!"

"······."

정면 돌파는 무슨.

앞으로 나가는 건 고사하고 시간 끄는 것조차도 쉽지 않다.

그런데······.

'저놈은 어떻게 버티는 거지?'

케일럽이 뽑았던, 그 모험가 최하위 삼류 떨거지 몽크 말이다.

그의 전투력이 이상하다.

쾅!

쩍!

콰직!

거대한 강철 대봉은 거리를 두고 지역을 장악하고 통제하는 데 최강의 무기다.

특히 조악한 장검을 들고 달려드는 파수꾼들 상대로는.

퍽!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괴물들이 박살 나서 주저앉았다. 칼로 막으면 칼도 부러져버렸고.

"버나드! 힘들면 바바리안하고 같이 합쳐요! 오른쪽은 몽크 형님한테 맡기고!"

뒤에서 케일럽이 소리쳤다.

"······몽크. 악취를 어떻게 견디는 겁니까?"

버나드는 왼쪽으로 빠지면서 물었다.

"달라이 산에서 수련하면."

아이무스는 철봉으로 다시 파수꾼 두 마리를 터뜨렸다.

"잡념에 매몰되지 않는 법을 배웁니다."

"······봉술은요?"

"달라이 산에서 배웠습니다."

삐이잇!

다시 관리자가 완드를 휘둘렀다.

"몽크 형님!"

케일럽이 뒤에서 외쳤다.

"스매싱 가이아!"

으깨져서 쓰러졌다가 다시 복원되어 일어나는 파수꾼 십수 마리 가운데.

아이무스는 힘껏 철봉을 내리찍었다.

***

성당 바닥재가 박살 나면서 폭발적인 충격파가 발생했다.

방금 일어나던 파수꾼 무리를 싹 쓸어버리면서.

가라앉는 먼지와 시체 살점들 사이로 버나드의 경악한 표정이 보인다.

당황스럽겠지.

봉술 힘몽크는 처음이지?

내가 그걸로 턴제 마스터 난이도도 깼다.

지역 통제와 반격에 뛰어날 뿐 아니라 정신 내성도 높아서, 1.5층의 악취의 오라 정도는 안 통한다.

'그래도 혼자였으면 뚫렸겠지만.'

어쨌든 바바리안이 광포 상태에 들어가서 몽롱함에 저항하는 모양이고 팔라딘도 썩어도 준치라고 전위 탱킹은 되기 때문에 셋이서 그럭저럭 시간을 벌어내고 있다.

퓩!

하플링 석궁수도 쏠쏠하게 지원사격을 해주고 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놈도 나가서 우리 몽크한테 사과하겠군.

"잘 하고 있어요!"

나는 분진 폭발을 발사하며 소리쳤다.

"그대로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 돼요! 시간 끌면서!"

예르닐이 신호할 때까지만.

"케일럽!"

하플링이 내 어깨를 다급히 두드렸다.

"신호탄이에요!"

옆을 돌아보니 200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섬광탄 화살 하나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됐다.

"전부 지붕으로 올라와요! 제가 엄호해줄 테니까!"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60초]

[행동력 : ■■■■]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31화

마법사의 탈출 전략 (2)

분진 폭발.

1등급 마법인 탄진과 열풍을 주문 슬롯에 등록하면 발생하는 2등급 결속 마법.

피해량이 높고, 화상을 입힐 수 있다.

게다가 장애물을 건너뛸 수도 있어서 더욱 유용하다.

하지만 내가 더 자주 써먹는 경우는 장애물을 파괴할 때였다.

***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56초]

[행동력 : ■■■■]

마치 건물을 철거하는 작업반장처럼 신중하게 마법의 표적 지점들을 고른다.

"분진 폭발."

성당 정면 벽 모서리에 하나 터뜨리고.

10초의 쿨타임을 잰 다음.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45초]

[행동력 : ■■■□]

"분진 폭발."

반대편에 또 하나 터뜨리고.

벽과 천장을 붕괴시켰을 때, 쏟아지는 낙하물이 우리 팀을 덮치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지금 관리자가 서 있고, 파수꾼들이 쇄도해 들어오는 지점.

성당 입구와 그 근처 벽면 모서리와 천장을 터뜨린다.

"분진 폭발."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23초]

[행동력 : ■□□□]

무너뜨리면 파수꾼들은 어떻게 되는가? 아마 60~70% 정도는 무너지는 천장과 성당 정면의 벽에 깔릴 것이다.

관리자는?

둘 중 하나다.

운 좋으면 같이 깔려서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릴 테고, 운 나쁘면······.

'위상 이동.'

안식의 관리자는 단거리를 순간 이동할 수 있다. 어쩌면 그걸로 낙하물을 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돼도 나쁘진 않아.

아예 낙하물에 깔려서 위상 이동을 쓰지도 못하면 더 좋겠지만, 그 마법을 지금 빼버리는 것은 훌륭한 메리트다.

그럼 우리가 게이트까지 달려갈 때 뒤를 잡히지 않을 테니까.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마지막을 어딜 터뜨리지?'

너무 욕심부렸다간 천장이 제대로 붕괴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낙하물이 떨어지는 지점을 잘못 설계하면 우리 팀이 다칠 수 있다.

그렇지만 너무 보수적으로 폭파시켰다간, 파수꾼들이 너무 많이 남을지도 모른다.

바바리안과 팔라딘과 몽크 아재가 진열장을 기어올라 지붕으로 올라오는 데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

무장을 해제하고 등에 메거나 하는 시간까지 넉넉하게 한 사람당 7초씩 잡자.

몽크 형님 철봉은 손에 드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철봉 먼저 받는 것도 방법이겠다.

[당신의 턴입니다. 남은 시간 : 8초]

[행동력 : ■□□□]

최악의 사태가 벌어져도 길이 있긴 하다.

임시 모래시계 말이다.

나는 진즉에 획득했다. 다만 쓸 데가 따로 있어서 아끼는 중이지만.

만약 세 사람 중에 누군가가 진열장을 기어오르다가 적에게 잡힌다면, 그리고 우리의 백업으로 구해줄 수 없다면 임시 모래시계를 쓴다.

아.

생각해보니 운이 좀 따라주면 임시 모래시계를 안 써도 될지도.

"분진 폭발."

[행동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턴을 종료합니다.]

[모래시계가 다시 뒤집어졌습니다. 쿨타임 : 60초]

***

쾅! 콰광! 쾅!

갑자기 성당 정문 근처 벽과 천장 모서리가 폭파되었다.

불꽃은 솟아오르고 벽돌은 쏟아져내린다. 박살난 기와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쨍!

봉안함은 절반 이상이 산산조각났다.

붕괴된 천장과 벽면은 그대로 떨어져서 입구의 파수꾼과 관리자를 덮쳐버렸고,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뭐······뭐야."

석궁을 겨누던 하플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이 마법사가 갑자기 밑으로 완드 한 쌍을 겨누더니 영창도 없이 쿨타임도 없이 건물을 반파시켜버렸다.

"이게 무슨······."

도망치던 팔라딘 버나드도 당황해서 되돌아보았다.

"빨리 올라와요! 시간 없어!"

다시 마법사가 소리를 질렀다.

"어서 가십시오!"

몽크는 바바리안의 등짝을 철썩 후려치며 되돌아섰다.

바닥에서 땡그랑 땡그랑 굴러다니고 튀어 오르는 기와 파편.

벽돌과 진흙 조각들, 그리고 가라앉는 흙먼지.

그 가운데 살아남은 파수꾼들이 나타났다.

"어서 올라와! 이 바바리안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플링은 오랫동안 함께 해온 자기 동료부터 챙길 수밖에 없다.

"알았다!"

바바리안은 믿을 수 없는 치악력으로 그 거대한 양손 도끼를 입에 물더니 빠르게 진열장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몽크!"

버나드는 살아남은 파수꾼 하나의 머리통을 깨버렸다.

"바바리안 다음은 당신입니다! 먼저 올라가십시오, 몽크!"

"······아니요."

아이무스도 그 옆에서 기어나오는 파수꾼 셋을 철봉으로 부숴버렸다.

탁 트여버린 하늘과 성당 정면을 바라보면서.

'케일럽이 지붕을 붕괴시켰다.'

안식의 관리자도 저 잔해에 파묻혔을까?

모른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아직은 파수꾼들이 부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동료를 뒤에 두고 먼저 도망치는 건 질색입니다."

백어택 이야기였다.

아이무스는 백어택이 광기에 사로잡혀서 그를 구하러 왔을 때, 미궁에 버려두고 혼자 도망쳤다.

"팔라딘이 먼저 올라가세요!"

달라이 산에서는 잡념에 매몰되지 않는 법을 가르친다.

지나간 일을 마음에 두지 말라고.

후회는 그 무엇도 낳지 못하며, 마음을 파괴하기만 할 뿐이라고.

하지만 이런 것을 어떻게 떨쳐낼 수 있단 말인가?

콰직!

아이무스는 또 하나의 파수꾼을 부숴버렸다.

"어서 가십시오!"

"당신은······."

리자드는 진열장 쪽으로 먼저 돌아섰다.

"내가 본 전위 중에서 최고입니다. 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동시에 세 마리의 파수꾼이 잔해를 넘어왔다.

쩍!

아이무스는 대봉으로 하나를 부숴버렸고 나머지 둘은······.

빠직!

퍽!

번개 쇼크와 석궁 볼트가 동시에 날려버렸다.

"아이무스! 천천히 뒤로!"

케일럽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무스는 천천히 한 걸음씩 뒤로 빠지면서 전방을 경계했다.

팔라딘은 등에 방패를 멘 채, 최대한 빠르게 진열장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삐이잇!

모두의 머리카락을 쭈뼛 세우는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옥의 정문에다 기름칠을 하지 않고 여닫아서 끼익 소리가 난다면 마치 저런 느낌일 것이다.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안 깔렸어! 관리자는 안 깔렸어!"

케일럽이 소리쳤다.

"아이무스! 올라와요! 빨리!"

그 괴물은 위상 이동을 써서 천장 낙하물을 피했고, 건물 밖으로 도망친 다음 잠깐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제 다시.

삐이잇!

안식의 관리자가 침입자들을 추격하러 성당으로 들어섰다.

삐이잇!

바닥에 가득한 건물 잔해들이 들썩거린다.

죽은 파수꾼들이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

대부분의 몬스터의 어그로가 성당에 끌려버린 지금.

1.5층의 텅 빈 층간 마을 한복판을 내달리는 사람 둘이 있다.

바로 엘프 궁수 예르닐과, 드워프 마법사 아스틴.

"헉······. 헉······. 천천히 좀 가!"

"저희 시간 없어요! 빨리 가야 해요!"

"아니 이 녀석아······."

드워프가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나는 부상을 당했잖아······. 죽었다가 부활한 몸이라고."

"치료해줬잖아요?"

예르닐은 케일럽이 시킨 대로 드워프의 시신 옆에 봉안함을 놓고, 버나드에게 받은 부활 스크롤을 뜯었고, 드워프의 상처에다가 힐링 포션을 마구 들이부었다.

깨어난 다음에 힐링 포션을 먹이기도 했다.

치료 끝!

"그걸로 완쾌가 되겠냐!"

드워프는 아직 뛸 때마다 옆구리가 찢어질 것처럼 쑤셨다.

"그래도 조금만 참아요! 아저씨 파티랑 저희 파티랑 다 위험하단 말이에요!"

"그건 나도 아는데······."

드워프 마법사, 아스틴은 바바리안 그렉, 하플링 레무스와 함께 활동하는 숙련된 3인 파티였다.

함께 수없이 많은 생사를 넘나들고 동고동락하며 다져진 우정은 웬만한 심층 파티 못지않다.

그 역시 빨리 돌아가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눈앞의 엘프 이상이다.

"젠장."

드워프가 악바리로 이를 깨물었다.

"그래, 좋다. 앞장서!"

그가 지끈거리는 옆구리를 움켜쥐며 속력을 냈다.

"고마워요! 케일럽이 빨리 돌아오라고 했어요. 어서 가요!"

"가서 뭘 해야 한댔지?"

"케일럽이 토담 마법으로 호응해달랬어요."

"무슨 호응?"

"케일럽이 구름을 만들 건데 그때 호응해달래요!"

"뭔 소리야?"

이 엘프는 꼭 리자드 팔라딘이 나타니엘을 찾는 것처럼 케일럽, 케일럽, 불러대는구만.

아스틴은 그 신생 파티의 초보 궁수가 약간 웃겼다.

신뢰 관계가 굳건한 녀석들은 항상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

"괴물이다!"

갑자기 전방에서 튀어나온 파수꾼을 발견한 아스틴이 완드를 꺼냈다.

하지만 그가 마법을 영창하기 직전.

팡!

예르닐의 손에서 번개처럼 발사된 화살이 파수꾼의 머리를 뚫어버렸다.

그것도 한 발이 아니라 세 발이나.

파방!

"뭐야!"

드워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한 가닥 하는구만!"

"······!"

드워프를 돌아보는 예르닐의 얼굴에는 붉게 상기된 뿌듯함이 올라왔다.

"삼점사격이에요! 스킬이요!"

"안 물어봤어."

"아저씨 시체 찾으러 가는 길에도 셋이나 잡았어요."

"너 대체 미궁 몇 번째냐?"

"두 번째요!"

어쩐지 풋내가 풀풀 났다.

하지만 예르닐은 자신감이 충만했다.

스킬도 없고 보호만 받던 최약체 예르닐은 이미 없다.

다시 태어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순식간에 화살 세 발을 잇달아 박아넣는 슈퍼 루키 궁수.

케일럽이 가장 신뢰하는(?) 오른팔.

낙오된 동료를 부활시켜서 데려오는 중대한 임무를 짊어진 천재 궁수.

특명의 예르닐 등장!

"참나."

아스틴은 이 풋내기 궁수를 보고 있으려니 자신의 초보자 시절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풋풋하던 레무스와 그렉도.

같이 나이가 들면서 이래저래 흉터도 추억도 쌓아놓은 사이다. 그들의 실력은 2층에서 더 내려가기 힘들었지만.

"못난 놈들. 죽지만 마라."

"이제 다 왔어요! 성당이 보여요!"

***

'잡힐지도 몰라.'

모두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미궁에 뛰어든 모험가는 언제나 죽음을 동반자처럼 여겨야 한다.

그래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둔다.

그래도 이런 순간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죽음의 위기에 빠지면 달라이 산에서 수련한 몽크의 강철 같은 마음에도 공포가 싹튼다.

어쩌면 다시 가족들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게.

마지막 차례.

아이무스는 진열장을 오르기 시작했다.

"철봉 먼저!"

버나드가 손을 뻗었다.

"여기요!"

아이무스는 걸리적거리는 철봉을 위로 올려보냈고, 버나드와 바바리안이 동시에 철봉을 챙겼다.

"서둘러요!"

하플링이 고함을 질렀다. 진열장 바로 앞까지 파수꾼들이 몰려든 참이었다.

"백업해! 백업!"

하플링이 석궁을 마구 쏴댔다.

"번개 쇼크!"

케일럽의 완드에서도 마법이 분출한다.

삐이이잇!

관리자의 휘파람 소리가 장송곡처럼 울렸다.

"······!"

아이무스는 갑자기 진열장 밑에서 무언가가 휘청거리는 충격을 느꼈다.

"진열장에 붙었습니다!"

팔라딘이 고함을 질렀다.

내려다보니 진짜다. 파수꾼 두 마리가 진열장을 붙잡고 흔들고 있었다.

"분진 폭발!"

케일럽이 재빨리 마법을 써서 한 마리를 폭파시켰다.

그 옆은······.

탕!

하플링 석궁수가 관통 사격으로 찢어버렸다.

이제 아이무스는 거의 진열장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손 뻗어!"

바바리안이 뻗은 손을 아이무스가 움켜쥐는 그 순간.

'뭐야?'

갑자기 눈앞의 네 사람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아이무스는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발목이 차갑다.'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발목을 움켜쥔 것처럼.

이곳에는 사다리가 없다.

그러나 봉안함은 진열장 첫 단에 놓인다.

그 이유는 안식의 관리자가 손을 뻗으면 거기까지 닿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목이 차갑다.

1.5층을 지배하는 죽음의 군주가 얼음장 같은 손으로 그의 발목을 움켜쥐었으므로.

"아이무스!"

버나드가 아이무스의 철봉을 창처럼 내질렀지만 형편없었다.

관리자는 공격을 사뿐히 피해버렸고.

펑!

케일럽의 번개 쇼크는 적중했지만 별 데미지를 입히지 못했으며, 하플링이 발사한 석궁 볼트는······.

콰직!

놀랍게도 관리자가 입으로 깨물어서 잡아채 버렸다.

"말도 안 돼!"

바바리안의 손에서 아이무스의 손이 힘없이 미끄러진다.

다급한 전투 속에서 손에 땀이 차 있었던 탓이다.

콰앙!

그는 진열장 꼭대기를 움켜쥐고 매달렸지만······.

"못 버티겠어!"

강철 대봉을 나뭇가지처럼 휘두르는 몽크의 힘도 층간 보스를 당해낼 수는 없다.

"아이무스!"

"흐. 흐흐. 흐흐."

위에서는 절규.

뒤에서는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

진열장에 매달린 아이무스는 순식간에 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끝났다.

여기까지다.

강한 직감이 왔다.

"먼저 도망치······."

"제 배낭에!"

갑자기 케일럽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단검이 있습니다!"

약탈자 파티의 개과 수인이 쓰던 무기였다.

케일럽은 임시 모래시계를 쓸 필요가 없다.

그가 일어났으니까.

"뭐······."

케일럽과 하플링의 얼굴 너머, 아이무스에게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일찍이 그의 파티에서 막내 도적이었고, 핵심 전력이었으며, 1층 최고의 루키로 모험가 길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

아이무스는 그의 스킬도 안다.

'마법 투검.'

백어택의 단검에 흰 빛이 반짝거리면 결코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

"끼아아아아아악!"

단검은 관리자의 이마에 박혀버렸고, 3.5미터의 괴물은 성당이 쩌렁쩌렁 울리는 비명과 함께 뒷걸음질 쳤다.

"아아아악!"

이마를 움켜쥔 채로 지붕 잔해물에 발을 헛디뎌서 콰광!

파수꾼 몇 마리를 깔아뭉개면서 쓰러진 틈에 아이무스는 재빨리 자세를 회복했다.

"지금이에요!"

구원의 손길들이 앞다퉈 아이무스를 끌어올렸다.

"헉······. 헉······."

아이무스는 죽음 직전까지 갔던 공포로 숨을 헐떡였다.

"인사하시죠."

케일럽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눈앞에는 백어택이 서 있었다.

32화